산행대장 관련 자료/혜소선사비

신라국 고 지리산 쌍계사 교시 진감선사 비명과 서

아베베1 2016. 2. 21. 17:11



소재지(출토지)慶南 河東郡 花開面 雲樹洞 雙溪寺  
시대887년  
크기높이 203cm、폭 100cm、글자크기 2cm  
서체 및 제질楷書 
주제분류문화>문화재>금석문>碑文  
역주자金南允  
解釋文
  신라국 고 지리산 쌍계사 교시 진감선사 비명과 서

前 중국 도통순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이며 자금어대를 하사받은 신 최치원 왕명을 받들어 글을 짓고 아울러 篆字의 제액을 씀.

무릇 道란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으며 사람에게는 나라의 다름이 없다. 이런 까닭에 우리 동방인들이 불교를 배우고 유교를 배우는 것은 필연이다. 서쪽으로 대양을 건너 통역을 거듭하여 학문을 좇아 목숨은 통나무 배에 의지하고 마음은 보배의 고장으로 향하였다. 비어서 갔다가 올차서 돌아오며 어려운 일을 먼저하고 얻는 것을 뒤로 하였으니, 또한 옥을 캐는 자가 곤륜산의 험준함을 꺼리지 않고 진주를 찾는 자가 검은 용이 사는 못의 깊음을 피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드디어 지혜의 횃불을 얻으니 빛이 五乘을 두루 비추었고 유익한 말(가효)을 얻으니 미각은 六經에서 배불렀으며, 다투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善에 들게 하고 능히 한 나라로 하여금 仁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학자들이 간혹 이르기를 “인도의 석가와 궐리의 공자가 교를 설함에 있어 흐름을 나누고 체제를 달리하여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것과 같아서 서로 모순되어 한 귀퉁이에만 집착한다” 하였다. 시험삼아 논하건대 詩를 해설하는 사람은 글자로써 말을 해쳐서는 안되고 말로써 뜻을 해쳐서도 안된다. 예기에 이른바 “말이 어찌 한 갈래뿐이겠는가. 무릇 제각기 타당한 바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廬山의 慧遠이 論을 지어 이르기를 “여래가 주공, 공자와 드러낸 이치는 비록 다르지만 돌아가는 바는 한 길이다. 극치를 체득함에 있어 아울러 응하지 못하는 것은 만물을 능히 함께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沈約은 말하기를 “공자는 그 실마리를 일으켰고 석가는 그 이치를 밝혔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 대요를 안다고 이를 만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더불어 至善의 道를 말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心法을 말씀하신 데 이르면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이름하려 해도 이름할 수 없고 설명하려 해도 설명할 수 없다. 비록 달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달을 가리킨 손가락을 잊기란 끝내 바람을 잡아매는 것 같고 그림자처럼 가서 붙잡기 어렵다. 그러나 먼 데 이르는 것도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비유를 취한들 무엇이 해로우랴. 공자가 문하 제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말하지 않으련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고 하였으니 저 유마거사가 침묵으로 문수보살을 대한 것이나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은밀히 전한 것은 혀를 움직이지도 않고 능히 마음을 전하는 데 들어맞은 것이다. ‘하늘이 말하지 않음’을 말하였으니 이를 버리고 어디 가서 얻을 것인가. 멀리서 현묘한 도를 전해와서 우리 나라에 널리 빛내었으니 어찌 다른 사람이랴. 禪師가 바로 그 사람이다.
선사의 법휘는 慧昭이며 속성은 崔氏이다. 그 선조는 漢族으로 山東의 고관이었다. 수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정벌하다가 고구려에서 많이 죽자 항복하여 변방(우리나라)의 백성이 되려는 자가 있었는데 성스러운 당나라가 4군을 차지함에 이르러 지금 전주의 금마사람이 되었다. 그 아버지는 昌原인데 재가자임에도 출가승의 수행이 있었다. 어머니 顧氏가 일찍이 낮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서역 승려가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阿㜷{弥/女}(방언으로 어머니를 이른다)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 유리 항아리를 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선사를 임신하였다.
태어나면서도 울지 아니하여 곧 일찍부터 소리가 작고 말이 없어 빼어난 인물이 될 싹을 보였다. 이를 갈 나이에 아이들과 놀 때는 반드시 나뭇잎을 사르어 향이라 하고 꽃을 따서 공양으로 하였으며 때로는 서쪽을 향하여 무릎 꿇고 앉아 해가 기울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듯 착한 근본이 진실로 백 천겁 전에 심어진 것임을 알지니 발돋움하여도 따라갈 일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부모의 은혜를 갚는데 뜻이 간절하여 잠시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집에 한 말의 여유 곡식도 없고 또 한 자의 땅도 없었으니 天時를 이용하는 것으로 음식을 봉양함에 있어 오직 힘 닿는 대로 노력하였다. 이에 소규모의 생선 장사를 벌여 봉양하는 좋은 음식을 넉넉하게 하는 업으로 삼았다. 손으로 그물을 맺는데 힘쓰지 않았으나 마음은 이미 통발을 잊은 데 부합하였다. 능히 부모에게 콩죽을 드려도 그 마음을 기쁘게 하기에 넉넉하였고 진실로 養親의 노래(采蘭之詠)에 들어 맞았다. 부모의 상을 당하자 흙을 져다 무덤을 만들고는 이내 “길러주신 은혜는 애오라지 힘으로써 보답하였으나 심오한 道에 둔 뜻은 어찌 마음으로써 구하지 않으랴. 내 어찌 덩굴에 매달린 조롱박처럼 한창 나이에 지나온 자취에만 머무를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정원 20년(804), 歲貢使에게 나아가 뱃사공이 되기를 청하여 배를 얻어 타고 서쪽으로 건너 가게 되었는데 속된 일에도 재능이 많아 험한 풍파를 평지와 같이 여기고는 자비의 배를 노저어 고난의 바다를 건넜다. 중국에 도달하자 나라의 사신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각기 뜻이 있으니 여기서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하였다. 드디어 길을 떠나 滄州에 이르러 神鑑大師를 뵈었다. 오체투지하여 바야흐로 절을 마치기도 전에 대사가 기꺼워하면서 “슬프게 이별한 지가 오래지 않은데 기쁘게 서로 다시 만나는구나!” 하였다. 급히 머리를 깎고 잿빛 옷을 입도록 하여 갑자기 印契를 받게 하니 마치 마른 쑥에 불을 대는 듯 물이 낮은 들판으로 흐르는 듯 하였다. 문도들이 서로 이르기를 “동방의 성인을 여기서 다시 뵙는구나!”라고 하였다. 선사는 얼굴 빛이 검어서 모두들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지목하여 흑두타라고 했다. 이는 곧 현묘함을 탐구하고 말 없는데 처함이 참으로 칠도인의 후신이었으니 어찌 저 읍중의 얼굴 검은 子罕이 백성의 마음을 위로해 준 것에 비할 뿐이랴. 길이 붉은 수염의 佛陀耶舍 및 푸른 눈의 達磨와 함께 色相으로써 나타내 보인 것이다.
원화 5년(810) 숭산 소림사의 유리단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어머니의 옛 꿈과 완연히 부합하였다. 이미 계율에 밝았으매 다시 學林으로 돌아왔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니 홍색이 꼭두서니보다 더 붉고 청색이 남초보다 더 푸른 것과 같았다. 비록 마음은 고요한 물처럼 맑았지만 자취는 조각 구름같이 떠돌아 다녔다. 그 때 마침 우리나라 스님 道義가 먼저 중국에 와서 도를 구하였는데 우연히 서로 만나 바라는 바가 일치하였으니 서남쪽에서 벗을 얻은 것이다. 사방으로 멀리 찾아다니며 부처님의 知見을 증득하였다. 도의가 먼저 고국으로 돌아가자 선사는 곧바로 終南山에 들어갔는데 높은 봉우리에 올라 소나무 열매를 따먹고 止觀하며 적적하게 지낸 것이 삼년이요, 뒤에 紫閣으로 나와 사방으로 통하는 큰 길에서 짚신을 삼아가며 널리 보시하며 바쁘게 다닌 것이 또 삼년이었다. 이에 고행도 이미 닦았고 타국도 다 유람하였으나 비록 空을 觀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근본을 잊을 수 있겠는가.
이에 태화 4년(830) 귀국하여 大覺의 上乘 도리로 우리 나라 어진 강토를 비추었다. 흥덕대왕이 칙서를 급히 보내고 맞아 위로하기를 “道義 선사가 지난 번에 돌아오더니 上人이 잇달아 이르러 두 보살이 되었도다. 옛날에 흑의를 입은 호걸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누더기를 걸친 영웅을 보겠도다. 하늘까지 가득한 자비의 위력에 온 나라가 기쁘게 의지하리니 과인은 장차 동방 계림의 땅을 吉祥의 집으로 만들리라” 하였다.
처음에 尙州 露岳山 長栢寺에 석장을 멈추었다. 의원의 문전에 병자가 많듯이 찾아오는 이가 구름같아 方丈은 비록 넓으나 물정이 자연 군색하였다. 드디어 걸어서 강주의 지리산에 이르니 몇 마리의 호랑이가 포효하며 앞에서 인도하여 위험한 곳을 피해 평탄한 길로 가게 하니 산을 오르는 신과 다르지 않았고 따라가는 사람도 두려워하는 바가 없이 마치 집에서 기르는 개처럼 여겼다. 곧 善無畏 삼장이 영산에서 여름 결제를 할 때 맹수가 길을 인도하여 깊은 산속의 굴에 들어가 牟尼의 입상을 본 것과 완연히 같은 사적이며, 저 竺曇猷가 조는 범의 머리를 두드려 經을 듣게 한 것 또한 그것 만이 僧史에 미담이 될 수 없다. 이리하여 화개곡의 고 三法和尙이 세운 절의 남은 터에 堂宇를 꾸려내니 엄연히 절의 모습을 갖추었다.
개성 3년에 이르러 민애대왕이 갑자기 보위에 올라 불교에 깊이 의탁하고자 국서를 내리고 齋費를 보내 특별히 친견하기를 청하였는데, 선사가 말하기를 “부지런히 善政을 닦는 데 있을 뿐, 어찌 만나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使者가 왕에게 복명하니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워 하면서도 깨달은 바가 있었다. 선사가 색과 공을 다 초월하고 선정과 지혜를 함께 원만히 갖추었다 하여 사자를 보내 호를 내려 慧昭라 하였는데 昭자는 聖祖의 廟諱를 피하여 바꾼 것이다. 그리고 대황룡사에 적을 올리고 서울로 나오도록 부르시어 사자가 왕래하는 것이 말고삐가 길에서 엉길 정도였으나 큰 산처럼 꿋꿋하게 그 뜻을 바꾸지 않았다. 옛날 僧稠가 後魏의 세 번 부름을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산에 있으면서 도를 행하여 크게 통하는데 어긋나지 않으려 합니다”라고 하였으니 깊은 곳에 살면서 고매함을 기르는 것이 시대는 다르나 뜻은 같다고 하겠다.
몇 해를 머물자 法益을 청하는 사람이 벼와 삼대처럼 줄지어 송곳을 꽂을 데도 없었다. 드디어 빼어난 경계를 두루 가리어 남령의 기슭을 얻으니 앞이 탁 트여 시원하고 거처하기에 으뜸이었다. 이에 禪廬를 지으니 뒤로는 안개 낀 봉우리에 의지하고 앞으로는 구름이 비치는 골짜기 물을 내려다 보았다. 시야를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먼 산이요, 귓부리를 시원하게 하는 것은 돌에서 솟구쳐 흐르는 여울물 소리였다. 더욱이 봄 시냇가의 꽃, 여름 길가의 소나무, 가을 골짜기의 달, 겨울 산마루의 흰 눈처럼 철마다 모습을 달리하고 만상이 빛을 바꾸니 온갖 소리가 어울려 울리고 수많은 바위들이 다투어 빼어났다. 일찍이 중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머물게 되면 모두 깜짝 놀라 살펴보며 이르기를, “慧遠公의 東林寺가 바다 건너로 옮겨 왔도다. 연화장 세계는 범부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지만 항아리 속에 별천지가 있다 한 것은 정말이구나” 하였다. 대나무통을 가로질러 시냇물을 끌어다가 축대를 돌아가며 사방으로 물을 대고는 비로소 玉泉이라는 이름으로 현판을 하였다. 손꼽아 법통을 헤아려 보니 선사는 곧 조계의 현손이었다. 이에 六祖靈堂을 세우고 채색 단청하여 널리 중생을 이끌고 가르치는데 이바지하였으니 經에 이른바 “중생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화려하게 빛깔을 섞어 여러 像을 그린 것”이었다.
대중 4년(850) 정월 9일 새벽 문인에게 고하기를 “만법이 다 空이니 나도 장차 갈 것이다. 一心을 근본으로 삼아 너희들은 힘써 노력하라. 탑을 세워 형해를 갈무리하지 말고 銘으로 자취를 기록하지도 말라” 하였다. 말을 마치고는 앉아서 입적하니 금생의 나이 77세요, 법랍이 41년이었다. 이 때 하늘에는 실구름도 없더니 바람과 우뢰가 홀연히 일어나고 호랑이와 이리가 울부짖으며 삼나무 향나무가 시들어졌다. 얼마 뒤 자주색 구름이 하늘을 가리우더니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가 나서 장례에 모인 사람이 듣지 못한 이가 없었다. 곧 『梁史』에 “시중 저상이 일찌기 사문을 청하여 앓고 계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다가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를 들었다”고 실려 있으니 성스러운 감응이 보이지 않게 나타난 것이 어찌 꾸밈이겠는가. 무릇 도에 뜻을 둔 사람은 기별을 듣고 서로 조상하고 정을 잊지 못한 이들은 슬픔을 머금고 우니 하늘과 사람이 비통하게 애도함을 단연코 알 수 있었다. 널과 무덤길을 미리 갖추어 준비하게 하였으니 제자 法諒 등이 울부짖으며 시신을 모시고는 날을 넘기지 않고 동쪽 봉우리의 언덕에 장사지내어 유명을 따랐다.
선사의 성품은 질박함을 흐트리지 않았고 말에 꾸밈이 없었으며, 입는 것은 헌 솜이나 삼베도 따뜻하게 여겼고 먹는 것은 겨나 싸라기도 달게 여겼다. 도토리와 콩을 섞은 범벅에 나물 반찬도 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귀인들이 가끔 찾아와도 일찍이 다른 반찬이 없었다. 문인들이 거친 음식이라 하여 올리기를 어려워하며 말하기를 “마음이 있어 여기에 왔을 것이니 비록 거친 밥인들 무엇이 해로우랴” 하였으며, 지위가 높은 이나 낮은 이, 그리고 늙은이와 젊은이를 대접함이 한결같았다. 매양 왕의 사자가 역마를 타고 와서 명을 전하여 멀리서 法力을 구하면 이르기를, “무릇 王土에 살면서 佛日을 머리에 인 사람으로서 누구인들 마음을 기울이고 생각을 다하여 임금을 위하여 복을 빌지 않겠습니까? 또한 하필 멀리 마른 나무 썩은 등걸같은 저에게 綸言을 더럽히려 하십니까? 왕명을 전하러 온 사람과 말이 허기져도 먹지 못하고 목이 말라도 마시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하였다. 어쩌다 胡香을 선물하는 이가 있으면 질그릇에 잿불을 담아 환을 짓지 않고 사르면서 말하기를, “나는 냄새가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마음만 경건히 할 뿐이다”고 하였고, 또 漢茶를 공양하는 사람이 있으면 돌솥에 섶으로 불을 지피고 가루로 만들지 않고 끓이면서 말하기를 “나는 맛이 어떤지 알지 못하겠다. 뱃속을 적실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참된 것을 지키고 속된 것을 꺼림이 모두 이러한 것들이었다.
평소 梵唄를 잘하여 그 목소리가 금옥같았다. 구슬픈 곡조에 날리는 소리는 상쾌하면서도 슬프고 우아하여 능히 천상계의 神佛을 환희하게 하였다. 길이 먼 데까지 흘러 전해지니 배우려는 사람이 堂에 가득찼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魚山의 묘음을 익히려는 사람들이 다투어 콧소리를 내었던 일처럼 지금 우리나라에서 玉泉의 餘響을 본뜨려 하니 어찌 소리로써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겠는가.
선사가 열반에 든 것은 문성대왕 때였는데 임금이 마음으로 슬퍼하여 청정한 시호를 내리려다 선사가 남긴 훈계를 듣고서는 부끄러워하여 그만두었다. 3紀를 지난 뒤 문인들이 세상 일의 변천이 심한 것을 염려하여 법을 사모하는 제자에게 영원토록 썪지 않고 전할 방법을 구하였더니 내공봉 일길간인 楊晉方과 숭문대의 鄭詢一이 굳게 마음을 합쳐 돌에 새길 것을 청하였다. 헌강대왕께서 지극한 덕화를 넓히고 불교를 흠앙하시어 시호를 眞鑑禪師, 탑명을 大空靈塔이라 추증하고 이에 篆刻을 허락하여 길이 영예를 다하도록 하였다.
거룩하도다! 해가 暘谷에서 솟아 어두운 데까지 비추지 않음이 없고, 바닷가에 향나무를 심어 오래될수록 향기가 가득하다. 어떤 사람은 “선사께서 銘도 짓지 말고 탑도 세우지 말라는 훈계를 내리셨거늘 후대로 내려와 문도들에 이르러 확고하게 스승의 뜻을 받들지 못했으니 ‘그대들이 스스로 구했던가, 아니면 임금께서 주셨던가’ 바로 흰 구슬의 티라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아! 그르다고 하는 사람 또한 그르다. 명예를 가까이 하지 않아도 이름이 드러난 것은 선정을 닦은 법력의 나머지 보응이니 저 재처럼 사라지고 번개같이 끊어지기 보다는 할만한 일을 할 수 있을 때 해서 명성이 大千世界에 떨치도록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러나 귀부가 비석을 이기도 전에 임금이 갑자기 승하하고 금상이 이어 즉위하시니 질나발과 저가 서로 화답하듯 뜻이 부촉에 잘 맞아 좋은 것은 그대로 따르시었다. 이웃 산의 절도 옥천이라고 불렀는데 이름이 서로 같아 여러 사람의 혼동을 일으켰다. 장차 같은 이름을 버리고 다르게 하려면 마땅히 옛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지어야 했는데 절이 자리잡은 곳을 살펴보게 하니 절 문이 두 줄기 시냇물이 마주하는데 있었으므로 이에 제호를 하사하여 雙溪라고 하였다.
신에게 명을 내려 말씀하시기를 “선사는 수행으로 이름이 드러났고 그대는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니 마땅히 銘을 짓도록 하라”고 하시어 치원이 두 손을 마주대고 절하면서 “예! 예!”하고 대답하였다. 물러나와 생각하니 지난번 중국에서 이름을 얻었고 章句 속에서 살지고 기름진 것을 맛보았으나 아직 성인의 도에 흠뻑 취하지 못하여 번드르르하게 꾸민 것에 깊이 감복했던 것이 오직 부끄러울 뿐이다. 하물며 法은 文字를 떠난지라 말을 붙일 데가 없으니 혹 굳이 그를 말한다면 수레를 북쪽으로 향하면서 남쪽의 郢땅에 가려는 것이 되리라. 다만 임금의 보살핌과 門人들의 큰 바램으로 文字가 아니면 많은 사람의 눈에 밝게 보여줄 수 없기에 드디어 감히 몸은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맡고 힘은 五能을 본받으려 하니 비록 돌에 의탁한다 해도 부끄럽고 두렵다. 그러나 ‘道란 억지로 이름붙인 것’이니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재주가 없다 하여 필봉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신이 어찌 감히 할 것인가. 거듭 앞의 뜻을 말하고 삼가 銘을 지어 이른다.

 입을 다물고 禪定을 닦아 마음으로 부처에 귀의했네.
 근기가 익은 보살이라 그것을 넓힘이 다른 것이 아니었네.
 용감하게 범의 굴을 찾고 멀리 험한 파도를 넘어,
 가서는 秘印을 전해받고 돌아와 신라를 교화했네.

 그윽한 곳을 찾고 좋은 데를 가려 바위 비탈에 절을 지었네.
 물에 비친 달이 심회를 맑게 하고 구름과 시냇물에 흥을 기울였네.
 산은 性과 더불어 고요하고 골짜기는 범패와 더불어 응하였네.
 닿는 대상마다 걸림이 없으니 간교한 마음을 끊음이 이것으로 증명되도다.

 도는 다섯 임금의 찬양을 받았고 위엄은 뭇 요사함을 꺾었도다.
 말없이 자비의 그늘을 드리우고 분명히 아름다운 부름을 거절했네.
 바닷물이야 저대로 떠돌더라도 산이야 어찌 흔들리랴.
 생각도 없고 걱정도 없으며 깎음도 없고 새김도 없었네.

 음식은 맛을 겸하지 아니하였고 옷은 갖추어 입지 않으셨네.
 바람과 비가 그믐밤 같아도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네.
 지혜의 가지가 바야흐로 뻗어나는데 법의 기둥이 갑자기 무너지니,
 깊은 골짜기가 처량하고 뻗어나는 등라가 초췌하구나!

 사람은 갔어도 道는 남았으니 끝내 잊지 못하리라.
 上士가 소원을 말하니 임금이 은혜를 베푸셨네.
 법등이 바다 건너로 전하여 탑이 산 속에 우뚝하도다.
 天衣가 스쳐 반석이 다 닳도록 길이 松門에 빛나리라.

 光啓 3년 7월 어느 날 세우고 중 奐榮이 글자를 새김.

 

  ?海東故眞鑑禪師碑(題額)
有唐新羅國故知異山雙谿寺 敎謚眞鑒禪師碑銘并序
     前西國都統巡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臣崔致遠奉 敎撰幷書篆額
夫道不遠人人無異國是以東人之子爲釋爲儒□□西浮大洋重譯從學命寄刳木心懸寶洲虛往實歸先難後獲亦猶釆玉者不憚崐丘之峻探珠者不辭驪壑之深遂得慧炬則
光融五乘嘉肴則味飫六籍竸使千門入善能令一□□仁而學者或謂身毒與闕里之設敎也分流異體圜鑿方枘互相矛楯守滯一隅甞試論之說詩者不以文害辭不以辭害志
禮所謂言豈一端而己夫各有所當故廬峯慧遠著□□□來之與發致雖殊所歸一揆體極不兼應者物不能兼受故也沈約有云發其端窮其致眞可謂識其大者始可
與言至道矣至若佛語心法玄之又玄名不可名說無□□雖云得月指或坐忘終類係風影難行捕然陟遐自迩取譬何傷且尼父謂門弟子曰予欲無言天何言哉則彼淨名之默
對文殊善逝之密傳迦葉不勞鼓舌能叶印心言天不□□此奚適而得遠傳妙道廣耀吾鄕豈異人乎禪師是也禪師法諱慧昭俗姓崔氏其先漢族冠盖山東隋師征多沒驪貊
有降志而爲遐甿者爰及 聖唐囊括四郡今爲全□□馬人也父曰昌元在家有出家之行母顧氏甞晝假寐夢一梵僧謂之曰吾願爲阿?方言□母之子因以瑠璃甖爲寄未幾娠
禪師焉生而不啼迺夙挺銷聲息言之勝牙也旣齔從戱必燌葉□香釆花爲供或西嚮危坐移晷末甞動容是知善本固百千劫前所栽植非可跂而及者自丱弁志切反哺跬步
不忘而家無斗儲又無尺壞可盜天時者口腹之養惟力是視乃裨販娵隅爲贍滑甘之業手非勞於結網心己契於忘筌能豐啜菽之資允叶釆蘭之詠曁鍾棘負土成墳迺曰鞠
育之恩聊將力報希微之旨盍以心求吾豈匏爪壯齡滯跡遂於貞元廿年詣歲貢使求爲榜人寓足西泛多能鄙事視險如夷揮楫慈航超截苦海及達彼岸告國使曰人各有志請
從此辭遂行至滄州神鑒大師投體方半大師怡然曰戱別匪遙喜再相遇遽令削染頓受印契若火沾燥艾水注卑然徒中相謂曰東方聖人於此復見禪師形貌黯然衆不名
而目爲黑頭陁斯則探玄處默眞爲漆道人後身豈比夫邑中之黔能慰衆心而已哉永可興赤髭靑眼以色相顯示矣元和五年受具於嵩山少林寺瑠璃壇則聖善前夢宛若合符
旣瑩戒珠復歸橫海聞一知十茜絳藍靑雖止水澄心而斷雲浪跡粵有鄕僧道義先訪道於華夏邂逅適願西南得朋四遠叅尋證佛知見義公前歸故國禪師卽入終南登萬仭之
峯餌松實而止觀寂寂者三年後出紫閣當四達之道織芒屩而廣施憧憧者又三年於是苦行旣已修他方亦己遊雖早觀空豈能忘本乃於大和四年來歸大覺上乘照我仁域
興德大王飛鳳筆迎勞曰道義禪師已歸止上人繼至爲二菩薩昔聞黑衣之傑今見縷褐之英彌天慈威擧國欣賴寡人行當以東雞林之境成吉祥之宅也始憇錫於尙州露岳
長栢寺毉門多病來者如雲方丈雖寬物情自隘遂步至康州知異山有數於菟哮吼前導避危從坦不殊兪騎從者無所怖畏豢犬如也則與善旡畏三藏結夏靈山猛獸前路深入
山穴見牟?立像宛同事跡彼笁曇猷之扣睡虎頭令聽經亦未專?於僧史也因於花開谷三法和尙蘭若遺基簒修堂宇儼若化成洎開成三年
愍哀大王驟登寶位深託玄慈降璽書餽齋費而別求見願禪師曰在勤修善政何用願爲使復于 王聞之愧悟以禪師色空雙泯定惠俱圓降使賜號爲慧昭昭字避
聖祖廟諱易之也仍貫籍于大皇龍寺徵詣京邑星使往復者交轡于路而岳立不移其志昔僧稠拒元魏之三召云在山行道不爽大通棲幽養高異代同趣居數年請益者稻麻成
列殆無錐地遂歷銓奇境得南嶺之麓塏居㝡經始禪廬却倚霞岑俯壓雲澗淸眼界者隔江遠岳爽耳根者迸石飛湍至如春谿花夏徑松秋壑月冬嶠雪四時變態萬象交光百
籟和唫千巖竸秀甞遊西土者至止咸愕視謂遠公東林移歸海表蓮花世界非凡想可擬壺中別有天地則信也架竹引流環階四注始用玉泉爲牓屈指法胤則禪師乃曹溪之玄
孫是用建六祖影堂彩飾紛墉廣資導誘經所謂爲悅衆生故綺錯繪衆像者也大中四年正月九日詰旦告門人曰萬法皆空吾將行矣一心爲本汝等勉之無以塔藏形無以銘紀
跡言竟坐滅報年七十七積夏四十一于時天無纖雲風雷歘起虎狼號?杉栝變衰俄而紫雲翳空空中有彈指聲會葬者無不入耳則梁史載侍中甞請沙門爲母疾祈福聞
空中彈指聖感冥應豈誣也哉凡志於道者寄聲相弔未亡情者銜悲以泣天人痛悼斷可知矣靈函幽隧預使備具弟子法諒等號奉色身不踰日而窆于東峰之冢遵遺命也禪師
性不散樸言不由機服煖緼黂食甘糠芧菽雜糅蔬佐無二貴達時至曾不異饌門人以腹進難則曰有心至此雖糲何害尊卑耋穉接之如一每有 王人乘馹傳命遙祈法
力則曰凡居 王土而戴佛日者孰不傾心護念爲 君貯福亦何必遠汚 綸言於枯木朽株傳乘之飢不得齕渴不得飮吁可念也或有以胡香爲贈者則以瓦載煻灰
不爲丸而?之曰吾不識是何臭虔心而己復有以漢茗爲供者則以薪爨石釜不爲屑而煑之曰吾不識是何味濡腹而已守眞忤俗皆此類也雅善梵唄金玉其音側調飛聲爽快
哀婉能使諸天歡喜永於遠地流傳學者滿堂誨之不倦至今東國習魚山之妙者競如掩鼻效玉泉餘響豈非以聲聞度之之化乎禪師泥洹當
文聖大王之朝上惻 僊襟將寵淨謚及聞遺戒愧而寢之越三紀門人以陵谷爲慮扣不朽之緣於慕法弟子內供奉一吉干楊晉方崇文臺鄭詢一斷金爲心勒石是請
獻康大王恢弘至化欽仰眞宗追謚眞鑒禪師大空靈塔仍許篆刻以永終譽懿乎日出暘谷無幽不燭海岸植香久而爾芳或曰禪師埀不銘不塔之戒而降及西河之徒不能確奉
先志求之□抑與之歟適足爲白珪之玷嘻非之者亦非也不近名而名彰盖定力之餘報與其灰滅電絶曷若爲可爲於可爲之時使聲震大千之界而龜未戴石 龍遽昇天
今上繼興□□相應義諧付囑善者從之以隣岳招提有玉泉之號爲名所累衆耳致惑將俾弃同卽異則宜捨舊從新使眎其寺之所枕倚則以門臨複澗爲對乃錫題爲雙溪焉申
命下臣曰□□□顯汝以文進宜爲銘致遠拜手曰唯唯退而思之頃捕名中州嚼腴咀雋于章句間未能盡醉衢罇唯愧深跧泥甃況法離文字無地措言苟或言之北轅適第以
國主之外□□□□□願非文字不能昭昭乎群目遂敢身從兩役力效五能雖石或憑焉可慙可懼而道强名也何是何非掘笔藏鋒則臣豈敢重宣前義謹札銘云
杜口禪那□□□□□□□薩弘之靡它猛探虎窟遠泛鯨波去傳秘印來化斯羅尋幽選勝卜築巖磴水月澄懷雲泉寄興山與性寂谷與梵應觸境無硋息機是證道賛五朝威摧
衆妖默垂□□□□□□□□□□□□□□□□□□□□□□□□□□服不必備風雨如晦始終一致慧柯方秀法棟俄墜洞壑淒涼煙蘿憔忰人亡道存終不可諼上士陳願
大君流恩□□□□□□□□□□□□□□□□
□□□□□□□□ 僧奐榮刻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