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대장 관련 자료/인제공 휘현관련자료

인제공 휘현 관련자료

아베베1 2016. 3. 21. 10:41




최현(崔晛)

[문과] 선조(宣祖) 39년(1606) 병오(丙午)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4위(14/36)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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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승(季昇)
인재(認齋)
생년계해(癸亥) 1563년(명종 18)
합격연령44세
본관전주(全州)
거주지미상(未詳)

[이력사항]

선발인원36명
전력참봉(參奉)
관직강원감사(江原監司)
관직한림(翰林)
타과선조(宣祖) 21년(158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1등(一等) 2위

[가족사항]

 
[부]
성명 : 최심(崔深) 
[조부]
성명 : 최치운(崔致雲) 
[증조부]
성명 : 최이준(崔以準) 
[처부]
성명 : 김복일(金復一) 
본관 : 의성(義城)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저집 제9권  
  
 차(箚) 14수(十四首)
최산휘(崔山輝)의 일을 논한 차자

삼가 아룁니다. 최산휘는 먼 지방에서 온 한미(寒微)한 집안 출신의 유생(儒生)입니다. 그리고 그의 부친은 당시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조정에서 그 죄를 논하면서 사형시켜야 한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가령 그때에 최산휘가 선하지 못한 사람이라서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더라면, 이수향(李秀香)으로부터 흉역(凶逆)에 대한 말을 들었을 적에, 비록 그 패거리 속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우선 가만히 앉아서 성패(成敗)의 결과를 관망하며 자기 부친이 죄적(罪籍)에서 빠져나오게 되기를 은근히 기대하였을 텐데, 그는 이 사실을 급한 마음으로 곧장 보고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가 마음속으로 자기 부친이 처벌을 받는 것은 국법(國法)으로 볼 때에 당연한 것인 만큼 원망할 수 없다고 여겼으리라는 것과, 오직 종사(宗社)의 화란(禍亂)과 군부(君父)의 환란만을 안타깝게 여겼으리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의 충의(忠義)의 정성이야말로 진신(搢紳)의 인사로서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기만 하고 아무런 죄책(罪責)도 받지 않은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백 배나 차이가 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니, 특별히 더 예우하고 은총을 내려서 그의 선행을 표창하는 것이 참으로 온당하다고 하겠습니다. 게다가 최산휘가 고발한 역적 모두가 그중에서도 수괴(首魁)요 복심(腹心)들이었고 보면, 그의 공이 또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혹자(或者)는 그가 늦게 고발한 것을 죄로 삼기도 합니다마는, 이것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대저 최산휘가 이수향의 말을 들은 것은 인정(人定)이 지난 뒤였습니다. 그 당시에 야간 통행금지가 매우 엄하게 행해졌으므로 인정이 지난 뒤에는 왕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치는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리다가 김경(金澃)에게 달려가서 심명세(沈命世)에게 말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곧바로 알린 것이니, 지연시켰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최산휘가 심명세에게 말하게 한 것은 심명세로 하여금 위에 진달하게 할 목적에서였습니다. 한(漢) 나라 때에 장장(張章)과 동충(董忠) 등이 곽우(霍禹)를 고발한 일을 가지고 살펴보더라도, 심명세가 직접 위에 진달하여야 마땅할 것이요 다시 최산휘에게 직접 고발하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설혹 늦게 고발했다 하더라도 이것은 바로 심명세가 지연시킨 것이지 최산휘가 지연시킨 것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들은 삼가 최산휘가 잘한 일은 가장 크고 죄로 삼을 것은 하나도 없다고 여기는 바입니다.
최산휘가 상변(上變)한 뒤로 양사(兩司)에서 그의 부친인 최현(崔晛)에게 법대로 치죄(治罪)하기를 청하는 논계(論啓)를 정지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최산휘의 공을 아름답게 여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현은 여전히 육진(六鎭)의 최북단 변경의 땅에 유배되어 있습니다. 대저 최현의 죄를 법에 따라 처벌하는 것으로 말하면 비록 사형에 처한다 해도 지나친 것은 아니니, 유배의 형벌로 처벌한 것만도 정상을 참작해서 용서해 준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최산휘의 공로가 그 부친의 죄를 면하게 해 주기에 충분한 것이고 보면, 아예 사면해 주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까 삼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대저 국가에서 공신(功臣)을 대우할 적에 그와 함께 대려(帶礪)의 맹세를 하고 그 내용을 철권(鐵券)에 기록하여 공훈(功勳)의 명호(名號)를 내려 주면서 그의 작위를 높여 주고 그의 집안을 부유하게 해 주는 목적은 그 공로를 특별히 총애하여 영구히 복록을 향유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최산휘의 심정으로 말한다면, 비록 관직을 높여 주고 작록을 후하게 해 주는 것이 신하된 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라고 할지라도, 자기 부친의 죄를 면하게 해 주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최산휘를 총애하여 대우해 주는 방도로는 그의 부친을 사면해 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할 것입니다.
옛날에 순우의(淳于意)가 죄를 지어 형벌을 받게 되었을 적에 제영(緹縈)의 한마디 말을 듣고 한 문제(漢文帝)가 조서를 내려 육형(肉刑)을 없애도록 하였는데, 지금 최산휘의 공로로 말하면 제영의 한마디 말 정도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국법(國法)에 공신의 자손은 용서해 주게 되어 있는데, 심지어는 원종(原從)까지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 은택이 지극히 후하다고 말할 만합니다. 대저 몇 세대가 지난 자손까지도 용서해 주는 은택이 미치는 법인데, 하물며 그의 부친이 용서받을 수 없다면 될 말이겠습니까. 최산휘가 자기 부친을 따라 북행(北行)을 하여 변경 지방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며 혈혈단신으로 외롭게 우거하고 있으니, 이는 큰 공을 세운 사람을 우대하는 도리가 아닐 듯싶습니다.
지금 최산휘가 다행히 전하의 은택을 입고 조사(朝士)의 명부에 끼일 수 있게 되었으니,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최현의 죄를 특별히 사면해 주신 다음에 최산휘를 역마(驛馬)로 불러서 부친과 함께 오도록 해 주소서. 그렇게 하면 최산휘의 부자(父子)가 전하의 은총에 감격한 나머지 목숨을 바치더라도 위의 은혜에 보답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뿐만이 아니라, 보고 듣는 사람들마다 모두 감동하면서, 조정이 선행을 한 사람에게는 이처럼 후하게 대우해 준다는 것과 선행을 하면 그 보답이 자기 어버이에게까지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모두 충의에 힘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신들은 최산휘에 대해서는 얼굴을 서로 알 정도의 연분도 전혀 없습니다만, 참으로 그의 선행이 가상하고 그의 공로가 매우 큰 만큼, 조정에서 그를 대우할 때에는 특별히 후하게 우대하여 사람들의 충의를 권장해야 마땅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혹시라도 그를 평범한 신하로 대우할 경우에는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실망하게 될 것 같은 걱정도 들기에 감히 이렇게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삼가 전하의 결재를 기다립니다.

[주D-001]그의 부친 : 최현(崔晛)이다. 인조 5년(1627)에 강원 감사(江原監司)로 있으면서 이인거(李仁居)의 변란을 막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국문(鞠問)을 받았는데, 최산휘가 영사 공신(寧社功臣)이 되자 죄가 감해져서 종성(鍾城)에 안치되었다가 얼마 뒤에 다시 사면의 은혜를 받았다.
[주D-002]인정(人定) : 야간 통행금지를 알리기 위하여 종을 치던 일을 말한다. 저녁 이경(二更)에 28수(宿)를 상징하여 28번 큰 종을 치고 성문을 닫았다. 그러다가 오경(五更) 삼점(三點)이 되면 삼십삼천(三十三天)의 뜻으로 33번 쇠북을 치고 통행금지를 풀었는데, 이것을 파루(罷漏)라고 하였다.
[주D-003]한(漢) 나라 …… 일 : 곽우(霍禹)는 대장군 곽광(霍光)의 아들로서, 곽광이 죽은 뒤에 작위를 세습하여 위세를 부리다가, 모친이 허 황후(許皇后)를 독살한 사건이 누설되면서 삭직이 된 것에 불만을 품고는, 황제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즉위할 음모를 꾸몄는데, 선제(宣帝) 지절(地節) 4년에 그 일이 탄로나면서 요참(腰斬)을 당하고 멸족(滅族)되었다. 《漢書 卷68 霍光金日磾傳》
[주D-004]대려(帶礪)의 맹세 : 대려는 허리띠와 숫돌이라는 말로, 공신의 영예를 대대로 누리게 해 주겠다는 뜻인데,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개국 공신들을 책봉하면서 “황하가 변하여 허리띠처럼 되고, 태산이 바뀌어 숫돌처럼 될 때까지, 그대들의 나라가 영원히 존속되어 후손들에게 전해지도록 할 것을 맹세한다.〔使河如帶 泰山若礪 國家永寧 爰及苗裔〕”라고 말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卷18 高祖功臣侯者年表》
[주D-005]철권(鐵券) : 옛날에 임금이 공신에게 내려 면죄(免罪) 등의 특권을 누리게 한 증명서를 말하는데, 철제(鐵製)의 계권(契券)에 단사(丹砂)로 썼으므로 보통 단사 철권(丹砂鐵券)이라고 부른다.
[주D-006]순우의(淳于意)가 …… 하였는데 : 제영(緹縈)은 한 문제(漢文帝) 때에 제(齊) 나라 태창령(太倉令)이었던 순우의의 딸이다. 부친이 법에 저촉되어 형벌을 받으러 장안(長安)으로 끌려갈 적에 함께 따라가서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고 육형을 받은 자는 원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없는 만큼, 비록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되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할 방도가 없어서 끝내 만회하지 못할 것이니, 제 몸을 바쳐 관청의 노비가 됨으로써 부친이 형벌을 면제받고 다시 새롭게 될 수 있게 하기를 원한다.〔死者不可復生 而刑者不可復續 雖欲改過自新 其道莫由 終不可得 妾願人身爲官婢 以贖父刑罪 使得改行自新也〕”라는 내용으로 간절히 호소하며 소를 올리자, 문제가 이에 감동받은 나머지 형법 조항에서 육형(肉刑)을 없애라는 조서를 내린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105 扁鵲倉公列傳》
[주D-007]원종(原從) : 원종공신(原從功臣)의 준말이다. 각 등급에 해당되는 정식의 공신 이외에 작은 공이 있는 사람에게도 주는 등외(等外)의 공신을 말하는데, 원종공신(元從功臣)이라고도 한다.

論崔山輝事箚 
論崔山輝事箚 


伏以崔山輝以遠方寒士。其父方在獄中。朝廷論罪至於死。使山輝爲不善之人。懷怨懟之心。則聞秀香凶逆之言。雖不入於其黨。亦且坐觀成敗。冀以脫其父於罪籍。乃汲汲告之。是其心以其父之得罪。乃法所當然。不可爲怨。而唯以宗社之禍。君父之難爲悶也。是其忠義之誠。比之搢紳之士受國厚恩。及085_163a無罪責者。可謂百倍。誠宜特加優寵。以奬其善。且山輝所告之賊。皆是其中巨魁腹心。則其功亦豈少哉。或以其遲告爲罪。此則大不然。夫山輝聞秀香之言。在人定之後。其時夜禁甚嚴。人定後不得往來。待聞曉鍾。奔告金澃。使言於沈命世。乃是卽告。不可爲遲也。山輝之使言於沈命世。欲命世上達也。以漢時張章,董忠等告霍禹之事觀之。則命世自當上達。不當還使山輝自告也。然則雖曰遲告。乃命世之遲也。非山輝之遲也。故臣等竊以爲山輝善則最大。而罪則無也。自山輝上變。兩司停其父晛按法之085_163b啓。乃嘉山輝之善也。然晛因流六鎭極邊之地。夫晛之罪。以法言之。則雖死不爲過。流竄之罰。亦以情恕也。然山輝之善。足以免其父之罪。則竊恐赦之爲宜也。夫國家待功臣。與之同帶礪之盟。載鐵券之書。賜功勳之號。尊其爵富其家。所以寵異其善。使享永久之福也。今以山輝之情言之。雖尊官厚祿。極人臣之榮。樂莫如免其父之罪也。然則寵待山輝之道。莫如赦其父也。昔淳于意有罪當刑。緹縈一言。漢文詔除之。今山輝之善。非如緹縈之一言。且國法宥功臣子孫。至於原從亦然。恩澤可謂至厚矣。夫子孫累085_163c世。猶且宥及。況其父而不得免乎。山輝隨父北行。作旅邊陲。孑孑孤寄。恐非所以優待有大功之人也。今山輝幸蒙天恩。得廁朝籍。伏請殿下特赦崔晛之罪。召山輝以馹騎。使與其父偕來。則非但山輝父子感激恩寵。滅身無以仰報。凡在瞻聆。莫不感動。知朝廷待爲善之人如是其厚。而爲善之報。可以及於其親。皆思勉於忠義矣。臣等於山輝。絶無相識之分。誠以其善可嘉。其功甚大。朝廷待之。特宜優厚。以勸人之忠。恐或以庸臣遇之。使人心落莫。不敢不言。取進止。



제문(祭文) [문인(門人) 최현(崔晛)]

아, 선생께서 이 세상에 살아 계실 적에는 세상 사람들이 멀고 가깝거나 귀하고 천하거나를 가리지 않고 모두들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오늘날의 세상에서 무언가를 할 만한 사람이 있다. 그가 나가면 나는 그가 한 세상의 시귀(蓍龜)가 될 것임을 알겠고, 그가 물러나면 또한 사문(斯文)의 태산 북두(泰山北斗)가 될 것임을 알겠다.” 하였다. 그리고 선생이 돌아가시자 세상 사람들이 멀거나 가깝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를 막론하고 모두들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죽었으니 내가 누구와 더불어 일을 하겠는가. 어진이들은 누구와 더불어 선(善)을 행하고, 용감한 자들은 누구와 더불어 의(義)를 행하겠는가.” 하였다.
지난날에 사람들이 기뻐한 것은 선생을 위해서 기뻐한 것이 아니라 한 세상을 위하여 기뻐한 것이고, 지금 슬퍼하는 것은 선생을 위해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한 세상을 위해서 슬퍼하는 것이다. 선생께서 살고 죽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고 슬퍼하니,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을 선생 역시 기뻐하고 슬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선생께서 평소에 지녔던 임금을 걱정하고 백성들을 걱정하는 생각으로 인해 죽어서도 지하에서 편히 눈감지 못할 것임을 안다.
아, 선생의 덕은 한두 가지를 가지고 말할 수가 없다. 더구나 못난 나는 뒤늦게 태어난 탓에 내가 본 것은 선생께서 남기신 찌꺼기일 뿐이다. 그러니 어찌 선생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용에 대해 말하면서 뱀을 그리고 있으니, 이 또한 나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한갓 혼후하고 강건한 덕이 백번을 정련한 금과 같고, 화락하고 순수한 태도가 조각을 아로새긴 옥과 같음만을 보았다. 안으로 마음을 닦는 데 독실하여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으니, 비단옷을 입고서 그 위에 홑옷을 덧입은 것이고, 한가로이 홀로 있을 때 더욱 얼굴빛이 장엄하였고 응접함에 있어서 어긋나지 않았으니, 안을 바르게 하고 밖을 방정하게 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착한 점을 들으면 하찮은 일이라고 하여 기록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자신의 그릇된 점을 알면 지나간 일이라고 하여 고치기를 인색하게 하지 않았으니, 선으로 나아가는 것을 즐기고 의로운 데로 옮겨 가는 데 용감한 것이다. 대개 그 순수한 자질과 단단한 조행(操行)은 비록 천부적인 자질을 홀로 풍부하게 타고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그렇게 되도록 변화시킨 공과 실천하는 바탕은 실로 친히 도야한 힘에서 얻은 것이다.
못난 내가 선생을 모신 지가 몇 년 되었는데, 일찍이 다른 사람과 특별히 다른 행실이나 세속을 놀라게 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으나, 의리(義利)나 공사(公私)의 나뉨에 이르러서는 분연히 떨쳐일어나 용감하였고, 확고히 구별하여 범하기 어려웠다. 또 글을 읽거나 문장을 지음에 있어서는 일찍이 기이하고 화려한 말이나 범범하고 과장된 말을 취하지 않았으나, 붓을 적셔 글을 지음에 이르러서는 웅대하고 전아(典雅)하여 말과 뜻이 모두 갖추어졌다. 그러니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말이 있다는 것을 믿을 만하다.
애석하게도 내가 비록 선생께서 부모를 섬기던 것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으나, 선생께서 여묘살이를 할 때는 보았다. 그때 보니, 염습(殮襲)을 할 때부터 담제(禫祭)를 지낼 때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옛 예법을 준수하여, 정은 슬프면서도 거칠지 않았고, 의문(儀文)은 갖추어졌으면서도 꾸미지 않았다. 그리고 슬픔 속에 애통해하기를 종시토록 해이하게 하지 않았으며, 수척해져서도 최질(衰絰)을 벗지 않았다. 또 예경(禮經) 이외의 글은 눈에 접하지 않았고, 훈계하는 말 이외의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길일(吉日)이 되었는데도 애통한 마음에 소복차림을 한 채 한 달을 넘게 지냈으며, 그 해가 다 가도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어떤 사람이 지나치게 예를 지킨다고 간하자, 공은 그래도 다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죽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살았을 때 섬긴 것이 어떠하였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선생께서는 조정에 있으면서는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말을 하면 끝까지 다 말하였다. 사직(社稷)의 안위(安危)와 백성들의 휴척(休戚)과 군심(君心)의 태홀(怠忽)과 사정(邪正)의 진퇴(進退)에 이르러서는, 부지런히 상소를 올렸으며, 측은한 마음이 속에서 우러나왔다. 그리하여 비록 임금의 노여움을 만났더라도 조금도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에 급암(汲黯)이 홀(笏)을 바로 들자 천자가 얼굴빛을 바꾸었으며, 주목(朱穆)이 수레를 타자 탐관오리들이 인끈을 풀고 떠나갔다. 사람들은 위태롭게 여겨 두려워 떨었으나 공은 태연자약하였다.
이에 시골의 종들조차도 모두 공의 성명을 알았으며, 시정의 장사꾼들조차도 공이 꼿꼿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한 마음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기로 한 붉은 충심과 네 글자로 임금을 바로잡은 지극한 정성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지 거짓으로 꾸며서 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떠들어 대는 자들이 꼿꼿하고 강직하다는 것만으로 선생을 찬미하니, 이것이 어찌 선생에 대해서 잘 알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일본에 사신으로 감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위험하게 여겨 가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선생께서는 태연한 마음으로 행장을 꾸리라고 재촉하여 떠나갔다. 그리고 여러 차례 풍랑을 만나서 배의 노가 부러졌는데도 선생께서는 꼼짝하지 않은 채 성색(聲色)을 변하지 않았다. 또 교만한 오랑캐의 추장이 교활하고 사나워서 말투가 몹시 패만스러웠는데, 선생께서는 의연히 이를 사리로써 꺾었다. 이는 공자(孔子)가 말한, “오랑캐 땅에 가서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니, 어찌 속에 든 것이 없이 그럴 수가 있었겠는가.
위태롭고 어지러운 즈음에 명을 받들고, 다 무너진 뒤끝에 직임을 받은 데에 이르러서는, 눈물을 뿌리면서 장수 자리에 올랐고,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모았으며, 의병들을 끌어모아 용감한 군사로 만들었고, 약한 자들을 끌어당겨 강한 군사로 만들었다. 피를 토하면서 쓴 한 조각 글에서 사람들이 윗사람을 위하여 죽는 의리를 알게 되었으니, 마침내 동남쪽 지방의 반쪽을 지탱해서 나라를 회복시키는 근본 바탕이 되게 한 것은 그 누구의 힘이었던가.
아, 평소에 기른 것이 독실하지 않고 지조가 확고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죽고 살고 무너지고 쓰러지는 즈음에 어찌 거조가 이와 같이 조용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옛사람이 말한, “6척(尺)의 외로운 아이를 맡기고 백리의 명을 내맡길 수 있으며, 대절(大節)에 임해서도 그 뜻을 빼앗을 수 없다.”고 한 것은, 그럴 만한 사람이 있는 것인가? 그럴 만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아, 붉은 마음으로 나라를 걱정하여 범로(范老)의 수염이 온통 하얗게 되었고,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이 늦어 촉(蜀) 나라 부인들의 머리를 복머리가 되게 하였으니, 시운 탓인가, 운명 탓인가.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돕지 않으려고 한 것인가. 선생의 재주와 덕은 태평 시대로 돌아가게 할 수가 있었는데, 마침내 여기에서 그치게 하였단 말인가. 백성들이 기뻐하는 것을 하늘이 기뻐하면서도 백성들이 슬퍼하는 것은 하늘이 슬퍼하지 않는단 말인가. 아니면 저 푸른 하늘은 망망하기만 하여 기쁨과 슬픔을 맘대로 하면서 선악(善惡)과 화복(禍福)의 이치에 대해서는 전혀 관할하지 않는 것인가. 아, 슬프다.
선생께서 일찍이 청성산(靑城山)의 물가에 정사(精舍)를 지은 것이 어찌 아무런 뜻이 없이 지은 것이겠는가. 선생으로 하여금 몇 년을 더 살게 하여 담박하고 고요한 곳에서 소요하면서 말년의 공부를 마칠 수 있게 하고, 선사(先師)께서 남기신 학문을 이을 수 있게 하고, 후학들이 나아갈 방향을 깨우쳐 주게 하였다면, 선생의 뜻과 바람이 거의 유감이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선생으로 하여금 나아가서는 그 도를 다하지 못하게 하고, 물러나서는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하게 하여, 한 나라를 도야(陶冶)시키려는 소망을 저버리게 하고, 후학들에게 대들보가 무너지는 애통함을 남겨 주었으니, 이것이 어찌 백성들이 복이 없는 것이 아니겠으며, 사문(斯文)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어리석은 비부(鄙夫)인 나는 학문을 함에 있어서 나아갈 방향도 모르면서 썩은 나무에는 아로새기기가 어렵다는 것도 헤아리지 않은 채 스스로 돌아가 의지할 곳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면서 매번 못난 나는 풍진 세상에 침체되어 있고 선생께서는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는 탓에, 나를 이끌어 준 기간이 얼마 안 되어 하루 동안 햇볕 쪼이고 열흘 동안 추운 것을 탄식하였다. 이에 평상시에도 잠자리에 누웠다가는 벌떡 일어나 앉고 밥을 먹다가도 수저를 내던지고는, 두려운 마음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선생의 풍모를 우러르며 나의 나약함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면서 장차 선생께서 물러나 성산(星山)에서 한가로이 지내시기를 기다렸다. 만약 모든 일을 돌아보지 않은 채 책을 들고서 가 가르침을 받았더라면, 내가 비록 형편없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또한 어찌 내 스스로 낮은 부류의 사람이 되는 것을 달갑게 여겼겠는가. 그런데 이제는 모든 게 끝나 버려서 영원토록 다시는 선생을 곁에서 모시지 못하게 되었고, 선생의 기침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다. 아아, 슬프다.
이미 돌아가시는 즈음에 임종하지 못하였고, 또 반장(返葬)하는 날에 상여의 뒤를 따라가지도 못하였다. 유명(幽明) 간에 죄를 지게 되었기에 내 자신을 돌아보매 몸둘 바를 모르겠다. 이에 삼가 영구 앞에서 통곡하며 속에 쌓인 한마디 말을 하고, 간략하게 제수를 차리고서 애오라지 나의 정성을 붙이는 바이다.


[주D-001]비단옷을 …… 덧입은 것 : 자신의 화려한 모습을 감추고서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경》 위풍(衛風) 석인(碩人)에, “훌륭한 사람이 훤칠도 한데, 비단옷을 입고서 또 홑옷 입었네.[碩人其頎 衣錦褧衣]” 하였다.
[주D-002]급암(汲黯)이 …… 바꾸었으며 : 한 나라 급암은 황제의 면전에서 직간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언젠가는 황제 앞에서 “폐하께서는 속으로는 욕심이 많으면서 겉으로는 인의를 베푸니, 그러고서야 어떻게 요순 시대를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아무 말 없이 있다가 얼굴빛이 변하였다. 《史記 卷120 汲黯列傳》
[주D-003]주목(朱穆)이 …… 떠나갔다 : 주목은 후한 때의 사람으로, 효렴과(孝廉科)에 천거되었다. 영흥(永興) 원년에 기주(冀州)에 도적이 많이 발생하자 주목을 발탁하여 자사(刺史)로 삼았는데, 주목이 황하(黃河)를 건너서 기주에 가까이 왔다고 하자, 기주의 아전들 가운데 죄를 받을까 두려워서 인끈을 풀고 떠나간 자가 40여 명이나 되었으며, 경내에 도착하자 자살하는 자까지도 있었다. 《後漢書 卷43 朱穆列傳》
[주D-004]범로(范老)의 …… 되었고 : 범로는 송(宋) 나라 인종(仁宗) 때 사람인 범진(范鎭)을 가리킨다. 범진이 간원(諫院)에 있으면서 일찍이 태자를 세울 것을 청하였는데, 면전에서 몹시 간절하게 진달하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인종이 이르기를, “짐이 그대의 충성을 잘 알았으니, 기다리고 있으라.” 하였다. 그러자 범진이 전후로 19차례나 상소를 올리고는 백여 일 동안 명이 내려지기를 기다렸는데, 노심초사한 탓에 수염과 눈썹이 하얗게 세었다. 《宋史 卷337 范鎭列傳》
[주D-005]촉(蜀) 나라 …… 하였으니 : 복머리는 상중(喪中)에 부인들이 머리를 위로 묶는 것을 말한다. 촉 나라의 제갈량(諸葛亮)이 죽었을 때 촉 나라 부인들이 모두 머리를 묶어 애도를 표했다고 한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제4권 시일지하마적(是日至下馬磧) 시에, “하루아침에 별이 떨어져서 마침내 촉 나라 부인들 좌발하게 하였네.[一朝長星墮 竟使蜀婦髽]” 하였다.
[주D-006]하루 동안 …… 추운 것 : 학문 공부를 꾸준히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천하에 잘 자라는 생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루 동안 햇볕을 쪼이고 열흘 동안 춥게 하면 제대로 자랄 수가 없다.” 하였다.

제문(祭文) [문인(門人) 최현(崔晛)]


嗚呼。先生之存于世也。世之人不問遐邇貴賤。莫不爲喜曰。可爲於當世者有若人在。其出也。吾知其著龜於一世。其入也。亦不失山斗於斯文。先生之歿于世也。世之人不問遐邇貴賤。莫不爲悲曰。斯人亡矣。吾誰與有爲。仁者誰與爲善。勇者誰與爲義。向之喜也。非爲先生喜也。爲一世喜也。今其悲也。非爲先生悲也。爲一世悲也。先生之存亡。世之所以悲喜。而世之悲喜。先生亦不得不喜不悲。則吾知其平日憂君憂民之念。歿且不瞑於地下048_370c矣。嗚呼。先生之德。不可以一二擧。況小子之生也後。所見者糟粕耳。豈足以盡先生之美哉。談龍畫蛇。亦出於不自量也。徒見其渾剛之德。百鍊之金也。和粹之容。追琢之玉也。篤於內修。不求人知。衣錦而尙褧也。燕閒益莊。應接不錯。直內而方外也。聞人之善。不以細微而不錄。知己之非。不以旣往而吝改。樂於取善。而勇於徙義也。蓋其純粹之質。堅確之操。縱由天賦之獨豐。而變化之功。踐實之地。實有得於親炙之力也。小子侍先生有年矣。未嘗見其有崖異之行。驚俗之言。而至於義利公私048_370d之分。則奮然其勇。截然難犯。其讀書爲文。未嘗取奇麗之詞。浮夸之語。而至於灑翰成章。則雄贍典雅。辭義俱到。信乎有德者必有言也。惜乎吾雖未及見事親之日。而得見其居廬之時。自殮及禫。一遵古禮。情戚而不野。儀備而不文。悲憂痛毒。終始不懈。纍然致毁。衰絰不釋。禮經之外。未嘗接乎目。訓戒之外。未嘗出乎口。卽吉而哀素踰月。終其年不就仕宦。或諫過禮。公不爲盡。事亡如此。事生可知矣。其在朝也。知無不言。言無不盡。至於社稷之安危。生民之休戚。君心之怠忽。邪正之進退。048_371a勤勤章奏。惻怛中誠。雖値雷霆。少無怨悔。汲黯正笏。天子動容。朱穆乘車。汚吏解印。人懼阽危。公則綽綽。里巷僕隸。皆知名姓。市井商賈。亦知骨鯁。然其一心許國之丹衷。四字格君之至誠。出於天性。不假修爲。而世之談者。以侃侃剛直。爲先生美者。豈足以知先生者乎。奉使日域。人莫不危。而先生恰然促裝而行。屢値風波。舟楫顚危。而先生凝然聲色不動。驕酋桀狤。辭語悖慢。而先生毅然折之以理。孔聖所謂蠻貊可行者。豈無所存而然耶。及其奉命於危亂之際。受任於傾覆之後。灑泣登048_371b壇。招募散亡。集義爲勇。挽弱爲强。一片瀝血之書。人知死長之義。卒能撑拄半壁之東南。以基恢復之根柢者。伊誰之力歟。嗚呼。自非素養之篤。志操之確。其於死生顚沛之際。安能擧措若是之從容乎。古人所謂托六尺之孤。寄百里之命。臨大節而不可奪者。其在斯人歟。其在斯人也。噫。赤心憂國。白盡范老之鬚。出師未捷。奄髽蜀婦之髻。時耶命耶。天未欲佑我東耶。以先生之德之才。庶可以挽回太平。而竟止於是耶。下民之喜。天不以爲喜。下民之悲。天不以爲悲耶。抑蒼蒼茫茫。任其悲喜。而048_371c善惡禍福之理。都不管耶。嗚呼。先生嘗營精舍于靑城湖水之上。豈無意耶。使先生假之以年。優游恬靜之地。以卒中晩之功。庶紹先師之遺緖。牖示後學之指南。則先生志願。殆無憾矣。使先生進不得盡其道。退不能畢其志。負一邦陶冶之望。遺後學山樑之慟。則豈非黎庶之不祿。而斯文之不幸也耶。空空鄙夫。學迷趨向。不量朽木之難雕。自多依歸之有所。每歎小子汨沒乎塵臼。先生筮仕乎王庭。提撕未久。以歲月一曝。無賴於十寒。居常方寢而起坐。方食而投筯。竦然惕念。向風起懦。方048_371d將竢先生退閒于星山也。遺棄百事。執經承敎。則小子雖無狀。亦豈自甘於下流耶。已焉哉。永不復侍先生之側。而聞先生之謦欬矣。嗚呼。旣不得啓手於易簀之際。又不能執紼於返葬之日。罪負幽明。撫躬跼蹐。伏哭柩前。矢心一辭。薄奠非物也。聊以寓我誠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