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선생께서 이 세상에 살아 계실 적에는 세상 사람들이 멀고 가깝거나 귀하고 천하거나를 가리지 않고 모두들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오늘날의 세상에서 무언가를 할 만한 사람이 있다. 그가 나가면 나는 그가 한 세상의 시귀(蓍龜)가 될 것임을 알겠고, 그가 물러나면 또한 사문(斯文)의 태산 북두(泰山北斗)가 될 것임을 알겠다.” 하였다. 그리고 선생이 돌아가시자 세상 사람들이 멀거나 가깝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를 막론하고 모두들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죽었으니 내가 누구와 더불어 일을 하겠는가. 어진이들은 누구와 더불어 선(善)을 행하고, 용감한 자들은 누구와 더불어 의(義)를 행하겠는가.” 하였다.
지난날에 사람들이 기뻐한 것은 선생을 위해서 기뻐한 것이 아니라 한 세상을 위하여 기뻐한 것이고, 지금 슬퍼하는 것은 선생을 위해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한 세상을 위해서 슬퍼하는 것이다. 선생께서 살고 죽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고 슬퍼하니,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을 선생 역시 기뻐하고 슬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선생께서 평소에 지녔던 임금을 걱정하고 백성들을 걱정하는 생각으로 인해 죽어서도 지하에서 편히 눈감지 못할 것임을 안다.
아, 선생의 덕은 한두 가지를 가지고 말할 수가 없다. 더구나 못난 나는 뒤늦게 태어난 탓에 내가 본 것은 선생께서 남기신 찌꺼기일 뿐이다. 그러니 어찌 선생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용에 대해 말하면서 뱀을 그리고 있으니, 이 또한 나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한갓 혼후하고 강건한 덕이 백번을 정련한 금과 같고, 화락하고 순수한 태도가 조각을 아로새긴 옥과 같음만을 보았다. 안으로 마음을 닦는 데 독실하여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으니,
비단옷을 입고서 그 위에 홑옷을 덧입은 것이고, 한가로이 홀로 있을 때 더욱 얼굴빛이 장엄하였고 응접함에 있어서 어긋나지 않았으니, 안을 바르게 하고 밖을 방정하게 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착한 점을 들으면 하찮은 일이라고 하여 기록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자신의 그릇된 점을 알면 지나간 일이라고 하여 고치기를 인색하게 하지 않았으니, 선으로 나아가는 것을 즐기고 의로운 데로 옮겨 가는 데 용감한 것이다. 대개 그 순수한 자질과 단단한 조행(操行)은 비록 천부적인 자질을 홀로 풍부하게 타고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그렇게 되도록 변화시킨 공과 실천하는 바탕은 실로 친히 도야한 힘에서 얻은 것이다.
못난 내가 선생을 모신 지가 몇 년 되었는데, 일찍이 다른 사람과 특별히 다른 행실이나 세속을 놀라게 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으나, 의리(義利)나 공사(公私)의 나뉨에 이르러서는 분연히 떨쳐일어나 용감하였고, 확고히 구별하여 범하기 어려웠다. 또 글을 읽거나 문장을 지음에 있어서는 일찍이 기이하고 화려한 말이나 범범하고 과장된 말을 취하지 않았으나, 붓을 적셔 글을 지음에 이르러서는 웅대하고 전아(典雅)하여 말과 뜻이 모두 갖추어졌다. 그러니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말이 있다는 것을 믿을 만하다.
애석하게도 내가 비록 선생께서 부모를 섬기던 것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으나, 선생께서 여묘살이를 할 때는 보았다. 그때 보니, 염습(殮襲)을 할 때부터 담제(禫祭)를 지낼 때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옛 예법을 준수하여, 정은 슬프면서도 거칠지 않았고, 의문(儀文)은 갖추어졌으면서도 꾸미지 않았다. 그리고 슬픔 속에 애통해하기를 종시토록 해이하게 하지 않았으며, 수척해져서도 최질(衰絰)을 벗지 않았다. 또 예경(禮經) 이외의 글은 눈에 접하지 않았고, 훈계하는 말 이외의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길일(吉日)이 되었는데도 애통한 마음에 소복차림을 한 채 한 달을 넘게 지냈으며, 그 해가 다 가도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어떤 사람이 지나치게 예를 지킨다고 간하자, 공은 그래도 다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죽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살았을 때 섬긴 것이 어떠하였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선생께서는 조정에 있으면서는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말을 하면 끝까지 다 말하였다. 사직(社稷)의 안위(安危)와 백성들의 휴척(休戚)과 군심(君心)의 태홀(怠忽)과 사정(邪正)의 진퇴(進退)에 이르러서는, 부지런히 상소를 올렸으며, 측은한 마음이 속에서 우러나왔다. 그리하여 비록 임금의 노여움을 만났더라도 조금도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에
급암(汲黯)이 홀(笏)을 바로 들자 천자가 얼굴빛을 바꾸었으며, 주목(朱穆)이 수레를 타자 탐관오리들이 인끈을 풀고 떠나갔다. 사람들은 위태롭게 여겨 두려워 떨었으나 공은 태연자약하였다.
이에 시골의 종들조차도 모두 공의 성명을 알았으며, 시정의 장사꾼들조차도 공이 꼿꼿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한 마음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기로 한 붉은 충심과 네 글자로 임금을 바로잡은 지극한 정성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지 거짓으로 꾸며서 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떠들어 대는 자들이 꼿꼿하고 강직하다는 것만으로 선생을 찬미하니, 이것이 어찌 선생에 대해서 잘 알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일본에 사신으로 감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위험하게 여겨 가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선생께서는 태연한 마음으로 행장을 꾸리라고 재촉하여 떠나갔다. 그리고 여러 차례 풍랑을 만나서 배의 노가 부러졌는데도 선생께서는 꼼짝하지 않은 채 성색(聲色)을 변하지 않았다. 또 교만한 오랑캐의 추장이 교활하고 사나워서 말투가 몹시 패만스러웠는데, 선생께서는 의연히 이를 사리로써 꺾었다. 이는 공자(孔子)가 말한, “오랑캐 땅에 가서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니, 어찌 속에 든 것이 없이 그럴 수가 있었겠는가.
위태롭고 어지러운 즈음에 명을 받들고, 다 무너진 뒤끝에 직임을 받은 데에 이르러서는, 눈물을 뿌리면서 장수 자리에 올랐고,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모았으며, 의병들을 끌어모아 용감한 군사로 만들었고, 약한 자들을 끌어당겨 강한 군사로 만들었다. 피를 토하면서 쓴 한 조각 글에서 사람들이 윗사람을 위하여 죽는 의리를 알게 되었으니, 마침내 동남쪽 지방의 반쪽을 지탱해서 나라를 회복시키는 근본 바탕이 되게 한 것은 그 누구의 힘이었던가.
아, 평소에 기른 것이 독실하지 않고 지조가 확고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죽고 살고 무너지고 쓰러지는 즈음에 어찌 거조가 이와 같이 조용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옛사람이 말한, “6척(尺)의 외로운 아이를 맡기고 백리의 명을 내맡길 수 있으며, 대절(大節)에 임해서도 그 뜻을 빼앗을 수 없다.”고 한 것은, 그럴 만한 사람이 있는 것인가? 그럴 만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아, 붉은 마음으로 나라를 걱정하여
범로(范老)의 수염이 온통 하얗게 되었고,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이 늦어
촉(蜀) 나라 부인들의 머리를 복머리가 되게 하였으니, 시운 탓인가, 운명 탓인가.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돕지 않으려고 한 것인가. 선생의 재주와 덕은 태평 시대로 돌아가게 할 수가 있었는데, 마침내 여기에서 그치게 하였단 말인가. 백성들이 기뻐하는 것을 하늘이 기뻐하면서도 백성들이 슬퍼하는 것은 하늘이 슬퍼하지 않는단 말인가. 아니면 저 푸른 하늘은 망망하기만 하여 기쁨과 슬픔을 맘대로 하면서 선악(善惡)과 화복(禍福)의 이치에 대해서는 전혀 관할하지 않는 것인가. 아, 슬프다.
선생께서 일찍이 청성산(靑城山)의 물가에 정사(精舍)를 지은 것이 어찌 아무런 뜻이 없이 지은 것이겠는가. 선생으로 하여금 몇 년을 더 살게 하여 담박하고 고요한 곳에서 소요하면서 말년의 공부를 마칠 수 있게 하고, 선사(先師)께서 남기신 학문을 이을 수 있게 하고, 후학들이 나아갈 방향을 깨우쳐 주게 하였다면, 선생의 뜻과 바람이 거의 유감이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선생으로 하여금 나아가서는 그 도를 다하지 못하게 하고, 물러나서는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하게 하여, 한 나라를 도야(陶冶)시키려는 소망을 저버리게 하고, 후학들에게 대들보가 무너지는 애통함을 남겨 주었으니, 이것이 어찌 백성들이 복이 없는 것이 아니겠으며, 사문(斯文)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어리석은 비부(鄙夫)인 나는 학문을 함에 있어서 나아갈 방향도 모르면서 썩은 나무에는 아로새기기가 어렵다는 것도 헤아리지 않은 채 스스로 돌아가 의지할 곳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면서 매번 못난 나는 풍진 세상에 침체되어 있고 선생께서는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는 탓에, 나를 이끌어 준 기간이 얼마 안 되어
하루 동안 햇볕 쪼이고 열흘 동안 추운 것을 탄식하였다. 이에 평상시에도 잠자리에 누웠다가는 벌떡 일어나 앉고 밥을 먹다가도 수저를 내던지고는, 두려운 마음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선생의 풍모를 우러르며 나의 나약함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면서 장차 선생께서 물러나 성산(星山)에서 한가로이 지내시기를 기다렸다. 만약 모든 일을 돌아보지 않은 채 책을 들고서 가 가르침을 받았더라면, 내가 비록 형편없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또한 어찌 내 스스로 낮은 부류의 사람이 되는 것을 달갑게 여겼겠는가. 그런데 이제는 모든 게 끝나 버려서 영원토록 다시는 선생을 곁에서 모시지 못하게 되었고, 선생의 기침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다. 아아, 슬프다.
이미 돌아가시는 즈음에 임종하지 못하였고, 또 반장(返葬)하는 날에 상여의 뒤를 따라가지도 못하였다. 유명(幽明) 간에 죄를 지게 되었기에 내 자신을 돌아보매 몸둘 바를 모르겠다. 이에 삼가 영구 앞에서 통곡하며 속에 쌓인 한마디 말을 하고, 간략하게 제수를 차리고서 애오라지 나의 정성을 붙이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