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시조공에 대한 기록/최씨의 유래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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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베1 2016. 3. 30. 07:04






영남서 올라간 시골뜨기, 광해군의 천도론(遷都, 수도를 옮김)에 맞짱 뜨다

구미를 대표하는 최현은 8세때부터 두곡 고응척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배웠다. 13세 되던 해에는 금오서원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금오서원 읍청루에서 바라본 정학당(正學堂)의 모습이 최현의 강직한 성품을 닮은 듯하다. <영남일보 DB>
최현(1563~1640)은 조선시대 영남대로가 이어진 구미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여덟살 때 두곡 고응척을 스승으로 모시고 두각을 나타냈고, 이후 한강 정구와 학봉 김성일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특히 문무를 겸비한 강직한 관료였던 최현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구국책을 올리고 스스로 의병으로 나섰다. 광해군 때는 천도론이 거론되자 이를 적극 반대해 계획을 중단시켰다. 한때 역모에 휘말려 투옥되기도 했지만 그의 성품을 알고 있던 인조 임금이 왕명으로 사면하기도 했다.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1. ‘영남의 시골뜨기’라며 자신 낮춰

최현이 지은 ‘용사음(龍蛇吟)’과 ‘명월음(明月吟)’은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3·4조의 가사(歌辭)다. ‘용사음’은 임란 당시의 전황과 사회상을 묘사했다. ‘명월음’은 당시의 흉흉한 민심을 노래한 것이다. 그가 광해군 1년(1609)에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사행한 후 쓴 ‘조천일록(朝天日錄)’과 함께 학계에서 주요 자료로 평가된다.



내 탓인가? 뉘 탓인가? 천명인가? 시운인가?
잠깐 사이에 어떤 건지 난 모르겠다.
백전 건곤에 치란도 미상하고,
남만 북적도 예부터 있건마는
참목 상심이 이처럼 심하던가?
(……)

일편 청구에 몇 번을 뒤적여
구종 삼한이 어느새 지나갔나?
아생지 초에 병혁을 모르더니,
그동안 세상 변해 이 난리 만났지만,
의관 문물을 어제 본 듯 하건마는
예악 현송을 찾을 데 전혀 없다.


‘용사음’ 전반부다. 이 가사는 이동영에 의하여 1959년에 처음 학계에 보고됐다. 임진의 ‘진’(용을 상징함)과 계사의 ‘사’(뱀을 상징함)를 취하여 제목으로 했으며, 선조 25년(1592)과 26년(1593)에 있었던 임진왜란을 소재로 노래한 것이다. 앞부분에서는 중국에도 치란이 어지럽더니 우리나라에도 전란이 일어나 옛날의 문물을 볼 수 없게 되었음을 밝히고, 이어서 왜군들이 쳐들어온 것과 이에 패주하는 관장들을 나무라고, 의병장들을 칭찬한다. 이어서 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을 애석해 한다. 그리고 끝부분에서는 비분강개한 마음과 함께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고 했다.


고응척·김성일의 문하서 수학
42세땐 정구 찾아가 학문 심화

임진왜란·병자호란 의병 궐기
이괄의 난 평정에도 큰 공 세워


최현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포의(布衣)로서 나라를 구하는 구국책을 체찰사에게 올렸다. 당시 이원익 체찰사가 이를 읽고는 감탄을 했다고 한다. 최현은 또한 스스로 의병이 되어 싸움에 나서기도 했다. 이 공로를 인정 받아 그에게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이 제수됐다. 그는 선조 21년(1588) 진사가 되었는데, 이어서 35년(1602) 문과에 올라 벼슬길에 나섰다.

그는 언제나 스스로를 ‘영남에서 온 시골뜨기’라고 낮추었다. 이런 겸손과 더불어 실무위주의 기술관료 출신으로 언제나 국리민복과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매사에 임했다. 성품은 강직했고, 잘못된 일에는 결코 나서지 않았다. 그와 관련된 일화들이 꽤 전한다.

생육신 이맹전의 전기인 ‘이맹전전’을 지은 것도 그러하다. 이맹전은 그의 외고조부가 되기도 하지만, 이맹전의 삶을 옳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를 지은 것이다. 당시(1576년경) 남효온이 ‘육신전’을 지어 선조가 이를 괴이하게 여겨 신하들과 토론을 한 바도 있었을 만큼 이는 아주 예민한 문제였다. 식자들 간에는 단종과 사육신 등에 동조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그러나 이 문제는 나중에 가서야 풀려, 숙종 17년(1691)에 사육신이 복권됐다.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위된 것도 이보다 훨씬 뒤인 숙종 24년(1698)이었다. 그가 사육신 복권보다 무려 50년 전에 당시까지 역적의 무리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찬양하는 전기를 저술한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어쨌든 그가 쓴 ‘이맹전전’으로 인해 이맹전이 생육신에 오른 근거를 제공했던 것이다.

선조에 이어 임금이 된 광해군이 천도를 할 때에 그는 반대를 했다. 임란으로 한양이 피폐해진 데다, 한양에는 자신의 지지 세력이 없기에 광해군은 천도를 생각했던 것인데, 당시 한림으로 있던 그는 이를 적극 반대하여 그 계획을 중지시켰다. 한편 왕이 충청도 민심을 알기 위해 암행어사를 맡기자, 그는 꼼꼼하게 돌아보고는 세금이 공평치 못하고, 백성의 부담이 많아 살기 어렵다는 걸 임금에게 아뢰어 시정하기도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인조 2년(1624) 7월에 사헌부에서 왕대비의 수발을 드는 하인을 잡아다 문초한 일이 있었다. 이에 인조는 ‘쥐에게 돌을 던지려 해도 그릇을 깰까 무서워 못 던진다’라는 속담을 들어 신하들이 왕대비를 공경하는 마음이 부족하다고 꾸짖었다. 이에 승지로 있던 최현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사헌부의 책무가 법을 어긴 자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비록 왕대비의 하인이라 해도 잘못하면 잡아다가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이를 두고 임금이 나무란다면 하인들이 더욱 기고만장할 것입니다. 상감마마께서 이를 재고해주십시오.”

이에 임금은 화를 내면서 말했다. “다시 생각할 것도 없다. 그대들 맘대로 하라.” 뒷날 최현이 역모에 휘말렸을 때 인조는 “최현은 언제나 직간을 해왔기에 내가 자못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뒤에 생각하니 참으로 나를 친애한 것이었다. 지금 비록 죄가 있기는 하나 반드시 그때의 마음을 저버리지는 않았을 게다”라며 사면을 해주었다고 한다.

#2. 이괄의 난 평정에 큰 공 세우다

인조 2년(1624)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왕은 급히 그를 입궐하라고 했다. 그가 어전에 나가자 왕은 말했다.

“경은 지략이 있고 군무에 종사한 적이 있으니, 독전어사(督戰御使)로 출전하라.” 왕은 그에게 칼을 내렸다. “이 칼을 내리니, 부원수 이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척벌하라.”

그가 북으로 가서 전세를 살폈다. 이괄은 계속 남하하고 있었고, 원수 장만은 후퇴하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이 이상 더 후퇴하면 조정과 민심이 걷잡을 수 없이 동요될 것입니다. 더욱이 임진강을 저항 없이 건너게 하면 금후 군사의 사기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그는 전쟁을 독려했다. 그리하여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그는 전난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보고서와 지방관원과 군관들의 거취와 전투행위 등을 기록한 ‘정장사근만행적(征壯士勤慢行蹟)’을 발표했다. 인조는 논공행상을 이 기록에 의거하여 행했다고 한다.

그는 병조·형조참의를 거쳐 대사성과 부제학 및 대사간에 이르렀고 64세에 강원도 관찰사 겸 병마절도사로 부임했다. 당시 북방 호족이 평산까지 쳐들어왔을 때 직접 관군을 이끌고 북한강까지 가서 이를 지키게 했다. 또한 정예 군사를 보내 해안을 지키게 한 후 창의 격문을 작성, 각처에 발송하여 영서지방의 의병을 조직하게 했다. 그후 횡성현에 거주하는 이거인의 모반에 관련됐다는 무고를 입어 금부에 투옥되었다가 회령에 유배됐는데, 이때 인조는 그를 신임하여 무고를 일축하고 특사를 내리기도 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왕이 옮겨갔을 때 그는 의병을 일으켜 조령을 넘다가 강화소식을 듣고 치욕을 개탄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3. 고응척에 수학…정구 찾아 학문 심화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송산에 있는 최현 유허비. <영남일보 DB>
최현의 호는 인재(齋)로 명종 18년(1563)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에서 출생했다. 8세에 두곡 고응척에게 수학하게 되는데, 아주 열심히 공부했다. 어느 날 두곡이 인재에게 ‘우야명등(雨夜明燈)’이란 제목을 내어 시를 짓게 하자 그는 바로 “등 앞에는 요순의 햇살이 비치고, 창 밖에는 전국의 바람이 분다”고 해서 스승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13세 되던 해에는 근처 금오서원에서 공부했다. 이때부터 성리학에 깊이 파고들었다고 한다. 19세 되던 해부터 학문을 본격적으로 시작, 학봉 김성일을 만나 학문의 요체를 터득한다. 이후 권문해, 박성, 장현광 등과 교유하고, 42세 되던 해에는 한강 정구를 찾아 학문을 심화했다.

특히 만년에 고향 구미에 돌아와서는 ‘동국통감’과 고향의 풍물을 수록한 ‘일선지’를 저술했다. 인조 18년(1640) 78세로 별세했다. 사후에 문집인 ‘인재집’이 출간됐고, 송산서원(松山書院)에 위패가 모셔졌다. 송산서원은 최현의 고향인 해평면 해평리에 있던 송산사(松山祠)가 시초다. 효종 7년(1656) 해평면 창림리로 옮겨 서원으로 확장됐다. 고종 5년(1868)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된 후 일제강점기에 송산서당으로 중수해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서당은 출입문인 사주문과 강당만 남아 있다. 최현의 고향인 해평면 해평리 송산에는 그의 유허비가 있다.

글=이하석 <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참고문헌=구미시지, 정우락의 인재 최현의 한시문학과 그 의미지향, 조규익의 사행문학(使行文學) 초기 자료의 쓰기 관습과 내용적 성격 : 인재 최현의 ‘조천일록(朝天日錄)’을 중심으로.
공동기획: 구미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