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명현록/전주최씨 음사편

서산대사 화상당명

아베베1 2016. 5. 10. 23:59

 

 

홍재전서 제5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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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銘)

 

서산대사 화상당명(西山大師畫像堂銘) 병서(幷序) ○ 갑인년(1794)
 

 


석가(釋家)를 통칭 사미(沙彌)라고 하는데, 사미란 식자(息慈)이니 자비의 땅에서 안식하는 것을 이름이다. 그러므로 불교에 삼장(三藏)이 있는데 수다라(修多羅)가 으뜸이며, 불교에 십회향(十回向)이 있는데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으뜸이다. 대체로 계율(戒律)과 선정(禪定)과 지혜(智慧)가 자비를 구승(究乘)으로 삼지 않는 것이 없다. 법계(法界)의 공덕도 여기에 있고, 항사(恒沙)의 복전(福田)도 여기에 있으니, 이보다 더한 것이 없도다, 자비의 가르침이여. 후세의 사미는 그렇지 않아서 운천(雲天)과 수병(水甁)의 실상(實相)의 밖에서 마음을 유람하고 취죽(翠竹)과 황화(黃花)의 정이 없는 물체에 몸을 비교하니, 마침내 우리 유학에서 고목(枯木)과 사회(死灰)라고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유학에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후세의 사미가 스스로 비난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 같은 이의 사미됨은 아마 자비에서 안식하는 뜻에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석장(錫杖)을 지니고 여러 곳에 두루 참례하여 법당(法幢)을 세움으로써 인천안목(人天眼目)이 되어 운장(雲章)과 보묵(寶墨)의 하사품이 특별히 융성하였으니, 지금까지 정관(貞觀)이나 영락(永樂)의 서문과 도솔란야(兜率蘭若)에서 영광을 다툴 지경이다. 중간에는 종풍(宗風)을 발현하여 국난을 크게 구제하고 의병을 창설하여 군왕을 구제한 원훈(元勳)이 되어 요사스럽고 성전(腥羶)한 기운이 손을 따라 맑아졌으니, 지금까지 방편으로 세상을 제도한 공적은 염부제(閻浮提)ㆍ무량겁(無量劫)에 영원히 의지할 것이다. 끝에 가서는 인연을 따라 현신(現身)하고 업보를 따라 섭신(攝身)하여 인과(因果)를 찾아 상승(上乘)의 교주가 되어 매화가 익고 연꽃이 피어나 순식간에 피안(彼岸)에 이르렀으니, 지금까지 바라보면 엄연하고 가까이 가면 온화한 초상이 남아 있어 서북과 남도의 영당에서 정례(頂禮)를 받고 있다. 이러한 다음에야 비로소 삼천 대천(三千大千)을 구제하고 속세에 은혜를 베풀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몇 알의 염주로 면벽(面壁)하거나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드는 따위를 자비라고 할 수 있겠으며, 탑묘(塔廟)를 많이 건축하고 경률(經律)이나 많이 쓰는 것으로 자비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내가 영당(影堂)의 편액을 요청하는 서남 도신의 청에 따라 남도는 표충당(表忠堂)이라고 하사하고, 서도는 수충당(酬忠堂)이라고 하사하는 한편, 관리에게 명하여 제수(祭需)를 주어 해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금년이 갑인년(1794, 정조18)이므로 홍무(洪武) 갑인년(1374, 공민왕23)에 선세선사(善世禪師)에게 시를 하사한 고사를 추억하여 서설과 명문을 지어 영당에 걸게 하노라. 내 비록 불가의 진체(眞諦)를 익히지는 않았으나 일찍이 《법화경》의 의해(義解)를 들은 일이 있는데, 게(偈)의 의미가 유학의 서문(序文) 다음에 오는 명문(銘文)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으니, 유학의 명문은 진실로 범어의 게송이다. 명문은 이러하다.

불일이 처음 비추니 / 佛日初照
자비의 구름 법이 되도다 / 慈雲爲經
호겁에 외길로 전수되니 / 浩劫單傳
부탁함도 정녕하다 / 囑付丁寧
그 맹서하여 발원한 것을 묻는다면 / 問其誓願
누구인들 보시(普施) 아니라 할쏘냐만 / 孰非施舍
의리의 바다 망망하니 / 義海茫茫
건너는 이 적었는데 / 津逮者寡
복된 나라 도움 많아 / 福國多祐
높은 스님 시기에 맞추었네 / 高僧應期
석장 세우고 한 소리 외치니 / 卓錫一喝
마귀의 군졸 흩어졌고 / 魔軍離披
하늘 맑고 달 밝은데 / 天晶月朗
파도는 잠들고 물결도 조용하여라 / 波恬浪平
우담바라의 꽃이 / 優曇鉢華
동해에서 피어났네 / 涌現東瀛
경사는 적현으로 돌려주고 / 歸慶赤縣
진으로 돌아간 곳 청련이어라 / 返眞靑蓮
엄숙하고 아늑하다 쇠북과 목어(木魚)여 / 肅穆鐘魚
선방의 등불 하나 호젓하구나 / 禪燈孤懸
이름은 죽간에 전해지고 / 名流竹簡
도는 패엽에 남겼도다 / 道存貝葉
적막한 시골 주발만 한 절간에 / 寂鄕鉢寺
모습 전하여 빛나도다 / 交暎眉睫
보답하는 제사 어떻게 하나 / 報祀伊何
채소 음식은 관청에서 보내리라 / 蒲饌自官
신령스러운 복 내린다면 / 儻布靈貺
길이 시주를 보우하리 / 長蔭旃檀
상마(桑麻)와 도량(稻粱) 대나무와 갈대가 / 麻稻竹葦
온 나라에 두루 무성하여 / 匝域蓊若
주 나라의 부유하고 많음을 짝하고 / 匹周富庶
당 나라의 농경에 비견하리라 / 媲唐耕鑿
팔만 사천 세를 / 八萬四千
자자손손이 함께 즐기리 / 子孫同樂
내 즉위한 지 십팔 년 / 予卽阼之十有八年
갑인 사월 초파일에 / 甲寅四月初八日
표충사와 수충사에 봉안하노라 / 安于表忠酬忠之祠中


[주D-001]인천안목(人天眼目) : 불가(佛家)의 용어로, 인간과 천상의 일을 환히 꿰뚫어 보는 지혜나 그러한 지혜를 갖춘 사람을 이른다.

(6) 죽음을 각오하고 國務에 任한 宰相. 西山大師를 戰列에 參與케 함.
공(公)이 대가를 모시고 용만(龍灣) 행소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저 유명한 서산대사(西山大師 자는 玄應 성은 崔. 호는 淸虛. 休靜)가 제자 쌍익(雙翼) 편에 편지를 보내어 공과 만난 일이 있다. 서산대사는 공이 평안 감사로 있을 때 많은 도움을 준 관계로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그래서 공(公)은 칠언율시(七言律詩) 두 수를 답서에 대신하여 이를 서산대사에게 보냈는데 그 시(詩)에

적을 평정하는 데 방도가 없는 줄 알았노라 / 極知無策可平戎
앉아서 도성을 적의 칼날에 받쳤네 / 坐便京都陷賊鋒
천리 되는 산하에 수치가 적지 않고 / 千里山河羞不歇
만민이 어육이 된 이 참상을 어찌 무어라고 말하리요 / 萬民魚肉慘何窮
출병(出兵)할 것 비노라. 머리 먼저 희였고 / 乞師未免頭先白
격문 받들고 얼굴 붉어짐을 부끄러워하네 / 奉檄還慙面發紅
사미 보낸 것 응당 뜻 있으리 / 爲送沙彌應有意
후일에 내 유골 전장에서 찾으려 함일세 / 他時覓我戰場中


맑고 수척한 백살이나 되는 몸 / 靑羸已近百年身
고사풍연(古寺風煙)에 또한 봄일세 / 古寺風烟又一春
온 세상이 다 전쟁터가 되었는데 / 寰海自成戎馬窟
오직 대사만이 아직도 한가한 사람이구려 / 惟師猶一閑人


서산대사가 이 시를 받아 보고 감격해서 제자 쌍익(雙翼)을 대동하고 공(公)을 찾아와서 죽기까지 나라를 위하여 일할 것을 다짐하고, 공(公)의 주선으로 선조 임금으로부터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라는 직책을 받아가지고 73세의 노령으로 전국에 격문을 돌려 승병(僧의 義兵) 수천 명(六千명이라고도 함)을 규합하여 이들의 총수(僧將軍)가 되어가지고, 이들을 이끌고 명나라 군사를 도와 삼경(三京 平壤, 開城, 漢城(서울)) 수복에 큰 공을 세우게 된 것이다.
서산대사에게 보낸 이 시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격동감을 느끼게 하고 심금을 울리는 절구(絶句)로서 목석이 아닌 이상 이 시에 감동하지 아니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특히 “온 세상이 전쟁터가 되었건만 대사만이 아직도 한가한 사람이구려.”하는 구절에 서산대사는 큰 충격을 느꼈을 것이고 또 “후일에 내 유골을 전쟁터에서 찾으려 함일세”한 구절은 목숨을 헌신짝같이 생각하고 죽음을 각오한 숭고한 정신으로서 이에 격동감을 느꼈을 것이다.

 

碩齋稿卷之九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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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東外史

 

[西山大師] a_287_15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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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山大師者。完山人也。俗姓崔氏。父昌世爲箕子廟參奉。師誕三歲。而有老人謂其父曰。吾訪少沙門耳。遂以兩手擧兒。呪數聲撫其頂曰。以雲鶴字此兒。因忽不見。以故名曰雲鶴。甞與羣兒遊。輒立石爲佛。聚沙爲塔。及長。風骨英秀。力學靡懈。事其親至孝。十歲287_152d而父母歿。就學於泮宮。欝欝不得意。南遊智異山。遂悟禪旨。聽法於靈觀大師。剃髮於崇仁長老。年三十。中禪科。自大選陞禪敎。判兩宗事。忽喟然歎曰。吾出家之志。豈在於斯乎。卽解綬歸楓岳。及壬辰之役。國王西幸龍灣。乃仗劒道謁。王曰。世難極矣。爾可弘濟耶。遂泣而拜命。命爲八道十六宗都捴攝。諭方岳禮遇之。當是時。雪英起於關東。處英起於湖南。師募緇徒一千五百。合關東湖南僧軍五千人。與提督李如松。戰倭于牧丹峯。斬獲甚多。倭宵遁。師以勇士百人。迎駕還都曰。臣年八十。精已耗矣。請以戎事287_153a屬臣之徒惟政處英。歸老西山。惟政者雪英也。王嘉其志。賜號國一都大禪師禪敎都捴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甲辰正月二十有三日。會比丘於竗香山之圓寂菴。爇香講法。取影本書其背曰。八十年前渠是我。八十年後我是渠。遂趺坐而逝。年八十五。法臘六十七。異香滿室。二十餘日而始歇。師法號休靜。名其堂曰淸虗。甞登香爐峯題詩曰。萬國都城如垤蟻。千家豪傑若醢鷄。師雖鞱光不耀于世。而問道者日衆。李提督甞以詩贈之曰。無意圖功利。專心學道仙。今聞王事急。捴攝下山巓。李如松亦稱細玩尊287_153b書。足覘所養。予以紅柬。東征文武諸公。又以爲國討賊。忠誠貫日。不勝珍謝。各以銀五兩靑布一段。謹助義饗。曰勑使行人司行人薛藩。欽差經略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加一品服兵部右侍郞宋應昌。贊畫兵部員外劉黃裳。兵部主事袁黃寬。奠督陣葉邦榮。參贊軍機事同知鄭文彬。知縣趙汝梅。經理戶部主事艾維新。欽差布政司都御史韓取善。遼東都司張三畏。經歷鄧璠。欽差提督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総兵官中軍都督府都督寧夏伯兼太子少傅李如松。中協守副総兵都督楊元。左287_153c協守副総兵李如栢。右協守副総兵都指揮張世爵。原任都司李鎭。中都司吳夢豹。遊擊章接。遊擊李文昇。督陣遊擊徐輝。義州衛參將李如梅。參將駱尙志。統領宣府東路副総兵楊紹先。提督標下中軍參將方時春。統領宣府副総兵任自強。統領宣府遊擊周弘謨。統領大同營遊擊高策。統領大同營遊擊谷燧。遊擊王承恩。統領標下親丁遊擊李寧。眞定遊擊趙文明。保定遊擊梁心。陝西遊擊高徹。山西遊擊施朝卿。參將陳邦哲。經畧標下遊擊錢世禎。密雲標營都司方時輝。建昌車營都司王問。防海南兵遊擊吳惟287_153d忠。參將胡澤。遊擊王守寬。遵化左營參將李芳春。原任參將張應种。參將郭夢徵。參將蘇國賦。參遊佟養中。參遊胡鸞寬。奠副総兵佟養正。副総兵祖承訓。副総兵査大受。原任副総兵孫守廉。副総兵王維貞。副総兵王有翼。副総兵吳希漢。經歷孫論。經畧委官通判王君榮。旗皷中軍王承恩。中軍王汝禎。答應官李起明。經畧沈思賢。遊擊張奇功。遊擊葛逢夏。遊擊沈惟敬。遊擊戚金。遊擊王友迪。監督都司樓大有。遊擊戴胡弁。參遊李郁。參遊李如梧。參遊趙之牧。參將周易拜。其見重於中國人有如此。今上甲寅。命建遺287_154a像之堂。以宸章銘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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