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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최공 문성공 장손 휘 용생 후손 인제공 휘현 행장

아베베1 2016. 6. 8. 17:15





대산집 제50권        
                                                                      
 행장(行狀)
증 순충보조 공신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완성군 행 통정대부 강원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인재 선생 최공 행장〔贈純忠補祚功臣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完城君行通政大夫江原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訒齋先生崔公行狀〕
  

공의 휘는 현(晛), 자는 계승(季昇), 성은 최씨(崔氏)이니, 그 선대는 전주(全州) 사람이다. 고려조에 문하시중을 지냈고 시호가 문성공(文成公)인 휘 아(阿)가 비조(鼻祖)이다. 5대를 내려와 비안 현감(比安縣監)을 지냈고 도승지에 추증된 휘 수지(水智)에 이르러 비로소 선산(善山)의 해평현(海平縣)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고, 자손들이 이곳에 일가를 이루었다. 증조부 휘 이회(以淮)는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를 지냈고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치운(致雲)은 참봉을 지냈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부친 휘 심(深)은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추증되었으니, 3대가 추증된 것은 모두 공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참찬공은 덕을 감추어 벼슬하지 않았는데, 여헌(旅軒) 장 선생이 그의 묘갈명을 썼다. 모친은 세 분이니,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정희좌(鄭煕佐)의 따님이고, 덕양 기씨(德陽奇氏)는 교도(敎導) 기우(奇遇)의 따님이며, 성산 이씨(星山李氏)는 병절교위(秉節校尉) 이지원(李智源)의 따님이자 정언(正言) 경은(耕隱) 선생 이맹전(李孟專)의 증손녀이다. 세 분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가정(嘉靖) 계해년(1563, 명종18) 6월 10일에 공이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보통 아이들과 달리 총명하고 뛰어났다. 8세에 두곡(杜谷) 고공 응척(高公應陟)에게 배웠는데, 뜻을 가다듬어 학문에 힘썼고 시문(詩文)을 지으면 번번이 사람들을 놀랬다. 9세에 어머니 정부인이 세상을 떠나니 상례를 치르는 것이 마치 어른과 같았다. 13세에 방백(方伯)이 금오서원(金烏書院)에서 책문(策問)으로 선비들을 시험 보였는데, 공의 글이 일등을 차지하니 경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약관이 되어서는 학봉(鶴峯) 김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학문하는 방도를 배워, 이때부터 학문이 날로 진보하니 동학(同學)들이 모두 칭찬하고 탄복하였다.
만력(萬曆) 무자년(1588, 선조21)에 생원시에 1등 2위(位)로 입격하였다.
기축년(1589, 선조22)에 부친 참찬공의 상을 당하였는데, 공은 상례를 지킴에 어긋남이 없었다.
임진년(1592)에 섬나라 오랑캐가 난리를 일으키자 공은 진성(眞城)과 영해(寧海) 어간으로 피해 가서 머물다가 갑오년(1594)에 옛집으로 돌아왔다.
병신년(1596)에 체찰사(體察使) 이공 원익(李公元翼)이 영남에 부임하자 공이 글을 올려 세 가지 강령(綱領)과 아홉 가지 조목(條目)을 진술하였다. 모두 나라를 다스리고 어지러움을 바로잡을 계책이었으니, 이공이 감탄하고 답장을 보내었다.
무술년(1598)에 재신(宰臣)들이 공을 재행(才行)으로 추천하여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나서, 상소하여 아홉 가지 조목을 진달하기를,
“인재(人材)가 없어진 것은 편당 짓는 폐습이 그들을 해쳤기 때문이고, 기강이 떨치지 못하는 것은 장상(將相)에게 권한이 없기 때문이며, 인심이 해이한 것은 상벌이 분명치 못하기 때문이고, 사기(士氣)가 경박한 것은 선비를 장려함이 지극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어질고 유능한 사람이 모이지 않는 것은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서관(庶官)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일을 맡기지 않기 때문이며, 군대의 사기가 진작(振作)되지 않는 것은 통솔하는 장수에게 방책이 없어서이고, 백성의 삶이 날로 곤궁한 것은 수령을 제대로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나라의 재정이 날로 위축되는 것은 계획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목이 아홉 가지이지만 이것을 행하는 방법은 하나이니, 하나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이른바 성(誠)인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는 갓 큰 난리를 겪어 모든 일이 번잡하였으므로, 공이 한 말은 모두 당시의 상황에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곧바로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고, 그 뒤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병오년(1606, 선조39)에 과거에 급제하고, 정미년(1607)에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추천되고 제수받았다. 당시의 재상 중에 조정(朝政)을 문란케 하는 사람이 있어 공이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글을 썼고, 시배(時輩)가 이것을 가지고 공을 공격하려고 하자 말미를 청하여 남쪽으로 돌아왔다.
광해군(光海君)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대교(待敎)로 승진하고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로 옮겨졌다가, 얼마 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 이때 〈구지명(九知銘)〉을 지어 스스로를 성찰하였으니, 명(銘)에 쓰기를,
“몸가짐은 진중하여야 하고, 일 처리는 잘 살펴서 해야 하며, 말을 할 때는 삼가서 해야 하고, 진퇴는 분명하여야 하며, 학식은 넓혀야 하고, 위의(威儀)는 잘 갖추어야 하며, 벗을 사귀는 일은 신중하게 하여야 하고, 남을 응접하는 일은 정성껏 하여야 하며, 관리의 일은 익숙하게 하여야 한다.”
하였다. 이해 8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겸관하고, 하절사(賀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3월에 돌아와 복명(復命)하였다. 공은 자신을 다스림에는 간소하고 검약하였으며 아랫사람을 부림에는 엄격하고 공정하였으므로 역(驛)의 하례(下隷)들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그런데 명나라에서 받아 온 칙서 가운데 ‘권서(權署)’ 두 글자를 미처 바로잡지 못하였다고 하여 삼사(三使)가 모두 의금부에서 추고(推考)를 당하였으며, 석방되어 나와서는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도중에 정언(正言)에 제수되었으나, 사직을 청하여 체직되었다.
경술년(1610, 광해군2) 1월, 선조(宣祖)의 대상(大祥)에 참여하였다. 사헌부지평 겸 춘추관기주관(司憲府持平兼春秋館記注官)과 실록청낭청 겸 체부종사관(實錄廳郞廳兼體府從事官)에 제수되었고, 이윽고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암행 어사가 되어 관서(關西)로 내려가 강 연안을 방수(防守)하는 데 편리하도록 안배(按排)하고서 복명하였다. 낭청과 종사관에 도로 제수되었는데, 대신인 이공 덕형(李公德馨)과 이공 항복(李公恒福)이 계청하여 공을 비국랑 겸 주사구관사종사관(備局郞兼舟師句管司從事官)으로 삼고, 해안 방어에 관련된 업무들을 정비(整備)토록 한 것이다. 이때 공은 고향에 있었으므로, 관찰사에게 명하여 말을 지급하여 상경시키도록 하였다.
신해년(1611)에 예궐(詣闕)하여 주사(舟師)의 이해(利害)에 대해 상소로 진달하고, 긴급하지 않은 역사(役事)를 중단함으로써 낭비를 줄여 방수에 전념할 것을 청하였다. 마침내 호남과 영남을 차례로 순시하여 적절하게 조처하였는데, 일을 다 끝마치기 전에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최 아무개가 내려가자 호남과 영남의 분방(分防)을 마련하는 일이 조금 두서가 잡혔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대신 관장하게 되면 일이 다시 흐지부지되고 말 것이니, 판관의 직책을 갈아서 그로 하여금 그대로 주사의 직무를 관장토록 해 주소서.”
하였고, 재차 아뢰어 허락을 받았다. 얼마 안 가서 조정에 돌아와 복명하고, 다시 실록청 낭청과 춘추관 기주에 제수되어, 주사의 일을 관장하고 양남 순무 어사(兩南巡撫御史)를 겸임하니, 해안 방어에 관련된 일들이 차례로 자리가 잡혔다. 홍문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에 제수되니, 조정으로 돌아와 배명(拜命)하였다. 폐주(廢主)가 술사의 말에 따라 교하(交河)로 수도를 옮기고자 하여, 대신에게 명하여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와 이 의견을 아뢴 지관(地官)을 데리고 그곳에 가서 형편을 살펴보라고 하자, 대신과 대간(臺諫)이 편리하지 못함을 힘껏 간언하였다. 공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극력 쟁론하였는데 말이 매우 사리에 맞으니 의론이 마침내 잦아들었다. 어사가 되어 문경(聞慶) 어류산성(御留山城)의 형세를 두루 살펴보았다. 홍문관부교리 겸 경연시독관으로 승진되었고, 또 비변사 낭청으로서 조총청 도청(鳥銃廳都廳)을 겸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에 제수되자, 소장을 올려 산림의 현사를 널리 선발하여 동궁(東宮)을 보도(輔導)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폐주가 생모를 추숭하여 봉자전(奉慈殿)에 봉안하고, 천자에게 고명(誥命)을 주청하려 하니, 공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이미 높은 존호가 있고 또 별전(別殿)에서 제향(祭享)하니, 높이고 받드는 법도가 지극히 융성합니다. 그런데 지금 고명을 청하여 천자에게 이 일을 알리려 하십니다. 신이, 집안에는 두 어른이 있을 수 없고 예(禮)에는 두 적처(嫡妻)가 있을 수 없다고 들었으니, 대경대법(大經大法)이 지극히 엄하고 지극히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魯)나라 은공(隱公)이 중자(仲子)에게 한 일과 희공(僖公)이 성풍(成風)에게 한 일을 《춘추(春秋)》에서 몹시 잘못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두 군주가 뒤쫓아 천왕(天王)에게 책명(冊命)을 청하였다는 일은 듣지 못하였으니, 예를 지키고 의를 존중하는 일이 아니라서 감히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생모의 위호(位號)가 이미 정하여져 나라 안에서 높이 일컬어지는 데 조금도 미진함이 없습니다. 비록 천조(天朝)에 청한다 하여도 그 위에 더할 바가 없을 것인데, 하물며 청하고서도 윤허를 얻지 못하고 도리어 상국(上國)의 나무람을 받게 되면, 참으로 현양(顯揚)하는 도리에 혐의가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정언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이때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그의 도당을 몰래 사주(使嗾)하여,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한다고 모해하여 옥사를 꾸몄다. 영창대군을 안율(按律)해야 한다는 계사(啓辭)를 아침저녁으로 올리니, 공이 다툴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규례를 들어 혐의(嫌疑)가 있음을 이유로 물러나기를 청하니, 폐주가 좋아하지 않았다. 정조(鄭造)와 윤인(尹訒)이 아뢰기를 “최 아무개가 작은 혐의를 핑계로 중요한 의논을 교묘하게 회피하려 하니, 관직을 삭탈하소서.” 하니, 폐주가 그 청을 따랐다. 이때부터 고향에 숨어 자취를 감추고서 도서(圖書)와 사서(史書)를 읽으며 자적(自適)한 세월이 모두 11년이었다.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고 홍문관수찬 겸 도원수종사관(弘文館修撰兼都元帥從事官)에 제수되었으나, 공이 소를 올려 체직을 간청하였다. 그 대략에,
“임자년(1612) 봄에 영창대군을 임금에 추대하려 한다는 뜬소문이 도성 안에 횡횡하고 대궐에도 퍼졌으며, 인심이 흉흉하여 언제 터질지 모르는 형편이었습니다. 신은 그때 정언에 제수된 지 5일 만으로, 뜨거운 불길이 눈앞에 닥쳐 말을 하고자 하여도 할 수 없어, 마침내 사직하여 구차히 불길을 피하였고, 결국에는 죄로 관직에서 삭출(削黜)당하였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신하가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면 그 형벌은 묵형(墨刑)이다.’ 하였습니다. 더구나 신의 책무가 간관(諫官)의 일이었으니 직책상 머리가 부서지도록 간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흉악한 자들이 어린 대군을 무함하여 죽이려는 것을 앉아서 보고만 있으면서 입을 다물고 한마디 말도 못하였고, 난처하여 물러났습니다. 한 번의 죽음을 아까워하여 선왕을 저버린 잘못을 끝내 면치 못하고 정온(鄭蘊)의 죄인이 되었으니, 어찌 곧은 선비의 기개에 유독 부끄럽지 않았겠습니까. 이때부터 두문불출하였으며, 스스로 깊은 골짝에서 생을 마치게 되고 벼슬에 올라 도성 문에 들어갈 가망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다행히 지금 때를 만나 성상께서 등극하시매 동지들과 함께 줄지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나, 전에 지은 죄를 되돌아보아 떳떳하지 못하니 어찌 감히 물의(物議)를 생각지 않겠습니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낯 두껍게 죄지은 사람이 다시 나선다면 청명한 조정의 명기(名器)를 더럽히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면서 직책을 잘 수행하라고 하였다.
이때는 아직 국옥(鞫獄)이 끝나지 않아 잡아 가둔 죄수가 감옥에 가득하였는데, 공이 진언하기를 “천하에 원래 한번 정해져 변하지 않는 법이 있으니, 이는 법을 집행하는 자가 형량을 높이거나 낮출 수 없는 것입니다. 강상(綱常)을 범하고 국모(國母)를 폐하기를 꾀한 자와 소장을 올리기를 맨 앞에서 이끈 유생과 논계(論啓)에 참여한 대관(臺官)은 반드시 죽여 용서하지 않아야 합니다. 대군(大君)을 죽이도록 청한 자는 마땅히 차율(次律)로 처단하여야 하고 원흉에 붙어서 충량(忠良)한 사람들을 해친 자는 그다음의 형벌에 처해야 합니다. 은밀히 모의를 주도한 자, 소차(疏箚)에는 이름이 빠졌으나 인사권(人事權)을 오래 잡았던 자와 도당(徒黨)을 널리 심었던 자는 그다음의 형벌로 다스려야 합니다. 혹시라도 본심은 그렇지 않았으나 화(禍)를 두려워하고 세(勢)에 밀리어 논죄하는 정청(庭請)의 계사에 참여한 자와 유생으로서 협박을 받아 상소에 참여한 자에 대해서는 협종망치(脅從罔治)의 율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등급이 분명하니 차례에 따라 단죄하는 것은 유사(有司) 한 사람의 일입니다. 상께서도 어려운 일이라 하여 미루지 않으시고 공의(公議)로써 결단하신다면 무슨 혼란스럽고 지체되는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옳게 여겼다.
교리에 제수되어 매일 강연(講筵)에 입시하여 문의(文義)를 통해 경계의 말을 올렸다. 그 말 가운데에서 “군자와 소인이 하는 일은 다르면서도 서로 비슷합니다. 소인이 군자를 무함할 때에는 역시 붕당(朋黨)을 짓는다는 것으로 지목하니, 한(漢)나라의 당고(黨錮)와 우리나라 기묘사화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임금의 규구준승이 정밀하지 못하여 공과 사의 구분을 잘 살피지 못하면 그 재난이 크게 됩니다. 소인의 당은 알기도 쉽고 없애기도 쉬우나 군자가 서로 화합하지 않는 것은 더 불행한 일이니, 송나라의 낙삭(洛朔)과 우리나라의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이것입니다. 상께서 더할 나위 없이 바르고 대단히 공평한 도를 가지고 정성스럽게 시행하고 오랫동안 지켜 따른다면, 편벽되고 사사로운 습속이 저절로 크게 바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고금의 제왕 중에 그 누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기를 바라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요순에는 도저히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한계를 짓는 데 안주하여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니, 그래서 날로 가려져 덕을 밝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대요(大堯)의 ‘능히 높은 덕을 밝히는 일’을 고원(高遠)하여 행하기 어렵다고 여기지 마시고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보는 일’에 ‘스스로 밝히는 공부’를 더하시어 마치 하루도 빼놓을 수 없는 의복과 음식처럼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한다면 요 임금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만약 금방 행하였다가 금방 그만둔다면 밝다가도 다시 어두워질 것입니다. 공부에서는 시종여일(始終如一)하게 하는 것이 가장 어려우며, 임금에게는 더욱 어렵습니다. 요즘 전하께서 지난날의 잘못된 일을 살펴 경계를 삼으시어 백성과 함께하기를 다시 시작하셨으니, 만약 지금부터 끝까지 이 덕을 지켜 조금도 그침이 없으시다면 구족(九族)을 친하게 하고 만방(萬邦)을 화목하게 하는 일이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또 “성인(聖人)은 사욕(私欲)이 없고 그침이 없어서 저절로 성실하지 않음이 없지만, 보통 사람의 경우는 사려(思慮)가 사방에서 일어나면서 선악의 기미가 은밀히 드러납니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 점이니 반드시 성실하게 되어 스스로 속이는 잘못이 없기에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성인을 배우는 공부이며, 실제로 이 하나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적을 막는 방책이 싸우는 것이라고도 하고 지키는 것이라고도 하지만, 싸우고 지킬 수 없을 때는 피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모장(毛將)은 바다의 섬에 홀로 주둔하면서 겨우 자신을 보전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비록 온 나라의 힘을 다하더라도, 만약에 오랑캐가 멀리서 쳐들어오면 그들과 싸울 수가 없고, 일패도지(一敗塗地)하여 근본이 다 없어질 것이며, 비록 굳게 지키고자 하여도 지킬 수 없어서 형세가 반드시 피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조금 여유가 있을 때는 ‘도적을 피한다.〔避寇〕’라는 말을 꺼리지만, 급한 상황이 되면 피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피한다고 미리 말하여 인심을 해이하게 해서는 안 되겠지만, ‘성벽을 견고히 하고 들판을 깨끗이 치우는〔堅壁淸野〕’ 대비를 생각하심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다.
윤방(尹昉)이 “최 아무개는 젊어서부터 병무(兵務)에 관심을 가져 군사(軍事)에 통달하고, 근래에 관서(關西)로 가서 산천을 그림으로 그리고 방어하는 계책을 수립하였다고 합니다. 지금 막료로 있는 사람이 큰일을 하기에 부족하니, 최 아무개에게 한쪽 방면의 책임을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신은 타고난 바탕이 약하고 천성이 느긋하여 군사의 일에는 맞지 않습니다. 다만 전쟁하는 시기에 생장하여 기껏 비분강개하는 말만을 할 뿐인데, 더군다나 지금은 늙어 쇠약하고 병이 많으니 오죽하겠습니까. 원수(元帥)가 불러 종사관으로 삼으려는 것은 신을 한창 나이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막관(幕官)이 되었으니 내일 응당 숙배하고 병을 무릅쓰고 내려가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가서 임무에 힘쓰라.”라고 하면서, 산천을 그린 그림 한 책을 바치게 하고, 어주(御酒)를 내리고 활과 화살을 하사하였다. 황주(黃州)에 가서 여러 읍의 군병을 점검하였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제수되었다. 원수가 병을 이유로 종사관을 체차(遞差)하기를 아뢰어 조정으로 돌아오자 병으로 면직을 청하였는데,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와 사도시 정(司䆃寺正)으로 옮겨졌다. 상이 비국(備局)에 명하여 사대부로서 장수의 재질이 있는 자를 추천하도록 하여 추천된 사람이 모두 10명이었다. 당대의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뽑혔는데 공이 그 안에 들었다. 그 뒤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홍문관 응교, 성균관 사성과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2)에 체부(體府)의 종사관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사인(舍人)에 옮겨 제수되었다. 역적 이괄(李适)이 군사를 일으켜 모반하자, 상이 공을 독전 어사(督戰御史)로 임명하고 검(劍)을 주면서 “힘껏 싸우지 않는 자가 있으면 부원수 이하는 마음대로 처단하도록 허락한다.”라고 하였다. 공은 밤새 평안도로 말을 달려가서 장수들을 독찰하고 충성과 의리로써 면려하였다. 당시에 원수 장만(張晩)이 군사를 집결시켜 놓고 신중하게 행동하여 싸움에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공이 공문(公文)으로 질책하니 장만이 화를 내었고, 저탄(猪灘)에 이르러 비로소 전투가 벌어져 관군이 패배하자, 장만이 급히 장계(狀啓)하여 공의 독전 탓으로 허물을 돌렸다. 공이 장계를 올려 “저탄의 싸움에서 아군은 죽은 자가 600명에 가깝고 적병은 도망하여 흩어진 자가 거의 몇천 명입니다. 이전에 과연 몇 차례 교전을 하였다면 적병은 저절로 흩어져 없어졌을 것인데, 도적을 길러 주어 근심을 남김으로써 세력을 강성하게 만들었으니 원수가 어찌 그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안현(鞍峴)에서 대승을 거두자 행조(行朝)의 논공(論功)에서 부원수 이수일(李守一)을 수장(首將)으로 삼고, 장만의 직책을 빼앗아 백의종군하게 하였다. 공이 행재소(行在所)에 들어갔을 때, 상이 “오늘의 원훈(元勳)은 누가 되는 것이 마땅한가?”라고 물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전투의 방략(方略)을 지시한 것은 모두 장만에서 나왔고 이수일은 단지 먼저 승전보를 올렸을 뿐이니, 마땅히 앞선 사람과 따른 사람의 분별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 말에 따랐다. 또 이흥립(李興立)의 죄에 대해 물었을 때, 공이 “이흥립이 역적을 맞아들인 죄상은 뚜렷하여 숨기기 어려운데, 아직 목숨을 보전하고 있으니 신은 이것을 괴이하게 여깁니다.”라고 하자, 바로 이흥립을 참형(斬刑)에 처하도록 명하였으니, 상이 공에게 크게 의존하여 공의 말을 듣고 공의 계책을 따르는 것이 이러하였다.
환도(還都)하고 나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특별히 자급이 오르자, 공이 사은(謝恩)하고서 소장을 올려 자핵(自劾)하며 승질(陞秩)을 사양하였다. 얼마 안 있어 병조 참지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이때 명례궁(明禮宮)의 장무(掌務)가 위조한 인장을 찍은 문서로 경기의 고을에서 소란을 일으켰는데, 사헌부에서 추문(推問)하여 죄를 다스리니, 상이 하교하기를 “윗전에 소속된 자이니 사건의 성격이 본시 여느 사건과는 다르다. 그런데도 무단히 형신(刑訊)하여 자전(慈殿)을 크게 놀라게 하였으니, 존경하는 도리에 흠이 되었다. 이제부터는 십분 신중히 하여야 할 것이니, 이 말을 사헌부에 전하라.”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법부(法府)의 임무는 서정(庶政)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니, 간악한 짓을 하고 법을 어긴 자는 궁중과 부중(府中)에 관계없이 죄를 따져 다스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명례궁의 장무가 감히 멋대로 만든 문서로 민간을 침탈하였으니, 법부에서 적발하여 형신한 것은 바로 직무를 수행한 것입니다. 중외(中外)의 사람들로 하여금 중간의 간악한 놈들이 한 짓을 분명히 모두 알게 하여 백성의 원망이 위로 자전께 이르지 않게 하였으니, 사리(事理)로써 헤아릴 때 어찌 온당하지 않음이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십분 신중히 하라는 뜻을 사헌부에 내리신다면, 대관(臺官)들의 의기가 저상되고 아랫것들의 기가 살아 지난날 방자하게 날뛰던 폐단이 오늘날 다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승지를 담당한 신들은 감히 이 전교를 사헌부에 전하지 못하고 삼가 도로 들입니다. 전하께서는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근래 승정원에서 일의 체요(體要)를 알지 못하고 하교한 것을 멋대로 도로 들였으니 극히 해괴하다. 승지를 추고(推考)하라.” 하였고, 양사(兩司)가 그 명을 거두어들이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그 후 연신(筵臣)들이 잇달아 강력히 간하자 마침내 추고하라는 명을 거두었다.
본궁(本宮)의 장무가 여전히 이전의 폐습(弊習)을 좇아 위조한 인장을 찍은 문서를 보내 소란하게 지방에 해악을 끼치고도 숨어서 나타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또 그자가 전후에 저지른 간교하고 방자한 죄를 극론(極論)하니, 상이 “여러 번 계사를 올렸어도 윤허하지 않았던 일인데, 이처럼 마음대로 가두고 치죄하니 오늘날의 대관(臺官)은 군명(君命)을 만만히 여겨 무시하는 자라고 할 만하다. 속히 그자를 풀어 주라.”라고 답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잘못을 저지른 하인을 사헌부가 규찰하여 적발하고 추문하여 치죄하는 것은 그 직임인데, 전하께서 본궁 소속의 하인은 다른 곳의 하인과 같이 취급할 수 없다고 몇 번이나 엄하게 하교하셨습니다. 사구(司寇)의 직임은 간교한 자를 벌하고 포악한 자를 누르는 것으로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감싸는 의(義)로 삼으니, 비록 천자의 아버지라도 살인을 하였으면 마찬가지로 법을 적용하여 용서하지 않는데, 하물며 법으로 다스리게 되어 있는 본궁의 하인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만약 죄주기를 청하는 것을 가지고 마음대로 한다고 하시고 법을 적용하는 것을 가지고 군명을 만만히 여겨 무시하는 것이라고 하신다면, 이 또한 몹시 온당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전에 하교를 봉환(封還)하였으니 지은 죄가 이미 큰데, 지금 또 죽음을 무릅쓰고 번독하게 하는 것은, 신(臣)들이 차라리 전하께 거듭 죄를 얻더라도 전하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죄를 얻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부디 세 번 더 생각하시어 이 상주문에 부표(付標)하시고 윤허를 내려 대각(臺閣)을 넉넉히 용납하는 도리를 보이소서.” 하였다. 공이 사안에 따라 복역(覆逆)하면서도 왕명의 출납(出納)을 성실하게 하니, 사람들은 옛날의 도가 오늘에 다시 행하여진다고 말하였다.
체차되어 호군(護軍)에 제배되었다가 얼마 뒤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자, 차자(箚子)를 올려 시폐(時弊)에 대해 극언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보건대,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오늘날처럼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해와 달의 빛이 흐리고 다섯 행성의 운행이 어지러우며, 유성(流星)이 명당성(明堂星)을 범하고 목수(木宿)가 집법성(執法星)을 침해하는가 하면 모두(旄頭)가 동요하고 천랑(天狼)망각(芒角)이 생겼습니다. 또 4일 밤에는 감추어졌던 천둥과 번개가 묘성(昴星)과 필성(畢星)의 분야(分野)에서 발생하였으니, 이곳은 연호(燕胡)에 해당됩니다. 신들이 밤새 근심하였는데, 이것이 매일 사라지지 않으니 잠자리에서도 근심되고 두렵기가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쉬지 않고 부지런히 분발하는 정성으로 위에서 힘쓰시고, 나이 많고 명망 있는 신하와 어질고 유능한 선비들이 각각 그 직책에 따라 온갖 폐단을 없애는 것을 인사(人事)에서 구하니, 재앙을 입을 까닭이 없을 듯도 합니다. 이변이 생긴 것이야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근래의 일을 살펴보면 모두 옛날 일을 답습하고 있어 전혀 제대로 정돈된 일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비록 현자를 구하려는 정성은 있으나 끌어들이고 신임하는 도리가 미흡하고, 비록 정사(政事)를 새롭게 하려는 뜻은 있으나 선후와 본말의 순서가 잘못되었으며, 비록 절약하고 검소히 하는 덕은 있으나 쓸데없는 일을 없애고 비용을 줄이는 실천이 없습니다. 신하들은 비록 밤낮으로 부지런히 일하지만 온갖 직무가 부진하고 흐트러진 것은 옛날과 같고, 비록 인재(人材)를 가려서 뽑는다는 이름은 있으나 사사로움을 따르는 폐단은 옛날과 같으며, 비록 재생(裁省)의 명령은 있으나 간리(奸吏)들의 농간은 옛날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기강은 날로 문란해지고 민심은 날로 동요되며, 군정(軍政)은 날로 허물어지고 나라의 재정은 날로 위축되고 있습니다. 호시탐탐 노리며 나날이 커 가는 적은 흉계를 품고서 때를 기다리고, 원망을 품고 재앙을 기뻐하는 무리는 선동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으니, 지금의 형세가 몹시 위태롭다 할 것인데도 여전히 공허한 글을 더욱 늘어놓아 겉모양을 꾸미고 있습니다. 노성(老成)한 사람들은 주저하며 결정을 미루는 데 익숙하여 아무도 기꺼이 일을 맡으려 하지 않고, 명망 있는 사람들은 원대한 계획에 어두워 부질없는 논의만을 일삼으니, 설혹 밖에서 갑작스러운 침입이 있거나 안에서 뜻하지 않은 재난이 생기면 그 누가 나라를 위해 한번 계책을 내어 이처럼 흐트러진 형세를 그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반정(反正) 초기에 대단히 간특한 자들은 이미 그들의 죗값을 치렀으니, 윤기(倫紀)를 어긴 죄 이외에 지엽적으로 연좌된 부류들은 다스리지 말아야 하는데, 유배 보낸 사람이 너무 많아 원한을 품은 자가 더욱 많아졌으니, 이는 임금의 광대한 다스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또 훈신(勳臣)의 군관(軍官)들을 호위(扈衛)라고 일컬으니 의당 급할 때 의지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멀리 변방에서 수자리하는 것을 피하려는 무리가 다투어 투속(投屬)하여 몇천 몇백의 무리를 지어 사실(私室)을 호위하고 있습니다. 비록 한때의 임시 계책은 된다 하더라도 실로 영구히 상례(常例)로 시행할 수 있는 규범이 아닙니다. 폐단의 근원을 한번 열어 놓으면 말류를 막기는 어려우니, 나중에 잘 마무리하려면 일찍부터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호패법(號牌法)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근본이 정해지지 않고 기강이 바로 서지 않아 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금방 법을 제정했다가 곧바로 폐지하니, 이는 단지 소란의 빌미가 될 뿐이었고 끝내 언제 정리될지 기약이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계책에는 반드시 때가 있는 법이니 지금이라도 고치지 않는다면 반드시 위태하고 망하는 상황에 이를 것입니다. 이는 천심(天心)이 기뻐하지 않아 사람을 놀라게 하고, 전하로 하여금 두렵게 여겨 정사(政事)를 개혁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천도(天道)가 유원(幽遠)하다고 여겨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해이하게 하지 마십시오. 충실하고 꾸밈이 없으며 상황을 잘 해결하고 도량이 넓은 인재를 얻어서, 고굉(股肱)의 소임을 맡기고 아침저녁으로 자문(諮問)하되, 경박한 의론이 이간질하지 못하게 하여 그의 능력을 널리 펼 수 있게 하십시오. 또 재략이 있고 용감하며 계책이 원대한 인재를 얻어서, 곤수(閫帥)의 직책을 맡기고 지휘와 계획을 전적으로 맡기되, 아무데서나 쑥덕거려 그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여 재지(才智)를 다 발휘할 수 있게 하십시오. 일단 몇 명의 충성스러운 신하를 얻었으면 문무의 온갖 직책을 역량에 따라 맡기되, 그 직책을 나누었으면 옮기지 마십시오. 관리들이 그들의 일에 익숙하도록 하고 무신(武臣)들이 변방의 성에서 목숨을 바치도록 하되, 실적을 내지 못하면 그 태만한 죄를 물어 주극(誅殛)의 법에 따라 조처한다면, 그 누가 감히 오늘 하는 것보다 더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먼저 하셔야 할 급선무는, 절실히 필요하지 않은 관원을 태거(汰去)하고, 특별히 설치한 국(局)을 혁파하여 낭비를 줄이며, 죄에 연좌된 사람들을 사면하고, 의지할 곳 없는 무리에게 생업을 주어 인심을 진정시키는 일입니다. 형식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일에 전념하고, 부드럽게 처신하여 강한 것을 제어하고 간략하게 처신하여 번잡한 것을 제어하여야 합니다. 힘써 행하여 게을리하지 않고 차례로 닦아 거행한다면, 민심이 기뻐하게 되고 하늘의 뜻이 돌아올 수 있어서, 위망(危亡)의 재앙이 수습되고 중흥의 치적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그대들의 말이 바로 지금의 병폐에 적중하니, 그대들은 시무(時務)를 아는 자라고 할 만하다. 세도(世道)를 회복하고 무너진 기강을 엄숙히 정돈하는 것은 책임이 임금에게 있다. 오늘날 노성(老成)한 자들은 타성에 젖어 머뭇거리기만 하고 연소(年少)한 자들은 오직 경박한 짓을 일삼으니, 어찌 사리에 어두운 내가 덕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천재(天災)가 이와 같고 습속(習俗)도 이와 같으니 나는 몹시 부끄럽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그대들의 직무는 언책(言責)이니 일에 따라 극력 말하고 행여 조금이라도 숨기지 말라. 차자의 말은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소(疏)의 내용에 “군관들이 투속하여 사실을 호위한다.〔軍官投附 宿衛私室〕”라는 말이 있다고 하여 훈신(勳臣)들이 떼 지어 격노하여 들고일어나자, 공이 논계(論啓)하여 인혐(引嫌)하였다. 상이 이 다툼을 조정하려는 뜻으로 특별히 체차를 명하였다가 얼마 안 있어 병조 참지에 제수하였다.
이때 역적 김원(金愿)이 처형되면서 당시의 유명한 인사들 중 많은 사람들을 무고하게 끌어댔는데 공의 이름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상이 문책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공이 소장을 올려 자핵(自劾)하였으니, 그 대략에,
“신의 성명이 역적의 초사(招辭)에 나왔는데도, 하늘의 해가 어두운 곳을 밝히듯 신을 문책하지 말라는 전지를 내리고 또 대죄하지 말고 직임을 살피라고 명하시니, 너무도 감격하여 애써 직임을 살피고 있습니다. 삼가 듣건대, 중신(重臣)이 등대(登對)했을 때, 신이 군관을 없애기를 청하여 기찰(譏察)할 방도를 막아 역적의 무리로 하여금 그들의 계책을 이루게 하려 하였고, 또 신이 역모를 알면서도 고변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알면서 고변하지 않는 자는 그들과 죄가 같으니 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신이 비록 못난 사람이기는 하지만 군신(君臣)의 직분과 의리를 대략은 안다는 것은 흉악한 역적들도 알았을 것입니다. 저들이 비록 흉악하고 우둔하지만 어찌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가지고 신에게 알렸겠으며, 신 또한 차마 이런 말을 들었다면 어찌 잠자코 있었을 뿐이었겠습니까. 중신의 말이 이미 연석(筵席)에서 나온 이상, 신은 감히 스스로 죄가 없다고 여겨 세간에서 낯 두껍게 지낼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을 형리(刑吏)에게 내려보내 진위를 캐내어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다.
좌찬성 김류(金瑬)가 차자를 올려 공을 준엄하게 논죄하였으나 상이 비답하기를 “최현이 소를 올려 스스로를 변명하였으니 외람됨이 심하다. 그러나 그 본심은 질박하고 곧을 뿐이니, 어찌 역모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을 리가 있겠는가. 경의 말 또한 지나치니, 사실에 없는 말로써 다른 사람의 죄를 논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공이 훈공 있는 귀족들을 거스른 데다 이제 역적의 무함을 당하게 되자, 여러 원망하는 자들이 일을 꾸며 때를 틈타 공을 헐뜯고 배척하였다. 다행히 성명(聖明)의 보살핌으로 문책당하지 않도록 바로 허락을 받았으니, 만약 외길의 충성과 곧은 도리로 임금과 일찍 맺어진 사이가 아니었다면 거의 화를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을축년(1625, 인조3)에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다가 예조 참의, 대사성, 부제학으로 옮겨졌다. 차자를 올려 여덟 가지 힘써야 할 일을 진술하였는데, 심학(心學)을 밝히는 것을 다스림의 근본으로 삼는 일과 말을 삼가 여러 아랫사람의 마음을 순하게 하는 일과 궁액(宮掖)의 기강을 엄히 하여 민간의 비난을 그치게 하는 일과 상신(相臣)을 존중하여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효과를 책임 지우는 일과 기량에 따라 사람을 써서 당대의 인재를 다 활용하는 일과 관원을 자주 바꾸는 것을 삼가서 돈박(敦樸)한 기풍을 보존하는 일과 공론(公論)을 세움으로써 붕당의 폐해를 없애는 일과 유학(儒學)을 숭상하여 풍속 교화의 근원을 북돋우는 일이었다.
또 진강하는 기회에 폐정(弊政)을 바로잡는 일에 대한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지금 시행되는 제도 중에 가장 심하게 퇴폐한 것이 세 가지이니, 그것은 관제(官制)와 전제(田制)와 병제(兵制)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도 관제가 가장 급합니다. 지금 비국(備局)이 국정을 오로지 주관하니 의정부는 한가한 부서가 되고, 승정원이 단지 출납만 관장하니 승지는 일개 정원의 하리(下吏)가 되었으며, 도감(都監)을 별도로 설치하니 본사(本司)가 도리어 남는 관사가 되었습니다. 관원을 자주 바꾸니 중앙 관사가 역참과 같이 잠시 머무는 곳이 되고, 문서를 관수(管守)하지 않으니 서리(胥吏)가 법을 농단하게 되었으며, 직책을 겸하는 일이 많으니 전적으로 책임지는 성실함이 없습니다. 일이 하위 관원에게 돌아가니 직무를 나누는 의의가 없고, 고과와 감독이 분명하지 않으니 자리를 비워 두는 것이 습관이 되었으며, 봉록이 너무 박하니 염치가 쉬이 없어졌습니다. 이 모두가 관제의 폐단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서사(署事)의 법을 폐지한 뒤로는 삼공이 정사를 논의할 곳이 없었습니다. 이에 비국을 따로 설치하여, 재신(宰臣) 중에 군무(軍務)를 아는 자를 당상으로 삼고 무반(武班)에서 글자를 아는 자를 낭청으로 삼으니, 이 제도는 대략 송나라의 추밀원(樞密院)과 같아서 조정의 정령(政令)이 모두 비국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찬성(贊成)과 참찬(參贊)은 병을 요양하는 자리가 되고 사인(舍人)과 검상(檢詳)은 기악(妓樂)을 주관하게 되었으며, 기무(機務)를 관장하는 중대한 업무는 도리어 명망 없는 재상과 글자만 대충 아는 무부(武夫)에게 맡겨졌으니, 이러고서 치도(治道)가 이루어기를 바라는 것이 이미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마땅히 조종(祖宗)의 법도를 따라 서사의 규정을 다시 두어야 하며, 그 후에야 정령이 한 곳에서 나오고 기강이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승지는 옛날의 시중(侍中)과 상서령(尙書令)에 해당하며 중국 조정의 내각(內閣)입니다. 나라의 크고 작은 문서가 이곳을 경유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모든 정령(政令)의 이로움과 해로움, 임금의 잘잘못에 대하여 대신과 대간은 알 방법이 없어도 승지만은 알 수 있으니, 그 자리의 중요함이 어떠합니까. 그런데도 지금 승지의 물망(物望)이 도리어 삼사(三司)의 아래에 있고, 단지 문서를 받들어 행하는 일만 할 뿐입니다. 신은, 마땅히 세상의 명망 있는 사람을 잘 가려 선발해서 충당하고, 자주 하문하시어 그 권한을 무겁게 하며, 그들로 하여금 일에 따라 잘못된 것을 논박하게 함으로써 직접 임금의 정책을 도와, 의정부와 서로 표리의 관계가 되게 하여야 옳다고 여깁니다.
오늘날 정사가 번거로운 것은 모두 대간이 자주 바뀌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사소한 혐의도 모두 피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신이 듣기로 조종(祖宗)의 조정에서는 대간은 비록 추고를 받더라도 피혐을 이유로 체직하지 않고 양사로 하여금 서로 함사(緘辭)를 보내어 묻게 하였다고 하니, 피혐이 원래 조종의 제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혹시라도 가벼운 병에 걸리거나 조금이라도 곤란한 일이 있으면 다투어 정고(呈告)하기를 미처 다 말하지 못하는 듯이 하니 더욱 온당하지 않습니다. 또 옛날의 언관(言官)은 각자가 스스로 정사를 논계하였으므로 누구나 그 소견을 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계사(啓辭)는 하리(下吏)가 간통(簡通)을 가지고 각 언관의 집으로 뛰어다녀, 반드시 한 의견으로 된 다음에야 입계합니다. 이 때문에 걸핏하면 구애받아 감히 말을 다 하지 못하고, 하나라도 어긋나거나 틀린 것이 있으면 시끄러운 사단이 분분히 일어납니다. 그러니 지금 마땅히 옛날의 제도를 전적으로 본받아서, 피혐하지도 말고 정고하지도 말며, 생각하는 바가 있는 사람은 각자가 스스로 진계(陳啓)하고, 오직 매우 중요한 일로 조의(朝議)가 일치된 의견에 대해서만 비로소 합계(合啓)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올바른 말을 날마다 듣게 되고 또한 분란이 일어날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조정 신하 중에 경학에 밝은 사람은 경연에 두어 오로지 군덕을 보도하는 것을 전담하게 하고, 문장에 능한 사람은 예문관에 두어 왕언(王言)을 짓는 것을 전담하게 해야 합니다. 기타의 사람은 그들의 재주에 따라 육조와 각 관사(官司)에 두어 한 가지 일을 전담하게 하되 겸관시키지도 말고 이동시키지도 말며, 그중에 공적이 남다른 사람은 각각 그 관사에서 승진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 여러 관사 중에 긴요하지 않은 것은 하나로 합치고, 정원이 너무 많을 때에는 태거해야 합니다.
또 따로 산국(散局)을 설치하되 원수(員數)는 많게 하고 녹봉은 적게 하여, 오래 벼슬하다가 늙었는데 돌아갈 전지(田地)가 없는 사람이나 실제로 병이 있는 사람이 모두 이것으로 녹용(錄用)의 실마리로 삼게 하며, 혹 사명(使命)을 받들거나 제관(祭官)으로 차임하는 등의 일이 있을 경우에는 모두 이들로 충당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관직에 있는 사람은 직임이 없어질 염려가 없고 벼슬을 잃은 사람은 낙담하는 한탄이 없을 것입니다.
외방에 있어서는 감사(監司)와 병사(兵使)와 수사(水使)에게 모두 한 고을의 수령을 겸하도록 허락하여 각각 그 땅의 수입으로 살아가게 하고, 문신 판관을 두어 세세한 직무를 규찰하고 방자한 일을 막는다면, 직임을 오래 맡아서 성과를 내면서도 여러 고을을 침탈하는 폐단이 없게 될 것입니다.
군정(軍政)에 있어서는 정예한 장정을 뽑아서 속오(束伍)를 편성하고 노약자는 군역을 면제하고 대가로 베를 받으며, 군역을 관후하게 하여 도망간 자가 돌아오게 하고, 무예를 가르쳐 정예로 만들어야 합니다.
전제(田制)에 있어서는 양전(量田)을 다시 하여 누락된 전결(田結)을 수습하고, 대동법을 복구하여 민역을 균등하게 하며, 입안(立案)을 금지하여 겸병을 억제하며, 면세(免稅)를 없애어 부세(賦稅)의 수입을 넓혀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 대략입니다.
무릇 지금 세상의 사람들은 조용히 일 없이 지내는 것을 고상하다고 여기고 부지런한 것을 저속하다고 여기며, 사사로운 정에 따르는 것을 후하다고 여기고, 법대로 하는 것을 박덕하다고 여깁니다. 또 벼슬이 자주 갈리는 것을 영화롭게 여기고 오래 직임을 맡는 것을 구차하다고 여기며, 뇌물을 주며 청탁하는 것을 법전으로 여기고 부의(浮議)를 공론으로 여깁니다. 이런 풍속을 크게 고치지 않는다면 강동(江東)에서 구차히 연명한 진(晉)나라, 시들어 쇠약한 송(宋)나라가 되어, 좋은 법과 훌륭한 정책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또 대사성 겸 승문원부제조에 제수되어,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병인년(1626, 인조4)에 우부승지에 제수되었다가 전례에 따라 좌부승지로 옮겼다. 이때 흰 무지개가 해를 가리는 이변이 일어나니 공이 재난을 멈추게 하고 하늘을 감동시키는 법을 아뢰었다.
황제의 아들이 태어나 반조사(頒詔使)가 우리나라에 오자 공이 연위사(延慰使)가 되어 관서(關西)로 내려갔는데, 병이 나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니 상이 다른 사신으로 공을 대신하게 명하였다. 조정에 돌아와 병으로 체직되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도중에 좌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체직을 요청하는 소를 올렸다. 고사(固辭)하는 뜻이 매우 간절하니 상이 윤허하면서 약물(藥物)을 하사하였다. 얼마 안 있어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가서 보니, 전결(田結)이 없는데도 장부에 올리는 일과 적곡(糴穀)을 갚지 않는 일이 온 도의 고질적인 폐단이었다. 공이 바로 소장을 올려, 여러 고을에 명하여 없는 땅과 있는 땅 두 가지 전안(田案)을 만들게 하여, 없는 땅은 빼고 실재의 땅에만 세금을 매기고 도망갔거나 죽은 자를 조사하여 갚지 않은 적곡을 탕감해 주게 하니, 온 도의 백성이 고루 혜택을 입었다.
정묘년(1627, 인조5)에 북쪽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침노하여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니, 공이 정예한 군사를 뽑아 해서(海西)의 부원수(副元帥) 휘하로 보내고, 노약한 군사 천여 명을 규합하여 한강을 방어하였다. 도원수 및 관북의 군사가 강원도 경내로 들어와 주둔하니, 공은 정성을 다해 주선하여 그들의 식량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격문을 지어 온 도에 널리 알렸다.
“아! 큰 도적이 창궐하여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운데, 묘당의 계책이 전도되어 마련해 둔 계획이 없다. 각 고을의 수령들은 달려가서 대응하기에 여념이 없어야 할 것인데, 한 사람도 활을 당기고 칼을 휘둘러 임금을 잊지 않고 싸워서 죽는 사람이 없으니, 수백 년간 배양해 온 원기(元氣)가 무너지는 것이 세찬 바람 앞의 마른 풀과 같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통곡을 참을 수 있겠는가. 여러 군자들은 예의의 나라에서 나고 자라 군사의 일을 익히지 않았으니, 이런 위급한 때를 만나서 한 목숨 구하기도 힘에 벅찰 것이다. 그런데도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목숨을 바치는 의리를 생각하고 나라와 함께 원수를 갚아야 하는 의리로 함께 분기하여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의량(義糧)을 모으니, 진실로 옛 열사의 풍도가 있어 국가에 빛이 있게 되었다. 얼핏 듣기로 여러 고을에 의로운 선비를 비웃으면서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더러 있으며, 심지어 음으로 양으로 배척하여 반드시 저지하고야 말려는 자도 있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서 나도 모르게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칼을 뽑아 책상을 내리쳤다. 백발의 늙은이로 세상 물정 모르는 내가 관찰사 직임을 맡아 한 지방을 다스림에, 마음이 피로하고 재주가 졸렬하여 볼만한 공적이 없다 하더라도, 의를 중시하고 악을 미워하는 일은 나의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참으로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있다면 길을 쓸고 달려가 맞이하고자 하거니와, 만약 누구라도 의를 해치고 일을 그르친다면 반드시 조사하여 처벌할 것이며, 여러 고을의 수령들로 하여금 남김없이 적발하여 결단코 용서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당나라의 사나운 병졸도 오히려 흥원(興元)의 조서(詔書)에 눈물을 흘렸는데, 무릇 혈기가 있는 자라면 어찌 애통해하는 교서(敎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든 군자들은 나라를 위한 충성심을 더욱 북돋아 소인들에게 동요되지 말고, 군량을 모으거나 의사(義士)를 모집하여 관군을 도와 싸움으로써 절의(節義)를 다해야 할 것이다. 또 선적(善籍)과 악적(惡籍)을 만들어, 재력을 아끼지 않고 내놓은 자와 기꺼이 의병으로 지원한 자는 선적에 올리고, 대의를 듣기 싫어하여 비방하고 배척하는 자는 악적에 올리도록 하라. 나중에 조정에 보고하여 상벌을 확실히 시행할 것이다. 혹시 처음에 미혹된 짓을 하다가 뒤에 도리를 깨달은 자가 있다면 이전의 죄를 용서할 것이니, 함께 큰일을 수행하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이 격문이 이르니 사람들이 다투어 분발하였다.
임금이 도성으로 돌아오자, 공이 시무에 대해 소를 올렸는데 거의 만언(萬言)이나 되었다. 큰 요점은 뜻을 세우는 것을 근본으로 삼되 기강을 세우는 일, 쓸데없는 관직을 없애는 일, 군병을 기르는 일, 재용(財用)을 비축하는 일, 요새를 설치하는 일로 이 다섯 가지를 급선무로 여겼다. 상소의 끝에 말하기를 “아뢴 다섯 가지 일은 모두 지엽적인 일이라 본시 유자(儒者)가 임금께 올릴 말씀이 아닙니다만, 지금은 위급한 상황이라 규정만을 준수하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디 전하께서 절충하고 취사선택하시어, 혹시라도 채택할 만한 것이면 과감히 시행하셔서 환란을 대비하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상이 비답하기를 “경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을 가상히 여긴다. 진달한 일에 대하여는 마땅히 의논하여 처결하겠다.” 하였다. 공이 전후로 올린 차자와 상소가 모두 시폐(時弊)를 정확히 지적한 것이었는데, 이 상소는 더욱 절실하였다. 공의 훌륭한 지략과 큰 계획은 참으로 다스림을 행하는 좋은 법이요 폐단을 고치는 긴요한 일이었지만,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으니 식자(識者)들이 한으로 여겼다.
공은 관서의 의병장 정봉수(鄭鳳壽)가 용골산성(龍骨山城)으로 들어가 의로움을 떨치고 적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으나 병기가 모자라고 식량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서, 바로 목면과 궁시(弓矢)와 환약과 마필(馬匹)을 보내어 군수(軍需)를 도와주었다. 그러고는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사사로이 다른 도(道)를 도왔다는 이유로 장계를 올려 보고하고 자핵(自劾)하였다. 관서의 관찰사가 아뢰기를 “정봉수가 용골산성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고 최 아무개가 용골산성을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였다.
9월에 순시하여 횡성(橫城)에 이르렀는데, 이 현(縣)에 사는 이인거(李仁居)가 만나기를 청하고는, 군사를 일으켜 역적을 토벌하고자 하며 곧 상소문을 지어 서울로 올라가려 한다고 하므로, 공이 호되게 꾸짖어 물리쳤다. 그리고 원주(原州)와 횡성 두 고을의 수령에게 은밀하게 경계하여 각별히 조사하고 동태를 살피도록 하고, 행차가 홍천(洪川)에 이르러서도 여러 번 단속하여, 낌새가 있으면 급히 통보하게 하였다. 그 역적이 횡성의 군기(軍器)를 훔쳤다는 소식을 듣고서 크게 놀라 즉시 급히 장계(狀啓)하여 상황을 보고하고, 급히 사람을 보내 이인거에게 편지를 남겨 반역과 순종의 도리를 가지고 타일렀다. 여러 고을의 관군들을 정돈시켜 좌우에서 진격하여 토벌하게 하니, 원주 목사 홍보(洪靌)가 군사를 보내 이인거를 체포하여 곧바로 조정에 바치고서 비로소 공에게 보고하였다. 공이 듣고서 즉시 급히 보고하였으나, 조정에서는 기찰(譏察)과 체포가 늦었다는 이유로 공을 체포하여 여러 달 동안 구금하니,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상이 말하기를 “지난해 야대(夜對)에서, 마침 나의 처치(處置)에 미진한 일이 있다며 이 사람이 극력으로 간쟁하기를 그치지 않아 내가 매우 괴로웠다. 그런데 그 후 생각해 보니 이 사람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비록 죄를 입었지만 틀림없이 초심(初心)을 저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니, 풀어 주게 하라.” 하였다. 그러나 간관들이 계속 처벌을 고집하여 회령(會寧)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있다 용서받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경오년(1630, 인조8)에 천성이 간교한 역적 양천식(楊天植)의 역모가 발각되었는데, 초사(招辭)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상이 또 전에 하였던 말로 하교하기를 “이렇게 충성스럽고 진실한 사람이 어찌 역적과 서로 알고 지낼 이치가 있겠는가.” 하고 특별히 석방하도록 명하니, 공이 임금의 은혜에 감격하여 전교(傳敎)를 글로 써서 자손들을 훈계하였다.
정축년(1637)에 아들 산휘(山輝)가 세상을 떠나자, 비참하고 시들하여 집에 머물고 싶지 않아 금릉(金陵)의 별서(別墅)로 옮겨 거처하였다.
경진년(1640) 6월 4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8세였다. 12월 모일, 묵평(默坪) 곤향(坤向)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부음을 아뢰자 상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 주게 하였다. 순충보조 공신(純忠補祚功臣)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 홍문관제학(禮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완성군(完城君)에 증직되었으니, 이는 아들 산휘가 공신에 참록되었기 때문이었다.
공은 의성 김씨(義城金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사(府使) 김복일(金復一)의 따님이다.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산휘이니, 통정대부로 부사를 지냈고 영사 공신(寧社功臣)에 책훈(策勳)되었다. 재취는 창녕 조씨(昌寧曺氏)이고 후취는 재령 이씨(載寧李氏)인데,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부사는 3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 이박(爾博)은 부사과(副司果)이고 그 아래는 이후(移厚)와 이원(爾遠)이며, 딸은 현감 박황(朴愰)에게 출가하였다.
이박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응건(應乾)은 부호군(副護軍)이고 체건(體乾)은 부사과(副司果)이다. 이후는 세 아들을 두었으니, 대건(大乾)과 양자로 나간 상건(象乾)과 준건(峻乾)이다.
응건은 네 아들을 두었으니, 두첨(斗瞻), 두망(斗望), 두기(斗紀), 두앙(斗昂)이다. 체건은 외아들 두추(斗樞)를 두었다. 대건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두극(斗極)과 두령(斗齡)이다. 상건은 네 아들을 두었으니, 두흥(豆興)과 생원 두원(斗元), 두인(斗寅), 두남(斗南)이다. 준건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두광(斗光)과 두징(斗徵)이다.
그 아래 후손들은 거의 수백 명이라 많아서 다 적지 않는다. 그중에 과제(科第)에 오른 사람으로, 5세손 수이(壽頤)는 생원이고, 경(憼)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으며, 수인(壽仁)은 생원이다. 6세손 만주(萬柱)와 정주(廷柱)는 생원이고, 광옥(光玉)은 진사이다. 광악(光岳)은 생원, 진사 양과에 모두 입격하였고, 광벽(光璧)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지평을 지냈다. 광익(光翊)은 진사이고 광직(光稷)은 생원이다. 7세손 작(綽)과 양우(陽羽)는 생원이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빼어나고 기품이 너그럽고 의연하였으며, 충성과 신의를 마음에 간직하고 청렴과 근신으로 처신하였다. 총명이 남달랐고 박문강기(博聞强記)하였으며, 더욱 경전 공부에 힘을 써서 깊이 파고들어 자득한 공부가 있었다. 천문과 지리, 병진(兵陣)과 주수(籌數)의 법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통하였고, 글을 지을 때는 이치에 맞고 뜻이 잘 통하는 것을 위주로 하여 험하고 날카로운 말은 하지 않았다. 남이 잘한 것을 보면 칭찬하기를 마치 못 미치는 듯이 하였고 남이 잘못한 것을 들으면 그것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정성스럽고 간절하였으나, 일에 임하여 시비를 가릴 때는 의연히 당신의 지조를 지켰다. 공은 젊어서부터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일에 관심을 두어, 항상 격앙되고 강개한 어조로 고금의 성패와 득실을 논하였으니, 얽힌 곳을 풀어내고 긴요한 곳을 꿰뚫어 시조(施措)와 운용(運用)의 실제를 드러내려 한 것이지 빈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공은 벼슬에 나아간 지 얼마 안 되어 환란을 만났고, 기미에 밝아 벼슬에서 물러나 집에 들어앉아 자정(自靖)하였다. 청명한 조정을 만나 임금의 보살핌을 받게 되자, 감격하여 정사에 대해 아뢰기도 하고 소장과 차자를 올리기도 하여, 끝까지 할 말을 다 하였고 기휘(忌諱)하느라 피하지 않았다. 공이 나랏일을 지적하여 통절히 말하고 진실한 마음을 드러낸 것은 육지(陸贄)의 ‘봉천지주(奉天之奏)’가부(賈傅)의 ‘통곡지책(痛哭之策)’에 비하여도 손색이 없는 듯하다. 상은 모두 겸허하게 개납(開納)하여 공의 충신(忠信)함을 알아주었으며, 시무(時務)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또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이라고 치하하였으니, 군신의 관계에서 이만하면 때를 만나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 없으나, 불행히도 액운을 만나 거듭 체포되고 구금되었다. 비록 임금께서 용서해 주는 은택을 입었으나, 훈신귀족(勳臣貴族)들은 공을 미워하여 기회를 틈타 모함하였다. 이때부터는 공의 발자취가 유유히 금오산(金烏山)과 낙동강 근처에 머물러 다시는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공이 경륜(經倫)과 기도(奇道)를 지니고서 청명한 시대를 만났으면서도 그 지닌 것을 만분의 일도 펴지 못하였으니 어찌 백 년 뒤 뜻있는 선비의 유감이 아니겠는가. 그렇기는 하나 오늘날 공의 글이 빠짐없이 남아 있고, 세상에 주보언(主父偃)처럼 헌책(獻策)을 잘하는 사람이 있어 공의 글을 읽고서 조정에 올려 채택되었으니, 이것 역시 공의 언행이므로 당시에 쓰이지 않았던 것을 한스러워할 것이 아니다.
공은 일찍부터 스승에게 배웠고, 또 한강(寒岡 정구(鄭逑))과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등 여러 선생과 편지로 논변하여 훈도(薰陶)와 도움을 받은 것이 많았지만, 애써 재덕을 감추고 저술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공의 학문에 대한 조예(造詣)를 자세히 상고할 수 없다. 그러나 공이 지은 《강의(講議)》 한 편을 보더라도, 경훈(經訓)을 분석하고 의리를 설명하는 것이 모두 성현의 뜻에 부합하며, 설명과 대답이 분명하고 일에 따라 경계하는 것 또한 임금에게 아뢰는 요체를 깊이 안 것이니, 공의 학문이라면 어찌 이른바 ‘이치에 따라 일을 다스리고 본체를 밝혀 쓰임에 알맞게 한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시문(詩文)과 잡저(雜著), 그리고 〈경연강의(經筵講議)〉ㆍ〈학봉언행록(鶴峯言行錄)〉ㆍ《일선지(一善志)》ㆍ〈관서록(關西錄)〉 등 몇 권이 남아 있다.
광벽이 가첩(家牒)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부탁하기를 “선조(先祖)의 사적(事跡)은 모두 기록이 있지만, 그동안 세상에 어려운 일이 많아 행장을 여태 맡기지 못하였습니다. 감히 행장을 써 주기를 부탁합니다.” 하였다. 내가 학문이 변변찮은 후학으로서 어떻게 감히 덕을 기록하고 일을 찬술하여 분수를 모르고 행장을 함부로 짓는 죄를 저지르겠는가. 굳이 사양하자 지헌군(持憲君)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선조께서 돌아가신 지 이제 100여 년이 되었습니다. 지금에도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더욱 희미해져서 아무것도 밝히지 못할 것입니다. 그대는 선조를 깊이 앙모하고 있으니 어찌 이일에 무정할 수 있겠습니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감히 끝까지 사양할 수 없어, 삼가 가첩에 따라 이렇게 차례로 기록하여 글 쓰는 사람들이 상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삼가 행장을 쓴다.


[주D-001]선산(善山)의 해평현(海平縣) :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일대로, 조선 태종 때 해평현을 선산부(善山府)에 병합하였다.
[주D-002]여헌(旅軒) …… 썼다 : 장현광(張顯光)의 문집인 《여헌집(旅軒集)》 권12에 〈처사최공묘갈명(處士崔公墓碣銘)〉이 실려 있다.
[주D-003]고공 응척(高公應陟) : 고응척(1531~1605)의 본관은 안동, 자는 숙명(叔明), 호는 두곡(杜谷) 또는 취병(翠屛)이다. 사마시에 입격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저술로는 《두곡집(杜谷集)》과 《대학개정장(大學改正章)》이 있다.
[주D-004]명나라에서 …… 하여 : 1609년(광해군1) 동지사(冬至使)가 북경에서 돌아오면서 받아 온 명나라 예부 자문(禮府咨文)에서, 새로 즉위한 광해군을 ‘국사를 임시로 맡은 한 사람〔權署國事一員〕’이라고 지칭한 것을 바로잡지 않은 일을 말한다. 《光海君日記 1年 4月 6日》
[주D-005]삼사(三使) : 당시 동지사로 함께 갔던 정사(正使) 신설(申渫), 부사(副使) 윤양(尹暘)과 서장관 최현(崔晛)을 말한다.
[주D-006]분방(分防) : 분번입방(分番入防)의 준말로, 수군(水軍)에 편성된 군사가 평소 육지에 있다가 순번에 따라 해방(海防)의 역에 복무하는 일을 말한다.
[주D-007]폐주가 …… 봉안하고 : 광해군의 생모는 공빈(恭嬪) 김씨(金氏)이다. 광해군은 1610년(광해군2) 윤3월에 생모를 추숭하여 묘호를 봉자전(奉慈殿), 능호를 성릉(成陵)으로 정하였다. 《국역 광해군일기 2년 윤3월 6일》
[주D-008]예(禮)에는 …… 들었으니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5년 경문(經文)에 “혜공은 중자의 손 무늬 때문에 그녀를 맞아 부인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제후는 두 적처를 둘 수 없었다.〔惠公以仲子手文 娶之 欲以爲夫人 諸侯無二嫡〕”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9]노(魯)나라 …… 일 : 《춘추좌씨전》 은공 5년의 “9월에 중자의 궁을 완성하고 처음으로 육우의 춤을 바쳤다.〔九月 考仲子之宮 初獻六羽〕”라는 기사와 문공(文公) 9년의 “진인이 와서 희공과 성풍의 수의(襚衣)를 주었다.〔秦人來 歸僖公成風之襚〕”라는 기사를 말한다. 중자와 성풍은 각각 은공과 희공의 생모로, 모두 부왕의 측실이었다.
[주D-010]혐의(嫌疑)가 …… 청하니 : 최현이 백의(白衣) 차림으로 외출하였다가 길에서 숭양부원군(嵩陽府院君) 김신원(金信元)을 만나 미처 피하지 못하고 말을 탄 채 대화를 나누었는데, 낮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 백의 차림으로 말을 탄 채 1품(品)의 관원을 본 일에 대해 자책한 것이다. 《국역 광해군일기 5년 5월 4일》
[주D-011]신하가 …… 묵형(墨刑)이다 : 《서경》 〈이훈(伊訓)〉에 “임금이 몸에 한 가지의 잘못이라도 있으면 나라가 반드시 망하니, 신하가 이것을 바로잡지 못하면 그 형벌은 묵형이다.〔邦君有一于身 國必亡 臣下不匡 其刑墨〕”라고 하였다.
[주D-012]정온(鄭蘊)의 죄인 : 정온(1569~1641)은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정온이 1614년(광해군6)에 부사직(副司直)으로 있으면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이 부당함을 상소하고 강화 부사 정항(鄭沆)의 참수를 주장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며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되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13]차율(次律) : 사형(死刑)보다 한 단계 낮은 형벌이라는 의미로, 대체로 절지(絶地)에 유배하는 것을 말한다.
[주D-014]협종망치(脅從罔治)의 율 : 《서경》 〈윤정(胤征)〉의 “괴수는 섬멸하되 협박에 못 이겨 따른 자들은 다스리지 말라.〔殲厥渠魁 脅從罔治〕”라는 지침을 말한다.
[주D-015]한(漢)나라의 당고(黨錮) : 후한(後漢)의 환제(桓帝)와 영제(靈帝) 때 환관(宦官)이 득세하여, 반대당이었던 진번(陳蕃)과 이응(李膺) 등 청절(淸節)한 학자들을 종신 금고에 처하여 벼슬의 길을 막아 버린 일을 말한다. 《後漢書 卷67 黨錮列傳》
[주D-016]송나라의 낙삭(洛朔) : 북송의 철종(哲宗) 무렵 서로 다투었던 두 당파를 이른다. 낙(洛)은 정이(程頤)ㆍ주광정(朱光庭) 등의 낙당을 말하고, 삭(朔)은 유지(劉贄)ㆍ유안세(劉安世) 등의 삭당을 말한다.
[주D-017]구족(九族)을 …… 일 : 《서경》 〈요전(堯典)〉의 “능히 높은 덕을 밝혀 구족을 친하게 하시니 구족이 친하고, 백성을 고루 밝히시니 백성이 덕을 밝히며, 만방을 화목하게 하시니 여민이 아, 변하여 온화하게 되었다.〔克明俊德 以親九族 九族旣睦 平章百姓 百姓昭明 協和萬邦 黎民於變時雍〕”라는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주D-018]모장(毛將) :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을 가리킨다. 1621년(광해군13)에 요동 지방이 후금(後金)에 점령당하자, 요동 도사(遼東都司) 모문룡은 조선 땅으로 넘어와 압록강 연안을 근거지로 후금과 대치하였다. 1622년에는 평안도 철산 가도(椵島)를 점령하고, 요동 회복을 공언하면서 조선에 병기와 식량을 강요하였다. 이는 당시 조선의 외교와 사회 안정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였으며, 이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빌미가 되었다.
[주D-019]오랑캐 : 당시 명나라를 압박하면서 강성해지고 있던 북쪽의 청나라를 가리킨다.
[주D-020]윤방(尹昉) : 1563~1640.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가회(可晦), 호는 치천(稚川)이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인조반정 후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쳤고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정묘호란 때는 왕을 강화(江華)에 호종(護從)하였다.
[주D-021]명례궁(明禮宮) : 당시 인조의 생모 구씨(具氏)가 살던 저택이다. 선조가 임진왜란 후 환도하여 궁으로 사용하였고 광해군 때 경운궁(慶運宮)으로 개칭하였으며, 인조 때 다시 명례궁으로 개칭하였다. 순종 때 덕수궁(德壽宮)으로 개칭하였다.
[주D-022]복역(覆逆) : 임금이 내린 명령이 잘못되었다고 여기면, 승정원에서 임금의 뜻을 거스르면서 다시 아뢰는 것을 말한다.
[주D-023]모두(旄頭) : 묘수(昴宿)의 다른 이름으로 호성(胡星)이며, 오랑캐를 상징한다고 한다.
[주D-024]천랑(天狼) : 천랑성(天狼星)으로, 침략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별 이름이다.
[주D-025]망각(芒角) : 별에서 날카롭게 뻗어 나오는 빛살을 말한다.
[주D-026]재생(裁省) : 물자의 낭비를 줄이는 일을 가리킨다. 1623년(인조1)에 국가의 경비를 줄이고 각종 세금을 삭감할 목적으로 재생청(裁省廳)을 설치하였다. 《國朝寶鑑 卷34 仁祖朝1》
[주D-027]역적 김원(金愿)이 처형되면서 : 1624년(인조2)에 이인거(李仁居)ㆍ박윤장(朴允章)ㆍ이대온(李大溫)ㆍ기필헌(奇必獻) 등이 선조의 일곱째 아들 인성군(仁城君)을 세우려는 역모를 꾸몄을 때, 군관 김원이 모의에 참여하였다가 처형된 일을 말한다. 《국역 인조실록 2년 11월 8일》
[주D-028]때를 틈타 : 대본에는 ‘乘幾’라고 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용례에 의거하여 ‘幾’를 ‘機’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9]서사(署事)의 법을 폐지 : 1405년(태종5)의 관제 개정으로 의정부에서 관장하던 정무를 육조(六曹)와 각 관사(官司)로 이관한 일을 말한다. 《국역 태종실록 5년 1월 15일》
[주D-030]입안(立案) : 전지(田地)나 생산물이 있는 산림, 하천 등에 대하여 관에 청원하여 소유의 허가를 받는 일, 또는 그 허가한 문서를 말한다.
[주D-031]강동(江東)에서 …… 송(宋)나라 : 여기서 말한 진(晉)나라는 서진(西晉)이 흉노족 유한(劉漢)에 망한 후 남쪽으로 내려와서 세운 동진(東晉)을 말하고, 송나라는 여진족 금(金)나라에 밀려 남쪽으로 내려온 남송(南宋)을 말한다. 두 나라 모두 북쪽 오랑캐 나라의 핍박을 받아 수모를 겪으면서 구차하게 나라를 유지하였다.
[주D-032]흰 …… 이변 : 장차 병란이 일어날 조짐으로 보기도 하고 지성이 감천한 증표로 보기도 한다. 《사기(史記)》 권83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에 관련 기사가 나온다.
[주D-033]당나라의 …… 흘렸는데 : 흥원(興元)은 당나라 덕종(德宗)의 연호이다. 덕종 때 요영언(姚令言)과 주자(朱泚)가 반란을 일으켜 수도 장안(長安)을 점령하니, 덕종이 봉천(奉天)에 피난해 있으면서 흥원 1년(784)에 자신의 실정(失政)을 자책하는 조서를 반포하여 군사들을 격려하였다. 그러자 장수와 병졸들이 이 조서를 보고는 감격하고 용기를 내어 적병을 쳐부수고 장안을 수복하였다. 《舊唐書 卷133 李晟列傳》
[주D-034]애통해하는 교서(敎書) :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도로 피란하여 반포한 교서로, 인조가 자신의 부덕함을 탓하고 백성이 겪는 괴로움을 애통해하면서, 나라의 위급한 상황을 설명하고 승전을 위한 백성들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국역 인조실록 5년 2월 4일》
[주D-035]이인거(李仁居) : ?~1627. 본관은 영천(永川)으로, 익찬(翊贊)을 지내고 강원도 횡성(橫城)에 거주하다가 1627년(인조5)에 정사 공신(靖社功臣)이 나라를 그르친다는 명분으로 도당을 규합하여 난을 일으켰다. 스스로 창의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으로 칭하고 서울로 침입하려다가 원주 목사 홍보(洪靌)에게 잡혀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주D-036]홍천(洪川) : 대본에는 ‘洪州’로 되어 있는데, 《인재집(訒齋集)》 부록 〈행장〉에 의거하여 ‘州’를 ‘川’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37]아들 산휘(山輝) : 최산휘(崔山輝, 1550~1637)로 자는 백옥(伯玉), 호는 낙남(洛南)이며,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1628년(인조6) 유효립(柳孝立)의 역모 사건을 알려 평완군(平完君)에 책봉되었다. 청송 부사(靑松府使)로 있을 때 세상을 떠났다.
[주D-038]육지(陸贄)의 봉천지주(奉天之奏) : 당나라 육지(754~805)의 상주문(上奏文)들을 가리킨다. 육지는 당나라 덕종(德宗)의 신하로, 주자(朱泚)의 난을 만나 봉천에 포위되어 있을 때 내상(內相)으로 시종하여, 임금을 위해 많은 조서를 쓰고 상주문을 올렸다. 육지의 글은 모두 사정을 곡진하게 나타내고 시의(時宜)에 잘 들어맞았으며 주의(奏議)에 뛰어났다. 육지의 시호는 선공(宣公)이다. 그가 쓴 주의를 후인이 모아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를 편찬하였고 후대 정치가의 필독서가 되었다.
[주D-039]가부(賈傅)의 통곡지책(痛哭之策) : 가부는 전한(前漢)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를 지낸 가의(賈誼, 기원전 200~기원전 165)이다. 가의가 문제(文帝)에게 상소한 글에 “오늘날 시국에 통곡할 만한 것이 한 가지요, 눈물 흘릴 만한 것이 두 가지요, 긴 한숨을 지을 만한 것이 여섯 가지입니다.〔今之事勢 可爲痛哭者一 可爲流涕者二 可爲長太息者六〕”라는 구절이 있다. 통곡지책은 이 상소문을 가리킨다. 《漢書 卷48 賈誼傳》
[주D-040]주보언(主父偃) : ?~기원전 126. 전한(前漢) 무제(武帝) 재위 시의 제나라 사람으로, 황제에게 직접 올린 상소로 발탁되어 낭중(郞中)이 되었다가 한 해 동안 네 차례나 벼슬이 올라 중대부(中大夫)가 되었다. 당시 제후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추은책(推恩策)〉 등, 주보언의 모책(謨策)들이 시행됨으로써 한(漢)나라가 크게 안정되었다. 《漢書 卷64上 主父偃傳》
[주D-041]지헌군(持憲君) : 사헌부 지평을 지헌으로 부르기도 한다. 행장을 부탁한 최광벽(崔光璧)이 전 지평이었으므로 이렇게 지칭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