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세종 대왕신도비 (펌)

세종대왕 막내아드님 영해군 이당 이장 묘지

아베베1 2016. 6. 25. 21:19




三灘先生集卷之十四            
                                                                      
墓誌

世宗莊憲大王遷陵誌石文 




恭惟我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太宗恭定大王第三子也。元敬王后閔氏。以大明洪武三十年丁丑四月初十日壬辰。誕于漢陽邸。自幼聰明絶倫。兩宮奇愛之。長封忠寧大君。性好學。雖在疾病。猶不釋卷。世子禔多失德。永樂十六年戊戌夏。群臣請廢立。太宗以王有潛德。具奏于太宗文皇帝。冊爲世子。秋八月。太宗倦勤。禪位于王。遣使請命。明年己亥春正月。帝遣使錫命爲王。繼遣使賜宴。又賜太宗宴。敕曰。王能簡賢命德。俾宗祀有托。不唯王一家之慶。且爲王一國之人慶也。歲庚子。元敬王后不豫。避忌于外第。王步行扶輦。至有露宿之時。及薨。哀毀踰禮。是年。設集賢殿。博選儒雅。置二十員以備顧問。壬寅夏五月。太宗薨。致喪三年。宣德元年丙午。宣宗皇帝賜綵幣書籍。自是寵賚頻繁。史不絶書。丁未秋。始置宗學。悉令宗室子弟受學。其諸子未就外傅者。亦敎以義方。嫡庶之間。禮嚴恩篤。人無間言。戊申冬。制朝會樂。始於大會。不用女樂。我國歲貢金銀。然非土宜。常患不給。乃遣親弟表請。朝議難之。帝曰。朝鮮王必不欺。豈可強人所無哉。許免貢。婆猪江野人數犯邊。癸丑四月。命將討之。斥地置慶興等鎭。自麗季。咸吉道沿邊之地。爲野人所據。至是盡復舊疆。甲子。對馬一歧島倭入寇上國。又侵軼我濟州之境。王使人諭島主。主承命。執送賊倭六十二人。於是械獻京師。帝賜綵幣嘉獎。夫以倭奴之頑悍。屈於折札。野人之桀驁。熸於偏師。非恩信素孚而威靈遠讋。則何以得此哉。初世子禔避謗在外二十年。召還京。群臣切諫皆不納。事二兄友諸弟。極其敬愛。以至九族之親。亦皆敦睦。王英睿冠古。輔以聖學。自卽位以來。宵旰求治。禮樂刑政。制度文爲凡先世所未遑者。皆擧而力行。酌古今文質之中。修五禮儀注。述祖宗功德之盛。作定大業等樂。創制訓民正音。以二十八字。盡通天下言語。文字紐切之妙。人所叵測。損益累朝憲章。以成經濟六典。規模宏遠。條貫詳密。可爲萬世法程。尤洞曉天文律曆。修七政算內外篇。作諸儀象。所以授人時也。取資治通鑑諸家註釋。讎校纂輯。名曰訓義。又撰三綱行實,治平要覽等諸書。所以隆文敎厚人倫也。哀矜庶獄。則有恤刑之敎。慮民淫僻。則作戒酒之書。虛懷受諫。尊賢禮士。終王之世。大臣無有遭刑戮者。尤重親民之職。朝臣未經守令者。不敢陞授顯秩。三十年間。吏稱其職。民安其業。朝庭淸明。四方晏如。號爲東方堯舜云。妃昭憲王后沈氏。靑松世家。皇曾祖諱龍。高麗贈門下侍中。靑華府院君。祖諱德符。相高麗恭愍王。再爲門下侍中。逮我恭靖王朝。爲議政府左政丞。封靑城伯。皇考諱溫。某官。皇妣安氏。領敦寧府事諡昭懿公天保之女。封三韓國大夫人。以洪武乙亥九月己未。生王后于楊州私第。少有聰慧貞淑之德。永樂戊子歲。后將笄。以選嬪于王。封敬淑翁主。敬事兩宮。篤承眷愛。后之進退。王必起立。其見敬禮如此。丁酉秋九月。改封三韓國大夫人。王之封世子也。進封敬嬪。及卽位。封恭妃。壬子正月。有司言中宮有美稱非古也。改封王妃。后正位中宮之後。益自謙謹。禮接嬪媵。甚得歡心。後宮有進御者。必加慰納。所生諸子。養之宮中。盡心撫育。同於己出。御膳進則必躬自省視。宮中之事。無敢專制。大小皆稟於上。亦未嘗爲親戚子弟求官與婚。儉以律身。慈以逮下。雞鳴進戒。述宣陰敎。配德並明。母儀一國。於戲。世宗有文王之聖。王后石有大姒之賢。故以能致關睢之化。螽斯之慶。本支百世。祚流無極。正統十一年丙寅春三月二十四日辛卯。以疾薨于外第。春秋五十二。王悼失良佐。以白衣素膳終三十日。夏六月。降冊諡昭憲王后。越五年庚午春二月十七日壬辰。王亦以疾薨于別宮。春秋五十四。在位三十三年。文宗率群臣上諡曰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廟號世宗。又表請易名。帝遣使致祭。賜諡莊憲。初。合葬于獻陵之西岡。以今上殿下卽位之元年己丑春三月初六日庚寅。移葬于呂興府治之北城山南向之原。實成化五年也。后誕八男二女。長文宗恭順大王。景泰三年壬申五月十四日薨。次世祖惠莊大王。成化四年九月初八日薨。次瑢。歲癸酉。謀不軌賜死。次璆。臨瀛大君。先遷陵二月卒。次璵。廣平大君。次瑜。亦謀不軌賜死。次琳。平原大君。與璵皆先卒。次琰。永膺大君。先遷陵二年卒。女長未䈂而卒。贈貞昭公主。次貞懿公主。下嫁延昌尉安孟耼。愼嬪金氏生六男。長璔。桂陽君。次玒。義昌君。次琛。密城君。次璭。翼峴君。次璋。寧海君。次璖。潭陽君。遷陵之年。唯密城在。餘皆先卒。惠嬪楊氏生三男。長。次玹。壽春君。早卒。次瑔。與以瑢黨貶死于外。淑婉李氏生一女。貞安翁主。適儀賓沈安義。尙寢宋氏生一女。貞顯翁主。適鈴川尉尹師路。宮人姜氏生一男瓔。亦以瑢黨貶死于外。文宗顯德王后權氏。贈議政府左議政專之女。誕一男一女。男卽魯山君。女敬惠公主。下嫁鄭悰。司則楊氏生一女。敬淑翁主。適儀賓姜子順。世祖慈聖王妣尹氏。贈議政府左議政璠之女。誕二男一女。男長懿敬世子。早卒。次卽今上殿下。女懿淑公主。下嫁儀賓鄭顯祖。某官朴氏生二男。長曙。德原君。次晟。昌原君。瑢娶贈左議政鄭淵之女。生二男。長友直。次友諒。皆連坐死。臨瀛娶右議政崔承寧之女。生五男二女。男長澍。烏山君。次浚。龜城君。次淳。定陽君。次淨。八溪君。次澄。懽城君。女長中牟縣主。適兵曺參判居昌君愼承善。次淸河縣主。適司䆃正安友騫。側室生四男六女。男長涵。英陽副正。次潾。丹溪副正。次濯。輪山副011_512b正。次沃。玉川副正。女皆幼。廣平娶某官申自守之女。生一男。漙。永順君。瑜娶贈左議政崔士康之女。生一男。平原娶贈左議政洪利用之女。無子。永膺娶某官宋福元之女。生一女。側室生一男一女。皆幼。瓔娶密山君朴仲孫之女。無子。側室生一男。桂陽娶左議政韓確之女。生七男三女。男長澧。寧原君。次瀜。江陽君。次湜。富林都正。餘幼。女長適某官安繼편001。餘幼。側室生一男一女。男幼。女適某官鄭從善。義昌娶某官金脩之女。生一男二女。男灝。蛇山君。女長適參奉辛禹鼎。次幼。娶戶曹正郞權格之女。無子。密城娶軍器副正閔承寧之女。生四男二女。男長誡。雲山君。次譡。春城君。次。遂安都正。次䛿。石陽都正。女長適某官011_512c某。次幼。壽春娶全州府尹鄭自濟之女。生一女。適某官沈順老。翼峴娶某官趙鐵山之女。生一男一女。男漬。槐山君。女幼。瑔娶朴彭年之女。寧海娶某官申允童之女。生一男一女。皆幼。貞懿公主生四男二女。男長安如獺。僉知事。次溫泉。副正。次桑雞。典籤。次貧世。參判。貞顯翁主生二男。長尹磻。僉知事。次磷。護軍。貞安翁主生一男一女。男幼。女適某官崔孟思。



세종 장헌대왕의 천릉지석문〔世宗莊憲大王遷陵誌石文

공손히 생각건대, 우리 세종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 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께서는 태종 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의 셋째 아드님이시다.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가 대명(大明) 홍무(洪武) 30년 정축(1397, 태조6) 4월 10일 임진일에 한양(漢陽)에 있는 집에서 낳으셨다.
대왕께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기가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났으므로 양궁(兩宮)께서 몹시 사랑하였다. 장성해서는 충녕대군(忠寧大君)에 봉해졌다. 성품이 학문을 좋아하여 병을 앓고 있는 중이라도 오히려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세자로 있던 제(褆)가 덕을 잃는 일이 많았다. 영락(永樂) 16년 무술(1418, 태종18) 여름에 여러 신하들이 세자를 폐하기를 청하자, 태종께서 왕이 숨은덕이 있다는 이유로 사유를 갖추어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에게 주문을 올려 세자로 책봉하였다.
추8월에 태종께서 정무에 싫증이 나 왕께 선위(禪位)하고서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명을 청하였다. 다음 해인 기해년(1419) 춘정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명을 내려 왕으로 삼고 이어 사신을 보내 연회를 베풀고 또 태종에게 연회를 베풀며 칙서를 내려 이르기를 “왕이 능히 어진 사람을 뽑고 덕 있는 사람에게 명하여 종사(宗社)가 의탁할 곳이 있게 하였으니, 왕의 한 집안만의 경사가 아니라, 왕의 온 나라 사람들의 경사이다.” 하였다.
경자년(1420, 세종2)에 원경왕후(元敬王后)께서 편찮아 외제(外第)로 비접(避接)하였는데, 왕께서는 연(輦)을 붙잡고 걸어서 따라갔으며, 노숙(露宿)하는 때도 있었다. 훙함에 미쳐서는 애통해하기를 예제(禮制)보다 더하였다. 이해에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널리 유학자를 선발하여 20원(員)을 두고서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하였다. 임인년(1422, 세종4) 하5월에 태종께서 훙하였다. 3년 동안 상제(喪制)를 지켰다. 선덕(宣德) 원년 병오(1426)에 선종황제(宣宗皇帝)께서 채폐(綵幣)와 서적을 하사하였으며, 이로부터 총애하여 물품을 보내는 일이 빈번해져 역사서에 끊이지 않고 기록되었다.
정미년(1427) 가을에 비로소 종학(宗學)을 설치하고는 종실(宗室)의 자제들로 하여금 모두 수학하게 하였다. 여러 아들 가운데 바깥의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하지 않는 자들 역시 의방(義方)으로 가르쳤다. 적서(嫡庶) 사이에 예는 엄하면서도 은혜는 도탑게 하여 비방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무신년(1428) 겨울에 조회(朝會)할 때의 음악을 제정하여 비로소 대회(大會)에서 연주하면서 여악(女樂)을 쓰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해마다 중국에 금과 은을 공물로 바쳤는데, 토산(土産)이 아니어서 항상 제대로 바치지 못하는 걱정이 있었다. 이에 친동생을 보내어 표(表)를 올려 고쳐 줄 것을 청하니, 중국 조정의 의논이 허락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 그러자 황제께서 말하기를 “조선의 왕은 반드시 속이지 않을 것이다. 어찌 없는 것을 올리라고 강요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금과 은을 공물로 바치는 것을 면제해 주었다.
파저강(婆豬江)의 야인(野人)들이 자주 우리의 변경 지역을 침범하였는데, 계축년(1433, 세종15) 4월에 장수에게 명해 토벌하게 하여 땅을 넓히고서 경흥진(慶興鎭) 등의 진을 설치하였다. 고려 말부터 함길도(咸吉道) 연변(沿邊) 지역을 야인들이 점거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옛 강토를 모두 회복하였다.
갑자년(1444)에 대마도(對馬島)와 일기도(一岐島)의 왜인들이 상국(上國)에 들어가서 노략질을 하였으며, 또 우리나라 제주(濟州)의 지경을 침범하였는데, 왕께서 사람을 보내어 도주(島主)에게 유시하자, 도주가 명을 받들어 노략질을 한 왜놈 62명을 잡아 보내었다. 이에 이들을 묶어서 경사(京師)에 바치니, 황제께서 채폐를 하사하면서 가상히 여겼다. 무릇 완악하고 드센 왜노(倭奴)들조차도 짤막한 서찰에 몸을 굽혔으며, 사납고 거친 야인들조차도 작은 군대에 기가 꺾였으니, 은혜와 신의가 평소에 미덥고 위엄과 위령이 멀리까지 퍼져 나가지 않았다면 어찌 이처럼 할 수 있었겠는가.
이전에 세자 제(褆)가 비방을 피하여 외방으로 나가 있은 지 20년이나 되어 서울로 불러들였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간절하게 간하였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두 형을 섬기고 여러 동생들에게 우애롭게 대하여 공경하고 사랑함을 극도로 하였으며, 구족(九族)의 친족들에 이르러서도 모두가 도탑고 화목하게 대해 주었다.
왕께서는 영특하고 지혜롭기가 고금에 으뜸인 데다가 성학(聖學)으로 보충하였다. 즉위한 뒤로부터 소간(宵旰)하면서 다스림을 구해 예악(禮樂)과 형정(刑政), 제도(制度)와 문위(文爲) 등 선대에 미처 행할 겨를이 없었던 것을 모두 힘써 거행하였다. 고금(古今)의 문질(文質)의 적당한 것을 참작하여 《오례의주(五禮儀注)》를 찬수하고, 조종(祖宗)의 공덕(功德)의 성대함을 찬술하여 〈정대업(定大業)〉 등의 음악을 만들었다. 또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여 28자로써 천하의 언어를 모두 통하였는데, 문자의 유절(紐切)의 묘함은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바였다.
또 여러 대에 걸친 헌장(憲章)의 좋고 나쁜 점을 따져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완성하였는데, 규모가 굉대하고 심원하며 조관(條貫)이 상세하고 치밀하여 만대의 법이 될 만하였다. 특히 천문(天文)과 역법(曆法)에 대해서 환히 깨달아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과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을 찬수하였으며, 여러 의상(儀象)을 만들어서 농사지을 때를 알려 주었다. 또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대한 여러 사가(史家)의 주석(註釋)을 가져다가 수교(讐校)하여 찬집하고는 이름을 《훈의(訓義)》라고 하였다. 또 《삼강행실(三綱行實)》과 《치평요람(治平要覽)》 등의 서책을 찬하였는데, 문교(文敎)를 융숭히 하고 인륜(人倫)을 도탑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옥(庶獄)을 애처롭게 보고 불쌍히 여겨 휼형(恤刑)하는 전교를 내렸으며, 백성들의 음탕하고 편벽됨을 염려하여 술을 경계하는 글을 지었다.
왕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였으며, 어진 이를 존숭하고 선비들을 예우하였다. 이에 왕의 치세가 다하도록 대신 가운데에는 형벌을 받아 죽은 자가 없었다. 특히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는 관직을 중하게 여겨 조정 신하 가운데에서 수령의 직을 거치지 않은 자는 감히 높은 직질에 오를 수가 없었다. 30년 동안 관리들은 그 직에 걸맞았고, 백성들은 자신의 생업에 편안하였으며, 조정은 청명하고 사방은 평온해 동방(東方)의 요순(堯舜)이라고 불렸다.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는 청송(靑松)의 세가(世家)이다. 황증조고(皇曾祖考)의 휘는 룡(龍)으로,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고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에 봉해졌다. 황조고(皇祖考)의 휘는 덕부(德符)로, 고려 공민왕 때 정승을 지내 두 차례나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우리 공정왕(恭靖王)의 조정에서는 의정부 좌의정을 지내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다. 황고(皇考)의 휘는 온(溫)으로 아무 관직을 지냈다. 황비(皇妣) 안씨(安氏)는 영돈녕부사를 지내고 소의공(昭懿公)의 시호를 받은 안천보(安天保)의 따님으로,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졌다. 홍무(洪武) 을해년(1395, 태조4) 9월 기미일에 양주(楊州)에 있는 사제(私第)에서 왕비를 낳았다.
왕비께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곧고 맑은 덕이 있었다. 영락(永樂) 무자년(1408, 태종8)에 후(后)가 계례(笄禮)를 올리고서 선발에 뽑혀 왕의 빈(嬪)이 되어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졌는데, 양궁(兩宮)을 공경히 섬겨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후가 들어오고 나아갈 때에는 왕께서 반드시 자리에서 일어났는바, 공경스럽게 예우함이 이와 같았다. 정유년(1417) 추9월에 삼한국대부인으로 봉호(封號)가 고쳐졌다. 왕께서 세자로 책봉되자 경빈(敬嬪)으로 봉호가 올라갔으며, 즉위하자 공비(恭妃)에 봉해졌다. 임자년(1432, 세종14) 1월에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중궁(中宮)에 미칭(美稱)이 있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닙니다.”라고 하여, 왕비로 봉호가 고쳐졌다.
왕후께서는 중궁에서 위(位)를 바로 한 뒤에는 더욱더 스스로 겸손하고 삼가면서 빈첩(嬪妾)들을 예로 대하여 그들의 환심을 크게 얻었다. 후궁 가운에 진어(進御)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위로하면서 받아들였으며, 후궁이 낳은 여러 아들을 궁중 안에서 기르면서 모두 어루만져 주기를 자신이 낳은 아이들과 같이 하였다. 어선(御膳)을 올릴 경우에는 반드시 몸소 살펴보았으며, 궁중의 일을 감히 자신 마음대로 하지 않고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위에 여쭈어 결정하였다. 또한 일찍이 친척의 자제들을 위하여 관직을 구해 주거나 혼처를 구해 주지 않았다. 검소함으로써 자신의 몸가짐을 단속하였으며, 인자함으로써 아랫사람들을 거느렸다. 첫닭이 울 적에 나아가 경계하여 음교(陰敎)를 펴서 부인의 덕이 아울러 밝아 온 나라 어머니들의 모범이 되었다.
아, 아름답다. 세종께서는 문왕(文王)의 거룩함이 있었고, 왕후께서는 태사(太姒)의 어짊이 있었으므로, 능히 〈관저(關雎)〉의 교화〈종사(螽斯)〉의 경사를 이루어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이 백대토록 전해지고 국조(國祚)가 끝없이 이어지게 할 수 있었다. 정통(正統) 11년 병인(1446, 세종28) 춘3월 24일 신묘일에 외제(外第)에서 병으로 훙하니, 춘추는 52세였다. 왕께서는 어진 배필을 잃은 데 대해 애도하여 흰옷을 입고 소선(素膳)을 하면서 30일의 상제(喪制)를 마쳤다. 하6월에 책명(冊命)하여 소헌왕후(昭憲王后)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경오년(1450) 춘2월 17일 임진일에 왕께서도 별궁(別宮)에서 병으로 훙하시니, 춘추는 54세였으며, 재위는 33년이었다. 문종(文宗)께서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시호를 올려 영문예무인성명효 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라고 하였으며, 묘호(廟號)를 세종(世宗)이라 하였다. 또 중국에 표문을 올려 시호를 청하자, 황제께서 사신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장헌(莊憲)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처음에는 헌릉(獻陵)의 서쪽 등성이에 합장하였다가 금상 전하(今上殿下)께서 즉위한 원년 기축(1469, 예종1) 춘3월 6일 경인일에 여흥부(驪興府) 치소의 북성산(北城山)에 있는 남향의 언덕으로 이장하였으니, 실로 성화(成化) 5년의 일이었다.
왕후께서는 8남 2녀를 낳으셨다. 장남은 문종 공순대왕(文宗恭順大王)으로 경태(景泰) 3년 임신(1452, 문종2) 5월 14일에 훙하였다. 차남은 세조 혜장대왕(世祖惠莊大王)으로 성화(成化) 4년(1468, 세조14) 9월 8일에 훙하였다. 삼남은 용(瑢)으로 계유년(1453, 단종1)에 불궤(不軌)를 도모하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사남은 구(璆)로 임영대군(臨瀛大君)인데, 천릉(遷陵)하기 전인 2월에 졸하였다. 오남은 여(璵)로 광평대군(廣平大君)이다. 육남은 유(瑜)로 역시 불궤를 도모하다가 사사되었다. 칠남은 림(琳)으로 평원대군(平原大君)인데, 여(璵)와 더불어 모두 먼저 졸하였다. 팔남은 염(琰)으로 영응대군(永膺大君)인데, 천릉하기 2년 전에 졸하였다. 장녀는 계례(笄禮)를 올리기 전에 졸하여 정소공주(貞昭公主)에 추증되었다. 차녀는 정의공주(貞懿公主)로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耼)에게 시집갔다.
신빈(愼嬪) 김씨(金氏)는 6남을 낳았다. 장남은 증(璔)으로 계양군(桂陽君)이다. 차남은 공(玒)으로 의창군(義昌君)이다. 삼남은 침(琛)으로 밀성군(密城君)이다. 사남은 곤(璭)으로 익현군(翼峴君)이다. 오남은 장(璋)으로 영해군(寧海君)이다. 육남은 거(璖)로 담양군(潭陽君)이다. 천릉하던 해에는 오직 밀성군만 살아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먼저 졸하였다.
혜빈(惠嬪) 양씨(楊氏)는 3남을 두었다. 장남은 어()이다. 차남은 현(玹)으로 수춘군(壽春君)인데, 일찍 졸하였다. 삼남은 천(瑔)으로 어()와 함께 용(瑢)의 당파로 유배를 갔다가 외방에서 죽었다.
숙원(淑媛) 이씨(李氏)는 1녀를 두었는데, 정안옹주(貞安翁主)로, 의빈(儀賓) 심안의(沈安義)에게 시집갔다.
상침(尙寢) 송씨(宋氏)는 1녀를 두었는데, 정현옹주(貞顯翁主)로, 영천위(鈴川尉) 윤사로(尹師路)에게 시집갔다.
궁인(宮人) 강씨(姜氏)는 1남을 두었는데, 영(瓔)으로, 역시 용(瑢)의 당파로 유배를 갔다가 외방에서 죽었다.
문종의 비(妃)는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인데,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된 권전(權專)의 따님이며, 1남 1녀를 낳으셨다. 아들은 바로 노산군(魯山君)이다. 딸은 경혜공주(敬惠公主)로, 정종(鄭悰)에게 시집갔다. 사칙(司則) 양씨(楊氏)는 1녀를 낳았는데, 경숙옹주(敬淑翁主)로, 의빈 강자순(姜子順)에게 시집갔다.
세조의 비는 자성왕비(慈聖王妃) 윤씨(尹氏)인데,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된 윤번(尹璠)의 따님이며, 2남 1녀를 낳으셨다. 장남 의경세자(懿敬世子)는 일찍 졸하였다. 차남은 바로 금상 전하(今上殿下)이다. 딸 의숙공주(懿淑公主)는 의빈 정현조(鄭顯祖)에게 시집갔다. 모관(某官) 박씨(朴氏)는 2남을 두었다. 장남 서(曙)는 덕원군(德原君)이다. 차남 성(晟)은 창원군(昌原君)이다.
용(瑢)은 좌의정에 추증된 정연(鄭淵)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을 두었다. 장남은 우직(友直)이고, 차남은 우량(友諒)인데, 모두 죄에 연좌되어 죽었다.
임영대군은 우의정 최승녕(崔承寧)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5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주(澍)는 오산군(烏山君)이다. 차남 준(浚)은 구성군(龜城君)이다. 삼남 순(淳)은 정양군(定陽君)이다. 사남 정(淨)은 팔계군(八溪君)이다. 오남 징(澄)은 환성군(懽城君)이다. 장녀는 중모현주(中牟縣主)로, 병조 참판 거창군(居昌君) 신승선(愼承善)에게 시집갔다. 차녀는 청하현주(淸河縣主)로, 사도시 정(司䆃寺正) 안우건(安友騫)에게 시집갔다. 또 측실에게서 4남 6녀를 두었다. 장남 함(涵)은 영양부정(英陽副正)이다. 차남 린(潾)은 단계부정(丹溪副正)이다. 삼남 탁(濯)은 윤산부정(輪山副正)이다. 사남 옥(沃)은 옥천부정(玉川副正)이다. 딸들은 모두 어리다.
광평대군은 모관(某官) 신자수(申自守)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을 두었다. 아들 보(溥)는 영순군(永順君)이다.
유(瑜)는 좌의정에 추증된 최사강(崔士康)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을 두었다.
평원대군은 좌의정에 추증된 홍이용(洪利用)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다.
영응대군은 모관(某官) 송복원(宋福元)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녀를 두었으며, 또 측실에게서 1남 1녀를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어리다.
영(瓔)은 밀산군(密山君) 박중손(朴仲孫)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으며, 측실에게서 1남을 두었다.
계양군은 좌의정 한확(韓確)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7남 3녀를 두었다. 장남 풍(澧)은 영원군(寧原君)이다. 차남 융(瀜)은 강양군(江陽君)이다. 삼남 식(湜)은 부림도정(富林都正)이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장녀는 모관(某官) 안계송(安繼宋)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또 측실에게서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어리며, 딸은 모관 정종선(鄭從善)에게 시집갔다.
의창군은 모관 김수(金脩)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 호(灝)는 사산군(蛇山君)이며, 장녀는 참봉 신우정(辛禹鼎)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아직 어리다.
어()는 호조 정랑 권격(權格)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을 두지 못했다.
밀성군은 군기시 부정 민승녕(閔承寧)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 계(誡)는 운산군(雲山君)이다. 차남 당(譡)은 춘성군(春城君)이다. 삼남 상()은 수안도정(遂安都正)이다. 사남 격(䛿)은 석양도정(石陽都正)이다. 장녀는 모관 아무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어리다.
수춘군은 전주 부윤(全州府尹) 정자제(鄭自濟)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녀를 두었는데, 모관 심순로(沈順老)에게 시집갔다.
익현군은 모관 조철산(趙鐵山)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지(漬)는 괴산군(槐山君)이고, 딸은 아직 어리다.
천(瑔)은 박팽년(朴彭年)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영해군은 모관 신윤동(申允童)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정의공주(貞懿公主)는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안여달(安如獺)은 첨지사(僉知事)이고, 차남 안온천(安溫泉)은 부정(副正)이고, 삼남 안상계(安桑雞)는 전첨(典籤)이고, 사남 안빈세(安貧世)는 참판(參判)이다.
정현옹주(貞顯翁主)는 2남을 두었다. 장남 윤반(尹磻)은 첨지사(僉知事)이고, 차남 윤린(尹磷)은 호군(護軍)이다.
정안옹주(貞安翁主)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아직 어리고, 딸은 모관 최맹사(崔孟思)에게 시집갔다.




[주D-001]제(褆) :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을 가리킨다. 태종의 장남이며, 자는 후백(厚伯)이다. 1404년(태종4)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자유분방한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왕세자로서 지녀야 할 예의범절, 딱딱한 유교적인 교육, 엄격한 궁중생활 등에 잘 적응하지 못하여 1418년에 유정현(柳廷顯) 등의 청원으로 폐위되었다.
[주D-002]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 : 명나라의 태종(太宗)을 가리킨다.
[주D-003]비접(避接) : 피우(避寓)와 같은 말로, 병이 들어 거처를 옮겨서 요양(療養)하는 것을 말하는데, 흔히 대궐에서 바깥으로 나와 요양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4]의방(義方) : 집안에서 가르치는 덕의(德義)의 교훈을 말한다.
[주D-005]친동생 : 세종의 이복동생인 공녕군(恭寧君) 이인(李裀)을 말한다. 공녕군은 신녕궁주(信寧宮主) 신씨(辛氏)가 낳은 아들 가운데 장남이다. 1429년(세종11) 8월에 계품사(計稟使)로 공녕군 이인과 부사(副使) 원민생(元閔生)을 보내어 금과 은으로 공물을 바치는 일을 면제해 달라고 청하였다.
[주D-006]파저강(婆豬江)의 야인(野人) : 파저강은 동가강(佟家江)으로, 만주 요령성(遼寧省) 임강현(臨江縣) 서북에 있는 삼차자(三岔子)에서 발원하여 압록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한대(漢代)에는 비류수(沸流水)로 불렸으며, 명말(明末)에 와서 동(佟) 씨 성이 이 강 유역에 많이 살았기 때문에 동가강으로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혼하(渾河), 혼강(混江) 등으로 불린다. 세종 초에 파저강 등지에 살고 있던 야인 이만주(李滿住) 등이 얌무다우〔楊木答兀〕와 결탁하여 요동과 개원(開原) 등지를 노략하였는데, 군사와 백성들 중에 포로로 잡혀갔던 자들이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우리나라로 도망쳐 나오자, 이들을 모두 명나라로 보냈는데, 야인들이 이로 인하여 앙심을 품고 북쪽 변방을 침범하여 시끄럽게 하였다. 이에 최윤덕(崔潤德) 등을 보내어 이들을 정벌하였다.
[주D-007]구족(九族) : 위로 고조로부터 곁으로 삼종형제에 미치고 아래로 현손에 이르기까지 3개월 복을 입는 친족을 가리키는데, 전하여 모든 친족을 뜻한다.
[주D-008]소간(宵旰) : 소의간식(宵衣旰食)에서 나온 말로, 미명(未明)에 일어나서 정복(正服)하고 해가 진 후에야 저녁 밥상을 받는 것으로 왕이 정사(政事)에 부지런함을 비유한 것이며, 정사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근심하는 것을 말한다. 《舊唐書 卷15 憲宗本紀下》
[주D-009]정대업(定大業) : 종묘의 제례 때에 연주하던 음악과 추던 춤의 하나이다. 음악은 조선 세종 때 지은 것으로, 소무(昭武), 독경(篤慶), 선위(宣威) 따위의 15곡이었는데 세조 때에 11곡으로 줄였다. 춤은, 정재(呈才)에는 여악(女樂), 제향(祭享)에는 남악(男樂)을 썼으며 향악과 당악을 섞어서 연주하였다. 검, 창, 활, 화살을 든 내무(內舞) 36명과 소라, 북, 오색기를 든 외무(外舞) 35명이 곡진(曲陣), 직진(直陣), 예진(銳陣), 원진(圓陣), 방진(方陣)으로 진형(陣形)을 바꾸어 가면서 추었다.
[주D-010]유절(紐切) : 반절(半切)과 같은 말이다. 반절이란 명칭은 남북조(南北朝) 이전에는 다 반(反)이라고만 하였고, 《당운(唐韻)》에는 절(切)이라고만 했는데, 이는 대개 당시에 반 자를 꺼려서 모든 서적에 있는 반(反) 자를 반(返) 자로 고쳐 썼다. 당현도(唐玄度)의 《구경자양(九經字樣)》 서문에는 “반언(反言)을 피하여 다만 유사성(紐四聲)으로 그 소리와 뜻을 정하였다.” 하였는데, 그 책 속의 글자 중 개(蓋) 자 밑에 ‘공해번(公害翻)’이라 하여, 반(反) 자 대신 번(翻) 자를 썼으며, 표() 자 밑에 ‘평표뉴(平表紐)’라 하여, 번 자 대신 뉴(紐) 자를 썼으니, 그렇다면 반(反), 번(翻), 절(切), 뉴(紐)는 다 한가지인 것이다. 《五洲衍文長箋散稿 經史篇1 訓詁 反切翻紐辨證說》
[주D-011]의상(儀象) : 천문(天文)을 관측하는 기구를 말한다. 세종은 대소간의(大小簡儀), 혼의(渾儀), 혼상(渾象), 앙부일구(仰釜日晷), 일성정시(日星定時), 규표(圭表), 금루(禁漏) 등의 기구를 만들게 하였는데, 그 규모와 제도는 모두 세종이 직접 구상한 것이었다. 또 천추전(千秋殿) 서쪽 뜰에다가 한 칸의 작은 누각을 지어 놓고, 종이를 발라서 높이가 7척쯤 되는 산을 만들어 누각 안에 설치한 다음, 그 속에 옥루기륜(玉漏機輪)을 두어 물로 움직이게 하였다. 또 사신(四神), 십이신(十二神), 고인(鼓人), 종인(鍾人), 사신(司辰), 옥녀(玉女)와 같은 모든 기관(機關)들이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동적으로 치고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마치 신이 그렇게 시키는 것처럼 만들었는데, 하늘의 해를 표시한 각도와 구루(晷漏)의 눈금이 천체가 운행하는 것과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았다. 또 옥루에서 남는 물을 이용하여 의기(欹器)를 만들었다. 의기는 비어 있으면 기울고 적당히 차면 똑바로 되며 가득 차면 엎어지도록 만든 것인데, 이것은 모두 고훈(古訓)과 같이 하여 천도(天道)의 차고 비는 이치를 보여 준 것이다. 산의 사방에는 〈빈풍(豳風)〉의 〈칠월(七月)〉 시에 의거하여 사계절의 풍경을 만들고 나무를 깎아서 인물, 짐승, 초목의 형상을 만들어 그 계절에 맞게 배열하여 백성들의 농사짓는 어려움을 보여 주었다. 이 누각의 이름을 흠경각(欽敬閣)이라고 하였다. 《國朝寶鑑 卷7 世宗朝3 20年條》
[주D-012]음교(陰敎) : 음(陰)의 교화, 즉 후비(后妃)의 덕을 말한다.
[주D-013]태사(太姒) : 유신씨(有莘氏)의 딸로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후비(后妃)인데, 후대에는 흔히 어진 후비의 대명사로 쓰인다.
[주D-014]관저(關雎)의 교화 : 〈관저〉는 《시경》의 편명으로, 후비의 덕이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시인데, 그 시에 이르기를 “구욱구욱 물수리 강가 모래섬에서 우니, 아름다운 아가씨는 군자의 좋은 짝이다.〔關關雎鳩 在河之洲 窈窕淑女 君子好逑〕” 하였다.
[주D-015]종사(螽斯)의 경사 : 종사는 메뚜기의 한 종류로, 《시경》 〈주남(周南)〉의 편명이기도 한데, 후비가 질투하지 않아서 여러 첩에게서 자식이 많이 탄생해 왕실이 번성한 것을 읊은 시이다. 또 《시경》 〈사제(思齊)〉에 “태사가 그 아름다운 명성을 이으니 낳은 아들이 백이나 된다.”라고 한 시가 있다.
[주D-016]헌릉(獻陵) :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능으로, 서울의 내곡동(內谷洞)에 있다.
[주D-017]용(瑢) : 봉호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이다.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되었으므로 삼탄이 봉호를 기록하지 않았다. 아래도 마찬가지이다.
[주D-018]유(瑜) : 봉호는 금성대군(錦城大君)이다.
[주D-019]어() : 봉호는 한남군(漢南君)이다.
[주D-020]천(瑔) : 봉호는 영풍군(永豐君)이다.
[주D-021]영(瓔) : 봉호는 화의군(和義君)이다.
[주D-022]정연(鄭淵) : 대본에는 ‘鄭洲’로 되어 있는데, 《세종실록》 11년 1월 20일 기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정연(1389~1444)은 본관이 연일(延日)이고, 자는 중심(仲深), 호는 송곡(松谷)이다. 형조와 병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1442년(세종24)에 사은 겸 주문사(謝恩兼奏聞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성종 8년 정유(1477,성화 13)

 5월5일 (신미)

08-05-05[03] 영해군 이장의 졸기

영해군(寧海君) 이장(李璋)이 죽으니, 조회를 정지하고, 부의(賻儀)ㆍ조제(弔祭)ㆍ예장(禮葬)을 예와 같이 하였다. 당은 세종(世宗)의 후궁(後宮) 신빈(愼嬪) 김씨(金氏)의 소생으로, 처음 이름이 장(璋)이었는데, 뒤에 당(瑭)으로 고쳤다. 정통(正統) 임술년에 영해군(寧海君)에 봉해지고,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43세이다. 시호를 안도(安悼)라 하였는데, 화합을 좋아하여 다투지 않는 것이 안(安)이요, 중년에 일찍 죽는 것이 도(悼)이다. 아들은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과 길안정(吉安正) 이의(李義)이다.
【원전】 9 집 456 면
【분류】 *인물(人物)


[주D-001]임술년 : 1442 세종 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