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조선 태종신도비 (펌)

조선 태종 신도비(朝鮮太宗神道碑)

아베베1 2009. 7. 2. 14:10

 

태종신도비는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산13-1번지에 사적 제194호로 지정된 태종과 그의 비 원경왕후를 모신 헌릉(獻陵)과 순조와 그의 비 순원왕후를 모신 인릉(仁陵)인 헌인릉내의 정자각(丁字閣) 오른쪽 뒤 비각 안에 위치하고 있다.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손상되어 숙종 때 다시 세운 것으로 구비와 함께 나란히 세워져 있다.
구비(舊碑)는
귀부이수를 갖춘 통비(通碑)로서 비신의 높이는 280cm이며, 폭은 137cm, 두께는 39cm이고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마멸이 심하다. 비의 건립 연대는 세종 6년(1424)이다. 신비(新碑)는 화강암으로 된 귀부이수를 갖춘 통비로서 비신의 높이는 295cm이며, 폭은 141cm, 두께는 46cm로 구비와 거의 같은 형태와 크기이다. 비의 중건 시기는 비문 말미에
「永樂 二十二年五月 日立石 後二百七十二年乙亥五月 日重建」

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숙종 21년(1695)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전액(篆額)은 2행으로 ‘태종헌릉지비(太宗獻陵之碑)’라고 종서되어 있으며 자경(字徑)은 약 15cm 정도이다. 비제(碑題)는 ‘유명증시공정조선국태종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헌릉신도비명(有明贈諡恭定朝鮮國太宗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獻陵神道碑銘)’이라 되어 있고, 비문은 변계량(卞季良)이 찬하였으며, 비음(碑陰)은 박태상(朴泰尙)이 기(記)하였고, 글씨는 이덕성(李德成)이 썼으며 홍수주(洪受疇)가 전(篆)하였다. 비문은 해서로서 자경은 약 2∼3cm이다.
비 전면에는 태종의 출생 및 왕위 즉위 과정과 자녀 관계 그리고 행적 및 업적에 대한 기록이 있다. 비 후면에는 개국공신
[註] 방의(芳毅) 의안대군 이화(李和) 문하시중 배극렴(裵克廉) 등 37명과[註] 정사공신 봉녕부원군 이양우(李良祐) 등 17명이[註] 그리고 좌명공신 진산부원군 하륜(河崙) 등 37명이[註] 기록되어 있다.
태종은 태조의 제5자로 휘(諱)는 방원(芳遠), 자는 유덕(有德)이며 태조의 개국에 특히 공헌이 커 정안대군(靖安大君)에 피봉되었으나 세자책봉에 불만을 품었다. 태조 7년 8월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매 제왕자를 궁중으로 불러들여옴을 기회로 일거에 방원을 위시한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을 하고 있다고 트집을 잡아 이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분을 세워 마침내 정도전(鄭道傳) 등을 습격하였다. 그리고 변란의 책임을 세자와 정도전 일파에게 돌려 이들을 죽이고 형인 영안대군(永安大君) 방과(芳果)를 세자로 책봉 즉위케 하였고,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芳幹)의 반란을 평정하는 등 왕위를 얻기 위해 두 번이나 피비린내나는 왕자의 난을 일으켜 드디어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그는 궁궐, 관아를 건설하고 배불숭유정책의 강행, 관제 개혁, 신문고 설치, 호패법 실시 등 왕권 확립에 힘써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태종신도비의 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註]

 太宗獻陵之碑


有明贈諡恭定朝鮮國太宗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獻陵神道碑銘
 正憲大夫藝文館大提學集賢殿大提學知經筵同知春秋館事兼

成均館大司成卞季良奉 敎撰


 天之將降大任於 有德也必生 聖子 神孫以開景運以永洪祚我 朝鮮 太祖康憲大王之興也以我 太宗爲子以我 殿下爲孫噫獻盛矣豈人爲之所能及哉 天也其與商家賢聖君之繼作周家大王王季文武之相承何以異哉臣謹按 璿源 李氏全之望姓司空諱翰仕新羅娶宗姓之女六世而至諱兢休始仕高


麗十三世而至皇玄祖穆王入仕元朝而長千夫四世襲爵咸能 濟美元政旣衰 皇祖桓王還事高麗恭愍王積功累仁其來久矣
我 神懿王太后以至正丁未五月辛卯誕 太宗于咸興府厚州私第我 太祖之第五子生而神異梢長英睿絶倫好讀書學日進 年未冠中高麗科第時政散民離國勢抗헣慨然有濟世之志
 太祖愛之異諸子嘗以書狀官偕侍中李穡朝 京師累官至密 直司代言洪武辛未九日 神懿王太后薨廬于齊陵之側欲終三年壬申春 太祖西行즲疾而還來侍湯藥恭讓之臣乘隙謀傾勢甚急 太宗應機制變討除渠魁群謀瓦解秋七月與諸將相倡以 大義推戴 太祖化家爲國封 靖安君甲戌夏 高皇帝命遣親男 入朝 太祖以我 太宗通經達禮最賢諸子콉遣應 命旣 至敷奏稱 旨優禮 賜還戊寅秋八月 太祖不豫權臣朋家聚黨
有欲挾幼擅政以肆己志者?發斯迫 太宗炳幾殲除時宗親將相皆欲請冊我 太宗爲世子 太宗牢辭推尊恭靖上請 太祖冊封世子以定 宗社九月丁丑 太祖以疾未廖禪于恭靖建文庚 辰正月逆臣朴苞謀캓同氣陰誘芳幹父子稱兵爲亂 太宗勒軍
平之誅苞餘悉釋安置芳幹不廢懿親 恭靖以無嗣且謂開 國定 社皆我太宗之績冊爲世子冬十有一月亦以疾傳位于我 太宗遣使請 命明年辛巳六月建文 帝遣通政寺丞章謹等奉 誥命印章來封我 太宗爲王冬遣鴻쪻寺行人潘文奎來 錫冕 服秩視 親王歲壬午今 皇帝콉位遣左政丞臣河崙賀 登極 帝嘉忠誠明年癸未四月 賜以 誥印遣都指揮使高得等來仍封爲王秋遣翰林待詔王延齡來 錫줼冕九章錦段 紗羅書籍


 太祖錦段紗羅 元敬王太后冠袍錦段紗羅各有差自時厥後帝?쾶至無虛歲矣歲乙酉以漢陽 太祖所都排群議而還歲丁亥 帝語朝正使臣曰朝鮮國王至誠事大自後每當使臣至輒 稱至誠戊子五月 太祖晏駕 哀慕罔極居于諒闇喪葬以禮遣 使告訃 帝震悼罷朝遣禮部郞中林觀等 賜祭大牢贈諡康獻又勅 太宗賜厚賻壬辰冬有以王氏之裔隱於民間者上言攸司請誅之 太宗曰帝王之興自有
 

天命誅王氏之後非我 太祖本意乃 下敎曰王氏之後存者 쯸之各安生業甲午六月甘露降于咸興府月光仇未里及定平 白雲山明年乙未四月甘露又降咸興府德山洞吾東方前古所 未有也政府俱進箋賀 不受戊戌六月以世子?敗德 廢之封讓寧大君以我 殿下聰明孝悌好學不짏國人屬望冊封 世子以聞 帝兪允是年八月禪于我 殿下遣使請 命十有一月我 殿下奉冊寶賓獻號曰 聖德神功上王明年己亥正月 帝遣鴻 쪻寺丞劉泉等奉 誥命封我 殿下爲王五月對馬島倭犯邊殺掠軍士 命領議政臣柳延顯及長川君臣李從茂等以舟師往討之島倭納款如舊八月帝遣使賜宴勅書略曰至誠篤厚祇事朝廷一德一心終始不怠能簡賢命德쯸宗祀有託以副國人之望又賜宴我 殿下勅書略曰爾父篤厚老成祇敬 天道忠順之誠愈久不替九月恭靖王콉世 服斬衰終易月之制遣使告訃明年四月 帝遣使致祭賜諡恭靖是年春我 殿下率群臣請 上 太上王之號 不允秋七月 元敬王太后薨以我 殿下哀毁過禮 命從易月之制 殿下涕泣固辭乃 命葬後釋服白衣終制
九月壬午葬 太后于廣州治之大母山陵 曰獻辛丑秋九月我 殿下奉冊寶獻 太上王之號十月稟太宗命冊封元子珦爲 世子 太宗以不世之資緝熙聖學孝悌通於 神明誠敬格于 宗社事 大則 天子稱其至誠交隣則倭邦服其有道欽

 天恤民崇儉節用先德禮而愼刑罰進忠直而黜奸邪闢異端而禁淫祀酌古今以定制度昭文敎而嚴武備績弊悉革而庶績咸熙四境按堵而民安物阜 帝王之道嗚呼盛哉宜其紆 帝眷之隆而再甘露之 上瑞矣壬寅四月始不豫越五月寅薨于離宮 我 殿下不勝哀痛三日徹膳群臣涕泣請進膳竟 不許定爲三年之喪不用易月之制 太宗春秋五十六歲在王位十有九年居 閒쳶養五年而弓劒忽遺大小臣僚下之僕隸莫不失聲號哭愈
久愈哀如喪考쯼嗚呼慟哉以是年九月初二日丙辰上尊號曰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 廟號 太宗初六日庚申 合葬于 元敬王太后之陵 遺命也及訃聞 帝哀慟輟朝特遣禮部郞中楊 善等 賜祭其文略曰惟王篤厚至誠聰明賢達敬事朝廷忠順之心終始不替訃音遠聞良深感悼又 賜誥命諡曰恭定又賜 殿下賻優厚盖我 太宗功德之盛及我 殿下孝誠之至前後相承克享 天心故於始終之際寵異之典如此其備至矣 中宮元敬王太后姓閔氏驪興世家自高麗門下侍郞平章事文景公諱令謨六世而至 皇高祖諱宗儒相毅陵位都僉議侍郞贊成事諡忠順忠順生 皇曾祖判密直司事諡文順諱힒文順生 皇祖大匡
驪興君諱쮷大匡生 皇考純忠同德贊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驪興府院君修文殿大提學領藝文春秋館事諡文度諱霽 母宋氏封三韓國大夫人高麗重大匡礪良君諱璿之女積善流慶是生 淑德聰慧異常將?擇配來嬪于我 太宗太宗少有濟世之志留心經史不事家産 太后能儉於治家謹於主饋以勉其功敎誨多男쯸循義方禮遇妾侍克盡婦道洪武壬甲封 靖寧翁主戊寅 太宗定社之際勢甚孤危 太后盡心輔贊以濟大事庚辰
春封 貞嬪其年冬太宗콉位封 靜妃永樂癸未 帝賜冠袍自是年至丁酉累受 帝賜凡六戊戌冬我 殿下獻號曰 厚德王大妃庚子九月上諡 元敬王太后春秋五十六歲 太后?幽
閑貞靜之德克配 太宗以專內治二十年間壺儀肅穆又誕 聖쯸主 宗社以享榮養及 薨嬪칑妾侍莫不盡心悲痛 婦則母 儀其至矣乎 誕四男四女我 殿下居三長콉?次曰補封孝寧大君次曰種封誠寧大君先卒女長貞順公主下嫁淸平府院君李伯剛非一李也次慶貞公主下嫁平壤府院君趙大臨次慶安公主下嫁吉昌君權?亦先卒次貞善公主下嫁宜山君南暉 懿嬪權氏生一女貞惠翁主適雲城君朴從遇昭惠宮主盧氏生一女幼信寧宮主辛氏生三男七女男長썐封恭寧君餘幼女長貞信翁主適鈴平君尹季童次貞靜翁主適漢原君 趙璿次淑貞翁主適日城君鄭孝全餘皆幼宮人安氏生一男三女皆幼金氏生一男?封敬寧君高氏生一男崔氏生一男一女李氏生一男金氏生一女皆幼我中宮恭妃沈氏門下侍中諱德符第四子溫之女誕四男二女男長콉 世子餘皆幼讓寧娶金漢老之女生三男一女皆幼孝寧娶前判中軍都摠制府事鄭易之女生四男皆幼誠寧娶前全羅道都觀察使成抑之女無子貞順公主生一女適龍쵃侍衛司護軍李季?亦非一李慶貞公主生四女長適敦寧府丞安進次適幼學金仲淹餘幼慶安公主生二男長聃娶漢城少尹鄭淵之女次幼貞善公主生二男一女皆幼敬寧娶戶曹參議金灌之女生二男皆幼恭寧娶兵曹參判崔士康之女生二女皆幼臣竊觀我 太宗之盛德隆功固已高出於百王之上矣而 配匹之賢內助之功又有可與蜀塗辛摯同符而儷美者矣群臣咸願刻銘于 陵之 神道碑昭示永世 殿下以命臣季良臣季良承 命祇慄不敢辭謹拜手稽首而 獻銘銘曰
 

天眷海東降我 太宗쭯쭯 太宗盛德在躬推戴 聖父克集大功乃覲 帝庭敷奏從容優荷睿恩保我黎元炳幾靖亂 嫡長是尊雖値탵墻 友愛猶惇孝悌之至從古罕聞維 德之厚惟 功之懋 天鑑孔昭式申保佑煌煌金寶輝暎前後帝誥쾶臻我乃龍受 祖訓惟服還于漢北制作禮樂煥乎郁郁遭喪居廬哀慕罔極以 葬以祭古典是式祗事 朝廷 帝稱至誠肅肅承祀感于 神明交 隣有道倭邦來庭存?王裔쯸遂其生中外乂安垂二十齡?? 甘露歲降咸府 廢昏 命 德以作民 主期 享永年

 父臨下土何促賓 天一疾莫愈哀哀 聖子痛悼無比徹膳三 日不勝쿫毁凡百喪事維禮之履 帝聞慟悼遣使以祀贈諡褒崇賜賻優隆恤典之備喜溢臣工思齊 太后允也肅춲密贊定 社克配 亶聰篤生 聖哲쯸主 宗픚乾健離明 恭定之德坤厚柔貞 元敬之德則琴瑟以友藏同其域 子孫振振췕嗟其麟綿綿  宗祀垂萬億春臣拜 獻詞刻之貞珉萬代不磨照我東垠  永樂二十二年五月 日立石 後二百七十二年乙丑五月 日 重建

 <後面>
 恭惟我 太宗大王聖德神功卓冠前古春秋未高傳퓒 聖子方遂優閑備享榮養而弓劒?遺我 殿下哀毁盡禮越五月合葬于 元敬王太后之 獻陵遵治命也 陵在廣州治之西大母峰下乾亥之山乾坐巽向北距京城三十許里謹按山來自長白山而南踰數千里至尙州之俗離山折而西北又數百里至果川之淸溪山又折而東北負漢江而止是爲大母山坤靈停峙淑氣췱혏噫 天作地藏以待 園陵之吉兆歟 殿下命卽 陵之巽方六十步樹之豊碑以紀 德美垂耀來今又命序次開國定社佐命功 臣姓名刻諸碑陰臣竊惟自古王者之作必有名世之臣應時而出弼成大業於是有紀功宗銘츺鼎之典所以示不朽傳悠久也
我朝壬申之開創與夫戊寅庚辰之戡定實 天所以啓我 太宗 以基朝鮮萬億年無彊之祚也然亦將相大臣忘身委質贊襄輔佐之力與有多焉是宜?名貞石以示永世後之觀者尙克知我 殿下顯揚 先烈褒奬元動之至意云嘉善大夫藝文館提學集賢殿提學同知經筵春秋館事臣尹淮拜手稽首謹記

 開國功臣
 益安大君芳毅 義安大君李和 門下侍中裴克廉 領議政府 事趙浚 上洛府院君金士衡 安平府院君李舒 漢山府院君趙英茂 宜寧府院君南在 西原府院君韓尙敬 星山府院君李稷議政府右議政鄭擢 漢川府院君趙溫 玉川府院君劉敞 花山府院君張思吉 興寧府院君安景恭 驪川府院君閔汝翼 平城府院君趙죺 興安君李濟 寧城吳思忠 判三司尹虎 鷄林君金? 靑海君李之蘭 判漢城府事鄭熙啓 延城君金輅 宜城君南誾 政堂文學鄭摠 復興君趙쮐 興原君李敷 東原君咸傳霖 漢山君趙仁沃 南陽君洪吉旼 瑞成君柳爰廷 完城君李伯由 常山君李敏道 知中樞院事黃希碩 知中樞院事金仁贊 知中樞院事趙琦 高城君高呂 戶曹典書趙英珪 上將軍韓忠

 定社功臣
 益安君芳毅 奉寧府院君李良祐 義安大君李和 領議政府趙浚 上洛府院君金士衡 晋山府院君河崙 漢山府院君趙英茂 議政府右議政鄭擢 完原府院君李良祐 完山府院君李天祐 漢川府院君趙溫 花山府院君張思吉 上黨君李佇 靑海君李之蘭 鷲山君辛克禮 延城君金輅 中樞院副使張哲

 佐命功臣
 義安大君李和 昌寧府院君成石璘 晋山府院君河崙 漢山府院君趙英茂 星山府院君李稷 文城府院君柳亮 錦川府院君朴? 議政府左議政李原 完山府院君李天祐 漢川府院君趙溫 沔城府院君韓珪 平壤府院君金承켼 長川府院君李從茂 漢平府院君趙涓 漆原府院君尹子當 谷山府院君延嗣宗 上黨君李촧 完川君李淑 靑海君李之蘭 吉昌君權近 漆城君尹抵 坡平君尹坤 鷲山君辛克禮 礪山君宋居信 長興君
馬天牧 南陽君洪恕 蓮城君金定卿 줖城君李來 豊山君沈龜齡 知□府事朴錫命 兵曹判書李膺 刑曹判書李升商 參判三軍府事金英烈 利城君徐愈 熙川君金宇 麻城君徐益 越川君文彬
 

嗚呼玆惟我 太宗恭定大王獻陵也 陵下舊有神道碑中經兵?石刻剝落多不可辨認我 殿下卽位之二十年甲戌春二月 祗謁 園寢顧瞻興歎思所以再闡紀德之事乃 命有司伐新石改刊舊文於是設重建聽禮曹工曹官掌其事而董治之越明年乙亥五月工告訖涓吉折舊閣增其?楹與舊碑쯂竪焉盖舊卽碑卞季良所撰權弘篆其額尹淮記其陰獨書碑者成姓而其下字缺不知名之爲誰碑文及陰記具載於 列聖誌狀通紀中故今依通紀所載改刊而其或不能無異同者則一從碑刻以存愼重 之意嗚呼我 先王化家爲國之烈我殿下奉先思孝之德其自是 光于萬代與天無極矣  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 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 世子左副賓客臣朴泰尙奉 敎記
通政大夫兵曹參議臣李德成奉

 敎書通正大夫 兵曹參知知製敎臣 洪受疇 奉 敎篆

 
출처 : 서울 600년사



 

동문선 제121권
 비명(碑銘)

유명증시 공정 조선국 태종 성덕 신공문무 광효대왕 헌릉 신도비명 병서

 (有明贈諡恭定朝鮮國太宗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獻陵神道碑銘) 幷序


변계량(卞季良)

하늘이 덕이 있는 이에게 큰 임무를 내려주려 할 때에는 반드시 착한 아들과 뛰어난 손자를 낳게 하여 큰 운수를 열고, 큰 복록을 길게 하는 것이다 우리 조선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이 일어나매, 우리 태종(太宗)으로써 아들이 되게 하고, 우리 전하로써 손자 되게 하셨다. 아, 장하다. 어찌 사람의 작위(作爲)로 될 수 있겠는가. 하늘이 하는 일이로구나. 그것은 상(商) 나라의 왕실(王室)에 어진 임금과 착한 임금이 이어 일어난 것과, 주(周) 나라의 왕가(王家)에서 대왕(大王)ㆍ왕계(王季)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 같은 임금이 서로 계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신은 삼가 선원(璿源)을 상고하여 보오니, 이씨(李氏)는 전주(全州)의 이름난 가문이다. 사공(司空) 벼슬한 휘 한(翰)이 신라에 벼슬하였으며, 신라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 들었다. 6대 손인 휘 긍휴(兢休)에 이르러 비로소 고려에 벼슬하였고, 13대 만에 태종 임금의 5대조 목왕(穆王)에 이르러서는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었다. 4대가 내리 습작(襲爵)하여 모두 잘 하였다. 원 나라의 정치가 이미 쇠잔하게 되니, 황조(皇祖) 환왕(桓王)은 돌아와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을 섬기었다. 공을 쌓고 어진 덕행을 누적(累積)하였음이 그 유래가 장구하다.
우리 신의 왕태후(神懿王太后)께서 지정(至正) 정미년 5월 신묘일에, 태종(太宗)을 함흥부(咸興府) 후주(厚州)의 사저(私邸)에 낳으니, 우리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기특하였는데 차츰 자라면서 슬기로움이 무리에 뛰어났다. 글 읽기를 좋아하여 학문이 날로 진보하여 나이 20도 못 되어서 고려의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때, 정치는 산란하고 백성들은 유리(流離)하여 국가의 형세는 위태로웠다. 강개(慷慨)하여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으니, 태조가 여러 아들들 중에서 유달리 사랑하였다.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의 자격으로 시중(侍中) 이색(李穡)과 같이 명 나라의 서울에 조회하였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벼슬이 밀직사 대언(密直司代言)에 이르렀다. 홍무(洪武) 신미년 9월에 신의왕태후(神懿王太后)가 훙(薨)하니, 태종이 제릉(齊陵)의 곁에 여막을 짓고 3년 상을 마치고자 하였는데, 임신년 봄에 태조가 서쪽의 행차에서 병을 얻고 돌아왔으므로 와서 탕약(湯藥)을 돌보며 모시었다. 공양왕의 신하가 그 틈을 타서 태조의 세력을 뒤집어 엎을 것을 꾀하여 사세가 매우 급하게 되었다. 태종이 조짐에 대응하여 변고를 제압하고 그 괴수(魁首)를 쳐서 제거하니, 온갖 음모가 와해되었다. 가을 7월에, 여러 장상(將相) 들과 더불어 앞장서서 대의(大義)를 외치고 태조를 추대하여 집을 바꾸어 나라로 만드니 정안군(靖安君)에 봉군(封君)되었다.
갑술년 여름에, 명(明) 나라의 고황제(高皇帝)가 태조에게 친아들을 보내어 들어와 조회하게 하라고 명령하니, 태조가 우리의 태종이 경서에 능통하고 예에 밝아서 여러 아들 중에 가장 현명하다고 하여 즉시 보내어 명령에 응하였다. 명 나라에 이르러서는 진술하는 것이 황제의 뜻에 만족하였으므로, 예를 갖춘 우대를 받고 돌아오게 되었다. 무인년 가을 8월에 태조가 몸이 편찮았는데 권신(權臣)이 붕당(朋黨)을 모아 어린 왕자를 끼고 정권을 잡아 제 마음대로 휘둘러 보고자 하는 자가 있어서 화가 곧 일어날 것 같으므로 태종이 낌새를 밝게 살펴 제거해 버렸다. 그때에 종친들과 장군과 재상들이 다 우리 태종을 세자로 책봉하기를 청하고자 하였으나, 태종이 굳이 사양하고 공정(恭靖 정종(定宗))을 추천하여 높이고, 위로 태조에게 청하여 세자로 책봉하게 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시켰다. 9월 정축일에 태조가 병이 낫지 않으므로 공정에게 선위(禪位)하였다.
건문(建文) 경진년 정월에는 역신(逆臣) 박포(朴苞)가 동기(同氣)를 해칠 음모를 꾸미고 몰래 방간(芳幹)의 부자를 유인하여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저지르니, 태종이 군사를 통솔하여 평정하였다. 박포만을 베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주었으며, 방간은 안치(安置)의 벌에 처하였을 뿐 지친(至親)의 정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공정(恭靖)이 후사(後嗣)가 없고, 또 개국(開國) 정사(定社)의 일이 다 우리의 태종의 공적이라고 하여 세자로 책봉하였다. 11월에 또한 병으로 우리 태종에게 전위(傳位)하였다. 사신을 명 나라에 보내어 황제의 명을 청하니, 다음해 신사년 6월에 건문제(建文帝)가 통정시 승(通政寺丞) 장근(章謹)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고 와서 우리 태종을 봉하여 왕으로 하였다. 겨울에는 홍려시 행인(鴻臚寺行人) 반문규(潘文奎)를 보내와서 면복(冕服)을 내리니, 품질(品秩)이 친왕(親王)과 비등(比等)하였다.
임오년에 지금의 황제가 즉위하자 좌정승 신 하륜(河崙)을 보내어 등극을 축하하니, 황제가 충성을 칭찬하였다. 다음해 계미년 4월에 고명과 인장을 내리고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와서 전대로 봉하여 왕으로 하였다. 가을에는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을 보내와서 곤면(袞冕) 9장(章)과 금단사라(錦段紗羅)ㆍ서적을 주었는데, 태조에게는 금단사라를,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에게는 관포(冠袍)와 금단사라를 내리어서 각각 차등이 있게 하였다. 그때부터 뒤에는 황제의 하사하는 선물이 계속하여 쉬는 해가 없었다.
을유년에, 한양(漢陽)은 태조가 수도로 정한 곳이라고 하여 여러 사람들의 반대 의논을 물리치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정해년에 황제가 정조(正朝)의 조하(朝賀)에 간 조선의 사신에게 말하기를, “조선의 국왕은 지성으로 사대(事大)한다.” 하였다. 그 뒤로는 사신이 도착할 때마다 번번히 ‘지성이라.’ 칭찬하였다.
무자년 5월에 태조가 안가(晏駕)하니 태종이 애모함을 그지없이 하였다. 양암(諒闇 임금이 거상(居喪)할 때에 있는 방)에 거처하면서 초상과 장사를 예로써 하였다. 사자를 보내어 부고(訃告)를 알리니, 황제가 매우 슬퍼하고 정사 보는 것을 정지하였다. 예부 낭중 임관(林觀) 등을 보내어 대뢰(大牢)를 서서 사제(賜祭)하고 시호를 강헌(康獻)이라고 추증하였다. 또 태종에게 칙서(勅書)를 내려 후한 부의(賻儀)를 주었다.
임진년 겨울에 왕씨(王氏)의 후예로서 민간에 숨은 자가 상언(上言)한 것이 있었다고 하여 담당 관사(官司)에게 사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제왕(帝王)이 일어남은 본래 천명(天命)이 있는 것이다. 왕씨의 후예를 죽이는 것은 우리 태조의 본의가 아니다.” 하고, 곧 하교하기를, “왕씨의 후예로서 생존한 자는 각기 생업에 안정하게 하라.” 하였다. 갑오년 6월에 감로(甘露 달콤한 이슬)가 함흥부 월광구미리(咸興府月光仇未里)와 정평(定平)의 백운산(白雲山)에 내렸다. 다음해 을미년 4월에 감로가 또 함흥부의 덕산동(德山洞)에 내렸다. 우리 나라에서는 전고(前古)에 없었던 일이다. 의정부에서 모두 전문(箋文)을 올리어 진하(進賀)하였으나 임금이 받지 아니하였다. 무술년 6월에 세자 제(禔)가 패덕(敗德)하다고 해서 세자의 직위를 해제하여 양녕대군(讓寧大君)에 봉하고, 우리 전하가 총명하고 효도하며 우애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 함이 없어서 국민들이 촉망(囑望)한다고 하여, 세자로 책봉하고 중국 조정에 알리니, 황제가 좋다고 윤허하였다.
이해 8월에 임금이 우리 전하에게 선위(禪位)하고 사신을 보내어 황제의 명령을 주청(奏請)하였다. 11월에 우리 전하가 책보(冊寶)를 받들어 부왕(父王)에게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는 호(號)를 올렸다. 다음해인 기해년 정월에 황제가 홍려시 승(鴻臚寺丞) 유천(劉泉)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을 받들고 우리 전하를 왕으로 하였다. 5월에 대마도(對馬島)의 왜구가 변경을 침범하여 우리의 군사를 살해하고 약탈하므로 영의정 신(臣) 유정현(柳廷顯)과 찬성(贊成) 신 이종무(李從茂) 등을 명하여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니, 대마도의 왜인들이 예전과 같이 성심으로 섬겼다.
8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 와서 상왕에게 잔치를 하사하였다. 칙서(勅書)의 사연은 대략 이러하였다. “왕의 지성이 돈독하고 두터워서 성심으로 황제의 조정을 섬기어 한결같은 덕과 한결같은 마음이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었으며, 능히 어진 이를 고르고 덕있는 이에게 명하여 종사(宗祀)로 하여금 의탁함이 있게 하고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하였다.” 하였다. 또 우리 전하에게 잔치를 하사하였는데, 칙서는 대략 이러하다. “부왕이 돈후하고 노성하여 천도(天道)를 삼가 공경하였으며 충순(忠順)한 정성은 오래 갈수록 변함이 없었다.” 하였다.
9월에 공정(恭靖)이 죽자, 전하가 참최복(斬衰服)을 입고 역월의 복제[易月之制]를 마쳤다. 사자를 보내어 부고를 알리었더니, 다음해 4월에 황제가 사자를 보내 와서 치제(致祭)하고 공정(恭靖)이라는 시호를 내리었다. 이해 봄에 우리 전하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태상왕(太上王)의 호를 올리도록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아니하였다. 가을 7월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가 훙(薨)하였다. 우리 전하가 애통하여 몸을 훼상(毁傷)함이 예(禮)에 지나친다고 하여 거상 기간을 날을 달로 계산하는 역월의 복제를 좇기를 명하였으나 전하가 울며 굳이 사양하였다. 이에, 장사 뒤에 상복을 벗고 흰옷으로 복제(服制)를 마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9월 임오일에 태후(太后)를 광주(廣州) 수읍(首邑)의 대모산(大母山)에 장사 지내고 능(陵)을 현릉(顯陵)이라고 하였다. 신축년 9월에 우리 전하가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고 태상왕(太上王)의 호를 올렸다. 10월에 태종(太宗)에게 품의(禀議)하고 원자(元子) 향(珦)을 책봉하여 세자로 삼았다.
태종은 좀처럼 세상에 나지 않는 훌륭한 자질로서 성인의 학문에 밝으며, 효도와 우애는 신명에 통하고, 정성과 공경함은 종묘와 사직을 바로잡았다. 사대하는 일은 천자가 그의 지성을 칭찬하였으며, 교린(交隣)하는 일은 왜국(倭國)이 그의 도(道) 있음에 심복하였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며,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비용을 절제하였다. 덕과 예(禮)를 우선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였으며, 충직한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내쫓았다. 이단을 물리치고, 음사(淫事)를 금지하였다.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제도를 정하였으며, 문교(文敎)를 밝히고 무비(武備)를 엄중하게 하였다. 누적된 폐단을 모두 없애버리니, 모든 사적(事績)은 다 빛이 났다. 온 나라 안이 안도하여 백성들은 편안하고 산물은 풍성하였다. 제왕의 도가 아, 성대하도다. 그가 상제(上帝)의 사랑을 얻음이 융숭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두 번이나 감로(甘露)를 내리는 상제의 상서를 얻었던 것이다.
임인년 4월에 처음으로 병환이 있더니, 다음달 5월 병인일에 이궁(離宮)에서 훙하였다. 우리 전하가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3일 동안 수라를 들지 아니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울며 수라 들기를 청하였으나 마침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3년을 거상(居喪)할 것을 정하고 역월(易月)의 제도를 쓰지 아니하였다.
태종은 춘추가 56세이며 왕위에 있은 것이 19년이었다. 한가롭게 살며 정양한 지 5년 만에 갑자기 승하하시니, 크고 작은 신료들과 아래로 하인과 노예에 이르기까지 목이 쉬도록 호곡(號哭)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오랠수록 더욱더 슬퍼하기를 부모의 상을 당한 것 같이 하였다. 아, 슬프다. 이해 9월 6일 경자(庚子)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의 능에 합장하였다. 유언의 명령에 좇은 것이다. 부고(訃告)가 가니, 황제가 슬퍼하여 정사보는 것을 정지하였다. 특별히 예부낭중(禮部郞中) 양선(楊善) 등을 보내 와서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제문(祭文)은 대략 이러하였다. “왕은 돈후하고 지성스러우며, 총명하고 현달하여 공경히 황제의 조정을 섬기어서 충순(忠順)의 정성이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었습니다. 부음이 멀리 들려오니 진실로 깊이 슬픔을 느낍니다.” 하였다. 또 고명(誥命)을 내려 시호를 공정(恭定)이라고 하였다. 또 전하께서 부의(賻儀)를 넉넉하고 후하게 내리었다. 대체로 우리 태종(太宗)의 공덕이 성대함과 전하의 효성이 지극함이 앞뒤에서 서로 받들어서 천심을 잘 누렸기 때문에 마지막과 시초의 즈음에 있어서 남달리 총애하는 은전이 이와 같이 갖추어지고 지극하게 된 것이다.
중궁(中宮) 원경왕태후의 성(姓)은 민씨(閔氏)니, 여흥(驪興)의 세가(世家)이다. 고려의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障事) 문경공(文景公) 휘 영모(令謨)로부터 6대 만에 황고조(皇高祖) 휘 종유(宗儒)에 이르러 의종(毅宗)을 도왔으니, 벼슬은 도첨의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로서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충순이 황증조(皇曾祖)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시호 문순(文順) 휘 적(頔)을 낳고, 문순은 황조(皇祖) 대광(大匡)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휘 복(扑)을 낳았으며, 대광은 황고(皇考) 순충동덕찬화공신(純忠同德贊化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수문전대제학 영예문춘추관사(修文殿大提學領藝文春秋館事) 시호 문도(文度) 휘 제(霽)를 낳았다. 황비(皇妣) 송씨(宋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을 봉하였는데, 고려 중대광(重大匡) 여량군(礪良君) 휘 선(璿)의 딸이다. 선을 쌓음으로써 흘러나오는 경사가 맑고 덕 있는 이를 낳게 되었으니, 총명하고 지혜스러움이 남에게 뛰어났다.
시집갈 나이가 되매 배필을 가려서 우리 태종에게 시집왔다. 태종이 젊었을 때, 세상을 건지려는 뜻이 있어 경서와 사기에 마음을 두고 집안 살림살이를 돌보지 아니하였으나, 태후는 능히 집을 다스리는 데 검소하게 하고, 가정의 공궤(供饋)에는 삼가하여 그의 공부를 힘쓰게 하였으며, 많은 아들들을 가르쳐서 의로운 방법을 따르게 하였다. 첩(妾)과 시녀들을 예(禮)로 대우하여 부인의 도리를 극진하게 하였다. 홍무(洪武) 임신년에 정녕옹주(靖寧翁主)로 봉하여졌다. 무인년에 태종이 사직을 정할 즈음에는 형세가 매우 외롭고 위태하였는데, 태후가 마음을 다해 도와서 큰 일을 성취하게 하였다. 경진년 봄에 정빈(貞嬪)으로 봉하였고, 그해 겨울에 태종이 즉위하여 정비(靜妃)로 봉하였다. 영락(永樂) 계미년에는 명 나라의 황제가 관포(冠袍)를 내려주었으며, 이 해로부터 정유년에 이르는 동안 여러 번 황제의 하사를 받은 것이 모두 다섯 번이나 되었다. 무술년 겨울에 우리 전하가 후덕 왕대비(厚德王大妃)의 호(號)를 올리었고, 경자년 9월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춘추는 56세였다.
태후는 차분하고 한아하며 정숙하고 경건한 덕을 타고났으며 태종을 잘 도와서 내치(內治)에 전심하였다. 20년 동안 궁궐 안에서의 용의(容儀)는 엄숙하고도 화목하였으며, 또 착한 아들을 낳아서 종사(宗社)를 맡게 하여 영광스러운 봉양을 누리었다. 흥하자 빈(嬪)과 시녀와 첩들이 마음껏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부(婦)가 모(母)의 거동을 본받음이 지극하였도다. 4남 4녀를 낳았으니, 우리 전하는 셋째이다. 장자는 제(褆)이며, 다음은 이름을 보(補)이니 효녕대군(孝寧大君)으로 봉하였다. 그 다음은 종(種)이니 성녕대군(誠寧大君)으로 봉하였다. 맏딸은 정순공주(貞順公主)이니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다. 같은 이씨(李氏)는 아니다. 다음은 경정공주(慶貞公主)이니 평양부원군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경안공주(慶安公主)이니 길창군(吉昌君) 권규(權跬)에게 시집갔으나 또한 먼저 졸하였다. 다음은 정선공주(貞善公主)이니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시집갔다.
의빈(懿嬪) 권씨(權氏)가 딸 하나를 낳았으니, 정혜옹주(貞惠翁主)로서 운성군(雲城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시집갔다. 소혜궁주(昭惠宮主) 노씨(盧氏)가 딸 하나를 낳았으나 아직 어리다. 신녕궁주(信寧宮主) 신씨(辛氏)가 3남 7녀를 낳았으니, 맏이는 이름을 인(禋)이라고 하며 공녕군(恭寧君)으로 봉하였다. 나머지는 어리다. 큰딸은 정신옹주(貞信翁主)이니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정정옹주(貞靜翁主)이니 한원군(漢原君) 조선(趙璿)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숙정옹주(淑貞翁主)이니 일성군(日城君) 정효전(鄭孝全)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다 어리다.
궁인(宮人) 안씨(安氏)가 1남 3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김씨(金氏)가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이름은 비(緋)인데 경녕군(敬寧君)으로 봉하였다. 고씨(高氏)가 아들 하나를 낳았으며, 최씨(崔氏)가 1남 1녀를 낳았고, 이씨(李氏)가 1남을, 김씨(金氏)가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우리 중궁(中宮) 공비(恭妃) 심씨(沈氏)는 문하시중 휘 덕부(德符)의 넷째 아들인 온(溫)의 딸이다. 4남 2녀를 낳았으니, 첫째는 바로 세자이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양녕(讓寧)이 김한로(金漢老)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효녕(孝寧)이 전 판중군도총제부사(前判中軍都摠制府事) 정이(鄭易)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성녕(誠寧)이 전 전라도 도관찰사 성억(成抑)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다. 정순공주(貞順公主)가 딸 하나를 낳았으니 용양시위사 호군(龍驤侍衛司護軍) 이계린(李季疄)에게 시집갔다. 물론 같은 이씨가 아니다. 정경공주(貞慶公主)가 딸 넷을 낳았으니, 첫째는 돈녕 부승(敦寧府丞) 안진(安進)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유학(幼學) 김중엄(金中淹)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어리다. 경안공주(慶安公主)가 아들 둘을 낳았으니, 첫째는 이름을 담(聃)이라고 하며 한성 소윤(漢城小尹) 정연(鄭淵)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다음은 어리다. 정선공주(貞善公主)가 2남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경녕(敬寧)이 호조 참의 김관(金灌)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나 다 어리다. 공녕(恭寧)이 병조 참의 최사강(崔士康)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둘을 낳았으나 다 어리다.
신은 적이 살펴보니, 우리 태종(太宗)의 큰 덕과 높은 공이 본래 이미 모든 임금들의 위에 높이 뛰어났으나, 배필의 어지심과 내조의 공도 또 촉도 신지(蜀塗莘摯)와 더불어 부서(符瑞)를 같이하고 아름다움을 짝할 만한 것이 있다. 모든 신하들이 모두 능(陵)의 신도비(神道碑)에 명(銘)을 새겨 길이 뒷 세상에 밝혀 보이고자 하여, 전하가 신(臣) 계량에게 명하였다. 신 계량은 명령을 받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손으로 읍하고 머리를 조아려 명(銘)을 올린다. 명에 이르기를,

하늘이 우리 나라를 돌보시어 / 天眷海東
우리 태종을 내려주셨네 / 降我太宗
부지런히 힘쓰는 태종이여 / 亹亹太宗
성대한 덕 몸에 지니셨네 / 盛德在躬
성스러운 아버지를 추대하여 / 推戴聖父
위대한 공 이루게 하고 / 克集大功
황제의 조정에 조근하여 / 乃覲帝庭
조용히 진주하였네 / 敷奏從容
천자의 은총 넉넉히 입게 되어 / 優荷睿恩
우리 나라 백성들 보전하셨네 / 保我黎元
기미를 밝게 살펴 변란을 평정하고 / 炳幾靖亂
적계 형을 높여 세자되게 하였네 / 嫡長是尊
형제간의 싸움을 만났으나 / 雖値鬩墻
우애가 오히려 두터웁네 / 友愛猶惇
효제의 지극함은 / 孝悌之至
전고에도 드물었네 / 從古罕聞
그 덕은 후하고 / 維德之厚
그 공은 성대하니 / 惟功之懋
하늘이 매우 밝게 살펴 / 天鑑孔昭
거듭하여 보우하시네 / 式申保佑
휘황한 금보가 / 煌煌金寶
전후에 빛나고 / 輝映前後
황제의 고명이 잇달아 도착하매 / 帝誥荐臻
내 드디어 왕위를 받았네 / 我乃龍受
할아버지 훈계를 지켜 / 祖訓惟服
한성에 환도하고 / 還于漢北
예악을 제작하니 / 制作禮樂
아름답게 문채나네 / 煥乎郁郁
상중에 여막살며 / 遭喪居盧
애모함이 망극하여 / 哀慕罔極
장사와 제사에 / 以葬以祭
옛 법을 따르셨네 / 古典是式
공손히 사대하니 / 抵事朝廷
황제가 지성이라 칭찬하였네 / 帝稱至誠
경건하게 승사하니 / 肅肅承祀
신명이 감응하고 / 感于神明
교린에 도 있으니 / 交隣有道
왜국이 복종하며 / 倭邦來庭
왕씨 후예 돌보아 / 存䘏王裔
편안히 살게 하였네 / 俾遂其生
안팎이 태평하기 / 中外又安
20년이 되어가니 / 垂二十齡
윤택한 감로가 / 浥浥甘露
해마다 함부에 내리었네 / 歲降咸府
어두운 아들(湜) 폐하시고 덕 있는 이에 명하여 / 廢昏命德
백성의 주인이 되게 하였네 / 以作民主
길이 천수를 누리며 / 期享永年
이 땅에 군림하시기를 기약하였는데 / 父臨下土
그 어찌 빈천을 재촉하여 / 何促賓天
병이 낫지 않는가 / 一疾莫愈
슬프다, 착하신 아들 / 哀哀聖子
슬퍼함이 가이없어 / 痛悼無比
3일 동안 철선하고 / 徹膳三日
상심을 못이기며 / 不勝摧毁
거상 중의 모든 절차를 / 凡百喪事
예대로 지키었네 / 維禮之履
황제 듣고 슬퍼하며 / 帝聞慟悼
사자 보내 사제하고 / 遣使以祀
높이는 시호 주며 / 贈謚褒崇
후한 부의 내리시니 / 賜賻優隆
조문의 예를 완비함에 / 恤典之備
신하들 기뻐하네 / 喜溢臣工
신의 태후 생각 같아 / 思齊太后
진실로 화순하네 / 允也肅雝
가만히 도와 사직을 안정시켜 / 密贊定社
큰 총명에 배필하고 / 克配亶聰
성철한 아들 낳아 / 篤生聖哲
종묘제주 되게 했네 / 俾主宗祐
하늘처럼 건전하고 밝으심은 / 乾健离明
공정의 덕이요 / 恭定之德
땅처럼 후하고 바르심은 / 坤厚柔貞
원경의 법칙이네 / 元敬之則
살아서는 금슬 같은 벗이요 / 琴瑟以友
죽어서도 같이 장사하였네 / 藏同其域
자손이 번성하니 / 子孫振振
아, 기린 같도다 / 于嗟其麟
종묘 제사 / 緜緜宗祀
억만년 이어가리 / 垂萬億春
신은 절하고 글을 올리오니 / 臣拜獻詞
옥 같은 굳은 돌에 이 사연 새기어서 / 刻之貞珉
만대에 마멸 없이 / 萬代不磨
우리 나라 빛나게 하리라 / 昭我東垠

하였다.

태종 18년 무술(1418,영락 16)
 11월8일 (갑인)
예문관 대제학 변계량이 찬한 태종의 신도비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신(臣)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찬(撰)하게 하였다. 그 글은 이러하였다.
“하늘이 장차 유덕(有德)한 이에게 큰 임무를 내려주려 할 때에는 반드시 성자(聖子)·신손(神孫)을 낳게 하여 큰 운수를 열고 큰 복조(福祚)를 길게 하는 것이다. 우리 조선(朝鮮) 태조 강헌 대왕(康獻大王)이 일어나시고, 우리 태종으로써 아들을 삼고 우리 전하로써 손자를 삼았었다. 아아,성하도다! 어찌 인위(人爲)로써 능히 미칠수가 있는 바이겠는가? 하늘이 상(商)나라 왕가(王家)에 어질고 착한 임금을 잇달아 내신 것과 주(周)나라 왕가(王家)에 태왕(太王)·왕계(王季)·문왕(文王)·무왕(武王)과 같은 임금을 서로 잇달아 내신 것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신(臣)이 삼가 선원(濬源)을 살펴 보니, 이씨(李氏)는 전주(全州)의 이름난 대성(大姓)이었다. 사공(司空) 휘(諱) 이한(李翰)은 신라(新羅)에 벼슬하여 종실(宗室)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6세(六世) 휘(諱) 이긍휴(李兢休)에 이르러 비로소 고려(高麗)에 벼슬하였고, 13세(十三世) 황현조(皇玄祖) 목왕(穆王)에 이르러 원조(元朝)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千夫)의 장(長)이 되었고, 그 후 4세(四世)가 작위(爵位)를 이어받아서 모두 능히 선대의 업(業)을 잘 받들어 이루었다. 원(元)나라 정치가 이미 쇠약하자, 황조(皇祖) 환왕(桓王)은 돌아와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조에 벼슬하여 공(功)을 쌓고 인(仁)을 쌓은 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우리 신의 왕태후(神懿王太后)께서 지정(至正) 정미년(丁未年) 5월 신묘(辛卯)에 태종(太宗)을 함흥부(咸興府) 후주(厚州)의 사제(私第)에서 낳으니, 우리 태조의 제5자(第五子)이었다. 나면서부터 신이(神異)하고, 점점 자리면서 영예(英睿)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글 읽기를 좋아하여 배움이 날로 진전하였다. 나이 20이 못되어 고려의 과거(科擧)에 급제하였다. 당사의 정사(政事)가 문란하고 백성들이 유리(流離)하여 나라 형세가 위태로우니, 개연(慨然)히 세상을 구제(救濟)할 뜻을 가지게 되었다. 태조께서 사랑하기를 여러 아들과 달리 하였고,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시중(侍中) 이색(李穡)과 함께 명나라 서울[京師]에 조현(朝見)하였고, 관(官)을 여러 번 옮겨 밀직사(密直司) 대언(代言)에 이르렀다. 홍무(洪武) 신미년(辛未年) 9월에 신의 왕후(神懿王后)가 훙(薨)하니, 제릉(齊陵)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상(三年喪)을 마치고자 하였는데, 임신년 봄에 태조(太祖)께서 서쪽으로 행차하였다가 병에 걸려 돌아오니, 달려와서 탕약(湯藥)을 받들어 모시었다. 공양왕(恭讓王)의 신하들이 그 틈을 타서 경복(傾覆)하기를 꾀하여 형세가 매우 위급하므로, 태종이 시기에 응하여 변(變)을 제압하고 그 괴수(魁首)를 쳐서 없애니, 모든 음모가 와해되었다. 가을 7월에 여러 장상(將相)들과 더불어 대의(大義)를 제창하여 태조를 추대(推戴)하여 집을 바꾸어 나라를 만드니, 정안군(靖安君)에 봉(封)해졌다. 갑술년 여름에 명나라 고황제(高皇帝)가 태조의 친아들을 보내도록 명하니, 태조(太祖)가 우리 태종(太宗)이 경서(經書)에 능통하고 예(禮)에 밝아서 여러 아들중에서 가장 어질다고 하여, 즉시 보내어 명에 응(應)하게 하였다. 명나라에 이르러 황제에게 아뢴 것이 황제의 뜻에 맞았으므로, 황제가 예를 우대하여 돌려보내 주었다.
무인년(戊寅年) 가을 8월에 태조가 편찮으시니, 권신(權臣)들 가운데 집안끼리 무리를 짓고 붕당(朋黨)을 모아서 유얼(幼孼)을 끼고 정권을 마음대로 잡고 자기들의 뜻을 마음대로 펴고자 하는 자가 있어서 화(禍)의 발생이 임박하여지니, 태종이 기미(幾微)를 밝게 알아 모두 없애버리니, 그때에 종친(宗親)과 장상(將相)들이 모두 우리 태종을 세자로 삼기를 청하였으나, 태종이 굳이 사양하고, 공정왕(恭靖王)을 추대하여 높이고, 위로 태조에게 청하여 세자(世子)에 책봉(冊封)하게 하여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안정시켰다. 9월 정축(丁丑)에 태조(太祖)가 병이 낫지 않으므로 공정왕(恭靖王)에게 선위(禪位)하였다.
건문(建文) 경진년 정월(正月)에 역신(逆臣) 박포(朴苞)가 동기(同氣)를 살해할 음모를 하여 몰래 방간(芳幹) 부자(父子)를 꼬이어 군사를 일으켜 난(亂)을 일으키니, 태종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평정하여, 박포를 베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고 방간을 안치(安置)하여 의친(懿親)의 정을 폐하지 아니하였다. 공정왕(恭靖王)이 후사(後嗣)가 없고, 또 개국(開國)과 정사(定社)가 모두 우리 태종의 공적이라 하여 세자(世子)로 책봉하고, 겨울 11월에 또한 병으로 우리 태종에게 전위(傳位)하였다.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니, 다음해 신사년 6월에 건문제(建文帝)가 통정시 승(通政寺丞) 장근(章勤)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고 와서 우리 태종을 왕(王)으로 봉(封)하고, 겨울에 홍려시 행인(鴻臚寺行人) 반문규(潘文奎)를 보내어 와서 면복(冕服)을 하사하였는데, 그 직질(職秩)을 친왕(親王)과 같게 하였다. 임오년 겨울에 지금의 황제(皇帝)가 즉위하자, 좌정승 하윤(河崙)을 보내어 등극(登極)을 하례하니, 황제가 충성을 아름답게 여겨 이듬해 계미년 4월에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하사하고,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 와서 그대로 왕(王)으로 봉(封)하였다. 가을에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을 보내 와서, 곤면(袞冕) 9장(九章)금단 사라(錦段紗羅)와 서적(書籍)을 하사하고, 태조에게는 금단 사라를, 원경 왕태후(元敬王太后)에게는 관포(冠袍)와 금단 사라를 각각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이때부터 그 뒤로 황제의 하사함이 거듭 이르러 해마다 거르는 때가 없었다. 을유년에 한양(漢陽)은 태조께서 도읍한 곳이라 하여 여러 의논을 물리치고 환도(還都)하였다. 정해년에 황제가 정조 사신(正朝使臣)에게 말하기를, ‘조선 국왕이 지성(至誠)으로 사대(事大)한다.’ 하였고, 그 뒤부터 매양 사신이 이를 때를 당하면, 문득 임금의 지성을 칭찬하였다.
무자년 5월에 태조가 안가(晏駕)하니, 슬퍼하고 그리워하기가 끝이 없었고, 양암(諒闇)에 거처하면서 상장(喪葬)을 예(禮)로 하였다. 사신를 보내어 부고(訃告)를 알리니, 황제가 몹시 슬퍼하고 조회를 파(罷)하였으며, 예부 낭중(禮部郞中) 임관(林觀) 등을 보내어 제사에 대뢰(大牢)로써 사제(賜祭)하고 시호(諡號)를 강헌(康獻)이라 주었고, 또 태종에게 칙서(勅書)를 내려 후하게 부의(賻儀)를 하사하였다. 임진년 겨울에 왕씨(王氏)의 후예(後裔)로서 민간(民間)에 숨었던 자가 있어 상언(上言)하니, 유사(攸司)에서 베기를 청하였으나, 태종이 말하기를, ‘제왕(帝王)이 일어남은 천명(天命)이 있는 것이니, 왕씨의 후예를 죽인 것은 우리 태조의 본의가 아니었다.’하고, 이에 하교(下敎)하기를, ‘왕씨의 후예로서 생존한 자들은 그들로 하여금 각각 생업(生業)에 안정하게 하라.’하였다. 갑오년 6월에 감로(甘露)가 함흥부(咸興府) 월광(月光) 구미리(仇未里)와 정평(定平) 백운산(白雲山)에 내렸다. 이듬해 을미년 4월에 감로(甘露)가 또 함흥부(咸興府) 덕산동(德山洞)에 내렸다. 우리 동방(東方)에서는 전고(前古)에 있지 않았던 일이었으므로 정부에서 함께 전(箋)을 올려 하례했으나, 임금이 받지 않았다. 무술년 6월에 세자 이제(李禔)가 패덕(敗德)하였으므로, 폐하여 양녕 대군(讓寧大君)으로 봉하고, 우리 전하가 총명하고 효도하고 우애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아서 나라 사람들이 촉망(屬望)하기 때문에 세자로 책봉(冊封)하고 중국에 아뢰니 황제가 윤허하였다.
이 해 8월에 우리 전하에게 선위(禪位)하고 사신을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였다. 11월에 우리 전하께서 책보(冊寶)를 받들어 호(號)를 ‘성덕 신공 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 바치었다. 이듬해 기해년 1월에 황제가 홍려시 승(鴻臚寺丞) 유천(劉泉)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을 받들고 우리 전하를 왕(王)으로 봉(封)하였다. 5월에 대마도(對馬島)의 왜구(倭寇)가 변경을 침범하여 군사를 죽이거나 노략질하니, 영의정 신(臣) 유정현(柳廷顯)과 장천군(長川君) 신(臣) 이종무(李從茂) 등에게 명하여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니, 대마도의 왜적이 성심으로 복종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8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사연(賜宴)하였는데, 칙서(勅書)의 대략은 이러하였다. ‘왕의 지성(至誠)이 돈독하고 후(厚)하여 삼가 중국 조정을 섬겨 한결같은 덕(德)과 한결같은 마음이 처음이나 끝이나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능히 어진 사람을 고르고 덕(德)과 한결같은 마음이 처음이나 끝이나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능히 어진 사람을 고르고 덕(德)있는 사람에게 명하여 종묘(宗廟)·사직(社稷)이 의탁(依託)할 데가 있게 하니, 나라 사람들의 소망에 부응(副應)하였다.’하였고, 또 우리 전하에게 사연(賜宴)하였는데, 칙서(勅書)는 대략 이러하였다. ‘그대의 아비가 독후(篤厚)하고 노성(老成)하여 천도(天道)를 삼가 공경하고, 충순(忠順)의 정성은 더욱 오래 갈수록 변하지 않았다.’하였다.
9월에 공정왕(恭靖王)이 즉세(卽世)하니, 참최복(斬衰服)을 입었고, 역월(易月)의 복제(服制)를 마치었다. 사신을 보내어 부고를 알리니, 이듬해 4월에 황제 사신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시호를 ’공정왕(恭靖王)’이라 내렸다. 이 해 봄에 우리 전하께서 군신(群臣)을 거느리고 태상왕(太上王)의 호를 올리도록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가을 7월에 원경 왕태후(元敬王太后)가 훙(薨)하니, 우리 전하께서 심히 슬퍼함이 예(禮)에 지나치므로 〈태종께서〉 역월(易月)의 복제를 따르도록 명하였으나, 전하께서 눈물을 흘리고 울며 굳이 사양하였다. 이에 명하여 장례 뒤에는 최복(衰服)을 벗고 백의(白衣)로 복제(服制)를 마치게 하였다. 9월 임오(壬午)에 태후를 광주(廣州)의 관내 대모산(大母山)에 장사지내고 능을 ‘헌릉(獻陵)’이라 하였다. 신축년 가을 9월에 우리 전하께서 책보(冊寶)를 받들어 태상왕의 호(號)를 바치었다. 10월 태종에게 품신(稟申)하니, 원자(元子) 향(珦)을 책봉하여 세자로 삼도록 명하였다. 태종은 좀처럼 세상에 없는 뛰어난 자질로서 성학(聖學)에 밝았으며, 효도와 우애가 신명(神明)에 통하고, 정성과 공경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이르렀으며, 사대(事大)하는 일은 천자가 그 지성(至誠)을 칭송하였고, 교린(交隣)하는 일은 왜국(倭國)이 그 도(道)가 있는 데 복종하였다. 하늘을 흠모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며 검소함을 숭상하고 비용을 절약하였다. 덕(德)과 예(禮)를 먼저 하고 형벌을 삼갔으며, 충직(忠直)한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이를 내쳤으며,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음사(淫祀)를 금지하였다.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제도를 정하고, 문교(文敎)를 밝게 하고 무비(武備)를 엄하게 하였다. 쌓였던 폐단을 모두 개혁하니, 모든 공적(功績)이 다 빛나고, 사방(四方)이 안도(按堵)하여 백성이 편안하고 산물이 풍족하니 제왕(帝王)의 도(道)가, 아! 성하였도다. 그 황제의 사랑을 얻음이 융성하였던 것과, 두 번씩이나 감로(甘露)의 상서(上瑞)를 얻었던 것도 마땅하다 하겠다. 임인년 4월에 비로소 몸이 편찮아서 5월 병인(丙寅)에 이궁(離宮)에서 훙(薨)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3일 동안 철선(輟膳)하니, 군신(君臣)들이 체읍(涕涖)하면서 진선(進膳)하기를 청하였으나, 마침내 허락하지 않았다. 3년상(三年喪)으로 정하고 역월(易月)의 제도를 쓰지 않았다. 태종은 춘추가 56세이고, 왕위(王位)에 있은 지 19년이었다. 왕위를 물려주고 한가하게 거(居)하면서 정양한 지 5년 만에 갑자기 승하(昇遐)하시니, 대소 신료(大小臣僚)에서 아래로 복례(僕隷)에 이르기까지 목이 메어 울지 않은이가 없고, 세월이 오랠수록 더욱 슬퍼하기를 고비(考妣)의 상사(喪事)와 같이 하였다. 아, 슬프도다! 이 해 9월 초2일 병진(丙辰)에 존호(尊號)를 ‘성덕 신공 문무 광효 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라하고,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초6일 경신(庚申)에 원경 왕태후(元敬王太后)의 능에 합장(合葬)하였으니, 이것은 유명(遺命)이었다. 중국에 부음(訃音)을 알리자, 황제가 애통하여 철조(輟朝)하였고, 특별히 예부 낭중(禮部郞中) 양선(楊善) 등을 보내어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글은 대략 이러하였다. ‘오직 왕이 독후(篤厚)하고 지성(至誠)하며 총명하고 현달(賢達)하여, 삼가 중국 조정을 섬겨서 충순(忠順)한 마음이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었다. 부음(訃音)이 멀리 들리니, 진실로 깊이 애도(哀悼)한다.’하였고, 또 고명(誥命)을 하사하여 시호를 ‘공정(恭定)’이라 하였다. 또 전하에게 내린 부의(賻儀)가 넉넉하고 후(厚)하였다. 대개 우리 태종의 공덕의 성함과 우리 전하의 요서의 지극함이 전후에서 서로 이어서 황제의 마음을 잘 누린 까닭으로 시작과 마지막 때에 있어서 남달리 총애(寵愛)하는 은전(恩典)이 이와 같았으니, 그 갖춤이 지극하다 하겠다.
중궁(中宮) 원경 왕태후(元敬王太后)는 성(姓)이 민씨(閔氏)이요, 여흥(驪興) 세가(世家)였다. 고려의 문하 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문경공(文景公) 휘(諱) 민영모(閔令謨)로 부터 6세(世)에 황고조(皇高祖) 휘(諱) 민종유(閔宗儒)에 이르러 의릉(毅陵)을 도와서 도첨의 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에 벼슬하였고, 시호는 충순공(忠順公)이었다. 충순공(忠順公)은 황증조(皇曾祖)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시호 문순공(文順公) 휘(諱) 민적(閔頔)을 낳았으며, 문순공(文順公)은 황조(皇祖) 대광(大匡) 여흥군(驪興君) 휘 민변(閔抃)을 낳았으며, 대광(大匡)은 황고(皇考) 순충 동덕 찬화 공신(純忠同德贊化功臣)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여흥 부원군(驪興府院君)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시호 문도공(文度公) 휘(諱) 민제(閔霽)를 낳았다. 어머니 송씨(宋氏)는 삼한 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封)해졌는데, 고려 중대광(重大匡) 여양군(礪良君) 휘(諱) 송선(宋璿)의 딸이었다. 선(善)을 쌓아 경사(慶事)가 돌아와서 이에 숙덕(淑德)을 낳으니, 총명하고 지혜로움이 남보다 뛰어났으므로, 곧 계년(筓年)이 되자 짝을 골라서, 와서 우리 태종의 빈(嬪)이 되었다. 태종이 젊어서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이 있어서, 마음을 경전(經典)과 사기(史記)에 두고 가산(家産)을 돌보지 않으니, 태후가 능히 집을 다스리는 데 검소하게 하고 주궤(主饋)에 삼가하여서 그 공(功)을 이루게 힘쓰고, 많은 아들들을 가르쳐서 의방(義方)을 따르게 하였고, 첩(妾)과 시녀를 예로 대우하여 부인의 도리를 극진히 하였다. 홍무(洪武) 임신년(壬申年)에 정녕 옹주(靖寧翁主)로 봉(封)해졌다.
무인년(戊寅年)에 태종이 정사(定社)할 때에 형세가 심히 외롭고 위태로왔는데, 태후가 마음을 다하여 도와서 큰 일을 이루게 하였다. 경진년(庚辰年) 봄에 정빈(貞嬪)으로 봉(封)해졌고, 그 해 겨울에 태종의 즉위하자 정비(靜妃)로 봉해졌다. 영락(永樂) 계미년(癸未年)에 황제가 관포(冠袍)를 하사하였으며, 이 해로부터 정유년(丁酉年)에 이르기까지 누차 황제의 하사(下賜)를 받은 것이 모두 다섯 번이었다. 무술년(戊戌年) 겨울에 우리 전하가 호(號)를 ‘후덕 왕대비(厚德王大妃)’라 바치었고, 경자년(庚子年) 9월에 시호(諡號)를 ‘원경 왕태후(元敬王太后)’라 올렸다. 춘추는 56세였다. 태후는 유한(幽閑)하고 정정(貞靜)한 덕(德)을 타고났으며, 태종에게 능히 짝이 되어 내치(內治)에 오로지하여서 20년 동안 궁중의 법도[壼儀]가 엄숙하고 화목(和穆)하였고, 또 거룩한 아들[聖子]을 낳아서 종묘와 사직을 맡도록 하여 영광스러운 봉양(奉養)을 누리었다. 훙(薨)하자 빈(嬪)·잉(媵)·첩(妾)·시녀(侍女)들이 마음을 다하여 비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부인(婦人)은 모의(母儀)가 지극하였으니, 4남 4녀를 낳았는데, 우리 전하는 세째이다. 장자는 곧 제(禔)이고, 다음은 보(補)이니 효령 대군(孝寧大君)에 봉해졌고, 다음은 종(褈)이니 성녕 대군(誠寧大君)에 봉해졌으나 먼저 졸(卒)하였다. 장녀(長女)는 정순 공주(貞順公主)이니, 청평 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으나 같은 이씨(李氏)가 아니다. 다음은 경정 공주(慶貞公主)이니, 평양 부원군(平壤府院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경안 공주(慶安公主)이니, 길창군(吉昌君) 권규(權跬)에게 시집갔으나 또한 먼저 졸(卒)하였다. 다음은 정선 공주(貞善公主)이니,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시집갔다. 의빈(懿嬪) 권씨(權氏)가 1녀를 낳았는데, 정혜 옹주(貞惠翁主)이니, 운성군(雲城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시집갔다. 소혜궁주(昭惠宮主) 노씨(盧氏)가 1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신녕 궁주(信寧宮主) 신씨(辛氏)가 3남 7녀를 낳았는데, 장남 인(裀)이 공녕군(恭寧君)에 봉해졌으며,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장녀 정신 옹주(貞信翁主)는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정정 옹주(貞靜翁主)이니 한원군(漢原君) 조선(趙璿)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아직 어리다. 궁인(宮人) 안씨(安氏)가 1남 3녀를 낳았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김씨(金氏)가 1남을 낳았는데, 비(裶)이니 경녕군(敬寧君)에 봉해졌다. 고씨(高氏)가 1남을 낳았고, 최씨(崔氏)가 1남1녀를 낳았고, 이씨(李氏)가 1남을 낳았고, 김씨(金氏)가 1녀를 낳았으나 모두 아직 어리다. 우리 중궁(中宮) 공비(恭妃) 심씨(沈氏)는 문하 시중(門下侍中) 휘(諱) 심덕부(沈德符)의 네째아들 심온(沈溫)의 딸인데, 4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곧 세자(世子)이고, 나머지는 모두 아직 어리다. 양녕 대군(讓寧大君)이 김한로(金漢老)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으나 모두 아직 어리다. 효령 대군(孝寧大君)이 전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 정역(鄭易)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낳았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성녕 대군(誠寧大君)이 전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성억(成抑)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자식이 없다. 정순 공주(貞順公主)가 1녀를 낳았는데, 용양 시위사(龍驤侍衛司) 호군(護軍) 이계린(李季疄)에게 시집갔으나, 또한 같은 이씨가 아니다. 경정 공주(慶貞公主)가 4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돈녕부 승(敦寧府丞) 안진(安進)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유학(幼學) 김중암(金仲淹)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경안 공주(慶安公主)가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한성 소윤(漢城少尹) 정연(鄭淵)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다음은 아직 어리다. 정선 공주(貞善公主)가 2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경녕군(敬寧君)이 호조 참의(戶曹參議) 김관(金灌)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으나, 모두 아직 어리다. 공녕군(恭寧君)이 병조 참판(兵曹參判) 최사강(崔士康)의 딸에게 장가들어 2녀를 낳았으나, 모두 아직 어리다.
신은 간절히 보건대, 우리 태종의 성한 덕과 높은 공이 진실로 이미 백왕(百王)의 위에 높이 뛰어났으며, 배필(配匹)의 어짐과 내조(內助)의 공(功)도 또 촉도(蜀塗)의 길고 험난한 데 더불어 부서(符瑞)를 같이하여서 아름다움을 짝할 만한 것이었다. 군신(群臣)들이 다 능(陵)의 신도비(神道碑)에 명(銘)을 새기어 영세(永世)에 밝게 보이기를 원하므로, 전하께서 신(臣)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시니, 신 변계량이 명을 받들어 삼가고 두려워하나, 감히 사양하지 못하여 삼가 배수(拜手)하고 계수(稽首)하여 명(銘)을 바친다.
명(銘)에 이르기를, ‘하늘이 해동(海東)을 사랑하여 우리 태종을 내려 주셨네. 부지런하신 태종께서 성한 덕(德)을 몸에 지녔네. 거룩한 아버지를 추대하여 능히 위대한 공업을 이루고 이에 황제의 조정에 조근(朝覲)하여 아뢰니 황제가 따르고 용납하였네. 황제의 은총(恩寵)을 넉넉히 입어 백성들을 보호하였도다. 기미(幾微)를 훤하게 알아 난(亂)을 평정하고, 적장(嫡長)을 이에 높이었네, 비록 집안 싸움을 만났으나, 우애가 오히려 두터웠네. 효제(孝悌)의 지극함은 전고(前古)에 듣기 드물었네. 오직 덕이 두텁고 오직 공(功)이 성하니, 천감(天鑑)이 매우 밝아 이에 거듭 보우(保佑)하셨네. 휘황찬란한 금보(金寶)가 전후(前後)에 빛나고, 황제의 고명(誥命)이 잇달아 이르니, 내가 이에 왕위를 받았네, 할아버지의 훈계에 오로지 복종하여 한북(漢北)에 환도(還都)하고 예악(禮樂)을 제작하니, 밝게 빛나도다. 상(喪)을 당하여 여막(廬幕)에 살면서 애모(哀慕)함이 끝이 없고, 장례(葬禮)와 제례(祭禮)를 옛 법대로 식(式)을 삼았네. 중국 조정을 공경하여 섬기니, 황제가 지성(至誠)함을 칭송하였네. 엄숙히 제사를 받드니, 신명(神明)에 감응하였네. 교린(交隣)함에 도(道)가 있으니, 왜방(倭邦)이 내정(來庭)하였네. 왕씨 후예(王氏後裔)를 불상히 여겨 그 생업(生業)을 이루게 하였네. 중외(中外)가 평안한 지 20년을 내려오니, 촉촉한 감로(甘露)가 해마다 함흥부(咸興府)에 내렸도다. 혼매(昏昧)한 이를 폐하고 덕(德) 있는 이에 명하여서 백성들의 임금을 삼았도다. 오랜 세월을 향수(享壽)하여 아버님이 이 땅에 임(臨)하기를 기약하였더니, 어찌 빈천(賓天)을 재촉하여, 한 병이 낫지 않았던가? 슬프고 슬프도다. 거룩한 아드님[聖子]이 몹시 애통함이 비할 데 없도다. 철선(輟膳)을 3일 동안 하고 상심을 이기지 못하네. 무릇 온갖 상사(喪事)을 오직 예(禮)대로 이행하였네. 황제가 듣고 몹시 슬퍼하여 사자를 보내어 제사지내며, 시호(諡號)를 주어 포장(褒奬)하여 높이고, 부의(賻儀)를 내려 줌이 매우 융숭하였네. 휼전(䘏典)을 갖추어 신공(臣工)에게 시호(諡號) 내림을 기뻐하도다. 태후(太后)를 생각하고 사모하니, 진실로 숙옹(肅雝)하였네. 정사(定社)함을 비밀히 도우고 진실로 크게 총명한 이의 짝이 되어 성철(聖哲)한 아들을 낳아 종묘(宗廟)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네. 하늘처럼 건전하고 밝으심은 공정 대왕(恭定大王)의 덕이요, 땅처럼 후(厚)하고 바르심은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법칙이네. 살아서는 금슬(琴瑟)의 벗이요, 죽어서는 같은 땅에 묻히었네. 자손이 번성하니, 아아! 그 기린(麒麟)같은 자손이 끊이지 않고 종묘 제사를 억만 년 이어가리.’하였다.
신이 절하고 사(詞)를 바치니 굳고 단단한 돌에 새기어 만세토록 마멸(磨滅)되지 않고, 우리 동방(東方)에 비추게 하소서.”
【원전】 2 집 249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 *역사-사학(史學) / *어문학-문학(文學)


[주D-001]상(商) : 은(殷).
[주D-002]목왕(穆王) : 목조(穆祖).
[주D-003]천부(千夫) : 천 명의 군사.
[주D-004]환왕(桓王) : 환조(桓祖).
[주D-005]제릉(齊陵) : 신의 왕후의 능.
[주D-006]공정왕(恭靖王) : 정종(定宗).
[주D-007]황제(皇帝) :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
[주D-008]9장(九章) : 조선조 때의 임금의 정복인 면류관과 곤룡포에, 의(衣)에는 산(山)·용(龍)·화(火)·화충(華蟲)과 종이(宗彝)의 다섯 가지를 그리고, 상(裳)에는 마름·분미(粉米)·보(黼)·불 등 네 가지를 수놓은 것.
[주D-009]안가(晏駕) : 임금의 죽음.
[주D-010]양암(諒闇) : 임금이 부모의 상중(喪中)에 있음, 또는 그 기간 중에 거처하는 방. 양음(諒陰).
[주D-011]대뢰(大牢) : 나라 제사 때에 소를 통째 제물로 바치던 일. 처음에는 소·양·돼지를 함께 바치는 것을 대뢰라고 하였으나, 뒤에는 소만 바치게 하였음.
[주D-012]감로(甘露) : 단 이슬. 임금이 선정(善政)을 하여 천하가 태평하면 하늘이 상서(祥瑞)로 내리는 것이라 함.
[주D-013]주사(舟師) : 수군(水軍).
[주D-014]즉세(卽世) : 죽음.
[주D-015]복제(服制) : 상제(喪制)에 있어 날을 달로 계산하여 복제(服制)를 빨리 끝마치던 제도.
[주D-016]향(珦) : 뒤의 문종(文宗).
[주D-017]음사(淫祀) : 옳지 않은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
[주D-018]철선(輟膳) : 수라를 들지 않음.
[주D-019]진선(進膳) : 수라를 듬.
[주D-020]고비(考妣) : 돌아간 부모.
[주D-021]철조(輟朝) : 제왕이 조회를 폐함.
[주D-022]의릉(毅陵) : 의종(毅宗).
[주D-023]계년(筓年) : 여자가 시집갈 나이로 처음 비녀를 꽂는 해.
[주D-024]주궤(主饋) : 공궤(供饋)를 주장함.
[주D-025]의방(義方) : 의(義)를 지켜 외모를 단정히 함.
[주D-026]정정(貞靜) : 부녀가 인품이 높아 얌전하고 점잖음.
[주D-027]촉도(蜀塗) : 중국 사천성(四川省)의 촉(蜀) 지방으로 통하는 험난한 길이라는 뜻으로, ‘거친 인생 행로’를 일컫는 말.
[주D-028]적장(嫡長) : 적실(嫡室)에서 난 후손의 맏아들과 맏손자.
[주D-029]천감(天鑑) : 상제(上帝)의 감시(監視).
[주D-030]내정(來庭) : 조정에 들어와서 임금을 뵘.
[주D-031]빈천(賓天) : 임금의 죽음을 말함.
[주D-032]휼전(䘏典) : 사망한 사람의 사후를 장식하는 의식 제도.
[주D-033]숙옹(肅雝) : 삼가고 화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