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조선 태종신도비 (펌)

廣州 朝鮮太宗獻陵神道碑 太宗獻陵之碑 자료

아베베1 2013. 6. 24. 22:52

 
위치 :산 13번지 1호 해제 :현 서초구 내곡동의 헌릉은 조선 태종과 그의 원경왕후 민씨(閔氏)의 릉이다. 이 능에 있는 태종의 신도비 중 구비(舊碑)의 귀부(龜趺)부분이 훼손된 경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임진왜란 때 왜군 장군이 이 곳에 이르니 귀부가 움직였다고 한다. 그래서 깜짝 놀란 왜군대장이 철퇴로 귀부의 목을 치자 벼락치는 소리가 나며 깨어져 뻘건 피가 흘러 내렸다. 왜장이 크게놀라 급히 쇠줄로 깨진 부분을 얽어매게 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후부터는 국가에 큰 변고가 일어날 때면 귀부의 잘린 부분에서 땀이 줄줄 흘러 내려 주민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6·25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도 역시 땀이 흘러 내렸다고 한다.


廣州 朝鮮太宗獻陵神道碑  太宗獻陵之碑(篆 題)
有明贈諡恭定朝鮮國太宗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獻陵神道碑銘(幷 序)
正憲大夫藝文館大提學集賢殿大提學知經筵同知春秋館事兼成均館大司成臣卞季良奉 敎撰
天之將降大任於  有德也必生 聖子 神孫以開景運以永洪祚我  朝鮮」  

太祖康獻大王之興也以我」 
太宗爲子以我」  
殿下爲孫噫戲盛矣豈人爲之所能及哉 天也其與商家賢聖君之繼作周家大王王季文武之相承何以異哉臣謹按  璿源  李氏全之望姓司空諱翰仕新羅娶宗姓之女六世而至諱兢休始仕高麗十三世而至 皇玄祖穆王入仕元朝而長千夫四世襲爵咸能濟美元政」
旣衰 皇祖桓王還事高麗恭愍王積功累仁其來久矣我  神懿王太后以至正丁未五月辛卯誕  太宗于咸興府厚州私第我  太祖之第五子生而神異稍長英睿絶倫好讀書學日進年未冠中高麗科第時政散民離國勢抗隉慨然有濟世之志  太祖愛之異諸子甞」
以書狀官偕侍中李穡朝 京師累官至密直司代言洪武辛未九月  神懿王太后薨廬于齊陵之側欲終三年壬申春  太祖西行遘疾而還來侍湯藥恭讓之臣乘隙謀傾勢甚急 太宗應機制變討除渠魁群謀瓦解秋七月與諸將相倡以大義推戴  太祖化家爲國封」 
靖安君甲戌夏」  
高皇帝命遣親男入朝  太祖以我  太宗通經達禮最賢諸子卽遣應  命旣至敷奏稱  旨憂禮  賜還戊寅秋八月太祖不豫權臣朋家聚黨有欲挾幼擅政以肆己志者發斯迫 太宗炳幾殱除時宗親將相皆欲請冊我太宗爲世子  太宗牢辭推尊」 
恭靖上請  太祖冊封世子以定  宗社九月丁丑 太祖以疾未瘳禪于恭靖建文庚辰正月逆臣朴苞謀戕同氣陰誘芳幹父子稱兵爲亂  太宗勒軍平之誅苞餘悉釋安置芳幹不廢懿親 恭靖以無嗣且謂開  國定  社皆我  太宗之績冊爲世子冬十有一」
月亦以疾傳位于我  太宗遣使請  命明年辛巳六月建文  帝遣通政寺丞章謹等奉  誥命印章來封我  太宗爲王冬遣鴻臚寺行人潘文奎來  錫冕服秩視  親王歲壬午今」  
皇帝卽位遣左政丞臣河崙賀  登極  帝嘉忠誠明年癸未四月  賜以 誥印遣都指揮使高得等來仍封爲王秋遣翰林待詔王延齡來  錫衮冕九章錦段紗羅書籍  太祖錦段紗羅 元敬王太后冠袍錦段紗羅各有差自時厥後  帝賚荐至無虗歲矣歲乙酉」
以漢陽  太祖所都排群議而還歲丁亥  帝語朝正使臣曰朝鮮國王至誠事大自後每當使臣之至輒  稱至誠戊子五月  太祖晏駕  哀慕罔極居于諒闇喪葬以禮遣使吿訃 帝震悼罷朝遣禮部郎中林觀等  賜祭大牢贈諡康獻又勅  太宗賜厚賻壬辰冬有以王氏之裔隱於民間者上言攸司請誅之  太宗曰帝王之興自有  天命誅王氏之後非我  太祖本意乃  下敎曰王氏之後存者俾之各安生業甲午六月甘露降于咸興府月光仇未里及定平白雲山明年乙未四月甘露又降咸興府德山洞吾東方前古所未有」
也政府俱進箋 賀 不受戊戌六月以世子禔敗德  廢之封讓寧大君以我  殿下聦明孝悌好學不惓國人屬望冊封  世子以聞  帝俞允是年八月禪于我  殿下遣使請  命十有一月我  殿下奉冊寶獻號曰  聖德神功上王明年己亥正月  帝遣鴻臚」
寺丞劉泉等奉  誥命封我  殿下爲王五月對馬島倭犯邊殺掠軍士 命領議政臣柳廷顯及長川君臣李從茂等以舟師往討之島倭納款如舊八月 帝遣使賜宴勅書略曰王至誠篤厚祇事朝廷一德一心終始不怠能簡賢命德俾宗祀有託以副國人之望又賜宴我」 
殿下勅書略曰爾父篤厚老成祇敬  天道忠順之誠愈久不替九月  恭靖王卽世  服斬衰終易月之制遣使吿訃明年四月  帝遣使致祭賜諡恭靖是年春我 殿下率群臣請上 太上王之號  不允秋七月  元敬王太后薨以我  殿下哀毁 過禮 命從易月」
之制  殿下涕泣固辭乃  命葬後釋服白衣終制九月壬午葬  太后于廣州治之大母山陵  曰獻辛丑秋九月我  殿下奉冊寳獻  太上王之號十月禀  太宗命冊封元子珦爲  世子  太宗以不世之資緝熈聖學孝悌通於  神明誠敬格于  宗社事  大則」  
天子稱其至誠交隣則倭邦服其有道欽  天恤民崇儉節用先德禮而愼刑罰進忠直而黜奸邪闢異端而禁淫祀酌古今以定制度昭文敎而嚴武 備積弊悉革而庶績咸熈四境按堵而民安物阜  帝王之道嗚呼盛哉宜其紆 帝眷之隆而再獲甘露之  上瑞矣壬寅四月始」
不豫越五月丙寅」薨于離宮我  殿下不勝哀痛三日徹膳群臣涕泣請進膳竟  不許定爲三年之喪不用易月之制  太宗春秋五十六歲在王位十有九年居閒頥養五年而弓劒忽遺大小臣僚下至僕隷莫不失聲號哭愈久愈哀如喪考妣嗚呼慟哉以是年九月初二日丙辰上」
尊號曰  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  廟號  太宗初六日庚申  合葬于  元敬王太后之陵 遺命也及訃聞 帝哀慟輟朝特遣禮部郎中楊善等  賜祭其文略曰惟王篤厚至誠聦明賢達敬事朝廷忠順之心終始不替訃音遠聞良深感悼又賜誥命諡曰恭定又賜」  
殿下賻優厚盖我  太宗功德之盛及我  殿下孝誠之至前後相承克享  天心故於始終之際寵異之典如此其備至矣  中宮元敬王太后姓閔氏驪興世家自高麗門下侍郎平章事文景公 諱令謨六世而至  皇高祖諱宗儒相毅陵位都僉議侍郎賛成事諡忠順忠順生」  
皇曾祖判密直司事 諡文順諱頔文順生  皇祖大匡驪興君諱抃大匡生  皇考純忠同德賛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驪興府院君修文殿大提學領藝文春秋館事諡文度諱霽 母宋氏封三韓國大夫人高麗重大匡礪良君諱璿之女積善流慶是生  淑德聦慧異常將笄擇配來」
嬪于我  太宗  太宗少有濟世之志留心經史不事家産  太后能儉於治家謹於主饋以勉其功敎誨多男俾循義方禮遇妾侍克盡婦道洪武壬申封  靖寧翁主戊寅  太宗定社之際勢甚孤危  太后盡心輔賛以濟大事庚辰春封  貞嬪其年冬  太宗卽位」
封  靜妃永樂癸未 帝賜冠袍自是年至丁酉累受  帝賜凡六戊戌冬我  殿下獻號曰  厚德王大妃庚子九月上諡  元敬王太后春秋五十六歲  太后禀幽閑貞靜之德克配  太宗以專內治二十年間壺儀肅穆又誕  聖子俾主宗社以享」
榮養及  薨嬪媵妾侍莫不盡心悲痛  婦則母儀其至矣乎  誕四男四女我  殿下居三長卽禔 次曰補封孝寧大君次曰種封誠寧大君先卒女長貞順公主下嫁淸平府院君李伯剛非一李也次慶貞公主
下嫁平壤府院君趙大臨次慶安公主下嫁吉昌君權跬亦先卒次貞善」
公主下嫁宜山君南暉  懿嬪權 氏生一女貞惠翁主適雲城君朴從愚昭惠宮主盧氏生一女幼信寧宮主辛氏生三男七女男長䄄封恭寧君餘幼女長貞信翁主適鈴平君尹季童次貞靜翁主適漢原君趙璿次淑貞翁主適日城君鄭孝全餘皆幼宮人安氏生一男三女皆幼金氏生一」
男裶封敬寧君高氏生一男崔氏生一男一女李氏生一男金氏生一女皆幼我
中宮恭妃沈氏門下侍中諱德符第四子溫之女誕四男二女男長卽  世子餘皆幼讓寧娶金漢老之女生三男一女皆幼孝寧娶前判中軍都摠制府事鄭易之女生四男皆幼誠寧娶前全羅道都觀察」
使成抑之女無子貞順公主生一女適龍驤侍衞司護軍李季暽亦非一李慶貞公主生四女長適敦寧府丞安進次適幼學金仲淹餘幼慶安公主生二男長聃娶漢城少尹鄭淵之女次幼貞善公主生二男一女皆幼敬寧娶戶曹叅議金灌之女生二男皆幼恭寧娶兵曹叅判崔士康之女」
生二女皆幼臣竊觀我  太宗之盛德隆功固己高出於百王之上矣而  配匹之賢內助之功又有可與蜀塗辛摯同符而儷美者矣群臣咸願刻銘于  陵之  神道碑昭示永世  殿下以命臣季良臣季良承  命祇慄不敢辭謹拜手稽首而  獻銘銘曰 天眷海東降我  太宗亹亹 太宗盛德在躬推戴  聖父克集大功乃覲  帝庭敷奏從容優荷  睿恩保我黎元炳幾靖亂  嫡長是尊雖値䦧墻  友愛猶惇孝悌之至從古罕聞維  德之厚惟  功之懋  天鑑孔昭式申保佑煌煌金寶輝暎前後  帝誥荐臻」
我乃龍受  祖訓惟服還于漢北制作禮樂煥乎郁郁遭喪居廬 哀慕罔極以葬以祭古典是式祇事  朝廷  帝稱至誠肅肅承祀感于  神明交隣有道倭邦來庭存䘏王裔俾遂其生中外乂安垂二十齡浥浥甘露歲降咸府  廢昏  命  德以作民  主期  享永年」
父臨下土何促賓  天一疾莫愈哀哀  聖子痛悼無比徹膳三日不勝摧毁凡百喪事維禮之履  帝聞慟悼遣使以祀贈諡褒崇賜賻優隆恤典之備喜溢臣工思齊  太后允也肅雝密賛定  社克配  亶聦篤生  聖哲俾主  宗祐乾健離明  恭定之德坤」厚柔貞  元敬之則琴瑟以友藏同其域  子孫振振吁嗟其麟綿綿宗祀垂萬億春臣拜  獻詞刻之貞珉萬代不磨照我東垠」
永樂二十二年五月  日立石  後二百七十二年乙亥五月  日重建
(裏面)
恭惟我」  太宗大王聖德神功卓冠前古春秋未高傳畀  聖子方遂優閑備享榮養而弓劒忽遺」我」 殿下哀毁盡禮越五月合葬于  元敬王太后之  獻陵遵治命也  陵在廣州治之西大母峰下乾亥之山乾坐巽向北距京城三十許里謹按山來自長白山而南踰數千里至尙州之俗離山折而西北又數百里至果川之淸溪山又折而東北負漢江而止是爲大母山坤靈停峙淑氣」蜿蜒噫」  
天作地藏以待  園陵之吉兆歟   殿下命卽  陵之巽方六十三步樹之豐碑以紀  德美垂耀來今又命序次開國定社佐命功臣姓名刻諸碑陰臣 竊 惟自古王者之作必有名世之臣應時而出弼成大業於是有紀功宗銘彝鼎之典所以示不朽傳悠久也我朝壬申之開」
創與夫戊寅庚辰之戡定實 天所以啓我 太宗以基朝鮮萬億年無疆之祚也然亦將相大臣忘身委質賛襄輔佐之力與有多焉是宜䥴名貞石以示永世後之觀者尙克知我  殿下顯揚 先烈褒獎元勳之至意云嘉善大夫藝文館提學集賢殿提學同知經筵春秋館事臣尹淮拜手稽首謹記開國功臣益安大君  芳毅義安大君李和門下侍中裵克廉  領議政府事趙浚 上洛府院君金士衡  安平府院君李舒 漢山府院君趙英茂宜寧府院君南在  西原府院君韓尙敬星山府院君李稷  議政府右議政鄭擢  漢川府院君趙溫  玉川府院君劉敞  花山府院君張思吉  興寧府院君安景恭  驪川府院君閔汝翼  平城府院君趙狷  興安君李濟  寧城吳思忠  判三司尹虎  鷄林君金稇  靑海君李之蘭 判漢城府事鄭熙啓 延城君金輅 宜城君南誾 政堂文學鄭摠 復興君趙胖  興原君李敷 東 原君咸傅霖 漢山君趙仁沃 南陽君洪吉旼 瑞城君柳爰廷 完城君李伯由 常山君李敏道 知 中樞院事黃希碩 知中樞院事金仁賛 知中樞院事趙琦 高城君高呂 戶曹典書趙英珪 上將軍 韓忠 定社功臣 益安君 芳毅 奉寧府院君李良祐 義安大君李和 領議政府趙浚 上洛府院君金土衡 晋山府 院君河崙 漢山府院君趙英茂 議政府右議政鄭擢 完原府院君李良祐 完山府院君李天祐 漢 川府院君趙溫 花山府院君張思吉 上黨君李佇 靑海君李之蘭 鷲山君辛克禮 延城君金輅 中樞院副使張哲 佐命功臣 義安大君李和 昌寧府院君成石璘 晋山府院君河崙 漢山府院君趙英茂 星山府院君李稷 文 城府院君柳亮 錦川府院君朴訔 議政府左議政李原 完山府院君李天祐 漢川府院君趙温 沔 城府院君韓珪 平壤府院君金承霔 長川府院君李從茂 漢平府院君趙涓 㓒原府院君尹子當 谷山府院君延嗣宗 上黨君李薆 完川君李淑 靑海君李之蘭 吉昌君權近 㓒城君尹抵 坡平 君尹坤 鷲山君辛克禮  礪山君宋居信 長興君馬天牧 南陽君洪恕 蓮城君金定卿 雞城君李 來 豐山君沈龜齡 知缺府事朴錫命 兵曹判書李膺 刑曹判書李升商 叅判三軍府事金英烈 利城君徐愈 熙川君金宇 麻城君徐益 越川君文彬 嗚呼茲惟我 太宗恭定大王獻陵也 陵下舊有神道碑中經兵燹石刻剝落多不可辨認我 殿下卽位之二十年甲戌春二月 祇謁 園寢顧瞻興歎思所以再闡紀德之事乃  命有司伐新石改刋舊文於是設重建廳禮曹工曹官掌其事而董治之越明年乙亥五月工吿訖涓吉折舊閣增其簷楹與舊碑並竪焉盖舊卽碑卞季良所撰權弘篆其額尹淮記其陰獨書碑者成姓而其下字缺不知名之爲誰碑文及陰記具載於 列聖誌狀通紀中故今依通紀所載改刋而其或不能無異同者則一從碑刻以存愼重之意嗚呼我 先王化家爲國之烈我殿下奉先思孝之德其自是光于萬代與天無極矣
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 經筵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
世子左副賓客臣朴泰尙奉 敎記 
通政大夫兵曹叅議臣李德成奉 敎書 
通政大夫兵曹叅知知製敎臣洪受疇奉 敎篆

태종헌능지비(太宗獻陵之碑) (篆題)
유명(有明) 증시(贈諡) 공정 조선국 태종 성덕신공문무 광효대왕 헌릉 신도비명(恭定朝鮮國太宗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獻陵神道碑銘)과 아울러 서문 있음
정헌대부 예문관대제학 집현전대제학 지경연동지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正憲大夫藝文館大提學集賢殿大提學知經筵同知春秋館事兼成均館大司成) 신(臣) 변계량(卞季良)이 교서를 받들어 찬하다.


하늘이 장차 덕이 있는 이에게 큰 임무를 내려주려 할 때에는 반드시 신성한 자손을 낳게 하여 큰 운을 열게 함으로써 길이 큰 복을 이어받게 한다. 우리 조선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이 일어남에 우리 태종으로 아들이 되게 하고, 우리 전하로 손자가 되게 했으니, 아, 성대하도다. 어찌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있겠는가. 하늘이 한 일이다. 그것은 상(商) 나라 왕실에 현명한 성군이 이어서 일어난 것과 주(周) 나라 왕가에 태왕(大王)ㆍ왕계(王季)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이 서로 계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신이 삼가 왕실의 근원[璿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씨(李氏)는 전주(全州)의 이름난 가문[望族]으로, 사공(司空) 휘(諱) 한(翰)은 신라에서 벼슬하였으며, 신라 종성(宗姓 : 김(金)씨)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6세 휘(諱) 긍휴(兢休)에 이르러 비로소 고려에 벼슬했고, 13세 황현조(皇玄祖 : 태종의 4대조) 목왕(穆王)에 이르러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었다. 4세에 걸쳐 내리 작위를 세습하여 모두 선대(先代)의 아름다운 공렬을 계승하였다. 원 나라 정치가 이미 쇠하게 되자, 황조(皇祖 : 태종의 할아버지) 환왕(桓王)은 돌아와 고려 공민왕(恭愍王)을 섬겼으니, 공적(功積)과 인덕(仁德)을 쌓음이 그 유래가 오래이다.
우리 신의왕태후(神懿王太后)께서 지정(至正) 정미년(공민왕 16, 1367년) 5월 신묘에 태종을 함흥부(咸興府) 후주(厚州)의 사저(私邸)에서 낳으시니, 우리 태조의 다섯째 아드님이다. 태종은 나면서부터 신이(神異)였는데, 차츰 자라면서 영명하고 지혜로움이 비할 데 없이 뛰어났다. 글 읽기를 좋아하여 학문이 날로 진보하더니 나이 20세가 못 되어 고려의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때 고려의 정치는 어지럽고 백성들은 흩어져서 국가의 형세가 위태로웠다. 개탄스러운 심정으로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으니, 태조가 여러 아들 중에서 유달리 사랑했다.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시중(侍中) 이색(李穡)과 같이 명 나라 서울에 갔다 왔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벼슬이 밀직사 대언(密直司代言)에 이르렀다.
홍무(洪武) 신미년(공양왕 3, 1391년) 9월에 신의왕태후께서 돌아가시니, 제릉(齊陵)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삼년상을 마치고자 했는데, 임신년(공양왕 4, 1392년) 봄에 태조가 서쪽 지방으로 행차했다가 병을 얻고 돌아왔으므로 와서 탕약(湯藥)을 살피며 시중들었다. 이때에 공양왕(恭讓王)의 신하가 틈을 타서 태조의 세력을 제거하고자 하여 사세가 매우 급하게 되었다. 태종이 조짐에 대응하여 변고를 제압하고 그 괴수를 쳐서 제거하니 온갖 음모가 와해되었다. 가을 7월에 여러 장상(將相)들과 함께 대의(大義)를 부르짖으며 태조를 왕으로 추대하여 나라를 세우니,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
갑술년(태조 3, 1394년) 여름에 명 나라 고황제(高皇帝)가 태조에게 친아들을 보내어 입조하도록 명하니, 태조께서는 우리 태종이 경서에 통하고 예법에 밝아서 여러 아들 중에 가장 현명하다고 하여 즉시 보내어 명에 응했다. 태종이 명 나라에 이르러서 황제의 뜻에 맞도록 잘 아뢰었으므로 예우를 받고 돌아왔다.
무인년(태조 7, 1398년) 가을 8월에 태조가 편찮으시자, 권신들이 붕당(朋黨)을 만들어 어린 왕자를 끼고 정권을 잡아 제 마음대로 휘두르고자 하였다. 때문에 화가 곧 닥칠 다급한 상황이었으므로 태종이 기미를 밝게 살펴서 이들을 제거했다. 당시 종친(宗親)과 장상(將相)들이 다 우리 태종을 세자로 책봉하기를 청하고자 했으나, 태종이 굳이 사양하고 공정(恭靖 : 정종(定宗))을 추대하여 태조에게 청하여 세자로 책봉하게 하여 종묘사직을 안정시켰다. 9월 정축일에 태조가 병이 낫지 않으므로 공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건문(建文) 경진년(정종 2, 1400년) 1월에는 역신(逆臣) 박포(朴苞)가 태종의 형제를 해칠 음모를 꾸미고 몰래 방간(芳幹) 부자를 유인하여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키니, 태종이 군사를 통솔하여 평정했다. 박포만을 주벌하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주었으며, 방간은 안치(安置 : 일정한 지역에 가둬둠)시키는 벌에 처했을 뿐 형제사이의 사랑하는 정을 버리지 않았다. 공정이 후사(後嗣)가 없고, 또 나라를 열고 사직을 안정시킨 일이 다 우리 태종의 공적이라고 하여 세자로 책봉하고, 겨울 11월에 또한 병으로 인하여 우리 태종에게 왕위를 전하고는 사신을 명 나라에 보내어 황제의 명을 청했다.
다음해 신사년(태종 1, 1401년) 6월에 명 나라 건문제(建文帝)가 통정시승(通政寺丞) 장근(章謹)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고 와서 우리 태종을 왕으로 봉하였다. 겨울에는 홍려시 행인(鴻臚寺行人) 반문규(潘文奎)를 보내와서 면복(冕服)을 내리니, 품질(品秩)이 친왕(親王)과 비등했다.
임오년(태종 2, 1402년)에 지금의 황제 성조(成祖)가 즉위하였는데, 좌정승 신(臣) 하륜(河崙)을 보내어 황제의 등극을 하례하자 황제가 충성을 가상히 여겼다. 다음해 계미년(태종 3, 1403년) 4월에 고명과 인장을 내리고,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어 그대로 왕으로 봉하였다. 가을에는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을 보내와서 곤면 구장(袞冕九章)과 금단사라(錦段紗羅), 서적(書籍)을 내렸는데, 태조에게는 금단사라를,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에게는 관포(冠袍)와 금단사라를 각각 차등 있게 내렸다. 이로부터 황제가 하사하는 선물이 계속 이르러 거르는 해가 없었다.
을유년(태종 5, 1405년)에 한양은 태조께서 수도로 정한 곳이라고 하여 여러 사람들의 반대 의논을 물리치고 이곳으로 돌아왔다.
정해년(태종 7, 1407년)에 황제가 정조(正朝)에 하례하러 간 조선의 사신에게 말하기를, “조선 국왕은 지극한 정성으로 대국을 섬긴다.” 했는데, 그 뒤로는 사신이 도착할 때마다 그 지극한 정성을 칭찬하였다.
무자년(태종 8, 1408년) 5월에 태조가 승하하니 태종이 슬퍼하고 사모하기를 그지없이 하고, 상차(喪次)에 거처하면서 상례와 장례를 예에 따라 거행하였다. 명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부음을 알리자 황제가 매우 슬퍼하여 조회를 정지하고, 예부 낭중(禮部郎中) 임관(林觀) 등을 보내어 태뢰(太牢)로써 제사 지내게 하고 시호를 강헌(康獻)이라고 내렸다. 또 태종에게 칙서(勅書)를 내리고 후하게 부의(賻儀)를 주었다.
임진년(태종 12, 1412년) 겨울에 왕씨(王氏)의 후예가 민간에 숨은 있다고 상언(上言)이 있자, 담당 관사(官司)에서 죽이기를 청했다. 태종이 말하기를, “제왕이 일어남은 본디 천명에 달려 있는 것이다. 왕씨의 후예를 죽이는 것은 우리 태조의 본의가 아니다.” 하고, 곧 하교하기를, “살아남은 왕씨의 후예들을 각기 생업에 안정하게 하라.” 했다.
갑오년(태종 14, 1414년) 6월에 감로(甘露 : 단 이슬. 천하태평의 조짐으로서 하늘에서 내린다 함)가 함흥부의 월광구미리(月光仇未里)와 정평(定平)의 백운산(白雲山)에 내리고, 다음해 을미년(태종 15, 1415년) 4월에 감로가 또 함흥부 덕산동(德山洞)에 내렸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 의정부에서 이 상서로운 일에 대하여 모두 전문(箋文)을 올려 하례했으나 태종은 받지 않았다.
무술년(태종 18, 1418년) 6월에 세자 제(褆)가 패덕(敗德)하다는 이유로 폐하여 양녕대군(讓寧大君)에 봉하고, 우리 전하(세종)가 총명하며 효도하고 우애 있으며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름이 없어서 나라 사람들의 기대를 모은다고 하여, 세자로 책봉하고 명나라에 알리니, 황제가 좋다고 윤허했다. 이해 8월에 태종이 우리 전하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사신을 보내어 황제의 명을 청했다. 11월에 우리 전하가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어 부왕(태종)에게 성덕신공 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는 호를 올렸다.
이듬해 기해년(세종 1, 1419년) 1월에 황제가 홍려시 승(鴻臚寺丞) 유천(劉泉) 등을 파견하여 고명을 보내와서 우리 전하를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5월에 대마도(對馬島)의 왜구가 변경을 침범하여 우리 군사를 살해하고 약탈하므로 영의정 신 유정현(柳廷顯)과 장천군(長川君) 신 이종무(李從茂) 등에게 명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니, 대마도의 왜인들이 예전과 같이 성심으로 우리나라를 섬겼다. 8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와서 태종에게 잔치를 하사했는데, 칙서의 대략에, “왕의 지극한 정성이 돈독하고 두터워서 성심으로 황제의 조정을 섬기어 한결같은 덕과 한결같은 마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고, 능히 어진 이를 고르고 덕 있는 이에게 명하여 종묘와 사직을 맡김으로써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했도다.” 하였다. 또 우리 전하에게도 잔치를 하사했는데, 칙서의 대략에, “경의 부왕이 독후(篤厚)하고 노성(老成)하여 천도를 삼가 공경했으니 충순(忠順)한 정성은 오래 갈수록 변함이 없다.” 하였다. 9월에 공정왕(恭靖王 : 정종)이 승하하니 태종이 참최복(斬衰服)을 입어 거상(居喪) 기간을 달 대신 날로 계산하는 역월(易月)의 상제(喪制)를 마쳤다.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부음을 알렸더니, 이듬해 4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와서 치제(致祭)하고 공정(恭靖)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해 봄에 우리 전하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태상왕(太上王)이란 호를 올릴 것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가을 7월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가 돌아가셨는데, 우리 전하께서 너무도 애통해하여 몸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역월의 제도를 따를 것을 명했으나, 전하께서 울며 굳이 사양하니 장사 지낸 뒤 상복을 벗고 흰옷으로 복제를 마치도록 하라고 명했다. 9월 임오일에 태후를 광주(廣州)의 대모산(大母山)에 장사 지내고 능호(陵號)를 헌릉(獻陵)이라고 했다.
신축년(세종 3, 1421년) 가을 9월에 우리 전하가 옥책과 금보를 받들고 태상왕이란 호를 올렸다. 10월에 태종에게 여쭈어서 원자(元子) 향(珦 : 문종(文宗))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태종은 세상에 드물게 나는 훌륭한 자질로서 성학(聖學)에 밝았고, 효도와 우애는 신명에 통하고 정성과 공경은 종묘사직의 신을 감격시켰다. 사대(事大)에 있어서는 천자가 그 지극한 정성을 칭찬하고, 교린(交鄰)에 있어서는 왜국이 그 도가 있음에 복종했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며, 검소함을 숭상하고 재용을 절약했다. 덕(德)과 예(禮)를 앞세우고 형벌을 신중히 했으며, 충직한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내쫓았다. 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음사(淫祀)를 금지했으며, 고금을 참작하여 제도를 정했으며, 문교(文敎)를 밝히고 무비(武備)를 엄중하게 했다. 누적된 폐단을 모두 혁파하니 모든 일이 다 일신되었고, 온 나라 안이 안도하여 백성들은 편안하고 물산은 풍성했다. 제왕의 도가 실로 성대하니, 하늘로부터 크나큰 사랑을 받아 두 번이나 감로(甘露)가 내리는 상서를 얻음이 당연하다.
임인년(세종 4, 1422년) 4월에 처음으로 병환이 있더니, 5월 병인일에 이궁(離宮)에서 승하하시니, 우리 전하가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3일 동안 수라를 들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울며 수라를 들기를 청했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고, 삼년상을 행할 것을 정하고 역월의 제도를 쓰지 않았다.
태종은 춘추가 56세이며 19년 동안 왕위에 계셨다. 왕위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며 휴양한 지 5년 만에 갑자기 승하하시니, 대소 신료들로부터 아래로 노복에 이르기까지 목놓아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어서 시간이 갈수록 더욱 슬퍼하기를 부모의 상을 당한 것과 같이 했다. 아, 슬프다. 이해 9월 2일 병진일에 존호(尊號)를 올려 ‘성덕신공문무광효 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라 하고, 묘호(廟號)는 ‘태종’이라고 했다. 6일 경신에 원경왕태후의 능에 합장하니,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다.
명나라에 부고가 알려지자, 황제가 슬퍼하여 조회를 멈추고, 특별히 예부 낭중(禮部郎中) 양선(楊善) 등을 보내와 사제(賜祭)하였다. 그 제문의 대략에, “왕은 독후(篤厚)하고 지성(至誠)스러우며 총명하고 현달(賢達)하여, 공경으로 조정을 섬김에 있어 충순(忠順)한 정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도다. 부음이 멀리서 들리니 실로 슬픈 감회가 깊도다.” 하고, 또 고명을 내려 시호를 ‘공정(恭定)’이라고 했다. 또 전하에게 부의를 넉넉하고 후하게 내렸다. 대체로 우리 태종의 성대한 공덕과 전하의 지극한 효성이 앞뒤로 서로 이어져서 천심(天心)을 잘 받들었기 때문에 시종(始終) 남달리 총애하는 은전이 이와 같이 갖추어지고 지극했던 것이다.
중궁 원경왕태후의 성은 민씨(閔氏)이니 여흥(驪興)의 세가(世家)이다. 고려의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문경공(文景公) 휘 영모(令謨)로부터 6세를 거쳐 황고조(皇高祖) 휘 종유(宗儒)에 이르러 의릉(毅陵 : 고려 충숙왕)을 도왔으니, 벼슬은 도첨의 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로서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충순공이 황증조(皇曾祖)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시호 문순(文順) 휘 적(頔)을 낳았다. 문순공은 황조(皇祖) 대광(大匡) 여흥군(驪興君) 휘 변(抃)을 낳았다. 대광공은 황고(皇考) 순충동덕찬화공신(純忠同德贊化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수문전대제학 영예문춘추관사(修文殿大提學領藝文春秋館事) 시호 문도(文度) 휘 제(霽)를 낳았다. 모친 송씨(宋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졌는데, 고려 중대광(重大匡) 여량군(礪良君) 휘 선(璿)의 따님이니, 선을 쌓음으로써 경사가 전해져서 맑은 덕이 있는 태후를 낳게 되었다.
태후는 총명하고 지혜로움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고, 시집갈 나이가 되자 우리 태종의 배필이 되었다. 태종이 젊었을 때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이 있어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마음을 두고 집안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았으나, 태후는 검소하게 집안을 꾸려나가고 음식을 장만하는 일에 부지런하여 태종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했으며, 많은 아들을 가르쳐서 의(義)를 따르게 하고, 첩과 시녀들을 예로 대우하여 능히 부인의 도리를 극진히 했다.
홍무(洪武) 임신년(태조 1, 1392년)에 정녕옹주(靖寧翁主)로 봉해졌다.
무인년(태조 7, 1398년)에 태종이 사직을 안정하게 할 즈음 형세가 매우 외롭고 위태했는데, 태후가 마음을 다해 도와서 대사를 이루게 했다.
경진년(정종 2, 1400년) 봄에 정빈(貞嬪)에 봉해지고, 그해 겨울에 태종이 즉위하면서 정비(靜妃)에 봉해졌다.
영락(永樂) 계미년(태종 3, 1403년)에는 명 나라 황제가 관포(冠袍)를 내려주었는데, 이해부터 정유년(태종 17, 1417년)까지 모두 여섯 번이나 황제의 하사를 받았다.
무술년(태종 18, 1418년) 겨울에 우리 전하가 존호를 올려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라 하였다.
경자년(세종 2, 1420년) 9월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라는 시호를 올렸으니, 춘추는 56세였다.
태후는 그윽하고 정숙한 덕을 타고나 능히 태종의 배필이 되어 집안 살림에 전심할 수 있었다. 20년 동안 왕비로서의 위의는 엄숙하고, 또 성스러운 아들을 낳아서 종묘와 사직을 맡게 하여 영광스러운 봉양을 누리었다. 승하하기에 이르러 빈(嬪)과 시첩(侍妾)들이 마음을 다해서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부인의 도리와 모후로서의 위의가 지극했도다.
4남 4녀를 낳았는데, 우리 전하는 셋째이다. 장자는 바로 제(褆)이고, 둘째는 보(補)인데 효령대군(孝寧大君)에 봉해졌다. 넷째는 종(褈)이며 성녕대군(誠寧大君)에 봉해졌는데 먼저 죽었다. 맏딸은 정순공주(貞順公主)이며,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는데 동본(同本)의 이씨(李氏)는 아니다. 둘째는 경정공주(慶貞公主)이며,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다. 셋째는 경안공주(慶安公主)이며, 길창군(吉昌君) 권규(權跬)에게 시집갔는데 또한 먼저 죽었다. 넷째는 정선공주(貞善公主)이며,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시집갔다.
의빈(懿嬪) 권씨(權氏)가 1녀를 낳았는데, 정혜옹주(貞惠翁主)이며 운성군(雲城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시집갔다. 소혜궁주(昭惠宮主) 노씨(盧氏)가 1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신녕궁주(信寧宮主) 신씨(辛氏)가 3남 7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인(䄄)이며, 공녕군(恭寧君)에 봉해졌고, 나머지 두 아들은 어리다. 맏딸은 정신옹주(貞信翁主)이며,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에게 시집갔다. 둘째는 정정옹주(貞靜翁主)이며, 한원군(漢原君)조선(趙璿)에게 시집갔고, 셋째는 정숙옹주(貞淑翁主)이며, 월성군(月城君)정효전(鄭孝全)에게 시집갔고, 나머지 네 따님은 다 어리다. 궁인(宮人) 안씨(安氏)가 1남 3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김씨(金氏)가 1남을 낳았는데, 이름은 비(裶)이며 경녕군(敬寧君)에 봉해졌다. 고씨(高氏)가 1남, 최씨(崔氏)가 1남 1녀, 이씨(李氏)가 1남, 김씨(金氏)가 1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우리 중궁 공비(恭妃) 심씨(沈氏)는 문하시중 덕부(德符)의 넷째 아들 온(溫)의 따님이다.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바로 세자이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양녕(讓寧)은 김한로(金漢老)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효령(孝寧)은 전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 정역(鄭易)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성녕(誠寧)은 전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성억(成抑)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이 없다. 정순공주(貞順公主)는 1녀를 낳았는데, 용양시위사 호군(龍驤侍衛司護軍) 이계린(李季疄)에게 시집갔고 물론 같은 이씨는 아니다. 경정공주(慶貞公主)는 4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돈녕부승(敦寧府丞) 안진(安進)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유학(幼學) 김중엄(金仲淹)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경안공주(慶安公主)는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담(聃)이며, 한성 소윤(漢城少尹) 정연(鄭淵)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다음은 어리다. 정선공주(貞善公主)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경녕(敬寧)은 호조 참의김관(金灌)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다 어리다. 공녕(恭寧)은 병조 참판최사강(崔士康)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신이 삼가 살펴보니, 우리 태종의 성대한 덕과 높은 공이 실로 이미 역대의 제왕을 크게 능가하였으나 배필의 현숙함과 내조의 공이 또한 촉도(蜀塗 : 촉산씨(蜀山氏)와 도산씨(塗山氏)의 딸을 말함. 황제(黃帝)의 아들 창의(昌意)가 촉산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고양(高陽)을 낳았는데 이가 제곡(帝嚳)이다. 또 하(夏) 나라 우왕(禹王)이 도산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계(啓)를 낳았다.), 신지(莘摯 : 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부인 태사(太姒)와 태왕(大王)의 부인 태임(太任)을 말함. 신(莘) 땅 출신 태사(太姒)는 무왕(武王)을 낳았고, 지(摯) 땅 출신 태임(太任)은 문왕을 낳았음.)와 신표처럼 일치하는 점이 있으니 나란히 기리는 것이다. 많은 신하들이 모두 능의 신도비에 명(銘)을 새겨서 길이 후세에 밝게 보이기를 원하니, 전하께서 이 일을 신 계량에게 명하셨다. 신 계량은 명을 받고 나서 조심스럽고 두려워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머리를 조아려 명을 바칩니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해동을 사랑하여
우리의 태종을 내려주시니
부지런히 힘써서 쉬지 않는 태종이여
성대한 덕 몸에 지니셨네
성부를 추대하여
능히 위대한 공 이루게 하고
황제의 조정에 사신 가서
조용히 진주(陳奏)하니
천자의 은총 넉넉히 입게 되어
우리나라 백성들 보전하셨네
기미를 밝게 살펴 변란을 평정하고
형을 높여 보위에 오르게 하니
비록 형제간에 싸움을 만났으나
우애 오히려 도타웠으니
효성과 우애의 지극함은
전고에 드물었네
오직 덕을 후하게 하고
오직 공에 힘썼으니
하늘의 살핌이 매우 밝아
이에 거듭 보우해 주셨네
빛나는 금보가
찬란하게 비춤에
황제의 고명(誥命) 거듭 내리니
내 곧 은총을 받았네
선왕의 훈계를 따라
한성에 환도하고
예악을 제작하니
문채가 빛나네
상을 당해 여막에 거처하며
애모가 망극하고
장사와 제사에
옛 법식을 따르셨네
공손히 명 나라를 섬기시니
황제는 그 지성을 칭찬했고
엄숙하게 제사를 받듦에
신명이 감응하였네
교린에 도가 있으니
왜국이 와서 복종하였고
왕씨의 후예를 보살펴
편안히 살도록 했으니
중외가 다스려져 태평하여
억만 년 길이 드리우리
윤택한 감로가
해마다 함흥부에 내렸고
어두운 아들 폐하고 덕 있는 아들 명하여
백성의 주인이 되게 하였네
영년토록 향수(享壽)하여
상왕으로 계시길 기약했더니
어찌 하늘에 오르기를 재촉하여
한 질병이 낫지 않았던가
애달프도다 성자여
슬픔을 비길 데 없어
사흘 동안 수라를 그치고
상심으로 몸이 손상함을 견디지 못했네
거상(居喪) 중의 모든 절차
오직 예대로 이행하니
황제가 듣고 슬퍼하며
사신을 보내 사제(賜祭)했네
시호를 주어 포숭하고
부의(傅儀)를 후하게 내리니
황제의 조문하는 예가 구비되매
기쁨이 신하들에게 넘쳤네
엄정하신 태후여
진실로 엄숙하고 화순하니
사직의 안정을 가만히 도와
능히 총명한 성군의 짝이 되었네
돈독히 성철한 아들 낳아
종묘의 주인 되게 하셨네
하늘처럼 굳세고 명철함은
공정왕의 덕이요
땅처럼 후덕하고 유정함은
원경왕후의 법칙이니
살아서는 금실이 좋으시고
죽어서는 같이 장사 지냈네
자손이 번성하니
아, 기린같이 인후하여
끊임없는 종묘사직
억만년 이어가리
신은 절하고 명(銘)을 바쳐서
옥돌에 새기노니
만대에 마멸되지 않고
우리 동방에 밝게 빛나리라

영락(永樂) 22년(세종 6, 1424년) 5월 일 비를 세우다. 그 272년 뒤 을해년(숙종 21, 1695년) 5월 일에 다시 세우다.



(裏面)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태종대왕께서 성스러운 덕과 신공(神功)이 뚜렷하여 옛날보다 우뚝 높았도다. 춘추 아직 많지 아니하실 적에 왕위를 성스러운 아들에게 전해주시고, 바야흐로 한가함을 얻으시어 영화로운 봉양을 누리시다가 갑자기 돌아가시었다. 우리 전하(세종)께서 슬퍼하시어 몸을 상하였으나 예법대로 다하셨다. 5개월이 지나 원경왕태후의 헌릉에 합장하시니 유명(遺命)을 따름이다. 능은 광주(廣州) 치소(治所)의 서쪽 대모봉(大母峯) 밑 건해좌(乾亥坐 : 서북쪽)의 산에 있는데 능의 방향은 건좌손향(乾坐巽向 :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향함)이다. 북으로 서울 도성과의 거리는 30리쯤 된다. 삼가 살펴 보건대, 이 산은 장백산(長白山)으로부터 내려오다가 남쪽으로 수 천리를 넘어 상주(尙州)의 속리산(俗離山)에 이르고, 여기서 꺾여 서북으로 또 수백 이를 달려 과천(果川)의 청계산(淸溪山)에 이르고, 또 꺾여 동북으로 달려 한강을 등지고 멈추었는데 이것이 대모산이다. 땅의 영기(靈氣)가 멈추어 솟아 맑은 기운이 꿈틀거리니 아,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간직하여 능(陵)의 길조(吉兆)를 기다림인가. 전하께서 능의 손방(巽方 : 동남쪽) 63보에 나아가 큰 비를 세워서 덕의 아름다움을 기록하여 빛을 지금 세대와 오는 세대에 드리우라 명하시었다. 또한 개국공신(開國功臣) 좌명공신(佐命功臣) 정사공신(定社功臣)들의 이름을 차례로 비 뒤에 새기도록 명하시었다.
신이 그윽히 생각하건대, 옛부터 제왕(帝王)이 일어남에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신하가 있어 때에 응하여 나서 대업(大業)을 도와서 이루었습니다. 이에 종명이정(鐘銘彝鼎)에 공을 기록하는 법이 있는 것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공을 보여서 영구히 전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조정이 임신년에 개창되고 무인년과 경진년의 내란을 평정한 것은 실로 하늘이 태종에게 열어준 바입니다. 이로써 조선왕조가 억만년 무궁한 복을 누릴 기초를 잡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또한 장상(將相)들과 대신들이 몸을 잊고 명을 바쳐 보좌한 것이 많았습니다. 이것을 마땅히 비석에 새겨 영원히 세상에 보여줌으로써 뒤에 보는 사람이 오히려 능히 우리 전하께서 선대의 빛나는 공을 현양(顯揚)하고 원훈(元勳)을 포장(褒獎)하신 지극한 뜻을 알았다고 할 것입니다.
가선대부 예문관제학 집현전제학 동지경연춘추관사(嘉善大夫藝文館提學集賢殿提學同知經筵春秋館事) 신(臣) 윤회(尹淮)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삼가 기록하다.

개국공신(開國功臣)
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ㆍ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ㆍ문하시중(門下侍中) 배극렴(裵克廉)ㆍ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조준(趙浚)ㆍ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ㆍ안평부원군(安平府院君) 이서(李舒)ㆍ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ㆍ의녕부원군(宜寧府院君) 남재(南在)ㆍ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상경(韓尙敬)ㆍ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ㆍ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정탁(鄭擢)ㆍ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조온(趙溫)ㆍ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유창(劉敞)ㆍ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장사길(張思吉)ㆍ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안경공(安景恭)ㆍ여천부원군(驪川府院君) 민여익(閔汝翼)ㆍ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조견(趙狷)ㆍ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ㆍ영성(寧城) 오사충(吳思忠)ㆍ판삼사(判三司) 윤호(尹虎)ㆍ계림군(鷄林君) 김곤(金稇)ㆍ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ㆍ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희계(鄭熙啓)ㆍ연성군(延城君) 김로(金輅)ㆍ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ㆍ정당문학(政堂文學) 정총(鄭摠)ㆍ부흥군(復興君) 조반(趙胖)ㆍ흥원군(興原君) 이부(李敷)ㆍ동원군(東原君) 함부림(咸傅霖)ㆍ한산군(漢山君) 조인옥(趙仁沃)ㆍ남양군(南陽君) 홍길민(洪吉旼)ㆍ서성군(瑞城君) 유원정(柳爰廷)ㆍ완성군(完城君) 이백유(李伯由)ㆍ상산군(常山君) 이민도(李敏道)ㆍ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황희석(黃希碩)ㆍ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김인찬(金仁賛)ㆍ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기(趙琦)ㆍ고성군(高城君) 고려(高呂)ㆍ호조전서(戶曹典書) 조영규(趙英珪)ㆍ상장군(上將軍) 한충(韓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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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안군(益安君) 방의(芳毅)ㆍ봉녕부원군(奉寧府院君) 이량우(李良祐)ㆍ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ㆍ영의정부(領議政府) 조준(趙浚)ㆍ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ㆍ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 하륜(河崙)ㆍ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ㆍ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정탁(鄭擢)ㆍ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이량우(李良祐)ㆍ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李天祐)ㆍ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조온(趙溫)ㆍ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장사길(張思吉)ㆍ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ㆍ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ㆍ취산군(鷲山君) 신극례(辛克禮)ㆍ연성군(延城君) 김로(金輅)ㆍ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장철(張哲)

좌명공신(佐命功臣)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ㆍ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ㆍ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 하륜(河崙)ㆍ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ㆍ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ㆍ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 유량(柳亮)ㆍ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 박은(朴訔)ㆍ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이원(李原)ㆍ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천우(天祐)ㆍ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조온(趙温)ㆍ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한규(韓珪)ㆍ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김승주(金承霔)ㆍ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 이종무(李從茂)ㆍ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 조연(趙涓)ㆍ칠원부원군(㓒原府院君) 윤자당(尹子當)ㆍ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 연사종(延嗣宗)ㆍ상당군(上黨君) 이애(李薆)ㆍ완천군(完川君) 이숙(李淑)ㆍ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ㆍ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ㆍ칠성군(㓒城君) 윤저(尹抵)ㆍ파평군(坡平君) 윤곤(尹坤)ㆍ취산군(鷲山君) 신극례(辛克禮)ㆍ여산군(礪山君) 송거신(宋居信)ㆍ장흥군(長興君) 마천목(馬天牧)ㆍ남양군(南陽君) 홍서(洪恕)ㆍ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ㆍ계성군(雞城君) 이래(李來)ㆍ풍산군(豐山君) 심구령(沈龜齡)ㆍ지#부사(知#府事) 박석명(朴錫命)ㆍ병조판서(兵曹判書) 이응(李膺)ㆍ형조판서(刑曹判書) 이승상(李升商)ㆍ참판삼군부사(叅判三軍府事) 김영렬(金英烈)ㆍ이성군(利城君) 서유(徐愈)ㆍ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ㆍ마성군(麻城君) 서익(徐益)ㆍ월천군(越川君) 문빈(文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