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 판관공 휘 희수 등/10세 방조 휘 득수

영암의 문익주 등이 상소를 올려 최득수를 효자로 표창해 줄 것을 청하

아베베1 2009. 10. 6. 22:00

선조 36년 계묘(1603,만력 31)
 3월14일 (경오)
영암의 문익주 등이 상소를 올려 최득수를 효자로 표창해 줄 것을 청하다

전라 감사 한준겸(韓浚謙)이 아뢰었다.
“영암(靈巖)에 사는 전 현감 문익주(文益周) 등 20여 인이 연명(連名)하여 와서 정소(呈訴)하기를 ‘군(郡)에 사는 사인(士人) 최득수(崔得壽)는 고(故) 명현(名賢) 최덕지(崔德之)의 6대손이다. 일찍이 의방(義方)을 알았고 성품 또한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른의 뜻을 받들어 어기지 않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다. 지난 임진년 경성(京城)에서 적변을 만나자 나이 80인 노모를 모시고 삭녕(朔寧)으로 피란하였다. 노모가 병으로 죽자 산중에 임시로 묻어 두고 1년 동안 주야로 빈소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마침내 적봉(賊鋒)을 면하고 다음해 가을 금천(衿川)으로 돌아가 장사지낸 다음 3년을 죽만 마시면서 여묘 밖을 나가지 않았다. 계사년·갑오년에 기근이 너무 심하여 여사(廬舍) 옆에서 사람들이 다투어 서로 잡아 먹었지만 득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애절한 통곡과 수척한 모습을 보는 자는 눈물을 흘렸다. 득수는 본군 사람으로 난 후에 와서 살았는데 그 성효(誠孝)의 돈독함을 보면 충분히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므로 순선(旬宣) 아래에 와서 진달하는 것이니 조정에 아뢰어 달라. 그리고 전쟁을 치른 뒤 의열(義烈)로 표창해 줄 사람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없는데 장려해 주는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인정이 모두 답답해 하는 것은 물론 장차 후인을 용동시킬 수 없다.’ 하였습니다.
득수가 과연 문익주 등이 진달한 것과 같다면 참으로 가상한 일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더욱더 순방(詢訪)하게 하여 우선 정표(旌表)하게 하소서. 그리고 나주(羅州) 생원 강위호(姜渭虎) 등 1백여 인이 와서 정소하를 ‘난 후 의병을 일으킨 사람 가운데 고경명(高敬命) 같은 이는 광주(光州)에 사당을 세워 주었고 조헌(趙憲) 같은 이는 금산(錦山)에 비석을 세워 주었는데, 김천일(金千鎰)만은 아직 표창해 주는 은전이 없어서 충신의 마을로 하여금 묻혀서 빛이 없게 만들어 수레타고 가는 사람이 경의를 표할 줄 모르고 걸어가는 사람도 존경할 줄 모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호남의 사론(士論)이 지금까지 답답해 하니 또한 조정에 알려서 충신의 공적을 표창해 주고 그 문려에 정표함으로써 후세에 권장되도록 해달라.’ 하였으니, 모두 해조로 하여금 시행하게 하소서.”
【원전】 24 집 457 면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군사(軍事) / *윤리(倫理)


순선(旬宣) : 관찰사를 가리킴.
 
휘 득수는 전주최씨 문성공파 10세손 휘 판관공 휘 희수 선조님의 형제 되시는 방조님이시다  

 

최희수(崔稀壽)

[생원진사시] 선조(宣祖) 1년 (1568) 무진(戊辰)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3등(三等) 37위

[인적사항]

UCI G002+AKS-KHF_13CD5CD76CC218B1530X0
인수(仁叟)
생년 경인(庚寅) 1530년
합격연령 39세
본관 전주(全州)
거주지 경(京)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가족사항]

 
[부모구존] 자시하(慈侍下)
[형] 최낙수(崔樂壽)

[제] 최득수(崔得壽)
[제] 최미수(崔眉壽)
[제] 최기수(崔耆壽)

[부]
성명 : 최언청(崔彦淸)
관직 : 행제용감부봉사(行濟用監副奉事)
품계 : 승의랑(承議郞)

[출전]

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