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 판관공 휘 희수 등/10세 방조 휘 득수

최 처사(崔處士)의 묘지명 병서(幷序)(10세 방조 휘 휘수 장형)

아베베1 2010. 7. 23. 13:26

포저집 제33권 포저 조익)
 묘지명(墓誌銘) 10수(十首)
최 처사(崔處士)의 묘지명 병서(幷序)


우리가 옛날에 살던 집이 의동(義洞)에 있었으니, 그곳은 바로 도성 안의 동쪽 변두리였다. 같은 동네에 최씨(崔氏)가 살고 있었는데, 두 가문의 집들이 서로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두 집안의 자손들이 그 동네에서 가장 많이 모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두 집안의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같은 연배끼리 서로 어울리면서 아침저녁으로 항상 함께 지냈으니, 그 친한 관계가 마치 골육과 같았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두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이리저리 흩어지면서 집들이 모두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 뒤에 서울에 와서 벼슬하는 사람이 있어도 모두 다른 동네에 우거(寓居)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서로 만나게 되면 마치 멀리 사는 친척을 본 것처럼 반갑게 대하며 기뻐하곤 하였다.

처사(處士)는 나의 조고(祖考) 항렬에 해당되는 분이었다. 처사의 아들 3인 중에 백씨(伯氏)와 중씨(仲氏)는 나의 제부(諸父) 항렬이었지만, 막내인 응형(應亨)은 나보다 나이가 두 살 적었으므로 나와 함께 어린 시절 벗으로 지냈다.

처사가 임진왜란 때에 80여 세 되는 노모를 모시고 삭녕(朔寧)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노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임시로 산속에 초빈(草殯)을 하고는 밤낮으로 호곡(號哭)하며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때 적이 그곳에 이르자 처사가 혼백(魂帛) 상자를 등에 지고 숲 속으로 들어가서 숨었는데, 적이 그를 찾아내어 붙잡은 뒤에 그 상자를 보고는 기보(奇寶)가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처사를 해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막상 열어 보자 바로 혼백이 들어 있었으므로 적도 감동한 나머지 처사에게 활로(活路)를 알려 주고 떠나갔다. 그 이듬해 가을에 금천(衿川)의 선산에 반장(返葬)한 뒤에 묘소 옆에서 여묘(廬墓)하였는데, 삼년상을 마치도록 미음만 마시면서 하루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때에 병화(兵禍)를 당한 뒤끝이라서 백성들이 기아(飢餓)에 시달리다 못해 도적이 되어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는 일이 줄을 이었으며 심지어는 서로 잡아먹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하였는데, 기전(畿甸)이 그중에서도 특히 심하였다. 그런데도 처사는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홀로 산속에서 여묘를 하며 떠나지 않았는데, 처사가 애처롭게 곡읍(哭泣)하고 애훼(哀毁)하여 몸이 삭정이처럼 여위었으므로 이를 보는 자마다 모두 눈물을 흘렸다. 처사의 중자(仲子)인 응선(應善)이 날마다 땔나무를 등에 지고 성안으로 들어가서 얼마 안 되는 쌀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으므로 미음이라도 계속 먹을 수가 있었다.

아, 사람의 자식이라면 그 누가 부모가 없으리오마는 제대로 효도를 하는 자는 지극히 드물기만 하다. 이때에 처사에게도 아우가 있고 여러 조카들이 있었는데, 그들도 모두 선인(善人)이었지만 유독 처사만이 그렇게 하였다. 이를 통해서 처사의 효행이야말로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요, 노력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난리가 일어난 혼란한 와중에 생사를 기필할 수 없었는데도 바로 이처럼 독실하게 행하였던 것이니, 평소의 효성과 우애야 처사에게는 일상적인 행동으로서 말할 것도 없다고 하겠다.

그 뒤에 처사가 영암(靈巖)에 와서 살자 호남(湖南) 사람들이 감사(監司)에게 정장(呈狀)을 하니 상이 듣고서 상으로 관직을 내리라고 명하였고, 그 뒤에 양주(楊州)에 와서 살자 양주 사람들이 또 감사에게 정장을 하니 상이 듣고서 복호(復戶)를 명하였으며, 그 뒤에 용산(龍山)에 와서 살자 용산 사람들이 또 예조(禮曹)에 정장을 하였는데, 이 모든 일이 끝내는 예조에 의해서 폐각(廢閣)되고 말았다.

처사의 휘(諱)는 득수(得壽)요 자(字)는 덕수(德叟)이다. 병진년(1616, 광해군 8) 모월 모일에 모지(某地)에서 세상을 떠나, 그해 모월 모일에 양주(楊州) 금정리(金正里) 유좌묘향(酉坐卯向)의 언덕에 묻히니 향년 72세였다.

고(考) 휘 언청(彦淸)은 봉사(奉事)이고, 조부 휘 호문(浩文)은 모관(某官)이고, 증조 휘 지성(智成)은 현감이다. 그 선조는 전주(全州) 사람이다. 5세조 덕지(德之)는 세조(世祖) 때에 예문관 직제학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영암으로 돌아와서 생을 마쳤다. 조비(祖妣)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고 우의정에 추증된 일두(一蠹) 선생 여창(汝昌)의 딸이다. 그러고 보면 처사의 선행도 실로 그 근본이 있다고 하겠다.

부인은 청송 심씨(靑松沈氏)이다. 장남은 응성(應聖)이고, 다음 응선(應善)은 웅천 현감(熊川縣監)이고, 다음 응형(應亨)은 현재 소촌 찰방(召村察訪)이다.


 

나의 기억에 의하면, 임진년 당시에 두 집안이 동시에 도성을 빠져나온 뒤에 우리 집안의 동문 밖 저택에서 묵고 나서 그다음 날 통곡하며 이별을 하였다. 그때 내가 동자(童子)의 몸으로 당(堂) 옆에 서서 울고 있자 처사가 나를 붙잡고서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였다. 그 뒤 다행히 각자 죽지 않고 살아서 기유년(1609, 광해군 1)에 처사를 용산에서 뵐 수 있었는데, 이때 응형이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다.

처사는 평생토록 성신(誠信)으로 일관하였고 거짓이 없었는데, 그의 모습만 보아도 그가 순선(純善)의 소유자로서 털끝만큼도 사념(邪念)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처사가 작고한 지 지금 20여 년이 되는 때에 응성(應聖) 장(丈)이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기에 내가 삼가 응낙하고 글을 짓게 되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예로부터 지극한 행실의 소유자는 / 自古至行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법 / 於世絶儔

참으로 그만둘 수 없기 때문이니 / 誠所不已

어찌 대가를 구하는 것이 있어서랴 / 豈有所求

이것이 자기네와 무슨 상관이 있으랴만 / 是何與己

사람들이 자연히 공경하고 흠모하나니 / 人自敬慕

이 역시 어찌 밖에서 빌려 온 것이리오 / 亦豈外假

천성적으로 똑같이 품부받았기 때문이라 / 性惟同賦

그런데 어찌하여 오늘날 사람들은 / 何今之人

유독 이와 반대로 행동한단 말인가 / 而獨反此

임금님이 정표(旌表)하라 명하셨건만 / 王命旌異

예조가 그만 소홀히 취급한 나머지 / 忽焉而已

우리 처사처럼 선한 분으로 하여금 / 乃使善人

끝내 초야에서 생을 마치게 하였도다 / 終死草野

공에게야 무슨 한스러움이 있으랴만 / 於公何恨

세상일이 참으로 개탄할 만하도다 / 可嗟世也

오직 하늘의 도는 이와 같지 않아서 / 唯天不然

보답을 결코 허투루 하지 않으리니 / 施報無虛

어디에서 그 증거를 볼 수 있을까 / 其所可期

바로 공의 후손들에게 있으리로다 / 其在後歟


 전주최씨 문성공파 10세손 휘 득수 (효자  정려)
                                     휘 희수  (안동판관)
                                     휘 미수
                                     휘 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