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휘 덕지 등/연촌공 휘 덕지 존영

전주최문 문성공파 5세손 휘 덕지 (연촌선생) 존영 (자랑스런 선조님)

아베베1 2009. 11. 8. 09:18

최덕지 (전주최씨 문성공 휘 아 고려문화시중 5세손

           전주최씨 연촌공파 파조 諱  德之

 

본문내용

연촌 최덕지 영정 및 유지 초본
 
 
최덕지 선생은 고려 우왕 10년(1384)에 출생하여 조선조 원년(1456)에 서거한이로 호는 연촌(烟村) 또는 존양당(存養堂)이다. 태종 5년(1405)에 무년 문과에 급제한 후 사관이 되었다.

1409년 교서관 정자에 이어 뒤에 삼사(三司)의 벼슬을 지냈다. 또한 남원부사(南原府使)에 올랐다가 사퇴하고 영암 영보촌에 내려와 학문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존양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문종 원년(1451)에 문종 대왕(文宗大王)의 소명(召命)으로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 춘추관 기주관(春秋館 記注官)을 역임하는 등 그의 학문이 높이 평가받았다. 또한 고려사(태조 이성계의 지시로 편찬 작업을 시작, 문종 1년, 1451년 완료) 편찬 작업에 참여한 33인 중 한 분으로 공헌한 분이다.

선생께서는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후학 양성에 힘쓰다 72세에 서거하였다. 그 후 영암주민들이 높은 뜻을 기리고자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존양사라 칭하였다.

현재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전주의 서산사(西山祠), 남원의 주암서원(舟岩書院) 등에서 제향되고 있다.

최덕지 영정 및 유지초본은 보물 제594호(1975.5.16)로 지정, 보존관리 되고 있으며,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에는 영보정(도지정 기념물 제104호), 존양사 등 많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1384(우왕 10)∼1455(세조 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가구(可久), 호는 연촌(烟村)·존양(存養). 참의(參議) 담(담)의 아들이다.
1405년(태종 5)
[식년문과] 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원구단(#환02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제문(五帝祭文)을 준비 못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뒤에 감찰 등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외관으로 김제군수·남원부사 등 여러 주·군을 다스렸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존양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예문관
[제학]과 홍문관직제학에 임명,벼슬길로 나가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다음해인 1451년에 그는 아직 사직할 나이가 안되었는데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로운 직책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며, 다투어[詩賦를 지어주고] 노자를 마련하여 주었다.
72세에 죽으니 영암의 유림과 주민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존양사(存養祠)라 이름지었다. 그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들지 않고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쳤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등에
[제향]되고 있다.
 

사직 후 왕실를 걱정하며 지은 칠언율시

  紅白群芳滿院香 (붉고 흰꽃 뜰 가득 향기로운데,) 
  禾麻菽麥亦登場 (벼 삼 콩 보리도 거기 있구나,) 
  誰知遯世狂癡客 (누가알리 세상을 등진 늙은이,) 
  寢食隨緣覺日長 (되는 대로 먹고자니 참 해도길다,)

  雨暘時若稻花香 (비가 개면 벼꽃 더욱 향기롭고,) 
  擊壤歌聲處處場 (격양가소리 여기저기에 드높아라,)
  斗米三錢開壽域 (한되 쌀 돈 삼전으로 끼니이으며,)
  端知聖業與千長 (왕업이 하늘같이 이어지길 빌뿐!)

 

崔 德 之 

청산이 적요(寂寥)한데 미록(麋鹿)이 벗이로다.
약초에 맛들이니 세미(世味)를 잊을로다.
벽파(碧波)로 낚싯대 둘러메고 어흥(漁興)겨워 하노라.

이 시는 아마 남원부사를 그만두고 영암으로 물러가 존양(存養)이라 당호를 짓고 전원에서 생활하던 때에 지었을 것이다. 자연 속에서 본성을 보존하고 기른다는 당호를 내걸고 학문과 전원생활에서 즐거움을 찾았을 때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에는 현실을 잊고 자연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초장에는 청산에서 사슴과 벗하는 자연 속의 생활을 말했고, 중장에는 자연에 묻혀서 사는 생활이 생명에 이로운 약초의 맛과 같아서 세속적 현실의 즐거움은 끊어버렸다고 했다. 종장에는 전원에서 고기잡이하는 흥취가 자신의 삶의 의미라고 결론을 지었다. 그는 이렇게 전원에 사는 즐거움을 알았기에 문종이 불러 다시 벼슬길에 나갔으나 왕은 병약하고 세자는 어렸으며, 여러 대군은 강건하여 정국이 소용돌이칠 것을 예견하고 68살의 나이를 핑계삼아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수양대군의 피비린내나는 왕위찬탈에 연루되지 않고 몸과 이름을 보전했던 것이다. 이 작품은 강호(江湖)의 생활이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지혜와 관련됨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여러 선비들의 송별시

여기의 송별시는 연촌(최덕지)께서 관직을 사직한후 동료들의 송별시임


1.유성원의 송별시문

有美人兮慾何之歲將속兮霜雪飛山重水複兮路遲遲百駒翩翩兮不可維我思古人兮爵祿誰辭我觀今人兮爭利與名偃일今古兮惟有先生蒼眉脩嚬兮氷玉其情一朝葉官兮麝脫雲經王日爾賢兮士惜其去湖之南兮足逸豫泉之甘兮土又肥超逍遙兮樂無期欲往從之兮紅塵深愛寞留兮矢以音

 

                                                                                柳誠源(文化人)

 

 

미인이 있는데 어찌 하오리까 해는 저물어 가고 서리와 눈이 내리네 산과 물이 중복되어 길은멀고 흰망아지는 가자고 하는데 맬수없구나

내 고인을 생각할때 작고 오직 선생만이 있을뿐 푸른 눈섭이 희어지도록 빙옥같은 그뜻이 든이 하루아침에 벼슬을 버리니 구름같이 가벼워라 왕은 그대의 어짐을 보고 가는것을 아낄때 호남으로 가시면 넉넉히 편안 하시리 단 샘물에 땅도 비옥한데 소요하시면 그 즐거움 끝이 없으리 같이 가고자하나 홍진이 깊구나 더 만류하지 않으리 소식이나 전하소.

 

                                                                               유성원(문화인)


2.성삼문의 송별시

歸田非隱計, 出處政如斯, 漢主思疏廣, 唐朝重孔撥,

江山應有喜, 魚鳥亦相知, 終始能全義, 如公我所師,

                                                                               成三問(昌寧人)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은퇴가아니라, 물러갈때는 이와같이 함이다,

옛날 한나라 임금은 소광을생각하였고, 당나라에서는 공규를 소중이 여겼네,

강산에 응당 기쁨이 있어, 고기나 새도 서로 알고 있으리, 끝까지 의를 지켜왔으니,

그대 같은분 나의 스승이 되리라,

 

                                                                               성삼문(창녕인)


3.하위지의 송별시

丈夫出處古來難, 喜覩先生早掛冠, 疏傳乞骸知止足, 樂天知命愛淸閑,

十年魚鳥親如舊, 三經兒童候己歡, 終此不懺林下見, 況今淸擧滿朝端,

 

                                                                               河緯地(晉州人)

 

 

장부의 향방은 옛적부터 어려운데, 선생의 괘관을 기꺼이 볼뿐일세,

옛날 소광은 물러갈줄을 알았고, 그대는 낙천하고 천명을 알아,

청한을 사랑하시었고, 십년의 어조도 옛날같이 친한데.

길거리의 아이들도 즐거운 그모습 기다리네, 이제부터 시골에서 만나도 부끄럽지 않는데,

하물며 그명예 만조에 가득할것을,

 

                                                                              하위지(진주인)


4.이개의 송별시

進退從容只適情, 肯微榮利肯微名, 蒼諺百髮閑身世, 繞屋山靑水更淸,

去意翩然不可禁, 先生高義起人欽, 百壺江上如維酒, 盡是斯文惜別心,

 

                                                                              李塏(官 : 應敎 韓山人)

 

 

진퇴는 종용하여 사정에 맞고, 영리와 명예에 따름을 싫어하셨도다,

창안이 백발되어 한가로운 신세되니, 집주위에 산이 푸르고 물도 푸르구려,

돌아가실 그 뜻 번의치 못하는, 선생의 높은 뜻 사람에게 흠모케 하네,

한강위에 즐비한 백잔의 술은, 모두 선비들의 석별을 아끼는 마음일세,

                                                                             이개(관 : 응교 한산인)


5.정인지의 송별시

濁世休官未足奇, 淸時投絨有誰知, 靑山綠水如欺我, 今日懺題送子詩,

湖南正是小江南, 千里鶯化間翠嵐, 何幸我鄕知不遠, 方期異日共淸酣,

 

                                                                             鄭麟趾(官 : 領相 河東人)

 

 

혼탁한 세상에 퇴관함은 기이하지 않건만, 맑은이때 물러감을 뉘가알리,

푸른산 푸른물도 나를 속이는듯 한데, 오늘날 그데를 보내는 시쓰기 부끄러워라,

호남은 바로 적은 강남같은데, 천리의 꾀꼬리와 꽃은 푸른 기운 속에있네,

다행이 내 고향과 멀지않은 곳에 있으니, 기필코 다른날 만나 술마시며 같이 맑게 지내리,

 

                                                                             정인지(관 : 영상 하동인)


6.신숙주의 송별시

遯世兩情挽不回, 一朝投綏賦歸來, 士林噴噴稱高義, 始信勇兒有壯懷,

宿德高風表簪据, 淸規又復範州閭, 古今人物歸公議, 祖送都門幾兩車,

歸臥湖南寂寞濱, 환蘭佩芷作閑身, 急流勇退知多少, 差殺紅塵汨沒人,

早與先人結髮遊, 如今存沒兩悠悠, 日陪杖屦方爲幸, 柰此愁雲隔海諏,

相送離亭日欲頹, 故山迢適海雲開, 征途雪滿西風急, 且進江頭酒一盃

 

                                                                            申叔舟(高靈人)

 

 

세상에서 숨은 그윽한정 만류하기 어려워, 하루 아침에 벼슬 버리고 귀거래를 부르셨네,

사람들이 그높은뜻 작작한데, 처음으로 남아의 장한 회포로 알리로다,

숙덕과 높은풍도 잠과거거로 표시하고 맑은규률은 다시금 고을의 모범이 되셨네,

고금의 인물이 공의를 따를때, 도문밖에서 전송하는 수레많구나,

호남으로 돌아가 적막한 곳에 게시면, 난초속에 싸이시어 한가로우리,

급류와같이 용퇴하는 사람이 몇이나되나, 홍진속에 쌓여 골몰하는 사람이 부끄럽구려,

일찍이 선인과 결별하며 놀았건만, 지금은 졸몰할지 유유한생각뿐일세,

날마다 같이 있었던것을 다행으로 여겼는데, 이제부터는 근심이 바다끝까지 격했구나,

서로 보내는 정자에 해가 기우는데, 고향길은 멀어 구름속에 있구나,

가실길에 눈이 쌓여 서풍이 급한데, 강가에서 또한잔 다시 올리네,

 

                                                                            신숙주(고령인)


7.김종서의 송별시

歸臥竹林希七賢, 更將尊酒得天全, 行吟秋水月長照, 遊賞春山花欲然,

一兩朱輪光未絶, 數枝丹桂影相連, 효然不喜三刀蒙, 笑殺南柯綠二千,

 

                                                                            金宗瑞(官: 左議政 號: 節齊)

돌아와 죽림에 누어 옛칠현을바라다가, 다시 장차 술과함께 온전한 천복을 얻으셨네,

가을 물가에서 읍조리면 달은 길게 비치는데, 봄동산에 놀때 꽃은 타오를듯이 붉구나,

한쌍의 붉은 수래빛이 끊치지 않고. 몇가지 단계의 그림자가 연했구나,

어리석게 삼도몽을 좋아 아니하므로, 남가일몽 그녹이 이천임을 웃으리,

 

                                                                            김종서(관: 좌의정 호: 절제)


8.안평대군의 송별시

四子承承易色賢, 老年三樂正雙全, 掛冠不下胸弘景, 得句還如孟浩然,

虛白堂中常宴息, 軟紅塵裏肯留連, 先生早世賦歸去, 不見潮州路八千,

 

                                                                            安平大君(號: 梅竹軒 字: 淸之)

 

네아들이 집을 이어 높은 빛으로 바뀌니, 노년에 삼락이 쌍전하구나,

관에서 물러나와 도흥경에 내리지 않으시고, 시를 질때는 도리어 맹호연 같도다,

허백당중의 잔치에 항상 편안하게 쉬고, 연분홍 티글속에 오래도록 머므르리,

선생이 일즉 귀거래를 부르시니, 보이지 않은 조주길이 팔천리나 되구나,

 

                                                                            안평대군(호: 매죽헌 자: 청지)


9.김 담의 송별시

聖君恩重許歸田, 僚友情深惜別筵, 微起正當初服日, 辭還未及退休年,

出處己曾關世敎, 湖山令復作詩仙, 一盃江上休嫌醉, 明日相思各脹然,

 

                                                                            金 淡(官: 吏判 號: 文節)

 

 

성군의 은혜 깊어 은퇴를 허락하는날, 친구들은 깊은 정으로 송별연을 열었도다,

부름받고 처음으로 오던날, 사퇴할날 그때는 몰랐스리,

은퇴해 나가는일 이것이 세교가되니, 호남에서 다시금 신선이 되오리라,

강머리에서 한잔 올리니 사양마시오, 내일이면 서로 생각에 잠겨 슬프리로다,

 

                                                                            김 담(관: 이판 호: 문절)


10.윤자운의 송별시

飜然就召謁新君, 却憶山中有白雲, 出處如公古亦少, 幾人乾沒只云云,

先祖於公利斷金, 事公如祖慰孤心, 令朝又爾休官去, 臨別悠悠意轉深,

 

                                                                            尹子雲(官: 領相 號:文憲)

 

 

부름받고 새임금 보일때, 지금도 생각하니 산속에 흰구름같도다,

출처 하는것이 그때와 같은사람 옛적부터 적으니, 몇사람이나 그대의 다못 안다고하랴,

그대에게 먼저 조전보내 송별을 고하니, 그 전별과 같이 외로운마음 위로하소서,

오늘 아침에 또 퇴관하고 가시니, 이별하는 마음 유유하여 더욱 깊어 가노라,

 

                                                                            윤자운(관: 영상 호: 문헌)

 

◎ 선사주거지 영보정
종 목: 시도기념물 104호
명 칭: 영보정 (永保亭)
분 류: 누(정).각
수 량: 일원
지정일: 1987.01.15
소유자: 사유
관리자: 전주최씨,거창신씨종중
영보정은 연촌 최덕지(1384∼1455) 선생이 관직을 떠난 후 영암의 영보촌에 내려가 학문 연구에 몰두하면서 사위 신후경과 함께 지은 정자이다.
최덕지 선생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학식이 높고 행동이 단정하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으나 불타버려서 한 권만 남아 있고 여러 현인들의 논설만 전하고 있다.
처음 있던 정자는 황폐화 되어서 최정과 신천익(1592∼1661)이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지었다.
정자는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현판은 한석봉이 쓴 것이라고 전한다.
영보정은 일제시대 때 청소년들에게 항일구국정신을 교육한 장소로 역사적 의미가 크며, 해마다 5월 5일에 풍향찰(豊鄕察)이라는 마을 축제가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 녹동서원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183호
명 칭: 영암녹동서원소장목판및고문서류(靈巖鹿洞書院所藏木版및古文書類)
분 류: 전적류
수 량: 2종665점
지정일: 1992.11.30
소재지: 전남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356
소유자: 녹동서원
관리자: 녹동서원

녹동서원은 인조 8년(1630)년에 ‘존양사(存養祠)’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어, 숙종 39년(1713)에 ‘녹동’이란 사액을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서원에는 창건당시 연촌 최덕지(1384∼1455)만을 모시고 있었으나, 그 뒤 최덕지의 손자인 산당 최충성(1458∼1491), 문곡 김수항(1629∼1689), 농암 김창협(1651∼1708) 등을 차례로 모셨다.
현재 많은 고문서류와 목판 등이 보관되어 있다.
대표적인 고문서로는 원생들의 명단을 적은『서원청금안』25책, 『서원서재유안』2책, 『심원록』5책, 『합경재보노안』3책 등을 비롯하여 통문, 완의, 노비기증문서 등의 낱장 문서가 있다.
또한 목판으로는 『연촌유사』, 『문곡집』, 『산당집』등 모셔진 인물들의 문집 목판과 인근지역의 인물의 『석천집』 등이 있다.
이 유물들은 녹동서원의 연혁, 조직과 운영, 경제기반, 유생들의 명단 등 종합적이고 다각적인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崔德之


崔德之全州人文戶議霮子辛禑癸亥生字
迃叟烟村存養堂權近門人(。太宗乙酉文科歴翰林三司)文宗
即位召拜藝文直提學以南原府使知有
權擥韓明澮之事退老于靈巖永保村築
書楼扁以存養時以元昊同称始退也成三問諸人以(。詩)餞之以高其志者甚衆癸酉
間國家多故炳幾保身世称明智亦有正
世祖甲戌卒年七十二靈巖有院[주:三]


(文宗朝)崔德之


全州人其先自唐淸河浮海而來居完山今俗號客山者以此也父霮文科參議生四
子匡之直之得之德之德之煙村迂叟早從陽村權近太宗乙酉生員文科直提學累
典州郡皆有聲績以南原府使退居靈巖永保村扁其樓曰存養文宗元年召拜集賢殿學
士明年冬告老而歸上謂近臣曰曩於召對見其爲人純實年未甚老予欲留之諸臣皆曰
歸志已定不如從之以遂其志[주:人物考]德之子凋凋子岱岱子連孫字子胤成宗庚子生員
壯元己酉文科檢閱僉知[주:國朝榜目]兄直之文科知郡事得之以經明行修登薦官至典農少
尹兄弟三人皆受業于陽村[주:東儒師友錄]以上文宗

 

송자대전(宋子大全) 제148권
 발(跋)
연촌(煙村) 최 선생(崔先生)의 유사 발(遺事跋)


한 문공(韓文公 문은 한유(韓愈)의 시호)의 송양소윤서(送楊少尹序)에 ‘승상(丞相)이 시(詩)를 노래하니, 서울의 시를 잘하는 자가 이에 화답한다.’ 하였으니, 그때에 시가 매우 성행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나, 장문창(張文昌 장적(張籍))과 배 사공(裴司空 배도(裴度))의 글만이 후세에 칭도(稱道)될 뿐, 그 나머지는 모두 적료(寂寥)하다.
이제 연촌 최 선생의 유적을 본다면, 그 모든 시문(詩文)이 하나도 빠짐없이 수록되었으니, 이는 양 소윤(楊少尹 당 나라 양거원(楊巨源)을 말함)은 덕행은 있어도 어진 자손이 없었고, 선생은 두 가지를 겸한 때문이 아닌지. 이번에 선생의 8세손 세영 몽여(世榮夢與 몽여는 자임)가 그 맏형 방언(邦彦)과 함께 그 구본(舊本)의 그릇된 데를 바로잡아 중간(重刊)하여 널리 세상에 전하려 한다. 나는 선생의 상언(上言 임금께 올리는 글) 중에서 그윽이 느끼는 바가 있다. 즉 이른바 ‘손실답험(損實踏驗)’이라는 말은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자주 보이는데, 이는 실로 주 부자(朱夫子)가 일찍이 마음을 기울이던 바이며, 또 이른바 ‘업거세존(業去稅存)’이라는 네 글자도 주 부자가 당시에 매우 통탄해하면서 기어이 변혁시키려 하다가 마침내 오우규(吳禹圭 장주(漳州)의 진사(進士))의 소(疏)에 의해 저지된 바이다. 그런데 어찌 5백 년 후 선생의 글 속에서 다시 볼 줄 뜻하였으랴. 택당(澤堂) 이 선생(李先生)이 선생을 정학(正學)의 인사(人士)라 칭하였던 까닭도 여기에서 그 일단(一端)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이 말한 ‘업거세존’은 사실 주 부자가 말한 것과 조금 다름이 있으니, 후인(後人)이 마땅히 알아야 할 점이다.
모든 서문과 발문 중에서 택로(澤老)의 것이 가장 상세하고 또 그 칭도(稱道)도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다만 그중에 ‘기미(機微)를 알았다.’는 택로의 말을 후인들이 잘못 이해하여 선생을 일컫기에 부족한 것처럼 여겼는데, 그렇다면 《주역》에서 어찌 ‘기미를 아는 것이 신(神)이다.’ 하였겠는가. 이는 택로에게 반드시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니, 몽여(夢與)는 택로의 아들 계주(季周 이단하(李端夏))에게 물어보기 바란다.
숭정 기원 후 무오년(1678, 숙종4) 3월 일에 은진 송시열은 쓴다.


 

[주D-001]업거세존(業去稅存) : 본시 주희의 말인데, 여기는 가난한 백성이 쪼들리다 못해 자기의 전토(田土)를 부호(富豪)에게 매각하고 나서 도리어 부호의 소작인(小作人)이 되어 그 세(稅)를 물어야 하므로, 결국 전토는 없어지고 세만 부담하게 된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