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휘 덕지 등/연촌공 휘 덕지 존영

휘 연촌공 영정 ( 최덕지의 생존시에 그린 초상화인 영정(影幀)

아베베1 2011. 2. 6. 18:39

 

 

 

                              저의 19대조고 영정  영암 녹동서원 보존

                               휘 덕지 연촌공   보물 제594호

 

 

素隱先生遺稿一
 [文]
烟村畫像贊 崔德之。文宗朝以直提學。退老靈巖永保 b_025_202a


有皎必汚。旣盈則昃。濟剛以柔。在巽而决。煕煕遺像。

 

肅然可慄。燭照於微。履危猶安。進退能全。從古所難。

 

卓乎高躅。孰匹其美。如吾不信。考之國史


 

 

 

 

농암집 별집 제2권 

 부록(附錄) 1
녹동서원(鹿洞書院) 사제문(賜祭文) 숙종 계사년(1713, 숙종39) [어유귀(魚有龜)]

 


지제교 어유귀(魚有龜) 지음

계사년 6월 병자삭 12일 정해에 국왕은 신 예조 정랑 길경조(吉景祖)를 보내어 고 직제학(直提學) 최덕지(崔德之), 고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고 사인(士人) 최충성(崔忠成), 고 판서 김창협(金昌協) 네 신하의 영전에 하유하고 제사를 지낸다. 국왕은 다음과 같이 이르노라.

도학이며 절행은 / 道學節行
세상이 존경하고 따라야 할 일 / 世所矜式
어질고 덕 있는 자 향사하라는 / 祀賢饗德
이 나라에 정해진 법이 있다네 / 邦有典則

강직하고 올곧은 학문을 지녀 / 侃侃直學
명망과 내실 모두 성대했는데 / 望實俱赫
영릉이라 세종 때 마침 만나서 / 遭際英陵
만리 전도 앞길이 창창하다가 / 進途方闢
고을 수령 인끈을 던져 버리고 / 一投州紱
월출산 산기슭에 편히 누워서 / 高臥月出
문 닫고 성현 글을 익혔었는데 / 杜門講學
무엇보다 맹자의 말씀 궁리해 / 玩賾鄒說
존양이란 편액을 걸어 붙이고 / 堂扁存養
힘쓰기를 깊고도 정밀히 하자 / 用功微密
문종께서 마침내 가상히 여겨 / 文廟乃嘉
조정이라 대궐로 불러와서는 / 召致內閣
순결하고 진실함 치하하시어 / 賞其純實
은총이며 예우가 두터웠건만 / 恩顧優渥
상소로 물러감을 자청하고서 / 尺疏乞骸
처음의 신분으로 다시 돌아와 / 復遂初服
심산계곡 속에서 생을 마치니 / 終身邱壑
무너진 세상 풍속 감화되었네 / 風勵頹俗

그 뒤에 가정교훈 영향을 받아 / 庭訓所漸
태어난 손자 또한 어질었나니 / 有孫亦賢
스승의 문하에서 덕성 기르고 / 薰德師門
어린 나이 묘령에 도에 뜻 두어 / 志道妙年
식견이 고매하고 행실 독실해 / 識高行篤
마침내 가문 전통 계승하였네 / 遹紹家傳

어허, 나의 어질고 유능한 보좌 / 繄我良佐
이 나라의 귀감이 분명했거니 / 邦國蓍龜
충직하고 순수한 절조에다가 / 忠純其操
씩씩하고 공손한 자질을 지녀 / 莊穆其資
이름난 조부에게 직접 배우고 / 親炙名祖
큰 스승 문하에서 갈고닦은 뒤 / 切磋大老
들은 바를 높이고 아는 걸 행해 / 尊聞行知
평소에 지닌 포부 크게 펼쳤네 / 大展抱負
세상의 도덕 풍속 책임지고서 / 身任世道
음기를 억누르고 양기 붙들며 / 抑陰扶陽
한 절개로 세 조정 섬기는 동안 / 一節三朝
도덕 업적 한층 더 빛이 났었네 / 德業彌章
의정부 들어온 게 네 번이었고 / 四入中書
남쪽에 귀양 간 게 두 번이거니 / 再遷南裔
오로지 우리 경의 진퇴에 따라 / 惟卿進退
시운의 길흉 성쇠 점칠 수 있어 / 占時否泰
무진 기사 그 당시 생각노라면 / 永言龍蛇
슬픔이며 후회를 어이 가누랴 / 曷勝悼悔
저기 저 영암 땅을 돌아다보면 / 睠彼朗山
충성스런 경의 넋 서린 곳으로 / 是卿湘沅
내 남쪽 선비들을 계도했는데 / 迪我南士
남긴 교훈 아직도 그대로 있어 / 餘敎斯存
학문을 강습하던 생각 일어나 / 淇竹興思
세상 떠날 때까지 잊지 못하네 / 沒世不諼

그리고 또 상서는 지혜 출중해 / 嶷嶷尙書
선대의 아름다운 자취를 밟아 / 趾美先躅
시례의 가업 전통 계승하였고 / 業承詩禮
재덕의 도량 인품 가슴에 품어 / 器鞰珪璧
경연에서 왕도정치 토론을 하고 / 經幄討論
바른말로 임금을 인도하다가 / 昌言啓沃
불행히도 중도에 변고를 만나 / 中罹變故
황량한 골짝으로 은둔하였네 / 遯于荒谷
성현 학문 부단히 스스로 닦아 / 俛焉自修
일심으로 도리를 탐구하였고 / 一心求道
주자 연원 거슬러 올라가서는 / 探溯紫陽
빗장 열고 심오한 이치 더듬어 / 叩抽鍵奧
진정으로 알았고 실천했기에 / 眞知實踐
조예가 날로 더욱 정밀해지자 / 造詣益精
유학을 붙들어서 보호하였고 / 扶植世敎
후생이 따라 배울 모범이 되니 / 模範後生
기풍이며 영향이 두루 미치어 / 光塵所曁
선비들 너나없이 흠모하였네 / 衿紳均慕

앞 시대와 뒤 시대 현인 네 사람 / 前後四賢
이 고장에 자취를 남기었는데 / 跡留斯土
조부와 손자 서로 대를 이었고 / 祖孫相望
부자가 아름다움 함께 하였네 / 父子並美
선비들이 다 함께 상의한 끝에 / 多士協謀
사당 세워 제사를 지내 주면서 / 立廟以祀
오른쪽 위치에다 배향을 하되 / 齊享于右
차례대로 줄지어 봉안하였네 / 列配其次
아름다운 편액을 이에 내리어 / 玆宣華額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했는데 / 俾聳瞻聆
백록동 서원 이름 서로 같아서 / 名叶鹿洞
천년을 사이 두고 함께 빛나네 / 輝映千齡
제관 보내 제물을 올리게 하니 / 遣官致酹
희생도 살 오르고 술맛도 좋다 / 牲酒肥香
영령들이여 부디 강림을 하여 / 靈其來格
아무쪼록 이 술잔 받아 들게나 / 庶歆此觴

 

[주C-001]녹동서원(鹿洞書院) 사제문(賜祭文) : 녹동서원은 1630년(인조8)에 전라도 영암(靈巖)에 세웠는데, 1713년(숙종39)에 사액하면서 고유한 글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최덕지와 함께 배향된 성종 때의 학자 최충성 및 농암의 부친 김수항, 농암 등의 순으로 열거하며 공덕을 기렸다.

 

농암집 제7권
 소차(疏箚)
영암(靈巖) 유생을 대신하여 지은 연촌서원(煙村書院)의 사액(賜額)을 청하는 소 경신년(1680)


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예로부터 조정에서 벼슬했던 인물들 중에 일단 들어가면 물러나지 않고 녹을 끌어안고 총애를 탐하다가 신세를 망친 사람은 많고, 결연히 물러나 부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겨우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 상황을 고찰하여 논하자면, 이들은 또 모두 쇠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화를 당하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자신을 온전히 할 방도를 궁리한 끝에 벼슬하지 않은 경우이거나, 이미 최고의 명성과 지위를 누렸기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 그리한 것일 뿐입니다. 성군(聖君)의 시대를 만나 임금이 크게 등용할 의향이 여전한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떠난 경우는 수백 수천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더구나 절조(節操) 하나만으로 자족하지 않고 대도(大道)에 뜻을 두며, 유유자적 한가로이 지내지 않고 실천에 힘쓰는 경우로 말하자면 어찌 더욱 뛰어나 그와 같은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신들은 먼 고을의 어리석은 선비로서 견문이 넓지 못하지만 한 가지 들은 것이 있습니다. 세종(世宗), 문종(文宗) 때에 신(臣)
최덕지(崔德之)가 있었으니, 그는 한림원(翰林院)에서 출발하여 옥당(玉堂)과 대각(臺閣)을 거치고,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있다가 물러나 영암에서 지내면서 서재를 지어 존양(存養)이라고 편액을 달고 두문불출하였는데, 당시는 세종의 만년이었습니다. 문종이 즉위했을 때 불러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제수하고 순수하고 진실하다고 칭찬하며 계속 등용하려 하였는데, 조정에 있은 지 2년도 못 되어 사직소를 올리고 돌아와서 끝내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의 정치와 교화는 세종, 문종 때보다 더 융성한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뛰어난 인재들이 시운(時運)을 타 구름같이 모여들고 경학과 문장에 밝은 선비들이 진기하고 뛰어난 식견으로 줄지어 조정에 서서 모두 공명(功名)을 떨쳤으니, 이는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시절이었습니다. 최덕지의 그 훌륭한 재주로 그들과 어울릴 때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으니 만일 느긋하게 따라가며 시운에 편승하였더라면 경상(卿相)의 자리에 올라 공명이 찬란했을 터인데, 벼슬을 버리고 멀리 떠나서 변방 산천에 은둔한 채 일생을 마쳤습니다. 이는 경중의 구분에 밝고 영욕(榮辱)의 경계를 초월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니, 저들 기미를 살펴 화를 피하는 자들과 지위가 극도에 이른 뒤에야 그만두는 자들의 경우는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리고 예로부터 은둔한 선비는 대부분 스스로 고상함을 표방하여 가장 훌륭하다고 여기고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면서 마음 쓰는 것이 없었으니, 이들이 비록 부귀의 유혹에 빠져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는 자들보다는 낫다 하나, 그 역시 도(道)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 지금
최덕지는 귀향하여 마침내 맹자(孟子)가 말한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한다.[存心養性]’는 말을 택하여 거처하는 집의 이름을 지었으니, 그가 바른 학문에 마음을 두고서 덕을 향상시키고 학업을 닦는 일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부귀와 빈천을 취하고 버리는 기준이 분명해진 뒤에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는 공부가 치밀해지고,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는 공부가 치밀해지면 부귀와 빈천을 취하고 버리는 기준이 더욱 명백해진다.” 하였는데, 최덕지로 말하면 이에 가깝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에 기록된 것이 소략하여 그의 말과 풍격을 상세히 상고해 볼 수 없으니 애석합니다.

 

그러나 그 높은 지조와 바른 마음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 후세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손자 대에 이르러 최충성(崔忠成)이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특출한 재주와 독실한 학문으로 수제자라 일컬어졌으니, 이는 그 사우(師友)의 연원이 본디 그럴 만했을 뿐만 아니라 선조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최덕지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이미 200여 년이 흘렀는데도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도 변치 않아서 남쪽 고장을 찾아오는 사대부는 반드시 이른바 존양루(存養樓)라는 곳을 방문하여 그의 초상 앞에 예모를 갖추고 탄식하며 발걸음을 떼지 못하곤 하니, 그가 남기고 간 영향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 또한 깊다 하겠습니다.

 

지난 경오년(1630, 인조8)에 온 읍의 선비들이 힘을 모아 사당(祠堂)을 세워
최덕지를 향사하고 최충성을 배향하였는데, 향사하는 일이 세월이 아무리 오래 지나도 여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먼 지방의 고루한 곳인 관계로 아직까지 조정에 사액(賜額)을 요청하지 못하여 사류(士類)의 수치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삼가 보건대 성상께서는 현인을 높이고 도를 중시하여 선비들이 행하고 싶어하는, 사문(斯文)의 누락된 전례(典禮)를 모두 흔쾌히 행하고 계시니, 신들은 지금 이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감히 여럿이 함께 와서 대궐문 아래에서 명을 청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최덕지의 출처의 전말과 학문의 대체가 사류의 존경을 받을 만함을 살피시고 특별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시어 편액을 하사함으로써 그를 표창하시어 먼 지방의 선비들이 현인을 존경하는 성심을 이룰 수 있도록 하시고, 후세에도 보고 느끼는 점이 있어 분발하게 하시기를 바라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신들은 우러러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주C-001]영암(靈巖) …… 소 : 작자의 나이 30세 때인 1680년(숙종6)에 지은 소로서, 작자의 부친인 김수항(金壽恒)이 전라도 영암에서 귀양살이할 당시에 작자가 부친을 만나기 위해 그곳에 여러 번 왕래한 적이 있었던 인연으로 대작한 듯하다. 연촌서원은 세종과 문종 때의 문신인 최덕지(崔德之)와 그의 손자 최충성(崔忠成)을 향사(享祀)하는 서원으로, 전라남도 영암의 사류들이 1630년(인조8)에 세운 것이다. 당시에 최덕지의 생존시에 그린 초상화인 영정(影幀)이 그가 거처하던 존양루(存養樓)에 봉안되어 있었다. 《煙村遺事》
[주D-001]존양루(存養樓) : 최덕지가 남원 부사를 그만두고 내려와서 건립하여 거처하던 곳으로 영암 덕진면(德津面) 영보리(永保里)에 있는데, 존양당(存養堂)이라고도 한다.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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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可久)         
연촌(烟村)/존양(存養)
생졸년 1384 (우왕 10) - 1455 (세조 1)
시대 조선 전기
본관 전주(全州)
활동분야 문신 > 문신

 

[상세내용]

최덕지(崔德之)에 대하여
1384년(우왕 10)∼1455년(세조 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가구(可久), 호는 연촌(烟村)·존양(存養). 참의 담(霮)의 아들이다.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원구단(圜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제문(五帝祭文)을 준비 못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뒤에
감찰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외관으로 김제군수·남원부사 등 여러 주·군을 다스렸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존양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문종
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예문관직제학에 임명,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그는 아직 치사할 나이가 안되었는데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로운 직책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며, 다투어 시부를 지어주고 노자를 마련하여 주었다.


72세에 죽으니 영암의 주민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존양사(存養祠)라 이름지었다. 그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들지 않고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쳤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文宗實錄   國朝榜目   山堂集   東儒師友錄   國朝人物考

 

[가족사항] 

  [부]    성명 : 최담(崔霮)    [조부]  성명 : 최을인(崔乙仁)   [증조부]  성명 : 최용봉(崔龍鳳)
 [외조부]  성명 : 박인부(朴仁夫)    [처부]  성명 : 조안정(趙安鼎)

 

해동잡록 1 본조(本朝)
최덕지(崔德之)


○ 본관은 전주(全州)로서 스스로 존양당(存養堂)이라고 호했다. 우리 태종(太宗) 때 급제하고, 여러 차례 주(州)ㆍ군(郡)의 수령을 맡아 왔는데, 모두 치적을 남겼다. 세종조(世宗朝)에 벼슬이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이르렀고, 시에 이름이 높았다. 문종(文宗) 말년에 관직을 버리고 영암(靈岩)으로 물러가 살았는데, 그때의 명사들이 모두 전송하였다. 성삼문(成三問)은 시를 지어 주기를

 

고향으로 돌아감은 은둔한 계책이 아닐 것이니 / 歸田非隱計
출처는 정히 이같이 하느니 / 出處正如斯
한주는 소광을 생각하고 / 漢主思疏廣
당종은 규공을 중히 여겼다오 / 唐宗重戣孔
강산은 공을 기다리고 있는 듯 / 江山如有待
원숭이와 새들과도 서로 아는 사이 / 猿鳥亦相知
종히 의리를 온전히 할 수 있으니 / 終始能全義
공 같은 이는 나의 스승인 것을 / 如公我所師
  하였다. 〈본록(本錄)〉

 

○ 익산(益山) 수령이 되어 몸을 처신함이 검약(儉約)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는 상세하고 밝게 하였다. 《명환록(名宦錄)》


 

海東雜錄[一]○權鼈
 本朝[一]
崔德之

全州人。自號存養堂。我太宗朝登第。累典州郡。皆有聲績。世宗朝。官至集賢殿直提學。有詩名。文廟末年。棄官退老靈岩。一時名士皆餞之。成三問以詩贈之曰。歸田非隱計。出處正如斯。漢主思疏廣。唐宗重戣孔。江山如有待。猿鳥亦相知。終始能全義。如公我所師。 本錄 守益山。行己儉約。處事詳明。 名宦錄


 

敬齋先生文集卷之一
 
題崔德之存養堂 a_008_438a


經營制度出心香。存養知行自義方。匪好赤松空却老。還如五柳恥爲郞。龍光遠映三垂豁。

 

鵬翮高登萬里長。鶴詔應飛山水窟。鷗盟豈徙風雲場。
心香。一作尋常。

太虛亭詩集卷之一
 七言律詩
送崔直提學歸田。 三首。 a_009_168d


始終忠直荷恩綸。藉甚名高動縉紳。夬夬危機知足客。紛紛要路折腰人。

 

無何鄕裏忘塵慮。
存養堂난001009_169a中葆性眞。太史明朝應有奏。壽星還與少微隣。

昂昂獨鶴出群鷄。綽綽行藏命與偕。應鵠已能依日月。

 

縶駒終得老山谿。紆靑有客爭彈指。垂白無人解乞骸。自笑悠悠俄十載。五湖風月夢中迷。


每詠何曾欲厚顏。果哉今古似君難。

 

一區泉石誰爭所。四座琴書自適閑。淸夢幾曾尋綺陌。塵蹤那得訪仙關。離觴且擧江之滸。

 

回首湖南思未闌。


[난-001]存養堂 : 存養堂乃完山崔德之

 

山堂集卷之四
 附錄
延額時賜祭文 知製敎魚有龜製進 a_016_624b


維歲次。康煕五十二年癸巳六月丙子朔。十二日丁亥。
國王遣臣禮曹正郞吉景祖。諭祭于故直提學崔德016_624c之。故領議政金壽恒。故士人崔忠成。故判書金昌協四臣之靈。
王若曰。道學節行。世所矜式。祀賢饗德。邦有典則。侃侃直學。望實俱赫。遭際英陵。進途方闢。一投州紱。高臥月出。杜門講學。玩賾鄒說。堂扁存養。用工微密。文廟乃嘉。召致內閣。賞其純實。恩顧優渥。尺疏乞骸。復修初服。終身邱壑。風勵頹俗。庭訓所漸。有孫亦賢。薰德師門。志道妙年。識高行篤。遹紹家傳。繄我良佐。邦國蓍龜。忠純其操。莊穆其資。親炙名祖。切磋大老。尊聞行知。大展抱負。身任世道。抑陰扶陽。一節三朝。德▣016_624d彌章。四入中書。再遷南裔。惟卿進退。占時否泰。永言龍蛇。曷勝悼悔。眷彼朗山。是卿湘沅。迪我南士。餘敎斯存。淇竹興思。沒世不諼。嶷嶷尙書。趾美先躅。業承詩禮。器鞰珪璧。經幄討論。昌言啓沃。中罹變故。遯于空谷。俛焉自修。一心求道。探泝紫陽。叩抽鍵奧。眞知實踐。造詣益精。扶植世敎。模範後生。光塵所曁。衿紳均慕。前後四賢。跡留斯土。祖孫相望。父子幷美。多士協謀。立廟以祀。齊享于右。列配其次。茲宣華額。俾聳瞻聆。名叶鹿洞。輝映千齡。遣官致酹。牲酒肥香。神其來格。庶歆此觴。


農巖別集卷之二
 附錄
鹿洞書院賜祭文 肅宗癸巳○知製敎魚有龜製 a_162_533b


維歲次癸巳六月丙子朔十二日丁亥。國王遣臣禮曹正郞吉景祖。諭祭于故直提學崔德之。故領議政金壽恒。故士人崔忠成。故判書金昌協四臣之靈。王若曰。道學節行。世所矜式。祀賢饗德。邦有典則。侃侃直學。望實俱赫。遭際英陵。進途方闢。一投州紱。高臥月出。杜門講學。玩賾鄒說。堂扁存養。用功微密。文廟乃嘉。召致內閣。賞其純實。恩顧優渥。尺疏乞骸。復遂初服。終身邱壑。風勵頹俗。庭訓所漸。有孫亦賢。薰德師門。志道妙年。識高行篤。遹紹家傳。繄我良佐。邦國蓍龜。忠純其操。莊穆其資。親炙名祖。切磋大老。尊聞行知。大展抱負。身任世道。抑陰扶陽。一節三朝。德業162_533c彌章。四入中書。再遷南裔。惟卿進退。占時否泰。永言龍蛇。曷勝悼悔。睠彼朗山。是卿湘沅。迪我南士。餘敎斯存。淇竹興思。沒世不諼。嶷嶷尙書。趾美先躅。業承詩禮。器鞰珪璧。經幄討論。昌言啓沃。中罹變故。遯于荒谷。俛焉自修。一心求道。探溯紫陽。叩抽鍵奧。眞知實踐。造詣益精。扶植世敎。模範後生。光塵所曁。衿紳均慕。前後四賢。跡留斯土。祖孫相望。父子並美。多士協謀。立廟以祀。齊享于右。列配其次。玆宣華額。俾聳瞻聆。名叶鹿洞。輝映千齡。遣官致酹。牲酒肥香。靈其來格。庶歆此觴。


 

 

 

 

 

 

 

 

 

 

(文宗朝)崔德之


全州人其先自唐淸河浮海而來居完山今俗號客山者以此也父霮文科參議生四

 

子匡之直之得之德之德之煙村迂叟早從陽村權近太宗乙酉生員文科直提學累

典州郡皆有聲績以南原府使退居靈巖永保村扁其樓曰存養文宗元年召拜集賢殿學

 

士明年冬告老而歸上謂近臣曰曩於召對見其爲人純實年未甚老予欲留之諸臣皆曰

歸志已定不如從之以遂其志[주:人物考]德之子凋凋子岱岱子連孫字子胤成宗庚子生員

 

壯元己酉文科檢閱僉知[주:國朝榜目]兄直之文科知郡事得之以經明行修登薦官至典

 

農少尹兄弟三人皆受業于陽村[주:東儒師友錄]以上文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