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율곡 이이 비문 (펌)

율곡 선생(栗谷先生)의 비명(碑銘) (백사집)

아베베1 2009. 11. 11. 09:54

 백사집 제4권
 비명(碑銘)
율곡 선생(栗谷先生)의 비명(碑銘)


옛날에 우리 선종(宣宗)이 글을 숭상하고 학문을 진흥시켜 유신(儒臣)을 높이 등용하기 좋아함으로 인하여 그 조정에 오른 이들이 찬란하게 문학(文學) 하는 선비가 많았었다. 하늘이 인재를 도타이 내리는 것은 반드시 먼저 징조를 보이는 것이기에, 구름은 용(龍)을 따르고 바람은 범[虎]을 따르며, 성왕(聖王)이 일어나면 어진 보좌(輔佐)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때로 말하면, 이이 선생(李珥先生)의 경우는 태평 성대를 만나서 옛 성인(聖人)의 도를 계승하고 후학(後學)을 개도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아서 장차 큰일을 해낼 듯하였다. 그런데 갑신년 정월에 하늘이 선생을 급속히 빼앗아 갔다.
부음이 전해지자, 선종은 소복(素服)을 입고 소식(素食)을 하였다. 그리고 선생이 병들었을 때부터 작고하여 장사지낼 때까지에 걸쳐, 작고하기 전에는 의원의 문안이 길에 연잇고 약과 음식이 자주 내려졌으며, 작고한 뒤에는 근신(近臣)이 치조(致弔)하고 사마(司馬)가 치제(致除)하였으며, 사도(司徒)가 폄기(窆器)를 갖추어 주고 종백(宗伯)이 천례(竁禮)를 인도해 줌으로써 무릇 죽은 이를 높이고 종신(宗臣)을 영화롭게 하는 도리가 다 갖추어졌다.
이때에 태학생(太學生) 및 삼학(三學)의 생도(生徒), 금군(禁軍), 서도(胥徒)들은 달려와서 문에 가득히 회곡(會哭)하였고, 심지어 여염의 백성들은 방아 찧는 일을 중지하기까지 하여, 선생의 죽음을 슬퍼하는 자가 도성을 기울인 가운데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라고 하였다. 그리고 발인(發靷) 때에 미쳐서는 담장 밖으로 나와서 촛불을 잡고 장송(葬送)하는 이들이 모두 방성통곡을 하며 지나치게 슬퍼하였으므로,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유여하고 위대하도다. 덕(德)이 대중을 화합하게 하는 것이 이와 같도다.”
라고 하였다.
임진년 이후 7년 동안을 병란(兵亂)이 종식되지 않고 유복(儒服)이 땅에 떨어져서, 세상이 공리(功利)만을 서로 다투어 사욕(私欲)이 하늘에 넘침으로써, 협서율(挾書律)위학(僞學)의 금령(禁令)이 이미 조짐을 나타내어 선인(善人)들의 두려워하는 바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전일에 이씨(李氏)의 도(道)를 높이던 사람들이 의당 외면을 하고 팔을 내저어서 그 학문을 말하기를 꺼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조관(朝官)이나 선비들이 날로 더욱 마음으로 복종하여, 재목을 모으고 비석을 다듬어서 후세에 영원토록 전하기를 도모하여 나에게 그 중책을 맡기었다. 그래서 나는 감히 할 수 없다고 굳이 사양하였으나, 무릇 여섯 차례나 왕복을 하면서까지 끝내 고집하여 마지않으므로, 마침내 가엾게 여겨 삼가 승낙을 하였다.
그런데 이윽고 또 나는 치욕스레 소멱(素簚)을 하고 적막하게 황야(荒野)에 틀어박혀 있는데, 전일의 선비 수배(數輩)가 행장(行狀)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명(銘)을 지어 달라고 요구하면서 말하기를,
“선생이 처음에 한 말씀이 있기 때문에 감히 선생에게 청합니다. 많은 선비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청컨대 선생은 도모해 주시오.”
하므로, 마침내 행장을 절하고 받아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는 바이다.
이씨(李氏)는 덕수현(德水縣)에서 나왔는데, 그 처음에 돈수(敦守)라는 이가 있어 고려(高麗)를 섬겨 중랑장(中郞將)이 되었다. 그로부터 육세(六世)를 지나 판관(判官) 의석(宜碩)에 이르러서는 대사헌(大司憲)에 추증되었고, 대사헌이 휘 천(蕆)을 낳았는데 천은 우참찬(右參贊)에 추증되었으며, 참찬이 휘 원수(元秀)를 낳았는데 원수는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덕수 이씨는 드러난 지가 대체로 오래되었으나, 공(公)에 이르러서 더욱 크게 드러났다.
처음에 진사(進士) 신명화(申命和)가 한 딸을 대단히 사랑했는데, 총명함이 뛰어나서 고금(古今)의 글을 다 통하여 글을 잘 짓고 그림 그리는 일에도 뛰어났다. 그래서 신명화가 스스로 동양(東陽)의 망족(望族)인데다 또 이런 규수(閨秀)가 있다 하여 그 배우자를 높이 가렸는데, 참찬이 마침내 찬성을 그 규수에게 장가들였다. 그래서 가정(嘉靖) 병신년에 신 부인(申夫人)이 임신을 하여, 용(龍)이 바다에서 날아와 방으로 들어와서 아이를 안아다가 부인의 품속에 넣어 주는 꿈을 꾸고는 이윽고 아들을 낳았다.
공은 3세 때에 벌써 스스로 문자(文字)를 알았고, 5세 때에는 신 부인에게 병환이 있자 외가(外家)의 사당에서 기도하였으며, 12세 때에 찬성에게 병환이 있을 적에도 또한 그렇게 하니, 사람들이 비로소 공을 이상하게 여겼다. 16세 때에 부인이 작고하여서는 상사(喪事)에 효성을 다하여 3년을 하루같이 최복(衰服)을 벗지 않고 여묘살이를 하였다.
18세 때에는 구도(求道)할 뜻이 있어 산사(山寺)에 가 있으면서 우연히 석씨(釋氏)의 글을 펼쳐 보다가 사생(死生)에 관한 설(說)에 감화를 받았고, 또 이른바 돈오법(頓悟法)이란 것이 있다는 것을 듣고는 이에 말하기를,
“큰길이 숫돌처럼 편평하니, 어쩌면 그렇게 신속할 수 있을까.”
하였다. 그래서 19세에는 출가(出家)하여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서 계정(戒定)을 견고히 닦다가 갑자기 스스로 마음에 생각하기를,
“만상(萬象)이 일(一)로 돌아가면 일은 어느 곳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끝내 그 요령이 없은 다음에야 그 학문을 모조리 버리고, 마침내 상자를 열고 공씨(孔氏)의 글을 취하여 엎드리고 읽다가 해를 넘기어 나왔다. 그러자 도중(都中)의 숙유(宿儒)들이 모두 유의하여 공을 높이 우러러보고 배항(輩行)을 굽혀 서로 얼굴 알기를 요구하였다.
공은 이때 퇴계 선생(退溪先生)이 도산(陶山)에 은거하여 도학(道學)을 강명(講明)한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찾아가 주일응사(主一應事)의 요점을 물었다. 이로부터 체용(體用)이 겸비되고 지행(知行)이 아울러 진취되어, 발하여 글이 된 것이 바르고 우아하고 여유작작하였으므로, 자유자재로 답안을 작성하여 응시할 때마다 합격을 하였다. 갑자년에는 사마(司馬)와 명경(明經) 양시(兩試)에 응시하여 연달아 장원을 하였으므로, 당시에 구장 장원(九場壯元)으로 일컬어졌다.
그 후 지부(地部), 춘관(春官), 천조(天曹)의 낭서(郞署)와 정언(正言), 교리(校理), 사가호당(賜暇湖堂) 등의 관직을 역임하는 동안에 화려한 명성이 날로 높아지자, 공이 진정(陳情)하여 스스로 자신을 탄핵하여 말하기를,
“어린 나이에 구도(求道)의 뜻이 있었으나 학문의 방향을 알지 못하여 마침내 석교(釋敎)에 빠져들어 선문(禪門)에 종사한 것이 거의 일 주년이나 되었는지라, 장부(臟腑)를 긁어 내어 씻는다 하더라도 그 더러움을 다 씻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런데 신(臣)의 아비가 재주를 애석히 여겨 굳이 공명(功名)을 구하게 하므로, 부끄러움을 참고 더러움을 숨겨 가면서 마침내 거인(擧人)이 되었던 것이니, 이는 다만 승두(升斗)의 녹봉을 구해서 기한(飢寒)이나 면하기 위한 것인데, 어찌 좋은 벼슬이 뜻밖에 내려지기를 기대했겠습니까.”
하니, 상(上)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아무리 호걸(豪傑)한 선비일지라도 불씨(佛氏)에게 빠져드는 것을 면치 못했거니와, 또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워졌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치란(治亂)을 말하고 왕사(王事)를 진술하면서 경술(經術)로써 부연하였는데, 말마다 상청(上聽)을 감동시키므로 듣는 이들이 놀라워하였다. 또 서당(書堂)의 과제(課製)를 인하여 왕패 치안(王伯治安)에 관한 도리를 진술해서 이를 동호문답(東湖問答)이라 명명하고 이것으로 상의 마음을 계발시킴이 있기를 기대하였다.
하루는 상이 을사년의 일을 언급하자, 대신(大臣)으로서 그때 연좌 체포된 선사(善士)가 많았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므로, 공이 그를 반박하여 말하기를,
“대신은 모호한 언행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간인(奸人)이 쓸데없는 말을 날조하여 사류(士類)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이것을 빙자하여 위훈(僞勳)을 만들었던 것이니, 이제 신정(新政)을 당하여 의당 먼저 위훈을 삭제하고 명분을 바로잡아야만 국시(國是)가 이에 정해질 것입니다.”
하고, 물러나와 조정에서 그 의논을 제창하니, 선배인 퇴계(退溪), 고봉(高峯) 같은 이들도 오히려 그 일을 중난하게 여기었는데, 공이 홀로 굽히지 않고 항언(抗言)하여 마침내 힘을 다해 남김없이 격파하니, 조야(朝野)에 사기가 증진되었다.
경오년에는 공이 스스로 학문이 더 진취되지 못하여 정치에 종사할 수 없다는 이유로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해주(海州)의 고산(高山)에 집을 짓고 은거하면서, 성철(聖哲)의 글이 아니면 읽지 않고 의리에 어긋나면 비록 천사(千駟)라도 돌아보지 않았으며, 그 일체의 세미(世味)에 대해서는 담박하였다.
그러자 조의(朝議)가 더욱 관작으로 공을 묶어 두고자 하여 누차에 걸쳐 천관 원외(天官員外), 옥당(玉堂), 중서(中書), 미원(薇垣)의 아장(亞長)을 임명하였는데, 간혹 억지로 입조(入朝)한 때도 있었으나 모두 오래지 않아서 물러갔다. 공이 직제학(直提學)으로 들어왔을 적에는 조야(朝野)가 모두 공에게 확연한 뜻이 있는 줄로 알았고, 삼사(三司)에서는 서로 상소하여 공을 머물게 하기를 청하기까지 했으나 공은 바로 떠나 버렸다.
공이 젊어서 글을 읽을 적에‘장공예(張公藝)의 구세(九世)가 동거(同居)하였다’는 구절에 이르러 개연히 말하기를,
“구세(九世)의 친족이 한 집에 같이 살기는 어려울지라도 형제간이야 어찌 따로따로 살 수 있겠는가.”
라고 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형제와 뭇 종형제들이 한 당(堂)에서 베개를 나란히 하여 자고, 매양 주식(酒食)의 연회 때에는 아우에게 거문고를 타게 해서 젊은이와 어른이 함께 노래하고 즐기며, 새벽이면 가묘(家廟)를 배알하고 당(堂)에 물러와 차서대로 모이었고, 자손 남녀(子孫男女)로부터 기타 가족에 이르기까지 가정의 예의가 엄숙하여, 한 사람이 집례(執禮)하여 가훈(家訓)을 펴서 한 번 죽 읽으면 뭇사람이 머리를 숙이고 공경히 들었으므로, 온 집안이 여기에 이르러 힘입었다.
이윽고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승진되었다. 공이 매양 상을 뵐 적마다 걸핏하면 삼대(三代)를 끌어대므로 상이 공을 우활(迂闊)하다고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또 상에게 큰 뜻을 분발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예로부터 유자(儒者)는 속리(俗吏)와 일을 도모하기가 어렵습니다. 유자는 말하기를‘당우(唐虞) 시대를 당장 이룰 수 있다.’하고, 속리는 말하기를‘고도(古道)는 반드시 행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속리는 유학(儒學)을 배척하고 유학 또한 속리를 배척하니, 똑같이 양쪽의 말이 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 정치는 의당 요순(堯舜)을 본받아서 하되, 사공(事功)에 대해서는 모름지기 점진적으로 이뤄 나가야 합니다. 신(臣)이 삼대를 끌어대는 것은 그 시대를 한걸음에 올라가라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 한 가지 선정(善政)을 행하고, 명일에 또 한 가지 선정을 행하여 점차로 지치(至治)를 도모하자는 것일 뿐입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고사(故事)에 의하면 현량(賢良)의 선비는 비록 등제(登第)를 못했을지라도 모두 대관(臺官)이 될 수 있었는데, 기묘년에 사림(士林)이 패배한 이후로 이 길이 마침내 폐해졌으니, 이는 매우 훌륭한 인재를 넓히는 길이 아닙니다.”
하고, 이를 계청(啓請)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때 막 퇴계(退溪)의 상(喪)을 당하여 한창 시호(諡號)를 의논하려 하는데, 상이 행장(行狀)을 아직 짓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것을 어렵게 여겼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황(滉)의 언론(言論)과 풍지(風旨)가 이미 세상에 드러났으니, 행장의 있고 없음은 경중(輕重)이 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 이미 죽은 현자(賢者)에게 한 가지 포장(褒章)을 아끼시니, 황이 시호를 갖는 것은 비록 1년이 지체된다 하더라도 진실로 안 될 것이 없겠으나, 삼가 사방에서 전하께 호선(好善)하는 정성이 없는가 의심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갑술년에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리니, 상이 명하여 한 통(通)을 쓰게 해서 조석으로 보았다.
공이 간장(諫長)으로 있을 때 하루는 상이 황랍(黃蠟) 500근을 올리라고 명한 일이 있었으므로 공이 조정에서 강력히 간쟁하니, 상이 누구에게서 들었느냐고 책망하여 묻자, 공이 말하기를,
“도로에 시끄러이 들리는 말에 의하면 장차 불상(佛像)을 만들려 한다고 하더이다. 전하께서는 다만 의당 속으로 반성해 보아서 그런 일이 있으면 고치셔야 할 터인데, 어찌 완강히 거절하기까지 하신단 말입니까.”
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감히 언근(言根)을 숨기는 것은 임금에게 숨김없이 말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고, 조언율(造言律)로 다스리려고까지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대간(臺諫)은 들은 것이 있으면 바로 간하는 것이니, 이것을 임금에게 숨김없이 말하는 도리라고 하는 것인데, 지금 간관(諫官)에게 중률(重律)을 가하려고 하시니, 이것은 한 마디 말로 나라를 망치는 데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임금의 노염이 더욱 격해져서 동렬(同列)들은 두려워서 모두 목을 움츠리고 있었으나, 공의 대답은 더욱 준절하여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이윽고 병으로 해면되어 돌아갔다가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임명되었고, 그 다음해에 사임하고 돌아와서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 상이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공에게 이르기를,
“사서(四書)의 집주(集註)가 착란스러워서 반드시 산정(刪定)을 거쳐야겠으니, 지금 경에게 맡기노라.”
하였다.
이때 조신(朝臣)들이 형적(形迹)을 서로 표방(標榜)하여 동서(東西)의 당(黨)이 생기기까지 하므로 조정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공이 조정이 편안하지 못할 것을 미리 걱정한 나머지, 노상 수신(盧相守愼)에게 말하여 심의겸(沈義謙), 김효원(金孝元) 두 사람을 외군(外郡)으로 내보내서 조정을 진정시키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심의겸은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가 되고 김효원은 부령 부사(富寧府使)에 임명되자, 공이 말하기를,
“북쪽 변새는 유신(儒臣)이 있을 곳이 아니다. 효원은 병약(病弱)하므로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까 두렵다.”
하고, 상에게 그 사실을 말하니, 상이 공을 효원의 당이라 하여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뒤에 공이 또 이 일을 강력히 말하여 마지않음으로써 효원이 마침내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고쳐 임명되었다. 그러자 혹자가 말하기를,
“천하에 양시(兩是)는 없는 법인데, 공은 이 일에 있어 양쪽을 다 보전하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두 사람이 조정의 불화를 만드는 데에 있어서는 양쪽이 다 그르다. 그러나 둘이 다 사류(士類)인데, 굳이 이쪽을 옳게, 저쪽을 그르게 여기려고 하다가는 그 논쟁이 끝날 때가 없을 것이니, 오직 융화를 시켜야 한다.”
고 하였으나, 조의(朝議)가 그렇게 여기지 않으므로, 이에 돌아가기를 결심하고 떠나 버렸다. 이미 물러간 뒤에 승지, 대사간, 이조와 병조의 참판, 전라 관찰사 등의 관직이 내려진 것은 모두가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간 것들이다.
공이 해주(海州)에 있을 적에는 누차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날마다 학자(學子)들을 가르치니, 학자들이 원근에서 모여들었다. 그 당시 파주(坡州)에는 성혼(成渾)이란 이가 있었으니, 고(故) 청송 선생(聽松先生) 수침(守琛)의 아들로 파산(坡山)에 은거하여 부자(父子)가 잇따라 종유(宗儒)가 되었는바, 세상에서 우계 선생(牛溪先生)이라 일컬은 분인데, 공과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이에 앞서 호운봉(胡雲峯)이 정의(情意)가 발현하는 것을 성심(性心)에 분속(分屬)시키었고, 퇴계(退溪)에 이르러서는 또 이기호발(理氣互發)의 설(說)이 있었는데, 우계는 퇴계를 존신(尊信)하여 항상 그 설을 주장하였다. 그러자 공이 체용(體用)은 근원이 하나이기에 이를 두 가지로 나누어 변석(辨析)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편지를 수십 차례 왕복하였는데, 그 중에는 간혹 전현(前賢)들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한 것도 있어 마침내 이학(理學)의 전문가가 되었으니, 그에 대한 말은 본집(本集)에 나타나 있다. 전언(前言)에 구애되지 않고 스스로 경지(經旨)를 깨달았으니, 율곡보다 천 년 뒤에 반드시 귀신의 가르침이나 신묘한 고안이 있어 곧바로 정문(頂門)에 일침(一針)을 놓는 경지에 도달해야만 바야흐로 진맥(眞脈)을 찾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색맥(濇脈)을 후맥(芤脈)으로 착각하는 자가 많게 될 것이다.
경진년에는 대사헌에 발탁되었다가 이윽고 대사간에 옮겨졌는데, 이때 호조 판서의 자리가 비었으므로 대신(大臣)의 천거에 의해 호조 판서에 제수되고 아울러 대제학을 겸하였다. 공이 호조 판서가 되어서는 재물을 절약하고 백성의 일에 심력(心力)을 다하여 백성들이 싫어하는 것을 제거하니, 백성들이 공의 은택을 하늘처럼 여겼다.
임오년에는 이조 판서에 전임되어 인재 선발을 온당하게 하였고, 이윽고 숭정(崇政)에 올라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 이해 겨울에 황홍헌(黃洪憲), 왕경민(王敬民) 두 조사(詔使)가 나오므로, 명을 받고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경상(境上)에 나가서 그들을 영접했는데, 향연을 베풀고 술잔을 나눌 때에 미쳐 공이 스스로 멀리 떨어져 올라가서 배례(拜禮)를 하니, 황 조사가 공을 가리켜 역관(譯官)에게 묻기를,
“어쩌면 저리도 산림(山林)의 기상(氣象)이 있단 말인가. 혹 우리들을 위하여 산림의 선비를 억지로 불러들인 것이 아닌가?”
하자, 역관이 말하기를,
“삼장 장원(三場壯元)으로 오랫동안 옥당(玉堂)에 몸담아 있었고, 중년에는 비록 고향에 물러가 있었으나, 상부(相府)의 찬성으로 들어온 지도 또한 수년이 되었습니다.”
하니, 두 조사가 경의를 표하여 심지어는 율곡이라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 일을 마치고는 병조 판서에 전임되었다. 이때 북로(北虜)가 구란(寇亂)을 일으킴으로 인하여 군무(軍務)가 가득 쌓였었는데, 손으로 판별하고 입으로 결정하며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계획하되, 조금도 서로 혼란됨이 없었고, 환연하여 마음에 생각하지도 않은 듯하였다. 그래서 상이 공의 처사를 훌륭하게 여겨 공에게 북관(北關)의 일을 전적으로 맡기었는데, 일이 쌓여도 적체되지 않았고 여러 가지 일을 아울러 행하여도 그릇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마다 속으로 말하기를,
“우리 공이 아니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고 하였다.
공이 일찍이 십만(十萬)의 군대를 길러서 완급(緩急)에 대비하려는 뜻으로 건의하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공이 조정에서 물러나와 서애에게 말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부진한 지 오래인데, 속유(俗儒)들은 시의(時宜)를 모르겠으나 공이 또한 이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그 후 임진년의 변란이 일어나자, 서애가 항상 조당(朝堂)에서 말하기를,
“당시에는 무사하기에 나 또한 백성을 소요시키는 일이라고 했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이 문정(李文靖)은 참으로 성인(聖人)이었다.”
고 하였다.
공은 평생에 붕당(朋黨)을 하나로 하고 공안(貢案)을 고칠 것과 사례(祀禮)를 약정(約定)하여 민력(民力)을 펴게 할 것을 우선으로 삼았는데, 상이 처음에는 매우 실망되게 여겼으나, 오랫동안 시험해 보고는 믿음이 더욱 두터워져서 바야흐로 공을 의뢰하여 정사를 하게 되었고, 공 또한 선(善)을 추장하고 악(惡)을 억제하여 자기 소신을 곧바로 행해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자 간혹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어, 겉으로는 공을 사모하는 척하면서 은밀히 간격을 두고 거짓말을 분란하게 퍼뜨리어 상의 권우(眷遇)를 흔들기를 꾀하여, 공이 하는 일을 참소해서 헐뜯는 것이 날로 심해졌다. 그래서 심지어는 붕당의 세력을 분발하여 은미한 말을 꾸며 만들어서 공공연히 탄핵하므로, 공이 인책(引責)하여 물러가기를 요청하되 여섯 번이나 소장(疏章)을 올려 마지않으니, 대간(臺諫) 또한 더욱 강력히 공을 논박하였다.
그러자 이때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와 있으면서 상소하여 그 실상을 진술하였고, 영의정 박순(朴淳)은 입대(入對)를 요청하여 단단하게 아뢰어 공을 구하니, 양사(兩司)가 다시 박순과 성혼을 싸잡아 논박하였다. 그래서 태학생(太學生) 400여 인이 대궐을 지켜 서서 공을 신변(伸辨)하자, 정원(政院)이 태학생들을 가리켜 패란(悖亂)을 짓는다고 하니, 상이 더욱 진노하여 도승지(都承旨) 박근원(朴謹元), 대사간(大司諫) 송응개(宋應漑), 전한(典翰) 허봉(許篈)을 명하여 유배시켰다.
공이 도성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불렀는데, 공이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으니, 상이 이르기를,
“아, 하늘이 우리 나라를 평치(平治)하려 하지 않는 것인가.”
라고 하였다. 그해 겨울에 특별히 공에게 이조 판서를 제수하면서 하유(下諭)한 말이 준절하였으므로, 공이 마지못하여 들어와 사은(謝恩)하니, 상이 즉시 인견(引見)하였다. 공은 인책하여 사과를 올리고 유배시킨 세 사람을 귀환시키기를 청한 다음 인하여 치사(致仕)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 후 60일이 지나서 병으로 작고하니, 그 때의 나이 49세였다.
공의 자는 숙헌(叔獻)인데 학자들이 공을 높여서 율곡 선생(栗谷先生) 이라고 한다. 저술로는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선악기도(善惡幾圖),《학교규범(學校規範)》,《성학집요(聖學輯要)》,《소학집주(小學集註)》및 문집(文集) 10권이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 묘(墓)는 파주(坡州)의 자운산(紫雲山) 아래에 있는데, 부인(夫人) 노씨(盧氏)를 부장(祔葬)하였다. 부인은 바로 경린(慶麟)의 딸인데 아들이 없었고, 측실(側室)에서 낳은 아들은 경림(景臨), 경정(景鼎)이다. 노 부인(盧夫人)은 임진년의 변란을 만나서 신주(神主)를 받들고 산기슭으로 돌아가다가 적(賊)에게 욕을 하고 해를 당하였는데, 그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旌閭)되었다.
공이 일찍이 대사간으로 서울에 왔을 적에 내가 약관(弱冠)의 나이로 공을 저사(邸舍)에서 배알했더니, 학문하는 요점을 일러 주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미 돌아갈 뜻이 있으니, 그대도 만일 뜻이 있다면 나를 석담(石潭)으로 찾아오게나.”
라고 했었는데, 이때부터 공은 돌아가지 못하였고, 나 또한 세상살이에 골몰했었다. 그리고 나는 또 공이 인재 선발하는 권병(權柄)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출세의 배경으로 삼는다는 혐의를 부끄럽게 여겨 스스로 그 문장(門牆)에 출입을 금하였으므로, 공의 일부분도 엿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 대사(大事)를 당하고 보니, 솜씨가 없어서 큰 문장은 발휘할 수 없고, 다만 자세히 살펴보고 신중히 쓸 수 있는 정도의 능력만이 약간 있을 뿐이다. 나의 친구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스승의 법도를 고치지 않고 능히 그 설(說)을 굳게 지키고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그 학문은 수심 양성(收心養性)을 근본으로 삼아 주정(主靜)에 전일하여 천인 성명(天人性命)의 은미함과 수기 치인(修己治人)의 도리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분화(芬華)한 가운데서도 스스로의 지킴이 더욱 엄격하였고, 옥루(屋漏)의 은밀한 데서도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리고 경전(經傳)을 두루 섭렵하면서 자득(自得)한 곳을 만났을 경우에는 매양 흔연히 소리를 높여 읽었고, 질병이 있지 않은 때에는 일찍이 드러누운 적이 없었다.”
고 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공은 들어간 곳이 바르고 깨달은 곳이 통투(通透)하였기 때문에 말할 때는 여유가 있고 행사할 때는 민첩했었다고 여긴다.
또 의심하건대, 그 학문에 진취한 차서는 마치 우(禹) 임금이 용문(龍門)을 뚫을 적에 먼저 긴요한 곳을 좇아 여수(汝水), 한수(漢水), 제수(濟水), 탑수(漯水)를 뚫어 성대히 형세를 따라서 했던 것과 같이 하였으므로, 보는 이들은 마치 상달(上達)한 다음에 하학(下學)을 한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세상에 거꾸로 하는 공부가 어디에 있겠는가.
일찍이 들으니, 경(經)에 이르기를,“청명(淸明)이 몸에 있으면 지기(志氣)가 신(神)과 같다.”하였고, 전(傳)에 이르기를,“명으로부터 성한다.[自明誠]”하였으니, 나는 이를 해석하기를“하늘이 열리고 태양이 밝으면 자연히 가리움이 없는 것이다.”고 하노라.
간혹 영명(英明)함이 뛰어난 이의 경우는 능히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을 초월하고 막히고 어두운 틀을 벗어나서, 그 성립된 것이 마치 바다 위에 뜬 신기루가 인위적으로 다듬은 흔적이 없고 그 간가(間架)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니, 또한 생각건대 이것이 아니겠는가.
지혜로 찾거나 바람을 타거나 계단을 밟아 올라가지 않고도 자물쇠를 끄르고 닫힌 문을 열어서 본체(本體)를 환히 내다보았는데, 마음속에 활경(活敬)을 지녔으므로 혼란되는 걱정이 없었고, 정의(精義)로 일을 행하였으므로 하나하나의 선(善)을 점차적으로 성취하는 이로움이 있어, 축곡(逐曲)이나 무교(舞交)를 하듯, 얼음이 풀리듯, 표적을 꿰뚫듯 하였으니, 후세에 모두 칭술(稱述)할 만한 것이다.
아, 산연(山淵)에서 수레를 빼내어 끝내 구허(丘虛)로 들어갔는데, 험난한 곳을 나오고자 하여도 끌어 낼 힘이 없어서 소의 넓적다리와 수레의 굴대가 함께 부러졌으니, 애석하도다.
지금 세상에 저울대를 가지고 전배(前輩)의 경중(輕重)을 헤아려 평론할 만한 호걸스러운 사람이 없는 게 한스럽다. 그래서 다만 나 같은 하찮은 사람의 소견으로 천년토록 고증할 수 없는 경중을 결정하려고 하니, 한갓 뻔뻔스러울 뿐이다. 사람들이 누가 이것을 믿어 주겠는가. 또 모르긴 하지만 이로부터 몇백 년 뒤에 다행히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는, 마치 지금 이항복과 같은 사람이 한 사람 나와서 그 말을 동일하게 한다면 이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니, 우선 조금 기다리는 바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도가 하늘에서 나와서 / 道出於天
사람에게 부쳐졌으니 / 而寓於人
사람이 있으면 도가 있고 / 人存道存
사람이 떠나면 도가 막히도다 / 人去道堙
우리 도가 동방으로 오고부터 / 自吾道東
드러나고 어두움이 일정치 않았는데 / 顯晦無時
공은 오직 큰 마룻대가 되어서 / 公唯厚棟
중책을 맡아 의심하지 않았네 / 任重不疑
옛날 철인들의 말은 / 古哲人言
뜻이 오묘하고 은미했는데 / 義奧旨微
공이 이를 변석함으로 인하여 / 因公剖判
나그네가 집에 가듯 길이 열렸네 / 如旅斯歸
모든 유자로 불리는 자들도 / 凡號儒者
혹 일은 잘 말하지만 / 或善說事
용을 극진히 함에 이르러서는 / 至於致用
조금 서로 다름을 경계했는데 / 戒于差異
아, 공은 말을 하기만 하면 / 繄公有言
실행이 반드시 뒤따랐네 / 行必隨之
명성이 높은 지위는 / 大名之下
예부터 잘 보전키 어려운 건데 / 古難善持
굴할수록 더욱 밝아지니 / 屈而益明
사부가 화살을 부러뜨렸도다 / 射夫折矢
그 누가 뒤를 이으려는고 / 孰爲後焉
진실로 많은 선비들이로세 / 允矣多士
자운산 그 곁에는 /紫雲之側
물이 넘실넘실 흐르는데 / 維水瀰瀰
비석에 이 명을 새기어 / 銘于牲繫
무궁한 후세에 보이노라 / 爲示無止


[주D-001]협서율(挾書律) : 진 시황(秦始皇) 34년에 이사(李斯)의 말을 채택하여 민간에는 의약(醫藥), 복서(卜筮), 종수(種樹) 등에 관한 서적 이외의 서적은 소장하지 못하도록 금한 율령(律令)을 가리킨다.
[주D-002]위학(僞學)의 금령(禁令) : 송 영종(宋寧宗) 때에 한탁주(韓侂冑)가 용사(用事)하면서 자기와 의견을 달리한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도학(道學)을 위학(僞學)이라 규정하고 도학자들을 등용하지 못하게 한 금령을 이르는데, 이로 인해 으뜸으로 주희(朱熹)가 삭관(削官)되고 채원정(蔡元定)이 유배되었다.
[주D-003]소멱(素簚) : 흰 개가죽으로 만든 수레 덮개를 이른다.《예기(禮記)》곡례(曲禮)에 “대부사(大夫士)가 조국을 떠날 때에는 흰 짚신을 신고, 수레의 손잡이를 흰 개가죽으로 덮는다.”고 한 데서 온 말로, 여기서는 곧 조정에서 쫓겨나 초야에 묻혀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4]색맥(濇脈)을 후맥(芤脈)으로 : 한의(漢醫)의 맥경(脈經) 또는 변맥법(辨脈法) 등에 의하면, 색맥의 색은 껄끄럽고 막힘을 뜻하므로, 색맥은 즉 맥박(脈搏)이 윤활하지 않고 꽉 막혀서 혈맥의 왕래가 간삽한 것을 이름한 것이고, 후맥의 후는 가운데가 텅 빈 총관(蔥管)을 이르는 말이므로, 후맥은 즉 맥박이 부대(浮大)하여 가운데가 텅 비어서 마치 손으로 총관을 누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을 이름한 것이다.
[주D-005]이 문정(李文靖)은 …… 성인(聖人)이었다 : 이 문정은 송(宋) 나라 태종(太宗), 진종(眞宗) 때의 명상(名相)으로 시호가 문정인 이항(李沆)을 가리킨다. 이항은 재상이 되고 왕단(王旦)은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을 적에, 일찍이 이항이 왕단에게 변방이 무사해지면 나이 어린 진종이 사치심을 일으키기 쉬우리라고 걱정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늙어서 이런 일을 미처 보지 못하리니, 이것이 후일에 참정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다.”고 하였으나, 왕단은 그렇지 않으리라고 말했었는데, 이항이 죽은 뒤에 진종은 과연 봉선(封禪)을 하고 또 대대적으로 궁관(宮觀)을 짓는 등 사치를 자행하였으나 금할 길이 없게 되자, 왕단이 이항의 선견지명을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 문정은 참으로 성인이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宋史 卷282》여기서는 바로 유성룡이 율곡의 선견지명을 이항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주D-006]축곡(逐曲)이나 무교(舞交) : 옛날에 말[馬]을 몰던 다섯 가지 방법인 명화란(鳴和鸞), 축수곡(逐水曲), 과군표(過君表), 무교구(舞交衢), 축금좌(逐禽左)에서 온 말인데, 축수곡은 수레를 몰아 수세(水勢)의 굴곡(屈曲)을 따르면서 물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고, 무교구는 십자로(十字路)에 수레를 몰면서 수레가 무절(舞節)에 맞추어 선회(旋回)하게 하는 것이다.《周禮 地官 保氏》
[주D-007]산연(山淵)에서 …… 부러졌으니 : 《태현경(太玄經)》현괘(礥卦)에 “차오(次五)는 산연(山淵 험난함을 상징한 말임)에서 수레를 빼내는 것이니, 대인이라야 할 수 있다. [拔車山淵 宜於大人]”하였고, 또 “차육(次六)은 그 수레를 가지고 구허(丘虛 역시 험난함을 뜻함)로 들어간다. [將其車 入于丘虛]” 하였는데, 이는 군신(君臣)의 도(道)를 얻지 못하여 더욱 간난하게 됨을 의미한 말이다. 또 “차칠(次七)은 험난한 곳을 나와서 언덕에 오르자면 혹 소가 끌어 주어야 한다. [出險登丘 或牽之牛]” 하였고, “차팔(次八)은 너무 험난한 곳을 만나서 수레를 빼내지 못하고 소의 넓적다리와 수레의 굴대가 함께 부러진다. [車不拔 髀軸折]” 한 데서 온 말이니, 이를테면 대인이 험난한 시기를 만나서 경륜을 한껏 발휘하여 세상을 제도하지 못하고 중도에 좌절되었음을 의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