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율곡 이이 비문 (펌)

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 栗谷 李先生家狀

아베베1 2013. 7. 3. 16:11

 

 

사계전서 제6권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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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장(行狀)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議政府右贊成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 행장 상(上)


본관은 경기 풍덕부(豐德府) 덕수현(德水縣)이다.
고조의 이름은 추(抽)이며 지군사(知郡事)로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부인 윤씨(尹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증조의 이름은 의석(宜碩)이며 판관으로서 대사헌에 추증되었고, 부인 최씨(崔氏)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이름은 천(蕆)이며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되었고, 부인 홍씨(洪氏)는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부친의 이름은 원수(元秀)이며 감찰로서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부인 신씨(申氏)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선생의 휘는 이(珥)요, 자는 숙헌(叔獻)이다. 윗대에 휘 돈수(敦守)라는 분이 있어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는데, 실로 그분이 시조이다. 대대로 훌륭한 가문을 계승하여 정승으로서 부원군이 된 분의 휘는 윤온(允蒀)이며, 사공(司空)으로서 낙안백(樂安伯)에 봉해진 분의 휘는 천선(千善)이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분의 휘는 인범(仁範)이다. 문학이 휘 양(揚)을 낳았는데, 이분이 처음으로 조선조에 벼슬하여 참의(參議)가 되었고 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명신(明晨)을 낳았는데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서 시호는 강평(康平)이다. 이분이 지군사공(知郡事公)을 낳았다. 자세한 것은 덕수 이씨 세보(德水李氏世譜)와 여러 묘비와 묘갈의 기록에 나와 있다.
감찰공(監察公)은 성실하고 소박하여 꾸밈이 없고 마음이 너그럽고 착한 것을 좋아하여 옛사람의 풍모가 있었다. 신씨(申氏)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인 명화(命和)의 딸로 타고난 바탕이 매우 남달라 예(禮)에 익숙하고 시(詩)에 밝아서, 옛 여인의 규범을 모르는 것이 없었다. 선생은 가정(嘉靖) 병신년(1536, 중종31) 12월 26일, 관동(關東) 임영(臨瀛 강릉(江陵)의 고호)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났다. 선생이 태어날 때, 신씨 부인의 꿈에 용이 아이를 품안에 안겨 주었던 까닭에 어렸을 때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하였다.
선생은 나면서부터 총명이 출중하여 말을 배우면서 곧 글을 알았다. 3세에 외할머니가 석류를 가지고 “이것이 무엇과 같으냐?”라고 시험하자, 선생은 곧 고시(古詩)를 들어 “석류 껍질 속에 부스러진 붉은 구슬 있네.[石榴皮裏碎紅珠]”라고 대답하니, 사람들이 선생을 기특하게 여겼다.
5세에 신씨 부인이 병에 걸려 위독하여 온 집안이 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 선생은 몰래 외할아버지 사당에 들어가 기도하고 있었다. 그의 이모가 마침 지나가다가 보고서 깜짝 놀라 감탄하고 달래어 안고 돌아왔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물을 건너가다가 넘어져 하마터면 죽을 뻔하였는데 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손뼉을 치며 구경하였으나, 선생은 홀로 내려다보고 두려운 마음에 여러 번 움찔움찔 놀래는 소리를 내다가 그 사람이 물에서 빠져 나오고서야 그쳤으니,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남을 사랑하는 마음은 바로 천성(天性)이었다.
8세에 스승에게 나아가 글을 배워 학업이 날로 향상되었다. 일찍이 화석정(花石亭)에 올라가 시를 지었는데, 그 격조(格調)가 혼성(渾成)하여 시율(詩律)에 능숙한 사람이라도 따를 수 없었다. -시에 이르기를, “숲 정자에 가을이 저무니, 시인의 마음 끝이 없어라. 먼 강물은 하늘을 잇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햇살을 향해 붉어라.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하고, 강은 만리의 바람을 안고 있네. 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저문 구름 속으로 울면서 사라지네.[林亭秋已晩 騷客意無窮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하였다.
9세에 《이륜행실록(二倫行實錄)》을 읽다가 장공예(張公藝)의 9대(代)가 한집에 살았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감탄하여 “9대가 한집에 산다는 것은 형편상 어려운 점도 있겠지만 형제가 떨어져 살 수는 없다.” 하고서, 마침내 형제가 함께 살면서 부모를 봉양하는 그림을 손수 그려 놓고 보았다. 또 옛날 명현(名賢)이나 장상(將相)의 사실들을 뽑아 모으기를 좋아하여 그들의 성명(姓名)을 써 놓고 그 행적을 기록하여 우러러 사모하였다.
13세(1548, 명종3)에 진사(進士) 초시에 합격하여, 문장이 날로 진취되어 명성이 자자하였으나 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마침내 성현의 학문에 마음을 다하였다. 16세(1551, 명종6)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3년 동안 여묘살이 하면서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라 상복을 벗지 않았고, 손수 제수를 장만하고 그릇 씻는 일까지도 종들에게 맡기지 않았다.
18세에 관례(冠禮)를 하였다. 학문을 하면서는 오로지 심성(心性)을 수양하는 데 힘썼다. 그때 선생은 처음 상복을 벗었으나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항상 밤낮없이 울부짖었다. 하루는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불서(佛書)를 펴 보다가 사생(死生)의 설에 깊이 감명을 받았고, 또 그 학문이 간편하고도 고묘(高妙)한 점을 좋아하여 시험 삼아 속세를 떠나 불법(佛法)을 구하려 하였다.
19세에 여러 친구들에게 글로 이별하면서 말하기를, “문장은 배워서 능할 수 없으나 기(氣)는 길러서 이룰 수 있다. 그 기란 것은 사람마다 똑같이 타고난 것으로서 잘 기르면 마음의 부림을 받지만 잘 기르지 못하면 마음이 기의 부림을 당하는 것이다. 기가 마음의 부림을 받으면 몸에 주재(主宰)가 있어서 성현도 기약할 수 있으나, 마음이 기의 부림을 당하면 칠정(七情)을 통솔할 수가 없어서 어리석고 미친 사람이 됨을 면할 수 없다. 옛날에 기를 잘 기른 이가 있었으니, 맹자(孟子)가 바로 그분이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하였는데, 산을 좋아하는 것은 그 우뚝 솟아 있는 것만을 취한 것이 아니라 그 고요한 도[靜之道]를 취하여 본받으려는 것이며, 물을 좋아하는 것은 그 막힘없이 흘러가는 것만을 취한 것이 아니라 그 움직이는 도[動之道]를 취하여 본받으려는 것이다. 어질고 지혜로운 자가 기를 기르려면 산과 물을 버려두고 어디에서 찾겠는가.” 하였다.
이를 계기로 절에 들어가 수행을 열심히 한 나머지 침식까지 잊을 정도였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 문득 생각하기를, “부처님이 그 제자들에게 ‘생각을 더하거나 덜하지 말라.’고 경계한 것은 무슨 뜻일까. 그 학문은 달리 기묘한 것이 없고, 다만 마음이 딴 곳으로 치달리는 것을 끊고 정신을 집중하여 지극히 고요하고 허명(虛明)한 경지에 이르게 하고자 화두(話頭)를 빌려 이를 의지해 공부를 하게 했던 것인데, 또 사람들이 먼저 이런 뜻을 알게 되면 선(禪)을 하는 데 반드시 정밀하고 전일하지 못할까 염려되기 때문에 이런 계율을 만들어서 속인 것이다.” 하였다.
이에 이단(異端) 학설의 잘못된 점을 깨달아 그 학문을 다 버리고 유도(儒道)에 마음을 다하였으며,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을 지었으니, 한결같이 성현을 표준으로 삼아 경(敬)과 의(義)를 아울러 지키고 지(知)와 행(行)을 모두 힘써 스승의 가르침 없이도 스스로 그 오묘한 것을 터득하였다.
일찍이 배우는 사람들에게 “내가 어릴 때에 선가(禪家)의 돈오법(頓悟法)이 도(道)에 들어가는 데 매우 빠르고 절묘한 법이라고 허튼 생각을 하여,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 것인가.’라는 것으로 화두를 삼아 수년 동안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 이에 돌이켜 생각해 봄으로써 비로소 참된 학설이 아님을 알았다.”고 하였다.
23세에 도산(陶山)으로 퇴계 선생을 찾아가 뵙고, 주일무적(主一無適)과 사물을 응접(應接)하는 요령을 물었다. 그후 서찰을 주고받으면서 거경(居敬)ㆍ궁리(窮理)와 《중용(中庸)》ㆍ《대학(大學)》의 집주(集註)와 성학십도(聖學十圖) 등의 학설을 변론하였는데, 퇴계는 옛날의 의견을 많이 버리고 선생의 설을 따랐다. 일찍이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세상에 영특한 인재가 한량없이 많지만 옛 학문에 마음 두기를 즐겨 하지 않는데, 그대같이 뛰어난 재주와 젊은 나이로서 바른길에 발을 내디뎠으니, 앞으로의 성취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거듭거듭 부탁하니 더욱 원대한 것으로 스스로 다짐하게.”라고 하였다.
신유년(1561, 명종16)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갑자년(1564, 명종19)에 사마시(司馬試)와 문과(文科)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여 곧 호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명묘(明廟)가 ‘석갈등용문(釋褐登龍門)’이라는 글제를 내놓고 글을 짓도록 하여 선생이 30운(韻)의 율시를 지어 바치니, 상이 크게 칭찬하고 상을 특별히 많이 주었다. 을축년(1565, 명종20)에 예조 좌랑으로 옮겨 갔다가 얼마 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는데, 선생은 스스로 “신진(新進)이 갑자기 언관(言官)의 직책을 맡을 수 없다.”고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허락 받지 못하였다.
병인년(1566, 명종21)에 동료를 거느리고 상소하여, 뜻을 세워 학문을 힘쓰고 바른 선비들을 가까이할 것을 청하였다. 그해 겨울에 이조 좌랑으로 옮겼는데, 벼슬길이 혼탁한 것을 개탄하고서 공도(公道)를 경장하기에 힘쓰고 뇌물을 써서 청탁하는 길을 막으려 하였으나, 이조 판서 박영준(朴永俊)이 수긍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선생은 고질이 된 폐습을 참으로 고칠 수 없다고 탄식하였다.
융경(隆慶) 정묘년(1567, 명종22) 명묘의 초상(初喪) 때에 택일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4개월 만에 장사를 지내려 하니, 상소하여 갈장(渴葬)을 비난하는 유생들이 있었다. 왕대비(王大妃)가 5개월이 되거든 장사 지내라고 하며 명하기를, “아무리 불길하여도 그대로 하는 수밖에 없다.” 하니, 영상 이준경(李浚慶)과 좌상 이명(李蓂)이 아뢰기를, “선왕의 혼령을 편안히 모시어 장사 지내는 데 좋은 달을 가려서 하지 않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이를 듣고 탄식하기를, “제후(諸侯)를 5개월 만에 장사 지내는 것은 선왕께서 정해 놓은 제도이며, 달을 가려서 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자전(慈殿)께서 올바른 이치를 밝게 아시는데, 대신들이 그 아름다움을 받들어 따르지 못하고 도리어 이치에 맞지 않은 설을 중요시하니, 시국(時局)이 어찌 될지 알 만하다.” 하였다.
무진년(1568, 선조1)에 직강(直講)으로 옮기고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갔다가 겨울에 돌아와서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되었는데, 바로 선조가 즉위한 원년이었다. 선생은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스스로 젊었을 때 선학(禪學)에 물든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감히 논사(論思)의 책임을 맡을 수 없다고 진달하였다. 그런데 상이 은혜로이 비답하기를, “예전부터 아무리 호걸스러운 선비라도 불씨(佛氏)에 빠져 들어간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지난날 선문(禪門)에 종사한 조그마한 잘못을 가지고 경솔하게 옥당(玉堂)의 논사하는 중임을 체직할 수 없으며, 또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워지려 하니, 그 뜻이 가상하다.”고 하였다.
복직되었다가 다시 이조 좌랑이 되었는데, 외조모의 병환이 심하다는 말을 듣고 벼슬을 그만두고 강릉(江陵)으로 내려가 문안을 드렸다. 사간원에서 “외조모를 가 뵙는 것은 법전에 없다.” 하여 선생을 탄핵하였으나, 상이 그 효성을 아름답게 여겨 윤허하지 않았다.
기사년(1569, 선조2)에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들어왔으나, 스스로 학문이 진보되지 않아 정사에 종사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 이전에도 여러 번 요직을 사양했으나, 이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외조모는 길러 준 은혜가 있는데, 강릉에 살면서 늙고 병든 데다 자식이 없으니, 벼슬을 내놓고 돌아가 봉양하길 원하며, 또 학문이 진취될 때를 기다려 벼슬하려 합니다.”라고 진정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몸이 비록 조정에 있더라도 왕래하면서 보살필 수 있는데, 어찌 반드시 벼슬을 그만두려 하는가.” 하고서, 이어 이조에 명하기를, “외조모를 가 뵙는 것은 법례(法例)에 없다고 하나 교리 이이(李珥)만은 특별히 명하여 가 뵙도록 하라.” 하였다.
선생이 성상의 은혜에 감격하여 벼슬에 나가니, 때마침 명묘의 담제(禫祭) 때인데, 구례(舊例)에는 담제 후에 하례(賀禮)를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 선생은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임금께서 상제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하례를 받는 것은 정리(情理)에 비추어 온당치 않으며, 또 백관(百官)들이 통곡하던 끝에 바로 하례를 드리는 예를 행한다면 이것은 노래와 곡하는 것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하고서, 차자(箚子)를 올려 하례를 위안례(慰安禮)로 대신할 것을 청하였다.
8월에 경연에서 《맹자》를 강론하다가 아뢰기를, “세대마다 각각 숭상하는 것이 있는데, 전국(戰國) 시대에는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사를 강성하게 하며 싸워서 이기고 공격하여 빼앗는 데 있었을 뿐입니다. 서한(西漢)의 순후(淳厚), 동한(東漢)의 절의(節義), 서진(西晉)의 청담(淸談) 이 모두가 한 시대에 숭상했던 것들입니다. 임금은 그 시대에 숭상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서 그 숭상하는 것이 바르지 못하면 마땅히 그 폐단을 고쳐야 합니다. 지금은 권간(權姦)들이 선비들을 꼼짝 못 하게 한 뒤여서 선비들의 풍습이 쇠퇴하고 나태해져 녹이나 타 먹으며 제 한 몸 살찌게 하는 것만을 알 뿐,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아무리 뜻있는 사람 한둘이 있더라도 모두 세속에 얽매여서 감히 기력을 내어 나라의 형세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세속의 숭상하는 바가 이러하니, 성상께서 마땅히 크게 한 번 잘 다스려 보겠다는 뜻을 분발하셔서 사기(士氣)를 진작시켜 주셔야만 세도(世道)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옛날 맹자는 필부(匹夫)의 힘으로써 언어만으로 사람을 가르쳐 사악한 이단의 불길을 끄고 바른 길을 넓혔는데, 하물며 임금께서는 세상을 다스리는 책임을 맡고 계시니, 이 도로써 백성을 가르치신다면 후세에 가르침을 남길 뿐 아니라 또한 당대에도 교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공이 어찌 다만 맹자와 같을 뿐이겠습니까.” 하였다.
강론을 마치고 다시 아뢰기를,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만이거니와 만일 다스리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학문을 해야 합니다. 학문이란 부지런히 경연에 나가서 옛 성현의 글을 많이 읽는 것뿐만 아니라 반드시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의 공부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실제로 그 공효가 있어야만 곧 학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필부는 제 집에만 있기 때문에 아무리 학문의 공부가 있어도 그 공효가 세상에 나타날 수 없지만 임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쌓아 둔 것이 정사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 공효가 즉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 백성들은 살기가 어렵고 풍속은 각박해졌으며 기강은 해이해지고 선비의 풍습은 바르지 못한데,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몇 년이 되었는데도 치적(治積)을 볼 수 없는 것은 전하의 격물, 치지, 성의, 정심의 공부가 지극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잘 다스리는 데 뜻을 두신다면 비록 꼴 베고 나무하는 하찮은 사람의 말이라도 성덕(聖德)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만일 전하께서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면서 겉치레만을 일삼으신다면 아무리 공자와 맹자가 항상 좌우에 있으면서 날마다 도리를 말한들 또한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나아가 아뢰기를, “조정에서는 마땅히 체통을 지켜야 하는데, 지난번 승지가 면대를 청한 일은 근래의 규례가 아니니, 체통을 무너뜨릴까 염려됩니다. 가령 국가에 무슨 큰 변이 발생할 기미가 있다 하더라도 본래 대간(臺諫)과 논사(論思)를 맡은 신하가 있는데, 하필이면 승지가 면대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이 말은 옳지 않습니다. 다만 승지가 어떤 것을 말했는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만일 그가 말한 것이 옳다면 체통에 무슨 손상이 있겠습니까. 승지 또한 경연의 참찬관(參贊官)이니, 면대를 청하여 국사를 말하는 것 또한 그의 직분입니다. 요즘 선정(善政)이 시행되지 못하고 온갖 제도가 해이해져 가니, 만일 분연히 진작하여 일대(一代)의 법규를 새롭게 하지 아니하고, 한갓 상례(常例)에 얽매여 구습만을 지키려 한다면 어떻게 산적한 폐단을 바로잡아 나라를 한 번 잘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대신으로서 임금을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오로지 근래의 법규만을 준수하는 데 힘쓰니, 이는 결코 많은 신하들의 바람이 아닙니다.” 하였다.
선생은 늘 경연에 나와 강론할 때를 이용하여, 학문하고 정사하는 말들을 극진히 아뢰었으나, 상께서 잠자코 아무 말이 없자 아뢰기를, “입시(入侍)하는 신하가 아뢸 일을 미리 밤낮없이 생각했다가도 전하 앞에 이르러서는 위엄에 눌려서 마음에 있던 말들을 다하지 못합니다. 전하께서 아무리 허심탄회하게 말씀을 주고받으신다 해도 오히려 신하들의 마음이 모두 전하께 전해지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하물며 침묵하고 말씀하지 않으셔서 신하들의 입을 막아서야 되겠습니까. 요즘의 천재(天災), 시변(時變)은 근고(近古)에 없던 것으로, 신하와 백성들은 두려워하여 또 무슨 일이 있을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하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좋은 계책을 널리 구하여 이 시국을 구제하는 데에 급급하셔야지 아무런 계책도 세우지 못한 채 팔짱이나 끼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명종대왕(明宗大王)께서 200년의 종묘사직을 전하께 물려주셨으니, 전하는 그 근심을 물려받으신 것이지 그 즐거움을 받으신 것은 아닙니다. 200년의 종묘사직이 날로 위태롭게 되어 가는데도 전하께서는 이를 진작시켜 볼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속에 쌓여 덕행이 된 뒤에야 사업을 일으킬 수 있는 법인데, 어떻게 덕행도 없이 사업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삼대(三代)의 정치를 갑자기 회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전하의 이 말씀은 참으로 근본을 따르는 의논입니다. 다만 덕행은 하루아침에 갖춰지는 것이 아니고 정사는 하루도 폐지할 수 없는 것인데, 진실한 덕행이 이뤄지기 전에는 정사를 불문에 부쳐 문란한 대로 맡겨 두려 하십니까. 덕행과 사업은 마땅히 서로 닦아 나가면서 함께 발전시켜 가야 합니다. 또 삼대의 정치를 갑자기 회복할 수는 없으나, 폐단을 개혁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야 어찌 시행하기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비록 요순(堯舜)의 덕은 미치기 어렵다 하더라도 요순의 심법(心法)을 구하여 요순의 선정(善政)을 본받으면 거의 요순의 정치에 가까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전에도 요순의 덕이 없으면서 요순의 정치를 한 이가 있었는가?”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예전 사람으로서 요순을 본받은 이가 없었기 때문에 그 정치를 보지 못하였으나, 진실로 요순을 본받아 행한다면 어찌 그러한 정치가 없겠습니까. 맹자가 제 선왕(齊宣王)과 양 혜왕(梁惠王)에게 왕도(王道)를 행하도록 권한 것은 이 두 임금도 왕도를 행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지, 어찌 빈말하기를 좋아하여 그러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독서당(讀書堂)에서 매월 글을 지어 올리는 기회에 문답의 글을 가설하여 왕도(王道)와 패도(霸道),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을 논변하였는데, 《동호문답(東湖問答)》이라 이름하여 임금에게 올린 적이 있었다. 그 뒤에 상이 묻기를, “어째서 한 문제(漢文帝)를 자포자기한 임금이라 하였는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문제는 참으로 어진 임금이지만 한(漢)나라의 전성기를 맞아 예전의 도를 회복할 수 있었음에도 잡패(雜霸)에 그쳤던 까닭에 신이 자포자기한 임금이라 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문제가 예전의 도를 회복하지 못한 것은 경서가 불에 타고 참다운 선비가 떨쳐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인데, 어떻게 그것이 문제의 허물이겠는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문제는 큰 뜻이 없어서 항상 비루한 의논을 좋아하였습니다. 비록 전적(典籍)과 어진 이가 있었다 한들 또한 어쩔 수 있었겠습니까. 임금으로서 뜻을 높이 세우지 않은 이는 대체로 모두 자포자기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 당시에 왕비를 아직 세우지 못하였는데, 선생은 상소하여 당시의 폐단을 논하고 이어서 왕비를 간택하는 방법을 아뢰었다. 그 대략에, “옛 제왕이 혼인한 대상은 선성(先聖)의 후손이거나 인현(仁賢)의 후예가 아닌 이가 없었으며, 왕비를 간택하는 방법은 ‘요조숙녀를 자나 깨나 구하다가 얻을 수 없어서 자나 깨나 생각한다.’고 했을 뿐이지, 지금처럼 대궐 뜰에 여인을 모아 놓고 그 우열을 판별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왕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지금부터는 용모와 자태, 옷맵시로써 등급을 정하거나 앞날의 길흉을 미루어 점치는 것을 급선무로 삼지 마시고, 먼저 그 부모가 어진가의 여부를 보아서 가법(家法)을 살피고, 그다음에는 그 여인의 위의가 법도에 맞는가를 보아서 여덕(女德)을 살피고, 또한 대신에게 물어 반드시 여러 사람의 마음에 흡족한 뒤에 비로소 결정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하늘과 사람의 뜻이 같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하루는 상께서 말씀하시는 도중에 을사사화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아뢰기를, “위사(衛社)할 때에 선량한 선비로서 혹 연좌되어 죽은 사람이 있어 그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습니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대신의 말이 어찌 이렇게 어물어물하여 분명하지 않습니까. 위사란 곧 위훈(僞勳)이며, 그때 죄를 받은 사람은 모두 선량한 선비들입니다. 인묘(仁廟)께서 승하하신 후에 중묘(中廟)의 적자(嫡子)는 명종(明宗) 한 분이 계실 뿐인데,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어찌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겠습니까. 그럼에도 간흉(姦兇)들이 감히 공훈을 탐낸 나머지 사림(士林)을 죽이고서 위훈에 기록되어 신명(神明)과 사람들이 분노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새로운 정사를 베푸시는 초기에, 마땅히 위훈을 삭제하고 명분을 바로잡아 국시(國是)를 정해야 할 것이니, 이를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이준경이 아뢰기를, “이 일은 선조(先朝)께서 하신 것이니 갑자기 고칠 수 없습니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명종께서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간흉들의 속임수를 면치 못하였으나, 지금은 하늘에 계시는 영혼도 그 간악한 것을 다 아셨을 것입니다. 아무리 선조(先朝)께서 하신 일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고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겨울에 외조모의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벼슬을 내놓고 돌아가 뵈었다.
경오년(1570, 선조3)에 다시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5월에 백인걸(白仁傑)이 상소하여 을사사화와 기유옥사(己酉獄事)에 연루된 억울한 자들을 신원해 줄 것을 요청하자, 의정부와 삼사(三司)에서 동시에 논계(論啓)하였으나, 오히려 위훈을 들어 말하지는 못했다. 선생은 명분을 바로잡는 것이 정사의 근본인데, 명분의 바르지 않은 것이 위훈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동료들에게 말하여 위훈을 삭제하자는 논의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때 퇴계 선생도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 함께 또한 “선조(先朝)께서 이미 정해 놓은 일이니 혁파할 수 없다.” 하였으므로, 조정의 논의는 대부분 선생의 의논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였으나, 선생은 홀로 여러 사람의 의논을 배격하고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옥당(玉堂)에서 41회나 올린 차자(箚子)는 모두 선생이 손수 쓴 글이었다. 정축년(1577, 선조10)에 선생의 의논으로 인하여 다시 논의하여 결국 임금의 마음을 돌리어 허락을 얻으니, 많은 사람들이 시원하게 여겼다. 겨울에 벼슬을 사양하고 해주(海州)로 돌아갔다.
신미년(1571, 선조4)에 파주(坡州)로 돌아왔는데, 이조 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홍문관 교리로 부름을 받고 조정에 들어왔는데, 검상(檢詳), 사인(舍人), 홍문관 부응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6월에 청주 목사(淸州牧使)에 제수되니 오로지 백성의 교화에 힘써 손수 향약법(鄕約法)을 만들어 다스렸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병으로 체직되었다.
임신년(1572, 선조5) 여름에 홍문관 부응교에 제수되어 사은(謝恩)하였으나, 병으로 벼슬을 할 수 없어 다시 사양하고 파주로 돌아갔다. 이때 정승 이준경이 자신을 드높여 선비들에게 몸을 낮추지 않고, 또 구례(舊例)를 굳게 지켜 고식적(姑息的)으로 임금을 인도하여, 정승으로서의 업적에 볼만한 것이 없었으므로 선비들 중에 비난하는 자가 많았다. 이준경은 이에 홍담(洪曇), 김개(金鎧)의 무리와 함께 선비들을 억누르려는 마음이 있었다.
무진년(1568, 선조1) 연간에 김개가 대사헌이 되어서 이준경의 뜻을 받들어, 박순(朴淳), 박응남(朴應男), 기대승(奇大升), 이후백(李後白), 윤두수(尹斗壽) 등 17명을 논핵하여 제거하려 하다가 때마침 다른 일로 체직되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기사년(1569, 선조2)에 다시 경연에 들어가 “젊은이들이 붕당을 지어 어른을 업신여겨 거의 기묘년(己卯年)의 풍습을 이루고 있다.”고 극언하자, 대간(臺諫) 안자유(安自裕)ㆍ정철(鄭澈), 승지 심의겸(沈義謙) 등이 그 자리에서, “기묘명현들을 비난하여 남곤(南袞), 심정(沈貞)이 했던 일을 그대로 한다.”고 배척하니, 삼사(三司)에서도 모두 일어나 도성 밖으로 추방하기를 청하였다. 그 이튿날 승지 기대승이 청대(請對)하여 그 자세한 사실을 힘껏 아뢰고 그를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퇴계 선생 또한 그 소행을 미워하여 기대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늘날 우리들 중에 실제로 나랏일을 뒤바꾸고 정법(政法)을 변경하여 어지럽히며, 장차 선배들을 핍박하여 내쫓고 자기 일을 이루기 위하여 당파를 심으려 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저들은 이처럼 없는 것을 억지로 있다고 저렇게 덮어씌워 죄를 만들고, 옛사람들의 모함을 끌어다가 지금 사람을 배척하는 증거로 만드니, 기어이 함정 속에 몰아넣은 후에야 그만둘 것이다.” 하였다. 그 뒤에 이준경이 입시하여 “승지로서 청대한 것은 근래에 없는 규례입니다.”라고 아뢰자, 선생은 그렇지 않다고 변론하였다. 명묘(明廟)의 상(喪)을 마치자, 선비들은 “명묘는 이미 인묘(仁廟)의 후사가 되었는데, 남의 뒤를 이은 사람이란 바로 그의 아들이 되는 법이니, 인묘는 연은전(延恩殿)에 모시는 게 옳지 않고 문소전(文昭殿)에 모셔야 한다.”고 하였으나, 이준경은 “인종과 명종은 부자간과 다르니, 마땅히 연은전에 모셔야 한다.” 하여, 논의가 일치하지 않자, 삼사에서 이준경이 또 이기(李芑)의 말을 따른다고 논핵하였다.
신미년(1571, 선조4)에 이준경이 그 족제(族弟) 이원경(李元慶)을 시켜 백인걸(白仁傑), 홍담(洪曇) 등 여러 재상을 통하여 다시 박순, 박응남, 이후백, 윤두수, 윤근수(尹根壽), 오건(吳健), 정철 등 17명을 죄주게 하려 하였는데, 그 말이 전파되어 백인걸에게 혐의가 돌아가자 백인걸이 급히 파주로 내려갔다. 이 때문에 이준경의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이준경이 병들어 죽을 무렵에 차자(箚子)를 올려 “조정 신하들이 붕당을 짓는다.”고 말하여, 상의 마음을 의심스럽게 만들어서 반드시 선비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에 상이 자못 놀라고 의심하였는데, 선생이 상소하여 그 의혹이 풀리게 되었다.
얼마 후 원접사(遠接使)가 아뢰어 종사관이 되었으며,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고, 또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양하니, “이이(李珥)는 본래 세상일에 어두운 사람이다.”라는 상의 전교가 있었다. 이는 선생이 스스로 “학문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정사에 종사할 수 없다.” 하여 여러 번 요직을 사양하면서 아뢴 말들이 모두 당(唐), 우(虞)와 삼대(三代)의 도(道)로 말하였기 때문에 이런 전교를 내린 것이다. 얼마 후 전한(典翰)에 제수되었으나 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만력(萬曆) 계유년(1573, 선조6)에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제수하고 세 차례나 불러 그대로 두지 않으니, 선생이 이에 조정에 들어왔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어째서 물러가기만 하고 나오지는 않는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신은 병이 깊고 재주가 적어서 스스로 헤아려 볼 때 일은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녹만 받아먹는 것이 스스로 물러가 죄를 면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감히 나오지 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재주는 내가 아는 터이니, 너무 겸손한 말을 하지 말라. 지금부터 다시는 물러가기를 원하지 말아야 될 것이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신은 시골에 묻혀 살아서 전하의 학문이 얼마쯤 성취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백성들은 곤궁하고 풍속은 퇴폐하여 이 지경이 되었으므로 신은 전하의 학문이 날로 빛나기를 기대하였는데 마침내 그 공효를 볼 수 없으니, 신은 삼가 이를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즉위하신 처음에 대신들이 잘못 보좌하고 인도하여 매양 근래의 규례만 가지고 선비의 말을 배척한 까닭에 지금까지 잘 다스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필부(匹夫)도 글을 읽어 몸소 행할 때에는 오히려 세상을 구제할 뜻을 가지는 법인데, 하물며 전하께서는 한 나라의 주인으로서 일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시며 일할 수 있는 재질을 타고나셨는데, 어찌 두려운 마음으로 스스로 분발할 뜻이 없으시겠습니까. 향약은 삼대 때 쓰던 법인데 전하께서 시행하라는 명을 내리시니, 참으로 근대에는 없던 경사입니다. 다만 모든 일에는 본말(本末)이 있으니, 향약은 온 백성을 바르게 하는 법입니다. 조정의 모든 관리들이 아직 바르지 못한데, 먼저 백성들을 바로잡으려 하신다면 그것은 근본을 제쳐 놓고 지엽만 다스리는 것이니, 이 일은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몸소 실천하시고 마음으로 체득하신 다음 조정에 미치어 정사와 명령이 모두 바른 도에서 나오게 되어야 백성들이 감동하여 따라 일어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 스스로를 돌아보고 경솔하게 시행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말하는 자들이 계속해서 청하였기 때문에 그대로 따른 것이다.”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성심으로 선치(善治)를 해 보려고 하신다면 단지 이 한 가지 생각이 곧 관저(關雎)와 인지(麟趾)의 뜻이니, 어찌 문왕(文王)과 같은 덕이 있어야만 비로소 주(周)나라의 사업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10월에 선생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임금이 드높은 지위에 앉아 스스로 만족스럽게 생각한다면 좋은 말이 어디로부터 들어오겠습니까. 반드시 다방면으로 널리 들어서 그중 좋은 것을 가려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만 신하들이 모두 나의 스승이 되고 여러 가지 좋은 것이 임금의 몸에 모여들어 덕망과 업적이 이로써 높아지고 넓어질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겸허한 마음과 사양하는 모습이 하교(下敎)에 나타나오나, 공론을 따르지 않은 채 자신의 의견을 옳다 하시고 남의 말이 틀렸다고 하는 데 있어서는 도리어 남이 나만 못하다고 여기는 병폐를 가지고 계시니, 신은 삼가 민망스럽게 생각합니다. 삼정승이 아무리 아뢰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성상의 뜻을 거슬러 도리어 임금의 덕에 누가 될까 두려워하는 까닭에 묵묵히 입을 다물고 세월만 보내는 실정입니다. 만일 성상의 뜻이 선치를 해 보려는 데 있다면 대신 또한 반드시 속에 있는 말을 다하고 조정의 신하들도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각각 아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일은 참으로 하기 어렵다. 한 가지 폐단을 고치려 하면 또 한 가지 폐단이 생겨나 그 폐단을 고치기도 전에 도리어 해만 더하게 된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기강이 서지 않아 인심이 해이하고 관직에 적임자를 가리지 않은 채 구차하게 충당한 사람이 많으므로 녹 먹는 것만 알 뿐 나랏일은 생각하지 않기에, 폐단을 고치라는 명령이 한 번 내려지면 귀찮아서 꺼리는 생각부터 먼저 가져 임금의 명을 받들어 행하지도 않을뿐더러 고의로 폐단을 만들어 내기까지 합니다. 이 때문에 공적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얼마 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하여 경연에 입시하였다가 아뢰기를, “오늘날 나라에는 기강이 없어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만일 지금 그대로 인순(因循)한다면 다시는 희망이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전하께서 큰 뜻을 분발하여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시고, 이를 계기로 대신과 백관들을 엄하게 경계하여 일시에 진작시켜 기강을 세워야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강은 법령이나 형벌로써 억지로 세울 수는 없습니다. 조정에서 착한 사람을 좋아하고 악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을 공정히 하여 사사로운 정이 통할 수 없어야만 기강이 서는 것인데, 지금 조정에서는 공(公)이 사(私)를 이기지 못하고 정도(正道)가 사도(邪道)를 이기지 못하니, 어떻게 기강이 설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소견은 예로부터 똑같지 않아서 세상일에 어두운 선비는 ‘요순(堯舜)의 정치를 하루아침에 할 수 있다.’ 하고, 시속의 선비들은 ‘옛 도는 결코 행할 수 없다.’ 하니, 이는 모두 옳지 않습니다. 정치는 요순을 기약하되 사업은 점진적으로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신이 예전에 외람되이 옥당(玉堂)에 있을 때, 항상 요순과 삼대(三代)의 일을 가지고 전하께 아뢰었지만 신의 생각에도 별안간 그 실효를 보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오늘 하나의 일을 행하고 내일 또 하나의 일을 행하여 차차 아름다운 경지로 들어가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정사가 본받을 만합니다. 그때에는 인재를 등용함에 상례(常例)에 얽매이지 않고 어진 사람과 재능 있는 사람을 등용하여 각각 그 재주에 알맞게 하였으니, 지금도 반드시 사람을 가려 벼슬을 내리고 직임을 맡겨 완성하게 하여야만 모든 업적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기묘년(1519, 중종14) 연간에 조광조(趙光祖)가 ‘임금에게는 충성을 다하여 훌륭한 임금이 되게 하고 백성에게는 혜택이 돌아가게 한다[致君澤民]’는 뜻이 있었지만, 나이 젊은 사류(士類)로서 일을 점진적으로 하지 않아서 소요를 면치 못함으로써 결국 사림(士林)의 화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책임을 맡은 자들이 툭하면 기묘사화를 경계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묘년에 일을 점진적으로 하지 않은 잘못이 있다지만, 오늘날처럼 전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반드시 먼저 실천하시어 근원을 맑게 한 뒤에 다스려야 할 일들을 차례차례 거행하신다면 많은 신하들이 분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나의 몸을 닦으려면 반드시 어진 사람을 높여야 합니다. 이른바 어진 사람을 높인다는 것은 벼슬을 높여 주는 데 그치지 않고 반드시 그 말을 수용하여 정사를 하는 데 써야만 어진 사람을 높이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어진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으나, 벼슬에 임명하는 것만을 보았을 뿐 그의 말을 수용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참으로 도를 지키는 선비라면 어찌 허례(虛禮) 때문에 나와서 벼슬을 하겠습니까. 또 과거에 급제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재덕(才德)이 있으면 헌관(憲官)으로 등용하는 것이 국가의 상규(常規)인데, 기묘년 이후부터는 그 길이 막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조종(祖宗)의 법을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진 사람을 쓰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다만 경험이 없는 사람은 일을 하는 데 너무 지나칠까 염려가 된다.”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만일 너무 지나친 일이 있으면 전하께서 마땅히 제재를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편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세도(世道)가 점점 쇠미하여 선비들은 과거가 출세하는 길인 것으로만 알고 있는데, 저 훌륭한 인물들은 반드시 과거에 급급하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로 사람을 뽑아 쓰는 것은 말세의 습속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또 아뢰기를, “지금 해야 할 일은 공도(公道)를 넓히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털끝만 한 사의(私意)도 없으셔야만 인심을 감동시킬 수 있는데, 요즘 대간(臺諫)이 대궐 안이나 내수사(內需司)에 관계되는 일로 아뢰면 전하께서 반드시 거절하시니, 많은 신하들이 전하께서 무슨 사사로움이 있는가 의심하면서도 아무 말 없이 넘어가는 것을 체통에 맞는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신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리석은 자라도 혹시 한 가지 옳은 생각은 할 수 있으니, 그런 말도 들을 만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다른 날 선생이 다시 과거에 급제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헌관으로 등용하는 길을 열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그 안건을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대신들이 모두 옳다고 하였으므로 상이 윤허하였다.
상이 밤에 비현각(丕顯閣)에 납시어 시신(侍臣)을 불러, 《서전(書傳)》을 진강(進講)하게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태갑(太甲)은 이윤(伊尹)이 바로잡아 준 데 힘입어 진실한 덕을 이룰 수 있었는데, 만일 이윤이 없었다면 덕을 이루었을지 기약할 수 없습니다. 임금이 어진 사람을 얻으면 한때의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육척(六尺)의 어린 임금을 부탁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성스럽고 지혜로운 임금이라도 드넓은 천하를 혼자서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어진 사람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맹자》에 ‘요(堯)는 순(舜)을 얻지 못한 것으로 자기의 근심을 삼았고, 순은 우(禹)와 고요(皐陶)를 얻지 못한 것으로 자기의 근심을 삼았다.’ 하였으니, 임금의 책무는 어진 사람을 얻는 데 있습니다.” 하였다.
진강이 끝나자 다시 아뢰기를, “전하께서 논변하신 인심(人心)ㆍ도심(道心)설이 지극히 정밀하고 간절하니, 이처럼 정밀하고 밝으신 학문으로 더욱 실천하는 공부를 하시면 한 시대를 바로잡아 구제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글 뜻을 잘 안다 하여도 자신에게 절실한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또한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신이 보건대, 근래에 기강이 문란해져 명령이 시행되지 않아서 백성의 괴로움은 물과 불 속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고서도 국가가 무사했던 적은 있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급히 어진 선비를 모아서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각기 진술하게 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데 절실한 것을 채택하여 시행한다면 그나마 이 시국을 구제할 수 있겠지만, 혹시라도 이럭저럭 전철만 되풀이하여 날로 점점 나빠지기만 한다면 아무리 위대한 현인이 있을지라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새로 나라를 세운 임금들은 실덕(失德)이 없지 않았어도 오히려 소강(小康)을 이룩하지만, 나라를 세운 지 오래되어 점점 쇠퇴해지면 아무리 어진 임금이 있어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주 선왕(周宣王)과 한 광무제(漢光武帝)는 모두 중흥한 임금인데, 이 두 임금이 어찌 문왕(文王)과 고조(高祖)보다 나을 수 있겠습니까. 진 도공(晉悼公)으로 말하면 나이 14세에 즉위하였는데, 당시에 육경(六卿)이 강하고 공실(公室)이 약하였지만 도공이 스스로 분발하여 마침내 패업을 이룩하였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그 뜻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뜻을 세워 올바른 정치를 하려 하여 해묵은 폐단을 고치신다면 무슨 정치인들 이루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폐단을 고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만일 인재를 얻으신다면 어렵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무리 인재를 얻더라도 만일 송 신종(宋神宗)처럼 뜻만 크고 재주가 따라 주지 않는다면 또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송 신종이 뜻을 세운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것인데, 신종은 부국강병만을 일삼으려 했던 까닭에 소인들이 이익이 되는 사업을 일으킨다는 말만을 올린 것입니다. 만일 백성을 보호하는 것으로 힘썼다면 소인들이 어떻게 그 간사한 계책을 쓸 수 있었겠습니까. 임금이 된 자는 반드시 백성을 보호하는 것으로 뜻을 세워야 합니다.” 하였다.
그때에 여러 신하들이 퇴계 선생의 시호를 내려 주기를 청했으나, 상께서 행장이 없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선생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황(李滉)의 행적은 환하게 귀로 듣고 눈으로 보신 것이니, 행장의 있고 없음이 어찌 그의 덕에 영향을 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죽은 어진 이에게도 포장해 높이기를 인색하게 하시는데, 하물며 살아 있는 당시의 선비들에게 어찌 그 선(善)을 좋아하는 정성이 있겠습니까. 이황의 시호는 비록 1, 2년을 지체한다 하더라도 큰 해가 없겠지만 사방에 있는 선비들이 전하께서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없지 않으신가 의심하게 된다면, 그 해가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선생은 정성을 쌓아 임금의 뜻을 돌려 보고자 억지로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우계 선생(牛溪先生)이 말하기를, “선비는 마땅히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힘써야 하는 법이니, 만일 성상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면 속히 사직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왕척직심(枉尺直尋)이니, 선비로서 할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그 말은 참으로 옳으나 임금의 마음을 어떻게 갑자기 돌릴 수 있겠습니까. 서서히 정성을 쌓아서 임금이 감동하여 깨닫기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만일 천박한 정성으로 열흘이나 또는 한 달 동안에 효과를 거두려고 서둘다가 제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문득 사직하는 것 또한 신하 된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갑술년(1574, 선조7) 1월에 우부승지로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당시의 폐단을 극력 진달하고, 또 재앙을 막는 계책과 덕(德)을 진전시키는 공부를 말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훌륭하다. 이 논의여. 예전 사람도 이보다 더 나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신하가 있는데, 어찌 다스리지 못함을 근심하랴. 다만 개혁할 일이 많기 때문에 졸지에 모든 것을 다 고칠 수는 없으나, 이 상소를 대신에게 보여 의논해 처리하겠다.” 하고서, 또 이 상소를 한 벌 베껴 써서 올리도록 명하였다.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이 음식을 삼가는 것이 병을 치료하는 관건이라 아뢰자, 선생은 “병을 치료하는 것은 약이나 음식물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고, 반드시 마음을 다스리고 기력을 기른 뒤에야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옛사람의 시에 ‘온갖 보약으로 섭양한다는 건 모두 헛일이고, 마음 하나 잡는 것이 제일 중요한 법이라네.[萬般補養皆虛僞 只有操心是要規]’ 하였으니,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근본이고, 음식을 조심하는 것은 말단입니다. 만일 마음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양생(養生)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선생은 비록 성상의 사랑을 받고 있었으나 그의 말이 쓰여지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공(公)이 조정에 있은 지 몇 달이 되었는데, 무슨 공업(功業)이 있습니까?” 하니, 선생은 “비록 국정을 맡은 사람이라도 몇 달 사이에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는데, 하물며 말만 아뢸 뿐 실천할 수 없는 사람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가 또 말하기를, “식자(識者)들은 숙헌(叔獻)이 조정에 오래 머물고 있는 것을 퍽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하니, 선생은 “항상 임금의 마음이 혹시나 돌려질까 기대하기 때문에 거취를 결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또 선생에게 말하기를, “엎어지는 것을 부축하고 위태로운 것을 붙들어 주려는 데 뜻이 있으면 아무리 구차스러워도 물러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선생은 “구차스럽게 한다면 이것은 자기 몸을 먼저 굽히는 것이니, 자기 몸을 먼저 굽히고서 남의 엎어지는 것을 부축하고 위태로운 것을 붙들어 준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설령 큰일은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때그때 일에 따라 도와서 나라가 위태하고 망하는 데 이르지 않으면 이것도 혹 하나의 길이 될 것입니다.” 하니, 선생이 “이는 나라를 맡은 대신의 일입니다. 대신은 이미 중대한 임무를 맡았으니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면 마땅히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이요, 물러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신이 아니면 조짐을 보고 미리 떠나서 그 몸을 잃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몇 달 동안 조정에 머물러 있자니, 어떤 사람은 왜 그렇게 오래 있는가 의심하고, 어떤 사람은 속히 물러갈까 두려워하니, 식견이 중도를 얻기가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이는 상이 유학을 몹시 좋아하여 선생에게 마음을 두니, 선생은 도(道)를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여 행여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을까 기대했던 까닭에 비록 마음에 맞지 않은 일이 있어도 연연하여 머뭇거리며 차마 갑자기 물러가지 못했던 것이다.
2월에 상이 선생에게 이르기를, “한 문제(漢文帝)는 어째서 가의(賈誼)를 등용하지 않았는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한 문제는 어질기는 했으나, 그 뜻이 높지 못하여 가의가 큰일을 말하는 것을 보고 의심하여 쓰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큰 뜻이 있어야만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유하면 집주인은 두어 칸의 조그마한 집을 지으려 하는데 목수가 큰 집을 지으려 한다면 주인이 어찌 그의 말을 기꺼이 들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상께 아뢰기를, “요즘 재변이 자주 일어나 백성들이 날로 더욱 곤궁해지니, 한갓 두려워하고 반성한다는 말만 하고서 그 실효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근래 전교나 명령이 다 옳은데도 실효는 볼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하면 실효가 있겠는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항상 변통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시기 때문에 결국은 실효가 없는 것입니다. 제도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이 나라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일 선대 조정에서 정해 놓은 법이 아니라면 개정하기가 어찌 어렵겠는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선대 조정에서 정해 놓은 법을 다 개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공안(貢案)으로 말하면 이는 연산군 때 정한 것이지, 선대 조정의 법이 아닙니다. 신도 개정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고통을 구제하고자 할 뿐입니다. 만일 오늘날의 정사를 개정하려 한다면 반드시 그 일을 할 만한 인재를 구해야 하겠지만, 개정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어진 사람을 구하여 어디에 쓰겠습니까. 예전부터 성현은 때에 따라 변통해 나갔습니다. 하늘의 운행으로 말하더라도 세월이 오래되면 절기의 도수에 반드시 차이가 생기며 그때마다 훌륭한 사람이 나와 개정하였습니다. 만일 때에 따라 개정하지 않는다면 천상(天象)이 어긋나고 사계절이 차례를 잃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훗날 상이 나라에 기강이 서지 않은 것을 탄식하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국가의 기강이란 사람의 몸에 있는 호연지기(浩然之氣)와 같습니다. 호연지기는 의로운 일을 많이 쌓아 행한 데에서 생기는 것이지, 한 가지 일이 어쩌다 의리에 합하였다고 해서 단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나의 의리를 행하고 내일 또 하나의 의리를 행하여 그 몸에 의리가 쌓여서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 땅에 부끄럽지 않은 뒤에야만 호연지기가 가득 차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기강도 그러하여 하루아침에 분발한다 하여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공평하고 정대한 마음으로 정사에 옮겨서 오늘 하나의 선정(善政)을 행하고 내일 또 하나의 선정을 행하여 곧은 사람은 반드시 등용하고 간사한 사람은 반드시 내치며, 공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벌을 내려야 기강이 설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어떤 일을 시행하면 잘 다스려질 수 있겠는가?”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정치하는 방도를 어찌 다 아뢸 수 있겠습니까만, 대개는 먼저 큰 뜻을 세우고 어진 이를 얻어서 위임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사람을 알기가 실로 어려우니, 반드시 먼저 학문에 공력을 들여서 궁리(窮理)ㆍ거경(居敬)ㆍ역행(力行) 세 가지에 부지런히 노력하여 이치가 밝아지고 덕이 이루어지면 인물의 어질고 어리석음과 간사하고 정직한 것을 환하게 알 수 있어 털끝만큼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학문은 반드시 계옥(啓沃)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니, 학문이 높은 신하들을 가까이하여 그들로 하여금 정성을 다하여 돕고 인도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일이 바로 정치를 하는 근본이며, 이 밖에 특별히 다른 교묘한 방법은 없습니다. 전하께서 만일 신하들을 가까이하시어 틈이 없다면 그 정상을 자세히 알 수 있어 올바른 취사선택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종대왕께서 사람을 알아보고 잘 맡긴 것도 그 정상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종조에 인재를 등용할 적에, 벼슬에 오래 있고 오래 있지 않은 것과 그 지위의 높고 낮은 것을 묻지 않고, 오직 그 사람과 직위를 서로 알맞게 한 까닭에 한 벼슬을 고수하여 몸을 마친 사람도 있었고, 계급을 초월하여 별안간 재상이 된 사람도 있었으며, 육경(六卿)과 모든 관리들이 오래 그 직책을 맡지 않은 사람이 없어서 모든 공적이 다 이룩되었습니다. 특히 학문이 높은 신하들에게는 남다른 돌보심과 예우가 있었던 까닭에 신하들이 모두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아직까지 가까이하고 믿고서 위임하는 신하가 없으며, 여러 관리를 자주 바꾸는 까닭에 모든 일이 다스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한 집안의 일에 비유하면, 집안 식구들을 나누어 일을 맡겨서 밭가는 사람은 밭을 갈게 하고 나무하는 사람은 나무를 하게 하고 길쌈하는 사람은 길쌈을 하게 하여야만 집안 살림살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아침에 밭을 갈게 하다가 점심 때 나무를 하게 하거나, 점심 때 나무를 하게 하다가 저녁에 길쌈을 하게 한다면 한 가지 일도 이룰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사대부로서 그 직책을 다한 사람에게도 상 주는 일이 없으며,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벌 주는 일이 없으시니, 제 한 몸이나 잘 지내려는 사람에게는 좋겠지만 나랏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째서 사람을 가려 벼슬을 주시고, 그 자리에 오래 있게 하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수찬(修撰) 윤현(尹晛)이 아뢰기를, “이이(李珥)가 학문을 논함에 있어 궁리(窮理)를 거경(居敬)의 앞에 두었는데, 신의 생각에는 거경이 궁리보다 앞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정자(程子)가 ‘치지(致知)를 하면서 경(敬)에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였으니, 윤현의 말이 옳습니다. 다만 경(敬)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공부로서 선후를 논할 수 없습니다. 또 궁리는 지식의 공부요 거경은 실행의 공부이기에, 신은 지행(知行)의 차례로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학문을 하시려 한다면 먼저 뜻을 세워서 굳게 정하여 흔들리지 않게 한 다음, 경(敬)으로 궁리하고 경으로 힘써 실행하소서. 이렇게 오랫동안 공부를 하여 의리를 좋아하고 학문을 즐거움으로 삼게 된다면 착한 일을 하고 이치에 따라 스스로 기쁘고 만족하게 되며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편안하고 펴져서 태연하게 즐거워질 것입니다. 옛날 임금 중에는 그 나라를 다스리기는 하였으나 학문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고 한갓 사업에만 힘쓴 까닭에 처음과 끝이 같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옛날 당 명황(唐明皇)이 ‘내 몸은 여위어도 나라는 살찔 것이다.’라고 한 말이 있으나, 이것은 억지로 한 것이니, 어떻게 오래 갈 수 있겠습니까. 만일 학문을 하여 공효가 있다면 그 몸이 나라와 더불어 함께 살찌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성균관 유생들이 나이 차례대로 앉으니, 이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해수(李海壽)가 선생에게 말하기를, “나이 차례대로 앉는 것은 성균관에서는 옳지 않은 일입니다. 동방(同榜)에는 장원을 존경하니 이 또한 예절인데, 어찌 장원 위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장원을 존중하는 것은 방회(榜會)에서 시행하는 것은 옳으나, 성균관은 윤리를 밝히는 곳이기에 어른과 어린 사람의 차례를 어지럽힐 수 없으며, 또 장원한 자가 높다고 하나 어찌 왕세자만 하겠습니까. 옛날에 왕세자가 입학하여도 나이에 따라 앉았으니, 장원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였다.
3월에 상이 의영고(義盈庫)에 명하여 황랍(黃蠟) 500근을 바치도록 하였다. 외부에서는 어디에 쓸 것인지 몰랐는데, 어떤 사람이 불사(佛事)에 쓰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때 선생은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었는데, 아뢰기를, “황랍을 어디에 쓰려고 하십니까? 빨리 성상의 뜻을 나타내시어 모든 사람의 의혹을 풀어 주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궐 안에서 쓰는 물건은 신하들이 감히 묻는 것이 아니다.” 하니, 또 아뢰기를, “궁중에는 특별히 황랍을 쓸 곳이 많지 않으니, 이것은 반드시 옳지 못한 일에 쓰려고 하시어 남에게 알릴 수 없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들은 성상의 뜻에 미혹됨이 없지 않으신가 염려되어 그 시초와 조짐을 막아 커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옛적에 사마광(司馬光)이 말하기를, ‘내가 평소에 한 일들을 하나도 남에게 말 못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신등은 전하께 정심(正心)과 성의(誠意)를 바라고 있는데, 이런 한 가지 일도 알리기를 싫어하시니, 모르긴 하지만 혼자서 마음 놓고 하실 수 있는 곳에서는 옥루(屋漏)에 부끄럽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는 정당하지 않은 데 쓸 물건을 올리게 하지 마시고, 맑은 하늘의 밝은 태양같이 성상의 마음을 환하게 보이시어 신하들이 다 우러러볼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화를 내어 이르기를, “옛적에 양 무제(梁武帝)가 입이 써서 꿀을 좀 달라고 하였다가 얻어먹지 못했다 하더니, 오늘날 이 꼴을 다시 볼 줄은 몰랐다. 지금 시사(時事)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닌가.” 하였다.
선생이 동료들을 거느리고 사직하면서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너무 엄하시어 후경(侯景)을 신들에게 비유하기까지 하시니, 신들은 지극히 경악과 전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의영고에 있는 물건은 원래 전하의 소유물이니, 정당하게 쓰시기만 한다면 신하들은 이를 받들어 올리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니, 어찌 감히 한 마디 말이라도 할 리가 있겠습니까. 만일 정당하지 못한 데 사용하시어 전하의 하시는 일이 불법으로 귀결된다면 아무리 의영고라 할지라도 복계(覆啓)하여 반대해야 하는데, 하물며 언관(言官)으로서 어찌 감히 잠자코 있겠습니까. 요즘 외부에 파다한 소문이 나도는데, 어떤 사람은 ‘불상(佛像)을 만들려고 한다.’ 하고, 어떤 사람은 ‘불사(佛事)를 일으키려고 한다.’ 하기도 하는데, 수은(水銀)과 황랍(黃蠟)을 대궐 안에 바치라는 명령이 마침 이때에 내려졌으니, 신등이 어찌 근심스럽고 두려운 생각이 없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마음속으로 반성하시어 그런 일이 있으면 고치시고 그런 일이 없으면 그런 일이 없도록 더 힘쓰셔야 할 뿐인데, 이를 숨기고 이처럼 심하게 딱 잡아떼시는 것은 어찌 된 까닭입니까? 옛날에 순 임금이 옻칠한 그릇을 만들자 간하는 사람이 10명이 있었고, 무왕(武王)이 포어(鮑魚)를 좋아했으나 태공(太公)이 바치지 않았는데, 이것이 어찌 임금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진실로 충신은 임금을 덕으로써 사랑하고 예로써 공경하는 법이니, 비위를 맞춰 받들고 따르는 것은 도리어 임금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데 해가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말 한마디를 따르지 않은 것 때문에 매번 진노(震怒)하시고 마음이 아프다고까지 하셨습니다. 대저 비위를 맞춰 순종하는 태도가 부족해서 ‘오직 내가 말을 하면 그 말을 어기지 않는 것이 즐겁다.’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은 전하께서 마음 아파하시는 것이며, 위에는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아량이 없고 아래에는 충성스럽고 강직한 보필이 없어서 나랏일이 날마다 잘못되어 수습할 수 없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은 신들이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신들은 경솔하고 천박하며 고루하고 비열하여 정성이 신뢰를 얻지 못하였으니, 신들을 내치소서.” 하였다.
상이 더욱 노하여 이르기를, “지금 아뢴 글을 보니, 한 번 웃음거리도 되지 못한다. 가령 이교(異敎)를 받들려고 한다면 전해 내려온 불상도 많은데 새로 만들어 무엇하겠는가. 그 말을 어느 사람에게서 들었는가? 내가 잡아다 국문하려 한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떠도는 소문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만일 반드시 하나하나 잡아다 국문하려 한다면 위(衛)나라의 무당이 임금을 비방하는 것을 감시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다만 신들이 망언한 죄를 다스리시면 그만이지, 어찌 반드시 위엄을 세워서 남의 입을 틀어막아 사방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시려 합니까. 아, 임금의 위엄은 날마다 드높아 가고 선비들의 습관은 날로 나약해져 가니, 비록 주운(朱雲)급암(汲黯)을 지위에 있게 하여서 곧은 말을 날마다 진달하게 한다 하여도 오늘의 세태를 바로잡을 희망이 없는데, 하물며 천박하고 비열한 신들이 어찌 만분의 일이나마 보좌할 수 있겠습니까. 물리쳐 파면하소서.” 하였다.
무릇 다섯 차례나 아뢰어 임금의 전교가 더욱 엄하였으나, 선생의 말은 더욱 간절하고 강직하여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얼마 뒤에 상이 크게 뉘우치고 황랍을 도로 내려 보내라고 명하였다.
선생이 매양 입시할 때는 정성껏 아뢰는 말이 많았는데, 정승 노수신(盧守愼)이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모(李某 율곡(栗谷)을 지칭)는 경연에서 상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너무 많이 하여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되는데, 내가 중지시키려 하여도 서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중지시킬 수 없었다.” 하였다. 선생이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자기는 말하지 못하면서 또한 다른 사람의 말을 중지시키려 하다니, 평생 동안 글을 읽고서 무슨 소견으로 이런 말을 하는가.” 하였다.
다른 날 입시하였다가 선생이 스스로 아뢰기를, “병이 많아 벼슬을 할 수 없으니 물러가 조섭하게 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이 그러하다면 또한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은거하는 것이 가장 좋다. 고시(古詩)에 ‘귀를 씻어 인간사를 듣지 않고서, 푸른 소나무와 벗이 되고 사슴과 친구가 된다.[洗耳人間事不聞 靑松爲友鹿爲羣]’ 하였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하였다. 선생이 대답하기를, “신의 형편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전 은사(隱士)는 임금과 만난 적이 없어 임금과 신하의 친분이 없기 때문에 서로 잊을 수 있었으며, 또 몸이 건강하고 병이 없어서 좋은 산수(山水)에 제멋대로 노닐 수 있었지만, 신은 은혜를 너무 많이 입었기 때문에 아무리 시골에 있더라도, 마음은 성상을 향해 있고 또 몸은 병이 있으니 은거한들 무슨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다만 하는 일 없이 녹만 먹기가 어려운 까닭에 물러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서 병으로 사양하여 면직되었다. 조금 있다가 우부승지를 제수하였으나, 다시 병으로 사양하고 파주(坡州)로 내려갔으며, 승지와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0월에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선생은 “외직(外職)은 임금 가까이 모시는 것과는 다르고 또 감사는 백성들의 한 가지 고통이라도 구제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취임하고, 백성의 어려움을 상소로써 아뢰어 폐해가 심한 정사를 개혁하였으며, 오로지 학교를 세우고 교화를 숭상하며 백성의 고통을 덜어 주고 군정(軍政)을 닦으며 착한 사람을 표창하고 악한 사람을 벌하는 것에만 힘쓰니, 선비와 백성들은 감복하여 좋아하고 탐관오리나 교활한 아전은 두려워하여 꼼짝 못하였다.


 

[주D-001]장공예(張公藝) : 당(唐)나라 수장(壽張) 사람으로, 9대가 한집에 동거하여 우애가 돈독한 집안으로 알려졌다. 고종(高宗)이 태산(泰山)에 봉선(封禪)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집을 방문하고 9대가 동거하는 요결(要訣)을 묻자, 인(忍) 자 100여 개를 써 올리니, 고종이 크게 칭찬하였다. 《舊唐書 卷188 孝友列傳》
[주D-002]주일무적(主一無適) : 한 가지 일에 정신을 집중시켜 잡념이 없게 하는 것을 경(敬) 공부라고 하는데, 정주학(程朱學)에서는 이를 학문의 기본으로 삼았다.
[주D-003]성학십도(聖學十圖) : 1568년(선조1)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성학(聖學)의 개요를 그림으로 설명하여 선조에게 올린 것이다. 십도(十圖)는 첫째는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을 가감한 태극도(太極圖), 두 번째는 횡거(橫渠)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을 근거한 서명도(西銘圖), 세 번째는 주자(朱子)의 《소학(小學)》을 체계화한 소학도(小學圖), 네 번째는 《대학(大學)》을 체계화한 대학도(大學圖), 다섯 번째는 주자의 백록동서원 동규(白鹿洞書院洞規)를 근거한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여섯 번째는 임은(林恩) 정복심(程復心)의 것을 수정한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일곱 번째는 인(仁)을 설명한 인설도(仁說圖), 여덟 번째는 정복심의 것을 수정한 심학도(心學圖), 아홉 번째는 주자의 경재잠(敬齋箴)을 근거한 경재잠도(敬齋箴圖), 열 번째는 남당(南塘)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근거한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이 중에 심통성정도와 심학도에 대하여 이견(異見)을 제시하였다.
[주D-004]논사(論思)의 책임 : 학문을 강론하고 사리를 논변하며, 계책을 사려(思慮)하는 책임을 말한다. 이는 경연(經筵)에서 경서의 강론을 맡은 관원이 담당한다.
[주D-005]잡패(雜霸) : 정치에 정도(正道)만을 쓰지 않고 왕도(王道)와 패도(霸道)를 혼용하는 것을 일컫는다. 《한서(漢書)》 원제기(元帝紀)에, “태자인 원제가 유신(儒臣)을 등용할 것을 청하자, 선제(宣帝)는 ‘우리나라는 본래부터 패도와 왕도를 섞어 썼으니, 어찌 순전히 덕교(德敎)만을 써서 옛날 주(周)나라 정사와 같게 하겠는가.’ 했다.”라고 하였다.
[주D-006]위훈(僞勳) : 거짓 공신이란 뜻으로, 을사년(1545)에 인종(仁宗)이 승하하고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명종의 생모인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등에 업은 윤원형(尹元衡) 등이 인종의 외숙인 윤임(尹任)과 그와 가까운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을 모함하여 사화(士禍)를 일으키고, 이에 가담한 정순붕(鄭順朋), 이기(李芑), 임백령(林百齡), 허자(許磁) 등 29명을 추성위사 협찬홍제보익 공신(推誠衛社協贊弘濟保翼功臣)으로 녹훈(錄勳)한 사실을 가리킨다. 이들은 뒤에 관직과 녹권(錄券)을 모두 삭탈당하였다.
[주D-007]을사사화와 …… 자 :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에 발생한 을사사화(乙巳士禍)와 기유년(1549, 명종4)에 이약빙(李若氷)의 아들 이홍남(李洪南)이 그의 아우 이홍윤(李洪胤)을 모함하여 일으킨 옥사(獄事)에 연루된 자들을 가리킨다. 이홍윤은 윤임(尹任)의 사위로 충주(忠州)에 있었는데, 윤원형 일파에 의하여 윤임 등이 처형되고 부친 역시 양재역 벽서(良才驛壁書) 사건에 연루되어 죽자, 불평하는 말을 자주 하였다. 이에 동생과 사이가 나쁜 이홍남이 고발하자, 이기(李芑) 등은 이홍윤이 윤임의 사위라는 이유로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이 사건을 확대하여 충주의 한 면민(面民)이 거의 다 연루되어 억울하게 처형되고, 충주는 유신현(維新縣)으로 강등되기까지 하였다.
[주D-008]기묘년(己卯年)의 풍습 : 조선조 중종(中宗) 기묘년(1519) 연간에 신진 사류(新進士類)들이 급속한 개혁을 주장하다가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 훈구파(勳舊派)들에게 모함당하여 실패한 일을 가리킨다. 이 때문에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의 명현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니, 이를 기묘사화(己卯士禍)라 칭하게 되었다.
[주D-009]연은전(延恩殿) : 경복궁 안에 있는 덕종(德宗)의 위패 봉안소이다. 성종 2년(1471)에 성종은 그의 생부인 덕종을 추존하여 문소전에 모시려 하였으나, 원래 문소전은 태조와 그 이하 4대만을 봉안하는 사당이었으므로, 덕종을 봉안하면 예종이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연은전을 따로 건립하였는데, 그후 인종이 승하하자, 명종 2년(1547)에 다시 인종의 향사 문제가 대두되어 논란을 거듭한 끝에 결국 연은전에 모시게 하였다가, 선조 2년(1569) 문소전에 후전(後殿) 1칸을 짓고 인종의 위패를 옮겨 봉안하였다.
[주D-010]문소전(文昭殿) : 원래는 이 태조(李太祖)의 비(妃)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를 모셔 인소전(仁昭殿)이라 했던 것을, 태종 8년(1408) 문소전으로 개칭하였는데, 세종 15년(1433)에 태조와 태종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후 다시 세종 이하 3왕을 모시게 되었다.
[주D-011]관저(關雎)와 인지(麟趾)의 뜻 : 모두 《시경(詩經)》 주남(周南)의 편명인데, 관저는 후비(后妃)의 덕을 읊은 것으로 부부간에 화합하여 가정이 원만함을 표현하였고, 인지는 어진 공자(公子)를 찬양한 것으로 모두 왕자(王者)의 덕화(德化)를 상징한다. 《시경》 주남의 인지편 서(序)에, “인지의 교화는 관저의 효응(效應)이다. 관저의 교화가 행해지면 천하에 비례(非禮)를 범하는 자가 없어, 비록 쇠퇴한 세상의 공자일지라도 인지의 시에서 읊은 것처럼 신후(信厚)하게 된다.” 하였다.
[주D-012]헌관(憲官) : 사헌부의 관원을 말한다. 조선조에서는 과거에 급제하지 않은 자라도 학행(學行)이 뛰어나면 사헌부의 장령(掌令)ㆍ지평(持平) 등을 제수하였는데, 이를 남대(南臺)라 칭하였다.
[주D-013]태갑(太甲) : 탕왕(湯王)의 손자로 탕왕이 죽자 즉위하였는데, 아형(阿衡)인 이윤(伊尹)의 가르침을 듣지 않고 방탕한 행실을 하다가 이윤에게 축출되어 탕왕의 묘소가 있는 동(桐) 땅에 3년 동안 유폐되었다. 태갑이 이곳에서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행실을 닦으며 이윤의 훈계를 따르자, 이윤은 다시 그를 복위시키고 정권을 물려주었다.
[주D-014]진 도공(晉悼公) :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군주로 양공(襄公) 환(歡)의 증손이며, 문공(文公) 중이(重耳)의 현손(玄孫)인데 이름은 주(周)이다. 여공(厲公)을 시해한 권신(權臣) 난서(欒書) 등의 추대로 옹립되었는데, 시역에 가담한 역신(逆臣) 7명을 축출하고 군권(君權)을 장악하였으며,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여 강대국인 초(楚)나라를 물리치고 다시 제후국의 패권을 차지하였다.
[주D-015]송 신종(宋神宗) : 북송(北宋)의 6대 황제로 이름은 조욱(趙頊)이다. 영종(英宗)의 태자로 1067년 즉위한 다음, 왕안석(王安石)을 등용하여 신법(新法)을 시행하여 새로운 정치를 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신법에 반대하는 사마광(司馬光) 등의 원로들을 물리치고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송나라는 결국 쇠퇴하고 말았다.
[주D-016]왕척직심(枉尺直尋) : 한 자[尺]를 굽혀서 여덟 자[尋]를 편다는 뜻으로, 한 번 지조를 굽혀 훌륭한 공업을 많이 이루는 것을 비유한다. 그러나 맹자는 “자기 몸을 굽히고 남을 바르게 하는 법은 없다.” 하여, 이를 비판하였다. 《孟子 滕文公下》
[주D-017]가의(賈誼) : 서한(西漢) 때 낙양(洛陽) 사람으로 시문에 뛰어나고 제자백가에 정통하여 20세에 문제(文帝)에게 발탁되어 박사(博士)가 되었다가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승진되었다. 정삭(正朔)과 복색(服色)을 고치고 법률을 제정하며 예악(禮樂)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주발(周勃) 등 당시 고관들의 시기로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로 좌천되었다. 4년 뒤 복귀하여 문제의 막내아들인 양 회왕(梁懷王)의 태부(太傅)가 되었으나 왕이 낙마하여 급서하자 이를 애도한 나머지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주D-018]공안(貢案) : 공물(貢物)의 품목과 수량을 기록한 문부(文簿)로 공적(貢籍)이라고도 한다.
[주D-019]계옥(啓沃) : 신하가 자기의 생각을 충심으로 임금에게 진언하여 선도(善導)하는 것을 가리킨다. 은(殷)의 고종(高宗)인 무정(武丁)이 명재상인 부열(傅說)에게 “네 마음을 열어서 내 마음에 쏟아 달라.[啓乃心 沃朕心]” 한 데서 유래하였다. 《書經 說命上》
[주D-020]궁리(窮理)를 …… 두었는데 : 궁리는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연구하는 것으로 지공부(知工夫)에 해당하며, 거경(居敬)은 몸과 마음을 공경히 갖는 것으로 주로 행공부(行工夫)에 해당한다. 그러나 경건한 마음의 자세가 없이는 지공부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궁리에도 거경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주자는 “거경은 공부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지공부에도 필요하며, 공부의 종결이라 할 수 있는 행공부에도 필요하다.” 하였다.
[주D-021]당 명황(唐明皇) : 당나라 6대 황제인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를 말한다. 당시 재상으로 있던 한휴(韓休)는 직간(直諫)을 좋아하여 현종의 조그마한 잘못이라도 반드시 간하였다. 좌우에 있는 신하들이 “한휴가 재상이 된 후로 폐하께서 전보다 크게 수척해지셨습니다. 어찌하여 그를 축출하지 않습니까?” 하자, 현종은 탄식하며 “내 용모는 비록 수척해졌으나 천하는 반드시 살찌게 될 것이다.” 하였다. 그후 현종은 끝내 간신 이임보(李林甫)를 등용하고 양 귀비(楊貴妃)에게 빠져 천하가 크게 혼란하였으며,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숙종(肅宗)에게 선위(禪位)하고 말았다.
[주D-022]옥루(屋漏) : 방 안의 서북쪽 귀퉁이로 신주(神主)를 모셔 두는 곳이니, 곧 사람이 보지 않는 곳을 가리킨다. 《시경》 대아(大雅) 억(抑)에, “거의 옥루에 부끄럽지 않게 한다.[尙不愧于屋漏]” 하였는데, 이는 타인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경건함을 지켜 마음속에 부끄럽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주D-023]양 무제(梁武帝)가 …… 하더니 : 남북조(南北朝) 시대 양(梁)의 초대 황제인 고조(高祖) 소연(蕭衍)을 말한다. 549년 무제는 적신(賊臣) 후경(侯景)의 강압으로 유폐되어 음식도 마음대로 먹지 못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화병으로 정거전(淨居殿)에 누워 있으면서 입이 써서 꿀물을 찾았으나 끝내 얻어먹지 못하고 죽었다.
[주D-024]위(衛)나라의 …… 감시한 것 : 주(周)나라의 폭군인 여왕(厲王)은 자신의 실정(失政)을 비방하는 자들을 처벌하기 위하여 위나라의 무당을 데려다가 비방하는 자를 감독하는 책임자로 임명하고 실정을 비방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처형하게 하였다. 그 결과 주나라는 3년 만에 대혼란에 빠졌으며, 여왕은 쫓겨나고 말았다. 《國語 卷1 周語上》
[주D-025]주운(朱雲) : 한 성제(漢成帝) 때의 직간(直諫)하는 신하로 당시 성제의 사부(師傅)로 있던 장우(張禹)가 간신들을 탄핵하지 않자, 괴리 영(槐里令)으로 있던 주운은 상서(上書)하여 “상방검(尙方劍)을 빌려 주시면 간신 한 사람을 목 베겠습니다.” 하였다. 성제가 그를 불러 “간신이 누구인가?” 하고 묻자, 옆에 있는 장우를 가리켰다. 이 때문에 성제의 노여움을 사서 참형에 처해지게 되었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주D-026]급암(汲黯) : 한 무제(漢武帝) 때의 직간하는 신하로 당시 승상(丞相)으로 있던 공손홍(公孫弘)의 위선(僞善)을 논박하였으며 무제의 잘못을 여러 번 극간(極諫)하였다.

 

 

 

사계전서 제7권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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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장(行狀)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 행장 하(下)


을해년(1575, 선조8) 봄에 병으로 체직되고 파주(坡州)로 내려갔는데, 곧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다시 병으로 사양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때마침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상이 났으므로 선생은 병든 몸으로 가마에 실려 서울에 들어와 세 번이나 사직하였으나 또 허락하지 않았다. 지평(持平) 민순(閔純)이 “졸곡(卒哭) 뒤에는 송 효종(宋孝宗)이 하던 예(例)대로 흰옷에 흰 갓을 쓰고 정사를 보도록 하소서.” 하니, 이에 2품 이상과 삼사(三司)의 장관을 모아 놓고 정의(廷議)가 열렸는데, 2품 이상은 모두 말하기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는 선대 조정에서 오래전에 만들어 놓은 것이니, 경솔히 고칠 수 없습니다.” 하였고, 대사헌 유희춘(柳希春) 또한 “선대 조정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임금의 복 입는 것은 사대부와 다릅니다.” 하였다. 이때 선군자(先君子)가 대사간으로 계셨는데 선생과 의견이 일치되어 “상례가 옛날과 같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니, 이 기회에 마땅히 변통하여 근고(近古)의 예대로 해야 합니다.”라고 적극 주장하였다.
선생은 고례(古禮)를 들어 아뢰기를, “반드시 선왕의 예에 다 맞게 하려 하면 당초에 임금이나 신하들이 모두 최질(衰絰)을 갖추어 《의례(儀禮)》의 제도와 같이 하고, 따로 포모(布帽)와 포단령(布團領), 포대(布帶)를 만들어 시사복(視事服)으로 삼았어야 하는데, 지금 이미 어긋나서 뒤미쳐 회복할 수 없게 되었으니, 차라리 송 효종의 제도대로 하는 것이 고례에 가깝습니다. 검은 갓[玄冠]에 검은 띠[烏帶]를 두르는 제도로 말한다면 송 고종(宋高宗) 때에 나점(羅點)이 건의하여 시행한 것입니다. 그때에는 상례의 법도가 무너져서 역월(易月) 뒤에는 순전히 길복(吉服)을 착용하였기 때문에 나점의 이 의논은 아주 안 입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었습니다. 주자(朱子)의 군신복의(君臣服議)에 자세히 변론해 놓았는데, 어째서 주자의 말을 따르지 않고 나점의 말에만 얽매인단 말입니까. 《국조오례의》를 만들 때에는 예를 잘 아는 신하가 없어서 선왕을 올바른 예로 인도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오늘에 와서 또다시 잘못을 범하려 하십니까.” 하였다. 좌의정 박순(朴淳)과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이 의계(議啓)하여 흰옷에 흰 갓 쓰는 제도를 따를 것을 청하였다.
선생은 지난해에 대사간으로서 아뢴 말이 임금의 뜻에 맞지 않으므로 물러갔었는데, 이때 다시 벼슬을 하니, 제공(諸公)들이 대부분 그의 출처(出處)를 의심하였다. 우계 선생(牛溪先生) 또한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숙헌(叔獻) 같은 출처는 옛날에 없었다.” 하니, 선생은 듣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출처는 실로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애당초 벼슬할 생각이 없었다. 산릉(山陵)의 일이나 마친 뒤에 물러가려 하였는데, 마침 성상께서 여러 차례 휴가(休暇)를 주시고 직책을 바꾸지 않으며, 또 성상께서 거상(居喪) 중에 착한 마음이 생겨서 그전과 다르신 까닭으로, 아직 그대로 있으면서 정성을 쌓아 행여 만분의 일이라도 잘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군자가 과감히 이 세상을 등지려고 하면 그만이지만, 만일 이 세상에 뜻이 있다면 음(陰)이 막히고 양(陽)이 생기려는 이러한 때를 맞이하여 어찌 좋은 기회가 없겠는가.” 하였다.
상이 졸곡을 지낸 뒤에도 상선(常膳)을 회복하지 않자 삼공(三公)이 2품 이상을 거느리고 나아가 권도(權道)를 따를 것을 청하였다. 신하들이 물러가려 하자, 상은 선생을 불러오게 하여 이르기를, “부제학이 시골로 내려갔다가 그대로 감사가 되어 오랫동안 서로 보지 못하였다.” 하고는 부드러운 말로 격려하면서 황해도 백성들의 고통을 묻고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눈 뒤에 물러가게 하였다.
훗날 《서전(書傳)》을 강론하다가 긍구긍당(肯構肯堂)이란 대목에 이르러 선생이 아뢰기를, “지금 사람들은 긍구긍당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많아서 옛날 법을 꼭 지키는 것만 가지고 긍구긍당이라 하는데 이는 매우 옳지 않습니다. 그 아비가 그 터전을 마련했으면 그 아들이 그 제도에 따라 집을 지어야만 아비의 가업을 잘 계승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만일 그 터전만을 지킬 뿐 집을 짓지 않는다면 이는 긍구긍당이 아닙니다. 국가로 말하면, 조종(祖宗)이 창업할 때에 법도가 미비하였거나 혹은 세대가 변하여 개혁할 만한 것이 있으면 시의에 따라 적절히 마련해서 의리에 맞게 하는 것이 바로 조종의 뜻을 계승하고 조종의 사업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법을 지킬 줄만 알고 변통할 줄은 몰라서 그대로 폐습을 따르다가 점점 쇠퇴하게 되면 어찌 그것이 조종의 뜻을 계승하고 조종의 사업을 계승하는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이는 선생이 정치의 폐단을 고치려고 하였기 때문에 글을 읽다가 풍간(諷諫)한 것이었다.
이어 상에게 묻기를, “일찍이 전하께서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학문을 하고 싶으나 많은 일에 얽매여 틈이 없다.’ 하셨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이런 일이 진실로 있으셨습니까?” 하니, 상이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신이 이 말씀을 듣고 한편으로는 기뻐하였고 한편으로는 근심스러웠습니다. 기뻐한 것은 전하께서 학문에 뜻이 있는 것을 기뻐한 것이고, 근심한 것은 전하께서 학문의 이치를 자세히 알지 못하시는가 근심한 것입니다. 학문은 혼자 단정히 앉아서 종일 글만 읽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일상생활 속의 하는 일이 하나하나 이치에 맞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오직 그 이치에 맞고 맞지 않은 것을 스스로 알 수 없기 때문에 글을 읽어서 그 이치를 찾는 것입니다. 만일 글 읽는 것만을 학문이라 하고 날마다 하는 일이 이치에 합당한가를 찾아보지 않으신다면 어찌 학문이라 하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일상생활하시는 가운데 매사가 이치에 합당한가 깊이 찾아보시되 조금이라도 잘못이 없으면 이것이 곧 학문입니다. 전하께서는 타고난 자질이 훌륭하고 욕심이 적으니, 학문을 스스로 하지 않으시는 것이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6월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어제 전하께서 홍문관의 차자에 답하기를, ‘너무 고상한 의논을 하지 말라.’ 하셨는데, 만일 전하께서 겸사로 하신 말씀이라면 좋지만, 실제로 신들의 말을 고상한 의논이라 하신다면 이는 아무래도 종묘사직과 백성의 복이 아닌 듯합니다. 한 문제(漢文帝)가 삼대의 정치를 고상한 의논이라 여겼기 때문에 그 공렬(功烈)이 비루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를 어찌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어느 날 경연에서 상이 이르기를, “사서(四書)의 소주(小註)가 온당치 못한 곳이 많으니, 약간 삭제하고 개정하여 보기에 편리하게 하려고 하는데, 옥당(玉堂)에서 이 임무를 맡아야 한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이는 신의 학문으로 홀로 담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학문하는 선비라면 출신(出身) 여부를 묻지 말고 옥당에 참여시켜 같이 의논해서 삭제하고 개정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에 대신이 나로 하여금 성혼(成渾)을 불러 보라 하였고, 나 또한 보고 싶다. 다만 출신(出身)하지 않은 사람이 경연에 들어와 참여한 예(例)가 없으니, 비록 어진 사람을 불러와도 한 차례 만나 볼 뿐인데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진실로 큰일을 하려고 하시면 아무리 전례 없는 일이라도 변통해야 합니다. 옛날 법을 융통성 없이 지키면서 어찌 큰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학문하는 선비를 한직에 두어 돌아가면서 경연에 입시하게 한다면 진실한 덕을 이룩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다른 날 또 아뢰기를, “오늘날의 급선무는 무엇보다도 전하께서 학문을 더욱 힘써서 정치를 하는 근본으로 삼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어진 선비를 등용하여 같이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신이 일찍이 출신하지 않은 사람을 경연에 출입하게 하는 일로써 아뢰었는데도 전하께서 어려운 일이니 마땅히 다시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또 승지가 직접 들어가 아뢰는 것은 중묘조(中廟朝)에서 행했던 일이며, 성묘조(成廟朝)에서는 불시에 옥당에 입직(入直)한 신하를 불러 편전(便殿)에서 문답하였는데 이를 ‘독대(獨對)’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전례 또한 회복시켜야 합니다.” 하였다. 선생은 또 아뢰기를, “마땅히 품계를 초월하여 올려 주고 한 관직에 오래 있도록 하는 법을 써야 합니다. 세종(世宗)께서는 이 법으로 사람을 등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벼슬은 아침에 경질하고 저녁에 바꾸어 아이들 장난하듯 하니 모든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7월에 왕자궁(王子宮)의 종이 법을 범하여 사헌부 아전을 구타하고 왕자가 거처하는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이튿날 사헌부에서 급히 쫓아가 체포하니, 상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헌부의 아전이 왕자가 거처하는 집에 가서 난리를 피웠다.” 하고서 사헌부의 아전을 의금부에 가두도록 명하고, 전지(傳旨)를 내리기를, “사헌부에서 왕자의 집에 들어가 사람을 체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니, 사헌부에서 피혐(避嫌)하였다.
이때 선생은 상을 당하여 집에 있었는데, 그후 벼슬에 나온 다음 홀로 아뢰기를, “이 일은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모두 잘못하였습니다. 사헌부 아전의 일은 대관(臺官)이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닌데, 어떻게 왕자의 집에서 직접 잡아 오지 않은 것을 알아서 사실이 그렇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도 직접 보신 것은 아니고 다만 부녀자와 내시의 말만 들으신 것이니, 부녀자와 내시의 말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또 왕자궁의 노비들은 평소부터 버릇이 없다고 소문이 났으니, 마땅히 엄하게 단속해야 합니다. 후씨(侯氏)는 일개 부녀자이지만 오히려 자식을 가르치는 방법을 알아서 항상 말하기를, ‘남에게 굽히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고 남에게 뜻을 펴지 못하는 것은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하였는데, 전하께서 왕자에 대해서 남에게 뜻을 펴지 못하는 것을 어찌 걱정하시겠습니까.” 하였다.
그 뒤 경연에서 아뢰기를, “사람은 모두 어질 수도 없고 모두 어질지 못할 수도 없습니다. 어진 이는 임금의 시비가 분명하여 선비를 사랑하기를 바라지만, 어질지 못한 이는 임금의 시비가 분명하지 않아서 선비를 좋아하지 않기를 바라게 마련이니, 이는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얼마 전에 전하께서 대신을 자주 접견하시고 선비를 좋아하셔서 또한 불시에 불러 보시는 전교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면서 훌륭한 정치가 이루어질 것을 바랐는데, 근일에 와서는 사세가 별안간 변하여 선비를 불러 보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경연 또한 드문드문 여시니, 여염집의 불선(不善)한 자들이 모두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어진 이는 근심하고 어질지 못한 이는 좋아하는 것이 어찌 좋은 시대의 일이겠습니까.” 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근일에 사헌부 아전의 한 가지 일 때문에 전하께서 법을 지키고 뜻을 거스르는 신하를 싫어하시는데, 예로부터 아첨하고 달라붙는 자는 뒤에 반드시 임금을 버렸으며, 정도를 지키면서 아부하지 않은 자는 뒤에 반드시 충성을 다하였으니, 주창(周昌)의 일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창이 조정에서 간쟁할 때에는 몹시 강경하여 조왕(趙王)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뒤에 조왕의 정승이 되어 충성을 다하여 보호하였습니다. 여후(呂后)는 조왕을 불러 가지 못하고 먼저 주창을 부른 뒤에야 비로소 조왕을 불러 갔습니다. 오직 평소에 정도를 지키는 절개가 있었기 때문에 훗날 보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뜻은 전하께서만 아실 게 아니라 비빈(妃嬪)들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때 허엽(許曄)이 대사간이 되고 김효원(金孝元)이 사간이 되었는데, “좌의정 박순(朴淳)이 옥사를 맡아 다스릴 때에 체통을 잃었다.” 하여 추고(推考)할 것을 계청하니, 박순이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이에 양사(兩司)의 의논이 서로 일치되었는데, 정언 조원(趙瑗)만이 선군자(先君子)와 더불어 대신의 추고를 청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이때 선군자는 대사헌으로 계셨는데, 이윽고 “허엽이 죽은 죄인과 가까운 친족으로서 너무 지나친 주장을 했다.”고 논박하니, 양사가 피혐(避嫌)하여 사직하였으므로 홍문관에서 그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선생이 동료들에게 묻기를, “이 일을 어떻게 해야 좋겠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만일 양사를 갈아치우면 언로(言路)에 방해가 된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마땅히 그 일의 잘잘못을 따져 볼 뿐이다. 간관(諫官)의 잘못을 옥당(玉堂)이 바로잡아 준다고 하여 무엇이 언로에 방해가 되겠는가. 대신에게 죄가 있으면 갈아치워도 좋고 파직시켜도 좋으며, 멀리 추방하거나 귀양 보내거나 죽이는 것까지 해도 좋다. 언관(言官)은 일에 따라 논척하니 무엇을 회피할 것이 있겠는가마는 추고만은 청해서는 안 된다. 이른바 추고란 유사(有司)가 따져 물어 조율(照律)하는 것이니, 대신을 대우하는 예가 아니다. 옛날 한(漢)나라 신하 가운데 사례 교위(司隸校尉)로 하여금 삼공(三公)을 감독하고 사찰하게 할 것을 청한 자가 있었는데, 논의하는 자들이 잘못이라 하여 말하기를, ‘유사로 하여금 삼공을 감독하고 사찰하게 할 수는 없다.’ 하였다. 지금 대신의 추고를 요청한 것은 바로 유사가 삼공을 감독하고 사찰하게 하는 것이다. 사간원의 계(啓)가 잘못되었는데, 사헌부에서 덩달아 부화뇌동하였으니 모두 체직해야 한다. 오직 김 대헌(金大憲 김계휘(金繼輝))과 조 정언(趙正言 조원(趙瑗))만은 그대로 벼슬을 할 수 있다.” 하였다. 동료들의 의논이 같지 않았는데, 선생이 강력히 변론하여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의논을 통일시켰다. 저작(著作) 홍적(洪迪)과 이경중(李敬中) 등이 말하기를, “허 대간(許大諫 허엽(許曄))이 어찌 자기 친족이라고 지나친 논의를 하였겠는가. 김 대헌 또한 체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이에 차자를 올려 양사를 모두 체직하고 조원(趙瑗)만 벼슬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보다 앞서 윤원형(尹元衡)이 한창 세력이 있을 때, 심의겸(沈義謙)이 사인(舍人)이 되어 일 때문에 그 집에 갔었는데,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李肇敏)이 심의겸과 서로 아는 처지여서 서실(書室)로 데리고 들어갔다. 심의겸이 서실에 침구가 많은 것을 보고 이것들은 누구의 침구인가 하고 차례차례 물으니, 이조민이 묻는 대로 대답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김효원(金孝元)의 침구였다. 김효원은 당시 과거 급제는 못하였으나 글 잘한다는 이름이 있었다. 심의겸은 마음속으로 비루하게 여기기를, ‘어찌 문학한다는 선비가 세도가의 자제와 어울려 논단 말인가. 이 사람은 결코 지조가 굳은 선비가 아니다.’ 하였다.
그 뒤에 김효원이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명성이 날마다 높아가니, 조정의 선비들이 다투어 칭찬하였다. 오건(吳健)이 김효원을 이조 정랑으로 추천하려 하였으나, 심의겸이 윤원형의 집에서 본 일을 가지고 번번이 저지하였기 때문에, 김효원이 낭료(郞僚)로 있은 지 6, 7년 만에야 비로소 이조 정랑이 되었다. 계해년 연간에 이량(李樑)이 한창 선비들을 잡아들일 때, 심의겸이 구호에 힘을 썼기 때문에 선배들은 심의겸을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이가 많았는데, 김효원만은 심의겸을 마음속으로 미워하여 항상 남에게 말하기를, “심의겸은 미련하고 기질이 거칠어서 일을 맡길 수 없다.” 하니, 선배들은 모두 김효원이 지난날의 감정을 가지고 보복하려는 생각이 있는가 의심하여 어떤 이는 김효원을 소인이라 하였는데, 김효원의 무리들 또한 모두 심의겸을 배척하여 정도를 해치는 사람이라 하였다. 이 때문에 선후배가 서로 화합하지 못하여 당파가 갈리는 조짐이 있었다.
허엽(許曄)은 비록 선배였으나 김효원을 중히 여기고 인정하였기 때문에 나이 젊은 사람들이 그를 높여 우두머리로 삼았고, 박순(朴淳)은 맑고 높은 명망이 있었으나 선배였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심의겸 당파로 지목하였다. 이때 허엽과 김효원이 박순을 공격한 것은 실제는 사의(私意)에서 나온 것인데 나이 젊은 사람들이 모두 김효원의 무리였기 때문에 그 의논에 부화뇌동하여 이렇게 되기에 이른 것이다.
9월에 대사간 정지연(鄭芝衍)이 선생에게 묻기를, “사림의 의논이 지리멸렬하니 이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것은 전조(銓曹)에 적임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무마시켜 진정시켜야 하며 끝내 논박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박근원(朴謹元)의 소행은 여러 사람의 마음에 만족스럽지 못하니, 그는 계(啓)를 올려 체직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정지연은 선생의 말을 깊이 수긍하여 박근원만 논박하려 하였으나, 동료들이 전조의 관원을 모두 논박하고자 하여 그 의논이 매우 강경하니, 정지연은 이를 억제하지 못하고 참판(參判) 이하를 모두 체직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선생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으려는 데 마음이 간절하여, 경전과 사서의 중요한 말로서 학문과 정사에 절실한 것들을 뽑아 내어 같은 것끼리 모으고 차례를 나누되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으로 순서를 정하고 책 이름을 《성학집요(聖學輯要)》라 하여 차자(箚子)와 함께 올렸다.
그 이튿날 상이 경연에 나와 선생에게 이르기를, “이 글은 몹시 절실하고 긴요하다. 이것은 부제학의 말이 아니고 곧 성현의 말이니, 치도(治道)에 큰 도움이 되겠다. 다만 나같이 불민한 사람이 실행하지 못할까 걱정이 된다.” 하니, 선생이 일어났다가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전하께서 매양 이런 분부가 있으시니, 신으로서는 지극히 민망하게 생각합니다. 전하께서는 자질이 탁월하시니, 성인의 학문을 하지 않으시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원컨대, 뒤로 물러나지 마시고 뜻을 독실히 가지시고 스스로 분발하여 진실한 덕을 이룩하소서. 옛날 송 신종(宋神宗)이 이르기를, ‘이것은 요순의 일인데 짐(朕)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니, 명도(明道 정호(程顥))가 근심스레 아뢰기를, ‘폐하의 이 말씀은 종묘사직과 신하와 백성들의 복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전하의 말씀이 이와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10월에 선생이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으로 조정이 편안치 않은 것을 걱정하여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에게 말하기를, “이 두 사람은 모두 선비로서 흑과 백, 사(邪)와 정(正)이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끝끝내 시끄럽게 떠들어 대어 근거 없는 말이 서로 얽혀 있으니, 대신이 진계(陳啓)하여 두 사람을 모두 외직으로 내보내면 아마 진정이 될 것입니다.” 하니, 우의정이 그 말을 옳게 여겨 경연에서 아뢰었다.
선생은 나아가 아뢰기를, “이 사람들은 반드시 깊은 혐의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두 사람의 친구들이 각각 소문을 퍼뜨려 결국 시끄럽게 된 것입니다. 대신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진정시키고자 한 때문입니다. 오늘날 조정에는 비록 드러난 간신은 없으나 또한 어찌 반드시 소인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소인들이 당파 싸움을 한다고 지목하여 양쪽을 모두 다스릴 계획을 꾸민다면 반드시 사림의 화(禍)가 일어날 것이니, 이 점을 모르셔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이에 특지(特旨)를 내려 김효원을 부령 부사(富寧府使)로, 심의겸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삼으니, 김효원의 무리들이 두려워하여 어쩔 줄 몰랐다. 또 김효원이 병으로 변방에 나갈 수 없게 되자, 선생이 홀로 아뢰기를, “김효원을 외직으로 보내야 한다는 말은 대신의 생각이 신의 생각과 일치될 뿐만 아니라 진실로 사림의 공론입니다. 그러나 김효원은 병이 몹시 위중하니, 이런 근력을 가지고 북쪽 변방의 책임을 맡는다면 죽지 않는 것만도 다행인데, 어떻게 일을 계획하여 변방을 튼튼하게 하겠습니까. 또 대신의 생각은 다만 진정시키려는 계책일 뿐, 김효원이 죄가 있다 하여 내쫓자는 것은 아니니, 내지(內地)의 궁벽한 고을을 김효원에게 맡겨서, 안으로는 군신의 의를 온전하게 하시고 밖으로는 변방의 방비를 튼튼하게 하소서.” 하였다.
그 뒤 인대(引對)하던 날 다시 김효원의 말을 끄집어 내니 이에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바꾸었다. 선생은 이어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전일 전하의 비답에 온당치 못한 곳이 있는데, ‘신하로서 녹봉(祿俸)을 먹으면 마땅히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말씀은 신하가 말한다면 옳으나, 임금으로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임금은 신하의 재주와 역량을 보아서 그가 감당할 만한 벼슬을 가려 주어야 하고, 신하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시기를 당하여 이로써 평탄한 데나 험난한 데나 한결같은 절개로 나아가야 합니다. 많은 녹봉과 깊은 은혜는 진실로 신하의 마음을 묶어 둘 수 있으나 신하 된 사람은 마땅히 직분과 의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만일 은혜와 녹봉만을 생각하여 충성을 한다면 다른 사람도 반드시 은혜와 녹봉을 가지고 유인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선생이 또 아뢰기를, “옛날에는 학문이라는 명칭이 없었고 일상생활하는 인륜의 도리가 모두 사람마다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이어서 별도로 뚜렷한 명목(名目)이 없었습니다. 군자는 단지 그 마땅히 해야 할 일만 하는 것뿐이었는데, 후세에는 도학(道學)이 밝지 않고 인륜도 어두워져서 이에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행하는 것을 학문이라 이름하였습니다. 학문이라는 이름이 생긴 후로는 도리어 세상 사람들의 지목을 받게 되어 털을 불어 가며 흠집을 찾아 내듯이 갖은 잘못을 찾아 내어 혹은 위학(僞學)이라 지목하기도 하여,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꺼리고 숨기게 함으로써 학문한다는 이름을 피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후세의 큰 걱정거리입니다. 임금은 모름지기 학문을 주장하여 속류(俗流)들로 하여금 비방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선생에게 이르기를, “내가 지나간 역사를 살펴보니, 시대가 점점 변천하여 하(夏)나라가 당(唐)ㆍ우(虞)만 못하고 상(商)나라가 하나라만 못하며 주(周)나라가 상나라만 못하니, 오늘의 시대에는 진실로 삼대의 정치를 회복하기 어렵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세도(世道)가 참으로 점점 낮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옛 선왕의 도를 실행한다면 어찌 옛날로 돌아갈 이치가 없겠습니까. 정자(程子)의 말에, ‘순 임금은 미칠 수 없지만 삼대는 결단코 회복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대개 당ㆍ우 때는 억지로 하는 것 없이 저절로 화(化)하였기 때문에 후세에서 따라갈 수 없지만, 삼대의 정치로 말하면 진실로 그 도를 실행한다면 반드시 회복할 수 있는데 다만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3000년 동안에 그 일을 하고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볼 수 없습니다.” 하였다.
11월에 야대(夜對)하여 아뢰기를,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은 털끝만 한 틈도 없습니다. 이 두 가지가 처음에는 두 근본이 아니어서, 발(發)하지 않았을 때에는 혼연(渾然)한 천리일 뿐인데, 매양 동(動)하는 곳에서 선과 악이 나뉘어지니, 마음이 움직여야만 비로소 인욕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동하는 것은 기(氣)를 연유한 것이니, 기에 맑고 혼탁함이 있기 때문에 선과 악이 나누어지는 것이고, 천리와 인욕이 애초부터 마음속에 나란히 서 있는 것은 아니다.”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전하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천리와 인욕이 애당초 두 근본이 아니지만, 선악으로 나누어진 뒤에는 한계가 매우 분명하여 천리가 아니면 인욕이고, 인욕이 아니면 천리여서 천리도 아니고 인욕도 아닌 것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행동이 설령 선하다 할지라도 명예를 구하는 마음이 있으면 또한 천리라고 할 수 없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마음속으로는 명예를 구하면서 겉으로 선한 척하려 하면 이 또한 인욕일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천승(千乘)의 나라를 사양할 수 있지만 밥 한 그릇과 국 한 그릇에도 그 감정이 얼굴에 나타나니, 그 근본이 없는 것이 이와 같다. 또 이(利)를 좋아하는 사람은 사람을 속이지 못하지만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사람을 잘 속이니 그 폐단이 크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전하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다만 선을 하는 자와 명예를 좋아하는 자의 분별이 매우 어렵습니다. 만일 선을 하는 자를 보고 문득 그가 명예를 좋아한다고 의심하면 착한 자를 좋아하는 실상이 없게 되니, 이것을 모르셔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얼마 있다가 병으로 벼슬을 사양하니, 체직하고 서반(西班)을 제수하였다.
병자년(1576, 선조9)에 선생이 부제학에서 체직되자, 사암(思菴) 박순(朴淳)이 항상 경연에서 “그는 어질고 또 재주가 있어서 쓸 만한 사람입니다.”라고 천거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사람은 과격하고 또 나를 섬기려 하지 않으니, 내가 어떻게 억지로 붙잡아 두겠는가. 옛날부터 물러가는 것을 허락하여 그 뜻을 이루게 한 일이 많았다. 가의(賈誼)는 글을 읽어서 말은 잘했으나 실제로 쓸 만한 재주가 없었다. 한 문제(漢文帝)가 가의를 쓰지 않은 것은 참으로 본 바가 있어서였다.”고 하였다.
김효원이 외직으로 나간 뒤에 조정의 의논이 곧 과격해져서 그의 죄를 크게 다스리려고 하였다. 선생이 힘을 다해 중지시키고 조화하여 진정시키려 하였는데, 선배들은 선생이 김효원을 공격하지 않는다 원망하고, 후배들은 선생이 김효원을 쓰지 않는다 원망하여, 그 논의가 두 갈래로 나누어져 모두 선생만 잘못했다고 하였다.
선생은 당초에 동서(東西)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인재를 보합(保合)하여 오직 훌륭한 사람만 가려 쓰려 하였는데, 동인(東人)들은 도리어 선생을 가리켜 서인(西人)을 주장한다 하여 반드시 제거하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선생에게 말하기를, “천하에는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법이 없는데, 공이 요즘의 일에 대하여 시비를 가리지 않고 둘 다 온전히 하려고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심의겸과 김효원의 일은 국가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끼리 서로 알력이 생겨 결국 조정이 편안치 못하게까지 된 것이니, 참으로 둘 다 그른 것이다. 그러나 둘이 다 잘못하였어도 그들은 똑같이 선비들이니, 마땅히 화해시켜 융화시키는 것이 옳다. 반드시 이쪽은 옳고 저쪽은 그르다고 한다면 서로 시비하는 말과 서로 간의 알력을 어느 세월에 끝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선생은 위로는 임금의 총애를 받지 못하고 아래로는 동료나 벗들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으므로 마침내 물러갈 뜻을 결정하였다. 선비들은 선생이 물러가려는 것을 짐작하고 많이 와서 작별하였는데, 동인과 서인이 뒤섞여 앉아 있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지금 결론을 내려 말하려 하니 여러분들은 잘 들어보시오. 권간(權奸)들이 조정을 어지럽힌 지 오래인데 그들을 숙청하여 선비들이 기를 펼 수 있게 한 것은 어찌 방숙(方叔 심의겸)과 여러 선배의 공이 아니겠소. 인백(仁伯 김효원)이 만일 나랏일을 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거실(巨室)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하는데, 선배들을 배척하고 억눌러서 선배들을 격분시켜 사림(士林)들이 서로 대립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인백의 잘못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공론이 그를 제재하여 외관(外官)으로 나가게 하였으니 이미 중도를 얻었는데, 오히려 너무 심하게 미워하고 너무 지나치게 공격하니, 이것은 선배들의 잘못입니다. 이와 같이 판단을 내린다면 그 실정에 알맞을 것입니다.” 하니, 모두 말하기를, “이 말은 참으로 공정한 논의입니다.” 하였다.
3월에 벼슬을 내놓고 파주로 내려갔다. 우부승지, 대사간, 이조 참의, 전라 감사, 병조 참의 등 여러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선생은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정축년(1577, 선조10)에 해주(海州)로 내려갔는데, 선생은 일찍이 장공예(張公藝)가 동거(同居)하던 일을 사모하다가, 이때에 비로소 사당을 세우고 거처할 집을 짓고는 큰형수 곽씨(郭氏)에게 청하여 종가(宗家)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오도록 한 뒤 형제와 자질(子姪)을 모두 모아 놓고 한 집에 살아 평소의 뜻을 이루었다. 대사간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때 상이 몸소 대원군(大院君)의 사당에 제사 지내려 하니,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예(禮)에, 사가(私家)의 사당에 제사 지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누가 이런 의논을 하였는가?” 하고 의금부의 옥에 내려 국문하려 하였는데, 대신들이 해명하고서야 그만두었다. 선생이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주상께서 대원군의 사당에 몸소 제사 지내는 것은 예에도 어긋나지 않고 정리(情理)로도 반드시 있을 법한 일인데, 옥당에서 무슨 소견으로 중지할 것을 청하였는가? 혹자는 대원군의 제사에 임금이 신하의 사당에 가는 예절로써 한다면 아들이 아비를 신하로 대할 수 없는 혐의가 있고, 만일 아들이 아비의 사당에 가는 예절로써 한다면 정통을 높이는 데 방해되지 않을까 의심하는데, 이것은 옛날 글을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한 말이다. 공조(公朝)의 예(禮)는 임금을 높여야 하기 때문에 아무리 백부나 숙부일지라도 모두 신하의 예로써 행하지만, 다만 친아버지는 신하로서 대할 수 없다. 가인(家人)의 예는 존속(尊屬)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임금도 아버지나 형의 밑에 앉을 수 있다. 효혜제(孝惠帝)가 궁중에서 제왕(齊王)의 아래에 앉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학궁(學宮 태학)의 예는 스승을 높이기 때문에 아무리 천자라도 노인에게 절하는 절차가 있으니, 효명제(孝明帝)가 환영(桓榮)에게 절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물며 대원군은 성상을 낳았으니, 만일 지금까지 생존해 계신다면, 주상께서는 반드시 감히 신하로 대하지 못할 것이며 궁중에서 만날 때에는 반드시 절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 그 사당에 들어가서 조카로서 숙부에게 제사 지내는 예를 어찌 할 수 없겠는가.” 하였다.
무인년(1578, 선조11) 3월에 대사간으로 부름을 받고 나아갔다. 이때에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가 승하하여 상이 상중에 있었으므로 선생이 차마 편안히 있을 수 없어 한 차례 나아가 사은(謝恩)한 것뿐이지, 본래 벼슬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파산(坡山 파주(坡州)의 고호(古號))으로 내려갔는데, 이때 “배 띄워 차마 종남산 멀리할 수 없다. 사공아, 돛 올리지 마라.[舟行不忍終南遠 爲報篙師莫擧帆]”는 시를 지었다. 5월에 또 대사간을 제수하니,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만일 신이 쓸 만한가 못한가를 알려고 하신다면 마땅히 시사(時事)를 가지고 물어보셔서 쓸 만한 말이 없다면 다시는 부르지 마소서.” 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대사간의 자리는 오래 비워 둘 수 없으므로 이제 그 자리를 바꿀 것이다. 만일 말할 것이 있으면 그 사실을 자세히 써서 밀봉(密封)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선생은 곧 상소하여 당시의 폐단을 모두 아뢰고, 또 시국을 구제하는 계책을 아뢰니, 글자는 만여 자가 넘었고 그 말은 아주 간절하였다. 승정원이 다시 부를 것을 청하였으므로 마침내 부르는 명이 있었다. 조금 있다가 다시 대사간을 제수하였는데, 선생은 대사간에 제수된 것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부르는 명만을 사양하였다. 그런데 상이 갑자기 명하여 체직시키니, 승정원과 옥당이 모두 “스스로 사직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대사간을 체직하는 것은 옛 전례가 아니며, 또한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우계 선생이 당시의 폐단을 아뢰는 상소를 읽어 보고 말하기를, “참으로 이른바 직언(直言)과 극간(極諫)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계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상소가 임금의 윤허를 받고 못 받는 것은 시운(時運)에 관계되는 것이요,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며칠 있다가 이조 참의를 제수하였으나 선생은 끝내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이때에 선비들이 둘로 나뉘어 동인은 왕성하고 서인은 쇠퇴하니, 당시 벼슬하는 자들이 모두 동인으로 들어가서 팔뚝을 걷어올린 채 동인은 옳고 서인은 그르다고 하였다.
윤현(尹晛)과 김성일(金誠一)이 함께 이조 정랑이 되었는데 의논이 서로 맞지 않아서 마침내 틈이 생겼다. 윤현의 숙부 윤두수(尹斗壽)와 계부(季父) 윤근수(尹根壽)가 모두 요직에 있었는데, 서인을 도와주고 동인을 억압하니 동인들이 몹시 미워하였다.
김성일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전응정(全應禎)이 뇌물을 쓰다가 죄를 받았는데, 또 쌀을 싣고 다니면서 뇌물을 쓰는 자가 있어서 탐욕(貪慾)의 풍습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어떤 사람이 그런가?” 하니, 김성일이 “진도 군수(珍島郡守) 이수(李銖)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대간들이 그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상이 명하여 “이수를 의금부의 옥(獄)에 가두라.” 하고, 이르기를, “뇌물을 준 사람만 다스리고 받은 사람은 다스리지 않은 게 옳은가?” 하니, 대간들이 곧 삼윤(三尹 윤현, 윤두수, 윤근수)을 들먹이며 뇌물 받은 사람이라 하였다.
선군자(先君子)가 대사간으로 휴가를 얻어 시골에 계시다가 돌아와 아뢰기를, “삼윤은 모두 특별히 발탁된 사람으로서 별로 큰 과오가 없으니, 뇌물을 받았다는 것은 남을 중상하는 사람의 꾸며 낸 말이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 천천히 옥사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려서 그 죄를 다스려도 늦지 않을 터인데, 갑작스럽게 세 사람의 이름을 들추어내어 그저 함께 다스릴 것을 요청하니, 이것은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양사(兩司)가 격분하였으며 장령 이발(李潑)은 추한 말을 들먹이며 못하는 소리가 없었다. 사헌부에서는 이수가 쌀을 장사꾼 장세량(張世良)의 집에 맡겨 두었다는 말을 듣고 곧 다른 일을 핑계 대어 장세량을 잡아다 가두었다가 의금부로 옮겨 가두었는데, 기어이 옥사를 만들고자 하여 20여 차례나 고문하여 거의 죽게 되었으나 장세량이 끝까지 승복하지 않았다.
혹자가 장세량에게 말하기를, “네가 만일 이런 일이 있다고 승복하기만 하면 죽음을 면할 수 있는데, 어째서 곤장을 맞으면서도 승복하지 않는가?” 하니, 장세량이 말하기를, “내 어찌 승복하지 않으면 죽고 승복하면 산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다만 실제로 이런 일이 없는데, 어찌 나만 살기 위하여 남을 죽는 데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상은 장세량이 오래도록 승복하지 않으므로 이수의 옥이 사실이 아닌가 의심하여 놓아주라고 명하였는데, 승정원이 간쟁하여 네 차례나 계(啓)를 올리니, 상이 크게 노하여 승지들을 모두 체직하였다. 선군자께서는 본래부터 청렴하다는 명망이 있어서 후배들도 혹 자문을 구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크게 괴리가 생겼고,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이번 옥사는 사실이 아니었다고 언급하는 바람에 동서가 이로부터 다시 화합할 가망이 없어지게 되었다.
선생이 듣고 말하기를, “이수가 뇌물을 쓴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장세량이 쌀을 받아 둔 죄는 아주 경미한 것이다. 장세량을 증인으로 삼아서 반드시 직접 문초하고자 하였다면 증인을 심문하는 것은 준례에 세 차례밖에 못하게 되어 있는데, 어째서 함부로 20여 차례나 하였는가. 설령 장세량이 정범(正犯)이라 하더라도 국법에 ‘죽을죄가 아니면 실정을 말할 때까지 고문할 수 없다.’ 하였으니, 장세량의 죄는 곤장을 몇 대 치는 것에 불과할 뿐인데 어떻게 그 실정을 말하는 것으로 한정할 수 있겠는가. 후배들의 식견이 밝지 못하고 마음 씀이 넓지 못하여, 단지 옥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도리어 그 화를 당하게 될 것만 걱정하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의리에 어긋나는 것은 생각하지 않아서 앞뒤의 시비는 돌아보지 않고 오직 옥사를 만들려고만 노력하였으니,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창피한 노릇이다.” 하였다. 또 이발에게 답하는 편지에서도 간절하게 꾸짖었다.
기묘년(1579, 선조12) 5월에 다시 대사간으로 부르니, 선생은 병으로 사양하여 취임하지 않고 상소하여 논하기를, “동서(東西)로 당이 나누어졌는데, 동인이 서인을 공격하는 것이 너무 심하여 억지로 시비를 정하려 하니, 동서의 당파를 깨끗이 없애고 선비들을 화합시켜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몸바치게 해야 한다.” 하였는데 그 말이 몹시 격렬하고 절실하였다. 상이 “상소의 내용이 적절하지 못하다.” 하여 벼슬을 체직하라고 명하였다.
7월에 참찬 백인걸(白仁傑)이 상소하여 동서의 당파를 화합시킬 계책에 대해 적극적으로 논의하였다. 백인걸이 상소하려 할 때에 그 문장이 자기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선생에게 그 글을 고쳐 달라고 하니, 선생은 나라를 근심하는 그의 정성이 죽을 때까지도 변하지 않은 것을 기특히 여겨 그의 의견대로 고쳐 주었다. 이에 이르러 정언 송응형(宋應泂)이 이양원(李陽元)의 사주를 받아 아뢰기를, “백인걸의 상소는 이이(李珥)가 지은 글입니다. 백인걸은 노망하였으니 책망할 것이 없거니와, 이이는 경연의 옛 신하로서 무엇이든지 생각이 있으면 직접 진달하여 숨김이 없어야 할 터인데, 감히 그 자취를 감추고서 떳떳치 못하게 몰래 남의 상소를 대신 지었으니, 신하로서 임금을 속이는 바르지 못한 잘못을 다스리소서.” 하였다. 이에 양사와 옥당이 시비를 서로 들고 나오니, 백인걸이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송(宋)나라의 정이(程頤)는 팽사영(彭思永)을 대신하여 복왕(濮王)의 전례(典禮)를 논하는 소(疏)를 지었고, 또 부필(富弼)을 대신하여 영소릉(永昭陵)을 논하는 소를 지었으며, 여공저(呂公著)를 대신하여 응조소(應詔疏)를 지었으니, 이런 일은 일찍이 선유(先儒)들도 한 일이기 때문에 신은 이이의 글을 쓰면서도 혐의하지 않았고 남에게 숨기지도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이 말을 전하는 사람이 ‘이이가 신을 꾀어서 상소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신이 아무리 불초하나 어찌 감히 신의 본의가 아닌 것을 가지고 남의 교사를 받아서 이 상소를 하였겠습니까.” 하였다.
경진년(1580, 선조13) 겨울에 대사간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해주(海州)에서 서울로 들어와 사양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을 인견(引見)하여 그 지방의 흉년든 형편을 물어보고, 또 이르기를, “오랫동안 서로 보지 못하였으니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겠는가.” 하니, 선생은 곡식을 옮겨다가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할 것을 청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의 요지를 하나하나 아뢰었다. 이어서 상에게 아뢰기를, “전하께서 성혼(成渾)에게 은례(恩禮)를 더한 것은 근고에 드문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혼의 어짊은 내가 이미 들어 아는 바이지만 그 재주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재주는 또한 사람마다 똑같지 않습니다. 혼자서 온 나라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을 만한 사람도 있고, 선(善)을 좋아하여 여러 인재를 등용할 만한 사람도 있습니다. 성혼의 재주는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말이지만, 그 사람됨이 선을 좋아합니다. 선을 좋아하는 것은 천하를 다스리고도 남으니, 어찌 쓸 만한 재주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신사년(1581, 선조14) 정월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으니, 선생은 동료들을 거느리고 정사를 닦아 하늘의 재앙을 막을 것을 청하였다.
선생이 처음에는 벼슬할 뜻이 없었는데, 상이 자못 써 주려는 뜻이 있는 것을 보았고 또 선비들의 의논이 분열된 것을 보고 머물러 있으면서 사림을 화해시켜 보려고 하였다. 선비들이 선생에게 지금 꼭 해야 할 일을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지금 근심되는 것은 임금과 신하가 서로 알지 못하고 선비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것이니, 모름지기 서로의 견해를 귀일시키고 서로 의심하고 막히지 않도록 함으로써 함께 정성을 쌓아 임금의 뜻을 돌리는 것이 제일 좋은 계책이다.” 하였다.
2월에 《춘추(春秋)》를 강론하다가 아뢰기를, “정자(程子)가 ‘후세의 임금이 만일 《춘추》의 뜻을 안다면 비록 우(禹)ㆍ탕(湯)의 덕이 없더라도 삼대의 정치를 본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매양 이 경(經)을 읽으실 때에, 반드시 어떻게 해야 삼대의 다스림을 회복할 수 있을까 생각하시면 반드시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해에 큰 가뭄이 들어 평안도와 황해도에 흉년이 특히 심하였다. 나라의 저축한 곡식은 다 떨어져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할 계책이 없는데도 조정에서는 가만히 앉아서 어떻게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선생은 이를 몹시 근심하여 경연에서 아뢰기를, “만일 폐단이 많은 법을 변통해서 백성의 어려움을 구제해 주지 않고, 단지 곡식을 옮겨다가 백성을 살리려고 하신다면 곡식이 또한 다 떨어져 옮길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공안(貢案)이 잘못된 까닭에 방납(防納)하는 자들은 폭리를 취하고 백성들은 곤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공안을 개정하여 공평하게 배정하고 반드시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특산물을 바치게 한다면 백성들의 누적된 고통이 없어질 것입니다. 또 백성의 잘살고 못사는 것은 수령에게 달려 있고, 수령의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은 감사에게 달려 있는데, 감사가 자주 바뀌기 때문에 모두 그저 세월이나 보내려고 하며, 어쩌다 직무를 다하려고 하는 자가 있더라도 해 볼 사이도 없으니, 모름지기 그 도의 큰 고을을 골라서 감영을 만들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게 하며, 특별히 다스리는 재주가 있어 공보(公輔)를 감당할 만한 사람을 가려서 맡긴다면 반드시 그 실효를 거둘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은 물러 나와 동료들과 더불어 의논하고 차자를 올려서 또 폐단이 많은 법을 변통하고 공안을 개정하며, 감사를 오래 머물도록 하고 작은 고을을 병합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어진 사람을 등용하여 인재(人才)를 진작시키고 몸을 닦아서 정치의 근본을 깨끗이 하며 당파를 없애 조정을 화합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우리나라 왕실의 종계(宗系)의 기록이 잘못되어 명(明)나라 황제의 ‘고치는 것을 허락한다’는 명을 받았으나, 미처 반포되기도 전에 《대명회전(大明會典)》을 편찬하는 일이 거의 끝나게 되었다. 선생이 탄식하기를, “필부로서도 잘못 기록됨이 있으면 오히려 고쳤을 터인데, 어떻게 한 나라 임금으로서 잘못 기록된 종계를 200년이 되도록 고치지 못할 수 있겠는가. 이는 사신을 보낼 때 그 적임자를 얻지 못한 때문이다.” 하고, 곧 사람을 가려 보낼 것을 계청하고 교지를 받들어 명나라에 아뢰는 주본(奏本)을 지어 바치니, 상이 이르기를, “훌륭하다. 이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큰일이 반드시 잘 될 것이다.” 하였다.
6월에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켜 대사헌을 제수하니, 두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조정의 의논이 더욱 두 갈래로 갈라져서 일마다 분열이 생겼다. 장령 정인홍(鄭仁弘)과 전한(典翰) 이발(李潑)은 평소부터 심의겸을 미워하여 반드시 탄핵하여 제거하려 하니, 선생이 강력히 만류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선생이 우계(牛溪)에게 말하기를, “정인홍이 기어이 방숙(方叔 심의겸)을 공격하여 제거하려는 것은 몹시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그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정인홍은 반드시 성을 내고 고향으로 내려갈 것이며, 그 무리들은 반드시 이 일을 가지고 나를 공격할 것입니다. 내가 떠난다면 동서(東西)가 다시 화합할 가망이 없어질 것이니, 나는 형편상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할 듯합니다.” 하니, 우계도 그렇다고 하면서 탄식하기를, “정인홍은 평지에 풍파를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할 만합니다.” 하였다.
선생은 마침내 정인홍과 더불어 의논하여 계사(啓辭)를 초해 놓고 말하기를, “이 계사는 매우 잘 되었으니, 이 뒤에 한 글자도 가감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정인홍도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는데, 첫 번째 계사의 뒤에 정인홍이 “심의겸이 선비들을 끌어들여 위세를 조장한다.”는 따위의 말을 덧붙여 썼다. 상이 묻기를, “선비들이란 누구인가?” 하니, 정인홍이 대답하기를, “선비들이란 심의겸과 윤두수, 윤근수, 정철 등 여러 사람으로, 서로 더불어 결탁하여 형세를 엿보고 있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정인홍에게 말하기를, “연전에 시론(時論)이 과격하였기 때문에 계함(季涵 정철(鄭澈))이 너무 지나치다고 과연 불평한 말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는 심의겸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계함은 지조가 있는 선비이니, 만일 심의겸과 결탁하여 위세를 조장하려 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억울합니다. 그대가 피혐(避嫌)하여 정철을 위해서 해명하여야만 내가 벼슬에 있을 것입니다.” 하니, 정인홍이 이에 자기 뜻을 굽히고 선생의 뜻을 따랐다.
선생이 동료들과 더불어 정인홍의 일을 처리하려 하는데, 동료들의 논의가 일치되지 못하고 서로 피혐하려 하였다. 윤승훈(尹承勳)이 정언(正言)이었는데, “선생이 당(黨)을 위하여 송강(松江)을 비호한다.” 하여 논박해서 체직하려고 하였으나 동료들의 의논이 똑같지 않아서 홀로 혐의를 피하고 계(啓)하였다. 이에 공론은 “윤승훈을 체직해야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시속의 무리들은 송강을 몹시 미워하고, 옥당의 의논은 윤승훈만 그대로 두고 양사를 모두 체직하자고까지 하니, 이발과 김우옹(金宇顒)이 이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여 상에게 올린 차자에도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양사를 모두 내보내소서.”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시론의 편벽됨을 내가 바로잡을 수 없으며 삼사(三司)의 의논도 모두 공정치 못하니, 나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곧 피혐하여 아뢰기를, “옥당에서 올린 차자의 말이 이처럼 애매모호한데도 시비를 진정시킬 수 있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대개 정철은 선비들이 과격한 것을 의심하여 불평하는 기운이 여러 번 그 말투나 얼굴빛에 나타났고, 선비들은 또한 정철의 마음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너무 지나치게 헐뜯고 배척하였는데, 선비들이 정철을 의심하는 것이 더욱 심하자 정철의 불평도 더욱 깊어졌습니다. 정철도 참으로 옳지 않지만 정철을 심의겸의 당파라고 하는 것도 공론이 될 수 없습니다. 저 윤승훈은 단지 선비들의 뜻에 영합하여 세력에 붙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한 짓이니, 선비들의 의논이 이래서야 어찌 편안할 때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양사가 선생이 윤승훈을 배척한 것이 너무 지나치다 하여 선생을 체직시키라고 청하였다. 상은 준엄한 전교를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으나 여러 차례 아뢰니, 이에 윤허하고 특별히 윤승훈을 내보내어 신창 현감(新昌縣監)으로 삼았다. 선생이 이미 대사헌에서 체직되니, 공론은 모두 “시속 무리들의 하는 짓이 정도(正道)를 해친다.”고 하였다. 선생은 조정에 같이 있는 선비들이 모두 식견이 없는 것을 보고서 매우 답답하여 즐거워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내가 동서를 타파하고 선비들을 화합시키려고 하는데, 시속의 무리들은 스스로 자기 의견만 옳다 하여 나랏일을 그르치려 하니, 내가 물러가면 이 시국은 더욱 분열될 것이므로 참고 물러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 뒤에 입시한 기회를 이용하여 잘못을 자신의 탓으로 돌려 말하고, 또 “윤승훈을 너무 지나치게 억눌러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도탑게 답할 뿐이었다.
바야흐로 삼사가 선생을 공격할 적에 사암(思菴) 박순(朴淳)이 탄식하기를, “나이 젊은 사람들이 식견이 없다. 숙헌(叔獻 이이(李珥))으로 말하면 선비의 종장(宗匠)이 될 만하다. 시속의 무리들은 그 명령을 들어야 할 것인데도 조그만 일을 가지고 이처럼 다투며 나랏일을 도외시하니, 이는 ‘사슴을 쫓다가 태산(泰山)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였다.
9월에 예문관 대제학과 사간원 대사간을 제수하니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지금 시급한 일은 동서를 타파하고 선비들을 화합시키는 일인데, 신이 진정시킬 수 없으니 서관(庶官)이 되어 충성을 다하게 해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뜻은 다 알았으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마침내 병으로 체직되었다. 상이 호조에 적임자가 없는 것을 근심하니, 대신이 첫 번째로 선생을 천거하자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시켜 호조 판서를 제수하였다. 선생은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천재(天災)로 인하여 공경(公卿)들을 불러 그 대책을 물으니, 선생이 나아가 아뢰기를, “천도(天道)는 현묘하고 심원하여 실로 추측할 수 없으나 옛 역사를 보면 치란(治亂)의 형세가 이미 정해진 뒤에는 재앙이 없었습니다. 재앙은 반드시 장차 혼란해지려고 할 때에 생겨, 아무리 어진 임금이라도 재앙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늘의 마음이 인애(仁愛)하여 임금을 깨우쳐 정치를 잘하게 하려고 해서입니다. 우리나라는 창건한 지 거의 200년이 되어 오늘날에 와서는 마치 노인이 원기(元氣)가 거의 다 쇠진하여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성상께서 이 세상에 나셨으니, 이것은 바로 다스려질 수도 있고 혼란해질 수도 있는 조짐입니다. 만일 이때에 분발하여 떨치고 일어서면 우리 동방에 억만년의 한량없는 복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 궤멸하여 구제할 길이 없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임금은 반드시 그 시대의 폐단을 알아야만 한 세상의 선치(善治)를 일으킬 수 있으니, 마치 의원이 병의 근원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만 그 증상에 따라 약을 쓸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의 폐단은 진실로 낱낱이 열거할 수 없으나, 대개 병의 근원은 어진 인재에게 맡기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 실제의 공력을 들이지 않으면서 재앙이 없어지기를 바란다면 되겠습니까. 폐단을 고치는 한 가지 일로 말하면 신에게 망녕된 계획이 있습니다. 대신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하나의 국(局)을 설치하도록 하고 그 이름을 경제사(經濟司)라 하여 대신에게 그것을 주관하게 하고 선비로서 시무(時務)에 밝고 나랏일에 마음을 두고 있는 사람을 가려서 그 인선(人選)에 참여하게 한 뒤, 건의하는 말이 있으면 모두 이 관사(官司)에 회부하여 의논해서 폐단이 많은 정사를 개혁하게 한다면 하늘의 마음을 거의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금 교화를 밝히려고 하면 반드시 선현을 높이고 숭배하여 후학으로 하여금 본받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이름난 선비를 비록 다 사전(祀典 문묘(文廟))에 배향할 수는 없으나 조광조(趙光祖)는 도학을 주창하여 밝혔고 이황(李滉)은 이치의 근본을 연구하였으니, 이 두 분을 문묘에 종사(從祀)하여 여러 선비들의 선(善)을 향하는 마음을 진작시켜야 합니다.” 하였다.
선생이 다른 날 입시하여 아뢰기를, “공경들을 불러 천재(天災)에 대한 대책을 묻고 좋은 말을 구하셨으나 어떤 계책을 써서 어떤 폐단을 고쳤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한갓 겉치레가 될 뿐이니, 천재를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하면 천재를 막을 수 있겠는가?”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만일 전하께서 먼저 된다 안 된다 하는 마음을 가지지 마시고, 대신 및 시무(時務)를 아는 자와 더불어 당시의 폐단을 바로잡을 대책을 의논해 정하시되 모두 개혁하는 것만 주장하지 말고 또한 구례(舊例)를 고수하는 것만 주장하지도 말아서, 조종(祖宗)의 좋은 법으로서 폐지되고 시행되지 못한 것은 다시 시행하고, 근래 만든 법규로서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제거하며, 새 정책으로서 나라에 이익이 되고 백성을 잘살게 할 수 있는 것은 강구하여 실행해야 합니다. 이처럼 부지런히 세상을 바로잡을 계책을 구하여 날마다 실제로 하는 일이 있으면, 인심과 세도(世道)를 고칠 수 있고 하늘의 노여움 역시 없앨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단지 두려워하고 반성한다고 말만 하고 실제의 행동이 없으면 어떻게 위로 하늘의 마음에 보답하며 아래로 여러 사람들의 바람을 위로하겠습니까.” 하였다.
이해 겨울에 양관(兩館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제수하니, 선생이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은 언제나 내용은 없이 화려한 문장의 폐단을 탄식하였는데, 대제학을 맡게 되자 이 습관을 과감히 개혁하여 모든 시험에서 선비를 뽑는 데 반드시 이치를 중시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임오년(1582, 선조15) 봄에 이조 판서에 제수되니, 세 차례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선생은 오로지 묵은 폐단을 개혁하고 벼슬길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힘썼다. 예를 들면, 어진 선비를 가려서 대헌(臺憲)의 책임을 맡기고 학행(學行)이 있는 사람을 뽑아서 사유(師儒)의 벼슬을 시키며, 영리에 뜻이 없는 사람을 천거하여 명예와 절조를 숭상하는 기풍을 장려하고 이재(吏才)가 있는 사람을 천거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직책에 쓰며, 감사의 선출을 신중하게 하고 수령을 천거하는 것을 엄격하게 한 것은 모두 이때에 청하여 시행하게 된 것들이다.
가을에 의정부 우참찬에 제수되고 또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여 우찬성에 제수되었다. 선생은 모두 사양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전교를 받들어 인심도심도설(人心道心圖說)과 김시습전(金時習傳), 학교 규범(學校規範)을 지어 올렸다. 이보다 먼저 상이 경연에서 선비의 습관이 야박해지고 스승의 도(道)가 없어져 가는 폐단을 언급하시고 선생에게 명하여 “스승을 가려 뽑고 선비를 양성하는 법규를 만들라.” 하였다. 선생은 이리저리 생각하여 스승을 가려 뽑고 선비를 양성하는 것으로써 사목(事目)을 만들었으며, 또 학교 모범(學校模範) 16조(條)를 만들어 학교 법령을 보완하게 하였다.
겨울에 명(明)나라에서 국사편수(國史編修) 황홍헌(黃洪憲)과 공과급사중(工科給事中) 왕경민(王敬民)이 사신으로 와서 조서를 반포하였는데, 삼공(三公)이 선생을 원접사(遠接使)로 천거하여 국경에 나가 맞이하게 하였다. 두 사신은 선생을 한동안 눈여겨보고는 역관(譯官)에게 묻기를, “자못 산림처사(山林處士)의 기상이 있는데, 산림에 있는 선비를 억지로 내세워 우리를 맞이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였다. 역관이 대답하기를, “삼장장원(三場壯元)을 하여 오래도록 시종관(侍從官)으로 있다가 중년에 물러나 여러 해 동안 산림에 있었지만, 지금은 국왕이 신임하여 맡긴 지 벌써 오래되었으니, 실로 산림에 있는 선비가 아닙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그렇다면 천도책(天道策)을 지은 사람인가?” 하자, 그렇다고 대답하니, 두 사신은 머리를 끄덕였다. 오는 도중에 서로 시(詩)를 주고받았는데, 두 사신이 글제를 내어 읊으면 선생이 붓을 들고 그 즉시 시를 짓는데도 그 문장과 의미가 모두 아름다우니, 조사(詔使)가 탄복하여 찬미하기를, “대단한 솜씨로다. 대단한 솜씨로다.” 하였으며, 선생이 도학 군자라는 것을 알고서 지극히 존경하여 반드시 율곡 선생이라 불렀다.
서울에 들어와 문묘에 배알할 적에 그 벽에 걸린 정자(程子)의 사잠(四箴)을 보고 선생에게, ‘자기의 사욕(私慾)을 이겨 예(禮)에 돌아감이 인(仁)을 하는 것이다[克己復禮爲仁]’라는 의미에 대해 강의해 달라 요청하니, 선생이 곧 설명하는 글을 지어 해석해 주었다. 조사가 5, 6번이나 읽고서 이 말이 지극히 좋으니 중국 조정에 가서 꼭 전하겠다고 하였다. 사신이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가에 이르렀는데 떠날 무렵에 정사(正使)가 별안간 칠언시(七言詩)와 고율시(古律詩) 각각 한 수를 내놓고서 화답해 달라고 하였다. 선생은 그들이 곧 떠나게 된 까닭에 즉석에서 시를 지어 스스로 써서 주었는데, 두 사신이 돌려 가면서 보았으며 작별할 때에 모두 헤어지기가 안타까워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헤어졌다. 그 일을 말하는 사람들이 “조사가 접반사를 존경한 것은 근고(近古)에 없던 일이다.”고 하였다.
얼마 후 병조 판서를 제수하였으나 세 번 사양하였고, 계미년(1583, 선조16) 1월에 또다시 사양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병조는 사무가 복잡하고 바쁜 데다가 또 호인(胡人)의 침범이 있어서 편지와 통첩이 구름 쌓이듯 하였는데, 선생은 물 흐르듯 결재하였고, 비변사(備邊司)의 그 많은 계획을 모두 선생에게 미루어 처리하게 하니, 모든 배치와 대책이 각각 올바르게 되었으며, 호령이 엄숙하고 분명하며 나중 할 것과 먼저 할 것이 차례가 있어서 민심이 믿고 복종하였으며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 모두 든든하게 의지하였다.
당시는 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되어 군비는 허술해지고 징발이 계속되니 변방에 군사와 식량이 모두 떨어지게 되었다. 선생이 서자(庶子)와 천례(賤隸)들을 모집하여 북쪽 변방으로 보내어 수자리를 살게 하고 무예(武藝)가 없는 자는 변방에 군량미를 바치게 하며, 서자는 벼슬길을 열어 주고 천례는 양민이 되게 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이는 모두 한때의 편의를 따른 것이지만 실로 선대의 조정에서 벌써부터 시행하던 법이었다. 그러나 서자를 금고(禁錮)한 지 이미 100년이 지나서 사람마다 모두 익히 보고 들어 무관심하였다가, 선생이 홀로 “왕자(王者)가 어진 사람을 뽑아 쓰는 데는 제한이 없으니, 인재를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하고서, 항상 서자에게 벼슬길을 열어 주려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아뢰어서 시행하니, 시속 사람들 중에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퍽 많았다.
또 여섯 조목을 아뢰었는데,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을 등용할 것, 군민(軍民)을 양성할 것, 재물을 풍족하게 할 것, 변방의 방어를 튼튼하게 할 것, 전마(戰馬)를 비치할 것, 교화를 밝힐 것 등이니, 모두가 그 시기에 적절한 일이었다. 또 당시의 폐단을 고치자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조정을 화합시키고 폐해가 많은 정치를 개혁하는 것은 근본이며, 군사와 식량을 조달하고 방어를 튼튼하게 하는 것은 그 지엽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생의 뜻은 연산조(燕山朝) 때의 폐해가 많은 정치와 근래에 잘못된 법을 모두 개혁하고, 조종(祖宗)의 전성기에 하던 일을 그대로 따라서 쇠퇴해 가는 것을 부흥시키고 폐단을 바로잡아 모두 옛 법대로 하려는 것이었다. 오직 문소전(文昭殿)과 연은전(延恩殿)의 제사와 산릉(山陵)의 삭제(朔祭)와 망제(望祭)는 예가 아니라고 여겨, “비록 하루아침에 예(禮)에 의거하여 다 없애지는 못하나 번독함이 너무 심하여 계속할 수 있는 법이 아니니, 산릉에는 사절(四節)에만 제사를 지내고 문소전과 연은전은 하루 한 번씩만 지내어 제사 지내는 일을 삼가고 백성의 힘을 펴게 하소서.” 하였다. 이는 선생이 조정에 있을 때에 건의하여 아뢴 큰 의논들이었다.
상이,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모두 용렬하고 재능이 없어 자리나 채우고 녹봉만 먹을 줄 아는데 선생은 공정하고 충성스러워서 당파에 휩쓸리지 않으며 지성껏 나라를 근심하는 것을 보고, 선생을 신임하는 것이 두터워 그 말을 많이 들어 주었으나, 시속 무리들은 더욱 꺼려하여 밤낮없이 기회를 엿보며 함정으로 몰아넣으려 하였다. 무릇 무엇이나 건의하여 아뢰는 것이 있으면 곧장 가로막고 나서서 근거 없는 의논이 쏟아져 나오고 비방하는 말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와 당시의 일을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해 여름에 북쪽 오랑캐가 재차 침입하여 나라 안이 떠들썩해서 사수(射手)를 뽑아 들이는데, 관가에는 전마(戰馬)가 없어서 이를 갑자기 마련할 수가 없었다. 선생은 을묘년에 전사(戰士)들이 말을 빼앗던 일을 경계하고, 이로 말미암아 혼란이 야기되지 않을까 몹시 근심하여 군대를 뽑은 다음, 3등(等) 이하에게는 말을 바치도록 하고 대신 부방(赴防)을 면제해 주며, 그 말을 1, 2등에 뽑혀 부방하는 사람에게 주었다. 처음에는 계청(啓請)하여 이 일을 시행하려 하였으나 이에 응하는 자가 적을까 염려되어 먼저 명령을 내려 모집해 보았더니, 말을 바치는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전사(戰士)의 출정 시기가 임박하여 시기를 늦출 수 없으므로 마침내 먼저 말을 나누어 주고 나서 뒤에 아뢰었다. 상이 윤허하니, 싸우러 나가는 사람은 말을 얻어 다행으로 생각하고 나가지 않은 사람은 부방을 면제받아 좋아하여 공사 간에 모두 편리하게 되었다. 또 군자감(軍資監)에 있는 면포(綿布)를 군인의 옷감으로 내려 주고, 모든 관리들의 녹봉을 삭감하여 부방하는 사람의 처자에게 나누어 줄 것을 청하니, 군사들이 모두 기뻐하여 수자리하는 괴로움을 몰랐으며, 응모하여 군용으로 바치는 곡식으로 또한 군량을 넉넉히 조달하게 되었다.
하루는 변방에서 보낸 보고가 있어 상이 명령하여 선생을 부르니, 선생은 몹시 현훈증(眩暈症)이 심하였으나 병을 참고 부르는 명령에 나오다가 승정원에 도착하지도 못하고 병이 더하여, 할 수 없이 내병조(內兵曹)에 들어가 누웠다. 이를 가지고 삼사(三司)가 권세를 제멋대로 휘두르고 교만하여 임금을 업신여긴다고 논핵하였다. 이른바 권세를 제멋대로 휘두른다는 것은 말[馬]을 바치고 군대를 면제하게 해 줄 때에 먼저 계청하지 않은 것을 지적한 것이고,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것은 부름을 받고도 승정원에 나오지 않은 것을 지적한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허엽(許曄)이 경상 감사가 되어 병이 몹시 위중하였는데, 그 아들 허봉(許篈)이 응교(應敎)로서 사직서를 내고 그 아버지를 뵈러 가서는 기생을 끼고 놀기만 하다가 병간호를 잘 하지 않아, 허엽이 결국 죽고 말았다. 선생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 시속 무리들이 허봉을 직제학에 주의(注擬)하려 하자, 선생은 그 일을 가지고 배척하여 허락하지 않으니, 허봉의 무리가 많이 원망하였다. 박근원(朴謹元)이 이조 참판으로 있을 때에 선생이 일찍이 정지연(鄭芝衍)에게 권하여, 사정(私情)만 돌보고 공도(公道)는 생각하지 않아 정사를 그르친 것으로 탄핵하게 하였으며, 선생이 대사간으로 있을 때에 또 박근원이 욕심 많고 비루하며 간사하다고 탄핵하였다. 그리고 또 선생은 중립에 서서 당파에 휩쓸리지 않고서 혼탁한 자를 배격하고 깨끗한 사람은 치켜세우며, 서인(西人) 중에 쓸 만한 사람을 거두어 등용하고 동인(東人) 중에 편벽된 사람을 억눌렀다. 이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감정이 고슴도치 털처럼 일어나 헐뜯는 말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모함해 온 지 벌써 오래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터지게 되어 그들이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선생은 여섯 차례나 상소를 올려 책임을 지고 죄를 받을 것을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득한 천 년 동안에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서 공업을 이룩한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경은 전일 내가 한 말을 직접 듣지 않았는가. 내가 물러가라고 명한 뒤에 물러가라고 한 간곡한 내 말은 귀신도 알 것인데, 경이 어찌 차마 오늘 사양하고 떠나려 하는가.” 하였다. 전후에 비답한 말이 더욱더 간절하게 나오라고 심하게 재촉하니, 선생이 드디어 대궐로 나가 다시 아뢰었다. 그러나 상은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대간(臺諫) 송응개(宋應漑) 등은 다시 대간을 무시하고 공론을 멸시한다고 탄핵하였으며, 허봉(許篈)이 전한(典翰)이 되어 스스로 차자를 써서 동료들을 거느리고 논계(論啓)하였는데, “한쪽 말만 치우쳐 들으면 간사함이 생기고 한 사람에게만 맡기면 어지럽게 됩니다. 어진 이를 시기하고 유능한 이를 미워하며 아랫사람의 의사소통을 막고, 임금의 총명을 가려서 사사로운 당파를 만드니, 그의 뜻은 장차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라는 등의 말까지 하였다.
상이 손수 전교를 써서 대신에게 내리기를, “요즘에 이이(李珥)의 말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대간이 서로 격렬하게 논쟁하면서 계속 모함으로 얽어매고 옥당(玉堂)이 올린 차자에는 이이를 ‘나라를 그르치는 소인’으로까지 비유하였으니, 이것은 말에 대한 문제로서만 우연하게 발단된 것이 아니다. 이는 이이가 전부터 신진 사류(新進士類)들이 시류에 따라 당파에 가담하는 것을 미워해서 그들을 억제하기 위한 진론(陳論)을 여러 차례 하였기 때문에 지금 논란하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은 지가 오래된 것이다. 그래서 조그마한 잘못을 가지고 이 기회를 이용해서 반드시 탄핵하여 제거하고야 말려는 것이다. 무릇 공경대부(公卿大夫)로서 부름을 받고서 오지 않은 자가 많았지만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말로 논박하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다. 어째서 대간의 말이 이이에게만 박절하게 하는가. 말[馬]을 바치게 할 때에 아뢰지 못한 것은 또한 그 많은 사무 때문에 미처 아뢰지 못한 것일 뿐인데, 이것이 어찌 권세를 제멋대로 휘둘러서 그러했겠는가. 대체로 권세를 제멋대로 휘두르고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것은 신하로서 제일 큰 죄이다. 임금이라도 백성에게 오히려 실상이 없는 죄명으로써 함부로 그 몸에 덮어씌울 수 없는데, 하물며 재상에게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미 권세를 제멋대로 휘두르고 임금을 업신여겼다고 말했으면 어째서 그 죄를 분명히 밝혀 국가의 법률에 따라 처벌하지 않고, 이에 감히 파직시키라 하여 마치 을사년에 간신들이 반역했다고 지목하면서도 죄로는 파직시키라고 한 것과 똑같이 한단 말인가. 이 때문에 이이가 심복할 수 없어서 여러 번 사양할 적에 과연 스스로 변명하는 말이 있게 된 것이나, 이 어찌 언관(言官)을 시기하고 앙심을 품어서 그러한 말을 하였겠는가. 대간(臺諫)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그 몸이 공론을 담당한 까닭인데, 만일 남 모르게 사욕(私慾)을 이루기 위하여 남을 배척하여 함정으로 몰아넣을 계획을 한다면 대간의 도(道)가 어디에 있겠는가. 경들은 만일 이이가 나라를 그르친 소인이라면 마땅히 분명하게 논변하여 물리쳐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공격하는 사람이 바로 소인이다. 어찌 임금이 소인을 쓰고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이치가 있겠는가. 선인과 악인을 분별하는 것이 어찌 오늘에는 있지 않겠는가. 경들은 어물어물 분명히 가려 내지 않아서는 안 된다. 대체로 조정에서 당파가 형성되어 나랏일이 날마다 잘못되어 가는데 대신이 분별하지 않는다면 장차 나랏일을 어디에 두려고 그렇게 하는가.” 하였다. 이어 상은 병무(兵務)를 오래 비워 둘 수 없어서 우선 선생을 체직하였다. 선생이 물러나 파주로 내려가니 조야(朝野)가 격분하고 여론이 떠들썩하였다.
우계 선생(牛溪先生)이 상소하여, 삼사(三司)가 모함한 진상을 극력 진달하니, 상이 삼공(三公)을 불러 놓고 전교하기를, “며칠 전에 경들에게 어질고 간사함과 옳고 그름을 물었는데도, 경들은 감히 어물어물 말을 얼버무렸다. 내가 진실로 경들의 마음을 잘 알고서 이 다음에 처리하겠다는 전교를 이미 내렸거니와, 지금 성혼(成渾)의 상소를 보니 대신으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과연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당초에 이이를 배척한 것은 누가 한 짓이며, 붕당을 맺고 간악한 짓을 한 무리는 또 누구인가? 자세히 분별하여 아뢰라.” 하였다.
사암(思菴) 박순(朴淳)이 수상(首相)으로서 청대(請對)하여, 선생이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나라를 위하는 사실과 허봉(許篈)과 송응개(宋應漑)가 거짓말을 꾸며서 바른 사람을 해친 죄를 낱낱이 아뢰니, 송응개가 곧 피혐하면서 또 거짓말을 꾸며 추한 말로 비난하여 못하는 소리가 없었다. 이에 태학과 호남의 유생들이 연이어 항의하는 상소로써 자세히 변론하였는데, 박근원(朴謹元)이 도승지로 있으면서 전후 여러 차례 아뢰어 유생들의 상소를 패란(悖亂)하다고까지 하였다. 상이 그 정상을 환히 알고 손수 전교를 써서 내려 박근원, 송응개, 허봉 등을 귀양 보내게 하니, 그 추종하는 무리들이 상소하여 구원하려 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이 상소를 보니 삼사(三司)가 아뢴 말을 베껴 썼을 뿐이다. 사당(邪黨)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이야 이상할 것이 없지만, 이이가 당파를 만든다고 하는 데 있어서는 이따위 말을 가지고 내 뜻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 진실로 군자라면 그 당이 있는 것을 근심할 것이 없고, 그 당이 적을까 걱정할 뿐이다. 나도 주희(朱熹)의 말을 본받아 이이와 성혼의 당에 들어가기를 원한다. 이 다음부터는 너희들이 나를 이이와 성혼의 당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너희들은 그래도 할 말이 있는가. 어쨌든 이이와 성혼을 헐뜯는다면 반드시 죄를 주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파주에서 해주로 내려갔는데 조금 뒤에 판돈녕부사로 부르니, 선생은 상소를 올려 간곡하게 사양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아, 하늘이 우리나라를 잘 다스리려 하지 않은 것일까. 어째서 경같이 훌륭한 사람으로서 이 시대에 뜻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생각건대, 아마 하늘이 경으로 하여금 마음을 분발하고 성질을 참아 가면서 능하지 못한 것을 더욱 보충하게 하여, 뒷날에 국가의 앞길을 열어 갈 큰 책임을 맡기려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하늘이 경에 대해 곡진하게 성취시켜 옥(玉)이 되게 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오늘날의 일이 경에게야 무슨 나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특명(特命)으로 이조 판서를 제수하고 또 부르는 명령이 있자, 선생이 다시 상소하여 사양하고 서울에 들어와 또 사양하였다. 상이 즉시 명령하여 인견(引見)하니, 선생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려 사과의 말을 한 다음 귀양 간 세 사람을 풀어 줄 것을 청하였으며, 이어서 치사(致仕)하기를 요청했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은 우계(牛溪)와 더불어 전후로 인견할 때마다 귀양 간 세 사람을 풀어 줄 것을 강력히 청하였고, 물러 나와 서로 말하기를, “이들 세 사람이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일을 말하다가 죄를 짓고서 외진 시골로 귀양 가게 된 것은 뒷사람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것이 못 되니, 이 일은 반복하여 아뢰어 임금의 뜻을 돌리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때 시속의 무리들이 대각(臺閣)에 늘어서 있으면서 의심을 품고 눈치만 보면서 같이 일할 의사가 없었다. 이에 선생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시속의 무리들 중에도 마음이 공정한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보면 얼마 뒤에는 마땅히 나의 진실한 마음을 알게 되어 함께 일을 할 것이다.” 하였다.
갑신년(1584, 선조17) 1월 3일에 병이 났는데, 14일에 서익(徐益)이 순무사(巡撫使)의 명을 받아 함경도로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병환을 무릅쓰고 방략(方略) 여섯 조목을 입으로 불러 아우 이우(李瑀)에게 받아쓰게 하여 서익에게 주었다. 이때부터 병이 더욱 심하여 그 이튿날 별세하니, 향년 49세였다. 병이 위중해지자, 상은 의원을 보내어 문병하고 약을 하사했다. 부고를 받고는 상이 슬피 통곡하였고, “소찬(素饌)을 올리며 3일간 조회를 그만두라.”라고 명하였으며, 곧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를 올렸다. 그 제문에 이르기를, “나라 위해 한 몸을 다하고서야 그만두었으니 경이야 무슨 슬픔이 있겠는가. 강물 가운데서 노를 잃었으니 나는 못내 슬퍼하노라.” 하였다. 또 연로(沿路)에 있는 고을에 명령하여, 그 집안 식구들을 호송(護送)해 주도록 하였다. 그해 3월 모일(某日), 파주 두문리(斗文里) 자운산(紫雲山) 갑좌(甲坐) 경향(庚向)에 장사 지내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선생의 배필은 정경부인(貞敬夫人) 노씨(盧氏)이다. 곡산(谷山)의 이름 있는 집안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노중례(盧重禮)의 현손이다. 아버지 휘 경린(慶麟)은 종부시 정(宗簿寺正)이며, 어머니는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선공감 정(繕工監正) 휘 한로(漢老)의 딸이다. 부인은 가정(嘉靖) 신축년(1541, 중종36)에 태어나 정사년(1557, 명종12)에 선생에게 시집왔는데, 인자하고 유순하며 자애롭고 화목하여 남편을 섬기되 부덕(婦德)에 어긋남이 없었고, 서모(庶母) 섬기기를 친어머니 섬기듯이 하였으며, 손윗동서인 곽씨(郭氏)를 받드는 데 성의를 다하였고 첩들을 은혜로 대우하여 친자매와 같이 여겼으며, 첩의 자식을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어루만져 스스로 안아 키우기까지 하였고, 비록 천한 종이라도 한 번도 성내어 꾸짖은 적이 없었으니, 그의 성품이 화순(和順)한 때문이었다.
갑신년 봄에 선생의 궤연(几筵 영좌(靈座))을 모시고 해주로 내려가 아침저녁으로 상식(上食)을 올리되 반드시 두 첩과 더불어 친히 깨끗이 장만하였고, 삼년상을 지낸 뒤에도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반드시 곡하면서 제수를 올렸다.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서자를 어루만지고 사랑하는 것이 지성스러운 마음에서 나와 집안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그 아들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고 자기는 간여하지 않았으며, 여러 조카들을 돌봐 주기를 친정 친속보다 잘하였는데 종손집 조카에게 더욱 잘하였다.
파주에 있는 토지에서 추수하는 곡식을 모두 제사하는 비용으로 쓰고, 일가를 대우하는 것과 이웃 사람을 대접하는 것을 선생이 계실 때와 똑같이 하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는 선생에게 보고 감화되어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부인은 왜적들이 바다를 건넜다는 소문을 듣고 아들과 조카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본래 병이 있는 사람으로 말을 탈 수 없고, 또 왜적들이 온 나라에 가득하니, 반드시 살아갈 곳이 없을 것이다. 타향에 굴러다니다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파주 산소 곁에 가서 죽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나의 뜻은 결정되었으니, 너희들은 나 때문에 염려하지 말고 잘 피난하고 있다가 이 다음에 난리가 평정되거든 나의 뼈를 선영의 산소 곁에 잘 묻어다오.” 하니, 아들과 조카들이 대답하기를,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부인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그리 어렵게 생각하느냐. 내가 하늘로 섬기던 남편을 잃은 지 벌써 8년이나 되었으니 내 목숨이 너무 모질지 않느냐. 더욱이 큰 난리를 만났는데 산소 곁에서 죽지 않고 구차스럽게 살려고 하면 무슨 의리가 있겠느냐. 내 뜻이 결정되었으니 다시 더 말하지 말라.” 하였다.
4월 그믐날, 임금의 수레가 서쪽으로 옮겨 가니, 부인은 곧 신주를 모시고 파주의 산소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적군이 몰려오자 부인은 처음 뜻을 그대로 지키고 산소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마침내 5월 12일에 적군을 만나 굴하지 않다가 결국 살해를 당하였다. 그 이듬해 임금이 조정에 돌아와서 명령하여 정려문(旌閭門)을 세워 주었다.
부인은 딸 하나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첩(妾)에게 아들 둘이 있었으니 경림(景臨)과 경정(景鼎)이고, 딸 하나는 진사(進士) 김집(金集)의 첩이 되었다. 경림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제(穧), 칭(稱), 거(秬), 찬(穳), 아무개[某]이고, 딸 하나는 어리다. 경정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임(稔)과 아무개이며, 딸 하나는 어리다. 김집의 첩은 아들딸 넷이 있는데 모두 어리다.
선생은 타고난 기품이 지극히 고매하여 충후(忠厚)하고 화락하고 공손하였다. 용모가 빼어나고 풍채가 사람을 경동(驚動)시켰으며, 그 말은 법도가 있고 행동은 떳떳함이 있었다. 너그러우면서도 절제가 있고 화기로우면서도 엄숙함이 있으며, 기쁨과 성냄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꾸짖는 소리를 입에서 내지 않았다. 행동거지는 반드시 빈틈없이 하고 법도가 있어서 누구든지 한 번 보면 바로 그가 도학 군자임을 알았다. 그의 학문은 마음을 가다듬고 성품을 기르는 것으로 근본을 삼되 한결같이 마음을 고요히 가지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마침내 잠깐 선학(禪學)에 물들었으나 하루아침에 석연(釋然)히 깨닫고서 사도(邪道)를 버리고 정도(正道)로 돌아와 순수하게 되었다.
천인(天人), 성명(性命)의 미묘한 것과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도를 끝까지 연구하여 찾아내지 않은 것이 없어 대도(大道)의 근원을 환하게 알았다. 그리하여 이를 몸과 마음에 체득하고 실천에 옮겨서 번거로운 가운데에도 스스로 몸가짐을 더욱 엄하게 하였고, 옥루(屋漏)에 혼자 있을 때에도 조심하여 부끄러움이 없었다. 식견이 깊은 곳까지 이르고 실천을 독실히 하였으나 항상 부족하게 생각하였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가서 오직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생활에 있어서는 일체 담박하게 지냈지만 남을 대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조리(條理)를 자세히 살피어 조금도 잘못함이 없었다. 매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단정히 하고 사당에 나아가 향을 사르고 절을 올렸으며, 그런 다음 서실로 물러 나와 널리 경전을 보았는데 그중에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더욱 좋아하였다. 일찍이 위병(胃病)을 앓은 까닭에 글 읽는 데 소리 내기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마음에 맞는 대목을 읽을 때면 문득 기쁘게 소리를 내어 읽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반드시 하는 일이 있어서 어떤 때는 글을 읽으며 그 뜻을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붕우들과 학문을 강론하기도 하며 어떤 때는 일을 처리하기도 하여 병이 있을 때가 아니면 일찍이 자리에 누운 적이 없었다. 도리(道理)를 강론하는 데는 정밀하고 투철하여 선현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밝힌 것이 많았다. 그중 큰 것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운봉 호씨(雲峯胡氏)는 “성(性)이 발(發)하여 정(情)이 되니 그 처음에는 선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마음이 발하여 의(意)가 되니 곧 선하고 선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하고, 퇴계 선생은 “사단(四端)은 이(理)가 발하여 기(氣)가 따르고 칠정(七情)은 기가 발하여 이가 편승(便乘)한다.” 하여, 호씨(胡氏)는 정과 의를 두 갈래로 보았고, 퇴계는 이와 기가 서로 발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선생은 논변하기를, “마음의 체(體)가 성이요, 마음의 용(用)이 정이니, 성(性)과 정(情) 밖에 다시 다른 마음이 없다. 그러므로 주자(朱子)가 ‘마음이 동한 것이 정이 된다.’고 하였다. 정은 외물(外物)에 감촉되어 나오는 것이요, 의는 정을 인연하여 이리저리 계교(計較)하는 것이니, 정이 아니면 의가 인연할 데가 없다. 그러므로 주자가 또 ‘의는 정이 있는 것을 인연한 뒤에 작용을 한다.’고 하였다. 마음이 고요하여 동하지 않은 것을 성이라 하고, 마음이 감동하여 그대로 통하는 것을 정이라 하고, 마음이 감동되어 이리저리 생각하는 것을 의라 한다. 그렇다면 심(心)과 성에 과연 두 작용이 있고, 정과 의에 과연 두 갈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오성(五性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 밖에 다른 성이 없고, 칠정(七情 희(喜)ㆍ노(怒)ㆍ애(哀)ㆍ락(樂)ㆍ애(愛)ㆍ오(惡)ㆍ욕(欲)) 밖에 다른 정이 없다. 맹자(孟子)가 칠정 가운데서 그 선한 정을 뽑아 내어 사단(四端)이라 지목한 것이요, 칠정 밖에 따로 사단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정의 선하고 악함이 그 어느 것인들 성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마는 그 악한 것은 본래 악한 것이 아니요, 다만 형기(形氣)에 가려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한 것이 있어서 악이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선과 악이 모두 천리(天理)이다.’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천리를 인연하여 인욕(人欲)이 있다.’고 하였다. 사단과 칠정이 과연 두 가지 정이 되고, 이와 기가 과연 서로 발할 수 있겠는가. 대저 심과 성을 두 가지 작용이라 하고 사단과 칠정을 두 가지 정이라 하는 것은 모두 이와 기를 투철하게 알지 못한 까닭이다. 무릇 정이 발할 때에 발하는 것은 기요, 발하게 하는 그 원인은 이이다. 기가 아니면 발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발하게 하는 그 원인이 없다. 이와 기는 한데 엉켜서 원래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서로 떨어졌다 합했다 하는 것이 있다면 동(動)과 정(靜)이 실마리가 있고 음(陰)과 양(陽)이 시초가 있는 것이 된다. 이는 태극(太極)이요, 기는 음양(陰陽)이니, 지금 ‘태극과 음양이 서로 동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태극과 음양이 서로 동하지 않으면 ‘이와 기가 서로 발한다’는 것이 어찌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우계(牛溪)가 말하기를 “주자가 인심(人心)ㆍ도심(道心)을 논할 때에 생겨나기도 하고 근원하기도 한다고 한 말은 퇴계의 뜻과 부합하는 듯합니다. 사단 칠정과 인심 도심은 그 말의 의미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 성(性)과 정(情)의 용(用)을 말한 것입니다. 이와 기가 서로 발한다는 말이 천하에 정해진 이치가 아니라면 주자가 어째서 ‘생겨나기도 하고 근원하기도 한다’는 설을 주장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감동하는 것은 진실로 형기(形氣)이지만, 그 발한 것은 바로 인ㆍ의ㆍ예ㆍ지의 바른 천성에서 나온 까닭에 이를 주로 한 것을 도심이라 하고 그 근원이 아무리 천성에 근본하였지만 그 발하는 것이 이목(耳目)ㆍ사지(四肢)의 사사로움에서 나온 까닭에 기를 주로 한 것을 인심이라 지목하였습니다. 인심과 도심은 단지 하나의 마음으로서 그 발하는 것에 따라 이름을 다르게 붙인 것일 뿐입니다. 만일 이와 기가 서로 발한다고 하면 이는 이와 기 두 가지가 각각 마음 가운데에 뿌리를 박고 있어서 발하기 전에 벌써 인심과 도심의 싹이 있다가 이가 발하면 도심이 되고 기가 발하면 인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 두 근본이 있는 것이 되니, 어찌 크게 잘못된 말이 아니겠습니까. 퇴계는 사단(四端)은 마음속에서 발하는 것이고 칠정(七情)은 외물(外物)에 감촉되어 발하는 것이라 하여, 이로써 선입견(先入見)을 삼아 주자의 ‘이에서 발하고 기에서 발한다’는 학설을 가지고 주장하여 더 부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반드시 감촉이 있어야 동하는데, 감촉하는 것은 모두 외물입니다. 천하에 감촉하는 것이 없이 마음속에서 스스로 발하는 정(情)이 어디 있겠습니까. 감촉하는 것에는 바른 것도 있고 간사한 것도 있으며, 동함에는 너무 지나친 것도 있고 미치지 못하는 것도 있어서 이에 선과 악의 구분이 있습니다. 이제 측은(惻隱)을 가지고 말한다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본 뒤에 이 측은한 마음이 비로소 일어나는 것입니다. 감촉시킨 것은 어린아이이니, 어린아이가 외물이 아니겠습니까.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지 않고 스스로 측은한 마음이 일어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가령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음에 병이 있는 사람에 불과할 뿐이고, 정상적인 사람의 정(情)은 아닙니다. 주자의 설은 그 뜻이 반드시 있는 데가 있어서 ‘사단은 오로지 이(理)만 가지고 말한 것이고, 칠정은 기(氣)까지 겸하여 말한 것이다.’ 한 데 불과할 뿐이며, 사단은 이가 먼저 발하고, 칠정은 기가 먼저 발한다고 한 말은 아닙니다. 또 칠정으로 말하면 사단이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으니, 인심과 도심이 서로 대립하여 명명한 것과는 다릅니다. 이미 도심이라 하면 인심은 아니고, 이미 인심이라 하면 도심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심과 도심은 둘로 갈라서 말할 수 있지만, 이른바 사단이란 단지 칠정 가운데서 곧장 나온 것이니, 어떻게 사단은 칠정이 아니고 칠정은 사단이 아니라 하여 둘로 갈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전후하여 주고받은 편지가 10여 통이나 되는데 모두 두 분 선생의 문집에 실려 있다. 선생은 심(心), 성(性), 정(情), 이(理), 기(氣)의 근원에 대하여 지극히 연구하여 투철하게 안 까닭에 그 식견과 언론을 근세의 선비들이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선생은 집에 계실 때에는 효성과 우애가 마음에서 우러나와 어려서부터 가족이 한 집에서 같이 살 생각을 하였는데, 집안 형편이 가난하여 부모 형제가 서로 떠나 흩어지게 되니, 항상 이 때문에 안타까워하였다. 맏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그 가솔(家率)이 회덕(懷德)에 있었는데, 집으로 맞아들이고 그 아들딸들을 길러 주었으며, 교육을 시키고 제때에 결혼시킨 다음 자기 집 종들을 나누어 주었으며, 재정에 관한 모든 일을 큰집 조카가 맡아 처리하게 하였다. 항상 둘째 형님과 막내 아우, 그리고 여러 조카와 생질들을 한 집에 모아 베개를 나란히 하고 함께 잤으며, 명절 때나 좋은 날에 술과 음식이 생기면 아우로 하여금 거문고를 타게 하고, 젊은이나 늙은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를 불러 화답하게 하여 즐거움을 다하고서야 그만두었다. 제사는 한결같이 주자의 《가례》에 따라 하며, 초하루와 보름날 사당에 참배한 뒤에는 안팎 친족들을 큰방에 모두 모여 앉히되 선생은 동쪽에 앉고 서모와 형수인 곽씨(郭氏) 및 부인은 서쪽에 앉아서 아들, 조카, 며느리, 딸들의 절을 받고, 또 아들과 아우로 하여금 선생이 지은 동거계사(同居戒辭)를 읽게 하여 모두를 경계하였으며, 노비들도 뜰 아래에 남자와 여자를 갈라 세우고 차례차례 인사를 하게 하며, 또 동거계사를 언문(諺文)으로 번역하여 정성껏 가르쳐 이를 상례로 하였다.
그 당시 국법에 소의 도살을 엄금하여 그 법을 범하는 사람은 변방으로 내쫓기까지 하였는데, 선생은 “나라에서 금하는 것은 범해서는 안 된다.” 하고, 그로부터 쇠고기를 제사에 쓰지도 않고 먹지도 않았다. 누가 선물을 가지고 오면 반드시 가려서 받았으며, 비록 하찮은 것일지라도 모두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서모를 정성껏 섬겨 결국에는 서모의 사나운 성격마저 고치게 되었으며, 종을 부리는 데는 은혜를 먼저 하고 위엄을 뒤로 하여 가정이 엄숙하기가 조정과 같았다. 선생은 언제나 여색(女色)을 멀리하였다. 일찍이 누님을 뵈러 황주(黃州)에 갔었는데 유명한 기생이 선생의 방에 들어오자, 곧 촛불을 켜놓고 거절하였으니, 그 함께 어울리면서도 휩쓸리지 않음이 이러하였다.
선생은 평소에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모든 명승지를 가보지 않은 데가 없었다. 해주의 잠양동(潛陽洞), 장선동(藏仙洞), 승선암(乘仙巖), 한암동(寒巖洞), 호연정(浩然亭) 같은 곳은 바로 선생이 노닐고 읊조리던 곳으로, 항상 학자 5, 6명과 더불어 흥에 겨워 시냇물을 따라 오르내리면서 해가 지도록 돌아올 줄 몰랐다. 어떤 때는 술을 가지고 갔으나 취할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고, 거나하게 취하면 문득 노래도 하고 시(詩)도 읊으며 스스로 즐겼다.
옛 전장(田庄)이 파주 율곡촌(栗谷村)에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옛터에 화석정(花石亭)을 중수해 놓고 스스로 율곡(栗谷)으로 호(號)를 삼았다. 그 뒤에 해주 수양산(首陽山) 서쪽으로 이사갔는데, 산수가 수려하고 바위와 돌이 기이하며 물이 휘감아 흐르는 곳이 아홉 골짜기나 되었다. 높은 데는 절벽이 병풍처럼 서 있었고 낮은 데는 흐르는 물이 고여 못이 되니 마치 무이산(武夷山) 구곡(九曲)의 산세와도 같았다. 선생이 지팡이를 짚고 노닐다가 제5곡(第五曲)에 이르러 “여기가 살 만하다.” 하고서, 그곳을 은병(隱屛)이라 이름하였다. 여기에 정사(精舍)를 짓고 또 사당을 세워 주자의 신주를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과 퇴계(退溪 이황(李滉))를 배향하여 봄가을에 제사 지내기를 예의대로 하였다. 때로는 여러 선비를 거느리고 그 사당에 나아가 참배하고 사당 문 밖에 나와 서로 향하여 읍(揖)하였으며, 초하루와 보름에는 관복을 입고 중문(中門)을 열어 놓고서 분향, 배례하고 물러 나왔다. 그곳이 이른바 석담서원(石潭書院)이다.
선생은 조정에 있을 때에는 임금을 인도하여 도(道)에 합하게 하였는데, 반드시 당우(唐虞)와 삼대(三代)로써 기약하고 격물, 치지, 성의, 정심의 학문을 권하였으며, 그의 문장과 논설에는 새로운 뜻을 밝힌 것이 많았다. 매양 뜻 세우기를 원대하게 하여 규모를 정하고, 공도(公道)를 넓혀서 그 기강을 세우고, 널리 어질고 뛰어난 사람을 불러서 조정에 벼슬을 시키고, 폐단이 많은 법을 고쳐서 백성의 고통을 깨끗이 없애 줄 것을 청하였으며, 상소를 올려 아뢸 때에는 정성껏 간절하게 다스려야 할 급선무를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혹시 임금의 하는 일이 정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정색하고 바른말을 하여 임금의 마음을 돌리려 하였으며, 아무리 우레 같은 위엄으로 압박하여도 정도를 지켜 굴하지 않으니, 임금도 허심탄회하게 귀기울여 듣고서 감탄하고 칭찬하는 바가 많아서 어떤 때는 해가 기울어서야 연석(筵席)에서 물러 나온 적도 있었다. 김응남(金應南)이 일찍이 경연에서 나와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오늘날 다시 삼대의 도유(都兪)하는 훌륭한 일을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하였다.
일찍이 경연에서 “미리 10만 명의 군사를 양성하여 위급할 때를 대비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못 되어 흙이 무너지는 듯한 화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정승 유성룡(柳成龍)이 말하기를, “아무 일이 없는데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화근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였다. 당시는 난리가 없은 지 오래되어 안일한 것만을 좋아하여 경연에 있던 신하들이 모두 선생의 말을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선생은 나와서 유성룡에게 말하기를, “나라의 형편이 위태롭기가 달걀을 쌓아 놓은 것과 같은데, 시속의 선비는 시무(時務)를 모르니 다른 사람이야 진실로 기대할 것이 없거니와 그대도 이런 말을 하는가.” 하였다. 임진왜란이 난 뒤 유 정승이 조정에서 언젠가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지금 와서 보면 이 문정(李文靖)은 참으로 성인이다. 만일 그의 말대로 하였으면 나랏일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또 그가 전후로 계획한 정책을 혹자들은 비난하였지만 지금 모두 꼭꼭 들어맞으니, 참으로 따라갈 수 없다. 율곡이 만일 살아 있다면 오늘날 반드시 타개할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100년을 기다리지 않고도 안다는 것이다.
선생은 일찍이 “조정이 화합하지 못하면 정치를 할 수 없다.” 하여 동인과 서인이 서로 대립한 뒤로부터 반드시 동서를 타파하고 양편을 화합시키려고 하여, 심의겸과 김효원을 모두 외관(外官)으로 내보내어 진정시킬 계획을 하였는데, 서인이 김효원을 지나치게 치죄(治罪)하려 하자 선생이 힘껏 말렸다. 그후 심의겸을 논핵하여 파면하게 되어서는 동인의 의논이 너무 심하여 선비들까지 모두 배척하려 하니, 선생은 이를 제재하며 논쟁하였다. 선생의 뜻은 다만 선비들을 조화시켜 나랏일을 함께 하자는 것일 뿐, 실제로 어디에도 치우친 데가 없었는데 시비가 서로 맞서 앞다투어 선생을 잘못한다고 탓하였다.
선생은 도와 때가 서로 어긋나서 벼슬에 잘 나오지 않고 물러가려고만 하였는데, 다만 나라에 일이 많았고 새로 중국에서 온 조사(詔使)를 맞이하였으며, 또 호인(胡人)의 변을 만나 물러갈 만한 틈이 없었기 때문에 온갖 정성을 다하여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았는데, 원망을 품은 무리들이 속으로 질투하다가 마침내 감히 드러내 놓고 공격하여 그 화가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뻔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공론이 없어지지 않아 시비가 저절로 판가름났으니, 선생에게야 무슨 손익(損益)이 있었겠는가.
선생은 사람을 가르칠 때에 신분의 귀천을 묻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이면 누구나 받아들였으며, 슬기롭고 어리석은 자를 가리지 않고 각각 그 사람의 재목에 따라 가르쳤다. 배우는 자로 하여금 먼저 《소학(小學)》을 읽고, 다음에 사서(四書)를 읽고, 《근사록(近思錄)》과 《심경(心經)》을 읽게 하되, 반드시 입지(立志)를 급선무로 삼아 성현을 목표로 삼고, 궁행(躬行)을 힘써 효제(孝悌)의 도리를 다하게 하였으며, 경(敬)으로써 도(道)에 들어가는 요체를 삼고, 성(誠)으로써 성학(聖學)의 근본을 삼아, 차례차례 잘 인도하여 가르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사서와 삼경(三經)에 대해서는 구결(口訣)과 언해(諺解)가 정밀하지 못하여 더러 본뜻에 위배되는 것이 있음을 염려하여 바로잡은 것이 많았으며, 서로 다른 소주(小註)의 여러 학설도 취사한 것이 많았다. 《소학》에 대해서는 옛 주해가 잘못되고 자세하고 간략함의 차이가 있는 것을 걱정하여, 정밀하고 중요한 것을 가려 뽑고 번거롭거나 분명하지 않은 것은 삭제하였으며, 미비한 것은 자기의 뜻으로 보충하고서 《소학집주(小學集註)》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처음 배우는 자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르고 또 굳은 의지가 없이 그럭저럭 배우기만 청하면 아무런 도움이 없을까 걱정하여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여 뜻을 세우고 몸을 단속하며 어버이를 받들고 남을 대하는 도리를 알게 하였으며, 또 학규(學規)를 만들어 거듭 그 뜻을 밝혔고 약속(約束)을 만들어 그들을 깨우쳐 주었다.
선생이 일찍이 배우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도는 높고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일상생활하는 가운데 있으니, 일에 따라 각각 마땅함을 얻으면 그만이다. 다만 배우지 못한 사람은 마음이 사욕에 막히고 식견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글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여 마땅히 행해야 할 길을 밝게 안 뒤에야 바른 조예를 얻게 되고 중도(中道)를 실천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배우는 사람이 풍문을 듣고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두 모여들어 서당이 꽉 차서 나중에 오는 사람은 들어설 데가 없었다. 또 해주 야두촌(野頭村)에 사창(社倉)을 설치하여, 한편으로는 덕업을 권장하고 한편으로는 환란을 구제하였다.
선생은 남의 선한 일을 들으면 언제나 숨기지 않았고 남의 잘못을 보면 소문내려 하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할 적에는 마음을 열어 놓고 정성을 보여서 숨기는 바가 없었다. 혹자가 선생이 남을 너무 쉽게 허락한다고 비난하자, 선생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저 사람이 먼저 진실한 마음으로 오는데, 내 어찌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사대부들은 조정에서 조문하고 처사(處士)들은 집에서 조문하였으며, 외진 시골 늙은이들까지도 모두 슬피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백성들이 복이 없다.”고 하였다. 태학생(太學生), 삼의사(三醫司), 각사(各司)의 서리(胥吏)들까지도 모두 와서 울고 제사를 올렸으며, 발인(發靷)할 때에는 금군(禁軍)과 장꾼들까지도 길 좌우에서 횃불을 들고 통곡하면서 장송(葬送)하였다.
아, 우리나라는 기자(箕子) 이후로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을 지키고 예악(禮樂)과 의관(衣冠)이 훌륭하여 군자의 나라로서 중국에까지 칭찬을 받아 왔으나,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한 선비는 잠잠하여 드러난 사람이 없다가 고려 말엽에 이르러서 정 문충(鄭文忠 정몽주(鄭夢周))이 처음으로 도학(道學)을 부르짖었다. 그 뒤로 이름난 선비가 계속 나와 조선조에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학문이 고명한 경지에 이르고 재주가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감당할 수 있으며 나아가고 물러가기를 의리에 맞게 한 분은 조 문정(趙文正 조광조(趙光祖))과 선생뿐이다. 그러나 기묘년의 일은 사람으로 하여금 기가 막히게 하니, 어떻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선생은 도를 밝히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고 시국을 바로잡는 것을 자신의 근심으로 여겨, 비록 시골에 가 있으나 한 번도 임금을 잊은 적이 없었고, 여러 차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나와서는 재질을 숨김없이 다하였지만 빈말이 되어 시행되지 못하였으니, 아무리 간절한 말인들 무슨 도움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선생이 학문을 논한 뜻이 저술해 놓은 여러 책에 분명하게 실려 있고, 전후의 상소에 보이는 건의하여 아뢴 정책들이 모두 문집에 담겨 있으니, 뜻있는 선비가 진실로 그 말을 인하여 그 마음을 찾고 그 계책을 실행하여 자기 몸에 체득하고 국정에 시행한다면 선생의 도가 한 시대에는 시행되지 못하였으나 만세(萬世)를 위하여 태평 시대를 열어 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공로가 멀고도 크다고 할 수 있다. 하늘이 세상에 뛰어난 대현(大賢)을 내심이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는가.
문인 김장생(金長生)은 짓다.

경자년(1600, 선조33) 연간에 나는 안성 군수(安城郡守)로 있었는데, 참의 김우옹(金宇顒)이 어디를 가는 길에 두 차례나 나를 찾아왔었다. 이야기를 하다가 율곡 선생의 일에 관해 말하게 되어 내가 그에게 묻기를, “선생께서 살아 계실 적에도 공에 대해 극진히 칭찬하는 말을 직접 들었고, 지금 선생의 문집을 모으면서도 선생께서 공에게 보낸 편지에서 또한 공을 칭찬하는 말들을 아주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훗날 어찌하여 선생과 서로 의견이 어긋나게 되었습니까?” 하니, 김우옹이 답하기를, “그런 편지는 어느 해에 보낸 것입니까?” 하기에, 내가 “병자년과 정축년 사이에 보낸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다. 김우옹이 말하기를, “율곡이 만일 지금 살아 계신다면 지금도 이렇게 칭찬하실지 알 수 없습니다.” 하고, 이어서 또 말하기를, “율곡이 나의 말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내가 묻기를, “선생이 공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일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니, 김우옹이 말하기를, “계미년에 삼사(三司)에 있던 사람들은 진실로 소인배들이었지만, 율곡은 그들과 함께 일을 했어야만 했습니다. 내가 여러 차례 말을 했는데도 나의 말을 듣지 않은 까닭에 이렇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답하기를, “공이 한 말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니, 김우옹이 “무엇 때문입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공은 앞서 삼사에 있던 사람들을 소인배들이라 생각하면서 또다시 율곡 선생이 그들과 함께 일하지 않은 것을 탓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삼사의 사람들이 이미 소인배들이라면 어떻게 그들과 함께 일할 수 있겠습니까. 군자와 함께 일하지 않은 것이라면 진정 잘못된 것이지만, 소인배들과 함께 일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또한 어떻게 그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율곡 선생이 공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니, 김우옹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공의 말이 옳기는 하지만 율곡이 한 일은 그래도 잘못된 것입니다. 삼사의 관리를 어떻게 모두 소인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 사이에 어쩌다 경망스럽게 아무런 생각 없는 사람이 있어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을 지껄여 일을 그르치게 만들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율곡 또한 그들을 격분시켜 그렇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이러한 말들은 김우옹의 말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근래에 들어 이처럼 구차스러운 말들이 끊이질 않아서 후생들까지 김우옹의 말을 이어받아 율곡 선생께서 삼사의 소인배들과 함께 일하지 않은 잘못을 앞다투어 욕하고 있다. 그 당시 삼사에서 연명으로 율곡 선생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조정의 관료들이 온통 그들에게 휩쓸리어 율곡 선생을 헤아릴 수 없는 데 빠뜨리려고 하였다. 그들의 마음 씀씀이는 흉악하고 참혹함의 극치에 이르렀다. 옛사람들은 뜻이 같지 않은 사람들과 억지로 말하는 것조차 부끄럽게 생각하였는데, 하물며 소인배들과 함께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선생이 설령 그들의 뜻에 영합하여 함께 일을 하려고 했어도 저들은 반드시 선생과 함께 일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았을 터인데, 어떻게 그런 저들과 함께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김우옹의 의중은 삼사가 혼탁한 죄를 이징(李徵)과 이경률(李景㟳)에게 돌리고, 삼사 관원들의 죄는 애당초 관계되지 않은 것처럼 발뺌하려고 하였으나, 그의 그런 계산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경연에서 아뢰어 귀양 간 세 사람을 놓아주고자 하였으나 임금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만일 선생께서 얼마간만 더 살아 계셨다면 그들을 풀어 주려고 했던 선생의 뜻이 반드시 시행되었을 것이다.


 

[주D-001]송 효종(宋孝宗) : 남송(南宋)의 제2대 황제로 이름은 조신(趙愼)이다. 고종(高宗)의 양자가 되어 그의 선위(禪位)를 받아 즉위하였는데, 순희(淳煕) 14년(1187) 고종이 죽자, 백포건(白布巾)으로 삼년상을 마쳤다.
[주D-002]선군자(先君子) : 본 행장의 찬자(撰者)인 사계 김장생의 부친 김계휘(金繼輝)를 가리킨다. 자(字)는 중회(重晦)이고 호는 황강(黃岡)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명종 4년(1549)에 문과에 급제하고 1555년에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있다가 김홍도(金弘度)의 일파라 하여 쫓겨났으나 1563년에 복직되었으며, 식견이 높고 박학하여 명망이 높았다.
[주D-003]역월(易月) : 상례(喪禮)를 빨리 끝내기 위하여 달수를 날수로 바꾸어 계산하여 상례를 치르던 제도를 말한다.
[주D-004]긍구긍당(肯構肯堂) : 긍당긍구(肯堂肯構)와 같은 말로, 부조(父祖)의 창업을 자손들이 잘 계승함을 가리킨다. 《서경(書經)》 대고(大誥)에, “비유하면 아버지가 집 짓는 법을 정해 놓았는데도 그 아들이 집터를 제대로 닦으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집을 지으려 하겠는가.” 한 데서 유래하였다.
[주D-005]후씨(侯氏) : 송대(宋代) 성리학(性理學)의 대가인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의 어머니이다.
[주D-006]주창(周昌) : 패현(沛縣) 사람으로 강직한 성격에 말을 몹시 더듬었다. 일찍이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따라 출전하여 군공을 세우고 분음후(汾陰侯)에 봉해졌다. 고조가 여후(呂后)의 소생인 태자 영(盈)을 폐위하고 척 부인(戚夫人)의 소생인 조왕(趙王) 여의(如意)를 태자로 세우려 하자, 말을 더듬거리면서도 그 부당함을 강력히 간하여 중지시켰다. 고조는 자기가 죽은 후 나이 어린 조왕 여의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주창을 조왕의 정승으로 삼았는데, 주창은 조왕에게 충성을 바쳤다. 고조가 죽고 태자 영이 즉위하여 혜제(惠帝)가 되었는데, 여후는 조왕을 살해하기 위하여 세 차례 소환하였으나, 주창은 그때마다 조왕에게 병을 칭탁하고 가지 못하게 하였다. 여후는 하는 수 없이 주창을 소환하여 장안(長安)에 오게 한 다음 다시 조왕을 소환하니, 조왕은 그대로 갔다가 결국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이에 주창 역시 병을 칭탁하고 조회하지 않다가 3년 만에 병사하였다. 《漢書 卷42 周昌傳》
[주D-007]천승(千乘)의 나라 : 병거(兵車)가 천승인 제후국을 가리킨다. 고대에는 병거의 대수를 국력으로 평가하였는데, 병거 1승(乘)에는 통상 군마(軍馬) 4필, 갑사(甲士) 3명, 보졸(步卒) 72명, 취사병(炊事兵) 25명이 배속되었다. 땅이 천 리인 천자국을 만승지국(萬乘之國), 땅이 백 리인 제후국을 천승지국(千乘之國)이라 칭하였다.
[주D-008]서반(西班) : 원래 문관(文官)인 동반(東班)과 대칭되는 말로 무관(武官)을 지칭하였으나, 여기서는 현직을 떠난 문무관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중추부(中樞府)의 관직을 가리킨 것이다.
[주D-009]거실(巨室) : 대대로 국록을 먹는 대가(大家)로 곧 심의겸을 가리킨다.
[주D-010]장공예(張公藝)가 동거(同居)하던 일 : 장공예는 당(唐)나라 수장(壽張) 사람으로, 9대가 한집에 동거하여 우애가 돈독한 집안으로 알려졌다. 고종(高宗)이 태산(泰山)에 봉선(封禪)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집을 방문하고 9대가 동거하는 요결(要訣)을 묻자, 인(忍) 자 100여 개를 써 올리니, 고종이 크게 칭찬하였다. 《舊唐書 卷188 孝友列傳》
[주D-011]효혜제(孝惠帝)가 …… 앉은 것 : 효혜제는 한 고조(漢高祖)의 적자인 유영(劉盈)을 가리키며, 제왕(齊王)은 서장남(庶長男)인 도혜왕(悼惠王) 유비(劉肥)를 가리킨다. 효혜제 즉위 2년에 제왕 유비가 입조(入朝)하자, 효혜제는 그와 더불어 술을 마셨는데, 군신 간의 예의를 쓰지 않고 가인(家人)의 예로 대하여 일반 집안의 예의를 썼다. 《史記 卷52 齊悼惠王世家》
[주D-012]효명제(孝明帝)가 …… 것 : 효명제는 후한(後漢)의 2대 황제인 유장(劉莊)을 가리킨다. 환영(桓榮)은 용항(龍亢) 사람으로 자(字)는 춘경(春卿)이며, 경학(經學)에 밝아 광무제(光武帝) 때에 당시 태자인 효명에게 오경(五經)을 가르쳤다. 효명제가 즉위한 다음 스승으로 예우하여 오경(五更)에 임명하고 태학(太學)에 행차하면 반드시 절하였다. 《後漢書 卷37 桓榮列傳》
[주D-013]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 : 인종(仁宗)의 비(妃)인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朴氏)를 말한다.
[주D-014]복왕(濮王)의 전례(典禮) : 복왕은 송 영종(宋英宗)의 생부(生父)인 복안의왕(濮安懿王) 조윤양(趙允讓)을 가리키며, 전례는 그의 추존과 관련된 예전(禮典)을 말한다. 영종이 인종(仁宗)의 양자로 즉위한 다음, 생부인 복왕을 추존할 것을 의논하자, 사마광(司馬光), 구양수(歐陽脩) 등이 “영종은 인종의 양자가 되었으니, 인종을 황고(皇考)라 칭하고, 복왕을 황백(皇伯)으로 칭해야 한다.” 하여, 추존할 것을 반대하였으나, 영종은 이를 따르지 않고 이에 반대한 자들을 많이 파직하거나 좌천시켰다. 이에 관한 내용은 《이천선생문집(伊川先生文集)》 권5에, 〈대팽사영상영종황제논복왕전례소(代彭思永上英宗皇帝論濮王典禮疏)〉라는 제목으로 보인다.
[주D-015]영소릉(永昭陵) : 송 인종(宋仁宗)의 능(陵)으로 하남성(河南省) 공현(鞏縣)에 있다. 이에 관한 내용은 《이천선생문집》 권5에, 〈대부필상신종황제논영소릉소(代富弼上神宗皇帝論永昭陵疏)〉라는 제목으로 보인다.
[주D-016]응조소(應詔疏) : 신종(神宗)의 조명(詔命)에 응하여 올린 상소로, 《이천선생문집》 권5에, 〈대여공저응조상신종황제서(代呂公著應詔上神宗皇帝書)〉라는 제목으로 보인다.
[주D-017]공보(公輔) : 삼공(三公)과 사보(四輔)로 임금을 보필하는 직임을 말한다.
[주D-018]우리나라 …… 잘못되어 : 명(明)나라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 왕조의 시조인 태조(太祖)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고려의 네 임금을 시해하였다고 기록된 사실을 가리킨다.
[주D-019]삼장장원(三場壯元) : 과거(科擧) 볼 때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에 거듭 장원으로 합격하는 것을 말한다.
[주D-020]정자(程子)의 사잠(四箴) :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지은 시잠(視箴), 청잠(聽箴), 언잠(言箴), 동잠(動箴)을 가리킨다. 《논어(論語)》 안연(顔淵)에, 공자는 인(仁)을 묻는 안연에게 극기복례(克己復禮)를 말하고, 그 조목으로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동하지 말라[非禮勿動]’고 하였는데, 정주학(程朱學)에서는 이것을 사물(四勿)이라 하여 학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으로 삼았으며, 이천은 이에 근거하여 사잠을 지었다. 일명 사물잠(四勿箴)이라고도 한다.
[주D-021]사절(四節) : 설날, 단오, 추석, 동지를 말한다.
[주D-022]전사(戰士)들이 …… 일 : 명종(明宗) 10년(1555)에 있었던 을묘왜변(乙卯倭變) 때에 출정하는 군사들이 타인의 말을 약탈하여 의복과 식량을 싣고 간 사건을 가리킨다.
[주D-023]옥루(屋漏) : 방 안의 서북쪽 귀퉁이로 신주(神主)를 모셔 두는 곳이니, 곧 사람이 보지 않는 곳을 가리킨다. 《시경》 대아(大雅) 억(抑)에, “거의 옥루에 부끄럽지 않게 한다.[尙不愧于屋漏]” 하였는데, 이는 타인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경건함을 지켜 마음속에 부끄럽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주D-024]운봉 호씨(雲峯胡氏) : 원(元)나라의 성리학자 호병문(胡炳文)을 가리킨다. 자(字)는 중호(仲虎)이며 주자학에 정통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역본의통석(易本義通釋)》, 《서집전(書集傳)》, 《춘추집해(春秋集解)》, 《예서찬술(禮書纂述)》, 《사서통(四書通)》 등의 저서를 남겼다. 《元史 卷189 胡炳文列傳》 《宋元學案 卷89》
[주D-025]동(動)과 …… 된다 : 정이천(程伊川)은 음양동정(陰陽動靜)을 논하면서 “동(動)과 정(靜)은 실마리가 없고 음(陰)과 양(陽)은 시초가 없다.[動靜無端 陰陽無始]” 하였는데, 만일 호병문과 퇴계의 학설을 따른다면 그와 정반대가 된다고 말한 것이다.
[주D-026]생겨나기도 …… 한다 : 주자는 《중용장구(中庸章句)》 서문에서 인심, 도심을 설명하면서 “어떤 것은 형기의 사사로움에서 생겨나고, 어떤 것은 성명의 바름에서 근원하기도 한다.[或生於形氣之私 或原於性命之正]” 하여, 인심은 형기가 있은 뒤에 생겨나고 도심은 고유한 성명에 근원한다고 보았다.
[주D-027]무이산(武夷山) 구곡(九曲) : 무이산은 중국 복건성(福建省) 숭안현(崇安縣) 남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구곡은 무이산을 감돌고 흐르는 구곡계(九曲溪)인데, 절경이 아름다운 승진동(升眞洞), 옥녀봉(玉女峯), 선기암(仙機巖), 금계암(金鷄巖), 철적정(鐵笛亭), 선장봉(仙掌峯), 석당사(石唐寺), 고루암(鼓樓巖), 신촌시(新村市) 등을 말한다. 주자는 일찍이 시인 신기질(辛棄疾)과 함께 이곳에서 뱃놀이하면서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櫂歌)〉를 읊었는데, 율곡 역시 해주(海州)의 석담(石潭)을 무이 구곡에 비유하여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지어 읊었다.
[주D-028]도유(都兪) : 도(都)와 유(兪)는 모두 감탄사인데, 《서경》에 요순과 삼대의 성군들이 신하와 더불어 정사를 논한 기록 가운데 이러한 감탄사가 자주 보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주D-029]이 문정(李文靖)은 참으로 성인이다 : 이 문정은 송 진종(宋眞宗) 때의 명신인 이항(李沆)을 가리킨다. 당시 이항은 정승이었고 왕단(王旦)은 참지정사(參知政事)였는데, 송나라의 서북 변경을 괴롭히던 거란(契丹)이 화친을 청하자, 왕단은 이를 만족스럽게 생각하였으나, 이항은 “국가에는 다소의 걱정거리가 있어야 한다. 너무 편안하면 결국 태만하게 되어 큰 화근이 된다.” 하였으며, 각 지방에 수재(水災)와 한해(旱害), 도적들이 발생하면 반드시 임금에게 아뢰었다. 왕단은 “너무 작은 일이니, 굳이 임금에게 아뢸 것이 없다.” 하였으나, 이항은 “지금 젊은 군주에게 이러한 어려움을 알게 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뒤에 군주가 안일에 빠질 것이니, 나는 늙어서 보지 못하고 죽겠지만 왕 참정(王參政)은 이 때문에 크게 걱정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항이 죽은 후, 진종은 과연 국가가 무사하다고 하여 봉선(封禪)을 일삼고 궁궐을 지으며 간신들을 등용하였다. 이에 왕단은 이항의 원대한 안목을 감탄하여 “이 문정은 참으로 성인이다.” 하였다. 《宋史 卷282 李沆列傳》여기에서는 이이를 이 문정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주D-030]삼의사(三醫司) : 의료를 맡은 세 관사로 내의원(內醫院), 전의감(典醫監), 혜민서(惠民署)를 말한다.


 


 

 

沙溪先生遺稿卷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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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狀
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栗谷李先生家狀。 a_057_080a
     


本貫。京畿豐德府德水縣。
高祖抽。知郡事。贈左贊成。妣 [缺]
曾祖宜碩判官。贈大司憲。妣崔氏。贈貞夫人。
祖蕆。贈左參贊。妣洪氏。贈貞夫人。
057_080b父元秀。監察。贈左贊成。妣宜人申氏。贈貞敬夫人。
先生諱珥。字叔獻。上世有諱敦守。高麗中郎將。實爲鼻祖。世趾其美。政丞府院君曰允蒀。司空。樂安伯曰千善。政堂文學。曰仁範。文學。生諱揚。始仕我朝。爲參議。贈判書。生諱明晨。知敦寧事。諡康平。是生知郡事。詳在德水世譜及諸墓碑碣所記。監察公悃愊無華。休休樂善。有古人風。申氏。己卯名賢名和女。資稟絶異。習禮明詩。於古女範。博極無餘。先生以嘉靖丙申十二月二十六日。生于關東臨瀛北坪村。生時057_080c申夫人夢。龍抱兒納于懷中。故小字見龍。生而穎悟絶倫。學語。便知文字。三歲。外王母以石榴試之曰。此物何似。先生卽擧古詩以對曰。石榴皮裹碎紅珠。人奇之。五歲。申夫人感疾危劇。一家奔遑。先生潛禱于外王父祠堂。從母適過而見之驚嘆。與之慰解而抱歸。嘗有人渡水而顚躓幾危。人皆拍手。先生獨俯視怵惕。亟發驚動之聲。其人獲免乃已。其孝親愛物之心。天性然也。八歲。就外傅。業日進。嘗題詩花石亭。調格渾成。雖老於詩律者。有不能及也 詩曰。林亭秋已晚。騷客意無窮。遠水連天碧。霜楓向日紅。山吐孤輪月。江含萬里風。塞鴻何處去。聲斷暮雲中。 九歲。覧二倫057_080d行實。讀至張公藝九世同居。卽慨然曰。九世同居。勢或有礙。至於兄弟。不可離析。遂手畫兄弟同居奉父母之圖以觀之。又好摭前古名賢將相事實。題其姓名。記其行迹而景慕焉。十三歲。中進士初試。文章日就。聲聞藉藉。而亦不屑爲也。遂專心于聖賢之學。十六歲。丁內憂。廬墓三年。一遵家禮。不脫衰絰。躬執祭饌。雖洗滌之事。不使僮僕任之。十八歲而冠。爲學專用力於內。時先生新免於喪。哀慕不自克。常日夜號泣。一日。入奉恩寺。披覽釋氏書。深感死生之說。且悅其學簡便而高妙。試欲謝去人事而求之。十九歲。以057_081a書留別諸友曰。文不可學而能。氣可以養而致。是氣者。人只所同得者。而養之則役於心。不能養之則心爲氣役。氣役於心則身有主宰。而聖賢可期。心役於氣則七情無統。而愚狂難免。古之人有善養氣者。孟子是也。孔子曰。知者樂水。仁者樂山。樂山者非取其峙而已。取其靜之道而體之也。樂水者非取其流而已。取其動之道而體之也。仁知者之所以養氣者。捨山水而奚求哉。因入山門。戒定堅固。至忘寢食。久之。忽思以爲佛氏戒其徒勿作增減想者何意也。蓋其學無他奇妙。只欲其截斷此心走作之路。凝聚精神。057_081b以造靜極虛明之域。假話頭使之依靠下功。而又恐人先知此意。則着禪必不精專。故又設此禁以誑之也。乃悟異說之非。盡棄其學而專心吾道。著自警文。一以聖賢爲準則。敬義夾持。知行並進。不由師承。自得其妙。嘗語學者曰。吾少時。妄意禪家頓悟法。於入道甚捷而妙。以萬象師一。一歸何處爲話頭。數年思之。竟未得悟。反而求之。乃知其非眞也。二十三歲。謁退溪先生于陶山。問主一無適應接事物之要。厥後往來書札。辨論居敬窮理及庸學輯註,聖學十圖等說。退溪多捨舊見而從之。嘗致書曰。世間英才何限。057_081c而不肯存心於古學。如君高才妙年。發軔正路。他日所就。何可量哉。千萬益以遠大自期。辛酉。丁外憂。甲子。試司馬文科。皆擢壯元。卽拜戶曹佐郎。明廟以釋褐登龍門命題。先生製三十韻律詩以進。上嘉賞之。賜賚特優。乙丑。移拜禮曹佐郎。尋拜司諫院正言。自以新進未可遽當言責。上疏辭。不許。丙寅。率同僚陳疏。請立志勉學親近正士。冬。遷吏曹佐郎。慨然仕路之溷濁。務張公道。欲防關節請托之路。銓長朴永俊不肯。先生歎曰。痼弊誠不可醫也。隆慶丁卯明廟喪。用日者言。卜葬以第四月。儒生上疏。有譏其057_081d渇葬者。王大妃命用第五月曰。雖不吉。亦可用也。領相李浚慶,左相李蓂。啓以爲安厝先靈而不用吉月未安。先生聞之歎曰。諸侯五月而葬。先王之定制。未聞擇月也。慈殿明燭正理。而大臣不能將順其美。反以左說爲重。時事可知。戊辰。遞爲直講。以千秋書狀官朝京。冬還朝。拜弘文館副校理。卽宣祖初服也。上疏辭職。自陳少時誤染禪學之失。不敢當論思之任。上優批答之曰。自古雖豪傑之士。未免爲佛氏之所䧟溺矣。不可以昔日從事禪門之小失。輕遞玉堂論思之重任。且悔過自新。其志可嘉。057_082a旣復。拜吏曹佐郎。聞外王母病甚。棄官歸省于江陵。諫院以歸覲外祖。法典不載劾之。上嘉其孝。不允己巳。拜弘文館校理。承召入京。自以爲學未進。不可從政。前此累辭要職。至是。自陳外祖母有養育之恩。居江陵老病無子。請解官歸養。且俟學進而仕。上答曰。身雖在朝。亦可往來省覲。何必解職。因命吏曹曰。往見外祖母。雖非法例。校理李珥。特令省覲可也。先生感恩就職。時當明廟禫。舊例禫後陳賀。先生謂同僚曰。自上喪制甫畢。遽受賀禮。揆之情理。未安。且百官哭泣之餘。旋卽陳賀。是歌哭同時也。057_082b乃上劄請以賀爲慰。八月。於經席進講孟子。啓曰。世代各有所尙。戰國之時。在於富國强兵戰勝攻取而已。至於西漢之淳厚。東漢之節義。西晉之淸談。皆一代所尙也。人君當觀一代所尙之如何。所尙不正則當矯其弊。今者承權奸鉗制之後。士習委靡偸惰。徒知食祿自肥。而無忠君憂國之心。縱有一二有志者。皆爲流俗所拘。莫敢出氣力以振國勢。俗尙如此。聖上當奮大有爲之志。以作士氣。然後世道庶可變。昔者。孟子以匹夫之力。只以言語敎人。尙能熄邪燄。廓正路。況人君任治世之責。能以斯道敎民。057_082c則非徒垂敎於後世。亦可興化於當時。其功豈特孟子而已。講畢。又啓曰。人君不欲治則已。如欲爲治。必先下功於學問。學問者。非特勤御經筵多讀古書而已。必也格物致知誠意正心工夫不懈。實有其效。然後乃可謂之學問也。匹夫在家。雖有學問之功。其效不見於世。人君則不然。藴之心術。發爲政事。故其效立見也。當今民生困瘁。風俗薄惡。綱紀陵夷。士習不正。而殿下臨御數年。未見治效。竊恐殿下格致誠正之功有未至也。殿下誠志於治則雖蒭蕘之言。可補聖德。若殿下悠悠泛泛。只事文具057_082d則雖孔孟恒在左右。日談道理。亦何益哉。領議政李浚慶進曰。朝廷之上。當守體統。頃日承旨請面對。事非近規。恐壞體統。假使國家有可畏之機。自有臺諫論思之臣。何必承旨請對耶。先生曰。此言不然。只在所言之如何耳。若所言是則何妨於體統。承旨亦經筵參贊之官。請對言事。亦其職也。今者善政不擧。百度廢弛。若不奮然振作。以新一代之規矩。而徒欲拘常守舊。則安能祛積弊而大有爲哉。大臣不能引君當道。而唯遵守近規是務。殊非群下所望也。先生每因進講。極陳爲學爲治之說而上嘿無一057_083a言。乃啓曰。入侍之臣。預思所啓之事。晝夜量度。及至上前。怵於天威。言不盡意。自上雖虛心酬酢。尙患下情不逹。況沈嘿不言以阻之乎。目今天災時變。近古所無。臣民惴惴。不知更有何事。殿下當敷求善策。汲汲救時。不宜深拱無所猷爲也。明宗大王以二百年宗社。付之殿下。殿下受其憂也。非受其樂也。二百年宗社日阽危地。而殿下不思所以振起之乎。上曰。藴之爲德行。然後乃可發之爲事業。豈可無德行而有事業乎。且三代之治。不可猝復也。先生曰。殿下此言。固是循本之論。057_083b但德行非一朝可辦。而政事不可一日廢也。允德未成之前。將置政事於不問。而任其紊亂乎。德行事業。當交修並進也。且三代之治。固不可猝復。至於革弊救民則此豈難行之事乎。堯舜之德。雖曰難及。但求堯舜之用心。法堯舜之善政。則庶幾堯舜之治矣。
上曰。古亦有無堯舜之德而有堯舜之治者乎。先生曰。古人無法堯舜者。故不見其治。誠能法堯舜而行之。則豈無其治乎。孟子勸齊宣,梁惠行王道。以二君可行王道故也。豈好爲空言哉。先生嘗因書堂月製。乃設爲問答之辭。論王伯治國安民之道。名之曰東057_083c湖問答以奏御。後上問曰。何以漢文帝爲自棄乎。對曰。文帝固是賢君。當漢道全盛之時。可以復古。而終於雜覇。故臣以爲自棄耳。上曰。文帝之不能復古。以經籍遇火。眞儒不作故耳。豈是文帝之過乎。對曰。文帝無大志。每好卑論。雖有文獻。亦將如之何哉。人君立志不高者。大抵皆自棄也。時壼儀未建。先生疏論時弊。因陳擇妃之道。其略曰。古之帝王。所與爲婚者。莫非先聖之後。仁賢之裔。其求之之道。不過曰窈窕淑女。寤寐求之。求之不得。寤寐思服而已。未聞聚會闕庭。辨其優劣。如今日之爲也。已然之057_083d事。雖不可追。白今以後。勿以容姿服飾次等級。推卜吉凶爲急務。而先觀父母之賢否。以察其家法。次觀威儀之合度。以察其女德。且以宣問大臣。必得衆心允協。然後乃定。則天人之意無不同矣。一日上語及乙巳之事。領議政李浚慶曰。衛社之時。善士或有坐死者。其瘡痍未合矣。先生曰。大臣之言。何可含糊不明乎。衛社是僞勲也。其得罪者皆善士也。仁廟禮陟。中廟嫡子。只有明宗一人而已。天命人心。豈歸他人哉。奸兇乃敢貪天之功。斬伐士林。以錄僞勲。神人之憤久矣。今當聖上新政之初。當削057_084a勲正名。以定國是。不可緩也。浚慶曰。事在先朝。不可猝改。先生曰。不然。明廟幼沖卽阼。雖不免奸兇之欺蔽。今則在天之靈。洞照其奸。雖曰先朝之事。豈可不改乎。冬。聞外祖母病重。解官歸省。庚午。又拜弘文館校理。五月。白仁傑上疏。請昭雪乙巳己酉之冤。枉於是。政府三司同發論啓。而猶未擧僞勲。先生以爲正名爲政之本。而名之不正。莫甚於僞勲。乃言于同僚。力主削勳之議。時退溪先生與奇高峯大升。亦以爲先朝已定之事。不可革罷。朝議多以先生之議爲過。而先生獨排衆論。終始不撓。玉堂四057_084b十一劄。皆先生手筆也。至丁丑。因先生議又論之。竟得回天。物論快之。冬。辭歸海州。辛未。還坡州。拜吏曹正郎不赴。尋以弘文館校理承召入朝。拜檢詳,舍人,弘文館副應敎。皆辭。六月。除淸州牧使。專務敎化。手撰鄕約法。以率之。未幾病遞。壬申夏。拜弘文館副應敎。謝恩。病不供仕。復辭歸坡州。時相李浚慶。高亢不能下士。且膠守舊轍。導上因循架漏。無相業可觀。士類多短之。乃與洪曇,金鎧輩。有裁抑士類之意。戊辰年間。金鎧爲大憲。承浚慶風旨。欲論去朴淳,朴應男,竒大升,李後白,尹斗壽等十六人。適以事057_084c遞職。不果。己巳。再入筵中。極言年少輩朋黨。以少凌長。幾成己卯之習。臺諫安自裕,鄭澈。承旨沈義謙等。面斥其詆毀己卯。紹述袞,貞之所爲。三司竝發。請門外黜送。翌日。承旨奇大升請對。力陳其曲折而請罪之。退溪先生亦惡其所爲。與奇高峯書有曰。吾輩今日。實無更張國事。變亂政法。將欲迫逐舊人。濟已植黨之爲者。而彼乃强此之無。擬彼爲罪。援昔所誣。斥今爲證。必欲納之罟擭陷穽之中而後已也。其後李浚慶入侍。啓承旨請對非近規。先生辨其不然。及明廟喪畢。士類以爲明廟旣後仁廟。爲人057_084d後者爲之子。仁廟不宜享於延恩。當祔文昭殿。浚慶之意則仁廟之於明廟。異於父子。當享於延恩。論議不合。三司論浚慶復踵李芑之論。辛未。李浚慶使其族弟李元慶。通白仁傑,洪曇諸宰等。復欲罪朴淳,朴應男,李後白,尹斗壽,尹根壽,吳健,鄭澈等十七人。其言傳播。語侵白仁傑。仁傑遽歸坡州。以此浚慶之計解散。及疾病將死。上劄言朝臣朋黨。疑亂上聽。必欲去之。上頗驚疑。先生爲陳疏解之。旣而遠接使啓差從事官。拜司諫院司諫。辭。又拜弘文館應敎。上疏辭。自上有李珥本是迂濶者057_085a之敎。蓋先生自以爲學未進。不可從政。累辭要職。而凡所陳說。必以唐虞三代之道爲言。故下是敎。未幾。拜典翰。又辭不就。萬曆癸酉。拜弘文館直提學。三召不置。乃入朝。上曰。爾何退而不來。對曰。臣病深才疏。自度不能有爲。徒食廩祿。不如退免罪戾。故不敢進耳。上曰。爾才予所知也。勿爲過謙之辭。從今不更求退可也。先生曰。臣跧伏田里。未知聖學成就如何。今日民生憔悴。風俗頽敗。至於如此。臣佇見聖學之日章。而終不見效。臣竊怪焉。卽位之初。大臣輔導失宜。每引以近規。排儒者之論。故至057_085b今不善治耳。匹夫讀書躬行。尙且志在濟世。況殿下稟可爲之質。主一國之民。操可爲之勢。寧無惕然自奮之志乎。鄕約是三代之法。而殿下命行之。誠近代所無之慶也。但凡事有本有末。鄕約正萬民之法也。朝廷百官。未底於正。而先正萬民則舍本治末。事必無成。殿下必須躬行心得。而施及朝廷。政令皆出於正。然後民有所感發而興起矣。上曰。予自顧省。不欲輕擧。而言者不止。故從之耳。對曰。殿下誠心願治。則只此一念。便是關睢麟趾之意。豈必德如文王。然後始興周家事業乎。十月。於筵中啓057_085c曰人君處崇高之位。自以爲滿足。則善言何由而入。必也兼聽博聞。擇善虛受。然後群臣皆爲我師。而衆善合於君身。德業以之崇廣矣。今殿下謙沖退讓。形於下敎。而至於不從公論。自是非人。則反有謂人莫己若之病。臣竊悶焉。三公雖欲建白。恐拂聖旨。反爲君德之累。故悶嘿度日。若聖旨在於求治。則大臣亦必盡言。而廷臣各陳所懷矣。上曰。我國之事。誠難爲也。欲改一弊。又生一弊。弊未能革。反添其害。先生曰。紀綱不立。人心解弛。官不擇人。苟充者多。徒知餔啜。不念國事。革弊之令一下。先懷057_085d厭憚之心。非徒不能奉承。又從而故令生弊。此所以績用不成也。已而。陞同副承旨。入侍筵中。啓曰。今日國無紀綱。無可爲者。若今因循則更無所望。必須自上奮發大志。深悔旣往之誤。因以儆勑大臣百僚。一時振發。以立紀綱。然後可以爲國。紀綱不可以法令刑罰强立之也。朝廷善善惡惡。得其公正。私情不行。然後紀綱立矣。今者公不能勝私。正不能勝邪。紀綱何由而立乎。人之所見。自古不同。迂儒則以爲堯舜之治。朝夕可做。俗士則以爲古道決不可行。此皆非也。爲治須以唐虞爲期。而事功則須以漸進057_086a也。臣昔者。忝冒玉堂。每以唐虞三代之事。陳逹於上前。臣意非欲遽見其效也。只欲今日行一事。明日行一事。漸入佳境耳。我國唯世宗大王之政可法。用人不拘常例。任賢使能。各當其才。今日必須擇人授官。委任責成。然後庶績可熙矣。己卯年間。趙光祖有致澤之志。而年少士類。作事無漸。未免騷擾。竟致士林之禍。至於任事者。輒以己卯爲戒。然己卯之作事無漸。豈不逾於今日之全不做事乎。自上必先躬行。本原澄澈。然後爲治之具。次第擧行。則群下聳動矣。旣先修己。必須尊賢。所謂尊賢者。非爵之而057_086b已。必用其言。施之事爲。然後方是尊賢也。今殿下可謂好賢矣。但見命之爵而已。未聞用其言也。彼誠守道之士。豈爲虛禮而來仕乎。且未出身人若有才德。則用爲憲官。此國家恒規也。自己卯以後。遂杜其路。此不遵祖宗之法也。上曰。用賢固好矣。但不經事之人。恐其作事過中也。對曰。若有過中之擧。則自上當裁制之。不猶逾於恬然不爲者乎。世衰道微。士子只知科擧爲發身之路。彼一等人物。必不屑屑於此。科擧用人。乃叔季之習也。又曰。今日之務。莫急於恢張公道。自上無一毫私意。然後可以感057_086c發人心。而近日臺諫所啓。若涉宮禁,內需等事。則上必牢拒。群下疑殿下之有私。而以容嘿爲得體。孰有如臣愚者乎。愚者或有一得。其言亦可聽也。他日。先生更請以未出身人通臺憲之路。上乃下其議于大臣。大臣皆以爲是。上允之。上夜御丕顯閣。召侍臣進講書傳。先生啓曰。太甲賴伊尹匡救之力。克終允德。若無伊尹則成德未可期也。人君之得賢。非但爲一時之益。亦可托六尺之孤矣。雖聖智之君。天下之大。不能獨理。必以得賢爲務。故孟子曰。堯以不得舜爲己憂。舜以不得禹,皐陶爲己057_086d憂。人君之職。在於得賢耳。講訖。又啓曰自上所論人心道心之說。至爲精切。以此精明之學。益加踐履之功。則可以匡濟一時矣。雖精於文義。若不切己用功。則亦何益乎。臣見近來紀綱板蕩。命令不行。民生之苦。如在水火。如是而國家無事者未之有也。今須急聚賢士。使之各陳所懷。切於救民者。採而用之則猶可及救也。苟或因循舊轍。日益向下則雖有大賢。亦無如之何矣。上曰。自古新立國之君。不能無失德。而尙致小康。立國寢久。漸至衰微則雖有賢君。不能爲治矣。對曰。不然。周宣王,漢光武。皆中興之057_087a主也。二君豈賢於文王,高祖乎。至如晉悼公。十四卽位。六卿强。公室弱。而悼公能自振奮。卒成覇業。顧其立志如何耳。今者殿下立志求治。矯革宿弊則何治之不可成乎。上曰。革弊極難矣。先生對曰。若得人則不難矣。上曰。雖得人。若如宋神宗之志大才疏。則亦何益乎。先生對曰。宋神宗之立志亦誤矣。爲國以愛民爲先。而神宗欲事富强。故小人進興利之說。若以保民爲務。則小人何由售其奸乎。爲人君者。須以保民爲志可也。時群臣請賜退溪先生謚。上以行狀未成不許。先生進曰。李滉行迹。昭在耳目。057_087b行狀有無。有何增減。殿下於已死之賢。猶且靳於褒崇。況於一時之士。寧有好善之誠乎。李滉之謚。雖遲一二年。猶無大害。四方之士。疑殿下無好賢之誠。則其害豈淺淺乎。是時。先生欲積誠以回天意。黽勉從仕。牛溪先生語之曰。儒者當以格君爲務。若上心不回。則當速引退。不然則是枉尺直尋。非儒者事也。先生曰。此言固然。但上心豈可遽回。當徐徐積誠。以冀感悟。若以淺薄之誠。責效於旬月。而不如意。則輒欲引退。亦非人臣之義也。甲戌正月。以右副承旨。上萬言疏。極陳時弊。且言弭災之策及進德之057_087c功。上答曰。善哉論也。古之人無以加焉。有臣如此。何憂不治。第緣事多更張。不可猝然盡變。此疏示諸大臣議處。且命謄書以進。副提學柳希春進啓以愼飮食爲治病之要。先生曰。治病非但藥餌食物。必須治心養氣。然後可以養病。古人詩曰。萬般補養皆虛僞。只有操心是要規。是故。治心本也。食物末也。苟不治心。亦何能養生乎。先生雖被上眷。而言不見用。有人問曰。公留朝數月。有何功業。先生曰。雖當國之人。亦不可責效於數月之內。況能言而不能施者乎。人曰。識者頗疑叔獻之久留也。先生曰。每冀天057_087d心庶或可回。是以不決去就耳。或又謂先生曰。志在扶顚持危則雖涉苟且。不可退去。先生曰。苟且則是枉己也。枉己而能扶顚持危者。吾未之聞也。或曰。雖不能大有所爲。隨時隨事。有所補益。使不至危亡者。是或一道。先生曰。此當國大臣之事也。大臣已受重任。當見危授命。不可退去。苟非大臣。則見幾而作。不可失其身也。先生語人曰。吾留數月。或疑其久留。或恐其速退。識見之得中。豈不難哉。蓋以上頗好儒術。傾嚮先生。先生自任之重。庶幾有爲。故雖有不合者。猶眷戀低徊。不忍遽退也。二月。上謂先生曰。漢057_088a文何以不用賈誼乎。對曰。文帝雖賢。志趣不高。見賈誼言大。疑而不用耳。凡人有大志。然後可以做大事。譬如主人欲搆數間小屋。而工師乃欲構大廈。則豈肯聽從其言乎。因白上曰。今者災變屢作。民困日甚。不可徒曰恐懼修省而無其實也。近來敎令儘善。而實效則未之見也。上曰。何以則有實效耶。對曰。殿下每以變通爲難。故終無實效。若不更張。無以爲國。上曰。若非祖宗法制。則更張何難。對曰。非欲盡變祖宗之法也。至於貢案。是燕山所定。非祖宗法也。臣非好更張。欲救民瘼也。若欲改紀今日057_088b之政。則必求有爲之才。若不改紀則求賢何用。自古聖賢。隨時變通。以天運言之。歲久則曆數必差。代各有人。出而改正。若不隨改。則天象差謬。四時失序矣。後日。上以紀綱未振爲歎。先生對曰。紀綱在國家。若浩然之氣在一身。浩然之氣。是集義所生。非一事偶合於義而可襲取之也。須是今日行一義。明日行一義。義積于身。仰不愧。俯不怍。然後浩然之氣。充滿流行矣。紀綱亦然。非一朝發憤而可立也。須以公平正大之心。施之政事。今日行一善政。明日行一善政。直必擧。枉必錯。功必賞。罪必刑。紀綱立矣。上曰。今057_088c行何事。可以爲治乎。先生曰。爲治之道。何可盡逹。大槪先立大志。得賢委任可也。但知人實難。必先用功於學問。窮理,居敬,力行三者。勉勉加功。至於理明德成。則人物之賢愚邪正。可以洞照。毫髮不差矣。然學問必資啓沃之助。須親近儒臣。使之盡誠補導。此等事是爲治之根本。此外別無他巧術矣。殿下若於群臣。親密無間。則可以細知情狀。得其取舍之正矣。世宗大王知人善任。亦由知其情狀故也。世宗朝用人。不問久近高卑。惟其人器相稱。故有守一職而終身者。有超擢不日而至卿相者。六卿百官。莫不久057_088d任。而庶績以成。其於儒臣。眷遇殊絶。故臣隣咸懷效死之心。今日殿下。旣無親信委任之臣。庶官數易。故百事不理。譬之家事則分家衆以職。耕者耕。樵者樵。織者織。然後家業以成。若朝耕而午樵。午樵而暮織。則無一事可成矣。今士大夫盡職者無賞。癏官者無罰。其爲身謀則便矣。奈國事何哉。殿下何不擇人授職。使久於其任乎。修撰尹晛進曰。李珥論學。以窮理置於居敬之先。臣意居敬當在窮理之先。先生曰。程子曰。未有致知而不在敬者。尹晛之言是也。但敬是貫終始之功。無先後可論。且窮理。知也。居敬。057_089a行也。臣以知行之序言之耳。又曰。殿下欲用功於爲學。則先須立志。堅定不移。而敬以窮理。敬以力行。用功之久。至於義理有味。以學爲樂則處善循理。快然自得。心廣體胖。泰然悦豫矣。古之人君。有能治其國。而不知學問之樂。徒勉於事功。故多有終始參差者。昔者唐明皇以身瘐國肥爲言。此是强作者也。其能久乎。若學問有效。則身與國俱肥矣。是時。成均館儒生序齒。流俗多非之。李公海壽謂先生曰。齒坐非館中所宜也。榜中尊敬壯元。此亦禮俗。豈可坐於壯頭之上乎。先生曰。壯元之尊。施于榜會可也。若館中。057_089b乃明倫之地。長幼之序。不可亂也。且壯元之尊。何如王世子乎。古者世子入學。尙以齒坐。壯元非所論也。三月。上命義盈庫。納黃蠟五百斤。外間莫知所用。或云將用于佛事。時先生爲大司諫。啓曰。黃蠟將用何處耶。亟示聖意。以解群惑。上曰內用之物。非群下所敢仰問。又啓曰。宮中別無許多用蠟之處。此必出於邪岐曲逕。不可使聞於人。故臣等憂聖志之不能無惑。欲防微杜漸耳。昔司馬光曰。吾平生所爲。未嘗有不可對人言者。今臣等方以正心誠意望於殿下。而只此一事。不肯宣示則未知幽獨057_089c得肆之地。其能不愧屋漏乎。請自今以後。勿進非正之供。洞示聖懷。若靑天白日。使群下得仰見也。上怒曰。昔者梁武口苦。索蜜不得。不料再見於今日也。時事至此。寧不痛心。先生率同僚辭職曰。聖敎辭氣太厲。至以侯景比臣等。臣等不勝驚愕戰慄之至。該司之物固是殿下之所有。用之以正則群下當奉承之不暇。尙敢有一言乎。若用之以不正。而君擧將歸不法則雖該司亦當覆逆。況言官安敢嘿嘿乎。近者外間喧播之說。或以爲將造佛像。或以爲將興佛事。而水銀,黃蠟內入之命。適下於此日。臣057_089d等豈無憂懼之念乎。殿下但當內省于心。有則改之。無則加勉而已。祕諱峻拒。一至於此。何歟。昔舜造漆器。諫者十人。武王嗜鮑魚。太公不進。此豈愛敬不足而然哉。誠以忠臣愛君以德。敬君以禮。逢迎承順。反害於愛敬故也。殿下以一言之不能承順。輒加震怒。至於痛心。夫逢迎承順之態不足。而有妨於唯其言而莫予違者。殿下之所痛心也。上無虛受之量。下乏忠鯁之益。國事日非。不可收拾者。臣等之所痛心也。臣等輕淺陋劣。誠未上孚。請斥逐臣等。上尤怒曰。今見啓辭。不足備一笑。假使崇奉異敎。流057_090a來胡像亦多矣。新造何爲。未知聞於何人乎。予欲拿鞫。啓曰。傳播之說。非出於一人之口。若必一一拿鞫。則何異於衛巫之監謗乎。殿下只治臣等妄言之罪足矣。何必立威而箝口。以駭四方之觀聽乎。嗚呼。君德日就高亢。士習日趨萎弱。雖使朱汲在位。讜言日進。時事之正。亦不可望。況以臣等之淺劣。其能有補於萬一乎。請賜斥罷。凡五啓。上敎愈嚴。而言尤切直。不少挫焉。旣而上頗悔之。命還下黃蠟。先生每於入侍之時。懇懇多所陳逹。盧相守愼謂人曰。李某於經席多言。上所厭聞者。恐其057_090b生事。我欲止之而不相知。故不能也。先生聞之。笑曰。旣不能自言。又止他人之言。平生讀書。何所見而如此乎。他日入侍。先生自陳多病不能從仕。請退而調攝。上曰。病若如此。亦無可奈何。隱居最好。古詩曰。洗耳人間事不聞。靑松爲友鹿爲群。豈不樂乎。先生對曰。臣則有不然者。古之隱士。與人主不相接。無君臣之契。故可以相忘。而又身健無疾。自適於佳山好水。臣則受恩深重。故雖在畎畝。心懸冕旒。又有疾病。隱居何樂焉。只是難於尸素。故不得不退耳。因謝病免。旋拜右副承旨。復謝病。歸坡州。拜承旨,諫長。皆辭057_090c不就。十月。拜黃海道觀察使。先生以爲外職非如近侍。且方伯可救斯民一分之瘼。乃拜命。疏陳民瘼。蠲除弊政。專以興學校。尙敎化。恤民隱。修軍政。旌淑癉惡爲務。士民感悦。貪猾悚戢。乙亥春。以疾遞歸坡州。即拜副提學。又以疾辭。不許。會有仁順王后之喪。遂舁疾入京。呈辭至三。又不許。持平閔純。請於卒哭後依宋孝宗例。以白衣冠視事。乃會二品以上及三司長官廷議。二品以上皆曰。五禮儀。祖宗時撰定之久矣。不可輕變。大司憲柳希春亦以爲當守祖宗之典。且曰。人君居喪。與士大夫不同。時先057_090d君子爲大司諫。與先生意合。力言喪禮不古久矣。因此幾會。當變通從近古之禮。先生引古禮以啓曰。必欲盡合先王之禮。則當初上下當具衰絰如儀禮之制。別造布帽,布團領,布帶。以爲視事之服。今旣蹉過。不能追復。寧依宋孝宗制爲近於古也。若玄冠,烏帶之制。宋高宗朝羅㸃。建白行之。此時喪紀廢壞。易月之後。純用吉服。故罷㸃此論。猶愈於己。朱子君臣服議。辨論甚詳。豈可不從朱子之論。而泥於羅㸃之議乎。五禮儀撰定時。無識禮之儒臣。不能導先王於正禮。豈可再誤於今日乎。左議政朴淳,右議政盧057_091a守愼乃議啓。請從白衣冠之制。先生去年以大諫。言不合退去。而今又供職。諸公多疑其出處。牛溪先生亦語人曰。如叔獻出處。古未之有也。先生聞而笑曰。出處固非一端。我當初固無供職之志。欲於山陵事畢後退去。而適自上累賜休告。不改其職。且主上哀疚之中。善端開發。異於昔日。故欲姑留積誠。以冀萬一之幸耳。君子果於忘世則已。如或有意於斯世。則當此錮陰生陽之時。豈無可乘之機乎。上於卒哭後。猶未復膳。三公率二品以上啓請從權。群臣將退。上呼先生來曰。副提學歸鄕里。仍爲監057_091b司。久不相見矣。因溫諭。問以海西疾苦。賜語良久而罷。後日。講書傳至肯構肯堂處。先生啓曰。今人多不解肯堂構之意。只以膠守前規。爲肯堂構。此甚不可。其父定其基址。其子仍其制而構屋。然後乃爲善承父業也。今若只守其基。而無所營建。則是不肯堂構也。以國家言之。祖宗創業。法度未備。或時移世變。有可矯革者。隨宜經紀。當乎義理。乃是繼志述事也。若只守其法。不知變通。因循頽墮則豈是繼志述事乎。蓋先生欲改弊政。故臨文風之。因問上曰。曾聞殿下謂侍臣曰。予欲學問。只緣多事未遑。此057_091c誠有之乎。上曰。然。先生曰。臣聞此言。一以爲喜。一以爲憂。喜者。喜上有學問之志也。憂者憂上不察學問之理也。學問非謂兀然端坐。終日讀書也。只是日用間處事一一合理之謂也。唯其合理與否。不能自知。故讀書以求其理。若只以讀書爲學問。而日用處事。不求當理。則豈所謂學問者哉。今上日用之間。事事深求合理。而無少不善。則此乃學問也。自上質美寡欲。其於學問。不爲也。非不能也。六月。入侍啓曰。昨日。自上答館劄曰。毋甚高論。若只是殿下謙辭則可矣。若實以臣等之言爲高論。則恐非057_091d宗社生民之福也。漢文帝以三代之說爲高論。故功烈未免乎卑。此豈可法乎。一日筵中。上曰。四書小註。多有未穩處。欲稍刪改。以便觀覽。玉堂可任此也。先生啓曰。此非臣學力所能獨當。學問之士。不論出身與否。使參玉堂。同議刪定。上曰。前日大臣。使予招見成渾。予亦欲見之。但未出身人。無入參經席之例。雖招賢者。只一見而已。有何益乎。先生曰。自上誠欲有爲則雖舊例所無。亦可變通。膠守前規。豈能有爲乎。學問之士。處以閑職。使之輪日入侍經筵則於助成允德。大有所益矣。他日又啓曰。今日057_092a急務。莫如勉加聖學。以爲出治之本。而必得賢士。與之居處。曾以未出身人出入經筵事進啓。而自上以爲難當。更問大臣而處之。且承旨親入啓事。此中廟朝所行也。成廟朝。不時招玉堂入直之臣。對于便殿。名曰獨對。此例亦可復也。又曰。當用超遷久任之法。世宗用人以此法。今之官爵。朝更夕變。有同兒戲。百事不可做矣。七月。有宮奴犯禁。歐打憲吏。跳入王子寓舍。明日。憲府追捕益急。上聞之大怒。以爲憲吏作亂于王子寓舍。命下憲吏于義禁府。傳旨曰。憲府不當捉人于王子寓057_092b舍。憲府避嫌。時先生遭服在家。出仕後乃獨啓曰。此事上下胥失之。憲吏之事。非臺官所目覩。安知非直捉于王子寓舍。而明言其不然耶。殿下亦非目覩。只聽婦寺之言。婦寺之言。何可盡信。且王子宮奴。素稱縱恣。當嚴加檢飭。侯氏一婦人也。尙知敎子之方。常曰。患其不能屈。不患其不能伸。殿下有子。何患其不能伸乎。後於經席啓曰。人不能皆賢。不能皆不肖。賢者。欲君上是非分明。愛好儒士。不肖者。亦欲君上是非不明。不喜儒士。此理勢之自然也。頃者。自上頻接大臣。傾嚮儒士。且有不時057_092c召見之敎。人皆欣然以冀至治。而近日事勢忽變。非徒不喜引接。開筵亦罕。閭閻間不善者。皆喜悅增氣。賢者憂而不肖者悅。此豈盛世之事乎。因啓曰。近日以憲吏一事。守法忤旨之臣。上必厭之。但自古阿諛附托者。後必遺君。守正不阿者。後必盡忠。以周昌之事觀之。昌廷爭甚强。可謂不愛趙王矣。後爲趙相。盡誠保護。吕后不能召致趙王。先召周昌。然後乃致之。惟其平日有守正之節。故後日能保護。此意非獨自上知之。妃嬪亦當知之。上默然。時許曄爲大司諫。金孝元爲司諫。以爲左相朴淳按獄057_092d失體。啓請推考。淳乃謝病。於是。兩司議論相符。而獨正言趙瑗與先君子。以請推大臣爲非。先君子時爲憲長。仍論許曄以屍親切族。持論過重。兩司引嫌辭避。弘文館當處置。先生問于同僚曰。此事何如。皆曰。若遞兩司。是妨言路。先生曰。不然。當觀其事之是非耳。諫官有失。而玉堂糾正。則何妨言路乎。大臣有罪則遞之可也。罷之可也。雖流放竄殛亦可也。言官隨事論斥。有何回避。但不可請推也。所謂推考者。有司詰問照律。非所以待大臣也。昔漢臣有請使司隷校尉督察三公。議者非之。以爲不可使有司督察057_093a三公。今之請推大臣。乃有司督察三公也。諫院之啓旣非。而憲府雷同。皆可遞。唯金大憲,趙正言可出仕。僚議不同。先生力辨。良久乃歸一。著作洪迪,李敬中等曰。許大諫豈至於私所親。而爲過重之論乎。大憲亦不可不遞。乃上劄盡遞兩司。而只請趙瑗出仕。先是。尹元衡方用事。沈義謙爲舍人。以事詣其家。元衡之壻李肇敏與義謙相知。引入書室。室中多有寢具。義謙歷問是何人所寢。肇敏隨答以對。其一則金孝元也。孝元時未登第而有文名。義謙心鄙之曰。安有文學之士。乃從權門子弟游乎。決非介士也。厥後057_093b孝元登魁科。聲名日盛。朝士爭推奬焉。吳健欲薦孝元爲銓郎。義謙以前事輒沮遏。故孝元居郎僚六七年。乃爲銓郞。癸亥年間。李樑方禍士林。義謙有救護之力。故前輩士類多許之。而孝元心嫉義謙。常語人曰。沈也戇而氣粗。不可柄用。前輩皆疑孝元挾前憾。有報復之志。或有指爲小人者。而孝元儕輩。亦皆斥義謙。以爲害正之人。由是。前後輩不相協。有分黨之迹。許曄雖前輩而推許孝元。故年少輩尊之爲首。朴淳有淸名重望而是前輩。故人或指爲義謙之黨。許金之攻朴。實出於私意。而年少輩皆孝元之儕輩。故057_093c議論之和附至此。九月。大司諫鄭芝衍問于先生曰。士論橫潰。將何以處之。先生曰。此由銓曹不得其人故也。但當靜以鎭之。終不可駁撃。惟朴謹元所爲。不厭衆心。此可啓遞。芝衍深然之。欲只駁朴謹元。而同僚欲悉駁銓官。其論甚盛。芝衍不能抑。請盡遞參判以下。時先生銳意於格君。乃採掇經史要語切於學問政事者。彙分次第。以修己治人爲序。名之曰聖學輯要。上劄進之。翌日。上御經筵。謂先生曰。其書甚切要。此非副學之言。乃聖賢之言也。甚有補於治道。但如我不敏。恐不能行耳。先生起而伏地曰。自057_093d上每有此敎。臣隣極以爲悶。殿下資質卓越。其於聖學。不爲也。非不能也。願勿退托。篤志自奮。以成允德焉。昔宋神宗曰。此堯舜之事。朕何敢當。明道愀然曰。陛下此言。非宗社臣民之福。殿下之言。無乃近此乎。十月。先生以沈,金角立。朝廷不靖爲憂。言于右相盧守愼曰。兩人皆士類。非若黑白邪正之可辨。末路囂囂。浮言交亂。大臣當陳啓而兩出于外則庶可鎭靜。右相然之。乃於筵中白之。先生進啓。此未必深成嫌隙。只是二人親舊各傳所聞。遂致紛紜。大臣此言。欲鎭靜故耳。今日朝廷。雖無奸人顯著057_094a者。亦豈可謂必無小人乎。若小人目以朋黨。爲兩治之計。則士林之禍必起矣。此不可不知也。於是。特旨以金孝元爲富寧府使。沈義謙爲開城留守。孝元輩危懼不定。且孝元病不堪赴塞。先生獨啓曰。金孝元補外之說。非但大臣之意與臣合。實是士林間公論。第孝元疾病深重。將此筋力。受任塞北則緩死爲幸。安能有所籌畫。以爲固邊之計。且大臣之意。只欲爲鎮定之策而已。非以孝元爲有罪而放逐之也。請以內地僻邑授孝元。內全君臣之義。外固邊圉之備。後於引對日。復及之。乃改授三陟府使。因白上057_094b曰。前日上批有未安者。謂人臣食祿則當效死。是人臣自言則可矣。在上則不當發此言也。人君當量臣子才力。擇授可堪之職。人臣則當死生以之。夷險一節。重祿深恩。固所以結臣子之情。然人臣當以分義爲重。若只慕恩祿而效忠則他人亦必誘以恩祿矣。上然之。先生又啓曰。古者無學問之名。日用彝倫之道。皆人所當爲。別無標的之名目。君子只行其所當爲者而已。後世道學不明。彝倫隨晦。於是。以行其所當爲者。名之以學問。學問之名旣立。反爲世人所指目。吹毛覓疵。或指爲僞學。使爲善者諱祕057_094c遷就。以避學問之名。此後世之大患。人君須主張學問。使俗流不得謗議可也。上謂先生曰。予觀往史。時代漸變。夏不及唐虞。商不及夏。周不及商。今代固難復三代之治也。先生曰。世道固漸降矣。雖然。若行古道則豈無復古之理乎。程子有言曰。虞帝不可及已。三代決可復也。蓋唐虞無爲而化。後世所不能及。若三代之治則苟行其道。必可復也。只是不爲耳。三千年來。爲之而不成者。不可見矣。十一月。夜對啓曰。天理人欲。間不容髪。二者初非二本。未發時只是渾然天理而已。每於動處。善惡分焉。心動然後乃有057_094d人欲。上曰。動者因氣。氣有淸濁。故善惡分焉。天理人欲。初非並立於心中也。對曰。上敎當矣。天理人欲初非二本。而旣分之後。界限甚明。非天理則是人欲。非人欲則是天理。未有非天理非人欲者也。上曰。所行雖善。而或有求名之心。則亦不可謂天理也。先生曰。心欲求名而矯情爲善。則是亦人欲而已。上曰。好名之人。能讓千乘之國。而簞食豆羹見於色。其無根本如此。且好利者不能欺人。好名者善於欺人。其弊大矣。先生曰。上敎當矣。但爲善者與好名者。辨之甚難。若見爲善者而輒疑其好名。則無好善057_095a之實矣。此不可不知。未幾。謝病辭職。遞授西班。丙子。先生旣遞副提學。朴思菴淳每於經席。薦其賢且才可用。上曰。此人矯激。且不欲事予。予何爲强留乎。自古許退而俾遂其志多矣。賈誼讀書能言。而實非可用之才。漢文之不用誼。眞有所見也。金孝元旣出之後。朝論便激。欲深治之。先生極力止之。務欲調和鎭定。而前輩則尤先生之不攻孝元。後輩則尤先生之不用孝元。論議中分。皆以先生爲非。先生當初於東西。亦無偏重之見。只欲保合人才。惟賢是取。東人反以先生爲主西。必欲去之。或謂先生曰。天下無057_095b兩是兩非。公於近日事。不分是非。務欲兩全。如何。先生應之曰。沈,金之事。非關國家。而自相傾軋。至於朝廷不靖。眞是兩非也。雖曰兩非。而俱是士類。但當和解消融可也。必欲是此而非彼。則方生之說。相軋之勢。何時可了乎。先生上旣不得於君父。下則僚友不從其言。遂決退意。士類知先生將退。多來就別。東西雜坐。先生曰。吾今欲爲定論。諸公試聽之。權奸濁亂久矣。摧陷廓淸。使士論得伸。豈非方叔諸公之功乎。仁伯若爲國事則宜無失巨室之心。而乃排抑前輩。使前輩懷憤。士林自相角立。此則仁伯之罪也。旣如057_095c此。故公論裁抑。出補外官。已得中矣。而猶嫉之太甚。攻之太劇。此則前輩之罪也。如此論斷。得其事情矣。皆曰。此言眞是公論。三月。解官歸坡州。拜右副承旨,大司諫,吏曹參議,全羅監司,兵曹參議等職。皆不就。丁丑。歸海州。先生嘗慕張公藝同居之事。至是。立祠堂。築居室。請伯嫂郭氏奉宗家神主以來。大會兄弟子姪同居。以遂平生之志。拜大司諫不就。時上將親祭于大院君廟。弘文館上劄。以爲禮不可祭于私廟。上大怒曰。誰作此議。將詔獄鞫問。大臣救解乃止。先生聞之曰。主上於大院君之廟。親行祀事。於057_095d禮無違。於情所必至。玉堂何所見而請止乎。或疑祭大院君。若用君臨臣廟之禮。則子不可臣父。若用子入父廟之禮。則有妨於尊正統。此非稽古之說也。公朝禮。以君爲尊。故雖諸父皆行臣禮。但親父則不可臣也。家人禮。以尊屬爲重。故人君可居父兄之下。若孝惠於宮中。坐齊王之下是也。學宮禮。以師爲尊。故雖天子。亦有拜老之儀。若孝明拜桓榮是也。況大院誕生聖躬。假使尙存。主上必不敢臣而相見於宮中。必拜矣。今入其廟。用姪子祭叔父之禮。有何不可乎。戊寅三月。以大司諫赴召。時恭懿王大妃057_096a升遐。上方在哀疚中。故不忍安居。一出謝恩而已。本無供職之念。還向坡山。有舟行不忍終南遠。爲報篙師莫擧帆之句。五月。又拜大司諫。上疏辭職。且言殿下若欲知臣可用與否。則當問以時事。言不可用則願勿更召。上答曰。諫長不可久闕。玆遞本職。如有所懷。可實封以聞。乃上疏極陳時弊。且陳救時之策。過萬餘言。言甚剴切。政院請更召。乃有召命。未幾。復拜大司諫。先生不知旋授大司諫。只辭召命。而上遽命遞之。政院,玉堂。皆以爲不待自辭。徑遞諫長。旣非故例。亦非待士之道。不允。牛溪先057_096b生讀先生陳弊疏曰。眞所謂直言極諫經世之策。此疏蒙允與否。乃關時運。非人力可及。居數日。拜吏曹參議。先生竟辭不至。時士類中分。東盛西衰。一時進取者咸趨入於東。扼腕以爲東是西非。尹晛與金誠一。同作銓郎。議論矛盾。遂成嫌隙。晛之叔父斗壽。季父根壽。皆在要津。扶西抑東。東人深嫉之。金誠一於經席啓曰。全應禎以行賂受罪。而亦有載米行賂者。貪風未戢矣。上問何人。誠一對曰。珍島郡守李銖。臺諫請治其罪。上命下銖詔獄曰。只治與者。不治受者可乎。臺諫乃擧三尹爲受者。先君子以大057_096c司諫受暇。自鄕還啓曰。三尹俱被擢用。別無大段過惡。受賂事。安知非陰中者所造言乎。徐待獄成。治罪未晚。而遽拈出三人之名。泛請治罪。非待士之道。於是。兩司憤激。掌令李潑。捃摭醜詆。無所不至。憲府聞李銖之米接置于市人張世良家。乃托他事。捕繋世良。因移囚禁府。必欲成獄。考掠至二十餘次。殆死而終不服。或謂世良曰。汝若承服則可免死。何苦忍杖。世良曰。我豈不知不服則死。服則生乎。但實無是事。安可自貪其生。而陷人於死地乎。上以世良久不服。疑銖獄不實。命釋之。政院爭之。至四啓。上057_096d大怒。盡罷遞承旨。先君子素負淸望。後輩亦或咨稟。至是大乖。鄭松江澈。不直此獄事。語頗及之。東西自是更無相合之望。先生聞之曰。李銖行賂。虛實未可知。而張世良接米之罪甚輕。以世良爲干證。必欲其直招。則爲干證者考訊。例不過三次。何可濫加二十餘次乎。設令世良爲正犯國法。非死罪則不可限輸情窮治。世良之罪。不過杖之而已。安可以輸情爲限乎。後輩識見不明。用意不弘。只恐獄不成。反中其禍。不念殺無辜之爲害義。不顧前後是非。而唯獄之務成。不可使聞於他人也。又答李潑書。切責之。己卯五057_097a月。復以大司諫召。先生辭疾不就。上疏論東西分黨。而東人攻西太甚。欲强定是非。請洗滌東西。保合士類。使之一心徇國。言甚激切。上以疏辭不中。命遞之。七月。白參贊仁傑。上疏極論保合東西之策。仁傑將陳疏。而恐其辭不逹意。請先生修潤。先生憐其憂國之誠臨死不渝。乃依其言爲改草。至是。正言宋應泂聽李陽元指嗾。啓曰。白仁傑之疏。出於李珥之手。仁傑老妄。不足責。珥以經幄舊臣。凡有所懷。宜直逹無隱。而乃敢匿跡回互。隱然代述。請正人臣詭秘不直之失。於是。兩司,玉堂。是非相持。仁傑陳057_097b疏自明曰。宋之程頤。代彭思永作論濮王典禮疏。代富弼作論永昭陵疏。代呂公著作應詔疏。此等事。先儒亦嘗爲之。故臣用李珥之文。而不以爲嫌。向人無隱。故傳者以爲珥誘臣上疏。臣雖無狀。豈敢以非臣本意。而聽人所敎爲此疏乎。庚辰冬。拜大司諫。承召。自海州入京。辭不許。引見。問以凶歉之狀。且曰。久不相見。無乃欲有所言乎。先生請移粟賑飢。歷陳治道之要。因白上曰。自上加恩禮于成渾。近古所罕。上曰。渾之賢。予已聞知。第未知其才如何。先生曰。才亦非一般。有可獨任經綸之責者。有好善而能057_097c用群才者。成渾之才。若謂之能經綸天下則過矣。其爲人也好善。好善優於天下。此豈非可用之才乎。辛巳正月。白虹貫日。先生率同僚。請修政以弭天災。先生初無從政之志。見上頗有向用之意。又見士論潰裂。欲留而調劑。士類問先生以當務之道。先生曰。當今患在君臣不相知。士類不協和。須通融爲一。不相疑阻。而相與積誠。以回天意。此是第一策也。二月。講春秋。啓曰。程子曰。後王若知春秋之義。則雖無禹湯之德。亦可以法三代。願殿下每讀此經。必思如何作爲。可回三代之治則必有益矣。是歲大057_097d旱。平安,黃海。凶歉特甚。國儲已罄。救荒無策。朝廷恬然無所猷爲。先生深憂之。乃於筵中啓曰。若不變通弊法。以濟艱難。而只欲移粟活民。則粟亦已乏。無可移者矣。我國貢案失宜。故防納之徒以牟利。而齊民困苦。今須改定貢案。均敷平定。而使之必貢土產。則民解積苦矣。且生民休戚。係於守令。守令勤怠。係於監司。監司數易。故皆苟經歲月。間有盡職者。亦未及施爲。須以大邑爲營。久居其職。而別擇制治之才。可堪公輔者授之。則必有其效矣。退與同僚商議。上劄又請變通弊法。改定貢案。久任監司。倂省州縣。057_098a且請用賢以作人才。修己以淸治本。去私朋以和朝廷。時宗系之誣。雖蒙聖旨許改。而未及頒降。會典纂修垂畢。先生慨然曰。匹夫受誣。尙能伸雪。安有國君受誣二百年不伸者乎。此由使价不得其人故也。乃啓請擇遣。奉敎製進奏本。上曰。善哉蔑以加矣。大事將必諧矣。六月。特陞嘉善。拜大司憲。再辭不允。時朝議益携貳。隨事潰裂。掌令鄭仁弘,典翰李潑。素嫉沈義謙。必欲劾去。先生力止不能得。言於牛溪曰。鄭必欲擊去方叔。此甚非是。然我若不從則鄭必怒而下去。其徒必執此而攻我矣。我去則無057_098b復保合之望矣。勢將黽勉而從之矣。牛溪然之而歎曰。鄭可謂平地起風波矣。先生遂與仁弘議草啓辭曰。此啓辭十分停當。此後不可添刪。仁弘唯唯。一啓之後。仁弘添以義謙援附士類。以助聲勢等語。上問士類何人。仁弘對曰。所謂士類者。義謙與尹斗壽,根壽,鄭澈等諸人。相與締結。窺覘形勢也。先生謂仁弘曰。年前時論過激。故季涵以爲過。果有不平之言。此非爲義謙也。季涵是介士也。若以爲締結義謙。以助聲勢則冤枉極矣。君須避嫌。爲澈分疏。然後某可供職。仁弘乃屈意從之。先生與同僚將處置057_098c仁弘。僚議不一。互爲避嫌。尹承勲爲正言。以先生爲黨護松江。欲論遞。而僚議不同。獨避嫌以啓。於是。公論以爲承勲當遞。而時輩深嫉松江。玉堂之論。至欲獨留承勲。竝遞兩司。李潑,金宇顒。依違兩間。上箚不分是非。請竝出兩司。先生曰。時論之偏。我不能匡救。三司皆無公論。我不可無言。乃避嫌啓曰。玉堂劄論。其言糊塗。如是而能底鎭定者。未之聞也。大抵鄭澈。疑士類之過激。屢形於辭色。士類亦不深究澈之心事。而詆斥過實。士類之疑澈愈甚。而澈之不平愈深。澈固不是。而以澈爲黨於義謙者。亦不得爲公057_098d論矣。彼承勲不過承望士類之風旨。爲趨附之計耳。士論如此。豈有寧靖之時乎。兩司以指斥尹承勲爲太過。請遞先生。上下峻敎不允。而屢啓乃允。特出尹承勲爲新昌縣監。先生旣遞大司憲。公論皆以時輩所爲爲害正。先生見同朝之士皆無識見。殊鬱鬱不樂曰。我欲打破東西。保合士類。而時輩則自是己見。寧誤國事。我若退去則時事尤潰裂。故隱忍不去耳。後因入侍。引咎自陳。且言尹承勲不可折之太過。上優答而已。方三司之攻先生也。朴思菴淳歎曰。年少輩識見暗昧。如叔獻可作儒宗。時輩當聽命。057_099a而乃以細事爭競至此。置國事於度外。可謂逐鹿而不見泰山也。九月。拜藝文提學,司諫院大司諫。上疏辭職曰。當今急務。在於打破東西。保合士類。而臣不能鎭定。請爲庶官。以盡葵藿之誠。上答曰。具悉卿意。可勿辭。竟以疾遞。上憂度支未得其人。大臣首薦先生。特陞資憲。拜戶曹判書。辭不許。上以天災。延訪公卿。先生進啓曰。天道玄遠。誠難窺測。第以古史觀之。治亂之形已定。則無災異。災異必作於將亂之際。雖賢君亦不免災異。蓋天心仁愛。欲使人君儆省興治也。我朝立國幾二百年。至于今日。如057_099b老人元氣垂盡。不可復振。而幸有聖上出焉。此正將治將亂之幾也。若於此時奮興振作。則爲東方億萬年無疆之休。不然則將至於潰敗澌盡。而莫之救也。人君必知一世之弊。然後可興一代之治。如醫者必知疾根之所在。然後方可對証用藥。今日之弊。誠難枚擧。大槪病根。不能委任賢才之故也。今不能做實功。而欲望其無災。得乎。至於革弊一事。臣有妄計。請令大臣商議設局。名之曰經濟司。使大臣領之。而擇士類曉逹時務留心國事者。與其選。凡有建白之言。皆下司商議。以革弊政則天心庶可回矣。又啓057_099c曰。今欲明敎化。則必須尊奬先賢。使後學有所矜式。本朝名儒。雖不可悉入祀典。如趙光祖倡明道學。李滉沈潛理窟。此二人誠可從祀。以起多士向善之心。他日。入侍啓曰。延訪求言。未聞用某策救某弊。如此則徒爲文具。何以應天變乎。上曰。何以則可應天變乎。先生曰。若殿下不先立適莫之心。與大臣及識時務者。商確救時之策。不以更張爲主。亦不以膠守爲主。祖宗良法廢而不擧者。修擧之。近規之貽患於生民者。革除之。新策之可以利國活民者。講行之。如是勤求匡救之術。日有所爲則人心世道可057_099d變。而天怒亦可弭矣。不然。而只以恐懼修省爲名。而無其實。則將何以上答天心。下慰人望乎。是冬。拜兩館大提學。累辭不許。先生每嘆浮文之幣。及典文衡。痛革此習。凡試取。必以理勝爲主。壬午春。拜吏曹判書。三辭不獲。先生專以革舊弊。淸仕路爲務。如簡賢士以充臺憲之任。擇學行以爲師儒之官。擧恬退以礪名節之風。薦吏才以試臨民之職。重監司之選。嚴守令之薦。皆一時所請施行者也。秋。拜議政府右參贊。陞崇政。拜右贊成。皆辭不允。奉敎製進人心道心圖說,金時習傳,學校規範。先是上於經席。057_100a論及士習偸薄。師道廢弛之弊。命作擇師養士之規。先生商量搆思。以擇師養士爲事目。又作學校模範十六條。以補學令。冬。皇朝遣國史編修黃洪憲,工科給事中王敬民來頒詔。三公薦先生爲遠接使。逆於境上。兩使注目良久。問於譯官曰。頗有山林氣象。無乃强起林下士以儐我耶。譯官對曰。三場壯元。久居侍從。中年退居林下有年。今則國王倚任已久。實非林下士也。又問曰。然則豈作天道策者乎。對曰。是也。兩使頷之。及途次賡和。兩使題詠。先生操筆立成。而詞意俱美。詔使嘆美曰。大手大手。知先生爲057_100b有道君子。禮敬甚至。必以栗谷先生稱之。入京謁文廟。見壁上書程子四箴。請先生講解克己復禮爲仁之義。先生卽爲說以解之。詔使讀至五六遍曰。此說極好。當傳布中朝。回程至江頭。臨發。正使遽出七言古律各一首求和。先生以行旆將發。卽就座上。自寫以呈。兩使傳玩。臨分。皆戀戀至執手揮淚而別。論者謂詔使致敬。近古所未有也。俄拜兵曹判書。三辭。癸未正月。又辭。終不許。本曹事務煩劇。又値胡變。牋牒雲委。剖決如流。而備邊司許多籌畫。咸推先生裁決焉。布置策應。各適其當。號令嚴明。緩急有序。人情057_100c信服。上下倚仗。時昇平日久。軍備虛疏。調發相繼。兵食俱乏。先生建請募庶孼及賤隷。入戍北邊。而使無武藝者。納粟于邊。庶孼則許通。賤隷則從良。皆一時便宜。而實祖宗朝已行之規也。禁錮庶孼。已過百年。人皆習熟見聞。而先生獨以爲王者立賢無方。不可廢棄人才。每欲通庶孼仕路。而至是啓行之。流俗頗多不悅。又進六條曰。任賢能。曰養軍民。曰足財用。曰固藩屛。曰備戰馬。曰明敎化。皆切時之務也。又上時弊疏。其大略言。和朝廷而革幣政。其本也。調兵食而固防禦。其末也。先生之意。蓋欲盡革燕山朝弊057_100d政及近來謬規。一遵祖宗全盛時故事。興衰補弊。率由舊章。惟以文昭,延恩之祭。山陵朔望之祭爲非禮。以爲雖未能一朝據禮盡廢。而煩黷已甚。非可繼之道。請於山陵。只祭四節。兩殿。日行一祭。以謹祀事。以紓民力。此先生立朝建白大議論也。上見朝臣皆庸瑣無能。充位持祿。而先生公忠不黨。至誠憂國。倚任頗專。多用其言。而時輩忌憚愈甚。日夜偵伺。謀所以傾陷之者。凡有建白。動輒沮撓。浮議交亂。謗言繁興。而時事決不可爲矣。夏。北胡再擧入寇。國內騷動。抄發射手。官無戰馬。難以卒辦。先生懲057_101a乙卯戰士之掠馬。深以階亂爲憂。募所抄三等以下。許令納馬免防。以給一二等之應赴者。初欲啓請。而恐鮮應募者。乃先下令試募之。於是納馬者雲集。而戰士臨行。不可緩期。遂先頒馬。而後啓聞。上旣允之。行者以得馬爲幸。留者以免防爲喜。公私兩便。又請出軍資監綿布。計給衣資。減百官祿。以給赴防者之妻孥。軍情大悅。不知有防戍之苦。而應募輸邊之粟。亦足以繼餉矣。一日有邊報。上命召先生。先生方患眩暈。力疾趨命。未及政院疾甚。不得已入臥內兵曹。於是。三司以專擅權柄。驕蹇慢上論劾。057_101b所謂專權。指納馬免防。不先啓請也。慢上。指承召不詣政院也。先是。許曄爲慶尙監司。得病危重。其子篈以應敎。呈辭省親。挾妓游戲。不謹侍藥。曄竟不起。及先生典選。時輩將擬篈以直提學。先生斥其事而不許。篈之徒多怨之。朴謹元爲吏曹參判。先生曾勸鄭公芝衍。劾以徇私失政。先生爲大諫時。又劾謹元貪鄙巧詐。且先生中立不比。激濁揚淸。收用西人之可用者。沮抑東人之偏私者。由是諸憾蝟起。毁言橫流。醖釀媒孼。其來已久。至此而乃發。累啓不允。先生陳六疏。引咎請罪。上曰。寥寥千載。君臣相遇。057_101c得做功業者。絶無而僅有之。卿不親聞向者之敎乎。予命之退然後退。丁寧一言。神鬼亦知之。卿何忍今日欲辭去也。前後批辭。愈益懇切。促出甚至。先生遂詣闕復啓。上終不允。臺諫宋應漑等。復劾以無臺諫。蔑公論。許篈爲典翰。自草劄率同僚論啓。至有偏聽生奸。獨任成亂。妬賢嫉能。禦下蔽上。以成其私。其志欲將何爲等語。上以手敎下大臣曰。近因李珥言語間事。臺諫相激爭辨。反覆纏繞。至於玉堂上劄。比某於誤國小人。此非發於偶然言語間事也。蓋珥自前裁抑新進之士。惡其趨時黨附。累爲陳論。057_101d由是見忤於時論者久矣。遂因小失。乘時俟釁。必欲劾去而後已。凡公卿大夫承召不來者多。未聞有以慢上論之者。是何臺諫之言。獨能直截於珥也。其納馬不禀。亦不過許多事務間趁未取稟耳。是豈擅權而然哉。夫擅權慢上。人臣極罪。人君之於小民。尙且不可以情外罪名。輕加於其身。況宰相耶。旣曰擅權慢上。則何不明正其罪。照以王法。乃敢請以罷職。有如乙巳奸臣輩目之以叛逆。而罪之以罷遞者之爲耶。此所以珥不心服。累辭之際。果有涉於自辨。豈有忌克忿心於言官哉。所貴乎臺諫者。身任公論爾。若057_102a陰濟己私。以爲排擯傾陷之計。則烏在臺諫之道也。卿等如以珥爲誤國小人。則當明辨斥退。不然。攻之者是小人也。安有人君用小人而可以爲國之理乎。分別淑慝。其不在今日乎。卿等不宜含糊不辨。大抵朝廷朋比分黨。國事日去。而大臣不爲分別。則將置國事於何地耶。乃以兵務久曠。姑遞其職。先生退歸坡州。朝野憤激。物論讙譁。牛溪先生上疏。極陳三司構陷之狀。上命招三公。仍傳曰。頃日。問卿等以賢邪是非。而卿等乃敢爲含糊之說。予固以洞燭卿等之心。而隨後處之之敎則已諭矣。今觀成渾疏。大057_102b臣事君之道。果如是乎。當初排擯李珥。誰所爲也。其朋奸之類又誰也。其辨別以啓。朴思菴淳。以首相請對。極陳先生忘身徇國之實。許,宋飾誣害正之罪。宋應漑因避嫌。復揑虛醜詆。無所不至。於是。太學及湖南儒生。相繼抗章申辨。朴謹元爲都承旨。前後累啓。至以儒生疏爲悖亂。上洞燭情狀。下手敎。竄逐朴謹元,宋應漑,許篈等。其徒上疏救之。上答曰。觀此上疏。只是謄寫三司啓離。邪黨言之如此。無足怪者。至於以李珥爲黨云。其能以此說動予意乎。苟君子也。不患其有黨。唯患其黨之少。予亦法朱熹之057_102c說。願入珥,渾之黨也。自今以後。爾輩以予爲珥,渾之黨可也。爾輩尙復有說乎。唯詆斥珥,渾則必罪不赦矣。先生自坡州因下海州。未幾。以判敦寧府事命召。先生陳疏懇辭。上答曰。噫。天未欲平治我邦耶。是何以卿之爲人。而不得於時也。意者天其使卿動心忍性。增益其所不能。將任舟楫霖雨之責於後日也。天之於卿。可謂曲成而玉汝矣。今日之事。於卿何損焉已。特拜吏曹判書。且有召命。先生復陳疏辭。入京又辭。上卽命引見。先生引咎陳謝。請疏放三竄。因乞致仕。皆不許。先生與牛溪前後引見。力057_102d請放還三竄。退而相謂曰。三人雖不可謂無罪。以言獲罪。至於投之魑魅之鄕。非所以示後嗣。此事不可不反覆陳啓。以回天意。時時輩布列臺閣。懷疑顧望。無意共事。先生歎曰。時輩之心公者。觀我所爲。久當明我赤心。與之同事矣。甲申正月初三日。始感疾。十四日。聞徐益受巡撫之命。將往北道。扶疾口號方略六條。使弟瑀書以贈益。自是疾尤劇。翌日卒。年四十有九。疾病。上命醫問疾賜藥。訃聞。上哀慟。命進素饍。輟朝三日。乃遣禮官弔祭。祭文有曰。盡瘁乃已。卿則何悲。中流失楫。予甚痛之。且令沿路州郡。057_103a護送其家屬。以是年三月某日。葬于坡州斗文里紫雲山某坐某向之地。從先兆也。先生之配曰貞敬夫人盧氏。谷山望族。知中樞府事重禮之玄孫。考諱慶麟。宗簿寺正。妣安東金氏。繕工監正諱漢老之女。夫人生于嘉靖辛丑。丁巳。歸于先生。仁順慈和。配君子無違德。事庶母如事母。承奉宗姒郭氏。極其誠意。待衆妾以恩。視之如姊妹。撫妾子如己出。至自抱持鞠育之。雖侍婢之賤。未嘗加以威怒。蓋其性度和順也。甲申春。奉先生几筵歸海州。朝夕上食。必與二妾。親自精備。三年之後遇朔望。必哭泣而奠。撫憐奉祀妾057_103b子。出於至誠。凡家政細大。一使主之而己不與焉。顧恤諸姪。甚於私親。而於宗姪尤篤。以坡州田收。盡爲助祭之資。凡待宗族。接隣里。一以先生時爲法。人以爲是觀感所致。壬辰之變。聞賊渡海。語子姪曰。我本以病人。不能騎馬。且此大盗彌滿一國。必無偸生之地。與其轉死他鄕。寧死於坡山墓側。吾志決矣。爾輩勿以我爲念。善爲避兵。他日亂定。好收吾骨於墓側。子姪對曰。寧有是哉。夫人笑曰。爾輩以我死爲難乎。吾喪所天已八年。吾之命不亦頑乎。況逢大亂。不死於墓側。而茍且偸生。有何義乎。吾志決矣。勿復言。四057_103c月晦。大駕西幸。乃奉神主。歸坡州墓所。及賊至。夫人猶守初志。不離於墓側。卒以五月十二日。遇賊不屈。遂被害。明年。大駕還朝。命旌表其閭。夫人有一女。早夭。側室有子二人。曰景臨。曰景鼎。女一人。爲進士金集妾。景臨有子五人。曰穧。曰稱。曰秬。曰穳。曰某。女一人幼。景鼎子二人。曰稔。曰某。女一人幼。金集妾有子女四人。皆幼。先生天稟極高。忠厚愷悌。容儀秀發。神彩動人。其言有物。其行有常。寬而有制。和而有節。喜愠不形於色。恚罵不發於口。行步必詳。動靜有法。一見輒知其爲有道君子也。其爲學也。以收心養057_103d性爲本。而一於主靜。遂暫染禪學。一朝釋然開悟。去邪歸正。醇如也。天人性命之微。修己治人之道。無不硏窮玩索。洞見大原。體之於身心而推之於事爲。紛華之中。自持愈嚴。屋漏之隱。謹獨無愧。見識精詣。踐履篤至。而每以爲未足。勇往直前。唯恐不及。雖於世味。一切淡泊。而至應物處事則條理詳密。不遺錙銖。每日晨起。整齊衣冠。詣祠堂焚香拜謁。退坐書室。涉覽經傳。尤喜朱子大全。嘗患胃疾。故讀書不喜出聲。而若遇理會自得處。輒欣然朗讀而止。自晨至夕。必有所事。或讀書思索。或朋友講論。或應接事物。非有057_104a疾病。未嘗偃臥枕席。講說道理。精微透徹。多闡先儒所未發者。試撮其大者而言之。雲峯胡氏以爲性發爲情。其初無有不善。心發爲意。便有善不善。退溪先生以爲四端理發而氣隨之。七情氣發而理乘之。胡氏以情意爲二歧。退溪以理氣爲互發。而先生辨之曰。心之體是性。心之用是情。性之外更無他心。故朱子曰。心之動爲情。情是感物所發底。意是緣情計較底。非情則意無所緣。故朱子又曰。意緣有情而後用。心之寂然不動者。謂之性。心之感而遂通者。謂之情。心之所感而紬繹思量者。謂之意。然則心性果有二057_104b用。而情意果有二歧乎。五性之外無他性。七情之外無他情。孟子於七情中。剔出其善情。目爲四端。非七情之外別有四端也。情之善惡。夫孰非發於性乎。其惡者本非惡。只是掩於形氣。有過不及而爲惡。故程子曰。善惡皆天理。朱子曰。因天理而有人欲。四端七情。果爲二情。而理氣果可互發乎。夫以心性爲二用。四端七情爲二情者。皆於理氣。有所未透故也。凡情之發也。發之者氣也。所以發者理也。非氣則不能發。非理則無所發。理氣混融。元不相離。若有離合則動靜有端。陰陽有始矣。理者太極也。氣者陰陽也。今曰。057_104c太極與陰陽互動。則不成說話。太極陰陽。不能互動。則謂理氣互發者。豈不謬哉。牛溪以爲朱子論人心道心。有或生或原之語。似與退溪之意合。四七之與人心道心。雖其立言意味差有不同。皆其說性情之用耳。理氣互發之說。非天下之定理。則朱子何以有或生或原之說耶。先生曰。感動者固是形氣。而其發也直出於仁義禮智之正。故主乎理而目之以道心。其源雖本乎天性。其發也由乎耳目四肢之私。故主乎氣而目之以人心。人心道心。只是一心。而隨其發而異其名耳。若曰理氣互發。則是理氣二物。各爲根057_104d柢於方寸之中。未發之時。已有人心道心之苖脈。理發則爲道心。氣發則爲人心矣。然則吾心有二本矣。豈不大錯乎。退溪以四端爲由中而發。七情爲感外而發。以此爲先入之見。而以朱子發於理發於氣之說。主張而伸長之。夫心必有感而動。而所感皆外物也。天下安有無感而由中自發之情乎。所感有正有邪。其動有過有不及。斯有善惡之分耳。今以惻隱言之。見孺子入井。然後此心乃發。所感者孺子也。孺子非外物乎。安有不見孺子之入而自發惻隱者乎。就令有之。不過爲心病耳。非人之情也。朱子之說。意必057_105a有在。不過曰四端專言理。七情兼言氣云爾。非四端則理先發。七情則氣先發也。且言七情則四端在其中。非若人心道心之相對立名也。旣曰道心。則非人心。旣曰人心。則非道心。故可作兩邊說下矣。若所謂四端者。則只是七情中直出者也。何可謂四端非七情。七情非四端。而分兩邊說乎。前後往復。殆至十數書。皆在兩先生文集。先生於心性情理氣源頭。極深硏幾。通透灑落。故其見識言論。非近世諸儒所可及。其居家也。孝友因心。自少有宗族同居之志。家世淸貧。骨肉離散。常以是傷之。伯兄早世。家累在懷德。迎057_105b致于家。撫養其子女。訓誨成長。婚嫁以時。捐己臧獲以給之。財用諸事。使宗姪掌之。每與仲兄季弟諸姪諸甥。相聚一堂。連枕而宿。歲時佳辰。若有酒食。命第彈琴。使少長歌而和之。極歡而罷。凡祭祀。一依朱子禮。朔望參後。內外親會坐正寢。先生坐東。庶母及郭氏與夫人坐西。受子姪婦女等拜。又令子弟。讀所著同居戒辭以警之。婢僕亦於庭下。分男女序立。以次行禮。又以方言譯戒辭。諄諄告飭。卒以爲常。國法嚴禁屠牛。犯者至於徙邊。先生曰。國禁不可犯。自是。牛肉不用於祭。不入於口。凡人之饋遺。必擇而受之。雖057_105c騶直。盡散與親舊。事庶母致其誠。卒化其暴悍。使奴僕。先恩後威。家庭之內。肅穆如朝庭。居常遠女色。嘗以省姊。行到黃州。有名妓近方。卽明燭以拒之。其和而不流如此。先生雅好山水。凡勝地無不往觀。如海州潛陽洞,藏仙洞,乘仙巖,寒巖洞,浩然亭。乃游詠之地也。常與學者五六人。乘興而往。沿流上下。日夕忘返。有時携酒。飮不至醉。微醺。輒歌詠自娛。以舊業在坡州栗谷村。故曾修花石亭于故址。自號栗谷。後改卜于首陽山之西。溪山秀麗。巖石奇瓌。盤回屈曲者九區。而高者壁立如屛。下者渟流作潭。如武夷九曲057_105d之狀。先生杖履逍遙。行至第五曲曰。此可居矣。名之曰隱屛。及作精舍。且立祠宇。專祀朱子。而以靜菴,退溪配焉。春秋奠享如儀。時率諸生。詣廟庭行禮。出廟門分庭而揖。朔望則用公服開中門。焚香行禮而退。卽所謂石潭書院者也。其立朝也。引君當道。必以唐虞三代爲期。勸講格致誠正之學。臨文論說。多有所發明。每請立志遠大。以定其規模。恢張公道。以立其紀綱。旁招賢俊。布列朝著。變通弊法。痛刮民隱。而至於章疏之所陳。勤勤懇懇。莫非爲治之急務。或君擧失當。則必正色直言。冀回天聽。雖迫之以雷057_106a霆之威。而守正不屈。上亦虛心聳聽。多所歎賞。或至日昃罷對。金應南嘗自筵中出謂人曰。不圖今日復見三代都兪之盛云。嘗於筵中。請預養十萬兵。以備緩急。否則不出十年。將有土崩之禍。柳相成龍以爲無事而養兵。養禍也。時久安恬嬉。筵對之臣。皆以先生言爲過。先生出謂成龍曰。國勢危如累卵。而俗儒不達時務。他人則固無望。君亦爲此言耶。逮壬辰之後。柳相於朝嘗語人曰。到今見之。李文靖眞聖人也。若用其言則國事豈至於此乎。且其前後籌策。人或訾議。而今皆鑿鑿中窾。眞不可及。栗谷若057_106b在。必能有爲於今日矣。誠所謂不待百年而知也。嘗以爲朝廷不和。則無以爲治。自東西相軋之後。必欲打破東西。混融彼此。兩出沈,金于外。以爲鎭定之計。而西人欲深治金孝元則力止之。及駁罷沈義謙之時。東人之議太甚。至欲並斥士流則裁抑之。與之辨爭。先生之意。只欲調協士類。共濟國事而已。實非有所偏倚者。而是非相激。爭咎先生。先生道與時乖。難進易退。而只緣國家多事。新經詔使。又値胡變。無隙可退。蹇蹇匪躬。而挾憾之輩興心嫉妬。乃敢顯然攻之。其禍將有不可測者。幸而公論不泯。是非自057_106c定。於先生有何損益。其敎人也。不問貴賤而來者受之。無分智愚而各因其材。使學者先讀小學。次讀四子。以及近思錄,心經。必以立志爲先而期至聖賢。躬行爲務而盡其孝悌。以敬爲入道之要。誠爲聖學之根。循循然善誘不倦於四書三經。患其口訣釋義不精。或違本旨。多所更定。而小註諸說同異。亦頗取舍點抹。於小學書。病其舊註訛舛。詳略互異。乃擇精要刪繁亂而有未備者。補以己意。名曰集註。且恐初學不知向方。又無堅固之志。而泛泛請益則無補也。爲著擊蒙要訣。使知立心飭躬奉親接物之方。又作學057_106d規以申之。約束以警之。嘗語學者曰。道非高遠。只在於人倫日用之間。隨事各得其當而已。但不學之人。心地茅塞。識見茫昧。故必須讀書窮理。以明當行之路。然後造詣得正。而踐履得中矣。學徒聞風。遠近咸集。盈堂溢齋。後來者無所容。又於海州野頭村設社倉。一以勸德業。一以救患難。先生聞人之善。未嘗隱。見人之惡。不欲揚。待人開心見誠。無所隱伏。或譏其輕許人物。先生笑曰。彼旣以誠來。我何不以誠待乎。先卒。士大夫相弔於朝。處士相弔於家。至於窮村父老。亦皆咨嗟涕泣曰。生民無福。太學生,三醫司,各057_107a司胥吏。皆來哭奠。發引之時。禁軍市人等奉炬左右。哭而送之。嗚呼。我東方自箕子以來。仁義忠信禮樂衣冠。以君子之國見稱於中華。而硏究性理之士寥寥乎其無聞。至麗末鄭文忠。始以道學倡之。名儒繼作。盛於我朝。而學造高明。才堪經濟。而進退以義者。趙文正及先生。而己卯之事。令人氣塞。尙忍言哉。先生以明道爲己任。濟時爲己憂。雖在林泉。未嘗忘君。累承綸命。進不隱賢。而空言無施。雖切何補。雖然。先生論學之旨。昭載於著述諸篇。而建白謀猷。見於前後章疏者。具在集中。有志之士。苟能因其言。而057_107b求其心。行其策。體之於身。而施之於邦國。則先生之道。雖不得行於一時。然其爲萬世開太平。則其功可爲遠且大矣。天生命世之大賢。夫豈偶然哉。門人金長生撰。
先生嘗於筵中啓曰。方今兵務解弛。不成貌樣。由今之形勢。無變今之軍政。雖小醜作梗。而將有不測之患。請於諸道養兵八萬。京師養二萬。預養此十萬兵。以爲緩急之用。時方昇平。上下不爲動念。及壬辰之亂。一如先生之言。柳相成龍語人曰。當時吾亦妄以爲擾民生事。決不可爲也。到今見057_107c之。李某之明見。誠不可及已。若用其言則國事之蕩殘。豈至於此乎。
庚子年間。余爲安城郡守。金參議宇顒爲客。再度過去。言及先生事。吾問曰。先生在世時。親聞其於公極稱道。而今者裒集先生文集。得見先生與公書。亦多推許之語。後來。何以與先生相違也。宇顒答曰。其書在於何年間耶。答以丙子丁丑年也。宇顒曰。栗谷若在今日。亦未知如此否也。因言曰。栗谷不聽吾言故也。吾問曰。所不聽之言。何事也。宇顒曰。癸未三司。誠小人也。栗谷與之同事可也。而吾057_107d反覆論之。而不聽吾言。故如此也。吾答曰。公之所言。未曉得也。宇顒曰。何如。吾曰。公旣以三司爲小人。而又尤栗谷之不同事。何也。三司旣爲小人則何可同事也。若不與君子同事則非矣。與小人不同事。又何非也。栗谷之不聽公言宜矣。宇顒嘻笑曰。公言然矣。栗谷之所爲亦非矣。三司豈盡爲小人。其間有輕妄無計慮之人。多發不中之言。以致誤事而然也。栗谷亦激而成之也云。此論非徒金宇顒之言爲然。近來一種苟且之論有未絶。後生亦有紹述宇顒之論者。爭咎先生不與三司同事057_108a之失。其時三司聯名請罪。擧朝靡然。欲陷不測之地。其爲設心。極其凶慘。未同而言。古人所恥也。而況與之同事乎。先生雖欲苟合同事。彼必不肯與之同事。如之何其可爲也。宇顒之意。三司濁亂之罪。歸之於李徵,李景㟳。而欲免三司之罪。若不干與者然。其計誤矣。然先生啓達筵中。欲放三竄。不得蒙允。若假之歲月則先生之志必行矣。逆賊鄭汝立矯飾欺世。以讀書爲名。以先生爲當世儒宗。對先生門徒。輒以爲聖人。及朴謹元,宋應漑,許篈之竄也。與先生書曰。魑魅魍魎。已伏其辜。057_108b巨奸尙握時論。樂禍之心。囂然未已。若不除去。他日之禍。有甚於今日。及先生之卒也。見東人之勢甚盛。又聽李潑之言。諂付時輩。於筵中。極詆先生及朴思菴淳,鄭松江澈諸人。上惡其言痛斥之。柳成龍利其付己。且欲植其黨。引而推奬。極稱於上前。許以山野朴直之士。後日。先生之姪李景震以汝立所與先生書。謄書上疏陳達。上問侍臣曰。有見鄭汝立書者乎。校理李德馨進曰。臣之友李貴持而示之。得見之。上知汝立反覆之狀。以今之邢恕斥之。及其逆節之現露也。松江語057_108c人曰。柳而見以鄭賊爲山野朴直之士。今何如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