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목은 이색 신도비문(펌)

목은집(牧隱集) 목은 이색 신도비(神道碑) 행장

아베베1 2009. 11. 11. 10:49

 

 

 

목은집(牧隱集) 신도비(神道碑)
 신도비(神道碑)
목은선생 연보
 연보(年譜)
목은 선생 연보(牧隱先生年譜)

천력(天曆) 원년 무진(1328, 충숙왕15)
○ 5월 신미일에 공이 태어났다.

지정(至正) 원년 신사(1341, 충혜왕 복위 2)
○ 가을에 송당 선생(松堂先生) 삼사 우사(三司右使) 김공 광재(金公光載)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성균시(成均試)를 관장하였는데, 공은 나이 14세로 그 시과(詩科)에 합격하였다.

지정 3년 계미(1343, 충혜왕4)
○ 5월에 별장(別將)에 보임되었다.

지정 6년 병술(1346, 충목왕2)
○ 권씨(權氏)에게 장가들었다.

지정 8년 무자(1348, 충목왕4)
○ 국자감 생원(國子監生員)이 되어 도성(都城)에 가서 입학(入學)하였다.

지정 9년 기축(1349, 충정왕1)
○ 국자감에 있었다.

지정 10년 경인(1350, 충정왕2)
○ 여름에 상도(上都)로 분학(分學)하였다가 겨울에 학교로 돌아왔다.
○ 가을에 고향에 가서 근친(覲親)하였다.

지정 11년 신묘(1351, 공민왕 즉위년)
○ 정월에 가정 선생(稼亭先生)의 부음(訃音)을 받고 분상(奔喪)하였다.

지정 13년 계사(1353, 공민왕2)
○ 서장관(書狀官)으로 경사(京師)에 갔다.
○ 여름에 상제(喪制)를 마쳤다. 5월에 공민왕이 초과(初科)를 열어서, 익재 선생(益齋先生) 이공 제현(李公齊賢)이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양파 선생(陽坡先生) 홍공 언박(洪公彦博)이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는데, 공이 을과(乙科) 제일인(第一人)으로 합격하여 숙옹부 승(肅雍府丞)에 제수되었다. 가을에는 정동성 향시(征東省鄕試)의 제일명(第一名)으로 합격하였다.

지정 14년 갑오(1354, 공민왕3)
○ 2월에 회시(會試)에 합격하고, 3월에는 전시(殿試)에서 제이갑(第二甲)의 제이명(第二名)으로 합격하여 응봉한림문자승사랑 동지제고 겸 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郞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에 제수되었다.
○ 3월에 동쪽으로 돌아와서 관리 등용의 차례를 기다렸는데, 11월에 통직랑(通直郞) 전리정랑 예문응교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典理正郞藝文應敎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에 제수되었다.

지정 15년 을미(1355, 공민왕4)
○ 서장관으로 경사(京師)에 갔다. 8월에는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었고, 겨울에는 권경력(權經歷)이 되었다.
○ 정월에 봉선대부(奉善大夫) 시내서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試內書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에 승진되었다. 5월에는 봉상대부(奉常大夫) 전의부령(典儀副令)에 전임되고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지정 16년 병신(1356, 공민왕5)
○ 정월에 벼슬을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 7월에 관제(官制)가 바뀌어 중산대부(中散大夫)에 승진되어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 사관편수관 지제교 겸 병부낭중(吏部侍郞翰林直學士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兵部郞中)이 되었다.

지정 17년 정유(1357, 공민왕6)
○ 2월에 중대부(中大夫) 시국자좨주 한림직학사 겸 사관편수관 지제교 지각문사(試國子祭酒翰林直學士兼史館編修官知製敎知閣門事)에 제수되었다. 7월에는 대중대부(大中大夫) 우간의대부 한림직학사 겸 사관편수관 지제교(右諫議大夫翰林直學士兼史館編修官知製敎)에 전임되었다.

지정 18년 무술(1358, 공민왕7)
○ 2월에 통의대부(通議大夫) 추밀원우부승선 한림직학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교 지공부사(樞密院右副承宣翰林直學士充史館修撰官知製敎知工部事)에 승진되었다.

지정 20년 경자(1360, 공민왕9)
○ 3월에 정의대부(正議大夫) 추밀원좌부승선 지예부사(樞密院左副承宣知禮部事)에 전임되고, 나머지는 모두 전과 같았다.

지정 21년 신축(1361, 공민왕10)
○ 11월에 홍건적(紅巾賊)이 송경(松京)을 함락함으로써 공민왕이 남쪽으로 행행(行幸)할 때에 공이 어가(御駕)를 수행하여 일등공신(一等功臣)의 호(號)가 내려졌다. 12월에는 정의대부(正議大夫) 추밀원좌승선 한림시독학사 충춘추관수찬관 지제교 지병부사(樞密院左承宣翰林侍讀學士充春秋館修撰官知製敎知兵部事)에 전임되었다.

지정 22년 임인(1362, 공민왕11)
○ 3월에 정순대부(正順大夫) 밀직사우대언 진현관제학 지제교 충춘추관수찬관 지군부사사(密直司右代言進賢館提學知製敎充春秋館修撰官知軍簿司事)로 바뀌었다.

지정 23년 계묘(1363, 공민왕12)
○ 봉훈대부(奉訓大夫) 정동행중서성 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에 선수(宣授)되었다.
○ 12월에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제학 우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提學右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에 임명되었다.

지정 24년 갑진(1364, 공민왕13)
○ 정월에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제학 우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제점서운관사(密直提學右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提點書雲觀事)에 임명되고, 공신(功臣)의 호는 전과 같았다.

지정 25년 을사(1365, 공민왕14)
○ 3월에 봉익대부(奉翊大夫) 첨서밀직사사 보문각대제학(簽書密直司事寶文閣大提學)에 전임되고, 나머지는 모두 전과 같았다. 6월에는 첨서밀직사사 예문관대제학(簽書密直司事藝文館大提學)에 임명되고, 나머지는 모두 전과 같았다. 이어 제조전선사(提調詮選事)가 되고, 10월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지정 27년 정미(1367, 공민왕16)
○ 11월에 광정대부(匡靖大夫)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임명되고, 나머지는 모두 전과 같았다. 12월에는 판개성부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겸 성균대사성 제점서운관사(判開城府事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兼成均大司成提點書雲觀事)에 임명되고, 공신의 호는 전과 같았다.

지정 28년 무신(1368, 공민왕17)
○ 조열대부(朝列大夫)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에 선수(宣授)되었다.
○ 4월에 상(上)이 구재(九齋)에 행행하여 친히 경의(經義)를 시험하면서 공에게 시권(試卷)을 읽게 하여 이첨(李詹) 등 7인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8월에는 광정대부(匡靖大夫) 삼사 좌사(三司左使)에 승진되고, 나머지는 모두 전과 같았다.

홍무(洪武) 2년 기유(1369, 공민왕18)
○ 6월에 숭록대부(崇祿大夫) 삼사우사 진현관대학사 지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제점사천감사(三司右使進賢館大學士知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提點司天監事)로 고쳐 임명되었고, 8월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홍무 4년 신해(1371, 공민왕20)
○ 봄에 지공거가 되었다. 7월에 문충보절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고, 나머지는 모두 전과 같았다. 12월에는 문충보절동덕찬화공신(文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가 더해졌다. 9월에는 모친(母親) 요양현군(遼陽縣君)의 상(喪)을 당하였다.

홍무 5년 임자(1372, 공민왕21)
○ 6월에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겸 판전의시사 성균대사성 제점서운관사(政堂文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兼判典儀寺事成均大司成提點書雲觀事)에 임명되었고, 공신의 호는 전과 같았다.

홍무 6년 계축(1373, 공민왕22)
○ 11월에 대광(大匡)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고,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에 임명되었으며, 공신의 호는 전과 같았다.

홍무 7년 갑인(1374, 공민왕23)
○ 12월에 중대광(重大匡) 한산군(韓山君)에 진봉(進封)되고,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지서연사(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知書筵事)에 임명되었으며, 공신의 호는 전과 같았다.

홍무 8년 을묘(1375, 우왕1)
○ 8월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한산군(韓山君)에 진봉되고, 영예문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領藝文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에 임명되었다.

홍무 12년 기미(1379, 우왕5)
○ 10월에 중대광(重大匡) 정당문학 우문관대제학 영예문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상호군(政堂文學右文館大提學領藝文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上護軍)에 임명되었고, 공신의 호는 전과 같았다.

홍무 14년 신유(1381, 우왕7)
○ 9월에 삼중대광(三重大匡)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한산군(韓山君)에 임명되었고, 공신의 호는 전과 같았다.

홍무 15년 임술(1382, 우왕8)
○ 11월에 삼중대광(三重大匡) 판삼사사 영예문춘추관사 상호군(判三司事領藝文春秋館事上護軍)에 임명되었고, 공신의 호는 전과 같았다.

홍무 16년 계해(1383, 우왕9)
○ 3월에 삼중대광(三重大匡) 한산군(韓山君)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에 봉해지고, 11월에는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전과 같았다.

홍무 17년 갑자(1384, 우왕10)
○ 7월에 삼중대광(三重大匡)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에 봉해지고, 공신의 호는 전과 같았다.

홍무 18년 을축(1385, 우왕11)
○ 12월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검교문하시중 영예문춘추관사 상호군(檢校門下侍中領藝文春秋館事上護軍)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임명되었고, 공신의 호는 전과 같았다.

홍무 19년 병인(1386, 우왕12)
○ 4월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7월에는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에 봉해지고, 공신의 호는 전과 같았다.

홍무 21년 무진(1388, 우왕14)
○ 10월에 명년(明年)의 하정사(賀正使)로 입조(入朝)하였다.
○ 정월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판삼사사 상호군 우문관대제학 영예문춘추관사(判三司事上護軍右文館大提學領藝文春秋館事)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임명되었고, 공신의 호는 전과 같았다. 6월에는 한산부원군에 봉해졌다. 8월에는 추충보절동덕찬화보리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輔理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문하시중 판전리사사 영효사관서연예문춘추관사 상호군(門下侍中判典理司事領孝思館書筵藝文春秋館事上護軍)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임명되었다.

홍무 22년 기사(1389, 창왕1)
○ 7월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판문하부상서시사 우문관대제학 영서연춘추관사 상호군(判門下府尙瑞寺事右文館大提學領書筵春秋館事上護軍)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임명되었고, 공신의 호는 전과 같았다. 12월에는 장단(長湍)으로 폄척되었다.

홍무 23년 경오(1390, 공양왕2)
○ 4월에 함창(咸昌)으로 폄척되었는데, 5월에 청주(淸州)에 이르러 수재(水災)가 발생함으로 인하여 용서를 받고 장단으로 돌아갔다. 8월에 또 함창으로 폄척되었다가, 12월에 용서를 받고 경성으로 돌아왔다.

홍무 24년 신미(1391, 공양왕3)
○ 6월에 또 함창으로 폄척되었다가, 12월에 소환(召還)되어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지고, 공신의 호는 전과 같았다.

홍무 25년 임신(1392, 태조1)
○ 4월에 강(江) 밖으로 나가라는 분부가 있어 금주(衿州)로 갔다가, 6월에 여흥(驪興)으로 옮기었다. 7월에는 국가에 혁명(革命)이 일어나서 장흥부(長興府)로 폄척되었다가, 10월에 용서되어 한주(韓州)로 돌아갔다.

홍무 27년 갑술(1394, 태조3)
○ 8월에 부인(夫人) 권씨(權氏)가 작고하였다.

홍무 28년 을해(1395, 태조4)
○ 5월에 여강(驪江)에서 더위를 식히었다. 가을에는 관동(關東) 지방을 유람하다가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서 그대로 머물러 살았다. 11월에는 태조가 사자(使者)를 보내서 공을 불러 맞이하여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한산백(韓山伯)에 봉하였다.

홍무 29년 병자(1396, 태조5)
○ 공의 나이 69세였는데, 5월에 물러가기를 요청하고 여강으로 가서 더위를 식히다가, 7일에 병으로 작고하였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이 매우 애도하여 음식을 철폐하고 조회를 정지하였다. 그리고 사자를 보내서 교서(敎書)를 받들어 치제(致祭)하고 부증(賻贈)하게 하였으며, 유사(攸司)에게 명하여 장사(葬事)를 도와주게 하고, 문정공(文靖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10월에 자손(子孫)들이 영구(靈柩)를 받들고 한주(韓州)로 돌아가서 11월 갑인일에 가지(加智)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유명 조선국(有明朝鮮國)의 원(元)나라로부터 조열대부(朝列大夫)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에 선수(宣授)되었고 본국(本國)에서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지고 시호가 문정(文靖)인 이공(李公)의 신도비(神道碑) 병서(幷序) [하륜(河崙)]

 


문인(門人) 분충장의정란정사좌명공신(奮忠仗義靖亂定社佐命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정승 판이조사 겸 판상서사사 수문전대제학 감춘추관사 영경연서운관사(議政府左政丞判吏曹事兼判尙瑞司事修文殿大提學監春秋館事領經筵書雲觀事)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은 찬(撰)하다.

중조(中朝)에서 진사가 되었고, 이학(理學)으로 동방을 창명(唱鳴)하고 지위가 왕국(王國)의 상상(上相)에 이른 이는 한산(韓山) 목은 선생(牧隱先生) 이 문정공(李文靖公)뿐이다. 지정(至正) 을사년 가을에 공이 성산(星山) 초은 선생(樵隱先生) 이 문충공(李文忠公)과 함께 과시(科試)를 관장하였는데, 내가 부재(不才)한 사람으로 다행히 과거에 합격하여 그 후 제자(弟子)의 예를 가져온 지 어언 30여 년이 되었다. 그런데 공이 작고했을 적에 직사(職事)로 인하여 영위(靈位)에 가서 곡(哭)을 하지 못했으므로, 지금까지 슬픈 생각이 그지없다. 지금 공의 막내아들 종선(種善)이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찬한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비명(碑銘)을 부탁하니, 내가 참으로 공의 훌륭한 덕을 제대로 형용하지 못할까 염려되기는 하나, 의리로 보아서 감히 사양할 수가 없다.
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휘는 색(穡),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인데, 대대로 충청도(忠淸道) 한주(韓州)에 살았다. 증조(曾祖) 휘 창세(昌世)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증되었고, 조(祖) 휘 자성(自成)은 원조(元朝)로부터 비서감 승(祕書監丞)에 추증되고 본국(本國)에서는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추증되었다. 고(考) 휘 곡(穀)은 원조의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이 되었고, 본국에서는 도첨의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都僉議贊成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가 되었는데, 호는 가정(稼亭)이고,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며, 원조의 원통(元統) 계유년 제과(制科)에 합격하였고, 시문(詩文)이 한 시대에 뛰어났으며, 문집이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 비(妣) 김씨(金氏)는 원조로부터 요양현군(遼陽縣君)이 되고, 본국에서는 함창군부인(咸昌郡夫人)이 되었는데, 천력(天曆) 무진년 5월 신미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여 글을 읽는 족족 외워 버렸다. 지정(至正) 신사년에 본국의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고, 나이 14세 때인 무자년에는 가정 선생(稼亭先生)이 원조(元朝)에서 중서사 전부(中瑞司典簿)가 되었으므로, 공이 관례에 따라 국자감 생원(國子監生員)으로 들어가서 학문이 더욱 진취되었다. 경인년에는 가정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그 명년 정월에 작고하자, 공이 분상(奔喪)하여 삼년상을 마쳤다.
계사년 여름에는 본국의 과거에 장원하여 숙옹부 승(肅雍府丞)에 제수되었고, 가을에는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의 향시(鄕試)에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갑오년 봄에는 경사(京師)의 회시(會試)에 참예하여 전정(殿庭)에서 대책(對策)한 것이 독권관(讀券官)의 칭상(稱賞)을 크게 받아 제이명(第二名)으로 급제하여 응봉한림문자 동지제고 겸 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에 칙수(勅授)되었다. 그 후 본국에 돌아와서 등용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왕이 특별한 예로 대우하여 전리정랑 예문응교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典理正郞藝文應敎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을 더해 주었다. 을미년 봄에는 왕부(王府)의 필도치(必闍赤)가 되고 내사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內史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에 승진되었다. 이로부터 본국에서 벼슬을 제수함에 있어서는 모두 관직(館職)을 겸대시켰다. 여름에는 경사에 가서 본원(本院)에 임용되고, 겨울에는 권경력(權經歷)이 되었는데, 공이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는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병신년 가을에는 본국의 관제(官制)가 바뀜에 따라 이부시랑 겸 병부낭중(吏部侍郞兼兵部郞中)에 제수되어 문무관(文武官)의 선발에 참여하였다. 공이 일찍이 시정(時政)에 관한 여덟 가지 일을 상언(上言)하였는데, 그중 한 가지가 정방(政房)을 혁파하고 이부ㆍ병부의 인재 선발하는 규정을 복구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으므로, 이 임명이 있었던 것이다. 정유년에는 시국자좨주 지각문(試國子祭酒知閣門)이 되고, 이어 왕부 지인(王府知印)이 되었다가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 전임되었다.
무술년에는 동료들이 모두 시사(時事)를 말한 것 때문에 권귀(權貴)에게 거슬리어 좌천되었는데, 왕이 재상에게 이르기를, “이색은 뭇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고, 추밀원 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에 승진 임명하였다. 그 후 누천(累遷)하여 좌승선(左承宣)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무릇 7년 동안 기밀(機密)에 참여하여 왕을 성심으로 인도한 것이 매우 많았다.
신축년 겨울에는 홍건적(紅巾賊)이 왕경(王京)을 함락시킴으로써 왕이 남쪽으로 행행하게 되자, 공이 왕을 시종하면서 호위하고 협찬하여 회복(恢復)의 공을 이루어 냈으므로,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책록(策錄)하여 철권(鐵券)을 하사하였다. 계묘년에는 원조(元朝)로부터 정동행중서성 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에 제수되었고, 본국에서는 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密直提學同知春秋館事)에 제수되고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의 호가 내려졌다. 이로부터 국정에 참여하였다. 을사년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책을 휴대하고 과장(科場)에 들어가는 자를 수검(搜檢)하는 법과 다른 사람을 시켜 답안지(答案紙)를 일률적으로 고쳐 쓰게 하는 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정미년에는 원조로부터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에 제수되었다.
무신년에는 판개성(判開城)으로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을 겸하였다. 이때에 왕이 학교를 부흥시키고자 하여 성균관을 고쳐 짓고 한 시대의 경술(經術) 있는 이들을 선발하여 생도(生徒)들을 나누어 교수(敎授)하게 함으로써 모두 다른 관직에 있으면서 학관(學官)을 겸하게 되었다. 이때 공은 매일 여러 학관들과 더불어 생도들에게 교수를 마치고 나서는 서로 모여 앉아 토론하고 변석하면서 종일토록 피곤함도 잊었다. 그리하여 학자들이 잘못된 구습(舊習)을 고치게 되어 유풍(儒風)이 일신되었다. 여름에는 왕이 구재(九齋)의 생도들에게 육경(六經)의 경의(經義)를 시험 보여 7인에게 급제를 내리면서 공에게 명하여 시권(試券)을 읽게 하였다. 기유년에는 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삼장(三場)을 통고(通考)하는 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이전에 왕이 왕륜사(王輪寺)의 동쪽 언덕에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영전(影殿)을 지었는데, 그 땅이 협소하다 하여 다시 마암(馬巖)의 서쪽에 땅을 골라서 더할 수 없이 으리으리하게 지으려고 하므로, 시중(侍中) 유탁(柳濯) 등이 상서하여 그것을 정지하도록 간하자, 왕이 노하여 유탁을 하옥시키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면서 공에게 명하여 여러 사람에게 유시하는 글을 지으라고 하자, 공이 그 죄명(罪名)을 물으니, 왕이 네 가지 죄목을 열거하므로, 공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모두 이미 지나간 일이요, 또 법으로 보아서도 죽음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요즘 유탁 등이 상서하여 영전의 일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으니, 비록 이 일로 죄준다 하더라도 국인(國人)들은 반드시 상서했기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왕께서는 그 점을 생각하소서.” 하니, 왕이 더욱 노하여 글을 지으라고 더욱 급히 재촉하자, 공이 엎드려 말하기를, “신이 어찌 감히 글을 지어서 죄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므로, 왕이 더욱 몹시 노하여 정비궁(定妃宮)으로 처소를 옮겨 가서 진선(進膳)도 윤허하지 않았다. 그 이튿날 행신(幸臣) 신돈(辛旽)이 왕의 노염을 풀게 하기 위해 왕에게 청하여 공을 하옥시키고 왕명을 따르지 않은 죄를 적용하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신이 외람되이 상의 알아주심을 입어 포의(布衣)로부터 갑자기 달관(達官)에 이르렀으므로, 항상 상의 덕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것만 있으면 반드시 숨김없이 진달하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왕께서 유 시중(柳侍中)을 죽이려고 하므로, 신이 감히 할 말을 다한 것은 다만 왕의 명성이 천하 후세에 불미스럽게 될까 염려해서입니다.” 하였는데, 옥관(獄官)이 공의 말을 갖추 왕에게 아뢰자, 왕이 마침내 느끼어 깨달아서 유탁 등을 석방하고, 사람을 시켜 공에게 이르기를, “명일에 목욕(沐浴)하고 조회하도록 하라. 내가 장차 사과하겠다.” 하였다. 그 후로는 왕이 더욱 공을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신해년에는 지공거가 되었다. 가을에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고 문충보절찬화(文忠保節贊化)라는 공신의 호가 더해졌다. 왕이 매양 공을 소견(召見)할 적에는 반드시 방을 청소하고 향을 피우면서 이르기를, “이색의 학문은 중국에서도 견줄 만한 사람이 드문데, 어찌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9월에는 요양현군(遼陽縣君)의 상을 당하였다. 명년 6월에 왕이 명하여 본직(本職)에 기복(起復)시키려 하였으나, 공이 극력 사양하였다. 계축년 겨울에는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갑인년 가을에는 왕이 훙하였다. 공은 요양현군이 작고한 후로 지나치게 슬퍼한 것이 병이 되었는데, 게다가 왕이 훙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후 7년 동안이나 문밖을 나가지 않았다.
정사년에는 추충보절동덕찬화(推忠保節同德贊化)의 호가 더해지고,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가 되었다. 임술년에는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었다. 계해년에는 다시 한산군에 봉해졌고, 갑자년에는 부원(府院)이 더해졌다. 을축년에는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임명되었다. 병인년에는 또 지공거가 되었다. 공은 모두 다섯 번 시험을 관장하여 지명인사(知名人士)가 많이 나왔다.
무진년에는 명나라 조정에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 하자, 무신(武臣) 최영(崔瑩)이 위주(僞主)를 끼고 군대를 일으켜 요동(遼東)을 공격하려고 하였는데, 행군하여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렀을 때 우리 태상왕(太上王)께서 의거(義擧)로 회군(回軍)하여 최영 등을 체포해서 물리치고 공을 문하시중으로 삼았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지금 국가에 불화가 있는데, 왕은 어려서 친조(親朝)할 수 없고 집정자(執政者)가 의당 가야겠으니, 노신(老臣)이 감히 자청한다.” 하니, 왕과 국인들이 모두 공이 늙고 또 병이 있다 하여 굳이 만류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신이 지극히 두터운 국은(國恩)을 받았기에 항상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려고 하였으니, 진실로 천자(天子)에게 국명(國命)을 전달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고, 마침내 입조(入朝)하여 그간의 사실을 자세하게 아뢰니, 고황제(高皇帝)가 두터운 예로 공을 대우하고 많은 물품을 하사하여 돌려보냈다. 기사년 여름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가을에는 병으로 인해서 바쁜 직무에서 해면되기를 청하여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임명되었다.
이해 겨울에는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자, 공이 자기에게 붙지 않은 것을 꺼리던 자가 있어 공을 탄핵하여 장단현(長湍縣)으로 폄척하였다. 경오년 4월에는 함창(咸昌)으로 옮겨졌다. 5월에는 윤이(尹彝)ㆍ이초(李初)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서 공 등 수십 인을 청주(淸州)로 체포해다가 장차 준법(峻法)을 적용해서 죄를 얽어 만들려고 하여 일이 자못 헤아릴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공은 천명(天命)으로 자처하여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큰비가 아침부터 정오까지 내리어 산이 무너지고 홍수가 넘쳐서 성문(城門)이 붕괴되고 관사(館舍)가 모두 물에 잠기어, 문사관(問事官)이 나무를 부여잡고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역참을 통하여 이 사실이 나라에 알려지자, 모두 방환(放還)하도록 윤허하였다. 그래서 청주의 부로(父老)들이 서로 이르기를, “청주가 생긴 이후로 이렇게 극심한 수재(水災)는 없었으니, 이는 자못 공 등이 신명을 감동시킨 소치이다.” 하였다. 왕은 본디 공이 다른 마음이 없음을 잘 알고 누차 소환(召還)하였으나, 공을 꺼리는 자가 매양 다시 폄척하곤 하였다.
신미년 겨울에는 공이 함창으로부터 소환되어 한산부원군에 다시 봉해졌다. 임신년 4월에 다시 금주(衿州)로 폄척되었다가 6월에는 여흥(驪興)으로 옮겨졌다. 7월에는 우리 태상왕이 즉위하자, 공을 꺼리던 자가 공에게 거짓 죄를 얽어서 극형을 가하려고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나는 평생에 망녕된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어찌 감히 무복(誣服)을 한단 말인가. 죽어도 곧은 귀신이 되면 또한 혐의로움이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말이 전해지자, 왕이 공을 용서하여 장흥부(長興府)로 옮겨 안치시키니, 공과 동시에 폄척된 사람들도 공을 힘입어 생명을 보전한 이가 많았다. 이해 겨울에 석방되어 한주로 돌아갔다.
을해년 가을에는 관동(關東) 지방을 유람하다가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서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왕이 사자를 보내서 공을 맞이하여 한산백(韓山伯)을 봉하고 친구의 예로 대우하였으며, 공이 왕을 뵙고 물러 나올 적에는 왕이 반드시 중문(中門)까지 나와서 전송하였다. 병자년 5월에는 공이 여강(驪江)으로 가서 피서(避暑)를 한다고 청하였다가, 7일에 병이 위독해졌다. 이때 어떤 중이 와서 공에게 불도(佛道)를 말하려고 하자, 공이 손을 내저으면서 말하기를, “사생(死生)의 이치에 대해서 나는 의심이 없다.” 하고, 말을 마치자마자 작고하니, 향년이 69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왕이 음식을 철폐하고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였으며, 사자를 보내어 치제(致祭)와 부증(賻贈)을 내려서 예장(禮葬)을 하게 하고, 시호를 문정(文靖)이라 하였다. 10월에 아들 종선(種善) 등이 영구(靈柩)를 받들고 한주로 돌아와서 11월 갑인일에 가지(加智)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청수하고 학문이 정밀하고 예민하였으며, 일찍부터 가훈(家訓)을 받들고 중국의 태학(太學)에 들어가 글을 널리 배우고 독실히 실천하면서 특히 성리학(性理學)을 힘써 다하였다. 그리고 본국에 돌아와서는 후생(後生)들을 힘써 진취시키면서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으니, 학자들이 공을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숭앙하였다. 국가의 사명(辭命)을 수십 년 동안 관장할 적에는 항상 중국 조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시문(詩文)을 지을 적에는 붓을 잡은 즉시 써 내려갔는데, 사리(辭理)가 아주 정밀하여 한 시대에 절묘(絶妙)하였다. 문집 55권이 있다.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은 박학하고 감식(鑑識)하는 안목이 있어 전배(前輩)들을 논함에 있어서도 인정을 하는 일이 드문데, 유독 공에 대해서만은 칭탄하여 마지않으면서 말하기를, “목은은 참으로 천재(天才)이다.” 하였다.
공이 평상시에 인물(人物)을 접대함에 있어서는 혼연한 일단(一段)의 화기(和氣)뿐이지만, 벼슬자리에 앉아 일을 처리할 적에는 논의가 지극히 적절하여 확고해서 흔들리지 않았다. 재상이 되어서는 대체(大體)를 힘써 견지하고 조금도 명예를 추구하는 누(累)가 없었다. 평생에 산업(産業)을 다스리지 않았고 비록 끼니를 자주 거르는 지경에 이르러도 개의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한가히 지내면서 이따금 산수(山水)의 사이를 유람하여 심심소일을 하였는데, 그간에 방외인(方外人)이라도 혹 종유하려는 이가 있으면 거절하지 않았고, 시문을 요구하는 이가 있어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공처럼 이치를 달관한 명철함으로써 어찌 불가(佛家)의 환망(幻妄)된 설(說)을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을 몰랐겠는가. 그 임종시의 한 마디 말을 보면 알 수가 있다.
부인(夫人) 영가 권씨(永嘉權氏)는 원조(元朝)의 명위장군(明威將軍)이 되고 본국에서 화원군(花原君)에 봉해진 중달(仲達)의 딸이요, 원조에서 태자 좌찬선(太子左贊善)이 되고 본국에서 도첨의 우정승(都僉議右政丞)이 된 한공(漢功)의 손녀인데, 어진 행실이 있어 부도(婦道)를 잘 수행하여 있고 없는 것 때문에 공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3남을 낳았다. 장남 종덕(種德)은 추성익위공신(推誠翊衛功臣)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이고, 그다음 종학(種學)은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인데, 병진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기사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으나, 모두 공보다 먼저 작고하였다. 그다음 종선(種善)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인데, 임술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지밀직(知密直)은 4남을 두었는데, 장남 맹유(孟㽥)는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이고, 그다음 맹균(孟畇)은 을축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 직제학(藝文直提學)이 되었으며, 그다음 맹준(孟畯)은 임신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그다음 맹진(孟畛)은 사복시 직장(司僕寺直長)이다. 2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서령군(瑞寧君) 유기(柳沂)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첨총제(僉摠制) 하구(河久)에게 시집갔다. 첨서는 6남을 두었는데, 장남 숙야(叔野)는 사재소감(司宰少監)이고, 그다음 숙규(叔畦)는 사수 주부(司水注簿)이며, 그다음 숙당(叔當)은 부사직(副司直)이고, 그다음 숙묘(叔畝)는 공조 의랑(工曹議郞)이며, 그다음은 숙복(叔福), 숙치(叔畤)이다. 딸은 정윤(正尹) 이점(李漸)에게 시집갔다. 집의는 3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계주(季疇)이고 둘은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오직 한산의 뛰어난 영재 / 維韓之英       훌륭한 가정이 있었으니 / 有翼稼亭
주옥같이 화려한 문사로 / 瓊琚厥辭        중국의 과거에 급제하였고 / 射策帝庭
아 혁혁한 문정공에게 / 於赫文靖           실로 경학을 전수하였네 / 實維傳經
문정은 일찍 태학에 들어가 / 蚤入辟廱    그 명성 크게 전파하고 / 大播其馨
연이어 을과에 급제하여 / 聯中乙科        뒤이어 한림원에 들어가서 / 繼踵玉堂
명성이 더욱 크게 알려지니 / 厥鳴益大    국가의 광영이었네 / 國家之光
그만두고 동으로 돌아와선 / 斂而東歸      온 나라의 사범이 되었는데 / 師範一方
의리는 정하고 치밀하여 / 義理精微         위로 정자(程子) 장자(張子)를 접하였고 / 上接程張
문사는 고상하고 고아하여 / 文辭高古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을 내려보았네 / 下視蘇黃
도가 그 몸에 축적되었기에 / 道積厥躬     처사가 안온하고 자상했으며 / 處事安詳
덕과 연치가 함께 높아서 / 德與齒尊        지위가 조정의 으뜸이었네 / 位冠巖廊
사명 받들고 중국에 가서는 / 奉使專對     천왕에게 예우를 받았고 / 見禮天王
돌아와선 사직을 요청하니 / 歸來乞閑       진퇴를 다 바르게 했도다 / 進退其臧
오직 시기가 어려움이 많고 / 維時多艱      하늘의 뜻 또한 아득하여 / 天意杳茫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지니 / 狼尾之疐       나라 사람들 마음 아파했네 / 國人心傷
태산이 마침내 무너지니 / 泰山之頹          길 가는 사람도 눈물 흘렸네 / 行路涕滂
아 선생이여 / 嗚呼先生                          훌륭한 덕음을 잊을 수 없네 / 德音不忘
자손들이 모두 계승했으니 / 子孫其承       복록이 길이 다하지 않으리 / 福祿未央
내 명이 아첨한 말 아니니 / 我銘不諛         이로써 먼 후세에 보이리라 / 用示攸長
양촌선생문집 제40권
 행장(行狀)
목은 선생(牧隱先生) 이 문정공(李文靖公) 행장

공(公)의 휘는 색(穡)이요 자는 영숙(穎叔)이며 호는 목은(牧隱)인데, 본관은 충청도 한주(韓州)이다. 증조부는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봉(追封)된 창세(昌世)며, 조부는 봉훈대부(奉訓大夫) 비서 감승(秘書監丞)에 선증(宣贈)되고 본국(本國)에서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추봉(追封)된 자성(自成)이요, 아버지는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奉議大夫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을 선수(宣授) 받고 본국(本國)에서 광정대부(匡正大夫) 도첨의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상호군(都僉議贊成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으로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요, 이름은 곡(穀)이다. 원조(元朝) 원통(元統) 계유(1333)에 제과(制科)에 합격했으며 호는 가정(稼亭)이요 문집 20권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어머니는 요양현군(遼陽縣君)에 선봉(宣封)된 본국의 함창군부인(咸昌郡夫人)인 김씨(金氏)다. 천력(天曆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무진(戊辰) 5월 신미(辛未)에 공을 낳았는데, 총명하고 지혜로움이 특이하여,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았고 보면 곧 욀 수 있었다.
신사년에 공은 나이 겨우 14세였는데 본국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니, 이미 명성이 우뚝하였다. 20세가 되매 혼인을 구하니, 당시의 높은 가문과 덕망 있는 집안에서 사위를 고르는 자들은 모두 그 딸을 시집보내고자 하여 혼인지낼 때까지도 다투었다. 이에 안동 권씨(安東權氏)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니, 명위장군 제군만호부 만호(明威將軍諸軍萬戶府萬戶)를 선수(宣授) 받은 본국의 중대광 화원군(重大匡花原君)인 중달(仲達)의 딸이며, 원조(元朝)의 조열대부(朝列大夫) 태자 좌찬선(太子左贊善)이며 본국의 삼중대광(三重大匡) 도첨의 우정승(都僉議右政丞) 한공(漢公)의 손녀다. 무자년에 가정 선생(稼亭先生)이 원조(元朝)에 있을 때에 중서사 전부(中瑞司典簿)가 되었는데, 공은 조관의 아들로서 국자감 생원(國子監生員)으로 보충되어서, 3년 동안 재학하며 중국의 연원(淵源) 있는 학문을 익혔는데 탁마(琢磨)하고 함양하여 더욱 진보하였으며 특히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신묘년 정월에 가정이 본국에 돌아와서 졸(卒)하니 분상(奔喪)하여 복제를 다 마쳤다. 계사년 5월에 공민왕(恭愍王)이 과장을 열고 선비들을 시험했는데, 공이 장원을 하여 숙옹부 승(肅雍府丞)을 제수받았고, 가을에는 정동행성(征東行省)에서 향시(鄕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리고 곧 진봉사서장관(進奉使書狀官)이 되어 원 나라 서울에 갔었다. 갑오년 2월에는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 구양현(歐陽玄)과 예부 상서(禮部尙書) 왕사성(王思誠)이 회시(會試)를 관장하였는데, 공은 또 합격하였고, 3월에는 전정(殿庭)에서 대책(對策) 시험을 보았는데, 제이갑(第二甲)에 두 번째로 합격되었으므로, 독권관참지정사(讀卷官參知政事) 두병이(杜秉彝)와 한림승지(翰林承旨) 구양현 등 제공이 크게 칭찬하였다. 칙령으로 응봉한림문자승사랑 동지제고 겸 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仕郞同知製誥兼國史院編修官)을 제수받았다.
귀국하여 차례를 기다리는데 공민왕(恭愍王)은 통직랑 전리정랑 예문응교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通直郞典理正郞藝文應敎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을 제수하였다. 을미년 봄에 왕부(王府)의 필도지(必闍赤)가 되어 비목(批目) 베껴 쓰는 것을 맡았으니 선비로는 영광된 피선이었고, 계자를 더 높여 주어 봉선대부(奉善大夫) 시내사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試內史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을 제수하였다. 여름에는 또 서장관(書狀官)에 충원되어 표(表)를 받들고 원경(元京)에 갔는데, 8월에 한림원(翰林院)에 예사(禮仕)되었으며, 겨울에는 경력(經歷)에 임시 임명되기도 하였다. 병신년 정월에 어머니가 늙으신 이유로 관직을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왔으니, 대개 천하(天下)가 어지러워질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을에 본국의 관제(官制)가 다시 시행되매 중산대부(中散大夫)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지제고 겸 춘추관편수관 겸 병부낭중(吏部侍郞 翰林直學士知製誥兼春秋館編修官兼兵部郞中)이 되어 문무관(文武官)의 선발 권한을 맡았었다. 당초 공이 시정(時政) 8개항을 아뢰어 모두 시행되었는데, 그 하나는 정방(政房)을 폐하고 이ㆍ병부(吏兵部)의 선거를 복구시키는 것이었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정유년에는 국자좨주 지각문(國子祭酒知閣門)이 되어 중대부(中大夫)에 오르고 지인상서(知印尙書)가 되니, 이는 필도지의 장(長)으로 이에 선임된 것은 더욱 명예스러운 것이다. 7월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옮기면서 계자(階資)는 대중대부(大中大夫)에 올랐다. 이 뒤로부터는 모든 벼슬을 제수하는 데 모두 관직(館職)을 겸대하게 하였다.
무술년에는 어느 일을 말하다가 권귀(權貴)들에게 거슬려 한때 간관(諫館)들이 모두 좌천되었다. 공은 상주(尙州)로 가게 되어 행장을 정리하고 새벽을 기다려 떠나려고 하였는데, 그날 밤에 특명이 내려 공만은 통의대부(通議大夫) 추밀원우부승선 지공부사(樞密院右副承宣知工部事)가 되었다. 왕(王)이 재상(宰相)에게, 이르기를,
“이색(李穡)은 재덕이 출중하여 다른 사람과 같지 않으니 그를 등용하기를 이같이 아니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감복시킬 수 없다.”
고 하였다. 이렇게 임금에 가까운 직책과 국가의 중요한 기밀에 참여하여 관장한 것이 모두 7년 동안에 계책을 진술하고 유익한 일을 아뢰어서 나라에 도움된 바가 대단히 많았다.
신축년 11월에 홍건적(紅巾賊)이 서울을 함락하여 임금이 피란하게 되니 신료(臣僚)들은 창졸간에 모두 흩어졌었다. 공은 임금의 곁을 떠나지 않고 따라다니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호위하고 참모하여 많은 어려움을 구제하고 회복하는 큰 공(功)을 세웠으므로 1등훈(一等勳)에 책봉하고 철권(鐵券) 및 전지(田地) 1백 결(結)과 노비 20명을 하사하였다. 계묘년에 봉훈대부(奉訓大夫) 정동행중서성 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를 선수(宣授) 받고 겨울에 본국에서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이 되었다. 이때부터 20여 년이나 나라 정사에 참여하여 비록 관직을 그만두고 한가히 있더라도 언제나 큰 정사가 있으면 반드시 찾아와서 물었다. 을사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윤소종(尹紹宗) 등 28명을 뽑았다. 정미년 겨울에는 조열대부(朝列大夫)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을 선수(宣授) 받았으며, 본국에서 판개성 겸 성균관대사성(判開城兼成均館大司成)이 되었다.
당초 신축년 병란을 겪은 후에 학교의 교육이 폐이(廢弛)되었으므로, 임금께서는 이를 다시 일으키려고 성균관(成均館)을 숭문관(崇文館)의 옛 터에다 다시 지었다. 강의(講義)를 맡을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당시의 경술에 능한 선비를 뽑았으니, 영가(永嘉) 김구용(金九容)ㆍ오천(烏川) 정몽주(鄭夢周)ㆍ반양(潘陽) 박상충(朴尙衷)ㆍ밀양(密陽) 박의중(朴宜中)ㆍ경산(景山) 이숭인(李崇仁) 같은 사람들인데, 모두 다른 관직에 있으면서 학관(學官)을 겸하게 했으며, 공으로써 그 장(長)을 시켰으니 대사성(大司成)을 겸직한 것도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듬해 무신년 봄에는 사방(四方)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제공(諸公)이 경서(經書)를 나누어서 가르쳤다. 매일 강의(講義)가 끝나면 서로 의심나는 뜻을 토론하여 각각 그 극진함을 다하였다. 이때에 공은 화평한 표정으로 중도를 잡아 변석하고 절충하여 정주(程朱)의 학설에 부합되도록 힘썼으며, 밤이 다하여도 지칠 줄을 몰랐다. 이로부터 우리나라의 성리학(性理學)이 크게 일어났었고, 학자들은 그 기송사장(記誦詞章)의 습관을 버리고 신심성명(身心性命)의 이치를 연구하였으며, 유학을 높일 줄 알고 이단(異端)에 빠지지 아니하며, 의리를 바로잡고 공리(功利)를 구하려 하지 않았으므로, 유풍(儒風)과 학술(學術)이 새롭게 찬란하였으니 이는 모두 선생의 가르친 공로였다. 4월에 왕(王)이 구재(九齋 고려 문종(文宗) 때 최충(崔冲)이 세운 사학(私學)의 9개 과목)에 거둥하여 직접 제생(諸生)들을 경의(經義)로써 시험하매, 공에게 독권(讀卷 독권관. 시험 답안을 읽어 올리는 시험관)을 명하였는데, 이첨(李詹) 등 7인을 뽑아서 급제(及第)를 주었다. 기유년 여름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유백유(柳伯濡) 등 33인을 뽑았는데, 처음으로 중국의 과거 제도인 역서통고법(易書通考法)을 채용한 것이었다.
당초 공민왕(恭愍王)이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위하여 영전(影殿)을 왕륜사(王輪寺)의 동쪽에 세우는데, 사치하고 화려함이 극하여 몇 해가 되도록 이루지 못하고 마암(馬巖)의 서쪽에 터를 잡아서 다시 짓는데 그 굉장함은 더욱 심하여 인력과 비용이 헤일 수 없었다. 시중(侍中) 유탁(柳濯)이 동지밀직(同知密直) 안극인(安克仁)과 첨서밀직(僉書密直) 정사도(鄭思道)에게 말하기를,
“마암(馬巖)의 역사는 백성을 괴롭히고 재물을 손상할 뿐만 아니라, 술사(術士)의 말에 ‘여기다 큰 집을 지으면 나라에 불리할 것이다.’라고 했으니, 내가 재주가 없으나 백관(百官)의 장(長)으로 있으면서 사직(社稷)을 걱정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차라리 죽기로써 간하겠다.”
하고, 바로 글을 올려 옳지 못함을 극론(極論)하니, 왕이 크게 노하여 유탁 등을 하옥시켜 베려고, 공에게 명하여 백성에게 알리는 글[諭衆文]을 지으라 하였다. 공이 그들의 죄명(罪名)을 묻자 왕(王)이 이르기를,
“오랫동안 수상(首相)으로 있으면서 불의(不義)를 많이 행하여 하늘로 하여금 크게 가물게 한 것이 그 하나요, 연복사(演福寺)의 전지(田地)를 빼앗은 것이 그 둘째요, 노국공주의 죽음에 3일간 제사를 궐한 것이 그 셋째요, 노국공주의 장사를 영화공주(永和公主)의 예로써 낮추어 시행한 것이 그 넷째이니, 불충불의(不忠不義)함이 무엇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는가.”
하매, 공이 이에 답하여 아뢰기를,
“그것은 모두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요사이 유탁 등의 상서(上書)는, 영전(影殿)의 역사(役事)를 정지할 것을 청한 것이오니, 비록 위에서 말씀하신 네 가지 일로 죄를 준다 해도 백성은 모두 상서를 했기 때문이라 할 것이요, 또한 이 네 가지 일들은 모두 죽일 죄가 못 됩니다. 원하옵건대 다시 생각하소서.”
하니, 왕(王)은 더욱 노하여서 글짓기를 재촉하였으나, 공이 엎드려 아뢰기를,
“신(臣)이 차라리 죄를 얻을지언정 어찌 감히 그 글을 지어서 그들의 죄를 만들겠습니까. 또한 상서(上書)한 일은 영도첨의(領都僉議) 역시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 때에 신돈(辛旽)이 영도첨의가 되어 극히 총애를 받으며 세력을 잡았는데, 마침 왕의 옆에 앉아 있었다. 신돈도 할 수 없이 이어 아뢰기를,
“노신(老臣)도 알고는 있었습니다마는, 다만 왕께서 노하실까 하여 감히 아뢰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왕은 시중(侍中) 이춘부(李春富)에게 명하여 국인(國印)을 봉하게 하니 춘부가 허리를 굽히고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므로, 신돈이 아뢰기를,
“마땅히 말한 자로 하여금 봉하게 하소서.”
하니, 곧 공에게 명하였다. 공은 왕이 더욱 노할까 두려워서, 곧 봉(封)하고 쓰기를 ‘신 색은 삼가 봉합니다.[臣穡謹封]’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내가 부덕하므로 내 말을 좇지 않으니, 이 국인을 가지고 가서 덕있는 자를 구하여 섬기어라. 우리 태조(太祖)께서도 처음이야 어찌 왕손(王孫)이었겠는가. 내가 자리를 피하리라.”
하고, 곧 거처를 정비궁(定妃宮)으로 옮기고 음식 들이는 것도 허락하지 아니했다. 다음날 신돈은 왕의 노함을 풀게 하려고 왕에게 아뢰어, 공을 옥에 가두고 문책하니 공이 아뢰기를,
“신(臣)은 하찮은 선비로 외람히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아 재상(宰相) 지위에 올랐으니 임금의 덕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죽임을 당할지라도 힘을 다해 말씀드려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려 합니다. 지금 유 시중(柳侍中)이 누설(縲絏 구금되는 것으로 감옥을 가리킨다)에 있는데, 신이 감히 죄가 없음을 끝까지 아뢴 것은 왕(王)의 마음이 감동되어 깨닫고 대신을 함부로 죽이지 않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신이 우는 것은 죽기가 두려워서가 아니요, 다만 이 한 번 실수로 인하여 왕의 이름이 후세에 불미하게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했다. 옥관(獄官)이 사실대로 왕에게 아뢰니 왕이 드디어 감동하고 깨우쳐서, 유탁(柳濯) 등을 풀어주고 공으로 하여금 목욕하고 조정에 나오게 하였다. 신해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김잠(金潛) 등 33인을 뽑았다. 가을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배수받고 문충보절 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의 호를 더 받았다. 우리 태상왕(太上王)이 지문하사(知門下事)가 되었을 때 공민왕은 가까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요사이 물의(物議)가 어떠한가?”
하매, 공이 아뢰기를,
“모든 사람들이 나라에서 인재들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하니, 왕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문관ㆍ무관 모두 최고의 인물을 기용하여 재상(宰相)으로 삼았으니 누가 감히 말하리오.”
하였으니, 이는 대개 같은 날 두 어진 사람을 함께 등용했음을 스스로 흡족히 여긴 것이다. 왕은 언제나 공과 성산(星山) 이인복(李仁復)을 불러 대내에 들어오게 할 때는 꼭 좌우 시종을 시켜 닦고 쓸며 향불을 피우게 하니, 행승(倖僧) 신조(神照)가 왕에게 아뢰기를,
“임금이 신하를 보려 하면서 어찌하여 이처럼 공경합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네가 어찌 이런 일을 알겠는가. 이 두 사람의 도덕은 보통 선비들과 다르며 또한 이색(李穡)은 학문이 겉치레를 버리고 정수를 얻은 자이다. 중국에서도 비하기 드문 선비인데 어찌 감히 함부로 하겠느냐.”
하였다. 이는 왕이 일찍이 황제의 조정에 들어갔을 때에 그곳의 사대부들이 평소부터 공을 칭찬함을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9월에 어머니 요양현군(遼陽縣君)의 상사를 당하였다. 다음해 임자년 9월에 왕은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기복(起復 거상중 왕명에 의하여 출사하는 것)을 명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계축년 겨울에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고 대광(大匡)의 계자를 받았다. 갑인년 겨울에 공민왕(恭愍王)이 훙(薨)하였는데, 공은 어머니가 돌아간 뒤부터 심한 슬픔으로 병이 되어 구토(嘔吐)와 설사병에 걸렸는데 왕이 훙했다는 말을 듣고 더욱 위독해져서 문을 닫고 나가지 않은 지 7~8년이 되었었다. 그런 사이에 왕명에 의하여 지공(指空)과 나옹(懶翁) 두 화상(和尙)의 부도(浮屠 사리탑(舍利塔)을 말한다)에 명(銘)을 지었는데, 그 무리들이 인하여 공의 집을 많이 왕래하였고 시문(詩文)을 구하면 모두 지어 주었으므로 불교(佛敎)에 아첨한다는 비방도 있었다. 공은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그들이 우리 임금과 어버이에게 명복을 빈다 하니, 내 감히 거절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정사년에 추충보절 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號)를 받았으며,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가 되었다. 임술년에 삼중대광 판삼사사(三重大匡判三司事)를 배수했으며, 계해년에 다시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고 갑자년에는 다시 한산부원군이 되었으며, 을축년에 벽상삼한 삼중대광 검교 문하시중(壁上三韓三重大匡檢校門下侍中)을 제수받고, 병인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서 맹사성(孟思誠) 등 33인을 뽑았다. 무진년에 조정(朝廷 명 나라 조정)에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 하니,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국권을 장악하고 있는 때라 군사를 일으켜서 요동을 공격하였다. 우리 태상왕(太上王)이 의거(義擧)하여 회군(回軍)한 후 최영(崔瑩)을 물리치고 공을 기용(起用)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삼았다. 공이 말하기를,
“지금 국가간에 틈이 생겼으니 왕(王)이나 집정(執政)한 신하가 직접 중국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변명할 수 없는데, 왕은 어려서 갈 수 없으니 이는 노부(老夫)의 책임이다.”
하고, 곧 북경에 갈 것을 자청하였다. 왕과 나라 사람들은 모두 공이 늙고 병이 심하다 하여 굳이 만류했지만 공이 말하기를,
“신(臣)이 하찮은 선비로서 지위가 최고의 품계에 이르렀으니, 항상 죽음으로써 이에 보답하려 하였는데 지금이야말로 죽을 곳을 얻은 것이다. 설사 길에서 죽어 시체가 된다 하더라도 왕명을 받들어 천자(天子)에게 전달하게 된다면 죽는다 해도 산 것과 같다.”
하고, 북경에 입조(入朝)하니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가 가상히 여겨 상품을 많이 내려 특별히 대우하고 돌려보냈다. 기사년에 나라에 돌아와서 가을에 사퇴하기를 청했으나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배명되었다. 겨울에 공양왕(恭讓王)이 등극하니 공을 꺼리는 무리들이 탄핵하여 장단(長湍)으로 쫓겨났고, 경오년 4월에는 함창(咸昌)으로 내쫓기었으며 5월에는 이초(彝初)를 명 나라에 파견했다는 모함을 입어서, 공 등 수십 명이 청주(淸州)로 잡혀갔는데 국문이 너무 준엄하여 일이 어찌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공이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마땅히 의리와 운명에 순응할 뿐이다.”
라고 하며 그 처신함이 태연하였다. 그 수일 후 새벽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대낮이 되기 전에 산이 무너지고 물이 솟구쳐서 성문을 부수며 넘쳐들어와서 집들이 함몰되었고, 문사관(問事官)도 물에 빠져 떠내려가다 나무를 붙잡아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이 사실을 나라에 알리니 곧 석방시키고 불문에 붙였다. 이 고을이 생긴 후 이같이 극심한 수재가 없었으므로, 모두 공(公)의 충성에 감동되어서 그랬으리라고 하였다. 이때 왕(王)은 평소부터 공이 딴 마음이 없음을 알았으므로 누차 불러들였으나, 공을 꺼려하는 자들에게 탄핵을 입어 바로 쫓겨나곤 하였다. 사람들은 공이 쫓겨났다 들어왔다 하는 것을 비웃기도 하고 더러는 공이 위태로울까 염려하여 병을 핑계하고 가지 말라고 한 사람도 있었다.
신미년 겨울에 나라에 부름을 받고 또 함창(咸昌)으로부터 올라왔다. 제자인 권근(權近)도 충주(忠州)로 쫓겨났는데 길에서 공을 만나 사람들에게서 들은 대로 고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거짓이다. 신하된 도리는 오직 임금이 명한 바에 따라서 부르면 오고 버리면 가야 하며, 죽음이라도 피하지 못할 것이어늘 갔다 왔다 하는 것을 어찌 근심하겠는가.”
하였다. 조정에 이르니 다시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으로 봉하였다. 임신년 4월에 다시 금주(衿州)로 쫓겨났다가 6월에는 여흥(驪興)으로 옮겼다.
7월에 우리 태상왕(太上王 이 태조)이 즉위하매, 공을 꺼리는 자들이 극형(極刑)을 가하고자 하니, 공은 말하기를,
“나는 평생 동안 망녕된 말을 하지 않았는데 구태여 거짓으로 승복하겠는가. 비록 죽는다 해도 나는 바른 귀신이 되겠다.”
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왕(王)은 그 정상을 살펴서 특별히 놓아 주고 장흥부(長興府)에 옮겨 두게 하였으며, 이때 공을 힘입어 살아난 자가 많았다. 겨울에 풀려나와 한주(韓州)로 돌아왔다.
공양왕(恭讓王) 초기부터 공을 꺼려 여러 번 간계를 꾸며 죽이려는 자가 있었으나 왕이 그때마다 구원하여 온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공을 꺼리는 자들도 감히 다시는 그 간계를 부리지 못하였다. 을해년 가을에는 관동(關東) 지방에 가서 놀았고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머물러 살고 있었는데, 왕이 사신을 보내어 맞아들여 다시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으로 봉했다. 나아가 뵙고 물러나오는데 중문(中門)까지 나와서 전송하며 옛 친구의 예로서 대우했다. 병자년에 공의 나이 69세였다. 여름 5월에 여강(驪江)으로 피서 갈 것을 청하고 곧 배를 타려다가 병이 나서, 아들 종선(種善)을 경성(京城)에서 불러왔는데 초7일에는 병이 위독하여졌다. 중이 불도(佛道)를 진언하니, 공은 손을 저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죽고 사는 원리를 알아서 의심이 없다.”
하고는, 말을 마치자 곧 졸하였다. 부음을 아뢰자 왕은 슬픔이 가득하여 식사를 거두고 3일간 조회를 정지했으며, 사신을 파견하여 조문하고 제사지내며, 부의를 보냈고, 시호를 문정공(文靖公)이라 하였다. 10월에 자손들이 영구를 받들고 한주(韓州)로 돌아가서 11월 갑인일에 가지(加智)의 언덕에 장사했다.
공은 선천적으로 자질이 밝고 깊으며, 학문이 정밀하고 넓었다. 일을 처리함에는 자상하고 마음가짐은 너그러우며, 옳고 그름을 의논함에는 명백하고 절실하였으나 반드시 충후(忠厚)함을 주장하였다. 사람을 대하고 물건에 접할 때는 공경하고 겸손하여 화기애애하였으나 그 늠름한 기상은 범할 수 없었다. 그가 재상(宰相)이 되었을 때는, 헌장(憲章)을 준수함에 힘써 자주 변경하는 것을 싫어했으며 대체를 지켰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를 사랑하던 마음은 늙어서도 변치 않아 언제나 얼굴에 나타나고 시문(詩文)에서도 나타났다. 후학들을 권면함에 있어서도 반드시 윤리(倫理)를 주장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모든 글을 널리 보았으며 더욱 이학(理學)에 정심하였고, 무릇 문장을 지을 때에는 붓만 잡으면 곧 쓰는데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듯 조금도 거침이 없이 말과 뜻이 정밀하고 품격이 고고하여, 넓고 깊은 것이 강물이 바다에 모여드는 듯하였다. 문집으로는 시(詩) 35권과 문(文) 20권이 있다.
원(元) 나라 말엽 지정(至正) 계사(1353)로부터 황조(皇朝) 홍무(洪武) 기사(1389)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간 나라의 문한(文翰)을 맡았고, 거듭되는 변고로 험난한 때에 임금의 말과 명령을 문장으로 잘 다듬어서 여러 번 가상하다는 감탄을 받았었다. 공이 쫓겨나매 공을 꺼려한 자가 전문(典文 문한을 맡음을 말함)이 되었는데, 표사(表辭)가 잘못되었다 하여 처음으로 황제의 책망을 들었으니 공의 문장과 지식이 세상에 도움됨이 이와 같았다. 아깝게도 공민왕(恭愍王)은 한갓 공경할 줄은 알았지만 그 말하는 바를 모두 쓰지 못하였으며, 뒤에 백관의 장(長)이 되었으나 바로 파관되고 드디어 헐뜯고 배척을 당하여 그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학문은 끝내 크게 펴지 못하고 말았으니, 이는 천운이었나 보다.
집을 다스리되 그 가용이 있고 없음을 묻지 아니하고, 비록 자주 양식이 없다 해도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평생에 급한 말이나 당황한 빛이 없었으며 집안 식구나 노복들이 혹 실수가 있더라도 서서히 이치로 타일러 성낸 말을 한 일이 없었으며, 잔치 자리에서도 예사롭게 행동하나 난잡스러운데에 이르지 아니하였다. 마음에 거리낌이 없고 말과 행동이 조용하며 즐겁고 성냄을 나타내지 않고 모난 행동이 없어 마치 훈훈한 한 덩이의 화기(和氣)인 듯했다. 오랫동안 은총을 받고 권리를 잡은 자리에 있었으나, 교만하고 뽐냄을 보지 못하였으며 나이들어 환란을 만났어도 기개를 잃지 아니하여 옥중에 갇혀도 욕되게 여기지 아니하고, 높은 벼슬에 올라서도 영화로 여기지 아니하였으니, 공은 몸과 마음을 지켜나가는 것이 역시 확고하여 뺏을 수 없는 사람이라 하겠다.
공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종덕(種德)이니, 추성익위공신(推誠翊衛功臣) 봉익대부(奉翊大夫)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요, 둘째는 종학(種學)이니 봉익대부(奉翊大夫) 첨서 밀직사사(僉書密直司事)인데, 병진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무진년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기사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었으나, 이 두 아들은 공보다 먼저 졸(卒)하였다. 셋째는 종선(種善)인데, 중정대부(中正大夫) 전교령 지제교(典校令知製敎)였으며 임술년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큰아들 밀직(密直)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장자 맹유(孟㽥)는 중현대부(中顯大夫) 감문위 대호군(監門衛大護軍)이요, 둘째는 맹균(孟畇)인데 승봉랑고공좌랑(承奉郞考功佐郞)으로 을축년에 진사가 되었고, 셋째는 맹준(孟畯)인데 임신년에 진사가 되었다. 넷째는 맹진(孟畛)인데 인덕궁 사연(仁德宮司涓)이 되었다. 딸이 둘인데 큰딸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추부 우부대언(承樞府右副代言) 유기(柳沂)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중훈대부(中訓大夫) 종부영(宗簿令) 하구(河久)에게 시집 갔다.
둘째 아들 첨서(僉書)는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장자는 숙야(叔野)로 조봉대부(朝奉大夫) 사재소감(司宰少監)이요, 둘째는 숙규(叔畦)로 성균 생원(成均生員)이요, 셋째는 숙당(叔當)으로 호용순위사 부사직(虎勇巡衛司副司直)이요, 넷째는 숙묘(叔畂)로 조산대부(朝散大夫)사수소감(司水少監)이요, 다섯째는 숙복(叔福)으로 성균생원(成均生員)이요, 여섯째는 숙치(叔畤)인데 아직 어리다. 딸이 둘인데 큰딸은 정윤(正尹) 이점(李漸)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아직 어리다.
셋째 아들 전교(典校)는 아들 하나인데 계주(季疇)이다. 증손은 남자가 일곱이며 여자가 아홉이다.

[주D-001]가을에……시행되매 : 고려가 충렬왕 이후 원 나라에 예속되어 옛 관제(官制)를 변경하였다가 공민왕 5년에 다시 복구한 것을 말한다. 《高麗世家 卷第38 恭愍王2年》
[주D-002]이초(彝初)를……파견 : 이는 윤이(尹彝)이며 초는 이초(李初)인데, 이 두 사람은 명 나라에 가서 “이성계(李成桂)는 왕씨가 아닌 요(瑤 공양왕)를 왕으로 세우고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을 치려 하므로, 이색(李穡) 등 재상들이 우리들을 비밀히 보내 이 사실을 황제께 고하라 하여 왔다.”고 한 사건을 말한다.

 

 

양촌선생문집 제40권
 행장(行狀)
목은 선생(牧隱先生) 이 문정공(李文靖公) 행장


공(公)의 휘는 색(穡)이요 자는 영숙(穎叔)이며 호는 목은(牧隱)인데, 본관은 충청도 한주(韓州)이다. 증조부는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봉(追封)된 창세(昌世)며, 조부는 봉훈대부(奉訓大夫) 비서 감승(秘書監丞)에 선증(宣贈)되고 본국(本國)에서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추봉(追封)된 자성(自成)이요, 아버지는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奉議大夫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을 선수(宣授) 받고 본국(本國)에서 광정대부(匡正大夫) 도첨의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상호군(都僉議贊成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으로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요, 이름은 곡(穀)이다. 원조(元朝) 원통(元統) 계유(1333)에 제과(制科)에 합격했으며 호는 가정(稼亭)이요 문집 20권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어머니는 요양현군(遼陽縣君)에 선봉(宣封)된 본국의 함창군부인(咸昌郡夫人)인 김씨(金氏)다. 천력(天曆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무진(戊辰) 5월 신미(辛未)에 공을 낳았는데, 총명하고 지혜로움이 특이하여,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았고 보면 곧 욀 수 있었다.
신사년에 공은 나이 겨우 14세였는데 본국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니, 이미 명성이 우뚝하였다. 20세가 되매 혼인을 구하니, 당시의 높은 가문과 덕망 있는 집안에서 사위를 고르는 자들은 모두 그 딸을 시집보내고자 하여 혼인지낼 때까지도 다투었다. 이에 안동 권씨(安東權氏)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니, 명위장군 제군만호부 만호(明威將軍諸軍萬戶府萬戶)를 선수(宣授) 받은 본국의 중대광 화원군(重大匡花原君)인 중달(仲達)의 딸이며, 원조(元朝)의 조열대부(朝列大夫) 태자 좌찬선(太子左贊善)이며 본국의 삼중대광(三重大匡) 도첨의 우정승(都僉議右政丞) 한공(漢公)의 손녀다. 무자년에 가정 선생(稼亭先生)이 원조(元朝)에 있을 때에 중서사 전부(中瑞司典簿)가 되었는데, 공은 조관의 아들로서 국자감 생원(國子監生員)으로 보충되어서, 3년 동안 재학하며 중국의 연원(淵源) 있는 학문을 익혔는데 탁마(琢磨)하고 함양하여 더욱 진보하였으며 특히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신묘년 정월에 가정이 본국에 돌아와서 졸(卒)하니 분상(奔喪)하여 복제를 다 마쳤다. 계사년 5월에 공민왕(恭愍王)이 과장을 열고 선비들을 시험했는데, 공이 장원을 하여 숙옹부 승(肅雍府丞)을 제수받았고, 가을에는 정동행성(征東行省)에서 향시(鄕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리고 곧 진봉사서장관(進奉使書狀官)이 되어 원 나라 서울에 갔었다. 갑오년 2월에는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 구양현(歐陽玄)과 예부 상서(禮部尙書) 왕사성(王思誠)이 회시(會試)를 관장하였는데, 공은 또 합격하였고, 3월에는 전정(殿庭)에서 대책(對策) 시험을 보았는데, 제이갑(第二甲)에 두 번째로 합격되었으므로, 독권관참지정사(讀卷官參知政事) 두병이(杜秉彝)와 한림승지(翰林承旨) 구양현 등 제공이 크게 칭찬하였다. 칙령으로 응봉한림문자승사랑 동지제고 겸 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仕郞同知製誥兼國史院編修官)을 제수받았다.
귀국하여 차례를 기다리는데 공민왕(恭愍王)은 통직랑 전리정랑 예문응교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通直郞典理正郞藝文應敎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을 제수하였다. 을미년 봄에 왕부(王府)의 필도지(必闍赤)가 되어 비목(批目) 베껴 쓰는 것을 맡았으니 선비로는 영광된 피선이었고, 계자를 더 높여 주어 봉선대부(奉善大夫) 시내사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試內史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을 제수하였다. 여름에는 또 서장관(書狀官)에 충원되어 표(表)를 받들고 원경(元京)에 갔는데, 8월에 한림원(翰林院)에 예사(禮仕)되었으며, 겨울에는 경력(經歷)에 임시 임명되기도 하였다. 병신년 정월에 어머니가 늙으신 이유로 관직을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왔으니, 대개 천하(天下)가 어지러워질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을에 본국의 관제(官制)가 다시 시행되매 중산대부(中散大夫)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지제고 겸 춘추관편수관 겸 병부낭중(吏部侍郞 翰林直學士知製誥兼春秋館編修官兼兵部郞中)이 되어 문무관(文武官)의 선발 권한을 맡았었다. 당초 공이 시정(時政) 8개항을 아뢰어 모두 시행되었는데, 그 하나는 정방(政房)을 폐하고 이ㆍ병부(吏兵部)의 선거를 복구시키는 것이었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정유년에는 국자좨주 지각문(國子祭酒知閣門)이 되어 중대부(中大夫)에 오르고 지인상서(知印尙書)가 되니, 이는 필도지의 장(長)으로 이에 선임된 것은 더욱 명예스러운 것이다. 7월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옮기면서 계자(階資)는 대중대부(大中大夫)에 올랐다. 이 뒤로부터는 모든 벼슬을 제수하는 데 모두 관직(館職)을 겸대하게 하였다.
무술년에는 어느 일을 말하다가 권귀(權貴)들에게 거슬려 한때 간관(諫館)들이 모두 좌천되었다. 공은 상주(尙州)로 가게 되어 행장을 정리하고 새벽을 기다려 떠나려고 하였는데, 그날 밤에 특명이 내려 공만은 통의대부(通議大夫) 추밀원우부승선 지공부사(樞密院右副承宣知工部事)가 되었다. 왕(王)이 재상(宰相)에게, 이르기를,
“이색(李穡)은 재덕이 출중하여 다른 사람과 같지 않으니 그를 등용하기를 이같이 아니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감복시킬 수 없다.”
고 하였다. 이렇게 임금에 가까운 직책과 국가의 중요한 기밀에 참여하여 관장한 것이 모두 7년 동안에 계책을 진술하고 유익한 일을 아뢰어서 나라에 도움된 바가 대단히 많았다.
신축년 11월에 홍건적(紅巾賊)이 서울을 함락하여 임금이 피란하게 되니 신료(臣僚)들은 창졸간에 모두 흩어졌었다. 공은 임금의 곁을 떠나지 않고 따라다니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호위하고 참모하여 많은 어려움을 구제하고 회복하는 큰 공(功)을 세웠으므로 1등훈(一等勳)에 책봉하고 철권(鐵券) 및 전지(田地) 1백 결(結)과 노비 20명을 하사하였다. 계묘년에 봉훈대부(奉訓大夫) 정동행중서성 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를 선수(宣授) 받고 겨울에 본국에서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이 되었다. 이때부터 20여 년이나 나라 정사에 참여하여 비록 관직을 그만두고 한가히 있더라도 언제나 큰 정사가 있으면 반드시 찾아와서 물었다. 을사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윤소종(尹紹宗) 등 28명을 뽑았다. 정미년 겨울에는 조열대부(朝列大夫)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을 선수(宣授) 받았으며, 본국에서 판개성 겸 성균관대사성(判開城兼成均館大司成)이 되었다.
당초 신축년 병란을 겪은 후에 학교의 교육이 폐이(廢弛)되었으므로, 임금께서는 이를 다시 일으키려고 성균관(成均館)을 숭문관(崇文館)의 옛 터에다 다시 지었다. 강의(講義)를 맡을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당시의 경술에 능한 선비를 뽑았으니, 영가(永嘉) 김구용(金九容)ㆍ오천(烏川) 정몽주(鄭夢周)ㆍ반양(潘陽) 박상충(朴尙衷)ㆍ밀양(密陽) 박의중(朴宜中)ㆍ경산(景山) 이숭인(李崇仁) 같은 사람들인데, 모두 다른 관직에 있으면서 학관(學官)을 겸하게 했으며, 공으로써 그 장(長)을 시켰으니 대사성(大司成)을 겸직한 것도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듬해 무신년 봄에는 사방(四方)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제공(諸公)이 경서(經書)를 나누어서 가르쳤다. 매일 강의(講義)가 끝나면 서로 의심나는 뜻을 토론하여 각각 그 극진함을 다하였다. 이때에 공은 화평한 표정으로 중도를 잡아 변석하고 절충하여 정주(程朱)의 학설에 부합되도록 힘썼으며, 밤이 다하여도 지칠 줄을 몰랐다. 이로부터 우리나라의 성리학(性理學)이 크게 일어났었고, 학자들은 그 기송사장(記誦詞章)의 습관을 버리고 신심성명(身心性命)의 이치를 연구하였으며, 유학을 높일 줄 알고 이단(異端)에 빠지지 아니하며, 의리를 바로잡고 공리(功利)를 구하려 하지 않았으므로, 유풍(儒風)과 학술(學術)이 새롭게 찬란하였으니 이는 모두 선생의 가르친 공로였다. 4월에 왕(王)이 구재(九齋 고려 문종(文宗) 때 최충(崔冲)이 세운 사학(私學)의 9개 과목)에 거둥하여 직접 제생(諸生)들을 경의(經義)로써 시험하매, 공에게 독권(讀卷 독권관. 시험 답안을 읽어 올리는 시험관)을 명하였는데, 이첨(李詹) 등 7인을 뽑아서 급제(及第)를 주었다. 기유년 여름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유백유(柳伯濡) 등 33인을 뽑았는데, 처음으로 중국의 과거 제도인 역서통고법(易書通考法)을 채용한 것이었다.
당초 공민왕(恭愍王)이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위하여 영전(影殿)을 왕륜사(王輪寺)의 동쪽에 세우는데, 사치하고 화려함이 극하여 몇 해가 되도록 이루지 못하고 마암(馬巖)의 서쪽에 터를 잡아서 다시 짓는데 그 굉장함은 더욱 심하여 인력과 비용이 헤일 수 없었다. 시중(侍中) 유탁(柳濯)이 동지밀직(同知密直) 안극인(安克仁)과 첨서밀직(僉書密直) 정사도(鄭思道)에게 말하기를,
“마암(馬巖)의 역사는 백성을 괴롭히고 재물을 손상할 뿐만 아니라, 술사(術士)의 말에 ‘여기다 큰 집을 지으면 나라에 불리할 것이다.’라고 했으니, 내가 재주가 없으나 백관(百官)의 장(長)으로 있으면서 사직(社稷)을 걱정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차라리 죽기로써 간하겠다.”
하고, 바로 글을 올려 옳지 못함을 극론(極論)하니, 왕이 크게 노하여 유탁 등을 하옥시켜 베려고, 공에게 명하여 백성에게 알리는 글[諭衆文]을 지으라 하였다. 공이 그들의 죄명(罪名)을 묻자 왕(王)이 이르기를,
“오랫동안 수상(首相)으로 있으면서 불의(不義)를 많이 행하여 하늘로 하여금 크게 가물게 한 것이 그 하나요, 연복사(演福寺)의 전지(田地)를 빼앗은 것이 그 둘째요, 노국공주의 죽음에 3일간 제사를 궐한 것이 그 셋째요, 노국공주의 장사를 영화공주(永和公主)의 예로써 낮추어 시행한 것이 그 넷째이니, 불충불의(不忠不義)함이 무엇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는가.”
하매, 공이 이에 답하여 아뢰기를,
“그것은 모두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요사이 유탁 등의 상서(上書)는, 영전(影殿)의 역사(役事)를 정지할 것을 청한 것이오니, 비록 위에서 말씀하신 네 가지 일로 죄를 준다 해도 백성은 모두 상서를 했기 때문이라 할 것이요, 또한 이 네 가지 일들은 모두 죽일 죄가 못 됩니다. 원하옵건대 다시 생각하소서.”
하니, 왕(王)은 더욱 노하여서 글짓기를 재촉하였으나, 공이 엎드려 아뢰기를,
“신(臣)이 차라리 죄를 얻을지언정 어찌 감히 그 글을 지어서 그들의 죄를 만들겠습니까. 또한 상서(上書)한 일은 영도첨의(領都僉議) 역시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 때에 신돈(辛旽)이 영도첨의가 되어 극히 총애를 받으며 세력을 잡았는데, 마침 왕의 옆에 앉아 있었다. 신돈도 할 수 없이 이어 아뢰기를,
“노신(老臣)도 알고는 있었습니다마는, 다만 왕께서 노하실까 하여 감히 아뢰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왕은 시중(侍中) 이춘부(李春富)에게 명하여 국인(國印)을 봉하게 하니 춘부가 허리를 굽히고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므로, 신돈이 아뢰기를,
“마땅히 말한 자로 하여금 봉하게 하소서.”
하니, 곧 공에게 명하였다. 공은 왕이 더욱 노할까 두려워서, 곧 봉(封)하고 쓰기를 ‘신 색은 삼가 봉합니다.[臣穡謹封]’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내가 부덕하므로 내 말을 좇지 않으니, 이 국인을 가지고 가서 덕있는 자를 구하여 섬기어라. 우리 태조(太祖)께서도 처음이야 어찌 왕손(王孫)이었겠는가. 내가 자리를 피하리라.”
하고, 곧 거처를 정비궁(定妃宮)으로 옮기고 음식 들이는 것도 허락하지 아니했다. 다음날 신돈은 왕의 노함을 풀게 하려고 왕에게 아뢰어, 공을 옥에 가두고 문책하니 공이 아뢰기를,
“신(臣)은 하찮은 선비로 외람히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아 재상(宰相) 지위에 올랐으니 임금의 덕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죽임을 당할지라도 힘을 다해 말씀드려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려 합니다. 지금 유 시중(柳侍中)이 누설(縲絏 구금되는 것으로 감옥을 가리킨다)에 있는데, 신이 감히 죄가 없음을 끝까지 아뢴 것은 왕(王)의 마음이 감동되어 깨닫고 대신을 함부로 죽이지 않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신이 우는 것은 죽기가 두려워서가 아니요, 다만 이 한 번 실수로 인하여 왕의 이름이 후세에 불미하게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했다. 옥관(獄官)이 사실대로 왕에게 아뢰니 왕이 드디어 감동하고 깨우쳐서, 유탁(柳濯) 등을 풀어주고 공으로 하여금 목욕하고 조정에 나오게 하였다. 신해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김잠(金潛) 등 33인을 뽑았다. 가을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배수받고 문충보절 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의 호를 더 받았다. 우리 태상왕(太上王)이 지문하사(知門下事)가 되었을 때 공민왕은 가까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요사이 물의(物議)가 어떠한가?”
하매, 공이 아뢰기를,
“모든 사람들이 나라에서 인재들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하니, 왕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문관ㆍ무관 모두 최고의 인물을 기용하여 재상(宰相)으로 삼았으니 누가 감히 말하리오.”
하였으니, 이는 대개 같은 날 두 어진 사람을 함께 등용했음을 스스로 흡족히 여긴 것이다. 왕은 언제나 공과 성산(星山) 이인복(李仁復)을 불러 대내에 들어오게 할 때는 꼭 좌우 시종을 시켜 닦고 쓸며 향불을 피우게 하니, 행승(倖僧) 신조(神照)가 왕에게 아뢰기를,
“임금이 신하를 보려 하면서 어찌하여 이처럼 공경합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네가 어찌 이런 일을 알겠는가. 이 두 사람의 도덕은 보통 선비들과 다르며 또한 이색(李穡)은 학문이 겉치레를 버리고 정수를 얻은 자이다. 중국에서도 비하기 드문 선비인데 어찌 감히 함부로 하겠느냐.”
하였다. 이는 왕이 일찍이 황제의 조정에 들어갔을 때에 그곳의 사대부들이 평소부터 공을 칭찬함을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9월에 어머니 요양현군(遼陽縣君)의 상사를 당하였다. 다음해 임자년 9월에 왕은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기복(起復 거상중 왕명에 의하여 출사하는 것)을 명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계축년 겨울에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고 대광(大匡)의 계자를 받았다. 갑인년 겨울에 공민왕(恭愍王)이 훙(薨)하였는데, 공은 어머니가 돌아간 뒤부터 심한 슬픔으로 병이 되어 구토(嘔吐)와 설사병에 걸렸는데 왕이 훙했다는 말을 듣고 더욱 위독해져서 문을 닫고 나가지 않은 지 7~8년이 되었었다. 그런 사이에 왕명에 의하여 지공(指空)과 나옹(懶翁) 두 화상(和尙)의 부도(浮屠 사리탑(舍利塔)을 말한다)에 명(銘)을 지었는데, 그 무리들이 인하여 공의 집을 많이 왕래하였고 시문(詩文)을 구하면 모두 지어 주었으므로 불교(佛敎)에 아첨한다는 비방도 있었다. 공은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그들이 우리 임금과 어버이에게 명복을 빈다 하니, 내 감히 거절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정사년에 추충보절 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號)를 받았으며,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가 되었다. 임술년에 삼중대광 판삼사사(三重大匡判三司事)를 배수했으며, 계해년에 다시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고 갑자년에는 다시 한산부원군이 되었으며, 을축년에 벽상삼한 삼중대광 검교 문하시중(壁上三韓三重大匡檢校門下侍中)을 제수받고, 병인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서 맹사성(孟思誠) 등 33인을 뽑았다. 무진년에 조정(朝廷 명 나라 조정)에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 하니,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국권을 장악하고 있는 때라 군사를 일으켜서 요동을 공격하였다. 우리 태상왕(太上王)이 의거(義擧)하여 회군(回軍)한 후 최영(崔瑩)을 물리치고 공을 기용(起用)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삼았다. 공이 말하기를,
“지금 국가간에 틈이 생겼으니 왕(王)이나 집정(執政)한 신하가 직접 중국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변명할 수 없는데, 왕은 어려서 갈 수 없으니 이는 노부(老夫)의 책임이다.”
하고, 곧 북경에 갈 것을 자청하였다. 왕과 나라 사람들은 모두 공이 늙고 병이 심하다 하여 굳이 만류했지만 공이 말하기를,
“신(臣)이 하찮은 선비로서 지위가 최고의 품계에 이르렀으니, 항상 죽음으로써 이에 보답하려 하였는데 지금이야말로 죽을 곳을 얻은 것이다. 설사 길에서 죽어 시체가 된다 하더라도 왕명을 받들어 천자(天子)에게 전달하게 된다면 죽는다 해도 산 것과 같다.”
하고, 북경에 입조(入朝)하니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가 가상히 여겨 상품을 많이 내려 특별히 대우하고 돌려보냈다. 기사년에 나라에 돌아와서 가을에 사퇴하기를 청했으나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배명되었다. 겨울에 공양왕(恭讓王)이 등극하니 공을 꺼리는 무리들이 탄핵하여 장단(長湍)으로 쫓겨났고, 경오년 4월에는 함창(咸昌)으로 내쫓기었으며 5월에는 이초(彝初)를 명 나라에 파견했다는 모함을 입어서, 공 등 수십 명이 청주(淸州)로 잡혀갔는데 국문이 너무 준엄하여 일이 어찌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공이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마땅히 의리와 운명에 순응할 뿐이다.”
라고 하며 그 처신함이 태연하였다. 그 수일 후 새벽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대낮이 되기 전에 산이 무너지고 물이 솟구쳐서 성문을 부수며 넘쳐들어와서 집들이 함몰되었고, 문사관(問事官)도 물에 빠져 떠내려가다 나무를 붙잡아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이 사실을 나라에 알리니 곧 석방시키고 불문에 붙였다. 이 고을이 생긴 후 이같이 극심한 수재가 없었으므로, 모두 공(公)의 충성에 감동되어서 그랬으리라고 하였다. 이때 왕(王)은 평소부터 공이 딴 마음이 없음을 알았으므로 누차 불러들였으나, 공을 꺼려하는 자들에게 탄핵을 입어 바로 쫓겨나곤 하였다. 사람들은 공이 쫓겨났다 들어왔다 하는 것을 비웃기도 하고 더러는 공이 위태로울까 염려하여 병을 핑계하고 가지 말라고 한 사람도 있었다.
신미년 겨울에 나라에 부름을 받고 또 함창(咸昌)으로부터 올라왔다. 제자인 권근(權近)도 충주(忠州)로 쫓겨났는데 길에서 공을 만나 사람들에게서 들은 대로 고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거짓이다. 신하된 도리는 오직 임금이 명한 바에 따라서 부르면 오고 버리면 가야 하며, 죽음이라도 피하지 못할 것이어늘 갔다 왔다 하는 것을 어찌 근심하겠는가.”
하였다. 조정에 이르니 다시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으로 봉하였다. 임신년 4월에 다시 금주(衿州)로 쫓겨났다가 6월에는 여흥(驪興)으로 옮겼다.
7월에 우리 태상왕(太上王 이 태조)이 즉위하매, 공을 꺼리는 자들이 극형(極刑)을 가하고자 하니, 공은 말하기를,
“나는 평생 동안 망녕된 말을 하지 않았는데 구태여 거짓으로 승복하겠는가. 비록 죽는다 해도 나는 바른 귀신이 되겠다.”
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왕(王)은 그 정상을 살펴서 특별히 놓아 주고 장흥부(長興府)에 옮겨 두게 하였으며, 이때 공을 힘입어 살아난 자가 많았다. 겨울에 풀려나와 한주(韓州)로 돌아왔다.
공양왕(恭讓王) 초기부터 공을 꺼려 여러 번 간계를 꾸며 죽이려는 자가 있었으나 왕이 그때마다 구원하여 온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공을 꺼리는 자들도 감히 다시는 그 간계를 부리지 못하였다. 을해년 가을에는 관동(關東) 지방에 가서 놀았고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머물러 살고 있었는데, 왕이 사신을 보내어 맞아들여 다시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으로 봉했다. 나아가 뵙고 물러나오는데 중문(中門)까지 나와서 전송하며 옛 친구의 예로서 대우했다. 병자년에 공의 나이 69세였다. 여름 5월에 여강(驪江)으로 피서 갈 것을 청하고 곧 배를 타려다가 병이 나서, 아들 종선(種善)을 경성(京城)에서 불러왔는데 초7일에는 병이 위독하여졌다. 중이 불도(佛道)를 진언하니, 공은 손을 저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죽고 사는 원리를 알아서 의심이 없다.”
하고는, 말을 마치자 곧 졸하였다. 부음을 아뢰자 왕은 슬픔이 가득하여 식사를 거두고 3일간 조회를 정지했으며, 사신을 파견하여 조문하고 제사지내며, 부의를 보냈고, 시호를 문정공(文靖公)이라 하였다. 10월에 자손들이 영구를 받들고 한주(韓州)로 돌아가서 11월 갑인일에 가지(加智)의 언덕에 장사했다.
공은 선천적으로 자질이 밝고 깊으며, 학문이 정밀하고 넓었다. 일을 처리함에는 자상하고 마음가짐은 너그러우며, 옳고 그름을 의논함에는 명백하고 절실하였으나 반드시 충후(忠厚)함을 주장하였다. 사람을 대하고 물건에 접할 때는 공경하고 겸손하여 화기애애하였으나 그 늠름한 기상은 범할 수 없었다. 그가 재상(宰相)이 되었을 때는, 헌장(憲章)을 준수함에 힘써 자주 변경하는 것을 싫어했으며 대체를 지켰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를 사랑하던 마음은 늙어서도 변치 않아 언제나 얼굴에 나타나고 시문(詩文)에서도 나타났다. 후학들을 권면함에 있어서도 반드시 윤리(倫理)를 주장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모든 글을 널리 보았으며 더욱 이학(理學)에 정심하였고, 무릇 문장을 지을 때에는 붓만 잡으면 곧 쓰는데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듯 조금도 거침이 없이 말과 뜻이 정밀하고 품격이 고고하여, 넓고 깊은 것이 강물이 바다에 모여드는 듯하였다. 문집으로는 시(詩) 35권과 문(文) 20권이 있다.
원(元) 나라 말엽 지정(至正) 계사(1353)로부터 황조(皇朝) 홍무(洪武) 기사(1389)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간 나라의 문한(文翰)을 맡았고, 거듭되는 변고로 험난한 때에 임금의 말과 명령을 문장으로 잘 다듬어서 여러 번 가상하다는 감탄을 받았었다. 공이 쫓겨나매 공을 꺼려한 자가 전문(典文 문한을 맡음을 말함)이 되었는데, 표사(表辭)가 잘못되었다 하여 처음으로 황제의 책망을 들었으니 공의 문장과 지식이 세상에 도움됨이 이와 같았다. 아깝게도 공민왕(恭愍王)은 한갓 공경할 줄은 알았지만 그 말하는 바를 모두 쓰지 못하였으며, 뒤에 백관의 장(長)이 되었으나 바로 파관되고 드디어 헐뜯고 배척을 당하여 그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학문은 끝내 크게 펴지 못하고 말았으니, 이는 천운이었나 보다.
집을 다스리되 그 가용이 있고 없음을 묻지 아니하고, 비록 자주 양식이 없다 해도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평생에 급한 말이나 당황한 빛이 없었으며 집안 식구나 노복들이 혹 실수가 있더라도 서서히 이치로 타일러 성낸 말을 한 일이 없었으며, 잔치 자리에서도 예사롭게 행동하나 난잡스러운데에 이르지 아니하였다. 마음에 거리낌이 없고 말과 행동이 조용하며 즐겁고 성냄을 나타내지 않고 모난 행동이 없어 마치 훈훈한 한 덩이의 화기(和氣)인 듯했다. 오랫동안 은총을 받고 권리를 잡은 자리에 있었으나, 교만하고 뽐냄을 보지 못하였으며 나이들어 환란을 만났어도 기개를 잃지 아니하여 옥중에 갇혀도 욕되게 여기지 아니하고, 높은 벼슬에 올라서도 영화로 여기지 아니하였으니, 공은 몸과 마음을 지켜나가는 것이 역시 확고하여 뺏을 수 없는 사람이라 하겠다.
공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종덕(種德)이니, 추성익위공신(推誠翊衛功臣) 봉익대부(奉翊大夫)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요, 둘째는 종학(種學)이니 봉익대부(奉翊大夫) 첨서 밀직사사(僉書密直司事)인데, 병진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무진년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기사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었으나, 이 두 아들은 공보다 먼저 졸(卒)하였다. 셋째는 종선(種善)인데, 중정대부(中正大夫) 전교령 지제교(典校令知製敎)였으며 임술년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큰아들 밀직(密直)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장자 맹유(孟㽥)는 중현대부(中顯大夫) 감문위 대호군(監門衛大護軍)이요, 둘째는 맹균(孟畇)인데 승봉랑고공좌랑(承奉郞考功佐郞)으로 을축년에 진사가 되었고, 셋째는 맹준(孟畯)인데 임신년에 진사가 되었다. 넷째는 맹진(孟畛)인데 인덕궁 사연(仁德宮司涓)이 되었다. 딸이 둘인데 큰딸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추부 우부대언(承樞府右副代言) 유기(柳沂)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중훈대부(中訓大夫) 종부영(宗簿令) 하구(河久)에게 시집 갔다.
둘째 아들 첨서(僉書)는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장자는 숙야(叔野)로 조봉대부(朝奉大夫) 사재소감(司宰少監)이요, 둘째는 숙규(叔畦)로 성균 생원(成均生員)이요, 셋째는 숙당(叔當)으로 호용순위사 부사직(虎勇巡衛司副司直)이요, 넷째는 숙묘(叔畂)로 조산대부(朝散大夫)사수소감(司水少監)이요, 다섯째는 숙복(叔福)으로 성균생원(成均生員)이요, 여섯째는 숙치(叔畤)인데 아직 어리다. 딸이 둘인데 큰딸은 정윤(正尹) 이점(李漸)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아직 어리다.
셋째 아들 전교(典校)는 아들 하나인데 계주(季疇)이다. 증손은 남자가 일곱이며 여자가 아홉이다.


[주D-001]가을에……시행되매 : 고려가 충렬왕 이후 원 나라에 예속되어 옛 관제(官制)를 변경하였다가 공민왕 5년에 다시 복구한 것을 말한다. 《高麗世家 卷第38 恭愍王2年》
[주D-002]이초(彝初)를……파견 : 이는 윤이(尹彝)이며 초는 이초(李初)인데, 이 두 사람은 명 나라에 가서 “이성계(李成桂)는 왕씨가 아닌 요(瑤 공양왕)를 왕으로 세우고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을 치려 하므로, 이색(李穡) 등 재상들이 우리들을 비밀히 보내 이 사실을 황제께 고하라 하여 왔다.”고 한 사건을 말한다.

 

 

陽村先生文集卷之四十
 行狀
牧隱先生李文靖公行狀 a_007_345d


公諱穡。字穎叔。號牧隱。忠淸道韓州人。曾祖追封奉翊大夫,版圖判書昌世。祖宣贈奉訓大夫,秘書監丞。本國追封匡靖大夫,都僉議贊成事自成。考宣授奉議大夫,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本國匡正大夫,都僉議贊成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諡文孝公穀。中元朝元統癸酉制科。號稼亭。有文集二十卷行于世。妣宣封遼陽縣君。本國咸昌郡夫人金氏。以天曆戊辰五月辛未生公。聦慧異常。自知讀007_346a書。見輒成誦。至正辛巳。公年甫十四。中本國成均試。嶄然已有聲。始冠將婚。一時高門望族擇東床者。皆欲歸其女。至婚夕猶爭。乃娶安東權氏宣授明威將軍諸軍萬戶府萬戶。本國重大匡,花原君仲達之女。元朝朝列大夫,太子左贊善。本國三重大匡,都僉議右政丞漢公之孫也。戊子。稼亭先生在元朝。爲中瑞司典簿。公以朝官子。補國子監生員。在學三年。得受中國淵源之學。切磨涵漬。益大以進。尤邃於性理之書。辛卯正月。稼亭還本國卒。奔喪終制。癸巳夏五月。恭愍王開科試士。公爲魁。授肅雍府丞。秋中征東行007_346b省解元。仍充進奉使書狀官赴京。甲午二月。翰林學士承旨歐陽玄,禮部尙書王思誠同掌會試。公又得中。三月。對策殿庭。擢中第二甲第二名。讀卷官參知政事杜秉彝,翰林承旨歐陽玄諸公大加稱賞。勑授應奉翰林文字,承仕郞,同知製誥兼國史院編修官。東歸須次。恭愍王就加通直郞,典理正郞,藝文應敎,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乙未春。爲王府必闍赤。掌書批目。儒林榮選也。陞授奉善大夫,試內史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夏又充書狀官。奉表如京。八月。禮仕翰林院。冬權經歷。丙申正月。以母老棄官東007_346c歸。盖亦知天下將亂也。秋。本國官制行改中散大夫,吏部侍郞,翰林直學士,知製誥兼春秋館編修官。兼兵部郞中以掌文武之選。初。公上言時政八事。皆蒙施行。其一。罷政房復吏兵部選也。故有是命。丁酉。試國子祭酒知閣門。階中大夫。爲知印尙書。是必闍赤之長也。其選尤榮。七月。遷右諫議大夫。階加大中。自後凡除授。皆帶館職。戊戌。以言事忤權貴。一峕諫官皆左遷。擬公尙州。公理裝待曉將發。其夜命下。獨公進拜通議大夫樞密院右副丞宣,知工部事。王謂宰相曰。李穡才德出衆。非他人之比。用舍不如此。無以007_346d伏人心。由是昵居喉舌。參掌機密凡七年。陳謨啓沃。裨益弘多。辛丑十一月。紅賊陷王京。乘輿播越。臣僚倉卒多潰散。公從王不離側。一心扞衛。參謀協贊。洪濟多艱。弼成克復之功。策勳一等。賜以鐵卷田一百結奴婢二十口。癸卯。宣授奉訓大夫,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冬。拜本國端誠輔理功臣,奉翊大夫,密直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自是與聞國政二十餘年。雖在罷閑。每有大政。必就問焉。乙巳。同知貢擧。取尹紹宗等二十八人。丁未冬。宣授朝列大夫,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以本國判開城。兼成均大司成。007_347a初。自辛丑經兵之後。學校廢弛。王欲復興。改創成均于崇文館之舊址。以講授員少。擇一時經術之士若永嘉金九容,烏川鄭夢周,潘陽朴尙衷,密陽朴宜中,京山李崇仁等。皆以他官兼學官。以公爲之長。兼大司成。自公始也。明年戊申春。四方學者坌集。諸公分經授業。每日講畢。相與論難疑義。各臻其極。公怡然中處。辨析折衷。必務合於程朱之旨。竟夕忘倦。於是東方性理之學大興。學者祛其記誦詞章之習。而窮身心性命之理。知宗斯道而不惑於異端。欲正其義而不謀於功利。儒風學術煥然一新。皆先生敎誨之007_347b力也。夏四月。王幸九齋。親試諸生經義。命公讀卷。取李詹等七人賜及第。己酉夏。同知貢擧。取柳伯濡等三十三人。始用中朝科擧易書通考之法。初。恭愍王爲魯國公主。構影殿于王輪寺之東。窮奢極麗。數年不就。更相地於馬巖之西。尤極宏壯。勞費鉅萬。侍中柳濯謂同知密直安克仁,簽書密直鄭思道曰。馬巖之役。非止勞民傷財。術士有言營作于此。不利於國。予以不才。濫長百官。不憂社稷可乎。寧以死諫。乃上書極言不可。王大怒。下濯等獄。欲以事誅之。命公製諭衆文。公請罪名。王曰。久爲首相。多行不義。致天大007_347c旱。一也。奪演福寺田。二也。魯國之薨。三日闕祭。三也。其葬降用永和公主之例。四也。不忠不義。孰大於此。公對曰。此皆旣往事也。近日濯等上書請停影殿之役。雖以四事罪之。國人皆以爲上書之故。且此四事皆非可殺之罪也。願更思之。王益怒促愈急。公伏曰。臣寧得罪。安敢爲文以成其罪。且上書之事。領都僉議亦知之。時辛旽爲領都僉議。極寵幸用事。方在王側。旽不得已乃曰。老臣亦知之。但以王怒不敢告耳。王命侍中李春富封國印。春富俛伏不敢進。旽曰。宜令言者封之。乃命公。公恐王益怒。乃書封曰臣穡謹007_347d封。王曰。以予否德。不從予言。持此去求有德者事之。我太祖初豈王孫哉。予避位矣。乃移居定妃宮。不許進膳。翌日。旽欲解王怒。啓王下公獄責問。坐以不從王命。公曰。臣自布衣。濫蒙主知。驟至宰相。謂有可以益上德者。至死力言之以報萬一。今柳侍中在縷絏。臣敢盡言無罪者。欲王動心省悟。以不濫殺大臣也。因泣下曰。臣之泣非畏死。但恐因此一失。王之名不美於後世也。獄官具以聞。王遂感悟。放濯等出。使公沐浴而朝。辛亥。知貢擧。取金潛等三十三人。秋拜政堂文學。加文忠保節贊化功臣之號。時我太上王爲007_348a知門下事。恭愍王謂近臣曰。近日物議如何。對曰。皆言國家得人。王笑曰。文武皆用第一流以爲宰相。誰敢議之。盖自多同日竝用兩賢也。王每召公及星山李仁復入內。必令左右洒掃焚香。倖僧神照白王曰。君見臣。何以致敬如此。王曰。爾何知此。二公道德非庸儒。且穡學問。舍肌膚而得骨髓者也。雖中國亦罕比。烏敢慢之哉。盖王嘗入侍帝庭。聞朝中縉紳稱譽公有素。故云然。九月。丁母遼陽縣君憂。明年壬子六月。王命起復政堂文學。以疾辭。癸丑冬。封韓山君。階大匡。甲寅秋。恭愍王薨。公自遼陽之逝。哀毀成疾。中007_348b惡嘔泄。聞王薨愈篤。杜門臥者七八年。間奉旨銘指空,懶翁二和尙浮屠。其徒因多往來于門。凡求詩文。扣者輒應。頗有佞佛之譏。公聞之曰。彼謂追福君親。予不敢拒也。丁巳。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之號。領藝文,春秋館事。壬戌。拜三重大匡,判三司事。癸亥。復封韓山君。甲子。加封韓山府院君。乙丑。拜壁上三韓三重大匡,檢校門下侍中。丙寅。知貢擧。取孟思誠等三十三人。戊辰。朝廷欲置鐵嶺衛。侍中崔瑩當國用事。擧兵謀攻遼。我太上王擧義回軍。執退瑩。起公爲門下侍中。公曰。今國家有釁。非王及執政親朝。無007_348c以辨之。王幼不能行。是老夫之責也。卽自請如京。王及國人。皆以公老且病固止之。公曰。臣以布衣。位至極品。常欲以死報之。今得死所矣。設死道路。以屍將命。苟得達國命於天子。雖死猶生。入朝于京師。高皇帝嘉賚有加。優禮以遣。己巳。還國。秋請退。拜判門下府事。冬。恭讓君立。忌公者劾貶長湍。庚午四月。貶咸昌。五月。誣以遣彝,初于上國。逮繫公等數十人于淸州。鞠問甚峻。事叵測。公曰。死生天也。當順義命。其處之自若也。後數日黎明始雨。未及日中。山崩水湧。壞城門漲入。屋舍皆沒。問事官漂溺。攀樹木謹免。驛聞007_348d于國。釋不問。自有是州未嘗有水災如此之劇。皆以謂公忠誠所感也。時王素知公無他。累次召還。爲忌公者所劾。輒見斥逐。人有譏公往來不憚煩者。又有爲公危之。欲其稱疾毋行者。辛未冬。又自咸昌被召而來。門人權近亦貶忠州。路見公。以所聞於人者告之。公曰。是則詐也。人臣之道。唯君所命。召之則來。揮之則去。死且不避。往來何恤焉。旣至。復封韓山府院君。壬申四月。復貶衿州。六月。徙驪興。七月。我太上王卽位。忌公者欲加極刑。公曰。吾平生不妄語。敢誣服乎。雖死吾爲直鬼也。語聞。王察其情特原之。移置長007_349a興府。賴公專活者多。冬。宥歸韓州。自恭讓初年。忌公者屢以計必欲置之死地。王輒救之得全。及是。忌公者不敢復施其計。乙亥秋。游關東。入五臺山因留居之。王遣使召迎。復封韓山。進見而退。送至中門。待以故舊之禮。丙子。公年六十九。夏五月。請往驪江避暑。將登舟疾作。召男種善于京城。初七日疾革。有僧進語其道。公擧手揮之曰。死生之理。吾無疑矣。言訖而卒。訃聞。王悼甚。輟膳停朝三日。遣使吊祭。賻贈有加。諡文靖公。十月。子孫奉柩歸于韓州。十一月甲寅。葬于加智之原。公天資明睿。學問精博。處事詳明。秉心007_349b寬恕。議論可否。明白簡切。而必主於忠厚。待人接物。謙恭愷悌。和氣油然。而凜乎不可犯。其爲宰相。務遵成憲。不喜紛更。而持大體。忠君愛親之念。至老不衰。每形於辭色。現於詩文。勉進後學。必以倫理爲主。孶孶不倦。博覽群書。尤深於理學。凡爲文章。操筆卽書。如風行水流。畧無凝滯。而辭義精到。格律高古。浩浩滔滔。如江河注海。有集詩三十五卷文二十卷。自元季至正癸巳。至皇朝洪武己巳。數十年間。掌國文翰。多更變故。險難之際。能修詞命。屢見嘉歎。及公貶斥。思公者典文。始以表辭見責於帝。則公之文章智識007_349c有補於世如此。惜恭愍徒知致敬而不能盡用其言。後長百寮而未幾罷免。遂見詆姍。經濟之學。卒莫大施。天也。爲家。不問有無費。雖至屢空。不以動心。平生無疾言遽色。家人僕隸或有失。必徐以理曉譬之。未嘗加以怒言。尊俎之間。油油然而處。亦不及亂。襟懷洒落。言動從容。喜怒不形。圭角不露。渾是一團和氣。久居寵利而不見其驕盈。晚遭屯難而不見其隕獲。縷絏非辱。圭組非榮。公之操存守履。亦可謂確乎不拔者矣。公三男。長曰種德。推誠翊衛功臣,奉翊六夫,知密直司事。次曰鍾學。奉翊大夫,簽書密直司事。丙007_349d辰。進士。戊辰。掌成均試。己巳。知貢擧。皆先公卒。次曰種善。中正大夫,典校令,知製敎。壬戌。進士。密直男四。長曰孟㽥。中顯大夫,監門衛大護軍。曰孟畇。承奉郞,考功佐郞。乙丑進士。曰孟畯。壬申進士。曰孟畛。仁德宮司涓。女二。長適通政大夫,承樞府右副代言柳沂。次適中訓大夫,宗簿令河久。簽書男六。長曰叔野。朝奉大夫,司宰少監。曰叔畦。成均生員。曰叔當。虎勇巡衛司副司直。曰叔畒。朝散大夫,司水少監。曰叔福。成均生員。曰叔畤。幼。女二。長適正尹李漸。次幼。典校男一。曰季疇。曾孫男七人女九人。
007_350a陽村先生文集卷之四十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