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유명(有明) 시(諡) 강헌 조선국 태조

성문신무대왕(康獻朝鮮國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건원릉(健元陵) 신도비

아베베1 2009. 11. 12. 10:51

양촌선생문집 제36권
 비명류(碑銘類)
유명(有明) 시(諡) 강헌 조선국 태조 지인계운 성문신무대왕(康獻朝鮮國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건원릉(健元陵)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이 비문(碑文)은 원본(元本)이다. 선생이 이 비문을 찬(撰)하여 올리고 나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졸하였다. 지금 석각본(石刻本)은 자못 남들의 수정을 거친 것이다. 이 글과 내용이 같지 않으므로 두 가지를 다 적어둔다.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봐 다스리는 운수를 열어 줄 때에는, 반드시 먼저 특이한 상서의 감응이 있어 임금이 될 징조를 보이는 것이니, 하우씨(夏禹氏)가 나올 때에는 하늘이 현규(玄圭)를 준 일이 있었고, 주 무왕(周武王)이 즉위할 때에는 꿈이 점[卜]과 맞는 상서로움이 있었다. 한(漢)ㆍ당(唐) 이후 역대 왕조가 일어날 때 모두 다 이와 같은 상서의 징조가 있었으니, 이는 사람의 지혜로 구할 수 없는 것이요,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성철(聖哲)의 자질과 신무(神武)의 덕을 지닌 어진이를 기다려, 그가 천운을 받아 탄생하게 하고 그가 보위에 올라 흥기하게 한 뒤에야 쇠망해가는 세상을 전이(轉移)하여 태평시대로 만들고, 대업을 창조하여 통서(統緖)를 드리우게 되는 것이니, 이 모두 하늘이 주는 것이요 사람의 모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우리 태조 강헌 지인계운 성문신무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께서 용연(龍淵 즉위하지 않을 때를 말함)에 있으면서 장상(將相)의 벼슬을 겸한 수십 년 동안 왕위에 오를 상서의 조짐이 계속 나타났다. 재상이 되었을 때에는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 주며 말하기를,
“시중(侍中) 경복흥(慶復興)은 청백하되 이미 늙었고, 도통(都統) 최영(崔瑩)은 강직하나 우직하다. 이것을 가지고 국정을 바로잡음에 있어 그대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라고 하였으니, 하우에게 현규를 줌과 주 무왕의 보필을 점치는 꿈을 짝할 만하고, 장군이 되어 경술년(1370, 공민왕19)에 올라성(兀羅城)을 격파할 때 군사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매 붉은 서기가 공중에 뻗쳤었고, 경신년(1380, 우왕6)에 운봉(雲峯)의 승첩을 거둘 때 군사가 장단(長湍)에 나아가매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였으니, 한 고제(漢高帝) 때 있었던 망탕산(芒碭山)의 구름 기운송 태조(宋太祖) 때 있었던 진교(陳橋)의 그 아름다운 햇빛을 짝할 만하다.
무진년(1388, 우왕14) 최영(崔瑩)의 핍박으로 요동(遼東)을 공격할 때 밖으로는 감히 상국의 지경을 침범할 수 없고, 안으로는 감히 폭군의 명령을 어기지 못하여 나아가지도 물러가지도 못하고 위화도(威化島)에서 군사를 머물고 있는데, 여러 날 동안 장마가 져도 물이 불지 않더니, 의리의 깃발을 돌려 군사들이 이미 언덕에 오르자 큰물이 밀려와 온 섬이 침몰되었다. 이는 참으로 한 광무(漢光武) 때 있었던 호타(滹沱)의 얼음원 세조(元世祖) 때 있었던 전당(錢塘) 조수의 일만이 좋은 것이 아니었다. 구변도 십팔자(九變圖十八子)의 전설이 단군(檀君) 때부터 있어 수천 년을 지났는데, 지금에 와서 징험할 수 있다.
또 이승(異僧)이 지리산(智異山) 석굴로부터 이상한 책을 얻어 가지고 와 드렸는데, 거기에 씌어 있는 말이 위에서 말한바 단군 시대에 나왔다는 것과 서로 부합되니, 이 또한 광무(光武) 때 있었던 적복부(赤伏符)의 유와 참위(讖緯)의 설로서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하겠으나, 역시 간혹 이수(理數)가 있어 옛날부터 여러 번 징험되었다.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봄은 진실로 징험이 있는 것이다.
삼가 선원(璿源)을 상고하건대 이씨(李氏)는 전주(全州)의 망족(望族)으로, 신라(新羅) 때 사공(司空) 휘 한(翰)으로부터 23대 황렬고(皇烈考) 환왕(桓王)에 이르기까지 적덕누인(積德累仁)으로 계승한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우리 태조께서 잠저에 있을 때 선정(先正) 이색(李穡)이 찬(撰)한 환왕묘비(桓王墓碑)에 자세히 실렸고, 우리 태조께서 왕업을 이루어 통서를 드리운 신기한 공로와 위대한 업적의 성대함은, 4대를 왕작으로 추존할 때 문신 정총(鄭摠)이 찬한 환왕의 정릉비(定陵碑)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이제 비명을 지으라는 명을 받았으나 감히 덧붙일 수 없어 그 대략만을 모아 쓴다.
사공(司空)이 처음 신라(新羅)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6대손 긍휴(兢休)에 이르러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였고, 13대 황고조(皇高祖) 목왕(穆王)에 이르러 처음으로 원(元) 나라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었다. 4대에 걸쳐 습작(襲爵)하여 모두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원 나라의 정치가 쇠퇴하게 되므로 황고(皇考) 환왕(桓王)은 돌아와 고려 공민왕 조정에 벼슬하였는데, 당시 홍건적(紅巾賊)이 일어나 상도(上都)를 침범하여 요심(遼瀋)을 유린하므로 천하가 감히 그 칼날을 막아낼 수 없더니,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신축년(1361, 공민왕10)에 왕경(王京)을 함락하였다. 그러므로 공민왕은 남쪽으로 파천하여 군사를 보내 극복하였는데, 우리 태조께서 맨 먼저 승첩의 보고를 올려 위엄의 명성을 비로소 떨쳤다.
이듬해 임인년에는 오랑캐 납합출(納哈出)을 쳐서 달아나게 하였고, 또 그 다음해 계묘년에는 승왕(僧王) 탑첩목(塔帖木)을 쫓으니, 이처럼 날카로운 칼날을 꺾고 적을 물리쳐 가는 곳마다 필승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공민왕은 믿고 의지함이 더욱 두터웠으며 장상(將相)으로 안팎을 드나들면서 적을 치고 백성을 안정시켜 자주 특이한 공적을 세웠는데, 그 호령이 밝고 믿음직하여 추호도 범할 수 없었다. 세상을 제도할 만한 활달한 도량과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후한 덕은 지성(至誠)에서 나왔으며, 국사를 논의하는 여가와 싸움터에서 쉬는 틈에도 명망 높은 선비를 맞아 경사(經史)를 논의하되, 힘써 노력하고 게을리 아니하여 혹은 밤이 되어도 잠자지 아니하였다. 더욱 진덕수(眞德秀)가 지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즐겨 읽으며 개연히 세도(世道)를 만회할 뜻을 품었는데 그의 용맹과 지략은 세상을 덮고, 영리하고 날래기는 무리에 뛰어나 한 시대의 물망이 모두 그에게 쏠리었다.
공민왕이 죽고 딴 성(姓)이 왕위를 빼앗으니, 권세를 잡은 간신들이 국정을 제멋대로 휘둘러 정치를 어지럽히며 재물을 탐내어 죽이고 약탈함이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함부로 사람을 죽여 참혹 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우리 태조를 힘입어 생명을 보전한 자가 자못 많았다. 최영은 태조께서 충성스럽고 용맹이 있다 하여 특별히 우시중(右侍中)으로 삼았다가 곧 우군도통(右軍都統)의 절월(節鉞)을 준 다음 망녕되이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치게 하였다. 그리하여 태조는 위화도에 머물러 있다가 모든 장수를 거느리고 바른 의리를 지켜 깃발을 되돌렸다.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21년 무진(1388, 우왕 14) 6월에 최영을 잡아 조정에서 물러나게 하고, 대신 학명 높은 이색을 좌시중으로 삼아 서정(庶政)을 새롭게 고쳐서 한 나라를 안정시켰다. 이때를 당하여 앞서는 포학한 무리들의 탁란을 겪었고, 후에는 패려한 자들의 말썽으로 위망의 형세가 급급하여 그 화난을 예측할 수 없었다. 우리 태조의 전이(轉移)한 힘이 아니었다면 온 나라의 생명은 참으로 위망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색이 태조에게,
“공(公)이 지금 의로운 일로 창을 돌이켜 죄인을 치고 중국을 높였습니다. 내가 위에 있어 같이 국정을 맡고 있으니, 공의 높은 충성을 천자 앞에 진달하는 것이 나의 책임입니다.”
하고, 날을 정하여 경사(京師)로 가려 하였다. 이때 태조는 여러 아들 중에서 지금의 우리 주상 전하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 색(穡)과 함께 조현(朝見)하게 하니, 고황제(高皇帝)가 그 충성을 가상히 여기어 두터이 예우하여 보냈다.
기사년(1389, 창왕1) 가을에 황제가 우리나라에서 딴 성(姓)으로 왕씨(王氏)의 뒤를 삼은 것을 문책해 오므로 태조가 여러 장군들과 의논하여 왕씨의 종친인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세우고 정성을 다해 보필하여 국정을 바로잡았다. 사전(私田)의 제도를 혁파하여 약탈을 막았고, 관직을 중히 여겨 쓸데없고 참람한 벼슬아치를 도태시켰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모두 즐거워하며 흡족한 정치를 기대하였는데, 공로가 높으므로 시기하는 자가 생겨서 간악한 자들의 참소와 모함이 번갈아 일어났으며, 정창군은 혼암하여 도리어 그 소인들의 말에 현혹되었다. 태조께서는 여러 번 직책이 분에 넘치므로 글을 올려 청로(請老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는 것)하였으나 사양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때 마침 서행(西行)으로 인하여 병을 얻어 돌아오니, 모함하는 자들의 음모가 더욱 급격하게 되었다. 우리 전하께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변고를 막아 송두리째 꺾어버려 일당이 모두 와해되었으나 정창이 정사에 어둡고 국세는 위태하여졌다.
홍무(洪武) 25년 임신(1392, 태조1) 7월 16일에 하늘이 전하와 좌시중(左侍中) 배극렴(裵克廉)ㆍ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 등 52인을 유도하여 바른 의리로 태조를 추대하게 하니 신료(臣僚)와 부로(父老)들도 모의한 일 없이 모두 뜻을 같이하게 되었다. 우리 태조는 정변을 듣고 놀라 일어나서 두세 번 굳이 사양하다가 중의에 못이겨 억지로 왕위에 올랐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한 국가가 저절로 이루어져서 성(姓)을 바꾸고 천명을 받은 것이 마치 환(丸)을 굴리듯이 쉬웠으니, 하늘이 나라를 안정시킴에 있어 덕(德)있는 이를 계도한 도움이 아니고서야 누가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즉시 지중추(知中樞) 조반(趙胖)을 보내 황제에게 알리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삼한의 백성이 이미 이씨(李氏)를 높였으며, 백성에게는 병화(兵禍)가 없이 사람마다 제각기 하늘이 주는 즐거움을 즐기고 있으니, 바로 천명이라 하겠다.”
하고, 이어서 또 칙명을 내려 이르기를,
“나라 이름은 무엇으로 고치려 하는가? 사신을 빨리 보내어 아뢰라.”
하므로, 즉시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한상질(韓尙質)을 보내어 나라 이름을 주청하니, 황제가 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에 근본하여 짓는 것이 좋겠다.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길러서 깊이 후손에까지 번창하게 하라.”
하였다. 우리 태조께서는 위엄과 명성이 평소부터 높은 분이라 천하가 그 용맹에 복종하였고, 이미 충의를 바친 분이라 천하가 그 지략을 높였다. 이와 같은 훈덕(勳德)이 위에 들려 황제의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청명(請命)하자 윤허(允許)를 얻게 된 것이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3년을 지난 갑술년(1394, 태조 3) 여름에 임금의 친아들을 입조(入朝)시키라는 황제의 명이 있었다. 태조께서는 지금의 우리 전하가 경서에 능통하고, 사리에 통달하며 일찍이 황제의 조정에 입조한 일이 있다 하여 즉시 보내어 명령에 응하였는데, 우리 전하께서 황제 앞에 이르러 진술하는 의견이 황제의 뜻에 맞았으므로 황제는 예로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그해 겨울 1월에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고 궁실과 종묘를 지었다. 황고조(皇高祖)는 목왕(穆王), 황조비(皇祖妣)는 효비 이씨(孝妃李氏)로 추존하여 제1실에 봉안하고, 황증조(皇曾祖)는 익왕(翼王), 황증조비(皇曾祖妣)는 정비 최씨(貞妃崔氏)로 추존하여 제2실에 봉안하고, 황조(皇祖)는 도왕(度王), 황조비(皇祖妣)는 경비 박씨(敬妃朴氏)로 추존하여 제3실에 봉안하고, 황고(皇考)는 환왕(桓王), 황비(皇妣)는 의비 최씨(懿妃崔氏)로 추존하여 제4실에 봉안하였으며, 산릉(山陵)에도 각각 수릉호(守陵戶)를 두어 수시로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예악을 닦아 제사를 빛내고, 복장을 정하여 등위를 분변하였으며, 비용을 넉넉히 하여 학교를 일으키고, 봉록을 두터이 하여 선비를 권면하였으며, 송사의 분쟁을 밝게 분별하고 수령의 출척을 신중히 했으며, 좋지 못한 정치를 급히 고치므로 모든 공적이 밝게 빛났다. 제후의 법도를 삼가 대국을 섬김에 정성을 다하였고, 전함(戰艦)을 만들어 왜침(倭侵)의 방어를 튼튼히 하였다. 황제의 하사품은 해마다 이르렀고, 왜국에서는 보물을 바쳐 왔다. 바다의 외적들은 두려움에 떨어 복종해 오는 자가 잇달았고 온 나라는 마음 놓고 살 수 있었으며, 백성이 안정되고 물품이 풍성하였다. 우리 태조의 광대한 성덕(聖德)은 정말 하늘이 주신 용기와 지혜로서 총명하게 다스렸다. 신무(神武)하되 살해하지 않고 웅위(雄偉)하되 범상치 않은 분으로 호걸의 임금이라 하겠다.
간신(姦臣) 정도전(鄭道傳)이 표전(表箋) 때문에 견책을 받게 되어 황제가 두 번이나 사신을 보내어 책망하였으되, 병을 핑계하면서 가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치며 명령을 거부하려고 음모하였다. 무인년(1398,, 태조7) 가을 8월에 우리 태조가 병중인 틈을 타서 모든 적자(嫡子)를 제거하고 어린 서얼(庶孼)을 끼고 제멋대로 자신의 뜻을 펴고자 밤에 사제(私第)에 모이곤 하여 그 화단의 기미가 이미 긴박하였다. 전하께서 그 기미를 밝게 살피어 남김 없이 제거하고 적장자(嫡長子)인 지금의 상왕(上王 정종(定宗))을 세자(世子)로 세울 것을 청하므로, 인륜이 바로잡히고 종사가 곧 안정되었다. 9월 정축일에 태조가 병이 낫지 아니하므로 지금의 상왕에게 선위하였고, 상왕은 후사가 없고 또한 나라를 열고 사직을 정한 것은 다 우리 전하의 공적이라 하여 전하(태종(太宗)을 가리킨다)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경진년(1400, 정종2) 가을 7월 기사일에 책보(冊寶)를 받들어 우리 태조에게 계운신무 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의 존호를 올리고, 겨울 11월 계유일에는 상왕(上王) 또한 병 때문에 우리 전하에게 선위하였다. 명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명을 청하니, 지금의 황제가 즉위하여 고인(誥印)을 하사하였다.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원년(1402, 태종2) 여름 4월에 황제가 도지휘(都指揮) 고득(高得), 좌통정(左通政) 조거임(趙居任) 등을 보내어 우리 전하를 책봉하여 국왕(國王)으로 삼고, 이어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과 행인(行人) 최영(崔榮)을 보내 와서, 우리 전하에게는 구장(九章)의 곤면(袞冕)과 금단사라(錦段紗羅)ㆍ서적(書籍)ㆍ왕비에게는 관포(冠袍)와 금단사라, 태조에게는 금단사라를 하사하되 각각 차등을 두었다. 이로부터 약재(藥材)ㆍ사견(絲絹)ㆍ진완(珍玩)의 하사가 해마다 이르러 그 중한 은총을 입음이 옛날에 비할 바 아니었다.
영락 6년(1408, 태종8) 무자 5월 24일 임신에 태조께서 승하하시니 춘추가 74이다. 재위가 7년이었고 태상왕으로 물러나 있은 것이 11년이었다. 신민(臣民)은 다같이 아버지처럼 임어하시어 만세에 길이 영화로운 낙을 누리기 기대하였는데, 하루아침에 승하하여 갑자기 활과 칼을 버렸도다.
아, 슬프도다. 우리 전하께서는 망극(罔極)한 슬픔으로 거상의 예를 극진히 하였으며, 삼가 뭇 신하를 거느리고 책보(冊寶)를 받들어 태조에게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의 존호를 올렸다. 이해 9월 초9일 갑인에 도성의 동쪽 양주(楊州) 검암산(儉巖山)에 장사하고 건원릉(健元陵)이라 하였다. 그 곁에 절을 지어 개경사(開慶寺)라 하고 명복을 빌게 하였으며, 상장(喪葬)의 예에 성심을 다하여 한결같이 옛 제도를 따랐다. 사신을 보내어 명 나라에 부음을 전하니 황제는 매우 슬퍼하며 조회를 파하는가 하면, 특별히 예부 낭중(禮部郞中) 임관(林觀)을 보내어 태뢰(太牢)를 내리고 제문(祭文)을 지어 제사하게 하였으니 그 제문의 대략에,
“왕은 밝고 통달하며 선(善)을 좋아하는 것이 천성에서 나오고 있다. 천도를 따르고 충의를 바쳐 근신한 마음으로 대국을 섬기고 한 나라의 백성을 보호하여 잘 살게 하므로, 우리 황고(皇考)께서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다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내렸다. 왕의 드러난 공덕은 비록 고대 조선의 어진 임금이라도 더 나을 수 없다.”
하고, 또 고명(誥命)을 내려 시호를 강헌(康獻)이라 하였다. 그리고 전하에게 조칙을 내리고 부의(賻儀)를 특별히 후하게 내렸으니, 남달리 총애하는 은전(恩典)이 유감 없이 갖추어졌다. 오직 우리 태조의 하늘을 두려워하는 정성이 앞에서 기초를 닦고, 우리 전하의 뜻을 계승하는 효성이 뒤에서 받들어서 성은이 서로 천심(天心)을 누리므로 그 정성이 신명에 통하고 경사가 종사(宗社)에 뻗치며, 국말(國末) 국초(國初)에 즈음하여 천인(天人)의 도움이 이처럼 지극함을 얻게 되었다. 아, 성대하도다.
수비(首妃) 한씨(韓氏)는 안변(安邊)의 세가(世家)로서 증 영문하부사 안천부원군(贈領門下府事安川府院君) 휘(諱) 경(卿)의 딸인데 먼저 죽었으며, 처음의 시호는 절비(節妃)로 하였다가 뒤에 승인순성 신의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로 시호를 올렸다. 6남 2녀를 낳았는데 상왕이 둘째이며 우리 전하가 다섯째다. 장남 방우(芳雨)는 진안군(鎭安君)으로서 먼저 죽었고, 셋째 방의(芳毅)는 익안대군(益安大君)으로서 역시 먼저 죽었으며, 넷째 방간(芳幹)은 회안대군(懷安大君)이며, 여섯째 방연(芳衍)은 등과하였으나 일찍 죽어 원윤(元尹)에 추증되었다. 장녀는 경신궁주(慶愼宮主)로서 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에게 하가(下嫁)하였으니 동본(同本)의 이씨(李氏)가 아니며, 차녀는 경선궁주(慶善宮主)로서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차비(次妃) 강씨(康氏)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윤성(允成)의 딸로서 처음에는 현비(顯妃)에 봉하여졌다가 먼저 죽었으며 시호는 신덕왕후(神德王后)라 하였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첫째 방번(芳蕃)은 공순군(恭順君)에 추증되고, 둘째 방석(芳碩)은 소도군(昭悼君)에 추증되었으며, 딸 경순궁주(慶順宮主)는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에게 하가하였으니 역시 동본의 이씨가 아니며, 다 먼저 죽었다.
상왕의 배위 김씨(金氏)는 지금 왕대비(王大妃)에 봉해졌는데 증문하시중(贈門下侍中) 천서(天瑞)의 딸로서 후사가 없으며, 우리 중궁(中宮)은 정비(靜妃) 민씨(閔氏)로서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문도공(文度公) 휘 제(霽)의 딸이다.
4남4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세자(世子)인 제(禔)요, 다음 우(祐)는 효령군(孝寧君)이요, 다음은 금상(今上) 충녕군(忠寧君)이요, 다음은 어리다. 장녀 정신궁주(貞愼宮主)는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에게 하가하였으니 역시 동본의 이씨가 아니며, 다음 경정궁주(慶貞宮主)는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에게 하가하였으며, 다음 경안궁주(慶安宮主)는 길천군(吉川君) 권규(權跬)에게 하가하였으며, 다음은 어리다. 진안군은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으니, 장남 복근(福根)은 봉녕군(奉寧君)이요, 다음 덕근(德根)은 원윤(元尹)이다.
익안군은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최인규(崔仁㺶)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석근(石根)을 낳았으니 익평군(益平君)이며, 회안군은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맹종(孟宗)을 낳았으니 의령군(義寧君)이다.
천명을 받은 역대의 임금을 보니, 그 상서로운 경사를 당시 붓을 잡은 선비가 반드시 상세히 기록하였으되, 특히 빛나는 덕의 부명(符命)을 써서 그릇되게 엿보는 것을 막으므로 그것이 간책(簡冊)에 빛나 무한한 덕을 후세에 전하였다. 지금 우리 조선이 탄생하여 일어남에 천명을 받는 부명이 한꺼번에 모여 옛날에 비해 더욱 광채가 난다. 이것이 비록 덕에 있는 것이고 경사에 있는 것이 아니나 하늘의 도움이 이로 말마암아 더욱 빛나는 것이다. 이는 마땅히 큰 덕업으로 이미 왕위를 얻고 또 그 장수(長壽)를 얻을 것이며, 넓은 터전을 확고히 다져 높이고, 큰 복록을 무한히 전하여 천지와 함께 유구하리라. 변변치 못한 재주나마 외람되이 붓을 잡은 직책에 있으니, 마땅히 갖추 기록하여 후세에 전해야 하거늘, 하물며 이처럼 외람되이 비명(碑銘)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정성을 다하여 성대한 덕을 펴서 그 밝은 빛을 후세에 드리우게 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요즈음 필력이 비졸하여 그 성대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밝은 뜻을 만족하게 칭송하기에는 마치 좀벌레가 하해(河海)를 헤아리고, 털끝으로 천지(天地)를 그리는 격이라, 어찌 그 넓음을 방불하게나마 엿볼 수 있겠는가. 삼가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남아 있는 훈덕(勳德)을 찬술하고, 감히 머리 조아려 절하며 다음과 같이 명(銘)을 드린다.

아득한 옛날에 하늘과 땅이 생기고 사람이 그 사이에 참여하여 셋이 되었는데, 거기에 임금을 세워 백성을 기르고 다스리게 할 제 이에 덕 있는 이를 돌보았도다. 하늘이 순순히 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명령은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니, 우(禹) 임금에게는 현규(玄圭)를 주었고 주 무왕(周武王)의 꿈은 점과 맞아 역대의 부명(符命)이 사책(史冊)에 갖춰져 볼 만하도다.
우리 조선도 왕업을 일으킬 적에 꿈에 신인이 나타나 금척(金尺)을 주었는데, 붉은 기운이 공중에 뻗치고 무지개가 해에 엉기어, 경사로운 상서가 잇달아 일어나고 천심(天心)이 밝았도다. 고려의 운수가 끝난 것은 그 전복을 자초함이라, 그 임금이 혼암하고 재상이 혹독하여, 농사철에 군사를 일으켜 대국에 싸움을 걸었도다. 나라는 이미 망해가는 지경이라 위망이 급급하더니, 우리 태조 바른 의리를 지켜 깃발을 되돌려서 죄인을 잡으니 그 충성 위에 들려 황제가 기뻐하였도다. 이에 윤음(綸音)을 받들어서 왕사(王祀)를 다시 잇고, 유약하고 혼암함을 바로잡아 천명을 마치게 하였는데, 천운이 돌아오고 민정이 절박하여 왕업을 이미 이뤘으나 저자의 상인들도 동요되지 않았도다. 고황제(高皇帝)가 찬탄하여 이르기를,
“훌륭하도다. 그대가 나라를 이룩하였으되 백성들은 병화(兵禍)가 없이 하늘이 주는 기쁨을 즐기네.”
하고 이어 조선(朝鮮)이라는 옛 국호를 다시 쓰게 하였도다.
지리를 살펴 도읍을 정하니 한양의 북쪽이라, 범이 웅크리고 용이 도사린 듯 왕기(王氣)가 쌓였도다. 궁궐은 높고 높으며 종묘는 우뚝한데, 조종에 정성껏 제사하며 왕작(王爵)으로 높였도다. 어진 마음 매우 깊어 살리기 좋아하며, 정치는 빛나고 생각이 화순하였도다. 온갖 제도는 갖추 닦아지고 만화(萬化)가 이에 흡족하니, 온 신민 부로(臣民父老)들은 춤추며 노래하도다. 옛날에 우리가 전복되어 어육이 되었더니, 지금은 우리 모두 소생하여 그 은택에 젖었도다. 자급자족하여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보살피며 만년의 장수를 누려 길이 많은 복을 받았도다.
근정(勤政)하시기에 지쳐서 맏아들에게 전하시고, 맏아들 또한 공로가 있는 이에게 사양하여 부자 형제간에 계승하였도다. 밝고밝은 우리 임금 기미를 살핌이 촛불과 같았고, 눈비가 엉겼다가 햇빛을 보자 풀리듯 하였도다. 화란을 두 번이나 평정하여 그 경사가 더욱 독실하도다.
나라를 열고 사직을 안전하게 한 것은 모두 다 우리 전하의 덕이니, 천명을 사양하기 어렵고 신기(神器)는 제대로 의탁되었도다. 두 임금을 받들어 모심에 정성을 다하여 공손하고 더욱 정성스러웠도다. 그 효제(孝悌) 신명에 통하여 상제의 보살핌이 더욱 두터웠도다. 총애로 내리는 선물이 해마다 이르러 산처럼 쌓였으며, 사경(四境)이 안정되고 원근(遠近)이 고요하였도다.
상을 당하자 근심에 잠겨 슬피 사모하며 몸부림쳐 울부짖었는데, 황제께서 부고를 듣고 애도하며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였도다. 또 태뢰(太牢)를 내려 제사하고 부의(賻儀)를 후하게 하라는 칙명을 내리는가 하면, 아름다운 시호까지 주어 칭찬하니, 조상하는 예법이 완전히 갖추어졌도다.
하늘의 도움이 시종일관 변함없어, 큰 복록(福祿)이 길이 이어지고 자손은 천억으로 번창하며 만년토록 길이 종사(宗祀)를 보존하여 고산(高山)이 닳고 푸른 바다가 마르도록 종사가 유구(悠久)하여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으리라.

석각본(石刻本)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봐 다스리는 운수를 열어 줄 때에는 반드시 먼저 특이한 징조를 나타내어 그의 부명(符命)을 보이는 것이니, 하(夏) 나라에서는 현규(玄圭)를 준 일이 있었고, 주(周) 나라에는 점[卜]과 맞는 꿈이 있었다. 한(漢) 나라를 거쳐 그 이후로 어느 왕조에서나 다 이러한 징조가 있었으니, 이는 모두가 하늘이 주는 것이요 사람의 모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태조대왕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 공덕이 이미 높았으며 부명 또한 현저하였다.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 주면서 이르기를,
“그대는 마땅히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로잡으라.”
고 한 일이 있었으니, 하 나라의 현규와 주 나라의 꿈으로 더불어 같은 부명이라 하겠다. 또 이인(異人)이 문 앞에 와 글을 올리면서 이르기를,
“지리산(智異山) 바위 틈에서 얻은 것인데 ‘목자(木子)가 삼한을 고쳐 바로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기에, 사람을 시켜 나아가 맞으려 하니 이미 가버리고 없어진 그런 일이 있었다. 그리고 서운관(書雲觀)에 예전부터 비장하여 오는 비기(秘記)의 구변진단도(九變震檀圖)‘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建木得子]’는 말이 있었다. 조선을 진단(震檀)이라고 하는 말은 수천 년 전부터 떠돌았는데 이제야 징험(徵驗)되니,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본다는 것은 진실로 징험이 있는 것이다.
삼가 선원(璿源)을 상고하여 보니, 이씨(李氏)는 전주(全州)의 망족(望族)으로, 사공(司空)인 휘(諱) 한(翰)이 신라(新羅)에 벼슬하고 신라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6대손 긍휴(兢休)에 이르러 처음으로 고려(高麗)에 벼슬하였고, 13대 황고조(皇高祖) 목왕(穆王)에 이르러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었다. 4대에 걸쳐 습작(襲爵)하여 모두 다 좋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원 나라 정치가 쇠퇴해지자 황고(皇考) 환왕(桓王)은 돌아와 고려 공민왕을 섬기었다.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신축년(1361, 공민왕10)에 홍건적(紅巾賊)이 내침하여 왕경(王京)을 함락하므로, 공민왕이 남쪽으로 파천하여 군사를 보내어 극복할 제 우리 태조께서 맨 먼저 승첩(勝捷)의 보고를 올렸다.
이듬해 임인년에는 오랑캐 납합출(納哈出)을 격퇴하였고, 또 이듬해 계묘년에는 위왕(僞王) 탑첩목(塔帖木)을 물리쳐 쫓으므로 공민왕의 신임이 더욱 두터웠고, 여러 번 벼슬이 승진되어 장상(將相)으로 안팎을 드나들게 되었다.
경사(經史)를 보기 즐겨하여 노력을 게을리 아니하며, 세상을 구제할 도량과 살리기 좋아하는 심덕은 지성(至性)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민왕이 죽고 딴 성이 왕위를 빼앗으니, 권력 있는 간신들이 국정을 제멋대로 휘둘러 조정을 어지럽히고, 해구(海寇)가 깊이 침입하여 군현(郡縣)을 불지르고 약탈하였는데,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경신년(1380, 우왕6)에 우리 태조가 운봉(雲峯)에서 싸워 이기므로 동남쪽이 편안하게 되었다.
무진년(1388, 창왕1)에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권간(權奸)을 죽일 때에 지나치게 참혹하였는데, 우리 태조에게 의지하여 생명을 보전한 자가 적지 않았다. 최영은 태조를 시중으로 삼고 곧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의 절월(節鉞)을 주어서 억지로 요동(遼東)을 치게 하였다. 군사가 위화도(威化島)에 머물러 있을 때 앞장서 모두 장수를 거느리고 바른 의리를 지켜 깃발을 되돌렸는데, 군사들이 언덕에 오르자 큰물이 섬을 삼켜버리므로 사람들은 모두 신기하게 여기었다. 최영을 잡아 조정에서 물러나게 하고 그 대신 이름 높은 유학자 이색(李穡)을 좌시중(左侍中)으로 삼았다. 바로 이때 권간들은 국정을 어지럽히고 패려한 자들은 모함을 일삼아 위망(危亡)의 형세가 급급하여 닥쳐올 화란을 예측할 수 없었다. 실로 우리 태조의 전이(轉移)한 공로가 아니었다면 이 나라는 위태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색이 말하기를,
“이제 공(公)이 거의(擧義)하여 중국을 높였으니 집정대신(執政大臣)이 친히 조회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고, 날을 가려 경사(京師)에 가게 하였다. 태조는 여러 아들 중에서 지금의 우리 주상 전하를 택해서 이색과 함께 조현(朝見)하게 하니, 고황제(高皇帝)가 칭찬하여 돌려보냈다.
기사년(1389, 창왕1) 가을에 황제가 우리나라에서 딴 성(姓)인 사람을 임금으로 삼은 것을 문책하여 오므로, 태조는 여러 장상(將相)과 더불어 왕씨(王氏)의 종친인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세우고 정성을 다하여 정사를 보필하였다. 사전(私田)의 제도를 혁파하고 쓸데없는 관원을 도태하므로 민중의 마음은 서로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공로가 높아지므로 시기하는 자가 생겨서 참소와 간악한 모함이 번갈아 일어나니 정창이 자못 이에 현혹되었다.
태조는 벼슬이 성만(盛滿)하므로 노퇴(老退)를 청하였으나 그 사양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때 마침 서행(西行)으로 인하여 병을 얻어 돌아오니 모함하는 자들의 음모가 더욱 급격하게 되었다. 우리 전하(태종)께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변고를 막아버림으로 온갖 모의가 와해되고 말았다.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임신년(1392, 태조1) 가을 7월 16일에, 전하가 대신(大臣) 배극렴(裵克廉)ㆍ조준(趙浚)등 52명으로 더불어 창의하여 태조를 추대하니, 신료(臣僚)와 부로(父老)들도 모의한 일 없이 모두 뜻을 같이하게 되었다. 태조는 정변을 듣고 놀라 일어나 두세 번 굳이 사양하다가 어찌할 수 없이 왕위에 올랐다. 가만히 앉은 채 한 국가가 저절로 이루어졌으니, 하늘이 덕 있는 이를 계도하는 도움이 아니고서야 누가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즉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반(趙胖)을 보내어 알리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삼한의 백성이 이미 이씨(李氏)를 높였으며, 백성은 병화(兵禍)가 없이 사람마다 제각기 하늘이 주는 즐거움을 즐기고 있으니, 바로 상제의 명이라 하겠다.”
하고, 이어 또 칙명에 이르기를,
“나라 이름은 무엇이라고 고치려 하는가?”
하므로, 즉시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한상질(韓尙質)을 보내어 주청(奏請)하니, 황제가 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에 근본하여 이름을 짓는 것이 좋겠다.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길러서 길이 후세의 자손에게 이르도록 창성하게 하라.”
하였다. 우리 태조의 위성(威聲)과 의열(義烈)이 위에 들려 황제의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청명(請命)하자 곧 윤허를 얻게 된 것이다. 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3년이 지난 갑술년 여름에 우리나라를 황제에게 구무(構誣)한 자가 있어서, 임금의 친아들을 입조(入朝)시키라는 황제의 명령이 있었는데, 태조께서는 지금의 우리 전하가 경서(經書)에 능통하고 사리에 밝아 여러 아들 중에 제일 현명하다 하여 즉시 보내어 명령에 응하였다. 이미 경사에 도착하여 진술하는 의견이 황제의 뜻에 맞으므로 황제는 예로써 우대하여 돌려보냈다.
그해 겨울 11월에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여 궁궐과 종묘를 세우고, 일찍이 4대를 추존하여 황고조(皇高祖)를 목왕(穆王), 배위 이씨(李氏)를 효비(孝妃)라 하고, 황증조(皇曾祖)를 익왕(翼王), 배위 최씨(崔氏)를 정비(貞妃)라 하고, 황조(皇祖)를 도왕(度王), 배위 박씨(朴氏)를 경비(敬妃)라 하고, 황고(皇考)를 환왕(桓王), 배위 최씨(崔氏)를 의비(懿妃)라 하였다.
예악을 닦아 제사를 빛내고, 복장을 정하여 등위를 분변하고,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육성하고, 녹봉을 후하게 하여 선비를 권장하였다. 송사를 밝게 분변하여 바르게 판단하고 수령(守令)을 뽑는 데 신중하였으며, 나쁜 정치를 모두 고치므로 여러 가지 공적이 함께 빛났으며, 해구(海寇)가 와서 복종하므로 온 나라가 편안하게 되었다. 우리 태조의 높고 큰 성덕(盛德)은 정말 하늘이 주신 용기와 지혜로서 총명하고 신무(神武)하며 영웅스럽고 위대한 임금이라 말할 수 있다.
간신 정도전(鄭道傳)이 표전(表箋) 때문에 황제의 조정으로부터 견책을 받게 되자,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려고 음모하였다. 무인년(1398, 태조7) 가을 8월에 우리 태조가 병중인 틈을 타서 어린 서얼(庶孼)를 끼고 제 뜻을 펴려고 하자, 우리 전하께서 그 기미를 살펴 모조리 제거하고 적장자(嫡長子)인 지금의 상왕(上王 정종(定宗)을 가리킨다)을 세워 세자(世子)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9월 정축일에 태조의 병이 낫지 아니하므로 지금의 상왕에게 선위하였는데, 상왕은 후사가 없고 또한 나라를 열고 사직을 안정한 것은 모두가 우리 전하의 공로라 하여 전하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경진년(1400, 정종2) 가을 7월 기사일에 태조에게 계운신무 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의 존호를 올리고, 겨울 11월 계유일에 상왕 또한 병으로 우리 전하에게 선위하였다. 명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명을 청하니,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원년(1403, 태종3) 여름 4월에 황제가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에게 조인(詔印)을 받들려 보내와서 우리 전하를 국왕으로 책봉하고, 이어 한림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 등을 보내어 전하에게 구장(九章)의 곤면(袞冕)을 하사하니, 그 품수가 친왕(親王)에 비등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두 임금을 봉양함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영락 무자년(1408, 태종8) 5월 24일 임신일에 태조가 승하하시니 춘추는 74이었다. 재위 7년이요, 태상왕으로 물러나 있은 것이 11년인데, 활과 칼을 갑자기 버리시니 참으로 슬프도다. 우리 전하께서는 슬피 사모함이 망극하며 거상의 예절을 극진히 하였다.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어 태조에게 지인계운 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의 존호를 올리고, 이해 9월 초9일 갑인일에 도성 동쪽 양주(楊州) 검암산(儉巖山)에 안장하고 건원릉(健元陵)이라 하였다. 황제는 부고를 듣자 매우 슬퍼하며 조회를 파하고 곧 예부 낭중(禮部郞中) 임 관(林觀) 등을 보내어 태뢰(太牢)로써 사제(賜祭)하니, 그 제문의 대략에,
“오직 왕은 밝고 통달하며 선(善)을 좋아하는 것이 천성에서 나왔으며, 천도(天道)를 공경하여 따르고 충의를 다하며, 근신한 마음으로 대국을 섬기고 한 나라의 백성을 잘 보휼(保恤)하므로, 우리 황고(皇考)께서 그 충성을 가상히 여기어 나라 이름을 다시 ‘조선’이라고 내렸다. 이처럼 드러난 왕의 공덕은 비록 옛날 조선의 어떤 임금이라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없다.”
하고, 또 고명(誥命)을 내려 시호를 강헌(康憲)이라 하였다. 또 전하에게 조칙을 내려 부의(賻儀) 내리기를 특별히 후하게 하였으니, 남달리 총애하는 은전이 유감 없이 갖추어졌다. 대체로 우리 태조의 하늘을 두려워하는 정성과 전하의 그 뜻을 계승하는 효성이 전후에 서로 이어져서 하늘의 마음을 잘 누리므로, 국말 국초를 즈음하여 크게 위로는 하늘과 아래로는 사람의 도움이 이처럼 지극함을 얻게 된 것이다.
아, 성대하도다. 운운(云云) 역대의 천명을 받아 창업한 임금을 보니, 덕업(德業)의 성대함과 부명(符命)의 신기함이 간책에 빛나 무한한 덕을 후세에 전하였다. 이제 우리 조선이 일어남에 성대한 덕과 큰 부명이 예보다 더욱 빛나니, 참으로 그 왕위를 얻고 또 그 장수를 얻은 것이다. 넓은 터전을 높여 큰 복록을 흘려 보내니 천지와 더불어 장구하리라.
근(近)이 외람되게 비명(碑銘)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감히 정성을 다하여 성대한 덕을 기술하여 밝은 빛을 후세에 드리우게 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필력이 비졸하여 성대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밝은 뜻을 만족하게 칭송하기에 부족하므로, 삼가 사람의 이목에 남아 있는 훈덕만을 찬하고, 감히 머리 조아려 절하며 다음과 같이 명을 드린다.

하늘이 이 백성을 낳으시고 임금을 세워 백성을 기르고 다스리게 할 제 이에 덕 있는 이를 돌보았도다. 하늘이 순순히 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명령은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니, 우(禹) 임금에게는 현규(玄圭)를 주었고, 주 무왕(周武王)의 꿈은 점[卜]과 맞았도다. 우리 조선이 왕업을 창건할 적에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척(金尺)을 주었도다. 부록(符籙)이 미리 정하니 하늘의 뜻도 분명하도다.
고려의 운수가 이미 종말이라 임금이 혼암하고 재상이 혹독하여, 농사철에 군사를 일으켜 대국에 싸움을 걸었도다. 바른 의리로 깃발을 되돌려 죄인을 잡으니, 그 충성 위에 들려 황제가 기뻐하였도다.
천운이 돌아가고 민정이 절박하여 위대한 왕업을 이미 이루었으나, 저자의 상인들도 동요되지 않았도다. 고황제(高皇帝)가 찬탄하여 이르기를,
“그대가 나라를 이룩하였으되 백성들은 병화(兵禍)가 없이 하늘이 주는 기쁨을 즐기네.”
하고, 이어 조선(朝鮮)이라는 옛 국호를 다시 내렸도다. 지리를 살펴 도읍을 정하니 한양의 북쪽이라, 범이 웅크리고 용이 도사린 듯 왕기가 쌓였도다. 궁궐은 높고 높으며 종묘는 우뚝한데, 어진 마음 매우 깊어 살리기를 좋아하며, 정치는 빛나고 생각은 화순하였다. 온갖 제도는 갖추어 닦아지고 만화(萬化)가 이에 흡족하도다. 근정(勤政)하시기에 지쳐서 맏아들에게 전하시고 맏아들은 이어 공로가 있는 이에게 사양하여 오직 부자ㆍ형제간에 계승하였도다. 밝고 밝은 우리 임금 조그마한 기미도 반드시 살피는 분이다. 두 번이나 화란을 평정하니 그 경사 더욱 독실하도다. 나라를 열고 사직을 안정한 것은 다 우리 전하의 공덕이니, 천명은 사양하기 어렵고 신기(神器)는 제대로 의탁되었도다. 두 임금을 받들어 모심에 공손하고 더욱 정성스러웠도다. 이와 같은 효제(孝弟) 신명에 통하여 상제의 돌보심이 더욱 두터웠도다. 상사를 당하자 근심에 잠겨 슬피 사모하며 몸부림쳐 울부짖었는데 황제께서 부음을 듣고 매우 애도하며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였도다. 또 태뢰(太牢)를 써 제사하며 부의(賻儀)를 후하게 하라는 칙명을 내리는가 하면, 아름다운 시호까지 내려 칭찬하니, 조상하는 예법이 완전히 갖춰졌도다. 하늘의 도움이 시종일관 변함없어 큰 복록이 길이 이어지고 자손은 천억(千億)으로 번창하며, 종사(宗祀)가 유구하여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으리라.


[주D-001]하우씨(夏禹氏)가……현규(玄圭) : 순(舜) 임금이 우(禹)에게 권한을 맡겨 수토(水土)를 평정하게 하였는데 우가 수토를 평정하고는 현규, 즉 하늘색 구슬로 폐백을 삼아 그의 성공을 순 임금에게 아뢰었다 한다. 《書經 禹貢 蔡傳》
[주D-002]주 무왕(周武王)이……상서 : 주 무왕이 즉위한 지 13년에 맹진(孟津)에서 회합을 갖고 “나의 꿈이 점과 맞으니 이는 상서가 겹친 것이니 상(商) 나라를 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하였다. 《書經 泰誓上》
[주D-003]한 고제(漢高帝)……구름 기운 : 한 고조(漢高祖)가 미천하였을 때 망탕산(芒碭山)에 은거하였었는데 은거한 산 위에 항상 구름 기운이 있어, 여후(呂后)가 그 구름 기운을 보고 찾았다 한다. 《史記 高祖本紀》
[주D-004]송 태조(宋太祖)……햇빛 : 송 태조가 출사(出師)하던 날 해 밑에 또 하나의 해가 있어 그 빛이 충천하는 것을 보고 그날 저녁 진교역(陳橋驛)에 군사를 머무르고 있다가 그 군중으로부터 옹립되어 왕위에 올랐다. 《宋史 太祖紀》
[주D-005]한 광무(漢光武)……얼음 : 한 광무가 왕랑(王郞)의 군사에게 쫓겨 호타하(滹沱河)에 이르렀는데, 앞서 길을 인도하던 자가 “호타하의 얼음이 풀려 배가 없으면 건널 수 없다.”고 아뢰었다. 광무는 다시 왕패(王霸)를 보내어 나루를 살피게 하였는데 과연 건널 수 없었다. 왕패는 사실대로 고하여 군중을 경동시킬 수 없고 또 물에 가까이 있어야 적을 막아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곧 얼음이 굳어서 물을 건널 수 있다고 광무에게 거짓 아뢰었다. 광무는 망언(妄言)이라 질책하면서 나루에 이르니, 과연 얼음이 굳어 있어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東觀漢記》
[주D-006]원 세조(元世祖)……전당(錢塘) 조수 : 원 세조의 군사가 전당에 주둔하자, 송 태후(宋太后)가 멀리서 “바다가 영험이 있다면 파도를 일으켜 전당을 씻어버려라.”고 빌었으나, 3일 동안이나 조수가 일지 않았다 한다.
[주D-007]구변도 십팔자(九變圖十八子) : 구변도는 미래를 예언한 비결(秘訣). 십팔자는 이(李) 자를 파자(破字)한 것으로, 곧 이씨(李氏)에 대한 예언이 들어 있는 비결.
[주D-008]적복부(赤伏符) : 예언이 쓰인 붉은 색깔의 부적. 유수(劉秀 뒤에 광무제(光武帝)가 됨)가 장안(長安)에 있을 때 강화(彊華)가 드린 적복부에 “유수가 군사를 일으키매 사이(四夷)가 운집하고 4ㆍ7 즈음에 화(火)가 임금이 된다.” 하였는데, 사이 운집은 곧 여러 영웅들의 싸움을 가리킴이요, 4ㆍ7은 곧 4에 7을 곱한 셈 28의 숫자로서 한 고조(漢高祖)에서 광무까지 2백 28년임을 가리킨 것이라 하며, 혹은 광무가 기병할 때 28세였음을 가리킨 것이라 하기도 한다. 《東觀漢記》
[주D-009]참위(讖緯) : 미래의 길흉화복의 조짐이나 또는 그에 대한 예언.
[주D-010]활과 칼을 버렸도다 : 임금의 죽음을 비유하는 말. 황제(黃帝)가 수산(首山)의 동(銅)을 캐서 솥을 주조하였는데, 그 솥이 완성되자 용(龍)이 수염을 드리우고 내려와 황제를 맞으니, 황제가 그 용을 타고 올라가면서 활과 칼을 떨어뜨렸으므로, 백성들은 그 활과 칼을 주워 가지고 돌아왔다 한다. 《史記 封禪書》
[주D-011]금상(今上) : 세종(世宗)을 가리킨다. 저자인 권근(權近)은 세종이 즉위하기 10년 전에 죽었으므로 금상이란 자주는 《양촌집(陽村集)》을 간행할 때 삽입한 것으로 추측된다.
[주D-012]현규(玄圭) : 순(舜) 임금이 우(禹)에게 권한을 맡겨 수토(水土)를 평정하게 하였는데 우가 수토를 평정하고는 현규, 즉 하늘색 구슬로 폐백을 삼아 그의 성공을 순임금에게 아뢰었다 한다.《書經 禹貢 蔡傳》
[주D-013]주 무왕(周武王)의……맞아 : 주 무왕이 즉위한 지 13년에 맹진(孟津)에서 회합을 갖고 “나의 꿈이 점과 맞으니 이는 상서가 겹친 것이니 상(商) 나라를 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하였다.《史記 高祖本紀》
[주D-014]신기(神器) : 옥새(玉璽), 곧 임금의 자리를 뜻한다.
[주D-015]목자(木子) : 이(李)자를 파자한 것. 목(木) 밑에 자(子)를 붙이면 이(李)자가 되는데, 곧 이성계(李成桂)를 가리키는 참설(讖說)이다.
[주D-016]서운관(書雲觀) : 고려 때 천문(天文)ㆍ역법(曆法)ㆍ누각(漏刻)ㆍ도참(圖讖) 등을 맡아보던 관청.
[주D-017]구변진단도(九變震檀圖) : 아홉 번 변하는 진단의 그림, 일종의 도참서(圖讖書)이다.
[주D-018]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建木得子] : 이(李) 자를 파자한 것. 목(木) 밑에 자(子)를 붙이면 이(李) 자가 되는데, 곧 이성계(李成桂)를 가리키는 참설(讖說)이다.
   출처: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