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경도 한성부

한성부(漢城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아베베1 2009. 11. 12. 12:41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한성부(漢城府)
한성부(漢城府)


동쪽은 양주(楊州) 경계까지 10리, 남쪽은 과천현(果川縣) 경계까지 10리, 서쪽은 고양군(高陽郡) 경계까지 10리, 북쪽은 양주 경계까지 10리.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북한산군(北漢山郡)이었는데, 백제의 온조왕(溫祚王)이 빼앗아 성을 쌓았으며,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옮겨 도읍하였다. 1백 5년을 지나 개로왕(盖鹵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이 와서 도성(都城)을 포위하니, 개로왕이 달아나다가 피살되고, 아들 문주왕(文周王)이 도읍을 웅진(熊津)으로 옮겼다. 후에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북한산에 이르러 국경[封疆]을 정하고, 18년에 북한산주(北漢山州)의 군주(軍主)를 설치하고, 경덕왕(景德王)이 한양군(漢陽郡)이라 고쳤다. 《삼국사》를 보면, “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고, 도읍을 한성으로 옮겼다.”하였는데, 지금 〈본기(本紀)〉를 상고하여 보니, “백제 시조 14년에 위례성(慰禮城)에서 도읍을 한성으로 옮겼고, 성을 한강(漢江) 서북쪽에 쌓고, 한성 백성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으며, 38년에는 경내(境內)를 순찰ㆍ안무(按撫)하였는데, 북쪽으로 패하(浿河)에까지 이르렀다.” 하였다. 그렇다면, 북한산은 온조왕 때부터 이미 백제 땅이었으며, 근초고왕이 남한산으로부터 옮겨 도읍한 것인데, 어찌 근초고왕이 빼앗았다고 할 것이겠는가. 《고려사(高麗史)》에서는 다만 《삼국사》에 의하여 적고, 그 본말(本末)을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으며, 또 장수왕을 자비왕(慈悲王)이라고 잘못 적었기 때문에, 여기서 위와 같이 분변하여 바로잡은 것이다.
고려 초기에는 또 양주라 고쳤으며, 성종(成宗)이 처음으로 10도(道)를 정하고 12주(州)의 절도사(節度使)를 둘 때에는, 좌신책군(左神策軍)이라 이름하여 해주(海州)와 함께 왕도(王都)의 좌우 2보(輔)로 삼아서 관내도(關內道)에 속하게 하였다. 현종(顯宗) 때에는 안무사(安撫使)로 고치고, 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降等)하여 양광도(楊廣道)에 속하게 하였으며, 문종(文宗) 때에는 남경 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진시키고, 이웃 고을의 백성들을 옮겨 채웠다. 숙종(肅宗) 때에는 김위제(金謂磾)가 도선(道詵) 밀기(密記)에 의하면, “양주에 목멱양(木覓壤)이 있으니 도읍을 정할 만하다.”고 하면서, 남경으로 옮겨 도읍하기를 청하고, 일지[日者] 문상(文象)이 거기에 따라서 함께 주장하니, 왕이 친히 와서 보고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와 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에게 명하여, 남경에 도성을 경영하는 그 역사[役]를 감독하게 하여 5년 만에 완성하였다. 충렬왕(忠烈王) 때에는 한양부(漢陽府)라 고치고, 공양왕(恭讓王) 때에는 경기좌도(京畿左道)에 속하게 하였다. 우리 태조(太祖) 3년에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한성부(漢城府)라 고쳤으며, 판부사(判府事)ㆍ윤(尹)ㆍ소윤(小尹)ㆍ판관(判官)ㆍ참군(參軍) 등의 관원을 두었으며, 예종조(睿宗朝)에는 판부사를 판윤(判尹)으로 고치고, 윤을 좌ㆍ우윤으로 불렀으며 소윤을 서윤(庶尹)으로 고쳤다. 판윤 1명은 정2품(正二品), 좌ㆍ우윤 각 1명은 종2품(從二品), 서윤 1명은 종4품, 판관 2명은 종5품, 참군 3명은 정7품인데, 그 중 1명은 다른 관직에서 겸하게 하였다. 경도(京都)의 호적[口帳]ㆍ시전(市廛)ㆍ가옥ㆍ전답ㆍ사산(四山)ㆍ도로ㆍ교량(橋梁)ㆍ구거(溝渠)ㆍ포흠(逋欠)ㆍ부채(負債)ㆍ쟁투 구타[鬪歐]ㆍ 낮순찰[晝巡]ㆍ 검시(檢屍)ㆍ차량(車輛)ㆍ사고ㆍ잃어버린 마소의 낙계(烙契 낙인(烙印)) 등의 일을 맡아 하였다.

【군명】 남경ㆍ한양ㆍ남평양(南平壤)ㆍ북한산ㆍ양주ㆍ광릉(廣陵).

【성씨】 본부(本府) 한(韓)ㆍ조(趙)ㆍ민(閔)ㆍ신(申), 애(艾) 촌성(村姓)이다. 함(咸)ㆍ박(朴)ㆍ홍(洪)ㆍ부(夫)ㆍ최(崔)ㆍ정(鄭) 모두 내성(來姓)이다.
○ 성씨는 모두 주관 육익(周官六翼)ㆍ윤회(尹淮)의 《지리지(地理志)》ㆍ 경상ㆍ전라 두 도의 관풍안(觀風案 감사의 전임자 명부)에 의거하였다. ○ 무릇 다른 고을에서 와서 사는 자는 성 아래 다만 본적(本籍)만을 주(註)달아 둔다. 다음에도 이에 따른다.

【형승】 북쪽으로 화산(華山 삼각산)을 의지하고, 남쪽으로 한강[漢水]에 임하였다 《고려사》에, “북쪽으로 화산을 의지하고 남쪽으로 한강에 임하였는데, 토지가 평평하게 펼쳐졌으며, 백성이 많고 물산이 풍부하며, 번화(繁華)하다.” 하였다. 산하가 겹겹이 둘러 싸이고 사방으로 도로의 거리가 바르고 고르다. 박의중(朴宜中)의 시에 있다. 북악(北岳)이 뒤에 솟았으니 궁전이 빛을 더하고, 남봉(南峯)이 앞에 높이 솟았는데 성곽이 사면으로 둘렀다. 모두 예겸(倪謙)의 〈등루부(登樓賦)〉에 있다. 범이 걸터 앉고 용이 서렸으니, 금성 천부(金城天府)로다. 모두 권우(權遇)의 시에 있다. 8도가 관활되고 겹으로 된 문[重門]에 딱다기[柝]를 치네. 장영(張寧)의 〈대평관(大平館)〉이란 시에 있다. 하늘이 만든 견고(堅固)함이로다. 권근(權近)의 시에, “화산은 높이 솟고 한강수[漢水]는 철철 흐르니, 하늘이 만든 견고함이 금성탕지(金城湯池)보다 장대하도다. 우리나라 일어나 천명 받고 한양에 도읍 정하자, 점쳐 보니 길(吉)하여 길이 좋으리로다. 화산은 높이 솟고 한강수 세차게 흐르는데, 하늘이 만든 땅 평탄하게 펼쳐 넓도다. 도로와 거리 고른데 배와 수레 모두 이르니, 도읍을 여기에 정하자 원근에서 모두 기뻐하네. 흐르고 흐르는 한강수 나라 도읍 둘렀는데, 지기[風氣]가 모인 곳에 둘러 싸여 완전하도다. 왕이 와서 자리 잡자 신민들 안정되었으니, 천만 년에 길이길이 삼한(三韓) 땅 진압[鎭]하리.” 하였다. 한 물은 남쪽을 두르고, 세 산은 북쪽을 진압하였네 권근의 시에, “한 물은 남쪽을 둘러 출렁거리며 흐르고, 세 산은 북쪽을 진압하여 우뚝 솟았다. 중국의 번방(藩邦)이다 〈함허자(涵虛子)〉에, “이웃 나라가 모두 그 의(義)를 사모하여 서로 친해서 중국의 번방이 되었다.” 하였다.

【풍속】 신의(信義)를 숭상하고 유술(儒術)에 돈독하다 〈함허자〉에, “사람들이 모두 신의를 숭상하고 유술에 돈독하여, 중국의 풍속을 양성(釀成)하였다.” 하였다. 의관 제도는 모두 중국과 같다 위와 같은 글에, “의관 제도는 모두 중국과 같기 때문에, 시서 예악(詩書禮樂)의 고장이요, 인의(仁義)의 나라라 한다.” 하였다. 천성이 유순하다 《후한서(後漢書)》에,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三方)과 다르므로 공자가 가서 살려고 하였다.” 하였다. 백성과 물산이 크게 이루어졌다 예겸의 〈등루부〉에 있다. 노(魯) 나라처럼 어진 이가 많다 장영의 〈대평관〉이 시에 있다. 집집마다 순후[淳厖]하다 김식(金湜)의 시에, “중화(中華)를 사모하여 점점 중화와 같아지니, 집집마다 순후하여 모두 봉해 줄 만하다.” 하였다. 시서(詩書)로 선비를 가르친다 김식의 시에, “폐백[玉帛]으로 천자(天子)에게 조회하니 마음이 간절하고, 시서로 선비를 가르치니 뜻이 화평하다.” 하였다. 의관으로 예양(禮讓)한다 김식의 시에, “집집마다 농사 짓고 누에[桑]치는 직업이며, 곳곳마다 의관으로 예양하는 모습이네.” 하였다. 시서(詩書)의 숲[藪]이다 진감(陳鑑)의 〈희청부(喜晴賦)〉에, “조선은 동번(東藩) 중의 한 나라가 되었는데, 예의의 구역이요, 시서의 숲이므로, 특별히 첫째로 꼽는다.” 하였다.

【산천】 삼각산(三角山) 양주(楊州) 지경에 있다. 화산(華山)이라고도 하며,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 하였다. 평강현(平康縣)의 분수령(分水嶺)에서 잇닿은 봉우리와 겹겹한 산봉우리가 높고 낮음이 있다. 빙빙 둘러서 양주 서남쪽에 이르러 도봉산(道峯山)이 되고, 또 삼각산이 되니, 실은 경성(京城)의 진산(鎭山)이다.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沸流)ㆍ온조(溫祚)가 남쪽으로 나와서,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땅을 찾았으니, 바로 이 산이다.
○ 고려 오순(吳洵)의 시에, “공중에 높이 솟은 세 송이의 푸른 연꽃, 아득한 구름 안개 몇만 겹인고. 전녀에 누대(樓臺)에 올랐던 곳 추억(追憶)하니, 날 저문 절간에 종 소리 두어 번 울리네.” 하였다.
○ 고려 이존오(李存吾)의 시에, “세 송이의 기이한 봉우리 멀리 하늘에 닿았는데, 아득한 대기(大氣)에 구름 연기 쌓였네. 쳐다보니 날카로운 모습 장검(長劒)이 꽂혔는데, 가로 보니 들쭉날쭉 푸른 연꽃 솟았네. 언젠가 두어해 동안 절간에서 글 읽을 제, 2년간 한강 가에 머물렀네. 누가 있어 산천이 무정타고 말하던가. 이제 와서 서로 보니 피차에 처량하네.” 하였다.
○ 고려 이색(李穡)의 시에, “소년 시절 책을 끼고 절간에 머무를 제, 돌다리에 뿌려지는 샘물 소리 고요히 들었네. 멀리 보이는 서쪽 벼랑에 밝은 빛 반짝반짝, 두어 마디 종소리 저녁 햇빛 향해 치네.” 하였다.
○ “세 봉우리 깎아 내민 것 아득한 태고적이니, 신선의 손바닥이 하늘 가리키는 그 모습 천하에도 드물리. 소년 시절에 벌써부터 이 산의 참모습 알았거니, 사람들 하는 말이 등 뒤엔 옥환(玉環 양귀비) 살쪘다고 하네.” 하였다.

백악(白嶽) 도성(都城) 안, 궁성(宮城) 북쪽에 있다. 인왕산(仁王山) 백악 서쪽에 있다. 타락산(酡酪山) 도성 안 동쪽에 있다. 무악(毋嶽) 도성 서쪽에 있다. 사현(沙峴) 모화관(慕華館) 서북쪽에 있다. 녹반현(綠礬峴) 사현 북쪽에 있다. 목멱산(木覓山) 곧 도성의 남산인데, 인경산(引慶山)이라고도 한다. 설마현(雪馬峴) 둘이 있는데, 목멱산 남쪽에 있는 것을 큰 설마라 하고, 산 동쪽에 있는 것을 작은 설마라고 한다. 가산(假山) 도성 수구(水口) 안, 훈련원(訓練院) 동북쪽에 있다. 하나는 물 남쪽에 있고, 하나는 물 북쪽에 있는데, 흙을 쌓아 산을 만들었으니, 지기(地氣)를 함축시키기 위하여서인 것 같다.
잠두봉(蠶頭峯) 시속에서는 가을두(加乙頭)라 부르고, 또 용두봉(龍頭峯)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용산(龍山)이라 하였는데, 양화도(楊花渡) 동쪽 언덕에 있다.
○ 강희맹(姜希孟)의 서술(敍述)에, “서호(西湖)는 도성과의 거리가 10리도 못 되는데, 산이 푸르고 물이 푸르러 형승(形勝)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간다. 호수의 북쪽에 끊어진 언덕이 있는데, 형상이 큰 자라 머리[鰲頭]같으며 혹은 잠두(蠶頭)라고 한다. 언덕이 호수 가운데 뾰족하게 바늘처럼 나왔는데, 형세가 또 높아서 호수 가운데의 승경(勝景)을 모두 볼 수 있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용두(龍頭) 제일봉에 걸어서 오르니, 풍광이 한이 없는데 흥인들 다 할 수 있으리. 사방의 산과 물은 시정(詩情) 밖인데, 만리 건곤(乾坤)은 한 눈에 들어오네. 마을 집들은 북쪽으로 연이어 성곽에 가깝고, 고깃배는 서쪽으로 가매 바다 어귀 통했네. 주인이 술자리 마련하고 손을 자주 만류하니, 저녁 해가 어느덧 붉은 빛 사라지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닻줄을 내리고 나룻가 산봉우리에 올라가니, 기이한 풍경 더욱더 많고 생각은 끝이 없네. 평생의 버릇[氣習]은 삼상(三上)에서 시 지었는데, 오늘 다시 호탕한 마음[豪狂] 술 한 번 취하게 마셨네.[酒一中] 산세(山勢)가 두루 감쌌는데 하늘은 저 멀리 높고, 강물 소리 컸다 작았다 바다의 조수와 통하였네. 자리에 앉은 이들 모두 다 신선 손인데, 지척간의 동화(東華)가 연홍(軟紅 홍진(紅塵))에 가려 있네.” 하였다.
○ 장근(張瑾)의 시에, “양화도 한 물굽이 겨우 지나서, 용두봉 저 위로 다시 올라가네. 높은 데 올라 장안(長安)길 바라보니, 가는 저 구름 빌려 이내 몸 싣고 돌아갈거나.” 하였다.
○ “용산에 함께 올라 저물녘 갠 풍경 바라보니, 백구(白鷗) 날아드는 저 물가에 배들 많이 매여 있네. 멀리 포구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 집으로 돌아가는데, 열 두 봉우리에 저 머리에 달이 마침 밝아 오네.”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도성 서쪽 10리 양화도(楊花渡)인데, 혹시나 기심(機心 술책(術策)을 부리는 마음)있어 갈매기를 친할 수 없으려나. 비가 오려는지 구름은 희묽게 번져 가고, 바람 소리 세찬데 물은 길게길게 흐르네. 산 위에 취해 누우니, 닭의 울음 정오를 알리고, 시 짓느라 세월도 잊었는데 또 보리가을[麥秋] 닥쳐 왔네. 반월(半月) 한가로움 오히려 즐거운데, 하물며 신세를 창주(滄洲 강호(江湖)와 같은 말)에 붙였음에랴.” 하였다.
○ 권건(權健)의 시에, “배 안에서 잠이 깨니 술기운 가시는데, 서늘한 밤 바람 이슬 옷에 스며 차구나. 우연히 흥이 나서 곤한 줄 모르고서, 달지고 연기 비낄 제, 느릿느릿 배 저어 돌아오네.” 하였다.
○ 박은(朴誾)의 시에, “사해(四海) 문장 소자첨(蘇子瞻)은, 우주(宇宙)간에 그 기개 다 용납하지 못하였네. 이름이 높으면 화(禍)가 되나니, 시구(詩句)를 헐뜯어서 모두 죄안(罪案)에 넣었네. 3년간이나 동파(東坡)에서 와력(瓦礫)을 주었는데, 그림자뿐인 외로운 신세 누가 이 몸 머물게 하려나. 촌야(村野)의 할머니가 만나서 하는 말이, 옛날의 부귀(富貴)는 봄꿈이 깨었다네. 선생은 아무 것도 개의(介意)치 않고, 높이 누워 문장만을 즐겼다네. 때로 가다 산수(山水)에 흥이 나면, 집을 나가 놀기도 자주 했네. 적벽강(赤壁江) 가을 칠월, 기망(旣望 16일) 달빛 더욱 맑았네. 일엽 편주에 흰 이슬 비꼈는데, 나는[飛] 신선을 끼고 먼 공중에 노닐꺼나. 뱃전 두드리며 노래 불러 조공(曹公 조조(曹操))에게 화답하는데, 퉁소 소리 애원(哀怨)하여 곡조가 되지 않네. 바가지 술잔 기울이며 손과 주고 받거니, 취해 누워 동방이 밝은 줄 몰랐네. 당시의 강신(江神)이 호방한 문장 도와주어, 몇 글자 우연히도 인간 세상에 남았네. 지금껏 펄펄 날아 구름 위에 오를 듯, 내 전날 읽어 보고 다시금 세 번 탄식했다네. 금년은 다행히도 같은 임술(壬戌), 좋은 놀이 고금(古今)이 일반이네. 서호(西湖)에서도 매우 기이한 누에 머리[蠶頭] 그 봉우리, 친구들아 가보지 않으려나. 우리 친구 세 사람 함께 웃는데, 따라온 두 손은 와서 같이 웃네. 마포(麻浦)로 나가서 작은 배 띄우니, 봄 강물이 처음 불어 한창일세. 가벼운 물결 일지 않고 바람 잔잔하니, 어느덧 좋은 경치 맑은 놀이 알맞았네. 사화(士華 남곤(南袞)의 자(字))의 얼굴에는 흥이 넘치는데, 좌중(座中)에 다리 뻗고 앉아[槃礴] 그 자리엔 관도 쓰지 않았네. 술 한 말 마시며 글 5백 자 쓰는데, 글자마다 용사(龍蛇)처럼 꿈틀거리니 그 누가 있어 붙들어 매리. 천 년 후에 알아주는 이 있는 줄 알면, 하늘 위의 소선(蘇仙 소동파) 응당 감탄하리. 황혼에 배를 띄워 흐르는 물빛 치며 가니, 서쪽으로 보이는 넓은 물결 끝이 없네. 사공이 돛대 멈추고 나에게 하는 말이, 잠두봉 지나면 물결 다시 사납다네. 어촌에 닻을 매고 장사배[商船]에 의지하니, 코 고는 소리만이 들리네. 저 달이 너무 밝아서 하늘이 밝은 달 아끼는 듯, 일부러 엷은 구름[微雲] 보내어 은하수에 점을 찍네. 버드나무들 저 멀리 깃발[旌纛]인 양 서 있고, 등불은 점점이 별처럼 빛나네. 시원한 비 서쪽에서 소리 내며 뿌리니, 큰 고기들 물결 가르며 모두들 도망해 숨누나. 이때에 옷을 여미고[擁褐] 술잔 돌리기 재촉하니, 그대의 좋은 글귀 폭탄 터지듯 사람을 놀라게 하네. 시령(詩令)을 지금 다시 내는데, 명은 엄하고 재주 모자라니 나는 도망치려네. 술잔 들고 달에게 물으며 소선(蘇仙)을 불러 보니, 공중에서 바람 타고 날개 돋칠 듯. 동방은 밝으려 하고 물기운 넘치니, 천지가 혼돈(混沌)해 개벽(開闢)하는 처음 같네. 돛대를 치며 다시 저어 연무(煙霧)를 뚫고 가니, 풀빛은 멀고 모래판은 긴데 까마귀 황새 어지러이 날아가네. 양화도 나룻가에 종일토록 비오니, 배 밑에서 맑은 시가 구슬처럼 빛나고 많네. 돌아와선 10일간이나 문 닫고 누웠는데, 머리 돌려 놀던 곳 생각하며 부질없이 팔을 걷네. 영웅들 흘러가고 천지는 늙었는데, 소선(蘇仙) 죽은 뒤에 해가 몇 번 바뀌었나. 옛부터 인간사가 매양 이러한 것인데, 우리 친구 벌써 백 년을 반이나 살았네. 오늘의 이 즐거움 헛되이 하지 말아, 흥이 나면 술 가지고 다시 한 번 찾아보세.” 하였다.
○ “성긴 비 강을 지나매 급한 소리 나는데, 작은 등불 달 대신 외로이 밝아 있네. 스스로 우습구나 천지간 하루살이[蜉蝣] 사는 듯, 만경창파에 갈대 하나[一葦] 비꼈는 듯. 이날 우연히 만나 애오라지 술을 마시나니, 옛 사람 보지 못하고 이름만 들었거니, 풍류(風流)는 천 년 만에 우리들에게 돌아왔는데, 비루하고 추솔(麤率)한 말 두서도 없어라.” 하였다. ○ 남곤(南袞)의 시에, “강머리에 달 솟아 오르자 물결은 밤에도 희어, 우리들로 하여금 공명(空明 고요한 물에 비치는 명월(明月)의 경치)을 치게 하네. 시를 지으니 퉁소 화답 필요 없고, 꿈을 깨니 외로운 학이 강을 질러 지나는 데 놀랬네. 세상일 지금에 우리들 늙으려고 하는데, 강물은 예로부터 소리만 남았구나. 내 어찌 짧은 글로 신선의 붓을 따르리, 응당 저 하늘 구만 리 밖에 있으리라.” 하였다.

전관(箭串 살곶이) 곧 국도(國都)의 동쪽 들[東郊]이다. 그 땅이 평평하고 넓으며, 물과 풀이 매우 넉넉하므로 울타리를 둘러쳐서 나라 말[國馬]을 기른다. 넓이가 34리이다. 남지(南池)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데, 연지(蓮地)라고 한다. 서지(西池) 모화관(慕華館) 남쪽에 있는데, 가물 때 비를 빌면 영험이 있다.
개천(開川) 백악산(白岳山)ㆍ인왕산(仁王山)ㆍ목멱산(木覓山) 여러 골짜기의 물이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서, 도성 가운데를 가로 지나서 세 수구(水口)로 나가 중량포(中梁浦)로 들어간다.
○ 세종 26년에 이현로(李賢老)가 풍수설(風水說)을 가지고 도성 안 개천에 더러운 물건을 던지는 것을 금하여, 명당(明堂)의 물을 맑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어효첨(魚孝瞻)이 상소하기를, “신이 살피건대, 《동림조담(洞林照膽)》이란 책은 범월봉(范越鳳)이 지은 것인데, 월봉은 오계(五季 오대(五代)) 때의 한 술사(術士)였습니다. 그 중에서 말한 바, ‘명당(明堂)에 냄새 나고 더러우며, 불결한 물이 있으면 패역 흉잔(悖逆凶殘)의 징조이다.’한 것은 장지(葬地)의 길흉을 말한 것이요, 도읍지의 형세에 대해서는 말한 것이 없습니다. 대개 월봉의 의견으로는, 신도(神道)는 정결함을 숭상하기 때문에 물이 불결하면 신령(神靈)이 불안하여 그러한 징조가 있다는 것이요, 국가 도읍지에 대하여 말한 것이 아닙니다. 도읍하는 곳을 말씀드리면, 인가(人家)가 번성해지니 이미 인가가 번성해지면 자연히 냄새나고 더러운 것이 쌓이니, 반드시 통하는 개천과 넓은 내가 있어, 그 사이를 가로 세로 흘러 그 나쁜 것을 떠내려 보낸 후에라야만 맑게 할 수 있는 것이니, 도성에는 그 물이 맑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만일 도읍지의 물을 한결같이 산간의 청정(淸淨)한 물과 같이 하려 한다면, 이것은 사세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치로 말하더라도 사생(死生)이 길이 다르고 신(神)과 사람이 처지가 다른데, 무덤[塜地]에 대한 일을 어찌 국가 도읍지에 해당시키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그 상소를 보고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효첨의 의논이 정직하다.” 하고, 드디어 이현로의 말을 쓰지 않았다.

중량포(中梁浦) 도성 동쪽 15리에 있는데, 물이 양주(楊州)에서 남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들어간다. 입석포(立石浦) 두모포(豆毛浦) 상류에 있다. 도요연(桃夭淵) 살곶이[箭串]에 있다. 두모포(豆毛浦) 도성 동남쪽 5리쯤에 있다.
한강(漢江) 목멱산 남쪽에 있는데, 옛날에는 한산하(漢山河)라 하였다. 신라 때에는 북독(北瀆)이라 하여 사전(祀典)에서 중사(中祀)에 실려 있었으며, 고려 시대에는 사평도(沙平渡)라 칭하고, 사리진(沙里津)이라고도 이름하였다. 그 근원이 강릉부(江陵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와서 충주(忠州) 서북쪽에 이르러 달천(達川)과 합하고, 원주(原州) 서쪽에 이르러 안창수(安昌水)와 합하며, 양근(楊根) 서쪽에 이르러 용진(龍津)과 합한다. 광주(廣州) 땅에 이르러 도미진(度迷津)이 되고, 광나루[廣津]가 되며, 삼전도(三田渡)가 되고, 두모포가 되며, 경성 남쪽에 이르러 한강 나루가 된다. 여기서 서쪽으로 흘러서는 노량(露梁 노돌)이 되고, 용산강(龍山江)이 되며, 또 서쪽으로 나가 서강(西江)이 되고, 금천(衿川) 북쪽에 이르러 양화도(楊花渡)가 되며, 양천(陽川) 북쪽에서 공암진(孔巖津)이 되고, 교하(交河) 서쪽에 이르러서는 임진강과 합하며, 통진(通津) 북쪽에 이르러 조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 도승(渡丞) 한 명을 두어서 출입하는 사람들을 검문하게 하였다.
○ 고려조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강이 머니 하늘이 나직이 붙었고, 배가 가니 언덕이 따라 옮기네. 엷은 구름은 흰 비단처럼 가로 질렀고, 성긴 비는 실처럼 휘날리누나. 여울이 험하니 흐르는 물 빠르고, 봉우리 많으니 산은 끝나 더디구나.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자주 머리 돌리는 것은, 바로 멀리 고향을 바라봄일세.” 하였다.
○ 고려조 중 선탄(禪坦)의 시에, “혼자 강루(江樓)에 오르니 조망(眺望)도 좋아, 모래터에서 배 기다리는데 저녁 조수[晩潮] 돌아 오누나. 외로운 돛대 지나는 밖에 청산이 끝나고, 한 쌍의 새 돌아가는 가에 흰 빗발이 오누나.” 하였다.
○ 고려조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저 멀리 월악(月嶽)이 중원(中原 충주(忠州))에 비꼈는데, 한강(漢江)물이 거기서 발원(發源)되었네. 도도히 흘러 남국의 강기(綱紀)로 중요한 나루터인데, 푸른 물결 천길 속에 이무기와 자라[蛟龜]도 잠겨 있다네. 오는 소 가는 말 날마다 다함 없으니, 나루터에서 간간히 사공을 걱정시키네. 내 옛날 강정(江亭)에 올랐을 때, 기둥에 기대 서서 가을 바람 읊었다네. 광성(廣城)은 동쪽에 둘러있고, 화산(華山)은 서쪽에 솟았네. 바다와의 거리 수백 리이니, 썰물ㆍ밀물 어찌 통하리. 어찌하여 섬 오랑캐[島夷 왜구[倭]]는, 나는[飛] 저 기러기처럼 빠르게도 다니나. 날뛰며 이곳 지날 땐, 지키는 군사들 긴 활 버렸다네. 지금도 부로(父老)들 눈물 길게 흘리며, 사람 만나면 태평시절 즐겁던 일 이야기하네. 예성(禮成) 항구 여기가 해문(海門)인데, 고기잡이배 장사배들 베짜는 듯 드나들었네. 아, 언제나 그 옛날이 다시 올까.” 하였다.
○ 고려조 이곡(李穀)의 〈얼음 위로 한강을 건너며〉 라는 시에, “모래판에 지나는 길손 행색이 쓸쓸하니, 몇 번이고 빈 처마 밑에서 북두성 쳐다보았는고. 한밤중 세찬 바람 불어서 집 무너뜨리고, 흐르던 그 강물 얼어서 다리가 되었네. 잠깐 사이에 사람들 조심하니, 짧은 거리에도 말 잘 걷는다 자랑 말게. 위태한 길 지나고서 도리어 스스로 웃기를, 돌아가서 고기잡고 나무하면서 늙은 것만 못하리.” 하였다.
○ 변계량(卞季良)의 시에, “말 타고 성곽을 나가, 고삐 멈추고 낚시터로 내려가네. 긴 강엔 새 한 마리 나는데, 석양에 돛대 두어 개 오누나. 촌가 나무꾼들은 여울에 의지해 모이는데, 초가집들은 언덕 곁에 벌였네. 한평생 호해(湖海)의 마음, 물 건너고서 도리어 배회(徘徊)하네.” 하였다.
○ 예겸(倪謙)의 기문에, “조선 도성에서 남쪽으로 10리 되는 거리에 물이 있는데 한강이라 한다. 금강(金剛)ㆍ오대(五臺) 두 산에서부터 발원(發源)한 물이 합류(合流)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물에 임하여 누(樓)가 있는데 한강루(漢江樓)이다.
때는 경태(景泰) 원년(세종 32년) 정월 14일인데, 공조 판서 정인지(鄭麟趾)와 한성부윤(漢城府尹) 김하(金何)가 나와, 황문(黃門) 사마(司馬 사마순(司馬恂)) 선생을 청하여 가서 놀았다. 이에 말을 타고 남대문으로부터 나갔는데, 지원(知院) 신숙주(申叔舟)와 성삼문(成三問) 및 도감(都監)의 여러 분들이 함께 갔다. 구불구불 산길과 들길 사이를 지나, 날이 정오가 거의 되어서야 누 위에 이르렀는데, 국왕이 미리 보낸 좌부승지(左副承旨) 이계전(李季甸)과 예조 판서 허후(許詡)가 잔치를 벌이고 맞이하였다.
난간에 의지하여 둘러보니 강산의 좋은 경치가 모두 자리 사이에 들어왔다. 술이 돌아가기 시작한 다음, 내가 즉석에서 시 3장(章)을 지었는데, 도감에서 먼저 화려한 현판[華扁]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기다리다가, 나에게 지은 시를 써서 누 위에 걸라 하기에, 내가 글씨를 잘 쓰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술이 반쯤 취하였는데 한성부윤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작은 배가 누 아래 메여있으니 한 번 타고 놀아보지 않겠소.’ 하기에, 내가 곧 자리를 치우게 하고 걸어서 배 가운데로 올라갔다. 배는 3척을 연결하였고, 가운데에 작은 집[小軒]을 세우고 띠풀로 덮었는데, 아래는 6, 7명이 앉을 만하며, 걸상을 만들었는데 자못 높았다. 내가 말하기를, ‘강산이 이러한데 도리어 처마뿔[簷角]에 가리어지니, 어찌 나의 바라봄을 넓게 하지 않겠는가.’ 하며, 명하여 낮은 걸상으로 바꾸게 하고, 술잔을 씻고 다시 마시기 시작하였다. 언덕을 따라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몇 리를 못 가서 다시 누 아래로 돌아왔는데, 호군(護軍) 매우(梅佑)가, ‘달이 벌써 떴습니다.’ 하기에, 그만 언덕 위로 올라와서 말을 타고 돌아왔다.
이틀이 지나서 공조 판서와 한성부윤이 다시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도성에서 서남쪽으로 15리쯤 가면 멀리 나루터가 있어 양화도(楊花渡)라고 하는데, 대개 각도에서 오는 양곡[餫餉]이 와 닿는 곳입니다. 나루 어귀에 몇 묘(畝)나 되는 푸른 돌이 물가에 벽처럼 섰는데 푸르고 늙은 소나무가 많아, 높은 관을 쓰고 칼을 든 이가 뒤섞여 서서 서로 마주 향한 것 같으며, 여기에 올라가면 한없이 조망(眺望)이 좋으니, 한 번 가서 놀지 않겠소.’ 하기에, 나는 다시 황문(黃門)과 함께 갔다. 거기에 도착하니, 국왕이 미리 보낸 도승지 이사철(李思哲)과 병조 판서 민신(閔伸)이 장막을 설치하고 길가에서 맞이하였다.
말에서 내려 장막으로 들어가 차를 마시고, 걸어서 돌 깔린 산마루로 올라가 험한 곳에서 소나무를 의지하니, 모두 나무를 얽어 난간을 만들어 기울어지고 엎어지는 것을 방지하였으며, 그 가운데에는 차려 놓은 것이 매우 성대하였다.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니, 멀고 가까운 곳에 있는 돛단배들이 섬 사이에 나고 들며, 언덕 너머에는 좋은 전지(田地)가 많고 촌가가 총총히 있다. 먼 산이 중첩되어 푸른 병풍이 둘러 벌인 것 같은데, 긴 바람은 바다 쪽에서 불어와서 선들선들 옷에 부니, 호연(浩然)한 마음 만리의 물결을 헤치는 뜻이 있으니, 참으로 장쾌한 구경이다. 조금 있다가 자리에 앉아, 술이 몇 순배 돌아 갔는데, 공조 판서가 말하기를, “애석한 일은 퉁소 부는 손[客]이 없어 술을 권함이 없는 것이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풍악은 없지만 술 한 번 들고 시 한 번 읊는 것으로 넉넉히 그득한 정회를 풀 수 있소.’ 하니, 모두들 한 번 웃었다. 어부가 있어 그물질하여 비늘이 번쩍번쩍하는 고기를 잡아다 바치니, 꼬리가 퍼덕퍼덕하며 소반 위에서 움직였는데 빨리 삶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한성부윤이 다시 배에 오르자고 하기에, 걸어서 평탄한 산록으로 내려와 교자를 타고 물가에 이르니, 여러 사람들이 벌써 언덕을 따라 내려와서 먼저 배에 이르렀다. 배에 올라 도사려 앉아[趺坐] 술을 얼마쯤 마신 후에 물결을 따라 내려가니, 두 겨드랑이로 삿대를 젓느라 때때로 얼굴에 물이 뿌려지는데, 분주히 언덕 위에 모여 구경하는 여자들이 천 명은 되어 보였다. 황문이 ‘어째서 저렇게 모였느냐.’고 물으니 한성부윤이 말하기를, ‘먼 지방 사람이 한 번 풍경을 보고자 하여 그러는 것 뿐이요.’ 하였다.
한성부윤이 멀리 송림(松林)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 안에 있는 정자를 ‘희우정(喜雨亭)’이라 하는데, 효령군(孝寧君)의 별장으로서 역시 한 번 놀 만하오.’ 하였다. 또 서로들 배에서 내려 육지로 걸어서 정자 아래에 이르니, 국왕이 벌써 술을 보내어 와 있었다. 다시 자리를 마련하고 술을 마시는데, 갑자기 바람이 세차고 구름이 어두워지며, 물결이 출렁거리고 솔바람[松風]이 물결처럼 소리가 났다. 내가 말하기를, ‘날이 벌써 저녁 때가 되고 비가 오겠으니,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만 일어나서 교자를 타고 돌아왔는데, 관(館)에 이르니 밤 누수(漏水)가 두어 각[數刻]이 되었다.
아, 땅이란 반드시 사람이 있음으로써 승지(勝地)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으로도 우군(右軍 왕희지)이 없었다면, 무성한 숲 긴 대나무에 불과하였을 것이며, 황주(黃州)의 적벽(赤壁)으로도 동파(東坡 소동파)가 없었다면, 높은 산 큰 강에 불과하였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이름을 날릴 수 있겠는가. 생각하면 내가 어찌 감히 왕희지와 소동파에 비하리요마는, 시대가 다르고 지역이 다르나 흥취는 한 가지이니, 어찌 글로써 기록함이 없겠는가. 또 인생의 회합(會合)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요, 아름다운 지경[佳境]도 역시 많이 만나기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조선은 바다 밖에 있으니, 비록 이 사람과 이 경치가 있다 하더라도 중국 사람이 누가 능히 더불어 회합하고 만날 수 있겠는가.
이번에 내가 욕되게도 조정의 사명을 받고 나와서, 잠시나마 여러 군자들과 여기서 놀고 노래하게 되었는데, 며칠이 안 되어 이별하고 가게 되니, 이런 놀이를 계속하려 하여도 원래 될 수 없는 일인데, 이 곳을 다시 우리들이 한 번 구경하고자 한들 또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이래서 내가 붓으로 적어 잊지 않으려 하며, 때로 한 번 펼쳐 본다면 만나 놀던 즐거움이 완연하게 항상 눈에 있을 것이니, 역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러나, 산천을 구경하고 그 고장의 풍토(風土)를 기록하는 것은, 역시 사신 직책의 당연한 일이니 만일 잔치하여 노는 것만 일삼았다고 한다면, 이것은 나를 알아주는 이가 아닐 것이다. 놀이가 있은 다음날 17일에 적는다.” 하였다.
○ 예겸의 시에, “높은 누각에 올라서 기이한 경치 마음대로 보고, 누선(樓船)을 저어 푸른 강물에 떠 있네. 비단 닻줄 천천히 매어 푸른 석벽에 배 대었는데, 아로새긴 난간 사이에 옥술병[玉壺] 자주 전해 오네. 강산은 천년토록 그 옛빛 고치지 않는데, 손님과 주인 한때에 마음껏 즐기네. 저 멀리 달 밝고 사람 간 후엔, 백구만이 날아들어 거울 같은 맑은 물결 차지하리.” 하였다.
○ 기순(祁順)의 기문에, “조선국 성 남쪽 10리쯤 되는 곳에 물이 있어 한강이라 하는데, 근원이 오대(五臺)ㆍ금강(金剛) 두 산에서 나와 합류(合流)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그 경치가 그윽하고 좋기로 유명하였으며, 강에 임하여 누대가 있는데 올라가 조망(眺望)할 만하기 때문에, 전인(前人)들 중 중국에서 오는 사람들이 모두 가서 놀았다.
성화(成化) 병신년(성종 7년) 2월에, 내가 행인사부(行人司副) 장정옥(張廷玉)과 함께 사명(使命)을 받들고 이곳에 와서 겨우 일을 마치자, 한강에서 놀자고 청하는 이가 있으므로 응낙하였다. 이달 26일에, 관반사(館伴使) 찬성(贊成) 노사신(盧思愼), 참찬(叅贊) 서거정(徐居正)과 함께 숭례문(崇禮門)으로 나가 산길ㆍ마을 길을 지나 강가에 이르니, 임금이 미리 도승지 유지(柳輊)와 부승지 임사홍(任士洪)을 보내어 잔치를 누대 위에 배설하였는데, 의정(議政) 윤자운(尹子雲), 의정 김수온(金守溫), 중추(中樞) 임원준(任元濬), 중추(中樞) 성임(成任), 판서(判書) 이승소(李承召)가 모두 있었다.
이때 오랜 비가 새로 개어서 산천이 맑고 아름다우며 하늘 빛과 물빛이 서로 연하여 이난(二難)사미(四美)를 겸하였다. 여기서 누대에 올라 마음대로 조망하며 술잔 들어 서로 권하는데, 참찬 서거정이 율시 두 수를 지었으므로 내가 곧 화답하고, 다시 만강홍(滿江紅 사(詞)의 이름) 한 절[一闋]을 뒤에 붙였다. 얼마 있다가 서로 잡고 배에 올라가 강물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니, 주민들이 와서 구경하는 자가 앞을 다투는데, 물새ㆍ들새가 날아들어 고기잡이배와 안개 낀 수면 사이에 춤추니, 역시 호화찬란한 모습을 보기를 즐거워하여 배회하면서 차마 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잔치를 배 가운데 벌이고 생선을 삶고 사슴 고기를 구우며, 호탕하게 마시기를 한정 없이 하였다. 술이 취하여 내가 다시 가사[辭]두 장(章)과 율시 한 수를 짓고, 장정옥도 지은 것이 있기에 또 화답하였다.
몇 리쯤 가서 양화도(楊花渡)에 이르니 이곳은 각 도의 양곡이 모이는 곳으로서, 창고(倉庫)가 층층이 솟아 산 형세와 서로 같다. 또 몇 리쯤 가서 용두산(龍頭山)에 오르니, 산이 물가를 내려다보는데, 여러 산봉우리 중에서 특출하여 맞은편 인가와 원근 도서(島嶼)간에 나고 드는 배들의 출몰하는 것이 모두 눈앞에 들어온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산 위에는 먼저 장막을 치고 술자리를 벌였음으로, 뜻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다시 술 두어 순배를 마시고 율시 한 수를 짓고 돌아왔는데, 성중에 들어오니 누수가 초경을 알렸다.
대개 조선은 중국과의 거리가 수천 리이므로 국가[王事]가 아니면 올 수 없으니, 한강의 놀이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의 놀이가 어찌 특별히 기이한 것을 찾고 좋은 경치를 구경하며, 시와 술로 즐기고 노는 것뿐이겠는가. 강의 남쪽은 옛날 백제요 백제의 동쪽은 옛날 신라인데,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는 또 당(唐) 나라의 유적이다. 그 자취를 찾으며 그 시절을 생각하니, 회고(懷古)의 생각을 이루 말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내 이번 놀이가 항상 있을 수 없음을 생각하면서, 혹시라도 잊을까 하여 여기에 적어 둔다.” 하였다.
○ 기순의 가사[辭]에, “저 강물이여 유유(悠悠)히 흐르는데, 거마(車馬)들 강 머리로 몰려드누나. 누선(樓船)을 타고 물결 가로질러, 잔잔한 흐름을 건너누나. 풍륭(豐隆 구름신)으로 뒤따르게 하고, 비렴(飛廉 바람신)으로 앞서 인도하게 하였네. 산은 분분(紛紛)히 와서 맞이하고, 구름은 나부끼어 나를 호위하누나. 회포를 풀어 놓고 크게 노래 부르고, 술잔을 들어 지체하네. 사람 그림자 물 가운데 감도는데, 새가 하늘가에서 나네. 동쪽 언덕에서 그윽한 난초 캐고, 남쪽 물가에서 꽃다운 지초(芷草)를 캐네. 미인을 생각함이여 오지 않으니, 패물 끈을 맺으며 멈칫거리네.” 하였다.
○ 옛 나루터 웅진(熊津)인데, 봄 물결 푸름이여 맑고 맑도다. 갓 쓰고 일산 받은 이 와서 노는데, 깃발들이 구름 같도다. 고기와 용을 불러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이무기와 자라를 좌우(左右)로 모누나. 물 신령 놀라 빨리 달리는데, 하백[川伯]이 읍(揖)하고 맞이해 기다리네. 신선의 술을 잔에 따르고, 기린포[麟脯]에 문어회(文魚膾)라네. 하늘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데, 황홀하게 나는 신선세계에 오르는 듯. 저 멀리 하늘가 바라보니 아득도 하여라, 어즈버 노래 부르고 한 번 웃어보세. 날이 저물어 오래 머물 수 없으니, 배를 멈추고 길에 올라야겠네. 흰 갈매기 쌍쌍이 나누나, 어찌하면 너와 함께 세상 일 잊을꼬.” 하였다.
○ 기순의 시에, “강머리 풍경이 누선에 가득 차니, 꽃과 버들 고움을 다투는 2월 봄철일세. 돛 그림자는 나는 새와 함께 지나가고, 피리 소리 늙은 용의 잠을 깨우네. 산이 두 언덕에 잇닿으니 구름과 숲이 합쳤고, 돌이 중류에 섰으니 흰 물결 뿌리네. 동국(東國)에 와서 높이 즐긴다고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예사로이 시와 술에 서로 끌렸다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양화도(楊花渡) 어귀에 놀잇배 대니, 인간 세계에 별천지 있는 줄 이제야 알겠다. 하필 신선과 함께 학을 타고 놀아야 하나, 그림 그릴 것 용면(龍眠 송 나라 화가 이공린(李公麟)의 호)에게 부탁할까. 해가 자라 등에 밝으니 황금빛 물결 치는데, 바람이 용의 머리 흔드니 푸른 구슬 뿌리네. 서호(西湖)를 서자(西子)에 비하겠는데, 이 좋은 강산에 흥이 일어나는 것 어찌하리.”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명승지 찾아와 놀며 놀잇배 띄우니, 봄철 강물 새로 불어 물결이 하늘 같네. 마음껏 시 읊으며 병 가운데 경치[壺中景]인가 하였고, 몹시 취하니 물 속에서 조는 것 같네. 해 지자 산에서 내려오니 도리어 담담(淡淡)한데, 회오리 바람[橫飆] 물결을 치니 다시 옷에 뿌리네. 소동파(蘇東坡)의 풍류 이제라서 없으리. 가려다가 도리어 늦은 흥에 끌리네.” 하였다.
○ 진감(陳鑑)의 시에, “한강에 엷은 안개 끼어 쪽빛보다 푸른데, 그림배[畫船] 맑은 놀이 운치 있구나. 아름다운 경치 좋은 철에 해외(海外)에 머무니, 좋은 산 좋은 물이 강남(江南)에 못지 않네. 갈매기 나루 어귀에 나는데 조수는 처음 부풀고, 시가 붓 끝에 들어오니 술이 반쯤 취했네. 깊은 언덕 숲 속으로 배 저어 들어가니, 공중에 가득한 푸른 산 기운이 부슬부슬 떨어지네.” 하였다.
○ 명(明) 나라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긴 강이 아득하여 고요히 쪽빛 오르고, 양쪽 언덕에 물결 잔잔하여 거울[一鏡] 맑았네. 하늘 밖 봉우리들은 북쪽 끝까지[朔漠] 잇닿았는데, 눈앞의 그림 같은 경치 소상강 남쪽[湘南]을 상상케 하네. 미친 바람 거친 비에 배 비껴 띄워놓고, 자리를 다가앉아 술잔 권하니 손님 모두 취하였네. 희미하고 아득하니 어느 곳에 배를 댈까, 나루터의 버드나무 실처럼 드리웠네.” 하였다.
○ 고려 배중부(裵仲孚)의 시에, “산야의 정취[野情] 나그네 생각이 함께 아득하니, 마을 다리에 말 멈췄는데 해는 저물어가네. 자주 왕래한다고 저 강물도 싫어하는 듯, 일부러 풍랑(風浪) 몰아다 나그네 옷[征衣] 적시네.” 하였다.
○ 이석형(李石亨)의 시에, “침침한 천지에 바람 비 몰려오니, 천산(千山) 만학(萬壑)에 파도가 솟아나네. 강물이 넘쳐서 가도 끝도 없으니, 사공들 나루 아전[津吏] 서로 보며 놀라네. 저기 저 작은 배 빈 언덕에 매어 있으니, 부러진 돛대 썩은 노로 어찌 의지할 것인가. 아 어찌하면 만 섬을 싣는 큰 배를 얻어, 저 풍랑 뚫고 넘어 화살처럼 빨리 달려 별안간에 건널꼬.” 하였다.
○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강물이 깊어 굴을 이루었는데, 고기잡이 노래소리에 탁영곡(濯纓曲) 섞였네. 해가 멈추니 고기 비늘 유난히 번쩍이는데, 바람이 스쳐가자 가는 물결 일어나네. 배는 끊어졌는데 쪽빛 물 멀리 아득하고, 조수가 돌아가니 거울처럼 맑고 반듯하네. 내 어찌 늘그막에 작은 배 얻어 타고, 흰 갈매기 벗삼아 한평생 지내 볼거나.” 하였다.
노량(露梁 노돌) 도성 남쪽 1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도승(渡丞) 한 사람이 있다. 또 과천현(果川縣)에도 있다.
용산강(龍山江) 도성 서남쪽 10리 되는 곳에 있는데, 곧 고양(高陽)의 부원현(富源縣) 땅이었다. 경상ㆍ강원ㆍ충청ㆍ경기도 상류(上流) 지방의 세곡(稅穀) 수송선이 모두 여기에 모인다.
○ 고려 이인로(李仁老)의 〈용산 한언국(韓彦國)의 서재에서 유숙하다〉라는 시에, “두 물은 용용(溶溶)하게 흘러 제비 꼬리처럼 갈라졌는데, 세 산은 아득하게 서서 자라 머리에 탔네. 다른 해에 만일 구장(鳩杖)을 모시게 된다면, 함께 저 푸른 물결 찾아 백구(白鷗)를 벗하리.” 하였다. 그 시 서(序)에 이르기를, “산봉우리가 굽이굽이 서려서[屈盤] 형상이 푸른 이무기 같은데, 서재(書齋)가 바로 그 이마[額]에 있으며, 강물은 그 아래에 와서 나뉘어 두 갈래가 되고, 강 밖에는 멀리 산이 있는데 바라보면 산자(山字) 같다.”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용산이 반쯤 한강수(漢江水)를 베개삼았는데, 푸른 솔은 산에 가득하고 마을에는 뽕나무라네. 동네엔 닭ㆍ개 소리 나는 수십 집, 초가 지붕 기울어진 데 점심 연기 일어나네. 배에서 내려 말을 타고 찬 여울 건너가, 낙화(落花) 속 빈 대청에 들어 쉬누나. 아전이 와서 밥을 올리는데 들나물 섞였더니, 뒤따라 가져오는 강의 잉어가 별미(別味)로세.” 하였다.
삼전도(三田渡) 광주(廣州) 땅에 있는데 도성에서 30리요, 도승(渡丞) 1명이 있다. 마포(麻浦 삼개) 도성 서쪽에 있는데 곧 용산강의 하류이다.
○ 성간(成侃)의 시에, “검은 구름 한 조각 푸른 하늘 나직한데, 때때로 들리는 먼 물가의 외로운 학의 울음. 밤 사이 나루터에 남풍이 세차더니, 서강(西江) 물결 걷어다 빗발을 날리네. 고기 새끼들 나고 들며 다투어 거품 뿜는데, 풍이(馮夷 물귀신)는 물결치고 신령은 춤추네. 섬들[島嶼]을 휘어 싸서 홍몽(洪濛)으로 돌아가는데, 창에는 서늘한 기운 남은 더위 다 가시네. 강 기러기 어지러이 날며 끼룩끼룩 우는 소리, 마름과 연 이리저리 바람과 물결 따르네. 어옹(漁翁)이 닻줄 잃고 강에서 소리 치는데, 큰 배는 옆으로 기울고 작은 배 떠내려가네. 인간 세상 어느 곳이 지극히도 험하지 않으리, 별안간에 생애가 어찌 될지 모른다네. 낭간군자(琅玕君子 작자의 호) 한바탕 웃고 나서, 밤중에 잠 못 이루고 머리가 학(鶴)처럼 기울어지네.” 하였다.

『신증』 김수동(金壽童)의 시에, “우뚝하게 높도다, 범바위[虎巖] 깎아선 모습 몇 천 길인고. 뭇 봉우리 높이 솟음이여, 용이 나는 듯 봉새가 춤추는 듯 다투어 솟아오르네. 아래는 긴 강 있어 쉬지 않고 흐름이여, 밤낮으로 성난 조수 바다 어귀[海門]에 통한다네. 강 머리에 뭉게뭉게 잇닿은 구름은 먹을 끼얹은 듯, 강루(江樓)에 주룩주룩 뿌리는 비는 물동이를 뒤엎은 듯. 모인 물 몇 삿대[篙]나 더 깊은고, 홍수(洪水)가 세차게 흘러 하늘 땅을 뒤덮네. 얼마 안 되어 바람 불고 빗소리 끊기니, 물결 무늬 주름잡고 거울처럼 고요해, 보이는 건 외로운 안개와 지는 노을이 얼기설기 얽히는 것뿐. 좋은 시절의 즐거운 일 저버릴 수 없어, 사공을 급히 불러 중류에 배 띄우네. 배다락[柂樓]에 의지하여 밤 깊도록 혼자 수심하는데, 저 하늘에 두둥실 찬 달이 떠오르네.
한 조각 흰 그림자에 강촌 밝아지니, 희고 흰 그 빛이 물에도 숲에도 흩어지네. 물 속에 이무기 뛰놀고, 깃들었던 갈가마귀 나누나. 생선 잡아 서리 같은 칼날로 가늘게 회를 치매, 은실이 날리는 듯 뱃노래 소리 속에 맑은 술병 열었구나. 미인이 있어 검푸른 눈동자 푸른 머리칼인데, 맑고 시원한 선궁(仙宮)으로 나를 맞이하고, 자하주(紫霞酒) 부어 나를 권하려 하니, 이 내 몸 어느 사이 신혼(神魂)이 아득하네, 신령스런 자라 부르고 푸른 용 불러서, 흥(興)을 타고 신선 나라 바로 찾으려니, 천풍(天風)이 나를 끼고 소요(逍遙)하며 노네. 인간 세상 내려다보니 몇 겹의 티끌로 막혔으니, 소상강ㆍ동정호 좋다한들 이 경치 비길쏘냐. 소동파[蘇仙]의 적벽(赤壁)놀이 말할 것은 무엇인가. 영주(瀛洲)와 단구(丹丘) 신선의 짝이 아니면, 이런 놀이 얻을 수 없을 것을, 나같은 용렬한 인물 어찌하다 이런 은혜 입었나. 산사(山寺)에서 꿈깨자 술도 처음 깨니, 달은 지고 조수 나갔는데, 저 멀리 긴 물가에 배댔던 자리만이 보이누나.” 하였다.

서강(西江) 도성 서쪽 15리에 있는데, 황해ㆍ전라ㆍ충청ㆍ경기도 하류의 조세곡 수송선이 모두 여기에 모인다.
양화도(楊花渡) 곧 서강의 하류인데 도승(渡丞) 1명이 있다.
○ 예겸(倪謙)의 시에, “한강의 옛 나루터 양화라고 하는데, 좋은 경치 골라 정자 지으니 물가에 가깝네. 멀리 보면 돛단배 먼 포구(浦口)로 떠나는데, 문득 들으니 우는 기러기 모래판에서 일어나네. 숲에 가린 부엌에서 솔잎을 불때고, 자리 위 봄 소반엔 여뀌 싹이 새로 났네. 황성[神京]을 떠나매 여기서 4천 리인데, 이곳에 와서 사신(使臣)의 성사(星槎) 멈출 줄 생각지도 못했네.” 하였다.
○ 얼음 풀린 봄 강에 물이 이끼 같은데, 놀잇배 천천히 저으며 술잔 함께 드누나. 적벽(赤壁)의 황니판(黃泥坂) 겨우 지나자, 또 구당(瞿塘)의 염예퇴(灩澦堆)를 지나게 되누나. 관서(官署)에서는 쉴새 없이 좋은 술 가져오는데, 고깃배에선 다투어 생선을 보내오누나. 인생의 즐거운 놀이 많이 있기 어려우니, 입을 크게 벌려 웃지 않으리. 하였다.
○ 고윤(高閏)의 시에, “물결이 출렁출렁 큰 자라 떠 있는 듯, 비에 젖은 이끼 흔적 푸른 빛 흐를 것 같네. 눈에 가득한 좋은 경치 지금이 6월인데, 하늘 가득 바람 비에 외로운 배 위에 있네. 고래처럼 술마시니 강해(江海)도 작은 것, 용처럼 읊으니 귀신도 수심하게 하네. 내일 아침 서로 이별하고 조정으로 돌아가면, 아침저녁 바다쪽에 정운(停雲)이리.” 하였다.
○ 진감(陳鑑)의 시에, “양화도 옛 나루터 맑고도 그윽한데, 불쑥 나온 기이한 산봉우리 푸른 강물 베개 삼았네. 술이 취하니 몸 밖의 일 다 잊는데, 빗소리는 객의 수심 씻지 못하네. 푸른 나무에 연기 엉기니 넓은 들이 희미하고, 바람은 돛을 보내어 먼 물가로 들어가네. 이별한 후엔들 좋은 모임 잊을건가. 저 바다 동쪽 머리에 이 내 꿈 항상 왕래하리.” 하였다.
○ 김수온(金守溫)의 시에, “서호(西湖)의 아름다운 경치 맑은 연기 떠 있는데, 산색은 창창(蒼蒼)하고 푸른 물 흐르네. 하늘 위의 사신 행차[使華] 옥절(玉節)이 빛나는데, 인간 세계 명승지에 놀잇배 띄웠네. 백 편의 시로 주고 받으니 재주 겨루기 어려운데, 실컷 마시매 천고의 수심을 술이 씻노라. 하늘이 뜻이 있어 시 쓰기 재촉하여, 조각 구름 비를 머금고 머리 위에 벌써 다다랐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높은 누대에서 내려와도 정(情)은 끝이 없어, 또 다시 봄빛을 이끌고 강물에 배를 띄우네. 사람은 죽엽배(竹葉盃) 속에 취하는데, 배는 양화도 향해 가누나. 동해 저 멀리 외로운 섬 보일락말락, 남산 푸른 곳에 가벼운 구름 일어나네. 강호의 노는 운치 전부터 알았지만, 오늘의 이내 마음 백 배나 맑아지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강해(江海)의 풍류는 10년의 정인데, 앉아서 강물 대하니 눈 다시 밝아지네. 산은 높은 선비 모습인양 언제나 거만하고, 물은 잘 쓰이는 붓[筆] 같아서 다시 이리저리 달리네. 배 다락[柂樓]에서 술을 드니 날이 방금 저물려는데, 나루터에서 시를 읊으니 조수 벌써 들어오네. 달 밝기 기다려 취한 몸으로 돌아가니, 살구꽃 성긴 그림자 맑기도 하구나.”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만겹의 산은 만고의 정을 머금었는데, 봄 바람에 먼 곳 나그네 두 눈이 밝아지누나. 마을에 잇닿은 버들은 천 가지가 고운데, 섬을 덮은 운연(雲煙)은 한 줄기로 비꼈네. 갈가마귀 석양에 날아드니 등에 금빛 번쩍이는데, 고기가 잔잔한 물결을 부니 푸른 무늬 생기누나. 온 세상 강호가 땅에 가득하니 이내 가슴 한껏 넓어지는데, 신선의 뗏목 타고서 하늘 나라 올라갈거나.” 하였다.

『신증』 어세겸(魚世謙)의 시에, “동쪽으로 오는 붉은 기운 강가에 뻗쳤으니, 도성[神京]이 지척인데 처소가 희미하네. 버들꽃 날아가고 실버들만 늘어졌는데, 연파(煙波) 위에 비 내리고 어부들 배 저어 가누나. 햇발이 구름 속에서 새[漏]니 붉은 빛 줄줄 나오고, 조수 휘몰아 언덕을 휘감으니 넓은 들 어딘지 모르겠네. 물결 치며 뛰놀고 노래하는 나루터 아이들이요, 언덕 위에서 그물 말리는 강변 집 딸이네. 푸른 창 붉은 난간이 누구네 집인가. 강 가까이 어른거리는 기장(奇章)의 별장이라네. 오는 소 가는 말 어느 때 끝날꼬, 배 돛대 총총한데 장사꾼 나그네들 분주하네. 해 지고 연기 잠겨 조망은 가이 없는데, 한 곡조[一聲] 뱃노래 어디서 들려오누나. 멀리 보이는 한강가에 나라의 창고인데, 조운선(漕運船) 해마다 바다에서 들어온다네. 강에 비낀 만 척 배 앞뒤 잇닿았는데, 사공이 노래하고 춤추니 용도 응당 말하리. 도읍지[神都]를 감싸서 억만 년에, 조종(朝宗 여러 강물이 바다에 흘러들어가 모임)하는 물결을 누가 막으리. 절월(節鉞)을 받들어 이곳을 지나가니, 강 건너는 친구들에게 주즙(舟楫 천자를 보좌하는 신하)의 재주 부끄럽네. 큰 소원은 이 물 기울여 기름진 은택을 이루어서, 억조 창생에게 고루 적셔 모두들 편안히 사는 것일세.” 하였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서호(西湖) 가에서 술 들고, 시 읊으니 해[日]가 일 년만큼이나 길구나. 하늘가 저 멀리 새들 날아 지나고, 수풀 끝에 어렴풋이 밥짓는 연기 보이누나. 이 고장 신선 지경인데, 사람들은 이곽(李郭)의 신선을 그리워하네. 새벽녘 짙은 경치야, 서시(西施)인들 이보다 더 고우리.” 하였다.

저자도(楮子島) 삼전도(三田渡) 서쪽에 있는데, 고려의 한종유(韓宗愈)가 별장을 이곳에 두었다. 우리 조정의 세종이 섬을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였는데, 공주의 아들 안빈세(安貧世)가 전하여 차지하였다.
○ 한종유의 시에, “10리 평평한 호수에 가랑비 지나갔는데, 갈대꽃 너머에 긴 피리 한 소리. 금솥의 국에 간을 맞추던 그 손으로, 지금은 낚싯대 메고 저물녘에 모래사장으로 내려온다네.” 하였다.
○ “홑적삼 짧은 모자로 연못가에 앉으니, 언덕 저 건너 수양버들이 저물녘 서늘함을 불어 보내네. 산보하고 돌아오니 저 산에 달 떠오르는데, 지팡이 머리엔 아직도 연꽃 향기 남아 있구나.” 하였다.
○ 정인지(鄭麟趾)의 서문에 대략 이르기를, “경도(京都)는 뒤에 화산(華山)을 지고, 앞으로 한강(漢江)을 마주하여 형승(形勝)이 천하에 제일간다. 중국의 사군자(士君子)들이 사신(使臣)으로 우리나라에 오면, 반드시 시를 지으면서 놀며 구경하다 돌아가는데, 동쪽 제천정(濟川亭)에서부터 서쪽으로 희우정(喜雨亭)에 이르기까지의 수십 리 사이에는, 공후귀척(公侯貴戚)들이 많이 정자를 마련하여 두어 풍경을 거두어 들였다. 동쪽 교외에는 또 토질이 좋고 물과 풀이 넉넉하여 목축에 적당한데, 준마가 만 필은 되는 듯 바라보매 구름이 뭉친 것 같았다.
그 가운데의 높은 언덕은 형상이 가마[釜]를 엎어 놓은 것 같으며, 그 위에 낙천정(樂天亭)이 있는데, 우리 태종이 선위(禪位)하신 후 편히 쉬시던 곳이다. 남쪽으로 큰 장에 임하였으며 저자도 작은 섬이 완연히 물 가운데에 있는데, 물굽이 언덕이 둘러쌌고, 흰 모래 갈대 숲에 경치가 특별히 좋다. 세종이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였으며, 공주가 또 작은 아들 안빈세(安貧世)에게 주었다. 이에 정자를 수리하고 한가할 때 왕래하며, 화공(畫工)을 시켜 그림을 그리게 하고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니, 대개 조종(祖宗)이 전하여 준 것을 빛내고 또 속세 밖에서 지내려는 본래의 뜻을 보이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니, 봄철이 되어 초목은 꽃다움을 다투고 푸른 안개 공중에 비꼈는데, 중류에서 사방으로 바라보면 돛단배 오르내리니, 무우(舞雩)와 호연(浩然)한 기운이 증점(曾點)이나 맹자(孟子)와 자리를 맞대고 함께 즐기는 것 같다. 혹 하늘과 땅이 화로처럼 더울 때에, 맑은 바람이 낯을 스쳐 오면 쾌재(快哉)를 부르던 초양왕(楚襄王)이나, 냉연(冷然)하던 열자(列子)와도 같이 역시 옷깃을 헤치고 돌아가기를 잊을 것이다. 또 누각이 맑고 별과 달은 강물에 잠겼을 제, 때마침 거문고를 타면 아아(峩峩)하고 양양(洋洋)한 곡조, 그 묘함을 알 자 없을 것이며, 다시 눈꽃이 하늘에 비껴 날며 백제(白帝)와 옥비(玉妃)가 뛰어 오르고 제압할 제는, 설령 옛날의 눈을 읊던 한퇴지(韓退之)나 나귀를 타고 가던 대씨(戴氏)도 고삐를 나란히 하여 와서 재주를 뽐내고 흥을 타고 서로 즐길 것이다. 대개 사시(四時)의 경치는 이렇게 같지 않지만 공의 즐거움은 한 가지인 것이다.
아, 누대(樓臺)와 산천의 아름다운 경치가, 천하 고금에 회자(膾炙)되는 것은 악양루(岳陽樓)와 등왕각(滕王閣)뿐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하늘가 수천 리 밖에 있어서 귀로만 들을 수 있을 뿐 눈으로 보지는 못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어찌 가까이 도성 근처에 있어서 조석으로 가서 놀며 지극한 즐거움을 펼 수 있는 것만 같겠는가.” 하였다.

잉화도(仍火島) 서강(西江) 남쪽에 있으며 목축장이 있는데, 사축서(司畜署)와 전생서(典牲署)의 관원 각각 1명씩을 보내어 목축(牧畜)을 감독하였다. 율도(栗島 밤섬) 마포(麻浦) 남쪽에 있는데 약초를 심고 뽕나무를 심는다.

『신증』 백운동(白雲洞) 인왕산(仁王山) 기슭에 있는데, 추부(樞府) 이염의(李念義)가 살던 곳이다.
○ 김수온(金守溫)의 시에, “길 가는 사람은 다만 뭇 산봉우리 푸른 것만 보니, 이곳에 공후(公侯)의 집이 있는 줄 어찌 알겠는가. 등나무 덩굴 굽어져서 뱀과 구렁이 숨었고, 돌문은 높아서 지나가는 우마(牛馬) 가리울 만하네. 풍악 소리 누대엔 높은 귀인들 많이 모였는데, 산수를 몹시 사랑하여 성정(性情)을 수양했네. 잔치 파하고 손들 돌아가는데 저 산 위에 달 뜨니, 한 누각 아름다운 경치 무엇이라 형용하리.” 하였다.
○ “일찍이 운종가(雲從街 종로거리) 옛 집에서 뵈었는데, 일만 인가(人家) 비늘처럼 다닥다닥 소란하기도 하였네. 어느 해에 집을 옮겨 한가한 데로 돌아왔나. 오늘 와서 그대 만나니 웃음과 이야기 향기롭네. 두어 이랑 아름다운 꽃 봄 지나서 늙었는데, 연못가에 가득 늘어진 버들 비 온 뒤 길어졌네. 산야의 운치 즐겨서 조회에 참여하기 게으르나, 사람들은 장차 묘당(廟堂)에 들어갈 것이라 말하네.” 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백운동(白雲洞) 저 속엔 흰 구름이 그늘졌는데, 백운동 밖엔 홍진(紅塵)이 깊었네. 한 길이 돌고 돌아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문득 도시(都市)에 산림(山林)을 감췄는데 놀랬네. 시냇물 졸졸 뜰을 따라 소리나고, 긴 솔이 반쯤 가리웠는데 바람이 읊조리네. 내겐 칡덩굴 사이에 고릉(觚棱 전당(殿堂)의 가장 높고 뾰족히 나온 모서리) 드러나는데, 화려한 집 그윽하여 언제나 침침하네. 묻노니, 그 누가 주인옹이 되었나, 전일에 높고 귀하던 장씨(張氏)나 김씨라네. 산수를 몹시 사랑하여, 비단옷 입은 몸으로 연하(煙霞)의 마음 가졌네. 봄철이면 바위 골짜기에 산 꽃이 밝은데, 공중에 메아리치고 짹짹 산새가 우네. 황매우(黃梅雨 매실(梅實)이 익을 무렵에 오는 긴 장마) 가늘게 뿌릴 제 인가가 희미한데, 동문(洞門) 이끼 빛 푸르러 깊숙하네. 가을빛은 목욕한 듯 수풀 언덕 맑은데, 달 밝은 밤 일만 집에 다듬이 소리 맑게 들려오네. 나뭇가지에 흰 눈 쌓여 찾아오는 거마(車馬)가 끊어졌는데, 장작 불땐 따스한 기운 주단 이불 속에 생기누나. 골 가운데 풍경은 사시(四時)에 제각각인데, 물에서 갓끈 씻고 산에 오르누나. 기영(耆英 덕망이 있는 노인)들 맞이하여 높은 회합 가질 때면, 수레 타고 동구에 들어와 친구들 모이네. 아담한 노래 투호(投壺) 놀이 즐거움 다함 없는데, 몇 날 남은 기우는 해 푸른 산에 낮아지네. 제공(諸公)의 높은 기개 구름보다 높은데, 해마다 관개(冠盖)들 서로 와서 찾네. 태평풍월(太平風月)에 동부(洞府)도 넓으니, 좋은 땅과 좋은 사람 서로 만나매 사람들 부러워하네. 내가 들으니 송악산 왼쪽에 신선의 고장 있는데, 자하곡(紫霞曲) 그 노래 지금도 전해진다네. 풍류와 문아(文雅) 그 옛날 상상하니, 서로 위 될 듯 아래 될 듯, 천 년의 지음(知音)일세. 내 시가 거칠고 졸하여 곡조 이루지 못하는데, 혹시라도 거문고 곡조에 들어갈 수 있을런가. 유전(流傳)하여 한양(漢陽) 가요가 된다면, 옛 사람과 함께 회포 같이할 것을.” 하였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송악산 5백 년에 왕기(王氣)가 다하였으니, 자하선인(紫霞仙人)이 의지할 곳 없었네. 화악(華嶽)의 태평 시대 만만세(萬萬歲)나 기약하는데, 백운동의 주인공이 자하선인의 꽃다운 자취 따르네. 왕성의 서북쪽 금잔지(金盞地)에, 소나무ㆍ상수리나무 그늘진데 좁은 길 희미하다. 바위에 걸치고 골짜기에 자리잡아 정사(精舍)를 지으니, 중화당(中華堂) 그 모습 저 멀리 보이누나. 물소리 냉랭(冷冷)하여 거문고ㆍ비파 울리는 듯, 시내 안개는 옹기종기 병풍 장막되었네. 아침에 나올 때엔 수 놓은 수레 휘장에 금어(金魚) 비치고, 저녁에 돌아와선 학창의(鶴氅衣) 긴 옷 입네. 여의(如意)를 가지고서 산호(珊瑚)를 부수지 않으며, 매[鷹] 부르며 눈 가운데 사냥도 아니하네. 가다가 좋은 날 만나 궁중에서 외척들 초대할 때엔, 특별한 은총 받아 왕궁으로 나아간다네. 기영(耆英)들 이따금 수레가 잇닿았는데, 방 휘장 열어 놓고 숲 기운 거두어 들이네. 화제(話題) 바뀌어질 땐 주미(麈尾)가 떨어지고, 술 기운 훈훈하니 초엽배(蕉葉盃 납작한 작은 술잔) 날리네. 바둑 놓고[彈碁] 장구 치며 못하는 것 없는데, 하물며 미인의 섬섬옥수로 악기를 다루는 것이랴. 마부는 말에 기대 서서 서쪽 성곽을 바라보는데, 흩어진 저녁 노을이 아침 햇빛 같네. 그윽한 사람의 이런 즐거움, 봄이고 또 가을이니, 운림(雲林)이 세상과 멀다고 누가 말하더냐. 나이 많고 지위 높은데 몸 또한 건강하니, 왜 다시 평지에서 위태로움 근심하리. 자손들 가진 홀(笏) 상 위에 가득하니, 집안의 번영 한평생에 족하네. 자하선인(紫霞仙人) 다시 올 수 있다면 응당 무릎을 꿇으리라. 아 백운동 주인 아니면 누구와 의지하리.” 하였다.

대은암(大隱巖)ㆍ만리뢰(萬里瀨) 모두 백악산(白嶽山) 기슭에 있는데, 곧 영의정 남곤(南袞)의 집 뒤이다. 박은(朴誾)이 이름을 붙이고 시를 짓기를, “주인이 산봉우리에 있는데, 우리 집 향 피우는 화로라네. 주인이 계곡에 있는데, 우리 집 낙숫물이라네. 주인이 벼슬 높아 세력이 불꽃 같으니, 문 앞에 거마(車馬)들 많이도 문안 왔네. 3년 가야 하루도 동산은 들여다보지 않으니, 만일에 산신령 있다면 응당 꾸지람을 받았으리. 손이 왔는데 다른 사람 아니고, 주인의 친구로세. 문 앞을 지나며 들어가지 않는 것도 차마 할 수 없고, 발걸음 당장 돌리는 것도 도리 아니라. 바위 사이에서 잠시 쉬니, 풍경은 참으로 뜻밖에 만났네. 물결이 감추어져 안개로 쌌다가 나를 위하여 열리니, 울던 학과 우는 원숭이 놀라지도 않누나. 주인이 금옥(金玉) 있으면, 열 겹으로 싸 두어 누구에게 함부로 주리오. 자물쇠 굳게 봉하여 밤중에도 지키나, 시내와 산에 한낮이 옮아간 줄을 모르네. 앉아 있은 지 오래매 날 저무는데, 흰 구름 먼 산에서 일어나네. 무심하기는 내가 저 구름보다 못하고, 자취 있으니 스스로 부끄럽네.” 하였다.
○ “대은암 앞에 쌓인 눈은, 봄들어 또 한 경치일세. 우연히 흥이 나서 놀러 왔고, 주인과는 기약도 없었네. 혼자 서 있으니 우는 새 가까이 오고, 길게 읊자니 붓 들기 더디어지네. 그대 집에서는 나의 방광(放曠)함을 용납하겠지만, 지금 사람들 해괴하게 여길까 두렵네.” 하였다.

청학동(靑鶴洞) 목멱산(木覓山)에 있다. 명(明) 나라 당고(唐皐)가 우의정 이행(李荇)의 서재에 쓴 시에, “조선(朝鮮) 성 안 청학동에, 누가 이곳 찾아 높은 집 지었나. 내 지금 사절(使節) 따라 와서 처음으로 들으니, 청학선인(靑鶴仙人)의 글독[書甕]이라네. 선인이 우연히 시전(市廛)에도 나오지만, 때로 학을 타고 저 하늘 가에 논다네. 그의 의복 음식 무엇인가 물었더니, 자색 구름 의상(衣裳)에 옥처럼 맑은 산골 샘물 마신다네. 동문(洞門)이 바로 저기 구름 깊은 곳에 있으니, 책상 위 신선의 책 몇 권인지 모르겠네. 근래에 종적을 아는 사람 있어, 왕문(王門)에 데리고 들어가 수양한다네. 신선 사는 그곳이 인간 세상 같으랴, 청학이 소리내어 공중에서 울고 있다네. 밤 깊어도 저 산에 달 밝아 있고, 봄은 가도 바위 밑의 꽃은 전과 같이 붉다네. 선동(仙洞)을 그리워하며 가지는 못하니, 새 시[新詩]나 지어 마음을 표시하네. 저 멀리 황산(黃山) 66봉으로 머리 돌리니, 흰 학과 푸른 소나무가 초연한 먼 생각 일으키누나.” 하였다.
○ 명 나라 사도(史道)의 시에, “푸른 학 어느 해에 동문(洞門) 열었나, 도인이 이 곳 찾아 좋은 집 지었네. 자줏빛 언덕 붉은 절벽에 샘물 소리 섞였고, 푸른 전나무와 소나무에 새소리 끊기지 않네. 마음은 성현을 짝지어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손으로 고금의 책 뒤지며 근원을 연구한다. 동국(東國)에 좋은 경치 많은 줄 내 알고 있지만, 한 번 가서 옥 술병 기울여 볼 길 없네.” 하였다.
○ 남곤의 시에, “일부러 그윽한 곳 찾아 푸른 봉우리 올라가니, 주인이 손을 사랑하매 손은 돌아갈 줄 모르네. 그대 집에 술 떨어지면 내 집에서 가져 오세나, 남산에는 꽃이 피고 북악에는 꽃이 진다네. 청학은 벌써 신선의 골격(骨格) 알아보는데, 홍도(紅桃)는 어찌타 굳은 마음 괴롭히나. 풍류 있는 두 늙은이 조용히 노는 곳에, 아이들 보내 우리 즐거움 방해하지 말라.” 하였다.

【봉수】 목멱산 봉수(木覓山烽燧) 동쪽의 첫째 것은 양주(楊州) 아차산(峩嵯山)과 응하니, 이것은 함경도와 강원도의 봉화[烽]요, 둘째 것은 광주(廣州) 천천현(穿川峴)과 응하니, 이것은 경상도의 봉화요, 셋째 것은 무악(毋岳) 동쪽 봉우리와 응하니, 이것은 평안도와 황해도의 육로(陸路) 봉화요, 넷째 것은 무악 서쪽 봉우리와 응하니, 이것은 평안도와 황해도의 해로(海路) 봉화요, 다섯째 것은 양천현(陽川縣) 개화산(開花山)과 응하니, 이것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해로 봉화이다.
무악 봉수(毋岳 烽燧) 동쪽 봉우리에서는 서쪽으로 고양군(高陽郡) 소질달산(所叱達山)과 응하고, 남쪽으로 목멱산 세 번째 봉화에 응하며, 서쪽 봉우리에서는 서쪽으로 고양군 봉현(蜂峴)에 응하고, 남쪽으로 목멱산 네 번째 봉화에 응한다.

【궁실】 종루(鍾樓) 운종가(雲從街 종로)에 있다. 태조 4년에 집을 짓고, 세종조에 고쳐 층루(層樓)를 지었는데, 동서가 5칸이고 남북이 4칸인데, 종과 북을 달아 새벽과 저녁을 알렸다.
○ 권근(權近)의 종명(鍾銘) 서문에, “조선조 천명을 받아 나라를 세운 지 3년에, 도읍을 한강 북쪽에 정하고, 그 이듬해에 비로소 궁전을 지었다. 그해 여름에 유사에게 명하여 큰 종을 만들게 하고, 완성된 다음 집을 큰 시가에 짓고 종을 달았는데, 성공한 사실을 기록하여 큰 사업을 후세에 전하려 함이었다. 옛날부터 국가를 다스리는 자는 큰 공을 세우고 큰 사업을 정하면 반드시 종과 솥에 명(銘)을 지어 새기기 때문에, 그 아름다운 소리가 땡땡ㆍ둥둥[鏗鍧]하여 후세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깨우치게 하며, 또 넓은 도시[通都]의 큰 고을에서 새벽과 저녁에 두드리고 쳐서, 백성들의 일하고 쉬는 시간을 엄하게 하니, 종의 용도가 큰 것이다.
우리 전하께서는 왕위에 오르시기 전부터 덕망이 날로 높아져 천명과 인심이 귀의하매 절로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었으며, 여러 어진 이들이 힘써 도와서 모두 그 지혜와 힘을 다하였다. 하루 아침에 고려조를 대신하여 나라를 세우시고서는 밤낮으로 염려하시며 법을 세우고 질서를 마련하여 자손 만대의 태평을 터 닦았으니, 공을 세웠다 할 만하고 사업을 정하였다 할 만하다. 이것을 명(銘)으로 새겨 소상하게 후세에 알려 주어야 할 것이다. 또 《주역》에 이르기를, ‘하늘의 큰 덕을 생(生)이라 하고 성인(聖人)의 큰 보배를 위(位)라 하는데, 무엇으로써 위(位)를 지킬 것인가. 그것은 인(仁)이라는 것이다.’ 하였으니, 성인은 천지의 만물을 살게 하는 마음을 마음으로 삼아서 확충(擴充)하기 때문에 그 위(位)를 보전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것이 하늘과 사람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 마음은 한 가지인 것이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날에,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도 중외(中外 중앙과 지방)가 편안하여, 포학한 정사(政事)에 고통받던 백성들이 모두 생생(生生)의 즐거움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저 순임금이라도 여기서 더할 수 없는 일이니, 이것을 더구나 명(銘)을 새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명(銘)에, ‘거룩할손 우리 임금, 명(命)을 받음이 크셨도다. 새 도읍 찾아오시니, 한강수 북쪽이었네. 옛날 송도(松都)에 있을 땐, 국운도 기구(崎嶇)하였지. 우리 임금 대신하시니, 포학(暴虐)을 덕으로 제거했네. 백성은 병기를 보지 않았는데, 하루 아침에 청명해졌네. 어질고 지혜로운 이들 힘 모으니 태평성대에 이르렀네. 원근(遠近)의 사람들 비로소 오니, 이미 많고도 번성해졌네. 이에 그 종(鍾)을 만들어서, 새벽과 저녁 알리게 했네. 우리의 공열(功烈)을, 이에 새기네. 신도(神都)를 진정하여, 천만 년 전하리라.’ 했다.” 하였다.

종각(鍾閣) 경복궁 광화문 밖 서쪽에 있다. 세조가 큰 종을 만들어 처음에는 사정전(思政殿)에 둘려 하다가 후에 종각을 여기에 짓고 달았다.
○ 신숙주(申叔舟)의 종명 서문에, “거룩하신 우리 주상전하께서, 태평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군비에 관한 일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생각하여, 유사에게 명하여 큰 종을 만들어 사정전 앞 행랑에 설치하여 금군(禁軍)을 호령하여 정제하게 하였다. 우리 조정의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이 창업 개국하신 후로, 태종 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이 윗 대의 공업을 빛나게 이었으며, 세종 장헌대왕(世宗莊獻大王)에 이르러서는 가득 찬 것을 보전하고 이룬 것을 지키되 문화로써 정치를 하니,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병란을 보지 못한 지 30여 년이었다.
문종(文宗)께서 왕위에 계신 지 오래지 못하고 뒤를 이은 임금이 어렸는데, 권신(權臣)과 간신이 나라 일을 마음대로 하여, 조정 정사를 흐려 어지럽게 하고 종묘와 사직을 위태롭게 하려 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영특한 무력(武力)을 분발시키고, 충과 의를 격려하여 대란(大亂)을 평정하고 대업을 정하시니, 중흥 시기에 당하는 것이었다. 정사와 형법을 닦아서 밝히며 기강을 고치고 폐단을 제거하여 조종조의 옛 모습을 모두 회복하였는데, 먼저 군사에 관한 정치를 힘써서 이끌고 격려하기를 하지 않음이 없으니, 1년이 되지 않아서 조정과 민간이 깨끗하고 편안해졌다. 궁중의 호위가 정제ㆍ엄숙하여 중외가 편안하고 북쪽 오랑캐와 해적이 와서 알현하고 정성을 바치며 잇달아 앞을 다투니,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않되 생각하는 것이 깊고 계획하는 것이 멀어서, 중흥의 사업을 이룬 것이 지극하다고 하겠다.
대개 큰 공업을 세운 자가 반드시 그 사실을 종(鍾)과 솥에 새겨 공덕을 밝히고 충훈(忠勳)을 기록하는 것은, 큰 사업을 전해서 후세에 보여 주려 하기 때문이다. 지금 큰 그릇이 이루어지는데 어찌 명을 지어 새겨서 후세에 밝게 보여 주지 않을 것인가. 신(臣) 숙주는 삼가 손을 모아 절하고 머리를 숙입니다. 다음에 명을 붙입니다. 명에 말하기를, ‘거룩하신 우리 태조, 동쪽 나라 세우셨네. 성인과 성인 서로 계승하여, 교화 정치 더욱 높았네. 다스려도 항상 편안하지 못하니, 상제께서 경계를 보였네. 큰 운수 중간에 막혀, 나라가 편안치 못했네. 권신과 간신이 어지럽혀, 나라 정치 마음대로 하였네. 독한 연기 사나운 불길, 활활 번져 갔네. 하늘이 우리 임금 돌보아 용맹과 지혜 주었네. 신성한 위무(威武) 분발하여, 종묘와 사직 안정시켰네. 충성스럽고 어진 이 힘 다하여, 나비들이 밤 촛불에 날아들 듯 하였네. 큰 난리 평정하기를, 하루도 안 걸렸네. 나라 안이 편안하고, 노래 소리 즐겁기도 하네. 이때 우리 임금, 기강을 정돈하셨네. 우리 옛 법 회복하여, 모두 다 펼쳐 놓았네. 편안하다 맘 놓을세라, 위태로움 잊을세라. 나라 중흥 보전하려, 무비(武備)를 먼저 힘쓰셨다. 여기서 큰 종 만들어, 궁중에 달았네. 뗑뗑 둥둥 치는 소리에, 무사(武士) 벌여 섰네. 정정하고 당당한 모습, 장할손 우리 큰 사업이네. 위풍이 떨치고 빛나, 끝없이 멀리 퍼지네. 산융(山戎)과 도이(島夷)들, 위엄에 눌리고 덕에 감복하였네. 폐백 가지고 보물 바치며, 관문 밖에서 뵙네. 요사한 공기 깨끗이 가시고, 온 나라에 근심 없어졌네. 백성들 즐거워서, 아름답고 어젓하구나. 거룩하신 우리 임금, 순(舜)임금ㆍ우(禹)임금 짝 되시네. 선왕 사업이었지만, 임금의 의사로 창작하신 것일세. 충훈(忠勳)들 함께 따라 영특하신 무력 협찬하여, 큰 공적 세우니 우리 동방 은혜로세. 여기 큰 종에 명문 새기니, 협욕(陜鄏) 땅 함께 짝하네. 몇 천억 년 지내도록, 길이 전해 썩지 않으리.’ 했다.” 하였다.

대평관(大平館) 숭례문(崇禮門) 안에 있다. 중국[中朝] 사신을 대접하던 곳. 관 뒤에 누(樓)가 있다.
○ 예겸(倪謙)의 〈눈[雪] 갠 뒤 누에 오르다〉라는 부(賦)에, “내가 황문(黃門) 사마(司馬) 선생과 함께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 대평관에 멈추었는데, 관 뒤에 누가 있어 전망이 좋다. 때는 경태(景泰) 원년(세종 32년) 정월 초이레이다. 아침 일찍 식사하고 산보하니, 쌓인 눈이 처음 개였다. 선생이 나와 함께 올라, 경치를 바라보다가 붓을 가져 오라 하여, 일시의 좋은 풍경을 적으니, 감히 상림(上林)과 자허(子虛)를 따를 수는 없지만, 또한 남루(南樓)의 방일(放逸)을 모방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 남국(南國)의 제후(諸侯)들이 문왕(文王)의 교화를 입어서 백성을 덕으로 다스린 남은 은혜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치니, 시인(詩人)이 추우(騶虞 신령한 짐승의 이름) 시를 지어 칭찬하였다. 내가 여기서 반드시 은혜를 조정으로 돌리는 것은 옛날 시인의 끼친 뜻이니, 보는 이는 이전 뜻에서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에 부(賦)를 붙인다.
부에 말하기를, 성인은 임금 위에 계시며, 새 책력을 사방에 반포하였네, 동쪽나라 돌아보고 허리띠 같은 물 한하여 서로 바라보니, 어찌 충성ㆍ예절 다 하지 않으리. 때로 와서 조회하니, 특별 우대 더하는 것 마땅하여, 황실[九重]의 조서(詔書) 내리셨네. 이에 글하는 신하에게 명하여 사신[皇華]으로 보내니, 마자(馬訾 압록강)를 건너고 낙랑(樂浪 평양)을 지났도다. 사신배 창해(蒼海)에 띄워 한양에 사절(使節)을 멈추었다. 황제 조서 선포한 다음 공당(公堂)에서 잠시 쉬노라니, 누(樓)가 있어 높기도 한데, 규모ㆍ제도 날아갈 듯, 그린 기둥 꿩 나는가. 새긴 난간 가시나무 화살 마귀도 쫓겠네. 밝은 산은 구슬 서까래에 비치고, 봄 구름 붉은 벽에 스치는 듯. 선선한 바람 거침 없이 들어오고, 높은 하늘에 도듬 놓고 홀로 섰네. 믿을 만하도다. 황학(黃鶴)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생각하면 취미(翠微 푸른 하늘)도 움키리라. 넓은 희포 시원스레 풀어놓고, 큰 물결(洪濤 높은 곳의 공기)도 깨끗하게 씻어 내네. 삼춘(三春)이 처음 오고 육화(六花 눈)가 방금 개었다데. 흐렸던 것 걷어 버리고 얼굴 드러내어 밝은 햇빛 비쳐오네. 사마(司馬) 선생 나를 이끌어 층층 섬돌 밟고 여러 기둥 붙잡고 올라가, 굽은 난간 의지하여 높은 지붕 굽어보니, 온 누리가 얼음병[氷壺]인양 바라보이고, 구슬섬[瓊島] 신선 나라[蓬瀛] 여기인 듯 여겨지네. 삼한(三韓)의 거룩한 모습 장하기도 하여, 만고의 깊은 정 활짝 열리는도다. 자리 가까이 보면 소나무 푸른 수염 늘이고, 늙은 몸 꿈틀거려 옥룡이 다투어 날아가며, 검은 여의주 잡으려 싸우는 듯. 멀리 둘린 방문과 대문들 흰 벽돌 어슷비슷, 구슬 수풀 엇갈렸는데, 맑은 일만 기와 가득 쌓이고, 하얀 일천 문은 백회가 엉겨 있다. 산을 말하면 북악이 뒤에 솟은 데다 궁전이 빛을 더하고, 남산이 앞에 높은 데다 성곽이 사면으로 둘렸으며, 높은 성벽 구불구불 서쪽으로 둘려 있고, 잇닿아 연이어서 높고 낮게 동쪽으로 뻗어 갔네. 물을 말한다면, 개천(開川)이 둘러 가는데, 은하수 내리 꽂은 것 같고, 한강수 넓게 흘러 발해(渤澥)로 들어간다. 고기들 편안하게 키워 주고, 논밭을 참으로 윤택하게 하여 준다. 그 중의 5감(監) 6시(寺) 등 여러 관청들은 종ㆍ북 소리 은은하고, 서로 다투어 높고 기이하네. 닭ㆍ개 소리 서로 들리니, 정교(政敎)의 시행 알 수 있는데, 읊조리고 감상함 끝없으니, 이내 몸 구이(九夷)에 있는 줄 모르겠어라. 선생이 웃으며 하는 말이, 경치 구경할 줄 그대 알면, 이 눈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풍년의 좋은 징조 상천(上天)이 주신 것이라네. 아, 우리 황제, 덕이 천지와 합하시고, 화기(和氣)로 평화를 이룩하시니, 맑은 기운 대지에 서리어 비 오고 개는 것 때 맞추어 만 백성 모두 기르나니, 신령한 기운 우내(宇內)에 퍼지고, 남은 물결 먼 나라에도 넘치나니, 기자(箕子)의 옛나라 백성들 많고 잘 되는 것 어느 것이 황제 은혜 아니겠는가. 내 이 말 듣고서 무릎 치며 노래하네. 층루(層樓)의 높음이여, 구조가 정밀하기도 하구나. 옷을 걷고 올라가니 눈에 가득 은세계일세. 남은 은택 점점 퍼짐이여, 우리 황제 서울부터라네. 즐거운 이 밝고 밝은 낙토로세. 백성과 물건 풍성하다 동쪽 나라의 신하됨이여, 태평 시대 이루었다 천추 만대 가도록. 황제(명황(明皇))의 변방[屛翰] 굳건히 하리라.” 하였다.
○ 기순(祁順)의 〈등루부(登樓賦)〉에,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영락(零落)함이여, 고루하여 벗 적은 것 부끄럽다. 전철(前哲)의 규범 따름이여, 아름다움을 믿고 좋아하였도다. 영해(嶺海)의 먼 지역 싫어하여, 일찍부터 중원[中州]에 노닐었다. 견문이 넓지 못하다 함이여, 멀리 나아가서 두루 놀기 소원이었도다. 이 세상 좁고 험함을 슬퍼함이여, 인생 일생[浮生]이 얼마 안 됨을 탄식했도다. 뽕나무로 만든 화살 들고 사방으로 쏘는 것이여. 어찌 남아의 처음 뜻이 아니었던가. 혼자 좋아하며 만족해 함이여, 한평생 그르치지 않을런가. 우물 안 개구리와 하루살이도 제딴은 잘난 체 한다네. 옛날 굴원(屈原)의 멀리 놂이여, 말뿐이고 실제는 아니었도다. 어찌하여 사마공(司馬公)의 많은 지식도 중국에만 그쳤는가. 생각하면 구주(九州 중국)땅이 적막하고도 넓었건만, 내 발자취 절반이나 미쳤네. 봉호(蓬壺)의 좋은 경치 들음이여, 한 번 와서 숙원(宿願)을 풀려 했도다. 천자의 은명을 받음이여, 수레 달려 동한(東韓)으로 떠났도다. 천애(天涯)를 향해 달림이여, 아득한 길 멀고 멀도다. 아침에 도성[大都]에서 떠남이여, 계문(薊門)을 지나 잠시 쉬도다. 난하(灤河) 맑은 물에 씻음이여, 갈석(碣石)의 옛 자취 찾도다. 겹겹한 관문 산해(山海)가 높음이여, 높은 누대 작은 여염에 솟았도다. 요택(遼澤)이 얼고 흐리지 않음이여, 학야(鶴野)는 멀고도 황폐하도다. 압록강을 건너 동쪽으로 옴이여, 현도(玄菟)ㆍ낙랑(樂浪) 향하도다. 신세웅(辛世雄)을 살수(薩水)에 조상함이여, 기자(箕子)를 평양에서 뵈옵도다. 황주(黃州)의 좋은 대숲[脩竹] 찾음이여, 봉산(鳳山)의 아침 볕[朝陽] 구경하도다. 개성을 지나며 숭악(嵩岳) 쳐다봄이여, 어느 사이 새 서울에 왔도다. 넓고 깊은 황제의 은혜 선포함이여, 나라 사람들의 시청[觀聽]을 놀라게 하는도다. 물러나와 대평관에 머무름이여, 맑은 흥 끝이 없구나. 누(樓)에 올라 사면을 바라보니, 일만 경치 한곳에 모였도다. 왕궁은 울울(鬱鬱)하고도 빛남이여, 성곽이 저 멀리 에워쌌도다. 앞에는 남산 뾰족하게 솟았고, 뒤에는 북악산이 높도다. 긴 행장은 아홉 거리에 잇닿았고, 크고 작은 집들 사방에 벌여 있도다. 창해(蒼海)가 그 어디메뇨, 동쪽을 바라보니 물결이 하늘에 닿아 끝이 없도다. 신산(神山)이 여기 있다더니, 아, 신선들 사는 곳이로다. 불현듯 마음 동하고, 뜻이 향함이여, 수레 차려 따라가는도다. 신령이 나에게 길한 점괘 알려 줌이여, 신관(神官)이 나를 도와 의심 없게 하도다. 비렴(飛廉 풍백(風伯))을 명하여 맑은 티끌 일게 함이여, 금영(黔嬴)이 앞길 인도하도다. 봉황새 어지럽게 날아들어 모임이여, 학이 훨훨 날며 그 아래 있도다. 여덟 용[八虯]의 꿈틀거리는 것 타고서 무지개 깃발 펄렁거리도다. 보배 검[寶劍]을 함지(咸池)에 담금이여, 큰 활을 부상(扶桑)에 걸도다. 좋은 음찬 가져 서로 맞이하여 구슬가지로 음식 장만하여 드리도다. 맑은 이슬의 정액(精液)을 마심이여, 화려한 꽃을 구슬에서 캐도다. 뭇 신선들의 아름다운 모습[妁約] 모임이여, 은근한 정으로 나를 맞아 주도다. 하늘의 별들처럼 빽빽하게 빛남이여, 구름 우레처럼 빠르게 달리도다. 망서(望舒)를 시켜 서로 잇닿게 함이여, 구망(勾芒 귀신 이름)을 불러 짝하도다. 두 의사의 깊은 속[綢繆]을 통함이여, 은밀한 분부를 하녀(下女)에게 주도다. 내 마음의 고요하고 맑음을 아름답게 여김이여, 나의 모습[余骨] 비범하다 하도다. 청허(淸虛)한 마을[府]에 나를 앉힘이여, 나를 백옥(白玉) 자리에 손님으로 모시도다. 얼음 복사, 푸른 연근 모두 다 진설함이여, 용고(龍膏)를 불러 앞에 오도다. 운하(雲和) 곡조 멀리 예상(霓裳) 춤 잘도 추네. 좋은 모임 아직도 흡족하지 못한데, 저 해는 빨리도 새벽을 재촉한다. 취하여 옷을 떨치고 크게 노래 부름이여, 여러 사람 칭찬이 놀랍도다. 옛날 놀던 일 생각하며 도성을 바라봄이여, 아홉 층 저 하늘 위에 있도다. 이곳이 즐겁지만 내 나라 아니니 어쩌면 머물러 놀까. 길게 읍하고 짐짓 이별함이여, 다시 사방 돌아보며 어물어물 떠나지 못하도다. 신선 수레 앞뒤로 달림이여, 온갖 신령들 옹위하고 나가도다. 구슬같은 새 글[新篇]을 줌이여, 장생(長生)하는 진결(眞訣)도 주도다. 큰 기운[一氣]의 매우 신령함이여, 맑고 깨끗하여 모자람이 없네. 천천히 절월(節鉞) 놓고 즐거워함이여, 불현듯 옛 고향 생각나네. 이 놀이 특별도 하여, 마음속에 또렷하여 잊기 어렵네. 신선되는 그 길이 있는지, 옛 사람의 애써 찾으려던 것이었네. 이내 몸이라고 못하랴 어디 한 번 만났으면. 제일 높은 것은 덕을 세움이요, 그 다음은 공을 세움이요, 또 말[言]을 세움이라. 명성과 광채[聲光]를 온 누리에 전하여, 영원한 세대에 언제나 남으리니. 이것이 나의 마음에 바라는 일이니, 또 어찌 신선의 집을 부러워 하리오.” 하였다.
○ 고윤(高潤)의 〈등루시(登樓詩)〉에, “새벽에 홀로 조선루(朝鮮樓)에 오르니, 누대 앞 경치 어찌 그리 유유한가. 손으로 황학(黃鶴)을 불러도 오래토록 오지 않고, 여러 층의 처마, 겹겹이 포개진 집에 바람만 솔솔[颼颼] 부누나. 시 잘 짓던 이적선(李謫仙), 그 사람 지금 어디 있나. 내 문득 새로 지은 시 가져다 첫 머리에 쓴다네. 꽃 구경 좋다지만 얼마 안 가서 꽃 질까 애석해 하고, 그 글을 다 읽기도 전에 수심 먼저 생긴다네. 악양루(岳陽樓) 또렷이 갠 날 냇가의 수림(樹林), 이 누의 그림 그대로보다는 못하리. 난간 밖의 저 산은 무한히도 푸른데, 흰 구름 들보에 가득 차고, 푸른 소나무 외롭다. 궁전이 서로 빛나 단청도 휘황찬란한데, 그 중에 사는 이는 정녕 신선이리라. 태양(太陽)이 내리 비치고 붉은 대문 열어 놓으면, 비단옷, 검은 모자 어지러이 서로들 들어간다네. 뉘 집의 새댁[小婦] 짙은 단장 다했는가, 구름 같은 머리, 검은 상투[鴉髻]에 황금 빛 곁들였네. 붉은 빛[血色] 비단 치마에 난초 사향 풍기는데, 주렴을 반만 걷고 술을 드리웠네. 여섯 거리 세 저자[市]에 노는 한량 많아, 푸른 실 끝 다투어 잡고 옥병을 끄네. 높고 낮은 풍악 소리 종일토록 들리니, 천금을 다 흩으면서 갑오(놀음) 빼기 안 구하네. 머리 돌리면 저기 저 한강물 부럽기도 하니, 도도(滔滔)하게 흘러가서 넓은 바다와 통한다네. 어저께는 놀잇배 타고 놀았는데, 가벼운 돛 조용히 연파(煙波) 중에 걸려 있었네. 은실같이 가늘게 썬 것, 양화도의 생선회인데, 실버들 저 사이에선 희우정(喜雨亭) 꾀꼬리 소리 들려온다. 즐거운 놀이 마치기 전에 궂은 비 내리고, 누로 돌아오자 하늘 벌써 개였네. 엄자릉(嚴子陵)이 창주(滄洲)의 나그네인 줄 그대 알지 못하나, 어찌 일찍이 배 삼킨 고래를 낚았던가. 천자가 불러도 가려 하지 않았는데, 밤중에 자다 보니 하늘의 별이 움직였다. 맑은 기풍, 높은 절개 사치하고 화려한 사람들 압도(壓倒)했는데, 지금도 역사에서 그 이름 전해 온다네. 높은 난간에 그저 기대어 길게 웃으려 하지만, 웃으면 하늘 사람들 놀라지 않을는지. 중산(中山)의 붓과 강주(絳州)의 먹으로, 종이[楮先生] 위에 한바탕 풍운 일으킬까. 만고의 모든 일 일소(一掃)하려 하나니, 중선(仲宣)의 울울한 것이야 말할 것 무엇 있으리. 안중에 보이는 것 천지가 넓을 뿐인데, 한 쌍의 날랜 새매 가을철이라 날아드네. 내일 아침 말을 타고 조정으로 돌아가면, 이곳의 풍광은 어느 호걸이 차지할꼬.” 하였다.
○ 진감(陳鑑)의 시에, “화려한 집 층층 누대 구조도 깊은데, 3천 리 밖 외지에서 여기 한 번 올라 보네. 웃고 말할 때, 난간에 기댄 흥취 있었지만, 느낀 회포는 임 그리운 마음이니 어이하리. 바람은 소나무 물결 몰아 만학(萬壑)에서 불어오고, 하늘은 그림 펼쳐 외로운 흥 돋우누나. 흰 구름 땅 위에 가득하고 황학(黃鶴)이 나니, 사람은 요대(瑤臺)에 있고 자리엔 녹음(綠蔭)일세.” 하였다.
○ 명 나라 장영(張寧)의 시에, “높은 다락 아득하게 푸른 공중에 솟았는데, 서쪽으로 장안(長安)을 바라보니 내 마음 이미 통하였다. 하늘과 땅이 은혜 있어 같이 덮고 실었는데, 중국과 오랑캐들 모두 다 한곳으로 모이네. 요양(遼陽)에서 동쪽으로 3천 리를 내려오니, 화악(華岳)이 서쪽으로 백이(百二) 겹이나 잇닿았네. 금 궁궐 옥 대문엔 수위(守衛)도 엄하고, 흰 깃발 누런 부월(斧鉞)로 장군들 정해졌네. 국경 남쪽 먼길엔 봉화 연기 끊어졌고, 북쪽 지역 여러 진영엔 방위도 웅장하도다. 온 누리 모든 제도 주(周) 나라 법칙인데, 강역은 모두 다 한(漢) 나라 봉역(封域)에 속하였다. 구성(九成)의 풍악 아뢰니 봉새들 모여 오고, 5색 상서 구름에 6룡이 달리누나. 상원(上苑)의 봄빛은 바다처럼 넓은데, 귀족들의 비단옷 무지개처럼 찬란하네. 옛부터 없었던 데에서 엮어 만들었고, 생민(生民)으로 아직 없었던 공업 잇달아 세웠네. 일만 나라들 수레로 배로 폐백 보내 오는데, 일천 집 가가호호 노래 소리와 악기 소리 들려온다. 교화는 구주[九服] 담장 밖까지 행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삼왕(三王) 예악 속에서 살고 있는 것, 억 년을 두고 변함 없으리. 고황제(高皇帝 명 나라를 건국한 임금) 공업 두 서울 함께 있으니, 신령의 조화로다. 황당한 말 도리어 장몽수(莊蒙叟 장자(莊子))를 웃게 하고, 부(賦)를 지으려니 좌대충(左大沖)을 기다려야겠네. 이 몸 이역(異域)에 사신 와서 생각해도 끝이 없는데, 마음은 서울에 있으나 바라보아도 다하기 어려워라. 전부터 동쪽 나라에 문화 풍속 좋으므로, 옛날부터 중국에서 대우도 융숭했네. 황실에 번병(藩屛)되어 절도(節度)를 숭상하고, 성인의 모범 형용하여 피폐한 백성 구휼하네. 안으로 경기에 접하니 백성들 편안하고, 밖으로 변방을 제어하니 요충지일세. 팔도에 병부(兵符)를 나누니 지방 풍속 좇았고, 겹문에서 딱딱이[折]를 쳐 흉한 일 있을까 방비했네. 수륙(水陸) 길 멀리 오니 시골 말씨 다르건만, 천지간에 봄 가득 차니, 풍경이야 어디나 같으리. 닭ㆍ개 소리 들리니 민가는 사방 들에 잇닿았는데, 연하(煙霞) 속의 산성(山城) 천 봉우리나 뻗었네. 흐르는 세월 또 한 번 봄철 따라 바뀌니, 미물(微物)들 모두 다 조물주(造物主)의 은택 입었네. 높고 낮은 곳 뽕나무 푸른 잎 퍼져 나니, 지정(池亭) 가의 살구나무 벌써 붉은 꽃 피었네. 빈 수풀에 땅이 좋으니 인삼(人蔘)이 자랐고, 먼 섬에 모래가 평평하니 큰 조개 많이 나네. 꽃다운 풀 돌아가는 나그네, 생각 흐리게 하는데, 푸른 이끼는 전에 놀던 자리 메꾸지 않았네. 시냇가의 남은 흰 점은 봄 오기 전 눈인데, 버들가지에 새로 난 누른 빛, 밤 사이 바람에 터졌네. 대숲 밖 서늘한 그늘에 갠 풍경 맑은데, 매화나무 곁 향기로운 아지랑이 새벽 들어 몽롱(朦朧)하네. 동산에 복사ㆍ오얏꽃 피니, 벌은 꿀을 빚고. 들판에 마른 쑥대 많으니, 사슴이 용(茸)을 기르도다. 꽃 떨어지고 피는 것 비단 오린 것 같은데, 사람이 오고 가는 것은 날으는 쑥대같네. 흥이 오면 난간 의지하여 긴 피리 불고, 앉은 지 오래면 처마 끝 돌며 짧은 지팡이 짚는다네. 고절(高絶)한 행동은 서시(徐市) 나라 엿보려 하는데, 청허(淸虛)한 그 마음 무이궁(武夷宮)에 쉬는 것 같네. 부상(扶桑)과 석목(析木)이 가까운 듯하여, 방장(方丈)과 영주(瀛州)도 찾기 쉬운 줄 알겠네. 용처럼 뛰는 말 타고서 멀고 먼 길 가볼거나. 학처럼 늙은 나이 공동산(崆峒山)에 놀아 볼까. 향기로 둘러싸인 장막은 술로 돌려 있고, 구슬처럼 푸른 난간 비단 줄로 얽혀 있다. 좌석에 들어와 정이 있는 듯 제비는 춤추는데, 창을 지나도 말이 없으니 꾀꼬리 어찌 저리도 게으른가. 전각에 빛이 나니 황제의 필적 여기 있고, 거리에 기쁨 넘치니 채색 비단을 묶었어라. 어느 곳 시골에는 농악소리[社鼓] 들리는데, 여기저기 정원(庭院)에는 새긴 기둥 높이 섰네. 맑은 샘물 동리에는 조용한 집 아담한데, 흰 돌 세운 산문(山門)에는 옛 절이 높이 솟았어라. 있는 듯 다시 없어지는 아지랑이 들어오고, 차갑다가 잠시 더워지니 봄볕 푸근하다. 여러 층의 얼음 절벽 아래 언제나 여름철이 좋고, 높은 고개의 외로운 나무는 올해도 겨울을 견디어 내네. 사냥하러 나가면 꿩ㆍ토끼도 많고, 나무하고 풀 베는 데는 원래 아이들 금하지 않는다. 내와 언덕 둘러 싸였으니, 멀리 바라볼 만하다. 인물도 기특하고 많으니, 수려한 기운 모인 탓이리. 가죽 신 긴 소매는 일하러 나온 부인이요, 풀옷의 헌 패랭이는 관청에 매어 있는 품꾼일세. 부중(府中)에서 북을 치니 뭇 아전들 들어가고, 원외(苑外)에서 피리 불며 적은 군사[小戎] 훈련하네. 시골 할머니 성 안 들어 올 땐, 토산(土産) 포목 가져 오고, 흙화로에 불을 때어 동철을 주조(鑄造)하네. 월상(越裳)인양 거듭 통역하니 왕래에 편리하고, 노(魯) 나라인 양 어진 이가 많으니 선비들로 가득 찼네. 저 멀리 누선(樓船)은 바다 인 오게 하고, 비 개자 들판엔 농사짓는 이들 나가네. 바다 어귀 조수 나가니, 천마(天馬) 오르는 듯, 모래톱에 티끌 맑으니 외기러기 보이도다. 마읍(馬邑) 땅의 구릉(丘陵)은 얼마나 멀고 가깝나. 봉산(鳳山)의 풀 숲[榛莽]도 함께 아득하기만 하네. 그 옛날 임둔(臨屯)은 진번(眞番) 경계 연접했는데, 평양성 저 멀리 패수(浿水) 동쪽에 잇닿았네. 기자묘(箕子廟) 황량한 사당에 비석이 높이 섰고, 고려 시대 수자리 터엔 돌만이 험상궂네. 올라와 구경하는 이들 예나 이제나 그치지 않는데, 좋은 경치 모두 다 뇌락한 가슴속에 들어오네. 풍속을 묻는 옛일 오계자(吳季子)를 찾아볼까, 재주 없는 이내 몸 정승 주공(周公)이 부끄럽다. 묘금(卯金)을 마음대로 열람하려 천록(天祿)에 올랐고, 백옥에 글을 간직하니 사홍(射洪)에 가득 찼네. 일을 의논하다가는 스스로 양자(楊子 양웅(楊雄))의 말더듬이 부끄럽고, 시기에 통함은 중거(仲車)의 귀머거리가 부럽네. 묻혀 있는 이내 몸 개천 속의 나무가 우스운데, 세상에 드러나고 보면 뉘라서 부엌에 때는 오동[爨下桐]을 꺼리겠는가. 승지의 구경은 깊은 지경(地境) 탐하지만, 높이 올라가도 하늘엔 미치지 못한다네. 지경이 묘한 곳 당도하면 공교롭게도 서로 모이는데, 정이 극진한 곳에 이르면 짙어지기만 하여라. 이슬 묻혀 시를 쓰니 은붓대 젖는데, 석양녘에 술을 재촉하니 옥병이 다 비었네. 시 읊기를 다하니 외로운 회포 상쾌해지는데, 취한 뒤에 두 귀밑을 혐의하네. 난간을 의지해 거듭 바라본다고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이 좋은 풍경 좋아 시절이 태평함을 즐기노라.” 하였다.
○ 명 나라 장성(張珹)의 시에, “황명(皇明)의 기풍 한 번 떨쳐 호원(胡元) 풍속 쓸어내니, 옥이며 비단이며 육지로 해로(海路)로 만 나라들 와서 조회하네. 밝고 밝아 화락하기 반 년 동안, 곳곳에서 사람들 태평곡 노래하누나. 태평곡 들어온 지 오래니, 이 이름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하루 아침 명을 받들어 조선성(朝鮮城)에 나오니, 공관(公館)의 그 이름이 분명히 태평(太平)이네. 그 옛날 이 이름 지은 것 어찌 뜻없이 했으리, 길이길이 태평 세대 누리기 위해서리라. 내가 들으니 이 고장은 기자(箕子)의 옛 봉역(封域)인데, 순후한 그 풍속이 여러 변방 나라와 다르다네. 남자는 밭갈고 여자는 베짜며 선비는 학문에 부지런한데, 의관도 점잖은 모습 중화(中華)의 풍속이네. 정성을 다하고 힘써서 신하 직분 다하니, 천자께서 보통으로 보지 않아 기쁜 일 지으시네. 새 황제 즉위하사 정사도 새로우니, 경하(慶賀) 예식 드렸다고 사신 보내 은총 베푸시네. 황제 말씀 선포하고 비단 폐백 나눠주느라, 몇 달 동안 분주하고 이제야 비로소 한가하네. 동행의 김태복(金太僕)이 나를 이끌어 태평관의 누(樓)에 올랐는데, 누가 높고 서늘한 기운 많아 5월이지만 가을 같네. 눈앞에 펼쳐진 풍경 모두가 구경할 만한데, 게다가 어진 임금 있어 손님 대접 잘도 하네. 빛난 잔치 크게 벌이고 멀리 온 수고 위로하는데, 취중에 올라 보니 이내 생각 끝간 데 없네. 그림 문지방 깊은 곳에 점심 연기 희미한데, 들말[野馬]은 오지 않고 발 아래에서 울음 우네. 물결 소리인양 저 메아리 노송 있는 고개에서 들리고, 꾀꼬리 북인양 수양버들 동쪽에 드나드네. 남산ㆍ북악이 진하게도 푸른데, 비 뒤의 뽕나무ㆍ삼이 푸른 띠를 둘렀어라. 천왕(天王)은 은총 내리고 나라는 근심 없는데, 또 한 번 새로운 기개 보겠노라. 태평관에 이제 와서, 높은 누에 다시 올라 크게 한 번 웃어보노라. 황명(皇明)이 천명받아 억만 년 전하리니, 다음 날에도 다시 와서 함께 읊고 구경하오리.” 하였다.
○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아로새긴 문지방, 비단 난간에 하늘 빛도 깊은데, 저 멀리 천상(天上)에서 사신은 부절 가지고 지금 왔네. 성주(聖主)가 은혜 베풀어 옥새 조칙 반포하는데, 국왕이 은혜 보답하여 단심(丹心)을 기울이네. 구름ㆍ연기 자리를 두르니 거문고ㆍ서책 윤(潤)이 나고, 소나무ㆍ전나무에 바람이 이니 새들 와서 지저귀네. 정원에 말 소리 없으니 봄빛이 고요한데, 발 가득 꽃 그림자 대낮에도 그늘이 생기누나.” 하였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달빛 따라 누대에 오르니, 생각이 호연(浩然)하다. 문지방 의지하여 서 있으니, 졸음 오는 줄 모르겠네. 담장 저 건너로 등잔불 희미한데, 성곽 주위의 인가들 멀고 가깝게 잇닿았다. 전나무ㆍ잣나무 바람받아 그림자 움직이는데, 봉우리들 머리 들고 하늘을 맞이하는 것 같네. 돌아가기 재촉하는 북 소리 기다리지 말고, 술기운 어한(御寒)은 됐으니 잔 더 돌리지 말라 일렀노라.” 하였다.
○ “누에 오르니 밤 깊은 줄 모르니, 구경하려고 멀리서 온 데 참으로 비하겠네. 꽃은 아직 맺지 않았는데 봄은 벌써 눈에 가득하고, 나무에 그림자 생기니 달이 내 마음 알아주네. 경치는 보아도 다함 없으니 맑은 구경 외롭고, 시흥(詩興)은 처음 온 것을 써서 짧은 시에 붙이노라. 이 보소 이 나라 사람들 웃지를 마소, 산음(山陰)에 배질하던 옛 그림 다시 이으려네.” 하였다.

모화관(慕華館) 돈의문(敦義門) 밖 서북쪽에 있다. 본래는 모화루(慕華樓)였는데, 세종(世宗) 12년에 고쳐서 관(館)으로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봄 성에 치장한 말[珂馬] 새벽부터 들끓는데, 저 멀리 청산에 멈추고 특별한 자리 벌였네. 시와 예(禮) 오랫동안 이어받아 사람들은 학문 좋아하고, 문(文)과 무(武) 서로 함께 해서 나라에 어진 이 많다. 돌아가려는 마음 밤마다 난하(灤河) 달빛에 오가는데, 객지 생각은 새벽에 한강물 위 연기와 같이 일어나누나. 떠난 뒤의 깊은 정 추억도 많을 것인데, 비단 주머니 주옥같은 시(詩) 더구나 많다네.”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비온 뒤에 총총히 한성(漢城)을 나갔는데, 가다가 말 세우고 돌아가는 이정(里程) 계산하네. 모화루 저 위에 쌍 술 두루미 술인데, 숭례문 그 앞엔 10대(隊)의 군사 있었네. 세자는 마음 깊이 이별하기 어려운 생각인데, 이 나라 신하들 아직도 떠나지 않으려 하네. 재삼 손들어 저으며 훈훈한 바람 따라 가는데, 저 소리 노래소리 가는 행렬 호위하네.” 하였다.

동평관(東平館) 남부 낙선방(樂善坊)에 있다. 일본 등 여러 나라의 사신들을 접대하던 곳이다. 북평관(北平館) 동부 흥성방(興盛坊)에 있다. 와서 조회하는 야인(野人)들을 접대하던 곳이다. 독서당(讀書堂) 옛 용산(龍山)의 폐지한 절인데, 강 북쪽 언덕에 있다. 성종이 고쳐 지어 당(堂)을 만들고, 홍문관(弘文館)의 글읽는 곳으로 삼았으며, 일찍이 궁중의 술을 하사하고 수정배(水精杯)에 부어 권하고 관원에게 맡겨 두었다. 도금(鍍金)하여 받침[臺]을 만들고 거기에 새기기를, “맑으면 흐리지 않고 비면 받아들일 수 있다. 그 물건을 덕으로 여겨 저버리지 말기를 생각하라.” 하였다.

『신증』 지금 임금 10년에 옮겨 지었는데, 두모포(豆毛浦) 남쪽 언덕에 있다.
○ 조위(曹偉)의 〈용산독서당기〉에, 큰 집을 짓는 자는 미리 편(梗)ㆍ남(楠)ㆍ기(杞)ㆍ자(梓)의 재목을 수십ㆍ백 년 전에 길러서 반드시 하늘에 높이 뻗치고 골짜기에 우뚝 솟아나기를 기다린 후에야만 취하여 기둥ㆍ들보의 재목으로 쓸 수 있으며, 만리 길을 가는 자는 미리 화(驊)ㆍ유(騮)ㆍ녹(騄)ㆍ이(駬)의 종자를 구하여 반드시 그 꼴[蒭]과 콩을 풍부하게 주고 안장과 안갑[鞍鞁]을 정비한 후에야만 연(燕) 나라ㆍ초(楚) 나라의 먼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니, 국가를 다스리는 이가 미리 어진 인재를 기르는 것 또한 무엇이 이와 다르랴. 이것이 독서당을 지은 까닭이다.
삼가 생각건대, 본조(本朝)에서는 열성(列聖)께서 서로 계승(繼承)하여 문교의 정치가 날로 성하였으며, 세종대왕께서는 신명(神明)한 생각과 밝은 지혜가 어느 임금보다도 뛰어났으며, 제작(制作)의 기묘함이 모두 신명에 합치하였다. 제도와 문화는 선비가 아니면 함께 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널리 글하는 선비를 뽑아서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아침저녁으로 치도(治道)를 강습하게 하였으며, 또 의리(義理)의 오묘함을 자세히 연구하고 여러 서책의 많고 큰 것을 널리 종합하려면 전적으로 하지 않고는 할 수 없다고 하여, 처음으로 집현전의 문신(文臣) 권채(權採) 등 세 명을 보내어, 특별히 장기 휴가를 주어 산간의 절에서 편할 대로 글을 읽게 하였으며, 만년에는 또 신숙주(申叔舟) 등 여섯 명을 보내어, 천천히 공부하고 편히 쉬면서 크게 그 힘을 기를 수 있게 하였다.
문종이 왕위를 계승한 뒤로는 크게 선비의 일에 뜻을 두고, 또 홍응(洪應) 등 여섯 명에게 휴가를 주어 보내니, 여기서 인재의 성함이 일시에 극진하여서 저술 제작의 공이 중국을 짝하게 되었다. 지금 임금께서 즉위하여서는 먼저 예문관(藝文館)을 개설하여 옛 집현전 제도를 회복하고,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가서 크게 문적(文籍)에 정통하고 유술(儒術)을 높여 숭상하니, 인재의 육성(育成)이 옛보다도 더함이 있었다. 병신년에는 다시 조종조의 고사(故事)를 써서 채수(蔡壽) 등 6명에게 휴가를 주었으며, 금년 봄에는 또 김감(金勘) 등 8명에게 휴가를 주어 장의사(藏義寺)에 가서 글을 읽게 하였으며, 음식 맡는 관리는 음식을 대고 술 맡은 관리는 술자리를 마련하며, 때때로 중사(中使)를 보내어 물건 하사하기를 자주하였다. 정원(政院)에 하교하기를, “성 밖에 땅을 선택하여 집을 지어 독서하는 장소로 삼게 하라.” 하니, 정원에서 회보하기를, “용산의 작은 암자가 지금 공청[公廨]에 속하여 폐기되었는데, 수리하면 앞이 틔어 밝으며 그윽하고도 넓어서, 공부하고 쉬는 데에는 여기가 제일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청원을 옳게 여기고, 관원을 보내어 공사를 감독하여 두 달이 걸려 낙성되니, 집이 합하여 겨우 20칸이었다. 여름엔 서늘하고 겨울엔 따스하여 모두 알맞았다. 이에 ‘독서당’이라고 사액(賜額)하고, 신에게 명하여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
신이 가만히 생각건대, 《시경》 〈한록장(旱麓章)〉에, “개제(愷悌)한 군자여 어찌 사람을 진작시키지 않는가.” 하였는데, 인재가 일어나는 것은 윗사람이 어떻게 작성(作成)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잘 양성한다면 선비들이 많이 있어 임금과 나라가 살 수 있지만, 잘 양성하지 못한다면 나라에 사람이 없으니 누구와 더불어 다스리기를 도모하리요. 만일 선비 기른다는 이름만 좋게 여겨서 구차히 취한다면, 닭의 울음 소리를 내고 개 도둑질하는 무리들이 그 사이에서 가만히 움직일 것이니, 조심하지 않을 것인가.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三代)에는 인재가 모두 상서(庠序)를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도 주 나라의 선비 양성하는[造士] 법은 제일 자세하고 주밀하였다. 저 한(漢) 나라의 요재(翹材)와 당(唐) 나라의 등영(登瀛)은, 모두 구차스럽게 한때의 이름을 얻은 것뿐이니, 어찌 의논할 것이랴.
우리 국가에서 백 년 간 길러 오며 교화하여 열어 인도하는 방법과 장려하여 양성하는 규정이, 사실 성왕(成王)과 주공(周公)의 선비 양성하는 법과 서로 안팎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반궁(泮宮)ㆍ옥당(玉堂) 이외에 또 어진 이 양성하는 장소를 두어서, 선택하기를 정밀히 하고 대우하기를 후히 하니, 이것이 저 《시경》 〈권여장(權輿章)〉에, “밥 먹을 때마다 남음이 없고 권여(權輿)를 잊지 못한다.”는 것과 어떠한가. 《주역》에 이르기를, “성인이 어진 이를 양성하여 만 백성에게 미친다.” 하였는데, 전하는 이의 말이, “어진이를 양성하는 것은 만 백성을 양성하기 위하여서이다.”고 한다. 지금 집을 주고 음식을 보내는 것이 직접 다스리는 일[治道]에는 관계가 없다. 나라 정사가 번거로운데 특별히 성상의 생각을 더하게 하는 것이니, 사리에 적절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날 다스리는 일을 경륜하고 왕법을 빛내게 하는 것이 반드시 이들에 의하여 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태평성대를 장식하고 은택을 백성들에게 입혀서, 그 공과 이익이 멀리까지 미치게 함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편(梗)ㆍ남(楠)ㆍ기(杞)ㆍ자(梓) 등의 좋은 재목과 화(驊)ㆍ유(騮)ㆍ녹(騄)ㆍ이(駬) 등의 좋은 말을 미리 길렀다가 일시에 거두어 쓰는 것과 같은 것이니, 어찌 만 번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또 이것은 전하께서 급선무로 여기는 일이고, 멀리 전(前)의 군왕들보다 앞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선발에 응하는 이는 성상의 기르기 좋아하는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성인의 도리는 모두 서책 중에 퍼져 있다. 6경(經)의 깊은 뜻과, 여러 사기(史記)의 다르고 같음과, 백가서(百家書)의 넓고 많음을 반드시 다 거두고 넓게 찾아내어, 그 흐름을 지나서 정밀한 것을 모으고 그 모임을 보아서 요긴한 것을 찾으며, 그 넓은 것을 다하여 요약한 데로 돌아오게 한 후에야 깊이 나가 그 근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황(皇)ㆍ왕(王)ㆍ제(帝)ㆍ패(霸)의 도리와 예(禮)ㆍ악(樂)ㆍ형(刑)ㆍ정(政)의 근본, 수신ㆍ제가ㆍ치국ㆍ평천하의 요지가 모두 여기에 있으니, 사업에 시행하는 것은 힘써 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이다. 동자(董子 한 나라의 동중서)의 이른바, “학문을 힘써 하면 문견이 넓어지고 지혜가 더욱 밝아지며, 도를 행하는 데 힘쓰면 덕이 날로 일어나고 크게 공이 있다.”는 것으로서, 그 효험을 보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옛 사람이 남긴 글의 찌꺼기만을 가져다 기록하고 외우는 자료로 삼으며, 비단같이 화려하게 이리저리 얽어 운(韻)을 달고 곡조를 맞추는 글만 지어서, 세상에 자랑하고 풍속을 현혹시킨다면 조정에서 선비들을 미리 양성(養成)한 본뜻이 아닌 것이다. 아! 학문의 공은 변화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오늘 한 문장을 읽고도 그대로 그 사람이고 내일 한 문장을 읽고도 역시 그대로 그 사람이라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무엇을 하겠는가. 공자는 말하기를,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다.”고 하였다. 또 자하(子夏)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는 군자다운 선비가 되고 소인다운 선비가 되지 말라.”고 하였다.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정】 제천정(濟川亭) 한강 북쪽 언덕에 있다.
○ 예겸의 시에, “백 척 높은 누대 한강 가에 섰는데, 시간을 내어 와 보니 정신이 상쾌해지네. 산 그림자 물 속에 잠기니 부용(芙蓉)이 푸르고, 옥 항아리에 향기 뜨니 호박(琥珀)이 봄빛이네. 날이 따스하니 일엽편주(一葉片舟) 가볍게 뜨고, 바람이 잔잔하니 봄 물결 가늘게 줄 짓네. 바다 어귀 저 물결 은하수에 닿은 듯, 신선 뗏목 타고서 하늘 나루터 찾아갈거나. ○ 도성 남쪽에 경치 제일 좋다더니, 한강 저 위에 높은 누대 서 있네. 멀리 나온 여러 재상들 좋은 잔치 마련하였는데, 가까이 내려다보니 한가한 어부 작은 배 저어가네. 만 겹이나 되는 봉우리들 여기저기서 읍하는데, 몇 쌍의 비오리 제멋대로 뜨고 잠기네. 적벽강의 옛 글이야 어찌 감히 따르랴만, 새 시(詩)나 지어서 이 좋은 놀이 적어 두려네.” 하였다.
○ 고윤(高潤)의 시에, “청신(淸新)한 시구는 먹 흔적 남겼는데, 여기 올랐던 사람들 가신 지 이미 오래되었네. 누대에서 보는 좋은 경치 어제와 같지 않은데, 난간 밖의 긴 강물만 속절없이 절로 흘러 가네. 붉은 조서 내릴 때는 봉새 여기 멈췄는데, 놀잇배 지나가자 갈매기들 놀라네. 난간에 기대어 멀리 바라보며 옛일 생각하는데, 바람이 흰 구름 보내 나무 위에 와 있구나.” 하였다.
○ “여름 날 누대에 오르니 비 지나 날씨 서늘한데, 앉으라 재촉하더니만 잔은 느리게 돌리네. 재주 없는 몸 사신으로 온 것 무어라 부끄러워하리, 글하는 이들의 이 모임 기쁘기만 하다네. 새 몇 마리 울며 오니 산은 적적하기만 한데, 외로운 돛 멀리 가니 물은 더욱더 망망하구나. 난간에 의지한 흐뭇한 흥 시(詩)로 다 거둘 수 없는데, 머리 돌리니 저 하늘가에 해 벌써 석양이네.” 하였다.
○ 진감(陳鑑)의 시에, “백 척 높은 누대 넓은 나루 내려다 보는데, 점점이 보이는 저 청산들 하나하나 참 모습이네. 화원에 향기 풍기니 춤추는 나비 날아들고, 고깃배에서 그물 드니 생선이 번득이네. 눈앞의 저 좋은 경치 누가 먼저 차지하였나. 주머니 속에서 시를 찾으니 내가 제일 가난하네. 오늘의 이 풍광이 어제 그것 아니니, 잠시 동안 서로 구경하는데 자주한들 어떠리.” 하였다.
○ 장영(張寧)의 시에, “동쪽 나라에 높은 누대있는데, 누대 앞엔 한강 물 흐르네. 광채 흔들림은 청작(靑雀) 배요, 그림자 떨어짐은 백구의 물가로다. 멀리 바라보니 저 하늘이 다한 듯하고, 공중에 솟았으니 땅이 떠 있는 것 같네. 여덟 창 열었는데 풍경ㆍ날씨 좋으니, 걸상에서 내려와서도 그대로 주춤거린다.”
○ “봄물이 오리 머리처럼 새파란데, 새벽 산은 소라뿔같이 푸르네. 조각 구름 먼 산에 걸치고, 외기러기 긴 물가로 내려오누나. 이역(異域)에서 일 아직 끝나지 않고 태평 시대에 혼자 깨어 무엇하나, 이곳에 오고 보니 시사(詩思)가 끝이 없네.”
○ “길이 머니 거마(車馬)가 적은데, 봄이 깊으니 풍경도 좋구나. 안개가 걷히니 산은 그림 같고, 바람이 맑으니 물결은 비단 같구나. 즐거운 일 좋은 철 만나니, 맑은 술 항아리에 노래도 호방(豪放)하네. 옛부터 문화[文物]의 지방이라, 가는 곳마다 잘도 지내네.”
○ “아득히 폭포가 급히 흐르는데, 저 멀리 돌 층계 평평하네. 산새는 울다 다시 멈추고, 강 포구는 흐리다가 개누나. 흥은 구름과 함께 가고, 정은 풀을 따라 함께 자라네. 양친을 볼 수 없으니, 다시금 신경(神京)을 생각하네.”
○ “좋은 구경 언제나 같으니, 아름다운 기약은 부를 것도 없다네. 올 때는 시골이 가깝다 여겼더니, 앉으니 객(客)의 회포 사라지네. 골짜기의 새 소리 서로 응하는데, 시냇가 꽃은 그림자 마주 흔들린다. 봄바람이 뜻이 있는 양, 목란(木蘭) 노를 불어 보내누나.
○ 물가는 바라봐도 끝없는데, 봉우리는 몇 층이나 되는지. 병들었을 땐 금귀약(金匱藥)을 생각하고, 목마를 땐 옥호빙(玉壺氷)을 마시고자 하네. 요해(瑤海 신선이 있는 곳)를 배질하여 건널 듯, 단구(丹丘 신선이 있는 곳)를 날아갈 것 같네. 문지방 의지하여 오래 섰으니, 고향 생각 문득 멀어지네.”
○ “흰 구름은 일지만, 황학(黃鶴)만은 오지 않네. 지경 깊으니 신선 고장 같고, 좋은 경치는 봉래산(蓬萊山) 생각나네. 취미는 원룡(元龍)의 호기인데, 시는 이태백의 재주 부끄럽네. 금곡(金谷)의 주름은 주거니 받거니, 취하여 쓰러짐을 비웃지 마라.”
○ 철은 바뀌지만, 강산은 고금에 같네. 점잖은 이들 몇 번이나 유람했나, 시와 술로 지금 다시 올라왔네. 경치 대하니 지난 일 생각나고, 풍속을 보니 내 마음에 맞네. 태평의 교화 멀리 퍼지니, 가는 곳마다 친구들 있네. ○ 네 필 말 끊임없이 달려가, 초연(超然)히 산에 앉았네. 술 향기는 춤추는 소매에 풍기고, 봄 기운 비단옷에 스미네. 돌길엔 솔꽃이 지는데, 성긴 발에 제비 나누나. 좌중이 모두 좋은 모임이라, 저물녘에도 돌아가자는 말 없네.
○ 옮기고 의지하며 아름다운 경치 다 보고, 이리저리 오가며 좋은 놀이 다 했네. 어진 임금 빈객을 좋아하고, 여러 정승 풍류에 바쁘다네. 취하고서도 그대로 마시고, 돌아가려다 다시 머무네. 내일 아침 태평관에서도, 머리 돌려 생각 끝없으리.” 하였다.
○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손님과 함께 누대에 올라 잠시 쉬려 하니, 벼슬살이 하려는 마음, 고향 생각 모두 다 아득하구나. 산에 오랜 비 지나니 구름 안개 모이고, 강은 봄 조수 곁들여 밤낮으로 흐르네. 골짜기의 소나무 물결 조는 학을 놀라게 하고, 저물녘 고기잡이 북 소리 한가로운 갈매기 날아가게 하네. 심상하게 발 밑에서 산 안개 일어나니, 아마도 이내 몸 푸른 하늘 제일 위에 있는가 싶네.” 하였다.
○ 김식의 시에, “누대 가의 풍악 소리 훈훈한 바람 풍기는데, 누대 밖의 꽃가지는 술에 비쳐 붉구나. 구름 그림자 물결 빛 하늘 위 아래요, 흰 모래 푸른 풀 언덕의 동쪽 서쪽이네. 오대산(五臺山) 옛길에 봄 언제나 있는데, 백제(百濟) 끼친 터엔 나무도 없구나. 취한 뒤 난간에 기대서서 햇빛 바라보니, 이내 몸 수정궁에 있는 듯하네.”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한강루 위에 올라 남풍에 의지하니, 눈 아래 산꽃 몇 점이 붉구나. 빛나는 오색 구름 언제나 북극성을 향하고, 넓은 강물은 절로 동쪽으로 흐르네. 안개 부슬비 자리를 스치니 시를 이루기 어렵고, 풍악이 어울리니 술잔이 잘도 비네. 취해지니 이내 몸 객지에 있는 줄 모르고, 도리어 아침 일찍 대명궁(大明宮)에 찾아뵙길 생각하네.”
○ “한강수에 배 띄우고서, 한강루에 다시 오르네. 강 꽃을 캐고 캐니 어느 새 한줌이 차고, 강 풀이 가느니 객의 수심 절로 나네. 강물 한 방울 길어다 벼루에 부으니, 먹물 구름처럼 넓게 깊게 번득이네. 검은 여의주 빛을 발하며 멀리 번져 나가니, 물 속의 용 두 마리 한낮에 굼틀거리는 듯. 한평생 별 따는 솜씨, 몇 번이나 약양루(岳陽樓)에 올랐던가. 동정호(洞庭湖) 물결 3만 8천 이랑, 푸른 산 한 점이 그 중앙에 있다네. 이 누대 역시 좋은 것이, 임 계신 서울 바라볼 수 있네. 오색 구름 저렇게 아득하니, 여기서 술이나 같이 할까. 취하여 난간 치며 황학에게 물으니, 황학은 보이지 않고 물 위에 원앙새만 나네. 나는 들었노라, 물은 깊어서만 좋지 않고, 누대는 높아서만 좋지 않다는 것을. 바다로 모여 가는 그것이 만고에 흘러 좋은 것이라네. 천하의 근심 먼저 하고 천하의 즐거움 나중한 이 범가(范哥) 늙은이 한 명뿐이랴, 후세의 사람인들 어질고 호방한 이 없을 건가. 짧은 노래 다 부르고 또 길게 휘파람 부니, 누대의 달은 밤에 찬데 강 기러기만 울고 가누나. 거듭 와서 절월(節鉞) 멈추는 일 어느 해쯤 될는지, 성주(聖主)의 은혜 깊어 하늘같이 덮여 있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누대 앞에 바람 걷히니 흰 구름 퍼지는데, 여러 산의 붉고 푸른 빛 한 자리에서 보게 되네. 백제의 지형은 강물에 와서 끝나고, 오대산 흐르는 샘물 하늘에서 오네. 시를 쓰자니 최랑(崔郞 최호(崔顆))의 글귀 못 따른 것 부끄러우나, 술을 대하여는 이태백의 잔 사양하기 어려워라. 꽃과 새 앞에 가득하고 봄 경치 좋으니, 웃고 이야기하며 더디 돌아간들 어떠리.” 하였다.
○ 봄비 처음 개고 하늘도 높은데, 한강의 새 봄물 푸른 것이 삿대로 한 길일세. 구름 가의 붉은 조서(詔書)는 한 쌍 봉새가 날아오고, 바다 위의 푸른 산은 여섯 자라 타고 있네. 성곽을 둘러싼 갠 빛은 보리 물결 흔들리고, 발 너머 은은한 메아리 소나무 파도 흩어지네. 글하는 이들 모두 모여 수창하매, 시중(詩中)의 제일 호걸은 저버리지 마세.”
○ “만강홍(滿江紅 중국 노래 곡조의 이름) 한강의 풍광(風光) 좋을시고, 사람들 모두 다 해동에서 드물다 하네. 하늘이 준 기이한 경치요, 땅이 나눠 준 신령하고 수려한 기상이네. 금마군(金馬郡) 그 성(城)인들 옛날과 같으리, 신라의 인물들 모두 다 옛 사람 아니어라. 당 나라 도독부(都督府)를 기억하노니, 그 이름 곰나루터[熊津口]에 남기기도 했다네. 갈매기 친해지고 어룡(魚龍)은 소리치며, 산은 그림 같고 강은 술 같네. 노는 사람들 여기 와서 즐기느라, 오래된 것 잊었다네. 아름다운 모임은 등왕각(滕王閣)보다 뛰어나고, 그윽한 풍경은 난정(蘭亭)보다 못지 않네. 내일 아침 한 번 이별하면, 저 구름 바라보며 고개만 돌리리라.” 하였다.
○ 노사신(盧思愼)의 시에, “오랜 비 처음 개니 갠 빛도 좋을시고, 누대 앞의 봄 물결 푸른 구름 뭉쳐 있다. 강 안개 막막하더니 바람 불어 걷히고, 산 안개[山翠] 부슬부슬 새가 가지고 오네. 배는 비단 닻줄 끌며 꽃 핀 나루터로 돌아가고, 술은 은하수 기울이듯 옥잔에 떨어지누나. 즐거운 모임 얼마인데 어찌 이별하기 쉬운가, 풍겨 다시 보려 하여 배회하고 또 배회하네.” 하였다.
○ “봄 강에 밤 비 와서 포도주처럼 넘치니, 새벽에 띄운 작은 배 절반이나 뱃전이 묻히네. 천상의 높은 모습[羽儀] 채색 봉황이 날아들고, 공중에 선 누각 신령한 자리 걸터 앉았네. 주렴을 잠깐 걷으니 산은 그림처럼 펼쳐지고, 채색 붓 한가로이 휘두르니 바다도 물결 움추리네. 웃으며 난간 의지해 마음놓고 한 번 취하니, 원룡(元龍)이 백 척인양 기개 더욱 호탕하여라.” 하였다.
○ 김수온(金守溫)의 시에, “서호(西湖)에 봄이 들어 꽃 늦게 피려는데, 좋은 술 천 병에 고기는 백 그릇[百堆]이나 되네. 한 장의 조서[璽書] 햇빛 따라 내리는데, 아홉 겹 하늘에서 사신이 오셨네. 산하(山河)가 안팎되니 위문후(魏文侯)의 나라인데, 주빈(主賓)이 마음껏 즐기니 이태백의 술잔이로다. 높은 누각에서 잠시 떠나 서로들 읍하고서, 놀잇배 강 위에 띄우고 다시 배회하였어라.”
○ “봄물이 새로 불어 한길[一丈]은 높았는데, 고기 잡는 늙은이 지난 해의 삿대 저어 보네. 연경[燕都]의 저 손님은 두 봉새 왔는데, 용백(龍伯)은 그 누가 큰 자라 낚을 것인가. 작은 나라에 높은 손님 천 년의 경사인데, 흰 갈매기 누런 학 한 강 물결 위에 있네. 좋은 경치 가득 안고 읊조리기 오래하니, 시단(詩壇)의 제일 호걸 그대인가 하노라.”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누대 가운데 아름다운 모임[佳麗] 비단자리 펼쳤는데, 누대 밖의 푸른 산엔 비취빛 쌓이는 듯. 풍월은 옛날 황학 따라 가지 않았고, 연파(煙波)는 지금도 백구(白鷗)를 보내 오누나. 올라와서 주거니 받거니 지은 시 삼천 수요, 빈주(賓主)의 풍류는 백 잔 술이로다. 밤 깊어지기 다시 기다려 옥피리 부니, 달 떠서 두우(斗牛 북두와 견우성) 사이에 밝은데 우리도 함께 배회하네.”
○ “한강의 봄물이 푸른 포도 같은데, 비 와서 새로 불으니 몇 삿대나 더 높아졌나. 한 뱃줄 천천히 당기는데 갈매기 놀라고, 세 산이 높이 솟았는데 금자라 걸터앉았네. 은소반의 가는 회는 붉은 실이 날고, 옥잔의 향기로운 술 푸른 물결 주름지네. 사신의 문장이 자리 가득한 이 놀라게 하는데, 나 같은 사람 지은 시 다시 더 거칠기만 하네.”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청산이 하나하나 비단 병풍 펼쳤는데, 봄물이 새로 불어 흰 물결 넘치네. 오랜 비 우연히도 오늘에야 개니, 하늘이 응당 사신 옴을 위함이리라. 읊다 바라보니 냇가 버들은 황금 실인데, 어사주 백옥 술잔에 취해서 거꾸러지네. 푸른 벽 저 아래로 긴 뱃줄 천천히 끌어 갈 제, 하늘빛 구름 그림자 다 함께 배회하누나.”
○ “금 술단지에 출렁출렁 포도주 넘치는데, 누선(樓船)으로 옮겨 타니 물결이 한 삿대나 높네. 취해가니 한 말 술을 어찌 사양하리, 흥 겨우니 삼산(三山)의 큰 자라 낚으려 하네. 뱃사람 노 저어 안개 낀 물가로 돌아오고, 아이들 그물 끌어 푸른 물결 흥청이네. 십 리 강산을 저멀리 바라보니, 봄빛이 넓고 넓어 호방한 시흥 돕누나.”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누대 앞의 봄물이 거울처럼 열렸는데, 누대 밖의 청산은 푸른 것이 몇 더미냐. 주방[廚子]에서는 어느 새 금과일 보내 왔는데, 어부들 다투어 가며 번득이는 생선 가져 오네. 좋은 풍경 오래 봄은 시구에 의지하고, 정회를 푸는 데는 술잔이 있다네. 석양의 강가 풍경 무한히 좋아, 배 위에서 취하여 또다시 배회하네.” 하였다.
○ “비 온 뒤 저 강물 몇 자나 불었나. 삿대 깊이 들어가는 줄 아침에야 알았네. 인간 세상의 세월 나는 새 같은데, 바다 위의 구름과 안개는 큰 자라 너머에 있네. 봄철이 오니 점점 꽃이 바다 같은데, 잔을 기울이니 술에도 물결이네. 배 가운데서 한없이 담소가 길어지는데, 취중에 시를 지으니 말이 더욱 호방하여라.” 하였다.
○ 동월(董越)의 시에, 우뚝한 한 이층 누대 한강을 의지했는데, 동쪽 나라의 형승(形勝)이 어찌 이리도 좋은가. 갠 날씨 신기루 잇달아 세 섬이 희미하고, 찬 기운 조수 소리 보내 여덟 창에 들어오네. 나계(螺髻)에 구름 걷히니 산이 겹겹이 푸르고, 곤새[鵾 큰 새] 줄이 밤에 울리니 돌 위에 물 흐르네. 높은 누대 오르면 옛부터 시 지었는데, 오늘에사 필력(筆力)이 작대[杠]같지 못함이 부끄럽네.” 하였다.
○ 명(明) 나라 왕창(王敞)의 시에, “끊어진 언덕에서 백 척 누대로 천천히 오르고, 푸른 발 놀잇배로 한강에도 떠 놀았다. 술잔은 폭포 기울이듯 앵무(鸚鵡 술잔 이름)가 날고, 새가 노래 소리 보내니 꾀꼬리 소리를 듣겠네. 소동파[蘇老]의 퉁소 소리 적벽(赤壁)에서 들리고, 안기생(安期生 옛 신선)의 학 수레 단구(丹丘)로 지나가네. 모쪼록 돌을 채찍질하여 동해를 보려 하지 않으나, 운수(雲樹) 저 사이로 십주(十洲)가 희미하게 보이네.” 하였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백 척 높은 누대 푸른 물가 내려다 보는데, 견여(肩輿)로 성을 나가 함께 올라 구경하네. 먼 포구에 노을 밝으니 비단인양 얼기설기, 급한 여울에 석양 비치니 가늘게 금이 부서지네. 관악산이 푸른 빛 보내와서 자리 위에 들어오고, 양화(楊花)가 빛 물결 띄어 성 저쪽에 떨어진다. 함께 노는 여러 재상들 손님 대접 잘도 하네. 배 잇고 술 두루미 옮기니 흥 다시 깊어지누나.” 하였다.
○ “높은 누대 강에 임하여 청계산(淸溪山 과천(果川)에 있음) 마주 앉으니, 이 하루 함께 노는데 술 아니 가져오리. 어부들의 즐거운 마음 드리는 것 보아 알 수 있고, 시인의 호방한 흥은 써 놓은 것에서 볼 수 있다. 횃불이 환하니 돌아가는 길 늦었는데, 밤 피리 저 메아리 여관에 들자 희미해지네. 취하여 누으니 미처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여, 바로 독록(獨鹿 술 그릇)으로 가서 선이주[仙梨] 찾아보네.” 하였다.
○ 남곤(南袞)의 시에, “큰 밧줄로 배를 끌어 얕은 물가 가르고 나가, 고관들 자리 정하고 거울 속에 앉았네. 노는 고기 물 위에 나오니 옥이 뛰는 듯, 밝은 달[好月] 산에서 엿보니 금이 솟아오르네. 술기운 넘치니 남은 추위 몸에 배어오는데, 횃불 연기 가로지르니 산이 반쯤 그늘지누나. 갠 날 보면 한강수 천 길은 깊은데, 오늘의 즐거운 마음 얼마나 깊을런지.
○ “동쪽으로 나오는 그 동안 많은 산천 지났는데, 가는 곳마다 필연(筆硯)이 소용됐네. 먼 곳 노니니 글 건장해야 하고, 좋은 곳에서 흥 나면 적어 남겨야 하는 법. 짐승 모양 화로에 향내[香煙] 풍기니 옷도 함께 향기롭고, 깊은 대문에 푸른 기운 엉기니 바라보아도 희미하네. 이 세상과 저 영주(瀛洲)는 원래 다른 것, 날아 오르매 교리(交梨 신선이 먹는 과실)를 물을 필요없네.” 하였다.

반송정(盤松亭) 모화관(慕華館) 북쪽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소나무가 서리고 굽으며 둘러 그늘져서 수십 보(步)를 덮었는데, 고려 왕이 일찍이 남경(南京)에 거둥하다가 이곳에서 비를 피하고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한다. 본조(本朝 이조) 초기까지 있었다.
○ 고려조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푸른 솔 저 푸른 솔 길가에 났는데, 두어 그루 그늘 서로 이으니 덕있는 이에게 이웃이 있는 듯하네. 큰 줄기 올라가서 서린 모양 용인 듯, 꿈틀꿈틀 달아나고 굽혔다 다시 폈네. 가는 가지 멀리 뻗어 푸른 장막 펼쳤는데, 햇볕을 가로막아 서로 의지했네. 속에는 벽력(霹靂)을 감춘 듯 태음(太陰)을 기르고, 겉 껍질[莓蘢] 벗겨지고 떨어져 쭈글쭈글 비늘 생겼네. 태고 옛적 나고 자라 연대(年代)를 알 수 없는데, 도끼에 찍히지 않고 꺾여서 섶이 되지도 않았네. 심고 자란 것 응당 조화에 의지하였을 터이니, 지키고 보호하는데 지금은 신이 있는 줄 알겠다네. 내 지금 여기 오니 때마침 더운 날인데, 남풍이 낯을 스치고 티끌 불어 날리네. 말 안장에 기대어 맑은 그늘 아래 누우니, 어느새 찬 기운 생겨 온몸에 가득하네. 함께 앉은 나무꾼 4ㆍ5명 있는데, 그 중에는 우스개 소리하고 많이 아는 사람도 있네. 그 사람 하는 말이 먼 옛날 그 언젠가, 임금님 비 피하기 진(秦) 나라 황제 같이 했다네. 그래서 이 나무 봉(封)하여 장군으로 삼고, 지키는 이 대대로 녹봉 받아 임금 은혜 입었다네. 내 이 말 듣고서 근거 없는 일이라 웃었더니, 돌이켜 생각하면 속으로 슬프기도 하구나. 우연히도 저 곳에서 소나기를 만난 탓에, 수목이지만 오히려 특별한 대우 받았네. 그대들 부질없이 맹랑한 말 하지 마소. 이내 몸 여러 대 두고 이 왕조의 신하라네.” 하였다

화양정(華陽亭) 유사눌(柳思訥)의 기문에, “화산(華山)의 동쪽 한수(漢水)의 북쪽에 들이 있는데, 토지가 평평하고 넓으며 길이와 넓이가 10여 리는 된다. 뭇 산이 둘러싸고 내와 못이 둘렀다. 태조께서 한양에 도읍을 정하신 처음, 이곳을 목장(牧場)으로 삼았다. 임자년에 주상전하께서 사복제조 판중추원사(司僕提調判中樞院事) 최윤덕(崔潤德)과 이조 참판 정연(鄭淵) 등을 명하여 정자를 낙천정(樂天亭) 북쪽 언덕에 짓게 하였는데, 주부(主簿) 조순생(趙順生)이 그 일을 모두 주관하고 와서, 그 자세한 것을 나에게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천하의 누대와 정사(亭榭)는 모두 그 이름이 있다고 하는데, 이 정자에만 이름이 없어서 되겠는가 하고 인하여 주서(周書) 중의 말을 화산 남쪽에 돌려보낸다는 뜻을 취하여 ‘화양(華陽)’이라 이름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태조께서 하늘에 응하고 사람에 순하여, 집을 미루어 나라를 삼았으며, 열성조께서 서로 계승하여 무(武)를 쉬고 문을 닦으며, 말을 목장으로 돌려보내고 소를 놓아 먹이니, 그때에 맞게 한 것이다.” 하였다.
○ 양성지(梁誠之)의 시에, “한가할 제 말이 가는 대로 홍진(紅塵) 밖에 나오니, 저 멀리 들판에 풍경이 새롭네. 하늘에 닿은 먼 산은 푸른 것이 그린 눈썹 같고, 비 온 뒤 방초(芳草)는 푸르름이 이부자리 같네. 꾀꼬리 오르락 내리락 아침 햇볕에 울고, 소와 말 부산하게 사방[四垠]으로 흩어지네. 호탕한 봄바람에 3월도 저무니, 술 가지고 나가서 좋은 경치 구경하세.” 하였다.

낙천정(樂天亭) 살곶이[箭串]에 있다.
○ 변계량(卞季良)의 기문에, “낙천정은 우리 주상전하가 때로 구경하고 놀던 곳이다. 전하(태종)께서 왕위에 있은 지 19년 가을 8월에 우리 주상전하께 선위(禪位)하고 다음 농한기를 이용하여 나와서 동교(東郊)에 유람하였다. 한 언덕이 있는데 높은 곳이 불쑥 솟아 형상이 가마 엎은 것 같으니, 대산(臺山)이라 명명하였다. 올라가 사면을 돌아보면 큰 강이 둘러 소(沼)가 되어 푸르게 물결치며 잇따른다. 연이은 봉우리와 첩첩한 멧부리가 서로 나타나고 겹겹이 나와서 언덕을 둘러싸고 마주보는데, 형세가 별들이 향하는 것 같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든 경치 좋은 곳이다.
전하께서 명하여 이궁(離宮)을 언덕 동북쪽 모퉁이에 짓게 하고, 풍우를 가리게 한 다음 드디어 정자를 언덕 위에 짓고, 좌의정 박은(朴誾)에게 명하여 정자 이름을 짓게 하였다. 박은이 《주역》 〈계사(繫辭)〉의 ‘낙천(樂天)’이란 두 글자를 취하여 드리니, 대개 전하의 한 일을 총괄하여 이것을 정자 이름에 붙이고, 또 지금의 즐거움을 뜻한 것이다.
신(臣) 계량(季良)에게 명하여 글을 지어 기록하게 하였다. 신 계량이 가만히 생각건대, 하늘이라는 것은 이치 뿐이요, 낙이라는 것은 애써 하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히 이치에 맞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대개 태극의 진리와 이기(二氣)와 오행(五行)의 정기가 묘하게 합하고 엉기어 사람이 태어나게 되니, 천리가 사람에게 부여된 것은 같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뭇사람들이 태어나매 기품이 박잡하고 물욕이 가리는 것이니, 힘써서 천리를 따르려 하여도 또한 될 수 없거든 하물며 자연히 이치에 맞기를 바라겠는가.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는 하늘이 내신 바탕으로 만물에서 으뜸으로 태어났으며, 청명하신 몸으로 덕성(德性)을 항상 활용하시니, 이래서 그 행하시는 일은 어느 것이나 천리의 유행(流行)이 아님이 없는 것이다. 일찍이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는, 신의모후(神懿母后)가 돌아가심을 슬퍼하여 인사를 모두 물리치고 제릉(齊陵 신의왕후의 능) 곁에 시묘 살았으며, 전 왕조의 말년에 임금은 혼암(昏暗)하고 신하들은 서로 해치며 우리 태조를 모해하여, 화가 매우 급박하였을 때에는, 의를 주창하여 나라를 세우고 태조를 천승(千乘)의 높은 자리에 추대(推戴)하였다. 무인년에 권신(權臣)이 우리 태조의 편치 않음을 틈타서 어린이를 끼고 난을 꾸밀 때에는, 기미를 알아 섬멸하고 제거하여 종묘 사직을 편안히 하였으며, 여론이 전하를 추대하여 세우게 되었지만 상왕(上王 정종(定宗))에게 양보하였으니, 맏이를 높인 것이다.
즉위한 후로는 항상 태조를 조석으로 모시지 못함을 근심하였으며, 병술년(태종 6년)에는 왕위를 사퇴하려 하니, 어버이를 곁에서 모시려는 뜻을 이루려 함이었다. 군신(群臣)이 죽기를 불사하고 고집하고 태조도 힘써 중지시켰다. 그 후 3년 되는 무자(태종 8년)에 태조가 세상을 떠나니,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초상 중에 예절을 극진히 하였다. 부묘(祔廟)할 때에는 장마비가 내려서 전하께서 염려하였는데 전날 저녁에 천지가 깨끗이 개었으며, 일을 끝낸 3일 만에 비가 다시 왔으니, 하늘이 전하의 효성을 도와준 것이다. 상왕께 우애와 공경을 다하되 오래도록 더욱 돈독하게 한 것은, 서책 중에 실린 옛날 사실에도 일찍이 없는 일이며, 회안군(懷安君)을 석방하고 법으로 다스리지 않으니, 이것은 대개 순임금이 그 아우 상(象)을 살린 일을 따르고, 주공(周公)이 법대로 행한 것을 본받지 않으려 한 것이었다. 왕씨의 후손을 남겨 두어서 편안히 생활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천하와 국가를 공(公)으로 삼는 천지 같은 도량으로서, 곧 탕왕(湯王)이나 무왕(武王)이 혁명하고서도 기(杞) 나라와 송(宋) 나라를 남겨둔 의리이며, 대국을 예절로 섬겨서 두 번이나 황제의 고명(誥命)을 받았으며, 천자가 매양 전하의 지극한 정성을 칭찬하였다. 또 작은 나라를 사랑하되 인(仁)으로 하니 50년 간이나 큰 해가 되던 왜구[海寇]가 이마를 조아리고 예물을 바치며 신하가 되기를 원하였다. 또 궁정에 계실 때는 좋은 얼굴로 화목하고, 제사를 받들 때는 엄숙하게 공경을 다하며, 충직(忠直)한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물리치며, 간하는 말을 좇고 학문을 좋아하며, 검박함을 숭상하고 비용을 절약하되, 하늘의 경계를 조심하고 백성의 고통을 불쌍히 여겼다. 무릇 심신에 있어 행사에 나타나는 것이 순수하여 한결같이 이치를 따르니, 역시 노력하여서 된 것이 아니요, 대개 우리 전하의 천성이 그러한 것이었다. 왕위에 계신 20년 간에 사방이 한결같이 평안하고 창고가 부유하고 충실하며, 백성은 전란을 당하지 않고 하늘은 감로(甘露)를 내려서 지극히 태평스러운 것이 전고에도 보기 드문 일이었으니, 선유(先儒)들이 이른바, ‘천리를 따르면 자연 이롭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선위 하실 때에는 춘추 아직 늘그막에 이르지 않았고, 건강이 일을 폐지할 지경에 이르지 않았으며, 또 형세에 의하여 부득이한 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소 신하들이 궁정에 서서 통곡한 것이 수일간이었지만, 마침내 마음을 돌리는 효과를 보지 못하고, 하루 아침에 왕위를 사양하기를 헌신짝 벗어 버리듯 하니, 역시 고금 제왕(帝王)에 아직 있지 못한 일이었다. 지금 우리 주상 전하는 총명ㆍ효제하고 온인(溫仁)ㆍ근검하여 모든 일에 명을 받아 부탁하신 중임을 이어 받드니, 전하의 근심을 덜 만하며, 낙천정을 짓게 된 까닭이다.
신이 이 정자의 경치를 보니, 봄바람이 화기를 불어오면 아름다운 초목이 다투어 자라서 붉고 푸른 색이 깔리고 덮이며, 여름철 복중이 되어 대지가 화롯불처럼 뜨거울 때는 맑은 바람이 자리에 가득 차며, 가을이 강산에 찾아오면 밝은 거울과 비단 병풍이 좌우에 비치고 어울리며, 퍼붓던 눈이 처음으로 개는데, 난간에 의지하여 바라보면 천 리가 한 빛이다. 우리 전하께서 상왕(정종(定宗))을 모시고 술자리를 마련하여 서로 부탁하는데, 주상전하께서 그 사이에 주선하여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손하며 아버지는 사랑하고 아들은 효도하여 즐거워하니, 천하의 즐거움이 다시 이보다 더할 것이 있겠는가.
대개 우리 주상전하께서 즐거워하는 것은 천리(天理)요, 즐거워하지 않는 것은 천위(天位)니, 저 순(舜)이나 우(禹)가 거기에 관계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경우인 것이다. 그러나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에 관한 큰 계책이야 어찌 잠시인들 마음에 잊으랴. 그리고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는데, 물고기는 연못에 뛰논다는 것은 도의 큰 것이요, 《주역》 대축괘(大畜卦)에서 말한 산이나 감괘(坎卦)에서 말한 물은, 어진 이와 지혜 있는 이가 좋아하는 바이며, 하늘이 위에서 운행하는 것은 쉼 없는 기상이 나타남이고, 대지가 아래에서 고요한 것은 후덕한 형상이 현저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전하께서는 화평한 모습으로 등람하여 부앙(俯仰)하는 사이에 잘 합하여 스스로 그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것이니, 이것을 어찌 글이나 말로 그 만분의 1이나 형용할 수 있겠는가.
신이 글로 쓰는 것은 전하께서 천리를 즐거워하는 것이 여러 행사의 사실에 드러나는 것인데, 이러한 행사의 사실에 드러나는 것은 신하와 백성들도 함께 아는 것이다. 그러면 그 천성의 참됨을 보고 느껴 흥기하여 각기 그 어버이를 어버이로 여기고, 각기 그 어른을 어른으로 여겨서 인륜의 도를 다하여, 전하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우리 조선은 풍속 교화의 아름다움이 저 우순(虞舜)이나 주(周) 나라에 비견되는 것으로서, 왕업(王業)의 영원함이 곧 높은 산 깊은 강물과 더불어 함께 하여 오래도록 다함이 없을 것이니, 아! 성대하도다.” 하였다.

칠덕정(七德亭) 곧 한강의 하류 백사정(白沙汀)에 있는데, 세조가 자주 거둥하여서 군대를 사열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 지었다.
망원정(望遠亭) 양화도(楊花渡) 동쪽 언덕에 있는데, 정자는 원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희우정(喜雨亭)이었다. 성종 갑진년에 월산대군(月山大君)이 고쳐 짓고 지금 이름으로 하였는데, 매해 농사를 살필 때 및 수전 연습[水戰]을 볼 때에 항상 이 정자에 거둥한다. 변계량(卞季良)의 〈희우정기(喜雨亭記)〉에, “용산의 입석(立石) 마을은 세상에서 놀기 좋은 강산이라고 말한다. 도성에서 겨우 몇 리쯤 되는데, 효령대군이 별장을 두었던 곳이다. 뒤에 한 언덕이 있으니 높고 꿈틀꿈틀하여 형상이 용이 서린 것 같은데, 그 위에 정자를 지으니 휴식하는 장소로 삼기 위하여서이다. 군후(君侯)가 계량에게 일러 말하기를, ‘주상전하께서 일찍 수레를 타고 농사일을 순시하며, 이 정자에 올라 신에게 주식(酒食)과 안마(鞍馬)를 하사하였다. 그때 한창 파종할 철에 비가 흡족하지 못하였는데, 술을 반쯤 들자 비가 와서 종일토록 좍좍 내리니, 정자 이름을 희우(喜雨)라고 하사하였다. 신이 감격한 마음 금할 수 없어 우리 성상께서 하사한 것을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이미 신 부제학 장(檣)으로 하여금 희우정이라는 세 글자를 크게 쓰게 하여 집 벽에 걸었는데, 그대가 글을 지어 기록하라.’ 하였다.
하루는 군후를 모시고 가서 오르니, 정자의 제도가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은데, 화악(華岳 백악산)이 뒤를 굽어보고 한강이 앞에 흐르며, 서남쪽의 여러 산이 창망(蒼茫)하고 아득하여 구름과 하늘과 안개와 물 밖에 저 멀리 보일락말락하였다. 굽어보면 고기와 새우를 또렷이 셀 수 있는데, 바람 실은 돛과 모래 위에 새들은 바로 자리 아래서 왕래하며, 천여 그루의 소나무는 푸르고 울창하여, 술잔과 노반에 어른거린다. 여기에 풍악 소리 요란하고 맑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니, 황홀하기가 날개를 끼고 푸른 바다에 오르는 것 같으며, 호연하기가 바람을 모아 신선 경지에 노는 것 같아서, 눈이 아찔하고 모발이 곤두서는데 모든 생각 잊고 말없이 오래도록 있다가 돌아왔다.
일찍이 생각건대 사람과 천지는 원래 일체(一體)이다. 그러기 때문에 말하기를,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생육(生育)될 것이다.’ 하였으니, 한 마디 말 한 가지 생각의 미세한 데에 이르기까지 하늘과 사람이 서로 느끼는 기틀이 분명하여 속일 수 없는 바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덕은 대소가 있고 지위는 고하가 있으며, 감통(感通)하는 효험의 넓고 좁음과 더디고 빠름이 따르는 것이니, 그러므로 감통의 묘함을 다할 수 있는 것은 제왕의 직책이요 성인(聖人)의 사업인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주상전하께서는 하늘이 내신 세상에 다시 없는 자질로 성인의 학문을 계속하여 밝혀서, 중과 화의 덕을 지극히 하여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생육하는 효험을 극진히 한 것이니, 이야말로 넓고 커서 무엇이라 이름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이 일은 특히 그 중에 한가지를 나타낸 것뿐이다.
대개 우리 전하의 백성을 근심하는 마음은 안에 깊이 쌓여 있는 것으로서, 하루 아침 교외에 나가서 농사짓는 것을 보고 비가 오지 않는 것을 근심하는 생각이 일어나서 그칠 줄을 모르게 된 것이니, 하늘의 감응이 시각을 어기지 않음도 여기서 온 것이다. 전하의 지극한 어짊과 후한 은택은 바로 이 비와 함께 흘러 퍼지고 널리 넘쳐서 천지간에 충만하여 근심하던 자가 기뻐하고 병든 자가 낫는 것이니,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 이르기까지 어찌 그 생생하는 본 성품을 이루지 못함이 있겠는가. 희우로 정자를 이름 지은 것은 하늘이 비를 내려줌을 감사하여 잊지 않으려 하는 까닭이다.
아! 저 진(秦) 나라 한(漢) 나라 이후로 중화의 도에 병든 자가 많아서 민물(民物)이 시들고 천지가 거칠어졌으니, 슬퍼할 만하도다. 지금 세상에 태어나서 은택을 입는 자는 금수나 초목의 미물(微物)까지도 어찌 영광이요 다행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푸른 띠를 띠고 붉은 자락을 끌면서 조정 위에 몸을 두어서 특별히 돌보아 주심을 받은 자에 있어서이겠는가. 참으로 천 년에 한 번도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인 것이다. 군후는 또 왕실의 지친(至親)으로 높은 지위와 부귀하기가 비할 데 없고 깊이 전하의 우애를 받음에 있어서이겠는가. 더구나 전하께서 제후의 자리에 계시면서 군후에게 이 정자에서 술을 주어 조용히 주고 받기를 잠저(潛邸)에 계실 때나 다름없이 하니, 군후의 영광이야말로 붓이나 글로 형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 전하의 우애하는 덕이 천성에 근거하고 지성(至誠)에서 나온 것으로, 대개 자신이 억조 신민의 주인이 됨을 스스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아! 지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군후는 겸공(謙恭)하고 온후하여 부귀한 자리에 잘 거처하면서 거의 교만하고 자랑하는 기운이 없으니, 종실(宗室)에 모범이 되고 왕가(王家)를 호위하여 전하의 우애가 이렇게 지극하게 되는 것도 마땅한 일이다. 그리고 이 지역의 명승은 이것이 천지 개벽 때부터 있은 것인데, 어찌 오랜 동안을 감추어져 있다가 오늘에 와서야 알려지고 빛이 나는 것인가. 이것은 군후가 몸은 비록 명예와 부귀 중에 처해 있지만, 그 높이 세속에서 벗어난 생각이 일찍이 구학(丘壑)과 강호(江湖)의 사이를 왕래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천지의 주인이 이것을 주어서 위로하는 것이다.
산천 풍경의 아름다운 것으로 말한다면 아침 저녁과 4계절의 변화하는 모양이 병든 몸이기는 하지만 다른 날 다시 군후를 모시고 이 정자에 놀면서도 군후를 위하여 적을 수 있겠기에, 여기서는 조잡한 글로 군후께서 비루하게 여기지 않음에 대해 우러러 보답한다. 다만, 성상께서 정자에 이름을 붙인 본의에 대하여는 발명한 것이 없는데, 이것은 소라 껍데기로 바닷물을 헤아리고 털끝으로 천지를 그리려 하는 일과 같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문자를 빙자하여 성명을 그 사이에 붙이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신을 알아줌이 아니겠는가. 반딧불의 작은 불빛이 해나 달의 빛을 의지하여 오래 있고 초목의 미미한 것이 천지에 붙어서 썩지 않음을 스스로 다행으로 여길 뿐이다. 드디어 흔연히 글을 쓰고 또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날아갈 듯한 새 정자, 붕새처럼 높이 앉았네. 누가 지었나, 어진 군후라. 임금이 서교(西郊)에 나가시니, 놀려함도 아니요 사냥함도 아니었네. 백성들 바야흐로 파종할새 밭에 가뭄 들어 염려하였네. 우리 임금 정자에 계시니, 때마침 단비 잘도 내렸네. 우리 임금 군후(君侯)에게 잔치 베푸니, 북소리도 은은하네. 정자(亭子) 이름 하사하니, 그 영광 전에 없던 일. 군후 머리 조아리며, 성덕을 하늘처럼 여기네. 군후 머리 조아리며 우리 임금 만년 살기 바라네. 문인에게 부탁하여, 영구히 전하려 하였네. 신이 절하고 글 지으니, 여러 선비들보다 앞섰네. 화악(華嶽)을 쳐다보니, 돌에 새길 만하네. 이 칭송하는 글 새겨, 천고에 밝게 전하리라.”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푸른 솔 깊은 곳에 정자 그윽한데, 배 대고 올라오니 취한 눈 밝아지네. 나루터의 풍파는 언제나 진정되려나, 바다 어귀의 집 같은 저 물결 언제 거두려나. 일만 집 촌락은 남쪽 포구에 잇닿았고, 일백 치첩(雉堞) 산성은 강 위에 버티고 있네. 이 경치에 넓은 회포 마음 놓고 한 번 취하리니, 덩굴 사이 밝은 달 물가에 비쳐도 좋으리라.” 하였다.
○ 동월(董越)의 시에, “저물녘에 높은 누대에 오르니, 좋은 풍광 오래 즐기며 웃는 소리 끊이지 않네. 언덕 위의 새 버들잎 강 나무와 함께 그늘지고, 물가 안개 가볍게 날아 들 구름 따라 뜨네. 난간에 의지해도 평생 꿈길 찾을 수 없는데, 촛불을 잡으니 이 밤의 놀이 참으로 좋구나. 돌아오는 길 도성 불빛이 점점 가까운데, 바다 저 동쪽엔 은빛 달 떠오르네.”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응당 응거(應璩)ㆍ유정(劉楨)과 같이 즐거운 놀이 마련하고, 윤건(綸巾)과 우선(羽扇)으로 고운 물가 내려다보네. 유리빛 그림자 움직이니, 고기와 용이 희롱하고, 논이 비었으니 기러기와 따오기 도모하네. 두 언덕의 행인들은 나루터 가느라 바쁘고, 몇 척의 상선(商船)은 가을 바다에 떠 있네. 달 밝으면 소상강 신(神)의 비파 들을 것 같으니, 술집에 막수(莫愁 기생 이름) 있는 것 무엇이 부러우리.” 하였다.
○ “자라 머리에 집을 지으니 먼 형승(形勝) 들어오는데, 창에서 보이는 것 새 병풍 둘러친 듯 하여라. 난간 앞에 바다로 가는 물 양화(楊花)의 흰 물결인데, 성 밖의 하늘에 닿은 듯 모악(母嶽)의 푸른 봉우리라. 작은 저자에 사람 돌아가니 채색 배 매여 있고, 먼 하늘에서 학 내려와 굽은 물가에서 퍼덕이네. 푸른 일산(임금의 일산) 옛날에 농사일 구경하였는데, 여기가 서교(西郊)의 희우정 그곳이라네.”
○ “천지가 넓고 넓어 아득히 끝이 없는데, 한 조각 누대에 취한 늙은이 누웠네. 지경이 봉성(鳳城 서울)에 연접하였는데 연수(煙樹)가 합하였고, 강이 큰 구렁으로 들어가 바닷길 통하네. 고기 잡는 노래 처량하니 귀한 손님 슬퍼하고, 임금 글씨 휘황하니 공장이들 수고했네, 어디선가 한가한 사람 노 저어 오니, 악군(鄂君)이 향기로운 이불 달밤에 펼치네.”
○ “이내 몸 동정호(洞庭湖) 사이에서, 천원(川原)의 좋은 풍경 구경하네, 거마는 옛 나루터에 헤매고, 높이 뜬 따오기 먼 산에 닿았네. 풍경은 봄ㆍ가을이 다르고, 하늘 모습 밤낮으로 좋아라. 한공(韓公)은 옹졸한 사람, 온수(溫水)에서 속절없이 낚시만 하네.”
○ “성문 밖 지척인데, 일 없이 놀려는 것 아니네. 강물은 참으로 도도히 흐르고, 인사는 진실로 아득하구나. 날이 맑으니 소ㆍ양도 저녁 알고, 서리 내리니 초목이 가을 되었네. 굽은 난간에서 풍악 소리 나더니, 갈대꽃 물가로 퍼져가네.”
○ “서호의 유람하던 곳, 형승(形勝)은 이 정자가 제일이네. 구름은 사곡(賜谷)을 이웃했고, 풍류는 영화(永和)와 같네. 도성 사람들 절경이라 말하는데, 왕자가 별장 지었네. 이 세상의 그림 그리는 이, 저 모습 그릴 수 있는가.” 하였다.

영복정(榮福亭) 서강(西江) 북쪽 언덕에 있는데,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별장이다. 세조가 일찍이 거둥하여 손수 ‘영복(榮福)’이란 두 글자를 써서 정자의 편액으로 하고 이어 영일세 복백년(榮一世福百年 한 세상에 영화롭고 백 년에 복 받는다는 뜻)이란 여섯 글자로 그 뜻을 해석하여 하사하였다.
풍월정(風月亭)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정자를 안국방(安國坊) 집 서쪽 동산에 지었는데, 성종이 친히 왕림하여 ‘풍월(風月)’이란 두 글자를 하사하여 편액으로 하게 하고, 시 여섯 수를 지어 문신들에게 명하여 화답하게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문물이 태평한 세월 백 년 가운데, 공후(公侯)의 집 연못 정자에 또 봄바람 불어오네. 임금 글 하사하니 성신(星辰)인양 빛나고, 어사주 자주 내리니 우로(雨露)인양 풍성하네. 작은 물결 무늬져 오리처럼 푸르렀고, 온갖 꽃 점점이 단장하여 원숭이 같이 붉게 물들었네. 누대 앞 꽃봉오리도 은혜 받아 취한 것, 조회에서 물러나 소나무와 대나무의 주인옹(主人翁) 되네.” 하였다.
○ “열두 난간이 푸른 못 대하였는데, 높이 달린 금빛 편액에서 용의 광채 움직이네.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긴 천 년 승지(勝地)에, 버들 푸르고 꽃 피니 온갖 봄빛 향기롭네. 염막(簾幕)에 바람 풍기니 더위란 간 곳 없고, 지대(地臺)에 달 뜨니 은근히 서늘한 기운 생기네. 동평왕(東平王)의 선을 즐기는 일 어느 누가 허물 하리, 보잘것없는 식객 둔 맹상군(孟嘗君)을 어찌 일찍이 헤아리리요.”
○ “유리 같은 맑은 물 정자를 서늘케 하는데, 햇빛 반짝반짝 푸른 마름 뒤척이네. 쇠채로 줄을 골라서 비단 비파 울리고, 금구(金龜)로 술을 바꾸어 은병으로 보내오네. 밤 기운 서늘하니 연꽃에 달 비쳐 차고, 하늘이 맑으니 계수나무에 바람 풍겨 향기롭네. 일대의 이름난 왕자[維城] 그 모습 옥 같은데, 하간(河澗)의 예약으로 길이길이 강녕(康寧)을 누리길.”
○ “못 위에 줄줄이 잔무늬 물결지는데, 푸른 하늘 물 같고 구름 한 점 없네. 금 술 두루미 가는 그림자는 꽃 사이로 보이고, 옥 바둑알 울리는 소리 대 숲 너머로 들려오네. 동산 안 풍류 소리에 봄놀이 흥겹고, 귀한 손님 패물에 달빛이 아롱지네. 눈썹 사이엔 누른 햇무리 보이기도 하는데, 좋은 잔치 새로 베푸니 뺨 먼저 붉어지네.”
○ “당당한 저 시절 가고 찾고 하는 동안, 아름다운 경치 좋은 날에 구경할 마음 다시 생기네. 좋은 자리 골라 잡아 자리 펴니 꽃 기운 풍기고, 서늘한데 찾아내어 자리 옮기면 버들 그늘이 깊네. 악보 새로 편성하니 청탁음(淸濁音)이 나뉘는데, 전에 사들인 도서(圖書)엔 고금(古今) 일이 섞여 있네. 맑은 흥은 풍류가 담박(淡泊)을 겸하였으니, 작은 난간에 달 뜨면 외로운 술잔 벗 삼으리.”
○ “봄을 감춘 깊은 담에 따뜻한 연기 일어나니, 중국 사신이 하사품 가져 온 것 절하고 보내네. 비단 안장 철총(鐵驄)말은 버들 사이로 지나가고, 금방울 고운 비둘기는 꽃 흔들며 우네. 구중 궁궐 은혜도 중한데, 천상의 성신(星辰)은 지척간에 벌여 있다. 진중(珍重)한 성은(聖恩)에 응당 감격하여, 남산같이 만수무강하기를 마음속 깊이 축원하노라.”

『신증』 황화정(皇華亭) 두뭇개[豆毛浦] 북쪽 언덕 위에 있다. 연산군(燕山君)이 이 정자를 지어 놀이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지금 임금 초년에 제안대군(齊安大君)에게 하사하였다.
침류당(枕流堂) 한강 언덕에 있는데 경력(經歷) 이사준(李師準)의 별장이다.
○ 강혼(姜渾)의 시에, “인간 세상에 크게 숨은 한강 남쪽 늙은이, 조용히 거처하는 곳 성 밖의 침류당이네. 강산은 길이 돌아오지 않는 손을 짝하는데, 풍월은 참으로 무진장하구나. 솔 언덕에 새벽 일찍 학 앉은 나무 보겠고, 단풍 숲엔 저녁 늦게 낚시 배 매어두네. 오직 한 번 취한 그것으로 조물주에 보답하니, 풍당(馮唐)의 늙은 낭관 뉘라서 부러워하리.”
○ “한강 남쪽의 형승은 동방에서 이름났는데, 낚시질하는 저 늙은이 그 옆에 살며 주인 노릇하네. 강에 비 내릴 때는 붉은 잉어 뛰놀고, 산바람 지나면 흰 마름이 향기롭네. 문에는 속객(俗客) 없으니 그윽한 지경 이루었고, 술이 신이(神異)한 공 있어 취한 마을 들어가게 하네. 조물주 아마도 이 늙은이 편안케 하리니, 귀밑털 흩날리며 창랑에 노닌들 어떠리.” 하였다.
○ 최숙생(崔淑生)의 시에, “한강 저 강 위 제천정(濟川亭) 곁에, 그대가 지은 집 이 당(堂) 있네. 갈매기ㆍ해오라기 시름 잊고 함께 이웃하는데, 구름ㆍ노을 서로 벗하여 같이 숨어 사노매라. 동ㆍ서문 밖엔 사람들 길 다투는데, 서쪽 변방 산 앞에 손이 배 띄우네. 헛된 명성에 분주하는 것 무엇에 소용되리, 백 년의 생애를 늙은 어부와 함께 하리라.” 하였다.
○ 남곤(南袞)의 시에, “그대 경치 좋은 곳 찾아 푸른 강가 정했는데, 좋은 집 새로 지으니 조망(眺望)이 탁 틔었다. 벌린 멧부리 평평한 모래사장은 진정 생동하는 그림인데, 물오리 나는 해오라기 이 역시 풍류스럽도다. 주인은 높이 누웠으니 실컷도록 볼 것이고, 지나는 손 와서 놀 제 말이 그치지 않네. 언제나 벼슬 버리고 그대 따라가서, 반 삿대 맑은 강물에 가벼운 배나 띄워 볼까.” 하였다.

【역원】 노원역(盧原驛) 흥인문(興仁門) 밖 4리 지점에 있다. 청파역(靑坡驛) 숭례문(崇禮門) 밖 3리에 있다. 이상의 두 역은 바로 병조(兵曹)에 예속되었다. 보제원(普濟院) 흥인문 밖 3리 지점에 있다. 누대가 있는데 기로(耆老)들이 여기서 모여 술 마셨으며, 조말생(趙末生)이 서문(序文)을 지었다. 홍제원(洪濟院) 사현(沙峴) 북쪽에 있다. 누대가 있는데, 중국 사신이 옷을 고쳐 입던 곳이다. 이태원(梨泰院) 목멱산(木覓山 남산) 남쪽에 있다. 전관원(箭串院) 살곶이 다리 서북쪽에 있다.
【교량】 혜정교(惠政橋) 운종가(雲從街 종로)에 있는데, 다리 동쪽에 앙부일구대(仰釜日晷臺)가 있다.
○ 김돈(金暾)의 명(銘)에, “모든 시설을 하는 데에는, 시간보다 더 중한 것이 없다. 밤에는 경루(更漏)가 있지만, 낮에는 알기 어렵다. 구리로 주조하여 그릇을 만들었는데, 형상이 가마솥 같다. 바르게 둥근 테를 설치하였는데, 자(子)와 오(午)가 마주 선 것이다. 공간이 꺾인 데를 따라 돌아오니, 분각(分刻)을 기록한 것이다. 도수(度數)를 안에 새겼는데, 주천(周天)을 절반한 것이다. 신(神)의 몸을 그렸는데,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하여서이다. 각(刻)과 분(分)이 소상한데, 햇빛에 비친 것이다. 길가에 설치함은, 보는 사람들이 모이게 함이다. 지금부터는, 백성들이 일할 때를 알 것이다.” 하였다.

대광통교(大廣通橋)ㆍ소광통교(小廣通橋) 모두 종루(鍾樓) 남쪽에 있다. 통운교(通雲橋) 종루 동쪽에 있다. 연지동교(蓮池洞橋) 통운교 동쪽에 있다. 동교(東橋) 연지동교 동쪽에 있다. 광제교(廣濟橋) 광통교 동쪽에 있다. 장통교(長通橋) 광제교 동쪽에 있다. 수표교(水標橋) 장통교 동쪽에 있다. 다리 서쪽 물 가운데 석표(石標)를 세우고 척촌(尺村)의 수를 새겼는데, 빗물이 나면 거기에 의하여 깊고 얕음을 안다. 신교(新橋) 수표교 동쪽에 있다. 영풍교(永豐橋) 신교 동쪽에 있다. 대평교(大平橋) 영풍교 동쪽에 있다. 송첨교(松簷橋) 사헌부(司憲府) 서쪽에 있다. 영도교(永渡橋) 흥인문 밖에 있는데, 곧 개천(開川)의 하류이다. 제반교(濟磐橋) 살곶이에 있다. 청파신교(靑坡新橋)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다. 경고교(京庫橋)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다. 홍제교(洪濟橋) 홍제원(洪濟院) 북쪽에 있다.
【시가】 운종가(雲從街) 곧 종루 서쪽 시가이다.
【불우】 흥천사(興天寺) 서부(西部) 황화방(皇華坊)에 있다. 홍무(洪武) 정축년(태조 6년)에 우리 태조께서 명하여 신덕왕후(神德王后)를 정릉(貞陵)에 장사지내고 절을 그 동쪽에 지으니, 선종(禪宗 참선을 위주로 하는 불교의 종파)의 절이 되었다. 권근(權近)의 기문(記文)이 있다. 후에 능은 다른 곳으로 옮기고 절은 그대로 두었다. 세조 7년에 큰 종을 주조하여 달았다.
○ 한계희(韓繼禧)의 명(銘)에, “성신(聖神)하신 우리 임금, 일찍부터 불법(佛法)을 받들었네. 손으로 금륜(金輪)을 잡고, 하늘 받들어 정치하셨네. 근엄하고 조심하여, 잠잘 겨를도 없으셨네. 신인(神人)이 협력하고 화합하여, 영험ㆍ은혜 함께 이르렀네. 크게 깨달음 있어, 부처 인연 널리 퍼졌네, 사리(舍利) 분신(分身) 설치하니, 희한한 사실 나타났네. 세상 이목 경동(驚動)하고, 천지에 광채 빛나네. 신령한 상서 진동하니, 억천 겁에 없는 일이네. 임금 마음 기뻐하사, 큰 맹세로 발원하였네. 높은 화상[睟容] 그려 모시고, 불경 뜻 풀이하셨네. 열성조에 복 주시고, 만백성에 미쳤네. 국사 사업 영원하여, 억만 년 가리라. 부처님의 도가 넓어서, 막힌 것 모두 뽑아주네. 우리 임금 본받으사, 큰 자비(慈悲)로 널리 구제하네. 금을 부어 종 만드니, 일체 중생 깨우쳐 주려함일세. 고생 멈추고 혼미한 것 깨우침이, 오고 오는 영원한 세상까지.” 하였다.

흥덕사(興德寺) 동부 연희방(燕喜坊)에 있는데, 교종(敎宗 교리를 위주로 하는 불교의 종파)이다.
○ 권근(權近)의 〈덕안전기(德安殿記)〉에 “건문(建文) 3년(태종 1년) 여름에 태상왕(太上王 태조)이 명하여 터를 예전 사시던 집 동쪽에 정하고, 따로 이 새집을 짓게 하였다.
가을에 공사가 끝나니 신 근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고려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그 사가(私家)를 광명(廣明)ㆍ봉선(奉先) 두 절로 만들었으니 나라를 이롭게 하려 함이었다. 내가 부덕한 몸으로 국가를 대신 통치하게 되어 전대(前代)의 일을 생각하여 장차 이 집으로 절을 만들어서 영원히 대대로 나라를 복되게 하는 장소를 삼으려 하니, 위로는 선조(先祖)를 복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이롭게 하여, 종묘 사직이 영구히 견고하고 왕실의 계통을 그지없도록 전할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정전에는 석가모니의 출산(出山)하는 그림을 걸고, 또 북쪽 문미에는 그 위에 시렁을 만들어 가운데는 밀교대장경(密敎大藏經) 한 부를 봉안하고 동쪽에는 새로 새긴 대자능엄경(大字楞嚴經) 판본을 두며, 서쪽에는 새로 새긴 수륙의문(水陸儀文) 판본을 간직하였다. 좌우로 곁채를 지어 참선하고 강론하기에 편리하게 하며 곁에 작은 집을 지으니 네모진 못을 내려다 보게 되고 주방ㆍ곳간ㆍ문간ㆍ행랑 등이 모두 제자리에 놓여졌다. 공(功)은 금장식[側金]보다 못하지만 발원은 온 누리[轉輪]에 두루하여 모르는 가운데 보탬이 되고 분명하게 이익을 얻는 것이다. 은택을 한정 없이 펴고 국가를 무궁하게 전하며 마침내는 티끌 세상을 벗어나고 바른 깨달음[正覺]을 증명하게 되는 것이 소원이다. 그대가 기문을 지어 후세에 전하여 만세의 자손들로 하여금 지켜서 변함이 없게 하라.’ 하셨다. 그러므로 신 근이 물러나서 명을 받들고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적는다.” 하였다.
○ 서거정의 〈연당시(蓮塘詩)〉에, “작은 목 찰랑찰랑 잔 물결 푸른데, 연꽃 새로 피어 깨끗도 하구나. 천손(天孫)이 운금(雲錦) 베틀에서 짜낸 듯, 붉고 붉고 희고 흰 것 서로 비쳐 빛나네. 깨끗하고 높은 모습 진흙의 더러움 받지 않으니, 좋은 꽃들 마냥 풍류롭고 아름답다. 백발의 세속 늙으니 강남(江南)을 꿈꾸다가, 여기서 언뜻 이 꽃 보고 맑은 흥에 취하였네. 향기로운 바람 불고 불어 향기로운 안개 젖었는데, 난간을 의지한 저문 날에 두 소매도 젖었어라. 내 평생 꽃과 운치 죽도록 좋아하여, 사가(四佳)와 인연을 맺은 지 어느새 10년이라네. 서로 만나매 상긋 웃으며 친구라 이름 부르니, 내가 꽃을 저버리지 않는데 꽃 어찌 나를 저버리리. 산중의 새로 판 못이 독보다 작은데, 화신(花神)이 벌써 신령한 종자 옮겨주기 허락했네. 내년 5월에 저 꽃들 만발하면, 벽통(碧筒)에 술 따라 3백 잔 마셔보려네. 그때 그대 술병 가지고 한 번 찾아오면, 노래 부르며 두 다리로 뱃전 두드려 보세나.” 하였다.

내불당(內佛堂) 인왕산(仁王山)에 있다.
원각사(圓覺寺) 중부 경행방(慶幸坊)에 있는데, 예전 이름은 흥복(興福)이다. 태조 때에 조계종(曹溪宗) 본사(本社)가 되었으며, 후에 절을 폐지하여 관청[公廨]을 삼았다. 세조 10년에 고쳐 짓고 원각사라 이름하였는데,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다.
인왕사(仁王寺) 인왕산에 있다.
○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한 구비 임천(林泉)이 좋은데, 천 그루 수목도 맑구나. 끊어진 암벽(巖壁)에 이끼 끼어 푸르고, 그윽한 시내엔 절로 난 꽃 환하여라. 겹겹의 봉우리에 구름 엉겨 그림자 지고, 절반쯤 저 고개 위에 소나무 서서 소리나네. 세상 공명 꿈인양 생각 없는데, 게으른 습성 이래서 이뤄졌네.” 하였다.

금강굴(金剛窟) 인왕사 서쪽에 있다.
복세암(福世菴) 인왕산에 있는데 세조조에 지었다.
장의사(藏義寺)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다. 신라가 황산벌에서 백제 군사와 더불어 싸웠는데, 장춘랑(長春郞)ㆍ파랑(罷郞)이 진중에서 죽으니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두 사람을 위하여 이 절을 지었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시냇물 끊어졌는데 층층이 얼음만 쌓이고, 바람소리 요란하니 일만 구멍 울리네. 산 모습 겨울 되자 더 여위고, 눈빛은 밤에도 밝구나. 외로운 탑 달빛에 그림자 지고, 성긴 종소리 구름 밖에서 들리네. 분향하자 선실(禪室)도 따스한데, 단정하게 앉으니 마음 절로 맑아지네.” 하였다.
○ “범궁(梵宮)이 계곡에 빛나는데, 목탁소리 공중에서 높이 들리네. 탑[榻]을 둘러 향연(香煙)이 푸르고, 창에 비쳐 햇빛 밝다. 눈 쌓여도 소나무 절개 안 변하고, 얼음이 합하니 물은 소리 없네. 제호(醍醐) 맛 하도 좋아서, 입안[齒頰] 절로 맑아지네.” 하였다.

연굴(演窟) 소격서동(昭格署洞)에 있다.
향림사(香林寺) 삼각산(三角山)에 있다.
○ 고려조 현종(顯宗) 경술년 난리에 태조의 재궁(梓宮)을 이 절로 옮겼다가, 7년 병진에 현릉(顯陵)으로 환장(還葬)하였으며, 9년에 거란[契丹]의 소손녕(蕭遜寧)이 다시 여기에 이안(移安)하였다가, 10년에 다시 현릉으로 모셨다.

석적사(石積寺) 삼각산에 있다.
청량사(淸涼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조의 이자현(李資玄)이 춘천(春川) 청평산(淸平山)에 있었는데, 예종(睿宗)이 남경(南京 지금 서울)에 순행하여 그 아우 자덕(資德)을 보내어 행재(行在)에 나오게 하여, 청량사에 머물게 하였다. 일찍이 불러 보고 양성(養性)하는 요결(要訣)을 물었는데, 심요(心要) 한 편을 드리니 왕이 감탄 칭찬하며 대우가 매우 후하였다.

중흥사(重興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조의 중 보우(普愚)가 일찍이 절 동쪽 봉우리에 집 짓고 살며 태고(太古)라고 편액하고, 영가체(永嘉體)를 모방하여 노래 한 편을 지었다. 보우가 죽자 이색(李穡)이 비명(碑銘)을 지었다.

승가사(僧伽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조 이오(李䫨)의 중수기에 이런 말이 있다. “최치원(崔致遠)의 문집을 보면, 옛날 신라 시대의 낭적사(狼跡寺) 중 수태(秀台)가 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익히 듣고, 삼각산 남쪽에 좋은 자리를 정하여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형상을 그리니 대사의 어진 모습이 더욱 우리나라에 비쳤다. 국가에서 천지의 재변과 수재ㆍ한재의 재난이 있으면 기도를 드려 물리치게 하였는데, 언제나 즉석에서 영험이 있었다.” 하였다.
○ 고려조 유원순(兪元淳)의 시에, “구불구불한 돌다리에 구름을 밟고 올라가니, 좋은 집 높이 있어 조화의 고장 같아라. 가을 이슬 가늘게 떨어지니 천 리 안계(眼界) 상쾌하고, 석양이 멀리 잠기니 저 강물 밝게 빛이 난다. 공중에 오락가락 가는 아지랑이 향불 연기[香穗]에 잇닿았고, 골짜기에서 우는 한가한 새 소리 경뇌 소리 대신하네. 그보다 부러운 일은 고승(高僧)의 마음, 인간 세상의 명리(名利)란 도무지 마음에 없다네.” 하였다.
○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높은 바위 산길은 험한데, 지팡이 짚고 또 덩굴 더위잡네. 처마 가엔 가던 구름 머물고, 창 앞엔 쏟아지는 폭포 많을세라. 차를 끓이니 병에서 가는 소리나고, 물을 길으니 우물에 작은 물결지네. 두어 명 고승(高僧) 있어, 관공(觀公)하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네.” 하였다.
○ 유방선(柳方善)의 시에, “승가의 법당 높은 데 의지했는데, 예전 놀던 일 계산하니 오랜 세월 지났네. 어느 날 또다시 그 선탑(禪榻) 가에서, 등잔불 돋우고 조용히 앉아 찬 밤을 지내 볼꼬.” 하였다.

삼천사(三川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조의 이영간(李靈幹)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다.

문수사(文殊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조 이장용(李藏用)의 시에, “성 남쪽 10리에 평평한 모래 희기도 한데, 성 북쪽엔 두어 줄기 중첩된 봉우리 푸르구나. 늙은 원님 거칠고 게을러[疏慵] 공사 일찍 파하고, 마음대로 나가 놀며 그윽한 자취 찾네. 양주(楊州) 하늘에 학을 타고 날기도 하는데, 가다가는 나귀 타고 화산(華山) 길을 지나기도 한다네. 벼슬길 그만두려 하나 어리석어 어찌 하리, 좋은 일 가시기 쉬우니 더구나 애석하도다. 누른 소매 호통치며 인도하나 너무나 속되고, 반가운 눈빛으로 대하니 높은 격조 있는 듯하여라. 구불구불한 비탈길 더위잡고 올라가니, 으슥한 수풀 고개 차츰 막혀지네. 절벽 저 골짜기 내려다보니 까마득하기만 한데, 높은 산마루에 올라가니 더욱더 움추려지도다. 긴 해는 높은 봉우리에서 겨우 두어 길인데, 구름다리 공중에 건너질러 몇 천 자나 되나. 나는 새 까마득 초(楚) 나라 하늘에 닿았는 듯, 넓은 들 분명하여 한강의 그림이네. 안개 끼지 않은 저 서쪽에 신선 마을 보이는데, 큰 강물 남쪽은 나루터로 통해 있다. 한 번 돌아 옮겨 서서 혼자서 탄식하노니, 팔방 잠시간에 둘러 볼 수 있는 듯하여라. 매달린 돌층계 들죽날쭉 90층 되는데, 옛날의 그 자취 어슴푸레 오르내린 신 자국이런가. 기이하다 세상엔 없는 청련궁(靑蓮宮)인데, 크게 슬기로운 진인(眞人)의 집이 여기라네. 석굴(石窟)이 크게 열렸는데 돌이끼 아롱지고, 수풀 속의 감실[林龕] 빛나는데 단청이 눈부시네. 그린 모습 완연히 복성(福城) 동쪽 같은데, 보배로운 앉음 금사자 등에 높이 있다. 바라보면 길한 지역 장자(長者)의 거처인데, 법계(法界)의 현관(玄關 불법으로 들어가는 입구) 열려 있는 줄 뉘라서 알았으리. 큰 자비는 분명 세상 번뇌 제거하는데, 한 움큼 샘물 흘러 내려 영액(靈液)이 피어 있다. 노는 사람 천룡(天龍)의 꾸지람 혹시라도 두려워서, 마실까 주문 외며 물그릇 한 번 던져 본다네. 연하(煙霞) 그림자 속에 외로운 탑이 푸른데, 종소리ㆍ불경 소리에 등잔불 밝게 비치네. 의연한 좋은 모임 보광(普光)을 옮기니, 응당 묘한 공양 있어 향적(香積)으로 오리라. 옛날 선왕이 어향(御香)을 올렸다는데, 지금도 중국 사신 와서 종사(宗社 나라의 종묘와 사직단)의 안녕 기원한다네. 가을 풍경 찾아내 마침 찾아드니, 중 있어 만류하며 저녁 산색(山色) 구경하라네. 처마 의지한 여러 산봉우리 옥인 양 높이 서 있고, 난간에 닿아 있는 먼 수풀들 비단같이 펼쳐 있네. 채소 음식 즐거이 들며 맑은 향기 배불리고, 다시금 부들 자리 빌려 앉아 편한 것 찾았노라. 이야기가 길어지니 조각달 깊은 문에 들어오고, 밤이 오래니 은은한 바람 잣나무를 울어 스치네. 하도 좋을사, 선탑(禪榻)의 고요하고 적막함이여, 불현듯 웃음 나네. 인생들 무어라 허덕이나. 쉽사리 의관 벗지 못함은, 혹시라도 죽백(竹帛)에 공명 정하려는 것이어라. 맑은 잠 왼통 동자의 깨우는 대로 맡기니, 붉으스레 아침 해가 떠오르네. 천태산[台崖]에 손 흔들어 부르는 사람 따라가려 하나, 여산[盧嶽]의 눈썹 찡그리던 사람이 부끄럽네. 진세의 속된 말이 청산을 더럽히니 그대여 싫어 마소, 일찍이 임금 말씀 쓰며 궁중에 들어섰다네.” 하였다.
○ 고려조 탄연(坦然)의 시에, “한 칸 방 어찌 그리 너무도 고요한가, 일만 인연 모두 적막하네. 길은 돌 틈으로 뚫고 가고, 샘은 구름 속에서 새어나네. 밝은 달 처마 끝에 걸려 있고, 산들바람 숲 속에서 일어나네. 누가 저 스님[上人]따라, 고요히 앉아 참 즐거움 배우려나.” 하였다.

진관사(津寬寺) 삼각산에 있다.
○ 권근의 〈수륙사조성기(水陸社造成記)〉에, “근본에 보답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것은 왕도 정치의 먼저 할 바이요, 물건을 이롭게 하고 창생을 구제하는 것은 불교에서 중히 여기는 것이니, 두 가지가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 인(仁)한 마음의 발동으로써 사랑하고 효도하는 정성이 자연 그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전의 덕이 높은 황제와 명철한 군왕의 도는 조(祖)를 높이고 종(宗 조상(祖上))을 공경하여 그 효도를 넓히며, 은혜를 널리 베풀어 많은 사람을 구제하여 그 인을 넓혀서 근본에 보답하는 것이 지극하고, 물건을 이롭게 하는 것이 넓다고 할 것이다.
불가[佛氏]의 말에는, 사람이 죽어도 없어지지 않고 그가 한 일이 선하고 악함에 따라서 바퀴처럼 돌아 태어나게 되는데, 부처님은 자비를 베풀어서 고생을 없애고 기쁨을 주며 그 빠지는 것을 건져줄 수 있으니, 살아있는 이가 만일 부처님을 섬기고 중을 대접하여 죽은 이를 좋은 길로 인도한다면 죽은 이의 혼이 아귀(餓鬼)가 되었다가도 배부를 수 있고 괴롭다가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부처가 되어 길이 돌고 도는 보응(報應)을 면하며 살아 있는 이도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하니, 여기서 효자 자손(慈孫)에서 우부(愚夫) 우부(愚婦)에 이르기까지 휩쓸려서 불도로 돌아가지 않는 이가 없고, 혹시라도 미치지 못할까 하여 온 세상이 물결처럼[滔滔] 불도를 높이고 이것을 받드는데 수륙 무차평등(水陸無遮平等)의 모임은 그 법 중에서도 제일 성대한 것이다.
홍무(洪武) 정축년(태종 6년) 정월 을묘일에 주상께서 내신(內臣) 이득분(李得芬)과 중[沙門] 신(臣) 조선(祖禪) 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내가 국가를 맡아 다스리게 된 것은 오르지 조종(祖宗)의 적선[積慶]에 의하여서이니, 조상에 대한 보답을 위하는 일이라면 힘쓰지 않는 것이 없다. 또 생각하니, 신하와 백성들이 혹은 나라 일에 죽고 혹은 스스로 운명하였는데, 주관하여 제사드릴 이가 없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쓰러져도 구원하지 못하니, 내가 매우 민망스럽게 여긴다. 옛 절에 수륙도량(水陸道場)을 마련하고 해마다 베풀어서 조종의 명복을 빌고 또 중생을 이롭게 하려 하니, 너희들이 가서 자리를 찾아 보라.’ 하였다. 사흘째 되는 정축일에 득분 등이 서운관(書雲觀) 신(臣) 상충(尙忠)ㆍ양달(陽達), 중 지상(志祥) 등과 함께 삼각산에서부터 도봉산(道峯山)까지 보고 복명(復命)하여 아뢰기를, ‘여러 절들이 있지만 진관사(津寬寺)만큼 좋은 데가 없습니다.’ 하니, 이에 주상께서 도량을 이 절에 설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대선사(大禪師) 덕혜(德惠)ㆍ지상(志祥) 등에게 명하여, 중들을 소집해서 공사를 시행하게 하였는데, 내신 김사행(金師幸)이 더욱 힘을 들였다. 그달 경진일에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2월 신묘일에 주상이 친히 왕림하여 세단(壇)의 위치와 차례를 정하였으며, 3월 무오일에 또 행차하여 보았다. 가을 9월에 공사가 끝났는데 세 단은 모두 집을 3칸씩 지었으며, 중단과 하단 좌우에는 또 각각 목욕실 3칸 있고, 하단 좌우에는 따로 조종의 영실(靈室) 8칸씩을 설치하였다. 대문ㆍ행랑ㆍ부엌ㆍ곳간이 갖추어져 시설되지 않은 것이 없는데, 모두 합하여 59칸이며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그 제도에 맞았다. 이달 24일 계유에 주상이 또 친히 보시고, 정축일에 명하여 신 근(近)을 불러, ‘그 시종을 적어서 후세에 보여 주게 하라.’ 하였다.
신 근이 가만히 들으니, 인륜의 도는 효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며, 군왕의 덕도 효보다 큰 것이 없다 하니, 조종 제사의 예의와 추모 숭봉하는 법전은, 군왕으로서 근본을 보답하는데 무엇이 효보다 더하리요. 그런데 성인의 마음은 오히려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하늘을 짝하여 교(郊)에서 제사드리고 상제를 짝하여 명당(明堂)에 임하시니, 높여 받드는 일이 극진하다 할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주상전하께서는 신무(神武)하신 자질과 인효(仁孝)하신 덕으로 천명을 받들어 국가를 창건하시니, 공은 조종조에 빛나고 은택은 만물에 덮였으며, 선조를 받드는 마음이 주야로 더욱 정성스러웠다. 하늘을 짝하는 제사가 이미 극진하고 부처에 귀의(歸依)하는 마음이 또한 간절하여 우리 조종의 하늘에 계신 영혼으로 불기(佛記)를 받고 묘과(妙果)를 깨달아 얻을 수 있게 하며, 그 은택이 주인 없는 귀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로운 은택을 입게 하시니, 성효(誠孝)의 감동하는 바가 지극하다고 할 것이다. 이 마음을 미루어 물건에도 미치며 친근한 데에서 소원한 데에 이르고, 어두운 데에서 밝은 데에 나아간다면, 금일부터 무궁한 후일에 이르기까지 그 공덕의 큼과 이택(利澤)의 영원함을 어찌 쉽게 측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푸르고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 연못가의 누대 둘러쌌는데, 땅 궁벽하고 하늘 깊은 곳에 동부(洞府) 열려 있다. 시내는 옥이 둘린 것같이 굽이치고, 산은 구름 솟은 것같이 형세가 높기도 하네. 중을 도태(陶汰)한 원위(元魏)는 오히려 웃음만 자아내고, 불도에 혹한 소량(蕭梁)은 슬플 것도 못 된다네. 옳게 여기고 그르게 여김이 없으면 마음 자연 바르게 되는 법, 누가 인연 깨달은 이고 누가 여래(如來)이더냐.” 하였다.

도성암(道成菴) 삼각산 동쪽에 있는데, 정의공주(貞懿公主)의 원찰(願刹)이다.

【사묘】 백악신사(白嶽神祠) 백악 마루에 있는데 매해 봄ㆍ가을에 초제(醮祭)를 지낸다.
○ 중악(中嶽) 삼각산을 여기 와서 제사 드리는데 삼각산 신은 북쪽에 있어 남향이고, 백악산 신은 동쪽에 있어 서향이다.

목멱신사(木覓神祠) 목멱산 마루에 있는데 매해 봄ㆍ가을에 초제를 지낸다.
한강단(漢江壇) 한강 북쪽 언덕에 있다. 매해 봄ㆍ가을에 제사를 드린다.

【고적】 장한성(長漢城) 한강 위에 있는데 신라 때 중요한 진영(鎭營)을 설치하였다. 후에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던 것을 신라에서 군사를 출동하여 회복하고 장한성 노래를 지어서 그 공적을 기념하였다.
대성락영(大星落營) 용삭(龍朔) 원년(신라 문무왕 1년) 봄에 고구려와 말갈(靺鞨)이 신라의 정병이 모두 백제 가까이에 있어 안이 비었으니 공격할 만하다고 하면서, 군사를 출동하여 수륙으로 함께 나아와서 북한산성을 포위하였다. 고구려는 서쪽에 진치고, 말갈은 동쪽에 주둔하여 공격하기 열흘이 넘으니 성안에서 위태롭고 두려워하였는데, 문득 큰 별이 적진에 떨어지고 또 뇌우(雷雨)가 오며 번개 치니 적들이 겁내고 놀라서 포위를 풀고 도망갔다.
신혈사(神穴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조에 현종(顯宗)이 중이 되어 이 절에 거처하였는데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자주 사람을 보내어 해치려 하였다. 절에 늙은 중이 있어 방 안에 굴을 파고 숨긴 다음, 그 위에 평상을 두어서 불측한 변을 방지하였다. 하루는 왕이 우연히 시냇물 흐르는 것을 보고 시를 짓기를, “한 줄기 시냇물 백운봉(白雲峯)에서 나오니 만 리 먼 바다에 길이 절로 통하네.” 하였다. 잔잔하여 바위 아래 있단 말을 마소. 많은 시일 안 가서 용궁(龍宮)에 이른다네.” 하였다.

면악(面嶽) 고려조 숙종(肅宗) 9년에 최사취(崔思諏)ㆍ윤관(尹瓘) 등을 명하여 남경(南京)으로 삼을 장소를 찾아보게 하였다. 사취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신 등이 노원역(盧原驛)ㆍ해촌(海村)ㆍ용산(龍山) 등지에 가서 산수의 형편을 살펴 보았는데 도읍지를 삼기에 적당하지 않으며, 오직 삼각산 면악 남쪽에 산의 모양과 물의 형세가 옛글에 부합(符合)하니, 그 주간(主幹) 중심지 임좌병향(壬坐丙向)되는 곳에 형세를 따라 도읍을 삼고, 지형에 의하여 동쪽은 대봉(大峯)에 이르고 남쪽은 사리(沙里)에 이르며, 서쪽은 기봉(岐峯)에 이르고 북쪽은 면악에 이르게 경계를 정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 지금 생각하면 면악은 백악인 것 같다.

추흥정(秋興亭) 옛 터가 용산강(龍山江) 가에 있다.
○ 이숭인(李崇仁)의 기문에 “용산(龍山)은 원래부터 강산의 좋은 곳으로 알려졌다. 또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이 잘 되며, 강에는 배가 운행하고 육지에는 수레가 통행하여 이틀 밤낮이면 경도(京都)에 이를 수 있으므로 귀인들이 많이 별장을 마련하여 두었다. 전(前) 봉익(奉翊) 김공(金公)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휴양한 지 오래였는데, 우연히 사는 집 동쪽에서 한 언덕을 발견하니 높고 바르며 등이 굽어서 형상이 배를 엎어놓은 것 같았다. 드디어 정자를 그 위에 지었는데 솔 베어 서까래를 걸고 속새 베어 지붕을 덮었다. 땅이 높고 모진 것은 평평하게 하고 수목이 빽빽하고 가리운 것은 베어내니, 두루 다니며 사면으로 바라보아도 좋지 않은 것이 없다. 이에 정자 이름 지어 주기를 김비감(金秘監)에게 청하여 추흥정(秋興亭) 세 글자를 써서 현판을 달고,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므로 내가 그 한두 가지 그럴 듯한 것을 찾아서 이렇게 적는다.
천지의 운행은 다함이 없고 사시의 경치는 같지 않은데, 우리의 즐거움도 한 가지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다. 내가 이 정자를 생각해보니 봄날이 따스하고 동풍이 화창하게 불어오면 숲 속의 꽃과 들판의 풀이 붉게 새로 피고 푸르게 깔리는데, 이때에 큰 소리로 노래 부르며 서성거리면 유연(悠然)히 공자가 ‘나는 증점(曾點)의 기상을 허여(許與)한다.’는 마음이 있으며 뜨거운 볕이 하늘에서 내려오면 쇠라도 녹이고 돌이라도 녹일 것 같으며, 천지가 이글이글 타는 화로 같아지는데, 이때에는 나무 그늘을 찾고 맑은 바람을 쏘이며 옷깃을 풀어 헤치고 산보하면 한만(汗漫)하기가 열어구(列禦寇)의 신선놀이와도 같다. 또한 찬 기운이 엉겨서 얼고 외로운 기러기 구름 속에서 울고 가면 등륙(滕六)이 재주를 피워 강과 하늘이 한 빛이 되는데, 이때에 일엽 편주 저어 오가면 높은 생각 맑은 운치가 섬중(剡中)에 가는 것과도 방불하다. 그런데 비감(秘監)은 어찌하여 가을의 흥치[秋興]만을 취한 것인가.
대개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는 사람들이 모두 괴로워하는데, 오직 봄철의 화창함과 가을철의 맑음이 사람에게 적합하다. 그렇지만 봄철의 화창한 기운은 사람들을 게을러지게 하기 쉬운데, 무더위가 명령을 거두고 맑은 가을 소리가 음률을 맞추어 들려오게 되면 하늘 끝 땅 다한 데까지 청명하고 환하게 트이니, 그 기운이 사람에게 주는 것은 비록 공명과 부귀 같은 사람의 마음을 태우는 것이라도 변하여 청량하게 되는 것이다. 사시의 경치가 가을처럼 좋은 것이 없고, 가을 경치가 이 정자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비감의 이름 지은 뜻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김공은 나이 장성해서 중국에 벼슬하였으며, 교제한 이들은 모두 부하고 귀한 친구들이요, 놀고 본 곳은 모두 매우 굉장하고 사치스럽고 넓고 큰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아무런 생각 없이 마음속에 거두어 가지고 나와서 쇄락(洒落)하여 한 점의 티끌도 없으니 대개 맑은 자이다. ‘추흥’이라는 현판을 거는 것이 역시 마땅하지 않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봄ㆍ여름ㆍ겨울철의 이 정자에서의 좋은 일은 그대가 곡진하게 말하여 숨김이 없으면서 가을 흥치의 좋은 것은 말만 하고 드러내지는 않으니 어쩐 일인가.’ 하였다. 다른 날 김비감과 함께 복건(福巾)과 청려장(靑藜杖)으로 공을 따라 이 정자에 올라서, 무릉(茂陵)의 가사를 노래하고, 안인(安仁)의 부(賦)를 화답하게 된다면, 가을 흥치의 설명은 그 좌우에서 취하여 쓰매 그 근원을 알게될 것이다. 이것으로 기문을 삼는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농가에서 고생 고생 쉬는 일 없더니, 곡식이 익게 되면 풍년을 기뻐하네. 정자 위에서 내가 이 즐거움 같이 하는데, 산 속의 사람들도 서로 함께 놀 수 있네. 들바람 쌀쌀하게 검은 모자에 불고, 강비는 부슬부슬 낚싯배에 뿌리네. 어찌하면 그대 따라 한 번 돌아가서, 정자에 올라 구경하며 10년 수심 삭여보나.” 하였다.

담담정(淡淡亭) 옛터가 삼개[麻浦] 북쪽 언덕에 있는데,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의 별장이었다.
○ 이극감(李克堪)의 시에 “저녁해 서쪽으로 떨어지고 물은 동쪽으로 흐르는데, 아득한 강산에 한없는 수심이어라. 천지가 다함이 있어 나도 늙었으니, 이 몸도 나중에는 백구 뜬 물가에서 지내려네.” 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찬 구름 막막하고 강물은 유유한데, 양쪽 언덕의 푸른 단풍[楓]나무 끝없는 수심일세. 외로운 등잔 마주 대한 채 밤중이 지났는데, 강에 가득한 비바람에 푸른 물가 어두워지네.” 하였다.

중흥동석성(重興洞石城) 중흥사(重興寺) 북쪽에 있는데 주위가 9천 4백 17자이다. 성 안에 산이 있어 높이 솟은 것이 노적 같으므로 세상에서들 노적산(露積山)이라 한다.

『신증』 쌍계재(雙溪齋) 옛터가 성균관 반수(泮水) 동쪽에 있는데 참판 김뉴(金紐)의 옛집이다.
○ 강희맹(姜希孟)의 부(賦)에, “서울 왼쪽 경계요, 반궁(泮宮)의 북쪽 언덕이네. 풍운은 모여 흩어지지 않고, 동학(洞壑)은 아늑하고도 넓도다. 울창하게 많은 가지 아름다운 수목이요, 아롱지게 덮인 돌은 검푸른 이끼일세. 냇물이 갈려 흐르니 비녀 다리 인 듯, 돌에 고여 서려 있는 빗물 받으니 도는 듯. 잔잔한 소리 옥가락지 울리는 듯, 콸콸 흐를 제는 여러 사람 들레는 듯. 골 안에서 나온 지 얼마드냐. 글의 물결 윤색하여 인재를 기르도다. 범상하고 용렬한 자 흘겨보고 알지 못하여, 이 좋은 지역 풀 속에 묻혀 있게 하였네. 진정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겼음은, 어질고 준수한 이 기다려서 열어 주려 함이로세. 여기에 금헌(琴軒) 선생은, 높은 관원의 자손이요 화려한 집안의 맏이로세. 어지러운 세상 싫어하고 도를 즐기며, 정신이 명랑하고 기상이 빼어났다. 옛 책 읽기 즐겨하고, 역사를 섭렵하였네. 어찌 나이는 젊지만 그릇은 노성한가, 정말 덕이 온전하고 재주가 풍부하다. 흉금이 트였으니 개인 밤 달과 같고, 호방한 기운 뻗어나서 우주에 찼다네, 비단옷 옛 기습(氣習) 벗어나서, 천석(泉石)에 고질병 들었네, 관복을 두르고도 먼 것을 생각하며, 조시(朝市)에 젖어 있어 발길이 막혔어라. 그러므로 성중에서 살 곳을 찾아, 멀다고 여겨 찾지 않은 곳 없었다네. 반수(泮水)에 찾아보다가, 물 근원 다 가서야 이 자리 얻었다네. 남쪽을 앞으로 하고 북쪽을 등졌으니, 군자의 거처할 곳이로다. 이에 가시덤불 처 버리고 깊고 좁은 것 개척했네. 띠풀을 베고 재목을 모아, 설계하고 건축하기 시작했네. 따뜻한 방을 만드는데 밝고 맑게 하고, 바람 불어오는 격자창 성글게 사면으로 열었도다. 선생이 그 안에서 눕고 쉬며, 아침저녁 휘바람 불고 노래하네. 하늘 조화 자세히 관찰하며, 사시 변하고 바뀌는 경치 보노라. 봄철이 와서 화창한 볕이 공중에 가득하면, 언덕의 풀은 돋아나려 하고 땅은 처음으로 풀리며, 시냇가 누른 버들가지 흔들리고 동산의 복사꽃 붉게 타오른다. 풍연(風煙) 어두운 건 푸른 솔이로세. 글 읽는 소리[絃誦] 공자묘에서 들리는데 쌍계수(雙溪水) 깊고 맑게 흐름이여, 돌 여울로 내려오면서 영롱(玲瓏)하도다. 선생은 이때 봄옷이 이미 이루어지면 예닐곱의 관(冠)을 쓴 어른과 동자를 데리고 스르릉 비파 울리어 정회를 펴면서, 기수(沂水)에 목욕하던 높은 자취를 사모하도다. 맑고 훈훈한 그 절기 되면 녹음 더욱 좋은데, 자색 제비 가벼운 바람에 날아들고, 누런 꾀꼬리 높은 언덕에서 노래한다. 어느 사이 뜨거운 햇볕 하늘에 있으면 붉은 구름 멈추고 가지 않는데, 쌍계수 맑고 차고 푸르며 구비 돌아 웅덩이지고 다시 흘러 버리도다. 선생은 이때 가는 베옷 풀어헤치고 바람을 쏘이며 서늘한 그늘 찾아 편안히 쉴 것이다. 매우(梅雨) 부슬부슬 내리고 그늘진 구름 덮여 있을 때면, 산앵도 타는 듯 붉게 익고 젖은 새는 갈 곳 없어 헤매는데, 쌍계수는 여러 골 물 받아 모아 형세 더욱 커져 공(空) 산에 메아리 치며 세차게 흐르도다. 선생은 이때면 청려장 손에 들고 짚신 발에 신고, 근본이 있으면 멈추지 않고 근원이 없으면 마르기 쉬운 이치 생각하도다. 쇠소리 나는 바람 슬슬 불고 비취 같은 하늘 맑게 개였는데, 무서리 수풀에 뿌리면 진홍빛 현란하니 취한 듯하여라. 꽃다운 국화 언덕 위에 피어 있고, 연잎은 쓰러져서 찬 못에 덮여 있다. 상쾌하고도 쓸쓸함이여, 마음대로 멀리 찾고 그윽한 경치 더듬게 하도다. 쌍계수는 맑고 밝아 거울 같으며, 푸르고 깨끗하여 쪽[藍] 같도다. 선생은 이때 향기로운 두루미 열어 놓고 흐르는 물 보며 좋은 손님 맞아 즐기도다. 그러다가 매미소리 그치고 흰 달이 광채를 더하게 되면, 밤들어 산은 적적 사람 없는 것 같은데, 귀뚜라미 울음소리 뜰 안에서 목 매인 듯 들려온다. 쌍계수는 차고 찬데 달은 더욱 빛이 밝아 은물결 사방에 흩어졌도다. 선생은 이때 거문고 어루만지며 한 곡조 연주하니 산과 물의 깊은 뜻을 줄줄이 엮어낸다. 삭풍(朔風)이 울부짖으면 긴 수풀 모두 비는데 찬 기운 몸에 해로울까 걱정하여, 나무등걸 지펴니 따뜻하게 한다. 쌍계수 얼음 얼어 새겨놓은 듯 깎아놓은 듯 거문고 소리 딩둥댕둥 울리도다. 선생은 이때 석양 주흥(酒興) 얼큰하여 붉은 털옷 걸치고서 남쪽 언덕에 서서 돌아갈 줄 모르니, 얼굴을 깎아내는 듯한 찬바람인들 아랑곳하리. 그리고 빽빽한 구름 잎사귀처럼 뭉치고 퍼붓는 눈 낙화처럼 날리는데, 공중에 흩어져서 노송나무를 덮고, 구렁을 메우고 언덕에 가득하다. 쌍계수 얼어붙어 소리는 없는데, 움틀꿈틀 은빛 뱀이 달리는 것 같아라. 선생은 이때 비단 휘장을 걷어올리며 창의 깁을 열고, 양고주(羊羖酒) 좋은 술 부어 가며 미인 시켜 거문고 뜯어 현묘(玄妙)한 곡조 들으며 즐기도다. 집안엔 봄철처럼 화창한 기운 덮이고, 사시의 차례 어지럽게 오고 가도다. 정말로 광경은 한이 없는데 세상 티끌 반걸음 저 밖이로다. 완연히 한 번 병 속에 들어간 것 같아라. 이야말로 땅의 영기가 기다렸다가 비장(祕藏)한 것 내어 준 것이냐. 가시덤불 베어내니 흙이 조강(燥剛)하도다. 뜰 안에서 말을 돌릴 만하니 객이 당에 오르도다. 집을 지어 안락하니 군자 여기서 편안하다. 군자 여기서 편안하여 천 년을 누리리라. 거듭 노래로 고하나니, 물소리 산을 두르고 산은 작은 집[蓬蓽] 가리웠네. 마음 편히 떨쳐가서 그윽하고 고독함 즐기노라. 무엇이 즐거운가, 성조(聖朝) 벗어나서, 어하(魚蝦)와 짝이 되고 미록(麋鹿)과 친구 되네. 내가 쌍계를 사랑함이여 강호도 산림도 아님일세. 몸은 비록 벼슬해도 마음만은 연하(煙霞)에 있네. 가서 따르고자 하였으나, 동부(洞府)가 깊고 깊었어라. 무엇으로 그대에게 주리오, 쌍남금(雙南金)이로다.” 하였다.

【명환】 신라 총명(聰明) 헌덕왕(憲德王) 17년에 북한산 도독(北漢山都督)이 되었다. 헌창(憲昌)의 아들 범문(梵文)이 고달산(高達山)의 도적 수신(壽神) 등 백여 명과 더불어 반란을 도모하여, 도읍을 북한산주(北漢山州)에 세우고자 하였는데 총명이 군사를 거느리고 잡아 죽였다. 김대문(金大問) 성덕왕(聖德王) 3년에 도독이 되었다. 변품(邊品) 도둑이 되었다. 찬덕(讚德)의 아들 해론(奚論)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가잠성(椵岑城)을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고려 한문준(韓文俊) 인종조에 부유수(副留守)가 되어 은혜로운 정사가 있었다. 유응규(庾應圭) 나가서 남경의 수령이 되었는데 정사를 하는 데 있어 맑고 간략함을 숭상하며 한 가지도 다른 사람에게서 취하는 일이 없었다. 그 아내가 젖을 앓는데도 채소국만을 먹으므로 아전 한 사람이 가만히 닭 한 마리를 가져다 바쳤더니 아내가 말하기를, “그분이 평생에 선물을 받아 본 일이 없는데, 내가 어찌 잘 먹고자 하여 그 분의 맑은 덕에 누가 되게 할 것인가.” 하니, 아전이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유원순(兪元淳) 희종조(熙宗朝)에 사록참군(司錄參軍)이 되었다. 오형(吳詗) 원종조(元宗朝)에 사록(司錄)이 되었다. 왕규(王珪) 유수가 되어 은혜로운 정사가 있었다. 홍자번(洪子藩) 유수판관(留守判官)이 되어 끼친 은혜가 있었다. 윤선좌(尹宣佐) 충숙왕조(忠肅王朝)에 민부전서(民部典書)로 나가서 한양윤(漢陽尹)이 되었다. 조금 있다가 왕과 공주가 용산(龍山)에 갔는데 좌우 사람에게, “윤윤(尹尹)은 청렴하고 검소하기 때문에 이곳 백성들을 돌보아 주게 한 것이다. 너희들은 조심해서 아예 소란 피우지 말라.” 하였다. 박인헌(朴仁軒) 한양윤이 되었다. 정해(鄭瑎) 충선왕조(忠宣王朝)에 남경 유수(南京留守)가 되었다. 조문발(趙文拔) 남경 사록(南京司錄)이다. 박달상(朴達祥) 공민왕조(恭愍王朝)의 한양윤이다. 민제(閔霽) 한양윤이다.

【인물】 고려 한종유(韓宗愈) 충렬왕조(忠烈王朝)에 급제하고, 아홉 번째 승진하여 삼중대광 좌정승 한양부원군(三重大匡左政丞漢陽府院君)이 되었다가 그 고장으로 연로하여 물러났다. 젊었을 때, 당시의 명사들과 오가며 모여서 술 마시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이름하여 양화도(楊花徒)라 하였다. 종유가 취하면 문득 일어나 춤추며 양화사(楊花辭)를 노래하기를, “그믐의 맑은 바람 기다려서 날아 올라 황각(黃閣 의정부(議政府)의 딴 이름) 가운데 이르리라.” 하니, 아는 이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조돈(趙暾) 처음 이름은 우(祐)이다. 쌍성총관(雙城摠管) 휘(暉)의 손자인데 대대로 동쪽 경계의 용진(龍津)에 살았으며, 약관(弱冠) 전에 충숙왕(忠蕭王)을 섬겼다. 그때 이속과 백성들이 도망하여 여진(女眞)으로 들어갔는데, 임금이 돈을 보냈는데, 해양(海陽)에 가서 백여 호를 데려오니, 임금이 가상히 여겼다. 여러 번 승진하여 예의 판서(禮儀判書)가 되었으며, 지병마사(知兵馬事)로 홍적(紅賊)을 쳐서 패주시키고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졌다. 연로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용진에서 죽었다.

【본조】 조인벽(趙仁璧) 돈의 아들이다. 여러 번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벼슬이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이르렀다. 조인옥(趙仁沃) 인벽의 아우이다. 우리 태조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니, 윤소종(尹紹宗)이 군전(軍前)에 나가 곽광전(霍光傳)을 드렸는데, 태조가 인옥에게 읽게 하고 들었다. 여기서 왕씨(王氏)를 복위(復位)하는 의논을 극구 진술하였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개국공신이 되었으며 지위가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이르고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졌다. 태조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조온(趙溫) 인벽의 아들이다. 개국 정사 좌명공신(開國定社佐命功臣)에 참여하였으며,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양절(良節)이다. 조연(趙涓) 인벽의 아들이다. 태조조의 개국공신이며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조영무(趙英茂) 개국공신으로,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며,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조계생(趙啓生)ㆍ조말생(趙末生) 건문(建文) 신사년(태종 1년)과거에 장원하고 벼슬이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강(文剛)이다. 조혜(趙惠) 연(涓)의 아들이다. 형조ㆍ호조 판서를 지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옮겼으며, 시호는 공안(恭安)이다.

【효자】 본조 홍계산(洪戒山) 어머니가 복병(腹病)을 얻어 오래도록 낫지 않았는데, 계산이 다리 살을 베어,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드디어 나았다. 성종(成宗) 무신년에 사실이 알려지니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신증』 한계련(韓繼璉) 외조모가 오래 광질(狂疾)을 앓았는데,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드디어 나았다. 지금 왕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이식(李植) 어머니가 오래도록 앓았는데 다리 살을 베어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나았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김수견(金壽堅) 어머니가 광질(狂疾)을 앓았는데 수견이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로 약을 지어 드리니 병이 나았다. 지금 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김석련(金石連) 어머니가 병이 났는데 석련이 다리 살을 베어, 약에 섞어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후에 어머니가 돌아갔는데 복(服)이 끝나도 오히려 아침 저녁 상식을 폐하지 않았다. 지금 임금 8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박귀손(朴貴孫) 사가(私家)의 천인이다. 아버지가 병이 났는데 다리 살을 베어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나았다. 어머니 병에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지금 임금 8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김맹감(金孟監) 다섯 살에 어머니가 돌아갔는데 장성하여 계모의 상에 복을 다 입은 다음에는, 이어 생모를 위하여 추후로 3년복을 입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시묘에 살며 조석으로 곡하고 전 올렸다. 지금 임금 10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전호손(田好孫) 갑사(甲士 군인)이다. 나이 일곱 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지성스럽게 전 올리고 제사지냈으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니 손수 제물을 장만하여 제사지냈다. 일찍이 상중에 종군하게 되었는데 돌아와서는 다시 3년상을 다하였다. 국기일(國忌日)을 만나도 역시 술ㆍ고기를 먹지 않았다. 지금 왕 10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유희(柳熙) 어머니가 악질(惡疾)을 앓았는데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드디어 나았다. 지금 임금 1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김수(金粹) 어버이를 효도로 섬겼는데 삭망(朔望)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제물을 많이 차리고, 이웃 사람들을 청하여 즐겁게 하였다. 전후 시묘 살기 각각 백 일이었는데,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 상사가 끝난 다음에도 소복으로 3년을 마쳤으며, 화상을 그려 벽에 걸고 조석으로 전 올리는 일을 폐지하지 않았다. 지금 임금 1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붕이(朋伊) 사가(私家)의 천인이다. 나이 12세에 아버지가 악질을 앓으니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로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나았다. 지금 임금 1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조어정(趙於玎) 관청에 매인 천인이다. 그 누이 막금(莫今)과 함께 어버이를 효도로 섬겼다. 부모가 잇따라 별세하니 3년 간을 소금ㆍ장ㆍ채소ㆍ과일을 먹지 않고, 나무 형상을 만들어서 조석으로 전 올리며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고하고, 새 물건을 얻으면 반드시 올리며, 초하루마다 묘소에 올라갔다. 지금 임금 14년에 함께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소비(少非) 관청에 매인 천인이다. 연산조(燕山朝) 때에, 죄인에 연루되어 길성(吉城)으로 귀양가고 어머니는 명천(明川)으로 귀양 갔는데, 서로 간의 거리가 60리나 되었다. 소비가 낮에 관청에서 일하고 밤에는 가서 어머니를 모셨다. 풀려 돌아오게 되자, 밥을 빌어서 봉양하며 따뜻하고 서늘한 데에 맞추어 마음을 다하였다. 지금 임금 14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숙미(淑美) 관청에 매인 천인이다. 나이 14세에 어머니가 악질을 앓으니 다리 살을 베어 약에 섞어 드렸는데 병이 나았다. 지금 임금 14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말금(末今) 사가의 천인이다. 나이 15세에 아버지의 병이 위중하자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드디어 나았다. 지금 임금 2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박련(朴連) 사가의 천인이다. 부모가 일찍이 불교를 진심으로 믿었으므로 죽게 되니 집안이 모여서 화장하였다. 박련이 어릴 때 상사를 당하였으나, 장성하게 되어 슬퍼하고 사모함을 마지 못하여 화상을 그려 벽에 걸어두고, 날마다 상식(上食)드리며 남긴 의복을 가져다 시신을 불 태운 곳에 합장하고 6년 간을 시묘 살며 한 번도 집에 와 보지 않았고 또 소금ㆍ장ㆍ채소ㆍ과일을 먹지 않았다. 지금 임금 2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신증』 【충의】 본조 심원(深源) 종실(宗室)인데 주계군(朱溪君)에 봉해졌다.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어, 일찍이 그 외숙 임사홍(任士洪)의 간사함을 힘써 말하니, 성종이 사홍을 외지로 귀양보냈는데 연산군 말년에 와서 사홍이 세력을 얻으면서 마침내 심원을 죽였다. 지금 임금 초기에 작위를 추증하고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아들 유령(幼寧)은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장령(掌令)에 이르렀는데 함께 살해되었다.
김동(金同) 종실 강녕부정(江寧副正) 기(祺)의 종이다. 연산군의 사랑하는 기생이 기(祺)의 집을 빼앗고, 기가 종을 시켜 자기를 욕한다고 호소하니, 연산군이 노하여 기 및 김동을 가두고 불로 지지며 심문하였는데, 동(同)이 말하기를, “죄는 나에게 있지, 주인은 모른다.” 하여 기는 벗어났지만, 동은 형벌을 받았다. 지금 임금 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신증』 【열녀】 본조 공신옹주(恭愼翁主) 성종대왕의 딸인데 청녕위(淸寧尉) 한경침(韓景琛)에게 출가하였다.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연산군이 갑자년에 아산(牙山)으로 귀양가게 되니 신주를 안고 가서 아침ㆍ저녁으로 곡하고 전 올렸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유씨(柳氏) 좌의정 허침(許琛)의 아내이다. 침이 세상을 떠나니 시묘살며, 아침ㆍ저녁으로 친히 재물을 장만하였다. 연산조 때에 상기(喪期)를 단축하는 법이 엄하였지만, 그래도 예절을 지켜서 3년상을 마쳤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박씨(朴氏) 승지 강경서(姜景敍)의 아내이다. 연산조 무오년에 경서가 곤장을 맞고 귀양가게 되니, 박씨가 걱정하고 상심하여 제대로 먹지 않은 채 해를 넘겨 세상을 떠났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민씨(閔氏) 조성벽(趙成璧)의 아내이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니 시묘살며 아침ㆍ저녁으로 곡하고 전 올렸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김씨(金氏) 대사간 강형(姜詗)의 아내이다. 연산조 갑자년에 형이 살해되니 김씨는 제대로 먹지 않고 울부짖어 곡하다가 한 달이 넘어서 세상을 떠났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동질비(同叱非) 관청에 매인 천인 범산(凡山)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으니 3년간 복상(服喪)하며, 화상을 그려 벽에 걸고, 하루 세 번씩 상식을 드리며 시어머니 섬기기를 매우 삼갔다. 지금 임금 14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남씨(南氏) 부사(府使) 최계사(崔季思)의 아내이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아침ㆍ저녁으로 곡하고 전 올리고, 죽을 먹으며 상기를 마쳤다. 지금 임금 2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도리정균통조만(道理正均通漕輓) 박의중(朴宜中)의 시에, 도리(道理)가 바르고 고른데 배와 수레[漕輓]가 통한다 “강산이 겹겹으로 막히니 금성탕지(金城湯池)보다 낫다.” 하였다. 화악최괴압한강(華嶽崔嵬壓漢江) 권우(權遇)의 시에, “화악(華嶽)이 높이 솟아 한강을 누른다 “금성(金城) 천부(天府)의 요해지는 이 이상 없는 것이다.” 하였다. 호거용반천고지(虎踞龍蟠千古地) 전인(前人)의 시에, 호랑이 걸터앉고 용이 서린 듯 천고의 지역이다. “꿩의 문채요 새 나는 듯 구중궁궐이네.” 하였다.
팔영(八詠) 기전산하(畿甸山河) 정도전(鄭道傳)의 시에 “기름지고 풍요한 기전(畿甸) 천리 땅에, 안팎의 산하(山河)는 백두 겹일세. 덕과 교화로 땅의 형세까지 겸하니, 역년(歷年)이 천 년을 가리라.”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첩첩한 멧부리 기전(畿甸)을 둘렀고, 길게 흐르는 강물 도성을 둘렀네. 아름다운 이 형승(形勝) 하늘이 내린 것, 임금 도읍터 참으로 좋구나. 사방으로 거리 모두 비슷하고, 기름진 전원(田原) 농사 지을 만하네. 주민들 부유하고 많아 태평 세월 즐기니, 곳곳에 노래소리 들려오누나.” 하였다.
○ 권우의 시에, “사방으로 나라 터도 멀고, 천년 왕조에 지리도 웅장하구나. 강산에 험요(險要)한 곳 조물주의 조화인데, 나라 세우고 여기에 경영하였네. 범이 걸터앉고 용이 서린 듯한 그 고장에 닭의 울음개 짖는 소리 들리누나. 우리 임금 덕을 닦아 시종 여일 조심하니, 크나큰 왕업(王業) 길이 무궁하리라.” 하였다.

도성궁원(都城宮苑) 정도전의 시에, “성은 높아 철옹(鐵瓮)인데 천 길이요, 구름은 봉래산 둘렀는데 오색일세. 해마다 상원(上苑 어원(御苑))에는 꾀꼬리와 꽃인데, 해마다 서울 사람들 놀며 즐기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하늘이 주신 큰 도읍지 장하기도 한데, 구름 걸친 저 사이로 성첩이 열렸네. 금벽(金碧)으로 단청한 추녀 성대하고 높은데, 검(劍)과 노리개 찬 이들 이 사이에 배회하누나. 상원(上苑)에서 봄을 즐기는데, 깊은 궁중엔 만수 축원 술잔 도네. 우리 임금 정사에 근면하여 조회보고, 꽃 그림자 사이 돌아 누대로 돌아가누나.” 하였다.
○ 권우의 시에, “날아갈 듯 저 도성 웅장한데, 크고 높음 존엄함을 상징하였네. 오색 구름 좋은 기운 참으로 천지에 가득하여, 그 기운 엉겨서 태평세월 이루네. 검(劍)과 노리개 찬 이 단궐(丹闕)로 달려나가고, 큰 깃발 작은 깃대는 자문(紫門)에 번득이네. 임금 얼굴 지척간에서 온화한 말씀 하사하시는데, 머리 조아리며 성은(聖恩)에 감사하누나.” 하였다.

열서성공(列署星拱) 정도전의 시에, “여러 관청들 높이 서서 서로 향하는 것, 별들이 북두칠성[北辰] 향하듯 했네. 달 밝은 새벽 거리는 물같이 고요한데, 굴레장식 울려도 작은 티끌 일지 않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줄같이 곧은 긴 거리 넓기도 한데, 별 두른 여러 관청 나뉘었네.” 하였다. 궁문 향해 관원들 구름처럼 모여드는데, 많은 사람들 밝은 임금 보좌한다네. 여러 정사 공적을 이루었고, 뛰어난 인재들 모두 특출하구나. 거리에 가득[籠街] 갈도(喝道 길 비키라는 소리) 소리 쉴 새 없이 들리니, 관리들 퇴청하느라 한창 분주하구나.” 하였다.
○ 권우의 시에, “하늘에 가까운 저 궁궐 깊숙도 한데, 별처럼 벌여 있는 관청들 많기도 하구나. 높은 오대(烏臺 사헌부)ㆍ봉각(鳳閣 의정부) 가장 맑고 화려한데, 마주 대하여 성대하고도 높다랗다. 밤 숙직땐 촛불 켜고, 새벽 조회 길엔 굴레장식 울리누나. 빛나는 우리 임금의 교화 덕에 티 없으니, 이 백성들 은혜의 물결에 젖었어라.”하였다.

제방기포(諸坊碁布) 정도전의 시에, “큰 집들[第室] 구름 위에 높이 섰고 여염집 땅에 가득 연이었네. 아침저녁으로 연화(煙火) 끊기지 않으니, 일대의 번화한 것 태평도 하여라.” 하였다.
○ 권근의 시에, “새 서울에 하늘 관청 열었는데, 여러 동리 판 위의 바둑처럼 펄쳐 있네. 천문 만호 어슷비슷한데, 관원들 날마다 상종하누나. 저자 가게 집집마다 풍요하고, 동산 정자 곳곳마다 기이하네. 멀리 저 달 아래 노래 소리 들려 오니, 태평 시기 이때이다.” 하였다.
○ 권우의 시에, “얼기설기 여염집 조밀하고, 이리저리 도로가 나뉘었네. 천만 수레와 말들 스스로 떼지어, 오고가기 어찌 그리도 분분한가. 저자의 장사치 온종일 모이니, 거리의 종소리 바람 속에 번화한 것 알려주네. 이 시대는 문화를 펴는 때라, 대궐에 상서로운 구름 항상 엉기누나.” 하였다.

동문교장(東門敎場) 정도전의 시에, “종고(鍾鼓) 소리 쾅쾅 땅을 흔들고, 깃발 펄럭펄럭 공중에 휘날리네. 천군만마(千軍萬馬)가 주선함이 한결 같으니, 몰아가서 싸움 할 수 있겠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다섯 장교[五校] 그 모습 장엄한데, 세 군영엔 호령도 잘 듣는다. 동문에서 징과 북소리 울려올 제, 일만 기병들 무기를 번득이네. 햇빛이 비치니 금빛 갑옷 선명하고, 바람이 이니 그림 그려 놓은 깃발 펄럭이네. 포로를 바치고 개가(凱歌) 불러 많은 공 이루어, 사방 나라에 웅장한 이름 떨치네.” 하였다.
○ 권우의 시에, “지세는 평평하여 손바닥 같은데, 군용(軍容)의 신속함 우레 같네. 북치면 나가고 징치면 그치기 몇 번이나 되풀이했나, 일만 기병 다시 돌아오네. 진치는 것은 정명(精明)한 기술이고, 적의 기세 꺾는 것은 용결(勇決)한 재주일세. 이만하면 적국들 스스로 항복해 오게 할 것이니, 미리 병사를 양성함 어찌 부질없다 하리.” 하였다.

서강조박(西江漕泊) 정도전의 시에, “사방의 선박들 서강으로 몰려들어, 용 그린 배 앞서 끌어 1만 섬[斛] 풀어놓네. 그대여 저 창고의 썩는 쌀 보았는가, 정사 잘하는 일은 식량 넉넉하게 하는 데 있다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남해에 풍랑 고요하니, 서강에 선박들 모여드네. 검은 돛대 총총히 서서 구름 하늘 가리웠는데, 쌓인 노적 산과 가지런하네. 일천 창고의 썩고 남는 곡식, 창생 일만 집의 밥 짓는 연기이네. 공사간에 부유하고 저마다 편안하니, 왕실의 큰 사업 길이 길이 이어지리.” 하였다.
○ 권우의 시에, “조운(漕運)은 천리 길에 통하고, 누선(樓船)은 만 척이나 겹겹이 대었네. 긴 강에 물결 넓어 물가를 감싸는데, 조수 들어오니 많은 배 돛을 내리네. 공물과 부세(賦稅) 해마다 들어오고, 창고는 날마다 받아들이네. 백성의 양식 나라의 수요 모두 다 충족하니, 춤추며 성은에 보답하자.” 하였다.

남도행인(南渡行人) 정도전의 시에, “남쪽 나루터에 물결 도도(滔滔)한데 행인들 사방에서 모여들어 분주하네. 늙은이 쉬고 젊은이 짐 지고서, 즐거운 노래 앞뒤에서 주고받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관가 나루터 잡다하게 건너려니, 번화한 서울의 문턱이라 그러하다. 거리 정자 날마다 높은 수레에 맞이하여, 오가는 술잔 향기롭게 기울이네. 들길은 강 언덕에 잇닿았고, 물가 모래엔 물 흔적 남아있네. 오가는 사람들 모두 이 속에서 분주하니, 물 건너는 은혜 뉘라서 알 것인지.” 하였다.
○ 권우의 시에, “멀리 보이느니 아득한 저 길인데, 가로 흐르는 강물 여기저기 나루터일세. 남쪽에서 오고 북쪽으로 가는 사람 몇천 명 될는지, 끊이지 않고 날마다 들어온다네. 바람이 자니 배는 조용히 건너가고, 연기 개니 물 기운 새롭구나. 제천정(濟川亭) 그 위엔 송별ㆍ영접도 잦아, 흐뭇하게 화려한 자리 베풀었네.” 하였다.

북교목마(北郊牧馬) 정도전의 시에, “저 북쪽 들 평평하기 숫돌 같은데, 봄철 되면 풀 무성하고 샘물 좋다네. 일만 말 구름처럼 몰리고 까치처럼 뛰는데, 말 기르는 사람들 마음대로 서쪽 남쪽에 서성이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무성한 풀은 긴 들 저 밖에 있고, 맑은 냇물은 끊어진 언덕 가로 흐르네. 용마[龍媒] 일만 필 다투어 높이 뛰는데, 저 멀리 오색 꽃 잇닿았네. 언덕에서 뛰놀 적에 발굽에서 번개가 생기고, 바람결에 울음 우니 갈기에서 연기 출렁이네. 사특함 없는 그 생각 앞으로 나갈 수 있나니, 《시전》의 경시(駉詩) 한 편 우리 님께 드리려네.” 하였다.
○ 권우의 시에, “들이 넓으니 푸른 연기 덮여 있고, 봄이 깊으니 푸른 풀 가지런히 자랐네. 달리고 뛰는 말떼들 동쪽으로 서쪽으로, 번갯불 번쩍이며 가볍게 굽놀리네. 물을 건너며 무리지어 마시고 바람 향해 서서 짝을 찾아 울음 우네. 말 기르는 사람들 하루종일 긴 언덕 오르내리니, 도롱이 삿갓에 비 젖어 쓸쓸하여라.” 하였다.

십영(十詠) 장의심승(藏義尋僧) 풍월정(風月亭) 시에, “푸른 언덕 일만 겹이 푸른 옥 같은데, 그 안에 있는 절 거의 3백 곳. 나는 샘물 폭포 되어 절벽에 걸렸는데, 바위 가에 큰소리 옷감이 찢기는 듯. 노는 사람 이 좋은 경치 두고 혼자서 돌아가리, 종일토록 중을 찾아 마주앉아 말하네. 머리 돌리니 인간 세상은 꿈만 같으니, 이곳은 정녕 노닐 만한 곳이네.” 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산 아래 찬 물결 옥 같은 시냇물인데, 동구 나가선 웅덩이 이루어 몇 백이더냐. 구름 깊은 곳 저 멀리 보배로운 당간(幢竿) 보이는데, 목탁 소리 떨쳐나서 산이 찢어지는 듯. 승려와 짝하기 좋아하여 머물고 가지 않는데, 현묘(玄妙)한 말 하다가는 문득 세상 말씨[侵綺] 부끄럽네. 백발 늙은이 돌아와서 우리들 찾으니, 이곳이 저 광산(匡山)의 글 읽던 곳인줄 알겠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세 봉오리 우뚝우뚝 옥을 깎아 세웠는듯, 전조(前朝) 시대의 옛 절이 8백 곳이나 된다네. 고목이 바위를 둘렀는데 누각(樓閣)이 겹겹이고, 우는 냇물 부딪히니 산 돌이 찢어지네. 내 옛날 중을 찾아 한 번 돌아가서, 밤늦도록 밝은 달 아래서 정담을 나누었지. 새벽 종 한 소리에 깊은 반성 생기지만, 백운이 땅에 가득하여 방향을 알지 못하겠구나.”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절 아래 맑은 냇물 푸른 구슬 흐르는 듯, 절 안에 사는 중은 수없이 많구나. 때로 뇌성소리인양 새벽 종이 울리는데, 높은 봉 무너질 듯 푸른 언덕 찢기는 듯. 한가한 틈타 성 밖 나와 중을 찾아가, 전의 셋과 후의 셋이 어떠한가 한 번 물어봤네. 동문이 깊숙하여 연하(煙霞)도 늙었으니, 멍하니 이 몸이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를레라.”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절 뒤의 산봉우리 옥처럼 모였는데, 문 앞의 높은 나무 백 년도 지났으리. 임학(林壑)이 굽이굽이 돌아 깊고도 깊은데, 범종(梵鍾) 두어 소리 산이 찢어질 듯 울려 오네. 마른 여장(藜杖) 휘두르며 연기와 덩굴 헤쳐 들어가서, 한가로이 승방 찾아 중과 이야기하네. 오손도손 주고 받는 말 해가 지는 줄도 모르니, 세상 티끌 씻을 곳 여기가 아니던가.” 하였다.

제천완월(濟川翫月) 풍월정 시에, “은하수에 바람 없어 흰 물결 고요하니, 늙은 두꺼비 저 못 속의 그림자 들이마시고 있구나. 강 머리에는 백옥 소반 굴리는 것 같은데, 구름 저 사이에는, 벌써 황금 떡이 솟아났네. 높은 다락에 한 잔 술 차갑고 깨끗도 한데, 이 맑은 광경 대하니 백발도 모르겠네. 머리 돌리니 젓대 소리 어디서 들려오나, 밤 깊으니 예상곡(霓裳曲) 듣는 것 같구나.”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밤은 차고 강도 비어서 모든 소리 고요한데, 가는 발 반만 걷고 흰 달빛 맞이하네. 자색 연기 날아 흩어지니 하늘은 넓기만 한데, 얼음 바퀴 반쯤 나오니 금으로 떡을 만들었네. 비고 밝은 이 마음도 함께 맑고 깨끗하니, 밤 늦도록 학과 함께 흰 털을 흩날리네. 강 다락 어느 곳에서 쇠젓대 소리 들려오나, 맑은 흥 유유(悠悠)하게 강 구비에 퍼져가네.”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가을 빛 일만 이랑 유리처럼 고요한데, 그림 기둥 구슬 발에 찬 그림자 어른거리네. 먼 하늘 구름 없어 쓸어버린 것 같은데, 앉아서 밝은 달 황금 떡 모양 나오기만 기다리네. 천지의 맑은 기운 뼈 속까지 스미는데, 밝은 광채 비쳐 털끝도 하나하나 세겠네. 밤은 깊고 깊은데 광경 더욱 기이하여서, 열두 구비 난간 모두 옮겨 의지하였다네.”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달이 가을 강에 드니 강물이 고요한데, 백 척 다락 한가로이 누운 모습 돌탑[浮圖]과도 같구나. 달을 마주 앉으면 열 말[斗] 천 말 술 기울일 것을, 달처럼 둥근 3백 개의 떡은 해서 무얼 하나. 맑은 빛 찬 기운 위아래로 들어오니, 이 내 귀밑털 수풀처럼 일어서네. 다만 바라는 건 언제나 술 그릇 속의 술 비치는 것. 거울같이 둥글거나 갈구리 모양 굽은 것 무어라 생각하리.” 하였다.
○ 성임의 시에, “강 위에 바람 없고 가을 밤 고요한데, 가는 구름 움직이지 않으니 그림자도 없구나. 난간 의지해 수정 발 걷어올리니, 바다의 용이 금색 둥근 떡 받들고 나오네. 하늘 빛 물빛 둘 다 맑고 깨끗하니, 한끝 맑은 그 빛에 흰 머리털 더욱 밝아지네. 문득 이 내 몸 광한궁(廣寒宮)에 있는가 의심하나니, 귓가에 예상곡(霓裳曲) 들려오는 것 같구나.” 하였다.

반송송객(盤松送客) 풍월정 시에, “오늘 아침 천리 길 떠나는 손 전송하니, 나를 대해 앉아 황금 술잔 사양마소. 떠나는 길에 술을 부으니 눈물자국 젖었는데, 이별하는 마음 얼마인가 수심도 그지없네.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삼상(參商)과도 같아, 가고 오는 저나 내나 모두 애끊는 일이로세. 바람을 당해 서서 세 번 탄식하고 다시 슬퍼하는 것은, 그리운 그대 볼 수 없고 마음만 망연하여서라네.”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수레 일산 구름처럼 모여 먼길 손 전송하니, 술잔 소반 흩어진 데 황금 술병 곁들였네. 버들 푸른 머나먼 길 술도 다했는데, 가고 남는 일 한탄한들 어이하리. 슬픈 노래 한 곡조에 맑은 음률 울려 나니, 소리소리 귀에 들어 창자라도 끊게 하네. 별안간에 이별하면 천리 길 떨어지는데, 외로운 연기 저문 날이 창망(蒼茫)하기만 하구나.”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옛 친구 나를 이별하며 원유가(遠遊歌) 부르는데, 무엇으로 전송할까나 한 쌍 은 항아리 기울여보세. 성문 밖에 버들가지 어찌 차마 꺾을쏘냐, 방초에 남은 한 끊길 날이 있으리. 지난해에도 금년에도 길이 삼상(參商)처럼 떨어졌으니, 부자로 이별하나 가난으로 이별하나 애태우긴 한 가지라네. 양관곡(陽關曲) 세 곡조 노래 이미 끝났으니, 동쪽 구름 북쪽 나무 모두 함께 망망(茫茫)하여라.”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도성 정자에 만리 길 유람하는 저 손 보낼 적에, 취한 뒤 노래 길게 부르며 옥 항아리 두드리네. 사람이 이 세상에 삶은 구르는 쑥대 같으니, 백 년간 허덕이다 언제나 그만두나. 미인은 비파를 타서 청상곡(淸商曲) 연주하니, 좌중이 침울하여 창자까지 수심일세. 이별은 많고 모임은 적으니 어이할까나, 내일 아침 서로 생각하면 길만 망망하리라.” 하였다.
○ 성임의 시에, “내 옛 친구 관문 밖으로 유람 보낼 제, 손에 한 쌍 꽃 그린 사기 항아리 들고 왔네. 단번에 수십 잔 들어도 술 아니 취하니, 이별의 한(恨) 길고 길어 끝없어라. 잦은 가락 급한 피리 궁상(宮商) 곡조 곁들이니, 가는 말 떠나지도 않아 창자 먼저 끊기노라. 슬프게도 이별하고 동서로 헤어지니, 만 겹 구름 낀 산 앞에 놓여 아득하네.” 하였다.

양화답설(楊花踏雪) 풍월정 시에, “북풍의 성낸 소리 밤새도록 메아리치더니, 아침에 내리는 눈 크기가 손바닥만하네. 넓고 넓은 천지 끝이 없는데, 언덕과 골짜기 평평해졌으니 깊이는 몇 길이나 되는지. 강촌 어가(漁家) 두어 채 초가집, 울타리 아래에 수북수북 은대[銀竹]로 가득 찼네. 이곳에 오면 흥이 절로 나, 시도 읊고 술도 들며 쉴 사이 없구나.”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강 머리에 바람 세차니 마른 나뭇잎 소리 내는데, 얼은 구름 땅에 붙으니 평평하기 손바닥 같아라. 잠시간에 눈 되어 바다를 덮어 오니, 언덕은 평평하고 골짜기 가득 차서 한 길이나 깊어졌네. 언덕에 의지한 어가(漁家) 여덟 아홉집에 술 판다는 푸른 깃발 대 끝에 휘날리니, 삼백 닢 청동전(靑銅錢) 가지고서, 바로 술청[壚頭]으로 나아가서 이내 몸 쉬어보리.”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북풍이 땅을 휩쓸고 모든 소리 메아리치는데, 강 머리의 눈조각 손바닥보다 더 크네. 망망한 은세계엔 인적 볼 수 없는데, 옥산(玉山)은 공중에 기대서서 천만 길 높았어라. 내가 이때 나귀 타고 가니 모자가 집 같은데, 은꽃은 눈을 어지럽히고 머리털 대처럼 곤두선다. 돌아오다 술 사서 청루(靑樓)에서 마시고, 취한 뒤 매화등걸 찾아가서 꽃 소식 찾아 보자.”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쌓인 눈 하얗고 북풍은 소리내니, 한(漢) 나라 궁중엔 선인(仙人)의 손바닥 얼어 부러졌네. 나귀 타고 강산에 취하여 시 읊으니, 흉중에 큰 기개 천 길 무지개처럼 펼쳐지네. 원안(袁安)이 흰 집에 누워 있던 일 우습고, 희만(姬滿)의 황죽(黃竹) 노래도 우습구나. 바로 시율(詩律)을 가지고 매우 엄함을 겨루었으니 설당(雪堂)에 높은 기풍 우러러 탄식하네.” 하였다.
○ 성임의 시에, “강변의 갈매기 해오라기 그림자 볼 수 없는데, 하늘 위의 옥가루 신선의 손바닥에서 뿌려지네. 공중에 어지러이 흩어지며 바람따라 날리더니, 평지에 가득 차 어느 사이 한 길이나 되었네. 열 말[斗] 천 말 술집마다 가득한데, 눈에 가득한 구슬꽃 대숲을 눌렀네. 옷을 잡혀 술을 사니 흥이 팔방에 비껴있어, 백 년의 인생사가 한순간에 식어졌다.”

목멱상화(木覓賞花) 풍월정 시에, “구름 한가롭고 봄 산은 높은데, 아지랑이 은은히 시내 다리에 잇닿았네. 산에 올라 꽃을 구경하고 취하기도 하였으니, 그대와 함께 종일토록 포도주 따랐지. 벌의 소리 새 울음은 촌가 담장에서 들려오고, 꽃 기운은 늦는 봄비 빚어낸다. 돌아오니 석양은 거리에 비쳐 기우는데, 운종가(雲鍾街 종로) 큰 거리에 인경[鍾鼓] 소리 들리누나.”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종남산 푸른 기운 구름 위에 높은데, 서울 장안 24개 다리 굽어본다. 앵무새와 꽃 한창 좋고 궁원(宮苑)도 깊으니, 옥술잔에 포도주 붓는 모임 상상한다. 구름 비단 단장하여 일만 집 담장을 이뤘는데, 한 쟁기 향기로운 비 거두네. 노끈 길다 해도 서쪽으로 지는 해 매지 못하는 법, 높은 다락 뗑뗑뗑 종고(鍾鼓)소리 나누나.”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성 남쪽 지척에 산이 정히 높은데, 푸른 구름 열두 다리 더위잡고 올라가네. 화산(華山 북악산)은 옥부용(玉芙蓉)인 양 깎아 섰고 한강수 깊고 깊어 금포도(金葡萄) 물들었네. 장안 일만 집 온갖 꽃 핀 언덕 누대에 은은히 비쳐 붉은 비 같아라. 청춘(靑春) 제철에 와서 구경하는 이 얼마나 될는지, 낮이 길고 긴데 갈고(羯鼓)로 재촉하네.”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남산에 앉아 보니 증성(曾城)도 높아, 어구(御溝)의 버들 무지개 다리에 스치네. 상원(上苑)에 꽃이 피니 붉은 노을 무르익고, 태액(太液 비원의 못)에 물결 따스하니 포도주 넘치는 듯, 큰 집[甲第]들 구름에 닿고 봄은 언덕에 가득한데, 동풍이 우유 같은 비를 불어 보내네. 천만 가지 붉은 꽃 고운 자태 머금어, 서로 재촉하여 마루 앞의 북 치지 않게 하네.” 하였다.
○ 성임의 시에, “인경산(引慶山 남산의 딴이름) 층층의 구름 속에 들어 높고, 공중에 백 자는 되게 무지개 다리 걸려있네.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흥이 다함 없고, 푸른 술 처음 익어 포도 빛이 진하여라. 천만가지 꽃핀 언덕이 어두운데, 어찌 즐기지 않고 풍우에 맡기리. 한강수 기울여 금빛 술동이에 더하고 일백 개 방망이로 뇌문고(雷門鼓) 마음껏 두드려 보려네.” 하였다.

전교심방(箭郊尋芳) 풍월정 시에, “봄철 교외에 가는 풀 비단자리 같은데, 봄바람에 술을 싣고 노는 사람 찾아가네. 아침엔 준마 타고 푸른 풀 밟고 나갔다가, 저물녘 취해 돌아오며 공연히 봄을 애석해 하는구나. 푸른 옷 저 소년들 누대 모퉁이 오르더니, 높은 누각의 젓대와 퉁소 소리 정히 들리네. 버들가지 한들한들 녹음도 깊었는데 명일엔 그네가 담장 가에 걸렸으리.”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따스한 기운 평야[平蕪]에 들어 푸름이 자리 같은데, 풍광이 담탕(淡蕩)하여 사람에게 좋기도 하구나. 옷을 걷고 창포 물가에 꽃을 따니, 눈에 가득 밝은 빛 온 누리가 봄이로세. 장수하고 단명함 다 같은 회계곡(會稽曲)인데, 하루살이 같은 인간 바삐도 호흡하누나. 술잔 받으면 무어라 흠뻑 취함을 사양하리, 꽃 밖에 저 멀리 석양 벌써 지려 하누나.”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평평한 들판이 손바닥 같고 풀은 자리 같은데, 개인 날 따스한 바람이 진정코 사람 죽이네. 오늘 아침 술 사려고 푸른 옷 잡히고서, 삼삼오오 떼를 지어 좋은 봄 찾아갔네. 날으는[飛] 술잔 물굽이 도는 것보다도 급하여, 맑은 술동이 쉽게도 마르니 고래처럼 마심일세. 돌아올 때 준마 타고 달빛을 밟으니, 옥피리 남은 소리 살구꽃 떨어진다.”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방초가 온전히 비단 자리보다 좋아, 날리는 꽃 퍼지는 녹음 사람을 수심하게 하네. 사녀(士女)들 서로서로 광음을 다투는 양, 비단 휘장 수놓은 장막 청춘을 비치네. 누런 수탉 대낮에 영롱한 노래 곡조, 흐르는 세월 한 호흡 같기도 하였어라. 급히 좋은 술 불러 좋은 계절 즐기고서, 거꾸로 실려 돌아올 때 검은 모자 떨어진다.” 하였다.
○ 성임의 시에, “동교(東郊)의 푸른 풀 겹자리 깔렸는데 성을 나가니 상춘객 여기저기 보이네. 풍광이 얼핏 지나니 헛되이 보낼 수 있겠는가, 1년 중 행락은 봄에 해야 한다네. 술동이 열고 또 다시 계곡(溪曲)에 앉으니, 백 병 술을 한 입으로 마시는 것 마다하리. 마음껏 놀다가 달 밝아 돌아가려니, 석양이야 지고말고 관여하지 마세나.” 하였다.

마포범주(麻浦泛舟) 풍월정 시에, “개포에 가득 연광(煙光)이 푸르게 퍼지는데, 은은한 바람 솔솔[嫋嫋] 찬 물결에 불어가네. 강가의 작은 풀들 물들인 것보다 푸르르고, 언덕의 버들 황금 가지 이루었네. 놀잇배에 퉁소랑 북 싣고 나루터를 건너면, 푸른 향초, 붉은 향초 꽃다운 물가에 났으리라. 이리저리 저어 석양에 돌아올 제 고개 돌리니 모래판에 갈매기 날아드네.”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소선(蘇仙)은 영수(穎水)에 배 띄워 무엇을 하였던고, 나도 이 놀이 좋아서 물결 위에 흥청이네. 봉창을 옮겨 어기여차 연파(煙波)를 거슬러 올라가니, 배 묶을 곳에 도리어 단풍든 가지 구나. 푸른 소라 천 점은 바다 서쪽 머리인데, 갈대꽃 한 언덕은 강 가운데 모래톱일세. 물 속에 비친 달 그림자를 치면서 가는 대로 흘러가니, 넓고 넓은 만 리 물결에 갈매기 따르네.”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서호(西湖)의 짙은 화장[濃抹] 서시(西施 중국의 미인)와도 같은데, 복사꽃 가는 비에 푸른 물결 일어나네. 흥청이며 돌아오니 물이 반 삿대나 불었는데, 날 저무니 죽지사(竹枝詞) 부를 사람 없네. 삼산(三山)은 금 자라 머리에 은은(隱隱)하고, 한강은 앵무주(鸚鵡洲)에 역력하네. 머뭇머뭇 기다려도 황학은 보이지 않는데, 날아드느니 한 쌍의 백구일세.”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호(濠)에 노는 데 반드시 혜시(惠施) 같아야 할까, 박달나무 베어서는 반드시 잔잔한 물에 두어야 할까. 아직은 서호(西湖) 향해 술을 싣고 노니는데 취해선 화정(和靖)의 매화 가지 꺾는다네. 청산은 수없이 강 머리로 나왔는데, 나무 빛은 저 멀리 창포 물가에 잇닿았네. 피리 불며 노래하기 마치지 못했는데 날 저물려 하니, 돌아와서 불현듯 한가히 조는 갈매기가 부러워라.” 하였다.
○ 성임의 시에 “가슴 가득 청광(淸狂)한 마음 어디에 풀어보리, 놀잇배 이리저리 저어 잔잔한 물결따라 가네. 중류에서 용의 읊는 소리 들어 보는데, 언덕 저 너머로 어부의 피리 소리 한 가락 들려 오누나. 외로운 돛단배 하늘 저 끝에 가물가물, 오호(五湖)의 연파(煙波)가 창주(滄洲) 신선 있는 곳에 잇닿았네. 표연(飄然)한 이내 종적 어데다 비길꼬, 흐르는 물따라 정처없이 가는 몸 갈매기와 같구나.” 하였다.

흥덕상화(興德賞花) 풍월정 시에, “누대 그림자 겹겹이 물 속에 비치는데 누대 앞 연꽃 아침 이슬에 씻겼어라. 난간에 옮겨 의지하여 풍경을 구경하니, 6월의 맑은 향기가 모시옷에 풍겨난다. 붉은 깃대 푸른 일산 수없이 많은데, 마주앉아 때로는 총채를 휘두르네. 서늘한 기운이 뼈에 스며 구슬 자리 차가운데, 날 저물자 가벼운 바람 비를 불어오네.”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누대 아래 모난 연못 맑기도 하여, 물 위에 뜬 붉은 연꽃 바람 이슬에 씻겼네. 난간 의지하여 구경하다가 달 밝을 때까지 이르니, 서늘한 밤 기운에 가는 모시 가벼운 옷 걸쳤어라. 묘련(妙蓮)의 꽃 열매 많기도 한데, 이내 몸 부끄러워 꼬리 아끼는 사슴 같네. 하늘 향기 찾으려해도 그곳을 알지 못하는데, 물 기운 서려서 개인 날에도 비 되어라.”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절집의 단청이 물 속에 비치는데, 연꽃 처음 피어 깨끗하게 씻은 것 같구나. 부슬부슬 붉은 안개 구슬 난간에 뿌리는데, 향기로운 바람이 불려 하여 모시 소매 나부끼네. 때로 벽통주(碧筒酒) 수없이 마시는데 대낮에 큰 소리 하다가는 파리채도 휘두르네. 중이 손을 붙들며 밝은 달 기다리자는데, 작은 누대 한밤에 서늘하기 비올 때 같네.”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연꽃 수없이 누대 아래 가득한데, 연줄기 무어라 미인 시켜 씻나. 맑은 향기 그윽하고 바람 살짝 이는데, 한 가닥 가을 기운 흰 모시인 양 시원하네. 술 취한데 술잔 계산 어찌 셈하리, 팔 잡고 글 논란할 제 파리채 휘두르는 것 잊었더라. 붉은 옷 떨어지기 전에 참으로 구경할 만한데, 내일 아침에 미친 비바람 어찌 할까나.” 하였다.
○ 성임의 시에, “한 못의 가을 물 맑아서 밑이 없는데, 만 줄기 부용화 이슬에 새로 씻겼네. 구름 비단인 양 널리 흩어져 눈앞에 있는데, 맑은 향기 은은히 모시옷에 풍기네. 늙은 중 재치 있어 오묘함 헤아리기 어려운데, 조용히 말하다가 흰털 총채 때로 짚네. 《연화경(蓮華經)》깊은 뜻 설명 아직 마치지 못했는데 만곡(萬斛)의 구슬알 한 번 비에 떨어지네.” 하였다.

종가관등(鍾街觀燈) 풍월정 시에, “서울 10리 천만 집에 거리 등불 곳곳마다 붉은 안개 감도네. 향 수레 보배 말 길 가득 지나가니, 취한 노래 노는 여자 얼굴이 꽃 같아라. 밝은 달 휘황하여 맑기가 대낮 같은데, 옆사람 오가는 것 작은 원숭이처럼 여기네. 인간 세상 즐거운 일 여기에 많나니, 음악 소리 끝나는 곳에 새벽녘 물시계의 물 떨어지는 소리 들리누나.”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하늘 위의 항성(恒星)이 일천 집에 떨어진 듯, 황혼에 가는 곳마다 붉은 노을 감도누나. 긴 장대에 펄럭펄럭 채색 노끈 날리고, 구슬 나무에 번화하게 금속화(金粟花) 피었네. 산하(山河) 대지가 대낮으로 변했는데, 노랫소리 북소리 들끓으니 사람도 원숭이 같네. 소리 모아 다투어가며 부처 탄신 노래하니, 물결처럼 밀려 다니며 물시계의 물 다 떨어진 줄도 모르네.”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장안 성중 백만 집에, 하룻밤 연등 밝기가 노을 같구나. 3천 세계의 산호수(珊瑚樹)요, 24다리에 부용꽃이네. 동쪽 거리 서쪽 저자에 밝기가 대낮 같으니 아이들 놀라 달림이 원숭이보다 빠르네. 별들마냥 난간에 흩어져 그대로 있는데, 황금 누대 앞에 새벽 물시계의 물 떨어지는 소리 재촉한다.”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수없는 등불 수없는 집에 밝혔는데 붉은 빛 서로 비쳐 흐르는 노을 같구나. 옥 노끈엔 나직하게 명월주(明月珠)가 드리웠고, 구슬 가지엔 번화하여 영롱한 꽃 피어 있네. 어둔 거리 다 비쳐 밝은 낮 이루니, 구경하는 이들 기뻐 뛰며 조급하기 원숭일세. 아홉 거리의 풍악소리 태평세월 즐기는데, 어느 사이 종소리 오경 누수를 알려온다.” 하였다.
○ 성임의 시에, “태평한 기상 일천 집에 넘치는데, 일천 집 성곽이 붉은 노을보다 밝았어라. 거리 메운 대말[竹馬] 달리며 호령하는데, 일만의 금련화 늘어진 꽃송이 다투어 구경하네. 밝은 별인양 찬란하니 밤이 대낮 같고, 높은 장대 구름 속에 드니 원숭이도 못 오르리. 좋은 말안장을 맞대고 구경하기 절반도 못 되는데, 새벽 화살이 금문(金門)의 누수 끝내기 재촉하네.” 하였다.

입석조어(立石釣魚) 풍월정 시에, “낚싯대 들고 한가로이 와서 혼자 기대섰는데, 비온 뒤 더한 물 아직도 푸르게 담겨 있네. 부령초 움직이는 곳에 물결무늬 흩어지고, 고기들 때로 뛰고 다시 잠긴다. 잠깐 동안 낚은 고기 회도 치고 국도 끓이니, 사오는 술병에 가득 차 있어라. 인생을 마음가는 대로 사는 일 옛날부터 중히 여겼으니, 엄광(嚴光)이 어찌 공후(公侯)를 부러워했겠는가.”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긴 냇물 언덕을 씻으니 돌만이 우뚝 섰는데, 벼랑 아래 맑은 소에 마름풀 푸르렀다. 깃은 가볍고 줄은 가는데, 미끼 향기로워, 큰 고기 깊숙히 잠기고 작은 고기 뛰노네. 살찐 고기 잡아 아이들 불러 빨리 국 끓이라 재촉하고, 좋은 술 따라내니 봄기운 병에 가득하여라. 비낀 바람 가는 비에 취해서 돌아오지 않고, 강호에 내 성명 모두 다 맡겼노라.”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시냇가 괴이한 돌 사람처럼 섰는데, 가을물 영롱하여 차고 푸르게 비친다. 낚싯대 들고 찾아가서 푸른 풀 위에 앉으니, 백 척 은실에 금 잉어 번뜩이네. 가늘게 썰어 회를 치고 불에 익혀 국을 끓이니, 모래사장 위에 쌍옥병(雙玉甁) 자주 넘어지네. 취하자 다리 두드리며 창랑가(滄浪歌) 노래하니, 만고에 빛나는 이름은 있어 무엇하리.”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큰 바위 우뚝우뚝 물 굽어보며 섰는데, 맑은 못물 백 이랑 유리처럼 푸르구나. 한가로이 낚싯대 들고 이끼 낀 낚싯터에 앉으니, 노는 고기 미끼를 희롱하여 잠겼다 뛰어 오른다. 금빛 양념 가는 회가 쌀가루 국보다 나으니, 좋은 술 가득가득 은술병 기울어지네. 흠뻑 취하여 머리 밝은 달빛 아래 누웠으니, 유령(劉伶)의 주성(酒聖) 이름 내가 아닐런가.
○ 성임의 시에, “천 년의 우뚝한 돌 언덕 곁에 섰는데, 일만 길 맑은 못물 푸르기도 하구나. 노는 사람 낚싯대 들고 이끼 낀 낚시터에 앉으니, 수없는 고기들 거울 속에 뛰노네. 금빛 양념 옥같은 회에 향기로운 국물 곁들이니, 죽엽주(竹葉酒) 봄 향기를 몇 병이나 기울였나. 인생이란 마음대로 지내는 그것이 즐거운 일, 삼공(三公)으로도 어초(漁樵)의 이름 바꾸지 않으리라.” 하였다.

남산팔영(南山八詠) 정이오(鄭以吾)의 시.
운횡북궐(雲橫北闕) “옥엽(玉葉)은 금궐(金闕)에 비끼고, 붉은 기와 푸른 하늘에 비치네. 뗑뗑 누수 재촉하는데, 북쪽에 상서로운 구름 일어나누나. 아름다운 기운 개인 날 서로 둘렀는데, 높은 기상 바라보니 다시 잇닿았네. 남산 같은 높은 복을 우리 임금께 드리려니, 조심조심 일만 년을 누리소서.” 하였다.
수창남강(水漲南江) “장마물 들판을 덮었는데, 저 강의 흰 기운 성곽에 잇닿았네. 모래판[平沙] 휩쓸어 가고 온갖 냇물 다 모았네. 나루터에서 언덕이 묻힌 줄 알겠는데, 저 하늘 가 가는 배 아득하게 바라본다. 저녁 때 비 개이고 둥근 달 떠오르니, 용용(溶溶)한 그 모습 하늘에 닿았네.” 하였다.
암저유화(巖底幽花) “봄은 가고 꽃 이미 졌는데, 산중에 빽빽하게 녹음 무성하네. 물 건너니 그윽한 향기 풍기고, 가까운데 언덕 위 바위틈에 기이한 풀 있구나. 늦은 떨기 은일(隱逸)인 양 가련하고, 부질없는 꽃 흥망성쇠 애석하네. 이로부터 정(貞)하고 길(吉)하나니 하늘이 어찌 소나무 두었는가.” 하였다.
영상장송(嶺上長松) “집을 둘러 층층의 묏부리 솟아, 공중에 버텨 푸른 일산 되었네. 비가 개이니 구름 와서 희게 걸치고, 밤이 고요하니 달이 맑게 흥청 이네. 벽이 서 있은 지 천 년은 되어, 바람 따라 10리에 소리 들리누나. 이 모습 돌아보는 이 없고, 떠들썩 명예만 따라 경쟁하네.” 하였다.
삼춘답청(三春踏靑) 북쪽 바라보면 비록 성시(城市)이지만, 남쪽으로 오면 곧 동천(洞天)이라네. 꽃을 찾으니 바람이 맑게 불어오고, 풀은 밟으니 날씨가 따사롭다. 이런 모임 많은 사람 있으리, 고상한 정희 열선(列仙)보다 낫구나. □□□
구일등고(九日登高) 술병 차고 높은 데 오르는 날, 하늘도 맑은 9월초일세. 단풍 숲 먼 골짜기에 한창이고, 푸른 소나무 층층의 언덕 둘러쌌네. 남동(藍洞)은 시 짓던 곳이고, 용산(龍山)에 모자 떨어지던 때로다. 예나 이제나 취함은 같은 것, 마음에 맞으면 그 밖에 다른 무엇 구하리.
척헌관등(陟巘觀燈) 4월 8일 관등놀이 성대한데, 승평세월 이 얼마인가. 일만 초롱불 대낮같이 밝으니, 사방이 고요하고 티끌 하나 없네. 붉은 불길 천 길이나 서린 듯, 별 광채 북두칠성[北辰]으로 향했네. 밤을 새워도 구경 부족하여, 닭 우는 새벽에 이른 줄도 모른다네.
연계탁영(沿溪濯纓) 정절(靖節 도연명의 시호) 선생은 다만 물에 다다랐고, 종군(終軍)은 일찍이 긴 노끈 청했네. 냇물 맑으니 발 어이 씻으리, 티끌 떨고 세상 물정 잊겠네. 천천히 흐르니 시내에 이끼 끼어 미끄럽고, 굽이쳐 돌아오니 옥 물결 감도네. 떨어진 붉은 꽃 물에 떠 동구 밖으로 나가니, 봉래(蓬萊) 영주(瀛洲) 여긴가 하노라.”


 

[주D-001]손바닥이……그 모습 : 중국의 화산(華山)에는 선인장[掌]이 높이 솟았으므로, 시인이, “선인장 위에 비가 처음 개었네.” 하였다.
[주D-002]삼상(三上) : 마상(馬上)ㆍ침상(枕上)ㆍ측상(廁上)을 말한다. 송 나라 구양수(歐陽脩)의 귀전록(歸田錄)에 있는 말인데, 시를 생각하는 데에는 말 위, 베개 위, 측간 위의 세 가지가 가장 좋다는 말이다.
[주D-003]술……마셨네 : 술을 한 번 잘 마셨다는 뜻이다. 중국 송(宋)대의 문장가 소동파(蘇東坡)의 시 가운데 ‘신금시부일중지(臣今時復一中之)’라는 구가 보이는데, 그것은 옛날 조조(曹操)가 서막(徐邈)을 부르니, 서막이 술에 취하여, “지금 성인(聖人)에 맞았다.”[중(中)은 중독(中毒)이란 뜻] 하였다. 당시에 금주(禁酒)하였으므로 술꾼들이 청주를 성인이라 하고, 탁주는 현인이라는 은어(隱語)를 썼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주D-004]동화(東華) : 당(唐) 나라 때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동화문(東華門)으로 들어갔다.
[주D-005]시구(詩句)를……넣었네 : 장돈(章惇)ㆍ채경(蔡京) 등이 소동파(蘇東坡)를 모함하되, 그가 지은 시(詩)를 지적하여 이것은 국가의 어느 일을 비방한 시요, 저것은 어느 일을 비방한 것이라고 일일이 지적하여 죄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오대시안(烏臺詩案)이라 한다.
[주D-006]그림자뿐인……하려나 : 소동파가 귀양갔을 때에 장돈(章惇)이 그곳의 주민에게, 소동파에게 집을 빌려주지 못하게 하였다.
[주D-007]옛날의……깨었다네 : 소동파가 귀양가 있는데, 이웃에 사는 어떤 노파가 보고 말하기를, “내한(內翰)의 어젯날 부귀가 일장춘몽이요.” 하였으므로, 동파는 그 노파를 춘몽파(春夢婆)라 하였다.
[주D-008]적벽강(赤壁江)……노닐꺼나 : 이상은 〈적벽부〉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주D-009]지금껏……오를 듯 : 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지은 글을 보고 감탄하여 한 말인데, 여기서는 소동파가 지은 〈적벽부〉를 말한 것이다.
[주D-010]시령(詩令) : 여러 사람이 시를 지으면서 시간이라든지 기타 특수한 조건으로 제한하고 재촉하는 것을 말한다.
[주D-011]명당(明堂) : 풍수(風水)의 용어인데, 양택(陽宅)의 앞을 말한다.
[주D-012]남국의 강기(綱紀) : 《시경》 소아(小雅) 〈사월(四月)〉에, “도도한 강한이 남국의 강기가 되느니라.[滔滔江漢 南國之紀]” 하였다.
[주D-013]어찌하여……버렸다네 : 고려조 말기에는 왜구(倭寇)의 침략이 심하여, 서울에서 멀지 않은 강화도 해상에까지 자주 들어왔으며, 고려 공민왕 22년 6월에는 왜선(倭船)이 양천(陽川)을 지나 한양부(漢陽府) 즉 서울에도 들어와서 약탈하였는데, 시중에 보이는 왜구의 사실은 이 일을 말한다.
[주D-014]호연(浩然)한……뜻 : 육조(六朝) 시대의 종각(宗慤)이 소원을 말하기를, “긴 바람을 타고 만리의 물결을 헤치는 것이 소원이다.” 하였다.
[주D-015]풍악은……있소 : 이 구절은 왕희지(王羲之)가 지은 〈난정기(蘭亭記)〉에 보인다.
[주D-016]무성한 숲……것이며 : 〈난정기〉에, “무성한 숲 긴 대나무[茂林脩竹]”라는 구절이 있다.
[주D-017]이난(二難) : 두 가지 얻기 어려운 것. 즉 어진 주인과 아름다운 손님을 말한다.
[주D-018]사미(四美) : 좋은 때[良辰], 아름다운 경치[美景], 완상하는 마음[賞心], 즐거운 일[樂事]을 말한다.
[주D-019]서호(西湖)를……비하겠는데 : 소동파의 〈서호시(西湖詩)〉에, “만일 서호를 서자(西子)에 비하면 넓은 화장과 진한 화장이[淡粧濃抹] 모두 서로 마땅하네.”라는 구절이 있는데, 서자(西子)는 옛날의 미인 서시(西施)를 말한 것이다.
[주D-020]병 가운데 경치[壺中景] : 한(漢) 나라 여남(汝南)에 한 노인이 약방[藥肆]을 내고 있었는데, 해가 저물면 병 속으로 들어갔다. 비장방(費長旁)이 몰래 그것을 보고 그에게 간청하여 함께 병 속에 들어가니, 별천지였다고 한다.
[주D-021]물 속에서 조는 것 :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하지장(賀知章)을 두고, “취해서 우물에 빠져 물 속에서 조네.” 하였다.
[주D-022]구장(鳩杖) : 비둘기 형상을 머리에 새긴 노인의 지팡이. 나라에서 공로 있는 늙은 신하에게 하사하였다. 여기에서는 한언국을 지칭하는 듯하다.
[주D-023]성사(星槎) : 한(漢) 나라 때, 장건(張騫)이 황하(黃河)의 근원을 탐사(探査)하려고 뗏목에서 자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늘로 올라가 견우(牽牛)ㆍ직녀(織女)를 보았다는 고사.
[주D-024]염예퇴(灩澦堆) : 사천성(四川省)의 구당협(瞿唐峽) 상류의 큰 암석이 있는 곳. 초(楚)ㆍ촉(蜀)의 문호이다.
[주D-025]정운(停雲) :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진(晉)의 도연명(陶淵明)이 〈정운〉이란 시의 자서(自序)에서 “정운은 친우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26]조각 구름 : 두보(杜甫)가 여러 사람과 야외(野外)에서 술을 마시고 놀다가 지은 시에, “머리 위에 한 조각 구름이 검으니, 응당 비[雨]가 시 쓰기를 재촉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27]기장(奇章) : 당(唐) 나라 정승 우승유(牛僧孺)를 기장공(奇章公)이라 하였는데, 그는 특히 돌을 좋아하여 많은 기암괴석을 모았다.
[주D-028]절월(節鉞) : 지방에 병권(兵權)을 맡아 나가는 신하에게 임금이 절(節)과 도끼[鉞]를 주어서 보낸다.
[주D-029]이곽(李郭) : 한(漢) 나라 때에 명사(名士)인 이응(李膺)과 곽태(郭泰)가 낙양에서 지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올 때 전송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배를 타고 건너가니 사람들이 바라보고 신선이라고 하였다. 《後漢書 高士傳》
[주D-030]금솥의……손 : 은(殷) 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정승으로 삼으면서 “국에 간을 맞추는 데에 비유하면 너를 소금과 매실로 삼으리라.” 하였다. 여기에서는 조정에서 재상으로 정치하던 솜씨란 말이다.
[주D-031]무우(舞雩)와 호연(浩然)한 기운 : 증점(曾點)이 무우에 나가 바람 쏘이겠다 한 것은 《논어(論語)》에 있고, 호연한 기운을 길러야 한다는 말은 《맹자》에 보인다.
[주D-032]쾌재(快哉)를 부르던 초양왕(楚襄王) : 송옥(宋玉)의 〈풍부(風賦)〉에, “초양왕(楚襄王)이 높은 대(臺)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여 ‘쾌하다[快哉]’ 하였다.” 한다.
[주D-033]냉연(冷然)하던 열자(列子) : 《장자(莊子)》에, “열자가 바람을 타고 공중에 노니니 냉연(冷然)히 좋았다.” 하였다.
[주D-034]아아(峩峩)하고 양양(洋洋)한 곡조 : 지음(知音)을 뜻하는 아양곡(峩洋曲)으로 춘추 시대 백아(백아)가 타고 종자기(鍾子期)가 들었다는 거문고의 곡조이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서 고산(高山)에 뜻을 두자 종자기가 “높고 높기가 마치 태산과 같도다![峩峩兮若泰山]” 하였고, 또 유수(流水)에 뜻을 두자 “넓고 넓기가 강하와 같도다.[洋洋兮若江河]”라고 했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列子 湯問》
[주D-035]백제(白帝)와 옥비(玉妃) : 백제와 옥비는 여기서는 눈[雪]의 신(神)을 지칭하는 듯하다.
[주D-036]악양루(岳陽樓 남창에 있는 누각)와 등왕각(滕王閣) : 강서성(江西省)에 있으며 당(唐) 나라 고조의 아들 원영(元嬰)이 세웠다.
[주D-037]금어(金魚) : 당 나라 때에 3품 이상의 벼슬아치와 특사(特賜)를 받은 사람만이 금어(金魚)를 찼다.
[주D-038]학창의(鶴氅衣 학의 털로 만든 옷) : 학의 털로 만든 것인데 도사(道士)가 입는 옷이다.
[주D-039]여의(如意) : 진(晉) 나라 왕개(王愷)와 석숭(石崇)이 서로 부유함을 자랑하는데, 하루는 왕개가 두어 자[尺]나 되는 산호수(珊瑚樹)를 석숭에게 자랑하자, 석숭이 방망이를 들고 때려부수고는 제 집에 있는 것을 가져다 보이는데 5, 6척이나 되는 것이 여러 나무였다.
[주D-040]주미(麈尾) : 육조(六朝) 시대에 명사(名士)들이 청담(淸談)을 할 때에 주미를 손에 들고 휘두르며 이야기하였으므로 주미의 털이 떨어졌다.
[주D-041]협욕(陜鄏) : 중국 주(周) 나라 떄의 지명인데,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에 있었다. 주 나라 성왕(成王)이 보정(寶鼎)을 두어 두고 장래를 점치던 곳이다.
[주D-042]상림(上林)과 자허(子虛) : 상림과 자허는 모두 한(漢) 나라 문인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부(賦) 이름이다. 처음 상여가 〈자허부〉를 지어 제후들이 유렵(遊獵)하는 모습을 말하였는데, 뒤에 한 나라 무제(武帝)의 칭찬을 받고서는, 다시 〈상림부〉를 지어 천자의 유렵하는 모습을 글로 옮겼다. 두 글이 모두 명문(名文)으로 알려졌다.
[주D-043]방일(放逸) : 옛날 진(晉) 나라의 유량(庾亮)이 은호(殷浩) 등 친구들과 함께, 가을밤에 남루에 올라가 호탕ㆍ방일(放逸)한 회포를 말하고, 글로도 읊은 것을 말한다.
[주D-044]가시나무 화살 : 가시나무로 만든 화살은 복숭아나무 활과 함께 마귀 쫓는 데에 사용하였다.
[주D-045]뽕나무로 만든 화살 : 사내아이가 태어났을 때, 뽕나무로 만든 활[桑弧]과 쑥대로 만든 화살[蓬矢]로 천지사방을 향하여 쏘았는데, 이는 장차 원대한 일이 있을 것을 기대하는 의미였다. 《禮記 內則》
[주D-046]봉호(蓬壺) : 봉래(蓬萊)와 방호(方壺)를 의미한 것으로 모두 신선이 산다는 곳이다.
[주D-047]금영(黔嬴) : 수신(水神)의 이름이다. 금뢰(黔雷)라고도 한다.
[주D-048]망서(望舒) : 달을 둥근 바퀴로 생각하고 그 바퀴를 몰고 가는 신(神)을 망서(望舒)라고 한다.
[주D-049]용고(龍膏) : 용의 기름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등유로 하면 특히 밝아 서광(瑞光)이라 이름한다.
[주D-050]신선의 집 : 옛날 중국에서 불도 불사의 신선으로 전하여 오는 왕자교(王子喬)와 적송자(赤松子)를 말하는데, 장수(長壽)하는 것을 교송지수(喬松之壽)라고도 한다.
[주D-051]중선(仲宣) : 위(魏) 나라 문인 왕찬(王粲)의 자(字)이다. 지금 호북성(湖北城) 당양현(當陽縣) 동남쪽 장수(漳水) 위에 중선루(仲宣樓)가 있는데, 왕찬이 여기에 올라서 〈중선루부〉를 지어 유명하다.
[주D-052]좌대충(左大沖) : 진(晉) 나라 문인 좌사(左思). 그는 학문이 높고, 글을 잘 지었는데, 또한 부(賦)에도 능하였다. 〈제도부(齊都賦)〉ㆍ〈삼도부(三都賦)〉 등은 모두 그가 지은 명문장이다.
[주D-053]서시(徐市) : 진시황(秦始皇) 때의 도사(道士)로서, 삼신산(三神山)에 가서 불사약(不死藥)을 구해 오려면 동남(童男 순결한 남자아이) 5백 명과 동녀(童女 순결한 처녀) 5백 명을 데리고 가야 된다고 말하여, 진시황이 그대로 하여 주었는데, 그는 배를 타고 동해(지금의 발해)로 떠나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나라로 와서 영주하였다고도 한다.
[주D-054]무이궁(武夷宮) : 중국 복건성(福建省)에 있는 산. 무이산은 옛부터 신선이 있는 곳이라 한다. 무이궁은 그 신선이 있는 궁이란 말이다.
[주D-055]석목(析木) : 석목은 하늘의 별의 위치이다. 그 위치는 중국 북경으로부터 우리나라까지에 해당된다.
[주D-056]월상(越裳) : 옛날 주(周) 나라 성왕(成王) 때에 남서방에 있는 월상국에서 이중 통역을 앞세우고 와서 조회하였다 한다.
[주D-057]마읍(馬邑) : 중국 산서성 북방 가에 있는 땅이다. 여기서는 단지 봉산(鳳山)과 상대해서 말한 것뿐이다.
[주D-058]봉산(鳳山) : 황해도 봉산인데, 중국 사신이 서울 오는 도중에 지난 길의 역정 중에서 기억나는 대로 쓴 것 같다.
[주D-059]오계자(吳季子) : 춘추 시대 오 나라의 제후 수몽(壽夢)이라는 사람의 넷째 아들로서 매우 현명한 사람이었다. 북방에 와서 여러 나라의 민요와 음악을 듣고서 각기 그 나라의 풍속과 국민성을 알았다고 한다.
[주D-060]천록(天祿) : 한(漢) 나라 시대에 서적을 모아서 쌓은 곳이었다. 양웅이 이 천록각에서 서적을 읽다가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체포하려고 하자, 아래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
[주D-061]중거(仲車) : 송(宋) 나라 사람이다. 시골에 들어앉아 있었던 선비로, 귀가 절벽이어서 남의 말을 듣지 못하므로 붓으로 써서 의사를 통하였다. 그러나 세상에 일어난 일은 가장 빨리 알았기 때문에 하나의 기적으로 여겼다.
[주D-062]선비 양성하는[造士] : 주 나라 학제(學制)의 하나인데, 학문이 우수한 이를 조사 또는 준사(俊士)로 하였으니, 대개 학문의 성취를 의미하는 말이다.
[주D-063]요재(翹材) : 수재(秀才)를 의미하는 말이다. 한(漢) 나라에서 요재관(翹材館)을 짓고, 어진 이들을 초청하여 거처하게 한 일이 있었다.
[주D-064]등영(登瀛) : 신선이 사는 영주(瀛洲)에 올라간다는 의미의 말이다. 당(唐) 나라의 태종(太宗)이 글하는 이들을 좋아하여 문학관(文學館)을 짓고, 문장이 뛰어나고 어진 선비인 방현령(傍玄齡) 등 18학사를 초청하여 거처하게 하며 극진히 대우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등영주’라 하였다.
[주D-065]범가(范哥) 늙은이 : 송(宋) 나라 범중엄(范仲淹)을 말한다. 그는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선비는 마땅히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할 것이다.” 하였다.
[주D-066]등왕각(滕王閣) : 중국 강서성의 수부인 남창(南昌)에 있는 정자. 당(唐) 나라 고종(高宗)의 아들 원영(元嬰)이 강주 자사(江州刺史)로 있으면서 이 누각을 세웠는데 당시에 등왕에 봉해졌던 까닭으로 등왕각이라고 일컬음. 왕발(王勃)이 이곳에 이르러 〈등왕각서(滕王閣序)〉라는 글을 지어 문명을 떨쳤다.
[주D-067]나계(螺髻) : 나환(螺鬟). 머리를 묶어 올린 모습으로 산봉우리를 형용하는 말이다.
[주D-068]돌을 채찍질하여 : 진(秦) 나라에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을 때에 진시황이 채찍으로 돌을 치면 그 돌이 날아가서 쌓을 자리에 놓였다 한다.
[주D-069]임금님……했다네 : 진시황(秦始皇)이 태산(泰山)에 봉선(封禪)하러 갔다가 갑자기 비바람을 만나 큰 소나무 아래로 몸을 피하고, 그 소나무가 공이 있다고 하여 대부(大夫)로 봉(封)하였다. 《史記 秦始皇本紀》
[주D-070]치첩(雉堞) : 성(城) 쌓는 데 몇십 걸음 씩 가다가 직선 밖으로 조금씩 내어 쌓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치첩이라고 한다. 원래 성을 공격하는 사람이 성 밑에 바짝 들어오면 성 위에서 방어할 수 없으므로 이런 치첩을 만들어서 방어한 것이다.
[주D-071]악군(鄂君) : 춘추 시대 초왕(楚王)의 이종 아우 자석(子晳). 악군이 배를 타고 가는데, 월(越) 나라 여인이 노래로 애모하는 정을 전달하였다. 악군이 이에 비단 이불로 덮고 자리를 같이하였다고 한다.
[주D-072]영화(永和) : 진(晉) 나라 목제(穆帝)의 연호(年號)이다. 그 영화 9년 3월 3일에 왕희지(王羲之)가 당시의 명사(名士) 41명과 회계산 아래 난정(蘭亭)에 모여 놀았던 고사가 있고 아울러 〈난정기(蘭亭記)〉라는 글을 남겼다.
[주D-073]동평왕(東平王) : 한(漢) 나라 광무제의 여덟째 아들 유창(劉蒼)인데, 광무제가 집에 거처할 때에 무엇을 즐기느냐고 물으니,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제일 즐겁다고 대답하였다.
[주D-074]금구(金龜) : 옛날 중국인들의 패물의 하나이다. 당(唐) 나라의 문장가 하지장(賀之章)이 이 금구로 술을 바꾸어 이태백과 함께 술을 마신 사실이 있다.
[주D-075]하간(河澗) : 중국의 한 지방인데, 이 지방의 음악은 중국의 바른 음악으로 알려졌다. 여기서는 왕국의 정악(正樂)을 의미한다.
[주D-076]벽통(碧筒) :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정공이 연잎에다 술을 빚어 넣어 그 술이 익은 뒤에 연잎 줄기에 구멍을 내고 그 구멍으로 술을 빨아먹으며 그것을 벽통주라고 이름지었다.
[주D-077]양주(楊州) : 예전에 네 사람이 모여서 소원을 말하는데 한 사람은 10만 관(貫)의 돈이 소원이라 하였고, 한 사람은 학(鶴)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고, 한 사람은 양주 자사(楊州刺史)가 되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는데, 한 사람은 허리에 10만 관(貫)의 돈을 차고 학을 타고 양주 공중에 날아오르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으니, 다른 세 사람의 것을 모두 겸한 것이다.
[주D-078]화산(華山) : 송(宋) 나라 반낭(潘閬)이 화산(華山)에 가서 시를 짓기를, “삼봉(三峯)이 하늘에 높이 솟은 것을 사랑하여 처들고 읊조리며 바라보느라고 나귀를 거꾸로 탔네.” 하였더니, 다른 이가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다, 위야(魏野)가 시를 지어 주기를, “지금부터 화산의 도적(圖籍) 위에 반낭의 나귀 거꾸로 탄 것을 보태겠다.” 하였다.
[주D-079]교(郊)에서……제사드리고 : 예전에는 오직 천자라야만 교(郊)에서 하늘에 제사지낼 수 있었다.
[주D-080]원위(元魏) : 중국 남북조(南北朝) 시대 북조(北朝)의 한 나라이다. 나라 이름은 위(魏)인데 황제의 성이 선비족(鮮卑族)의 척발씨(拓跋氏)였으므로 흔히들 척발위(拓跋魏)로 불렀는데 후에 성을 원(元)으로 고쳤으므로 원위라고도 한다.
[주D-081]소량(蕭梁) : 중국 남북조 시대 남조(南朝)의 한 나라인데 황제의 성이 소씨(蕭氏)였으므로 소량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주D-082]등륙(滕六) : 눈을 내리게 하는 신이다. 등륙이 재주를 피운다는 말은 곧 눈이 왔다는 의미의 말이다.
[주D-083]섬중(剡中) : 중국 절강성(浙江省)의 한 지명이다. 옛날 이곳에 대안도(戴安道)라는 선비가 살았는데, 그의 친구인 왕자유(王子猶)가 눈오는 날 밤에 방문한 일이 있어 유명하다.
[주D-084]무릉(茂陵)의 가사 : 무릉(茂陵)은 한 나라 무제(武帝)의 능이다. 여기에서는 그의 능으로 그(무제)의 대명사로 쓴 것이다. 그는 〈추풍사(秋風詞)〉라는 노래를 지러 불렀다.
[주D-085]안인(安仁)의 부(賦) : 안인(安仁)은 진(晉) 나라 반악(潘岳)의 자(字)이다. 그는 〈추회부(秋懷賦)〉를 지었다.
[주D-086]병 속에 들어간 것 : 한(漢) 나라 때 호공(壺公)이라는 신선이 병 하나를 벽에 걸어두고 밤이면 그 병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 속에는 사람 생활에 필요한 것이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주D-087]쌍남금(雙南金) : 중국에서는 예전에 남쪽 지방에서 나는 금(金)이 품질이 좋아서 북방에서 나는 금보다 값이 배나 되었다. 그래서 보통금 두 몫 되는 남쪽 금이라고 하여 쌍남금이라고 말한다.
[주D-088]광산(匡山) : 중국 여산(廬山)을 말하는데, 옛날 은자(殷者) 광유(匡裕)선생이 이 여산에 숨어서 글을 읽으며 지냈기 때문에 여산을 광려산(匡廬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주D-089]예상곡(霓裳曲) : 당(唐) 나라 현종(玄宗)이 꿈에 월궁(月宮)에 올라가서 들은 음악을 기억하여, 그 곡조를 인간 세상에 전했다는데, 그것을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이라 한다.
[주D-090]삼상(參商) : 두 별의 이름이다. 삼성(參星)의 위치는 서쪽이요, 상성(商星)의 위치는 그와 반대쪽에 있으므로 이 두 별은 함께 보지 못하다. 따라서 사람이 떨어져 서로 만나지 못함을 비겨 말한다.
[주D-091]양관곡(陽關曲) : 예전 중국 사람들은 이별하는 자리에서 양관곡(陽關曲)이라는 노래를 부른다 한다. 그 노래는 세 편(篇)으로 되었다.
[주D-092]원안(袁安) : 동한(東漢) 때에 어느 겨울날 눈이 많이 왔는데, 원안이라는 사람이 먹을 것도 없으면서 3일 동안이나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는 고사.
[주D-093]설당(雪堂) : 소동파(蘇東坡)가 황주(黃州)에서 조그만 당(堂)을 짓고 그 네 벽에다 설경(雪景)을 그렸으므로 설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소동파는 눈오는 날 여러 친구와 눈을 제목으로 한시를 짓는데 보통 눈에 대해서 쓰는 문자나 글자는 통 쓰지 아니하고 짓는다는 법칙을 세우고 지은 일이 있다.
[주D-094]갈고(羯鼓) : 당(唐) 나라 현종(玄宗)이 갈고라는 서방 민족 갈족의 악기를 잘 쳤다. 어느 이른 봄 아직도 꽃이 활짝 피지 아니한 때에 후원 화악루(花萼樓)에서 갈고로 한 곡조 쳤더니 후원의 꽃들이 일시에 활짝 피었다 한다.
[주D-095]뇌문고(雷門鼓) : 춘추 시대 월(越) 나라에 있던 북인데, 그 소리가 1백 리 밖에까지 들렸다 한다.
[주D-096]화정(和靖) : 화정은 송(宋) 나라의 처사 임포(林逋)의 시호이다. 그는 항주(杭州) 서호에 살면서 황제가 벼슬시키려 하여도 거절하고 일생을 깨끗하게 살았는데, 그는 매화를 매우 사랑하여 자기의 아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의 매화시는 유명하다.
[주D-097]유령(劉伶) : 진(晉) 나라 사람으로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다. 그는 술을 잘 마셔 한 자리에서 한 섬 술을 마시고 다섯 말[斗]로 해장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주덕송(酒德頌)〉을 지어서 술을 찬미하였다.
[주D-098]종군(終軍) : 한(漢) 나라 사람이다. 18세 때에 남월(南越 지금의 광동)왕이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지 아니하므로 나라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하라고 하였는데, 종군(從軍)이 황제에게 글을 올려, “긴 노끈 하나를 주면 가지고 가서 남월왕의 목을 얽어 가지고 오겠다.”고 청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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