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경도 한성부

세종지리지 기록

아베베1 2012. 12. 23. 14:51


 





세종
확대원래대로축소
 지리지
세종 지리지 / 경도 한성부

◎ 경도 한성부(京都漢城府)
본래 고구려의 남평양성(南平壤城)이니, 일명(一名) 북한산군(北漢山郡)이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동진(東晉)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2년(372) 임신에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와서 도읍을 정하여【남한산은 지금의 광주(廣州).】 1백 5년을 지내고, 문주왕(文周王)이 고구려의 난을 피하여 고마나루[熊津]로 옮겨 도읍하였고, 고려 초에 양주(楊州)로 고쳤다. 숙종(肅宗) 때 술사(術士) 사의령(司儀令) 김위제(金謂磾)가 옥룡 선사(玉龍禪師)의 《도선밀기(道詵密記)》를 증거로 하여 아뢰기를,
“양주(楊州)에 목멱양(木覓壤)이 있는데, 가히 도읍을 세울 만합니다.”
하고, 일자(日者) 소부감(少府監) 문상(文象)이 따라서 그 말대로 아뢰니, 4년 기묘 9월에 임금이 친히 거둥하여 땅을 살펴보고,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와 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에게 명하여 그 역사를 감독하게 해서, 5년 신사에 시작하여 9년 갑신에 역사를 마치니, 곧 송(宋)나라 휘종(徽宗) 숭녕(崇寧) 3년(1104)이다. 8월에 임금이 와서 살펴보고 남경 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격시켰다. 이로부터 인종(仁宗)·의종(毅宗)·충렬왕(忠烈王)·공민왕(恭愍王)·공양왕(恭讓王)이 모두 순행하여 이곳에 머물렀다. 충렬왕 34년 무신에【곧 원(元)나라 무종(武宗) 지대(至大) 원년(元年).】 한양부(漢陽府)로 고쳐서 부윤(府尹)·판관(判官)을 두었고, 본조(本朝)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憲大王) 3년 갑술【곧 명(明)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홍무(洪武) 27년.】 10월 갑오에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한성부(漢城府)로 고쳐서, 판사(判事)·윤(尹)·소윤(少尹)·판관(判官)·참군(參軍)을 두고, 을해 2월에 비로소 종묘(宗廟)와 궁실(宮室)을 경영하여 9월에 모두 낙성되었다.
도성(都城)의 둘레가 9천 9백 75보(步)인데, 북쪽 백악사(白嶽祠)로부터 남쪽 목멱사(木覓祠)에 이르는 지름이 6천 63보요, 동쪽 흥인문(興仁門)으로부터 서쪽 돈의문(敦義門)에 이른 지름이 4천 3백 86보가 되며, 정동(正東)을 흥인문, 정서(正西)를 돈의문, 정북(正北)을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을 홍화문(弘化門)【곧 동소문(東小門).】, 동남(東南)을 광희문(光熙門)【곧 수구문(水口門).】, 서남(西南)을 숭례문(崇禮門)【곧 남대문.】, 소북(小北)을 소덕문(昭德門)【곧 서소문(西小門).】, 서북(西北)을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태조(太祖) 5년 병자 봄에 각도의 민정(民丁) 11만 8천 76명을 모아 도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니, 번와(燔瓦) 및 석회군(石灰軍)이 또 1천 7백 59명이었다. 가을에 이르러 또 민정 7만 9천 4백 31명을 모아서 8월 13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9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였으며, 금상(今上) 4년 임인에 태종의 명으로 성을 수축하여 토성(土城)을 모두 돌로 바꾸었는데, 8도의 군사 총 32만 2천 4백 명을 모아,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에 마치었다. 성 동쪽에, 처음에 수문(水門) 3을 열었는데, 장마를 만나면 〈문이〉 막히는 것을 없애기 위하여 2문을 더 만들었다.】
동부(東部) 12방(坊)【숭신(崇信)·연화(蓮花)·서운(瑞雲)·덕성(德成)·숭교(崇敎)·연희(燕喜)·관덕(觀德)·천달(泉達)·흥성(興盛)·창선(彰善)·건덕(建德)·인창(仁昌).】
남부(南部) 11방(坊)【광통(廣通)·호현(好賢)·명례(明禮)·대평(大平)·훈도(薰陶)·성명(誠明)·낙선(樂善)·정심(貞心)·명철(明哲)·성신(誠身)·예성(禮成).】
서부(西部) 8방(坊)【인달(仁達)·적선(積善)·여경(餘慶)·황화(皇華)·양생(養生)·신화(神化)·반석(盤石)·반송(盤松).】
북부(北部) 10방(坊)【광화(廣化)·양덕(陽德)·가회(嘉會)·안국(安國)·관광(觀光)·진장(鎭長)·명통(明通)·준수(俊秀)·순화(順化)·의통(義通).】
중부(中部) 8방(坊)【징청(澄淸)·서린(瑞麟)·수진(壽進)·견평(堅平)·관인(寬仁)·경행(慶幸)·정선(貞善)·장통(長通).】
종묘(宗廟)【중부 정선방(貞善坊)과 동부 연화방(蓮花坊) 중앙에 있으니, 담 둘레에 소나무를 심었다.】 영녕전(永寧殿)【종묘의 담 안 서쪽에 있다. 태조(太祖)가 하늘의 명[天命]을 받아 〈왕이 되매〉 왕(王)으로 목(穆)·익(翼)·도(度)·환(桓)의 네 조상을 추존하고, 종묘를 세워 제사를 받들다가, 태종(太宗)을 부묘(祔廟)하게 되매, 목조(穆祖)를 체천(遞遷)해야 하므로, 따로 이 전각을 세우고 목조의 신주를 옮겨 모시었으며, 익(翼)·도(度)·환(桓)의 세 조상도 또한 이곳에 차례로 옮겨 모시었다.】 사직(社稷)【인달방(仁達坊)에 있으니, 둘레의 담에 소나무를 심었다.】 문소전(文昭殿)【처음에 문소전을 창덕궁 서북쪽에 세우고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憲大王)과 신의 왕후(神懿王后)의 화상[神御]을 모시고, 또 광효전(廣孝殿)을 창덕궁 동북쪽에 세우고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과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화상을 모시었다가, 그 후에 송(宋)나라 경령궁(景靈宮)의 제도에 의하여 원묘(原廟)를 경복궁 성안 동북쪽에 고쳐 지었는데, 앞에는 묘(廟), 뒤에는 침(寢)으로 하여 한결같이 고례(古禮)를 따르고, 이름을 문소전이라 하여, 두 임금(태조·태종)의 화상을 옮겨 모시었다.】 문묘(文廟)【숭교방(崇敎坊)에 있고, 뜰에 비(碑)가 있다. 성균관 학관(成均館學官)을 두어 선비를 가르치는데, 2백 사람으로써 액수를 정하였다. 옆에 양현고(養賢庫)를 두어 섬학전(贍學田) 1천 35결(結)을 주었고, 금상(今上) 13년(1431) 신해에 9백 65결을 더 주었다.】
경복궁(景福宮)【백악산(白岳山) 남쪽에 있다.】 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 동쪽 작은 침전(寢殿)을 연생전(延生殿), 서쪽 작은 침전을 경성전(慶成殿), 또 그 남쪽을 사정전(思政殿)【정사를 보는 곳.】, 또 그 남쪽을 근정전(勤政殿)【조회를 받는 곳.】, 안문[內門]을 근정(勤政), 안 동문(東門)을 일화(日華), 동각루(東閣樓)를 융문(隆文), 서각루(西閣樓)를 융무(隆武)라 한다.
영제교(永濟橋)【근정문 밖에 있다.】 홍례문(弘禮門)【영제교 남쪽에 있다.】 경회루(慶會樓)【궁 서쪽 담안에 있는데, 둘레가 못으로 되어 있다.】 동궁(東宮)【건춘문(建春門) 안에 있다.】
궁성(宮城)【둘레가 1천 8백 13보(步)이다.】 동문(東門)을 건춘(建春), 서문(西門)을 영추(迎秋), 남문(南門)을 광화(光化)라 한다.【문루(門樓)가 2층이요, 누 위에 종고(鍾鼓)를 달고 새벽과 저녁에 울리어 때알림을 엄하게 한다. 문 남쪽 좌우에 의정부(議政府)·중추원(中樞院)·육조(六曹)·사헌부(司憲府) 등 각사(各司)의 공해(公廨)를 벌려 놓았다.】
창덕궁(昌德宮)【정선방(貞善坊)에 있다. 태종(太宗) 5년(1405) 을유에 세워서 이궁(離宮)으로 삼았다.】 인정전(仁政殿)【조회를 받는 곳.】 안문을 인정(仁政), 중문을 진선(進善), 바깥문을 돈화(敦化)라 한다.
광연루(廣延樓)【궁 동쪽에 있다.】 수강궁(壽康宮)【연화방(蓮花坊)에 있다. 태종(太宗) 18년(1418) 무술에 왕위를 물려주고, 따로 이 궁을 지어 거처하였다.】 선양정(善養亭)【궁 남쪽 언덕에 있다.】
혜정교(惠政橋)【중부 서린방(瑞麟坊) 북쪽에 있다.】 운종가(雲從街)【곧 서린방과 수진방(壽進坊)의 중앙이다.】 통운교(通雲橋)【관인방(寬仁坊)남쪽에 있다.】 북광통교(北廣通橋)【광통방 북쪽에 있다.】
큰 저자[大市]【중부 장통방(長通坊)과 경행방(慶幸坊) 중앙에 있다.】 종루(鐘樓)【도성 중앙에 있다. 2층으로 되어 있고, 누 위에 종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깨우쳐 준다.】 도성 좌우 행랑(都城左右行廊)【대략 2천 27간이다.】
태평관(太平館)【숭례문(崇禮門) 안 황화방(皇華坊)에 있다. 이곳에서 중국 사신(使臣)을 접대하는데, 옆에다 별전(別殿)을 지어서 임금이 쉬는 곳으로 삼았다.】 모화관(慕華館)【돈의문(敦義門) 밖 서북쪽에 있다. 본이름은 모화루(慕華樓)이니, 중국 사신(使臣)을 영접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금상(今上) 12년(1430) 경술에 고쳐 짓고 관(館)으로 하였다. 남쪽에 네모진 못이 있는데, 낮은 담을 쌓고 버들을 심었다.】
오부(五部)의 호수(戶數)는 1만 7천 15호, 성저십리(城底十里)의【동쪽은 양주(楊州) 송계원(松溪院) 및 대현(大峴)에 이르고, 서쪽은 양화도(楊花渡) 및 고양(高陽) 덕수원(德水院)에 이르고, 남쪽은 한강 및 노도(露渡)에 이른다.】 호수는 1천 7백 79호이다.
간전(墾田)은 1천 4백 15결(結)이다.
삼각산(三角山)【도성 밖 정북(正北)에 있으니, 일명(一名)은 화산(華山)이다.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 일컬었다.】 도성(都城)의 진산(鎭山)은 백악(白岳)이다.【산정(山頂)에 사당[祠宇]이 있어서 삼각산의 신을 제사 지내는데, 백악을 붙여서 지낸다. 중사(中祀)로 한다.】
목멱사(木覓祠)【도성 남산 꼭대기에 있으니, 소사(小祀)이다. 봉화(烽火)가 5곳이 있으니, 제일(第一)은 함길도(咸吉道)와 강원도(江原道)로부터 온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 봉화에 응하고, 제이(第二)는 경상도로부터 온 광주(廣州) 천천산(穿川山) 봉화에 응하고, 제삼(第三)은 평안도·황해도로부터 육로(陸路)로 온 무악(毋岳) 동쪽 봉우리의 봉화에 응하고, 제사(第四)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해로(海路)로 온 무악 서쪽 봉우리의 봉화에 응하고, 제오(第五)는 전라도와 충청도로부터 온 양천(陽川) 개화산(開花山) 봉화와 아차산(峨嵯山) 봉화에 응하고, 또 강원도로부터 온 풍양(豐壤) 대이산(大伊山) 봉화에 응한다.】 무악(毋岳)【모화관 서쪽에 있다. 위에 봉화가 두곳이 있으니, 동쪽 봉우리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육로로 온 고양(高陽) 소달산(所達山) 봉화에 응하고, 서쪽 봉우리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해로로 온 영서역(迎曙驛) 서산(西山) 봉화에 응한다.】
연희궁(衍禧宮)【무악 남쪽에 있다.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일찍이 “이 땅이 무악의 명당(明堂)이 되어 가히 도읍을 세울 만하다.”고 하였는데, 세종 3년(1421) 신축에 태종이 그 말을 생각하고 이궁(離宮)을 짓게 하였다.】
우사단(雩祀壇)·동방 토룡단(東方土龍壇)·선농단(先農壇)【모두 흥인문(興仁門) 밖 평촌(坪村)에 있다.】 마보단(馬步壇)·마조단(馬祖壇)·선목단(先牧壇)·마사단(馬社壇)【모두 흥인문 밖 사근사리(沙斤寺里)에 있다.】 선잠단(先蠶壇)【동소문 밖 사한이(沙閑伊)에 있다.】 노인성단(老人星壇)·원단(圓壇)·영성단(靈星壇)·풍운뢰우단(風雲雷雨壇)【모두 숭례문 밖 둔지산(屯地山)에 있다.】 남방 토룡단(南方土龍壇)【한강 북쪽에 있다.】 서방 토룡단(西方土龍壇)가을두(加乙頭)에 있다.】 북교단(北郊壇)·북방 토룡단(北方土龍壇)·여제단(厲祭壇)【모두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다.】
동적전(東籍田)【흥인문 밖에 있다. 종묘·사직·산천(山川) 백신(百神)의 제미[棄盛]를 제공한다. 또 구도(舊都)의 문교(門郊)에 서적전(西籍田)이 있다.】
한강도(漢江渡)【목멱산 남쪽에 있다. 너비 2백 보. 예전에는 사평도(沙平渡)또는 사리진도(沙里津渡)라 하였다. 북쪽에 단(壇)이 있는데, 봄·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며, 중사(中祀)로 한다. 도승(渡丞) 1인을 두어서 드나드는 사람을 조사한다. 나루 머리[渡頭]에 제천정(濟川亭)이 있다.】 용산강(龍山江)【숭례문 밖 서남쪽 9리에 있다. 배로 실어 온 세곡(稅穀)을 거둬들이는 곳으로서, 군자 강감(軍資江監)과 풍저 강창(豐儲江倉)이 있다.】 서강(西江)【서소문 밖 11리에 있다. 또한 배로 실어 온 세곡(稅穀)을 거둬들이는 곳으로서, 광흥 강창(廣興江倉)과 풍저 강창(豐儲江倉)이 있다.】 가을두(加乙頭)【서소문 밖 12리에 있다. 오똑하고 기이하게 빼어났고, 남쪽으로 큰 강을 임하여 벽처럼 서서, 백 길이나 되는데, 나무를 휘어잡고 아래를 굽어보면 터럭끝이 오싹해진다.】
빙고(氷庫) 2【곧 예전의 얼음집[淩陰]이다. 하나는 두모포(豆毛浦)에 있으니, 나라 제향에 쓸 얼음을 바치고, 하나는 한강 아래 백목동(栢木洞)에 있으니, 어선(御膳), 나라 손님 접대 또는 백관(百官)에게 나누어 줄 얼음을 바친다.】
조지소(造紙所)【장의사동(壯義寺洞)에 있다. 처음에는 사대(事大)의 표(表)·전(箋)·주(奏)·계(啓)·자문(咨文)에 쓸 종이를, 전라도 전주(全州)와 남원부(南原府)에서 해마다 세밑에 바쳤는데, 많이 쓰는 것을 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금상 2년에 특명으로 조지소를 두어 종이를 만들었는데, 품질이 옛 것에 견주어 훨씬 곱고 좋았다. 이로 말미암아 전주와 남원 두 부(府)의 세공(歲貢) 독촉의 폐단이 비로소 없어졌다.】 물방아[水輾]【장의사 동구(壯義寺洞口)에 있다.】
동활인원(東活人院)【동소문 밖에 있다.】 서활인원(西活人院)【서소문 밖에 있다. 옛 이름은 대비원(大悲院)이다. 제조(提調)와 별좌(別坐)를 두고, 또 의원과 무당을 두어서, 서울 안에 병들고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을 모두 이곳에 모아 놓고, 죽·밥·국·약을 주며, 아울러 옷·이불·자리를 주어 편하도록 보호해 주고, 만일 죽는 이가 있으면 잘 묻어 준다.】
귀후소(歸厚所)【용산강 가에 있다. 제조(提調)와 별좌(別坐)를 두고, 또 중들로 일을 주장하게 하여, 관(棺)·곽(槨)을 만들어 팔아서 초상집의 급작스럽게 당한 일을 예비하게 한다.】
흥천사(興天寺)【황화방(皇華坊)에 있는데, 선종(禪宗)에 속한다. 3층탑이 있고, 〈그 속에〉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사리(舍利)를 안치하였다. 태조가 세우고 밭 2백 50결(結)을 주었다.】 흥덕사(興德寺)【연희방(燕喜坊)에 있는데, 교종(敎宗)에 속한다. 태조가 궁(宮)을 버리고 절을 만들어서 밭 2백 50결(結)을 주었다.】 장의사(壯義寺)【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는데, 교종(敎宗)에 속한다. 밭 2백 50결을 주었다.】
봉경(封境)【동쪽으로 양양(襄陽)에 이르기 5백 40리, 서쪽으로 풍천(豐川)에 이르기 6백 리, 남쪽으로 해진(海珍)에 이르기 9백 80리, 북쪽으로 여영(閭迎)에 이르기 1천 4백 70리, 동북쪽으로 경원(慶源)에 이르기 2천 1백 90리, 동남쪽으로 동래(東萊)에 이르기 8백 70리, 서남쪽으로 태안(泰安)에 이르기 3백 90리, 서북쪽으로 의주(義州)에 이르기 1천 1백 40리이다.】
【원전】 5 집 613 면



 
세종
확대원래대로축소
 지리지
세종 지리지 / 경기

◈ 경기(京畿)
도관찰 출척사(都觀察黜陟使) 1인, 수령관(首領官) 1인, 의학 교유(醫學敎諭)·검률(檢律) 각각 1인.【다른 도(道)도 이와 같다.】
본래 고구려의 땅이다. 고려 성종(成宗) 14년 을미에【곧 송(宋)나라 태종(太宗) 지도(至道) 원년(元年).】 개주(開州)를 개성부(開城府)로 승격시켜 적현(赤縣) 6, 기현(畿縣) 7을 관할하게 하다가,【고사(古史)에 다만 현(縣)의 수만 기록하고 이름을 적지 아니해서 자세히 상고할 수 없다.】 현종(顯宗) 9년 무오에【곧 송나라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11년.】 개성부를 파하고 개성 현령(開城縣令)으로써 정주(貞州)·덕수(德水)·강음(江陰)의 3현을 관할하게 하고, 장단 현령(長湍縣令)으로써 송림(松林)·임진(臨津)·토산(兎山)·임강(臨江)·적성(積城)·파평(坡平)·마전(麻田)의 7현을 관할하게 하고,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직속시켜 경기(京畿)라 일렀다. 문종(文宗) 16년 임인에【곧 송나라 인종(仁宗) 가우(嘉祐) 7년.】 다시 개성부로 승격시켜 도성(都省)에서 관장하던 11현을 모두 붙이고, 또 서해도(西海道)의 평주(平州)임내(任內)인 우봉군(牛峯郡)을 떼어 이에 붙였으며, 그 후 다시 개성 현령을 두어 개성부에 붙이었다.【연대는 알 수 없다.】 공양왕(恭讓王) 2년 경오에【곧 명나라 태조 고황제 홍무(洪武) 23년.】 경기(京畿)를 갈라 좌·우도(左右道)로 하여, 장단·임강·토산·임진·송림·마전·적성·파평현을 좌도(左道)로, 개성·강음·해풍·덕수·우봉을 우도(右道)로 하고, 또 경기(京畿)를 더 넓혀서 양광도(楊廣道)의 한양(漢陽)·남양부(南陽府)·인주(仁州)·안산군(安山郡)·교하(交河)·양천(陽川)·금천(衿川)·과주(果州)·포주(抱州)·서원(瑞原)·고봉현(高峯縣)과 교주도(交州道)의 철원부(鐵原府)·영평(永平)·이천(伊川)·안협(安峽)·연주(漣州)·삭녕(朔寧)으로써 좌도(左道)에 붙이고, 양광도의 부평(富平)·강화부(江華府)·교동(喬桐)·김포(金浦)·통진현(通津縣)과 서해도(西海道)의 연안부(延安府)·평주(平州)·배주(白州)·곡주(谷州)·수안군(遂安郡)·재령(載寧)·서흥(瑞興)·신은(新恩)·협계현(俠溪縣)으로써 우도(右道)에 붙이고, 각기 도관찰 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두고 수령관(首領官)으로써 돕게 하다가,【4품 이상은 경력(經歷)을 삼고, 5품 이하는 도사(都事)를 삼았다.】우리 태조(太祖) 3년 갑술에【곧 홍무 27년.】 도읍을 한양부에 정하게 되매, 그 이듬해 을해에 평주·수안·곡주·재령·서흥·신은·협계는 새 서울[新都]에 가는 길이 멀므로 도로 서해도에 붙이고, 양광도의 광주(廣州)·수원부(水原府)·양근군(楊根郡)·쌍부(雙阜)·용구(龍駒)·처인(處仁)·이천(利川)·천녕(川寧)·지평현(砥平縣)을 갖다 이에 붙이고, 광주·수원의 관할인 군(郡)·현(縣)을 갈라서 좌도(左道)로 하고, 양주·부평·철원·연안의 관할인 군·현을 우도(右道)로 하고, 7년[戊寅]에 또 충청도(忠淸道)의 진위현(振威縣)을 떼어서 좌도에 붙이었다가, 태종(太宗) 2년 임오에【곧 홍무 35년.】 두 도(道)를 합하여 경기 좌·우도라 하고, 성관찰사(省觀察使)·수령관(首領官) 각각 1인씩을 두었다. 13년 계사에【곧 명나라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 영락(永樂) 11년.】 사방길의 멀고 가까움을 참작하여 연안(延安)·배주(白州)·우봉·강음·토산을 도로 풍해도(豐海道)에, 이천(伊川)을 도로 강원도에 붙이고, 충청도의 여흥부(驪興府)·안성군(安城郡)·양지(陽知)·양성(陽城)·음죽현(陰竹縣)과 강원도의 가평현(加平縣)을 떼어다가 이에 붙이고, 좌·우도(左右道)로 나누지 않고 다만 경기 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라 일컫고 사(司)를 수원(水原)에 두었다. 동쪽은 강원도 춘천(春川)과 원주(原州)에 이르고, 서쪽은 황해도 강음(江陰)과 배천(白川)에 이르며, 남쪽은 충청도 죽산(竹山)과 직산(稷山)에 이르고, 북쪽은 황해도의 토산(兎山)과 강원도 이천(伊川)에 이르러서, 동서가 2백 64리요, 남북이 3백 64리가 된다.
목(牧)이 1이요, 도호부(都護府)가 8이요, 군(郡)이 6이요, 현(縣)이 26이다.
명산(名山)으로 말하면, 삼각산(三角山)은 도성(都城)의 진산(鎭山)이 되며, 백악(白岳) 북쪽에 있고, 성거산(聖居山)은 옛 서울의 송악(松岳) 동북쪽에 있으며, 화악(花岳)은 가평현(加平縣) 북쪽에 있고, 겸악(鉗岳)은 적성현(積城縣) 동쪽에 있으며, 용호산(龍虎山)은 임강현(臨江縣) 남쪽에 있고, 오관산(五冠山)은 임강현의 임내(任內)인 송림(松林) 북쪽에 있으며, 마리산(摩利山)은 강화부(江華府) 남쪽에 있다.
대천(大川)으로 말하면, 한강(漢江)은 그 근원이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으로부터 나와 영월군(寧越郡) 서쪽에 이르러 여러 내를 합하여 가근동진(加斤同津)이 되고, 충청도 충주(忠州)의 연천(淵遷)을 지나서 한결같이 서쪽으로 흘러 여흥(驪興)을 지나 여강(驪江)이 되고, 천녕(川寧)에서 이포(梨浦)가 되며, 양근(楊根)에서 대탄(大灘)이 되고, 또 사포(蛇浦)와 용진(龍津)이 되었으며, 〈한 줄기는〉 인제현(麟蹄縣)이 이포소(伊布所)로부터 나와 춘천(春川)에 이르러 소양강(昭陽江)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가평현(加平縣) 동쪽에서 안판탄(按板灘)이 되고, 양근(楊根) 북쪽에서 입석진(立石津)이 되며, 또 〈양근〉 남쪽에서 용진도(龍津渡)가 되고, 사포(蛇浦)로 들어가서 두 물이 합하여 흘러 광주(廣州) 경계에 이르러서 도미진(渡迷津)이 되고, 〈다음에〉 광나루[廣津]가 되었으며, 서울 남쪽에 이르러 한강도(漢江渡)가 되고, 서쪽에서 노도진(露渡津)이 되며, 서쪽에서 용산강(龍山江)이 되었는데, 경상·충청·강원도 및 경기 상류(上流)에서 배로 실어 온 곡식이 모두 이곳을 거치어 서울에 다다른다. 강물이 도성 남쪽을 지나 금천(衿川) 북쪽에 이르러 양화도(楊花渡)가 되고, 양천(陽川) 북쪽에서 공암진(孔岩津)이 되며, 교하(交河) 서쪽 오도성(烏島城)에 이르러 임진강(臨津江)과 합하고, 통진(通津) 북쪽에 이르러 조강(祖江)이 되며, 포구곶이[浦口串]에 이르러서 나뉘어 둘이 되었으니, 하나는 곧장 서쪽으로 흘러 강화부 북쪽을 지나 하원도(河源渡)가 되고, 교동현(喬桐縣) 북쪽 인석진(寅石津)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니, 황해도에서 배로 실어 온 곡식이 〈모두〉 이곳을 거치어 서울에 다다른다. 하나는 남쪽으로 흘러 강화부 동쪽 갑곶이나루[甲串津]를 지나서 바다로 들어가니, 전라·충청도에서 배로 실어 온 곡식이 모두 이곳을 거치어 서울에 다다른다. 임진강(臨津江)은 그 근원이 함길도(咸吉道) 안변(安邊)의 임내(任內)인 영풍현(永豐縣) 방장동(防墻洞)으로부터 와서 이천(伊川)·안협(安峽)·삭녕(朔寧) 경계를 지나 연천(漣川)에 이르러, 물이 비로소 커져서 징파도(澄波渡)가 되고, 마전(麻田)을 지나 적성(積城)에 이르러 이포진(梨浦津)이 되며, 장단(長湍)에서 두지진(豆只津)이 되고, 임진현 동쪽에 이르러 임진도(臨津渡)가 되며, 서쪽으로 흘러 〈임진현〉 동남쪽에 이르러서 덕진(德津)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교하현 서쪽에 이르러서 낙하도(洛河渡)가 되며, 봉황바위[鳳凰岩]를 지나 오도성(烏島城)에 이르러 한강과 합하여 함께 바다로 들어간다.
호수가 2만 8백 82호, 인구가 5만 3백 52명【본조(本朝)는 인구(人口)의 법이 밝지 못하여, 문적에 적힌 것이 겨우 열의 한둘이 되므로, 나라에서 매양 바로잡으려 하나, 너무 인심(人心)을 잃게 되어, 그럭저럭 이제까지 이르렀으므로, 각도 각 고을의 인구수가 이렇게 되었고, 다른 도들도 모두 이렇다.】이요,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천 7백 13명, 선군(船軍)이 3천 8백 92명이다.
간전(墾田)은 20만 3백 47결(結)이다.【밭[旱田]이 12만 4천 1백 73결 남짓하고, 논[水田]이 7만 6천 1백 73결 남짓하다.】 그 부세(賦稅)는 쌀[稻米]【멥쌀[粳米]·흰쌀[白米]·세경미(細粳米)·점경미(粘粳米)·조미(糙米)가 있다.】·직미(稷米)·콩[豆]【콩·팥·녹두가 있다.】·보리【보리·밀·메밀이 있다.】·지마(芝麻)【속명 참깨.】·꿀[蜂蜜]·밀[黃蠟]·지마유(芝麻油)【속명 참기름.】·소자유(蘇子油)【속명 법유(法油).】·가루장[末醬]·겨자[芥子]·모시[白苧布]·다섯새베[正五升布]【대개 군읍(郡邑)의 구실[田賦]이 머나 가까우나 모두 같으므로, 다시 고을 밑에 적지 아니한다.】 등이다.
토공(土貢)은 모과[木瓜]·개암씨[榛實]·상수리[橡實]·밤[栗]·감[柿]·대추[棗]·느타리[眞茸]·싸리 버섯[鳥足茸]·황각(黃角)·산삼(山蔘)·도라지[桔梗]·마른 멧돼지고기[乾猪]·토끼젓[兎醢]·물고기젓[魚醢]·숭어[水魚]·민어(民魚)·젓[醢]·질그릇[陶器]·사기 그릇[磁器]·목기(木器)·버들 그릇[柳器]·갈소쿠리[蘆簞]·참빗[省帚]·왕골속[莞心]·노화지(蘆花紙)·잡깃[雜羽]·갓[常笠]·새[草]·마의(馬衣)·짚[藁草]·꼴[芻藁]·새끼[藁索]·삼노[麻索]·소나무 그을음[松煙]·송진[松脂]·주토(朱土)·갈탄(葛炭)·향나무[香木]【백단향(白檀香)·자단향(紫檀響)·역목(櫟木)이 있다.】·굴가루[蠣灰]·명아주재[藜灰]·황회(黃灰)·지초(芝草)·단풍나무잎[楓葉]·영선 잡목(營繕雜木)·자작나무[自作木]·은행나무[杏木]·피나무[椵木]·뽕나무[黃桑木]·앵도나무[櫻木]·장작[燒木]이다.
약재(藥材)는 쇠쓸개[牛贍]·범의 정강이뼈[黃虎脛骨]·곰의 쓸개[熊膽]·돼지쓸개[猪膽]·수달피쓸개[獺膽]·고슴도치쓸개[猬膽]·섣달토끼머리[臘兎頭]·고슴도치가죽[猬皮]·아교(阿膠)·말벌집[露蜂房]·지네[蜈蚣]·누에나비[元蠶蛾]·누에허물[馬鳴退]·가뢰[斑猫]·매미허물[蟬退皮]·뱀허물[蛇退皮]·두꺼비[蟾酥]·청개구리[蝦蟆]·자라껍데기[鼈甲]·뽕나무벌레[桑螵蛸]·마른 잉어[乾鯉魚]·잉어쓸개[鯉魚膽]·굴조개껍질[牡蠣]·누에똥[蠶沙]·오가피(五加皮)·황경나무껍질[黃蘗皮]·뽕나무뿌리껍질[桑白皮]·느릅나무속껍질[楡白皮]·산이스랏씨[郁李仁]·복숭아씨[桃仁]·살구씨[杏仁]·탱자[枳殼]·회화나무열매[槐實]·회화나무꽃[槐花]·송진[松脂]·연밥[蓮子]·조피나무열매[川椒]·오배자(五倍子)·복령(茯苓)【붉은 것과 흰 것 두 종류가 있다.】·복신(茯神)·안식향(安息香)·산골[自然銅]·돌고드름[禹餘糧]·하늘타리[天圓子]·새삼씨[兎絲子]·고무딸기열매[覆盆子]·오미자(五味子)·나팔꽃씨[牽牛子]【흰 것과 검은 것의 두 가지가 있다.】·질경이씨[車前子]·찔레씨[蒺梨子]·백부자(白附子)·백출(白朮)·창출(蒼朮)·창포말(菖蒲末)·석창포(石菖蒲)·쥐방울[馬兜苓]·쇠비름[馬齒莧]·붓꽃[馬藺]·부들꽃[蒲黃]·택사(澤瀉)·도라지[桔梗]·탱알[紫莞]·삽주[薊草]【큰 것과 작은 것 두 종류가 있다.】·수자해좆뿌리[天麻]·수자해좆싹[赤箭]·가위톱[白歛]·삿갓풀뿌리[蚤休]·검산풀뿌리[續斷]·절국대뿌리[漏蘆]·박새[藜蘆]·족도리풀뿌리[細辛]·칡뿌리[葛根]·석죽화[瞿麥]·외나물뿌리[地楡]·승검초뿌리[當歸]·마뿌리[山藥]·하눌타리뿌리[括樓根]·버들옷[大戟]·자리공뿌리[商陸]·검화뿌리껍질[白蘇皮]·매자기뿌리[京三稜]·여우오줌풀뿌리[鶴蝨]·나리뿌리[百合]·감대뿌리[虎杖根]·두룹뿌리[獨活]·두여머조자기[天南星]·쇠무릎[牛膝]·사자발쑥[獅子足艾]·도꼬마리[蒼耳]·시호(柴胡)·끼절가리뿌리[升麻]·함박꽃뿌리[芍藥]【붉은 것과 흰 것 두 가지가 있다.】·호본(蒿本)·구리때뿌리[白芷]·끼무릇뿌리[半夏]·현삼(玄蔘)·쓴너삼뿌리[苦蔘]·더위지기[茵陳]·진봉[秦]·현호색(玄胡索)·부처손[卷栢]·참외뿌리[土瓜根]·속서근풀[黃芩]·단너삼뿌리[黃耆]·으름덩굴[木通]·으름[林下夫人]·낙석(絡石)·지모(知母)·회초미뿌리[貫衆]·수뤼나물뿌리[葳靈仙]·바곳[草烏頭]·방장초(放杖草)·살남람(殺男藍)·들쑥[漆]·며래뿌리[萆]·이리어금니[狼牙]·하국[旋覆花]·겨우살이꽃[金銀花]·금등화[金燈花]이다.【이상의 잡공(雜貢) 및 약재(藥材)를, 이제 토산(土産)의 희귀(稀貴)한 것은 각기 그 고을 밑에 기록하고, 그 각 고을마다 나는 것으로서, 다만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만은 다시 기록하지 아니한다.】
재배하는 약재(藥材)는 백변두(白扁豆)·양귀비[粟]·차조기[紫蘇]·영생이[薄荷]·소야기[香薷]·악실(惡實)·겨자[芥子]·삼씨[麻子]·회향(回香)·생지황(生地黃)·장군풀[大黃]·청목향(靑木香)·정가[荊芥]·해바라기씨[葵子]·무우씨[蘿葍子]·순무우씨[蔓菁子]·참외꼭지[眞苽帶]·맨드라미꽃[鷄冠花]【붉은 것과 흰 것 두 종류가 있다.】·감국(甘菊)·잇[紅花]·율무[薏苡]이다.【이상의 약재는 각 고을의 풍토에 맞는 것을 따라 의원(醫院)으로 하여금 심어 기르게 한다. 〈이것은〉 본래 산이나 들에서 나는 것이 아니므로, 모두 각 고을 밑에 기록하지 아니하였다. 무릇 한 물건이 밭구실[田賦]·토공(土貢)·약재(藥材) 따위에 거듭 나온 것이 많이 있으나, 이제 그 거듭된 것을 좇고, 오직 꿀[蜂蜜]·밀[黃蠟] 따위는 다만 토공에 기록하고, 인삼·오미자(五味子) 따위는 다만 약재난에 기록하여, 다시 거듭 나오지 않게 하였다.】
좌도 수군 첨절제사영(左道水軍僉節制使營)은 남양부(南陽府) 서쪽 화지량(花之梁)에 있고,【항상 중대선(中大船) 3척과 쾌선(快船) 10척, 무군선(無軍船) 13척을 거느리고 강화(江華)를 수어(守禦)하는데, 장번 수군(長番水軍)이 69명이요, 각관(各官)의 좌·우령(左右領) 선군(船軍)이 총 1천 5백 97명이다. 대개 배 1척에 각기 땔나무와 물을 실어 나르는 삼판소선(三板小船)이 있으며, 그 무군선은 만일 경급(警急)한 일이 있으면 영선군(領船軍)을 모두 징발하여 태우는 것이니, 뒤의 것도 모두 이와 같다.】 영종포 만호(永宗浦萬戶)는 남양부(南陽府)의 서쪽에 있고,【중대선(中大船) 3척, 맹선(孟船) 1척, 무군선(無軍船) 3척이요, 각관의 좌·우령(左右領) 선군(船軍)이 총 5백 10명이다.】 초지량 만호(草芝梁萬戶)는 안산(安山) 서남쪽 모래곶이[沙串]에 있고,【중대선 5척, 무군선 4척이요, 장번 수군(長番水軍)이 8명이며, 각관의 좌·우령 선군이 총 6백 15명이다.】 제물량 만호(濟物梁萬戶)는 인천군(仁川郡) 서쪽 성창포(城倉浦)에 있다.【병선(兵船) 4척, 무군선 4척이며, 각관의 좌·우령 선군이 총 5백 10명이다.】
우도 수군 첨절제사영(右道水軍僉節制使營)은 교동현(喬桐縣) 서쪽 응암량(鷹岩梁)에 있고,【항상 쾌선(快船) 9척과 맹선(孟船) 3척과 왜별선(倭別船) 1척을 거느리고 교동(喬桐)을 수어하는데, 장번 수군이 2백 95명이요, 각관의 좌·우령 선군이 1천 18명이다.】 정포 만호(井浦萬戶)는 강화부(江華府) 서쪽에 있다.【쾌선 11척, 무군선 10척이요, 강화(江華) 장번 수군(長番水軍)이 2백 46명이며, 각관 좌·우령 선군이 9백 24명이다.】
좌도 충청도(左道忠淸道) 정역 찰방(程驛察訪)의 관할 역(驛)이 7이요,【양재(良才)·낙생(樂生)·구흥(駒興)·김녕(金寧)·좌찬(佐贊)·분행(分行)·무극(無極).】 우도(右道) 정역 찰방(程驛察訪)의 관할 역(驛)이 8이며,【영서(迎曙)·벽제(碧蹄)·마산(馬山)·동파(東坡)·초현(招賢)·청교(靑郊)·교예(狡猊)·중련(中連).】 경기(京畿)·강원도(江原道) 정역 찰방(程驛察訪)의 관할 역이 22이다.【녹양(綠楊)·안기(安奇)·양문(梁文)·풍전(豐田), 그 나머지 18역은 모두 강원도 지경에 있다.】
좌도 수참 전운 판관(左道水站轉運判官)【광진 승(廣津丞)을 겸하다.】, 우도 수참 전운 판관(右道水站轉運判官)【벽란도 승(碧瀾渡丞)을 겸하다.】, 감목관(監牧官) 1인, 의학 교유(醫學敎諭) 1인, 검률(檢律) 1인, 역승(驛丞) 5인이다.
중림도(重林道)의 관할 역이 6이요,【경신(慶申)·석곡(石谷)·반유(盤乳)·남산(南山)·금수(金輸)·종생(種生).】 동화도(同化道)의 관할 역이 5이며,【장족(長足)·해문(海門)·청호(菁好)·가천(加川)·강복(康福).】 평구도(平丘道)의 관할 역이 8이요,【구곡(仇谷)·쌍수(雙樹)·봉안(奉安)·오빈(娛賓)·전곡(田谷)·동백(冬白)·감천(甘泉)·연동(連洞).】 경안도(慶安道)의 관할 역이 7이며,【덕풍(德豐)·아천(阿川)·오천(吾川)·유춘(留春)·양화(楊花)·신진(新津)·안평(安平).】 도원도(桃源道)의 관할 역이 6이다.【구화(仇和)·백령(白嶺)·옥계(玉溪) 용담(龍潭)·단금(丹金)·상수(相水).】
【원전】 5 집 614 면



 
세종
확대원래대로축소
 지리지
세종 지리지 / 충청도

◈ 충청도(忠淸道)
본래 백제의 땅이다. 고려 성종(成宗) 14년 을미에【송나라 태종(太宗) 지도(至道) 원년.】 경내(境內)를 나누어 10도(道)로 함에 따라, 충원도(忠原道)는 충주(忠州)·청주(淸州)·강주(剛州)·환주(歡州) 등 13주(州)를 관할하고, 하남도(河南道)는 공주(公州)·운주(運州) 등 11주를 관할하였다. 예종(睿宗) 원년 병술에【송나라 철종(哲宗) 숭녕(崇寧) 5년.】 양광 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라 하다가, 명종(明宗) 원년 신묘에【송나라 효종(孝宗) 건도(乾道) 7년.】 양광 충청주도를 갈라 두 도(道)로 만들었다. 충숙왕(忠肅王) 원년 갑인에【원나라 인종(仁宗) 연우(延祐) 원년.】 다시 양광 충청주도를 양광도(楊廣道)로 하고, 홍무 21년 무진에 도(道)의 평창군(平昌郡)을 갈라 교주도(交州道)에 옮겨 붙였다. 본조 태조(太祖) 4년 을해에【홍무 28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양주(楊州)·광주(廣州) 관할 군(郡)·현(縣)을 갈라 경기(京畿)에 옮겨 붙였고,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고쳐 도청[司]을 청주에 두었다. 공정왕(恭靖王) 원년 기묘에【건문(建文) 원년.】 영월군(寧越郡)을 갈라 강원도(江原道)에 옮겨 붙였고, 그 도의 원주(原州) 임내(任內)인 영춘현(永春縣)을 내속(來屬)시켰다. 태종(太宗) 13년 계사에【영락 11년.】 여흥(驪興)·안성(安城)·음죽(陰竹)·양성(陽城)·양지(陽智)를 갈라 경기(京畿)에 옮겨 붙였고, 경상도(慶尙道)의 옥천(沃川)·황간(黃澗)·영동(永同)·청산(靑山)·보은(報恩)을 이에 내속시켰다.
그 지경은 동쪽이 단양(丹陽) 죽령(竹嶺)에 이르고, 서쪽은 태안(泰安) 오근이포(朽斤伊浦)에, 남쪽은 은진(恩津) 작지(鵲旨)에, 북쪽은 직산(稷山) 아주제(牙州梯)에 이르는데, 동서가 4백 77리요, 남북이 2백 44리이다.
관할은 목(牧)이 4, 군(郡)이 11, 현령(縣令)이 1, 현감(縣監)이 39이다.
명산(名山)은 계룡산(鷄龍山)이 공주(公州)에 있고, 죽령(竹嶺)이 단양(丹陽)에 있으며, 가야산(伽倻山)이 덕산(德山)에 있고,【모두 사전(祀典)에 있다.】 월악(月嶽)이 청풍(淸風)에 있으며,【삼국(三國) 때에는 월형산(月兄山)이라 하여 사전(祀典)에 있었는데, 지금은 혁파하였다.】 도고산(道高山)이 신창(新昌)에 있다.【사전(祀典)에 있었는데, 지금 혁파하였다.】
대천(大川)은 웅진(熊津)이다. 그 근원이 전라도(全羅道)에서 나와 양산(楊山) 서쪽을 지나 영동현(永同縣)에 들어가고, 이산현(利山縣)에 이르러 적등진(赤登津)이 되고, 옥천(沃川)에 이르러 화인진(化仁津)이 되며, 회덕(懷德)에 이르러 이원진(利遠津)이 되고, 연기(燕岐)에 이르러 또 큰 내가 있어, 청주(淸州)의 서쪽 지경으로부터 남쪽으로 흘러 들어와서, 그 아래가 웅진(熊津)이【사전(祀典)에 있다.】되고, 공주(公州)에서 금강(錦江)이 되며, 부여(扶餘)에서 고성진(古省津)이 되고, 임천(林川)에서도 고다진(古多津)이 되며, 진포(鎭浦)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양진명소(楊津溟所)는 그 근원이 강원도(江原道) 영서(嶺西)로부터 나와서 며촌(旀村) 방림역(芳林驛)을 지나 평창군(平昌郡) 북쪽에 이르러 용연진(龍淵津)이 되고, 영월군(寧越郡) 서쪽에 이르러 가근동진(加斤同津)이 되고, 군(郡) 남쪽에 이르러 금장강(錦障江)과 합류(合流)하여, 영춘(永春)·단양(丹陽)·청풍(靑風)을 지나 충주(忠州)에 이르러 연천(淵遷)이 되고, 경기(京畿) 여흥(驪興) 우음안포(亐音安浦)에 들어간다.
호수가 2만 4천 1백 70호(戶)요, 인구가 10만 7백 90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천 9백 74명이요, 영진군(營鎭軍)이 1천 7백 66명이요, 수호군(守護軍)이 2백 48명이요, 선군(船軍)이 7천 8백 58명이다.
간전(墾田)이 23만 6천 3백 결(結)이다.
구실[賦]은 쌀【경미(粳米)·백미(白米)·세경미(細粳米)·상경미(常粳米)·점경미(粘粳米)·점백미(粘白米)·조미(糙米)가 있다.】·피[稷米]·콩【녹두·붉은 팥·콩이 있다.】·보리【찰보리[眞麥]·메밀.】·지마(芝麻)【향명(鄕名)은 참깨[眞荏子].】·꿀·밀[黃蠟]·지마유(芝麻油)【향명(鄕名)은 참기름[眞油].】·소자유(蘇子油)【향명은 들기름[法油].】·겨자[芥子]·모시[白苧布]·명주[紬布]·무명[綿布]·닷새베[正五升布]·솜[綿子]·초쇄자(草刷子)【국속(國俗)에서 솔[之省]이라 함.】·표주박[瓢子]이다.【대체로 군읍(郡邑)의 구실[田賦]이 멀든지 가깝든지 모두 같으므로, 다시 군읍 아래에 적지 아니한다.】
공물[貢]은 범의 가죽·표범가죽·곰가죽·여우가죽·삵괭이가죽·노루가죽·사슴가죽·쇠가죽·말가죽·산수달피(山水獺皮)·표범꼬리·범꼬리·곰털·족제비털·돼지털·잡깃[雜羽]·수돛[雄猪]·말린 사슴고기[乾鹿]·말린 노루고기·말린 돼지고기·거위[天鵝]·포육(脯肉)·쇠뿔[牛角肋]·사슴젓[鹿醢]·토끼젓·가뢰[班猫]·홍어(紅魚)·큰 새우·말린 숭어·상어·어교(魚膠)·칠(漆)·먹[墨]·주토(朱土)·황밤[黃栗]·마름[菱仁]·가시연밥[芡仁]·개암[榛子]·말린 포도[乾葡萄]·오미자(五味子)·조피나무열매[川椒]·호도(胡桃)·배[梨]·연감[紅柿]·참가사리[細毛]·황각(黃角)·청각(靑角)·석이[石茸]·느타리·싸리버섯·소나무그을음[松煙]·송화(松花)·송진[松脂]·세겹줄[三股縄]·두겹줄[兩股縄]·마의(馬衣)·목화[綿花]·모시[苧]·삼[麻]·각색 종이[各色紙]·유둔(油芚)·왕골자리[莞席]·돗자리[草席]·소쿠리[簞]·각색 비[各色尾帚]·각색 사기그릇[磁器]·질그릇[陶器]·각색 나무그릇[木器]·고리[柳器]·자단향(紫檀香)·백단향(白檀香)·애끼찌[弓幹木]·나무활[木弓]·자작나무[自作木]·장작개비[燒木]·건축에 쓰는 큰 나무·서까래[椽木]·잣나무[栢木]·황양목(黃楊木)·대추나무·피나무[椵木]·가래나무·넓은널 대중목[廣板大中木]·피나무널[椵板]·잣나무널[栢板]·해죽(海竹)·그 고을의 박선[仍邑朴船]·숯[炭]·시우쇠[正鐵]이다.
약재(藥材)는 담비쓸개[獺膽]·고슴도치가죽·섣달 여우간[臘狐肝]·사슴뿔·영양뿔[羚羊角]·녹각교(鹿角膠)·토끼대가리[兎頭]·쇠쓸개[牛膽]·아교(阿膠)·범의 정강이뼈[虎脛骨]·우황(牛黃)·이리뼈[狼骨]·녹용(鹿茸)·곰의 쓸개[熊膽]·돼지쓸개[猪膽]·도아조유(島阿鳥油)·오징어뼈[烏魚骨]·자라껍데기[鼈甲]·거북껍데기[龜甲]·매미허물[蟬脫皮]·찰머구리[蝦蟆]·두꺼비[蟾酥]·뽕나무벌레[桑螵蛸]·등에[蝱蟲]·거머리[水蛭]·잉어쓸개[鯉膽]·말린 잉어[乾鯉魚]·지네[蜈蚣]·뽕나무 겨우살이[桑寄生]·오가피(五加皮)·잣[栢子仁]·닥나무열매[楮實]·회화나무꽃[槐花]·탱자껍데기[枳殼]·오배자(五倍子)·구기자(枸杞子)·복신(茯神)·복령(茯苓)【붉은 것과 흰 것의 두 종류가 있다.】·괴좆나무뿌리[地骨皮]·모란뿌리껍질[牧丹皮]·고무딸기열매[覆盆子]·함박꽃뿌리[芍藥]【붉은 것과 흰 것의 두 종류가 있다.】·족도리풀뿌리[細辛]·구리때뿌리[白芷]·현삼(玄蔘)·낭아(狼牙)·수뤼나물[葳靈仙]·지치[紫草]·끼절가리뿌리[升麻]·질경이씨[車前子]·쇠무릎지기뿌리[牛膝]·버들옷[大戟]·대소 삽주[薊草]·자호(紫胡)·배암도랏씨[蛇床子]·고본(藁本)·으름덩굴[木通]·끼무릇뿌리[半夏]·삽주뿌리[蒼朮]·백부자(白附子)·쪽칠[藍漆]·단너삼뿌리[黃耆]·부들꽃[蒲黃]·도라지·창출[蒼朮]·바디나물뿌리[前胡]·쥐방울[馬兜零]·칡꽃[葛花]·범부채[射干]·납가새[蒺藜子]·연밥[蓮子]·연밥송이[蓮房]·연잎[蓮葉]·연꽃술[蓮花蘂]·더위지기[茵陳]·겨우살이풀[麥門冬]·택사(澤瀉)·마뿌리[山藥]·바곳[草烏頭]·수자해좆싹[赤箭]·파랭이꽃이삭[瞿麥穗]·과남풀[龍膽]·가위톱[白歛]·인삼(人蔘)·수자해좆뿌리[天麻]·승검초뿌리[當歸]·파고지(破古紙)·하눌타리[括樓]·매재기뿌리[京三菱]·새박뿌리[何首烏]·외나물뿌리[地楡]·대왕풀[白芨]·창포[菖蒲]·두여머조자기[天南星]·회초미뿌리[貫衆]·호라비좆뿌리[天門冬]·자리공뿌리[商陸]·두릅뿌리[獨活]·감제뿌리[虎杖根]·검산풀뿌리[續斷]·속서근풀[黃芩]·며래뿌리[萆蘚]·새삼씨[兎絲子]·양귀비열매껍질[粟殼]·병풍나물뿌리[防風]·궁궁이[芎藭]·낙석(絡石)·애기풀[遠志]·초결명씨[決明子]·자자(紫子)·왕골뿌리[莞根]·석위(石葦)·모향(茅香)·산골[自然銅]·곱돌[滑石]·산비둘기[班鳩]·백교향(白膠香)·북나무진[安息香]·하국[旋覆花]·겨우살이꽃[金銀花]이다.
재배하는 약재(藥材)는 회향(茴香)·대추[棗]·누에나비[元蠶蛾]·감국화(甘菊花)·부추씨[韮子]·율무씨[薏苡仁]·모과[木瓜]·콩꽃[豆花]·잇[紅花]·정가이삭[荊芥穗]·소야기[香薷]·우엉[惡實]·생지황(生地黃)·영생이[薄荷]·백변두(白扁豆)【검은 것과 흰 것의 두 가지가 있다.】·장군풀[大黃]·참외꼭지[眞瓜蔕]·나팔꽃씨[牽牛子]·【흰 것과 검은 것의 두 종류가 있다.】누른 국화[黃菊]·누른 해바라기씨[黃葵子]이다.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는 해미현(海美縣)에 두었는데, 바다 어귀에 이르기 6리요,【군관(軍官)이 5백 명, 신백정(新白丁)이 1백 48명, 수성군(守城軍)이 2백 7명이다.】 병마 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의 지키는 곳[守禦處]이 둘 있으니, 순성진(蓴城鎭)은 바다 어귀에 쑥 들어가 있고,【유방군(留防軍)이 61명, 패속군(牌屬軍)이 3백명, 신백정(新白丁)이 58명, 수성군이 50명이다.】 남포진(藍蒲鎭)은 바다 어귀에 이르기 8리이며,【유방군(留防軍)이 63명, 진속군(鎭屬軍)이 3백 명, 신백정(新白丁)이 39명, 수성군이 51명이다.】 수군 도안무 처치사(水軍都安撫處置使)는 보령현(保寧縣) 서쪽 대회이포(帶回伊浦)에 머무르며,【거느린 것이 중대선(中大船)이 6척, 중맹선(中孟船)이 18척, 쾌선(快船)이 4척, 군사 없는 중대선이 6척, 추왜별맹선(追倭別孟船)이 6척, 선군(船軍)이 1천 7백 66명, 선직(船直)이 1백 14명이다.】 수군 만호(水軍萬戶)가 지키는 곳이 7이니, 좌도 도만호(左道都萬戶)는 태안군(泰安郡) 서쪽 오근이포(朽斤伊浦)에 머무르고,【거느린 것이 병선(兵船)이 11척, 추왜별선(追倭別船)이 2척, 무군선(無軍船)이 2척, 선군(船軍)이 1천 4백이다.】 우도 도만호(右道都萬戶)는 남포현(藍浦縣)이 구정(龜井)에 머무르며,【거느린 것이 병선(兵船)이 16척, 별선(別船)이 2척, 무군선(無軍船)이 1척, 선군(船軍)이 1천 3백 2명이다.】 서천포 만호(舒川浦萬戶)는 장암포(長巖浦)에 머무르고,【거느린 것이 병선이 16척, 선군이 7백 97명이다.】 고만량 만호(高巒梁萬戶)는 보령현(保寧縣) 서쪽 송도포(松島浦)에 머무르며,【거느린 것이 병선이 10척, 선군이 6백 61명이다.】 파치도 만호(波治島萬戶)는 서산군(瑞山郡) 북쪽 대산포(大山浦)에 머무르고,【거느린 것이 병선이 13척, 별선(別船)이 2척, 무군선 1척, 선군이 7백 90명이다.】 당진 만호(唐津萬戶)는 당진현(唐津縣) 북쪽 박지포(朴只浦)에 머무르며,【거느린 것이 병선이 13척, 선군이 7백 90명이다.】 대진 만호(大津萬戶)는 홍주(洪州) 임내(任內) 신평현(新平縣) 북쪽 대진(大津)에 머무른다.【거느린 것이 병선이 13척, 선군이 7백 94명이다.】
감목관(監牧官)이 1명이요, 역승(驛丞)이 9명이다. 율봉도(栗峯道)의 관할 역이 7이요,【쌍수(雙樹)·덕류(德留)·금사(金沙)·저산(楮山)·태랑(台郞)·장양(長楊)·시화(時化).】 일신도(日新道)의 관할 역이 5요,【경천(敬天)·광정(廣程)·평천(平川)·단평(丹平)·유구(帷鳩).】 연원도(連原道)의 관할 역이 6이요,【단월(丹月)·용안(用安)·안부(安富)·가흥(可興)·감원(坎原)·인산(仁山).】 성환도(成歡道)의 관할 역이 4요,【신은(新恩)·김제(金蹄)·연춘(延春)·장명(長命).】 황강도(黃江道)의 관할 역이 6이요,【수산(水山)·장림(長林)·영천(令泉)·천남(泉南)·안음(安陰)·의풍(義豐). 의풍의 속칭 오사호(吾賜乎)라 한다.】 증약도(增若道)의 관할 역이 9이요,【가화(嘉禾)·화인(化仁)·원암(原巖)·함림(含林)·토파(土坡)·순양(順陽)·회동(會同)·신흥(新興)·전민(田民).】 시흥도(時興道)의 관할 역이 4이요,【창덕(昌德)·일흥(日興)·장시(長時)·화천(花川).】 금정도(金井道)의 관할 역이 11이요,【광시(光時)·세천(世川)·용곡(龍谷)·급천(汲泉)·순성(順成)·흥세(興世)·풍전(豐田)·하천(下川)·몽웅(夢熊)·해문(海門)·청연(靑淵).】 이인도(利仁道)의 관할 역이 9이다.【용전(龍田)·은산(銀山)·유양(楡陽)·숙홍(宿鴻)·남전(藍田)·청화(靑化)·두곡(豆谷)·신곡(新谷)·영유(靈楡)·분행(分行)·좌찬(佐贊) 2역(驛)은 경기 찰방도(京畿察訪道)를 관할한다.】
수조처(收租處)가 8이니, 연천(淵遷)은 충주(忠州) 서쪽 10리에 있고,【본주(本州) 및 단양(丹陽)·청풍(淸風)·괴산(槐山)·연풍(延豐)·제천(堤川)·영춘(永春)·음성(陰城) 등 고을은 〈구실을〉 모두 이곳에 바쳐서 〈배로〉 양진(楊津)을 따라 앙암(仰巖)을 지나 서울에 다닫는데, 물길[水路]이 2백 60리이다.】 앙암(仰巖)은 충주(忠州) 서쪽 60리에 있으며,【본주 및 단양(丹陽)·청풍(淸風)·괴산(槐山)·연풍(延豐)·제천(堤川)·영춘(永春) 등 고을은 〈구실을〉 모두 이곳에 바쳐서 〈배로〉 양진을 따라 여흥(驪興)을 지나 서울에 다닫는데, 물길이 2백 20리이다.】 우음안포(亐音安浦)는 경기(京畿) 여흥(驪興) 동쪽 10리에 있으며,【옥천(沃川)·영동(永同)·황간(黃澗)·청산(靑山)·보은(報恩)·청안(靑安) 등 고을은 〈구실을〉 모두 이곳에 바쳐서 〈배로〉 여강(驪江)을 따라 서울에 다닫는데, 물길이 2백 10리이다.】 추호포(推乎浦)는 여흥 서쪽 1리에 있고,【청안(靑安)·음죽(陰竹) 2현(縣)의 구실은 〈이곳에 바쳐서〉 여강을 따라 이포(梨浦)를 지나 서울에 다닫는데, 물길이 1백 94리이다.】 이포(利浦)는 경기 천령현(川寧縣) 동쪽 5리에 있으며,【죽산(竹山)·진천(鎭川) 2현(縣)의 구실을 이곳에 바치는 데, 물길이 1백 60리이다.】 경양포(慶陽浦)는 직산현(稷山縣) 서쪽 1리에 있고,【본주 및 평택(平澤)의 구실은 이곳에 바쳐서 〈배로〉 공세곶(貢稅串)을 지나 서해(西海)를 거쳐서 서강(西江)에 다닫는데, 물길이 5백 40리이다.】 공세곶(貢稅串)은 아산현(牙山縣) 서쪽 8리에 있으며,【본주 및 청주(淸州)·목천(木川)·전의(全義)·연기(燕岐)·온수(溫水)·신창(新昌)·은진(恩津)·연산(連山)·회덕(懷德)·공주(公州)·정산(定山)·회인(懷仁)·천안(天安)·진잠(鎭岑)·이산(尼山)·문의(文義)의 구실은 모두 이곳에 바쳐서 〈배로〉 범근천(犯斤川)을 지나 서해를 거쳐서 서강(西江)에 다닫는데, 물길이 5백 리이다.】 범근천(犯斤川)은 면천(沔川) 동쪽 30리에 있다.【본주 및 임천(林川)·한산(韓山)·서천(舒川)·남포(藍浦)·비인(庇仁)·홍산(鴻山)·홍주(洪州)·태안(泰安)·서산(瑞山)·해미(海美)·강진(康津)·덕산(德山)·예산(禮山)·청양(靑陽)·보령(保寧)·결성(結城)·대흥(大興)·석성(石城)·부여(扶餘) 등 고을의 구실은 모두 이곳에 바쳐서 〈배로〉 대진(大津)을 지나 서해를 거쳐서 서강에 다닫는데, 물길이 5백 10리이다.】
【원전】 5 집 624 면



 
세종
확대원래대로축소
 지리지
세종 지리지 / 경상도

◈ 경상도(慶尙道)
삼한(三韓) 때에는 진한(辰韓) 땅이었고, 삼국(三國) 때에는 신라 땅이었는데, 고려 태조(太祖)가 신라와 백제를 병합함에 미쳐서 동남도 도부서사(東南道都部署使)를 설치하고, 사(司)를 경주(慶州)에 두었다가, 성종(成宗) 14년(995) 을미에 경내(境內)를 10도(道)로 나누어, 상주(尙州)의 관할은 영남도(嶺南道)로 하고, 경주(慶州)·금주(金州)의 관할은 영동도(嶺東道)로, 진주(晉州)의 관할은 산남도(山南道)로 하였었는데, 그 뒤에 어느 때인지 알 수 없으나 합하여 경상도로 되었다. 지금 국사(國史)를 상고하건대, 예종(睿宗) 원년(元年) 병술에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라 일컬었고, 명종(明宗) 원년(元年) 신묘에는 나누어서 경상주도(慶尙州道)·진합주도(晉陜州道)로 만들었으며, 16년 병오에 이르러 비서승(秘書丞) 이계장(李桂長)을 동남해 도부서사(東南海都部署使) 겸 경상주도 안찰사(慶尙州道按察使)로 삼았다고 하였으니, 경상도의 이름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는가 싶다. 신종(神宗) 14년 갑자에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로 고치고, 그 뒤에 또 경상진안도(慶尙晉安道)로 고쳤으며, 충숙왕(忠肅王) 원년(元年) 갑인에【원(元)나라 인종(仁宗) 연우(延祐) 원년(元年).】 도로 경상도로 하였는데, 본조(本朝)에서 그대로 따라 도관찰사(都觀察使)를 두고 사(司)를 상주(尙州)에 두었다.
그 땅이 동남쪽에는 큰 바다가 있고, 서쪽은 지리산(智異山)을 경계로 하여 감음현(減陰縣) 육십현(六十峴)에 이르고, 북쪽은 죽령(竹嶺)을 경계로 하여 문경현(聞慶縣) 초점(草岾)에 이르는데, 대구군(大丘郡)이 도(道) 중앙에 있다. 동서가 3백 76리, 남북이 4백 48리이다.
관할[所管]은 유수부(留守府)가 1, 대도호부(大都護府)가 1, 목(牧)이 3, 도호부(都護府)가 6, 군(郡)이 15, 현령(縣令)이 6, 현감(縣監)이 34이다.
명산(名山)이 5이니, 주흘산(主屹山)【문경(聞慶)에 있다.】·태백산(太伯山)【봉화(奉化)에 있다.】·지리산(智異山)【진주(晉州)에 있다.】·사불산(四佛山)【상주(尙州)에 있다.】·가야산(伽倻山)【성주(星州)에 있다.】 이다.
대천(大川)이 3이니, 첫째가 낙동강(洛東江)이다. 그 근원(根源)이 셋인데, 하나는 봉화현(奉化縣) 북쪽 태백산(太伯山) 황지(黃池)에서 나오고, 하나는 문경현(聞慶縣) 북쪽 초점(草岾)에서 나오고, 하나는 순흥(順興) 소백산(小白山)에서 나와서, 물이 합하여 상주(尙州)에 이르러 낙동강이 된다. 선산(善山)에서 여차니진(餘次尼津), 인동(仁同)에서 칠진(漆津), 성주(星州)에서 동안진(東安津), 가리현(加利縣)에서 무계진(茂溪津)이 되고, 초계(草溪)에 이르러 합천(陜川)의 남강(南江) 물과 합하여 감물창진(甘勿倉津)이 되고, 영산(靈山)에 이르러 또 진주(晉州) 남강(南江)의 물과 합하여 기음강(岐音江)이 되며, 칠원(漆原)에서는 우질포(亐叱浦)가, 창원(昌原)에서는 주물연진(主勿淵津)이 되어 김해(金海)에 이르고, 밀양(密陽) 응천(凝川)을 지나 뇌진(磊津)이【해양강(海陽江)이라고도 한다.】 되고, 양산(梁山)에서 가야진(伽倻津)이 되고, 황산강(黃山江)이 되어,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둘째는 진주(晉州) 남강(南江)이다. 그 근원(根源)이 둘이니, 하나는 지리산 북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와서, 진주 서편에서 합류하여 광탄(廣灘)이 되고, 의령(宜寧)에 이르러 정암진(定巖津)이 되어, 동쪽으로 흘러 기음강(岐音江)으로 들어간다. 세째는 초계(草溪) 황둔진(黃芚津)이다. 그 근원(根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전라도 무주(茂朱) 초현(草峴)에서 나오고, 하나는 감음현(減陰縣) 황석산(黃石山)에서 나와서, 거창(居昌)에서 합류되어 합천(陜川)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감물창진(甘勿滄津)으로 들어간다.
호수는 4만 2천 2백 27호, 인구가 17만 3천 7백 59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2천 6백 30단(單) 1명, 영진군(營鎭軍)이 3천 8백 76명, 선군(船軍)이 1만 5천 9백 34명이다.
간전(墾田)이 30만 1천 1백 47결(結)이다.
부세(賦稅)는 쌀[稻米]【흰쌀[白米]·조미(糙米)·찹쌀[糯米]·좁쌀이 있다.】·콩【콩과 녹두가 있다.】·밀[小麥]·참깨[芝麻]·향유(香油)·차조기기름[蘇子油]·꿀·밀[黃蠟]·명주[綿紬]·모시[苧布]·무명[綿布]·베[正布]·풀솜[雪綿子]【품질이 가장 좋으며, 타도에는 없다. 또, 상면자(常綿子)가 있다.】·면화(綿花)이다.
공물(貢物)은 호랑이가죽[虎皮]·표범가죽[豹皮]·곰가죽[熊皮]·사슴가죽[鹿皮]·노루가죽[獐皮]·여우가죽[狐皮]·삵가죽[狸皮]·잘[山獺皮]·수달피(水獺皮) 말가죽[馬皮]·쇠가죽[牛皮]·돼지가죽[猪皮]·점찰피(占察皮)·어피(魚皮)·가죽줄[皮絃]·표범꼬리[豹尾]·여우꼬리[狐尾]·족제비털[黃毛]·돼지털·늑(肋)·잡깃[雜羽]·쇠뿔[牛角]·마른 사슴고기[乾鹿]·마른 돼지고기[乾猪]·마른 노루고기[乾獐]·녹포(鹿脯)·사슴꼬리[鹿尾]·대구어(大口魚)·문어(文魚)·상어[沙魚]·마른 물고기[乾水魚]·백조(白條)·전포(全鮑)·홍합(紅蛤)·어교(魚膠)·곽(藿)·해모(海毛)·우무[牛毛]·참가사리[細毛]·오해조(吾海曹)·칠(漆)·송연(松煙)·송진[松脂]·밤·대추·홍시(紅柿)·곶감[乾柿]·모과[木瓜]·석류[石榴]·배·개암[榛子]·잣·송화(松花)·귤(橘)·호도(胡桃)·치자(梔子)·작설차(雀舌茶)·석이[石茸]·느타리[眞茸]·표고버섯·겨자[芥子]·마른 죽순[乾竹笋]·지초(芝草)·홍화(紅花)·괴화(槐花)·뇌록[磊碌]·저마승색(苧麻繩索)·마의(馬衣)·지차(紙箚)【중국에 바치는 표지(表紙)와 나라에서 쓰는 표지, 도련지(擣鍊紙)·안지(眼紙)·백주지(白奏紙)·상주지(常奏紙)·장지(狀紙) 등이 있다.】·유둔(油芚)·유기(柳器)·목기(木器)·자기·초마선석(哨麿船席)【중국에 바치는 황화석(黃花席)·채화석(彩花席)·만화침석(滿花寢席)·만화석(滿花席)·염석(簾席)·방석(方席) 등이 있고, 타도에는 없다. 또 나라에서 쓰는 만화 각색석(滿花各色席)·별문상석(別文上席)·답석(踏席)·상문답석(常文踏席)·백문석(白文席)·초석(草席) 등이 있다.】·죽피방석(竹皮方席)·가는대[篠]【검은대[烏竹]와 살대[箭竹]가 있다.】·왕대[簜]【통대[全竹]와 쪽대[片竹]가 있다.】·입초(笠草)·자단향(紫檀香)·백단향(白檀香)·정철(正鐵)이다.
약재(藥材)는 쇠쓸개[牛膽]·곰쓸개[熊膽]·사향(麝香)·소유(酥油)·돼지쓸개[猪膽]·수달피쓸개[獺膽]·고슴도치쓸개[猬膽]·고슴도치가죽[猬皮]·우황(牛黃)·아교(阿膠)·섣달토끼머리[臘兎頭]·녹각(鹿角)·녹용(鹿茸)·녹각교(鹿角膠)【또 녹각상(鹿角霜)이 있다.】·섣달여우간[臘狐肝]·영양뿔[羚羊角]·범의 정강이뼈[虎脛骨]·도아조유(島阿鳥油)·상말벌집[霜蜂房]·원잠아(元蠶娥)【또 만잠아(晩蠶娥)가 있다.】·누에허물[馬鳴退]·오어골(烏魚骨)·가뢰[班猫]·자라껍데기[鼈甲]·매미허물[蟬脫皮]·거북껍데기[龜甲]·뽕나무벌레[桑螵蛸]·잉어쓸개[鯉膽]·굴조개껍질[牡蠣]·등에[蝱蟲]·백화사(白花蛇)·뱀허물[蛇脫皮]·오가피(五加皮)·필등(蓽䔲)·가(茄)·황경나무껍질[黃蘗皮]·뽕나무껍질[桑白皮]·느릅나무속껍질[楡白皮]·고염[小柿]·탱자[枳殼]·무이(蕪荑)·산이스랏씨[郁李仁]·복숭아씨[桃仁]·살구씨[杏仁]·괴각(槐角)·조피나무열매[川椒]·뽕나무 겨우살이[桑寄生]·모란껍질[牧丹皮]·오배자(五倍子)·산조인(酸棗仁)·조협(皂莢)·율설(栗楔)·오수유(吳茱萸)·산수유(山茱萸)·오미자(五味子)·후박(厚朴)·오매(烏梅)·염매(鹽梅)·백매실(白梅實)·청피(靑皮)·진피(陳皮)·두충(杜沖)·비자(榧子)·팔각(八角)·해동피(海東皮)·자석(磁石)·감꼭지[柿帶]·담죽엽(淡竹葉)·초목(椒目)·촉수자(蜀隨子)·적복령(赤伏苓)·백복령(白伏苓)·복신(茯神)·북나무진[安息香]·산골[自然銅]·새삼씨[兎絲子]·고무딸기열매[覆盆子]·겨우살이꽃[金銀花]·선복화(旋覆花)·사상자(蛇床子)·질려자(蒺藜子)·백부자(白附子)·결명자(決明子)·천선자(天仙子)·인삼·백합(百合)·검화뿌리껍질[白鮮皮]·병풍나물뿌리[防風]·두여머조자기[天南星]·창포말(菖蒲末)·마기령(馬夔零)·쇠비름[馬齒莧]·매자기뿌리[京三稜]·제니(薺苨)·포황(蒲黃)·택사(澤瀉)·감데뿌리[虎杖根]·여우오줌풀뿌리[鶴蝨]·탱알[紫莞]·대소 계초(大小薊草)·수자해좆뿌리[天麻]·수자해좆싹[赤箭]·두룹뿌리[獨活]·가희톱[白歛]·검산풀뿌리[續斷]·절국대뿌리[漏蘆]·족도리풀뿌리[細辛]·유향(葇香)·외나물뿌리[地楡]·당귀(當歸)·버들옷[大戟]·활석(滑石)·연꽃술[蓮花蘂]·연방(蓮房)【또 연밥이 있다.】·검인(芡仁)·으름[林下婦人]·동초(冬草)·독주근(獨走根)·파고지(破古紙)·작약(芍藥)【백(白)·적(赤)이 있다.】·박색[藜蘆]·구기자(枸杞子)·지골피(地骨皮)·석위(石葦)·호라비좆뿌리[天門冬]·만형자(蔓荊子)·향부자(香附子)·영릉향(苓陵香)·현호색(玄胡索)·택란(澤蘭)·등심(䔲心)·맥문동(芡門冬)·쇠무릎[牛膝]·자호(紫胡)·전호(前胡)·끼절가리뿌리[升麻]·호본(蒿本)·백지(白芷)·반하(半夏)·백급(白芨)·현삼(玄蔘)·쓴너삼뿌리[苦蔘]·더위지기[茵陳]·진봉(蓁芃)·속서근풀[黃芩]·단너삼뿌리[黃耆]·으름덩굴[木通]·지모(知母)·회초미뿌리[貫衆]·수뤼나물뿌리[葳靈仙]·바곳[草烏頭]·쪽[藍]·칠(漆)·여여(䕡茹)·저실(楮實)·두고(豆鼓)·초해(草蘚)·낭아(狼牙)【낭아자(狼牙子)도 있다.】·인동초(忍冬草)·구맥(瞿麥)·첨정력(甛葶藶)·청호(靑蒿)·수평(水萍)·해조(海藻)·용담(龍膽)·서장경(徐長卿)·충위자(茺蔚子)·목적(木賊)·사간(射干)·원지(遠志)·석곡(石斛)·수포석(水包石)·하수오(何首烏)·자하거(紫荷蕖) 등이다.【이상의 잡공(雜貢) 및 약재는, 지금의 토산이 희귀한 것은 각 고을의 밑에 기록하고, 그 각 고을마다 생산되는 것은 그 일반 물건만 여기에 기록해 두고 다시 새로 기록하지 아니한다.】
재배하는 약재(藥材)는 적소두(赤小豆)·두화(豆花)·대맥(大麥)·백변두(白萹豆)·흑변두(黑萹豆)·양귀비[鶯粟]·차조기[紫蘇]·영생이[薄荷]·소야기[香薷]·회향(茴香)·악실(惡實)·생지황(生地黃)【또 건지황(乾地黃)과 숙지황(熟地黃)이 있다.】·장군풀[大黃]·청목향(靑木香)·형개(荊介)·해바라기씨[葵子]·맨드라미꽃[鷄冠花]·감국(甘菊)·흑대두(黑大豆)·궁궁이[芎藭]·율무[薏苡]·청대(菁黛)·호유(胡荽)·호로(胡蘆)·순무우씨[蔓菁子]·생강[薑]·심황(深黃)·견우자(牽牛子)【검은 것과 흰 것 두 가지가 있다.】·자리공뿌리[商陸]이다.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의 사(司)를 창원(昌原)에 두었다.【군관(軍官)이 5백 명, 수성군(守城軍)이 4백 38명이다.】 병마 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의 수어(守禦)하는 곳이 다섯이니, 울산진(蔚山鎭)【군관 3백 99명, 수성군 40명.】·영일진(迎日鎭)【군관 3백 1명, 수성군 80명.】·동래진(東萊鎭)【군관 3백 명, 수성군 80명.】·영해진(寧海鎭)【군관 3백 명, 수성군 80명.】·사천진(泗川鎭)【군관 3백 명, 수정군 49명.】 이며, 좌도 수군 도안무처치사(左道水軍都安撫處置使)는 동래(東萊) 부산포(富山浦)에 있다.【병선(兵船) 33척, 군사 1천 7백 79명.】 수군 만호(水軍萬戶)가 수어(守禦)하는 곳이 11이니, 염포(鹽浦) 울산에,【도만호(都萬戶)가 수어한다. 병선(兵船) 7척, 군사 5백 2명.】 서생포(西生浦) 울산에,【3품은 만호(萬戶), 4품은 부만호(副萬戶), 5품은 천호(千戶), 6품은 부천호(副千戶)라 일컫는다. 아래에도 이와 같다. 병선 20척, 군인 7백 67명.】 축산포(丑山浦) 영해(寧海)에,【병선 12척, 군사 4백 29명.】 오포(烏浦) 영덕(盈德)에,【병선 8척, 군사 3백 53명.】 통양포(通洋浦) 흥해(興海)에,【지금은 두모적포(豆毛赤浦)에 있다. 병선 8척, 군사 2백 18명.】 포이포(包伊浦) 장기(長鬐)에,【지금은 가엄포(加嚴浦)에 있다. 병선 8척, 군사 5백 89명.】 감포(甘浦) 경주(慶州)에,【병선 6척, 군사 3백 87명.】 개운포(開雲浦) 울산에,【병선 12척, 군사 4백 20명.】 두모포(豆毛浦) 기장(機張)에,【병선 16척, 군사 8백 43명.】 해운포(海雲浦) 동래(東萊)에,【병선 7척, 군사 5백 89명.】 다대포(多大浦) 동래에【병선 9척, 군사 7백 23명.】 있다. 우도 수군 도안무처치사(右道水軍都安撫處置使)는 거제(巨濟) 오아포(吾兒浦)에 있다.【병선 28척, 군사 2천 6백 1명이다. 예전에는 제포(薺浦)에 있었는데, 금상(今上) 원년 기해에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파하고 처치사를 이곳으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또 가배량(加背梁)·견내량(見乃梁) 등지의 만호로 하여금 옥포(玉浦)로 옮겨 지키게 하였으니, 이른바 그 목구멍을 틀어막은 것이었다.】 수군 만호(水軍萬戶)가 수어하는 곳이 여덟이니, 가배량(加背梁) 고성(固城)에,【지금은 거제(巨濟) 옥포(玉浦)에 있으니, 도만호가 수어한다. 병선 22척, 군사 1천 1백 22명.】 제포(薺浦) 김해(金海)에,【병선 9척, 군사 8백 82명.】 영등포(永登浦) 거제(巨濟)에,【병선 8척, 군인 7백 20명.】 견내량(見乃梁) 고성(固城)에,【지금은 거제(巨濟) 옥포(玉浦)에 있으니, 병선 20척, 군사 9백 40명.】 번계(樊溪) 고성(固城)에,【지금은 당포(唐浦)에 있으니, 병선 15척, 군사 7백 22명.】 구량량(仇良梁) 진주(晉州)에,【지금은 고성(固城) 사포(蛇浦)에 있으니, 병선 16척, 군사 7백 48명.】 적량(赤梁) 진주(晉州)에,【지금은 가을곶(加乙串)에 있으니, 병선 13척, 군사 7백 20명.】 노량(露梁) 진주(晉州)에【지금은 평산포(平山浦)에 있으니, 병선 8척, 군사 5백 68명.】 있다.
감목관(監牧官)이 1인, 염장관(鹽場官)이 3인, 역승(驛丞)이 10인이다.
사근도 승(沙近道丞)의 관할하는 역(驛)이 15,【금양(金陽)·권빈(勸賓)·유린(有隣)·삼가 신역(三嘉新驛)·무촌(茂村)·성기(星奇)·성초(省草)·초계 신역(草溪新驛)·함양 신역(咸陽新驛)·안음 신역(安陰新驛)·신안(新安)·단계 신역(丹溪新驛)·전곡(戩穀)·신번 신역(新繁新驛)·소남(召南).】 성현도 승(省峴道丞)의 관할하는 역이 14,【용가(龍駕)·수안(水安)·수산 신역(守山新驛)·무흘이(無訖伊)·동음 신역(冬音新驛)·풍각 신역(豐角新驛)·온정(溫井)·내야(內也)·일문(一門)·쌍산(雙山)·서지(西之)·청도 신역(淸道新驛)·매전(買田)·유천(楡川).】 김천도 승(金泉道丞)의 관할하는 역이 16,【답계(踏溪)·안언(安偃)·무계(茂溪)·설화(舌化)·팔거 신역(八莒新驛)·안림(安林)·추풍(秋豐)·부쌍(扶雙)·김산 신역(金山新驛)·양천(楊川)·범어(凡於)·하빈 신역(河濱新驛)·인동 신역(仁同新驛)·약목신역(若木新驛)·작내(作乃)·장곡(長谷).】 창락도 승(昌樂道丞)의 관할하는 역이 7,【창보(昌保)·평은(平恩)·유동(幽洞)·안교(安郊)·통명(通明)·도심(道深)·순흥 신역(順興新驛).】 장수도 승(長水道丞)의 관할하는 역이 16,【청통(淸通)·영천 신역(永川新驛)·아화(阿火)·모량(毛良)·사리(沙里)·경역(鏡驛)·조역(朝驛)·인비(仁庇)·의곡(義谷)·육역(六驛)·압량(押梁)·흥해 신역(興海新驛)·대송(大松)·송라(松羅)·장기 신역(長鬐新驛)·하양 신역(河陽新驛).】 황산도 승(黃山道丞)의 관할하는 역이 13,【잉보(仍甫)·노곡(奴谷)·구어(仇於)·부평(富平)·굴화(屈火)·간곡(肝谷)·윤산(輪山)·위천(渭川)·덕천(德川)·아월(阿月)·성산(省山)·기장 신역(機張新驛)·동래 신역(東萊新驛).】 유곡도 승(幽谷道丞)의 관할하는 역이 20,【요성(聊城)·덕통(德通)·낙양(洛陽)·낙동(洛東)·낙원(洛源)·낙서(洛西)·장림(長林)·청리 신역(靑里新驛)·공성 신역(功城新驛)·상평(常平)·구며(仇旀)·영향(迎香)·안곡(安谷)·상림(上林)·쌍계(雙溪)·안계(安溪)·수산(守山)·용궁 신역(龍宮新驛)·지보(知保)·소계(召溪).】 소촌도 승(召村道丞)의 관할하는 역이 22,【진주 신역(晉州新驛)·말문 신역(末文新驛)·평거(平居)·부다(富多)·정수(正守)·평사(平沙)·금량 신역(金良新驛)·영선 신역(永善新驛)·상령(常令)·춘곡(春谷)·함안 신역(咸安新驛)·지남(知南)·송도(松道)·배둔(背屯)·춘원(春原)·횡포(橫浦)·율원(栗原)·마전(馬田)·관률(官栗)·사천 신역(泗川新驛)·완사(浣沙)·오양(烏壤).】 안계도 승(安溪道丞)의 관할하는 역이 16,【옹천(甕泉)·일직 신역(一直新驛)·금소(琴召)·송제(松蹄)·우곡(牛谷)·청로(靑路)·철파(鐵破)·병곡(柄谷)·석보 신역(石保新驛)·영덕 남역(盈德南驛)·주등(酒登)·예안 신역(禮安新驛)·용안(龍安)·문거(文居)·화목(和睦)·진보 신역(眞寶新驛).】 자여도 승(自如道丞)의 관할하는 역이 12이다.【근주(近珠)·신풍(新豐)·안민(安民)·창인(昌仁)·영포(靈浦)·김해 신역(金海新驛)·대산 신역(大山新驛)·남역(南驛)·금곡(金谷)·덕산(德山)·성법(省法)·적항(赤項).】
도내(道內)의 공부(貢賦)는 각각 가까운 곳에 따라, 김해(金海)의 불암창(佛巖倉), 창원(昌原)의 마산창(馬山倉), 사천(泗川)의 통양창(通洋倉) 등으로 나누어 수송하여 바다를 따라 전라·충청도 해로(海路)를 지나서 서울에 이르는데, 수로(水路)가 험악하여 매양 파선하여 침몰되므로, 태종 3년 갑신에 조선(漕船)을 폐하고 각각 농민들로 하여금 충청도의 충주(忠州) 경원창(慶源倉)으로 바로 바치게 하였다. 그 가운데 낙동강 하류의 연강(沿江) 각 고을은【김해(金海)·창원(昌原)·밀양(密陽)·양산(梁山)·함안(咸安)·초계(草溪)·창녕(昌寧)·칠원(漆原)·진해(鎭海)·의령(宜寧).】 삼가세(三價稅)를【뱃 삯[船價]·사람 삯[人價]·말 삯[馬價]을 이른다.】 거두어서 사람을 모집해 배에 싣고【배 삯과 사람 삯을 준다.】 거슬러 올라와 상주(尙州)에 이르러서, 육로(陸路)로 운반하여 문경(聞慶) 초점(草岾)을 지나【사람 삯과 말 삯을 준다.】 경원창에 바치면, 참선(站船)으로 서울에 이른다.
【원전】 5 집 636 면


 
세종
확대원래대로축소
 지리지
세종 지리지 / 전라도

◈ 전라도(全羅道)
본래 백제의 땅이다. 의자왕(義慈王) 19년 경신에【당나라 고종(高宗) 현경(顯慶) 5년.】 신라 태종왕(太宗王)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더불어 백제를 멸하고 드디어 그 땅을 합쳤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전주(全州)·무주(武州) 두 도독부(都督府)로 나누었다. 진성왕(眞聖王) 5년 임자【당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원년.】에 서면 도통(西面都統) 견훤(甄萱)이 백제의 옛 땅을 모두 차지하여 후백제왕(後百濟王)이라 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19년 병신【후진(後晉) 고조(高祖) 원복(元福) 원년.】에 친히 후백제를 쳐서 이기고, 성종(成宗) 14년 을미【송나라 태종(太宗) 지도(至道) 원년.】에 전주(全州)·영주(瀛州)·순주(淳州)·마주(馬州) 등 고을을 강남도(江南道)로 하고, 나주(羅州)·광주(光州)·정주(靜州)·승주(昇州)·패주(貝州)·담주(潭州)·낭주(朗州) 등 고을을 해양도(海陽道)로 하였다가, 현종(縣宗) 9년 무오【송나라 진종(眞宗) 천희(天禧) 2년.】에 전라도로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도관찰사(都觀察使)의 관청을 두고 있다.
동쪽은 경상도(慶尙道) 함양군(咸陽郡)에 이르고, 서·남쪽은 바다에 닿으며, 북쪽은 충청도(忠淸道) 은진현(恩津縣)에 이르는데, 동·서가 2백 33리요, 남·북이 4백 5리이었다.
관할은 유수(留守)가 1이요, 목(牧)이 2이요, 도호부(都護府)가 4이요, 군(郡)이 12이요, 현(縣)이 39이며, 계수관(界首官)이 4이니, 전주(全州)·나주(羅州)·남원(南原)·장흥(長興)이다.
명산(名山)은 지리산(智異山)【일명 지리(地理), 또는 방장(方丈), 또는 두류(頭流)라 한다.】인데 남원(南原)에 있으니, 그 동쪽은 진주(晉州)·곤남(昆南)이요, 북쪽은 함양(咸陽)·산음(山陰)이요, 서쪽은 구례(求禮)요, 남쪽은 광양(光陽)이다. 웅장하게 높이 하늘에 우뚝 치솟아, 산허리에 간혹 구름이 머물고, 비가 오고 천둥과 번개가 치는데, 그 위는 맑게 개어 평상시와 같으며, 가을철 서늘하면 매떼[鷹]가 모여들므로 잡아다가 나라에 바친다. 속설에 전하기를, “태을(太乙)이 그 위에 살고, 여러 신선(神仙)이 모이며, 여러 용(龍)이 살고 있다.” 고 한다. 두보(杜甫)의 시에 소위 “방장은 삼한 밖이라.[方文三韓外]” 한 주(註)와 《통감집람(通鑑輯覽)》에 이르기를,
“방장(方丈)은 대방군(帶方郡) 남쪽에 있다.” 한 것은 이 산을 말하는 것이다. 신라에서 남악(南嶽), 중사(中祀)로 하였고, 고려와 본조(本朝)에서도 모두 그대로 따라 중사(中祀)로 하여서, 봄·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리어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한다. 금성산(錦城山)은 나주(羅州)에 있는데, 제례(祭例)는 지리산과 같다. 무등산(無等山)은【일명 무진악(武珍岳), 또는 서석산(瑞石山)이라 한다.】 무진(武珍)에 있는데, 풍후하고 높고 커서, 신라에서는 소사(小祀)로 하였고, 고려에서는 나라 제사[國祭]를 지냈고, 본조(本朝)에서는 주(州)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한다. 천관산(天冠山)은 장흥(長興)에 있는데, 높고 험하고 풍후하여, 가끔 서기(瑞氣)가 흰 연기같이 하늘을 찔러서, 사람들이 자못 이상히 여기며, 제례는 무등산과 같다. 월출산(月出山)은【일명 월내악(月柰岳)이라 한다.】 영암(靈岩)에 있는데, 바위 봉우리가 층층이 치솟아 섰고, 그 가장 높은 봉우리 꼭대기에 바위가 우뚝 솟아 있어, 높이가 두 길이 넘으며, 곁에 한 구멍이 있는데,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하며, 그 구멍을 따라 그 꼭대기에 올라가면 20명이 앉을 만하고, 그 평평한 곳에 오목하게 패어서 물이 담기기를 동이같이 된 것이 아홉이므로, 구정봉(九井峯)이라 하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아니하므로, 속설에 전하기를,
“아홉 용[九龍]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아래에 움직이는 돌이 있는데, 홀로 층바위 위에 서서 높이가 한 길이 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며, 서쪽으로는 산골에 연하고, 동쪽으로는 밑없는 구렁에 임하였는데, 한 사람이 흔들면 무너질 듯하면서도 무너지지 아니하며, 이 같은 바위가 또 둘이 있었다. 상산(裳山)은 무주(茂朱)에 있는데, 사면(四面)이 벽처럼 서서 층층히 끊어져 사람의 치마처럼 되었으므로, 상산이라 한다. 옛사람이 험한 것을 이용하여 성을 만들었는데, 겨우 두 길이 있어서 올라 다니며, 그 가운데는 평탄하고 넓으며, 샘물이 사방에서 나와 합하여 큰 내가 되어 동쪽 구렁으로 흘러 들어간다. 변산(邊山)은【일명 영주산(瀛洲山)이라 한다.】 부안(扶安)에 있는데, 여러 겹으로 높고 크며, 바위로 된 골짜기가 깊고 으늑하며, 전함(戰艦)의 재목이 많이 이곳에서 난다. 마이산(馬耳山)은 진안(鎭安)에 있는데, 두 봉우리가 우뚝 솟아 동서로 마주 서서 모양이 깎아 세운 듯하며, 높이가 천 길이나 되고, 그 꼭대기에 나무가 울창하며, 속설에 전하기를, “동쪽산 꼭대기에 작은 못이 있다.” 하나, 바라만 보일 뿐이요, 올라갈 수는 없다. 우리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임금이 산 아래에 행차(行次)하여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대천(大川)은 남포진(南浦津)이 나주(羅州)에 있는데, 그 수원이 3이 있으니, 그 하나는 담양(潭陽) 추월산(秋月山)의 물이 창평현(昌平縣)을 지나 무진(茂珍)의 북쪽으로 들어가 창평현(昌平縣)의 남쪽 물과 합하고, 또 무진성(茂珍城) 서쪽 물과 어울려 서쪽으로 흐르고, 그 하나는 장성(長城) 위령(葦嶺)의 물이 진원현(珍原縣) 서쪽과 나주 북쪽 경계를 지나 옛 내상성(內廂城) 남쪽을 거쳐서 생압진(生鴨津)에 이르러 무진 북쪽 경계의 물과 합하여 나주의 동쪽을 지나고, 그 하나는 능성(綾城) 쌍봉(雙峯)의 물이 남평현(南平縣) 북쪽을 지나 또 나주의 동쪽 경계의 물과 합하여 남쪽으로 돌아 서쪽으로 흘러서 남포진(南浦津)이 되어 나룻배로 사람을 건너게 되고, 무안현(務安縣) 동쪽에 이르러 대굴포(大堀浦)가 되고, 또 서쪽으로 흘러서 영암군(靈岩郡) 운적산(雲積山)의 기슭을 지나 목포(木浦)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하도(下道)의 조운(漕運)이 이곳을 경유하여 서울에 이른다. 잔수진(潺水津)은 구례(求禮)에 있는데, 그 수원이 2가 있으니, 그 하나는 진안(鎭安) 중대산(中臺山)의 물이 서남쪽으로 흘러 임실(任實)·순창(淳昌)을 지나 돌아서 동쪽으로 흘러 남원 남쪽 경계에 이르러 순자진(鶉子津)이 되며, 그 하나는 지리산 서북쪽 여러 골짜기의 물이 남원을 지나 순자진으로 들어가서, 그 하류가 압록진(鴨綠津)이 되며, 또 보성 정자천(寶城亭子川)의 물이 복성(福城) 옛 현(縣)을 지나 북쪽으로 흘러서 낙수진(洛水津)이 되고, 동북쪽으로 흘러 옛 곡성(谷城)을 지나 압록진으로 들어가서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 구례현 남쪽과 순천(順天) 북쪽 경계에 이르러 잔수진이 되고, 지리산 남쪽 기슭을 지나서 경상도 진주(晉州)의 옛 임내(任內) 화개현(花開縣) 서쪽에 이르러 용왕연(龍王淵)이 되는데, 조수가 이르며, 동남쪽으로 흘러 광양현(光陽縣)의 남쪽을 지나 섬진(蟾津)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신창진(新倉津)은 전주(全州)에 있는데, 그 수원이 3이 있으니, 그 하나는 부(府)의 남쪽 여현(礪峴)의 물이 성(城) 남서쪽을 돌아서 북쪽으로 흘러 부(府)의 서남쪽 모산(母山) 여러 골짜기의 물을 합하고, 삼례역(蔘禮驛) 남쪽에 이르러 또 고산(高山)과 운제(雲梯)의 물과 어울려서 서쪽으로 흘러 회포(回浦)가 되고, 비간장진(飛艮藏津)이 되는데, 조수가 이르며, 이성(利城)의 옛 성(城) 북쪽에 이르러 신창진(新倉津)이 되는데, 나룻배가 있으며, 서쪽으로 흘러 만경(萬頃)과 임피(臨陂)를 지나 옥구(沃溝)에 이르러 고사포(古沙浦)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동진(東津)은 부안현(扶安縣)에 있는데, 태인(泰仁)과 정읍(井邑) 두 현(縣)의 물이 김제(金堤) 벽골(碧骨)의 물과 합하여 서쪽으로 흘러서 흥덕(興德) 동쪽에 이르러 고부(古阜) 눌제(訥堤)의 물과 어울려 동진이 되는데, 조수가 이르므로 다리를 놓아 행인을 다니게 하고, 만경현 서남쪽을 지나 바다에 들어간다.
호수[戶]는 2만 4천 73호요, 인구[口]는 9만 4천 2백 48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천 1백 67명이요, 영진군(營鎭軍)이 2천 4백 24명이요, 기선군(騎船軍)이 1만 1천 7백 93명이다.
간전(墾田)이 27만 7천 5백 88결(結)이다.【논이 10분의 4이다.】
그 부세(賦稅)는 볍쌀【찹쌀·멥쌀.】·콩【누렁콩·팥·녹두.】·밀[小麥]·참깨[芝麻]·차조기씨[蘇子]·모시[苧布]요, 그 공물(貢物)은 꿀·밀[黃蠟]·범가죽[虎皮]·표범가죽[豹皮]·곰가죽·쇠가죽·말가죽·이긴 사슴가죽[熟鹿皮]·이긴 노루가죽[熟獐皮]·여우가죽·삵괭이가죽·잘[山獺皮]·수달가죽[水獺皮]·활줄[弓絃]·표범꼬리[豹尾]·여우꼬리[狐尾]·족제비털[黃毛]·사슴·돼지·토끼·산돼지·말린 사슴·말린 노루·말린 돼지·정향(丁香)·포(脯)·사슴꼬리[鹿尾]·돼지털·쇠뿔·녹각(鹿角)·갖풀[阿膠]·힘줄[筋]·잡깃[雜羽]·가뢰[斑猫]·대모(玳瑁)·고니[天鵝]·상어·말린 숭어·전복·생복[生鮑]·말린 홍합·낙지·굴·감합(甘蛤)·대합조개·은어·붉은 큰새우·인포(引鮑)·조포(條鮑)·오징어·옥둥어[玉頭魚]·다시마·부레·칠(漆)·겨자·황밤[黃栗]·대추·곶감·연감[紅柿子]·모과·석류·배[梨]·개암·가시연밥[芡仁]·유자(柚子)·감자나무열매·비자[榧子]·유감(乳柑)·동정귤(洞庭橘)·금귤(金橘)·푸른귤[靑橘]·산귤(山橘)·마름[菱仁]·분곽(粉藿)·상곽(常藿)·올멱[早藿]·해모(海毛)·우무·해각(海角)·황각(黃角)·매산이(莓山伊)·김[海衣]·감태(甘笞)·오해자(烏海子)·송이·석이·느타리·표고·새앙·고사리·지초·회화나무꽃·치자·작설차[雀舌茶]·송화(松花)·소나무그을음[松煙]·송진[松脂]·목화·모시·삼[麻]·삼노·각색 종이【표전지(表箋紙)·자문지(咨文紙)·부본단자지(副本單子紙)·주본지(奏本紙)·피봉지(皮封紙)·서계지(書契紙)·축문지(祝文紙)·표지(表紙)·도련지(擣鍊紙)·중폭지(中幅紙)·상표지(常表紙)·갑의지(甲衣紙)·안지(眼紙)·세화지(歲畫紙)·백주지(白奏紙)·화약지(火藥紙)·장지(狀紙)·상주지(常奏紙)·유둔지(油芚紙)·유둔(油芚).】·자리[席]【별무늬돗자리[別紋踏席]·보통무늬돗자리[常紋踏席]·흰무늬돗자리[白紋席]·왕골 자리[草席].】·대껍질방석[竹皮方席]·가는 대[篠]·오죽(烏竹)·화살대[箭竹]·바닷대[海竹]·등상자[土藤箱子]·대껍질[竹皮]·말린 죽순[乾筍]·자기(磁器)·나무그릇[木器]·버들고리[柳器]이다.약재(藥材)는 우황(牛黃)·쇠쓸개[牛膽]·범의 뼈[虎骨]·고슴도치가죽[蝟皮]·곰쓸개[熊膽]·녹용·녹각상(鹿角霜)·토끼머리[兎頭]·녹각(鹿角)·담비쓸개[獺膽]·산양이뿔[羚羊角]·도아조기름[島阿鳥油]·두꺼비[蟾蛛]·뽕나무벌레[桑螵蛸]·자라껍데기[鼈甲]·오징어뼈[烏魚骨]·말린 잉어[乾鯉]·잉어쓸개[鯉膽]·자네[蜈蚣]·등에[蝱蟲]·매미허물[蟬脫皮]·거북껍데기[龜甲]·결명초[石決明]·인삼(人蔘)·영릉향(零陵香)·곽향(藿香)·박상(舶上)·회향(茴香)·가시연밥[鷄頭實]·연꽃[蓮花蘂]·겨우살이꽃[金銀花]·궁궁이[芎藭]·나팔꽃씨·으름덩굴[木通]·호라비좆뿌리[天門冬]·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패랭이꽃이삭[瞿麥穗]·수자해좆뿌리[天麻]·택사(澤瀉)·새삼씨[免綠子]·탱알[紫莞]·탱알뿌리·연밥[蓮子]·회초미뿌리[貫衆]·파고지(破古紙)·삽주뿌리[蒼朮]·쪽[藍]·칠[漆]·감제뿌리[虎杖根]·당귀(當歸)·하국[旋覆花]·하눌타리[括婁]·작약(芍藥)·끼무릇뿌리[半夏]·부들꽃[蒲黃]·끼절가리뿌리[升麻]·도라지[桔梗]·꽃창포[馬藺花]·족두리풀뿌리[細辛]·칡꽃[葛花]·버들옷[大戟]·검화뿌리껍질[白蘇皮]·두여머조자기[天南星]·쇠무릎지기[牛膝]·범부채[射干]·쓴너삼뿌리[苦蔘]·구리때뿌리[白芷]·사양채뿌리[前胡]·바곳[草烏頭]·계소(鷄蘇)·병풍나물뿌리[防風]·숭나물[蒿本]·자리공뿌리[商陸]·다시마[昆布]·흰띠[芧香]·겨우살이덩굴[忍冬草]·아기풀[遠志]·갈뿌리[蘆根]·박새[莒蘆]·암눈바앗씨[蔚子]·진득찰[稀簽]·꽈리[酸醬]·검산풀뿌리[續斷]·할미씨깨비[白頭翁]·향부자(香附子)·심황[鬱金]·수자해좆씨[赤前子]·난향[蘭香]·지치[紫草]·현삼(玄蔘)·멧미나리[柴胡]·매자기뿌리[京三稜]·흰바곳[白附子]·등대풀싹[澤漆]·가위톱[白歛]·대왕풀[白芨]·오미자(五味子)·창이(蒼耳)·외나물뿌리[地楡]·창포(菖蒲)·자주연꽃[紫荷蕖]·개구리밥[水萍]·감국화(甘菊花)·더위지기[茵陳]·절국대[漏蘆]·수뤼나물[葳靈仙]·영생이[薄荷]·속수자[續隨子]·꼭두서니뿌리[茜草根]·두루미냉이씨[葶子]·단너삼[黃耆]·순비기나무열매[蔓荊子]·쥐방울[馬兜苓]·게로기뿌리[薺苨]·항가새[大薊草]·조방가새[小薊草]·사하(蓑荷)·파초·산해박[徐長卿]·익관초(益貫草)·초결명씨[決明子]·백작약(白芍藥)·모시잎[苧葉]·석골풀[石]·골풀[草]·말오줌나무[蒴藋]·마뿌리[山藥]·두룹뿌리[獨活]·속수자[蜀有子]·소태나무열매[川練子]·석류껍질[石榴皮]·흰매화[白梅]·매화열매[烏梅]·탱자껍데기[枳殼]·괴좆나무열매[枸杞子]·흰매화열매[鹽梅實]·복령(茯苓)·모란껍데기[牧丹皮]·닥나무열매[楮實]·솜대속껍질[竹茹]·괴좆나무뿌리껍질[地骨皮]·죽력(竹瀝)·황경나무껍데기[黃蘗皮]·조피나무열매[川椒]·백복령(白茯苓)·호도(胡桃)·오갈피[五加皮]·솜대잎[淡竹葉]·철쭉꽃[躑躅花]·쥐엄나무열매[皀莢]·쥐엄나무가시[皀角刺]·산이스랏씨[郁李仁]·말린 모과[乾木瓜]·살구씨[杏仁]·오배자(五倍子)·복숭아씨[桃仁]·삿갓나물[蚤休]·측백나무잎[側栢葉]·아가위[棠]·배[梨]·잣[松子仁]·묵은 귤껍질[陳皮]·엄나무껍질[海桐皮]·푸른 귤껍질[靑皮]·후박(厚朴)·두충(杜沖)·솔씨[松實]·팔각(八角)·복신(茯神)이다.
심는 약[種藥]은 생지황(生地黃)·장군풀[大黃]·건강(乾薑)·백변두(白萹豆)·검은 변두[黑萹豆]·우엉[惡實]·심황(深黃)·소야기[香薷]이었다.
조운창[漕倉]이 2이니, 영산창(榮山倉)이 나주(羅州) 목포(木浦)에 있고,【나주·순천(順天)·장흥(長興)·담양(潭陽)·낙안(樂安)·보성(寶城)·해진(海珍)·영암(靈岩)·영광(靈光)·무진(茂珍)·강진(康津)·고흥(高興)·광양(光陽)·능성(綾城)·남평(南平)·화순(和順)·동복(同福)·곡성(谷城)·옥과(玉菓)·창평(昌平)·진원(珍原)·장성(長城)·흥덕(興德)·무장(茂長)·함평(咸平)·무안(務安) 등의 조세를 이곳에 바친다.】 덕성창(德成倉)이 함열현(咸悅縣) 서피포(西皮浦)에 있다.【함열·전주(全州)·남원(南原)·익산(益山)·고부(古阜)·김제(金堤)·금산(錦山)·진산(珍山)·순창(淳昌)·임피(臨陂)·옥구(沃溝)·만경(萬頃)·부안(扶安)·정읍(井邑)·금구(金溝)·태인(泰仁)·임실(任實)·구례(求禮)·운봉(雲峯)·장수(長水)·진안(鎭安)·용담(龍潭)·무주(茂朱)·고산(高山)·여산(礪山)·용안(龍安) 등의 조세를 이곳에 바친다.】
관방(關防)의 수어(守禦)는 병마 도절제사 영(兵馬都節制使營)이 강진현(康津縣)에 있고,【정군(正軍)이 4백 98명, 수성군(守城軍)이 51명, 조역군(助役軍)이 1백 63명, 장인(匠人)이 1백 41명이다.】 진(鎭)이 4이니, 옥구(沃溝)·부안(扶安)·무장(茂長)·조양(兆陽)이요,【정군이 각각 3백명이다.】 수군 처치사 영(水軍處置使營)이 무안현(務安縣) 대굴포(大堀浦)에 있고,【대선(大船) 8척, 중선(中船) 16척, 군사 1천 8백 95명, 뱃사공[梢工] 21명을 거느린다.】 좌도 도만호 선박처(左道都萬戶船泊處)가 보성군(寶城郡) 동쪽 여도량(呂島梁)에 있는데,【중선 6척, 맹선(孟船) 12척과 군사 1천 12명과 뱃사공 19명을 거느린다.】 관내의 만호(萬戶)가 8이니, 내례(內禮)가 순천부(順天府) 남쪽 며포(旀浦)에 있으며,【중선 6척, 별선(別船) 6척과 군사 7백 66명과 뱃사공 6명을 거느린다.】 돌산(突山)이 순천부 남쪽 용문포(龍門浦)에 있으며,【중선 8척과 군사 5백 18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축두(築頭)가 고흥현(高興縣) 남쪽 고흥포(高興浦)에 있으며,【중선 6척, 별선 2척과 군사 5백 12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녹도(鹿島)가 장흥부(長興府) 북쪽 녹도량(鹿島梁)에 있으며,【중선 6척, 별선 2척과 군사 4백 83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회령포(會寧浦)가 장흥부 남쪽 주포(周浦)에 있으며,【중선 4척, 별선 4척과 군사 4백 72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마도(馬島)가 강진현(康津縣) 남쪽 원포(垣浦)에 있으며,【중선 8척과 군사 5백 10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달량(達梁)이 영암군(靈岩郡) 남쪽에 있으며,【중선 7척, 맹선(孟船) 2척과 군사 5백 19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어란(於蘭)이 해진군(海珍郡) 남쪽 삼촌포(三寸浦)에 있다.【중선 4척과 군사 4백 80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우도 도만호 선박처(右道都萬戶船泊處)는 함평현(咸平縣) 서쪽 원관(垣串)에 있는데,【중선 8척, 별선 10척과 군사 1천 55명과 뱃사공 9명을 거느린다.】 관내 만호(萬戶)가 5이니, 목포(木浦)가 무안현(務安縣) 남쪽에 있으며,【중선 6척, 별선 2척과 군사 4백 98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다경포(多慶浦)가 무안현 서쪽 와포(瓦浦)에 있으며,【중선 4척, 별선 4척과 군사 4백79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법성포(法聖浦)가 영광군(靈光郡) 북쪽에 있으며,【중선 6척, 별선 2척과 군사 4백 93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금모포(黔毛浦)가 부안현(扶安縣) 남쪽 웅연(熊淵)에 있으며,【중선 4척, 별선 4척과 군사 4백 55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군산(群山)이 옥구현(沃溝縣) 북쪽 진포(鎭浦)에 있다.【중선 4척, 별선 4척과 군사 4백 61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감목관(監牧官)이 3인이요,【도(道)안에 1인이요, 제주(濟州)에 2인이다.】 역승(驛丞)이 7인이니, 창활도(昌活道)의 관할 역(驛)이 11이요,【잔수(潺水)·갈담(葛潭)·오수(獒樹)·은령(銀嶺)·통도(通道)·인월(引月)·익신(益申)·섬거(蟾居)·양률(良栗)·낙수(洛水)·지신(知申).】 앵곡도(鶯谷道)의 관할 역이 5이요,【거산(居山)·천원(川原)·부흥(扶興)·내재(內才)·영원(瀛原).】 제원도(濟原道)의 관할 역이 2이요,【달계(達溪)·소천(所川).】 벽사도(碧沙道)의 관할역이 9이요,【파청(波淸)·진원(鎭原)·통로(通路)·낙신(樂新)·영보(永保)·별진(別珍)·녹산(祿山)·양강(陽江)·가신(可申).】 삼례도(參禮道)의 관할 역이 6이요,【반석(半石)·양재(良才)·오원(烏原)·재곡(才谷)·소안(蘇安)·옥포(玉包).】 청엄도(靑嚴道)의 관할 역이 9이요,【단엄(丹嚴)·선엄(仙嚴)·신안(新安)·녹사(祿沙)·청송(靑松)·영신(永申)·청연(淸淵)·경신(慶新)·가리(街里).】 경양도(景陽道)의 관할 역이 8이다.【덕기(德基)·가림(加林)·인물(人物)·창신(昌新)·대부(大富)·금부(黔富)·오림(烏林)·광리(廣里).】
【원전】 5 집 654 면


 
세종
확대원래대로축소
 지리지
세종 지리지 / 황해도

◈ 황해도(黃海道)
본래 고구려의 옛 땅인데, 당나라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멸하였으나, 〈그 땅을〉 지키지 못해, 신라에서 드디어 합병하였다. 그 말기에 이르러 태봉 국왕(泰封國王) 궁예(弓裔)가 차지하게 되었다가, 고려 태조(太祖)가 들어서서 모두 그 땅을 차지하였다.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경내(境內)를 나누어 10도(道)로 하였는데, 황주(黃州)·해주(海州) 등의 관할이 모두 관내도(關內道)에 속하였으며, 그 뒤에 고쳐서 서해도(西海道)로 하였다.【연대가 미상이다.】 본조 태조(太祖) 4년 을해에 풍해도(豊海道)로 고치었다가, 태종(太宗) 17년 정유【곧 명나라 태종 문황 제 영락(永樂) 15년.】에 또 고쳐서 황해도로 하였다. 항상 도관찰 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써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겸하게 하였다.
그 경계는 동쪽으로 경기 삭녕(朔寧) 완전(薍田)에, 서쪽으로 풍천(豊川) 업청강(業淸江)에, 남쪽으로 강령(康翎) 구월봉(九月峯) 바닷가에, 북쪽으로 평안도 중화(中和)의 마아(馬兒)에 이르는데, 동서가 4백 26리, 북남이 2백 35리이다.
관할[所管]은 목(牧)이 2, 도호부(都護府)가 3, 군(郡)이 7, 현(縣)이 12인데, 관할 주(州)·군(郡)이 떨어졌다 합쳤다 한 것은 자세히 경기(京畿)에 실려 있다.
산을 낀 여러 고을은 산이 높아서 서리가 일찍 오며, 바다에 임한 각 고을도 서북 바닷 바람으로 인하여 일찍 춥고 늦게 따뜻해진다. 연안(延安)·배천(白川)과 평산(平山)의 남촌(南村)은 평평하고 넓어서 논이 많고, 봉산(鳳山)·안악(安岳)·신천(信川)·은율(殷栗)은 기름진 땅이 좀 있으나, 나머지는 모두 척박하다.
명산(名山)은 우이산(牛耳山)이 해주(海州)에 있고, 구월산(九月山)이 문화(文化)에 있다.
대천(大川)은 벽란도(碧瀾渡)인데, 그 근원이 수안군(遂安郡) 동쪽 언진산(諺眞山)에서 비롯하여 평산부(平山府) 동쪽에 이르러 전탄(箭灘)이 되고, 우봉현(牛峯縣) 서쪽에 이르러 원중포(源中浦)가 되며, 저탄(猪灘)이 되니, 일명 청룡강(靑龍江)이라 하여 그 흐름이 비로소 커졌으며, 강음현(江陰縣) 북쪽에 이르러 기탄(岐灘)이 되고, 남쪽에 이르러 조읍포(助邑浦)가 되며, 배천군(白川郡) 동쪽 금곡포(金谷浦)를 지나 남쪽에 이르러 벽란도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호수가 2만 3천 5백 11호요, 인구가 7만 1천 8백 97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2천 2백 94명이요, 영진 속군(營鎭屬軍)이 2천 7백 36명이요, 선군(船軍)이 3천 9백 97명이다.
간전(墾田)이 10만 4천 72결(結)이다.
구실[賦]은 볍쌀[稻米]【경미(粳米)·중미(中米)·조미(糙米)·속미(粟米)·유미(糯米)가 있다.】·콩[豆]【콩·팥·녹두가 있다.】·보리[麥]【보리·밀·메밀이 있다.】·참깨·참기름·들기름[蘇子油]·꿀·밀[黃蠟]·가루장[末醬]이다.
공물[貢]은 겨자·밤·개암·상수리·배·대추·잣·오미자·오배자(五倍子)·다래[獼猴桃]·마름·가시연밥·느타리·석이·싸리버섯·청각(靑角)·황각(黃角)·오해자(吾海子)·말린 사슴고기·말린 노루고기·말린 돼지고기·토끼젓·기러기젓·곤쟁이젓·물고기젓·민어·상어·숭어·물고기기름·어교(魚膠)·고니·말가죽·쇠가죽·범가죽·표범가죽·곰가죽·녹비·돼지가죽·노루가죽·잘·수달피·여우가죽·삵괭이가죽·족제비털·잡깃·사슴뿔·사슴갈비·도기(陶器)·자기(磁器)·목기(木器)·유기(柳器)·표초(薸草)·솔[刷子]·유둔(油芚)·종이·자리·삼·마의(馬衣)·나무활애끼찌[弓斡木]·숯·소나무그을음·송진·명아주재·큰 재목·황양목·자작나무·가래나무·피나무·잣나무·장작·장나무[長木]·회화나무꽃·잇·지초·청태(靑苔)·칠·갈피(葛皮)·시우쇠·연철(鉛鐵)·주토(朱土)·정분(丁粉)·다북쑥이다.【오직 연안부(延安府)에서만 바친다.】
약재(藥材)는 쇠쓸개·곰쓸개·담비쓸개·고슴도치쓸개·고슴도치가죽·우황·아교(阿膠)·소유(酥油)·섣달토끼·영양각(羚羊角)·섣달여우간·도아조기름[島阿鳥油]·산비둘기[斑鳩]·말벌집[露蜂房]·누에나방[元蠶蛾]·가뢰[斑猫]·매미허물·뱀허물·섬소(蟾酥)·뽕나무벌레[桑螵蛸]·자라껍데기·거북껍데기·도마뱀·청개구리·잉어쓸개·굴조개껍질·등에[蟲]·약누룩[神麴]·석고(石膏)·산골·복신(茯神)·복령(茯苓)【적(赤)·백(白)의 두 종류가 있다.】·북나무진[安息香]·풍고(楓膏)·오갈피·황경나무껍질·뽕나무뿌리껍질·느릅나무껍질·모란뿌리껍질·측백나무잎·탱자껍데기·무이(蕪荑)·측백나무열매 씨·산이스랏씨[郁李仁]·살구씨[杏仁]·복숭아씨·도효(桃梟)·회화나무열매·느릅나무열매·조피나무열매·철쭉꽃·밤·노가주나무[楔]·뽕나무겨우살이[桑寄生]·멧대추씨[酸棗仁]·쥐엄나무열매[皀莢]·인삼·백출(白朮)·삽주뿌리[蒼朮]·병풍나물뿌리[防風]·천선과씨[天仙子]·초결명씨[決明子]·흰바곳[白附子]·납가새씨[蒺藜子]·질경이씨[車前子]·배암도랏씨[蛇床子]·새삼씨[兎絲子]·암눈비앗씨[荒蔚子]·연밥·창포말(菖蒲末)·쥐방울[馬兜苓]·쇠비름[馬齒莧]·마린(馬藺)·부들꽃[蒲黃]·택사(澤瀉)·도라지[䓀梗]·탱알[紫莞]·대소 계초(大小薊草)·수자해좆뿌리[天麻]·두여머조자기[天南星]·수자해좆싹[赤箭]·가위톱[白歛]·구리때뿌리[白芷]·대왕풀[白芨]·검화뿌리껍질[白蘚皮]·할미씨깨비[白頭翁]·장구채씨[王不留行]·삿갓나물[蚤休]·검산풀뿌리[續斷]·절국대[漏蘆]·여로(藜蘆)·하눌타리[括婁]【뿌리와 꽃가루를 쓴다.】·칡뿌리[葛根]·칡꽃[葛花]·갈뿌리[蘆根]·외나물뿌리[地楡]·족도리풀뿌리[細辛]·승검초뿌리[當歸]·마뿌리[山藥]·버들옷[大戟]·자리공뿌리[商陸]·매자기뿌리[京三稜]·여우오줌풀뿌리[鶴蝨]·나리뿌리[百合]·마디풀[百節]·감데뿌리[虎杖根]·두룹뿌리[獨活]·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쇠무릎지기[牛膝]·쑥잎[艾葉]·멧미나리[柴胡]·바디나물뿌리[前胡]·끼절가리뿌리[升麻]·함박꽃뿌리【적(赤)·백(白)의 두 종류가 있다.】·호본(蒿本)·끼무릇뿌리·현삼(玄蔘)·고삼(苦蔘)·더위지기[茵陳]·진봉(蓁芃)·속서근풀[黃芩]·황기(黃蓍)·으름덩굴·통초(通草)·담쟁이·지모(知母)·회초미뿌리[貫衆]·수뤼나물[葳靈仙]·바곳[草烏頭]·쪽[藍]·칠(漆)·오독도기[茹]·며래뿌리[萆薢]·오독도기[狼牙]·아자(牙子)·차조기잎[赤素葉]·나마(羅麻)·율초(律草)·박새[藜蔞]·꼭두서니뿌리[茜草根]·소루쟁이[羊蹄]·생암(生菴)·들쑥[蒿]·겨우살이덩굴[忍冬]·편축(篇畜)·야총(野葱)·패랭이꽃[瞿麥]·두루미냉이[葶歷]·제비쑥[菁蒿]·개구리밥[水萍]·바다말[海藻]·야생(野生)·경천(景天)·꽈리[酸醬]·진득찰[稀簽]·과남풀[龍膽]【일명 관음초(觀音草).】·산해박[徐長卿]·계소(鷄蘇)·속새[木賊]·범부채[射干]·애기풀[遠志]·택칠(澤漆)·석골풀[石斛]·새박뿌리[何首烏]·자주연꽃[紫荷蕖]·삼지구엽(三枝九葉)이다.【이상의 잡공(雜貢) 및 약재는, 이제 장차 토산(土産)으로서 희귀한 것은 그 고을 아래에 적고, 각 고을에 나는 것으로서 여기에 적은 것은 다시 적지 않는다.】
심는 약재(藥材)는 율무[薏苡]·삼씨[麻子]·나팔꽃씨[牽牛子]【검은 것과 흰 것의 두 종류가 있다.】·백변두(白扁豆)·양귀비·차조기[紫蘇]·영생이[薄荷]·소야기[香薷]·회향(茴香)·악실(惡實)·장군풀[大黃]·날지황[生地黃]【말리기도 하고 혹, 찌기도 한다.】·청목향(靑木香)·정가[荊芥]·해바라기씨·염교뿌리[薤子]·아주까리씨[麻子]·참외꼭지·감국(甘菊)·맨드라미꽃【붉은 것과 흰 것의 두 종류가 있다.】·궁궁이이다.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 관청을 해주에 두었고, 병마 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의 수어처(守禦處)가 4이니, 풍천진(豊川鎭)은 서쪽으로 바다 어귀 업청강(業淸江)에 이르기 10리요,【유방군(留防軍)이 3백명, 수성군(守城軍)이 80명, 방패군(防牌軍)이 60명이니, 본군(本郡) 및 황주(黃州)·서흥(瑞興)·안악(安岳)·문화(文化)·은율(殷栗)·장련(長連)·송화(松禾)의 군(軍)에 속한다.】 장연진(長淵鎭)은 서쪽으로 별서강(別西江)에 이르기 36리요,【유방군이 3백 명, 수성군이 80명, 방패군이 48명이니, 본현 및 재령(載寧)·안악·문화·신천(信川)·송화·장련의 군대에 속한다.】 옹진진(甕津鎭)은 서쪽으로 바다 어귀 관량(館梁)에 이르기 8리요,【유방군이 3백 62명, 수성군이 80명, 방패군이 60명이니, 본현 및 해주·연안(延安)·배천(白川)·평산(平山)·재령·장연·송화·신천의 군에 속한다.】 강령진(康翎鎭)은 동쪽으로 순위량(巡威梁)에 이르기 10리이다.【유방군이 4백 명, 수성군이 80명, 방패군이 60명이니, 본현 및 해주·서흥·봉산(鳳山)·곡산(谷山)·수안(遂安)·배천·우봉(牛峯)·강음(江陰)·신은(新恩)·토산(兎山)의 군대에 속한다.】 수군 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옹진현 관량(館梁)에 머물러 있다.【병선(兵船)이 9척, 선군이 5백 16명.】 수군 만호(水軍萬戶) 수어처(守禦處)가 6이니, 용매량(龍媒梁)이 지금 해주 동쪽 피곶(皮串)에 머무르고,【병선이 6척, 선군이 4백 11명.】 순위량(巡威梁)이 지금 강령현 동쪽 무지곶(無知串)에 머무르며,【병선이 7척, 선군이 5백명.】 대곶량(大串梁)이 장연현 남쪽에 있고,【병선이 6척, 선군이 5백 2명.】 아랑포(阿郞浦)가 장연현 서쪽에 있으며,【병선이 4척, 선군이 4백 명.】 풍천량(豊川梁)이 풍천군 서쪽 업청강에 있고,【병선이 4척, 선군이 4백명.】 광암량(廣巖梁)이 은율현 서쪽에 있다.【병선이 5척, 선군이 5백 10명.】
참로 찰방(站路察訪)이 1인이요, 관할 참(站)이 10이다.【금교(金郊)·흥의(興義)·금암(金巖)·보산(寶山)·안성(安城)·용천(龍泉)·검수(劍水)·절령(岊嶺)·동선(洞仙)·경천(敬天).】 감목관(監牧官)이 1인, 역승(驛丞)이 2인이다. 청단도 승(靑丹道丞)의 관할 역(驛)이 8이요,【금곡(金谷)·심동(深洞)·망행(望行)·금강(金剛)·문라(文羅)·금동(金洞)·신행(新行)·유안(維安).】 기린도 승(麒麟道丞)의 관할 역이 16이다.【달만(達滿)·삼지(三支)·원산(元山)·진목(眞木)·박산(朴山)·문라(文羅)·안산(安山)·소곶(所串)·도공(陶工)·바곶이[所串之]·단림(丹林)·신로(新蘆)·소평(所坪)·위라(位羅)·신흥(新興)·연양(延陽).】
수조처(收租處)가 2이니, 금곡포(金谷浦)가 배천군 동쪽 20리에 있고,【본읍·해주·연안·풍천·강령·옹진·장연(長淵)·송화·신천·문화·장련(長連)·은율 등의 고을은 모두 이곳에 바쳐서 수참선(水站船)으로 운반하여 용산강(龍山江)에 이르니, 물길이 95리이다.】
조읍포(助邑浦)가 강음현(江陰縣) 남쪽 5리에 있다.【본현(本縣)·황주(黃州)·서흥·봉산·곡산·수안·안악·재령·신은(新恩)·평산·우봉·토산 등의 고을은 모두 이곳에 바쳐서 수참선(水站船)으로 운반하여 금곡포(金谷浦)를 지나 용산강에 이르니, 물길이 1백 35리이다.】
【원전】 5 집 668 면

 
세종
확대원래대로축소
 지리지
세종 지리지 / 강원도

◈ 강원도(江原道)
본래 예맥(濊貊)의 땅인데, 뒤에 고구려의 소유로 되었다. 고려 때에 이르러 영동(嶺東)은 성종(成宗) 14년 을미【송나라 태종(太宗) 지도(至道) 원년.】에 삭방도(朔方道)라 불렀고, 명종(明宗) 8년 무술【송나라 효종(孝宗) 순희(淳熙) 6년.】에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 불렀으며, 원종(元宗) 4년 계해【송나라 이종(理宗) 경정(景定) 4년.】에 강릉도(江陵道)라 불렀었다. 공민왕(恭愍王) 5년 병신【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16년.】에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라 불렀고, 또 다음해 정유에 강릉도(江陵道)라 불렀다가, 또 4년 경자에 삭방강릉도(朔方江陵道)로 불렀고, 또 7년 병오에 다시 강릉도라 불렀다. 영서(嶺西)는 명종(明宗) 8년 무술에 춘주도(春州道)로 불렀고, 그 뒤 혹은 동주도(東州道)로 불렀으며, 원종 4년 계해에 교주도(交州道)라 하였다가, 공양왕(恭讓王) 원년 무진【대명(大明) 홍무(洪武) 21년.】에 영동과 영서를 합쳐서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라 하고, 충주(忠州) 소관(所管)의 창평군(昌平郡)을 내속시켰다. 〈공양왕〉 3년 경오에 경기(京畿)를 더 넓힘에 따라, 철원(鐵原)과 영평(永平)을 분할하여 경기에 옮겨 붙이고, 본조 태조 4년 을해에 이르러 비로소 강원도라 일컫고, 도관찰사(都觀察使)의 관청을 원주(原州)에 두었는데, 공정왕(恭靖王) 원년 기묘에는 원주의 임내 영춘(永春)과 충주(忠州)의 소관 영월(寧越)이 개 이빨처럼 들쭉날쭉하다 하여 서로 바꿔 붙였다. 태종 13년 계사에 또 가평(加平)과 조종(朝宗)을 분할하여 경기에 이속(移屬)하였다.
동쪽은 양양(襄陽) 바다 어귀에 이르고, 서쪽은 경기 가평현에 이르며, 남쪽은 충청도 영춘현에 이르고, 북쪽은 철령(鐵嶺)에 이르는데, 동서가 2백 50리, 남북이 5백 58리이다.
관할[所管]은 대도호부(大都護府)가 1, 목(牧)이 1, 도호부(都護府)가 4, 군(郡)이 7, 현이 11이다.
명산(名山)은 치악(雉岳)이 원주 동쪽에 있고, 거슬갑산(琚瑟岬山)이【속칭 백덕산(白德山).】 원주 임내 주천현(酒泉縣) 북쪽에 있으며, 의관령(義館嶺)이 회양부(淮陽府) 북쪽에 있고, 금강산(金剛山)이【일명 개골(皆骨), 또는 풍악(楓岳)이라 한다.】 회양 임내 장양현(長楊縣) 동쪽에 있으며, 오대산(五臺山)이 강릉부(江陵府) 서쪽에 있고, 팔봉산(八峯山)이 홍천현(洪川縣) 서쪽에 있으며, 태백산(太伯山)이 삼척부(三陟府) 서쪽에 있다.
대천은 소양강(昭陽江)이다. 그 근원은 인제현(麟蹄縣) 이포소(伊布所)에서 시작하여 서화(瑞和)·양구현(楊口縣)을 지나 춘천부(春川府) 북쪽에 이르러 소양강이 되었다. 모진(母津)은 그 근원이 회양 임내 장양현 경계 금강산에서 시작하여 화천현(和川縣)을 지나 회양부 북쪽에 이르러 덕진명소(德津溟所)가 되고, 금성(金城) 임내 기성현(岐城縣) 북쪽에 이르러 보살진(菩薩津)이 되며, 낭천현(狼川縣) 남쪽에 이르러 남진(南津)이 되고, 춘천부 북쪽에 이르러 모진(母津)이 되며, 남쪽으로 흘러 소양강의 물과 합하여 경기 양근군(陽根郡) 서쪽에 다다라 용진(龍津)이 된다. 섬강(蟾江)은 그 근원이 횡성(橫城) 덕고산(德高山)에서 시작하여 횡성현을 거쳐서 원주 이천(梨遷)·갑곶이[甲串]를 지나 흥원창(興原倉)에 이르러 섬강이 되어, 여강(驪江)으로 들어간다. 이천(伊川) 덕진명소(德津溟所)는 그 근원이 함길도(咸吉道) 안변(安邊) 임내 영풍현(永豐縣) 경계 방장동(防墻洞)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경기 안협현(安峽縣)에 이르러서 황포(黃浦)가 되니, 곧 임진강(臨津江)의 상류이다. 금장강(錦障江)은 그 근원이 오대산동(五臺山洞) 금강연(金剛淵)에서 시작하여 진부역(珍富驛) 수다사골[水多寺洞]을 지나 정선군(旌善郡)에 이르러 광탄(廣灘)이 되고, 고을 남쪽에 이르러 대음강(大陰江)에 들어가 두 물이 합하여, 흘러서 가탄(加灘)에 들어가고, 평창군(平昌郡) 동쪽에 이르러 연화진(淵火津)이 되며, 영월군(寧越郡) 동쪽에 이르러 금장강이 된다. 가근동진(加斤同津)은 그 근원이 강릉 영서(嶺西) 죽원(竹源)과 금천(金川) 등지에서 시작하여 향며촌(向旀村) 방림역(芳林驛)을 지나 평창군 북쪽에 이르러 용연진(龍淵津)이 되고, 영월군 서쪽에 이르러 가근동진이 되며, 고을 남쪽에 이르러 금장강과 합하여 충청도 영춘현(永春縣)을 지나 충주에 이르러 연천(淵遷)이 된다.
호수가 1만 1천 84호요, 인구가 2만 9천 단(單) 9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2천 2백 76명이요, 선군이 1천 3백 84명이요, 수성군(守城軍)이 11명이요, 진속 방패(鎭屬防牌)가 25명이다.
간전(墾田)이 6만 5천 9백 16결이다.
구실은 볍쌀·좁쌀·누른콩·녹두·붉은팥·가루장·참밀·메밀·참깨·참깨기름·들기름·정포(正布)이다.
공물은 꿀·밀·잣·개암·감·오배자·겨자·모과·호도·배·대추·조피나무열매·밤·지초·잇·송화·괴화·석이·느타리·옻·바다옻·쇠가죽·말가죽·여우가죽·삵괭이가죽·담비가죽·범가죽·표범가죽·사슴가죽·잘·수달피·해달피(海獺皮)·돼지가죽·어피(魚皮)·노루가죽·곰가죽·표범꼬리·여우꼬리·곰털·돼지털·사슴포·말린 돼지 고기·문어·대구·연어·상어·숭어·물고기 기름·전복·홍합·전복껍더기·쇠뿔·가뢰·백단향·자단향·안지(鞍枝)·나무그릇·박·생삼·익힌 삼·참바·새끼·틀가락바·송진·유지·달래·사기그릇·질그릇·종이·휴지·자리·잡깃·고리·포도·다래·갈피(葛皮)·자작나무·장작개비·나무활·책판나무·재목·숯·송연(松烟)·마의(馬衣)·주토(朱土)·토끼젓·산 사슴·토끼·집돼지·미역이다.
약재는 범의 뼈·웅담·우황·쇠쓸개·산양이뿔·돼지쓸개·소유(酥油)·오소리기름[油]·담비쓸개[獺膽]·녹각교(鹿角膠)·누에허물[馬鳴退]·녹각(鹿角)·범의 정강이뼈[虎脛骨]·아교(阿膠)·섣달토끼대가리[臘兎頭]·고슴도치가죽[猬皮]·산무애뱀[白花蛇]·두꺼비[蟾酥]·매미허물[蟬脫]·범부채[射干]·말범집[露蜂房]·도마뱀[蜥蜴]·석결명(石決明)·거머리[水蛭]·오징어뼈[烏魚骨]·등에[虻蟲]·공청(空靑)·해구신[膃臍]·오미자(五味子)·괴좆나무열매[枸杞子]·측백나무열매[栢子仁]·조피나무열매[川椒]·탱자껍더기[枳殼]·모란뿌리껍질[牧丹皮]·괴좆나무뿌리껍질[地骨皮]·뽕나무뿌리껍질[桑白皮]·황경나무껍질[蘗皮]·복신(茯神)·북나무진[安息香]·다린송진[白膠香]【송진을 구은 것이다.】·말린 옻·백복령(白茯苓)·살구씨·으름덩굴[木通]·적복령(赤茯苓)·측백잎[栢葉]·백태목(栢胎木)·댕댕이덩굴[方巳]·닥나무잎[楮葉]·뽕나무겨우살이[桑寄生]·산이스랏씨[郁李仁]·복숭아씨[桃仁]·인삼(人蔘)·쓴너삼뿌리[苦蔘]·삽주뿌리[蒼朮]·바디나물뿌리[前胡]·끼무릇뿌리[半夏]·단너삼뿌리[黃耆]·하눌타리뿌리[括蔞]·검산풀뿌리[續斷]·쇠귀나물[澤蘭]·승검초뿌리[當歸]·배암도랏씨[蛇床子]·망초뿌리[蓁]·칡뿌리[葛根]·수자해좆뿌리[天麻]·족도리풀뿌리[細辛]·쇠무릎지기[牛膝]·쪽[藍]·칠(漆)·수뤼나물[葳靈仙]·도라지[桔梗]·외나물뿌리[地楡]·꽈리[酸醬]·두룹뿌리[獨活]·끼절가리뿌리[升麻]·바곳[草烏頭]·산해박[徐長卿]·흰 함박꽃뿌리[白芍藥]·붉은 함박꽃뿌리[赤芍藥]·바다말[海藻]·마뿌리[山藥]·연밥[蓮子]·병풍나무뿌리[防風]·자주연꽃[紫荷蕖]·대왕풀[白芨]·가위톱[白歛]·검화뿌리껍질[白鮮皮]·구리떼뿌리[白芷]·삽주덩이뿌리[白朮]·나리뿌리[白合]·양귀비열매껍질[粟殼]·감데뿌리[虎杖根]·겨우살이꽃[金銀花]·하국[旋覆花]·절국대[漏草]·장리공뿌리[商陸]·두루미냉이씨[葶歷子]·흰대꽃[芧香]·석창포(石菖蒲)·창포(菖蒲)·회초미뿌리[貫衆]·숭나물[蒿本]·쥐방울[馬兜鈴]·버들옷[大戟]·겨우살이덩굴[忍冬草]·매자기뿌리[京三稜]·오랑캐꽃[紫胡]·다시마[昆布]·현삼(玄蔘)·수자해좆꽃[赤箭]·새박뿌리[何首烏]·궁궁이[芎藭]·속새[木賊]·두여머조자기[天南星]·오독도기[莒茹]·나팔꽃씨[牽牛子]·고무딸기열매[覆盆子]·초결명씨[決明子]·질경이씨[車前子]·박새[藜蘆]·석고(石膏)·속돌[水泡石]·자석(磁石)·붉은 돌[赤石]이다.
심는[種養] 약재는 우엉[惡實]·생지황(生地黃)·삼씨[麻子]·해바라기씨[黃葵子]·차조기[紫蘇]·누른국화[黃菊]·백변두[白篇豆]·장군풀[大黃]·검은콩[黑豆]·율설(粟楔)·정가이삭[荊芥]·영생이[薄荷]이다.
진(鎭)이 2이니, 삼척(三陟)과 간성(杆城)이다.【태조 6년 정축에 비로소 진(鎭) 둘을 두었으나, 진에 유방군(留防軍)이 없어, 일이 있으면 시위패(侍衛牌)로 충당한다.】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의 영을 강릉에 두고, 도관찰사(都觀察使)가 겸한다. 수군 만호 수어처(水軍萬戶守禦處)가 6이니, 월송포(越松浦)가 평해(平海) 동쪽에 있고,【배가 1척, 군사가 70명이다.】 속초포(束草浦)가 양양(襄陽) 북쪽에 있고,【배가 3척, 군사가 2백 단(單) 10명이다.】 강포구(江浦口)가 고성(高城) 남쪽에 있으며,【배가 3척, 군사가 1백 96명이다.】 삼척포(三陟浦)가 부(府) 동쪽에 있고,【배가 4척, 군사가 2백 45명이다.】 수산포(守山浦)가 울진(蔚珍) 남쪽에 있으며,【배가 3척, 군사가 1백 91명이다.】 연곡포(連谷浦)가 현(縣) 동쪽에 있다.【배가 3척, 군사가 1백 91명이다.】
역승(驛丞)이 3인이니, 보안도 승(保安道丞)의 관할 역(驛)이 20이요,【보안(保安)·인람(仁嵐)·부창(富昌)·원창(原昌)·연봉(連峯)·천감(泉甘)·연평(延平)·약수(藥水)·평안(平安)·여량(餘糧)·창봉(蒼峯)·갈풍(葛豐)·오원(烏原)·벽탄(碧呑)·호선(好善)·안흥(安興)·유원(由原)·신흥(新興)·양연(陽淵)·단구(丹丘).】 대창도 승(大昌道丞)의 관할 역이 28이요,【대창·안인(安仁)·진부(珍富)·구산(丘山)·횡계(橫溪)·대화(大和)·방림(芳林)·운교(雲交)·목계(木界)·고단(高丹)·대강(大康)·고잠(高岑)·등로(登路)·악풍(樂豐)·임계(臨溪)·동덕(冬德)·인구(麟丘)·연창(連倉)·상운(祥雲)·강선(降仙)·청간(淸澗)·죽포(竹苞)·운근(雲根)·명파(明波)·양진(養珍)·조진(朝珍)·거풍(巨豐)·진덕(眞德).】 평릉도 승(平陵道丞)의 관할 역이 9이다.【평릉(平陵)·사직(史直)·교가(交可)·용화(龍化)·옥원(沃原)·흥부(興富)·수산(守山)·덕신(德神)·달효(達孝).】
【원전】 5 집 675 면


[주D-001]율설(粟楔) : 3개의 알이 든 밤송이에서 가운데 있는 알을 말한다.《東醫寶鑑 雜病 諸傷 單方》
 
세종
확대원래대로축소
 지리지
세종 지리지 / 평안도

◈ 평안도(平安道)
본래 조선의 옛 땅이다. 삼국(三國) 시대에는 고구려의 소유(所有)이었는데, 보장왕(寶藏王) 27년 무진【당나라 고종(高宗) 총장(摠章) 원년.】에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과 더불어 이를 멸(滅)하고 드디어 그 땅을 병합하였다. 효공왕(孝恭王) 9년 을축【당나라 애제(哀帝) 천우(天祐) 2년.】에 궁예(弓裔)가 철원(鐵原)에 웅거하여 스스로 후고려왕(後高麗王)이라 일컫고 패서(浿西) 13진(鎭)으로 분정(分定)하였는데, 고려에서도 그대로 따라 패서도(浿西道), 또는 북계(北界)라고 칭하였다. 숙종(肅宗) 7년 임오【송나라 건중정국(建中靖國) 2년.】에 서북면(西北面)이라 칭하고, 고려 말에 황주목(黃州牧)·안악군(安岳郡)·철화현(鐵和縣)·장명진(長命鎭)을 내속(來屬)시켰다가, 홍무(洪武) 무진년에 다시 서해도(西海道)에 붙이었다.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평안도(平安道)로 고치고, 16년 병신에 영길도(永吉道)·갑산군(甲山郡)·서면(西面)·여연(閭延) 등의 땅이 본도(本道)와의 거리가 너무 멀므로, 소훈두(小薰頭) 이서(以西)를 떼어 여연군(閭延郡)으로 삼고 내속(來屬)시켰다.
동쪽으로 함길도 고원(高原)에, 서쪽으로 바다에, 남쪽으로 황해도 황주(黃州)에, 북쪽으로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는데, 동서(東西)가 3백 23리, 남북(南北)이 4백 23리이다.
관할[所管]은 유수(留守)가 1, 대도호부(大都護府)가 1, 목(牧)이 3, 도호부(都護府)가 5, 군(郡)이 21, 현(縣)이 14이다.
명산(名山)은 대성산(大成山)【평양(平壤).】·묵방산(墨方山)【개천(价川).】·묘향산(妙香山)【희천(熙川).】천마산(天磨山)【정녕(定寧).】·천성산(天聖山)【은산(殷山).】향적산(香積山)【태천(泰川).】이다.
대천(大川)은 대동강(大同江)이니, 곧 옛 패강(浿江)이다.【《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이르기를, “평양성(平壤城) 동북쪽에 노양산(魯陽山)이 있고, 노성(魯城)이 그 위에 있으며, 서남쪽 20리에 위산(葦山)이 있는데, 남쪽으로 패수(浿水)에 임(臨)한다.”고 하였다.】 또 왕성강(王城江)은【중사(中祀)에 실리어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그 하나는 희천군(熙川郡) 가막동(加莫洞)에서 시작하여 묘향산(妙香山) 동쪽을 둘러서 덕천(德川)·개천(价川)·순천(順川)·은산(殷山)·성천(成川)·자산(慈山)을 지나 강동(江東)에 이르고, 그 하나는 양덕현(陽德縣) 북쪽 문음산(文音山)에서 시작하여 곡산(谷山)·수안(遂安)·상원(祥原)·삼등(三登)을 지나 강동(江東)에 이르러서, 두 갈래의 물이 합류(合流)하여 평양부(平壤府) 지경으로 들어가서 성(城) 동쪽을 안고 흘러 대동강(大同江)이 되고, 9리를 더 가서 마둔진(亇屯津)이 되었으니, 옛 이름은 구진 익수(九津溺水)이다.【소사(小祀)에 실리어 있다.】 모두 배가 있어서 사람을 건네준다. 강서(江西)를 지나 용강현(龍岡縣) 남쪽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청천강(淸川江)은 안주(安州)에 있는데, 살수(薩水)라고도 한다.【곧 수나라 장수[隋將] 우문 술(宇文述) 등이 패(敗)한 곳이다.】 그 근원은 희천군(熙川郡) 옛 영원진(寧遠鎭)으로부터 나와서 강계(江界) 적유현(狄踰峴)의 물과 합하여, 희천군 동쪽 묘향산을 둘러서 영변(寧邊) 동쪽을 지나, 주성(州城) 북쪽에 이르러 청천강이 되고, 안융(安戎) 노근강(老斤江)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소사(小祀)에 실리어 있다.】 박천강(博川江)은 박천(博川)에 있는데, 옛 이름은 대녕강(大寧江)이다. 그 근원은 삭주(朔州) 천마산(天磨山)으로부터 나와서 태천(泰川)·운산(雲山)·영변(寧邊)을 지나, 군(郡) 옛성[古城] 서쪽에 이르러 박천강이 되어 안주강(安州江) 하류로 들어간다. 압록강은 의주(義州) 서쪽에 있는데, 옛 이름은 청하(靑河), 또는 용만(龍灣)이라고도 한다. 그 근원은 백두산(白頭山)으로부터 나와서 수백여 리를 흘러 함길도 갑산군(甲山郡)을 지나고, 여연(閭延)·강계(江界)·이산(理山)을 거쳐서 독로강(禿魯江) 물과 합하여, 벽동(碧潼)·창성(昌城)·소삭주(小朔州)를 지나, 주(州)의 성(城) 서쪽에 이르러 압록강이 되고, 암림곶(暗林串)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중사(中祀)에 실리어 있다. 신(臣)이 상고하건대,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이르기를,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멀리 지키기가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遼東) 고새(故塞)를 수축하였는데,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위만(衛滿)이 패수를 건너 조선왕(朝鮮王) 준(準)을 격파(擊破)하였다.” 하였으며, 또 상고하건대,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낙랑군(樂浪郡)은 산의 둘레를 따라 성바퀴를 삼았는데, 남쪽으로 패수 가에 임하였다.” 하고, 또 이르기를, “등주(登州)에서 동북쪽으로 해행(海行)하여 남쪽으로 바닷가를 끼고 패강(浿江) 어귀의 초도(椒島)를 지나서 신라(新羅)의 서북(西北)을 얻었다.” 하였고, 또 수 양제(隋煬帝)의 동정 조서(東征詔書)에 말하기를, “창해(滄海)를 배로 천리(千里)를 가서 패강을 가로 질러가면 평양에 이른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말하면, 지금의 대동강이 패수가 됨이 명백하다. 그런데, 《문헌통고》에 패수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은 압록강을 가리키어 패수라 한 듯하니, 대개 전해 듣기를 잘못한 것이다.】
호수가 4만 1천 1백 67호, 인구가 10만 5천 4백 44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2천 8백 78명, 익군(翼軍)이 1만 4천 53명, 선군(船軍)이 3천 4백 90명, 수성군(守城軍)이 7백 89명이다.
간전(墾田)은 30만 8천 7백 51결(結)이다.
구실[賦]은 살[稻米]【조미(糙米).】·핍쌀[稷米]·좁쌀[粟米]·기장쌀[黍米]·콩[豆]【대두(大豆).】·보리[麥]【소맥(小麥).】·지마(芝麻)【향명(鄕名)은 참깨[眞荏子]이다.】이다.
공물은 쇠털·말털·개가죽·표범가죽·사슴가죽·노루가죽·여우가죽·삵가죽·수달피(水獺皮)·돈피가죽[貂皮]·날다람쥐가죽[靑鼠皮]·돼지가죽·건녹포(乾鹿脯)·건장포(乾獐脯)·건저포(乾猪脯)·정향포(丁香脯)·숭어·민어·상어·조기·가물치[加火魚]·준치[淮魚]·넙치[廣魚]·오징어·큰새우·굴·족제비털[黃毛]·산양이뿔[羚羊角]·돼지쓸개·고슴도치쓸개·옻[漆]·지마유(芝麻油)【향명(鄕名)은 참기름[眞油]이다.】·차조기기름[蘇子油]·석밀(石蜜)·꿀[蜂蜜]·밀[黃蠟]·지초(芝草)·오미자·개암열매[榛實]·잣·느타리[眞茸]·싸리버섯[鳥足茸]·잇[紅花]이다.
약재(藥材)는 곰쓸개[熊膽]·녹각교(鹿角膠)·사향(麝香)·범의 정강이뼈[虎脛骨]·소유(酥油)·녹용(鹿茸)·말벌집[露蜂房]·뱀허물[蛇脫皮]·자라껍데기[鱉甲]·죽대뿌리[黃精]·감출(甘朮)·승검초뿌리[當歸]·족도리풀뿌리[細辛]·삽주덩이뿌리[白朮]·바곳뿌리[草烏頭]·외나물뿌리[地楡]·구리때뿌리[白芷]·도라지[桔梗]·마[薯藇]·백부자(白附子)·멧무릅뿌리[獨活]·회초미뿌리[貫衆]·쪽[藍]·옻[漆]·두여머조자기뿌리[天南星]·창포(菖蒲)·여로(䕡蘆)·범부채뿌리[射干]·할미씨깨비[白頭翁]·쓴너삼[苦蔘]·함박꽃뿌리·끼무릇뿌리[半夏]·질경이씨[車前子]·소루쟁이뿌리[羊蹄根]·속새[木賊]·칡뿌리[葛根]·검화뿌리껍질[白鮮皮]·쥐방울[馬兜苓]·오독도기[茹]·버들옷[大戟]·꼭두서니뿌리[茜草根]·쇠귀나물[澤瀉]·탱알[紫莞]·생진주봉[生菴]·들쑥[蒿]·나마(蘿麻)·붓꽃[馬藺]·과남풀[龍膽]·삽주뿌리[蒼朮]·끼절가리뿌리[升麻]·현호색(玄胡索)·계소(鷄蘇)·꽈리[酸漿]·새삼씨[兎絲子]·겨우살이덩굴[忍冬草]·자리공뿌리[商陸]·쇠무릎지기[牛膝]·산해박[徐長卿]·더위지기[茵陳]·단너삼뿌리[黃耆]·나리[百合]·바디나물뿌리[前胡]·배암도랏씨[蛇床子]·벳미나리[小柴胡]·칡꽃[葛花]·대왕풀[白芨]·병풍나물뿌리[防風]·애기풀[遠志]·한삼덩굴[葎草]·감데뿌리[虎杖根]·암눈비앗씨[蔚子]·더덕[沙蔘]·제로기뿌리[薺苨]·수뤼나물[葳靈仙]·인삼·북나무진[安息香]·오갈피[五加皮]·황경나무껍질[黃蘗皮]·복령(茯苓)·삿갓나물[蚤休]·철쭉꽃[躑躅]·뽕나무뿌리껍질[桑白皮]·느릅나무껍질[楡皮]·엄나무껍질[海東皮]·가위톱[白歛]·아관석(鵝管石)·산이스랏씨[郁李仁]이다.【이상의 잡공(雜貢) 및 약재는, 이제 토산(土産)의 희귀(稀貴)한 것은 각읍(各邑)의 밑에 적고, 그 매읍(每邑) 마다의 소산(所産)으로 여기에 적힌 보통의 것은 다시 적지 아니한다.】
재배하는 약재는 궁궁이[芎藭]·장군풀[大黃]·삼씨[麻子]·정가이삭[荊芥穗]·참외꼭지[眞苽蔕]·새박뿌리[何首烏]·연밥[蓮實]·복숭아씨[桃仁]·살구씨[杏仁]이다.【이상의 약재는 각읍(各邑)의 풍토(風土)에 맞는 것에 따라 의원(醫員)으로 하여금 심어 가꾸게 한다. 원래 산이나 들에서 나는 것이 아니므로, 다 적지 아니하였다. 무릇 한 물건인데도 전부(田賦)에 거듭 나오고, 토공(土貢)이나 약재(藥材) 같은 것도 자못 많으므로, 이제 그 중요한 것을 좇아서, 꿀[蜂蜜]·밀[黃蠟] 따위 같은 것은 다만 토공에 적고 인삼·오미자 따위는 다만 약재에만 적어서 다시 거듭 나오게 하지 아니하였다.】
옛 장성[古長城]【세속에서 전하기를,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하는데, 인산군(麟山郡) 서쪽 진병곶강(鎭兵串江)으로부터 쌓기 시작하여 의주(義州) 남쪽을 지나서 삭주(朔州)·창성(昌城)·운산(雲山)·영변(寧邊)에 연하여 뻗치고, 희천(熙川) 동쪽의 옛 맹주(孟州) 지경에 이르며, 함길도 정평(定平) 지경에 닿았다.】
창고(倉庫), 각 고을 조세(租稅)는 모두 본고을 창고에 수송하며, 오직 의주창(義州倉)만이 용천(龍川)·인산(麟山)의 조세를 거두어 저장한다.
관방비어(關防備禦), 평양도(平壤道)의 중(中)·좌(左)·우(右)의 삼익군(三翼軍)이 5천 6백 72명, 의주도(義州道)의 삼익군(三翼軍)이 1천 7백 68명, 영변도(寧邊道)의 삼익군(三翼軍)이 3천 3백 37명, 삭주도(朔州道)의 삼익군(三翼軍)이 1천 5백 35명, 강계도(江界道)의 삼익군(三翼軍)이 1천 7백 41명이다.
평양도 수군 첨절제사(平壤道水軍僉節制使)가 거느린 병선(兵船)이 11척, 군사가 1천 명인데, 삼화(三和) 범도포(凡島浦)에 있고, 안주도 첨절제사(安州道僉節制使)가 거느린 배가 15척, 군사가 1천 3백 80명인데, 안주(安州) 노근강(老斤江)에 있으며, 의주도 첨절제사(義州道僉節制使)가 거느린 배가 15척이요, 군사가 1천 1백 명인데, 선천(宣川) 선사포(仙槎浦)에 있다.
증산(甑山)의 차여현(車餘峴), 함종(咸從)의 차유구리(車踰仇里), 삼화(三和)의 대령산(大嶺山), 용강(龍岡)의 신덕산록(新德山麓), 숙천(肅川)의 대산(代山) 및 여외립소(餘外立所), 안주(安州)의 입석(立石), 정주(定州)의 이석 팔래리(李石八來里), 곽산(郭山)의 능한성(凌漢城) 밑 우동(牛洞), 인산(麟山)의 숙랑천(宿狼遷) 및 북산(北山), 수천(隨川)의 와요구(瓦窰丘), 용천(龍川)의 장안봉(長安峯)【위의 13소(所)는 왜적의 변이 있으면 수어(守禦)한다.】
이산 봉화대(理山烽火臺)·도을한(都乙漢)·앙토리(央土里)·산양회(山羊會)·통건(通巾)·벽동(碧潼)·호조리(胡照里)·군내구자(郡內口子)·대파아(大波兒)·아이(阿耳)와【이상의 10구자(口子).】 강계 읍성(江界邑城)·여연 읍성(閭延邑城)【위의 처(處)는 겨울철 얼음이 얼 때에만 수어(守禦)하니,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의 방추(防秋)와 같다.】
창성(昌城)의 실호리(失號里)·창주구자(昌州口子)·갑암(甲岩)·운두리(雲頭里)·여연(閭延)의 소보이(小甫伊)·조명간동(趙明干洞)【위의 6구자(口子)는 겨울철이면 규망군(窺望軍)이 있다.】
요해처(要海處)는 압록강(鴨綠江)·박주강(博州江)·청천강(淸川江)·대동강(大同江), 여연(閭延)의 나이내동(羅伊乃洞)·감음동(甘音洞)·주사동(朱沙洞)·어용괴(於用怪), 강계(江界)의 만포(滿浦)·고산리(高山里)·지령괴(知寧怪), 벽동(碧潼)의 여시산(餘侍山)·채가동(蔡家洞)·창포(倉浦)·벽단구자(碧團口子), 의주(義州)의 금동전(金洞田)·청수(靑水)·낙태탄(駱駄灘)·구령(仇寧)·검동도(檢洞島)·암림곶(暗林串)·미륵당(彌勒堂)·구룡연(九龍淵)·삼기이(三岐伊)·고동(庫洞)·중오강(中吾江)·수구(水口)·방산구자(方山口子), 용천(龍川)의 진곶(辰串)·오도곶(五道串)·소위포(少爲浦)·석곶입소(石串立所), 곽산(郭山)의 석포(石浦)이다.
목장(牧場)이 1이니, 목미도(牧美島)이다.【선천(宣川).】
관로(館路)는 찰방(察訪)이 1인이며, 관할 관[所管館]이 13이다.【생양(生陽)·대동(大同)·안정(安定)·숙령(肅寧)·안흥(安興)·가평(嘉平)·신안(新安)·운흥(雲興)·임반(林畔)·차연(車輦)·양책(良策)·소곶(所串)·의순(義順).】
【원전】 5 집 682 면


 
확대원래대로축소
 지리지
세종 지리지 / 함길도

◈ 함길도(咸吉道)
함길도는 본래 고구려의 고지(故地)이다. 고려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경내(境內)를 나누어 10도(道)로 하고, 동계(東界)로써 삭방도(朔方道)를 삼았는데, 함주(咸州) 이북이 동여진(東女眞)에게 함몰되어 예종(睿宗) 2년 정해【송나라 휘종(徽宗) 대관(大觀) 원년(元年).】에 중서 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윤관(尹瓘)을 원수(元帥)로 삼고,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군사 17만을 거느리고 동여진을 쳐서 몰아내고, 함주(咸州)에서 공험진(公險鎭)에 이르기까지 9성(九城)을 쌓아서 경계를 정하고, 비석(碑石)을 공험진의 선춘령(先春嶺)에 세웠다. 사신을 보내어 요(遼)나라에 알리니, 천조제(天祚帝)가 회답하여 조칙(詔勅)하기를, “경(卿)은 황가(皇家)를 호위[藩衛]하여 해표(海表)를 진무(鎭撫)하고, 정토(征討)를 오로지하여 직분(職分)을 지켜, 도적을 쳐부수는 데 노고가 있도다. 싸움에 이김으로 인하여 항복을 받고, 드디어 강토(疆土)를 넓혀서 보루(堡壘)를 두어 이에 오로지 시설(施設)하니, 서로 화평하게 지냄이 편의할 것이로다. 지난번에 사신을 보내어 먼 곳까지와서 승첩(勝捷)을 알리니, 길이 찬미(讚美)를 할 만하므로, 진실로 위로하는 바이다.” 하였다. 고종(高宗) 45년 무오(戊午)에【남송(南宋) 이종(理宗) 보우(寶祐) 6년.】 몽고병(蒙古兵)이 와서 용진(龍津)을 침범하니, 본현(本縣) 사람 조휘(趙暉)와 정주(定州) 사람 탁청(卓靑)이 반(叛)하여 화주(和州) 이북 땅을 가지고 몽고에 귀부(歸附)하매, 몽고에서 쌍성 총관부(雙城摠管府)를 화주에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摠管)으로 삼고, 탁청을 천호(千戶)로 삼았다. 이 뒤에 또 원나라에 속(屬)하였다. 공민왕(恭愍王) 5년 병신(丙申)에【원(元)나라 순제(順帝) 지원(至元) 16년.】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보내어 화주(和州) 이북의 여러 성(城)을 수복(收復)하여 동북면(東北面)이라 하였다. 본조(本朝) 태종 13년 계사에 이르러【명(明)나라 태종(太宗) 영락(永樂) 11년.】 관내(管內)에 영흥(永興)·길주(吉州)가 있다 하여, 영길도(永吉道)로 고치었고, 16년 병신【영락 14년.】에 영흥부(永興府)를 강등시켜 화주목(和州牧)으로 삼고, 함주목(咸州牧)을 승격시켜 함흥부(咸興府)로 삼았다가, 곧 함길도로 고쳤다.
동쪽은 큰 바다[大海]에 임하고, 남쪽은 철령(鐵嶺)에 닿고, 서쪽은 황해도와 평안도에 접(接)하였다. 준령(峻嶺)이 백두산(白頭山)에서부터 기복(起伏)하여 남쪽으로 철령(鐵嶺)까지 뻗쳐 있어, 천여 리에 긍(亘)한다. 북쪽은 야인(野人)의 땅에 연하였는데, 남쪽은 철령으로부터, 북쪽은 공험진(公險鎭)에 이르기까지 1천 7백 여 리이다. 동쪽과 서쪽으로 큰 산과 큰 바다 사이에 끼어 있어서, 〈그 땅의〉 넓고 좁은 것이 같지 아니하여, 어떤 데는 수백여 리가 되고, 어떤 데는 6, 70리가 되는데, 오직 갑산(甲山)만이 큰 산의 서북쪽 바깥으로 쑥 들어가 있다.
관할[所管]은 유수부(留守府)가 1이요, 대도호부(大都護府)가 1이요, 목(牧)이 1이요, 도호부(都護府)가 4이요, 군(郡)이 7이요, 현(縣)이 1이다. 계수관(界首官)이 4이니, 함흥(咸興)·영흥(永興)·안변(安邊)·길주(吉州)이다.
명산(名山)은 비백산(鼻白山)이 정평부(定平府) 서북쪽 백 리쯤에 있고 백산(白山)이 경성군(鏡城郡) 서쪽에 있고, 오압산(烏鴨山)이 안변부(安邊府) 동쪽에 있다.
대천(大川)은 두만강(豆滿江)이 경원부(慶源府) 동북쪽에 있고, 용흥강(龍興江)이 영흥부(永興府) 동쪽에 있다.
호수가 1만 4천 7백 39호요, 인구가 6만 6천 9백 78명이다.
군정(軍丁)은 익속군(翼屬軍)이 4천 4백 72명이요, 선군(船軍)이 9백 69명이요, 수성구(守城軍)이 5백 16명이다.
간전(墾田) 13만 4백 13결이다.【밭이 12만 3천 7백 42결 남짓하고, 논이 6천 6백 70결 남짓하다.】
그 부세(賦稅)는 쌀[稻米]【조미(糙米).】콩[黃豆]·보리[麥]【대맥(大麥)·소맥(小麥).】·좁쌀[粟米]이다.【본도(本道)의 부세는 모두 그 읍(邑)의 군창(軍倉)에 바치어 완급(緩急)한 양식[糧餉]에 대비한다.】
공물(貢物)은 표범가죽·금·곰가죽·아양사슴가죽[阿羊鹿皮]·노루가죽·삵괭이가죽·여우가죽·표범가죽·여우꼬리·사슴뿔·아양사슴뿔·소유(酥油)·밀[黃蠟]·말린 돼지고기[乾猪]·대구·연어·고등어·전복·미역·다시마[多絲]·곤포(昆布)·해태(海帶)·녹반(綠磻)·잇·지초·벚나무껍질이다.
약재는 곰쓸개·녹용·사향(麝香)·우황(牛黃)·호경골(虎脛骨)·굴조개[牡蠣]·말벌집·송진·안식향(安息香)·오배자(五倍子)·오미자·측백나무열매·산이스랏씨·살구씨·가래열매[椒實]·복령·철쭉·오갈피·모란뿌리껍질[牧丹皮]·뽕나무뿌리껍질[桑白皮]·솜대잎[淡竹葉]·물푸레나무껍질[榛皮]·느릅나무껍질[楡皮]·황경나무껍질[蘗皮]·마뿌리[山藥]·작약(芍藥)·당귀(當歸)·두릅뿌리[獨活]·버들옷[大戟]·장군풀[大黃]·삽주뿌리[蒼朮]·삽주덩이뿌리[白朮]·대왕풀[白芨]·구리때뿌리[白芷]·쇠귀나물[澤寫]·도라지[桔梗]·오독도기[茹]·쪽[藍]·칠(漆)·등대풀싹[澤漆]·자리공뿌리[商陸]·회초미뿌리[貫衆]·수뤼나물[威靈仙]·산해박[徐長卿]·병풍나물뿌리[防風]·댕댕이덩굴[防己]·검산풀뿌리[續斷]·삿갓나물[蚤休]·가위톱뿌리[白歛]·나리뿌리[白合]·족두리풀뿌리[細辛]·끼무릇뿌리[半夏]·범부채[射干]·한눌타리뿌리[括樓]·들깨껍질[白蘇皮]·괴좆나무뿌리껍질[地骨皮]·질경이씨[車前子]·흰바곳[白附子]·고무딸기열매[覆盆子]·두루미냉이씨[葶子]·새삼씨[兎絲子]·암눈비앗씨[蔚子]·수해자좆뿌리[天麻]·끼절가리뿌리[升麻]·창포(菖蒲)·더위지기[茵陳]·부들꽃[蒲黃]·연밥[蓮子]·바디나물뿌리[前胡]·멧미나리[柴胡]·호본(蒿本)·망초뿌리[秦]·탱알[紫莞]·과남풀[龍膽]·쇠무릎지기[牛膝]·개구리밥[水萍]·속새[木賊]·박새[藜蘆]·절국대[漏蘆]·칡꽃[葛花]·매자기뿌리[京三稜]·바곳[草烏頭]·갈뿌리[蘆根]·칡뿌리[葛根]·수자해좆싹[赤箭]·현호색(玄胡索)·할미꽃뿌리[白頭翁]·소루쟁이[羊蹄]·붓꽃[馬藺]·쥐참외뿌리[土瓜]·외나물뿌리[地楡]·도꼬마리[蒼茸]·현삼(玄蔘)·쓴너삼[苦蔘]·인삼·꼭두서니뿌리[茜草]·한삼덩굴[葎草]·진득찰[稀簽]·마디풀[篇蓄]·하눌타리뿌리가루[天花粉]·두여머조자기[天南星]이다.【이상의 잡공(雜貢) 및 약재(藥材)는 이제 토산(土産)으로서 희귀(稀貴)한 것은 각 읍(邑)의 아래에다 적고, 그 매 읍(邑)마다 생산되는 것은 다만 여기에만 적고 〈각 읍의 아래에는〉 다시 적지 아니한다.】
재배[種養]하는 약재는 감국(甘菊)·우엉[惡實]·삼꽃[麻花]·궁궁이[芎藭]이다.【이상의 약재(藥材)는 각 읍(邑)의 풍토(風土)에 알맞은 데 따라 의원(醫院)으로 하여금 심어서 기르게 한다. 이것은 원래 산이나 들에서 나는 것이 아니므로, 모두 각 읍(邑)의 아래에 적지 아니한다.】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의 관청은 길주(吉州)에 설치하였다. 낭성포 등처 수군만호(浪城浦等處水軍萬戶)의 관할[所管]이 3이니, 낭성포가 안변부(安邊府)에 있고,【병선이 9척이요, 군사가 3백 30명이다.】 조지포(曹至浦)가 용진현(龍津縣)에 있고,【병선이 5척이요, 군사가 1백 20명이다.】 임성포(林城浦)가 영평부(永平府)에 있다.【병선이 7척이요, 군사가 2백 2명이다.】 도안포 등처 수군만호(道安浦等處水軍萬戶)의 관할이 2이니, 도안포(道安浦)가 예원군(預原郡)에 있고,【병선이 16척이고, 군사가 3백 50명이다.】 장자지(長者池)가 북청부(北靑府)에 있다.【병선이 4척이고 군사가 67명이다.】
경원부 성(慶源府城)의 수어군(守禦軍)이 2천 3백 55명이요,【본부(本府)의 군사가 3백 59명이요, 함흥(咸興)의 군사가 6백 60명이요, 북청(北靑)의 군사가 5백 9명이요, 단천(端川)의 군사가 3백 20명이요, 길주(吉州)의 군사가 5백 7명이다.】 용성 목책(龍城木柵)의 수어군(守禦軍)이 1천 9백 18명이다.【경성(鏡城)의 군사가 2백 99명이요, 안변(安邊)의 군사가 2백 59명이요, 의천(宜川)의 군사가 70명이요, 문천(文川)의 군사가 74명이요, 용진(龍津)의 군사가 31명이요, 고원(高原)의 군사가 1백 76명이요, 영흥(永興)의 군사가 6백 40명이요, 예원(預原)의 군사가 71명이요, 정평(定平)의 군사가 2백 98명이다.】
감목관(監牧官)이 1인이요, 역승(驛丞)이 3인이다. 고산도(高山道)의 관할 역(驛)이 18이요,【신역(新驛)·남산(南山)·삭안(朔安)·신풍(新豊)·요지(要知)·화등(火燈)·장정(長汀)·상음(霜陰)·봉룡(奉龍)·조양(照陽)·조동(朝東)·철관(鐵關)·장부(長富)·고종(高宗)·덕녕(德寧)·통달(通達)·거방(巨防)·화원(和原)이다.】 동기도(東岐道)의 관할 역이 13이요,【장천(長川)·다포대(多浦台)·주천(酒泉)·거천(巨川)·평원(平原)·덕산(德山)·신은(新恩)·평포(平浦)·오천(五川)·거산(居山)·제인(濟人)·허천(虛川)·우음대(亐音代)이다.】 시리도(施利道)의 관할 역이 14이다.【곡구(谷口)·기원(碁原)·마곡(磨谷)·하오(河吾)·상가사(尙家舍)·영동(嶺東)·임명(臨溟)·웅평(雄平)·약수(藥水)·명원(明原)·주촌(朱村)·오촌(吾村)·수성(輸城)·회수(懷綏)이다.】
【원전】 5 집 693 면

 

 
 
 세종
확대원래대로축소
 지리지
세종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진주목(晉州牧)
백제 거렬성(居列城)인데, 신라 문무왕 2년 계해에【바로 당 고종(唐高宗) 용삭(龍朔) 3년이다.】 이를 탈취하여 주(州)를 만들고, 신문왕(神文王) 4년 을유에【바로 당(唐)나라 수공(垂拱) 원년이다.】 거렬주(居列州)를 올려서 청주(箐州)로 하고 총관(摠管)을 두었으며,【거렬(居列)은 일명(一名) 거타(居陁)라고도 한다.】 경덕왕이 강주(康州)로 고치고, 혜공왕(惠恭王)이 다시 청주(箐州)로 하였다. 고려 태조가 또 강주(康州)로 고쳤고, 성종 2년 계미에 처음으로 12목(牧)을 두었으니, 바로 그 하나이다. 을미년에 12주(州)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이름을 진주 정해군 절도사(晉州定海軍節度使)로 하였는데, 현종 3년 임자에 절도사(節度使)를 폐하고 안무사(按撫使)로 고쳤다가, 무오년에 진주목(晉州牧)으로 정하여 8목(牧)의 하나로 삼았다. 본조(本朝) 태조 원년 임신에 현비(顯妃) 강씨(康氏)의 내향(內鄕)인 까닭으로 올려서 진양 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를 삼았고, 태종 2년 임오에 도로 진주목(晉州牧)으로 하였다. 속현(屬縣)이 3이니, 반성(班城),【삼국 시대의 칭호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영선(永善)은 본디 일선현(一善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상선(尙善)으로 고쳐서 고성군(固城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악양(岳陽)은 본디 소다사현(小多沙縣)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하동군(河東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위의 세 현은 현종 무오년에 모두 본주(本州) 임내(任內)에 붙였다.】 부곡(部曲)이 2이니, 화개곡(花開谷)·살천곡(薩川谷)이다.【위의 두 부곡의 장(長)은 모두 머리를 깎아서 ‘승수(僧首)’라고 일컬었는데, 방언(方言)의 소리가 변하여 지금은 시내(矢乃)가 되었다.】
명산(名山)은 지리산(智異山)이 주(州) 서쪽에 있다.【일명(一名) 두류산(頭流山)이다. 대천왕사(大天王祠)가 있다.】 옥산(玉山)은 주(州) 서쪽에 있다.【가뭄을 만날 때마다 산 위에서 제사를 베풀고 섶[柴]을 태우면, 곧 비가 온다.】 본주(本州)의 성황(城隍)【국초(國初)에는 춘추(春秋)로 향과 축문을 내려서 제사를 행하였는데, 지금은 다만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행하게 한다.】 대천(大川)은 남강(南江)과【그 근원이 둘이니, 하나는 지라산 북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와, 주(州) 서쪽에서 합류하여 동남쪽으로 흐른다.】 두치진(豆恥津)이다.【그 근원이 둘이니, 하나는 지리산 서남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전라도 구례(求禮)에서 나온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함안(咸安)에 이르기 46리, 서쪽으로 전라도 구례(求禮)에 이르기 1백 2리, 남쪽으로 고성(固城)에 이르기 45리, 북쪽으로 진성(珍城)에 이르기 28리다.
본주(本州)의 호수는 1천 6백 28호, 인구가 5천 9백 6명이요, 반성(班城)의 호수는 2백 77호, 인구가 6백 87명이요, 영선(永善)의 호수는 2백 54호, 인구가 7백 48명이요, 악양(岳陽)의 호수는 60 단(單) 1호, 인구가 1백 80 단(單) 1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백 74명, 영진군(營鎭軍)이 1백 88명, 선군(船軍)이 9백 75명이다.
본주(本州)의 토성(土姓)이 4이니, 정(鄭)·하(河)·강(姜)·소(蘇)이요, 입주(立州) 후(後)의 성(姓)이 3이니, 유(柳)·임(任)·강(康)이며, 속성(續姓)이 2이니, 김(金)【예주(禮州)에서 왔다.】·박(朴)【근본은 알 수 없다.】 이다. 반성(班城)의 성이 4이니, 옥(玉)·성(成)·형(邢)·주(周)이요, 속성이 1이니, 김(金)이다.【고성(固城)에서 왔다.】 영선(永善)의 성이 3이니, 임(林)·임(任)·양(陽)이요, 악양(岳陽)의 성이 5이니, 도(陶)·오(吳)·임(任)·손(孫)·박이며, 속성이 1이니, 김이다.【김해에서 왔다. 이상 세 현의 속성은 지금 모두 향리가 되었다.】 없어진 복산(福山)·송자(松慈) 2향(鄕)의 성이 1이니, 문(文)이다. 인물(人物)은 지중추원사 병부 상서(知中樞院事兵部尙書) 강민첨(姜民瞻)【고려 현종 때 사람이다.】·영의정부사 진산 부원군 문충공(領議政府事晉山府院君文忠公) 하윤(河崙)【본조 태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였다. 묘(墓)는 주(州)에서 25리 동쪽 동방산(桐旁山)에 있다.】 이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풍속은 부유하고, 화려함을 숭상한다. 간전(墾田)이 1만 2천 7백 30결이다.【논이 조금 적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조·메밀·감·배·석류·뽕나무·삼[麻]·목면(木綿)이요, 토공(土貢)은 꿀·밀[黃蠟]·녹포(鹿胞)·문어·은구어·표고버섯·석이(石茸)·송이버섯·지초·작설다(雀舌茶)·자리[席]·죽피방석(竹皮方席)·가는 대[篠]·왕대[簜]·칠·종이·돼지털·사슴가죽·노루가죽·여우가죽·수달피(水獺皮)·산달피(山獺皮)이며, 약재(藥材)는 천문동(天門冬)이요, 토산(土産)은 우무[牛毛]·세모(細毛)·청각(靑角)·미역·해삼이다. 어량(魚梁)이 2이니, 하나는 김양촌(金陽村)에 있고, 하나는 강주포(江州浦)에 있다. 염소(鹽所)가 1이니, 곤양(昆陽) 경계에 있다.【본주 사람이 내왕하면서 구워 온다.】 자기소(磁器所)가 3이니, 하나는 주(州) 북쪽 목제리(目堤里)에 있고, 하나는 주(州) 서쪽 중전리(中全里)에 있고, 하나는 주(州) 동쪽 월아리(月牙里)에 있다.【모두 하품이다.】 도기소(陶器所)가 2이니, 하나는 주(州) 동쪽 유등곡(柳等谷)에 있고, 하나는 주(州) 남쪽 반룡진(盤龍津)에 있다.【오로지 누른 옹기만을 만드는데, 하품이다.】
읍 석성(邑石城)【둘레가 2천 6보인데, 안에 못이 3, 우물 3이 있다.】 송대산 석성(松臺山石城)은 주(州) 동쪽 35리에 있다.【높고 험하며, 둘레가 7백 6보인데, 안에 샘 2가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봉명루(鳳鳴樓)는 객사(客舍) 남쪽에 있고, 촉석루(矗石樓)는 용두사(龍頭寺) 남쪽 돌벼랑[石崖] 위에 있다. 역(驛)이 10이니, 조촌(村)·평거(平居)·정수(正守)·평사(平沙)·소남 신역(召南新驛)·금량 신역(金良新驛)·말문 신역(末文新驛)【모두 주(州) 경계에 있다.】·영선 신역(永善新驛)·부다(富多)【반성(班城)에 있다.】·신역(新驛)이 주(州) 경계에 있다. 적량(赤梁)은 주(州) 서쪽 창선도(彰善島)에 있다.【주(州)에서 80리 거리인데 수군 만호가 수어한다.】 봉화가 5곳이니 망진산(望津山)은 주(州) 남쪽에 있다.【남쪽으로 사천(泗川) 성황당(城隍堂)에 응하고, 북쪽으로 광제산(光濟山)에 응한다.】 광제산(光濟山)【북쪽으로 단계현(丹溪縣) 입암(笠岩)에 응한다.】 각산향 주산(角山鄕主山)은 주(州) 남쪽에 있다.【동쪽으로 고성(固城) 좌이산(佐耳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사천(泗川) 침지(針枝)에 응하며, 남쪽으로 금량 부곡(金良部曲) 양둔산(陽芚山)에 응한다.】 양둔산(陽芚山)【남쪽으로는 남해도(南海道) 망운산(望雲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본주(本州) 계화산(桂花山)에 응한다.】 계화산(桂花山)【서쪽으로 전라도 건대산(件代山)에 응한다.】 단속사(斷俗寺)는 주(州) 서쪽 42리에 있고,【선종(禪宗)에 속하며, 급전(給田)이 1백 50결이다. 절에 《한창려집(韓昌黎集)》 및 고려 《이상국집판(李相國集板)》 판(板)이 있다.】 쌍계사(雙溪寺)는 주(州) 서쪽 화개곡(花開谷)에 있다.【전우(殿宇)는 허물어졌고 신라 때에 창건한 조사전(祖師殿)만이 있다. 절 앞에 문(門)처럼 생긴 돌이 있는데, 최치원이 그 위에 쓰기를, “쌍계석문(雙溪石門)”이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어제 쓴 것과 같이 분명하다. 동변(東邊)의 한 돌에는 ‘쌍계’ 두 자를 새기고, 서변(西邊)의 한 돌에는 ‘석문’ 두 자를 새겼다.】 흥선도(興善島)는 본디 고려 유질 부곡(有疾部曲)인데, 뒤에 창선현(彰善縣)으로 고쳐서 진주(晉州) 임내(任內)에 붙였고, 충선왕(忠宣王) 초에 왕의 혐명(嫌名)을 피하여 흥선(興善)으로 고쳤는데, 왜적으로 인해 인물(人物)이 전망(全亡)한 까닭으로 지금은 직촌(直村)을 삼았다. 수로(水路)로 10리이다.【백성들이 내왕하면서 농사를 짓는다.】
관할[所領]은 도호부(都護府)가 2이니, 김해(金海)·창원(昌原)이요, 군(郡)이 3이니, 함안(咸安)·함양(咸陽)·곤남(昆南)이며, 현(縣)이 12이니, 고성(固城)·거제(巨濟)·사천(泗川)·거창(居昌)·하동(河東)·진성(珍城)·칠원(漆原)·산음(山陰)·안음(安陰)·삼가(三嘉)·의령(宜寧)·진해(鎭海)이다.
【원전】 5 집 649 면


[주D-001]혐명(嫌名) : 이름과 음이 비슷한 것.
 
세종
확대원래대로축소
 지리지
세종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의령현

◎ 의령현(宜寧縣)
본디 장함현(獐含縣)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함안군(咸安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 현종 무오년에 진주(晉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공양왕 경오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고, 신번현(新繁縣)을 이에 붙였다. 속현(屬縣)이 1이니, 신번현(新繁縣)이다. 이는 본디 신이현(神尔縣)인데,【주오(朱烏)라고도 하고, 천천(泉川)이라고도 한다.】 경덕왕이 이름을 의상(宜桑)으로 고쳐서 강양군(江陽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 무오년에 합주(陜州) 임내(任內)에 붙였었다. 부곡(部曲)이 1이니, 정골(正骨)이요,【예전에는 곤명(昆明)에 속하였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직촌(直村)이 되었다.】 향(鄕)이 1이니, 지산(砥山)이다.【예전에는 곤명에 속하였었는데, 지금은 망하고 직촌이 되었다.】
자굴산(闍崛山)은 현 북쪽에 있고, 정암진(鼎巖津)은 현 남쪽에 있다.【진주(晉州) 남강(南江)의 하류이다. 나룻배가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초계(草溪)에 이르기 46리, 서쪽으로 삼가(三嘉)에 이르기 29리, 남쪽으로 진주(晉州)에 이르기 24리, 북쪽으로 합천(陜川)에 이르기 18리이다.
본현의 호수는 5백 4호, 인구가 1천 6백 29명이요, 신번(新繁)의 호수는 5백 55호, 인구가 9백 82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50명, 영진군(營鎭軍)이 70명, 선군(船軍)이 3백 27명이다.
본현의 토성(土姓)이 4이니, 남(南)·심(沈)·여(余)·옥(玉)이요, 속성(續姓)이 3이니, 임(林)·김(金)·강(姜)이며,【모두 근본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지금은 향리가 되었다.】 신번(新繁)의 성이 5이니, 진(陳)·서(徐)·임(任)·석(石)·오(吳)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김(金)이며,【근본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지금은 향리가 되었다.】 정골(正骨)의 성이 1이니, 옥(玉)이요, 내성(來姓)이 3이니, 강(姜)·유(柳)【모두 진주(晉州)에서 왔다.】·조(趙)【함안(咸安)에서 왔다.】 이며, 지산(砥山)의 성이 1이니, 여(余)요, 없어진 소(所)인 저지(楮旨)의 성이 1이니, 박(朴)이다. 인물(人物)은 좌의정 충경공(左議政忠景公) 남재(南在)와 참찬문하부사 강무공(參贊門下府事剛武公) 남은(南誾)이다.【형제가 함께 개국 공신(開國功臣)으로서 본조(本朝)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3천 5백 58결이다.【논이 3분의 2에 약하다.】 토의(土宜)는 벼·조·보리·뽕나무·삼[麻]·모시[苧]·목면[木綿]·감·배이요, 토공(土貢)은 꿀·밀[黃蠟]·지초·가는 대·왕대·칠·종이·사슴가죽·노루가죽·여우가죽이며, 약재(藥材)는 맥문동(麥門冬)·속단(續斷)·인삼이며, 토산(土産)은 은구어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본현(本縣) 동쪽 원당리(元堂里)에 있고,【하품이다.】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원당리에 있다.【중품이다.】
역(驛)이 2이니, 지남(知南)【현(縣) 경계에 있다.】·신역(新驛)【신번(新繁)에 있다.】 이요, 봉화가 1곳이니, 가막산(可莫山)이 본현 동쪽에 있다.【남쪽으로 함안(咸安) 소산(所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초계(草溪) 미타산(彌陁山)에 응한다.】
월경처(越境處)는 합천(陜川)의 남촌(南村) 어등화리(於等火里)와 초계(草溪) 다호점리(多乎岾里)가 신번현(新繁縣) 서촌(西村)으로 넘어 들어왔다.
【원전】 5 집 653 면

 
세종
확대원래대로축소
 지리지
세종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전주부(全州府)
윤(尹) 1인, 판관(判官) 1인, 교수관(敎授官) 1인.
본래 백제의 완산(完山)이었는데,【일명 비사벌(比斯伐) 또는 비자화(比自火)라 한다.】 위덕왕(威德王) 원년 을해에【양(梁)나라 간문제(簡文帝) 승성(承聖) 4년.】완산주(完山州)로 하였다가, 11년이 지나서 을유에【진(陳)나라 세조(世祖) 천가(天嘉) 6년.】 주(州)가 폐지되었고, 의자왕(義慈王) 22년 경신에【당나라 고종(高宗) 현경(顯慶) 5년.】 신라 사람들이 당(唐)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백제를 멸하자, 그 땅이 모두 신라에 들어갔으며, 신문왕(神文王) 4년 을유에【당나라 측천(則天) 수공(垂拱) 원년.】 다시 완산주를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 15년 정유에【당나라 숙종(肅宗) 원년.】 전주로 고쳤다. 효공왕(孝恭王) 3년 경신에【당나라 소종(昭宗) 광화(光化) 3년.】 견훤(甄萱)이 완산에 도읍하고 후백제(後百濟)라 하였는데, 고려 태조(太祖) 19년 병신에【후진(後晉) 고조(高祖) 천복(天福) 원년.】친히 백제를 쳐서 이기고 안남 도호부(安南都護府)로 고쳤다가, 23년 경자에【천복(天福) 5년.】 다시 전주로 하였다. 성종(成宗) 12년 계사에【송나라 태종(太宗) 순화(淳化) 4년.】 승화 절도안무사(承化節度按撫使)로 고쳤고, 15년 병신에【송나라 태종(太宗) 지도(至道) 2년.】 전주 순의 군절도사(全州順義軍節度使)로 고쳤고, 현종(顯宗) 9년 무오에【송나라 진종(眞宗) 천희(天禧) 2년.】 안남 대도호부(安南大都護府)로 고쳤고, 13년 임술에【송나라 진종(眞宗) 건흥(乾興) 원년.】전주목(全州牧)으로 고쳤다. 본조(本朝) 태조(太祖) 원년 임신에【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 홍무(洪武) 25년.】 완산부(完山府)로 승격하니, 이씨(李氏)의 본관인 까닭이다. 태종(太宗) 3년 계사에【명나라 태종(太宗) 영락(永樂) 11년.】 전주부(全州府)로 고쳤다. 별호를 승화(承化)·완산(莞山)【고려 성종(成宗) 10년 신묘에 정한 것이다.】 혹은 견성(甄城)이라고 한다.【순화(淳化) 때 정한 것이다.】 고속현(古屬縣)이 4이니, 이성현(伊城縣)은 본래 백제의 두이현(豆伊縣)이었는데, 신라에서 두성현(杜城縣)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이성현으로 고쳤으며, 이성현(利城縣)은 본래 백제의 내리아현(乃利阿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이성(利城)으로 고쳐서 김제(金堤)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전주에 내속(來屬)하였으며, 옥야현(沃野縣)은 본래 백제의 소력지현(所力只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옥야(沃野)로 고쳐서 금마군(金馬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전주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6년 병신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다시 전주에 내속(來屬)하였으며, 우주현(紆州縣)은 본래 백제의 우소저현(于召渚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우주(紆州)로 고쳐서 금마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초에 전주에 내속(來屬)하였다. 향(鄕)이 2이니, 경명(景明)【일명 영명(榮明)이라 한다.】·제견(堤見)이요, 소(所)가 2이니, 두모촌(豆毛村)·양량(陽良)이다.【태종(太宗) 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 윤향(尹向)이 아뢰어서 도(都) 안의 현(縣)·향(鄕)·소(所)·부곡(部曲)들을 모두 본고을에 합쳤다. 지금 고속현(古屬縣)을 적는 것은 뒷날에 참고에 이바지하기 위함이다. 뒤에도 모두 이와 같다.】
대천(大川)은 신창진(新倉津)이다.【주의 북쪽에 있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고산(高山)에 이르기 30리, 서쪽으로 금구(金溝)에 이르기 27리, 남쪽으로 임실(任實)에 이르기 31리, 북쪽으로 여산(礪山)에 이르기 46리이다. 태조 강헌 대왕 진전(太宗康憲大王眞殿)【성 안 동남쪽 모퉁이에 있다.】
호수는 1천 5백 65호요, 인구는 5천 8백 29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77명이요, 진군(鎭軍)이 1백 48명이요, 선군(船軍)이 8백 26명이요, 수성군(守城軍)이 30명이다.
토성(土姓)이 9이니, 이(李)·최(崔)·유(柳)·박(朴)·전(全)·유(庾)·한(韓)·백(白)이요, 내접성(來接姓)이 1이니, 방(房)이요, 속성(續姓)이 4이니, 양(梁)【주계(朱溪)에서 왔다.】·장(張)【결성(結城)에서 왔다.】·김(金) 2【하나는 모평(牟平)에서 왔고 하나는 온 곳을 모르는데, 모두 향리(鄕吏)가 되었다.】이다. 이성(伊城)의 성은 5이니, 조(趙)·배(裴)·장(張)·구(仇)·염(廉)이요, 이성(利城)의 성은 5이니, 이(李)·백(白)·정(鄭)·손(孫)·진(陳)이요, 옥야의 성은 4이니, 장(張)·염(廉)·양(梁)·구(仇)·요, 망성(亡姓)이 1이니, 임(林)이다. 우주(紆州)의 성은 5이니, 박(朴)·이(李)·정(鄭)·황(黃)·최(崔)요, 경명(景明)의 성은 4이니, 김(金)·임(林)·배(裵)·인(印)이요, 두모촌(豆毛村)의 성은 3이니, 책(冊)·최(崔)·이(李)요, 양량(陽良)의 성은 4이니, 백(白)·나(羅)·강(康)·유(劉)이다. 인물(人物)은 예부 낭중(禮部郞中) 최균(崔均)이니, 고려 명종(明宗) 때 사람이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되며, 민간 풍속이 장사[儇利]를 좋아한다. 간전(墾田)이 1만 8천 6백 64결이요,【논이 조금 많다.】 토의(土宜)는 오곡·뽕나무·삼[麻]·목화·감·배[梨]·왕대[簜]이다. 토공(土貢)은 표범가죽·여우가죽·이리가죽·잘[山水獺皮]·종이【표전(表箋)·주본(奏本)·부본(副本)·자문(咨文)·서계(書契) 등의 종이 및 표지(表紙)·도련지(擣鍊紙)·백주지(白奏紙)·유둔(油芚)·세화(歲畫)·안지(眼紙)인데, 도(道) 안에 오직 이 고을과 남원(南原)의 것의 품질이 좋다.】·모시·무늬있는 자리[有文席]·족제비털[黃毛]·칠(漆)·꿀·대추·석류·새앙[薑]【읍(邑)의 사람들이 업(業)으로 삼는다.】이요, 약재(藥材)는 인삼·말오줌나무[蒴藋]·궁궁이[芎藭]·호라비좆뿌리[天門冬]·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패랭이꽃이삭[瞿麥穗]·흰매화열매[鹽梅實]·복령(茯苓)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요,【부의 남쪽 장파곤동(長波昆洞)에 있는데, 중품(中品)이다.】 도기소(陶器所)가 2이다.【부의 서쪽 우림곡(雨林谷)에 있는데 중품(中品)이다.】
읍 석성(邑石城)【둘레가 1천 2백 88보(步)이다.】 고덕산 석성(高德山石成)【둘레가 1천 4백 13보이며, 성안에 샘이 7이 있고, 또 시내가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 역(驛)이 3이니, 반석(半石)·삼례(蔘禮)·앵곡(鷪谷)이요, 요해(要害)가 1이니, 상관동(上館洞) 여현(礪峴)이다.【주(州) 남쪽에서 임실(任實)로 가는 지로(指路)이다.】 큰 방죽[大堤]이 3이니, 상시제(上屎堤)·하시제(下屎堤)·공덕제(孔德堤)이다.
관할[所領]은 군(郡)이 5이니, 진산(珍山)·금산(錦山)·익산(益山)·고부(古阜)·김제(金堤)요, 현(縣)이 11이니, 금구(金溝)·만경(萬頃)·임피(臨陂)·옥구(沃溝)·함열(咸悅)·용안(龍安)·부안(扶安)·정읍(井邑)·태인(泰仁)·고산(高山)·여산(礪山)이다.
【원전】 5 집 655 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