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 의령공 휘 충성 ,지성 등/휘 충성 산당공 관련기록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 기록된 산당공 휘 충성

아베베1 2009. 11. 12. 21:35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남효온(南孝溫) 찬(撰)

○ 김굉필(金宏弼)은 자(字)가 대유(大猷)이며, 점필재(佔畢齋)에게 수업하여 경자년에 생원이 되었다. 나와 동갑인데 생일이 나보다 뒤이다. 현풍(玄風)에 살았는데, 그의 독특한 행실은 비할 데가 없어서 평상시에도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있었으며, 집밖에는 일찍이 읍(邑) 근처에도 나가지 않았다. 손에서 《소학(小學)》을 놓아본 적이 없었고, 파루를 친 뒤에야 침소에 들었으며, 닭이 울면 일어났다. 사람들이 국가 일을 물으면 그는 반드시, “《소학》읽는 아이가 어찌 대의(大義)를 알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글공부가 아직 천기를 알지 못하나 / 業文猶未識天機
《소학》글 가운데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도다 / 小學書中悟昨非
하였다. 점필재 선생이 평하기를, “이는 곧 성인될 바탕이 됨직하니 노재(魯齋) 이후에 어찌 사람이 없다고 하리오.” 하였으니, 그를 추중(推重)함이 이와 같았다.
그는 나이 30이 넘은 후에야 비로소 다른 책을 읽었으며 후진을 가르침에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니, 이현손(李賢孫)ㆍ이장길(李長吉)ㆍ이적(李勣)ㆍ최충성(崔忠成)ㆍ박한공(朴漢恭)ㆍ윤신(尹信)과 같은 이는 다 그의 문하에서 나온 이들로, 그들의 무성한 재질과 독실한 행실은 그의 스승과 같았다. 그는 나이가 많아질수록 도(道)가 더욱 높아졌는데, 세도의 만회하지 못할 것과 도가 행해지지 못할 것을 잘 알고 나서는 빛을 감추고 종적을 흐려버렸으나, 사람들은 또한 이러한 것을 알아주었다.
점필재 선생이 이조 참판이 되어 바른 일을 건의함이 없으매, 대유가 시를 지어 올리기를,
도는 겨울에 갖옷을 입고 여름에 시원한 것을 마시는 데 있거늘 / 道在冬裘夏飮氷
비를 걷고 홍수를 멈추게 함을 어찌 다 잘할 수 있으리오 / 霽行潦止豈全能
난초도 세속에 심으면 결국은 변질되니 / 蘭加從俗終當變
뉘라서 소는 밭을 갈고 말은 타고 다니는 짐승임을 믿어주리까 / 誰信牛耕馬可乘
하였는데, 선생이 시로써 이에 화답하기를,
분수 밖에 벼슬을 하게 되어 경대부 자리에 이르렀으나 / 分外官聯到伐氷
임금을 바르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것 내 어찌 할 수 있겠는가 / 匡君救俗我豈能
교육에 종사하는 후배가 우졸하다고 조롱하지만 / 從敎後輩嘲迂拙
세도와 권리가 구구한 벼슬길은 탈 만한 것이 못 되는구나 / 勢利區區不足乘
하였다. 이는 유쾌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그는 이로부터 점필재와 사이가 좋지 못하게 되었다. 정미년에 부친 상(喪)을 당하여서는 죽만 먹고 너무 슬피 울던 나머지 졸도하였다가 깨어난 일도 있었다.
○ 안우(安遇)는 자(字)가 시숙(時叔)이다. 효행이 그 고을에서 으뜸이었다. 아버지 상중에는 한결같이 《주자가례》를 따랐다. 점필재에게 학업을 닦았으나 얼마 안 되어 벼슬할 마음이 없어져 비로소 점필재와 틈이 났다. 일찍이 향시(鄕試)에 뽑혀 서울로 와서 회시(會試)에 응하려 하였는데, 사관소(四館所)의 연소한 자들이 오만하여, 나이든 지방 학생들을 때리려 하니, 시숙이 말하기를, “어찌 부모께서 물려준 몸을 죄없이 스스로 훼상시키면서까지 명예와 이익을 구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장중에 들어가지도 않고 가버렸다. 그 지조와 절개는 가히 동한(東漢)의 절의에 비할 만하다고 하겠다.
○ 권안(權晏)은 본관이 안동(安東)으로 자는 화청(和淸)이니, 나이는 나보다 20여 세나 위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다행히 죽지 아니하고 말년에 세 익우(益友)를 만났다.” 하였는데, 이는 나와 정중(正中)과 극창(克昌)을 지칭한 것이다. 젊어서 무술에 능하여 별시위(別侍衛)에 소속된 일도 있었다. 사람됨이 청백하여 오능중자(於陵仲子)와 같았고, 산수를 좋아하고 도학과 진리를 좋아하며, 효제충신에 있어서는 그 이상 갈 만한 사람이 없었다. 집이 헐어도 비바람을 가리지 않았고 혹 양식이 떨어져도 그 즐거움은 여전하였으며 짧은 베옷에도 소연하였다. 말년에는 불도(佛道)를 좋아하였다.
○ 정여창(鄭汝昌)은 자가 자욱(自勗)이다.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3년 동안이나 나오지 않고 오경을 닦아 그 깊은 진리를 다 터득하여 체(體)와 용(用)의 근원은 한 가지이지만 갈린 끝이 다른 것을 알았고, 선(善)과 악(惡)의 성(性)은 같으나 기질이 다른 것을 알았고, 유(儒)와 불(佛)의 도(道)는 같으나, 자취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성리학은 성광(醒狂 이심원(李深源)의 호)이 존경하였다. 경자년에 왕이 성균관(成均館)에 하교하여 경전에 밝고 행실을 닦은 유생을 구하였는데, 성균관에서는 자욱이 제일이라 하여 천거하였고, 지관사(知館事) 서거정(徐居正)은 자욱을 경연에 추천하려고 하였으나 자욱이 이를 사양하였다. 계묘년에는 진사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 육을(六乙)이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에 나라를 위하여 죽었는데, 이때 자욱의 나이가 적었으나 거상하는 데 결함이 없었고, 모상(母喪)에도 전례(典禮)의 수(數)나 죽을 먹는 일등을 일체 《가례》에 따랐다. 경술년에 참의 윤긍(尹兢)이 그의 효행과 학문은 사림 중에 으뜸이라고 천거하여 특별히 소격서(昭格署) 참봉을 시켜서 불렀으나 자욱은 글을 올려 면직을 청하였다. 상이 하교하여 그를 포상하니, 명성이 더욱 높았다. 자욱은 성품이 단아하고 정중하며 술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않고 소와 말고기를 먹지 아니하였다. 겉으로는 항상 담담하였으나, 내면으로는 대단히 영리하였다. 젊을 때 성균관에 유생으로 있으면서 사람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는데, 코를 골며 졸았으나 누워 자지는 않았다. 남들이 이것을 모르다가 어느 날 밤 최진국(崔鎭國)의 눈에 띄어서 성균관에 파다하게 소문이 나기를, “정모(鄭某)는 참선을 하고 자지 않는다.” 하였다.
○ 이정은(李貞恩)은 자가 정중(正中)이요, 호는 월호(月湖), 또는 남곡(嵐谷), 혹은 설창(雪窓)이라고도 하였다. 수천 부정(秀川副正)에 배수되었으며, 음를이 세상에 으뜸이어서 슬프게 연주하면 지나가던 행인도 꼭 눈물지을 정도였다. 사람됨이 독실하고 돈후하며 스스로 겸손하고 식견과 도량이 있고 총명하여 학문을 하는 데도 그 이치를 먼저 터득한 후에 문사를 다루어 스승을 수고롭히지 않았고, 시를 지을 때도 그 격식을 먼저 다룬 후에 수사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았고, 덕을 닦는 데 있어서도 마음을 먼저하고 외모를 다음에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고, 행실에 있어서는 그 지위가 높다고 남을 위압하지 아니하고 가장 가난한 선비와 같은 태도를 취하였다.
○ 이분(李坌)은 자가 자야(子野)며, 장안(長安)에 살았다. 어진이와 착한 이를 좋아하고 세력과 이욕에 담백하였으며 시를 잘하였다. 그의 심원한 기틀에 대해서 대유(大猷 김굉필)도 탄복하였다.
○ 노조동(盧祖同)은 자가 공서(公緖)이다. 《소학》 읽기를 좋아하였고, 순서를 밟지 않은 공부나 조롱하는 글이나 과거의 재능 등은 좋아하지 않았다. 법도에 맞는 몸가짐은 거의 대유와 같았으며,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시묘살이 3년 동안 한결같이 《가례》에 의하여 행하였다. 시숙(時叔 안우(安遇))과 함께 점필재(佔畢齋)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는데, 선생도 그를 공경하였다.
○ 정세린(鄭世麟)은 자가 창부(昌符) 이며, 영남에 살았다. 점필재에게 수업하였는데 그 학문은 공서(公緖 노조동)와 같으나, 시에 대한 재주가 월등하였다. 선생도 그를 공경하였는데, 병오년에 죽었으니, 나이 22세였다.
○ 양준(楊浚)은 자가 징원(澄源)이다. 점필재에게 수업하였는데, 속이 깊고 침착하며 도량이 커서 가난하여도 걱정이 없이 도를 즐기기를 담담히 하였다. 또 국량이 웅장하고 깊었으며 외형에 나타나지 않도록 수양을 닦아 총명이 날로 진전하였다. 유림들은 그를 가장 낮게 보았으나 오직 여경(餘慶 홍유손(洪裕孫))만이 그의 인품을 잘 알았다.
○ 김시습(金時習)은 본관이 강릉(江陵)으로, 신라(新羅) 왕족의 후예이다. 나이는 나보다 20세 위로, 자는 열경(悅卿)이며, 호를 동봉(東峯), 또는 벽산청은(碧山淸隱), 또는 청한자(淸寒子)라고 했다. 세종 을묘에 태어났는데, 나이 5세에 문장을 엮을 줄 알았다. 세종이 승정원에 불러들여 시를 짓게 하시고 크게 기특하게 여겨 그 아버지를 불러 이르기를, “이 아이를 잘 기르라. 내가 장차 크게 쓰리라.” 하였다.
을해년에 세조(世祖)가 정권을 잡게 되자, 불문(佛門)에 들어가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수락산(水落山)의 절에 들어가서 불도를 닦고 몸을 수련하였으나, 유생을 보면 말마다 공맹을 칭송하고 불법에 대하여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도 닦는 것을 물으면 그는 또한 말하려 하지 아니하였으며, 어떤 사람이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이 앉아 죽은 일을 들어 말한 일이 있었는데, 그는 대답하기를, “앉아 죽는다는 것은 예(禮)에서 귀히 여기지 않는다. 나는 단지 증자(曾子)의 역책(易簀)자로(子路)가 결영(結纓)하고 죽은 것을 귀한 것으로 알 뿐이요, 그 외는 알지 못한다.” 하였다.
신축(1481, 성종 12) 연간에는 육식을 하고 머리를 길렀다. 글을 지어 조부에 제사하며 말하기를, “삼가 아뢰옵건대, 순제(舜帝)는 오교(五敎)를 펴는 데 유친(有親)을 첫머리에 두었고, 죄를 3천으로 나열하되 불효함을 가장 큰 죄로 여겼습니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살면서 누가 양육의 은혜를 저버리겠나이까. 그러므로 악독한 짐승에는 범과 늑대보다 더함이 없고, 미물의 충성으로는 승냥이와 수달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다 능히 제 어버이를 사랑하는 품성을 온전히 가졌으며 또한 근본에 보답하려는 정성을 삼가 행하였으니, 이는 모두 천리의 원래 그러한 것이요, 물욕이 이를 덮기 어려운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이 미련한 소자도 근본과 지염의 계통을 이어받았으되 젊을 때 이단에 빠져 어리석게도 배우지 아니하였음을 슬퍼하여 장차 도(道)를 닦아 뛰어나보려고 하였으나, 윤회설과 같이 황당함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장년(壯年)에는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다가 늙어서야 비로소 뉘우쳐 예전(禮典)을 상고하고, 성경(聖經)을 찾으며 먼 조상을 추모하는 넓은 의례를 정하고, 가난한 생활을 참작하여 간소하고 깨끗함에 힘쓰고 제수를 차림에 정성으로서 하였나이다. 한무제(漢武帝)는 70세 때에 비로소 전 승상(田丞相)의 말을 깨달았다고 하오며, 원(元) 나라 덕공(德公)은 백 세가 되어서야 허노재(許魯齋)의 풍도에 감화했다고 하나이다.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것을 느끼고 세월의 지나감을 근심하니, 놀라웁고 황공함이 끝이 없어, 한탄함이 자못 많사옵니다. 만일 지난 허물을 씻어서 하늘과 땅 사이에서 용납된다면 행여 면목을 세워서 구천에서 조종을 뵙기를 바라옵니다.” 하였다.
임인년 이후부터는 세상이 쇠하여감을 보고 인간의 일은 하지 아니하고, 여염간에 버려진 사람이 되어 날마다 남과 더불어 장예원(掌隷院)에서 송사를 한 일도 있었고, 어느 날에는 술을 먹고 시가를 자나다가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을 보고 말하기를, “너 같은 놈은 그만두어야 마땅하다.” 하니, 정은 못 들은 척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위험하게 여겨 전에 서로 사귀어 놀던 사람들도 다 절교하고 왕래하지 않았다. 홀로 시정배의 미치광이 같은 아이나 만나 놀며 취하여 길가에 쓰러지고 늘 어리석은 척하며 늘 웃고 지냈다. 뒤에 설악산(雪嶽山)에 들어가기도 하고, 혹 춘천산(春川山)에서 살기도 하여 드나듦이 무상하니, 사람들은 그의 정처를 알지 못하였다. 그가 좋아한 사람은 정중(正中)ㆍ자용(子容)ㆍ자정(子挺)과 나였다. 그가 지은 시문은 수만여 편이나 되었는데,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사이에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다. 조정의 신하들과 선배들이 혹 그의 글을 절취하여 마치 자기의 작품인양 하기도 하였다.
○ 홍유손(洪裕孫)은 자가 여경(餘慶)이요, 호는 조총(篠叢), 또 광진자(狂眞子)라고도 하였다. 남양(南陽) 아전 순치(順致)의 아들로 집안이 대대로 청빈하여 겨우 몸만 감싸고 혹 속옷도 입지 못하고 다녔다. 경전(經典)과 《사기(史記)》를 탐독하면서 기탄없는 행동을 하였으며, 과거에 응시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며 향리를 면할 계획도 하지 않았다. 신축년에 남양 부사 채신보(蔡申甫)가 여경이 글 잘하는 것을 이유로 그 향역(鄕役)을 면제해 주었더니, 그는 곧 걸어서 영남(嶺南)으로 가 점필재(佔畢齋)를 뵙고, 두시(杜詩)를 배웠다. 그때 점필재 선생은, “이 사람은 벌써 안자(顔子)의 즐겨한 바를 본 사람이다.” 하였고, 학자들도 다 그를 존경하였다.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에 들어가 학업을 닦고 서울에 올라와 점필재 선생이 시사(時事)를 건의하지 못함을 간하여, “무엇 때문에 남의 벼슬과 녹을 헛되이 받고 계십니까. 그리고 지금 학자들은 불교나 노장학을 미워하지 않은 바 없으나, 실행에 있어서 불노학을 벗어난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행동을 둥글게 하고 모난 것을 싫어하는 것이 노자학이며, 혼자만 행하고 남을 구휼하지 못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하였다. 선생은 여경(餘慶)을 대단히 미워하여 이로부터 항시, “여경은 속이는 자이다.” 하였으니, 여경 역시 그 행동을 감추고 호화스런 가정에서 의식을 하였을 뿐이었다. 사람됨이 문(文)에는 칠원(漆園 장자)과 같고, 시에는 산곡(山谷 황정견(黃庭堅))과 비길 만하고 재주는 공명(孔明)을 지녔으며 행실은 만청(曼倩 동방삭(東方朔))과 같았다.
○ 유종선(柳從善)은 본관이 진주(晉州), 자(字)는 여등(如登)이다. 산에서 살면서 스스로를 감추어서 그 친구와 친척들도 그 얼굴 보기가 드물었었다.
○ 우선언(禹善言)은 처음의 자는 덕부(德父)이고, 호는 풍애(風崖)이다. 단성군(丹城君) 공(貢)의 아들로 사람됨이 뛰어나서 외물에 구애되지 않았다. 신축년에 남으로 영남에 내려가서 점필재(佔畢齋) 선생을 여막(盧幕)에서 뵈었는데, 선생이 그의 자를 자용(子容)이라고 지어주었다.
○ 김물(金勿)은 자가 개중(介重)이다. 강진(康津) 사람으로 감사(監司) 반()의 아들이다. 단정하고 묵중하며 결백함을 좋아했다. 계묘년에 생원이 되어 거듭 과거에 급제하였다.
○ 최하임(崔河臨)은 자가 진국(鎭國)이요, 호는 태허당(太虛堂)이다. 성품이 공명을 좋아하였으며, 경자년에 진사를 하였다. 이해 여름 요승(妖僧) 학조(學祖)가 그의 무리인 설의(雪義)를 시켜서 불상을 몰래 숨겨 돌리며 부처가 저절로 다닌다 하고, 곡식과 비단과 베 등을 매일 천여 건씩 거둬들였다. 태학생들이 임금에게 글을 올려 이 요망한 중을 죽이기를 청하였다. 무려 다섯 번이나 글을 올렸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지만, 이 상소문은 다 진국의 손에서 된 것이었다. 병오년 7월에 죽으니, 나이 32세였다. 집이 가난하여 장사를 거두지 못하자, 그 친구들이 부의를 보내서 장사를 지내게 하였다. 저술한 책으로는 《안택기(安宅記)》가 있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 이달선(李達善)은 자가 겸지(兼之)이다. 성품이 착한 것을 좋아했다. 병오년에 셋째로 급제하여 종부시(宗簿寺) 직장(直長)을 지냈다.
○ 권경유(權景裕)는 자가 군요(君饒)니,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성질이 굳세고 대체를 알며 꾸밈이 없어서 강공직(姜公直 강응정(姜應貞)의 자)을 심히 미워하여 그이는 인정(人情)에 멀다고 하였으나, 늦게서야 그의 행실을 듣고 매우 사랑하였다. 계묘년에 진사가 되고 병오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를 지냈다.
○ 이윤종(李尹宗)은 자가 극창(克昌)이요, 호는 차군당(此軍堂), 또는 죽계(竹溪)라고도 했다. 시문(詩文)에 뛰어났고, 사람됨이 어진이를 좋아하며 공직(公直)ㆍ자욱(自勗 정여창의 자)ㆍ백연(伯淵)ㆍ화정(和情 권안(權晏)의 자) 등은 그가 가장 좋아하던 벗들이다.
○ 고순(高淳)은 자가 희지(熙之), 또는 태진(太眞)ㆍ진진(眞眞)이라고도 하였으며,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귀머거리가 되어서 사람들은 땅에 글자를 써서 의사를 통하였다. 무술년에 조명(詔命)에 응하여 시정을 논하는 글월을 올렸는데, 망령된 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누가 이 소리를 전하니 희지는 듣고 대단히 기뻐하며 스스로 호를 망인(妄人)이라고 하였다. 희지가 처음으로 신덕우(辛德優 신영희(辛永禧)의 자)를 유림들 가운데서 보았을 때, 유림들은 서로 조심스럽게 말들을 하고 있는데, 희지는 한 조각 작은 종이에 절구 한 수를 쓰기를,
조그마한 누각에 봄바람이 고요한데 / 小閣春風靜
담담히 오고가는 말들은 모두 여유 있어 보이도다 / 淡談摠有餘
귀머거리인 이 사람은 아무 느낌이 없어서 / 聾人無一味
머리를 숙이고 홀로 책만 보고 있도다 / 垂首獨看書
하였다. 덕우(德優)는 기꺼워하며 그 글에 화답하기를,
세상 모든 소리는 귀가 시끄럽도록 혼탁하고 / 世聲聒溷濁
더러운 흙의 냄새는 아직도 코에 스쳐 남아 있도다 / 糞壤嗟鼻餘
부럽다. 그대여 방에 있는 누구보다도 나을세라 / 羨君勝房老
낮에도 가만히 천 권 책을 읽을 수가 있으니 / 晝隱千卷書
하였다. 이로부터 마음을 알아주는 교우로 여겼다. 무□년에 생원을 하였다.
○ 신영희(辛永禧)는 자가 덕우(德優)이다. 본관은 영산(靈山)으로, 재상인 석조(碩祖)의 손자이다. 도량이 커서 구애됨이 없고 활달하여 정의심이 많았다. 과거는 좋아하지 않았으며, 시(詩)의 명성은 온 나라에 파다하였다. 참의(參議) 성현(成俔)은, “그의 시는 소(蘇 소식)ㆍ황(黃 황정견)의 경지에 출입하고 있다.” 하였다. 계묘년에 진사를 하였으나, 그후로는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 이종준(李宗準)은 자가 중균(仲鈞), 호는 부휴자(浮休子), 또는 상우당(尙友堂)ㆍ태정일민(太庭逸民)ㆍ장륙거사(藏六居士)ㆍ용헌거사(慵軒居士)라고도 하는데, 시문에 능하였다. 정유년에 진사를 하고 병오년에 제2등으로 급제하여 지금은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이다. 그는 젊어서 군요(君饒)의 집을 몰라, 나와 정중(正中)과 더불어 달밤을 타고 꽃을 완상하면서 군요의 집에 이르렀다. 나는 거짓말로 군요에게, “호현방(好賢坊) 살구꽃 아래에 이상한 사람이 글을 읊고 있기에 같이 데리고 왔는데, 그 말을 들으니 도량이 넓어 구애됨이 없으며, 그 시를 보니 맑고 차서 세상 티끌을 벗어나 있고 화식(火食)하는 사람들의 말하는 바가 아니니, 세상에 선인(仙人)이 있다 하면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닌가.” 하였다. 군요는 황급히 신을 거꾸로 신고 맞아들이며 서로 달 아래 자리잡고 앉았다. 중균이 글을 짓는데, 일부러 청수한 시태로 지어내니 군요는 과연 크게 감복하여 무릎을 꿇고, “누추하고 궁벽한 곳까지 뛰어난 선비가 어떻게 나의 친구와 함께 오셨습니까. 천행이 아니오니까. 하룻밤 묵고 가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 중균은 굳이 가려고 하였다. 군요는 꿇고서 옷 뒷자락을 붙잡고 머물기를 청하였다. 담소로서 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에야 비로소 어배동(於背洞)에 사는 진사 이종준(李宗準)임을 알고 서로 손을 붙잡고 크게 웃었다. 중균과 군요는 드디어 마음을 허락하는 친우가 되었다.
○ 김응기(金應箕)는 자가 백봉(伯奉)이다. 정유년에 급제하고 지금은 예조 정랑이다. 신라의 왕족 계통인 방경(方慶)의 아들이다.
○ 김응규(金應奎)는 자가 중성(仲聖)이다. 응기의 아우로서 의분심이 강하고 절개를 중히 여겼는데, 아버지 방경이 이를 매우 사랑했다. 정유년 나이 20세에 평안도의 향공(鄕貢) 시험에 세 번 연거푸 장원을 했다. 진사 회시(會試)에 들어가 시장(試場)에서 죽으니, 그때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아들 하나가 있다.
○ 총(摠) 종실은 자가 백원(百源)이다. 무풍 부정(茂豐副正)을 지냈는다. 태종(太宗)의 증손(曾孫)이니, 거문고의 재주는 정중(正中 정은(貞恩)의 자)과 비슷했으나, 그의 넓은 도량은 정중을 능가했다. 양화진(楊花津) 입구에 집을 짓고 손수 고기잡이 배를 저었으며 자호하여 서호주인(西湖主人)이라고 했다.
○ 현손(賢孫 종실)은 자가 세창(世昌)이요, 신요(神饒)의 아들이다. 벼슬은 명양 부정(鳴陽副正)에 이르렀다. 나이는 나보다 13세나 적다. 매양 법도에 따라 몸을 자제하였으며, 독실한 몸가짐은 대유(大猷 김굉필의 자)의 다음이었다. 일찍이 관례를 행하고자 하였으나, 대유가 이것을 저지시켰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한결같이 가례에 의하여 행하였다.
○ 윤신(尹信 종실)은 자가 임지(任之)다. 파주(坡州)에서 대대로 내려온 집으로 문숙공(文肅公)의 후예다. 몸가짐은 세창(世昌 현손(賢孫)의 자)과 비슷하였으나, 침착하고 원만한 것은 세창을 능가할 정도였고, 대유에게 사사(師事)하였다.
○ 이적(李勣)은 자가 중율(仲栗)이다. 시를 공부한 후에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공부하여 그 도(道)를 맛보고서부터는 시를 공부하지 않고 도에 뜻을 두었는데 오히려 시보다 경지가 심원하였다. 형식적인 일을 힘쓰지 않고 오히려 옛 사람을 벗삼았으며, 보통 때도 꼭 관대(冠帶)를 하고 당당한 행동을 하였다. 대유와 백연(伯淵)에게 사사하였다.
○ 허반(許盤)은 자가 문병(文炳)이다. 계묘년에 진사를 하였다. 성리학에 뜻을 두고 출세에 급급하지 않았다. 모든 일을 옛것을 본받으려 하였고, 대유를 사우(師友)로 삼았다. 대유는 그의 단아함이 천성에서 나왔음을 경복하였다. 음직으로 사직 참봉(社稷參奉)에 임명되었는데, 이때에 좌상 홍응(洪應)이 제조(提調)로 있었다. 문병이 그에게 말하기를, “왕세자는 나라의 저군(儲君)입니다. 훗날 동방 백성이 우러러 의지할 몸이온데 지금 내시와 더불어 거처하고, 서연(書筵)에 나갈 때가 적고 잡된 것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때가 많사오니, 청하건대…….” 하였다.
○ 민구손(閔龜孫)은 자가 서경(瑞卿)이다. 본관이 여주(驪州)로 죽은 첨정 수(粹)의 아들이요, 자정(子挺)의 처남이다. 일찍이 자정에게서 시를 배웠는데, 얼마 아니하여 능하게 되자 또한 정중(正中 이정은(李貞恩)의 자)ㆍ정지(貞之 심정(沈貞)의 자)ㆍ중율(仲栗 이적(李勣)의 자) 등에 종유하였고, 대유에게 사사(師事)하였다. 위인이 단정하고 우아하여 더러움이 없었다.
○ 신용개(申用漑)는 본관이 고령(高靈)으로 자는 개지(漑之)이다. 대단히 침착하고 큰 도량이 있었다. 시와 문에 능하였다. 숙주(叔舟)는 바로 그의 할아버지이다. 그의 아버지 면(沔)은 시애(施愛)의 난에 죽었다.
○ 이주(李冑)는 본관이 고성(固城)으로 자는 주지(冑之)이다. 어질고 문에 능하였다. 용헌선생(容軒先生 이원(李原))의 증손이다.
○ 이원구(李元龜)는 낭옹(浪翁)이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요, 참판 박팽년(朴彭年)은 바로 그의 외조부다. 두 집의 현능함이 이원구 한 사람에게로 모였다.
○ 이계맹(李繼孟)은 자가 희순(希醇)이다. 점필재(佔畢齋)가 그의 시문을 취택하였다. 전주(全州)에 살았는데 청수한 행동이 출중하였다.
○ 이세칙(李世則)은 자가 효옹(效翁)이다. 연안군(延安君) 숙기(叔琦)의 아들로 기개가 있었고 곧은 것을 좋아하였으며, 맑은 지조가 출중하였으며 시문에 능숙하였다.
○ 장세필(張世弼)은 자가 언경(彦卿)이다. 고양(高陽)에서 살았는데, 가난한 살림에도 반드시 술과 고기를 갖추어 어머니를 섬겼다. 젊어서 배우지 못하여 겨우 성명(姓名)을 기록할 정도였다 한다.
○ 최세명(崔世明)은 자가 보광(葆光)이다. 독서를 좋아하였으며 벼슬길에 나아감을 싫어하였다. 정유년에 진사를 하였다.
○ 안계송(安繼宋)은 자가 우윤(于胤)이요, 호는 박전(薄田)이다. 사람됨이 어리석어 시와 술 외에는 다른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알건 모르건 간에 모두 박전이라 하여 비웃었다. 그러나 박전은 그런 것도 몰랐다. 음직(蔭職)으로 돈녕부 직장(敦寧府直長)을 배명 받은 후 지금까지 17년이 되었으나, 승진을 못하고 있으니, 세리(勢利)에 담담함을 알 수 있다.
○ 신포(申誧)는 자가 지정(持正)이요, 호는 허주(虛舟)이다. 시와 그림에 조예가 있고, 집이 가난하고 술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장륙(莊六)이라 호하였는데, 중균(仲鈞)이 그 호를 좋아하여 술 한 병과 바꾸자고 청하니 지정은 허락하였다.
○ 구영안(丘永安)은 본관이 강릉으로 자가 중인(仲仁)이요, 호는 호은(壺隱)이니, 문장의 명성이 있었고 기축년에 생원 시험에 제2등으로 합격하였다. 벼슬과 공리를 싫어하였다. 또한 음양ㆍ추보(推步)ㆍ풍수ㆍ의술ㆍ선도ㆍ불도ㆍ승제(乘除 산술)의 법까지 섭렵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 심원(深源 종실)은 자가 백연(伯淵)이요, 호는 성광(醒狂) 또는 묵재(黙齋), 혹은 태평진일(太平眞逸)이라 하기도 하였다. 태종(太宗)의 현손(玄孫)으로 나와 동년생이나, 달과 날이 나보다 늦다. 경학에 밝고 조행(操行)이 있으며 겸하여 의술에도 통하였다. 사람됨이 충효하고 무술(巫術)이나 불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평상시에도 관대를 하였으며 손에서는 책을 놓지 않았다. 전강(殿講) 때는 사서와 오경에 통달하여 명선대부(明善大夫)에서 주계 부정(朱溪副正)으로 진급하였다. 나이 25세에 전후 다섯 번이나 상소를 올려 다스리는 도를 논하였는데, 혹은 윤허를 받기도 하고 혹은 윤허를 얻지 못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정에서 숙모부(叔母夫) 임사홍(任士洪)이 무도하여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음을 논난하다가 조부의 눈밖에 나서 장단(長湍)으로 귀양갔다. 또 이천(伊川)에서 임금께 글을 올려 병중의 부모를 가뵙기를 청하였는데, 그 말들이 간곡하고 지극하여 윤허를 얻었다. 정미년에 종친들만 보는 과거[宗親科]에서 경(經)ㆍ사(史)ㆍ강독에 제1등으로 뽑히어서, 임금께서는 약과 술을 내리셨고 계급은 2품으로 높아졌으나, 군(君)은 봉하지 않았으니 이전에 조부(祖父)에게 거스른 허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 강응정(姜應貞)은 자가 공직(公直)이며, 호는 중화재(中和齋)이다. 나보다 10여 세 위이다. 은진(恩津)에서 살았으며 효행으로 칭송을 받았다. 일찍이 어머니의 병에 3년 동안이나 띠를 풀지 않았으며, 약은 반드시 몸소 맛보고 바쳤다. 하루는 꿈에 천신(天神)이 마당에 내려와 공직에게 이르기를, “내일 오는 손님은 반드시 의술가이니, 너의 어머니 병을 그에게 물어라.” 하였다. 이튿날 아침 과연 한 소년이 왔는데, 이름은 원(元)이라 하며 스스로 윤왕동(輪王洞)에서 산다고 하며, 공직에게서 숙박하기를 청하므로 머무르게 하였다. 어머니의 병에 대하여 물어보니, 한 마디 말에 과연 의약자(醫藥者)임을 알게 되어 소년의 말대로 시험해 본 결과 15일 만에 병이 나았다고 한다. 뒤에 부모상에 있어 한결같이 가례를 좇아 행하여서 겨울에도 맨발로 지내니, 온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까지 들리어 그 문에 효자의 정표(旌表)를 달았었고 집안의 병역을 면제해 주었다.
공직의 사람됨은 경서를 잘 외우며 사주ㆍ관상 등으로 인명(人命)을 예언하며, 또한 의술서를 섭렵하고 겸하여 지리 서적까지도 보았다. 젊어서는 태학에 노닐면서 장안의 준걸한 재사들과 더불어 주문공(朱文公)의 고사에 의거하여 향약(鄕約)을 짓기도 하고, 혹 월삭(月朔)에는 《소학》도 강론하였다. 그때 뽑힌 이는 다 한때의 명사들로서 김용석(金用石)은 자가 연숙(鍊叔)이요, 신종호(申從護)는 자가 차소(次韶)요, 박연(朴演)은 자가 문숙(文叔)이요, 손효조(孫孝祖)는 자가 무첨(無忝)이요, 정경조(鄭敬祖)는 자가 효곤(孝昆)이요, 권주(權柱)는 자가 지경(支卿)이요, 정석형(丁碩亨)은 자가 가회(嘉會)요, 강백진(康伯珍)은 자가 자온(子韞)이요, 김윤제(金允濟)는 자가 자주(子舟)인데 이들은 그 중에서 뛰어난 자이고, 그 나머지 사람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 자는 그들을 비방하여 혹은 소학계(小學契)라고 지목하기도 하고, 혹은 효자계(孝子契)로 지목하기도 하였으며, 공자(孔子)ㆍ사성(四聖)ㆍ십철(十哲)이라는 기롱도 있었다. 시골서 불우하게 지내며 늙도록 과거 시험을 보지 않다가 계묘년에 생원이 되어 훈도(訓導)가 되었다.
○ 안응세(安應世)는 본관이 죽산(竹山)으로, 자는 자정(子挺)이요, 호는 월창(月窓)인데, 또는 구로지인(鷗鷺至人) 또는 연파조도(煙波釣徒), 여곽야인(藜藿野人)이라고도 하였다. 나보다 한 살 아래다. 사람됨이 청수하고 담담하고 상쾌하며 가난한 생활에도 태연자약하여 분수를 달게 여겼으며,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선불(仙佛)의 도(道)를 배우지 않고 장기와 바둑을 즐겨하고, 시를 잘하는데 악부(樂府)에 더욱 뛰어났다. 일찍이 그는, “의롭지 못한 재물을 집안에 보태두는 것이라든지, 의롭지 못한 음식으로 오장(五臟)을 보(補)한다는 것은 더욱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였다. 자정의 마음가짐이 대체로 이와 같았는데, 흰 옥에 흠이 있는 격으로, 그는 주색(酒色)을 좋아하였다. 경자년에 진사를 하였는데 그해 9월에 죽으니, 나이가 26세였다. 그를 알고 모르고 간에 마음 아프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채순(蔡恂)은 자가 숙부(叔孚)니, 양천(陽川)에 살았다. 경자년에 진사를 하였다. 사람됨이 과거를 중시하였다.
○ 한훈(韓訓)은 자가 사고(師古)요, 아명은 학이(學而)이다. 본관은 청주(淸州)로 서울에 살았으며, 시에 조예가 있고 병오년에 진사를 하였다.
○ 강흔(姜訢)은 자가 시가(時可)이다. 본관은 진주(晉州)로 관찰사(觀察使) 자평(子平)의 막내아들이다. 처음에는 밀양(密陽)에서 여경(餘慶)에게서 배웠고, 점필재(佔畢齋)에게서 두시(杜詩)를 배웠으며, 다음에는 덕우(德優)에게서 시를 배웠으며, 다음에 대유(大猷)에게서 《소학》을 공부하였고, 그 다음에는 시숙(時叔)과 공서(公緖)에게서 배웠으며 유극기(兪克己)의 여막에까지 가서 글을 읽었다.
○ 조자지(趙自知)는 본관이 평양(平壤)으로 자는 성지(性之)이다.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고 어진이를 좋아하며, 산수를 좋아하고 유희를 좋아하였으며, 공명을 좋아하지 않고 침울하여 말이 적었다. 여경에게서 배웠는데, 시에 능하였다.
○ 강백진(康伯珍)은 자가 우온(于韞)이다.
○ 김용석(金用石)은 자가 연숙(鍊叔)이다.
○ 이장길(李長吉)
최충성(崔忠誠)은 자가 필경(弼卿)이다.
○ 노섭(盧燮)
○ 유방(劉房)
○ 조원기(趙元紀)
○ 조광림(趙廣臨)
○ 정붕(鄭鵬)


[주D-001]증자(曾子)의 역책(易簀) : 증자는 임종시에 대부의 대자리를 거두고 딴 자리를 바꾸어 깔고 죽었다.
[주D-002]자로(子路)가 결영(結纓) : 위(衛) 나라의 싸움에서 자로가 창에 맞아 관끈이 끊어졌는데, 자로는 “군자는 죽더라도 관을 벗어서는 안 된다.” 하고, 관끈을 매고 죽었다.
秋江先生文集卷之六
 雜著
智異山日課 016_122b

丁未九月二十七日癸亥。發晉州餘沙等村。赴斷俗寺。洞口有廣濟巖門四大字。銘在石面。不知何人所書。入巖門里許。有斷俗寺。隷人之家。杮林竹樹成一村落。中有大伽藍。扁其門曰智異山斷俗寺。門前有편001然禪師碑銘。平章事李之茂撰。大金大定十二年壬辰正月日立。寺西。有神行禪師碑銘。皇唐衛尉卿金獻貞撰。元和八年九月日立。寺北。有鑑玄禪師通照之碑。爲人所拔。僧云俗徒所爲也。翰林學士金殷周撰。開寶八年甲戌七月日立。寺內東北隅。有一室。016_122c崔文昌讀書之房。寺庭。有梅花二株。前朝政堂文學姜通亭手種。梅樹去四五年前枯死。其曾孫用休先生繼種者。余讀편002然碑銘。入與住持聖空語。空乃一庵門人。待余厚。又出見西北二碑。入見用休所種梅。坐於樓上。仰讀用休種梅記。空饋余飯。又飯奴從訖。辭主人下來。至糟淵裸身入浴。水石淸漑。淵北有泉。逬出石面。淸泠異常。余掬手飮之。還出廣濟巖門。越佛嶺。過白雲洞。洞水與德川水合爲苔淵。淵之下流。卽晉州南江。過苔淵。從德川遷上行十餘里。下瞰長川。曠爽快心。行盡洞口入一村。曰壤堂。家家戶戶。鉅016_122d竹成林。杮栗掩靄。柴門鷄犬。依然如武陵朱陳然。其右有矢川洞。矢川者。晉州屬縣也。其縣吏希智異山釋敎。仕至戶長記官。則髡髮着緇。遞任則復爲人。遂成古風。官長不能改其俗。日暮。投德山寺。寺在二水交流之墳。竹木周布。其左有水。瀦而復進。편003龍淵。其右有瀑。落而爲匯。曰婦淵。其深無底。寺主道崇者曾謁匪懈堂。有名禪林。匪懈堂敗。遁跡林泉。見余談論。甚喜。饋余及奴從飯甚備。語及夜半。其徒泂裕,義文,誼化主等皆靑眼待余。是日行四十里。甲子。與道崇,泂裕等歷見左右淵。淵傍竹樹可玩。誼化主饋余飯。016_123a飯後道崇使義文從余嚮導。從婦淵而上。行紅樹中。左歷金藏,解會二庵。右歷石上,百王,兜率,內院四庵。東轉一嶺。而入叢竹中。艱難穿過。登檜房嶺而南下。入管葦田。歷盡葦田而入杻林。路甚艱澁。山行四十里入普庵。杮竹繞屋。主僧道淳摘杮子饋余。淳者曾於無字。破義不精。自謂我外無人。掇誦經念佛。坐臥嘗露陰莖。多方設計。欲聚僧徒爲禪林宗者。與余始談小合。更與語。妄說參差。固執回輪之科。夜半。祝我起寢。語言油油。乙丑。發普庵。望見東上院。過文殊,麻田。行樹底川邊。亂石無路。往往聚石爲塔。以表山路。016_123b余尋石塔行。忽失法界庵路。又逢山雨。將宿石窟下。雨霽復行。得抵香積庵。庵有一僧。名曰一冏。頗聰明。解禪指。曾於無字。纔破大義。一示余六祖檀經。頗淸靜可愛。是日行四十里。丙寅。與義文及冏師自香積登上峯。雲埋風磨。木無完枝。艸無靑葉。霜嚴地凍。天寒倍於山下。雲梯石竇。僅出一人。余等穿土。及登上峯。見所謂天王者。僧曰。此釋伽母摩倻夫人爲此山神。禍福當世。將來代生彌勒佛者。其言一何遼遠而無文據。余坐堂隅石角。微雲四卷。山海可數。全羅,慶尙二道在我脚底。堂內。有禦侮將軍鄭義門懸板記。016_123c友人金大猷等名字書在板上。夕還下香積。往返二十里。十月丁卯朔。留米一斗別一冏。發香積。登少年臺。穿綿竹度鷄足。山行三十里。抵貧鉢庵。庵下有靈神庵。庵後有伽葉殿。世俗所謂有靈驗者。余詳視之。一石頑然。余從伽葉殿後攀枝仰上一山。名曰坐高臺。有上中下三層。余止上中層。心神驚悸。不得加上。臺後有一危石高於坐高臺。余登其石。俯視臺上。亦奇玩也。義文坐臺下。恐懼不得上。是日之西面淸明。倍於曩日。西海及鷄龍諸山。歷歷可辨。須臾。還下貧鉢夕飯。時落日在庵。人寰夜黑。戊辰。發貧鉢。穿靈神。016_123d行西山頂樹木中三十里。抵義神庵。庵之西面。盡爲脩竹。杮木雜生竹間。紅實透日。舂廬溷室。亦在竹間。近日所見佳境無此比。殿內。有金佛一軀。西側室。有僧像一軀。余問此何人。僧曰。此義神祖師也。到此修道。道旣半。此山天王勸祖師移住他所。自爲鷦鷯鳥引路。師隨之。及一大岾。化爲鵰。至今名其岾曰鷦鷯鵰云。鵰又引路。至下無住基。師曰。此地幾日成道。鵰曰。三七日。師遲之。편004又至中無住基。師曰。此地幾日成道。鵰曰。一七日。師又遲之。鵰又至上無住基。不能入。曰。此地可一日成道。非女人所得入。師自入擇地。016_124a結幕精盡。改名曰無住祖師。其言甚厖。余於庵前攤飯。穿竹林中涉三大川。登內堂岾。北視鷦鷯鵰岾。南下草莽中行三十里。抵七佛寺。寺本名雲上院。新羅眞平王朝。有沙飧金恭永之子名玉寶高者。荷琴入智異山雲上院。以琴修心五十餘年。作曲三十調。日日彈之。景德王於街亭。翫月賞花。忽聞琴聲。王問樂師安長一名曰聞福。請長一名曰見福者曰。此何聲。二人曰。此非人間所聞。乃玉寶仙人彈琴聲也。王齋戒七日。玉寶至王前奏曲三十調。王大喜。使安長,請長習之。傳於樂府。更於所居寺。設大伽藍。三十七國。016_124b皆宗此寺爲願堂。有泂首坐者稍解禪法。爲山中衲子師者爲余云云。己巳。寺有溫法主者示余玉寶事跡。與泂首坐所言同。臨別。泂首坐求余詩。余留一絶。西上金輪庵。有田禪師者延入饋果。又過靑窟。泝一川流而上。迷失路者二。其初行。迷已遠而復。其終。不遠復。越一大岾。到伐艸幕。伐艸幕之上。有新幕一間。有衲子一人。曰雪根。來饋余菹菜鹽醬。是日余足生繭。艱難得步。行三十里。庚午。與雪根,義文登般若峯。俯見峯北有昏黑月落之洞。有草幕一間。雪根所居。又其北中鳳山。卽貧鉢峯之北構也。於岡斷處。有寂016_124c照,無住等庵。又其北金鳳山。有金臺庵。峯西有方丈山。山頭有萬福臺。臺東有妙峯庵。臺北有普門庵。一名黃嶺庵。峯南有姑母堂。堂南有牛翻臺。牛翻禪師道場也。峯東有仙人臺。臺東卽雙溪洞也。貧鉢峯當峯之東面。天王峯又當其東北面矣。余西下般若峯之中峯。顧瞻訖。下視牛銅水。水枯而白蟲滿井。非佳玩。是日黃雲回塞。山下所望。只南原而已。日向西。義文催還艸幕。往返二十里。辛未。留米五升別雪根。食後發伐艸幕。過淵嶺登姑母堂。挾右牛翻臺而南下。過寶月,堂窟,極倫等庵。僧云。宋仁宗皇帝愛妃薨逝。016_124d夢告於仁宗曰。妾入高麗國智異山南花嚴寺洞地獄。願爲妾作冥福。帝愴然作極倫寺。其言無文據。未足信也。是日行三十里。抵奉天寺。寺在竹林中。樓前長川。行竹底而鳴。佳刹也。是日聞皇帝陟方之奇。住老六空。辛丑年遊山時見於開城甘露寺者。接余樓上。館余禪堂。壬申。滯雨留奉天。坐樓上覓近體一首。帖在樓囱。癸酉。有首坐道敏者自稱善山金氏。見我絶糧。饋米五升。聞崔忠成弼卿,金鍵子虛等在知及庵。使人寒暄。飯後下觀黃芚寺。寺古名花嚴。名僧緣起所創。寺兩傍皆竹林。寺後有金堂。堂後有塔殿。殿016_125a最明漑。茶花,鉅竹,石榴,杮木環繞其傍。俯視大野。長川橫跨其下。爲熊淵。中庭有石塔。塔四隅。有四柱戴塔。又有婦人中立頂戴狀。僧曰。此緣起毋爲尼者也。其前有小塔。塔四隅。亦有四柱戴塔。亦有男子中立頂戴仰向於戴塔婦人狀。此緣起也。緣起者。故新羅人。從其母入此山創寺。率弟子千人。精盡話道。禪林號爲祖師。夕。弼卿,子虛訪余焉。有法主雪凝。引宿其房。饋梨杮。夜半明燈。弼卿等講論小學,近思錄。凝雖佛者。曾向兪提學鎭受中庸章句者。聞余輩語。弗拂於耳。達曙談話。甲戌。黃芚非勿禪師饋余飯。弼卿,子016_125b虛備酒饌。要余留奉天。空師更請余輩。余與弼卿輩還入奉天。夜觀近思錄。時有知及悟首坐者。聞余輩性情之論。大喜曰。持心省察之功。儒釋無異。乙亥。雪凝使其弟子齎紙。來奉天請詩。余留五字長篇爲別。又別弼卿,子虛二生。弼卿以白鑿四斗爲別。余從黃芚前大路。過求禮鼎頂村。從江邊行過熊淵遷。千山錦綉。水聒聒穿山鳴。步行三十餘里。神氣快暢。至晉州花開洞。棄熊遷泝雙溪水西邊上。左右人家。明如畫屛。自晉州,求禮地境小堠。又步行二十餘里。自西涉東。有兩地石如門。有刻雙溪石門四大字。崔文昌016_125c侯手題者也。石門內一二里許。有雙溪寺。余問僧曰。誰是靑鶴洞。義文曰。未及石門三四里。有東邊大洞。洞內有靑鶴庵。疑是古之靑鶴洞也。余惟李仁老詩杖策欲尋靑鶴洞。隔林惟聽白猿啼。樓臺縹緲三山遠。苔蘚依稀四字題。則石門內雙溪寺前。無乃是耶。雙溪寺上佛日庵下。亦有靑鶴淵。此爲靑鶴洞無疑矣。寺前。有光啓三年七月日所建眞鑑禪師碑銘。乃文昌侯奉敎撰竝書及篆額也。師名慧昭。入唐遊學。還國創此寺。祝上念佛終其身。文昌譽其道泰甚。師無乃文字禪耶。不然。文昌何推之如此耶。余讀碑畢。016_125d渡木根橋。山僧傳云。文昌手戾木根。引渡溪流。其根漸大。因爲橋。後六百年。爲野火所燒。然猶存黑榦。寺前白菊數叢。四季一樹。余坐歇花間不忍去。寺廚接筒引流。筒端水鳴。寺後有金堂。友人餘慶澄源讀書此房。房前有八詠樓故基。卽文昌侯所居室。今則但有鉅竹數十挺矣。夜宿禪堂。有客僧學乳曾從餘慶遊般若峯者。余與談禪。強要余詩。余贈一絶。丙子。泝流上將十里許。左度一峴。到佛日庵。庵乃慧昭鍊道之所。庵前有靑鶴淵。孤雲嘗遊其上。余要庵僧祖成往尋。路僻不得尋。又上普珠庵。乃普珠禪師舊居。庵016_126a因茲得名。有老釋饋余梨杮。還投佛日寓宿。祖成作詩一首贈余。詩韻圓熟。淸曠且密。曾於詩家下功者。要余次韻。余和曰。孤雲歸不駐。靑鶴返何遲。人物無今古。淸寒賈島詩。余觀成才能異常。而有儒家氣象。故云。是日雨雪。丁丑。祖成和余奉天律詩韻。爲余別。余辭成過普珠庵。登佛智嶺。下默溪洞。水石最淸奇。過鼯鼠淵,廣巖淵,龍廻淵。度碑文嶺。抵獅子庵。庵有僧海閒,戒澄迎我。閒乃余少日空門友。不見十餘年。見余靑眼。是時明月中天。鉅竹圍庵。其梢可準人長三四十矣。展談舊懷。夜深乃寢。戊寅。海閒要余強留。016_126b余留焉。食後與海閒,戒澄等下觀五臺寺。寺前有前朝國子司業權편005水精社記刻在碑石。時大宋紹興八年也。水精一名如意珠。戊子年。盲僧學悅建白奪取。藏其名洛山寺塔中。讀碑訖。入坐樓上。有僧饋余杮子。移時還上獅子庵。己卯。別海閒,戒澄。自丁丑至今朝。余及奴從五人。海閒皆辦給糧餉。過五臺。又過河府尹叔孚宅。宅背山臨流。場圃築前。竹林周布。仲長統所稱樂志篇無異也。步行四十餘里。還至餘沙等村。
秋江先生文集卷之七
 雜著
師友名行錄 016_137b

金宏弼字大猷。受業於佔畢齋。庚子年生員。與余同庚。而日月後於余。居玄風。獨行無比。平居必冠帶。室家之外。未嘗近色。手不釋小學。人定然後就寢。鷄鳴則起。人問國家事。必曰。小學童子何知大義。嘗作詩曰。業文猶未識天機。小學書中悟昨非。佔畢齋先生批云。此乃作聖之根基。魯齋後豈無其人。其推重如此。年三十後。始讀他書。訓後進不倦。如賢孫,李長吉,李勣,崔忠成,朴漢恭,尹信皆出門下。茂材篤行如其016_137c師。年益高。道益邵。熟知世之不可回。道之不可行。韜光晦迹。然人亦知之。佔畢先生爲吏曹參判。亦無建明事。大猷上詩曰。道在冬裘夏飮氷。霽行潦止豈全能。蘭如從俗終當變。誰信牛耕馬可乘。先生和韻曰。分外官聯到伐氷。匡君救俗我何能。從敎後輩嘲迂拙。勢利區區不足乘。蓋惡之也。自是貳於畢齋。丁未年。遭父憂。饘粥哭泣之哀。絶而復穌。
安遇字時叔。孝行冠於鄕。居父喪。一從家禮。從佔畢齋受業。旣而無仕心。始貳於畢齋。嘗擧於鄕。赴京入會試。四館年少者驕傲。長老鄕生欲撻之。時叔曰。安016_137d可以父母遺體。無罪而自毀。以求名利乎。不入而去。操節可方東漢云。
權晏安東人。字和淸。年先於余二十餘歲。嘗曰。吾幸不死。垂亡之年。得遇三友。謂余及正中,克昌也。少時。以武才屬別侍衛。爲人淸如於陵仲子。喜山水。樂道眞。孝弟忠信。無能出其右者。屋毀不蔽風雨。或糧絶。其樂晏如。短褐蕭然。末路好佛。
鄭汝昌字自勖。入智異山。三年不出。明五經。窮極其蘊。知體用之源同分殊。知善惡之性同氣異。知儒釋之道同迹差。性理之學。醒狂敬之。庚子年。上下敎016_138a成均館。求經明行修儒生。館中擧自勖爲第一。知館事徐居正將進自勖而講經。自勖退。癸卯年進士。其父六乙。施愛之亂死國。是時自勖年少。居喪無闕。居母喪。典禮之數。饘粥之食。一依家禮。庚戌年。參議尹兢薦其孝與學士林無比。特召爲昭格署參奉。自勖上書請免。上下敎褒之。名益重。自勖爲人。性端重。不飮酒醴。不茹葷菜。不食牛馬肉。外爲常談。內惺惺也。少時。居館與人寢。鼾睡而不寐。人不知也。一宵見獲於崔鎭國。館中喧傳。以爲鄭某參禪不寐。
貞恩字正中。號月湖。又號嵐谷。又號雪囱。拜秀川副016_138b正。音律冠於世。幽彈慷慨。行路必泣。爲人篤厚自謙。識量聰明。爲學。先理而後文。師不勞。爲詩。先格而後辭。人不厭。爲德。先內而後外。人不知。行身。不以位尊壓人。如最貧儒生然。
李坋字子野。居長安。好賢樂善。恬於勢利。詩學甚富。大猷伏其機軸深遠。
盧祖同字公緖。好讀小學。不喜躐等之學。嘲弄之文。科擧之才。持身守法。略與大猷同。居父喪。廬墓三年。一依家禮。與時叔同學於佔畢齋之門。先生敬之。
鄭世麟字昌符。居嶺南。受業於佔畢齋之門。其學同016_138c於公緖。而詩才甚高。先生敬之。丙午年歿。年二十二。楊浚字澄源。受業於佔畢齋。深沈有大度。安貧樂道。淡如也。又局量雄深。修爲不形於色。而聰明日進。儒林最卑下之。餘慶獨知之。
金時習。江陵人。新羅之裔。先余二十歲。字悅卿。號東峯。又號碧山淸隱。又號淸寒子。世宗乙卯年生。五歲。能屬文。世宗命招承政院賦詩。大異之。召其父敎之曰。善養此兒。予將大用。乙亥年。光廟攝政。入沙門。名曰雪岑。入居水落山精舍。修道鍊形。見儒生則言必稱孔孟。絶口不道佛法。人有問修鍊事。亦不016_138d肯說。或有言金乖崖守溫坐化之事。岑曰。坐化於禮不貴。吾但知曾子之易簀。子路之結纓以死之爲貴也。不知其他。辛丑年間。食肉長髮。爲文以祭祖父曰。伏以帝敷五敎。有親居先。罪列三千。不孝爲大。凡居覆載之內。孰負養育之恩。故惡獸莫過虎狼。而微蟲無踰豺獺。能全愛親之性。又謹報本之誠。是皆天理之固然。而物欲之難蔽者也。伏念愚騃小子。似續本支。少沈滯於異端。嗟迷懵而未講。將修道可以薦拔。悟謊說莫如輪廻。壯歲因循。末路方悔。乃考禮典。搜聖經。攷定追遠之弘儀。參酌淸貧之活計。務簡而潔。016_139a在腆以誠。漢武帝七十年。始悟田丞相之說。元德公一百歲。乃化許魯齋之風。感霜露之沾濡。憂歲月之逾邁。驚惶無已。嘆訝良多。如贖舊愆。儻納堪輿之兩際。庶將面目。得拜祖宗於九原。自壬寅以後。睹世將衰。不爲人間事。爲棄人於閭閻間。日與人爭訟於掌隷院。一日。飮酒過市。見領議政鄭昌孫曰。汝奴宜休。鄭若不聞。人以此危之。其嘗與交遊者。皆絶不往來。獨與市僮狂易者。遨遊醉倒於道側。恒愚恒笑。後或入雪岳。或居春川山。出入無常。人莫知其涯涘也。其所喜者。正中,子容,子挺及余。所著詩文數萬餘篇。播016_139b遷之際。散亡殆盡。朝臣儒士。或竊取之以爲己作。
洪裕孫字餘慶。號篠叢。又號狂眞子。南陽吏順致之子。家世淸貧。僅裹身體。或不裙行。涉躐經史。放達不撿。不喜科擧。不爲免鄕計。辛丑年。南陽守蔡申甫以餘慶爲能文。放其役。卽步歸嶺南。謁佔畢齋受杜詩。先生曰。此子已見顏子所樂處。學者皆宗之。入頭流山肄業。到京。諫先生不建白時事。何空取人爵祿爲也。且當今學者莫不惡佛,老。而行己無一箇免於佛,老者。行圓而惡方者老也。行獨而不恤者佛也。先生大惡之。自是每稱餘慶譎詐。餘慶亦自晦行。衣食於016_139c朱門而已。爲人文如▒▒。詩涉山谷。材挾孔明。行如曼倩。
柳從善。晉州人。字如登。居山自晦。朋戚罕見其面。
禹善言初字德父。號楓崖。丹城君貢之子。爲人倜儻。辛丑年。南行嶺南。謁佔畢齋先生於廬幕。先生字之曰子容。
金圽字介仲。康津人。觀察使之子。端重好潔。癸卯年生員。重科第。
崔河臨字鎭國。號太虛堂。所性喜功名。庚子年進士。是年夏。妖僧學祖敎其徒雪義潛回佛像。云佛自行。016_139d致粟帛布錦。日以千數。大學生上書請誅妖僧。凡五上書。不得允。疏文大抵皆出鎭國手。丙午七月歿。年三十二。家貧不能斂葬。友人致賻而葬之。所著安宅記傳于世。
李達善字兼之。性喜善。丙午年。及第第三名。調宗簿寺直長。
權景裕字君饒。安東人。剛毅識體。不喜作爲。深嫉姜公直。以爲不近人情。晩聞實行。甚愛之。癸卯年進士。丙午年及第。調弘文館正字。
李尹宗字克昌。號此君堂。又號竹谿。工於詩文。爲人016_140a好賢。公直自勖,伯淵,和淸。其所絶喜者也。
高淳字煕之。又字太眞。又字眞眞。濟州人。爲人有聾病。人畫地成字以致意焉。戊戌年。應詔。上書論時政。得妄名。人或告之。煕之聞而喜之。自號妄人。煕之初見辛德優於諸儒中。諸儒相與語詡詡。煕之書一絶於小紙云。小閣春風靜。淸談摠有餘。聾人無一味。垂首獨看書。德優喜之。和其詩曰。世聲聒溷濁。糞壤嗟鼻餘。羨君勝房老。晝隱千卷書。自是以爲知心交。戊申年。生員。
辛永禧字德優。靈山人。宰臣碩祖之孫。倜儻不羈。磊016_140b磊多大節。不喜科名。詩名播聞中外。成參議俔。以其詩爲出入蘇黃。癸卯年進士。自後不應擧。
李宗準字仲鈞。號浮休子。又號尙友堂。又號太庭逸民。又號藏六居士。又號慵軒居士。能詩文。丁酉年進士。丙午年。及第第二名。今爲平安評事。少時。不識君饒。與余及正中。乘月翫花。到君饒家。余誣君饒曰。好賢坊杏花下。有異人吟詩。招與偕來。聞其語。倜儻不羈。見其詩。淸泠出塵。非煙火食人所道。世有仙者。無乃是耶。君饒倒屣出迎。相與坐月下。仲鈞作詩。故作淸瘦態。君饒果大服。跪曰。陋幕至僻。秀才何因我情016_140c友幸臨耶。豈非天幸也。幸望一宿。仲鈞必欲求去。君饒跪奉衣裾而請。雷談竟夜。朝明。始識於背洞 於背洞名寓居進士李宗準也。相與拊掌大笑。仲鈞,君饒遂爲知心交。
金應箕字伯春。丁酉年及第。今爲禮曹正郞。新羅宗姓方慶之後。
金應奎字仲星。應箕之弟。慷慨有大節。父之慶鍾愛之。丁酉年。年二十。擧平安道鄕貢。連魁三科。入進士會試。死於場。時議惜之。有子一人。
摠字百源。拜茂豐副正。太宗曾孫也。琴才與正中016_140d齊。宏量過之。卜築楊花渡口。自刺漁舟。自號西湖主人。
賢孫字世昌。神堯之後。官至鳴陽副正。年後余十三歲。動以法律身。篤行亞於大猷。嘗欲行冠禮。大猷止之。丁母憂。一從家禮。
尹信字任之。坡州之世家。文肅公之後。行同世昌。而深沈和緩過之。師事大猷。
李勣字仲栗。工於詩。後攻庸學。味其道。自是不專攻詩道。志尙高遠。不事窠臼中事。尙友古人。平居冠帶。澹澹如也。師事大猷伯淵。
016_141a許磐字文炳。癸卯年。進士。志於性學。恬於進取。欲事事師古。師友大猷。大猷服其端雅出於天性。蔭補調社稷參奉。時左相洪應爲提調。文炳說之曰。王世子。國之儲君也。他日東方萬姓之所仰賴者。今與宦寺居處。進見書筵之時少。遊玩狎昵之時多。請云云。
○閔龜孫字瑞卿。驪州人。故僉正粹之子。子挺婦弟。嘗學詩於子挺。少焉卽工。又從正中,貞之仲栗遊。師事大猷。爲人端雅無累。
申用漑。高靈人。字漑之。深沈有大度。工詩能文。叔舟乃其祖也。父沔死於施愛。
016_141b李胄。固城人。字胄之。賢而能文。容軒先生之曾孫也。
○李黿字浪翁。益齋齊賢之後。朴參判彭年乃外王父也。二家賢能。萃于一人。
李繼孟字希醇。佔畢齋取其詩文。居全州。淸修出衆。
○李世則字效翁。延安君叔琦之子。慷慨好直。淸操過人。能於詩文。
張世弼字彥卿。居高陽。家貧事母。必有酒肉。少不學。僅記姓名。
崔世明字葆光。好讀書。重仕進。丁酉年。進士。
安繼宋字于胤。號薄田。爲人性癡。詩酒之外。餘無留016_141c心。人知與不知。皆稱薄田而笑之。薄田不知也。承蔭拜敦寧府直長。到今十七年不遷。恬於勢利。可知也。
○申誧字持正。號虛舟。工詩畫。家貧喜酒。嘗自號藏六。仲鈞喜其號。請以酒一편001易之。持正許焉。
丘永安。江陵人。字仲仁。號편002隱。有文名。己丑年。生員第二名。重仕重利。又陰陽,推步,風水,醫術,仙釋,乘除之法。無不涉獵。
深源字伯淵。號醒狂。又號默齋太平眞逸。太宗之玄孫。與余同年生。日月後於余。經明有行。兼通醫術。性忠孝。不喜巫佛。平居冠帶。手不釋卷。殿講。通四書016_141d五經。進階明善大夫。行朱溪副正。年二十五。凡前後五上書論治道。或允或不允。又廷論叔母夫任士洪不道異心。失意於祖父。謫長湍。又謫伊川。上書請見病父母。言語懇至。得允。丁未年宗親科試。講經史擢第一人。賜藥賜酒。賜階二品而不封。以前有忤祖父之過也。
姜應貞字公直。號中和齋。先余十餘歲。居恩津。以孝行稱。嘗母病。三年不解帶。藥必親嘗。一日夢。天神降庭謂公直云。明日來客。必醫汝母病。明朝。果有一少年名元。自云居輪王洞。請宿於公直。館之。以母病問016_142a之。少年果知醫藥者。以少年言試之。十五日病愈。後居父母喪。一從家禮。冬月裸跣。體無完肉。事聞。旌表門閭。甄家丁役。公直爲人。善誦經書。推步人命。又涉獵醫術。兼涉地理之書。少時遊大學。與長安俊士。依朱文公故事作鄕約。或月朝講論小學。其選皆一時名士。如金用石字鍊叔。申從濩字次韶。朴演字文叔。孫孝祖字無忝。鄭敬祖字孝昆。權柱字友卿。丁碩亨字嘉會。康伯珍字子韞。金允濟字子舟。此其尤也。餘不盡錄。世之不悅者喧之。或指爲小學之契。或指爲孝子之契。有夫子四聖十哲之譏。坎軻鄕曲。終老016_142b不試。癸卯年。生員。爲訓導。
安應世。竹山人。字子挺。號月囱。又號鷗鷺主人。又號煙波釣徒。又號黎藿野人。後於余一歲。爲人淸澹洒落。安貧喜分。不求名利。不學仙佛。不喜博奕。能詩。尤長於樂府。嘗曰。不義之財。補止於家。不義之食。補止五臟。尤不可犯也。子挺之操心。類如此。白玉之疵。喜酒色也。庚子年進士。是年九月歿。年二十六。知與不知莫不痛之。下止字恐誤
蔡恂字叔孚。居陽川。庚子年。進士。爲人重科擧。
韓訓字學而。淸州人。居長安。工詩。丙午年。進士。
016_142c姜訢字時可。晉州人。觀察使子平之末子。始從餘慶于密陽。受杜詩於佔畢齋。次從德優學詩。次從大猷攻小學。次從時叔,公緖。讀詩於兪克己廬幕。
趙自知。平壤人。字性之。好施好賢。好山水好遊戲。不喜功名。深沈少言語。學於餘慶。能詩。
康伯珍字子韞。
金用石字鍊叔。
李長吉
崔忠成字弼卿。
盧燮
016_142d柳房
趙元紀
趙廣臨
鄭鵬
秋江書于敬止齋
海東野言[二]
成宗

成宗篤志於學三時講書。乘夜又引玉堂入直之士。與之講論。講畢賜酒。從容問今古治亂民間利病。便服相對。閣中只張一燭而已。或至夜分。大醉而出。賜御前燭送歸院。卽金蓮炬之遺意也。 出慵齋叢話下同
成廟學問淵博。文詞灝噩。命文士撰東文撰輿地勝覽東國通鑑。又命校書館。無書不印。如史記左傳春秋前後漢書晉書唐書宋史元史網目通鑑東國通鑑大學衍義古文選文翰類選事文類聚歐蘇文集書經講義天原發微朱子成書自警編杜詩王荊公集。陳簡齋集。此余之所記者。其餘所印諸書亦多。又聚徐剛中四佳集姜景醇私淑齋集申泛翁保閑齋集惟李胤保及我文安公成任 詩文。逸失未印。可恨也。
宣廟好文續契。兩聖寵奬。儒林逈出常謨。一時文章魁傑之士。彪炳玉署。如梅溪三魁㵢溪曁先大人。 金訢 尤被隆眷。常所述作。隨月書進。梅溪㵢溪俱以親老丐外。特致米石。以優其親。㵢溪進稿。有北望君臣隔南來子母同之句。上從容賞咏曰。好仁身雖在外。心不忘君矣。梅溪遭艱。錫祭榮之。寵及存亡。人人感起。鼓舞人材。振作士氣。誠千歲罕遇之盛也。成領相希顏由弘文正字丁憂去。制闋復敍。例謝恩命。上召至閤門外慰之。命中官。臂一鷹以賜曰。爾有老母。公退有暇。可以郊獵。助供滋味。又入夜對。賜酒果。公袖柑橘十數枚。因醉伏不省。中官負出之。不覺袖橘墮散于地。明日下柑橘一盤于玉堂。敎曰。昨日希顏袖橘。意欲遺親。故賜。公鏤骨忘死。卒倡靖國之擧。以爲報效也。宣廟待士之誠。知人之明。固有以盡人忠也。而公之革危措安。勳在社稷。亦可謂不負知遇矣。 出龍泉談寂記下同
文成兩聖。精於楷法。文廟遒勁生動之眞。深奪晉人奧處。只有石刻數本。傳世至寶神秘。眞跡罕覩。惜哉。
成廟嫵媚端重。從容三昧於趙松雪規度。上又或留意於墨戱小畫。斯皆天縱之能。不煩模習。而妙詣古範萬機之暇。淸讌有時。時親翰墨。畧加揮掃。寸箋尺幅。散落人間。得之者欽玩複襲。不啻如拱璧矣。上舍生朴元秢稍善書。成廟覽而嘉之。下書其鄕。賜紙筆以奬之。榮耀鄕閭。無不驚動。夫才藝細技。豈足以動睿賞哉。然不以聖能而廢之。勸奬之隆。必出於誠如此。由是文章書畫工技百術。莫不賴激而精臻。乃知聖人鼓舞轉移之機。特在於一嚬笑之間。若非誠意之好敻超凡情。則雖百方勸勅。嚴立程課。秪見其騷頗頹墮耳。安能動人若此之深耶。
成廟爲王大妃。日設曲宴。選內需婢五六名。習俗樂。其中有一名。容色才藝冠絶。常目成廟不已。成廟覽之。命付其父母嫁之。勿令復出入宮掖。自此曲宴亦罷。又成廟苟無故。日三御經筵。日三朝王大妃殿。日引宗室射于後苑。對宗室必設小酌。妓樂隨之。此固太平盛事。然議者或以爲燕山之耽於宴樂。有耳目之習然也。惜哉。 出先君子前言往行錄
有出宮人。箱筐收貯截紙札翰異常。云。幽亭流水。高樹俯潺湲。驊騮嘶靑草。春在翠微間。又絶壁立千仞。松風鳴未休。憑欄無限意。依約故山秋。又曰新瓜初嚼水精寒。兄弟情親忍獨看。又曰問兄何事送羲娥。遙想洋琴與渭歌。又曰期會親戚。聘招佳妓。義雖君臣。恩則兄弟云云。見之者知爲成廟常時戱筆棄餘也。二絶句必題畫之詩。不知誰作。餘皆與月山大君之簡槁也。成廟每引月山入內曲會。出則簡寄酬唱無虛日。蓋其友愛至焉。 出謏聞瑣錄
世宗設集賢殿。揀文士有名者二十人。兼帶經筵。凡諸文翰之事。悉任之。早仕晩罷。日官奏時。然後乃得出。朝夕飯時以內官爲對客。其隆待之意至矣。由是爭相勸勉。雄才鉅士多出。有名文苑者。不可勝數。丙子之亂。世祖命罷集賢殿。揀文臣數十人。兼稱藝文。日日引見論思。及成廟卽位。依集賢殿。復設弘文館。又以本官兼經筵。待之尤厚。每賜宣醞。又招聚承旨對飮。多賜奴婢。以備役使。又令皁隷皆帶銀牌。又令作堂于龍山江上。館官分番讀書。又於上已仲秋重陽佳節。命遊郊外。仍賜酒樂。其寵榮至矣。而有文名者。不似世宗朝之盛也。 出慵齋叢話下並同
新羅高麗崇釋敎。專以供佛飯僧爲常。我太宗雖革寺社奴婢。其風猶在。公卿儒士之家。例於殯堂聚僧說經。名佛席。又於山寺設七七齋。富家爭務豪侈。貧者亦因例措辦。耗費財穀甚鉅。親戚朋僚皆持布物往施。名曰食齋。又於忌日邀僧先饋。然後引魂設祭。名僧齋。成廟祟正學闢異端。凡于佛事盡革極言其弊。由是士大夫家。畏憲章物議。雖遭喪忌。但依法行祭。不供僧佛。其因仍不廢者。惟無賴下民。然不得恣意爲之。又嚴度僧之禁。州郡推刷無牒者。長髮還俗。中外寺刹皆空。物盛而衰。理所當然也。
成均館專掌敎訓。國家設養賢庫。以館官兼之。常養儒生二百人。上黨府院君韓明澮啓建尊經閣。多印經籍藏之。廣川君李克增啓搆典祀廳。余亦啓建享客廳。其後皆搆聖殿東西廡及食堂。又賜布五百餘匹米三百餘石。又賜學田以備館中之需。李克增啓。今承聖恩。多受米布。乞備酒食聚朝中文士及諸生。以爲斯文盛事。成廟允之。於是文士大會明倫堂。饌品極精。承旨賚宣醞及御廚珍味。絡繹不絶。癸丑秋。幸成均館。祀先聖先師。退御帳殿于下輦臺。文臣宰樞入侍殿內。堂下官文臣分庭列坐。八道儒生雲集京師。皆無慮萬餘人。上下皆揷花參宴。新製章奏而侑之。各司分掌設饌。上頻遣內臣督察之。人皆醉飽。自前昔所未聞也。
太宗於永樂元年。謂左右曰。凡爲治必須博觀典籍。吾東方在海外。中國之書罕至。板刻易以刓缺。且難盡刊天下之書。予欲範銅爲字。隨所得而印之。以廣其傳。誠爲無窮之利。遂用古註詩書左氏傳字鑄之。此鑄字所由始也。名曰丁亥字。世宗又於庚子年。以所鑄之字大而不整。改鑄之。其樣小而得正。由是書無不印。名曰庚子字。甲寅年。又用爲善陰騭字鑄之。比庚子字。差大而軆甚好。又命世祖書綱目大字。世祖時爲首陽大君。遂範鉛爲字。以印綱目。卽今所謂訓義也。壬申年間。文宗改鎔庚子字。命安平書之。名曰壬子字。乙亥年。世祖改鎔壬申字。命姜希顏書之。名曰乙亥字。至今用之。其後乙酉年。欲印圓覺經。命鄭蘭宗書之。字體不整。名乙酉字。成宗於辛卯年。用王荊公歐陽公集字鑄之。其軆小於庚子而尤精。名曰辛卯字。又得中朝新板綱目字鑄之。名曰癸丑字。
成廟賜死廢妃。傳旨曰。尹氏性本凶險。多行悖逆。曩在宮中。暴惡日深。旣不順於三殿。又肆凶於寡躬。待之如奴隷。至曰並足跡而削去之。是特細事不足論也。至於嘗見歷代母后挾幼擅政之事。自以爲喜。常以毒藥自隨。或置之懷抱。或藏之篋笥。非唯欲去其所忌。又將不利於寡躬。常自言曰。我命長壽。將有所爲之事。此則不道之罪。關於宗社。而猶不忍斷以大義。只廢爲庶人。寘之私第。今者外人。見元子漸長。前後紛紛。多以此爲言。雖在當時。不足深慮。後日之禍。何可勝言。若使凶險之性。得操威福之權。則元子賢明。亦必不得有爲於其間。而跋扈之志日益自恣。漢呂唐武之禍。翹首可待。余念至此。深用寒心。今若優遊。不早定大計。而國事至於不可救。則悔之無及。而予實爲宗社之罪人。昔鉤弋無罪。漢武猶爲萬世之計。況此凶險。又有難赦之罪乎。肆於今月十六日。賜死于其第。宗社大計不得不爾。 出謏聞瑣錄下並同
壬寅十月初四日。唐陽公主卒。禮曹啓。公主卒無停朝市。上特命停一日。令弘文館考前事。云。宋時長公主卒。命停五日。曰。古亦如是。今胡不然。命停朝三日。
成化癸酉五月。慶尙監司移文禮曹云。寧海府地火。晝有烟氣。夜有火光。投以木則成火。長八尺許。廣二十尺許。上令弘文館攷古事。晉惠帝元煕間。地燃。趙石虎後秦苻堅時。及唐貞觀時。石燃于幽州。又高麗仁宗明宗時。白州地火。本朝世宗時。寧海有是災。文宗時尙州地火。命內臣李孝智往審之。持所焚石塊而來。黑如炭。置之於火。則生火。
甲辰九月。奉常上金良璥謚號。曰恭威公褊肅公齊克公。上問於承政院。對曰。良璥有偏心之病。故謚皆如是。上曰。曩者金國光尹繼謙之謚。慮有後弊。欲改而未果。今有正直之人。其朋友以私事請囑而不從。則皆云其心偏急。朝議靡然從之。以正直得偏急之謚。其可得乎。予欲改此謚何如。政院日奉常旣已定謚。改之似難。正直之人。豈可以偏急稱之。大抵以偏急得名者。於其所不當爲之事。偏執强爲者也。良璥偏急之病。想必公論皆然。今若改定。恐有後弊。但於奉常擬進六字中。上裁何如。御書恭肅公而出。敬事供上曰恭。執心決斷曰肅。甲辰十一月。奉常擬進李繼孫謚。曰長敬公玎憲公。誨人不倦曰長。述義不勉曰玎。金文簡公在經筵啓曰。繼孫爲永安道觀察使。興學養材。至今多中科第者。然謂之誨人不倦則失實。誨人不倦如金鉤金末則當矣。以監司興學而已。不自敎誨。何以得此謚。繼孫爲人得宰相軆。善人君子也。不須長字。亦可得美謚。其曰述義不勉恐亦失實。曾以罪謫罰。而謂之玎不可。上遂書敬憲公而出。
成化丙午。直提學金訢以命進其外曾祖成槪所書魏徵十漸疏。兼進箚子。以寓規警之意。上乃賜經御白綃帖裡黑黍皮靴。且手札金牋以賜曰。省所上箚子與魏徵疏軸。深用嘉焉。徵之此言實萬世之蓍龜也。爾父勸汝以魏相自許。爾又勸予以唐虞同治。可謂父愛其子臣愛其君者也。予雖不淑。其敢忘之。嘉汝之誠。賞以褒之。常寘左右。以自警焉。書之楷正。固無所取。特陞訢爲工曹參議。其父友臣爲丹陽郡守。
戊申二月初六日。納世子嬪。自朝風雨大作。御札付嬪父左參贊愼承善曰。世俗以婚日風雨爲忌。大凡風以動之。雨以潤之。萬物之生。莫非風雨之功云云。出於傳聞。雖不能盡記。眞帝王之言哉。自午開霽淸明。 出忠敏公雜記
成廟朝。孫勿齋舜孝。知燕山不克負荷。一日登御榻。有撫床之請。臺諫請罪。且欲聞密啓何事。上曰。戒予好色耳。竟不言。 出丙辰丁巳錄
高麗文士。皆以詩騷爲業。唯圃隱始倡性理之學。至我朝陽村梅軒兄弟。能明經學。又能於文。陽村定四書五經口訣。又作淺見錄入學圖說等書。羽翼之功不少。其後任函丈者。黃鉉尹祥金鉤金末金泮鉉之學無聞。祥最精而稍知作文。鉤與末皆精。而末則未免於固滯。常時議論。不相上下。爭之不已。受業者亦兩備焉。二公皆爲世祖所知。官至一品。泮爲大司成。年老致仕。卒餓死于故鄕。又其次者有孔頎鄭自英丘從直兪希益兪鎭頎。滑稽能談。至於作文。雖尺牘之微。不能措一辭語。常受人簡牘。不知裁答。生員金順明適在房。依所言而答之。辭語甚稱。頎嘆曰。子學出於我。子善用而我不能用。眞所謂靑出於藍而靑於藍也。自英非徒知五經。亦能博涉諸史。官至判書。從直以容貌奇偉。蒙世祖拔擢。竟至一品。希益未甚顯達。鎭頎固執不通於理。近有盧自亨李文興。久在學官。成宗以年老優之。竟陞堂上。皆退死于鄕。 出傭齋叢話
上黨府院君韓明澮。搆亭漢水之南。名曰押鷗。欲以定策功擬韓忠獻。而得恪退之名。將辭老江湖爲言。而顧戀爵祿不能去。上作詩別之。朝中文士爭相和韻。累數百篇。而判事崔敬止詩爲第一。其詞曰。三接慇懃寵渥優。有亭無計得來遊。胸中自有機心靜。宦海前頭可押鷗。明澮惡之。不列懸板中。 出秋江冷話
許忠貞公琮。少時奇偉不類凡兒。年十二三時。同隊小兒上寺讀書。一日夜半盜來。盡偸諸兒衣鞋而去。翌日諸兒恐佈皆散去。獨確然不動。高枕大臥。取筆書壁曰。旣奪我之衣兮。宜吾鞋之莫偸。旣奪衣又奪鞋。竊爲盜先生不取也。聞之者已知其非爲凡器也。出思齋摭言
陽川君許琮狀貌魁偉。風彩嶷然。一時推爲大人君子。自少博學能文。至於天文律曆醫卜之技。無不精通。而又能弓馬。國有大事。必以公爲元帥。然不治家產。所居僅蔽風日。淡如也。 出靑坡劇談
弘治戊申董侍講越王給事敞。來頒登極詔。許忠貞公以遠迎使。候于義州。兩使尙矜持。待人蔑如。左右執事。小失尺寸。則必詬怒曰。我非爾國貂璫。敢爾無禮耶。蓋往時奉使者。多我國入朝宦寺故有是言。及見公。長身玉立。衣冠偉然。兩使瞿然相目曰。堂堂哉若人。自是嚴稜稍消。左右雖或迕意。皆不問。每見公。必留語從容。相與討論經史。或至夜分而罷。一日王給事語及嘗奉使遊蜀。公問入蜀有二路。陸由褒斜。水由荊門。公由何路。給事曰由江而入。公又問江出岷。濫觴至巙。東峽極險。至夷陵始漫流。信否。因擧江至某某地水。沿江上下襄樊荊鄂數千里間。山川遠近。戶口多寡。以至古今英雄並呑割據。歷歷縷數。兩使心服。執公手曰。若非胸藏萬卷。何能如此。公問中朝典故。雖宮禁隱密。皆爲公盡言。略無所諱兩使還到江上。依依不忍別。至涕出曰。望公早時來朝。使中國知海外有此人。還朝嘖嘖縉紳間曰。所不知者天上也。人間則無雙。其後艾郞中璞奉使而來。爲人傲猥。遇卿相貴人。皆睥睨不爲禮。入境首問公起居。及見公。斂容屛氣。送迎鞠躬。甚禮重之。出稗官雜記
李陰崖有跋尙友堂詩曰。國朝名臣。在英陵曰黃曰許。在宣陵曰許公諱琮字宗卿。號尙友堂。初釋褐。以謾佛見忤。光陵壓以淫威。以試其守。旋命進爵。從容不失儀範。自是華問日著。躐致靑紫。不由階級。儀觀環偉。風采凝嚴。如秋天冬日。望之也厲。卽之也溫。尤好性理之學。沈潛考究。多其所自得者。非銖積寸累塗諸耳目者比。復貫穿諸史。閱朱文公通鑑綱目。更兩旬而畢。其精勤俊敏多類是。故其施諸注措者。皆爲模倣爲可法。知遇宣陵。比德元首。入爲皐夔。出爲方召。歡欣鼓舞。期臻大猷。而遽爾殂殞。豈非命也歟。其爲詩文。類其德焉。不事雕琢。而渾厚端愨。自中聲律。有德者必有言。詎不信歟。 出丙辰丁巳錄
孫判院聚三休四休之說。稱七休居士。爲人純謹無他。事每經情直行。若關風俗綱常。必先致意。醉則發豪語無己。時嘗爲江原道監司。適時大旱。禱雨無效。公曰不得求雨者無他。守令不盡誠也。如或誠心感天。則天必應之。遂齋戒親出祈雨。半夜聞雨聲。喜而起曰。我當謝天。被朝服立庭中。無數拜天。雨勢漸急。有吏持傘倚後。公曰壓尊處安用傘爲。命去之。衣裳盡濕。又爲慶尙監司。若過孝子烈女門閭。必下馬再拜。雖雨不避。都事李緝擁蓑坐田間。公拜畢謂都事曰。足下何以爲之。緝曰我先令監拜矣。左右無不掩口。又嘗至平壤。見箕子墓。下馬瞻拜曰東人囿於禮義之場者。專是太師之敎。又嘗陪獵于穿嶺。猛虎被圍。公乘醉抽木箭彎弓馳馬欲入射之。衆人力持而止。凡事多類此。每於上前。書忠恕二字。懇懇陳啓。成宗以爲忠直。遂至大用。公位高而操心愈約。每對設酌。只用黑豆苦菜松芽爲蔌。專惡繁華之事。 出慵齋叢話
圃隱鄭文忠祠堂。舊在永川縣。文貞七休公嘗按是道。巡過郡境馬上醉睡。瞢騰昏昏。過圃隱村。夢間依俙見一老翁。鬢髮皤如。衣冠偉然。自言圃隱。且云所居頹廢。風雨無庇。如有意相屬之色。七休驚異之。詢故老得其古址。勖郡人營之。堂成。備物躬奠以落之。自傾大巵。醉書壁上曰。文丞相忠義伯兩先生。肝膽相照。忘一身立人紀。千萬世景仰無已。惟利所在。古今奔走。淸霜白雪。松柏蒼蒼。搆屋一間。將以蔽風雨。公靈安兮。我心安兮。竊疑忠魂毅魄。在天地間。藹然與造化元氣。同其流。豈肯區區以祠宇成毀有所丐貸於人耶。意亦此老胸中休休。平生以忠恕爲心。或能感通於恍惚間耶。 出龍泉談寂記上同
七休按行列郡。道見孝子烈婦旌表。必下馬展拜而過。就金烏山下。吉先生再故居。爲文以奠之曰。拜瞻祠下。彷佛儀形。惟山洛鳥水之如昨。念先生兮安在。奠蕉黃與荔丹。冀英靈之不昧也。此老無意雕琢於文字間。而胸中所發自能如此。可以想見其風槩。
孫勿齋爲方伯時。若遇旱乾。每致齋虔。禱雨輒應。如不雨則乃怒其神曰。予禱汝雨。不雨何也。怒神之言。雖非自反之道。而身若不誠則必不能發此言也。 出丙辰丁巳錄
凡人之將死。精神不亂。然歸化者有非道者。則固不能矣。孫二相舜孝常自言。吾願必無疾痛而終。一日與宰相劇飮話竟夕。晨起謂夫人曰。吾氣似不平。呼諸子來速具飯。訖曰。吾欲效少時挾冊遊師門也。乃取一卷書掖之。上下階級數次。曰困矣。吾欲休焉。乃隱枕而臥。家人以爲就睡。良久視之。則息絶矣。嘗命好燒酒一大壺。埋於靈石下。如命焉。 出謏聞瑣錄
權參判景祐。成廟朝以監察充書狀官赴燕。譯官濫賚物貨。馹路騷然。其屬託之家。多聯權貴。公一切探索以聞。苟托一布者。皆鞫于詔獄。命超公三階。及爲正言。倡臺諫請黜任士洪。言甚抗直。士洪乘夕抵家。陽爲不知者曰。誰敢爲此論者。公直答曰。惟我敢爾。士洪氣沮。不敢出一言而退。其在弘文館。論廢妃雖有罪。不宜褻處閭閻。上震怒。以爲陰附世子爲後日地。命下牢獄。責詰備至。公略不沮拙。開陳誠悃。援據歷代人主待廢妃事。言益剴功。上乃霽威。只罷其官。 出稗官雜記
鄭判書錫堅。骯髒不拘小節。弘文館本無丘史。只有選奴一頭。故爲官員者。例借於他司帶率。鄭爲應敎。獨不借丘史。只以懸蠟牌皁卒前導。跨馬居中。唯一奴隨後。道路指笑言山字官員。僚員戱曰。借一丘何害於大義。而失儀容至此耶。鄭笑曰。借丘於人眼前事。衛從多少背後事也。爲所不見。而前乞於人。吾所不爲。寧作山字官也。不願丐丘於人也。聞者大笑。 出思齋摭言
韓淸城致亨爲刑判。衙仕甚勤。郞官不堪早暮。頗厭苦之。其族侄韓健爲正郞。暇日往候。從容語曰。魚咸從世謙雖晩仕早罷。尙無不可。尊叔何自苦如此。淸城再頷之。徐曰。咸從道德文章俱優。雖懶於聽斷。猶有可取者。在吾與爾。他無所長。唯謹守所職。不亦可乎。吾之所志如此。健慚而退。 出忠敏公雜記
姜應貞。字公直。號中和齋。居恩津。以孝行稱。嘗母病。三年不解帶。藥必親嘗。一日夢天神降庭。謂公直曰。明日客來。必醫汝母病。明早果有一少年名元義者。自云居輪王洞。請宿。公直館之。以母病問之。少年果知醫藥者。以少年言試之。十五日病愈。後居父母喪。一從家禮。冬日裸跣。軆無完衣。事聞。命旌表門閭。蠲家丁役。公直爲人善誦經書。推占人命。又涉獵醫術。兼涉地理之書。少時遊太學。與長安俊士。依朱文公故事作鄕約。或月朝講論小學。其選皆一時知名之士。如金用石字鍊叔。申從濩字次韶。朴演字文叔。孫孝祖字無忝鄭敬祖字孝昆。權柱字枝卿。丁碩亨字嘉會。康伯珍字子韞。金允濟字子舟。此其首也。餘不盡錄。世之不悅者喧之。或指爲小學之契。或指爲孝子之契。有夫子四聖十哲之譏。坎坷鄕曲。終老不試。 出南孝溫師友名行錄下同
金宏弼字大猷。受業於佔畢齋。庚子年生員。居玄風。篤行無比。平居必冠帶。人定然後就寢。鷄鳴則起。室家之外。未嘗近女色。手不釋小學。人或問國家事。必曰。小學童子何知大義。嘗作詩曰。業文猶未識天機。小學書中悟昨非。佔畢齋先生批云。此乃作聖之根基。魯齋後豈無其人。其推重如此。年三十後。始讀他書。訓後進不倦。如賢孫。卽鳴陽副正也。李長吉李勣崔忠成朴漢參尹信皆出門下。茂材篤行如其師。年益高道益卲。熟知世之不可回。道之不可行。韜光晦迹。然人亦知之。畢齋先生爲吏曹參判。亦無建明事。大猷上詩曰。道在冬裘夏飮氷。霽行潦止豈專能。蘭如從俗終當變。誰信牛畊馬可乘。先生和韵曰。分外官聯到伐氷。匡君救俗我何能。從敎後輩嘲迂拙。勢利區區不足乘。蓋惡之也。自是異於畢齋。丁未年。遭父憂饘粥哭泣之哀。絶而復蘇。大猷以小學律身。以古聖人爲準則。招來後學。恂恂然執灑掃之禮。修六藝之學者。滿於前後。謗論將騰。自勗勸止之。大猷不聽。嘗謂人曰。釋陸行設爲禪敎。弟子攷業者千餘人。其友止之曰。禍患可畏。行曰。使先知先覺覺後知後覺。吾所知者告人耳。其禍福天也。吾何與哉。行雖緇流。豈無可取。其言至公。 出秋江冷話
金大猷性學淵源。謹獨不倦。成廟朝。以行首擧。累遷爲刑曹佐郞。去數十年間。責我曰。於君已欲絶交。而情不忍云。問之則云。非君能斷也。追問之則曰。伯恭百源正中文炳皆有晉風。晉以淸談累。不出十年。禍在此輩云。予誓自今不復來往。後皆不保。 出辛永禧師友言行錄
鄭汝昌字自勗。入智異山。三年不出。明五經。窮極其蘊。知體用之源同分殊。知善惡之性同氣異。知儒釋之道同迹差。潛心性理之 學。醒狂敬之。庚子上下詔成均館。求經明行修儒生。館中擧自勗爲第一。知館事徐居正將進自勗而講經。自勗退。癸酉年進士。其父六乙。施愛之亂死國時。自勗年少居喪無聞。後居母喪。典禮之數。饘粥之食。一依家禮。庚戌年。參議尹兢薦其孝與學。士林無比。特召爲昭格署參奉。自勗上書辭免。上下敎褒之名益重。自勗爲人性端重。不飮酒醴。不茹葷菜。不食牛馬肉。外爲常談。內惺惺如也。少時居館與人寢。鼾睡而不寐也。人不知也。一宵見獲於崔鎭國。館中喧之。以爲鄭某參禪不寐。 出師友名行錄
鄭先生自勗少時嗜酒。一日與友人痛飮。醉倒曠野。經宿而返。母夫人責曰。爾如此吾誰賴乎。先生深自刻厲。君賜飮福之外。更不接口。 出內辰丁已錄下同
鄭先生早年卜築頭流山麓。以爲終老之計。成廟召爲昭格署參奉。懇辭不允。乃出。先生律身甚嚴。終日端坐。雖盛暑。妻子未見肌肉。平生不喜作詩。只有一篇。流傳於世。其詩曰。風蒲獵獵弄輕柔。四月花開麥已秋。看盡頭流千萬疊。孤帆又下大江流。胸中洒落。無點塵態。蓋可想見矣。 花開縣名
圃隱之後。我朝性理之學。實自金大猷先生倡。同志者鄭先生自勗其人也。大猷精於理。自勗精於數。惜乎遭時不祥。殞於非命。蒼蒼者天。謂之奈何。中廟朝皆贈議政。致祭家廟。南孝溫字伯恭。號秋江。又號杏雨。才行卓越。惡衣食。常乘雌馬。兒童婦女。相隨指笑。性嗜酒。母責之。著止酒賦。十年不飮。病風復飮。病已復作止酒賦。五年不飮。後病篤。酒作生涯。不仕終家。廢朝以畢齋門徒斬大猷。以復昭陵疏陵遲伯恭屍。范希文曰。忠信天所扶。何獨不扶兩人耶。 出師友言行錄
秋江性慷慨。嘗師淸寒子。放迹物外。與世俗不相關。年十八。上書成廟。請復昭陵。每憤時事。或登毋岳。慟哭而返。危言激論。雖觸諱莫忌也。大猷自勗戒止之。終不聽。二公講明性理。操履以小學爲律。其所造。實與秋江異。然交契相厚。眞所謂芝蘭同臭也。 出丙辰丁巳錄
南孝溫字伯恭。號秋江。性固倜儻。篤學好古。有志節。嘗上書請復昭陵。被謫而不撓屈。友朱溪正深源安應世子挺擧進士。或不試東堂。慈氏有言。則時就試而不屑也。由是竟不第。弘治壬子。年纔三十九而卒。成化己亥。予徵入京。將赴日本。伯恭袖詩求見。送予于漢江。因以相好。同遊松都。上天磨山。家在高陽。策蹇相尋。宿鴨島。燒荻火啖魚蟹。探韵賦詩以徹夜。介予謁畢齋于湖南。嘗愛其詩。比之古人。旣死。遺孤忠恕有狂易病。且死非命。餘皆女婿。不集草。 出謏聞瑣錄
寒暄先生爲佐郞時。馳見辛進士永禧氏曰。今日吾當絶君。觀今士氣。且類東漢之末。朝夕禍起。如我則禍已迫矣。進退無及矣。諸君遠遯鄕曲。不者吾卽相絶。肯聽我言否。辛公忽引去稷山斜山下。號安亭。安亭嘗與南孝溫洪裕孫。結爲竹林羽士。文章行義。爲一時領袖。東南行過者。無不禮於其門。 出景賢錄
姜菊塢景醇。編晉山世稿。與金參判壽寧。點抹增損。以快人目。揚父祖詩名於後世。人以此爲孝。餘則以爲不孝。辛上舍永禧家。有祖父文禧公之詩集。友人有曰。子之家集可以印行于世乎。辛曰。我祖雖有能文名冠世。而家集所載。無一可傳者。嘗有挽一門生詩曰三十二而卒。不幸同顏回句之外。無佳詩。豈可刊行。人以此爲不孝。餘則以爲孝也。何者直述祖父之行藝。祗乃孝道。假使巧言飾筆以譽。父母之鬼寧無愧心於冥冥之中乎。 出秋江冷話
南孝溫辛永禧。俱以上舍未顯達。早死。爲人好古倜儻。出世俗科臼外。南之遣興詩曰。蒯生友安期。知爲不世翁。豎兒看大楚。蟻封視沛公。如何說齊王。顧欲作元功。若非桀狗辨。幾陷大辟中。又匹夫楊王孫。生當漢武時。帝方事西北。擧世務駒馳。緩帶食萬戶。顧乃學支離。平生殘祈候。稗葬得如期。又嗣宗爲亡魏。狐媚視文帝。猖狂引麴生。六旬托末契。却得僞主婚。大節昭萬世。曹賊責無禮。可笑不自計。又四十七奏疏。欲廣靈修聰。終然四字論。不啻耳過風。賴用季通筮。末路號遯翁。寒泉一間舍。端合訂參同。又胡元駒大宋。兩京迷黃塵。魯齊許文正。被髮爲其臣。欲將堯舜道。强敎板屋人。方圓不能周。畢竟無新民。辛之寓意詩曰。男僕掃庭除。女僕掃堂閨。丈夫掃邊塵。志不在門楣。高臥斗屋下。掉我胸中旗。野人非大夫。大夫各自奇。又走馬下急坂。呼鷹入雲際。下馬雪消處。踞石時少憩。僕夫開冷飯。敲火湯沸細。家在十里餘。山腰夕陽麗。又花枝揷破笠。垢袂翻舞臂。云云。辛有氣槩。而蹭蹬於世。委室私婢爲其主所辱。怏怏而死。南亦遭身後之變。何其命隻。 出謏聞瑣錄
金時習江陵人也。新羅之裔。字悅卿號東峰。又號碧山淸隱。又號淸寒子。世宗乙卯年生。五歲能屬文。世宗命招承政院賦詩。大異之。召其父敎之曰。善養此兒。予將大用。乙亥年。光廟攝政。入沙門。名曰雪岑。入居水落精舍。修道煉形。見儒生則言必稱孔孟。而口不道佛法。人有問修煉事。亦不肯說。或有言金乖崖守溫坐化之事。岑曰。坐化於禮不貴。吾但知曾子之易簀。子路之結纓以死之爲貴也。不知其他。辛丑年間。長髮食肉。爲文以祭祖父曰。伏以。帝敷五敎。有親居先。罪列三千。不孝爲大。凡居覆載之內。孰負養育之恩。故惡獸豈過虎狼。而微蟲無逾豺獺。能全親愛之性。又謹報本之誠。是皆天理之固然。而物欲之難蔽者也。伏念。愚蠢小子。似續本支。少沈滯於異端。嗟迷懵而未講。將修道可以薦拔。悟謊說莫如輪回。壯歲仍修。末路方悔。乃考禮典搜聖經。攷定追遠之弘儀。參酌淸貧之活計。務簡而潔。在腆而誠。漢武帝七十年始悟田丞相之說。元德公一百歲乃化許魯齋之風。感霜露之沾濡。憂歲月之逾邁。驚惶無已。嘆訝良多。如贖罪愆倘納堪輿之兩際。庶將面目得拜祖宗於九原。自壬寅以後。賭世將衰。不爲人間事。爲棄人於閭閻間。日與人爭訟於掌隷院。一日飮酒過市。見領議政鄭昌孫曰。汝奴宜休。鄭若不聞也。人以此危之。其嘗交遊者。皆絶不往來。獨與市中狂易者遨遊。醉倒路側恒愚笑。後或入雪岳。或居春川山。出入無常。人莫知其涯涘也。其所喜者正中子容子挺及余。所著詩文數萬餘篇。播遷之際。散亡殆盡。朝臣儒士或竊取之。以爲己作。 出師友名行錄
金時習與柳襄陽手簡累百。其略曰。僕生纔八月。自能知書。族祖崔致雲命名時習。三歲能綴文。作桃紅柳綠三月暮。珠貫靑針松葉露等句。五歲讀中庸大學於修撰李季甸門下。司藝趙須命作字說以授。許政丞稠到廬曰。余老矣。其以老字作句。僕應聲曰。老木開花心不老。許擊節嘆賞曰。此所謂神童也。英廟聞而召于代言司。命知申事朴以昌試之。知申事抱于膝上。指壁畫山水圖曰。汝能作句乎。僕應聲曰。小亭舟宅何人在。如此作文作詩甚多。傳旨欲親引見。恐駭人聽。宜韜晦敎養。待年長學業成就。將大用。賜物還家。十三歲詣大司成金泮門下。受語孟詩書春秋。又詣司成尹祥。受易禮諸史。比長不喜榮達。且以親戚隣里濫譽爲惡。旣而心事相違。顚沛之際。英廟顯陵相繼賓天。光廟之初。故舊喬木。盡爲鬼簿。而復異敎大興。斯文凌蔑。僕之志已荒涼矣。遂伴髡者。遊山水。故人以我爲喜釋。然不欲以異道顯世。故光廟傳旨屢召。而皆不就。處身益以疏曠。然使人不齒。故或以僕爲癡。或以僕爲狂。呼牛馬皆便應。今聖上登極。用賢從諫。冀欲筮仕。十餘年前後。於六籍溫熟稍精。而累見身世相違。如圓鑿方枘。舊知已盡。新知未慣。孰知余之素志。故復放浪於山水間矣。是皆實事。惟公默志。 出稗官雜記
梅月堂平生心懷。世人未窺。觀詩集。好使薇蕨字。亦不知意所在。余見老衲。頗聞玄理。問所受師。則少時以沙彌。逮事五歲。仍曰五歲著述傳世者。僅百中之一二。問其由曰。老僧以侍奉陪居中興寺最久。每値雨後。山水添流。折作片紙百餘端。令具筆硯隨後。沿流而下。必擇湍急處而坐。沈吟作詩。或絶或律。或五言古風。書于紙放流。見遠去。且書且放。或至終夕。紙盡乃還。有時一日所述幾百餘首。此亦其意難窺。 出思齋摭言
東峯金時習。自髫齓已有能詩聲。遂擺落科臼。祝髮爲僧。改名雪岑。與南秋江爲方外遊。狂吟放浪。玩弄一世。逃世於禪。不奉其法。世以狂僧目之。行過市肆中。或凝睇忘歸。植立移刻。或便旋衢路。不避稠視。群兒詆笑。爭擲瓦礫以逐之。其藏獲田宅。任人取寇。曾不屑意。復息從其人請還。其人不肯。岑身卽雀鼠之庭。面爭供對。譊譊如市井之競。竟獲辨理。官券旣成。納懷中出門。視天大笑。遽出券碎裂而投之溝中。其戱人侮俗如此。光廟嘗作法會于內殿。岑亦被揀預。忽凌晨逃出。不知所之。遣使踵之。則故陷街路溷穢中。露半面而已。有沙彌。喉音淸楚。能出商聲。浪咏長吟。遺響裊空。凄有餘感。每値皓月朗然。中宵獨坐。令沙彌咏離騷經一過。輒泣下霑襟。性嗜飮酒。醉則曰不見我英廟。流涕甚悲。諸比丘推以爲神師。服事頗謹。一日合辭請曰。弟子等奉大師久。尙靳一敎。大師淸净法眼終以付誰。諸生迷方。願受金篦之刮。請彌堅。岑曰諾。大開法筵。岑具袈裟法衣。坐跏趺。緇流坌擁。合掌羅跪方聳聽。岑曰可牽一牛來。衆莫測所以。牽牛繫庭下。岑又曰將蒭一束置牛後。大笑曰爾等欲聞法。類是矣。 牛於畜類中最爲頑然人之迷冥無識者俗謂之牛後置蒭 緇衆赧然而退。近代詩僧。岑爲領袖。爲詩典重。少蔬筍氣。入金鰲山著書。藏石室曰。後世必有知岑者。大抵述異寓意。效翦燈新話等作也。 出龍泉談寂記
深源字伯淵。號醒狂。又號默齋。又號太平眞逸。太宗之玄孫。與余同年生。月日後於余。經明有行。兼通醫術。性忠孝不喜巫佛。平居冠帶。手不釋卷。殿講通四書五經。進階明善大夫。行朱溪副正。年二十五。凡前後五上言論治道。或允或不允。又廷論叔母夫任士洪不道異心。失意於祖父。謫長湍。又謫伊川。上書請見病父母。言語懇至。得允。丁未年。宗親科試講經史。擢第一人。賜樂賜酒賜階二品。而不封君。以前有忤祖父之過也。 出師友名行錄
朱溪正深源。非但解理學。亦能綴詩。雨後晩望曰。一犁春雨杏花殘。處處人耕白水間。獨立蒼茫江海上。不勝惆悵望三山。到雲溪寺曰。樹陰濃淡石盤陀。一逕縈回透澗阿。陣陣香風通鼻觀。遙知林下有殘花。 出謏聞瑣錄
朱溪君深源。有先見之明。成廟朝。知姑夫任士洪姦邪。上疏力辨。竟竄士洪於外。燕山末年。士洪用事。讚殺之。中廟卽位。嘉其忠義。贈爵旌閭。蓋深源之意。我爲宗親。當與國休戚。豈私一家之姑夫乎。今讀其疏。凜凜然有生氣。 出稗官雜記
貞恩字正中。號月湖。又號風谷。又號雪牕。拜秀泉副正。音律冠於世。悲彈慷慨。則行路必泣。爲人篤厚自謙。識量聰明。爲學先理而後文。師不勞。爲詩先格而後辭。人不厭。爲德先內而後外。人不知。行身不以位尊壓人。如最貧儒士然。 出師友名行錄
宗室秀泉副正貞恩。日以詩酒琴琶自娛。詩文音律。與百源齊名。聞大猷責我。盡棄舊習。故作俗態。閉門不出。不敢與親故通。果獨保。參判金紐聞琴嘆曰。手段政如澗邊梅花格。其立春帖詩曰。細翦紅箋架小春。馬上口呼詩曰。桑乾牛吐舌。所作蓋皆如此。 出師友言行錄
國朝雅樂。自堧後士族無可稱者。成化年中。有秋 任興 始顯。正中百源國聞。 鄭子芝 起而一洗舊習。敎坊推四人爲冠。余未嘗曉音律。日與四子酣暢。聞伶人尙論熟矣。其論曰。有秋心平而手下。國聞手妙而心酷。百源雄渾而手雜。正中調高而氣偏。余與正中遊松都彈琴時。親見士人妓女皆泣下。聖居山僧不涕出者無幾。還都之日。乘馬躕躇。行人立聽。伯牙千載之後。非此人爲誰乎。氣偏之語。無乃過當。百源有秋嘗備樂器。日夜肄習。正中家無風物。行行到處偶執他樂器。而音律恂如也。余嘗服其手藝甚高也。然知音者或譏正中琴類伯牙。而時中不及百源。豈非濟世經略之才蘊而歸之於小技故發之偏也。僕不堪涕泗。嗚呼不展也。 出秋江冷語
賢孫字世昌。神堯之後。官至鳴陽副正。動以禮法。律身篤行亞於大猷。嘗欲行冠禮。大猷止之。丁母憂。一從家禮。 出師友言行錄
宗室鳴陽副正。瀟洒出塵。喜文雅作詩。如其爲人。遣意詩曰。懷疴謝塵事。終日檢詩篇。藥蔓穿疎壁。蛛絲掛短椽。傾壺盡餘酒。高枕眷飛鳶。到處生涯在。何須負郭田。小雨茅齋濕。新晴枕席涼。水衣緣礎上。庭草過墻長。露浥苽花净。風含蕙葉香。悠然午眠破。林抄淡夕陽。秋日詩曰。白露園林淨。高風草木衰。覆盃流竹葉。汲井煮桑枝。落日雁橫塞。秋窓蟲吐絲。誰憐貧病客。長吟楚人詞。又空盤推馬齒。荒苑長鷄腸。水閣靑奴冷。岩田腐婢香。莓苔侵礎遍。蓬艾繞窓長。紫蘇葉帶回風響。紅蓼花含返照明。溪禽帶雨全身濕。山杮經霜半臉紅。常有淸羸之疾。未三十而歿。其感懷詩可見兆其不壽云。光陰如電瞥。歲月不貸余。成名雖及時。畢竟空歸虛。形骸非我有。一朝無復餘。英華豈足賴。天地眞蘧廬。笑彼窮途人。痛哭終何如。 出謏聞瑣錄
安應世字子挺。號月窓。又號鷗鷺主人。又號烟波釣徒。又號藜藿野人。爲人淸淡洒落。安貧喜分。不求功名。不學仙佛。不喜博奕。能詩尤長於樂府。嘗曰。不義之財物。補止於家。不義之食。補止於五臟。尤不可犯也。子挺之操心類如此。白玉之疵。喜酒色也。庚子年進士。是年九月歿。年二十六。知與不知。莫不痛之。 出師友名行錄下同
安遇字時叔。孝行冠於鄕。居父喪。一從家禮。從佔畢齋受業。旣而無仕心。始異於畢齋。嘗擧於鄕。赴京入會試。四館年少者驕傲。長老鄕生欲撻之。時叔曰。安可以父母遺體。無罪而自毀。以求名利乎。不入而去節操可方東漢云。
柳從善晉州人。字如登。居山自晦。朋戚罕見其面。
禹善言禮字德父。號楓崖。丹城君貢之子。爲人倜儻。辛丑年。南行嶺南。謁佔畢齋先生於廬幕。先生喜之。字曰子容。
崔河臨字鎭國。號太虛堂。所性喜功名。庚子年進士。是年夏。妖僧學祖。敎其徒雪儀。潛回佛像。云佛自行。致粟帛錦布。日以千數。太學上書請誅妖僧凡五上書。不得允。疏文大抵皆出鎭國手。丙午七月歿。年三十二。家貧不能斂葬。友人致奠而葬之。所著安宅記。傳于世。
高淳字煕之。又字眞眞。又字太眞。濟州人。爲人有聾病。畫地成字以致意焉。戊戌年。應詔上書論時政。得妄名。人或告之。煕之聞而喜之。自號妄煕之。初見辛德優於諸儒中。諸儒相與語詡詡。煕之書一絶於紙云。小閣春風靜。淸談摠有餘。聾人無一味。垂首獨看書。德優喜之。和其詩曰。世聲聒溷濁。糞壞嗟鼻餘。羡君勝房老。晝隱千卷書。自是以爲知心友。
高煕之嘗有聾病。篤信好學。一日吟詩就寢。先父中樞。 守宗 夢與一詩曰。華髮蒼蒼減昔年。孤身寂寂守山前。莫言白骨無知感。聞汝吟詩我不眠。余嘗序其詩。略曰。一氣於天地。至而伸散而歸。其實一物。而人死之餘。氣各分諸子孫身上。有動於子孫。則有感於神明。昭昭也。雖然。人必直哉。惟淸而愀然。如復見父母陟降常在左右矣。若高煕之者。所謂惟淸者也。 出秋江冷話並下同
東人效兀良哈舞。搖頭揚目。聳肩屈臂。二股十指同時屈伸。或作張弓狀。或作狗行狀。或爲熊經鳥伸或退風生。自公卿大夫。以至於士庶人倡優女子。解音律便容體者。無不爲之。號胡舞。被之管絃。議政府右贊成魚有沼尤善之。余初亦以爲風流事。亡友子挺極言非之曰。媚人之行。柔嫚之態。非人所爲。況戎狄譬如禽獸安得吾身上加禽獸事乎。余聞之。頗不然之。旣讀漢書蓋次公效檀長卿沐猴辭。然後方知子挺之正論。而前賢後賢之同一揆也。
慶徵君諱延字大有。淸州人。冬月病父嘗欲食魚膾。君鑿氷置網。不得魚。君泣曰。古人叩氷而得魚。今吾寘網而不得。誠感固矣。赤脫巾襪。立氷穴經一夜。得烏鯉。父又欲食辛甘菜。君泣於菜根。菜忽生。歸而食其父。父病愈。及父歿。居廬三年。饘粥蔬果之羞。一依家禮。事母定省。年踰五十不少衰。母歿又如喪父時。光廟徵辟不就。主上之九年。應聘爲司宰監主簿。召入內殿。問曰。聞卿家居叩氷魚躍然乎。對曰。冬月無魚之時。父以爲必不得。設網以求甚密。幸而得之。父喜謂孝感所致。鄕里聞而不察。謂孝感所致。臣實不能如此。上曰。卿讀幾書。曰。四書二經。上曰。四書二經之中。何語爲第一義乎。對曰。四書二經之中。書稱舜之大孝。此臣之所欲而不能者。又稱周公之忠。此臣之所欲而不能者。上嗟歎久之。
淸州有楊水尺三兄弟。所行不類。聞慶徵君事親有道。棄其舊染。恂恂然執子道。亦昏定晨省。喪親之日。勺飮不入口。居廬三年。不進酒果。喪畢之後。三人同居。盡得歡心。相自戒曰。若有不類之行。慶生員聞之。不亦愧乎。
兪生員垣者沔川人。戊申年間。挾書詣闕。陳所學數千餘言。皆切中朝廷之病。士林萃而騰笑。兪嘗號其亭曰淸風。其友朴生扁其齋曰明月。縉紳之間有可笑事。必曰。兪淸風朴明月。以此言詆之。二人坎坷不試。亦未嘗有干進心。
壬寅年。開寧縣松坊里一人耕田。得古石佛。耳目口鼻皆泯滅。置之田畔。偶有病喘人。拜之病若輕歇。遂以爲靈。或云放光。隣邑有宿疾者。無嗣息者。未娶婦者。失藏獲者。凡中心有所爲。禱之輒驗云。男女雜還。持米布紙錢香燭花果者。日夜不絶。有僧來主香火。有施主作瓦屋。又將作大刹。士族婦女皆親至祈禱。開寧縣監金山訓導。皆禱其子病。或祈嗣。時金山郡守李仁亨聞之。遣儒生及吏卒。捕其僧及施主逐之。金文簡公辭應敎之命。方居金山。以詩賀李守云。拋擲菜田不記春。頑然拳石有何神。初如求食木居士。漸作撞錢土舍人。男女幾家將汙染。香燈一里欲因循。我侯直是邠州守。擊破妖狐▣▣▣。時人美之。有聖朝方信有英雄之句。今開寧之石佛。其怪愈於妖狐。而無敢攻袪惑者。明府不以爲他境之事。而毅然遣卒逐捕妖首。焚毀紙錢。使愚民曉然知其爲所誤。眞曠世一奇事也。 出謏聞瑣錄
崔應敎溥羅州人也。宋正字欽靈光人也。同時在玉堂。俱受由下鄕。相距十五里。一日正字訪應敎於家。語間應敎曰。君騎何馬來耶。正字曰馹也。應敎曰。國之所給。止于君家。自君家至吾居。乃私行也。何至乘馹。歸朝應敎啓此意罷之。正字來辭於應敎。則曰。若君年少輩。後當操心可也。祖宗朝士大夫奉法。友朋勸勵服義。可以想見。 出前言往行錄
成廟昇遐之日。城中士大夫巨族。多有婚媾者。或乘朝而往。或當午而往。或若不知而往。其後事覺。皆抵罪。竹城君朴之蕃武人。不解文字。前一日是醮子之夕。賓僚畢集。忽聞大內疾劇。乃曰。君父不豫。臣子何忍私行婚禮。遂謝絶賓僚而返之。時有議者曰。儒林反不如武。可歎也已。 出慵齋叢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