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의병 곽재우 /미수 허목 관련기록 미수집

기언 별집(記言別集) 제7권 [감사(監司) 이명웅(李命雄)에게 보냄 등기록

아베베1 2009. 11. 18. 17:25

기언 별집(記言別集) 제7권
 서독(書牘) 3
[감사(監司) 이명웅(李命雄)에게 보냄]


변란을 겪은 이래로 만사가 마음을 놀래게 하여, 차라리 보지 않고 듣지 않음만 같지 못하니 어찌하겠소. 영공은 막북(漠北)에서 해를 넘겨 몹쓸 괴로움을 모두 겪으며, 온갖 마음을 경동시키고 성질(性質)을 참아서 덕에 힘쓰기를 두터이 하였으니, 이것은 서로 사랑하는 자가 매우 바라던 것이라 또한 무엇을 탄식하겠소. 이번에는 다행하게 남방(南方)에 안절(按節)하게 되었구려. 지금 병란과 흉년 뒤에 백성의 목숨이 위급하고 근심을 진정하지 못하니, 바로 어진 인재가 포부를 펼칠 때이오. 더욱 노력해서 역사에 아름다운 이름을 얻은 옛사람을 따라가기를 바라오. 높다란 관(冠)에 띠를 매고 태평한 날 부귀(富貴)를 누리는 것과는 사업(事業)이 만분 다를 뿐이 아닐 것이니, 어찌 생각하시오?
나는 다행히 죽지 않고 온 가족이 의춘(宜春 지금의 의령) 고을 깊은 구석에 밥을 얻어먹고 있으니, 인사가 더욱 끊어져 버렸소. 옛사람의 남긴 글에 전심(專心)하나, 영공의 가르침은 받지 못한 지가 벌써 오래되었음이 한스럽고 고루(固陋)함이 매우 부끄럽소. 이번에 마침 감영(監營) 앞을 지나가게 되었으니, 한번 만나 악수(握手)하고 난리 동안 쌓인 정회(情懷)를 풀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겠소만, 영문(營門) 출입에 번거롭고 외람됨이 겁나오. 그러나 또 어찌 무정한 자같이 지나 버리겠소. 그렇기에 편지 한 장을 올려서 잊지 못하는 생각을 대략 아뢰오.
만약 강우(江右) 지역을 순행하다가 도굴산(闍崛山) 서쪽 난석계(亂石溪) 물가에 오거든, 가난한 집이나마 한번 찾아서, 마을 아이와 시골 늙은이에게 ‘말라 빠진 허화보(許和父 허목)가 어떤 사람이기에 능히 고귀(高貴)한 사람이 찾아오게 하는가?’라고 서로 이르도록 하오. 우습소. 말을 다 못하오

 

송자대전(宋子大全) 제101권
 서(書)
정경유(鄭景由)에게 답함 - 정사년(1677) 2월 23일


의춘(宜春 의령(宜寧)의 옛 이름)에서 헤어진 지 어느덧 3년이 되었네. 그사이 세상사의 변화가 너무도 많았네.
그전에 자네의 가문은 선대의 덕을 고치지 않고 또 여경(餘慶)으로 제사를 받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편지를 받고서 백씨(伯氏)가 세상을 떠나 연기(練期 소상(小祥))가 벌써 지났음을 알았으니, 놀라움과 애통함을 금할 수 없네. 운기(運氣)가 좋지 못하여 대현(大賢)의 후예도 복을 받지 못함을 알겠네. 신명한 이치가 잘못된 지 오래이네. 어쩌겠는가.
3년 사이에 안부를 보낼 인편이 없지를 않았건만 양문(梁門)의 구서사건(購書事件)에 징계되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라네. 지금 미약한 자네 집의 힘으로 사람을 멀리 보내어 궁벽한 곳을 찾아 존문(存問)을 하니, 이 어찌 쉬운 일인가. 게다가 이 어리석은 사람을 형편없다고 여기지 않고 굽어 물어 마치 내가 조금이라도 아는 것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하니, 송구스럽고 부끄러워 어찌할 줄 모르겠네. 그러나 자네의 성의를 감히 저버리지 못하겠기에 조목에 따라 답하였으니, 다음 편에 고쳐서 돌려보내 주기를 바라네. 지금 감히 나의 어리석음을 숨기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이를 통하여 가르침을 구하고 싶어서라네.
나는 온갖 시련(試鍊)을 받아 죽을 날이 날마다 가까워지니,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것이 죄인으로서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조금도 슬픈 마음이 없다네. 하고 싶은 말은 매우 많지만 여기 온 종[奴]이 양식이 떨어져 빨리 돌아가야겠다고 하므로 하나하나 다 말하지 못하네. 회답한 것도 매우 난잡하니 모두 헤아려 살펴 주기를 바라네.


별지
‘《대학》을 본다[看大學]’에서부터 ‘앞쪽을 보기도 어렵다[便看前頭亦難]’까지에 대하여.
전두는 전문(傳文)에 상대하여 하는 말이니, 경 1장(經一章)임에는 의심이 없네. 거기서 말한 ‘명명덕(明明德)을 읽을 적에는 명명덕이 전두가 된다.’고 한 것은, 아마 현석(玄石 박세채)의 본의(本意)가 아닐 것이니, 혹시 기록에서 틀린 게 아닐까. 전혀 문리(文理)가 이루어지지 않네.
‘어느 것이 소학인가[如何是小學]’에 대하여.
《대학(大學)》ㆍ《소학(小學)》은 부자(父子)란 글자와 같네. 자(子) 자를 말하면서 부(父) 자를 빼 버리면 안 되듯이 《대학》을 말하면서 《소학》을 빼 버리는 것도 되지 않으므로 여기서 겸하며 말한 것이네.
‘내가 했던 많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 나의 공부의 깊이를 보지 못할 것이다[不用某許多工夫亦看某底不出]’에 대하여.
오직 성인(聖人)이어야 성인의 뜻을 아는 것이니, 단지 문자(文字)뿐만이 아닐세. 아마 선생의 깊은 뜻은, 스스로 《대학》 한 책이 이미 가슴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한 것이네. 만일 선생의 평생 공부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선생의 공부가 이 지위에까지 이른 것을 알겠는가.
복희(伏羲)ㆍ신농(神農) 아래 진씨(陳氏) 주(註)의 ‘학교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學之名未聞]’에 대하여.
맹자가 ‘하(夏)에서는 서(序)라 하였고, 은(殷)에서는 상(庠)이라 하였고, 주(周)에서는 교(校)라 하였다.’ 하였고, 이 이상은 이런 명칭이 없기 때문에 진씨의 말이 이러하네.
인생팔세(人生八歲) 주의, 제씨(齊氏)의 ‘육예는 8세 아이의 일이 아니다[六藝非八歲]’에서 ‘이름과 일일 뿐이다[名物而已]’까지에 대하여.
선사(先師) 문원공(文元公)도 제씨의 말을 따르지 않았네. 또 주 선생이 절문(節文) 두 글자를 위아래 문구(文句)에 나누어 소속시켰으니, 마땅히 절문(節文)의 문(文) 자로 보아야 할 듯하네.
규모와 절목을 안[內]과 밖[外]으로 구별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모든 만물이 큰 것은 밖에 있고 작은 것은 안에 있네. 그러므로 《중용》의 주에 ‘그 큼은 밖에다 더 둘 것이 없고 그 작음은 안에다 더 둘 것이 없다[其大無外其小無內]’고 하였네.
‘살펴보면 그 책이[顧其爲書]’에서 ‘그 빠지고 소략한 것을 보충하여[補其闕略]’까지에 대하여.
’고기위서’의 서(書) 자는 서문 첫머리의 ‘대학지서(大學之書)’의 서(書) 자에 응하는 것 같네. 대략 그 뜻은, 《대학》 책이 정자(程子)의 개정을 거쳤으나 그래도 약간 잘못되었다[放失]는 것이니, 정자는 그 순서만을 고쳤을 뿐이므로, 정자의 책으로 지목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네. 또 ‘방실(放失)’ 두 글자는 반드시 둘로 나누어 소속시킬 것 없네. 대체로 실(失) 자는 순서가 옛 모양을 잃었다는 것에 적용할 수도 있는 것이며, 오직 제5장의 없어진 것[亡失]만이 아닐세. ‘가려 모았다[采而輯之]’는 것은, 아마 정자의 말을 가려서 《대학》에 모았다는 것일 것이니, 이를테면 ‘친(親)은 신(新)으로 해야 한다.’ ‘신(身)은 심(心)으로 해야 한다.’는 것과 ‘지본(知本)은 연문(衍文)이다.’라고 한 따위이네. ‘보기궐략(補其闕略)에 이른 다음에 도로 고기위서(顧其爲書)를 응한다.’고 한 기(其) 자는 모두 《대학》을 말한 것이네. 이렇게 보면 어떨지 모르겠네.
‘명덕이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明德者人之所得乎天]’에서 ‘모든 일에 응한다[應萬事]’까지에 대하여.
명덕은, 성(性)이 심(心)에 들어 있어서 광명(光明)하고 발동(發動)하는 것에 입각하여 말한 것이니, 심을 놓아두면 그러한 소이연(所以然)을 밝힐 수가 없고, 성을 놔두면 그러한 소당연(所當然)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장구(章句)에서 해석하기를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는 성을 말한 것이지만 심과 동일한 까닭에 허령불매(虛靈不昧)하여 광명이 밝게 비치는 것이니 이것은 이른바 명덕이고 ‘모든 이치를 갖추어 만사에 응한다[具衆理而應萬事]’는, 특히 심이 이 성을 통섭[統此性]하여 운용하는 도리를 말한 것입니다. ‘허령불매’ 4자가 중간에 있어서, 위 1구(句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人之所得乎天]’을 말함)는 허령불매의 원인을 말하였고, 아래 2구(‘뭇 이치를 갖추어[以具衆理]’와 ‘모든 일에 응한다[而應萬事]’를 말함)는 허령불매의 도(道)를 말한 것이니, 장구(章句)의 정묘하고 자세함이 이와 같습니다.
언젠가 이 뜻을 가지고 현석(玄石 박세채)에게 질문을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논(論)한 것이 더욱 정묘하다. 요사이 다시 헤아려 보니, 명덕의 본체만을 가지고 말하면 단지 허령불매의 4자면 충분하니, 맹자(孟子)의 이른바 본심(本心) 및 인의(仁義)의 마음이 그것이다. 명덕의 의(義)를 총괄하여 말하면 인지소득호천(人之所得乎天)에서부터 응만사야(應萬事也)까지 모두 연결지어 보아야 하는 것이니, 장자(張子 장재(張載))의 이른바 심통성정(心統性情)이 그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말이 어떻습니까?
‘소이연’과 ‘소당연’을, 주 선생은 모두 이(理)로 말하였는데, 지금 자네가 ‘소이연’을 심(心)에 소속시킨 것은 매우 잘못일세. 비록 하문(下文)의 불매(不昧)의 원인과 불매한 도(道)의 근본이 된다 하더라도 매우 타당하지 않네. 그 이하는 대체로 잘 보았네. 그런데 ‘통차성(統此性)’의 통(統) 자를 구(具) 자로 고치고 ‘운용지도리이(運用之道理耳)’ 여섯 자를 ‘이 정을 행하는 것이다[行此情者也]’로 고치면 나을 듯하네.
또, 이른바 하늘에서 얻은 것이라는 것은 심(心)ㆍ성(性)ㆍ정(情) 세 가지를 통합하여 말한 것인데, 지금 자네는 성 하나만을 말하니 그렇다면 심과 정은 하늘에서 얻은 것이 아닌가?
또, 이른바 ‘위 1구(句)는 허령불매한 원인을 말한 것이다’고 한 것은 하늘에서 얻은 것을 지적하여 말한 것이니, 위에서 말한바 ‘하늘에서 얻은 것은 곧 성을 말한 것이다’와는 서로 모순이 되네.
명덕의 소주에 주자가 심(心)은 화(火)에 속한다고 말한 것에 대하여.
오성(五性)은 오행(五行)의 이치이고 오행이 오장(五臟)에 속한다면, 당연히 오장이 각기 하나의 성을 통섭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오성을 모두 심(心)에 통섭시킨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천하의 만물은 오행에 배속되지 않은 것이 없네. 오행의 이치가 사람에게 부여되어 오성이 되었다고 하면 되지만, 그대로 오행에 배속된 모든 것에 모두 인ㆍ의ㆍ예ㆍ지ㆍ신(仁義禮智信)의 성(性)이 있다고 하면 크게 옳지 못하네. 대체로 오행에 배속되는 것은 혹은 기(氣), 혹은 형(形), 혹은 맛, 혹은 냄새로 하는데, 지금 맛 가운데 모든 단맛은 다 토(土)에 속한다 하여 꿀이 신(信)의 성(性)을 갖추었다고 하면 되겠는가. 이런 곳은 절대로 집착하여 보면 안 되는 것이네.
북계 진씨(北溪陳氏)가 ‘이와 기가 합한 것이 허령하게 된 까닭이다[理與氣合所以虛靈]’ 한 데 대하여.
이 단락은 율곡과 사계 두 선생이 모두 깊이 배척하여, 그 말이 《경서변의(經書辨疑)》 속에 자세하게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어류(語類)》를 참고하였더니, 혹자가 묻기를,
“지각(知覺)은 마음의 영(靈)입니까, 아니면 기(氣)의 작용입니까?”
하자, 주자가 말하기를,
“오로지 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지각의 이치가 있다. 이치가 지각하기 전에 기가 모여 형(形)을 이루게 되는데 이(理)와 기가 합하고 나서 능히 지각할 수 있게 된다.”
하였습니다. 지각이 허령과 체용(體用)의 구별이 있기는 하지만 그 이치는 결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정우복(鄭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이른바 ‘북계(北溪)의 말이 곧 주자의 말이다.’ 한 것이 참으로 그 본뜻을 맞췄는데, 사계는 어찌하여 깊이 고찰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까. 언젠가 이것을 연유하여 생각해 보니, 이(理)는 비유하자면 등불이고 기(氣)는 비유하자면 기름입니다. 등불은 반드시 기름과 서로 합한 뒤에야 불빛이 생기는 것이고, 이치는 반드시 기와 서로 합한 뒤에야 허령(虛靈)이 생기는 것입니다. 단지 이치는 형(形)이 없고 불은 형이 있는 것이 같지 않은 점입니다. 혹 기름이 탁하면 그 불빛이 어두컴컴하여 물건을 비추지 못하는 것이 마치 새나 짐승이 편색(偏塞)한 기를 얻은 것과 같으니, 이는 이가 기에 가려져서 허령하지 못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와 기가 합했다는 데 대한 이(李)ㆍ김(金) 두 선생의 배척은 이 한 구절뿐이 아니네. 그 위에서,
“사람이 태어날 때 천지의 이(理)를 얻고 또 천지의 기(氣)를 얻는다.”
하였는데, 이 말은 매우 옳지 않네. 사람과 생물이 태어나지 않았을 때에는 이와 기가 본디 저절로 섞여 있어서 분리되지 않았네. 그러므로 기가 모여서 형을 이룰 때에, 이는 저절로 형 속에 갖추어지는 것이네. 그러기에 《중용》 주(註)에,
“기로써 형이 이루어지고 이도 부여된다.”
하였으니, 이 어찌 아주 분명한 점이 아닌가. 지금 먼저 천지의 이를 얻었다고 말하였는데, 사람이 천지의 기를 얻지 않은 때에 이가 어디서 떨어졌기에 얻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네.
그 아래에 또 ‘천지의 기를 얻었다’ 하였으니, 이것은 먼저 이가 공중에 따로 매달려 있고 기가 혼자 능히 이리저리 조화를 부려 형을 이룬 것이란 말인가. 비록 그 문장을 고쳐 ‘천지의 기를 얻고 또 천지의 이를 얻었다’ 하더라도, 오히려 앞과 뒤 두 번이라는 혐의가 있는 것인데, 더구나 이가 먼저이고 기가 뒤이겠는가. 퇴계 선생이 이발기수설(理發氣隨說)을 내세웠는데, 율곡 선생은 언제나 이것을 퇴계 선생의 바른 견해 가운데 하나의 결점으로 여겼네. 혹시 퇴계 선생의 견해가 사실 여기에 말미암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한 이와 기가 합했다는 것은, 마치 이와 기가 제각기 한곳에 있다가 인ㆍ물(人物)이 태어날 때에야 비로소 저쪽과 이쪽에서 한곳에 합하는 것 같네. 그것은 《어류》에서 말한 ‘기가 모여 형(形)을 이루고 이와 기가 합한다’ 는 것과 크게 서로 다르지 않은가. 《어류》의 설은 곧 《중용》 주(註)의 설의 뜻이지만, 사실은 태극도(太極圖)에서 말한 ‘무극(無極)의 진(眞)과 이오(二五 음양과 오행)의 정(精)이 묘하게 합하여 모인다’ 에서 근본한 것이네.
자네의 편지에서 ‘이 이(理)가 반드시 이 기(氣)와 서로 합한 뒤에 허령(虛靈)이 생긴다.’는 것은 매우 그릇된 것이네. 만약 고쳐서 ‘이와 기가 합하여 허령한 것은 심(心)이고 그 허령한 가운데 갖춰진 것은 성(性)이다’고 한다면 거의 타당할 것이네. 그런데 지금 자네의 편지에는 ‘이와 기가 합한 뒤에 허령이 생긴다’ 하였으니, 이는 허령을 성(性)이라 한 것일세. 이 어찌 석씨(釋氏)가 작용(作用)을 성이라 하는 것과 다르겠는가. 이것은 그만두고 태극도와 《중용》 주를 가지고 반복하여 참고하면, 진씨(陳氏)의 설 및 이ㆍ김 두 선생이 논한 것에 대하여 논변하지 않고서도 그 옳고 그름을 알 수가 있을 것이네.
황씨(黃氏)가 말한 ‘허령불매(虛靈不昧)’에서 ‘덕야(德也)’까지에 대하여.
이 단락은 주자의 뜻과는 부합되지 않는데, 율곡은 뜻이 통하여 잘못이 없다고 하여 동그라미를 쳤으니, 의아스럽습니다.
주자가 《중용》에서 심(心)을 논하면서는 ‘허령지각(虛靈知覺)’이라 했는데, 여기서 지각을 바꾸어 말한 ‘불매(不昧)’는 바로 ‘명덕(明德)’의 명(明) 자의 근본이고 ‘하늘에서 얻었다[所得乎天]’의 득(得) 자는 바로 덕(德) 자의 근본이네. 황씨의 설은 진실로 주자의 본뜻과 들어맞네. 절실하게 밝힌 것은 없지만 사실 잘못된 점이 없기 때문에 율곡이 예전대로 그냥 둔 것이네.
옥계 노씨(玉溪盧氏)가 ‘허는 심의 적이다[虛者心之寂]’ 한 것에 대하여.
허(虛)란 투명하게 밝은 것을 말하고 적(寂)이란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이르는 것으로, 허는 동정(動靜)을 통합하여 하는 말이고 적은 정(靜)할 때의 기상(氣象)만을 관섭(管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자는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의미와 기상은 크게 다르니, 아마도 강제로 끌어다 합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어떻습니까?
심(心)이 만약 시끄럽고 파동(波動)한다면, 어떻게 허(虛)가 되겠는가.
《주역(周易)》에,
“생각도 없고 하는 것도 없어서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다.”
하였고, 정자(程子)는,
“심의 체(體)를 가리켜 말한 것이 있으니,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것이다.”
하였네. 심의 체에서 적(寂) 자를 말한 사람은 노씨뿐만이 아니네.
‘반은 목욕하는 데 쓰는 반이다[盤沐浴之盤]’에 대하여.
소주(小註)의 소씨(邵氏)의 설을 운봉(雲峯 호병문(胡炳文))도 칭찬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에, 이것은 몸의 때[垢]를 제거하는 것으로 심의 악(惡)을 제거하는 데 비유한 것이므로 반드시 온몸을 들어서 한 말입니다. 아마도 세숫 대야로 얼굴 하나만 깨끗이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또 옛사람은 닷새에 한 번 머리를 감고 사흘에 한 번 목욕을 하였으니, 날마다 목욕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곳은 대의(大義)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니 꼭 이처럼 노력을 들일 것은 없네.
‘작신민(作新民)’에 대하여.
《상서(尙書)》의 본주(本註)에는 ‘작신(作新)’ 두 글자를 합하여 말하였으나, 여기서 꼭 작(作) 자를 임금에게 속하게 하고 신(新) 자를 백성에게 속하게 한 것은, 아마도 뜻이 있어서일 것이네. 이것은 위 장(章)의 극명준덕(克明峻德)을 이어서 한 말이니, 이미 임금이 능히 큰 덕을 밝히기를 요(堯) 임금처럼 한다면, 백성이 어찌 보고 느끼어 스스로 새로워짐이 없겠는가. 그들의 스스로 새로워짐을 따라서 진작시키는 것은, 또 《맹자(孟子)》에 인용된 ‘또 좇아서 진작시켜 은혜를 베풀어 주라[又從而振德之]’고 한 방훈(放勳)의 말과 같은 것이네. 그렇지 않다면, 주 선생이 어찌 작신(作新) 두 글자를 합하여 해석하면 간편하다는 것을 몰라서, 꼭 이렇게 지리하고 번거롭게 나누어 소속시켰겠는가. 나의 생각은 이러하나 옳은지는 모르겠네.
‘나의 명덕이 이미 밝다[我之明德旣明]’를 소주(小註)에 ‘명덕이 근본이 된다’ 하였고 ‘자연히 백성의 심지를 외복시킴이 있다[自然有以畏服民之心志]’를 소주에 ‘이것은 곧 신민(新民)이다’ 한 것에 대하여.
《경서변의(經書辨疑)》에서 사계(沙溪)는 이곳의 소주가 아래 주(註)의 주자의 설과 같지 않다고 하여 의심하였습니다.
경문(經文)의 ‘만물에는 근본과 끝이 있다[物有本末]’의 주에 ‘명덕이 근본이 되고 신민이 끝이 된다’ 하였는데, 이 청송장(聽訟章)은 바로 이 경의 글을 해석한 것이네. 그러므로 본주에 ‘나의 명덕이 밝으면 자연히 백성의 심지(心志)를 외복(畏服)시킴이 있다. 그러므로 송사는 판결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저절로 없게 된다’ 하였네. 이른바 나의 명덕이 이미 밝게 된다는 것은 명명덕(明明德)이고, 저절로 백성의 심지를 외복시킴이 있어서 송사는 판결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저절로 없게 된다는 것은 신민(新民)이네.
그 아래에서 또 끝맺기를 ‘이 말을 보면 근본과 끝의 먼저 하고 뒤에 할 바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네. 이는 명덕과 신민이 근본과 끝이 됨을 거듭 말하여 ‘먼저하고 뒤에 할 바를 알면’의 뜻을 해석한 것이니, 말뜻이 분명하여 다시 의심할 만한 것이 없네. 《혹문(或問)》에서도 ‘송사를 들음[聽訟]과 송사 없음[無訟]이 명덕과 신민의 뜻에 어떻게 해당되는가?’ 하였으니, 이 또한 송사를 들음과 송사가 없음으로 명덕과 신민의 뜻을 삼아 질문을 내세운 것이고, 그 대답한 말도 장구(章句)와 다름이 없네. ‘자기의 덕이 이미 밝게 되었다[己德旣明]’는 것은 이른바 명덕이고 ‘백성의 덕이 스스로 새로워진다[民德自新]’는 것은 이른바 신민이니, 이 역시 명덕과 신민으로 근본과 끝을 삼은 것이 매우 명백하네. 그러나 다만 그 아래 글에 ‘그 또한 끝이다[其亦末矣]’라는 글이 있으므로, 많은 독자들이 이를 고집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송사가 없게 하는 것은 근본이고 송사를 듣고 판결하는 것은 끝이라고 하지만, 아마도 여기에서의 끝[末] 자는 근본과 끝[本末]의 끝 자가 아니고, 곧 아주 작음[徵末]의 뜻일 것이네. 왜 그런 줄을 아느냐 하면, 그 위 글에 ‘혹시 그렇게 하지 못하고 구구하게 분쟁(分爭)과 변송(辨訟) 속에서 잘해 보려고 한다면……’이라는 말이 실상 억눌러 물리치려는 말인데, 그것을 어떻게 ‘만물에는 근본과 끝이 있다[物有本末]’는 뜻과 함께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선사(先師 김장생을 가리킴)께서 소주(小註)의 말이 혹시 기록한 사람의 오기(誤記)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이네. 바라건대, 다시 경문(經文) 및 장구(章句)ㆍ《혹문(或問)》을 가지고 반복하여 참고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 마음을 바르게 함에 있다[在正其心]’와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不得其正]’에 대하여.
《변의(辨疑)》와 호운봉(胡雲峰)의 설이 다른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계(沙溪)의 설이 아마 정론(正論)인 듯합니다. 대체로 이 심(心)의 용(用)이 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실상 그 네 가지가 있으면 마음에 막히는 병이 있어 체(體)가 그 허(虛)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단 있다[有所]고 말했으면 마음의 체가 바르지 못함이 벌써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인데, 운봉은 네 가지 바른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을 마음의 체가 바름을 얻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전(傳)에서 말한 ‘네 가지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이 네 가지에 혹시라도 막히어 체가 그 허를 잃게 되면, 마음의 체가 바름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 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한 구절은 중복되고 막히며 원래 기력이 없고 전혀 의미도 없으니, 전을 지은 이의 뜻은 결코 이렇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장구(章句)에,
“용(用)의 행하는 것이 혹 그 바름을 잃지 않을 수 없다.”
라고 분명히 말하였으니, 앞에서 말한 ‘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용을 가리킨 말이네. 운봉의 설은 정말 맞지 않으니 자네의 설이 옳네.
‘욕이 움직이고 정이 이긴다[欲動情勝]’에서 ‘그 바름을 잃는다[失其正]’까지에 대하여.
《경서변의》에서 사계 선생은 ‘욕심이 움직이고 사정이 정성을 이기면, 행하는 것의 바름을 잃는 것은 필연적인데 주(註)의 혹(或) 자는 알 수 없다.’ 하였습니다.
‘혹 그 바름을 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或不能不失其正]’의 혹 자는 ‘욕심이 움직이고 사정이 정성을 이긴다’의 뒤에 있으므로 율곡(栗谷)도 의심하여 《성학집요(聖學輯要)》에는 빼 버리고 쓰지 않았네. 그렇지만 나의 뜻은 항상 그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네.
‘한 집이 어질면이라고 한 그 이상은[一家仁以上]’에서 ‘사람이 스스로 감화된다[人自化之]’까지에 대하여.
이것은 ‘보적자(保赤子)’ 아래 소주의 ‘이는 단지 감화시키는 것이 근본임을 말한 것이다[此且只說動化爲本]’와 같지 않으니 의심스럽습니다.
‘일가인(一家仁)’의 소주에 비록 ‘백성이 저절로 감화된다[人自化之]’는 글이 있으나, 위 글에서 말한 ‘그 집에서부터 미루어 나가 국가를 다스린다[推其家而治國]’와 ‘어린이를 보호하듯이 하라[如保赤子]’의 소주에서 말한 ‘뒤는 오로지 미루어 나가는 것을 말한 것이다[後方專說推]’와 서로 부합하네. 이 한 단락은 대략적으로 말하면, 곧 미루어 가는 것인데, 미루어 가는 중에도 감동ㆍ교화의 뜻이 있는 것이네. 다만 ‘보적자’의 소주에서 말한 ‘감동하여 교화시키는 것이 근본이다[動化爲本]’라는 것은 위 주(註)에서 말한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 백성을 부린다[推慈幼之心以使衆]’는 것과는 서로 모순이 되네. 혹시 미루어 가는 것[推去]과 감동ㆍ교화[動化]는 다른 두 가지 일이 아니라, 서로 표리(表裏)가 되기 때문에 번갈아 말해도 방해가 되지 않는 것인지 의심스럽네.
‘재물이 있으면 이에 쓰임이 있다[有財此有用]’에 대하여.
‘재물이 있으면 이에 쓰임이 있다’는 것은, 실상 맹자(孟子)가 말한,
“곡식과 물고기를 다 먹지 못할 것이고, 재목을 다 쓰지 못할 것이니, 이는 백성으로 하여금 산 사람을 기르고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는 데 유감이 없게 하는 것이다.”
와 같은 것이네. 곡식ㆍ물고기ㆍ재목은 재물이고, 이것으로 산 사람을 기르고 죽은 사람을 장사하는 것은 쓰임이다.
선즉득지(善則得之)의 소주에 옥계 노씨(玉溪盧氏)가 말한 ‘여기서 이른바 선은 지지선(止至善)의 선이다[此所謂善卽止至善之善]’에 대하여.
‘지선(至善)’의 선(善)은 사리(事理)를 가지고 하는 말이고 선하다 선하지 않다의 선은, 공부하는 점을 가지고 하는 말이므로, 그 뜻이 본디 다른데 노씨는 합쳐서 같이 취급하였으니 의심스럽습니다.
경문(經文)의 ‘지선’은 통괄하여 말한 것이고, 여기서 말한 선은 아마 혈구(絜矩)를 능히 수행하는 것을 가리켜 한 말일 것이네. 비록 통괄하여 말했거나 나누어서 말한 점은 다르지만 그 이치는 다를 것이 없네.
전(傳) 10장을 호씨(胡氏 호병문(胡炳文))는 8절(節)로 나누었는데, 너무 세쇄한 듯합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5절로 나누어 보아야 할 듯한데 어떻습니까?
전 10장은 주 선생이 벌써 8절로 만들었으니, 반드시 그에 대한 설이 있어서 바꾸지 못할 것이네. 호씨가 이미 첫머리의 1절을 나누어 2절을 만들고 또 ‘언패(言悖)’와 ‘강고(康誥)’를 합하여 1절을 만들었으니, 벌써 별 의미가 없는 듯한데, 지금 자네는 또 묶어서 5절로 만드니, 합당한지의 여부는 그만두더라도 경솔하고 참람한 혐의가 없지 않겠는가. 이것이 작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일어난 원인을 찾아보면 작은 잘못이 아니네.
독서를 할 때에는 반드시 마음을 텅 비게 하고 뜻을 겸손히 하여, 한결같이 선유(先儒)의 옛날에 해 놓은 말을 반복하여 음미해 보다가, 몹시 걸리고 막히는 곳은 부득이 따로 다른 설[異說]을 구하는 것은 그런대로 괜찮은 것이네. 그렇지 않고 언제나 새롭고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것으로 힘을 쓰면 마음이 이미 밖으로 내달아서 심복(心服)이 되지 않는 것이네. 그러니 무엇으로 학문의 근본을 삼겠는가. 서로 깊은 허여를 입었기에 이와 같이 깊은 말을 하였으나 대단히 두렵네.


 

[주C-001]정경유(鄭景由) : 정찬휘(鄭纘輝)를 말함. 경유는 그의 자. 호는 궁촌(窮村). 송시열의 문인. 음직(蔭職)으로 현감(縣監)을 지냈음.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임. 이 편지는 송시열이 유배지(流配地)인 장기(長鬐)에서 3년 만에 그의 편지를 받고 그동안에 변천된 여러 가지 일을 개탄하고, 질문한 《대학장구(大學章句)》 문목(問目)에 대하여 별지로 회답한 것이다.
[주D-001]양문(梁門)의 구서사건(購書事件) : 양문은 영평(永平 경기도 포천군(抱川郡)에 속한 지방)에 있던 역(驛)의 이름. 언젠가 여기에서 송시열이 부친 편지를 남에게 빼앗긴 적이 있었다. 《宋子大全隨箚 卷10》
[주D-002]전문(傳文) : 《대학(大學)》에 있어서 경문(經文)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로, 《대학》의 경문은 공자의 말을 증자(曾子)가 기록한 것이고, 전문은 증자의 뜻을 증자의 문인이 기록한 것이다. 《大學章句 經1章》
[주D-003]절문(節文) : 쇄소(灑掃)ㆍ응대(應對)ㆍ진퇴(進退)의 절차와 예ㆍ악ㆍ사ㆍ어ㆍ서ㆍ수(禮樂射御書數)의 문예(文藝)이다.
[주D-004]친(親)은 …… 따위 : 정이(程頤)가 경(經) 1장 첫 구절의 ‘친민(親民)’의 친 자는 신(新) 자로 고치고 전(傳) 7장의 ‘신유소분치(身有所忿懥)’의 신(身) 자는 심(心) 자로 고쳐야 한다고 한 것과, 전 5장 첫머리의 ‘차위지본(此謂知本)’은 연문이라고 한 것을 말한다.
[주D-005]네 가지 : 《대학》 전 7장의 분치(忿懥)ㆍ공구(恐懼)ㆍ호요(好樂)ㆍ우환(憂患)을 말한다.
[주D-006]혈구(絜矩) : 자기를 척도(尺度)로 하여 남을 헤아리는 동정(同情)의 도를 말함. 《大學章句 傳10章》
송서습유(宋書拾遺) 제7권
 잡저(雜著)
악대설화(幄對說話)

기해년(1659, 효종10) 3월 11일에 희정당(煕政堂)에서 소대(召對)하였다. 상(上)이 이르기를,
“제신(諸臣)들은 모두 나가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송시열을 가리킴)만 남아 있도록 하라.”
하였다. 제신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자, 상이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문을 활짝 열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너희들도 모두 멀리 물러가 있도록 하라.”
하였다. 그런 다음 상이 이르기를,
“경(卿)과 조용히 대화를 하고 싶어 여러 달을 기다렸지만 끝내 기회가 없었소. 그러므로 오늘은 마음먹고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오. 오늘은 나도 다행히 기운이 회복되었으니, 내 뜻을 다 말할 수 있을 것이오.”
하고는, 이어 탄식하며 이르기를,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의 대사를 말하자는 것이오. 저 오랑캐는 반드시 망하게 될 형편에 처해 있소. 예전의 칸[汗 청 나라 군주를 낮게 칭하는 말]은 그 형제들이 매우 번성했었는데 지금은 점점 줄어들었으며, 예전의 칸은 인재가 매우 많았는데 지금은 모두 용렬하며, 예전의 칸은 오로지 무예와 전쟁만을 숭상했었는데 지금은 점점 무사(武事)를 폐하고 자못 중국의 일을 본받고 있소. 이것이 바로 경이 지난번 주자(朱子)의 말씀을 들어 말한바 ‘오랑캐가 중원(中原)의 인재를 얻어 중국의 제도를 배우면 점점 쇠약해진다.’는 것일 것이오. 지금의 칸이 비록 영웅이라고는 하나, 주색(酒色)에 깊이 빠져 있어 그 형세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오. 오랑캐의 일은 내 익히 알고 있소. 신하들은 모두 내가 병사(兵事)를 다스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나,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있소. 그 이유는 천시(天時)와 인사(人事)의 좋은 기회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정예화된 포병(砲兵) 10만을 길러 자식처럼 사랑하고 위무하여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는 용감한 병사로 만든 다음, 기회를 봐서 저들이 예기치 못하였을 때에 곧장 관(關)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그러면 중원의 의사(義士)와 호걸 중에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소. 아마 곧장 관으로 쳐들어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오. 저들은 무비(武備)를 힘쓰지 않아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의 천 리 길에 활을 잡고 말을 타는 자가 전혀 없으니, 우리가 쳐들어가면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할 수 있을 것이오. 또 하늘의 뜻을 헤아려 보건대, 우리나라의 세폐(歲幣)를 저들이 모두 요동과 심양에 쌓아 두고 있으니, 하늘의 뜻은 아마 다시 우리의 물건이 되게 하려는 것인 듯하오. 또 우리나라에서 잡혀간 수만 명의 포로가 그곳에 억류되어 있으니, 어찌 내응하는 자가 없겠소. 오늘날의 일은 과단성 있게 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뿐이지,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하여, 이에 응대하기를,
“전하의 뜻이 이와 같으시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실로 천하 만대의 다행입니다. 그러나 제갈량(諸葛亮)도 능히 성공하지 못하고서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것이 세상사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만에 하나 차질이 있어 국가가 망하게 된다면 어찌하시렵니까?”
하니, 상이 웃으며 이르기를,
“그것은 경이 나를 시험하는 말이오. 나는 내 능력이 충분히 이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 아니오. 다만 천리나 인심으로 보아 그만둘 수 없는데, 어찌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 하여 스스로 포기하고 하지 않을 수 있겠소. 뜻이 진실로 굳게 정해지면 정성이 자연 돈독해지고, 정성이 돈독해지면 능력 또한 키울 수 있는 것이오. 이 때문에 항상 스스로 분발하고 있을 뿐이오. 더구나 하늘의 뜻이 이러하니, 나는 국가가 망하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하늘이 내게 부여해 준 자질이 그리 용렬하지 않은 데다가, 나로 하여금 일찍이 환란을 당하게 하여 나의 능하지 못한 면을 능하게 해 주었고, 나로 하여금 일찍이 궁마(弓馬)와 전진(戰陣)의 일을 익히게 하였으며, 나로 하여금 저들 속에 들어가 저들의 형세와 산천의 지리를 익히 알게 하였고, 나로 하여금 그곳에 오랫동안 있게 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하였소.
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하늘이 나에게 이러한 시련을 겪게 한 뜻이우연하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소. 그러나 이 일을 함께할 수 있는 신하들이 없고 내 나이가 점점 많아져 세월만 자꾸 흐르니, 내 생애가 즐겁지 못하였소. 그러다 경이 올라온 뒤로 점점 생각이 좋아지게 되었으나, 경 또한 외로운 처지이니 매우 걱정이 되오. 경은 당론(黨論)을 하지 않으니, 저쪽이나 이쪽 모두가 도와주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나와 경은 뜻이 같고 생각이 일치되어 항상 골육의 형제와 같으니, 함께 호응해 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오. 나는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10년을 기한으로 삼고 있는데, 앞으로 10년이면 내 나이 50세가 되오. 10년 안에 이 일을 이루지 못하면 나의 지기(志氣)가 점점 쇠하여 다시는 가망이 없을 것이오. 그렇게 되면 나도 경이 물러가기를 허락할 것이고, 그때엔 경이 물러가도 괜찮을 것이오.
세자(世子)가 매우 총명하니, 아무리 부자간이라 해도 어찌 그 장단점을 알지 못하겠소. 그 아이의 성질이 온순하고 효성스러우며 또 견고한 마음이 있으니, 정녕 수문(守文)의 훌륭한 군주가 될 것이오. 그 아이는 깊은 궁중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병가(兵家)의 일을 알지 못하니, 그에게 어려운 일을 가지고 억지로 하기를 요구해서는 안 될 것이오. 아직 천연두도 겪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어린아이처럼 보호하고 있소. 또 자주 병을 앓고 아직까지 자식이 없어 극히 염려하고 있소. 한편 생각해 보니, 그 아이는 나이가 어려 혈기가 정해지지 못하였으므로, 정력을 보전하고 아끼지 못해서 자식을 낳는 데 좋지 못할까 걱정이 되고, 또 학문에도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오. 이 때문에 나는 근자에 저곳에다가 인하여 손으로 경의각(敬義閣)을 가리켰다. 방 하나를 별도로 만들어 그 아이로 하여금 그곳에서 독서를 하게 하고, 근신(謹愼)한 노관(老官)을 뽑아 세자와 함께 기거하게 하였소.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지켜보면서 그 아이로 하여금 때때로 내전(內殿)에 들게 하고 있소.
부자간의 일은 남에게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지만 경은 골육의 형제와 같기 때문에 숨기지 않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오. 오늘날의 이 일은 아마도 나에게서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장차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 것이오. 세자의 훌륭한 덕(德)은 국가를 편안히 보존할 수는 있겠지만, 이처럼 지극히 어렵고 위태로운 일을 해내는 것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오. 또 내가 내전에 들어가는 날은 혈기가 손상될 뿐만 아니라, 지기(志氣) 또한 해이해져서 일을 처리하는 데에도 온당치 못한 점이 많아지오. 또 옛사람들이 요절(夭折)한 경우를 보면 대부분 여색과 관계가 있으니, 진실로 무일(無逸)의 경계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오. 그리하여 나는 주색을 끊고 경계하여 가까이하지 않은 결과, 이로 인하여 나는 늘 정신이 맑고 몸도 건강해졌으니, 어찌 앞으로 10년을 보장할 수 없겠소. 하늘이 나에게 10년의 기간을 허용해 준다면 성패와 상관없이 한번 거사해 볼 계획이니, 경은 은밀히 동지들과 의논해 보도록 하오. 내 소견으로는 송준길(宋浚吉)은 담당할 의사가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오?”
하여, 응대하기를,
“그런 뜻이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사람은 기질이 약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유태(李惟泰)는 어떻소?”
하여, 응대하기를,
“이유태가 항상 말하기를 ‘주상께서 뜻을 굳게 정하신다면 모든 기무를 반드시 치밀하게 한 다음에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일을 하다가 사람이 죽더라도 우선 집 뒤에 장사 지내게 하는 식으로 다른 일까지 하여 백성을 동원하고 재정을 허비하는 등의 모든 일을 일체 중지하며 한결같이 백성을 기르고 양식을 풍족하게 하기를 힘써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기뻐하면서 이르기를,
“그의 말이 이와 같다면 참으로 쓸 만한 사람이오. 내 생각에 허적(許積)은 굳세고 용감하여 일을 맡길 수 있겠으나, 다만 그 사람이 주색에 빠져 자못 행실이 좋지 않다고 하니, 매우 애석한 일이오. 내 일찍이 생각하기를, 나와 이 일을 함께할 수 있는 자는 오랑캐의 손에 죽은 집안의 자제들뿐이고 그 밖의 사람들은 어렵다고 여기고 있었소.
내가 만수전(萬壽殿)을 지을 적에 터 잡는 일을 핑계로 한곳에 가서 앉아 몇 명을 인견(引見)하고 이 일을 은밀히 말하여 시험해 보았는데, 모두 무관심하여 깊이 생각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처럼 통탄할 일이 어디 있겠소. 신하들이 모두 눈앞의 부귀만을 도모하여 이 일을 하면 국가가 망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을 말하면 모두 간담이 서늘해서 놀라는 것이니, 나 혼자서 부질없이 탄식할 뿐이오. 저들이 모두 제 자손들을 위한 계획만 세우고 나를 도우려 하지 않고 있소. 이 때문에 나도 결국 좋지 못한 마음이 생기게 되었고, 또 내가 따로 할 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아녀(兒女)들을 위하여 집을 짓는 계획을 하였던 것이오. 대계(大計)가 진실로 정해진다면 아녀들의 집이 이미 완공되었더라도 헐어 버리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신이 일어나 진언(進言)하기를,
“예로부터 제왕들은 반드시 먼저 자신을 수양하고 가정을 다스린 뒤에야 법도와 기강을 세워 일에 두서가 있게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능히 혼잡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떨쳐 버리지 못하시니 지기(志氣)가 있는 선비들의 마음이 게을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으며, 뭇 신하들이 제 집안을 살찌우는 데에만 힘쓰는 것도 전하를 보고 배운 것이 아니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인조(仁祖) 때 윤황(尹煌)의 말에 ‘예로부터 윗사람이 선을 행하여 아랫사람들을 통솔하는 경우는 있어도, 아랫사람이 선하지 않은 일을 하는데 윗사람이 본받는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그 말은 상당히 이치가 있는 말입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심신(心身)을 깨끗이 하시어 잡다한 모든 일들을 일체 제거하시고, 마음과 생각에 한결같이 이 일만을 위주로 하신다면, 신하들도 어찌 감히 나라를 위해 제 몸을 바치려 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지난번에, 제갈량(諸葛亮)이 우선 사관(史官)을 설치하지 않은 일과 주자(朱子)가 중원이 회복되기를 기다려 사당을 세우려 하였던 일을 말씀드린 것은 뜻이 있어 그랬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옳소. 이제부터는 모든 일을 경과 더불어 은밀히 의논할 것이오, 그런데 은밀히 의논하기가 극히 어려우니, 내 서서히 그 방도를 생각해 보겠소. 이후에 과연 이 전교와 같이 은밀히 의논한 일이 있었다. 오늘날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이처럼 극심하오.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면 재변을 초래하게 되지만, 또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도 재변이 반드시 이르게 되는 것이오. 옛날 진 무제(晉武帝)는 창업을 한 다음, 전혀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때처럼 재앙과 이변이 자주 일어난 적이 없었던 것이오. 이것을 보면 가만히 앉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어도 하늘의 노여움을 사 재변을 초래함을 알 수 있소. 하물며 오늘날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으면 안 될 천지의 떳떳한 도리인데, 태연히 하지 않고 있으니, 하늘이 경계하여 재변을 내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소.
오늘날 의논하는 자들은 모두 저 오랑캐에게 투항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감히 기운을 내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반드시 그럴 리가 없을 것이오. 저들은 우리나라가 보존되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이로운 점이 매우 많으니, 우리나라가 만일 망한다면 저들은 이익을 얻을 곳이 없어지게 될 것이오. 따라서 우리나라를 보존되게 하여 영원히 자기들의 이익으로 삼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쓸 것이오. 그러므로 저들이 때로 우리에게 공갈을 치는 것은 우리를 협박하여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려는 것이지, 실제로 그들 마음은 우리나라가 무사하기를 바라고 있소. 그런데 저들이 한마디 공갈을 치면 모두들 기운을 잃고 넋이 빠지고 마니, 매우 슬픈 일이오.
또 내가 하려고 하는 일과 아래에서 하려는 일이 있더라도 중간에서 대신들이 막으면 결국 할 수가 없게 되오. 지난번 포척(布尺)에 대한 정식(定式)을 내 경의 말을 듣고 즉시 내수사(內需司)에서 사용하는 베[布]부터 그 길이를 줄이라고 전교하였는데, 대신 이하 신료들이 시행하기 어렵다 하여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소. 이제부터는 반드시 경과 같이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모든 일을 상의하도록 하겠소. 나는 오래전부터 경에게 큰 임무를 맡기고 싶었지만 경을 꺼리는 자들이 많기 때문에 경에게 편치 못한 일이 될까 염려하였고, 또 경이 승진하고 나면 전선(銓選)을 맡을 만한 자가 없으므로 지금까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마음이 항상 답답하오. 내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은 조만간 경에게 큰 임무를 맡기고 양전(兩銓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가리킴)을 겸직하게 하려 하오. 다만 힘든 일을 많이 맡게 하는 것이 미안하고, 또 이와 같이 하면 경을 시기하는 자들이 더욱 많아지게 될 염려가 있기 때문에 마음속에만 두고 있을 뿐이오.”
하였다. 신이 일어나 응대하기를,
“신은 결코 그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셨다면 전하께서 신을 너무 모르시는 것입니다. 신은 감히 전하의 위임을 감당할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난번 전하께서 큰 뜻을 은밀히 보여 주셨을 적에, 신의 벗인 이유태(李惟泰)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과연 큰 뜻을 가지고 계시다면 비록 능력과 지혜가 없는 자라 할지라도 또한 분발해서 석호(石壕)의 아낙처럼 새벽밥 짓는 일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고 하였기 때문에, 신이 비록 매우 용렬하지만 감히 소지(召旨)를 받들어 온 것일 뿐입니다. 전하께서 큰 뜻을 가지고 계시고 또 신을 크게 쓰려고 하시는데, 신이 어찌 물러가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죽을 각오로 일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은 쓸 만한 재능이 없습니다. 다만 전하께서 신을 유악(帷幄)에다 두시고 때때로 의심나는 일을 물으신다면 신이 어찌 어리석은 소견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뜻은 내 뜻과 다르오. 그러나 경은 오늘날 해야 할 일 중에서 무엇이 가장 급선무인지 한번 말해 주오.”
하여, 응대하기를,
“그것은 즉석에서 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평소에 배운 것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의 학설을 사람들은 진부하고 오활한 옛말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을 들으면 사람들이 모두 마음속으로 비웃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필시 쓸데없는 말을 해서 후세 사람들을 속였을 리가 없습니다. 격물치지라는 것은 이 마음의 본체를 밝혀 사물의 이치에 대하여 막힘이 없고 모두 통달하여 모든 일을 마땅하게 처리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진실로 밝지 못하면 사물의 이치에 어둡고 막혀서 일을 처리할 적에 그 마땅함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비단 정치에 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인심이 사나워져 복종하지 않을 것이고, 심한 경우에는 윗사람을 능멸하기까지 하게 됩니다. 이와 같고서도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는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후세의 오활한 유자(儒者)들은 초목과 곤충의 이치를 살피는 것을 격물치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비록 격물치지의 한 가지 일이기는 하나, 초목이나 곤충의 이치만을 살피고 인륜에 대한 큰일을 먼저 살피지 않는다면 어찌 격물치지가 제대로 될 것이며, 또 그런 것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성상께서도 그것을 격물치지의 실상이라고 여기신다면 성인이 말씀한 격물치지가 오활하여 절실하지 않다고 생각하시어 노력하려고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옛날에 주자(朱子)는 ‘모든 일에 옳은 것을 찾는 것이 격물치지의 요지이다.’라고 말씀하였으니, 이 말씀을 깊이 체득해야 할 것입니다. 성의(誠意)의 학설에 이르러서는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 바로 그 실제입니다. 군주가 안으로 자신의 마음과 몸에서부터 밖으로 사람을 쓰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성의 공부에 힘쓴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이른바 정심(正心)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본체를 담연(湛然)히 허명(虛明)하게 하여 치우치거나 분잡함이 없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의 본체는 격물치지를 하여 이미 밝아지고,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은 성의 공부를 하여 이미 판단이 섰다 하더라도 마음이 담연히 허명하지 못하면 외물에 쉽게 흔들려 어두워지게 됩니다. 이 때문에 도리어 제대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지 못하여 한쪽으로 치우치고 번잡하게 됨으로써 장차 못하는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격물ㆍ치지ㆍ성의를 하고 난 뒤에도 이 정심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한번 시험 삼아 이른 새벽 사물을 접하지 않아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을 때에, 그 마음의 대응이 어떠한가를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그때에 한 일은 반드시 이치에 합당한 것이 많고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적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매우 옳소. 나는 이른 새벽 이와 같음을 많이 체험하였는데, 한낮에 마음이 분잡하고 소란할 때 한 일과는 큰 차이가 있었소.”
하여, 응대하기를,
“격물치지를 하여 사리가 이미 통명해지고, 성의 공부를 하여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이 분별되며, 정심 공부를 하여 마음의 본체가 항상 태연해서 누(累)가 없게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모든 사물을 처리할 적에 올바른 이치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서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고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경우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격물ㆍ치지ㆍ성의ㆍ정심이라는 것이 과연 오활하여 실상이 없는 헛소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지 않고 한갓 지혜와 혈기를 가지고 억지로 한다면 비록 우연히 이치에 합하는 일이 없지는 않겠지만, 뿌리 없는 나무와 같고 근원이 없는 물과 같아서 한 가지 일은 이치에 맞았다가도 한 가지 일은 이치에 맞지 않게 되며, 오늘은 잘하였다가도 내일은 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마음에도 항상 쾌하지 않은데 더구나 다른 사람들이 믿고 따르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참으로 옳소. 이것이 옛사람이 이른바 ‘청명(淸明)함이 몸에 있으면 지기(志氣)가 신명(神明)해진다.’는 것일 것이오, 내 비록 어둡고 어리석으나 때때로 이러한 의사가 실제로 있으니, 만일 이러한 의사가 중단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인들 할 수 없겠소. 그러나 이처럼 좋은 의사가 있을 경우는 극히 적구려.”
하여, 응대하기를,
“그렇기 때문에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학문을 논할 적에 반드시 경(敬)을 위주로 하였던 것입니다. 공경하면 이 마음이 항상 보존되어 조금도 중단됨이 없고, 공경하지 않으면 마음이 분잡하고 어지러워져서 좋은 의사가 곧 쇠미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자가 말씀하기를 ‘한때의 의사가 능히 얼마 동안 지속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작은 일도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천하 국가의 일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늘 지극한 정성으로 나를 이끌어 주니, 내 감히 잊지 못할 것이오. 경 또한 스스로 모든 선(善)을 모으고 훌륭한 말을 할 것을 생각하여 함께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도모해야 할 것이오. 경이 말한 이른 새벽에 대한 얘기가 가장 절실하오. 나도 여러 번 체험하였는데, 내 마음에 어긋나는 일이 있을 경우 우선 내버려 두었다가 한밤중이 되어 불평한 마음이 없어지기를 기다린 다음, 이른 새벽에 일어나 처리하면 사리에 합당하지 않은 경우가 드물었소. 이 때문에 맹자(孟子)의 말씀이 지론(至論)임을 알게 되었소.”
하여, 응대하기를,
“성상께서 항상 이와 같이 힘쓰신다면, 어찌 학문이 고명한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마음에 크게 답답히 여기고 있는 것이 있는데, 지금 경에게 물어 결정해야 하겠소. 오늘날 큰 근심거리는 율곡(栗谷)과 우계(牛溪) 양현(兩賢)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데 대한 논란보다 더 큰 것이 없소. 내 일찍이 양현을 존봉(尊奉)하는 쪽과 배척하는 쪽에 대하여 백방으로 미봉책을 써서 겨우 조용해졌으므로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이 논란이 갑자기 다시 일어나 풍파가 크게 일어 오랫동안 안정되지 못하고 있으니, 일에 해로움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소. 경은 이 시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소?”
하여, 응대하기를,
“그것은 쉽사리 단정하여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양현을 종사하자는 주청은 온 나라가 함께하는 말로 지금 벌써 수십 년이 되었으니, 이것은 공론(公論)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몇몇 사람들만이 선대의 의논을 답습하여 이견(異見)을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양현을 문묘에 종사하는 일은 막중한 전례(典禮)이니, 경솔히 의논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괜찮지마는 양현을 무함하고 모욕하는 자들은 정녕 패역한 무리입니다. 양현의 도덕이 어떻다는 것은 논하지 않더라도 그분들은 선배의 장자(長者)이시니, 후생으로서 어찌 감히 이처럼 무함하고 모욕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정자(程子)의 제자 중에 선배의 단점을 논하는 자가 있으면 정자는 반드시 ‘너희들은 그 장점만을 배우면 된다.’고 책망하였으니, 아름답고 훌륭한 가르침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자들은 참으로 패역한 자들이니 어찌 잘잘못을 따질 것이 있겠소.”
하여, 응대하기를,
“그 자들과 일일이 잘잘못을 따질 것이 없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그중에 간혹 그들의 부형으로서 그들을 제지하지는 않고 도리어 그들을 지지하는 자가 있으니 매우 가증스럽습니다. 양현의 도덕과 학문에 대해 신 또한 학식이 보잘것없으니,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상께서 그분들의 책을 읽고 그분들의 마음을 찾아 그분들의 행적을 논해 보신다면 문묘에 종사하는 것이 합당한지 부당한지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만약 분명히 알지도 못하고 독실히 신봉하지도 않으면서 남의 말만 들으신다면 아무리 숭장(崇奬)하는 은전을 지극히 하신다 할지라도 전하의 몸에는 아무 이익이 없을 것이니, 광해군(光海君)이 오현(五賢)을 제사한 경우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이에 대하여 별도로 소견이 있지만 외람된 것이라 감히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한번 말해 보라고 하여, 응대하기를,
“오현을 종사(從祀)한 것이 비록 온 나라가 함께 주청하여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그중에 어찌 다시 참작해야 할 점이 없겠습니까. 이이(李珥)는 일찍이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滉)만을 들어 문묘에 종사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신은 아마도 이 의논이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뒤에 이이 같은 대현(大賢)이 다시 나왔으니, 이미 종사하고 있는 현인과 아직 종사하지 않은 현인을 정밀히 선별하여 후세의 비판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한다면 일은 비록 지당하게 될지라도 의논은 더욱 분분해질 것이오.”
하여, 응대하기를,
“그러기 때문에 신이 이 일은 반드시 대현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시급한 것은 이 일이 아닌 듯한데, 조정의 신하들과 선비들이 모두 급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나는 매우 병통이라고 생각하오.”
하여, 응대하기를,
“양현을 문묘에 종사하는 일은 의논이 통일된 뒤에 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나, 선비들의 습관은 먼저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선현을 무함하고 모욕하는 자들은 상께서 깊이 미워하고 통렬히 끊으셔야 할 것이니, 급선무가 아니라고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소. 이후로 만일 선현을 무함하고 모욕하는 자가 있다면 내 마땅히 통렬히 배척하여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내가 밤낮으로 애써 생각하는 것은 오직 병력을 기르는 일이오, 경이 전에 말하기를 ‘병력을 기르는 일과 백성을 기르는 길은 반드시 서로 방해가 된다.’ 하였는데, 어떻게 하면 서로 방해가 되지 않겠소?”
하여, 응대하기를,
“그것은 신의 말이 아니라, 바로 주자의 말씀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재력(財力)에 관계되는 것을 일체 함부로 쓰지 말고 모두 군수(軍需)로 돌리면 군수가 점차 넉넉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보오법(保伍法)을 시행하여 누락되는 민정(民丁)이 없게 한 다음, 세 사람마다 그중에서 장정 한 사람을 뽑아 병사로 삼아서 활 쏘기와 말 타기를 익히게 하고, 나머지 두 사람으로 하여금 베[布]를 내어 한 명의 병사를 양성하게 하여 오늘날 어영군(御營軍)의 규례와 같이 한다면, 이는 병사로써 병사를 양성하는 것이어서 농민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오법은 곧 ‘주례(周禮)’의 뜻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먼저 기강을 세운 뒤에라야 이 법을 시행할 수 있는데, 기강을 세우는 길은 전하께서 사심(私心)을 없애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법을 경과 더불어 서서히 강구하도록 하겠소.”
하였다. 내가 아뢰기를,
“강(姜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嬪) 강씨(姜氏)를 가리킴)의 옥사(獄事) 때문에 지금까지 사람들의 마음이 불평해 하고 있는데, 상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늘 경과 그 일을 말해 보려고 했었는데 틈이 없어 하지 못했을 뿐이오, 강(姜)의 못된 짓을 어떻게 한 입으로 다 말할 수 있겠소.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말하겠으니, 경은 한번 들어 보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비록 짐승들이라도 가지고 있는 법이오. 그런데 소현(昭顯)의 상사(喪事) 때에 대조(大朝)께서 애통해하시며 책망하시기를 ‘이는 잠자리(여색)를 조심하지 않은 소치이다.’ 하시자, 강은 즉시 발악하기를 ‘모월(某月) 이후로는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하였소. 그후 자식을 낳게 되자 가까이하지 않았다는 말을 실증하기 위해 곧 자식을 죽이고 그 사실을 은닉하였소. 그의 성품이 이와 같으니, 그가 역모를 꾀한 것이 어찌 괴이하다 하겠소. 또 역모를 꾀한 일은 궁내에서만 알고 있는 일이니, 밖에 있는 사람들이 어찌 알고 있겠소. 그 일이 확연히 드러나 전혀 의심할 것이 없는데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원통한 일이라고 하고 있으니, 나는 실로 가슴이 아프오.”
하여, 응대하기를,
“그가 역모를 꾀한 일을 외간에서 참으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도 의심이 없지는 않습니다. 신은 일찍이 ‘흉한 것을 땅에 묻어 저주하고 독약을 넣은 것은 필시(必是) 그 사람의 소행일 것이다.’라고 한 선왕의 전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필시’라는 두 글자는 증거가 분명하지 않은 것을 억지로 단정하는 말이니, 분명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대역죄(大逆罪)라 하여 사람을 죽였는데도 사람들이 원통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리가 어찌 있겠습니까. 송 고종(宋高宗)이 ‘막수유(莫須有)’라는 세 글자를 가지고 악비(岳飛)를 죽였기 때문에 천하에서 지금까지 원통한 일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필시’라는 두 글자 때문에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놀라며 이르기를,
“그 점은 내 아직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데, 과연 경의 말과 같구려. 그러나 역모를 꾀한 일은 의심할 것이 없소.”
하여, 응대하기를,
“설령 강(姜)은 역모를 하였다 하더라도, 김홍욱(金弘郁)이 어찌 그녀가 역모를 꾀한 일을 알고서 그를 구제하려 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김홍욱은 소견이 그와 같았을 뿐이었는데 전하께서 너무 급히 그를 죽이셨기 때문에 인심이 더욱 불평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미 법령을 정하여 만일 이 일을 감히 발설하는 자가 있으면 강과 같은 죄로 다스리겠다고 하였는데, 그가 어찌 감히 이 법을 무시하고 그 일을 말한단 말이오. 이 때문에 내가 그를 처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오.”
하여, 응대하기를,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비난하는 말을 하게 된 이유입니다. 강을 이미 대역으로 처벌하였으면 그만인데, 어찌 다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걱정하여 억지로 발설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키는 법을 만들어 사람들의 입을 막는단 말입니까. 이는 실로 내면에 부족함이 있는 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더욱 의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경의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해 보니, 과연 그렇구려.”
하고, 또 이르기를,
“경은 말할 적마다 주자(朱子)를 칭하는데, 경은 몇 년 동안이나 주자의 글을 읽었기에 이처럼 잘 알고 있소?”
하여, 응대하기를,
“신은 어렸을 적부터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를 읽고 마음에 진실로 좋아하였으나, 마음과 힘이 강하지 못하여 아직도 다 읽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주자의 말씀은 과연 하나하나 모두 행할 수 있는 것이오?”
하여, 응대하기를,
“옛 성인의 말씀에는 간혹 시대와 형편이 달라 시행할 수 없는 것도 있지만, 주자의 말씀은 시대와 형편이 지금과 매우 가깝고 또 주자가 만났던 시대상도 오늘날과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신은 그 말씀을 하나하나 모두 행할 수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하께서 시험 삼아 한가한 때에 봉사(封事)ㆍ주차(奏箚)ㆍ주의(奏議) 등의 글을 먼저 읽으시고, 그 다음에 《주자어류》 중에 요긴하고 절실한 말들을 보신다면 반드시 전하의 마음에 부합되는 바가 있으실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말한 대로 하도록 하겠소.”
하고, 이어 이르기를,
“오늘 경과 조용히 대화를 하게 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 신료들의 시비(是非)와 진퇴(進退)에 관한 일에 대하여 별로 언급한 것이 없지만 밖의 사람들 중에는 반드시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많을 것이오.”
하여, 응대하기를,
“혹 그런 자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측으로 여러 신하들을 의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음에도 다시 오늘처럼 대화를 해야 하겠지만, 은밀히 편지로 자세히 의논할 수 있는 방법을 경 또한 생각해 보도록 하시오. 그리고 오늘 대화한 내용은 비록 묻는 자가 있더라도 경이야 어찌 다른 사람들에게 누설하겠소.”
하여, 내가 웃으면서 사양하기를,
“전하께서 반드시 신이 전광(田光)처럼 하지 않을 것을 아시기 때문에 이런 분부를 내리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웃으며 이르기를,
“그것이 어찌 장자(長者)를 의심해서 하는 말이겠소. 성인(공자)도 일(전쟁)에 임해서 신중하게 처리하며 잘 도모하여 이룬다는 말씀을 하였소.”
하였다. 내가 밖으로 물러 나오니, 상이 직접 중관(中官)을 불러 다시 오라고 하였다. 12일에 추기(追記)한다.

천신(賤臣)이 기해년(1659, 효종10) 3월 12일에 전날 주상을 모시고 대화한 것을 기록해서 하나의 작은 책자를 만들었다. 그 다음달에 성상의 옥후(玉候)가 편찮으시더니 5월 4일에 끝내 승하하시었다. 하늘을 원망하여 부르짖었으나,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례식을 마치자마자, 그 책을 가지고 산속으로 돌아와 단단히 싸서 깊숙이 보관하고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끝내 내놓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깊숙이 보관하여 백세 이후를 기약하려고 하고 있었는데, 지난해 한림(翰林) 이자휘(李子輝 이광직(李光稷))가 은밀히 편지를 보내와 이 기록이 있는지의 여부를 묻고, 또 부탁하기를 ‘그 기록을 얻어 다른 책서(策書)에다 실을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나는 그 편지를 받고 처음에는 마음속으로 의심하여 종일토록 골몰히 생각하였으나 그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문득 마음속으로 혼자 생각하기를 ‘당시 하늘이 주상을 더 사시게 하여 그 지업(志業)을 마칠 수 있게 하였다면 이 기록은 굳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지금 이미 일이 끝나고 말았으니, 만약 그 당시 하셨던 말씀까지도 끝내 매몰되게 한다면 나의 죄는 또한 어떠하겠는가. 누설하지 말라고 정녕하게 분부하신 당일의 경계를 저버리는 일이기는 하나, 이 죄는 도리어 적은 것이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손수 봉함하여 사람을 보내어 부치려 하였는데, 그날 자휘의 부음(訃音)이 갑자기 도착하였다. 나는 자휘가 요절한 것을 애통해하고, 또 그의 훌륭한 뜻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함을 애처로이 여겨 슬퍼하는 마음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지난번 이도원(李道源)과 이공택(李公擇) 두 한림이 또 자휘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때 나는 남의 구설수에 올라 엎드려 죄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어서 이로 인하여 죄가 가중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주저하고 선뜻 그들의 뜻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도원의 요청이 변함없이 계속되므로, 나는 또 스스로 생각하기를 ‘먼저 자휘에게는 허락을 해 놓고 이제 이 사람에게는 인색하게 하고 있으니,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마침내 김경능(金景能)을 통하여 이것을 부쳐 주는 것이다.
아, 성고(聖考)의 거룩하신 계획과 큰 뜻을 단지 짧은 시간에 전석(前席)에서 보여 주셨을 뿐 하나도 시행하지 못하셨으니, 저 푸른 하늘이여, 어찌 그리도 무심하단 말인가. 이 외로운 신하는 슬픔을 머금고 있으면서도 아직 몸을 바쳐 국가에 봉사하지 못하고 있으니, 덕음(德音)을 생각할 적마다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다. 오늘 아침에 다시 예전에 봉함한 것을 점검해 보다 보니, 아련히 다시 문석(文石)에 올라 옥음(玉音)을 듣는 듯하였다. 다시 울음을 삼키며 그 봉함 외에 이 글을 써서 두 한림에게 고한다. 아, 이도원과 이공택은 나의 이러한 고충을 알아 이 기록을 역사에 모두 기재하도록 하고, 또 혹시라도 이것을 외인에게 누설하지 말고 그 원본을 적당한 사람을 통해 돌려준다면 매우 다행이겠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을 가리킴)이 말하기를 ‘주상이 훌륭하신데도 그 덕이 알려지지 않는 것은 유사(有司)의 잘못이다.’ 하였다. 아, 이것이 장차 만세 이후에 전해질 것인가. 이도원과 이공택은 노력하도록 하라. 숭정(崇禎 명 나라 의종(毅宗)의 연호) 을사년(1665, 현종6) 7월 15일에 승하하신 성상을 부르짖던 천신은 절하고 올리면서 번거로워 감히 이름을 쓰지 못하니 죄송할 뿐이다.
그 뒤 11년이 지난 을묘년(1675, 숙종1) 5월 4일에 안동(安東) 김수증 연지(金壽增延之 연지는 자임)가 성천(成川)의 임소(任所)에서 의춘(宜春)의 유배지에 있는 나를 찾아왔다. 김연지는 문정공(文正公) 석실 선생(石室先生 김상헌(金尙憲)을 가리킴)의 사손(嗣孫)인데, 내가 선생의 제자라고 하여 찾아온 것이다. 지난 일들을 말하면서 서로 탄식하고 눈물을 흘렸는데, 떠날 때에 나에게 말하기를 ‘당일의 악대설화를 남에게 보여 주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런 일들을 우리 두 집안의 자제들에게 알려 주지 않는다면 도리에 잘못된 일이다. 또한 나는 그것을 얻어 선조의 언행을 기록한 책 뒤에 실어서 한 책을 만들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사리에 마땅할 것이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기에,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이로 인하여 생각해 보니 ‘석실 선생이 평소에 자임(自任)하였던 것은 바로 성조(聖祖)가 뜻하였던 일이니, 그때에 하늘이 우리 선생에게 장수하게 하여 그 기회를 얻게 하였다면 성조의 간곡한 말씀은 반드시 석실 선생에게 하였을 것이요, 나에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연지가 두 집안을 둘로 보지 않고 하나로 보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여 마침내 작은 책자에 기록하여 봉함해서 부쳐 주었다.
악대(幄對)라고 이름한 것은, 송 효종(宋孝宗)이 장 위공(張魏公) 부자에게 정사를 위임하고서 남헌(南軒)을 유악(帷幄) 안으로 불러 토론할 적에 밖에 한 사람도 없었던 고사가 있으므로 지금 이 대화도 악대설화라고 명명한 것이다. 8월 모일(某日)에 봉산(蓬山)의 유배지에서 쓰다.

[주D-001]무일(無逸)의 경계 : 무일은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편명. 이 편은 주(周) 나라 성왕(成王)이 처음 즉위한 초기에, 주공(周公)이 성왕을 경계하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제왕이 정사에 부지런하면 장수를 누리고 나라가 태평해지지만, 안일에 빠지면 나라가 혼란해지고 군주도 요절하고 만다는 내용이다.
[주D-002]제갈량(諸葛亮)이 …… 일 : 제갈량은 한(漢) 나라의 적인 조조(曹操) 부자를 토벌하여 중원(中原)을 수복하기 전에는 사관(史官)을 두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주자(朱子)는 금(金) 나라를 정벌하여 송 나라의 실지(失地)를 수복하기 전에는 사당을 세우지 않겠다고 하여, 그대로 실천한 고사를 가리킨다.
[주D-003]석호(石壕)의 …… 일 : 싸움터에 나가 조그만 일이라도 하겠다는 뜻. 석호는 중국 하남성(河南省) 섬현(陝縣)에 있던 진(鎭)의 이름으로 일명 석호촌(石壕村)이라고도 한다. 당 현종(唐玄宗)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평정하기 위하여 남정(男丁)들을 모두 징발해 가고 심지어 나이든 사람까지도 마구 전쟁터로 내몰았다. 마침 두보(杜甫)가 석호촌에 유숙하고 있었는데, 아들 삼 형제가 모두 전쟁터로 끌려가고 늙은 남편마저 징발하러 온 관리들에 대해 차라리 자신이 전장으로 나가 새벽밥이라도 짓겠다며 호소하는 노부(老婦)의 애절한 말을 듣고 석호리(石壕吏)라는 시를 지었다. 《杜詩 石壕吏》
[주D-004]광해군(光海君)이 …… 경우 : 1610년(광해군2) 9월에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廸)ㆍ이황(李滉) 등 5현(賢)을 문묘에 배향(配享)한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서는 진실한 정성이 없이 형식적으로만 했다는 뜻이다.
[주D-005]막수유(莫須有) : 두 가지를 모두 인정하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가리킨다. 송의 간신인 진회(秦檜)는 금(金)과의 화의(和議)에 반대하는 악비(岳飛)를 죽이기 위하여 악비의 아들 악운(岳雲)이 악비의 장수 장헌(張憲)에게 편지를 보내어 국론(國論)을 어기고 대역을 꾀했다는 누명을 씌웠다. 이에 대하여 한세충(韓世忠)이 그 부당함을 따지자, 진회는 어물거리며 ‘악운이 장헌에게 편지한 것은 분명치 않다. 그러니 그럴 리야 없겠지만[莫……] 그러나 반드시 있을 수 있는 일이다.[須有]’ 하여 애매모호하게 대답하였다. 뒤에 이 두 가지를 합하여 ‘막수유’라 한 것이다.
[주D-006]전광(田光)처럼 …… 것 : 전국 시대 연(燕) 나라 협객(俠客) 전광을 연 나라 태자인 단(丹)이 불러서 함께 진 시황(秦始皇)을 살해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전광은 자신은 늙고 쇠약하다 하여 사양하고 형가(荊軻)를 대신 추천하였는데, 태자가 전광에게 “이 일을 밖에 나가 누설하지 마시오.” 하고 당부하였다. 전광은 밖으로 나와 탄식하기를 “일을 하면서 사람을 의심하는 것은 의협(義俠)을 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다.” 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주D-007]장 위공(張魏公) 부자 : 남송(南宋) 때의 명재상인 장준(張浚)과 그의 아들 식(栻)을 가리킨다. 장준이 효종 때에 추밀원사(樞密院使)가 되고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장 위공이라 칭하게 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그의 아들 식은 자(字)가 경부(敬夫), 호가 남헌(南軒)인데, 주자(朱子)와 절친한 사이였다.
송자대전(宋子大全) 제2권
 시(詩) ○ 칠언 절구(七言絶句)
원 진사(元進士) 차산(次山) 의 운에 차하여 주다.

원 진사 내중(來重)이 의춘(宜春)에서 찾아와서 매우 정다웠다. 이제 또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기구한 천 리 길을 내려와 수산(囚山)을 찾았으니, 이는 옛사람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작별에 임하여 시를 주기에 그 운에 차하였다. 나는 기질의 병으로 하여 실패하지 않는 것이 없다. 백방으로 치료하려 해도 마침내 변화하지 못하니 삼가 스스로 슬퍼한다. 일찍이 읽어본바에 의하면 이천(伊川)이 왕전기(王佺期)가 약을 보낸 데 대해 사례하며 하나의 정성 성(誠) 자로써 백성을 오래 살게 하는 선약[丹]이 된다고 했고, 부주(涪州)로 귀양 갈 때 사나운 파도에서도 마음에 성경(誠敬)을 보존해서 마침내 기력을 얻어 칠분(七分)의 큰 가르침을 이루었다고 한다. 유 원성(劉元城)도 멀고 험한 땅을 동서로 천 리 만 리 두루 다녔으나 하루도 병을 앓은 적이 없었는데, 스스로 ‘모두 정성에서 연유한 것이다.’ 했다. 이것이 내가 배우려고 해도 되지 않은 것이다. 지금 내중은 의학(醫學)도 겸통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내중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다.

옛 병 겸해 오니 말하면 시름 되어 / 古疾兼來說著愁
영약을 구하고자 더운 바닷가에 왔네 / 欲求靈藥到炎洲
그대 만나 주머니 더듬는 일 이야기해 보니 / 逢君試話探囊事
정자의 공경이라야 치유할 수 있다네 / 謂服程丹始可瘳

[주D-001]주머니 더듬는 일 : 남의 비법을 몰래 취함을 말한다. 《장자(莊子)》 거협(胠篋)에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더듬고, 궤짝을 터는 도적을 위해 수비한다.[將爲胠篋探囊發匱之盜而爲守備]”는 말이 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5권
 사대전고(事大典故)
공헌(貢獻)

태종 8년에 말[馬] 3천 필을 진상하였고, 9년에 또 좋은 말을 뽑아 진상하였다. 앞의 조사(詔使) 조에 상세하다.
○ 태종 때, 천마(天馬)를 헌상하였다. 태종고사(太宗故事)에 상세하다.
○ 태종 8년, 9년, 17년에 여자를 뽑아 진상하였다. 이것도 앞의 조사(詔使)조에 상세하다.
우리나라 여자로 뽑혀 중국에 들어가 황제[皇上]를 모시던 자로 총애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권영균(權永均)ㆍ여귀진(呂貴眞)ㆍ최득비(崔得霏)가 열경(列卿 경(卿)의 반열)이 되어 조선 녹(祿)을 받았다. 왕세정(王世貞)의 <이전술(異典述)>에서, “외국관(外國官)이란 중국의 직위를 갖고 외국에 거처하는 자라.” 하였는데, 그것이 이런 사람들이다. 한확(韓確)은 두 누이가 중국에 들어간 관계로 불려가서 광록소경(光祿少卿)이 되고 조서(詔書)를 받들고 조선에 와서 반포하였으니, 이는 더욱 특이한 은전(恩典)이다. 《지소록》
○ 태종 9년 기축 영락(永樂) 7년 에 예부(禮部)에 공문을 보내 공물로 바치는 금ㆍ은 기명[金銀器皿] 대신 토산물로 대체하여 줄 것을 원하자 상서(尙書) 조열(趙說)은 사신 설미수(偰眉壽)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 나라에서 금ㆍ은이 산출되지 않는 까닭으로 다른 물건으로 대신 공물을 바치고자 하는데, 홍무(洪武) 연간의 전례에 어긋나는 일이니 나는 감히 주상(奏上)하지 못하겠다. 꼭 아뢰고자 한다면 내일 일찍이 스스로 황상께 주상하라.” 하였다. 《고사촬요》
○ 세종 3년에 말 1만 필을 진상하고, 5년에 또 말 1만 필을 진상하고, 9년에 5천 필을 진상하고, 23년에 5천 필을 진상하였다. 조사(詔使)조에 상세하다.
○ 세종 기유년 혹 임자년으로 되어 있는 데도 있다. 에 계품사(計稟使) 공녕군(恭寧君) 인(裀)과 부사(副使) 도통제(都統制) 원민생(元閔生)이 금ㆍ은으로 공물 바치는 일을 면제받기 위하여 중국으로 떠났는데, 임금이 친서(親書)를 모화관(慕華館)에서 주어 보냈다. 인(裀) 등이 황제의 칙서를 받들어 가지고 왔는데 금ㆍ은의 공물은 면제하고 토산물(土産物)로 정성을 바칠 것을 허락하였다. 《동각잡기》
인(裀)이 북경에 가서 금ㆍ은 기명으로 공물 바치는 것을 면제하여 줄 것을 청하자, 황제가 칙서 두 통(通)을 주었는데, 그 하나는, “금과 은은 조선의 생산물이 아니니 이제부터는 공물 헌납을 다만 토산물만을 가지고 정성을 바치도록 하라.” 하였고, 또 하나는, “이제부터는 조정에서 보내는 내관(內官)이나 내사(內使)가 조선에 이르거든 다만 예(禮)로써 대접함에 그칠 것이지 물건을 증정하지는 말도록 하라. 조정에서 무릇 요구하는 물건도 오직 어보 칙서(御寶勅書)에 의거해서만 보낼 것이며, 짐(朕)의 말을 입으로 전하여 요구하는 것이나 또 이치에 어긋난 요구는 모두 듣지 말도록 하라. 왕(王)의 부자가 우리 조정을 공경히 섬긴 지가 이미 여러 해 되었는데 오래될수록 더욱 두텁다는 것을 짐이 알고 있으니, 저들 좌우(左右)의 근습(近習)들이 능히 그 사이에 이간할 수 없을 것이다. 왕은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고사촬요》
금ㆍ은(金銀)을 세공(歲貢)으로 바치는 일을 이때에 와서 비로소 면제를 받았는데, 살펴보면 세종 때에는 말 1만 필을 진상한 것이 두 번이요, 5천 필을 진상한 것이 또 두 번이다. 지금은 세공(歲貢)이 50필이며 그것마저 겨우 숫자를 채우든가 아니면 궐종(闕種)하는 데 이르기까지 하니, 국초(國初)에 물력(物力)이 풍부했음을 오늘날에 능히 미칠 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지봉유설》
○ 선덕(宣德) 기유년 세종 11년 에 중국 사신 윤봉(尹鳳)ㆍ창성(昌盛)ㆍ이상(李翔) 등이 와서 황제의 칙명으로 나이 어린 고자 6명과 음식 요리하는 여비(女婢) 12명과 노래하는 여비 8명을 가려 뽑고, 가야금(伽倻琴)ㆍ현금(玄琴)ㆍ향비파(鄕琵琶)ㆍ당비파(唐琵琶)를 가지고 갔다. 《동각잡기》ㆍ위의 조사(詔使)조에도 있다.
○ 선종 황제(宣宗皇帝)가 일찍이 칙명을 내려 세종 14년 임자 농우[耕牛] 1만 마리를 요동(遼東)으로 보내 견포(絹布)를 무역해 가도록 하였다. 세종이 정원(政院)과 정부의 육조(六曹)에 명하여 대책을 의논하게 하였더니, 신하 중에 ‘소가 병에 걸려 많이 없어졌으므로 그 숫자를 채우기가 어렵다는 핑계를 하자.’고 하는 자가 있었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이 의논은 내가 감히 좇을 수 없다. 내가 지성으로 대국을 섬기는데 이제 이 일을 당하여 거짓말로 주청(奏請)하여 감면받기를 꾀한다는 것이 어찌 올바른 도리이겠는가, 이는 곧 산을 쌓아 올리는데 아홉 길[九仞]을 쌓고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서 마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지신사(知申事) 안숭선(安崇善)도 아뢰기를, “천하 고금의 일은 사(邪)와 정(正) 두 글자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어찌 사도(邪道)로써 상국(上國)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동각잡기》. 칙서를 내려 회유(回諭)한 것이 위의 조사(詔使)조에도 있다.
○ 여러 가지 품목의 해미(海味)와 토표(土豹)ㆍ해동청(海東靑)ㆍ황백(黃白)의 매[鷹]와 개[狗]를 진상하였다. 모두 조사조에 상세하다.
○ 중관(中官)으로 입조(入朝)하는 자가 대대로 있었는데 홍치(弘治) 연간 성종(成宗) 때 에 이르러 뽑지 말라고 명했다. 우리나라를 위하여 한 가지 폐단을 덜어 주었다. 《지소록》 ○ 김영(金英)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조칙을 받들고 오기를 꺼린 것은 위의 조사조에도 보인다.
○ 중종(中宗)……
○ 명종 1년 병오에 예부(禮部)가 성지(聖旨)를 전하기를, 배신(陪臣) 민세량(閔世良)은 먼저 역관(譯官)을 보내 돗자리 대신 조선종이를 1, 2차로 나누어 바치라고 하였으므로 곧 이기(李蘷)에게 종이를 가지고 가서 바치게 했다. 《고사촬요》. 아래의 사신(使臣)조에도 상세하다.
○ 선조 때에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이 말하기를, “들으니 예부(禮部)가 방물(方物)을 검납(檢納)할 때 운남(雲南)국 등지에서 바치는 말[馬]은 나는 용(龍)과 같은 점이 있고, 그림 안장[圖鞍]과 문채 있는 굴레[彩勒]에 붉은 보로 싸서 휘황하게 빛나는데, 우리나라 말들은 병들어 검고 누렇고 뼈가 튀어나왔을 뿐 아니라 이것을 새끼줄로 고삐를 한 때문에 볼품이 없다고 합니다.” 하니, 특진관(特進官) 김신원(金信元)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말들도 굴레는 갖추었지만, 다만 일단 옥화관(玉華館)에 들어가면 우리나라 사람이 돌보지 못하고 오로지 중국 사람[唐人]이 맡게 되므로, 굴레를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였다. 《임인일기(壬寅日記)》 《청야만집(靑野謾集)》
○ 선조 임인년 35년 에 사은사(謝恩使) 황신(黃愼)이 돌아와 아뢰기를, “북경(北京)에 있을 때에 예부(禮部)의 채낭중(蔡郞中)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서 모사포(氁絲布)를 진상하지 않은 것은 이미 구례에 어긋나므로 전일 배신(陪臣)이 돌아갈 때에 여러 번 일렀는데 지금 방물(方物)에 어찌하여 또 포자(布子)를 빠뜨렸는가. 너희 나라가 중국을 공경히 섬기는 것은 다른 나라에 견줄 바가 아니지만, 다만 근래에 바치는 방물(方物) 중 모시포ㆍ석자(席子) 등의 물건도 품질이 거칠고 낮은 것이 많으니, 이제부터는 정하게 골라서 바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묻기를, ‘너희 나라에서 이른바, 모시포(毛施布)라 하는 것은 백저포(白苧布)인가. 흑마포(黑麻布)인가.’ 하기에, 회답하여 말하기를, ‘모시포는 우리 조선의 방언이며 곧 백저포(白苧布)입니다. 흑마포는 날[經]은 백사(白絲)를, 씨[緯]는 저사(苧絲)를 쓴 것이니, 그것은 색다른 모양의 포자(布子)이지요.’ 하였습니다.” 하였다. ‘우리나라는 외구(外寇)의 난리로 파괴되어 방물을 바치는 데 결함이 생겼다. 송구스러워 사죄한다.’는 뜻으로 예부에 공문을 보냈다. 《고사촬요》
○ 광해 경술년, 연례로 바치는 인삼에 늘 생삼(生蔘)을 보냈는데, 길이 멀어 습기로 인해 상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동지(冬至)의 하절사(賀節使)로 유대정(兪大禎)을 보내 파삼(把蔘)으로 대신 바치기를 청하였는데 예부에서 황제의 뜻을 받아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 해마다 바치는 세폐(歲幣)의 수는, 백상면포(白上綿布) 1천 필(疋)ㆍ생상면포(生上綿布) 2천 필ㆍ대호지(大好紙) 2천 권(卷)ㆍ소호지(小好紙) 3천 권ㆍ녹피(鹿皮) 1백 장(張)ㆍ수달피(水獺皮) 3백 장ㆍ백주(白紬) 2백 필ㆍ홍주(紅紬) 백 필ㆍ녹주(綠紬) 백 필ㆍ백저포(白苧布) 2백 필ㆍ오조용문석(五爪龍紋席) 2장ㆍ채화석(彩花石) 20장ㆍ호요도(好腰刀) 10자루[柄]ㆍ점미(粘米) 40석(石)이었다.
○ 해마다 하는 예대로 철을 따라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는 총수는 황세저포(黃細苧布) 30필ㆍ홍세저포(紅細苧布) 60필ㆍ백세저포(白細苧布) 1백 80필ㆍ황세면주(黃細綿紬) 70필ㆍ자세면주(紫細綿紬) 1백 40필ㆍ백세면주(白細綿紬) 1백 20필ㆍ용문렴석(龍紋簾席) 6장ㆍ황화석(黃花席) 1백 15장ㆍ만화방석(滿花方席) 55장ㆍ만화석(滿花席) 95장ㆍ잡채화석(雜綵花席) 1백 15장ㆍ점(粘) 6장ㆍ후유둔(厚油芚) 10부(部)ㆍ수달피(水獺皮) 20령(令)ㆍ백면지(白綿紙) 4천 권ㆍ나전소함(螺鈿梳函) 4사(四事)였다. 별도로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친 것은 이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 숭덕(崇德) 정축년에 비로소 세폐(歲幣)를 정하였는데, 황금 1백 냥 강희(康熙) 임신년에 면제되었다.ㆍ백은(白銀) 1백 냥 강희 신묘년에 면제되었다.ㆍ수우각궁면(水牛角弓面) 2백 부(副) 1백 부는 정해년에 감면되고, 1백 부는 갑오년에 호대지(好大紙) 1천 권과 호소지(好小紙) 1천 5백 권으로 대신하게 하였다.ㆍ호대지(好大紙) 1천 권 수우각(水牛角)을 대신하는 1천 권을 합하여 2천 권을 진상하였다.ㆍ호소지(好小紙) 1천 5백 권 수우 대신 1천 5백 권을 보내니 합하여 3천 권이다.ㆍ표피(豹皮) 1백 장ㆍ수달피(水獺皮) 4백 장 이 중에서 1백 장은 옹정 계묘년에 감면되었다.ㆍ청려피(靑黎皮) 3백 장 옹정 계묘년에 감면되었다.ㆍ차(茶) 1천 포(包) 순치(順治) 을유년에 면제되었다.ㆍ호초(胡椒) 10근 순치 정해년에 면제되었다.ㆍ소목(蘇木) 2백 근 순치 을유년에 감면되었다.ㆍ호요도(好腰刀) 26자루[把] 이 중에서 6자루는 숭덕(崇德) 계미년에 감면되고, 10자루는 순치 을유년에 감면되었다.ㆍ순도(順刀) 20자루 10자루는 순치 을유년에 감면되고 10자루는 정해년에 면제되었다.ㆍ오조용문렴석(五爪龍紋簾席) 4장 2장은 숭덕 계미년에 감면되었다.ㆍ잡채화석(雜彩花席) 40장 2장은 숭덕 계미년에 감면되었다.ㆍ백저포(白苧布) 2백 필ㆍ각색면주(各色綿紬) 2천 필 이중에서 6백 필은 숭덕 계미년에 감면되고, 7백 필은 순치 을유년에 감면되고, 2백 필은 정해년에 감면되고, 1백 필은 신묘년에 감면되었다.ㆍ각색세목면(各色細木棉) 1만 필 이 중에서 2백 필은 숭덕 계미년에 감면되고, 2천 7백 필은 순치 을유년에 감면되고, 2천 1백 필은 정해년에 감면되고, 6백 필은 신묘년에 감면되고, 6백 필은 강희 임신년에 감면되고, 8백 필은 옹정(擁正) 계묘년에 감면되었다.ㆍ세마포(細麻布) 4백 필 3백 필은 숭덕 계미년에 감면되고, 나머지 1백 필은 순치 을유년에 면제되었다.ㆍ마포(麻布) 1천 4백 필 순치 을유년에 면제되었다.ㆍ쌀 1만 포 이 중에서 9천 포는 숭덕 신사년에 감면되고, 9백 포는 순치 정해년에 감면되고, 60석은 옹정 무신년에 감면되었다. 였다. ○ 괴원호조등록(槐院戶曹謄錄)
○ 인조 경진년에 세폐(歲幣)로 진헌할 황금 50냥이 부족하여 대신 은(銀) 1천 냥을 바쳤는데 받지 않았다. 역관(譯官) 조효신(趙孝信)을 단지 그 일 때문에 보내 보충하여 바친 뒤 ‘금은 우리나라 토산물이 아니므로 아무리 적은 분량이라도 쉽게 준비할 수 없다.’는 뜻으로서 호부(戶部)에 공문을 보내 알리었다. 《통문관지(通文館志)》조에도 이와 같다.
○ 신사년에 함양(咸陽)의 백성이 흙을 파다가 한 개의 질그릇전[瓦]을 얻었는데, 위에는 ‘일천 년내 유황금 14편(一千年內有黃金十四片)’이라 새겨져 있고, 한쪽에는 ‘의춘대길(宜春大吉)’이라 새겨져 있었다. 역관(譯官) 이완(李俒)을 보내 그것을 가지고 가서 중국에 바쳤는데 조서(詔書)에 이르기를, “옛날 신라의 금(金)을 얻었는데 왕이 스스로 가지지 않고 특히 사람을 보냈으니, 상국 섬기는 정성을 볼 수 있다. 그 글자의 말뜻은 상서로운 조짐인 듯하다. 왕이 얻은 것은 곧 짐이 얻은 것과 같으니, 원금(原金)은 온 관원 편에 되돌려 준다.” 하였다.
○ 갑신년에 칙명으로 유시하기를, “미량(米糧)을 되는 데까지 양(量)껏 배에 실어서 올 가을 안으로 연경에 보내주어, ‘급한 사정을 돕는다’는 뜻을 보여주기 바란다.” 하였다. 곧 1만 석을 장만하여 두 번으로 나누어 숙천(肅川)의 선박 16척에 실어 보냈는데, 쌀 4백 79석 신산도(神山島)에 이르러 배가 침몰하였다. 전후에 침몰된 곡식이 2천 5백 4십 9석이었다. 을유년에 ‘나라의 창고를 모두 털어서 대미(大米) 9만 5천 석을 모으고 또 사신을 삼남(三南)과 양서(兩西)로 나눠 보내 배를 내어 쌀을 수납(輸納)하여 연경의 식량의 어려운 사정을 돕는다’는 뜻을 호부(戶部)에 공문서를 보내 알렸다.
○ 병술년 호부(戶部)에서 보내온 문서의 지시에 따라 가을 배[秋梨] 2만 6천 2백 개와 홍시 6천 8백 개를 가지고 봉성(鳳城)에 갔다.
○ 효종 정유년에 황제의 명에 의하여 좋은 조총(鳥銃) 1백 자루를 바쳤다.
○ 숙종 신미년에 황제의 명에 따라 좋은 조창(鳥槍) 3천 자루를 바쳤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주(州)와 군(郡)

신라의 9주(九州) : 경덕왕(景德王) 16년 정유(757)에 비로소 9주를 두고 주(州)와 군(郡)의 이름을 고쳤다. 상주 왕성 동북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사벌주(沙伐州)고, 군 10과 현 31을 거느렸다., 양주(良州) 왕성 남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삽량주(歃良州)며 지금의 양산(梁山)이니, 소경(小京) 1과 군 12와 현 34와 정소(停所)를 거느리고 있다., 강주(康州) 왕성 서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청주(菁州)이며, 지금은 청주(靑州)이다.군 11과 현 30을 거느리고 있다. 의 3주(三州)는 본래 신라 땅이다. 한주(漢州) 서쪽에 있으니, 고구려의 남쪽 경계로서 옛이름은 한산주(漢山州)고, 지금은 광주(廣州)이다. 소경 1과 군 28, 현 49를 거느리고 있다., 삭주 한주 동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수약주(首若州)며, 지금은 춘천이다. 소경 1과 군 12, 현 26을 거느리고 있다. 와 명주 삭주 동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서주(西州)며 지금은 강릉이다.군 9와 현 25를 거느리고 있다. 의 3주(三州)는 옛 고구려 땅이다. 웅주(熊州) 백제 고성(古城) 북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웅천주(熊川州)이며, 지금은 공주이다. 소경(小京) 1과 군 13과 현 39를 거느리고 있다., 전주 웅주(熊州) 서남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완산주(完山州)이다. 소경(小京) 1과 군 10과 현 31을 거느리고 있다., 무주(武州) 전주의 남쪽에 있으니, 옛이름은 무진주(武珍州)며, 지금은 광주이다. 군15와 현 43을 거느리고 있다. 의 3주(州)는 옛 백제 땅이다. ○ 주(州), 군(郡), 현(縣)은 도합 4백 48이다. 주 9와 소경(小京) 5, 군 1백 20, 현 3백 8, 정소(停所) 6이다.
○ 고려의 10도(十道) : 성종(成宗) 14년 을미(995)에 경내를 나누어서 10도를 만들었다. 개성부 적현(赤縣) 6과 기현(畿縣) 7을 거느렸다.ㆍ관내도(關內道) 양주ㆍ광주(廣州)ㆍ황주(黃州)ㆍ해주 등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道)를 만들었으니, 주 29와 현 82를 거느리고 있다.ㆍ중원도(中原道) 충주ㆍ청주 등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道)를 만들었으니, 주 13과 현 42를 거느리고 있다.ㆍ하남도(河南道) 공주ㆍ운주(運州)와 지금의 홍주 등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를 만들었으니, 주 11과 현 34를 거느리고 있다.ㆍ강남도 전주ㆍ영주(瀛州)와 지금의 고부(古阜)ㆍ순주(淳州)ㆍ마주(馬州) 등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를 만들었으니 주 9, 현 49를 거느리고 있다.ㆍ영남도 상주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를 만들었으니, 주 12와 현 48을 거느렸다.ㆍ영동도 경주ㆍ금주(金州)와 지금의 김해 등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를 만들었으니, 주 9와 현 48을 거느리고 있다.ㆍ산남도(山南道) 진주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를 만들었으니 주 10과 현 37을 거느리고 있다.ㆍ해양도(海陽道) 나주ㆍ광주ㆍ정주(靜州)와 지금의 영광ㆍ승주(昇州), 지금의 순천ㆍ패주(貝州), 지금의 보성ㆍ담주(潭州), 지금의 담양ㆍ낭주(朗州), 지금의 영암 등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를 만들었으니, 주 14와 현 62를 거느리고 있다.ㆍ삭방도 춘주(春州)와 지금의 춘천ㆍ화주(和州)와 지금의 영흥(永興)ㆍ명주(溟州), 지금의 강릉 등에 소속된 군현으로 도(道)를 만들었으니, 주 7과 현 72를 거느리고 있다.ㆍ패서도(浿西道) 서경에 소속된 군과 현으로 도를 만들었으니, 주 14, 현 4, 진 7을 거느리고 있다. 이니 주ㆍ현ㆍ진이 모두 6백 26이다. 주가 1백 28이요, 현이 4백 91이며, 진이 7이다.
○ 고려의 8도(八道) : 현종(顯宗) 3년 임자(1012)에 주와 현을 더하고 줄여서 8도를 만들었다.
○ 개성부(開城府) 군 1과 현 12를 거느렸다. ○ 현종 9년 무오에 부(府)를 혁파하고 현을 두어 속현 3을 거느리게 했고, 또 장단현은 속현 7을 거느리게 하여 모두 직접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예속시키고 경도(京都)라 이름했다. ○ 문종 16년 임인에 다시 부(府)를 두어 11현을 도로 예속시키고, 또 우봉군(牛峯郡)을 나누어 예속시켰다.○ 공양왕 2년 경오에 경기도를 나누어 좌ㆍ우도를 만들었는데, 장단(長湍) 등 8읍(邑)은 좌도가 되고, 개성(開城) 등 5읍(邑)은 우도가 되었다.ㆍ양광도ㆍ충청도 양광도는 경(京) 1, 소경 1목(牧) 5, 도호부 6, 군 1, 현 75를 거느렸다. ○ 예종 원년 병술에 관내(關內)ㆍ중원(中原)ㆍ하남(河南)의 3도를 합쳐서 양광ㆍ충청의 주도(州道)를 만들었다. ○ 명종 원년 신묘에 나누어 2도(道)를 만들었다. ○ 충숙왕(忠肅王) 원년 갑인에 양광도를 만들었다.○ 공민왕 5년 병신에 충주ㆍ청주 등에 소속된 주현을 나누어 충청도를 만들고 소경 1, 목(牧) 5, 도호부 3, 군 14, 현 70을 거느리게 했다. ○ 공양왕 2년 경오에 양광도를 나누어 둘을 만들고, 한양 등 11읍과 교주도(交州道)ㆍ철원 등 6읍으로 좌도를 삼고, 부평(富平) 등 5읍과 서해도 연안(延安) 등 9읍으로 우도를 삼았다.ㆍ경상도 경(京) 10, 대도호부 1, 목 2, 도호부 6, 군 16, 현 1백 5를 거느리게 하였다.○ 예종 병술년에 영남ㆍ영동ㆍ산남(山南)의 3도를 합쳐서 경상ㆍ진주도(晉州道)를 만들었다. ○ 명종(明宗) 신묘년에 나누어 경상ㆍ진합천(晉陜川) 2도(道)를 만들었다. ○ 16년 병오에 나누어서 경상주도를 만들었다. ○ 신종(神宗) 7년 갑자에 상진(尙晉)ㆍ안동도라 일컬었다. ○ 그 후에 또 경상진안도(慶尙晉安道)라고 일컬었다. ○ 충숙왕 갑인년에 경상도가 되었다.ㆍ전라도 부 1, 대도호부 1, 목 2, 도호부 3, 군 12, 현 85를 거느리게 하였다. ○ 현종 무오년에 강남ㆍ해남 2도를 합쳐서 전라도를 만들었다.ㆍ교주도(交州道) 도호부 2ㆍ군 3ㆍ현 23을 거느리게 하였다. ○ 명종 8년 무술에 삭방도에 소속된 춘주(春州) 등의 주와 현으로 춘주도(春州道)를 만들었다.○ 뒤에 동주도(東州道)라고 일컬었다. ○ 원종(元宗) 4년 계해에 교주도(交州道)라고 일컬었다. ○ 충숙왕 갑인년에 회양도(淮陽道)라고 일컬었다. ○ 신우 14년 무진에 영동ㆍ영서를 합하여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를 만들었다.ㆍ서해도 목 1, 도호부 1, 군 8, 현 13, 진 1을 거느리게 하였다. ○ 관내도(關內道)에 소속된 황주(黃州)ㆍ해주 등의 주와 현으로 서해도를 만들었는데, 연대는 자세하지 않다. 동계 대도호부 1, 목 1, 도호부 2, 만호부 3, 군 12, 현 24, 진 9를 거느리게 하였다. ○ 정종(靖宗) 2년 병자에 삭방도에 소속된 화주(和州)ㆍ명주 등의 주와 현을 동계라고 일컬었다. ○ 문종 원년 정해에 동북면이라 일컬었고, 혹은 동면ㆍ동로ㆍ동북로ㆍ동북계라고 일컬었다. ○ 명종 무진년에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고 일컬었다. ○ 원종 계해년에 강릉도라고 일컬었다. ○ 공민왕 병신년에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라고 일컬었다. ○ 같은 해에 다시 동북면이라는 이름을 회복했다. ○ 9년 경자에 삭방강릉도라고 일컬었다. 북계 경1, 대도호부1, 목 1, 도호부 2, 만호부 3, 군 20, 현 18, 진 9를 거느리게 하였다. ○ 패서도(浿西道)를 북계라고 일컬었으나, 연대는 상세하지 않다. ○ 숙종 7년 임오에 서북계라고 일컬었다. 등 합하여 5백 15이다. 경(京) 3, 소경 1, 부 1, 대도호부 4, 목 12, 도부로 22, 만호부 6, 군 88, 현 3백 59, 진 19이다.
○ 우리나라의 8도는 도합 3백 33고을[官]이다.
○ 경기도 동계(東界)와 동쪽 강원도 경계의 동남쪽, 남쪽 충청도 경계와 서남쪽 충청도 경계, 큰 바다 서쪽과 서북쪽, 큰 바다 북쪽, 황해ㆍ강원 2도의 경계이다. 는 38고을이다. 좌도 23고을ㆍ우도 15고을이다. 고조선의 땅과 마한(馬韓)의 지역이니, 4군(四郡)으로 있을 때는 낙랑군(樂浪郡) 관할이었다. 그 후에 남쪽 경계는 백제의 소유가 되었다가 다시 고구려와 신라가 나누어 점령했었고, 뒤에는 모두 신라가 병합하였으며 한주(漢州)를 두었다. 말기에는 궁예가 점령하였다. 고려 성종(成宗)이 관내도(關內道)를 두었고, 현종(顯宗)은 경기와 양광도로 나누어 두었으나 충숙왕이 양광도를 만들었으며, 공양왕이 비로소 경기좌도ㆍ우도로 나누어 만들었다. 장단ㆍ임강(臨江)ㆍ토산(兔山)ㆍ임진ㆍ송림(松林)ㆍ마전(麻田)ㆍ적성(積城)ㆍ파평은 좌도가 되었고, 개성ㆍ강음(江陰)ㆍ해풍(海豐)ㆍ덕수(德水)ㆍ우봉은 우도가 되었다. 한양ㆍ남양(南陽)ㆍ인천ㆍ안산(安山)ㆍ교하(交河)ㆍ양천(陽川)ㆍ금천(衿川)ㆍ과천ㆍ포천ㆍ서원(瑞原)ㆍ고봉(高峯)ㆍ철원ㆍ영평(永平)ㆍ이주(伊州)ㆍ안협(安峽)ㆍ연주(漣州)ㆍ삭녕(朔寧)은 좌도(左道)에 예속되었고, 부평ㆍ강화ㆍ교동(喬桐)ㆍ김포ㆍ통진ㆍ연안ㆍ평주(平州)ㆍ백주(白州)ㆍ곡주(谷州)ㆍ수안(遂安)ㆍ재령(載寧)ㆍ서흥(瑞興)ㆍ신은(新恩)ㆍ협계(俠溪)는 우도(右道)에 예속되었다. 태조 을해년에 고쳐서 좌도와 우도를 두었다. 평주(平州)ㆍ수안(遂安)ㆍ곡주(谷州)ㆍ재령(載寧)ㆍ서흥(瑞興)ㆍ신은(新恩)ㆍ협계(俠溪)는 새 서울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도로 서해도에 예속시키고, 광주(廣州)ㆍ수원ㆍ양근(楊根)ㆍ쌍부(雙阜)ㆍ용구(龍駒)ㆍ처인(處仁)ㆍ이천(利川)ㆍ천녕(川寧)ㆍ지평(砥平)을 나누어 좌ㆍ우도로 만들었다가 무인년에 또 충청도 진위현(振威縣)을 나누어 좌도에 예속시켰다. 태종 임오년에 양도(兩道)를 합해서 경기 좌ㆍ우도라고 부르다가 계사년에 좌ㆍ우도를 합하였다. 도ㆍ리(道里)의 원근을 참작해서 연안(延安)ㆍ백주(白州)ㆍ우봉(牛峯)ㆍ강음(江陰)ㆍ토산(兔山)은 도로 풍해도(豐海道)에 예속시키고, 이천(伊川)은 도로 강원도에 예속시키며, 또 충청도의 여흥(驪興)ㆍ안성(安城)ㆍ양지(陽智)ㆍ양성(陽城)ㆍ음죽(陰竹)과 강원도 가평현(加平縣)을 분할하여 예속시켰다. ○ 세종 갑인년에 다시 철원ㆍ안협(安峽)을 강원도에 옮겨 예속시켰다.
○ 한성부 : 고구려 때의 북한산군(北漢山郡)이니, 백제 온조왕(溫祚王)이 성을 쌓았고, 근초고왕이 도읍을 옮겼으며,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북한산에 와서 지경을 정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의 군주(軍主)를 두었다. 경덕왕이 한양군이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고쳐서 양주라 하였으며, 성종이 좌신책군(左神策軍)이란 이름을 지어서 해주와 함께 좌우이보(左右二輔)를 삼았다.문종이 승격시켜 남경(南京)이라 하였고, 이웃 군(郡) 백성을 옮겨다가 채웠다. 숙종이 장차 도읍을 옮기려 하여 윤관(尹瓘)이 공역을 맡은 지 5년 만에 준공하였다. 충렬왕이 고쳐서 한양부(漢陽府)라 하였고, 우리 태조가 도읍을 정하여 한성부라고 고쳤다. ○ 남평양(南平壤) : 광릉(廣陵)이라 부른다.
○ 좌도 강화부 : 성이 있다. 고구려 때 여혈군(麗穴郡) 혹은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도 한다. 이니,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해구(海口)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고쳐서 강화현이 되었으며, 고종이 강도(江都)라 이름하였다. 몽고 군사를 피하여 이곳에 들어가서 도읍했기 때문이다. ○ 심주(沁州)라고도 부른다. 17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가 1백 35리이다.
○ 진강(鎭江)은 폐현(廢縣)이며 고구려 때 수지현(首智縣)이다. 하음(河陰)도 폐현이다. 고구려 때 동음내현(冬陰奈縣)이다.
○ 광주부(廣州府) : 백제의 고도 남한산성이니, 신라 때에 고쳐서 한산주(漢山州)라 하였고, 경덕왕이 한주(漢州)라 고쳤으며, 고려 초기에 광주라 고쳤고, 성종이 봉국군(奉國軍)이라 이름하였다. ○ 회안(淮安)이라고도 부른다. 23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5리이다.
○ 화성부(華城府)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매홀군(買忽郡)이요, 신라 때의 수성(水城)이니, 고려 태조가 승격시켜 수주(水州)라 하였고, 뒤에 수원으로 고쳤다. ○ 한남(漢南) : 수성(隋城)이라고도 부른다. 52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8리이다. 옛날 송수부곡(松水部曲)이다. ○ 정송(貞松)과 광덕(廣德)은 폐현이다.
○ 여주 : 고구려 때 골내근현(骨乃斤縣)이니, 신라 때는 황요(黃驍)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황려(黃驪)로 고쳤으며, 뒤에 또 영의(永義)라 고쳤다가 다시 승격시켜 여흥군(驪興郡)이 되었고, 뒤에 신우(辛禑) 때에 와서 황려부(黃驪府)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군으로 강등시켰다. 태종이 다시 부 원경왕후(元敬王后)의 고향 로 승격시켰더니, 예종 기축년에 여주목 영릉(英陵)으로 옮겼다. 으로 고쳤다. ○ 여강(驪江)ㆍ여성(驪城)ㆍ황리(黃利)라고도 부른다. 13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90리이다. ○ 천녕(川寧)은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술천군(述川郡)이니, 일명 성지매(省知買)이다. 신라 때에 고쳐서 기천(沂川)이라 하였고, 예종이 주에 합쳤다.
○ 부평 : 고구려 때 주부토군(主夫吐郡)인데, 신라 때에 장제(長堤)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수주(樹州)로 고쳤다가 뒤에 안남계양(安南桂陽)으로 고쳤으며,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시켰다가 부평부로 강등시켰다. 1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5리이다.
○ 남양 : 고구려 때의 당성군(唐城郡)인데, 신라 때에 당은(唐恩)이라 고쳤고, 고려 때에는 수주(水州)와 인주(仁州)에 속해 있다가 뒤에 현을 두었다. 다시 익주(益州)로 승격시켰다가 강남(江南)ㆍ안양(安陽) 등으로 고치고 남양부가 되었다. ○ 영제(寧堤) : 과포(戈浦)라고 한다.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5리이다. ○ 재양(載陽)은 폐현이다. 옛 안양현(安陽縣)이다.
○ 이천(利川) : 고구려 때의 남천현(南川縣)인데 혹은 남매(南買)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황무(黃武)라 고쳤다가 고려 태조가 이천군으로 고치고 뒤에 영창(永昌)이라 고쳤다. 우리 태조 계유년에 다시 이천현이라 하고, 세종 갑자년에 부로 승격시켰다. 1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41리이다.
○ 인천 : 고구려 때의 매소홀현(買召忽縣)인데, 혹은 미추홀(彌趨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소성(邵城)이라 고쳤다가 고려 때에 수주(樹州)에 예속시켰고, 뒤에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시켰으며, 다시 인천이라 고쳤다. 공양왕이 경원부(慶源府)로 승격시켰다가 7대(代)조의 고향이라 하여 호장과 홍혜(紅鞋)를 하사하였다. 우리 태조 원년에 다시 인주(仁州)라고 하였는데, 군을 강등시켜 현이라 하였다. 태종이 인주군(仁州郡)이라 고쳤고, 세조 경진년(1460)에 다시 부(府)로 승격시켰다.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향(外鄕)이다.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7리이다.
○ 통진 : 고구려 때의 평회압현(平淮押縣)인데, 혹은 비사성(比史城)이라고도 하고, 또는 별사파의(別史波衣)라고도 한다. 신라 때 분진(分津)이라 고쳤고, 고려 때에는 통진이라 고쳤으며, 숙종 갑술년에 현을 부로 승격시켰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14리이다. ○ 동성(童城)은 폐현이고 고구려 때의 동자홀현(童子忽縣)인데, 혹은 당산현(幢山縣)이라고도 하고, 또는 구사파의(仇斯波衣)라고도 하는데, 공양왕 때에 통진에 속했다. 수안(守安)도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수이홀(首爾忽)인데, 신라 때에 수성(戍城)이라 고쳤다.
○ 죽산 : 고구려 때의 개차산군(皆次山郡)인데, 신라 때 개산(介山)이라 고쳤고, 고려 때에 죽주(竹州)로 고쳤으며, 우리 태종이 죽산이라 고쳤다. ○ 음평(陰平)ㆍ연창(延昌)이라고 한다. ○ 1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70리이다. ○ 양근(楊根) : 고구려 때의 양근군(楊根郡)이니, 혹은 항양(恒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빈양(濱陽)이라 고쳤고, 고려 때는 영화(永化)라고 일컬었다. 뒤에 익화(益和)로 승격시켰다가 지금 명칭으로 다시 고쳤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16리이다. ○ 미원(迷原)은 속현이다. 공민왕이 국사(國師) 보우(普愚)로 하여금 군(郡)의 미원장(迷原莊) 소설암(小雪庵)에 살게 하고, 장(莊)을 현(縣)으로 만들고 감무(監務)를 승격시켰더니, 조금 후에 그곳은 땅이 좁고 사람이 드물다 하여 다시 군에 예속시켰다.
○ 안산 : 고구려 때의 장항구현(獐項口縣)이니, 신라 때 장구군(獐口郡)이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안산으로 고쳤다. ○ 연성(蓮城)이라고 한다. ○ 6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2리이다. ○ 장항(獐項)은 폐현이다.
○ 안성 : 고구려 때의 제혜홀(祭兮忽)이니, 신라 때 백성군(白城郡)이라 고쳤고, 고려 때 안성현(安城縣)이라 고쳤다. 뒤에 수주(水州) 천안에 예속시켰다가 또 현을 두고 군으로 승격시켰다. 홍건적의 난리에 임금이 남쪽으로 피난하니, 여러 고을이 항복했으나 오직 안성(安城) 사람이 거짓 항복하는 체하고 잔치를 베풀어 취한 것을 이용하여 괴수 6명을 목베어 죽였다. ○ 1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52리이다.
○ 김포 : 고구려 때의 금포현(黔浦縣)이니, 신라 때 김포로 고쳤다. 태종이 양천(陽川)을 나누어서 이 현에 합치고 이름을 금양(金陽)이라 하였더니, 뒤에 양천을 또 금천(衿川)에 합병시키고, 김포는 부평에 합병시켰다가 그 후 2년에 다시 현을 만들었다. ○ 8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0리이다. ○ 금릉(金陵)이라고 한다.
○ 용인 : 용구(龍駒)는 본래 고구려 때의 구성(駒城)인데, 혹은 멸오(滅烏)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 거서(巨黍)라 고쳤다가 고려 초기에 용구(龍駒)라 고쳤다. 처인현(處仁縣)은 본래 수원의 처인부곡(處仁部曲)이니, 태조가 처음으로 현을 설치하였다. 태종이 2현을 합해서 용인으로 고쳤다. ○ 1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0리이다.
○ 진위(振威) : 고구려 때의 부산현(釜山縣)이니, 신라 때 진위로 고쳤다. ○ 연달(淵達) : 송촌(松村)ㆍ활달(活達)이라고 한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18리이다. ○ 영신(永新)은 폐현이다. 또는 영풍(永豐)이라고도 한다. 송장부곡(松莊部曲)이라고도 한다.
○ 양천 : 고구려 때의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니, 신라 때 공암(孔巖)으로, 고려 때 양천으로 고쳤다. ○ 제양(齊陽)ㆍ파릉(巴陵)이라고도 한다. ○ 양평(陽平)ㆍ양원(陽原)이라고도 한다. ○ 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1리이다.
○ 지평(砥平) : 고구려 때의 지현현(砥峴縣)이니, 신라 때 지평으로 고쳤다. ○ 지제(砥堤)라고도 한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62리이다.
○ 과천 : 고구려 때의 율목군(栗木郡)이니, 신라 때 율진(栗津)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과주로 고쳤다. 태종이 과천으로 고치고, 또 금천(衿川)과 합쳐서 금과(衿果)라고 부르다가 조금 후에 다시 복구하였다.
○ 동사혜(冬斯盻) : 부림(富林)ㆍ부안(富安)이라고도 한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0리이다.
○ 금천(衿川) : 고구려 때의 잉벌노현(仍伐奴縣)이니 신라 때 곡양(穀壤)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금주(衿州)로 고쳤는데, 혹은 금주(黔州)라고도 한다. 태종 때 금과(衿果)가 되고 또 양천과 합쳐서 금양(衿陽)이 되었다. ○ 시흥(始興)이라고도 한다. ○ 1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1리이다.
○ 음죽(陰竹) : 고구려 때의 노음죽현(奴音竹縣)이니, 신라 때 음죽으로 고쳤다. ○ 설성(雪城)이라고 한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95리이다.
○ 양성(陽城) : 고구려 때의 사복홀(沙伏忽)이니, 신라 때 적성(赤城)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양성(陽城)으로 고쳤다. ○ 사파을(沙巴乙)이라고 한다. ○ 14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14리이다.
○ 양지(陽智) : 본래 수주(水州) 양양부곡(陽良部曲)이니, 정종이 승격시켜 현을 만들고 양지로 고쳤으며, 태종이 현의 관아를 추계(秋溪)로 옮겼었다. ○ 양산(陽山)이라고 한다. ○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11리이다.
○ 우도 개성부(開城府) : 고구려 때의 부소압(扶蘇押)이니 신라 때 송악군(松岳郡)으로 고쳤고, 고구려 때 동비홀(冬比忽)을 고쳐서 개성군(開城郡)을 만들었다. 고려 태조가 2군을 합친 이 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개주(開州)라 하였다가 뒤에 개성부라 고쳤다.정주(貞州)ㆍ덕수(德水)ㆍ강음(江陰)ㆍ장단ㆍ송림(松林)ㆍ임진ㆍ토산(兔山)ㆍ임강(臨江)ㆍ적성(積城)ㆍ파평ㆍ마전(麻田)의 11현을 관할하였다. 또 서해도ㆍ우봉군(牛峯郡)을 분할하여 이에 예속시켰더니 우리 태조가 도읍을 옮기고 송도라 고쳤다.
○ 개경 : 황도(皇道)ㆍ촉막군(蜀莫郡)이라고도 한다. 《송사(宋史)》에, “고려왕이 개주(開州) 촉막군(蜀莫郡)에 살아 이곳을 개성부라고 하는데, 산을 의지해서 궁실을 짓고, 성벽을 세워서 그 산을 신숭산(神嵩山)이라 하였다.” 하였다.
○ 사부(四部) 동부는 인흥방(仁興坊)이고, 남부는 예안방(禮安坊)이며, 서부는 의흥방(義興坊)이요, 북부는 지안방(智安坊)이다. 또 5부(部) 35방(坊)을 개정하였다. 동부 7방은 안정(安定)ㆍ봉향(奉香)ㆍ영창(令昌)ㆍ철령(哲令)ㆍ양제(楊堤)ㆍ홍인(弘仁)ㆍ창령(倉令)이요,남부 5방은 덕수(德水)ㆍ덕풍(德豐)ㆍ안흥(安興)ㆍ덕산(德山)ㆍ안신(安申)이요, 서부 5방은 삼송(森松)ㆍ오정(五正)ㆍ건복(乾福)ㆍ진안(鎭安)ㆍ향천(香川)이요, 북부 10방은 정원(正元)ㆍ법왕(法王)ㆍ흥국(興國)ㆍ오관(五冠)ㆍ자운(慈雲)ㆍ왕륜(王輪)ㆍ제상(堤上)ㆍ사내(舍乃)ㆍ사자(獅子)ㆍ암내(巖內)ㆍ천왕(天王)이요, 중부(中部) 8방은 남계(南溪)ㆍ흥원(興元)ㆍ홍도(弘道)ㆍ앵계(鸚溪)ㆍ유암(由巖)ㆍ변양(變羊)ㆍ광덕(廣德)ㆍ성화(星化)이다. 우리 세조가 개성은 외관(外官)이므로, 옛 제도 그대로 둘 수 없다 하여 드디어 이것을 줄여서 4부 4방 17면으로 만들었다.○ 서울과의 거리가 1백 66리이다. ○ 전팔경(前八景) 곡령춘청(鵠嶺春晴)ㆍ용산추만(龍山秋晩)ㆍ자동심승(紫洞尋僧)ㆍ청교송객(靑郊送客)ㆍ웅천계음(熊川禊飮)ㆍ용야심춘(龍野尋春)ㆍ남포연사(南浦煙簑)ㆍ서강월정(西江月艇)이다. ○ 후팔경(後八景) 자동심승(紫洞尋僧)ㆍ청교송객(靑郊送客)ㆍ북산연우(北山煙雨)ㆍ서강풍설(西江風雪)ㆍ백악청운(白岳晴雲)ㆍ황교만조(黃郊晩照)ㆍ장단석벽(長湍石壁)ㆍ박연폭포이다.
○ 파주 : 파평현(坡平縣)은 고구려 때의 파해평사현(坡害平史縣)이니, 액봉(頟逢)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파평으로 고쳤다. 서원군(瑞原郡)은 고구려 때의 술매홀현(述尒忽縣)이니, 신라 때 봉성(峯城)으로 고쳤고, 고려 때 다시 고쳐서 서원(瑞原)이 되었다.태조 무인년에 서원(瑞原)ㆍ파평을 합쳐서 원평군(原平郡)이 되었다. 태종 을미년에 부사로 승격시키고, 세조 경진년에 이름을 파주목 왕비의 고향이다. 이라 고쳤었는데, 연산군 때에 주(州)를 파하여, 그 땅이 비었던 것을 중종(中宗)이 다시 설치하였다. ○ 영평(鈴平)ㆍ곡성(曲城)이라고 한다. ○ 11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2리이다.
○ 양주(楊州) : 고구려 때의 매성군(買省郡)이니 또는 창화(昌化)라고도 한다. 신라 때 내소(來蘇)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견주(見州)로 승격시켰다. 우리 태조 갑술년에 부(府)의 관아를 동촌(東村)으로 옮기고 양주로 강등시켰다. 태종 을미년에 부로 승격시켰다. 세조 경진년에 목(牧)으로 승격시켰고, 연산군 때 주(州)를 파하여 이 땅이 비었던 것을 중종(中宗)이 다시 설치하였다. ○ 33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0리이다. 풍양(豐壤)은 속현이고, 고구려 때 골의노현(骨衣奴縣)이니, 신라 때 황양(荒壤)으로 고쳤고, 고려 때 풍덕(豐德)으로 고쳤는데, 세종 때 와서 양주에 예속시켰다. 사천(沙川)은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내을매현(內乙買縣)이니, 또는 내매미(內尒米)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사천(沙川)으로 고쳤다.
○ 장단(長湍) : 고구려 때의 장천성현(長淺城縣)이니 신라 때 장단으로 고쳤고, 고려 때 단주(端州)로 승격시켰으며, 태종이 임강현(臨江縣)과 합쳐서 장림(長臨)이라 하였다. 뒤에 다시 장단과 임진을 합쳐서 임단(臨湍)이라고 불렀는데, 세종 기해년에 다시 장단현이 되었다. 세조 기묘년에 군으로 승격시키고, 중궁의 증조 이상의 3묘(墓)가 있다. 관아를 도원역(桃源驛)으로 옮겼더니 예종 기축년에 부로 승격시켰다.○ 습천(隰川)ㆍ야야(耶耶)ㆍ야아(夜牙)라고도 한다. ○ 2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20리이다. ○ 임강(臨江)은 폐현이고 고구려 때의 장항현(獐項縣)이니 또는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라고도 한다., 송림(松林)도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약지(若只)ㆍ두치현(頭恥縣)이니, 또는 지섬(之蟾)ㆍ삭두(朔頭)라고도 한다. 신라 때 여비(如羆)로 고쳤다. 임진은 폐현이다. 고구려 때 진림성현(津臨城縣)이니, 또는 오아홀(烏阿忽)이라고도 한다.
○ 풍덕(豐德) : 고구려 때의 정주(貞州)이니, 고려 때 승천부(昇天府)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해풍군(海豐郡)으로 강등시켰다. 태종이 군을 줄여 개성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다시 군을 만들었고, 세종이 덕수현(德水縣)과 합쳐서 이름을 풍덕이라고 고쳤으며, 효종 기축년(1649)에 부로 승격시켰다.○ 하원(河源)이라고도 한다. ○ 8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80리이다. ○ 덕수(德水)는 폐현이다. ○ 고구려 때의 덕물현(德勿縣)이니, 또는 인물(仁物)이라고도 한다.
○ 교동(喬桐)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고목근현(高木根縣)이니, 대운도(戴雲島) 또는 고림(高林) 또는 달을신(達乙新)이라고도 한다. 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교동으로 고쳤다. 태조가 만호를 두었으며 뒤에 현으로 승격시켰고, 인조 기사년에 부로 승격시켰다. ○ 4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육로로 1백 20리고, 수로로는 50리이다. ○ 삭녕(朔寧) : 고구려 때의 소읍(所邑)ㆍ두현(豆縣)이니 고려 때 삭녕ㆍ승령현(僧領縣)으로 고쳤다. 고구려 승량현(僧梁縣) 또는 빗물(非勿)이라고도 한다. 을 신라 때 동량(㠉梁)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 때에 2현을 모두 동주(東州)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승령현(僧嶺縣)을 두고 삭녕과 합쳤다. 태종 계미년에 군으로 승격시키고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외향(外鄕)이다. 또 안협현(安峽縣)을 줄여서 예속시켜 안삭군(安朔郡)을 만들었더니 조금 뒤에 복구하였다. ○ 7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95리이다.
○ 마전(麻田) : 고구려 때의 마전천현(麻田淺縣)이니, 신라 때 임단(臨湍)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마전으로 고쳤다. 문종 임신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숭의전(崇義殿)이 있기 때문이다. ○ 6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25리이다. ○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서울과의 거리는 1백 79리이다.” 하였다.
○ 고양(高陽) : 고구려 때의 달을성현(達乙省縣)이니 신라 때 고봉(高峯)이라고 개칭했고, 고구려 때 개백현(皆伯縣)을 신라 때 우왕(遇王)이라고 고쳤는데, 또는 왕봉(王逢)이라고도 하였다. 고려 때 행주(幸州)로 개칭하였으며, 현종 때에 2현을 모두 양주에 예속시켰다. 태조 갑술년에 비로소 고봉현을 두고, 행주와 부원(富原)ㆍ황조(荒調)를 이에 예속시켰다.태종 계사년에 고양이라 개칭하고, 고봉ㆍ덕양(德陽) 성종 신묘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 8면(面)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7리이다. ○ 고봉고현(高峯古縣)이라고도 한다. 김부식이 말하기를, “한씨(漢氏)의 미녀가 달을성현(達乙省縣) 높은 산꼭대기에서 봉화를 놓고 안장왕(安藏王)을 맞이했기 때문에 뒤에 이름을 고봉이라 하였다.” 하였다. 왕봉(王逢)은 폐현이고 바로 행주(幸州) 한씨의 미녀가 안장왕(安藏王)을 개백현(皆伯縣)에서 맞았으므로 이름을 고쳐서 왕봉(王逢)이라 하였다. 부원(富原)도 폐현이다. 본래 과주(果州) 용산처(龍山處)인데, 지금은 한성부에 예속되었다. 황조향(荒調鄕) 본래 부평에 예속되었으니 바로 주엽리(注葉里)이다.
○ 교하(交河) : 고구려 때의 천정구현(泉井口縣)이니 또는 굴화(屈火)라고도 한다. 신라 때 교하군(交河郡)이라 고쳤고, 고려 때 양주에 예속시켰는데, 태조 갑술년에 비로소 현을 두고 심악(深岳)ㆍ석천(石淺) 부평의 속향 을 여기에 예속시켰으며 영종(英宗) 계축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 선성(宣城)ㆍ원정(原井)이라고도 한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90리이다. ○ 심악(深岳)은 폐현이다. 옛날의 보신향(寶新鄕)이다.
○ 가평 : 고구려 때의 근평군(斤平郡)인데, 병평(幷平)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가평이라 고쳤으며, 가평(嘉平)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춘주(春州)에 예속시켰는데 태조 병자년에 비로소 현을 두었으며 중종 정묘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 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37리이다. ○ 조종(朝宗)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심천현(深川縣)이니 또는 복사매(伏斯買)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준천(浚川)이라고 고쳤다.
○ 영평 : 고구려 때의 양골현(梁骨縣)이니, 신라 때 동음(洞陰)이라 고쳤고, 고려 때 영흥(永興)으로 승격시켰으며, 태조 갑술년에 영평이라 고쳤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40리이다.
○ 포천 : 고구려 때의 마홀군(馬忽郡)이니 신라 때 견성(堅城)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포천으로 고쳤으며, 태종 계사년에 포천현으로 고쳤다.
○ 명음(命音) : 청화(淸化)라고도 한다. ○ 광해군 무오년(1618)에 영평(永平)과 합하여 부사로 승격시켰다가 계해년에 도로 혁파하였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97리이다.
○ 적성(積城) : 고구려 때의 칠중현(七重縣)이니, 신라 때 중성(重城)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적성(積城)으로 고쳤다. ○ 내별(乃別)이라고도 한다. ○ 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20리이다.
○ 연천(漣川) : 고구려 때의 공목달현(工木達縣)이니, 웅섬산(熊閃山)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공성(功成)이라 고쳤고, 고려 때 장주(漳州)ㆍ연천이라 고쳤으며, 태종 갑오년에 마전(麻田)과 합해서 마련현(麻漣縣)을 만들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나누어 연천현을 만들었다. ○ 장포(獐浦)라고도 한다. ○ 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43리이다.
○ 충청도 : 동북쪽은 강원도와 경계요, 동쪽은 경상도와 경계로 동남쪽은 경상ㆍ전라 양도의 경계로, 남쪽은 전라도와 경계로 서남쪽 및 서쪽ㆍ서북쪽은 모두 큰 바다이며, 북쪽은 경기도와 경계이다. 54고을 좌도 21고을, 우도 33고을 이니, 옛 마한(馬韓)의 땅으로서 고구려와 백제가 나누어 점거하였다가 뒤에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다. 웅주를 두었다. 말기에는 궁예와 견훤이 나누어 점거하였다. 고려 성종이 중원도(中原道)ㆍ하남도(河南道)를 두었는데, 예종이 관내도(關內道)에 합쳐서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라 일컬었다. 다시 명종이 나누어 2도를 만들었고, 충숙왕이 다시 합쳐서 1도로 만들어 양광도(楊廣道)라 하였고, 공민왕이 충청도라고 불렀다. 신우가 평창군(平昌郡)을 나누어서 교주도(交州道)에 옮겨 예속시켰다. 우리 태조 을해년에 양광주(楊廣州)가 거느린 군현을 경기에 예속시키고, 그 나머지는 그대로 충청도라 일컬었다. 태조 무인년에 진위현을 나누어 경기도에 예속시켰고, 정종은 영월군을 나누어 강원도에 예속시켰으며, 강원도 영춘현(永春縣)을 충청도에 예속시켰다. 태종 계사년에 영흥(永興)ㆍ안성(安城)ㆍ음죽(陰竹)ㆍ양성(陽城)ㆍ양지(陽智)를 경기도에 예속시키고, 경상도의 옥천(沃川)ㆍ영동(永同)ㆍ황간(黃澗)ㆍ보은ㆍ청산을 충청도에 예속시켰다.
○ 좌도 충주 : 성(城)이 있다. 고구려 때의 국원성(國原城) 또는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하며, 난장성(亂長省)이라고도 한다. 이니, 신라 진흥왕이 소경(小京) 귀족 자제들과 6부(部)의 호민(豪民)들을 옮겨다가 채웠다. 을 두었으며 뒤에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고쳐서 충주라 하였고, 성종은 창화군(昌化軍)이라 이름하였다. 세종 기사년에 관찰사로서 목사(牧使)를 겸하게 했다가 얼마 안 되어 혁파하였다. ○ 대원(大原) 결(缺) 예(蘂)는 본래 고구려의 원성(原城)인데, 신라 때 병합하고 진흥왕이 소경을 두었고, 경덕왕이 중원(中原)이라 하였으며, 고려 때 충주라 고쳤다.
○ 청주 : 성이 있다. 백제 때 상당현(上黨縣)이니, 또는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우곡(娘于谷)이라 한다. 이라 한다. 신라 때 서경ㆍ소경(小京)을 두었으며, 고려 태조가 청주라 고쳤다가 뒤에 전절군(全節軍)으로 삼았다. 세종 기사년에 관찰사로서 목사를 겸하게 했다가 얼마 안 되어 파하였다.○ 청주ㆍ낭성(琅城)이라고도 한다. ○ 23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리가 된다. ○ 청주는 속현이다. 옛날 살매현(薩買縣)이니, 또는 청천(淸川)이라고도 한다.
○ 청풍(淸風) : 고구려 때의 사열이현(沙熱伊縣)이니, 신라 때 청풍이라 고쳤고, 현종 경자년에 군을 부로 승격시켰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55리이다.
○ 단양 : 고구려 때 적산현(赤山縣)이니 적성(赤城)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단산(丹山)이라 고쳤다가 또 단양으로 고치고, 군으로 승격시켰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80리이다.
○ 천안 : 본래 동서(東西) 도솔(兜率)의 땅이니, 고려 태조가 병합하여 천안부를 만들었고, 성종이 환주(歡州)라고 고쳤는데 뒤에 영주(寧州)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영산군(寧山郡)이라 고쳤다가 조금 후에 천안으로 고쳤다. ○ 임환(任歡)이라고도 한다. ○ 1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19리이다. 풍세(豐歲)는 폐현이다. 백제 때 감매현(甘買縣)이니, 또는 제천(稊川)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순치(馴稚)라 고쳤다.
○ 괴산 : 고구려 때의 잉근내군(仍斤內郡)이니, 신라 때 괴양(槐壤)으로 고쳤고, 고려에서는 괴주(槐州)라 고쳤는데, 태종 계사년에 괴산군으로 고쳤다. ○ 시안(始安)이라고도 한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0리이다.
○ 옥천 : 신라 때 고시산군(古尸山郡)이니 뒤에 관성(管城)이라 고쳤고, 고려 때 옥주(沃州)로 승격시켰으며, 태종 계사년에 옥천군(沃川郡)으로 고쳤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0리이다. ○ 이산(利山)은 속현이다. 신라 때의 소리산현(所利山縣)이다. 안읍현(安邑縣) 신라 때의 아동혜군(阿東兮郡)이니 안정(安貞)이라 고쳤다. 양산현(陽山縣) 신라 때의 조차천현(助此川縣)이니, 고려 충선왕 때 3현을 나누어 여기에 예속시켰다.
○ 문의(文義) : 백제 때의 일모산군(一牟山郡)이니, 신라 때 연산(燕山)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문의현이라 고쳐서 가림(嘉林)과 합쳤다가 얼마 안 되어 복구하였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6리이다.
○ 제천 : 고구려 때의 내토군(奈吐郡)이니, 신라 때 내제(奈堤)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제주(堤州)라 고쳤는데, 태종 계사년에 제천현(堤川縣)으로 고쳤다. ○ 의천(義川)이라고도 한다. ○ 의원(義原)이라고도 한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0리이다.
○ 직산(稷山) : 본래는 위례성(慰禮城)이니 백제가 도읍을 세웠고, 고구려는 이곳을 차지하여 사산현(蛇山縣)이라 하였으며, 고려 초기에 직산으로 고쳤다. 태조 계유년에 군으로 승격시켰고, 태종 신사년에 다시 강등시켰으며, 연산군 때 경기도로 옮겨 예속시켰다가 중종 때 복원하였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83리이다. ○ 경양(慶陽)은 폐현이다. 고려 때 하양창(河陽倉)이다.
○ 회인(懷仁) : 백제 때의 미곡현(未谷縣)이니, 신라 때 매곡(昧谷)이라 고쳤고, 고려 때에는 회인이라 고쳤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6리이다.
○ 연풍(延豐) : 고구려 때의 상모현(上芼縣)이니, 고려 때에 장연(長延)이라 고쳤고, 태조 갑술년에 장풍현(長豐縣)과 합쳤으며, 태종 계미년에 연풍으로 고쳤다. ○ 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62리이다. ○ 장풍(長豐)은 폐현이다.
○ 음성(陰城) : 고구려 때의 잉홀현(仍忽縣)이니, 신라 때 음성으로 고쳤다. ○ 설성(雪城)이라고도 한다. ○ 잉근내(仍斤內)는 선조 임진년에 혁파했다가 광해군 무오년에 다시 두었다. ○ 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48리이다.
○ 청안(淸安) : 청당현(淸塘縣)이니 청연(淸淵)이라고도 하는데, 고려 때 도안(道安)과 겸하여 다스렸다. 도안현(道安縣)은 본래 고구려 때 도서현(道西縣)이니 신라 때에는 도서(都西)로 고쳤다. 태종 을유년에 양현(兩縣)을 합쳐서 청안으로 고쳤다. ○ 청당(淸塘)이라고도 한다.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3리이다.
○ 진천(鎭川) : 고구려 때의 금물노군(今勿奴郡)이니, 만노(萬弩)라고도 하며 수지(首知) 혹은 신지(新知)라고도 한다. 신라 때 흑양(黑壤)으로 고쳤는데 또는 황양(黃壤)이라고도 한다.고려 초기에 강주(降州)라 일컬었다가 진주(鎭州)로 고쳤으며, 창의(彰義) 의령(義寧)으로 승격시켰다. 태조 계사년에 진천현으로 고쳤고, 연산군이 경기도로 옮겨 예속시켰는데 중종이 복원하였다. ○ 상산(常山)이라고도 한다. ○ 1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34리이다.
○ 목천(木川) : 백제 때 대목악군(大木岳郡)이니 신라 때 대록(大麓)이라 고쳤고, 고려 때에는 목주(木州)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목천현이라 고쳤다. ○ 신정(新定)이라고도 한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47리이다.
○ 영춘(永春) : 고구려 때의 을아단현(乙阿旦縣)이니, 신라 때 자춘(子春)으로 고쳤고, 고려 때 영춘으로 고쳤으며, 정종 기묘년에 옮겨 예속시키고 현(縣)을 설치하였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0리이다.
○ 보은(報恩) : 신라 때 삼년산군(三年山郡)을 삼년으로 고쳤고, 고려 때 보령(保齡)으로 고쳤으며, 태종 병술년에 보은현으로 고쳤다. 보령(保寧)과 음(音)이 서로 같기 때문이다. 삼산(三山) ○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6리이다.
○ 영동(永同) : 신라 때 길동군(吉同郡)을 영동으로 고쳤고, 고려 때 계주(稽州)로 승격시켰다가 도로 폐하여 현으로 하였다. ○ 영산(永山)ㆍ계산(稽山)이라고도 한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60리이다.
○ 황간(黃澗) : 신라 때의 소라현(召羅縣)이니, 황간 신라 때 수영(水永)에 속해 있었다. 이라 고쳤고, 태종 갑오년(1414, 태종 14)에 청산(靑山)과 합쳐서 황청현(黃靑縣)을 만들었다가 얼마 안 되어 이전 상태로 회복하였다. ○ 황계(黃溪)라고도 한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0리이다.
○ 청산(靑山) : 신라 때의 굴산현(屈山縣) 삼년군(三年郡)에 속해 있었다. 이니, 돌산(堗山)이라고도 하는데 기산(耆山)이라 고쳤고, 고려 때 청산으로 고쳤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23리이다. ○ 주성(酒城)은 속현이다. 보은 북촌(北村)에 들어갔다가 땅이 작다 해서 분할하여 부속시켰다.
○ 우도 공주 : 백제 때의 웅천(熊川)이니, 문주왕(文周王)이 북쪽 한수(漢水)로부터 도읍을 이곳에 옮겼는데,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멸하고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었다. 신라 때 웅천주(熊川州)라 고쳤다가 또 웅주(熊州)로 고쳤고, 고려 태조가 공주로 고쳤다가 뒤에 안절군(安節軍)이라 일컬었다.○ 회도(懷道)라고도 한다. ○ 2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3리이다. 유성(儒城)은 속현이다. 백제 때 노사지현(奴斯只縣)이다. 덕진(德津)은 폐현이고, 백제 때 소비포현(所比浦縣)이요, 신라 때의 적조(赤鳥)이다. 신풍(新豐)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벌음지현(伐音只縣)이니, 또는 무부(武夫)라 했다. 신라 때 청음(淸音)으로 고쳤다.
○ 홍주(洪州) : 성(城)이 있다. 고려 때의 운주(運州)이니, 홍주라 고쳤다.
○ 안평(安平)ㆍ해풍(海豐)ㆍ해흥(海興)ㆍ홍양(洪陽)이라고 한다. ○ 2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3리이다. 신평(新平)은 속현이다. 면천(沔川)ㆍ동촌(東村)으로 들어갔으니, 백제 때 사평현(沙平縣)이다. 여양(驪陽)은 폐현이고 백제 때의 사시량현(沙尸良縣), 또는 사라(沙羅)라고도 하는데, 신라가 신량(新良)이라 고쳤다. 고구(高丘)도 폐현이며 백제 때의 우견현(牛見縣)이니, 신라 때에 목우(目牛)로 고쳤다. 흥양(興陽)도 폐현이고, 옛 이름은 원군(遠軍)이다. 합덕(合德)도 폐현이다. 본래는 덕풍현(德豐縣)에 속하여 부곡이 되었다.
○ 임천(林川) : 백제 때의 가림군(加林郡)이니, 신라 때 가림으로 고쳤고, 고려 때 임주(林州)를 두었다. 태조 갑술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가 태종 신사년(1401, 태종 1)에 도로 강등시켰으며, 계미년에 또 다시 승격했다가 갑신년에 도로 강등시키고, 계사년에 임천(林川)으로 고쳤다. ○ 2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9리이다.
○ 태안 : 백제 때의 성대혜현(省大兮縣)이다. 신라 때 소태(蘇泰)로 고쳤고, 고려 때 태안군으로 고쳤다. ○ 전성(蓴城)이라고도 한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8리이다.
○ 한산(韓山)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마산현(馬山縣)인데, 고려 때 한주(韓州)로 승격시켰고, 태종 계사년에 한산군으로 고쳤다. ○ 마읍(馬邑)ㆍ아주(鵞州)라고도 한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0리이다.
○ 서천(舒川) : 백제 때의 설림군(舌林郡)이니, 남양(南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서림(西林)으로 고쳤고, 고려 때 서주(西州)로 승격시켰으며,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서천군으로 고쳤다. ○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0리이다.
○ 면천(沔川) : 백제 때의 혜군(槥郡)이니, 신라 때 혜성(槥城)이라 고쳤고, 고려 때 면주(沔州)로 승격시켰으며, 태종 계사년에 면천군으로 고쳤다. ○ 마산(馬山)ㆍ해종(海宗)이라고도 한다. ○ 1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0리이다.
○ 서산 : 백제 때의 기군(基郡)이니, 신라 때 부성(富城)으로 고쳤고, 고려 때 서산으로 고쳤으며, 서주(瑞州)로 승격시켰다가 서령부(瑞寧府)로 강등시켰었는데, 태종 계사년에 다시 서산군이 되었다. ○ 1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88리이다. ○ 지곡(地谷)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지륙현(知六縣)이니, 신라 때 지육(地育)이라 고쳤다.
○ 온양 : 백제 때의 탕정군(湯井郡)이니, 신라 때 주로 승격시켰고 고려 초기에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쳤다. 태종 갑오년에 신창(新昌)과 합쳐서 온창(溫昌)이라 일컫다가 병신년에 그전 이름을 회복했고, 세종 임술년에 온양군으로 고쳤다. ○ 온천(溫泉)이라고도 한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3리이다.
○ 대흥(大興) : 백제 때 임존성(任存城)이니 금주(今州)라고도 한다. 신라 때 임성군(任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대흥으로 고쳐서 현을 만들었다. 숙종 신유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3리이다.
○ 홍산 : 백제 때의 대산현(大山縣)이니, 신라 때 한산(翰山)으로 고쳤고, 고려 때 홍산으로 고쳤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22리이다.
○ 덕산(德山) 덕풍현(德豐縣) : 백제 때의 금물현(今勿縣)이니, 신라 때 금무(今武)로 고쳤고, 고려 때 덕풍(德豐)으로 고쳤다. 이산현(伊山縣)은 백제 때의 마시산군(馬尸山郡)이니, 신라 때 이산(伊山)으로 고쳤고, 고려 때 현으로 만들었다. 태종 을유년(1405, 태종 5)에 이산의 인물(人物)이 쇠잔하다 하여 두 현을 합쳐서 덕산을 만들었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3리이다.
○ 평택 : 고하팔현(古河八縣)이니, 고려 때 평택으로 고쳤고, 연산군이 경기도로 이속시키더니 중종이 이전대로 회복시켰다. ○ 팽택(彭澤) 《여지승람》에는 실려 있지 않다. 은 선조 병신년에 혁파하였다가 광해군 무오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1백 73리이다.
○ 정산(定山) : 백제 때의 열기현(悅己縣)이니, 두릉윤성(豆陵尹城)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열성(悅城)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정산으로 고쳤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9리이다.
○ 청양 : 백제 때의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이니, 신라 때 청무(靑武)로 고쳤고, 고려 때 청양으로 고쳤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33리이다.
○ 은진(恩津) : 덕은군(德恩郡)이니, 백제 때의 덕근군(德近郡)이며, 신라 때 덕은(德殷)으로 고쳤고, 고려 때 덕은(德恩)으로 고쳤다. 시진현(市津縣)은 백제 때 가지내현(加知奈縣)이니, 또는 가을내(加乙乃)라고도 하고, 또는 신포(薪浦)라고도 한다.신라 때 시진(市津)으로 고쳤는데, 고려 때 모두 공주에 예속시켰다. 태조 정축년에 두 현을 합해서 덕은으로 하였다. 세종이 은진으로 고쳤더니, 인조 병술년에 이성(尼城)ㆍ연산을 합쳐서 은산(恩山)을 만들었고, 효종 병신년(1656, 효종 7)에 이전 이름을 회복했다. ○ 1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2리이다.
○ 회덕 : 백제 때의 우술군(雨述郡)이니, 오천(汚淺)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비풍(比豐)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회덕현으로 고쳤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81리이다.
○ 진잠(鎭岑) : 백제 때의 진현현(眞峴縣)이니 정현(貞峴)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진령(鎭嶺)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진잠으로 고쳤다. ○ 기성(杞城)이라고도 한다. ○ 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51리이다.
○ 연산 : 백제 때의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이니, 신라 때 황산(黃山)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연산현으로 고쳤다.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6리이다.
○ 이성(尼城) : 백제 때의 열야산군(熱也山郡)이니, 신라 때 이산(尼山)으로 고쳤다. 태종 갑오년에 석성(石城)과 합쳐서 이산성이라 일컫다가 다시 나누었다. ○ 노산(魯山)ㆍ노성(魯城)이라고도 한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7리이다.
○ 부여 : 백제 때의 소부리군(所夫里郡)이니, 사비(泗沘)라고도 한다. 성왕(聖王)이 이곳에 와서 도읍하고 이름을 남부여라 하였는데, 신라 때 부여군으로 고쳤다. ○ 반월(半月)ㆍ여주(餘州)라고도 한다. ○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6리이다.
○ 석성(石城) : 백제 때의 진악산현(珍惡山縣)이니, 신라 때 석산(石山)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석성으로 고쳤다. 태종 갑오년(1414, 태종 14)에 이산(尼山)과 합쳐서 이성(尼城)을 만들었더니, 얼마 후에 고다진(古多津)이 왕래하는 요충지라 해서 다시 나누어서 현을 만들었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3리이다.
○ 비인(庇仁)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비중현(比衆縣)이니, 신라 때 비인으로 고쳤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3리이다.
○ 남포(藍浦)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사포현(寺浦縣)이니, 신라 때 남포로 고쳤고 공양왕이 진(鎭)을 두었는데, 세조가 진을 없애고 현을 두었다. ○ 마산(馬山)이라고도 한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3리이다.
○ 결성(結城)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결기현(結己縣)이니, 신라 때 결성(潔城)으로 고쳤고, 고려 때 또 결성으로 고쳤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3리이다.
○ 보령(保寧)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신촌현(新村縣)이니, 사촌(沙村)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신읍(新邑)으로 고쳤고, 고려 때 보령으로 고쳤으며, 효종 임진년(1652 효종 3)에 부로 승격시켰다가 을미년에 도로 강등시켰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3리이다.
○ 해미(海美) : 정해현(貞海縣)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태조 때, 몽웅역(夢熊驛) 역리(驛吏) 한씨 성을 가진 자가 큰 공이 있어서 대광(大匡)이라고 공호를 하사하고, 고구현(高丘縣) 땅을 나누어 정해현(貞海縣)을 만들었다.” 하였다.ㆍ여미현(餘美縣)은 백제 때의 여촌현(餘村縣)이니, 신라 때 여읍(餘邑)으로 고쳤다. 태종 정해년에 두 현을 합쳐서 해미를 만들었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53리이다. ○ 여미고현(餘美古縣)이라고도 한다.
○ 당진 : 백제 때의 벌수지현(伐首只縣)이니, 부지나(夫只那)라고도 한다. 신라 때 당진으로 고쳤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33리이다.
○ 신창(新昌) : 백제 때의 굴직현(屈直縣)이니, 신라 때 기량(祈梁)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신창으로 고쳤으며, 공양왕이 장포(獐浦)에 성을 쌓고, 이웃 주ㆍ현의 조세를 거두어 비로소 만호(萬戶) 겸 감무(監務)를 두었다. 태조 무신년에 만호를 없앴다. ○ 온창(溫昌)이라고도 한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3리이다.
○ 예산 : 백제 때의 오산현(烏山縣)이니, 신라 때 고산(孤山)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가 예산으로 고쳤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63리이다.
○ 전의(全義) : 백제 때의 구지현(仇知縣)이니, 신라 때 금지(金池) 혹은 금지(金地)라고도 한다. 로 고쳤고, 고려 때 전의(全義)로 고쳐서 청주에 예속시켰다. 태조 을해년에 현을 두었고, 태종 갑오년(1414, 태종 14)에 연기와 합쳐서 이름을 전기(全岐)라 하였다가 병신년에 이전 이름으로 회복했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1리이다.
○ 연기(燕岐) : 백제 때의 두잉지현(豆仍只縣)이니, 신라 때 연기로 고쳤고, 고려 때 목주(木州)를 여기에 합쳤다. 태종 병술년(1406, 태종 6)에 다시 나누었으며, 갑오년(1414)에 전의(全義)와 합쳤다가 얼마 안 되어 이전대로 하였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1리이다.
○ 아산 : 백제 때의 아술현(牙述縣)이니, 신라 때 음봉(陰峯)으로 고쳤는데, 음잠(陰岑)이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에 인주(仁州)ㆍ아주(牙州)로 고쳤고,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아산현(牙山縣)으로 고쳤다. 세조 기묘년(1459, 세조 5)에 군(郡)을 줄여서 온양(溫陽)ㆍ평택(平澤)ㆍ신창(新昌) 세 읍(邑)에 나누어 예속시켰다가 을유년에 이전대로 하였다. ○ 영인(寧仁)이라고도 한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24리이다.
○ 전라도 : 동북쪽은 충청ㆍ경상 두 도와 경계를 이루며, 동쪽은 경상도와 경계를 이루고, 동남쪽은 경상도와 큰 바다로 경계를 이루며, 남쪽과 서남쪽 및 서쪽은 모두 큰 바다이며, 서북쪽은 큰 바다 및 충청도와 경계를 이루고, 북쪽은 충청도와 경계를 이룬다. 56고을 좌도 23고을, 우도 33고을 이니, 본래 변한(卞韓) 땅으로서 백제의 소유였으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쳐서 멸하고 나누어서 5도독부를 두었다. 당 나라 군사가 본국으로 돌아가자, 신라가 그 땅을 모두 병합해서 뒤에 전주ㆍ무주(武州) 두 주를 두었다.그 말기에는 견훤과 궁예가 나누어 차지했는데, 고려 태조가 신검(神劍)을 멸하였다. 성종이 강남도(江南道)ㆍ해양도(海陽道)를 두었으나, 현종이 합쳐서 전라도를 만들었는데 본조에서도 이를 그대로 두었다.
○ 좌도 능천(綾川) : 백제 때의 이릉부리군(尒陵夫里郡)이니, 또는 죽수부리(竹樹夫里) 인부리(仁夫里)라고도 한다. 라고도 한다. 신라 때 능성(陵城)으로 고쳤고, 고려 때 나주에 예속시켰다. 태종 병신년(1416, 태종 16)에 화순현과 합쳐서 순성(順城)이라고 일컬었으나 조금 있다가 도로 회복했다.인조 임신년(1632, 인조 10)에 능주목(綾州牧)으로 승격시켰다. 왕비의 고향이다. ○ 연주(連珠)라고도 한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8리이다.
○ 남원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고룡군(古龍郡)이니, 뒤에 한 나라 대방군(帶方郡)이 되었고, 조위(曹魏) 때 남대방(南帶方)이 되었으며, 신라 때 소경(小京)을 두고 남원으로 고쳤다. ○ 용성(龍城)ㆍ일신(一新)이라고도 한다. ○ 4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5리이다.○ 유곡(楡曲)은 속현이다. 백제 때의 구차례현(仇次禮縣)이니 지금의 구례(求禮)이다. 거령(居寧)은 폐현이다. 거령이라고도 하니, 백제 때의 거사물현(居斯勿縣)이요, 신라 때의 청웅(靑雄)인데, 별호는 영성(寧城)이다. 유인궤성(劉仁軌城) 소정방이 백제를 멸하니 당(唐)에서 유인궤에게 조서를 내려 검교대방자사(檢校帶方刺使) 겸 도독(都督)으로 임명하여 읍내 이전(里廛)에 정전(井田)을 본받아 9구(區)를 만들었으니 그 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 장흥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오차현(烏次縣)이니 신라 때 오아(烏兒)로 고쳤고, 고려 때 정안(定安)으로 고쳤다가 다시 장흥부(長興府)로 고치고,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시켰으나 조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관아를 수령(遂寧)으로 옮겼다. ○ 정주(定州)ㆍ관산(冠山)이라고도 한다. ○ 1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6리이다. ○ 회령(會寧)은 폐현이며, 백제 때의 마사량현(馬斯良縣)이니 신라 때 벌로(伐勞)로 고쳤다. 수령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이니, 신라 때 마읍(馬邑)으로 고쳤다. ○ 장택(長澤)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계천현(季川縣)이니, 신라 때 계수(季水)로 고쳤다. ○ 옛날 장흥은 천관산(天冠山) 남쪽에 있었다.
○ 순천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염평군(欿平郡)이니, 사평(沙平)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승평(昇平)이라 고쳤고, 고려 때는 승주(昇州), 연해군(兗海軍)으로 고쳤는데, 승화(昇化)라고도 한다. 뒤에 순천부로 고쳤다. ○ 평양(平陽)이라고도 한다. ○ 2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96리이다.○ 여수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원촌현(猿村縣)이니 신라 때 해읍(海邑)으로 고쳤다. 돌산(突山)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돌산(突山)이니, 신라 때 여산(盧山)으로 고쳤다. 부유(富有)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둔지현(遁支縣)이다.
○ 담양 : 백제 때의 추자혜군(秋子兮郡)이니, 신라 때 추성(秋成)으로 고쳤고, 고려 때 담주(潭州)로 고쳤다가 뒤에 담양으로 고쳤으며, 정종이 부(府)로 승격시켰다. 중궁 김씨의 외향(外鄕)이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6리이다.
○ 무주(茂朱) : 무풍현(茂豐縣)인데 신라 때의 무산현(茂山縣)이니, 무풍으로 고쳤고, 고려 때 진례현(進禮縣)에 예속시켰다. 주계(朱溪)는 백제 때의 적천현(赤川縣)이니, 신라 때 단천(丹川)으로 고쳐서 진례현에 예속시켰는데, 고려 때 주계(朱溪)로 고쳤고, 공양왕이 무풍과 병합시켰다. 태종 갑오년에 무주현으로 고쳤고, 현종 갑인년(1674, 현종 15)에 부(府)로 승격시켰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6리이다.
○ 보성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복홀군(伏忽郡)이니, 신라 때 보성으로 고쳤고, 고려 때 패주(貝州)로 고쳤으나 조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 산양(山陽)이라고도 한다. ○ 1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51리이다. ○ 조양(兆陽)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동로현(冬老縣)이다. 복성(福城)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파부리군(波夫里郡)이니, 신라 때 부리(夫里)로 고쳤다.
○ 낙안(樂安)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분차군(分嵯郡)이니, 분사(分沙)라고도 한다. 신라 때 분령(分嶺)으로 고쳤고, 고려 때 낙안으로 고쳤는데, 이는 양악(陽岳)이라고도 한다. ○ 부차(浮槎)ㆍ낙천(洛川)이라고도 한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6리이다.
○ 순창(淳昌) : 백제 때의 도실군(道實郡)이니, 신라 때 순화(淳化)라 고쳤고, 고려 때 순창으로 고쳤다. ○ 오산(烏山)ㆍ옥천(玉川)이라고도 한다. ○ 1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6리이다. ○ 복흥(福興)은 폐현이며, 적성(赤城)도 폐현이다. 백제 때 역평현(礫坪縣)이다.
○ 창평(昌平) : 백제 때의 굴지현(屈支縣)이니, 신라 때 석양(析陽)으로 고쳤고, 고려 때 창평으로 고쳤는데, 명평(鳴平)이라고도 한다. 성종 5년 이 이를 없애고, 광주에 예속시켰다가 10년에 이전대로 하였다. ○ 명양(鳴陽)이라고도 한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6리이다.
○ 용담(龍潭) : 백제 때의 물거현(勿居縣)이니, 신라 때 청거(淸渠)로 고쳤고, 고려 때 용담으로 고쳤다. ○ 옥천(玉川)이라고도 한다. ○ 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백 36리이다.
○ 광양(光陽)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마로현(馬老縣)이니, 신라 때 희양(晞陽)으로 고쳤고, 고려 때 광양으로 고쳤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0리이다.
○ 강진 : 성이 있다. 도강현(道康縣)은 백제 때의 도무군(道武郡)이니 신라 때 양무(陽武)로, 고려 때 도강현으로 고쳤다. 탐진현(耽津縣)은 백제 때의 동음현(冬音縣)이니, 신라 때 탐진으로 고쳤다. 태종 정유년(1417, 태종 17)에 병영을 도강 옛 관아로 옮기고, 두 현을 합쳐서 강진을 만들었다. ○ 금릉(金陵)ㆍ오산(鰲山)이라고 한다. ○ 2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76리이다.
○ 옥과(玉果) : 백제 때의 과지현(果支縣)이니, 과혜(果兮)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옥과로 고쳤다. ○ 설산(雪山)이라고도 한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66리이다.
○ 구례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구차례현(仇次禮縣)이니, 신라 때 이름을 구례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남원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현을 두었다. 중종 경오년에 현을 폐지하고 유곡부곡(楡谷部曲)을 만들어 다시 남원에 예속시켰다. 고을에 사는 백성 배목인(裵目仁)ㆍ문빈(文彬) 등이 참언으로 여러 사람을 꾀어 모아서 반역할 것을 모의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66리이다. ○ 《여지승람》에는 남원의 속현에 들어 있다.
○ 곡성(谷城) : 백제 때의 욕내군(欲乃郡)이니, 신라 때 곡성으로 고쳤고, 고려 때 현을 두었다. ○ 욕천(浴川)은 선조 정유년에 없앴다가 광해군 기유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6리이다.
○ 운봉(雲峯) : 신라 때의 모산현(母山縣)이니, 경덕(景德) 또는 아영성(阿英城) 아막(阿莫)이라고도 한다. 이라고도 하는데, 뒤에 운봉으로 고쳤다. 고려 때 남원에 예속시키고 태조 임신년에 현을 두었는데, 선조 경자년에 없앴다가 광해군 신해년에 다시 두었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6리이다.
○ 임실 : 백제 때의 임실군(任實郡)이니, 신라 때 이를 그대로 두었고, 고려 때 현을 두었다. ○ 운수(雲水)라고도 한다. ○ 1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백 82리이다.
○ 구고(九皐)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돌평현(堗坪縣)이니 누평(淚坪)이라고도 한다.
○ 장수(長水) : 백제 때의 우평현(雨坪縣)이니, 통일 신라 때 고택(高澤)으로 고쳤고, 고려 때 장수로 고쳐서 장계(長溪)까지 겸해서 맡겼다. 태조 임신년에 다시 나누어 장수라고 하였다. ○ 장천(長川)이라고도 한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68리이다. ○ 장계는 속현이다. 백제 때의 백해군(百海郡)이니, 신라 때 벽계(璧溪)로 고쳤는데, 따로 장세(長世)라고도 한다.
○ 진안(鎭安) : 백제 때의 난진아현(難珍阿峴)이다. 또는 월량(月良)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진안으로 고쳤다. ○ 월랑(越浪) 월량(月良)이 이렇게 전해졌다. ○ 13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백 86리이다. ○ 마령(馬靈)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마돌현(馬突縣)이니, 마진(馬珍)이라고도 하고, 마등량(馬等良)이라고도 하는데 별명은 영천군(頴川郡)이다.
○ 동복(同福) : 백제 때의 두부지현(豆夫只縣)이니, 신라 때 동복으로 고쳤다. 태조 갑술년에 화순(和順)까지 겸하여 정무를 감독하게 했으며, 태종 을유년(1405, 태종 5)에 화순과 합쳐서 복순(福順)이라 하였고, 병신년에 다시 이전대로 하였다. ○ 구성(龜城)ㆍ옹성(甕城)ㆍ복천(福川)ㆍ나복(蘿葍)이라고도 한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26리이다. ○ 수촌(水村)은 폐현(廢縣)이고, 압곡(鴨谷)도 폐현이다.
○ 화순(和順) : 백제 때의 잉리아현(仍利阿縣)이니, 신라 때 여미(汝湄)로 고쳤는데, 여빈(汝濱)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화순으로 고쳤고, 뒤에 남평(南平)을 겸해서 맡겼다. 태조 갑술년에 나누어서 두 현을 만들었고, 태종 때 동복(同福)과 합쳤다가 다시 동복은 분리하고 능성(綾城)과 합하여 순성(順城)이라 일컬었는데, 얼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선조 갑오년에 폐하였다가 광해군 신해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해빈(海濱)ㆍ오성(烏城)ㆍ산양(山陽)이라고도 한다. ○ 3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3리이다.
○ 흥양(興陽) : 본래 장흥부(長興府) 고이부곡(高伊部曲) 방언(方言)으로는 묘(猫)라 한다. 이니, 고려 때 고흥현(高興縣)으로 승격시켰고, 태조 을해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인하여 진을 설치하였다. 세종 때에 첨사(僉使)로 고쳤으나 곧 흥양현으로 고쳤다. ○ 고양(高陽)이라고도 한다. 13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96리이다.○ 남양(南陽)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조조례현(助助禮縣)이니, 신라 때 충렬(忠烈)로 고쳤다. 태강(泰江)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비사현(比史縣)이니, 신라 때 백주(柏舟)로 고쳤다. ○ 풍안(豐安)도 폐현이다. 보성군 식촌부곡(食村部曲)이니, 고려 충선왕 때에 현으로 승격시켰다. 도화(道化)도 폐현이다. 보성군 타주부곡(他州部曲)이다. 두원(荳原)도 폐현이다. 백제 때 두혜현(豆盻縣)이니, 신라 때 강원(薑原)으로 고쳤다. 도양(道陽)도 폐현이다. 장흥부 도량도부곡(道良道部曲)이니, 세종조 때 병합하여 목장을 만들었다. 고흥(高興)도 폐현이다. 묘부곡(猫部曲)이니 고려 때 묘부곡 사람이 조정에 벼슬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참언이 있었다.
○ 우도 전주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완산(完山)이니, 비사성(比斯城) 혹은 비자화(比自火)라고도 한다. 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완산주를 두었고, 뒤에 전주로 고쳤다. 견훤이 도읍을 세우고 후백제라고 일컬었다. 고려 태조가 신검(神劍)을 쳐서 평정한 후에 안남(安南)으로 고쳤다.뒤에 또 승화(承化)라 부르고 순의군(順義軍)이라고도 하였다. 태조 임신년에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시켰고, 태종 계미년(1403, 태종 3)에 전주 부윤으로 고쳤다. ○ 진성(甄城)이라고도 한다. ○ 3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6리이다. ○ 우주(紆州)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우소저현(于召渚縣)이다. 이성(伊城)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두이현(豆伊縣)이니, 왕무(往武)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에 두성(杜城)으로 고쳤다. 이성(利城)은 폐현이다. 백제 때 내리아현(乃利阿縣)이다.
○ 나주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발라군(發羅郡)이니, 통의(通義)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금산군(錦山郡)으로 고쳤다. 금성이라고도 한다. 고려 태조가 수군을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여 점령하고, 나주로 고쳤으며, 뒤에 진해군(鎭海軍)이라 일컬었고,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 3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가 7백 42리이다.○ 영산(榮山)은 폐현이다. 흑산도 사람이 육지로 나와 남포(南浦)에 살아서 영산현(榮山縣)이라 일컬었는데, 공민왕이 승격시켜 군을 만들었다. 압해(壓海)는 폐현이다. 압해(狎海)라고도 하는데 바다 가운데의 섬이다. 백제 때의 아차산군(阿次山郡)이다. 여황(艅艎)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수천현(水川縣)이니, 수입이(水入伊)라고도 한다. 회진(會津)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두혜현(豆盻縣)이다. 안로(安老)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아로곡현(阿老谷縣)이니, 신라 때 야로(野老)로 고쳤다. 복룡(伏龍)은 폐현이다. 배룡(杯龍)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용산(龍山)으로 고쳤다. 반남(潘南)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반내부리현(半奈夫里縣)이다. 장산(長山)은 폐현이다. 안릉(安陵)이라고도 하는데 바다 가운데의 섬이다. 백제 때의 거지산현(居知山縣)인데, 신라 때 안파(安波)로 고쳤다.
○ 제주 : 성이 있다. 본래 탐라국이니, 혹은 탁라(乇羅)라고도 한다. 신라 때의 이름은 성주(星州)라고 하는데, 고려 때 고쳐서 군을 만들었다가 현으로 낮추었다. 충렬왕 때에 원(元) 나라에서 말을 기르는 목장을 만들었으나 조금 후에 도로 고쳐서 제주목(濟州牧)으로 하였다. 태종 임오년에 좌우도지관(左右都知管)을 두었고, 세종 을축년에 상부진무(上副鎭撫)로 고쳤으며, 세조 병술년에 절제사를 두었고, 예종 기축년에 목사(牧使)로 고쳤다.○ 탐탁라(眈乇羅)ㆍ동영주(東瀛州)라고도 한다. ○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육로(陸路)로 9백 36리이고, 수로(水路)로 9백 70리이다. ○ 고내현(高內縣)ㆍ애월현(涯月縣)ㆍ곽지현(郭支縣)ㆍ귀덕현(歸德縣)ㆍ명월현(明月縣)ㆍ신촌현(新村縣)ㆍ함덕현(咸德縣)ㆍ금령현(金寧縣) 이상의 각현(各縣)은 모두 직촌(直村)이다.
○ 광주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무진주(武珍州)이니, 노지(奴只)라고도 한다. 신라 때 무주(武州)로 고쳤고, 고려 태조가 광주로 고쳤으며, 뒤에 해양현(海陽縣)으로 낮추었다가 다시 익주(翼州)로 승격시켰다. 또 화평부(化平府)로 낮추었다가 무진부(茂珍府) 혜종(惠宗)의 휘(諱)는 무(武)이다. 로 고쳤고, 뒤에 광주라 일컬었다. 세종 경술년에 무진군으로 낮추었고, 문종 신미년에 이전대로 하였으며, 성종 기유년에 낮추어 광산현(光山縣)을 만들었다가 연산군 신유년에 이전대로 하였다. ○ 익양(翼陽)ㆍ서석(瑞石)이라고도 한다. ○ 40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25리이다.
○ 여산(礪山) : 여량현(礪良縣) 또는 양(陽)이라 한다. 은 백제 때의 지량초현(只良肖縣)이니, 신라 때 여량(礪良)으로 고쳤고, 고려 때 전주에 예속시키고 낭산(朗山)까지 겸하여 맡았다. 낭산현은 백제 때의 알야산현(閼也山縣)이니, 신라 때 야산(野山)으로 고쳤다. 정종 경진년에 2현의 이름을 떼어다가 여산이라고 일컬었다.세종 병진년(1436, 세종 18)에 군으로 승격시켰고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외향(外鄕)이다. 충청도로 이속되었다가 조금 후에 도로 전라도에 속했으며, 숙종 기묘년에 부사로 승격시켰다. ○ 호산(壺山)이라고도 한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6리이다. ○ 낭산(朗山)은 폐현이다. 군(郡) 서쪽 토성(土城)의 옛터이다.
○ 장성 : 백제 때의 고시이현(古尸伊縣)이니, 신라 때 압성군(押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때 장성으로 고쳤으며, 본조에서 현으로 고쳤다. 선조 정유년에 진원(珍原)과 합쳤고, 효종 을미년(1655, 효종 6)에 부로 승격시켰다. ○ 오산(鰲山)ㆍ이성(伊城)이라고도 한다. ○ 1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66리이다. ○ 진원(珍原)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구사진혜현(丘斯珍兮縣)이니, 신라 때 진원(珍原)으로 고쳤는데, 구진(丘珍)이라고도 한다.
○ 익산 : 본래 마한국(馬韓國)이니, 온조왕(溫祚王)이 땅을 병합해서 이름을 금마저(金馬渚)라 하였고, 신라 때 금마군(金馬郡)으로 고쳤다. 고려 때 익주(益州)로 승격시켰으며, 태종 계사년에 익산군으로 고쳤다. ○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56리이다.
○ 고부(古阜)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고사부리현(古沙夫里縣)이니, 신라 때 고부로 고쳤고, 고려 태조 때 영주(瀛州)라 일컬었다. 뒤에 안남(安南)으로 고쳐서 영광과 합쳤다가 조금 후에 다시 이전대로 하였다. ○ 1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가 6백 6리이다.
○ 영암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월내군(月奈郡)이니, 신라 때 영암으로 고쳤고, 고려 때 낭주(郞州)ㆍ안남(安南)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낮추었다. ○ 낭산(郞山)이라고도 한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2리이다. ○ 곤미(昆湄)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고미현(古彌縣)이다.
○ 영광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무시이부(武尸伊部)이니, 신라 때 무령(武靈)으로 고쳤고, 고려 때 영광으로 고쳤다. ○ 오성(筽城)ㆍ정주(靜州)라고도 한다. ○ 2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99리이다. ○ 삼계(森溪)는 폐현이며, 백제 때의 소비혜현(所非兮縣)이니, 소을부(所乙夫)라고도 한다. 임치(臨淄)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고록지현(古祿只縣)이니, 신라 때 염해(鹽海)로 고쳤다. 육창향(陸昌鄕) 백제 때의 아로현(阿老縣)이니, 갈초(葛草)ㆍ가위(加位)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갈도현(碣島縣)으로 고쳤다.
○ 진도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인진도군(因珍島郡)이니, 신라 때 진도로 고쳤다. 태종 기축년에 해남현과 합하여 해진군(海珍郡)으로 하였다가 세종조에 이전대로 하였다. ○ 옥주(沃州)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1천 20리이다. ○ 가흥현(嘉興縣) 백제 때의 도산현(徒山縣)이니 원산(猿山)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뇌산(牢山)이라고 고쳤다. 이 있다. 임회(臨淮)는 폐현이다. 백제 때 여기에 구리현(九里縣)을 두었고 신라 때 첨탐(瞻眈)으로 고쳤다.
○ 금산(錦山) :백제 때의 진내군(進乃郡) 진잉을(進仍乙)이라고도 한다. 이니 신라 때 진례(進禮)로 고쳤고, 고려 때 금주(錦州)로 올렸다. 태종 계사년에 금산군으로 고쳤다. ○ 경양(景陽)ㆍ금계(錦溪)라고도 부른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86리이다. ○ 부리(富利)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두시이현(豆尸伊縣)ㆍ부시이(富尸伊)라고도 한다. 신라 때 이성(伊城)으로 고쳤다.
○ 진산(珍山) : 백제 때의 진동현(珍同縣)이니 신라 때에도 그대로다. 태조 때 진주로 승격시켰고 왕실의 탯줄을 안치하였다. 태종 때에 진산군으로 고쳤다. ○ 옥계(玉溪)라고도 부른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56리이다.
○ 김제(金堤) : 백제 때의 벽골군(碧骨郡)이니 신라 때 김제라고 고쳤다. 고려 때 현으로 하였으나 태종 계미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 23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41리이다. ○ 회원고현(會原古縣)이라고도 부른다. ○ 평고(平皐)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수동산현(首冬山縣)이다.
○ 임피(臨陂)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시산군(屎山郡)이니 피산(陂山)ㆍ흔문(忻文)ㆍ소도(所島)ㆍ실조출(失鳥出)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임피라고 고쳤다. 고려 때 군을 현으로 낮추었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6리이다.
○ 만경(萬頃)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두내산현(豆乃山縣)을 만경으로 고쳤다. 광해군 경신년에 고을을 없앴다가 인조 정축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두산(杜山)이라고도 부른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6리이다. ○ 부윤(富潤)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무근촌현(武斤村縣)이니, 신라 때 무읍(武邑)으로 고쳤다.
○ 금구(金溝) : 백제 때의 구지지산현(仇知只山縣)이니, 신라 때 금구라고 고쳤다. ○ 봉산(鳳山)ㆍ금계(金鷄)라고도 부른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6리이다. ○ 거야(巨野)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야서이현(也西伊縣)이니, 신라 때 야서(野西)로 고쳤다. 역양(櫟陽)도 폐현이다.
○ 용안(龍安) : 고려 때 함열현(咸悅縣)의 도내산은소(道乃山銀所) 창산소(蒼山所)라고도 한다. 이니 충숙왕(忠肅王)이 용안현으로 승격시켰다. 태종 기축년(1409, 태종 9)에 함열과 합하여 안열(安悅)이라고 부르다가 병신년에 이전대로 회복시켰다. ○ 칠성(七城)이라고도 부른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8리이다. ○ 풍제(豐堤)는 폐현이다. 풍성(豐城)이라고도 한다. 공양왕 때에 속현이 되었다.
○ 함열(咸悅) : 백제 때의 감물아현(甘勿阿縣)이니, 신라 때 함열로 고쳤다. 태종 기축년에 용안(龍安)과 합하였다가 곧 다시 이전대로 고쳤다. ○ 함라(咸羅)라고도 부른다. 9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66리이다.
○ 부안(扶安) : 성이 있다. 부령현(扶寧縣)은 백제 때의 개화현(皆火縣)이니 신라 때 부령(扶寧)으로 고쳤다. 혹은 계발(戒發)이라고도 일컬었다. 보안현(保安縣)은 백제 때의 흠량매현(欽良買縣)이니, 신라 때 희안(喜安)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이 두 고을을 나누기도 하고 합하기도 하였다.태종 병신년(1416, 태종 16)에 합하여 부안현으로 하였으며, 다음해에 부안현을 폐지하고 흥덕진(興德鎭)으로 옮겼으며, 부안진(扶安鎭)을 설치하였다가 뒤에 현감으로 고쳤다. ○ 낭주(浪州)라고도 부른다. ○ 20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77리이다. ○ 보안(保安)은 폐현이다. 현의 남쪽 30리의 거리에 있다.
○ 함평(咸平) : 함풍현(咸豐縣)은 백제 때의 굴내현(屈乃縣)이니 신라 때 함풍으로 고쳤다. 모평현(牟平縣)은 백제 때의 다지현(多只縣)이니 신라 때 다기(多岐)로 고쳤다. 태종 기축년에 두 현을 합하여 함평현으로 하였다. ○ 모양(牟陽)ㆍ기성(箕城)이라고도 부른다. ○ 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62리이다. ○ 해제(海際)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도제현(道際縣)이니 음해(陰海)ㆍ운화(云火)라고도 한다.
○ 고산(高山) : 백제 때의 고산현(高山縣)이니 또는 난등량(難等良)이라고도 한다. ○ 봉산(鳳山)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6리이다. ○ 운제(雲梯)는 폐현이다. 또는 운산(雲山)이라고도 한다. 백제 때의 지벌지현(只伐只縣)이다.
○ 태인(泰仁) : 태산군(太山郡)은 백제 때의 대시산군(大尸山郡)이니, 신라 때 태산(太山)으로 고쳤다. 인의현(仁義縣)은 백제 때 빈굴현(賓屈縣)이니 부성(賦城)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무성(武城)으로 고쳤다. 태종 기축년에 두 고을을 합하여 태인현으로 하였다. ○ 19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63리이다. ○ 인의(仁義)는 폐현이다.
○ 옥구(沃溝)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마서량현(馬西良縣)이니 신라 때 옥구로 고쳤다. 태조 때 진을 두었고 세종 계묘년에 현으로 고쳤다. ○ 옥산(玉山)이라고도 부른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3리이다. ○ 회미(澮尾)는 폐현이다. 일명 연강(連江)이라고도 한다. 백제 때의 시부리현(矢夫里縣)이다.
○ 남평(南平) : 백제 때의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이니, 신라 때 현웅(玄雄)으로 고쳤고, 고려 때 남평(南平)으로 고쳤다. ○ 오산(烏山)ㆍ영평(永平)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6리이다. ○ 철야(鐵冶)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실어산현(實於山縣)이다.
○ 흥덕(興德) : 백제 때의 상칠현(上漆縣)이니, 신라 때 상질(尙質)로 고쳤고, 고려 때는 장덕(章德) 창덕(昌德)이라고도 한다. 으로 하였다가, 흥덕으로 고쳤다. ○ 흥성(興城)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6리이다.
○ 정읍 : 백제 때의 정촌현(井村縣)이니, 신라 때 정읍으로 고쳤다. ○ 정촌(井村)ㆍ초산(楚山)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91리이다.
○ 고창(高敞)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이니 신라 때 고창으로 고쳤다. ○ 모양(牟陽)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28리이다.
○ 무장(茂長) : 무송현(茂松縣)이니 백제 때의 송미지현(松彌知縣)이며, 신라 때 무송으로 고쳤다. 장사현(長沙縣)은 백제 때의 상로현(上老縣)이니 신라 때 장사로 고쳤다. 태종 정유년(1417, 태종 17)에 두 고을을 합하여 무장진을 두었다가 뒤에 고쳐서 현으로 하였다. ○ 송산(松山)ㆍ사도(沙島)라고도 한다. ○ 16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6리이다.
○ 무안 : 백제 때의 물아혜군(勿阿兮郡)이니, 신라 때 무안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물량(勿良)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무안이라 고치고 현으로 하였다. ○ 면주(緜州)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96리이다.
○ 해남 : 백제 때의 새금현(塞琴縣)이니, 신라 때 침명(浸溟)으로 고쳤는데 투빈(投濱)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해남으로 고쳤다. 태종 기축년에 진도(珍島)와 합하여 해진(海珍)이라고 하였다가 세종 정미년에 다시 이전대로 하였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96리이다.
○ 정의(旌義) : 본래는 제주의 동도(東道)인데, 태종 병신년에 제주 안무사(濟州按撫使) 오식(吳湜)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라산 남쪽의 넓이 90여 리의 땅을 나누어 동쪽을 정의, 서쪽을 대정(大靜)이라고 하여 현을 두었다. ○ 3면, 제주와의 거리는 1백 30리이다. ○ 토산현(兎山縣)ㆍ호아현(狐兒縣)ㆍ홍로현(洪爐縣)이라고도 한다.
○ 대정(大靜) : 본래 제주의 서도(西道)이다. ○ 4면, 제주와의 거리는 백 40리이다. ○ 예래현(猊來縣)이라고도 한다.
○ 경상도 동북은 강원도 경계와 바다이고, 동남과 남은 모두 바다이며, 서남은 바다와 전라도 경계이고, 서쪽은 전라도 경계, 서북쪽은 충청도 경계, 북쪽이 강원도 경계다. 71고을 좌도 40고을, 우도 31고을 본래 진국(辰國)의 땅으로 북쪽은 진한(辰韓)이 되고 남쪽은 변한(卞韓)이 되었었다.신라가 그 땅을 모두 차지하고, 통합한 뒤에 상주ㆍ양주(良州)ㆍ강주(康州)의 3주(州)를 두었다. 말기에는 궁예와 견훤이 상주와 양주 두 고을을 나누어 점거하였다. 고려 태조는 여기에 동남도(東南道)를 두고 관사를 경주에 두었다. 성종 때는 영남도ㆍ영동도(嶺東道)ㆍ산남도(山南道)의 3도로 나누었으며, 예종 때는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라고 하였고, 명종 때는 경상주도(慶尙州道)와 진합주도(晉陜州道)로 나누었으며, 신종(神宗) 때는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라고 고쳤다가 또 경상진안도(慶尙晉安道)로 고쳤다. 고종 때 명주도(溟州道)의 화주(和州)ㆍ등주(登州)ㆍ정주(定州)ㆍ장주(長州)의 네 주를 몽고에게 빼앗겼으므로 본도의 평해(平海)ㆍ영덕(盈德)ㆍ덕원(德原)ㆍ송생(松生)을 떼내어 명주도에 예속시켰고, 충렬왕은 또 덕원ㆍ영덕ㆍ송생을 옮겨 동계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본도로 돌려주었다. 충숙왕(忠肅王)이 경상도라고 정하였고, 본조에서 이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옥천(沃川)ㆍ영동(永同)ㆍ황간(黃澗)ㆍ보은ㆍ청산(靑山)을 충청도에 이속시켰다.
○ 좌도 경주 : 성(城)이 있다. 신라의 옛 수도이다. 국호를 서야벌(徐耶伐) 혹은 사라(斯羅)라고 부르고, 또 사로(斯盧)라고도 일컬었다. 뒤에 신라라고 일컬었고, 탈해왕(脫解王) 때에는 다시 계림(鷄林)이라고 이름하였다. 고려 태조 때, 신라가 없어지면서 경주로 되었다. 뒤에 동경유수라고 고쳤으며, 또 계림부라고 고쳤다. 태종 때에 다시 경주라고 불렀다. ○ 진한(辰韓)ㆍ낙랑(樂浪)ㆍ월성(月城)ㆍ금오(金鰲)ㆍ문천(蚊川)이라고도 한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0리이다. ○ 안강현(安康縣)은 속현이다. 신라 때의 비화현(比火縣)이다. 기계현(杞溪縣)이 있고, 신라 때의 모혜현(芼兮縣)이니 화계(化鷄)라고도 한다. 자인(慈仁)은 폐현이다. 현재 다시 현을 두었다. 다음에 나온다. 신광현(神光縣) 신라 때의 동잉음현(東仍音縣)이니, 신을(神乙)이라고도 한다. 뒤에 이어진(眤於鎭)ㆍ신광진(神光鎭)이라고 일컬었다.ㆍ진량현(珍良縣) 신라 때의 진량현이니 여량(餘粮)이라고 고쳤다가 뒤에 구사부곡(仇史部曲)으로 강등시켰다.ㆍ장진현(長鎭縣)이 있다. 신라 때의 장진현이니 고려 때 죽장부곡(竹長部曲)으로 낮추었다.
○ 안동 : 성이 있다. 신라 때는 고타야군(古陁耶郡)이라 하다가 고창(古昌)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안동부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영가군(永嘉郡)으로 고치고, 길주(吉州)ㆍ복주(福州)로 고쳤으며, 다시 안동부로 승격시켰다. ○ 능라(綾羅)ㆍ지평(地平)ㆍ석릉(石陵)ㆍ일계(一界)ㆍ화산(花山)ㆍ고장(古藏)ㆍ창녕(昌寧) 옛 창녕국ㆍ고령(古寧)이라고도 한다. ○ 24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4리이다. ○ 임하현(臨河縣)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굴화군(屈火郡)이니 신라 때 곡성(曲城)이라 고쳤다. 풍산현(豐山縣) 신라 때의 하지현(下枝縣)이니, 영안(永安)으로 고쳤으며, 순주(順州)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현으로 낮추었다. 신라 때에는 예천에 예속되었다.ㆍ일직현(一直縣) 신라 때의 일직현인데 뒤에 직녕(直寧)으로 고쳤다. 도 속현이고, 감천현(甘泉縣)ㆍ길안현(吉安縣) 원래는 부곡이다.ㆍ내성현(奈城縣) 퇴곶부곡(退串部曲)인데 고려 때 현으로 승격시켰다.ㆍ춘양현(春陽縣) 가야향(加也鄕)인데 고려 때 현으로 올렸다.ㆍ재산현(才山縣) 덕산부곡(德山部曲)인데 고려 때 현으로 올렸다.ㆍ일계현(日谿縣)이 있다. 본래는 열혜현(熱兮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영해(寧海) : 고구려 때의 우시군(于尸郡)이니 신라 때에 유린(有隣)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예주(禮州)로 고쳤으며 덕원부(德原府)로 올렸다가 영해부로 고쳤다. ○ 덕원(德原)이라고도 한다. ○ 4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5리이다. ○ 청기(靑杞)는 속현이다. 대청부곡(大淸部曲)이니, 예전에는 청도현(靑島縣)에 예속되었다. 고려 때 청기현(靑杞縣)을 두었다. 다른 이름으로 청계(靑溪)라고도 한다.
○ 밀양 : 성이 있다. 신라 때의 추화군(推火郡)인데 밀성(密城)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밀주(密州)로 고쳤다가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낮추어 계림에 예속시켰으며, 뒤에 밀성현이라고 하다가 밀양부로 고쳤다. 태조 때에 도로 밀성군으로 하였다가 뒤에 밀양부로 올렸다. 태종 때에 군(郡)으로 낮추었다가 곧 다시 올렸다.○ 응천(凝川)ㆍ밀산(密山)이라고도 한다. ○ 1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12리이다. ○ 수산현(守山縣)은 속현이다. 천산부곡(穿山部曲)인데 고려 때 현으로 올렸다. 풍각현(豐角縣)이 있다. 상화촌현(上火村縣)이니, 다른 이름은 유산(幽山)이다. 중종 무인년에 현으로 낮추고 부(府)의 땅을 나누어 청도(淸道)ㆍ경산(慶山)ㆍ영산(靈山)ㆍ현풍(玄風)에 예속시켰다. 밀양부의 사람이 그의 아비를 죽인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오년에 도로 이전대로 하였다. ○ 밀진현(密津縣) 죽산(竹山)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이 있다. ○ 신라에서는 불[火] 자를 넣은 고을 이름이 많다. 불[火]자는 곧 불(佛)의 전음(轉音)이요, 불(佛)은 곧 벌(伐)의 전음이다. 방언에 들판을 벌이라고 한다.
○ 청송(靑松) : 고구려 때의 청기현(靑己縣)이니, 신라 때에 적선(積善)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는 부이(鳧伊)라고 하였고, 또 운봉(雲鳳)으로 고쳤다가 청부(靑鳧)로 고쳤다. 태조 갑술년에 진보현(眞寶縣)과 합하였고, 세종 기해년(1419, 세종1)에는 청보군(靑寶郡)으로 올렸다. 소헌왕후(昭憲王后)의 고향이다. 뒤에 진보(眞寶)를 떼내고 송생현(松生縣)과 합하여 청송이라 고쳤으며, 세조 때에 부(府)로 올렸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0리이다. ○ 안덕(安德)은 속현이고 고구려 때의 이화혜현(伊火兮縣)이니, 신라에서 연무(緣武)라고 고쳤다. 송생(松生)은 폐현이다.
○ 대구 : 성이 있다. 신라 때의 달구화현(達句火縣)이니 달불성(達弗城)이라고도 하다가 대구로 고쳤다. 세종 때에 군으로 올렸고, 세조 때에 부로 올렸다. ○ 달성(達城)이라고도 한다. ○ 33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0리이다. ○ 수성현(壽城縣)은 속현이다. 계화군(界火郡)인데 상촌창군(上村昌郡)이라고도 한다. 수창군(壽昌郡)으로 고쳤다. 가창(嘉昌)이라고도 한다. 해안현(解顔縣) 치성화현(雉省火縣)인데 미리(美里)라고도 한다.ㆍ하빈현(河濱縣) 다사지현(多斯知縣)인데 답지(沓只)라고도 한다. 이 있다.
○ 울산 : 신라 때의 굴아화촌(屈阿火村)이니, 뒤에 현을 두고 이름을 하곡(河曲) 하서(河西)라고도 한다. 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흥려부(興麗府)로 올렸다가, 뒤에 공화현(恭化縣)으로 낮추고, 울주(蔚州)로 고쳤다. 태조 때에 진을 두었고, 태종 계사년에 울산군으로 고쳤다. 세종 정사년에 부(府)로 올렸다가 도로 낮추었으며, 선조 무술년에 다시 부로 올렸다.○ 학성(鶴城)ㆍ개지변(皆知邊)ㆍ화성(火城)이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50리이다. ○ 우풍(虞風)은 고현(古縣)이다. 우화(亏火)는 우불(于佛)이 바뀐 말이다. 경덕왕(景德王)이 현으로 고쳐서 안동에 예속시켰다. 동진(東津) 율포현(栗浦縣) 도 고현이다.
○ 동래(東萊) : 성이 있다. 옛날의 장산국(萇山國) 내산(萊山)이라고도 한다. 인데, 신라가 차지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을 두었다가 동래로 고쳤다. 태조 때에 진을 두었고, 세종 때에 첨사(僉使)를 두었다가 뒤에 현령으로 고쳤다. 명종 정미년에 부로 올렸다. 선조 때 현으로 낮추었다가 곧 다시 올렸으며, 임진년에 또 낮추었다가 기해년에 다시 올렸다.○ 봉래(蓬萊)ㆍ봉산(蓬山)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62리이다. ○ 동평(東平)은 속현이다. 신라 때의 대증현(大甑縣)이다.
○ 인동(仁同) : 신라 때의 사동화현(斯同火縣)인데, 인동으로 고쳤다. 선조 갑진년에 부로 올렸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리이다. ○ 수동(壽同)ㆍ옥산(玉山)이라고도 한다. 약목현(若木縣)은 속현이고, 신라 때의 대목현(大木縣)이니, 칠촌(七村) 또는 곤산(昆山)이라고도 한다. 계자현(谿子縣)이라고 고쳤다. 소목현(小木縣)이 있다. 견훤이 벽진(碧珍)을 침공할 때, 대목ㆍ소목 두 고을의 곡식을 베어 버렸다고 하였는데 지금 어디인지 상세하지 않다.
○ 순흥(順興)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급벌산군(及伐山郡)이니, 신라 때에 급산(岌山)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흥주(興州)로 고쳤다가 순정(順政)으로 고쳤다. 뒤에 순안(順安)에 이속되었다. 흥녕현(興寧縣)으로 고치고 흥주(興州)라고 올렸으며 또 순흥부로 고쳤다.세조 정축년에 고을을 폐지하여 마아령(馬兒嶺)의 물 동쪽 땅은 영주(榮州)에 예속시키고, 문수산(文殊山)의 물 동쪽 땅은 봉화(奉化)에 예속시켰다. 풍기(豐基)에 예속시켰다가 숙종 계해년에 이전대로 하였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7리이다. ○《여지승람》에는 풍기군의 폐촌에 들어 있다.
○ 칠곡(漆谷) : 성이 있다. 신라 때의 팔거현(八居縣)이니, 인리(仁里)라고도 하다가 팔리(八里)로 고쳤다. 고려 때에 다시 팔거(八居)라고 일컬었는데 바뀌어 팔거(八莒)가 되었다. 칠곡(七谷)이라고도 한다. 뒤에 성주(星州)에 예속되었다. 인조 경진년에 비로소 부를 두었다. ○ 가산(架山)이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0리이다. ○ 《동국여지승람》에는 팔거는 성주(星州)의 속현이라 하였다.
○ 청도(淸道) : 성이 있다. 이서소국(伊西小國)인데 신라가 벌취(伐取)하고 구도성(仇刀城)의 경내에 있는 솔이산(率伊山)ㆍ경산(驚山) 가산(笳山)이라고도 한다.ㆍ오도산(烏刀山) 등의 3성(城) 3성은 신라 때 밀성(密城)에 속해 있었다. 을 합하여 대성군(大城郡)을 두었다. 경덕왕 때, 구도는 오악현(烏岳縣)이라 고쳤고, 경산은 형산현(荊山縣)으로, 솔이산은 소산현(蘇山縣)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3성을 합하여 청도군을 만들었다. ○ 도주(道州)ㆍ오산(鰲山)ㆍ마악(馬岳)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2리이다.
○ 영천(永川) : 신라 때에 절야화군(切也火郡)이라고 하다가 임고(臨皐)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도동(道同)과 임천(臨川)의 두 현을 합하여 영주(永州)로 고쳤는데 고울부(高鬱府)라고도 일컬었다.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영천군으로 고쳤다.○ 익양(益陽)ㆍ영양(永陽)이라고도 한다. ○ 20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7리이다. ○ 도동(道同)은 폐현이며, 신라 때의 도동대현(刀冬大縣)이다. 임천도 폐현이다. 골화소국(骨火小國)이니 신라 때에 현을 두었다.
○ 영천(榮川) : 고구려 때의 내기군(奈己郡) 혹은 내기(己)로 쓴다. 이니, 신라 때에 내령(奈靈)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강주(剛州)로 고쳤다가 순안현(順安縣)이라 고쳤으며, 영주(榮州)로 올렸다. 태종 계사년(1413, 태종13)에 영천군으로 고쳤다.○ 구성(龜城)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0리이다. ○ 선곡현(善谷縣)이 있다. 고구려 때의 고곡현(賈谷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예천(醴泉) : 신라 때에 수주현(水酒縣)이라 하다가 예천군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보주 (甫州)로 고쳤다가 기양현(基陽縣)으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보주군으로 고쳤다가 곧 다시 예천이라고 하였다. ○ 청하(淸河)ㆍ양양(襄陽)이라고도 한다. ○ 2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8리이다.○ 다인(多仁)은 속현이며, 신라 때의 달기현(達己縣)이니 혹은 다기(多己)라고도 한다. 용궁(龍宮)의 동촌(東村) 너머[越]에 있다. 인양(仁陽)이라고도 한다.신라 때는 상주에 속하였다. 안인(安仁)은 폐현이다. 난산현(蘭山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흥해(興海) : 성이 있다. 신라 때에 퇴화군(退火郡)이라고 하다가 의창(義昌)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흥해로 고쳤다. ○ 미질부성(彌秩夫城)ㆍ곡강(曲江)ㆍ오산(鰲山)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6리이다.
○ 양산(梁山) : 성이 있다. 신라 때에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나누어서 삽량주(歃良州)를 두었다가 뒤에 양주(良州)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양주(梁州)라고 고쳤으며 뒤에 밀성(密城)과 합하였다가 곧 다시 이전대로 하였다. 태종 때에 위산군(爲山郡)으로 고쳤고, 선조 임진년에 동래와 합쳤다가 갑진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90리이다.
○ 풍기(豐基) : 신라 때의 기목진(基木鎭)이다. 고려 초기에는 기주(基州)라고 일컬었으며, 뒤에 은풍(殷豐)을 예속시키고 기천현(基川縣)으로 고쳤다. 문종 때에 풍기군으로 올렸다. 은풍에 태실(胎室)을 봉안하였기 때문이다.○ 영정(永定)ㆍ안정(安定)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0리이다. ○ 은풍현은 속현이며, 신라 때에 적아현(赤牙縣)이라 하다가 은정(殷正)이라고 고쳤다. 다른 이름은 은산(殷山)이다. 인풍현(鄰豐縣)이 있다. 고구려 때의 이벌지현(伊伐支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경산(慶山) : 성이 있다. 압량소국(押梁小國)이니, 압독(押督)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군을 두었는데, 뒤에 장산(獐山)으로 고쳤다. 고구려 초기에 장산(章山)으로 고쳤다가 경산으로 고쳤다. 태조 때에 현으로 낮추었고, 선조 신축년에 폐읍하였다가 정미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옥산(玉山)이라고도 한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10리이다. ○ 신라 때에 고포성(古浦城)ㆍ금성(金城)ㆍ우곡성(亏谷城)의 3성을 합하여 압량군(押梁郡)으로 하였다.
○ 의성(義城) : 소문국(召文國)이었는데, 신라가 차지하여 문소군(聞韶郡)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기에 의성부로 고쳤다가 뒤에 곧 다시 현으로 낮추었다. 또 대구와 합하였다가 곧 다시 이전대로 회복시켰다. 19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90리이다. ○ 고구(高丘)는 고현(古縣)이다. 신라 때에 구화현(仇火縣)을 고쳐서 고구로 하였다. 혹은 고근(高近)이라고도 한다.
○ 영덕(盈德)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야시홀군(也尸忽郡)이니, 신라 때에 야성(野城)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영덕현으로 고쳤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리이다.
○ 하양(河陽) : 고려 때에 하주(河州)라 하다가 뒤에 하양현으로 고쳤다. ○ 화성(花城)이라고도 한다. 선조 신축년에 고을을 폐지하였다가 정미년에 다시 두었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42리이다.
○ 용궁(龍宮) : 신라 때의 축산(竺山)이니, 원산(園山)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용주(龍州)로 승격시켰다가 또 용궁현으로 고쳤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4리이다.
○ 봉화 : 고구려 때의 고사마현(古斯馬縣)이니, 신라 때에 옥마(玉馬)로 고쳤고, 고려 때는 봉화로 고쳤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0리이다. ○ 봉성(鳳城)이라고도 한다.
○ 청하(淸河)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아혜현(阿兮縣)이니, 신라 때에 해아(海阿)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청하로 고쳤다가 뒤에 경주에 예속시켰다.태조 때에 비로소 현을 두었다. ○ 덕성(德城)이라고도 한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41리이다.
○ 언양(彦陽) : 성이 있다. 신라 때에 거지화현(居知火縣)이라 하다가 헌양(巘陽)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 언양으로 고쳤다. 헌산(巘山)이라고도 한다. 선조 기해년에 고을을 폐지하였다가 광해군 임자년(1612, 광해군 4)에 이전대로 하였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47리이다.
○ 진보(眞寶) : 칠파화현(漆巴火縣)을 신라 때에 진보로 고쳤고, 조람현(助攬縣)은 진안(眞安)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두 고을을 합하여 남성부(南城府)를 두었는데, 재암성(載巖城)이라고도 한다.태조 때에 보성현(甫城縣)을 두었고, 세종 때에 청부(靑鳧)에 합하여 청보(靑寶)라고 이름했다가 곧 폐지하고 진보현으로 고쳤다. 성종 때에 폐읍하였다가 지방 사람들의 진정에 의하여 다시 현을 두었다. ○ 재암(載巖)ㆍ진해(眞海)라고도 한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16리이다.
○ 현풍(玄風) : 신라 때에 추량화현(推良火縣)이라고 하다가 현효(玄驍)로 고쳤으며 고려 때 현풍으로 고쳤다. ○ 포산(苞山)ㆍ현풍(玄豐)이라고도 한다. ○ 17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0리이다. ○ 신라 때에는 지금의 창녕(昌寧)인 화왕군(火王郡)에 속하였다.
○ 군위(軍威) : 신라 때에 노동멱현(奴同覔縣)이라 하다가 군위로 고쳤다. ○ 적라(赤羅)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75리이다. ○ 효령(孝靈)은 속현이다. 효령(孝令)이라고 쓰기도 한다. 신라 때의 모혜현(芼兮縣)이다.
○ 비안(比安) : 신라 때의 아화옥현(阿火屋縣)이니, 또는 병옥(幷屋)이라고도 한다. 비옥(比屋)으로 고쳤으며, 뒤에 안정현(安貞縣)과 합하였다. 세종 신축년(1421, 세종 3)에 비안이라고 개칭하였다. ○ 병산(屛山)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38리이다. ○ 안정(安貞)은 속현이다. 신라 때 아시혜현(阿尸兮縣)이니 안현(安賢)이라 고쳤다. 세종 때에 안비(安比)라고 고쳤으며, 뒤에 고을의 관아를 비옥(比屋)으로 옮기고 비안이라고 개칭하였다.
○ 의흥(義興) : 고려 때의 의흥군이니, 뒤에 안동에 예속시켰다가 다시 현을 두었다. ○ 구산(龜山)ㆍ구성(龜城)이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26리이다. ○ 부계(缶溪)는 속현이다. 삼국 시대의 부림현(缶林縣)이다.
○ 신녕(新寧) : 신라 때에 사정화현(史丁火縣)이라 하다가 신녕으로 고쳤다. 연산군 정사년에 폐읍하였다. 현의 아전이 현감 길수(吉脩)의 엄격하고 사나운 것을 싫어하여, 고을을 비우고 도망한 일이 있었으므로, 폐읍하여 영천(永川)에 예속시키고, 땅을 분할하여 의성ㆍ하양(河陽)ㆍ의흥(義興)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계해년에 다시 고을을 설치하였다. ○ 화산(花山)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0리이다. ○ 민백현(黽白縣)이 있다. 신라 때의 매열차현(買熱次縣)이니, 민백으로 고쳤다. 신녕과 합하였다. 이지(梨旨)는 폐현이다. 영주(永州)의 이지은소(梨旨銀所)이니, 고려 때에 현으로 하였고 태조 때 신녕(新寧)의 속현이 되었다.
○ 예안(禮安) : 고구려 때의 매곡현(買谷縣)이니, 신라 때 선곡(善谷)으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 때 예안군으로 고쳤다. 우왕(禑王) 때 주(州)로 승격시켰다가 왕실의 태(胎)를 간직해 두는 곳이기 때문이다. 곧 현으로 고쳤다. ○ 선성(宣城)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45리이다. ○ 의인(宜仁)은 폐현이다. 안덕현(安德縣)의 지도보부곡(知道保部曲)이다.
○ 장기(長鬐) : 성이 있다. 신라 때 지답현(只沓縣)이라고 하다가 기립(鬐立)으로 고쳤고, 고려 때 장기로 고쳤다. ○ 봉산(峯山)이라고도 한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0리이다.
○ 영일(迎日) : 성이 있다. 신라 때의 근오지현(斤烏支縣)이니 오량우(烏良友)라고도 한다. 임정(臨汀)으로 고쳤으며 고려 때 영일로 고쳤다. 태종 때 진을 두었다가 세종 때 첨사로 고쳤고 뒤에 현감으로 고쳤다. ○ 오천(烏川)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0리이다.
○ 창녕(昌寧) : 신라 때의 비자화군(比自火郡)이니 비사벌(比斯伐)이라고도 한다. 뒤에 하주(下州)를 두었다가 곧 폐지하고 화왕군(火王郡)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창녕으로 고쳤고 뒤에 진(鎭)으로 삼았다. ○ 창산(昌山)ㆍ창성(昌城)ㆍ하성(夏城)ㆍ하산(夏山)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20리이다.
○ 영산(靈山) : 신라 때 서화현(西火縣)이라고 하다가 상약(尙藥)으로 고쳤으며, 고려 때 영산으로 고쳤다. ○ 취산(鷲山)ㆍ취성(鷲城)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0리이다. ○ 계성(桂城)은 폐현이다.
○ 기장(機張) : 신라 때 갑화양곡현(甲火良谷縣)이라고 하다가 기장으로 고쳤다. ○ 거성(車城)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40리이다. ○ 신라 때에는 동래에 속하였다.
○ 자인(慈仁) : 신라 때의 노사화현(奴斯火縣)이니 기화(其火)라고도 한다. 자인으로 고쳤고 경주에 예속시켰다. 인조 정축년에 비로소 현을 두었다. ○ 자주(慈州)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30리이다. ○ 《동국여지승람》에는 경주 조에 들어 있다.
○ 영양(英陽) : 고은현(古隱縣)이라고 하다가 뒤에 영양군으로 고쳤다. 연양(延陽)이라고도 쓴다. 고려 때는 예주(禮州)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현을 두었으며 다시 영해(寧海)에 예속시켰다. 숙종 병진년에 비로소 현을 설치하였다가 정사년에 도로 폐지하였고, 계해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0리이다. ○ 《동국여지승람》에는 영해 조에 들어 있다.
○ 우도 창원 : 성이 있다. 의창현(義昌縣)은 신라 때 굴자군(屈自郡)이라고 하다가 의안(義安)으로 고쳤으며, 회원현(會原縣)은 신라 때 골포현(骨浦縣)이라고 하다가 합포(合浦)로 고치었다. 고려 때에 의창(義昌)ㆍ회원의 두 고을로 하다가 태종 때 합하여 창원부라 하였다. ○ 회산(檜山)ㆍ환주(還珠)라고도 한다. ○ 1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44리이다.
○ 상주(尙州) : 성이 있다. 사벌국(沙伐國)이니 또는 사불(沙佛)이라고도 한다. 신라가 차지하여 주(州)로 하였다가 상주(上州)로 고치고 군주(軍主)를 두었는데, 상락군(上洛郡)으로 고쳤고 또 상주(尙州)ㆍ사벌주(沙伐州)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상주로 고쳤고, 절도사를 두어 귀덕군(歸德軍)이라고 부르다가 또 상주로 고쳤다.세종 때 관찰사로서 목사를 겸임하게 하다가 곧 폐지하였다. 세조 때 진(鎭)을 두고 목사로서 우도병마부사(右道兵馬副使)를 겸임하게 하였다가 곧 폐지하였다. ○ 사량벌(沙梁伐)ㆍ상산(商山)ㆍ타아(陁阿)라고도 한다. ○ 34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7리이다. ○ 화령현(化寧縣)은 속현이다. 신라 때의 □ 달비군(達匕郡)이니 화령으로 고쳤다. 중모현(中牟縣) 신라 때의 도량현(刀良縣)이니 도안(道安)이라 고쳤다.ㆍ단밀현(丹密縣) 신라 때의 무동미지현(武冬彌知縣)이니 갈동미지(曷冬彌知)라고도 한다.ㆍ산양현(山陽縣) 신라 때의 근품현(近品縣)이니 근암(近巖)이라고도 쓴다. 가유(嘉猷)로 고쳤다.ㆍ화창현(化昌縣) 지내미지현(知乃彌知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이 있다. 공성(功成)은 폐현이고, 신라 때의 대병부곡(大幷部曲)이다. 영순(永順)도 폐현이며 북면 임하촌(林下村)인데 고려 때에 태(太)씨라는 이 마을 사람이 도적을 잡아 공로가 있었으므로 현으로 승격시켰다. 청리(靑里)도 폐현이다. 신라 때의 석리대현(昔里大縣)이니, 청려(靑驢)ㆍ고려(高驢)ㆍ청리라 고쳤다.
○ 성주(星州) : 성이 있다. 신라 때 본피현(本彼縣)이라고 하다가 신안(新安)으로 고쳐 성산군(星山郡)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벽진(碧珍)으로 고치고, 고려 태조 때 경산부(京山府)로 고쳤다. 광평군(廣平郡)으로 낮추었다가 대주(垈州)로 고쳤고, 흥안부(興安府)로 올렸다. 뒤에 성산목으로 고쳤다가 부(府)로 강등시켰으며, 태종 때 목으로 올렸다. 조곡산(祖谷山)에 왕실의 탯줄을 봉안하였다. ○ 가야(伽倻)라고도 한다. 성산가야(星山伽倻)는 6가야 중의 하나이다. ○ 40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27리이다. ○ 가리현(加利縣) 신라 때의 일리현(一利縣)이니 이름을 성산군(星山郡)이라 고쳤다. 기성(岐城)이라고도 한다.ㆍ팔거현(八莒縣) 지금의 칠곡부이다.ㆍ화원현(花園縣) 신라 때의 설화현(舌火縣)이니 금성(錦城)이라고도 한다.ㆍ도산현(都山縣) 적산현(狄山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이 있다.
○ 진주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거열성(居列城)인데 거타(居陁)라고도 한다. 신라가 차지하여 진주(晉州)라고 하였다가 강주(康州)ㆍ청구(菁州)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절도사를 두고 정해군(定海軍)이라고 불렀다. 태조 때 진양부(晉陽府)로 올렸다가 현비(顯妣)의 고향이다. 태종 때 다시 진주목으로 하였다. ○ 청주(菁州)ㆍ진산(晉山)ㆍ진강(晉康)이라고도 한다. ○ 70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66리이다. ○ 반성현(班城縣)은 속현이다. 편월(片月)이라고도 한다. 수선현(水善縣) 신라 때의 일선현(一善縣)이니 상선(尙善)이라 고쳤다.ㆍ악양현(岳陽縣) 신라 때의 소다사현(小多沙縣)이다.ㆍ화개현(花開縣)이 있다. ○흥선(興善)은 폐현이다. 흥선도(興善島)이니 고려 때의 유질부곡(有疾部曲)이다. 창선현(彰善縣)으로 고쳤는데 지금의 직촌(直村)이다. 굴촌(屈村)도 폐현이다. 《삼국사》에서도 상세하지 않다고 하였다.
○ 김해 : 성이 있다. 가락국(駕洛國)이니 혹은 가야(伽倻)라고도 일컬었다. 뒤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신라 때에 금관군을 두었으며 뒤에 소경을 두었고, 다시 김해라 고쳤다.고려 태조 때 낮추어 부로 하였다가 뒤에 낮추어 임해현(臨海縣)으로 하였다. 군으로 올렸다가 금주(金州)로 고쳤고 금녕부(金寧府)ㆍ금주목(金州牧)으로 올렸는데 다시 김해부로 하였다. ○ 분성(盆城)이라고도 한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4리이다.
○ 태산(太山)은 속현이다. 엄산(嚴山)이라고도 한다.
○ 선산(善山) : 성이 있다. 신라 때 일선군(一善郡)이니 주(州)로 올렸다가 숭선군(嵩善郡)으로 고쳤고, 고려 때 선주(善州)로 고쳤다. 태종 때 선산군으로 고쳤으며 뒤에 부(府)로 올렸다. ○ 화의(和義)라고도 한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36리이다. ○ 해평(海平)은 속현이다. 파징(波澄)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의 병평현(竝平縣)인데 고려 초기에 평군(平郡)이라 고쳤다.
○ 거제(巨濟) : 성이 있다. 바다 가운데의 섬이다. 신라 때 상군(裳郡)이라고 하다가 거제로 고쳤다. 뒤에 관성(管城)과 합하였다가 곧 폐지하였다. 태종 갑오년에 폐읍하고 거창에 합하여 제창현(濟昌縣)이라고 부르다가 또 곧 폐지하였다. 세종 임자년에 다시 현을 두었고 숙종 신묘년에 부로 올렸다. ○ 기성(岐城)이라고도 한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1천 44리이다. ○ 아주(鵞州)는 폐현이며 신라 때의 거로현(居老縣)이다. 송변(松邊)도 폐현이며 신라 때 남수(南垂)라 고쳤다. 명진(溟珍)도 폐현이다. 신라 때의 매진이현(買珍伊縣)이다. 정종 때 강성현(江城縣)과 합하여 진성(珍城)이라고 일컬었다.
○ 하동(河東) : 신라 때 한다사군(韓多沙郡)이라고 하다가 하동으로 고쳤다. 고려 때 현을 두었다. 태종 때 남해현(南海縣)과 합하여 하남현(河南縣)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다시 분할하였다. 숙종 갑신년에 부로 올렸다. ○ 청하(淸河)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36리이다.
○ 함양(咸陽) : 성이 있다. 신라 때의 속함군(速含郡)이니 함성(含城)이라고도 하다가 천령(天嶺)으로 고쳤다. 고려 때 허주(許州)로 올렸다가 함양군(含陽郡)으로 낮추었으며, 뒤에 함양으로 고치고 현으로 낮추었다. 태조 을해년에 군으로 올리고 영종 기유년에 부로 올렸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6리이다.
○ 거창(居昌) : 신라 때의 거열군(居烈郡)이니 거타(居陁)라고도 하다가 거창으로 고쳤다. 고려 때 현을 두었다. 태종 때 거제와 합하여 제창(濟昌)이라고 부르다가 곧 이전대로 회복시켰다. 연산군 초기에 군으로 올렸다. 왕비의 고향이다. 중종 병인년에 다시 현으로 낮추었다가 영종 기유년에 부로 올렸다. 거창 신씨(愼氏)인 단경왕후(端敬王后)가 복위한 때문이다. ○ 아림(娥林)이라고도 한다. ○ 22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35리이다. ○ 가조(加祚)는 속현이다. 신라 때의 가소현(加召縣)이니 함음(咸陰)이라고 고쳤다.
○ 초계(草溪) : 신라 때 초팔혜현(草八兮縣)이라고 하다가 팔계(八溪)로 고치었다. 고려 때 초계로 고치고 군으로 올렸다. ○ 청계(淸溪)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5리이다.
○ 함안(咸安) : 성이 있다. 아시량현(阿尸良縣)이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10리이다. ○ 현무현(玄武縣)이 있다. 신라 때의 소다현(召多縣)인데 뒤에 낮추어 부곡으로 하였다.
○ 금산(金山) : 신라 때의 금산현(金山縣)이다. 정종 때 군으로 올렸다. 왕실의 태(胎)를 봉안(奉安)하였다. ○ 금릉(金陵)이라고도 한다. ○ 16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3리이다. ○ 어모(禦侮)는 폐현이다. 신라 때의 금물현(今勿縣)이니 음달(陰達)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개령(開寧)에 속하였다.
○ 곤양(昆陽) : 성이 있다. 고려 때의 곤명현(昆明縣)인데 신라 때의 이름은 상세히 알 수 없다. 세종 때 남해현(南海縣)과 합하여 곤남군(昆南郡)으로 올렸다. 왕실의 태(胎)를 고을의 북쪽 소곡산(所谷山)에 봉안하였다. 정사년에 다시 나누어 남해군을 두고, 진주의 금양부곡(金陽部曲)과 합하여 곤양으로 고쳤다.
○ 철성(鐵城)ㆍ곤산(昆山)이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6리이다. 하읍(河邑)은 폐현이다. 포촌현(浦村縣)이다.
○ 합천 : 신라 때 대량주군(大良州郡)이라고 하다가 대야주군(大耶州郡)이라고도 쓴다. 강양(江陽)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합주(陜州)로 올렸으며, 태종 때 합천군으로 고쳤다. ○ 20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35리이다. ○ 야로(冶爐)는 속현이다. 신라 때의 적화현(赤火縣)이다.
○ 고성(固城) : 성이 있다. 본래 가야국(伽倻國)이니, 신라가 차지하여 고자군(古自郡)을 만들었다가 고성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고주(固州)로 고쳤다가 뒤에 현으로 낮추었다. 또 남해와 합하였다가 곧 이전대로 하였다. ○ 철성이라고도 한다. ○ 14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10리이다. ○ 교화량(蛟火良)은 폐현이다.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남해(南海) : 성이 있다. 바다 가운데의 섬이다. 신라 때 전야산군(轉也山郡)이라고 하다가 남해로 고쳤다. 고려 때에 현을 두었다. 태종 때 하동(河東)과 합하여 하남현(河南縣)이라고 하다가 뒤에 분할하여 해양현(海陽縣)이라고 일컬었다. 진주의 금양부곡(金陽部曲)을 예속시켰다가 얼마 안 가서 도로 진주에 환속시켰다. 세종 때 곤명현(昆明縣)과 합쳤다가 다시 분할하였다.○ 전산(轉山)ㆍ화전(花田)ㆍ윤산(輪山)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1천 45리이다. ○ 난포(蘭浦)는 폐현이며 신라 때의 내포현(內浦縣)이다. 평산(平山)도 폐현이다. 신라 때의 평서산현(平西山縣)인데 서평(西平)이라고도 한다.
○ 삼가(三嘉) : 성이 있다. 삼기현(三岐縣)은 신라 때 삼지현(三支縣)이라고도 하고 마장(麻杖)이라고도 하다가 삼기로 고쳤다. 태조 때 군으로 올렸다가 태종 때 현으로 낮추었다.가수현(嘉壽縣)은 신라 때 가주화현(加主火縣)이라고 하다가 가수라고 고쳤으며, 가수(嘉樹)라고도 한다. 태종 때 두 고을을 합하여 삼가현으로 하였다. ○ 기산(岐山)ㆍ봉성(鳳城)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3리이다.
○ 의령(宜寧) : 성이 있다. 신라 때 장함현(獐含縣)이라고 하다가 의령으로 고쳤다. ○ 의춘(宜春)ㆍ의산(宜山)이라고도 한다. ○ 19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95리이다. ○ 신번(新繁)은 속현이다. 신라 때 신니현(辛尒縣)이니 주오촌(朱烏村)이라고도 하고, 천천현(泉川縣)이라고도 하다가 의상(宜桑)으로 고쳤다.
○ 칠원 : 성이 있다. 신라 때 칠토현(漆吐縣)이라고 하다가 칠제(漆堤)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칠원(漆原)으로 고쳤다. 칠원(漆園)이라고 쓰기도 한다.
○ 구성(龜城)ㆍ무릉(武陵)이라고도 한다. ○ 4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0리이다. 구산(龜山)은 속현이다. 본래 성법부곡(省法部曲)이니 고려 때 올려서 현을 만들었다. 은산(銀山)이라고도 한다. 창원부의 서촌(西村)에 넘어서 들어 있다.
○ 진해(鎭海) : 성이 있다. 고려 때의 진해현이다. 선조 신축년에 폐읍하였다가 광해군 때 다시 두었고, 인조 정묘년에 폐읍하였다가 기묘년에 다시 두었다. ○ 팔진(八鎭)ㆍ우산(牛山)이라고도 한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7리이다.
○ 문경(聞慶) : 신라 때의 관문현(冠文縣)이니 고사갈이성(高思曷伊城)이라고도 하다가 관현(冠縣)으로 고치고 또 관산(冠山)으로 고쳤다. 고려 때 문희군(聞喜郡)으로 고쳤다가 뒤에 문경으로 고쳤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77리이다. ○ 가은(加恩)은 속현이다. 신라 때 가해현(加害縣)이라고 하다가 가선(嘉善)이라고 고쳤다. 호계(虎溪)는 폐현이다. 신라 때의 호측현(虎側縣)인데 신라 때에는 고령에 예속되었었다. 배산성(拜山城)이라고도 한다.
○ 함창(咸昌) : 본래 고령가야국(古寧伽倻國)이니 신라가 차지하여 고동람군(古冬攬郡)으로 만들었다. 고릉(古陵)이라고도 하다가 고령(古寧)으로 고쳤다. 고려 때 함령(咸寧)으로 고쳤고 또 함창으로 고쳤다. 6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7리이다.
○ 지례(知禮) :신라 때 지품천현(知品川縣)이라고 하다가 지례로 고쳤다. ○ 구성이라고도 한다. ○ 4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24리이다. ○ 두의곡부곡(頭衣谷部曲)은 속현이다.
○ 고령(高靈) : 본래 대가야국(大伽倻國)이니 신라가 차지하여 대가야군을 만들었다가 고령으로 고쳤다. ○ 고양(高陽)ㆍ영천(靈川)이라고도 한다. ○ 14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4리이다.
○ 단성(丹城) : 강성현(江城縣)은 신라 때 궐지군(闕支郡)이라고 하다가 궐성(闕城)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강성현(江城縣)으로 고쳤다. 태종 때 영선(永善)에 임시 예속되어 있던 명진현(溟珍縣)과 합하여 진성현(珍城縣)이라고 불렀다. 단계현(丹溪縣)은 신라 때 적촌현(赤村縣)이라고 하다가 단읍(丹邑)으로 고쳤고, 고려 때 단계(丹溪)로 고쳤으며, 공양왕 때에는 강성(江城)에 예속시켰었다.세종 때 두 고을의 이름을 따서 단성으로 고쳤다. 선조 기해년에 폐읍하였다가 광해군 계축년에 다시 두었다. ○ 구성(龜城)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46리이다. ○ 단계는 폐현이다.
○ 개령(開寧) : 감문소국(甘文小國)이니 신라가 차지하여 청주(淸州)를 설치하고 군주(軍主)를 두었다가 감문군(甘文郡)으로 고쳤고 개령으로 또 고쳤다. 고려 때 현으로 고쳤다. ○ 감주(甘州)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58리이다.
○ 사천(泗川) : 성이 있다. 신라 때 사물현(史勿縣)이라고 하다가 사수(泗水)로 고쳤는데, 고려 때에 사주(泗州)로 고쳤다. 태종 때 사천현으로 고쳤다가 뒤에 진을 설치하였다. 첨사로 삼았다. 뒤에 다시 현으로 고쳤다. ○ 동성(東城)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6리이다.
○ 웅천(熊川) : 성이 있다. 신라 때 웅지현(熊只縣)이라고 하다가 웅신(熊神)으로 고쳤다. 고려 때는 금주(金州)에 예속되었다. 세종 때는 이 고을에 요새지를 설치하고 첨사를 두었다. 문종 때 웅천현으로 고쳤으며, 중종(中宗) 5년에 부로 올렸다가 왜구를 평정한 곳이기 때문이다. 곧 이전대로 하였다. ○ 웅구(熊口)ㆍ병산(屛山)ㆍ웅산(熊山)이라고도 한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70리이다.
○ 안의(安義) : 이안현(利安縣)은 신라 때 마리현(馬利縣)이라고 하다가 이안으로 고쳤다. 고려 말기에는 감음(感陰)에 이속시켰다. 감음현은 신라 때 남내현(南內縣)이라고 하다가 여선(餘善)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감음이라고 고쳤으며, 뒤에는 부곡으로 낮추었다가 다시 현으로 하였다. 태종 때 관아를 이안에 옮기고 안음(安陰)이라고 하였다.영종 기유년에 폐읍하였다가 종단(終丹)이라는 계집아이가 7세에 아들을 낳았다 병진년에 다시 현을 두고 이름을 안의로 고쳤다. ○ 화림(花林)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2리이다. ○ 감음은 폐현이다.
○ 산청(山淸) : 신라 때 지품천현(知品川縣)이라고 하다가 산음(山陰)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합천에 예속되었다가 공양왕 때에 현을 설치하였다. 영종 때 산청으로 고쳤다. ○ 산양(山陽)이라고도 한다. ○ 14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6리이다.
○ 강원도 : 동북쪽과 동쪽은 바다이고, 동남쪽은 경상도와 경계이며 남쪽은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이고, 서남쪽은 충청도와 경계, 서쪽은 경기도와 경계이며 서북쪽은 경기ㆍ황해도의 경계이고, 북쪽은 함경도와 경계이다. 26고을이다. 동도 9고을, 서도 17고을 본래 예맥(濊貊)의 땅인데 한4군(漢四郡) 때에 임둔(臨屯)이 되었다가 뒤에 고구려와 신라가 차지하게 되었고, 신라가 통합하여 명주(溟州)ㆍ삭주(朔州)의 두 주를 두었다. 말기에 궁예가 점거하였다. 고려 때에는 삭방도를 두었다. 성종이 화주(和州)ㆍ명주 등의 군ㆍ현으로 삭방도를 만들고 춘주(春州) 등의 군ㆍ현에 예속시켰다. 뒤에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고 고쳤고, 춘주(春州) 등의 군ㆍ현은 비로소 춘주도 혹은 동주도(東州道)라고 불렀다. 명종 때 명주도(溟州道)를 강릉도로 고쳤고, 동주도를 교주도(交州道)라 하였다. 뒤에 또 교주도를 고쳐 회양도(淮陽道)라고 부르고, 강릉도를 고쳐서 강릉삭방도라고 불렀다. 우왕 때 비로소 강릉도를 분할하여 교주도와 합하여 드디어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라고 불렀다. 충주의 관할인 평창군(平昌郡)을 교주강릉도에 예속시켰으며, 공양왕은 철원ㆍ영평(永平) 등의 현을 옮겨서 경기에 예속시켰다. 태조 을해년에 강원도라고 개칭하였다. 정종 때 영춘(永春)과 영월을 서로 교환하였으며, 태종 때 가평(加平)과 조종(朝宗)을 분리시켜 경기도에 예속시키고, 경기도의 이천(伊川)을 강원도에 예속시켰다. 세종 때 철원과 안협(安峽)을 도로 강원도에 예속시켰다.
○ 동도 강릉 : 성이 있다. 본래 예국(濊國) 철국(鐵國) 또는 예국(蘂國)이라고도 한다. 이니 한 무제의 한4군(漢四郡) 때에는 임둔(臨屯)이었다. 고구려 때에는 하서량(河西良)이라고 일컬었는데 하슬라주(河瑟羅州)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소경으로 하였다가 뒤에 명주(溟州)로 고쳤다.고려 태조는 동원경(東原京)이라고 이름했다가 뒤에 하서부(河西府)라고 일컬었다. 명주목으로 고쳤으며, 경흥도호부로 올렸다가 다시 강릉부로 고쳤다. 본조에서도 이를 그대로 하였다. ○ 임영(臨瀛)ㆍ동온(東溫)ㆍ명원(溟源)ㆍ예국 이하는 이곡(李穀)의 <염양정기(艶陽亭記)>에 나온다.ㆍ철국(鐵國)ㆍ도원경(桃源京)ㆍ북빈경(北濱京)이라고도 한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30리이다. ○ 연곡(連谷)은 속현이다. 고구려의 지산현(支山縣)이니 양곡(陽谷)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명주의 영현(領縣)이었다. 우계(羽溪)는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우곡현(羽谷縣)이니 옥당(玉堂)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삼척군의 영현이었다.
○ 양양(襄陽) : 고구려 때의 익현현(翼峴縣)이니 이문(伊文)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익령현(翼嶺縣)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양주(襄州)로 올렸다가 덕령현(德寧縣)으로 낮추었으며 다시 양주(襄州)라 일컬었다. 태조 정축년에 부로 올렸다. 임금의 외향(外鄕)이다. 태종 때 양양으로 고쳤다. ○ 양산(襄山)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50리이다. ○ 동산(洞山)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혈산현(穴山縣)이니 신라 때 동산(洞山)이라 고쳤다.
○ 삼척 : 성이 있다. 실직국(悉直國)이니 신라 때 실직주군주(悉直州軍主)를 두었다가 뒤에 삼척군으로 고쳤다. 고려 때 척주(陟州)로 고쳤다. 뒤에 현으로 낮추었다가 또 군으로 올렸다가 태조 계유년에 부로 올렸다. 목조(穆祖)의 외향(外鄕)이다. ○ 직주(直珠)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2리이다. ○ 죽령은 고현(古縣)이다. 고구려 때의 죽현현(竹峴縣)이니 신라 때 죽령이라고 고쳤다. 만경현(滿卿縣) 만경현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때의 만방현(滿芳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ㆍ해리현(海利縣) 고구려 때의 파리현(陂利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등으로 되어 있다.
○ 평해(平海)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근을어군(斤乙於郡)이다. 고려 초기에 평해군으로 고쳤다. ○ 기성(箕城)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0리이다.
○ 통천(通川) : 고구려 때의 휴양군(休壤郡)이니 금뇌(金惱)라고도 한다. 신라 때 금양(金壤)으로 고쳤다. 고려 때 현을 두었다가 통주(通州)로 올렸다.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통천군으로 고쳤다. ○ 금란(金蘭)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0리이다. ○ 임도(臨道)는 폐현이고 고구려 때의 도림현(道林縣)이니 조을포(助乙浦)라고도 한다. 벽산(碧山)도 폐현이며 고구려 때의 토상현(吐上縣)이니 신라 때 제상(堤上)으로 고쳤다. 운암(雲巖)도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평진현(平珍縣)이니 변현(邊縣)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편검(偏儉)이라 고쳤다.
○ 고성(高城) : 고구려 때의 달홀(達忽)이니 신라 때 달홀주군주(達忽州軍主)를 두었다. 뒤에 고성군으로 고쳤다. 고려 때 현으로 고쳤다. 세종 때 군으로 올렸다. ○ 풍암(豐巖)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9리이다.
○ 간성(杆城) : 고구려 때의 변성군(邊城郡)이니 가라홀(加邏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수성군(守城郡)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간성현으로 고쳤으며, 뒤에 군으로 올렸고 고성(高城)을 겸임시켰다가 조금 후에 다시 분할하였다. ○ 수성(水城)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55리이다.
○ 울진(蔚珍)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우진야현(于珍也縣)이니 고우이군(古亏伊郡)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울진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현으로 낮추었다. ○ 선차(仙槎)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5리이다. ○ 해곡현(海曲縣) 고구려 때의 파조현(波朝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이 있다.
○ 흡곡(歙谷) : 고구려 때의 습비곡현(習比谷縣) 곡(谷)을 탄(呑)으로 쓰기도 한다. 이니 신라 때 습계(習磎)로 고쳤고, 고려 때에 흡곡으로 고쳤다. 선조 병신년에 폐읍하였다가 무술년에 다시 두었다. ○ 학림(鶴林)이라고도 한다. 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0리이다.
○ 서도(西道) 원주 : 고구려 때의 평원군(平原郡)이니 신라 때 북원소경(北原小京)을 두었다. 고려 태조 때 원주로 고쳤다. 뒤에 낮추어 일신현(一新縣)으로 하였다가 조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또 정원부(靖原府)로 올렸다가 익흥부(益興府)로 고치고, 성안부(成安府)로 고쳤으며 다시 원주목으로 하였다.○ 평량경(平涼京)이라고도 한다. ○ 20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82리이다. ○ 주천(酒泉)은 속현이다. 학성(鶴城)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때의 주연현(酒淵縣)이니 신라 때 주천(酒泉)이라 고쳤다.
○ 회양(淮陽) : 고구려 때의 각련성군(各連城郡)이니 가혜아(加兮牙)라고도 한다. 신라 때 연성(連城)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이물성(伊勿城)이라고 부르다가 교주(交州)로 고쳤다. 회주목(淮州牧)으로 올렸다가 회양부로 낮추었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80리이다. ○ 화천(和川)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수왕천현(藪往川縣)이니 신라 때 수천(藪川)으로 고쳤다. 남곡현(嵐谷縣) 고구려 때의 적목진(赤木鎭)이니 사비근을(沙非斤乙)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단송(丹松)으로 고쳤다. 이 있다. 질운(軼雲)은 고현이고 고구려 때의 관술현(管述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희령(稀嶺)도 고현이다. 고구려 때의 저수현현(猪守峴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춘천 : 본래 맥국(貊國)이었는데, 신라 때 우수주(牛首州) 우두주(牛頭州)라고도 한다. 를 설치하고 군주(軍主)를 두었다가 수약주(首若州)로 고쳤는데 오근내(烏斤乃)ㆍ수차약(首次若)이라고도 한다. 뒤에 삭주로 고치고, 광해주(光海州)로 고쳤다.고려 태조 때에는 춘주(春州)라고 하였다가 안양부(安陽府)로 올렸다.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춘천군으로 고쳤고 을미년에 부로 승격시켰다. ○ 수춘(壽春)ㆍ봉산(鳳山)이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5리이다. ○ 기린(基鱗)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기지군(基知郡)이다. 난산(蘭山)은 고현이다. 고구려 때의 석달현(昔達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철원(鐵原) : 고구려 때의 철원군(鐵圓郡)이니 또는 모을동비(毛乙冬非)라고도 한다. 신라 때 철성(鐵城)이라고 고쳤다. 궁예가 와서 도읍을 정하고 태봉(泰封)이라고 이름하였다. 고려 태조 때 동주(東州)로 고쳤다. 뒤에 현으로 낮추었다가 또 목으로 올렸으며, 철원부로 고쳤다. ○ 육창(陸昌)ㆍ창원(昌原)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21리이다.
○ 영월 : 고구려 때의 내생군(奈生郡)이니 신라 때 내성군(奈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때 영월군으로 고쳤다. 숙종 기묘년에 부로 올렸다. 단종을 복위하였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7리이다.
○ 이천(伊川) : 고구려 때의 이진매현(伊珍買縣)이니 신라 때 이천으로 고쳤다. 광해군 초년에 부로 올렸고, 인조 계해년에는 도로 낮추었다가 숙종 정묘년(1687, 숙종13)에 다시 올렸다. ○ 화산(花山)이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0리이다.
○ 정선(旌善) : 고구려 때의 잉매현(仍買縣)이니 신라 때에 정선으로 고쳤고, 고려 때 군으로 올렸다. ○ 삼봉(三鳳)ㆍ주진도원(朱陳桃源)ㆍ침봉(沈鳳)이라고도 한다. ○ 4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0리이다.
○ 평창(平昌) : 고구려 때의 욱오현(郁烏縣)이니 우오(于烏)라고도 한다. 신라 때 백오(白烏)로 고치고, 고려 때에는 평창으로 고쳤다. 뒤에 군으로 올렸다가 도로 현(縣)으로 낮추고 태조 임신년에 다시 군으로 올렸다. 목조(穆祖)의 왕비 효비(孝妃)의 고향이다. ○ 노산(魯山)이라고도 한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0리이다.
○ 금성(金城) : 고구려 때의 모성군(母城郡)이니 야차홀(也次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익성(益城)으로 고쳤다가 뒤에 금성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현으로 낮추고 또 도령(道寧)이라고 일컬었다. 본조에서 다시 금성이라고 하였다. ○ 금양(金壤)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70리이다. ○ 통구(通溝)는 속현이다. 통구(通口)라고도 쓴다. 고구려 때의 수입현(水入縣)이니 매이(買伊)라고도 한다. ○ 기성(岐城)은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동사홀군(冬斯忽郡)이다.
○ 평강(平康) : 고구려 때의 부양현(斧壤縣)이니 어사내(於斯內)라고도 한다. 신라 때 광평(廣平)으로 고쳤고, 고려 때 평강으로 고쳤다. ○ 평강(平江)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40리이다.
○ 금화(金化) : 고구려 때의 부여군(夫如郡)인데 신라 때 부평(富平)으로 고치고, 고려 때 금화로 고쳤다. ○ 화산(花山)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20리이다.
○ 낭천(狼川) : 고구려 때의 생천군(狌川郡)인데 야시매(也尸買)라고도 한다. 신라 때 낭천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 현(縣)으로 하고 양구를 겸임했다. 본조에서는 도로 분할하였다. 인조 갑신년에 폐읍하였다가 효종 계사년(1653, 효종 4)에 다시 설치하였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5리이다.
○ 홍천(洪川) : 고구려 때의 벌력천현(伐力川縣)인데 신라 때 녹요(綠繞)로 고쳤고, 고려 때에 홍천으로 고쳐 현을 두었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0리이다.
○ 양구(楊口) : 고구려 때의 양구군인데 요은홀차(要隱忽次)라고도 한다. 신라 때 양록(楊麓)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양구(楊溝)로 고쳤다가 양구로 고쳤다. 뒤에 낭천과 병합하였다가 태조 계유년에 도로 분할하였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10리이다. ○ 방산(方山)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삼현현(三峴縣)인데 밀파혜(密波兮)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 삼령현(三嶺縣)으로 고쳤다.
○ 인제(麟蹄) : 고구려 때의 저족현(猪足縣)인데 오사회(烏斯回)라고도 한다. 신라 때 희제(狶蹄)로 고쳤고, 고려 때 인제로 고쳤다. 4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67리이다. ○ 서화(瑞和)는 속현이다. 서화(瑞禾)라고 쓰기도 하며, 서성(瑞城)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때의 옥기현(玉岐縣)인데 신라 때 치도(馳道)로 고쳤다.
○ 횡성(橫城) : 고구려 때의 횡천현(橫川縣)인데 또는 어사매(於斯買)라고도 한다. 신라 때 횡주(橫州)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횡천이라고 일컬었다. 태종 갑오년에 홍천(洪川)과 발음이 비슷하다고 하여 횡성으로 고쳤다. ○ 화전(花田)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0리이다.
○ 안협(安峽) : 고구려 때의 아진압현(阿珍押縣)인데 궁악(窮岳)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안협(安峽)으로 고쳤다. 태종 갑오년에 경기도의 삭녕과 합쳐서 안삭(安朔)이라고 부르다가 병신년(1416, 태종 16)에 도로 이전대로 하였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20리이다.
○ 황해도 : 남과 북은 함경도의 경계요, 동은 강원도 경계이며 동남은 강원도와 경기도의 경계이고, 남은 경기도의 경계이며, 서남과 서는 바다이고, 서북은 바다와 평안도의 경계이며, 북은 평안도의 경계이다. 23고을이다. 좌도 14고을, 우도 9고을 조선과 마한의 옛 땅이니 한4군(漢四郡) 때에는 낙랑군(樂浪郡)의 관할이었다. 뒤에 고구려가 차지하였는데 당(唐) 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니 그 땅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마침내 신라가 이 땅을 병합하였다. 한주(漢州)를 두었다. 신라의 말기에는 궁예가 점거하였다. 고려 때에는 관내도(關內道)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서해도로 고쳤다. 뒤에 수안(遂安)ㆍ곡주(谷州)ㆍ은율(殷栗) 등의 고을을 원(元) 나라에 빼앗겼다가 충렬왕 4년에 원 나라에서 돌려 주었다. 뒤에 황주목ㆍ안악군(安岳郡)ㆍ철화현(鐵和縣)ㆍ장명진(長命鎭) 등을 서북면에 옮겨 예속시켰다가 우왕 때에 도로 본도에 예속시켰다. 태조 을해년에 풍해도(豐海道)로 고쳤고, 태종 정유년에 황해도로 고쳤다. 태조 을해년에 평주(平州)ㆍ수안(遂安)ㆍ곡주(谷州)ㆍ재령(載寧)ㆍ서흥(瑞興)ㆍ신계(新溪)ㆍ협계(俠溪)를 경기도로부터 도로 본도에 예속시켰다. 태종 계사년에 연안ㆍ배천ㆍ우봉ㆍ강음(江陰)ㆍ토산(兔山)을 경기도로부터 도로 본도에 예속시켰다.
○ 좌도 황주(黃州)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동홀(冬忽)인데 우동어홀(于冬於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취성(取城)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황주로 고쳤다가, 뒤에는 절도사를 두고 천덕군(天德軍)이라고 일컬었다. 고령군(固寧郡)으로 낮추었다가 다시 황주목이라고 일컬었다. ○ 제안(齊安)ㆍ용흥(龍興)ㆍ성성(聖城)ㆍ대룡(大龍)ㆍ동울(冬鬱)ㆍ대홀(大忽)이라고도 한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65리이다. ○ 철화(鐵和)는 폐현이다. 고려 때 현을 두었다가 뒤에 폐지하였고, 태조 병자년에 다시 현을 두었다가 태종 때 또 폐지하였다.
○ 평산(平山) :고구려 때의 대곡군(大谷郡)인데 다지홀(多知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영풍(永豐)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평주(平州)로 고쳤으며 부흥군(復興郡)과 합하였다가 조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평산부로 고쳤다. ○ 연덕(延德)ㆍ동양(東陽)이라고도 한다. ○ 17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71리이다.
○ 서흥(瑞興) : 고구려 때의 오곡군(五谷郡)인데 우차탄홀(于次呑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오관(五關)이라 고쳤다. 고려 때는 동주(洞州)로 고쳤다가 서흥현으로 고쳤다. 태종 을미년에는 군으로 올렸고 세종 갑진년(1424, 세종 6)에는 부(府)로 올렸다. 현종 신해년에는 백년 동안 현으로 낮추라는 처분이 있었다. □ 부로 올렸다. ○ 농서(隴西)ㆍ서성(瑞城)ㆍ옥곡(玉谷)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5리이다
○ 곡산(谷山) : 고구려 때의 십곡성(十谷城)이니 덕돈홀(德頓忽)이라고도 하고, 곡성(谷城)이라고도 한다. 고곡군(古谷郡)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진서(鎭瑞)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곡주(谷州)로 고쳤다.태조 계유년(1393, 태조2)에 곡산부로 고쳤다. 현비(顯妣) 강씨(康氏)의 고향이다. 태종 임오년에 군으로 낮추었다가 현종 기유년에 다시 올렸다. 본관이 곡산인 신덕(神德)왕후가 복위하였기 때문이다. ○ 상산(象山)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4리이다.
○ 봉산(鳳山) : 고구려 때의 휴암군(鵂巖郡)인데 휴류성(鵂鶹城)이라고도 하고, 조파의(租坡衣)라고도 한다. 신라 때 서암(棲巖)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는 봉주(鳳州)로 일컫다가 봉양(鳳陽)으로 고쳤으며,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봉산군으로 고쳤다. ○ 지하(池河)라고도 한다. ○ 15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20리이다.
○ 안악(安岳) : 고구려 때의 양악군(楊岳郡)인데 고려 때 안악으로 고쳤다. 뒤에 현으로 하였다가 군으로 올렸다. ○ 양산(楊山)이라고도 한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86리이다.
○ 재령(載寧) : 고구려 때의 식성군(息城郡)인데 한성(漢城)이라고도 하고, 내홀(乃忽)이라고도 하며, 한홀(漢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중반(重盤)으로 고쳤다.고려 초기에 안주(安州)라고 일컬었고 뒤에는 현을 두었고 재령으로 고쳤다. 태종 을미년에 군으로 올렸다. 중종 때 옛 읍에 질병이 많이 유행한다고 하여 관아를 옛 고을의 서쪽 60리 되는 곳에 옮겼다. ○ 안릉(安陵)ㆍ안풍(安風)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65리이다. ○ 삼지(三支)는 폐현이다.
○ 수안(遂安) : 고구려 때의 장새현(璋塞縣)인데 고소어(古所於)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에 수안으로 고쳤고, 수주(遂州)로 올렸다. 본조에서 수안군으로 고쳤다. ○ 저새(猪塞)ㆍ요산(遼山)ㆍ장률(獐栗)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5리이다.
○ 신천(信川) : 고구려 때의 승산군(升山郡)인데 고려 때에는 신주(信州)로 고쳤다가 뒤에 현으로 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신천으로 고쳤고 예종 기축년에 군으로 올렸다. ○ 신안(信安)ㆍ신성(信城)ㆍ화산(花山)ㆍ승주(升州)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5리이다.
○ 금천(金川) : 우봉현(牛峯縣)은 고구려 때 우잠군(牛岑郡)이니 우령(牛嶺)이라고도 하고, 수지의(首知衣)라고도 한다. 신라 때 우봉(牛峯)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평주(平州)에 예속 되었다가 개성부에 예속되었으며 뒤에 현을 두었다. 태종 계사년에 본도에 예속되었다.강음현(江陰縣)은 고구려 때의 굴압현(屈押縣)이니 강서(江西)라고도 한다. 신라 때 강음(江陰)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개성부에 예속되었다가 뒤에 현을 두었다. 태종 계사년에는 본도에 예속되었다. 효종 신묘년에 두 현을 합하여 금천군을 만들었다. ○ 금릉(金陵)이라고도 한다. ○ 16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5리이다.
○ 신계(新溪) : 고려 때의 신은현(新恩縣)인데 담주(覃州)로 고쳤다가 뒤에 옛 이름대로 회복하고 곡주(谷州)에 예속시켰다. 태조 병자년에 비로소 현을 두었으며 협계(俠溪)를 여기에 예속시켰다. 세종 을축년(1445, 세종 27)에 두 현의 이름을 따서 신계라고 하였다.○ 신성(新城)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8리이다. ○ 협계(俠溪)는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수곡성현(水谷城縣)이니 매차홀(買且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단계(丹溪)로 고쳤다.
○ 문화(文化) : 고구려 때의 관구현(關口縣)인데 고려 때 유주(儒州)로 고쳤다. 뒤에 현으로 하였으며 문화로 고쳤다. ○ 시령(始寧)ㆍ문성(文城)이라고도 한다. 중종 경진년에는 관아자리에 질병이 많다고 하여 관아를 현의 남쪽 13리로 옮겼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5리이다.
○ 장련(長連) : 장명진(長命鎭)은 본래 황주(黃州)에 예속되었고, 연풍장(連豐莊)은 본래 안악(安嶽)에 속하였었다. 태조 병자년에 장명진을 폐지하고 연풍에 예속시켰으며, 태종 갑오년(1414 태종 14)에 장련현으로 고쳤다.
○ 토산(兔山) : 고구려 때의 오사함달현(烏斯含達縣)인데 신라 때 토산(兔山)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개성부에 예속되었으며, 태종 계사년에 본도에 예속시켰다. ○ 월성(月城)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0리이다.
○ 우도 해주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내미홀군(內未忽郡)인데 지성(池城)이라고도 하고, 장지(長池)라고도 한다. 신라 때 폭지(瀑池)로 고쳤고, 고려 태조 때 해주로 고쳤다. 뒤에 절도사를 두고 우신책군(右神策軍)이라고 일컬었다. 양주(楊州)와 더불어 좌우보(左右輔)가 되었다. 안서(安西)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해주목으로 하였다. ○ 대령(大寧)ㆍ서해(西海)ㆍ수양(首陽)ㆍ고죽(孤竹)이라고도 한다. ○ 35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65리이다.
○ 연안(延安)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동음홀(冬音忽)인데 시염성(豉鹽城)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해고군(海皐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염주(鹽州)라 일컬었고 뒤에 영응현(永膺縣)이라고도 하였다.복주(復州)로 올렸다가 석주(碩州)로 고쳤으며 온주목(溫州牧)으로 올렸다가 또 낮추어 연안부로 하였다.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도로 본도에 예속시켰다. ○ 오원(五原)ㆍ양원(陽原)이라고도 한다. ○ 22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55리이다.
○ 풍천(豐川) : 고구려 때의 구을현(仇乙縣)인데 굴천(屈遷)이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에 풍주(豐州)로 고쳤다. 태조 정축년에 비로소 진(鎭)을 두었으며, 태종 계사년에 풍천군으로 하였다. 은율(殷栗)과 합하여 풍율(豐栗)이라고 일컫다가 얼마 안 되어 폐지하였다. 예종 기축년에 부로 올렸다. 왕후의 외가의 고향이다. ○ 서하(西河)ㆍ성해(成海)ㆍ안주(安州)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35리이다.
○ 옹진(甕津)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옹천(甕遷)인데 고려 초기에 옹진으로 고치고 현을 두었다. 태조 정축년에 진을 두었다가 세종 때 다시 현을 두었으며 숙종 기해년(1719, 숙종45)에 부로 올렸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85리이다.
○ 장연(長淵) : 고구려 때의 장연인데 신라ㆍ고려가 모두 그대로 따랐다. 태조 임신년에 만호를 두었으며, 태종 때에 영강현(永康縣)과 합하여 연강(淵康)이라고 일컬었으나 얼마 안 되어 폐지하였다. 세종 5년에 첨사를 두었다가 뒤에 현으로 하였고, 광해군 계해년에 부로 올렸다. ○장담(長潭)이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3리이다. ○ 해령(海寧)은 폐현이다. 고려 때 현을 두었다가 뒤에 청송에 예속시켰다. 태종 병신년에 그 땅을 장연현의 서쪽 경계에 예속시켜 직촌(直村)이라 하고 해령현의 아전들은 송화(松禾)에 배속시켰다.
○ 배천(白川) : 고구려 때의 도랍현(刀臘縣)이니 치악성(雉嶽城)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구택(雊澤)으로 고쳤었다. 고려 초기에 백주(白州)라고 일컬었으며 개흥부(開興府)로 올렸다가 뒤에 이전대로 하였다. 충익현(忠翊縣)으로 고쳤다가 부흥군(復興郡)으로 올렸다. 태종 계사년에는 배천군으로 고치고 도로 본도에 예속시켰다. 중종 병술년에 현으로 낮추었다가 도로 회복시켰다. ○ 은천(銀川)이라고도 한다. ○ 16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5리이다.
○ 송화(松禾) : 청송현은 고구려 때의 마경이(麻耕伊)이고, 가화현(嘉禾縣)은 고구려 때의 판마곶(板麻串)인데, 고려 때에는 두 곳에다 각각 현을 두었었다. 태종 무자년에 두 고을을 합하여 송화라고 하였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5리이다. ○ 영녕(永寧)은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웅한이(熊閑伊)이다. 가화(嘉禾)는 고현(古縣)이다.
○ 강령(康翎) : 영강현(永康縣)은 고구려 때의 부진이(付珍伊)인데 고려 초기에 영강(永康)으로 고치고 현을 두었다. 태종 갑오년에 장연(長淵)과 합하였다가 얼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백령도(白翎島)는 고구려 때의 곡도(鵠島)인데 고려 때에는 백령진을 두었다. 세종 무신년(1428, 세종 10)에 영강(永康)과 백령을 합하여 강령현으로 하였다. 백령은 고려 공민왕 때에 곡령도의 수로가 험하다고 하여 진(鎭)이 육지로 나와 문화현의 동촌 가을산(加乙山)에 임시로 붙여 그곳을 그냥 백령이라고 일컫고 본섬을 백령에 예속시켰다. 인조(仁祖) 정축년에 폐읍하였다가 효종 기해년에 다시 현을 두었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55리이다.
○ 은율(殷栗) : 고구려 때의 율구(栗口)인데 또는 율천(栗川)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은율로 고쳤고, 태조 병자년에 비로소 현을 두었다. 태종 갑오년(1414, 태종 14)에 풍천(豐川)에 병합하였다가 얼마 후에 다시 현을 두었다. 숙종 무진년에 폐읍하였다가 경오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4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85리이다.
○ 함경도 : 동북과 동은 두만강이고, 동남과 남은 바다이며, 서남은 강원도 경계이고, 서와 서북은 평안도 경계이며, 북은 여진의 경계이다. 23고을이다. 남도(南道)가 13고을이었는데, 지금은 14고을이고, 북도가 10고을이다. 본래는 옥저(沃沮)의 땅인데 한4군(漢四郡) 때에는 현도군(玄菟郡)이 되었다가 뒤에 고구려가 소유하였는데 신라가 3국을 통합할 때 남쪽 지방만을 차지하고, 명주(溟州)를 두었다. 북쪽 땅은 발해가 차지하였다. 고려 때는 삭방도라고 하다가 뒤에 동계(東界)로 개칭하였고, 또 동북면이라고도 일컬었다. 뒤에 함주(咸州) 이북은 동여진에게 빼앗겼다. 윤관이 개척하여 9성을 쌓았으며, 뒤에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고 일컬었으나 후에 화주(和州) 이북을 원(元) 나라에 빼앗기게 되니, 원 나라에서 쌍성총관부를 두었다. 공민왕이 쌍성을 쳐서 함락하고 다시 동북면이라고 이름하다가, 또 강릉삭방도라고 일컬었으며 삭방강릉도로 고쳤다.공양왕 때에 비로소 강릉도와 분할하여 한 도(道)를 이루었다. 태종 계사년에 영길도(永吉道)로 고쳤으며, 또 함길도로 고쳤다. 성종 때에는 영안도(永安道)로 고치고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으로 인하여 길주를 낮추어 현을 만들었고, 함흥을 낮추어 군으로 하였다. 감영을 영흥으로 옮겼다가 중종 기사년(1509 중종4)에 함흥을 부로 복구시키고 감영을 옮겨왔으며 함경도라고 개칭하였다.
○ 남도(南道) 함흥 : 고구려의 옛 땅인데 오랫동안 동여진이 점거하였다. 고려 예종 때에 윤관이 여진을 쫓아내고 함주를 두었다가 대도독부를 두어 진동군(鎭東郡)이라고 부르고 성(城)을 쌓았다. 남쪽 지방의 장정 1천 9백 48호를 옮겨다가 채웠다. 다음해에 성을 철폐하고 그 땅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뒤에 원 나라가 차지하여 합란부(哈蘭府)라고 일컬었다. 환조(桓祖)가 쌍성을 쳐서 깨뜨렸다. 뒤에 함주로 고쳤다가 얼마 후에 만호부로 고쳤으며 또 목(牧)으로 올렸다. 태종 병신년에 함흥부로 고치고 감영을 두었다. 성종 때 군으로 낮추었다가 중종 때 이전대로 하였다. ○ 함평(咸平)ㆍ함산(咸山)이라고도 한다. ○ 24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0리이다.
○ 영흥(永興) : 고구려 때의 장령진(長嶺鎭)인데 혹은 당문(唐文)이라고도 하고 혹은 박평군(博平郡)이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에 화주(和州)라고 하였고 성과 보루를 쌓았다. 원 나라가 여기에 쌍성총관부를 두었으며 등주(登州)에 합하였다가 뒤에는 통주(通州)에 합하였다. 수복한 뒤에는 화주라고 하였고 화령부(和寧府)로 올렸다.태조 계유년에 영흥으로 고쳤다. 외조 최씨(崔氏)의 고향이다. 태종 계미년에 군으로 낮추었다가 다음해에 이전대로 하였으며, 병신년에는 화주목으로 낮추었다가 세종 병오년에 영흥부로 고쳤다. 성종 경인년에 감영을 설치하고 부윤으로 올렸다가 연산군 무오년에 도로 낮추었다. ○ 역양(歷陽)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5리이다. ○ 평주진(平州鎭) 본래는 영흥진인데 태조 때 평주(平州)로 고쳤다.ㆍ정변진(靜邊鎭)ㆍ영인진(寧仁鎭) 청원(淸源)이라고도 한다.ㆍ장평진(長平鎭) 예전에는 고질달(古叱達)이라고 일컬었다. 공민왕이 현으로 고쳤다.ㆍ요덕진(耀德鎭) 본래는 현덕진(顯德鎭)인데 공민왕이 현으로 고쳤다. 이 있다.
○ 안변(安邊) : 고구려 때의 비열홀군(比列忽郡)인데 천성(淺城)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비열주(比列州)라 하고 군주(軍主)를 두었다가 삭정군(朔庭郡)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등주안변부(登州安邊府)로 고쳤다. 태종 계미년에 현으로 낮추었다가 부(府)의 사람 조사의(趙思義)가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 해에 도로 부로 복구하였다.○ 삭방ㆍ학성(鶴城)이라고도 한다. ○ 25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0리이다. ○ 학포(鶴浦)는 속현이며, 고구려 때의 곡포현(鵠浦縣)이다. 영풍현(永豐縣) 본래 증대이(甑大伊)인데 고려 때 진을 두었다가 뒤에 현으로 고쳤다.ㆍ문산현(文山縣)은 폐현이고 고구려 때의 가지달현(加支達縣)으로 신라 때 청산(菁山)으로 고쳤다. 익곡(翼谷)도 폐현이며, 고구려 때의 어지탄현(於支呑縣)인데 신라 때 익계(翊溪)로 고쳤다. 서곡(瑞谷)도 폐현이고, 고구려 때의 원곡현(原谷縣)이다. 궁탄(弓呑)이라고도 한다. 파천(派川)도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기연현(岐淵縣)이다. 위산(衛山)도 폐현이고, 복령(福令)도 폐현이며, 복령(福靈)이라고 쓰기도 한다. 복평향(福平鄕)이다. 상음(霜陰)도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살한현(薩寒縣)이다.
○ 북청(北靑) : 고구려의 옛 땅인데 오랫동안 여진이 점거한 지역이었다. 윤관이 9성을 쌓을 때의 칭호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뒤에 원 나라에 빼앗겨 삼살(三撒)이라고 일컬었다. 공민왕 때 안북천호(安北千戶)를 두었다가 북청주(北靑州)로 고쳤다. 태조 무인년에는 청주부(靑州府)로 고쳤고, 태종 때 다시 북청이라 일컬었다. 청주와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세조 때 남도병영(南道兵營)을 두었다. ○ 청해(靑海)라고도 한다. ○ 19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10리이다.
○ 덕원(德源) : 고구려 때의 천정군(泉井郡)인데 어을매(於乙買)라고도 한다. 신라 때 정천(井泉)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용주(湧州)라고 일컬었고 뒤에 의주(宜州)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의천(宜川)으로 고쳤다. 세종 정사년에 덕원군으로 고쳤고 을축년에 부로 올렸다. 사조(四祖)의 고향이다. ○ 덕주(德州)ㆍ동모(東牟)ㆍ의춘(宜春)ㆍ의성(宜城)ㆍ춘성(春城)이라고도 한다. ○ 20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60리이다. ○ 진명(鎭溟)은 폐현이고 원산현(圓山縣)이라고도 하고 수강(水江)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진명사(鎭溟社)라 한다. 용진(龍津)도 폐현이다. 고호포(古狐浦)이다. 고려 때 용진진(龍津鎭)으로 고쳤고 뒤에 현을 두었다. 세조 때 나누어 덕원과 문천(文川)에 예속시켰다.
○ 정평(定平) : 옛날에는 파지(巴只)라고 일컬었으며 선위(宣威)라고도 한다. 고려 때 천정만호부(千丁萬戶府)를 두었고, 뒤에 성을 쌓고 관문을 설치하여 정주(定州)라고 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정평부로 고쳤다. 평안도의 정주와 이름이 같기 때문이다. ○ 중산(中山)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70리이다. ○ 장곡(長谷)은 폐현이며, 고려 때의 장주(長州)이니 가림(椵林)ㆍ단곡(端谷)이라고도 한다. 세종 때 폐읍하고 사(社)로 하였다. ○ 예원(預原)도 폐현이다. 고려 때 생천(牲川)에 성을 쌓아 원흥진(元興鎭)이라 하고, 또 예주(預州)에 성을 쌓아 방어사를 두었다. 태조 때 예주와 원흥을 합하여 예원군(預原郡)을 만들었다. 세조 무인년에 군을 폐지하고 정평에 예속시켜 독산사(禿山社)라고 일컬었다. 원성(原城)이라고도 한다.
○ 갑산(甲山) : 성이 있다. 본래 허천부(虛川府)인데 오랫동안 여진에게 점거되었다. 여러 차례 병화를 겪어 사람이 살고 있지 아니하였다. 공양왕이 처음으로 갑주만호부(甲州萬戶府)를 두었다. 태종 계사년에 갑산군으로 고쳤고 세종 때 진을 두었으며, 세조 신사년에 부로 올렸다. ○ 이산(夷山)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2백 75리이다.
○ 삼수(三水) : 성이 있다. 본래 갑산군 삼수보(三水堡)인데 세종 신유년에 만호를 두어 적병의 길목을 막게 하였고, 병인년에 다시 삼수군을 두었다. 단종 갑술년에 다시 만호로 하였다. 세조 임오년에 부로 올렸고 갑신년에 다시 군으로 낮추었다가 숙종 경인년에 다시 부로 올렸다. ○ 삼강(三江)이라고도 한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3백 65리이다.
○ 단천(端川) : 성이 있다. 본래 오림금촌(吳林金村)인데 오랫동안 여진에게 점거되었었다. 윤관이 성을 쌓고 복주(福州)를 두었다가 얼마 후에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뒤에 원 나라에 빼앗겨 원 나라가 이곳을 독로올(禿魯兀)이라고 일컬었다. 우왕 때에 단천으로 고쳤고, 태종 계사년에 단천군으로 고쳤으며, 숙종 경자년에 부로 올렸다. ○ 증산(甑山)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2백 5리이다.
○ 고원(高原) : 옛날의 덕녕진(德寧鎭)이니 홍원군(洪源郡)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성을 쌓고 고주(高州)라고 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고원군으로 고쳤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45리이다.
○ 문천(文川) : 옛날에는 매성(妹城)이라고 불렀는데 고려 때 성을 쌓고 문주(文州)라고 하였다. 뒤에 의주(宜州)와 합하였다가 얼마 후에 다시 분할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문천군으로 고쳤다. ○ 이균(伊均)이라고도 한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95리이다.
○ 홍원(洪原) : 옛날에는 홍긍(洪肯)이라고 일컬었으며 혹은 홍헌(洪獻)이라고도 한다. 고려 말기에 현을 두었으나 태조 무인년에 홍원으로 고치고 함흥에 예속시켰다. 태종 임오년에 다시 분할하여 현을 두었다가 얼마 후에 폐읍하고 도로 함흥에 예속시켰다. 세종 계축년(1433 세종 15)에 다시 현을 두었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20리이다.
○ 이성(利城) : 옛날에는 시리(時利)라고 일컬었다. 고려 때에는 복주(福州)에 예속되었다. 세종 병진년에 단천의 마운령(磨雲嶺) 남쪽에 있는 두 사(社)와 동사(東社)를 떼내어 이성현을 두었다. ○ 시질간(時叱間)ㆍ다보(多甫)ㆍ아사(阿沙)ㆍ관성(觀城)이라고도 한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백 15리이다.
○ 장진(長津) 결(缺)
○ 북도(北道) 길주(吉州) : 성이 있다. 고구려의 옛 땅인데 오랫동안 여진에 점거되었다. 윤관이 여진을 쫓아내고 국경선을 획정하니 동쪽은 화곶령(火串嶺)에 이르고, 북쪽은 궁한령(弓漢嶺)에 이르며 서쪽은 몽라골령(蒙羅骨嶺)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강토가 되었다. 궁한촌(弓漢村)에 6백 70칸(間)을 쌓고 길주라고 이름하였다가, 얼마 후에 여진에 돌려 주었다.뒤에 원 나라에 빼앗겨 해양(海洋)이라고 일컬었다. 공양왕이 길주 등처관 군민 만호부(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를 두고 영주(英州)ㆍ선화(宣化) 등의 진을 모두 여기에 예속시켰다. 태조 무인년에 길주목으로 고쳤다. 예종 기축년에 현으로 낮추어 길성(吉城)이라고 부르고, 이 주(州) 북쪽 영평 등 땅을 분할하여 따로 명천현(明川縣)을 두었다가 중종 임신년(1512, 중종 7)에 다시 올렸다. 선조 을사년에 다시 올렸다. ○ 삼해(三海) 혹은 삼양(三洋)이라고도 하였다.ㆍ웅성(雄城)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3백 85리이다.
○ 옛 웅주(雄州) 윤관이 여진을 쫓아내고 화곶령(火串嶺) 아래에 성을 쌓은 뒤 영해군웅주방어사(寧海郡雄州防禦使)를 두었다. 공양왕 때 길주(吉州)와 합하였다.《고려사》에 이르기를, “길주는 북쪽에 있고 웅주는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지금 그 땅을 상세히 알 수 없다. 가 있고, 옛 영주(英州) 윤관이 몽라골령 아래에 성을 쌓고 안령군 영주 방어사(安嶺軍英州防禦使)를 두었다. 지금 그 땅을 상세히 알 수 없다. 가 있으며, ○ 옛 선화진(宣化鎭) 윤관이 진을 두었다. 공민왕 때 수복하여 길주와 합하였다. 이 있다.
○ 경원(慶源) : 성이 있다. 옛날의 공주(孔州)인데 광주(匡州)라고도 한다. 오랫동안 여진에 점거되었었다. 윤관이 성채를 설치하고 공험진(公險鎭)이라고 하였다. 태조 무인년에 경원부로 고쳤다. 경성(鏡城)ㆍ용성(龍城) 이북을 분리시켜 여기에 예속시켰다. 태종 기축년에 관아를 소다로(蘇多老)의 옛 진영에 옮기고 경인년에 민가들을 옮겨 경성에 합하고 마침내 그 땅을 비우게 하였다.정축년에는 경성의 두롱이현(豆籠耳峴) 이북 땅을 분리시켜 부가참(富家站)에 다시 고을을 설치하였다. 세종 무신년에는 또 부의 관아를 회질가(會叱家)의 땅 남쪽 지방의 백성들을 옮겨다가 이곳에 채웠다. 추성(楸城)에 옮겼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2천 2백 9리이다. ○ 거양성(巨陽城)이 있다.
○ 회령(會寧) : 성이 있다. 고구려의 옛 땅 알목하(斡木河)이니 오음회(吾音會)라고도 한다. 태종 때 알타리(斡朶里)의 동맹가(童孟哥)가 허술함을 틈타서 들어와 살았다. 세종 갑인년에 알목하에 성과 보루를 설치하고 영북진(寧北鎭)으로 하여금 겸하여 관장하게 하였다.이해 여름에 따로 진을 두어 회령진이라고 일컫고 첨사를 두었다. 겨울에 부로 승격시켰다. ○ 오산(鰲山)ㆍ회산(會山)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9백 35리다. 공험령(公嶮嶺)이 있다. 지금은 상고 할 수 없다.
○ 종성(鐘城) : 성이 있다. 수주(愁州)이다. 세종 을묘년(1435, 세종 17)에 영북 본진(寧北本鎭)에 군을 두고 백안수소(伯顔愁所)이다. 종성이라고 불렀다. 경신년에 관아를 수주(愁州)로 옮기고, 본진은 도절제사의 행영으로 하였다. 신유년에 부로 올렸다. ○ 종산(鐘山)이라고도 한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2천 32리이다.
○ 온성(穩城) : 성이 있다. 다온평(多溫平)이다. 세종 경신년에 처음으로 군을 두어 온성으로 고치고 신유년에 부로 올렸다. ○ 전성(氈城)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2천 백 2리이다.
○ 경흥(慶興) : 성이 있다. 옛 공주(孔州)의 땅이다. 경원의 관아를 회질가(會叱家)로 옮겨 공주의 옛 성에 만호를 두었다. 을묘년에 따로 현을 두어 공성현(孔城縣)이라고 일컫다가 정사년에 군으로 올렸다. 목조(穆祖)가 처음으로 터전을 마련한 곳이다. 경흥으로 고치고 계해년에 부(府)로 올렸다. ○ 공성(孔城)ㆍ광성(匡城)이라고도 한다. ○ 서울과의 거리는 2천 3백 64리이다.
○ 부령(富寧) : 성이 있다. 경성군 석막(石幕)의 땅이다. 세종 신해년에 처음으로 영북진(寧北鎭)을 두고 경성을 겸하여 관장하게 하였다. 갑인년에 진을 백안수소(伯顔愁所)로 옮기고, 석막의 옛 땅을 토착 관리인 천호(千戶)가 지켰다.기사년에 부거현(富居縣)을 폐지하고 백성들을 석막으로 옮겨 부령부라고 이름하였다. ○ 영산(寧山)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6백 95리이다. ○ 부거(富居)는 폐현이다. 경성의 부가참(富家站)이니 지금의 회수역(懷綏驛)이다.
○ 명천(明川) : 성이 있다. 길주(吉州)의 명원역(明原驛)이다. 예종 기축년에 길주의 장덕산(長德山) 이북의 땅을 분할하여 따로 명천현을 두고 명원을 관아로 삼았다.중종 임신년에 현을 폐지하고 길주에 예속시켰다가, 계유년에 다시 분할하고 고을을 두었으며 선조 을사년에 부로 올렸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4백 55리이다.
○ 무산(茂山) : 성이 있다. 숙종 갑자년에 처음으로 부를 두었다. ○ 삼산(三山)ㆍ오대(鰲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8백 40리이다.
○ 경성(鏡城) : 성이 있다. 우롱이(亐籠耳)인데 목랑고(木郞古)라고도 한다. 태조 무인년에 처음으로 경성이라고 일컫고 만호를 두었다. 정종 경진년에 군으로 올렸고 세종 병진년(1436 세종 18)에 부로 올렸다. 세조 정해년에 북병영을 두었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5백 95리이다.
○ 평안도 : 동북과 동은 함경도의 경계이고, 동남은 함경도ㆍ황해도 두 도(道)의 경계이며, 남은 황해도의 경계이고, 서남과 서는 바다이고, 서북은 압록강, 북은 여진(女眞)의 경계이다. 42 고을, 남도 22고을, 북도 20고을 본래 조선 땅인데 한4군 때에는 낙랑군(樂浪郡)이다. 뒤에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당 나라의 장수 이적(李勣)과 더불어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키고 마침내 그 땅을 병합하였다. 패강(浿江) 대동강 이남의 땅은 한주(漢州)에 예속되고 강 북쪽은 모두 발해와 여진에 들어갔다. 신라 말기에 궁예가 이 땅을 나누어 패서(浿西) 13진(鎭)을 두었다. 고려가 점차로 수복하여 성종 때에는 패서도를 두었다.뒤에 북계(北界)라고 일컬었고 숙종 때에는 서북면이라고 일컬었다. 뒤에 황주목(黃州牧)ㆍ안악군(安岳郡)ㆍ철화현(鐵和縣)ㆍ장명진(長命鎭)을 여기에 예속시켰다. 우왕 때에 다시 예속하였다. 본조의 초기에 압록강 안의 땅을 모조리 개척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평안도로 고쳤다. 병신년에 여연군(閭延郡)을 설치하였고, 세종 때에 자성(慈城)ㆍ우예(虞芮)ㆍ무창(茂昌)을 설치하였다. 여연ㆍ무창ㆍ우예는 본래 영길도(永吉道)ㆍ갑산(甲山)의 땅인데 여기에 예속시켰다. 세조 을해년에 모두 폐지하고 그 땅을 비워버렸다.
○ 남도 평양 : 성이 있다. 단군이 평양에 도읍을 정하여 전조선(前朝鮮)이 되었고, 기자(箕子)가 와서 여기에 도읍을 정하여 후조선(後朝鮮)이 되었으며, 위만(衛滿)이 왕험성(王險城) 왕검성(王儉城)이라고도 한다. 에 도읍을 정하여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되었다. 한 무제가 왕검성을 낙랑군으로 삼았다.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이 국내성(國內城)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적(李勣)이 신라와 합력하여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키고 여기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다.고려 태조 때에는 서경이라고 하였다. 평양이 황폐하다고 하여 염주(鹽州)ㆍ백주(白州)ㆍ황주(黃州)ㆍ해주(海州)ㆍ봉주(鳳州) 등 여러 고을의 백성들을 옮겨다가 이곳을 채웠다. 뒤에 서도(西都)로 고쳤다. 혹은 호경(鎬京)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뒤에 몽고에 빼앗겨 동녕부(東寧府)라 하였고 파령(岊嶺)을 경계로 삼았다. 원 나라가 우리에게 돌려주어 다시 서경이 되었다. 공민왕이 여기에 만호부(萬戶府)를 두었고 뒤에 평양부로 고쳤다. 본조에서는 감영을 설치하였다. ○ 기성(箕城)ㆍ장안(長安)ㆍ유경(柳京)이라고도 한다. ○ 36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66리이다.
○ 안주(安州)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식성군(息城郡)인데 신라 때 중반군(重盤郡)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팽원군(彭原郡)으로 고쳤으며, 또 안북부(安北府)를 두었다가 영주 안북부(寧州安北府)로 고쳤다. 공민왕이 안주 만호부를 두었다가 뒤에 목(牧)으로 올렸다. ○ 안릉(安陵)ㆍ밀성(密城)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36리이다. ○ 옛날의 맹주(孟州) 맹산(孟山)이 본주의 속향일 때의 관아이다. 이다.
○ 성천(成川) : 비류왕 송양(松讓)의 옛 수도인데 고구려의 동명왕이 다물도(多勿都)를 두었다. 송양을 다물후로 봉하였다. 고려 태조가 여기에 강덕진(剛德鎭)을 두고 뒤에 성천군으로 고쳤으며 태종 을미년에 성천부로 고쳤다. ○ 졸본 부여(卒本扶餘)라고도 한다. ○ 25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6리이다.
○ 숙천(肅川) : 고려 때의 평원군(平原郡)인데 태조가 진국성(鎭國城)을 이곳으로 옮겨 쌓고 통덕진(通德鎭)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뒤에 숙주(肅州)라고 일컫다가 군으로 고쳤다. 태종 병신년에 숙천부로 올렸다. ○ 평원(平原)이라고도 한다. ○ 14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6리이다.
○ 중화(中和) : 고구려 때의 가화압(加火押)인데 신라 때 당악현(唐岳縣)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서경의 속촌이 되었다가 뒤에 중화현으로 하였다. 묘청의 반란이 있은 뒤에 경기의 4도(四道)를 나누어 6현으로 하였다. 뒤에 군으로 올렸다가 선조 임진년에 부로 올렸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6리이다. ○ 송현(松峴)은 폐현이다. ○ 고구려의 부사파의현(夫斯波衣縣)이다.
○ 자산(慈山) : 고려 때의 문성군(文城郡)인데 태안주(太安州)로 고쳤다가 자주(慈州)로 고쳤으며 다시 군으로 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자산으로 고쳤다. 연산군 을축년에 폐읍하였다가 중종 초년에 다시 그전대로 두었다. 숙종 계미년(1703, 숙종 29)에 부로 올렸다. ○ 자모(慈母)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6리이다.
○ 삼화(三和) : 고려 때 경기를 나누어 삼화현을 만들었다. 금당(金堂)ㆍ호산(呼山)ㆍ칠정(漆井)의 세 부곡을 합한 것이다. 숙종 병인년(1686, 숙종 12)에 부로 올렸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6리이다.
○ 상원(祥原) : 고구려 때의 식달현(息達縣)인데 신라 때에는 토산(土山)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황주(黃州)에 예속시켰다가 상원군이라 고쳤고 뒤에 본도에 예속시켰다. ○ 금달(今達)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6리이다.
○ 함종(咸從) : 고려 때의 아선성(牙善城)인데 뒤에 함종현으로 고쳤다. 경종 신축년에 부로 올렸다. ○ 아산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6리이다.
○ 덕천(德川) : 고려 때의 요원군(遼原郡)인데 장덕진(長德鎭)이라고도 한다. 덕주(德州)로 고쳤다가 태종 계사년에 덕천으로 고쳤다. 얼마 안되어 맹산과 합하여 덕맹현(德孟縣)이라고 일컫다가 얼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46리이다. ○ 옛 무산현(撫山縣) 옛날에는 영변에 예속되었으나 세조 때에 덕천에 예속되었다. 이 있다.
○ 개천(价川) : 고려 때의 안수진(安水鎭)인데 연주(連州)로 고쳤다가 조양진(朝陽鎭)으로 고치고, 다시 익주(翼州)로 고쳤으며 또 개주(价州)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개천군으로 고쳤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91리이다.
○ 순천(順川) : 고려 때의 정융군(靜戎郡)인데 순주(順州)로 고쳤다. 뒤에 덕주(德州)에 합하였다가 다시 나누어 군으로 하였고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순천군으로 고쳤다. ○ 15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21리이다.
○ 용강(龍岡) : 옛날의 황국(黃國)인데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고려 때에는 황룡성(黃龍城)이라고 일컬었고 군악(軍岳)이라고도 한다. 뒤에 용강현으로 고쳤다. ○ 오산(烏山)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6리이다.
○ 영유(永柔) : 고려 때의 정수현(定水縣)인데 뒤에 영청(永淸)으로 고쳐 용강(龍岡)에 예속시켰으며, 또 현을 폐지하고 안인(安仁)의 진장(鎭將)이 겸임하게 하였다. 태조 계유년에 안인진을 안주(安州)에 이속시키고 통해현(通海縣)과 영원(寧遠)ㆍ유원(柔遠) 두 진(鎭)과 합쳐서 영녕현이라고 일컬었다.세종 계묘년(1423, 세종 5)에 영유로 고쳤다. ○ 청계(淸溪)라고도 한다. ○ 14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6리이다. ○ 유원진(柔遠鎭)이 있고 고려 때의 평로진(平虜鎭)이다. ○ 옛 영원이 있다. 세조가 영원은 요해지라고 하여 별도로 군을 두었다. 통해(通海)는 폐현이다.
○ 증산(甑山) : 본래 강서현(江西縣)의 증산향인데 태조 갑술년에 분할하여 현으로 하였다. ○ 서하(西河)라고도 한다. ○ 선조 을미년에 폐읍하였다가 정미년에 다시 두었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6리이다.
○ 삼등(三登) : 고려 때 서경기(西京畿)에서 분할한 성주(成州)의 삼부곡(三部曲) 신성(新城)ㆍ나평(蘿坪)ㆍ구아(狗牙) 을 합하여 삼등현(三登縣)을 만들었다. 6현(縣) 중의 하나이다. 세종 때 강동현(江東縣)과 합하였다가 세조 을해년에 폐지하였다. ○ 능성(能城)이라고도 하고 양양(陽壤)이라고도 한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6리이다.
○ 순안(順安) : 고려 때 서경기(西京畿)에서 분할하여 순화현(順和縣)을 만들었다. 6현 중의 하나이다. 태조 병자년에 관아를 평양의 안정참(安定站)으로 옮겼다. ○ 평교(平郊)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60리이다.
○ 강서(江西) : 고려 때 서경기(西京畿)에서 분할하여 강서현을 만들었다. 6현 중의 하나이다. 태조 갑술년에 증산향(甑山鄕)을 나누어 따로 증산현을 만들었다. ○ 무학(舞鶴)이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16리이다.
○ 양덕(陽德) : 본래 고려 때의 양암(陽巖)ㆍ수덕(樹德) 두 진인데, 태조 병자년에 합하여 양덕현을 만들었다. ○ 동양(東陽)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96리이다.
○ 맹산(孟山) : 고려 때의 철옹현(鐵甕縣)인데 뒤에 맹주(孟州) 맹주(猛州)라고도 쓴다. 라고 일컬었다. 뒤에 은주(殷州)에 합하였다가 또 나누어 현을 두었다. 태종 신사년에 안주와 합하였다가 갑오년에 다시 예전대로 하였다. 또 맹주ㆍ덕주(德州)와 합하여 덕맹(德孟)이라고 일컫다가 다음해에 분할하여 맹산현으로 하였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46리이다.
○ 강동(江東) : 고려 때 서경기(西京畿)에서 분리하여 강동현을 만들었다. 6현 중의 하나이다. 뒤에 성주에 예속되었다가 다시 현을 두었다. 세종 을묘년에 폐읍하고 삼등에 예속시켰으며, 삼등현의 관아를 이 고을에 옮겼다. 성종 임인년에 다시 현을 두었다. ○ 송양(松壤)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6리이다.
○ 은산(殷山) : 고려 때의 흥덕군(興德郡)인데 동창(同昌)이라고도 한다. 뒤에 은주(殷州)라고 일컬었다. 태종 갑오년에 폐읍하고 자산(慈山)에 예속시켰다가 을미년에 분할하여 은산현으로 하였다. 인조 계미년(1643, 인조 21)에 부로 올렸다가 얼마 후에 도로 낮추었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6리이다.
○ 북도(北道) 의주 : 성이 있다. 고려 때의 용만현(龍灣縣)인데 화의(和義)라고도 한다. 거란이 압록강의 동쪽 언덕에 성을 쌓고 보주(保州)라고 일컬었으며, 또 궁구문(弓口門)을 설치하고 포주(抱州)라고 일컬었다. 파주(把州)라고도 한다. 그곳의 요(遼) 나라 사람이 우리나라에 귀화하였으므로 의주(義州)라고 고치고, 남쪽 지방 사람들을 데려다가 이곳을 채웠다. 다시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다. 뒤에 낮추어 함신(咸新)이라고 일컫다가 얼마 후에 복구하고 또 목(牧)으로 올렸다. 또 만호부를 두고 좌정(左精)ㆍ우정(右精)ㆍ충신(忠信)ㆍ의용(義勇)의 4군(軍)을 두었다. 선조 계사년에 부윤으로 올렸다. 태종 임오년에 정주(靜州)와 함원진(咸遠鎭)을 예속시켰다. ○ 송산(松山)이라고도 한다. ○ 21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96리이다.
국내성(國內城) : 불이성(不而城)이라고도 한다. 고구려의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겨서 위나암성(尉那岩城)을 쌓고 4백년을 지나다가 장수왕 때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지리지(高麗地理志)》에는, “인주(麟州)에 긴 성터가 있으니 덕종조 때 유소(柳韶)가 축조한 것이다. 압록강이 바다에 흘러 들어간 곳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고 하였다.또 <병지>에는 “서해빈(西海濱)의 옛날 국내성의 경계인 압록강이 바다에 들어간 곳을 기점으로 하였다.” 하니, 국내성은 당연히 옛 인주의 경내에 있는 것이다. 김부식의 《고구려지지(高句麗地志)》에는 “국내성은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압록강 이북의 한(漢) 나라 현도군(玄菟郡)의 경계인 요동경(遼東京) 요양(遼陽)의 동쪽에 있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어느 설이 옳은지 상세히 알 수 없다.
옛 정주(靜州) : 본래 고려의 송산현(松山縣)인데 덕종(德宗) 때 성을 쌓고 정주진이라고 하였다. 태종 때 의주(義州)에 예속시켰다. 세종 때에 또 석성(石城)을 쌓았다.
옛 인주 : 본래 고려의 영제현(靈蹄縣)인데 현종 때 인주(麟州)라고 일컬었고 토성을 쌓았다. 세상에서는 오여(烏餘)라고 불렀다. 뒤에 함인군(含仁郡)이라 낮추어 불렀고, 본조에서는 의주에 예속시켰다가 세종 때 인산진을 두었다.
옛 영주(靈州) : 본래, 고려 때의 흥화진(興化鎭)인데 현종 때에 영주로 올렸다.
옛 정령현(定寧縣) : 태종 5년에 현령을 두었다. 세종 때 방산(方山)으로 옮기고 군으로 올렸다. 세조 원년에 옛 읍으로 돌아왔으나 2년에 폐읍하고 의주에 예속시켰다.
○ 영변(寧邊) : 성이 있다. 영주(迎州)는 고려 때의 밀운군(密雲郡)인데 연주(延州)로 고쳤다가 연산부(延山府)로 올렸다. 무주(撫州)는 고려 때의 운남군(雲南郡)인데 또는 고청산(古靑山)이라고도 한다. 뒤에 현을 두었다. 태종 계사년에 무산현(撫山縣)으로 고쳤다. 세종 기유년에 영산(迎山)과 무산(撫山)을 합하여 영변부라 하고 약산성(藥山城)에 읍(邑)을 두었다. 단종 때 병영을 설치하였다. 세조 때 옛 연주의 땅을 분할하여 운산(雲山)에 예속시켰다. ○ 안삭고청산(安朔古靑山)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96리이다. ○ 옛 위주(渭州)가 있으며 낙릉군(樂陵郡)인데 옛날에는 덕성(德城)이라고도 하였다. 고려 때 위주로 고쳤으며, 위천성이 있다. 행인국(荇人國)이 있다. 태백산의 동쪽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땅을 자세히 알 수 없다.
○ 정주(定州) : 성이 있다. 고려 때의 구천군(龜川郡)인데 정원부(定遠府)로 올리고 또 정주목으로 고쳤다. 세조 을해년에 분할하여 옛 구주(龜州)의 땅에 구성군(龜城郡)을 두고 정주의 관아를 수주(隨州)로 옮기고 마침내 수천군(隨川郡)을 폐하였다. ○ 조천(鳥川)이라고도 한다. ○ 19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56리이다. ○ 수천(隨川)은 폐현이다. 고려 때의 수주이니 곽주(郭州)를 겸하게 하였다가 뒤에 다시 분할하여 곽주를 두었다. 태종 계사년에 수천군으로 고쳤고, 세조 때 폐읍하고 정주의 관아를 이곳으로 옮겨 왔다.
○ 강계(江界) : 성이 있다. 옛날에는 독로강(禿魯江)이라고 일컬었다. 고려 때에는 만호를 두고 강계로 고쳤다. 진변(鎭邊)ㆍ진성(鎭城)ㆍ진안(鎭安)ㆍ진녕(鎭寧)의 네 군을 만들었다. 태종 신사년에 입석(立石)ㆍ등이언(等伊彦)의 두 땅을 합하여 석주(石州)라고 일컫고 부로 고쳤다. 세종 때 도절제사의 진영을 두었으나 조금 후에 폐지하였다. ○ 청원(淸源)이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3백 46리이다. ○ 여연(閭延)은 폐부이며 본래 함길도 갑산부(甲山府)의 여연촌인데, 태종 병신년에 부(府)와의 거리가 너무 멀다고 하여 소훈두(小薰豆)의 서쪽을 떼내어 여연군을 만들어 본도에 예속시켰다. 세종 때 부(府)로 올렸으며, 세조 을해년에는 그 땅을 비워 버리고 그곳의 백성들을 구성으로 옮겼다. 무창(茂昌)은 폐군이고, 본래 여연부의 상무로보(上無路堡)인데 세종 병진년에 만호를 두었다. 뒤에 또 무창현을 두었다가 군으로 올렸다. 세조 때 그 땅을 비워 버렸다. 우예(虞芮)도 폐군이며 본래는 여연보(閭延堡)이니 처음에 만호(萬戶)를 두었다가 세종 때 우예군을 두었다. 세조 때 그 땅을 비워 버리고 그곳의 백성을 부로 옮겼다. 자성(慈城)도 폐군이다. 본래 여연 때, 번강(番江)의 자작리(慈作里)였다. 세종 때 자성군을 두었으며 세조 때 그 땅을 비워버렸다.
○ 창성(昌城) : 성이 있다. 창주(昌州)는 고려 때의 장정현(長靜縣)인데 창주로 고쳤으며, 이성부(泥城府)에는 만호를 설치하였다. 진평(鎭平)ㆍ진강(鎭康)ㆍ진정(鎭靜)ㆍ진원(鎭遠)의 4군(四軍)을 만들었다. 태종 임오년에 이성을 창주에 합하여 창성군으로 고쳤다. 계사년에 현으로 고쳤다가 세종 때 부(府)로 올렸다. 7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백 6리이다.
○ 삭주(朔州) : 성이 있다. 고려 때의 영새현(寧塞縣)인데 삭주로 고쳤다가 부로 올렸다. 태조 갑술년에 땅의 경계가 서로 어긋난다 하여 옛 구주와 그 부근의 12촌(村)을 분리하여 여기에 합쳤다. 군으로 낮추었다가 태종 계사년에 부로 올렸다. 세종 기미년에 군으로 낮추었다가 경신년에 다시 부로 올렸다. 세조 병술년에는 고을의 관아를 소삭주(小朔州)로 옮겼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36리이다.
○ 구성(龜城) : 성이 있다. 고려 때의 만년군(萬年郡)이며 구주(龜州)로 고쳤다. 정원부로 올렸다가 또 정주목으로 고쳤다. 뒤에 주의 관아를 마산(馬山)의 남쪽으로 옮겼다. 세조 을해년에 옛 구주를 떼내어 구성군을 만들고 여연과 무창을 없애고, 그곳의 백성들을 구성군으로 옮겨 왔다. 병술년에 부로 올렸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96리이다. ○ 안의진(安義鎭)이 있다. 옛날에는 수주에 예속시켰다가 세조 때 구성에 예속시켰다.
○ 선천(宣川) : 성이 있다. 본래 안화군(安化郡)인데 고려 초기에 통주(通州)로 고쳤다가 선주(宣州)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선천군으로 고쳤으며, 명종 계해년에 부로 올렸다가 조금 후에 도로 낮추었으나 인조 계해년에 다시 올렸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23리이다. ○ 동림성(東林城)이 있다. 옛 선주성(宣州城)이다.
○ 철산(鐵山) : 고려 때의 장녕현(長寧縣)인데 동산(銅山)이라고도 한다. 철주(鐵州)로 고쳤다가 태조 임신년에 지주(知州)라 하고 영삭 만호(寧朔 萬戶)를 겸하게 하였다.태종 계사년에 철산으로 고쳤다. 을미년에 만호를 폐지하고 그대로 군으로 하였다. 광해군 임술년(1622, 광해군 14)에 부로 올렸다. ○ 철천(鐵川)이라고도 한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76리이다. ○ 옛 영삭성(寧朔城)이 있다. 옛날에는 만호영(萬戶營)이 있었다.
○ 용천(龍川) : 성이 있다. 고려 때의 안흥군(安興郡)인데 용천으로 고쳤다가 용만부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용천으로 고쳤고 광해군 경신년에 부로 올렸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6리이다. ○ 유등정(柳等井)은 폐현이다.
○ 초산(楚山) : 성이 있다. 본래 여진이 살던 두목리(豆木里)이다. 태종 임오년에 산양회(山羊會) 등의 땅을 합하여 이주(理州)라고 하였다가 계사년에 이산(理山)으로 고쳤다. 세종 때 관아를 앙상리(央上里)로 옮겼다. 경종 갑진년에 군을 부로 올렸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백 96리이다.
○ 가산(嘉山) : 고려 때의 신도군(信都郡)인데 고덕현(古德縣)이라고도 한다. 가주(嘉州)로 올렸다가 무령(撫寧)이라고 낮추어 불렀다. 태종 계사년에 가산군으로 고쳤다. ○ 고덕진(古德鎭)이라고도 한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96리이다.
○ 곽산(郭山) : 고려 때의 장리현(長利縣)인데 곽주(郭州)로 고쳤다가 정양(定襄)이라고 낮추어 불렀었다. 태종 계사년에 곽산군으로 고쳤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6리이다.
○ 희천(熙川) : 고려 때의 청새진(淸塞鎭)인데 위주(威州)로 올렸다가 희주(熙州)로 고치고 개주(价州)에서 겸하여 관리하게 하였는데, 태조 병자년에 분할하고 군을 두었다. 태종 계사년에 희천으로 고쳤다. ○ 위성(威城)이라고도 한다. 8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1리이다. ○ 봉단성(鳳丹城)이 있다.
○ 벽동(碧潼) : 성이 있다. 여진이 살던 임토(林土)ㆍ벽단(碧團)의 땅인데 공민왕이 이성만호(泥城萬戶) 김진(金進) 등을 보내어 쳐서 쫓아버리고 임토를 음동(陰潼)이라고 고친 뒤에 벽단을 여기에 예속시켰다. 남쪽 지방의 사람들을 뽑아 이곳을 채웠다. 태종 계미년에 벽동군(碧潼郡)으로 고쳤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백 21리이다.
○ 운산(雲山) : 고려 때의 운중군인데 고원화진(古遠化鎭)이라고도 한다. 위화진(威化鎭)으로 고쳤다가 운주(雲州)로 개칭하고 태종 계사년에 운산으로 고쳤다. 운양(雲陽)이라고도 한다. 세조 기묘년에 폐읍하고 영변부에 예속시켰다가 임오년에 복구하였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56리이다.
○ 박천(博川) :고려 때의 박릉군(博陵郡)인데 고덕창(古德昌)이라고도 한다. 박주(博州)로 고쳤다가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박천으로 고쳤다. 세조 기묘년에 폐읍하고 영변부에 예속시켰다가 갑신년에 예전대로 하였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76리이다.
○ 위원(渭原) : 본래 초산군(楚山郡)의 도을한보(都乙漢堡)인데, 세종 계해년(1443 세종 25)에 사방이 모두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을 때에 구원하기 어렵다고 하여, 강계ㆍ초산(楚山)의 땅을 분할하여 위원군을 만들었다. 세조 경진년에 폐읍하고 이산(理山)에 예속시켰다가 계미년에 이전대로 하였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천 2백 36리이다. ○ 봉화대(烽火臺) 보루가 있다.
○ 영원(寧遠) : 고려 때의 영원진인데 태조 병자년에 영청현(永淸縣)과 합하여 영령(永寧)이라고 일컫다가 세조 병술년에 옛 영원 땅에 따로 군을 두었다. ○ 요원(遼原)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91리이다.
○ 태천(泰川) : 고려 때의 광화현(光化縣)인데 영삭(寧朔)ㆍ연삭(連朔)이라고도 하였는데 태주(泰州)라고 고쳤다. 공민왕 때 무주(撫州)ㆍ위주(渭州) 두 주를 이 군에 예속시켰고 뒤에 다시 분할하여 두 주를 두었다.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태천군으로 고쳤고, 성종 임인년에 현으로 낮추었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36리이다.
용재집(容齋集) 제1권
 칠언 절구(七言絶句)
사화(士華)와 중열(仲說) 두 학사(學士)에게 삼가 올리다. 4수(四首)

높은 이름은 이미 의춘 몫이 되었고 / 高名已付宜春
묘한 시구는 온전히 읍취옹에게 양보했지 / 妙句全輸挹翠翁
늙은 나 평생 두고 무엇이 한스러우랴 / 老我平生何所恨
게다가 두 눈이 남아 나는 기러기 보내는데 / 且留雙眼送飛鴻
내가 바야흐로 눈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였다.

대명 아랜 진실로 오래 머물기 어려운 법 / 大名之下信難居
자기 몸가짐엔 처음이 중요한 줄 알아야지 / 行己須知自有初
비방과 칭찬이 우리들에게 무슨 상관이랴 / 毀譽豈關吾輩事
지금에야 비로소 뉘우치고 전거로 삼노라 / 只今方悔作前車

평소의 출처가 대략 서로 같았더니 / 平生出處略相如
내가 몹시 부끄러운 줄 이제야 알겠구려 / 此日方知媿有餘
우리들 몹시 요락함이야 아랑곳 않나니 / 遮莫吾儕太寥落
옥인이 다시금 이영려에 가까이 갔구나 / 玉人還近邇英廬
당시 사화가 응교(應敎)에 배수되었다.

지금 사람은 앞사람 무시해선 안 되니 / 今人未可薄前人
조금 굽힌 것은 크게 펴기 위함인 것을 / 少屈那知欲大伸
인생 백 년 사업을 다 마치기 어려운데 / 事業百年難自必
세상에서 어찌 내 몸 잃는 것 한탄하리 / 世間何恨失吾身

[주D-001]의춘자(宜春子) : 조선조 문신 남곤(南袞)을 가리킨 말이다. 그의 자가 사화(士華)이고, 본관이 의령(宜寧)인데 의령의 또 다른 이름이 의춘(宜春)이므로 이렇게 부른 것이다.
[주D-002]읍취옹(挹醉翁) : 조선조 학자요 시인인 박은(朴誾)의 호가 읍취헌(挹翠軒)이고 자가 중열(仲說)이다.
[주D-003]두 눈이 …… 보내는데 : 위(魏)나라 혜강(嵇康)의 시 〈증수재입군(贈秀才入軍)〉에 “눈으로 멀리 돌아가는 기러기를 보내고 손으로 오현금을 뜯는다.[目送歸鴻 手揮五絃]”라고 한 대목을 차용한 것으로, 매우 자적(自適)함을 뜻한다.
[주D-004]대명(大名) …… 법 : 성대한 명성을 얻으면 화를 초래하기 쉬워 오래 있기 어렵다는 뜻으로, 《사기(史記)》 월세가(越世家)에 보이는 범려(范蠡)의 말이다.
[주D-005]전거(前車) : 앞의 잘못을 거울삼는다는 뜻으로, 《대대례(大戴禮)》 보부(保傅)편에, “앞의 수레가 넘어짐에 뒤의 수레가 조심한다.[前車覆 後車誡]” 하였다.
[주D-006]이영려(邇英廬) : 송(宋)나라 때 금원(禁苑)의 궁전인 이영각(邇英閣)으로, 영재(英才)를 가까이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용재집(容齋集) 제1권
 칠언 절구(七言絶句)
숙달(叔達)에게 주다. 2수(二首)

날이 밝도록 술 마시길 그치지 않으니 / 夜飮連明不肯休
우리의 풍류 여기서 더없이 무르녹았지 / 吾儕於此極風流
이미 조물주에게 오랜 휴가 얻었으니 / 已從造物占長暇
의춘에게 가서 좋은 놀이 벌이세나 / 且向宜春作勝遊

북쪽 이웃서 말 빌리고 서쪽 집서 종 빌리어 / 北隣借馬西家僕
남쪽 산에 꽃을 찾고 동쪽 들판 방초 찾으세 / 南嶽尋花東野芳
인생 만사 그 무엇도 행락만 못하느니 / 萬事不如行樂耳
일생에 봄빛을 그 얼마나 누릴 수 있으랴 / 一生能費幾春光

[주D-001]의춘(宜春) : 조선조 문신 남곤(南袞)을 가리킨 말이다. 그의 자가 사화(士華)이고, 본관이 의령(宜寧)인데 의령의 또 다른 이름이 의춘(宜春)이므로 이렇게 부른 것이다.
칠언 절구(七言絶句)
화답(和答)하여 올리다. 2수(二首)

도단은 북쪽에 도인은 남쪽에 있는데 / 道壇在北道人南
왕래하는 사람들 전삼이요 후삼이로세 / 來往前三定後三
뒷날 화봉 사람 비록 다시 늙을지라도 / 他日華封雖更老
한마음은 오로지 장수와 다남 축원하리
/ 一心唯祝壽多男

조정 관모가 가벼운 도건만 못하느니 / 朝簪不似道巾輕
정결한 세계가 속인의 뼈 시원케 하누나 / 淨界能令俗骨淸
삼 년에 세 번 온 것 공은 괴이쩍어 말라 / 三歲三來公莫怪
일 년에 한 차례씩 내가 속정(俗情)을 잊는다오 / 一年一度我忘情

늙어 가매 세상 굴레 이미 가벼우니 / 老來身世已相輕
독 속에 든 술에는 관심 갖지 않으오 / 未肯關心甕裏淸
지척의 계산이 되레 만리인 양 머니 / 咫尺溪山還萬里
오늘 밤 달빛 밝을 제 이 마음 어이할꼬 / 今宵月色若爲情

날갯짓도 가벼운 신선의 학을 빌어 / 願借仙禽羽翼輕
훨훨 날아 열흘 동안 삼청궁을 두루 보고 / 泠然旬日遍三淸
돌아와선 다시금 의춘라 술잔 잡고 / 歸來更把宜春
표표히 속세를 벗어난 심정 죄다 말하고저 / 說盡飄飄遺世情
원시(原詩)에 청학(靑鶴)이란 말이 있기에 애오라지 이렇게 말해 보았다.

주송과 다경은 본래 우열이 없으니 / 酒頌茶經本重輕
백이 유하혜 성인도 청과 화가 있었지 / 聖稱夷惠有和淸
한 사발 차를 마시고서 달게 자다가 / 一甌啜罷還甘寢
꿈결에 조구와 노닒은 역시 옛정이지 / 夢逐糟丘亦故情
몽(夢) 자의 뜻을 부연하였다.

선비란 본래 몸 가볍기 쉽지 않지만 / 士亦從來未易輕
이 마음 곳곳마다 절로 맑을 수 있지 / 此心隨處自能淸
잔 엎고 사흘을 공연히 시 읊었나니 / 覆觴三日空吟嘯
사람을 속인 봄빛 너무도 박정하여라 / 春色欺人太薄情


[주D-001]전삼(前三)이요 후삼(後三)이로세 :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으로, 당(唐)나라 무착 선사(無着禪師)와 문수보살(文殊菩薩)과의 문답에서 나온 말이다. 무착 선사가 문수보살에게 이곳의 대중(大衆)은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문수보살이 “앞도 삼삼이요, 뒤도 삼삼이다.” 하였다 한다. 여기서는 단순히 이곳을 왕래하는 사람의 숫자를 뜻한다.
[주D-002]화봉(華封) …… 축원하리 : 화(華)라고 하는 땅의 봉인(封人)이 수(壽), 부(富), 다남자(多男子)라고 하는 세 가지로써 요(堯) 임금을 축도(祝禱)했던 데서 온 말로, 성어(成語)로는 화봉삼축(華封三祝)이라 한다. 《莊子 天地》 여기서 화봉 사람은 작자 자신을 가리킨다.
[주D-003]의춘주(宜春酒) : 당(唐)나라 때 중화절(中和節)에 신을 제사할 때 쓰던 술인데, 여기서는 본관이 의령(宜寧), 즉 의춘인 조선조 문신 남곤(南袞)의 집 술을 뜻하는 듯하다.
[주D-004]주송(酒頌)과 다경(茶經) : 진(晉)나라 유령(劉伶)이 지은 〈주덕송(酒德頌)〉과 당(唐)나라 육우(陸羽)가 지은 《다경(茶經)》을 가리킨다.
[주D-005]백이(伯夷) …… 있었지 : 맹자가 성품이 매우 개결(介潔)한 백이를 두고 ‘성인 중 맑은 자[聖之淸者]’라 하고, 성품이 매우 혼후(渾厚)한 유하혜(柳下惠)를 두고 ‘성인 중 온화한 자[聖之和者]’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차를 백이에, 술을 유하혜에 비기고 있다. 《孟子 萬章下》 《용재집》 제1권 〈공석(公碩) 김세필(金世弼)이 작설차를 보내 주었기에〉 넷째 수의 원주(元註)에 자세한 내용이 있다.
[주D-006]꿈결에 …… 옛정이지 : 조구(糟丘)는 동조구(董糟丘)로, 이백(李白)의 시에, “추억하노니 낙양의 동조구가 나를 위해 천진교(天津橋) 남쪽에 주루(酒樓)를 지었었지.” 하였다. 여기서는 술을 뜻하는바, 작자 자신이 술을 끊고 차를 마시지만 꿈속에서는 혹 술을 마시기도 하는데, 이는 과거에 술을 좋아했던 마음이 남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주D-007]몸 가볍기 : 신선처럼 몸이 가벼워 세상을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주D-008]잔 엎고 …… 박정하여라 : 봄빛이 좋아 술을 끊고 시를 읊었는데, 봄빛은 무정하게도 일찍 시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용재집(容齋集) 제5권
 남천록(南遷錄) 을축년 봄 정월, 함안(咸安)으로 배소(配所)를 옮긴 뒤에 지은 시들이다.
주필(走筆)로 2월 26일의 일을 뒤미처 기록하다.
용재집(容齋集) 제7권
 해도록(海島錄)
내가 찬축(竄逐)되어 섬에 살면서부터 자주 자진(子眞), 직경(直卿), 공석(公碩) 등 제공(諸公)과 함께 서로 시를 주고받아 창수(唱酬)하였는데, 스스로 생각해 보니 근래 이삼 년 사이 망형(忘形)의 교분을 맺은 벗들이 하늘과 인간의 앙화(殃禍)로 거의 다 세상을 떠나고, 살아 있는데도 만나지 못하는 이는 남사화(南士華)와 권숙달(權叔達)뿐이다. 이제 제공(諸公)들이 창수한 시편들에 따라 연구(聯句)로 차운하여 심회를 말하매 옛날을 애도하고 오늘을 상심하는 중 정이 절로 복받쳤으니, 그저 시를 짓는다고 지은 것은 아니다. 10수(十首)

분분한 비방과 칭찬이 들끓건만 / 毁譽紛紛萬口騰
이 공의 마음은 모릉하지 않았지 / 此公心地不摸稜
초강 어드메서 남긴 패물 찾을꼬 / 楚江何處尋遺佩
원컨대 오색 끈으로 묶은 밥통을 부치고저 / 願寄纏筒五彩繩
정순부(鄭淳夫)가 임술년 5월 5일, 스스로 강에 빠져 죽었다.

이 사람은 응당 백운향에 있어야 할 몸 / 斯人合在白雲鄕
한 번 세상에 귀양 와 상전벽해 되었구나 / 一謫塵區海變桑
광릉산이 이제 끊겼음을 통곡하노니 / 痛哭廣陵今已絶
이승에서 다시는 아양곡 들을 수 없어라 / 此生無復聽峨洋
박중열(朴仲說)이 갑자년 6월 15일, 화를 당했다.

흰 칼날 비낀 한길에 홀로 나아갔나니 / 橫衢白刃獨能前
하늘이 요기를 시켜 해 주변을 가리었지 / 天遣妖氛翳日邊
한밤 꿈속의 그 모습 옛날과 같으니 / 半夜夢魂如夙昔
몇 줄기 맑은 눈물 차운 이불 적신다 / 數行淸淚濕寒氈
권통지(權通之)가 갑자년 겨울, 나와 더불어 재차 옥에 갇혀 갖은 고문을 다 당하였다. 하루는 그가 나의 손을 잡아당겨 하늘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해 아래 흰 기운이 허공에 뻗쳐 있는데, 그대도 보이시오?” 하였다. 내가 “못 보았소이다.” 하자, 권통지가 하늘을 우러러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아, 누군가 죽을 것이니, 바로 나일 것이다.” 하였는데, 그해 12월 1일 화를 당하였다. 근자에 밤마다 연이어 꿈에 권통지를 보았는데 마치 생시의 모습과 같았기에 앞에서 언급하였다.

담박하기는 가을 하늘 흰 이슬 맺힌 듯 / 澹若秋空白露漙
굳건하기는 지주가 거센 물살에 서 있는 듯 / 剛如支柱鎭奔瀾
평생의 명행기는 가야객이 짓고서 / 百年名行伽倻記
의춘에게 청하여 흰 깁에 쓰게 했지 / 要倩宜春灑素紈
김인로(金仁老)가 계해년 9월,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갑자년 사화(士禍) 때 그도 관계되었었다. 중열(仲說)이 일찍이 김인로의 명행기(名行記)를 짓고 사화(士華)에게 청하여 붓으로 써서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다.

그대 부친 높은 절개는 가을 하늘처럼 밝았고 / 乃翁高節倚秋明
경술과 문장은 한나라 선비가 다시 태어난 듯 / 經術文章漢更生
문중이 마침내 재앙의 그물에 모두 걸렸으니 / 門地終隨一網盡
간사한 소인배가 어찌 맑은 하늘 두려워하랴 / 㜸狐寧復忌天晴
이영지(李寧之)는 나의 종성(宗姓)으로, 갑자년 4월 모일(某日)에 화를 당했다. 그의 부친 주계공(朱溪公)이 일찍이 직언(直言)으로 간신의 비위를 거슬렀는데 이해 가을 역시 화를 당하고 말았으니, 온 집안에 화를 면한 이가 없었다.

서남쪽에 귀양 가서 세월을 보냈나니 / 憔悴西南歲月重
모진 풍상에 검은 수염 죄다 변했지 / 風霜變盡紫髥茸
죽산 길에서 창황히 서로 만났더니 / 竹山路上蒼黃面
열화에 백 길의 솔이 마침내 꺾였구나 / 烈火終摧百丈松
성계문(成季文)이 무오년 가을, 사초(史草) 사건으로 의주(義州)로 유배되었다가 경신년 여름, 하동(河東)으로 배소를 옮겼고, 갑자년 겨울, 배소에서 화를 당하였다. 내가 갑자년 6월 포박된 채 한양의 감옥으로 가던 중 죽산(竹山)의 길에서 성계문을 만났으니, 그도 옥사(獄事)로 뒤미처 곤장을 맞고 다시 배소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모습이 초췌하고 얼굴이 여위어 보고도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말을 나란히 세우고 소리 질러 부르고서야 비로소 성계문인지 알았으며, 눈물을 뿌리고 크게 탄식하고는 이별하였다.

문성공의 후예라 맑은 가문이니 / 文成之後是淸門
시례의 풍류 본시 연원이 있었지 / 詩禮風流自有源
사생간에 몸 보전한 이 그대뿐 / 生死保身知汝獨
한남촌에 넉 자 높이 외로운 무덤 / 孤墳四尺漢南村
안선지(安善之)는 고려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후손인데, 갑자년 사화(士禍)가 일어난 지 넉 달 뒤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쪽 변방엔 서쪽 기러기 만나기 어려워 / 南塞難逢西雁來
밤 침상에 풍우만 속절없이 몰아치누나 / 夜床風雨謾相催
백발의 몸 호해에 그대만이 있건만 / 白頭湖海唯君在
다시 만나 회포 풀 길은 정녕 없고나 / 懷抱無因得再開
남사화(南士華)가 양덕(陽德)에 유배 중이다.

상산은 아스라이 천 봉우리에 막혔고 / 商山迢遰隔千岑
제수는 질펀하여 만 길도 너머 깊어라 / 濟水汪洋過萬尋
공건지 가에서 한 잔 술 기울였나니 / 公建池邊一杯酒
그 언제나 만나서 글을 깊이 음미할꼬 / 幾時文字更㪺深
권숙달(權叔達)이 상주(尙州)에 유배 중이었는데, 지난해 가을, 내가 공건지(公建池) 가에서 권숙달과 이별하며 “공건지 가에서 한 잔 술을 마시노라니, 생이별의 슬픔을 돕는 듯 서풍이 부누나.[公建池邊一杯酒 西風爲助生離悲]”라는 시구를 지었다.

가을 들어 비 내려 갠 날을 못 만났으니 / 秋來陰雨不逢晴
동쪽 울 밑의 국화 줄기 몹시도 시름겹군 / 愁殺東籬黃菊莖
구사일생 이 한 몸 마음은 외려 남아 있어 / 九死一身心尙在
남은 나이로 황하가 맑아지는 것 보련다 / 擬將餘齒看河淸

[주D-001]모릉(摸稜) : 책상 모서리를 만진다는 뜻으로, 일이 잘못되면 자신에게 그 책임이 돌아올까 두려워 가부를 결단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유하는 것이다. 당(唐)나라 소미도(蘇味道)가 재상이 되었을 때 누가 “천하의 일이 많은데 공은 어떻게 다스리겠소?” 하자, 그는 아무 말 없이 책상 모서리만 만지고 있었다 한다.
[주D-002]초강(楚江) …… 찾을꼬 : 순부(淳夫) 정희량(鄭希良)의 죽음을 초(楚)나라 충신 굴원(屈原)의 죽음에 비유한 것이다.
[주D-003]오색 …… 밥통 :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을 제사할 밥을 담은 대나무 통을 말한다. 소식(蘇軾)의 〈화황노직식순차운(和黃魯直食筍次韻)〉에, “오히려 삼려대부(三閭大夫)에게 밥을 올릴 수 있으니, 밥통을 오색실로 감쌌다오.[尙可餉三閭 飯筒纏五采]” 하였다.
[주D-004]백운향(白雲鄕) : 신선이 사는 하늘 나라로, 《장자》 천지(天地)에 “저 흰 구름을 타고 제향(帝鄕)에 노닌다.” 하였다.
[주D-005]광릉산(廣陵散)이 이제 끊겼음 : 삼국 시대 위(魏)나라 혜강(嵇康)은 광릉산이란 곡을 잘 연주하였는데, 이 곡을 남에게는 전수하지 않았다. 그가 후에 참소를 입고 죽음을 당할 때 소금(素琴)으로 이 곡을 연주하면서 “광릉산이 이제는 끊기는구나.” 하였다. 《晉書 卷49 嵇康列傳》
[주D-006]아양곡(峨洋曲) : 〈아양곡〉은, 춘추 시대 백아(伯牙)가 타면 그의 벗 종자기(鍾子期)만이 알아들었다는 금(琴)의 곡조로, 백아가 금을 타면서 고산(高山)에 뜻을 두자 종자기가 “높디높기가 마치 태산과 같도다.[峨峨兮若泰山]” 하였고, 또 유수(流水)에 뜻을 두자 “넓디넓기가 마치 강하와 같도다.[洋洋兮若江河]”라고 했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주D-007]가야객(伽倻客) :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을 가리킨다. 그의 관향이 가야산(伽倻山)과 인접한 고령(高靈)이므로 이렇게 부른 것이다.
[주D-008]의춘자(宜春子) : 남곤(南袞)을 가리킨다. 그의 본관이 의령(宜寧)인데 의령의 또 다른 이름이 의춘(宜春)이므로 이렇게 부른 것이다.
[주D-009]사생간에 …… 그대뿐 : 화를 당하기 전에 병으로 죽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10]밤 …… 몰아치누나 : 벗이 가장 그리울 때를 뜻한다. 성어(成語)로 풍우대상(風雨對牀), 즉 비바람이 치는 날 벗끼리 나란히 침상에 누워 밤을 보내는 정겨운 시간을 뜻한다.
[주D-011]동쪽 울 밑의 국화 : 도연명(陶淵明)의 〈잡시(雜詩)〉에,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하였다.
[주D-012]황하가 맑아지는 것 : 《문선(文選)》 운명론(運命論)에, “대저 황하가 맑으면 성인이 태어나고, 이사(里社)가 울면 성인이 나온다.” 하였다. 여기서는 어진 임금이 출현하여 시대가 바뀜을 뜻한다.
용재집(容齋集) 제7권
 남유록(南遊錄) 경오년
동짓달 11일, 조령촌(鳥嶺村)에 묵었는데, 이날 저녁 눈보라가 몰아치기에 최자진(崔子眞)과 영남으로 내려가면서 이 조령을 넘던 때를 회상하였다. 당시 즉석에서 입으로 불러 읊은 시에 “눈은 행인을 위해 언 산을 감싸고[雪爲行人裹凍山] 자진(子眞), 말은 먼 길에 시름하며 대궐 마구간을 그리워한다.[馬愁長路憶天閑] 택지(擇之)”라는 연구(聯句)가 있는데 갑작스레 지었음에도 진퇴격(進退格)을 이루었기에 크게 한 번 웃고 굳이 자진의 시구를 추려 낼 것 없이 그대로 시낭(詩囊)에 넣었다. 자진은 당시 충청 감사(忠淸監司)였다.

중원에서 새벽에 서둘러 출발했고 / 中原催曉發
우뚝 솟은 조령에 저물녘 당도했지 / 鳥嶺暮巑岏
내 말은 오히려 먼 길을 걱정하고 / 我馬猶愁路
그대의 시에 눈 덮인 산 기억하노라 / 君詩記雪山
정이 있어 공연히 바라도 보지만 / 有情空跂望
안부를 알려 오는 심부름꾼 없구나 / 無使報平安
세모에 의춘라 술을 마시면서 / 歲晩宜春
이별 위로하던 얼굴 멀리서 알겠어라 / 遙知慰別顔

[주D-001]의춘주(宜春酒) : 용재의 벗인 남곤(南袞)의 본관이 의령(宜寧), 즉 의춘(宜春)인 것으로 보아, 그의 집 술을 뜻하는 듯하다.
용재집(容齋集) 제9권
 산문(散文)
의정부제명록(議政府題名錄)의 서문(序文)

관시(官寺)의 제명(題名)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혹은 벽에 적기도 하고 혹은 문안(文案)에 적기도 하였으니, 비록 작은 관시일지라도 오히려 그렇게 하였었다. 그런데 하물며 의정부는 백사(百司)의 우두머리임에도 옛날에 그러한 기록이 없었던 것은 어찌 빠뜨린 것이리요. 대개 제명이란 한때의 자취를 기록해 두어 훗날에 볼거리로 삼아 집사(執事)들을 권면하고 경계하기 위한 것이다. 의정부의 직책은 한 나라의 일에 있어 통괄하지 않음이 없어, 나라의 태평 여부가 이에서 연유하고 나라 정치의 잘잘못이 이와 유관하니, 다른 부서의 집사들이 저마다 한 직책에 매여 있는 것과는 같지 않다. 후일의 사람들이 당시의 태평 여부를 참작해서 보면 당시 정치의 잘잘못이 어디 있는가를 알 수 있으니, 굳이 기록을 살펴본 뒤에야 아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연대가 이미 멀어지매 전문(傳聞)이 혹 엉터리일 수도 있고 보면, 또 기록을 상고하여 당시 정치의 잘잘못을 아는 편이 더욱 신빙성이 있느니만 못하니, 제명을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이러한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
가정(嘉靖) 계미년(1523, 중종18), 의춘(宜春) 남공(南公 남곤(南袞))이 영상(領相)이 되고, 한산(韓山) 이공(李公 이유청(李惟淸))과 영창(永昌) 권공(權公 권균(權鈞))이 좌상(左相)과 우상(右相)이 되었다. 이때 사인(舍人) 어영준(魚泳濬)이 우리 국조(國朝)의 개운(開運) 이래 재상이 된 이들 및 그 참좌(參佐)들의 신상을 기록하여 모아 한 질의 책을 만들고 그 제배(除拜)한 월일(月日)을 아래에 주석으로 갖추어 달았으니, 장차 신빙성 있는 기록으로 전하고자 한 것이다. 혹 징험(徵驗)할 글이 없고 전문(傳聞)을 통해 안 사실도 있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상략(詳略)의 차이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그 시대를 살펴보면 그 대강의 사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성상(聖上)께서 선치(善治)를 위해서 정성을 쏟으시어 서사(署事)의 법을 복구하여 바야흐로 임무를 주고는 성과를 독책하는 터라 삼공(三公)의 직책이 옛날에 비해 더욱 중요해졌으니, 제명한 뜻이 아마도 여기에 있으리라.
행(荇)은 외람되이 참좌의 자리에 앉았으므로 이를 기록하지 않을 수 없기에, 대략 그 사실의 시말(始末)을 밝혀두는 바이다.
가정 2년(1523, 중종18) 8월 18일에 이모(李某)는 서(序)하노라
읍취헌유고 제4권
 기(記)
김인로명행기(金仁老名行記)

성묘(成廟)께서 인정(仁政)으로 국가를 다스리시매 인재를 구하는 것을 급무로 삼고 학교를 일으키는 것을 중요히 여기셨다. 그리하여 늠료(凜料)를 넉넉히 지급하고 율조(律條)를 관대하게 정한 다음 사람을 뽑아 사장(師長)을 삼아 사방의 선비를 기다렸다. 이에 사방의 선비들이 택궁(澤宮)에 운집(雲集)하여 모두 스스로 학문을 닦고 서로 남의 선(善)을 보고 배웠다. 그중에 사람들이 우러러 흠모하고 애써 친근하면서 자신을 벗으로 거두어 주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를 모두 ‘인로(仁老)’라 하였다. 상(上)께서 즉위하여 과거를 열었을 때 제 2 과(第二科)에서 군(君)이 장원으로 뽑혔다. 이에 공경(公卿) 이하로 모든 이들이 그 재능을 높이 인정하고 그 이름을 공경하여 그와 교유하기를 원하나 감히 친압하지는 못하였으니, 그를 모두 ‘김군(金君)’이라 하였다. 그가 죽자 그를 아는 이들은 슬퍼하고 그를 모르는 이들은 애석해하여 모두 “선인(善人)이 죽었다.” 하며 재물을 보내고 관곽(棺槨)을 갖추어 장사를 지냈다. 장사를 지낸 뒤 내가 군과 사귀던 벗들에게 말하기를, “인로는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광중(壙中)에는 기(記)가 없고 그 묘소에는 갈석(碣石)이 없으니, 그 이름과 행실이 오래 지나면 인몰(湮沒)되지 않겠는가.” 하니, 모두 “그렇다.” 하고 나에게 군의 평소 사적을 말해 주어 한두 가지 얻어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군의 종부형(從父兄)인 예조 좌랑 인령(引齡)을 통해서 그의 세계(世系) 및 집안에서의 행실을 알 수 있었다. 이에 그중 사람들에게 두드러지게 알려진 것을 모두 모아 차례로 기술하여 그 후인(後人)에게 주는 한편 사필(史筆)을 잡은 이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한다.
군은 휘가 천령(千齡)이니, 경주 김씨(慶州金氏)이다. 경주 김씨는 보계(譜系)가 신라 경순왕(敬順王) 부(傅)에게서 나왔다. 그 후예에 휘 곤(稇)이 있었는데 여말(麗末)에 우리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開國)에 공로를 세워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그 손자에 종순(從舜)이란 이가 있었으니, 청덕(淸德)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고 졸(卒)한 뒤에 공호(恭胡)란 시호가 내려졌다. 공호의 아들은 치세(致世)이니, 관직은 홍주 통판(洪州通判)으로 마쳤다. 홍주 통판은 안씨(安氏)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군을 낳았으니, 그해는 기축(己丑)이요 그달은 건미(建未)요 그날은 경진(庚辰)이다.
군은 11세에 부친을 잃고 18세에 모친을 잃어 혈혈단신으로 의지할 곳이 없었으나 남달리 영특하여 학문이 매우 조숙하였다. 그래서 일찍이 시부(詩賦)로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을 차지하여 상사생(上舍生)이 되었으며, 유생들과 궐문(闕門)에 엎드려 항소(抗疏)하여 조정의 일을 논박한 것이 두 차례였다. 이에 사대부들 사이에 군의 이름이 자주 일컬어져 마침내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되니, 사람들이 큰 그릇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홍치(弘治) 병진년(1496, 연산군 2)에 군의 나이 28세였으니, 이때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그다지 늦은 것이 아니었는데 논자들은 모두 ‘군으로서는 너무 늦었다.’고 하였다. 과거를 관장한 이가 오직 공을 잃을까 걱정했고 과거를 마치자 군이 일방(一榜)에 장원으로 뽑히니, 사람들이 인재를 얻은 것을 국가의 경사로 여겼다. 군은 어려서 고아가 되어 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했는데도 자립하고 힘써 학문하여 문장을 익혀서 과거에 급제하되 한 번도 남의 뒤에 처지지 않았으니, 천품이 남보다 탁월하지 않으면 이러할 수 있겠는가.
규례대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고 이조 좌랑에 선임되어 사직(史職)을 겸하였으며,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수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로 자리를 옮겼고 호조 정랑으로 바뀌었다. 전조(銓曹)가 ‘군은 문학을 잘하므로 의당 시종(侍從)의 자리에 있어야 하니 미염(米鹽)을 관리하는 곳은 군이 있을 곳이 아니다.’ 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옮겨 제수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응교(副應敎)로 승진하였다.
군은 외면은 온화하여 포용력이 있었으나 내면은 강인하여 결단력이 있었으며, 발언은 강직하였고 처사(處事)는 분명하였다. 선(善)을 들으면 미처 돕지 못할까 걱정하였고 악(惡)을 들으면 미처 없애지 못할까 걱정하였으니, 그 본성이 그러하였다. 홍문관에서 매양 언사(言事)로 회의할 때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입장을 생각하여 저마다 다른 의견을 주장하면 군은 한마디로 꺾고 들뜬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언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군을 든든히 의지하였다. 일찍이 동렬(同列)과 더불어 연변(沿邊)에 성을 쌓는 일의 이해(利害)에 대해 상소하였다가 처음 이 일을 발의한 사람을 비판했다 하여 문죄(問罪)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나 이윽고 불문에 부쳐졌다. 얼마 뒤에는 또 언사로 재상의 비위를 거슬러 파면된 사람도 있고 좌천된 사람도 있었는데 군은 좌천되어 승문원 교감(承文院校勘)이 되어 성절사(聖節使)를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중국어를 질정(質正)하였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사헌부에 들어가 장령이 되었다. 입대(入對)할 때 경전의 글을 인용하고 고금의 일로 증명하여 그 말이 명백하고 개절(凱切)하고, 지루하게 무익한 말을 하지 않으니, 진언할 때마다 성상의 뜻을 움직였다. 이에 원로 재신(宰臣)들이 서로 돌아보고 찬탄하며 말하기를, “참대관〔眞臺官〕이다.” 하고 물러나 집에 가서는 자제들에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 마지않았다. 마침 병으로 입대하지 못한 지 여러 날이 되자 상께서 묻기를, “요즈음 어찌하여 김모(金某)가 오래 보이지 않는가?” 하셨으며,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휴가를 내리고 약물(藥物)을 지급하셨다. 이에 군은 얼마 뒤 병석에서 일어나 공직(供職)하였다. 전조(銓曹)가 군을 오래 헌대(憲臺)에 두어 조정의 기강을 진작하고자 하여 집의로 승진시켰다. 이에 군은 재차 병을 이유로 사직하니, 윤허가 내렸다. 그러나 군을 외직에 제수해서는 안 된다 하여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으로 자리를 옮기고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겸임하게 하였다. 응교는 극선(極選)의 자리로, 장차 문병(文柄)을 잡을 사람이 아니면 맡을 수 없었다. 군이 석갈(釋褐)한 지 겨우 8년 만에 아홉 차례 승진하여 이 벼슬을 맡았으니, 재상의 자리에도 오래지 않아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군은 평소에 염퇴(恬退)하고 영진(榮進)을 부끄럽게 여겨 한 번 승진할 때마다 마음이 즐겁지 않았다. 게다가 병으로 대관을 사직하자 외직에 제수하지 않고 내직에서 자리를 옮겨 주니, 군은 사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병이 이어져 마침내 사직하지 못한 채 운명하고 말았다.
대저 명성이란 선비가 추구하는 바이고 사환(仕宦)이란 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기는 바이니, 그것이 자신에게 오지 않더라도 스스로 힘써 가지려고 한다. 그런데 하물며 절로 자신에게 오는 것을 피하려 하겠는가. 군의 마음을 미루어 간다면 어찌 천백 사람 중에 한 사람 있을 뿐이 아니겠는가.
군은 생활이 매우 가난하였으며, 서사(筮仕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감)한 뒤로 모두 청요직(淸要職)을 맡았고 3품(品)의 벼슬에 올랐으나 가산(家産)을 이룬 것은 하나도 없었다. 거주하는 곳인 선친에게 물려받은 집은 겨우 처자식이 들어가 살 수 있을 정도로 비좁아 담장도 없고 손님을 맞을 자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아우를 위해 혼수를 마련하여 제때 혼인을 시키니,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군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 너무 가난하여 빈소를 차릴 수 없고 상구(喪具)를 갖출 수 없어 염습과 장례의 물품들이 모두 붕우들의 손에서 나왔으니, 군은 이에 더욱 어질다는 평판을 받았다.
군은 정월에 걸린 질병이 오래 끌고 낫지 않아 8월 갑진일에 이르러 졸(卒)하였고 9월 을유일에 장례를 지냈다. 그곳은 실로 고양(高陽) 치소(治所) 동쪽 대자산(大慈山) 아래 승보리(昇甫里)의 둔덕이니, 선친 통판공의 무덤에서 10보쯤 떨어진 곳이다. 태어난 지 35년째인 홍치 16년 계해년(1503, 연산군 9)이다.
배(配)는 종실(宗室)의 딸로 부친 이금정(李金丁)은 명산부수(明山副守)이다. 5남 1녀를 두었다. 딸은 아직 비녀를 꽂을 나이보다 몇 살이 적고, 장남은 겨우 11세라 유모의 등에 업힌 채 위차(位次)에서 곡(哭)하니, 조객들이 더욱 슬퍼하였다.
나는 군과 동방급제(同榜及第)한 사람이다. 군이 홍문관에 벼슬할 때 나는 수찬으로 있었고 군이 좌천될 때 나도 파직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군을 가장 잘 안다. 군은 모습이 간정(簡靜)하여 겉보기에는 쉽게 가까이할 수 없을 듯하나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흥미진진하게 담소를 늘어놓아 듣는 사람이 피로한 줄 몰랐으며, 때로 술잔을 잡고 고금을 담론할 때에는 흉금이 시원스러워 조금도 고집과 격의가 없었으니, 참으로 개제군자(愷悌君子)라 할 만했다. 찬(贊)은 다음과 같다.

행실이 닦여지지 않은 것도 아니요 / 行非不修也
세상에 쓰이지 않은 것도 아니건만 / 世非不用也
수명만은 유독 길지 못하였으니 / 而年獨莫之與也
누구를 탓할 것인가 / 將誰尤
하늘을 탓해야 할 것이다 / 其尤天乎

아아, 명예가 드날려지지 못하는 것은 붕우의 잘못이니, 인로(仁老)와 같이 어진 사람의 이름이 민몰(泯沒)되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면 어찌 우리의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지은 이 글이 반드시 후세에 전해질 것이라 감히 자신할 수 없으며 내가 인로를 아는 것도 한두 가지에 불과하니 어찌 다 기술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인로를 아는 이들이 이 글을 이어서 기술하고, 기술하여 마지않는다면 인로의 사적을 거의 다 기술하여 널리 세상에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두 장의 종이에 이 글을 베껴서 하나는 의춘(宜春) 남군 사화(南君士華)에게 주고, 하나는 덕수(德水) 이군 택지(李君擇之)에게 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인로의 벗이다.
홍치 계해년(1503, 연산군 9) 겨울, 10월 모일에 고령(高靈) 박은(朴誾)은 쓰노라
잠곡유고 제13권
 신도비명(神道碑銘)
이조 판서를 지낸 남공(南公)의 신도비명

나의 벗 남 상서(南尙書)는 처음에 나와 함께 유생이 되어 성균관에서 공부하였으며, 또 함께 조정에 섰고, 함께 낙사(洛社)에서 기영회(耆英會)를 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그의 청렴하고 검소한 덕에 마음속으로 감복하여 다른 사람으로서는 미칠 수가 없는 바라고 여겼다. 마음을 합하고 힘을 합쳐서 함께 나라 일에 힘을 쏟기로 기약했었는데, 나처럼 능력이 없는 자는 아직 살아 있는데도 공은 갑작스레 나를 먼저 버리고 떠났으니, 아아, 내가 어찌 차마 내 벗의 신도비명을 지을 수가 있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내가 마음속으로 감복했던 의리를 잊고 다른 사람으로서는 미칠 수 없었던 덕을 천양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공을 저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차마 나의 벗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이에 공의 질손(姪孫)인 교리 남용익(南龍翼)이 지은 행장을 인하여 대충 세계(世系)와 역관(歷官) 및 일의 시종을 서술하고 명을 짓는 바이다.
남씨의 족속은 영의공(英毅公) 김충(金忠)에게서 비롯되었다. 천보(天寶) 말년에 천자(天子)의 명을 받들어 바다 바깥 나라로 사신을 갔는데, 바람에 표류하여 신라(新羅)에 정박하였다가 영양 남씨(英陽南氏)의 성을 받고 영의공에 봉해졌다. 8대를 내려와 남군보(南君甫)에 이르러 고려의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는데, 의령(宜寧)에 장사지내었으며, 그 뒤로 의령 남씨(宜寧南氏)가 되었다.
그 뒤로 자손들이 번성하여 공신(功臣)과 재상(宰相)이 많이 나왔는데,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더욱 성하였으니,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 남재(南在)와 같은 이가 있어서 모두 개국 공신(開國功臣)에 참여되었으며, 추강 거사(秋江居士) 남효온(南孝溫)과 동교처사(東郊處士) 남맹하(南孟夏)에 이르러서는 현달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름은 더욱 드러났다.
공은 휘가 선(銑)이고, 자가 택지(澤之)이며, 호는 회곡(晦谷)이다. 증조인 휘 경춘(慶春)은 좌통례를 지내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의 휘는 맹하(孟夏)로 바로 동교처사인데, 행실이 높았으나 오래 살지는 못하였으며, 호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복시(復始)로, 무주 현감(茂朱縣監)을 지냈으며, 우찬성에 추증되었다. 이상은 모두 공이 귀하게 됨으로 인해서 은혜를 미루어 증직(贈職)된 것이다. 어머니는 경주 김씨(慶州金氏)로, 좌의정을 지내고 경림부원군(慶林府院君)에 봉해진 김명원(金命元)의 딸인데, 만력(萬曆) 임오년(1582, 선조 15)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외가에서 자랐는데, 경림부원군이 몹시 사랑하여 항상 말하기를, “이 아이는 풍채와 기골이 좋으니 뒷날에 반드시 크게 될 것이다.” 하자, 사람들이 모두 재상감으로 기대하였다. 병오년(1606)에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혼란스러운 광해군 시대를 당하여 과거 공부 할 생각을 끊고는 온 가족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용인(龍仁)의 부거곡(芙蕖谷)에 살았는데, 경전을 공부하면서 먹을 것이 없어도 마음을 편히 여겼다. 기미년(1619, 광해군 11)에 상을 당하여 여묘살이 하면서 예제(禮制)를 지켰는데, 제사에 올리는 물품을 모두 직접 장만하면서 여종에게 맡기지 않았으므로 인근 사람들이 효성을 칭송하였다.
계해년(1623, 인조 1)에 반정(反正)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태릉 참봉(泰陵參奉)에 제수되었고, 주부, 사평, 호조 좌랑으로 차례차례 승진하였다. 을축년(1625)에 황주 판관(黃州判官)에 제수되었다. 정묘년(1627)에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강도(江都)로 들어가 사복시 판관에 제수되었으며, 가을에 고산 현감(高山縣監)에 제수되었는데, 그 동안에 쌓였던 폐단을 말끔히 제거하고, 스스로를 봉양함이 몹시 간략하였으며,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행해지고, 간사함을 적발하는 것이 귀신과 같아서 두 차례나 표리(表裏)를 하사받는 표창을 받았다.
기사년(1629)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에 발탁되어 제수되었는데, 상피(相避)가 있어서 체차되었다. 그러자 상께서 특별히 명하여 고산 현감으로 되돌아가게 하였는데, 이는 정사(政事)가 가장 뛰어나서였다. 경오년(1630)에 간관(諫官)에 결원이 생기자, 상께서 고을을 잘 다스린 수령으로 의망하도록 명함에 따라 공은 두 번째로 의망되었다가 낙점받았다. 이 당시에 뒷문으로 해서 궁궐로 들어간 자 때문에 소양(昭陽)의 조짐이 있었는데, 공이 사간 조정호(趙廷虎)와 더불어 불가하다고 극론하였다. 이 일로 인해 상의 뜻을 거슬러서 특별히 안악 군수(安岳郡守)에 제수되었다. 그러자 양사에서 한 달이 넘도록 간쟁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이때 중국의 반장(叛將) 유흥치(劉興治)가 가도(椵雁)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의 휘하 군사들이 사방으로 나와서 약탈하였다. 공은 평소 중국말을 알고 있어 차관(差官) 등과 문답하면서 개유(開諭)하여 과조(科條)를 엄하게 세운 다음 조약을 감히 어기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잡아다가 곤장을 치거나 혹 국경 밖으로 내쫓았다. 그러자 유흥치의 병사들이 서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남 노야(南老爺)가 지키는 고을의 경내는 범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며, 인근 경계의 백성들 가운데에는 혹 안악 고을 백성이라고 거짓말을 하여 모면하는 자도 있었다.
계유년(1633)에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승진 제수되었다. 그러자 안악 고을의 노소 백성들이 길을 막고 울부짖으며 마치 부모를 잃은 것처럼 하면서, 조정에 쌀 1천 석을 바치겠으니 1년을 더 유임시켜 달라고 조정에 청하였다. 그러나 끝내 허락받지 못하였다. 갑술년(1634)에 통정 대부로 승진되어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출척을 엄명(嚴明)하게 하자 열읍(列邑)의 수령들이 숙연해졌다. 임기가 만료되어 다시 잉임하였다가 병자년(1636) 가을에 이르러 비로소 체차되었다. 이해 겨울에 호조 참의로서 어가를 호위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정축년(1637) 2월에 세자가 북행(北行)을 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공을 평안 감사로 천거하면서 가선 대부로 승진시켰다. 이에 공은 그 날 바로 길에 올라 포로가 된 사람들을 속환(贖還)하기를 계청하고 떠나가 청석동(靑石洞)에서 세자의 행차를 따라잡았다. 이때 청 나라 병사들이 산과 들판에 가득 널려 있으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을 남녀와 귀천을 막론하고 잡아갔는데, 공이 오랑캐의 진영에 출입하면서 임시 방편을 써서 속환시킨 자가 거의 1000명이나 되었다.
세자를 구련성(九連城)까지 따라가 배웅한 다음 돌아와서는 비분한 심정에 홀로 술잔을 기울이다가 근심이 쌓여 병을 얻었다. 그러자 공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던 자가 술에 빠져서 정무를 팽개쳤다는 이유로 공을 탄핵하였다. 이로 인해 새로 승직된 자급을 삭탈당하였다. 공은 필마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와 두어 칸짜리 초가집을 짓고는 심안(審安)이라고 편액을 달았다. 그런 다음 책을 보는 여가에 들판에 나아가 호미를 잡고 농사를 지었다.
무인년(1638) 겨울에 온성 부사(穩城府使)에 제수되었는데, 기쁜 마음으로 직임을 살피고 간략하게 정사를 행하자, 인근 고을이 모두 경외하면서 꺼리었다. 기묘년(1639)에 남도 병마절도사(南道兵馬節度使)로 승진하여 변방의 보루를 순시하였는데, 가서 살피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병사와 백성들을 위무하여 각자에게 옷과 식량을 지급해 주었다. 그러면서 자신을 검속함은 더욱더 심하여 입고 있는 가죽 바지는 날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막관(幕官)이 새 바지를 만들어서 올리자, 공은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함경도 백성들이 혹심하게 침학을 받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차마 입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부로들이 이 말을 듣고는 말하기를, “남도에 병영(兵營)이 설치된 뒤로 이런 일은 없었다.” 하였다.
신사년(1641, 인조 19)에 체차되어 예조 참의,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가, 형조 참의, 병조 참지에 옮겨 제수되었다. 임오년(1642)에 호남으로 나가서 안찰하였다가 계미년(1643)에 체차되었다. 갑신년(1644)에 또 관동으로 나가 안찰하였다. 을유년(1645)에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연경(燕京)에 갔는데, 중도에서 병을 얻어 위독하였는데도 병든 몸을 이끌고 갔다. 돌아올 적에 연경으로 들어갈 때 가지고 갔던 이불만 가지고 오고 한 가지 물품도 사 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일행들이 모두 얼음같이 맑다고 칭찬하였다.
병술년(1646)에 다시 가선 대부로 승진하여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이해에 호서 지방에 토적(土賊)의 변고가 있었는데, 조정에서 공을 진무사(鎭撫使)로 천거하자, 백성들을 안집시키는 계책을 극진하게 하였다. 정해년(1647)에 체차되어 조정으로 돌아와 대사간에 제수되었다가 예조 참판, 도승지로 옮겨 제수되었다. 무자년(1648)에 경기 관찰사에 제수되었고, 기축년(1649)에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경인년(1650, 효종1)에 언사(言事)로 인해 상의 뜻을 거슬러 관직을 삭탈당하고 집에 있었다. 이해 가을에 또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영남으로 나가 안찰하였다. 이때 용궁(龍宮)에서 어비(御批)를 위조하여 선현(先賢)을 모함하고 헐뜯는 옥사(獄事)가 일어나, 서로 간에 맞고발을 함에 따라 온 도의 사람들이 모두 화가 파급될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이 단지 당사자만을 처형하여 화가 만연되지 않게 하니, 시론(時論)이 훌륭하게 여기었다.
임진년(1652)에 판결사(判決事)에 제수되었는데, 직무에 종사한 지 1년이 되자 상께서 공정하게 판결한다는 것을 알고는 자리를 이동시키지 말게 하였다. 겨울에 특별히 형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의금부사 도총부도총관에 제수되었다. 계사년(1653)에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다가 체차되어 의정부 우참찬에 제수되었다.
갑오년(1654)에 좌참찬으로 승진되었다가 여름에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는데, 공에 대해 좋지 않게 여기고 있던 자가 체차하도록 논박하였다. 그러면서도 감히 공의 청렴하고 부지런함에 대해서는 감추지 못하였는데, 세 차례 체차하도록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받지 못하였다. 그러자 공은 재차 상소를 올려서 물러난 다음 형조 판서로 옮겼다. 그 뒤 또 다시 참찬으로 옮겨 제수되었는데, 세자 우빈객을 겸임하였다. 겨울에 《인조실록(仁祖實錄)》을 받들고 강도(江都)에 갔다 왔는데, 추위를 무릅쓰고 말을 달리다가 풍질(風疾)을 얻었다. 12월 6일에 머물고 있던 집에서 졸하니, 춘추가 73세였다.
상께서 애도하여 2일 동안을 시조(視朝)하지 않으면서 하교하기를, “날마다 서로 만나 보다가 갑작스레 훌쩍 떠나가니, 내가 몹시 비통하다. 졸하기 하루 전에 빈객의 직임을 해임시켜 줄 것을 청하기에, 나는 심상한 병인 줄로만 알았다. 어찌 이 지경에 이를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하고, 이어 별치부(別致賻)하도록 명하고, 또 관곽(棺槨)을 살 돈을 하사하도록 명하니,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죽은 뒤에 내려진 특별한 은총에 대해 영광스럽게 여겼다. 다음 해 1월에 양주(楊州) 송산(松山)의 곤좌(坤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자태와 풍모가 웅걸차고 컸으며, 기국과 도량이 넓고도 깊어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 군자였다. 그러면서도 단단하고 확고한 지조는 우뚝하기가 산과 같아서 사람들이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다섯 차례 주군(州郡)을 다스리고 여덟 차례 관찰사를 맡았는데, 해임되어 돌아오던 날에는 짐꾸러미가 쓸쓸하였다. 이에 식량을 꾸어서 밥을 먹고 집을 세내어 살았으며, 거친 밥과 나물국을 먹으면서 상에는 두 가지 이상의 고기 반찬이 오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혹 거짓으로 꾸며 본심을 속이는 것이라고 비난하였으나, 역시 해명하지 않았다.
관직에 임해서는 어려운 자리라고 하여 피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수고로움을 잊었는데, 머리가 희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산(高山), 안악(安岳), 해주(海州), 온성(穩城), 북청(北靑)의 백성들이 모두 공이 떠나간 뒤에 그리워하여 비석을 세웠으며, 해주의 경우에는 영속(營屬)과 백성들이 각각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덕을 기렸다.
공의 청렴하고 검소한 덕은 천성에서 나온 것으로, 관직이 높아지고 나이가 들어서도 조복(朝服) 이외에는 비단옷을 몸에 걸치지 않았으며, 이불 등도 모두 무명이나 거친 명주로 만들었다. 일찍이 입시하였을 때, 상이, 다 떨어진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을 보고는 특별히 새로운 모양의 검은 담비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하사하니, 사람들이 모두 영광으로 여겼다. 공은 군수 도원량(都元亮)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은 없고 딸은 둘을 두었는바, 군수 정영한(鄭榮漢)과 교관 박내문(朴乃文)이 사위이다. 정영한은 4남 4녀를 두었고, 박내문은 5남 3녀를 두었다. 측실에게서 난 아들이 넷 있는데, 남득화(南得華), 남득팔(南得八), 남득성(南得星), 남득한(南得漢)이고, 딸이 넷 있는데, 장녀는 동지 조형원(趙亨遠)의 첩이고, 차녀는 정석기(鄭碩器)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유만흥(劉晩興)에게 시집갔고, 사녀는 심정달(沈廷達)에게 시집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의춘이 관향인 의령 남씨는 / 宜春之南
그 시조가 거강에서 처음 나왔네 / 來自巨康
구백여 년 세월이 흐른 지금은 / 九百餘祀
자손들이 천억으로 번성하였네 / 千億其昌
여러 대에 걸쳐서 등용되어서 / 累代登庸
공훈 세워 평장사에 올랐었다네 / 勳業平章
상서 되어 삼태성을 밟게 되어선 / 尙書踐斗
조상들께 영광이 있게 되었네 / 于祖有光
두 임금을 잇달아 섬기면서는 / 歷事兩朝
팔도의 관찰사를 지내었다네 / 旬宣八方
곧은 지조 굳게 지켜 검약하였고 / 儉約苦蘗
감당나무 아래에서 사랑 끼쳤네 / 遺愛甘棠
총마 타고 임금에게 직간을 하자 / 乘驄伏蒲
조정 반열 엄숙하게 정돈되었네 / 肅穆班行
발탁되어 이조 판서 자리에 앉자 / 擢置冢宰
사람들은 왕양 왔다 기뻐하였네 / 人喜王陽
공의 인품 그 누구만 못하였겠나 / 誰之不如
그런데도 논박 당해 꺾이어졌네 / 而被摧傷
어떤 자는 공의 단점 지적했으나 / 或斥之短
남은 덕은 길이길이 전해지리라 / 其存者長
공께서 돌아감에 갈 곳 없겠나 / 公歸無所
소나무 우거져서 푸른 산 있네 / 松有山蒼
비문 지어 빗돌에다 새기노라니 / 文追鑱石
나의 두 눈 그렁그렁 눈물 젖누나 / 淚我浪浪


[주D-001]소양(昭陽)의 조짐 : 후비(后妃)들이 정사에 간여하는 조짐을 말한다. 소양은 한(漢) 나라 궁전의 이름인데, 일반적으로 후비(后妃)들이 거처하는 궁전을 가리킨다. 이때 김두남(金斗南)과 조기(趙錡)의 첩 딸이 대궐로 들어가서 인조를 모셨다.
[주D-002]감당(甘棠)나무 …… 끼쳤네 : 어진 관리의 아름다운 정사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감사(監司)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주(周) 나라 때 소공(召公)이 북연(北燕)에 봉해져서 감당나무 아래에서 어진 정사를 펼쳤는데, 소공이 죽은 뒤에 백성들이 소공을 그리워하여 감당나무를 감히 베지 못하면서 감당시(甘棠詩)를 지어 기렸다. 《史記 卷34 燕召公世家》
[주D-003]총마(驄馬) 타고 : 대간(臺諫)의 관직에 있는 것을 말한다. 한(漢) 나라 때 환전(桓典)이 시어사(侍御史)에 제수되어 당시에 국정을 농단하던 환관(宦官)들을 조금도 꺼리지 않고 탄핵하였는데, 항상 총마를 타고 다녔으므로 경사(京師) 사람들이 모두 “총마를 탄 어사는 피해 가라.” 하였다. 《後漢書 卷37 桓典傳》
[주D-004]왕양(王陽) : 전한(前漢) 때 사람인 왕길(王吉)을 가리키는데, 그의 자가 자양(子陽)이므로 왕양이라고도 한다. 왕양이 공우(貢禹)와 친하였는데, 왕양이 인사를 맡은 자리에 앉자, 공우가 갓의 먼지를 털고는 자신을 천거해 주기를 기다렸다. 《漢書 卷72 王吉傳》
청성잡기 제3권
 성언(醒言)성언(醒言)사람을 깨우치는 말이란 뜻으로, 총 3권에 인물평 및 일화, 사론(史論), 필기(筆記), 한문단편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다.
의춘군(宜春君) 남이흥(南以興)의 절의

조 풍원(趙豊原 조현명(趙顯命))이 평안 감사 시절에 순행하다가 안주(安州)에 이르러 백상루(百祥樓)에서 연회할 때, 앉아 있는 기녀들의 이름을 차례로 물어보았는데 의춘색(宜春色)이라고 대답한 자가 있었으니, 바로 의춘군 남이흥의 후손이었다. 풍원은 서글퍼하며,
“만일 다른 고을에 있다면 모르겠지만 이곳은 바로 의춘군이 절의를 위해 죽은 곳이 아니더냐.”
하더니, 당장 기적(妓籍)에서 빼내 주고 절구 한 수를 지어 주었다.
열렬한 대장부 의춘군이여 / 烈烈宜春大丈夫
명성이 당시에 중국 수도까지 떨쳐졌네 / 聲名當日震皇都
수양성의 기적(妓籍)에 / 睢陽城裏紅裙籍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의 후손이 있었던가 / 巡遠遺孫在也無
의춘군은 정승 남이웅(南以雄)의 사촌형이었는데, 남 정승은 호기가 많아 항상 의춘군을 조롱하고 무시하였다. 의춘군이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남 정승은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배를 타고 명나라에 조회하러 가서 옥하관(玉河館)에 머물고 있었는데, 청나라 병사가 조선을 함락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얼마 안 있어 숙소의 문에 누런 종이에 쓴 방이 붙었는데, 거기에는 “조선 절도사 남이흥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라고 쓰여 있었다. 남 정승이 즉시 밖으로 나와 거애(擧哀)하자, 명나라 조정에서는 그가 절의로 죽은 남이흥의 동생인 것을 알고는 더욱 후대해 주었다. 중국 수도까지 명성을 떨쳤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주C-001]의춘군(宜春君) 남이흥(南以興) : 1576 ~ 1627. 본관은 의령, 자는 사호(士豪), 호는 성은(城隱)이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안주성(安州城)에서 후금의 3만여 군을 저지하며 용감히 싸웠으나 무기가 떨어져 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그는 “조정에서 나로 하여금 마음대로 군사를 훈련하고 기를 수 없게 하였는데 강한 적을 대적하게 되었으니, 죽는 것은 내 직분이나 다만 그것이 한이로다.” 하며 성에 불을 지르고 뛰어들어 죽었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의춘부원군(宜春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주D-001]조 풍원(趙豊原) : 풍원은 조현명(趙顯命 : 1690~1752)의 봉호이다.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치회(稚晦), 호는 귀록(歸鹿)ㆍ녹옹(鹿翁)이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발생하자,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종군하였으며, 난이 진압된 뒤 그 공으로 분무 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 풍원군(豊原君)에 책봉되었다.
[주D-002]장순(張巡)과 허원(許遠) :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명신(名臣)으로, 안녹산(安祿山)의 난에 수양성(睢陽城)을 굳게 지키다 순국하였다. 《舊唐書 卷187 忠義列傳下》
추강집 제4권
 기(記)
담양향교보자기(潭陽鄕校寶上記)

담양부(潭陽府)는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추자혜군(秋子兮郡)이었고, 신라가 겸병한 뒤에는 추성군(秋成郡)이었고, 지금 이름을 -원문 빠짐-이라 부르는 것은 당대(當代)의 제도이다.
향교는 부(府)의 북쪽 2리 밖 경대산(檠臺山) 남쪽 원율천(原栗川) 물가에 있다. 산천이 빽빽이 둘러싼 곳에 남쪽으로 자리 잡았으니, 아름다운 기운이 수재(秀才)를 잉태하여 남도 지방 인재의 산실이 되었다. 재술(材術)로 이름난 이영간(李靈幹)과 공명(功名)으로 이름난 이성(李晟)과 문장으로 이름난 전녹생(田祿生)ㆍ강호문(康好文)과 독행(篤行)으로 이름난 김기(金頎)ㆍ김근(金謹)ㆍ송시흥(宋時興)이 모두 담양부 출신이다.
내가 호남을 여행하다가 교사(校舍)에 묵게 되었다. 대성전이 높고 크며, 단청이 밝고 촘촘하며, 제사를 준비할 청사(廳舍)가 있으며, 재물을 보관할 창고가 있으며, 학생과 스승이 숙소를 달리하며, 집기는 모두 새것이며, 보자(寶上)를 거두고 흩어서 경비를 마련하며, 제생(諸生) 80여 명이 모두 재주와 행실이 있어 서울의 학궁(學宮)보다 못하지 않았다.
교관(敎官) 김군(金君)은 휘가 빈(濱)이고 자(字)가 위수(渭叟)이니, 나의 죽마고우이다. 나에게 말하기를 “학교를 중수(重修)한 것은 부사(府使) 남계당(南季堂) 사또가 내려 준 은혜이고, 보자를 창립한 것은 감사(監司) 김종직(金宗直) 공과 부사 곽은(郭垠) 사또가 내려 준 은혜라오. 김공이 종포(賨布) 15필을 내려 주고 곽 사또가 조(租) 30석과 종포 5필을 내려 주어 해마다 이자를 취하여 제생의 책ㆍ양식ㆍ소금ㆍ간장을 마련하였소. 곽 사또가 또 종포 6필을 내려 주어 부(府) 안의 생원ㆍ진사들이 함께 모여 강신(講信)하는 경비로 삼게 하고 사마보자(司馬寶上)라 이름하였소. 사또가 또 김공이 발송한 공문서의 취지로 인하여 향교의 현판을 새로 기록하도록 명하였으니, 그대가 나를 위하여 기문을 지어 주시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국가의 흥망성쇠는 정령(政令)이 일어나고 폐함에 달렸고, 정령이 일어나고 폐함은 인재의 존망에 달렸고, 인재를 배양하는 방도는 평소에 학교의 교육이 잘 시행됨에 달렸음이 분명하다.
김공은 호가 점필재(佔畢齋)이고, 문장과 도덕이 이 시대 사대부의 영수(領首)이다. 조정에 일이 있으면 공에게 자문하고 학자에게 의문이 있으면 공에게 질문하니, 이른바 백성은 부모가 있고 나라에는 시귀(蓍龜)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스승으로 섬긴 지 몇 해가 되었고, 공 또한 나를 받아들이고 예우하여 으레 문하의 선비로 보았기 때문에 나를 알아줌이 더욱 깊었다.
곽 사또는 적은 봉급에도 노고를 아끼지 않았고, 일을 처리함이 깨끗하고 간편하며, 정사를 행함이 너그럽고 대범했기 때문에 관리들은 그 위엄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그 은혜를 그리워하였다. 관(官)에서 세상을 떠나니, 영구(靈柩)가 돌아가는 날 거리마다 곡하는 소리가 이어졌고, 사민(士民)들이 의논하여 해마다 돌아오는 제삿날 저녁에 쌀을 모아 재(齋)를 지내어 명복을 빌었다. 내가 처음 부(府)의 경계에 들어와서 부 안의 이름난 벼슬아치를 물었더니, 필부필부가 모두 곽 사또 한 사람을 일컬을 뿐이었다. 두 공의 덕이 크다 할 것이다.
대저 전라도가 생긴 이래로 몇 명의 감사가 역임했으며 담양이 읍이 된 이래로 몇 명의 수령이 역임했던가. 그러나 향교의 보자가 설치됨이 오늘에서야 있게 되었으니, 공자가 말한 “그러한 사람이 있으면 그러한 정치가 거행된다.”는 뜻을 알겠다.
오호라! 보자를 설치하지 않아 인재 양성에 결함이 있던 예전에도 오히려 두 이씨와 전녹생, 강호문 같은 인물이 이 학교에 다니면서 학업을 닦고 조정에 서서 후대에 이름을 전하였거늘 더구나 두 공께서 보자를 설치한 뒤로는 인재 양성이 처음보다 더하게 되었으니, 반드시 앞에 거론한 몇 인물만큼 현명한 이가 아름답게 배출되어 성대하게 명신(名臣)이 되는 자가 있을 것이다. 내가 직접 그들을 보게 된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홍치(弘治) 4년 신해년(1491, 성종22) 2월 모일에 과객(過客) 의춘(宜春 의령) 후학 진사 남효온(南孝溫)은 삼가 기록한다.

[주C-001]담양향교보자기(潭陽鄕校寶上記) : 보자(寶上)는 보(寶)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보는 특별한 목적의 사업을 경영하기 위하여 돈이나 곡식을 모아 일정한 기금을 마련하고, 이를 백성에게 꾸어 주어 이자를 받아 운영하는 제도이다. 환자(還上)에 비겨서 보자라고 한다.
[주D-001]이른바……것이다 : 소식(蘇軾)의 〈제구양공문(祭歐陽公文)〉에 나오는 구절이다. 시귀(蓍龜)는 시초(蓍草)와 거북이다. 옛날에 일의 시비와 길흉을 점치던 것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을 뜻한다. 나아가서 한 시대의 사표로서 모든 의문을 판별해 주는 원로나 국사(國士)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古文眞寶後集 卷8》
[주D-002]그러한……거행된다 : 공자가 말하기를 “문왕과 무왕의 정사가 방책에 펼쳐져 있으니, 그러한 사람이 있으면 그러한 정사가 거행되고 그러한 사람이 없으면 그러한 정사가 그치게 된다.〔文武之政 布在方策 其人存則其政擧 其人亡則其政息〕” 하였다. 《中庸章句 第20章》
추강집 제8권
 부록(附錄)
의양서원(宜陽書院) 봉안문 의령(宜寧)에 있다.

신석우(申錫愚)

의춘의 옛 집안은 / 宜春古家
정기가 모인 곳이니 / 正氣攸萃
그간 삼백 년 사이에 / 間三百年
충절과 의리가 빛났네 / 忠節名義
열렬한 추강이여 / 烈烈秋江
그 뜻이 우뚝하니 / 卓爾其志
아아 열경이 / 嗚呼悅卿
혹 공의 마음 알았네 / 倘知公意
그대는 임금의 지우에 보답하고 / 君酬主知
나는 아름다운 본성을 따를 뿐이라
/ 我秉惟懿
소릉의 옥완이 / 昭陵玉椀
천지간에 뒤집혔는지라
/ 翻覆天地
저 높고 험한 산에 올라 / 陟彼崷嵂
피를 뿌리고 눈물을 흘리니 / 灑血繼淚
하늘의 도와 사람의 기강이 / 天道人紀
이에 힘입어 실추되지 않았네 / 尙賴罔墜
생육신 중의 한 사람으로 / 生六臣一
만고에 둘도 없는 분이네 / 無萬古二
강이 깊고 흐름이 맑아 / 江深流淸
추계로 흘러 들어가니 / 注于秋溪
스승을 지극히 슬퍼하여 / 至慟師門
은둔하여 그윽이 지냈네 / 嘉遯幽棲
효도로써 정치를 대신하여 / 孝乎爲政
몸을 닦고 집을 다스리니 / 身飾家齊
홀로 서서 근심함이 없이 / 獨立無悶
나의 생애를 잘 끝마쳤네 / 畢我生兮
동인의 점괘가 길하여 / 同人筮吉
우뚝 호곡을 낳으니 / 挺生壺谷
언의가 곧고 굳세며 / 言議勁直
문채가 밝고 빛났네 / 文彩炳郁
높고 큰 만년의 절개 / 磊落晩節
옛 정원의 황국 같아 / 老圃黃菊
상악을 먼저 주창하다 / 首唱霜鶚
마침내 귀양살이 했네 / 竟吟野鵩
아아 세 분의 공이 / 猗嗟三公
한 가문에 서로 이어지니 / 一門相望
《여지승람》에 칭송이 성대하고 / 在輿誦艶
또한 가첩에도 빛나도다 / 亦家牒光
울창한 뽕나무와 가래나무 / 鬱鬱桑梓
저 선대의 고향을 돌아보네 / 睠彼先鄕
현인들이 태어난 곳인지라 / 禮原所生
돈독히 하여 잊지 못하니 / 曰篤不忘
엄숙한 기둥과 서까래 / 有儼楹桷
추수의 곁에 세워졌네 / 秋水之傍
일찍이 제향을 계획했으나 / 夙謀腏籩
이제 겨우 상량을 마쳤네 / 甫訖抛樑
이에 길한 날을 가려서 / 載揀元辰
향기로운 제물을 갖추니 / 蕆我馨香
후손들이 이에 감동하고 / 雲仍是感
많은 선비들이 도와주네 / 多士于將
정결한 제사를 흠향하여 / 冀歆精享
끝없는 은혜를 내리소서 / 嘉惠無疆

상향축문

신석우(申錫愚)
도를 세움을 의리라 하니 / 立道曰義
한 몸으로 이를 담당했고 / 擔以脊梁
몸은 맑고 폐함은 권도이니 / 身淸廢權
그 지절은 추상을 능가하네 / 志節凌霜

[주C-001]의양서원(宜陽書院) : 경남 의령군(宜寧郡) 유곡면(柳谷面) 칠곡리(漆谷里)에 있다. 1861년(철종12)에 창건되어 남효온, 남진(南振), 남용익(南龍翼)의 위패를 모셨다.
[주D-001]의춘(宜春) : 남효온의 고향인 의령(宜寧)의 옛 이름이다.
[주D-002]그대는……뿐이라 : 남효온이 과거에 응시하지 않자, 김시습이 말하기를 “나는 세종의 두터운 지우(知遇)를 받았으니 이처럼 괴롭게 생활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공은 나와 다르니 어찌 세도(世道)를 위하여 계획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남효온이 말하기를 “소릉이 복위된 뒤에 과거에 응시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김시습이 또한 다시 강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D-003]소릉의……뒤집혔는지라 : 소릉이 파헤쳐진 것을 말한다. 옥완(玉椀)은 왕릉에 순장(殉葬)하는 물건을 가리킨다.
[주D-004]추계(秋溪) : 남진의 호이다.
[주D-005]호곡(壺谷) : 남용익의 호이다.
[주D-006]상악(霜鶚) : 미상이다.
[주D-007]뽕나무와 가래나무 : 고향 마을에 심겨진 나무이다. 《시경》〈소아(小雅) 소변(小弁)〉에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경해야 한다.〔惟桑與梓 必恭敬止〕”라고 한 데서 유래하여 선대로부터 살아오던 고향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주D-008]몸은……권도이니 : 남효온의 맑음은 백이ㆍ숙제와 같고, 세조가 단종을 폐위함은 권도라는 의미이다.
 
패관잡기 제2권
패관잡기 2

성화(成化) 정해년(1467, 세조 13)에 길주(吉州) 사람 전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꾀하여 그 절도사 강효문(康孝文) 등을 죽이고 그 부하를 보내어 글을 가지고 와 주달(奏達)하였으므로, 귀성군(龜城君) 이준(李俊)을 도총사(都摠使)로 삼고 우찬성 조석문(曹錫文)을 부사로 삼아 가서 치게 하였다. 나의 할아버지 양숙공(襄肅公)의 휘는 어세공(魚世恭)인데, 그때 좌승지로서 계급을 건너뛰어 가정대부(嘉靖大夫)가 되고, 신면(申㴐)을 대신하여 함길도(咸吉道) 관찰사가 되었다. 공이 가는 도중에 함흥 백성들이 또 난을 일으켜 전 관찰사 신면 등을 죽였는데, 그것도 이시애가 꾀한 일이었다. 공이 안변부(安邊府)에 들어가니 백성들이 도망쳐 흩어진 지가 열에 아홉이었고, 함흥부에 이르렀으나 한 사람도 맞이하는 자가 없었다. 나가서 야외를 순시하니 민가는 모두 비었고, 가끔 만나는 사람은 모두 달아나 풀 속에 숨었다. 곧 불러서 일깨워 주기를, “조정에서는 반역을 한 역적 이시애를 치려고 생각할 따름이니, 너희들 백성과는 관계가 없다. 제각기 전과 같이 생업에 종사하라.” 하고, 이어 양식을 주어 서로 깨우쳐 주게 하였다. 어떤 이가 공에게 이르기를, “자객(刺客)이 두려우니 방비하지 않을 수 없겠소.”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만약 그런 방비를 마련하면 백성들이 더욱 의심할 것이다.” 하고는, 다만 아전 몇 사람만을 거느리고 다녔는데, 어느 날 적의 무리 한숭지(韓崇智)를 사로잡았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조정에 품의(稟議)하려 하니, 공이 항의하기를, “군대 안의 일은 주장(主將)이 맡아 할 것이고, 또 함흥 사람 가운데 한숭지와 같은 자가 하나뿐이 아닐 것이니, 빨리 목 베어서 그들의 마음을 외롭게 하며 사람들의 의심을 끊어버리는 것만 한 것이 없을 것이다.” 하고는, 드디어 대문 밖에 내어다가 목 베었더니, 함흥의 군사나 백성이 그 죄를 면하고자 하여 다투어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들의 성명을 써서 도총사에게 투항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모두 다 죽여서는 안 된다.” 하고, 그 문서를 군중(軍中)에서 불태웠더니 모반한 자들이 안정되었다. 관군이 홍원현(洪原縣)에 주둔하고 있을 때에 밤중에 적이 습격해 왔다. 도총사가 진을 옮겨 피하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지금 적진에 들어와 인심이 불안하고 의심이 많은데, 주장이 만일 움직임다면 적이 없어도 스스로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우리 군사가 비록 적으나 모두 정예(精銳)들이니 어찌 먼저 피하여 약함을 보이리오.” 하여, 그만 두었다. 이튿날 도총사가 또 적의 야습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함관령(咸關嶺)으로 퇴진(退陣)하려 하자 공이 말리며 말하기를, “대군이 적의 뒤에 있으니 적이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고, 설사 온다 하더라도 피차가 협공을 하면 우리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이에 만약 밤에 떠나게 되면 적이 반드시 와서 우리 군사의 중간을 끊을 것이니 반드시 지고 말 것입니다.” 하여, 드디어 중지하였다. 이튿날 재를 넘었더니 적이 과연 복병(伏兵)을 하고 있으면서 우리 군사의 보급하는 짐바리를 끊으려 하다가 관군이 뒤를 쫓으니 도망해 버렸다. 그 위험한 고비에 임하여 일 처리하기를 이와 같이 하자 적이 평정되었다. 함길도를 남북 두 도로 나누어 공은 북도의 관찰사가 되어 드디어 북방을 평안하게 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6세였다.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려 할 때에, 그의 무리들을 시켜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말을 퍼뜨리기를, “아래 지방 삼도(三道)의 군사가 바다와 물 양쪽으로 나란히 쳐들어오는데, 평안도와 황해도의 군사가 설헌령(雪巘嶺)을 넘어 쳐들어와서 본도의 백성을 모두 다 죽이려 한다.” 하고, 또 해적(海賊)이 나타났다는 말을 지어냈는데, 관찰사 오응(吳凝)도 그것을 믿고 공문을 돌려 각 관원들은 백성들을 거느리고 산으로 올라가라고 하여 백성들은 더욱 혼란에 빠졌다. 그 후 반란을 일으키자 선전하기를, “본도의 절도사가 모든 진(鎭)의 장수들과 공모하여 반역을 꾀했다.” 하고, 드디어 절도사 등 관원을 죽였다. 패군(敗軍)하여 길주(吉州)로 달아날 때에도 그 휘하(麾下)의 군사들은 여전히 이시애의 반란을 모르고 있었다. 길주 별시위(別侍衛) 허유례(許由禮)가 서울에서 관군을 따라 와서 길주로 몰래 들어가 적의 무리의 여수(旅首 군사의 우두머리) 이주(李珠)를 설득하여 적중에 들어가 이시애의 반역 상황을 들어 부하들을 타이르게 하고, 드디어 갑사(甲士) 이운로(李雲露)ㆍ황생(黃生) 등과 함께 이시애를 잡아 결박하여 관군에게 보냈다. 이때에는 이시애가 이미 궁지에 빠져 있기는 했으나, 그를 사로잡은 공은 실로 허유례와 이주 두 사람에게 힘입은 것이다.
주본(奏本)과 제본(題本)의 격식이 《구정록(求政錄)》에 실려 있기는 하나 아직 그것의 차이점을 자세히 알 수가 없고, 주자(株子)라는 말은 더욱 알 수가 없다. 요즈음 섭성(葉盛)이 지은 《수동일기(水東日記)》를 얻어 보았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국조(國朝)의 제도에 신민(臣民)이 아뢰는 일을 주본이라 일컫는데, 긴 종이를 쓰고 글자의 획은 반드시 《홍무정운(洪武正韻)》에 따라야 한다. 그 후 간편하게 하기 위하여 고쳐서 제본(題本)을 쓰는데, 제본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제본은 내아문(內衙門) 공사(公事)에 쓰고, 만일 밖에 있으면서 자신의 일까지 진술할 경우에는 그대로 주본을 썼는데, 선황(宣皇)은 매양 그것을 주자(株子)라고 부른다.” 하였다.
족자(簇子)의 위쪽 가장자리에 두 줄의 흰 종이나 흰 생사를 붙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그 뜻을 모른다. 처음에는 위쪽 끝에만 붙여 펄럭이게 하여 연니(燕泥)를 막게 한 것으로, 그것을 비연(飛燕)이라 부른다. 뒤에 족자를 만드는 사람이 아래쪽 끝에도 붙였으므로 그것이 고사(故事)가 되었다. 내가 일찍이 연경(燕京)에 가서 《비설록(霏屑錄)》을 보니, 그렇게 써 있었다.
태사(太史) 당고(唐皐)가 압록강에서 연경의 여러 군자들을 그리워한 시의 한 연(聯)에 이르기를,
아침에는 목밀에 깃발이 날리고 / 朝飛木蜜斾
밤에도 한강에 뗏목이 떠 있도다 / 夜泛漢江槎
하고, 발문(跋文)에, “목밀은 나무의 이름으로, 곧 이른바 남산의 기(杞)나무라는 것이다.” 하였으나, 산에 이 나무 이름이 있는지 그 여부는 알 수가 없다. 만약 목멱(木覓)이라고 써도 시구(詩句)에 있어서는 구애될 것이 없으나, 산이 나 때문에 그 이름을 받아 주지 않을까 두려울 뿐이다. 대개 한음(漢音)에서 밀(蜜)과 멱(覓)은 그 음이 비슷하므로 태사(太史)가 의심한 것인 듯하다.
문묘의 제도에 중국에서는 소상(塑像)을 모시고, 우리나라는 위판(位版)을 사용한다. 다만 개성부(開城府)와 평양부(平壤府) 두 문묘에만 소상을 봉안하였는데, 역시 원 나라 때에 중국으로부터 온 것이다. 가정(嘉靖) 병술년 무렵에 황제가 천하에 영을 내려 공자와 배향(配享)한 여러 선현(先賢)의 소상을 철거하고 밤나무로 위판을 만들게 하였다. 또 공자는 대성(大聖)인데, 왕위가 없었는데 왕의 칭호로 높이는 것은 참람 으로 반드시 제사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 드디어 대성문선왕(大成文宣王)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위판에 ‘지성선사 공자지위(至聖先師孔子之位)’라고 썼다. 이보다 앞서 황제가 문묘에 가서 제사를 지낼 때에 단상에 서서 만약 배례를 하려고 하면 홍려관(鴻臚官)이 외치기를, “공자는 노(魯) 나라의 배신(陪臣)이오.” 하여 드디어 중지하고 절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이미 선사(先師)로 높였으니, 비록 천자라도 스승에게는 마땅히 절을 해야 한다 하고 드디어 배례를 행하였다. 다만 소상을 철거하라는 조서(詔書)가 우리나라에는 오지 않았으므로 개성과 평양의 문묘에는 옛 소상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 임금의 만력(萬曆) 무렵에 소상을 철거하고 위판을 쓰게 되었다.
세상에 전하기를, “관청에서 무당에게 세포(稅布)를 너무 많이 걷어 들였으므로, 매양 관원이 문에 이르러 외치면서 들이닥치면 온 집안이 쩔쩔매고 술과 음식을 갖추어 대접하면서 기한을 늦추어 달라고 애걸하였다.” 하였다. 이런 일이 하루걸러 있거나 연일 계속되어 그 괴로움과 폐해가 헤아릴 수 없었다. 설이 되면 광대들이 이 놀이를 대궐 뜰에서 상연하였더니, 임금이 명을 내려 그 세포를 면제하게 하였으니, 광대도 백성에게 유익하다 하겠다. 지금의 광대들도 아직 그 놀이를 전하므로 그것이 고사(故事)가 되었다. 중종 때에 정평 부사(定平府使) 구세장(具世璋)이 토색질하여 만족함이 없었는데, 안장을 팔려는 사람을 부(府)의 뜰로 끌고 들어와서 친히 흥정을 하여 며칠 동안 그 값을 따지다가 끝내 관청의 돈으로 샀다. 광대가 설에 그 상황을 놀이로 상연하였더니 임금이 묻는 데에 대답하기를. “정평 부사가 안장을 사는 장면입니다.” 하였다. 드디어 명을 내려 정평 부사를 잡아다가 심문을 하고 마침내 장물죄로 처벌하였으니, 광대 같은 자도 능히 탐관오리(貪官汚吏)를 규탄(叫彈)하고 공박(攻駁)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정덕 기사년(1509, 중종 4) 무렵에 삼가 현령(三嘉縣令)이 있었는데, 그 성명을 잊어버렸으나 정사(政事)가 자못 탐혹(貪酷)하였다. 마침 병으로 죽어 관(棺)을 내어 발인하려고 하는데, 고을 사람이 관머리에 시를 써 붙이기를,
저승의 다섯 귀신이 뭇 백성을 학대하니 / 冥間五鬼虐烝民
염라대왕이 천라를 시켜 악독한 몸을 죽였구나 / 帝使天羅殺毒身
이제부터는 백성들의 시름과 원한이 끊겼으니 / 從此閭閻愁怨絶
요순시대의 태평한 봄 이로다 / 堯天舜日太平春
하였다. 관찰사가 그 말을 듣고, “현령이 참으로 나쁘다. 그러나 읍인(邑人)도 잘못하였다.” 하고, 그 시를 지은 자를 찾아서 잡으라고 하였으나 끝내 잡지 못하였다. 이 시를 살펴보건대, 비록 잘 짓지는 못했으나 재물을 탐하고 독직(瀆職)하는 자의 경계가 될 만하다.
나재(懶齋) 채수(蔡壽)가 중종 초에 《설공찬환혼전(薛公瓚還魂傳)》을 지었는데, 그 내용이 매우 괴이하다. 그 끝에 이르기를, “설공찬이 남의 몸을 빌려 몇 달 동안을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의 원한과 저승에서 들은 일들을 아주 자세히 말하고, 또 말하고 쓴 것을 그대로 써 보게 하여 한 자도 틀리지 않는 것은 그것을 전하여 믿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였다. 언관(言官)이 그것을 보고 논박하기를, “채 아무개가 허황되고 거짓된 책을 지어서 사람의 귀를 현혹시키고 있으니, 사형에 처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파직시키는 것으로 그쳤다.
성종 때에 유생(儒生) 아무개는 시책(試策)에서 절을 세워서 재난(災難)과 변이(變異)를 물리치기를 청하였다. 시험관이 아뢰어 대신(大臣)들과 의논하니 모두 불문(不問)에 붙이고자 하였으나, 임금이 이르기를, “유생으로서 이런 이단(異端)을 주장하는 것은 그 죄가 크다.” 하고, 명을 내려 먼 곳으로 귀양 보냈다.
목계(木溪) 강혼(姜渾)이 일찍이 영남에 가서 성산(星山)의 기생 은대선(銀臺仙)을 사랑하였는데, 돌아오게 되어 짐바리가 부상역(扶桑驛)에 이르니 앞선 일행이 침구를 가지고 이미 지나가 버렸다. 공이 기생과 역사(驛舍)에서 자면서 시를 지어 주기를,
부상 역관에서 하룻밤을 즐기는데 / 扶桑館裏一場懽
나그네 이불은 없고 촛불만 타다 남았네 / 宿客無衾燭燼殘
십이무산이 새벽꿈에 어려 / 十二巫山迷曉夢
역루의 봄밤은 추운 줄을 모르겠네 / 驛樓春夜不知寒
하였다. 또,
고야산 선녀의 옥같이 흰 살결이여 / 姑射仙人玉雪肌
새벽 창가 금 거울에 아미(아름다운 눈썹) 그리네 / 曉窓金鏡畵峨眉
아침 술에 반쯤 취하여 취기가 낯에 오르고 / 卯酒半酣紅入面
동풍이 하늘하늘 푸른 머리 날리네 / 東風吹髩綠參差
하였고, 또 짓기를,
헝클어진 머리 다 빗고 다락에 기대어 / 雲鬟梳罷倚高樓
피리 부는 그 손가락 옥같이 부드럽네 / 鐵笛橫吹玉指柔
만리타향 외로운 달에 / 萬里關山一輪月
두어 줄기 눈물이 이주에 떨어지네 / 數行淸淚落伊州
하였다.
상주(尙州)에 이르러 이별하고 공이 새재[鳥嶺]를 넘어 잠깐 쉴 때에,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呂)씨라는 성을 가진 성산의 서생(書生)을 만나 함께 즐거이 술을 마시면서 글을 지어 기생에게 부치기를, “나와 낭자는 본래 모르는 사이지만 신(神)의 도움으로 천리 밖에서 사귀었으니, 어쩌면 오래된 인연이 있다고 하겠구나. 상산(商山)에서 이별한 뒤에 땅거미 질 무렵에 그윽한 골짜기에 다다르니, 빈 집은 고요하고 쓸쓸하며 낙숫물은 영롱한데 등잔을 돋우고 꼼짝 않고 앉아 외로운 그림자가 배회하는 이때의 심정이야말로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이튿날 아침에 재를 넘는데 시냇물은 졸졸 흐르고 산새들은 지저귀니 마음은 스산하고 뼈는 시려 마음을 가늘 수가 없었다. 낭자의 피리 소리 듣고 싶건만 들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 기생이 공의 시와 편지 글로 병풍을 만들었는데, 공은 본래 글씨를 잘 썼으므로 취중에 쓴 글씨의 기세가 마치 용이 서로 얽힌 것 같다. 선비들이 남쪽으로 내려가 이 고을을 지나는 사람은 그것을 구하여 보지 않는 이가 없고 물건을 보내 주었으므로 기생이 이 병풍에 의뢰하여 잘 살게 되었다 한다.
영의정 김전(金詮)이 그 아들을 제사하면서 제문에 이르기를, “지난해에는 네가 아들을 잃고 올해에는 내가 너를 잃었으니, 부자간의 정을 네가 먼저 알 것이다. 상향(尙饗 제문 끝에 쓰는 말로, 제사를 받기를 바란다는 뜻).” 이라고 하여. 두어 마디를 썼을 뿐이나 정을 나타내는 말이 구비되어 있어 읽으면 슬퍼진다.
지사(知事) 안침(安琛)의 영암군(靈岩郡)의 배회루(徘徊樓)에,
배회루 위에 달이 배회하니 / 徘徊樓上月徘徊
나그네 배회함 또한 유쾌하도다 / 客子徘徊亦快哉
옥토끼는 몇 해나 선약을 찧고 / 玉兎幾年仙藥搗
소아(달의 딴 이름)는 어디에서 거울갑을 여는고 / 素娥何處鏡奩開
흔들리는 물결이 백 갈래로 흩어지는 동파수에 / 搖波散百東坡水
비친 그림자 셋이 되어 이태백의 잔이로다 / 對影成三太白杯
바로 밤중이 되니 하늘이 씻은 듯하고 / 直到夜深天似洗
바람이 불어 보내니 계향이 오도다 / 好風吹送桂香來
하였는데, 그 당시 가작(佳作)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파백태백삼(東坡百太白三)의 문구는 본래 이 문순공(李文順公)의 말이고, 또 안침의 창녕(昌寧)의 〈추월헌시(秋月軒詩)〉가 있는데, 그 한 연에,
흔들리는 물결은 흩어져 동파의 백 갈래가 되고 / 搖波散作東坡百
비친 그림자는 참으로 태백의 삼을 이루도다 / 對影眞成太白三
하였다. 무슨 새로운 말이라고 여러 번이나 썼는가.
독서당(讀書堂)에 전에 임금이 내려주신 수정잔(水精盞)이 있었는데, 탁영(濯纓) 김공(金公 김일손)이 그 잔반(盞盤)에 명(銘)을 짓고, 그 뒤에 또 서문을 지었다. 그 서문에 이르기를, “잔이 처음에는 반(盤)이 없어서 장인(匠人)을 시켜 만들었는데, 구리 바탕에 황금으로 도금(鍍金)을 하였다.” 하였다. 반의 표면 네 둘레에는 임희재(任熙載)의 팔분체(八分體) 글자로 볼록하게 새기고, 반의 한가운데에는 내사독서당(內賜讀書堂)의 다섯 글자를 오목하게 새겼는데, 강사호(姜士浩)의 전자(篆字)로 된 명에 이르기를,
맑아서 흐려지지 않고 비어서 능히 받아 들인다 / 淸不涅虛能受
그 물건 주심을 감사히 여겨 저버리지 말기를 바란다 / 德其物思勿負
하였다. 드디어 당시의 문사(文士)들이 완상하게 되었는데, 어느 해인지 모르나 그것을 맡아서 지키던 자에게 도둑을 맞아 호사자(好事者)들이 늘 한탄하였다. 그러던 중 가정(嘉淸) 연간에 송강(松岡) 조사수(趙士秀)가 통역관 홍겸(洪謙)으로 하여금 중국에서 구하여 사들이게 하여 고사(故事)를 보충하였다.
지정(止亭) 남곤(南袞)이 백악(白嶽) 기슭에 집을 지었는데, 그 북쪽 동산에 산수의 경치가 좋았다. 취헌(翠軒) 박은(朴誾)이 매양 용재(容齋) 이행(李荇)과 함께 술을 가지고 가서 놀았으나, 지정은 승지로서 새벽에 대궐에 들어갔다가 밤에야 돌아오기 때문에 한 번도 함께 놀지 못하였다. 취헌이 농담으로 그 바위를 대은(大隱)이라 하고, 그 여울을 만리(萬里)라고 불렀으니 이것은 바위가 주인의 아는 바가 되지 못하였으므로 대은이라 하였고, 여울은 만 리나 되는 먼 곳에 있는 것 같다 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일찍이 크게 취하여 바윗돌에 시를 지어 쓰기를,
주인이 벼슬이 높고 세력이 불꽃처럼 타오르니 / 主人官高勢薰灼
문 앞에 문안드리는 거마들이 많도다 / 門前車馬多伺候
3년에 하루도 동산을 돌보지 않으니 / 三年一日不窺園
만약에 산신령이 있다면 응당 허물을 받으리라 / 倘有山靈應受詬
하였고, 또,
주인이 재물이 많으니 / 主人有金玉
세간인들 어찌 함부로 두겠는가 / 什襲豈輕授
단단히 잠가 놓고 밤중에 지켜도 / 緘縢固鐍守夜半
내와 산을 대낮에 옮겨 가지 않을까 의심 스럽도다 / 未信溪山移白晝
하였다. 또 용재와 함께 자정의 집에서 술을 마시면서 지어 주기를,
어제 만리뢰를 지나다가 / 昨過萬里瀨
우연히 봄눈을 뒤에 만났도다 / 偶逢春雪後
늙은 병정은 잃어도 좋으나 / 老兵失亦可
내 벗을 얻으니 그래도 다행이로다 / 猶幸得吾友
시내와 산은 저절로 청안 이요 / 溪山自靑眼
새들은 서로서로 화답하는 듯하다 / 禽鳥如相和
잔 들고 좋은 시 지어 나가니 / 擧杯聯好詩
날이 이미 저물었음을 깨닫지 못하도다 / 未覺日己酉
소나무 사이에서 갈도 소리 들리니 / 松間聞喝道
그윽한 흥취가 문득 깨어져 버리네 / 幽趣忽鹵莽
다구 치면 이러할 뿐이니 / 迫則斯可耳
어찌 담을 넘어 달아나겠는가 / 寧使踰墻走
서로 붙들고 돌아와 한껏 마시니 / 相持還劇飮
몽롱하여 누구임을 분간하지 못하고 / 蒙未辨誰某
앉아서 취한 얼굴 마주 보는데 / 坐見玉山摧
곁의 사람은 다투어 손뼉을 치네 / 旁人爭拍手
하였다.
송계(松溪) 신용개(申用漑)가 대제학으로 있을 때에 지정(止亭)을 방문했더니 남공이 술을 대접하였는데, 송계가 술잔을 들고 운(韻)을 부르면서 말하기를, “자네가 능히 이 시를 지으면 대제학의 자리를 물려주리라.” 하였더니, 지정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읊기를,
버드나무 그늘지고 낮닭이 울려는데 / 楊柳陰陰欲午鷄
갑자기 가난한 골목에 들이닥친 수레에 놀랐네 / 忽驚窮巷隘輪蹄
다투어 풍채를 보느라고 이웃집들은 비었고 / 爭瞻風裁空隣舍
술상을 못 차려 늙은 아내 군색하네 / 未具盤筵窘老妻
흥이 나서 다만 술을 기울일 줄만 알고 / 乘興但知傾藥玉
지체 다름을 생각지 않고 가죽 띠 잡고 만족 하네 / 忘形不省挽鞓犀
흥얼거리며 고헌과 를 지으려 하나 / 沈吟欲賦高軒過
거친 글이라 감히 짓지를 못하네 / 鄭重荒詩未敢題
하였더니, 송계가 한참동안 감탄하고 칭찬하다가 말하기를, “의발(衣鉢 여기에서는 대제학의 후임)이 돌아갈 곳이 있도다.” 하였다. 뒤에 지정이 과연 그를 대신하여 문형(文衡)을 맡았다.
근대(近代) 무신(武臣) 중에 시에 능한 사람이 몇 사람에 지나지 않고 또 볼만한 것도 못 된다. 오직 박위겸(朴撝謙)이 젊어서 신 문충공(申文忠公 신숙주)의 막하에 있을 때에 시를 지었는데,
10만 정병이 수루를 호위하고 / 十萬貔貅擁戍樓
변방의 깊은 달밤에 여우 갖옷 싸늘한데 / 夜深邊月冷狐裘
한 가닥 긴 피리 소리 어디메서 들려오는고 / 一聲長笛來何處
정부의 만리의 시름을 불어서 다하는구나 / 吹盡征夫萬里愁
하였다. 뒤에 흥덕현(興德縣) 배풍헌(培風軒)에서 시를 지었는데,
우뚝 솟은 높은 봉우리 정정한데 / 屹立亭亭萬仞峯
봉우리에 선 높은 누각 멀리 바람 속에 있도다 / 峯頭高閣逈臨風
땅은 봉래섬과 삼청의 경계에 이어 있고 / 地連蓬島三淸界
사람은 소상팔경 중에 있도다 / 人在瀟湘八景中
구름은 산허리에 아득하고 / 雲帶山腰橫縹緲
물은 하늘가에 닿아 뿌옇도다 / 水㴠天影接空濛
문득 먼 포구에 돌아오는 배를 보니 / 忽看遠浦歸帆疾
물길이 멀리 한수(한강)와 통하는구나 / 水道遙連漢水通
하였으니, 무인(武人)의 시 가운데 이런 작품은 쉽사리 얻지 못할 일이다.
안동(安東)과 김해(金海) 두 부(府)의 풍속에 매년 정월 16일이 되면 주민들이 모여서 좌우로 나뉘어 돌팔매질하는 놀이를 하여 승부를 겨루었는데, 정덕(正德) 경오년에 왜적이 침입하자 방어사(防禦使) 황형(黃衡)과 유담년(柳聃年) 등이 두 부의 돌팔매질 잘하는 사람들을 모아 선봉을 삼아 드디어 적을 크게 격파하여 섬멸하였다.
청풍군(淸風郡) 사람들이 옛날부터 나무로 만든 인형(人形)을 얻어 그것을 귀신으로 삼고, 매년 5ㆍ6월 간에 공관(公館)에 모셔 놓고 제사를 크게 지내니 그 고장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첨지 김연수(金延壽)가 원이 되어 남녀 무당과 그 일에 앞장선 자를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그 나무 인형을 불태워 버렸더니, 그 요사스러운 제사가 드디어 끊어졌다.
판서 송천희(宋千喜)는 성품이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었다. 일찍이 영남 관찰사로 있을 때에 어떤 무당이 자칭 부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나는 능히 병든 사람을 낫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린다.” 하니, 온 도내(道內)가 그 도술(道術)을 믿고 다들 전하기를, “손님 중에는 그 무당의 요구를 충당하려다가 파산을 하고도 거리낌이 없는 사람까지 있다.” 하니, 공이 듣고 노하여 말하기를, “그가 감히 내 고장에서 멋대로 요술을 부리다니.” 하고,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곤장을 쳐서 죽였더니 온 도내가 삼가고 두려워하였다. 뒤에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있을 때에, 부(府)에 사는 사람들 중에 소를 도살(屠殺)하는 것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관청에서도 금하지를 못하였다. 공이 이 일을 보고 먼저 규약(規約)을 만들고 범하는 자는 언제나 용서하지 않았더니, 그 폐단이 드디어 없어졌다. 형조(刑曹)의 장(長 참판)이 되어서 소를 도살하는 죄를 범한 자는 경중(輕重)을 가리지 않고 역시 모두 문초하여 죽였더니, 사람들이 그 잘못을 바로잡음이 너무 지나치다고 의논이 분분하였다.
신라(新羅) 성덕여왕(聖德女王)의 시가 《당시품휘(唐詩品彙) 》에 실려 있고, 고려 사람의 〈인삼찬(人蔘賛)〉이 《본초강목(本草綱目) 》에 실려 있는데, “인삼과 잣이 양(陽)에는 안 맞고 음(陰)에는 맞는다.” [三椏五葉背陽向陰]는 말을 당(唐) 나라 이후로 시인들이 많이 썼다. 이규보(李奎報)ㆍ김극기(金克己)ㆍ김구(金坵)ㆍ이제현(李齊賢)ㆍ박인범(朴仁範)ㆍ이곡(李穀) 부자와 우리나라의 신숙주(申叔舟)ㆍ성삼문(成三文)ㆍ서거정(徐居正)의 시가 모두 중국에 널리 퍼졌다. 근대에 또 전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중국 서울에 간 사람이 동파(東坡)의 시를 사려고 하니, 중국 사람이 말하기를, ‘어째서 당신 나라의 이상국(李相國)의 시를 읽지 않는가.’ 하였다.” 한다. 또 전하기를, “중국이 《향시록(鄕試錄)》에 김일손(金馹孫)의 〈중흥대책(中興對策)〉 전편이 실려 있는데 그것은 시험장에서 몰래 베껴서 관원을 속였던 것이다.” 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우리나라의 인재가 반드시 중국에 못 지는 않다.
예부터 이르기를 앵무새(鸚鵡)는 말을 한다고 한다. 영락(永樂) 정해(丁亥)년에 흠차내사(欽差內使) 김수(金壽) 등이 왔을 때에, 황제가 앵무새 장 여섯 개를 주었는데, 모두 말을 못했다. 성화(成化) 무렵에 유구국(琉球國) 왕이 사신을 보내면서 앵무새 한 마리를 바쳤는데, 역시 말을 못하였다. 점필재(佔畢齋)가 동도(東都)에서 앵무새를 만나 시를 짓기를,
진귀한 새 한 마리 동국에 와서 / 珍禽隻影到東陲
밤낮으로 얼씬거리는 담장의 까마귀와 몇 번이나 짝지었던고 / 幾伴墻烏日夜馳
다만 울음으로 대함은 고향이 아니기 때문이요 / 鳴咽只應非故土
어리둥절 도리어 바보를 배우려네 이 새가 말을 못함을 이름이다. / 媕娿還欲學癡姬
푸른 깃은 마름꽃과 겨루기를 꺼리고 / 翠衿自惜菱花照
남빛 발가락은 옥 사슬 면하기 어렵구나 / 紺趾難辭玉鏁縻
아홉 가지 특징이 있는 단혈산의 봉황새 닮으면 / 爭似九苞丹穴鳳
말하지 않아도 오히려 태평시를 기리리라 / 不言猶瑞太平時
하였다.
노두(老杜)의 유한실탄오(遺恨失呑吳)의 구절은 동파의 꿈으로 인해서 그것이 탄오(呑吳)의 잘못이 유한이 됨을 알았고, 강호다백조(江湖多白鳥)의 구절은 아전들의 속담에 의해서 백조(白鳥)가 도롱룡[蛟]임을 알았다. 예나 지금이나 이와 비슷한 것이 어찌 한두 가지에 그치겠는가. 황산곡(黃山谷)의 잡시(雜詩)에,
고풍이 쓸쓸하여 말하지 않고 돌아가니 / 古風蕭索不言歸
빈천할 때 사귄 정 부귀로써 그르쳤네 / 貧賤交情富貴非
세조가 본래 천하를 포용할 역량이 없어서이지 / 世祖本無天下量
자릉이 어찌 고기 낚던 기슭을 그리워 하리오 / 子陵何慕釣魚磯
하였는데, 사용(史容)의 주(註)에, “엄자릉이 뜻이 높고 굽신 거리지 않았음은 세조의 도량이 포용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세조가 빈부에 따라 사귀는 정에 다름이 있었다면 엄광(嚴光 자릉)이 어찌 그를 그리워하였겠는가.” 하였다. 내 생각에는 그렇지가 않다. 광무(光武)가 엄자릉을 대함에 있어 포의(布衣) 의 맹세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로 나이로써 존경하고 덕으로써 받든 사람이다. 세조가 하루아침에 천자의 귀한 몸이 되어 사우(師友)로써 예우(禮遇)하지 못하고 관직(官職)으로써 굴하게 하였으므로 엄자릉이 세조가 본래 천하 량이 없음을 혐오(嫌惡)하여 고개를 저으면서 가 버린 것이지, 진심으로 고기 낚기를 그리워한 것은 아니다. 시의 뜻이 이러하니 참으로 사씨가 말한 바와 같다면 마땅히 “만약 천하 량이 없었다면.[若無天下量]이라 할 것이지, 어찌 본무(本無)라는 글자를 썼겠는가. 안식(眼識)을 갖춘 사람은 반드시 이를 분변하리라.
유빈객(劉賓客)이 한퇴지(韓退之)의 악양루(岳陽樓)에서 두사직(竇司直)과 이별하는 시에 화답하는 시에서 관진척리족 안도후가자(觀津戚里族 按道侯家子)의 구절을 남에게 여러 번 물어 보았으나 모두들 말하기를, “관진(觀津)은 물을 본다는 말이고 안도(按道)는 한 도를 안찰(按察)한다는 말이니 이것은 척리지족(戚里之族) 후가지자(侯家之子)가 혹은 물을 보거나 혹은 한 도를 안찰하려고 와서 좌상(座上)에 있다는 뜻이다.” 하였다. 그러나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은 그르다. 《한서(漢書)》를 살펴보면, 두영(竇嬰)은 관진 사람으로 두태후(竇太后) 의 사촌오빠이다. 그러므로 척리족(戚里族)이라고 한 것이고, 한왕신(韓王信)의 손자 열(說)은 안도후(按道侯)에 봉해졌으므로 후가자(侯家子)라고 말한 것이다. 지금 두상(竇庠)과 한유(韓愈 퇴지(退之))가 함께 누각 위에 있으니 두상과 한유 두 사람을 끌어다가 견주었으니, 이것은 바로 시인의 솜씨이다. 세상 사람들의 억지 해석은 참으로 한 번 껄걸 웃어댈 만한 일이다.
문정공(文貞公) 어세겸(魚世謙)이 신래(新來 과거에 새로 급제한 사람)로서 승문원에 있으면서 빠른 글씨로 〈김자정선생찬(金自貞先生賛)〉을 희롱으로 지어 장서각(藏書閣)의 아래 대들보 위에 썼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저작(승문원의 한 벼슬) 김 공 / 著作金公
이름은 자정인데 / 名曰自貞
몸은 비록 여기에 있으나 / 身雖在此
마음은 서경에 가 있다 / 心則西京
서경에는 / 西京謂何
이름난 기생이 있어 / 有妓擅名
자나 깨나 그를 생각하지만 / 寤寐思之
소원 못 이루었네 / 誓願未成
그 소원 어이 이루리 / 焉遂其慾
오직 말 타고 가려고 글씨를 쓰는데 / 惟點馬行
쓴 글자 획을 보니 / 顧其字畫
졸하고도 서투르구나 / 旣拙且生
쓰고 적어서 / 爰書膽錄
정교하기 힘쓰는데 / 以求其精
삼복 무더위에 / 三伏極暑
땀 흘러 내가 되네 / 流汗川橫
쉬지 않고 부지런히 쓰며 / 勤書不掇
20장을 한정하고 / 卄紙爲程
종일토록 쓰면서도 / 窮日矻矻
지칠 줄을 모르네 / 不知疲癭
벗들이 위로하기를 / 友朋共弔
얼마나 힘드냐하고 / 曰何勞形
가탁하여 말하기를 제조가 / 托云提調
고찰함이 매우 자세하므로 / 考察甚明
부득이 / 不得已耳
감히 부지런히 하지 않을 수 없으니 / 非敢營營
글쓰기 스스로 괴로워도 / 書之自苦
부지런히 하라 하였네 / 勤劬丁寧
아, 김 공이 / 嗚呼金公
병이 나려 하는데도 / 病孼將萌
오히려 멈추지를 않으니 / 猶未悔止
또한 어리석지 않느냐 / 不亦愚冥
사람의 몸이란 / 人之有身
역시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는 것 / 亦不可輕
모든 일을 할 때에는 / 庶節其勞
쉬기도 하고 편안히 있기도 할 것이니 / 載逸載寧
자문도 익히지 말고 / 莫習咨文
기성(평양)도 생각지 말며 / 莫思箕城
분수를 지키고 연분을 따라서 / 守分隨緣
나이를 보전하라 / 以保其齡
기성의 아리따운 기녀 / 洛城佳妓
얼굴이 순영(무궁화)같고 / 顔如舜英
서울 길 긴 뚝에 / 紫陌長堤
왕도는 평평하니 / 王道平平
말 몰고 달려 / 載驅載馳
임금의 마음을 위로하라 / 以慰君情
하였는데, 그 뒤부터는 새로 분관(分館)에 급제하면 공의 이 찬(賛)을 한 번 지나가며 읽게 하여 곧 외게 하고, 만약 외우지 못하면 벌을 가하였으므로 몰래 베껴다가 외었다. 이것이 드디어 원중(院中)의 고사(故事)가 되었다.
양성재(楊誠齋)의 시의,
강매는 정히 먼저 교할 하는 것이 마땅하다 / 汪梅端合先交割
봄빛은 어찌하여 탐지하지 못 하는가 / 春色如何未探支
와 당 나라 태사(太史)의 시의,
금소로 일찍 농촉을 통하게 하였던가 / 曾否金牛通隴蜀
풍학은 부진(적진)을 놀라게 함이 있었더냐 / 有無風鶴駭苻秦
의 교할(交割)ㆍ탐지ㆍ증부ㆍ유무는 모두 이문(吏文) 중에 있는 말로, 이른바 속된 것으로 아담함을 삼는다는 것이다.
모든 원이 된 자는 으레 민가의 과일나무를 일일이 적어두고 그 열매를 거두어들이는데, 가혹하게 하는 자는 그해의 흉년든 것도 상관하지 않고 거두어들이는 데에 반드시 그 수효를 채웠으므로 백성들이 그것을 괴롭게 여겨 그 나무를 베어버리는 자도 생기기까지 하였다. 어잠부(魚潜夫)가 김해(金海)에 살 때에 매화나무를 도끼로 찍는 사람을 보고 부(賦)를 짓기를,
세상에 향기 풍기는 군자가 없고 / 世乏馨香之君子
시대는 사호(뱀과 범) 같은 가혹한 법을 일삼는구나 / 時務蛇虎之苛法
참혹하기가 이미 어미닭을 잡아가기에 이르렀고 / 慘己到於伏雌
다스림이 또한 어린 양에 혹독하도다 / 政又酷於童羖
백성이 한 그릇의 밥을 먹으면 / 民飽一盂飯
벼슬아치가 침 흘리며 달려들고 / 官饞涎而齎怒
백성이 한 벌의 갖옷을 입으면 / 民暖一裘衣
벼슬아치가 팔을 걷고 벗겨 가네 / 吏攘臂而剝肉
설사 내가 들에서 굶어 죽은 넋을 제사지내고 / 使余香掩野殍之魂
유민의 뼈에 꽃을 덮어 주어도 / 花點流民之骨
마음 아프기 이러하니 / 傷心至此
어찌 초췌함을 논하리오 / 寧論悴憔
어찌 할까, 농부가 무지하여 / 奈何田夫無知
형벌의 욕을 보고 / 見辱斧斤
바람에 시달리고 달에 고생하니 / 風酸月苦
누가 이 끊어진 혼을 부르겠는가 / 誰招斷魂
하고, 또,
황금 같은 열매가 많이 달리니 / 黃金子蘩
벼슬아치가 토색질을 멋대로 하여 / 吏肆其饗
수량을 늘려 갑절로 거두어 들이고 / 增顆倍徵
걸핏하면 매질하니 / 動遭鞭捶
아낙은 원망하면서 낮에 지키고 / 妻怨晝護
어린 것은 울면서 밤에 지킨다 / 兒啼夜守
이것이 다 매화 탓이니 / 玆皆梅崇
매화가 근심거리가 되었구나 / 是爲尤物
앞산에는 가죽나무 있고 / 南山有樗
뒷산에는 상수리나무 있으나 / 北山有櫟
관청에서는 상관하지 않고 / 官不之管
아전도 모질게 하지 않는다 / 吏不之虐
매화는 도리어 그만도 못하니 / 梅反不如
어찌 베어 버림을 면할 수 있겠는가 / 豈辭剪伐
하였다. 김해 원이 그것을 읽어 보고 크게 성을 내어 잡아다가 그 죄를 다스리려 하자 잠부가 다른 고을로 도망하여 절도사 무열공(武烈公) 박원종(朴元宗)에게 가서 의탁하려 했으나, 병들어 역사(驛舍)에서 죽었다.
가정(嘉靖) 병오년(1546, 명종 1)에 서반(西班) 이시정(李時貞)이 하지사(賀至使) 첨지 김섬(金銛)에게 말하기를, “유구(琉球)와 안남(安南) 두 나라는 그 관복(冠服)의 제도가 중국과 다름이 없으나, 당신네 나라의 관복만은 중국과 다르므로, 근일(近日) 조천궁(朝天宮)에서의 연례(演禮)와 회동관(會同館)에서 임금이 연회를 베풀 때에 어사(御史) 및 예부(禮部)의 여러 관원들이 모두 조선(朝鮮)이 유구와 안남 두 나라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소.” 하기에, 내가 극력 변명하기를, “유구와 안남은 예의를 모르오. 유구의 풍속에는 바지가 없어 개돼지 같으므로 내조(來朝)하는 날 두 나라 사람들은 모두 중국옷을 빌려 입은 것이고, 조선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예악문물(禮樂文物)이 있어 천문ㆍ지리ㆍ의약(醫藥)ㆍ복서(卜筮 점)ㆍ산율(算律 셈법과 법률) 등의 글이 한결같이 중국과 같고, 의복에는 조복(朝服)ㆍ공복(公服)ㆍ사모(紗帽)ㆍ단령(團領)이 있는데, 다만 예의 제도가 조금 다를 뿐이고, 또 복장(服章)에 차등(差等)이 있어 당상관(堂上官)만이 비단옷을 입고, 일반 선비와 평민들은 모두 그것을 입을 수 없소. 그러니 두 나라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오.” 하였더니, 이에 서로 돌아보며 감탄하면서 “우리 여러 관원들이 처음에 두 나라를 가리켜 낫다고 한 것은 다만 관복(冠服)이 중국과 같기 때문이었소. 공 등이 환국하여 모름지기 대신(大臣)에게 고하여 관복의 체제를 고치면 매우 다행이겠소.” 하였다.
남지정(南止亭)이 지은 교리(校理) 권달수(權達手)의 묘갈(墓碣)에, “교동주(喬桐主 연산주(燕山主)) 즉위 10년 갑자년에, 윤비(尹妣) 추존(追尊)의 일을 거행하려고 백관들과 의논할 때에 연산주가 술주정이 한창 심하여 그의 뜻에 거스르는 자는 곧 해를 입혀 시체가 거리에 쌓이고 온 대궐 안이 벌벌 떨고 감히 이의(異議)를 제기하지 못하였는데, 교리 그대는 분격하여 말하기를, ‘어찌 나의 목숨을 아껴 임금을 악에 빠뜨릴 수 있겠는가. 이 의논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했더니, 같이 있던 선비들과 어사와 간관(諫官) 등이 그대의 말이 옳다고 하여 모두 그대의 의논과 같으므로 연산주가 모두 쫓아내었다. 그대는 반 년 만에 붙잡혔는데, 전에 의논을 한 사람은 모두 형벌을 주려고 할 때에, 그대가 말하기를, ‘그 의논을 주창한 사람은 나요. 다른 사람들은 관계가 없소.’ 하여, 그대만이 저자에서 죽음을 당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안전할 수가 있었다. 그대가 잡히자 부인 정씨는 함창(咸昌)에 살고 있었는데, 한 알의 쌀도 입에 넣지 않고 괴로우면 물을 마실 뿐이었다. 남편의 죽음을 듣고 말하기를, ‘나는 그와 함께 한 무덤에 묻히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하고, 드디어 오래도록 슬퍼하여 울다가 숨을 거두었다. 아, 그대 같은 사람이 어찌 옛날의 열사(烈士)가 아니겠으며, 부인도 그대와 마찬가지이니 참으로 절개와 의리가 한 쌍을 이룬 것이라고 하겠다.” 하였다.
참판(參判) 권경우(權景祐)가 성종 때에 감찰(監察)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연경에 갔다. 역관(譯官)이 물건을 너무 많이 가지고 오느라고 여정이 떠들썩하였는데, 그것을 부탁한 집들은 권세 있는 사람들과 대부분 연관되어 있었다. 공이 그것을 모두 다 찾아내어 임금에게 아뢰니, 한 필의 베[布]를 부탁한 사람도 모두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게 되었다. 공은 세 품계를 뛰어 정언(正言)으로 승진되었는데 대간들을 움직여 임사홍(任士洪)을 내쫓기를 청했는데 그 말이 매우 굳세고 곧았다. 임사홍이 저녁에 공의 집에 가서는 그 일을 모르는 척하고 말하기를, “누가 감히 이 의논을 냈느냐.” 하니, 공이 곧장 대답하기를, “오직 나만이 감히 할 수 있을 뿐이오.” 하였다. 임사홍이 가가 꺾여 다시는 한 마디의 말도 못하고 물러갔다. 그가 홍문관에 있을 때 논하기를, “폐비가 비록 죄가 있으나 여염집에 살게 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하였더니, 임금(성종)이 크게 노하여 속으로 세자에게 붙어서 뒷날의 터전을 마련하려는 것이라 생각하고는 그를 옥에 가두고서 꾸짖고 따지기를 다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꺾이지 않고 진심을 털어놓고 역대 임금의 폐비를 대우한 사례(事例)를 인용하면서 말이 더욱 간절하니 임금은 이에 노여움을 풀고 다만 그 벼슬만 파면시켰다.
홍치(弘治) 갑자년(1504, 연산군 10)에 연산주가 죄도 없는 심순문(沈順門)을 죽이려고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삼정승 이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감히 이의(異議)를 말하지 못할 때, 대사간 성세순(成世純)이, “우리들이 간관을 맡고 있으면서 어찌 말없이 잠잠히 있으리오.” 하고, 헌납(獻納) 김극성(金克成)은, “벼슬이 간관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죄 없이 죽는 사람을 보고 설사 몸을 아껴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는 데에는 어찌하리오.” 하니, 정언 이세응(李世應)이, “헌납의 말이 옳다.” 하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만약 임금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반드시 심순문과 함께 죽을 것이니, 결국 이익이 없는 짓이다.” 하니, 김극성과 성세순이 태연히 담소(談笑)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큰 일이니 각기 그 뜻에 맡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오늘 먼저 죽을 사람은 반드시 우리 두 사람이고 그 다음은 정언일 것이다.” 하고, 드디어 그 죄 없는 연유를 아뢰니, 연산주가 비록 들어주지는 않았으나 또한 그들을 벌주지도 않았다.
박희문(朴希文)이 병든 어머니를 위하여 다리 살을 베어 먹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산소 옆에 초막을 짓고 집이 가난하여 늘 쌀을 구걸 해다가 제사를 지냈는데, 불을 지피고 땔감을 나르는 일을 모두 몸소 하여 게으름이 없었다. 사람됨이 진솔하고 꾸밈이 적어서 남이 그 일을 물으면 사실대로 대답하고, 살을 베어 낸 흔적을 보자고 하면 내어 보여 주었다. 이에 그를 비방하는 소문이 시끄럽게 퍼져서 그 넓적다리의 살을 벤 일을 과장해서 명예를 얻으려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슬프다. 넓적다리의 살을 벤 것이 어찌 거짓에서 나왔겠는가. 그 착한 행위를 칭찬하지는 못할망정 그것을 명예를 구하기 위한 것이라 하니, 이른바 남의 미덕을 도와서 이루어 준다는 것이 아니다.
정문(旌門)으로 효자와 열녀를 표창하여 권장하는 것은 옛날부터의 제도다. 다만 중국은 효자에게 있어서는 백성 벼슬이 있으면 그 벼슬을 일컫고 벼슬이 없으면 민인(民人)이라고 하였다. 모의 효행지문[民人某孝行之門]이라 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효자모지문(孝子某之門)이라 하였다. 중국에서 절부(節婦)에 대해서는 고 백성 모의 처모씨 정절지문[故民某妻某氏貞節之門]이라 하였는데, 이는 아내는 반드시 남편을 따라야 하므로 그 남편의 관작과 성명을 든 것이다. 이른바 정절(貞節)이라는 것은 남편이 죽은 뒤에 죽을 때까지 절개를 지킨 여인을 말하는 것이고, 열부(烈婦)의 특이(特異)한 행실에 이르러서는 고 민모의 처모씨 정렬지문[故民某之妻某氏貞烈之門]이라 하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다만 열녀모씨지문(烈女某氏之門)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부인들은 모두 수절을 했으므로 반드시 특이한 행실이 있은 뒤에라야 정문을 세웠으니, 절부ㆍ열부ㆍ정절ㆍ정렬(貞烈)의 구분이 없다. 그러나 그 정문의 문구는 마땅히 중국을 본떠서 고쳐야 할 것이다.
죄를 짓고 온 가족을 이끌고 변방(邊方)으로 이주하는 자를 입거(入居)라고 하는데, 죽으면 장사를 치르자마자 백정이나 관가의 종으로 아내 없는 자가 관청에 고하여 그 죽은 자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하면 수령이 위협하여 시집가게 하니, 비록 양가(良家)의 자녀라도 면하지 못하였다. 과부로 하여금 비록 절의(節義)를 지키게 하지는 못할지언정 어찌 차마 그 뜻을 빼앗고 시집을 가게 한단 말인가. 퇴폐한 풍속이 이보다 큼이 없을 것이다. 수령이 그 그릇됨을 모르고 방백(方伯)도 금하여 없앨 줄을 모르니 한탄스러운 일이다.
사약(司鑰 액정서(掖庭署) 정6품 잡직의 하나) 조어정(趙於玎)이 그 어머니에게 효도하였는데, 어머니가 죽자 슬프게 곡하고 아침저녁으로 정결하게 제사지냈으며, 탈상 후에도 그렇게 하였다. 그 일을 중종이 듣고 그의 집에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 뒤에 김안로(金安老)를 극진히 섬겨 언제나 그의 말을 들어주었는데 죄에 걸린 자가 조어정에게 뇌물을 주면 반드시 놓아 주었다. 김안로가 패하고 조어정은 북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용서를 받고 서울로 다시 돌아왔으나 또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죽었다. 옛 속담에 말하기를, “백리를 가는 자는 90리를 반으로 잡으라.” 하였는데, 이는 그 말로(末路)의 어려움을 말한 것으로 거울삼을 만한 일이다.
당 나라 여공(呂恭)이 관내에 아비 무덤에 여막(盧幕)을 치고 있던 사람이 얻은 석서(石書)를 임금에게 아뢰려 하매, 유종원(柳宗元)이 편지를 보내어 말리기를, “심은 소나무를 새가 뽑은 변괴가 있어 그 땅을 팠더니 돌을 얻었다는 말은 상도(常道)에 어긋나 믿기 어렵다. 대저 거짓 효도를 하여 간교한 이익을 보려고 하는 것을 참으로 어진 자가 차마 그 잘못을 들추지 못하는 것은 교(敎)를 손상시킬까 두려워해서이다. 그러나 거짓을 하도록 하여 이익을 탐하게 하면 교가 더욱 무너지는 것이니, 그 받아둔 글은 내지 않는 것이 매우 다행이겠다.” 하였다. 가정(嘉靖) 초년에 사천(私賤) 이양동(李良童)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효도로써 마을에 소문이 났다. 이양동이 관령사(管領使) 길남부(吉南部)에게 뇌물을 주고, 또 부관(部官)에게 뇌물을 주어 예조(禮曹)에 통첩을 올려 달라고 했으나 부관이 미워서 듣지 않았다. 몇 해가 지난 뒤에 마침내 예조에 통첩을 올려 정문을 세우고 복호(復戶)를 해주려고 장차 통첩을 올리려 할 때에 이양동이 기뻐하여 첩지(牒紙)를 집에 가지고 가서 그 일이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랐는데, 그 뜻이 반드시 효자라는 명예를 사모한 것이 아니라 실지의 잇속은 복호에 있었던 것이다. 뒤에 그 부의 서원(書員)으로 고용되어 권력으로 백성의 재물을 몰수하곤 하여 민간에 폐를 끼치다가 마침내 곤장을 맞고 죽었다. 아, 효자의 표창도 뇌물로 얻으니, 돈귀신[錢神]의 이야기가 참으로 헛된 말이 아니로구나.
가정 신사(辛巳)년에 무인(武人) 하정(河挺)의 첩 강씨(姜氏)가 수절하고 개가하지 않기로 손가락을 잘라 스스로 맹세하였다. 뒤에 그 어머니가 몰래 사람을 시켜 강제로 데려가게 하였더니, 신혼의 사랑이 전보다도 더 두터워져서 늘 규방 안에 함께 거처하면서 마치 목을 서로 기대고 있는 원앙새보다도 사이가 더 좋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정호음(鄭湖陰 사룡(士龍))이 〈강절부행(姜節婦行)〉을 지었는데,
의춘현 무등촌에 / 宜春之縣無等村
강씨라는 여인이 있어 아름답다고 일컬어졌네 / 有女姓姜稱淑美
문벌이 비록 외가는 보잘 것 없었으나 / 門譜雖然無外家
아비는 조상 때부터 좋은 벼슬자리에 올라 / 郞罷夙世躋膴仕
정수 북쪽에 크게 자리 잡고 살면서 / 田園雄據鼎水北
천 명이나 되는 식구들이 모두 비단옷을 입었다네 / 家人千指被羅綺
강 아가씨 성품이 난초처럼 아름답고 / 姜娥天賦蕙蘭質
검은 머리 붉은 뺨에 하얀 이 / 綠鬂丹臉仍皓齒
소랑의 수놓는 솜씨 모두 배웠고 / 蘇娘錦字工宛轉
설도 의 아름다운 편지 사연도 많네 / 薛濤華牋賦辭理
땋은 머리 가만히 받들어 그 어미 지키고 / 阿鬟密奉阿母護
문밖에 일찍이 신발 소리 들은 적 없네 / 閾外不曾聞繡履
중신할미 헛되어 청조사 되어 / 媒媾浪費靑鳥使
깊은 규방에서 짝 가리기 몇 해던고 / 幾年擇對深閨裏
악목이 다투어 접근해도 고개 끄덕이지 않더니 / 岳牧爭調不點頭
스스로 마음 주어 하씨 아들께로 갔었네 / 自許竟歸河氏子
하생이 비록 무계로써 나아갔으나 / 河生縱由武階進
사귀는 이 모두 명사들이라 / 納交盡是知名士
고관대작을 겨자 줍듯 한다고 자랑하면서 / 自謂高官若拾芥
사랑방에 객을 치고 서사를 탐독했는데 / 郡齋養客耽書史
어찌 알았으랴. 주포화 에 연좌되어 / 郍知竟坐主逋禍
패가하고 몸은 죽어 세루 되었네 / 家破身戮爲世累
강씨는 피눈물로 천지에 맹세하여 / 姜娥泣血誓天地
절개를 빼앗기면 죽기로 결심하고 / 有如奪志期一死
몸소 지아비의 뼈를 가져다가 산아에 모시니 / 親携夫骼妥山阿
외로운 몸 의지할 곳 없이 되었구나 / 孑然被經無所倚
어미가 재가를 권하고 친척들이 가엾다 하면 / 玆母勸止親黨憫
듣기도 전에 소스라쳐 펄쩍 뛰는구나 / 語不及耳輒驚起
어떤 갑부가 재물로써 꾀었더니 / 有甲利財挾勢誘
은장도로 가냘픈 손가락을 잘라 / 忍取銀刀落纎指
적삼에 피가 흥건하고 땅위에 낭자 하구나 / 羅衫殷血紛滴地
붓을 들어 피로 종이에 가득히 쓰고 / 承以栗尾書滿紙
묘 앞에 하소연하는 곡소리 하늘에 사무치니 / 陳詞墓前哭撤天
듣는 이 모두 다 놀라는구나 / 聞者怖愕來雲委
백성들은 감탄하고 현관은 칭찬하여 / 氓庶咨嗟縣官嘉
여자들로 하여금 강씨같이 되라 하였고 / 令女共姜擬可企
젊은 홀어미 개가하려다가도 / 有娣亦寡欲再適
감화되어 가문의 부끄러움 사지 않았네 / 感起不作家聲耻
어찌 어미가 딸 팔기를 좋아하리요마는 / 何知母性喜售女
몰래 불량배들과 짜고 속임수를 써서 / 陰結惡少逞奇詭
황혼에 뒷방에서 숨죽이고 있다가 / 黃昏屛息後閤子
강씨의 잠자리 엿보고 달려들게 하였다 / 侗女就房令逼邇
늙은 할미 자랑하기를 “몇 사람을 섬기다가 / 揚言老媼事幾人
너의 아범 만나 이 집으로 온 나다 / 乃遭汝翁來家此
눈앞에 분분히 너희들 있으니 / 紛然眼前烈女曹
영광을 누리기 나 만한 이 없구나 / 享有光榮莫我似
사람의 한 세상 풀에 붙은 티끌인데 / 人生一世塵寄草
너는 수절하여 누구를 기쁘게 하려느냐 / 汝縱立節誰復喜
강씨가 이 소리 듣고 홀연히 마음이 돌아서 / 女聞斯言心忽回
어제의 잘못을 지금에 깨달은 듯 / 昨非方知悟今是
끌어안는 힘에 못 이기는 척하고 / 甘心似爲力所扼
밤새도록 꿈에 맺은 원앙 이불 안에서 / 通宵夢結鴛鴦被
생각을 돌이켜 옛 님 에게 정성을 보내려 하나 / 翻思舊主欲輸忱
엎지러진 물이 되었으니 다시 담기 어렵구나 / 傾甁已作難收水
동서(형제의 아내가 서로 부르는 말)들 사이에 오래 웃음거리 되고 / 長遭咥笑妯娌間
추문은 퍼져 더럽다 침뱉았으나 / 醜言播耳忽唾鄙
신혼이 도리어 죽자사자하는 사이가 되어 / 新婚反供嚙臂盟
하루만 떨어져도 그리움을 어이하리 / 一日睽異情難已
절행이 온통 음행으로 변했으니 / 節行居然變淫行
죽은 하정의 넋이 있다면 부끄러워하리라 / 河間有靈羞與擬
남은 몸 따라 죽자던 첫 마음 어디 두고 / 殘肢效死始何心
한 마디에 절개 꺾음은 무슨 일인고 / 片言毁節終奚事
회가 몸 바쳐 강포한 오랑캐와 싸워 / 會之挺身鬪強虜
목숨 바쳐 조 나라 제사를 보존했으나 / 辨命碎腦存趙祀
마침내는 조 나라 꺾고 오랑캐에게로 갔으니 / 終然折趙欲歸虜
만약 주심을 얻었다면 개 돼지 같도다 / 若得誅心同犬豕
성인이 끝맺음을 귀히 여기는 까닭은 / 聖人所以貴終功
아홉 길의 공도 마지막 한 삼태기에서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 九仞虛簣宜審始
느낀 바 있어 절부행을 지어 / 感歎聊爲節婦行
보는 이로 하여금 거울삼게 하노라 / 庶使觀者爲鑑砥
하였다.
가정(嘉靖) 계미년에 하정사(賀正使) 판서 신제(申濟)와 관압사(管押使) 첨지 공세린(孔世麟) 등이 중국 조정에 떠나는 인사를 하는 날, 서장관(書狀官) 김기(金紀) 이하 13명이 모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예부에서 의논하여 아뢰기를, “통사(通事) 김산해(金山海)가 이미 국왕의 파견을 받았은즉 스스로 예법을 지키고 여러 사람들은 깨우쳐 조참(朝參)을 부지런히 해야 할 터인데, 도리어 법을 가볍게 여기고 한때의 편안함만을 추구하여 미리 깨우쳐 주지 않아 여러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어 떠나는 인사를 하는 사람의 수효가 적으니, 일이 법에 어긋나므로 법으로 볼 때 가볍게 다루기 어렵게 되었다…….” 하였고, 또 우리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왔으므로, 중종이 크게 노하여 일행을 심문하고 다스리려 모두 파직시켰다. 연경에 가는 사신으로서 조알(朝謁)을 게을리 하는 자는 알아서 경계할 일이다.
약재(藥材)중에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 많으므로 사신이 중국에 갈 때마다 의관(醫官) 두 사람을 보내어 사 가지고 오게 하였는데, 거간꾼이 속여 팔아 이익을 챙겼다. 소합유(蘇合油)ㆍ곽향(藿香)ㆍ독활(獨活)ㆍ유향(乳香)ㆍ사향(射香) 같은 것은 진짜가 아닌 것이 가장 많았다. 가정 병오년에 중종이 예부에 자문을 보내어 해당 관원과 합의 계약을 맺고 사기를 청하였더니, 상서(尙書) 하언(夏言) 등이 아뢰어 태의원(太醫院)으로 하여금 약품을 잘 시험하게 하기 위하여 의생(醫生) 한 명을 해당 관원으로 삼아 변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의생이라는 자가 저 상인들과 한 통속이 되어 끝내 진짜를 팔지 않았다.
요동(遼東) 사람으로 북방 민족 달자(達子)에게 사로잡힌 자들이 많이 우리나라 국경을 향해 나왔는데, 곧 도사(都司)에게 놓아 보내면 도사는 다시 광녕(廣寧)의 도어사(都御史)에게 보냈다. 도어사가 연말에 여러 번 중국 조정에 아뢰니 지금의 황제가 다시 칙서를 내려 표창하였다. 갑오년 무렵부터 함경도 육진(六鎭) 성 밑의 야인(野人)들이 사로잡힌 한인(漢人)들을 깊은 곳에 사는 달자에게서 사서 변방을 지키는 장수에게 바쳐 임금의 상이 내리기를 구하였다. 조정에서는 받지 않을 수 없어서 드디어 그 사람에게 상을 주고 잡힌 사람들을 요동으로 놓아 보냈더니, 그 뒤로는 야인들이 그 상을 받으려고 포로들을 사 오는 것이 그치지 않았다. 그 상으로 내리는 물건으로 역로(驛路)의 붐빔이 매우 심했으므로, 이에 변방을 지키는 장수에게 명하여 포로를 바치는 것을 물리치게 하였더니, 그 폐단이 드디어 없어졌다.
요동의 동쪽 30리 되는 곳에 도독첨사(都督僉事) 왕상(王鏛)의 무덤이 있는데, 그 비갈(碑碣)과 양마석(羊馬石)의 체제(體制)가 썩 잘 되어 있어 우리나라 사신이 으레 가보게 되니 묘지기가 대가를 요구하는데 이르렀다. 내가 한 사상(使相)에게 말하기를, “왕상은 한낱 장관(將官)이고, 신도(神道 묘소로 가는 길)의 시설도 장관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지금 사자(使者) 고관(高官)들이 그의 무덤 아래에 연이어 가는 것은 우리나라의 수치를 크게 끼치게 되는 것이니 가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였더니, 사상이 웃으면서, “너는 참으로 우물 안의 개구리로다. 어째서 이것을 수치라고 하겠는가.” 하였다.
중종 초에 통역관이 말하기를, “요동의 도사가 우리나라의 자문(咨文)을 보고, ‘너희 나라의 이문(吏文)은 알 수가 없다. 어째서 문자(文字 한자)로 자문을 지어 오지 않느냐.’ 하더라.” 하였다. 뒤의 통역관들도 연이어 이런 말들을 하였고, 크고 작은 자문은 반드시 이문으로 쓸 필요는 없다고 하기까지 하였다. 내가 우리 조정의 문서를 살펴보건대, 글이 매우 분명하고, 그 가운데 쓰인 글자가 때때로 한둘 예식(禮式)에 맞지 않는 것이 있기는 하나, 알 수 없을 까닭이야 있겠는가. 그때 통역관 배사신(陪使臣)이 도사에 서서 갑자기 대인(大人)이 하는 말을 듣고 그것을 번역하는 말이 서투르기 때문에 잘못 전한 것이 아니겠는가 싶지만 이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다.
세조 때에, 명나라 영종(英宗) 황제가 칙서로 타이르기를, “왕의 나라(조선)의 시서(詩書)와 예의(禮儀)의 가르침이 전하고 익힘에 전통이 있어 표정(表箋)ㆍ장주(章奏)와 보내오는 이문이 모두 예식에 맞다…….” 하였다. 또 가정 13년에 상서 하언(夏言)이 아뢰기를, “조선 나라의 문자가 명백 합니다…….” 하였는데, 어째서 통역관의 말과 같지 않음이 이와 같으냐 말이다. 내가 직사(職事)로 연경에 가기를 전후 일곱 번이나 하였는데, 요동 및 예부가 우리나라에서 보낸 글을 보고 이해하기 힘든 기색을 보인 일은 일찍이 없었다. 가정 정미년에 주문사(奏聞使) 동지(同知) 송순(宋純)이 문금(門禁)의 일 로 예부에 자문을 올리기 하루 전에 제독관(提督官)이 가져다 보고 통역관에게 말하기를, “여러 말 할 필요가 없다. 내가 이 글을 보고 벌써 그 전체를 알았다.” 하였다. 또 차부(車夫)가 통역관 이순종(李順宗)의 짐을 훔친 일에 대하여 나로 하여금 글을 지어 제독(提督)에게 올리게 하였는데, 이당(李棠)이 그것을 읽고 나서 연달아, “참으로 좋다.”고 몇 번을 칭찬하고, 이어 말하기를, “이 글은 이 곳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냐.” 하였다. 이 두 가지 일은 내 눈으로 본 사실이니, 이른바, “너희 나라의 이문은 알 수가 없다.” 한 것은 더욱 믿을 것이 못 된다.
성화(成化) 정미년에 교리(校理) 최부(崔溥)가 제주 경차관(濟州敬差官)으로 있을 때에, 아버지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빨리 오다가 바람을 만나 바다에 표류하여 태주(台州)에 닿으니, 비왜지휘(備倭指揮) 등의 관원이 다시 항주(杭州)로 보냈다. 보낸 관원이 함께 데리고 연경에 이르니 예부에서 임금에게 아뢰어 허락을 받고 놓아 보냈다. 그 뒤 제주의 백성들이 표류하여 영파부(寧波府)에 이르렀다가 다시 풀려 나와 모인 자가 6,7기(起 차(次))에 이르렀으므로, 우리나라에서 곧 사신을 보내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가정 정미년에 내가 주문사(奏聞使)를 따라 연경에 갔을 적에 제주 사람 김만현(金萬賢) 등 64명이 사관(使舘)에 이르렀는데, 역시 표류하여 영파부에 닿은 사람들이었다. 그 가운데 바람을 만나 두 번째 온 사람도 5,6명 있었는데, 데리고 온 지휘(指揮) 양수(楊受)가 말하기를, “항주에서 연경까지 수로로 1만여 리인데, 연도의 역사(驛舍)가 많이 황폐해졌다. 내가 지체 낮은 관원으로 64명을 데리고 배와 식량을 한결같이 조달할 수가 없어 혹은 하루 이틀 묵었는데, 김만현 등이 떼를 지어 몽둥이를 휘둘러 통역관을 욕하고 때리니, 역에서 일을 맡아보는 사람들이 무서워 도망쳐 버렸다. 내가 말렸으나 종내 듣지 않고, 전후 두 달 이상을 이르는 곳마다 모두 그렇게 하였으니, 예의의 나라의 백성으로 난폭함이 이에 이를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지휘 양수의 말을 처음 들을 때는 모두 믿지 못했으나, 돌아오는 길에 그들이 연도에서 하는 짓을 보니 과연 양수의 말과 같았다. 저 제주는 먼 바다 남쪽에 있으니 표류하여 살아 돌아오는 사람이 근대와 같이 잦은 적은 없었다. 이것은 목사(牧使)된 사람이 쉽사리 증명서를 발급해 주었으므로, 배를 탄 사람이 표류하여 중국에 가 닿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구태여 순풍을 기다리지 않았다. 이것이 표류하는 사람이 옛날보다 많았던 까닭이다. 그래서 항주 일대는 이미 표류민의 폐해를 입고 있었으니, 어찌 변장(邊將)이 왜적으로 지목하여 목을 베지 않으리라고 장담하겠는가. 또 어찌 쫓아내어 바닷길을 따라 돌아가게 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하겠는가. 김만현 등이 말하기를, “만약 15말의 쌀과 몇 항아리의 물만 있다면 비록 폭풍을 만나더라도 불과 며칠 사이에 곧 영파부에 닿을 것이니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바다에 표류하는 폐단이 장차 그치지 않으리라.” 하였다.
가사(歌詞)의 체(體)는 율시(律詩)와는 같지 않다. 율시는 상하(上下)ㆍ평성(平聲)으로 평성을 삼고, 상성(上聲)ㆍ거성(去聲)ㆍ입성(入聲)으로 측성(仄聲)을 삼는데, 가사는 사성(四聲)이 각기 제 구실이 있어 측성이 서로 통하여 쓰이지 않는다. 가(歌)는 말을 길게 늘이는 것이니 소리의 청탁(淸濁)ㆍ고하(高下)가 정연하게 조리가 있어 섞여서는 안 된다. 만약 그것이 섞이면 비록 면구(綿駒)를 시켜 부르게 하여도 역시 음(音)을 이루지 못한다. 익재(益齋 이제현)가 오래 중국에 가 있었으므로 그 체에 아주 밝고 작품도 많으나, 과연 중국과 들어맞는지는 모르겠다. 그 밖의 작자는 모두 그저 그렇고 그렇다. 성화(成化) 무렵에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기랑중(祈郞中)의 가사에 화답하였는데 기랑중이 역사(譯士)에게 말하기를, “이 가사가 성절(聲節)과 맞지 않는 것은 어찌된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우리나라는 말과 소리가 매우 다르니 어찌 그 성절이 같을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기랑중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정 병오년에 공운강(龔雲岡)과 오용율(吳龍律)이 짧은 가사 몇 곡을 짓고서는 원영사(遠迎使) 정호음(鄭湖陰)에게, “어째서 화운(和韻)이 없느냐.” 물으니, 호음이 답하기를, “가사는 율시와 비교할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성운(聲韻)은 아주 다르니 만약 억지로 본뜬다면 그 체계를 이루지 못하므로 감히 짓지 않는 것이다.” 하였으나, 공운강은 끝내 이상히 여겼다. 그러나 그것을 지어서 욕을 먹는 것보다는 짓지 않아 참되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물며 성음이 통하지 않는 것이 어찌 부끄러움이 되겠는가.
급사(給事) 오희맹(吳希孟)이 임진(臨津)을 지나면서 쌍운 종어가(雙韻縱魚歌)를 지었는데, 운이 억지스럽고 말이 매우 서툴렀다. 정호음이 생각나는 대로 써서 차운(次韻)하기를,
형강의 적벽이 우리 동국에 있으니 / 荊江赤璧在吾東
와서 노니는 조사는 소선(소동파) 같도다 / 來遊詔使蘇仙同
봄 물결 처음 일어 배를 띄우니 / 桃浪初生容泛
그물에 들어오는 송강의 농어와 위의 동어로다 / 入綱松鱸與衛鮦
요리사가 좋은 것을 얻어 □하지 않는 것을 편안히 여기고 / 厨人得雋活不□
싱싱한 채로 꼬챙이에 꿰어 화로에 굽네 / 活剝串炙洪鑪中
소반에 오르자 손가락 움직여 다 먹어버리니 / 登盤指動共呑嚨
누가 너를 출렁이는 물결 속에 놓아줄 것인가 / 誰肯放爾溟波浺
용진의 장인을 우연히 만나 / 龍津丈人偶然逢
생각하니 만물이 모두 자연의 조화로다 / 推念萬物天同功
고기와 새는 깊고 높은 곳에 숨어 사는데 / 魚鳥潜棲在深崇
천기가 자재하여 통발이나 새장에 살기 어렵도다 / 天機自在難罶籠
어찌 먹이를 탐하여 보금자리를 뜨랴마는 / 胡爲貪餌辭舊葒
아가미 거품 뿜으며 어항에서 노네 / 穿腮煦沫盆水容
도마 위에 지느러미 붉음을 누가 어여삐 여기리오 / 刀几誰憐尾鬣紅
맹공의 넓은 아량 크기도 하여라 / 孟公博雅心期沖
어찌 상주충에만 놓아 주리오 / 放生奚獨常州漴
여기에도 물 있어 맑고도 넓은데 / 此間有水淸而洪
너를 숨기 좋은 마름떨기에 놓아 주노니 / 縱汝好隱藻荇叢
나가거든 삼가 어부의 떨기를 범하지 말라 / 愼出莫犯漁人藂
용문에 못 오르고 멀리 날아가 버리면 / 龍門點額棄風翀
천지는 아득하고 하늘은 넓은데 / 天地浩渺層霄空
선생이 칼 있어 공동(전설상의 산)에 거니 / 先生有釰掛崆峒
솟구치는 기운이 충융을 넘네 / 超揖元氣凌沖瀜
남은 힘 이에 모두 금잉어로구나 / 餘力控此赤鯶公
교룡을 베어 피묻은 창 씩씩도 하여라 / 斬蛟血染霜鋒雄
천하에 영을 내려 경봉을 업신여기고 / 遂令四域無驚烽
두루 내리는 큰 비 창공에 돌도다 / 晉注霖雨回蒼穹
은혜 입어 바다 밖에도 풍년 드니 / 澤被海外作時豐
어찌 이 고기의 은혜를 사사로이 하리오 / 豈徒此魚恩私融
마침내 기약하는 도움 천룡에 있으니 / 終期賛翊在天龍
공 거두기 같이 하면 백성은 슬픔 없으리 / 收功咸若民無恫
하였다. 오희맹(吳希孟)과 공운강(龔雲岡)이 읽어 보고 감탄하기를, “참으로 높은 재주로다.”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원숭이가 없으므로 고금의 시인들이 원숭이 소리를 표현한 것은 모두 틀리다. 가정 병오년에 행인(行人) 왕학(王鶴)이 한강에서 놀면서 시를 지었는데,
푸른 술통이 물결에 잠겼으니 춘의(술 구더기)가 뜨고 / 綠尊隱浪浮春蟻
긴 피리 바람에 부니 저녁 원숭이의 휘파람 소리로다 / 長笛吹風嘯暮猿
하였다. 대제학 낙봉(駱峯) 신광한(申光漢)이 이에 화답하기를,
한수에서 지금 채봉을 만났으니 / 漢水卽今逢彩鳳
초운 어느 곳에서 원숭이 울음을 들을꼬 / 楚雲何處聽啼猿
하였는데, 이것은 을사년 여름에 행인 장승헌(張承憲)이 고명(誥命)을 받들고 왔을 때 낙봉이 강가에서 송영(送迎)하면서, 초(楚) 나라에서 사신으로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이 시를 지은 것으로 제원(啼猿)으로 운을 달았는데, 기교의 흔적이 없어 가장 뛰어난 시가 되었다.
적암(適庵) 조신(曺伸)이 일찍이 연경에 가서 안남국(安南國)의 사신 여시거(黎時擧)와 시를 지어 주고받기를 수십여 편이나 하였는데, 여시거의 시 한 수에 이르기를,
듣노니, 삼한 풍경이 유다르다 하니 / 三韓見說景偏殊
압록강 맑고 맑아 물빛이 가을이로다 / 鴨綠澄澄水色秋
이 강산 시 생각하기 좋다 하며 / 知是江山詩思好
도리어 구법을 소주를 본떴네 / 還將句法效蘇州
하였다. 적암(適庵)이 차운(次韻)하기를,
좋아하는 물고기와 웅장이 그 맛이 무엇이 다르랴 / 嗜魚熊掌味何殊
나는 그대 시의 맑기가 가을 같음을 사랑하노라 / 我愛君詩淡似秋
온(비경)과 이(태백)는 오직 부염하기를 자랑하려 하니 / 溫李只要誇富艶
공평하게 소주(위응물) 배움이 합당하리라 / 平平端合學蘇州
하였다. 여시거의 시가 소주(蘇州)로 운을 달아 창운(唱韻)을 어겨 화시체(和詩體)가 아니므로 글을 보내 나무랐더니, 또 한 수를 건넸는데,
삼한의 끼친 풍속 옛사람과 다르니 / 馬辰遺俗古人殊
세대가 바뀌기 몇 해던고 / 世代相移幾度秋
누살 명관이 무슨 뜻인고 / 耨薩名官何意義
그대는 예의 제도가 중국과 다름을 아는가 / 知君禮制異中州
하였으므로, 적암이 글로써 대답하기를, “앓고 난 뒤라, 글 생각이 잘 나지 않아 좋은 생각이 숨어 버리고 무기인 제충(梯衝)이 앞에서 춤추지만 처녀는 스스로를 지키노라. 그대는 회음(淮陰)의 물 위의 군사 달아남을 보고 조(趙) 나라 사람의 웃음을 유발시키지 말라. 훗날 몸이 건강해지기를 기다려서 서로 시단(詩壇)에서 장단을 겨루어 보기로 하자. 늙은이 말 위에 앉아서 사면을 돌아본 것을 보고 장막 안의 산가지를 아끼지 말라. 누살은 본래 방언(方言)으로 옛날의 운조(雲鳥)인데 벼슬을 이름 함은 무슨 뜻인가. 교지(交趾)가 어찌 변무(駢拇)의 뜻인가.” 하였더니, 여시거가 회답하기를, “그대는 회음(淮陰)으로 자처하고 조 나라 사람으로 나를 대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저 회음의 배수(背水)의 진은 바로 용병법(用兵法) 중의 기율(紀律)로 이긴 것이다. 지금 그대가 시를 읊을 적에 바로 쓰는 운을 답습한 것은 병법으로 비긴다면, 그대는 대오를 잃고 자리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 심한 것이니, 장차 무기를 버리고 군사를 이끌고 달아나게 될 것이니, 어느 겨를에 말 위에 올라 앉아 사면을 돌아보겠는가. 대장부는 호탕하여 먹으로 갑옷을 삼고 붓으로 칼날을 삼아 대군(大軍)을 소탕할 것이니, 어찌 막사 안의 계책을 쓰겠는가. 훗날 그대의 건강이 회복되어 한 번 찾아주시면 삼가 단부(壇夫)에게 명하여 엄숙히 기고(旗皷)를 마련하고 즉 재주를 겨룰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겠노라. 교지(交趾)는 본래는 한 군(郡)이다. 군의 북쪽에 남교관(南交關)과 천지산(天阯山)이 있으므로 군의 이름을 교지(交阯)라 하였는데, 뒤에 지(阯)를 지(趾)로 잘못 쓰게 되었으니, 그대가 잘못된 것을 그대로 쓰게 된 것도 괴이쩍을 것이 없다.” 하였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사천소감(司天少監) 우필흥(于必興)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하여 지리산(智異山)에서 끝나는데, 그 지세(地勢)가 물의 근원과 나무의 줄기처럼 생긴 땅입니다. 검은 것으로 부모를 삼고 푸른 것으로 몸을 삼았으니, 토(土)의 이치에 순응하면 번창하고 토의 이치를 거스르면 재앙이 생깁니다. 이제부터 문무백관은 검은 옷 푸른 갓을 쓰고, 중은 검은 두건에 큰 관(冠)을 쓰고, 여자의 옷은 검은 비단으로 만들어 입을 것이고, 또 모든 산에는 소나무를 빽빽이 심고, 그릇으로는 놋쇠와 구리와 토기(土器)를 써서 풍토에 순응할 것입니다.” 하였더니, 왕이 이를 따랐다. 지금의 승복(僧服)과 여자 옷의 제도나 소나무를 심고 그릇을 쓰는 것이 모두 그 옛것을 답습한 것이다. 다만 백관(百官)의 푸른 갓은 어느 해부터 고쳐졌는지 알 수 없다.
중국 사람들은 옷 길이와 소매 넓이가 모두 규정이 있어서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자세히 실려 있다. 가정 병신년(중종 31년)에 중국 사신이 오게 되자 조정에서는 의논하여 대명회전에 의거해서 옷의 길이와 소매넓이를 바로잡고 그 조문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선포하였으며, 계묘년에 이르러서 그것을 《대명회전후속록(大明會典後續錄)》에 실었는데, 그 글에, “모든 사람들은 문무 관직을 막론하고 겉옷 앞자락은 땅에서 세 치 떨어지고 뒷자락은 땅에 두 치 떨어지게 하며, 소매 길이는 손을 지나서 다시 걷어 올려 팔꿈치에 이르며, 수장(袖丈)은 한 자, 소맷부리는 7치로 한다. 서민(庶民)의 겉옷은 앞자락은 땅에서 4치, 뒷자락은 땅에서 3치, 소매길이는 손을 지나 6치, 수장(袖丈)은 8치, 소맷부리는 5치이며, 속옷은 역시 이것에 따라서 점차로 감한다…….” 하였다. 그러나 세상 사람의 마음이 옛것을 좋아하고 새것을 꺼리며 또 조사하여 단속하는 자도 없으니, 오직 재상(宰相)과 조관(朝官)만이 대략 새 규례에 따를 뿐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예전대로 하였다.
가정 을유년(1525, 중종 20)에 남지정(南止亭 남곤)이 중종께 아뢰어 이문학관(吏文學官)을 두었는데, 그 제도는 경서(經書)와 사기(史記) 중의 세 책을 강론하고, 시(詩)ㆍ부(賦)ㆍ논(論) 각각 1편을 시험 보이는데, 정원(定員)은 6명으로 하였다. 신축년에 김모재(金慕齋 김안국)가 건의하여 한리학관(漢吏學官)으로 고치고 정원을 7명으로 하고 실관(實官)이라고 불렀으며, 또 예비로 3명을 뽑아 두었다. 그것이 처음 설치될 때에 나도 재주 없는 몸으로 그 반열에 참여하였는데, 몇 해 뒤에는 모든 동료들이 모두 인재(人材)들이 되어서 주서(奏書)ㆍ자문(咨文) 등을 지을 때에 즉석에서 맨손으로 내리썼으니, 역시 국록(國祿)을 헛되이 먹지는 않았다고 할 만하다.
동지(同知) 최세진(崔世珍)은 중국말에 정통하고 이문(吏文)까지도 통달하였으므로, 여러 번 연경에 가서 질문하고 익혀 모든 중국의 제도와 물명(物名)을 통달하여 알지 못함이 없었다. 일찍이 《사성통해(四聲通解)》ㆍ《훈몽자회(訓蒙字會)》를 지어 바쳤고, 또 임금의 교지를 받들어 《노걸대(老乞大)》와 《박통사(朴通事)》등의 책을 언해(諺解)하여 지금의 통역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 같이 쉽고 편리하게 하여 스승을 찾아다니는 번거로움이 없게 하였다. 중종 중기부터 사대문서(事大文書)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가정 병술년에 이문(吏文)으로 정시(庭試)에 1등으로 급제하여 당상(堂上)으로 특별 승진되었고, 기해년에 또 1등으로 급제하여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남지정이 임금께 아뢰어 이문학관을 설치하고 공에게 수업을 받게 하였는데, 나는 동료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적고 학문이 얕았는데, 잘못이 있어도 공이 너그럽게 보아 주고 매양 권면하여 마지않았으므로, 수십 년 동안 체제와 격식을 조금이나마 이해하여 꾸지람을 듣지 않은 것은 실로 공이 가르치고 깨우쳐 준 데 힘입은 것이다.
가정 계미년에 중종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정시(庭試)를 베풀었는데, 정번(鄭蕃)이 2등으로 합격하여 이미 청포(靑袍)를 입히고 홍패(紅牌)를 내리려 하는데, 대사간 서후(徐厚)가 그의 문벌이 매우 낮음을 논하여 드디어 청포를 벗기고 내쫓았다. 정번이 상소하여 원통함을 호소하니, 그 사건이 예조로 내려졌으나 끝내 억울함을 풀지 못하였다. 그 후 남지정이 아뢰어 이문학관(吏文學官)에 보직(補職)시켰다. 신묘년에 중종이 사알(司謁) 벼슬을 주었는데, 출근할 때마다 술을 내려 취하게 하거나, 옷감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하루는 귤 한 쟁반을 내려 주면서. “듣건대, 너는 어버이가 있다 하니, 그것을 가져다주라.” 하였다. 일찍이 어제(御題)를 내어 논(論)ㆍ부(賦)ㆍ배율(排律)ㆍ단률(短律) 10여 편을 하룻 동안에 지어 바치게 했다. 또 왜인(倭人)이 바친 작은 그림 10폭을 보여주고 그림마다 지으라 하여 지어 바쳤다. 얼마 되지 않아 간관이 아뢰기를, “정 아무개는 이문(吏文)은 잘 익혀 이미 인재가 되었으니 사알은 그에 합당한 직책이 아닙니다.” 하여, 드디어 학관(學官)으로 되돌아가게 하였는데, 마침내는 패관(稗官)으로 좌천되어 백수(白首 센 머리)에 이르렀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랴.
민개(珉介) 이숙(李叔)은 스스로 호를 천량자(天諒子)라 하고, 중종이 즉위하기 전에 맹자(孟子)를 진강(進講)하였다. 중종이 즉위해서 특별히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을 하사하였다. 가정 경인년 무렵에 내수사 별제(內需司別提)에 제수하였는데, 그때는 천량(天諒)이 이미 늙었다. 임금이 그 아들과 사위의 수를 묻고 차비문(差備門) 밖에서 내려 주었으며, 그 후 어제를 내어 율시(律詩)를 지으라고 하여 지어 바쳤다. 불시에 술을 내린 것이 헤아릴 수 없었으니, 임금의 은혜가 또한 크다고 하겠다. 천량은 여러 책들을 널리 많이 읽었는데, 늙어서도 게으름이 없었다. 일찍이 나에게 시를 지어 보내 왔는데,
문에서 시정의 사람들을 물리치고 / 門麾市井之間子
상ㆍ주 이상의 글을 힘써 연구하노라 / 方討商周以上書
하였다. 또 계사년에 내가 연경으로 갈 때에 시를 지어 전송하였는데, 그 끝 구절에
한번 금대를 향하여 부지런히 물어보라 / 試向金臺勤問訊
중국에도 사람들을 금고시킴이 있는지 / 中朝亦有錮人無
하였다. 나와 천량은 서로 처지가 같은 사이라, 그것을 읽고 나도 모르게 탄식하였다.
가정 경자년 여름에, 모재(慕齋) 김 공이 임금께 아뢰어 찬집국(纂集局)을 설치하고 《이문제서집람(吏文諸書輯覽)》을 편찬했는데, 동지 최세진(崔世珍), 참의 윤개(尹漑), 첨지 윤계(尹溪)를 당상(堂上)으로 삼고, 이문학관(吏文學官)으로 그 일을 맡게 하였다. 이문(吏文)과 속이문(續吏文)은 정군진(鄭君陳)ㆍ유대용(柳大容)ㆍ이경성(李景成) 및 나의 형제 등 5명이 함께 그 일을 보았는데, 공에게 아뢰어 의논하는 일은 유대용이 주로 하고, 원고를 고치고 가리고 의논하는 일은 내가 주로 맡아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윤참의는 충청도 안찰사로 나가고, 윤첨지는 연안(延安) 군수로 나가 최동지 혼자서 도맡아 관리하였다. 이듬해 신축년 봄에 책이 완성되어 서국(書局)에 명하여 출판하게 하였는데, 모든 이어(吏語) 및 중국의 대소(大小) 관제(官制)로 각 서적에 보이는 것은 매우 자세히 주석했으므로 이 책을 펴 보면 분명하니, 이른바 객(客)은 돌아가기 마련인 것과 같다는 것이다. 다만 간혹 견강부회(牽强附會)한 것이 한두 군데 있고, 또 자세하지 못한 것이 몇 조목 있으나, 그 후 여러 차례 중국에 가서 질정한 바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찬집(纂集)이 오늘날 남아 있지 않는 것이 애석하다.
《경제육전(經濟六典)》에 한리과(漢吏科)가 있는데. 그 제도는 궁전 뜰에서 방(榜)을 불러 홍패(紅牌)를 내리고 유가(遊街)하게 하는 것인데 《경국대전》을 편찬할 때에 그 조목을 빼어 버렸다. 가정 신축년에 김모재(金慕齋)가 건의하여 다시 한리과를 설치하였는데, 초시(初試)는 2장(場)으로 나누어 초장에서는 부(賦)ㆍ시(詩) 각 1편을 시험보이고, 종장에서는 이문 1편과 계상서(啓上書) 중의 1편을 시험 보였다. 회시(會試)는 3장으로 나누어 초장에서는 이문 중의 2서, 사서(四書) 중의 1서, 삼경(三經) 중의 1서, 중국어 중의 1서를 강론하고, 경서(經書)는 모두 제비를 뽑은 대목을 책을 보지 않고 외게 하며, 중장에서는 표문(表文)과 전문(箋文) 중에서 1편, 기(記)와 송(頌) 중에서 1편을 시험보이고, 종장에서는 배율(排律) 1편, 이문 1편을 시험 보이는데, 정원은 오직 3명뿐이다. 그 시관(試官) 사동관(査同官)ㆍ지동관(枝同官)ㆍ등록관(謄錄官)ㆍ봉미관(封彌官) ㆍ입문관(入門官 시험장에 들어감)ㆍ수협관(搜挾官 책을 가진 사람이 없는가 조사함) 등의 벼슬아치 및 시험장에 울타리를 치는 제도 등은 모두 문과(文科)와 똑같다. 임인년 가을에 초시를 실시하였는데 나와 동료들이 모두 합격하였다. 마침 모재(慕齋)가 사망하고,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각년(各年)에 내린 교지(敎旨)를 교정하여 《후속록(後續錄)》을 편찬하였는데, 그 한리과(漢吏科) 한 조목을 빼어 버리고 싣지 않았다고 한다.
근래 선비로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매우 많다. 산수화에는 별좌(別坐) 김장(金璋)과 사인(士人) 이난수(李蘭秀)의 아내 신씨(申氏)와 학생(學生) 안찬(安瓉)이 있고, 영모(翎毛 새나 짐승을 그린 그림)를 그린 잡화(雜畵)에는 종실(宗室) 두성령(杜城令)이 있으며, 풀벌레 그림에는 정랑 채무일(蔡無逸)이 있고, 묵죽(墨竹 먹으로 그린 대)에는 현감 신잠(申潜)이 있는데, 이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저명(著名)한 사람들이다.
이상좌(李上佐)는 사인(士人) 아무개의 종으로 어릴 적부터 그림을 잘 그렸는데, 그 중에서 산수화와 인물화는 당시에 가장 뛰어났다. 중종이 특명으로 그를 양민(良民)으로 만들어 도화서(圖畵署)에 근무하게 하였다. 중종이 승하(升遐)하자 임금의 초상을 그렸으며, 가정 병오년에는 또 공신(功臣)의 초상을 그려서 드디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참여하였다. 이상좌 같은 사람은 역시 기이한 대우를 받았다고 할 만하다. 그의 아들 이흥효(李興孝)도 그림을 잘 그려 명종의 초상을 그림으로써 군직(軍職)에 붙였는데, 필법은 김식(金湜)을 본떴다고 한다.
연산조에 한 선비 집 종이 임금에게 총애 받는 여인 장녹수(張綠綉)의 집에 의탁하여 그 주인을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반정(反正)이 되자, 그 주인이 땅을 두어 길이나 파고 종을 묶어 두덩이 속에 세우고 흙을 채워 넣으니 종이 슬프게 호소하며 소리 내어 울다가 흙이 허리에까지 올라오니 놓아 주지 않을 것을 알고 많은 욕지거리를 하다가 흙이 다 덮이자 마침내 그쳤다. 한평군(漢平君) 이성언(李誠彥)의 종이 장인(匠人)으로서 궁중에서 일을 하였는데, 하루는 고소장을 가지고 중관(中官 내시)에게 호소하니, 중관이 큰 소리로 꾸짖어 말하기를, “주인을 큰 죄에 빠뜨리는 일을 네가 차마 할 수 있느냐.” 하고, 몰래 고소장을 공(公 이성언)에게 보냈다. 얼마 안 가서 연산이 폐위되니, 공이 울면서 말하기를, “임금이 임금된 도리를 잃어서 상하가 더욱 어지러워졌다. 종들의 나쁨을 어찌 책망할 수 있으랴. 다만 나와는 대의(大義)가 이미 끊어졌으니, 다시 나의 종노릇을 할 수는 없다.”고 마침내 종을 그 처남에게 주었다. 주인을 배반한 종은 죄가 마땅히 죽어야 하는 것이지만, 도량이 같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현감 안중손(安仲孫)은 청빈(淸貧)함으로 지조를 지켜 옛사람의 풍도가 있었다.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영남(嶺南)에 집을 짓고 몸소 농사를 지어 그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하루는 도사(都事) 유예신(柳禮臣)이 그 집을 찾아 가는데, 뒤따르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데도 안중손은 밭에 있다가 삿갓에 잠방이 차림으로 호미를 들고 돌아와서 문 앞에서 자리를 깔지 않고 앉아 막걸리를 가져오라고 하여 권하였다. 그의 진솔(眞率)함이 이러하였다.
진사(進士) 이별(李鱉)의 자는 낭선(浪仙)인데, 연산주 무오년에 모형(母兄) 이원(李黿)이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의 문인으로 나주(羅州)로 귀양 갈 때, 서로 울면서 교외에서 이별하였다. 그 뒤로는 과거를 다시는 보지 않고, 황해도 평산(平山)에 살면서 그가 거처하는 당의 이름을 장륙당(藏六堂)이라고 하였다. 늘 소를 타고 술을 싣고서 고을의 노인들과 더불어 낚시질도 하고 사냥도 하였으며,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면서 해가 저물어도 돌아갈 줄을 몰랐다. 마실 때마다 취하고 취하면 노래를 부르거나 울면서 슬퍼하기도 하였는데, 아내와 첩, 종들도 그 까닭을 괴이쩍게 여겼다. 병이 위독해지자 유언하기를, “명당자리를 찾지 말라.” 하였으므로 앞 산 기슭에 장사지냈다. 일찍이 방언시(放言詩)를 지었는데,
내가 우는 닭을 잡으려 하나 / 我欲殺鳴鷄
순(舜) 같은 성인이 있을까 염려 된다 / 恐有舜之聖
비록 잡지 않으려고 하나 / 雖不欲殺之
역시 도척(盜跖)처럼 횡포한 자
가 있구나 / 亦有跖之橫
풍우가 휘몰아치는 밤에도 울어 그치지를 않으니 / 風雨鳴不已
순과 도척이 함께 듣게 되는구나 / 舜跖同一聽
선과 악을 제각기 힘쓰니 / 善惡各孜孜
울지 않음은 닭의 천성이 아니다 / 不鳴非鷄性
하였다. 그의 시집 몇 권과 지은 가사(歌詞) 6장이 세상에 전한다.
우리나라의 과거 제도에 전에는 강경(講經)의 제도가 없어서 비록 식년시(式年試)라 하더라도 양장(兩場)의 제술(製述)로써 33명을 뽑을 뿐이었는데, 그 후에는 식년시마다 임시로 강경을 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하였으나, 강경을 할 때가 많았다. 성종 초부터 비로소 식년시에 강경 하는 법이 제정되었으나, 별시(別試)에는 일정한 규정이 없어서 강경을 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하였으며, 강서(講書)할 때에도 경서 가운데 두 가지 책만을 강론하여 약(略 강론 성적의 둘째 등급) 이상을 뽑기도 하고, 조(粗 강론 성적의 셋째 등급) 이상을 뽑기도 하였으니, 이것이 그 대략이다. 가정 신사년에 별시에 강서를 정지할 것을 명하고 조세영(趙世瑛) 등 약간 명을 뽑았다. 이때 하색장(下色掌)의 후보 명단에는 유학(幼學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이 많았고 또 나이가 어렸으므로 집의(執義) 어득강(魚得江)이 아뢰기를, “사람을 뽑는 방법으로는 경술(經術)이 우선인데, 이번 별시의 합격자는 모두 나이 어린 사람들이니, 앞으로는 비록 별시의 경우라 하더라도 으레 강경을 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6ㆍ7년이 지난 뒤에는 그때 합격한 사람 중에 재주와 인망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 많았으니, 어 공이 강경을 고집한 것은 역시 좁은 소견이라 할 수 있다.
옛사람이 글로써 일을 서술(叙述)한 것을 기(記)라 하는데, 송(宋) 나라 주회암(朱晦庵 주자)에 이르러 비로소 〈유형악록(遊衡嶽錄)〉이 있었고, 우리나라에는 점필재(佔畢齋)의 〈두류기행록(頭流紀行錄)〉이 있으며, 청파(靑坡) 이육(李陸)의 〈유지리산록(遊智異山錄)〉과 나재(懶齋) 채수(蔡壽), 반계(潘溪) 유호인(兪好仁)에게 모두 〈유송도록(遊松都錄)〉이 있으며,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유금강산록(遊金剛山錄)〉과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속두유록(續頭遊錄)〉이 있고, 철성(鐵城) 이주(李冑)의 〈금골산록(金骨山錄)〉이 있어 드디어 문장의 한 체(體)가 되었다.
가정 병신년에 내가 원영사(遠迎使) 퇴휴당(退休堂) 소(蘇) 정승을 따라 의주(義州)에 머무르고 있을 때, 공이 취승정(聚勝亭)에서 휘자(暉字) 운으로 시를 지으려고 한참 동안을 고심하다가 말하기를, “여러 분의 시에 ‘낙휘(落暉)ㆍ석휘(夕暉)ㆍ사휘(斜暉)ㆍ모휘(暮暉)ㆍ조휘(朝暉)로 운을 단 것이 많은데, 중첩되고 정교(精巧)하지 못하다. 이제 한 구를 얻었는데,
맑은 강이 비단과 같으니 사현휘네 / 澄江如練謝玄暉
하였으니 옛 압운(押韻)을 답습하지 않은 것 같으나 그 대구(對句)가 어렵다.”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황산곡(黃山谷)의 시에
서릿달이 금사를 끌어당긴다 / 霜月掣金蛇
는 구가 있는데, 만약
서릿달이 뱀을 끌어당김은 황태사로다 / 霜月掣蛇黃太史
라고 한다면 쓸 만 하지만, 황산곡의 구가 맑은 강이 비단과 같다는 것이 천고에 회자(膾炙)되는 것만은 못합니다. 한퇴지(韓退之)의 시에,
초생달이 갈아 놓은 낫 같다 / 新月似磨鎌
하였으니, 이것으로 저것과 대하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공이 “됐다.” 하고, 드디어 읊기를,
초생달이 낫과 같음은 한리부로다 / 新月似鎌韓吏部
하고, 이어 전편(全篇)을 지었다. 그때는 마침 보름을 지난 뒤라 초생달이 아님을 꺼려 뒤에 초승이 되기를 기다려 써서 사람들에게 보였으나 소공이 체직되어 왔으므로 정자(취승정(聚勝亭))에 현판으로 써서 달지는 않았다.
병신년에 내가 의주(義州)에 있을 때, 퇴휴당 소(蘇) 정승을 모시고 밤에 앉아서 《당고황화집(唐皐皇華集)》을 보다가, 내가 말하기를, “용재(容齋 이행(李荇))의 〈한강시(漢江詩)〉에
아득한 세 산은 엎은 솥인 듯 / 査紗三山看覆鼎
굽이굽이 한 때는 투금에 닿았도다 / 逶迤一帶接投金
라는 연(聯)이 매우 좋습니다.” 하였더니, 공이 웃으면서, “너는 참으로 시를 보는 안식(眼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내가 지은 것으로, 용재가 때마침 분주하여 나에게 대신 짓게 한 것이다.” 하였다. 엎은 솥과 투금(投金)의 대(對)가 과연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비록 형공(荊公)이 다시 살아나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것은 사실 용재가 지은 것인데, 소세양은 자기가 지은 것이라 하니 부끄러움을 모르기가 심하도다.” 하였다.
충재(盅齋) 최숙생(崔淑生)의 의주 취승정시(聚勝亭詩)에,
말굽 같은 서해가 막다른 모퉁이에 이르렀는데 / 馬蹄西海到窮陲
백척 높은 정자 자미(북두의 북쪽 별)에 닿을 듯 / 百尺危亭近紫微
난간에 기대어 좋은 경치 바라보며 / 且倚雕欄看勝景
구슬발이 밝은 햇빛을 가리지 말라 하네 / 不敎珠箔障晴暉
가로지른 압록강이 하늘에 닿아 있고 / 江橫鴨綠兼天暉
버들개지 노랗게 비 맞아 살쪘구나 / 柳暗鵝黃着雨肥
문득 옥당을 생각하니 이 몸 만리 밖에 있는데 / 忽憶玉堂身萬里
봉래산 어느 곳에 오색 구름 나는고 / 蓬萊何處五雲飛
하였는데, 퇴휴당 소정승이 나에게 현판의 시를 읽게 하고 이 한 편에 이르러 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 늙은이의 시는 시다운 시라고 할 만하다.” 하였다. 그러나 매계(梅溪) 조위(曺偉)의 시에,
웅번 예부터 변방에 건장한데 / 雄藩自古壯邊陲
새로 지은 정자 산허리에 마주 섰네 / 新搆華亭對翠微
절역(멀리 떨어져 있는 땅)의 구름 안개 취한 눈에 들어오고 / 絶域雲煙來醉眼
성 마루에 핀 꽃버들은 봄빛을 자랑하네 / 層城花柳媚春凈
산을 두른 넓은 들 그림같이 푸르고 / 山圍廣野靑如畫
비 지난 긴 강은 푸르기가 더하네 / 雨過長江綠漸肥
참지 못하여 정자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 叵耐登臨還望遠
고향 생각 밤낮 없이 남쪽으로 날아가네 / 歸心日夜正南飛
하였는데, 나의 좁은 소견으로 본다면 조위의 시가 어찌 충재만 못하겠는가.
돌아가신 아버지께 《구전경험방(舊傳經驗方)》 1권이 있었다. 그 속에 모란의 변종법[變牡丹法] 한 대목이 있는데, “쇠똥을 흰 모란 뿌리 밑에 묻어주면 변하여 살색으로 되고, 또 살색 모란 뿌리 밑에 묻어 주면 자줏빛으로 변한다. 작약(芍藥)도 마찬가지이다.” 하였다. 다만 그 글을 읽어보기만 했을 뿐, 아직 시험해 보지는 못하였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일찍이 살색 작약을 담장 밑에 심어 두었는데, 그 땅이 메마르다 하여 하루는 그 뿌리의 사방을 한 자쯤 파고 말똥으로 메웠더니, 이듬해에 흰 꽃이 피었다. 그 뿌리를 캐어 그늘에 말려 껍질을 벗겼더니 하얗기가 비길 데 없어 약재로 쓸 만하였다. 그러나 《경험방》에는 살색이 자줏빛으로 변한다고 했는데, 지금 변한 것은 흰색 빛이다. 쇠똥과 말똥의 효험(效驗)이 각각 달라서가 아닐까. 자줏빛과 흰색이 비록 다르기는 하나 그 본래의 색깔이 변한 것만은 확실하니, 그 방법이 역시 징험(徵驗)이 있다고 하겠다.
일찍이 《본초강목(本草綱目)》을 보았더니, 거기에, “사람이 뱀의 발을 보면 좋지 않다고 하는데, 뽕나무 장작으로 뱀을 불사르면 발이 나온다.” 하였는데, 괴이할 것이 없다. 내가 젊었을 적에 절에 있으면서 우연히 머리를 감으려고 뽕나무 장작을 뜰에서 때며 마침 벽 위를 보니 뱀이 기어가고 있었다. 잡아서 뜰에 내던졌더니 굴러서 뽕나무를 피운 화로 속으로 들어갔다. 한참 동안 꿈틀거리더니 드디어 네 발이 나오는 것이 도마뱀의 형상과 같은데 다만 붉은 살갗에 비늘이 없었다. 아, 방서(方書 의약에 관한 책)가 과연 징험이 있음이 이와 같구나.
가정 을미년에 이과좌급사중(吏科左給事中) 진간(陳侃)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명을 받들고 유구국(琉球國)에 가서 왕을 봉하고 돌아올 때, 밤에 폭풍을 만나 큰 돛대가 바람에 부러지려 하면서 삽시간에 키도 부서지니, 뱃사람들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흔들고 큰 소리로 신명(神明)을 부르면서 구원을 청하였습니다. 신들도 머리를 조아려 마지않고 있는데 홀연 호롱불 같은 붉은 빛이 하늘에서 배로 내려오니 뱃사람들이 놀라 보고하기를, ‘신(神)이 이미 내려왔으니 우리들은 살 수 있습니다.’ 하더니, 배는 과연 무사하였습니다. 이튿날 나비 한 마리가 배 위를 빙빙 날아 돌아다니니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나비는 매우 작아서 채소밭에서나 사는 것으로 백보(百步) 밖을 날아가지 못하는 것인데, 어찌 멀리 바다를 건널 수 있겠는가. 이것은 아마 나비가 아니라 신일 것이다. 아마 앞으로 변괴가 있으리라.’ 하므로, 속히 뱃사람들에게 대비시켰습니다. 다시 또 참새 한 마리가 돛대 위에 와 앉았는데, 참새도 나비와 비슷한 것입니다. 과연 이날 밤 폭풍이 불어 흰 물결이 하늘에까지 치솟고 바람 소리가 우레 소리와도 같았는데 물소리가 또 그것에 곁들여졌습니다. 신 등은 의관(衣冠)을 갖추고 빌기를, ‘이런 풍랑을 만나고서도 능히 우리 수백 명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기적의 일로 마땅히 비석을 세워 주어야 할 것이니,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겠습니다.’고 하였더니, 말이 떨어지자 바람이 조금 누그러져 배가 나는 듯이 나아가 날이 샐 무렵에는 이미 민(閩)의 산에 도착하였습니다. 신들은 이미 3일 동안 재계(齋戒)하고 초제(醮祭 별들에게 지내는 제사)를 지내고 사당을 짓고 비석을 세웠습니다. 다만, 전하께 아뢴다는 말이 이미 입에서 나왔으므로, 삼가 전말(顚末)을 적어 위로 성상께 번거롭게 아뢰는 것입니다.” 하였다. 예부(禮部)가 복주(覆奏)하기를, “우리나라는 악진(嶽鎭)과 해독(海瀆)에 모두 제사를 지냅니다. 제법(祭法)에 이르기를, ‘큰 환난을 막으면 제사를 지낸다.’ 하였사오니, 전례(典禮)에 있어서는 본래부터 그러합니다. 지금 진간(陳侃) 등이 사신으로 해외에 나가 여러 번 풍랑의 위험을 만나고도 끝내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또한 환난을 막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제사를 지내서 신(神)의 공덕에 보답하게 하소서.’ 하였다.
가정 임오년 봄 감시(監試 생원과 진사를 뽑는 과거)의 방(榜)을 내걸려 할 때에 점장이 김효명(金孝明)이 점을 쳐보고 말하기를, “금년 생원(生員) 장원에는 초두성(草頭姓)을 가진 사람이 되고, 진사(進士) 장원에는 목성(木姓)을 가진 사람이 되리라.” 했는데, 채무일(蔡無逸)이 과연 생원의 장원이 되고, 이거(李璖)가 진사의 장원이 되었다.
중은 자비(慈悲)를 베풀어 살생(殺生)을 하지 않음을 도(道)로 삼는다. 서해(西海)의 한 동냥중이 멧돼지를 쫓고 있는 사냥꾼을 만났는데, 멧돼지가 성이 나서 달아나니 중이 앞에 가서, “가엾도다, 가엾도다.” 하며, 지팡이로 가리키면서, “빨리 남쪽으로 가라.” 하니, 멧돼지는 이빨로 물어 중이 드디어 죽었다.
제안대군(齊安大君) 이현(李琄)은 예종(睿宗) 대왕의 아들로 성품이 어리석었다. 일찍이 문턱에 걸터앉아 있다가 거지를 보고 그 종에게 말하기를, “쌀이 없으면 꿀떡의 찌꺼기를 먹으면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어째서 고기죽을 먹지 않느냐.” 한 말과 같다. 또 여자의 음문(陰門)은 더럽다 하여 죽을 때까지 남녀 관계를 몰랐다. 성종은 예종이 후사가 없음을 가슴 아프게 여겨 일찍이 “제안에게 남녀 관계를 알 수 있게 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겠다.” 하였더니, 한 궁녀가 자청하여 시험해 보기로 하고, 드디어 그 집에 가서 밤중에 그가 깊이 잠든 틈을 타서 그의 음경을 더듬어 보았더니 바로 일어서고 빳빳하였다. 곧 몸을 굴려 서로 맞추었더니, 제안이 깜짝 놀라 큰 소리로 물을 가져오라 하여 자꾸 그것을 씻으면서 잇달아 “더럽다.”고 부르짖었다. 사인(士人) 신원(申遠)의 집이 제안의 집과 담이 이어져 있었는데, 신원이 말하기를, “일찍이 제안이 여자를 5ㆍ6명을 데리고 문밖에서 산보하는 것을 보았는데, 한 여자 종이 도랑에서 오줌 누는 것을 제안이 몸을 구부리고 엿보고서 말하기를, ‘바로 메추리 둥지 같구나.’ 하였는데, 그것은 음모(陰毛)가 무성한 것을 이름이다. 정덕(正德) 연간에 상의원(尙衣院)에서 무소가죽으로 만든 띠를 바치는데, 그 품질이 아주 좋았다. 제안이 대궐 안에서 만나 드디어 허리에 차고 차비문(差備門) 밖에 가서 아뢰어 청하기를, “이 띠를 신에게 하사하소서.” 하니, 중종이 웃으며 그것을 주었다. 혹자는, “제안이 실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만약 종실의 맏아들로 어질고 덕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 몸을 보전하지 못할까 두려워서 늘 스스로 감춘 것이다.” 하기도 하는데, 남녀 사이의 욕망은 천성으로 타고난 것이어서 인정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인데, 평생토록 여자를 더럽다 하여 가까이하지 않은 것은 실지로 어리석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몽와(夢窩) 유희령(柳希齡)이 일찍이 우리나라 사람의 시를 가려 뽑아 《대동시림(大東詩林)》이라 이름 짓고, 그 서문에 우리나라의 시를 가려 뽑는 사람의 잘못을 일일이 비난하고, 또 “시는 짓기도 쉽지 않고 가려 뽑기도 쉽지 않다.” 하였는데, 이는 자기가 뽑은 것이 흠이 없다는 것을 대체로 인증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대동시림》에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매우 많다. 우선 대강을 여기에 들어 본다면, 김시습(金時習)은 근세의 기이한 남자로, 비록 거짓 미친 체하고 중이 되었으나 마음은 중에 있지 않았다. 하물며 이미 환속(還俗)하였으니, 어찌 그 옛날을 가지고 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그 잘못의 첫째요, 어무적(魚無跡)의 시는 근대에 드문 것인데 그 문벌을 꺼려 뽑지 않았고, 유수재(柳睡齋)의 작품은 맹랑하고 재미가 없는데, 그의 선친이라 하여 지나치게 많이 뽑았으니 그 잘못의 둘째이다. 일본 중들이 그 나라 명을 받들고 한 번 서울에 온 것을 귀화(歸化)하였다고 지목하여 그들의 시를 수록한 것이 그 잘못의 셋째요, 여류(女流)의 시는 시가 되지 않은 것까지도 일체 취하였으니 그 잘못의 넷째이다. 시를 모은 것이 70여 권이나 되는데도 이문순(李文順)의 3수 운(韻) 배율(排律)과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의 〈제잠두록(題蚕頭錄)〉 후장편(後長篇)을 모두 뽑지 않았음은 그 잘못의 다섯째이다. 이것은 그 중에서 큰 것들이고, 그 밖에 버리고 뽑은 잘못은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참으로 시는 뽑기가 쉽지 않구나.
유몽와(柳夢窩)의 《대동시림》에 있는 그의 선친 수재의 〈숙낙생역(宿樂生驛)〉 시에,
날이 저물어 온 산이 어두운데 / 日夕衆山暗
멀리 낙생에 와 머물도다 / 遠來投樂生
나귀는 남은 풀을 씹고 / 征驢吃殘草
늙은 종은 좋은 밥을 먹네 / 老僕飯香粳
베개를 찾아 등잔을 등지고 자며 / 索枕背燈睡
잔을 잡고 술을 따라 마시네 / 把杯斟酒傾
때때로 장로를 불러 / 時時呼長老
손꼽아 앞길을 묻노라 / 屈指問前程
하였는데, 나귀가 남은 풀을 씹는다는 것은 이미 여행길이 고달픈데, 어찌 늙은 종이 좋은 밥을 먹겠으며, 이미 등잔을 등지고 자는데, 또 무슨 잔을 잡는 일이 있겠는가. 그리고 파(把)ㆍ짐(斟)ㆍ경(傾) 자는 모두 비슷한 뜻이다. 더욱 우스운 것은 낙생역에서 단 하루만 묵었는데, ‘때때로 장로를 부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역(驛)의 하인들이 불도를 닦는 중과 비길 바가 아닌데, 그들을 가리켜 장로라 함은 또한 무슨 뜻인가. 굴지(屈指)라는 말은 본래 《한서(漢書)》 진탕전(陳湯傳)에, “손꼽아 그날을 세면서 말하기를, 며칠 가지 않아서 응당 길한 말이 들릴 것이다.” 하였는데, 지금 앞길을 물으면서 굴지라는 글자를 쓴 것은 역시 그것이 온당한 말인가 모르겠다.
상사(上舍) 신영희(辛永禧)가 그의 할아버지 문희공(文僖公)의 시고(試稿)를 가지고 있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그대의 집안 문집(文集)이 출판할만하다.”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우리 할아버지가 글로써 이름이 나기는 했으나, 그 원고 가운데 실려 있는 것이 전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찌 간행할 수 있겠는가.” 하니, 남추강(南秋江)이 그것을 효도가 된다고 하였다. 또 점필재가 《청구풍아(靑丘風雅)》를 편찬하였는데, 선대부(先大夫)의 시에서는 오직 절구(絶句) 한 편만을 실었으니, 사람들의 마음에 조금 들 만한 것을 취하여 그 이름을 전하는데 그친 것이다. 근래 몽와 유희령이 《대동시림》을 편찬했는데, 그의 선친 수재의 시를 7ㆍ80편, 아우 인첨(仁瞻)의 시도 수십 편을 실었으니, 아, 많기도 하구나. 점필재가 보게 되면 반드시 그 많음을 싫어할 것이고, 남추강이 보면 또한 그것이 효도가 된다고 할지 모르겠다.
가정 기축년(1529, 중종 24)에 동지(同知) 유부(柳溥)가 하절사(賀節使)로 연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요동에 이르러 달자(達子)의 소문을 듣고 도사(都司)에게 고하여 군대를 내어 호송(護送)하여 주기를 청하였더니, 도사가 지휘(指揮)한 사람을 시켜 군사 2백 명을 거느리고 왔다. 탕참(湯站)에 이르러 역사(譯士)를 시켜 지휘에게 말하기를, “여기에서 의주(義州)까지는 겨우 80리 밖에 안 되므로 군사가 호송할 필요가 없다.” 하였더니, 지휘가 말하기를, “나는 도사의 명을 받고 너의 재상을 호송하는 것이니 국경까지 호송하겠다.” 하였다. 드디어 압록강을 건너와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고, 무명 등의 물건을 군사들에게까지 주고, 또 삼베도 주었다. 그 뒤로는 탕참에 사신이 돌아올 때에는 으레 군사 1백 명을 보내었는데, 그것을 호송(護送)이라고 불렀으며, 늘 잔치를 베풀고 무명을 주는 폐단을 남기게 되었다.
가정 을미년에 하지사(賀至使) 아무개가 역사(譯士) 이응성(李應星)을 봉황성(鳳凰城)에 보냈다. 길가 인가(人家)에서 쉬는데 문에 널[柩]이 놓여 있음을 보고 놀라 달아나려 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죽어서 관 속에 들어가는 것은 떳떳한 이치인데, 그대는 무엇을 괴이하게 여기느냐. 일찍이 당신 나라 사람이 길에서 병사(病死)한 사람을 옮기기 편리하게 하느라고 그 시체를 둘로 잘라서 말에 싣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무서운 일이다.” 하였다. 이응성이 데리고 간 의주 사람에게, “참으로 그런 일이 있었느냐.” 물으니, “과연 그런 일이 있었는데 확실히 어느 해에 있었던 일인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하였다. 시체를 자른 일이 비록 무뢰(無賴)한 군사의 소행이긴 하겠지만, 그때 사신된 사람으로서 이 소리를 듣고도 죄주지 않았으니, 어찌 사신의 직무를 잘 이행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공운강(龔雲岡)이 동파(東坡)에 이르러 역사 아무개에게 말하기를, “너의 나라 서울에 도착하는 날 화란판아(華欄板兒)를 많이 만들어 시를 쓰려고 한다.” 하였는데, 역사가 그 말을 잘못 알고, 원영사(遠迎使)에게 고하기를, “조사(詔使)가 빈 족자[空簇子]를 많이 만들어 두라고 합니다…….” 하니, 드디어 이 일을 급히 임금께 아뢰었다. 공운강이 서울에 도착한 이튿날 빈 족자 각 10폭을 두 사신에게 바치니, 자기들의 필적(筆跡)을 보고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기쁘게 각각 기행시(紀行詩)를 쓰고 돌아갔다. 중국으로 떠나 다시 동파관(東坡舘)에 이르러 내가 역사 홍겸(洪謙)과 같이 묵게 되어 등잔을 가져오라 하여 일기(日記)를 쓰는데, 홍겸이 빈 족자를 많이 만들었다는 말을 보고 나에게 말하기를, “그때 나도 참석하여 들었는데, 그것은 현판(縣板)이지 빈 족자가 아니었다.” 하였다. 다음 날 가만히 공운강에게 물어 보았더니 역시 그러하였다.
가정 계미년에 일본의 내대전(內大殿) 사신의 배가 중국 영파부(寧波府)에 닿았는데, 뒤에 온 왜선(倭船)과 저희들끼리 서로 살해(殺害)하므로 그곳 비왜관(備倭官)이 군사를 거느리고 오니, 왜인들이 항거하여 지휘(指揮) 한 사람을 죽여 바다에 띄우고 달아났다. 성명이 등원중림(藤原中林)이라는 자가 우리나라 황해도 풍천부(豐川府)에서 잡혔고, 또 전라도에서 왜적 망고다라(望古多羅)를 잡았는데, 역시 영파부에서 도망쳐 온 자였다. 조정에서는 관원을 보내 사로잡은 왜놈을 중국 서울에 바쳤다. 그 뒤 일본국은 돌아오는 사신이 올 때마다 등원중림을 돌려보내 달라고 애걸하였으니 그 나라로 돌아간 그 일당이 중림이 우리나라에서 잡혔다고 확실히 말했기 때문이다. 이미 중국에 바쳤다고 글월로 알렸는데도 그 요구가 더욱 잦고, 그 사연이 갈수록 간절하였다. 기해년에 김모재(金慕齋) 판춘부(判春部)가 중림 등의 전후 죄를 진술한 말들을 적당한 말로 써서 일본으로 보내고, 또 “우리 나라는 성심으로 중국을 섬기니, 잡은 이런 도적을 의리상 중국에 바쳐야 하니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더구나 망고다라(望古多羅)는 우리나라 변경을 지키는 병사를 죽여서 그 죄가 더욱 크니, 그대의 나라에서도 마땅히 우리나라를 위하여 그 죄를 다스려야 할 것이다. 하물며 변장(邊將)에게 잡힌 것을 어떻게 하랴.” 하였더니, 이로부터 일본이 다시는 구원하러 오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비록 섬나라 오랑캐지만 이 말이 도리(道理)가 있음을 보고 옳게 여긴 것이리라.
종기(腫氣)를 잘 고치는 의사로서 김순몽(金順蒙)이 있었다. 성종 말년부터 그의 침과 약으로 효험을 본 사람이 몇 천 명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중종이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려 주었다. 그 후에 녹사(綠事) 이맹형(李孟亨)이라는 사람이 또한 종기 잘 고치기로 서울 안에 이름이 높았으므로 군직(軍職)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의술은 김순몽만 훨씬 못하였다. 근래 김상곤(金尙昆)이라는 사람이 방서(方書)도 모르고 종기를 보면 곪았는지 곪지 않았는지를 따지지 않고 번번이 손침으로 침을 놓았다. 일찍이 여러 절을 돌아다니면서 병든 중에게 침을 매우 많이 놓았는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거지반이나 되는데도 오히려 혜민서(惠民署)에 소속시켜 봉록(俸綠)을 주었다. 중종이 일찍이 풍종(風腫)에 걸리자 모든 명의들이 다 들어와 모신 자리에서 김상곤으로 하여금 침 자리를 잡게 하고 박세거(朴世擧)에게 침을 놓게 하였으니, 이는 김상곤의 경솔하고 망녕 됨을 염려해서이다.
서피장(黍皮匠)은 그 방법을 전하는 데에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주지 않으니, 이는 그 이익을 독차지하고자 해서이다. 가정 계사년에 금박장인(金箔匠人) 김아동(金阿童)이 사신을 따라 연경에 가서 가짜 금[假金] 만드는 법을 배웠는데, 은박(銀箔)을 연기에 그슬리면 진짜 금같이 된다. 그것으로 그림을 그리고 혹은 종이에 발라서 쓰는데 노랗기가 비길 데 없다. 다만 마른 풀을 써서 연기를 내는데 그것이 무슨 풀인지를 모른다. 상고해 보건대, 지정(至正) 조격(條格)에 안서로(安西路) 풍직(馮直) 등이 은박으로 그슬려 만든 가짜 금으로 바느질을 하고 천을 짠다고 하였으니, 그런 일은 이미 오래된 듯하다. 뒤에 김아동이 다시 연경에 가서 그슬리는 풀을 많이 사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만든 금박(金箔)을 팔아 부자가 되었다. 법부(法部)에서 그 기술을 널리 퍼뜨리려고 그를 불러다가 물었으나, 사실대로 고하지 않아 여러 번 고문을 받고 심문을 당하다가 마침내 옥중에서 죽었다. 그것은 돈피장(獤皮匠)처럼 이익을 독점하려다가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니, 어찌 매우 어리석고 완고함이 아니겠느냐. 근래 별시위 김수량(金遂良)이라는 사람이 나력(瘰癧 연주창)을 잘 고치는데, 가벼운 것은 약을 붙여서 없어지게 하고, 심한 것은 그 둘레에 뜸을 뜨고 독(毒)을 약에 섞어 바르면 며칠 안 가서 살갗이 짓무르는데 쇠로 그 상처를 2,3일 간격으로 한 번씩 째서 한 쪽이 다 비게 되면 수술이 끝난다. 거기에 고약을 바르면 새살이 나와서 드디어 건강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늘 그 의술을 비밀히 하고 남에게 가르쳐주지 않으니, 그도 돈피장이와 훈금(熏金)장이와 같은 부류(部類)인가.
세상에서는 김수량(金遂良)이 나력((瘰癧)이나 연주(聯珠) 등의 부스럼을 잘 고친다고 하나, 나는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젊었을 때 목에 멍울이 생겨 두세 개가 되었는데, 의원이 보고 말하기를,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뒤에는 고칠 수 없다.” 하기에 나는 걱정을 놓지 못하고 늘 크고 작은 멍울을 만져 보곤 하였다. 생연(生鉛)과 십향고(十香膏)를 6ㆍ7년이나 발랐으나, 해마다 더 커지고 또 작은 멍울 하나가 더 생겼다. 하루는 문득 생각하기를, “죽고 삶은 명(命)이 있는 것인데 어찌 반드시 약에만 집착(執着)하여 내 마음을 괴롭힐 것인가.” 하고, 드디어 약을 끊고 치료하지 않았는데 1년이 지나자 그 멍울이 저절로 없어졌다. 지금까지 30여 년이 되는데, 오직 한 개만이 남아 있어 겨우 그 형상을 알아볼 정도이다. 일찍 김수량에게 보였더라면 반드시 시술(施術)을 하려고 했을 것이다. 윤인동(尹仁同)이라는 성명을 가진 사람이 목 의 멍울을 수량에게 보였더니 수량이 그 의술로 치료하면서 수술을 할 때 그 맥로(脈路)를 잘라 피가 멎지 않아 많을 때에는 4ㆍ5되에 이르러 혹은 매일 혹은 며칠 간격으로 계속 흘러 이러기를 해를 넘겼으므로 몸이 야위고 얼굴빛이 누렇게 되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가령 김수량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 부스럼이 독하기로서니 어찌 갑자기 이렇게까지 되었으랴. 하물며 그 부스럼이 반드시 독한 것은 아님에랴. 내 생각에 김수량의 의술은 아마도 우(禹)가 자연스럽게 한 방법과는 다른 것인 듯하다.
사인(士人) 홍수기(洪守紀)의 여자 종이 대하증(帶下症)을 앓기 1년이 넘었는데, 발작될 때마다 두어 동이의 피를 흘렸고 배가 나오기는 임신부와 같았다. 하루는 핏덩어리를 쏟았는데 크기가 술통만이나 하였고, 또 둥그런 줄기가 음문(陰門) 안에 있어 딱딱하기가 돌과 같아 송곳으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고 조금 당기면 아파서 참을 수가 없었으니, 아마 오장(五臟)에 닿아 있는 모양이다. 의원들에게 널리 물었으나 모두들 그것이 무슨 병인지 알지 못하였다. 김순몽(金順蒙)이 말하기를, “그것은 아마 냉기(冷氣)가 엉겨서 덩어리가 된 것일 것이니, 침으로 그 줄기를 찌르면 침 기운이 오장으로 들어갈 것이니, 거미줄 같은 것으로 그 줄기를 얽어매어 저절로 끊어지게 할 것이다.” 하므로, 그의 말대로 해보았더니 며칠 지나 줄기가 끊어지자 곧 죽었다.
우리나라의 풍속에는 마마귀신을 중히 여겨 제사(祭祀)ㆍ초상집 출입[犯染]ㆍ잔치ㆍ성교[房事]ㆍ외인(外人) 및 기름과 꿀 냄새ㆍ비린내와 노린내ㆍ더러운 냄새 등을 대체적으로 금기(禁忌)하였는데, 이것은 의방(醫方)에 실려 있다. 이는 마마가 누에와 같이 물건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다. 세속에서는 이것을 매우 신중히 지키며, 그 밖의 꺼리는 일들은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어쩌다가 범하면 죽고 또 위태롭게 되는 자가 열에 6ㆍ7은 된다. 만약 목욕하고 빌면 거의 죽어가다가도 다시 살아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더욱 그것을 믿고 지성으로 높이고 받든다. 심지어는 출입할 때에 반드시 관대(冠帶)를 하고 나갈 때나 들어올 때에 고하기까지 한다. 앓고 난 뒤 1ㆍ2년이 되어도 여전히 제사지내기를 꺼려 비록 사인(士人)이라도 그 풍속에 구애되어 제사를 폐지해 버리는 사람까지 있다. 마마귀신에 대한 금기(禁忌)가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근년에 와서 더욱 심해졌으니, 만약 또 4ㆍ50년이 지나면 마침내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송도(松都) 송악산(松岳山)에 성황사(城隍祠)가 있는데, 세속에서는 영검이 있다고 하여 서울의 부자 상인들이 가산을 털어 가지고 가서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길에 줄을 지었다. 한 번 제사 지낼 때마다 무명 수천 필이 들며, 거기에 드는 술과 음식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한 해에 한 번 제사지내는 집도 있고 두 번 지내는 집도 있는데, 만일 병이나 옥송(獄訟) 이 있게 되면 반드시 말하기를, “아무 때 제사의 반찬 그릇이 불결했으므로 그때 몸이 더러움을 탄 것이니 다시 정성을 들여서 사당에 제사지내라.” 하였다. 또 병이 낫거나 옥송이 끝나거나 하면 “과연 신의 힘이다.” 하였다. 아버지가 이미 죽었으면, “아버지가 죽고서 아들이 계속하지 않으면 신이 반드시 노한다.” 하여 계속해서 제사를 지내게 되니 이어서 세업(世業)이 되고 만다. 또 재산이 조금 밖에 없는 사람은 재물을 바치지 못하는 것을 수치로 여겨 파산하게 되어도 개의하지 않았다. 심하구나, 요사스런 무당이 사람을 미혹(迷惑)시킴이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재물을 없애는 것도 염려스러운 일인데, 이 음사(淫祀)를 숭상하여 요사스러운 이야기를 고무(鼓舞)하니, 어찌 작은 일이겠느냐.
예전에는 나쁜 무명을 통용(通用)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중간에 와서 금지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하다가, 근년에 와서는 전적으로 금지하지 않아서 날로 더욱 나빠져 갔다. 한 필의 무명이 겨우 10자 남짓해지고, 심지어는 반폭(半幅)을 잘라 한 필로 만든 것도 있으니, 물가를 뛰어오르게 함이 얼마나 괴이하냐. 화폐를 함부로 함이 이보다 심함이 없을 것이다. 가정 정미년 무렵에 한성부(漢城府)가 의논하여 그것을 금지하려 했으나, 때마침 기근(饑饉)이 들어 상계(商界)에 폐를 끼칠까 두려워 잠깐 그 통용을 허락하였다. 그랬더니 민간에서 무명의 실을 풀어 조금 가는 무명으로 다시 짜서 팔아 이익을 많이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쁜 무명으로 남아 있는 것이 얼마 안 되었다. 만약 이 기회에 반년 동안의 기한을 두고 법을 세워 엄격히 금지한다면 뒷날 무명을 짜는 자는 반드시 예전의 나쁜 무명 짜기를 본받지 않을 것이니, 그 폐단을 거의 고치게 될 것이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역청(瀝靑)을 만들어 쓰는 방법을 몰랐다. 중종 때에 일찍이 칠장이[漆匠]를 중국에 보내어 배워 오게 했으나, 끝내 그 방법을 전해 받지 못하였다. 진사 조성(趙晟)이 당본 역청방(唐本瀝靑方)을 얻어 그대로 시험해 보았더니 옻칠과 차이가 없었다. 그 뒤에 또 복건(福建)에서 표류해 온 사람에게 물어 보고 해서 그 기능자가 점차 중외(中外)에 퍼졌다.
전 우의정(右議政) 성(成) 공이 일찍이 《식물찬요(食物纂要)》를 편찬했다. 가정 병오년에 내가 연경에 가서 《식물본초(食物本草)》 1부를 얻었는데, 명나라 노화(盧和)가 지은 것이다. 그 내용이 매우 넓고도 간결하고 적절하여 《식물찬요》같은 것은 거의 폐기(廢棄)할 정도다.
서얼(庶孼) 자손에게 과거와 벼슬을 못하게 한 것은 우리나라의 옛 법이 아니다.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살피건대, 영락(永樂) 13년에 우대언(右代言) 서선(徐選) 등이 진언하여 서얼 자손에게는 높은 벼슬을 주지 말아서 그것으로 적서(嫡庶)를 구별하자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건대, 영락 13년 이전에는 높은 벼슬도 주었는데, 그 이후로는 과거를 정반(正班)에게만 허가하였고, 《경국대전》을 편찬한 뒤부터 비로소 금고(禁錮 벼슬길을 막음)를 하였으니, 지금까지 백 년이 채 못 된다. 세상 천지에 땅에 자리 잡고 나라라고 이름 한 것이 어찌 일백 정도일 뿐 이겠는가마는, 벼슬길을 막는 법이 있다는 것을 아직 듣지 못하였다. 하물며 향리(鄕吏)ㆍ수군(水軍) 따위의 천인이 아직도 과거보러 가서 그 부모의 세계(世系)를 말하면 애당초 근거로 삼을 만한 본관(本貫)도 없을 것이고, 혹은 유민(流民)에게 시집가고 혹은 도망한 사람에게 장가들곤 하였으니, 누가 능히 그 양민과 천인을 가릴 수 있겠는가. 경대분(卿大夫)의 아들로 오직 외가가 하찮아서 대대로 벼슬길이 막혀 비록 뛰어난 재주와 쓸만한 그릇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끝내 남에게 머리를 숙이고 들창 밑에서 죽어 일찍이 향리나 수군만도 못하니 불쌍하도다.
예전에 일을 벌이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중국의 관제를 가져다가 우리나라의 종정도(從政圖) 에 의거하여 그 품금(品級)을 나누어 올라가게 하고 중국종정도(中國從政圖)라 불렀는데, 오직 관품(官品)의 높낮이에 의거했을 뿐, 중국의 제도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심지어는 이부시랑(吏部侍朗)을 도독첨사(都督僉事)로 옮기고, 좌도독(左都督)을 종인령(宗人令)으로 옮기는 등 이런 따위는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가정 계사년에 내가 하절사(賀節使)를 따라 연경에 가서 여지도(礪志圖) 한 벌을 얻었는데, 문무(文武)가 각각 그 반열이 다르니, 모든 벼슬을 올리고 내리고, 상주고 벌주는 것을 한결같이 중국에서 행하여지는 제도에 의거하였다. 표제(標題)에 쓰기를, “가정 무인년에 한림(翰林)이 구본(舊本)을 지었고, 가정 임진년에 행촌(杏村)이 신도(新圖)를 교열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첨온(詹溫)이 지은 것을 찬송한 것이다. 또 설명하기를, “전배(前輩)가 이 여지도(礪志圖)를 만들고 황량(黃粱) 이라고 불렀는데,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르는 것도 쉽게 이룰 수가 있어 마치 꿈과 같으니, 이것은 장난에 가깝다. 비록 장난에 가깝기는 하나, 사실은 상벌(賞罰)이 뚜렷이 그 가운데에 들어 있다. 정덕 무인년에 한림이 고쳐 만든 것을 합비(合肥) 한상사(韓上舍)의 집에서 얻었다. 당시에는 더욱 정해진 명칭이 없이 그저 강남(江南)에 전해졌는데, 명공거경(名公巨卿)의 재주 있는 자제들이 매일 서로 즐겁게 가지고 놀면서 모두들 말하기를, ‘사람의 뜻을 장려할 만하다. 한 등급을 올림으로써 현능(賢能)의 등급을 올리고, 한 등급을 내림으로써 재주 없는 사람을 경계한다. 만약 문과로 급제한 생원(生員) 선비들이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여 나아간다면 사람을 격려하여 독서를 하게 할만하고, 무과에 급제한 군사가 모두 싸움터에서 공을 세우면 사람을 격려하여 용맹을 떨치게 할 만하다. 만약 음양(陰陽)이나 의도(醫道)로 뽑힌 벼슬아치들이 모두 그 직업에 부지런히 하여 공명을 취하게 된다면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는 것은 비록 우연에서 나온 것이라도 역시 조종(祖宗)의 공덕으로 쌓아 올린 바인데, 하물며 그 사이 문무 관원이 공사를 처리하는 데에는 다 상벌이 있으니, 사람으로서 향상하고 앞길을 구하고자 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구본은 교방(敎坊)에 한 번 던지면 모두 극품(極品)에 이르니 사리에 맞지 않는 것 같으므로, 내가 그것을 고쳤다. 비록 인주(印朱)는 얻었더라도 원년통록(元年通錄)의 승강(陞降)에는 통하지 못하게 하니 갑자기 문계(文階)로 옮겨 서로 우열을 다투기를 허용할 것인가.
나는 재주 없음을 부끄럽게 여겨 여지도(礪志圖)로 이름을 고쳤으니, 옳고 그름은 알지 못하겠고, 우선 간행하여 통달한 군자(君子)의 재교(再校)를 기다린다.” 하였다.
가정 신축년에 내가 하절사(賀節使)를 따라 연경에 갔을 때, 때마침 무종(武宗)의 황후가 돌아갔으므로, 우리나라 사람들도 반열(班列)에 따라 아침저녁으로 나아가 곡(哭)하였다. 어느 날 일찍 사문(社門) 밖에 임시로 앉아 있는데, 중국 관원들이 많이 와서 극우(隟宇)에 앉아 있었다. 한 벼슬아치가 역사(譯士) 홍겸(洪謙)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시를 지을 수 있는가.” 하니 홍겸이, “어젯밤에 비가 조금 내려 나그네의 회포가 쓸쓸하여 우연히 절구 한 수를 지었다.”고 하였더니, 그 벼슬아치가 매우 간곡히 보여 달라고 하였다. 홍겸이 최고운(崔孤雲)의 시를 써서 보여 주었는데,
가을 바람에 비록 애써 읊었으나 / 秋風雖苦吟
세상에 알아 주는 사람이 적구나 / 世俗少知音
창밖은 비내리는 한밤중인데 / 窓外三更雨
등잔 앞에서 먼 고향 생각에 잠겨 있네 / 燈前萬里心
하였다. 벼슬아치가 가지고 가서 그 상관에게 보였더니, 다투어 벼슬아치를 보내 적어 갔다. 한참 손님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심지어 과일과 차를 가지고 와서 위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지막 한 사람이 붓을 들어 홍겸에게 주면서, “그대, 다시 한 수 지어 달라.” 하니, 홍겸이 나를 가리키며, “저 분도 시를 잘 지으니 가서 청하여 보라.” 하니, 드디어 나에게 구하였다. 내가 종이에 쓰기를, “조충전각(雕虫篆刻 자질구레하게 문장의 문구를 수식함)은 본래 장부의 할 일이 아니다. 하물며 국상(國喪)을 당하였는데, 어찌 풍월을 읊을 때냐. 그래도 원한다면 길에서 지은 것이 있으니, 그 중의 절구 하나를 보여 주리라.” 하였더니, 그 사람이 “매우 다행이라.”고 하였다. 이에, “탕참(湯站)에 이르러 사람을 동쪽으로 돌려보내다.”라는 시를 썼는데, 그 시는,
송골산 앞 길에서 / 松鶻山前路
그대는 동으로 나는 서쪽으로 헤어지네 / 君東我馬西
집에 편지 써 보내려고 / 欲題家信去
종이를 대하니 생각이 도리어 아득하구나 / 臨紙意還迷
하였다. 서로 돌아보며 베껴 쓰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어찌 풍월을 읊을 때이냐.”의 말을 가리켜 탄복하기를, “참으로 예의를 아는 나라로다.” 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여 행인(行人) 장승헌(張承憲) 등이 고명(誥命)을 받들고 와서 행례(行禮)를 하는 날, 철문 밖의 왼쪽 산대(山臺)가 무너져 구경하던 사람들이 많이 깔려 죽었다. 서민들이 왁자하게 퍼뜨리기를 길조(吉兆)가 아니라고 하였는데, 넉 달도 못 가서 인종이 돌아가셨다.
가정 을사년에 서울의 한 천한 계집이 아이를 낳았는데, 몸은 하나에 머리가 둘이었다. 어미와 아기가 잇달아 모두 죽었다. 또 정미년에 한 말이 길가에서 사람을 낳았는데 얼굴 모습만 말과 비슷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죽었다. 말 주인이 그것을 버리고 갔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관청에서 주인이 말과 교접하여 잉태한 것이므로 심문을 당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하였으나, 그 사실은 알 수 없다.

[주D-001]청안 : 친한 사람을 대할 때의 눈매를 말한다. 진(晉) 나라의 완적(玩籍)이 자기와 가까운 사람은 청안(靑眼)으로 맞이하고, 거만한 사람은 백안(白眼)으로 맞이하였다고 한다.
[주D-002]갈도 : 길을 인도하는 하인이 앞에 서서 소리를 질러 사람의 통행을 금하는 일.
[주D-003]고헌과 : 높은 수레가 지나간다는 뜻으로, 당 나라 때의 이장길(李長吉)이 어릴 적에 재주가 있다고 이름이 났으므로 한유(韓愈)가 보러 가서 시를 짓게 하였더니, 이런 제목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주D-004]삼청 : 신선이 사는 옥청(玉淸)ㆍ상청(上淸)ㆍ태청(太淸)이다.
[주D-005]당시품휘(唐詩品彙) : 명나라의 고병(高棅)이 당대(唐代)의 시를 품별(品別)로 모아 수록한 책으로 90권, 습유(拾遺) 10권으로 되어 있다.
[주D-006]본초강목(本草綱目) : 명나라 이시진(李時珍)이 동물ㆍ식물ㆍ광물 천 8백 92종을 7항목으로 해설한 책으로 52권으로 되어 있다. 약재(藥材)의 참고로 소중히 여긴다.
[주D-007]포의(布衣) : 옛날에 서민(庶民)은 비단옷을 입을 수 없었으므로, 포의는 벼슬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니, 벼슬이 없거나 가난할 때의 사귐, 또는 이욕(利慾)을 떠난 사귐을 포의지교(布衣之交)라 한다.
[주D-008]두태후(竇太后) : 후한(後漢) 환제(桓帝)의 황후로 황제가 죽은 뒤에 영제(靈帝)를 받들어 권세를 휘둘렀다.
[주D-009]분관(分館) :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승문원(承文院)ㆍ성균관(成均館)ㆍ교서관(校書館)에 배정하여 실무를 익히게 하던 일로 세 등급으로 나누어 1등급은 승문원에, 2등급은 성균관에, 3등급은 교서관에 배정되었다.
[주D-010]설도 : 당 나라 때의 여류 시인으로 양반집 딸이었으나 기생이 되어 백거이(白居易) 등과 교류하였다. 특히 원진(元稹)과 친하였는데, 그가 좌천된 뒤에는 촉(蜀)의 완화계(浣花溪)에서 여생을 보냈다.
[주D-011]청조사 : 서왕모(西王母)의 사자(使者)로 세 발 가진 파랑새[靑鳥]가 한 나라의 궁전에 왔다고 한다.
[주D-012]악목 : 4악(岳)과 12목(牧)으로 후세의 공경(公卿) 제후(諸侯)와 같은 것이니, 지체 높은 도령을 뜻한다.
[주D-013]주포화 : 하정(河挺)이 칠원 현감(漆原縣監)으로 좌천되었을 때, 기묘 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인 대사성 김식(金湜)이 기묘사화에 연좌되어 도망 다니는 것을 감추어 주었다. 뒤에 그도 도망하였다가 잡혔다.
[주D-014]문금(門禁)의 일 : 명나라에 간 우리나라 사신들의 자유 출입을 금지한 일.
[주D-015]봉미관(封彌官) : 과거 시험지의 오른편 끝에 자기의 성명ㆍ생년월일ㆍ주소 따위를 쓰고 봉하여 붙이는 일
[주D-016]순(舜) 같은…… 횡포한 자 : 맹자의 말에, “닭이 울 때부터 부지런히 착한 일만 하는 것은 순(舜)의 무리이고, 닭이 울 때부터 부지런히 이익만 추구하는 것은 도척(盜跖 춘추 시대의 악인)의 무리이다.” 하였다.
[주D-017]서피장(黍皮匠) : 보통 돈피장(獤皮匠)이라고 하며 돈피를 만드는 기능자를 이른다. 돈피는 담비 종류의 모피로, 품질에 세 가지 등급이 있다. 검은담비의 모피인 잘이 상등이고, 노랑 가슴담비의 모피인 초서피(貂鼠皮)와 노랑담비의 모피인 돈피가 중등이고, 흰 담비의 모피인 백초피(白貂皮)가 하등이다.
[주D-018]옥송(獄訟) : 옥(獄)은 형사 소송이고 송(訟)은 민사 소송이다. 《주례(周禮)》에, “죄의 다툼을 옥이라 하고, 재물의 다툼을 송이라 한다[爭罪曰獄 爭財曰訟].” 하였다.
[주D-019]종정도(從政圖) : 종경도(從卿圖)ㆍ승경도(陞卿圖)라고도 하는데, 옛날 실내 오락의 한 가지이다. 넓고 큰 종이에 옛 벼슬의 이름을 품계(品階)와 종류를 써 놓고, 알 또는 주사위를 굴려 소정의 규정대로 올라가서 먼저 영의정까지 간 사람이 이기게 된다. 종경도를 그려 놓은 큰 종이를 종경도판이라 하고, 굴려서 수(1~5까지 있다)를 보는 길쭉하게 깎은 다섯 모진 나무를 종경도 알이라고 한다.
[주D-020]황량(黃粱) : 황량몽(黃粱夢)으로 사람의 일생의 부귀라는 것은 꿈같이 헛되고 덧없음을 말한다. 당 나라의 노생(盧生)이 조(趙) 나라의 서울 한단(邯鄲) 주막에서 도사(道士) 여옹(呂翁)에게서 베개를 얻어 베고 잠이 들어 부귀영화를 누리며 80까지 잘 산 꿈을 꾸었는데, 깨어 보니 아까 주인이 짓던 좁쌀 밥이 채 익지 않았더라고 한다. 한단지몽(邯鄲之夢)ㆍ일취지몽(一炊之夢)이라고도 한다.
학봉집(鶴峯集) 부록 제4권
 [제문(祭文)]
제문(祭文) [박성(朴惺)]

내 일찍이 공의 인품 들었거니와 / 夙聆風槩
고졸하고 질박함을 지녔었다네 / 古直其遺
가을 하늘 날아오른 소리개라서 / 鶚奮秋霄
눈과 서리 같은 의표 자태였다네 / 雪儀霜姿
조정에선 충성 다할 생각 하여서 / 進思竭忠
자신의 몸 생각 않고 곧은말 했네 / 匪躳謇諤
바른 도가 어찌 용납될 리 있겠나 / 直道何容
급암(汲黯) 당개(唐介) 쫓겨났고 유배되었네 / 汲外唐謫
일 많은 나주 고을 다스리면서 / 剖劇于羅
우뚝하니 정사 잘한 치적 있었네 / 蔚有聲績
강직함에 소인배들 싫어하여서 / 剛峻慍小
함정에 빠뜨리고 돌 내리쳤네 / 落穽又石
명 받들고 일본으로 사신을 가니 / 銜命日出
장건(張騫) 뗏목 바다 위에 아득하였네 / 騫槎渺溟
몸 내던져 절조를 가다듬어서 / 投身勵節
왜놈들의 눈과 귀를 두렵게 했네 / 聳彼瞻聽
관백(關白)과 대등한 예로 대하여 / 蔑酋抗禮
위태로울 때에 더욱 용기 있었네 / 阽危彌勇
부필(富弼) 덕에 송 나라는 높게 되었고 / 宋藉富尊
정몽주(鄭夢周)로 인해 고려 중하게 됐네麗賴鄭重
대궐에 와 임금에게 복명할 때에 / 復命彤墀
내리는 눈 펑펑 쏟아졌었지 / 雨雪其雱
하얗게 센 머리카락 짧았었지만 / 皓髮雖短
임금 향한 붉은 마음 아주 길었지 / 丹心甚長
임금 수레 엎어질까 두려웁거니 / 寔恐皇輿
내 몸에 닥칠 재앙 어찌 꺼리랴 / 詎憚身殃
가슴속의 붉은 정성 피력하여서 / 披瀝寸血
두 차례나 곧은 말한 상소 올렸네 / 再抗危章
나라 위한 근심 깊어 생각 긴 탓에 / 憂深思永
한 글자에 한 줄기 눈물 흘렸네 / 一字一涕
곧은 말에 입 다문 자 부끄러웠고 / 讜愧循默
그 기세에 간사한 자 몸을 떨었네 / 氣震姦嬖
조정 안이 이로 인해 엄숙해져서 / 朝端肅整
이에 나라 지탱하는 기둥 되었네 / 展也邦楨
단아함은 보필하기 적당했는데 / 端合補袞
어찌하여 군무 맡아 병사(兵使) 되었나 / 胡掌戎兵
행차가 조령을 넘기도 전에 / 行未鳥峴
남쪽 지방 이미 모두 상처입었네 / 南旣刳剔
흉악한 왜놈들이 기세 떨치며 / 凶焰虓闞
번개치듯 우레치듯 치달리었네 / 雷奔電激
타고 가던 피로한 말 채찍질하여 / 鞭我玄黃
곧장 우도로 내달려 갔네 / 直抵右壁
날랜 군사 새처럼 달아나 숨고 / 豼貅鳥竄
노련한 장수조차 혼 달아났네 / 老將褫魄
왜적들이 진 가까이 다가왔는데 / 賊梟進薄
호상에 걸터앉아 태연하였네 / 坐床凝然
용감한 군사 죽음 무릅쓰면서 / 勇夫致命
가슴 쏘자 왜놈 장수 꼬꾸라졌네 / 中胸以顚
한창 군사 지휘하고 있던 즈음에 / 節度方宣
갑작스레 잡아오란 명령 내렸네 / 拿命遽至
죽음 보길 아무렇지 않게 보고서 / 視死如歸
조용하게 명에 따라 올라갔었네 / 從容就義
세자께서 온 힘 다해 구원하자 / 前星朗耀
임금께서 밝게 살펴 깨달으셨네 / 天鑑方悟
벼락 같던 위엄 되레 은혜 내리어 / 雷雨渙恩
총애하며 초유사로 임명하였네 / 寵以招諭
천령에서 고개 돌려 바라보니 / 天嶺回首
오랑캐 기운 사방 가득하였네 / 狼煙四散
낙동강 서쪽 일대 있는 고을들 / 一帶江西
위태롭긴 계란 쌓아 놓은 듯했네 / 危若累卵
죽음 눈앞 있더라도 명 따르나니 / 有死無霣
어찌 일이 글러진 걸 물었겠는가 / 寧問事去
외론 충성 홀로 떨쳐일어났는데 / 孤忠獨奮
그 누가 공과 함께 더불었는가 / 而誰我與
지성이면 귀신과도 통하는 거니 / 誠通神鬼
피 뿌리며 초유하는 글을 지었네 / 灑血摛文
불타 버린 나머지에 수습하여서 / 期收煨燼
기세 성한 왜놈들을 쓸어 버렸네 / 翦彼凌雲
뜻 있는 선비 모두 고무되었고 / 志士咸聳
군사들과 백성들은 한마음 됐네 / 軍民協一
정인홍(鄭仁弘)과 김면(金沔) 등이 의기 떨쳐서 / 鄭倡金奮
그 의로움 해와 달을 꿰뚫었다네 / 義貫白日
서로 간에 화합시켜 잘 지내게 해 / 會際同好
모두 함께 어려운 때 곧음 지켰네 / 共玆艱貞
곽재우(郭再祐)도 우뚝하게 일어나서는 / 郭亦崛起
정호를 지키는 간성 되었네 / 鼎湖干城
선비들의 의논 들어 계책 세우며 / 猷採士議
군사들의 마음 단합 힘을 쏟았네 / 務合軍情
참뜻으로 군사들을 믿게 하여서 / 推誠鶡冠
이로써 장려하고 신칙하였네 / 以獎以勅
어진 마음 가진 데다 위엄 있으니 / 懷仁怵威
그 누가 온 힘을 다 아니 바치랴 / 孰不效力
군사 진영 죽 늘어서 요충 지키며 / 鸛列守要
쳐들어오는 왜적놈들 길을 막았네 / 式遏奔衝
안원에서 피 뿌리며 왜놈 목 베자 / 安院斫血
십리 안이 온통 붉게 물이 들었네 / 十里殷紅
강가에서 왜적들 배 침몰시키고 / 江上沈舟
벌레 같은 왜놈들을 쓸어 버렸네 / 厮殺蟻蟲
계속해서 지례에서 적 섬멸하자 / 繼勦知禮
흉한 기세 잇달아서 꺾이어졌네 / 兇氣連沮
왜적들이 진주성을 포위했을 땐 / 勁寇環晉
우리 군사 숫자 겨우 몇 백이었네 / 百千其旅
이들 능히 통솔하고 격려하여서 / 將克率勵
왜적들 물리치고 성 지키었네 / 卻賊完堞
군사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지매 / 犒勞撫循
마치 솜을 몸에 두른 것만 같았네 / 若纊斯挾
이때 당시 상황으론 호남 지방이 / 于時湖南
나라를 회복하는 근본이었네 / 爲國根柢
영남 호남 양쪽이 서로 의지해 / 嶺湖相倚
형세상 서로 구제해야 했었네 / 勢須互濟
입술이 붙어 있지 않을 경우에 / 脣吻不存
이빨이 그 어디에 붙어 있겠나 / 齒將安傅
낙동강의 오른쪽을 차단하여서 / 蔽遮江淮
휘몰아쳐 들어오는 길을 끊었네 / 截彼長騖
당 나라가 망하지 아니했던 건 / 唐之不亡
장순(張巡) 허원(許遠) 두 사람의 공이었다네 / 巡遠其功

굳게 지킨 그 근본을 따져 본다면 / 原厥固守
의병들이 충성 바친 결과였었네 / 義帥効忠
그렇지만 선생께서 안 계셨다면 / 倘微先生
그들 혼자 무슨 일을 하였겠는가 / 彼獨奚爲
일은 아주 어려운 처지인 데다 / 事有至難
또한 운수 안 좋아서 불리했었네 / 亦數之奇
공께서 이들 사이 잘 주선하여 / 公其周旋
분란 풀고 사특한 자 제거하였네 / 解紛釋回
이에 공을 태산처럼 의지하였고 / 倚如崇嶽
북두칠성 바라보듯 우러러봤네 / 望若斗魁
아, 공께서는 / 嗚呼
충의로움 하늘에서 타고나시어 / 忠義出天
가슴속서 간절한 맘 우러났었네 / 惻怛由中
험하거나 편하거나 절개 같아서 / 一節夷險
종시토록 두 마음을 갖지 않았네 / 不貳始終
북쪽으로 임금 계신 의주(義州) 쪽 보며 / 北瞻龍灣
피눈물을 흘리면서 옷깃 적셨네 / 血淚沾裳
말하다가 종묘사직 말이 나오면 / 語及宗社
강개하고 분통하여 상심 더했네 / 慨惋增傷
그러면서 군대 위세 크게 떨쳐서 / 恨未振旅
왜적 섬멸 못한 것을 한탄하였고 / 殲彼讎賊
구차하게 한쪽 구석 보전한 것이 / 苟保一隅
자신의 잘못인 양 죄책하였네 / 謂當自劾
뜻은 큰데 힘이 그만 못하였기에 / 志與力違
침식조차 폐한 채 지내시었고 / 廢寢去食
오랜 피로 쌓이어서 병 심한데도 / 積勤悴疾
쉬지 않고 부지런히 공무 보았네 / 亹亹不倦
임종할 때 다른 생각 하나도 않고 / 臨絶曠然
단지 임금 그리는 맘 뿐이었다네 / 只存忠戀
빛나고도 빛났던 공의 그 마음 / 炯炯此心
해와 달과 그 밝음을 다툴 것이리 / 日月爭皎
큰집이 기울어서 무너지는데 / 大厦傾壞
어찌하여 집의 기둥 흔들리었나 / 胡遽棟撓
그 누가 나의 이 슬픔을 알리 / 孰識余悲
공에 대해 자세하게 아는 이 적네 / 知公者少
아, 애통하고 애통하구나 / 嗚呼哀哉
못난 나는 난리를 만난 뒤부터 / 余遭亂離
공과 함께 고생 근심 같이 하였네 / 同此艱虞
공께서는 못난 나와 함께하면서 / 公取臭味
용렬하고 못났다고 아니 버렸네 / 不棄庸愚
둘이 함께 지낸 지가 얼마이런가 / 聯衾幾何
지낸 세월 한 해가 다 되어 가네 / 星霜欲周
한밤중에 둘이 함께 눈물 뿌렸고 / 夜共灑泣
아침에도 계책을 상의하였네 / 朝詢畫謀
환아정(換鵝亭) 숲과 침류정(枕流亭)에서 / 鵝林枕流
가을 달빛 바라보며 선잠 잤었네 / 假寐秋月
동원에서 동쪽으로 길을 갈 때엔 / 桐院東征
호랑이 굴 탐색하는 거와 같았네 / 若探虎窟
하빈에서 서쪽으로 강 건너 갈 땐 / 河濱西渡
행색이 위태롭고 급박하였네 / 行色危迫
의춘이라 의령(宜寧)의 옛 성에서는 / 宜春古城
겨울 해가 서산 너머 지려고 했지 / 寒日欲夕
환난 속에 서로 죽길 다짐하면서 / 患難相死
신의가 이에 더욱 도타워졌지 / 信義斯篤
공에게 잘못된 거조 있으면 / 公有過擧
아무런 꺼림 없이 충고 다했지 / 告不憚瀆
첨엔 받아들이기를 꺼리더니만 / 初慊虛受
곧바로 자기 의견 고집 안 했지 / 旋克舍己
옥인데도 흠집 아니 가리웠으니 / 瑜不掩瑕
허물 보면 군자인 줄 알 수 있었지 / 過亦君子
내가 공께 관대하라 권면을 하자 / 勗公寬大
공은 내게 강렬하라 권면하였지 / 勉我剛烈
서로 간에 돕는 것이 마땅하다며 / 曰宜相資
영원토록 절차탁마 기약하였지 / 永期磨切
기이한 계책이 부족한데도 / 顧乏奇策
군사 방략 곁에서 도와 주었지 / 裨益籌略
돌보아 준 공의 은혜 못 갚았기에 / 未報眷眄
돌아보매 부끄러워 얼굴 뜨겁네 / 反省慙怍
병 났을 때 제대로 약 못 썼기에 / 藥不知方
염습하며 나의 마음 부끄러웠지 / 斂有愧心
공은 나를 충신하다 하였건마는 / 謂我忠信
나는 실로 정성스럽지가 못했네 / 我實匪忱
공께서 영원토록 떠나가시매 / 自公長逝
넘어지고 쓰러지며 떠돌았었지 / 顚沛流落
아직까지 술 한 잔도 못 올렸기에 / 尙闕一奠
다시금 나의 마음 부끄럽구나 / 重愧余薄
마음 기약 영원히 끊어졌는데 / 心期永阻
무덤에는 묵은 풀만 황량도 하네 / 宿草荒涼
제문으로 어찌 슬픔 다 쏟아 내랴 / 文何洩哀
정성 다해 술 한 잔을 내 올리노라 / 誠以侑觴
공의 풍모 눈앞에 있는 듯하여 / 風儀在目
어렴풋이 향내음이 풍겨져 오니 / 怳襲芬芳
아, 이젠 모두 끝나 버렸네 / 嗚呼已矣

[주D-001]급암(汲黯) …… 유배되었네 : 한 나라 때 급암은 황제의 면전에서 직간하기를 좋아하다가 자주 외직으로 쫓겨났고, 송 나라 때 당개(唐介)는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있으면서 재상으로 있던 문언박(文彦博)을 탄핵하였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 유배되었다.
[주D-002]장건(張騫) 뗏목 : 사신이 타고 가는 배를 말한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한 나라 무제(武帝)가 장건을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보내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게 하였는데, 장건이 뗏목을 타고 가다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났다.” 하였다.
[주D-003]부필(富弼) …… 높게 되었고 : 송 나라 때의 명신(名臣)인 부필이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가서 ‘헌(獻)’ 자와 ‘납(納)’ 자를 쓰는 일을 가지고 거란의 임금과 다툰 일을 말한다. 부필이 거란에 사신으로 갔을 때 거란의 임금이 세폐(歲幣)를 더 바치기를 요구하면서 부필에게 말하기를, “남조(南朝)에서 나에게 세폐를 보내면서는 마땅히 올려 바친다는 ‘헌(獻)’ 자를 써야 하고, 아니면 바친다는 ‘납(納)’ 자라도 써야 한다.” 하자, 부필이 이 두 글자를 쓸 수 없다고 다투어 거란의 뜻을 꺾었다. 《宋史 卷313 富弼列傳》
[주D-004]정몽주(鄭夢周)로 …… 됐네 : 우왕(禑王) 1년에 정몽주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왜구(倭寇)의 침입을 금지시켜 줄 것을 교섭하였는데, 그때 사신다운 풍채가 있어서 일본 사람들이 몹시 존경하였다고 한다.
[주D-005]내리는 …… 쏟아졌었지 :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기상이 몹시 걱정스럽고 처참하다는 뜻이다. 《시경》 패풍(邶風) 북풍(北風) 시에, “북풍이 차갑게 불어오며 내리는 눈 펑펑 쏟아지네.[北風其涼 雨雪其雱]” 하였다.
[주D-006]마치 …… 같았네 : 군사들을 위무함에 있어서 은혜로 감동시켜 추울 때도 추위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춘추좌씨전》 선공(宣公) 2년 조에 “군사들이 추위에 떨고 있으니, 왕께서 삼군(三軍)을 순시하면서 면려하시면 삼군의 군사들이 모두 솜을 몸에 두른 듯이 여길 것입니다.” 하였다.
[주D-007]당(唐) 나라가 …… 공이었다네 :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은 모두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의 충신이다. 천보(天寶) 연간에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장순은 백성들을 인솔하고 당 나라의 시조인 현원 황제(玄元皇帝)의 묘(廟)에 나아가 통곡한 다음 기병(起兵)하여 반란군을 막았다. 그 뒤에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인 수양성(睢陽城)을 몇 달 동안 사수하고 있었는데, 구원병이 오지 않아 양식은 다 떨어지고 힘은 다 소진되어 성이 함락되었다. 그러자 그곳의 태수(太守)로 있던 허원과 함께 사절(死節)하였다. 《舊唐書 卷187下 忠義列傳》

 학봉집(鶴峯集) 부록 제2권
 행장(行狀)
행장(行狀)

공(公)의 휘(諱)는 성일(誠一)이고, 자는 사순(士純)이며, 호는 학봉(鶴峯)으로, 향년 56세이다. 성은 김씨(金氏)이고, 본관은 경상도 의성현(義城縣)이다.
증조(曾祖) 만근(萬謹)은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증직(贈職)되었다. 비(妣)는 해주 오씨(海州吳氏)로, 숙인(淑人)에 증직되었다.
조(祖) 예범(禮範)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증직되었다. 비는 영해 신씨(寧海申氏)로, 숙부인(淑夫人)에 증직되었다.
부(父) 진(璡)은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비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되었다.

김씨는 본래 신라(新羅)의 종성(宗姓)으로 경순왕(敬順王) 휘(諱) 부(傅)의 후손이다. 세상에는 경순왕의 아들 휘 석(錫)이 의성군(義城君)에 봉하여졌다고 전한다. 그 후손에 휘 용비(龍庇)라는 이가 있어 벼슬이 태자 첨사(太子詹事)에 이르렀는데, 백성들에게 공덕이 있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고을의 사당에 위패(位牌)를 모셔 놓고 수해(水害)와 한해(旱害)가 있거나 역질이 돌면 기도하였다. 공은 이를 위패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여겨 종당(宗黨)과 의논하여 고을 사당의 동편에 따로 사당을 세우고 진민사(鎭民祠)라고 현판을 건 다음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첨사가 휘 의(宜)를 낳았으니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였으며, 복야가 휘 서지(瑞之)를 낳았으니 조현대부(朝顯大夫) 내영고 소윤(內盈庫少尹)이었으며, 소윤이 휘 태권(台權)을 낳았으니 봉익대부(奉翊大夫) 문예부 좌사윤(文睿府左司尹)이었으며, 사윤이 휘 거두(居斗)를 낳았으니 봉익대부 공조 전서(工曹典書)였으며, 전서가 휘 천(洊)을 낳았으니 선략장군(宣略將軍) 진례도 도만호(進禮島都萬戶)였으며, 만호가 휘 영명(永命)을 낳았으니 통훈대부(通訓大夫) 신녕 현감(新寧縣監)이었으며, 현감이 휘 한계(漢啓)를 낳았으니 통훈대부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이다. 이분이 공에게 고조가 되는데, 우리 문종(文宗)과 노산군(魯山君)을 섬겨 경악(經幄)에 출입하면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러다가 시사(時事)가 일변(一變)하자 외직(外職)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남쪽으로 돌아온 뒤에는 병으로 인해 다시 벼슬하지 않았다.
김씨는 전서공(典書公) 때부터 대대로 안동부(安東府)에서 살다가 통례공(通禮公) 때에 임하현(臨河縣)으로 장가들어 이곳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삼대(三代)가 은혜를 미루어서 추증받은 것은 공이 귀하게 됨으로 인해서였다.
판서공은 좌정승(左政丞) 문도공(文度公) 민제(閔霽)의 현손인 민세경(閔世卿)의 집에 장가들어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공은 그 가운데 넷째로, 가정(嘉靖) 무술년(1538, 중종 33) 12월 을사일 정해시에 임하현 천전리(川前里) 집에서 태어났다.
공은 예닐곱 살 때부터 남보다 뛰어나게 총명하였다. 여러 아이들과 함께 놀 때에도 우뚝하게 두각을 나타냈으며, 만약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문득 결연히 버리고 떠나가 일찍이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판서공이 기이하게 여겨 이르기를, “이 아이는 뒷날에 반드시 사람들의 눈치나 보면서 세속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여러 아이들과 층층의 바위 낭떠러지 위에서 놀다가 한 아이가 밑으로 떨어졌는데, 다른 아이들은 모두 놀라 달아났으나, 공은 즉시 달려가 사람들에게 알려 그 아이를 살려냈다. 그러자 그 말을 전해 들은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기면서 옛날에 송 나라 사마광(司馬光)이 독을 깨뜨려 물에 빠진 아이를 살려낸 일에 비하였다. 공이 9세 때 모부인(母夫人) 민씨(閔氏)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슬퍼하고 애모함이 어른과 같았다.
판서공께서 아주 엄하게 가르쳤는데, 공은 항상 회초리를 맞고도 잘못을 고치지 못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거스를까 걱정하였다. 홍원(洪原)의 수령으로 부임하는 백씨(伯氏) 김극일(金克一)을 따라 그곳에 가 있었는데, 하루는 성 안에 불이 났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달려가서 아문(衙門)의 불을 끄고 있었는데, 공만은 홀로 책상자를 등에 짊어지고 전패(殿牌)를 손에 받들고서 불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갔다. 그러자 백씨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기이하다. 내 동생은 반드시 학문을 독실히 하고 충애하는 마음이 두터운 선비가 될 것이다.” 하였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유학(遊學)하여 계씨(季氏)인 김복일(金復一)과 함께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글을 읽었는데, 어느 날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과거 공부만 하고 자신을 위하는 학문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아주 부끄러운 일이다.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은 오늘날의 유종(儒宗)이시니, 어찌 가서 가르침을 청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판서공에게 청하니, 판서공이 기뻐하면서 허락하였다. 이에 곧장 계씨(季氏)와 함께 소수서원에서부터 걸어서 가 이 선생을 뵈었더니, 퇴계 선생이 그의 모습과 행동을 보고 이미 마음속으로 사랑하였다.
얼마 있다가 또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나눠짐과 선기옥형(璿璣玉衡)의 제도에 대해서 물은 다음 물러나와서 형제가 서로 더불어 반복하여 연구하면서 직접 그림을 그려 만들기도 하였다. 퇴계 선생께서 밤중에 나왔다가 보니 형제가 마주 대하여 쉬지 않고 강론하고 있었다. 그러자 퇴계 선생께서 정성스럽고 독실한 것을 가상하게 여겨 크게 기대하였다. 일찍이 퇴계 선생이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사순(士純) 김성일이 이곳 도산(陶山)에 와 있는데, 무더위를 무릅쓰고 산을 넘어 왕래하면서 《서전(書傳)》 가운데 의심나는 뜻을 질문한다. 이 사람은 민첩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므로, 그와 학문을 함께 하노라면 몹시 유익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였다. 그리고 또 퇴계 선생이 손자인 이안도(李安道)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요사이 보니 김성일은 지취(志趣)가 매우 좋아 능히 이 일에 뜻을 오로지 하고 있는바, 마음을 세움에 있어서 성실하고 절실하기가 이와 같다면 무엇을 구한들 얻지 못하겠으며, 무엇을 배운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또 일찍이 성현들께서 서로 전한 심법(心法)을 하나하나 서술하여 병명(屛銘)을 만든 다음 손수 깨끗하게 베껴서 공에게 주었다.
집이 가난하여 매양 보리쌀과 나물을 식량으로 가져갔으며 때로는 그것도 미처 대지 못할 정도였으나, 공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직 학문에 힘쓰지 못할까만을 걱정하였다. 이에 각고면려(刻苦勉勵)하면서 학문이 진보되기만을 구하였으므로, 동문들이 모두 추앙하고 탄복하였다.
공은 본디 성품이 명리(名利)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일찍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자 하여 퇴계 선생께 여쭈었는데, 퇴계 선생이 이르기를, “부형이 계신데 어찌 자신의 뜻대로만 해서야 되겠는가. 다만 내외(內外)와 경중(輕重)의 구분을 밝히지 않아서는 안 되네. 그러니 모름지기 주자(朱子)의 시에 나오는, ‘개중에는 저대로 초연한 곳 있으니, 아이들과 똑같이 분망한 걸 배우리오.[箇中自有超然處 肯學兒曹一例忙]’라는 구절을 항상 기억하여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으로 삼아야만 될 것이네.” 하였다.
임술년(1562, 명종 17)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요승(妖僧) 보우(普雨)의 말을 따라서 희릉(禧陵)을 천장(遷葬)하고 정릉(靖陵)의 묏자리를 새로 잡으려고 하였는데, 이 당시에 윤원형(尹元衡)이 정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온 조정 사람들이 그의 뜻에만 따른 채 감히 이에 대해서 말하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도 공은 의분에 차서 상소를 짓기를, “크게 불가한 점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신도(神道)가 아직까지 조용한데 무단히 움직여 옮기는 것이 첫째요, 자전(慈殿)께서 뒷날에 같은 묘혈에 묻힐 계책을 하여 오랫동안 배장(配葬)한 원비(元妃)로 하여금 외로운 넋이 되게 하는 것이 둘째요, 새 능의 풍토와 형세가 살아 있는 지맥(地脈)을 범하여 절대로 지금의 묏자리만 못한 것이 셋째요, 비고 허한 곳을 보토(補土)하여 메우느라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켜서 백성들이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게 해 백성들을 사랑하였던 선왕(先王)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넷째요, 사왕(嗣王)께서 유충(幼沖)하여 정사가 궁위(宮闈) 안에서 나와 한 요승의 사특한 말 때문에 경솔하게 국가의 대사를 그르치는 일을 하는 것이 다섯째입니다.” 하였는데, 말투가 꼿꼿하고 강직하여 조금도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부형들이 극력 저지하여 올리지 못하였다. 이에 근체시(近體詩) 한 수를 지어 분한 마음을 토로하였다.
갑자년(1564, 명종 19)에 셋째 형 명일(明一), 동생 복일(復一)과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는데, 삼 형제가 한꺼번에 나란히 합격하였으므로 한때의 영광이었다. 그런데도 공은 대장부의 사업이 과거에 합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 뜻을 더욱 굳게 세우고, 더욱 독실하게 공부하였다.
성균관(成均館)에서 공부하게 되어서는 행동거지와 말하고 입 다무는 것을 유속(流俗)에 휩쓸려서 구차스럽게 함께 하지 않았으며, 의론이 명쾌하고 취사(取捨)가 과감하였다. 이에 벼슬에 나가기 전부터 사람들이 이미 원대한 국량이 있음을 알았다.
융경(隆慶) 무진년(1568, 선조 1)에 별시(別試)에 급제(及第)로 출신(出身)하여 권지 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뽑혀 보임(補任)되었고, 기사년(1569, 선조 2)에 정자(正字)로 승진하였다. 경오년(1570, 선조 3)에 추천되어서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제수되었고, 신미년(1571, 선조 4)에 대교(待敎)로 승진하였다.
임신년(1572, 선조 5)에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 상소를 올려 노산군(魯山君)의 묘를 봉식(封植)할 것과 사육신(死六臣)의 관작(官爵)을 회복할 것을 청하였으며, 겸하여 임금의 덕과 당시의 폐단에 대해서까지 논하였는데, 상소에 적은 말이 수천 마디였다. 그 뒤에 노릉(魯陵)을 봉식하고 사육신의 자손이 서용(敍用)된 것은 대개 공이 발론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만력(萬曆) 계유년(1573, 선조 6)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올랐다가 형조 좌랑(刑曹佐郞)으로 옮겼다. 당시에 많이 밀려 있던 옥송(獄訟)을 공이 모두 판결하였으므로 당상관과 여러 재신(宰臣)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김규(金戣)가 사간(司諫)이 되어 상회례(相會禮)를 행하게 되었는데, 공이 일찍이 경연 석상에서 그가 하는 짓을 보고는 그의 사람됨을 비루하게 여기고 있었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대궐에 나아가 홀로 아뢰면서 곧바로 그를 배척하였다. 이에 드디어 김규는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였으며, 공 또한 체차되어 전적(典籍)이 되었다. 이로부터 조정이 엄숙해져서 사람들이 공을 공경하면서도 꺼렸다. 그러자 김응남(金應南)이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곧은 절개가 천 길이나 되는 절벽처럼 우뚝하게 섰으니, 이는 30년 내에 없었던 일이다. 철면어사(鐵面御史)의 풍채를 직접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하였다.
이해 가을 7월에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에 제수되었으며, 조금 있다가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옮겨졌다. 겨울에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갑술년(1574, 선조 7)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제수되었으며, 또다시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어느 날 상이 경연(經筵)에 납시어 조용히 묻기를,
“경들은 나를 전대의 제왕들과 비교해 볼 때 어떤 임금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가?”
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대답하기를,
“요(堯) 임금이나 순(舜) 임금 같은 임금입니다.”
하였는데, 공은 대답하기를,
“요 임금이나 순 임금도 될 수가 있고, 걸(桀)이나 주(紂)도 될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께서 이르기를,
“요순과 걸주가 이와 같이 비슷한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능히 생각하면 성인이 되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친 사람이 되는 법입니다. 전하께서는 천부적인 자질이 고명하시니 요순처럼 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똑똑하다고 여겨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병통이 있으십니다.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걸주가 망한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하자, 상께서 얼굴빛을 바꾸고 바르게 앉았으며, 경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었다. 이에 유성룡(柳成龍)이 나아가 아뢰기를,
“두 사람의 말이 다 옳습니다. 요순 같다고 대답한 것은 임금을 인도하는 말이고, 걸주에 비유한 것은 경계하는 말로, 모두 다 임금을 사랑해서 한 말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주상이 얼굴빛을 고치고는 술을 내리게 한 다음 자리를 파하였다.
을해년(1575, 선조 8) 봄에 도로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일로 인하여 파직(罷職)되어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때 마침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장례일이었으므로 새벽부터 뜰 아래 엎드려 날이 저물 때까지 있었는데, 자제들이 방 안으로 들어갈 것을 청하자, 공이 이르기를, “오늘이 어찌 신하 된 자가 몸이 편하기를 구하는 날이겠는가.” 하면서, 끝내 지겨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 뒤 곧바로 서용하라는 명을 받아 병조 정랑에 올랐다.
병자년(1576, 선조 9)에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는데, 인재를 등용하고 자신이 처신하는 데 있어 지공무사(至公無私)하였다. 이조의 아전이 일찍이 공의 관교(官敎)를 가지고 왔는데, 사일(仕日)과 급수(級數)를 따져 보니 달 수가 기준에 차지 않았다. 아전이 말하기를, “조(曹)에서 예전부터 내려오는 규칙입니다.” 하니, 공은 이르기를, “비록 예전부터 내려오는 규칙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하자, 아전이 황송해하면서 사죄하고 물러갔다.
이해에 독서당(讀書堂)에 선발되어 들어갔는데, 공은 두렵게 여기면서 이르기를, “독서당을 설치한 것은 미리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그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공부해 학문을 쌓게 하기 위한 것이다. 퇴계 선생께서 독서당에 계실 적에는 여러 동료들이 그럭저럭 지내는 동안에도 홀로 문을 닫고 들어앉아 글을 읽으셨다. 그런데 하물며 나 같은 후학이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사가(賜暇)를 받을 적마다 종일토록 꿇어앉은 채 글을 읽었는데, 편히 쉬거나 놀이를 하느라 공부를 폐한 적이 없었다.
이해에 조정에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두 선생에게 시호(諡號)를 내렸는데, 모두 공이 명을 받들고서 내려가 반포하였으며, 받은 예물과 폐백은 모두 서원으로 보냈다. 또 명을 받들어 퇴계 선생의 시호를 내리면서도 역시 전처럼 예물과 폐백을 모두 서원으로 보냈다.
정축년(1577, 선조 10) 봄에 사은 겸 개종계 주청사(謝恩兼改宗系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임되었다. 이때 판서공의 나이가 70이 넘었는데, 70세가 넘었을 경우 상소를 올려 면하게 해 줄 것을 청하는 예전 규례가 있었다. 이에 즉시 서신을 보내어 판서공께 여쭈니, 판서공께서 답하기를, “내가 비록 늙었지만 다행히도 병은 없다. 너는 이미 벼슬길에 들어섰으니 의리상 사적인 일을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나 때문에 염려하지 말고 속히 임금의 명에 따르라.” 하니, 사람들이 아들다운 아들에 아버지다운 아버지라고 하였다. 이에 정사(正使) 윤두수(尹斗壽), 질정관(質正官) 최립(崔岦)과 함께 조정에 하직 인사하고서 출발하였다.
이보다 앞서 종계(宗系)와 악명(惡名) 두 건에 대해 중국 조정에 변무(辨誣)하여 고쳐서 편찬할 것을 허락받기는 하였으나,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옛부터 틀리게 기록되어 있었던 것을 그대로 따라서 편찬하고 있었다. 공은 황도(皇都)에 이르러서 사은(謝恩)한 뒤에 즉시 같이 간 사람들과 함께 예부(禮部)로 가서 여러 차례 자문(咨文)을 올려 비로소 한림(翰林) 당학징(唐鶴徵)이 편찬한 것을 보게 되었는데, 거칠고 엉성하여 사실과 달랐다. 이에 또다시 고쳐 주기를 청하면서 다방면으로 하소연하자, 상서(尙書) 마공(馬公)이 낭중(郞中) 심현화(沈玄華)를 시켜 고쳐서 편찬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손수 글자를 지우고 바르게 고쳐 몇 줄을 써 넣기까지 하였는데, 당학징이 편찬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명백하였다.
당시에 최립이 문장을 잘 짓는 것으로 이름나 해당 부에서는 진짜 문장가의 솜씨라고 칭하였다. 그런데도 공이 지은 글이 말뜻이 아주 간절하여 장주문(章奏文)의 체제에 잘 맞았으므로, 전후로 올린 글이 대부분 공의 손에서 나오게 되었다. 종계(宗系)가 더럽혀진 원통함과 열성(列聖)들께서 하늘에 부르짖은 정성을 모두 신설(伸雪)하여, 뒷날에 《대명회전》을 반포하여 내리고 사신이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오게 된 것은 모두 이번 사행(使行)에서 바룬 것이다.
공은 풍채가 준엄하고 깨끗하다는 소문이 조정에 파다하였으므로, 공이 서장관으로 차임되자 아랫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떨었다. 공은 평양(平壤)에 이르러서는 참람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적발하고, 옥하관(玉河館)에 이르러서는 짐꾸러미를 뒤져 적발하면서 일체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자 여러 역관(譯官)이 서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차라리 빈손으로 돌아갈지언정 조심하고 조심해서 서장관에게 죄를 받지는 말라.” 하였다.
그리고 정사(正使)는 공을 공경하여 서로 만날 때에 예모(禮貌)를 깍듯이 하여 대하였으며, 조처를 취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먼저 공의 의향을 살폈다.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온 뒤에 양가죽으로 만든 갖옷 한 벌을 공에게 보내면서 말하기를, “노친이 계시다고 하기에 감히 이를 선물로 보내오.” 하였다. 그러자 공은 즉시 받았다가 그 다음 날에 도로 돌려보내면서 이르기를, “성대한 뜻에 매우 감사드립니다. 다만 저에게도 양가죽 갖옷이 있어 아버님께서 추위를 막을 수가 있는바, 더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정사가 부끄러워하면서 심복하였다. 이해 겨울에 이조 정랑으로 올랐다.
무인년(1578, 선조 11)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제수되었다. 일찍이 입시(入侍)한 자리에서 권신(權臣)이 뇌물을 받은 일에 대해 말이 미치게 되었는데, 공이 아뢰기를, “거룩하고 밝은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고는, 이어 탐오한 풍습이 크게 성행하고 뇌물질을 드러내 놓고 하는 폐단에 대해 극력 진달하니, 상께서 큰소리로 캐물었다. 이에 공이 일일이 이름을 들어 아뢰자,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목을 움츠렸다. 또 당시의 재신(宰臣) 중에 와서(瓦署)의 기와를 사사로이 판 사람이 있었는데, 공이 일찍이 함께 입시한 자리에서 아뢰기를, “조종조에 와서를 설립한 뜻은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서였지 권귀(權貴)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유사(有司)들이 자기 물건처럼 보아서 거리낌 없이 사사로이 주고 있습니다.” 하니, 그 사람이 바닥에 엎드려 사죄하였는데, 땀이 흘러 등을 적시기까지 하였다. 이해 겨울에 다시 이조 정랑이 되었다.
기묘년(1579, 선조 12)에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하였으며, 곧바로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제수되었다. 공은 임금의 면전에서 과감하게 간하며 피하지 않고 탄핵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전상의 호랑이[殿上虎]’라고 불렀다. 하원군(河原君) 이정(李珵)이 왕실(王室)의 의친(懿親)으로서 주색에 빠져 멋대로 행동하여 폐단을 한없이 끼치고 있었다. 이에 공이 그 집종을 잡아다가 묶어 놓고는 엄하게 국문하였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다리를 떨면서 위태로이 여겼으나, 공은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었다.
상이 경연에서 묻기를,
“근래에 염치가 날로 없어지는 것은 어째서 그런 것인가?”
하니, 공이 아뢰기를,
“대신으로 있는 자도 역시 다른 사람에게서 뇌물을 받으니, 염치가 상실되는 것이 괴이할 것도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그때 정승 노수신(盧守愼)이 자리에 앉아 있다가 자리를 피하여 엎드려 아뢰기를,
“김성일의 말이 옳습니다. 신의 집안 사람 가운데 북방의 변장(邊將)이 된 자가 있는데, 신이 노모를 모시고 있다는 이유로 조그마한 초피(貂皮) 갖옷 한 벌을 주었으므로, 신이 받아서 어미에게 주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의 바른말에 대신이 허물을 인책하니, 둘 다 잘했다고 하겠다.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서로 능히 책려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공은 본디 노 정승과 사이가 좋았는데도 면전에서 논척(論斥)하여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자 노 정승이 나와서 사례하기를, “옛날의 도의를 오늘날에 다시 볼 수가 있었다. 공이 아니면 누가 능히 그렇게 하겠는가.” 하였다.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으로 옮겨졌다가 얼마 뒤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올랐으며, 다시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에 다시 사인이 되었다. 의정부의 옛 풍습이 노래와 여색으로 희학질하는 것을 숭상하였는데, 공은 엄숙히 몸가짐을 가져 행실을 변치 않았다.
가을에 함경도 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史)에 차임되었다. 그러자 도내의 탐관오리 가운데에는 공이 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인수(印綬)를 끌러 놓고 지레 떠나는 자가 있었다.
당시 도망한 군인의 일족(一族)을 침징(侵徵)하는 폐단이 온 도 사람들의 큰 걱정거리라서 서로 이끌고 흩어져 떠나는 탓에 열 집에 아홉 집은 비어 있었다. 이에 공은 먼저 두루 물어본 다음 조목별로 상소를 올려 아뢰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일일이 그에 따라 시행하여 오래된 폐단이 조금이나마 수그러들었다. 이에 떠돌아다니던 자들이 다시 모여들어서는 말하기를, “어사님은 우리들의 부모나 마찬가지다.” 하였다.
북로(北路)는 날씨가 매우 추운 탓에 길을 가기가 몹시 어려웠는데, 공은 바람과 눈 속을 잠시도 쉬지 않고 갔다. 누군가가 너무 수고한다고 하자, 공은 이르기를, “수졸들이 추위에 얼어 고생하고 있으니 옷을 나누어 주는 일이 급하다. 그런데 어찌 감히 길을 지체하면서 나 자신만 편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변방의 보루를 두루 돌면서 병사와 백성들을 위무하였으며, 오랑캐의 지경까지 들어가 형편을 모두 살피고 돌아왔다.
경진년(1580, 선조 13) 4월에 복명(復命)하였다. 복명한 다음 날 휴가를 청해 귀근(歸覲)하니, 판서공은 이미 병에 걸려 위중하였다. 공은 여러 형제들과 밤낮으로 옆에서 모시면서 직접 약을 조제하고 맛보았다.
초상을 당하여서는 물도 장도 입에 대지 않고 비가 쏟아져 진흙탕이 되었는데도 뜰 아래 엎드려 있었으며, 졸곡(卒哭)하기 전까지 곡소리를 그치지 않았고, 잠을 잘 때에도 자리를 펴지 않았다. 장사(葬事)를 마친 뒤에는 묘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시묘(侍墓)살이를 하면서 최질(衰絰)을 끄르지 않은 채 지냈으며, 동구 밖을 나온 일도 없었고 한번도 집안일에 대해 물은 적이 없었다.
상장(喪葬)의 절차는 일체 《의례(儀禮)》와 《가례(家禮)》를 따르고 두씨(杜氏)의 《통전(通典)》과 구씨(丘氏)의 《의절(儀節)》 등의 책을 참고하였는데, 자제(子弟)와 문생(門生)들도 모두 이를 강습하여 행하였고, 부녀자들 또한 모두 예문(禮文)을 잘 알았다. 그 뒤에는 향리 사람들이 의논해 공의 효행(孝行)을 갖추어서 관가에 보고하였는데, 마침 공의 친구가 고을 수령으로 있다가 오랫동안 감탄하고는 말하기를, “이런 일 따위가 어찌 공을 높이는 일이 되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위에 아뢰지 않았다.
임오년(1582, 선조 15)에 복제(服制)를 마쳤다. 담제(禫祭)를 지낸 뒤에 중씨(仲氏) 김수일(金守一)과 함께 물러가 백운정(白雲亭)에서 살았다. 백운정은 바로 판서공이 자리를 잡고 중씨가 지은 것으로, 북쪽으로는 가묘(家廟)를 마주 대하여 있고 남쪽으로는 산소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상을 마친 뒤에도 집으로 곧바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대개 남은 슬픔이 다하지 않아 추모하는 생각을 부친 것이다.
이해에 여러 차례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는데,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제수되기에 이르러 비로소 조정에 나아가 사은하였다. 이어 사간원 사간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계미년(1583, 선조 16) 3월에 사인으로서 황해도 순무어사(黃海道巡撫御史)에 차임되었다. 당시에 군정(軍政)이 해이해져서 군적(軍籍)은 빈 장부만 남아 있었으며, 부역이 과중하여 백성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공은 개연히 부패한 것을 개혁하고 죽어가는 백성들을 살릴 뜻을 품어 조목조목 상소를 올려 그 폐단에 대해 극력 진술하였다. 경내에 도착한 뒤에는 호령이 바람 불듯 시행되어 군사와 백성들이 모두 원통함을 풀 수가 있었으며, 탐관오리를 적발함에 있어서는 위세가 있다고 하여 용서치 않았다.
그 뒤에 미처 조정으로 돌아와 복명하기도 전에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특별히 제수되었으며, 복명한 뒤에 곧바로 배사(拜辭)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탄식하기를, “사직(社稷)을 지킬 그릇인 장유(長孺)가 어찌 회양(淮陽)에서 누워서 다스리는 자리에 합당하겠는가.” 하니, 공은 이르기를, “서울에서 벼슬살이하거나 지방에서 벼슬살이하거나 모두가 직분이니 오직 있는 자리에서 온 마음을 다할 뿐이다.” 하였다.
임지에 도착해서는 날마다 사모관대를 갖추고서 백성들을 대하였는데, 춥거나 덥다는 이유로 이를 폐하지 않았다. 정사를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불쌍한 자들을 도와 주고 세력이 강한 자를 억누르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으며, 자신의 몸가짐을 더더욱 엄하게 하였다. 공은 나주가 매우 번화한 고을이라서 민정(民情)이 막힐까 몹시 두려워하였다. 이에 북 하나를 내걸도록 명하고는 영을 내리기를, “만약 원통한 일을 하소연하고 싶은 자는 반드시 와서 이 북을 치라.” 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이 소회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해 일이 막히는 법이 없어서 위아래가 서로 화합하니, 고을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공은 간사함을 적발해 내는 것이 귀신같아서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위조한 문서를 가지고 서로 다투면서 분별하지 못하고 있던 송사(訟事)가 있었는데, 공이 물을 가져오게 하여 이어 붙인 곳을 적셔보니 어제 붙인 것처럼 찰기가 있었다. 이에 다시 오래된 문서를 가져다가 적셔보니 찰기가 이미 다 없어졌으므로, 수고로이 캐묻지 않고서도 정상이 저절로 드러났다.
또 나주 고을에 나씨(羅氏)와 임씨(林氏)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한 고을의 거족(巨族)이었다. 나씨 집에서 임씨 집 딸을 며느리로 들였는데, 자식이 없이 죽자, 임씨 집에서 몰래 다른 사람의 아이를 훔쳐온 다음 여종과 짜고서 거짓으로 유복자를 잉태한 것처럼 꾸며 자신이 낳은 자식으로 만들었다. 이에 나씨 집안에서 진위를 판별해 주기를 청하면서 다른 성씨를 들여 종통을 어지럽혔다고 송사하였는데, 여러 차례 심리를 거치고서도 몇 년 동안이나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을 공은 한번 보고서 그 즉시 간파하여 거짓임을 밝혀내 곧바로 판결을 내리자, 공론이 아주 시원스럽게 여겼다. 이에 온 도의 송사가 모두 공에게 몰려들었는데, 공은 판결을 내리는 것이 물 흐르듯 하여 적체되는 일이 없었다.
공은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아전을 잘 단속하면서 너그러움과 매서움을 겸하여 행하였으며, 무너졌던 온갖 일들을 모두 바로잡아 치적이 있다는 명성이 크게 떨쳐졌다. 그러자 상께서 글을 내려 이르기를, “그대가 굳세고 밝게 다스리면서 송사를 판결하는 데 있어 흔들리지 않는 탓에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은 매우 꺼리나 백성들은 편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았는바, 몹시 가상하다.” 하고는, 표리(表裏) 한 벌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나주 고을은 본디 선비가 많다고 일컬어졌으나 이들이 모여서 공부할 만한 곳이 아직 없었다. 이에 공은 직접 성의 서쪽에 있는 금성산(錦城山) 기슭에 터를 잡은 다음 서원(書院)을 창건하였는데, 규모와 학령(學令)은 일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예를 따랐다. 그리고 사우(祠宇)를 세워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 등 다섯 선생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였다. 공은 공무를 보는 틈틈이 혼자서 말을 타고 이곳으로 달려가 유생(儒生)들과 경서의 뜻을 강론하였으며, 근태(勤怠)에 따라 점수를 매겨 인재를 양성하는 방도를 다하였다.
공은 자신을 봉양하는 데에는 간략히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데는 후하게 하였다. 대소 빈객들을 모두 예로써 대접하였으며, 일가들 가운데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는 모두 마음을 써서 보살펴 주었다.
을유년(1585, 선조 18)에 큰형님의 부음(訃音)이 이르자 애통한 마음에 관아의 공무를 폐하고 온 마음을 다해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하면서 이르기를, “큰형님은 다섯 고을로 아버지를 봉양하였는데, 나는 홀로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어서 녹봉으로 봉양하지 못하였기에, 아버지를 섬기는 마음으로 형님을 섬기려고 하였다. 그런데 형님이 또 이렇게 되었으니, 내가 어떻게 마음을 가눌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병술년(1586, 선조 19) 가을에 사직단(社稷壇)에 불이 나서 묘우(廟宇)가 전부 타 버리자, 고을 사람들이 묘우를 새로 짓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공은 이르기를, “사직단이 불탄 것은 그 죄가 수령에게 있는 것이니, 덮어 숨겨서는 안 된다.” 하고는, 드디어 사유를 갖추어 아뢰어서 파직당하였다.
대개 공이 처음 부임하였을 적에 먼저 사직단에 나아갔다가 단(壇)이 낮고 누추하며 위패(位牌)도 함부로 간수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더할 수 없이 불경스럽다고 여겼다. 이에 예(禮)를 상고하고 지형을 살펴서 단을 쌓고 사(祠)를 세운 다음, 봄가을로 제향(祭享)을 지내면서 몸소 깨끗이 청소하니, 아전과 백성들이 비로소 사직단이 중한 곳임을 알았다. 그런데 마침내 이에 연좌되어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 일이 간사한 자의 송사(訟事)에서 나온 것임은 단연코 의심할 여지가 없어서 사람들이 모두 어떤 자를 지목하면서 분통해하였다. 그런데도 공은 끝내 내버려둔 채 그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공은 고을살이를 하면서 맑고 신중하게 하여 청렴하다는 명성이 원근에 널리 퍼졌다.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방이 텅 비어 쓸쓸하였으나, 기쁜 얼굴로 태연자약한 채 문을 닫고 들어앉아 글이나 보며 지내었다. 그러면서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절대로 말하지 않았으며, 비록 서로 묻는 일이 있어도 가벼이 응접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단지 임금의 기체가 편하신가만 물을 뿐, 다른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 원근에서 배우러 오는 자가 재사(齋舍)에 넘쳤는데, 종일토록 강마하면서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에 잠깐씩 와서 배운 향리 사람들까지도 공의 언론(言論)을 흠모하여 감화되는 것이 많았다.
정해년(1587, 선조 20) 가을에 안동부(安東府)의 서쪽에 있는 청성산(靑城山)의 낙동강 가의 땅을 얻었는데, 바위 구렁이 기이하고 소(沼)가 맑고 푸르렀다. 이에 그 그윽한 경치를 사랑하여 그곳에 집을 짓고는 석문정사(石門精舍)라고 편액(扁額)을 달았는데, 온 방안이 환하게 밝았으며, 도서(圖書)가 시렁에 가득하였다. 공은 그 안에 단정하게 앉아 있으면 처음에 먹었던 마음과 부합되어 기뻤으므로 거기에서 생을 마감할 생각을 하였다. 나중에는 비록 임금이 부르는 명에 못 이겨 억지로 나아가 벼슬하였으나, 조정에 오랫동안 있었던 것은 공의 뜻이 아니었다.
이해 겨울에 천전리(川前里)의 종가(宗家)에 불이 나 모두 타 버렸다. 공은 즉시 사당으로 달려가서 곡하였으며, 온 문중에 건의하여 쌀과 베를 적당히 헤아려 거둔 다음, 공사를 직접 감독하였다. 종가가 몇 개월 만에 완공되었는데, 주가(主家)는 짓지 않았다. 마루와 방, 문, 창 등은 일체 예전 제도를 따라 그대로 지었으며, 대청은 조금 넓게 하여 제사를 지내는 데 편하게 하였다. 공은 일찍이 탄식하기를, “종자(宗子)에 대한 법이 무너져서 풍속이 더욱 투박해졌다. 지금 와서 비록 종법(宗法)을 갑작스럽게 세울 수는 없지만, 종가를 중시하는 의리를 알게 해야만 하겠다.” 하였다. 그리고는 문중의 길례(吉禮)와 흉례(凶禮)를 모두 종자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다.
퇴계 선생의 문집이 문하의 여러 사람들 손에 의해서 원고가 모아지기는 하였으나, 미처 탈고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자년(1588, 선조 21) 여름에 공이 한두 사람의 동지와 함께 다시금 수교(修校)한 다음 서로 상의하여 확정지었는데, 이 일을 종시토록 담당해서 한 것은 실로 공이 주관한 것이다. 퇴계 선생 문인들의 물음에는 엉성하고 치밀한 차이가 있고, 퇴계 선생의 답에는 상세하고 소략한 차이가 있었다. 이에 공은 여러 차례 정밀하게 생각한 다음 상세한 것은 남겨두고 번잡한 것은 삭제하였는데, 종일토록 조용히 앉아 읽으면서 감히 조금도 해이하게 하지 않았다.
가을에 종부시 첨정(宗簿寺僉正)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있다가 종부시 정(宗簿寺正)에 올랐다. 당시에 선비들의 의론이 서로 달라서 이미 동서(東西)로 나뉘어 있다가 또다시 남북(南北)으로 나뉘어졌는데, 서인(西人)들을 몹시 심하게 배척하는 자들이 북인(北人)이 되고, 동인과 서인을 적당히 헤아려서 쓰자는 사람들이 남인(南人)이 되어, 각자 자신들의 소견을 고집해 논의가 서로 어긋나 있었다. 그러던 차에 공이 조정으로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는 서로 말하기를, “김성일이 올라오면 어떤 논의를 주장하겠는가.” 하였는데, 공이 조정에 이르러서는 이르기를, “자기와 견해가 다르다고 하여 반드시 다 소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자기와 견해가 같다고 하여 어찌 다 군자라고 하겠는가. 피차를 따질 것 없이 오직 어진 자만을 등용하고 불초한 자를 내쳐야 한다.” 하였다. 공은 본래부터 성품이 강직하였으나, 논의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이 대개 이와 같았다.
봉상시 정(奉常寺正)으로 옮겨졌다. 이때 북관(北關)으로 옮겨져 간 백성들 가운데 도망쳐 돌아오는 자들이 날마다 많아졌으므로 공이 이들을 쇄환(刷還)하는 소임을 맡아 경기 지역에 나가 안찰(按察)하게 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북쪽 변경 지역을 채우는 일을 급하게 여겼으므로, 한 사람이 도망치면 그에 연좌되어 죄에 걸려든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되었다. 이에 백성들의 원통하여 울부짖는 소리가 시끄러웠으며, 근심스럽고 참담한 기색이 길에 가득하였다. 공은 그 폐단을 철저히 인식하고 자세하게 캐물어서 조사하였으므로,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지 못하였으며, 백성들 중에는 원망하는 자가 없었다. 뒷날에 공의 처자(妻子)가 난리로 인해 떠돌아다니다가 경기 고을을 지나가자, 이들이 앞다투어 음식을 싸들고 와 바치면서 지난날의 선정(善政)에 대해 감사해하였는데, 곳곳마다 모두 그러하였으며, 죄를 범하여 형벌을 받은 자들이 더욱더 정성을 보였다.
기축년(1589, 선조 22)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제수되었다가 예빈시 정(禮賓寺正)으로 옮겨졌다. 이때 마침 일본의 사자(使者) 현소(玄蘇)와 평의지(平義智) 등이 와 우리나라에서 통신사(通信使)를 보내 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들이 오래도록 동평관(東平館)에 머물러 있었다. 이때 공이 해당 관원으로 있으면서 접대하였는데, 예에 맞게 주선하였으며 의리로써 유시하였으므로, 그들이 비록 다른 나라 종족이라고는 하지만 그때부터 이미 공경하여 복종할 줄을 알았다.
조정에서 바야흐로 통신사를 보낼 것을 의논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가기를 회피하였다. 그러자 공은 가인(家人)에게 이르기를, “속히 행장을 꾸리라. 내가 반드시 가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공이 부사(副使)에 충원되었다. 친구들이 모두 와서 위로하니, 공은 이르기를, “임금의 명령이라면 물이나 불도 피하지 않는 법인데, 바람과 파도가 험한 것을 어찌 말하겠는가. 다만 재주가 부족하여 제대로 전대(專對)할 수 있을지만이 두려울 뿐이다.” 하였다.
경인년(1590, 선조 23) 봄에 상사(上使) 황윤길(黃允吉),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과 함께 대궐에 나아가 하직 인사를 하고 서울을 떠났다. 4월에 배를 띄워 이미 큰바다까지 나갔을 때 태풍이 불어 닻줄이 끊어지고 돛대가 부러져서 당장 배가 전복될 위기에 처했으므로,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울부짖었으며, 바다에 익숙한 사공들까지도 발을 동동 구르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런데도 공은 홀로 단정히 앉아 시를 읊었다. 바다를 건너 섬에 닿은 뒤에 어떤 사람이 묻기를, “배가 위태로운데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던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공이 이르기를, “죽고 사는 데는 명이 있는 법이므로 오로지 조용히 기다린 것일 뿐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천풍해도사(天風海濤辭)를 지어 회포를 붙였다.
5월에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하였는데, 왜사(倭使)가 미처 와서 영접하지 않았다. 상사가 ‘조정의 지휘(指揮)에 선위사(宣慰使)가 올 때까지 머물러서 기다리라는 말이 없다.’는 이유로, 선위사가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출발하려 하였다. 그러자 공이 이르기를, “우리 조정에서는 보통 왜인이 왕래할 적에도 오히려 접대하는 관원을 보내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통신사의 행차인데도 영접하고 호위하는 사신이 없단 말입니까. 듣건대 저들도 차관(差官)이 온다고 하였으니, 뱃길이 막혀 중간에서 지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속히 갈 생각만 하여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출발한다면, 우리들 스스로 처신하는 도리가 중하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저들이 장차 선위사가 있고 없고가 관계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럴 경우 이 뒤에는 드디어 이번 일을 끌어대어 전례로 삼아 선위사를 폐하고 보내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그런데도 상사가 고집을 꺾지 않았는데, 그 뒤에 보니 평행장(平行長)이 과연 선위사로서 일기도(一岐島)까지 와서 바람이 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의지(平義智) 등이 국분사(國分寺)를 유람하기를 청하여 사신 일행이 모두 갔는데, 현소(玄蘇)가 중당(中堂)에 앉아서 영접하였으며, 평의지는 나중에 오면서 가마를 탄 채 계단을 지나서 올라왔다. 공은 그들의 무례함이 미워 그들과 예모를 차리고 싶지 않았으므로, 상사에게 함께 피해 나갈 것을 청하였으나, 상사가 듣지 않았다. 그러자 공이 이르기를, “오랑캐들이 하는 짓을 비록 심하게 따질 것은 없겠으나, 역시 상하간의 분수는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만약 이대로 앉아서 술잔을 주고받는다면, 이것은 사신이 스스로 체모를 잃는 짓이며,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차스럽게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일어나 나와 관소(館所)로 돌아오니, 서장관도 뒤따라 나왔다. 평의지가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역관(譯官) 진세운(陳世雲)이 병이 나서 나간 것이라고 고하였다. 이에 공은 왜사(倭使)가 보는 자리에서 진세운을 곤장 친 다음 죄를 따지기를, “이 대마도는 대대로 우리나라의 은혜를 받아 우리나라의 동쪽 울타리가 되었는바, 사신이 왕래할 적이면 몸소 호위하고 서로 만나 볼 적에는 앞으로 나와서 재배(再拜)하는 것이 그들의 분수이다. 그런데도 며칠 사이에 우리들이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는 것을 보고서는 문득 교만스런 마음을 내어 태연스럽게 능멸하기를 이처럼 하였다. 저들이 물어 왔을 경우 너는 마땅히 전례(典禮)에 의거하여 사실을 갖추어서 대답했어야 한다. 그런데 도리어 겁을 집어먹고 입이 달라붙어서 얼버무리는 말을 해 저들의 환심을 사려 하였다. 그러니 일행의 체모를 그르친 자는 바로 너다.” 하였다. 그러자 도선주(都船主)가 이 사실을 듣고는 사람을 보내서 사죄하기를, “부관(副官)이 나이가 어린 탓에 예법을 잘 몰라서 이런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신께서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공이 답하기를, “대마도는 우리 조정을 신하로서 섬겨 왔으니 번신(藩臣)이나 다름이 없으며, 부관은 또 도주(島主)의 아들이다. 그런데 그가 어찌 감히 이처럼 무례하게 군단 말인가.” 하였다. 평의지 역시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여 가마를 메고 갔던 자에게 죄를 돌려 그의 목을 벤 다음, 자신을 낮추는 말로 사죄하였는데, 백 보 앞에서부터 따라오던 자들을 다 물리치고 걸어서 문으로 들어왔으며, 태도가 몹시 공손하였다. 이에 공이 충순(忠順)의 도리를 힘쓰라고 면려한 다음 보냈다. 이로부터 왜인들이 공의 절의(節義)에 굴복하여 감히 조금도 해이하게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서장관은 공이 진세운을 곤장 친 것은 너무 심한 일이라고 여겼으며, 또 평의지가 가마를 메고 갔던 종을 죽인 다음 사죄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더 마음이 편치 않아 공에게 글을 보내어서 말하기를, “오랑캐를 대우하는 도리는 상규(常規)로 대할 수 없는 것으로, 옛사람도 ‘잘 달랜다’고만 말했을 뿐이지, 어찌 일찍이 체모(體貌)를 말한 적이 있었습니까.” 하였으며, 상사 역시 말하기를, “오랑캐와는 겨룰 필요가 없으며, 자그마한 예절은 다툴 것이 못 됩니다.” 하였다. 그러자 공은 이르기를, “옛적에 공도보(孔道輔)가 요(遼) 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 요 나라의 영인(伶人)이 문선왕(文宣王)에 관한 내용으로 연극을 하자, 공도보가 벌떡 일어나 나와서 연회가 중간에 파하고 말았습니다. 평의지가 가마를 탄 채 당(堂)에 오른 것은 요 나라의 영인이 문선왕을 연극한 것보다 더 심한 것입니다. 사신이 모욕당하는 것은 실로 대국의 수치입니다. 그런데 어찌 미리 스스로 두려워하여 굴욕을 달갑게 여기면서 그들에게 따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서장관이 또 말하기를, “우리들이 친히 왕명을 받들고 부절(符節)을 잡고서 사신으로 온 것이 어찌 단지 체모를 높이는 한 가지 일만 하고자 해서였겠습니까.” 하니, 공이 이르기를, “우리들이 조정을 하직하던 날 임금께서 간곡하게 말씀하시기를, ‘행동을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예법대로 하라.’ 하였으며, 또 ‘나라의 체모를 높이고 임금의 위엄을 멀리 전파하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이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깊이 생각해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찮은 오랑캐가 함부로 무례하게 구는데도 마음 편하게 받아들여 능히 스스로를 바루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왜왕의 궁정에 들어간 뒤에 일이 이보다 더 크고 모욕이 이보다 더 심할 경우, 겁부터 내면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이 또 장차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구봉(龜峯)에서 바람이 불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진세운을 날마다 날마다 보내어[日遣] 평의지 등에게 출발하기를 청하게 하였는데, 평의지 등이 자신들의 방으로 들어가 버린 채 전혀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에 심지어는 걸어서 도선주(都船主)가 탄 말 뒤를 따라가면서 출발하기를 청하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공이 이르기를, “진세운이 욕을 당하는 것은 곧 사신이 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격왜(格倭)가 있으니 이들을 앞장 세우고 출발하면 될 것인데, 어찌 명을 여쭙는 것처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행(使行)이 만약 출발한다면 저들은 뒤쫓아 오기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우리들이 출발하기를 청하도록 기다린단 말입니까.” 하였다. 그러면서 반복하여 논변하였으나, 공의 말이 끝내 먹혀들지 않았다.
일기주(一岐州)에 이르자 선위사(宣慰使)와 국왕사(國王使)가 모두 와 머물며 기다리고 있었다. 왜인들이 쌀섬을 가지고 와 바치는 것을 상사와 서장관이 직접 받았다. 이에 공은 그것이 체모를 잃은 짓임을 논하면서 관여하지 않았다. 그 다음 날에 상사와 서장관이 왜사(倭使)와 만나 보기를 청하자, 공이 이르기를, “주인이 먼저 손님에게 청하는 것이 마땅하지, 손님이 먼저 주인에게 청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더구나 나와 서장관은 지금 모두 부모의 기일(忌日)을 당하였는데, 이는 사람의 자식 된 자의 종신의 상(喪)입니다. 오랑캐의 사신과 만나 보는 것이 뭐가 급한 일이라고 하필 기일에 만나 본단 말입니까.” 하였는데, 상사와 서장관이 공의 말을 듣지 않고 곧바로 왜사에게 청하였으나, 왜사가 허락하지 않았다.
7월에 계빈관(堺濱館)의 인접사(引接寺)에 도착하였다. 이때 서해도(西海道)의 왜인이 예물과 음식을 가져왔는데, 그가 보낸 글 가운데 ‘조선 사신이 내조하였다.[朝鮮使臣來朝]’는 말이 있었다. 일행들이 처음에는 자세히 보지 않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깨닫고 물어보니, 이미 물품을 다 받아서 종자(從者)들에게 나누어 준 뒤였다. 이에 공이 즉시 상사와 서장관에게 고하기를,
“왜인이 ‘내조(來朝)’라는 말을 하였으니 나라를 몹시 욕되게 한 것인데, 제대로 살피지 않고 망녕되이 받았으니, 장차 어쩌면 좋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오랑캐가 한 말은 잘 모르고서 망녕되이 말한 것이니, 어찌 따질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자, 공이 이르기를,
“오랑캐야 참으로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사신도 잘 모른단 말입니까. 옛사람은 주고받는 즈음에 털끝만한 일도 그대로 지나쳐 버리지 않고 오직 의리를 따랐습니다. 더구나 지금 사신으로 와서 나라를 욕되게 하는 음식을 받아 먹는다면, 의리에 있어서 어떻겠습니까. 저들이 보낸 음식을 보니 모두 저자에서 사온 것들입니다. 지금 만약 저들이 보내온 수효대로 사다가 되돌려주면서 이르기를, ‘너희들이 보낸 예단(禮單)의 말이 잘못되었다. 이미 그것을 알았으니 그대로 받을 수가 없다. 이에 즉시 저자에서 사다가 주니, 돌아가서 너희 주인에게 그렇게 고하라.’ 한다면, 말이 엄하고 의리가 발라서 치욕을 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사와 서장관이 처음에는 매우 어렵게 여겼으나 공이 계속해서 논하여 뭇 의논이 드디어 정해졌다. 이에 즉시 사다가 되돌려주도록 하고는 그 사유를 모두 말해 주었다. 그러자 심부름꾼이 사죄하기를, “저희들은 소인인지라 한자(漢字)를 모르므로 이곳에 와서 남의 손을 빌어서 글을 쓴 탓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비록 문구에 잘못된 것이 있더라도 우리 주인은 모르는 일입니다. 글을 다시 고쳐 써서 올리겠으니 사신께서는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며, 도선주(都船主)도 사람을 시켜 와서 말하기를, “저들이 번문(番文)으로 적어 와서 바치기에 제가 번역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 또한 어(魚) 자와 노(魯) 자도 분간하지 못하는 탓에 말에 실수를 하게 되었으니, 그 죄는 실로 저에게 있습니다. 부디 저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사와 서장관이 말하기를, “심부름꾼이 사실을 실토한 것이 저와 같고, 도선주가 자신의 죄를 말한 것이 또 이와 같으니, 우선은 받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공은 그래도 오히려 개운치가 않았으나, 그 말에 억지로 따랐다.
왜국의 지경에 들어오면서부터 상사와 서장관은 왜인들의 가마 타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공은 반드시 관디[冠帶]를 갖추고 길을 갔다. 왜도(倭都)에 이르러서도 상사와 서장관은 그대로 평상복을 입은 채 들어갔다. 이에 공이 이르기를,
“사신이 예복을 입는 것은 왕명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본국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그러해야 하거늘, 하물며 다른 나라의 도성에 들어가면서도 예복을 입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자, 상사와 서장관이 말하기를,
“나라 안에서 예복을 갖추어 입는 것은 외신(外臣)을 지영(祗迎)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왜국에서는 영접(迎接)하는 의식이 없고, 관백(關白)도 외방에 나가 있습니다. 그러니 사신이 어찌 반드시 예복을 입어야 하겠습니까.”
하니, 공이 이르기를,
“의관을 차려 입어 우러러보게 하는 것은 바로 군자가 평소에 몸가짐을 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사명을 받들고 온 때이겠습니까. 본조에서 사명을 받든 자는 비단 지영할 때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길을 갈 적에도 예복을 입습니다. 그런데 어찌 관백이 도성에 있고 없고를 따진단 말입니까.”
하였다. 그런데도 상사와 서장관이 모두 따르지 않았으므로 공 혼자서만 예복을 입고 들어갔다. 이날 왜도의 사녀(士女)가 전부 쏟아져 나와 보았으며, 궁녀와 고관들까지도 대궐 아래에 모여서 보았는데, 모두 부사의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교차시켜 공경하는 예를 표했으나, 그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깔보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제서야 서장관이 비로소 후회하였다.
9월에 총견원(摠見院)에 머물러 있었는데, 관백이 외방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은 탓에 오래도록 왕명을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평의지 등이 와서 우리나라의 음악을 들려 주기를 청하였다. 일행 사람들이 모두 허락하려고 하자, 공이 이르기를, “사명을 받든 신하가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아직 왕명을 전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처녀가 아직 시집 못 간 것과 같습니다.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가 노래를 팔아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경우, 어찌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왕명을 풀밭에 내팽개친 채 국도 가운데서 음악을 베풀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은, 처녀가 노래를 파는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더구나 일정하지 않은 것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인데, 악공(樂工)이 악기를 안고 밤새도록 국도 가운데 있을 경우, 어찌 걱정될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또 서장관과 관백을 만나 보는 절차에 대해 논하였는데, 서장관은 뜰 아래서 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고, 공은 기둥 밖에서 절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여, 며칠 동안이나 논쟁하였으나 결정이 나지 않았다. 이에 공이 이르기를,
“일본은 우리나라 조정의 여국(與國)입니다. 그리고 일본을 맡아 다스리는 자는 소위 천황(天皇)입니다. 관백이란 자는 그의 대신(大臣)일 뿐입니다. 오직 관백이 온 나라의 권력을 제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우리 조정에서는 그 실정을 모르고 국왕이라고 하면서 우리 임금과 대등한 신분으로써 대우했던 것입니다. 이는 왕자(王者)의 존엄함을 낮추어서 아래로 이웃 나라의 신하와 대등하게 하는 것이니, 또한 치욕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 나라에 들어와서 관백이 국왕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비록 전례가 없더라도 오히려 예법에 의거하여 분명하게 따져 상견(相見)하는 예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더구나 이전에 왔던 사신들이 모두 기둥 밖에서 절하는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들만 어찌 유독 뜰에서 절하는 것을 달가운 마음으로 받아들여 나라를 욕되게 하는 죄를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서장관이 말하기를,
“평수길(平秀吉)은 명칭은 비록 관백이지만, 실상은 한 나라의 임금입니다. 사신이 어떻게 그가 왕이 아닌 줄을 알아서 뜰에서 절하는 예를 폐하고자 한단 말입니까.”
하자, 공이 이르기를,
“관백이 감히 왕이라 일컫지 못하는 것은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그 기록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사신이 오면서 평수길을 가리켜서 관백이라고 하면 왜인들이 모두 알아들었으나, 국왕이라고 하면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관백이라 이르고 왕이라고 이르지 않는다’는 것은 산인(山人) 종장(宗長)의 말이고, ‘상군(相君)이 문교(文敎)를 이역 땅에 폈다.’는 것은 주지(住持) 태수(兌叟)의 서문(序文)입니다. 그리고 ‘증일품대상국태령(贈一品大相國台靈)’이란 것은 전 관백의 위패(位牌)이고, ‘대정대신신장(大政大臣信長)’이란 것은 전 관백의 명호(名號)입니다. 이것으로써 본다면 평수길은 국왕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왕이라고 하지 않는데, 다른 나라의 사신이 왕이라고 하면서 전례에 없는 예를 행하려고 하는 것은 또한 무슨 의리입니까. 이전에 온 사신들은 관백을 정말 임금인 줄 알고서도 오히려 기둥 밖에서 절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는데도 도리어 뜰 아래에서 절하는 예를 행하고자 하니, 이것이 무슨 도리입니까.”
하자, 서장관이 말하기를,
“국서에 곧장 어휘(御諱)를 쓰고 평수길을 국왕이라고 칭하였으니, 이는 우리 전하께서 대등한 신분으로 대우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하 된 자가 어찌 감히 대등한 예로 예를 행하여, 아래에서 절하여 공경하는 예를 폐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니, 공이 이르기를,
“국서에 어휘를 쓰고 국왕이라고 칭한 것은 모두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국서는 비록 뒤늦게 고칠 수가 없지만, 사신이 상견하는 예는 예전대로 하는 것이 마땅하지, 어찌 뜰 아래서 절하는 예를 새로 만들어 행하여 전에 없던 치욕을 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자, 서장관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게 청하였다가 저들이 그대로 들어 준다면 다행이겠지만, 만약에 저들이 ‘우리나라 사신도 이미 귀국 뜰에서 절하였는데, 귀국 사신은 어찌해서 유독 그렇게 하지 않는가?’ 할 경우, 우리는 할 말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공이 이르기를,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없고, 땅에는 두 사람의 임금이 없는 것이 천지의 떳떳한 법칙입니다. 일본의 소위 천황이 이미 국왕으로 되어 있은즉, 관백은 아무리 존귀하더라도 남의 신하일 뿐입니다. 사신이 소위 천황을 볼 적에는 뜰에서 뵙는 것이 예이지만, 관백에 대해서는 뜰에서 뵙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 지금 관백이 만약 뜰에서 절하여 뵙는 예를 받는다면 이것은 천황으로 자처하는 것이니, 관백이 천황을 높이 떠받든다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간절하게 타이른다면 저들 역시 반드시 마음속으로 깨달아서 굴복할 것인데, 어찌 우리의 청을 들어주지 않을 염려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군자(君子)는 처음을 잘 도모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법으로, 처음을 조심하지 않고서 그 뒤를 잘하는 자는 없습니다. 우리들의 행차는 100년 만에 있는 일이니, 이것도 하나의 시초입니다. 당(堂) 위에서 절하고 뜰 아래에서 절하는 것은 그 기미가 모두 오늘날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시초에 조심하지 않아서 뒷날에 오는 사신이 팔뚝을 걷어붙이고 ‘뜰에서 절하는 굴욕이 아무개가 사신으로 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또 연회 석상에서 현소에게 묻기를,
“귀국의 여러 전(殿)이 관백을 뵐 때 뜰 아래에서 절을 합니까, 당 위에서 합니까?”
하니, 현소가 대답하기를,
“관백은 여러 전(殿)과 똑같이 천황의 신하인데, 어찌 뜰 아래에서 절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하자, 공이 다시 묻기를,
“전부터 우리나라 사신은 기둥 밖에서 절했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현소가 답하기를,
“사신께서 물으신 것이 참으로 옳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역시 접대하는 데 대한 전고(典故)가 있으니, 관백이 오면 마땅히 자기가 정할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또 도선주(都船主)에게 유구(琉球)의 사신이 예를 행하는 데 대해 물어보니, 당에 올라가서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이르기를, “일본의 여러 신하가 관백을 볼 때 본디 뜰 아래에서 절하는 예가 없습니다. 그리고 유구 같은 작은 나라의 사신도 당에 올라가서 절하였습니다. 그러니 그가 우리들에게만 뜰에서 절하도록 하지는 않을 것임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현소 등이 이미 우리나라에 와서 뜰 아래에서 절을 했으니, 혹시라도 그에 비기어서 할까 염려되었으므로 미리 슬쩍 귀띔해서 그렇게 하는 길을 막은 것이다. 이에 현소 등이 공의 뜻을 가지고 관백에게 통보하여 드디어 기둥 밖에서 절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평수길이 도성으로 돌아온 뒤에 평의지가 사람을 시켜서 말하기를, “내일 관백이 일찍 천궁(天宮)에 갈 것이니, 사신이 관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공이 이르기를, “이국의 광경을 참으로 구경하고 싶지만, 왕명을 아직 전달하지 못했으니 사신 된 의리에 있어서 사사로이 나다니기가 곤란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평의지가 직접 와서 청하니, 서장관은 승낙하였는데, 공은 또 앞서 한 말을 끌어대면서 사양하니, 왜승(倭僧)이 와서 말하기를, “관광을 하라고 청한 것은 실은 관백의 뜻으로, 그의 뜻은 단지 과시하려는 데 있습니다. 만약 따르지 않으면 돌아갈 날이 늦고 빠름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일행 사람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반드시 제상(堤上)의 화(禍)를 입을 것이라고 하면서 서로 마주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 서장관이 말을 재촉하여 도중(都中)까지 들어갔다가 관백이 가지 않기로 하였다는 말을 듣고 중지하였다. 그 이튿날도 잔치가 있다 하여 서둘러서 갔다가는 실망한 채 헛되이 되돌아왔고, 세 번째 가서야 만나 보았다. 이에 공은 글을 보내어 엄하게 꾸짖었다.
이때 평수길이 국도로 돌아온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왕명을 받지 않고 있으면서 거짓말로 선동하였으므로 일행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는데, 어떤 자가 와서 말하기를, “일에는 알 수 없는 점이 있으니, 염려함을 주밀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어찌하여 관백의 좌우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서 성사되도록 도모하지 않습니까? 지금 민부 경(民部卿) 법인(法印)과 산구전(山口殿) 현량(玄亮)이 바로 관백의 좌우에서 일을 주장하는 자들인데, 마침 또 그들이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예를 행하여 그들의 환심을 산다면 사신의 일을 쉽게 완수할 수 있을 것이고, 돌아갈 기일도 역시 멀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자, 상사와 서장관이 아주 그럴 듯하다고 여기고는 후하게 뇌물을 주어 도모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이르기를,
“안 됩니다. 왕명을 받들고 국경을 나와서는 한결같이 예법대로 하여 구차스럽게 하지 않아도 오히려 실수하여 왕명을 욕되게 할까 염려되는 법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좌우 사람에게 뇌물을 줄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사와 서장관이 말하기를,
“이른바 예를 행한다는 것은 뇌물을 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손님과 주인 사이에는 반드시 예물로 바치는 폐백이 있어서 이로써 경의를 표하는 법입니다. 이 두 사람은 몇 달 동안이나 사신을 접대하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손님 된 도리에 있어서 경의를 표하는 예물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하자, 공이 이르기를,
“손님과 주인 사이에는 과연 예물로 바치는 폐백이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주는 데에는 시기가 있는 법으로, 구차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왕명이 아직도 함 속에 간직되어 있는데, 먼저 사사로이 예물을 주는 것이 어찌 예이겠습니까.”
하니, 상사와 서장관이 말하기를,
“사사로이 예물을 주는 것도 왕명을 전하기 위해서인데,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자, 공이 이르기를,
“당당한 나라의 사신으로서 성주(聖主)의 밝은 명령을 받들고 와서는 위엄과 덕화를 선양해 왜인들로 하여금 조대(朝臺) 아래에서 이마를 조아리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도리어 수치를 참으면서 아첨하여 왕명을 전하기를 도모한단 말입니까. 왕명을 지체하게 된 것이 비록 사신이 못난 탓이기는 하지만, 저들이 궁전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핑계를 대고 있으니, 잘못이 저들에게 있고 사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신 된 자로서는 단지 예의로써 거듭해서 타이르기나 할 뿐입니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비굴한 일을 하게 되면 왕명을 욕되게 한 죄가 비로소 커져서 씻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사와 서장관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관백이 왕명을 받은 지 4일 뒤에 사람을 시켜 와서 말하기를, “서계(書契)는 짓는 대로 뒤따라 보낼 것이니, 사신은 계빈(堺濱)에 가서 기다리라.” 하였다. 그러자 일행의 사람들은 모두 호구(虎口)를 벗어난 것만을 다행으로 여겨, 그 말을 듣는 즉시 행장을 꾸린 다음 수레를 몰아 먼저 떠났는데, 공은 반대하기를, “서계를 받지 않았으니 이는 사신의 일을 아직 마치지 못한 것입니다. 예로부터 사신 중에 일을 마치지 못하고서 지레 도성을 나간 사람이 있었습니까. 더구나 계빈 땅은 100리 밖에 있습니다. 설혹 서로 물어볼 일이 있는데도 미처 왕복하지 못할 경우에는 장차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리고 내가 비록 형편없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함께 차임되어 파견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와는 의논도 하지 않았으며, 내가 그에 대해서 말하자 훌쩍 떨쳐 버리고 떠났습니다. 이것이 어찌 사명을 받들고 함께 일하는 의리이겠습니까.” 하면서, 힘써 논집(論執)하였다. 그러나 행차가 이미 멀리 떠나갔으므로 홀로 뒤에 남아 있을 수가 없어서 마침내 계빈으로 나갔다.
계빈에서 반달 동안을 머물러 있은 뒤에야 비로소 서계가 왔는데, 서계의 말투가 매우 패만스러워서 ‘전하(殿下)’를 ‘각하(閣下)’라고 하고, ‘소송예폐(所送禮幣)’를 ‘방물영납(方物領納)’이라 하였으며, 또 ‘한번 뛰어 곧바로 대명국에 들어가겠다. 귀국은 앞장 서서 입조하라.[一超直入大明國 貴國先驅入朝]’는 따위의 말이 있었다. 공은 이를 보고는 크게 놀라 의리에 의거하여 즉각 물리친 다음 현소(玄蘇)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만약 이러한 말들을 고치지 않는다면 사신은 죽음이 있을 뿐 의리상 감히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니, 현소가 말을 굽히면서 각하(閣下)와 방물영납(方物領納)의 6자는 고칠 것을 허락하였으나, ‘한번 뛰어 대명국에 들어가겠다. 귀국은 앞장 서서 입조하라.’는 말은 ‘대명국에 입조한다.[入朝大明]’는 뜻의 말이라고 핑계 대면서 끝내 고칠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상사와 서장관은 모두 그의 말을 참말로 믿어 다시 고치라고 청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정색하면서 꺾어버린 다음 다시 현소에게 글을 보내었는데, 그 글에 대략 이르기를, “이 글을 지은 자의 뜻을 비록 쉽사리 추측할 수는 없으나 말을 꾸며서 일을 단정한 것이 저절로 일단의 기축(機軸)을 이루었는바, 어찌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앞서는 말하기를, ‘한번 뛰어 바로 대명국에 들어가서 400여 주를 우리 풍속으로 바꾸고, 억만년토록 제도(帝都)의 정화(政化)를 시행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귀국이 대명을 빼앗아서 일본의 정화를 시행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귀국이 앞잡이가 되어 입조하니 먼 생각이 있고 가까운 걱정은 없다.’ 운운하였으니, 이것은 귀국이 우리나라에서 오늘날에 사신을 보낸 것을 가지고 먼 생각이 있다고 이른 것입니다. 존사(尊師)께서는 과연 이 ‘입조(入朝)’라고 한 곳의 ‘조(朝)’를 대명에 조회한다는 뜻이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 ‘먼 지방에서 뒤늦게 오는 자는 허용할 수 없다.’ 하였는데, 이것은 귀국이 먼저 입조하는 자는 허용하고 후일에 오는 자는 처벌한다는 말입니다. 또, ‘내가 대명에 들어가는 날 사졸을 거느리고 군영을 바라보게 되면, 이웃 나라와의 맹약을 더욱 닦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귀국이 모든 나라로 하여금 군사를 있는 대로 다 거느리고 정벌하는 데 따라오게 한다는 말입니다. 서계(書契) 가운데에는 우리나라를 위협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와 같은데도 ‘입조’라고 한 곳의 ‘조’가 우리나라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나라 조정은 예의를 중하게 여겨서 귀국과 우호를 통한 지 200년이 되었으나, 일찍이 털끝만큼도 무례한 말을 가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통신사를 보낸 것도 귀국의 위세가 두려워서 보낸 것이 아니라, 실로 귀국의 신의를 가상하게 여겨 보낸 것입니다. 귀국에서 포로로 잡아간 우리나라 백성을 돌려보내고 우리나라를 침범한 무리의 머리를 베어 바치면서 옛날처럼 수교하기를 청했으니, 이것이 어찌 큰 신의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는 이를 몹시 가상하게 여기시어 특별히 사신을 보내셨으니, 이는 실로 두 나라 사이에 전에 없던 성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귀국의 서계 안에는 그런 일에 대하여 감사하다는 뜻은 생략해 버리고, 도리어 귀국의 위세를 장황하게 떠벌리면서 병력을 자랑코자 하였습니다. 위로는 대명국을 엿보고 옆으로는 이웃 나라를 위협하여, 업신여기고 위협하는 말이 바로 적진에 임해서 적을 꾸짖는 격문 같았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예로써 서로 사귀는 글이라고 하겠습니까.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이것이 어찌 모두 관백의 뜻이겠습니까. 아마도 글을 짓는 자가 우연히도 살피지 못한 것일 것입니다. 존사(尊師)께서는 관백에게 잘 아뢰어 서계를 고쳐 지은 다음 사신에게 보내 주기 바랍니다. 그럴 경우 두 나라 간에 우호 관계가 더욱 두터워져서 관백이 예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미덕이 원근에 더욱 드러날 것이니, 이 또한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현소가 공이 보낸 글을 보고는 역관(譯官)에게 쉬지 않고 칭찬하는 말을 하면서 그 즉시 답장을 보내어 공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입조(入朝)’니, ‘범대명(犯大明)’이니 하는 등의 말에 대해서는 종시토록 속이는 말로 대답하였다. 이에 공은 재차 글을 써서 보내어 기필코 고치고야 말 작정을 하였다.
상사와 서장관은 이미 ‘방물’ 등의 말을 고친 것을 다행으로 여겼으며, 또 변고를 일으켜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현소가 보낸 답서가 이와 같으니 억지로 따질 필요는 없다.” 하였다. 이에 공은 다시 상사에게 글을 보내어 따졌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사신이 불행하여 뜻밖의 변고를 만나 얽매여 있으면서 곤욕을 당한 지가 거의 1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나라를 모욕하는 글을 받들고 돌아가게 되었으니, 무슨 말로 우리 성상께 사죄한단 말입니까. ‘각하’ 등의 말에 대해서는 저들이 이미 고치기를 허락하였습니다. 그러한 말들을 고쳤으니 거만하고 무례한 말도 아울러 모두 고치는 것이 역시 옳지 않겠습니까. 명공(明公)과 서장관은 오로지 사단을 일으키는 것만을 두려워하여 한결같이 그들의 근거도 없는 말을 따르면서 ‘입조’라는 두 글자에 대해서조차 내버려둔 채 따지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 말을 고치지 않는다면 우리 조정이 왜놈의 속국(屬國)이 되고, 온 나라의 관원들이 죄다 그들의 배신(陪臣)이 되는 것이니, 또한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송(宋) 나라 고종(高宗)은 이미 신하로서 금(金) 나라를 섬겼는데도 금 나라에서 보낸 국서에, ‘강남에 조유한다.[詔諭江南]’고 말하자, 호담암(胡澹庵)은 눈물을 뿌리면서 분개하여 말하기를,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을지언정 속국이 된 조정에 구차스럽게 살기를 원치 않는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오랑캐와 이웃하고 있는 당당한 우리나라이겠습니까. 송 나라와 요(遼) 나라와의 관계처럼 형제국(兄弟國)이라 해도 이미 욕된 것이거늘, 사신된 자가 도리어 ‘입조’라는 욕을 달갑게 여기고 따지지도 않는단 말입니까.”
하였다. 그러자 상사가 말하기를,
“나의 소견에도 의심이 없지는 않아서 역시 이미 반복하여 고치라고 다투었습니다. 그러나 현소의 편지도 이와 같으니, 우선은 그의 말을 믿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공이 이르기를,
“이것은 현소의 말을 가지고 증거로 삼아 뒷날에 자신을 해명할 계책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사신께서는 비록 현소의 말을 믿는다 하더라도, 우리 조정의 사대부들이 믿어 주겠습니까. 그리고 사대부 중에서 혹 믿는 자가 있다고 치더라도, 우리 성상께서 믿으시겠습니까. 사신께서 만약 그 말이 욕된 것인 줄 알면서도 현소의 말을 빌려서 자신을 해명할 계책으로 삼는다면,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자신을 속여서 남을 속이고, 남을 속여서 임금을 속이는 것이 옳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서장관이 또 말하기를,
“서계 안에 비록 거만하고 공손치 못한 말이 있더라도, 우리가 돌아가서 보고한 뒤에 조정에서 나름대로 처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는 사신이 알 바가 아닙니다.”
하니, 공이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나라를 욕되게 하는 이런 말은 죽음으로써 다투더라도 사신이 제 마음대로 처리한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신의 이해만을 지나치게 염려하여 벌벌 떨면서 머리를 숙인 채 치욕을 참으면서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돌아가서 보고한 뒤에 조정에서 나름대로 처치가 있을 것이라고 하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들이 평소에 책을 읽고 의리를 강론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자부함이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 털끝만한 작은 이해에 임해서는 스스로 주장하지 못한 채, 일마다 나라를 욕되게 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치욕스런 서계를 싣고 가서 임금께 바치게 되었습니다.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침에 몹시 분통스러워 치욕을 참으면서까지 구차스럽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하였다.
공은 또 현소에게 답서를 보내어 ‘각자의 강역을 지키면서 대대로 인호(隣好)를 닦아 억만년토록 화평스럽게 지내는 복을 함께 누리자.’고 극력 말하였다. 또 선위사(宣慰使) 평행장에게 보내는 답서에는 이르기를, “대명국은 이에 우리 조정의 부모 같은 나라로, 우리 전하의 하늘을 두려워하는 공경과 대국을 섬기는 정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북쪽으로 신경(神京)을 바라보매 천자의 위엄이 지척에 있는 듯하여 조공하는 사신의 행차가 잇따라 가고 있는바, 이는 실로 온 천하가 다 들어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귀국이 지금 대명과는 화친 관계가 끊어졌으나, 수십 년 전에는 일찍이 대명국에 들어간 사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우리나라가 명 나라와 한집안 같은 사이인 줄을 몰랐겠습니까. 대명과 우리 조정은 대의(大義)가 이미 정해져서 하늘과 땅이 위치를 바꿀 수 없는 것과 같은데, 어찌 감히 두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서계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을 보고서도 한마디 말도 없이 잠자코 돌아간다면, 이것이 어찌 사신의 의리이겠습니까. 대저 두 나라 사이에 오가는 국서(國書)는 조심하여 쓰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원망을 해소하고 분쟁을 해결함이 여기에 달려 있고, 혐의를 맺고 틈이 벌어짐도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법 아닌 말과 의리를 해치는 말을 어찌 문자로 기록하여 이웃 나라에 보낼 수 있겠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바로 글을 지을 즈음에 혹 제대로 살피지 못해서 한 말이지, 관백의 뜻은 아닐 것으로 여겨집니다. 족하께서 이 뜻을 관백에게 전하여 알려 준다면, 이 또한 나라를 보존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며, 이웃 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영원토록 온전하게 하는 한 가지 방도일 것입니다.” 하였는데, 글을 싸서 장차 보내려고 하자, 일행들이 모두 사단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서로 선동하면서 갖은 방법으로 저지하여 전달하지 못하게 하였다.
대개 현소는 이미 공의 말을 옳다고 여겨 자못 부끄러워하고 굽히는 뜻이 있었다. 그런데도 일행의 일은 상사에게 절제권이 있으며, 서장관 또한 그와 합세하였으므로, 공은 마침내 그 뜻을 행할 수 없었다. 이에 공은 분통스럽고 답답한 마음에 그 글을 바다 속에 던져 버리고는 인하여 시를 지었는데, 그 시 가운데 ‘물속의 어룡은 응당 글자 알아보리[水底魚龍應識字]’란 구절이 있었다.
왜승(倭僧) 종진(宗陳)이 와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보여 주었는데, 그 책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의 연혁(沿革)과 풍속(風俗)이 대부분 비루하고 속되어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다. 이에 공은 국내에서 통행하는 예절과 풍속을 거론하고 그 아래에 각각 주를 달아서 잘못된 것임을 밝혀 《조선풍속고이(朝鮮風俗考異)》라는 책을 한 권 만들어 주었다. 그러자 종진이 감복하여 곧바로 관백에게 전해 보였다.
돌아올 적에는 여러 추장(酋長)들이 각자 수를 놓은 비단을 전별(餞別)하는 물품으로 보내왔는데, 공은 사양하고 받지 않으면서 모두 관소(館所)의 중들에게 나눠 주었다.
일행이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하자 평의지가 잔치를 베풀어 전별하면서 보검(寶劍)을 내어 죽 늘어 놓은 다음 사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출발할 때 공이 후왜(候倭)에게 명해 도주(島主)에게 보검을 되돌려주도록 하였다. 이에 공이 데리고 갔던 원역(員役)들은 위엄을 두려워하고 의리에 복종하여 절대로 왜인들과 물품을 교역하지 않아 한 가지 물품도 가져오지 않았다.
신묘년(1591, 선조 24) 2월에 돌아와서 부산(釜山)에 도착하였다. 행낭이 텅 비어 아무것도 없었으며, 오직 석창포(石菖蒲)와 종려나무 분재만 몇 개 있을 뿐이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에 안동(安東)을 지나게 되었는데, 집에도 들르지 않고 조정으로 올라갔다.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서 복명(復命)하였으며,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이에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전년에 광국훈(光國勳)을 녹훈(錄勳)할 때 전후로 주청(奏請)한 사신과 칙지(勅旨)를 받들고 와 은전(恩典)을 반포한 신하가 모두 참여되었는데, 공만 누락되었다. 그러자 당시의 역관(譯官) 가운데 글을 올려 억울함을 하소연한 자가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공이 그 사실을 듣고는 상소를 올려 자신의 잘못을 탄핵하였다. 공이 광국공신(光國功臣) 원종(原從) 1등에 녹훈됨으로 해서 부친의 관작은 이조 참의로 추봉(追封)되었고, 모친의 호는 숙부인(淑夫人)으로 올라갔다.
기축년(1589, 선조 22)의 변고(變故) 뒤에 선비들의 기운이 저상(沮喪)된 탓에 성균관 학생들 사이에도 의론이 분분하여 갑론을박하면서 서로 나뉘어서는 각자 기치를 세워 자신들의 의견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대사성으로 있는 자 또한 사사로이 자기 당파를 편들면서 진정시킬 뜻이 없었다. 이에 상께서는 당세의 이름난 선비를 뽑아서 모범이 되어 이끌게 하고자 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에 따라 특별히 공을 대사성에 제수하였다. 그러자 형적(形迹)이 분명치 않았던 자들이 공이 장차 태학(太學)에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대부분 물러갈 생각을 하였다. 이에 공이 조용히 타이르기를, “배우는 자의 일은 오직 글을 읽어 이치를 궁구하고, 도를 강론하여 학업을 익히는 것뿐이다. 조정의 시비와 용인(用人)의 득실은 유생이 관여할 바가 아니다. 더구나 명륜당(明倫堂)은 사사로운 싸움을 하는 곳이 아니며, 성균관이 어찌 벼슬길에 나가기를 다투는 길이겠는가. 자신의 본분을 돌아보지 않고 날마다 놀면서 떠들기만을 일삼으면, 몸과 마음에는 끝내 이로움이 없고, 군자에게는 버림을 받는 법이다. 나라에서 인재를 기르는 뜻이 어찌 그렇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지성으로 가르치고 차별하지 않으면서 장려하고 규계함을 한결같이 공평하게 하였다. 또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글을 가르쳐 성현(聖賢)의 학문으로 인도하였다. 이에 선비들이 마음속으로 복종하여 모두 스스로 새로워지려는 뜻을 품게 되었으며, 붕당을 만들어 서로 대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조금은 알게 되어, 선비들의 습속이 일변하였다.
공이 또 부제학(副提學)으로 옮겨서 제수되었다. 그러자 중외(中外) 사람들이 모두 연석(筵席)에 적임자를 얻었다고 하였으나, 사림(士林)에서는 사유(師儒)를 갑작스럽게 체차한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뒷날에 공을 잡아다가 국문하라는 명이 내리자, 관학(館學)의 제생(諸生)들이 함께 상소를 올려 억울함을 하소연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잡아다가 국문하라는 명이 거두어졌으므로 그만두었다.
당시에 막 정여립(鄭汝立)의 역변(逆變)을 겪고 나서 권간(權奸)이 정권을 잡고는 함정을 만들어 놓고 선비들을 잡아죽였다. 처사(處士) 최영경(崔永慶)은 세상일을 초월해 의리를 지킴으로 해서 사림에서 추중받았는데, 죄를 얽어 붙잡아 들인 다음 옥중에서 말라 죽게 하였다. 그런데도 대신 이하가 모두 숨을 죽인 채 지내면서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공이 탑전(榻前)에서 그가 억울하게 무함당한 상황을 일일이 진달하였다. 그러자 상께서 이르기를,
“너는 어떻게 최영경이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가?”
하니, 공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신이 그 사람의 얼굴은 알지 못하나, 그가 세속을 초월하여 지내면서 의리를 행한다는 것은 익히 들었는바, 바로 절개를 지키고 의리에 죽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평소에 의론하는 것이 당당하여 회피하거나 흔들리는 바가 없었던 탓에 간사한 자에게 크게 원한을 사게 되었습니다. 이에 간사한 자가 때를 틈타 죄를 얽어 넣었는데, 범범하게 한마디 언급한 말을 가지고 역적을 편들었다고 지목하였으며, 우연스레 형적도 없는 길삼봉(吉三峯)에 대해 떠도는 말이 있는 것을 가지고 최영경에게 뒤집어씌웠으니, 만고의 원통함 가운데 어느 것이 이보다 더 원통하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주상께서 캐묻기를 마지않았으므로, 공이 더욱더 소상하게 논해 아뢰었는데, 좌우에 있던 시신(侍臣)들이 모두 공을 위하여 위태롭게 여겼으나, 공은 말투가 한결같았다.
그 다음 날 상께서 최영경이 역적에게 보냈다는 편지를 조당(朝堂)에 내리니, 온 조정 사람들이 당황하고 놀라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는데, 얼마 있다가 최영경의 직첩(職帖)을 다시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상의 노여움이 비로소 걷힌 것을 알고서는 뭇사람들의 심정이 크게 시원해졌다. 이로부터 상께서 총애하면서 의지하는 것이 더욱 중하였으므로, 조야(朝野)에서 우러러 흠모하였다. 공도 나라의 안위(安危)를 자신의 책임으로 삼아,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말을 하면 다 말하여,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킴으로써 우뚝하게 중류(中流)의 지주(砥柱)가 되었다.
공은 잇따라 차자(箚子)를 올려 시사(時事)에 대해 극언하였는데, 그 가운데 한 차자에서 대략 이르기를,
“더할 수 없이 어진 것이 하늘이면서 더할 수 없이 위엄스러운 것도 하늘입니다.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늘이면서 못 믿을 것도 하늘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비록 도를 잃은 잘못이 있더라도 재앙을 만나 잘 수성(修省)한다면, 하늘의 마음을 돌릴 수 있으며, 재앙의 꾸지람을 늦출 수도 있습니다. 임금이 이미 도를 잃은 잘못을 초래하고서도 수성하지 아니하면, 신령의 노여움이 더욱 심해져서 하늘에서 주는 녹(祿)이 영원히 끊어집니다. 예전에 밝은 임금들은 믿을 만한 하늘의 어짊은 믿지 않으면서 두려워한 것은 하늘의 위엄이었으며, 두려워해야 할 하늘의 위엄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닦은 것은 인사(人事)였습니다. 인사를 제대로 닦지 못하고서도 하늘의 마음을 사무치게 한 자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있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등극하신 이후로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하는 데 힘쓰시면서 밤낮으로 부지런히 일하고 근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수십 년 이래로 장마와 가뭄이 잇따라 일어나고, 흉년과 기근이 거듭 닥치며, 하늘의 변괴와 물건의 괴이가 거듭 나타나고 있습니다. 올해의 경우를 두고 말하더라도, 삼원(三元)의 달에 서울에서 지진이 일어났으며, 심지어는 형혹성(熒惑星)이 한 달 동안이나 없어지지 않았고, 태백성(太白星)이 날마다 하늘을 가로질렀으며, 바람과 장마의 변고도 예전에 없었던 바이고, 번쩍대는 번개와 우레가 여름철같이 쳤습니다. 신들은 하늘의 뜻이 어찌해서 이처럼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변고가 비록 어떤 일에 대한 응험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인사에 있어서 잘못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닌바, 신들이 기휘(忌諱)하지 않은 데 대한 주벌을 무릅쓰고 그에 대해 낱낱이 말씀드리겠습니다.
공부(貢賦)를 바치는 한 가지 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토질에 따라 공물을 내는 것이 선왕(先王) 때부터 내려오는 정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토질에 맞는지의 유무와 군읍(郡邑)의 크고 작음을 묻지 않은 채, 똑같이 책정하여 생산되지 않는 것조차 다 바치게 하였는바, 그 괴로움이 이미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요사이에는 또 규정 이외의 각종 명목으로 수시로 징수함이 끝이 없는데,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기를 살가죽을 벗기고 뼛골을 후벼내듯이 합니다. 그러면서 백성에게 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자를 착한 수령이라 하고, 조세 독촉을 엄하게 하는 자를 유능한 서리라 하며, 형벌을 혹독하게 쓰는 자를 일 처리에 능한 자라 하고, 백성들의 것을 빼앗아서 위에 바치는 자를 봉공(奉公)을 잘한다고 합니다. 이에 360고을 가운데 자상하고 온화한 수령은 몇 안 되고, 침해하고 긁어들이는 자만 곳곳마다 널렸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어찌 곤궁해지지 않고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부를 거두는 번잡함이 이미 이와 같습니다. 그런 데다가 각사(各司)에서 방납(防納)한 뒤에 몇 배의 대가를 받는 폐단은 나라에 있어서는 큰 좀벌레이고, 백성들에게는 큰 병이 되는 것입니다. 공안(貢案)에는 정해진 액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바치는 것은 정해진 액수 이외에도 이른바 인정가(人情價)작지가(作紙價)니 하는 것이 있어서 원래의 액수보다 갑절이나 많습니다. 방납의 경우에 이르러서는, 각시(各寺)의 주인(主人)들이 그 이익을 독점하고 있으므로, 백성들이 직접 바치고자 하더라도 바칠 길이 없습니다.
조종조(祖宗朝) 때에는 이에 대한 금법(禁法)을 범하면 변방으로 내쫓아 버리기까지 하였으므로, 모리배들이 제멋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국가에서도 예삿일로 알아, 호조(戶曹)에서 매기거나 본사(本司)에서 징수하는 것도 고을에다가 하지 않고 그 주인(主人)에게 합니다. 그러니 주인들이 무엇에 징계되어서 두려워하는 바가 있겠습니까. 주인은 이익을 독점하여 가만히 앉아서 부자가 됩니다. 그리고 이끗을 좋아하는 사대부들도 혹 이를 본받아서, 권력이 센 자는 감사에게 편지를 보내고, 직위가 낮은 자는 사사로이 수령에게 부탁하여, 흔한 물품을 바치고서는 열 배의 값을 받아들입니다. 이에 양피(羊皮) 한 장 값이 면포 70필(疋)에 이르고, 표피(豹皮) 한 장 값은 수백 필에 이릅니다. 종이 10권(卷)은 지극히 적은 것임에도 산읍(山邑)에서 목재 100본을 받아들이고, 궁각(弓角), 소 힘줄, 아교 따위는 지극히 흔한 것인데도 민간에서 100여 곡(斛)의 쌀을 거두는 실정입니다. 지극히 적고 지극히 흔한 것도 이와 같으니, 하물며 이보다 더 중한 것이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가난한 백성들의 재물을 배로 운반하고 육로로 실어 날라서는 권력 있고 지체 귀한 집에 바치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바, 백성들의 고혈은 이미 다 말랐습니다.
아, 조세의 번거로움이 이와 같고 방납의 폐단 또한 이와 같으니, 백성들이 원망하고 탄식하여 화기(和氣)를 손상시키는 것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부역(賦役)에 관한 한 가지 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성들에게 부역시키는 것을 반드시 농사가 한가할 때 하는 것은, 농사를 해칠까 염려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맹자(孟子)》에, ‘농사철을 빼앗지 않는 것이 왕정(王政)의 근본이 된다.’ 하였으며, 《춘추(春秋)》에는 ‘남문(南門)을 지었다.’고 하여 때에 맞지 않는 일을 한 데 대해 기롱하는 뜻을 보이었습니다. 이것은 민력(民力)을 중히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을 수리하거나 하천을 준설하는 등의 모든 부역을 조발(調發)함에 있어서 시기를 가리지 않고 오직 목전의 일을 처리하는 것만 시원스럽게 여깁니다. 그리하여 밭고랑에서 일하는 백성들을 몰아다가 획일적으로 일을 시키고 독려하는데, 봄부터 겨울까지 끝날 기약이 없습니다.
토목(土木)의 역사(役事)에 이르러서는, 금년이 몇 해째입니까. 꽝꽝 찍어대는 도끼는 깊은 산골짝에서 번개처럼 번쩍이고, 어영차 힘쓰는 소리는 우뢰같이 도성 안에 울려 퍼집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천 개의 재목은 귀신이 실어나른 것이 아니라, 모두가 백성의 힘으로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역가(役價)로 지급하는 것도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베 짜는 부녀자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신들이 듣건대, 관동(關東)의 산읍(山邑)은 호구 수가 많은 곳도 수백 호에 지나지 않으며, 적은 곳은 수십 호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호랑이나 표범의 굴이 있는 깊은 산에 들어가고 험준하고 가파른 고개를 넘으면서, 아름드리 재목을 운반하여 강으로 끌어옵니다. 이에 소는 거꾸러지고 사람은 넘어져서 낭떠러지에서 죽는 자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살아 남는 백성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모든 고을이 쓸쓸하고 촌락이 텅 비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대궐 안에 깊이 계시어 바깥과는 동떨어져 있으니, 어찌 그 폐단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왕자의 제택(第宅)을 짓는 일을 비록 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드높은 집과 아로새긴 담은 정해진 한계가 없는 탓에 거리를 연해 뻗쳐 있는 것이 모두가 새로 지은 커다란 집들입니다. 당(唐) 나라의 목요(木妖)의 변괴가 오늘날에 다시 나타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비용을 제멋대로 쓰고 절약하지 않아 국가의 경비가 고갈되었으므로, 포흠(逋欠)에 대한 영을 신칙하고, 해유(解由)의 법을 엄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비록 생업을 잃었으나 조세(租稅)는 그대로 있어서, 유망(流亡)하였거나 절호(絶戶)된 백성에 대해서도 반드시 장부를 살펴서 부역과 조세를 내도록 하고 있습니다. 아, 부역의 무거움과 조세의 많음이 이와 같으니, 백성들의 원망과 탄식으로 인해 화기가 손상되는 것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군정(軍政)에 관한 한 가지 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군사는 정예롭기를 힘쓰고 많기를 힘쓰지 말라는 것이 옛날의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인구의 수는 예전보다 줄었는데도 군사의 정원은 선조(先朝) 때보다 갑절로 불어났습니다. 이에 머슴이나 거지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잡아넣어 정원을 채우며, 정원 외에 또 남은 군정(軍丁)이 있으면 별대(別隊)를 만들어 여외(旅外)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그런데 군적 작성을 마치자마자 도망치는 자가 속출하므로, 일족(一族)에게 책임지우고 이웃에게 책임지우며, 또 그 땅을 부치는 자에게 책임지웁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도망하면 그 화가 열 집에 미치고, 열 집이 지탱하지 못하면 그 화가 또 백 호에 미치는데, 이리저리 떠넘겨서 책임지우는 사이에 마침내는 빈 장부가 되는 데에 이르고 맙니다. 그러니 정예로운 군사를 기르는 뜻이 어디 있습니까.
지역은 멀고 가까움이 있으니 방소(防所)를 나누는 일은 살펴서 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부역은 괴롭고 쉬움이 있으니 고르게 시키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군정(軍政)을 모두 서리들에게 내맡기고 있는 탓에 방소를 정함에 있어서는 멀고 가까운 것을 따지지 않고, 군사를 배정함에 있어서는 고생스럽고 편함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오직 뇌물이 많고 적은 것에 따라서만 정합니다.
천경(踐更)하는 법을 시기에 따라서 하지 않는 탓에 몇 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못하는 자가 있으며, 심한 경우에는 7, 8년이 되도록 부모와 처자식을 떠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에 이와 서캐는 칼과 냄비에까지 득실거리고, 겨와 쭉정이로는 배가 차지 않아 춥고 배고픈 가운데서 울음을 삼키고 있습니다. 그런 데다가 채수(債帥)들이 재물을 긁어들이는 것이 물불보다도 더 심하여, 군민(軍民)을 닭이나 돼지로 보고 초개처럼 여겨, 씹어 먹고 베어 없앰이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15세에 군정이 되었다가 60세에 군역을 면제받는 것이 국법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젖먹이 아이조차 모두 군적에 편입되어 있고 70세가 넘은 자도 병적에 들어 있으며, 심지어는 병들어 파리한 자나 위독한 자도 대부분 병역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 군정이 이와 같으니, 백성들의 원망과 탄식이 화기를 손상시키는 것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조정(朝廷)의 일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는 치우침이 없는 법을 세우시어 잘 이끌었습니다. 이에 조정은 맑고 밝았으며, 백관들은 서로 공경하고 협동하여 점차 대도(大道)의 세상으로 나아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랬는데 불행하게도 선비들의 의논이 둘로 나뉘어 하나는 이쪽으로 하나는 저쪽으로 갈라졌습니다. 이에 사(邪)와 정(正)이 서로 싸우고 시(是)와 비(非)가 결정되지 않아, 수십 년 사이에 진퇴(進退)와 소장(消長)의 기미가 강하(江河)가 흘러가는 듯한 형세로 그치지 않고 서로 찾아들었습니다. 조정의 화목하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백성의 마음이 패악해짐과 괴이한 기운이 이변을 가져옴은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오직 다행한 일은 성상께서 밝게 통촉하시어 현명한 결단을 내리시어 한번 조처하는 사이에 승냥이 같은 자들이 벌벌 떨며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또 권간(權奸)이 정사를 어지럽힌 나머지 간사한 의논이 횡행하여 선비들의 기풍이 무너졌고, 뇌물이 몹시 성행하여 탐오의 풍습은 크게 일었습니다. 배척을 받은 자는 원망이 골수에 사무쳐서 때를 틈타 보복하려 하고 있고, 관직에 있는 자는 국사에는 뜻이 없고 오직 녹만 받고 몸만 보전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의정부에는 삼지재상(三旨宰相)만 있으며, 대각(臺閣)에는 장마언관(仗馬言官)만 포진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전하께서는 내맡길 만한 재상이 없고 의지할 만한 언관이 없어서, 억조창생의 윗자리에 외롭게 계시면서 여러 가지 복잡한 정사를 홀로 처리하고 계십니다.
일에는 옳고 그름이 있는 법인데 의견을 제시하는 자가 없으며, 정치에는 잘하고 못함이 있는 법인데 반론을 제기하는 자가 없습니다. 군덕(君德)을 보양(輔養)하는 자가 누가 있으며, 잘못을 바로잡는 자는 또 누가 있습니까. 치도(治道)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할 만한 정승이 있습니까. 적을 막아 치욕을 당하지 않게 할 만한 장수가 있습니까. 이를 비유하자면 큰 강을 건너는데 밧줄과 노가 없어서 중간에서 역풍을 만날 경우 반드시 전복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데다가 교화는 점점 쇠해지고 풍속은 점점 퇴폐해져서, 사유(四維)가 신장되지 않고 염치의 도가 없어졌습니다. 이에 임금을 버리고 어버이를 뒤로 하는 의논과 공론을 등지고 당파를 위하여 죽으려는 의논이 온 세상에 횡행하고 있습니다. 줄곧 이렇게 나가다가는 자사(子思)가 이른바 ‘나라에 같이 일할 사람이 없다.’라는 말과 불행히도 비슷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아, 조정이란 것은 사람의 심장이나 배와 같고, 사방(四方)은 사람의 사지(四肢)와 같습니다. 심장과 배가 병들었는데도 사지가 멀쩡한 경우는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조정이 다스려지지 않았는데 사방이 어지럽지 않은 경우도 없는 법입니다. 이것으로 보면 오늘날 이변이 일어난 것이 하늘의 운수 탓입니까, 아니면 인사가 잘못된 탓입니까.
전하께서 만약 재이(災異)가 변하여 상서가 되고 화(禍)가 바뀌어져 복(福)이 되게 하려 한다면, 또한 어찌 그 근본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근원이 맑으면 흐르는 물도 맑고, 바깥 형태가 바르면 그림자도 바르다.’ 하였으며, 동중서(董仲舒)는 말하기를, ‘자기의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하여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하여 만민을 바르게 한다.’ 하였습니다. 이 말이 비록 추구(芻狗)와 비슷한 것 같으나, 이렇게 하지 않고는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주희(朱熹)가 임금이 듣기 싫어하는 것을 무릅쓰고 정성스럽고 바른말을 아뢰었던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참으로 재앙을 만나 두려워하면서 성제(聖帝)와 명왕(明王)의 덕을 닦아, 전하의 한 마음으로 모든 교화의 근본이 되게 하고, 전하의 한 몸으로 만백성의 표준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몸과 마음의 은미함으로부터 궁궐 안에서 행하고 조정 위에 미침에 있어서까지 모두가 올바른 데에서 나오게 하소서. 그럴 경우 신들이 진달한 백성들의 폐막(弊瘼)쯤은 조처하는 가운데 한 가지 일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백성들의 원망이 어디에서 일어나겠으며, 하늘의 재앙이 어디에서 생겨나겠습니까.
아, 전하께서 근심하시는 것은 재이(災異)입니다. 그러나 신들의 지나친 염려에는 재이 이외에 다시 더 크게 우려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무릇 나라에 세자(世子)가 있는 것은 만백성의 마음을 단합시키고 종묘사직을 위한 계책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춘궁(春宮)이 오래도록 비어 있어서 종묘의 제기(祭器)를 맡길 곳이 없는데, 막중한 종국(宗國)의 일을 소홀히 여겨 지나쳐버린 채 방치해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나라의 근본을 정하고 민심을 단합시키는 길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신령하신 지모와 뛰어난 계책을 아무 말 없는 가운데 묵묵히 운용하시어, 심상한 거조에 있어서도 촛불로 밝히듯 은미한 것을 밝게 살피고 사리에 맞게 처리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유독 이 종묘사직의 큰 계책에 있어서만은 어찌하여 이처럼 오래도록 시일을 질질 끌고 계신단 말입니까. 옛부터 저군(儲君)을 일찍 세우지 않았다가 위태로운 난을 불러온 것은 역사책을 상고해 보면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으니, 어찌 신들이 번거로이 말씀드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어려서 이루어진 것은 천성과 같으며, 습관은 절로 된 것과 같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왕(先王)이 태자를 가르침에 있어서는 뱃속에 있을 때에는 올바른 태교(胎敎)가 있었으며, 출생하여서는 예법을 삼가 지키는 경(敬)이 있었으며, 어릴 때에는 보부(保傅)의 관원을 두었습니다. 이에 어려서부터 다 클 때까지 전후 좌우에 올바른 사람 아닌 이가 없었으며, 듣고 보는 것이 바른말과 바른 일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대개 이와 같이 하면 아무리 착하지 않은 일을 하려 해도 누구와 더불어 착하지 않은 일을 하겠습니까.
삼대(三代) 때에 어진 임금이 계속해서 일어나 국운이 길었던 것은, 가르쳐서 기르는 방도가 이와 같아서였습니다. 그런데 후세에는 그렇지가 않아 깊은 궁중에서 태어나 부인의 손에 자라는 탓에 부귀는 저절로 있는 것이고, 교만과 사치스러움도 저절로 생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옆에는 엄한 스승의 훈계와 존경하는 벗의 충고가 없는 탓에 더불어 상종하는 자는 환관이나 궁첩 아니면 가마꾼이나 종들뿐이며, 날마다 하는 일이라고는 닭싸움이나 개 달리기 경주 아니면 술이나 마시고 노래나 즐기는 것입니다.
혈기가 왕성해지고 마음과 뜻이 굳어진 뒤에 바야흐로 가르치면서 이끌어 줄 경우에는 속에서 완강히 거부하여 가르침이 먹혀들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하루 쬐는 햇볕이 열흘 추운 데 무슨 도움이 있겠으며, 제(齊) 나라 사람 한 명이 여러 명의 초(楚) 나라 사람이 떠들어대는 데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아, 천금(千金)을 가진 부잣집에서도 오히려 아이 가르치기를 급하게 여기는 법입니다. 종묘사직을 맡길 세자가 얼마나 중요한데, 미리 가르쳐 기르지 않는단 말입니까. 전하께서 만약 침소에 드실 때 이 일에 대해 생각이 미치면 어찌 놀라워서 가슴이 뜨끔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은 지위가 낮고 말이 가벼운바, 종묘사직의 큰 계책에는 감히 참여할 바가 못 됩니다. 그러나 사마광(司馬光)은 통판(通判)으로 있을 적에도 오히려 태자 세울 것을 청한 일이 있습니다. 신들이 논사(論思)하는 직책에 대죄(待罪)하고 있으면서 나라를 근심하는 구구한 정성을 어찌 감히 성상께 진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전하께서는 저희들의 어리석은 정성을 불쌍히 여기시어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또 차자를 올렸는데, 모두 10조목으로, 첫 번째 조목에서는 이르기를, “조정(朝廷)을 바르게 하여 백관(百官)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조정이 바르지 않게 되는 원인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현사(賢邪)를 판별하지 않는 것, 청탁을 공공연히 행하는 것, 탐오(貪汚)가 풍조를 이루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였고, 두 번째 조목에서는 이르기를, “학교(學校)를 일으켜서 교화(敎化)를 밝히는 것입니다. 학교가 부흥하지 않는 원인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사도(師道)가 서지 않는 것, 사습(士習)이 바르지 않은 것, 과거(科擧) 시험에 얽매이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였고, 세 번째 조목에서는 이르기를, “내치(內治)를 엄하게 하여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치가 엄해지지 않는 원인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여알(女謁)이 성행하는 것, 왕자(王子)들을 미리 가르치지 않는 것, 재화(財貨)를 가지고 이식(利殖)을 늘리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였고, 네 번째 조목에서는 이르기를, “민막(民瘼)을 제거하여 나라의 근본을 단단하게 하는 것입니다. 민막이 제거되지 않는 원인에는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거두어들이는 것이 지나치게 많은 것, 일족(一族)과 인족(隣族)들을 침해하는 것, 요역(徭役)이 지나치게 번다한 것, 공부(貢賦)가 고르지 않은 것, 방납(防納)이 백성들을 해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였고, 다섯 번째 조목에서는 이르기를, “군정(軍政)을 닦아서 변방(邊防)을 단단하게 하는 것입니다. 군정이 닦여지지 않는 원인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군율(軍律)이 해이한 것, 방수(防戍)가 고르지 않은 것, 채수(債帥)들이 침해하는 것, 조련(操鍊)에 법도가 없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였고, 여섯 번째 조목에서는 이르기를, “형옥(刑獄)을 심리하여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것입니다. 형옥이 제대로 심리되지 않는 원인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법령(法令)이 한결같지 않은 것, 관리들이 법을 굽히는 것, 큰 옥사가 만연된 것이 그것입니다.” 하였고, 일곱 번째 조목에서는 이르기를, “대신(大臣)을 임용하여 조정을 높이는 것입니다. 대신이 중해지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체모(體貌)를 공경하지 않는 것, 정사가 나오는 곳이 많은 것이 그것입니다.” 하였고, 여덟 번째 조목에서는 이르기를, “간쟁(諫諍)을 받아들여서 언로(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간쟁이 아뢰어지지 않는 원인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아첨하는 자들이 뜻을 얻는 것, 사기(士氣)가 좌절되는 것, 공론이 펼쳐지지 않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였고, 아홉 번째 조목에서는 이르기를, “성학(聖學)을 밝혀서 다스림의 근본을 세우는 것입니다. 성학의 요체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도술(道術)을 밝히는 것, 천덕(天德)을 본받는 것, 경외(敬畏)를 숭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였고, 열 번째 조목에서는 이르기를, “사치(奢侈)를 금하여 절검(節儉)을 숭상하는 것입니다. 사치의 폐단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궁궐이 지나치게 화려한 것, 의복(衣服)이 참람한 것, 음식이 지나치게 풍성한 것이 그것입니다.” 하였다.
또 차자를 올렸는데, 그 차자에서는 대략 이르기를,
“백성들이 들판에서 원망하는데도 위에서는 알지 못하고, 간사한 거짓이 안에서 일어나는데도 위에서는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어두워지고 어지러워져서 마침내 정치가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으니, 신들은 몹시 슬픕니다.
무엇을 일러 백성들이 들판에서 원망한다고 하겠습니까.
무릇 성지(城池)와 갑병(甲兵)은 외적의 침입에 미리 대비하여 요새를 설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 삼국 시대(三國時代) 때에는 내지(內地)의 군현에는 성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관방(關防)과 망루(望樓)를 내지에다가 두루 설치하면서, 나라의 근본을 뒤흔들고 백성들을 병들게 하고 재력을 다 허비하였습니다. 그리고 튼튼하게 쌓지 못하여 해마다 이를 수리하느라 백성들을 해치고 있습니다.
신들이 삼가 듣건대, 이 역사(役事)를 시작할 때 전지 1결(結)당 베를 17, 8필까지 냈고, 역사에 나온 사람들에게 보상하는 쌀이 4, 5곡(斛)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활, 화살, 갑주 같은 기구에 이르러서도 그 길고 짧은 제도가 사람마다 의견이 다른 탓에 매양 점검을 거칠 때마다 반드시 개조하게 하는데, 고치는 비용을 모두 백성들에게 책임지운다고 합니다. 그런 데다가 한 해 동안에 세금으로 바치는 것과 각종 명목을 붙여 거두어들이는 폐단이 있어서, 한 해 내내 매질을 해 대는 탓에 백성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불쌍한 과부가 숲 속에 들어가 목을 매어 죽은 경우도 있습니다. 신들은 거룩하고 밝은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키면 괭이나 고무래를 들고 일어나더라도 강한 진(秦) 나라의 왕업을 망하게 할 수 있는 법이고, 사람들이 화합하여 뭉치면 탄환만한 고구려로서도 수(隋) 나라나 당(唐) 나라의 군사를 무찌르기에 충분한 법입니다. 지금은 백성들이 이와 같이 흩어졌으니 비록 성지(城池)가 있더라도 누구와 나라를 지키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으로는, 관방(關防)이 옛부터 있던 곳은 해마다 수리하여 금성탕지(金城湯池)로 만들고, 내지(內地)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직 쌓지 않은 곳은 일체 정지하여 그만두고 이미 쌓은 곳은 그대로 두면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래도 백성이 다 흩어지기 전에 제 살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계미년(1583, 선조 16)의 변란이 발생한 뒤로 국가에서 무신(武臣)을 등용하면서 갑자기 발탁해서 등급을 뛰어넘어 뽑아 쓰면서 자격(資格)에 따라 제수하지 않았습니다.
재상(災傷)을 당하거나 하등(下等)을 맞거나 해유(解由)가 나오지 않은 데 대한 법과 장오(贓汚)를 범하거나 패군(敗軍)한 데 대한 율은, 이는 참으로 변경해서는 안 되는 금석(金石)과 같은 법전(法典)이며, 왕법(王法)에 있어 용서할 수 없는 형벌입니다. 그런데도 이에 대해 조금도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금방 탄핵을 받았는데도 갑자기 다시 승진시켜서 상과 벌을 시행할 수가 없고, 간사하고 탐악한 자를 징계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못돼먹은 어린 사람이 갑자기 큰 책임을 맡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끊임없이 형장(刑杖)을 참혹하게 치고 재물을 긁어들인 탓에 백성들이 흩어지고 재물은 탕진되어 완전한 고을이 없게 되었습니다.
내지(內地)의 큰 고을도 역시 무사(武士)에게 내맡긴 탓에 학교가 황폐하여져 글을 외는 소리가 끊어졌습니다. 예전에 송(宋) 나라 때 모든 고을의 통판(通判)을 반드시 문신으로 내보냈던 데는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적으로 무사만을 임명하여 나라의 근본이 되는 백성들을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이 점을 실로 신들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일러 간사한 거짓이 안에서 일어난다고 하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이후로 노래와 여색, 수레, 말 등을 완호(玩好)함이 없고, 잔치하거나 놀거나 사냥하는 등의 즐거움을 끊으시었습니다. 그러면서 궁궐 안을 엄히 다스려서 집안을 바로잡는 도를 다하고, 척속(戚屬)들을 교화하여 정사에 간여하는 조짐을 막으셨습니다. 이에 근본이 단정하고 근원이 맑은 정치가 사방에 모범이 될 만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만 신하들 가운데에 간언을 올리는 아름다움이 없어서 간사한 거짓의 폐단이 전해질 길이 없습니다.
왕자(王子)들은 존귀한 자리에 처하여 있는데, 미천한 하인들이 집안에서 농간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날다람쥐같이 심부름하면서 조금이라도 궁중이나 척리(戚里) 사이에 연줄이 있으면 빈번히 다른 사람을 협박하기를, ‘나는 어느 궁의 절친한 족속이다’ 하거나 ‘나는 아무 방(房)의 종이다’ 하면서, 권력을 부려 뇌물을 받을 계략을 꾸미고 있으며, 심지어는 대단치도 않은 옥송(獄訟)이나 미미한 관직을 제수하는 데 있어서도 모두 뇌물을 받고 도모하려고 합니다.
각종 명목의 방납(防納)이 팔도에 두루 널려 있는데, 반드시 궁지(宮旨)라고 칭하면서 값으로 계산하여 받아들입니다. 짐승 가죽이나 물고기, 고기를 시장에 팔면서는 말하기를, ‘이것은 대궐에서 내린 물건이다’ 하고, 금, 은, 채단 등을 시장 상인들에게 내어 놓으라고 꾸짖으면서는 말하기를, ‘이것은 대궐에서 사들이는 물건이다’ 합니다. 이에 각 방리(坊里)의 백성들은 그 소리에 두려워서 감히 대들지 못하고 비싸게 사고 헐하게 팔아,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 줍니다. 그러고 나서는 머리를 한데 모으고 이마를 찡그리면서 시장을 파하고 목 놓아 울어 생을 즐기는 마음을 잃었습니다.
성상께서 지척에 계신 금문(禁門) 안에서도 간사한 계책을 감히 방자하게 부립니다. 품계가 낮은 수령이 배사(拜辭)하러 올 경우에는 차비문(差備門)으로 불러들여 술과 과일을 대접하고는 말하기를, ‘이것은 어느 궁에서 내린 것이다. 어느 분이 너희 고을에서 무슨 일을 할 것인데, 너는 성의를 다하여 처리해 주라.’ 한다고 합니다. 이런 따위의 말이 길거리에 파다하게 퍼져 있는데, 곳곳마다 모두 마찬가집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전하께서 궁궐 안을 엄하게 다스린다는 것을 알아서 성명(聖明)의 세상에 허물을 돌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이런 말을 듣고는 몹시 통분스러운 심정입니다.
왕자방(王子房) 사람들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진짜로 그 방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조차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함부로 사약(司鑰)이라고 일컬으면서 군현(郡縣)에 횡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산에 있는 사찰을 원당(願堂)으로 삼는다고 핑계 대고서는 재물을 싹쓸이하고, 산택(山澤)이나 제언(堤堰) 등을 점령하여 제 것으로 삼고는 남의 전지를 빼앗습니다. 그리고 양갓집의 딸을 위협하여 처첩(妻妾)으로 삼고, 부근에 사는 민정(民丁)을 궁속(宮屬)이라고 하면서 수령을 억누르고 향리 사람들을 위협합니다. 또 서울 부근에 있는 산은 모조리 시장(柴場)으로 삼고, 강과 바다의 어장(漁場)과 염전(鹽田)을 모조리 입안(立案)하였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그들의 뜻에 순응하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 으레 종친부(宗親府)에서 보내는 관자(關子)라고 칭탁하고는 관리로 하여금 잡아 보내게 합니다. 그런데 그 방(房)에 이르러 보면 어느 한 사람도 그 왕자의 모습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뇌물을 바치도록 하고는 바깥에서 풀어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왕자의 명령이다’ 합니다.
성 안에 사는 강포한 자들은 그들의 족류(族類)나 친족 중에 조금이라도 여러 방의 하인과 관계가 있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어느 방의 하인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리고는 옥송(獄訟)이나 싸움에 조금이라도 관련이 되면 색리(色吏)를 매질하기도 하고 남의 집을 부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거리와 시정의 이익을 반드시 다 빼앗아서 차지하며, 하찮은 원한조차 반드시 앙갚음을 합니다.
무릇 왕자들은 전하의 훈계를 받았고 가만히 있어도 부귀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아 자신이 차지할 리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하인들이 방자하게 부리는 폐단에 대해서는 더더욱 왕자들이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백성들이 곡절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갓 원망하고 괴로워하는 마음만 품고 있습니다. 신들은 이런 말을 듣고는 몹시 통탄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궁궐 안을 엄하게 신칙하고 여러 대군들에게도 잘 훈계하시되, 한 가지 일이라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성지(聖旨)를 내려 분명하게 하유하소서. 그리하여 중외(中外)로 하여금 이런 일은 생쥐 같은 무리들이 한 일로, 전하께서 들어서 아는 바가 아니며, 왕자들은 알지도 못하는 일임을 환하게 알게 하소서. 그럴 경우 음습한 기운의 무지개가 얼음 녹듯 일시에 녹을 것이니, 어느 누가 전하의 밝고 밝은 덕에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신하로서 임금에게 고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먼저 아래에 있는 자로서의 도리를 바르게 하여야만 합니다. 근년 이래로 사대부들 사이에는 탐오(貪汚)한 것이 풍습이 되었으며, 뇌물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유사(有司)가 안핵(按覈)하여 다스렸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한갓 외람스럽고도 미세한 일을 가지고 전하께 낱낱이 아뢰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신하의 도리를 다하는 의리이겠습니까. 삼가 전하께서는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차자가 하나 올라갈 적마다 말이 더욱 간절하여 기휘(忌諱)에 저촉되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동료들 가운데에는 혹 물러가기를 청하는 자가 있었고, 척리(戚里)와 권귀(權貴)들은 공을 몹시 미워하였다. 심지어는 ‘김성일이 조정에 있으니, 우리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하면서, 대관(臺官)들은 모두 피혐(避嫌)하여 물러나기를 구하였고, 삼공(三公)들은 대죄(待罪)하려고까지 하였다. 세 통의 차자가 한꺼번에 올라가니 사방에서는 이를 전해 외우면서 이를 육지(陸贄)의 주의(奏議)에 비하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문충공(文忠公)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글을 보내 치하하기를, “곧은 말이 한번 올라가자 상께서 마음속으로 감동하였다. 군자가 없으면 어찌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이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전후로 올린 차자가 이 세 차자만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져서 전하지 못하니, 애석하다.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옮겨졌다가 얼마 뒤에 체차되고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부쳐졌다.
임진년(1592, 선조 25) 봄에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다. 본조에서는 계복(啓覆)한 중죄인(重罪人)을 제외한 나머지 죄수들에 대해서는 으레 속(贖)을 징수하는 까닭에 타사(他司)에 관련된 죄수들 중 간사한 무리들이 모두 본조에 옮겨 갇히어서 속을 바치고 죄를 면하고자 하였다. 이에 간사하고 교활한 짓이 날로 불어나 징계되거나 두려워하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공이 그들의 실정(實情)과 죄를 잘 살펴 한결같이 법대로 처리하면서 조금도 용서치 않자, 다시는 연줄을 타고 청탁할 수가 없게 되어 본조는 맑아졌고 각사도 따라서 맑아졌다. 공은 또 이르기를, “소는 농사의 근본이다. 이미 소를 도살하는 데 대한 금법(禁法)이 있어서 공상(供上)으로 바치는 것도 역시 올리지 않고 있다. 그런데 도성 안에서는 밀도살이 날로 성행하고 있다. 백성들의 재산을 축내는 것 중에 이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니, 참으로 성상의 뜻을 체득해서 백성들의 삶을 도탑게 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더욱더 엄하게 금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온 뒤로 조정에서는 왜적을 방비하는 계책이 전적으로 성지(城池)를 수축하는 데 달려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민정(民丁)을 끌어모아 군사로 만들고는 곳곳마다 성을 쌓았는데, 예전에는 성이 없었던 내지(內地)에도 모두 새로 성을 쌓았다. 이에 성을 개축하는 일이 여기저기서 벌어져 호령이 번거로웠으므로 각 마을마다 어수선해 인심이 크게 무너졌다. 그러자 공이 옥당에 있으면서 아뢰기를, “오늘날에 두려워할 것은 섬 오랑캐가 아니라 인심입니다. 만약 인심을 잃는다면 금성탕지(金城湯池)와 견갑이병(堅甲利兵)이 있어도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우선은 성 쌓는 일을 중지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늦추고 인심을 진정시키소서.” 하였다. 그리고 차자 가운데서도 내지에 새로 성을 쌓는 폐단에 대해 극력 진달하였다. 그러자 경상도 관찰사가 이를 듣고는 장계를 올리기를, “영남의 사대부가 작은 폐단을 싫어하여 국사(國事)를 생각하지 않고 이론(異論)을 제기하면서 갖가지로 방해합니다.” 하였으며, 공을 좋아하지 않고 있던 척리(戚里)들도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갖가지로 헐뜯었다. 이때에 이르러 비국에서 의논하여 곤수(閫帥)를 뽑으면서 이름난 무변(武弁)을 천거하여 의망(擬望)하였는데, 상이 하교를 내려 특별히 공을 뽑아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삼았다. 이에 정원에서 방계(防啓)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공은 명을 받자마자 곧바로 출발하였는데, 조정의 어진 사대부들이 모두 탄식하고 안타까워하였으며, 혹 길에 나와서 위로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자 공이 이르기를, “나라에 지은 죄가 큰데 중한 책임을 받았으니 성상의 은혜가 망극하다. 이 몸이 죽지 않으면 오직 온 힘을 다할 뿐, 일의 성패는 말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한강을 건너면서 시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부월 들고 남쪽 향해 길을 떠나매 / 仗鉞登南路
외론 신하 한번 죽음 각오했다네 / 孤臣一死輕
늘상 보던 저 남산과 저 한강물을 / 終南與渭水
고개 돌려 바라보니 남은 정 있네 / 回首有餘情

하였다.
단월역(丹月驛)에 이르러서 왜적들의 배가 바다를 뒤덮고 건너와 부산(釜山)과 동래(東萊)가 잇따라 함락당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갔다. 가다가 의령현(宜寧縣)에 이르러서 장차 정암진(鼎巖津)을 건너 곧장 본진(本鎭)인 창원(昌原)으로 가려고 하였는데, 왜적들이 이미 낙동강 오른쪽을 유린하고 있었다. 이에 휘하의 장사(將士)들이 모여서 말하기를, “정암진을 통해 가는 길은 적이 있는 곳과 가까우니, 곧장 갈 경우에는 반드시 위태로울 것이다. 진주(晉州)를 경유하여 함안(咸安)으로 나가 왜적들의 형세를 살펴보느니만 못하다. 그런데 병사(兵使)의 명이 엄한바 사실대로 고해서는 안 되니, 우선은 배가 없다고 거짓으로 고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그리고는 공의 둘째 아들 김역(金湙)에게 부탁하여 들어가서 ‘강물이 불어났고 배가 없으니 진주로 가는 것이 편하다’고 고하게 하였다. 그러자 공이 군관(軍官) 김옥(金玉)을 시켜 가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김옥도 돌아와서 배가 없어서 건널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공은 듣지 않고 이르기를, “명을 받은 이후로 왜적들의 형세가 이미 급해졌으니 어찌 길을 빙 돌아서 갈 수가 있겠는가. 내가 직접 가서 살펴보겠다.” 하였다. 전 목사 오운(吳澐) 역시 곁에 있다가 다른 길을 따라서 가라고 말하였으며, 군사들도 두려워하였는데, 공은 즉시 길을 재촉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정암진에 도착해서 보니 강가에 배가 있었다. 이에 곧바로 김옥과 김역을 끌어내려 장차 둘 다 처형하려고 하였는데, 장수들이 뜰 가득히 모여 번갈아 가면서 간하기를, “거짓말을 한 죄는 실로 여러 사람들의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병사께서 곧장 적들이 있는 길로 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자제(子弟)에게 임시변통으로 꾸며서 말씀드리도록 하였는데, 이 역시 한 가지 방도입니다. 그리고 김옥은 장사(壯士)이니 다행히 한번 죽음을 면해 주어 앞으로 공을 세우도록 하십시오.” 하였고, 김옥 또한 자원해서 목숨을 바쳐 싸우겠다고 하자, 공이 이에 용서해 주면서 그로 하여금 왜적을 만났을 때 앞장 서서 싸우라고 명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나루를 건너도록 재촉하여 출발하였다.
길을 가다가 미처 병영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 병사(兵使) 조대곤(曺大坤)을 만났는데, 그는 30리를 후퇴하여 주둔하고 있다가 군병들이 모두 흩어져서 혼자 도망치려고 하던 참이었다. 조대곤은 공을 만나자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맞이하면서 병사의 인(印)을 교부하고는 곧바로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나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준엄한 말로 꾸짖기를, “장군은 곤수로서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김해(金海)가 함락당하는 것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군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대대로 녹을 먹는 신하이며 경험이 많은 장수로서 이처럼 극심한 변란을 당하였는데, 의리상 어찌 도망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때 마침 그의 편비(褊裨)가 병영으로부터 와서는 말하기를, “본영(本營)이 이미 함락되었으며, 우후(虞候)도 나왔습니다.” 하였는데, 공은 그 말이 거짓임을 알아채고는 그를 끌어내리게 한 다음 이르기를, “너는 병사의 휘하로서 성을 지키고 있다가 한 놈의 왜적도 목베지 못하고 빈손으로 도망쳤다. 그리고서 또 어지러운 말을 해서 군사들을 현혹시킨단 말인가.” 하고는, 곧바로 목베어서 조리돌리니, 조대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넋을 잃었다.
이튿날 새벽에 정탐하던 군사가 왜적들이 이미 다가왔다고 급보를 올리자, 공이 왜적과의 거리가 몇 리나 되며 숫자는 얼마나 되는가에 대해 천천히 물었다. 왜적들이 이미 5리 앞까지 다가왔다고 보고하자, 공은 곧바로 정예병을 뽑도록 하였다. 잠시 뒤에 백마를 타고 새깃으로 만든 옷을 입고 은투구에 금가면을 쓴 왜적 두 명이 칼을 휘두르면서 앞으로 나와 100보 앞까지 다가왔다. 그러자 장사들이 처음으로 적의 칼날을 보고는 간담이 떨어지고 혼이 달아났는데도 공은 즉시 호상(胡床)에 걸터앉은 채 여러 군사들로 하여금 동요치 말게 하였다. 왜적들이 우리측 군사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는 의심하여 말에서 내려와 부채를 펼치면서 땅에 앉았다. 이에 공이 미리 뽑아 놓은 수십 명의 군사로 하여금 돌격하게 하였는데,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머뭇거렸다. 그러자 공은 즉시 말을 타지 않는 자들을 목베라고 명하는 한편, 김옥의 이름을 부르면서 소리치기를, “너보고 일찍이 먼저 앞장 서라고 하였는데, 지금 그렇게 하지 않을 건가.” 하니, 김옥이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타고는 수십 명과 함께 한꺼번에 돌진하였다. 몇 리를 뒤쫓아가자 매복하고 있던 왜적이 사방에서 일어나 한바탕 싸움을 치뤘는데, 공이 거느리고 있던 군교(軍校) 이숭인(李崇仁)이 금가면을 쓴 왜적의 우두머리를 활로 쏘아 거꾸러뜨렸다. 그러자 나머지 왜적들이 모두 달아났다. 이에 우리측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나아가 수급 둘을 베고 좋은 말, 금안장, 보검을 노획하여 돌아왔다.
이 싸움은 난이 일어난 처음에 왜적들과 가장 먼저 접전한 싸움이다. 군사는 천 명도 못 되었고, 무기가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강한 왜적을 만나 그들의 예봉을 꺾었으므로, 이로부터 군사들의 사기가 조금은 떨쳐졌다. 이에 즉시 이숭인을 올려보내어 수급을 바치면서 이 사실을 치계(馳啓)하였는데, 장계의 첫머리에 ‘한번 죽어 나라의 은혜를 갚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라고 적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군사들을 거두어 진을 물린 다음 기일을 정하여 왜적들을 나아가 치기로 하였다.
그로부터 하루 뒤에 갑자기 역졸(驛卒)이 와서 ‘잡아다가 국문하라는 명이 내렸는데, 금오랑(金吾郞)이 중간에서 길이 막혀 오지 못하고 있습니다.’고 전하였다. 이때 변방의 보고가 날로 급하여 경성(京城)이 크게 진동하였으므로, 상께서 정원에 하교하기를, “김성일이 일찍이 왜적들이 반드시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쳐서 변방의 방비를 해이하게 한 탓에 왜적들이 쳐들어오는 변고가 일어나게 하였다. 내가 장차 그를 국문하고자 하니, 의금부로 하여금 잡아오게 하라.” 하였다. 이에 좌의정 유성룡(柳成龍)과 대관(臺官)들이 모두 김성일의 본뜻은 그렇지 않다고 극력 진달하였는데도 상이 따르지 않았다. 공은 그 말을 듣고는 잠시도 기다리지 않은 채 곧바로 길을 떠났다. 그러자 좌우 사람들이 말하기를, “도사가 오지 않았으니 임금의 전지가 내려졌는지를 증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대적들이 목전에 당도하였는데 이러한 때 곤수가 어찌 입으로 전하는 한마디 말만 믿고 가벼이 진영을 떠나서야 되겠습니까.” 하자, 공이 이르기를, “이미 임금의 명이 내려졌다고 들었는데 어찌 감히 지체한단 말인가.” 하고는, 즉시 길을 떠나 사잇길을 따라 급히 달려갔다. 그러자 군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으며, 방비도 모두 풀리고 말았다. 감사 김수(金晬)가 길에서 공을 만나서는 공이 국문을 받으러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공은 말투가 평상시와 같았으며, 단지 이르기를,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공께서는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할 뿐이었다.
상이 입시한 재신(宰臣)들에게 묻기를,
“김성일의 장계에 ‘한번 죽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말이 있는데, 김성일이 과연 능히 한 목숨을 바쳐서 나라에 보답하겠는가?”
하자, 유성룡(柳成龍)과 최황(崔滉)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김성일은 소견은 혹 가리워짐이 있을지라도 그의 평소 마음가짐은 단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한 마음뿐이니, 한번 죽어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것임을 신들 역시 알고 있습니다.”
하였으며, 왕세자도 곁에서 모시고 있다가 극력 간하였으므로, 상의 노여움이 이에 풀리었다.
공이 올라가다가 직산(稷山)에 이르렀을 때 선전관(宣傳官)이 빨리 달려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는 따라가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통곡하였는데, 공은 얼굴빛이 변하지 않은 채 조용하게 뒷일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선전관을 만나보니, 용서하는 명을 가지고 왔으며, 공을 초유사(招諭使)로 제수한 것이었다. 대가(大駕)가 이미 서쪽으로 파천(播遷)하였다는 말을 듣고 공은 북쪽을 바라보면서 절한 다음 교지(敎旨)를 받들어 읽으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장계(狀啓)를 적어 왜적들의 기세가 창궐한 상황과 방수(防守)를 배치할 계책을 갖추어 아뢴 다음 즉시 남쪽으로 되돌아갔다.
5월 초에 함양(咸陽)에 도착하였다. 전 현령(縣令) 조종도(趙宗道)와 전 직장(直長) 이노(李魯)는 공의 옛 친구였는데, 이들이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공을 찾아왔으므로 드디어 막하(幕下)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 당시에 일로(一路)가 모두 무너져서 열읍(列邑)이 이미 텅 비었으며, 사민(士民)들은 달아나 숨어 산골짜기를 가득 메웠으므로, 원근의 들판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공은 그 자리에서 초유문(招諭文)을 지어 온 도 안에 포고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나라의 운수가 중간에 와서 불운한 탓에 섬 오랑캐들이 몰래 군사를 동원해 우리 강토를 함부로 유린하여 동쪽과 서쪽 두 방면에서 돌진해 들어왔다. 그런데 큰 성과 큰 진에는 일찍이 방비책(防備策)을 설치하지 않았던 탓에 열흘 사이에 험한 관문과 높은 고개를 넘어 곧바로 서울을 공격하게 되었다. 이에 상께서는 서울을 떠나 파천하고, 온 나라 사람들은 도망쳐 숨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생긴 이후로 오랑캐의 화란이 오늘날처럼 참혹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여러 곤수(閫帥)들은 국가의 간성(干城)인데도 왜적들이 침입했다는 소문만 듣고서 무너지기도 하였으며, 적병을 겁내어 움츠러들기도 하였다. 수령들은 한 고을의 군장(君長)인데도 모두들 자신의 처자식을 안전한 곳에 피난시키고 무기고를 불태웠다. 그리하여 한 사람도 충의(忠義)를 떨쳐 일어나 앞장 서서 왜적을 치는 자가 없었다. 그러니 불쌍한 우리 군사와 백성들이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지하여서 흩어져 도망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거센 물결에 한번 무너지자 이를 막아낼 도리가 없게 됨에 따라 성에는 창을 든 군사가 없었고, 고을에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신하가 없었다. 이에 왜적들은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에 들어오는 것처럼 몰려 들어와 마침내 영남 한 도가 왜적들의 소굴이 되어버렸는바, 형세가 마치 흙더미가 무너지고 기왓장이 깨지는 듯하여 조석간도 보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변고인가.
그러나 이것이 어찌 단지 변장(邊將)이나 수령들만의 잘못이겠는가. 이 지방의 선비와 백성들도 그 책임을 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옛날에 큰 난리를 만나서도 나라를 잘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윗사람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뜻이 있었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왜적들이 아직 이르지 않았는데도 선비와 백성들은 앞장 서서 먼저 도망쳐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구차스럽게 목숨을 부지하려는 계책을 하였다. 이에 수령은 백성이 없게 되고 장수는 군졸이 없게 되었으니, 장차 누구와 더불어 왜적을 막을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옛날에 추(鄒) 나라와 노(魯) 나라가 전쟁을 할 적에 추 나라 관리들은 전사한 자가 30여 명이나 되었는데도 백성들은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 이것은 관리들이 평상시에 백성들의 고통을 잘 돌보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선비와 백성들이 흩어져 달아나는 변고가 있는 것이 어찌 맹자(孟子)가 말한,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되돌아간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다. 아, 이것이 무슨 말이란 말인가.
근년 이래로 조세(租稅)가 정말 가혹하였고 부역(賦役)도 과중하였으니, 백성들이 과연 명령을 감당해 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성을 쌓고 해자를 파고 방비하는 도구를 갖추는 것은 모두가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지금 와서 본다면 성상께서 백성들을 보호하려는 생각이 원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어찌 백성들을 학대하면서 자신을 이익되게 한 것이겠는가. 더구나 추 나라와 노 나라의 싸움은 비록 한쪽이 이기고 한쪽이 지기는 하였지만, 이는 다 같은 중국의 나라로서,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이익되거나 손해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오랑캐의 풍습을 가진 왜적들은 우리 땅에 한번 들어오자 즉시 웅거하려는 뜻을 품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부녀자들을 잡아가서 처첩으로 삼고, 우리의 장정들을 마구 죽여 씨를 남기지 않았으며, 즐비한 민가를 모두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고, 공사(公私)의 재물은 모두 빼앗아 차지하였다. 이에 독기는 사방에 가득 차고 죽은 사람의 피는 천 리에 흘렀으니, 백성들이 참혹하게 화를 당한 것을 어찌 차마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실로 지사(志士)는 창을 베고 자면서 왜적을 쳐죽일 날이요, 충신은 국난을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쳐야 할 시기이다. 그런데 경상도 67고을 가운데에 아직까지 의(義)를 주창하여 의병을 일으킨 사람이 없다. 그러면서 오히려 남들보다 먼저 도망치지 못할까 걱정하고, 깊은 산속으로 숨지 못할까만 걱정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설령 산속으로 들어가서 왜적을 피하여 마침내 자신과 가족들의 목숨을 보전한다 하더라도, 열사(烈士)는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보전할 길이 절대로 없을 것인 데야 말해 뭐하겠는가. 내가 그 이유에 대해서 낱낱이 말하여 사민들의 의혹을 깨우치고자 한다.
지금 왜적들은 서울을 침범하는 일에 급급하여 지체하지 않고 곧장 행군해 올라갔기 때문에 병화(兵禍)가 여러 고을에 두루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왜적들이 목적을 달성한 뒤 흉악한 무리들이 국내에 가득 차게 될 경우, 그때에도 산골짜기가 과연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겠는가. 이를 비유해 보면 마치 큰 물결이 하늘까지 치솟고, 거센 불길이 들판을 불태우는 것과 같은바,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다시 어디에서 몸을 붙이고 살 수 있겠는가.
산골짜기에서 나오지 않을 경우에는 시일이 오래 지나면 식량이 떨어져 깊은 산속에서 앉은 채로 굶어 죽을 것이다. 그리고 산골짜기에서 나올 경우에는 부모와 처자식이 왜적에게 사로잡혀 욕을 당할 것이며, 예의를 지키는 사족(士族)은 짓밟혀 결단이 나게 될 것이다. 왜적에게 항복하면 영원토록 올빼미같이 흉악한 족속이 될 것이고,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가 왜적의 칼날 아래 죽은 귀신이 될 것이다. 이것이 어찌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야만 알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것은 단지 이해(利害)와 생사(生死)만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아아, 군신 간의 큰 의리는 천지간에 영원히 변치 않는 큰 도리로서, 이른바 사람이 지켜야 하는 떳떳한 법도이다. 무릇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임금이 피난하고 종묘사직이 넘어지며, 만백성들이 다 죽어가는 것을 가만히 앉은 채 보면서도 아무런 관심도 없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천지간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도리로 볼 때 어떻겠는가. 더구나 지금은 부모가 왜적의 칼날을 맞아 죽고 형제와 처자식이 서로 보전하지 못하게 되어, 집안의 화가 위급한 처지이다. 그런데도 자식이나 동생 된 자가 머리를 싸 쥐고 쥐새끼처럼 숨기만 하고, 죽을 각오를 하고 싸워 온전하게 하기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자식 된 도리로 볼 때 어떻겠는가.
돌아보건대, 우리 영남 지방은 본디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고장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천 년의 국운을 유지한 신라(新羅)와 오백 년의 국운을 지탱한 고려(高麗) 및 우리 조선(朝鮮) 200년 동안에 충신과 효자의 아름다운 명성과 뜨거운 의열이 청사(靑史)에 빛나는바, 아름다운 절의와 순후한 풍습은 우리나라에서 으뜸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사민들이 모두 다 잘 알고 있는 바이다.
또 근래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퇴계(退溪)와 남명(南冥) 두 선생이 한 시대에 나란히 나 도학(道學)을 처음으로 강명(講明)하면서 인심을 순화시키고 윤기(倫紀)를 바로잡는 것을 자신들의 임무로 삼았다. 이에 선비들 가운데에는 두 선생의 교육에 감화되고 흥기하여 본받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평소에 많은 성현들의 글을 읽었으니, 이들의 자부심이 어떠하였었는가.
그런데 하루아침에 왜변을 만나서는 오로지 살기만을 구하고 죽기를 피하는 데 급급하여, 스스로 군주를 버리고 어버이를 뒤로 하는 죄악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즉 구차스럽게 한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한 하늘 아래에서 살 수가 있겠으며, 죽어 지하에 들어가서는 또한 무슨 낯으로 우리 선현들을 뵐 수 있겠는가.
의관(衣冠)을 갖추고 예악(禮樂)을 배운 몸으로 치욕을 당할 수가 있겠으며, 머리를 깎고 문신을 새기는 야만인의 풍습을 따를 수가 있겠는가. 200년을 지켜 내려온 종묘사직을 차마 왜적들의 손에 넘겨 줄 수 있겠으며, 수천 리의 조국 강산을 차마 왜적들의 소굴이 되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문명한 나라가 변하여 오랑캐의 나라가 되고, 인류가 변하여 금수가 될 것인데, 이것을 참을 수 있겠으며,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수공(首功)을 으뜸 공으로 삼는 진(秦) 나라는 애당초 순전한 오랑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노련(魯連)은 오히려 달가운 마음으로 바다에 빠져 죽으려 하였다. 지금 이 야만인의 풍습을 가진 섬 오랑캐들은 얼마나 추잡한 종족인가. 그런데도 우리 강토를 멋대로 훔쳐서 차지하고 우리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고 욕보이도록 내버려둔 채, 내쫓아 버리고 죽여 버릴 것을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말하는 자는 말하기를, ‘저놈들은 용기가 있고 우리는 겁이 많으며, 저놈들의 무기는 날카롭고 우리 무기는 무디다. 그러니 설령 의병을 일으키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고 있다. 아, 어쩌면 이리도 생각이 모자란단 말인가.
옛날의 충신과 열사는 이기고 지는 것으로써 뜻을 바꾸지 않았고, 강하고 약한 것으로써 기운이 꺾이지 않았다. 의리에 있어서 마땅히 해야 할 바이면 비록 백번 싸워 백번을 지더라도 오히려 맨주먹을 휘두르고 시퍼런 칼날에 맞서 싸워 만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다. 하물며 이 왜적들은 비록 강하다고는 하지만 군사를 이끌고 멀리 들어왔는바, 전쟁에서 꺼리는 것을 범하였다. 그러니 어찌 제대로 살아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 군사가 비록 겁이 많다고는 하지만, 용감하고 겁내는 것이 어찌 일정한 것이겠는가. 충의가 북받치면 약한 자도 강해질 수 있고, 적은 군사로도 많은 군사를 대적할 수 있는 법으로, 단지 마음 한번 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지금 현재 무너져 도망친 군사가 산골짜기에 가득히 널려 있다. 이들은 처음에는 비록 도망쳐서 살려고 하였으나, 끝내 한번 죽음을 면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에 모두들 스스로 떨쳐 일어나서 나라를 위하여 온 힘을 다 바칠 것을 생각하고 있는데, 단지 앞에서 주창하는 자가 없어서 가만히 있을 뿐이다. 이런 때를 당하여 한 사람의 의사(義士)가 떨치고 일어나 큰소리로 한번 외치기만 하면, 원근에서 구름같이 모이고 메아리처럼 호응하여 앉은 자리에서 계책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상께서 이미 애통해하는 교서(敎書)를 내리셨으며, 또 소신(小臣)을 형편없다고 여기지 않고 백성들을 불러모아 유시하는 책임을 맡기셨다. 당(唐) 나라의 무식한 군사와 사나운 군졸들도 오히려 흥원(興元)의 조서(詔書)를 보고 울었는데, 하물며 예의를 숭상하는 지방에 사는 선비로서 어찌 팔뚝을 걷어붙이고 의분에 넘쳐 군부(君父)의 위급함에 달려나가지 않겠는가.
나는 진실로 원하노니, 이 격문(檄文)이 도착하는 날 수령은 한 고을에 분명하게 효유하고 변장은 사졸들을 격려하라. 그리고 문무(文武)의 조정 관원들과 부로(父老), 유생(儒生) 등 모든 사람들은 서로서로 유시하라. 그리하여 동지를 불러모아 충의로써 서로 단결하여 방비책을 세워 스스로 막기도 하고, 군사들을 이끌고 싸움을 거들기도 하라. 부자들은 유차달(柳車達)처럼 곡식을 날라 군량을 대고, 용사들은 원충갑(元沖甲)처럼 용기를 내어 적을 무찌르라.
집집마다 사람마다 각자가 싸우면서 일시에 함께 일어나면, 군사의 위용은 크게 떨쳐지고 용기가 백 배는 솟구쳐서, 괭이나 고무래도 튼튼하고 날카로운 무기로 변할 것이다. 그러니 왜적들이 비록 큰 칼과 긴 창을 가지고 있더라도 무엇이 두렵겠는가. 만약에 일이 성공한다면 나라의 부끄러움을 완전히 씻을 것이며,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의로운 귀신이 될 것이다. 제군들은 힘쓸지어다.
나는 일개 썩은 선비이므로 비록 전쟁하는 일을 배우지 못하였으나, 임금과 신하의 대의는 대충 들어서 알고 있다. 온 도가 뒤엎어진 뒤끝에 책임을 떠맡았는바, 뜻은 초(楚) 나라를 보전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나 신포서(申包胥)의 충성을 본받을 수 없고, 사당에 통곡하고 군사를 일으킴에 한갓 장순(張巡)의 충렬을 사모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히려 의사(義士)들의 힘을 빌려 기울어진 국가를 다시 회복시키는 공을 세우기를 기대하고 있다. 조정에서 내리는 상격(賞格)은 나중에 줄 것이니, 이 모두에 대해 마땅히 잘 알지어다.”
하였는데, 이 초유문(招諭文)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온 도 사람들이 바람에 쓸리듯이 감화되어 마치 가뭄 끝에 단비를 얻은 듯이 여겼다.
공은 또 조종도(趙宗道)와 이노(李魯) 두 사람을 시켜 각 고을에 통문(通文)을 보내 사람들이 믿고 복종할 만한 명망이 있는 자를 골라 뽑아 각 고을의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은 다음, 그들로 하여금 권장하고 격려하면서 징발하게 하였다.
이때 김면(金沔)은 거창(居昌)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정인홍(鄭仁弘)은 합천(陜川)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그 나머지 향병(鄕兵)을 끌어모아 의기를 떨쳐 일어나 왜적을 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나선 자가 또한 많았다. 그런데 관병(官兵)과 의병(義兵)이 서로 견제하고 있는 탓에 어지러워서 질서가 없었다. 이에 공이 김면과 정인홍을 의병 대장(義兵大將)으로 삼은 다음, 그들에게 의병을 규합하여 통솔하면서 협력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또 수령이 없는 군현(郡縣)에는 충성스럽고 부지런하며 순수하고 성실한 자를 골라 가수(假守)로 삼고, 용감하고 재략이 있는 자를 뽑아 가장(假將)으로 삼은 다음, 사유를 갖추어서 치계하였다. 이에 고을에는 수령이 있고 군대에는 주장(主將)이 있어서 원근에서 서로 호응하면서 공사(公私)간에 서로 도와 주어 회복할 만한 형세가 점차 두서가 잡히게 되었다.
의령(宜寧)의 곽재우(郭再祐)는 변란이 일어난 처음에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켜서는 자기 집 재산을 흩어서 군사들을 먹이고, 그래도 군량을 이어가지 못하자 혹 방치해 둔 전세미(田稅米)를 실은 배를 가져오거나 수령이 없는 고을의 창고 곡식을 가져다가 군량으로 쓰면서 날마다 왜적을 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마음병이 들었다고도 하고 미쳤다고도 하였다. 이웃 고을의 수령이 토적(土賊)이라고 관찰사에게 보고하는 바람에 관찰사 김수(金睟)가 열읍에 관문(關文)을 보내 그를 체포하도록 명하였으므로, 의병들의 사기가 꺾여 장차 흩어질 형편에 이르렀다. 그러자 곽재우도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알고 모두 팽개치고 두류산(頭流山)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공이 이 사실을 듣고는 놀라 탄식하였으며, 김수가 물었을 때는 곽재우를 극도로 기리는 내용으로 답하였다. 그리고는 곽재우에게 글을 보내어 장려하고 인정하면서 ‘선대부(先大夫)에게 후손다운 후손이 있다.’고까지 하였다. 이에 곽재우는 자신을 알아주는 데 감격하여 다시금 분발하여 떨쳐 일어나서는 곧바로 공의 글을 깃대에 매달아 향리 사람들에게 보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비로소 곽재우가 의거(義擧)하였다는 것을 믿게 되었고, 감사나 수령들도 감히 가로막거나 뒤흔들지 못하여 군대의 위세가 다시 떨쳐졌다.
공이 산음(山陰)에 이르렀을 때 산음의 수령인 김낙(金洛)이 다반(茶盤)을 성대하게 차려 내오자, 공은 표정이 변하여 김낙을 불러 깨우치기를, “이러한 성찬은 오늘날 신하 된 자가 먹을 만한 것이 아니다. 비록 먹더라도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추연한 기색으로 눈물을 흘리니, 김낙이 부끄러워하면서 사과하고 물리었다.
함양(咸陽), 산음(山陰), 단성(丹城)의 선비와 백성들이 공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는 앞다투어 달려나와서 맞이하니, 공은 그들에게 간담을 피력하면서 의리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그러자 모두들 눈물을 흘리면서 목숨을 바쳐 싸울 것을 생각하였다. 모두들 말하기를, “순찰사(巡察使) 김수(金睟)는 근왕(勤王)한다고 핑계 대고는 혼자서 말을 타고 멀리 달아났으며, 병사 조대곤(曺大坤)은 왜적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데도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갔습니다. 공께서 무슨 일을 하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먼저 이 두 사람을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공이 이르기를, “순찰사가 본도를 버리고 가고 병사가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간 것은 참으로 의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공들의 말도 옳지 않은 듯하다. 나는 단지 의(義)로써 일을 처리해 나갈 뿐이다.” 하였다. 제생(諸生)들이 또 ‘의’라는 한 글자를 가지고서 계속해서 말하자, 공이 이르기를, “제공들의 말은 끝내 의에는 부합되지 않으니, 우선은 버려두라.” 하였다.
왜란이 일어난 뒤로 감사, 병사 및 여러 장수와 수령들이 모두 창졸간에 왜적을 만나 화를 당하는 것을 피하고자 하여 모두 의관(衣冠)을 팽개치고 일반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는데, 공은 이르기를, “이처럼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어찌 우리나라의 의관 모습을 변형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초유사의 명을 받은 이후로 여러 차례 적들이 있는 소굴로 들어가면서도 한번도 변복(變服)을 하지 않았으며, 휘하의 사람들도 다 붉은 옷에 우립(羽笠) 차림을 하고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갔다. 이에 지나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 모습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오늘날에 다시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하였다.
다시 단성에 이르자 곽재우가 싸우러 나가다가 관복(官服) 차림으로 와서 공을 뵈었는데, 공은 그와 더불어 말을 나눠 보고는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이에 함께 가서 진주(晉州)에 이르렀다. 전 목사 오운(吳澐)이 소모관으로서 군사 수천 명을 얻어 곽재우를 도왔다.
이때 진주 목사(晉州牧使) 이경(李璥)과 판관(判官) 김시민(金時敏)은 지리산 속으로 도망쳐서 숨어 있었다. 공이 온다는 말을 듣고는 김시민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경은 병으로 죽은 뒤였다. 공은 판관을 독려해서 군사를 모으게 해 수천 명의 군사를 얻었는데, 이들로 대오를 편성해서 성을 지키면서 성과 못을 수축하고 군기(軍器)를 수선하였다. 공이 이르기를, “진주는 호남(湖南)의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으로, 진주가 없으면 호남도 없으니 나라에서 믿을 곳이 없게 된다. 왜적들이 항상 이곳을 노리고 있으니 방비를 느슨히 해서는 안 된다.” 하고는, 죽기로써 싸워 이 성을 나가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다. 그리고 또 군(軍)에 기율이 없어서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일정하지 않았으므로 조목을 정한 다음 열읍에 명령을 전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흩어져 도망치는 것이 풍조가 되었는바, 도망치는 자들이 스스로 이르기를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도망치면 일일이 군법을 시행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면서, 항오(行伍)에 통솔(統率)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10명의 군사 가운데에서 도망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통장(統將)을 참수하고, 통장 가운데에서 도망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도훈도(都訓導)를 참수하며, 전군(全軍)이 모두 도망칠 경우에는 영장(領將)을 참수하라. 그리고 잡아보내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그들도 같은 죄로 처벌하라.” 하였는데, 군율을 적용하는 것을 당기기도 하고 늦추기도 하여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폈으므로 군정(軍情)이 고무되고 두려워하여 감히 도망치는 자가 없었다.
공이 처음 진주에 이르렀을 때 성은 텅 비어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오직 강물만 출렁이며 흐르고 있었다. 공이 이리저리 배회하면서 바라보니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처참한 모습뿐이었다. 이때 조종도(趙宗道)가 의춘(宜春)으로부터 와서는 공의 손을 부여잡고 말하기를, “진주는 거진(巨鎭)이고 목사는 명관(名官)인데 왜적들이 이르기도 전에 일이 이미 이와 같으니, 앞으로는 다시 손써 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빨리 죽어서 눈으로 안 보느니만 못합니다. 왜적들의 칼날에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강물에 함께 빠져 죽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리고는 공을 잡고 강가로 이끌려 하였다. 그러자 공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한번 죽는 것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나, 헛되이 죽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필부들이 하는 짓을 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선왕(先王)께서 남기신 은택이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았고, 주상께서도 이미 자신을 죄책하는 교서를 내려, 하늘이 현재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하고 있다. 다행히도 여러분들이 의병을 일으켜 돕는 데에 힘입어서 열읍에서 많은 선비들이 모집에 응하고 있다고 한다. 선비들이 백성들의 본보기가 된다면 백성들이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적은 숫자의 군대로도 하(夏) 나라를 부흥시키기에 충분하였으니, 나라를 회복하는 공을 이루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만약 불행히도 그러지 못할 때에는 당(唐) 나라의 장순(張巡)처럼 죽음으로써 지키거나 안호경(顔杲卿)처럼 적을 꾸짖다가 죽어도 역시 늦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어찌하여 이처럼 서두르는가. 이 강물이 증명할 것으로,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서로 마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헤어졌다.
의병 대장 김면(金沔)이 군사를 파견하여 낙동강 하류 지역의 왜적을 뒤쫓아가 토벌하다가 노획한 채색 비단과 진귀한 보배 등을 몇 바리 공에게 실어 보내었는데, 좌우에서 행재소(行在所)로 올려보내라고 권하였다. 그러자 공이 이르기를, “관서(關西) 한 귀퉁이 지역은 가는 길이 멀고 막혔으며, 왜적들이 온 나라에 가득 차 있어서 계첩(啓牒)도 전하기가 어렵다. 오늘날에는 단지 온 충성을 다해 왜적들을 토벌하면서 함께 회복하기를 도모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물품은 우선 여기에 남겨 두고서 왜적들이 다 없어져서 길이 뚫리기를 기다려 보내느니만 못하다.” 하였다. 그리고는 남원부(南原府)로 실어다가 보관하게 하였다.
공이 막하 사람들을 나누어 파견하여 여러 고을의 군사들을 사열하였다. 이에 조종도가 단성(丹城), 산음(山陰), 함양(咸陽)으로 가고, 이노가 의령(宜寧), 삼가(三嘉), 합천(陜川)으로 갔는데, 조종도는 도중에 병이 나 글로써 보고하였으며, 이노는 돌아와서 여러 장사들이 의기를 떨쳐 일어나 힘껏 싸운 상황을 말하였다. 그러자 공은 몹시 기뻐하면서 장차 의령, 초계(草溪), 합천을 두루 돌면서 순시하고 거창으로 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도중에 수리원(愁離院)에 이르러서 ‘개령(開寧), 금산(金山), 지례(知禮) 세 고을의 왜적들이 모여들어 힘을 합해서 우현(牛峴)을 넘으려고 하는데, 의병 대장 김면(金沔)의 군사가 고개 위에 진을 치고 있으나 형세상 혼자서는 제압할 수가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은 이르기를, “그렇다면 거창이 위험하다. 달려가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드디어 곧장 삼가현으로 갔다. 그러자 사인(士人) 박사겸(朴思謙) 등 10여 인이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공의 충렬에 대해서는 어리석은 사람들조차도 모두 알고 있는바, 공의 소문이 미치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합니다. 지금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삼면이 모두 왜적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데, 우리 현이 그 한가운데 있습니다. 바라건대 공께서는 거창으로 가지 마시고 이곳에 주차(駐箚)해 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열읍에 명령을 내려 그들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 구원하게 하거나, 아니면 용사들을 뽑아 보내어 전진(戰陣)으로 가서 싸움을 돕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한 나라의 흥망이 매인 몸으로 필마를 타고 맨손으로 왜적들의 칼날을 무릅쓰고 범하여서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하면서, 번갈아 가면서 찾아와 간하고는 모두 읍하고 물러갔다. 그러자 공이 웃으면서 좌우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제생(諸生)들이 나를 보고 싸움터에 나가서 죽으라는구나.” 하였다. 거창에 이르자 산음, 안음(安陰), 함양의 군사들이 한꺼번에 와서 모였다. 공은 뒤에 있으면서 싸움을 독려하였는데, 군사들이 모두 죽기로써 싸워 왜적들이 고개를 넘지 못하였다. 공이 드디어 의병 대장 김면을 진중(陣中)에서 만나 보고 이틀 밤을 자면서 위로하였다. 이때 비로소 옛 친구인 박성(朴惺)을 만나서 함께 일할 것을 약속하고는 막하에 있게 하였다.
이정(李瀞)을 함안(咸安)으로 보내어 군사를 모으고 곡식을 모집하게 하였는데, 열흘 사이에 천여 명의 군사를 얻었다. 이때 군수 유숭인(柳崇仁)이 두 차례나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가 처벌을 받아 백의(白衣)로 종군하면서 진주(晉州) 성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정이 공에게 보고하기를, “군에는 군수가 없어서는 안 되고, 진영에는 장수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유숭인을 되돌려 보내 주소서.” 하니, 공이 회제(回題)하기를, “죽음을 무릅쓰고 왜적들의 소굴로 들어가서 수천 명의 향병(鄕兵)을 얻었다. 평소에 충의로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겠는가. 종시토록 격려하여서 흉적들을 섬멸하기 바란다.” 하고는, 즉시 전령을 보내어 유숭인에게 빨리 고을로 돌아가서 이정의 지휘를 받아 거창(居昌), 진해(鎭海), 칠원(漆原)의 왜적들을 막게 하였다. 그 뒤에 유숭인은 여러 차례 뛰어난 공을 세워 병사(兵使)로 승진하였다가 진주성 싸움에서 죽었다.
공이 거창에서 합천으로 돌아와 의병 대장 정인홍(鄭仁弘)을 진중에서 만나 보았다. 그리고는 이노, 박성 등을 나누어 파견하여 열읍에서 곡식을 모아 여러 의병들의 군량을 도와 주게 하였는데, 안음, 산음, 거창에서 얻은 것은 김면(金沔)에게 주고, 합천, 고령(高靈)에서 얻은 것은 정인홍에게 주고, 함안에서 얻은 것은 이정에게 주고, 의령에서 얻은 것은 곽재우에게 주었다.
이때 영남은 한가운데가 나눠져서 강 왼쪽에는 혈맥(血脈)이 통하지 않아 군읍(郡邑)이 텅 빈 탓에 왜적들이 거리낄 것이 없었으므로, 각자 감사나 수령이라고 칭하면서 마음대로 나다니며 노략질하였다. 이에 공이 탄식하기를, “좌도(左道)의 내지(內地) 지역은 어찌할 수 없지만, 강 건너편 세 고을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영산(靈山)은 신방주(辛邦柱)를 가장(假將)으로, 봉사(奉事) 신갑(辛)을 별장(別將)으로, 생원 신방즙(辛邦楫)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고, 창녕(昌寧)은 성천희(成天禧)를 가장으로, 조열(曺悅)을 별장으로, 정자(正字) 성안의(成安義)를 소모관으로 삼았다. 현풍(玄風)의 경우는 사족(士族) 집안 사람들은 모두 다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고, 남아 있는 이민(吏民)들은 왜적에게 부역(赴役)하여 길을 오가면서 짐을 운반하였다. 공은 이 말을 듣고는 이를 미워하여 즉시 격문(檄文)을 지어 유시하였다. 그리고는 명을 내려 전 군수 엄홍(嚴泓)을 별장으로, 곽찬(郭趲)을 소모관으로 삼은 다음, 그들에게 경내를 드나들면서 효유하게 하였는데, 그 격문에 이르기를,
“나라의 운수가 극히 불운하여 이빨을 검게 물들이는 오랑캐들이 몰아쳐 쳐들어와, 임금께서 도성을 떠나 피난하고 종묘와 사직이 몽진(蒙塵)하였다. 아, 사람은 다 떳떳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니, 이 땅에 살고 있는 자치고 그 누가 의리와 충성을 다하여 몸을 바쳐서 나라를 위해 순국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돌아보건대, 우리 영남 지방은 본래부터 덕과 학문이 가장 뛰어난 지방이라고 일컬어져 왔는데, 그중에서도 포산(苞山) 한 현은 또 선비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러니 그동안 의리와 절개에 죽은 자가 어찌 한이 있겠는가. 지금 왜적들이 성 안에 웅거하고 있으면서 사방으로 나가 죽이고 노략질하고 있는데, 그 해를 당한 사람은 우리의 부형이 아니면 처자식이다. 위로는 임금의 원수이니 한 하늘을 함께 이고 살아갈 수 없으며, 아래로는 형제와 처자식의 원수이니 또한 어찌 갚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산골짜기 숲 속에 엎드려 숨어 있는 자들이 창을 베고 자고 쓸개를 핥으면서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을 잠시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한 사람도 의병을 일으켜 강개한 마음으로 왜적을 친 자가 있다고는 듣지 못하였다. 이것이 어찌 왜적들이 꽉 차 있음으로 해서 우리 백성들이 싸울 여지가 없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충의로운 선비는 죽고 사는 것으로써 뜻을 바꾸지 않으며, 용감한 사람은 강하고 약함으로써 뜻이 꺾이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은밀히 서로 연락하여 효유하고 의병을 일으키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그리하여 적을 칠 만하면 지방을 지키면서 원충갑(元沖甲)의 군사처럼 떨쳐 일어나도 좋을 것이요, 형세가 자립할 수 없으면 군사를 이끌고 병사(兵使)의 군대로 가도 좋을 것이다. 또 나를 버려야 할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의병이 되어 강을 건너도 괜찮을 것이다.
지난번에 합천(陜川) 사람인 의령 군수(宜寧郡守) 정인홍(鄭仁弘)과 고령(高靈) 사람인 좌랑(佐郞) 김면(金沔)이 충성을 드날리고 의기를 드높여 한번 소리치자, 각 주군(州郡)에서 그에 따라 호응하였는데, 근래에 와서는 군사의 위세를 크게 떨쳐 나라를 회복하는 공을 세울 가망이 있게 되었다. 그러니 본현의 사민(士民)들도 왜노(倭奴)들의 위협에 겁먹지 말고 더더욱 의열(義烈)의 기운을 발휘하여 한결같이 임금의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을 하라. 그럴 경우 충분(忠憤)이 솟구치는 바에 용기가 백 배는 날 것이니, 저 왜적들이 어찌 감히 우리를 당해 내겠는가.
하물며 이 왜적들은 군사를 이끌고 멀리 들어왔다가 흉악한 칼날이 이미 꺾였다. 그리고 중국 군사 5만 명이 이미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조승훈(祖承訓), 곽몽징(郭夢徵), 왕수신(王守臣) 등 세 대장이 각각 정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구원하러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또 수군(水軍) 10만 명이 산동(山東)에서 곧바로 왜놈의 소굴로 쳐들어가고 있다. 이에 우리의 형세가 이미 떨쳐져서 왜적이 망할 날이 얼마 안 남았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바로 뜻 있는 선비가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공을 세울 때인 것이다. 만약 시일을 늦추어 앉아서 기회를 놓치게 되면, 화란을 평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장차 천하의 큰 윤리에 죄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무슨 면목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설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백성들 가운데에는 무식하여 임금과 신하의 의리를 알지 못하는 자도 있을 것인즉, 이들은 오직 상과 벌로써만 권장하고 징계할 수 있다. 그대들은 조정의 사목(事目)을 보지 못하였는가. 거기에 보면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을 막론하고 적의 수급 하나를 벤 자는 급제(及第)를 주고, 둘을 벤 자는 6품직을 주고, 셋을 벤 자는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주고, 왜장(倭將)을 벤 자는 녹훈(錄勳)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준다.’ 하였다. 무부(武夫)나 용사(勇士)들은 의병이 있는 곳으로 달려나가 뜻을 가다듬어 힘껏 싸우라. 그럴 경우 위로는 2품의 벼슬까지 할 수 있으며, 아래로는 훈신(勳臣)의 반열에 끼이게 되어, 영화는 한 몸에 가득하고 혜택은 후손에게까지 미칠 것이니, 이 또한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줄곧 숲 속에 숨어 엎드려 있을 경우에는, 비록 왜놈의 칼날은 면할지라도 깊은 산속에서 굶어 죽는 것을 면할 수 있겠는가. 설령 만에 하나 구차스럽게 살아났다고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난리가 평정되고 나면 나라에서는 그에 따른 형벌이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처자식들까지도 모두 잡혀 죽는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니 힘써 싸워 큰 공을 세우고 중한 상을 받는 것과 비교해 볼 때 그 이해와 화복이 어떻다 하겠는가. 살아서는 열사(烈士)가 되고 죽어서는 충혼(忠魂)이 될 것이니, 그대들은 힘쓸지어다.”
하였다.
또 이들에게 왜적에게 함락당한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유시하게 하였는데, 각 고을의 명칭에 따라 호칭을 달리하여 효유하였다. 이에 왜적에게 빌붙었던 아전과 백성들이 서로 뉘우치고 두려워하여 앞을 다투어 모집에 응하였다. 그리고 각 고을에 선악적(善惡籍)을 두게 해 왜적을 치는 자는 선적(善籍)에 적고 왜적에게 빌붙은 자는 악적(惡籍)에 적게 해서 권장하고 징계하는 뜻을 보이게 하였다. 그러자 왜적에게 빌붙었던 백성들이 앞다투어 왜적들의 수급을 가지고 와 앞서 지은 죄를 씻어 주기를 청하였다.
공이 오랫동안 거창에 머물러 있자 거창을 점거하고 있던 왜적들이 진주(晉州)에 방비가 없음을 알고는 진해(鎭海)에 있는 왜적과 서로 호응하여 크게 쳐들어와 노략질하면서 고성(固城)과 사천(泗川) 사이를 횡행하였다. 공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단성(丹城)으로 달려가 함양, 산음, 단성의 군사를 모두 동원해 진주로 달려간 다음, 김시민(金時敏)을 신칙하여 움직이지 말게 하였다. 그리고 또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및 최강(崔堈), 이달(李達) 등에게 신칙해서 좌익(左翼)과 우익(右翼)이 되게 하였다.
이때 곽재우가 먼저 성에 들어가 있어서 군대의 위세가 자못 왕성해 왜적들이 누대(樓臺) 앞까지 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면서도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공이 잇따라 이르러 싸움을 독려하자, 여러 장수들이 공의 명령에 따라서 힘을 합하여 추격하였으므로, 왜적들이 밤을 틈타 몰래 도망치다가 죽거나 다친 자가 아주 많았다. 이에 드디어 사천, 진해, 고성 등 여러 고을을 회복하였다.
또 곽재우에게 기회를 보아 현풍(玄風), 창녕(昌寧), 영산(靈山)에 있는 왜적을 치게 하였는데, 김면(金沔)과 정인홍(鄭仁弘) 두 대장 역시 군사를 파견하여 무계(茂溪)와 안언(安彦)의 왜적을 치고, 초계(草溪)의 의병장 전치원(全致遠), 이대기(李大期)도 사막(沙幕)과 황강(黃江)의 왜적을 쳐서 내쫓았다. 이에 세 고을에 주둔해 있던 왜적들이 모두 물러가 무계진(茂溪鎭) 아래에서부터 정암(鼎巖)에 이르기까지는 왜적들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여, 낙동강의 좌우가 이로부터 비로소 통하였다.
처음에 김수(金晬)가 산음에 있으면서 여러 고을에 공문을 보내어 군사를 나누고 장수를 임명하였으므로, 의병들이 무너져 흩어지고 뭇사람들이 몹시 불만스러워하였다. 이에 곽재우가 뭇사람들이 노여워하는 틈을 타 격문을 보내어 죄를 꾸짖은 다음 가서 김수의 목을 베려고 하였다. 그러자 김수는 군사들을 벌여 놓아 자신을 방비하는 한편, 곽재우를 반적(叛賊)이라고 논계(論啓)하여 일이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공은 이를 몹시 걱정하여 곽재우에게 체문을 보내어[貽帖] 이르기를,
“의병장은 처음 변란이 일어났을 때부터 재산을 있는 대로 다 털어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은 돌아보지 않은 채 한결같이 나라를 위하여 왜적을 칠 마음만 가졌다. 그러니 비록 옛날의 열사(烈士)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내가 경내에 이르러서 즉시 글을 보내 불렀더니, 의병장은 늙고 졸렬한 나를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고 즉시 와서 나를 만났는데, 나는 한번 인사하는 사이에 이미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하여 죽을 뜻이 있음을 알았다.
그 뒤에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낙동강 가를 횡행하면서 앞장서서 왜적을 쳐 머리를 벤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왜적들이 함부로 몰아쳐 들어오지 못하여 이 일대의 여러 성들이 지금까지 보전되었다. 이에 아름다운 명성이 사방으로 퍼짐에 듣는 사람마다 모두 고무되어 원근에서 메아리치듯 호응하였는바, 왜적을 쳐 없애는 공을 세우는 것은 날짜를 세어가면서 기약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 영웅다운 풍도와 의열한 마음은 당대에 빛날 뿐만 아니라 장차 역사에 드리워져 후세에 전하여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듣건대, 의병장이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문(檄文)을 보내어서 감히 패역스러운 말을 함부로 하였다고 하는데, 방백(方伯)은 어떠한 관원이고 의병장은 어떠한 사람이기에 감히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방백에게 실제로 죄가 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조처가 있을 것인바 도민(道民)이 손을 쓸 일은 아니다. 의병장은 충의로운 집에서 태어났으며, 왜적을 치는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장차 이룰 판인데, 스스로 자신을 죽이고 일족까지 멸망당하는 지경에 빠지는 짓을 할 줄을 내가 어찌 헤아리기나 하였겠는가. 당(唐) 나라의 배반한 졸개가 주수(主帥)를 찬역(簒逆)하여 쫓아내었다가 화를 당한 사람이 무릇 몇 사람이나 되었는가. 그런데도 앞서 실패한 일을 다시 되풀이하려 한단 말인가.
돌아오는 길을 잃은 것은 《주역》에서 경계한 바이며, 화를 돌이켜 복으로 삼는 것은 지혜 있는 선비가 취할 바이다. 내 말을 따르면 순하게 되어 복이 많을 것이고,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거스르게 되어 화를 받을 것인데, 그 기미에 털끝만한 간격도 없는 만큼 의병장은 잘 생각하길 바란다.”
하였는데, 곽재우가 공이 보낸 글을 보고는 느끼고 깨달아 사과하기를, “저 역시 역순(逆順)의 이치에 대해서 대충은 들어서 알고 있으니 어찌 감히 저의 견해만을 고집하면서 합하(閤下)의 분부를 어기겠습니까.” 하고는, 즉시 달려가서 포위된 진주성을 구하였다. 그러자 공은 또 온 힘을 다해 감사를 설득하여 그로 하여금 유감을 풀고 함께 일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조정에서 김수의 말만 치우치게 듣고 곽재우의 마음은 살피지 않은 채 패역(悖逆)으로 몰까 염려하여 사유를 갖추어 치계(馳啓)하였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곽재우는 바로 고(故) 통정대부(通政大夫) 곽월(郭越)의 아들이며,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외손녀의 사위로서, 중간에 무학(武學)을 배우다가 이를 버리고 글을 읽었습니다. 그의 사람됨은 단순하고 꾸밈이 없으며, 거상(居喪)함에 있어서 극진히 슬퍼하여 향리에서 자못 효행을 칭송하였습니다.
변란이 처음 일어났을 때 병사와 수사가 서로 잇따라 도주하고, 감사 김수(金睟)가 밀양(密陽)으로부터 영산(靈山)으로 물러나 있다가 곧바로 초계(草溪)로 향하였습니다. 그러자 곽재우는 분연히 일어나서 말하기를, ‘병사와 수사가 도망하였는데도 처형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또 왜적이 좌도(左道)에서 나오고 있는데도 감사가 초계로 퇴주(退走)하였으니 베어 죽이는 것이 옳다.’ 하고는, 칼을 잡고 길목에서 지나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향리 사람들이 극력 말리므로 중지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방어사(防禦使), 조방장(助防將), 수령(守令) 등이 모두 풍문만 듣고 무너져서 달아난 탓에 열흘 사이에 왜적이 서울의 대궐을 범하였습니다. 그러자 곽재우는 팔뚝을 걷어붙이고 의분에 못 이겨 말하기를, ‘이런 무리들은 왜병을 호위하여 서울로 들어가 군부에게 화를 끼친 것이니, 모두 베어 죽여야 한다.’ 하면서,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항상 큰소리쳤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루아침에 자기 집 재산을 흩어 군사를 모집하니, 그의 첩이 ‘어찌하여 이러한 개죽음을 하려고 하십니까.’ 하면서 말리자, 곽재우는 몹시 노하여 칼을 빼어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처자식의 의복조차도 군졸의 아내들에게 다 내주었으므로 가업(家業)이 이로 인해 탕진되어 굶주림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에 그의 매부인 허언심(許彦深)의 집에 처자식을 맡긴 다음 모집한 장사들을 거느리고 가면서 왜적을 치겠다고 큰소리치자, 향리 사람들이 듣고는 모두들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때는 벌써 의령과 초계 두 고을은 모두 왜적이 휩쓸고 지나가 고을은 텅 비어 있었으며, 의령의 관고(官庫)는 불에 타버린 탓에 곽재우의 군사는 식량이 없었습니다. 이에 초계와 신반현(新反縣)의 창고에 있는 곡식을 내어 군사에게 먹였는데, 합천 군수(陜川郡守) 전현룡(田見龍)이 도둑이라고 논하여 병사에게 보고하니, 병사가 명을 내려 체포하였습니다. 그러자 의병에 응모하였던 자들이 그 말을 듣고는 뿔뿔이 흩어져 가려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 지방에 도착한 처음에 즉시 글을 보내서 불렀으므로 군위(軍威)를 다시 떨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곽재우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줄곧 왜적을 쳤는데, 적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앞장 서서 힘차게 돌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거느린 전사들이 용기 백배하여 누구나 할 것 없이 일당백의 용사가 되었습니다. 싸울 때에는 반드시 붉은 비단으로 만든 철릭(帖裏)을 입고 당상관의 전립(氈笠) 차림을 하고 스스로 호하기를 ‘홍의천강장군(紅衣天降將軍)’이라 하였습니다.
말을 달려 적진을 유린하였는데, 오가는 것이 번쩍번쩍하여 왜적들이 철환(鐵丸)을 일제히 쏘아도 맞히지 못하였습니다. 혹은 말 위에서 북을 치면서 천천히 가서 행군하는 절도로 삼기도 하였으며, 혹은 사람을 시켜 피리도 불고 호르라기도 불게 하여 두려워하는 뜻이 없음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때로는 숲 속에 의병(疑兵)을 많이 풀어 놓고 피리도 불고 북도 치고 하면서 떠들어 대었으며, 혹은 곳곳에 복병을 숨겨 놓아 고요하기가 사람이 없는 듯하다가 적이 이르면 갑자기 쏴 죽이기도 하였으며, 혹은 왜적의 배를 뒤쫓아가 해안에서 활을 쏘기도 하여, 어느 하루도 싸우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싸우면 반드시 이겼으므로 왜적의 머리를 벤 것이 모든 장수 중에 가장 많았으며, 쏴 죽인 자는 그 숫자를 알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에 왜적들도 홍의장군이라고 부르면서 감히 해안에 올라와 도둑질을 못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의령(宜寧), 삼가(三嘉) 두 고을의 백성들은 모두 생업에 편안하여 농사에 힘써 오곡의 풍성함이 평소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도내의 나머지 성들이 지금까지 보전된 데에는 곽재우의 공이 아주 큽니다.
그런데 갑자기 삼도(三道)의 장수[帥]가 수원(水原)에서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는 미친 사람같이 위태로운 말과 망녕된 말을 수없이 지껄여 대었습니다. 순찰사가 비록 편지를 보내어서 공적을 표창하고 계문하여 공을 아뢰었으나, 역시 뜻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혹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고 경계하면 반드시 칼을 움켜잡고 성을 내었습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또 갑자기 두 차례나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서(檄書)를 보내어서 낱낱이 그 죄를 열거하고는 토벌하겠다고 떠들어 대었습니다. 그리고 또 각 고을의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돌려 토죄(討罪)하겠다는 뜻을 말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는 놀라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순찰사가 신에게 공문을 보내어 의령 고을에 명하여 곽재우를 잡아 가두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곽재우가 실제로 역심(逆心)을 품었다고 한다면 현재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있으니 한 사람의 역사(力士)로는 잡을 수가 없을 것이며, 만약 역심을 품고 있지 않다면 편지 한 장으로도 넉넉히 깨우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에 곧바로 체문(帖文)을 곽재우에게 보내어 다방면으로 비유해 깨우쳤으며, 김면(金沔) 역시 글을 보내서 경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곽재우가 곧바로 마음을 돌이켜 말대로 잘 따랐습니다. 진주(晉州)가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는 이에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구원하기로 하여, 3일에 이미 길을 떠났습니다.
곽재우는 일개 도민으로서 감사를 범하려고 하여 죄를 성토하고 격서를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비록 스스로는 나라를 위한 마음에서 분통스러워 이렇게까지 한 것이라고는 하나, 행적이 난민(亂民)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즉시 토죄하여 제거해서 그의 광패스러운 마음을 징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곽재우는 온 나라가 함몰된 뒤에 능히 외로운 군사로 용감히 적을 쳤으므로, 도내의 잔민(殘民)들이 그를 간성(干城)처럼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난폭한 말을 하였다고 하여 곧바로 베어 죽이면, 보전되어 있는 남은 성은 왜적을 막을 계책이 없습니다. 이에 신은 미봉책으로 그의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그러나 도순찰사(都巡察使)에게 죄를 졌으니, 서로 용납하기가 어려워서 다른 변고를 야기시킬까 염려스럽습니다.
신이 듣건대, 을묘년의 왜변(倭變)이 일어났을 때 전라 감사 김주(金澍)가 영암(靈巖)에서 다른 고을로 달아났습니다. 그러자 전 수원 부사(水原府使) 윤기(尹祁)가 당시에 유생으로서 포위된 성 안에 있다가 칼을 빼서 베어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김주는 성조차 내지 않고 웃으면서 이야기하여 잘 처리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논자(論者)들이 지금까지도 윤기의 용기에 대해 칭송하고, 김주가 능히 포용한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곽재우의 일이 비록 미치광스럽고 망녕되기는 하나, 그의 마음은 실로 다른 뜻이 없습니다. 그러니 감사가 만약 김주가 처리한 바와 같이 대처한다면 반드시 조용해져서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김수(金睟)에게 글을 보내어서 선처하도록 부탁한 결과, 걱정될 만한 변은 없게 되었습니다. 다만 김수가 이미 곽재우를 반적(叛賊)이라고 계문하였으며, 또 다른 사람을 사주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만약 이 일로써 그를 죄 준다면 그가 죄에 승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도의 인심을 수습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몹시 마음 아프고 절박합니다.
곽재우가 충의(忠義)를 일으켜 분발한 상황과 용감히 왜적을 친 공은 온 도에 널리 퍼지고 드러나서 아이들이나 군졸들까지도 모두 곽 장군(郭將軍)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그는 용병(用兵)에 뛰어나서 장수가 될 자질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만약 미치광스럽고 망녕스러운 짓을 한 데 대한 주벌을 조금만 늦추어 준다면, 반드시 공을 세워 보답할 것입니다.
신은 불행하게도 명을 받든 이후에 두 번이나 이런 변을 만났습니다. 신이 4월 중에 호남(湖南) 길로 오다가 운봉현(雲峯縣)에 이르렀을 때 호남 사람들이 순찰사 이광(李洸)이 근왕(勤王)하는 데 늦게 달려갔다는 이유로 토죄하고자 하면서, 신에게 은밀히 말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에 신이 대의(大義)로써 그 말을 꺾었으며, 곧장 김수와 상의하여 이광에게 알려 대비하라고 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김수가 말하기를, ‘그들이 근왕하는 데 늦게 달려갔다는 이유로 토죄하려고 하니, 의로운 선비라고 이를 만하다. 그런데 만약 이광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여 이 사람들을 베어 죽이게 되면 한 도의 인심이 더욱 격해질 것이다. 이광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이에 신은 그의 말에 따라 그만두었습니다.
지금 이 곽재우의 일이 꼭 저번의 그 일과 같습니다. 김수가 진실로 호남 사람들을 조처한 의리로써 곽재우에 대해 조처한다면 난처한 일이 없을 듯합니다. 신과 김면이 곽재우에게 보내 경계하여 신칙한 글과 곽재우가 보낸 답서를 아울러 등서(謄書)하여 올립니다.”
하였다. 감사 김수의 장계가 들어가자마자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곽재우를 조처하는 계책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는데, 공이 올린 계사를 보게 됨에 미쳐서는 뭇사람들의 의심이 모두 풀려 드디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공은 곽재우에 대해서 그를 알아주는 의리가 중했고, 그를 다시 살려 준 은혜가 깊었으며, 장려하고 탄압함에 있어 추켜세우고 억누름을 양쪽 다 지극하게 하여, 마침내 남쪽의 의병 가운데 선봉이 되게 하였다. 그러니 곽재우가 기공(奇功)을 세워 당세(當世)에 드러나게 된 것은 모두가 공이 화합시키면서 이끌어 준 덕분이다.
영천(永川) 사람인 진사 정세아(鄭世雅), 생원 조희익(曺希益), 전 현령 곽회근(郭懷瑾) 등 60여 명이 몇 천 마디나 되는 긴 글을 지은 다음, 사람을 시켜 낮에는 숨고 밤을 이용해서 걸어와 공에게 바쳤다. 그 글은, 좌도(左道)의 의병들이 명령을 받을 데가 없으니 공의 절제(節制)를 받고자 한다는 내용이었으며, 또 여러 장수들이 깊은 산속에 숨어 있다가 차츰차츰 나와서는 의병들을 방해하고 억눌러 의병들이 모두 흩어져 모이기 어려운 상황에 대해 진술하였다. 이에 공은 따뜻한 말로 위로해 깨우치면서 이르기를, “제군들이 호랑이 굴을 무릅쓰고 험난한 길을 지나서 멀리까지 와 문안하니, 충성스럽고 의로운 마음이 속에서 솟구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사람으로 하여금 감격의 눈물이 흐르게 한다. 당직(當職)이 명을 받들고 초유하고 있으니 의리상 이곳저곳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길이 막힌 것이 이와 같아서 문보(文報)가 통하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하였다.
훈련 봉사(訓鍊奉事) 권응수(權應銖)가 온 마음을 다해 의병을 모으고 여러 차례 왜적들을 물리쳤으므로 그로 하여금 의병 대장이 되게 하였으며, 근방에 있는 몇몇 고을에도 모두 의병장을 정하여 권응수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그러자 권응수는 공이 추천해 준 데 감격하여 더욱 분발하여 하양(河陽)의 의병장 신해(申海) 등과 함께 네 고을의 의병을 거느리고 영천에 웅거하고 있던 왜적을 쳐서 하나도 남김없이 섬멸하였다.
공이 항상 상주(尙州) 일로(一路)의 소식이 통하지 않는 것을 걱정하고 있던 차에 마침 사인(士人) 조정(趙靖), 이홍도(李弘道) 등이 와서 이봉(李逢)이 군사를 모아 왜적을 친 일에 대해 진달하였다. 그러자 공은 그 즉시 이봉을 올려 의병장을 삼고, 전 한림(翰林) 정경세(鄭經世), 전 찰방(察訪) 권경호(權景虎), 사인 신담(申譚)을 각각 상주, 함창(咸昌), 문경(聞慶) 세 고을의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았다.
가을에 행조(行朝)에서 경상좌도는 왜적이 웅거하고 있는 곳이어서 관찰사의 직임을 맡길 만한 적임자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대신의 천거에 의해 공을 경상좌도 관찰사 겸 순찰사(慶尙左道觀察使兼巡察使)에 제수하였다. 선전관(宣傳官) 이극신(李克新)이 교서(敎書)를 싸 가지고 왔는데, 그 교서에 대략 이르기를,
“경의 강직하고 방정함은 사대부 중에 소문이 났으며, 충신(忠信)스럽고 독실함은 섬 오랑캐를 감동시켰다. 경은 이미 본도 사람이며 또 특별한 공적을 세웠으니, 지금 더러운 왜놈들을 섬멸하여 옛 강토를 회복하고자 함에 있어서 경을 버려두고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이에 경을 경상좌도 감사에 제수하니, 경은 가서 공경히 일할지어다.
아, 평소에는 임금의 뜻을 거스르면서 과감하게 간하는 선비가 없었고, 난리에 임하여서는 절개를 다하여 의리에 죽는 신하가 없었다. 나는 경이 착한 말을 올린 것이 이미 충성스럽고 붉은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는바, 경이 오늘날에 공을 세울 것을 바라는 마음 또한 보통보다 만 배는 되노라.”
하였다. 공은 제수하는 명을 받은 뒤에 ‘평양(平壤)을 지키지 못하여 대가(大駕)가 의주(義州)로 가고 세자는 안협(安峽)에 돌아와 있다’는 말을 듣고는 가슴을 치면서 슬피 울며 소리치기를, “백발이 다 된 외로운 신하가 명을 받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사람들을 통솔하여 근왕(勤王)하지 못하였고, 또 흉악한 왜적들을 소탕하지도 못한 채 구차스럽게 살면서 지금까지도 숨이 붙어 있다. 그런데도 형벌을 내리지 않고 도리어 한 도를 책임지는 직임을 맡겨 주시었으니, 뼈가 가루가 되고 몸이 부서진다 하더라도 어찌 그 은공을 다 보답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면서 몸을 수그린 채 어찌할 바를 몰라하니,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감히 우러러 쳐다보지 못하였다. 그러자 공이 이르기를, “이미 경상좌도 감사가 되었으니, 지금부터는 우도(右道)의 일을 관여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 그러나 처음부터 의병에 관한 일을 관할하였으니, 어찌 감히 직분을 벗어난 짓이라는 혐의를 피하려고 당장의 염려스러운 기미에 대해 진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조목별로 하나하나 장계를 올려 진달하였다. 그리고는 다음 날 초계(草溪)를 경유해서 낙동강 왼쪽으로 향해 떠나려 하자, 우도의 사람들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마치 물고기가 물을 잃은 것처럼 허둥대었으며, 의병들은 모두 맥이 풀려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우도의 선비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와 날마다 뜰 아래에 서서 공에게 머물러 있기를 청하였으며, 초계의 유생 이대기(李大期) 등 30여 명이 수레를 붙들고 글을 올렸는데, 그 글에 대략 이르기를,
“김면(金沔)과 정인홍(鄭仁弘) 두 대장이 합하(閤下)께서 내린 초유(招諭)하는 격문(檄文)에 호응하여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떨쳐 일어나 흩어진 의병들을 모으자, 원근에서 의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의기의 칼날이 자못 예리해졌습니다. 낙동강 오른쪽의 8, 9개 군이 왜적들의 침입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합하께서 잘 절제(節制)하신 데에 힘입은 것입니다.
이번에 교서가 서쪽에서 내려와 좌도 감사가 되어 가시게 되자 여정(輿情)은 맥이 풀렸고 사람들은 의구심을 품어, 모여들었던 자들은 흩어져 떠날 생각을 하고 있으며, 의병이 되려고 하던 자들은 도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에 지난날에는 숨어만 있던 흉악한 자들이 그 기세를 드날리고 있으며, 두 의병 대장 역시 어찌 구차하게 공을 이루기를 바라서 저들에게 제지당하려고 하겠습니까.
곽재우는 광망스러운 마음을 잘 절제하지 못하여 방백의 뜻을 거슬렸는바, 믿는 바는 오직 합하뿐입니다. 합하께서 가시고 나면 형세상 장차 보전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곽재우가 없으면 의령을 지키지 못하여 삼가(三嘉) 서쪽 지역이 차례차례 함락당할 것입니다. 이것으로 볼 때 합하께서 가고 머무는 것이 어찌 의병들이 모이느냐 흩어지느냐에 관계된 바가 아니겠으며, 나라가 보존되느냐 망하느냐가 달려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일의 성패와 이해가 숨 한번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구구하게 임금의 명에 달려나가는 상규(常規)만을 지키려고 하다가 놓쳐서는 안 될 사기(事機)를 그르친다면, 합하께서 전날에 초유(招諭)한 공이 헛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공이 이르기를, “이미 상의 명이 내려졌는데 어찌 감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낙동강 오른쪽 고을의 유생들이 공을 머물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앞다투어 상소하여 머물게 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합천, 초계, 삼가, 의령, 진주, 단성에서는 진사 박이문(朴而文)이 소두(疏頭)가 되고, 거창, 안음, 산음, 함양에서는 진사 정유명(鄭惟明)이 소두가 되었다. 이들은 서쪽으로 쉬지 않고 달려가 왜적들이 있는 곳을 지나 행재소에 도달해 상소를 올렸다. 박이문이 올린 상소에는 대략 이르기를,
“나라를 광복(光復)시키는 기반은 영남에 있으며, 영남을 수복하는 책임은 김성일에게 달려 있습니다. 김성일이 없으면 의병이 없게 되고, 따라서 영남도 없게 됩니다. 지금 김성일이 단지 교서의 명만을 받들어서 낙동강을 건너 동쪽으로 가고 있으므로, 사당(邪黨)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으며, 의병들은 기운이 꺾이어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의 일이 어찌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는 데에서 그칠 뿐이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으로는, 이미 내려진 성명(成命)을 도로 거둘 수는 없더라도, 그로 하여금 좌도와 우도의 일을 겸하여 살피면서 의병들을 격려하게 하면 될 듯 싶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는 실로 전적으로 떠맡기고 책임을 중하게 하여 한 도의 일을 전부 총괄하게 하는 것으로서, 전화위복의 계기가 오로지 여기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며, 정유명이 올린 상소에는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의 일은 모두가 의병들이 한 일인데, 의병들이 종시토록 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김성일 덕분입니다. 지금 듣건대, 김성일이 좌도 감사로 옮겨 제수되었다고 하는바, 수복하는 공이 다 이루어져 가는 즈음에 방애가 없을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낙동강 오른쪽 지역의 군민(軍民)들이 김성일을 자모(慈母)처럼 보고 있으며, 김성일을 장성(長城)처럼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에 만 번 죽을 계책을 내어 왜적들을 쓸어버리고, 한번 살아남아서 태평 시대를 보기를 기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우도에서 빼앗아다가 좌도에 주는 일이 전혀 뜻밖에 생겼으므로, 충신들은 실망하고 있고 의병들은 맥이 풀려 있습니다. 김성일이 떠나가고 머무는 것이 어찌 유독 경상우도 의병들의 성패에만 관계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소가 올라가자 즉시 공을 다시 경상우도 관찰사로 삼도록 명하였다.
공이 박성(朴惺)을 경상좌도 가도사(慶尙左道假都事)로 삼은 다음 9월 초에 함께 낙동강을 건넜다. 좌도의 백성들이 공이 온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 날뛰면서 떠들어 대기를, “어찌하여 이렇게 늦게야 오시는가.” 하였고, 산골짜기로 도망쳐서 숨어 있던 수령이나 장사(將士)들은 공이 온다는 풍문만 듣고도 넋을 잃은 채 서로 떠들기를, “김성일이 좌도의 관찰사가 되었으니 우리들은 장차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으며, 어떤 자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려고 하였다.
청송(靑松)에 외가의 선영(先塋)이 있었는데, 공이 이르자 부사(府使)가 먼저 제전(祭奠)에 대한 일을 여쭈었다. 그러자 공이 노하여 이르기를, “이런 때를 당하여 왜적을 칠 일을 말하지 않고 도리어 상사(上司)를 위하여 사사로운 제향(祭享)의 일에 관해 말한단 말인가.” 하였다.
신녕(新寧)에 도착해서 도로 경상우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르기를, “도로 강을 건너가자면 반드시 우도의 군병들이 마중 나오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곳에서 선영까지는 이틀이면 갈 수가 있으니, 이러한 때에 어찌 잠깐 가서 사당에 참배하고 선산에 성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달려가 참배하고 성묘하였다.
안동에서 하루를 머문 뒤에 돌아갈 때 온 가족이 작별에 임하여 서로 붙들고 큰소리로 울었다. 그런데도 공은 못 본 체하면서 평소와 다름없이 웃고 떠들었다. 세 아들이 중도에까지 따라나오자, 큰아들 집(潗)에게 이르기를, “공과 사에는 구분이 있는 법이니 서로 돌아볼 수가 없다. 너는 돌아가서 너희 어미를 모시라. 홀로 되신 큰어머니와 둘째 큰어머니도 너희들의 어미와 같이 종시토록 잘 섬기라.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었을 경우에는 온 집안이 한꺼번에 죽어 황천에서나 만나는 것이 옳다. 나라가 보존되면 함께 보존되고 나라가 망하면 함께 망하는 것이다. 어찌 나라가 멸망했는데 집안이 보존되는 경우가 있겠는가.” 하였고, 둘째 아들 역(湙)에게는 자신을 따라오게 하였다. 두 아들이 통곡하고 절하면서 작별 인사를 하자, 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 강영(姜霙)이 말하기를, “공은 이러한 때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습니까?” 하니, 공이 이르기를, “어찌 마음이 동요되지 않겠는가마는, 내 스스로 마음이 동요되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 뿐이다.” 하였다.
대구(大丘)의 동화사(桐華寺)에 도착하니, 좌도 병사(左道兵使) 박진(朴晉)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 마중하였다. 어느 날 밤에 군중(軍中) 사람들이 공연히 놀라서 떠들어 대기를, “왜적들이 문 앞에 당도했다.” 하였다. 그러자 편비(褊裨)와 하리(下吏)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 숲속으로 숨었는데도 공만 홀로 동요하지 않았는데, 조금 있다가 도로 안정되었다. 좌도의 의병들이 박진에게 저지당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공은 박진을 만나 그래서는 안 된다고 힘껏 말하였다.
이보다 앞서 권응수(權應銖)가 영양(永陽)의 싸움에서 이긴 것은 오로지 선비들이 창의(倡義)하여 앞장 선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동도(東都)로 옮겨 가서 토벌할 때에는 이들이 앞다투어 적진으로 달려나갔다가 생원 최인제(崔仁濟), 정의번(鄭宜藩) 등 17인이 같은 날에 해를 당하였다. 그리고 정자(正字) 유종개(柳宗介) 역시 힘을 다해 싸우다가 관동(關東)에서 고개를 넘어온 왜적들에 의해 죽었다. 공은 이런 사실을 듣고는 놀라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200년 동안 배양해 온 교화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장계를 올려 유생들의 충렬(忠烈)이 가상하다는 것과 박진이 의병들을 가로막은 사실 및 권응수에게 한쪽 방면을 맡기라는 뜻을 모두 진달하였다. 그리고 또 아뢰기를, “본도의 감사가 따로 있습니다만, 신이 이미 은혜를 입어서 좌도로부터 우도로 옮겨 가게 되었으니, 신이 본 바를 다 아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전사한 사람들이 모두 표창받는 은전(恩典)을 입었고, 권응수는 병사로 승진 제수되었으며, 의병들 역시 박진에게 뒤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공이 정병(精兵) 100여 명을 거느리고 빠른 속도로 100여 리를 가서 한밤중에 낙동강을 건넜다. 이날 새벽에 대구(大丘)와 성주(星州)의 왜적이 동쪽과 서쪽에서 와 하빈(河濱)에 모였는바, 공의 걸음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일이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므로, 사람들이 신명(神明)이 도와 준 것이라고 하였다.
공은 관찰사의 직인을 인수받은 뒤에 거창에서 산음으로 옮겨 가 머물러 있었다. 공이 좌도로 건너 가자 우도의 의사(義士)들이 모두 흩어져 산속으로 들어갔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조종도(趙宗道)는 함양(咸陽)에서 오고, 이노(李魯)와 오장(吳長)은 지리산(智異山)에서 나왔으며, 사민(士民)들은 서로 치하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공이 왔으니 우리는 살아날 수 있을 것이고 회복도 기약할 수 있겠다.” 하였다. 김수(金睟)가 진주는 지킬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 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우현(牛峴)에 있는 김면(金沔)의 진(陣)으로 가서 돕게 하였는데, 공이 이르러서는 김시민을 데리고 오게 해 도로 진주를 지키게 하였다.
당시 수령 중에 결원이 많이 생겼는데도 차임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은 편의에 따라 사람을 뽑아 제수하라는 조정 명령을 인하여 각자의 재주와 자급에 따라서 인재를 선발해 채워 넣었다. 그리하여 정기룡(鄭起龍)을 상주 판관(尙州判官)으로, 김준민(金俊民)을 거제 현령(巨濟縣令)으로, 강덕룡(姜德龍)을 함창 현감(咸昌縣監)으로, 박사제(朴思齊)를 의령 현감(宜寧縣監)으로, 박정완(朴廷琬)을 거창 현감(居昌縣監)으로, 변혼(卞渾)을 문경 현감(聞慶縣監)으로, 여대로(呂大老)를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이정(李瀞)을 사근 찰방(沙斤察訪)으로, 정인홍(鄭仁弘)을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삼았다. 차임해 보내기를 마친 다음에는 일일이 계문(啓聞)하여 아뢰었는데, 사람을 뽑아 배치한 것이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맞았으므로 인심이 흡족해하였다.
공은 여러 진(陣)에서 왜적의 머리를 베어 바치면 반드시 몸소 검사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더러우니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고 하자, 공이 이르기를, “싸움터에서는 으레 거짓으로 속이는 일이 많은 법이다. 잘못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죽였을 경우, 그 죄는 실로 나에게 있다. 그러니 신중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서 머리를 베어 바치는 자가 감히 속임수를 쓰지 못하였다. 그리고 각처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이 조그만 승리라도 하였을 경우에는 이를 크게 떠벌려 대어 정말인지 거짓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었으며, 혹 자신의 공로를 과시하거나 자손이나 친구가 공을 세웠다고 기록하기도 하여, 실제로 피를 흘리면서 싸운 사람은 그 속에 들지 못하였다. 그런 탓에 사람들이 분을 품고 사기가 해이해지는 것이 당시의 공통된 걱정거리였다. 이에 공은 철저하게 조사하고 자세히 살펴서 엄하게 꾸짖었다. 일찍이 정인홍에게 통첩을 보내어 이르기를, “공을 과장하여 상을 바라는 것은 무변(武弁)이나 하는 일로, 대장의 휘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부하 사람들을 엄하게 신칙해서 거짓으로 속이는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고, 또 성주(星州)를 점거하고 있던 왜적을 습격할 적에 물어보지도 않고 경솔히 움직였다가 마침내 패하여 돌아왔다는 이유로 우두머리 아장(牙將)을 잡아다가 군율로 논해 곤장을 쳤다.
공이 산음에 있다가 창원(昌原)의 왜적이 부산(釜山), 김해(金海)의 왜적과 합세해 발호하고 있는데 그 무리가 수만 명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이들이 반드시 진주로 향할 것임을 알아채고 즉시 진주 목사 김시민에게 공문을 보내어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니 죽음으로써 보답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으로 면려하였다. 그리고는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진주 판관(晉州判官) 성수경(成守慶)에게 명령을 전하여 진주 고을 사람인 전 만호(萬戶) 최덕량(崔德良), 권관(權管) 이찬종(李纘宗)과 함께 힘을 합하여 왜적을 제압하게 하였다. 또 왜적들이 길을 나누어서 정진(鼎津)을 건널 경우에는 낙동강 오른쪽 일대와 호남 직로(直路)가 모두 손써볼 도리가 없게 될까 염려하여, 드디어 말을 달려 의령으로 가 산음, 단성, 삼가, 의령 등 네 고을의 관병과 의병으로 하여금 정진 가에다가 진을 치게 하였으며, 초계의 가수(假守) 곽율(郭) 역시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왜적들이 감히 나루를 건너지 못하였다.
이때 왜적은 이미 진주성을 열 겹으로 에워쌌으며, 대오가 수십 리에 걸쳐서 뻗쳐 있었다. 이에 공은 결사대를 모집한 다음 활과 화살을 주고 밤중을 틈타 적진(敵陣) 가운데서 방비가 좀 허술한 남강(南江)을 통하여 성 안으로 숨어 들어가게 해 장수와 사졸들을 격려하여 죽음으로써 지키게 하였으며, 첩자를 많이 보내 왜적의 정세를 정탐하게 하였다. 또 고성(固城)의 가수인 조응도(趙凝道)에게 최강(崔堈), 정유경(鄭惟敬) 등과 함께 남강 가에서 군대의 위세를 과시하게 하였다.
이때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와 임계영(任啓英) 역시 공이 서신을 보내 통보함으로 인하여 이보다 먼저 진주로 와서 공의 분부를 들은 다음 각각 군사 천 명을 거느리고 살천(薩川)에 진을 쳐 성세(聲勢)를 도왔다. 그리고 김시민은 한결같이 공의 지휘에 따라 기병(奇兵)을 매복하고 정예병을 숨겨 놓아 응전하였다. 이에 왜적들이 7일 밤낮을 계속하여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함락시키지 못한 채 많은 사상자만을 내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그들이 주둔하였던 막사를 불태우고 시체를 태워버린 다음 허둥지둥 서둘러 도망쳤다. 그러자 공은 합천의 가장(假將)인 김준민(金俊民), 정방준(鄭邦俊)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단계(丹溪)로 가 왜적들을 급히 치면서 추격하게 하였다.
싸움에서 이겼다는 보고서가 한밤중에 이르자 공은 촛불을 밝히고 일어나 앉아서 성을 지킨 절차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그런 다음 막하에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 성이 함락당하였더라면 성 안에 있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온 도의 나머지 성들도 보전할 수가 없었을 것이며, 호남도 당장에 왜적들의 침입을 받았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아전을 불러 멀고 가까운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인심을 안정시켰다. 휘하의 군교(軍校)들이 들어와 치하하면서 승전한 공을 대부분 공에게 돌리자, 공은 이르기를, “이것은 목사의 공이고 여러 장수들의 힘이다. 머리가 허연 썩은 선비가 무슨 공이 있겠는가. 다만 바라는 것은 너희들이 뜻을 날카롭게 다듬어서 왜적을 섬멸하기를 김시민이 한 것처럼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어찌 나라를 위해서만 다행이겠는가. 실로 너희들의 영광이 될 것이다.” 하였으며, 김시민의 공에 대해서 몹시 칭찬하면서 그날 즉시 치계(馳啓)하여 병사로 승진되게 하였다.
당초에 정진에서 우리 군사들의 위엄을 드러내 보일 때 곽재우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의령과 함안의 경내에 머물러 있게 하였는데, 곽재우가 왜적들이 대거 쳐들어올 것이니 배수진(背水陣)을 쳐서는 안 되겠다고 여겨 공의 지휘에 따르지 않았다. 이에 공이 노하여 곽재우를 뜰 안으로 잡아오게 한 다음 장차 군율로 다스리려고 하였다. 그러자 박성(朴惺)과 오운(吳澐)이 막하에 있다가 힘껏 말리므로 그만두었다. 곽재우의 벗이 곽재우에게 말하기를, “자네는 어찌해서 전과 같이 뻣뻣하게 굴지 않았는가?” 하자, 곽재우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아니면 어찌 내 목숨을 마음대로 하겠으며, 나 또한 어찌 제재를 받으려고 하겠는가.” 하였다. 그런데 공이 곽재우에게 명령한 것은 반드시 그로 하여금 한창 기세가 오른 왜적을 치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복병을 매복시켰다가 왜적의 후미를 치거나 돌아가는 왜적을 치라고 한 데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곽재우가 끝내 함안 경내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아 상처를 입고 패주하던 왜적들을 모두 편안하게 돌아가게 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공의 절제에 대해서 승복하였으며, 곽재우가 명령대로 따르지 않은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공이 장차 진주로 가서 장사(將士)들을 직접 위로하려 하였는데, 마침 개령(開寧)과 성주(星州)에서 왜적들에 대한 급보가 날아들었으므로, 도사(都事) 김영남(金穎男)을 대신 진주로 보내고 공은 삼가(三嘉)로 향하였다. 개령의 왜적들이 지례(知禮)를 침범하고 성주의 왜적들이 고령(高靈)을 쳐들어오자 휘하의 장사들을 나눠 보내어 김면(金沔)과 정인홍(鄭仁弘) 두 대장의 싸움을 돕게 하였으며, 남은 군사로 성원하였더니, 왜적이 모두 패하여 되돌아갔다.
이해 겨울에 상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경상 감사 김성일이 공을 많이 세웠으니, 가자(加資)하여 다른 사람들을 면려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에 드디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었다.
어느 날 이정(李瀞)이 함안과 진주 경내에서 돌아오다가 싸움에 죽은 사람의 뼈가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을 보고는 여러 진의 장수들에게 영을 내려 시신을 거두어 파묻게 하라고 청하였다. 그때는 한밤중이 다 되었을 때인데도 공은 곧 글을 써서 보낸 다음 이르기를, “착한 말은 하룻밤도 묵혀 두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김면과 정인홍 두 의병 대장이 일국의 중한 명망을 받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통제를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였으며, 곽재우 역시 고집이 세어 자기 멋대로 하면서 공의 통제에 따르지 않았는데, 공이 공문을 보내거나 명령을 전할 즈음에 매우 엄하게 대하여 조금도 용서치 않았다. 그러자 조종도가 조용히 공에게 말하기를, “이들 여러 사람들은 모두 한때의 명사(名士)로서 자신을 희생한 채 나라를 위하여 온 정성을 다해 왜적을 토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처럼 억누른단 말입니까?” 하니, 공이 이르기를, “내가 이들 몇 사람에 대해서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만약 내정(內廷)에서 함께 일하는 경우라면 체모에 비록 실수가 있더라도 반드시 서로 따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조정이 서쪽 변방에 아득히 멀리 있어서 명령이 통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때에 어찌 여러 장수들이 멋대로 영을 어기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하는 것이 내가 그들이 충성을 다하는 것을 기리는 것이고, 그들이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을 막는 방편인 것이다.” 하였다.
당시에 이들 두 사람이 명성과 지위가 모두 높아서 서로 엇비슷하였는데, 그들의 휘하와 문생들이 서로 시기하여 헐뜯어 두 사람이 사이 좋게 지내지 못하였다. 이에 문이(文移)의 가부에 대해서조차도 대부분이 어긋나서 화합되기 어려운 형세였다. 이에 공이 양쪽 진영에 가서 통렬하게 이르기를, “서로 마음을 합해 왜적을 토벌해서 함께 국난을 극복하는 것이 마땅하지, 부박한 자들이 하는 말을 듣고서 스스로 혐의하여 틈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지금부터는 양쪽 사이에서 분란을 일으켜 이간질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내가 끝까지 캐물어 법으로 다스리면서 조금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하였더니, 이로부터 부박한 말이 조금 줄어들어서 서로 헐뜯는 일이 점차 그쳐졌다.
의병 대장 김면이 일찍이 여러 고을을 순시할 적에 군대의 위의(威儀)를 크게 벌이고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다녔는데, 공이 이런 사실을 듣고는 불쾌해하면서 이르기를, “지해(志海)도 이렇게 한단 말인가.” 하였다. 그 뒤에 김면이 김시민을 대신하여 병사가 되었을 때 공은 거창에서 그를 만나 큰 사발로 술을 몇 잔 마시고 손을 잡고 소회를 토로하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다가 동이 틀 무렵에야 자리를 파하였다. 그 다음 날 김면을 따라다니는 아전을 불러다 놓고 수죄(數罪)하기를, “의병 대장으로 있을 때는 혹 지휘에 순응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병사의 체모에 있어서는 결단코 자기 멋대로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김면이 역질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였는데, 공이 그 소식을 듣고는 놀라 통곡하면서 이르기를, “장성이 무너졌으니 나랏일이 글러졌다.” 하고, 또 이르기를, “이 사람은 처자식이 10리 밖에 살고 있는데도 종시토록 서로 만나 보지 않았다. 그 정충(精忠)과 의열(義烈)은 신명(神明)에게 물어봐도 될 것으로, 어찌 나와 같은 자들이 미칠 수 있는 바이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치계하기를,
“병사 김면은 본래 병이 많은 사람으로 산림(山林)에서 병을 요양하면서 살아 세상 일에는 뜻이 없었는데, 변란이 일어나자마자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고 떨치고 일어나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는 이 왜적들과는 함께 살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한 해가 지나도록 피나는 싸움을 하여 여러 차례 왜적의 예봉을 꺾었는바, 낙동강 오른쪽 일대가 지금까지 보전된 것은 대부분이 그의 공이었습니다.
의병을 일으킨 뒤로는 그의 처자식이 가까운 지방에 살고 있으면서 유리걸식하는데도 한번도 만나 보지 않았습니다. 여름철과 겨울철에도 비바람과 눈서리를 무릅쓰고 다녔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반드시 죽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의연한 채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으니, 나라를 위하는 그의 정성은 환하게 밝기가 단약(丹藥)과 같았습니다.
은혜를 입어 병사에 제수된 뒤로는 더욱더 책임이 크고 임무가 무거움을 두렵게 여겼습니다. 그는 직접 여러 군사를 감독하면서 금산(金山)의 경내에 진주(進駐)해 있으면서 선산(善山)에 있는 왜적들과 서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왜적들이 자못 두려워하여 그곳을 버리고 도망칠 기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피로가 쌓인 나머지 갑자기 역질에 걸려 진중에서 목숨을 마쳤는바, 장성(長城)이 한번 무너짐에 삼군(三軍)이 눈물을 삼키고 있습니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돕지 않는 것이 끝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김면은 의병장이 되었을 때부터 공의 통제에 따르기는 하였으나, 호령을 시행하는 사이에 있어서 뻣뻣하게 굴었다. 공이 일찍이 김면은 성격이 편벽되고 고집스럽다고 하면서 자못 불쾌하게 여기는 뜻을 말과 안색에 여러 차례 나타냈다. 이에 사람들이 혹 두 사람이 서로 잘 지내지 못하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서 김면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포상을 청하는 것이 이와 같이 격렬하고 간절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더욱더 공의 마음씀이 공정하고 어진이를 좋아함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데 대해 탄복하였다.
난리로 불탄 뒤끝에 기근마저 닥쳤으므로 도내의 유민(流民)들이 도처에서 큰소리로 울부짖었는데, 길을 갈 때면 길을 막았고, 멈추어 있을 때면 뜰을 메웠다. 공은 이르는 곳마다 반드시 소금과 쌀을 가지고 가서 나누어 주었다. 또 여러 고을에 영을 내려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해 구휼하게 하였는데, 각별히 식견이 있는 사람을 뽑아서 관장하게 한 다음, 마음을 다해서 구휼하도록 신칙해 형식적으로 하지 못하게 하였다. 순시하기 위해 도착하는 날에는 간혹 불시에 음식을 맛보기도 하였으며, 병이 심하게 든 자의 경우에는 약을 조제해 먹여 살리기도 하였다. 진휼하는 정사를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였으므로 그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들이 감히 게을리 하지 못하였다.
관문(關文)이나 통첩(通牒) 등에 대해서는 비록 소소한 것이더라도 반드시 손수 지었으므로 간혹 밤중이 지나 잠들기도 하였다. 이에 피로가 쌓이고 소갈증이 들어 장차 큰 병이 될 상황이었다. 친한 벗이 혹 자질구레한 일까지 번거로이 수고한다고 말하자, 공이 한숨을 쉬면서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조정 관리들이 맑지 못하고 인심이 이반된 탓에 섬 오랑캐들이 쳐들어오는 화를 불러들이기에 이르렀으니, 우리들이 만 번을 죽더라도 죄를 갚을 길이 없다. 그런데 어찌 감히 번거로이 수고하는 것을 꺼리겠는가. 그리고 큰일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작은 일이라고 소홀히 한다면, 어찌 내 마음이 편하겠는가.” 하였다.
공은 중국 군사가 많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이르기를, “우리나라가 대대로 독실한 충정(忠貞)으로 대국을 지성껏 섬긴 것이 지금에 와서야 징험되었다. 중국 군사가 밀려 내려와서 왜적을 압박한다면 섬멸하기를 기약할 수가 있는바, 백성들에게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내년에 씨 뿌릴 종자를 미리 조처하지 않는다면 왜적들이 물러가더라도 백성들이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전후로 곡식을 옮기기를 계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중간에서 지체되어 전달되지 못하거나 혹은 밖에서 가로막혀 보고되지 않았다. 공은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근심하느라 온 마음을 다 쓰면서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수염과 눈썹이 모두 하얗게 세어 버렸다.
계사년(1593, 선조 26) 정월 초하루에 본 고을 수령이 휘하의 장사와 종사관(從事官)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들어와 뵙자, 공은 추연한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해가 바뀌었는데도 왜적들은 아직도 나라 안에 가득하고 서관(西關)은 멀기만 하여 소식을 전할 수 없다. 그런데 아직 죽지 않은 외로운 신하가 또다시 정초를 맞이하였으니, 장차 무슨 얼굴로 하늘의 해를 우러러보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수령에게 세찬(歲饌)을 올리지 말라고 경계시켰다.
공이 당초에 여러 차례 편비(褊裨)를 보내어 중국 군사의 소식을 알아보게 하였으나, 모두 길에 떠도는 말만 듣고 중간에서 돌아왔다. 이에 특별히 이노(李魯)를 보내어 서로(西路)에 가서 살펴보게 하면서 이르기를, “군사들은 지치고 군량은 다 떨어졌는데, 중국 군사가 또 나왔으니 오늘날의 형세가 참으로 위급하다. 농사철이 이미 다가왔으니, 씨 뿌릴 종자 역시 급하다. 온 나라의 존망이 너의 이번 걸음에 달려 있다.” 하였다. 그리고는 편지와 통첩을 써서 체찰사(體察使)에게 보냈는데, 이노가 중로에서 ‘지금까지는 중국 군사가 오지 않고 있다’고 치보(馳報)하였다. 그러자 공은 곧바로 여러 고을에 영을 전해 우선은 중국 군사를 지대(支待)하는 일을 늦추게 하여 백성들이 동요하지 않게 하였다.
또 군교(軍校)를 보내어 치계하기를,
“왜적들은 우리가 평양(平壤)을 수복하였다는 말을 듣고부터는 벌이나 개미처럼 모여 있으면서 모두 도망쳐서 돌아갈 뜻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 군사가 오래도록 머물러 있으면서 진격하지 않고 있으므로 왜적들이 다시 기운이 났습니다. 문경(聞慶), 함창(咸昌), 상주(尙州)에 머물러 있는 왜적들은 멋대로 분탕질하기를 변란이 일어났던 처음보다도 더 심하게 하고 있습니다. 전라도의 수군(水軍)이 패전한 뒤로는 웅천(熊川), 김해(金海), 창원(昌原)에 있는 왜적들도 다시 창궐하는 조짐이 있습니다.
각 고을의 군량은 이미 다 떨어졌습니다. 곽재우(郭再祐)의 군사 역시 굶주림으로 인해 다 흩어져서 장차 군사가 없는 장수가 되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주사(舟師)와 곁꾼(格軍)도 군량을 계속 대 주지 못하므로 형세가 장차 저절로 무너질 형편이며, 병사(兵使)가 거느린 장사들도 오래 지탱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이에 토붕 와해(土崩瓦解)될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신이 비록 만 번 죽더라도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부자 백성들이 쌓아 놓은 개인의 곡식은 작년부터 다 조사하여 끌어모았는데, 처음에는 상을 줄 것이라 여겨 바치려는 자가 꽤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을 오래도록 내리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에 곡식을 바치라는 영을 전후에 걸쳐서 여러 번 내렸는데도 한 사람도 응하는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비록 재물과 곡식이 바닥난 탓이기는 하지만, 또한 국법이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데에서 말미암은 것이기도 합니다.
군졸들은 한 해가 넘도록 비바람을 무릅쓰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백번을 싸운 끝에 살아 남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비록 군공(軍功)이 없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수고함을 가엾게 여겨서 보살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힘써 싸워 공을 세운 자에 대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신은 이들에게 보답할 만한 물품이 없으므로 단지 조정에서 상을 주기만을 기다리면서 격려하고 권장하는 바탕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에 감히 그들의 공로를 덮어 두지 못하고 전후로 계문하여 번거롭게 아뢰었던 것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다른 사람의 공을 훔치고 은혜를 팔아서 군사들에게 환심을 얻으려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대개 백성의 마음은 이미 떠났고 국가의 형세는 이미 글러졌으므로, 이런 방법이 아니고서는 군사들의 마음을 고무시키고 인심을 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군사를 일으킨 뒤로 조정에서는 그래도 사람이 못났다고 하여 그 사람의 말까지 폐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두루 은상(恩賞)을 내렸으므로, 사람마다 떨치고 일어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이 아직 죽지 않고 지금까지 구차스럽게 한 모퉁이나마 보전하고 있는 것은, 털끝만한 것조차도 다 조정에서 내려주신 것입니다.
다만 급보(急報)가 끊임없이 올라오고 군사 문서가 많이 쌓였으므로 해당 관서의 하리(下吏)가 미처 잘 살펴보지 못한 탓에, 공이 적은데도 먼저 녹공(錄功)되거나 공이 큰데도 녹공에 빠진 경우가 있습니다. 이에 심지어는 정병(正兵)으로서 적의 수급 하나도 베지 못하였는데도 판관(判官)에 제수되었으며, 수문장(守門將)으로서 한번 힘써 싸웠다는 이유로 목사(牧使)로 뛰어오른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노(私奴)가 왜놈 중 하나를 목베었다는 이유로 그 주인이 3품의 정직(正職)에 올랐으며, 장사(將士)가 수십 명의 왜적을 베었는데도 지금까지 한 등급을 올리는 상도 받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 밖의 온당하지 못한 일은 낱낱이 들어 말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뜻있는 선비들은 답답해하고 있고, 장졸(將卒)들은 맥이 풀려 있으면서 모두들 말하기를, ‘우리들은 해가 넘도록 창을 메고 만 번 죽기를 무릅쓰고 피나는 싸움을 하였는데도 녹공되지 않으니,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하고 있습니다. 군사들의 마음이 이러하므로 장수 된 자가 비록 날마다 독전(督戰)하지만, 전혀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서 도망하는 자가 잇따르고 있는데, 이들을 불러모으려 하여도 계책이 없습니다. 옛부터 믿음을 잃고 상 주는 것을 아끼면 비록 평상시라 하더라도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렇게 난리가 나서 망하는 때이겠습니까.
믿는 바는 중국의 군사로, 그들이 쏜살같이 내려온다면 회복하는 것은 며칠 안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 군사가 머뭇거리고 있으므로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실망하고 있습니다. 신과 같은 자는 조석간에 죽을 사람이니 무엇을 아까워하거나 돌아볼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조정이 언제쯤이나 편안하게 쉴 수 있게 될는지 알 수 없는바, 생각이 이에 미치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고 싶으나, 길이 없습니다.
본도의 흉년과 굶주림은 예전에 없던 일로서, 칼날 밑에 살아 남은 백성이 얼마 안 됩니다. 그리고 요행히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자들은 서로 모여서 도둑이 되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있습니다. 이들을 비록 잡아 죽이고는 있습니다만, 또한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데다가 곡식 종자가 한 톨도 없어서 적이 비록 물러간다 하더라도 농사를 지을 만한 형편이 전혀 못 되는바, 도내 사람들의 목숨은 적병이 오지 않더라도 반드시 남김없이 저절로 다 죽고 말 것입니다.
호남 백성들의 형편은, 꼴과 곡식을 실어 보내는 데 시달리고는 있으나 창고의 곡식이 아직은 온전합니다. 만약 군량과 곡식 종자를 각각 수만 섬씩 옮겨 온다면, 신이 비록 직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굶주린 자를 진휼하고 왜적을 막으며, 농사도 폐하지 않게 함으로써, 호남의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을 완전하게 해 국가를 회복하는 기틀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은 죽음이 있을 뿐, 다시는 손쓸 도리가 없습니다.
앞서 계하(啓下)하신 쌀과 콩 각 2천 섬은 만 명 군인의 열흘 양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조정에서 이미 중국 군사를 먹이기 위한 곡식 수만 섬을 본도에 운반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에 그 쌀과 콩이 이미 운봉(雲峯)과 남원(南原) 등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중국 군사가 끝내 고개를 넘어오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쌓아 두고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땅인들 왕의 영토가 아니며 어느 백성인들 왕의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설령 중국 군사가 넘어오지 않더라도 이것으로 굶주린 사람도 살리고 군량도 계속 대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습니까.
공명고신(空名告身), 허통(許通), 면천(免賤) 등의 항목에 대한 차첩(差帖)을 속히 계청해서 시행하여 거꾸로 매달린 듯한 위급함을 구제한다면, 만분의 일이나마 보전할 길이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 장계가 3월 4일에 마지막으로 올린 장계였다.
이노(李魯)가 직산(稷山)에 이르러서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이 임진(臨津)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들었으나, 길이 막혀서 가지 못하고는 다른 사람 편을 통해 공의 글을 보냈는데, 체찰사가 공이 보낸 글과 첩문을 보고는 즉시 계사(啓辭)를 작성해서 계청하니, 상께서 가엾게 여겨 특별히 전라도 관찰사에게 명해 2만 섬을 제급(題給)하게 하였다. 그러자 공은 종사관(從事官)을 나누어 보내 수로와 육로로 아울러 운반해 온 다음 여러 고을에 나누어 주어 제때에 씨를 뿌릴 수 있게 하였다.
공이 진주에 도착하니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었으며, 봉두난발을 한 사람들이 수백 명씩 무리를 지어 길 가에서 맞이하면서 울기도 하고 빌기도 하면서 공을 부모라고 불렀다. 이에 공은 목사 서예원(徐禮元)에게 명하여 진휼하는 일을 전담하여 관장하게 하고 죽을 쑤고 약을 달이면서 몸소 그들을 구호하였다. 그리고 판관 성수경(成守慶)에게는 군기(軍器)를 전담하여 관장하게 하고는 성을 돌아보고 군사를 검열하면서 반드시 직접 검칙하였다.
이때 역질(疫疾)이 곳곳에 만연하였으며 공에게 진휼해 주기를 바라는 백성들이 모두 성 안으로 몰려들어서 울부짖고 신음하는 소리가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였다. 이에 공은 가여운 마음에 눈물을 흘렸으며, 밥을 먹을 적에는 빈번히 숟가락을 놓으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식사를 하지 않아 병이 나면 국사는 어찌합니까?” 하자, 공은 이르기를, “어찌 다른 생각이 있어서 이러겠는가. 저절로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는다.” 하였다. 공은 날마다 문루(門樓)에 나가 앉아 있는 일을 일찍이 폐한 적이 없었는데, 막하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간하기를, “기운이 어그러지고 역질이 만연하였습니다. 비록 깊은 방 안에 계시더라도 호령을 내릴 수가 있으니, 밖으로 나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니, 공이 거절하면서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다. 어찌 피하겠는가.” 하였다.
공은 명을 받은 이래로 왜적을 쓸어내어 기운을 맑게 하지 못해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게 될까 두려워서 밤낮없이 근심하고 수고한 탓에 심열(心熱)이 몹시 심했다. 이때에 이르러 안으로 몸이 상하고 밖으로 감기가 들었던 차에 역질이 그 틈을 타고 파고들어 4월 19일에 두통(頭痛)이 생겨 점차 위독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어떤 늙은 의원이 와서 진찰해 보고는 말하기를, “이 병은 도리가 없습니다. 목숨은 시운(時運)에 관계되는 것이니 하늘인들 어쩌겠습니까.” 하였다. 박성(朴惺)과 이노(李魯)가 옆에 있다가 약을 드실 것을 청하니, 공은 약을 물리치면서 이르기를, “내 병은 약을 먹고 나을 병이 아니다. 그대들은 올리지 말라.” 하였다. 그때 아들 역(湙)도 역질에 걸려 옆 방에서 앓고 있었는데, 한번도 아들의 병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면서 항상 박성과 이노 두 사람에게 이르기를, “중국 군사가 머지않아 경내에 들어올 것인데, 어떻게 먹일 것인가? 그대들은 그 일에 대해 힘쓰라.” 하였다. 그리고 목사 오운(吳澐)이 문병을 오자, 그와 함께 말하면서 이르기를, “한번 병들어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운명인 걸 어쩌겠습니까. 다만 뜻을 이루지도 못하고 먼저 죽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비록 혼미하여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가냘픈 소리로 헛소리같이 하는 말이 모두 나라를 걱정하는 것뿐이었다. 측실 부인이 사위의 집에 와 살고 있었는데, 마침 거리가 서로 멀지 않아 여종을 보내어 병문안을 하자, 공은 손을 저어 내보내면서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였다.
이달 29일에 진주의 공관(公館)에서 졸(卒)하였다. 박성, 이노 등 제공들이 함께 곡하고 염하는 것을 주관하여 지리산(智異山) 기슭에 임시로 매장하고는 서로 목놓아 통곡하고 돌아왔다. 성 안팎에서 살려 주기를 바라면서 떠돌고 있던 사민(士民)들이 모두 허겁지겁 달려와서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흐느껴 울고 소리쳤는데, 목이 매어 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는 사방으로 흩어져 떠났는데, 마치 갈 곳조차 모르는 사람처럼 멍해져서는 말하기를, “하늘은 어찌 그리도 무심하여 우리들의 부모를 빼앗아 갔는가. 모두 다 끝나버렸으니 우리 목숨도 다했다.” 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원근 사람들이 모두 놀라 통곡하기를 마치 골육의 초상이라도 당한 것처럼 하였으며, 길을 가는 나그네들조차도 모두 침통한 얼굴로 서로 조상(弔喪)하면서 말하기를, “충신이 서거했고 열사가 죽었으니, 나라는 누구를 의지하고 절의는 어디에 의탁하겠는가.” 하였다.
공이 돌아가신 지 겨우 두 달 만에 진주성이 함락당하였고, 조금 완전하던 낙동강 오른쪽 지역의 고을들도 모두 도륙당하여 한 도의 보장(保障)이 되던 지역이 왜적들의 소굴이 되었다. 그러자 식자들이 길게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하늘이 만약 공을 조금만 늦게 데려갔더라면 어찌 이 지경에야 이르렀겠는가.” 하였다. 6월 초에 역(湙)도 세상을 떠났다.
공의 맏아들 집(潗)이 사잇길을 통해 남쪽으로 와 묘소 아래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공의 묘소가 여러 차례 왜적의 칼날을 겪으면서도 끝내 침범당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늘이 도와 주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지, 인력으로 그런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해 11월에 비로소 관을 받들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지나는 각 고을마다 사민들이 비록 난리를 당한 뒤끝이었지만 모두 지성껏 슬퍼하였으며, 분주히 힘을 써 주었다. 12월 경신일에 안동부(安東府) 북쪽에 있는 가수천(嘉樹川)의 감좌 오향(坎坐午向) 언덕에 장사하였다.
공의 자질은 빼어나서 영특하였고, 기품은 강하고 방정하였으며, 기질은 곧으면서 꿋꿋하였고, 재주는 민첩하면서 호탕하였으며, 기국(器局)은 단정하면서 성실하였고, 식견은 뛰어나서 원대하였다. 어려서부터 격앙되어 지취(志趣)가 범상하지 않았으며, 장성해서는 더욱더 강개하여 좋은 말을 들으면 힘써 행하였다. 몸가짐은 반드시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았고, 행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충서(忠恕)를 위주로 삼았다. 다른 사람의 착한 행실을 들으면 이를 칭찬하면서 흠모하였고, 다른 사람의 악함을 들으면 마치 자신에게 물들 것처럼 피했다.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어서는 마음으로 기뻐하고 성심으로 감복하여 떠받들고 믿으면서 본보기로 삼았다. 이에 학문에 본말(本末)이 있음을 알아서 취하고 버리는 것이 이미 정해져 있었으며, 비록 한가하여 마음대로 쉴 수 있는 때에도 감히 긴장을 풀고서 마음내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 일찍이 이르기를, “내가 평생에 걸쳐서 얻은 한마디 말은, ‘나의 허물을 공격하는 자는 나의 스승이고, 나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자는 나를 해치는 자이다.[攻吾過者 是吾師 談吾美者 是吾賊]’라는 것이다.” 하였는데, 이 열네 글자로써 항상 자신을 책려하였다. 또 ‘관홍(寬弘)’이라는 두 글자를 벗에게 크게 써 달라고 하고는, 이를 벽에다가 붙여 놓고 보면서 반성하여 가슴속에 새겨 명심하는 뜻을 붙였다.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나 퇴계 이 선생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가장 애독하여 마음속으로 깊이 인식하고 가슴에 새겨 두어 몸가짐의 표적으로 삼았는데, 마음을 가라앉혀 음미하면서 침식까지 잊어버렸다. 첫닭이 울면 일어나서 반드시 한두 편을 뽑아 왼 뒤에야 비로소 등불을 밝히고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다음 종일토록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강독을 할 즈음에는 송연(竦然)하기가 마치 선현을 직접 대한 듯한 자세로 앉아서 정밀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분변하며 조금도 방과(放過)하는 바가 없었다. 《근사록(近思錄)》이나 《심경부주(心經附註)》 같은 책도 모두 애독하면서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제생(諸生)들 가운데 배움을 청하는 자가 있으면 그 뜻을 자세히 분석하여 깨우쳐 주되, 온 마음을 쏟아 간절하고 지극하게 가르쳐 주었는데, 반드시 그 양단(兩端)을 다하였다. 문장(文章)을 지음에 있어서는 명백하고 전아하여 당초부터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한 험하고 기괴한 말을 쓰지 않았으며, 평이하고 명확함이 저절로 다른 사람이 미칠 수가 없었다. 모든 저술을 함에 있어서는 붓을 들면 곧바로 문장이 이루어졌다. 시율(詩律) 역시 담박하고 순하였는데, 특히 오언 고시(五言古詩)를 잘 지어서 도연명(陶淵明)이나 소동파(蘇東坡)의 시체(詩體)를 깊이 터득하였다.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미처 선부인(先夫人)을 봉양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통한으로 여겼으며, 판서공(判書公)을 봉양함에 있어서는 멀리 학문을 배우러 가거나 벼슬살이를 하러 가는 때를 제외하고는 판서공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봉양을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일정한 한도가 없었고, 뜻을 받듦에 있어서는 반드시 어김이 없기를 생각하였으며, 항상 예로써 섬긴다는 가르침에 미진한 바가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조정 반열에 나아감에 미쳐서는 대부분 시종신으로 있었으므로 고을 수령으로 나가서 판서공을 봉양하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그러자 판서공이 이르기를, “네가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 나의 뜻이다. 그러니 너는 나를 봉양하는 것을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여 한 집안에서 화락하게 지내었는바, 다른 사람들이 그 사이를 이간질할 수 없었다. 가산을 일구기를 일삼지 않아 집에 쌀이 자주 떨어졌다. 이에 판서공이 별도로 종을 떼어서 주자, 공이 굳이 사양하면서 여러 형제들 중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사양하였다.
큰누이가 남편을 잃고는 슬픔이 지나쳐서 뒤따라 죽었는데, 고아가 된 두 어린 아들이 외가에 와서 살았다. 이에 공은 가르치고 기르기를 모두 지극하게 해 한결같이 자기 자식처럼 하였다. 누이의 가업을 노비에게 떠맡겼다가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역시 그 집의 가산을 잘 관리해 주어 가업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하였다. 초상을 치르는 날에 친구들이 부의한 쌀과 포목 등속을 한 창고 안에 보관하였다가 장사 지내고 제사 지내며 비석을 세우는 등의 비용으로만 쓰면서 터럭만큼도 사사로이 쓰지 못하게 하였다. 또 죽은 형과 누이의 두 묘소에 가난해서 비석을 세울 수가 없을까 염려하여 남은 돈을 모두 그들에게 주었다.
매번 동기간이 따로따로 나뉘어 사는 것이 한탄스러워 일찍이 환산사조(桓山四鳥) 시를 지어서 자신의 뜻을 붙였다. 큰형님, 둘째 형님, 셋째 형님, 막내가 서로 뒤를 이어서 모두 돌아가시자, 애통한 마음이 점점 심해졌는데도 장사를 치르는 것을 종시토록 한결같이 돌보아 주었다.
중부(仲父)께서 종기를 심하게 앓아 몹시 위독하였는데, 곁에서 간병할 만한 자제가 없었다. 이에 공은 약방문을 묻고 의원을 맞이해 오기를 몇 달 동안이나 몸과 마음을 다하였는데, 무더위에도 조금도 해이하게 하지 않았다.
종제(從弟)가 일찍 외롭게 되어 의탁할 데가 없게 되자 각별히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어 그로 하여금 생업을 잃지 않게 하였다. 한 누이동생이 가난하여 대신 부릴 종을 둘 수가 없자, 자기 집의 여종 셋을 그에게 떼어 주었다. 얼숙(孼叔)이 궁핍해서 살아갈 수가 없게 되자 또다시 여종 둘을 주었다. 이 때문에 나눠 받은 종들이 거의 다 없어졌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내외의 집안 친족들 가운데 스스로 먹고 살 수 없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모두 다 보살펴 주었다. 얻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모두 다 나누어 주었는데, 반드시 가난하여 궁핍한 사람부터 먼저 나누어 주었고, 반드시 온 정성을 다하여 보살펴 주었으며, 또한 마을 사람들에게까지 나누어 주었다. 그러므로 모두들 감격해하면서 의지하였다.
초상을 치름에 있어서는 슬픔을 다하였고, 제사를 받듦에 있어서는 정성을 다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상례(喪禮)는 사람의 도리에 있어서 큰 예법이다. 사람의 자식 된 자로서는 반드시 성실하고 반드시 미더웁게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동방에서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 두 선생께서 여묘살이를 하면서 상을 마친 이래로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보고 감동하였으며,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과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등 여러 선생들께서도 역시 따라 행하였다. 그러니 비록 옛 예법은 아니라 하더라도 효자가 부모의 체백(體魄)이 안장된 곳을 차마 훌쩍 떠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지극한 정에서 나온 것이다. 실당(室堂)으로 반혼(返魂)하는 것이 비록 예경(禮經)에 실려 있는 바른 예법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중인(中人) 이하의 사람이 능히 오랫동안 이를 지켜서 게으르게 하지 않는 자가 드물며, 심지어는 내외간이 함께 거처하기도 하고 집안일을 돌보기도 한다. 이와 같이 하면서도 오히려 여묘살이하는 것은 바른 예가 아니며, 반혼하는 것이 예경과 합치된다고 하니, 상제(喪制)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세상의 도의가 글러진 것이 어찌 괴이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제사를 지낼 적에는 반드시 목욕하고 재계하였으며, 제수 물품을 직접 살펴서 정결하게 차리기를 힘썼다. 그리고 흉하고 더러운 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으며, 대청을 청소하고 제기(祭器)를 진설함에 있어서는 마치 조상들이 와서 앞에 계신 듯이 하였다. 혹 먼 지방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위패를 모셔 놓고서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일찍이 봉선제의(奉先諸儀) 및 길흉경조제규(吉凶慶弔諸規)를 저술하였는데, 한결같이 주자(朱子)의 예법을 근본으로 삼고 여러 유자들의 의론을 참고하여, 예속(禮俗)이 서로 맞고 정문(情文)이 모두 갖추어지게 해 영구한 규식으로 정하였다. 그런 다음 문중의 자제들로 하여금 준수해서 행하도록 하였는데, 오래 지나도 폐단이 생기지 않았다.
매번 정초와 동지, 초하루와 보름날 및 집안 어른의 생신날에는 자제들을 당 위에 모아 순서대로 서서 참알(參謁)하게 하였으며, 노비들은 정초에 순서대로 서서 한꺼번에 절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어른을 섬김에 있어서 읍양(揖讓)하는 예를 알게 되었고, 집안을 다스림에 있어서 법도가 있게 되었다.
자녀들은 은혜로써 기르고 의리로써 가르쳤으며, 노비들은 관대함으로써 거느리면서 정성스럽고 부지런히 하도록 권려(勸勵)하였다. 이에 내외간에는 구별이 있었고, 문정(門庭) 안은 정숙하였다. 자제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엄준하게 꾸짖은 적이 없고 순순하게 타일러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허물을 알아서 고치도록 하였다.
일찍이 자제들에게 훈계하여 이르기를, “학문을 하는 자는 마땅히 심학(心學)을 우선으로 하여야 한다. 만약 과거 공부만을 힘써서 한다면, 비록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그 본심은 이미 먼저 이욕(利欲)에 빠져들게 되니,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어느 날엔가는 검(劍)을 나누어 주면서 이르기를, “너희들은 내가 검을 나누어 주는 뜻을 알겠는가. 모름지기 이 검으로 의(義)와 이(利)의 빗장을 깨뜨려서 취하고 버릴 것을 구별하기 바란다.” 하였다.
집안에 있을 적에도 반드시 관복(冠服)을 갖추어 입었으며, 오직 책을 보거나 자제들을 가르치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것으로 일삼았는데, 조용하게 지내면서 자신을 검칙하여 일찍이 다른 사람과 차이가 있음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에 벼슬하여 이리 얽히고 저리 얽혀 어지러운 일을 당한 즈음에 이르러서는 영특한 기운을 발휘하여 떨치고 정밀함과 굳셈을 더욱더 가하여 의리로써 결단하면서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이에 비록 옛날에 용맹스럽기로 소문났던 맹분(孟賁)이나 하육(夏育)조차도 감히 그 기상을 빼앗지 못할 정도였으나, 그런 가운데도 정성과 성심이 알연히 피어났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수양을 쌓은 바가 더욱 공평하고 바르게 되어서 젊은 날의 용감하고 엄준한 태도가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쳐다보면 저절로 공경하는 마음이 우러나서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공의 말에 이르기를, “사람이 일을 조처함에 있어서는 오직 마음에 부끄럽지 않게 할 뿐이다. 어찌 자신을 굽혀서 다른 사람의 말을 따라서야 되겠는가. 내 평생에 매번 도를 바르게 하여 실천하기를 생각하였으니, 비록 죽더라도 아무런 후회가 없다. 그런데도 오히려 외물(外物)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 이것은 나의 강단이 부족한 탓으로 삿된 뜻에 미혹된 것이다.” 하였으며, 문인들에게 가르치면서는 이르기를, “배우는 자가 걱정할 바는 오직 뜻을 세우는 것이 성실치 못한 데 있는 것으로, 재주가 혹 부족한 것은 걱정할 바가 아니다. 재주가 없더라도 군자가 되기에는 방해되지 않으며, 재주가 있더라도 소인으로 귀결됨을 면치 못하니, 이는 단지 학문을 함에 있어서 뜻을 세우는 것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덕성을 함양하고 사욕을 이겨내는 공부에 힘을 쏟지 않으면서 이름만 학자라고 하는 것이 예로부터 내려오는 공통된 걱정거리다. 이것은 싹을 기른다고 하면서 북돋아 주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며, 잡초를 제거한다고 하면서 김매기를 일삼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무자기(毋自欺)’ 세 글자는 모름지기 종신토록 명심하여야 하는 것이다.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함에 있어서 한결같이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 이는 모두가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하였다. 문인 가운데 어떤 사람이 터벅터벅 걸어서 들어와 뵙는 것을 보고는 꾸짖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첫 번째 발자국을 떼어 놓으면서는 마음이 첫 번째 발자국을 떼어 놓는 데 있고, 두 번째 발자국을 떼어 놓으면서는 마음이 두 번째 발자국을 떼어 놓는 데 있다.’고 하였으니, 이를 알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향당(鄕黨)은 부형과 종족들이 살고 계시는 곳이니 공경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으며, 향중(鄕中)에서 집강(執綱)하는 사람을 만났을 경우에는 그가 아무리 나이가 어리더라도 반드시 예를 올렸다.
일찍이 어떤 재신(宰臣) 집의 장사에 가니 온 조정의 경상(卿相)들이 모두 모였는데, 방상(方相)이 굿놀이를 하면서 온갖 모양새를 짓자,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이를 쳐다보면서 웃고 손뼉 쳤다. 그런데도 공만은 엄숙한 얼굴로 짐짓 못 본 체하니, 여러 재신들이 부끄러워하면서 탄복하였다. 또 일찍이 아는 친구의 성복(成服)에 갔는데, 빈객이 아주 많았으며, 조정 관원이 태반이었다. 한참 뒤에 문지기가 김 정언(金正言)이 왔다고 말하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바삐 자리를 피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한 언관(言官)이 오는데 어찌하여 이렇게들 좌불안석인가?” 하니, 모두들 말하기를, “김성일은 담이 굳세고 혀가 곧으니 무심코 행동하다가 그에게 흠을 잡히고 싶지 않다.” 하였다. 그런데 막상 공이 들어와서 조문을 마치고 난 뒤에 온화한 태도로 말을 건네고 가자, 모두들 이르기를, “온화하고 의젓하기가 이와 같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하였다.
일찍이 정고(呈告)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다가 길가에서 말에게 꼴을 먹이고 있던 참에 밭고랑에 앉아 있는 자를 보았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저 사람은 효자다.” 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곧 그를 청하여 서로 인사하였는데, 그 사람은 촌에 사는 천인이었다. 그런데도 마루 위로 오르게 하여 손님에 대한 예로 대하니, 어떤 객이 괴이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공이 답하기를, “착하지 못한 사람은 경상(卿相)에 오른 귀인이라 할지라도 진실로 보잘것이 없으나, 착한 행실이 있다면 어찌 미천하다 하여 소홀히 대하겠는가.” 하였다.
관북(關北) 지방을 순시할 적에 뭇 번호(藩胡)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한 오랑캐의 용모와 행동거지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것을 보고는 물어보니, 효자였다. 이에 곧바로 술과 음식을 넉넉하게 주면서 특별히 상을 주어 장려하니, 여러 오랑캐들이 모여들어 보고서는 모두 고무되었다.
어떤 고을 수령 하나가 일찍이 명절날에 토산물을 잔뜩 실어 서울로 올려보내면서 조그만 책자에 명사(名士)들의 집을 두루 기록하였는데, 공의 이름만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답하기를, “우리 고을 태수께서 나를 보낼 때 김성일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경계시켰다.” 하였다.
사류(士類)에게 빌붙으면서 공에게 잘 대해 주는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공 역시 그를 잘 대해 주면서 여러 해를 친하게 지냈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 믿을 만한 벗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 주자, 공은 깜짝 놀라면서 이르기를, “나는 그런 소문을 미처 듣지 못하였다.” 하고는, 드디어 그와 절교하였는데, 세 번이나 찾아왔는데도 만나 보지 않았다.
변무(辨誣)를 주청(奏請)하는 사신 행차에 서장관(書狀官)의 직임을 맡아서는 온 정성을 다 기울이고 갖은 수고를 다하여 비로소 선원계보(璿源系譜)의 치욕스러움을 씻었다. 이에 드디어 나라를 빛내는 경사를 열었으나, 나라 안에서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공은 그 공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역사책에 전해지던 것도 병화에 다 타버려 전해지지 않게 되었으니, 어찌 오늘날의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바다 바깥의 거만한 오랑캐인 일본에 사명을 받들고 감에 미쳐서는 낌새를 살피면서 주저하는 바가 없었고, 조행(操行)은 평소부터 정해진 듯하였다. 그들의 흉악함과 교활함이 천태만상이고 변환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어 죽고 사는 것이 한순간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도 바름을 지켜 흔들리지 않으면서 정신과 기운을 더욱 가다듬었는바, 늠름하여 범할 수 없는 기상이 말과 안색에 항상 흘러 넘쳤다. 그러면서 사리는 반드시 털끝만한 것이라도 자세히 살피고, 의리는 반드시 어렵고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다투어, 반드시 우리나라의 위엄이 더욱 존중되어 감히 만홀히 대하지 못하게 하고자 하였다.
상사(上使) 황윤길(黃允吉)과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이 혹 위엄을 조금은 낮추라고 은근히 풍자했는데도 공은 의연하게 움직이지 않아, 마침내 섬 오랑캐들이 감격하여 칭찬하면서 탄복하게 하였다. 이에 지금까지도 왜인들이 김성일과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 선생을 나란히 칭찬하고 있다.
임진년에 왜놈들이 해주(海州)에 쳐들어왔을 적에는 부용당(芙蓉堂)에 걸려 있는 공의 제영(題詠)을 보고 나머지 현판은 다 철거하면서도 공의 시가 씌어 있는 현판만은 남겨서 채색 비단으로 싸 두었다. 이에 해주의 관청(官廳)과 민가는 다 불탔는데도 부용당만이 홀로 불길을 면할 수 있었다.
우리 동방에 전고에 없던 변란이 통신사의 행차가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발생하였다. 이에 공이 당초에 진정시키기 위해 한 말이 드디어 공을 화로 몰아넣는 계제가 되어 일을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되자, 공은 조용히 심리(審理)를 받으러 나가면서 일찍이 스스로 해명한 적이 없었다. 그 뒤에 성상께서 통촉하여 위엄을 거두었는데도 조금도 기쁜 빛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나라를 위하여 걱정하는 마음만 간절하였다.
온 나라가 보존되느냐 망하느냐 하는 때를 당하여서는 초유(招諭)하고 정토(征討)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이때는 민심이 이미 흩어지고 시사는 이미 글러져, 마치 광란의 물결이 휩쓸고 들어오는데도 막을 도리가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이에 한때의 중대한 명망을 짊어진 자라 할지라도 창졸간에 허둥지둥하여 자신의 재주를 펴지 못하고, 한 방면을 전적으로 떠맡은 자들도 모두 목을 움츠린 채 물러나고 있었다.
공은 경연(經筵)의 노숙한 유신(儒臣)으로서 군진(軍陣)의 일에 대해서는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데다가, 도내에는 적의 침략을 받지 않은 성한 곳이 없었고, 수하에는 한 자 한 치의 병기도 없었다. 그런데도 오직 피를 토하는 정성으로 사기를 고무시켜서 한 조각 붉은 마음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 주었다. 말을 할 적에는 반드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고, 글을 쓸 적에는 반드시 눈물을 섞어서 썼다. 이에 충의로운 마음을 가슴에 품고 있는 자들이 기뻐서 달려나오기에 겨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완악하고 사나운 자들조차도 모두들 흔쾌히 달려나와서 따랐으며, 도망쳤던 장수나 흩어졌던 사졸들까지도 모두 분발하여 일어나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자 하였다.
공은 조처하고 시행하는 것이 무엇이나 기의(機宜)에 알맞았고, 상벌을 행하고 호령을 내리는 것이 백성들의 뜻을 크게 감복시켰으며, 좌우로 수응하는 것이 정연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두가 잔멸된 나머지에서 수습하고, 불타 버린 가운데에서 다시 소생시켜, 낙동강 오른쪽 일대를 보전해 당시의 거묵(莒墨)이 되게 하였고, 나라를 회복시킬 바탕을 만들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장성(長星)이 지레 떨어져서 큰 훈업(勳業)을 다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인륜의 기강을 부지시키고 한 지방을 버틸 수 있게 하였으니, 그 공은 싸움터에서 상처를 입으면서 싸운 것과는 나란히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대개 영남(嶺南)이 오랑캐 땅이 되지 않은 것이 비록 의사(義士)들이 의병을 일으킨 공이라고는 하지만, 의병들이 종시토록 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실로 공이 성의를 가지고 일치단결시킨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고 진주성이 당초에 함락당하지 않은 것은 비록 김시민(金時敏)이 힘껏 싸운 공이라고는 하지만, 그 싸움을 지휘하고 책응하는 것은 전적으로 공의 계책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살아 있을 적에는 온 도 사람들이 장성(長城)처럼 의지하였고, 죽은 뒤에는 대소 사민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조상하였다.
공은 죽는 날에 임해서도 집안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으면서 오직 나랏일에 대해서만 온 마음으로 걱정하였다. 죽은 뒤에는 조야(朝野)에서 모두들 칭찬하고 탄복하면서, “난리 이후의 진실한 신하로는 마땅히 공이 첫째이다.” 하였다. 그러니 이름과 실제가 감응하는 이치가 참으로 속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식자(識者)들은 공을 두고 이르기를, ‘평소에나 전시에나 행동이 일치하여 대절(大節)에 임해서도 빼앗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실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하여 하는 말이 아니다.
공이 일찍이 개연히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나 대도(大道)에 대해 듣지 못하고서 술 취하거나 꿈속과 같은 상태로 살다가 간다면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다행히도 일찌감치 의귀(依歸)할 곳을 얻었는데, 학업을 끝마치지 못하고 명리(名利)의 굴레에 씌여 그대로 늙어 버리고 말았는바, 한 생각이 이에 미칠 적마다 두려움으로 땀이 흘러내린다.” 하였다.
공은 일찍이 외진 골짜기에 집을 짓고 당호(堂號)를 내어 걸고는 노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살 곳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조용한 곳에서 한가로이 지내면서 학문 공부에 뜻을 오로지해, 위로는 선사(先師)께서 남기신 학문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후생(後生)들이 공부하는 길을 열어 주려고 하였다. 이것이 공의 평소의 뜻으로, 잠시도 이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시사(時事)가 어렵고 근심스러우며 군신(君臣)의 의리가 중대하므로 억지로 조정에 나가 있으면서 거취를 자유로이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대란(大亂)을 만나 근심과 노고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이에 훈업(勳業)은 빛나게 드러났으나, 지원(志願)은 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공의 남은 한이 아니겠으며, 사도(斯道)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을사년(1605, 선조 38)에 조정에서 선무공신(宣武功臣)을 녹훈(錄勳)하였는데, 공은 원종(原從) 1등에 녹훈되어 가의대부(嘉義大夫)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부모도 아울러 관작이 추봉(追封)되었다. 논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공의 공훈과 충렬이 저와 같은데도 경인년(1590, 선조 23)과 을사년(1605, 선조 38)에 모두 녹훈되지 못하였다.” 하면서, 모두들 괴이하게 여겼다. 그러나 공의 도덕과 훈업은 그대로 있는 것이어서 우주에 머물러 무궁하게 드리울 것이니, 녹훈이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가 공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고을 사람들이 임하현(臨河縣)의 서쪽 천전리(川前里)에 서원을 세우고 사당을 세워 봄가을로 향사(享祀)하였는데, 사당의 이름은 존현사(尊賢祠)이고 서원의 이름은 임천서원(臨川書院)이다.
공이 평소에 벼슬살이하면서 받은 직첩(職帖)이나 조정에서 논열(論列)하거나 간쟁(諫諍)한 글, 경연에서 올린 말, 집에 있으면서 한 언행(言行)과 지은 시문(詩文) 가운데서 후세에 전할 만한 것들은 모두 병화에 없어졌다. 이에 단지 유고(遺稿) 몇 권과 《해사록(海槎錄)》 3편이 집에 보관되어 있으며, 또한 산실된 나머지에서 수습한 것이 백분의 일 정도만 겨우 보존되어 있을 뿐이다. 이른바 《해사록》 3편은 일본에 사신의 명을 받들고 갔을 때 지은 시문인데, 난리 중에 잃어버렸다가 3년 뒤에 어떤 사람이 우연히 여관집에서 발견하여 얻었으니, 이 역시 기이한 일이다.
공의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고려 때 태사(太師)를 지낸 권행(權幸)의 후손이며, 전력부위(展力副尉) 권덕황(權德凰)의 따님으로, 정부인(貞夫人)에 추봉되었다.
아들은 셋으로, 장남 집(潗)은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이고, 역(湙)과 굉(浤)은 종사랑(從仕郞)이다. 딸은 셋으로, 장녀는 장사랑(將仕郞) 홍수약(洪守約)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경주 부윤(慶州府尹) 권태일(權泰一)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김영조(金榮祖)에게 시집갔다. 측실 소생 아들은 넷인데, 잠(潛)은 훈도(訓導)이고, 그 나머지는 심(深), 침(沈), 명(溟)이며, 딸은 둘로 장녀는 이사첨(李士瞻)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정연종(鄭連宗)에게 시집갔다.
집은 아들 넷을 낳았는데, 시추(是樞)는 생원이고, 시권(是權)은 진사이고, 다음은 시강(是杠)과 시절(是梲)이며, 딸은 넷으로, 장녀는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오여벌(吳汝橃)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권지 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김연조(金延祖)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권상충(權尙忠)에게 시집갔고, 사녀는 김석중(金錫重)에게 시집갔다. 역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권태정(權泰精)에게 시집갔으며, 측실 아들은 시가(是榎)이다. 굉은 아들이 없어서 형의 아들 시절을 후사로 삼았으며, 딸은 둘로, 장녀는 생원 김응조(金應祖)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진사 신열도(申悅道)에게 시집갔다. 내외의 손(孫)과 증손(曾孫)은 모두 90여 명이다.
나 정구(鄭逑)는 공을 안 지가 30년이고, 공의 초상에 곡한 지가 지금 또 25년이 되었다. 그런데도 청수하고 엄정한 공의 의표(儀表)와 곧아서 변치 않는 공의 지조(志操)를 항상 접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공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난다. 공의 아들 집과 공의 문인 최현(崔晛)이 함께 최현과 공의 조카 김용(金涌)이 찬한 공의 행적(行蹟) 각 한 통씩을 가지고 나의 집으로 찾아와 말하기를, “묘지(墓誌)에 새길 글과 묘비(墓碑)에 새길 글을 장차 청하려 하는데, 아직까지 행장이 없습니다. 이 행적에서 대략 뽑아서 엮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병에 걸려 붓을 잡았다가 도로 멈춘 지가 또 3년이 지나갔다. 나는 죽을 때가 다 된 몸이라서 포기한 채 살펴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더욱더 부지런히 찾아오고 더욱더 굳게 청하여, 300리나 되는 먼 길을 오간 것이 10여 차례나 되었다. 그리고 가서는 반드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왔으며, 와서는 몇 달을 머물면서 돌아가지 않았다. 어버이를 드러내고자 하는 그들의 정성이 신명(神明)과 통할 수 있는바, 공의 자식답다고 칭할 만하다. 그러니 내가 비록 온갖 생각이 다 사그라든 상태이지만, 어떻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억지로나마 힘을 내어서 예전에 잡았던 붓을 다시 잡은 다음 최현과 김용 두 사람이 지은 글을 대충 가다듬어 행장을 지으니, 이로써 후세에 입언(立言)하는 군자를 기다린다.
만력(萬曆) 정사년(1617, 광해군 9) 겨울 10월 경술일에 가선대부(嘉善大夫) 행(行)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정구(鄭逑)는 삼가 행장을 짓는다.

[주D-001]전패(殿牌) : 각 고을의 객사(客舍)에 ‘전(殿)’ 자를 새겨 세운 나무패를 말한다. 이것은 임금을 상징하는 것으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그 고을의 관원이 모두 모여 배례(拜禮)하였는데, 이를 훼손하면 불경죄(不敬罪)를 받아 본인은 물론 수령과 그 고을까지 처벌받아 강등되기도 하였다.
[주D-002]봉교(奉敎)로 …… 마디였다 : 이 부분의 두주(頭註)에 “봉교로 승진한 것과 상소를 올린 두 조항은 연보(年譜)를 참고하라.” 하였다. 《학봉집》 부록 제1권 연보 부분의 두주(頭註)를 보면, “언행록(言行錄)에 의거하면 봉교로 오른 것과 상소를 올린 두 조항은 마땅히 신미년 조에 들어가야 하며, 상소의 내용도 연보와는 조금 차이가 난다. 이는 대개 소본(疏本)이 당시에 난고(亂藁) 속에 있어서 나오지 않은 탓에 행장(行狀)이나 신도비(神道碑)를 지을 때 미처 대조하지 못하였는데, 연보에서는 그것을 그대로 썼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하였다.
[주D-003]철면어사(鐵面御史) : 강직하고 사심이 없는 관원을 가리킨다. 송 나라 조변(趙抃)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있으면서 권귀(權貴)들도 피하지 않고 탄핵하였는데, 목소리가 늠름하여 사람들이 철면어사라고 하였다. 《宋史 卷316 趙抃列傳》
[주D-004]4월 : 이 부분의 두주(頭註)에, “‘사월(四月)’ 위에는 마땅히 ‘경진(庚辰)’이란 두 자가 있어야 한다.” 하였다. 번역은 두주를 따랐다.
[주D-005]사직(社稷)을 …… 합당하겠는가 : 조정에 있게 해야지 지방 고을 수령으로 보내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장유는 한(漢) 나라의 양리(良吏)였던 급암(汲黯)의 자이다. 급암이 동해 태수(東海太守)가 되었을 때 몸에 병이 있어서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누워서 다스렸는데도 동해가 아주 잘 다스려졌다. 그 뒤에 회양(淮陽)이 잘 다스려지지 않자 무제(武帝)가 특별히 급암을 보내어 다스리니, 회양 역시 잘 다스려졌다. 《漢書 卷50 汲黯傳》
[주D-006]수교(修校) : 이 부분의 소주(小註)에, “어떤 본에는 ‘수교(讎校)’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07]공도보(孔道輔)가 …… 말았습니다 : 공도보는 송(宋) 나라 사람으로 공자(孔子)의 45대손이다. 인종(仁宗) 때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갔는데, 거란에서 연회를 베풀면서 배우로 하여금 공자에 관한 놀이를 하게 하니, 공도보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거란측에서 다시 자리로 나오게 하여 사과하기를 요구하자, 공도보는 화를 벌컥 내면서, “중국과 북조(北朝)가 통호(通好)를 함에 있어서는 예의로 서로 접하는 법인데, 지금 배우 따위가 선성(先聖)을 모욕하는데도 금지시키지 않았으니, 이것은 북조에서 잘못한 것이다. 내가 어찌 사과하겠는가.” 하니, 거란의 군신들이 아무 말도 못하였다. 《宋史 卷297 孔道輔列傳》
[주D-008]날마다 보내어[日遣] : 이 부분의 두주에, “인재(認齋) 최현(崔晛)이 지은 언행록(言行錄)에는 ‘일견(日遣)’ 위에 ‘상사서장(上使書狀)’이라는 네 글자가 더 있다.” 하였다.
[주D-009]제상(堤上)의 화(禍) : 신라 때 박제상(朴堤上)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신라 왕의 동생인 미사흔(未斯欣)을 탈출시켜 신라로 돌려보낸 뒤 자신은 억류되어 있다가 피살당한 일을 말한다.
[주D-010]호담암(胡澹庵) : 담암은 송 나라 호전(胡銓)의 호이다. 남송(南宋)의 정신(廷臣)으로, 고종 때 추밀원 편수(樞密院編修)로 있으면서 진회(秦檜) 등이 금 나라에 대한 유화책(柔和策)을 주장하자, 봉사(封事)를 올려 진회를 목벨 것을 주장하였다가 폄관(貶官)되었다.
[주D-011]광국훈(光國勳) : 선조 때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훈명(勳名)이다.
[주D-012]기축년의 변고(變故) : 선조 22년(1589)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옥사를 말한다. 이해에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 등이 정여립 등이 모반하였다고 고변(告變)함으로써 옥사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 옥사로 인해 이발(李潑), 백유양(白惟讓), 최영경(崔永慶) 등이 처형되었으며, 정언신(鄭彦信), 정개청(鄭介淸) 등이 유배되었다.
[주D-013]형적도 …… 뒤집어씌웠으니 : 기축옥사가 일어나기 전에 천안(天安)에 길삼봉(吉三峯)이란 유령 인물이 있었는데, 정여립(鄭汝立)이 황해도에다가 “길삼봉이 신병(神兵)을 거느리고 지리산에도 들어가고 계룡산에도 들어간다.”는 말을 퍼뜨려 민심이 흉흉하였다. 그 뒤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최영경의 호가 삼봉(三峯)이었으므로 최영경을 바로 길삼봉이라고 지목하여 처형하였다.
[주D-014]삼원(三元)의 달 : 연, 월, 일이 처음 시작되는 날인 정월 초하루로, 여기서는 정월달을 말한다.
[주D-015]인정가(人情價) : 관청에 구실을 바칠 때 아전들에게 수수료 조로 주기 위하여 덧붙여 내는 것을 말한다.
[주D-016]작지가(作紙價) : 구실을 바칠 때 문서를 작성하는 종이 값으로 덧붙여 내는 것을 말한다.
[주D-017]주인(主人) : 나라에 공물(貢物)로 바치는 물품을 주관하여 바치는 사람을 말한다. 민간인 가운데에서 주인을 선정하여 각 관아에서 물건 값을 미리 준 다음 이들에게 물건을 사서 바치게 하였다.
[주D-018]춘추(春秋)에는 …… 보이었습니다 : 《춘추》 희공(僖公) 20년 조에, “20년 봄에 새로 남문을 지었다.” 하였는데, 그 전(傳)에, “20년 봄에 새로 남문을 지었다고 한 것은 지을 때가 아니었음을 밝혀 말한 것이다. 무릇 문을 짓고 다리를 놓는 것은 제때에 해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19]당(唐) 나라의 목요(木妖) : 목요는 목가(木稼)로, 나뭇가지에 얼음이 얼어붙어서 마치 갑옷을 입은 듯한 형상을 한 것인데, 나라에 병란이 일어날 조짐을 뜻한다. 당 나라 개원(開元) 29년 겨울에 몹시 추워서 나뭇가지에 얼음이 얼어붙었는데, 영왕 헌(寧王憲)이 보고는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세속에서 말하는 목가(木稼)이다.” 하였다. 《舊唐書 卷95 睿宗諸子列傳》
[주D-020]포흠(逋欠) : 관가의 물품을 사사로이 쓰는 것을 말한다.
[주D-021]해유(解由) : 관원이 갈릴 때 후임자에게 사무를 인계하고 그 내용을 적어서 상관에게 보고하여 책임의 면제를 청원하는 일이나, 또는 상관이 갈려 가는 관원에게 책임을 면제하여 준 증서를 말한다.
[주D-022]천경(踐更) : 번갈아 가면서 교대하는 것을 말한다.
[주D-023]채수(債帥) : 뇌물을 바치고 장수가 된 사람을 기롱하여 이르는 말이다.
[주D-024]삼지재상(三旨宰相) : 무능한 재상을 비웃는 말이다. 송(宋) 나라 때 왕규(王珪)가 재상으로 있었던 16년 동안에 한 가지도 훌륭한 계책을 내지 못하면서, 왕에게 나아가서는 “성지(聖旨)를 정하십시오.” 하고, 왕이 가부를 정하면 “성지를 알았습니다.” 하였으며, 물러나서는 일을 품의한 자에게 “이미 성지를 얻었다.” 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삼지재상’이라고 하면서 비웃었다. 《宋史 卷312 王珪列傳》
[주D-025]장마언관(仗馬言官) : 화를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직간하지 못하는 언관을 비웃는 말이다. 장마는 임금의 의장마(儀仗馬)이다. 당(唐) 나라 때 권신(權臣) 이임보(李林甫)가 간관들이 말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협박하기를, “그대들은 입장(立仗)한 말을 보지 못하였는가. 소리만 지르면 쫓겨나는 법이다. 그대들도 내가 하는 일에 말썽을 부려서는 안 된다.” 하였다. 《新唐書 卷223 李林甫列傳》
[주D-026]추구(芻狗) : 미천하여서 쓸모 없는 물건이나 말을 말한다. 본디는 짚으로 만든 개로, 옛날에 제사를 지낼 때 쓰던 것인데, 제사를 마치고 나면 쓸모가 없어서 내버렸다.
[주D-027]하루 …… 있겠으며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천하에 잘 자라는 생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루 동안 햇볕을 쬐고 열흘 동안 춥게 하면 능히 제대로 자랄 수가 없다.” 하였다.
[주D-028]제(齊) 나라 …… 있겠습니까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한 명의 제 나라 사람이 대부의 아들에게 제 나라 말을 가르치더라도 여러 초 나라 사람이 그 곁에서 초 나라 말로 떠들어 댄다면 날마다 종아리를 치면서 제 나라 말을 가르치더라도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주D-029]괭이나 …… 법 : 진(秦) 나라 말기에 백성들이 가혹한 정사에 시달리자,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농민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면서 무기가 부족하여 괭이 자루를 잡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로 말미암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끝내 진 나라가 망하였다.
[주D-030]계미년의 변란 : 선조 16년(1583) 1월에 경원부(慶源府)의 번호(蕃胡)들이 난을 일으켜서 부성(府城)을 함락시켰고, 여진족(女眞族)의 추장(酋長) 이탕개(泥湯介)가 침입했다. 이에 신상헌(申尙憲), 신립(申砬) 등을 파견하여 호적(胡賊)을 격파하고 9월에 두목을 참수하였다.
[주D-031]전해질 길이 없습니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무로전문(無路轉聞)’으로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의 소주(小註)에, “소본(疏本)에는 이 아래에 ‘어구중(於九重)’이라는 세 글자가 있다.” 하였다.
[주D-032]존귀한 자리에 처하여 있는데 : 이 부분이 원문에는 ‘처존귀지중(處尊貴之中)’으로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의 소주에, “소본에는 이 아래에 ‘이(而)’ 자가 있다.” 하였다.
[주D-033]육지(陸贄)의 주의(奏議) : 육지(陸贄)는 당 나라 덕종(德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이로, 시호(諡號)는 선공(宣公)이다. 주의(奏議)에 아주 뛰어났으므로, 후세에까지 존중되었다.
[주D-034]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 이 부분이 원문에는 ‘추첨(樞僉)’으로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의 두주(頭註)에, “아마도 ‘추첨(樞僉)’은 ‘첨추(僉樞)’일 듯하다.” 하였다. 번역은 두주를 따랐다.
[주D-035]방계(防啓) : 상주(上奏)된 안건에 대하여 담당 관서가 그 일의 부당성을 제시하여 아뢰는 것을 말한다.
[주D-036]수공(首功)을 …… 진(秦) 나라 : 수공은 적병의 목을 베어오는 공을 말한다. 진 나라의 법제(法制)에는 적병의 목을 계산하여 목 1개당 자급 1등급을 올려 주었다. 뒷날에 적병의 목을 수급(首級)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생긴 말이다. 《사기》 제83권 노중련열전(魯仲連列傳)에, “저 진 나라는 예의를 버리고 수공(首功)을 으뜸 공으로 삼는 나라이다.” 하였다.
[주D-037]노련(魯連)은 …… 하였다 : 노련은 노중련(魯仲連)으로, 제(齊) 나라의 장수이다. 일찍이 조(趙) 나라에 머물러 있을 적에 진 나라가 조 나라를 공격해 와 정세가 위급하였다. 그때 위(衛) 나라에서 조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진 나라 왕을 황제(皇帝)로 추대하여 군대를 철수시키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노중련이 진 나라는 예의를 버리고 살인만을 일삼는 무도한 나라임을 역설하면서, 만약 진 나라가 칭제(稱帝)한다면 자신은 동해(東海)에 빠져 죽을 것이라고 하여 그 일을 중지시켰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주D-038]당(唐) 나라의 …… 울었는데 : 흥원은 당 나라 덕종(德宗)의 연호이다. 덕종 때 반적(叛賊) 요령언(姚令言)과 주자(朱泚)가 참호칭제(僣號稱帝)하고 수도 장안(長安)을 침범하였으므로, 덕종이 봉천(奉天)에 피난해 있으면서 흥원 원년에 자신을 죄책(罪責)하는 조서를 반포하여 장사(將士)들을 격려하였다. 그러자 이성(李晟) 등이 그 조서를 보고는 감격하면서 용기를 내어 적병을 쳐 장안을 수복하였다. 《舊唐書 卷133 李晟列傳》
[주D-039]유차달(柳車達) : 고려 태조(太祖) 때의 공신으로 문화 유씨(文化柳氏)의 시조이다. 태조 때 군량 수송에 공을 세워서 대승(大丞)에 제수되었으며, 삼한공신(三韓功臣)의 호를 받았다. 《高麗史 卷99 列傳 12》
[주D-040]원충갑(元沖甲) :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무신이다. 향공진사(鄕貢進士)로 원주(原州)의 별초(別抄)에 소속되어 있다가 충렬왕 17년(1291)에 합단(哈丹)이 쳐들어 와 성을 포위하자, 전후 10차례에 걸쳐서 적을 크게 무찔러 성을 지켜 후세에까지 무명(武名)을 남겼다. 《高麗史 卷104 列傳 17》
[주D-041]신포서(申包胥)의 충성 : 춘추 시대 때 초 나라의 대부(大夫)로, 성은 공손(公孫)인데, 신(申) 땅에 봉작되었으므로 신포서라고 한다. 오자서(伍子胥)와 친하게 지냈는데, 오자서가 오(吳) 나라로 도망치면서 신포서에게 “내가 초 나라를 전복시킬 것이다.” 하자, 신포서가, “그대가 초 나라를 전복시키면 내가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다.” 하였다. 그 뒤에 오자서가 오 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초 나라의 수도인 영(郢)에 침입하자, 진(秦) 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였는데, 7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으면서 조정의 담에 기대어서 통곡하였다. 그러자 진 나라의 애공(哀公)이 감동하여 구원병을 내주므로, 그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와서 국난을 평정하였다. 《淮南子 修務訓》
[주D-042]장순(張巡)의 충렬 :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의 충신이다. 천보(天寶) 연간에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처음에 진원 영(眞源令)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을 인솔하고 당 나라의 시조인 현원 황제(玄元皇帝)의 묘(廟)에 나아가 통곡한 다음 기병(起兵)하여 반란군을 막았다. 그 뒤에는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인 수양성(睢陽城)을 몇 달 동안 사수하고 있었는데, 구원병이 오지 않아 양식은 다 떨어지고 힘은 다 소진되어 성이 함락되었다. 그러자 태수(太守)로 있던 허원(許遠)과 함께 사절(死節)하였다. 《舊唐書 卷187 張巡列傳》
[주D-043]한관(漢官)의 위의(威儀) : 한 나라 조정 관원들의 복식과 전례(典禮), 제도(制度)로, 번성한 문물과 제도를 말한다. 또 중화(中華)의 예의와 제도를 널리 일컫기도 한다.
[주D-044]관복(官服) : 이 부분의 소주에, “어떤 본에는 ‘관복(官服)’이 ‘관복(冠服)’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45]장순(張巡) :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의 충신이다. 천보(天寶) 연간에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처음에 진원 영(眞源令)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을 인솔하고 당 나라의 시조인 현원 황제(玄元皇帝)의 묘(廟)에 나아가 통곡한 다음 기병(起兵)하여 반란군을 막았다. 그 뒤에는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인 수양성(睢陽城)을 몇 달 동안 사수하고 있었는데, 구원병이 오지 않아 양식은 다 떨어지고 힘은 다 소진되어 성이 함락되었다. 그러자 태수(太守)로 있던 허원(許遠)과 함께 사절(死節)하였다. 《舊唐書 卷187 張巡列傳》
[주D-046]안호경(顔杲卿) : 당 나라 현종(玄宗)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 안녹산이 사사명(史思明)에게 상산군(常山郡)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때 성을 지키고 있던 위위경(衛尉卿) 안호경이 군사가 적음으로 인해 성이 함락되면서 사사명에게 포로로 잡혔는데, 동도(東都)로 끌려가서는 안녹산을 크게 꾸짖다가 처형당했다. 《舊唐書 卷187 顔杲卿列傳》
[주D-047]박사겸(朴思謙) : 이 부분의 소주에, “어떤 본에는 ‘박사겸(朴思兼)’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48]주차(駐箚) : 이 부분의 소주에, “《용사록(龍蛇錄)》에는 ‘주절(駐節)’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49]거창(居昌) : 이 부분의 소주에, “인재(訒齋) 최현(崔晛)의 기록에는 창원(昌原)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50]포산(苞山) : 현풍(玄風)의 고호(古號)이다.
[주D-051]원충갑(元沖甲)의 군사 :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무신이다. 향공진사(鄕貢進士)로 원주(原州)의 별초(別抄)에 소속되어 있다가 충렬왕 17년(1291)에 합단(哈丹)이 쳐들어 와 성을 포위하자, 전후 10차례에 걸쳐서 적을 크게 무찔러 성을 지켜 후세에까지 무명(武名)을 남겼다. 《高麗史 卷104 列傳 17》
[주D-052]거창 : 이 부분의 소주에, “《용사록(龍蛇錄)》에는 ‘창원(昌原)’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53]체문을 보내어[貽帖] : 이 부분의 소주에, “어떤 본에는 ‘이첩(移帖)’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54]돌아오는 …… 경계한 바 : 《주역》 복괘(復卦)에, “돌아오는 길을 잃었으니 흉하다.[迷復 凶]” 하였다.
[주D-055]창고에 있는 곡식 : 원문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는데, 소주에, “장계(狀啓)에는 ‘창곡(倉穀)’이라는 두 자가 들어 있다.” 하였으므로, 소주에 따라 번역하였다.
[주D-056]장수[帥] : 이 부분의 소주에, “장계에는 ‘수(帥)’가 ‘사(師)’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57]을묘년의 왜변(倭變) : 명종 10년(1555) 5월에 왜구가 전라도에 침입한 변란을 말한다. 이해에 왜구들이 배 60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침입하여 먼저 영암(靈巖), 달량(達梁)을 점령하고 어란포(於蘭浦), 강진(康津), 진도(珍島) 등을 잇따라 점령하여 갖은 만행을 다 부렸는데, 조정에서는 이윤경(李潤慶), 김경석(金慶錫), 남치훈(南致勳) 등을 파견하여 영암에서 이들을 크게 격파하여 물리쳤다.
[주D-058]수레를 붙들고 글을 올렸는데 : 어진 수령을 유임시켜 주기를 청하는 것을 말한다. 동한(東漢)의 후패(侯霸)가 회양 태수(淮陽太守)로 있을 때 조정의 사신이 회양에 들어가자 백성들이 수레바퀴 아래에 누워서 후패를 1년 동안 더 유임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後漢書 卷26 侯霸列傳》
[주D-059]지해(志海) : 김면의 자(字)이다.
[주D-060]속히 계청해서 시행하여 : 이 부분의 소주에, “장계를 여러 차례 올려 속히 시행하기를 계청하였다.” 하였다.
[주D-061]환산사조(桓山四鳥) 시 : 이별하는 시를 말한다. 공자(孔子)가 위(衛) 나라에 갔을 적에 곡하는 자의 소리가 몹시 슬픈 것을 듣고 안회(顔回)에게 물으니, 안회가 “저 곡소리는 죽은 자만을 위하여 곡하는 것이 아니라 생이별한 자를 위하여 곡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공자가 다시 그 까닭을 물으니, 안회가 답하기를, “환산에 사는 새가 새끼 네 마리를 낳았는데, 새끼가 점차 자라서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어미새가 슬피 울면서 보냈는데, 슬피 우는 소리가 저 소리와 비슷하였습니다.” 하였다. 《孔子家語 顔回》
[주D-062]집강(執綱) : 조선 시대 때 면(面)이나 동(洞)의 일을 맡아 보던 직임으로, 지금의 면장이나 이장이 이에 해당된다.
[주D-063]손님에 …… 물었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대이빈례답유괴이문지자(待以賓禮答有怪而問之者)’로 되어 있는데, 그 두주(頭註)에, “아마도 ‘답(答)’은 ‘객(客)’의 잘못인 듯하다.” 하였다. 번역은 두주를 따랐다.
[주D-064]거묵(莒墨) : 거(莒)와 즉묵(卽墨)으로, 나라를 회복시키는 근거지가 된 곳을 가리킨다. 제(齊) 나라 민왕(湣王) 때 연(燕) 나라 군사에게 패해 모든 성이 함락되고 거와 즉묵 두 성만이 남아 있었는데, 전단(田單)이 이 두 성을 근거로 하여 제 나라 70여 성을 모두 회복하였다. 《史記 卷82 田單列傳》
[주D-065]을사년 : 이 부분의 두주(頭註)에, “을사년은 마땅히 갑진년(1604, 선조 37)으로 되어야 한다. 연보(年譜)에 나온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