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의병 곽재우 /미수 허목 관련기록 미수집

미수 허목 신도비명 (기언부록)

아베베1 2010. 6. 22. 20:59

기언 부록(記言附錄)
 부록(附錄)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이익(李瀷)]


대개 듣건대, 우리 국조(國朝)의 현명한 공경(公卿)을 논평할 적에, 외방(外方)에 나가 맡는 일이나 조정에 들어와 세우는 계책에 대해 선왕(先王)들의 것이 아니면 진달하지 않기도 오직 허 선생이 그랬고,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올바름을 지켜 흔들리지 않기도 오직 허 선생이 그랬고, 가당함을 보고서 나아가고 기미를 알아차리고선 곧 물러 나와 시종[本末]이 법도가 있게 하기도 오직 허 선생이 그랬다 하니, 선생은 곧 쇠퇴한 세상에 이름을 온전히 한 분이다.
그때 익(瀷)의 선대부(先大夫)께서 함께 벼슬하게 되어 정신을 모아 협력하였는데, 청의(淸議 올바른 의논)를 주장하여 도(道)는 비록 굴했어도 선비들의 마음은 더욱 따랐었다. 지금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60여 년이고 거센 풍파가 휘몰아친 나머지에 시국이 변모하여 바뀌었지만, 오히려 후생(後生) 젊은이들로 하여금 머리를 들고 그 풍채(風采)를 회상하게 하니, 걸출(傑出)한 군자가 아니었다면 되지 않을 일이다.
선생의 5대 손자 징사(徵士) 지(砥)가 와서 영구히 전할 신도비명을 부탁하매, 익이 오직 두렵기만 하여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없었으나 의리에 사양할 수도 없었다.
선생은 양천(陽川)의 세가(世家 여러 대를 계속하여 국가의 중요한 지위에 있은 가문)로서 찬성(贊成) 자(磁)의 증손이다. 조부는 별제(別提) 강(橿)이고, 아버지는 현감(縣監) 교(喬)인데, 모두 공이 현달해짐에 따라 규례대로 추은(追恩)하고 증직하였다. 어머니는 나주 임씨(羅州林氏)인데 정랑(正郞) 제(悌)의 딸이다.
선생은 우리 소경왕(昭敬王 선조(宣祖)) 28년 을미 12월 기유에 태어났는데 손에 문(文) 자 무늬가 있었다. 휘(諱)는 목(穆), 자는 문보(文父) 또는 화보(和父)이며, 호는 미수(眉叟)이다. 스승에게 나아가 글을 배울 적에 백 번을 읽지 않고선 외지를 못했는데, 겨우 책 한 권을 다 배우자 글 뜻에 막히는 것이 없었고, 옛사람의 말과 옛사람의 행실을 듣기 좋아하여 이미 성현들의 학문에 뜻을 두었다.
장성하자 한강(寒岡) 정 선생을 찾아가 스승 삼았고, 두루 유명한 산천(山川)을 유람하여 지취(志趣)를 넓혔다. 우리 효종대왕 원년 경인에 이르러 침랑(寢郞 능참봉을 말함)에 제수되었고, 이로부터 8년 동안에 현감ㆍ낭서(郞署 중요하지 않은 관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사면하였다.
상이 산림(山林)에 있는 사람을 구득하여 함께 다스려 가려고 생각하여 정유년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부르자 드디어 입대하여 임금의 뜻에 맞았고, 기해년에 또한 장령(掌令)을 제수하자, 상소하여 군덕(君德)에 관해 논하기를,
“천도(天道)는 강건(剛健)을 숭상하고 일월(日月)은 광명을 숭상하고 군도(君道)는 천도를 체(體)받는 것인데, 조금이라도 사심을 두면 모든 소인이 몰려드는 법이니, 전하께서 나라 다스리기를 반드시 몸에서부터 시작하여, 연닐(燕昵 사사로이 친근한 사람들)들에게 사정 쓰지도 마시고, 기리는 아첨에 현혹되지도 마시고, 조그마한 이로움을 좋아하지도 마시고, 소소한 성공에 만족하지도 마시고, 교만하여 마음대로 하지 마소서.”
하였다. 이때 조정의 고관들이 무력 사용을 말하는 사람이 많자, 선생이 옥궤명(玉几銘)을 올렸고, 또 상소하여 둔전(屯田)의 폐단을 말하매, 상이 즉각 혁파하도록 명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임금[宮車]께서 승하(昇遐)하시어 일을 정지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이때 재궁(梓宮 임금의 널)을, 장생전(長生殿)에 전부터 저장해 놓은 것을 쓰지 않고, 하루 걸러 한 차례씩 칠을 칠하고 있어 빈례(殯禮 시체를 빈소에 안치하는 것)를 치르지 못하자, 선생이 상소하기를,
“순(輴)하고 찬(欑)하고 빈소에 장막을 두름은 고요하고 어둡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보기(寶器)도 진열하지 않고 우보(羽葆)도 차리지 않았으며, 성삼(聲三)ㆍ계삼(啓三)하는 절차도 차리지 않고서 빈소 문을 열기를 절도 없이 하니, 예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에 임금이 즉위하면 널[椑]을 만들어 해마다 한 차례씩 칠을 하는 법이니, 탕(湯)은 왕위(王位)에 13년 있었으므로 이관(杝棺 피나무 관)을 열세 번 칠하고, 무왕(武王)은 왕위에 7년 있었으므로 이관을 일곱 번 칠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재궁을 탕이나 무왕의 관에 비한다면 이미 칠이 두텁게 되었으니, 예에 미안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또, 제도(諸道)에 나간 어사(御史)를 재촉하여 돌아오게 한 실책을 논하기를,
“무릇 사명을 받들고 나갔다가 국상(國喪)을 만난 사람들은 일을 다 마친 뒤 빈전(殯殿)에 복명하는 것이 예입니다. 지금 여러 도에 암행(暗行) 나간 신하들은 일이 미처 끝나지도 않았는데 예조가 재촉하여 돌아오게 하였으니, 이는 임금의 명을 초야(草野)에다 버리는 것이 됩니다.”
하였는데, 당시에 봉사(奉使) 나갔던 모(某)가 감탄하기를 ‘조정에서는 마땅히 독서(讀書)한 사람을 등용할 일이다.’고 했다.
현종(顯宗) 2년 봄에 다시 장령(掌令)으로 소명(召命)을 받고 나갔다. 이에 앞서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일찍 죽고 효종(孝宗)이 다음 적자로서 왕위에 올랐는데, 기해년 국상 때에 재상(宰相) 송시열(宋時烈)이, 가공언(賈公彦)의 《의례(儀禮)》 주소에 ‘체이고 정이 아니라[體而不正]’는 문구(文句)를 들어, 자의대비(慈懿大妃)는 마땅히 서자(庶子) 위해 입는 기년복(期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이에 선생이 상소하여 그 잘못을 소급해서 바로잡기 청했으니, 그 대략에,
“상복편(喪服篇)의 주소에 ‘적자 세우기를 맏이로 한다.’고 말한 것은, 적처(適妻)의 소생인 둘째를 세우면 또한 장자(長子)라고 이름함을 알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적자와 적자가 서로 이어 가는 것을 ‘정이면서 체[正體]이다.’ 하여 삼년복(三年服)을 입고, 중자(衆子)로 계통을 이어받은 사람에게 대해서도 동일하게 입으나, 서자를 세워 후사(後嗣) 삼은 것은 ‘체이고 정이 아니라’ 하여 삼년복을 입지 않는 것이니, 첩자(妾子)이기 때문입니다. 효종(孝宗)은 인조의 둘째 장자로 이미 종묘(宗廟)를 이어받으셨는데, 그분에 대한 복이, 체이고 정이 아닌 사람과 같이 함은 신은 어디에 의거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선생이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좌천되고, 예를 의논했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죄를 얻게 되자 조야(朝野)가 곁눈질했는데, 3년 만에 그만두고 연천(漣川)으로 돌아왔다. 갑인년에 나이 많은 것으로 통정(通政)의 가자(加資)를 받았다. 이해 여름에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승하하였는데, 인선왕후는 곧 효종의 왕비이다. 이에 앞서 제신(諸臣)들이 억지로 국가의 법제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서는 장자나 중자에게 모두 기년복을 입는다.’고 한 말을 인용하여 임시 변통으로 맞추었으나, 실지의 뜻이 옛 경전(經傳)에 있는데도 지금의 국가 법전을 부회했던 것이다. 지금의 법전이 비록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서는 장자나 중자에게 동일하게 입지만, 시부모가 며느리를 위해서는 장부(長婦)에게는 기년복, 중부(衆婦)에게는 대공복(大功服) 입는 구별이 있어, 도리어 예가(禮家)들의 말과 합치되는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제신들이 오히려 사종(四種)의 설을 고집하여, 자의대비께서 마땅히 중부를 위해 입는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고 한 연후에야 기해년에 정한 의논이 국가의 법제가 아니었음이 드러나게 되자, 상이 깨닫고 수상(首相) 이하 예와 틀리게 떠들던 여러 무리들을 귀양 보냈다.
8월에 상이 승하하자, 숙종이 선왕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국가의 예를 바로잡고 예를 그르친 제신들을 소급하여 죄주되 생존한 자는 귀양 보내고 죽은 자는 직첩(職牒)을 빼앗았다. 그리고 특별히 선생을 대사헌(大司憲)으로 부르므로 두 차례를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아 들어가 사은(謝恩)하자, 맞이하여 접견하고 물품을 내려 은덕과 예가 갖추 지극하였다. 그때 금고(禁錮)되었던 사람들을 차례로 찾아서 임용(任用)하여, 그제야 국가의 종통(宗統)이 제대로 밝아지게 되었으니, ‘군자의 말은 한마디에 지자(知者)임을 알 수 있다.’고 한 것이 선생 같은 이를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듬해 봄에 상소하여 정사에 관한 폐단을 진달했는데, 등위(等威 신분과 지위에 맞는 위의)를 엄중히 하고, 정법(政法)을 닦고, 공경과 겸양을 숭상하고, 사정(邪正)을 분별하고, 절약과 검소를 실천하고, 덕과 은혜를 넓히는 것이었으니, 모두 당시의 폐단을 바로잡는 절당한 일들이었다. 조금 있다 이조 참판으로 전임하여서는 덕(德)ㆍ예(禮)ㆍ정(政)ㆍ형(刑)의 의의와 사려(師旅 군사)에 관한 경계를 진달하였으며, 또한 ‘심학도(心學圖)’ 및 요(堯)ㆍ순(舜)ㆍ우(禹)가 서로 전승(傳承)한 ‘심법도(心法圖)’를 올렸다.
여름에 특별히 의정부우참찬 겸 성균관좨주(議政府右參贊兼成均館祭酒)로 승진하였는데, 또 군덕(君德)에 관한 경계를 진언하기를,
“덕은 극일(克一)보다 나은 것이 없고, 치도(治道)는 백성 보호보다 나은 것이 없고, 정사(政事)는 혼란을 진정시킴보다 나은 것이 없고, 왕업(王業)은 황극(皇極)을 세움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이는 성인들이 힘쓴 것입니다. 덕은 안일과 사욕 때문에 쇠퇴되고, 치도는 참소와 아첨 때문에 쇠퇴되고, 정사는 사정(私情)과 친근(親近) 때문에 쇠퇴되고, 왕업은 태만과 방탕 때문에 쇠퇴되는데, 이는 성인들이 경계한 것입니다.”
하였다. 또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고 이조 판서로 전임하였다가 드디어 우의정으로 발탁되었다.
가을에 대관(臺官)이 삼공(三公)에게 미치는 말을 하였다가 파직(罷職)되자, 선생이 차자(箚子)를 올려 인책하고, 또한 상께 진언하기를,
“근대(近代)의 일로 말하더라도, 조사수(趙士秀)가 심연원(沈連源)을 논박하자 연원이 ‘국가의 복된 일이다.’ 하였고, 강서(姜緖)가 윤두수(尹斗壽)를 죄주기 청하자 두수가 달게 받아 죄로 여겼고, 송영구(宋英耉)가 이항복(李恒福)을 칭찬하여 주자 항복이 ‘기필코 배척하고야 말겠다.’ 했습니다. 국조(國朝)에서 간관(諫官)을 키워 줌이 이러했는데, 이번에 유신(儒臣)들이 삼공을 칭찬하여 주는 짓을 하였으니, 크게 조정이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주수도설(舟水圖說)’을 지어 신하들을 훈계하자, 선생이 그윽이 나머지 뜻을 화답하는 의미로, 부연하여 경계를 진달하니, 또한 궤장(几杖)을 내리는 명이 있었다.
또 이듬해 봄에 상소하기를,
“신이, 일이 없도록 하는 것으로써 오래 살게 되었기에 이런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마음이 안정되면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사물(事物)이 어지럽히지 못하는 법이니, 그런 다음에는 경거망동(輕擧妄動)이 없어지고, 경거망동이 없기 때문에 일이 없게 되어 수명대로 다 살게 되는 것인데, 가정이나 국가에 미루어 가도 모두 그러한 것입니다.”
하였다. 종신(宗臣) 영평정 사(寧平正泗)가 상소하여 선생을 비방하자, 상이 노하여 귀양 보내도록 했는데, 선생이 교외(郊外)로 나가 대죄(待罪)하매, 상이 앉은 자리를 비켜서 다시 들어오기를 기다렸고, 선생이 조상의 묘에 분황(焚黃)하러 가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어 길을 떠나매, 상이 친히 태복시(太僕寺) 말을 점검하여 좋은 것으로 골라서 주고 도신(道臣 관찰사)에게 명하여 가는 길을 호위하도록 했다. 선생이 드디어 연천(漣川)으로 가 버렸다가, 얼마 있다 자전(慈殿)께서 편치 못하시다는 말을 듣고 창황하게 서울로 들어왔고, 재차 차자를 올려 사(泗)의 죄를 풀어 주기 바라니, 상이 할 수 없이 따랐다.
겨울에 특별히 기로부(耆老府)를 주관하도록 명하자 선생이 또한 나이를 들어 물러가기 바랐으나[乞骸骨] 윤허하지 않다가, 무오년 봄에 비로소 체직하고 서추(西樞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임명하자, 선생이 그제야 한가로이 전원(田園)으로 돌아왔다. 이어 작별하는 말 진달하기를,
“수십 년 이래로 세도(世道)가 크게 변하여 혼탁한 짓이 풍습이 되었는데, 충성하려 해도 권면받을 데가 없고 죄짓고도 두려울 데가 없으며, 인심이 산란하고 재변이 경계를 보이니, 이 무슨 광경입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 궁금(宮禁)을 엄숙히 하고 사왕(私枉 사정 둠과 부정 저지르는 것)을 억제하고 충간(忠諫 충직한 말)을 받아들이고 사녕(邪佞 올바르지 못함과 아첨)을 배척하여 간난(艱難)하고 중대한 유업(遺業)을 떨어뜨리지 마소서.”
하였다. 상이, 사는 데에 가서 집을 지어 주도록 하였으니, 국조(國朝)에서 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에게 한 고사(古事)에 의한 것이다.
그 이듬해 여름에 역변(逆變)이 생겼는데, 소명(召命)을 받고 나아가, 나라 안을 모두 수색하는 일을 중지하기 청하였고, 죄인을 잡고 보자 사연이 재상 송시열(宋時烈)에게 미치매, 조정 의논이 끝까지 파자고 논하여 장차 중한 죄로 다스리려 하므로, 선생이 차자 올리기를,
“모의에 참여한 것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한갓 역적이 빙자한 것 때문에 율(律)을 가한다면, 왕법(王法)이 미진한 바가 있게 됩니다.”
하니, 일이 드디어 정지되었다.
이에 앞서 수상(首相) 허적(許積)이 나라 정사를 독단(獨斷)하므로 세력 좋아하는 사람들이 몰렸는데, 선생이 두서너 대부(大夫)들과 더불어 우뚝 버티고 서서 사림(士林)들의 영수가 되니, 세상에 청론파(淸論派)니 탁론파니 하는 지목이 있었다. 적(積)에게 또 패륜(悖倫)한 아들 견(堅)이 있었는데, 자못 신임하므로 불법(不法)한 짓을 마구 하나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했다. 선생이 나라를 근심하여 가사(家事)도 망각하고 오직 한 가지 생각에 몸 바친 지 오래다가, 이에 이르자 진언(進言)하여 그의 죄상을 논하기를,
“지금 교화(敎化)가 없어지고 형정(刑政)이 무너져 법도 없고 기강도 없으며, 당(黨)을 세워 서로 공격하는 짓과 임금을 속이고서 사정 쓰는 짓을 하니 사람의 도리가 극도로 어지러워진 일입니다. 영의정 허적은 소임이 크고 책임이 중하여 권세와 지위가 융성한데, 척리(戚里)들과 결탁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환시(宦寺)와 귀근(貴近)들을 비밀한 문객(門客)으로 삼아 임금의 동정을 엿보아 영합(迎合)을 합니다. 그의 서자(庶子) 견은 하는 짓이 모두 무상(無狀)하나 국가의 법을 맡은 사람이 금하지 못했는데, 남구만(南九萬)이 적발(摘發)했다가 구만만 귀양 가고 견은 마침내 아무 일이 없었으며, 그의 문정(門庭)은 저자와 같아 뇌물과 선사가 서로 잇달았습니다. 전하께서 이런 사람을 만나 그와 나랏일을 하려 하시니, 다스려지기 바라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상이 진노(震怒)하여 종용(慫慂)을 받았는가 의심하였고, 조정 신하들이 따라서 격동시켜 전후로 귀양 보내어, 조정이 텅 비게 되고 유생(儒生)도 귀양 간 사람이 네 사람이나 되므로, 선생이 시골집에서 대죄(待罪)했다. 이듬해인 경신년 여름 5월에 이르러 적 등이 실패하여 죽음을 받았는데, 당인(黨人)들이 주워 모아 죄안(罪案)을 만들게 되어, 선생이 또한 파출(罷黜)받아 면직(免職)되었다.
2년이 지난여름 4월 갑진에 정침(正寢 몸채의 큰 방, 곧 자기 집이란 뜻)에서 고종명(考終命 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하였는데, 가을에 모산(某山)에 권조(權厝 묏자리를 구할 때까지 임시 매장하는 것)하였다가 기사년 윤월(閏月)에 이르러 연천(漣川) 서쪽 선산(先山)의 건좌(乾坐 서북방을 등진 좌향) 언덕에 이장했다. 상이 이에 앞서 이미 관작(官爵)을 복구하도록 명했고, 이에 이르러서는 해부(該府)에 명하여 장례를 의식대로 갖추도록 하여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였고, 또 자손들을 녹용(錄用 임용)하고 유고(遺稿)를 간행하도록 했다. 두 해 뒤인 신미년(1691, 숙종17)에 사당을 마전군(麻田郡)에 세우자 ‘미강 서원(嵋江書院)’이라 사액(賜額)하였고,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예에 의하여 뇌장(誄狀 시장(諡狀)을 말함)을 기다리지 않고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내렸는데, 도덕이 널리 알려진 것을 ‘문’이라 하고 정직으로 사람들을 감복시키는 것을 ‘정’이라 한다. 계유년(1693, 숙종19)에는 특별히 나주(羅州)에 사당을 세우도록 명하여 ‘미천서원(眉泉書院)’이라 사액하고 또한 관원을 보내 치제했고, 18년이 지난 무자년에는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의 회원서원(檜原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선생은 여윈 얼굴 긴 눈썹에다 늘씬하고 출중하여 바라보기에 신선(神仙) 같았고 대하면 강직하여 시원스러운 운치가 있었으니, 요컨대 세상에 드문 분이었다. 초야(草野)에 있을 적에는 산수(山水)에 취미 붙이고 무릎을 포개고 앉아 선왕(先王)들의 도를 노래하며 장차 인생을 마칠 듯이 하였고, 임금이 예를 갖추어 초빙(招聘)함에 미쳐서는 누차 사양하다 나아가서 아름다운 계책을 임금께 말하되, 임금과 백성을 요순(堯舜) 때처럼 만들 생각이 간절했다. 간사한 무리들이 나랏일을 망치게 되어서는 정색(正色)하고 준엄하게 말하여 팔을 잘리더라도 불사할 듯이 하였고, 조정 신하들이 건의하여 따로 체찰부 군사를 서울에 두기로 하자, 선생이 한탄하기를,
“대권(大權)이란 용(龍)과 같아, 그가 지나가는 곳은 반드시 뇌성 벽력이 일어 산과 내 나무와 돌이 모두 꺾어지고 뽑히고 진탕이 되는 법입니다.”
했다. 그런데 이 무리들이 일찍이 큰 화가 그에게 근원할 줄을 모르고, 선생이 도성(都城)을 떠나자 크게 체찰부를 차리고 허적(許積)이 맡아보게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화가 일어나고 관련된 사람이 꽉 찼는데, 오직 일종의 사림(士林)들이 모두 죽게 되지 않은 것은 청의(淸議)의 힘이었다. 이것이 그분의 대략이고, 나머지 심상한 행신[行誼]은 이보다 작은 것들이니 생략함이 옳을까 한다.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李氏)는 왕실(王室)의 동성(同姓)인 문충공(文忠公) 원익(元翼)의 손녀로, 선생보다 30년 먼저 계사년에 죽었고 나이는 57이었는데, 선생의 묘에 합장했다. 아들 셋 딸 둘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훤(翧), 둘째는 함(), 셋째는 도(翿)인데 양자 나갔고, 사위는 윤승리(尹昇离)ㆍ정기윤(鄭岐胤)이다.
훤(翧)은 아들 상(恦)ㆍ돈(惇)ㆍ원(㥳) 셋을 두었고 사위는 이진하(李震夏) 하나인데, 상(恦)은 현감(縣監)을 지냈고 아들 보(溥)ㆍ급(汲)ㆍ식(湜)ㆍ담(潭)ㆍ징(澂) 다섯을 두었으며, 돈(惇)은 아들 형(泂) 하나를 두었다. 함()은 현감을 지냈고 변(忭)으로 양자를 하였으며, 사위는 정일(鄭佾) 하나가 있다.
도(翿)는 아들 염(恬)ㆍ변(忭)ㆍ유(愉)ㆍ이(怡) 넷을 두었는데, 변은 양자 나갔고, 염은 아들 혼(混)ㆍ육(淯)ㆍ협(浹)ㆍ부(滏)ㆍ유(鎏) 다섯을 두었다.
윤승리(尹昇离)는 사위 이구(李絿) 하나가 있고, 정기윤(鄭岐胤)은 아들 중리(重履)ㆍ중익(重益)ㆍ중겸(重謙)ㆍ중항(重恒) 넷이 있고, 사위는 윤천정(尹天挺) 하나이다.
보(溥)는 아들 정(楨), 식(湜)은 아들 권(權), 담(潭)은 양자 과(果)를 두었고, 형(泂)은 아들 단(檀)을 두었으며, 변(忭)은 양자 육(淯)을, 유(愉)는 아들 주(澍)를 두었고, 혼(混)은 아들 표(杓)ㆍ율(㮚) 둘을 두었고, 육(淯)은 율(㮚)을 양자로 하였으며, 협(浹)은 아들 반(攀)을 두었다. 주(澍)는 아들 환(桓)을 두었고, 부(滏)ㆍ유(鎏)는 양자 갔다. 지금 찾아와서 명(銘)을 부탁한 사람은 정(楨)의 아들이다. 아래와 같이 명한다.

선생은 세상에 드문 기품을 타고나 좋은 글들을 저작하여 / 先生間氣也咀嚼英華
진수로 배를 채우고 / 飽飫腴眞
장차 도를 펴려 기대하며 / 道將有待
도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 / 曰在吾身
옛것을 좋아하여 / 悅古
천년 이전의 일을 하루 전의 것처럼 가까이 여기고 / 則千歲以前近若隔晨
세상을 근심하여 / 憂世
광대한 사해를 같은 동포처럼 인애했다 / 則四海之廣同胞共仁
임금의 신임이 융숭하여 / 際會之盛
사자의 수레가 준읍 교외와 위수 가처럼 잇달았고 / 使者冠盖相望於浚之郊渭之濱也
보필함이 지극하여 / 輔導之至
한편으로는 요 한편으로는 순 때처럼 제일 좋은 것이 아니면 진달하지 않았다 / 左勳右華非第一等不屑陳也
사특한 것 배척하기를 한 칼로 쳐 두 동강 내듯 하니 / 其斥邪也一刀兩端
기미를 알아차림이 귀신 같았으며 / 知幾其神
인책하고 물러갈 땐 마음 편히 여유 있게 떠나 / 其引退也浩然餘裕
산야의 백성 속으로 사라졌다 / 混迹於山氓野民
신선 같은 모습과 고풍의 모습에 / 仙姿古貌
관 쓰고 띠 띠고서 / 正冠垂紳
고요히 혼자 있어도 부끄러울 일 없었고 / 幽獨不媿
후생들 깨우치길 변치 않았으니 / 諭後無磷
오늘날의 소위 사범이고 / 今之所謂師範
옛적의 소위 대신이었도다 / 古之所謂大臣


[주D-001]징사(徵士) : 학문과 덕행이 높아, 임금이 불러도 나가서 벼슬하지 않는 사람이다.
[주D-002]군자의 …… 있다 : 이 대문은 《논어(論語)》 자장편에 있는 말.
[주D-003]준읍(浚邑) …… 위수(渭水) : 준읍은 미상이다. 위수는 중국 감숙성(甘肅省) 위원현(渭源縣)의 서북 조서산(鳥鼠山)에서 발원하여 섬서성(陝西省)을 거쳐 황하로 흐르는 강이다. 강태공이 이 강에서 낚시질하며 세월을 보내는데, 주(周) 나라 문왕(文王)이 등용했다. 《史記 齊世家》
미수허목 선생

조선 중기의 위대한 학자이며 경세가로 특히, 동방전서체의 제1인자로서 유명한 미수 허목의 묘역이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에 위치하고 있다. 묘역은 민통선내인 안월천을 건너는 강서5교를 지나 북쪽으로 300m 정도를 더 가면 해발 100m 정도의 좌측 능선 상에 위치한다. 하지만 분단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은 임진강을 끼고 펼쳐진 비옥한 옥토에 수려한 자연경관과 함께 풍수 지리적으로도 지세가 온화하여 많은 문벌들이 터를 잡은 곳이다.

허 목의 본관은 양천으로 고려시대 이래 많은 명사들이 출사해오면서 개경을 중심으로 한 연천․장단․파주․포천일대에 자리를 잡아 왔다. 연천지역이 허 목의 삶의 터전이 된 것은 합천군수를 지낸 그의 5대조 훈(薰)이 오늘날 은거당(왕징면 강서리)터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부터인데 지금까지도 500년 세장지로 유지되어 오고 있다.

 


허목은 1595년(선조 28년) 서울 창선방에서 아버지 교(喬)와 어머니 나주 임씨 사이에 맏이로 태어났다. 손바닥에 ‘文’자 무늬가 있어 자(字)를 문보(文父), 또한 눈썹이 길어 눈을 덮으므로 별호를 미수(눈썹이 긴 노인이라는 뜻)라 자칭했다.

허목은 부친과 외조부 임제(林悌)의 영향으로 도가(道家)적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을 것으로 보여 진다. 허 목이 21세 되던 해, 1615년(광해군 7년) 총산(葱山) 정언옹(鄭彦顒)에게서 글을 배우고, 1617년 부친이 거창현감에 임명되자 부친을 따라가서 모계(茅溪) 문 위(文 緯)를 사사하였으며, 그의 소개로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이렇듯 허목은 당대 최고의 스승들을 모시고 학문을 닦는데 열정을 쏟음으로서 위대한 학자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허목은 정치적으로는 숙종 초기 청남의 영수로 알려져 있으나 학문적으로는 근기파(近畿派)에 속하고 마침내는 기호남인(畿湖南人)의 종장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의 학풍은 중세의 보편주의에서 근대지향적인 학풍으로 변화되었고 허목-이익-권철신-정약용으로 이어지는 기호 남인학파가 형성되어 훗날 실학사상의 발전에 획기적 역할을 하였다.

1624년(인조 2) 경기도 광주의 우천에 살면서 자봉산에 들어가 독서와 글씨에 전념하여 그의 독특한 전서(篆書)를 완성하였다. 관직에는 뜻이 없었던 듯 여러 번 관직에 나갈 기회가 있었으나 부임하지 않거나 곧 사임하였다.

84세 되던 해인 1678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인 연천으로 돌아왔으며, 나라에서 집을 지어주자 은거당(恩居堂)이라 명명하였다. 은거당은 허목묘역에서 동남쪽으로 400여미터 떨어져 있는 곳으로 현재는 그 터만 남아있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는 그림․글씨․문장에 모두 능하였으며, 글씨는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저서로는 『東事』․『邦國王朝禮』․『經設』․『經禮類算』․『眉叟記言』등이 있다. 88세의 나이로 돌아가니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다

1691년 그의 신위(神位)를 봉안하는 사액서원으로 미강서원(嵋江書院)이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옛 마전군)에 세워졌으며 나주의 미천서원(眉川書院), 창원의 회원서원(檜原書院)에도 제향되었다.


허목의 묘는 동남향한 나지막한 구릉 상에 6기의 묘 가운데 제일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인 전주이씨와의 합장묘이다. 봉분은 원형으로 규모는 직경 670cm, 높이 170 cm이며, 석물로는 봉분 전면에 묘비, 상석, 향로석, 장명등이 있고 양쪽에 문인석과 망주석이 1기씩 있으며 제수석이 마련되어 있는데 백색 대리석재질의 묘비의 비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석물이 각섬석운모편암으로 되어있다. 모든 석물에는 6․25전쟁으로 인한 총탄의 흔적이 있다. 묘비는 전․후 양면에 비문이 있으며, 전면에 종1열로 ‘右議政文正公眉수許先生之墓’의 비문이 있으나 일부 글자는 파손되어 있는 상태이다. 비문은 후면에 ‘許眉叟自銘’으로 보아 생전에 자찬(自撰)한 것으로 보인다.

 

십청원도(소치 허련의 그림)-허목이 살던 은거당에는 10가지의 늘 푸른나무가 있다하여 십청원이라 불리는 정원이 있었다. 은거당은 한국전쟁으로 전소되어 현재는 그 터만 남아있다

 

Huh, Mok's great-great-grand father, the magistrate of Hapcheon, started to live first in Yeoncheon. There are many graves of his family near the Mok Huh's tomb. His tomb is buried with his wife together. The house called 'Eungoudang' where he lived in lifetime was to about 500meter distance from this place to the East.

Mok Huh(1595~1682) was a great scholar in the mid Jeseon period. He liked to be called by his nickname, 'Misu', that means 'the old man with long white eyebrows' He entered government service in 1657 and became the minister of Civil Office. He devoted himself to the study of all philosophers, literary scholars and the Confucian classics. He was also an expert in drawing, calligraphy and writing. Among his literary works are 『Giun』,『Heomoksugobon』etc.

His tomb shows the typical tomb's style of the higher class in the mid Joseon period. He wrote his epitaph in his life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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