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고향 忠義 고장 宜寧/의령관련 각종 기록(기사) 1

의령ㆍ함안ㆍ칠원 ...여기부터 서쪽이 옛날 변진국(弁辰國)이다.

아베베1 2009. 12. 7. 16:10

경세유표 제3권
 천관 수제(天官修制)
군현분예(郡縣分隸)


경기(京畿)를 봉천성(奉天省)이라 하고, 다음 남쪽은 사천성(泗川省), 그 다음 남쪽은 완남성(完南省), 또 남쪽은 무남성(武南省)이라 한다. 동남쪽은 영남성(嶺南省)이라 하고, 그 서쪽은 황서성(潢西省)이라 한다. 서울에서 동쪽은 열동성(洌東省), 서울에서 서쪽은 송해성(松海省)이라 하고, 또 서쪽은 패서성(浿西省), 또 서쪽은 청서성(淸西省)이라 한다. 서울에서 북쪽은 현도성(玄菟省), 또 북쪽은 만하성(滿河省)이라 하여 총 12성으로 한다.
경기는 경계를 예전대로 분할하는데. 오직 낭천(狼川)ㆍ금성(金城)ㆍ금화(金化)ㆍ철원(鐵原)ㆍ평강(平康)ㆍ이천(伊川)ㆍ안협(安峽) 등 열수(洌水 : 한강) 서쪽 대수(帶水) 동쪽에 있는 일곱 고을은 경기에 붙이고, 양근(楊根)ㆍ지평(砥平)ㆍ제천(堤川) 등, 열수 동쪽에 있는 세 고을은 열동성에 붙인다. 또 송경(松京)으로 황해 포정사(黃海布政司)를 삼고, 장단(長湍)ㆍ마전(麻田)ㆍ풍덕(豊德) 등 세 고을을 송경에 붙여서 대수를 경계로 한다.
생각건대, 들(野)에 획을 그어서 주(州)로 나누는 데는 유명한 산과 큰 냇물을 한계로 해야 한다. 내가 보니, 열수의 근원 중 하나는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금강산(金剛山)에서 나와 용진(龍津) 하류에서 합류한다. 무릇 두 가닥 물의 동쪽에 있는 것을 열동성에 붙이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며, 열수 서쪽에 있는 것을 경기에 붙여서 근본(根本)되는 곳을 두텁게 함도 또한 마땅하다. 송경 유수(松京留守)는 한가롭게 하는 일이 없고, 황해 포정사는 궁벽지게 바다 한모퉁이에 있어, 무릇 징발하는 명령이 있어도 멀리 돌아서 가므로 매우 불편하다. 송경 유수에게 황해감사를 겸하게 하고, 도계(道界) 첫머리에 앉아서 평양이나 전주같이 한다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면 장단 등 세 고을을 황해에 예속시켜서 임진을 경계로 함이 또한 마땅하다.
살피건대, 경기와 사천성 사이에는 비록 유명한 산이나 큰 냇물이 한계가 된 곳은 없으나, 죽산(竹山) 남쪽에 있는 미수(洣水 : 속명은 天迷川이다)는 동쪽으로 흘러서 열수(驪興 남쪽에 있다)에 들어가며, 안성 남쪽에는 사수(沙水 : 하류가 素沙河이다)가 있어 서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며, 그대로 큰 나루가 되어 남북을 가로질러서 두 성의 경계(즉 해협)가 되었으니, 경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사천성이란 지금의 충청도인데, 그 강역(疆域)은 모두 예전대로이나, 오직 제천 한 고을을 열동성에다 고쳐 붙였다.
생각건대, 지금의 금강(錦江)을 옛 사기(史記)에 사비하(泗沘河)라 한 까닭으로 성 명칭을 사천성이라 했다. 이 성은 도성에 아주 가까운 울타리이므로 웅대했으면 하는 생각에서 깎거나 가르지 않았다.
완남성ㆍ무남성은 지금의 전라도다. 이 도(道)의 동쪽에는 잔수(潺水)가 있고 복판에는 노령(蘆嶺)이 가로뻗쳐서 남북 한계와 똑같다. 이번에 잔수 이동 노령 이북은 완남성에 붙이고 잔수 이서 노령 이남을 잘라서 무남성으로 만들었다.
잔수 동쪽에 있는 것은 구례ㆍ남원ㆍ운봉ㆍ임실이고, 노령 북쪽에 있는 것은 순창ㆍ정읍ㆍ고창ㆍ무창인데, 여기부터 북쪽은 모두 완남성에 붙였다.
잔수 서쪽에 있는 것은 곡성ㆍ옥과이고, 노령 남쪽에 있는 것은 담양ㆍ장성ㆍ영광인데, 여기부터 이남은 모두 무남성에 붙였다.
생각건대, 중국같이 큰 나라도 13성에 불과한데, 우리나라를 8도로 가른 것은 또한 지나친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예부터 내려오면서 법제가 분명하지 못하고, 기강이 확립되지 않았다. 하물며 인재를 선발하는 방법이 잘못되어서 인재가 흥기(興起)하지 않는데 한 방면의 임무를 부탁하니, 그 직에 능히 맞게 하는 자가 드물다. 서도(西道)와 북도(北道)는 지역이 넓고 아득한데, 감사(監司)가 경계 첫 고을에 앉아서 멀리 수천 리 지역을 통제한다. 그래서 명령이 빠를 수 없고, 간악함을 살필 수 없으니 갈라서 두 성으로 함이 마땅하다. 호남과 영남은 백성이 번성하고, 정무(政務)가 번거로우니 능통한 재질(材質)과 큰 기국(器局)이 아니면 다스릴 수가 없다.
나는 남쪽 지방에 15년이나 있었다. 그러나 능히 그 직무를 다하고 백성의 뜻을 크게 두려워한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각각 갈라서 두 성씩으로 함이 마땅하다. 하물며 고려제도는 호남에 남북 두 도가 있었고, 영남에도 두 도가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목릉(穆陵) 때에 영남을 좌우 두 도로 갈라서 왜구를 방어했다. 양남(兩南)을 갈라서 네 성으로 만든 것은 예전에도 그런 법이 있었으며, 내가 처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남성의 포정사(布政司)는 광주에 있음이 마땅하며 광주는 옛날 무주이다.
영남성ㆍ황서성이란 지금의 경상도이다. 이 도에 황수(潢水 : 낙동강)가 있어, 남쪽으로 흐르는데, 물의 근원 가운데 하나는 태백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소백산에서 나온다. 소백산을 따라 내려오면서, 황수 동쪽에 있는 것을 영남성으로 하고 황수 서편에 있는 것을 황서성이라 했다.
순흥ㆍ풍기ㆍ영천ㆍ안동ㆍ비안ㆍ군위ㆍ인동ㆍ현풍ㆍ창녕ㆍ영산에서 아래로 동래까지는 모두 이 물의 동쪽에 있는데 여기부터 동쪽은 옛적 진한국(辰韓國)이었다. 예천ㆍ용궁ㆍ함창ㆍ상주ㆍ선산ㆍ성주ㆍ고령ㆍ초계ㆍ의령ㆍ함안ㆍ칠원ㆍ창원에서 아래로 김해까지는 모두 이 물의 서쪽에 있는데, 여기부터 서쪽이 옛날 변진국(弁辰國)이다.
생각건대, 우리나라 중세에 영남 우도(右道)의 감사가 진주에 좌정(坐定)했던 것은, 왜적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진주는 남쪽 바다에 가까워서, 북쪽으로 용궁ㆍ예천과는 길이 너무 멀고, 상주는 또 북쪽에 치우쳐 있다. 나의 생각에는 황서성 포정사는 성주에 두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이 고을은 북쪽에 금오산성(金烏山城)을 두고 서쪽으로는 추풍령이 목이 되어서, 관방(關防)이 될 만한 요충지대이다. 그러므로 진주는 그대로 병영으로 만들고, 성주에다 감영(監營)을 건설하면 관할하기가 편리할 것이다.
살피건대, 성주에서 대구까지는 하룻길이 못 되니, 만약 남쪽 도적이 와서 침범하면 두 성 신하가 편지를 띄워서 일을 의논하여, 수레바퀴가 서로 의지하는 형세가 될 것이니 또한 애각(涯角)처럼 서로 동떨어진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열동성(洌東省)이란 지금의 강원도이다. 그 강역(疆域)은 예전대로 하되 오직 낭천(狼川)ㆍ금성(金城)등 열수(洌水) 서쪽 고을은 경기에 옮겨 붙이고(위에 이미 기록했다), 경기의 양근ㆍ지평 두 고을과 충청도의 제천한 고을을 본성(本省)에 옮겨다 붙인 것(위에 이미 기록했음)이 조금 다르게 되었다.
생각건대, 이 성의 영동 쪽 아홉 고을(북쪽의 歙谷에서 남쪽의 平海까지)은 본래 현도(玄菟)의 남부이다. 그후 금와(金蛙)의 아버지, 해부루(解夫婁)가 예(濊) 지역에서 동쪽의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겨왔는데, 가섭원은 하서량(河西良)이고, 하서량은 지금의 강릉이다. 이후부터 영동 아홉 고을이 예맥(濊貊)이라는 명칭으로 잘못 불렸으나 실상 예맥은 본래 요동(遼東)에 있었고, 이 지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큰 산이 서쪽을 막았고, 동해(東海)가 동쪽에 닿았는데 감사는 원주(原州)에 앉았으니, 멀리까지 통제하기란 실상 어렵다. 나의 생각에는 강릉부사(江陵府使)도 또한 안찰사(按察使)라는 직명을 겸해서, 영동 아홉 고을의 작은 일은 강릉에 영솔(領率)되고, 오직 큰 일만을 감사에게 관유(關由)하도록 함이 또한 알맞을까한다.
송해성(松海省)이란 지금의 황해도이다. 해주(海州)는 궁벽지게 한 모퉁이에 있고, 송경은 다만 성 하나만 관할한다. 위치가 궁벽지면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관할이 작으면 권세가 적고 약하다. 그리하여 서도(西道)의 울타리로서는 두 곳을 다 믿을 수 없으니 송경을 황해 감영으로 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장단(長湍) 등 세 고을은 저절로 따라가는 것이 마땅하며, 북도(北道)에 있는 중화(中和)ㆍ상원(祥原) 두 고을도 본래 패수(浿水) 남쪽에 있는 것이므로 이번에 본성에다 옮겨붙였다.
살피건대, 원제에 양남(兩南)과 양북(兩北)은 면적이 아주 큰데 복판 4도(道)는 지역이 아주 작으니, 그 안쪽은 중하게, 바깥은 경(輕)하게 하며, 줄기는 억세게, 가지는 약하게 하는 뜻에 있어, 매우 합당하지 못하다. 이제 양남과 양북은 갈라서 8성으로 만들고, 중앙 4도는 그전대로 했다. 그렇게 하면 중한 데에 있으면서 경한 것을 막고, 강함으로써 약함을 제어하게 되니 진실로 형세에 도움이 있을 것이다.
패서성(浿西省)과 청서성(淸西省)은 지금의 평안도이다. 이 도는 중앙에 적유령(狄踰嶺ㆍ江界 남쪽 경계)이 있는데, 영 남쪽은 곧 청수(淸水)가 나오는 곳이고, 영 북쪽은 곧 독수(水)가 나오는 곳이다. 설한령(薛罕嶺) 산맥이 서쪽으로 나가서 적유령이 되고 또 서쪽으로 극성령(棘城嶺 : 熙川 서북쪽에 있다)이 되었는데, 가로뻗쳐서 남북의 큰 관(關)이 되었다. 지금은 적유령 남쪽 청수 동쪽에 있는 것은 패서성에 붙이고, 적유령 북쪽 청수 서쪽에 있는 것은 잘라서 청서성으로 만들려 한다.
덕천ㆍ개천에서 안주까지는 청수 동편에 있는데 이 동쪽은 패서성 소관이다. 그리고 희천ㆍ영변에서 박천까지는 청수 서쪽에 있고, 강계ㆍ위원은 적유령 북쪽에 있는데 이 서쪽은 청서성 소관이다.
생각건대, 평안 한 도가 본래 청남(淸南)ㆍ청북(淸北)으로 갈라져 있는데, 두 성으로 가른다는 것은 내가 처음 말한 것이 아니다. 만약 두 성을 설치한다면 청서성 포정사는 영변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 영변은 옛 병영인데 이괄(李适)이 이곳을 점거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후에 병영을 안주로 옮겼으나 국론은 늘 영변이 안주보다 낫다 한다.
생각건대, 폐4군(廢四郡)이란 무창ㆍ여연ㆍ우예ㆍ자성이다. 네 고을의 지역이 거의 천 리가 넘어서 지금 황해도와 비교하여도 곱절이 넘는다. 비록 고을 관아는 없으나 또한 인민은 섞여서 살고 있다. 네 고을을 회복하지 않을 수가 없으나 남쪽으로 평양과의 거리가 거의 몇천 리여서, 감사가 멀리까지 통제할 수가 없다. 나의 생각에는 강계부사도 또한 안무사라는 직명을 겸해서, 네 고을 수령에게 작은 일은 모두 강계에서 결재를 받고, 오직 큰 일만 감사에게 관유해서 강릉 예와 같이 함이 진실로 마땅할 것이다. 다만 강릉이 관할하는 아홉 고을은 포정사에서 고과(考課)함이 마땅하나 강계가 관할하는 폐4군은 고과하는 것마저 강주대사(江州大使)에게 하도록 하여 제주목사(濟州牧使)가 정의(旌義)ㆍ대정(大靜) 두 고을을 고과함과 같이 함이 가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청렴한가 탐묵(貪墨)한가와 부지런한가 게으른가는 멀리 있으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폐4군의(廢四郡議)를 지었는데 거기에 이렇게 적었다. “그윽이 압록강의 형세를 보건대, 4군 이서(以西)로부터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고을이 된 것이 위원(渭原)ㆍ초산(楚山) 등 일곱 고을이고, 4군 이동(以東)으로부터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고을이 된 것이 삼수와 갑산이다. 압록강 물은 남에서 북으로 여연에 이르고, 또 꺾여서 남쪽으로 흐른다. 지금 북쪽으로 매우 불거져나간 지역으로서, 대략 지대가 같은 곳을 논한다면 위원ㆍ갑산은 시위[弦]가 되고, 4군은 활이 된다. 강역(疆域)을 분별하는 데에는 활로 다툼이 마땅하고, 울타리를 가리는 데에는 활로 굳게 함이 마땅한데, 지금 폐지하고 돌아보지도 않음이 가하겠는가? 솔연(率然)이라는 뱀은 머리쪽을 치면 꼬리로 달려들고, 꼬리쪽을 치면 머리로 달려들며, 중간을 치면 머리와 꼬리로 함께 달려드는데, 이것이 병가(兵家)의 대세이기도 하다. 지금 솔연의 머리는 갑산에 있고, 꼬리는 위원에 닿았는데, 그 허리와 배는 모두 썩어버렸다. 그런데 오히려 머리와 꼬리로써 구원할 수가 있겠는가? 군사가 이기고 지는 것과 살아 남고 죽어 없어지는 것은 형세에 달렸을 뿐이다. 산전(山戰)하는 자는 높은 영(嶺)을 먼저 차지하면 이기고, 수전(水戰)하는 자는 먼저 상류(上流)를 차지하면 이기는 것도 형세이다.
강인(疆人) 수천 명이 4군 지역을 차지하여 북쪽으로 갈파(葛坡) 길을 끊고, 서쪽으로 건주(建州) 곡식을 통하면서, 남쪽을 향해 우리를 호령한다면 일곱 고을 정수(亭燧)와 성벽은 장차 흙이 무너지듯, 기와가 부스러지듯 하여, 패수 이북 지역은 다시 조선의 소유가 아닐 것이다. 이것은 걱정하지 않고, 4군을 폐지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막는 것이 있기 전에 넘어옴은 해됨이 없거니와, 막았는데도 넘어오는 것은 어지럽게 되는 근본이다.
《시경(詩經)》에 ‘버들을 꺾어서 채마밭에 울타리를 치니, 미친 지아비도 조심을 한다.’라고 하는 것은, 막은 것은 넘지 못함을 이른 것이다. 압록강은 큰 방수(防守)인데 지금 까닭없이 허물어서, 북방의 간사한 백성들이 은밀히 산림 중에 살면서 그 처자를 끌고 와서 소굴을 만들고, 날마다 금ㆍ는ㆍ동ㆍ철을 캐서 두드리고. 주조하여 재물을 만들고, 아이만한 인삼과 초서피(貂鼠皮)로써 스스로 살찌우며, 활, 살, 창, 작은 창, 화기(火器) 따위를 갖추어서 스스로 호위하고 있는데도 그 지역을 지키는 신하는 숨기고 보고하지 않으며 묘당(廟堂)에서는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다. 난리는 이미 일어났는데 방어(防禦)는 어디에 있는가? 옛적에 우리 세종(世宗)과 세조(世祖)께서 장수에게 명하고 군사를 출동시켜서 6진(鎭)을 경영할 적에, 온 나라의 힘을 다하여 성공한 다음에 그만둔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두만강을 방수(防守)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방수할 곳이 남에게 있어도 오히려 도모했는데, 방수할 곳이 나에게 있건만 어찌해서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것인가? 나는 그런 이유로 폐4군은 복구함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생각건대, 장수(涱水 : 長進江)의 일대는 곧 우리 내지(內地)이고 방수할 곳이 아니다. 그런데 남쪽으로 장진에서 북쪽으로 갈파(葛坡)가지 물을 따라 내려가면서 보(堡)를 설치한 것이 7~8군데나 되어, 목(項)과 등(背)이 서로 바라보이며 딱다기[刁斗] 소리가 서로 들림은 이 무슨 까닭인가? 대개 장수 서쪽은 곧 폐4군 지역으로서, 고을 관아는 이미 철폐했으나 난민이 섞여 살고 있으니 조정에서는 4군을 이역같이 여겼으므로 장수도 변경같이 여겨서 이렇게 설비했던 것이다.
그 뜻이 이러했기 때문에 녹수(淥水)를 따라, 동쪽으로는 갈파에서, 서쪽으로는 만포(滿浦)까지 600여 리를 그냥 휑하게 비워 방수하는 곳이 없고, 군사 하나도 머물러 두지 않았다. 또 만포에서 남쪽으로 독수(水 : 禿魯江)를 따라 내려가면서 또 7~8군데 보를 설치하여 장수와 같게 했으니 대개 독수 동쪽도 또한 폐 4군 경계인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정에서는 참으로 폐4군 지역을 버려서 이역으로 만든 것이 분명하다. 대저 녹수는 하늘이 만든 우리나라의 해자(塹)인데 하늘이 만들어준 해자를 버림은 매우 상서롭지 못하다.
가경(嘉慶) 17년(1812)에 가산(嘉山) 역적 홍경래(洪景來)가 반역을 도모하다가 죽임을 받았는데, 그 격서(檄書)에 문득 폐4군이 응원한다는 말로 허튼 공갈을 했다. 그렇다면 서쪽 토인(土人)들이 폐4군을 조만간 사단을 일으킬 곳으로 여기는 것이 명백하다. 장수 연변과 독수 연변에 설치된 수보(戍堡)가 거의 20곳이나 된다. 지금 이 여러 보를 걷어다가 녹수 연변에 벌여 세워서, 갈파ㆍ만포 사이의 비어 있는 지역을 방색(防塞)한다면 힘을 더 들이지 않고 재물을 더 허비하지 않아도, 녹수는 천연의 해자로서 기능이 완전해질 것이다.
보를 설치하는 방법은 한꺼번에 크게 일으키면 참으로 좋겠으나 그렇지 못하면 금년에는 갈파 서쪽 30리 지점과 만포 동쪽 30리 지점에 보 하나씩을 세우고, 다음해에 또 새 보의 서쪽 30리 지점과 동쪽 30리 지점에 보 하나씩을 세우고, 또 명년에 30리 지점에 세운다면 형세는 주머니 주둥이를 졸라매듯 하고, 공(功)은 무너진 곳을 막는 것 같아서 10년을 넘지 않아 북쪽 변경에 보장(保障)이 완성될 것이다. 보장이 완성되고 나면 고을 관아를 설치하지 못할 곳이 있겠는가? 지금 남쪽에는 백성은 많고 땅은 좁아서, 한 농부가 경작할 만한 땅은 값이 수만이나 되니 이들을 이사시켜서 그 지역에 채우면 즐거워하지 않을 자가 없을 터인데 국정(國政)을 잡은 자가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 것인가?
패수(浿水) 남쪽에 있는 중화(中和)ㆍ상원(祥原) 두 고을을 이제 예에 따라 송해성(松海省)에 옮겨 붙이려고 한다(이미 위에 기록했다).
생각건대, 당시에 이 두 고을을 평안도에다 붙인 것은 평양이 바로 패수가에 있어, 배를 저어 잠깐 만에 갈 수 있는데 문득 다른 도(道)에 속해 있기 때문에 평양에다 임시로 붙였던 것이다. 그러나 들에 획을 그어서 고을을 가르는 것은 자연 지형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중국 금릉(金陵)이 바로 양자강에 임했으나 강 북쪽 고을을 강 남쪽에다 붙였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그런데 역(驛)을 설치해서 급변을 경계하면서 변경 보고가 왕래할 때에, 서로 돕지 않을 수 없다. 두고 온 토지와 인민에 대한 온갖 일은 다 중경(中京)에서 영솔(領率)하고 오직 변보(邊報)에 대한 한 가지 일만은 평양의 절제(節制)를 아울러 받게 하여도 아마 폐단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강역(疆域)의 한계만은 이동할 수 없는 것이다.
현도성과 만하성(滿河省)이란 지금의 함경도이다. 이 도는 한복판에 마천령(摩天嶺)이 있는데, 영(嶺)의 큰 등마루가 바로 장백산(長白山)큰 줄기에 닿아 있으므로 영 이남을 남도(南道)라 하고, 영 이북을 북도라 했다. 이제 이것을 따라 나누어 두 성으로 만들었다. 남성(南省)은 단천(端川)에서 그치고 북성(北省)은 길주(吉州)에서 시작한다. 여기부터 북쪽으로 큰 등성이의 서쪽에 있는 것은 현도성에 붙이고 동쪽에 있는 것은 만하성에 붙인다.
지금 북도 절도사(節度使)는 기후가 화창하면 경성(鏡城)에 들어가고 바람이 사나우면 종성 행영(鍾城行營 : 會寧 동쪽에 있다)에 나와서 있는데 이제는 경성을 포정사로 만들고, 종성 행영은 그대로 행영으로 만들어두는 것이 참으로 알맞겠다.
생각건대, 만하성 6진(鎭)은 본래 북옥저(北沃沮) 지역이었는데 오랜 세월 동안 말갈(靺鞨)이 점거(占據)해 있었다.발해(渤海)가 번성할 때에는 그 지역을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로 삼았고, 또는 책성부(柵城府)라 하여 경(慶)ㆍ염(鹽)ㆍ목(穆)ㆍ하(賀) 네 고을을 영솔했다. 당(唐)나라 정원(貞元) 2년(신라 元聖王 2년 786)에 발해 문왕(文王) 흠무(欽茂)가 상경(上京)에서 동남쪽으로 도읍을 옮겨 동경(東京 : 《輿地勝覽》에는 南京으로 되어 있다)에다 정했는데 동경이란 지금의 행영(行營)이 혹 그 지역인가 한다. 그 후 발해가 망하자 그 지역을 야인(野人)이 몽땅 차지해서 자주 변경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세종과 세조가 이를 정벌ㆍ경략하고 겨우 경리(經理)하여 만하 이남이 드디어 우리 판도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기후가 아주 다르며, 지방 풍속이 우둔하여 이시애(李施愛)와 이징옥(李澄玉) 등이 한번 깃발을 휘두르며 난리를 일으키자, 백성이 쓸리듯 좇았다. 그 후에도 왜장(倭將) 청정(淸正)이 북관(北關)에 침입하니 난민 국경인(鞠景仁) 등 이 시기를 틈타 화동(和同)해서,번신(藩臣)과 수신(帥臣)을 다투어 죽이고 적에게 투항했다. 다행스럽게도 정문부(鄭文孚)의 힘을 입어서 평정할 수 있었으나 바람이 불면 풀이 따라서 움직이는 것 같아서, 가장 걱정되는 곳이 이 지역이다. 게다가 지역이 아주 멀고 소식[聲聞]이 서로 전달되지 않아 그 지역을 지키는 신하가 제 뜻대로 탐학(貪虐)해도 조정에서 듣지 못하고, 감사도 살피지 못하여 한 지역 생민(生民)이 마침내 호소할 곳조차 없는 불쌍한 백성이 될 것이니, 무휼(撫恤)하고 위안(慰安)하는 방법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는 만하성 순찰사(巡察使) 자리는 반드시 경악(經幄)에 가까이 모시던 신하로서, 행실을 힘써 닦은 청렴한 사람을 뽑아 보내서, 백성을 회유하고 오게 하는[來上] 방법을 다하게 함을 그만둘 수 없다.

봉천성(奉天城) : 포정사는 경기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으며, 그 직명은 경기 순찰사(京畿巡察使)라 한다. 4주(州), 10군(郡), 22현(縣)을 거느린다.
또 심주(沁州)는 1개 군을 거느린다.

광주(廣州)는 3군, 6현을 관할한다.
3군은여흥(驪興)ㆍ죽산(竹山)ㆍ안성(安城)이고, 6현은 과천(果川)ㆍ양성(陽城)ㆍ용인(龍仁)ㆍ이천(利川)ㆍ양지(陽智)ㆍ음죽(陰竹)이다.
광주 도호부 대윤(廣州都護府大尹)이 경기 수어사(京畿守禦使)를 겸무하며, 판관(判官) 한 자리를 두어 민사(民事)를 다스린다.
살피건대, 유수(留守)라는 직은 반드시 그 지역이 서울이 되었던 적이 있는 지역에 둘 수 있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송도(松都)를 중경(中京),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함은 마땅하나 그 외에는 경(京)이라 일컬을 만한 곳이 없다(경주가 비록 신라의 옛 도읍이었으나 지역이 아득히 멀고, 부여가 비록 백제의 고도이나 고을이 쓸쓸하고 가난하다). 강도(江都)와 광주는 한때 병란을 피했던 곳에 불과한데 어찌 도읍이라 할 수 있으며, 도읍이 되지 않았는데 어찌 유수를 둘 수 있겠는가? 그런데 200년 이래로 광주는 혹 유수가 되기도 하고 혹은 부윤(府尹)이 되기도 하여, 해마다 달마다 고쳐서 명칭이 여러번 변했다. 나의 생각에는 유수라는 명칭은 지금부터 폐지함이 마땅할 듯하다.
그 도호부라 하는 것은 무엇인가? 호(護)라는 것은 위로 왕국을 호위하고, 아래로 군민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원제에는 주(州)와 부(府 : 평양 같은 곳)가 있고, 도호부와 대도호부가 있다. 주에도 부윤(府尹)ㆍ목사(牧使)ㆍ부사(府使 : 朔州에서는 府使라 일컬음)가 있다. 직관제도(職官制度)는 간략해야 하며, 번거로움은 마땅치 못하다. 이제는 주와 부를 합쳐서 한 등(等)으로 하고, 무릇 주를 모두 도호부라 일컫고자 한다. 그 중에도 예전부터 부윤이라 일컫던 곳은 도호부 대윤(大尹)이라 일컫고 예전부터 대도호라 일컫던 곳은 도호부 대사(大使)라 일컬으며, 예부터 목사라 일컫던 곳은 도호부 목사라 일컫는다. 그리고 새로 승격해서 주로 만든 곳도 또한 아무 주 도호부 목사라 일컬으며, 그 밑에 군수가 있고, 그 밑에 현령이 있다. 현령과 현감은 반드시 명칭을 다르게 할 것이 아니므로 이제 현령을 그냥두고 현감이라는 명칭을 없애서, 중국제도와 같이 함이 잘못이 아닐 듯하다.
여흥(驪興)을 강등하여 군으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 여흥은 본시 작은 고을이었는데, 왕비(王妃)의 본관(本貫)이라는 이유로 주로 승격되었다.
생각건대, 주와 군을 올리고 낮추는 법은 본래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 대저 왕자(王者)가 나라를 세우면서 들에 획을 그어서 주를 가르고, 그 법제를 한 번 정했으면 변동하는 것은 마땅치 못하다. 옛날 고려 때에 주ㆍ군을 승격함이 해로 더하고 달로 불어났는데, 혹은 왕비의 관향(貫鄕)이라는 이유 때문에, 혹은 공신의 관향이라는 이유 때문에, 혹은 고승(高僧)의 관향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무릇 王師나 國師가 된 자의 관향은 모두 승격하였다). 드디어 관제가 어지럽게 되고 아첨하는 풍습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에 와서도 그대로 따라서 법으로 삼고 있으니, 이것은 반드시 고쳐야 마땅하다. 국운이 장구하여 천년을 지날 것 같으면 군과 현은 다 주로 승격될 것이니 어찌 이런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지금부터 주ㆍ군ㆍ현 세 등은 그 명칭을 한 번 정했으면 다시 번복하지 않는 것이 또한 왕정(王政)의 큰 것이다.
지금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죄를 지은 자가 그 고을에서 나오면 비록 웅장한 주와 큰 군이라도 낮추어, 현으로 만들어서 고을 명칭도 고치고(公州를 公山이라 고치는 것과 같다), 혹은 그 도의 명칭마저 고쳤다가(淸州를 강등시켜서 西原으로 만들고, 충청도를 公忠都라 했다) 10년이 지난 다음에야 복구하는데 이것은 매우 무의미한 일로, 그 정도가 심한 것이다. 감정이 없는 물(物)에다 벌을 시행하고, 징계하지 못할 땅에다 징계를 내리니, 장차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죄인이 나온 고을이 현이고 군이 아니어서 다시 더 낮출 수가 없으면 말현(末縣)으로 강등한다. 분명 이와 같으면, 주ㆍ군도 또한 그 본래 등급은 그냥두고 낮추어서 끝자리로 함이 마땅한데 어찌해서 반드시 현으로 낮추는 것인가? 법이 평등하지 못하면 성인의 법이 아닌데, 하물며 죄인이 나온 고을이 원래 말현이라면 장차 어찌 하겠는가? 법을 시행하다가 여기에 이르면 막혀서 통하지 못할 것이다. 무릇 막혀서 통하지 못하는 것은 성인의 법이 아니다.
죽산(竹山)을 낮추어서 군으로 한 것과 이천(利川)을 낮추어서 현으로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죽산과 이천은 모두 작은 고을이니 모두 현으로 낮추어야 할 것이나, 다만 죽산은 한길목에 있어서 평소부터 방어하는 책임이 있으므로 우선 낮추어서 군으로 했다. 이 다음에 낮추어서 현으로 만든 것은 모두 이와 같다.
화주(華州)는 3군, 6현을 관할한다.
3군은 남양(南陽)ㆍ인천(仁川)ㆍ부평(富平)이고, 6현은 시흥(始興)ㆍ진위(振威)ㆍ양천(陽川)ㆍ안산(安山)ㆍ김포(金浦)ㆍ통진(通津)이다.
화주 도호부 대사(大使)는 경기남도 방어사를 겸한다.
살피건대, 화성이 유수가 된 것은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일찍이 여기에 특별한 뜻이 있어,행궁(行宮)을 짓고 그 전(殿) 이름을 노래당(老來堂)이라 한 것에서 연유한다. 지금은 까닭없이 명칭을 유수라 하여 한갓 관제만 깨뜨려서 완전하지 못하게 할 뿐이니 이번에는 옛 명호를 회복해서 도호부로 만들고자 한다. 오직 그 성지(城池)는 법대로 쌓았고, 또 요긴한 길목에 있으므로 방어사를 겸하도록 했다.
양주(楊州)는 2군, 5현을 관할한다.
2군은 파평(坡平)ㆍ고양(高陽)이고, 5현은 가평(加平)ㆍ포천(抱川)ㆍ영평(永平)연천(漣川)ㆍ적성(積城)이다.
교하(交河)는 작은 고을이므로 고양에다 합병했다.
양주 도호부 목사는 경기 운향사(運餉使)를 겸무한다.
생각건대, 고양은 서로(西路)의 첫 참(站)에 당해서, 공궤(供饋)하는 일이 크게 번거로운데, 고을 힘이 약하니 교하를 합병해서 한 군으로 함이 마땅하다.
살피건대, 양주는 왼쪽으로 대수(帶水 : 임진강)를 끼고, 오른쪽으로는 열수(洌水)를 안고 있다. 무릇 군사를 일으켰을 때에 군량(軍粮) 운반을 책임지우는 것이 마땅하므로 운향사를 겸하게 한다.
철주(鐵州)는 고을 2, 5현을 관찰한다.
2군은 이천(伊川)ㆍ삭녕(朔寧)이고, 5현은 평강(平康)ㆍ안협(安峽)ㆍ김화(金化)ㆍ금성(金城)ㆍ낭천(狼川)이다.
철주 도호부 목사는 경기북도 방어사를 겸무한다.
생각건대 철원(鐵原)이란 옛날 철원(鐵圓)으로서 궁예(弓裔)가 도읍했던 곳이다. 바로 북로 요충(北路要衝)에 당해서, 본래부터 방어하는 직을 겸했는데 이번에도 그대로 했다.
심주부(心州府)는 1군을 거느린다.
1군은 교동(喬桐)이다.
심주부 행궁대사(行宮大使)는 경기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겸하며, 판관(判官) 한 자리가 있어, 민사(民事)를 다스린다.
교동 군수는 경기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를 겸무한다.
생각건대, 강화(江華)와 교동에는 관제가 여러번 변했으나, 강화가 이미 경읍(京邑)이 아니니 유수라는 명칭은 마땅치 않다. 그리고 서로 수군(西路水軍)과 특별히 상관되는 바가 없으니, 삼도 통어사(三道統禦使)라는 것도 또한 군더더기이다. 이제 심주 대사가 수군 절도사를 겸하도록 하여 급한 변고에 쓸 수 있으니 반드시 교동에게 중임(重任)을 맡도록 할 것이 아니다.

사천성(泗川省) : 포정사는 공주(公州) 금강(錦江) 남쪽에 있는데 4주, 10군, 28현을 관할한다.
공주(公州)는 3군, 8현을 관할한다.

3군은 천안(天安 : 木川을 합병함)ㆍ노성(魯城 : 石城을 합병함)ㆍ한산(韓山)이고, 8현은 직산(稷山)ㆍ부여(扶餘)ㆍ은진(恩津)ㆍ정산(定山)ㆍ홍산(鴻山)ㆍ임천(林川)ㆍ남포(藍浦 : 庇仁을 합병함)ㆍ서천(舒川)이다.
사천성 순찰사는 공주 도호부 대사를 겸무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民事)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보통 사람의 재주와 기국(器局)은 그 거리가 심히 멀지 않은데 어떤 사람에게는 영남ㆍ호남을 전적으로 맡겨도 넉넉함이 있고, 어떤 사람은 비인ㆍ남포를 갈라 다스리게 하여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나는 큰 도는 갈라서 두 성으로 만들고, 작은 현은 합쳐서 한 군으로 만드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작은 현을 구차스럽게 남겨두면 그 폐단이 점점 심해진다. 왜냐하면 조그마한 고을에도 사직(社稷)이 있고, 빈객(賓客)이 있으며, 관원에게 권속(眷屬)이 있고, 관청에 아전과 하례(下隸)가 있다. 백성의 재물을 벗겨내고, 침해해서 큰 고을이 하는 짓을 다 본받고자 하니 백성을 해쳐서 만 가지로 괴롭힌다. 착한 원이 오면 팔짱끼고 구경만 할 뿐 할 일이 없고, 탐학한 원이 오면 백성의 등골을 뽑으면서 제 이익을 구한다. 대개 이와 같은 고을은 점차 합쳐서 용관(冗官)이 점점 줄어들고, 백성의 살림이 점점 펴지도록 함이 마땅하다. 위아래 여러 성에 무릇 둘을 합쳐서 하나로 만든 것은 모두 이러한 뜻에서이니 재찰(裁察)하기 바란다.
살피건대, 감사(監司)의 직을 관찰사라 호칭하면서 순찰사를 겸임하고 있으니 대저 관찰이 곧 순찰인데 겹쳐서 일컫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제부터는 관찰을 버리고, 다만 순찰사라 일컬어서 순찰하는 일에 전념하도록 함이 마땅하다. 그리고 별도로 판관을 두는 이유는, 감사는 순행하는 것을 직무로 하여 거처를 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또 생각해보니 감사가 솔권(率眷)하기 시작한 이래고 온갖 폐단이 어지럽게 일어나서 한 가지 일도 거행되지 않고, 봄가을 순행(巡行)도 겉치레뿐이다. 이제부터는 감사가 솔권하는 법을 영원토록 철폐함이 마땅하다(이 뜻을 監司條에 밝혔음).
홍주(洪州)는 3군, 8현을 거느린다.
3군은 온양(溫陽 : 新昌을 합병함)ㆍ면천(沔川 : 德山을 합병함)ㆍ서산(瑞山 : 海美를 합병함)이고, 8현은 아산(牙山 : 平澤을 합병함)ㆍ대흥(大興)ㆍ예산(禮山)ㆍ보령(保寧)ㆍ당진(唐津)ㆍ태안(泰安)ㆍ결성(結城)ㆍ청양(靑陽)이다
홍주 도호부 목사는 사천성 운향사(運餉使)를 겸무한다.
생각건대. 홍주는 조운하는 길목에 당했으므로 운향사를 겸하도록 했다. 무릇 군량을 운반하는 관직을 겸한 것은 군사가 일어나면 군량 수운을 관장하고, 평시에는 세곡(稅穀) 조운을 담당하는 것을 규식으로 한다.
청주는 2군, 6현을 거느린다.
2군은 황간(黃澗 : 永同을 합병함)ㆍ옥천(沃川)이고, 6현은 청산(靑山)ㆍ보은(報恩)ㆍ문의(文義 : 懷仁을 합병함)ㆍ연기(燕歧 : 全義를 합병함)ㆍ회덕(恢德 : 鎭岑을 합병함)ㆍ연산(連山)이다.
청주 도호부 목사는 사천성 중도 방어사를 겸무한다.
생각건대, 남쪽 도적이 추풍령을 지나서 기내(畿內)로 침범하게 되면 황간에 와서 드디어 두 길로 갈라진다. 한 길은 청산(靑山)ㆍ보은을 지나서 청주로 나오고 한 길은 옥천ㆍ문의를 지나 청주로 나와서 경성(京城)에 도달한다. 이리하여 청주는 중도의 요충이므로 방어사를 겸하도록 하는 것이다.
생각건대, 임진년(壬辰年)에 왜구의 큰 진(陣)이 조령(鳥嶺)을 지난 다음 그 가운데 1대가 추풍령을 지나서 청주로 나왔다. 그후 조령에는 세겹 성(城)을 쌓아서 엄중하게 지키고 있으나, 추풍령 길은 잊어버리고 비워둔 것은 또한 무슨 연고인가? 조령은 본디 천연적인 험지(險地)로서, 한 사람이 길목에 버티고 있으면 1만 명이라도 침범하기 어려운 곳이니, 비록 요새를 설치하지 않더라도 급한 변고에 대비할 수가 있다. 그러나 추풍령은 본시 평지이니 만약 견고한 성이 없으면 도적을 막을 수 없다. 나의 생각에는 추풍령 서쪽으로 황간에 이르기 전에 험하고 비좁은 곳을 택해, 견고한 성을 급히 쌓아서 무기와 곡식을 간직하였다가 급한 변고가 있으면 군수에게 가서 지키게 하고 방어하는 신하는 후원(後援)이 되도록 해야 함은 그만둘 수가 없다.
충주(忠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
2군은 단양(丹陽)ㆍ청풍(淸風)이고, 6현은 영춘(永春)ㆍ괴산(槐山)ㆍ연풍(延風)ㆍ청안(淸安)ㆍ음성(陰城)ㆍ진천(鎭川)이다.
충주 도호부 목사는 사천성 동도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충주는 조령 길과 죽령(竹嶺)길이 합하는 곳이므로 방어사를 겸하도록 한 것이다.

완남성(完南省) : 포정사는 전주부(全州府) 성안에 있으며 3주, 6군, 18현을 관할한다.

전주(全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
2군은 여산(礪山)ㆍ익산(益山)이고, 6현은 고산(高山)ㆍ용안(龍安 : 咸悅의 반을 합병함)ㆍ임피(臨陂)ㆍ김제(金堤)ㆍ만경(萬頃)ㆍ옥구(沃溝 : 함열의 반을 합병함)이다.
완남성 순찰사는 전주 도호부 대윤을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民事)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전주는 번성하고 부유해서 큰 도시라고 일컫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일찍이 경읍(京邑)이 된 적이 없으므로 남경(南京)이라는 명칭은 적당하지 않다.
용주(龍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용주는 지금의 남원이다).
2군은 무주(茂朱)ㆍ금산(錦山)이고, 6현은 진산(珍山)ㆍ용담(龍潭)ㆍ진안(鎭安)ㆍ장수(長水)ㆍ임실(任實)ㆍ운봉(雲峰 : 求禮를 합병한다)이다.
용주 도호부 목사는 완남성 동도 방어사를 겸한다.
살피건대, 용성(龍城)이 동쪽으로 팔량치(八良峙)에 통해서, 신라ㆍ백제의 경계가 되었고, 목구멍 같은 요충지이므로 방어사를 겸하도록 한다.
나의 생각에는 팔량영은 남방(南方)의 큰 관방(關防)이라 생각한다. 백제가 망할 때에 유인궤(劉仁軌)가 남원(南原)에 유진(留鎭)하면서 남원을 대방주(帶方州)로 만들어서 신라의 길을 막았다. 고려 말에는 우리 태조(太祖)가 왜구를 만나,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죽인 곳으로,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가 이곳에 있다. 만력 정유년(萬曆丁酉年 : 선조 30년,1597)에는 왜구가 이 길을 지나서 남원을 공격했는데, 명(明)나라 장수 양원(楊元)이 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따라서 이 길목을 방어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와 같은데, 지금까지 한 조각의 견고한 성도 없으니 엉성하다 할 수 있다. 운봉 동쪽 10여 리 지점이 그 영의 가장 험한 목에 해당하는데, 견고한 성 하나를 쌓고, 운봉 관아를 이 성으로 옮기도록 함은 그만둘 수 없다.
순주(淳州 : 곧 淳昌임)는 2군, 6현을 거느린다.
2군은 태인(泰仁 : 태인은 이번에 승격했다)ㆍ고부(古阜)이다. 6현은 정읍(井邑)ㆍ금구(金溝)ㆍ부안(扶安)ㆍ고창(高敞)ㆍ무장(茂長)ㆍ흥덕(興德)이다.
순주 도호부 목사는 완남성 중도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순주에도 노령(蘆嶺)이 있고, 복판 큰 길이 되었으므로 방어사를 겸하도록 했다. 또 순주에는 부흥산(復興山)이 있어, 험하게 막힌 것은 비교할 데가 없다. 남쪽 사람들은 모두 병마사(兵馬使)의 영(營)은 순주에다 설치해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무남성(武南省) : 포정사는 광주부(光州府) 성안에 있으며, 3주, 6군, 18현을 관할한다(또 濟州는 2현을 거느린다).

광주(光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
2군은 장성(長城)능성(綾城 : 綾州)이고, 6현은 담양(潭陽)ㆍ창평(昌平)ㆍ화순(和順)ㆍ남평(南平)ㆍ옥과(玉果)ㆍ곡성(谷城)이다.
무남성 순찰사는 무주(武州) 도호부 대사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살피건대, 광주(光州)란무주(武州)이다. 신라 말부터 항상 큰 진(鎭)이었고, 고려 때에도 또한 그러했다. 우리나라에 와서는 창의(倡義)하는 군사가 이곳에서 먼저 일어났으니 그 고을을 포정사로 한 것이 그것에 연유한다.
나주(羅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
2군은 영광(靈光)ㆍ영암(靈巖)이고, 6현은 함평(咸平)ㆍ무안(務安)ㆍ강진(康津)ㆍ해남(海南)ㆍ진도(珍島)ㆍ압해(押海)이다.
나주 도호부 목사는 무남성 우도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압해는 나주 바다의 바깥 섬이다. 나주 바다에 열두 개의 큰 섬이 있고, 작은 섬으로서 큰 섬에 딸린 것은 수십 개나 된다. 여러 섬에서 1년 동안 요역(徭役)으로서 고을 관청 사람의 요구에 응(應)하는데 곡식이 1만 섬이나 들고 다른 물건도 이만큼은 든다 한다. 나주 군관이 바깥 섬 주인이 되어, 그 이(利)를 다 먹으면서, 목사가 쓰는 목물(木物)과 잡비를 충당해준다 하니 천하에 무의 무법(無義無法)함이 이와 같을 수 없다. 섬 백성이 바다를 건너 육지에 와서 고소(告訴)하려 하여도 한 번 부성(府城)에 들어오려면, 헛되이 드는 비용이 매우 많고 사건은 결국 바로잡아지지 않기 때문에 원통함과 억울함이 쌓여서, 별도로 한 현을 세우고, 열두 섬을 다 이 현에다 붙이기를 원하고 있다. 내가 그 실정을 익히 알므로, 이번에는 열두 섬 중에 하나를 택해서 관아를 세우고자 하는데 자은(慈恩)ㆍ암태(巖泰)ㆍ압해가 그 후보지이다. 그런데 압해는 본시 옛 현이니 여기에다 관아를 설치함이 또한 마땅하다.
생각건대, 신라ㆍ고려 때에 왜구가 우리 서해(西海)를 여러 번 침범했고, 만력 임진년과 정유년 난리에는, 다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힘을 입어서, 왜적이 울두홍(熨斗谼)을 넘지 못했다. 만약 그때에 왜적이 이곳을 넘었더라면 나주 열두 섬이 맨 먼저 뱀과 돼지 같은 놈들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여러 섬에 성 하나, 보(堡) 하나 없으니 우리나라 서남해의 방어는 허술하다 할 수 있다. 바삐 한 현을 설치해서 그 침입을 막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승주(昇州)는 2군, 6현을 거느린다(승주는 곧 順天이다).
2군은 장흥(長興)ㆍ보성(寶城)이고, 6현은 광양(光陽)ㆍ흥양(興陽)ㆍ낙안(樂安)ㆍ동복(同福)ㆍ금오(金鼇)ㆍ검주(黔州)이다.
승주 도호부 목사는 무남성 좌도 방어사를 겸한다.
살피건대, 순천 수영(水營) 남쪽에 금오도(金鼇島)가 있는데 둘레가 300리이고, 그 서쪽에 수태도(愁太島)가 있는데 주위가 200리나 된다. 그리고 돌산(突山)ㆍ내발(乃發)ㆍ횡간(橫看) 따위 여러 섬은 그 수효도 모를 정도이다. 지금은 금오도를 현으로 만들고 그 옆에 있는 수십 개 섬을 다 이 현에 예속시켜서 왜구의 침입을 막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생각건대, 흥양 남쪽에 있는 절금도(折今島)는 둘레가 100여 리인데 백성이 많고 토지가 기름지다. 그 서쪽에 산이(山伊)ㆍ조약(助藥)ㆍ벌라(伐羅)ㆍ금당(衾堂) 따위의 섬이 있는데 그 수효도 모를 지경이다. 절금도에 금주현을 만들고, 그 옆에 있는 수십 개 섬을 다 이 현에다 예속시킴도 또한 마땅한 일이다.
제주(濟州)는 2현을 거느린다.
2현은 정의(旌義)ㆍ대정(大靜)이다.
제주 도호부 대사는 탐라부 병마 수군 도절제사(耽羅府兵馬水軍都節制使)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제주는 모두 원래 제도대로 하고 고칠 것이 아니다.

영남성(嶺南省) : 포정사는 달주부(達州府) 성안에 있는데 3주, 9군, 18현을 관할한다.

달주는 3군, 6현을 거느린다(달주는 곧 大邱이다).
3군은 청도(淸道)ㆍ밀양(密陽)ㆍ칠곡(漆谷)이고, 6현은 현풍(玄風)ㆍ창녕(昌寧)ㆍ영산(靈山)ㆍ인동(仁同)ㆍ경산(慶山 : 慈仁을 합병함)ㆍ신령(新寧 : 河陽을 합병함)이다.
영남성 순찰사는 달주 도호부 대사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가주(嘉州 : 곧 安東임)는 3군, 6현을 거느린다.
3군은 풍기(豊基 : 順興을 합병함)ㆍ청송(靑松 : 眞寶를 합병함)ㆍ의성(義城)이고, 6현은 봉화(奉化)ㆍ영천(榮川)ㆍ예안(禮安)ㆍ영양(英陽)ㆍ의흥(義興)ㆍ군위(軍威 : 比安을 합병함)이다.
가주 도호부 대사는 영남성 상도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풍기는 한길 요충에 당했고, 큰 영의 목을 차지했으나 고을 힘이 약하므로 순흥을 당겨서 합병했다.
경주(慶州)는 3군, 6현을 거느린다.
3군은 동래(東萊)ㆍ울산(蔚山)ㆍ영천(永川)이고, 6현은 영해(盈海 : 盈德을 합병함)ㆍ흥해(興海 : 淸河를 합병함)ㆍ장기(長鬐 : 延日을 합병함)ㆍ언양(彦陽)ㆍ양산(梁山)ㆍ기장(機張)이다.
경주 도호부 대윤(大尹)은 영남성 하도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동래는 본디 하나의 작은 현인데 이웃 나라와 인접했다는 이유로 부로 승격시킬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군수열(郡守列)에 두었다. 그러나 그 직은 병마 수군절제사를 겸해서 다른 고을 수령과 같지 않다.
생각건대, 경주는 비록 신라의 천년 고도(千年古都)이나 지역이 아득히 멀어서 여러 경(京)에 끼기에는 부족하다.

황서성(潢西省) : 포정사는 황수(潢水) 서쪽 성주(星州)에 있는데 3주, 9관, 18현을 관할한다.

성주는 3군, 6현을 거느린다.
3군은 합천(陜川)ㆍ함양(咸陽 : 安義를 합병함)ㆍ초계(草溪)이고, 6현은 고령(高靈)ㆍ거창(居昌)ㆍ삼가(三嘉)ㆍ의령(宜寧)ㆍ산청(山淸)ㆍ단성(丹城)이다.
황서성 순찰사는 성주 도호부 대사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함양이 팔량치 어구에 당했으니 형세를 고단(孤單)하게 할 수 없으므로 안의를 합병한 것이다.
상주(尙州)는 3군, 6현을 거느린다.
3군은 선산(善山)ㆍ예천(醴泉)ㆍ금산(金山)이고, 6현은 문경(聞慶)ㆍ용궁(龍宮)ㆍ함창(咸昌)ㆍ화령(化寧)ㆍ개령(開寧)ㆍ지례(知禮)이다.
상주 도호부 목사는 황서성 북로(北路)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추풍령 북쪽에 화령ㆍ중모(中牟)라는 두 옛 고을이 있는데, 지금은 모두 혁파되어서 상주에 속했다. 나의 생각에는 이 고을을 다시 설치하는데 두 고을을 합쳐 하나로 만들고 명칭은 화령이라 하여 추풍령 어구를 충실히 하게 한다면 관방(關防)하는 데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진주(晋州)는 3군, 6현을 거느린다.
3군은 김해(金海)ㆍ창원(昌原 : 漆原을 합병함)ㆍ하동(荷東 : 즉 河東으로, 昆陽을 합병함)이고, 6현은 사원(泗原 : 즉 泗川)ㆍ고성(固城)ㆍ함안(咸安 : 鎭海를 합병함)ㆍ웅천(熊川)ㆍ남해(南海)ㆍ거제(巨濟)이다.
진주 도호부 목사는 황서성 남로(南路)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하동은 잔수(潺水) 동쪽에 있어, 서쪽으로 섬진강(蟾津江 : 豆恥津)만 건너면 곧 광양(光陽)에 닿아 전라도에 통한다. 여기도 관방할 곳이니 곤양을 합병해서 한 군으로 함이 마땅하다. 곤양 남쪽, 남해 어구에 노량보(露梁堡)가 있는데 여기가 이순신이 왜적을 막던 곳이다. 곤양 남쪽 두어 마을을 노량에다 예속시켜서 그 힘을 굳세게 함도 또한 마땅한 바이다(노량에다 防寨를 설치하면 蟾津寨는 혁파함이 마땅함).
충청도(忠淸道)를 이번에 사천성(泗川省)이라 고쳤으니 사천현은 사원(泗原)이라 고쳐서, 명칭이 헷갈리지 않게 함이 마땅하다.

열동성(洌東省) : 포정사는 원주부(原州府) 안에 있다. 3주, 6군, 12현을 관할한다.

원주는 2군, 3현을 거느린다.
2군은 영월(寧越)ㆍ정선(旌善)이고, 4현은 제천(堤川)ㆍ평창(平昌)ㆍ횡성(橫城)ㆍ지평(砥平)이다.
열동성 순찰사는 원주 도호부 대사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열동성 포정사는 춘주(春州)에다 두어서, 남북 이수(里數)가 균등하도록 함이 마땅하다. 이번에는 우선 예전대로 했으나 그 의논은 그냥 무시할 것이 아니다. 또 영동 아홉 고을은 바로 이역 같아서 관할하기가 불편하니, 열동에 포정(布政)하는 신하를 봄ㆍ여름은 명주(溟州)에, 가을ㆍ겨울은 원주에 있도록 하여 선화(宣化)를 고르게 함이 마땅하다.
춘주(春州 : 춘주는 곧 春川임)는 2군, 4현을 거느린다.
2군은 회양(淮陽)ㆍ양근(楊根 : 본디 경기에 딸렸던 고을이다)이고, 4현은 홍천(洪川)ㆍ미원(迷源)ㆍ인제(麟蹄)ㆍ양구(楊口)이다.
춘주 도호부 목사는 열동성 운향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춘주란 옛적에 낙랑국(樂浪國)이었다. 한(漢)나라에서 처음에 평양에다 낙랑을 설치했는데 그후 고구려에게 빼앗기자, 낙랑 사람들이 우수주(牛首州)에 와서 차지하고, 백제와 연결해서 읍루(揖婁)에 항거하며 고구려와 대항하였다(아울러 《疆域考》에 밝혔다). 지금 사람들은 우수주를 맥국(貊國)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이것은 대개 가탐(賈耽)이 지지(地志)를 찬(撰)하면서부터 잘못 전해진 것이다. 이 지역이 본래 위치한 형세는 또 한 도의 복판에 있으니 열동성 포정사는 여기에 있음이 마땅하다.
생각건대, 양근 서북쪽에 미원이라는 옛 고을이 있는데, 아직도 창사(倉舍)가 있다. 이 지역은 홍천ㆍ춘천 두 고을 물이 합류하는 아래쪽에 있어 군사를 숨기고 곡식을 운반하여 급한 사변에 대처할 만한 곳이니, 그 고을을 복구하여 춘주 아래쪽을 받치게 하도록 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명주(곧 江陵)는 2군, 4현을 거느린다.
2군은 양양(襄陽)ㆍ삼척(三陟)이고, 4현은 간성(杆城)ㆍ고성(高城)ㆍ통천(通川 : 歙谷을 합병함)ㆍ울진(蔚珍 : 平海를 합병함)이다.
명주 도호부 대사는 영동 안무사(嶺東安撫使)를 겸한다.
생각건대, 나의 숙부가 일찍이 흡곡 현령을 지냈는데, 그때 흡곡에는 민호(民戶)가 400여 호에 불과했다. 400호만으로는 현이 될 수 없으니 통천과 합쳐서 백성의 노고를 덜어주도록 함이 마땅하다. 또 울진이 현으로 되어 있으나 또한 아주 작다고 칭하니 평해를 울진에다 합치는 것이 마땅하다.
살피건대, 명주 지역이, 동쪽으로는 큰 바다가 있고, 서쪽으로는 태산이 둘러 있어, 좁고 막힌 것이 문득 이역과 같으므로 감사에게 반(半)은 영동에 있도록 함이 마땅하나,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영동 여러 고을의 일반 정무는 명주 대사에게 결재를 받도록 하고 오직 큰 사건만 감사(監司)에게 관유(關由)하여, 강계(江界)의 폐4군처럼 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송해성(松海省) : 포정사는 중경 유수부(中京留守府) 안에 있는데 1경(京), 2주, 12군, 12현을 관할한다.

중경은 개성부(開城府)인데, 4군, 4현을 거느린다.
4군은 장단(長湍)ㆍ평산(平山)ㆍ연안(延安)ㆍ배천(白川)이고, 4현은 마전(麻田)ㆍ금천(金川)ㆍ토산(兎山)ㆍ신계(新溪)이다.
풍덕부(豊德府)는 송경(松京)에다 합병했다.
중경 유수는 송해성 순찰사와 개성부 대윤(大尹)을 겸하며, 서윤(庶尹)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개성부가 이미 주목(州牧)의 체재(體裁)를 갖추었으나 지역이 아주 작고, 성 하나만 웅거했을 뿐이어서 모양이 안 되므로 이번에 풍덕(豊德)을 합쳐서 한 주로 만드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해주(海州)는 4군, 4현을 거느린다.
4군은 장연(長淵)ㆍ풍천(豊川 : 松禾를 합병함)ㆍ안악(安岳)ㆍ신천(信川)이고, 4현은 장련(長連)ㆍ은율(殷栗)ㆍ문화(文化)ㆍ강령(康翎 : 瓮津을 합병함)이다.
옹진이 이미 수영(水營)에 들어 있어도 없는 것 같으니 강령에 합쳐서, 계산에 넣지 않았다.
해주 도호부 목사는 송해성 운향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풍천이 초도(椒島) 어구에 당해 있으니, 일후의 급한 변은 반드시 이곳에서 일어날 것인데, 고을의 힘이 아주 약하므로 송화(松禾)를 합친 것이다.
생각건대, 관서(關西)에 병란이 있으면 남도 곡식을 북쪽으로 실어오고, 경기에 흉년이 들면 서도 곡식을 남쪽으로 수운(輸運)하는데, 신하 하나를 조수(漕帥)로 삼아 두는 것이 마땅하므로 여기에 운향사를 겸하도록 한 것이다.
살피건대, 여러 성에 등(等)을 가를 때마다 군은 적고 현은 많은데, 서북 여러 도에는 군과 현의 수효가 서로 같은 데가 많다. 이것은 본래 큰 군이 많아서 현으로 이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황주(黃州)는 4군, 4현을 거느린다.
4군은 중화(中和)ㆍ봉산(鳳山)ㆍ서흥(瑞興)ㆍ곡산(谷山)이고, 4현은 상원(祥原)ㆍ수안(遂安)ㆍ재령(載寧)ㆍ인성(麟城)이다.
황주 도호부 목사는 송해성 서도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인성이란 봉산 동사리(東四里)이다. 봉산 동남쪽 100여 리 되는 기린역(麒麟驛) 북쪽에 동사리라는 곳이 있고, 또 재령(載寧) 성당면(聖堂面)이 기린역 서쪽에 있다. 이 지역은 텅 비어서, 성곽이 없고, 4방 고을과의 거리는 모두 100리가 넘는다. 그러므로 백성이 법을 모르고 행려(行旅)도 모여들지 않는다. 여기에다 작은 현을 만들고, 명칭을 인성이라 하여, 바둑알과 별처럼 벌여 있도록 하고, 너무 엉성하지 않게 함이 마땅하다. 깊은 산 큰 골짜기에 사람 사는 곳이 아주 희소하면 비워두지 않을 수 없겠으나 이와 같은 평지에 어찌해서 보장(保障)을 만들지 않은 것인가? 여기에는 현을 반드시 설치해야 마땅하다.
재령은 본래 큰 군이었으나 갈라서 인성현을 만들었으므로 이번에 낮추어서 현으로 만들었다.

패서성(浿西省) : 포정사는 서경 유수부(西京留守府)에 있다. 1경, 1주, 6군, 12현을 관할한다.

서경은 평양부인데 4군, 6현을 거느린다.
3군은 성천(成川)ㆍ삼화(三和)ㆍ함종(咸從 : 甑山을 합병함)이고, 6현은 강서(江西)ㆍ용강(龍岡)ㆍ순안(順安)ㆍ강동(江東)ㆍ삼등(三登)ㆍ양덕(陽德)이다.
서경 유수는 패서성 순찰사와 평양부 대윤을 겸하며서윤(庶尹)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삼화는 패강(浿江)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어구에 해당하므로 방어해야 할 책임이 있다. 비록 낮추어서 군으로 만들었으나 방어사라는 명칭은 그냥 겸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생각건대, 증산(甑山)은 작은 취락(聚落)이므로 함종에 합병함이 편당(便當)하나 증산과 함종이 예전에는 다 증지현(增地縣)에 매였던 것이므로 이번에는 함종에 증산의 명칭을 더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안주(安州)는 3군, 6현을 거느린다.
3군은 숙천(肅川)ㆍ순천(順川)ㆍ개천(价川)이고, 6현은 영유(永柔)ㆍ자산(慈山)ㆍ덕천(德川)ㆍ맹산(孟山)ㆍ영원(寧遠)ㆍ은산(殷山)이다.
안주 도호부 목사는 패서 방어사를 겸한다.
살피건대, 이 3군과 6현은 모두 살수(薩水) 동쪽에 있는데, 은산ㆍ맹산ㆍ영원은 또 패원(浿源) 동쪽에 있다.

청서성(淸西省) : 포정사는 영주(寧州) 약산(藥山) 성안에 있는데 3주, 18군, 2현을 관할한다.

영주(곧 寧邊이다)는 6군, 2현을 거느린다.
6군은 정주(定洲 : 곧 定州임)희천(熙川)ㆍ운산(雲山)ㆍ구성(龜城)ㆍ가산(嘉山)ㆍ곽산(郭山)이고, 2현은 박천(博川)ㆍ태천(泰川)이다.
청서성 순찰사는 영주 도호부 대사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주ㆍ군 제도가 모두 엄정하여 문란함이 없어야 한다면, 여러 고을이 주(州)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부당하므로 정주(定州)ㆍ삭주(朔州)는 모두 주(州)를 주(洲)로 고쳐야 한다.
의주(義州)는 6군을 거느린다.
6군은 삭주(朔洲)ㆍ창성(昌城)ㆍ벽동(碧潼)ㆍ용천(龍川)ㆍ철산(鐵山)ㆍ선천(宣川)이다.
의주 도호부 대윤은 청서 방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강변 여러 고을과 바닷가 세 고을은 그 등급이 높아야 할 것이므로 여섯 고을을 아울러 군(郡)으로 하고 현으로 낮추지 않는다.
강주(江州 : 강주는 곧 江界이다)는 6군을 거느린다.
6군은 여연(閭延)ㆍ무창(茂昌)ㆍ우예(虞芮)ㆍ자성(慈城)ㆍ위원(渭源)ㆍ초산(楚山)이다.
강주 도호부 대사는 청서 방어사와 4군 안무사를 겸한다.
생각건대, 4군에 백성을 채우는 방법은, 온 집이 변방으로 이사가는 율(律)을 회복하는 것이 마땅하나 다만 남북은 기후가 아주 다른데 갑자기 멀리 옮기면 인정이 슬퍼할 것이니 지금부터 중죄(重罪)는 1천 리 너머로 이사시키고, 그 다음은 500리 너머로 옮기도록 한다. 그리하여 남방 백성은 복판 도로 옮기고, 복판 도의 백성은 양서(兩西)로 옮기고, 서도 백성은 이에 4군으로 옮긴다면, 남방에는 호총(戶摠)이 죽어들고 4군에는 읍과 부락(部落)이 이루어질 것이니, 이것이 진실로 편리한 방법이다.

현도성(玄菟省) : 포정사는 함주부(咸州府) 성안에 있다. 2주, 4군, 10현을 관할한다.

함주(즉 咸興이다)는 2군, 5현을 거느린다.
2군은 영흥(永興)ㆍ안변(安邊)이고, 5현은 덕원(德源)ㆍ문천(文川)ㆍ고원(高原)ㆍ정평(定平)ㆍ장진(長津)이다.
현도성 순찰사는 함주 도호부 대윤을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영흥이 비록 우리 성조(聖祖)가 일어난 곳이나, 반드시 승격시켜서 부(府)로 만들어야 존엄해지는 것은 아니다. 한 태조(漢太祖)가 용흥(龍興)한 후에도 풍읍(豊邑)은 그대로 현이었고, 패군(沛郡)은 그대로 군이었을 뿐, 그것을 승격시켜서 주목(州牧)으로 했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법제(法制)를 한번 정했으면 기강이 있어야 하는데, 영흥은 이미 거느린 고을이 없으니 군이 될 뿐이다.
항주(航州 : 항주는 곧 北靑이다)는 2군, 5현을 거느린다.
2군은 단천(端川)ㆍ갑산(甲山)이고, 5현은 이원(利原)ㆍ홍원(洪原)ㆍ삼수(三水)ㆍ계산(階山)ㆍ후주(厚洲)이다.
현도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는 항주 도호부 대사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북청(北靑) 북쪽에 자항산(慈航山)이 있으므로 항주라고 고쳤다.
살피건대, 조정에서 이미 4군을 버려서, 4군은 야인잡류(野人雜類)가 사는 곳이 되어버렸는데, 이에 장수(涱水) 동쪽 연안에 장진(長津)ㆍ신방(神方)ㆍ강구(江口)ㆍ어면(魚面)ㆍ자작(自作)이라는 방수(防戍)를 두어서 갈파(葛坡)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문호를 열어서 적인(敵人)을 인도하는 것으로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선왕이 매우 개탄하여, 먼저 장진보(長津堡)를 장진부(長津府)로 만들고, 장신(將臣) 이경무(李敬懋)를 보내서 이 고을을 경영하였으니, 이것은 왕자(王者)의 큰 계획이었다.
생각건대, 항주 서북쪽에 소백계산(小白階山)ㆍ원동(院洞)ㆍ은동(銀洞)이라는 여러 곳이 어면보(魚面堡) 후면에 있으니, 그 지명을 계산이라 하여 바삐 한 현을 세우면 장수 서쪽 함덕(鹹德)ㆍ판막동(板幕洞) 여러 곳도 차츰 경영하는 안으로 들어올 것이니 고을이 되지 않을 것을 걱정할 것 없다.
살피건대, 폐4군은 모두 강 연안의 고을들인데 그 상류에 후주고성(厚州古城)이 있다. 지금은 조금 옮겨서 후주보(厚州堡)를 만들었는데, 이곳은 4군 외에 또 하나의 폐군(廢郡)이다. 이곳에다 현 하나를 설치하고, 명칭을 후주(厚洲)라 하여, 동쪽으로 삼수와 연하고 서쪽으로 무창(茂昌)에 접하여서 지금의 구갈파(舊葛坡)에 관아를 만들면,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지역이 모두 다스리는 계획 속에 들어와서 북변(北邊) 울타리가 점차 완전해질 것이다.

만하성(滿河省) : 포정사는 경주부(鏡州府) 성안에 있는데 2주, 8군을 관할한다.

경주(鏡州 : 곧 鏡城)는 4군을 거느린다. 4군은 길주(吉洲 곧 吉州)ㆍ명천(明川)ㆍ부령(富寧)ㆍ무산(茂山)이다.
만하성 순찰사는 경주 도호부 대사를 겸하며, 판관 한 사람이 있어, 민사를 다스린다.
생각건대, 12성 순찰사는 모두 병마절도사를 으레 겸하고 있으나, 실제로 겸한 것은 아니다. 만하성의 경우는 실제로 겸하고 병마영(兵馬營)을 별도로 세우지 않음이 마땅하다.
회주(會州 : 곧 會寧)는 4군을 거느린다. 4군은 종성(鍾城)ㆍ온성(穩城)ㆍ경원(慶源)ㆍ경흥(慶興)이다.
회주 도호부 대사는 만하성 방어사와 6진 안무사(六鎭安撫使)를 겸한다.
생각건대, 예전 예에 만하성 절도사는 기후가 화창하면 경성(鏡城)에 있고 기후가 차가워지면 종성 행영(鍾城行營)에 있었는데 지금은 순찰사가 이 직무를 실제 겸했으니, 또한 옛 예에 따라 옮겨가면서 있음이 마땅하다.
생각건대, 만하성 순찰사는 문신과 무신이 교대로 하는 것이 마땅하며 무신은 일찍이 승지나 참판을 지낸 자라야 천망(薦望)에 참여하도록 함이 또한 마땅하다.

12성(省) 주ㆍ군ㆍ현의 총수(가경 병자년, 곧 순조 16년, 1816년 8월 23일에 시험삼아 기록했다)
봉천성(奉天省) 38읍(4주, 10군, 22현. 또 沁州 1주, 1군)
사천성(泗川省) 42읍(4주, 10군, 28현)
완남성(完南省) 27읍(3주, 6군, 18현)
무남성(武南省) 27읍(3주, 6군, 18현)
제주(濟州) 3읍(1주, 2현)
영남성(嶺南省) 30읍(3주, 9군, 18현)
황서성(潢西省) 30읍(3주, 9군, 18현)
열동성(洌東省) 21읍(3주, 6군, 12현)
송해성(松海省) 27읍(1경, 2주, 12군, 12현)
패서성(浿西省) 20읍(1경, 1주, 6군, 12현)
청서성(淸西省) 19읍(3주, 14군, 2현)
폐4군 4읍(4군)
현도성(玄菟省) 16읍(2주, 4군, 10현)
만하성(滿河省) 10읍(2주, 8군)
이상 공 314읍이다. 본래는 346읍인데, 줄인 것이 43읍이고(풍덕ㆍ교하ㆍ목천ㆍ석성ㆍ비인ㆍ신창ㆍ덕산ㆍ해미ㆍ평택ㆍ영동ㆍ회인ㆍ전의ㆍ진잠ㆍ함열ㆍ구례ㆍ자인ㆍ하양ㆍ순흥ㆍ진보ㆍ비안ㆍ영덕ㆍ청하ㆍ연일ㆍ안의ㆍ칠원ㆍ곤양ㆍ진해ㆍ흡곡ㆍ송화ㆍ옹진ㆍ증산), 증설한 것이 11읍이다(압해ㆍ금오ㆍ검주ㆍ화령ㆍ인성ㆍ계산ㆍ후주ㆍ폐4군).


[주D-001]근본(根本)되는 곳 : 국도를 말함.
[주D-002]목릉(穆陵) : 선조(宣祖)의 능호(陵號).
[주D-003]관방(關防) : 관문(關門)을 만들어서 외적을 방어하는 곳.
[주D-004]애각(涯角) : 천애지각(天涯地角)의 준말. 하늘가와 땅 모퉁이가 아주 동떨어져 있다는 말.
[주D-005]금와(金蛙) : 옛날 북부여(北夫餘)의 임금 금와왕.
[주D-006]이괄(李适) :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했던 무장(武將). 그 후 일부 공신의 횡포에 반항하여 그들을 제거하려는 난을 일으켰고, 서울을 무혈점령했으나 안현(鞍峴) 싸움에 참패하여 부하에게 죽임을 당했음.
[주D-007]정수(亭燧) : 정(亭)은 망대(望臺), 수(燧)는 봉수(烽燧). 망대로써 적의 행동을 탐지하고 봉수로써 급변을 연락하였다.
[주D-008]묘당(廟堂) : 의정부의 별칭.
[주D-009]보(堡) : 적의 습격을 막기 위해서 설치한 요새. 보루.
[주D-010]말갈(靺鞨) : 만주(滿洲) 동부 지방에 있던 퉁구스계의 일파. 숙신(肅愼)ㆍ읍루(挹婁)ㆍ물길(勿吉)은 모두 그들의 옛 명칭으로 뒷날 여진족(女眞族)으로 불림.
[주D-011]발해(渤海) : 고구려의 유장 대조영(大祚榮)이 속수 말갈(束水靺鞨)을 이끌고 고구려 고토에 세웠던 나라. 만주 동북에서 연해주(沿海州)와 한반도(韓半島) 북부에 걸쳐 있었고, 669년에서 926년까지 존속했음.
[주D-012]야인(野人) : 옛날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에 살던 만주족(滿洲族).
[주D-013]번신(藩臣) : 국경지대를 방위하는 신하.
[주D-014]정문부(鄭文孚) : 선조 21년 식년 문과에 합격하고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 회령(會寧) 사람 국경인(鞠景仁) 등이 반란을 일으켜서 적에게 투항하자, 그는 관민합작(官民合作)으로 의병을 일으켜서, 그 반적(叛賊)을 평정하였음.
[주D-015]경악(經幄) : 임금 앞에서 경전(經傳)을 강론하는 자리. 경연(經筵).
[주D-016]강상(綱常) : 유교 도덕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인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말함. 삼강은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부부(夫婦)이고 오상은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
[주D-017]선대왕(先大王) : 선대(先代)의 대왕이라는 뜻. 여기에서는 정조 대왕(正祖大王)을 지칭한 말임.
[주D-018]행궁(行宮) : 임금이 대궐을 떠나서 머무는 곳. 행재조(行在所)와 같음.
[주D-019]사직(社稷) : 사(社)는 토지신(土地神)에게 제사하는 곳. 직(稷)은 곡신(穀神)에게 제사하는 곳.
[주D-020]유인궤(劉仁軌) : 당(唐)나라 장수. 당 고종(唐高宗) 때, 멸망시켰던 백제가 다시 일어났으므로, 신라 군사와 합동해서 평정시킨 일이 있음.
[주D-021]선화(宣化) : 덕화(德化)를 선포함.
[주D-022]읍루(揖婁) : 고조선(古朝鮮) 시대에 만주 지역에 살던 부족. 후에 숙신(肅愼)ㆍ말갈(靺鞨)이라는 명칭으로 불림.
[주D-023]가탐(賈耽) : 당(唐)나라 사람으로 순제(順帝) 때에 정승이었음. 독서를 좋아하여 지리(地理)에 밝았고, 음양잡수(陰陽雜數)에도 정통하였음.
 
경세유표 제4권
 천관 수제(天官修制)
군현분등(郡縣分等)

군ㆍ현 제도는 민호(民戶)의 많고 적음과, 전결(田結)의 넓고 좁음으로써 등급을 매김이 마땅하다.

시씨(柴氏) 주(周)나라 제도는 3천 호 이상을 망현(望縣)으로, 2천 호 이상을 긴현(緊縣)으로, 1천 호 이상을 상현(上縣)으로, 500호 이상을 중현으로, 500호 미만을 하현(下縣)으로 했다.
송 태조(宋太祖) 개보(開寶) 9년(976년, 고려 경종 8년)에 조서(詔書)하여 현망(縣望)을 다시 정하는데 4천 호 이상이 망이고, 다음을 긴(緊)ㆍ상ㆍ중ㆍ중하로 하여 무릇 5등이 있었다(지금 淸國 제도에도 劇縣ㆍ要縣처럼 대소 여러 등이 있으나 그것과 같지 않다).
생각건대, 중국 법은 부(府)가 가장 크고 주가 다음이며 군은 없다(송(宋)나라 이후로 군이 없다). 그리고 현에 다섯 등이 있어, 관직 차례대로 승진 또는 전임했다. 우리나라 법은 빈잔(貧殘)한 주ㆍ부(州府)는 혹 취락(聚落)도 되지 못하고, 웅대한 현은 혹 사무(事務)가 번거롭기도 하다. 관원을 차임(差任)해서 보낼 때에도 권세가 높으면 첫 솜씨를 바로 큰 현에 붙이고, 세력이 약하면 세 번이나 벼슬해도 모두 작은 현을 얻게 되니, 관방(官方)의 어지러움이 이와 같다. 이번에는 8도 여러 고을을 아울러 민호와 전결로써 대소(大小)를 분간하고, 시험삼아,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대략을 알고자 한다.

500호 이상 : 양천(陽川) 800, 회인(懷仁) 800, 흡곡(歙谷) 700, 태천(泰川) 900.
1천 호 이상 : 마전(麻田)ㆍ적성(積城)ㆍ연천(漣川)ㆍ평택(平澤)ㆍ언양(彦陽)ㆍ진보(眞寶)ㆍ칠원(漆原)ㆍ대정(大靜)ㆍ삼등(三登)ㆍ경흥(慶興).
1천 500호 이상 : 김포(金浦)ㆍ영평(永平)ㆍ시흥(始興)ㆍ음죽(陰竹)ㆍ전의(全義)ㆍ진잠(鎭岑)ㆍ석성(石城)ㆍ봉화(奉化)ㆍ하양(河陽)ㆍ평창(平昌)ㆍ정의(旌義)ㆍ운봉(雲峯)ㆍ구례(求禮)ㆍ화순(和順)ㆍ용안(龍安)ㆍ증산(甑山)ㆍ부령(富寧)ㆍ문천(文川)ㆍ옹진(甕津)ㆍ고성(高城)ㆍ인제(麟蹄)ㆍ양구(楊口)ㆍ안협(安峽).
2천 호 이상 : 안산(安山)ㆍ가평(加平)ㆍ교하(交河)ㆍ지평(砥平)ㆍ포천(抱川)ㆍ양지(陽智)ㆍ음성(陰城)ㆍ정산(定山)ㆍ장기(長鬐)ㆍ청하(淸河)ㆍ진해(鎭海)ㆍ정읍(井邑)고창(高敞)ㆍ옥과(玉果)ㆍ동복(同福)ㆍ무산(茂山)ㆍ이원(利原)ㆍ강령(康翎)ㆍ철원(鐵原)ㆍ양양(襄陽)ㆍ평해(平海)ㆍ간성(杆城)ㆍ낭천(狼川).
2천 500호 이상 : 진위(振威)ㆍ단양(丹陽)ㆍ문의(文義)ㆍ연풍(延豊)ㆍ목천(木川)ㆍ황간(黃澗)ㆍ청안(淸安)ㆍ진천(鎭川)ㆍ청산(靑山)ㆍ회덕(懷德)ㆍ부여(扶餘)ㆍ노성(魯城)ㆍ연기(燕岐)ㆍ청양(靑陽)ㆍ아산(牙山)ㆍ신창(新昌)ㆍ예산(禮山)ㆍ해미(海美)ㆍ풍기(豊基)ㆍ지례(知禮)ㆍ고령(高靈)ㆍ함창(咸昌)ㆍ산청(山淸)ㆍ단성(丹城)ㆍ자인(慈仁)ㆍ낙안(樂安)ㆍ흥덕(興德)ㆍ곡성(谷城)ㆍ자산(慈山)양덕(陽德)ㆍ덕원(德源)ㆍ경성(鏡城)ㆍ장련(長連)ㆍ이천(伊川)ㆍ정선(旌善)ㆍ평창(平昌).
3천 호 이상 : 부평(富平)ㆍ인천(仁川)ㆍ통진(通津)ㆍ양근(楊根)ㆍ고양(高陽)ㆍ과천(果川)ㆍ양성(陽城)ㆍ온양(溫陽)ㆍ대흥(大興)ㆍ직산(禝山)ㆍ연산(連山)ㆍ덕산(德山)ㆍ비안(庇安)ㆍ당진(唐津)ㆍ영해(寧海)ㆍ청송(靑松)ㆍ순흥(順興)ㆍ칠곡(漆谷)ㆍ경산(慶山)ㆍ기장(機張)ㆍ예안(禮安)ㆍ삼가(三嘉)ㆍ진산(珍山)ㆍ용담(龍潭)ㆍ함열(咸悅)ㆍ함종(咸從)ㆍ맹산(孟山)ㆍ갑산(甲山)ㆍ정평(定平)ㆍ온성(穩城)ㆍ단천(端川)ㆍ고원(高原)ㆍ홍원(洪原)ㆍ풍천(豊川)ㆍ수안(遂安)신계(新溪)ㆍ은율(殷栗)ㆍ송화(松禾)ㆍ영월(寧越)ㆍ평강(平康)ㆍ김화(金化)ㆍ횡성(橫城).
3천 500호 이상 : 파주(坡州)ㆍ죽산(竹山)ㆍ풍덕(豊德)ㆍ삭녕(朔寧)ㆍ천안(天安)ㆍ한산(韓山)ㆍ영동(永同)ㆍ결성(結城)ㆍ흥해(興海)ㆍ곤양(昆陽)ㆍ초계(草溪)ㆍ영일(迎日)ㆍ군위(軍威)ㆍ비안(比安)ㆍ의흥(義興)ㆍ영양(英陽)ㆍ익산(益山)ㆍ금구(金溝)ㆍ장수(長水)ㆍ초산(楚山)ㆍ덕천(德川)ㆍ곡산(谷山)ㆍ회양(淮陽)ㆍ삼척(三陟)ㆍ금성(金城).
4천 호 이상 : 안성(安城)ㆍ용인(龍仁)ㆍ괴산(槐山)ㆍ태안(泰安)ㆍ면천(沔川)ㆍ보령(保寧)ㆍ영천(榮川)ㆍ합천(陜川)ㆍ영덕(盈德)ㆍ용궁(龍宮)신녕(新寧)ㆍ개령(開寧)ㆍ사천(泗川)안의(安義)ㆍ웅천(熊川)ㆍ임피(臨陂)ㆍ만경(萬頃)ㆍ고산(高山)ㆍ옥구(沃溝)ㆍ광양(光陽)ㆍ창성(昌城)ㆍ삼화(三和)ㆍ개천(价川)ㆍ가산(嘉山)ㆍ순안(順安)ㆍ은산(殷山)ㆍ금천(金川)ㆍ홍천(洪川).
4천 500호 이상 : 청풍(淸風)ㆍ임천(林川)ㆍ서천(舒川)ㆍ제천(堤川)ㆍ보은(報恩)ㆍ은진(恩津)ㆍ홍산(鴻山)ㆍ남포(藍浦)ㆍ인동(仁同)ㆍ동래(東萊)ㆍ하동(河東)ㆍ거창(居昌)ㆍ함양(咸陽)ㆍ양산(梁山)ㆍ남해(南海)ㆍ문경(聞慶)ㆍ능주(綾州)ㆍ여산(礪山)ㆍ보성(寶城)박천(博川)ㆍ강서(江西)ㆍ길주(吉州)ㆍ경원(慶源)ㆍ명천(明川).
5천 호 이상 : 이천(利川)ㆍ거제(巨濟)ㆍ영산(靈山)ㆍ임실(任實)ㆍ남평(南平)ㆍ순천(順川)ㆍ곽산(郭山)ㆍ장진(長津)ㆍ신천(信川)ㆍ춘천(春川).
5천 500호 이상 : 남양(南陽)장단(長湍)ㆍ금산(金山)ㆍ현풍(玄風)ㆍ무주(茂朱)ㆍ김제(金堤)ㆍ진안(鎭安)ㆍ삭주(朔州ㆍ)상원(祥原)ㆍ회령(會寧)ㆍ장연(長淵)ㆍ서흥(瑞興)ㆍ강릉(江陵).
6천 호 이상 : 여주(驪州)ㆍ서산(瑞山)ㆍ함안(咸安)ㆍ담양(潭陽)ㆍ금산(錦山)ㆍ무장(茂長)ㆍ무안(務安)성천(成川)ㆍ구성(龜城)ㆍ철산(鐵山)ㆍ희천(熙川)ㆍ영원(寧遠)ㆍ북청(北靑)ㆍ안변(安邊)ㆍ종성(鍾城)ㆍ배천(白川)ㆍ문화(文化).
6천 500호 이상 : 옥천(沃川)ㆍ장성(長城)ㆍ고부(古阜)ㆍ순창(淳昌)ㆍ부안(扶安)ㆍ숙천(肅川)ㆍ영유(永柔)ㆍ통천(通川).
7천 호 이상 : 선산(善山)ㆍ영천(永川)ㆍ제주(濟州)ㆍ영변(寧邊).
7천 500호 이상 : 강화(江華)ㆍ창원(昌原)ㆍ의령(宜寧)ㆍ태인(泰仁)ㆍ함평(咸平)ㆍ연안(延安).
8천 호 이상 : 개성(開城)ㆍ울산(蔚山)ㆍ청도(淸道)ㆍ광주(光州)ㆍ진도(珍島)ㆍ해남(海南)ㆍ용천(龍川)ㆍ위원(渭原)ㆍ평산(平山).
8천 500호 이상 : 순천(順天)ㆍ용강(龍岡)ㆍ봉산(鳳山).
9천 호 이상 : 창녕(昌寧)ㆍ영암(靈巖)ㆍ중화(中和)ㆍ벽동(碧潼).
9천 500호 이상 : 의성(義城)ㆍ선천(宣川)ㆍ원주(原州).
1만 호 이상 : 양주(楊州)ㆍ교동(喬桐)ㆍ예천(禮泉)ㆍ남원(南原)ㆍ장흥(長興)ㆍ강진(康津)ㆍ황주(黃州).
1만 1천 호 이상.
1만 2천 호 이상 : 김해(金海)ㆍ영광(靈光)ㆍ정주(定州)ㆍ운산(雲山)ㆍ영흥(永興)ㆍ안악(安岳).
1만 3천 호 이상 : 청주(淸州)ㆍ홍주(洪州)ㆍ대구(大丘)ㆍ안주(安州)ㆍ함흥(咸興).
1만 4천 호 이상 : 진주(晋州)ㆍ고성(固城).
1만 5천 호 이상 : 성주(星州)ㆍ해주(海州).
1만 6천 호 이상 : 화성(華城)ㆍ안동(安東).
1만 7천 호 이상 : 광주(廣州)ㆍ공주(公州).
1만 8천 호 이상 : 흥양(興陽)ㆍ의주(義州).
1만 9천 호 이상 : 경주(慶州)ㆍ전주(全州)ㆍ강계(江界).
2만 호 이상.
2만 2천 호 이상 : 충주(忠州) 2만 3천 900, 상주(尙州) 2만 3천 900, 밀양(密陽) 2만 2천 900, 나주(羅州) 2만 2천 300.
3만 호 이상 : 평양(平壤) 3만 900.
(이상은 여러 고을 민호의 수효임)

500결(結) 미만 : 장진(長津) 200여 결, 안협(安峽) 400여 결.
500결 이상 : 가평ㆍ마전ㆍ양천ㆍ영춘ㆍ삭주ㆍ초산ㆍ삼등ㆍ맹산ㆍ삼수ㆍ회양ㆍ양양ㆍ정선ㆍ평창ㆍ고성ㆍ흡곡ㆍ평강ㆍ인제ㆍ양구ㆍ홍천.
1천 결 이상 : 교동ㆍ안산ㆍ시흥ㆍ지평ㆍ적성ㆍ연천ㆍ양지ㆍ단양ㆍ창성ㆍ덕천ㆍ벽동ㆍ가산ㆍ곽산ㆍ태천ㆍ은산ㆍ이원ㆍ풍천ㆍ연풍ㆍ음성ㆍ회인ㆍ청하ㆍ예안ㆍ의령ㆍ장연ㆍ평해ㆍ간성ㆍ울진ㆍ김화.
1천 500결 이상 : 김포ㆍ양근ㆍ안성ㆍ삭녕ㆍ교하ㆍ음죽ㆍ과천ㆍ영양ㆍ화순ㆍ용안ㆍ구성ㆍ철산ㆍ용천ㆍ자산ㆍ희천ㆍ박천ㆍ개천ㆍ청풍ㆍ황간ㆍ청산ㆍ비인ㆍ영해ㆍ진보ㆍ지례ㆍ위원ㆍ순안ㆍ증산ㆍ양덕ㆍ고원ㆍ토산ㆍ영월ㆍ삼척ㆍ통천ㆍ금성ㆍ횡성.
2천 결 이상 : 죽산ㆍ진위ㆍ영평ㆍ전의ㆍ진잠ㆍ청양ㆍ청송ㆍ칠곡ㆍ운봉ㆍ구례ㆍ동복ㆍ숙천ㆍ함종ㆍ순천(順川)ㆍ부령ㆍ홍원ㆍ풍기ㆍ기장ㆍ언양ㆍ신녕ㆍ산청ㆍ안의ㆍ단성ㆍ강릉.
2천 500결 이상 : 남양ㆍ풍덕ㆍ고양ㆍ포천ㆍ제천ㆍ영동ㆍ청안ㆍ정산ㆍ군위ㆍ하양ㆍ의흥ㆍ고령ㆍ문경ㆍ함창ㆍ창평ㆍ곡성ㆍ옥과ㆍ장수ㆍ연기ㆍ평택ㆍ남포ㆍ순흥ㆍ흥해ㆍ곤양ㆍ남해ㆍ장기ㆍ자인ㆍ웅천ㆍ칠원ㆍ광양ㆍ영변ㆍ정주ㆍ삼화ㆍ선천ㆍ영유ㆍ덕원ㆍ명천ㆍ문천ㆍ곡산ㆍ이천ㆍ철원.
3천 결 이상 : 파주ㆍ이천(利川)ㆍ부평ㆍ인천ㆍ통진ㆍ양성ㆍ괴산ㆍ온양ㆍ문의ㆍ봉화ㆍ비안ㆍ사천ㆍ무주ㆍ낙안ㆍ정읍ㆍ고창ㆍ진안ㆍ성천ㆍ상원ㆍ석성ㆍ결성ㆍ신창ㆍ해미ㆍ동래ㆍ거제ㆍ영천(榮川)ㆍ연일ㆍ정평ㆍ온성ㆍ옹진ㆍ장연ㆍ은율ㆍ강령ㆍ강화.
3천 500결 이상 : 대흥ㆍ목천ㆍ회덕ㆍ보령ㆍ당진ㆍ함양ㆍ초계ㆍ삼가ㆍ고산ㆍ강계ㆍ중화ㆍ강동ㆍ경흥ㆍ춘천ㆍ양산ㆍ경산ㆍ영덕ㆍ용궁ㆍ금천ㆍ수안ㆍ송화ㆍ개성부.
4천 결 이상 : 한산ㆍ부여ㆍ흥산ㆍ예산ㆍ하동ㆍ합천ㆍ현풍ㆍ영산ㆍ능주ㆍ만경ㆍ함열ㆍ강서ㆍ경원ㆍ무산ㆍ회령ㆍ배천ㆍ문화ㆍ낭천.
4천 500결 이상 : 여주ㆍ용인ㆍ태안ㆍ보은ㆍ인동ㆍ거창ㆍ김산ㆍ개령ㆍ흥덕ㆍ무안ㆍ임실ㆍ안주ㆍ서흥ㆍ원주ㆍ신계.
5천 결 이상 : 천안ㆍ옥천ㆍ임천ㆍ서천ㆍ은진ㆍ여산ㆍ익산ㆍ금구ㆍ길주ㆍ갑산ㆍ단천.
5천 500결 이상 : 장단ㆍ면천ㆍ직산ㆍ연산ㆍ청도ㆍ금산ㆍ진도ㆍ남평ㆍ경성ㆍ봉산ㆍ재령.
6천 결 이상 : 아산ㆍ창원ㆍ고성ㆍ창녕ㆍ진해ㆍ순창ㆍ옥구ㆍ의주ㆍ북청ㆍ안변.
6천 500결 이상 : 진천ㆍ덕산ㆍ함안ㆍ담양ㆍ용강.
7천 결 이상 : 예천.
7천 500결 이상 : 서산ㆍ신천ㆍ안악.
8천 결 이상 : 영천(永川)보성ㆍ임피ㆍ흥양ㆍ연안.
8천 500결 이상 : 선산ㆍ울산ㆍ의성ㆍ고부ㆍ부안.
9천 결 이상 : 장성ㆍ평양ㆍ영흥ㆍ종성ㆍ평산.
9천 500결 이상 : 태인ㆍ강진.
1만 결 이상 : 양주ㆍ밀양ㆍ김해ㆍ광주ㆍ순천(順天)ㆍ장흥ㆍ김제ㆍ함평ㆍ해남ㆍ함흥.
1만 2천 결 이상 : 홍주ㆍ안동ㆍ대구ㆍ남원ㆍ무장ㆍ황주.
1만 4천 결 이상 : 상주ㆍ성주ㆍ진주ㆍ영암.
1만 6천 결 이상 : 경주ㆍ영광.
1만 8천 결 이상 : 청주 1만 9천 300, 화성 1만 8천 920.
2만 결 이상 : 공주 2만 1천 500, 충주 2만 1천 500, 전주 2만 1천 300.
2만 4천 결 이상 : 해주.
2만 8천 결 이상 : 나주.
(이상은 여러 고을 田結의 수효임)

지금 민호(民戶)와 전결을 합계하고 그 수효로써 군ㆍ현의 대소를 분변하여 일곱 등급으로 차별했다. 가령 대구는 민호가 1만 3천이고 전결이 1만 2천이면 합해서 2만 5천이니 대주(大州)로 정하는 것이다.

2만 5천 이상, 대주.
2만 이상, 대군.
1만 5천 이상, 중군(中郡)
1만 이상, 소군.
8천 이상, 대현.
6천 이상, 중현.
4천 이상, 소현.
4천 미만인 것은 합병해서 줄이기를 논의한다.

시험삼아, 영남 한 도만. 그 차등을 열기한다.

경주(1만 9천 호, 1만 6천 결) 3만 5천, 이번에 대주로 했음.
상주(2만 2천 호, 1만 4천 결) 3만 6천, 대주.
밀양(2만 3천 호, 1만 결) 3만 3천, 대주(密州라 함이 마땅함).
성주(1만 5천 호, 1만 4천 결) 2만 9천, 대주.
진주(1만 4천 호, 1만 4천 결) 2만 8천, 대주.
안동(1만 6천 호, 1만 2천 결) 2만 8천, 대주(福州라 함이 마땅함).
대구(1만 3천 호, 1만 2천 결) 2만 5천, 대주(達州라 함이 마땅함).
김해(1만 2천 호, 1만 결) 2만 2천, 이번에 대군으로 했음.
고성(1만 4천 호, 6천 결) 2만, 대군.
의성(9천 500호, 8천 500결) 1만 8천, 이번에 중군으로 했음.
예천(1만 호, 7천 결) 1만 7천, 중군.
울산(8천 호, 8천 500결) 1만 6천 500, 중군.
선산(7천 호, 8천 500결) 1만 5천 500, 중군.
영천(7천 호, 8천 결) 1만 5천, 중군.
창녕(9천 호, 6천 결) 1만 5천, 중군.
창원(7천 500호, 6천 결) 1만 3천 500, 이번에 소군으로 했음.
청도(8천 호, 5천 500결) 1만 3천 500, 소군.
함안(6천 호, 6천 500결) 1만 2천 500, 소군.
김산(5천 500호, 4천 500결) 1만, 소군.
현풍(5천 500호, 4천 결) 9천 500, 이번에 대현으로 했음.
거창(4천 500호, 4천 500결) 9천, 대현.
인동(4천 500호, 4천 500결) 9천, 대현.
영산(5천 호, 4천 500결) 9천, 대현.
개령(4천 호, 4천 500결) 8천 500, 대현.
의령(7천 500호, 1천 결) 8천 500, 대현.
하동(4천 500호, 4천 결) 8천 500, 대현.
함양(4천 500호, 3천 500결) 8천, 대현.
합천(4천 호, 4천 결) 8천, 대현.
양산(4천 500호, 3천 500결) 8천, 대현.
거제(5천 호, 3천 결) 8천, 대현.
진해(2천 호, 6천 결) 8천, 대현.
동래(4천 500호, 3천 결) 7천 500, 기장을 합병하면 1만 2천 500이 되므로 군으로 승격한다.
용궁(4천 호, 3천 500결) 7천 500, 이번에 중현으로 했음.
영덕(4천 호, 3천 500결) 7천 500, 중현.
영천(4천 호, 3천 500결) 7천, 중현.
초계(3천 500호, 3천 결) 7천, 중현.
문경(4천 500호, 2천 500결) 7천, 중현.
사천(4천 호, 3천 결) 7천, 중현.
남해(4천 500호, 2천 500결) 7천, 중현.
비안(3천 500호, 3천 결) 6천 500, 중현.
경산(3천 호, 3천 500결) 6천 500, 중현.
삼가(3천 호, 3천 500결) 6천 500, 중현.
연일(3천 500호, 3천 결) 6천 500, 중현.
웅천(4천 호, 2천 500결) 6천 500, 중현.
군위(3천 500호, 2천 500결) 6천, 중현.
의흥(3천 500백호, 2천 500결) 6천, 중현.
신녕(4천 호, 2천 결) 6천, 중현.
안의(4천 호, 2천 결) 6천, 중현.
흥해(3천 500호, 2천 500결) 6천, 중현.
곤양(3천 500호, 2천 500결) 6천, 중현.
순흥(3천 호, 2천 500호), 5천 5백, 이번에 소현으로 했음.
청송(3천 호, 2천 결) 5천, 소현.
칠곡(3천 호, 2천 결) 5천, 소현.
함창(2천 500호, 2천 500결) 5천, 소현.
고령(2천 500호, 2천 500결) 5천, 소현.
영양(3천 500호, 1천 500결) 5천, 소현.
자인(2천 500호, 2천 500결) 5천, 소현.
기장(3천 호, 2천 결) 5천, 동래와 합병해서 군으로 만듦이 마땅하다.
풍기(2천 500호, 2천 결) 4천 500, 소현.
영해(3천 호, 1천 500결) 4천 500, 소현.
봉화(1천 500호, 3천 결) 4천 500, 소현.
산청(2천 500호, 2천 결) 4천 500, 소현.
단성(2천 500호, 2천 결) 4천 500, 소현.
장기(2천 호, 2천 500결) 4천 500, 소현.
예안(3천 호, 1천 결) 4천, 소현.
지례(2천 500호, 1천 500결) 4천, 소현.
하양(1천 500호, 2천 500결) 4천, 소현.
칠원(1천 호, 2천 500결) 3천 500, 창원과 합병함이 마땅하다.
청하(2천 호, 1천 결) 3천, 흥해와 합병함이 마땅하다.
언양(1천 호, 2천 결) 3천, 경주의 남부 1천 호와 500결을 떼어다 보태서 소현으로 함이 마땅하다.
진보(1천 호, 1천 500결) 2천 500, 청송과 합병함이 마땅하다.

무릇 4천 미만인 곳은 민호와 전결이 적어서 현이 될 수 없으므로 이와 같이 합병해야 한다.
무릇 민호는 많은데 결수(結數)가 적은 것은, 혹 산골 백성은 화전을 많이 경작하고, 바닷가 백성은 어획(漁獲)의 이(利)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을 힘이 넉넉하여, 전결(田結)이 많은 것과 서로 같다. 이로 말미암아서 말한다면 모든 군ㆍ현의 크고 작음은 민호의 많고 적음을 보는 것이 마땅하며 전결은 그 다음이다.

서북과 여러 도 같은 곳은 군ㆍ현의 크고 작음을 정하는 데에 율(率)을 다르게 적용함이 마땅하다. 지금 관북(關北) 한 도의 군ㆍ현 등급을 열기(列記)하는데 6등에서 그친다.
서북 두 도는 땅은 넓으나 사람이 드물고, 평탄한 전지가 아주 적다. 그런데 인삼(人蔘)ㆍ돈피(貂皮)ㆍ는ㆍ베[布]와 어획의 이익이 또한 많으니, 남도(南道)에서 시행하는 법으로 셈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시험삼아 관북 한 도를 열기했다. 패서(浿西)ㆍ해서(海西) 및 강원 한 도는 여기에 비례해서 표준할 것이며 삼남과 같이 함은 불가하다.
1만 5천 이상, 대주(大州).
1만 이상, 대군.
8천 이상, 소군.
6천 이상, 대현.
4천 이상, 중현.
4천 미만은 소현으로 한다.

함흥(1만 3천 호, 1만 결) 2만 3천, 대주.
영흥(1만 2천 호, 9천 결) 2만 1천, 대주.
종성(6천 호, 9천 결) 1만 5천, 대주.
안변(6천 호, 6천 결) 1만 2천, 대군.
북청(6천 호, 6천 결) 1만 2천, 대군.
회령(5천 500호, 4천 결) 9천 500, 이번에 소군으로 정한다.
길주(4천 500호, 5천 결) 9천 500, 소군.
경원(4천 500호, 4천 결) 8천 500, 소군.
단천(3천 호, 5천 결) 8천, 소군.
경성(2천 500호, 5천 500결) 8천, 소군.
갑산(3천 호, 5천 결) 8천, 소군.
명천(4천 500호, 2천 500결) 7천, 이번에 대현으로 정한다.
무산(2천 호, 4천 결) 6천, 대현.
온성(3천 호, 3천 결) 6천, 대현.
정평(3천 호, 3천 결) 6천, 대현.
장진(5천 호, 200결) 5천 200, 이번에 중현으로 정한다.
삼수(2천 호, 3천 결) 5천, 중현.
덕원(2천 500호, 2천 500결) 5천, 중현.
홍원(3천 호, 2천 결) 5천, 중현.
경흥(1천 호, 3천 500결) 4천 500, 중현.
고원(3천 호, 1천 500결) 4천 500, 중현.
문천(1천 500호, 2천 500결) 4천, 중현.
부령(1천 500호, 2천 결) 3천 500, 이번에 소현으로 정한다.
이원(2천 호, 1천 결) 3천, 소현.

이것이 그 대략이다. 전지 경계를 바로잡지 않고 호적(戶籍)을 밝히지 않으면 군ㆍ현의 크고 작음도 또한 정할 수 없다.

나의 생각에는 전지 경계를 바로잡지 못해서 숨기고 누락된 것이 반 수나 되면, 몇 결(結)이라 하는 것도 실수(實數)가 아니며, 호적을 밝혀내지 않아서 엄폐한 것이 점차 불어나면 몇 호라 하는 것도 모두 허명이 될 것이다. 숨겼던 결수(結數)를 기록하고, 묵은 결수는 없앤 다음이라야 실지 결수를 알 수가 있으며, 누락된 호(戶)는 잡아내고, 빈 호 수는 삭제한 다음이라야 실지 호수를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 정사(政事)를 거행하지 않으면 온갖 일이 모두 막혀서 그 사이에 손 하나 쓸 수 없게 될 것이다.

군ㆍ현의 등급을 정한다면 서리의 정원의 많고 적음도 여기에서 비율을 낼 수가 있다.
서리의 인원을 정하는 것은 오늘의 급무(急務)이다(별편에 기록했다). 대략 20명을 시점(始點)으로 하여, 매율(每率)에 5명씩을 보태며, 40명이 넘으면 매양 10명씩을 더하다가 100명이 되면 더 이상 늘리지 못한다.
민호와 결수를 합계해서 4천이면 민호는 대략 2천이 된다. 100호에 대해서 서리 1명씩을 둔다면 2천 호 되는 고을에는 20명을 두는 것이 옳다. 4천 호 미만인 곳도 이미 현(縣)이라고 명칭했으니 20명보다 적게 둘 수는 없다. 지금 비율을 다음과 같이 내었다.
4천 호 미만인 곳 서리 20인
4천 이상인 곳 서리 20인
5천 이상인 곳 서리 25인
6천 이상인 곳 서리 30인
7천 이상인 곳 서리 35인
8천 이상인 곳 서리 40인
1만 이상인 곳 서리 50인
1만 5천 이상인 곳 서리 60인
2만 이상인 곳 서리 70인
2만 5천 이상인 곳 서리 80인
3만 이상인 곳 서리 90인
3만 5천 이상인 곳 서리 100인
군관(軍官)과 노예 등속도 각각 여기에 비교하여, 차등(差等) 있게 비율할 것이다. 지금은 갖추어서 논하지 않는다.
[주D-001]시씨(柴氏) 주(周)나라 : 954~959년에 걸쳐 시영(柴榮)이 중국 대륙에 세웠던 나라. 중국 고대의 주나라와 구별하기 위해서 시씨 주나라라 일컬음.

간이집(簡易集) 제2권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 ○ 음기(陰記)와 묘표(墓表)를 덧붙임
고(故) 고려(高麗) 통헌대부(通憲大夫) 추밀원 직부사(樞密院直副使) 남공(南公)의 묘표(墓表)

내가 영남(嶺南) 지방의 우도(右道)에서 절도사(節度使)의 지휘를 받고 있을 적에, 절도사인 김공(金公)이 나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나는 의령 남씨(宜寧南氏)의 외손(外孫)이다. 외가(外家)의 선영(先塋)이 본현(本縣)에 있는데, 세월이 오래 흐르다 보니 묘소를 식별할 길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지역에서 묘비(墓碑)로 쓸 만한 좋은 돌이 나온다고 하는데, 또 의령과 거리도 매우 가까우니, 감히 폐를 끼치고자 한다.” 하였다.
나는 이 글을 받고 선조(先祖)를 추모하려는 공의 정성에 감복한 나머지 감히 농사철이라는 이유로 거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민력(民力)을 동원하고 공인(工人) 약간 명을 대주어 그 일을 하게 하였는데, 여기에 소요되는 비용의 약 절반은 절도사의 군문(軍門)에서 부담을 하였다.
그런데 그 일을 마쳤을 때 공이 또다시 글을 보내고 남문(南門)에서 작성한 행장(行狀)을 나에게 부치면서 말하기를, “내가 그대의 힘을 빌린 덕분에 비석 문제는 그런대로 해결을 하였다. 이제는 그 비석에 글을 기록하여 저간의 사정에 대한 곡절을 대략이나마 갖추어 놓고 싶은데, 그 일을 감히 그대에게 부탁하고자 한다.” 하였다.
나는 이 글을 받고 선조를 추모하려는 공의 정성에 또다시 감복한 나머지 감히 글솜씨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할 수가 없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조에 휘 군보(君甫)라는 분이 통헌대부(通憲大夫) 밀직 부사(密直副使)로 생을 마쳤는데, 어진 덕으로 세상에 알려졌었다. 그는 비순위장(備巡衛將) 남혁지(南赫胝)와 풍저 부사(豐儲副使) 남익지(南益胝) 등 두 아들을 두었으며, 그 뒤로도 세상에 귀한 신분의 관원을 배출하는 등 성대함을 보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저명한 인물로는 본조(本朝)의 좌의정(左議政) 남재(南在)와 우의정(右議政) 남지(南智)를 들 수 있으며, 그 아래로 추강거사(秋江居士) 남효온(南孝溫)이 유명하다.
그런데 추강(秋江)이 지은 가승(家乘)을 보면, 그 묘소가 본현(本縣) 관아의 뒤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관아가 지금 없어진 상태에서 세대가 더욱 멀어져 그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가 황선(黃瑄)이 현감(縣監)으로 있을 적에 그 고을의 북쪽 언덕 사이에 건물을 수축(修築)하려 하다가 옛 무덤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것을 보고는 이를 없애 평지로 만들 생각을 하였는데, 어느 날 밤 꿈에 고관(高官)이 나타나 말하기를, “늘어진 소나무 아래에 있는 무덤이 바로 나의 거처이니, 여무(余武)라는 사람을 찾아가 물어보도록 하라. 나는 너에게 선조가 되느니라.” 하였다.
이에 황(黃)이 깜짝 놀라 여무라는 사람을 수소문해서 찾아보니 나이가 백여 세 되는 고리(故吏)였는데, 그가 또 뜻밖에 말하기를, “저는 원님께서 저를 부르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꿈에 남 상공(南相公)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고을 수령이 나의 거처를 물어볼 것인데, 저쪽 몇 번째가 바로 그곳이다.’ 하셨습니다.” 하였다.
황(黃)은 본디 그의 외계(外系)에서 나왔던 터라서 이 말을 듣고는 더욱 감격을 하고 기이하게 여긴 나머지 그 묘소에 객토(客土)를 더 쌓아 봉분(封墳)을 높이 하였는데, 그 흙 속에서 나온 보라색 돌이 곧바로 부서지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새겨져 있는 글 가운데 남(南)이라는 글자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더더욱 의심할 여지없이 믿게끔 되었다. 그리고 이 밖에도 황금 반지 하나와 대구(帶鉤) 세 개를 얻어 도성에 살고 있는 남씨(南氏)들에게 보내 주면서 그 사연을 일러 주었다.
그러자 첨지중추부사 남치욱(南致勗)과 지사(知事) 남치근(南致勤)과 참판(參判) 남응운(南應雲) 등이 서로 슬피 울면서 이대로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들을 하였다. 그런데 그때 마침 승지(承旨) 남언순(南彦純)이 주부(注簿)의 일로 본도(本道)에서 순찰사(巡察使)를 보좌하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묘소에 가서 그 유물(遺物)을 거기에 도로 묻고 제문(祭文)을 지어 제사를 올리게 한 다음 봉분을 더 올려 확대해서 쌓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 지금 절도공(節度公)이 와서 살펴보고는 또다시 마음을 기울여 비석을 세우게 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사찰의 승려들에게 전지(田地)를 내주어 그 묘소를 지키게 한 것은 황 현감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요, 노호(奴戶)를 더해 주어 그 생업(生業)에 보탬이 되게 하고 재(齋)를 지내는 사찰을 복원(復元)하여 관역(官役)을 면하게 해 준 것은 승지로부터 시작된 것이요, 재를 지내는 사찰에 자금을 더 보조하여 시제(時祭)를 지낼 수 있게 하고 제사 지낼 때의 석상(石牀)과 비석을 세우고 기록을 남기게 한 것은 절도공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하겠다.
절도공의 이름은 김찬(金璨)이다. 그런데 지금의 현감인 이위(李韡) 역시 그 가문의 족보(族譜)에 들어 있는 사람인 만큼 뭔가 반드시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가 된다.
아, 남 대부(南大夫)가 세상을 떠난 지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내외(內外)의 친족 중에서 성대하게 의관(衣冠)이 배출되었는데,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더욱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정령(精靈)이 깃들여 있는 곳을 또 꿈을 통해 후손과 시골 노인에게 알려 주어 유택(幽宅)이 훼손되는 일을 면하게 하고, 그 뒤로도 계속 처음 장례를 행했던 때처럼 경영(經營)을 하게 하였으니, 선인(善人)이 후손으로부터 보은(報恩)을 받아 영원히 불후(不朽)하게 되는 것이 또한 이와 같다고 하겠다.
[주D-001]남문(南門) : 군남문(軍南門)의 준말로, 하늘을 지키는 대장군(大將軍)의 남문을 가리키는 별 이름인데, 보통 남쪽 변방을 지키는 절도사 등의 장수를 뜻하는 말이다.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제12권
 묘갈(墓碣) 16수(首)
통훈대부 봉상시정 겸 춘추관편수관 허공 묘갈명(通訓大夫奉常寺正兼春秋館編修官許公墓碣銘) 병서

양천(陽川)의 허씨(許氏)는 본래 수로왕(首露王)으로부터 비롯되는데, 여씨(麗氏)가 흥기하면서 선문(宣文)이라는 이가 태조(太祖)를 도와 공을 세움에 따라 공암(孔巖 양천(陽天))에 봉해지게 되었다.
그 뒤로부터 대대로 현달(顯達)한 사람들이 배출되었는데,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충정공(忠貞公) 종(琮)이 실로 장상(將相)의 공업(功業)을 이루어 한 세상의 원로 대신이 되었다. 여기에서 광(礦)이 태어났는데,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훈(策勳)되고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예조 판서에 증직되었으며, 판서의 아들 순(淳)은 동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 동지가 운(雲)을 낳았는데 관직이 결성 현감(結城縣監)에 이르렀으니 이분이 바로 공의 부친으로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된 공의 훈작(勳爵)에 따라 추은(推恩)하여 좌승지에 증직되었으며, 감찰 귀정(龜禎)의 딸인 영천 이씨(永川李氏)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계묘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외삼촌의 집에서 길러졌다. 어려서는 자못 학업을 잘 닦지 못했으나 조금 큰 뒤에 비로소 스스로 분발하여 독서에 힘을 쏟아 기묘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하고 계미년에 이르러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그 뒤 봉상시 주부, 사헌부 감찰, 형조 좌랑, 공조와 호조의 정랑, 성균관 직강, 군자감 부정과 정, 군기시와 예빈시와 봉상시의 정, 겸 춘추관 편수관 등의 관직을 차례로 거쳤으며, 외방에 나가서는 수성 찰방(輸城察訪), 경상도와 평안도의 도사(都事), 김제 군수(金堤郡守)와 남양(南陽), 안변(安邊), 인천(仁川), 숙천(肅川), 죽산(竹山) 등 다섯 곳의 도호부사(都護府使) 및 정주(定州)와 양주(楊州)의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광해(光海) 때에 종묘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어 호위한 공로로 인해 공신에 책훈되고 통정대부의 품계로 올라 첨지중추부사와 분승정원 승지가 되었다. 80세의 나이로 병이 들어 죽었는데, 이조 판서와 의정부 좌찬성에 거듭 증직되었다.
공의 휘(諱)는 흔(昕)이요 자(字)는 경회(景晦)이다. 태학(太學)에 노닐 때부터 사람들이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고 기대하였는데, 이때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군소배들에게 어처구니없이 비난을 당하자 공이 제생(諸生)의 앞장을 서서 항소(抗疏)하며 반박하였으므로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자들의 미움을 크게 사게 되었다. 그 결과 등제(登第)함에 미쳐 과연 공이 괴원(槐院)에 선발되는 길이 막혔다.
수성(輸城)은 북관(北關)의 번화한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무렵 또 번호(藩胡)가 반란을 일으켜 변방에 일이 많이 발생하였으므로 적임자가 아니면 제압할 수가 없다고 조정에서 의논한 결과 공을 그곳의 찰방으로 임명하였는데, 논하는 자들이 혹 공이 떠나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면서 붙잡아 두려고 하였으나, 공은 분연히 말하기를,
“내직(內職)에 있든 외직(外職)으로 나가든 나라의 일 아닌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고, 곧장 달려가 부임하였다. 그리고는 일체 법령대로 따르며 일을 처리해 나가자 일로(一路)가 숙연해졌다.
이때 영남 지방의 호우(豪右)들 대부분이 유자(儒者)의 이름을 함부로 가탁하고는 문득 선생이라고 일컫곤 하였는데, 그 문하에 빌붙어 있는 자들 또한 제자라고 칭하면서 정역(丁役)을 피하는 사례가 폭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국가에서 군적(軍籍)을 정비하였으므로 공이 도사(都事)로 나가 열읍(列邑)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생도들을 고시(考試)하게 되었다. 그러자 소위 제자라고 하는 자들을 주ㆍ현(州縣)에서 별적(別籍)에 소속시킨 뒤 시험을 면제받게 해 주려 하였는데, 이에 공이 힐난하기를,
“이런 식이 된다면 어찌 조정의 명령이 행해질 수가 있겠는가.”
하고는, 모조리 시험 대상에 포함시킨 뒤 합격하지 못한 자들은 일체 척적(尺籍 병적(兵籍))에 등재하였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명성을 도둑질하면서 의령 현감(宜寧縣監)으로 있었는데 교만하고 방자하여 영송(迎送)하는 예를 행하지 않자 공이 노하여 그 주리(主吏)를 죄주는가 하면, 명위(名位)가 있는 호우(豪右)들에 대해서 일체 사정을 봐주지 않았으므로 이 때문에 헐뜯는 소리가 더욱 무성하게 되었다.
기축년에 역변(逆變)이 일어났을 때 중외(中外)에 유언비어가 많이 나돌았는데, 그중에는 ‘역적의 괴수 정여립(鄭汝立)이 일찍이 최영경(崔永慶)과 왕복하였다.’는 말도 있었다. 공이 영남에 있을 적에 이 이야기를 감사 김수(金睟)에게 듣고는 도성에 들어와 친하게 지내는 언관(言官)에게 우연히 털어놓게 된 결과 영경과 이에 연루된 사람들을 국문(鞠問)하도록 청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도 체포되어 대질 신문을 받으며 사실대로 토로하게 되었고, 김수 역시 스스로 자기가 들은 곳을 설명하여 일이 마침내 일단락되긴 하였으나, 영남 사람들이 전에 있었던 일을 유감으로 품고는, 공이 실제로 영경을 무함했다고 하면서 못할 말 없이 배척을 가하였으므로 공이 이로부터 더욱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묘(宣廟)가 서쪽 지방으로 몽진(蒙塵)하다가 평양(平壤)에 어가(御駕)를 머물렀는데 이때 공이 그곳의 도사(都事)로 있었다. 그러다가 왜적이 장차 이르려 하자 공에게 명하여 절도사(節度使)와 함께 성을 분담하여 지키도록 하였는데 책응(策應)하고 비어(備禦)함에 있어 크게 방략(方略)을 발휘하였다.
뒤이어 차사원(差使員)의 총책임자로서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호종(扈從)하게 되었는데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마다 잘 극복하여 신주가 놀라거나 땅에 떨어지는 변고가 없게 하였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정주 목사(定州牧使)가 되었는데, 대가(大駕)가 도성으로 돌아올 때를 맞이하여 주ㆍ현(州縣)에서 많이 진헌(進獻)하며 후궁(後宮)에 아첨을 떨었으나, 공만은 바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內家 내궁(內宮))에서 상당히 불쾌하게 여겼다. 그러던 중 마침 간사한 백성이 무고하며 호소하는 바람에 결국 파직되고 말았는데, 공은 이로부터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채 중외(中外)에서 부침(浮沈)하면서 몇 차례나 낭패를 당하곤 하였다.
공의 관직 생활로 말하면, 늘 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를 돕곤 하면서 남의 뒤를 따라 자기의 뜻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또 일찍부터 영남 사람들의 뜻을 중하게 거슬렸으므로 가는 곳마다 번번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곤 하였으며, 만년에 들어와서는 그러한 현상이 더욱 심해졌으나 끝내 자신의 신조를 굽히려고 들지 않았다. 그리고 80세 나이가 되도록 날래고 굳센 기상이 조금도 쇠해지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공은 소탈한 품성을 타고나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용모가 걸출하여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광해(光海)가 이미 대비(大妃)를 유폐(幽閉)시킨 뒤에 간신들이 백관을 협박하여 폐위(廢位)를 청하게 하였으나 공은 끝내 참여하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하여 장차 견책을 받게 되자 친척과 고구(古舊)들이 서로 위로해 주기도 하였으나 정작 공만은 태연자약하여 동요됨이 없었다.
공이 죽은 이듬해에 금상(今上)이 내란을 평정하고 대위(大位)에 오른 뒤 광해 때 수여된 훈작(勳爵)들을 모조리 깎아 버렸는데 공도 이 가운데 포함되어 훈작과 품계와 증직받은 직질(職秩) 모두 추탈(追奪)당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이 생전에 기구한 처지를 자주 당했는데 죽은 뒤에까지도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다.
부인 엄씨(嚴氏)는 부정(副正) 서(曙)의 딸로서 부도(婦道)가 있었는데 일찍 죽어 광주(廣州) 읍소재지 북쪽 임향(壬向)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러다가 공이 죽자 합장을 하였는데, 이는 치명(治命 정신이 맑을 때 내린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아들 평(坪)은 모관(某官)이고, 딸은 사인(士人) 모(某)에게 출가하였다. 측실 소생의 아들로 선(墠), 구(坵), 탄(坦)이 있었는데 선은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구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모관이다. 내외손이 모두 약간명이다.
사자(嗣子)인 평이 비석을 세우려고 하면서 나에게 글을 부탁해 왔는데, 나의 선대부(先大夫)께서 실로 공과 같은 사마시에 입격하셨으니, 의리상 사양할 수 없기에 명(銘)을 지어 주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명예와 지위는 사람이 주는 것이요 / 名也位也人也
오래 살고 못 사는 것은 하늘의 일이로다 / 壽也殀也天也
공은 벼슬길 고달파도 천수를 누렸으니 / 若公宦數窮而得永年
사람엔 막혔어도 하늘의 사랑 받았다 하지 않으랴 / 謂非阨於人而媚於天者耶
아 / 噫

고려사절요 제31권
 신우 2(辛禑二)
임술신우 8년(1382), 대명 홍무 15년


○ 봄 정월에 전 판사 김극공(金克恭)의 사지를 찢어 여러 도에 돌리고, 그 가산과 처자를 적몰하였으며, 전교부령(典校副令) 정구(鄭矩)와 판사 장자충(張子忠)을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이전에 이인임의 사위 강서(姜筮)의 집에 던져진 익명서에, “왕의 즉위에 의심나는 것이 없지 않으며, 또 매우 무도하므로, 조민수ㆍ임견미ㆍ염흥방ㆍ도길부ㆍ문달한 등이 이인임과 최영을 없애고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세워 왕을 삼으려 한다." 하였다. 김극공이 듣고 다른 사람에게 얘기했는데, 그 사람이 임견미에게 고하였다. 견미는 김극공이 한 짓이라 생각하고 잡아서 국문하니, 김극공이 매에 못이겨 거짓 자복하였다. 옥관이 김극공에게 글자를 쓰게 하여 보니, 익명서와 필적이 다르므로 이인임이 자못 의심하였으나, 임견미가 기어이 극공에게 죄를 가하려 하므로, 옥관이 감히 분명하게 밝히지 못하고 드디어 죽였다. 장자충은 김극공의 말을 듣고도 나라에 고하지 않고 사사로 정창군에게 고하였고, 정구는 극공의 사위이므로 모두 귀양보냈다.
○ 요동 호발도(胡拔都)가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몰래 압록강을 건너 돌연 의주(義州)에 이르러 상만호(上萬戶) 장여(張侶)의 집을 포위하였다. 장여가 아들 장사길(張思吉)ㆍ장사충(張思冲)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장여는 창에 찔리고 두 아들은 화살에 맞았다. 호발도가 장여의 재물과 말 15필을 빼앗아 가니, 부만호 최원지(崔元沚)가 추격하여 20여 급을 베었다. 장여는 활 쏘고 말 타는 것이 능하였는데, 권문세가에 뇌물을 바쳐 만호가 되었다. 성질이 탐욕스럽고 무식하여 인심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적에게 경시당한 것이다.
○ 경상ㆍ전라ㆍ강릉도의 주린 백성을 진휼하였다.
○ 2월에 문하평리 한방언(韓邦彦)을 서북면 도체찰사 겸 안주도 상원수로 삼고, 전 지문하사 상의 김용휘(金用輝)를 도안무사(都按撫使) 겸 부원수로 삼아, 정요위(定遼衛)의 군대를 방비하게 하였다.
○ 판서운관사 장보지(張補之) 등이 글을 올려, 변괴가 자주 일어나니 도읍을 옮겨 재앙을 막기를 청하였다. 우가 그 글을 도당에 내렸으나, 이인임이 불가하다고 고집하여 마침내 중지하였다.
○ 노씨(盧氏)를 봉하여 의비(毅妃)로 삼고, 아비 영수(英壽)를 대호군으로 삼았다. 노씨는 본래 근비의 궁인(宮人) 석비(釋婢)인데, 우가 매우 총애하였다.
○ 왜적이 임주(林州)를 침범하니 도순문사 오언(吳彦)이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 계해일에 하늘에서 곡식이 내렸는데 검은 기장ㆍ팥ㆍ모밀 같은 것이 있었다. 우가 일관(日官)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흉년이 겹쳐들어 사람이 장차 서로 잡아먹을 징조입니다." 하였다.
○ 반전색(盤纏色 여비 조달을 맡은 관청)을 두어서 대소 문ㆍ무 관리로 하여금 마필(馬匹)ㆍ저포(紵布)ㆍ마포를 차등에 따라 내게 하여 명 나라의 세공(歲貢)에 대비하였다.
○ 아들 창(昌)이 병이 있으므로 이죄(二罪) 이하를 사하였다.
○ 갑술일에 해 속에 크기가 계란만한 흑자(黑子)가 있었는데, 사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 사삿집 종 무적(無敵)이 미륵의 화신이라고 자칭하다가 참형을 당하였다.
○ 해양(海陽 평북 길주(吉州) 만호 김동불화(金同不花)가 그 아들 부야개(夫耶介)를 보내어 볼모로 삼았다.
○ 윤달에 왜적이 임주(林州)ㆍ부여(扶餘)ㆍ석성(石城)을 침범하였다.
○ 우가 남교(南郊)에서 사냥하고, 또 동교(東郊)에서 사냥하였는데, 항상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사관이 감히 나의 과실을 기록한다니, 만일 보기만 하면 내가 반드시 죽이겠다." 하였기 때문에, 사관이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 김동불화가 제 관할 백성을 데리고 와서 항복하니, 독로올(禿魯兀 함남 단천(端川)의 땅에 살게 하였다.
○ 일본이 포로가 된 우리 백성 1백 50명을 돌려보냈다.
○ 3월에 왜적이 평해(平海)ㆍ삼척ㆍ울진ㆍ우계(羽溪) 등의 현(縣)을 침범하였다.
○ 곡성 부원군 염제신(廉悌臣)이 졸하였다.
○ 왜적이 영월ㆍ예안ㆍ영주ㆍ순흥ㆍ보주ㆍ안동을 침범하였다.
○ 여름 4월에 사헌부에서 경상도 도순문사 남질이 왜적을 막지 못하였다고 탄핵하여, 도당에 내리어 의논하였으나, 이인임이 질과 좋은 사이여서 의령현(宜寧縣)에 안치시키기만 하였다.
○ 양수척(楊水尺)의 무리들이 떼를 지어 왜적 행세를 하며 영월군을 침범하여 관사와 민가를 불태우니, 판밀직 임성미(林成味) 등을 보내어 쫓아 잡아서 남녀 50여명과 말 2백여 필을 노획하였다.
○ 문하찬성사 김유(金庾), 문하평리 홍상재(洪尙載), 지밀직 김보생(金寶生), 동지밀직 정몽주(鄭夢周), 밀직부사 이해(李海), 예의판서 배행검(裵行儉)을 남경에 보내어, 세공으로 금 1백근ㆍ은 1만 냥ㆍ베 1만 필ㆍ말 1천 필을 바쳤다.
○ 강릉도 상원수 조인벽(趙仁璧)과 부원수 권현룡(權玄龍)이 왜적과 싸워 머리 30급을 베었다.
○ 서해도 안렴사 이무(李茂)가 잡은 양수척 30여 명과 말 1백 필을 바치고 여러 도의 안렴사와 수령도 각각 잡은 양수척과 말을 바치니, 순군옥에 내리어 국문해서 그 주모자를 베고, 처자와 마필을 몰수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양수척을 여러 고을에 나누어 두고 평민보다 차등있는 역사를 시켰는데, 명령을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베었다.
○ 전 평리 양백익(梁伯益)을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일찍이 충혜왕(忠惠王)의 아들 석기 (釋器)가 민가의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아들이 양백익의 전장(田莊)에 숨어 있었다. 일이 발각되어 양백익은 귀양보내고, 석기의 아들은 머리를 깎아 계룡산으로 보냈으나, 비밀리에 아전을 시켜 도중에서 죽였다.
○ 왜적이 죽령을 넘어서 단양군을 침범하니, 원수 변안열(邊安烈)ㆍ한방언(韓邦彦) 등이 쳐서 깨뜨려, 80여 급을 베고 말 2백여 필을 노획했다.
○ 5월에 경상도 합주(陜州)에 사노(私奴) 한 명이 있었는데, 검대장군(劍大將軍)이라 자칭하고, 그 부하 1명은 초군장군(抄軍將軍)이라 일컫고, 또 1명은 산군장군(散軍將軍)이라 일컬으며, 무리를 모아서 떼를 지어 다니며 노략질하고, 그곳의 상전과 수령을 죽이고 난을 일으키려 하므로, 안림사 안경공(安景恭)이 잡아서 베었다.
○ 요망한 백성 이금(伊金)을 베었다. 이금은 고성 백성인데, 미륵불이라 자칭하고 여러 사람을 속이기를, “나는 석가불을 강림하게 할 수 있다. 다른 귀신에 기도하고 제사지내는 자, 마소의 고기를 먹는 자, 재물을 남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만일 내 말을 믿지 않으면 3월에 해와 달에 빛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술법을 부리면 풀에 푸른 꽃이 피기도 하고, 나무에 곡식 열매가 열리기도 하며, 한 번 심어서 두 번 베게 할 수 있다." 하였다. 우매한 백성들이 믿고 다투어 쌀ㆍ비단ㆍ금은을 보시하고, 소와 말이 죽어도 버리고 먹지 않으며, 재물이 있는 자는 모두 남에게 주었다.
이금이 또 말하기를, “내가 명령하여 산천 귀신을 모두 일본에 보내면, 왜적을 쉽게 사로잡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무당들이 더욱 공경하고 믿어서, 성황당과 사묘(祠廟)의 신위를 철거하고 이금을 부처같이 공경하여 복을 빌었다. 무뢰배들이 따라서 한패가 되어 제자라 자칭하고 여러 사람들을 속였는데, 이르는 고을의 수령 중에는 나와서 영접하여 상등 사관에 유숙시키는 자도 있었다. 청주 목사 권화(權和)가 꾀어서 오게 하여 그 괴수 5명을 묶어 가두니, 이에 도당에서 여러 도에 이첩(移牒)하여 모두 잡아서 베었다. 전 판사 양원격(楊元格)은 본래 그의 말을 신봉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도망하여 숨었으나, 끝까지 수색하여 잡아서 곤장을 때려 귀양보냈는데, 귀양가다 길에서 죽었다.
○ 유양(柳亮)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왜적이 영춘현(永春縣)을 침범하였다.
○ 변안열(邊安烈)ㆍ한방언(韓邦彦) 등이 안동에서 왜적을 쳐서, 30여 급을 베고 말 60필을 노획했다.
○ 왜적이 또 회양부(淮陽府)를 침범하였다.
○ 6월에 우가 상승(尙乘)의 집에 가서 말을 사열하고, 또 노영수(盧英壽)의 집에 갔다. 그 뒤로부터 상승과 노영수ㆍ이인임의 집에 가지 않는 날이 없고, 그 밖에 가는 곳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 김유(金庾) 등이 요동에 갔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돌아왔다.
○ 간관 정리(鄭釐)ㆍ박의중(朴宜中) 등이 상소하기를, “근년에 와서 왜적이 날로 성하여, 깊이 들어와서 도적질하며, 인민을 죽이고 노략질하며 가옥을 불태우고 헐어서 주ㆍ군이 조잔(凋殘)해지고 전야(田野)가 황폐해졌습니다. 더구나 수재와 한재까지 겹쳐서 흉년이 거듭 들어 굶주려 죽는 사람이 연이어지고, 창고가 비어서 용도도 부족합니다. 또 좀도둑이 일어나 사사로이 서로 죽이니, 인민은 흩어지고 부자(夫子)도 상존(相存)하지 못합니다. 화란(禍亂)의 지극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는데, 하물며 상국(上國)에서 우호를 맺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가까운 국경에 군사를 주둔시켜 틈을 엿보고 있는 때임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또 더군다나 천재(天災)ㆍ인요(人妖)ㆍ지괴(地怪)와 조수(鳥獸)ㆍ천어(泉魚)의 이변이 겹쳐 견고(譴告)를 보이니, 온 나라 백성 중에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참으로 마땅히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안일한 생각을 가지지 말고, 널리 여론을 받아들여 치안을 도모하고 변괴를 없애는 데 하루라도 게을리하고, 한 가지 일이라도 소홀히 하여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하물며 급하지 않은 공사를 일으키며, 이목(耳目)의 즐거움을 탐하여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자행해서 유흥과 오락을 일삼아 게으르고 거만해서야 되겠습니까. 원하건대 주색과 가무의 즐거움을 파하시고, 매와 개로 사냥하는 유희를 끊어버리며, 성인의 말씀을 무시하지 말고, 충성하고 곧은 사람을 거스르지 말며, 덕이 있는 기로(耆老)를 멀리하지 말고, 못된 아이들을 가까이하지 말며,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참소를 멀리하고 간하는 것을 들으며, 어진 사람을 임용하고 간사한 사람을 버리며, 밤낮으로 부지런하며, 공손하고 조심하여, 항상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부지런하기를 힘쓴다면, 대업(大業)을 길이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사헌부에서도 간하였으나, 모두 회답이 없었다.
○ 왜적이 경산ㆍ대구ㆍ화원(花園)ㆍ계림(鷄林) 등처를 침범하고, 또 통구현(通溝縣)을 침범하였다.
○ 전법판서 조준(趙浚)을 경상도 체복사(體覆使)로 삼았다. 이때는 왜적의 침범이 매우 강성하여, 각 고을이 소란해서 백성들이 모두 산골로 도망하였으며, 나라에 기강이 없고, 장수들은 둘러서서 보기만 하고 싸우지 않으니, 적세는 날마다 성하여졌다. 조준이 오자 호령이 엄하고 밝으므로, 장수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잇달아 전승하니, 도민(道民)들이 그 덕택으로 조금 편안해졌다.
이보다 먼저, 수성(守城) 사람 조희삼(趙希參)이 그 어머니를 부축하여 모시고 경산부(京山府)의 성에서 왜적을 피하려고 발길이 낙동강에 이르렀는데, 배가 없어서 건너지 못하였다. 적이 쫓아오자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나는 늙고 병들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 너는 말을 달리어 화를 면하라." 하였다. 조희삼이 말하기를. "어머니가 계신데 제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고, 어머니와 함께 밭 속에 숨었다. 적이 그 어머니를 칼로 치려 하자, 희삼이 몸으로 어머니를 가리어 적에게 해를 당하고 어머니는 죽음을 면하였다.
경산부 사람 배중선(裵仲善)의 딸이 아이를 업고 왜적에게 쫓기다가 소야강(所耶江)에 이르렀는데 강물이 한참 불어 있었다. 그 여자가 벗어나지 못할 것을 깨닫고 물속으로 뛰어들어가니, 적이 강 언덕에 이르러 활을 당기며 말하기를, “네가 나오면 죽음을 면할 수 있다." 하였으나, 여자가 말하기를, “나는 선비의 딸이다. 일찍이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죽을지언정 네놈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 하였다. 적이 활을 쏘아서 그 아이를 맞히고, 적이 활을 당기며 또 전과 같이 말하였으나, 끝내 나오지 않고 해를 당하였다.
영산(靈山) 사람 낭장 신사천(辛斯蕆)의 딸은 나이 16세였는데, 왜적에게 쫓기어 아비를 따라 강에 이르러 배를 타고 건너려 할 때에 적이 갑자기 이르러 배에 탄 사람을 거의 다 죽이고, 그 아버지도 해를 입었다. 한 도적이 그 여자를 잡아 배에서 끌어내리니, 여자가 말하기를, “네가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불공대천의 원수다. 죽을지언정 네놈을 따르지 않겠다." 하고, 드디어 적의 목을 쥐고 차서 거꾸러뜨리니, 적이 노하여 그 여자를 죽였다. 조준이 그 일을 진달하고 아뢰기를, “세 사람의 절개와 효도가 이와 같으니, 그 문(門)에 정표(旌表)하여 후세 사람을 권면하소서." 하니, 드디어 비석을 세우고 그 일을 기록하였다.
○ 이인임을 영문하부사로, 최영을 영삼사사로, 홍영통(洪永通)을 문하시중으로, 이자송(李子松)을 수문하시중으로 삼았다.
○ 가을 7월에 우리 태조를 동북면 도지휘사로 삼았으니, 이때에 호발도가 동북면 백성을 침범하였는데, 태조는 일찍부터 대대로 그 도의 군무를 관활하여 평소에 위신이 드러났으므로 보내어 위무(慰撫)한 것이었다.
○ 정당문학 정공권(鄭公權)이 졸하였다.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삼가고 두터웠으며, 정도로써 관직을 수행하였다. 이때에 가묘의 제도가 폐지되었는데, 공권은 제기를 별실에 간직하여 두고, 제삿날을 당하면 반드시 손수 씻어서 제물을 극히 정결하게 하였다. 간신이 권세 부리는 것을 미워하여 항상 분히 여기고 한탄하더니, 마침내 등창을 앓아서 죽었다.
○ 경성에 기근이 들어, 베 한 필 값이 쌀 서너 되 값이었다.
○ 황제가 운남(雲南)을 평정하고, 양왕(梁王)의 가속을 제주(濟州)에 안치하였다. 우가 밀직사사 유번(柳藩)을 경성에 보내서 표를 올려 하례하였다.
○ 8월 무자일에 혜성이 보였다.
○ 한양(漢陽)에 도읍을 옮기기로 의논하고 정하니, 간관이 상소하여 말렸으나 듣지 않고 드디어 한양으로 옮겼다. 경성은 시중 이자송에게 명하여 머물러 있으면서 지키게 하고, 이임ㆍ이인임ㆍ임견미ㆍ염흥방 등이 수행하였다. 모두 종을 보내어 여기저기에서 떼를 지어 백성의 토지와 집을 한없이 빼앗았다.
○ 겨울 10월에 왜적이 남원군을 침범하고, 또 왜선 50척이 진포(鎭浦)에 들어왔다. 해도원수 정지(鄭地)가 치니 달아났는데, 군산도(群山島)까지 쫓아 배 4척을 노획했다.
○ 11월에 대사헌 노숭(盧嵩) 등이 상소하기를, “근일에 전하가 나가 노는데, 입직(入直)한 이덕시(李德時)가 백관ㆍ유사에게 고하지 않았고, 내승(內乘) 김천수(金天守) 등이 훈련되지 않은 말을 내어서 넘어지고 미끄러지게 하였으니, 그 죄를 국문하소서." 하였다. 홍영통(洪永通)ㆍ이자송 등도 아뢰기를, “전하가 취하기만 하면 말을 달리므로, 신등이 항상 마음에 위태하고 두렵게 여겼었는데, 이제 과연 넘어지고 미끄러져서 귀하신 몸을 상하였으니, 이제부터는 구중궁궐에 가만히 계시어, 사냥을 경계하고 주색을 삼가서 혹시라도 가볍게 움직이지 마소서." 하니, 우가 좋아하지 않았다.
○ 동직밀직사사 정몽주와 판도판서 조반(趙胖)을 남경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고, 진정표(陳情表)를 올려 시호와 승습(承襲)을 청하였다.
○ 조민수를 수시중으로, 이색을 판삼사사로 삼았는데, 이색은 병을 핑계대고 일을 보지 않았다.
○ 천재지변이 여러 번 일어나므로, 가벼운 죄는 사하였다.
○ 12월에 조민수에게 명하여 송경(松京)을 지키게 하였다.
○ 우가 교외에서 사냥하였는데,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신하들이 우의 간 곳을 몰랐는데,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고려사절요 제31권
 신우 2(辛禑二)
기미신우 5년(1379), 대명 홍무 12년


○ 봄 정월에 요동 도지휘사(都指揮司)가 진무(鎭撫) 임성(任誠)을 보내와서 포로된 사람과 도망한 군사를 찾았다. 그때 요동 사람들이 말을 전하기를, “고려가 군사를 보내어 북원(北元)을 돕는다." 하였기 때문에, 성을 보내어 허실을 탐지한 것이었다.
○ 간관이 아뢰기를, “나라에 3년을 지탱할 만한 저축이 없으면 나라 구실을 할 수 없다 하였는데, 지금 안팎의 창고가 모두 비어서 1년을 지탱하기에도 부족하니, 각 고을로 하여금 둔전을 고과하여 군량을 충족하게 하십시오.《주역(周易)》에 말하기를, '장자가 군사를 거느리고, 제자가 시체를 실으면 흉하다.' 하였는데, 지금 원수(元帥)가 너무 많아 명령이 여러 곳에서 나오기 때문에 체통이 문란하고 기강이 서지 않으니, 옛날 제도에 의거하여 한 명의 원수만 두고 나머지는 모두 파해서 다른 칭호를 주어 모두 원수의 지휘를 듣게 하십시오. 벼슬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는 것은 본래 정한 제도가 있는데, 양부(兩府)의 인원수가 많아서 60명이나 되고, 밀직(密直) 이하 봉군(封君)과 통헌(通憲) 이상 첨설직(添設職)도 매우 많으니, 모두 파하고, 공장(工匠)의 무리는 비록 공로가 있더라도 관직을 받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이미 받은 자는 직첩(職牒)을 빼앗을 것이며, 군(君)으로 봉한 중들과 옹주(翁主)ㆍ택주(宅主)로 봉한 부녀자도 파하여 관작을 중하게 하소서.
또 왜적이 날마다 강성하여 여러 도를 침략하는데, 국가에서 급한 보고를 기다린 뒤에서야 장수를 보내고 군사를 내니, 거리가 멀기 때문에 장수가 도착할 때에는 적은 벌써 바다에 떠서 미처 싸움도 해 보지 못하며, 가령 싸운다 하더라도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가기 때문에 군사와 말이 피곤하여 여러 번 패하였으니, 여러 도에 미리 장수를 보내어 도적이 이르거든 치게 하소서.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하여야 나라가 편안할 것입니다. 근래에 왜적과 홍수와 가뭄의 재앙으로 인하여 백성이 굶주리므로 마땅히 더욱 구휼하고 농상을 장려하여야 하는데, 이제 후소(後蘇)ㆍ좌소(左蘇)의 토목공사가 한창 일어나서 그치지 않으니, 백성이 부역 때문에 피곤하여 장차 구렁에 뒹굴어 죽게 되었습니다. 곧 토목의 역사를 정지하였다가 가을이 되거든 역사를 시작하소서. 현릉(玄陵)께서 경학(經學)을 숭상하여 그것으로 선비를 양성하고 인재를 취하였는데, 근년 이래로 시(詩)와 부(賦)로 선비를 뽑기 때문에 오로지 사장(詞章)만 숭상하여 경학이 점점 폐하여지니, 지금부터는 한결같이 현릉의 기유년 과거법에 따르소서." 하였다. 우가 그 말을 받아들였으나, 토목공사만은 파하지 않았다.
○ 경인일에 일포(日抱)ㆍ일배(日背)ㆍ일관(日冠)ㆍ일대(日戴)ㆍ일이(日珥)에 갓끈[纓] 같은 것이 둘렸다.
○ 2월에 좌소(左蘇)에 천도(遷都)하는 계획을 파하였다.
○ 왜적이 순천(順天)ㆍ조양(兆陽) 등지에 침범하였는데, 정지(鄭地)가 적과 싸우다가 패하였다. 경복흥(慶復興)ㆍ황상(黃裳)ㆍ우인열(禹仁烈)이 함께 최영의 집에 가니, 영이 말하기를, “왜적의 침노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재상들은 어째서 걱정을 하지 않소. 정지 한 사람이 아무리 용맹한들 많은 도적을 어찌하겠소." 하니, 재상들이 부끄러워 하였다. 영이 또 일찍이 이인임에게 말하기를, “국가에 어려운 일이 많은데, 공이 수상(首相)으로 있으면서 어째서 이것은 걱정하지 않고 가산만 생각하오." 하였는데, 인임이 말이 없었다.
○ 3월에 우인열을 경상도 상원수로, 목자안(睦子安)을 전라도 부원수로 삼아서, 모두 도순문사를 겸하게 하였다.
○ 심덕부(沈德符)ㆍ김보생(金寶生)이 남경에서 돌아왔다. 황제가 손수 쓴 조서를 내리기를, “그대들이 온 것은 간신의 속임에 따라 부득이하여 와서 속이는 것이다. 이제 그대들에게 명하여 돌아가게 하니, 그대들은 마땅히 고려의 화를 빚어낸 괴수에게 짐이 이르는 말을 전해야 할 것이다. 죄 없는 사자(使者)를 죽인 원수 문제는 집정대신이 와서 조회를 하고 해마다 바치는 조공을 약속대로 하지 않는다면, 훗날에 문책하는 군사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창해(滄海)를 우리와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하는가. 만일 내 명령을 믿지 않는다면, 전함 수천 척과 정예 군사 수십만을 거느리고 돛을 날리며 동해에 대어 사지가 어디 있는가를 물을 것이다. 비록 그 도당을 다 멸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어찌 태반은 포로로 잡지 못하겠는가. 과연 감히 나를 가볍게 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예부 상서 주몽염(朱夢炎)이 전지를 기록하여 국인에게 보이기를,
"고려 국왕 왕전(王顓)이 표문을 받들어 조공할 때부터 신하라 일컬었는데, 그 표문에 '자손 대대로 신첩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수년 뒤에 왕이 간신에게 시해될 것을 어찌 알았으랴. 전후(前後)해서 사람을 보내어 바친 글에 모두 사왕(嗣王)의 사신이라고 말하였으나, 짐은 왕의 진실을 알지 못한다. 짐이 보건대, 고려가 중국에 대하여, 한(漢) 나라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나라의 대부분의 임금과 신하가 은혜를 생각지 못하고, 거짓으로 사귀어 화를 만들기만 하였다. 옛날 한 나라 때에 고(高)씨가 왕위를 잃었는데 광무제(光武帝)가 그 왕호를 회복하여 주었으나 도리어 곧 변방을 침략하다가 한 나라 군사에게 크게 패하였고, 당나라가 천하를 차지하였을 때에도 일찍이 봉작(封爵)을 주었으나, 곧 다시 배반하여 부자가 포로가 되어 족성(族姓)이 마침내 끊어졌다. 송 나라가 일어남에 이르러서는 왕씨(王氏)가 나라를 차지했으나 거란과 여진(女眞)에게 핍박당하여 기꺼이 종노릇을 하였고, 원 세조(元世祖)가 중원에 들어와서 거의 망하게 된 본국을 구원하여 주었는데, 공연히 의심을 품고 사신을 죽여서 여러 번 항복하고 여러 번 반역하였다. 그러므로 자주 병화를 만난 것이다. 지금 왕전이 시해 당하고 간신이 권력을 훔쳐 먼저 우리와 원수를 맺으려 하니, 우리가 받아들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춘추(春秋)의 법으로 논한다면, 난신과 적자는 누구든 벨 수가 있으니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 어찌하여 전후 5번이나 모두 이르기를, '사왕(嗣王)의 명을 배신(陪臣)이 받들었다.' 하는가. 중서성(中書省)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저곳에 가서 사왕이 어떠한지, 정령(政令)이 누구에게서 나오는지를 물어 보라. 만일 정령이 전과 같고 사왕이 잡혀 갇히지 않았다면, 마땅히 전왕(前王)의 약속대로 금년에 말 1천 필을 바치고 집정배신(執政陪臣) 반수(半數)를 보내어 조회하고, 명년에는 금 1백 근, 은 1만 냥, 좋은 말 1백 필, 세포(細布) 1만 필을 조공하여 해마다 이를 상례(常例)로 만들고, 또 잡아 간 요동 백성을 몇만 명이 되든지 따지지 말고 돌려보내라. 그런 뒤에야 왕위가 진실하고 정령이 행하여지는 것을 짐이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임금을 죽인 적이 하는 짓이니, 뒤에 많은 거짓이 아울러 생겨 반드시 멋대로 우리 변방을 침노하여 큰 화를 고려 백성에게 끼치게 할 것이다.
짐이 이 간신의 뜻을 추측하건대, 반드시 창해가 강토를 두르고 겹겹의 산이 굳고 험한 것을 믿고, 흉포하고 완악한 짓을 멋대로 부리고 날뛰는 데 뜻이 있어서 우리 조정의 군사가 출동하는 것을 한 나라ㆍ당 나라처럼 보는 모양인데, 한 나라ㆍ당 나라의 장수는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잘하나, 배에는 서툴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기에 고생을 하고 행군하는 것이 순조롭지 못하였다. 짐이 중국을 평정하고 호로(胡虜)를 물리침으로부터, 물과 육지를 모두 정벌하였으니 말 타고 활 쏘고 배 타고 하는 군대의 여러 장수가 어찌 한 나라ㆍ당 나라만 못하랴마는, 그래도 사신을 보내어 가서 보고 사왕(嗣王)의 안부를 묻는 것이니, 조칙과 같이 시행하라."
하였다. 이에 소루(邵壘)ㆍ조진(趙振)을 시켜 덕부(德符) 등을 따라서 왔다. 두 사람이 첨수참(甛水站)에 이르러, 본국에서 문천식(文天式)ㆍ오계남(吳季南)을 북원에 사신으로 보냈다는 말을 전하여 듣고 말하기를, “지난날에 사신을 죽이고 지금 또 두 마음을 품으니, 내가 고려에서 죽는 것보다는 우리나라에서 죽는 것이 낫겠다." 하고 마침내 이르지 않고 돌아갔다.
○ 전 전공판서(典工判書) 이연(李演)을 요동에 보내어 총병(摠兵) 반경(潘敬)과 섭왕(葉王)에게 우호를 닦게 하였는데, 연이 요동에 이르러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 왜적이 도강(道康)과 곡성(谷城)을 침범하고, 또 남원과 순천부를 침범하였다.
○ 여름 4월에 평리상의(評理商議) 한방언(韓邦彦), 밀직상의(密直商議) 김용휘(金用輝), 동지밀직 경의(慶儀)를 양광ㆍ전라ㆍ경상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삼고, 찬성사 양백연(楊伯淵)으로 하여금 싸움을 독려하게 하며, 지밀직 홍인계(洪仁桂)를 부(副)로 삼고, 또 만호 정용(鄭龍)과 윤송(尹松)을 보내어서 전함 20척으로 왜적을 쫓아서 잡게 하였다. 민간에서 양백연 등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말하기를, “차라리 왜적을 만날지언정 원수(元帥)는 만나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 밀직부사 안익(安翊)을 양광도 도문순사로 삼았다.
○ 갑진일에 지진이 있었다.
○ 왜적이 안산군을 침범했다.
○ 우가 판개성 부사 이임(李琳)의 딸을 책봉하여 들여서 근비(謹妃)로 삼았다.
○ 왜적이 연안부를 침범하니, 김해군(金海君) 김유(金庾)와 연안군(延安君) 나세(羅世)를 보내어 전함 52척을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였다.
○ 왜적이 합포를 침범하니, 원수 우인열이 싸워서 물리치고 4급을 베었는데, 인열은 빗나간 화살에 맞았고, 우리 군사의 사상자가 80여 명이나 되었다.
○ 5월에 왜적의 기병 7백과 보병 2천여 명이 진주를 침범하니, 양백연이 우인열ㆍ배극렴(裵克廉)ㆍ한방언ㆍ김용휘ㆍ경의ㆍ홍인계와 함께 반성현(班城縣)에서 싸워 13급을 베었으므로, 물건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 왜적이 풍주(豐州)를 불사르고 노략질했다.
○ 찬성사 홍중선을 의령에 내치었다. 이인임과 임견미 등이 중선과 함께 정방(政房)에 있었는데, 권세가 나뉘는 것을 싫어하여 중선을 계품사(啓稟使)로 삼아서 남경에 가게 하였다. 중선이 곧 떠나지 않으니, 간관 서균형 등이 평소 중선과 원한이 있고, 또 인임의 뜻을 맞추어 중선을 탄핵하여 시골로 쫓아 버리고,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을 중선을 대신하여 사부(師傅)로 삼았다.
○ 무인일부터 25일간이나 낮에 태백성이 보였다.
○ 나세와 김유가 왜적과 용강현(龍岡縣) 목곶포(木串浦)에서 싸워 적선 2척을 잡아 섬멸하였다.
○ 검교시중(檢校侍中) 권고(權皐)가 졸하였다. 고의 성품이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일찍이 그 아들 간(侃)과 토지를 다투다가 간의 아내를 차 낙태를 시켜 죽게 하였다.
○ 지문하(知門下) 심덕부를 서해 도원수로 삼았다.
○ 왜적이 신주(信州)를 침범하였다.
○ 윤달에 안주 만호 최원지(崔元沚)가 왜적을 영청현(永淸縣)에서 쳐서 이겼다.
○ 밀직제학(密直提學) 김도(金濤)를 파면하였다. 도가 홍중선에게 붙어서 인물을 비평하여 인임이 미워하였는데, 마침 도의 집 종이 옛 연경궁(延慶宮) 터의 돌을 도둑질하여 대리(臺吏)가 붙잡자, 인임이 대관(臺官)을 사주하여 탄핵해서 파면시켰다.
○ 사헌부에서 상소하여 5도에 새로 좌ㆍ우익(左右翼) 군사를 둔 폐단을 말하니, 우가 도당(都堂)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파하게 하였다.
○ 왜적이 울주(蔚州)를 침범하고, 또 계림부(鷄林府)를 침범하니, 일본해도포착군관(日本海盜捕捉軍官) 박거사(朴居士)가 왜적과 싸웠는데, 원수 하을지(河乙沚)가 구원하지 않았으므로 거사의 군사가 크게 패하여 겨우 50여 명만 살아 남았다. 이에 앞서 한주국(韓柱國)이 일본에서 돌아올 때에, 거사가 그 군사 1백 86명을 거느리고 같이 왔었다.
○ 6월에 왜적이 청도군(淸道郡)을 침범하니 원수 우인열이 쳤다.
○ 김속명(金續命)을 사면하였다.
○ 사헌부에서 남원 부사 노성달(盧成達)이 적이 물러간 뒤에 창고를 불지르고 쌀 1백 30여 석을 훔쳐내어 항상 창기들과 잔치하고 즐기어 백성의 일을 구휼하지 않은 것을 탄핵하고, 그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성달이 도망하니 이인임이 법대로 하지 않고 덮어 주었다.
○ 조인벽(趙仁璧)을 강릉도 원수로, 박수경(朴修敬)을 안동도 원수로 삼아 부윤을 겸하게 했는데, 왜적이 계림에서 강릉도로 향하기 때문이었다.
○ 북원이 첨원(僉院) 보비(甫非)를 보내어, 연호를 천원(天元)으로 고쳤다고 알려왔다.
○ 왜적이 용주(龍州)를 침범하니, 의주(義州) 만호 장여(張侶)가 쳐서 물리쳤다. 왜적이 또 울주ㆍ청도ㆍ밀성ㆍ자인(慈仁)ㆍ언양 등지를 침범하니, 우인열ㆍ배극렴ㆍ하을지가 울주에서 싸워 적선 7척을 사로잡았다.
○ 가을 7월에 찬성사 양백연을 합주(陜州)로 귀양보냈다. 백연이 경상도에서 돌아와 전공을 믿고 매우 교만하게 뽐내었다. 이인임ㆍ임견미 등이 미워해서 사헌부를 사주하여 백연이 몰래 처제와 간통하였고, 또 전 판사 이인수(李仁壽)와 죽은 밀직 성대용(成大鏞)의 첩을 간음하였다고 탄핵하여 드디어 관직을 삭탈해서 귀양보냈다. 그날 저녁에 환자(宦者) 임보(林甫)ㆍ한진(韓軫) 등이 왕의 명령을 거짓으로 꾸며서 백연을 소환하다가, 사자가 순작관(巡綽官)에게 잡혔다. 최영이 우에게 아뢰기를, “상호군(上護軍) 전천길(全天吉)이 일찍이 신에게 말하기를, '양백연이 두 시중(侍中)을 해치고 스스로 수상이 되려고 한다.' 하오니, 그 도당을 신문하여 치죄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천길ㆍ보ㆍ진과 전 제학 김도를 순군옥에 가두고, 영 등에게 명하여 국문하게 하였다. 천길ㆍ보ㆍ진이 모두 자복하기를, “백연은 스스로 좌시중이 되며, 최영을 수시중(守侍中)으로 삼고, 성석린은 대사헌을 겸하게 하며, 임보는 반주(班主)가 되기로 하였다." 하였는데, 도만이 자복하지 않아 고문을 받아서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나기를 3번이나 하다가, 다시 고문함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자복하였다.
또 백연의 아우 삼사좌윤 중연(仲淵), 상호군 계연(季淵), 밀직부사 자연(子淵)과 그 친구인 지문하사 윤승순(尹承順), 동지밀직 성석린ㆍ유만수(柳曼殊), 밀직부사 임의(任毅)ㆍ신렴(辛廉), 전법판서 안득희(安得禧), 판사 김남귀(金南貴)ㆍ조숙경(曹淑卿)ㆍ이귀(李貴), 전 직문하 홍임(洪琳), 전 소부윤(少府尹) 조희보(趙希甫)를 옥에 가두고 국문하니, 말이 홍중선에게 관련되었다. 드디어 판도판서 표덕린(表德麟), 전법판서 유번(柳蕃)을 보내어 백연과 중선을 귀양간 곳에서 죽이고, 그 집을 적몰하니, 국인들이 원통하게 여겼다. 중선은 표덕린 등이 온다는 말을 듣고서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기를, “나는 분명히 죄가 없다. 만일 죄가 있어 형을 받는다면 하늘이 빛을 변하지 않을 것이고, 만일 죄가 없이 원통하게 죽는다면 하늘이 반드시 위엄을 보일 것이다." 하였다. 죽은 뒤에 과연 하늘에서 크게 번개가 치고 바람이 부니, 고을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또 도ㆍ보ㆍ진ㆍ계연ㆍ남귀ㆍ숙경ㆍ임(琳)을 죽여 머리를 거리에 매달고, 도ㆍ진의 집을 적몰하였으며, 석린ㆍ승순ㆍ만수ㆍ의ㆍ귀ㆍ희보는 곤장을 때려서 수졸(戍卒)에 충당하고, 자연ㆍ중연ㆍ득희ㆍ염은 시골로 쫓아버렸다. 천길도 옥에서 죽었다. 도의 문생인 진사 10여 명이 문 밖에 이르러 시체를 보호하고, 이종(李悰)이란 사람은 시체를 안고 냇물에 들어가 그 피를 씻고 옷을 벗어 입히고, 삿자리로 싸고, 그 머리는 망(網)에 넣어 달아매고는 재배하고 가니, 당시 사람들이 의롭게 여겼다.
○ 왜적이 낙안군(樂安郡)을 침범했다.
○ 영녕군(永寧君) 왕빈(王彬)을 북원에 보내어 연호 고친 것을 하례하였다.
○ 전 판삼사사 손홍량(孫洪亮)이 졸하였다.
○ 이자용(李自庸)이 일본에서 돌아오는데, 구주(九州) 절도사(節度使) 원료준(源了俊)이 포로된 우리 백성 2백 30여 명을 돌려보냈다.
○ 왜적이 무릉도(武陵島)에 들어와서 반 달을 머물다가 물러갔다.
○ 왜적이 울주에 머무르면서 벼와 기장을 베어 양식을 삼고, 기장(機張)ㆍ언양까지 침노하니, 땅을 쓴 듯이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우인열이 군사를 모집하여 동래현에서 싸워 7급을 베었다.
○ 8월에 왜적이 여미현(餘美縣)을 침범하고, 또 수주(隨州)ㆍ곽주(郭州)를 침범하였다.
○ 요동도사(遼東都司)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게 공문을 보내어 말하기를, “근자에 들으니, 나하추가 사람을 시켜 합라(哈刺)ㆍ쌍성(雙城)을 경유해서 은밀히 고려에 보내어 예를 행하였고, 호주(胡州 북원(北元))도 사람을 시켜 앞서 고려에 가서 공무의 회의를 하였다 하는데, 생각하건대 본국(고려)이 일찍이 여러 번 사신을 보내서 우리 조정에 조공하여 신하의 예를 이미 정하였으니,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나하추 등이 비록 사람을 은밀히 보내더라도, 본국이 어찌 다시 그와 교통할 수 있는가. 오랑캐 사신을 잡아서 사람을 보내어 압송(押送)하라. 그렇지 않으면 간악한 것이 저절로 밝혀질 것이니,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하였다.
○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지용기(池湧奇)를 전라도 원수로 삼았다.
○ 경상도 원수 우인열ㆍ배극렴ㆍ박수경, 병마사 오언(吳彦)이 왜적을 사주(泗州)에서 쳐 크게 깨뜨리고 43급을 베었다.
○ 9월에 우(禑)가 유모 장씨(張氏)를 지평현(砥平縣)에 귀양보냈다. 이보다 먼저, 정당문학 허완(許完)과 동지밀직 윤방안(尹邦晏)이 그 아내를 시켜 장씨와 결탁해서 우에게 참소하여, 내재추(內宰樞) 임견미ㆍ도길부를 제거하기를 청하였다. 우가 견미 등에게 명하여 개인 집으로 돌아가 출입을 금하도록 하였다. 견미 등이 경복흥ㆍ이인임ㆍ최영에게 달려가 고하기를, “허완 등이 우리 두 사람을 죽이고 여러분에게도 이르려 하니, 화가 장차 일어날 것이다." 하였다. 완의 무리가 왕의 명령을 거짓으로 꾸며서 최영을 부르니, 영은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복흥ㆍ인임 등과 함께 흥국사(興國寺)에 모여서 백관ㆍ기로(耆老)를 모아놓고 의논하여, 장씨를 국문하자고 청하였다. 우가 급히 영을 부르니, 영이 아뢰기를, “이제 일국의 신민이 실망하고 있으니, 전하께서 만일 여러 사람의 뜻을 좇는다면 신이 들어가 뵙겠습니다." 하였다. 우가 말하기를 "경이 병으로 여러 날을 조회하지 않으니 한 번 볼 겸 실망한 일에 대해서 묻고자 한다." 하였다. 영이 들어가 뵈려 하니, 재상들이 말리며 말하기를, “간인(奸人)이 안에 있으니 경솔히 들어가서는 안 된다. 공이 가면 이 군사가 반드시 혼란할 것이니, 군사가 혼란하면 나라가 편안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영이 그 말을 좇았다.
이에 양부ㆍ대간이 함께 대궐에 나아가, 장씨를 하옥해서 신문하여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우가 듣지 않으니, 영의 무리가 장씨의 족당인 강유(康侑)ㆍ권원순(權元順)ㆍ권원보(權元甫) 등을 가두고 국문하였다. 우가 장씨의 말을 누설시킨 것에 노하여 환자 정난봉(鄭鸞鳳)을 하옥하고, 경복흥ㆍ목인길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임금으로서 유모한 사람 구하지 못하겠는가. 석방하고 다스리지 말라." 하였다. 영 등이 더욱 굳게 청하니, 우가 완과 방안을 하옥하고, 영에게 군사를 파하라고 명령하며 이르기를, “경은 어떤 도적을 막으려고 하기에 군사를 끼고 있으면서 오지 않는가. 경이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여러 대의 충신이라 하더니, 충심이 어디 있는가." 하였다. 최영이 아뢰기를, “신이 만일 부르시는 명령에 응하여 들어가면 군사가 반드시 따를 것이며, 군사를 끌고 대궐에 들어가면 신의 죄는 마땅히 베어야 합니다. 또 신이 어찌 궐하에 나가서 죽고자 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주상의 뜻이 아닌 것 같으므로 감히 못합니다. 신의 몸은 비록 작사오나 관계되는 바는 심히 크오니, 만일 간인의 손에 죽는다면 국가가 위태할 것입니다." 하였다. 또 대간과 중방(重房)을 거느리고 장씨를 내치기를 청하니, 우가 이에 장씨를 인임의 집에 보냈으며, 죽이지는 말고 국대부인(國大夫人)의 작위(爵位)는 삭탈하라 하였다. 영 등이 대궐에 나아가 사례하였다. 문하평리 김유가 영에게 말하기를, “신하로서 임금에게 항거하는 것은 불가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영이 노해서 우에게 아뢰어 유를 하옥하였다. 장씨가 늘 궁중에 있으면서 공공연하게 뇌물을 받으며, 불법적인 일을 많이 행하였다. 우가 일찍이 자주 왕비의 처소에 가니 장씨가 아뢰기를, "예에 군왕은 반드시 날짜를 가려서 비빈과 동침하는 법인데, 지금 어째서 들개처럼 어울립니까." 하였다. 이때에 와서 대간이 불경죄를 아울러 탄핵하여 귀양보내고, 완ㆍ방안ㆍ유ㆍ원순ㆍ원보를 베었으며, 김유는 곤장을 때려 합포(合浦)에 귀양보내고, 또 장씨의 양녀서(養女婿) 손원미(孫元美)를 베었다.
○ 왜적이 반성현을 침범해서 확산(確山) 꼭대기에 올라 목책을 세워서 스스로 보존하고 있었다. 우인열ㆍ박수경ㆍ오언이 합심해서 포위하고 공격하여 이겼으며, 머리 34급을 베었다. 왜적이 또 단계(丹溪)ㆍ거창(居昌)ㆍ야로(冶爐) 등의 현을 침범하여 가수현(嘉樹縣)에 이르니, 도순문사 김광부(金光富)가 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다. 왜적이 또 산음ㆍ진주ㆍ사주ㆍ함양을 침범했다.
○ 사신을 서해ㆍ양광도에 보내서 수군을 점검하여 경상ㆍ전라도에 있는 왜적에 대비하였다.
○ 겨울 10월에 문하평리 이무방, 판밀직 배언(裵彦)을 남경에 보내어 세공을 바치고 진정표(陳情表)를 올리기를, “신이 태어난 지 10년 만에 신의 아비 전(顓)이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조모 홍씨(洪氏)가 곧 신에게 명하여 상차(喪次)에서 상사를 주관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슬피 울부짖을 줄만 알고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여러 신하들이 조모의 명령을 받들고 신에게 임시로 국사를 맡아 보라고 청하므로, 신이 비록 사양하여 피하려 하였으나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표문을 갖추고 신의 서명을 청해서 들어가 천자께 아뢰고, 선신(先臣)의 시호와 신의 작명을 하사하기를 빌었는데, 세월이 흐르고 흘러 지금에 이르도록 밝은 명령의 내림을 받지 못했사오니, 신이 비록 어리석고 어리나 어찌 두렵고 황공하지 않겠습니까. 사적으로 생각하건대, 죽은 아비는 능히 천명이 돌아가는 것을 알아서 나라를 들어 복종하였는데, 수명이 길지 못하여 갑자기 돌아가셨고, 반신(叛臣) 김의가 사신을 죽이고 북방으로 달아났는데, 조모는 이미 늙고 신은 또 어리고 약하여, 더할 수 없이 어려운 일이 많은 때입니다. 성명(聖明)하신 천자께서 보전하여 주시는 혜택을 입지 않으면 장차 어떻게 존립을 꾀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표문을 받들고 멀리서 바라보며 날마다 덕음이 이르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배신(陪臣) 덕부(德符)가 서울(남경)로부터 돌아왔으므로, 공경히 성지를 받들고 읽었는데, 송구스러워 땀을 흘리며 몸둘 곳을 몰랐습니다. 조모 홍씨가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내 손자가 나이 어려서 사리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여러 신하들이 또 스스로 진달하기가 어려우니, 내가 마땅히 표문을 올려 아뢰어야 하겠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배신 이무방ㆍ배언 등을 시켜 조모의 표문을 싸서 금 31근 4냥, 은 1천 냥, 백세포(白細布) 5백 필, 흑세포 5백 필, 말 2백 필을 함께 가지고 서울로 가게 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 선신의 귀부(歸附)한 공을 생각하시고 조모의 궁박한 정상을 통찰하시어, 선신의 시호를 주시고 신의 습작(襲爵)을 명하시며, 해마다 조공하는 물건도 정한 수량에 구애받을 것 없이 소방(小邦)이 힘에 따라 마련하여 바치도록 용납하시면, 선신이 지하에서 웃음을 머금고 우리 자손을 인도하여 대대로 성조(聖朝)의 번신(藩臣)이 될 것이니, 이것은 신의 지극한 소원이요, 지극한 다행입니다." 하였다.
왕태후의 표문에 아뢰기를, “첩이 듣건대, 자고로 제왕이 바다 안팎을 통치하므로, 만방의 백성들이 모두 신첩이어서 남자는 신하가 되고 여자는 첩이 되니, 그 종류는 비록 다르나 그 성품은 같으며, 그 형세는 비록 다르나 그 정은 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한 지아비와 한 지어미가 자기 진정을 다하지 못하면 임금이 그 공을 이룰 수 없다.' 한 것입니다. 지금 첩은 사세가 박절하여 하늘에 부르짖을 뿐입니다. 폐하는 곧 하늘입니다. 보고 듣는 것을 우리 백성을 통하여 하는데 하늘이 말을 못하므로 폐하께서 대신하여 말씀하시니, 첩이 하늘의 위엄을 무릅쓰고 마음속에 있는 것을 남김없이 전달하는 바입니다. 첩이 16세 때에 선신 왕도(王燾)를 섬겨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정(禎)이요, 다음 아들은 전(顓)입니다. 정의 아들은 흔(昕)과 지(㫝)가 차례로 왕위를 이었다가 모두 일찍 죽어 아들이 없고, 전이 가장 뒤에 즉위하였는데, 첩에게 효도를 다한 것은 국인이 다 알고 있으며 천지가 보셨습니다. 폐하께서 즉위하심에 미쳐 전이 천명이 돌아가는 것을 알아서 즐겁게 귀부하였으니, 폐하께서도 또한 그 충성을 아셨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단명하여 갑자기 죽었으므로 의심을 사게 되었고, 전하는 말이 실지와 다르게 폐하께 들렸으니 폐하께서 노하시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너무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의심을 산 것이지, 다른 변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신을 죽인 도적 김의는, 중도에서 전의 죽음을 듣고 곧 간계를 내어서 심왕(瀋王)을 세워 왕을 삼으려고 오랑캐 땅으로 도망가서, 지금까지 감히 환국하지 못하고 있으니, 본국이 간여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또 들으니, 멸한 나라를 일으켜 주고 끊어진 대를 계승시켜 주는 것은 성인의 큰 정사라 합니다. 하물며 나라가 멸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았고, 대가 끊어지는 데까지 이르지 않음에 있어서겠습니까. 지금 우가 전의 고자(孤子)로서 임시로 국사를 맡아 보면서 표문을 올려 시호를 내리실 것과 왕위를 계승하게 하여 주실 것을 청한 것이 이미 해가 넘었습니다. 첩과 국인이 크나 작으나 할 것 없이 밤낮으로 멀리 바라며 덕음(德音)을 기다리나, 아직껏 내리시지 않으셨습니다. 폐하는 천지이십니다. 천지 사이에서 성대하게 만물을 발육시켜 각각 그 성(性)을 얻게 하는데, 소방(小邦)만이 왕화를 흡족히 받지 못하오니, 첩이 실로 애통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또 생각하건대, 소국이 바닷가에 있어서 왜국과 인접하여 날마다 서로 적이 되어 있기 때문에, 집정하는 신하들이 모두 장수가 되고 안에 있는 자가 적으니, 폐하의 명대로 그 반수(半數)로써 조회하러 들어간다면 국방에 소루하게 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왜적이 뜻을 얻게 된다면, 어찌 소방의 불행이 아니겠으며, 조정의 걱정이 아니겠습니까. 소국의 땅이 척박하여 금은이 산출되지 않는 것은 중국에서 아는 바이며, 말이 2종류가 있는데, 호마(胡馬)는 북방에서 오는 것이고, 향마(鄕馬)는 나라 안에서 산출되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말은 나귀와 같아서 좋은 것을 얻을 수 없고, 호마는 백에 한두 마리밖에 안 되니, 이것도 또한 중국에서 아는 바인데, 근래에는 왜적으로 인하여 거의 다 손상되었습니다. 포필(布匹)은 나라 안에서 나기는 하지마는, 수효가 1만 필이나 되면 참으로 수를 채우기가 어렵습니다. 요동에서 유리하여 온 백성은, 현재 방을 붙여서 불러모으는 중에 있습니다. 첩이 젊어서부터 한 번도 망언을 한 적이 없는데, 하물며 감히 하늘을 속이겠습니까. 첩이 대덕(大德) 무술년에 나서 나이 82세가 되었으니, 오늘 내일에 곧 세상을 하직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죽은 자식 전이 일심으로 폐하의 덕화를 향하던 아름다운 일이 민멸하여 나타나지 않고, 혈혈한 외로운 손자가 세상에 설 수 없게 된 것을 차마 보지 못하여, 예법을 범하고 심정을 호소하여 폐하께서 한 번 깨닫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여, 선왕의 시호를 주시고 습작(襲爵)의 명령을 내리시며, 세공의 조서를 거두어 소방으로 하여금 사사로이 그 편의를 도모하여 시절에 따라 토산물을 바치는 것을 영구히 준수하게 하시면, 첩이 마땅히 안심하고 죽는 날을 기다리겠고, 죽은 자식 전도 지하에서 보은하기를 도모할 것입니다. 첩이 한 여자로서 두 아들과 세 손자가 서로 이어서 봉양함을 받았는데, 하루아침에 급하고 어려운 일을 만나서 성명(聖明)의 세상에 변명함이 없다면, 장차 어떻게 선왕을 지하에서 보겠습니까. 지금 사람들은 십금(十金)의 자산만 있어도 오히려 자손에게 전하여 잃어버리지 않으려 하거든, 하물며 한 나라이겠습니까. 하물며 늙은 소가 송아지를 핥는 것 같은 자정(慈情)이겠습니까. 첩이 표문을 씀에 임하여, 눈물이 나와서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 찬성사 목인길ㆍ밀직부사 목자안ㆍ양제(梁濟)를 보내어 왜적을 전라도에서 쳤다. 이보다 먼저 인길이 묘당에서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왜적이 주ㆍ군을 침략하는데 우리들은 여기에서 배불리 먹고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니,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인임은 그 말이 자기에게 저촉되는 것에 노하여 인길을 내보냈다.
○ 삼사좌사 권중화, 문하평리 조민수(曹敏修)를 보내어 회암(檜巖)에 집터를 보았는데, 서운관(書雲觀)에서 말하기를, “도선(道詵)의 이른바 좌소(左蘇)가 곧 이 땅이다." 하였기 때문이었다.
○ 12월 을해일에 지진이 있었다.
○ 동지밀직 경의(慶儀)를 서경 원수로 삼았다.
○ 우가 그 장인 이임을 위하여 연회를 열어, 환관과 함께 풍악을 베풀고 대단히 즐겼는데, 얼마 후에 정색하고 이르기를, “옛 사람의 말에, 사람은 묵은 사람을 구하고 옷은 새것을 구하라고 하였는데, 지금 신하들이 내 좌우에 있으면서 나의 잘잘못을 말하여 서로 반성하고 깨우쳐 주니, 비록 참소하는 말이 있어도 내가 믿지 않을 것이다. 그 전에 유모 장씨가 나를 꾸짖고 때리고 하였으니, 나라 생긴 이래로 나같이 요물의 손에 곤욕을 본 사람이 없다. 다행히 헌사(憲司)에서 규탄하고 적발하여 멀리 귀양보내니 궁중이 조금 편안해졌다. 밖에는 기년(耆年) 석덕(碩德)이 있어서 여러 정사를 맡고 있으니, 안에서 너희들과 술에 취하여 즐기기로 무엇이 해롭겠느냐." 하였다.
○ 사헌부에서 상소하여 장씨를 베기를 청하였다.
○ 나하추가 사람을 보내어 매와 양을 바쳤다.


 

[주D-001]장자가……흉하다 : 주역》 사괘(師卦)에, “장자(長子)가 군사[師]를 거느려야 하는데, 제자로 군사를 거느리게 한다면 필연코 패전하여 송장을 메고 올 것이니 흉하다." 하였다.
[주D-002]창해(滄海)를……못하는가 : 이 말의 뜻은, “고려가 바다를 믿고 복종하지 않는 모양이나, 중국에서도 그 바다를 함께 가지고 있는데 어찌 바다만을 믿을 것인가." 하는 뜻이다.
[주D-003]보고……하는데 : 《서경》에 이르기를, “하늘이 보는 것은 백성이 보는 것을 통해서 보고, 하늘이 듣는 것은 백성의 귀를 통해서 듣는 것이다." 하였다.
고려사절요 제9권
 인종 공효대왕 1(仁宗恭孝大王一)
무신 6년(1128), 송 건염(建炎) 2년ㆍ금 천회(天會) 6년

○ 봄 정월에 금 나라에서 소회옥(蕭懷玉)을 보내와 생신을 하례하였다.
○ 이자겸의 아내 최씨를 소환하였다.
○ 인덕궁(仁德宮)에 불이 났다.
○ 2월에 남경 궁궐에 불이 났다.
○ 3월에 이공수를 문하시중, 김부일을 수사도 판상서병부사, 김향을 동중서문하평장사, 이숙(李璹)을 검교사도 수사공 좌복야 판례부사, 최자성을 판공부사로 임명하였다.
○ 정주(定州)에 흉년이 들자, 조서를 내려 창고를 열어서 구제하였다.
○ 최사전(崔思全)을 추충위사공신(推忠衛社功臣) 수사공 상서좌복야로 임명하였다.
○ 조서를 내리기를, “농업과 길쌈을 권장하여 의식을 풍족하게 하는 일은 성왕이 급선무로 여기는 것이다. 이제 수령들이 취렴을 이익으로 여겨, 근검하여 백성을 보살피는 사람이 적어 창고가 텅텅 비고 백성이 궁핍한데다가, 노동력을 징발하여 백성이 수족을 둘 곳이 없어 서로 모여 도둑질을 하니, 나라를 풍부하게 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려는 본의가 아니다. 주ㆍ군에 명령하여 쓸데없는 일을 정지하고, 급하지 않은 정무는 철폐하라." 하였다.
○ 여름 4월에 조서를 내리기를, “요즈음 천문에 변화가 일어나고 기후가 고르지 못하니, 마땅히 유사에게 명령하여 죄수를 살펴 이죄(二罪) 이하는 사면하고, 국내의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늙은이 및 중환자와 절부ㆍ의부ㆍ효자ㆍ홀아비ㆍ과부ㆍ고아ㆍ자식 없는 늙은이에게 음식을 먹이고, 차등 있게 물품을 주게 하라." 하였다.
○ 대방공(帶方公) 보(俌)가 경산부(京山府)에서 졸하였다. 자겸이 망하자 왕이 소환하고자 하였으나 명령이 내리기 전에 죽었다.
○ 갑술일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하늘을 횡단하였다.
○ 조서를 내리기를, “귀양간 사람 척준경이 비록 병오년 2월의 죄를 받았으나, 그 해 5월의 공이 역시 적지 아니하며, 최유적(崔惟迪)이 그 아들의 죄에 연좌되었으나, 사실은 자기가 지은 죄가 아니며, 박승중(朴昇中)은 비록 죄가 있으나, 문장으로 여러 대를 섬겨 명성이 매우 현저하니, 모두 죄를 참작하여 고장으로 옮겨 주기를 허락한다." 하여, 준경은 곡주(谷州)로 옮기고, 승중은 무안현(務安縣)으로 옮겼는데, 승중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 이원철(李元哲)등 29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5월에 종묘사직과 산천에 비오기를 빌었다.
○ 6월에 최홍재(崔弘宰)를 문하시랑 평장사로 임명하였다. 이전에 자겸이 한안인(韓安仁)을 귀양보낼 때에 홍재도 그 모의에 참여하였는데, 이때에 간관의 논박이 있었기 때문에 맨 나중에 불러들였다.
○ 송 나라에서 형부 상서 양응성(楊應誠)과 제주 방어사 한연(韓衍) 등을 보내왔다. 이전에, 응성이 벽란정(碧瀾亭)에 이르러 접반소(接伴所)에 공문을 보냈는데, 그 공문에, “귀국의 예의가 성실하고 두터워, 만일 미리 말씀을 드리지 않으면 반드시 쓸데없이 번거로운 수고가 있을까 합니다. 이성(二聖 흠종(欽宗)과 휘종(徽宗))이 먼 곳에 계시니 신하로서 차마 음악을 들을 수 없습니다. 조서를 받들고 표문을 드리는 날 이외에는 음악을 쓰지 마시고, 아울러 의대와 화주(花酒)를 보내는 일도 폐지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왕이 조서를 수창궁(壽昌宮)에서 맞으니, 그 조서에, “나라의 운수가 중간에 미약하여 변경에 변란이 생겼다. 짐(朕)이 위업을 계승하여 바야흐로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노라. 생각건대, 삼한(三韓)의 옛 땅은 실로 여러 대에 걸쳐온 우방이다. 지난번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정에 와서 하례를 하였으나 마침내 어려운 상황을 당하여 답례로 보내는 사절이 늦었다. 아마 우리의 사정이 많았음을 생각하여 평소의 마음에 변함이 없을 줄 아노라. 이번에 금 나라에 보내는 서한을 받들고 특히 사절 일행을 보내는데 바다를 건너고 국경을 넘기에 진실로 곤란한 난관이 있을 것이니 재난을 구제하고 백성을 진휼하는 데에 반드시 도와주어라. 약소한 물건을 보내니 평소의 전례에 미치지 못하나 도착되는 대로 받으라." 하였다.
응성 등이 또 차자(箚子)를 드렸는데 그 차자에, “옛날 주 나라 왕실이 난을 당했을 때에 어떤 사람이 진문공(晉文公)에게 말하기를, '제후의 마음을 얻으려면 왕실에 헌신하는 것 만 한 일이 없으니 제후들이 그것을 믿을 것이며, 또 크게 의로운 일이라' 하였습니다. 진문공은 왕실을 안정시킨 뒤 이어 패업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역사에 실려 영원한 세대까지 빛나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귀국은 해동(海東)에서 가장 큰 나라로 알려졌고, 대대로 충순(忠順)함을 나타내어 사절이 왕래한 이후로 우리나라에서 귀국을 대우하는 데 은혜와 예절이 특별히 두터워 처음부터 조금도 쇠하지 않았습니다. 요즈음 난국을 당하여 국가에 일이 많더니 뜻밖에 오랑캐가 농간을 부리어 마침내 이성(二聖 흠종과 휘종)이 먼 곳으로 가 계시니, 상하가 근심과 걱정으로 편안히 있을 겨를이 없습니다. 거듭 생각건대, 귀국은 예의를 지키며 의를 중히 여겼고, 또 우리나라에서 은혜로 대우한 것이 여러 해가 되었으니, 다른 나라와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지금 이런 위급한 일을 당하여 의리상 마땅히 소망하는 바이며, 바로 대의를 바로세워 왕실에 헌신할 시기입니다. 지금의 황제께서 처음으로 왕위에 올라 사신을 보내어 국왕을 위문하시고 나아가서 뱃길로 두 분의 황제를 모셔 오도록 부탁하였습니다. 지난 조서를 받들던 날에도 이미 대강 말씀을 드렸고 계속하여 공문으로 거듭 번거롭게 하여 정성과 간절함이 모두 극진하니 이 뜻을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귀국에서 말하기를, '금 나라로 가는 도로가 험난하여 갈 수 없다.' 하나 조종조 때 금 나라의 사람이 귀국의 사자를 따라 입공한 적이 있었으니 당시에는 길이 개통되어 있었으며 다닐 수 없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귀국은 또한 금 나라의 사람들도 이 길을 통행할까 염려할 듯하나 금 나라의 사람이 거란을 파한 뒤부터는 모두 하동(河東)과 산북(山北)을 경유하여 사절이 왕래하니 반드시 이 길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며, 만일 귀국이 금 나라의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문제를 일으킬까 염려하겠지만 응성(應誠) 등이 이번에 사절로 오는데 비무장 인원 1백 10명으로 다만 국서와 예물을 가지고 가서 강화를 하려는 것이며 싸움을 하려는 것이 아니니 귀국에서는 다만 길을 인도하여 사절의 일행이 국경에 이르러 먼저 금 나라 사람에게 보고하여 그 가부를 듣고 혹 인원수를 줄이라 하면 모든 것을 하자는 대로 따를 것이니, 이것으로 문제가 생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귀국의 길을 통하여 두 분의 황제를 맞아 들인다면 2백 년 동안 충성으로 따르던 의리가 어긋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여러 왕이 대우하여 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나라에서 은공을 갚는 것이 과거보다 갑절 더할 것이며, 사방의 모든 나라가 더욱 훌륭한 명성을 우러러 보며 높은 의리에 믿고 복종할 것이니, 실로 무궁한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요, 귀국의 중신(重臣)들도 모두 돕고 받드는 충성을 가질 것입니다. 국가에서 포상하는 은전이 영원한 세대에 전할 것이요. 일시적으로 한 사신의 사사로운 욕심이 아닙니다. 감히 속에 있는 것을 모두 피력하였으니, 국왕께서는 중신들과 상의하여 이 일을 협조하여 이루게 하시고, 별안간에 일어난 오랑캐로 인하여 오랫동안 친근하게 지내던 중국의 우호를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빨리 결정을 하여 지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왕이 글로 답하기를, “본국이 조종조 이래로 대국을 정성으로 섬긴 까닭으로 신종황제로부터 태상도군황제에 이르기까지 한집안처럼 생각하여 그 특이한 은혜와 두터운 예절을 이루 다 말 할 수 없습니다. 생각건대, 천지 같은 은덕이 그 보답을 바라지 않았지만, 우리의 감격한 뜻은 행여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를 바랐습니다. 삼가 듣건대, 두 황제께서 멀리 가시어 온 나라가 걱정과 울분으로 지내는데, 비록 직무상 제때에 달려가서 위문하지는 못할지언정 신하된 마음에 어찌 편안히 있을 겨를이 있겠습니까. 또 황제의 효성스러움과 공경하심과 여러분들의 충의는 반드시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킬 것이니, 천지와 귀신이 함께 서로 도와서 협조할 것이니 어찌 두 황제께서 오래 사막에서 고생하게 되겠습니까. 빨리 서울 궁궐로 돌아오시어 천하의 바라는 마음에 부응하기를 항상 축원하고 있습니다. 황제가 처음 즉위하시어 먼저 시신(侍臣)을 보내어 조서를 전하고 우리 나라로 하여금 길을 인도하여 가서 두 황제를 맞아오게 하고, 또 사신과 부사(副使)가 조서를 전하던 날에 낱낱이 직접 말씀하였고, 계속 공한을 보내어 간절한 뜻이 상세하고 극진하니 감히 명을 받지 않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여진은 처음에 부락에 흩어져 살아 일정한 군주가 없었기에 일찍이 우리나라에 예속되어, 간혹 우리 사절을 따라 상국에 들어가 조공하더니, 이 뒤로 점점 강성하여 항상 변경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근자에는 대요(大遼)를 함몰하고 상국을 침범하여 이로부터 무력이 더욱 커져서 우리나라로 하여금 칭신(稱臣)하게 하고, 의례를 약정하는 데 일체 옛날에 요나라를 섬기던 예절대로 하였지만, 우리나라는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 풍속이 싸움을 좋아하고 항상 우리가 상국을 따르는 것을 싫어하여 왔는데 근자에는 국경에다 성과 보루를 수축하며 병사를 모아 주둔하여 우리나라를 침략하려 하고 있으니, 만약 사절이 길을 빌려 저들의 국경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시기하고 의심하여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답례의 사절을 보낸다는 명목으로 우리나라에 길을 빌려 사절을 보내어 입조하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장차 무슨 말로 거절하겠습니까. 만일 참으로 바닷길이 편리한 줄 안다면 우리나라의 보전이 어려울 것이요. 회남(淮南)과 양절(兩浙)의 연해의 지역도 그들이 넘겨다보는 우려를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나라가 어찌 감히 태연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 문제는 사실상 중대하여 감히 말을 꾸며 대는 것이 아니니, 사절과 부사(副使)는 충심을 곡진히 살펴 당초의 생각을 조금 돌이켜 돌아가 궐하에 아뢰어 주시오." 하였다.
○ 가을 7월에 참지정사 이숙(李璹)이 파면되었다. 이숙의 아내 김씨가 그 동복 아우 인규(仁揆)와 재산을 다투어 사이가 나빴는데, 이숙의 아들 온경(溫卿)이 익명으로 고소장을 내어 인규를 무고로 죄를 얽어 밤에 어사대에 투서하려다가 순검에게 잡혀 부자가 다 죄를 받았다.
○ 8월에 송 나라 사신 양응성(楊應誠) 등이 돌아갔다. 왕이 표문으로 회답하기를, “제실(帝室)이 많은 어려움을 당하여 왕의 수레가 멀리 옮겨 가시니 다만 놀라움만 더할 뿐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날아서 갈 도리도 없어 계신 곳에 가서 문안드릴 길이 막혔음이 유감스럽습니다. 불행을 나누고 환난을 구제함에 마땅히 적개의 충성을 바쳐야 하는데 미약한 힘과 천박한 재주로 근왕의 노력을 펴기 어렵습니다. 걱정과 부끄러움은 더욱 심하오나 신명이 굽어보시는 바입니다. 마침 신이 왕위를 계승하면서부터 액운을 당하여 재난과 흉년이 연달아 들어 사람과 물자가 모두 쇠잔한데, 안으로는 반역하는 신하의 발호하는 흉변으로 곤란을 당하였고, 밖으로는 강국이 침략하는 기회가 될까 염려스러웠습니다. 이제 겨우 내란을 진정하고 아울러 이웃 나라와의 강화를 이루었으니 성공이라 할 수는 없으나 요행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된 것입니다. 나라의 힘을 다하여 조정의 명에 따르며 미약한 노력을 다하여 여러 왕조의 총애하여 주신 은택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사정이 곤란하여 일이 제대로 이루기 어렵습니다. 다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저의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신이 바야흐로 곤란한 지경에 놓여 있음을 잘 헤아리시고 사실상 신이 태만스러운 것이 아님을 용서하시어 영구히 덕을 베풀어 주시고 곡진히 보전해 주신다면 밝은 태양을 두고 마음을 맹세하오니 하늘처럼 비쳐 주실 것을 바랍니다." 하였다.
이때 응성(應誠) 등이 그치지 않고 왕복하였다. 또 답장을 보내기를, “상국에서 이전에 조서를 내려 우리나라로 하여금 여진에 가서 내조하도록 말하게 하였으나, 우리 나라는 여진으로 하여금 중국의 풍부함과 강성함을 엿보게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조서 대로 시행하지 않았더니, 조정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마침내 여러 방면으로 그들을 불러 들이고 금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습니다. 저들은 이미 중국의 허실을 알고 넘겨다보는 마음이 한번 움직이자, 멀리 군사를 몰아 깊숙히 쳐들어와 경사(京師)를 소란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금 나라와 영토가 서로 접하여 실정을 너무도 상세히 알고 있는데, 지금 사절이 이곳을 경유하여 간다면 곧 시기와 의심으로 분쟁이 생겨 발길이 미처 돌아서기 전에 벌써 화가 닥칠 것입니다. 가령 사절이 여기서 저 곳에 들어간다면 저들도 반드시 이 곳을 거쳐 답례를 할 것입니다. 하물며, 그 나라는 동으로 큰 바다를 끼고 있어 더욱 수전에 능하니 저들이 회답의 사절을 보내는 것을 핑계하여 회수(淮水)와 절강(浙江)의 사정을 상세히 알고, 만일 전함을 준비하여 바다로 내려와 불의에 공격을 가한다면, 염려되는 것은 북으로는 육상의 전투에 고통을 받고, 남에서는 해상 전투에 고통을 당하여 아래 위로 적을 받아서 위험이 반드시 클 것이니 일이 이렇게 되면 후회한들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나라가 조서를 시행할 수 없는 것은 하늘과 땅이 환하게 보고 있고 감히 말로 꾸며 대는 것이 아니니 여러 날 오랫동안 버틸지라도 다시 다르게는 상의할 수 없습니다." 하고, 이어 날을 가리어 회답하는 표문을 붙이기를 청하였다.
응성(應誠) 등이 대답하기를, “귀국의 군신은 꼭 해가 된다고만 생각하고 말을 듣지 않으며, 다만 사절로 온 사람을 돌려보내려고만 하니 이것은 마침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붙이는 표문도 받지 않고 전례에 의한 잔치와 폐백과 의대ㆍ예물들도 모두 받아 들이지 않고 갔다.
○ 예부 시랑 윤언이(尹彦頤)를 송 나라에 보내어 표문을 올렸다. 그 표문에, “이전에 황제 두 분께서 멀리 가셨다는 말씀을 듣고 온 삼한이 모두 슬퍼하였습니다. 이미 달려가서 위문을 드려 신자의 성의를 펴지 못하고 또한 먼저 의병을 일으켜 국가의 위난에 달려가지도 못하였습니다. 이제 원수부(元帥府 고종(高宗)이 휘종(徽宗)의 제 9자(第九子)인데, 도원수(都元帥)로서 황제의 위에 올랐다.)로부터 일어나 기업을 이어받으시고 신민과 함께 가신 황제를 맞아들이려 하니 조서가 내리자 늙은이와 어린이까지 눈물을 흘렸으며, 성의가 나타나 먼 곳과 가까운 곳이 모두 마음이 정해집니다. 지극한 정성은 귀신을 감동시키는 것인데 어찌 그 감응이 없겠습니까. 두 황제가 돌아오실 기회가 바로 지금입니다. 신은 집안이 분탕을 겪은 다음이라 국가가 시끄러운 때를 당하여 경하하는 예절을 올릴 겨를이 없었음을 부끄럽게 생각했는데, 외람되게 먼저 사절을 보내 주셨습니다. 비록 명을 내리심은 엄중하나, 상황이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저 금 나라는 우리 압록강과 연접해 있는데, 벌써 중국을 짓밟은 위세를 타서 또 이웃 나라를 해칠 뜻이 있습니다. 항상 비밀리 첩자를 시켜 틈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만일 사절이 길을 빌려서 갔다는 것을 듣는다면 반드시 곧장 일을 일으킬 것입니다. 혹은 군사를 동원하여 시위하면서 문책을 가할 것이며 혹은 답례한다는 명목으로 통과하기를 요청할 것으니 이 도로의 요충 지대에서 장차 무슨 말로 거절하겠습니까.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서로 다투기도 어려우며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 하니 상국의 화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어찌 오늘만 분할 뿐이리오. 반드시 다른 때에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곤란한 점이 많은 것이지 태만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신이 속으로 향모하는 마음을 품은 것을 생각하시고, 신이 밖으로 침략의 위협을 받음을 딱하게 여겨 주시어 산과 숲 같은 넓은 도량으로 받아 주시고 우레 같은 노여움을 거두어 주소서. 우리나라도 다행히 보전되고 상국에서도 변방의 위태로움이 없게 되면 제후를 거느리고 주 나라를 높이던 제 환공(齊桓公)과 진 문공(晉文公)의 옛일을 하겠다고는 감히 기대하지 못하나, 그 토산(土産)을 따라서 우공(禹貢)을 마련하는 데 청주(靑州)와 서주(徐州)의 옛 법식을 어기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 교서를 선포하여 이르기를, “짐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외척이 권세를 잡아 위엄도 부리고 복도 만들어 내어 해를 당한 사람이 많았다. 한안인(韓安仁)을 죽이고 문공미(文公美)와 최홍재(崔弘宰) 등 50여 명을 귀양보내어 이 때문에 조정이 텅 비고 과인이 고립 상태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붕당을 많이 만들어 화란이 장차 측량하기 어렵게 되었는데, 병오년 2월에 측근에 있던 관원과 한 두 대신이 그 권세를 제거하기를 청하므로 짐이 감히 따르지 아니할 수 없었더니 그는 마침내 악독한 짓을 부려 궁궐의 전각ㆍ부서ㆍ창고를 침범하여 남김없이 다 태워 버렸고, 짐은 연덕궁(延德宮)에 나가니 모든 좌우에 있는 시종과 군사를 베어 죽이거나 더러는 귀양보내어 흉악한 기세가 더욱 치열하고, 변란을 측량하기 어려웠다. 최사전(崔思全)이 은밀히 척준경을 타일러 마음을 합하고 계책을 정하여 흉악한 역도를 소탕하고 다시 종묘사직을 편안하게 하니, 공적을 잊을 수 없도다. 마땅히 유사에게 명하여 삼한후 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 다음에 쓰게 하라." 하였다.
○ 서경으로 행차하였다. 중 묘청과 분사검교소감 백수한(白壽翰)이 스스로 음양의 술법을 안다 하고 허황되고 이치에 맞지 않는 말로 여러 사람을 현혹시켰다. 정지상은 역시 서경 사람이라 그 말을 깊이 믿고 말하기를, “상경(上京 개성(開城))의 기업이 이미 쇠하여 궁궐이 다 타서 남은 것이 없고, 서경에는 왕기(王氣)가 있으니 마땅히 임금께서 옮겨가서 상경으로 삼아야 된다." 하였다. 마침내 근신 김안(金安)과 모의하기를, “우리가 만일 주상을 받들어 서도(西都)로 옮겨가서 상경으로 삼는다면 마땅히 중흥공신이 될 것이다. 다만 일신만이 부귀할 뿐이 아니라, 자손에게도 무궁한 복이 될 것이다." 하였다. 드디어 말을 퍼뜨려 서로 칭찬하며 근신 홍이서(洪彛敍)ㆍ이중부(李仲孚) 및 대신 문공인(文公仁)ㆍ임경청(林景淸)이 따라서 호응하여 드디어 글을 올려 아뢰기를, “묘청(妙淸)은 성인(聖人)이요, 백수한(白壽翰)도 그 다음이니 국가의 일을 모두 물은 다음에 행하고 그들이 건의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받아들인다면 정치가 이루어지고 일이 잘 되어 국가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하고, 이에 차례로 모든 관원에게 서명을 청하니 평장사 김부식(金富軾), 참지정사 임원애(任元敱), 승선 이지저(李之氐)만은 서명하지 않았다. 글이 올라가니 왕이 비록 의심을 가졌으나 여러 사람이 강력하게 말하므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묘청 등이 아뢰기를, “신등이 서경의 임원역(林原驛) 지세를 관찰하니 이것이 곧 풍수가들이 말하는 큰 꽃 모양의 터입니다. 만약 궁궐을 지어서 거처하면 천하를 병합할 수 있으며, 금 나라가 폐백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할 것이며, 36국이 모두 신하가 될 것입니다." 하였기에 이번 행차가 있었다.
○ 9월에 이유(李愈)를 보내어 금 나라에 가서 천청절(天淸節)을 하례하였다.
○ 행차에 따라온 재신과 추신에게 명하여 묘청과 백수한과 함께 임원역 지역에 새 궁궐 터를 보아 정하게 하였다.
○ 임경청(林景淸)을 추밀원 부사로 임명하였다.
○ 겨울 10월에 동남해 안무사(東南海安撫使) 정응문(鄭應文)이 아뢰기를, “명진(溟珍 경남 거제)ㆍ송변(松邊 경남 거제)ㆍ아주(鵝洲 경남 거제) 세 고을의 해적 좌성(佐成) 등 8백 20명이 귀순하여, 이미 합주(陜州 경남 합천) 삼기현(三岐縣 경남 삼가(三嘉))에 귀후장(歸厚場)ㆍ취안장(就安場)과, 진주(晉州) 의령현(宜寧縣)에 화순장(和順場)을 설치하여 그들을 정주하게 하였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하례하였다.
○ 왕이 서경에서 돌아왔다.
○ 이부 상서 최유(崔濡), 위위 소경(衛尉少卿) 송근(宋覲)을 금 나라에 보내어 경사를 선포함에 대하여 사례하고 방물을 바쳤다.
○ 11월에 유원서(兪元胥)를 금 나라에 보내어 생신을 하례한 데 대하여 사례하고 김택(金澤)은 새해를 하례하였다.
○ 임원역을 옮기고 새 궁궐을 짖는데 내시 낭중 김안(金安)에게 명하여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때가 바야흐로 추위가 심하여 백성의 원망이 심하였다.
○ 12월에 윤언이(尹彦頤)가 송 나라에서 돌아왔다. 조서에 이르기를, “짐(朕)이 얼마 전에 사절을 보내어 급히 먼 지역을 급히 보낸 것은 부형(父兄)께서 멀리 가셔서 물과 육지가 계속 가로막혀 아득한지라, 길을 빌려 갈 수도 없으니 문안할 마음 더욱 간절하였도다. 마침내 변경 국가의 옛 정리를 믿고 행여 영토를 통과할 것을 바랐더니, 갑자기 글을 올려 지극한 정성을 갖추니 여러 날 동안 열람하고 마음속으로 개탄하였노라. 다만 효성하고 우애하는 생각은 비록 나의 뜻을 이루려 한 것이나, 사전에 염려하는 마음 또한 인정(人情)에 당연한 일이다. 이미 극진한 태도를 알았으니 변방을 지킬 것을 잊지 말라." 하였다.
○ 최사전(崔思全)을 참지정사로, 한충(韓冲)을 추밀원 부사로 임명하였다.
○ 금 나라에서 금주(錦州) 관내 관찰사 사고덕(司古德), 위위 소경 한방(韓昉) 등을 보내 왔다. 조서의 요지에 이르기를, “송 나라 태상황(太上皇) 조길(趙佶)과 소제(少帝) 환(桓)이 은혜를 배반하고 신의를 잃었기 때문에 토벌을 행하여 포로가 되어 얼마 전에 조서를 내려 궁궐에 불러들이고 따라서 그 잘못을 직접 책망하였다. 그러나 죄를 용서해야 하겠고,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겨야 하겠기에 마침내 그를 차마 버리지 못하였노라. 다만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이치에 순하지 못하므로 또한 작호를 이미 붙여 조길을 혼덕공(昏德公), 조환(趙桓)을 중혼후(重昏侯)로 강봉하였다. 일이 이미 새롭게 되었으니 사리상 마땅히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의대ㆍ피륙ㆍ은으로 만든 그릇 등 물품을 주노라." 하였다.
사고덕(司古德) 등이 직접 어록(語錄)을 수교했는데, 그 요지에 이르기를, “추밀원의 차자(箚子)를 통하여 주상의 말씀을 받자오니 보주(保州 평북 의주(義州)) 땅은 처음에 조유(詔諭)가 있어 다시는 수복하지 않기로 한 것이오니, 귀국에서 당연히 옛법을 따라 왕실을 받들 것으로 생각하고 조정에서 그 땅을 아끼지 않고 특히 갈라 주었는데, 그 뒤에 몇 해가 지나도록 귀국에서는 아직 맹세하는 표문을 바치지 아니하며, 위에 말한 주성(州城)을 점령하여 지키니, 도리에 어찌 온당하다 하겠는가. 또 그 위협을 당하여 왔거나 도망하여 옮겨 사는 호구(戶口)가 그 수가 상당히 많은데 모두 사망하였다 하니 자못 믿을 수 없도다. 귀국이 과연 정성을 다하여 주상을 섬긴다면 곧 맹세하는 표문을 올리시오. 그러면 조정에서도 약속하는 조서를 회답하여 줄 것이며, 겸하여 따로 지휘(指揮)를 내려 거듭 경계를 획정하고 모든 것을 힘써 관대하게 처리하여, 장구한 계책을 이루도록 하라." 하였다. 왕이 대답하기를, “명을 들으니 감사하고 송구함을 견딜 수 없다. 뒤에 마땅히 표문을 올려 말하겠습니다." 하였다.

[주D-001]청주(靑州)와……법식 : 《서경》 우공편(禹貢篇)에, “(禹)가 치수(治水)에 성공한 뒤에 전국을 9주(九州)로 나누어 각기 토산물로 공(貢)바치게 하였다" 하였는데, 청주(靑州)·서주(徐州)는 9주 중에서도 동방에 있으므로, 여기서 인용한 것이다.
논사록 상권
정묘년(1567, 선조 즉위년) 10월 23일 선종조

상이 사정전(思政殿)에서 행한 조강(朝講)에 납시어 《대학(大學)》을 진강(進講)하였다. 선생이 집의(執義)로 입시하여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천하의 일이란 옳고 그름이 없을 수 없으니, 옳고 그름이 분명해진 뒤에야 인심이 복종하여 정사가 순조로워집니다. 옳고 그름은 비단 인심에서 나올 뿐만 아니라 실로 천리(天理)에서 나온 것이니, 일시적으로는 비록 엄폐하고 처형하여 입을 막을 수 있다 할지라도 그 시비의 본심은 끝내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중종대왕(中宗大王)께서 즉위한 초년에 정신을 가다듬어 훌륭한 정치를 이루고자 하시어 어진 선비들을 등용하였습니다. 이에 현사(賢士)라고 일컬어지던 이들이 또한 기꺼이 등용되어 요순 시대와 삼대(三代)의 정치를 다시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불행히도 참소하는 말이 한 번 들어가매 모두 큰 죄를 입었습니다.
당시에 조광조(趙光祖 : 1482~1519)는 선인(善人)으로 사림의 존경을 받아 물망(物望)이 높았고, 중종께서도 또한 정성을 미루어 신임하셨습니다. 소인들이 조광조를 참소하여 이간질하려던 참에 조광조 등이 ‘정국 공신(靖國功臣)들이 외람되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조광조가 인심을 수합(收合)하여 역모를 계획한다.’ 하고 모함하여 남곤(南袞)심정(沈貞)이 죄를 얽어 혹은 이들을 사형에 처하고, 혹은 축출하여 멀리 유배하였습니다. 중종이 이를 즉시 깨닫지 못하셨기에 20여 년 동안 유배지에서 세상을 마친 자도 많았습니다. 중종께서 말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들의 진실을 아시어 기묘년(1519)에 죄를 입은 사람들이 혹은 석방의 은전을 입거나 혹은 수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선왕(先王 명종) 초년에는 국가에 일이 많았는데 이때에 높은 학식과 훌륭한 행실이 있는 자들이 패망(悖妄)하고 탐오(貪汚)한 자들을 보고는 때로 탄핵하여 논박하였으니, 모두 국가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소인들은 이것을 기회로 삼아 ‘부박(浮薄)한 무리들이 다시 기묘년의 나쁜 버릇을 창도한다.’ 하면서, 처음에는 부박한 죄로 논박하다가 끝내는 난역(亂逆)의 죄율로 다스렸습니다. 지금은 죽은 자들은 복직되고 살아 있는 자들은 서용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옳고 그름이 여전히 분명하지 않으니, 옳고 그름이 분명해진 뒤에야 인심이 기뻐 감복할 것입니다.
이언적(李彦迪)은 근고(近古)에 없었던 유자(儒者)로서 조행이 방정하고 또 옛 서적을 깊이 알고 있던 분입니다. 이런 사람이 당시에 죄를 얻어 멀리 강계(江界)로 귀양 가서 죽었습니다. 송인수(宋麟壽) 역시 부박하다는 죄목으로 끝내 대죄(大罪 사형)를 받았으며, 노수신(盧守愼), 유희춘(柳希春), 정황(丁熿) 등도 부박하다는 죄를 받았습니다. 부박이라는 말은 다른 죄를 가할 수 없자 둘러댄 변명입니다. 선왕께서 어린 나이에 어찌 이것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뒷날 조정에 그 시비를 분명히 알아서 말할 수 있는 자가 어찌 없었겠습니까. 다만 윤원형(尹元衡)과 이기(李芑) 등이 국정을 담당하면서 매양 ‘역신을 비호한다.’고 죄를 가하여 살육하였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만 말하고 감히 입을 떼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선왕께서 말년에야 비로소 이러한 사정을 아셨기 때문에 혹 추방하거나 혹 서용하였으며 혹 이배(移配)하였습니다. 기묘년 이래로 남곤과 심정 등이 중종을 속여 총명을 가린 것이 몹시 심하였고, 을사년(1545) 이후로는 다시 옳고 그름을 의논하는 자가 없어졌습니다. 옳고 그름이 밝혀지지 못하면 비록 선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은들 국사에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지난날 이황(李滉)에게 글을 내려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이황은 어렸을 때부터 독서하였으나 당초에 선인들이 죄를 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물러갔으니, 이제는 그의 나이가 이미 칠십이고 또 질병이 많습니다. 그것은 대체로 옳고 그름이 밝혀지지 못함을 보고 벼슬아치들의 뒤만 따라다니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차라리 초야에 물러나 거처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지금 새로운 정사를 베풀 때에 어진 이를 초빙함은 가장 훌륭한 거조입니다. 그러나 어진 자를 등용하려고 한다면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외진 나라인지라 풍기(風氣)가 또한 혼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재지와 학식이 있으면 모두들 화를 입었습니다. 고려 말엽에 정몽주(鄭夢周 : 1337~1392)는 충효의 대절이 있었고 정주학(程朱學)으로 학문을 하여 동방 성리학의 조종(祖宗)이 되었는데, 불행히도 고려가 멸망할 때를 당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하였습니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 정몽주의 학문을 전습(傳習)한 자는 김종직(金宗直)입니다. 그는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었고 행실 또한 단정하고 방정하였으며, 후학을 가르침에 지극한 정성을 쏟았습니다. 성종께서 그의 어짊을 알고 판서로 발탁하였으나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았습니다. 연산조에 이르러 사화(史禍)가 일어나 사림(士林)들이 죄를 입자, 참화가 그 문도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김종직에게까지 화가 미쳤습니다. 또 김굉필(金宏弼)이라는 분이 있었으니, 이는 김종직의 제자입니다. 김종직은 대개 문장을 숭상한 반면, 김굉필은 실행에 힘쓴 사람입니다. 성종께서는 그를 소중히 여겨 좌랑으로 삼았는데, 연산조에 이르러 김종직의 문도라는 이유로 귀양 갔다가 갑자년(1504, 연산군10)에 끝내 대죄(大罪 사형)를 받았습니다. 중종께서 즉위하시어 그의 어짊을 애석히 여겨 표창하고 우의정을 추증하였습니다. 조광조는 또 김굉필의 제자입니다. 독학(篤學)의 공부가 있어 세도(世道)를 만회하여 이욕의 근원을 막고자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조정에서는 옳고 그름을 밝히지 못하고 있으니, 반드시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한 뒤에야 인심이 기뻐 감복할 것입니다.
이언적은 벌써 사면을 받았으니 죄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학문과 조행은 근대에 없는 바입니다. 지난번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다른 이는 볼만한 저술이 없으나 이언적은 저술한 것이 있었던 까닭에 그의 저술을 가지고 와서 보여 주었습니다. 그가 배운 바는 정주학이기 때문에 그의 말은 다 도리에서 나왔으며, 또 그의 저서를 보면 젊은 시절에 지은 것입니다. 젊은 시절의 저술이 이와 같았다면 말년의 성취를 어찌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집안에 남아 있는 유서(遺書)들을 찾아내게 해서 후학으로 하여금 존경하고 본받게 하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조광조와 이언적을 만약 표창하여 추종하고 존숭한다면 아마 인심을 흥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번 이기와 윤원형이 국정을 휘두를 때에 선인들이 죄를 받았고, 뜻을 얻은 자들은 다 새매나 개처럼 포악한 그의 졸개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탐오(貪汚)함이 습관이 되어 지금은 온 세상이 다 그러합니다. 지금의 이른바 염근(廉謹)하다는 자들도 역대 조종조의 염근한 자들과 견주어 본다면 모두 탐오한 자가 되고 맙니다. 수령들의 무절제한 탐욕이 곳곳마다 모두 이러하나, 맹자가 말한 바 “베려고 한다면 이루 다 벨 수 없다.〔誅則不可勝誅〕”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수령뿐만 아니라 조정에도 또한 이러한 자들이 많으니, 탐오한 인물을 반드시 통렬히 끊은 뒤에야 풍속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주D-001]남곤(南袞) : 1471~1527.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사화(士華), 호는 지정(止亭)ㆍ지족당(知足堂)이다. 1519년 심정(沈貞)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 신진 사림파를 숙청하였다. 저서에 《유자광전(柳子光傳)》, 《지정집》 등이 있다.
[주D-002]심정(沈貞) : 1471~1531.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정지(貞之), 호는 소요정(逍遙亭)이다.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조광조 일파의 탄핵으로 파직되자 남곤 등과 기묘사화를 일으켰다.
[주D-003]이언적(李彦迪) : 1491~1553.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ㆍ자계옹(紫溪翁)이다. 양재역 벽서 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63세로 죽었다. 저서에 《구인록(求仁錄)》,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봉선잡의(奉先雜儀)》 등이 있다.
[주D-004]송인수(宋麟壽) : 1499~1547.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미수(眉叟) 또는 태수(台叟), 호는 규암(圭菴),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한성부 좌윤으로 있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당한 뒤에 청주에 은거하여 지내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성리학에 밝고 성리학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평생 학문을 좋아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규암집》이 있다.
[주D-005]노수신(盧守愼) : 1515~1590.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 또는 여봉노인(茹峯老人), 암실(暗室), 이재(伊齋) 등을 쓴다. 을사사화로 유배되었다가 복귀하여 영의정에 올랐으나 기축옥사로 파직되었다. 온유하고 원만한 성격을 가진 문신이자 학자로서 사림의 중망을 받았으며, 특히 선조의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입었다. 충주의 팔봉서원(八峯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소재집》이 있다.
[주D-006]유희춘(柳希春) : 1513~1577.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부인은 여류문인인 송덕봉(宋德奉)이고, 김인후(金麟厚)와는 사돈간이다. 1547년 양재역(良才驛)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함경도 종성에 안치되었다. 그곳에서 19년을 보내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만년에는 왕명으로 경서(經書)의 구결 언해(口訣諺解)에 참여하여 《대학》을 완성하고, 《논어》를 주해하다가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 담양의 의암서원(義巖書院), 무장의 충현사(忠賢祠),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미암일기(眉巖日記)》, 《주자어류전해(朱子語類箋解)》 등이 있다.
[주D-007]정황(丁熿) : 1512~1560.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계회(季晦), 호는 유헌(遊軒),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인종의 장사(葬事)를 서둘러 갈장(渴葬)으로 치르려고 하는 데 대하여 당시 모든 관원들이 그 기세에 눌려 침묵하고 있을 때 극력 반대하여 의례대로 장사를 거행하게 하였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파직당하고 남원으로 돌아갔다.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곤양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거제로 이배되었고 배소에서 죽었다. 남원의 영천서원(寧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유헌집》, 《부훤록(負暄錄)》 등이 있다.
[주D-008]김종직(金宗直) : 1431~1492. 본관은 선산, 자는 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 김숙자(金叔滋)로부터 수학하고 후일 사림의 조종이 되었다. 문장과 사학(史學)에 두루 능하였으며, 절의를 중요시하여 조선 시대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 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무오사화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으며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다. 밀양의 예림서원(藝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점필재집》, 《유두류록(遊頭流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으며, 편저에 《일선지(一善誌)》, 《이존록(彝尊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이 전해지고 있다.
[주D-009]사화(史禍) : 1498년(연산군4)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를 말한다. 김일손(金馹孫)이 사초(史草)에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수록한 것이 빌미가 되어 일어났으므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주D-010]김굉필(金宏弼) : 1454~1504. 조선 전기의 문신ㆍ학자로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簑翁) 또는 한훤당(寒暄堂),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을 배운 것을 계기로 평생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일컬었고 《소학》의 화신이라는 평을 들었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이후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어 성리학의 기반 구축과 인재 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되었다. 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저서에 《경현록(景賢錄)》, 《한훤당집》, 《가범(家範)》 등이 있다.
[주D-011]베려고……없다 : 《맹자》〈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나오는 말이다.
고봉집 제3권
 [행장(行狀)]
고 봉훈랑(奉訓郞) 수 이조정랑(守吏曹正郞) 정공(鄭公) 행장(行狀)

공의 휘는 완(浣)이요, 자는 신지(新之)이니, 그 선대는 영일현(迎日縣) 사람이었다. 증조의 휘는 연(淵)인데 정헌대부로 병조 판서를 지내고 시호는 정숙(貞肅)이며, 조고의 휘는 자제(自濟)인데 가선대부로 전주 부윤이었다. 선고의 휘는 진(溱)인데 남부 참봉(南部參奉)이었고, 선비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배천 군수 윤우(尹遇)의 따님이다.
정씨(鄭氏)는 선대가 멀다. 휘 균지(均之)라는 분이 고려 때에 벼슬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으며, 몇 대 후에 휘 사도(思道)라는 분은 문무를 겸비한 재주로 세상에 크게 드러났고 벼슬이 지문하성사 정당문학(知門下省事政堂文學)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이분이 휘 홍(洪)을 낳았으니, 벼슬은 의정부사(議政府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공간(恭簡)이며, 공간이 공의 증조이신 정숙공(貞肅公)을 낳았는데, 세종조의 명신이었다.
공은 성화(成化) 계사년(1473, 성종4)에 태어났는데, 특이한 자질이 있었다. 장성해서는 예법에 따라 《소학》으로 몸을 지켰으며, 일찍이 《대학》을 읽고 말씀하기를 “성현들이 후학을 열어 보여 준 것은 이 《대학》만 한 책이 없다.” 하고는, 《대학》을 깊이 연구하여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서해(西海 황해도)에 갔다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을 만났는데, 추강은 공을 큰 인물로 여겨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만일 성취되면 반드시 진유(眞儒)가 될 것이다.” 하고, 함께 산사(山寺)에 머물다가 한 달이 넘어서야 떠나갔다.
연산군 갑자년(1504, 연산군10)에 공의 선고이신 참봉공이 죄 없이 화를 당하자 공 역시 연좌되어 영천(永川)으로 유배되었는데, 공은 애통해하고 어쩔 줄을 몰라 마치 운명할 듯이 하였으며, 제례와 상례를 정도에 어긋나지 않게 하였다. 중종이 즉위하자 석방되어 돌아왔는데, 모부인을 봉양함에 정성과 효성이 더욱 돈독하였다. 그리하여 처가에서 전해 오던 진귀한 보물을 팔아 곡식을 사서 맛있는 음식을 드리곤 하였다. 혹자가 만류하기를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 오는 물건을 이처럼 팔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나, 공은 “어버이를 봉양함에 어찌 물건을 아껴 인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덕(正德) 정묘년(1507, 중종2)에 사마시에 입격하니, 태학의 제생들이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김공 식(金公湜)은 공과 한방에 있었는데 한 번 보고는 서로 허여하여 막역지교를 삼고, 날마다 서로 학문을 강마하여 오래도록 게을리 함이 없었다. 갑술년(1514)에 천거되어 선릉 참봉(宣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공은 노친이 계신데 조석으로 곁에서 모시지 못한다 하여 사양하였다.
무인년(1518)에 의정부에서 공을 탁월한 행동이 있다고 천거하여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으며, 공조 정랑으로 승진되었다가 호조 정랑으로 옮겨졌다. 이때 중종께서는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려는 뜻을 두었는데, 정암(靜庵) 조 문정공(趙文正公)이 특별히 신임을 받았으며, 당시 여러 명현들도 분발하여 정치를 개혁해서 요순 시대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정직한 논의를 숭상하고 유속(流俗)을 크게 분발시켰다. 그러나 모두 공을 훌륭한 장자(長者)로 추존하였으며, 공에게 왕래하면서 의심을 질문하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기묘년(1519, 중종14)에 조정에서는 천거과(薦擧科)를 설치하였는데, 공은 여기에 참여하게 되어 시험을 보아 병과(丙科)로 발탁되고, 예조 정랑에 임용되었다가 얼마 후 이조 정랑으로 옮겼다. 이때 마침 한두 명의 간신들이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사림(士林)을 무함하니, 중종께서는 이에 크게 노하여 마침내 명현들에게 죄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공도 현풍(玄風)으로 부처(付處)되었는데, 출발할 때에 온 집안 식구들이 울부짖었으나 공은 얼굴빛을 변하지 않았다. 모부인에게 나아가 하직하기를 “자식의 죄가 많으니 먼 곳으로 귀양 가는 것이 무슨 한 될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지금 멀리 슬하를 떠나니 마음에 서글프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배소(配所)로 가서는 온갖 곤란을 겪었는데, 의리로 마음을 달래었다. 신사년(1521) 6월에 병으로 별세하니 향년 49세였다. 7월에 고양(高陽)의 목희리(木稀里)에 반친(返櫬)하고 9월에 선영의 아래 모좌모향의 언덕에 장례하였으니, 이는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공은 자품이 정대하고 의논이 엄정하였으며 선을 좋아하고 의리를 숭상하였다. 몸에 돌이켜 실천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었으며 세상을 따라 부앙(俯仰)하지 않았다. 과거에 응시하는 날에 장시관(掌試官)의 이름을 물어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면 과장(科場)에 들어가지 않고 물러 나오기도 하였으며, 독서할 때에는 《근사록》과 사자(四子 사서(四書))를 덕에 들어가는 입문서(入門書)로 삼고 차례로 연구하여 종신의 사업으로 삼았다.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사랑과 공경을 극진히 하여 부모의 뜻을 받들어 곡진하지 않음이 없었다. 평생토록 사사로이 재물을 저축하지 않고, 많고 적은 재물을 모두 어버이에게 드려 마음대로 쓰시도록 맡겼다. 배소에 있을 때에는 철에 맞는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사람을 달려 보내어 모부인에게 바쳤으며, 선고께서 비명으로 돌아간 것을 심히 애통히 여겨 형장(刑場)인 서쪽 시가(市街)를 한 번도 지나가지 않았다. 원래 집이 서쪽 시가에 가까웠으므로 인왕산 아래로 이주하였는데, 집을 지을 때에 먼저 사당을 세우고,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사당에 아뢰어 비록 비바람이 몰아치고 새벽과 밤중이라도 한 번도 폐지한 적이 없었으며, 성심을 다하여 제사를 받들어서 더욱 정성을 지극히 하였다.
항상 형제간이 없음을 한으로 여겨, 다만 한 누이가 있었으므로 우애하기를 매우 지극히 해서 한집에서 함께 밥을 지어 먹고 살 계획을 세우기까지 하였으며, 집을 지을 때의 규모도 여기에 대비해서 만들었다. 그리하여 온 가정이 매우 화락하였다.
거처할 때에는 태만하거나 방자하지 않았고, 비록 친한 사람을 대할 때라도 관을 벗거나 몸을 기대고 걸터앉는 때가 없었다. 문밖을 나갈 때에는 엄숙히 단정하고 공손하였으며, 정려문이 있는 마을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몸을 굽히고 얼굴빛을 고쳤다. 그리고 남의 상여 행렬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공손히 손을 마주 잡고 서 있었다. 붕우 간에는 신의를 반드시 지키고 언론을 반드시 바르게 하여 남의 비위나 맞추고 구차히 하려는 계책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속마음은 실지로 평탄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매우 너그럽게 하였다. 이해와 시비를 말함에 있어서는 마치 촛불로 비춰 보고 하나하나 세는 것과 같아서 사람들은 심지어 점쟁이라고 칭하기까지 하였다.
처음에는 하남군(河南君) 정숭조(鄭崇祖)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정씨 부인은 어진 덕이 있어서 군자의 배필이 될 만하였다. 1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숙(潚)으로 무자년(1528, 중종23) 생원시에 입격하여 돈녕부 정(敦寧府正)으로 있으며, 장녀는 현령 이억(李億)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전한 정응(鄭譍)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그 후 첨정(僉正) 한근(韓瑾)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며, 또 덕양 기씨(德陽奇氏)에게 장가드니, 부친은 기저(奇褚)로 성종 때에 사관이 되었는바 바로 나의 종조(從祖)이다. 나의 숙부이신 응교공(應敎公 기준(奇遵))은 평소 공을 사랑하여 마침내 인척을 맺게 되었다.
숙은 5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인원(仁源)ㆍ의원(義源)ㆍ충원(忠源)ㆍ효원(孝源)ㆍ대원(大源)이요, 딸은 정랑 심예겸(沈禮謙)에게 출가하였다. 이억은 2남을 낳았으니, 경성(慶星)은 포이포 만호(包伊浦萬戶)이고 경운(慶雲)은 장례원 사평이다. 인원은 2남을 낳았으니, 빈(濱)과 굉(浤)이다. 의원은 2남을 낳았으니, 기(淇)와 해(海)요, 충원은 2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아, 기묘년 명현의 일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현명한 임금을 만나 훌륭한 일을 하고자 하였으나 불행히도 소인배들에게 모함을 당하여 끝내 모두 화를 입고 말았으니, 지금까지도 뜻이 있는 선비들은 당시의 일에 분함을 머금지 않는 이가 없다. 나는 일찍이 숙부의 뜻을 애통히 여겨 더욱 당시의 여러분들에게 마음을 두었다. 그리하여 공의 행적이 이와 같이 아름다움을 듣고는 세월이 오래되면 이러한 사실이 없어질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감히 그 대강을 엮어 행장을 지어서 글을 쓰는 군자가 채택하기를 가다리는 바이다. 삼가 행장을 짓는다.

[주D-001]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 1454∼1492.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ㆍ행우(杏雨)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저서에 《추강집》, 《추강냉화(秋江冷話)》,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등이 있다.
[주D-002]김공 식(金公湜) : 1482∼1520. 조선 중기의 문신ㆍ학자로,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자는 노천(老泉), 호는 사서(沙西)ㆍ동천(東泉) 또는 정우당(淨友堂)이며,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광해조일기 1(光海朝日記一)
문목(問目) 계축년
 
전 판관 조위한(趙緯韓) 47세.
제가 기유년(1609, 광해군 1)에 출신(出身)하였는데, 그때 무과의 장원이 곧 정협입니다. 정협은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방회(榜會) 때에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보고 그 후에는 서로 만나 보지 못하였습니다. 신해년에 북청 판관(北靑判官)으로 부임한 후, 임자년 여름에 정협이 종성 판관(鐘城判官)이 되어 내려가기에 제가 나가서 접대하였습니다. 그때 그가 쇄마(刷馬 지방에 배치하였던 관용(官用)의 말)와 식량을 요구하였는데, 쇄마는 민간에서 거두어야 하므로 그때 형편으로는 요구에 응하기 어려워서 못 하였고, 식량도 본부(本府 북청)에 전염병과 기근(饑饉)이 들어서 관청에 저축한 곡식이 없었으므로 쌀 한 말을 보내 주었습니다. 그 뒤 종성에서 나온 장사(將士)의 말에 의하면 정협이 말하기를, “북청 판관은 동년(同年) 장원을 박대한다.”고 하였는데, 제가 그의 흉악한 정상을 미리 알지 못하고 동년(同年) 사이에 박대한 것이 마음에 미안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혐의를 품고 무고를 하였는지 알 수 없으며, 제가 병오년에 선공 직장(繕工直長)으로 근무하였으므로 그때에 제조(提調) 김제남의 집에 공사를 취품(取稟)하러 가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출신(出身)한 뒤, 부묘 도감(祔廟都監) 낭청(郞廳) 상격(賞格)에 사용할 숙마체자(熟馬帖子)를 받아 오는 일로 두어 번 가서 만나 본 죄는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역적 모의를 명사(名士)들에게 말하였을 것이다.” 하니, 제가 선공 직장으로 공사를 가지고 김제남의 집에 두서너 번 가서 겨우 한 번 만나 보았고, 숙마체자를 받으러 갔을 때는 공조 좌랑으로 있을 때이니, 선공 직장과 공조 좌랑이 명사입니까. 정협의 말 가운데, “모의를 명사들과 함께 하였을 것이다.” 하였지만, 제가 명사가 아니었음은 확실하오며, 설사 반역을 모의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사람마다 다 서로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물며 저를 허튼 소리나 하고 돌아다니는 미치광이 같은 사람이라고 남들이 모두 지목하고 있었으니, 흉측한 모의와 비밀스런 계책을 저와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대개 임금과 신하의 대의는 일월과 같이 밝으니, 편벽되고 사사로운 은혜로 보답할 것이 아니오나, 저의 집안은 그때에 특별한 은혜를 받고 있었습니다. 계사년과 갑오년(1593~1594, 선조 26~27) 무렵에는 제가 늙은 어미를 모시고 남원(南原)으로 피난하였는데, 그때에 흉년이 들어 사람들끼리도 서로 잡아 먹어 거의 다 없어지게 되었고, 늙은 어미도 거의 굶주려 쓰러질 지경이었습니다. 저의 형 조유한(趙維韓)이 사사(司事)로 전주(全州)에서 전하를 호종하였는데, 전하께서 늙은 어미가 남원에 있음을 아시고 특별히 조유한을 보내 의령(宜寧)에 있던 유 도독(劉都督 명 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문안하도록 하면서 지나는 길에 늙은 어미를 찾아보게 하였으며, 내시를 시켜 약밥을 많이 싸서 늙은 어미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본도의 감사 이정암(李廷馣)을 불러서 전교하시기를,
“조유한의 늙은 어미가 남원에 있으니, 이웃 여러 고을에서 양곡을 모아서 보내 주라.”
하셨으므로, 수일 안에 곡식 두어 섬을 얻어 집안의 여러 식구가 마침내 굶주려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어미가 죽을 때에 저의 손을 잡고 통곡하기를,
“나라의 은혜가 망극하니, 너희들은 끝까지 충성을 다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라.”
하기에, 제가 말하기를,
“형제가 모두 벼슬길에 올라 조금이라도 은혜에 보답하고 나라를 위하여 죽으려 하오나 그곳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으니, 역모에 참여하여 알고 있었다는 것은 천만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옵니다. 천지 귀신이 곁에서 살피고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반 마디 말이라도 속인다면 반드시 천벌이 있을 것입니다. 이 밖에 달리 아뢸 말씀은 없습니다.
국조보감 제31권
 선조조 8
26년(계사, 1593)

○ 1월.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양원(楊元)ㆍ장세작(張世爵)ㆍ이여백(李如栢) 등 세 협장(協將)을 거느리고 진군하여 평양에 접근하였는데, 도원수(都元帥)도 제진(諸陣)의 군사를 합쳐 거느리고 그 뒤를 따라 군사를 나누어 에워싸고 주둔하였다.
8일에 제독이 세 영에 명령을 전하여 일시에 군사를 전진시키고 성을 둘러 진을 치게 하였다. 우리 군사는 남쪽 성에 육박하고 절강(浙江)의 군사는 서쪽 성을 공격하였는데, 제독은 말을 달려 오가며 전투를 독려하였다. 온갖 포를 일제히 발사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제독이 겁을 먹고 후퇴하는 한 사람을 손수 베어 돌려 보이고 크게 소리치기를, “먼저 성에 오르는 자는 은(銀) 50냥을 상으로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낙상지(駱尙志)가 긴 창을 휘두르며 먼저 오르고 절강의 군사가 함성을 지르며 뒤따라 올라가 적의 기를 뽑아 버리고 명 나라 기를 세웠다. 적이 저항을 할 수 없게 되자 후퇴하여 토굴로 들어갔다. 우리 군사도 잇따라 올라갔다.
제독이 장세작(張世爵) 등과 함께 칠성문(七星門)을 공격, 대포로 문을 부수고 군사를 정돈하여 들어갔다. 이에 이여백(李如栢)은 함구문(含毬門)을, 양원(楊元)은 보통문(普通門)을 통해 승세를 타고 앞을 다투어 들어갔다. 그리하여 1천 2백 80여 명을 참획(斬獲)하고 불태워 죽인 수도 절반이 넘었는데, 왜적에게 투항했던 절강인(浙江人) 장대선(張大膳)도 사로잡았다.
행장(行長)이 도망해 연광정(練光亭) 토굴로 들어가 의거하였는데, 여러 왜장이 연달아 여러 굴에 의거하여 모두 비오듯 탄환을 발사하니 명 나라 군사가 공격하다가 부상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제독이 진영에 머물면서 장대선을 시켜 행장에게 회유하기를,
"차마 인명을 다 죽일 수 없어 너희의 살 길을 열어주겠으니, 속히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와서 약속을 들어라."
하니, 행장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퇴군할 것이니 뒷길을 차단하지 말아달라."
하였다. 제독이 궁지에 빠진 적이 결사 항전할까 염려하여 행장의 청을 허락하고는 우리 군사에게 영을 전하여 일로의 복병(伏兵)을 철수하게 하였다. 밤중에 행장이 남은 적을 거느리고 얼음이 언 강을 건너 탈출했는데, 중화(中和)와 황주(黃州)에 주둔해 있던 적은 이미 먼저 철수한 뒤였다.
역(驛)을 통하여 승리한 것을 황제에게 아뢰었는데 독부(督府)와 함께 상주하였다. 주문(奏文)에,
"황제의 위엄에 힘입어 평양을 수복하고 승리한 것을 급히 보고드리는 일입니다. 만력(萬曆) 21년(선조 26, 1593) 1월 9일에 배신(陪臣) 제도 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이 치계(馳啓)하기를 '제도 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 김명원(金命元)의 정문(程文)과 평안도 순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신보(申報)를 받았다. 이에 의하면「이달 6일에 흠차제독계요보정산동등처방해어왜군무총병관도독동지(欽差提督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總兵官都督同知) 이여송이 세력이 막강한 관군을 거느리고 곧장 평양성 밖에 도달하여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본성(本城)을 포위하였다. 왜적 2천여 명이 성 북쪽의 모란봉(牧丹峯)에 올라가 청ㆍ백기(靑白旗)를 세우고 함성을 지르며 총포를 쏘았다. 또 왜적 1만여 명이 성 위에 벌여 서서 앞에 녹각책자(鹿角柵子)를 세우고는 방패로 가리고 칼을 휘둘렀는데, 그 기세가 매우 강성하였다. 또 왜적 4~5천 명이 대장기를 앞세워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불며 성 안을 순시하여 여러 적들을 지휘하였다. 본성 안팎에 장애물을 설치하여 형세상 갑자기 공격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총병은 군사를 거두어 진영으로 돌아왔다. 이날 한밤중에 왜적 3천여 명이 함매(銜枚 소리를 내지 못하게 입에 막대를 물림)하고 몰래 나와 도독(都督) 양원(楊元), 도독 이여백(李如栢), 도지휘(都指揮) 장세작(張世爵) 등의 진영을 습격하였다가 본관들이 거느린 군사들에 의해 격퇴당하였다. 7일 밤에도 왜적 약 8백여 명이 다시 도독 이여백의 진영을 습격했다가 또 본관에 의해 격퇴당하였다. 8일 동틀 무렵에 총병이 향을 피우고 날을 점쳐서 길조(吉兆)를 얻었다. 아침밥을 먹고 나서 세 영의 장관들과 더불어 각 해당 장령(將領) 및 관군(官軍)을 나누어 거느리고 칠성문(七星門)ㆍ함구문(含毬門)ㆍ보통문(普通門) 밖에 진을 친 다음, 총병이 친병(親兵) 2백여 기(騎)를 거느리고 왔다갔다 하면서 지휘하니, 장수와 사졸들은 사기가 올라 모두 힘을 다할 것을 생각하였다. 진시(辰時)에 여러 군사를 나누어 차례로 전진하며, 각종 화기를 일시에 발사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온 들판이 캄캄하였다. 화전(火箭) 하나가 밀덕(密德) 토굴에 떨어지자 조금 뒤에 붉은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으며, 불길이 번져 거의 다 태웠다. 성 위에서 왜적이 총을 난사하고 끓는 물과 돌덩이를 사용하여 죽기로써 항거하며 긴 창과 큰 칼을 밖으로 일제히 내미니, 마치 고슴도치의 털처럼 빽빽하였다. 총병이 겁내는 자 한 명을 손수 베어서 호령하며 진중에 보이니, 모든 군사가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성에 접근하였다. 등에는 마패(麻牌)를 지고 손에는 창을 가지고서 일제히 돌진하며 활과 대포를 쏘기도 하고 성을 지키는 적을 올려 찌르기도 하니, 적이 지탱하지 못하고 조금 물러났다. 총병이 몸을 솟구쳐 먼저 올라가서 여러 장수를 독려하여 진입하였다. 명 나라 군사의 1진은 본국의 관군과 더불어 함구문으로 들어가고, 1진은 보통문으로 들어가고, 1진은 밀덕(密德)의 동쪽성에 올라갔다. 기병과 보병이 구름처럼 모여서 사면으로 공격하여 쳐죽이니 적들이 무너졌다. 명 나라 군사가 당시 전투에서 참획한 수급(首級)이 1천 2백 85과(顆)였는데, 조사해 보니 그 속에는 적추(賊酋) 평수충(平秀忠)ㆍ평진신(平鎭信)ㆍ종일(宗逸) 등 25인의 수급도 들어 있었다. 왜적 2명과 통사(通事) 장대선을 사로잡고, 말 2천 9백 85필과 왜적의 기물 4백 52건을 노획하였으며, 본국에서 사로잡혀간 남녀 1천 15명을 구출하였다. 명 나라 군사가 승세를 타고 불을 놓아 건물을 모두 불태우니, 많은 왜적이 숨어 들었다가 타죽은 자가 약 1만여 명이나 되어 그 냄새가 10여 리에 풍겼다. 잔적이 풍월루(風月樓)의 작은 성으로 숨어 들어갔는데, 총병이 시초(柴草)를 가져오게 해서 사면에 쌓아놓고 화전(火箭)을 쏘니, 일시에 타버려 모두 재가 되었다. 또 남은 적이 성을 뛰어넘어 강을 건너다가 얼음이 꺼져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칠성문ㆍ보통문ㆍ모란봉 등지에 있던 여러 왜적들은 그대로 토굴에 의거하고 있었으므로 견고하여 공략할 수 없었다. 총병은 군사를 철수하여 밥을 먹이면서 말하기를『적은 필시 밤에 도망할 것이다.』하고 즉시 부총병(副總兵)ㆍ참장(參將) 등의 관원을 보냈다. 이영(李寧)ㆍ조승훈(祖承訓)ㆍ갈봉하(葛逢夏)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매복하였고, 총병은 양원(揚元)ㆍ이여백(李如栢)ㆍ장세작(張世爵) 등 세 부장(副將)과 함께 큰 길로 추격해 갔는데, 왜적들은 사방으로 도망하다가 이영 등의 매복에 걸려 요격을 당하였다. 이때 수급 3백 59과를 참획하고, 왜적 3명을 생포하였다. 남은 적들은 병기를 버리고 황급히 도망하였으니, 절령(岊嶺 황해도 서흥군에 있는 재. 자비령(慈悲嶺)) 이서(以西)가 모두 평정되었다.」하였다. 신은 생각하건대, 평양부(平壤府)는 실로 본국의 옛 도읍으로서 성지(城池)가 험고한데 흉악한 적이 저돌적으로 침입하여 점거하고는 소굴로 만들었다. 즉일로 명 나라 군사가 진격하여 북소리 한번에 소탕하니, 흉악한 잔적은 도망갈 곳이 없게 되었다. 본국이 재조(再造)되는 기미가 실로 여기에 있게 되었다. 신은 이원익 등과 각처의 마초 및 군량을 독려 운반하여 본성에 들여보내어 독부에서 쓰도록 하였다. 승첩의 사유를 이렇게 갖추 아뢴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 치계를 받고 자세히 살펴보건대, 저희 나라는 군병이 약하여 날이 갈수록 국토가 깎이고 평양은 성이 험고하여 쉽게 수복할 수 없었으므로 밤낮 근심하며 죽을 곳을 알지 못하였는데, 성명(聖明)의 천지 부모와 같은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선왕조의 옛일을 곡진히 생각하시어 신의 잘못을 죄주지 않고 남북의 정병(精兵)을 동원하여 도탄에 빠진 소방을 구제하도록 명하시었습니다. 군량이 부족할까 염려하시어 먼저 은냥(銀兩)을 하사하시고, 군량과 마초가 모자랄까 걱정하시어 계속해서 군수품을 수송해 주셨습니다. 사졸들이 들판에서 노숙하고 노새와 나귀가 길에서 나뒹구는 등 신의 허물로 말미암아 이토록까지 천조(天朝)에 근심을 끼쳐드렸으니 신은 감격하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왕사(王師)가 정벌함에 천리(天吏) 앞에는 대적할 자가 없는 법입니다. 금년 정월 8일 평양에 진격하여 하루아침도 못 되어 성을 깨뜨렸는데, 타 죽고 빠져 죽고 참살당한 자는 말할 것도 없고 나머지 적들도 혼이 빠져 도망갔으니, 그 군위(軍威)의 성대함과 전승(戰勝)의 신속함은 옛 역사에도 없었던 일입니다. 신과 대소 배신(陪臣)들은 처음 승리의 소식을 듣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구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이는 대개 성천자(聖天子)의 성덕(盛德)이 널리 퍼지고 신무(神武)가 멀리 뻗친 데다 명공(名公)들이 계책을 잘 돕고, 병부(兵部)에서 전략을 잘 세웠기 때문입니다. 시랑(侍郞) 송응창(宋應昌)은 기무(機務)에 전심하여 방략을 지시함에 있어 계책이 부합하여 특별한 공을 이루었습니다. 총병(總兵) 이여송(李如松)은 군사들에 대한 맹세가 강개하고 그 의기(義氣)가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군사들이 지나는 곳마다 털끝만큼도 침범하는 일이 없었고 전장(戰場)에 임해선 독전하여 여러 장교에 솔선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말이 총탄에 맞고 불길이 몸을 에워싸도 두려운 기색이 없이 더욱 기운을 가다듬었습니다. 성을 함락시키던 날 기자(箕子)에게 제사를 지내고 먼저 그 무덤을 봉(封)했으며, 부상자를 어루만지고 전사자의 영혼을 두루 위로하는 한편, 덕의(德意)를 선포하고 환과고독(鰥寡孤獨)들을 위문했으니, 비록 배도(裵度)가 회서(淮西)를 평정했던 일이나 조빈(曹彬)이 강남(江南)을 함락시켰을 때의 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장(副將)ㆍ참장(參將)ㆍ유격(遊擊)ㆍ도사(都司) 이하 각 장령(將領)들도 용감하기가 마치 범이 포효하는 듯 신(神)이 도와주는 듯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큰 돌이 쏟아져 내려오는데도 이를 무릅쓰고 성 위로 올라간 자도 있고, 가슴에 탄환을 맞고서도 계속 왜적을 죽인 자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장졸(將卒)들은 팔짱만 끼고 놀라 움츠린 채 감히 그 사이에 돕지도 못하고 그저 철기(鐵騎)의 발굽에 들판 가득 먼지가 날리고 화전(火箭)에 맞아 붉은 불꽃이 하늘을 찌르는 것만을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포로 방책을 쏘아 맞히니 깃털이 날리듯 산산조각이 났고 창으로 적을 찌르는데 민첩하기가 마치 나는 송골매와 같았습니다. 비린내나는 연기는 공중에 가득하고 흐르는 피는 강물을 이루었으며, 천지는 갈라지고 산과 물이 뒤바뀌었습니다. 조총을 쏘고 끓는 물을 퍼부으며 돌멩이를 날리는 적들은 정말 버마재비가 수레바퀴를 막는 것과 같아서 감히 상대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평양성은 실로 정예로운 군사와 기계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신이 한 도의 힘을 다 기울였으나 해가 지나도록 도모하지도 못했었는데, 승전하여 수복한 뒤에 그들의 수비 시설에 대해 들어보니 저희 나라의 병력으로는 결코 쳐서 함락시킬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천자의 위엄이 한번 떨쳐지자 여러 적들이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 이미 파죽지세가 되었으므로 황해도 동쪽은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였으니, 구도(舊都)를 머지않아 수복하여 종묘 사직을 차례로 청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선조의 영혼이 지하에서 감격할 것과 남은 백성들이 소생될 희망을 생각하니 슬픔과 기쁨이 가슴에 교차하여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비록 되살려 주신 은혜를 보답하려 해도 실로 도모할 길이 없습니다.
신이 매우 한스러운 것은, 저 조무라기들이 제멋대로 날뛰어 게딱지만한 섬나라에서 스스로 잘난 체하면서 하늘의 위력을 모른 채 여러 번 미친 소리를 한 것이었습니다. 신은 가슴이 아팠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추악한 무리들이 본색을 드러내다가 천벌을 자초하여 온 섬 나라가 공포에 질린 채 벌벌 떨며 감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거의 살아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저희 나라의 수치만 씻는 것이겠습니까. 실로 역대 제왕들의 공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은 또 듣건대, 소원이 있을 때 곡진하게 이루어주는 것이 천지의 큰 덕이고 호소할 것이 있을 때 반드시 진달하는 것은 신하된 자의 지극한 정이라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지금 흉악한 적이 소탕된 것은 오로지 왕사(王師)가 출동했기 때문이니 소방은 털끝만큼도 한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저들은 천장(天將)이 회군(回軍)하여 저희 나라가 외롭고 미약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재차 침략할 흉계를 꾸며낼 텐데 그때에 가서는 재난이 더욱 심해져 막기가 훨씬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성상께서 동방을 돌보는 걱정을 하시게 되고 신은 왜적 방어를 잘못한 죄를 거듭 지게 될까 두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해동의 잔약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천조(天朝)의 은혜로운 인정을 끝까지 베풀어 주소서. 그리하여 제독부(提督府)로 하여금 강서(江西)와 절강(浙江)의 포수 5천 명을 뽑은 뒤 한두 장수에게 소속시켜 연해의 요해처인 부산 등지에 몇 달 동안 나누어 주둔케 하면서 한편으로는 저희 나라의 군민(軍民)을 가르치고 한편으로는 흉악한 적들의 음모를 소멸시키게 하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신은 길이 하늘의 위엄에 의지하여 수습을 해서 후일을 대비할 수 있겠습니다. 신이 이미 국토를 수복하고서도 또 마무리를 잘 해 주시도록 바라기까지 하니 지극히 참람하여 죄를 용서받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조(天朝)에서 저희 나라를 구휼하심이 이미 내국보다 더함이 있는데, 저희 나라가 천조에 하소연하는 일을 어찌 감히 외국으로 자처하겠습니까. 신은 더욱 황공스럽습니다.
신은 인력과 가축을 징발하여 군량과 마초의 운반을 독려하는 한편, 병사와 말을 조달하여 왕사와 협동해서 도성을 탈환할 계획인데, 이와 함께 함경도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적에도 대비할 것입니다. 신은 수복이 끝나는 대로 도성으로 돌아가서 관군(官軍)을 위로한 다음 곧 이어 전후로 은혜받은 사실을 갖춰 별도로 사은을 행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러러 황제의 위엄에 의지하여 평양을 수복한 승첩의 사유를 속히 보고드려야 하겠기에 삼가 갖추 적어서 주문(奏聞)합니다."
하였다. 제독(提督)이 거느린 남군(南軍)과 북군(北軍)이 공을 다투었는데, 제독은 북군을 편들면서 우리나라로 하여금 잘못되지 않게 주문(奏文)하도록 하였다. 상이 이호민(李好閔)에게 주문을 짓게 하니 이호민이 야간에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양편 군사의 공로에 대하여 골고루 빠짐없이 기술하였으므로 남ㆍ북군의 장수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 송 경략(宋經略)은 안주(安州)에 진주(進住)하고 제독 이여송은 파주(坡州)에 진군하여 벽제역(碧蹄驛)에서 싸우다가 불리하자 후퇴하여 개성(開城)에 주둔하였다.
○ 함경도 길주(吉州)에 주둔했던 적이 성을 비워놓고 도망하였다.
정문부가 경성으로 돌아와서 의병(義兵)을 해산시킨 뒤 북쪽으로 육진(六鎭)을 순행하며 반민(叛民)을 찾아내 베고 번호(藩胡)를 어루만져 안정시켰으며, 모든 보(堡)를 수복하여 장령(將領)을 파견해 두었다. 북변이 복구된 것은 모두 문부의 힘이었다.
○ 관원을 보내어 평양에서 전사한 명 나라 군사를 제사지내게 하고 그들의 시체를 거두어 묻었다.
상이 의주(義州)를 출발하여 다시 정주(定州)에 머물렀다. 세자가 성천(成川)에서 묘사(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행재소(行在所)에 왔다.
○ 2월. 군병에게 조총(鳥銃)을 배워 익히게 하고 과거(科擧)에서도 조총에 대한 기술이 있는 자를 뽑도록 하는 한편 자초(煮硝)하는 법에 대해 널리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 제독 이여송이 도로 평양에 머물렀다.
제독이 오래도록 개성에 머물면서 군량이 떨어져 가는데도 전진할 생각은 없이 자주 사람을 경략(經略)에게 보냈는데, 이는 대개 전일의 화의(和議)를 계속해 보려는 것이었다. 때마침 유언비어가 떠돌아 "적장 청정이 장차 안변에서 서쪽으로 평양을 침범하려 한다." 하자 제독은 이로 인하여 큰소리치기를,
"돌아가 평양을 구제하려 한다."
하고는 드디어 군사를 인솔하여 서쪽으로 돌아가고 왕필적(王必迪)을 개성에 남겨 두었다.
○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적병을 행주에서 격파하였다.
당시 경성에는 적들이 연합하여 둔을 치고 있었으므로 그 기세가 등등하였는데 권율은 명 나라 군사와 연락하여 도성을 탈환하려고 군사를 머물려 두고 있었다. 그리고는 선거이(宣居怡)로 하여금 전군을 거느리고 금천(衿川)의 광교산(光敎山)에 주둔케 하고, 권율 자신은 정병(精兵) 4천 명을 뽑아 양천(陽川)에서 강을 건너 행주산 위에 진을 치고는 책(柵)을 설치하여 방비를 하였다. 적은 외로운 군사가 깊이 들어간 것을 보고 수만 명의 대군을 출동시켜 새벽에 책을 포위하였다. 그들이 울려대는 징소리ㆍ북소리가 땅을 진동하니 온 책 안이 두려움에 사로잡혔는데, 권율은 거듭 영을 내려 진정시켰다.
적은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진격해 왔는데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에 이르기까지 안팎이 모두 사력을 다해 싸웠다. 우리 군사가 점령한 지역은 높고 험준한 데다가 뒤로는 강벽(江壁)에 막혀 달아날 길이 없었으므로 모두 죽을 각오를 하였다. 적은 올려다 보고 공격하는 처지가 되어 탄환도 자연 맞지 않는 데 반해 호남의 씩씩한 군사들은 모두 활을 잘 쏘아 쏘는 대로 적중시켰다. 화살을 비오듯 퍼부을 때마다 적의 기세가 문득 꺾이곤 하였다. 왜적이 각자 짚단을 가지고 와 책(柵)에 불을 놓아 태우자 책 안에서는 물을 길어 불을 껐다. 적이 서북쪽의 책 한 간을 허물자 지키고 있던 승군(僧軍)이 조금 물러나니 권율이 직접 칼을 빼어 물러난 자 몇 사람을 베고, 다시 책을 세워 방어하였다. 화살이 거의 떨어지려 할 때 수사(水使) 이빈(李薲)이 배로 수만 개의 화살을 실어다 대주었다. 적이 결국 패해 후퇴하면서 시체를 네 무더기로 쌓아 놓고 풀로 덮고 태웠는데, 그 냄새가 몇 리 밖까지 풍겼다. 우리 군사가 나머지 시체를 거두어 참획한 것만도 1백 30급이나 되었다.
다음 날 사대수(査大受)가 접전한 곳을 와서 보고 말하기를,
"외국에 진짜 장군이 있다."
하였다. 송 경략(宋經略)이 우리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 위로하고 추장(推獎)하는 한편 비단과 은(銀)을 상으로 주고 황제에게 주문(奏聞)하였다. 황제가 홍로시(鴻臚寺)의 관원을 보내 우리나라에 선유(宣諭)하기를,
"조선은 본디 강국으로 일컬어졌는데, 지금 보건대 권율이 참획한 것이 매우 많으니 그대 나라의 인민이 그래도 진작될 수 있겠다.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권율이 파주의 대흥산성(大興山城)으로 옮겨 진을 치자 적병이 또 침입해 왔으나 모두 싸우지 않고 물러갔다. 제독이 이 소식을 듣고는 갑작스레 회군(回軍)한 것을 자못 후회하면서 장세작으로 하여금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도로 개성에 가서 군량을 비축해 놓고 기다리게 하였다.
권율의 품계를 자헌(資憲)으로 올려 주도록 명하였다.
○ 상이 정주(定州)를 출발하여 숙천부(肅川府)로 진주하면서 세자와 중궁(中宮)은 그대로 남아 있게 하고 숙천부에서 다시 영유현(永柔縣)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대신과 여러 재신(宰臣)들이, 상이 내지에 진주하여 군량 운반을 감독하고 백성들의 신망을 유지하도록 연달아 청하였으나 상이 주저하며 따르지 않았다. 대신이 사기(事機)가 매우 위급하다고 하며 연달아 청해 마지않으니, 상이 답하기를,
"나의 생각에는 경략(經略)이 뒤에 있어 차견하는 관원이 연락부절하니 접응하는 일이 긴요하겠고, 왜적이 아직 북로(北路)에 주둔하고 있어 서쪽을 침범할까 우려된다. 또 여기에서 한 걸음만 떠나도 호령이 해이해져 중국 식량을 운반하는 일도 많이 지체될 것이다. 그 때문에 쾌히 따를 수 없다. 그만둘 수 없다면 세자와 중궁을 그대로 정주에 머물게 하고 나는 약간의 수행 관원을 거느리고 단기(單騎)로 평양에 달려가 대군의 뒤를 따르며, 모든 일을 지휘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대신들이 아뢰기를,
"이는 바로 신들이 원하는 바입니다. 속히 결행하시기만을 오직 바랄 뿐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숙천부에 잠깐 머물렀는데 직로(直路)이므로 수라를 제공하는 데 폐단이 있어서 영유현으로 이주하였다.
○ 4월, 경략(經略)이 심유경(沈惟敬)을 보내 왜영(倭營)에 들어가서 강화를 논의하게 하였다.
대장 수가(秀家) 등이 날짜를 언약하고 돌아갔다. 제독이 이 소식을 듣고 다시 군사를 이끌고 개성에 이르렀다.
○ 병부(兵部)가 내고(內庫)의 은(銀) 3천 냥을 조선에 주어 국내의 유공자 및 국사에 죽은 원역(員役)에게 반급하도록 청하였다.
○ 황제가 산동(山東)의 군량 10만 석을 내려 주어 배로 운송하여 군량을 보충하게 하였다. -이때 바닷길을 통행하지 않은 지 이미 2백 년이나 되었으므로 무관(武官) 오정방(吳定邦)을 여순(旅順)의 어구에 보내어 인도해 왔다.
○ 경기 감사 성영(成泳)이 선릉(宣陵)ㆍ정릉(靖陵) 두 능의 변고에 대하여 장계를 올렸다. 왜적이 물러간 후에 김천일(金千鎰)이 먼저 능의 변고를 살펴보고 군사로 호위하였는데, 성영이 이를 들어 계문한 것이다.
○ 예부(禮部)가 평양ㆍ개성ㆍ벽제ㆍ서울에 단(壇)을 설치하여 전사한 관군에게 위령제를 지낼 것을 황제에게 청하였는데, 성지(聖旨)를 받드니,
"단의 명호를 민충(愍忠)이라 하라."
하고, 인하여 관은(官銀)을 내려 제수(祭需)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 경상좌도 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이 죽었다.
성일은 일본에 봉명 사신으로 가서 적정(敵情)을 잘못 주달하였으므로 거의 죄벽(罪辟)에 빠질 뻔하였다. 그러다가 용서하는 왕명을 받고서는 더욱 감격하여 사력을 다해 적을 칠 것을 맹세하였다. 평소 군려(軍旅)에 대한 일은 알지 못했으나 지성으로 군중을 효유하고 관군과 의병 등 모든 군사를 잘 조화시켰는데, 한 지역을 1년 넘게 보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가 통솔한 효과였다.
○ 5월. 경략(經略)이 왜적이 도성을 버리고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패(牌)를 내어, 제독을 재촉해 추격케 하였으나 적이 떠난 지 이미 수십 일이 지난 뒤였다. 제독은 길에서 천천히 행군하는가 하면 혹은 머물러 날짜를 지연시키기도 하면서 겨우 새재를 넘어갔다가 되돌아왔다.
적이 물러가고 나서는 군사를 나누어 해변에 주둔하였다. 울산(蔚山)ㆍ서생포(西生浦)에서부터 동래(東萊)ㆍ김해(金海)ㆍ웅천(熊川)ㆍ거제(巨濟)에 이르기까지 수미가 서로 연하였는데, 16 둔진(屯陳)이 모두 산과 바다를 의거하여 성을 쌓고 참호(塹濠)를 파서 오래 머물 계획을 하였다.
명 나라 조정에서 사천 총병(四川總兵) 유정(劉綎)을 연달아 파견했는데 복건(福建)ㆍ서촉(西蜀)ㆍ남만(南蠻) 등처의 소모병(召募兵) 5천 명을 거느리고 성주(星州)에 둔을 쳤으며, 절강(浙江)의 장수 오유충(吳惟忠)은 선산(善山)에, 이영(李寧)ㆍ조승훈(祖承訓)ㆍ갈봉하(葛逢夏)는 거창(居昌)에, 낙상지(駱尙志)ㆍ왕필적(王必迪)은 경주(慶州)에 둔을 쳤다. 이들은 사면을 빙 둘러서 서로 대치하였다.
○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순변사 이빈(李薲),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는 적을 추격하여 영남에 내려가고, 충청 병사 황진(黃進)과 전라 방어사 이복남(李福男)은 각각 그들의 군사를 인솔하고 모였으며, 권율(權慄)은 신병(新兵)을 거느리고 운봉(雲峯)을 넘어 영남으로 달려갔다. 모두 창녕(昌寧)ㆍ의령(宜寧) 등 읍에 벌여 둔을 치고 적경(賊境)에 임하였다.
○ 6월. 청정(淸正)이 우리 두 왕자(王子)와 재신(宰臣)들을 돌려보냈다.
○ 왜적이 진주를 함락하였다.
창의사 김천일이 그 아들 상건(象乾) 및 경상 병사 최경회, 복수장(復讎將) 고종후, 좌랑 양산숙 등과 함께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종인은 이곳저곳에서 싸우다가 남강(南江)에 이르렀는데, 양팔로 두 명의 적을 끼고는 크게 소리치기를,
"김해 부사 이종인이 여기에서 죽는다."
하며, 강에 몸을 던졌다. 진사 문홍헌(文弘獻), 정자(正字) 오차(吳玼), 참봉(參奉) 고경형(高敬兄) 등이 모두 따라 죽었다. 성이 일단 함락되자 적이 대대적으로 도륙하였다. 거제 현령 김준민(金俊民)은 단독으로 말을 달리며 거리에서 싸웠는데, 좌우로 돌격할 때마다 적의 무리가 물 갈라지듯 흩어졌다. 왜적이 종일 그를 쫓아다녔으나 탄환과 칼이 모두 명중되지 않았는데, 끝내 그가 어디에서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성 안의 사녀(士女)들도 앞을 다퉈 강에 이르러 투신 자살하여 흐르는 시체가 강을 메웠다. 대략 죽은 자가 6~7만이나 되었는데, 장사(壯士) 중에 벗어난 자는 수삼 인에 불과했다. 적이 성곽을 헐고 가옥을 불태웠으므로 성이 온통 폐허가 되었다. 성이 포위를 당한 9일 동안 주야로 벌인 크고 작은 전투가 1백여 차례나 되었으며, 적의 죽은 자도 상당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인 데다가 외부에서 구원병이 이르지 않았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힘이 다하여 죽었다. 왜변(倭變)이 있은 이래 참혹하게 무너지고 의열(義烈)이 장엄하게 드러난 것으로 진주성 같은 예가 없었다. 천일에게는 좌찬성을, 경회에게는 좌찬성을, 종인에게는 병조 판서를, 준민에게는 형조 판서를 추증(追贈)하고, 그 나머지도 차등 있게 관작을 추증하였다.
○ 7월.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이 군영을 한산도(閑山島)로 옮기기를 청하니, 따랐다.
한산도는 거제(巨濟)의 남쪽 30리 지점에 있는데, 산세가 빙 둘러쳐져 배를 숨기기에 편리하였고 왜선(倭船)이 호남을 침범하려면 반드시 이 길을 경유해야만 하였다. 이순신은 본진(本鎭)이 좌측에 치우쳐 있어 방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청한 것이었다.
○ 제독(提督) 이여송이 군사를 철수해 돌아갔다. 상이 강서(江西)로부터 황주(黃州)에 가서 영송(迎送)하고 인하여 황주로부터 나아가 해주(海州)에 머물렀다. 왕비와 세자가 강서로부터 와서 모였고, 임해(臨海)ㆍ순화(順和) 두 왕자도 이르렀다.
○ 심유경(沈惟敬)이 왜영(倭營)에서 돌아왔는데, 수길(秀吉)의 화친을 청하는 표문(表文)을 가지고 오면서 왜관(倭官) 소서비(小西飛)를 데리고 왔다.
○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겸임시키고 본직(本職)은 그대로 두었다. 조정의 의논에서 삼도 수사(三道水使)가 서로 통제할 수 없다고 하여 특별히 통제사를 두어 주관케 하였다. 이순신이 육지는 군수 물자에 고달프다는 점을 들어 체부(體府)에 청하기를,
"다만 일면의 해포(海浦)를 부여해 주면 양식과 기계를 자족시킬 수 있게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소금을 구워 판매하여 곡식 몇만 석을 비축하였으며, 영사(營舍)와 기구(器具)가 완비되었다. 백성을 모집하여 완취(完聚)시키니, 하나의 거진(巨鎭)이 되었다.
○ 9월. 경략 송응창과 제독 이여송이 도로 압록강을 건너 돌아왔다. 오직 유정과 오유충(吳惟忠) 등 보병(步兵) 1만여 명만을 머물러두게 하였다. 또 왕세자가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을 경리(經理)하도록 주청한 결과 성지(聖旨)와 칙서(勅書)가 내려왔는데, 왕세자로 하여금 임시로 절제(節制)를 총괄하게 하였다.
○ 이여송은 용모가 걸출하고 국량(局量)이 넓고 컸다. 군사를 움직이고 진을 칠 때 군사를 온당하게 검속하였으므로 그가 지나는 곳마다 모두 편하게 여겼다. 그의 아버지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樑)이 추후에 글을 주기를,
"조선은 바로 우리 선조의 고향이니, 너는 힘쓰라."
하였는데, 이여송이 언젠가 그 글을 사적으로 접반사(接伴使)에게 보이기를,
"아버님이 이처럼 분부하셨는데, 감히 귀국을 위해 힘을 다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의 선조는 바로 우리나라 이산군(理山郡) 출신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였다. 이여송이 30여 세의 나이로 처음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는 안빈(顔鬢)이 매우 청수하였는데, 영남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흰 수염이 섞여 있었다. 그가 우리나라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를 위하다 보니 이처럼 반백(斑白)이 되었다."
하였다. 뒤에 상이 명하여 평양에 사당을 세운 뒤 석성(石星)과 이여송을 제사지내고 이여백(李如栢)ㆍ장세작(張世爵)ㆍ양원(楊元)을 배향케 하고는 '무열(武烈)'이라고 사액하였다.
○ 상이 환도하려 할 때에 왕비는 머물러 두었으며, 세자는 종묘 사직을 받들고 해주(海州)에 머물러 있었다. 상이 임진강의 전쟁터를 지날 때 즉시 행주(行廚 임금의 거둥 때 어선(御膳)을 담당한 임시 주방)에 명하여 전사한 군인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 10월. 상이 경사(京師)로 돌아와서 -4일- 정릉동(貞陵洞)에 있는 고(故)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을 행궁(行宮)으로 삼았다.
○ 중앙과 지방에 교서(敎書)를 반포하고, 사신을 보내 산천(山川)에 향을 내렸으며, 택일하여 종묘의 터에 곡읍(哭泣)하였다.
벽제(碧蹄)의 전투에서 죽은 명 나라 군사를 제사지내도록 명하였다.
○ 예조 판서 이증(李增)을 보내어 유생들을 거느리고 문묘의 터에 곡읍하게 하였다.
○ 승려를 모집하여 도성의 안팎에 있는 시체를 거두어 매장하도록 명하였다.
○ 청(廳)을 설치하여 기민(飢民)을 구휼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병란을 겪어서 도성 안이 크게 굶주려 쓰러진 시체가 즐비하였다. 5장(場)을 설치하여 미죽(糜粥)을 끓여 나누어 구휼하도록 명하고, 상이 친히 임하여 면대해서 지급하기도 하였다.
○ 선릉(先陵)에 배알할 날짜를 택일하도록 명하였다.
○ 윤 11월. 황제가 행인사 행인(行人司行人) 사헌(司憲)을 파견하여 칙서를 가지고 와서 선포하게 하였다. 황제는 상이 나라를 회복하고 환도(還都)했다 하여 칙서를 내려 위로하고 동시에 은폐(銀幣)를 하사하였다. 칙서의 대략에,
"저번에 왕이 대군을 몰아 왜적을 변경으로 쫓아내고 옛 강토를 수복한 다음 표문(表文)을 보내와 사례하니, 내 마음이 매우 기쁘다. 생각건대 나라를 회복한 중대한 일은 심상하게 보아 넘길 수 없는 보고이므로 지금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옛사람의 와신상담하던 뜻으로 유시하여 권면한다. 조정에서 속국을 대우하는 은의(恩義)는 이 정도에서 그칠 것이니, 혹시 다른 변이 발생한다 해도 나는 왕을 위하여 계획을 세워 줄 수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 12월. 광주(光州) 유생 김덕령(金德齡)이 의병을 일으켰다.
김덕령은 신력(神力)의 소유자로서 비호처럼 용건(勇健)하고 자못 기절(氣節)이 있었으며 집에서 유업(儒業)을 익혀 겸손한 태도로 남에게 자신을 낮추었으므로 그의 역량을 아는 자가 없었다. 전란이 있은 뒤로 그는 거상(居喪)을 하며 집에 있었다. 이때 관군(官軍)과 의병(義兵)이 무려 수백 둔(屯)이나 되었지만 적을 보고는 곧 무너졌다. 그의 자부(姉夫)인 김응회(金應會)는 강개(慷慨)한 선비였다. 그가 누차 김덕령에게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치도록 권하였으나 김덕령은 머뭇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때 마침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경린(李景麟)과 장성 현감(長城縣監) 이귀(李貴)가 상소하여 대장의 임무를 맡길 만하다고 김덕령을 추천하였고 당시 무군사(撫軍司)가 남하하여 또 세자의 유시를 가지고 효유하였다.
이에 김덕령이 친구인 장사(壯士) 최담령(崔聃齡) 등 수십 명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는데, 전택(田宅)을 팔아 무기를 마련하고 격문(檄文)을 띄워 군사를 모집하니, 응모자가 운집하였으므로 장정 5천여 명을 확보하였다. 김덕령이 손수 지획(指畫)하여 행진(行陣)을 가르쳤다.

[주D-001]배도(裵度)가……것입니다. : 평정이 신속하게 이루어진 것을 비유함. 배도는 당 헌종(唐憲宗) 때의 재상. 당시 회서 지방의 채주 자사(蔡州刺史) 오원제(吳元濟)가 반란을 일으켜 3년이 되도록 평정되지 않자, 조정에서 배도를 회서 초토사(淮西招討使)로 삼아 토벌케 하였는데, 절도사(節度使)인 이소(李愬)가 오원제를 사로잡아 난이 평정되었다. 《新唐書 裵度傳》 조빈은 오대(五代) 말기 사람으로 후주(後周)에 벼슬하다가 조송(趙宋)에 귀부(歸附)하였는데, 960년(건륭 1) 강남을 토벌하여 이듬해 11월 이욱(李煜)의 오(吳)를 항복받았다. 《宋史 曹彬傳》
국조보감 제76권
 순조조 1
2년(임술, 1802)

○ 1월. 장용영을 혁파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장용영을 장차 혁파하려 한다. 지난날을 돌이켜 생각하는 나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하고, 이어 군교(軍校)나 이례(吏隷)로서 장용영의 재화를 축낸 자가 있으면 모두 탕감해주라고 명하였다. 대왕대비가 장용영의 재화를 내탕고에 붙이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용영을 이미 혁파한 마당에 창고의 저축을 어찌 반드시 내부(內府)에 유치해 두어야 하겠습니까?"
하니, 대왕대비가 이에 모든 저축을 호조로 귀속시킬 것을 명하였다.
○ 2월. 영남 관찰사가 의령현(宜寧縣)의 창고와 민가가 불탔다고 치계하니, 상이 비변사 낭관을 보내어 위유하고, 구휼할 방도를 마련하여 농사철을 만난 백성들이 머물러 살 수 있게 하라고 감사에게 신칙하였다. 상이, 타고 남은 곡식을 민호(民戶)에 방출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탕감하도록 명하면서 이르기를,
"가련하구나, 백성들의 실정이여."
하였다.
○ 4월. 소대(召對)를 정지한 때에는 옛 규례에 따라 고사(故事)를 조목별로 써서 올리도록 명하고, 강연에서 물러간 후에 미진한 뜻을 거듭 아뢸 것이 있는 경우에도 아울러 적어 올리게 하였다.
○ 고 상신 홍명하(洪命夏)를 기천서원(沂川書院)에 배향(配享)하도록 명하였다.
○ 임인년(경종 2, 1722)에 화를 당해 죽은 김용택(金龍澤)ㆍ이희지(李喜之)ㆍ이천기(李天紀)ㆍ심상길(沈尙吉)ㆍ정인중(鄭麟重)에게 특별히 증직을 내리고 그 후손을 녹용하도록 명하였으며,궁인(宮人) 묵세(黙世)의 옛 집을 돌려주고 정문(旌門)을 옮겨 세우도록 하였다.
○ 5월. 정종대왕을 장차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하려 하였는데, 대신이 옛 전례에 따라 대왕대비전과 왕대비전에 존호를 올리기를 청하였다. 상도 누누이 우러러 청하였으나, 왕대비는 선조께서 존호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허락하지 않으면서 음식을 물리치고 울기까지 하였다. 대왕대비도 받지 않으려 하면서 언문 교지를 내리고 연석에서 신하들을 타일렀는데, 그 말뜻이 간절하였다. 대신이, 전례가 비록 중하지만 뜻을 따르는 것이 더 큰 일이라고 하여,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만을 올렸다.
○ 6월. 관상감 및 여러 도의 감사와 외방의 사관에게 신칙하여, 재이(災異)에 속하는 일은 크고 작은 것을 따지지 말고 그 즉시 보고하게 하였다.
○ 8월. 각신(閣臣)과 승지와 사관이 매년 사맹삭(四孟朔)에 봉모당(奉謨堂)을 봉심할 것을 명하였다.
○ 태묘에 부묘하였다. 예가 이루어지고 나서 하교하기를,
"하례 의식을 이미 거행하였으니, 계술하는 도리로 보아 의당 지난날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시던 거룩한 덕을 몸 받아야 하겠다."
하고, 이어 팔도의 묵은 환자곡 및 공인(貢人)의 묵은 유재(遺在), 시민(市民)의 요역(徭役), 푸줏간의 속전(贖錢)을 모두 무술년의 예대로 견감하라고 명하였다.
○ 9월. 고 태학생 윤지술(尹志述)을 사현사(四賢祠)에 배향하라고 명하였다.
○ 10월. 뇌변이 있었다. 3일 동안 반찬수를 줄이고, 대신(大臣)과 언책(言責)의 신하로 하여금 수성(修省)의 요지를 남김없이 진달하게 하였다.
○ 김씨(金氏)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인정전에 나아가 신하들의 하례를 받고 중외에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공인의 묵은 유재 및 여러 도의 증렬미(拯劣米)를 기묘년의 예대로 탕감하고 시민의 요역과 푸줏간의 속전을 경신년의 예대로 감해주도록 명하였다.
○ 승지를 보내어 고 상신 김창집(金昌集)의 사판(祠版)에 치제하였는데, 자교(慈敎)를 받든 것이었다.
○ 11월. 인정전에서 하례(賀禮)를 행하였는데, 진후(疹候)가 회복되었기 때문이었다.
국조보감 제84권
 헌종조 2
6년(경자, 1840)

○ 1월. 빈대(賓對)를 행하였다.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주상의 춘추가 14세가 되었으니 종사(宗社)의 경사가 이보다 큰 것이 없다. 그래서 묻겠는데, 산림(山林)의 선비들 중에 누구를 먼저 불러야 하겠는가?"
하니 조인영(趙寅永)이 아뢰기를,
"네 유현(儒賢)을 모두 초빙해야 합니다. 만일 정성과 예(禮)를 다한다면 결코 오지 않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열성조 이래로 연석에 산림이 참석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하유하여 좨주 송계간(宋啓榦) 및 경연관 김인근(金仁根)ㆍ성근묵(成近黙)ㆍ송내희(宋來熙)를 불렀으나, 모두 오지 않았다.
○ 조인영이, 영남의 곡식을 양서(兩西)에 운반하여 진자(賑資)에 보탤 것을 청하였다. 하교하기를,
"관서의 소문이 놀랍고 안타까워 잠들기 전에는 잠시라도 잊지 못했는데, 지금 주청하는 바를 들으니 매우 다행스럽다."
하였다.
○ 2월. 조인영이 아뢰기를,
"전부터 포세(浦稅)는 늘 쉽게 소요가 일고 궁차(宮差)들 중에 더러는 여러 모로 구실을 붙이는 경우가 많아, 품달해서 단속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설사 금년에 철저히 간민(奸民)을 적발해 낸다 하더라도 내년에는 어김없이 또 생길 것입니다. 이익이 있는 곳에 그 근원을 갑자기 금절(禁絶)할 수는 없는 법이니, 차라리 세액(稅額)을 헤아려 정해서 당해 고을로 하여금 전적으로 수납을 맡아 보게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궁세(宮稅)의 수납은 아무 탈없이 이루어지면서 포세의 폐단은 절로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니, 이에 따랐다.
○ 이전에 춘천 부사(春川府使) 이시원(李是遠)이 삼밭의 세금을 정하는 문제로 도신의 논핵을 받아 연풍현(延豐縣)에 도배되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대신(大臣)이 아뢰기를,
"그 본심을 헤아려본다면 문제의 발단은 사실 폐단을 구제하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더구나 그의 노모는 팔순이 다 된 나이로 오랜 기간 노환을 앓아 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비록 법적으로는 응당 속죄받을 수 있는 대상은 아니라 하더라도 만일 불쌍히 여겨 굽어살펴 주는 국은을 입는다면, 이는 실로 효도를 표방하는 정치 이념에 합당한 처사가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 본심이 폐단을 구제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니 용서할 만하다."
하고, 사면을 명하였다.
○ 상이 진강을 행하였다. 각신 박기수(朴綺壽)가 강독하는 글의 뜻과 관련하여 아뢰기를,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절개를 지켜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자를 구하려거든 반드시 임금이 싫은 안색을 하더라도 바른 말로 간하는 자를 취하라.' 하였습니다. 평소에 범간(犯諫)을 하지 못한다면, 환난을 당한 때에 어찌 그에게 절의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 만일 태평 시절에 이와 같은 사람을 취하여 쓸 수 있다면, 환난 또한 일어날 까닭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인재를 거두어 쓰시어 환난이 있기 전에 잘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 3월. 앞서 함경 감사 박기수(朴岐壽)가 장계하여 장진(長津)의 백성으로 강계(江界)의 칠평(七坪)에 이접(移接)한 자들이 장진에서 부역에 응할 수 있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그래서 묘당에 내려 수의하게 하고 그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평안 감사에게 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평안 감사 김난순(金蘭淳)이 장계하기를,
"옮겨온 자들은 3백여 호로 수년간 이곳에서 즐겨 해오고 있는 생업이 있으며, 이곳에 집을 짓고 호적을 올려 여기서 세금을 바치며 환곡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이들의 부역을 옮겨간다면 빠지게 된 장정들을 추가로 배정해 채울 길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예로부터 땅을 나누는 일은 있어도 백성을 나누는 일은 없었습니다. 땅은 강계에 속하는데 백성은 장진에 속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치에 벗어나는 일입니다."
하니, 평안 감사의 말을 따랐다.
○ 전조에 명하여 도천(道薦) 중에서 경행(經行)이 더욱 뛰어난 자를 선발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대신이 청하기를,
"도에서 천거하는 사람을 더욱 정밀토록 힘써 천거를 의무화하고 있는 본래의 법에 별도로 천거하는 의미도 부여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각 도에서 천거한 조희승(曹熙承) 등 15인이 모두 재행(才行)으로 소문이 난 자들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대신이 아뢰기를,
"각 도에서 천거한 자들의 전체 숫자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전조로 하여금 널리 공의(公議)를 채택하여 그 중에서 경행(經行)이 더욱 뛰어난 자들을 다시 뽑아서 아뢰게 하고, 그 나머지는 도천의 규례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전조가 하교에 응하여 이광로(李光老)ㆍ송달수(宋達洙)ㆍ성치묵(成致黙)ㆍ최림(崔琳)ㆍ이병곤(李秉坤)ㆍ엄익현(嚴翼鉉)을 선발하였다.
○ 이때 해를 거듭하여 흉년이 들어 거지가 길에 가득하였다. 이에 경조(京兆)의 오부(五部)로 하여금 거지들의 숫자를 정확하게 조사하게 하고, 다시 묘당에 지시하여 이들의 위급함을 구제하게 하고 이르기를,
"근간에 듣자하니 서울에 거지가 매우 많아 그 광경이 몹시 참담하다고 하니, 이를 생각할 때마다 비할 데 없이 불쌍하고 비통한 마음이 든다."
하였다.
○ 4월. 예조가 아뢰기를,
"영변(寧邊)의 고 판윤 이응거(李膺擧)는 그 참된 행실과 바른 지조가 변방의 모범이 되어 양 성조(兩聖朝)의 은유(恩諭)를 입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를 표장(表章)하는 도리에 있어 의당 숭장(崇獎)하는 조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증시(贈諡)할 것을 명하였다.
○ 이때 가뭄이 들었다. 상이 문득 깊은 밤에 곤의(袞衣)를 입고 후원(後苑)에 나아가 향을 피우고 친히 기도를 올렸다.
○ 5월. 조인영(趙寅永)이 아뢰기를,
"백성들의 고락은 전적으로 수령의 선정 여부에 달려 있는데, 수령을 다스리는 요체는 그들에 대한 출척(黜陟) 이상의 것이 아닙니다. 외도(外道)에 대해서는 이미 신칙한 바 있으나, 서울 각 관사(官司)의 포폄(褒貶)이 대개가 상(上)으로 고과된 것은 법제를 마련한 본래의 뜻이 아닙니다. 더구나 후일 수령이 될 자들이 바로 오늘의 낭료(郞僚)들이니 어찌 먼저 서울의 각 관사에서부터 그 평가를 살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실상을 밝히는 정사의 원칙상 의당 거듭 엄중히 하는 조치가 있어야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사의 포폄에 본래부터 중(中)과 하(下)가 없는데, 이것이 어찌 모두가 잘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대신의 말이 과연 옳다."
하였다.
○ 조인영이 또 아뢰기를,
"나라의 제도에 모든 쓰고 남은 전곡(錢穀)은 모두 별도로 저축해서 이를 '봉부동(封不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근래에 오면서 쓰고 남은 별도의 저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종전의 봉부동까지도 모조리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연유를 거슬러서 따져보면 전적으로 세입은 매년 줄어들고 용도는 날로 증가한 데 있습니다. 만일 그 불요불급한 낭비를 줄이고 출입을 절약한다면, 매년 약간씩 남겨서 봉장(封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매해의 과제로 삼아서 이름을 '별치(別置)'라 하고, 군국(軍國)에 관한 대사가 아니면 절대로 못쓰게 하되, 만일 출납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으면, 해사(該司)가 먼저 주사(籌司)에 보고하여 품달해서 시행하게 한다면, 후일에 반드시 그 효험을 볼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비록 재물이 넉넉한 때라도 용도를 절약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하물며 지금같이 나라의 재정이 궁핍한 때이겠는가? 만일 이런 저축을 할 수 있다면 참으로 다행이겠다."
하였다.
○ 이때 굶어 죽은 거지들이 많았다. 대신(大臣)이 인책하여 사직(辭職)하며 아뢰기를,
"한(漢) 나라 때의 대신들 중에는 재해로 인하여 파직된 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재해로 말하자면 어찌 지금과 같이 저렇게 굶어 죽는 경우보다 더한 것이 있겠습니까. 옛 사람은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삶의 안정을 얻지 못하면 마치 저자거리에서 매를 맞은 것처럼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신이 비록 변변치 못하나 그래도 대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하니,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지금 나라의 상하가 믿는 바는 오로지 대신에게 있다. 그 거지들의 죽음으로 말한다면 어찌 하필 대신에게만 그 책임이 있겠는가. 주상이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여 신하들의 말을 들어서 시행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경은 더욱 진력할 것을 생각하여 지치(至治)를 이루도록 하라. 이것이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 조인영이 아뢰기를,
"환곡의 포흠(逋欠)을 받아들이지 못한 데 대해서는 거기에 따른 정률(定律)이 있습니다. 가령 10분(分)의 포흠에 대해 9분을 받아들이고 1분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법부(法府)가 그 형량(刑量)을 논할 때는, 겨우 1분만 받아들이고 9분을 받아들이지 못한 자와 같은 율로 판결합니다. 왜냐하면 엄연히 법전에 실려 있어서 융통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포흠이 있는 고을의 수령을 모두 싫어하여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환포(還逋)를 못 받은 데 대한 율을, 수량(收糧)의 기한을 어겼을 때에 등급을 나누어서 감죄(勘罪)하는 예에 따라 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죄의 경중이 있으면 그에 따라 율도 분별을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 각 도에 지시하여 진전(陳田)을 개간하게 했다. 이때 기름진 땅들이 많이 묵었으나, 사람들이 이를 개간할 생각을 못해서, 백성들의 생산이 날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대신이, 각 도에 지시를 내려 널리 권해서 3년 동안 세금 2분을 면제하고 경작해 먹도록 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이런 지시가 있었던 것이다.
○ 7월. 대사헌 김홍근(金弘根)이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청하고, 이어서 성학(聖學)을 진면(陳勉)하기를,
"등대(登對)한 지 조금만 오래되면 벌써 그만 물러갔으면 하는 뜻을 보이고, 글의 내용이 조금만 길면 현저히 싫증을 내는 기색을 보입니다. 스스로 자만하여 사람을 천리 밖으로 쫓아버린다는 말이 불행하게도 가깝습니다. 이 때문에, 아직 서툴고 익숙하지 못한 신진(新進)이나, 두려워서 우선 겁부터 먹는 친근하지 못한 자들이, 자연 소신을 모두 펼쳐서 자신이 터득한 견해를 다 말하지 못하고, 위축되어 머뭇거리면서 모호하고 불분명한 듯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면 전하께서는 어김없이 이들을 거칠고 천박해서 들을 만한 말이 없다고 하면서, 마침내 깔보고 비웃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거칠고 천박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혹시라도 전하께서 이들을 가까이 불러서 부드러운 얼굴로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게 하신다면, 그들은 오히려 충분히 선현(先賢)이 훈고(訓詁)한 취지를 설명하고 선현이 토론한 내용을 해설하여, 성심(聖心)을 계옥(啓沃)하고 성총(聖聰)을 개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완전히 현명하지는 못하더라도, 역시 현자(賢者)의 무리입니다."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을 내려 가납하고 치사를 윤허하지 않았다.
○ 9월. 남문 밖의 염상(鹽商)이 의궁(義宮)에 의탁하여 주인(主人)의 명목을 새로 만들어서 체지(帖紙)를 발급하여 구문(口文)을 모조리 거두어서 그 이익을 독점하였다. 향민(鄕民)이 그 원통함을 호소하므로, 형조에 명하여 궁속(宮屬)과 체지를 받은 자를 형배(刑配)하게 하고 대신에게 이르기를,
"이는 내가 평소에 가장 가증스러워하던 바이다. 염상(鹽商)과 결탁하여 이익을 다투는 것은 더욱 수치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좌경(坐更)에 대한 구식(舊式)을 다시 분명히 하여 실시하였다.
○ 조인영이 아뢰기를,
"고명(誥命)의 체례(體例)는 본래 간결하고 엄밀함을 위주로 하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오로지 번문 욕례만을 일삼아, 지금 대찬(大撰)하는 자들은 어쩔 수 없이 전례를 갖추어 이를 모방하면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받는 이가 이를 부족하게 여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글의 체재가 너절함을 면치 못하니, 이것이 어찌 고명이 간결하고 엄밀해야 하는 본래의 뜻이겠습니까. 만일 이러한 관례를 고치게 된다면, 그 순박함으로 다시 돌아가는 도리에 있어서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대찬하는 고명을 10구(句)를 넘지 않게 하여 이를 정식으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 형조 판서 권돈인(權敦仁)이 아뢰기를,
"의령현(宜寧縣)의 여인이 억울함이 있다 하여 남산에 불을 놓았으니 죄가 사형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그 사정을 알아보니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한 것이므로 법전에서 말하는 방화자(放火者)와는 차이가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사체를 모르는 시골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할 경우 금산(禁山)에 불을 지르는 예가 흔히 있음을 생각할 때, 전적으로 방화율(放火律)로 감단(勘斷)하게 되면 법 적용이 사실과 맞지 않는다는 한탄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대신에게 물으니, 조인영이 아뢰기를,
"이것은 시골 구석의 어리석은 백성이 법률을 몰라서 생긴 일입니다. 더구나 그것이 여인인 경우이겠습니까? 곧장 형조에서 형징(刑懲)한 뒤 효유하여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이에 따랐다. 이와 관련하여 권돈인이 율문(律文)을 개정할 것을 청하였는데, 대신이 율문은 가벼이 고칠 수가 없는 것이고 또 어리석은 백성이 쉽게 범행할 염려가 있다 하여 중지되었다.
○ 상이 소대를 행하였다. 시독관 이정리(李正履)가 아뢰기를,
"여러 해 흉년이 들다가 이제 다행이 풍년을 만나게 되어 백성들이 장차 태평세월의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향리의 민정을 들어보니 백성들은 풍년을 당하여 그 고통이 도리어 흉년보다 심하다고들 합니다. 여러 해 동안 밀린 환곡과 미납된 신포(身布), 그리고 유망(流亡)한 이웃의 세역(稅役)까지 한꺼번에 몰아쳐서 성화같이 독촉하니, 한 해 동안 지은 농사를 모조리 관에 바치고 채 한 달 먹을 양식도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니 흉년에 지친 농민들이 장차 무슨 방법으로 그 생명을 보존하여 태평세월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관장(官長)이라고 하는 자는, 그저 기한에 대도록 독촉만 하여, 혹시라도 상공(上供)이 뒤처질까 두려워하는 것이 그 직분입니다. 조금이라도 이를 감면하거나 연기하고 늦추는 일에 대해서는 감히 의견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로지 백성들의 부모이신 임금에게 달린 일이니, 백성들의 형편을 깊이 살펴서 법에 정한 바 이외에 항상 이를 너그럽게 하고 늦추어 주어서, 감면의 혜택을 베풀기도 하고 납기를 연기하는 조처도 내리고 한다면, 백성들이 생명을 보전하여 풍년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1분(分)을 너그럽게 하면 백성들이 그 1분의 혜택을 받는다.' 하였습니다. 이 말은 전하께서 의당 깊이 유념하셔야 할 말로서 신이 삼가 바라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 10월. 천둥이 있었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이것은 재변이다. 하늘이 경고하는 것은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인바, 전적으로 이 미망인이 정령(政令)을 진려(振勵)하지 못하는 데 연유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부터 3일 간 감선하여 조금이라도 화를 두려워하는 성의를 표하겠다."
하였으며, 상은 정전을 피하고 3일 간 감선하고 이르기를,
"수성(修省)하는 도리에 있어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조처가 있어야겠다."
하였다. 대신ㆍ정원ㆍ삼사가 글을 올려 진면(陳勉)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을 내려 가납하였다.
○ 상이 소대를 행하였다.《사략(史略)》의 노중련(魯仲蓮)의 이야기를 강하였는데, 이정리(李正履)가 아뢰기를,
"신은 우리나라 사람들도 노중련을 능가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떤 사람인가?"
하니 이정리가 대답하기를,
"삼학사(三學士)와 선정신(先正臣) 김상헌(金尙憲)은 심양(瀋陽)에서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시종 오랑캐에게 굽히지 않았으며, 이확(李廓)과 나덕헌(羅德憲)은 청인(淸人)이 개원(改元)하는 날에 절개를 세웠는데, 중국 사람들이《조선사신불굴도(朝鮮史臣不屈圖)》를 그림으로 새겨서 이를 천하에 퍼뜨렸습니다. 노중련은 진(秦) 나라를 황제로 받들려고 할 당시에 한 마디 말로 신원연(新垣衍)과 변론하여 힐책한 것뿐이지만, 지금 말한 몇몇 신하는 도거(刀鋸)와 정확(鼎鑊)을 앞에 하고 시호(豺虎)와 낭웅(狼熊)의 무리 속에서도 능히 이와 같은 대절(大節)을 세웠으니, 그만하면 노중련을 능가한다고 말할 만합니다."
하였다.
○ 전결(田結)을 농간하는 자는 원래의 율(律) 이외에 금고(禁錮)를 추가하여 실시할 것을 명하고, 이를 정식으로 삼았다.
○ 11월. 강릉부(江陵府)에 명하여 영서(嶺西)의 허결(虛結)에 대해 3년 간 세금을 정지하였다. 부사 이원조(李源祚)의 소청(疏請)에 따른 것이다.
○ 상이 소대를 행하였다.《강목(綱目)》을 읽다가 제(齊) 나라 위왕(威王)이 아대부(阿大夫)를 삶아 죽인 사건에 이르러, 옥당 이정리(李正履)가 아뢰기를,
"신은 제 나라의 국운이 오래가지 못한 것은 실로 아대부를 삶아 죽인 일에 연유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상이 그 이유를 물으니, 이정리가 아뢰기를,
"옛날의 성왕(聖王)은 오형(五刑)의 제도를 만들어서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차마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를 시행하여 법외(法外)의 형벌을 만들지 않았기에 오랫동안 나라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대부가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었다면 법을 적용하여 사형을 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어떻게 법외(法外)의 형벌을 써서 솥에다 삶는단 말입니까?
사람이 짐승의 고기를 먹음에 있어서도 차마 그 비명소리를 듣고는 그 고기를 먹을 수가 없으므로, 푸줏간을 멀리하여 그 비명소리를 듣지 않음으로써 그 차마 못하는 마음을 온전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仁)의 도리입니다. 이제 아대부를 솥에다 삶았으니 비록 그 고기를 먹지 않았더라도 사람을 소나 양처럼 본 것입니다. 사람을 짐승처럼 본다면 인도(人道)는 멸망하고 천리(天理)는 손상을 입습니다. 어찌 이런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탐악(貪惡)을 징치(懲治)함에는 잔혹한 형벌이 아니더라도 적절한 법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어떤 것인가?"
하니 이정리가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원래 인후(仁厚)의 도리로 나라를 세웠으므로, 교화를 우선으로 하고 형벌은 뒤로 합니다. 세상에 혹시 탐관오리가 있어서 청의(淸議)의 용납을 받지 못하게 되면 대헌(臺憲)의 관원이 공의(公議)를 자세히 살펴서 먹으로 그 사람이 집에 가서 그 문에다 칠을 합니다. 그러면 그 집안은 마침내 벼슬길이 막혀 문을 걸어 잠그고 감히 바깥에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이 법이 어찌 형벌보다 엄하지 않겠습니까. 이 칠문(漆門)하는 법이 시행되지 않은 지는 오래되었으나, 사헌부의 하속(下屬)을 아직도 '묵척(墨尺)'이란 이름으로 부릅니다. 묵척은 먹병을 들고 대관(臺官)을 따라다니면서 먹칠을 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나라의 법을 세우고 풍속을 교화하는 아름다움은 삼대(三代)와 더불어 함께 일컬을 만한 것으로서 한당(漢唐) 이후와는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 저포전(苧布廛)에 불이 나서 진사전(眞絲廛)ㆍ망문(望門)ㆍ상전(床廛) 및 입전(立廛)이 연달아 타버렸다. 유사(有司)에 명하여 이들을 안도(安堵)시킬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보고 공화(公貨)를 빌려 주어 10년 동안 분할 상환하게 했으며 요역(徭役)과 세공(歲貢)을 탕감해 주고 이르기를,
"저자의 백성들은 서울 백성들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진휼함에 있어서 더욱 특별한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강릉(江陵)ㆍ삼척(三陟)ㆍ양양(襄陽)ㆍ간성(杆城)ㆍ고성(高城)ㆍ정선(旌善)ㆍ울진(蔚珍) 등의 고을에 홍수가 나서 무너지고 떠내려간 민가가 3백 7호였다. 강원 감사 이광정(李光正)이 장계를 올려 그 실상을 보고하니, 하교하기를,
"때 아닌 비로 무너지고 떠내려간 민가가 이처럼 많으니 참으로 너무나 놀랍고 안타깝다. 원래의 구제 조치 외에 별도로 도와주어 즉시 집을 지어 주거를 정할 수 있도록 해서,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살 곳을 잃고 방황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내년 신축년은 바로 대왕대비가 왕비에 책봉된 지 40년이 되는 해이므로, 옥책(玉冊)을 올리고 헌수하는 잔치를 열고자 했으나, 대왕대비가 겸양의 뜻을 굽히지 않으며 끝내 따르지 않았다. 대신과 예조 당상이 번갈아 청하였지만 되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자성(慈聖)께서 겸양하시는 뜻을 받들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는 더없이 큰 경사이니 포고하는 의식만은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 12월. 대왕대비가 시임 및 원임 대신과 국구(國舅)를 불러서 이르기를,
"오늘 수렴청정을 그만두기로 한 조치는 당초 마지못해 시작했던 날에 이미 마음에 결정을 보았던 것으로, 오늘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하루가 마치 1년과도 같았소. 이제 주상은 춘추가 한창이고 성학(聖學)이 숙성하여 번거로운 만기(萬機)에 응하여 나의 당초의 바람을 이룰 수 있게 되었소."
하고, 언교(諺敎)를 내리기를.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학문에 힘쓰고 어진이를 친히 하여 우리 선왕(先王)의 가법(家法)을 지켜가도록 주상은 힘쓰시오. 신하들은 서로 공경하고 도와서 임금이 과실이 없도록 인도하여 우리의 영원한 왕업(王業)을 보필해 줄 것을 대신과 여러 신하들에게 마음속 깊이 바라며 오늘부터 수렴청정을 그만두겠소."
하였다. 상이 발 앞에서 사양하기를,
"신이 아직 어린데 어떻게 모든 국사를 친히 총괄하겠습니까?"
하니,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당연한 도리인데, 더구나 이와 같은 대경대법(大經大法)에 관한 일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소? 내가 주상에게 바라는 것이 어찌 별다른 것이 있겠소? 다만 요임금이 되고 순임금이 되어 주는 것일 뿐이오. 주상이 나를 받들어 따르는 일 또한 별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요임금이 되고 순임금이 되어 주는 것일 뿐이오. 만약 이와 같이 된다면 나는 장차 여한이 없을 것이니, 이로써 권면하는 바이오."
하고 이어서 대신에게 이르기를,
"오늘부터 수렴청정을 그만둔 뒤로는 다시 경들을 대할 수가 없을 것이니, 성궁(聖躬)을 보도하는 모든 도리에 있어 경들은 반드시 더욱더 삼가는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오."
하였다.

[주D-001]좌경(座更) : 궁중의 보루각(報漏閣)에서 북과 징을 쳐서 시각을 알리던 일. 하룻밤을 5경(更)으로 나누고 초경과 5경은 3점(點), 2·3·4경은 5점으로 나누어, 경에는 북을 점에는 징을 그 숫자만큼 쳤음.
국조보감 제31권
 선조조 8
25년(임진, 1592)

○ 2월. 대장(大將)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을 파견하여 각 도의 병기 시설을 순시하도록 하였다. 이일은 양호(兩湖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임)로 가고, 신립은 경기(京畿)와 해서(海西)로 갔다가 한 달 뒤에 돌아왔다.
○ 4월. 14일 왜적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침략해 와서 부산진(釜山鎭)을 함락시켰는데 첨사(僉使) 정발(鄭撥)이 전사하고, 이어 동래부(東萊府)가 함락되면서 부사 송상현(宋象賢)도 전사하였다. 평수길(平秀吉)이 우리나라가 그들에게 명 나라를 공경하는 길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침내 여러 섬의 군사 20만을 징발하여 직접 거느리고 일기도(一歧島)까지 이르러 평수가(平秀家) 등 36명의 장수에게 나누어 거느리게 하고, 대마도주 평의지(平義智)와 평조신(平調信)ㆍ행장(行長)ㆍ현소(玄蘇)를 향도로 삼아 4~5만 척의 배로 바다를 뒤덮고 와 이달 13일 새벽 안개를 틈타 바다를 건너왔다.
부산 첨사 정발은 전선(戰船)에다 구멍을 뚫어 가라앉히게 하고 군사와 백성들을 모두 거느리고 성가퀴를 지켰다. 이튿날 새벽에 적이 성을 백겹으로 에워싸고 서쪽 성 밖의 높은 곳에 올라가 포(砲)를 비오듯 쏘아대었다. 정발이 서문(西門)을 지키면서 한참 동안 대항하여 싸웠는데, 적의 무리가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그러다가 정발이 화살이 다 떨어져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자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동래 부사 송상현은 지역 안의 주민과 군사 그리고 이웃 고을의 군사를 불러 모두 데리고 성에 들어가 나누어 지켰다. 병사 이각(李珏)도 병영(兵營)에서 달려왔으나 조금 지나서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핑계대기를 "나는 대장이니 외부에 있으면서 협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즉시 나가서 소산역(蘇山驛)에 진을 쳤으므로 즉시 포위를 당하였다. 상현이 성의 남문에 올라가 전투를 독려했으나 반나절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상현은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입고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적이 마침내 모여들어 생포하려고 하자 상현이 발로 걷어차면서 항거하다가 마침내 해를 입었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고 할 때에 상현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손수 부채에다 "달무리 끼고 포위당한 외로운 성에 대진의 구원병은 오지를 않네.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은혜는 가볍게 되었어라.[孤城月暈 大鎭不救 君臣義重 父子恩輕]"고 써서 집안 종에게 주어 그의 아비 복흥(復興)에게 돌아가 보고하게 하였다. 죽은 뒤에 평조신이 보고서 탄식하며 시체를 관(棺)에 넣어 성밖에 묻어주고 푯말[標]을 세워 식별하게 하였다.
갑오년(선조 27, 1594)에 병사(兵使) 김응서(金應瑞)가 울산(蔚山)에서 청정(淸正)을 만났을 때 청정이 그가 의롭게 죽은 상황을 갖추어 말하고, 또 집안 사람이 시체를 거두어 반장(返葬)하도록 허락하는 한편 경내를 벗어날 때까지 호위하여 주었다. 그 뒤 이조 참판에 추증하고 그의 아들 중 한 사람에게는 벼슬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서인(庶人)인 신여로(申汝櫓)가 상현을 따랐었는데 상현이 돌려보냈었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서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난리를 당하여 은혜를 저버릴 수 없다." 하고 도로 성으로 들어가 함께 죽었다고 한다.
○ 적에 대한 보고가 이르자 대신과 비변사가 빈청(賓廳)에 모여,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삼아 중로(中路)에 내려보내고,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로 삼아 좌도(左道)에 내려보내고,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서로(西路)에 내려보내고,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竹嶺)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鳥嶺)을 지키게 하고, 전 강계 부사(江界府使) 변응성(邊應星)을 기복(起復)시켜 경주 부윤으로 삼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모두 현재 소유한 병력이 없어 단지 스스로 군관(軍官)을 뽑아 대동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함락되고 패배하였다는 보고가 잇따라 이르니 도성의 인심이 크게 흔들렸다. 당시 사방에서 군사를 징발하였으나 아직 이르지 않으므로 이일이 장기(壯騎)와 군관 60여 인을 대동하고 길을 떠나 4천여 명의 군사를 수습하고 길을 재촉하여 달려갔다.
대간이, 대신(大臣)을 체찰사(體察使)로 삼아 여러 장수들을 단속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청하였다. 이산해(李山海)가 유성룡(柳成龍)을 보낼 것을 청하니 따랐고, 김응남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성룡이 신립(申砬)에게 계책을 물으니, 신립이 말하기를,
"이일이 열세한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갔으나 후속 병력이 없다. 체찰사가 내려간다 하더라도 전투하는 장수가 아니니 무장(武將)을 급히 먼저 보내 이일을 지원하도록 하여야 한다."
하였다. 이에 성룡이 김응남과 뵙기를 청하여 신립을 먼저 보내기를 청하자, 상이 신립을 불러 하문하니 신립도 사양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삼았다. 신립이 떠나려 할 때에 상이 불러 보고 보검(寶劍)을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일 이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참(斬)하라."
하였다. 당시에 상이 김여물(金汝岉)의 재능과 용맹을 아까워하여 방어해야 할 긴요한 곳에 정배(定配)시켜 공을 세워 보답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김여물이 의주 목사로 있으면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었다.- 여물이 출옥(出獄)하자 성룡이 불러 계책을 의논해 보고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성룡이 아뢰기를,
"신이 이번에 여물을 처음 보고 병사(兵事)를 의논해 보니, 무용(武勇)과 재략(才略)이 남보다 뛰어날 뿐만이 아닙니다. 막중(幕中)에 두고 계책을 세우는데 자문하도록 하였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신립이 또 청하기를,
"신이 일찍이 서로(西路)의 진영을 맡았을 적에 여물을 알았는데 재능과 용맹뿐만이 아니라 충의(忠義)의 인사였습니다. 신에게 소속시켜 먼저 가게 했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또 따랐다. 신립이 거느린 무리는 도성의 무사(武士)ㆍ재관(材官)과 외사(外司)의 서류(庶流)ㆍ한량인(閑良人)으로 활을 잘 쏘는 자 수십 명이었다. 조정의 관원으로 하여금 각기 전마(戰馬) 한 필씩을 내어 돕도록 하였다. 이들이 인근 고을을 순행하며 군사를 수합 하였는데 겨우 80명이었다.
○ 왜적이 상주(尙州)에 침입했는데, 이일의 군대가 패배하여 돌아왔다.
종사관(從事官)인 홍문관 교리 박지(朴篪)ㆍ윤섬(尹暹), 방어사 종사관인 병조 좌랑 이경류(李慶流), 판관 권길(權吉)이 모두 죽었다. 이일이 문경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 대죄(待罪)하고, 다시 조령을 넘어 신립의 군진으로 향하였다.
○ 적병이 충주(忠州)에 침입하였는데 신립이 패하여 전사하였다. 처음에 신립이 군사를 단월역(丹月驛)에 주둔시키고 몇 사람만 데리고 조령에 달려가서 형세를 살펴보았다.
김여물이 말하기를,
"저들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그 예봉과 직접 맞부딪칠 수는 없습니다. 이곳의 험준한 요새를 지키면서 방어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하고, 또 높은 언덕을 점거하여 역습으로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신립이 모두 따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 지역은 기마병(騎馬兵)을 활용할 수 없으니 들판에서 한바탕 싸우는 것이 적합하다."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장계를 올려 이일을 용서하여 종군(從軍)하게 해서 공로를 세우도록 청하고 드디어 군사를 인솔하여 도로 충주성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여물은 틀림없이 패할 것을 알고 종을 보내어 아들 김류(金瑬)에게 편지를 부치기를,
"삼도(三道)의 군사를 징집하였으나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남아(男兒)가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 웅대한 뜻이 재가 되고 마니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할 뿐이다."
하였다. 신립이 군사를 인솔하여 탄금대(彈琴臺)에 -충주 읍내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있다.- 나가 주둔하여 배수진을 쳤는데, 이 달 27일에 적이 이미 조령을 넘어 단월역에 이르렀다.
이튿날 새벽에 적병이 길을 나누어 대진(大陣)은 곧바로 충주성으로 들어가고, 좌군(左軍)은 달천(達川) 강변을 따라 내려오고, 우군(右軍)은 산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상류를 따라 강을 건넜는데 병기가 햇빛에 번쩍이고 포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신립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으며, 적이 벌써 사면으로 포위하므로 사람들이 다투어 물에 빠져 흘러가는 시체가 강을 덮을 정도였다.
신립이 여물과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 적 수십 명을 죽인 뒤에 모두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일은 사잇길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가 왜적 두세 명을 만나 한 명을 쏘아 죽여 수급(首級)을 가지고 강을 건너서 치계(馳啓)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처음으로 신립이 패하여 죽은 것을 알았는데, 병조에서는 마침내 이일의 죄를 용서하였다.
○ 이조 판서 이원익(李元翼)을 평안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최흥원(崔興源)을 황해ㆍ경기도 도순찰사로 삼아 모두 당일에 떠나도록 하였는데, 이는 장차 상이 서쪽으로 떠날 것을 의논할 때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원익은 일찍이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지냈고 흥원은 황해 감사를 지냈는데, 모두 은혜를 베푸는 정치를 하여 민심이 귀의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먼저 보내 어루만져 달램으로써 순행(巡幸)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 이 달 29일 저녁에 상이 충주에서 패전한 보고를 듣고 동상(東廂)에 나아가 서쪽으로 떠날 계획을 의결하였다. 대신들이 아뢰기를,
"일의 형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잠시 상께서 평양으로 가셔서 명 나라에 군사를 청해 회복을 도모해야 합니다."
하였다. 장령 권협(權悏)이 뵙기를 청하여 경성(京城)을 지킬 것을 청했는데, 유성룡이 아뢰기를,
"권협의 말이 무척 충성스럽기는 하나 일의 형세가 어쩔 수 없습니다."
하고, 이어 왕자를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 근왕병(勤王兵)을 불러 모아 회복을 도모하게 하고 세자는 어가를 따라가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 이달 그믐에 상이 서쪽으로 떠났다. 상이 일단 서쪽으로 의논을 결정하자 대궐 안의 하리와 노복들이 떠들다가 물러가더니 조금 뒤에는 위사(衛士)들도 모두 흩어졌으며, 시각을 알리는 북소리도 끊어졌다. 밤이 깊어서야 이일(李鎰)의 장계가 비로소 도착하였는데, 적이 금명간에 도성에 이를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장계가 들어온 뒤 얼마쯤 있다가 상이 돈의문(敦義門)을 나가 서쪽으로 떠났는데, 사관(祠官)으로 하여금 종묘와 사직의 신주판[主版]을 받들고 앞서게 하고 세자가 그 뒤를 따랐으며 어가가 나간 뒤 왕자 신성군 후(信城君珝)와 정원군 부(定遠君琈)가 따랐다. 상은 융복(戎服)으로 말을 타고 왕비(王妃)는 걸어서 인화문(仁和門)을 나왔는데, 수십 명의 시녀가 따랐다. 도승지 이항복이 촛불을 잡고 앞을 인도하니 왕비가 성명을 물어서 알고 위로하며 권면하였다.
○ 5월. 평명(平明)에 어가가 모래재[沙峴]를 넘었다. 이날 많은 비가 내렸는데 경기 감사 권징(權徵)이 뒤따라 와서 입고 있던 우의(雨衣)를 바쳤다. 일행이 비를 맞으며 벽제역(碧蹄驛)에 이르러 윤두수(尹斗壽)를 불러 차고 있던 칼을 풀어 그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경(卿)의 형제는 나를 떠나지 말라."
하였다.
상이 동파관(東坡館)을 출발하였다. 이날 아침에 상이 대신 이산해와 유성룡을 불러 이르기를,
"이모(李某)야 유모(柳某)야!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꺼리거나 숨기지 말고 속에 있는 생각을 털어놓고 말하라."
하고, 또 윤두수를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그에게 하문하니, 여러 신하들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상이 이항복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승지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어가를 의주(義州)에 머물게 했다가 만약 형세와 힘이 궁하여 팔도가 모두 함락된다면 바로 명 나라에 가서 호소할 수 있습니다."
하자, 두수가 아뢰기를,
"북도(北道)는 군사와 말이 날래고 굳세며 함흥(咸興)과 경성(鏡城)은 모두 천연적인 요새로 믿을 만하니 재를 넘어 북쪽으로 가는 것이 좋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의 말이 어떠한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안 됩니다. 어가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으로 가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하니, 성룡이 안 된다고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
"신이 말한 것은 곧장 압록강을 건너자는 것이 아니라 극단의 경우를 두고 한 말입니다."
하고, 성룡과 반복하여 논쟁하였는데, 성룡이 말하기를,
"지금 관동과 관북 제도(諸道)가 그대로 있고 호남에서 충의로운 인사들이 곧 벌떼처럼 일어날 텐데 어떻게 이런 일을 갑자기 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산해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성룡이 물러나와 항복을 책망하며 말하기를,
"어떻게 경솔히 나라를 버리자는 의논을 내놓는가. 자네가 비록 길가에서 임금을 따라 죽더라도 궁녀나 내시의 충성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이 한번 퍼지면 인심이 와해(瓦解)될 것이니 누가 수습할 수 있겠는가."
하니. 항복이 사과하였다.
상이 개성 남문루(南門樓)에 나아가 백성들을 모아 타이르고 유지를 내려 각각 마음에 품은 바를 진술하도록 하였다. 부로(父老)들이 앞으로 나와 정 정승(鄭政丞)을 부르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는데, 정철(鄭澈)을 가리킨 것이었다. 상이 알았다 하고 즉시 정철을 석방하도록 명하면서 전지를 내리기를,
"경(卿)의 충효 대절을 알고 있으니 속히 행재소(行在所)로 오라."
하였다. 이로부터 기축년(선조 22, 1589)ㆍ신묘년(선조 24, 1591)에 처벌받은 사람들이 모두 석방되어 돌아와 서용(敍用)되었다.
○ 이달 3일에 왜적이 도성에 침입하자 유도대장 이양원(李陽元),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도망갔다. 당초 적은 동래(東萊)에서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한 길은 중도(中道)로 양산(梁山)ㆍ밀양(密陽)ㆍ청도(淸道)ㆍ대구(大丘)ㆍ인동(仁同)ㆍ선산(善山)을 경유하여 상주(尙州)에 이르러 이일(李鎰)의 군사를 패배시켰고, 한 길은 좌도(左道)로 장기(長鬐)ㆍ기장(機張)을 거쳐 좌병영(左兵營)인 울산(蔚山), 경주(慶州)ㆍ영천(永川)ㆍ신령(新寧)ㆍ의흥(義興)ㆍ군위(軍威)ㆍ비안(比安)을 함락하고 용궁(龍宮)의 하풍진(河豐津)을 건너 문경(聞慶)으로 진출해서 중로의 군사와 합류한 다음 조령(鳥嶺)을 넘어 충주(忠州)로 침입하였다. 이들은 다시 충주에서 두 갈래의 길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여주(驪州)로 가서 강을 건너 양근(楊根)을 경유하여 용진(龍津)을 건너 경성의 동로(東路)로 진출하였고, 하나는 죽산(竹山)과 용인(龍仁) 쪽으로 나아가 한강(漢江)에 이르렀다. 또 한 길은 김해(金海)를 경유하여 우도(右道)로 진출, 성주(星州) 무계현(茂溪縣)을 따라 강을 건너 지례(知禮)ㆍ금산(金山)을 거쳐 추풍령(秋風嶺)을 넘어서 충청도 영동현(永同縣)으로 진출, 청주(淸州)로 침입하였다가 방향을 바꾸어 경기로 향했다.
왜적의 정기(旌旗)와 검극(劍戟)은 천 리에 끊이지 않고 포성(砲聲)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들은 10리나 50~60리마다 험한 곳을 점령하여 진영을 설치하고 밤이면 횃불로 서로 응하였다. 적이 한강 남쪽에 이르자 도원수 김명원이 군사 1천여 명을 이끌고 제천정(濟川亭)에 주둔하였는데 적이 쏜 포환(砲丸)이 정자 위에 어지러이 떨어지자, 명원은 감히 적에게 항거하지 못하고 군기(軍器)를 모두 강에다 넣어버린 뒤에 행재소로 후퇴하여 도망하였는데, 적이 마침내 강을 건넜다.
○ 도원수 김명원에게 임진(臨津)을 지키도록 명하였다. 명원이 임진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 적의 상황을 말하니, 상이 김명원에게 군사가 없었다는 것을 참작해서 그가 후퇴한 죄를 묻지 않고 다시 경기와 해서(海西)의 군사를 징발하여 임진을 지키도록 명한 것이다. 남병사(南兵使) 신할(申硈)이 막 체직(遞職)되어 돌아왔으므로 수어사(守禦使)로 삼아 함께 임진을 지키면서 서쪽으로 오는 길을 막도록 명하였는데, 유극량(劉克良)도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예속되었다.
○ 상이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는 교서를 팔도에 내리고 사신을 보내어 의병(義
兵)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 상이 개성에 머문 지 이틀 만에 서로(西路)로 출발하여 금교역(金郊驛)에 머물렀다. 이날 적이 이미 도성에 침입하여 서쪽으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상이 다급하여 재촉해서 떠났다. 당시 종묘 사직의 위패를 개성의 목청전(穆淸殿)에 봉안(奉安)했다가 그대로 묻게 하였는데, 상이 보산참(寶山站)에 이르렀을 때 윤두수가 그 사실을 듣고 속히 예조 참의를 보내어 받들고 오도록 청하였다.
○ 상이 평양(平壤)에 이르렀다. 호종한 신하들에게 직질(職秩)을 차등 있게 올리도록 명하고, 또 하교하였다.
"이조 참판 이항복은 마음이 곧고 신의가 있으며 물외(物外)에 초연한 인물이니, 위급한 상황에서는 더욱 크게 기용하는 것이 타당하다. 어떻게 자급(資級) 때문에 구애받을 수 있겠는가. 판서에 궐원이 생기면 발탁해서 보임하거나 다른 중책을 맡기는 것도 좋을 것이다. 경들은 나의 뜻을 알라."
○ 신각(申恪)은 처음에 부원수로서 김명원(金命元)을 따라 한강에서 방어했었는데, 명원의 군사가 패하자 이양원(李陽元)을 따라 양주(楊州)에 와서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였다. 마침 응원하러 온 함경 병사(咸鏡兵使) 이혼(李渾)을 만나 군사를 합쳐 진을 결성했는데, 여염(閭閻)에 흩어져 약탈하는 왜병을 양주의 개재[蟹嶺]에서 요격(邀擊)하여 패배시키고 70급(級)을 참수하였다. 왜적이 우리나라를 침범한 뒤로 처음 이런 승전이 있었으므로 원근에서 듣고 의기가 고무되었다. 그런데 이양원은 당시 산골짜기에 있었으므로 상황의 보고가 끊겼고, 김명원은 신각이 양원을 따른다고 핑계대고 도망쳤다는 것으로 장계를 올려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유홍(兪泓)이 그대로 믿고서 선전관을 보내어 현장에서 베도록 청하였다. 선전관이 떠나고 난 뒤에 승리했다는 보고가 이르렀으므로 상이 뒤따라 선전관을 보내어 중지하도록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 적이 처음 도성에 침입했을 때 궁궐은 모두 타버리고 종묘만 남아 있었으므로 왜의 대장 평수가(平秀家)가 그곳에 거처하였는데, 밤중에 괴이한 일이 많고 따르던 졸개 중에 갑자기 죽는 자도 생겼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조선 종묘에 신령(神靈)이 있다."고 하자, 평수가가 두려워하여 마침내 종묘를 태워버리고 남방(南坊)에 -바로 남별궁(南別宮)이다.- 이거(移居)하였다.
○ 성절사(聖節使) 유몽정(柳夢鼎)이 먼저 떠났다. 몽정이 성절사로 임명되어 미처 출발하기도 전에 상이 서쪽으로 떠났으므로 몽정은 단지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을 가지고 역관(譯官) 등과 -방물(方物)은 봉하지 못했다.- 어가를 따라 평양에 이르렀다. 대신들은 고급사신(告急使臣)을 보내야 한다며 성절사는 보내지 말자고 청하였다. 그런데 마침 한응인(韓應寅)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성절사를 보내지 않으면 명 나라에서 틀림없이 의심할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이에 다시 의논하여 보냈다. 상이 몽정을 직접 대하여 유시하기를,
"연경에 이르거든 그대가 먼저 중국으로 들어가겠다는 의사를 말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몽정이 아뢰기를,
"중국에서는 우리나라가 적을 친하게 대한다고 의심하는데 만약 원조를 청하지 않고 들어가겠다고 먼저 청한다면 의혹만 더 불러일으킬 듯싶습니다. 모름지기 왜변(倭變)이 일어난 까닭을 낱낱이 열거하여 요동의 진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구원해 줄 것을 청한 다음에 들어가겠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하자, 상이 그렇게 여기고 자문을 갖추어 보냈다.
○ 한응인(韓應寅)을 제도순찰사(諸道巡察使)로 삼아 임진(壬辰)에 나아가 주둔하게 하였다. 적이 도성에 들어와서 며칠 동안 군사를 휴식시켰는데, 도로에 와전되기를 "왜인들이 멀리서 오느라 발이 부르트고 피곤해 쓰러져 있으니 몽둥이를 가지고도 격퇴할 수 있다." 하였다. 행조(行朝)에서 이 말을 듣고 믿은 나머지 김명원(金命元)이 한강을 지키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고 있었으므로 명원을 재촉하여 임진을 건너 나아가 싸워 도성을 회복하도록 하였으나 명원이 감히 하지 못하였다.
때마침 한응인이 주청사(奏請使)로 연경에서 돌아왔고 서계(西界)의 토병(土兵) 1천여 명도 도착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오랑캐들을 상대해 본 정예병(精銳兵)이었으므로 마침내 응인을 장수로 삼아 거느리고 임진에 나아가 주둔하면서 기회를 보아 진격하도록 하고, 또 명원의 통제를 받지 말도록 하였다. 그러자 응인은 전혀 의심하지 않고 파주(坡州)를 지나면서 명원을 만나지 않고 임진(臨津)의 입구에 달려가 진격할 것을 재촉하였다.
○ 신할(申硈) 등이 임진강을 건너 왜적을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여 죽자 도원수 김명원과 제도순찰사 한응인 등이 임진을 버리고 달아났다.
당초 명원이 여러 장수들을 배치하여 신할ㆍ유극량(劉克良)ㆍ이빈(李薲)ㆍ이천(李薦)ㆍ변기(邊璣) 등에게 임진의 모든 여울을 지키도록 하였으므로 방비가 점차 완비되었다. 그래서 적병이 남쪽 언덕에 도착하여 서로 버틴 지 8~9일이 지나도록 건너지 못하였다. 하루는 적이 여막을 불태우고 퇴각하여 도망하는 모양을 보이며 아군을 유인하였다. 신할은 적이 실제로 퇴각하여 도망하는 줄로만 알고 강을 건너 추격하려고 하였다. 유극량은 나이가 많고 군사에 노련하였으므로 경솔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극력 말하자, 신할이 그를 참하려고 하니 극량이 말하기를 "내가 소싯적부터 종군(從軍)하였는데 어찌 죽음을 피할 마음이 있겠는가. 그렇게 말한 까닭은 국사(國事)를 그르칠까 싶어서이다." 하고, 분개해서 나가 그의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건너가서 적을 만나 순라하는 기병 몇 명을 참하였다.
신할의 군사가 모두 건넜는데 적은 먼저 산 뒤에 군사를 매복시키고는 산을 의지하여 진을 정돈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신할이 진에 나아가 핍박하니, 적이 일시에 모두 일어나 총과 칼로 접전을 벌이자 여러 군사가 마침내 허물어졌다. 극량이 신할을 부르며 진을 거두어 퇴각하려고 하였으나 신할이 응하지 않고 끝내 죽었다. 극량이 말에서 내려 땅에 앉아 말하기를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이다." 하고 활을 당기어 적을 쏘다가 화살이 떨어지자 죽었다. 군사들이 달아나 강 언덕에 이르렀는데 적이 뒤따르면서 시살하였다. 혹 목을 빼어 칼을 받는 자도 있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다. 여울을 지키던 여러 군사들이 모두 흩어졌으며 명원과 응인은 물러나 행재소로 나아갔다. 마침내 적이 강을 건너 서쪽으로 향하였다.
○ 전라 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이 경상도에 구원하러 가서 거제(巨濟) 앞바다에서 왜병을 크게 격파하였다. 왜병들이 바다를 건너오자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은 대적할 수 없는 형세임을 알고 전함(戰艦)과 전구(戰具)를 모두 물에 침몰시키고 수군 1만여 명을 해산시키고 나서 혼자 옥포 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 영등포 만호(永登浦萬戶) 우치적(禹致績)과 남해현(南海縣) 앞에 머물면서 육지를 찾아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운룡이 항거하여 말하기를 "사또가 나라의 중책을 맡았으니 의리상 관할 경내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 이곳은 바로 양호(兩湖)의 요해처로서 이곳을 잃게 되면 양호가 위태롭다. 지금 우리 군사가 흩어지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모을 수 있으며 호남의 수군도 와서 구원하도록 청할 수 있다." 하니. 원균이 그 계책을 따라 율포 만호(栗浦萬戶) 이영남(李英男)을 보내 순신에게 가서 청하게 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여러 포(浦)의 수군을 앞바다에 모으고 적이 이르면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영남의 말을 듣고 여러 장수들은 대부분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지역을 지키기에도 부족한데 어느 겨를에 다른 도에 가겠는가." 하였다. 그런데 녹도 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과 군관 송희립(宋希立)만은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순신에게 진격하기를 권하여 말하기를
"적을 토벌하는데는 우리 도(道)와 남의 도가 따로 없다.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 놓으면 본도도 보전할 수 있다."
하니, 순신이 크게 기뻐하였다.
언양 현감(彦陽縣監) 어영담(魚永潭)이 수로(水路)의 향도가 되기를 자청하여 앞장서서 마침내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과 만났다. 원균이 운룡과 치적을 선봉으로 삼고 옥포에 이르렀는데, 왜선 30척을 만나 진격하여 크게 깨뜨리니 남은 적은 육지로 올라가 도망하였다. 이에 그들의 배를 모두 불태우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노량진(鷺梁津)에서 싸워 적선 13척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전투에서 순신은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는데도 종일 전투를 독려하다가 전투가 끝나고서야 비로소 사람을 시켜 칼끝으로 탄환을 파내게 하니 군중(軍中)에서는 그때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이에 앞서 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 제도는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ㆍ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대포 구멍으로 활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 구멍을 설치하였다. 좌우에도 총 구멍이 각각 여섯 개가 있었으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도록 하였다. 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고 전후 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는 것처럼 빨랐다. 싸울 때에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되고 덮쳐 포위하면 화총(火銃)을 일제히 쏘았다. 그리하여 적선 속을 횡행(橫行)하는데도 아군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가는 곳마다 바람에 쏠리듯 적선을 격파하였으므로 언제나 승리하였다. 조정에서는 순신의 승리 보고를 보고 상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올려 주었다.
○ 비변사가 요동(遼東)에 자문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도록 청하였다. 당시 상하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계책을 결정하지 못했었는데, 이항복이 혼자서 극력 아뢰기를,
"지금 팔도가 무너져 수습해서 온전하기를 도모할 희망이 없습니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지혜로도 선주(先主) 유비(劉備)가 몸을 의탁하여 용무(用武)할 곳이 없음을 보고 손권(孫權)에게 구원을 청하여 마침내 적벽(赤壁)의 승리를 이루게 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다시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명 나라에 갖추어 아뢰어 구원병을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묘당(廟堂)의 의논은 모두 그렇게 여기지 않으면서 대체로 말하기를,
"명 나라에서는 틀림없이 기꺼이 와서 구원하지 않을 것이며 가령 와서 구원한다 하더라도 요ㆍ광(遼廣 요동(遼東)과 광녕(廣寧))의 병마를 출동시킬 터인데 요ㆍ광의 군사는 호달(胡達)의 종류로서 반드시 횡포를 부릴 것입니다. 지금은 평안도만이 안정되었다 하겠는데 다시 중국 군사가 공사간에 침탈한다면 필시 거덜이 나고야 말 것이니, 이 계책은 너무나 오활합니다."
하였다. 이때 마침 이덕형이 뒤따라 왔는데 항복과 의견이 같았으므로 마침내 함께 조당(朝堂)에서 극력 논쟁하니. 비로소 그 말을 따라 논계(論啓)하였다. 이에 상이 그대로 따라 즉시 사람을 보내 요동에 자문을 보내어 급박함을 알리고 군사를 청하였다.
○ 전라도 순찰사 이광이 절도사(節度使) 최원(崔遠)으로 하여금 본도를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4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임천(林川) 길을 경유해서 진격하였다.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은 2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여산(礪山)의 길을 경유하여 금강(錦江)을 건넜다. 경상 순찰사 김수(金睟)는 수하 군사 수백을 거느리고, 충청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은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였다. 이에 세 장수가 날을 정하여 진격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10만 군사라고 호칭하였다.
○ 박진(朴晉)을 경상 병마절도사로 삼았다. 박진이 병사(兵使)가 되어 남은 군사를 수습하고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 진격도 하고 후퇴도 하며 공격하자 형세가 조금 떨쳤는데 행조(行朝)에 승리의 보고가 잇따라 이르렀다. 그러자 상이 매우 중하게 여기며 이르기를
"나는 박진이 적을 가볍게 여긴 나머지 죽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일찍이 박진을 불러다 서도(西道)로 가게 해서 부원수로 삼아 평양을 도모하려고 했었는데 조정의 의존이 불편하게 여겨 그만 두었었다."
하였다.
○ 조방장 원호(元豪)가 여강(驪江)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여 섬멸시켰다. 원호는 강원도 조방장으로 여강의 벽사(甓寺)에 주둔하여 나루를 건너지 못하도록 차단하였다. 그런데 강원 감사 유영길(柳永吉)이 급히 원호를 불러 본도에 돌아가게 되었는데, 원호가 떠나자 적이 비로소 강을 건너 북상하였다. 얼마 있다가 원호가 다시 와서 고을의 군사들을 불러 모으고 적이 구미포(龜尾浦)에 주둔한 것을 보고서 새벽을 틈타 습격하여 50여 급(級)을 베니 나머지는 도망하였다. 이로부터 적이 여주의 길에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 6월. 삼도(三道)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패하여 이광 등이 본도로 돌아갔다.
○ 이순신(李舜臣)이 잇따라 왜병을 패배시켰다. 순신이 본영에서 사량(蛇梁)으로 나아가 진을 쳤는데 당포(唐浦)에서 적선을 만났다. 적장이 큰 군함을 타고 층루(層樓)에 앉아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순신이 휘하 병력을 진격시켜 통전(筒箭)으로 집중 사격하게 하니 층루 위의 왜장이 먼저 화살에 맞아 물에 떨어졌는데, 마침내 엄습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얼마 있다가 전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가 휘하의 수군을 모두 데리고 와서 회동하여 마침내 함께 당항포(唐項浦)에 이르러 왜선을 만나 크게 싸웠다. 이때 또 선루(船樓)위의 적장을 쏘아 죽여 그의 수급(首級)을 취했으며, 왜선 30척을 밀어붙여 격파하니 적이 대패하여 육지로 올라 도망하였다. 또 영등포(永登浦)에서 싸워 모든 배를 나포하여 섬멸시키니 이로부터 수군의 명성이 크게 떨쳤다. 승리를 아뢰자, 상으로 순신을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로 올려 주었다.
○ 왜장 평행장(平行長) 등이 해서(海西)의 여러 고을을 거쳐 대동강(大同江)의 남쪽 언덕에 침범하였다. 이때 이일(李鎰)이 관동(關東)의 길로 걸어서 이르렀다. 이일은 본래 명장으로 일컬어졌으므로 비록 적에게 패하여 도망하기는 하였지만 사람들이 모두 그가 온 것을 기뻐하였다. 그가 올 때 탐지한 정보에 적이 이미 봉산(鳳山)을 불태웠다고 하였으므로, 비변사가 급히 이일에게 영을 내려 대동강 하류를 지키도록 하였다. 이일이 막 도착하였을 때 적병 수백 명이 벌써 남쪽 언덕에 도착해 있었으므로 이일이 무사(武士) 10여 명으로 하여금 강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섬으로 들어가게 해서 강궁(强弓)을 쏘게 하자 적이 퇴각하였다.
○ 상이 평양을 떠나고 싶었으나 어디로 갈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조정의 신하들이 대부분 관북으로 들어가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왕비와 왕자가 먼저 떠나고 상은 평양을 떠나 영변부로 향하였다. 윤두수ㆍ김명원ㆍ이원익을 남겨 두어 평양을 지키게 하고, 대산 최흥원(崔興源)ㆍ유홍(兪泓)ㆍ정철 등은 유성룡을 수행하여 중국의 관원을 접대하기 위해 그냥 평양에 머물러 있었다. 상이 숙천(肅川)에 머물면서 이덕형을 청원사(請援使)로 삼아 요동에 거서 급박함을 알리도록 하였다. 당시 이항복과 이덕형이 야대(夜對)하여 상에게 영변에 진주(進駐)하기를 청하고, 그들이 직접 요동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겠다고 하면서 서로들 다투며 가기를 자청하였다. 이에 부제학 심충겸(沈忠謙)이 "항복은 현재 병조의 직책을 맡고 있으니 파견할 수 없다."고 하자, 마침내 덕형을 파견하였다.
○ 윤두수 등이 장수를 보내어 밤에 왜군의 진영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불리하여 퇴각하였다. 왜병이 마침내 대동강을 건넜다.
윤두수 등이 지킬 수 없음을 알고 먼저 성 안의 노약자와 부녀자를 내보내고, 적이 성에 가까이 오자 병기(兵器)를 강물에 가라앉힌 뒤 군사를 인솔하여 몰래 빠져 나왔는데, 더러는 배를 타고 강서(江西)로 내려갔다.
왜장이 마침내 평양을 점거하였다.
○ 왜장 청정(淸正)이 관북(關北)에 침입하였는데, 함경 감사 유영립(柳永立)이 사로잡히고 병사 이혼(李渾)이 적민(賊民)에게 살해당하였다. 당초에 청정과 행장(行長) 등이 함께 임진강을 건너 상의 행차를 추격하면서 어가가 혹시라도 방향을 바꾸어 관북으로 갈 것을 염려하여 길을 나눠 군사를 진격시키기로 약속하였다. 청정은 용맹이 적군 가운데 으뜸이었으며 그가 거느리는 군사도 더욱 날래고 사나웠다. 곡산(谷山) 지역에서 노리현(老里峴)을 넘어 철령(鐵嶺)의 길로 나왔는데, 철령에 지키는 군사가 없었으므로 그대로 치달려 들어갔다.
감사 유영립은 산골짜기로 들어갔는데 토병들이 적병을 인도하여 습격해서 사로잡았다. 병사 이혼은 도망하여 갑산(甲山)으로 들어갔는데 배반한 백성들이 추격해 오자 밭 사이의 토굴(土窟)에 숨었으나 마침내 그들과 싸우다 죽었다. 그리고 갑산 사람들은 부사의 목을 베고 투항하였다.
임해ㆍ순화 두 왕자는 적병이 바로 뒤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북쪽을 향해 질주하여 마천령(摩天嶺)을 넘어갔다.
○ 상이 북도로 떠날 것을 의논하자, 이항복이 다시 대신들과 극력 논쟁하기를, “의주(義州)로 진주(進駐)해야만 중국 군사와 접할 수 있고, 불행하게 될 경우 중국으로 건너가서 서서히 국토를 회복해도 실계(失計)가 아니다." 했는데, 심충겸(沈忠謙) 역시 그 의견에 따랐다. 그날 저녁에 뵙기를 청하여 항복이 극구 말하기를,
"북관(北關)은 단지 한 가닥 길만 있으니 궁하게 될 경우 오랑캐 지역 외에는 갈 만한 곳이 없으니 의주로 진주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도 본래 중국으로 가려고 하였으니, 경의 말을 따르겠다. 다만 중전(中殿)이 이미 멀리 갔는데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빨리 따라가서 돌아오게 하기를 청하니, 운산 군수(雲山郡守) 성대업(成大業)을 보내어 달려가게 하였다. 그런데 중전의 일행도 적이 이미 북도에 침범하였다는 소문을 들었으므로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와 마침내 상을 박천(博川)에서 만났다. 상이 영변부에 머물렀을 때 요동의 진에서 또 임세록(林世祿)을 보내 자문(咨文)에 답하면서 구원병 보낼 것을 허락하였다.
○ 세자에게 종묘 사직을 받들고 분조(分朝)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이날 박천에 머물렀다. 이튿날 걸음을 재촉하여 밤 오경에 가산(嘉山)에 도착하였다. 이날 밤에 비가 내리고 길은 어두운데 한 자루의 횃불도 없었으며 따르는 신하도 정철 등 2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이항복과 박동량(朴東亮)이 병조의 관원을 앞장세워 길을 인도하게 했는데,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 도성에서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 환관(宦官) 수십 명과 어의(御醫) 허준(許浚), 액정원(掖庭員) 4~5인, 사복원(司僕員) 3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뒷날 모두 녹공(錄功)하였는데, 끝내 직무는 맡기지 아니하였다.
○ 상이 정주(定州)에 머물렀다. 사자(使者)를 의주에 보내어, 어가가 본주(本州)에 머물고 곧바로 요동으로 건너가지 않는다는 것을 효유하여 군민(軍民)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게 하고 응교 심희수(沈喜壽)를 보내어 행궁(行宮)을 수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잇따라 차관(差官)을 보내 자문(咨文)으로 요동의 진에 알리도록 하고, 이덕형에게 위급하고 박절한 상황을 극력 진달하도록 유시하였다.
○ 세자가 영변부(寧邊府)로 나아가 머물렀다. 상이 분조(分朝)한다는 뜻으로 안팎에 하교하였다.
그리고 호종하는 관사를 무군사(撫軍司)라 하고 편의(便宜)대로 일을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 요동의 유격 사유(史游), 참장 곽몽징(郭夢徵)이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선천의 임반관(林畔館)에 도착하였다. 상이 예복(禮服)을 갖추고 나아가 보고 재배(再拜)하며 사례하기를,
"한 나라의 존망이 대인(大人)에게 달려 있으니 오직 지휘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하니, 사유 등이 말하기를,
"우리들로서는 평양을 구할 수 없으니 앞으로 조 총병(祖摠兵)이 오면 서로 모여 일을 의논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의주(義州)에 주둔하였다.
○ 상이 선천(宣川)에 머물렀다. 요동 순안어사(遼東巡按御史) 이시얼(李時孽)이 지휘(指揮) 송국신(宋國臣)을 보내어 우리나라에 자문을 보냈는데 자문 내용에,
"그대 나라에서 불궤(不軌)를 도모했다."
하고, 또,
"팔도의 관찰사는 어찌하여 한마디의 말도 없는가. 팔도의 군ㆍ현에서는 어찌하여 한 사람 도 대의(大義)를 주창하는 사람이 없는가. 어느 날에 어느 진(鎭)이 함락되고 어느 날에 어느 주(州)가 함락되었는가. 누가 절의를 지키다가 죽었고 누가 적에게 빌붙었는가. 적장(賊將)은 몇 명이며 군사는 몇 만 명인가. 적장자(嫡長子)를 후계로 세우는 것은 중국과 이적(夷狄)을 따질 것 없이 공통으로 행하는 의리인데, 귀국의 장자는 어디 갔기에 둘째 아들로 세자를 삼았는가. 하나하나 조목별로 갖추어 기록하여 보고하라. 천조(天朝)에는 개산대포(開山大砲)ㆍ대장군포(大將軍砲)ㆍ산화표창(神火標槍)이 있다. 그리고 날랜 장수와 정예병이 무척 많으니 급히 달려가면 왜병이 백만이라도 따질 것이 못 된다. 더구나 지혜 있고 용감한 문무(文武)의 인사들이 있어 간사한 모의를 환히 알고 음흉한 싹을 꺾어버릴 것이니 비록 소진(蘇秦)ㆍ장의(張儀)ㆍ상앙(商鞅)ㆍ범수(范睢)의 무리가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어떻게 천조의 계획을 엿볼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상이 차관(差官)을 대하고 자문을 본 뒤 송연(竦然)하여 이르기를,
"이는 대체로 우리나라가 왜적과 공모했는가 의심하여 이렇게 위협적인 말을 한 것이다."
하고, 지휘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여기의 신하를 파견하여 회보(回報)하겠소."
하였다. 지휘가 나가서 역관(譯官)에게 말하기를,
"순안어사(巡按御史)가 일찍이 내가 황 천사(黃天使)를 따라 나와 직접 국왕(國王)을 뵌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를 시켜 이번에 와서 정말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게 한 것이다. 자문에 말한 것은 모두 가정해서 한 말이니 두려워 말라."
하였다.
○ 상이 의주에 이르렀다. - 이달 22일이었다.- 목사의 아사(衙舍)를 행궁(行宮)으로 삼았다.
○ 주청사(奏請使) 지돈령부사 정곤수(鄭崐壽)를 파견하여 대병이 와서 구원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보낼 적에 면유(面諭)하기를,
"국가의 존망이 이 한번의 거사에 달려 있으니 경은 힘쓰라."
하였다.
○ 제도(諸道)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당시 삼도(三道)의 수신(帥臣)이 모두 인심을 잃은 데다가 군사와 식량을 징발하자 사람들이 모두 밉게 보아 적을 만나기만 하면 모두 달아났다. 그러다가 도내(道內)의 거족(巨族)과 명인(名人)이 유생(儒生) 등과 함께 조정의 명을 받들어 창의(倡義)하여 일어나자 듣는 사람들이 격동하여 원근에서 응모하였다. 크게 성취하지는 못했으나 인심과 국가의 명맥이 그들 덕분에 유지되었다. 호남(湖南)의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 영남(嶺南)의 곽재우(郭再祐)ㆍ정인홍(鄭仁弘), 호서(湖西)의 조헌(趙憲)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 현풍인(玄風人) 곽재우(郭再祐)는 본래 유생으로 일찍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고 무용(武勇)이 있었지만 스스로 감추었으며 집안도 제법 부유하였다. 왜적이 바다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가산을 모두 흩어 재질이 있는 무사와 교결하였다. 그리고는 "겁탈하는 도적들은 과감하고 사납기가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고 하여, 그 무사들을 찾아 화복(禍福)으로 그들을 달래어 먼저 수십 명을 얻었는데 점점 모인 군사가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적이 우도(右道)로 침입하였다. 왜장 안국사(安國司)란 자가 호남으로 향한다고 소문을 퍼뜨렸는데 재우가 강변을 왕래하면서 동서로 무찌르자 적병이 죽은 자가 많았다.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스스로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일컬었는데, 적진을 드나들면서 나는 듯이 치고 달리어 적이 탄환과 화살을 일제히 쏘아댔지만 맞출 수가 없었다. 충의롭고 곧으며 과감하였으므로 군사들의 인심을 얻어 사람들이 자진하여 전투에 참여하자 임기응변에 능하였으므로 다치거나 꺾이는 군사가 없었다. 이미 의령(宜寧) 등 두어 고을을 수복하고 군사를 정진강(鼎津江) 오른쪽에 주둔시키니 하도(下道)가 편안히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의로운 소문이 크게 드러났다.
○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은 광주(光州)에 살다가 적이 도성에 침입하였다는 사실을 듣고,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할 것을 도모하고 글을 지어 도내(道內)의 백성들에게 효유하기를,
"지난번 본도의 근왕병(勤王兵)이 금강(錦江)에서 돌아오던 날에 첫 번째로 패배했고 여러 군에서 군사를 초유(招諭)하던 때에 두 번째로 패하였다. 이는 대체로 수비 방법이 어긋나고 기율이 전혀 없으며 유언비어가 비등하여 군사들의 마음이 놀라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지금 흩어지고 도망한 나머지를 수습한다 하더라도 사기는 꺾였고 정예는 없어졌으니 어떻게 응급책을 세워 늦게나마 성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항상 생각건대 승여(乘輿)가 피난을 떠났는데도 관수(官守)는 오래도록 달려가 문안드리는 일을 폐하였고, 종사(宗社)가 모두 타버렸는데도 왕사(王師)로서 평정시킬 시기는 아직도 지체되고 있다. 이에 대해 말을 하자니 통분함이 가슴속에 사무친다.
우리 본도는 본래부터 군사와 말이 날래고 굳세다고 일컬어져 왔다. 성조(聖祖 조선 태조를 가르킴)께서 황산(黃山)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삼한(三韓)을 다시 일으킨 공로가 있으며, 선조(先朝 고려를 가리킴)의 낭주(朗州) 전투에서는 한 척의 배도 되돌아가지 못했다는 노래가 있는데, 지금까지도 빛나게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비춰지고 있으니 그때에 용맹을 뽐내며 적의 성벽에 먼저 오른 자는 이 도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더구나 근년 이래로 유도(儒道)가 크게 일어나 사람들이 모두 학문에 뜻을 가다듬었으니 임금 섬기는 대의(大義)를 그 누가 강독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유독 오늘날에 이르러 의로운 소문이 사라져버리고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 무너져버린 채 기력(氣力)을 내어 적과 교전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이 서로들 제 몸만 보전하고 처자를 보호할 계획만 하면서 혹시 뒤질세라 머리를 움켜쥐고 쥐처럼 도망하고 있다. 이는 본도의 사람으로서 국가의 은혜를 깊이 저버리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선조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지금은 적의 형세가 크게 꺾이고 왕의 영위(靈威)가 날로 확장되니 이야말로 대장부가 공명을 세울 기회이고 군부(君父)의 은혜에 보답할 때이다. 경명은 장구(章句)나 외는 오활한 선비로서 병법에는 문외한인데 이렇게 단(壇)에 올라 망령되이 대장으로 추대되니 이미 흩어진 사졸의 마음을 수습하지 못하여 여러 동지에게 수치거리가 될까 두렵다. 그러나 오직 마땅히 피를 뿌리고 진군한다면 조금이나마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 것 같기에 금월 11일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우리 도내의 모든 사람들은 아비는 그 자식을 깨우치고 형은 그 동생을 도와 의병을 규합하여 함께 일어나자. 원컨대 속히 결정하여 착한 일을 따르고 미혹된 나머지 스스로를 그르치지 말라."
하였다. 경명은 연로(年老)한 문관이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맹주(盟主)로 추대하자 개연히 사양하지 않았다. 이에 선비와 서민이 많이 응모하여 군사 6천여 명을 얻었다. 그리고 또 격문을 여러 도에 전하였는데 문사(文辭)가 격렬하고 절실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외며 전하였다.
○ 전 장령 정인홍(鄭仁弘)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인홍은 평소 시골의 선비와 주민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었다. 좌랑 김면(金沔), 전 현감 박성(朴惺), 유생 곽준(郭浚)ㆍ곽율(郭)등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집했는데, 전 첨사 손인갑(孫仁甲)을 얻어 중군(中軍)을 삼았다. 인갑은 무용(武勇)이 뛰어났는데 군진(軍陣)을 달리하면서도 인홍의 명령을 받았다. 인갑이 먼저 무계(茂溪)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군량을 태우고 돌아왔다.
○ 중국 조정에서 호군(犒軍 군사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함)할 비용으로 은(銀) 2만 냥을 내렸다. 당시 요동 사람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전하기를 "조선이 왜국과 함께 반역하여 거짓으로 가짜 왕을 삼아 인도하여 온다."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먼저 임세록(林世祿)등을 파견하여 평양에 와서 탐지하게 한 것이다. 그러다가 상이 평양을 떠남에 미쳐 연달아 요진(遼鎭)에 자문을 보내 비빈(妃嬪)ㆍ자녀ㆍ배신(陪臣)을 이끌고 중국으로 가기를 청하니, 요동 순무어사 학걸(郝杰)이 주본(奏本)을 올리기를,
"총병 동양정(佟養正)이 품보(稟報)를 받았습니다. 조선이 대국(大國)이라고 일컬으면서 대대로 동번국(東藩國) 노릇을 하여 왔는데 한번 왜적의 침입을 받자 소식만 듣고서 도망쳤습니다. 혹시라도 그 나라가 사직을 보전하지 못하고 갑자기 달려올 경우, 수신(守臣)의 입장에서 거절하자니 그들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어 속국의 신뢰하는 마음을 잃게 될 것이고, 받아들이자니 사체가 가볍지 않아 신하로서 마음대로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왜노(倭奴)들은 간사한 꾀가 비상하여 중국 사람도 앞잡이 노릇을 하는 자가 많습니다. 만약 간사한 생각을 품고 마구 들어온다면 해를 끼치는 것이 보통이 아닐 텐데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복제(覆題)하기를,
"해진(該鎭)에서 사람을 차출하여 조선으로 보내서 조정의 지극한 뜻을 선유(宣諭)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조선이 도망해 오면 나라를 회복할 기약이 없게 되어 왜적이 마침내 조선을 점거하게 될 것이고, 굳게 지키면 구원병도 기대할 수 있어 왜적이 자연 패하여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도록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들 지역의 요해처에서 머물며 천병(天兵)의 구원을 기다리게 하소서. 그리고 본국에 유시하여 배신(陪臣)들을 많이 파견하여 근왕병(勤王兵)을 불러 모아 옛 강토를 회복할 계책을 삼아 패몰(敗沒)하지 않도록 하고 만일 해국(該國)이 위급해서 도망해 오기를 청한다면 전적으로 거절하기는 어려우니 마땅히 칙령(勅令)을 내려 받아들이되 인원이 1백 명을 초과하지 않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황지(皇旨)를 받드니, 황지에,
"왜적이 조선을 함몰(陷沒)시켜 국왕이 도피하였으니, 짐(朕)은 매우 측은하게 여긴다. 구원병을 일단 파견하고 사람을 차견하여 그 나라 대신들에게 선유(宣諭)하되,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수호하고 각처의 병마(兵馬)를 속히 결집하여 성지(城池)를 굳게 지키며 요해처에 웅거하여 힘껏 회복을 도모하도록 하라. 어떻게 앉아서 망하는 것을 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성지(聖旨)가 특별히 내렸는데도 요진(遼鎭)에서는 여전히 의심이 풀리지 않아 송국신(宋國臣)을 보내 국왕의 진위(眞僞)를 실제로 알아보게 하였다. 국신이 돌아가 확실히 진짜 임금이고 가짜 임금이 아니라고 보고하자 요진에서 비로소 믿게 되었다.
중국 조정의 의논 역시 구구했는데 석성(石星)은 구원하기로 결심하였다. 우리나라의 사신 신점(申點)이 당시 회동관(會同館)에 있었는데, 석성이 뜰로 불러서 요동에서 변고를 보고한 문서를 꺼내어 보여주자 신점이 그 자리에서 통곡을 하며 아침 저녁으로 찾아가 병부(兵部)에 정문(呈文)하여 먼저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유몽정(柳夢鼎)도 그 뒤를 이어 도착했는데 통곡을 하며 병부에 호소하여 구원병을 속히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석성이 그 뜻에 감동하여 모두에게 답서를 보내 위로하면서 그들을 신포서(申包胥)에 비유하였다.
석성의 뜻이 더욱 굳어져 병부가 주청하여 지휘(指揮) 황응양(黃應暘)을 보내 살펴보도록 하니 상이 용만관(龍灣館)에서 맞이하여 보았다. 응양이 왜의 서신을 요구하여 증험하려 하자, 이항복이 지난 신묘년(선조 24, 1591)에 통신사(通信史)가 가지고 온 왜의 서신을 미리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꺼내어 보였다. 그 중에는 이미 자문(咨文)과 주문(奏文)으로 보냈던 내용도 들어 있었는데, 황응양이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조선이 상국(上國)을 대신하여 침략을 당하였는데도 의로운 소문은 드러나지 않고 도리어 나쁜 이름만 뒤집어 썼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돌아가 병부에 보고하니, 석성이 크게 기뻐하여 조선을 구원하는 의논이 결정되었다.
○ 경상도를 나누어 좌우 감사를 두었다.
이는 대체로 영남의 지역이 넓은 데다가 적이 중로(中路)를 따라 진영을 연결하여 좌우도가 서로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 호남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였다. 삼도(三道)의 군사가 무너진 뒤로부터 경기 안이 완전히 살륙과 노략질을 당했는데, 적에게 빌붙어 도성에 들어간 자도 많았다. 천일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니, 상이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임명하는 동시에 창의사(倡義使)라는 칭호를 내렸다. 천일의 군사가 수원(水原)에 이르러 독산고성(禿山古城)에 웅거하여 적에게 빌붙은 간민(奸民)을 찾아내어 목을 베니, 돌아와 따르는 경기의 사민(士民)이 많았다.
○ 7월. 전라 절제사 권율(權慄)이 군사를 보내어 왜적을 웅치(熊峙)에서 물리쳤는데 김제 군수 정담(鄭湛)이 전사하였다. 왜병이 또 이치(梨峙)를 침범하니 동복 현감 황진(黃進)이 패배시켰다.
이때 적이 금산(錦山)에서 웅치를 넘어 전주(全州) 지경으로 침입하려고 했는데, 나주 판관 이복남(李福男)이 황박(黃璞)ㆍ정담 등과 요해지에 웅거하여 적을 맞아 공격하였으므로 감사 이광(李洸)이 군사를 보내어 싸움을 돕게 하였다. 왜적의 선봉(先鋒) 수천 명이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정면으로 돌진해 왔는데, 복남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활로 쏘아 죽인 것이 헤아릴 수 없었으며 적이 패하여 물러갔다.
이튿날 새벽에 적이 병력을 총동원하여 산골짜기에 가득하였고 총포 소리가 우레처럼 났다. 복남 등이 최후까지 힘을 다하여 한바탕 싸웠으나 결국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하였으며, 황박의 군사도 패하여 복남의 진으로 들어갔다. 정담은 처음부터 힘을 다해 싸웠는데 붉은 기 아래 백마(白馬)를 타고 있는 적장을 쏘아 죽이니 적이 와해되어 물러갔다. 조금 뒤에 나주(羅州) 군사가 퇴각하자, 정담이 고군(孤軍)으로 포위당했는데 부하 장수가 정담에게 후퇴시키기를 권하니 정담이 말하기를 "차라리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고 말지 차마 내 몸을 위해 도망하여 적으로 하여금 기세를 부리게 할 수는 없다." 하고 꼿꼿이 서서 동요하지 않고 활을 쏘아 빠짐없이 적을 맞혔다. 이윽고 적병이 사방으로 포위하자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버리고 정담 혼자서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다. 종사관 이봉(李葑)도 전사하였다. 복남이 퇴각하여 재 아래 안진원(安鎭院)에 진을 쳤는데, 적이 방비가 있음을 알고 감히 재를 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정담은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했다는 사실을 듣고부터 눈물을 흘리고 분격해 하며 반드시 죽음으로 국가의 은혜를 보답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군사를 일으키던 날에는 희생(犧牲)을 잡아 사사(社詞)에 제사를 지내고 맹세를 고한 뒤 떠났는데, 고을 사람들이 그의 충의(忠義)에 감복하였다. 뒷날 조정에 아뢰어 관직을 추증하고 정문(旌門)을 세웠다.
왜장(倭將)이 또 대군(大君)을 출동시켜 이치(梨峙)를 침범하자 권율이 황진을 독려하여 동복현의 군사를 거느리고 편비(偏裨 부장(副將)) 위대기(魏大奇)ㆍ공시억(孔時億) 등과 함께 재를 점거하여 크게 싸웠다.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쏘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병을 대파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草木)까지 피비린내가 났다. 이날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사기가 저하되자 권율이 장사들을 독려하여 계속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에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 이복남ㆍ 황진은 이 전투로 이름이 드러났다. 왜적이 웅치(熊峙)의 전진(戰陣)에서 죽은 시체를 모아 길 가에 묻어 몇 개의 큰 무덤을 만들고서 그 위에 "조선의 충간의담을 위로한다.[吊朝鮮國忠肝義膽]"라고 썼다.
○ 전주(全州)의 경기전(慶基殿)에 봉안하였던 태조(太祖)의 수용(睟容)을, 당시 전주가 위급해지자 참봉(參奉) 홍여율(洪汝栗)이 어용을 받들고 적병을 피하여 해로(海路)를 경유해서 의주(義州)에 도달하니, 상이 행궁(行宮)에서 곡하며 제사지내고 묘향산(妙香山)의 절에 봉안하였다. 그리고 여율에게 상으로 6품의 직책을 주라고 명하였다.
○ 의병장 김준민(金俊民)이 왜병을 무계현(茂溪縣)에서 물리쳤으며, 곽재우(郭再祐)가 또 왜병을 현풍(玄風)과 창녕(昌寧) 사이에서 잇따라 물리치니 적이 주둔지에서 철수하여 도망하였다. 이로부터 우도(右道)의 적로(賊路)가 단절되어 적병이 대구(大丘)의 중로(中路)로 왕래하였다.
○ 이순신(李舜臣)이 왜병을 고성(固城) 견내량(見乃梁)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때에 왜적이 수군을 크게 출동시켜 호남(湖南)으로 향하자 순신이 이억기(李億祺)와 함께 각기 거느린 군사를 재촉하여 나가다가 견내량에서 적을 만나게 되었는데, 적선이 바다를 뒤덮어 오고 있었다. 원균(元均)이 앞서의 승리에 자신하여 곧장 대적하여 격파하려 하자 순신이 말하기를 "이곳은 항구가 좁고 얕아 작전할 수가 없으니 넓은 바다로 유인해 내어 격파해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원균이 듣지 않자, 순신이 말하기를 "공이 병법(兵法)을 이처럼 모른단 말인가." 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영(令)을 내려 거짓 패하여 물러나는 척하니, 적이 과연 기세를 몰아 추격하였다. 이에 한산도(閑山島) 앞바다에 이르러 군사를 돌려 급히 전투를 개시하니 포염(砲焰)이 바다를 뒤덮었고 적선 70여 척을 남김없이 격파하니 피비린내가 바다에 진동하였다. 또 안골포(安骨浦)에서 그들의 구원병을 역습하여 패배시키니 적이 해안으로 올라 도망하였는데 적의 배 40척을 불태웠다. 왜진(倭陣)에서 전해진 말에 의하면 "조선의 한산도 전투에서 죽은 왜병이 9천 명이다."라고 하였다, 이 일을 아뢰자 순신에게 정헌대부(正憲大夫)의 품계를 상으로 내리고 글을 내려 칭찬하였다.
○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에게 명하여 순안현(順安縣)에 주둔하면서 적을 막도록 하였다. 적이 처음 평양(平壤)에 들어올 때 군사가 대략 6~7천 명 정도였는데, 난민(亂民)을 초유(招誘)하고 군사를 만들어 성을 지키게 하면서 다시 나와 서로(西路)를 묻지 않았다. 이는 대체로 여러 곳에 분리 주둔하여 거느린 군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군대에게 공격당할까 두려워해서였다. 이로 말미암아 김명원이 이원익과 흩어진 군졸 및 강변의 토병(土兵)을 불러모아 다시 군용(軍容)을 갖추고서 한응인(韓應寅)과 함께 순안현으로 나아가 주둔하여 부산원(斧山院)의 현계(峴界)를 방수(防守)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순안현 이상의 여러 고을에 이민(吏民)이 되돌아와 모였다.
○ 요진(遼鎭)에서 총병(摠兵) 조승훈(祖承訓), 참장(參將) 곽몽징(郭夢徵), 유격(遊擊) 사유(史儒)ㆍ왕수신(王守臣)ㆍ대조변(戴朝弁) 등을 파견하여 기마병 3천 명을 거느리고 평양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한 채 사유와 대조변은 탄환에 맞아 죽었고 승훈은 퇴각하여 요동(遼東)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승훈이 요진(遼鎭)에 가서 무고하기를 "한창 전투할 때에 조선 군사 일진(一陣)이 적진에 투항(投降)하였기 때문에 전투가 불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상이 사신을 파견하여 분변해서 의혹을 풀게 하였다.
○ 승통(僧統)을 설치하여 승군(僧軍)을 모집하였다. 행조(行朝)에서 묘향산(妙香山)의 옛 승관(僧官) 휴정(休靜)을 불러 그로 하여금 중을 모집하여 군사를 만들도록 하였다. 휴정이 여러 절에서 불러 모아 수천여 명을 얻었는데 그의 제자 의엄(義嚴)을 총섭(摠攝)으로 삼아 그들을 거느리게 하고 원수(元帥)에게 예속시켜 성원(聲援)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격문(檄文)을 보내어 제자인 관동(關東)의 유정(惟政)과 호남(湖南)의 처영(處英)을 장수로 삼아 각기 본도에서 군사를 일으키게 하여 수천 명을 얻었다. 유정은 담력과 지혜가 있어 여러 번 왜진(倭陣)에 사자로 갔는데 왜인들이 신복(信服)하였다. 승군(僧軍)은 제대로 접전(接戰)은 하지 못했으나 경비를 잘하고 역사를 부지런히 하며 먼저 무너져 흩어지지 않았으므로 여러 도에서 그들의 힘을 입었다.
○ 왜장 청정(淸正)이 북계(北界)로 침입하니 회령(會寧)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王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와 여러 재신(宰臣)을 잡아 적을 맞아 항복하였다. 이로써 함경 남도와 북도가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다.
○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금산(錦山)의 적을 토벌하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
경명이 모집한 병사 6~7천 명을 단속해서 북상하여 여산(礪山)에 주둔하였는데 왜적이 호남 지역을 침입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휘하 장사들이 본도를 염려하여 먼저 도내의 적을 토벌한 뒤에 북쪽으로 정벌할 것을 다투어 청하자 경명이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 군사를 진산(珍山)으로 옮겼는데 당시 왜적은 금산으로 퇴각하여 진을 두터이 치고 견고하게 하고 있었다. 경명이 방어사 곽영(郭嶸)과 함께 재를 넘어 험한 곳으로 들어가 곧장 금산성 밖에 육박하였는데 곽영이 먼저 날랜 장사 수백 명을 보내어 적을 시험하다가 적에게 패하여 물러나자 경명이 북을 울리며 전투를 독려하여 도로 적병을 성 밖에서 위축시키고 성 안에서는 화포를 쏘아 적이 주둔하던 관사(館舍)를 불태우니 적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이튿날 동틀녘에 다시 방어사와 같이 성 밖으로 군사를 진격시켜 관군은 북문을 공격하고 경명은 서문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적이 관군의 진이 약한 것을 알고 군사를 총동원하여 나와 급히 공격하니, 관군이 크게 패배하였다. 경명은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일제히 활을 당기고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의병이 급히 부르짖기를 "방어사의 군사가 패하였다."고 하자 대오가 무너져 흩어졌다. 경명이 말에서 떨어졌는데 말이 달아나 버리니 종사관 안영(安瑛)이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주어 타게 하고 도보로 따라갔다. 종사관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는 말이 건장해서 먼저 나가다가 그의 종에게 묻기를 "대장은 모면하였는가?" 하니, 아직 못 나왔다고 하자, 팽로가 급히 말을 채찍질하여 어지러운 군사들 속으로 되돌아 들어갔다. 이에 경명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말을 달려 빠져나가라." 하였다. 팽로가 말하기를 "어떻게 차마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안영과 함께 경명을 보호하다가 적진에서 함께 전사하고 경명의 차자(次子) 인후(因厚)도 달려가 싸우다가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경명은 문학(文學)에 종사하여 무예를 익히지 않았으며 나이 또한 노쇠하였다. 이때에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켰는데 충의심만으로 많은 군사들을 격려하여 위험한 곳으로 깊이 들어가 솔선하여 적과 맞서다가 전사한 것이다. 공은 성취하지 못했어도 의로운 소문이 사람을 감동시켜 계속 의병을 일으킨 자가 많았으며, 나라 사람들이 그의 충렬(忠烈)을 칭송하면서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처음에 상이, 경명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 공조참의 겸 초토사에 제수하도록 명하고, 글을 내려 칭찬하고 위로하였다. 공조 좌랑 양산숙(梁山璹)이 행재소에서 남쪽으로 돌아올 적에 상이 직접 유시하기를 "돌아가 고경명과 김천일(金千鎰)에게 말하라. 그대들이 빨리 수복하여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얼굴을 조만간 볼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고 하라." 하였다. 그러니 관작 제수의 명이 이르지도 않아서 경명이 패하여 전사하였는데 예조 판서에 추증하였다. 그 뒤에 광주(光州)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포충사(褒忠祠)라고 편액을 하사하였다.
○ 서인(庶人) 홍계남(洪季南)이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계남은 양성현(陽城縣) 사람으로 충의위(忠義衛) 홍언수(洪彦秀)의 첩의 아들이다. 담력과 용맹이 있고 말타고 활쏘는 데에 능하여 금군(禁軍)에 소속되어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들어갔었는데, 왜인들이 그가 말타고 활쏘는 것을 구경하였으므로 그의 이름을 기억하였다. 그러자 계남이 왜진(倭陣)으로 달려들어가 그 아비의 시체를 거두어 돌아왔는데, 왜인들이 계남인 줄 알고 감히 서로 대항하지 못하였다. 계남이 아비의 군사를 거두고 높은 산꼭대기에 보루를 쌓고 양천(陽川)ㆍ안산(安山) 두어 고을의 지역을 굽어보며 군사를 주둔시키고 적의 헛점을 틈타 동서로 습격하여 많이 참살(斬殺)하였다. 그래서 적이 감히 그 지역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경기 지역과 호서의 여러 고을이 그의 힘을 입었다. 특별히 수원판관 겸 조방장에 제수하였다.
○ 고언백(高彦伯)을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삼았다. 언백은 교동(喬桐) 사람으로서 향리(鄕吏)로 무과에 올라 종군하며 모반한 호인(胡人)을 공격하여 명성이 있었다. 도원수를 따라 장령(將領)이 되어서는 적의 수급(首級)을 벤 공이 있었는데 양주(楊州)로 돌아가 군사를 모아 적군을 치겠다고 자청하니, 상이 특별히 당상관의 자급을 주어 양주 목사에 임명하고 능침(陵寢)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언백이 고향으로 돌아와 장사(壯士)를 모집하여 산꼭대기의 험한 곳에 모여 웅거하면서 가끔 나가 흩어진 적군을 습격하였다. 적이 많은 군사를 풀어 수색하였으나 언백이 기회를 엿보아 가며 잘 피하고 숨었으므로 적이 마침내 해치지 못하였다. 언백은 항상 여러 능(陵)에 군사를 잠복시켰다가 수시로 적을 쏘아 죽이곤 하였다. 적이 태릉(泰陵)을 침범한 일이 있었는데 언백이 그들을 쫓아 버렸으므로 여러 능이 온전하게 되었다. 상이 그의 공로에 상을 주고 여러 번 자급을 올려 주어 장려하였다.
○ 고경명 휘하의 사자(士子)들이 흩어진 군사 8백 명을 불러모아 화순(和順) 사람인 전 부사 최경회를 추대하여 장군으로 삼고 골(鶻) 자로 표신(標信)을 삼았다. 절의를 지키다 죽은 유팽로(柳彭老)등을 높이고 본보기로 삼아 많은 사람들을 권면하니 도내의 사민(士民)들이 많이 추종하였다.
○ 8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순찰사 이원익(李元翼)과 순변사 이빈(李薲)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진군하여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당시 이원익 등은 순안(順安)에 주둔하여 천여 명의 군사를 불러 모았는데 정예군사가 제법 많았다. 방어사 김응서(金應瑞), 별장 박명현(朴命賢) 등은 용강(龍岡)ㆍ삼화(三和)ㆍ증산(甑山)ㆍ강서(江西) 등 바닷가 여러 고을의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20여 둔(屯)에 배치하고 평양의 서쪽을 압박하며 때로 영세한 적을 소탕하면서 성 밖까지 이르렀으나 적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별장 김억추(金億秋)는 수군을 거느리고 대동강(大洞江) 입구에 웅거하였고, 중화(中和)의 별장 임중량(林仲樑)은 2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보루를 쌓아 주둔하며 지켰다.
행조(行朝)에서는 평양의 적세(賊勢)가 쇠약해져 우리 군사가 충분히 진격하여 취할 수 있고 또 중국 군사를 기다릴 수만은 없다고 여겨 영(令)을 내려 진격하기를 재촉하였다. 이에 삼로(三路)의 군사가 함께 나가 정탐하는 적을 만나 두어 명을 쏘아 죽였는데, 얼마 안 되어 적병이 크게 이르자 관군이 놀라 강가에서 흩어져 도망하였다. 이에 용병(勇兵)이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세 번 싸워 모두 불리하였으므로 물러나 본소(本所)에 주둔하였다.
○ 황제가 호군(犒軍)하는 비용으로 은(銀) 2만 냥을 내리고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도록 명하였다.
조승훈(祖承訓)이 이미 패배하자 행재소에서 크게 두려워하여 요진(遼鎭)에 사신을 보내어 군사를 파견해서 구원해 주기를 계속 청하니, 병부(兵部)에서 주청하여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그 성지에 "조선은 본래 정성을 다 바친 우리의 속국이다. 도적의 난을 당하고 있는데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요동 진무관(遼東鎭撫官) 은 즉시 정병(精兵) 2지(枝)를 보내어 구원하도록 하고 은(銀) 2만 냥을 그 나라에 보내 호군(犒軍)하게 하고 대홍저사(大紅紵絲) 두 벌을 국왕에게 내려 위로하라." 하였다.
이에 유격(遊擊) 장기공(張奇功)을 파견하여 은을 풀어 꼴과 양식을 사들인 뒤 의주(義州)로 운반해서 군향(軍餉)으로 사용하게 하고,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를 파견하여 남병(南兵)을 거느리고 북안(北岸)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대군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낙상지는 용력이 있어 천 근(斤)을 들었으므로 낙천근(駱千斤)이라 불리웠는데 매우 위명을 떨치었다.
○ 의병장 조헌(趙憲)이 청주성(淸州城)을 회복하였다.
조헌이 처음에 수십 명의 유생(儒生)과 뜻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뒤 1천 6백 명을 모집하였다. 공주 목사 허욱(許頊)이 의승(義僧) 영규(靈圭)를 얻어 그로 하여금 승군(僧軍)을 거느리고 조헌을 돕게 하니, 조헌이 군사를 합쳐 곧장 청주 서문에 육박하였다. 적이 나와서 싸우다가 패하여 도로 들어가니, 조헌이 군사를 지휘하여 성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서북쪽에서부터 소나기가 쏟아져 내려 천지가 캄캄해지고 사졸들이 추워서 떨자 조헌이 탄식하기를 "옛 사람이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말했는데 정말 그런 것인가?" 하고 맞은편 산봉으로 진(陣)을 퇴각시켜 성 안을 내려다 보았다.
이날 밤 적이 화톳불을 피우고 기(旗)를 세워 군사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진영을 비우고 달아났다.
○ 진주 판관(晉州判官) 김시민(金時敏)이 사천 현감(泗川縣監) 정득열(鄭得悅) 등과 군사를 합하여 사천ㆍ고성(固城)ㆍ진해(鎭海)의 적을 무찌르니 적병이 점점 철수하여 도망하였으므로 김시민이 연로(沿路)의 여러 고을을 수복하였다.
○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등이 유생 곽현(郭玄)ㆍ양산숙(梁山璹)을 보내어 바닷길을 따라 관서(關西)에 들어가 행조(行朝)에 일을 아뢰었다. 양산숙이 또 상소하여 계책을 올리니, 상이 자주 불러서 위로하고 공조 좌랑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호민(李好閔)으로 하여금 교서(敎書) 2통(通)을 짓게 하여 양산숙에게 부쳐 보냈다. 하나는 호남에 유시하는 것이었는데, 그 대략에,
"이광(李洸)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패배하였다는 말을 듣고부터 다시 남쪽을 바라보며 구원을 기대하는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들으니 고경명과 김천일 등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절도사 최원(崔遠)과 함께 수원(水原)으로 진주(進駐)했다 한다. 부덕(不德)한 내가 어떻게 이토록까지 사람들이 사력을 다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 이제 양산숙 등을 보내어 돌아가서 알리게 하니 그대들은 나의 괴로운 뜻을 헤아리도록 하라.
내가 비록 인애(仁愛)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정치에 실수한 것이 많았다 하더라도 본래의 마음은 언제나 백성을 사랑하고 어여삐 여기는 것으로 뜻을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만 살피건대 근래 변방에 흔단이 많고 군정(軍政)이 피폐하고 해이해졌으므로 중외에 신칙하여 엄중하게 방비를 더하도록 하였는데, 성을 높이 쌓을수록 국가의 형세는 날마다 낮아지고 못을 깊게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정말 헤아리지 못하였다. 게다가 궁중이 엄밀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조그마한 이익까지도 거둬들이고 형옥(刑獄)이 중도를 상실하여 원통한 기운이 화기를 손상케 하였으며, 왕자(王子)가 이익을 독점하여 소민(小民)들이 생업을 잃게 하였으니, 백성들이 나를 허물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제 유사(有司)로 하여금 모두 혁파하여 돌려주게 하였다. 무릇 이러한 유(類)를 내가 어찌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겠는가. 그러나 내가 몰랐던 것도 나의 잘못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후회스럽다마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대 사민(士民)들은 내가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다스리려는 것을 허락하기 바란다."
하고, 또 이르기를,
"용만(龍灣)의 한 모퉁이에서 천운이 어렵게 되었고 지운(地運)이 이미 다 되었으니 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인정이 극도로 곤궁해지면 회복하기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서늘한 가을 기운이 조금 움직이는데 변방은 벌써 추워진다. 저 장강(長江)을 보니 역시 동쪽으로 흐르는데, 돌아가려는 한 생각이 흐르는 강물처럼 왕성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하늘이 이성(李晟 당 덕종(唐德宗) 때의 인물)을 탄생시키니 성궐(城闕)을 회복할 기약이 있었고, 날마다 장소(張所 송 고종(宋高宗) 때의 인물)를 기다리니 원릉(園陵)에 흠이 없음을 아뢰었다. 가뭄에 비를 바라듯 하는 마음에 속히 부응하여 나의 어려운 고생살이를 면하게 하라."
하였다. 하나는 영남의 사민(士民)에게 유시하는 것이었는데 호남에 보내는 것과 같았다. 끝 부분에 이르기를,
"지난번에 듣건대, 우감사(右監司) 김수(金睟)는 용인에서 패하여 퇴각하였고 좌감사 김성일(金誠一)은 진주(晉州)에서 용사를 모집한다 하였다. 좌병사 이각(李珏)이 참수(斬首)당했으므로 박진(朴晉)이 충용하다 하여 그를 대신하게 하였으며, 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은 늙고 쇠약하므로 양사준(梁士俊)으로 대신하게 하고, 변응성(邊應星)을 좌도 수사로 삼았는데, 모두 각기 본도로 돌아가 힘써 주선하여 경영하는지 모르겠다. 좌도의 영해(寧海) 일대와 우도의 진주 등 약간의 고을이 아직 보존되고 있으니, 이것은 그래도 1성(成 사방 10리의 땅)이나 1려(旅 5백 명의 단위)보다는 나은 것이 아니겠는가. 본도의 백성들은 성실하고 후덕하여 본래 충성스럽고 의로운 인사가 많았다. 그대들이 진정 서로 분발하고 면려한다면 틀림없이 회복시키는 근본이 되지 않는다고 못할 것이다.
듣건대, 정인홍(鄭仁弘)ㆍ김면(金沔)ㆍ박성(朴惺)ㆍ곽율(郭?)ㆍ조종도(趙宗道)ㆍ곽재우(郭再祐) 등이 의병을 일으켜 많은 무리를 규합했다 하니, 본도의 충성과 의리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않았다 하겠다. 더구나 곽재우는 비상한 작전으로 적을 더욱 많이 죽였는데도 그 공로를 스스로 진달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더욱 기특하게 여기는 바로 그의 명성을 늦게 들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호남에도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본도 절도사 최원(崔遠) 등과 수원(水原)으로 진군하여 주둔하면서 바야흐로 경기(京畿)를 회복하려고 도모하면서 그의 무리인 양산숙 등으로 하여금 수륙(水陸)의 험한 길을 달려와 행재(行在)에 아뢰게 하였다. 내가 아뢴 내용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고 한편으로는 슬픈 마음이 들었다. 양산숙 등이 돌아가는데 이 글을 부쳐서 그로 하여금 상세히 전하게 하였으니, 내가 알리는 뜻을 잘 헤아리라.
요즈음 맑은 가을철에 태백(太白)이 바야흐로 높아 군사의 위용이 갖추어진 곳에 살기(殺氣)마저 따르니, 충성과 의리가 향하는 곳에 어떤 적인들 무찌르지 못하겠는가. 그대들은 마땅히 요해처를 제어하여 구적(寇賊)들을 초멸하도록 하라. 그리고 또한 연도에 복병을 설치하고 좌우에서 협공하여 적이 마음대로 말을 달릴 수 없게 하라. 그리하여 한 지방을 안정시켜 노약자들을 불러 모은 연후에 힘을 합하여 도성을 수복하고 와서 승여(乘輿)를 영접하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대들은 살아서는 아름다운 이름을 누리게 될 것이며, 혜택이 자손들에게 전해질 것이니 위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정인홍을 제용감 정으로, 김면을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박성을 공조 좌랑으로, 곽재우를 유곡 찰방(幽谷察訪)에 임명하여 표창하고 면려한다."
하였다.
교서(敎書)가 길이 막혀 몇 개월 만에야 도착하였는데 사민(士民)들이 임금의 교서 내용을 듣고 감격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 판관 김시민(金時敏)을 발탁하여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삼았다. 김시민이 진주의 주민을 안정시키면서 출전(出戰)하여 누차 승첩을 거뒀으므로 금산(金山) 이하에 머물며 주둔하던 적이 모두 도망하였다. 이에 김시민이 도로 진주에 주둔하면서 굳게 지킬 계책을 세웠다.
○ 별장 권응수(權應銖)가 영천(永川)의 적을 격파하고 그 성을 회복하였다.
안동 이하에 주둔한 적이 모두 철수하여 상주(尙州)로 향하였으므로 경상좌도의 수십 고을이 안전하게 되었다.
권응수는 용맹스러운 장수로 과감히 싸우는 것을 여러 장수들이 따르지 못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로 올려 방어사를 삼았다.
○ 의병장 조헌과 의승(義僧) 영규가 금산(錦山)의 적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조헌은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홀로 진군하여 곧장 금산의 적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전라 감사 권율(權慄)과 충청 감사 허욱(許頊)이 모두 만류하면서 동시에 군사를 크게 일으킬 것을 청하고 기일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또 기일이 연기되자 조헌은 그들이 머뭇거리는 것을 분하게 여긴 나머지 7백여 명만을 이끌고 재를 넘으려 하였다. 영규가 간곡한 말로 만류하기를 "반드시 관군이 뒤에서 지원을 해 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하였으나, 조헌은 울면서 말하기를 "군부(君父)가 어디에 계신가. 군주가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목숨을 버려야 하니, 그때가 바로 지금이다. 성패와 이해 관계를 어떻게 돌아볼 수 있겠는가." 하고 북을 치며 행군하였다. 영규도 "조공(趙公)을 혼자 죽게 할 수는 없다." 하고, 이에 거느린 승려 수백 명과 진(陣)을 합하여 함께 떠나면서 문첩(文牒)을 계속 보내 관군이 이어 진군하도록 재촉하였다.
조헌의 군사가 곧장 금산성 밖 10리 되는 곳에 이르러 진을 치고 관군을 기다리는데, 적이 후속부대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군사를 잠복시켜 후면을 끊은 뒤 군사를 총동원하여 나와 싸웠다. 조헌이 영(令)을 내리기를 "오늘은 한번 죽음이 있을 뿐이니 하나의 의(義) 자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 하니, 군사들이 모두 응락하였다. 한참 동안 힘을 다하여 싸웠는데 적이 세 번 진격했다가 세 번 패하였다. 그러나 조헌의 군사는 이미 화살이 다 떨어진 상태였다. 조헌은 장막 가운데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는데, 좌우에서 빠져나가기를 청하자, 조헌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죽었으면 죽었지 구차스럽게 살 수는 없다."하고, 북을 울리며 더욱 급하게 전투를 독려하였다. 군사들은 맨 주먹으로 육박전을 벌였는데, 한 사람도 자리를 떠나는 자가 없이 모두 조헌과 함께 전사하였으며, 영규도 전사하였다. 적의 무리는 죽은 자가 더 많아 시체를 운반하여 성으로 들어가면서 우는 소리가 연이어졌다.
이튿날 동생 조범(趙範)이 몰래 전쟁터에 들어가서 시체를 거두었는데, 조헌은 깃발 아래에서 죽었고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곁에 빙둘러 죽어 있었다. 4일 만에 빈(殯)하였는데 낯빛이 살았을 적과 같았으며 눈을 부릅뜨고 수염이 움직여 사람들은 그가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적이 퇴각한 뒤에 제자들이 가서 7백 명의 시체를 거두어 무덤 하나를 만들고 칠백의사총(七百義士塚)이라고 표시하였다. 조헌의 아들 완기(完基)는 신체가 장대하고 성품과 도량 역시 뛰어났다. 군사가 패하게 되자 일부러 관복(冠服)을 화려하게 입었으니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고자 한 것이다. 이에 적이 그를 주장(主將)으로 오인하고 그 시체를 찢었다.
함께 전사한 자로 드러난 자는 다음과 같다. 참봉 이광륜(李光輪)은 효성스럽고 우애와 절개가 있었다. 처음에 향병(鄕兵) 수백 명을 모집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에 참여하였다. 봉사 임정식(任廷式)은 성품이 질박하고 곧았으며 무재(武才)가 있었는데, 척후(斥候)로 진(陣)밖에 있다가 조헌의 위급함을 보고 말에 채찍질하며 돌격하여 전사하였다. 사인(士人) 이려(李礪)는 이탁(李鐸)의 손자로 학문과 덕행이 있었고, 사인 김절(金節)은 맨 먼저 군사를 모집하여 전투에 참여하면서 역전(力戰)하였다. 만호 변계온(邊繼溫), 현감 양응춘(楊應春), 봉사 곽자방(郭自防), 무인(武人) 김헌(金獻)ㆍ김인남(金仁男)ㆍ이양립(李養立)ㆍ정원복(鄭元福)ㆍ강인서(姜仁恕)ㆍ박봉서(朴鳳瑞)ㆍ김희철(金希哲)ㆍ이인현(李仁賢)ㆍ황삼양(黃三讓)ㆍ박춘년(朴春年)ㆍ한기(韓琦)ㆍ박찬(朴贊)은 모두 편비(褊裨)로 혈전을 벌이다 전사하였다. 사인(士人) 박사진(朴士振)ㆍ김선복(金善復)ㆍ복응길(卜應吉)ㆍ신경일(申慶一)ㆍ서응시(徐應時)ㆍ윤여익(尹汝翼)ㆍ김성원(金聲遠)ㆍ박혼(朴渾)ㆍ조경남(趙敬男)ㆍ고명원(高明遠)ㆍ강몽조(姜夢祖)는 모두 문인(門人)으로 종군하다가 전사하였다. 일이 알려지자 조헌에게는 이조 참판이 추증되고 그의 아들 완도(完堵)를 녹용(錄用)하였으며 그 집에 월름(月廩)을 지급하였다. 이광륜은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다.
○ 해남 현감(海南縣監) 변응정(邊應井)이 처음에 조헌과 함께 금산(錦山)을 공격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이윽고 관군과 함께 모두 기일을 늦추었다. 조헌이 패하여 전사하였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어찌하여 의병장과 약속을 하고서 위배하여 함께 죽지 못했단 말인가." 하고 즉시 군사를 이끌고 단독으로 진군하여 성 아래에 이르러 격투(格鬪)하다가 전사하였다.
○ 금산(錦山)에 주둔했던 적이 밤에 도망하였다. 적이 비록 조헌 등의 군사를 패배시키기는 하였지만 죽거나 다친 군사가 매우 많았고 관군이 잇따라 이르러 피폐한 때를 이용하여 공격할까 의심하고서 무주(茂朱)와 옥천(沃川)에 주둔했던 군사들을 거두어 군영을 태워버리고 밤에 도망하였다. 그리하여 호남이 다시 완전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조헌 등의 공이 장수양(張睢陽 당 나라의 장순(張巡))에 비교할 만하다고 하였다.
○ 이때 이순신(李舜臣)은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西海)의 입구에 웅거하였으며, 김성일(金誠一) 등은 진주(晉州)의 관요(關要)를 지키고 있었다. 적이 금산(錦山)의 길을 경유하여 호남에 침입했으나 여러 번 좌절당하였으므로 도로 종래의 길로 퇴각하여 돌아가니 호서 또한 함락되는 것을 면하였다. 국가가 이 두 도를 의지하여 군수 물자를 공급할 수 있었으니, 한때의 장사들이 방수(防守)한 공이 또한 많았다고 하겠다.
○ 9월. 중국 조정에서 왜의 진영에 사자로 보낸 유격(遊擊) 심유경(沈惟敬)이 돌아왔다. 당초 조승훈(組承訓)이 패하고 나자 적이 더욱 교만해져 우리 군대에 글을 보내어 장차 서쪽으로 올라가겠다고 큰소리치므로 행조(行朝)에서 두려워하였다. 심유경은 본래 절강성(浙江省) 사람으로 평소 왜국의 실정에 익숙하였으므로 병부 상서 석성(石星)이 유격이란 칭호를 붙여 주면서 그로 하여금 적의 사정을 정탐하게 하였다. 순안(順安)에 이르러 먼저 한 사람의 가정(家丁)을 왜군의 진영에 보내어 황제의 칙지로 책망하기를 "조선이 일본에 무엇을 잘못했기에 일본이 어찌 마음대로 군사를 일으켰는가?" 하니, 행장(行長)이 글을 보고는 직접 만나 일을 의논하자고 회보하였다. 심유경이 즉시 3~4명을 거느리고 가니, 행장 등이 군사를 매우 엄하게 진열하고 성 북쪽의 산 위로 나와서 만났다. 행장이 구봉(求封)과 통공(通貢)에 대한 일을 말하자, 심유경이 행장 등에게 말하기를,
"이곳은 바로 중국 조정의 지방이니 그대들은 물러나 주둔하면서 중국 조정의 다음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
하니, 행장이 지도(地圖)를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곳은 분명히 조선 지역이다."
하였다. 심유경이 말하기를,
"평상시에 여기서 조서(詔書)를 영접하는 까닭에 많은 궁실(宮室)들이 있다. 비록 여기가 조선 지역이라 하더라도 바로 중국의 지경이니 여기에 머물 수는 없다."
하니, 행장이 다시 회보할 때까지 기다릴 것을 청하고 물러갔다. 심유경이 갔다가 돌아오는 기간을 50일로 정한 뒤, 그동안에는 왜군의 무리가 평양의 서북쪽 10리 밖을 나오지 못하고 조선의 군사도 10리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는 나무를 세워 금표(禁標)를 하고 돌아왔다.
○ 전 사성(司成) 우성전(禹性傳)이 의병을 일으켜 의(義)자로 군호(軍號)를 삼았는데, 경기 안의 사민(士民) 중 따르는 자가 많아 군사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얼마 있다가 강화(江華)로 들어가 김천일(金千鎰)과 군사를 연합하였다.
○ 중국 황제가 행인사 행인(行人司行人) 설번(薛藩)을 파견하여 조칙을 내리고 위로하며 유시하기를,
"그대 나라는 대대로 동번(東藩)을 지키며 평소 공손히 순종하였고, 의관 문물(衣冠文物)이 성해 살기 좋은 곳이라고 불려졌다. 그런데 요즈음 듣건대 왜노가 창궐하여 대거 침입해서 왕성(王城)을 함락시키고 평양을 점거하여 생민들은 도탄에 빠져 원근이 소란하며 국왕은 서쪽의 바닷가로 피신하여 초야에 있다고 하니, 그렇게 결딴난 모습을 생각하면 짐(朕)의 마음이 서글퍼진다. 엊그제 급박함을 고하는 소식을 받고 이미 변신(邊臣)에게 조칙을 내려 군사를 일으켜 구원하도록 하였다. 이제 또 행인(行人)을 차송하여 그대 국왕에게 알리는 것이니 마땅히 그대 조종(祖宗)이 대대로 전한 기업을 생각하도록 하라. 어떻게 차마 하루아침에 가벼이 버리겠는가. 급히 치욕을 씻고 흉적을 제거해야 할 것이니 힘써 바로잡고 회복할 것을 도모하라. 그리고 다시 그대 나라의 문무 신민에게 잇따라 유시하여 각기 군주에게 보답하는 마음을 견고히 하고 원수를 갚는 의리를 크게 분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짐이 지금 문무 대신(大臣) 2원(員)에게 명하여 요양(遼陽)의 정병(精兵) 10만 명을 통솔하고 가서 도와 적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기필코 그대 나라의 병마(兵馬)와 함께 전후에서 협공하여 흉적을 모조리 죽여 하나도 남기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짐이 하늘의 명명(明命)을 받아 화이(華夷)의 군주가 되어 지금 만국이 모두 편안하고 사해가 안정되어 있는데 어리석은 소추(小醜 왜적을 가리킴)가 감히 횡행하므로 다시 동남변해(東南邊海)의 여러 진(鎭)에 조칙을 내리고 아울러 유구(琉球)ㆍ섬라(暹羅) 등의 나라에 선유(宣諭)하여 군사 10만 명을 모집해서 동쪽으로 일본(日本)을 정벌하여 경예(鯨鯢 악인을 가리킴)를 주살하고 사해를 안정시키게 하였다. 그렇게 되면 작위(爵位)를 주고 포상하는 성대한 전례를 짐이 어찌 아끼겠는가.
대체로 선세(先世)의 강토를 회복하는 것은 곧 대효(大孝)이며 군부(君父)의 환난에 급히 달려가는 것은 곧 지극한 충성이다. 그대 나라의 군신들은 평소 예의를 알고 있으니 틀림없이 짐의 마음을 잘 체득할 것이다. 옛날의 문물을 회복시켜 국왕으로 하여금 개가를 올리며 도성으로 돌아가 종묘와 사직을 굳건히 지키며 번병(藩屛)의 임무를 길이 보전하게 하라. 그리하여 먼 곳을 보살피고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짐의 뜻을 위로하게 될 것이다. 부디 신중히 할지어다. 그러므로 유시하노라."
하였다.
○ 박진(朴晉)이 경주를 수복하였다. 박진이 안강현(安康縣)에 주둔하다가 밤에 몰래 군사를 다시 진격시켜 성 밖에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성 안으로 발사하여 진 안에 떨어뜨렸다. 적이 그 제도를 몰랐으므로 다투어 구경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만져 보는 중에 조금 있다가 포(砲)가 그 속에서 터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나갔다. 이에 맞아 즉사한 자가 20여 명이었는데, 온 진중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신비스럽게 여기다가 이튿날 드디어 성을 버리고 서생포(西生浦)로 도망하였다. 박진이 드디어 경주에 들어가 남은 곡식 만여 석을 얻었다. 일이 알려지자, 가선대부로 승진시켰다. - 비격진천뢰의 제도는 옛날에 없었는데,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진천뢰(震天雷)를 대완포구(大碗砲口)로 발사하면 5~6백 보를 날아가 떨어지는데, 얼마 있다가 화약이 안에서 폭발하므로 진을 함락시키는 데는 가장 좋은 무기였으나 그 뒤에는 활용하는 사람이 없었다.
○ 황제의 조칙을 팔방(八方)에 선포하고 관군과 의병에게 힘을 합하여 적을 토벌하도록 유시하였다. 또 적의 계략에 빠졌던 사민(士民)들을 용서하여 귀순해서 스스로 충성을 다하도록 하고 공을 세운 자는 상을 주게 하였다.
○ 적을 토벌한 자에 대해 포상하는 규정을 중외에 반포하였다.
○ 여러 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궐원인 지방관에 대해서는 모두 적임자를 가려 임시로 지키게 하고 계문하여 정식으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 전라 순찰사 권율이 군사를 거느리고 도성으로 향하였다. 권율이 한번 호령을 새롭게 하자 호남의 인심이 조금 안정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군사 2만 명을 징발하여 북쪽으로 올라왔다.
○ 왜적이 연안성(延安城)을 공격하니, 초토사 이정암(李廷馣)이 그들을 격퇴시켰다. 적장 갑비수(甲斐守)ㆍ풍신장정(豐臣長政) 등은 연안성을 굳게 지키고 떠나지 않는다 하여 해주(海州)ㆍ평산(平山)의 여러 주현(州縣)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를 모두 징발하여 대거 침입해 왔다.
이에 성 안에서는 모두 기가 질려 말하기를 "초토사는 성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니 이 예봉(銳鋒)을 피하여 뒷날에 거사를 도모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하니, 이정암이 울면서 달래기를 "내가 경악(經幄)에 있던 늙은 신하로 말고삐를 잡고 행재를 수행하지 못했다. 이제 왕세자의 초토하라는 명을 받았고 보면 빨리 한 성의 수비라도 맡아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니, 어떻게 차마 구차하게 살겠는가. 그리고 주민을 이끌어 성으로 들어오게 하였다가 적이 왔다고 해서 버리는 짓을 내가 어찌 차마 하겠는가." 하고, 명령을 내리기를 "함께 죽고 싶지 않은 자는 마음대로 빠져 나가라." 하였다. 그리고는 노복을 시켜 섶을 쌓고 횃불을 가지고 기다리게 하면서 경계시키기를 "적이 만약 성에 오르거든 나는 여기에 앉아 있을 것이니 너는 즉시 태워서 적의 손에 내가 더럽게 죽지 않도록 하라." 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인사는 타일러서 보내니 종사관 우준민(禹俊民)이 나가서 군중에게 거듭 약속을 밝히고 마음과 힘을 합하기로 맹세하자 군중이 감동하고 분격해서 일제히 외치기를 "대장이 죽기로 결단하는 판에 우리들이 어찌 살기를 도모하랴." 하였다.
적이 드디어 성을 포위하였다. 한 장수가 흰 기를 등에 지고 백마를 타고는 성을 돌며 두루 살피던 중에 기가 갑자기 바람에 넘어졌다. 무사 장응기(張應祺)가 그것을 보고 화살 한 대를 쏘아 가슴을 꿰뚫어 죽였다. 이정암이 좌우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은 적이 패할 징조이다." 하였다. 적이 밤낮으로 공격하며 수천 개의 조총(鳥銃)으로 일제히 사격하니 연기가 자욱하고 탄환이 비오듯 하였다, 그러나 이정암은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성가퀴를 지키는 자에게 명하여 경솔히 활을 쏘지 말고 적이 성에 기어 오르거든 반드시 쏘아 죽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문짝ㆍ다락 등을 뜯어 방패(防牌)로 삼고 쌓아둔 풀을 묶어 횃불을 만들고 가마솥을 벌여 두고 물을 끓이면서 늙은이ㆍ어린이ㆍ부녀자 할 것 없이 모두 그 일에 달려들도록 하였다.
적이 시초를 참호에 채우고 올라오면 횃불을 던져 태우고, 적이 긴 사다리로 성에 오르거나 판자를 지고 성을 훼손시키면 나무와 돌로 부수고 끓는 물을 퍼붓게 하니 죽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적이 남산에다 높은 다락을 세워 판자 벽에 구멍을 내고 내려다보며 총을 쏘니, 성 안에서도 이에 대응하여 흙담을 쌓아 막았다. 적이 밤 안개를 틈타 몰래 서쪽 성으로 기어 오르는 것을 성가퀴를 지키는 군사가 횃불로 에워싸 40여 명을 태워 죽였다. 포위당한 지 4일 동안 밤낮으로 크게 싸웠는데 적도 탄환이 떨어져 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성 안에서는 또한 승리한 기세를 틈타 환호하며 쇠북을 치자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 적이 이에 시체를 모아 불을 지르고 퇴각하니, 즉시 군사를 출동시켜 추격하여 수급을 베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이정암이 승리의 보고를 하면서 단지 어느 날에 성이 포위당하고 어느 날에 풀고 떠났다고만 하였을 뿐 다른 말이 없었다. 조정에서 모두 말하기를 "전쟁에 이기는 것도 쉽지 않지만 공을 자랑하지 않는 것은 더욱 어렵다." 하고 상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더하고, 함께 지킨 장사로 공이 있는 장응기ㆍ조종남(趙宗男)ㆍ조서룡(趙瑞龍)ㆍ봉요신(奉堯臣) 등에게는 차등 있게 관직으로 포상하였다.
○ 함경북도 평사 정문부(鄭文孚)가 군사를 일으켜 경성(鏡城)을 수복하였다.
당시 북계(北界)의 수장(守將)들이 모두 토인(土人)에게 잡혀 왜장에게 넘겨졌는데, 도망하여 나온 자는 10명에 1~2명도 안 되었다. 평사 정문부는 교생(校生)들에게 글을 가르쳤기 때문에 변란이 일어난 뒤에 제자 몇 사람이 비호하여 빠져나올 수 있었다. 교생들과 식견이 있는 무사들이 정문부가 있는 곳을 알고 모두 그에게 찾아가 정문부를 추대하여 의병장으로 삼고 토병과 장사 수백 명을 모았는데, 경성 사람인 전 만호 강문우(姜文佑)가 선두에서 거느리고 즉시 부(府)의 성에 이르렀다.
이때 국세필(鞠世弼)이 예백(禮伯)이라고 일컬으며 병사(兵使)의 인(印)을 가지고 일을 보면서 태연히 부(府)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군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문을 닫고 성에 올라가 항거하였다. 이에 강문우 등이 화복(禍福)을 들어 위협하니 국세필이 대적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성문을 열어 맞아들이고 병사의 인을 반납하였다. 정문부가 명령을 내리기를 "대소의 병민(兵民)이 예전에 범한 죄는 문책하지 말라." 하고, 그대로 국세필에게 그전처럼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남북의 주보(州堡)에 격문을 전하여 병사 3천 명을 합하고 그 중에서 날래고 용맹스런 기마병을 뽑아 선봉으로 삼았다. 길주(吉州)의 왜적이 이 소식을 듣고 군사 백여 명을 보내어 성 서쪽에 와서 탐지하게 하였는데, 강문우 등이 성문을 열고 나가 공격하여 수십 명의 머리를 베니 남은 적들이 도망갔다.
○ 10월. 부산 등지에 주둔했던 적이 군사를 합쳐 대대적으로 진주(晉州)를 포위하였다. 목사 김시민이 적병을 크게 격파하여 진주가 포위에서 풀렸다. 당초 왜장이 군사 수만 명을 모두 동원하여 진주성을 포위하였는데 성 안의 군사는 3천여 명이었다. 김시민이 여러 성첩을 나누어 지키게 하면서 조용히 기다리도록 하니 성 안이 고요하였다. 적이 기치(旗幟)와 개삽(蓋翣)을 많이 설치하고 금으로 꾸민 가면에 의복을 이상하게 차려 입어 햇빛에 번쩍이고 바람에 펄럭이니 온갖 형상이 눈이 부시고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왜장 6명이 진(陣)을 나누어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총수(銃手) 수천 명이 항상 산 위에서 성 안을 향해 일제히 쏘아대니 그 형세가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리는 듯하였으며, 부르짖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그러나 김시민은 군사들로 하여금 움직이지 말고 적들의 소리가 약해지기를 기다려 즉시 포(砲)를 쏘고 북을 울리며 응전하게 하였다.
적이 대나무와 소나무 가지를 많이 베어 엮어서 막이를 만들고 흙으로 그 속을 채워 우리 군사가 모르게 하고 대나무 사다리 수천 개를 만들었는데 한 칸 너비쯤 되는 것으로 그 위에 망석(網席)을 덮어 많은 군사가 동시에 일제히 올라갈 수 있게 만들었으며, 3층의 산대(山臺)를 만들어 성첩을 내려다보게 하였다. 김시민은 화구(火具)를 미리 준비하고 화약(火藥)을 종이에 싸서 다발로 묶은 풀 속에 넣어두고 성 위에는 대포(大砲) 및 대석(大石)을 나누어 설치하게 하였으며, 여장(女墻) 안에는 가마솥을 비치하고 물을 끓여 대기하도록 하였다.
적이 공격할 장비를 모두 갖추고 사면으로 육박하자, 성 안에서 현자총(玄字銃)을 쏘아 산대의 적을 맞춰 떨어뜨리고, 화약과 풀로 송장(松障)을 태웠으며, 대포로 대나무로 엮은 긴 사다리를 부수고, 끓인 물을 퍼붓기도 하고 큰 돌을 던지기도 하여 여러 가지의 공격용 장비를 격파하였다. 9월 10일 밤중에 적병이 거짓 물러가는 체하다가 몰래 되돌아와 적의 대장이 직접 전투를 독려하였다. 여러 왜적이 모두 방패로 가리고 머리를 감싸고 처음에는 동문(東門)을 공격하였는데, 앞에서 한꺼번에 올라가게 하고 뒤에서는 천 개의 총으로 일제히 사격하여 성 위에 사람이 설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김시민은 무리를 지휘하여 활과 쇠뇌와 포를 쏘고 돌을 굴려 내리니, 적병이 오는 족족 죽어 넘어져 쓰러진 시체가 삼대처럼 즐비하게 모두 다 패하였다.
바야흐로 전투가 무르익을 무렵 또 하나의 대진(大陣)이 동문의 경우처럼 갑자기 북성(北城)을 공격하였다. 이에 만호 최덕량(崔德良) 등이 죽기를 무릅쓰고 대항해 싸우며 일사불란하게 막아 내었는데, 동녘이 밝아오자 조금 뜸해졌다. 성안의 나무와 돌, 기와, 띠풀 등이 거의 없어졌으며 김시민도 탄환에 맞아 누워 있었다. 이때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이 왜장을 쏘아 죽이니 한낮이 되어서야 적진이 비로소 퇴각하며 시체를 태우고 포위를 풀고 흩어졌다. 성이 포위당한 10여 일 동안 4~5차례 큰 전투를 벌이면서 안팎에서 힘껏 싸웠으므로 적이 먼저 도망하였다.
○ 복수(復讐)할 사람을 불러 모아 군사를 일으켰다. 처음에 고경명(高敬命)이 패한 뒤 그의 아들 전 현령 고종후(高從厚)가 상복을 입고 종군하여 부친의 남은 병사를 거두어 별군(別軍)을 만들었다. 이때에 이르러 체찰사 정철(鄭澈)이 조정의 뜻을 선포하며 권유하자 홍계남(洪季男)이 맨 먼저 여러 도에 편지를 보내니, 조헌의 아들 조완도(趙完堵) 등이 호응하였다. 또 고종후로 하여금 사노(寺奴)를 뽑아 군사를 삼도록 하였다.
○ 유격(遊擊) 갈봉하(葛逢夏)가 마병(馬兵) 2천 명을 거느리고 사대수(査大受)와 함께 행조를 호위하며 오랫동안 의주(義州)에 머물렀다.
○ 북도 평사(北道評事) 정문부(鄭文孚)가 길주(吉州)에서 적병(賊兵)을 크게 패배시키고 성을 포위하였다.
정문부가 백성을 안집(安集)시켜 안정이 되자 군사들의 마음이 모두 적을 공격하여 충성을 바치고자 하였다. 이에 출동할 날짜를 가려 출발하려 할 즈음에 장사들이 일제히 요청하기를 "앞으로 왜적을 토벌하려 하는데 국가에 반역한 적이 아직도 진중(陣中)에 있으니 먼저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국세필(鞠世弼) 등 13명을 잡아 목을 베어 여러 사람들에게 조리돌리고 말하기를 "당초에 앞장선 사람은 이 무리들뿐이며 이 밖에는 참여한 자가 없으니 부인(府人)은 의심하지 말라." 하니, 많은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는데, 이것은 정문부의 본래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다시 육진에 격문을 보내어 맨 먼저 반란에 앞장선 자를 처벌하게 하니, 회령(會寧)의 유생 신세준(申世俊)이 군사를 일으켜 국경인(鞠景仁)의 목을 베었으며, 남은 진도 모두 수복되고 반민(叛民)들은 주벌되기도 하고 도망하기도 하였다. 정문부가 군사를 고참역(古站驛)으로 진출시키고 군사를 보내어 명천(明川)의 반적(叛賊) 정말수(鄭末守)를 주벌하고 성울 수복하였다. 그러자 길주의 적이 마침내 사방으로 나와 분탕질을 쳤는데, 일지군(一枝軍)은 명천의 해창(海倉)을 노략질하였다. 정문부가 군사를 길주의 남촌(南村)에 진출시켜 돌아가는 길에서 요격하여 적병을 크게 깨뜨리고 6백 명의 수급을 베었다. 적의 한 부대가 마천령(摩天嶺) 아래 영동관 책성(嶺東館柵城)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임명촌(臨溟村)을 불태우고 노략질하므로, 정문부가 군사를 돌려 공격하였다. 쌍포(雙浦)에서 전투하였는데 적병이 패주하였으므로 60명의 수급을 베었다. 이로부터 두 곳에 주둔한 적이 모두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으므로 정문부가 군사를 나누어 포위하였다.
○ 11월. 정곤수(鄭崑壽)가 북경에서 돌아왔다. 중국 조정이 대병(大兵)을 출동시켜 구원할 것을 허락하고 먼저 은(銀) 3천 냥을 내려 주었다. 정곤수가 처음에 연경에 도착하여 주문(奏文)을 올리자 황제가 즉시 병부(兵部)에 내려 복의(覆議)하게 하였다. 정곤수가 병부에 글을 올려 거듭 간곡하고 절박하게 청원하고, 또 상서(尙書) 석성(石星)에게 나아가 통곡하며 애절하게 호소하는데 슬픔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니 석성도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당시 중국 조정에서도 이의(異議)가 분분하여 어떤 이는 말하기를 "중국 지역만 방어하면 되지 병마(兵馬)를 많이 징발하여 중국을 먼저 피폐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지만, 석성만은 군사를 내자는 의논을 극력 주장하며 복제(覆題)하여 격동시키는 한편 자신이 동쪽의 정벌에 나서겠다고 주청하였다. 황제가 즉시 윤허하여 병부 시랑(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을 경략(經略)으로 삼아 먼저 2만의 군사를 출발시키고 곧 이어 대군(大軍)을 조발하고 장수를 정하여 잇따라 파견하게 하였다. 그리고 마가은(馬價銀) - 마가은은 바로 중국 조정의 변방 오랑캐 방어용 자금이다.- 3천 냥을 내려 궁각(弓角)과 화약을 사서 보냈다. 정곤수가 무더운 때에 갔다가 추위를 무릅쓰고 돌아왔는데, 길에서 머물지 않고 주청하여 성사시켰으므로 상이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며 후하게 위로하였다.
○ 호남의 사민(士民)이 의곡(義穀)을 모아 해로(海路)를 따라 의주(義州)에 수송하였다.
○ 군공청(軍功廳)을 설치하여 군공을 조사하여 감정하게 하였다.
○ 전 동지사(同知事) 성혼(成渾)이 행재에 이르자 우참찬으로 승진 임명하였는데 대신의 의논을 따른 것이었다. 성혼이 아뢰기를,
"신이 국란 초기에 대궐에 달려가려 하였으니 조정에서 바야흐로 당인(黨人)의 지목이 있어 감히 스스로 반행(班行)에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승여가 임진강을 건너는 때를 당해서는 일이 갑작스러웠고 집이 15리 밖에 있어 미처 듣지 못했기 때문에 달려와 문안하지 못하였으니, 신하로서의 도리를 전혀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동궁(東宮)이 하교하여 이정형(李廷馨)의 군중(軍中)에 나아가 군사(軍事)를 함께 맡도록 명하였습니다. 신이 병으로 폐인이 되었으니 어떻게 말을 몰아 달리는 것을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부축을 받고 군대 있는 곳에 이르러 감히 죽기를 사양하지 못했습니다. 이어 동궁이 불러서 분조(分朝)로 달려갔는데, 머무른 지 열흘 만에 대조(大朝)로 들어가기를 청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달 말에 성천(成川)을 출발했는데, 겨울철 극심한 추위로 신은 몸이 점점 쇠약해져 한질(寒疾)이 다시 도져 도로에서 지체하느라 뒤처져 늦어진 바람에 평소의 마음을 스스로 아뢸 길이 없었으니 황공하고 두려워 죽어도 죄가 남는다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갖은 고생을 하며 여기에 도착하였으니 참으로 가상하며 기쁘다. 국가가 장차 경(卿)을 의지하여 회복될 것이니 대죄(待罪)하지 말라."
하였다. 성혼이 또 새로 승진된 직명(職名)을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재삼 사양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 문소전(文昭殿)의 위판(位版)을 처음에 전내(殿內)에 묻었는데, 김천일(金千鎰)이 사람을 모집하여 성에 들어가 몰래 가져오게 해서 강화(江華)에 봉안(奉安)하였다. 이때 응모한 사람에게도 상을 주도록 명하였다.
○ 12월. 전라 순찰사 권율(權慄)이 수원의 독성(禿城)으로 군사를 진출시켰다. 권율이 직산(稷山)에 이르자 체찰사 정철이 경솔하게 진격하지 말도록 경계하므로 권율이 그대로 군사를 머물게 하면서 보고하였다. 조정이 전지를 내려 정철을 책망하고 권율을 재촉하여 도성으로 진출하여 도모하도록 청하였다. 권율이 지난날 평야의 전투에서 군사가 패한 것을 징계하여 독성으로 진출하여 머물렀다. 상이 차고 있던 칼을 풀어 달려가 내려주게 하면서 "여러 장수들 중에 명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이 칼로 처단하라."고 하였다. 도성의 적이 진을 나누어 군사를 출동시켜 왕래하면서 도전(挑戰)하였으나 권율은 성곽을 튼튼히 지키고 응하지 않으니 적이 군영을 태우고 퇴각하였다. 권율이 가끔 날랜 군사를 출동시켜 낙후한 적을 습격하자 기내(畿內)에 주둔했던 적이 모두 도성으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서로(西路)에 행인이 다닐 수 있게 되어 여러 의병들이 차례로 경기 지역에 진출하여 주둔하면서 중국 군사를 기다렸다.
황제가 대병(大兵)을 파견하여 와서 구원하게 하였다.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먼저 압록강을 건넜다. 황제가 우리의 주청을 허락하고 병부 시랑(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을 경략군문(經略軍門)으로, 도독동지(都督同知) 이여송(李如松)을 제독군무(提督軍務)로 삼았다. 그리고 부총병(副摠兵) 양원(楊元)을 좌협대장(左協大將)으로 삼아 부총병 왕유익(王有翼), 부총병 왕유정(王維禎), 참장(參將) 이여매(李如梅), 참장 이여오(李如梧), 참장 양소선(楊紹先), 선봉 부총병 사대수(査大受), 부총병 손수렴(孫守廉), 참장 이영(李寧), 유격 갈봉하(葛逢夏) 등을 모두 양원이 통솔하게 하였다. 총병 이여백(李如栢)을 중협대장(中協大將)으로 삼아 부총병 임자강(任自强), 참장 이방춘(李芳春), 유격 고책(高策), 유격 전세정(錢世禎), 유격 척금(戚金), 유격 주홍모(周弘謨), 유격 방시휘(方時輝), 유격 고승(高昇), 유격 왕동(王洞) 등을 모두 이여백이 통솔하게 하였다. 부총병 장세작(張世爵)을 우협대장(右協大將)으로 삼아 부총병 조승훈(祖承訓), 부총병 오유충(吳惟忠), 부총병 왕필적(王必迪), 참장 조지목(趙之牧), 참장 장응충(張應忠), 참장 낙상지(駱尙志), 참장 진방철(陳邦哲), 유격 곡수(谷燧), 유격 양심(梁心) 등을 모두 장세작이 통솔하게 하였다. 참장 방시춘(方時春)을 중군 비어(中軍備禦)로, 한종공(韓宗功)을 기고관(旗鼓官)으로, 병부 원외랑(兵部員外郞) 유황상(劉黃裳), 병부 주사(兵部主事) 원황(袁黃)을 찬획(贊畫)으로, 호부 주사(戶部主事) 애유신(艾維新)을 독향(督餉)으로 삼았다. 군사는 도합 4만 3천여 명이었으며 잇따라 나온 자가 8천 명이었다. 이때 평양에 주둔한 적은 1만 수천 명 정도였는데, 우리 백성들까지 군사로 삼아 군세(軍勢)를 펼쳤다. 경략이 세 갑절의 군사로 공격할 계획을 하였다.
[주D-001]신포서(申包胥)에 비유 : 오(吳) 나라가 초(楚) 나라를 침략하자 초 나라 신하 신포서가 진(秦) 나라에 구원병을 청하러 가 뜰에서 7일 동안 울었더니 진 나라에서 그의 충성심에 감동되어 출병했던 고사. 《史記 卷六十六 伍子胥列傳》
기재사초 하(寄齋史草下)
임진일록 4(壬辰日錄四) 선조 25년, 만력 20년 9월에 시작하여 12월까지 씀 대체로 4개월 간의 기록.


9월

밀양 부사 박진(朴晉)은 왜란 초기에 전공(戰功)이 있어, 마침내 승직하여 좌병사(左兵使)가 되었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영천(永川)에 나가 공격하다가 적에게 습격을 받아, 겨우 죽음을 면했다.
○ 그 뒤에 신녕(新寧) 사람 권응수(權應銖)가 병정 천여 명을 모집하여 병정마다 한 묶음의 섶을 가지고 밤을 이용하여 영천을 공격하였다. 병정들이 바람을 따라 불을 놓으니, 적이 크게 궁지에 몰려, 불길을 무릅쓰고 포위를 뚫고 나가려고 하는 것을 아군이 어지러이 쏘아대니, 적이 나갈 수 없었다. 수천의 적이 다 불에 타 죽고 남은 자도 혹 벼랑에서 떨어져 물에 빠져 죽으니, 그 수효를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시체썩는 냄새가 길을 덮어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못했다. 이 일로 권응수를 절충장군 조방장(助防將)으로 발탁했다.
○ 지휘(指揮) 황응양(黃應暘)이 와서 말하기를,
“나는 비로 석 노야(石老爺 중국의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을 높인 말)가 보낸 사람이오. 직접 적의 진영으로 들어가 적의 형세를 살펴야 하니 반드시 한 분의 대신과 동행해야겠소.”
하였다. 상이 친히 용만관(龍灣館)에서 만나 보니, 황응양이 말하기를,
“귀국은 비록 작으나 평소 부강하다 일러 왔는데, 하루 아침에 파천(播遷)하여 여기에 온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우리 조정에서 어떤 사람은 구원해야 한다 하고, 어떤 사람은 구원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귀국의 형세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석 노야가 저에게 말하기를, ‘네가 곧장 친히 적의 진영에 가서 염탐해 보면 조선의 형세도 알 것이다.’ 하였는데, 내가 온 것은 실은 이것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통곡하며 이르기를,
“연전에 일본이 사람을 보내 함께 상국을 침범하자고 하므로 대의를 들어서 거절하였고, 그 뒤 또 와서 우리에게 길을 빌려주면 요동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므로 또 그것을 거절하였소. 그리고는 곧 전후의 왜적 형세를 갖추어 천조에 주달하였소. 이제 왜적이 우리 민생을 도살하고 우리 종묘를 불태우니,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결코 의리상 한 하늘 아래서 같이 살 수 없소. 그런데도 어찌 차마 원수를 잊고 원한을 풀고 그놈들과 함께 상국을 침범하는 계책을 세우겠소. 소방(小邦)의 군신이 도망하여 여기에 온 것은 다만 그간의 곡절을 분명히 알려 평소 사대(事大)의 정성을 밝히고자 하였을 뿐이오. 이 미미한 정성을 아직 사뢰지도 못하고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듣게 되니, 마땅히 압록강에 몸을 던져 죽어서 이 마음을 나타내겠소.”
하고, 상하가 다 목놓아 통곡하였다. 황 지휘는 상의 손을 잡고 가슴을 어루만지며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제 말씀하신 것을 들으니, 이것은 바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성실한 말씀입니다. 천조에서 만일 구원하지 아니한다면 충의(忠義)로운 동한(東漢)의 나라를 원통하게도 기회를 잃게 됨을 면치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꼭 적의 진영에 가 보지 않더라도 조선의 사정은 이미 잘 알았습니다.”
하고, 그날로 돌아갔다. 그 뒤에 우리 사신이 병부로 찾아가니, 병부 관리가 말하기를,
“황응양이 당신 나라에서 돌아온 뒤로 날마다 병부에 와서 석 노야를 만나 뵙고서, 석 노야가 나갈 적에는 멍에채를 붙잡고 통곡하며, 극력 구원해야 하는 정상을 말하여, 석 노야도 눈물을 흘렸소. 출병하자는 의론은 비록 석 노야가 처음부터 주장하였다 하더라도 또한 황 지휘의 힘이 적지 않습니다.”
하였다.
○ 조정에서 말하기를,
“이광이 4월에 기병하여 공주에 이르러 대가가 서울을 나갔다는 말을 듣고, 이유 없이 군사를 파하여 가버리고, 얼마 안 되어 용인(龍仁)에서 군사를 파하고 또 전주(全州)를 버리고 자신을 온전히 하려는 계책으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이것은 크게 신하의 의리를 잃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를 잡아다 죄주라 명하였다.
○ 윤두수가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광주 목사 권율(權慄)은 기골(氣骨)과 도량이 있어, 참으로 장수감이옵니다. 전라 감사로는 이 사람이 적격이옵니다.”
하니, 마침내 권율로서 순찰사를 삼았다.
○ 전 판서 김응남(金應南)으로 정주(定州) 수성장(守城將)을 삼고, 겸하여 배가 왕래하는 길을 관리하게 하였다. 처음에 김응남이 어머니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상소하여 전장에 나가 복수하겠다고 하였는데, 나중에 비로소 어머니가 생존한 것을 알았다. 조정에서는 드디어 정주를 중도(中道)의 거진(巨鎭)이라 하여 김응남에게 성과 기계를 수선하고 겸하여 관서(關西)의 뱃길을 살피게 하였다. 대체로 천조의 출병이 아직도 기약이 없으니 적의 형세가 만일 급박하면 바다로 항해하여 호남으로 향할 계책이었다.
○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이조 좌랑 허성(許筬)은 처음 소모(召募)의 명을 받았으나, 한 명의 군사도 모집하지 못하고 한 가지 일도 한 적이 없으면서 이제 와서 거만하게 복명(復命)하니, 어찌 신하로서 명을 받아 직책을 다했다 하겠나이까. 직을 파하여 그 죄를 응징하시기를 청하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세자가 이천(伊川)에 있으면서, 강원 감사 유영길(柳永吉)이 적을 피해 영동에 가 있어서 영접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마침내 강신(姜紳)을 기복(起復)하여 그와 대체하고 명을 조정에 청하니, 조정에서도 이를 따랐다. 처음 조정에서는 사대부의 처자가 산골짜기로 피난하여 굶어 죽은 자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강원도가 가장 심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진휼(賑恤)하여 목숨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유시를 내렸다. 이에 유영길이 불가하다고 고집하여 말하기를,
“사람마다 만족하게 해 주자면 한이 없소. 관가의 곡식을 가지고 사사로이 은혜를 베푸는 것은 나로서는 하지 못하겠소.”
하니, 이성중이 대답하기를,
“급암(汲黯)은 조령(詔令)을 고치면서까지 창고를 열었는데, 유영길은 전지(傳旨)를 위배하여 곡식을 나누어 주는 것을 막으니, 저 급암은 진실로 무슨 마음이며, 이 유영길은 진실로 무슨 마음인가.”
하였다. 경상 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이 왜란 초에, 늙고 겁이 많아 먼저 도망갔다. 함안 군수(咸安郡守) 유업인(柳業仁)은 전공이 있어 승진되어 병사(兵使)가 되었다. 그는 얼마 안 있어 진주가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하러 가다가 적을 길에서 만나 싸우다 패하여 죽었다. 이 때에 많은 적이 적이 진주를 포위하니, 목사 이경(李璥)은 병으로 죽고, 판관 김시민(金時敏)과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원악(李元岳) 등은 밤낮으로 고전하였다. 그들은 군대를 나누어 여섯 진영으로 만들어 번갈아 나가면서 주야를 쉬지 않았다. 성안에서는 총포와 시석(矢石)으로 갖은 수단을 다하여 7일 동안을 막으며 지켰다. 적은 사상자가 많자 마침내 도망쳤다. 조정에서는 김시민을 승임시켜 병사 겸 진주목사로 삼았는데, 오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처음 김면(金沔)이 의병을 일으킬 적에 먼저 집 하인 7백여 명을 이끌고 창의하니, 원근 사람이 다투어 호응하였다. 김면은 성주(星州)ㆍ초계(草溪)ㆍ합천(陜川)의 사이를 왕래하면서 적을 무수히 베니, 백성들이 의지하여 편안히 살았다. 마침내 김면을 발탁하여 병사로 삼았다.
곽재우(郭再祐)는 의령(宜寧) 사람으로 승지 곽규(郭﨣)의 아들이다. 일찍이 글을 업으로 하였는데, 적이 의령 근처로 온다는 말을 듣고 마을 사람들을 모아 그들을 회유하기를,
“적이 이미 육박해 왔으니, 우리의 부모 처자가 적에게 붙잡히게 될 것이오. 우리 마을에서 젊은 나이로 싸울 만한 자가 수백 명이 됩니다. 만일 마음을 같이하여 정진(鼎津)을 근거지로 삼아 지키면 마을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인데, 어찌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리겠소.”
하니, 여러 사람이 호응하였다. 드디어 군대를 나룻가 언덕 위에다 매복케 하였다. 또 호각 부는 자를 많이 구해서 붉은 옷을 입혀서 산 꼭대기로 올라가게 하였다. 그리고는 이들을 사면에 벌여 두고, 적이 이르면 사면에서 일제히 호각 소리를 내고 언덕 뒤의 복병은 또 마구 쏘기로 했다. 적은 이것을 보고 놀라 흩어졌다. 드디어 적의 목 백여 급을 베었고, 이 때문에 적은 감히 다시 가까이 오지 못했다. 조정에서는 드디어 곽재우를 절충장군 조방장으로 발탁하였다. 이 때에 8도에서 의병이 함께 일어났는데 모두 관군의 절제를 받지 아니하였고, 그 행동을 마음대로 하여 관가의 창고를 공공연히 부수고 곡식을 꺼냈다. 전쟁에 이기면 큰 상을 받고 전쟁에 패하더라도 견책이 거의 없자, 관군으로 죄있는 자는 대부분 그 의병 속으로 들어갔다. 김면이 혼자 말하기를,
“우리는 의로써 일을 일으켰으니, 관군의 절제를 받아야 마땅하다. 약탈하지 말고 오직 의로 돌아갈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의병의 의의가 어디 있겠는가.”
하였다. 그가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곽재우는 본래 유식한 사람이 아니니, 그가 행한 일은 깊이 책망할 것이 못된다. 정인홍(鄭仁弘)은 현자(賢者)라 일컬어 왔는데도 이와 같은 행동을 하니,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하였다.
처음에 감사 김수(金睟)는 처사가 조급하고 각박하여 인심을 잃었다. 변란이 일어나자 제대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전라도 경계로 피하여 갔으므로 지방 사람들의 나무람을 많이 받았다. 곽재우가 이미 뜻을 얻은 뒤에 법도를 따르지 아니함이 많아서, 김수는 그것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곽재우는 대노하여 드디어 격문을 돌려 그의 죄를 불충 불효라고 나열하여 죽이려 하자, 김면이 극력 이것을 말렸다. 조정에서 드디어 김성일(金誠一)을 감사로 삼고, 김수를 소환하였다. 곽재우는 또 상소하여 김수를 목베도록 청하였다. 상이 이것을 크게 의심하여 비밀히 비변사에 묻기를,
“이 사람이 한 도의 주인을 마음대로 죽이고자 하니, 역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를 제거하지 아니하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다.”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그의 행동를 보니, 일개 미친 아이에 불과합니다.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무찔러 마을을 잘 보전하고 동서로 달려가 구원하여 험난을 피하지 아니 한다고 스스로 의사(義士)라 자처합니다. 오늘날 상소함에 있어서도 그는 역시 의기의 격동이라는 것만 생각하고 스스로 큰 죄에 빠진 줄을 알지 못하였지만 전쟁이 어지러운 때에 어찌 사람마다 다 예법으로써 책할 수 있겠나이까.”
하였다. 상이 드디어 답하지 않았다.
○ 애당초 대가가 평양을 출발하지 않았을 적에 함경 감사 유영립(柳永立)이 일처리를 잘못한다 하여 윤탁연(尹卓然)으로 바꾸었는데, 윤탁연이 적에게 핍박되어 삼수(三水) 별해보(別害堡) 산중으로 들어갔다. 남북도의 반란민이 크게 일어나서, 강원도로부터 경흥에 이르기까지 5리마다 표목 하나씩을 세워 글을 써 놓기를,
“이덕형은 왕이 되고, 김성일은 대장이 되었다.”
하였다. 이 때문에 인심이 흉흉하여 모든 백성들이 말하기를,
“항복하면 반드시 죽지 않는다.”
하였다. 그리하여 북도 병사(北道兵使) 한극함(韓克緘),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영(李瑛), 온성 부사(穩城府使) 이수(李銖), 경성 판관(鏡城判官) 이홍업(李弘業) 등을 포박하여 적에게 항복하였다. 병조 좌랑 서성(徐渻)은 잡혔다가 적에게 뇌물을 주고 도망하였고, 회령 판관 이염(李琰)은 변을 듣고는 스스로 문루(門樓)에 목매었는데, 그 매달린 줄을 끊은 자가 있어서 마침내 성에서 줄을 타고 도망하였다. 그 나머지 사람은 죽음을 면한 자가 없었다.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이 표(表)를 써서 적을 맞이하여 항복하고자 하면서 심지어,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고 나를 학대하면 원수다. 누구를 부린들 신하가 아니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문구까지 있었다. 판관 임순(林恂)과 함께 그 글을 내던지고 도망가려고 했다.
반란민 국경인(鞠景仁)이 북병사라 자칭하며 군사를 영솔하고 적을 인도하여 호지(胡地)로 들어갔다. 그러나 삼일계(三日界)를 넘어서 여러 호인(胡人)에게 유인되어 크게 패하고 돌아왔다. 적군이 돌아와 길주(吉州)에 의거하였다. 이에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는 산골로 도망가, 6ㆍ7명의 수령과 협의하여 기병하고자 하였지만, 어느 사람은 호응하고 어느 사람은 호응하지 아니하여 관망하기로 하였다. 이 때 마침 조정에서 한 방문(榜文)을 보내왔는데, 8도의 의병과 관군이 곳곳에서 적을 치고, 천병(天兵) 10만이 조만간 평양에 도착할 것인데, 반은 설한령(薛罕嶺)을 넘었다는 말이 있어, 백성들이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정문부 등은 드디어 명천(明川)과 길주(吉州)의 지경에서 군사를 일으키니, 군사가 천여 명에 달했다. 부대를 편성하여 매우 엄하게 단속하였다. 반란민도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으므로 정문부는 이들을 후하게 대우하자, 사람들이 모두 기꺼이 따랐다.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璨)이 기병하여 성세(聲勢)를 돋우어 서로 응원하였다. 정문부는 정현룡을 불러 대장으로 삼고 군사를 전진시켜 적을 무찔러 연달아 적을 베었다. 조정에서는 정문부를 절충장군으로 삼고 평사를 겸하게 하였다. 강찬을 판교(判校)로 진급시키고, 갑산 부사(甲山府使) 성윤문(成允文)으로 북병사를 삼고, 이성 현감(利城縣監) 최호(崔胡)로 남병사를 삼았다.
○ 동지사 민준(閔濬), 서장관 이상신(李尙信) 등이 조정을 하직하니, 잣[海松子]과 화연(畫硯)ㆍ붓ㆍ먹 두세 종류로 방물(方物)에 충당했다.


10월

병조 정랑 이홍로(李弘老)가 함경도에서 오니, 대간이 논하기를,
“이홍로는 한 가지도 제대로 된 행실이 없는 사람으로 이산해(李山海)에게서 발신(發身)하여 그 앞잡이가 되고, 김공량(金公諒)과 교제하여 그의 종이 되어서 행한 음사(陰邪)하고 귀역(鬼蜮)같은 작태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가 변란 후에는 거취를 제 마음대로 하여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으니, 그 직을 삭탈하기 청하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김응남을 불러 부제학으로 삼고, 임국로(任國老)로 대신하게 하였다.
○ 대간이 또 논하기를,
“병조 정랑 임몽정(任蒙正)은 당초부터 시종신으로 대가를 따라 도성을 문을 나갔습니다. 그러나 임몽정은 혼자 먼저 도망갔으니, 직을 파하여 신하의 의리가 없는 죄를 징계하시기를 청하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유격(遊擊) 심유경(沈惟敬)이 우리 나라에 왔다. 심유경은 절강(浙江) 사람인데, 조선이 왜적의 침략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일개 포의(布衣)로 병부 상서 석성(石星)에게 청하여, 친히 적의 진영으로 들어가 계책을 써서 지원하면서 혹은 군대를 쓰고 혹은 얽어매되 자신이 맡겠다고 자원하니 상서는 이것을 허락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그가 용만관에 도착하니, 임금이 친히 가서 그를 만났다. 심유경이 말하기를,
“제가 적의 진영으로 직접 들어가 극력 황상(皇上)의 천위(天威)를 말해서 그들을 제 소굴로 돌아가게 하겠습니다. 만약 추장이 어리석게 고집하여 물러가지 아니하면 대군을 일으켜 그들을 토벌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천위는 비록 혁혁할지라도 저 왜적들은 하나의 유별난 독종인데, 어찌 근거없는 말만을 듣고 손을 거두고 물러가겠소.”
하니, 심유경은 말하기를,
“천조(天朝)의 사체(事體)는 심상의 것과는 다릅니다. 다만 보십시오. 제가 마땅히 계교로써 그들의 손발을 옭아매어 마침내는 위엄이 두려워 돌아가게 할 것이오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다음 날 새벽에 출발하여 3일 밤을 순안(順安)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는 먼저 그의 가정(家丁 제집에서 일부리는 남자. 상일군) 심가왕(沈嘉旺) 등 두 사람을 적의 진영으로 곧장 들어가세 하여 소서행장(小西行長)을 효유하여, 명일에 서로 만나자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그는 가정 6명만을 대동하고 곧장 평양성으로 나갔다. 적의 괴수 소서행장은 칠성문(七星門) 밖에다 장막을 치고 음식을 마련하여 놓고 심유경이 오는 것을 보자 길 왼쪽으로 나와 영접하면서 경의를 극진하게 하였다. 그리고 갈 때에도 올 때와 같이 하였다. 단 그들이 말을 주고 받을 적에 우리 나라 사람이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들을 길이 없었다. 그들은 사시(巳時)부터 미시(未時)까지 대화를 나누고서야 돌아왔다. 적의 괴수는 부산원(釜山院)에서 10리 못 미치는 곳에다 나무 하나를 세워서 경계로 삼았다. 심유경이 나와 김명원에게 말하기를,
“적이 내 분부를 받아 표목을 세워 경계를 긋고 50일 동안 서로 노략질을 않기로 하였다. 귀국에서도 이같이 함이 옳겠소. 군사를 거두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오.”
하였다. 이 때에 적의 군세는 성대하여 우리 나라 수천 리에 걸쳐서 한 사람도 적과 싸우는 자가 없었는데, 심유경이 단기(單騎)로 적진에 들어갔고 또 그들이 흉악한 마음을 감춘 채 머리 숙이고 고분고분 명령을 듣게 하였다. 그리하여 연도(沿道)의 선비와 백성들이 곳곳에서 말머리를 모아, 천 사람 백 사람씩 떼를 지어 모두 말하기를,
“오늘에야 우리는 살았다. 노야(老爺)는 끝까지 은혜를 베풀기 바란다.”
하였다. 촌 백성들이 물결처럼 몰려와 어떻게 생긴 남자가 이와 같은 일을 해냈는가 하여 앞을 다투어 바라 보았다. 심유경이 의주에 다투어 돌아오니, 상이 이르기를,
“8도의 여러 장수들이 마침 군사를 합하여 결전하고자 합니다. 오늘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시일을 끌다가 한겨울이 닥치면 군사의 마음이 놀라 흩어져 수습하기 어렵게 될까 염려되오.”
하니, 심유경이 웃으며 말하기를,
“제가 적을 옭아 놓은 것은 귀국이 이 적을 토멸할 수 없음을 염려해서 입니다. 만일 스스로 강토를 편안하게 할 수 있었다면 제가 어찌하여 꼭 적의 진중을 출입했겠으며, 천조에서도 어찌하여 동쪽을 돌아보는 근심이 있었겠습니까.”
하고, 그 날로 강을 건너 갔다.
○ 조정에서는 연이어 윤근수ㆍ한응인을 요동으로 보내 구원병을 청하고, 이어서 의주가 고립하여 위험에 처한 실정을 말하였다. 이에 순찰사는 바로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 더러 군사를 이끌고 의주에 들어가 지키도록 하였다. 낙상지는 용력이 뛰어나서 사람들이 낙 천근장(駱千斤將)이라고 불렀다. 일찍이 우리 나라 사람 12명이 대장의 쇠화살 1좌(座)를 운반하려다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그는 그것을 왼쪽 겨드랑에 끼고서 한 다발의 섶나무를 드는 듯이 하여 5리쯤 되는 곳에 운반해다 놓고도 조금도 피로해 하지 않았다.
○ 어떤 자가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이미 인심을 많이 잃으시어 오늘의 화가 있게 된 것인데, 어찌하여 세자에게 보위를 전하지 아니하옵나이까. 온 나라 사람들에게 진작 조금이라도 기쁨과 위안이 있게 하였다면 왜적을 평정하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였다. 또 남이순(南以順)이라는 사람이 상소하여, 전적으로 상을 공격하고 이어 이산해 등의 목을 베라고 청했다. 그가 또 말하기를,
“세자는 한 나라의 저부(儲副 다음 대를 이을 임금)이온데, 어찌하여 갈라져 다른 곳에 계십니까. 빨리 한 곳에 같이 머무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비록 보위를 전하라고 분명히 말하지는 않았으나, 그 뜻이 은연중 나타났다. 이 모두에 대해 상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어느 날 여러 신하에게 유시하기를,
“나는 종묘와 사직에 죄를 얻어 파천하여 여기까지 왔고, 전쟁을 겪은 나머지 또 정신을 잃어 온갖 병이 몸에 얽히었으니, 경 등은 나를 애처롭고 가련하게 여겨 빨리 나 같은 죄인을 물러나게 하고 세자를 보필하기 바라오.”
하니, 여러 신하가 아뢰기를,
“오늘의 일은 모두가 신자의 죄이옵니다. 변란이 나서 이미 전하 자신이 감당하게 되었으니 더욱 만회할 것을 도모하시어 조종의 신령을 위로해야 하고, 한갓 구구하게 겸손의 뜻을 가지시와 그대로 물러나서 스스로 옛날 난을 만나 왕위를 전하던 임금에 비하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소관(小官)도 상소하여 3일 만에야 비로소 윤허를 받았다.


11월

전라도 관찰사 권율이 군사를 일으키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여 진영을 수원에 두었다. 이 때에 김천일 등은 오랫동안 강화에 있으면서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고, 우성전(禹性傳) 등은 더욱 감감 무소식이었다. 상이 우성전 등을 불러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곧장 평안도로 가서 김명원과 군사를 합치라고 하였으나, 우성전은 병으로 가지 못했다. 이에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우성전은 군사를 끼고 자기를 호위하여 관망하면서 전장에 나가지 아니하고, 김천일 등은 편안히 앉아서 헛된 수작만 하고 있으니 국가에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김천일은 비록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으나 그가 여러 도를 제창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마침내 8도의 인심을 흡족하게 크게 돌려 놓았사오며, 지금은 다만 군대의 세력이 고단(孤單)해서 적절한 기회를 타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우성전은 그가 비록 오지 아니했더라도 장수를 대신 보낼 수 있었사온데, 계교가 여기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죄가 없다 할 수는 없사오나 본래부터 중병이 있었음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일입니다. 어찌 관망만 할 리가 있겠나이까.”
하였다.
이 때 권율은 홀로 고군(孤軍)으로 적의 길을 곧바로 찌르고 대적의 사이에다 진영을 편히 잡으니, 상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위로하였다.
○ 경기 감사 심대(沈岱)는 명을 받자 곧장 삭녕군(朔寧郡)에 이르러 군병을 소집하고, 또 사람을 서울에 보내어 화복의 이치를 들어 효유하게 했다. 서울 백성들이 오래도록 대가가 머무른 곳을 알지 못하다가 이 말을 듣고서야 기뻐하기도 하고 울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시에 모두 군기(軍器)를 가져다가 심대에게 바쳤는데, 연일 뒤를 이은 것이 천백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심대가 이끈 몇 천의 병사가 기계를 수습하여 양주 목사 고언백(高彦伯)과 약속하고 서울을 수복할 계책을 세웠다. 적이 이것을 엿보고는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길을 나누어서 습격하였다. 삭녕 군수 장지성(張志誠)이 군대를 이끌고 길에 매복하였는데, 심대는 이것을 믿고서 대비하지 않은 채 상하가 모두 날이 환히 밝도록 잠을 잤다. 장지성이 적을 보고 도망하니, 적이 드디어 군영을 포위하고는 불을 질렀다. 심대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가 적에게 살해를 당했다.
○ 윤두수가 아뢰기를,
“옛날 임금의 치도는 어진 이를 높이고 친한 이를 친히 여기는 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오늘날 파천의 즈음에 있어 이런 도를 버린다면 무엇으로 치도를 삼겠습니까. 성혼(成渾)은 도덕과 학문이 일대의 표본으로 지금 조정에 나왔으나, 대접하고 존경하는 일이 없사오니, 청컨대 자헌(資憲)으로 품계를 올려 사람들이 분발하고 흠모하게 하소서. 원천군 휘(原川君徽)와 한음 도정 현(漢陰都正俔)도 모두 종실로서 박학다문(博學多聞)하여 효도하고 우애하오니, 각각 한 자급(資級)을 올리시어 어진 이를 높이고 친한 이를 친히 여기는 뜻을 보이시면 진실로 이익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것을 모두 윤허하였다.
처음에 상이 임진강을 건널 때에 성혼이 대가를 수종하리라 생각했었는데, 마침 성혼이 대가가 출발할 줄을 미리 알지 못하여 호종하지 못했다. 이충원(李忠元)이 개성에서 성혼을 불러 보시라고 청하자, 상이 따르지 아니하니, 대체로 그가 호종하지 않은 것을 불만히 여겼기 때문이다. 윤두수는 어진 이를 우대함에 있어 어찌 한 자급을 아끼겠는가라고 생각하고, 드디어 아뢰어 승임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진이를 높이는 도리가 다만 경의와 예도를 다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임금을 몰아 세워 억지로 마음에 없는 일을 강요해서는 안 되거늘 조정의 작록과 포상을 가지고 사람에게 주기를 마치 자기 물건같이 하니, 사람들이 그의 무식함을 기롱하였다. 성혼이 시사(時事)를 논하는 10조(條)의 차자를 올리기를,
“임금의 덕을 진수(進修)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시고 언로(言路)를 널리 열어 놓는 것을 급선무로 삼으십시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나라를 그르치는 자에게 엄하게 벌주시고, 아첨하는 자들이 날뛰는 길을 막으소서.”
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시국을 근심하여 차자로 진술하니, 진실로 가상하다.”
하였다. 우대하는 비답이 아니었다. 이 때 구성(具宬)이 개성에서부터 연이어 부름을 받게 되어 출입이 무상하였는데, 의주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그치지 아니하였다. 성혼이 이것을 듣고 말하기를,
“국가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본래 옆길과 구부러진 길로 가서 음사(陰私)가 성대히 행해지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데도 이제 또 이런 일이 있으니, 이러고서야 어떻게 앞사람을 책할 것인가.”
하고는, 드디어 차자를 올려 나라를 그르치고 아첨하는 일을 열거하였던 것이다.
○ 이홍로가 상소하기를,
“오늘날 조정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조정이 서울을 떠난 그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죄를 이산해에게 돌려 나라를 그르친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오늘날 조정에 있는 신하들에게 왜란 초기의 일을 처리케 하였다면 그들이 과연 까맣게 밀려오는 적의 형세를 막고 서울을 떠나는 거둥이 있지 않게 하였겠습니까. 만일 그 형세를 막지 못했을 경우에 우리 임금에게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곳에 계셔도 관계없다는 말입니까. 심지어 임금을 막다른 곳에 모셔 두고서 느긋하게 좌담이나 하면서 옛날의 원한을 보복하는 것을 일삼으며, 염치없는 무리들은 분주하게 전하의 좌우에 출입하면서 세력을 키우기만 힘쓰고 국가가 조석에 멸망할 형세에 있다는 것을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전후로 나라를 그르친 적이 되는 데 있어 어느 쪽이 더 심하옵니까.”
하였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실덕(失德)하신 일이 없사옵고 조종께서 경사를 쌓으셨는데도 이처럼 변란이 발생한 것은 운수(運數)가 그렇게 만든 데 불과하옵니다.”
하였고, 또 아뢰기를,
“신은 국사가 날로 위태로워지는 것을 보고 임금 사랑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여 전하를 모시고 함께 천명(天命)의 거취를 기다리고자 하옵니다. 그러나 조정에 있는 사람들이 신이 행궁(行宮) 아래 가까이 있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오니, 신의 몸이 너무도 위태로워서 물러가서 죽는 날을 기다릴 수 밖에 없사옵니다. 떠남에 임하니 눈물이 흘러 무슨 말을 올려야 하올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하였다. 이 때 윤근수ㆍ구사맹ㆍ홍여순ㆍ유영립ㆍ이홍로 등이 어두운 밤에 서로 모였는데 반드시 자기네들을 엿보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라 하여, 김응남ㆍ이덕형마저 내쫓으려 하였다. 성혼ㆍ윤두수ㆍ이해수(李海壽)가 말하기를,
“부득이한 경우에는 그 중 심한 자만을 제거해야 하겠지만, 김응남ㆍ이덕형은 죄를 줄 만한 명목이 아직 없소.”
하였다. 이홍로는 죄를 면하지 못할 줄을 알고 마침내 이순(李諄)의 무리와 의논하여 목숨을 걸고 상소하였다. 그래서 이성중이 공청(公廳)에 있다가 소리 높여 말하기를,
“군신과 상하가 멀리 떨어진 변방에 모이게 된 것은 누구의 소치오? 그런데도 도리어 우리들을 가리켜 나라를 망친 역적이라 하오? 상소 가운데의 말은 아첨하는 작태가 아님이 없소. 우리는 평일에 임금의 녹을 먹고 높은 자리에 있었어도 여러 음사(陰邪)한 사람을 쓸어 버리자고 한 마디도 건의하지 못하고서 필경 이런 욕을 받게 되니, 모두 우리의 허물일 뿐 누구를 탓하리오.”
하였다.
○ 상이 성혼을 불러서 이르기를,
“경이 왔다는 말을 듣고도 마침 병이 있어 곧장 만날 수 없었음을 내 실로 부끄럽게 여기오.”
하니, 성혼이 아뢰기를,
“제가 4월에 길가는 사람이, 대가가 오늘을 출발하실 것이다라고 전하는 말을 잘못 듣고, 길 가에 나가서 기다렸습니다. 이 같이 3일을 하고서 신은 대가가 반드시 출발하지 않으실 것으로 생각하고 사처로 돌아왔습니다. 그믐 날에는 밤부터 큰 비가 와서 시냇물이 불어 넘실거렸습니다. 이 때 어찌 대가가 이미 임진강을 건너 개성으로 향할 것을 알았겠나이까. 신이 이미 길가에서 하직을 여쭈지 못하옵고, 또 감히 명령 없이 함부로 나올 수도 없어 모진 생명이 산골짜기로 굴러 다니다가 세자의 영지(令旨 왕세자의 명령서)를 받들어 성천(成川)를 받들어 성천(成川)에 이르게 되었으니, 도의상 와 뵈옵지 않을 수 없었나이다. 상감마마 아래에서 얼굴을 들고 다시 덕음(德音)을 접하게 되오니, 신하의 분수나 의리로 헤아리오면 참으로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를 잘못 지켜서 오늘날과 같은 곤경을 받게 했으니, 경을 보기가 부끄럽소.”
하니, 성혼이 아뢰기를,
“누군들 허물이 없겠습니까마는 허물을 짓고도 능히 고치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더욱 심지(心志)를 격려하시어 힘써 덕업(德業)을 닦으시고 폐습을 경장(更張)하시어 다시 유신(惟新)을 도모하시면 인애(仁愛)로운 하늘이 마땅히 복을 누리게 할 것이옵니다. 그리고 난을 평정하고 예전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은 내게 있는 도리를 다하는 것 뿐입니다. 참으로 군신 상하가 마음과 힘을 합하여 밤낮으로 부지런히 하여 안이 이미 닦아지면 바깥은 물리칠 수 있사옵니다.”
하였다. 승지 이국(李)이 아뢰기를,
“성혼이 말한 군신 상하가 마음과 힘을 합하라는 말은 매우 좋습니다. 성혼이 여기에 있으므로 신이 함부로 말을 못하옵니다만, 근일에 조신(朝臣) 사이에 자못 배척하고 알력하는 버릇이 있고 실로 화합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여기에 있는 자는 다만 한쪽 편의 사람뿐이니, 다시 어떠한 별다른 색당(色黨)이 있어 알력하는 버릇이 있는 지는 모르겠소.”
하니, 이국이 아뢰기를,
“비록 한두 사람이 그 사이에 끼인 적은 없지 아니하오나 모두 한직에 있는 벼슬아치들이온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이 습성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신이 말하였던 것이옵니다.”
하였다. 성혼이 아뢰기를,
“이국의 말은 신도 이 의논에 참여하여 그 사실을 아는 것으로 의심하여 신의 진언을 지적하여 증거로 삼는 것이옵니다. 알력하는 일에 대해 신은 무슨 일을 가리키는지 모르겠고, 또한 신이 모르는 사실이옵니다. 다만 한두 사람의 형편없는 무리가 분과 원망을 품고 시기를 타서 들고 일어나 저해(沮害)하고 요란한 행위를 도모하고자 한다 하오니, 부득이 별도로 아뢰겠습니다.”
하니, 이국이 아뢰기를,
“이 정도로 하고 논의를 그치면 좋겠사오나, 신은 조정의 기색으로 보아 반드시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였다. 이국은 평소에 성혼을 가볍게 여겼고, 또 그가 윤근수 등과 논의하였는가 의심하여 그의 말을 인용하여 증명하였으며, 말은 비록 이와 같으나 반드시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대체로 이국은 김응남과 지극한 교분이 있어, 항상 김응남까지 내쫓고자 하는 것을 분히 여겨 마침내 임금 앞에서 극력 이것을 말하였던 것이다. 실지로 성혼의 뜻을 알지 못한 것이다.


12월

상이 여러 신하를 불러 입대(入對)케 하니, 사간 이유징(李幼澄)이 나와 아뢰기를,
“근래 1ㆍ2년 전부터 궁궐이 엄하지 않고, 조정의 신하들이 편안하지 않으며, 뇌물이 성행하고 배척하고 모함함이 풍조를 이루었습니다. 왕자로 말하오면 백성의 토지와 노복을 빼앗고, 궁궐로 말하오면 벼슬과 옥사(獄事)를 팔며, 이익을 꾀하고 요행을 노려 인심을 동요시키니, 원망하는 말이 길에 가득 차 있습니다. 소인들이 정사를 어지럽혀 선비들에게 화를 입히니, 어질고 불초함을 논할 것 없이 오직 의론이 자기와 같으냐 다르냐만 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초방(椒房)의 천한 자라도 그 누이에게 세력을 의탁하여 조정의 시비까지도 참여하여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상하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붕괴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큰 도적이 연이어 들어오자 배반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북도의 변란 같은 것은 전에 들어보지 못하였던 것이옵니다. 전하께서 변을 만나신 이래 한 마디도 스스로 허물을 인책함이 없이 다만 깊은 방에 앉아 오직 안일함을 일삼으시고 여러 신하를 드물게 접견하심이 평일보다 더 심하옵니다. 이런 형세라면 신은 나라의 형세가 결국 망하지 않을까 염려되옵니다.”
하니, 상이 머리를 숙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임금의 얼굴을 우러러 보니 푸르락 붉으락 하여서, 모두 송구하여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서 물러나왔다.
○ 유영립이 함경도에서 오니, 상이 불러 이르기를,
“경도 잡혔었다 하니, 사실이오?”
하니, 유영립이 아뢰기를,
“신이 산속에 피란하고 있었는데 토민(土民)이 적을 인도하여 와서 마침내 잡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벗어 나왔는가?”
하니, 유영립이 아뢰기를,
“적이 비록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오나 그 마음을 위불(違拂)하지 아니하면 그도 또한 사람인데, 어찌 꼭 죽이겠나이까.”
하였다. 한림 이춘영(李春英)이 물러나와 유영립에게 말하기를,
“임금을 모신 자리에서 위불(違拂)이란 두 글자를 사용함은 좋지 못한 말이 아니오?”
하였다. 대간에서도 실절(失節)한 것을 들어 따졌다.
○ 동지(同知) 유영길이 장계하기를,
“정철이 남중(南中 경기도 이남의 땅)에 있을 때 주색에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아니하였고, 윤두수가 한 일은 끝내 그 결실이 없어서 주상의 형세를 날로 외롭게 하고, 국사는 날로 급하게 되어 가므로 신은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불러서 그에게 묻기를,
“경의 이 장계에는 무슨 의견이 있어서인가?”
하니, 유영길이 민망하여 아무 말 없이 얼마 있다가 대답하기를,
“단지 소문을 들었을 뿐이옵고, 별다른 의견은 없습니다.”
하고, 물러나왔다. 정철은 가는 곳마다 술에 빠져서 세월을 보내고 맡은 바의 임무는 두서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크게 인망을 잃었었다. 유영길의 말은 비록 기회를 타서 공격하려는 계책에서 나왔으나, 그의 행실과 일 처리가 실제로 이 말을 나오게 한 것이다. 윤두수는 조정에서 나가 10리쯤 떨어져 있는 곳에 있었는데, 임금이 자주 그를 불렀다. 윤두수가 아뢰기를,
“신은 본래 보잘 것 없고 또 재주나 식견도 없으면서 외람되이 임금의 말고삐를 잡는 반열에 있으면서 비록 밤낮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지상공론(紙上空論)에 불과할 따름이었습니다. 결실이 없다는 말은 바로 오늘의 일에 들어 맞았습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말 고삐를 잡고 따른다 하였으니, 신의 죄가 많습니다. 이것을 신이 알고 있사온데, 임금께서 어찌 알지 못하겠나이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빨리 견책을 내려 주시옵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사의 존망이 경의 몸에 달려 있는데 어찌 남의 말로 인해 혐의할 것이야 있겠소. 빨리 나와 일을 보오.”
하였다.
○ 정곤수가 북경에서 치계하기를,
“신이 북경에 들어온 것은 마침 영하(寧夏)의 도적을 평정한 날이었습니다. 석 상서(石尙書)가 담당하여 힘을 다해서 천관(千官)을 모아 다시 의론한 끝에 병부 시랑 송응창(宋應昌)을 경략(經略)으로 삼고, 도독(都督) 이여송(李如松)을 제독(提督)으로 삼아 대병을 조발하여, 날을 가려 나가 치게 되었습니다. 이 제독(李提督)은 영하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 되지 않았는데 또 동정(東征)의 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남북의 군사가 지금 연이어 떠나고 있습니다. 경략은 병부 원외(兵部員外) 유황상(劉黃裳), 주사(主事) 원황(袁黃)으로서 찬획(贊畫 임시 보좌관 격)을 삼기를 청하였습니다. 제독은 먼저 출발하고, 경략은 다음에 떠나 12월에 평양에 도착한다 하옵니다.”
하였다. 이 때 심유경(沈惟敬)과 약속한 50일의 기한이 장차 다하니, 행장(行長)이 매양 사람을 시켜 유격이 돌아오는 기한을 심가왕(沈嘉旺) 등에게 물어 왔으나, 확실한 대답을 못하겠다고 회시(回示)했다. 이원익은 중국의 대군이 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거짓으로 심유겸의 패문(牌文)을 조작하여 사람을 시켜 순안(順安)에 가지고 가니, 심가왕도 거짓임을 알지 못하고 급하게 말 위에서 행장에게 보였다. 행장이 기뻐서 말하기를,
“만일 이 패(牌)가 없었더라면 대사를 반드시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당초에는 4ㆍ5일 안에 한 번 무찌를 것을 결의하였었다.”
하였다.
양사(兩司)가 합동으로 논하기를,
“홍여순ㆍ송언신ㆍ이홍로가 이산해ㆍ김공량과 교분을 맺어 그들의 심복이 되어 조정을 어지럽히고 사림에게 화를 미치게 하며, 인심을 이반시키고 나라를 망하게 만든 것은 이 사람들이 아첨하고 악행을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멀리 귀양 보내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보건대, 이 사람들은 일찍이 정철(鄭澈)의 간사함을 탄핵했을 뿐이오.”
하였다. 이 일을 논한 지 사흘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윤허하였다. 다음 날 상이 이르기를,
“근일에 정신이 너무 감퇴되어 말을 함에 착오가 많소. 어제 양사에 내린 비답은 이 사람들이 정철을 간신이라 하였을 뿐이다[此人等頗以鄭澈爲奸而已也]라고 하여야 했소.”
하였다.
○ 상이 여러 신하를 불러 입대하게 하니, 정언 황극중(黃克中)이 나와 아뢰기를,
“오늘의 일은 진실로 종전에 궁궐이 엄하지 않아 아첨이 성행하고, 인심을 잃어서 가는 곳마다 원망과 배반이 있고, 상하가 서로 의심하여 정의가 통하지 않고, 겉만 기쁘게 하는 것으로 풍조를 이루어 언로(言路)가 오래 막히게 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위급한 때를 당하여 모든 것을 혁신하는[改絃易轍] 거조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겠사오니, 이러고서야 어찌 감히 회복을 바라겠나이까.”
하니, 최황(崔滉)이 손을 휘저어 말리고 말하기를,
“이 때는 적을 토벌하는 일이 급한데, 이 같은 말은 아무 관계가 없소.”
하였다. 구성(具宬)이 아뢰기를,
“인심이 원망하여 배반하고, 상하가 서로 의심하게 된다면 국사는 가망이 없습니다. 왜적을 토벌하는 계책으로는 이것이 첫 번째인데도 최황은 관계없다고 말하니, 이것은 면전에서 군상(君上)을 업신여기는 말입니다.”
하니, 최황이 크게 노하여 다시 아뢰고자 하자, 상이 말리고 이르기를,
“서로 따지지 마오.”
하였다. 드디어 파해 나왔다.
22일 유격 전세정(錢世禎)이 남병(南兵) 3천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오니, 군마와 병기가 매우 정연하였다. 다음 날 군사를 남문 밖에서 사열하였는데 앉고 일어나고 치고 찌르며 종횡과 기정(奇正)으로 천변만화(千變萬化)하니, 사람마다 이것을 보고 비로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24일 흠차제독 계요 보정 산동 등처 방해어왜군무 좌군도독부 도독 동지(欽差提督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佐軍都督府都督同知) 이여송(李如松)과 중협 총병관(中協摠兵官) 양원(楊元)과 좌협 총병관(左協摠兵官) 이여백(李如栢)과 우협 총병관(右協摠兵官) 장세작(張世爵) 등이 대군을 이끌고 강을 건너 왔다. 상이 친히 의주관(義州館) 길에서 맞이하였다. 제독은 홍금포(紅錦袍)를 입고, 홍명교(紅明轎)를 타고 왔는데, 상을 용만관에서 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과인이 나라를 잘못 지킨 죄로 황상께 심려를 끼쳐 드리고 여러 대인이 멀리까지 정벌에 종사하게 하였으니, 비록 심복신장(心腹腎腸)을 쪼갠다 하더라도 어찌 천지와 같은 한없는 은혜를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제독이 웃으며 말하기를,
“황상의 천위(天威)는 국군(國君)의 큰 복으로, 왜적은 스스로 궤멸하게 될 것이니, 무슨 감사할 것까지 있겠나이까.”
하였다. 제독은 키가 크고 예절에 익숙하며, 풍채가 뛰어나고 언어가 유창하였다. 상에게는 경의를 다하기를 지극히 공손하게 하였다.
○ 상이 이 날에 세 총병을 두루 만나보고 돌아왔다. 장관(將官)으로 따라온 자는 총병 이평호(李平胡), 부총병 조승훈(祖承訓)ㆍ고책(高策)ㆍ이방춘(李芳春), 참장 장기공(張奇功)ㆍ방시춘(方時春)ㆍ방시휘(方時輝)ㆍ이영(李寧)ㆍ곽몽징(郭夢徵)ㆍ사대수(査大受), 유격 곡수(谷燧)ㆍ갈봉(葛逢)ㆍ하왕문(夏王問)ㆍ오유충(吳惟忠)ㆍ척금(戚金)ㆍ한종공(韓宗功)ㆍ이여매(李如梅)ㆍ양소선(楊紹先)ㆍ누대수(樓大受)ㆍ이문성(李文成) 등 40여 원(員)이었다. 상이 모두 만나보고자 하니, 도승지 유근이 아뢰기를,
“허다한 장관을 어찌 모두 만나볼 수 있으시겠습니까. 다만 대장만 만나보아도 충분합니다.”
하였다. 윤두수는 여러 번 그들을 만나보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상은 기력이 몹시 피로할 것 같아서 이 말을 따르지 않았는데, 여러 장수들은 모두 노하였고 제독도 의아하게 여겼다. 임금이 늦게서야 그 말을 듣고 그들을 만나보고자 하였으나, 이튿날 새벽에 제독이 떠나서 만나보지 못하고 말았다.
○ 강을 건너는 날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고, 해에는 오른쪽 고리가 있었다. 제독이 여러 장관을 불러 이것을 보게 하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26일 제독의 대군이 성 밖으로 지나가면서 호령이 엄숙하여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감히 다치게 하지 않았다.
30일 정주에 이르러 사대수는 초병(哨兵) 1천 명을 거느리고 먼저 떠났다.

[주D-001]초방(椒房) : 후비(后妃)의 궁전을 지칭함. 여기서는 선조의 후궁(後宮) 숙원 김씨(淑媛金氏)를 지적한 것임.
[주D-002]말 고삐를 잡고 따른다 : 임금을 위하여 천역(賤役)에 종사하는 것. 따라다니는 자의 겸사.
난중잡록 2(亂中雜錄二)
임진년 하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8월 1일. 전라 중조방장(全羅中助防將) 이유의(李由義)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경기(京畿)로 향하다.
○ 창녕(昌寧)ㆍ청도(淸道)의 적이 절도사라 자칭하고, 밀양(密陽)의 적은 군왕이라 자칭하고 일시에 올라오면서 길을 닦는다 하다. 《경상순영록(慶尙巡營錄)》에 나옴. ○ 이러한 통분하고 해괴한 말들을 보니 이 적을 만세에 잊을 수 없다 하겠다.
○ 적이 영천(永川)으로부터 봉고어사(封庫御史)라 칭하고 신녕(新寧)으로 향하는데 안동(安東)의 병장 권응수(勸應銖)가 정대임(鄭大任)ㆍ정세아(鄭世雅)ㆍ조성(曺誠) 등과 더불어 박연(朴淵)에서 적을 만나서 크게 이겨 벤 것이 매우 많고 병기와 돈과 곡식과 문서 등 물건을 빼앗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도 영천의 의병(義兵)과 선비들이 본 고을에 둔(屯)치고 있는 적을 멸하기를 도모하여 계책을 이미 정하고 권응수ㆍ홍천뢰(洪天賚)에게 원병(援兵)을 청하다. 응수가 두어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신해(申海)ㆍ정대임ㆍ조성 등과 영천으로 나아가서 추평(楸坪)에 있는 적에게 군사의 위엄을 보여 추격하여 강변(江邊)에 이르렀다가 돌아오고 다음날에 또 그와 같이하였더니 적이 문을 닫고 나오지 아니하였다. 또 다음날에 여러 군사가 합세하여 나아가 포위하여 성문을 쳐부수고 북치고 부르짖으며 들어가니 적이 황급하여 달아나 관사(官舍)로 들어갔으므로 바람을 따라 불을 질러 거의 다 태워 죽이고 혹은 물에 뛰어들어 빠져 죽었으며, 수백여 급(級)을 베다. 병사(兵使) 박진(朴晉)이 치계(馳啓)하여 응수는 통정대부에 승급되고 대임은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었으며, 조성 등 여러 사람에게 관직으로 상을 주기를 등차(等差)가 있게 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3일. 김면(金沔)이 지례(知禮)에 둔친 적을 토벌하여 거의 다 태워 죽이다. 전라도의 아름다운 여자들이 많이 적에게 포로되어 있다가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것을 함께 다 태워 죽이다. 우리 군사 중에 죽은 자도 5천여 명이다. 남은 적이 도망하여 성주(星州)로 향하였는데 성주의 군사가 무찔러서 남김 없이 멸하다. 이때에 김면은 거창(居昌)에 주둔하여 지례ㆍ금산(金山)의 길을 막고 정인홍(鄭仁弘)은 성주에 주둔하여 고령(高靈)ㆍ합천(陜川)의 길을 질러 막았으며, 곽재우(郭再祐)는 의령(宜寧)에 진을 쳐서 함안(咸安)ㆍ창녕ㆍ영산(靈山)에서 강을 건너는 적을 방비하니 우도(右道) 일대가 보존될 수 있었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안동의 적이 나와서 풍산(豐山)에 둔치므로 박진이 청송(靑松)으로부터 안동에 들어가 성을 수습하다. 이보다 먼저 적이 군위(軍威)ㆍ의성(義城)ㆍ안동ㆍ예천 등의 고을에 나누어 둔쳐 사방으로 나와 분탕질을 하더니 영천에서 섬멸당한 뒤로는 군위의 적은 철수하여 개령(開寧)으로 향하고 의성ㆍ안동ㆍ예천의 적도 또한 동류를 이끌고 풍산 구담(九潭)에 물러와 둔치니 경상좌도의 인민이 조금 생기가 있었다. 얼마 안 되어 풍산의 적이 또한 상주(尙州)로 물러와 합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아! 우리나라 3백 고을에 적이 없는 데가 몇 고을인고. 이것으로 미루어 추한 무리의 많은 것을 알 수가 있다.
4일. 남원 부사 윤안성(尹安性)이 팔결군(八結軍)에게 명하여 호(壕)를 파도록 하였는데 5일 만에 끝마치다. 이때 본부(本府)에서 사역에 응한 사람이 1천 7백여 명이다.
○ 부산의 적이 칡 줄기를 가지고 왜인의 손바닥을 꿰어 우리나라의 봉비(封臂)와 같이하여 차사(差使)라 칭하고 상도(上道)에 있는 적에게 보내어 내려오기를 재촉한 때문에 모든 적이 흘러내려 길에 가득 찼는데, 우도 각 고을 의병이 곳곳에 구름처럼 일어나서 진주(晉州)ㆍ함양(咸陽)ㆍ거창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적을 쏘아대고 있다니 지금 이때에 무찔러 멸하지 못하면, 위로 임금의 수치를 씻고 아래로 백성이 살육된 것을 위로하지 못할 것이다. 민간에 포고하여 겁내지 말고 선등(先登)하게 하라. 함양 전통(傳通) 통문(通文).
○ 경주(慶州)의 부윤과 판관(判官)이 모두 도망해 숨었으므로 초유사(招諭使)가 우도에 있으면서 전령(傳令)하여 본부(本府) 사람 훈련봉사(訓練奉事) 김호(金虎)로 도대장(都大將)을 삼고, 전 현감 주사호(朱士豪)로 소모관(召募官)을 삼고 진사 최신린(崔臣隣)으로 소모유사(召募有司)를 삼다. 김호 등이 이미 군사를 모아 적을 토벌하였었는데 이에 이르러 더욱 분발하다. 2일에 적 5백여 기(騎)가 언양(彦陽)으로부터 노곡(奴谷)으로 몰려 왔는데 김호 등이 군사 1천 4백여 명을 거느리고 포위하여 싸워서 김호가 총에 맞아 죽었으나, 오히려 퇴각하지 아니하고 싸우니 적이 달아나 본주(本州)의 대진(大陣)으로 돌아가다. 우리 군사가 추격하여 50여 급을 베었으니 경주 전후의 승전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동궁(東宮)이 처음에 평양(平壤)에서 대가(大駕)와 서로 이별하면서 통곡하고 각자 헤어져 영상(領相) 최흥원(崔興源) 등을 거느리고 영변(寧邊)으로 달아났다가 적병이 날로 가까워 오므로 또 정주(定州)로 달려갔다가 정주로부터 비밀리 황해도를 지나 강원도로 향하였는데 낮에는 숨고 밤에 행(行)하여 고생이 말할 수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천(伊川)에 행차를 머물렀는데 전라도 의병들이 근왕(勤王) 하러 바로 올라온다는 소문을 듣고 손수 글을 써서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에게 전해 보내기를, “내가 외람되이 임시섭정[權攝)의 명령을 받아 회복의 계책을 돕게 되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건대, 재주와 덕이 엷어서 감당치 못할까 두렵다. 대가를 멀리 떠난 것이 이제 이미 천 리이니 다만 서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릴 뿐이다. 오늘날에 국사(國事)는 이미 10에서 8, 9는 틀렸고 밤낮 오직 근왕하는 군사만 바랄 뿐인데,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 한창 근심과 걱정이 절박하던 즈음에 여러분이 의병을 일으켜 이미 경성(京城)에 가까이 왔다 하니 이는 실로 천지 종묘 사직의 영(靈)이 가만히 도와서 그러한 것이다. 종묘 사직의 존망이 오직 여러분이 힘을 서로 합하느냐의 여하에 달렸으니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구하여 큰 공을 세우기에 힘쓸 일이다.” 하다.
○ 남원 부사(南原府使) 윤안성(尹安性)이 첨지 정염(丁焰)에게 통첩한 것은 다음과 같다.
왕세자 전하께서 이천현(伊川縣)에 계시면서 의병장 김천일에게 수서(手書)를 내리신 것을 보았는데, 반도 다 읽지 못하여 슬픈 느낌이 먼저 생겨 눈물이 절로 흘렀소. 이어 들은즉 주상 전하께서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중국 군사를 따라 이미 서울로 향하셨다 하오. 흉한 적의 화(禍)가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고 군부의 바람이 이러한 극도에 이르렀으니 이 날에 신자된 자는 죽느니만 못하오. 마땅히 사람들의 마음을 격려하고 의기(義氣)를 주창하여야 할 것인데, 부사인 나는 사람됨이 지극히 둔하여 봉직(奉職)이 형편없고 일마다 조치를 잘못하여 난을 감당하는 재주가 못 되니, 능히 군사와 백성을 통솔하지 못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하는 즈음에 두 번이나 군사가 붕괴되었소. 지난달 3일에 이르러 헛소문 때문에 뭇 군사가 무너지고 난민이 되어 필경에는 도적질이나 약탈을 함부로 하여 관가와 민간이 텅텅 비어 있었소. 이때를 당하여 내가 홀몸으로 성에 있으면서 앉아서 죽음만을 기다렸더니, 국가의 위령(威欞)이 아직 끊어지지 않아서 도망했던 백성이 이미 모여 들었고 무너졌던 군사가 도로 안정되었소. 큰 변을 여러 번 당하여 마음이 두서가 없을 뿐 아니라 성의가 부족하여 능히 인심을 감동시키지 못하니, 비록 위에 말한 왕세자의 간절한 말씀을 보아도 저 줄지어 늘어선 이들에게 능히 명령할 수 없소. 그러니 경내(境內)의 부로 기구(父老耆舊)는 이 곡절을 알고 마음을 다하여 힘쓰고 격려하여 혹은 의병에 달려가고 혹은 싸우고 지킬 뜻을 굳게 하라. 이상과 같이 첨지 정염에게 통첩한다.
○ 정염의 통문은 다음과 같다.
이극(貳極)이 내리신 수서에 이와 같이 목마르게 기대하시고 주상께서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향하셨다 하니, 신자 된 자로서 어찌 제 집에서 밥 먹고 잠자면서 사세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보고만 있겠습니까. 부사의 하체(下帖)에 이른바 혹은 의병으로 달려가고 혹은 싸우고 지킬 뜻을 굳게 하라 한 것은 분수에 따라 할 일이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지마는 다만 지금 민가에 전연 일이 없는 이가 없어 성을 지키고 물건을 운반하는 데도 또한 미칠 겨를이 없는데, 또 기운을 내어 일하는 것을 어찌 사람마다 독촉하여 나약한 사람들을 억지로 몰아서 싸움터로 보낼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양가(良家)의 자제로서 조금 활을 쥘 줄 아는 이와 장정(壯丁)으로 군적(軍籍)에서 빠진 자가 반드시 없다고 속일 수 없으니, 부락에서 한두 사람을 내어 준다면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 인정만 보아서 평상시처럼 하지 말고 이미 그런 사람을 뽑았거든 온 부락이 힘을 합하며 밑천을 대어 보내면 국가의 바람을 거의 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저 정염과 같이 늙고 정신없는 것이 감히 스스로 권하고 격려함이 아니라 이미 성주(城主 부사)의 하체를 받고 나서 저의 소견을 부친 것이니 여러분은 알아주십시오.
○ 광양 현감(光陽縣監)의 치보(馳報)에, “적세(賊勢)를 정탐하기 위하여 사람을 경상도 고성(固城) 감치[柹峙]에 보내었더니 복병장(伏兵將) 곤양 군수(昆陽郡守)가 회답하기를, ‘사천(泗川)의 도훈도(都訓導) 최막금(崔莫金)이라고 하는 자가 고성의 적중(賊中)에 들어가 있었는데 제 집에 왕래하다가 복병이 있는 곳에서 잡혀 공술(供述)하기를 「적중에 자진해서 들어간 것이 아니고 왜놈을 만나 포로가 되어 살려 달라 애걸하고 인하여 적중에 들어갔더니, 적이 먼저 진주의 창고에 있는 곡식이 얼마인 것과 전라도로 가는 바른 길과 얼굴 예쁜 여자들이 어디 있는지를 물었으므로, 아름다운 여자는 모르고 진주의 곡식은 대충 말해 주고 전라도로 가는 바른 길은 하동(河東)이라 하였다.」하였습니다.’ 하였고, 또 그 사람을 방금 진주의 관(官)에서 가두어 두었다는 것을 통보한다.” 하다.
○ 왕세자가 이천에 머문 지 한 달여 만에 적병이 사방에서 나오므로 따라간 모든 재상과 더불어 밤에 곡산(谷山)으로 가서 강동(江東)으로 가고 강동으로부터 성천(成川)으로 갔다가 도로 영변으로 향하니, 중도에 위태로운 변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각 도의 의병에게 내린 글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돌보지 않아 섬 오랑캐가 방자히 만행을 부리고 있는데, 각 고을에서 의사(義士)들이 있는 덕분으로 군사가 위엄을 떨치고 있으니, 이에 한마디 말로 여러 사람에게 고하노라. 생각건대, 분수도 모르는 오랑캐들이 초여름에 쳐들어오자 병사(兵使)ㆍ수사(水使)ㆍ감사(監司)들은 대개 앉아서 보고만 있었고, 진장(鎭將)과 수령들은 거의 버리고 도망한 자가 많았다. 도성에 개도 닭도 남은 것이 없으니 뭇 백성들의 도탄을 어찌 차마 보며, 나라에 예악(禮樂)을 지키지 못했으니 종묘가 폐허 됨을 어이하랴. 대가가 멀리 한구석으로 행차하시고 적의 칼날이 8도에 두루 미쳤네. 용만(龍灣 의주(義州))에 파천(播遷)하심 어인 일이냐. 벌써 한 달이 되었구나. 대동강에 사람 없으니 적을 뉘 막으리. 못난 내가 분조(分朝)의 책임을 맡아, 이리저리 다니던 끝에 용안(龍顔)을 천 리에 이별하였구나. 흩어지고 도망한 군사를 수습하여 한 성(城)에서 분조의 체통을 보전하였네. 비록 나라가 이와 같으나 아마도 때를 기다림이 있으리. 중국에 호소하여 구원을 청하니 황제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의병을 일으켜 근왕하니 신하의 절개를 오늘에 보겠도다. 나는 큰 난을 감당하지 못하나, 하늘이 우리나라를 버리지 않으리라. 평안도에서 이천(伊川)으로 갈 때 여러 번 변고를 겪었고, 곡산(谷山)으로 해서 성천에 도달할 때 온갖 고생을 맛보았네. 감히 위험한 데를 피해 편안함을 찾음이 아니라, 오직 국가 회복의 대계를 생각함이다. 항상 원수 갚아 수치를 씻을 것을 생각하여 적과는 함께 살지 않기를 맹세한다. 비록 왕래하느라 헛고생을 하더라도 또한 온갖 위험도 꺼리지 아니하리라. 원수의 적과 한 하늘을 이고 있는 것을 생각하니 내가 안존할 땅 없는 것이 민망하도다. 섶에 누우며 창을 베고 자는 마음이 어찌 잠깐인들 해이하랴. 마음이 아파서 살고 싶지 않다. 너의 군사와 백성들이 협조하고 따라서 다행히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니, 이는 실로 열성(列聖)의 은택이 미친 바이며 또한 너희들의 정성과 절개가 드러난 바이로다. 난리가 너무 크매 토벌하기 더욱 괴롭구나. 뒤돌아 볼 겨를이 없으니 민생이 살 곳을 안정하지 못하고, 싸움에 쉬지 않으매 사졸이 또한 밖에서 오래 있었네. 갑옷과 투구에 이[虱]가 생기니 나 홀로 고생한다는 슬픔이 있을 것이요, 해 저물어 소와 양이 내려오니 언제 오려느냐는 탄식이 응당 간절하리. 하물며 가을 날씨가 점점 차지는데 일찍 추워지는 서도(西道)는 어이하랴. 거처할 곳도 없으니 얼고 배고픔의 걱정을 뉘라서 면해 주리. 어떻게 해를 넘길꼬. 살 준비를 마련하지 못했네. 너희들은 비록 애써서 나를 따르건만 나는 홀로 무슨 마음으로 너희들을 수고시키랴. 매양 생각이 이에 미치매 몸에 병이 든 것 같도다. 너희들의 옷 없는 것을 보매 비단옷 겹으로 입음이 부끄럽고, 배고프고 목마름을 애처롭게 여기매 쌀밥 먹는 것이 어찌 마음 편하랴. 이에 유사(有司)에 명하여 음식 약간을 베푸노라. 소를 잡아 군사 먹이고 술을 쏟아 물을 마시게 하니 역사에 있는 말을 감히 잊으랴. 그윽히 옛사람의 일을 사모한다. 내가 이미 속마음을 너희들에게 전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나라 위해 몸을 바치라. 옛적 신릉군(信陵君)이 출병할 때에, 부자(父子)가 함께 군중(軍中)에 있는 자는 아비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형제가 함께 군중에 있는 자는 형이 돌아가서 부모를 봉양하며, 형제 없는 외아들은 전장에 가지 말라 하였다. 이 말이 책에 있는데 내가 어찌 모르랴. 다만 사세가 급박하므로 징발이 소요(騷擾)스럽게 되었다. 뉘라서 부모가 없으랴. 거리에 나와 기다리는[倚閭] 생각을 위로하기 어렵구나. 또한 아내가 있을지니 집을 떠난 한이 오랫동안 맺혔으리. 아! 공(功)에는 반드시 상을 주고 죄에는 반드시 징계함을 감히 오늘날에 어기지 않으리라. 윗사람을 친히 여기고 그를 위해 죽을 것을 너희들에게 바라는 바이다. 요망한 적을 쾌히 소탕하지 못하면 어찌 평일의 품은 뜻을 이루리오. 원하노니, 함께 전장으로 달려가서 천하의 형세를 일신하는데 같이 도모하며, 궁궐을 맑게 하고 능침(陵寢)에 절하여 왕가(王家)를 다시 세울 것이며, 삼경(三京 한성(漢城)ㆍ개성(開城)ㆍ평양(平壤))을 회복하고 대가를 돌아오시게 하여 다함께 영원토록 태평을 누리자. 황신(黃愼)이 지음.
○ 경상도 선산부(善山府)가 순차로 전통(傳通)하기를, “지난달 18일에 충청 감사의 사통(私通)과 공주 목사의 관문(關文)에, 평택현(平澤縣)의 치보(馳報)에 이르기를, ‘총병(總兵) 양원(揚元)이 평양의 적을 이기자, 개성ㆍ경성의 적이 모두 나와서 광나루로부터 양천 해구(楊川海口)에 이르도록 결진(結陣)하고 있는 일입니다.’ 하였고, 동시에 도부(到付)한 감사의 관문에, ‘포로로 잡혔다가 도망해 돌아온 사람의 말에, 적이 중국의 군사가 대대적으로 이른다는 말을 듣고 밤낮 없이 내려오는 일입니다.’ 하였으며, 이달 초에 경상 우수사가 전라 좌수사와 더불어 고성(固城)에서 적과 접전하여 배 70척을 부수고 머리 3백 급을 베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알 수 없으며, 군사를 효유하여 수합해 모아서 적을 치도록 약속한 일입니다.” 하였다.
○ 김수(金睟)를 불러 한성 판윤(漢城判尹)에 임명하고 경상도를 좌우도로 나누어 각기 순찰사를 두어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로 좌도 순찰사를 삼다. 성일의 장계(狀啓)는 다음과 같다.
5월 이후에 신이 네 번이나 장계를 올렸으나 길이 막힘으로 인하여 한 번도 돌아오지 아니하므로, 행재(行在)의 기별을 알 길이 없어 밤낮으로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듣건대 평양을 또 지키지 못하여 대가가 의주로 옮겨 가시고 동궁은 안협(安峽)에 와 머문다 하니, 오장이 무너져 어찌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신이 좌도 순찰사에 임명된 지 이미 오래었는데도 교서(敎書)와 인신(印信)이 아직 내려오지 않으니 이것은 반드시 적병이 가득 차서 길이 통하기 어려운 소치일 것입니다. 좌도의 적세를 말하면, 6월 초순 이후까지도 흥해(興海)ㆍ청하(淸河)ㆍ영덕(盈德)ㆍ영해(寧海)ㆍ진보(眞寶)ㆍ청송(靑松)ㆍ안동(安東)ㆍ예안(禮安)ㆍ봉화(奉化)ㆍ풍기(豐基)ㆍ영천(永川)ㆍ예천(醴泉)ㆍ용궁(龍宮)등 10여 고을이 아직 적을 겪지 않았는데, 이제는 용궁ㆍ예천ㆍ안동ㆍ예안ㆍ봉화가 이미 함몰되어 대개 30여 성(城)에 한 치도 깨끗한 땅이 없습니다. 신이 비록 동쪽으로 강을 건너도 다시 발을 붙일 곳이 없으니, 변이 난 뒤로부터 좌우도가 나뉘어 호령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좌도에는 앞장서 일어나 적을 치는 이가 없었으므로 적이 더욱 거리낌이 없어 땅을 저들이 차지하여 각기 고을의 원이라 칭하고, 집을 짓고 농토를 가꾸어 오래 머물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신이 각 고을에 통문을 돌려 선비 중에 유식한 자를 선택하여 소모관(召募官)을 지키고 무변(武弁) 가운데 재주 있는 자로 가장(假裝)을 삼았습니다. 영산(靈山)에는 정로위(定虜衛) 신방주(辛邦柱), 생원 신방즙(辛邦楫), 창녕(昌寧)에는 충의위(忠義衛) 성천희(成天禧), 성안의(成安義), 급제(及第) 성천유(成天裕), 보인(保人) 조열(曺悅), 유학(幼學) 곽찬(郭趲), 업무(業武) 신의일(辛義逸)이 각기 군사 6백여 명을 모아서 매복을 시켜 적을 쳐서 연달아 괵(馘)을 바치고, 이달 4일에 조열ㆍ성천유 등이 군사 1천여 명을 합하여 창녕을 포위 엄습하여 종일토록 교전하여, 고을 원이라 칭하는 백마 탄 왜놈을 소아 죽이자 사흘 만에 적이 책(柵)을 불태우고 도망하였습니다. 신녕(新寧)의 권응수(權應銖)는 신이 통문을 돌리기 전에 이미 군사를 일으켜 적을 쳤으므로 그대로 의병대장을 시켰더니, 지난달 27일에 병사 박진의 명령을 받고 하양(河陽) 의병장 신해(申海)와 더불어 네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영천에 성을 점령한 적을 쳐서 남김없이 무찔렀는데, 하양(河陽)ㆍ신녕ㆍ의흥(義興)ㆍ군위(軍威)ㆍ의성(義城)의 적은 모두 달아나고 안동의 적은 또 풍산현(豐山縣)으로 이둔(移屯)하였습니다. 박진이 부성(府城)에 들어가 있으면서 바야흐로 진격할 계책을 하고 있으며, 현풍(玄風)ㆍ영산(靈山)의 적도 역시 공격할 만한 기회가 있으므로 고령(高靈)ㆍ합천(陜川)ㆍ초계(草溪)의 의병으로 하여금 현풍을 치게 하고 창녕ㆍ의령(宜寧)의 군사로 영산을 치기로 이미 약속을 하였습니다. 곽재우(郭再祐)가 이보다 먼저 현풍ㆍ영산 등 고을을 수복하였는데, 여기서 또 적이 있다 한 것은 적의 오고 감이 일정치 않기 때문이다. 우도에는 전 좌랑 김면(金沔)이 거창(居昌)의 군사를 거느리고 본 현의 경계를 지켜서 금산(金山)ㆍ무주(茂朱)의 적을 방비하고 가장 전 주부 손승의(孫承義)와 전 수문장 제말(諸沫) 등으로 하여금 나누어 고령을 지켜서 성주(星州)의 적을 막게 하였으며, 전 장령 정인홍(鄭仁弘)으로 가목(假牧)을 삼고 거제 현령(巨濟縣令) 김준민(金俊民)으로 가장을 삼아서 유학 이대기(李大期)ㆍ전치달(全致達)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려 함께 초계를 지켜서 초계 및 강가에 왕래하는 적을 방비하였으며, 봉사(奉事) 윤탁(尹鐸)은 박사제(朴思齊) 등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려 의령ㆍ승진(昇津) 및 신반현(新反縣)을 지키고 유학 곽재우ㆍ봉사 권난(權鸞) 등은 그 모집한 군사 및 전 목사 오운(吳澐)이 모은 군사를 거느려 영산ㆍ창녕ㆍ현풍 및 강가에 왕래하는 적을 지키며 진주 판관(晉州判官) 김시민(金時敏)은 관군 및 군수 김대명(金大鳴) 등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려 고성(固城)ㆍ진해(鎭海)의 적을 막고, 함안 군수(咸安郡守) 유숭인(柳崇仁)ㆍ칠원 현감(漆原縣監) 이방좌(李邦佐)ㆍ사천 현감(泗川縣監) 정득렬(鄭得悅)ㆍ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등은 각기 그 성으로 돌아와서 싸우고 지킨 공이 많았습니다. 함창(咸昌)ㆍ상주(尙州)ㆍ지례(知禮)ㆍ선산(善山)ㆍ김해(金海)ㆍ창원(昌原)ㆍ진해ㆍ고성 밖에는 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합니다. 이 달 3일에 김면이 김해 부사 서예원(徐禮元) 등을 거느리고 지례를 화공(火攻)하여 창고 안에 들어 있는 적을 태워 죽이자 남은 적이 금산으로 도망해 갔습니다. 김면이 현재 다시 화구(火具)를 준비하여 금산 의병장 박사(博士) 여대로(呂大老), 가장 권응성(權應星) 등과 더불어 동군(同郡 금산)을 공격하려 합니다. 7일에 창원 부사 장의국(張義國)이 함안ㆍ칠원 등지의 군사와 더불어 나가 본부(本府)를 포위하여 적 10여 급을 베니 남은 적이 패하여 김해로 달아나고 군량이 남아 있으므로 의국이 그 성에 들어가 있습니다. 진해ㆍ고성의 적은 모두 배를 잃고 빠져 나갈 길 없는 도적이 되어 죽을 각오로 지키므로 진주ㆍ함안의 군사가 여러 번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수사(水使) 원균(元均)이 본진(本鎭)을 버린 뒤에 다만 전선(戰船) 네 채가 있었는데, 전라 좌우도의 수군을 청해 와서 세 번 해전을 벌여 아울러 크게 이겨서 수백 급을 베고 적선 백여 척을 부수었으며,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가 헤일 수 없었습니다. 적이 크게 겁내어 호남으로 가겠다고 소리를 치면서도 마침내 움직이지 못하고, 바다를 건너려는 자는 반드시 산에 올라 망을 보아 서해에 배가 없는 것을 알고야 떠나니, 변고가 생긴 뒤로 전공(戰功)은 양도(兩道) 수사가 제일입니다. 지금 또 들은즉 호남의 수군이 크게 이르러 장차 모든 섬을 토벌하고자 한다 합니다. 6월 중에 전라 감사라 자칭하는 왜놈이 창원으로부터 바로 함안에 이르러 의령의 승진을 건너고자 하다가 곽재우가 막으니 곧 김해로 돌아갔고, 거창에 침범하려 하다가 김면에게 퇴각을 당하였으며, 지례를 경유하여 무주현으로 향해 충청도의 적과 합하여 금산(錦山)에 들어가서 연달아 무주ㆍ용담(龍潭)ㆍ진안(鎭安) 등 모든 고을을 함락시키자, 전주(全州)의 위급함이 아침, 저녁에 임박하였는데, 다행히 적이 불리하여 퇴각하여 1천여 명이 몰래 본도(本道)로 오는 것을 김면이 지례의 지경에 매복을 시켰다가 불시에 뒤를 밟아 치니 적이 패하여 달아나서 이로부터 적이 감히 다시 오지 못하고 대부분 옥천(沃川)의 지경으로 들어갔습니다. 남은 적은 현재 금산ㆍ무주에 머물고 있는데 호남 사람들이 감히 몰아내지 못하므로, 적이 소리치기를, “여러 곳의 왜병을 합하여 다시 들어와 침략하겠다.” 합니다. 영남ㆍ호남 사람들이 능히 근왕하여 적을 치지 못하는 것을 순찰사에게 허물을 돌렸는데 이 도에는 곽재우가 감히 도주(道主)에 격문을 보낸 것을 신이 겨우 진정시켰고, 호남에서는 광주 목사 권율(權慄) 등이 순찰사 이광(李洸)이 직무를 행하여 적을 치지 못하여 모르는 체하고 있다고 그 죄를 열거하여 도내에 통문을 돌렸습니다. 대개 본도의 형세는, 좌도는 위에 진술한 바와 같으므로 신이 비록 강을 건너가더라도 일은 할 수가 없고 여기에 있으면 오히려 일부는 버티어 부지할 수 있겠으나 명령이 이미 내렸으니 지체하여 머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좌도의 숨어 있는 수령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영접하도록 하였으니, 그 보고가 이르기를 기다려 칼을 집고 강을 건너 사생결단을 하려 합니다. 엎드려 듣건대, 천병(天兵)이 크게 이르러 회복함이 희망이 있다 하니 신이 그동안 죽지 않아 난이 평정되어 환도하시는 날을 보게 된다면 비록 군량만 허비한 죄로 만 번 죽음을 받아도 뉘우침이 없겠나이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좌의병장(左義兵將) 임계영(任啓英)이 장흥(長興) 선비들에게 다음과 같이 격문을 돌리다.
의병을 일으킴이 유생으로부터 주창되었은즉 이름이 사류에 참여한 자는 마땅히 분기하여 사졸의 선봉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무식하고 어리석은 병졸들과 게을리 놀던 무리 또한 모두 의기로 달려오고 있는데도, 장흥은 큰 부(府)이면서 동지 1, 2명 외에는 모두 겁내고 움츠려 여기에 종사하려 하지 않고 있으니 여러분은 무슨 별다른 뜻이 있는가. 이때를 당하여 신자 된 이로서는 요행히 살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인데, 여러분은 홀로 임금을 생각하지 않는가. 공론(公論)이 한번 일어나면 정거(停擧)함이 늦을 것이다. 군율(軍律)이 지극히 엄한데 지금 우선 기다리고 있으니, 모름지기 다시 생각하여 일제히 모일 것이요 후회를 남기지 말라. 종사(從事) 정자(正子) 정사제(鄭思悌)가 지었다. 뒤에도 다 이와 같다.
○ 임계영이 낙안(樂安)에서 본군(本郡)에 이르러 격문을 돌린 것은 다음과 같다.
국가의 오늘날 일은 신자로서 차마 말하지 못할 바이다. 금산(錦山)의 패전에 의기가 저상되어 다시 진작할 길이 없으므로 우리들이 세상일에 어두움을 생각지 않고 의병을 일으켰으니 다 같은 사람의 마음에 거의 흥기됨이 있으리라 여겼다. 지금 군성(郡城)에 와 주둔하여 이웃 고을 의사들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본군의 사람들은 응모는 그만두고라도 한 사람도 나와 보는 이가 없으니 별다르게 무슨 뜻이 있는 것인가. 듣자 하니 당초에 의병의 격문이 올 때에 본 읍에서 물리칠 뜻이 있으나 믿을 수 없다 하더니, 지금으로 보건대 과연 헛말이 아니로다. 군수의 뜻도 군인(郡人)과 같으니 군인이 시킨 것임을 알겠다. 우리들의 이 의거는 공사(公事)를 위함이요 나라를 위함인데 이 고을서는 사(私)라고 보니, 아! 이 고을 사람들은 홀로 임금이 없는가. 우리에게는 손익이 될 것이 없지마는 후일에 공론이 없을까.
○ 임계영이 순천(順天)에 이르러 본부에 돌린 격문은 다음과 같다.
의병을 일으켜 적개(敵愾)함은 사람의 마음이 함께 바이며 동궁의 수찰(手札)이 의병을 장려하매 말이 심히 정성스럽고 슬프며 뜻이 심히 애통하니, 신자 된 이로서 누군들 감개하고 눈물을 떨구며 온 힘을 바치고자 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왜적이 천병에게 쫓겨 남도로 흩어져 내려왔는데 곤경에 몰린 짐승처럼 싸워 당할 길이 없어, 불사르고 약탈하는 화가 도처에 마찬가지이니 가정과 재물을 장차 누가 보전하랴. 그러니 하루아침에 적의 소유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조금이라도 내놓아 군수(軍需)에 약간의 도움이 되게 함이 나을 것이다. 승평(昇平)은 큰 부(府)라 물자가 풍부하고 인구도 많으며, 또 풍년이 들어 벼가 구름처럼 많으니, 어찌 앉아서 풍족한 것을 누리면서 국가의 일을 모르는 체하겠는가. 명가우족(名家右族)은 다 국가의 은혜를 알고 또 사체(事體)를 살필 것이니 타이르기를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요, 촌락의 평민에게도 또한 이 뜻을 전파하여 널리 거두고 부지런히 모아서 유사(有司)로 하여금 주장하여 때에 맞춰 잇달아 원조한다면 승평 한 부가 옛날 한(漢) 나라를 일으킨 관중(關中)이 될 것이다. 원하건대 여러분은 힘써서 태만하지 말지어다.
○ 좌의병장 임계영이 순천 전 만호(萬戶) 장윤(張潤)으로 부장(副將)을 삼아서 군사를 끌고 남원으로 향하여 각 고을에 돌린 격문은 다음과 같다.
의병을 일으키는 말은 전의 격문에 다하였으니 여러분은 다 보았을 것이다. 우리들은 수천 명의 날랜 군사를 뽑아서 바야흐로 적이 있는 곳으로 향하여 최(崔)의 군사와 더불어 협력하려 하므로 준비가 한창 급한데, 군대에 현재 양식이 없어 두어 고을에서 판출(辦出)하니 유장(儒將 선비로서 장수가 된 이)으로서 계속 시킬 도리가 없다. 이것은 우리들만이 맡을 걱정이 아닌데 여러 귀읍(貴邑)에 이름난 허다한 선비들이 일찍이 그 책임을 함께 나눈 이가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여러분에게도 다 같이 불공대천(不共戴天)의 분함이 있는데 이 의거들을 보고 어찌 차마 마음에 모르는 체한단 말인가. 하물며 금산ㆍ무주의 적이 소굴을 만들어 한 도의 형세가 털끝 하나처럼 위태로운 마당에, 여러분은 아침 저녁으로 구차하게 편안히 지낼 생각이 있는가. 이때를 당하여 신자 된 이라면 감히 제 몸을 제 것이라 생각할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재물을 제 것으로 생각하여 한자 한치를 아끼겠다는 것인가. 지금 비록 내도록 요구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민간에서 곤하고 쪼들리지마는 숨이 아직 붙어 있는 동안에 게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여러분이 비록 혹 병이나 사고가 있어 의병에 종사 하려 하지 않더라도, 군량을 계속해 원조하는 것만은 오히려 힘써 도모해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군사들이 풍우를 무릅쓰는 고생에 대해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고, 흉한 적이 분탕질하는 화를 생각하여 각기 분발하고 격려하며, 마음과 힘을 다하여 양식을 보내고 넉넉지 못한 것을 도와주어, 우리들로 하여금 먼저 국경의 적을 무찌르고 마침내는 근왕의 뜻을 다하여 궁금(宮禁)을 숙청하여 거가(車駕)를 모셔 환도하게 한다면, 군량을 운반하여 끊이지 아니하던 옛날의 소하(蕭何)가 한 나라에 세운 공만을 장하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삼가 바라건대 힘써서 태만함이 없을지어다.
○ 천병 중에 점을 치는 자가 우리 국가의 운수를 점치고 말하기를, “문교(文巧)로 풍속이 폐단이 되었으매 장차 큰 질박[大質]으로 돌아가리라. 엎어져 죽은 이가 삼대[麻]와 같고 피가 흘러 절굿공이 떠서 흐르며 사람들이 그 어미만 알고 그 아비를 모르리라. 그런 뒤에야 난리가 그치리라.” 하다.
○ 최원(崔遠)ㆍ김천일(金千鎰)의 군사가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가 머물다.
○ 광주 목사 권율로 나주 목사를 삼다.
○ 진주 판관 김시민이 전 병사 조대곤(曹大坤), 사천 현감 정득렬 등과 더불어 사천ㆍ고성ㆍ진해에 있는 적을 습격하니, 적이 점차로 도망하여 가다. 함안 군수 유숭인과 칠원 현감이 방좌가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추격하여 쏘아 죽인 것이 매우 많으니 적이 달아나 병영(兵營)으로 들어가다. 모든 군사들이 이긴 기세를 타서 나아가 포위하니 적이 밤에 도망하여 가다. 시민이 드디어 연도의 각 고을을 수복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곽현(郭玄)ㆍ양산숙(梁山璹) 등이 서해로 해서 십생구사(十生九死)로 행조(行朝)에 도달하여 표문을 올리니 임금이 친히 남방의 소식을 묻고 두 사람에게 벼슬을 주었으며, 인하여 전라도의 사민들에게 내리는 교서를 선포하다.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王若曰]. 내가 임금답지 못하여 능히 백성을 보존하여 나라를 지키지 못하였다. 한편으로는 인화(人和)를 잃고 한편으로는 적병을 방어하는 데에 실패하여 나라를 잃고 서쪽으로 파천하여 의주에 물러와 머문 지가 이미 한 달이 지났다. 종묘 사직은 폐허가 되고 신하와 인민은 어육이 되었다. 창창(蒼蒼)한 하늘이여! 이것이 무슨 일인가. 죄는 오로지 나에게 있으니 진실로 부끄러움이 깊도다. 서쪽과 남쪽이 멀리 떨어져 소식을 들을 길이 없다가, 이광(李洸)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붕궤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부터는 남쪽에서 구원병을 기다릴 생각을 다시는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곽현 등이 수로와 육로를 거쳐 도달하여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이 의병 수천을 모집하여 절도사 최원의 병마(兵馬) 2만과 함께 수원에 나와 둔쳤다고 보고하니, 덕이 없는 나로서 남이 나를 위해 죽을 힘을 다하여 줌이 어찌 이에까지 이르렀는고. 우리 조종들의 깊은 인애(仁愛)와 후한 은택이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되어 맺혀진 것이, 아! 지극한 것이로다. 내가 심히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여 곧 양산숙 등을 보내어 너의 군사와 백성들에게 알리게 하노니, 그대 다사(多士)들은 내가 알리는 뜻을 알도록 하라. 내가 즉위한 이래로 이제 25년째이다. 비록 사랑함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여 은택이 아래에 통하지 못하였고 지혜는 물정을 살피지 못하여 정사에 조치를 잘못함이 많았으나, 본심인즉 일찍이 백성을 사랑하고 물정을 알려는 데에 뜻을 두지 아니한 적이 없었다. 다만 요 몇 년 사이에 변방에 허술함이 많고 군정(軍政)이 해이해진 것을 보고는, 오직 성이 높고 참호가 깊으며 갑옷만 견고하고 칼날만 예리하면 왜적을 막을 수 있으려니 생각하여 중앙과 지방에 신칙(申勅)하여 엄하게 방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성이 더욱 견고할수록 국세는 더욱 약해지고 참호를 더욱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날로 깊어져서, 일찍이 가을 뽕잎이 떨어지고 기왓장들이 풀어지듯이 점차 이 지경에 이를 줄을 헤아리지 못하였구나. 더구나 궁중의 사람들을 엄밀히 단속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세세한 이권까지 그물질하고 형벌이 정당함을 잃어서 원통한 기운이 화기(和氣)를 손상하였다. 왕자(王子)들이 산택(山澤)의 이권을 점령하자 세민(細民)들이 생업을 잃어 걱정하였다. 백성은 마땅히 나를 허물할 것이니 내가 무슨 변명이 있으리오. 이에 유사로 하여금 모두 파하여 돌려주었다. 이러한 일들 역시 어찌 내가 다 알았던 것이리오. 내가 몰랐던 것 역시 나의 죄이다. 생각이 이에 이르니, 비록 뉘우친들 어찌 미치리오. 차라리 내 몸을 희생으로 삼아 천지 종사 모든 신령에게 사죄하고자 하노라. 내가 손가락을 깨묾이 이미 이러하니, 바라건대 너희 사민들은 나에게 허물을 고치어 새로운 정치를 도모하도록 허락하여다오. 나의 잘못은 대략 이미 진술하였거니와 이번의 전란은 실로 얼토당토않은 것이다. 미련한 저 오랑캐가 감히 하늘을 쏘려는[射天] 꾀를 내어, 혹은 우리더러 저의 반역에 편당이 되기를 요구하고 혹은 우리더러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므로 내가 대의에 의거하여 배척하고 거절하였더니, 올빼미의 성질이 나의 큰 덕을 잊고 작은 분을 풀려하였다. 나는 종사가 망하고 신민을 버릴 수가 있을지언정 군신(君臣)의 대의는 하늘이 내려다보신다 하여 대의를 우주에 밝히고 가슴속을 해와 별에 밝게 헤쳐 위아래 신령들에게 부끄러움이 없고자 할 뿐이다. 곤궁과 위축을 당하면서 천조(天朝)에 달려가 호소하였더니 천자의 성명(聖明)으로 나의 지극한 뜻을 살펴 요동 총병관(遼東總兵官) 조승훈(祖承訓)으로 하여금 유격장군(遊擊將軍) 등 병마 1만을 거느리고 평양을 진격도록 허락하여 서울까지 이르러 왜적을 소탕하려고 기약하니 천병의 소식이 미치는 곳에 사민들은 마땅히 분발하기를 생각할 것이다. 나의 행전(行殿)이 비록 한구석에 궁박하게 있으나, 천조에서 또 호(湖)ㆍ절(浙) 지방에서 왜적과 싸운 경험이 있는 6천을 징발하여 아침 저녁으로 압록강을 건널 것이며 본도(평안도)의 군사와 말이 또한 수만이 모였으니 응당 다시 실패할 걱정은 없을 것이다. 너희 경명(敬命) 등이 이미 경기도에 이르렀으니 부디 기회를 보아 힘을 합하여 경성을 수복하라. 금성(金城)과 평양을 점령하였던 적도 기세가 이미 꺾였으니 섬멸할 것을 기약할 수 있다. 이 두 곳의 적만 제지하면 나머지 지엽의 적은 싸우지 않고도 절로 평정될 것이다. 지금 각 도가 모두 왜적의 노략질을 당하였으나 오직 호남 한 도가 온전하니, 너희가 만일 힘쓰지 아니하면 또 어디를 믿으랴. 군량이 모자라거든 경(京)ㆍ호(湖)의 국고를 너희들이 먹도록 맡길 것이요, 무기가 다되거든 너희들이 쓰도록 맡기리니 각기 힘쓸지어다. 이제 경명을 공조 함의에 제수하여 초토사를 겸하고, 천일을 장예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로 승진시켜 창의사(倡義使)를 겸하며 박광옥(朴光玉) 등 이하도 각각 차등 있게 벼슬을 주노라. 생각건대 너희들의 충의(忠義)는 벼슬과 상을 기다리지 않겠지만, 내가 은혜를 베푸는 데는 이 밖에 다른 것이 없으니 도착하거든 받고 더욱 힘을 다하라. 또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로 하여금 충청ㆍ전라도 등의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나의 뜻을 선유(宣諭)하고 군무(軍務)를 감독하게 하노니, 너희들은 그의 절제(節制)를 받아서 각기 용감함을 뽐내라. 용만(龍灣 의주) 한구석에서 국세가 위험하여 땅의 한계가 이미 다되었으니 나는 장차 어디로 돌아가랴. 사람의 일이 이미 극도에 다다랐으니 이치가 마땅히 회복함을 구할 것이다. 가을의 서늘함이 동하자마자 국경은 일찍 차가워지는구나. 저 장강(長江 압록강)을 보건대 역시 동으로 흐르니, 돌아가기를 생각하는 나의 한 생각이 물처럼 흐르누나. 이 교서가 이르거든 각기 나의 뜻의 슬픔을 불쌍히 여김이 있으리라. 아! 하늘이 이성(李晟)을 낳았으니 도성을 수복하도록 기대하고, 날로 장소(張所)가 능묘에 탈이 없다고 보고하기를 바라노라. 가뭄에 비구름 바라듯 하는 바람에 어서 부응하여 내가 서리와 이슬을 맞고 있는 괴로움을 면하게 하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아마도 잘 알 것이다. 이호민(李好閔)이 지은 것이다. ○ 아! 멀리 서쪽 국경에 파천하시어 임금께서 몽진하시는데 남방에서 목숨을 붙이고 있는 신자가 이제 애통의 교서를 보니 어찌 슬픈 회포가 없으랴. “죄가 오로지 나에게 있다.”는 것은 성덕의 겸손함이 지극하심이고, “다시는 남으로 바랄 수 없으니, 신정(新亭)에서 서로 만나 우는 것이 무슨 소용이랴! 백성들은 마땅히 나를 허물할 것이라.”는 말씀은 귀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며, “내가 손가락을 깨묾이 이와 같다.” 하신 말씀은 입으로 차마 전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군신의 대의는 하늘이 내려다본다.”는 말씀은 비록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라도 가히 격동할 만하며, “돌아가기를 생각하는 한 생각이 강물처럼 흐른다.”는 그 말씀을 듣고 통곡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닐 것이다. 초야에 벌레 같은 신하는 미천한 정성을 견딜 수 없어 애오라지 오언율시(五言律詩)를 읊어 서쪽으로 바라며 눈물을 흘린다. “궁궐에는 벼와 기장이 났고 용암에는 우림(羽林: 임금을 호위하는 친위대)이 체류하네. 한관(漢官)의 위의를 어디서 볼꼬. 주도(周道)는 마침내 찾기 어렵네. 북쪽을 바라보는 외로운 신하의 눈물이요 동으로 돌아오길 생각하는 성주(聖主)의 마음일세. 열 줄의 애통교시를 보고 나니 뜻이 침침하네.” 하다.
○ 경상도 신민에게 내린 교서는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상동(上同) 운운. 소식을 들을 길이 없어 본도(영남)의 사세와 적의 기세가 쇠하였는지 왕성한지 어떠한 줄을 알지 못하였더니, 근자에 들은즉, 우도 감사(右道監司) 김수(金睟)가 용인에서 패하여 물러갔고, 좌도 감사(左道監司) 김성일이 진주에서 군사를 모집하였으며, 좌병사(左兵使) 이각(李珏)이 싸우지 않고 도망한 죄로 참형(斬刑)을 당하여 박진이 충성스럽고 용감하다 하여 이각을 대신하였고, 우병사(右兵使) 조대곤이 노쇠하여 양사준(梁士俊)으로서 대신하였으며, 변응성(邊應星)이 좌도 수사(左道水使)가 되었다 하니, 그들이 각기 본도로 돌아가서 힘을 써서 한 일이 있는가 모르겠다. 좌도에는 영해(寧海) 일대와 우도에는 진주 등 몇 고을이 아직 보전되었다 하니 이것이 사방 십 리 되는 땅이나 군사 일려(一旅)보다 낫지 않겠는가. 본도는 백성이 신실하고 후하며 본시 충의가 많으니 너희 다사들이 진실로 서로 분려(奮勵)한다면 반드시 회복의 바탕이 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을 것이다. 들은즉, 정인홍ㆍ김면(金沔)ㆍ박성(朴惺)ㆍ곽일(郭)ㆍ조종도(趙宗道)ㆍ이노(李魯)ㆍ노흠(盧欽)ㆍ곽재우ㆍ권양(權瀁)ㆍ이대기(李大期)ㆍ전우(全雨) 등이 의병을 일으켜서 군사를 모집함이 이미 많았다 하고 배덕문(裵德文)은 이미 적승(賊僧) 찬희(贊熙)를 죽였다 하니, 본도의 충의가 오늘날에도 아직 쇠하지 않았음을 더욱 믿겠도다. 하물며 곽재우는 전술이 비상하여 적을 죽인 것이 더욱 많았으되 공을 조정에 아뢰지 않는다 하니, 내가 더욱 기특히 여기노라. 내가 그의 이름을 늦게 들은 것이 한이로다. 호남에도 또한 전 부사 고경명과 김천일 등이 의병 수천 명을 모집하여 본도 절도사 최원의 병마 2만과 더불어 나아와 수원에 머무르면서 바야흐로 경성을 회복하도록 도모하고, 그의 부하 양산숙 등으로 하여금 수로와 육로로 달려와서 행재(行在)에 아뢰는데, 내가 그의 아룀을 보고 눈물이 글썽거려 한편으로는 위로되고도 슬펐다. 이제 양산숙 등이 군중(軍中)으로 돌아가는 편에 이 글을 부쳐 그로 하여금 전하여 이르게 하노니, 너희 사중(士衆)들은 내가 말하는 뜻을 알도록 하라. 내가 왕위에 오른 이래로 운운. 상동 군사들이 마땅히 분발하기를 생각할 것이다. 하물며 지금 광포한 왜적이 죄악을 쌓아 이미 가득 찼으니 하늘의 주벌이 마땅히 내릴 것이다. 더구나 평양의 적이 여러 번 야습(夜襲)을 당하여 세력이 쇠하였으니 섬멸할 것을 기약할 수 있다. 곧 맑은 가을이 철을 재촉하여 태백성(太白星)이 바야흐로 높아서 우리 군사의 머무는 곳에 살기가 이미 응하니 충의가 향하는 곳에 어느 적인들 꺾지 못하랴. 너희 사민들은 마땅히 힘을 헤아려서 비록 고경명 등과 힘을 합쳐 북으로 올라오지 못하더라도, 본도에 유둔(留屯)한 적 또한 많고 왕래하는 자 또한 많아서 길에 잇달았다 하니, 마땅히 서로 요해지를 끼고서 적들이 노략질하는 것을 나누어 무찌르도록 하라. 또한 마땅히 길 옆에 군사를 매복시켜 좌우로 서로 응하여 혹 맞아서 치고 혹은 뒤밟아 쳐서 적으로 하여금 마음 놓고 다니지 못하게 하여 마침내 한 놈도 바다를 건너가지 못하도록 만들고, 온 지방을 깨끗이 하고 평정시켜 노약(老弱)을 불러들여 살게 하라. 그런 뒤에 힘을 합하여 경성으로 나의 행차를 맞아 돌아가면, 너희 사민들이 살아서는 아름다운 이름을 누리고 은택이 자손에게까지 흐를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랴. 정인홍 제용감 정(濟用監正), 김면 합천 군수, 곽일 예빈시 정(禮賓寺正), 박성 공조 정랑, 곽재우 유곡 찰방(幽谷察訪), 이대기(李大期)ㆍ전우(全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여 표창하고 장려하노니, 생각건대, 너희들의 충의는 벼슬과 상을 기대하지 않겠지마는 운운. 상동
○ 처음에 정철이 강계(江界)의 적소(謫所)로부터 풀려와서 행조(行朝)에 따라갔다가 이미 체찰사(體察使)의 명을 받고 또 호남의 소식을 듣고는 초토사 고경명에게 편지하기를, “살아 돌아와서 차마 오늘의 일을 보게 되어 조복(朝服)으로 눈물을 닦으니 눈물이 말라 피가 이어 흐릅니다. 어찌 차마 말하랴, 어찌 차마 말하랴. 좌랑 상산숙이 와서, 형이 창의(倡義)하여 군사를 일으켜 호산(壺山 여산(礪山))까지 왔다고 들으니, 친구의 사사로운 정으로 배나 기쁠 뿐이 아니라 천안(天顔 임금의 안색)에 기쁨이 있고 백관들에게 희색이 돕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 복을 내리는 하늘이 가만히 도와서 그러함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모름지기 기운을 내고 전진하여 회복에 한결같이 뜻을 두어 임금의 행차를 봉영(奉迎)하기를 날로 바랍니다. 나는 외람되이 도체찰사의 명을 받아서 장차 내일 발정(發程)하려 하였다가 길이 막힐 것이 염려가 되므로 당분간 기다릴 뜻이 있으니 어떻게 귀결이 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종이는 다되고 말은 길어 우선 여기서 줄입니다. 철(澈) 배(拜).” 하다. 교지와 이 편지가 왔는데, 경명은 이미 한을 머금고 전사하였으니, 슬프도다.
○ 이광ㆍ윤선각(尹先覺)의 벼슬을 삭탈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하고 나주 목사 권율로서 전라 순찰사를 삼았으며, 공주 목사 허욱(許頊)으로 충청 순찰사를 삼고 이순신(李舜臣)에게 자헌대부의 계자(階資)를 내리다.
○ 영해 부사(寧海府使) 한효순(韓孝純)으로 토포사(討捕使)를 삼다. 교지에,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경상좌도는 아직 보존되었으나 다만 도내에 감사ㆍ병사ㆍ수사가 없어서 조정의 소식이 통하지 못하므로 인심이 붙일 데가 없다. 그래서 비록 창의(倡義)하여 적을 치는 사람이 있으나 통솔하기에 어려운데, 좌감사 김성일은 길이 통하지 않아 아직 간 곳을 모르고 사기(事機)는 심히 급하다. 이제 그대를 당상관으로 승진시켜 토포사를 겸하게 하노니 성일이 미처 부임하기 전에 그대는 군현(郡縣)을 통솔하여 적을 치는 일을 맡고 또 성일이 있는 곳을 찾아서 급히 부임하도록 하여 서로 힘을 합하여 적을 치도록 하라. 군사나 백성으로 공이 있는 자는 일일이 자세히 기록하여 후일에 논공(論功)할 증거를 삼고 공사(公私)의 종은 곧 면천(免賤)해 주도록 하라. 장기 현감(長鬐縣監) 이수일(李守一)은 각 고을이 연달아 무너질 때에 적을 베어 공을 세웠으니 극히 가상하다. 역시 당상관으로 승진시키고 그 나머지 공이 있는 사람도 역시 예(例)에 따라 논상(論賞)할 것이니 그리 알라.” 하다. 이 교서는 길이 막혀서 서너 달을 지나서 효순이 감사가 된 뒤에 도착하였다.
9일. 보성 군수(寶城郡守) 등이 금산(錦山)에서 적을 엿보다가 크게 패하여 달아나고 남평 현감(南平縣監) 한순(韓諄)은 적에게 죽었으며, 죽은 군인이 5백여 명이다.
○ 진주 판관(晉州判官) 김시민(金時敏)을 본주(本州)의 목사로 승진시키다. 변란이 처음 났을 때에 시민이 순찰사의 명령으로 날랜 기병(騎兵) 50여 인을 거느리고 영산(靈山)으로 달려가 진군하여 작원(鵲院)에서 맞아 쳤는데 참퇴장(斬退將) 윤탁(尹鐸)과 함안 군수(咸安郡守) 유숭인(柳崇仁)이 모두 붕궤되다. 거느린 군사 1백여 명이 모두 전사하고 숭인은 홀로 강물에 빠져 헤엄쳐 나왔는데, 시민이 옷을 벗어 입혀서 함께 돌아오다. 김수(金睟)가 군관을 시켜 시민에게 전령하기를, “적이 이미 고성(固城)의 길로 향하였으니 빨리 막아 끊으시오.” 하다. 시민이 곧 고성으로 달려오니 적이 이미 고성을 점령하여 전진할 수가 없어서 본주로 돌아온즉, 성중의 사졸들이 이미 흩어졌다가 차차로 돌아와 모여서 기세가 점차로 떨치다. 시민이 사졸과 더불어 고락(苦樂)을 같이하면서 사수할 계책을 하다. 사천을 점령하였던 적이 장차 본주를 범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드디어 조대곤(曺大坤)과 더불어 정병(精兵) 1천여 명을 거느리고 바로 사천성 밑에 이르렀더니, 적이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다. 이튿날에 또 진군하여 적을 십수교(十水橋)에 만나니 현에서 5리쯤의 거리다. 군사가 모두 죽도록 싸워서 머리 몇 급(級)을 베고 쏘아 죽인 것이 매우 많으니 적이 퇴각하여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성 밑에까지 갔다가 돌아오다. 이로부터 군사들의 기운이 배나 되다. 얼마 안 되어 적이 밤에 도망가 고성의 적과 합하다. 시민이 모든 군사에게 명령하여 고성의 적을 습격하고자 하다. 드디어 정병을 뽑아서 진주(晉州)의 남쪽 영선현(永善縣)에 진을 쳤다가 밤중에 군사들로 하여금 재갈을 머금게[啣枚] 하고 가만히 대둔령(大屯嶺)을 넘어서 새벽에 고성의 성 밑에 이르러 북치고 고함치며 위엄을 뽐내다. 적이 두렵고 위축되어 수일 만에 밤에 도망하여 진해(鎭海)에 있는 적과 합세하여 철병하여 창원(昌原)으로 가니, 세 고을이 연달아 수복되어 군의 기세가 크게 떨치다. 이때에 이르러 목사가 되다. 김면은 시민이 장수와 군사의 인심을 얻은 줄을 알고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응원하게 하다. 시민이 곧 정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거창(居昌)으로 달려가서 김면과 합하여 금산(金山)의 적을 쳐서 머리 수십 급을 베고 수 일 있다가 또 나가 싸워서 머리를 벤 것이 역시 많았다. 시민이 칼에 맞아 발이 상하자, 김면이 그 때문에 눈물을 흘리다. 얼마 안 되어 금산 등지의 적이 잇달아 도망가자, 시민이 진주로 돌아오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좌병사 김성일(金誠一)의 장계는 다음과 같다.
신이 이미 좌도의 감사가 되었으니 우도(右道)의 일은 마땅히 아뢸 것이 아니나, 다만 소신이 처음부터 의병을 주관하였으니 지금 만일 상례에 맡겨두고 근심스러운 기회를 눈으로 보고도 아뢰지 아니한다면 실로 신하된 의리가 아닙니다. 이러므로 한두 가지 조건을 외람되이 진술하여 직무 외의 일을 간섭한다는 혐의를 피하지 못하나이다. 당초에 김면은 고령(高靈)ㆍ거창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정인홍(鄭仁弘)은 합천(陜川)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각기 적을 쳐서 기세가 떨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김면은 은명을 받아 합천 군수가 되고 정인홍은 제용감 정(濟用監正)에 제수되매, 고령ㆍ합천ㆍ거창 세 고을의 군사가 모두 그 장수를 잃고 마음이 해이하여 적을 칠 뜻이 없으니 진실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일이 진정될 동안에는 각기 그 군사들을 거느리고 전대로 적을 치게 하소서. 전 군수 곽일(郭)은 초계(草溪)의 가수(假守)가 되어 직무를 잘 보아 군사와 백성들이 사모하여 모두 진군수(眞郡守)가 되기를 바라고 군수 정눌(鄭訥)은 있는 곳을 알지 못하니, 청컨대 곽일로 본군의 군수를 삼으소서. 전 목사 오운(吳澐)은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온 현을 타일러 군사 2천여 명을 모아서 노약자는 빼내어 보(保)를 삼고 군기를 주조하여 전투에 쓰게 하여 의령(宜寧) 한 고을이 온도의 보장(保障)이 되어 적이 감히 엿보지 못하니, 이 몇 사람의 공은 실로 도내에서 함께 아는 바입니다. 일이 의병에 관계되므로 감히 직책을 넘어 외람되게 아뢰나이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으로 본도 조방장(助防將)을 겸하게 하다.
○ 전라 우의병장(右義兵將) 최경회(崔慶會)는 담양(潭陽)ㆍ순창(淳昌)으로 해서, 좌의병장 임계영(任啓英)은 구례(求禮)로 해서 남원(南原)에 모이다. 경회가 본부 전 첨사 고득뢰(高得賚)로 부장(副將)을 삼으니, 남원의 선비와 백성으로 의병에 모집된 자가 거의 6, 7백 명이 되다. 두 군사가 장수(長水)에 이르러 유둔(留屯)하고 부장으로 하여금 금산(錦山)ㆍ무주(戊州)의 적을 잡을 조치를 하게 하였다.
○ 최원(崔遠)ㆍ김천일(金千鎰) 등이 장단(長湍)에서 적을 치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오다. 처음에 경기에서 피란한 조관(朝官)들과 의병들이 모두 강화(江華)에 있다가 두 군사가 근왕(勤王)하는 것을 보고 흔연히 기운이 나서 여러 차례 적을 치도록 권하였고 두 장수도 역시 군사들이 해이해질 것을 염려하여, 드디어 본 지방의 군사와 합세하여 강을 건너 장단에서 적을 엿보았는데 적이 군사를 감추고 약한 체하여 우리 군사를 유인하다. 여러 장수들이 급히 군사를 시켜 육지에 내려가 잡게 하였더니 적병이 사면에서 일어나 기세가 바람을 탄 불길 같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수없이 많았고 천일 등은 겨우 몸만 빠져 나와서 쪽배를 타고 달아나다. 수일이 지난 뒤 전장으로 사람을 보내어 당일에 죽음을 면하고 숨어 있는 자 들을 몰래 불러 모으게 하니 겨우 1천여 명을 얻다.
27일. 충청도 의병장 조헌(趙憲)과 중[僧] 의장(義將) 영규(靈圭) 등이 금산(錦山)에서 적을 치다가 패하여 죽다. 그 뒤 만력 23년 을미년(1595, 선조 28)에 전지(戰地)에 비를 세우다.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
아! 여기는 증 참판(贈參判) 조공(趙公)이 순절한 땅으로서 부하와 함께 죽은 병사들이 매장된 곳이다. 만력 임진년(1592, 선조 25)에 왜란이 갑자기 일어나니, 우리 땅을 범하였다. 우리 군사가 닿는 곳마다 번번이 붕괴되어 감히 그 칼날을 막는 자가 없었다. 왜적이 드디어 이긴 기세를 타고 마구 몰아서 바로 한강을 건너오니 삼경(三京 한양(漢陽)ㆍ개성(開城)ㆍ평양(平壤))이 모두 지켜지지 못하고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파천하였으나 근왕(勤王)하는 자가 전혀 없었다. 이때에 공이 옥천(沃川)의 시골집에 있다가 홀로 분연히 일어나서 피를 뿜으며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순찰사와 수령들이 모두 방해하였다. 공이 잉에 동지와 문생인 전승업(全承業)ㆍ김절(金節) 등과 더불어 충청 우도로 달려갔더니 전 참봉 이광륜(李光輪)과 선비 신난수(申蘭壽)ㆍ장덕개(張德盖)ㆍ고경우(高擎宇)ㆍ노응탁(盧應晫) 등이 공의 의기를 사모하여 앞다투어 와서 모였다. 드디어 군사와 군량을 모집하고 혹은 기계를 주조하여 7월 4일에 공주(公州)에서 기(旗)를 세우니 군사가 1천 7백이었다. 이때에 왜적이 공주를 점령하매 방어사 이옥(李沃)의 군사가 붕궤되었다. 공이 청주(淸州)로 진군하여 8월 1일에 바로 성의 서문 밖을 두드려서 승장(僧將) 영규와 진(陣)을 연합하였다. 공이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종일토록 독전(督戰))하니 적이 크게 패하여 마침내 저들의 송장을 태우고 밤에 달아났다. 이로부터 충청 좌도 여러 둔(屯)의 적이 모두 도망하였다. 공이 바야흐로 날랜 군사를 가려서 바로 행조(行朝)로 달려가려고 온양(溫陽)까지 이르자, 금산에 있는 왜적이 다시 창궐하여 장차 충청ㆍ전라도를 침범하려 하였다. 순찰사가 공의 동지를 소개로 하여 공을 만나 금산의 적을 치는 것에 대해 의론하자고 청하였다. 부하 장교들도 역시 대부분 말하기를, “국가의 땅이 모두 적에게 점령당하고 오직 충청ㆍ전라도만이 침범당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하늘이 우리를 도와서 중흥의 열려 함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버리고 서울로 올라간다면 이것은 충청ㆍ전라도가 없어지는 것이요, 또 먼저 금산의 적을 무찔러서 뒤를 밟을 적을 끊은 뒤에 북으로 가서 근왕하여도 늦지 않다.” 하므로, 공이 이에 공주로 돌아왔더니 순찰사와 뜻이 또 서로 틀어졌다. 대개 의병을 일으킬 처음에 공이 순찰사에게 글을 보내어, 그가 군사를 끼고 스스로 호위하고 근왕하는 데는 뜻이 없어 충신과 의사(義士)의 기운을 누른다고 책하였더니 순찰사가 사감을 품은 것이었다. 이에 이르러 순찰사가 각 고을에 공문을 돌려 무릇 공의 취하에 모집되어 있는 자에 대해 그의 부모와 처자를 잡아 가두고 또 관군에 영을 내려 서로 응원하지 않게 하니, 휘하의 군사가 이미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고 다만 의사 7백 명이 공을 따라 사생을 같이하려는 이가 있을 뿐이었다. 8월 25일에 군사를 옮겨 금계(錦溪)로 가려 하니 별장(別將) 한 사람이 극력 말리기를, “적이 명종(明宗) 을묘년(1555)에 호남에서 패한 것을 징계하여 지금 금계를 점령한 자는 특히 정예한 부대요 수효도 수만인데, 어찌하여 우리의 오합(烏合)한 군사를 가지고 당적하겠습니까. 마땅히 군사를 멈추고 기회를 보고 또 조정의 명령을 기다립시다.” 하다. 공이 울면서 맹세하기를, “임금께서 지금 어디 계시건대, 감히 승패를 말하리오.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가 죽어야 하는 것이니 나는 한번 죽음을 알 뿐이다.” 하고, 드디어 영규와 군사를 연합하여 진군하였다. 일찍이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과 27일에 일제히 협공(夾工)하기를 약속하였었는데 권율이 글을 보내어 기일을 변경하였으나, 글이 도착하기 전에 공이 이미 금산군에서 10 리의 거리에 당도하여 전라도 군사를 기다렸다. 적이 정찰해 알고 맞아 공격하여 우리가 미처 진을 치기 전에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번갈아 나와서 우리에게 대들었다. 공이 이내 군중(軍中)에 영을 내리기를, “오늘에는 다만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니, 생사와 진퇴에 있어 의(義) 자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라.” 하니, 군사들이 모두 명을 따라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힘껏 싸운 지 한참 만에 적이 세 번 패하여 겨우 다시 정돈하였는데, 우리 군사는 이미 화살이 다되었다. 적이 드디어 막하로 몰려 들어오자, 군사가 도망가기를 청하였다. 공이 웃으며, “장부가 죽으면 죽었지, 위태로움에 이르러 구차히 살 수는 없다.” 하고 드디어 북채를 들고 독전하기를 더욱 급히 하니, 군사들이 죽음을 각오로 달려들어 맨주먹으로 적을 치면서도 오히려 행오(行伍)를 이탈하지 않고 마침내 공과 함께 죽어서, 삶을 바라고 요행히 면한 자가 없었다. 적도 역시 그만큼 죽어서 세력이 드디어 꺾이자, 남은 군사를 거두어 진중으로 돌아가면서 곡하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고 그 송장을 사흘 동안 운반하여도 오히려 다하지 못하여 이내 쌓아서 불태웠으며, 마침내 무주에 있는 적과 함께 모두 도망하였다. 그러므로 충청ㆍ전라가 보존되어 국가가 그 덕에 오늘날의 중흥이 있게 되었으니, 공이 비록 패하여 죽었으나, 충청ㆍ전라를 보존하여 왜적을 꺾고 막은 공이 어떻다 하겠는가. 공이 군사를 일으킨 몇 달 동안 일찍이 형벌을 쓴 적이 없었으나, 군사들이 모두 명령에 복종하여 이르는 곳마다 숙연히 정제하여 시끄러움이 없었다. 공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는 멀고 가까운 데서 달려와 모여서, 비록 관에게 극력 방해를 당하여 처자가 옥에 갇혔으면서도 또한 공을 사랑하고 사모하여 차마 버리고 가지 못한 자가 있었다. 그의 패함을 듣자 거리에 곡성이 서로 들리며 전사한 집에서도 사사로운 원망을 하지 않고 오직 공의 죽음을 슬퍼하며, 뒤에 처져서 죽지 아니한 자도 자기의 죽음 면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다만 의탁할 데가 없음을 한탄하여서 충청 우도의 사람들은 천한 하인까지도 모두 소식(素食)을 하였으니, 공의 덕이 사람에게 감동됨이 깊었던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일이 위에 알려지자, 임금께서 매우 애도하시어 이조참판 겸 동지 경연의금부 춘추관사로 증직하고 그 아들 완도(完堵)를 태릉 참봉(泰陵參奉)으로 제수하였으며 달마다 집에 곡식을 내렸으니 아! 이로써 군신 관계를 보겠도다. 아! 평상시에는 큰 소리를 하다가 작은 이해에 임해서는 두려워하고 피하여 앞으로 갔다가 물러갔다가 하는 자가 많은데, 공과 같은 이는 전일에 곧은 상소를 올리고 국사(國事)를 말하여 여러 번 주운(朱雲)의 칼을 청하였으니 곧은 말을 한다는 명성이 일시에 진동하였고, 한가히 물러나 처하다가 국난을 듣고는 곧 분발하여 먼저 의병의 깃발을 날려 비록 성패가 하늘에 달려 있어 몸에 화살을 맞고 순국하였으니, 그가 전날 말한 바와 맞추어 보매 부절(符節)이 합한 듯 스스로 마음에 편안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또 국가에 문관으로서 전쟁에 달려가야 할 책임이 없고 공은 또 당시에는 관직도 없었는데도 한갓 의로써 일어났으니, 군사를 멈추고 기회를 보아서 조정의 명령을 기다린다 하더라도 누군들 불가하다 하리오마는,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강한 적에게 항거하여 죽어서 후회가 없었으니 어찌 열렬한 남자가 아니랴. 공이 신묘년(1591, 선조 24)에 왜적의 사신이 왔을 때에 문득 조정에 글을 올려 그 사신을 베어 천조(天朝)에 보고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늠름한 기색과 의연한 말이 바로 해나 달과 더불어 빛을 다투었으니, 호방형(胡邦衡)의 봉사(封事) 뒤로 공의 한 장의 상소를 보겠다. 또 천문에 특히 밝아서 하루는 동남쪽에서 큰 우레 같은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는 공이 울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천고(天鼓)라는 것이니, 왜적이 이제 반드시 바다를 건널 것이다.” 하였다. 그 말이 과연 증험되어 날짜도 틀리지 않았으니, 공은 이인(異人)이 아니고 무엇인고. 역적 정(鄭)가를 배척하면서 예(羿)와 착(浞)에게 비하였는데 그 뒤에 그 말이 마치 촛불로 비추고 거북으로 점친 것 같았으니, 이것은 사람마다 전해 외우는 바이다. 기타 사적과 행실이 탁월하고 빛나는 것도 진실로 전하지 아니할 수 없지마는, 이제 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한 가지 일은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것이다. 공의 8대조 휘(諱) 천성(天性)이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당하여 박주(博州)에서 두 번 이기고 안주(安州)에서 패하여 순국하였는데, 공이 일찍이 그 조상의 충절에 강개하여 탄복하고 추모하며 칭도하기를 좋아하더니 지금 마침내 능히 닮았으니, 또한 기이하도다. 공의 휘는 헌(憲)이요, 자는 여식(汝式)이요, 호는 중봉(重峯)이다. 정묘년(1567, 명종 22)에 문과에 올랐다. 집이 가난하여 처자는 배고픔과 추위를 면하지 못하였으나 모친을 봉양하는 데는 맛난 음식과 따뜻한 옷이 부족함이 없게 하였고, 몸소 밭 갈아 끼니를 대면서도 여가에는 항시 성현의 글을 대하여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아니하였으니, 옛날에 이른바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글 읽은 것이 아닌가. 인륜과 의리를 외우고 말하여 반드시 행사에 나타나기를 기약하였고, 생사에 분명하여 본래 마음에 정한 까닭에 창졸의 즈음에 능히 우뚝하게 스스로 성취함이 이와 같으니, 가히 공경할 만하도다. 행조에서 공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을 듣고 교서를 내려 봉상시 첨정(奉尙寺僉正)을 제수하였으나, 공이 또한 미처 보지 못하였다. 군사가 패한 이튿날에 공의 아우 조범(趙範)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지에 들어가니, 공은 기(旗) 밑에서 죽었고 장수와 군사들은 모두 그 옆에 죽어 있었다. 조범이 곧 공의 시체를 지고 옥천으로 돌아와서 4일 만에 빈(殯)하였는데, 안색이 살아 있는 듯하여서 성낸 기운이 발발(勃勃)하여 눈을 부릅뜨고 수염이 흐늘거리므로 사람들이 그가 죽은 지 이미 오래된 줄을 몰랐다. 공을 따라 전사한 7백 명은 대개 공의 열렬함을 사모하여 듣고 보면서 격동된 자들로서 몸을 버리는 데 뒤질까 두려워하여 온 군사가 모두 충의의 귀신이 되기를 사양하지 않았으니, 특히 이번 전란 이래로 다른 군중에서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옛 역사에 상고 하여 보아도 또한 듣기 드문 바이다. 또 그 중에 더욱 드러난 이로 참봉 이광륜 중임(仲任)은 효도와 우애가 타고났으며 강개히 절개가 있어 향병(鄕兵) 수백을 모집하여 실로 시종일관 공을 돕다가 마침내 죽음을 함께 하여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증직되었다. 봉사 임정식(任廷式)은 성품이 질박하고 정직한데다가 활 쏘고 말 타는 재주가 있어서 척후병을 거느리고 진(陣) 밖에 있다가 형세가 급한 것을 바라보고는 말을 채찍질해 돌진하여 왜놈 두엇을 쳐 죽이고 죽었다. 선비 김절(金節)은 의병을 모집하는 데 맨 먼저 따라서 전공이 많았다. 이려(李勵)는 바로 고(故) 수상(首相) 이탁(李鐸)의 손자로 학문을 좋아하고 행실이 돈독하였으며, 그의 가풍을 계승하더니 공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을 듣고 의기로 따라왔다가 진중에서 함께 죽었다. 또 만호(萬戶) 변계온(邊繼溫), 현감 양응춘(楊應春), 봉사 곽자방(郭自防), 무인(武人) 김헌(金獻)ㆍ김인남(金仁男)ㆍ이양립(李養立)ㆍ정원복(鄭元福)ㆍ강충서(姜忠恕)ㆍ박봉서(朴鳳瑞)ㆍ김희철(金希哲)ㆍ이인현(李仁賢)ㆍ황삼양(黃三讓)ㆍ박춘년(朴春年)ㆍ한기(韓琦)ㆍ박찬(朴贊)은 모두 편비(偏裨)로서 혹은 선등(先登)하여 견고한 적을 꺾고 혹은 적을 죽이기를 많이 하여 용맹과 열렬함이 남의 이목에 빛난 자들이다. 선비 박사진(朴士振)ㆍ김선복(金善復)ㆍ복응길(卜應吉)ㆍ신경일(辛慶一)ㆍ서득시(徐得時)ㆍ윤여익(尹汝翼)ㆍ김성원(金聲遠)ㆍ박혼(朴渾)ㆍ조경남(趙慶男)ㆍ고명원(高明遠)ㆍ강몽조(姜夢祖)는 모두 혹은 문학으로 혹은 행실로 알려진 이들인데, 살아서는 공의 문하에 출입하였다가 전장에서 공과 죽음을 같이한 자들이다. 공의 아들 완기(完基)는 씩씩한 용모에 체격이 듬직하였으며 성질이 남보다 뛰어났었는데, 군사가 패하자 일부러 그 의관을 화려하게 하여 공의 죽음을 대신하려 하니 적이 대장인 줄 알고 그 시체를 부숴버렸다. 적이 이미 물러가자, 공의 문도(門徒) 박정량(朴廷亮)ㆍ전승업(全承業)이 곧 가서 7백 의골(義骨)을 수습하여 모아 한 무덤을 만들었다. 정량은 기특한 선비라 옛 도리를 힘써 행하고 승업은 단아하여 경학(經學)에 통하고 행실을 다듬었는데, 공의 막하에 있다가 마침 임무를 받아 밖에 나갔었기 때문에 난에서 죽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비석을 세워서 영원히 전하기를 선창하였더니 불행히 연달아 병들어 죽었다. 동문(同門) 민욱(閔昱)은 의를 즐기는 자라, 그들이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애석히 여겨 그 뜻을 이어 경영하여 충청도 선비들 및 금산의 기로(耆老)들과 의론이 합하였다. 방백(方伯)과 수령들이 또한 비용을 보조하여 돌을 다듬기를 이미 마치자, 진사 송방조(宋邦祚)가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참판 조헌의 마음과 일을 아는 이가 몇 분인데 모두 세상에 살아 있지 아니하니 감히 자네에게 부탁하네.” 하였다. 내가 참판을 잘 알았는데 그가 순국한 초기 내가 행조에 있다가 듣고 특히 슬퍼하였다. 그러나 천 리에 서로 바라보면서 순국한 그 자리에 술 한 잔을 부어서 예전 마음을 풀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 글을 짓고 사적을 적어서 이 일을 돕게 되었으니 어찌 글이 훌륭하지 못하다는 핑계로 사양하리오마는, 다만 노쇠한 나머지에 어찌 능히 그 사적을 빛나게 써서 땅 밑에 7백의 충혼을 위로하여 그들로 하여금 눈을 감게 할 수 있으랴. 아! 상심된다. 일을 기록하고 시를 지어 끝에 부치노라, 하고, 그 시에,
신하는 큰 강이 있으니 / 臣有大綱
목숨을 바쳐 직분을 갚음은 / 授命酬分
지사의 당연함이건만 / 志士所程
이해가 그것을 빼앗아 / 利害奪之
진실로 실천한 이가 적으니 / 允蹈者鮮
난에 임해서야 나타나네 / 臨難乃明
강직한 조공은 / 侃侃趙公
학문이 이미 실천되어 / 學旣踐實
충성에 합하고 바른 것을 밟았네 / 合忠履貞
전년 용사의 해가 / 昔歲龍蛇
운이 양구를 당하여 / 連屬陽九
섬 오랑캐가 침범하였네 / 島夷構兵
금탕이 험함을 잃어 / 金湯失險
감히 막아내는 이 없어 / 莫敢儲胥
바로 한경에 처들어 왔네 / 直抵漢京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파천하매 / 鑾輅西遷
공이 피눈물을 흘리니 / 公泣其血
의는 중하고 몸은 가벼웠네 / 義重身輕
팔을 걷고 한 번 외치매 / 振袂一呼
의병들이 일제히 분발하여 / 義旅齊奮
소리에 메아리가 따르듯 하였네 / 如響赴聲
강개히 창을 베고 자면서 / 慷慨枕戈
군사를 멈춤이 없이 / 誓無留陣
청주에서 적을 멸하기로 맹세하였네 / 覆賊于淸
흉한 기세가 심히 치성하여 / 兇焰孔熾
금계를 차지하였는데 / 盤據錦溪
누가 그 고래를 잡아 죽일꼬 / 孰剪奔鯨
공은 우리 군사에게 / 公激我師
이 놈들을 멸한 뒤에 조반을 먹자고 맹세하고 / 滅此朝食
바로 나아가 감히 공격했네 / 直前敢攖
혈전하기 한참 만에 / 血戰逾時
화살은 다되었으나 / 矢盡途窮
북소리는 오히려 울렸네 / 枸鼓猶鳴
적을 많이 죽여서 / 殺賊過當
임금의 은혜를 갚았으니 / 以報主恩
비록 패했으나 오히려 이긴 것이네 / 雖敗亦嬴
임금 위해 죽는데 어찌 피하며 / 殉君胡避
장수 따르는데 어찌 두려워하랴 / 從師胡惘
열렬하다! 한 군영이여! / 烈哉一營
일이 행조에 알려지자 / 事聞行朝
충의를 표창하고 벼슬을 내려 / 褒忠錫秩
특별히 임금의 정을 표시하셨네 / 特軫震情
옛사람이 말하기를 / 人亦有言
부서져서 완전함이 있고 / 有碎而完
떨어질수록 꽃이 핌이 있다고 하였네 / 有殞而榮
마침내 그 몸은 죽었으나 / 竟毁其魄
실로 그 천성을 온전히 하여 / 實全其天
그 신령이 위로 올라가리 / 其神上征
끓어오르는 기운과 울려 퍼지는 소리가 / 騰氣犇音
우레가 되고 벼락이 되어 / 爲雷爲霆
우루루 쿵쾅쿵쾅 / 殷殷轟轟
저 요망한 기운을 소탕하여 / 掃彼欃槍
남방의 기강을 지키니 / 以桿南紀
국토가 편안케 되었네 / 彊塲載寧
진 터의 구름은 아득하고 / 陣雲莾蒼
들새는 슬피 우는데 / 野鳥哀吟
충의의 넋이 한 구덩에 묻혔구나 / 毅魄同坑
서대는 구름에 솟고 / 西臺陵雲
진악이 옆에 있어 / 震岳在傍
아울러 이 무덤을 표시하누나 / 幷表厥塋
오는 천추에 / 有來千秋
이 큰 비를 읽으면 / 讀此豐碑
그 사람들이 살아 있는 듯하리라 / 其人若生
하였으니,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가 지었다.
그 뒤 권필(權鞸)의 시에,
몇 번이나 운대의 난간을 꺾었으며 / 幾折雲臺檻
초수에서 깨어 있음을 읊었으니 / 長吟楚水醒
종래로 큰 군자는 / 從知大君子
작은 조정에 처하지 않음을 알겠네 / 不處小朝廷
곧은 기운은 천지를 베고 / 直氣斬天地
외로운 충성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 / 孤忠炳日星
높디높은 금산의 빛은 / 崔嵬錦山色
만고에 이렇듯 푸르네 / 萬古只摩靑
하였으니, 중봉을 위해 지은 것이다.
○ 전라 감사 권율이 각 고을로 하여금 근왕할 군사를 징발하게 하다.
○ 경상도 예안(禮安) 사람 정자(正字) 유종개(柳宗介)가 군사를 모집하여 적을 치다가 얼마 안 되어 패하여 죽다. 이보다 먼저 경상 좌도 산골의 궁벽한 10여 고을에는 전란이 조금 멀었으므로 선비와 백성들이 아침 저녁으로 구차히 생명을 보존하고 있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서 각기 처자를 보호하여 가재(家財)를 골짜기 안에 숨겨두고, 그 중에 한두 명의 강개한 선비들이 무인과 도망한 군사들을 격동시켜 권하여 적을 칠 의리로 타이르는 이가 있으면 왜적을 끌어들여 화를 입힐 것이라 하여 도리어 전쟁에 대해 말하는 이를 허물하다. 종개가 분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먼저 창의(倡義)하여 향병 수백을 모집하여 큰 산 가운데에 진을 쳤다. 강원도의 적이 평해(平海)ㆍ울진(蔚珍) 등지를 분탕한다는 말을 듣고 장차 광비촌(廣比村)을 넘어서 장서(掌書) 윤흠신(尹欽信)과 윤흠도(尹欽道) 등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맞아 치려하였는데, 적의 선봉이 변복(變服)하고 가만히 오매 척후병이 깨닫지 못하여 매복하였던 군사가 모두 흩어지다. 종개 등이 창졸에 적을 만나서 용감히 싸워 퇴각하지 않았으나, 힘이 다되고 구원병이 없어서 마침내 살해를 당하다. 적이 드디어 예안ㆍ영해(寧海)를 분탕질하고 가니, 이로부터 사람들이 모두 의병을 경계하여서 모집에 응하기를 즐기지 아니하다. 그 뒤에 초유사의 격문이 우도로부터 간간이 좌도 각 고을에 전해져서 문무(文武)ㆍ부로(父老)ㆍ사민(士民)에게 두루 타일러서 국가의 은혜를 잊음을 책하고 의병에 참가하기를 격동시키다. 안집사(安集使) 김륵(金玏)이 또 통문을 내어 말이 간절하였고, 또 영천(榮川)ㆍ풍기(豐基)의 선비 김대현(金大賢)ㆍ곽수지(郭守智) 등과 향병을 소집하였으며, 이상은 7월 사이의 일이다. 전 한림 김해(金垓), 생원 금응훈(琴應勳), 진사 임흘(任屹), 생원 이정백(李廷栢)ㆍ배용길(裵龍吉) 등이 예안ㆍ안동에서 일어나고, 전 현감 이유(李愈)와 진사 권욱(權旭)ㆍ이광옥(李光玉)이 예천(醴泉)에서 호응하다. 찰방 조현(趙玹), 생원 이함(李涵)ㆍ유학(幼學) 백현룡(白見龍) 등이 또한 영해에서 일어나고, 그 사이에 서로 호응하는 이로 신홍도(申弘道)는 의성(義城)에서, 이인호(李仁好)는 의흥(義興)에서, 진사 이영남(李榮男)과 홍위(洪瑋)는 군위(軍威)에서, 김희(金喜)는 비안(比安)에서, 민근효(閔根孝)ㆍ권계창(權季昌)은 청송(靑松)에서 호응하니, 물고기 비늘처럼 일어나서 군사가 만여 명이 되는데 모두 김해의 통솔을 받다. 김해는 충의롭고 강개한 자질로 신의가 본래 남에게 미더움을 받았으므로 먼 데나 가까운 데서 유위(有爲)할 것을 기대하여 간 곳마다 사람들이 적을 치는 데 힘쓰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또 9월 조에 나옴.
○ 경상 좌병사 박진(朴晉)이 모든 장사(壯士)와 더불어 안강(安康)에 모여서 군관 권응수(權應銖)와 판관 박의장(朴毅長)으로서 선봉을 삼아서 16고을의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밤에 40여 리를 행군하였다. 아침에 경주성(慶州城)에 육박하여 장사를 뽑아서 성 밖의 인가를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하여 지척을 분변할 수 없다. 대군이 포위하여 공격하였는데 적병이 경주 남쪽 10여 리로부터 불의에 돌진하여 우리 군사의 뒤를 습격하니, 대군이 놀라 무너져서 장수와 군사들이 갑옷을 버리고 무기를 던지며 달아나다. 적이 기세를 타서 급히 추격하니 송장이 쌓이고 서천(西川)의 물이 다 붉어졌으며 경주ㆍ영천(永川)의 의사들이 모두 죽다. 대개 하루 전에 언양(彦陽)에 있는 적이 와서 깊은 골짜기에 매복하여 우리 군사를 정탐해 기다렸는데도 모든 장수들이 살피지 못하여 패군하게 된 것이니, 사람들이 모두 통분히 여기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이유의(李由義)가 군사를 거느리고 행군하여 직산(稷山)에 다다르다. 경기도 조방장(助防將) 홍계남(洪季男)이 충청 병사 신익(申益)과 약속하기를, 죽산(竹山)의 적을 협공(恊攻)하여 횃불을 드는 것으로 신호를 삼고 밤을 틈타 진군하기로 하다. 유의 또한 약속에 참여하여 군사를 보내 응원이 되다. 호남의 군사가 몰래 죽성(竹城) 밖 5리 되는 땅에 도착하여 경기와 호서의 군사를 기다렸는데, 두 군사가 이르기 전에 적이 이미 먼저 알고 은밀히 기병(奇兵)을 내보내어 앞뒤로 덮치니 우리 군사가 크게 무너져 달아났고 죽은 자가 길에 겹겹이 쌓이다.
○ 충청도 영동(永同)의 선비들이 향병을 모집하고 본 고을의 수령인 한명윤(韓明胤)을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다. 그 통문은 다음과 같다.
양남(兩南) 호서(湖西) 열읍(列邑)의 명부(明府) 및 각 촌락 대소첨존시(大小僉尊侍)에게 삼가 고합니다. 왜적이 한번 범하여 왕경(王京)을 함몰시키매 임금께서 서쪽으로 파천하시고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었으니, 북쪽을 바라보매 심장이 무너져 통곡을 견딜 수 없소. 일국의 백성으로 직분상 마땅히 죽음을 바쳐야 할 터이나, 우리들이 형편없어 지혜는 병을 이끄는 데에 어둡고 생각은 띠풀 베는 데에 어두워 지금껏 이 적과 한 하늘 밑에 살았으므로 통곡하는 원통함은 아마 피차가 한 가지일 것이니, 다시 무슨 말을 하리오. 다만 우리 고을 선비들이 나의 비루하고 옹졸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의장(義將)으로 추대하므로 선비들이 적을 치는 마음에 감동되어 옳은 일에 사양하지 아니하였으니, 감히 급무(急務)를 가지고 문득 호소하오. 대개 적을 치는 데는 군량을 준비함보다 먼저 할 것이 없고, 싸워 이기는 것은 무기의 날카로움에 달린 것이오. 군량이 부족하면 적을 칠 수가 없고 무기가 예리하지 못하면 싸워봤자 이기지 못하는 것이니, 이 두 가지에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오. 내가 지키는 이 고을은 본래 적은 백성이 살고 호서와 영남에 끼어 있어 적의 요충이 되어서, 서울을 오르내리는 적이 반드시 이곳을 경유하고 금계(錦溪)로 왕래하는 적 역시 여기로 길을 삼으므로, 분탕질의 참혹함이 다른 고을보다 배나 되고 농사의 황폐함이 각 고을보다 심하오. 온 동리에 종을 단 듯한 집도 없고 백묘(百畝)에 반 포기의 작물도 없소. 무기고는 잿더미가 되었고 병기는 쓸은 듯 없어졌으며, 창고가 불에 타서 군사를 먹일 길이 없소. 관가에서 대여해 줄 희망이 끊어졌으니 군사에게 주린 빛이 있고, 사람들이 싸울 재주가 없으니 누군들 무용(武勇)을 드날리리오. 하물며 이 적변(賊變)에 여름부터 가을까지 혹은 맞이하여 공격하고 혹은 야습을 하여 많고 적음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쫓고야 말았소. 한 번 공격 한 뒤로 활이 부서지고 화살이 다되어 없는 데 따라 곧 준비하나 재물이 다하고 힘이 다되었으며 또 전일의 야습에서 남았던 활과 화살까지 아울러 다되었소. 만약 이때를 당하여 적이 충돌해 온다면 빈 주먹으로 버틴 군사들이 누가 능히 호응하며, 배가 고파 뱃속에서 뇌성처럼 울리는 군사들이 감히 전투하기를 바라리오. 흩어져 사방으로 가게 하자니 나라 원수를 갚지 못하겠고 합쳐 모아 요지에 매복시키자면 무기와 양식이 함께 다되었으니, 온갖 방법으로 생각해도 어쩔 바를 모르겠소. 이에 부득이한 요청으로 첨존시(僉尊侍)에게 두루 고하오. 삼가 원컨대, 여러분들은 온전한 고을에 살고 있으니 우리가 모래를 말질하는 민망함을 불쌍히 여기고 우리가 땔나무를 끄는 뜻을 생각하여, 공사(公私)의 전곡(錢穀)을 넉넉하게 하여 배고픈 군사를 같이 구제하고 화살촉과 어교(魚膠)를 많이 내어 병기를 만들게 한다면 적을 치기 위한 성심이 직접 무력에 맞서 싸우는 자와 일반일 것이오. 옛사람이 이르기를, “남에게 급한 일이 있을 때에 내가 능히 구하지 못한다면, 내게 급한 일이 있을 때엔 남이 누군들 구해 주리오.” 하였소. 이 때문에 산에 올라서 경계(庚癸)를 부르매 신숙조(申叔糶)가 양식을 주었고, 전진(戰陣)에 나아가 무기라 다되었음을 고하매 각완(卻完 춘추 시대 진(晉) 나라 대부)이 무기를 도와주었거늘 하물며 오늘날을 당하여 국적(國賊)을 멸하지 못했음이리오. 그대의 재물과 힘을 한 가지로 하여 피차를 헤아리지 말고 오랑캐가 거의 다 섬멸되려는 때에 특별히 병기와 양식의 은혜를 베풀어,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급함[倒懸之急]을 함께 풀어 준다면 심히 다행일 것이오. 서쪽 궁궐을 우러러 바라보매 눈물도 더 뿌릴 것이 없으니, 어쩌면 서로 만나서 이 뜻을 터놓고 고하리오. 종이를 대하니 목이 메어 우선 이만 줄입니다.
○ 경상도 영해 부사 한효순(韓孝純)이 장기 현감(長鬐縣監) 이수일(李守一)등과 더불어 적을 치기를 약속하였는데, 적이 강원도로부터 와서 동쪽에서 진지를 합쳐 영해를 범하고자 하다. 효순이 군관 장기(張豈) 등을 시켜 군사를 매복시켜 맞아 치니 적이 이내 물러가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 우도의 사민들이 김성일(金誠一)이 좌도의 감사로 옮겨 제수된 것을 듣고, 어린애가 젖을 잃은 것처럼 답답하여 통문을 돌려 모여서 구공(寇公)의 길을 막으려 하다. 그 통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영남은 왜적이 침범한 뒤로 모든 성이 와해되어 마치 무인지경에 들어오듯 장수는 썰물처럼 물러나고 수령들은 쥐처럼 숨으며, 백성과 군사는 붕궤되어 숨고 읍과 촌락이 소조(蕭條)하여 죄다 흉하고 추한 놈들의 굴혈(窟穴)이 되어 다시는 손댈 곳이 없었다. 다행히 우리 초유사 김상공(金相公)이 판탕(板蕩)한 나머지에 애통의 교서를 받들어 간담을 버티고 눈물을 뿌리며 이 적과는 한 하늘 밑에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여, 의를 선도하여 회복함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아 임지에 도착하는 날 곧 각 고을에 통문으로 타일러서 군신의 분(分)을 밝히고 복수할 의를 창도하였다. 말이 간절하매 충의가 격발되어 듣는 이는 팔을 휘두르지 않는 이가 없었고 글을 보는 이는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는 이가 없어서 같은 소리로 서로 응하고 멀든 가깝든 그림자처럼 따랐으니, 피곤하고 흩어진 천백의 군사를 거느리고 흉하고 추하며 한창 날뛰는 왜적에게 항거하여 요해지를 차단해 적의 기세를 꺾어서 국가로 하여금 거의 회복될 희망이 있게 한 것이 그 누구의 힘인가. 지금 들은즉 초유사가 좌도의 감사로 옮겨 제수되었다 하니, 이 어찌 다만 몇 고을 사민의 복 없음이리오. 아마도 또한 장수와 군사들이 마음이 이반되어 해이해지고 흩어질 형세가 있을 것이라 생각되니, 한 삼태기에 공(功)이 무너져서 또 회복의 기회를 잃을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에 망했다가 다시 보존된 것은 초유공이 온 때문이요, 뒤에 거의 성공했다가 다시 무너질 것도 초유공이 가는 때문이다. 가나오나 마찬가지로 국사를 위한 것이지마는 늦고 급한 형편에는 피차의 구별이 있고 좌도나 우도가 다 같이 한 도이니, 적을 평정할 기회는 반드시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뜻은 여러분과 더불어 먼저 구공을 빌려 달라는 소를 올리어 선전관(宣傳官)의 가는 편에 부치고, 또 머물러 살려 달라는 청을 초유공에게 바치기를 생각하노니 상상컨대 여러분은 반드시 기약하지 않고도 마음으로 맞는 점이 있을 것이다. 깊이 원하노니 여러분께서 고을의 자제들을 거느리고 다음달 1일에 우리 고을 향교에 와서 모이면 매우 다행이겠다. 유학 강위로(姜渭老) 등.
○ 경상 좌감사 김성일이 거창으로부터 초계(草溪)에 이주(移駐)하기 위하여 장차 강을 건너려는데 선비 이대기(李大期) 등이 길을 막고 머물기를 청하였다. 성일이 말하기를, “임금께서 이미 명하셨으니 어찌하랴.” 하고 드디어 강을 건너 좌도로 가서 우도의 여러 선비들이 적을 친 일을 크게 칭찬하여 일일이 공을 논하여 아뢰니 뭇사람의 마음에 매우 흡족하여 좌도의 인심이 쭉 따랐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피란하여 산에 들어갔던 경상 우도 사람들이 날짜가 오래되어 양식이 떨어지자 모두 호남으로 나오다. 이와 같이 남원부가 영남의 경계에 닿아 있으므로 유민(流民)과 원주민이 서로 반반이다.
○ 금산에 머물던 적의 기병(騎兵) 4백여 명이 무주(茂朱)에 이르러 그대로 머문다 하다. 경상도 합천 진사 박이문(朴而文), 안음(安陰) 진사 정유명(鄭惟明) 등이 소를 올려 김성일을 우도 감사에 유임하기를 청하여 윤허를 받고 토포사(討捕使) 한효순으로 좌도 순찰사를 삼다. 이때에 모든 지방 관원들이 모두 샛길을 다니기 때문에 큰 길에는 사람이 없었더니, 효순이 순찰사가 된 뒤에는 항상 자줏빛 도포를 입고 나팔과 피리를 울리며 방백의 위의를 성대히 하여서 각 고을에 둔치고 있는 적들이 성에 올라서 가리키며 바라보아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이로부터 길이 비로소 통하여 사람들이 그의 행차를 보고는, 다시 우리 관원의 위의를 보겠다고 하였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도와 전라도 수병(水兵)의 모든 장수들이 가덕도(嘉德島)에서 적을 치다가 녹도 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이 죽고 우리 군사들이 퇴각하여 돌아오다.
9월. 김성일이 좌도로부터 강을 건너 서쪽으로 와서 다시 우도 감사가 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성주(星州)에 진을 쳤던 적에게 이미 무계(茂溪)ㆍ현풍(玄風)의 응원이 없어져서 세력이 심히 외롭고 약해졌으므로, 정인홍(鄭仁弘)이 김면(金沔)과 세력을 합쳐서 진격하기로 약속하였더니, 김준민(金浚民)은 형세가 불편하다 하여 어렵게 여기고 의심하는 빛이 있었으나 여러 사람의 의론으로는 모두 진격함이 옳다 하여 드디어 진격하기로 결정하다. 모든 군사들이 모두 모여서 각기 부대를 정돈하고 수십 리에 둘러 포진하니 군사의 형세가 심히 장하였다. 인홍과 김면이 가평(可坪)에 대진(對陣)하니 성주성(星州城)에서 5리나 가까웠다. 모든 군사가 차례로 전진하여 성문을 포위하고 육박하며 진퇴하고 충돌하며 유인하여 도전하나, 왜적이 나오지 아니하고 다만 철환(鐵丸)으로 방어하였다. 종일토록 진퇴하여도 성을 함락시킬 기구가 없어서 해가 저물자 본진으로 돌아오고, 이튿날에 다시 진격하기로 약속하였다. 김면이 배설(裴楔)을 시켜 부상현(扶桑峴)에 매복을 시켜 개령(開寧)에서 응원하러 오는 적을 방비하게 하다. 배설이 응낙하고는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찌 서생에게 절제(節制)를 받아서 그를 위해 중로에 매복한다는 말인가.” 하고 드디어 가지 않았다. 이날 밤에 성주의 적이 개령에 달려가서 급함을 알리매 개령의 적이 크게 왔는데도, 우리 군사들이 알지 못하고 이튿날에야 바야흐로 성을 지킬 기구를 준비하였다. 응원하는 적이 불시에 크게 이르러 학익진(鶴翼陣)을 치고 에워쌌으며 성중의 적 또한 성문을 열고 앞뒤에서 공격하였다. 김면이 갑자기 말에 올라 먼저 나갔으나, 우리 군사들이 기와 북을 버리고 도망해 무너지다. 인홍은 꼿꼿이 앉아 움직이지 아니하고 선비를 김면에게 보내어 진정시키기를 권하였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이 안장을 얹은 말을 가지고 와서 인홍에게 급히 피하기를 청하매 인홍이 부득이하여 또한 나가다. 김준민이 뒤에 있어 싸우다가 퇴각하다가 하여 모든 군사를 방위하니 이로 하여 군사들이 많이들 죽음을 면하다. 고령(高靈)의 가장(假將)손승의(孫承義)는 탄환에 맞아 죽었고 사사(射士) 이죽(李竹)은 금안장에 탄 왜장을 쏘아서 칼로 베어 죽이다. 우순찰사(右巡察使) 김성일이 합천 의병군관(義兵軍官)을 잡아와서 품(稟)하지 않고 거사한 허물을 책하여 곤장을 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 우도 의병장들이 회의한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 지방이 변란의 초기부터 적의 소굴이 되어 도륙과 약탈의 참혹함이 다른 지방보다 더욱 극심하였다. 우리 부로(父老)와 선비들은 이리저리 도망하여 다른 지방으로 피하였으므로, 간혹 선비들이 분기하여 의병을 일으키려는 자가 있어도 속수무책으로 주먹을 휘두르며 길이 탄식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군세가 크게 떨쳐서 적의 칼날이 이미 꺾이었고 각 고을의 선비들이 각기 의병을 일으켜서 기율(紀律)이 이미 성립되었고, 전일의 피해 도망하였던 자들이 들과 산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분기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런데 우리 본부(本府)에는 이 국가의 백성이 아닌 이가 없는데도 유독 아무도 의병을 일으키는 사람이 없으니, 비록 적의 세력이 날뛰는 소치라 하더라도 임금의 원수를 어이하랴. 생각건대 여러 부형과 동지가 비록 도피한 중에 있더라도 팔을 걷어붙이고 분기하기를 생각하는 뜻은 일찍이 밥 먹고 숨쉬는 사이에도 마음에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갓 이 마음만 있고, 나와서 거사를 도모하기를 생각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숨어 엎드렸을 뿐이라면 사림의 가운데 설 수가 없을 뿐만이 아니라 신자의 도리에 죄를 지음이 이미 크지 않겠는가. 간절히 원하건대 부로와 선비ㆍ백성들로 가까운 곳에 피란해 있는 자들은 이달 8일에 의성(義城) 지보사(只寶寺) 앞에 모여서 상의하고 처치할 것이니, 길이 막혀 어렵다고 스스로 저상(沮喪)하지 말라. 명부(名簿) 외의 인원은 응당 간신히 도피해 있어 듣지 못할 것이니, 또한 모두 추록(追錄)하여 서로 통하고 타일러서 때맞춰 와 모이도록 할 것이다. 이 중에 응당 강서(江西)의 인사들은 필시 저 지방에 피란해 있을 것이나, 그 중에는 응당 창의(倡義)한 사람이 있을 것이므로 아직은 이쪽에 피란해 와서 있는 분에게만 고하노니, 그 가운데 혹 기록되지 않은 이는 각기 듣고 본 대로 추록하여 전하고 서로 고하라. 군부의 원수는 한 하늘 밑에 함께 살 수 없으며 문 안에 들어온 도적은 사람마다 죽일 수 있는 바이다. 만약 피란하여 곤궁한 중에 내 몸도 어찌할 겨를이 없는데 하물며 다른 일에 관계하랴 한다면, 그것은 8월의 교서를 보지 못하였는가. 무릇 신민이면 받들어 읽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gm를 것이니, 그것을 읽고도 태연하여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찌 인도(人道)로 책할 수 있겠는가. 유사(有司)가 된 이들은 와서 호응하려는 자들을 단결시키도록 하라. 9월 4일 정자 노경임(盧景任) 등.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남원 읍내의 건장한 사람 70여 명이 모여서 적을 치기를 도모하여 이응수(李應水)를 함께 추대하여 장수로 삼았고, 경내(境內)의 승려들 또한 군사를 뽑아 모아서 두인(斗仁)으로 장수를 삼다. 부사 윤안성(尹安性)이 크게 기뻐하여 곧 양식과 기계를 주어서 무주로 들여 보내었더니, 응수등이 모두 군사를 통솔할 재주가 없어서 적을 보고는 무너져 돌아오다. 그 뒤에 두 군사가 모두 적개병(敵愾兵)에 속하다.
7일. 황해도의 적이 나아가 연안(延安)을 포위하였는데, 초토사 이정암(李廷馣)과 조방장(助防將) 김대정(金大鼎) 등이 크게 부수어 쫓다. 처음에 임진강에서 패전한 뒤에 황해도 24군(郡)에 한 사람의 의사도 없고 진장(鎭將)과 수령은 모두 목숨이나 구하기를 도모하며 일도의 각 고을이 모두 분탕질과 약탈을 당하여 온 도내가 적의 소굴이 되었는데, 오직 연안부(延安府)가 남쪽에 치우쳐 있어서 적병이 이르지 않다. 정암 등이 패한 장수와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모아서 함께 죽음을 바쳐 지킬 계책을 하여 부내의 남녀를 모두 부대에 편입하고 근처의 돈과 양식을 실어다가 먹을 것을 준비하였으며, 척후병과 봉화를 신중히 배치하고 요지에 매복을 시켜 밤낮으로 변을 기다렸다. 이때에 이르러 본도에 웅거하였던 적추(賊酋)들이 군사 5, 6만여 명을 합하여 기세등등하게 쏜살같이 연안으로 달려와서 성을 포위 공격하다. 정암이 먼저 땔나무를 염주관(鹽州館) 입구에 쌓아두어 불행한 경우에 스스로 타 죽어 적에게 더럽혀지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는, 적이 성 밑에 이르자 여러 장수와 부대를 나누어 성을 지켜서 밤낮으로 순찰하였다. 군사와 백성을 위로 하고 타이르며 같이 죽기로 맹세하기를, “8도가 모두 적에 점령을 다하였고 오직 이 한 성이 국가의 소유이다. 지금 또 불행히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번 죽음으로 국가에 보답함이 여기에 있다. 하물며 능히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가 장차 어디로 가겠는가. 천백의 생명이 하루아침에 끊길 것이다.” 하니, 사졸들이 듣고 모두들 격분하여 기운을 내고 먼저 성에 오르며, 선동하여 다친 곳을 싸매고 나와 싸웠다. 그러나 적의 세력이 날로 늘어나고 구원병은 이르지 않으니, 포위를 당한 지 6일이 되매 성이 심히 외롭고 위태로워지다. 정암이 쌓아둔 땔나무 속에 들어가 누워서 종을 시켜 불을 지르게 하니, 사졸들이 듣고는 피눈물을 머금고 다시 성에 오르며 피로한 군사들이 다시 싸워 하나가 적병 천을 당해내다. 마침 동서에서 바람이 일어나매 전현룡(田見龍)ㆍ조신옥(趙信玉) 등이 섶을 불태워 성 밑으로 던지기를 무수히 계속하니, 불길은 세고 바람은 급하매 적의 군사들이 혼란하여 죽은 자가 수를 헤일 수가 없다. 남은 무리들이 본진으로 달아나 돌아가는데 추격하여 머리를 베인 것이 심히 많다.
○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鄭澈)이 행조(行朝)에서 출발하여 경기ㆍ충청도로 오면서 배가 황해도를 지나다가, 밤에 연안을 바라보매 포성과 불꽃이 천지를 뒤흔들다. 정철이 성중의 인명을 생각하고 눈물 흘리기를 마지아니하다. 9일에 장연(長淵)의 금사사(金沙寺)에 이르러 바다의 바람이 순하지 못하기 때문에 열흘을 유숙하다. 또 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이 연달아 패하여 죽었음을 듣고 뜰에다 신위를 설치하고 절하고 술잔을 올리며 통곡하다. 밤에 절간의방에서 사율(四律) 한 수(首)를 슬피 읊어서 종사관(從仕官) 정설(鄭渫)ㆍ황붕(黃鵬)에게 보내어 화답을 구하다. 그 시에,
열흘 동안 금사사에 머무르는데 / 十日金沙寺
삼 년 동안 고국을 생각한 듯 / 三秋故國心
한밤의 호수는 서늘한 기운을 뿜고 / 夜湖噴爽氣
돌아가는 기러기는 슬프게 울고 가네 / 歸雁有哀音
적이 있으니 자주 칼을 보고 / 虜在頻看鏡
친구가 죽었으매 거문고를 끊으려 하네 / 人亡欲斷琴
평생에 외우던 출사표를 / 平生出師表
난을 당해 다시 길이 읊노라 / 臨難更長吟
하다. 또 남정가(南征歌)를 지어서 충의로써 타이르다.
○ 경상도 의병장 제용감 정(濟用監正) 정인홍, 합천 군수 김면에게 교서를 내리니,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한다. 임금과 신하는 천지의 떳떳한 법이요, 충의는 인도(人道)의 대절(大節)이니 본래 있는 바이라 억지로 힘쓰기를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너희 영남은 신라가 일어난 땅이므로 부로는 충효를 실천하고 자제들은 시서(詩書)를 익혔으니, 비록 탕패(蕩敗)한 나머지라도 어찌 분기하는 무리가 적으리오. 중악(中岳)에서 달에 맹세하였으매 김유신(金庾信)의 칼이 칼집에서 뛰어 나왔고, 한산(漢山)에서 적을 꺾었으매 실여(實予 신라 때 사람)의 몸에 화살이 비 오듯 하였다. 전일에 적이 처음 이르렀을 때에 창의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음을 괴이하게 여겼더니, 그것은 장신(將臣)들이 소리만 듣고도 놀라 도망한 탓이었고 사민들은 뜻밖에 당하매 불러 모으기가 쉽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이제는 각 고을에 밥 짓는 연기가 끊어졌고, 한 지방이 물결처럼 일렁거린다. 백성은 어육이 되어 다시 살아나기를 도모하지 못하고 창고는 잿더미가 되어 손을 댈 곳이 없다. 내가 서쪽으로 파천한 뒤로 이미 남도에 대하여는 절망하였더니, 어찌 뜻하였으랴. 인홍과 김면이 앞장서서 군사를 모아 결심하고 적을 쳐서 몇 달 사이에 벌써 수천의 군사를 얻었으니, 의기를 하늘이 내려다보아 열사들이 메아리처럼 응한 것이다. 마른 밥을 싸가지고 군량으로 삼으니 백성에게서 긁어모았던 관가의 창고는 텅 비었을 뿐이요, 대를 깎아 활을 만드니 무고(武庫)에 쌓았던 갑옷과 병장기는 어디에 있는고. 정암 나루에서 군사를 떨치니 도망하는 적은 넋이 빠졌고, 무계에서 칼을 휘두르니 흐르는 송장이 강에 찼구나. 관군은 어찌 그리도 잘 붕괴되며, 의사는 어찌 그리도 모두 이기는고. 이는 관군이 겁내는 것은 군법인데 군법이 엄히 시행되지 못하였고, 의병이 결합된 것은 의(義)인데 의는 퇴각을 생각지 않음이다. 처음부터 성 쌓고 참호 파는 힘을 덜어서 백성의 힘을 후히 기르고 감사나 병사ㆍ수사의 봉작을 옮겨서 선비들의 마음을 굳게 맺어야 함을 알았더라면, 적의 혼백이 벌써 동래(東萊)의 들판에서 흩어졌을 것이며 독한 칼날이 어찌 평양성에 이르렀으랴. 오직 내가 밝지 못했던 탓이니,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랴. 근일에 본도 영리(營吏) 강만택(姜萬澤)이 돌아가는 편에 한 장의 종이로 죄기(罪己)의 교서를 내려 천 리에 심정을 토로하였는데, 다만 바다와 산을 건너갈 것이니 군주(郡州)에 잘 도착되었는지가 의문이다. 이에 최원(崔遠)의 군중(軍中)을 통하여 거듭 나의 뜻을 타이르고 인하여 적정(賊情)을 탐지하노니 너희들은 나의 뜻을 살피도록 하라. 나의 소회야 다함이 있으랴. 깊은 가을 서리와 이슬에 종묘사직의 신주(神主)가 표박(漂泊)함이 민망하고 국경의 강변에 장전(帳殿 임시로 임금의 장막을 치고 거처하는 곳)의 쓸쓸함을 부치누나. 고향을 그리워함은 귀천이 다르지 않으며, 돌아가고픈 생각은 아침 저녁으로 날마다 간절하도다. 다행히 천조(天朝)에서 불쌍히 여겨 용맹한 장수들이 명을 받들고 병부시랑(兵部侍郞) 1원(員)을 보내어 광녕진(廣寧鎭)ㆍ요동진(遼東鎭) 등지의 협수(協守)ㆍ총병(總兵) 등 관(官)을 통솔하고 70만의 군마를 내었으며, 아울러 양식과 군수품을 운반하여 수륙으로 함께 나와서 지금에 이르러 왕경(王京)의 적을 소탕하였다. 이달 11일에 유격 장군(遊擊將軍) 장기공(張奇功)이 선봉을 거느리고 강을 건넜고 강절(江浙) 지방의 유격 장군 심유경(沈惟敬)이 연포수(連炮手)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황제께서 내려주신 은(銀)을 가지고 15일에 강을 건넜다. 천병(天兵)이 곧 이르게 되매 산악에 광채가 움직인다. 하늘은 개고길이 말랐으니 바로 오랑캐를 잡을 시기요, 말은 살찌고 활은 굳세니 실로 적을 죽일 기회로다. 철마(鐵馬)가 대정강(大定江)ㆍ청천강(靑川江)에 뻗쳤으며 군함은 등래(登萊)ㆍ강절에 연이었다. 미친 도적이 죄악을 쌓을 대로 쌓았으니 하늘의 주벌이 마땅히 내릴 것이다. 하물며 우리 의병 열사의 무리들이 경기ㆍ황해ㆍ충청도에서 아울러 일어나서 도처에서 적의 수급을 베고 날마다 승전을 보고하는 것은 실로 천지가 가만히 도와서 그러함이니, 이는 바로 종묘사직이 중흥할 기회로다. 너희 다사(多士)들은 다시 충성을 가다듬으라. 들은즉, 김성일은 거창에 주둔하고 한효순은 영해를 보존하였다 하므로 그들에게 좌우도 순찰사ㆍ관찰사 관직을 내리고 대소(大小) 의병장에게 아울러 차등을 두어 관직을 제수하니, 너희들은 나아가서 절제를 받고 또한 함께 계책을 정하여 적이 돌아가는 길을 맞아 그의 뒤를 습격할 것이요, 적이 둔친 곳을 엿보아 그의 병영을 야습하라. 미리 여기서 이래라 저래라 통제하기는 어려우니 기회를 보아 하는 것은 너에게 맡기노라. 손인갑(孫仁甲)이 강물에 빠져 죽었음을 애통히 여겨서 판서의 중직을 내리며, 이형(李亨)이 전사한 것을 민망히 여겨서 아들 한 사람을 벼슬시킨다. 벼슬과 상줌은 관계없이 역사에 기록함을 어찌 아끼랴. 다만 먼저 영남을 평온히 하고서야 비로소 빨리 나의 행차를 영접하라. 나의 말을 다하려 하니 눈물이 먼저 흐른다. 내가 어찌 잊으리오. 너희들은 마땅히 힘쓸지어다. 아, 예악(禮樂)의 고장에서 오랑캐의 기운을 쓸어버린다면 산이 숫돌처럼 닳고 물이 띠처럼 마를 때까지 영원히 봉작(封爵)의 영화를 누릴 것이다. 이에 교시하니 의당 잘 알 것이다. 이 교서를 받고야 어찌 힘을 다하여 적을 칠 마음이 없으리오.
○ 경상 감사가 복수할 일로 관문(關文)을 내리니, 다음과 같다.
흉한 적이 뜻대로 날뛴 후로 각처의 약탈한 인물을 일본으로 보내어 날마다 연달았소. 지금에는 경성에 있던 적이 전보다 배나 흘러 내려오면서 남자와 부녀를 묶어서 내려오는 것이 그 수를 알 수 없어 길에서 곡성이 밤낮으로 끊이지 아니하는데 읍이나 마을을 지날 적에는 반드시 소리치기를, “나는 아무 도(道) 아무 관(官) 아무의 부모ㆍ처첩ㆍ자녀다, 나는 경성 아무 동네 문무관(文武官) 아무의 부모ㆍ처첩ㆍ자녀이다, 우리 고향을 버리고 우리 부모를 떠나서 적에게 몰리어 멀리 타국으로 가니 황천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우리를 살아 돌아오도록 해주소서. 장사들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힘을 다하여 적을 점멸해 주소서.” 하오. 약탈의 참혹함은 비록 말하지 아니해도 알았지마는 지금 이 말을 들으니 간장이 찢어지려 하오. 본도의 관병ㆍ의병 모든 군사는 비록 붕괴된 뒤라도 통분하지 아니함이 없어 앞을 다투어 맞아 공격하여 기어이 한 놈도 돌려보내려 하지 아니하오. 각 도의 여러 장수들은 군민(軍民)을 격동시켜 협력하여 원수를 갚으시오. 이 일로 충청도ㆍ전라도에 관문으로 통지하오.
○ 무주(茂朱)의 적이 소굴을 불 지르고 철병하여 모두 금산(錦山)으로 돌아가매, 본도 관병ㆍ의병 여러 장사들이 무주로 달려가 점령하다. 적이 올 때에는 소리만 듣고 도망했다가 적이 퇴각하고 나면 앞장을 서서 들어가 처치하니 그런 장수와 군사를 어디다 쓰랴.
16일. 금산의 적이 나와서 옥천(沃川)으로 향하였다가 중도에 모여서 밤낮으로 다시 금산으로 들어가더니, 이튿날 밤중에 철수하여 옥천으로 향하고 인하여 성주(星州)ㆍ개령(開寧)으로 내려가다.
○ 안성(安城)의 적이 경기 의병장 홍언수(洪彦秀)를 죽이다. 언수가 그의 아들 계남(季男)과 처음부터 군사를 일으켜 여러 번 큰 공을 세워서 적을 벤 것이 매우 많다. 이로 인하여 계남은 당상관에 승진되어 경기 조방장에 제수되다. 이때에 이르러 계남은 다른 군사와 합세하기를 의론하려고 마침 다른 진(陣)에 나간 사이에 적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언수가 나와 싸우다가 패하여 죽으니 적이 언수의 송장을 가지고 가다. 계남이 일의 급함을 듣고 본진으로 달려 돌아온즉 이미 군사의 패하고 아버지가 죽었으므로, 곧 혼자 말을 타고 적진으로 달려가서 문에서 크게 외치기를, “너희들이 나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나도 또한 너희들에게 죽겠노라.” 하니, 적이 언수의 송장을 던져서 돌려주고는 기병(奇兵)을 내어 사면으로 둘러쌌다. 계남이 왼손으로 아버지의 송장을 안고 오른손으로 칼을 휘두르며 싸우니, 적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아버지의 송장을 진중에 두고 추격하여 몇 놈을 베니 적이 더욱 겁내어서, 마을을 분탕질하다가도 사람들이 계남의 이름만 부르면 적이 반드시 도망하다.
○ 진주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진해(鎭海)에 있는 적장 소평태(小平太)를 꾀어 잡아서 판윤 김수(金睟)에게 부쳐서 행조(行朝)에 보내다. 혹은 평소태(平小太)라고도 한다.
○ 천조에서 유격 장군 심유경을 보내어 평양에 들어가서 행장(行長) 등과 약속하기를, 평양성 밖 40리에 표(標)를 세워서 다시는 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하다. 고사(考事)에서 나옴.
○ 이때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말을 퍼뜨리기를, “평양성 적장에 심안도(沈安度)란 자가 있는데 유경과 동성(同姓)이므로 그 때문에 유경이 적진에 출입한다.” 하다. 나는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의심한다. 적장 도진병고두의홍(島津兵庫頭義弘)이 이때에 의지(義智)와 함께 평양에 있었다. 도진은 성이요, 병고두는 관직이요, 의홍은 이름이다. 뒤에 정유재란에 행장과 의홍이 하동(河東)으로부터 바로 남원으로 갈 적에 유경이 요동에 있으면서 관하(管下) 우파총(牛把摠)을 보내 말렸으나 되지 않았었는데, 그때에도 역시 행장 심안도 등의 군사라고 말하였다. 뒤에 그들이 퇴각하여 둔치고 있을 때에 의홍이 사천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사천의 적장 심안도가 심유경과 동성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성이 심이라는 말도 반드시 헛것이다. 왜적이 그의 장수를 부를 때에는 반드시 관직을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므로 순천의 적이 중납언(中納言)인 행장을 부를 때에 주락갑(注樂甲)이라 한다. 왜음(倭音)이 우리의 한자음과 다른 까닭에 중(中)을 주(注)라 하고 납(納)을 낙(樂)으로 언(言)을 갑(甲)이라 한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해 듣고 주락갑을 행장의 이름이라 여겼다. 이러므로 의심컨대 심안도라는 말은, 뒤에 왜적에게 잡혔다가 돌아온 자에게 물은즉 왜음 도(島)는 심만(沈萬)이라 하고 진(津)을 도(度)라 한다 하니, 유경과 동성이란 것은 분명히 틀린 것이다. 임진년에 순천을 침범한 적장이 36명이요, 정유년에 침범한 적장이 27명인데 심안도라는 이름은 없으니 이것은 왜음이 전해져 잘못된 까닭이다.
○ 함안 군수(咸安郡守) 유숭인(柳崇仁)을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본도 우병사로 제수하고 양사준(梁士俊)을 파직하다.
○ 경상도 안동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키다. 이때에 생원 김윤명(金允明), 진사 배용길(裵龍吉) 등이 초유사의 격문을 보고 부로들에게 고하여 이달 9일에 금법사(金法寺)에 모이기로 약속하고 앞의 사람들이 먼저 가서 기다렸더니 전 현감 권춘란(權春蘭), 전 봉사 안제(安霽), 전 검열 김용(金涌), 진사 신경립(辛敬立) 등이 모두 와서 모이다. 의(義) 자는 스스로 뻐기는 혐의가 있다 하여 향병이라고 칭하다. 기약을 정하여 13일에 또 임하현(臨河縣)에 모였는데 전 예천 현감(醴泉縣監) 이유(李愈) 또한 참여하여 임하의 모임에는 사람 수를 백으로 헤아렸다. 김윤명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배용길로 부장(副將)을 삼아서 17일에는 향교에 모여서 일을 시작하는데, 윤명은 몸이 쇠하고 처사가 둔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생원 이정백(李廷栢)이 대신하다. 전 검열 김해(金垓)가 예안(醴安)으로부터 와서 합세하기로 모의하고, 이튿날에 일직현(一直縣)에서 동맹하여 예안ㆍ안동ㆍ의성(義城)ㆍ의흥(義興)ㆍ군위(軍威)ㆍ비안(比安)을 합하여 하나의 진을 만들어 다시 김해로서 대장을 삼고 정백ㆍ용길은 부장이 되며 안동 향교를 진소(陣所)로 삼다. 신경립은 문서를 맡다. 소속된 각 고을의 남정(男丁)은 모두 관군에 들어갔으므로 군사가 1만 명이 차지 못하자, 이에 선비와 품관(品官)을 모두 징발하여 건장한 자는 군대에 속하고 늙고 약한 이는 종[奴]을 대신하여 쌀을 바치게 하니 일부(一府)에서 얻은 것이 마침내 5백여 원(員)과 쌀ㆍ콩 1천여 석이 되다. 약속하기를, “적의 머리를 베는 것으로 상공(上功)을 삼는다면 먼저 베려고 다투다가 적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우리들의 이 일은 다만 적을 죽이려는 것이니, 잘 쏘아 꼭 죽이는 것으로써 상공을 삼고 머리 베고 왼쪽 귀를 베는 것은 차공(次功)으로 하자.” 하다. 그 뒤에 김면이 합도 대장(闔道大將 전라도 의병대장)이 되고 경립이 의병 명부를 가지고 강을 건너서 충청도 황간(黃澗)으로 둘러서 거창에 도달하다. 김면이 명부를 열람해 보매 모두 유생으로 편성되어 있으니, “이야말로 참의병이로다.” 하다. 이듬해 계사년에 김해는 천병을 따라 경주에 있다가 계림(鷄林)에서 병으로 죽다. 일이 위에 알려지매 홍문관 수찬으로 증직되었고, 생원 금응훈(琴應壎)이 대신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심유경이 평양의 적진에서 나와 순안(順安)에 와서 본국이 일본과 국교를 통하여 변란이 일어난 사실을 역관(譯官) 진효남(陳孝男)에게 물으니, 유경이 적장들의 말을 믿고 들었으므로 이 물음이 있었으니, 슬프도다. 효남이 대답하기를, “일본의 대마도(對馬島)는 땅이 가까우므로 저들이 개시(開市)를 위하여 때로 혹 왕래하나, 우리나라에서는 백여 년 동안 일본에 일체 사신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일에 일본이 근년 이래로 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하여 천조에 범하려 한다는 풍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서 교린(交隣)한다 칭하고 일본에 가서 사정(事情)을 탐지한 일이 있으니, 전일에 아뢴 글 가운데 또한 진술하였습니다. 그 후로 영원히 서로 배척하고 끊어서 길이 통하지 않았고 이로 인하여 원한을 맺었습니다.” 하다. 유격(遊擊) 유경(惟敬) 이 데리고 갔던 무리가 다 나오고 다섯 사람만을 성중에 머물게 하면서 다음달 5, 6일 사이에 유격이 두 번째 입성할 것이라 하다. 유격이 곧 송 시랑(宋侍郞 응창(應昌))에게 글을 보내어 병마(兵馬)를 재촉하여 7, 8일에는 마땅히 도착하게 하고 요동의 양향(糧餉)을 운반하여 평양에 주둔하여 뒷날의 계책을 하게 하였다. 또 효남에게 이르기를, “내가 왜장과 말을 많이 하였는데 행장이 국왕을 보고자 하였다. 내가 도리에 불가하다는 뜻으로 거절하였더니 행장이 말하기를, ‘노야(老爺)의 말이 이치가 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대장부가 식언(食言)하지 아니할 터이라. 50일 안에 가정(家丁)을 보내고 나 역시 뒤이어 와서 서로 약속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니, 평양성을 우리에게 돌릴 일은 어찌할 터인가?’ 한즉, 행장이 지도를 내어 보이며, ‘조선 팔도에 평안도 또한 그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데 어찌해서 평양의 서쪽만이 천조의 지방이 되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본시 천조의 지방이므로 조사(詔使)가 올 적에 국왕이 이 땅에서 영접한다.’ 하였다. 행장이, ‘비록 천조의 지방이 아니더라도 이미 의정(議定)된 것이니 평양 서쪽은 곧 노야(老爺)에게 돌리고 마땅히 대동강으로 경계를 삼아서 서쪽은 대명(大明) 지방이 되고 동쪽에는 일본 지방으로 할 것이나 다만 이 성을 어느 군사로 지키겠는가?’ 하였다. 나는, ‘우리가 스스로 지키겠다.’ 하니, 행장이, ‘노야의 견해가 옳다. 조선 군사로 지켜서는 안 된다. 나는 노야의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경성으로 돌아가겠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왜장이 함경도에 있는 자가 두 왕자(王子)를 포로로 하고 있다 하니, 지금 통지해 타일러서 돌려보내고 포로된 사람들 또한 모두 풀어주게 하며, 각처의 왜인들은 모두 돌아가라.’ 하였더니, 행장이 말하기를, ‘관백이 나를 평안도로 보냈으니 평양성은 내가 주장하지마는, 다른 도는 내가 관장하지 못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지금 노야와 함께 관백에게 가는 것이 어떠한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조정이 나를 시켜 다만 이 성에 갔다 오라 하고, 대동강을 건너는 데는 조정의 명령이 없으니 어찌 감히 넘을 수 있겠는가.’ 한즉 행장이 생각을 한참 하더니, ‘노야의 말이 이치가 있다. 노야는 두 사람을 시켜 봉서(封書) 한 통을 써서 관백에게 보내고, 나는 열 사람을 시켜 구봉(求封 명(明)에서 관백을 봉해 주기를 구함) 문서를 가지고 노야와 함께 북영으로 가면 어떻겠는가?’ 하므로, 내가 허락하였다.” 하다. 효남이 말하기를, “왜적이 언제 평양성에서 물러갑니까?” 하니, 유격이 말하기를, “천병이 크게 오면 적이 물러갈 것이다.” 하다. 이때에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 두 왕자가 수상(首相) 김귀영(金貴榮), 판서 황정욱(黃廷彧), 승지 황혁(黃赫), 남병사(南兵使) 이영(李榮) 및 여러 조신(朝臣) 허명(許銘) 등과 그의 내권(內眷)들까지 함께 몰래 회령(會寧) 땅에 모여 있었는데, 본도의 생원 진대유(陳大猷)가 본부의 관노(官奴) 국경인(鞠景仁)과 공모하고 청정(淸正)에게 밀통하여 불시에 야습하여 모두 포로로 잡아 경성으로 들여 보냈다. 그러므로 유경이 왜장과 말하다가 끝에 왕자를 돌려 달라는 일을 언급하였던 것이다. 이영은 그 뒤에 살아와서 복주되었고, 김귀영 이하 여러 신하는 모두 귀양갔다. 황혁은 순화군의 장인이요, 허영은 임해군의 장인이다.
○ 경상 우도 감사가 정랑(正郞) 박성(朴惺)으로 모곡차사원(募穀差使員)을 삼다. 이노(李魯)가 글을 지어 열읍(列邑)에 통문하였는데 그 글에, “백 척의 나무 이미 빠졌다가 한 치의 뿌리에 생기가 돌아오고, 아홉 길의 산이 장차 이루어지려다가 한 삼태기가 모자라 큰 공이 이지러진다. 진실로 국가에 이로움이 있다면 의당 내 몸에 아까움이 없어야 하리라.” 하였다. 이러한 구절들은《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군사와 백성에게 효유(曉諭)한 글은 다음과 같다.
왕세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앙화를 내리매 섬 오랑캐가 침범하였으니, 각 고을이 붕괴되매 강회(江淮)가 보장(保障)의 험함을 잃었고 옛 서울이 함몰되매 도성 사람이 서리(黍離)의 시를 슬피 읊는다. 구묘(九廟)가 티끌을 무릅쓰고 임금의 행차가 멀리 파천하였으며, 2백 년의 예악 문물이 하루아침에 없어졌으니 예로부터 드문 병화(兵火)의 참혹함이다. 슬프다! 우리 군사와 백성들이 혹은 칼날에 걸려 피를 풀밭에 쓰러지고 혹은 부모가 잡혀가서 의탁할 바를 잃었으며, 혹은 처자가 더럽혀지고 욕을 보아 집을 보존하지 못하니 이 원수를 생각하매 어찌 한 하늘을 이고 살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뉘우치매 회복함은 기약이 없었는데 상국(上國)이 구원병을 보내어 신병(神兵)이 대동강에 모였고 영남ㆍ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맹렬한 장사가 한강 언덕에 구름 뭉치듯 하였으니, 칼날이 이르는 바에 적의 넋이 이미 빠져나갔다. 전승의 보고가 끊이지 않고 전장에서 적의 귀를 베어 바침이 연달았으며, 더구나 적의 괴수 평수길(平秀吉)이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아와서 바다 위에서 주자 남은 군사들은 기운을 잃어 항복하며 혹은 거리에서 울부짖고 혹은 영동(嶺東)으로 달아나니, 너희 장사들의 힘으로 이 망해가는 적을 멸하기는 바로 벌겋게 달구어진 화롯불에 털 하나를 태우는 격이요 도끼를 갈아 버섯을 치는 격이라 할 것이다. 내가 왕명을 받고 동쪽으로 와서 국사(國事)를 권서(權署)하매 원수를 갚고자 괴롭고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창을 베고 자며 날새기를 기다리니, 이 적과는 함께 살지 아니하기를 맹세한다. 너희 군사와 백성이 누구인들 우리 열성조(列聖朝)께서 길러낸 사람이 아니겠는가. 위로는 국가의 수치를 생각하고 아래로 사삿집의 욕됨을 생각하여 분기하고 적을 섬멸할 것이 정히 이때로다. 벼슬과 상은 나에게 있으니 나는 너희에게 아끼지 않을 것이다. 아, 죽을 마음만이 있고 살려는 생각을 말아서 적개(敵愾)의 공을 함께 아뢰고 성상을 받들어 옛 도읍에 돌아와서 어서 내소(來蘇)의 희망을 위로하라.
○ 경상 좌병사 박진(朴晉)이 안강(安康)에 주둔하고 흩어진 군사를 수합하여 박의장(朴毅長)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낮에는 성 밑에 달려 돌격하여 군사의 위엄을 보이고 밤에는 산머리에다 횃불을 벌이고 포를 쏘아 놀라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경주의 적이 숨어 나오지 못하다가 얼마 안 되어 성을 비우고 밤에 도망하다. 의장이 성에 들어가서 창고의 곡식 4백여 석을 수합하고 길도 통할 수 있게 되니, 부윤 윤인함(尹仁涵)이 기계(杞溪)에 있으면서 의장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지키게 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황제가 사신 설번(薛藩)을 보내어 행조에 와서 주상을 위로하기 위하여 조서를 가지고 오다. 조서는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에게 칙유(勅諭)하노라. 그대 나라가 대대로 동번(東藩)을 지키고 평소 공순함을 바쳐서 의관(衣冠)과 문물이 낙토(樂土)라 칭해졌는데, 근간에 왜놈들이 창궐하여 크게 함부로 침략해서 왕성을 함락시키고 평양을 약탈하여 점령하매 생민이 도탄에 빠져 멀고 가까운 곳이 없이 소란해지고 국왕이 서쪽으로 바닷가에 피하여 거친 들에 거처하니, 그대가 난리를 겪은 상황을 생각하매 짐의 마음이 측은하다. 어제 급하다는 소식을 전하기에 이미 변방 장수에게 영을 내려 군사를 내어 구원하게 하고 이제 또 행인(行人 외교관) 설번을 시켜 국왕에게 이르니, 마땅히 그대 조종(祖宗)이 대대로 전해온 기업을 생각할 것이요 어찌 차마 하루아침에 가벼이 버리랴. 급히 수치를 씻고 흉악한 놈들을 제거하여 수복을 힘껏 도모하라. 다시 마땅히 계속하여 선유(宣遊)하니, 해국(該國) 문무 신민은 각각 임금에게 보답하는 마음을 굳게 하고 원수를 갚는 의리를 크게 분발하라. 짐이 이제 문무 대신(文武大臣) 2원(員)에게 명하여 요양(遼陽)의 정예한 군사 10만을 통솔하고 적을 치는 것을 도우러 가서 해국의 병마와 앞뒤로 협공(挾攻)하여 흉악한 적을 섬멸하여 남은 종자가 없기를 기하도록 하였다. 짐이 밝으신 천명(天命)을 받아서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에게 군주가 되어 있는데 방금 만국이 모두 편안하고 시해가 안정되었거늘 어리석은 이 조그맣고 하찮은 놈들이 감히 횡행하므로 다시 동남의 연해(沿海) 여러 진(鎭)에 신칙하고 아울러 유구(琉球)ㆍ섬라(暹羅) 등 나라에 선유하여 군사 10만 명을 모아 동쪽으로 일본을 쳐서 악인의 거괴(巨魁)의 목을 베어 바다 물결이 고요해지도록 하니, 벼슬과 상주는 후한 은전을 짐이 어찌 아끼랴. 대저 선대의 강토를 회복함이 이것이 대효(大孝)요, 군부(君父)의 환란에 급히 달려감이 이것이 지극한 충성이다. 해국의 군신은 본래 예의(禮義)를 아니 반드시 능히 짐의 마음을 잘 알아서 옛 강토를 빛나게 회복하여 국왕으로 하여금 개가(凱歌)를 울리며 환도하여 종묘사직을 지키게 하고, 길이 번병(藩屛)을 지켜짐이 먼 지방을 구휼하고 소국을 어루만져 기르는 뜻을 위로할 것이다. 공경할지어다. 그러므로 공경히 이를 선유하고 행인 설번을 시켜 받들고 조선에 달려가서 국왕 및 문무 신민에게 선유하노니 힘써 수복을 도모하기를 시행하라.
○ 8도 신민에게 선유하는 교서는 다음과 같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황천이 우리나라가 왜적에게 침략받은 것을 심히 불쌍하게 여겨 특별히 행인(行人) 설번을 보내어 성지(聖旨)를 선유하고 인하여 크게 군사를 보내어 적을 쳐서 우리의 생령(生靈)을 건지고, 우리의 강토를 회복시켜 주려고 기필하시었다. 그래서 힘이 1천 근의 중령을 들어 낙천근이라고 불리는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를 시켜서 남방의 정예한 화포수(火炮手)로 혼자서도 1백 명을 당해내는 자 5천 명을 거느려 선봉으로 삼고, 광녕총병관(廣寧總兵官) 양소(楊韶)는 요병(遼兵) 및 가정(家丁)ㆍ달자(㺚子)ㆍ철기(鐵騎) 3만 명을 거느리고 다음이 되며, 병부 상서(兵部尙書) 송응창(宋應昌)은 소진(蘇鎭)ㆍ산동(山東)ㆍ산서(山西)ㆍ선부(宣府) 등의 대군을 통솔하여 뒤이어 와서 육로로는 평양으로 달려가서 바로 공격하여 소탕하고 수로로는 두 패로 나누어, 수륙 모든 군사가 모두 경성에서 모여 멀리 몰아 남쪽으로 내려가기를 약속하였으니 전장(戰將)이 3백 명이요, 군사가 무릇 70만 명이다. 천병의 위엄으로 이 조그마한 오랑캐를 치는 것은 비유컨대 태산을 들어 새알을 누르는 것과 같을 것이다. 아! 너희 대소 서민들은 조종의 옛 백성으로 이제 함몰되어 섬 오랑캐를 위하여 복역(服役)하고 혹은 그 부모와 처자를 잃었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아니하랴. 어찌 원수 갚을 뜻이 없으랴. 마땅히 각각 힘을 다하고 분발하여 왜적을 메어 공을 바치면 난이 평정되는 날에 공신(功臣)을 녹(錄)하여 은택이 후손에게 미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천병이 멀리 몰아 짓밟을 즈음에 반드시 옥석구분(玉石俱焚)의 근심을 면치 못할 것이니 비록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각기 힘써서 공을 바치라. 왜장 한 놈을 베는 자는 신분을 따지지 않고 가선대부에 승진시킬 것이요, 왜적의 머리 한 개를 베는 자는 공신이 되고 적중에 들어 있던 자도 왜적을 베어가지고 나오면 죄를 면할 뿐 아니라 아울러 그 공을 녹할 것이다. 모두 알라.
○ 황제의 칙서(勅書)를 반포하는 교서는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임금답지 못하여 이렇게 천고에 없던 적변을 당하여 삼경(三京)을 지키지 못하고 여기 저기 파천하며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고 생령이 어육이 되었으니 천지와 조종에게 죄를 얻음이 지극하도다. 오직 우리 성천자(聖天子)께서 생각하고 구휼하기를 자성(子姓)의 나라와 같이 보아 전후로 군사를 크게 발하여 만 리에 달려와 구원하고 은(銀) 2만여 냥을 주어 군수(軍需)를 하게 하니, 지금껏 지탱하여 한구석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은 추호도 모두 황제의 은혜로다. 이제 또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과인에게 대효를 힘쓰라 하고 신민들에게 지극한 충성을 힘쓰게 하여, 한 통의 윤음이 정녕하고 간절하여 귀에다 대고 타이름과 같을 뿐만이 아니니 다 읽기도 전에 울음소리와 눈물이 함께 나오는구나. 스스로 생각하건대 박덕한 몸이 어찌하여 이것을 천조에 얻었는고. 불행 중의 다행히 이보다 더 클 수가 없노라. 무릇 혈기 있는 자로서 이 칙유를 보는 이는 누군들 감동되고 격동되어 정성을 다하여 적을 치기로 생각하지 아니하랴. 이에 별지에 등서하여 각 도에 게시하노라. 아! 3백 60여 고을에 어찌 충의 호걸의 선비가 적으랴마는 당초에 변란이 갑작스레 일어난데다 태평을 누린 지도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진실로 방위하는 힘을 바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이 더욱 원한을 쌓았고 선비들은 분발하기를 생각하며, 적도 또한 지극히 흉악함을 저지르던 나머지 조금 쇠하여 하늘이 우리에게 앙화를 내린 데 대해 뉘우침을 성하게 볼 수 있으니, 적을 꺾어 소탕함이 정히 이 기회에 있도다. 무릇 너희 대소 인민은 비록 과인을 생각지는 아니하더라도, 홀로 우리 선왕의 남기신 덕택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비록 우리 조종이 남긴 덕택을 생각하지는 아니하더라도, 홀로 성천자의 은혜로운 뜻을 생각하여 너희 부모 형제와 처자의 원수를 갚지 않겠는가. 힘쓸지어다. 힘쓸지어다.
○ 천사(天使) 설번이 행재(行在)에 하루 동안 머물다가 돌아가면서 먼저 천조에 보고하니, 다음과 같다.
행인사(行人司) 행인직 설번이 왜적의 정상이 교활하여 걱정할 만하므로 군사를 발하여 마땅히 급히 구해야 함과 방어의 한두 가지 사의(事宜)를 아울러 진술하여 성명(聖明)께서 참고하심에 대비합니다. 전에 우리 병부(兵部)에서, 오랑캐 놈이 반란하여 서로 싸우고 왜놈의 정상이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성명께 간절히 빌어서 빨리 문무 대신을 보내어 토벌하기를 경략(經略)하여 급한 환란을 풀어줄 일로 성지를 받들었습니다. 조선이 왜놈의 침략을 당하여 국왕이 심히 급하게 청병하므로 이미 다관(多官)의 회의를 거쳐 득실을 결정하고 예부(禮部)를 시켜 번직(藩職)을 파견하여 칙서를 받들고 가서 조선 국왕에게 선유하게 하였습니다. 공경히 받들고 곧 조선에 달려가서 칙서를 열어 선유하니 해국 임금과 신하가 감동되어 울지 않는 이가 없어 모두 말하기를, “황제의 은혜가 소국을 구원함이 참으로 천지의 은혜와 같다.” 하고, 우리 군사가 오는 것을 바라는 것이 큰 가뭄에 구름 바라듯 합니다. 그 임금과 신하가 슬피 호소하는 간절한 말과, 곤궁하고 고생하는 정상을 눈으로 본 것을 근거하건대 진실로 존망이 순간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사세의 민망함은 조선에 있지 않고 우리나라의 국경에 있으며, 직(職)이 깊이 염려하는 바는 국경에 있지 않고 내지(內地)의 진동(震動)함에 있습니다. 군사를 발하여 토벌함을 어찌 잠시인들 늦출 수 있겠습니까. 직은 청컨대 반드시 닥쳐올 사세와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방어할 지방의 사의를 헤아려서 황상을 위하여 진술하겠습니다. 대저 요진(遼鎭)은 경사(京師 북경)의 팔이며 조선은 요진의 울타리요, 영평(永平)은 기보(畿輔)의 중지(重地)이며 천진(天津)은 또 경사의 문정(門庭)입니다. 2백 년 동안 복건(福建)ㆍ절강(浙江)은 항상 왜환을 만나도 요양ㆍ천진에서는 왜구가 있음을 듣지 못한 것은 조선이 병풍이 되어 가려 준 까닭입니다. 압록강에 비록 세 길이 있으나 서쪽에 가까운 두 길은 물이 얕고 강이 좁아서 말이 뛰어 건널 수 있고, 나머지 한 길은 동서의 거리가 화살 두 개의 거리에 불과하니 능히 그것을 믿고 방어하여 지키겠습니까. 만약 왜놈이 조선을 차지한다면 요양의 백성이 하룻밤도 베개를 편안히 하여 눕지 못할 것입니다. 순풍이 한 번 빠를 때에 돛대를 날리고 서쪽으로 온다면 영평ㆍ천진이 첫째로 화를 당할 것이며 경사가 진동하여 놀라지 않겠습니까. 직은 사사롭고 지나친 걱정을 견딜 수 없어서 발길 가는 곳마다 곧 상세히 묻고 널리 알아보았으며 또 사람을 시켜 바로 평양 지방에 가서 정탐하였습니다. 그 회보에 의거하건대, 모두 이르기를, 왜적들이 각기 남의 집 부녀를 겁탈하여 살림을 차리고 창고를 수선하여 군량과 마초를 많이 저장하여 오래 머물 계획을 하고, 병기를 더 제조하고 민가의 활과 화살을 수색해 모아서 싸우는 데 쓰려고 한다 하니 이것은 그 뜻이 작은 데에 있지 아니합니다. 신이 도착하는 날에 그들이 서쪽으로 와서 압록강에 열병(閱兵)을 하겠다고 소리치는 것을 들었는데 조선의 신민들이 쩔쩔매어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다행히 유격 심유경이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단기(單騎)로 가서 말을 통하여 50일을 약속하여 그들의 침범할 기간을 늦추면서 우리 군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꾀로 저들을 속일 적에 역시 저쪽에서도 이 꾀를 가지고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습니까. 저것들이 간사하고 교활하여 한창 평양을 함락할 때에는 “조선에 길을 빌려 중국에 원수를 갚겠다.” 하더니, 지금은 ‘길을 빌려 조공(朝貢)하겠다.’ 합니다. 전일에는 중국과 대등하지 못함을 천고의 유한(遺恨)으로 삼다가 문득 또 심유경을 만나 조공을 통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순식간에 거만스럽고 욕하는 말을 하였다가 잠깐 사이에 공순한 말을 하니, 이로써 그들이 간사하여 신빙하기 어려움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또 10년 만에 한 번 공물을 바치기로 일정한 기간이 있었고, 공물을 바칠 적에 전에는 영파부(寧波府)를 거쳤고 또 귀주(貴州) 지방도 있는데 이제 와서는 조선을 끼고서 우리에게 맹약을 강요하니, 신은 생각건대 여러 겹의 번역을 거쳐서 조공하는 자는 아마도 이와 같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대로 두고 문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그 꾀를 헤아리건대, 이렇게 거짓으로 강화를 청하는 척하여 우리의 군사를 늦추려는 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혹은 강이 얼기를 기다려서 요양을 범하거나 혹은 봄을 기다려서 천진을 범할는지도 또한 알 수 없는 바입니다. 만일 이때에 빨리 큰 군사로써 임하지 아니하면 저들은 “침범하는 곳마다 우리를 감히 누가 어쩌랴.” 할 것이니, 순순하게 돛대를 돌리리라는 것을 신은 믿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조선이 거의 망하여 위태로움이 조만간에 임박해 있으나 칙서가 한 번 선포되어 그들의 충의의 마음을 고동시키고 그들의 적개(敵愾)한 기운을 진작시키매, 그 나라 사람들이 회복하기를 생각하여 왜적과는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 인심을 이용하고 정예한 군사를 주어 그들과 함께 왜적을 협공하면 왜놈을 반드시 기일을 정하여 섬멸할 수 있겠으나, 시일만 끌다가 저것들이 가난하고 궁한 백성을 불러 모으고 유리(流離)하는 자를 안정시키며 또 조선 사람들이 전쟁을 싫어하고 새 임금 있는 것을 좋아한다면 비록 1백만 군사가 있은들 되겠습니까. 혹자는,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가서 토벌하면 그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재촉하는 격이다.” 하는 이도 있으나, 직은 “토벌하면 올 것이요 토벌하지 않아도 역시 올 것인데, 토벌하면 평양의 동쪽에서 견제되므로 그들이 오는 것이 더디어 화가 작을 것이요 토벌하지 않으면 평양 밖에 함부로 날뛰므로 그들이 오는 것이 빨라 화가 클 것이니, 속히 토벌하면 우리가 조선의 힘을 빌려서 왜적을 사로잡을 것이요 더디게 토벌하면 왜적이 조선인을 거느리고서 우리를 대적할 것이다.”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신은 군사를 내어 토벌하는 것을 잠시라도 늦출 수 없다고 여기는 것 비록 대병(大兵)이 일시에 일제히 모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마땅히 연달아 군사를 내어 조선에 성세(聲勢)의 도움이 되게 하면 조금이라고 오랑캐의 넋을 빼앗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군사를 일으키는 비용으로는 군량이 막대한데 직이 조선에게 저축한 바를 물어본즉 7, 8천 명을 한 달 먹일 양식은 겨우 되고 부족한 것은 우리가 대주기를 의뢰한다 하고, 그 나라 임금과 신하들도 역시 인마(人馬)를 많이 내어서 압록강 부근에 있기를 원합니다. 평양을 수복한 뒤에는 그 나라 임금과 신하들이 또한 우리 군사들이 그 부모와 형제들을 위해 원수 갚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 양식을 즐겨 바칠 것이니, 절로 지방에 따라 양식을 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왜적이 쌓아둔 것도 있음이리까. 관전보(寬奠堡) 같은 데는 지방이 5백여 리인데 원액 관군(原額官軍)은 수효가 이미 극히 적은데다가, 지금 각영(各營)에서 조발해간 선봉(選鋒)ㆍ초마(哨馬) 및 연만(年滿), 도망친 자, 죽은 군사를 제하고 나면 관전보에 실제로 있는 영군(營軍)은 다만 3백 30여 명뿐입니다. 이미 왜를 막으려 하고 또 오랑캐를 막자니 보(堡)를 지키는 데 군사가 없을 수 없고 적을 질러 막는 데 사람이 없을 수 없으니, 왜가 만일 오게 되어 막는다면 직은 관전보 등지의 군사를 속히 더 설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북방 사람은 오랑캐를 막는 데 잘하고 남방 사람은 왜를 막는 데에 잘하니, 만일 왜와 싸운다면 남방 군사 2만 명을 쓰지 않고는 어찌 그 칼날을 꺾어 그 날랜 기운을 좌절시키겠습니까. 그런즉 남방 군사를 속히 조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장기(長技)는 말 달리고 활 쏘는 데 있고 왜의 장기는 조총(鳥銃)에 있으니, 우리 화살을 쏘는 곳에는 투구와 갑옷으로 피할 수 있지마는 조총을 쏘는 곳에는 군사와 말이 당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등패(藤牌)가 있으면 이미 몸을 가릴 수 있고 또 말도 가릴 수 있으니 등갑(藤甲)과 조총을 속히 준비해야 합니다. 신이 말한 바는 아마도 모든 신하들이 이미 말하였을 것이니 어찌 신이 누누이 진술함을 기다리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하루가 빠르면 조선이 하루에 망하는 화를 면할 것이요, 하루가 더디면 우리 영토에 하루의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간절히 바라건대 성명께서 밝으신 결단을 내리시고 해부(該部 병부)에 명령하시어 담당한 모든 신하에게 의론하게 하시고 병마(兵馬)를 재촉하여 전진하게 하면 국토에 다행이요 종묘사직에 다행이겠습니다. 직은 기인(杞人)의 걱정을 견디지 못하나 날씨와 바람은 차고 중도에서 병이 나서 빨리 달려가지 못하고, 의인(義人) 설지(薛志)를 시켜 글을 가져가서 병부에 아뢰나이다.
○ 경상도 의병장 김면이 호남 방백에게 구원을 청하는 글을 내다.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것이니 의거(義擧)는 바야흐로 일하기에 급하고,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것이니[脣亡齒寒] 한 임금의 국토에 어찌 피차를 구분하리오. 이에 불에 타고 물에 빠진 위태로운 자를 구하여야 할 사세를 당하여 감히 우리를 도와 달라는 소회를 진술하나이다. 그윽히 생각하건대, 군부(君父)의 병을 급히 여김은 신하로서의 지극한 정성이요 환란을 나누는 것은 이웃에 대한 도(道)의 대의입니다. 진정(秦庭)에서 통곡함은 실로 초(楚) 나라를 보존할 마음을 가진 것이며 업(鄴)의 군사가 달려가 구원함은 조(趙) 나라가 침략을 받은 화를 구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오창(敖倉)의 곡식이 아니었으면 성고(成皐)를 보존하기 어려웠을 것이요, 진양(晉陽)의 군사가 없었더라면 한단(邯鄲)이 가장 위태로웠을 것입니다. 제(齊) 나라의 곡식이 노(魯) 나라의 배고픔을 구해야 할 것이요, 절강(浙江)의 수자리[戍]를 마땅히 회(淮)로 옮겨야 할 것입니다. 장호(張鎬)의 구원병이 만약 급히 왔더라면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어찌 수양(睢陽)을 잃었겠으며, 소하(蕭何)의 군량 공급이 넉넉하지 못하였던들 한신(韓信)과 장이(張耳)가 어찌 파촉(巴蜀)을 보존하였겠습니까. 나라의 사경(四境)은 사람의 한몸과 같으니 병을 치료하는 데 머리니 발이니 가릴 것이 없고, 난을 구하는 데 어찌 동쪽과 서쪽을 구별하리오. 우리 이남(二南 영남ㆍ호남)은 영(嶺) 밖의 견아(犬牙)요, 별은 화유(火維)의 분야이다. 거진(巨鎭)과 웅주(雄州)는 남방에서 병풍 울타리가 되고, 금성(金城)과 천부(天府)는 부강함이 동방에서 으뜸으로, 유아(儒雅)는 주(周) 나라의 추로(鄒魯)요 물산은 촉(蜀) 나라의 형주(荊州)ㆍ익주(益州)이니, 나라의 재정(財政)이 여기서 나오고 지리(地利)가 여기서 믿을 만한 것입니다. 불행히 본도(本道)에 개ㆍ돼지가 날뛰매, 금탕(金湯)이 험함을 잃어서 60고을 닭 울고 개 짖던 지방이 이제는 오랑캐의 싸움터가 되었다. 수백 년 길러진 생령이 모두 도륙의 칼날에 죽었습니다. 인가가 모두 불타니 오직 봄 제비가 숲 속에 둥지를 짓는 것을 보고, 황새와 조개가 오래 버티매 벌써 가을 기러기가 우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초목도 빛을 잃고 강산이 부끄럼을 띠고 있습니다. 제 나라 70성 중에 오직 거(莒)와 즉묵(卽墨) 등 쇠잔한 고을만이 남았고, 삼천 리 검각(劍閣) 가는 길에 외로운 신하 두보(杜甫)가 슬퍼하였습니다. 나라를 걱정하다 희게 센 머리칼이 1천 줄기요, 적을 토벌할 단심(丹心)은 한 말[一斗 담이 큼을 말함]입니다. 밤중에 월(越) 나라 쓸개를 맛보매 태산(泰山)과 화산(華山)이 가슴에 버티었고, 반 년 동안 오(吳) 나라 섶에 잠자매 갑옷에 이[虱]가 생겼습니다. 오랑캐와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고 국가는 강을 건너 한구석에 있을 수 없으니, 눈물을 뿌리며 맨주먹을 떨칩니다. 처음엔 하(夏) 나라의 일려(一旅)도 없더니, 마음이 백일(白日)을 가리켜 맹세하매 거의 당 나라의 중흥(中興)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우리를 돕고자 한 덕분에 인심이 아직도 나라를 생각하여 마음에 충의가 같으니, 선비와 백성들이 모두 구름처럼 달려오고 땅은 동서가 없이 먼 데 가까운 데서 모두 호응하였습니다. 군사의 기세가 점점 떨치어 적의 머리를 많이 베었으니, 어질고 성스러운 열두 임금이 깊이 만백성에게 덕을 쌓아 문명한 소중화(小中華)는 하루아침에 오랑캐가 되지 않음을 이에 알겠습니다.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이 온전할 수 있으매 회복의 근저가 대강 성립되었습니다. 다만 한되는 것은 병화(兵火)가 휘몰아쳐서 군수가 텅 비었습니다. 천으로 만으로 쌓아둔 것이 적에게 갖다주는 물자가 되어 버렸고, 갈아두고 마련해 둔 것이 화살 잃고 화살촉 다된 한탄이 되고 말았으니, 군대는 당장의 양식이 없고 군사들은 정예로운 기계가 없습니다. 교위(校尉)가 무기(戊己)의 군대만을 거느렸으니 누가 한 나라 화살의 신(神)이라 칭하겠으며, 군사는 경계(庚癸)의 소리가 슬프니 양식의 운반을 독려하기 어렵습니다. 군비를 얻어내자니 부자에게도 이미 다 긁어냈고 쇠를 거두어들이자니 백성들에게서도 역시 모자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방법이 없어 두 손 놓고 있을 따름입니다. 우러러 생각건대 영공(令公)은 회서(淮西)의 소범(小范)이요 강좌(江左)의 이오(夷吾)이니, 만 리의 장성(長城)이 되어 명망이 이미 온 나라에 증합니다. 사방에 병영(兵營)이 많으니 걱정이 어찌 한 지방에만 치우치겠습니까. 이공(二公)이 섬(陝)을 나누기는 하였으나 한마음으로 주(周) 나라를 보좌하기는 다름이 없었습니다. 서쪽으로 회(淮)를 치고 북으로 연(燕)을 치매 성공하는 이가 있는 것이니, 현(縣)이 지경을 넘고 군(郡)이 한계를 넘었다고 간섭하지 않는 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물며 호남 전체가 온전히 보존된 것은 본도가 피폐한 것과는 다른데이겠습니까. 군량과 말먹이를 멀리 운반하는 수고도 없었고 병력이 거듭 피곤한 적도 없었으며, 어깨를 쉬고 편안히 잘 수 있도록 조금 편안하여졌으니 사기(士氣) 또한 배나 더할 것입니다. 원컨대 무의편(無衣篇 《시경(詩經)》의 편명으로, 나라를 위하여 싸움터로 나가자는 내용임)을 한 번 외어서 위엄 있고 강한 무용(武勇)을 부르신다면 창이(瘡痍)한 남은 군사가 온전한 군사에게 원조를 빌리고, 배고프고 목마른 피곤한 군사들이 든든한 배부름으로 찡그림을 펼 수 있을 것이니, 장차 사람마다 선등(先登)하는 용맹을 분발하고 군사마다 죽음을 바치는 충성을 간직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적벽(赤壁)의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날고 곤양(昆陽)의 무소와 코끼리가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요, 남쪽 하늘의 초(楚) 나라 기운이 깨끗이 소탕되고 북궐(北闕)의 요(堯)의 이마를 다시 보게 될 것을 나는 날로 바라오만, 누구와 더불어 이것을 준비하겠습니까. 슬픕니다! 촉으로 가는 잔도(棧道)에 구름이 아득하고 한궁(漢宮)에는 풀이 푸르며, 땅은 멀고 하늘은 넓은데 달빛은 속절없이 의주에 비치고 세월은 바뀌었는데 모구(旄丘)에 칡은 이미 변하였습니다. 부로(父老)들은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바라고 남녀들은 주왕(周王)의 수레바퀴를 기다리니, 신하로서 이 지경을 당하여 죽고 삶을 어이 논하겠습니까. 두견(杜鵑)을 읊으며 평강(平江)에 부쳐 있음은 진실로 부득이 함이요, 누른 감자를 던져 올출(兀朮 금 나라 대장)을 놀라게 함을 진실로 바랍니다. 제갈(諸葛)이 몸 바침을 함께 본받고, 숙(叔)ㆍ백(伯)이 귀먹은 듯함과 같게 하지 마시오. 궁금(宮禁)을 숙청하고 당 나라 종묘에 공경히 뵈었으니 이성(李晟)의 충성이 볼 만하였고, 신정(新亭)에 모여서 초수(楚囚)처럼 함께 슬퍼하니 진(晉) 나라 신하들이 한구석에 편안히 살아 있었음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22일. 전라 좌우 의병장이 무주(茂朱)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남원에 와서 진을 치다. 최(崔)는 객사 서헌(西軒)에 거처하고 임(任)은 광한루(廣寒樓)에 머물렀다. 이유의(李由義)를 경상 좌수사로 삼다. 이보다 먼저 유의가 천병계원사(天兵繼援使)로 서울에 달려가 직산(稷山)에 이르렀는데, 죽산(竹山)에서 군사가 패하고 남양(南陽)에 옮겨 주둔하여 그대로 강화를 향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명령을 받고 그 군사를 광주 판관(光州判官) 등에게 맡겨서 강화로 들여보내고, 자신은 단기(單騎)로 도로 호남으로 내려와서 이어 영남으로 향하다.
○ 임금의 급함에 달려오지 않고 용인(龍仁)에서 패군하여 퇴각한 죄를 논하여 금부도사를 보내어 이광(李洸)을 잡아가다. 이때에 이광이 순천에 있었는데 도사가 서해로부터 본도에 이르러 추적하여 체포하고 가면서 남원을 지나다. 도사가 광한루에 이르렀는데 문이 닫혀 들어갈 수 없자 용성관(龍城館)에 들어가서 사람을 시켜 말을 전하기를, “천 리 행조(行朝)에서 명령을 받고 남쪽으로 왔으니 남방 의사(義士)들이 적을 토벌하는 일을 들은 대로 곧 보고하는 것이 나의 뜻이요, 하물며 나는 임금의 계신 데서 왔으니 남도 사람들이 앞다투어 임금의 안부를 물을 것인데 어찌하여 거절하고 들이지 않는가.” 하니, 임계영(任啓英)이 곧 객사의 서헌으로 가서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들어가 도사를 만나고 이야기하고서 물러가다. 이튿날에 도사가 북쪽으로 돌아가다.
○ 전라 감사 권율이 군사 2만여 명을 거느리고 근왕(勤王)하려고 북쪽으로 달려가는데 각 고을 수령과 승장(僧將)ㆍ처영(處英) 등이 따르다.
○ 순천의 무사(武士) 강희열(姜希說)이 군사 2백여 명을 모아서 비(飛) 자로 군표(軍票)를 삼아 거느리고 남원으로 와서 적이 있는 처소로 향하다. 처음에 희열이 고경명(高敬命)을 따라 군사를 일으켰다가 금산(錦山)의 패전에 분하여 울면서 고향에 돌아와서 전일에 모집한 사람들을 소집하여 단결시켜 군대를 만들었는데 최경회의 의병이 뒤이어 일어나면서 합세하자고 불렀으나 응하지 않더니 이때에 이르러 양식과 기계를 준비하여 싸움터로 달려가다.
24일. 부산에 유둔(留屯)하던 적 등원랑(藤元郞)ㆍ평조신(平調信) 등이 동래ㆍ김해의 왜적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아울러 전진하여 한 무리는 노현(露峴)으로부터 한 무리는 웅천(熊川)으로부터 안민현(安民峴)을 넘어서 창원(昌原)에 범하였는데, 병사 유숭인(柳崇仁)이 관군과 의병을 거느리고 맞아 싸우니 불리하였다. 이때에 우도 몇 고을의 군사가 노현을 지키고 있었는데 적이 불의에 달려들어 함부로 죽여 남음이 없었다. 이튿날에 숭인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또 싸워서 크게 패하다. 적 80여 명이 바로 창원에 들어가서 읍내를 분탕질하고 물러나 사화촌(沙火村)에 둔치다. 숭인이 모든 장사(將士)와 더불어 마산포(馬山浦)에 진을 치니 이튿날에 적병이 합세하여 나아가 함안(咸安)에 둔치다.원랑과 조신 이것들은 작은 적장이니, 이번에 온 대장 중에는 또 다른 장수가 있었을 것이나 미처 전해 듣지 못하였으므로 이와 같다.《경상순영록》에서 나왔다.
○ 경상도 함창(咸昌)ㆍ당교(唐橋)의 적이 모여서 큰 진이 되어 용궁(龍宮) 등지에 횡행하면서 장차 다시 내지(內地)로 범하려 하는데, 좌감사 한효순이 안동에 있으면서 장기 현감(長鬐縣監) 이수일(李守一)로 대장을 삼아서 만호 민정홍(閔廷鴻) 등과 각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용궁을 지키게 하고 또 안동 부사 우복룡(禹伏龍)으로 도지휘대장(都指揮大將)을 삼아서 예천 땅에 진을 치게 하며, 영천(榮川)의 향병과 춘양(春陽)의 의병들이 합세하여 나아가 치다가 크게 무너져 돌아오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 우감사 김성일이 왜적이 다시 내지에 뚫고 들어올 걱정으로 전라 감사 및 좌우 의병에게 응원을 청하다.
28일. 수병(水兵) 여러 장수들이 웅천 바다를 수색하여 왜적을 만나 싸우다가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돌아오다.
○ 전라 좌도 의병대장이 본도 병영 우후에게 전령하니, 다음과 같다.
당일에 도부(到付)한 경상 우도순찰사 관문(關文) 내에, 김해ㆍ부산의 적이 합세하여 몰아오매 여러 장수가 붕괴되어 흩어지고 병사(兵使)는 퇴각하였다. 25일에 적이 이미 창원의 병영 등지에 침입하였으니 내지에 뚫고 들어올 걱정이 조석간에 급박하였는데, 적의 세력은 치성하고 우리 군사는 적어서 당적할 수 없다. 성주(星州)에 유둔한 적이 방금 거창의 길을 엿보아 동쪽으로 충돌하고 서쪽으로 공격하는 변이 아침이 아니면 곧 저녁에 있을 것이다. 적이 바야흐로 진주(晉州)ㆍ의령(宜寧)ㆍ산음(山陰) 등지를 도모하는데 만약 여기를 지키지 못하면 적이 반드시 바로 귀경(貴境 전라도)을 범할 것이다. 사세가 위급하고 절박하니 남원 근처의 군병은 산음 등지로 순천 등지의 관군은 진주로 장수를 정하여 거느려 보내며, 귀도(貴道 전라도)의 두 의병대장이 지금 남원에 유둔하고 있다 하기에 달려와 구원할 일로 공문을 보내는 것이니 두 대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음ㆍ의령의 길에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와 싸움을 도와줄 것으로 관문하였다. 적의 세력이 치성하여 마구 몰아 북으로 범할 걱정이 조석간에 박두하였으니 각 관군은 급히 출동하여 의병과 일시에 합세하여 달려가 구원할 것이다.
○ 전 남원 참봉 변사정(邊士貞)이 본부의 부로 박계성(朴繼成)과 흩어진 군사를 모았는데, 가까운 고을의 관군이 와서 붙는 자가 매우 많아서 수십 일 안에 2천여 명을 얻고 적개(敵愾)라는 두 글자로 군표를 하다.
○ 왕명으로 전하기를, “수령과 변방 장수 중에 싸우다 죽었거나 도망한 곳에는 각도의 감사가 현재 있는 사람 중에 감당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고 결원된 곳에 임시로 임명하여 일을 보도록 한 뒤에 아뢰라.” 하다.
10월 1일. 적이 함안군(咸安郡)의 동남쪽 경계를 분탕질하고 곧 부다현(富多峴)을 넘다. 부다현은 함안ㆍ진주(晉州)의 경계로 진주ㆍ사천(泗川)ㆍ곤양(昆陽)ㆍ하동(河東)ㆍ단성(丹城)ㆍ산음(山陰)의 군사들이 여기에 매복하였더니, 적이 불의에 달려들어서 죽은 자가 심히 많고 남은 군사는 무너져 달아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2일. 적병이 소촌(召村 진주에 있는 역 이름)에 옮겨 둔치다. 본도 우감사 김성일(金誠一)이 첨정(僉正) 조종도(趙宗道)를 보내어 전라 좌우 의병 및 여러 장수에게 구원을 청하였더니 우의병장 최경회(崔慶會)가 남원(南原)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운봉(雲峯)ㆍ함양(咸陽)으로 향하고 인하여 산음ㆍ단성으로 향하다.
3일. 적병이 길을 나누어 진주로 향하는데 한 무리는 마현(馬峴)을 넘고
한 무리는 불천(佛遷)을 넘어서 바로 진양(晉陽)을 공격하다. 이튿날에 선봉 천여 기(騎)가 진주 동봉(東峯) 위에 달려왔다가 돌아가다. 병사(兵使) 유숭인(柳崇仁)이 싸움에 패하여 단기(單騎)로 달려와서, 성에 들어가 함께 지키기를 원하니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생각하기를, “병사가 성에 들어오면 이는 주장(主將)을 바꾸는 것이니, 반드시 통솔하는 방법이 어긋나서 서로 합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거절하고 들이지 않으며, “적병이 이미 어울렸으므로 성문을 엄하게 경계하는데, 만약 조금이라도 열고 닫으면 갑자기 침입할 염려가 있으니 주장은 밖에서 응원을 함이 옳습니다.” 하다. 숭인이 들어가지 못하고 도로 나오다가 성 밖에서 적을 만났는데 사천 현감 정득열(鄭得說), 가배량 권관(加背梁權管) 주대청(朱大淸) 등과 함께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다. 곽재우(郭再禑)가 시민이 숭인을 들이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감탄하기를, “이 계책이 족히 진주성을 완전히 보존하였으니 진주 사람의 복이로다.” 하다.
6일. 적병이 나아가 진주를 포위하다. 이때에 목사의 군사 3천 7백여 명과 곤양 군수 이광악(李光岳)의 군사 1백여 명이 성중에 있어 부대를 나누어 지키다.
○ 해남 가장(海南假將)이란 전 판관 성천지(成天祗)가 본현에서 군사를 모아서 뇌진군(雷震軍)이란 석 자로 군표(軍標)를 삼고, 양식과 기계를 마련하여 근왕(勤王)하려고 북쪽으로 향하여 흥양(興陽)ㆍ낙안(樂安)ㆍ순천(順天)ㆍ구례(求禮)를 거쳐 남원을 지나가다. 이때에 관군과 의병이 동쪽으로 달리기도 하고 서쪽으로 향하기도 하면서 혹은 근왕(勤王)하겠다 칭하고, 혹은 적을 치러 가겠다 하여 칼과 창이 서로 부딪쳐 각 고을의 군사와 말이 제때에 일제히 출발하지 못하였다. 이것 때문에 천지가 남원 부사 윤안성(尹安性)을 크게 힐난하다.
○ 진주를 포위한 적이 군사를 갈라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을 하다. 전라 우의병장 최경회가 단성(丹城)에 군사를 주둔하였더니, 적병이 갑자기 들이닥쳐 장수와 군사가 놀라 무너지다. 적이 단성을 불태웠는데, 협천 가장(陜川假將) 김준민(金俊民)이 쳐서 쫓다. 아래 장계의 끝에 있다.
○ 경상 우순찰사 김성일이 또 정랑(正郞) 박성(朴惺)을 보내어 좌의병에게 응원을 청하니, 임계영(任啓英)이 남원으로부터 함양으로 향하다.
○ 진양이 포위를 당한 지 여러 날이 되도록 구원병은 이르지 않고 적은 날로 치성하다. 목사 김시민이 온갖 방법으로 계책을 내어 밤낮으로 방어하면서 항상 일심으로 죽음을 같이할 것으로써 모든 군사에게 권면하고, 몸소 밥과 장(漿)을 가지고 분주히 다니면서 배고프고 목마른 이들을 구하며 탄환이 비처럼 쏟아져도 서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때때로 눈물 흘리며 타이르기를, “온 나라가 함몰되고 남은 데가 적어서 다만 이 한 성이 나라의 명맥에 관계되는데 지금 또 불리하다면 우리 국가는 그만이다. 하물며 한 번 패하면 성중에 있는 천백의 인명이 모두 칼끝의 원귀가 될 것이니, 아! 너희 장사(將士)들은 힘을 다하여 용감하게 싸워서 죽을 각오를 하여야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하니, 군사들이 감격하여 결사적으로 싸우지 않는 이가 없다. 싸움이 오래되어 화살이 다되매 성중이 위태롭게 여겨 두려워하다. 시민이 밤에 사람을 시켜 성을 넘어 나가 달려가서 감사에게 보고하니, 감사가 군기(軍器)를 보내려 하나 보낼 만한 사람을 얻기가 어려웠다. 이에 중한 상(賞)을 걸고 영리(營吏) 하경해(河景海)를 얻어서 부탁하여, 경해가 밤을 타서 가만히 가서 성 밑에 도달하자, 문을 열고 들여서 장전(長箭) 백여 부(部)를 얻어서 뒤이어 쓰게 되니 군사들이 기운이 배나 나다.
○ 고성(固城) 의병장 최강(崔堈)ㆍ이달(李達) 등이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진주를 응원하다. 최강이 밤에 망진산(網陣山)에 올라서 군사들로 하여금 각기 4, 5개의 횃불을 들고 혹 나갔다 물러갔다 하며 북을 두드리고 고함을 치매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하니 적병이 놀라다. 성중의 군사들이 듣고는 기뻐 날뛰며, “이는 반드시 고성 의병장 최강ㆍ이달이 와서 응원하는 것이다.” 하다. 이달이 또한 군사를 거느리고 두골평(頭骨坪)에 진을 치고 마구 공격하여 베어 죽이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곽재우가 심대승(沈大承)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를 응원하다. 아래 장계에 나왔다.
○ 강원도 도순찰사의 종사관 겸 소모대장(召募大將) 홍인상(洪麟祥)인데, 뒤에 이름을 이상(履祥)으로 고쳤다. 의 통문은 다음과 같다.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왜적이 가득 찼는데 백성들이 전쟁을 몰랐다가 소문만 듣고 흩어졌으며, 마침내 거가(車駕)가 파천하고 종묘는 폐허가 되었으며, 옛 도읍의 산천이 달라졌고 백 년의 문물이 모두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으니, 말이 이에 미치매 원통함이 뼈에 사무치도다. 다행히 하늘의 뜻이 난리를 싫어하고 인심이 한(漢)을 생각하여 창의(倡義)하는 무리가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회복의 시기를 날짜를 정하고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임금 없고 부모 없다던 중들도 오히려 의기를 분발하여 무리를 모아 몽둥이로 적을 치거늘 하물며 도포 입은 우리 선비들은 국가 교육의 은택에 오래 젖어서 임금을 섬기는 대의를 아는 자들임이랴. 서쪽 국경은 일찍 추워져 전하께서 반드시 고생스러우실 것이며, 능(陵)에는 풀이 우거져 제사가 오랫동안 끊어졌으니 이것은 신자(臣子)로서 눈물을 뿌리며 팔을 걷고서 창을 베개 삼아 적을 쳐야 할 때이다. 대저 추운 겨울을 겪어야 소나무ㆍ잣나무가 늦도록 푸르름을 알 수 있고, 결이 좋지 않은 재목을 만나야 연장이 잘 드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무릇 우리 충의의 선비가 어찌 힘쓰지 아니하랴. 당직(當職)은 일찍이 제독(提督 지방의 학관(學官))의 직에 있어 외람되게 스승의 자리에 앉았으나 평시에 강론(講論)할 때 대의(大義)로써 가르치지 못하고서, 이제 난리의 때를 당하여서야 무리를 불러 모으고자 의병의 선창이 되어 강토에 요망한 기운을 맑히기를 맹세하고 회복의 큰일을 성취하려고 생각하니, 이것은 자신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아! 한강 남쪽 새재[鳥嶺] 북쪽에 왜놈의 진(陣)이 바둑판처럼 벌여 있어 민생이 어육이 되니 분탕한 즈음에 불러 모으기 실로 어려우나, 여주(驪州) 한 고을은 적의 속에 끼어 있어 동쪽으로 원주, 서쪽으로 죽산(竹山), 남쪽으로 충주(忠州), 북쪽으로 광주(廣州) 사면으로 적이 충만하여 한 지경이 쓸어 없어졌으니, 여주가 보존되지 못하면 죽산의 적을 도모할 수 없고 죽산의 적을 도모하지 못하면 경성을 수복할 수 없게 되므로, 여주 한 고을의 성패는 실로 국가 흥망이 관계된 바이다. 이것은 마땅히 밤낮으로 속을 태우고 뒤에 통곡할 바이다. 충청ㆍ전라 두 도는 겨우 완전하고 선비들이 많아 평소 부고(府庫)라고 칭하여졌으니 무릇 우리 충의의 선비들은 반드시 우리보다 먼저 의병의 깃발을 들었을 것이나 각 고을에 흩어져 있어 통일된 데가 없으니, 원컨대 통문을 돌려 모여서 날짜를 약속하고 의병을 일으켜서 중국의 군사와 호응하여 의각(犄角)의 형세를 이루어 흉한 무리를 섬멸하고 경성을 수복한다면 어찌 조정에서 그 공을 가상히 여길 뿐이랴. 그대들 조상의 혼령이 또한 모두, “내가 후손이 있구나.” 할 것이다. 당직은 지금 강원 도순찰사의 명령이다 을 받들어 이 소모 대장의 임무를 맡아서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각 고을에 군사를 모집하고 각 관에서 군량을 판출(辦出)하노니, 무릇 각 고을의 생원ㆍ진사ㆍ교생(校生)들은 맨 먼저 대의를 내세우고 모든 선비들도 또한 용략(勇略)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한 달씩 분번(分番)하여 안성에 방어진을 치고, 유사(有司)를 많이 정하여 양식과 기계를 판출하여 배에 실어 충청도 평택현(平澤縣)으로 운반하기에 마음을 다하여 각기 함께 일어나 한가지로 원수를 갚을 일이다. 이상을 충청ㆍ전라에 통문하노라.
이상(履祥)이 두 도에 돌아다니며 모집하나 두 도의 사람들이 각기 의병을 일으키므로 응하는 자가 적다.
10일. 진주 목사 김시민이 적병을 성 밑에서 크게 부수니 남은 적이 도망하여 본진으로 돌아가므로 추격하여 소촌역(召村驛)에까지 이르렀다가 돌아오다. 본도 우순찰사 김성일이 거창에 있다가 승전의 보고가 이르매 본주로 달려와서, 적의 송장이 서로 베개 삼아 깔렸고 피비린내가 땅에 가득한 것을 보고 탄복하기를 마지아니하고 이어 성에 들어가 목사가 누워 있는 방 안 탄환에 맞아 안에 누워 있었다. 으로 들어가 위로하고 감탄하기를 한참이나 하였으며, 김해 부사 서예원(徐禮元)으로 가목사(假牧使)를 삼아서 그 군사를 대신 거느리게 하고 즉일로 장계를 올리니, 다음과 같다.
김해ㆍ부산(釜山)에 유둔하던 적이 3만여 명을 모아 합쳐서 마구 몰아 함께 전진하여 9월 24일에 세 패로 나누어 노현(露峴)의 군사를 습격해 부수고, 27일에 또 창원부를 범하매 병사(兵使)가 다시 패하여 전후에 죽은 자가 1천 5백여 명이나 되니, 군사의 마음이 저상되고 백성들은 무너져 흩어졌으며, 적병은 승세를 타서 마치 회오리바람과 같았습니다. 본원 2일에는 나아가 함안을 함락시키고 5일에 선봉으로 말 탄 왜놈 1천여 명이 진주의 동쪽 마현(馬峴)의 북봉(北峯)에 바로 이르러 형세를 두루 보고 가로질러 달리면서 뽐내었으나, 목사는 성중에 전령하여 못 본 척하고 화살 한 개 총알 한 개를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하고, 다만 성내에 잘 바라보이는 곳에 용대기(龍大旗)를 세우고 장막들을 많이 치고 성중의 노약자와 남녀를 다 모아서 모두 남자 옷을 입혀서 군세(軍勢)를 웅장하게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이날 신시에 적들이 온 길로 도로 향하자 목사가 곧 날래고 건장한 사람을 시켜서 산에 올라 바라보았는데, 적병 수만 명이 진주 동쪽 10리 되는 임연대(臨淵臺) 등지에 진을 쳤습니다. 6일 이른 아침에 적이 대탄(大灘)으로부터 일시에 마구 몰아 말을 타고 가로 달리는 놈들이, 혹은 자루가 긴 둥근 금부채를 휘두르고, 혹은 흰 바탕 누른 무늬의 금 삽선[翣翁]을 짊어졌는데 온갖 채색으로 그려서 바람을 따라 펄럭이매 광채가 번쩍거리며, 혹은 닭털로 만든 관을 쓰고, 혹은 머리를 풀어 헤친 가면을 썼으며, 혹은 뿔이 있는 금색 가면을 쓰고 각기 잡색 기(旗)를 짊어졌는데 길거나 넓은 것이 그 수효를 알 수 없었고, 혹은 푸른 일산을 받쳤거나 붉은 일산을 들고 흰 칼날이 햇빛에 번쩍거리매 살기가 하늘에 뻗치니, 무릇 기괴한 형상이 사람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세 패로 갈라 산을 덮어 내려 와서 한 패는 동문 밖 순천당산(順川堂山)에 진을 치고서 성중을 내려다보고, 또 한 패는 개경원(開慶院)으로부터 바로 동문을 지나서 봉명루(鳳鳴樓) 앞에 벌여 섰으며, 또 한 패는 향교 뒷산으로부터 바로 순천당산을 넘어서 봉명루의 왜놈들과 합하여 한 진이 되고, 기타 각 봉우리에 둘러선 왜놈은 벌처럼 개미처럼 둔취하였습니다. 왜놈 장수 6명은 모두 검정 단의(單衣)를 입고 쌍견마(雙牽馬)를 타고 창과 칼을 가진 자가 앞뒤에 끼고 섰으며, 희거나 검은 옷을 입은 여자들 역시 쌍견마를 타고서 시종하는 왜놈을 많이 거느리고 장수 왜놈의 앞에 섰으며, 걸어서 따르는 여자들 또한 그 수가 많았습니다. 순천당산에 진을 친 왜놈은 총수(銃手)가 1천여 명쯤 되는데 성중을 향하여 총알을 일제히 쏘니 뇌성이 진동하고 우박이 날리는 것 같으며, 3만여 왜놈이 일시에 크게 소리치니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중에서는 전연 동요하지 않고 고요하기가 사람이 없는 것 같다가 그놈들의 기운이 쇠하기를 기다려서 또한 소리 지르고 북을 두드리고 포를 쏘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적들이 흩어져 민가로 들어가서 문판(門板)이나 관판(棺板)을 혹은 마루판을 가져와서 성밖 백 보 밖에 벌여 세워 놓고 판목(板木) 안에 가만히 엎드려 총 쏘기를 끊이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적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서편의 민가에 분탕질하고 또 동편의 초가지붕을 걷으며, 혹은 촌락의 대[竹]를 베고 혹은 짚을 실어 와서 일시에 만들어 6, 7리에 뻗쳤는데 모두 푸른 장막으로 둘렀습니다. 장수 왜놈은 혹은 향교 안에 들어가고 혹은 민간의 큰 집에 거처하였습니다. 이날 소와 말에 짐을 싣고 점심부터 저물녘까지 연락을 끊이지 않고 동쪽으로부터 들어오더니, 초경(初更)에 적이 한 곳에서 호각을 불자 곳곳에서 서로 응하고 뭇 왜놈들이 소리를 높이다가 식경(食頃)에 그치고, 총 쏘는 소리는 밤새도록 끊이지 않고 막사를 지은 곳곳에 밤새도록 불을 피웠습니다. 이날 밤에 곽재우가 심대승(沈大承)을 보내 군사 2백여 명을 거느리고 향교 뒷산에 올라서 호각을 불고 횃불을 들자 성중 사람들이 또한 호각을 불어 서로 응하니, 적들이 크게 놀라 소란하여 횃불을 들고 산에 올라 밤새도록 자지 못하였습니다. 7일에 적들이 아침부터 저물 때까지 총을 쏘아 그치지 않고 또 장편전(長片箭)으로 어지럽게 성중에 쏘고 군사를 나누어 사방으로 적들이 흩어져 불태우고 약탈하니 수십 리 안에 민가가 모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먼 곳 가까운 곳의 긴 대를 죄다 꺾어서 묶거나 엮고 솔가지를 많이 모아서 진 밖에 높이 쌓았으며 큰 나무를 베어다가 끊이지 않고 실어 들이는데 어디 쓸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목사는 군사의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힘써서 밤이면 악공을 시켜 문루 위에서 피리를 불어 한가로움을 보였습니다. 적진 가운데 조선 아이들이 많은데 혹은 서울말을 하고 혹은 시골말을 하면서 매양 성에 돌아다니며 크게 외치기를, “경성이 이미 함락되었고 8도가 붕괴되었는데 새장 같은 진주성을 네가 어찌 지키랴. 속히 항복하는 것만 못하다. 오늘 저녁에 개산 아빠[介山父]가 오면 너희 장수의 세 머리를 마땅히 깃대 위에 달 것이다.” 하니, 성중 사람들이 분노하여 소리를 높여 꾸짖고자 하나 목사가 금지하여 말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날 밤에 달이 떨어진 뒤에 적이 대 엮은 것[竹編]을 가만히 동문 밖에 세웠는데 수 백보에 뻗쳤으며 그 안에 판자를 벌여 세우고 빈 섬[石]에다 흙을 담아 포개어 언덕을 만들어서 성을 내려다보아 총을 쏘고 화살을 피할 처소를 만들었는데, 대 엮은 것이 앞을 가렸으므로 우리 군사가 처음에는 몰랐다가 아침에 보니 이미 토성(土城)이 되었습니다. 8일에 적이 대나무 사닥다리[竹梯]를 많이 만들었는데 수천 개나 되었으며 또 넓은 사닥다리를 만들어 대를 심히 빽빽하게 엮었는데 넓이가 한 칸쯤이나 되었으며, 멍석을 덮어서 비늘처럼 연달아 배열하여 여러 군사가 바로 올라올 길을 만들고, 또 3층의 산대(山臺)를 만들어 윤전(輪轉)하여 성을 누를 계책을 하였습니다. 목사가 현자총통(玄字銃筒)을 세 번 쏘아서 산대 만드는 왜놈을 관통하니, 놀라고 두려워하여 물러갔습니다. 목사는 적이 솔가지를 많이 쌓은 것이 성을 넘으려 함이며 대나무 엮은 것으로 앞을 막은 것은 성에 맞닿으려 함인 줄을 추측해 알고 불 지를 도구를 미리 준비하되, 생나무가 젖어서 태우기 어려울 것을 염려하여 종이에다 화약을 싸서 묶은 마른 섶 속에 넣어서 성밖으로 던져 솔가지를 태울 준비를 하였습니다. 성 위에는 진천뢰(震天雷)ㆍ질려포(蒺藜砲)ㆍ큰 돌덩이를 설치하여 성에 붙는 적을 치려 하고 또 자루가 긴 도끼와 낫 등 물건을 준비함은 윤전산대(輪轉山臺)를 부수기 위함이요, 여장(女墻) 안에는 또 가마솥을 많이 설비하여 물을 끓여서 적에 끼얹으려 하였습니다. 낮에는 여장 안에 군사를 매복시켜 서서 내다보지 못하게 하고 풀 인형을 많이 만들어서 활에다 화살을 메기고 성 위에 나왔다 숨었다 하게 하였으며, 군사에게 엄하게 단속하여 헛되게 화살을 쏘지 말게 하고 상시에 돌을 던져 적으로 하여금 성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날 밤에 적이 대 엮은 것을 많이 만들어 점차로 성에 가까이 오고 흙을 쌓기를 점점 높이 하였으며, 두 곳의 산대는 4층을 만들고 앞에는 목판을 달아 화살과 돌을 가리면서 총 쏘는 처소를 만들었습니다. 밤 2경에 고성 가현령(假縣令) 조응도(趙凝道)와 본주 복병장 정유경(鄭惟敬)이 군사 5백여 명을 거느리고 각기 십자횃불을 가지고 남강(南江) 밖 진현(晉峴) 위에 벌여 서서 호각을 불자 성중 사람들이 구원병이 이른 것을 바라보고 곧 큰 쇠북을 울리며 호각을 불어 호응하니, 적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떠들면서 곧 각 막사에다 불을 피우고 각기 복병을 보내어 강변에 가로막고 벌여 서서 구원병을 막았습니다. 9일 새벽에 적 2천여 명이 단성으로 향하는 길에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하고 한 떼는 단계현(丹溪縣)으로 향하다가 합천 가장 김준민에게 쫓기고, 한 떼는 단성 읍내를 분탕질하다가 역시 김준민에게 쫓겼으며, 한 떼는 살천(薩川)으로 향하다가 정기룡(鄭起龍)ㆍ조경형(曺敬亨)에게 쫓겨서 해가 저물자 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대로 남아 있던 왜놈들은 총을 쏘고 화살을 발사하여 종일토록 그치지 아니하고 흙을 지고 나르는 역사를 전일에 비하여 더욱 급하게 하였습니다. 적이 산대에 올라 무수히 총을 쏘자, 성중에서는 현자총통을 세 번 쏘아 대 엮은 것을 뚫고 또 큰 목판을 뚫었으며 한 화살은 적의 가슴을 뚫어 즉사하니 그 뒤에는 적이 감히 다시 산대에 오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복병장 정유경이 군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진현으로부터 사천(沙遷)에 이르러 벌여 서서 열병(閱兵)하고, 또 용사 20여 명을 뽑아서 남강 밖에서 분탕질하는 적과 대[竹] 베는 놈들을 무찔렀습니다. 본진에 남아 있던 왜놈 2백여 명이 강을 건너 추격하자, 정유경이 퇴각하였습니다. 이날 저녁 때에 적이 횃불을 들고 열을 지어 왕래하면서 서로 약속하는 형상을 하였습니다. 한 아이가 달아나 신북문(新北門)에 이르니 바로 본주에서 포로가 되었던 자였습니다. 불러들여 적의 실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일 새벽에 적이 힘을 합하여 성을 공격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10일 4경 초에 각 막사에 불을 밝히고 짐을 싣고 나가 거짓으로 퇴각하는 형상을 보여 우리 군사를 태만하게 하고 그런 뒤에 불을 끄고 가만히 돌아왔습니다. 4경 중에 두 떼로 갈라서, 한 떼는 1만여 명이 동문 새 성에 육박하여 각기 긴 사닥다리를 가지고 혹은 방패를 지고 혹은 향교에 제사지내는 대그릇을 쓰며 혹은 멍석을 베어 머리를 싸고 혹은 쑥대나 엮은 풀로 관을 만들어 써서 화살과 돌을 피하고, 3층의 가면을 쓴 풀 인형을 만들어서 차례로 사닥다리에 올라 우리 군사를 속였습니다. 그런 뒤에 적이 성에 기어오르고 말 탄 왜놈 1천여 명이 뒤를 따라 돌진하면서 비 오듯이 탄환을 쏘아대고 뇌성과 같이 소리를 지르며 장수 왜놈은 말을 달려 횡행하면서 칼을 휘둘러 독전(督戰)하였습니다. 목사는 동문 북격대(北隔臺)에 있고 판관은 동문 옹성(擁城)에 있어 활 쏘는 군사를 거느리고 결사적으로 싸우는데 혹은 진천뢰와 질려포를 쏘고 혹은 큰 돌을 던지며, 혹은 불에 달군 쇠[火鐵]를 던지고 혹은 짚을 태워 어지럽게 던지며 끓는 물로 적에게 끼얹으니, 적이 물밤쇠[菱鐵]을 밟거나 활에 맞고, 돌과 화살에 맞아 죽거나 머리와 얼굴이 불에 탄 자가 수없이 많았으며, 또 진천뢰에 부딪쳐 엎어져 죽은 것이 삼[麻]처럼 쌓였습니다. 성 동쪽에서 한창 싸울 때에 또 한 떼 1만여 명이 어둠을 타고 가만히 와서 돌연히 구 북문(舊北門) 밖에 이르러 긴 사닥다리를 가지고 방패를 짊어지고 형세가 장차 뛰어들 듯하였는데, 성가퀴를 지키는 군사들이 모두 놀라 무너졌다가 전 만호 최덕량(崔德良), 목사의 군관(軍官)인 이납(李納)ㆍ윤사복(尹思復)이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싸웠습니다. 무너졌던 군사가 다시 모여 방법대로 적을 방어하기를 동문과 한결같이 하여 노약과 남녀까지도 돌을 던지고 불을 던져 성중에 기왓장 돌과 초가지붕이 거의 다 떨어졌습니다. 한참 만에 동방이 밝으려 하자 적세가 조금 누그러지는데 목사가 왼편 이마에 탄환을 맞아 정신을 잃었습니다.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이 북격대를 대신 지키며 활 쏘는 군사를 거느리고 용맹을 떨쳐 힘껏 싸워서 쌍견마를 탄 왜장을 죽였고, 4경부터 교전하여 진사시(辰巳時)나 되자 적이 비로소 퇴군하였습니다. 두 곳 싸움터에 죽은 자가 수없이 많았는데 적들이 곧 송장을 끌고 가서 촌락에서 불 속에 태웠으므로 머리를 벤 것은 겨우 30여 개에 불과하였습니다. 적이 물러간 후에 촌락에 불태운 뼈가 곳곳에 쌓여 있고 장수 왜놈의 송장은 농에 넣어 가지고 메고 갔으며 포로가 되었던 사람과 우마를 버리고 창황히 도망해 가는 데도, 목사가 총알에 맞고 장수와 군사가 힘이 다되었으며 또 계속 응원하는 군사가 없어서 추격해 다 죽이지를 못하였으니 지극히 통분합니다. 목사는 난이 난 후에 국사에 마음을 다하여 염초(焰硝) 5백 10여 근을 미리 제조하여 두고 왜놈의 제도를 대략 모방하여 총통 70여 자루를 새로 제조하여 경내(境內)에 재간 있는 사람들을 따로 뽑아서 상시로 총 쏘기를 익혔습니다. 그 때문에 싸움에 임하여 화약을 물 쓰듯 하고 섶 속에 화약을 싸서 성 밖에 던지며 연달아 총을 쏘아 큰 적을 꺾었습니다. 대개 온 나라가 붕괴된 나머지에 한 사람도 감히 성을 지킬 계책을 못하는데, 목사만은 능히 외로운 성을 굳게 지켜서 바깥 응원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능히 큰 적을 물리쳐서 한 도를 보전할 뿐만이 아니라 또 호남을 보호하여 적으로 하여금 내지에 달려들지 못하게 하였으니, 목사의 공은 이것이 큽니다.
○ 처음에 진주가 여러 진(陣)에 급함을 고하였더니 정인홍(鄭仁弘)이 가장 김준민과 중위장(中衛將) 정방준(鄭邦俊) 등으로 하여금 스스로 정예한 사수(射手) 5백여 명을 선택하게 하여 달려 보내어 구원하다. 본월 9일에 단계에 이르니 해가 이미 뜨다. 큰 마을 하나가 시내의 동편에 있는데 앞에 대숲이 있다. 사람도 피곤하고 말도 피곤하므로 머물러 밥을 짓다. 전라 우의병대장 최경회(崔慶會)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단성에 머물러서 합천 군사와 합세하여 진주로 전진하려 하다. 단성의 피란하는 남녀들이 산에 올라서 바라보고는, “절라도 대군이 본현에 머물러 있고 또 합천 군사가 잇달아 올 것이니 다행히 잠깐이나마 죽음을 면하겠구나.” 하다. 밥 먹은 뒤에 장수와 군사들이 출발하니 짐수레가 앞에 섰다. 몇 리쯤 가자 앞서 가던 자가 뛰어와 외치기를, “많은 적이 여기 이르렀다.” 하였다. 준민이 놀라 일어나 보니 단성 청고개(靑古介)로부터 단계에 이르기 까지 산과 들의 촌락을 일시에 분탕질하여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자욱하고 포성이 땅을 진동하다. 준민 등이 불의에 이것을 당하자 사세가 심히 창황하여 몸을 날려 말에 뛰어올라 대숲 밖에 나가서 아래위로 달리며 충돌하는 즈음에 군관 윤경남(尹慶南) 등이 또한 달려와서 크게 외치기를, “두 장수가 이미 포위 속에 들었는데 너희들은 와서 구하지 않느냐.” 하다. 이에 5백여 명이 고함을 치며 함께 나가니 적이 우리 군사를 바라보고는 대숲 속으로부터 차차로 나왔는데 큰 군사의 매복이 있을까 겁내어 접전한지 얼마 안 되어 퇴각하여 시냇물을 건너다. 두 진이 상대하고 있는 곳에 화살은 비 오듯 하고 총소리는 뇌성과 같다. 적이 아직도 용감히 싸우고 퇴각하지 않다가 마침 승의장(僧義將) 신열(信悅)이 군사를 거느리고 잇달아 이르매 세력이 더욱 장하여 사기(士氣)가 절로 배나 되어 일시에 어울려 공격하니 적이 드디어 퇴각하여 달아나다.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청고개에 이르니 적이 기를 버리고 산으로 달아나다. 또 서쪽으로 읍내를 바라보니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가리고 총소리는 폭죽과 같다. 정방준이 준민을 불러 말하기를, “저것은 반드시 전라도 군사가 적과 싸우는 것이니 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곧 단성으로 달려가니 엎어진 송장이 길에 서로 잇달았다. 전라 의병장은 이미 붕괴되어 물러가고 남은 적이 뒤에 떨어져서 분탕질을 하고 있다가 우리 군사가 돌진하는 것을 보고 관망하며 물러가다. 군사들이 물을 길어 창고의 불을 끄고 불에 타다 남은 쌀 6백여 석을 수합하여 관인(官人)을 불러 지키게 하고 이튿날 진양(晉陽)으로 진군하니, 성은 이미 포위가 풀려 있다. 성중 사람들이 모두 합천 군사에게 말하기를, “어제 적이 갑옷을 버리고 칼을 끌고 달아나는 자가 많더니 이제 곧 퇴각해 도망하기에 우리들 생각에, ‘아마도 모처(某處)에서 접전하는 이들이 그놈들의 예기(銳氣)를 꺾어서 그런 것이리라.’ 하였더니, 반드시 그대들이었구나.” 하다. 준민 등이 추격하여 함안까지 이르렀다가 미치지 못하고 돌아오다. 최강(崔崗)ㆍ이달(李達)이 또한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반성(班城)에 이르러 머리 20여 개를 베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왜적이 당초에 국경에 침범할 때에 크게 성세를 떠벌리고 척후병을 곳곳에 나누어 보내 우리 군사로 하여금 서로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고, 깊은 산골까지 수색한 연후에 각처의 작은 진을 철수하고 부산(釜山)으로부터 경성에 이르기까지 다만 일로(一路)에 거진(巨鎭)을 벌여 놓다. 사방으로 흩어져 죽이고 약탈하는 데 군사가 부족하므로, 경상도에서 점거한 것이 좌도에는 오직 부산ㆍ동래(東萊)ㆍ경주(慶州)ㆍ밀양(密陽)ㆍ청도(淸道)ㆍ대구(大丘)ㆍ영천(永川)ㆍ영산(靈山)ㆍ창녕(昌寧)ㆍ현풍(玄風) 등 열 고을이요, 우도에는 오직 웅천(熊川)ㆍ김해(金海)ㆍ창원(昌原)ㆍ진해(鎭海)ㆍ고성(固城)ㆍ성주(星州)ㆍ금산(金山)ㆍ개령(開寧)ㆍ선산(善山)ㆍ상주(尙州)ㆍ함창(咸昌)ㆍ문경(聞慶) 등 열두 고을인데, 한 곳에 유둔한 왜놈은 적으면 수백 명을 밑돌지 아니하고 많아도 1천 명을 넘지 않거늘 오직 고성 근처에 모여 유둔한 적이 거의 수천에 가깝다. 이것으로 헤아리건대 영남의 적은 반드시 5만 명에 불과할 것이요, 그 장기(長技)는 조총ㆍ단총에 불과하여 엄습하는 외에는 다시 다른 재주가 없다. 밤이면 갔던 놈들이 도로 와 길을 점차 가득 채워서 수효가 많다는 것을 보이는데, 우리 군사는 왜적 열 놈만 보면 으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하여 적을 토벌할 뜻이 없고 나머지 6도도 그렇지 않은 데가 없거늘, 하물며 평안ㆍ경기ㆍ함경 3도의 왜놈 수효가 이 도보다 두서너 배가 되는데 우리 군사의 힘은 이 도보다 약하여 소문만 듣고는 먼저 무너져서 방어할 뜻이 없으니 온 나라가 함몰됨이 괴이할 것도 없다. 아! 통분하도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각 진에 복수하기를 타이르는 교서를 내리니, 다음과 같다.
왕세자는 이렇게 말하노라. 이 왜적과 한 하늘 밑에서 함께 살 수 없고, 만세에 잊을 수 없다. 우리 종묘사직을 폐허로 만들고 우리 승여(乘輿 임금의 행차)를 거리로 파천하게 하였으며, 우리 능을 범하고 우리 도시와 촌락을 잿더미로 만들어서, 우리 조종께서 수백 년 길러 놓은 백성을 도륙하고 닭 울고 개 짖으며,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던 강토 천 리를 하루아침에 갈대와 띠풀로 가득 차 쓸쓸하게 만들었으니, 말이 이에 미치매 문득 살기를 잊고 창을 베게삼아 밤새도록 잠 못 든다. 슬프다 ! 우리 장수와 군사들아! 누가 부모가 없으리오. 이끌고 잡고 받들고 업어서 오직 오래 살지 못할까 걱정하고, 또한 부부가 있어 죽으나 사나 함께하기로 맹세하였으며, 형제는 사랑하여 손이나 발과 같고 아들 딸 어린 것은 살펴 주는 것인데, 난리가 극도에 이르러 국가가 함몰되어 혹은 칼날에 걸리어 피가 풀밭을 적시고 혹은 포로로 잡혀 참혹함과 악독함을 당하였으며, 더럽히고 욕을 보여 인도(人道)가 땅에 떨어졌다. 지금 이 오랑캐는 나라의 원수일 뿐 아니라 너희의 사사 원수다. 복수하겠다는 일념을 밥 먹고 숨쉬는 동안인들 어찌 잊으랴. 내가 듣건대 옛말에 어버이의 원수는 날을 넘기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는 마땅히 하늘을 부르짖고 땅을 두드려 통곡하면서 날을 넘기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인데 세월이 이럭저럭 지나 한 해가 또한 저물었다. 슬프다! 너희들의 마음을 나는 헤아린다. 창을 잡고 싸움에 따라 다니며 피를 뿜고 울음을 삼키어 기회를 살펴 분발하여 이적과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리라. 속담에 이르기를, “새끼 가진 개는 범을 습격하고, 알을 품은 닭은 삵괭이를 친다.” 하였으니, 지극한 정이 발동하는 바에 강함과 약함이 아주 달라진다. 비겁하던 사나이도 의를 사모하면 용맹이 맹분(孟賁 옛날 중국의 용사)보다 지나치는 것이니, 이것으로써 적을 치면 누구인들 한 사람이 백 놈을 당해내지 못하랴. 사방에 둘러있는 3백 고을 중에 원한을 품은 자가 적어도 만 명을 밑돌지 않을 것이니 한 사람이 1백 명을 당하면 진실로 1백만의 강적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곰을 두들기고 표범을 잡는 장수와 뇌성처럼 무섭고 바람처럼 날랜 군사가 또 따라서 몰아줌이랴. 내가 감무(監務)의 명을 받고 편안히 처할 겨를이 없이 제군들과 함께 난을 평정하기를 원하고 이에 천병이 국토를 제압하였으니, 소탕할 것이 기약이 있다. 그러나 한 집의 원수를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스스로 손을 대지 않는다면 이것은 효자 인인(仁人)의 마음이 아니요, 예의(禮義)의 나라가 장차 오랑캐가 될 것이다. 나는 이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사람에게 크게 고하노니 너의 마음을 가다듬고 너의 기운을 떨쳐서 각자 제 원수를 갚고 사람마다 힘껏 싸워서 평행장(平行長)의 머리를 베어 음기(飮器)를 하고 또 현소(玄蘇)의 피를 가지고 흔고(釁鼓)한다면 어찌 마음에 쾌하지 않겠는가. 아! 인(仁)한 이는 어버이를 버리지 않는 것이며 의로운 이는 임금을 뒤로 하지 않는 것이니, 《춘추(春秋)》에는 백대의 법을 밝혀 원수 갚음이 위대하였다. 충성과 효도가 두 가지 길이 아니니 기특한 공을 일찍 세우라.
○ 전라 좌의병장 임계영(任啓英)의 상소는 다음과 같다.
왜적의 화가 어느 시대엔들 없었으리오마는 뜻밖에 흉하고 독한 것들이 성세(盛世)에 나왔으니 나라가 수렁에 빠진 욕은 참혹하여 차마 말할 수도 없나이다. 파천하신 행차가 지금까지 체류하였으나 한 사람도 칼날을 내밀고 적에게로 향하는 이가 없고 각 고을은 소문만 듣고 달아나서 인심이 붕괴된 것이 물이 가로 흐름과 같으니, 만약 의를 선창한 모든 신하들이 한(漢)을 생각하는 마음을 고동시켜 넘치는 내를 막아 물길을 돌리지 않았더라면 나라가 나라로 남아 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신은 멀리 바다 구석에 처하여 하늘을 깁기[補天]에 힘이 부족하여 원수 놈들과 한 하늘 밑에서 살기를 모두 부끄러워하면서도 죽을 처소를 얻지 못하여 서쪽을 바라보고 통곡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적의 화가 호남에 침입하자 의장신(義將臣) 고경명이 금산(錦山)에서 패하여 죽자, 한 도의 선비와 백성의 마음으로 흐느끼고 간담이 서늘하여 새처럼 보고 짐승처럼 숨쉬면서 적의 칼날이 짓밟는 것을 앉아서 기다렸습니다. 신은 그윽히 생각건대, 이때를 당하여 요행히 살 수 없으니 다같이 죽을 바에는 차라리 나라에 목숨을 바치리라 하였더니, 고을 사람 아무 아무 등이 먼저 신의 마음을 알고 의론이 서로 합하여 고을의 자제들을 권면하여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빠진 장정을 불러 모집하여 향병(鄕兵) 2백여 명을 얻었으며, 장흥(長興)의 아무 아무 등이 또한 정예한 군사 2백여 명을 모집하여 와서 신에게 소속하고 좌도를 거쳐 적의 초소로 향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다 위의 교만한 장수와 게으른 군사, 토호 백성과 비겁한 사나이들이 모두 유병(儒兵)을 오활(迕闊)하다 하여 헐뜯는 자도 있고 방해한 자도 또한 많아서 기꺼이 서로 도와주려고 하지 않으니, 군량과 무기를 사사로이 판출하기가 심히 군색하였습니다. 행하여 남원에 이르자 부사 윤안성(尹安性)이 의거를 장려하여 마음을 다해 주선하여 부중의 선비들이 자원하여 날라다 주는 자가 약간이었고 옆 고을의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호응한 연후에 양식이 부족함이 없고 병력이 차차 강화되었습니다. 전 부사 최경회 또한 경명의 흩어진 군사를 수합하여 우도로부터 나오매 신이 더불어 합세하여 장수현(長水縣)에 함께 주둔하여 혹은 기병(騎兵)으로 침략하고 혹은 달려 들어가 충돌하면서 어지러이 쏘니 무주(茂朱)의 적이 지탱하지 못하여 먼저 도망하였습니다. 신이 그들이 반드시 금산의 적과 서로 합쳐서 도망할 것을 헤아리고 부장(副將) 장윤(張潤)을 보내어 선봉으로 달려가게 하였더니 그날 밤중이 못 되어 적이 이미 도망하였고, 신이 보낸 장사(壯士)들 1백여 명이 추격하여 경계 밖으로 나가 영동(永同) 등지에까지 이르렀으나 흉적의 자취가 이미 멀어 추한 종자들을 섬멸하지 못하였으니, 실로 신들이 군사를 쓰는데 기회를 잃은 죄는 만 번 죽어도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방을 돌아보매 모두 비린내에 물들었고 홀로 이 호남이 겨우 완전히 보존되었으니, 아마도 하늘이 우리나라를 돌보아서 우리가 회복할 터전을 열어준 것입니다. 신이 곧 마땅히 군사를 정돈하여 들어가서 승여를 호위할 것이나, 다만 생각건대 이 지방이 비록 서울에서 머나 군사며 말이며 부고(府庫)를 운반하는 근본이니 한 나라에 있어서 관중(觀中)과 같은 관계입니다. 그런데 지금 병사(兵使)는 군사를 끌고 멀리 갔으며 순찰사는 군사를 전부 가지고 근왕하였으므로 적이 허한 틈을 탈는지 흉한 꾀를 헤아리기가 어렵거늘, 하물며 경상도 우감사 신 김성일이 급히 글을 보내어 위급한 사정을 말하기를, “김해ㆍ부산의 적이 합세하여 멀리 몰아 이미 단성을 함락시키고 호남의 경계에 가까이 왔다.” 하기로, 신이 부득이 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 나아가서 요해지를 끼고 싸움도 하고 방어도 하여서 한편으로 영남의 응원을 하고 한편으로 호남 경계의 충돌을 방어하여 국가의 중흥을 만에 하나라도 보존하려 하나이다. 신이 매양 교서를 받들어 읽으매, 울며 피를 뿌려서 마음은 더욱 붉어지고 한 몸은 더욱 가벼우나 문전에 박두하는 왜적 때문에 서쪽으로 향하여 군부(君父)의 위급함에 달려가지 못하니 오활하고 늦춘 죄는 만 번 죽어도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다를 향하여 흐르는 물은 일만 번 굽이를 꺾어도 반드시 동쪽으로 가는 것이니 신의 몸은 비록 먼 데 있어도 마음은 왕실에 있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장차 한 지방이 염려 없는 사세를 본 연후에 호남ㆍ영남 여러 의병과 힘을 합하고 꾀를 같이하여 길에 걸리는 적을 소탕하고 경성을 수복하려는 것이 신의 망령된 계책입니다. 신은 일개 오활한 선비로 본시 재주와 책략이 부족하나 구구히 이 의거를 하는 것은 뜻이 바다를 메우려는 새와 같고 어리석기가 산을 옮기려는 사나이보다 더하여 충성의 격동된 바에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요,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돌아보지 못하는 바입니다. 호걸의 선비들로 하여금 소문을 듣고 계속해 일어나게 하여 인심을 진정시키고 적의 기운을 탄압하여, 하늘을 떠받치고 해를 목욕시켜 중흥을 도우겠다는 것이 또한 신의 망령된 계책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조금이나마 굽어 살피소서. 행재소(行在所)가 멀고 먼 데 난리로 막히고 떨어져서 간절한 정성을 아뢰지 아니할 수 없어 삼가 종사관 신(臣) 모를 보내어 소를 받들어 올리니 통곡하고 눈물이 흘러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 8도에 교서를 내려 방학(放學)하게 하다. 이보다 먼저 병술년(1586, 선조 19)년에 지방 장관 밑에 제독(提督)을 두어 부속된 향교를 순시하며 독려하여 날로 학문을 힘쓰게 하였더니, 이때에 이르러 교훈하는 관원을 모두 혁파하고 봄ㆍ가을의 석전(釋奠)을 폐하며, 유생을 몰아서 군대에 편입하고 교노(校奴)를 관노(官奴)로 삼다.
○ 태인(泰仁)의 전 주부 민여운(閔汝雲)이 향병 2백여 명을 모집하여 웅(熊) 자로써 장표(章標)를 삼고, 기계를 마련하고 양식을 마련하여 영남으로 향하다.
○ 임계영(任啓英)이 거창에 주둔하니, 최경회가 군사를 끌고 잇달아 이르러 장윤(張潤)ㆍ고득뢰(高得賚) 등을 보내어 본도 의병장 김면(金沔)과 더불어 협력하여 개령의 적을 토벌하여 베고 사로잡은 것이 많다.
○ 체찰사 정철(鄭澈)이 아산(牙山)에 배를 대었는데 전라 감사 권율이 지나는 길에 찾아가 만나서 근왕하러 간다는 뜻을 말하였더니, 정철이 말하기를, “행재소는 길이 멀어 도달하기가 쉽지 않고 또 임금의 기체가 평안하시며, 천병이 크게 이르러 군사는 많고 먹을 것은 적어 자용(資用)이 심히 군색하니, 먼 지방의 군사가 가벼이 나아가지 말 것이요 맡은 지방으로 물러가 보존하는 것이 오늘날의 상책이다.” 하다. 권율이 듣지 않고 전진하여 수원부의 독성(禿城)에 진을 치다.
○ 소모어사(召募御史) 변이중(邊以中)을 충청도ㆍ전라도에 보내어 군사를 모집하여 근왕하게 하다. 이중은 호남 사람이다. 서해를 거쳐 본도로 향하다.
○ 전라도 해남의 진사 임희진(任希進)과 영광(靈光)의 전 첨정(僉正) 심우신(沈友信) 이 각기 향병 수백 명을 뽑아서 군량과 기계를 마련하여 아울러 영남으로 달려가다. 희진은 표(彪) 자로 장표를 삼고, 우신은 의(【義】)자로 장표를 삼다. 이때 전후에 의병을 일으킨 이가 호남에 무릇 28여 장수요 8도가 모두 그러하였는데, 나머지 소소하게 스스로 모집한 장수들은 이루다 기록할 수도 없다.
○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을 익산 군수(益山郡守)로 승진시키다. 이현(梨峴)에서 승전한 보고가 올라오자 또 충청 조방장(助防將)으로 승진시키고 절충 장군(折衝將軍)으로 가자하다.
○ 적괴(賊魁) 평수길(平秀吉)이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왜장들에게 말을 전하기를, “한 해가 이미 저물었는데, 겨울이 매우 차니 추위를 막을 준비를 어떻게 하는가?” 하다. 청정(淸正) 등이 답하기를, “겨울 추위는 족히 걱정할 것이 없으나 다만 잔당(殘黨)인 전라도가 항거하여 굴복하지 않으므로, 내년 봄에는 협력하여 공격할 계책을 하고 있으니 급급히 군사를 더 보내어 원조하여 주소서.” 하다.
18일. 세 개의 해가 함께 나왔다. 국가가 함몰되고 임금이 파천하였으니, 변괴가 나오는 것이 괴이할 것도 없다.
○ 함경 감사 유영립(柳永立)의 온 가족이 포로가 되었으므로 윤탁연(尹卓然)으로 대신하였더니, 그 뒤에 영립은 도망해 왔는데 그 어머니는 아직 왜적의 수중에 있었다. 영립이 충성과 효도에 다 어긋났다 하여 매[鷹]를 왜적에게 바치고 어머니를 돌려주기를 빌었더니 적이 허락하였다 하다.
○ 전라 감사 권율이 수원 독성에 있으면서 행조(行朝)에 장계하니 임금이 찼던 칼을 풀어 전하여 보내 주며 말하기를, “모든 장수 중에 명령을 받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이 칼로 처치하라.” 하다. 이때에 경성의 적이 호남 군사가 또 수원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군사 수만 명을 내어 길을 나누어서 침범하였다. 권율이 성을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않으니 적은 오산(烏山) 등지에 세 군데 병영을 만들고 날마다 도전하였으나, 권율이 또한 응하지 않고 때때로 기병(奇兵)을 내어 매복시켰다가 쏘고 베니 적이 밤에 병영을 불태우고 도로 경성으로 들어가다. 바야흐로 적이 침범할 때에 권율이 날마다 체찰사에게 보고하여 본도에 응원병을 처하니, 정철이 전라 도사에게 급히 글을 보내기를, “흉한 적이 수원 땅에 가득하여 청회(靑回) 오산의 들판에 적진이 퍼져 있고, 독성 밑에는 날마다 싸우지 않을 때가 없다. 한 도의 주장이 바야흐로 적병의 포위 속에 있는데 사방을 돌아보아도 응원이 없으므로 날마다 3번씩이나 급히 보고하니, 본도의 관군과 의병을 성화(星火)같이 발송하여 수원성의 군사를 구하라.” 하다. 도사 최철견(崔鐵堅)과 변사정(邊士貞)ㆍ임희진 등 의병이 달려가 응원하다.
○ 평안도 묘향산의 늙은 중 휴정(休靜)이 중 1천여 명을 모집하고 유정(惟政)으로 부장(副將)을 삼아 양식과 기계를 마련하여 적을 토벌하다.
○ 진주 목사 김시민이 졸하다. 시민이 총알에 맞은 뒤로부터 그자신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더욱 국사만을 생각하여 머리를 들고 때때로 북쪽을 향하여 눈물을 흘렸는데, 총알에 맞은 데가 낫지 않아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군중에서는 적이 알까 겁내어 숨기고 발상(發喪)하지 않다. 그러나 부모의 상을 당한 것 같아서 곡하는 소리가 서로 들리었고, 1년이 넘도록 남녀들이 소찬을 먹다. 행상(行喪)이 함양(咸陽)에 이르자 조정에서 표창하여 우병사로 승진시킨 것이 알려지다. 감사의 장계로 인하여 서예원(徐禮元)으로 대신 목사를 삼다. 그 뒤에 포로가 된 사람으로 왜국에 있는 자가 우감사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왜적이 매양 진주 목사를 일컫고 또 그때의 왜장으로 우시등원랑(羽柴藤元郞)이라는 자는 수길의 종질로서 병력이 가장 강하였는데, 패하여 창원으로 도망가서 분하고 한스러움이 병이 되어 죽었다.” 하다.
○ 천조의 병부(兵部)에서 군사를 내어 조선을 구할 것을 아뢰어 청하고, 또 말값[馬價]은 2만 냥을 청하여 참장(參將) 곽몽징(郭夢徵)으로 하여금 본국의 사신 신점(申點)과 함께 조선에 가져다주다. 황제의 성지를 받드니 그 내용에, “조선이 본시 공순함을 바쳐서 우리의 속국이 되었으니, 왜적의 침략을 받고 있는데 어찌 앉아서 보랴. 요동진무관(遼東鎭撫官)을 시켜 곧 정예한 군사 2지(枝)를 보내어 응원하게 하고 인하여 은 2만 냥을 내어 그 나라에 가져가서 군사를 먹이게 하며, 대홍저사(大紅紵絲) 안팎 두 벌로 국왕을 위로하라.” 하다. 병부에서 참장 낙상지(駱尙志)를 보내어 남방 군사를 거느리고 강 언덕에 둔치다. 본국에서는 계속하여 심희수(沈喜壽)ㆍ윤근수(尹根壽) 등을 보내어 속히 요광(遼廣)에 구하여 주기를 청하느라고 행차가 길에 잇달았으나 대병(大兵)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또 정곤수(鄭崑壽)를 보내어 북경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다.
○ 적개의병장(敵愾義兵將) 변사정(邊士貞)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향하다. 이보다 먼저 사정이 단기(單騎)로 달려가 정철을 보았더니, 정철이 군과 이잠(李潛)을 내주며 부장으로 삼게 하다. 사정이 더불어 같이 돌아와서 부장으로 삼다. 이때에 이르러 행군하여 공주까지 이르렀다가 체찰사의 분부로 인하여 돌아와 옥천으로 가서 군사를 주둔하고 적을 토벌하다.
○ 충청도의 노상(老相) 심수경(沈守慶)이 의병을 일으켜 조대곤(曺大坤)으로 부장을 삼고, 건의(健義)로서 장표를 삼다. 대곤이 먼저 경상도 우병사로 있다가 탈직(奪職)되고, 김수(金睟)를 따라 행조로 가다가 충청도에 이르렀는데 수경이 만류하여 부장을 삼다. 그 뒤에 행조에서 건의장(健義將)으로 8도 의병 도대장을 삼고 인(印)과 어도(御刀)를 주다.
○ 천장(天將) 조승훈(祖承訓)ㆍ사유(史儒) 등이 평양[箕城]을 포위하여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가다. 처음에 승훈 등이 의주로부터 순안(順安)에 진군하여 적의 형세를 알지 못하고 빨리 교전하려 하였으나, 다만 군사가 적으므로 잇달아 올 구원병을 기다리다. 이때에 이르러 승훈이 군사를 4초(哨)로 나누어 군대마다 각기 우리나라 사람 1백 명을 시켜 길잡이를 삼고, 사유는 선봉장이 되어 밤에 60여 리를 행군하여 새벽에 평양에 도달하여 성문을 쳐서 부수는데 고함소리가 하늘에 뻗치고 화살과 돌이 비 오듯 하다. 적병이 거짓으로 대동문(大同門)으로 나오자 사유가 급히 성에 들어갔더니, 행장 등이 군사를 독려하여 맞아 싸워서 남김없이 마구 죽이고 사유도 거기서 죽다. 조승훈 등이 남은 군사를 수합하여 달아나 요동으로 돌아가다.
○ 강우(江右)의 사우(士友)에게 통문한 것은 다음과 같다.
슬프다! 우리의 종묘사직이 잿더미가 되고 폐허가 된 지가 지금 몇 달이며, 우리 성상께서 평안도로 파천하여 계신 지는 지금 몇 달인고. 난이 처음 일어났을 때에 속으로 생각하기를, ‘추한 오랑캐들이 우리의 예악 문물을 더럽혔으니, 하늘이 장차 앙화내린 것을 뉘우쳐 인심을 계발해 줄 것이다.’ 하였는데, 저놈들은 이미 우리의 동족이 아니요, 또 죽이고 약탈하기를 함부로 하니 사람들이 누가 한(漢)을 생각하지 아니하리오. 요망한 기운을 소탕하여 양경(兩京 경성과 평양)을 평정함이 마땅히 오래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니, 슬프다! 사직의 신하로 능히 봉천(奉天)의 거가(車駕)를 돌아오시게 하고 간성(干城)의 장수로 능히 이(李)ㆍ곽(郭)의 충성을 나타내는 자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자고로 변란의 때에는 반드시 세상에 대처할 인재가 있는 것인데 지금에는 유독 그렇지 못한 것은 무슨 연유인가. 슬프다! 종거(鍾簴 악기)가 땅에 던져졌고 준조(尊爼 제기)가 먼지를 뒤집어썼으니, 하늘에 오르내리는 조종의 신령이 떠돌아 어디 의탁할꼬. 원수의 적이 오히려 떨치니, 섬멸할 날이 기약이 없다. 주상께서 창을 베개 삼는 뜻이 어찌 잠깐인들 조금이라도 해이하리오. 근자에 내리신 교서를 엎드려 읽으매 끝에 이르기를, “땅의 한계는 이미 다되었는데 나는 장차 어디로 돌아가랴. 돌아가고파 하는 한 생각이 물의 흐름과 같도다.” 하셨으니, 무릇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라면 누가 비감하여 눈물을 뿌리지 아니하랴. 인홍(仁弘) 등은 어리석은 생각에 격동되어 스스로 힘을 헤아리지 않고 창의하여 군사를 모아 회복을 도모하였으나 군사를 거느린 지 반 년에 근근이 한 구역만을 지키고, 아직도 유둔한 적을 섬멸하지 못하니, 슬프고 분함이 더욱 괴로워 마음이 타는 듯하도다. 지금 임계영(任啓英)ㆍ최경회(崔慶會) 두 사람이, “적을 토벌하는 데는 처음부터 피차의 구별이 없다.” 하고, 정예한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가까운 땅에 와서 주둔하면서 인홍 등과 더불어 성주ㆍ개령의 적을 치고자 하여 열렬한 의기가 보고 듣는 이를 감동시키니, 실로 하늘이 국가를 도와 강토를 회복할 징조로다. 다만 군량이 부족한데 판출할 계책이 없으니, 저 수천의 군사를 무엇으로 먹일꼬. 영남 50여 고을이 모두 적지 천리(赤地千里)가 되었고 오직 강우 6, 7고을이 추수가 좀 잘되었으나 관에서 새로 팔아 들인 곡식은 다만 우리 군사만 먹여도 오히려 넉넉지 못할까 염려되거늘, 하물며 호남의 군사에게 공급할 수 있으리오. 옛글에 이르기를, “양식이 부족하면 굳게 지킬 땅이 없다.” 하였으니, 양식과 물자가 계속 공급되지 못하면 비록 호남의 의병이라도 붕괴되어 흩어짐을 면치 못할 것이니, 회복을 하려는 자로서 어찌 군량을 판출하기를 생각지 않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사우들은 이미 말 타고 활 쏘는 재주에 부족하니, 시석(矢石)의 전장에 달려가서 왜놈 하나라도 쏘아서 적개의 충성을 바치려 한다면 그만이지마는 만분의 일이나마 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군량을 공급하는 일일 것이다. 엎드려 원하노니, 제군들이 동지에게 두루 타일러서 성의를 다하여 곡식을 낸다면 적은 것을 쌓아 많은 것이 되어 호남 군사의 수개월 양식을 공급하여 그들로 하여금 회복할 계책을 성취시키게 하리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임금이 욕되면 신하가 죽어야 하는 것이니, 제 몸도 족히 아끼지 못하거든 하물며 감히 그 재물을 아끼랴. 들은즉 호남의 의사들은 행재에 경비가 부족할 것을 생각하여 서로 권면하여 쌀 수만 석을 모아서 의곡(義穀)이라 이름하여 배에 싣고 수레로 운반하여 평안도로 보내 바치었으니 그 충성이 지극하다. 돌아보건대, 강우의 많은 선비들은 그 재력(財力)이 진실로 호남의 전성(全盛)함에 미치지 못하므로 비록 의곡의 장한 일은 본받지 못하지만, 감히 그 아름다운 뜻을 본받아 힘이 미치는 데에 따라서 바다에 한 방울의 물을 보태고 태산에 한 티끌을 보태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또 각 고을 중에 능히 선창하는 이가 있으면 같은 뜻으로 응하는 자가 절로 기약하지 않고도 이르는 이가 있을 것이다. 이러므로 감히 각 고을에 유사(有司)를 정하여 성명을 기록하였으니, 선창에 도가 있으면 그 지성이 귀신도 감동시키거늘 하물며 사람이리오. 하물며 의리를 아는 사람이리오. 제군은 힘쓸지어다. 정인홍 등.
○ 전라 좌의병장 임계영이 본도의 여러 의병에게 보내는 격문은 다음과 같다.
의거로 군사를 일으킴은 오로지 국가를 위하여 적을 토벌함이다. 흉하고 추한 놈들이 침범한 지 이제 이미 한 달이 넘었는데 관군이 여러 번 붕괴되어 소탕할 기약이 없다. 7도의 생령이 이미 어육이 되었고 다만 호남 한둘만이 겨우 보전함을 얻었으니, 지금 만약 기회를 잃으면 어찌 회복의 공을 성취하여 남아 있는 백성을 구하랴. 이때가 바로 의기 분발한 선비가 몸을 잊고 나라에 보답할 때이다. 우리들은 용성(龍城)으로부터 거창(居昌)에 와 주둔하여 바야흐로 영남의 여러 어진 분들과 협력하여 개령ㆍ성주 등지의 적을 치려 하나,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와 형세가 고단하고 힘이 약하여 바로 흉한 칼날을 치기가 어려워서 백가지로 생각하여도 상책을 얻지 못하고 있다. 공사(公私)가 모두 군색하여 앉아서 응원병만을 기다려도 아직까지 먼저 소리치는 장수가 이 경계에 이르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비록 반드시 까닭이 있다고야 하겠지마는 왜 그리 더딘지 또한 부끄러움이 없지 못하다. 개령의 험한 데가 지켜지지 못하면 운봉(雲峯)을 지키기 어렵고 운봉을 한번 잃으면 다시는 군사를 쓸 땅이 없을 것이니, 만일 흉한 오랑캐가 마구 몰아 빈다면 그 뒤에는 제군이 비록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가득 찬 적을 막으려 한들 피곤한 군사를 거느리고 굳센 적에게 항거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엎드려 원하노니, 제군은 각기 정예한 군사를 통솔하고 시기에 맞추어 와 응원하여 좌우의 어금니처럼 서로 의뢰하고 고기비늘처럼 잇달아 나온다면, 위엄이 미치는 곳에 적이 반드시 간담이 꺾어질 것이니 합세하여 일제히 치면 어떤 견고한 적인들 꺾지 못하리오. 비린내와 누린내를 소탕하고 씻어서 멀리 개령의 지경까지 막으면, 호남은 절로 완전하여져서 국가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의 기미가 이와 같은데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으리오. 다시 원하노니, 제군은 좋은 계책을 힘써 생각하여 후회가 있게 하지 말지어다. 임기응변은 병가(兵家)에서 귀히 여기는 바이며, 급한 데로 달려가 형세를 타는 것은 지사(志士)가 숭상하는 바이다. 만약 머뭇거리고 핑계하다가 늦어서 기회에 미치지 못하면 다만 모든 벗의 꾸짖음을 받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반드시 조정의 법이 있을 것이니, 두렵지 아니하리오.
○ 성주ㆍ개령에 점거한 적이 더욱 치성하므로 관군과 의병이 연달아 싸워 불리하다. 본도의 감사와 모든 의병장이 여러 번 체찰사에게 보고하여 간절히 구원병을 청하였더니, 정철이 운봉 현감 남간(南侃)과 구례 현감 이원춘(李元春) 등을 영장(領將)으로 삼아서 본도의 관군 5천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개령ㆍ성주의 전투를 돕게 하다. 남간 등이 해인사(海印寺)에 진군하여 영남의 여러 장수들과 협력하여 성주성을 치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왔는데 죽은 자가 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다.
○ 조정이 용만(龍灣)에 오래 체류하매, 성을 버리고 거둥한 것을 후회하니, 따라가 있는 여러 신하들이 모두 당시의 수상이던 이산해(李山海)에게 허물을 돌렸다. 이때에 산해가 강원도 평해군(平海郡)에 귀양가 있으면서 시를 지어 스스로 해명하기를, “성난 물결에 함께 빠지는 것은 자식이 달갑게 여기는 바이나, 몰래 업고 깊은 산으로 가는 것은 어떠한가. 백성들의 충의가 응당 무수하리니, 1려(旅)로 중흥함이 반드시 어려운 것만은 아니리.” 하다.
○ 영유(永柔)에서 무과를 보여서 무신 5천 명을 얻고, 또 의주에서 문무과를 함께 보여 문신 13명과 무신 6백 명을 얻다.
○ 휴정(休靜)을 가선대부로 승진시켜 팔도 승병 도총섭(八道僧兵都摠攝)을 삼고, 유정(惟政)은 절충장군으로 승진시켜 부총섭을 삼다. 적을 토벌하여 공이 많으므로 이런 승진이 있다.
11월. 경기 조방장 첨지 홍계남(洪季男)이 복수할 일로 격문을 전하니, 다음과 같다.
하늘이 돌보지 않아 난이 이와 같이 심하여 승여가 서쪽으로 파천하니, 만백성이 의탁할 데가 없도다. 눈을 들어 강산을 보매 그 누가 간장이 찢어지지 아니하랴. 이 땅에서 먹고 살고 혈기를 가진 자들은 모두 마땅히 창을 베개 삼고 모든 간고(艱苦)를 참으며 임금과 아버지를 위하여 복수해야 할 것인데, 내가 불행히 이 참혹한 처지를 당하여 흉한 칼날 아래 아버지와 형이 모두 목숨을 잃었으니, 어찌 구차스럽게 살기를 원하여 이 적들과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있겠는가. 인하여 생각건대, 원근의 선비와 백성들이 나와 같이 참혹하고 비통한 일을 당한 이가 반드시 백이나 천으로 헤아리는 정도에만 그치지 아니할 것이므로 이에 여러 장사들을 모집하여 한 군대를 만들어 복수하는 군사[復讐之軍]라고 이름 하여 부형의 깊은 원수를 갚으려 하는데, 제군들은 어떻다 하겠는지 모르겠다. 그대의 아버지ㆍ형ㆍ아내ㆍ자식이 참살당하여 해골이 들판에 드러나서 원흔이 의탁할 데 없이 황천이 아득한데, 우리가 홀로 편안히 물러나서 보통 사람과 다름없이 원수를 갚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황천에 혼령이 있건대 감히 내가 아들이 있고 아우가 있다 하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니 털끝이 쭈뼛하다. 제군들이 만약 이 말을 옳다고 한다면, 부형과 처자의 원수가 있는 이들은 마땅히 각기 징발하고 모집하여 무기를 준비하여 날짜를 약속하고 발정(發程)하여 종천(終天)의 원통함을 조금 풀어서 《춘추》의 의를 저버리지 아니함이 어떠하겠는가. 이상을 8도에 통문함.
○ 통문은 다음과 같다.
때를 불행히 만나서 가화(家禍)가 망극한데 불초한 고자(孤子 아버지가 죽은 상주의 자칭)는 초토(草土 상중에 있다는 뜻)에 병들어 아직도 이 적과 한 하늘을 이고 있었더니, 이제 첨지 홍계남(洪季男)이 먼저 대의로 주창하여 여러 도에 전해 타일러서 원통함을 참고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같이 적을 쳐서 원수 갚을 일을 도모하니, 사람의 마음은 같은 바이거늘 누가 흥기하지 아니하리오. 조완도(趙完堵) 군은 아사(亞使) 조헌(趙憲)의 아들이라 반드시 장차 아버지의 군사를 수습하여 호서에서 깃발을 들 것이다. 고자는 비록 못났으나 친상(親喪)이 이미 땅 속에 들어갔으니 이 몸은 죽어도 또한 유감이 없으므로 애통함을 무릅쓰고 병든 몸을 붙들고 본도의 동지 제군들과 군사와 기계를 모집하여 북으로 가서 적에게 죽을 계책을 하려 하노니, 엎드려 생각하건대, 여러분도 역시 즐겨 들을 바일 것이다. 슬프다! 구차히 살아 이에 이르매 윤기(倫紀)가 멸하였다. 다만 인품이 미천하고 힘이 약하여 일을 선창하지 못함이 한이더니, 홍공(洪公)이 이미 선창하였는데 고자 등이 또 손을 소매 속에 넣고서 따라 일어나지 않고 늙어서 방구석에서 죽는다면 장차 어찌 선인(先人)을 지하에서 뵈오리오. 홍공은 명성과 위엄이 이미 드러나서 그를 빌려 일할 만하고, 태인(泰仁)ㆍ진원(珍原)ㆍ장성(長城)의 3사군(使君 지방의 수령)이 또한 종천(終天)의 원통함을 품어서 이 적과 함께 살지 않기를 맹세하였으며, 도체찰상공(都體察相公)이 군사를 합쳐 원수 갚을 것을 허락하여 법규로써 구속하지 않기로 하였고, 군량과 무기도 뒷날의 걱정이 없으니, 다만 제공이 호응하느냐의 여하에 달려 있다. 아! 호남 사람이라야만 일을 같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생각하건대 서울에서 남장으로 적을 피해온 사람인들 어찌 부자 형제의 원수가 없겠는가! 비록 적의 칼날에는 요행히 면하였으나 풍상을 겪어 고생으로 부모를 잃은 이도 또한 이 적을 잊지 못하리라. 부모의 원수와는 한 하늘 밑에 살지 않으며, 형제의 원수와는 나라를 같이하지 않으며, 벗의 원수는 칼을 돌리지 않는다는 의리를 거듭 생각하라. 망친(亡親)께서 추성(秋城)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에 남방의 제공이 국사에 같이 죽기로 기약하여 향을 태우고 하늘에 맹세하여 대장으로 추대하였을 때에는 진실로 형제의 의가 있었으니, 불행히 공업(功業)을 마치지 못하였으나 제공이 어찌 차마 길가는 사람을 보는 것같이 하겠는가. 당일에 부하로 있던 무사들은 다 이미 의병으로 달려갔을 것이나 혹시 일로써 집에 있거나 혹시 진터에 나누어 수자리하는 자들은, 원컨대 고자를 불초하다고 하지 말고 추성에서 피를 마시며 맹세하던 것을 생각하여 큰일을 같이 성취시킴이 어떠하오. 제공들이 만약 가하다고 생각하거든, 엎드려 비노니 일제히 광주(光州)에 모여서 면대하여 맹세와 약속을 맺고 출병할 기일을 정하기를 지극히 비나이다. 월일에 전 임피 현감(臨陂縣監) 고종후(高從厚).
후록(後錄) 1. 비록 원수 갚는 데 뜻이 있어도 병들고 약하여 능히 종사하지 못할 자는 무기로 서로 부조하든지 혹은 건장한 종을 대신 보내든지 혹은 쌀과 베를 내든지 혹은 전마(戰馬)나 짐 싣는 말을 내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할 것이니, 하천(下賤)ㆍ빈궁(貧窮)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비록 한 되의 쌀 한 치의 쇠라도 모두 서로 부조함이 가하다. 아! 정위(精衛)가 바다를 메우고 한 삼태기로 산을 만드나니, 다만 그 정성에 있지 많은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1. 한갓 피난하여 온 사람으로서 앞장서서 맨손으로 서로 도울 만한 것이 없는 이는 혹은 자신이 군중에 따르든지 혹은 군량을 모집하되, 수수방관하지 말고 한 팔의 힘이라도 같이 들어줌이 어떠하오.
○ 전라 좌의병장 임계영이 거창으로부터 합천 해인사로 진을 옮겨서 영남 의병장 정인홍과 협력하여 성주의 적을 쳤다. 자세한 것은 계사년 5월 조에 나타나 있다. 최경회는 그대로 거창에 머물러서 김면과 개령에서 같이 일하다.
○ 심유경(沈惟敬)이 중국 조정에 갔다 와서 다시 평양의 적진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가 가지고 간 병부의 칙서에 중국 군사가 와서 구원한다는 말이 있다.
○ 복수 의병장 전 현령 고종후가 한 것은 다음과 같다.
제주(濟州)ㆍ정의(旌義)ㆍ대정(大靜) 3고을, 고성(高姓)ㆍ양성(梁姓)ㆍ문성(文姓) 3가 문호의 모든 어른에게 고하나이다. 옛적 태고 때에 인물이 생기기 전인 시초에 하늘이 세 신을 한라산 밑에 내려 보내시건대 고씨ㆍ양씨ㆍ부(夫)씨요, 또 아름다운 여인과 망아지ㆍ송아지의 종자를 함께 주어 한 지방에 터를 여는 조상이 되었으니, 이제에 이르러 인구의 번성함과 말을 많이 길러냄이 대개 세 신인의 덕택이 아님이 없습니다. 그 후세에 자손이 혹은 바다에 떠서 이리저리 옮겨 여러 곳에 흩어져 사니, 세상에서 이른바 제주 고씨, 제주 양씨는 모두 그 후손입니다. 고자의 선대도 고려 말기에 장흥(長興)의 고씨가 되었고, 부성(夫姓)의 후예는 지금에 문씨가 되어 처음의 부씨는 세상에 알려진 이가 없습니다. 지금 비록 분파(分派)가 되고 세계(世系)가 멀어서 경사와 조문에 통하지 않으나, 최초에 세 신인이 탄생한 상서와 형제의 의리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이목을 비추어 세상에서 말하는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게 칭도하는데, 하물며 그 자손이 된 자들이야 어찌 차마 그 옛날을 생각지 아니하고 원수 갚는 사람을 대번에 길가는 사람처럼 보겠습니까. 근일에 망친이 적이 경성을 범하고 7도가 붕괴된 초기에 먼저 의병을 선창하였는데, 몸이 흉한 칼날에 죽어 하루에 부자(父子)가 국사에 함께 죽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슬퍼하고 애석히 여겨 표장과 증직을 더하고 길 가던 사람도 듣고는 절로 눈물이 흐르거늘, 하물며 우리 한 뿌리에서 나온 사람이야 어찌 깊이 마음에 감동되지 않겠습니까. 불초한 고자는 비록 지혜와 재주가 얕고 짧아서 족히 망부(亡父)의 일을 이을 만하지는 못하나, 종천의 원통함을 씻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감히 사노(寺奴)의 군사를 거느리고 복수의 싸움을 하려 하나 본도에는 공사(公私)간에 파멸되어 군기와 전마(戰馬)를 마련할 도리가 없습니다. 생각건대 귀주(貴州) 3고을에는 물력(物力)이 홀로 완전합니다. 이에 격문을 가지고 사노와 대소 신민에 타이르는 동시에, 다시 생각한즉 동성(同姓)의 친함은 만세에 잊지 못할 의가 있으며 양성ㆍ문성 두 집도 또한 그 처음에 함께 생겼으니 한마디 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간담을 헤쳐 고하니, 소문을 듣고 의를 사모하기 바랍니다. 바라건대 3성(姓) 여러 어른들은 개연히 탄식하고 함께 불쌍히 여기시어 그 재력에 따라서 혹은 전마를 내고 혹은 힘을 합해 서로 부조하여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하여서, 위로는 하늘에 오르내리는 선조의 뜻을 맞추고 아래로는 고자 한 집의 죽은 이와 산 이가 바라는 바를 위로해 주심이 어떠하오. 정은 넘치고 말은 움츠러져 여쭐 바를 모르겠나이다. 《정기록(正氣錄)》에서 나옴.
○ 사노 의병장(寺奴義兵將) 전 현령 고종후가 운운한 것은 다음과 같다.
삼가 여러 고을 의병청 제공과 고을 안의 여러 군자에게 고하나이다. 고자는 저의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바야흐로 첨지 홍계남, 조아사의 아들 완도와 더불어 함께 복수할 계책을 도모하던 차에 도체찰 상공께서 또 사노장(寺奴將)으로 임명하셨습니다. 고자가 비록 지혜와 재주가 얕고 짧아서 망부의 뜻을 계승할 수는 없으나 종천의 원통함을 한번 씻지 아니할 수 없으므로 감히 금혁(金革)의 변례(變禮)를 좇아 이 적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지 않기로 맹서하니 여러 군자께서도 들으시면 또한 반드시 마음에 슬프게 여기실 것입니다. 생각건대 사노의 수효는 비록 명부는 만들었으나 늙고 약한 자를 추려내는 것을 오로지 아전들의 손에 맡기고 보니, 속이고 협잡하는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고자가 일을 일으키는 공효(功效)는 이것을 중하게 믿었는데 만약 징발한 것이 실지와 다르면 군사의 모양이 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제공께서 살피고 관리해 주시어 아전들로 하여금 농간을 하지 못하게 해 주시면, 건당한 자가 뇌물을 써서 빠질 수 없을 것이니 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자는 비록 사사 원수를 갚는 것이지만 실로 나라의 적을 치는 것이니, 여러 군자께서 그 수고를 꺼리지 않으시고 저의 뜻을 이루어 주시면 어찌 다만 고자 한 집의 죽은 이와 산 이가 감사할 뿐이겠습니까. 다시 바라건대, 조금이나마 불쌍히 여겨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후록. 오늘날 나라 안이 임금의 땅 아님이 없고 사해(四海)의 안이 모두 형제이니, 고자의 일을 사정(私情)으로나 공의(公義)로 헤아려 보건대 모두 예사로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각 고을 제공 중에 의병을 모집하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본래부터 친밀한 사이라야만 힘을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생각건대 널리 통문을 보내니 일정하게 지정한 데가 없으면 서로 미루고 사양할 염려가 있고 또 평소에 서로 아는 사이에는 한마디 간청이 없을 수 없으므로, 감히 의병청 제공 외에 또 따로 제공의 성명을 기록하면서 혹 비록 평소에 안면이 없이 명성만 서로 들은 분 또한 감히 외람되이 성명을 쓰니 협력해 함께 싸우기를 바라나이다. 《정기록》에 나오지 아니하였으니 상세히 알 수 없다.
○ 경상도 인동(仁同)의 향병장 장사진(張士珍)이 본현의 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죽다. 사진이 날래고 용맹스럽고 담략(膽略)이 있어 처음부터 열성으로 적을 토벌하다가 그의 아우 사규(士珪)가 전사하자 더욱 스스로 분발하여 별장(別將)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요해지를 지키다. 하루는 동현(同縣)에 둔쳤던 적 수백 명이 불의에 덮쳤는데 사진이 다만 용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힘껏 싸워 먼저 비단옷 입고 은 투구 쓴 적을 쏘고 머리를 베어 창 끝에 꽂으니 적도들이 부르짖고 울며 도망해 갔다. 사진이 이긴 기세를 타서 추격해 쏘아 죽인 것이 수없이 많았다. 그 후 10일 만에 왜놈이 군사를 있는 대로 몰아 다시 이르러서 먼저 10여 기병(騎兵)으로 유인하여 도전하므로, 사진이 또 돌격하여 적을 쏘매 활시위 소리에 응하여 적이 넘어지다. 드디어 이긴 기세를 타서 추격해 죽였는데, 매복하였던 적이 돌연히 사방에서 쏟아져 나와 사진이 앞뒤로 적에게 쌓여 좌편으로 치고 오른편으로 항거하다가 힘이 다하여 죽다. 일이 조정에 보고 되니 통정대부로 증직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정곤수(鄭崑壽) 등이 북경에서 돌아오다. 병부에서 황제에게 청하여 말값 은 3천 냥을 주어서 궁면(弓面)과 화약 등을 사서 운반해 가기를 허락하다. 고사(攷事)에서 나옴.
○ 황제가 병부시랑 정3품이다. 송응창(宋應昌)으로 경략군문제독(經略軍門提督)을 삼고, 동지(同知) 종1품이다 이여송(李如松)으로 제독군무(提督軍務)를 삼아서 남북 관병(官兵) 4만여 명을 통솔하여 와서 본국을 구원하다.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은 좌협대장(左協大將)이 되었는데 부총병 왕유익(王有翼)ㆍ왕유정(王維貞), 참장 이여매(李如梅)ㆍ이여오(李如梧)ㆍ양소선(楊紹先) 및 선봉 부총병 사대수(査大受)ㆍ손수렴(孫守廉), 참장 이영(李寧), 유격(遊擊) 갈봉하(葛逢夏) 등이 다 통솔되다. 부총병 이여백(李如栢)은 중협대장이 되었는데 부총병 임자강(任自强), 참장 이방춘(李芳春), 유격 고책(高策)ㆍ전세정(錢世禎)ㆍ척금주(戚金周)ㆍ주홍모(周弘謨)ㆍ방시휘(方時輝)ㆍ고승(高昇)ㆍ왕문(王問) 등이 모두 통솔되다. 부총병 장세작(張世爵)은 우협대장이 되었는데 부총병 조승훈(祖承訓)ㆍ오유충(吳惟忠)ㆍ왕필적(王必迪)ㆍ참장 조지목(趙之牧)ㆍ장응충(張應种)ㆍ낙상지(駱尙志)ㆍ진방철(陳邦哲), 유격 곡수(谷遂)ㆍ양심(梁心) 등이 다 통솔되다. 참장 방시춘(方時春)은 중군(中軍)이 되고, 비어(備禦) 한종공(韓宗功)은 기고관(旗鼓官)이 되며,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종5품이다. 유황상(劉黃裳)과 병부 주사(兵部主事) 정6품이다. 원황(袁黃)은 찬획(贊劃)이 되고, 호부 주사(戶部主事) 애유신(艾惟薪)은 군량을 감독하니, 특명으로 길을 배로 재촉하여 달려와 구원하게 하다. 고사(考事)에서 나옴.
○ 성지(聖旨)로 유격 장기공(張奇功) 등을 시켜 은을 내어 군량과 마초를 사서 의주로 옮기는데 연로(沿路)로 운반하여 군량을 대주다. 고사에서 나옴.
○ 호남 의병을 청하는 글은 다음과 같다.
슬프도다. 바다 도적이 세력을 믿고 침범하매 경계에서 막아낼 사람이 없어 7도의 강산이 적의 손에 모두 함몰되었는데, 오직 우리 호남만이 잠식됨을 면하여 조종의 강토가 지금까지 그대로 있는 것은 한두 의병장들이 충의를 분발하고 격려하여 의사를 모아 합한 힘이 아니었던가. 용성(龍城)ㆍ금산(錦山) 두어 성이 이미 적의 소굴이 되었다가 곧 도리어 섬멸되고 완산(完山) 한 부(府)가 거의 먹힐 뻔하다가 결국 보존되어 승전의 보고가 여러 번 날아와, 추한 무리가 넋을 잃어 한 도의 생령이 안심하고 살게 되매 다른날의 회복이 여기에서 근거가 될 것이니, 적개(敵愾)의 큰 공이 태상(太常 시호와 훈공을 정하는 곳)에 기록할 만하다. 그들의 고풍(高風)이 미치는 곳에 누가 감동되어 사모하지 않으리오. 인홍(仁弘) 등은 각 고을이 붕괴된 나머지에 분기하고 장수와 군사들이 흩어진 뒤에 수습하여 간신히 불러모아 겨우 1 려(旅)를 얻어 조개와 도요새처럼 서로 버티어[鷸蚌相持] 여름부터 겨울까지 이르니, 군사는 피곤하고 양식은 부족한데 여러 성을 점령한 적은 좌우에 벌여 있고 길에 왕래하는 왜놈은 먼 데나 가까운 데에 가득하다. 부상당하고 굶주린 군사를 거느리고 한창 날뛰는 적을 항거하자니 또한 어렵도다. 근일 이래로 적의 세력이 더욱 치성하여 이웃 고을에 개미처럼 모였던 놈이나 상도(上道)에서 후퇴한 놈들이 모두 성주로 모여서 실로 수효가 많으니, 마구 침입할 염려가 아침이 아니면 곧 저녁에 닥칠 것이다. 오늘 혹 방어에 실책하면 겨우 남은 8, 9고을도 장차 차례로 지키지 못할 것이니, 왜적들이 몰아 짓밟을 걱정은 역시 호남 지방에서도 같이 염려되는 바이다. 하양(下陽)이 한번 함락되매 우(虞)와 괵(虢)이 따라서 망하고, 한단(邯鄲)이 굳게 지켜지니 조(趙)와 위(魏)가 함께 온전하였다. 본도가 호남에 대해서는 곧 우ㆍ괵의 하양이요 조ㆍ위의 한단이니 영남이 없으면 호남도 없을 것인데, 막부에서 어찌 영남의 존망을 멀거니 쳐다보고 염려를 하지 않는가. 오직 생각건대 막부에서 평원군(平原君)의 사자[使]를 기다리지 아니하고도 강황(江黃)의 위태로움을 구원하고 저 무용스런 군사들이 와서 한쪽에 주둔한다면, 이것이 실로 순치(脣齒)의 형세를 살펴서 능히 남의 곤란함을 급히 여기는 의리라 할 것이다. 그러나 형(邢)을 구원하는 부분에 ‘머문다[次]’ 라고 쓴 것은 《춘추[麟經]》에서 비방한 바이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됨은 옛 사서(史書)에 경계한 바입니다. 만약 혹시 군사를 끼고 주저하여 멀리 성원(聲援)만 할 뿐이라면, 비록 나물을 캐는 것은 산에 있는 호랑이 때문에 꺼린다지만 장호(張鎬)의 구원병은 수양(睢陽)의 패함에 유익이 없었으니, 늦추어서 기회를 잃었다는 책임이 돌아가는 데가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임(任)ㆍ최(崔) 두 장수가 멀리 이웃 도의 위급함을 구원하여 새로 칼날이 한창 날래고 피곤한 군사도 용기를 솟구치니 크게 승리할 기약은 날짜를 정하고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삼가 원컨대 막부에서는 웅장한 계책을 쾌히 결단하여《시경》〈무의편〉을 읊고 와서 두 장수와 더불어 계책을 맞추고 힘을 한 가지로 하면, 본도의 사기(士氣)가 믿는 바가 있어 스스로 배나 될 것이며 충청도의 군사도 또한 서로 의지하여 떨칠 것이다. 그리하면 소륵(疏勒)의 외로운 성이 추한 오랑캐에게 삼켜지지 않고, 즉묵(卽墨)의 남은 성이 망한 제(齊) 나라의 업(業)을 수복할 것이니 어찌 장하지 아니하리오. 슬프다! 종묘가 바람과 먼지를 뒤집어썼는데 깨끗이 소제할 기약이 없고, 금여(金輿)가 서리 이슬을 맞는데 돌아오실 날이 언제이뇨. 서쪽으로 바라보고 통곡하니, 눈물도 더 뿌릴 것이 없어라. 송 나라 강왕(康王)이 금(金) 나라 병영에 억류를 당하였고, 승상(丞相)이 오파(五坡)에 포로가 되었도다. 임금의 욕됨이 이와 같으니 의리가 진실로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다. 창을 베개로 삼는 분함은 피차에 같은 바이요 경계는 비록 호남ㆍ영남으로 갈리었으나 형세는 보거(輔車)처럼 서로 의지하였으니, 때를 놓쳐서 미치지 못하면 배꼽을 물어뜯은들[噬臍]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부로(父老)들이 이마에 손을 얹고 바야흐로 고자(高子)가 오기를 기다리니, 숙(叔)ㆍ백(伯)은 여러 날이 걸리는지라 위(衛) 나라 사람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라. 깊은 마음속에서 나온 말이니, 선생들께서는 힘쓸지어다. 정인홍 등.
○ 좌의병 통문은 다음과 같다.
군량의 급한 것을 글월을 써서 달려가 고한 지가 여러 번인데도 아직 답장을 보지 못하였으니, 깊이 부끄럽고 괴이하게 여긴다. 혹시 중간에 지체되어 여러분에게 보여지지 못하였는가 걱정되므로 번독함을 잊고 다시 말씀을 드리노라. 대저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치는 것은 오로지 국가를 위함이니, 군량 한 가지는 피차를 구별함이 없이 오직 넉넉한가 급한가를 볼 뿐이다. 지금 우리 군사가 처한 곳은 곧 호남ㆍ영남의 목구멍인 격으로 성산(星山)에 웅거한 적이 세력을 길러 치성해지려 하고 있다. 만약 여기가 지켜지지 못하면 운봉(雲峯) 이하에는 다시 험하고 막혀 방어할 만한 데가 없으니, 우리 도의 위태로움을 장차 구할 수가 없고 회복의 터전도 또한 의지할 데가 없으니, 기회의 중대함이 진실로 여기에 있지 아니한가. 우리들이 이 때문에 여기에 힘을 써서 싸움도 하고 지키기도 하여 쳐서 죽인 것이 많으니 추한 놈들을 섬멸할 형세가 이미 우리의 눈앞에 있다. 다만 영남이 함몰된 나머지에 군량을 공급할 계책이 없고 우리들의 준비한 것은 또한 이미 다되어 거의 이룬 공이 하루아침에 폐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우리들만이 담당할 걱정이리오. 동도(同道)의 유식자로서 마땅히 한심히 여길 바이다. 대저 먹는 것이 군사보다 먼저이니 먹을 것이 없으면 군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므로 한(漢) 나라를 일으킨 공이 소하(蕭何)에게 갈 것인저. 하물며 지금 유림에서 거사하는데 나가는 자는 군대에서 힘을 다하고 위에 머물러 있는 자는 군사를 위해 양식을 준비함이 한결같이 공의(公義)이니, 기회에 나아가 싸움을 이기는 것은 내가 그 책임을 감당하려니와 양식을 끊이지 않게 함은 누가 그 중책을 맡을꼬. 여러분이 공사(公事)를 위하는 마음으로 응당 경영하고 도모하여 널리 거두고 모았을 것이며 또 들은즉 청(廳)을 세울 지시와 준비가 있어 장차 기다리는 바가 있다 들었다. 우리 군사의 급함이 이미 이와 같고 여러분이 계책하는 바도 역시 이와 같으니, 한 마음으로 서로 도울 것이요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그 몸도 생각지 않거늘 하물며 그 재물을 생각하랴. 사재(私財)도 감히 생각하지 않거늘 하물며 향교나 서원의 소유는 곧 유가(儒家)의 공물(公物)인데도 지금 쓸데없이 둔다는 말인가. 삼가 원하건대 제공이 혹은 공(公)이거나 혹은 사(私)이거나 있는 대로 그에 따라서 번개처럼 싣고 별처럼 운반하여 목마른 이가 물을 바라는 듯한 바람은 풀어 주면 이 일을 능히 끝낼 것이니, 어느 것이 여러분의 덕택이 아님이 있겠는가. 삼가 원하건대 여러분은 자세히 살펴 힘써 도모하소서. 이상은 호남에 보낸 통문이다.
○ 합천 군수 김면을 본도 우병사로 임명하고, 전라 우의병장 최경회를 통정대부로 가자하다.
○ 충청도 사람 이산겸(李山謙)이 조헌(趙憲)의 남은 군사를 수합하여 일어나 양식과 무기를 준비하여 적을 토벌하다.
○ 경기도 진사 원연(元埏)이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다가 용인(龍仁) 금령(金嶺)의 적에게 크게 패하다. 원연은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의 아우이다. 적령은 역의 이름인데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이 적은 곧 30리마다 일둔(一屯)씩을 둔 적이다.
○ 상의대장(尙義大將)이 합세할 일로 통문 하니, 다음과 같다.
오랑캐가 침범한 때를 당하여 군웅(群雄)이 병립할 수 없는[連鶴不栖] 걱정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감히 어리석은 계책으로써 만전의 계책을 돕고자 하나이다. 그윽히 생각건대, 적을 토벌하는 방법이 비록 한두 가지가 아니지마는 오늘날의 사세로 헤아려 본즉 가장 급선무는 합세하여 힘껏 싸우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바야흐로 이제 관군과 의병이 곳곳마다 벌 떼처럼 일어나는데 각기 맹주(盟主)가 있어서 깃발을 나누어 세워 군령에 통솔이 없고 여럿의 마음이 일치하지 못하니, 좌를 치려고 하면 갑(甲)이 달려와 원조하기를 꺼리고 우(右)를 치려고 하면 을(乙)이 경계를 넘을 수 없다고 핑계합니다. 피차의 사이에 전혀 입술과 이[脣齒]가 서로 의지하는 듯한 형세가 없고, 앞뒤의 진(陣)에 손발이 머리와 눈을 보호하듯 함이 없으며, 심지어 월(越) 나라 사람이 진(秦) 나라 사람의 수척함을 보듯 하여 앉아서 구원하지 않는 자도 있고, 서로 의지할 데가 없어 마침내 패하는 자도 있습니다. 때를 끌고 날을 끌어 적의 세력을 점점 기르고 오늘에 싸우지 아니하고 내일에 싸우지 않아 우리는 점차로 약해져서 마치 불이 기름을 태우듯 합니다. 마침내 전란이 오래 끌어 북풍의 눈비가 박두하는데 대가(大駕)가 파천하여 서쪽 국경에서 오랫동안 고생하고 계시니, 어찌 국가의 깊은 수치가 아니며 신민의 오랜 슬픔이 아니리오. 대저 우리와 적의 강하고 약한 것이 비록 현격하게 다른 것 같으나 만약 두어 진(陣)의 힘을 가지고 한 떼의 적을 섬멸한다면, 이것은 활활 타는 불을 들고 마른 풀에 날아 들어 태우는 것과 같아서 저 죽음을 앞에 둔 적의 무리를 한번 휘두르는 깃발에 다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고 오히려 매복을 설치하는 것으로써 급선무를 삼고 소굴을 질러 끊는 거조가 없다면, 비록 한두 가지의 공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모래사장의 사람이 흙을 짓이겨 맹진(孟津)을 막는 것과 같을 것이니, 어찌 날로 치성하는 적의 화에 효과가 있으리오. 큰 공을 도모하는 자는 눈앞의 작은 이익을 생각지 않는 것이며 기특한 계책을 내는 자는 반드시 뜻밖의 깊은 생각이 있는 것이니, 적을 치는 방법이 어찌 매복을 설치하는 데만 그칠 따름이리오. 세가 약하면 힘이 큰 자에게 압제를 당하고 원조가 고단하면 많은 군사에 좌절을 당함은 어리석은 이나 지혜 있는 이나 한 가지로 아는 바이거늘, 오히려 성패(成敗)에 요리조리 의심하고 이롭고 불리한 형세에 앞뒤로 오도가도 못하고서 1년의 오랜 세월을 끌면서 구벌(九伐)의 쾌함을 본받지 못하고 한갓 양식을 운반하는 허비만 있고 승리를 보고하는 기약을 보지 못하여 온 나라가 반이나 오랑캐의 땅이 되고 만백성이 전부 불타는 막사의 제비꼴이 되었소. 만약 이러기를 그치지 않으면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국사가 이루어질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옛날 충의의 선비는 국사가 위급할 즈음을 당하면 꺾이고 패함으로 저상(沮喪)하지 아니하고 세가 약하다고 싸우지 않는 일은 없었습니다. 우선 제갈무후(諸葛武侯)의 일을 가지고 판단하건대 한구석 탄환만한 지역을 3국이 솥발처럼 맞선 즈음을 당하여 동으로 치고 서로 쳐서 앞뒤로 백 번 싸웠으므로 그의 말에, “우리와 적이 양립하지는 못할 것이요, 왕업이 한쪽에서 편안할 수는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치는 것이 낫다.” 하였습니다. 하물며 10배의 군사로써 한 귀퉁이의 적을 질러 끊는 것은 애당초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데, 이것을 버리고 달리 구한다면 다시는 할일이 없습니다. 적이 와서 범할 때를 당하면 극력으로 방비하고 적이 물러갈 제는 합세하여 나아가 공격하여, 번갈아 싸워서 적을 애먹이는 공을 세우고 적을 구경이나 하여 길러 주는 걱정이 없게 하는 이것이 실로 지금의 급무입니다. 조개와 도요새처럼 서로 버티어 아직까지 섬멸하는 것을 늦추고 있으니 하루이틀 지나 다시 몇 달이나 더 걸린다면 군량은 이미 다되고 백성은 모두 흩어져서 비록 굳게 지키려 하여도 되지 못하고 적이 우리 땅을 점령한 것은 전일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리 군사의 양식이 다 된뒤를 타서 저 적의 물고 삼키는 화를 마구 저지른다면, 누가 다시 활을 당겨 적에게 항거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말이 이에 미치매 꿈에도 놀라고 먹다가도 목에 걸립니다. 원하건대, 모든 군자는 의리로 임금을 버리지 말고 충성으로 목숨을 바쳐, 하늘을 쏘는 흉한 놈들에게 마음을 분격하여 해를 취하는 공을 이루려 한다면 이는 실로 국가의 간성(干城)이요 중류의 지주(砥柱)일 것입니다. 제군의 하루가 없으면 인도(人道)의 하루가 없는 것이니, 온 나라 사람들 중에 누군들, “관중(管仲)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오랑캐의 옷을 입었으리라.” 하지 않으리오. 신포서(申包胥)의 한 몸이 오히려 능히 초(楚) 나라를 보존하였고 1려(旅)의 군사가 족히 하(夏) 나라를 일으켰으니, 지금의 병력이 전일보다 10배가 되는데 여러 군자의 충성을 분발하는 절개는 또 어찌 옛사람보다 뒤지리오. 다만 군사를 거느린 지는 시일이 경과되었는데 성공을 고하는 기약이 없는 것은 진실로 군사를 거느린 사람들이 각기 제 마음대로 하고 능히 합세하여 힘껏 싸우지는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군사를 쓰는 것은 졸렬하더라도 빠른 것이 좋지, 교묘하더라도 더딘 것을 숭상하지는 않습니다. 시사의 위급함은 불타는 것을 구하는 것과 같으니, 원컨대 주저하지 말고 속히 큰 계책을 내십시오. 풍문에 들은즉 근지에 유둔하던 적이 여러 번 야습을 당하고는 도망한 놈이 반이 넘는다 하고, 더구나 가을이 지나 날씨가 차가워지는데 적들의 거처는 서늘하고 엷게 되어 있으며 본래 벗고 사는 놈들이라 견디기에 익숙지 못하여 알몸으로 얼어 죽은 놈이 길에 서로 잇다랐다 합니다. 아마도 흉하고 교활하며, 사납고 추한 놈들이 죄악이 쌓일 대로 쌓였는데도 우리가 기회를 잃어 섬멸할 기약이 없으니 하늘이 반드시 추위를 빌려서 남김없이 죽이려 하심일 것입니다. 그러고 본즉 미친 적들이 우리 땅에 오래 지체하다가 겨울을 넘기는 것이 또한 국가의 불행 중 다행이 아닌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악한 자에게 앙화를 주는 하늘의 뜻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천시(天時)에 할 만한 기회가 왔으니 적이 어찌 그 목숨을 오래 끌 수 있으리오. 이러한 심한 추위를 당하여 급히 공격하고 놓치 말아야 할 기회가 이때입니다. 양쪽 진에서 통신하는데 편지 한 장이면 족하겠지마는 소모관(召募官)에게 부탁하여 간절한 뜻을 전달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전일에 회맹(會盟)할 때에 마침 사기(事機)로 인하여 크게 거사하지 못한 것이 지금 생각하면 통분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다시 고충(苦衷)을 가지고 감히 이렇게 전하니, 상세한 것은 전하는 이의 입으로 다할 것입니다. 각기 개미 힘을 다하고 함께 닭ㆍ개의 피를 마시어, 성하(城下)의 맹세로 하여금 패상(㶚上)의 희롱에 돌아가지 말게 합시다. 삼가 바라노니, 제군은 각기 힘쓰소서.
○ 전라 좌ㆍ우의병이 오래 영남에 있어서 성주ㆍ개령의 적과 여러 번 싸웠으나 한번도 전승(全勝)한 때는 없고 비록 몇몇 베어 죽인 공은 있으나 정병과 용사들의 피해가 너무 많으므로 두 장수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철병하여 북으로 가서 근왕할 계책을 하는 이가 많으니, 영우(嶺右)의 선비와 백성들이 그들에게 머물러서 살려 달라고 굳이 청하다. 인동 선비 장봉한(張鳳翰)이 임계영에게 글을 올리니, 다음과 같다.
군사를 의병이라고 이름한 것이 어찌 우연함이리오. 그 충성과 용맹이 다른 관군과 견줄 바가 아니요 의기에 분발함이 또 중들의 유가 아닙니다. 의로운 소리와 높은 절개가 늠름하여 창졸의 사이에 계책을 결단하고, 위태롭고 망하는 즈음에 자신을 잊고서 기회에 나아가 싸우는 것은 오직 의일 뿐이요 크고 작은 것과 강하고 약한 것은 논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의병의 앞에는 강한 적도 강함이 되지 못하고 많은 적들도 많은 것이 되지 못하여 부딪치면 부서지고 범하면 타버려서 그 형세가 마른 가지나 썩은 가지를 꺾은 것과 같이 쉬운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은 옛날 주(周) 나라에 있어서는 정 무공(鄭武公)과 위 문후(魏文侯)요 당 나라에 있어서는 곽자의(郭子儀)ㆍ이광필(李光弼)이 이런 분들입니다. 그런 시대에도 얻기가 어렵거늘 하물며 하대(下代)이겠습니까. 대저 이와 같이 얻기가 어려운데 우리나라의 많은 선비들은 태학관(太學館)에 올빼미가 낢을 통분히 여기고 태원(太原)을 침략당한 욕을 부끄럽게 여겨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고 개미 같은 군사를 모은 자가 곳곳마다 일어나지 아니한 곳이 없어 정신으로 싸우니, 기운이 산하(山河)를 웅장하게 하고 충과 의가 모두 열렬하여 정성이 금석(金石)을 꿰뚫은 것은 전라도가 제일입니다. 이것이 어찌 우리 조종 2백 년의 교화가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난리를 당한 즈음에 분발하게 하고, 호남의 의사들이 더욱 그 가운데 흥기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므로 임금께서 파천하시고 백관이 도망해 숨으며 빛나던 종묘사직이 이미 기장이 우거진 폐허가 되었는데도, 임금께서 다행히 여기시는 바는 전라도의 군사가 완전한 것입니다. 피란하는 백성들이 도마 위의 고기와 솥 속의 물고기를 면하지 못하고 유리(流離)하는 고생이 이미 극도에 달하였는데도, 백성들이 믿는 바는 전라도가 그 지킴이 견고하기 때문입니다. 위와 아래의 희망이 모두 전라도에 있을 뿐 아니라 왜적이 두려워하는 바도 역시 호남 한 도이니,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는 진실로 물러앉아서 매우 위급한 오늘날에 기대를 저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대가(大駕)를 눈과 서리 같은 모진 고생 가운데서 맞아 모셔올 것을 생각해야 하고 백성이 물과 불 같은 재난에 빠진 것을 보고 건져낼 것을 생각하여, 밤낮으로 힘을 다하여 국사에 절충하는 절개를 지켜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선등(先登)하는 용맹을 바치는 이것이 장군이 바라는 바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도 60고을의 남은 백성 중에 산골에 숨은 자가 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언제나 끝남이 있을 것인가.” 하는 글귀를 읊고, 호남을 바라보고는 매양, “왜 날을 지체하는고.” 하는 시를 읊조리면서 피란한 가운데서 목을 늘이고 바라는 것이 여후(黎侯)가 숙백(叔白)을 바라는 것보다 심함이 있습니다. 이제 겨울철이 닥쳐 추위의 위엄이 치성하니 각기 나라에 보답한 마음을 열렬히 가지고 앞다투어 원수 갚을 칼날을 갈아서 멀리 풍상의 고생을 무릅쓰고 발섭(跋涉)하는 괴로움을 꺼리지 말아서, 금릉(金陵)의 달밤에 깃발이 펄럭이고 감문(甘門)의 서리에 북소리가 들리어 즐거이 부르짖는 소리는 산이 무너지고 물이 뒤집는 듯 뛰고 날치는 기운은 번개가 번쩍거리고 뇌성이 달리는 듯하여, 그 뜻이 장차 길보(吉甫)의 토벌을 따르고,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의 전진을 좇아 궁금(宮禁)을 숙청하고 왕국을 평정하리니, 이것이 어찌 헛되게 갔다가 헛되게 돌아오는 자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남은 우리 백성이 북치는 소리를 듣고는 비록 바구니의 밥과 병에 넣은 장[簞食壺漿]을 가지고 서로 앞 다투어 영접하지는 못하나마 모두 기쁜 빛으로 서로 고하기를, “우리 장군은 위무(威武)와 용략(勇略)이 의를 제일로 삼는 분이로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렇게 장사(將士)가 구름처럼 모이고 호령이 엄숙하게 행하며 군세(軍勢)가 이와 같이 장할까.” 하여, 이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자주 이기기를 간절히 바라고 적을 죽이는 데는 모두 일곱 발자국 안에 허물없기를 기약하여 대를 쪼개는 형세와 매[鷹]처럼 드날리는 공을 하루아침에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근일에 전도(前導)가 밤에 놀라 망녕되이 대군이 별처럼 흩어지게 만들어 적을 잡을 기세를 놓쳤으니 이것이 어찌 장군의 실책이리오. 실로 영남의 군사들이 미친 개 같은 왜놈들에게 겁을 내는 것이 벌써 하루아침 하루저녁의 일이 아니므로, 적이 우리를 추격한다는 말을 그릇 전하여 퇴군한 죄를 가지고 마침내 장군의 군사로 하여금 회군할 의사가 있게 한 것입니다. 아! 백 번 싸워 백 번 패하여도 마지막에 한 번 이기는 것만 같지 못하거늘 어찌 한 번 놀란 일로 가고 머무는 것을 결정하리오. 대저 근왕한다는 것은 반드시 근왕하는 실제를 다한 연후에야 그 명칭에 맞추어 그 직책을 저버리지 아니한다 할 것입니다. 강회(江淮)의 외로운 성으로 감히 반역한 갈노(羯奴)를 항거하고 죄를 성토하는 한 장의 편지로 능히 백만의 군사를 물리쳤으니, 만고 이래로 의병이라 칭함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무릇 이 몇 사람이 만일 혹 적세의 강약을 비교하고 한 몸의 이해를 헤아렸다면 그 이름을 듣건대는 의사(義士)와 같은 점이 있지마는 그 실지를 돌아보면 도리어 겁쟁이와 같으니 의에 다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군자는 그 실지를 다함을 귀하게 여깁니다. 지금 장군은 맹렬하기가 범과 같은 용사와 곰과 같은 군사를 끼고 하늘에 뻗치는 칼을 짚으며 해를 휘두르는 창을 잡고서 의병으로 이름하고 호남의 의사를 끼고 왔으니 그 이름이 장하지 않습니까. 난을 평정하여 바른 데로 돌림이 이 한 걸음에 있고, 엎어지는 것을 붙들고 위태로움을 유지하는 것도 이 한 걸음에 있으니, 그 맡은 것이 중하고 그 책임이 큽니다. 그렇다면 어찌 소장부(小丈夫)처럼 싸워서 이기면 의기가 등등하고 싸워서 패하면 군세가 움츠러들어서 한 번의 승부 사이에 진퇴를 가벼이 하겠습니까. 반드시 의병의 군문에 위엄이 사랑함보다 앞서고 군령이 엄숙하여 오직 의(義)를 따른다면, 방숙(方叔)의 계책이 장하여 매우 치성하던 적세가 스스로 위축되어 날로 위축된 강토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맹시사(孟施舍)의 용맹을 굽히거나 조괄(趙括)의 겁(怯)을 내어 도끼가 이지러지지도 않았는데 오던 길로 수레를 속히 돌린다면 어찌 환영하였던 백성이 실망할 뿐이겠습니까. 또한 성상이 회복하실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되고 적에게 약함을 보임이 또한 심할 것입니다. 생(生)은 날뛰는 적의 세력이 이로부터 모진 독을 함부로 뿜고 유리(流離)하는 백성들이 더욱 물과 불에 빠진 고통을 당할까 염려합니다. 그런즉 장군이 이번에 가시는 것을 혹자는 국가의 불행이라 합니다. 애당초 사방에 두루 의론하여 의기를 떨쳐 군사를 모집하던 실제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그 이름과 그 실지가 현저히 다르니 혹자가 의병이라 말하더라도 나는 믿지 않겠나이다. 바라건대 장군은 생각하소서. 또 가는 것을 속히 할 수 없는 이유는, 지난 7월에 성상께서 손수 쓰신 조서를 만 리나 되는 평안도에 반포하시어 도탄에 빠진 남은 백성을 위로하고 군사를 모집한 의사들을 표창하셨습니다. 한 장의 윤음으로 신자의 정성을 격려하고 충의를 가상히 여김이 호남의 장수와 군사에게 더욱 극진하시니, 전하의 명철하심으로 어찌 모르고 이같이 칭찬하겠습니까. 과감한 기풍이 이미 무사할 때에 증험되었으므로 충성과 의분은 세상이 요란한 뒤에 더욱 미더웠던 것인데, 이제 적의 굴혈에 와서 벤 머리를 조정에 바치지 못하고 창과 칼을 거두어 넣으며 빠진 이를 건지러 왔던 수레를 장차 돌리려 하니, 비록 젖을 바라고 우는 어린애는 돌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파천해 계신 전하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모구(旄丘 앞이 높고 뒤가 낮은 언덕)의 칡이 서도의 풍상에 마디가 변하였고 깃발이 오기를 바라는 기대는 한갓 경동의 부로들에게만 간절하니, 처량한 기상이 기하(岐下)의 천도(遷都)에 견줄 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중흥을 생각하는 형세는 다만 호남의 의사들을 믿는데, 군사를 주둔한 지 10일 만에 혈전(血戰)하는 정성을 바치지 아니하니 장차 하늘이 돌보지 않음인가. 어찌 불행함이 이에 이르는가. 영남의 군사는 흩어지고 도망한 중에 불러 모았으니 흙 무너지듯 붕괴되던 나머지에 여러 번 물러감이 진실로 형세가 그러하지마는, 장군의 군사는 강하고 날래며 용감함이 견줄 데 없는데 윗사람을 위해 죽는 데 대한 의리를 알면서도 오히려 장한 기운이 꺾이어 도리어 군사를 돌리겠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전일에 올 때에는 한갓 아녀(兒女)들의 슬퍼함만 있었고 지금 돌아갈 때에는 피리와 북으로 환송함이 없으리니, 내일 아침 호남으로 가는 길에는 산하(山河)에 면목이 없을 것입니다. 부로들이 물어보면 장차 무슨 말로 답하시렵니까. 다만 부로에게 답할 말이 없을 뿐 아니라 호남 의사의 낙담함이 장차 장군으로부터 비롯할 것입니다. 상가 원하건대, 장군은 종묘사직이 폐허가 될 것을 깊이 애통히 여겨서 다시 근왕의 정성을 굳게 할 것이요 돌아가는 걸음을 빨리하지 마소서. 남도를 수복하여 소목공(召穆公)의 경영을 성취하고 이수(李收)의 토벌이 성공할 때는 지금이 그때입니다. 저는 무(武)로는 적을 막을 재주가 모자라니 창을 메고 싸우는 노력도 감당할 수 없고, 문(文)으로는 적을 퇴각시킬 수 없으니 어찌 무의(無衣)의 시를 화답하겠습니까. 장차 신포서(申包胥)의 정성을 본받아서 진(秦) 나라 뜰에 통곡 하고저 하나 갈 길이 아득하니 누구에게 의탁하리오. 멀리 북극(北極 임금의 별을 상징함)을 쳐다보니 슬픈 눈물이 하늘에 사무칩니다. 밤낮으로 간절히 바라는 바는 우뚝한 우리 장군이 지금 세상의 곽자의와 이광필로 기린각(麒麟閣) 위에 공이 반드시 제일이 되어 개선(凱旋)하는 날에 문무(文武)의 덕을 칭송하여 다시 〈6월편〉을 노래하기를 원하나이다. 장군은 장한 기운을 더하시어 곤이(昆夷)의 주둥이를 무찔러 주소서. 도망해 숨어 다니는 중에 소리를 삼키는 울음을 견딜 수 없어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나이다. 생각하소서.
○ 호종 전연서 별좌(扈從典涓署別坐) 경상도 고령 사람 김응정(金應禎)이 전하는 변란 후의 소식은 다음과 같다.
당초에 사변을 듣고는 모든 일이 창황하였고, 또 한 사람도 장수될 만한 사람이 없어 이일(李鎰)은 함부로 싸워서 처음은 대군이 패하였고, 신립은 한신도 아니면서 배수진(背水陣)을 쳐서을 쳐서 또 온 나라의 장사(壯士)를 다 죽였다. 주상과 조정은 항상 신(申)ㆍ가(李)를 장성(長城)처럼 믿었다가, 두 장수가 패한 것을 듣고는 인심이 놀라고 당황하였고 한두 정승이 처음으로 서도로 파천할 의론을 내어 경성이 지켜지지 못하고 대가가 도성을 떠나시게 되었다. 온 성중의 남녀들이 거리를 메워 물결처럼 달려서 길에 엎어지듯 자빠져서 구렁에 가득 찼는데, 대가를 호위하여 따르는 자가 겨우 수십 인이었다. 평양에 행차를 멈추시고 강변 7고을의 토병(土兵)을 긁어모아 임진강에서 방어하였더니, 적이 산곡에 군사를 감추고 수일 동안 약한 형세를 보였다. 이때에 신할(申硈)이 중군이 되고 이빈(李薲)ㆍ이천(李薦)이 좌우군이 되었는데, 좌우군이 이르기 전에 중위(中衛)가 먼저 돌진하였다. 적의 복병이 사면에서 일어나자 우리 군사가 혹은 물 속에 던져지고 혹은 칼날과 탄환에 죽어서 흐르는 송장이 강물을 막았고, 남은 군사들은 낙담하고 정신이 없어 투구를 떨어뜨리고 말을 버리고서 모두 무너져 흩어졌다. 적이 송경(松京)과 황해도를 함락시키고 대동강 가에 세 군데 진을 쳤다. 호종해 온 모든 신하들이 흩어진 군사를 불러 모아 성을 지키고 매복을 설치하며 명주 30여 동(同)과 포목 40여 동, 군량 7만여 석을 거두어들이니 군세가 조금 떨치고 인심이 분발하기를 생각하였다. 창성(昌城)의 관인(官人) 임욱경(任旭慶)이 모집한 용사들이 자원하여 먼저 올라서 군사를 거느리고 밤에 쳐서 적의 중위를 섬멸시키고 적의 선봉장을 베니 적의 세력이 크게 꺾이고 양곡이 다하여 물러가려 하였는데, 중화(中和) 사람이 향도(向導)가 되고 경통사(京通事) 김덕겸(金德謙)이 계책을 도와주어 왕성탄(王城灘)으로부터 인도하여 오니, 수장(守將) 김억추(金億秋)ㆍ성취(成鷲)ㆍ박석명(朴錫命)ㆍ김응서(金應瑞) 및 감사 송언신(宋言愼), 병사 이윤덕(李潤德) 등이 모두 달아났다. 그러나 성을 지키기를 심히 엄히 하였다. 임금이 울면서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나의 한 몸은 상관할 바 아니나 차마 아녀들이 욕을 당하는 것을 앉아서 볼 수 없다.” 하고, 거가가 장차 출발하려고 성문을 열도록 명하니 재상들이 굳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는데, 듣자니 두어 사람이 출성하기를 청하는 이가 있었다 한다. 윤좌상(尹左相)은 혼자 성 위에 앉았다가 적이 성을 포위한 연후에 단기(單騎)로 나갔다. 임금이 요동으로 건너가기로 계책을 결정하여 중전(中殿)을 강계(江界)로 보내고 동궁(東宮)을 강원도로 보내며, 임금은 하루 밤낮에 수백 리를 달려서 용천(龍川)에 멈추었다. 여러 신하들이 붕괴되어 흩어진 두어 장수를 잡아 베고 김명원(金命元)으로 원수(元帥)를 삼아서 순안(順安)에서 방어하여 여러 번 싸워 다 이겼으므로 적이 감히 마구 몰아가지 못하였다. 조정에서 요양(遼陽)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더니, 중국의 유격 장군 사유(史儒)ㆍ왕유정(王惟貞)ㆍ왕수관(王守官) 대조변(戴朝弁)ㆍ서일현(徐一賢) 및 부총병(副總兵) 수양정(修養正)과 관전보 참장(寬典堡參將) 조승훈(祖承訓) 등이 나오고, 광녕위 총병(廣寧衛摠兵) 양소(楊紹)가 동요(東遼) 동양참(東陽站)을 출동시켜 감독하였다. 형양성 밑에는 논이 많다. 또 비가 왔다. 사유가 군사를 나누어 4초(哨)로 만들어서 매 초마다 각기 우리 군사 백 명으로서 전도를 삼아서 밤을 무릅쓰고 성을 부수어 일시에 돌입하니 적이 놀라서 대동문(大同門)으로 나왔다. 우리 군사가 1초는 인도해 들어가고 나머지 3초는 들어가진 아니하니, 적이 다시 싸워서 사유가 죽고 중국의 말 5천 필과 중국 병사 4백여 명을 상실하였으며 나머지는 다 돌아왔다. 예조 판서를 보내어 요동에 청병하였더니, 구련성(九蓮城) 양 총병(楊總兵)이 인하여 북경의 조정에 아뢰었다. 절강(浙江) 장수 낙상지(駱尙志)는 손으로 천 근의 무게를 들어 호를 낙천근이라 하는 자인데 그와 송응창(宋應昌) 등이 포수(砲手) 3천을 거느리고 근일에 구원하러 나올 것이라 하였다. 황제가 사신 설번(薛蕃)을 보내어 주상을 위로하고 하루를 머물다가 돌아가고 중국 병사 수만이 왔는데, 모두 평지에서 달리기만 일삼고 활 쏘는 것은 훌륭하지 못하므로 당분간 포수가 오기만 기다렸다. 동궁은 한 달 여를 이천(伊川)에 머물다가 적병이 사방에서 오자 성천(成川)으로 옮겨서 머물렀다. 바야흐로 영변(寧邊)으로 향하려 할 때에 동궁을 모신 신하는 영상 최흥원(崔興元), 우상 유홍(兪泓), 이상상(二上相) 최황(崔滉)이요 임금을 모신 여러 신하는 풍원군(豐原君) 유성룡(柳成龍), 좌상 윤두수(尹斗壽)ㆍ이조 판서 이산보(李山甫),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 예조 판서 윤근수(尹根壽), 형조 판서 한응인(韓應寅)과 구사맹(具思孟)ㆍ유은(柳垠)ㆍ심충겸(沈忠謙)ㆍ박충간(朴忠侃)ㆍ정사위(鄭士偉)ㆍ이충원(李忠元)ㆍ심희수(沈喜壽)ㆍ오억령(吳億齡)ㆍ이국(李)ㆍ이정립(李廷立)ㆍ홍인상(洪麟祥)ㆍ박응복(朴應福)ㆍ정곤수(鄭崑壽)ㆍ민준(閔濬)ㆍ홍성민(洪聖民)ㆍ이해수(李海壽)ㆍ백유함(白惟諴)뿐이었다. 임금이 평양을 나올 때에 김귀영(金貴榮)으로 함경도 도체찰사를 삼아서 이양원(李陽元)ㆍ황정욱(黃廷彧) 부자 등과 더불어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을 모시고 함경도로 가게 하였다. 임금이 요동으로 건너가게 될 경우에 행차를 따를 이를 물으니, 위에 열기한 신하들이었다. 유홍과 최황으로 하여금 종묘의 5신주를 모시고 동궁과 더불어 영동(嶺東)으로 들여보냈다. 적병이 함경도로 침입하자, 김귀영이 남병사(南兵使) 이영(李榮)이 우수하다 하여 도순찰사로 정하여 남ㆍ북병사를 통제하게 하였더니, 북병사 한극함(韓克諴)이 그 밑에 있기를 부끄러워하여 나이를 다투고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군졸들이 단결되지 아니하고 겸하여 함흥(咸興)의 생원 진대유(陳大猷)가 처음으로 반역하였다. 왕자와 여러 재신(宰臣)들이 함께 회령으로 들어가자 관노(官奴) 국경인(鞠景仁)이 공모하고 적을 끌어들여 두 왕자와 그의 부인, 기타 조신(朝臣)들을 잡아서 왜장에게 항복하였다. 왜장이 가마에 왕자 및 여러 재신들의 부인을 메고서 가는 곳마다 객사에 거처시키고 문천(文川)에 이른 지가 지금 거의 한 달이나 되었으니, 지금은 아마 낙양(洛陽)에 이르렀을 것이다. 함경 감사 유영립(柳永立) 및 판관과 그의 가족들이 포로가 되었다가 유영립은 도망해 나왔고, 새 감사 윤탁연(尹卓然)은 겨우 평안도 경계 설한령(薛罕嶺) 밑에 별하소보(別河小堡)를 보존하였다. 적이 회령을 포위하고 6진을 치고서 강을 건너 호(胡)를 치자, 모든 호들이 멀리 도망하고 그 부락을 다 불태우고 돌아왔다. 전일에 청원사(請援使)가 요동에 이르러 수양정(修養正)의 말을 들었는데, 우리 사신이 중국 병사가 패한 데 대해 사과하니, 답하기를, “군사는 사지(死地)인데 어찌 우리만 살고 저들만 죽으란 이치가 있는가. 그리고 천시(天時)ㆍ지리(地利)ㆍ인화(人和)가 귀한 것인데 전해 들은즉 평양의 지세는 모두 진흙땅이요 또 논이 많다 하니 이것은 지리를 얻지 못한 것이다. 계절이 한창 장마비가 왔으니 이것은 천시를 얻지 못한 것이요 상국(上國)과 본국이 언어가 통하지 못하여 뜻이 통하지 못하니 이것은 인화가 없음이니, 그 때문에 패한 것이다. 반드시 남병(南兵)이 오고 겸하여 들판이 마르기를 기다린 연후에야 달리어 적을 쫓을 수 있을 것이니, 군량을 준비하여 근일에 나가서 구원하리라.” 하였다. 옛날 주 나라 말기에 천자가 7국의 전쟁을 구하기 어려웠거늘, 하물며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로 북으로는 오랑캐에 인접하고 남으로 섬 왜놈[島夷]에 이웃하여 전쟁이 늘 연달았어도 중국 병사가 와서 구원함이 이런 극진함에 이른 적이 없었다. 이로써 본다면 회복할 수 있는 일맥의 희망을 이것으로 알 수 있고, 남쪽에서 의병이 곳곳에 벌떼처럼 일어나니 이것이 큰 기회이다. 다만 들은즉 적이 경영한 지 여러 해 만에 그 소굴을 거의 비우고 온 것은 재물을 도둑질하고자 한 것만이 아니라, 처음 나올 때에는 여러 장수에게 부서를 나누어 각도에 흩어져 들어가서 분탕하고 전복시킨 연후에 명년 2월에는 요동을 범하기로 계획을 하였다는데, 지금은 평양에서 항거하고 각도에서 근왕하는 군사와 중국 병사가 구름처럼 모이니, 적의 계획이 아마도 중간에 저지될 것이다. 다만 함경도와 강원도의 모든 적이 경성과 평양의 모든 적과 더불어 성세가 서로 응하여 동래로부터 평양에 이르기까지 길에 막힘이 없어 적들이 모두 큰 도회지를 점령하였고 우리 군사는 곳곳의 들에 둔쳐서, 주인과 객이 바뀌어 괴로움과 편함이 형세가 다르다. 또 행재소를 호위하는 이, 동궁을 따르는 이, 순안에 있는 원수의 소관, 강동(江東)에 있는 이일(李鎰)이 거느린 바, 삼현(三縣)에 있는 김응서(金應瑞)가 거느린 바, 최원ㆍ김천일의 의병 만여 명과 호서(湖西)ㆍ삼포(三浦)ㆍ해서(海西)에 각기 감사ㆍ순찰사ㆍ방어사 등이 모두 군관 수천 명씩을 거느리니, 군사는 작고 장수는 많아서 여러 도에 의병을 일으켜 근왕하는 장수와 군사가 무려 수십만이다. 군사와 말이 한 달 동안 먹을 양식과 콩이 적어도 수만 석은 되어야 하는데도 각 고을의 창고는 타버려서 저축이 없고, 도망한 백성과 싸우는 군사는 농사를 짓지 못해 수확이 없어 얼마간의 시일에 복구할 수 없을 듯하니, 군량을 판출하기 어렵다. 하늘이 만약 우리를 돕는다면 평양을 수복하고 경성에 환도할 수 있으련만 통곡한들 어찌하랴. 대가는 중국 병사가 나와서 구원하여 평양의 적을 물리친다면 정주(定州)로 향하여 점차 연안(延安)에 머무를 것이다. 이정암(李廷馣)ㆍ김대정(金大鼎)ㆍ전현룡(田見龍)이 함께 연안을 지켰는데, 적이 7일 밤낮을 온갖 방법으로 성을 공격하였으나 능히 성을 잘 지켜서 마침내 완전히 보존하였다.
○ 구례(求禮)의 석주(石柱)와 운봉(雲峯)의 팔량(八良) 등에 새로 성을 쌓다. 두 곳은 호남의 요해지로 전에 성터가 있었다. 이때에 본도 방어사 곽영(郭榮)이 9월부터 항시 남원에 주둔하면서 조방장ㆍ별장 등을 영남 경계에 나누어 보내어 성을 쌓아 지키게 하였다. 석주에는 별장 및 구례 현감 이원춘(李元春)이 지키고, 팔량에는 조방장 이복남(李福男)과 운봉 현감 남간(南侃)이 지키며, 정동(井洞)의 육십치(六十峙)에도 모두 지키는 장수가 있어 매복을 설치하여 방비하다. 이복남은 곰티[熊峴]에서 힘껏 싸운 공으로 당상에 승진하다.
○ 소모관 안민학(安敏學)이 동궁에게 명령을 받아서 호서에서 군사와 말을 조달하다.
○ 경상도 군량 차사원(軍糧差使員)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敎) 오운(吳澐)의 통문은 다음과 같다.
금년의 왜변은 개국 이래로 우리 동방에서 있지 않던 바이니, 군부(君父)의 욕됨과 사사 가문의 화는 말하면 통분하다. 어찌 차마 다 말하랴. 흉한 놈들을 제거하고 원수를 갚는 것이 하루가 급한데, 우리와 적이 서로 버티어 지금 벌써 8개월이란 오랜 시일이 되었다. 온 나라가 함몰되어 착수할 땅이 없으니, 우선 우리 영남 우도로 말한다면 전란을 면하여 심히 파멸되지 않은 데가 겨우 7, 8고을 인데 앞뒤로 적을 맞아 조석을 보장할 수 없어, 불타는 처마의 제비요 솥 속에 든 물고기에 불과할 뿐이로다. 다행히 의병 제군과 적개(敵愾)한 장사(壯士)들의 힘을 입어 오늘날까지 보전하였는데, 군량이 다되고 군사들이 붕괴되어 흩어짐이 서로 잇달아서 손을 묶은 것처럼 방책이 다되고 군사들이 붕괴되어 흩어짐이 서로 잇달아서 손을 묶은 것처럼 방책이 없다. 신농(神農)이 이른바, ‘비록 돌성 천 길과 탕지(湯池) 백 보가 있더라도 곡식이 없으면 능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이 진실로 오늘날의 급한 걱정이로다. 전란을 참혹히 겪었으매 칼날에 죽은 자가 거의 반이나 되고 남은 군사는 아직도 놀라 산곡에 숨어서 굶주리며 죽음을 기다리는 자가 많으니, 만약 양식을 쌓아 놓고 불러 모으면 10일 동안에 모두 다시 모일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일은 곡식이 있으면 군사가 있고, 군사가 있으면 적을 없앨 수 있는 것이다. 관가의 곡식은 탕진되고, 6월 이후에는 오로지 민간의 곡식에 의뢰하였는데 그것이 다되어 계속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전일의 납속(納粟)은 관에서 지명하여 정한 것이요 자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지금 본즉 3석으로부터 1백 50석에 이르기까지 차등이 있게 관직으로 상을 주고 허통(許通)하고 면천(免賤)하게 되었으니 압입하는 바에 따라서 사목(事目)이 분명하고, 만약 납입한 것이 규격에 꼭 맞지 않는 것도 반드시 받아들이면 공사(公私)에 서로 이익될 것이다. 대저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는 것은 각기 신자의 의리를 다하는 것이니, 어찌 상을 내리기를 기대하겠는가. 다만 관직의 임명에 응하여 국가의 수용에 보조하는 것은 도리에 합당한 것으로 더욱 부득이한 것이다. 하물며 양식이 다되어 군사가 흩어져 만약 마구 쳐들어오는 적을 막지 못하여 약간 보존되었던 땅도 끝내 적의 소굴이 된다면, 몸도 또한 보존하지 못할 것인데 비록 곡식이 있다 한들 먹을 수나 있겠는가. 일의 득실은 다른 이가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는 것이니 보수를 받지 못할까 의심하지 말고 당분간 내 곡식을 가졌다고 다행으로 여기지도 말며 서로서로 권유하여 기회를 잃지 말라. 비인(鄙人)은 이 급하고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국가에 보답할 방법이 없다가 마침 군량을 판출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진실로 원하건대 제군 중에 납입하기를 원하는 자와 더 납입하는 자는 힘의 미치는 데 따라서 서명(署名)하고 아울러 석수(石數)를 기록하라.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12월. 행재(行在)에서 동요로 불리는 시가 있으니,
부슬비 서울 거리에 버들빛이 푸르니 / 細雨天街柳色靑
봄바람이 불어들매 말발굽이 가벼워라 / 東風吹入馬蹄輕
전일 대관들 환도하는 날에 / 舊時名宦還朝日
즐거운 개가 소리 한양성에 가득하리 / 奏凱歡聲滿洛城
하다. 혹자는 회복될 징조라고 말하였다.
○ 주상전하께서 먼 변방에 오래 체류하니 비감하여 시를 읊기를,
국사가 창황한 날에 / 國事蒼黃日
누가 곽ㆍ이의 충성을 능히 하랴 / 誰能郭李忠
빈을 떠남은 큰 계책을 위함이요 / 去邠存大計
회복은 제공을 믿네 / 恢復仗諸公
관산의 달에 통곡이요 / 慟哭關山月
합수의 바람에 상심일세 / 傷心鴨水風
조신들아 금일 후에도 / 朝臣今日後
오히려 다시 서인이니 동인이니 하려나 / 尙可更西東
하였다.
○ 최원(崔遠)은 노쇠하였으므로 면직되고, 진도 군수(珍島郡守) 선거이(宣居怡)로 전라 병사를 삼다. 곽준(郭峻)의 관직을 삭탈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하고 조방장 이복남(李福男)으로 전라 방어사를 삼다. 거이는 이때에 수원(水源)에 있었는데, 최원이 강화(江華)로부터 나와서 인부(印符)와 군사를 인계하다.
○ 남원 진사 방처인(房處仁)이 군사를 모집하여 광양(光陽)의 도탄(陶灘) 진주(晉州)와의 접계이다. 에 매복을 설치하고, 도탄의복(陶灘義伏)이라는 네 글자를 전사(篆寫)로 새겨서 군장(軍章)을 삼다.
○ 군사가 일어난 지 1년 만에 국가의 재정이 부족하여 약간의 남은 저축도 모두 탐관(貪官)의 손에 들어갔으므로 벼슬을 파는 것이 사세가 부득이하게 되다. 1백 석을 내면 3품의 되고 30석을 내면 5품을 주다. 계사년ㆍ갑오년에 이르러서는 120석만 내면 가선당상(嘉善堂上)에 승진시켰으나 응모하는 사람이 없었다.
○ 경상 좌순찰사 한효순(韓孝純)의 장계는 다음과 같다.
도내에 유둔한 적이 인동(仁同)ㆍ대구(大邱)ㆍ청도(淸道)ㆍ밀양(密陽)ㆍ기장(機張)ㆍ동래(東萊) 및 함창(咸昌)으로부터 당교(唐橋) 등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유둔하고 있는데 당교의 적은 좌우도의 인후(咽喉)가 되는 곳에 있어 그 세력이 심히 치성하니, 신은 비록 한 도의 힘을 다하여서라도 반드시 이 적을 먼저 치는 것으로 목표를 삼겠습니다. 병사 박진(朴晉)과 우후(虞侯) 권응수(權應銖), 밀양 부사 이수일(李守一) 및 부장(部將) 정대임(鄭大任) 등 모든 장수가 모두 안동ㆍ예천(醴泉) 등지에 모여서 경영하고 살핀 지가 이미 수개월이 가까우나, 적이 편리한 지점을 점거하고 있고 더구나 중간에 큰 내가 가로막혀 장수들이 모두 어렵게 여기어 아직까지 한 번도 공격하지 못하니, 통분하고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여 정예한 군사 2천 명을 선발하여 응수에게 맡겨서 기회를 보아 밤에 습격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장차 10여 고을의 군사와 말을 징발하여 의성(義城)ㆍ안덕(安德) 등지에 주둔하여 인동의 적세를 엿보아 만약 기회만 오면 크게 한번 공격할 것이며, 만약 불편하면 날랜 군사를 가지고 밤에 습격하려 합니다. 또 병사로 하여금 대구의 적을 밤에 공격하게 하여 이미 약속을 정하였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군량이 매우 어려워서 군사들로 하여금 스스로 싸가지고 오도록 하자니 민간에 한되 한말의 저축이 없어 굶어 죽은 송장이 길에 잇달았으며, 관량(官糧)을 주자 하니 각 고을의 창고가 간 곳마다 비었으니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도 안동 향병 대장(鄕兵大將) 김해(金垓)ㆍ이정백(李廷栢)ㆍ배용길(裴龍吉) 등이 좌순찰사에게 올린 글은 다음과 같다.
1. 기율(紀律)을 세울 것입니다. 무기는 흉한 기구요, 싸움은 위태로운 일인데 쟁기로 밭 갈고 호미로 밭 매던 백성들을 합하여 흉하고 위태로운 땅으로 가게 하면서 먼저 기율을 세우지 않으면, 비유컨대 양떼를 몰아서 맹수를 치는 것과 같으니 어찌 능히 성공이 있으리오. 옛말에 이르기를, “군사가 장수를 두려워하는 자는 이기고 적을 겁내는 자는 패한다.” 하였으니, 만약 군사가 적을 겁내지 않는다면 그 두려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기율을 세우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기율을 버리고서 군사들이 흩어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사닥다리 없이 하늘에 오르고, 배를 버리고서 바다를 건너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지금에 패전한 장수들은 모두 분명한 벌을 피하고 가르치지 못한 백성만이 엄한 벌을 당하니, 도망한 군사만을 베어도 군정(軍政)이 날로 해이해지는 것보다는 한 장수를 베어 기강이 절로 서는 것이 낫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한 사람을 베는 것은 만 사람을 온전히 하는 바이다.” 하였으니, 원컨대 상공(相公)은 기율을 세워서 붕괴되어 흩어짐이 없게 하소서.
2. 관하 수령의 출척(黜陟)을 엄하게 할 것입니다. 천지 사이에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것은 모두 도적이라 하는데, 밖에 있는 도적은 그 해가 얕고 안에 있는 도적은 그 해가 깊으니, 밖에 있는 도적을 치려 하면 먼저 안의 도적을 제거하여야 합니다. 무릇 지금에 민심을 잃어서 붕괴하게 만든 것은 실로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수령들이 토색질하고 빼앗아 먹기를 혹독히 하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나, 대궐이 아득하고 멀어서 상벌(賞罰)이 일정하지 못하고 겸하여 상공께서 남의 허물을 용서하고 덕으로써 사람을 감화시키려 하는 까닭에, 저 큰 쥐들이 윗사람의 용서하는 도량을 가만히 엿보아 스스로 벌을 면할 꾀를 쓰고 반이나 죽게 된 백성들의 피를 날로 짜내어 더욱 몸을 살찌울 교묘한 꾀를 부리니, 그 해독이 도리어 왜보다도 심함이 있습니다. 가까운 고을에 몇몇 수령의 죄상이 현저한 것은 상공께서 이미 환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옛날 범방(范滂)이 천하를 깨끗이 맑힐 뜻이 있자 소문만 듣고 인끈[印綬]을 풀어 놓고 가는 자가 서로 잇달았으니, 원컨대 상공은 수령의 출척을 엄히 하여 민적(民賊)을 제거하소서.
3. 좋아함과 미워함을 밝힐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좋아함과 미워함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착한 것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바이요 악한 것은 사람들의 미워하는 바입니다. 천하에 어찌 좋아함과 미워함이 분명치 않고서 능히 국가를 보존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지금에는 위로 임금과 신하에서 아래로 친구간에 이르기까지 모두 용서하는 것으로 덕을 삼고 충고하는 것을 잘못으로 보아서, 할 말을 하니 않고 구차스럽게 날을 보내어 좋아함과 미워함이 분명하지 않고 시비가 정하여지지 못하여 인심이 의혹하여 좇을 바를 알지 못하니, 국가가 위태로움이 대개 여기에서 말미암았습니다. 《춘추(春秋)》에 이르기를, “곽공(郭公)이 착한 것을 착하게 여기면서도 능히 쓰지 못하고, 악한 것을 악하게 여기면서도 능히 제거하지 못하여 망하는 데 이르렀다.” 하였습니다. 옛글에 이르기를, “어진 이를 보고도 등용하지 못하고, 착하지 못한 이를 보고도 멀리하지 못하는 것은 태만함이다. 사람이 좋아하는 바에 반대되면 재앙이 반드시 몸에 미친다.” 하였으니, 원컨대 상공께서는 좋아함과 미워함을 밝혀서 인심을 일정하게 하소서.
4. 비용을 절약할 것입니다. 이 난리를 당하여 각 고을이 텅 비었는데, 사신을 접대하는 것이 모두 백성에게서 나오니 군관이 많아서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은 평상시에 있어서도 또한 감당하기 어렵다 하거늘 지금 이 난리에 어찌 당하겠습니까. 소위 군관이란 것은 비록 없을 수는 없으나 반드시 쓸 때가 있는 것이요 보통 출입에는 인도하고 따르는 이가 없는 것이 아니니, 군관이 비록 적더라도 위의를 갖출 만합니다. 상공께서 만일 싸움터로 달려갈 뜻이 있다면 병사 이하가 모두 상공의 군관인데, 하필 잡되고 지저분한 무리들을 써야 하겠습니까. 원하건대 상공은 비용을 절약하여 한 폐단을 제거하소서. 무릇 이 네 가지 조건은 비록 훌륭한 계책은 아니라도 진실로 난을 평정하려면 이것을 버리고는 계책이 없습니다. 다만 적을 토벌하는 방책은 이 네 가지보다 급한 것이 있는 줄을 알기 때문에 전일에는 군사를 뽑는 방법을 건의하여 전구(前驅)에 쓰게 하였더니, 도리어 사패(射牌)의 항오에 편입하여 마침내 행차를 호위하는 것으로 삼으니 몸을 부지하는 데도 겨를이 없는데 용맹을 뽐낼 것은 어느 때이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상공이 능히 이 네 가지 조건에 반드시 먼저 유의한 연후에야 군사를 가르치고 적을 토벌할 수 있는 것이요, 만약 이 말을 좋다고만 하고 깊이 살피지 아니하여 썩은 선비의 말이라고 본다면, 한신(韓信)ㆍ백기(白起 진(秦) 나라의 명장)가 장수가 되고 군사를 1백만이나 거느린다 해도 상공이 장차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대저 건의하는 것이 어려움이 아니라 실용에 적합함이 어렵고, 말을 구하는 것이 어려움이 아니라 채택하여 시행하기가 어려운 것이니, 어리석은 저희들은 이미 건의는 하였으나 그 말이 실용에 적합할지 않을지는 알지 못합니다. 혹시 상공께서 전일에 말을 구하던 성의를 그대로 지니어 반드시 채용하여 시행하시면, 국가를 위해 수치와 욕을 씻는 데에 아마도 만에 하나라도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상공은 굽어 살피소서.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도 함창 의병 소모관 전 봉교(奉敎) 정경세(鄭經世)는 좌도 각 고을 수령 및 사림 제군자(士林諸君子)에게 격문으로 고하나이다.
하늘이 돌보지 않아 난리가 평정되지 않은 때 세 계절이 이미 다 지났으나 원수의 적이 아직 치성하여 평정하고 회복하기가 거의 기약이 없으니, 신하와 백성 된자로서 적과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통분함은 피차가 마음이 한 가지 일 것이니, 차마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대개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인이라 스스로 헤아려 보매 유위(有爲)할 수가 없는 줄을 극히 잘 알고 있으나, 분격한 뜻으로 능히 힘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의병으로 모이는 거사를 초가을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사의 세력이 고단하고 약하여 아직도 성 하나 공격하여 부수지 못하고 진 하나 섬멸하지 못하였으며 구구이 베어 죽인 것이 비록 반백(半百)에 이르렀으나, 정위새[精衛鳥]가 돌을 물어다 바다를 메우매 바다는 메워지지 아니하니 이 사이에 통분하고 민망한 생각을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수년 동안 전란의 나머지에 연로(沿路) 일대에는 공사(公私)가 텅 비어 군량이 땅을 쓴 듯 떨어졌는데 판출할 길이 없어 온갖 방법으로 경영하여 근근이 지탱한 지가 지금 이미 6개월입니다. 사방으로 망연히 돌아보아도 호소할 곳이 없어 장수와 군사가 굶주리고 피곤하여 용맹을 베풀 곳이 없으니, 수양(睢陽)의 군사는 겨우 쥐를 파먹는 것을 면하였고 동군(東郡)의 군사는 겨우 아직 투구를 삶아 먹을 지경에만 이르지 않았을 뿐입니다. 왼쪽에 밥이 있고 오른쪽에 죽이 있는 낙(樂)은 없고 아침에 흩어지고 저녁에 무너질 걱정이 있는데, 이러고도 여러 군자에게 고하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의 죄입니다. 그윽히 생각건대, 좌도[江左]의 여러 주변에는 비록 전란을 겪었으나 적이 오래 머물지 아니하여 농사의 풍년이 평일과 다름이 없거늘 하물며 적이 가지 않은 고을도 있음이겠습니까. 남은 것을 나누어 위급한 이를 구해주고 가산을 탕진하여 군비를 돕는 것은 이것이 정히 여러 군자가 힘을 다할 시기입니다. 아,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고 승여가 진흙과 이슬을 맞으며 고생하시며 남은 백성이 거의 죽어가니, 연(燕) 나라의 점령을 당한 제(齊) 나라의 땅 중에 보존된 것이 몇 성이었습니까. 수천 리 조총의 강토와 2백 년 의관과 문물이 모두 왜놈[卉服]의 손과 불꽃 속에 들어갔으니, 무릇 이 땅에서 먹고 살아 이씨의 신하와 백성이 된 자라면 누구인들 창을 베고 쓸개를 맛보아 하늘에 사무치는 통분을 조금이나마 풀려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여러 군자께서 피눈물을 삼키는 정성을 가지신 지가 오래일 것입니다. 위청(衛靑)은 일개 천한 종의 출신이로되 오히려, “흉노를 멸하지 못하였는데 집을 가질 수 없다.” 하였고, 복식(卜式)은 한 평민이로되 오히려, “재물이 있는 자는 관에 납입하고, 용맹이 있는 자는 변방에서 죽으면 흉노를 멸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한 나라 때에 흉노는 반드시 토벌해야 할 죄가 없었지마는 신하된 이가 능히 그 임금을 위하여 뜻을 가다듬음이 이와 같았으므로 무제(武帝)가 오랑캐를 물리쳐서 땅을 개척한 공이 예전 역사에서 견줄 자가 없거늘, 하물며 오늘날의 욕됨은 실로 신자로서 차마 말하지 못할 바가 있는데 이겠습니까. 닥쳐올 걱정이 또 오늘보다 심함이 있을 터인즉 오늘의 일은 진실로 조금도 늦출 수가 없는데, 우리들의 정성이 능히 옛사람과 같다면 또 어찌 적을 멸하지 못하고 공을 세우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원컨대 격문이 이르는 날에는 많으나 적으나 힘에 따라 각기 양식을 내어 군향(軍餉)을 도와주어서 이 모집된 군사로 하여금 붕괴되어 흩어지는데 이르지 않고 불러 모은 군사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보전하게 하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아, 북궐(北闕)의 애통한 교서는 모두 신자가 피눈물을 뿌려야 할 말씀이니 동해에 빠져 죽기 전에는 우리들이 목숨을 바칠 날이 이를 것입니다. 기꺼이 들으실 것이라 생각하므로 이에 충고하나이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도 안동의 전 검열 김용(金涌)이 군사를 모집하는 통문은 다음과 같다.
아, 이것이 어떠한 때인가. 이 어찌 몸을 숨기고 해를 피하여 제 몸만 편안하기를 도모할 날이랴. 승여가 파천하고 경성이 함몰되며, 열한대의 왕릉이 먼지를 뒤집어썼고 억만 백성의 피가 땅에 흘렀다. 신하가 되고 자식이 되어 군부의 수치와 욕됨이 무궁하고, 부모가 되고 형제가 되고 부부가 되어 골육의 원통함이 이미 지극한데, 아, 죽지 않고 남은 우리가 어찌 차마 환한 대낮에 낯을 들고 팔짱을 낀 채 요망한 적을 보면서 원한을 씻을 도리를 생각하지 아니하랴. 하물며 혹독한 불길이 사방에서 치성하여 누에가 뽕잎을 점차 먹어 들어오는 것 같고, 우리들이 어육이 될 걱정은 비늘처럼 차례로 겹쳐 오니 비록 한 구석에서 구차히 살려하여도 역시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들이 짐승이 된다면 모르거니와 진실로 우리 군부를 생각하여 원수와는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살 수 없는 것을 안다면 어찌 한번 죽음을 결단하고 일어나지 않겠는가. 생등(生等)은 복수를 결심하여 쓸개를 맛보기 여러 달이 어서 밤중에 주먹을 불끈 쥐고 관병을 모으려 하니 관병이 이미 흩어졌고, 막부(幕府)에 협력하려 하니 막부는 제 직임이 아니었다. 썩은 선비의 오활한 계책이 시설(施設)할 데 없는 줄을 오래 전부터 알았지마는 오히려 목숨을 버릴 각오를 잊지 아니함은 참으로 원수를 갚아야 할 의리가 있고 헛되게 죽어서는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용감한 사람을 얻어 심복의 동지를 삼는다면 바다를 굴리고 산을 돌리는 것도 모두 어려울 바가 없을 것이니, 저 적이 비록 많은들 무엇이 두려우랴. 이에 감히 남은 장정들에게 두루 타이르고 옆으로 중들을 모았더니 수십 일이 못 되어 수백 명이 되었다. 장차 몸을 잊고 약속에 달려가서 마음과 힘을 일치하여 나아가 죽는 것이 영광이 되고, 퇴각하여 사는 것이 욕이 되는 줄을 알 것이니, 저 도망하고 붕괴된 군사가 오직 두려워 쥐처럼 숨기에 겨를이 없는 자들과 비교해 볼 때에 그 용감함과 비겁함이 또한 현저하지 아니한가. 다만 난을 겪은 뒤에 이미 도두 탕진되어 양식은 콩 반쪽의 저축이 없고 기계는 활촉 한 개도 남은 것이 없어 우레처럼 달리고 번개처럼 칠 군사가 거의 다 빈 전대[橐]만 가졌고, 기를 들고 힘을 뽐낼 무리들이 반은 빈주먹이라, 한갓 왜놈을 잡을 뜻은 간절하나 용맹을 쓸 곳이 없으니 이것이 실로 오늘의 한 가지 큰 걱정이다. 그윽히 생각건대, 열 집 사는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한 사람이 있는 것이요, 흙덩이의 보탬도 태산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우리 한두 이웃 고을은 집이 모두 열 집이 넘고 선비가 모두 의리를 아니 적이 경계에 들어오기 전에 준비할 길이 있다. 윗사람을 위해 죽는 데에 어찌 을가(乙可)의 종이 없겠는가. 대대로 농사에 힘썼으니 또한 차달(車達)의 곡식이 많을 것이다. 진실로 원하건대, 글이 이르는 날에는 각기 정성을 다하여 충성을 바치기를 생각하여, 향병에 이미 나갔다고 핑계대지 말고 관군에 다 맡겼다고 어렵게 알지 말라. 힘이 미치는 데는 응모하기를 메아리[響]처럼 하여 혹은 자제를 보내고 혹은 종을 보내며, 혹은 군량의 소용으로 쌀이나 콩, 피곡(皮穀)이나 필목(匹木), 혹은 군기에 소용되는 것으로 아교나 깃, 전죽[箭]이나 철물 같은 것을 가지고 갖가지로 서로 도와 한번 승낙에 변함이 없으면 여러분이 가진 것 중에서 내놓기는 어렵지 않고 군수(軍需)에 쓰이는 데는 심히 관계되어 나라를 중흥시키는 정성이 이 한 번의 도움에 의뢰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어찌 장하지 않겠는가. 만약 웅번(雄藩)과 거진(巨鎭)도 간 곳마다 흙 무너지듯 하고 용사와 명장(名將)도 모두 바람처럼 쓰러지는데 ‘백면 서생(白面書生)이 무엇을 하랴.’ 하고 한 번 웃기만 하고 힘을 써주지 아니한다면 자못 여러분에게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니, 마음을 맞추어 원수를 갚겠다는 원을 또 장차 어디에 기대하랴. 아, 이제부터는 죽고 사는 것이 마땅히 적을 치고 치지 못하는 데서 결정되리니, 나라를 위하는 충성이 어찌 국록을 먹고 먹지 않음으로 인하여 차별이 있으리오. 일이 성공하면 신명과 사람에게 설분(雪憤)이 될 수 있고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또한 헛된 죽음에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니 여러 군자들은 힘쓸지어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소모사(召募使) 변이중(邊以中)이 완산(完山)에서 각 고을에서 징발한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서울 길로 향하다.
○ 송응창(宋應昌)ㆍ이여송(李如松)이 대군을 거느리고 중국 조정에서 우리나라로 오는데 주사관(主事官) 원황(袁黃) 등이 먼저 강을 건너 용만(龍灣)에 이르러 권유문(勸諭文)을 내니, 다음과 같다.
흠차 경략방해어 왜군 병부무고 청리직방청리사 원외랑(欽差經略防海禦倭軍兵部武庫淸吏職方淸吏司員外郞) 유황상(劉黃裳)과 사주사(司主事) 원황은 의병을 권유하여 광복(匡復)을 함께 도모하노라. 살피건대 그대 나라가 본시 문물을 숭상하고 대대로 충성을 돈독히 하더니 근자에 왜이(倭夷)가 무도하여 마구 몰아와 집어삼켜 임금과 신하가 풀밭에 파천하여 유리(流離)함이 어찌 이리도 곤한고. 대명 황제께서는 그대들이 2백 년간 신하의 직분을 삼가 지켜온 것을 생각하여 만금의 비용을 아끼지 아니하고 장수를 명령하여 와서 토벌하게 하신다. 그대 나라 가운데 어찌 종척(宗戚)으로 중한 소임을 맡아 충성과 의분이 마음에 가득한 이가 없겠으며, 어찌 현관(縣官)으로 지방을 지켜 강개히 목숨을 바치는 이가 없겠으며, 어찌 충신으로 임금이 욕되면 신하가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은 이가 없겠으며, 어찌 의사로 몸을 버려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이가 없으리오. 마땅히 황제께서 떨친 위엄을 받들어 속히 의병을 불러 각기 일려(一旅)의 군사를 이끌고 함께 아홉 번 토벌[九伐]할 뜻을 펴라. 지금 왜구는 비록 강성하나 그 형세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요, 그대 나라는 비록 미약하나 그 형세는 반드시 이긴다. 시험 삼아 헤아려 보자. 우선 천도(天道)로써 말하겠다. 조선의 분야는 석목(析木)의 부분에 해당하고 지난해부터 세성[木星]이 인방(寅方)에 왔는데 일본이 와서 침범하니, 이것은 우리가 득세하였는데 저놈들이 침범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역행(逆行)하면 비록 강성하더라도 반드시 약해질 것이 첫째이다. 왜구는 추위를 겁내는 것인데 금년은 궐음(厥陰)이라 풍목(風木)이 하늘을 맡아서 양명조금(陽明燥金)이 초(初)의 기(氣)가 되니, 입춘(立春) 뒤에도 오히려 2, 30일 동안은 한기가 녹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시(天時)를 꾀할 수 있는 것이 둘째이다. 그대 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함께 이 성중에 있는데 새벽에 일어나 기상을 바라본즉 아름다운 서기(瑞氣)가 비단과도 같고 그림과도 같다. 그러므로 왕기(王氣)가 우리한테 있으매 형세가 반드시 회복된 것이 셋째이다. 다음에는 인사(人事)로써 논하겠다. 대국의 웅장한 군사가 범과 같고 곰과 같으며, 무적(無敵)의 대포를 한 번 쏘면 한 발(發)에 천보씩 가니 저들이 힘을 헤아리지 않다가 마땅히 가루가 될 것이 첫째이다. 경략 송(經略宋 소응창)은 지혜가 깊고 꾀가 감추어져 있어 귀신도 측량하기 어렵고, 제독 이(提督李 이여송)는 가슴속에 가득한 충의와 백 번 싸움을 겪은 용맹으로 옛 명장의 기풍이 있다. 본직(本職)이 본래 충성을 가지고 그들과 마음을 한가지로 하고 힘을 맞추어 이 적을 멸하여 천자에게 보답하기를 맹세하고 두 나라의 군사를 합하였으니, 궁한 적을 몰아내기는 떨어지는 것을 떨치는 것과 같이 쉬울 것이 둘째이다. 관백(關白)이 포악하여 위로는 그 임금을 협박하고 아래로는 그 백성을 혹사하니 하늘이 그들을 망치려고 우리에게 손을 빌리는 것이다. 어제 국왕을 뵈었는데 거동이 안상(安詳)하고 얼굴이 준수하고 장하니 형세가 반드시 중흥할 것이요, 그대 나라에서 전에 보낸 여러 사신이 천조에 청병할 적에 성의가 간측(懇側)하여 눈물이 쏟는 듯하여 신포서(申包胥)가 초국(楚國)을 위해 우는 충성과 방불하니 임금과 신하가 이러한데 어찌 끝내 함몰되리오. 이것으로 적을 토벌하면 어느 공인들 이루지 못하랴. 왜놈이 믿는 바는 오직 조총(鳥銃)인데 세 번 쏜 뒤에는 곧 계속하기 어렵고, 그 군사가 비록 많으나 강한 놈은 얼마 없어 앞에 오는 1, 2백 명만 죽이면 나머지는 모두 바람을 따라 도망할 것이니 이것이 가히 이길 기회요, 정히 지사(志士)의 공을 세울 시기이다. 우리 조정에서 영을 내리기를 우리나라 그대 나라 사람을 물론하고 다만 평수길(平秀吉) 및 중 현소(玄蘇)를 사로잡거나 베는 자는 은 1만 냥을 상으로 주고 백작(伯爵)을 봉하여 세습하며 수길의 가신(家臣) 평행장(平行長)ㆍ평의지(平義智)ㆍ평조신(平調信) 등 이름있는 여러 추장(酋長)을 사로잡거나 베이는 자는 매번 은 5천 냥을 상주고 지휘사(指揮使)를 세습하며, 그 이하에 무릇 베이고 포로로 잡은 데는 각각 상격(賞格)이 있을 것이다. 그대 나라 신하와 백성이 다만 능히 때를 타고 군사를 모아서 함께 큰 공을 세우면, 이미 본국의 사직을 회복하고 또 천조의 후한 상을 받아서 쇠한 나라의 남은 백성으로서 집안을 일으키는 시조가 될 것이니 어찌 유쾌하지 않겠는가. 이를 위하여 글을 내리니 모름지기 속히 각 도의 신하와 백성에게 전해 보여서 의병으로 이미 일어난 자는 곧바로 전진하고, 일어나지 않은 자는 속히 불러 모아 혹은 협력하여 적의 위세를 꺾고 혹은 번갈아 나가 싸워서 적의 세력을 분산되게 하며, 혹은 그 물러가는 길을 막고 혹은 그 양식 운반의 길을 끊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모두 스스로 편리한 데에 따라 하기를 허락하노라. 이를 위하여 글을 내니 꼭 도착하게 하라.
25일. 경략 송응창과 제독 이여송이 대군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의주(義州)에 들어와서 곧 본국에 격문을 보내니, 다음과 같다.
흠차 경략계요 보정 산동 등처 방해어 왜군무 병부시랑 송(欽差經略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兵部侍郞宋)은 조선 국왕에게 격문을 보낸다. 동해에 개국하여 천조에 정삭(正朔 정월 초하루)과 조공을 받든 지 2백 년간에 충성과 공순함을 바치기를 하루같이 하였다. 시서(詩書)를 외우고 법받아 학사(學士)와 유자(儒者)의 풍도가 빛나니 다른 나라와 견줄 바가 아니다. 지금 황제께서 신성하사 사해를 어루만져 편안케 하여 만이(蠻夷)를 복종시킬 적에 유독 왕의 나라의 책봉에는 덕의가 심히 두터웠다. 지금 북으로는 달단(韃靼)에 이르고, 남으로는 안남(安南)ㆍ섬라(暹羅) 등 모든 나라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합밀(哈密) 여러 민족에 이르기까지 모두 향화(向化)되어 머리를 조아리고 토산물을 바쳐 앞다투어 뒤질까 저어하는데, 저 일본은 조그만 미꾸라지처럼 섬 안에 있으므로 다시 묻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찌 왕의 나라와 이웃하여 왕이 선량한 종족으로 풍속이 무(武)를 익히지 않았음을 업신여기고 문득 마구 엄습하여 전란을 일으켜서 이미 왕경(王京)을 빼앗고 평양을 점령하며, 왕의 두 아들을 포로로 하고 왕의 선영[先墳]을 파헤치며, 충신을 찢고 열녀를 죽이니 극히 악하고 참혹하고 독함은 신명과 사람이 함께 분히 여긴다. 왕이 이미 파천하여 의주에 거처하고 세력이 부족하고 힘이 약하여 천조에 구원을 청하니 폐하께서 깊이 측은히 여기시고 크게 성내시어 본부(本部 병부)에 명령하여 소사마(少司馬)로 하여금 깃발과 도끼를 잡게 하시었다. 군사가 일어나매 꾀있는 신하와 맹렬한 장사가 비바람처럼 모여들어 활을 당기고 창을 뽐내며 말을 달리고 수레를 몰아, 비단 깃발은 하늘의 해를 가리고 우레 같은 북소리는 바다 물결을 진동하여 모두 강한 놈을 베고 약한 이를 붙들며 곤란한 이를 건지고 충성된 이를 보전케 하여 천하에 대의를 펴고 큰 이름을 만세에 날리려 하고 있다. 왜놈이 비록 우둔하나 역시 지각이 있는 것들이니, 우리 군사가 동으로 와서 토벌하는 것을 듣고 곧 머리를 숙여 땅에 엎드리고 헐떡이는 주둥이로 밤에 도망하여 저의 본국에 돌아가 평정하여 한다면, 이것은 그들이 형세를 헤아리고 힘을 비교하여 화(禍)를 바꿔 복을 만들 시기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매하여 마음을 바꾸지 않고 자신들이 견고하다고 믿는 것이 전과 같다면, 곧 불수레를 몰고 귀신의 채찍을 갈겨서 번개처럼 달리고 뇌성처럼 빨리 평양을 포위하고 함락시켜 선봉을 피칠할 것이다. 하물며 이미 민(閩)ㆍ광(廣)의 장수로 하여금 섬라(暹羅)와 유구(琉球) 여러 나라의 군사와 연락하여 배를 젓고 돛대를 날려 바로 일본의 소굴을 두들기고 다시 진(秦 섬서(陝西))의 정예(精銳)와 촉(蜀 사천(四川))의 극모(僰矛), 연(燕 북경 이북)의 철기(鐵騎)와 제(齊 산동(山東))의 지극(枝戟), 삭방(朔方 요동(遼東))의 건아(健兒)를 징발하여 봉황성(鳳凰城)에 진을 쳤는데이겠는가. 압록강을 건너 대마도에 도달하여 맹세하기를, 왜놈의 종족을 벌하여 피가 바다에 뜨고 골수는 산에 발라 귀역(鬼蜮)이 모두 소멸되고 이무기와 고래들을 끊어 죽여서 왕으로 하여금 왕경에 돌아가서 옛 땅을 안정시켜 폐하에게 보답하고 우러러 빛나는 기운을 펴기로 하였다. 왕은 지금 마땅히 복수의 일념으로 섶에 눕고 쓸개를 맛보아 그대 나라의 사대부와 더불어 남은 군사를 수합하여 용맹을 떨쳐 힘껏 싸워서 회복하기를 도모할 것이니, 저 평양 제도(諸道)에 어찌 충의와 호기(豪氣)로 내응하는 이가 없겠는가. 가만히 꾀하고 묵묵히 통하여 지혜를 깊이하고 정신을 길러서 그 형편을 보아 요해지를 굳게 지키라. 천병이 이르기를 기다려 한 곳에 군사를 합하여 왕에게 음부(陰符)를 주고 장수들에게 분포하여 진군할 차례를 지시하여 비린내를 깨끗이 씻어 함께 기이한 공을 바랄 것이니 폐하의 신령하심을 드러내고 기자(箕子)의 옛 땅을 보존하도록 하라. 불과 같이 해외에 공을 세운 것은 성탕(成湯)의 군사요, 일려로 하(夏) 나라의 왕업을 중흥시킨 것은 소강(小康)의 어짊이니, 왕은 힘써서 대대로 떨치게 할지어다. 격문이 이르거든 자세히 생각하여 마땅히 율령(律令)과 같이하라.
○ 체찰사(體察使) 정철(鄭澈)이 종사관(從事官) 송영구(宋英耈)로 하여금 군사와 말을 충청ㆍ전라에서 수합하여 천병에 합세하라는 격문에 응하기로 하다. 이때에 남정(男丁)은 노약(老弱)한 자들까지 모두 징발되어 싸움터로 나갔으므로, 영구가 지경에 들어가자 군사를 수합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이르는 고을마다 품관(品官)과 교생(校生)으로 하여금 각기 한 명씩을 바치게 하고 바치지 못하는 자는 스스로 군대에 가게 하였더니, 선비들이 종사관의 앞에 들어와서 명단을 바치는 것이 모두 부호(浮戶)였으므로 문득 도망하여 흩어지기에 다시 선비들을 군사에 충당하여 각 고을의 수령들이 친히 데려다가 전주(全州)에 바치는데 정철이 듣고 중지시켰다. 영구는 다만 산졸(散卒) 수백 명만 얻어서 경성으로 향하였다. 당시에 남원 판관 노종령(盧從齡)이 이미 파면되고 홍영(洪嶸)을 임명하였더니, 이에 이르러 홍영이 영구를 따라 경성으로 가는데 각 고을 수령이 따르는 자 또한 많았다. 계사년 3월 경성 수복 후에 모두 돌아왔다.
○ 개령(開寧)에 주둔한 왜장이 본현의 백성에게 고한 것은 다음과 같다.
우시안예(羽柴安藝)와 재상(宰相) 휘원(輝元)은 일본의 관백(關白)인 수길(秀吉)에게 명을 받았다. 우리 왕이 대명(大明)에 뜻이 있어 이 나라에 길을 빌리려 하였더니 이 나라 국왕이 듣지 않았으므로 이에 장수들을 명령하여 모든 장수를 8도에 나누었다. 유악(帷幄) 가운데서 계획을 하여 천 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하니, 그 성을 함락하고 그 마을을 불태워 없고 이미 조선 국왕을 손바닥 속에 쥐었다. 개령 백성에게 고하노니, 개령 백성들은 왜 돌아오지 아니하는가. 돌아와서 각기 그 직업에 안정하여 농부는 제 농사를 지어 혹은 물을 대고 풀을 매며, 장사꾼은 장사하여 혹은 그 재물을 교통하고 이익을 얻는 것이 옳다. 비록 깊은 산골에 있어 종적을 숨기고 1백 년을 지낸들 또한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재물을 좋아하고 처자를 위하는 자는 큰일을 이루지 못하나니 너희들이 속히 산에서 내려와 항복하면 상관(上官)이 알아서 재물을 빼앗고 처자를 포로하는 자를 금할 것이다. 그 사이에 비록 법을 범하는 자가 있더라도 그 죄에 중벌을 줄 것이니 주면 무슨 거리낄 것이 있겠느냐. 이 글을 보매 더욱 그놈들의 고기를 먹고 싶다.
경기 감사 권징(權澄)이 파면되고 심대(沈岱)가 대신하여 삭녕(朔寧)에 와 있었는데 적병이 불의에 야습하여 드디어 죽임을 당하였다. 적이 심대의 머리를 가져다가 서울에서 효시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보이다. 심대의 아들이 은을 가지고 가만히 들어가서 아버지의 머리를 가지고 나와 몸에 연결하여 장사지냈다.

[주D-001]급(汲) : 적병의 머리 하나 베는 것을 급이라 한다. 그것은 적의 머리 하나에 벼슬[爵] 1급을 주던 옛날의 예에 의해서 부른다.
[주D-002]봉비(封臂) : 종을 심부름시킬 때에 빨리 돌아오도록 하기 위하여 종의 팔에다 노끈으로 아프게 묶고 거기다 도장을 찍어 봉하여 돌아와서야 풀어주는 방법이니, 종이 그 아픔을 못 견디어 빨리 돌아오게 된다.
[주D-003]근왕(勤王) : 왕실의 일에 군사로써 힘을 다하여 근로하는 것이다.
[주D-004]임시 섭정[權攝] : 선조(宣祖)가 의주로 파천하면서 세자인 광해군(光海君)을 후방에 머물게 하여 임시로 섭정하게 하였다.
[주D-005]이극(貳極) : 임금의 자리를 극(極)이라 하므로 세자는 이극이라 한다. 이(貳)는 부(副)의 뜻이다.
[주D-006]분조(分朝)의 책임 : 임금이 파천해 가면서 세자에게 분조의 권한을 준 것이니, 분조는 조정의 지부(支部)란 말이다. 즉 조정의 권한을 대행할 수 있는 것이다.
[주D-007]나 홀로 고생한다는 슬픔 : 《시경(詩經)》에 “나만 홀로 현명하여 노고하네[我獨賢勞].” 하였으니, 국사(國事)에 혼자 오래 고생한다는 의미이다.
[주D-008]술을 쏟아 …… 마시게 하니 : 진(晉) 나라와 초(楚) 나라가 전쟁할 때에 어느 사람이 임금에게 술 한 병을 바쳤는데, 임금이 전쟁하는 군사에게 나누어 마시게 하고 싶으나 술이 적어서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술을 하수(河水)에 쏟아서 군사들로 하여금 그 물을 마시게 하니, 군사들이 감격하여 힘껏 싸워서 초 나라가 크게 이겼다.
[주D-009]신릉군(信陵君) : 전국 시대(戰國時代) 위(魏) 나라의 신릉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秦) 나라의 침략을 받은 조(趙) 나라를 구하였다.
[주D-010]적개(敵愾) :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왕의 노함을 적대한다[敵王所愾].”는 말이 있는데, 신하가 임금의 적을 공격한다는 뜻이다.
[주D-011]관중(關中) : 한 고조(漢高祖)가 항우(項羽)와 싸워서 천하를 통일하였을 때에 지금의 서안(西安)인 관중을 근거지로 하였다.
[주D-012]궁금(宮禁)을 숙청 : 당(唐) 나라 덕종(德宗)이 주자(朱泚)의 난을 만나 지방으로 파천하고 주자가 서울을 점령하였는데, 이성(李晟)이 주자를 쳐서 멸하고 서울을 수복한 뒤에 덕종에게 아뢰는 글에 “신이 이미 궁금을 숙청하였습니다[臣已肅淸宮禁].” 하였다. 궁금은 곧 궁궐을 말한다.
[주D-013]소하(蕭何) : 한 고조가 항우와 싸울 때에 관중을 지키고 있던 소하가 군량을 끊이지 않고 전지에 보급하였으므로 뒤에 공신이 되었다.
[주D-014]문교(文巧)로 ……그치리라 :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초기에 어떤 사람이 한 나라 초연수(焦延壽)가 《주역(周易)》의 학자로서 지은 점치는 책인 《초씨림(焦氏林)》으로 점을 치니, 그 중에 이 문구가 있었다. 원문에는, 「文巧俗敝, 將反大質, 僵死如麻, 血流漂杵, 民知其母, 不知其父, 然後乃止.」라고 되어 있다.
[주D-015]하늘을 쏘려는 꾀 : 은(殷) 나라 임금 무을(武乙)이 가죽 주머니에다 피를 담아 놓고서 활로 쏘면서, “내가 하늘을 쏘아서 이겼다.” 하였는데, 그 뒤 들에 나갔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 여기서는 왜놈이 명(明) 나라를 침범하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주D-016]장소가 …… 바라노라 : 송(宋) 나라가 중원(中原)을 금(金) 나라에 빼앗기고 남방에 쫓겨 와 있을 때, 상소가 북으로 중원에 들어가서 선대의 능들을 살펴보고 보고를 올렸다.
[주D-017]한관의 위의를 어디서 볼꼬 : 전한(前漢) 말기에 왕망(王莽)을 쳐부수려고 의병들이 많이 일어났는데, 유수(劉秀)가 왕망의 의관 제도를 버리고 다시 한 나라 제도를 썼더니, 백성들이 보고 환영하며, “오늘날에 다시 한 나라 관(官)의 위의(威儀)를 볼 줄 몰랐다.” 하였다.
[주D-018]주운(朱雲)의 칼을 청하였으니 : 한(漢) 나라의 주운이 임금에게 아첨한 신하를 베라고 곧은 말을 한 일이다. 임금이 노하여 어사(御史)를 시켜 끌고 가서 죽이게 하니 주운이 크게 소리 지르기를, “장차 땅 밑에 가서, 옛날에 곧은 말 하다가 죽은 충신인 용봉(龍逄)ㆍ비간(比干)과 놀겠다.” 하고, 난간을 잡고 놓지 않자, 난간이 꺾어졌다.
[주D-019]호방형(胡邦衡)의 봉사(封事) : 남송(南宋)의 호전(胡銓)의 자가 방형이니, 금(金) 나라와 강화하여서는 안 된다는 유명한 상소를 올리고 귀양갔다.
[주D-020]역적 정 …… 착(浞)에게 비하였는데 : 하(夏) 나라 때에 유궁후 예(有窮后羿)는 한착(寒浞)이 극히 흉악한 역적이었다. 전주(全州) 사람 정여립(鄭汝立)이 처음에는 큰 선비로 이름이 나서 이이(李珥) 등이 추천하고 이발(李潑) 등이 친하였는데, 조헌(趙憲)이 그를 장차 예나 착과 같은 자이다 하였고, 그 뒤에 정여립이 역적의 죄로 죽었다.
[주D-021]신하는 큰 강이 있으니 : 삼강(三綱)에, “아버지는 아들의 강(綱 그물의 벼리줄)이 되고 임금은 신하의 강이 되며, 지아비는 아내의 강이 된다.” 하였다.
[주D-022]용사의 해 : 임진년과 계사년의 왜란이므로 용(龍 辰)과 사(蛇 巳)의 해라 하였다.
[주D-023]운이 양구를 당하여 : 음양가(陰陽家)에 백륙 양구(百六陽九)라는 말이 있으니, 1백 6년 중에 심한 재난의 해가 있다고 한다.
[주D-024]초수(楚水)에서 깨어 있음을 읊었으니 : 초(楚) 나라의 굴원(屈原)이 강호(江湖)에 추방을 당하여 글을 짓기를, “온 세상이 다 취하였는데 나 홀로 깨어 있네.” 하였다.
[주D-025]지혜는 병을 이끄는 데 :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비록 병을 이끌어 물을 긷는 조그만 지혜만 있어도 제 그릇을 지켜서 남에게 주지 아니한다.” 한 말이 있다.
[주D-026]종을 단 듯한 집 : 《춘추좌전》에, “집이 달아 놓은 종과 같다[室如懸磬].” 한 말이 있으니, 그것은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왜적의 분탕질로 그런 빈 집도 없어졌다는 말이다.
[주D-027]모래를 말질하는 민망함 : 남북조 시대 송(宋) 나라 장수 단도제(檀道濟)가 군중에서 양식이 떨어지자 적이 그 틈을 노릴까 염려하여 군량이 새로 도착된 것처럼 꾸미느라고 밤에 모래를 말질[斗]하여 헤아리는 소리를 외쳐 적을 속였더니, 아침에 적들이 양식 더미가 쌓인 것을 보고는 퇴각하였다.
[주D-028]땔나무를 끄는 뜻 : 《춘추 좌전》에, 진(晉) 나라가 초(楚) 나라와 싸울 때에 진 나라 장수 난지(欒枝)가 땔나무를 끌고서 거짓 도망하는 척하다가 옆으로 공격하여 승전하였다.
[주D-029]한 삼태기에 공이 무너져서 : 공자(孔子)의 말에, “아홉 길[九仭]의 산을 만드는 데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해서 공이 무너진다.” 하였다.
[주D-030]구공을 빌려 달라는 소 : 한(漢) 나라 구순(寇恂)이 하내 태수(河內太守)로 있다가 갈렸는데, 광무제(光武帝)가 하내를 지나자 백성들이 길을 막고 구공(寇公)을 1년만 더 살려 달라 하였다.
[주D-031]학익진(鶴翼陣) : 진법(陣法)의 하나이니, 학이 날개를 벌리는 형상으로 진을 치는 것이다.
[주D-032]가장(假將) : 조정의 명령이 빨리 통하지 못하므로 각 도의 순찰사 등이 임시로 장수를 임명하니, 이를 가장이라 한다.
[주D-033]친구가 …… 끊으려 하네 : 옛날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타매 종자기(鍾子期)가 곡조를 잘 알았는데,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를 줄을 끊어 버리고 다시 타지 않았다.
[주D-034]출사표(出師表) : 제갈량(諸葛亮)이 위(魏)를 치려고 출병하면서 임금에게 올린 표문(表文)을 출사표(出師表)라 하였다.
[주D-035]중악(中岳)에서 달에 …… 뛰어나왔고 : 김유신이 소년 시절에 나라를 구할 큰 뜻을 품고 경주 중악의 석굴에 들어가 기도하였다. 뒤에 대장이 되어 당 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를 치는데 당 나라 대장과 말다툼이 있어 유신이 성을 내니 칼이 절로 칼집에서 뛰어나왔다.
[주D-036]죄기(罪己)의 교서 : 나라 일이 위급하면 임금이 민심을 위로하기 위하여 자기에게 죄를 돌려 스스로 꾸짖고 뉘우치는 글을 발표한다.
[주D-037]손인갑이 강물에 빠져 죽었음 : 손인갑은 창녕 사람으로 낙동강에서 왜적과 싸워 크게 이긴 뒤에, 달아나는 왜놈을 추격하다 모래 속에 빠져 죽었다.
[주D-038]관백 : 한(漢) 나라 소제(昭帝)가 어리므로 곽광(霍光)이 정무를 맡았으므로 모든 정부는 곽광에게 먼저 경유하여 여쭈었다〔關白〕. 일본의 막부(幕府)가 정무를 마음대로 하므로, 관백(關白)이라 칭하였다.
[주D-039]내소(來蘇) : 《서경(書經)》에, “우리 임금을 기다렸더니 임금이 오니 살아났다[待我后后來其蘇].” 하였다.
[주D-040]옥석구분(玉石俱焚) : 《서경》에, “곤강에 불이 붙으면 옥과 돌이 함께 탄다[火炎崑岡玉石俱焚].” 하였으니, 곤강은 옥이 생산되는 산이므로 불이 나면 옥과 돌이 구별 없이 탄다는 말이다. 대개 난리에 양민과 적이 한꺼번에 죽는 경우를 비유한 것이다.
[주D-041]진정(秦庭)에서 통곡함은 …… 가진 것 : 오(吳) 나라가 초(楚) 나라에 침입하매 임금이 도망하였다. 초 나라 신하 신포서(申包胥)가 진(秦) 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매 진 나라에서 얼른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신포서는 진 나라 궁전의 뜰에 서서 7일 7야로 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으니 진왕이 감동되어 군사를 내 주었다.
[주D-042]업(鄴)의 군사가 …… 주기 위함 : 진(秦) 나라가 조(趙) 나라를 침노할 때에 위(魏) 나라 신릉군(信陵君)이 업(鄴)에 주둔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조 나라를 구하였다.
[주D-043]오창(敖倉)의 곡식이 …… 보존하기 어려웠을 것이요 : 한 고조(漢高祖)가 성고에 있는 오창에 쌓인 곡식을 먼저 점령하여 전쟁에 이기는 기본이 되었다.
[주D-044]견아(犬牙) : 옛날에 지방을 나눌 때에 이 군(郡)과 저 군과의 경계를 평행으로 하지 않고 개의 어금내[犬牙]처럼 서로 교착되게 하였다.
[주D-045]화유(火維) : 화유는 남방의 분야이니, 남방이 화(火)에 속한 까닭이다.
[주D-046]금성(金城)과 천부(天府) : 금성은 쇠로 만든 것처럼 견고한 성이란 말이요, 천부는 하늘이 자연적으로 만든 부(府)라는 뜻이다.
[주D-047]추로(鄒魯) : 맹자가 추(鄒)에 살았고 공자가 노(魯)에 살았으므로 그 후세에 그 지방에 학자가 많다.
[주D-048]금탕(金湯) : 금성탕지(金城湯池)란 말이다. 탕지는 끓는 못이니, 사람들이 건너지 못하는 것이므로 험한 방어 지대에 비유한다.
[주D-049]봄 제비가 …… 짓는 것 : 《남사(南史)》에 나온 말이니, 참혹한 난리를 겪어서 인가가 없으므로 봄 제비가 집 지을 곳이 없어 숲 속 나무에 집을 지었다 하였다.
[주D-050]제 나라 …… 고을만이 남았고 : 연(燕) 나라가 제 나라를 전부 짓밟았는데 거ㆍ즉묵 두 성이 남아서 수복하는 근거가 되었다.
[주D-051]삼천 리 …… 두보(杜甫)가 슬퍼하였습니다 : 당 나라 시인 두보가 난리를 만나 촉중(蜀中)에 피해 있으면서 지은 시가 많으니, 검각은 촉중의 높은 산이다.
[주D-052]하(夏) 나라의 일려(一旅) : 하(夏) 나라 소강(少康)이 일려의 남은 군사로 중흥하였다.
[주D-053]강회(江淮)의 보장(保障) : 당 나라 안녹산(安祿山)의 난리에 장순이 수양성을 굳게 지켜서 적세를 막아 강회에 보장이 되었다.
[주D-054]누가 한 나라 …… 신이라 칭하겠으며 : 한 나라 경공(耿恭)이 북선우(北單于)와 싸울 때에 화살에 독약을 발라서 쏘며, “한 나라 화살은 신(神)이 있으니 맞으면 이상한 징조가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그 화살을 맞은 자는 상처가 부풀어 올랐다 한다.
[주D-055]경계(庚癸)의 소리 : 경계는 양식이 떨어졌다는 암호이니, 《춘추좌씨전》에 나온다. 양식이 떨어지면 밤에 ‘경계’ 하고 외치라 하였으니, 곡식은 서방[庚方]에 속하고 물은 북방[癸方]에 속하므로 곡식을 청하는 암호로 쓴 말이다.
[주D-056]회서(淮西)의 소범(小范) : 송 나라에서 서하(西夏)를 방어하기 위하여 회서를 지키는 이가 전에는 범옹(范雍)이 있고 뒤에는 범중엄(范仲淹)이 있으므로 중엄을 소범이라 하였는데, 서하에서 범중엄을 두려워하였다.
[주D-057]강좌(江左)의 이오(夷吾) : 이오는 춘추시대 제 나라 관중(管仲)의 자이다. 진(晉) 나라가 중국을 빼앗기고 강좌(江左 강동(江東))로 옮아갔을 때에 왕도(王道)가 승상(丞相)으로 있었다. 환이(桓彛)가 처음 강동에 가서 조정이 미약한 것을 보고 실망하였으나, 왕도를 보고는, “내가 관이오(管夷吾)를 보았으니 다시 걱정이 없다.” 하였다.
[주D-058]이공(二公)이 섬(陝)을 나누기는 하였으나 : 주공(周公)은 섬의 서쪽을 맡고 소공(召公)은 섬의 동쪽을 맡았다.
[주D-059]적벽(赤壁)의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날고 : 조조(曹操)가 80만 군사를 거느리고 강동(江東)을 치려고 적벽강(赤壁江)에 군사를 끌고 가서 군중에서 시를 짓기를, “달 밝고 별 드문데 까막까치가 남으로 나네.” 하였다. 곧 싸움에 패하여 도망하여 돌아왔다.
[주D-060]곤양(昆陽)의 무소와 …… 흩어질 것이요 : 한 나라를 회복하려는 군사들이 곤양(昆陽)에서 왕망(王莽)의 백만 군사와 싸우는데 왕망의 군사는 물소[犀] 코끼리[象] 호랑이들을 몰고 와서 싸움을 돕게 하였다. 비가 크게 오매 모진 짐승들이 벌벌 떨면서 흩어지고 왕망의 군사는 패하고 말았다.
[주D-061]요(堯)의 의미를 …… 될 것을 : 어느 사람이 공자를 보고, “그의 이마는 요(堯)와 같다.” 하였다. 여기서는 임금의 얼굴을 말한 것이다.
[주D-062]촉으로 가는 잔도(棧道) : 당 명황(唐明皇)이 안녹산의 난을 피하여 촉(蜀)으로 파천하였는데 촉에는 산길이 험하여 잔도(棧道 사닥다리 길)로 통행하였다.
[주D-063]한궁(漢宮)에 풀이 푸르며 : 이것은 서울의 궁궐이 풀밭이 된 것을 말한다.
[주D-064]숙(叔)ㆍ백(伯)이 귀먹은 듯함 : 《시경》에 〈모구편(旄丘篇)〉에, 여(黎)의 임금이 나라를 잃고 위국(衛國)에 와 있으매 그 신하들이 시를 짓기를, “높은 언덕[旄丘]의 칡덩굴이 벌써 마디가 컸구나. 우리가 여기 온 지 세월이 오래되었는데, 위국의 신하인 숙(叔)ㆍ백(伯)들은 귀먹은 듯 우리의 말을 들어 주지 않는구나.” 하였다.
[주D-065]궁금(宮禁)을 숙청하고 …… 볼 만하였고 : 당 나라 이성(李晟)이 주자(朱泚)난을 평정하고 임금에게 올린 글에, “신이 궁금을 숙청하고 종묘에 공경히 뵈니, 악기도 옮기지 않았으며 종묘의 모양이 전일과 같습니다.” 한 문구가 있었다.
[주D-066]신정에 모여서 ……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 진(晉) 나라가 강동 한구석으로 쫓겨간 뒤에 하루는 여러 사람들이 신정에 모여서 놀다가 주이(周顗)가 눈물을 흘리며 고국을 생각하였다. 왕도(王導)가, “마땅히 힘을 다하여 국사를 할 것이지, 초수(楚囚)처럼 서로 대해 우는가.” 하였다. 초수는 초 나라의 종의(鍾儀)가 진 나라에 포로가 된 것을 인용한 말이다.
[주D-067]음기(飮器) : 춘추 시대에 진(晉) 나라 지백(智伯)이 조 양자(趙襄子)를 멸하려 하다가 도로 패하여 죽었다. 조 양자는 지백의 두골(頭骨)에 옻칠을 하여 마시는 그릇으로 만들었다.
[주D-068]흔고(釁鼓) : 옛날에 북을 새로 만들면 짐승의 피로 발라서 틈[釁]을 메우는데, 전시에는 적을 잡아 죽여서 쓰기도 하였다.
[주D-069]하늘을 깁기 : 옛날 전설에 하늘이 기울어지는 것을 여와씨(女媧氏)가 돌을 다듬어서 하늘을 기웠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는 기울어지는 나라를 붙든다는 뜻이다.
[주D-070]사직의 신하로 …… 돌아오시게 하고 : 당 덕종(唐德宗)이 주자(朱泚)의 난에 봉천(奉天)으로 파천하였는데 이성(李晟)이 장안(長安)을 수복하여 임금을 모셔왔다. 덕종은, “하늘이 이성을 낳은 것은 사직을 위함이로다.” 하였다.
[주D-071]간성(干城)의 장수 : 무인(武人)은 국가를 방어하고 보호하는 방패[干]와 성(城)이다 하였다. 《시경(詩經)》
[주D-072]이(李)ㆍ곽(郭)의 충성 : 당 나라 안녹산(安祿山)의 난은 이광필(李光弼)ㆍ곽자의(郭子儀) 두 장수의 공으로 평정되었다.
[주D-073]종천(終天)의 원통함 : 하늘이 끝날 때까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부모의 원수를 말한다.
[주D-074]정위(精衛) : 새의 이름이니, 옛날 염제(炎帝)의 딸이 바다에 빠져 새로 변하여 동해를 메우려 하였다 한다.
[주D-075]금혁(金革)의 변례(變禮) : 상주가 국가의 난을 당하였을 때에는 상례를 지키지 못하고 변례로 무기[金]를 들고 갑옷[革]을 입고 나오는 것이다.
[주D-076]맹진(孟津)을 막는 것 : 작은 흙으로 맹진(孟津)의 세찬 물결을 막는 데 비유하였다.
[주D-077]중류의 지주(砥柱) : 황하의 중류에 지주라는 바위 기둥이 있으니, 홍수가 아무리 범람하여도 지주는 우뚝 서 있다.
[주D-078]태원(太原)을 침략당한 욕 : 주 선왕(周宣王) 때에 북방 오랑캐가 태원을 침범하였다.
[주D-079]기운이 산하(山河)를 웅장하게 하고 : 조(趙) 나라 충신 조정(趙鼎)이 분하게 죽으면서, “나의 기운이 산하가 되어 본조(本朝)를 웅장하게 하리라.” 하였다.
[주D-080]길보(吉甫) : 주 선왕(周宣王)의 신하로 오랑캐를 축출하였다.
[주D-081]곽거병(霍去病) : 한 무제의 명장으로 흉노를 토벌하였다.
[주D-082]일곱 발자국 …… 없기를 기약하여 : 《서경(書經)》에 군령(軍令)을 선포하는 서사(誓辭)에, “세 발자국 다섯 발자국 일곱 발자국 안에 군령을 범치 말라.” 하였다.
[주D-083]매처럼 드날리는 공 : 강태공(姜太公)이 목야(牧野)의 싸움에 매처럼 드날렸다[鷹揚] 한다.
[주D-084]갈노(羯奴) : 오호(五胡)의 하나로 흉노의 별종이니, 산서성(山西省)에 살았다.
[주D-085]방숙(方叔) : 주 선왕의 장수로 북방 오랑캐를 쳐서 쫓았다.
[주D-086]맹시사(孟施舍)의 용맹 : 《맹자》에, “맹시사의 용맹은 적을 헤아린 뒤에 나아가고, 이길 것을 생각한 뒤에 시작한다.” 하였다.
[주D-087]조괄(趙括)의 겁 : 조(趙) 나라 장수 조괄은 겁이 많아서 진(秦) 나라 군사에게 패하였다.
[주D-088]도끼가 이지러지지도 : 주공(周公)이 동방을 정벌하고 돌아오면서, “나의 도끼가 이미 이지러졌네.” 하였다.
[주D-089]기하(岐下)의 천도(遷都) : 주(周) 나라 태왕(太王)이 적(狄)의 침략을 피하여 기산 밑으로 옮기었다.
[주D-090]이수(李收) : 전국 시대 조 나라의 명장으로 흉노를 토벌하였다.
[주D-091]기린각 : 한 나라 선제(宣帝)가 공신(功臣)들을 기린각(麒麟閣)에 초상을 그려 붙였다.
[주D-092]6월편 : 《시경》의 편명(篇名)으로, 주 선왕이 흉노를 토벌한 일을 읊은 시다.
[주D-093]곤이(昆夷) : 주 문왕(周文王)이 곤이의 강함을 당하지 못하여 섬겼었다.
[주D-094]배수진(背水陣) : 임진 왜란 때 신립이 조령(鳥嶺)을 지키자는 김여물(金汝物)의 말을 듣지 않고 한신(韓信)의 병법을 본받는다고 충주의 달천(撻川)을 뒤에 두고 배수진을 쳤다가 패하였다. 한신이 조(趙) 나라와 싸울 때에 배수진을 쳐서 이기자, 싸운 뒤에 여러 장수들이 묻기를, “병법에, ‘오른쪽과 등 뒤에는 산과 언덕을 두고 앞과 왼편에는 물을 끼고 진을 친다.’ 하였는데, 오늘 장군이 물을 등 뒤에 두고 진을 쳐서 이긴 것은 어떤 까닭입니까?” 하였다. 한신이 말하기를, “내가 한 방법도 병법에 있으니, 군사를 죽을 땅에 집어넣어야 힘껏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오늘 제군들은 내가 평소부터 어루만져 길러온 부하들이 아니니 장판의 사람을 몰아서 싸우는 것과 같다. 편리한 땅에 진을 치면 모두 도망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등 뒤에 물이 있어 갈 데가 없으니 전진이 있었을 뿐이다.” 하였다. 신립은 경우와 사세가 다른 데도 이 병법을 잘못 썼다가 패하여 죽었다.
[주D-095]천시(天時)ㆍ지리(地理) …… 귀한 것인데 : 《맹자》에, “천시가 지리보다 못하고 지리가 인화보다 못하다.” 하였다.
[주D-096]허통 : 서얼이나 문벌이 낮은 자는 문과에 올라 청직(淸職)을 할 수 없었는데, 여기서는 곡식을 바친 자에게 청직의 길을 터준 것이다.
[주D-097]면천 : 천인(賤人)에게 신분의 구속을 풀어 주어 천역(賤役)의 기록에서 빼준 것이다.
[주D-098]빈을 떠남 : 주 나라 태왕(太王)이 적을 피하여 도읍인 빈을 버리고 옮겨갔다.
[주D-099]범방(范滂)이 천하를 …… 서로 잇달았으니 : 후한(後漢) 말기에 각 지방에 탐관이 많으므로 안찰(按察)하는 사자(使者)를 나누어 보냈다. 범방이 수레에 오르면서 천하를 맑힐 뜻이 있자, 탐관오리들이 소문만 듣고도 인수를 풀어 놓고 가는 자가 많았다.
[주D-100]곽공(郭公)이 착한 …… 망하는 데 이르렀다 : 제 환공(齊桓公)이 놀러 나갔다가 한 노인을 만나서 그 지방의 역사를 물은즉 노인은, “저기가 곽공이 망한 터입니다.” 하였다. 제 환공이, “곽공은 어찌하여 망하였는가?” 하니, 답하기를, “곽공은 착한 것을 착하게 여기고 악한 것을 악하게 여겼습니다.” 하였다. 제 환공이, “그런데 왜 망하였는가?” 하니, 답하기를, “착한 것을 착하게 여기면서 쓰지를 못하고, 악한 것을 악하게 여기면서도 제거하지 못하므로 망하였습니다.” 하였다.
[주D-101]수양(睢陽)의 군사는 …… 것을 면하였고 : 당 나라 장순(張巡)이 수양을 치는데, 오래 포위되어 양식이 없으므로 나는 새를 그물로 잡아먹고 사람까지 수만 명을 잡아먹었다.
[주D-102]아홉 번 토벌 : 촉한(蜀漢)의 강유(姜維)가 한(漢) 나라를 회복하기 위하여 중원(中原)을 아홉 번 쳤다.
난중잡록 1(亂中雜錄一)
임진년 상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왜인 귤광련(橘光連)이 의(義)를 위해 죽다. 귤광련은 일명 강광(康光)이라고도 하는데, 일본 대마도(對馬島)의 작은 두목[小酋]이다. 경인년(1590, 선조 23) 이전에도 누차 왜의 사신이 되어 우리나라에 내빙(來聘)하였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후한 상과 높은 작위로 특별히 회유하였다. 경인년에 이르러, 그가 현소(玄蘇) 등과 함께 정탐하러 왔을 때, 귤광련이 은밀히 우리 조정에 고하여, “일본의 사람들은 변덕스럽고 간사하기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여러 해 동안 모략을 쌓은 끝에 상국(上國 명 나라를 말함)을 침범할 계획을 결정하였으니, 지금 온 두목들을 죽여서 큰 화를 막도록 하십시오.” 하였는데도, 우리나라에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번에는 수길(秀吉)이 귤광련이 우리나라를 자세히 안다고 해서 그로 하여금 의지(義智) 등과 함께 선봉을 갈라 맡아 가지고 날짜를 정해 바다를 건너가게 하였지만, 귤광련이 그 명령을 거부하고 말하기를, “이번 출병(出兵)은 무슨 명목에서인가. 조선으로 말하면 일본의 좋은 이웃이다. 2백 년 동안 조금도 틈이 없이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최대한의 성심을 다해 왔는데, 어찌하여 맹약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켜 상국의 땅을 범하려고 한단 말인가. 하물며 나는 상국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죽을 것을 산 것도 뼈에 살을 붙여 준 것도 모두 그 은덕이 아닌 게 없다. 내 비록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만은 지니고 있다. 머리 위에 하늘의 해를 이고 있으면서 어떻게 차마 은덕을 잊고 감히 조선을 짓밟고 지나가겠는가. 한 번 죽기는 마찬가지다. 군사를 몰고 바다를 건너가는 짓은 결코 하지 않겠다.” 하다. 의지가 이 말을 수길에게 전하여 알리자, 수길이 대노하여 곧 귤광련을 잡아다 목 베어 대중에게 보이게 하고 또 구족(九族)을 멸하게 했다. 귤광련의 한 아들은 요행히 상인으로 먼 섬에 나가서 머물러 있었는데, 이 변고를 들어 알게 되자 곧 행장을 버리고 성명을 바꾸고는 도망가 숨어서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 후 만력 34년 병오년(1606, 선조 39) 일본 국왕 원가강(源家康)이 평성(平姓)을 다 없애고, 서신을 써서 사신을 보내고는 다시 통신하기를 청해 왔다. 예조(禮曹)에서는 무과첨지(武科僉知) 전계신(全繼信)과 역관(譯官) 박희근(朴希根)을 회답사(回答使)로 하여 일본에 보냈다. 이들이 대마도에 당도하여 귤광련의 아들을 만나 보기를 원했더니, 성이 귤과 다른 한 왜인이 와서 그 이유를 캐는 것이었다. 전계신 등이 그가 귤광련의 아들임을 알아채고 백방으로 그를 위로하면서 극진한 은의를 베풀었다. 귤광련의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전에 있었던 일을 다 말했다. 회답사가 돌아와서 경상 감사에게 자세히 보고하였고, 감사 유영순(柳永詢)이 이 일을 조정에 갖추어 상주(上奏)하니, 조정에서 의론한 끝에 귤광련의 사당을 부산(釜山)에 건립했다. 그 후 신해년(1611, 광해군 3)에 유상(柳相)이 나한테 이 일을 자세히 전해 주기에, 내가 기특하게 여겨 그 일을 기록하고 이어 시를 짓기를,
천부의 양성이란 구해서 오는 것이 아니련만 / 秉彝良性非求至
난에 임해서는 어찌하여 신의 적단 말고 / 臨亂胡爲少信義
의관 갖춘 사람마저 나라 저버리고 부끄러움 모릅디다만 / 衣冠負國尙不恥
이적 땅의 사람으로 이럴 수 있었고야 / 夷狄之人乃如此
하였다.

여름 4월. 왜적 평수길(平秀吉)이 그의 장수 평수가(平秀家) 등 36명의 두목들을 보내어 상세한 것은 강항(姜沆)의 장계(狀啓)에 있다.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침입해 들어오다. 평행장(平行長)이 평의지(平義智)ㆍ평조신(平調信) 등과 함께 선봉이 되어 병선 4만여 척과 군사 1백만으로 바다를 덮고 와서는, 13일 새벽 안개가 자욱한 기회를 타서 곧장 부산(釜山)으로 쳐들어 왔다. 그때 첨사(僉使) 정발(鄭撥)은 절영도(絶影島)로 사냥을 나가 있었다. 처음에는 조공(朝貢) 오는 왜인이라고만 생각하고 걱정거리로 여기지도 않았는데, 잠시 후 병선이 무수히 몰려오는 것을 보고야 급히 돌아와 성으로 들어갔다. 성문이 겨우 닫히자 왜적들은 이미 상륙하여 성을 백 겹으로 포위하였으며, 얼마 안 가서 성은 함락되었고 정발은 죽었다. 왜적의 변란이 심히 다급해서 조야(朝野)가 창황하였다. 정 발은 나라를 위해 순절했으나 은명(恩命)을 받지는 못했었는데, 그 후 만력 31년 계묘년(1603, 선조 36)에 정발의 처 임씨(任氏)가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기를, “발은 고립된 성을 지키면서 힘을 다해 싸우다 죽었는데도, 어떤 사람은 정발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고 하니, 지하의 억울한 혼이 눈을 감지 못합니다. 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특별히 포상을 내려주시기를 청원합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본도 순찰사(巡察使)에게 명하여 정발이 전사한 곡절을 탐문해서 아뢰라 하니, 순찰사 이시발(李時發)이 좌수사(左水師) 이영(李英)에게 이첩하였고, 이영이 회보하기를, “그때 토병(土兵) 가은산(加隱山) 등 3명은 탈출할 수가 있어서 죽지 않았는데, 이들이 모두 말하기를, ‘첨사가 사냥을 나갔다가 왜선이 무수함을 보자 급히 부산진에 돌아와서 성 밖의 주민과 군인 등을 독촉하여 빠짐없이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는 사람을 시켜 왜관(倭館)에 머물러 있는 왜인을 가보게 했는데, 단지 네 명이 있을 뿐이어서 곧 잡아 가두게 하였습니다. 또 전선(戰船)ㆍ방패선(防牌船)ㆍ중선(中船) 등 도합 세 척을 모두 배 바닥에 구멍을 뚫어 물에 가라앉게 한 뒤에, 첨사는 남문의 성루(城樓)에서 밤을 지냈습니다. 그 이튿날 날이 샐 무렵에 왜적이 성 뒷산을 둘러싸고 진을 치자 첨사는 군중(軍中)에 영을 내려 동요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하고는, 마침내 서문으로 옮겨가 수비했습니다. 그런데 왜적이 일시에 함께 진격해 와 높은 곳을 점령하고 고함을 치면서 탄환을 비오듯이 쏘아대는데, 쏘는 탄환치고 맞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첨사는 탄환에 맞아 죽었고 첨사의 첩도 스스로 목 베어 죽었으니, 성은 마침내 함락되었습니다. 가은산 등은 쌓인 시체 속에 숨어 있었는데, 오후에 왜적이 군중에 영을 내려 남은 백성들을 죽이지 말라 하여 다 배 위에 잡혀 있다가 17일에 석방되어 돌아왔습니다. 운운.’ 하였습니다.” 하다. 순찰사가 그 회보에 의하여 자세히 아뢰다.
14일. 왜적이 동래(東萊)를 함락하였는데 부사(府使) 문과(文科) 출신의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평화시의 예에 따라 파견되었다. 송상현(宋象賢)은 죽고, 좌위장(左衛將)인 울산 군수(蔚山郡守) 이언성(李彦誠)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에게 항복하다. 하루 전에 송상현은 왜적이 대거 침입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인접 고을 군사를 불러다 동래성을 지켰다. 이리하여 좌병사(左兵使) 이각(李珏)이 동래성에 달려 들어왔는데, 부산이 이미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자, “나는 절제장(節制將)이니 본영(本營)을 지켜야지 여기에 있을 게 아니다.”라고 핑계하고, 성을 나가려 했다. 이때 송상현이 큰 소리로 외쳐 말하기를, “고립된 성이 함락되려고 하는데, 주장(主將)이 구원해 주러 왔다가 어찌 차마 버리고 간단 말이오.” 하였으나, 이각은 듣지 않은 채 아병(牙兵) 20명만을 남겨 놓고 가 버렸다. 이날 날샐 무렵 적병이 대거 진격해 와서는 우선 허수아비를 만들어 붉은 옷에 푸른 건을 씌우는 한편, 등에는 붉은 기를 지우고 허리에는 긴 칼을 채워서 그것을 긴 장대 끝에 꽂아 담 사이에 늘어 놓자, 성 안의 사람들이 크게 놀라 도망치며 울부짖었으며, 왜적은 칼을 휘두르면서 마구 성 안으로 쳐들어 왔다. 조방장(助防將) 홍윤관(洪允寬), 중위장(中衛將)인 양산 군수(梁山郡守) 조영규(趙英珪), 대장(代將) 송봉수(宋鳳壽), 교수(敎授) 노개방(盧盖邦) 등이 모두 이 싸움에 죽었다. 송상현은 남문 성루에 올라 갑옷 위에 단령(團領)을 입고 관대를 띠고는 교의에 앉아 있었다. 왜적은 그가 부사임을 알고 생포하려 하였으나, 송상현이 가죽신 신은 발로 두 차례나 차고 왜적을 꾸짖기를, “이웃 나라의 도리가 과연 이러한 것이냐. 우리는 너희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너희는 왜 이런 짓을 하기에까지 이른단 말이냐.” 하니, 왜적이 몹시 성내면서 그를 잡아 끌고 목 베려 할 즈음에도 그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사가 남문의 성루에 있을 때 왜적이 칼을 휘두르며 돌입하자 부사는 그를 쏘아 죽였으며, 뭇 왜적이 난입하자 부사는 장검으로 두 왜적을 쳐죽이고 죽었다.”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그의 첩은 북도의 기생이었는데 역시 굴복하지 않아 왜적이 송상현과 함께 죽였다. 양첩(良妾) 이소사(李召史)는 자녀를 데리고 일본에 잡혀 갔다가 그 후 갑오년(1594, 선조 27)에 평행장(平行長)이 경상 우병사 김응서(金應瑞)와 화평을 의논할 때 석방되어 돌아왔다. 왜적은 그들을 의리 있는 사람이라 여기고는, 두 사람의 시체를 거두어 성 동문 밖에 묻고 나무패를 세워 표적을 해주었다. 부사가 조용히 죽음을 당할 그때 관노(官奴) 급창(及唱)이 소리쳐 울며 달려 들어가 손으로 부사의 옷자락을 잡고 기꺼이 그와 함께 죽으니, 왜적이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애초에 부사가 경내의 대소 부녀들을 모아 모두 성 안에 들어와 있게 하였는데, 성이 함락되자 왜적들이 그들을 모두 문루 위로 몰아 오르게 하고, 기생과 악공에게 풍악을 잡히고 술자리를 벌여 모여 신나게 놀았으며, 창고를 다 털어서 준비했던 배에 싣고 저희 나라로 돌려보내다. 포위를 당하기 전에 송상현은 북쪽을 향해 재배하고 부채에, “외로운 성에 달무리[暈] 서매, 크디큰 진영(鎭營)을 구해 내지 못하누나. 군신의 의리는 무겁고, 부자의 은혜는 가볍다.”라고 손수 써서 그것을 집 종에게 주어 그의 부모한테 가서 알리도록 하다. 그 후 왜적들도 포로된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의 충신은 오직 동래부사 한 사람뿐이다.” 하다. 부채면의 16자(字)는 안 상산(顔常山)의 “신(臣)은 무상(無狀)하니,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 한 말과 문신국(文信國)의, “인(仁)을 이룩하고 의(義)를 취한다.” 한 찬(贊)과 더불어 전후로 같은 정신이다. 글을 읽고 비감(悲感)에 젖어 모르는 결에 눈물을 흘렸으니, 천고에 걸쳐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역적들의 마음을 격동시키기에 족하리라. 그때 본도의 감사(監司) 김 수(金睟)가 진주(晉州)에 있었는데, 부산의 급보가 졸지에 도착하자 마침내 좌우 도(道)의 군사들을 독촉 징발해서 계속 구원하러 나가게 하다.
15일. 김수가 진주로부터 달려 반성(班城) 진주의 속현 까지 갔는데, 거기에서 부산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곧 장계를 갖추어 급히 보내고 군대를 정비해 가지고는 함안(咸安)을 거쳐 칠원(漆原)에 이르렀다. 본도의《순영록(巡營錄)》에 나온다. 그때 본도의 우병사 신길(申硈)은 이미 갈리어 조대곤(曹大坤)이 그와 교체되었으나, 조정에서는 조대곤이 노쇠하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경질하고 김성일(金誠一)로 대신하였다.
○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변기(邊璣)와 조경(趙儆)을 경상 좌우 방어사로, 성응길(成應吉)ㆍ양사준(梁士俊)ㆍ박종남(朴宗男)ㆍ변응성(邊應星)을 경상 중좌우 조방장(慶尙中左右助防)으로, 곽영(郭嶸)을 전라 방어사로, 이유의(李由義)ㆍ김종례(金宗禮)ㆍ이지시(李之時)를 전라 중좌우 조방장으로, 이옥(李沃)을 충청 방어사로 하다.
16일. 왜적의 군사가 길을 나누어 전진했는데, 중도(中道)로 오는 왜적이 양산(梁山)을 지나면서 그곳을 깡그리 불태워 버렸다. 김수는 영산(靈山)에 이르러 왜적이 이미 양산을 통과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밀양(密陽)으로 달려갔는데, 적병이 대거 이르자 바로 영산(靈山)으로 후퇴하였다가 밤중에 초계(草溪)를 건너 전라 감사에게 이첩하였는데, “구원을 계속해 달라는 부산ㆍ동래ㆍ양산이 이미 함락되었고 적이 또 밀양(密陽)에까지 범했는데, 그 병세(兵勢)를 보니 사세가 버티어 나가기 어려워 또 함락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의 일은 정말 말할 수도 없는 형편이고 이 일을 생각하니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이는 개인의 화가 아니고 나라의 일이니, 귀도(貴道)의 군사 3, 4천 명과 도의 군관 3, 4명을 보내 주시오.” 하다. 이 통첩이 도달하자 호남은 겁에 질려 들끓고 다들 적을 피할 마음만을 지니고 있었다.
○ 경상 좌병사 이각(李珏)이 후퇴하여 소산(蘇山) 동래의 속역(屬驛)이다. 에 머물렀다. 이각은 이날 병영으로 달려 돌아가서는 싸우고 지키고 하는 대비에는 뜻이 없었고, 수석 진무(鎭撫)를 독촉해서 사람과 말을 내어 자기 첩과 면포(綿布) 천여 필을 운반해 옮겨 놓으라고 시키다. 진무가 어려운 기색을 보이자 이각이 대노하여 당장에 그를 목 베다. 본도《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 좌수사 박홍(朴泓)은 왜적이 도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양식과 기계를 불태우고는 도망쳐 버리다. 본도《순영록》에 나온다.
17일. 좌우의 왜적이 여러 고을에 가득 찼고 길을 나누어 진격하다. 한 대열은 언양(彦陽)에 함빡 몰려 들었다가 이어 경주(慶州)를 범했고, 중도(中道)로 오는 왜적은 곧장 밀양 가는 길로 해서 바로 들어 갔다. 부사 박진(朴晉)은 양산에서 후퇴하여 돌아와 황산(黃山)의 높은 잔교(棧橋)가 강에 임해 있는 그곳에서 적의 길을 막았다. 적장은 은색 가마를 타고 은색 우산을 펴고서 줄기차게 휘몰아 바싹 뒤쫓았다. 박진은 힘을 내어 싸워 여러 급(級)의 목을 베었고, 박진의 군관 이대수(李大樹)와 김효우(金孝友) 역시 연달아 여러 왜적을 쏘아 죽이고 자신도 탄환에 맞아 죽었다. 그러나 왜적이 이미 재[嶺]를 넘어 그의 귀로를 끊어 앞뒤로 적을 맞이하자 박진이 본부(本府)로 달려 돌아와 창고를 불사르고 성을 나섰는데, 왜적은 이미 성 밖에 가득 차 있었다. 박진은 단기(單騎)로 충돌하여 포위를 허물고 왜적의 목 2급(級)을 벤 다음 달아나니, 이로 말미암아 원근의 사람들은 곧 박진의 이름을 알게 되다.《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18일. 왜적의 배 2백여 척이 부산에서 이동하여 김해(金海)를 함락시키자 부사 서예원(徐禮元)은 성을 버리고 달아나다. 애초에 중위장(中衛將)인 초계군수 이유검(李惟儉)이 서문을 지키고 서예원은 남문을 지키면서 종일 접전했는데, 밤중에 이유검이 야경(夜警)이라 사칭하여 문지기를 찍어 죽이라 하고는 먼저 도망했고 서예원 역시 이유검을 추격한다고 청탁하고는 서문으로 해서 달아나, 김해성이 마침내 함락된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19일. 적병이 밀양에서부터 또 영산(靈山)ㆍ청도(淸道) 등지를 범해 깡그리 불태워 없앴는데, 그 기세가 바람에 불길 같고 진동하는 우레 같아 지나가는 곳이 다 초토(焦土)가 되었다. 김수는 합천(陜川)에 머물러 있으면서 또 전라도에 이첩하였는데, “경상감사가 전달하는 일입니다. 흉악한 왜적이 어제 밀양에서 성을 함락시킨 다음 또 영산에 침범하고 곧장 성주(星州) 길로 향했는데, 이어 대구 길로 올라갈지의 여부는 미리 알 수 없습니다. 현풍(玄風)ㆍ창녕(昌寧) 등지의 공사(公私) 집들은 다 비어 있고, 본도의 각 병영에서는 모두 우관(右關) 운봉현(雲峯縣)에 달려가 보고했습니다.” 하다.
20일. 경상 우병사 김성일(金誠一)이 병영으로 갔다. 애초 김성일이 어명을 받고 잽싼 걸음으로 달려 내려가 의령(宜寧)에 당도하고는, 정진(鼎津)을 거쳐 병영에 직접 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때 적병이 강의 우안(右岸)에 가득 모여 들자, 김성일의 휘하 장병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길은 왜적의 소굴에 가장 가까우니 진주로 해서 함안(咸安)에 도달하느니만 못하다. 그렇다면 왜적과도 좀 멀리 떨어지게 되지만, 만약 그렇지 않으면 주장은 군령이 엄하여 곧장 전진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 길은 위험하다.” 하고는, “정진에는 배가 없습니다.” 하고 김성일을 속이고 다시 그의 아들 김혁(金湙)에게, “강물이 불고 배가 없으니 진주 길로 가는 것이 편리합니다.” 하고, 힘들여 간하도록 당부했다. 김성일이 군관 김옥(金玉)을 시켜 가보게 했는데, 김옥이 돌아와서는, “배가 없어서 건널 수 없으니 진주 길로 빨리 가야 하겠습니다.” 하고 속여 보고했다. 그때 전 목사(牧使) 오운(吳澐)이 촌락의 집에 있다가 새 장수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배례하고, “영감이 오셔서 군민의 기운이 배가했습니다만 왜 정진으로 바로 건너지 않으시고 진주로 해서 돌아 가시려고 합니까.” 하니, 김성일이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길을 와 본 일이 없소만, 틀림없이 휘하 장병들이 왜적을 두려워하여 나를 속인 것이오.” 하다. 그리고는 직접 가서 보니 큰 배가 강 언덕에 대어 있었다. 김성일이 대노하여 김옥ㆍ김혁 등을 잡아들여 형을 집행하게 했는데, 김옥이 큰 소리로, “김옥의 죄는 마땅히 참형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공이 전쟁에 임하실 때 한 번 목숨을 바쳐 속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고 외치니, 김성일이 말하기를, “네가 속죄를 요구하였으니 앞으로 왜적을 만나거든 반드시 먼저 나서서 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의 죄까지 다스리어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하고는, 곧 군사들을 재촉하여 강을 건너 해망원(海望原)에 이르렀다. 전 병사 조대곤(曹大坤)이 이미 이곳에 후퇴하고 있었는데, 김성일을 보자 깜짝 놀라 읍하면서 맞이하고 그에게 직인과 부절을 넘겨 주고는 곧 하직하고 가려 하니, 이에 김성일이 그를 준렬하게 책하여 말하기를, “장군은 곤수(閫帥 병사나 수사를 일컬음) 신분으로 군사를 가지고도 진격하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서 김해(金海)를 함락당했으니, 그 죄는 마땅히 형을 받아야 하오. 더구나 세신(世臣)으로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이 극렬한 변란에 임해서 의리상 도망쳐서는 안 되오.” 하자, 조대곤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띠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움켜쥐었다. 얼마 안 있다가 척후병이 와서 왜적의 선봉이 이미 도착했다고 알리자, 조대곤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면서 김성일에게 말에 올라 타자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김성일이 그를 꾸짖어 저지시킨 다음 군사들에게 망동하지 말라고 영을 내리고, 용맹한 군사를 골라 좌우의 복병을 잠복시키고 왜적을 기다렸다. 두 왜적이 흰 말을 타고 새깃으로 만든 옷[羽衣]과 금 갑옷에, 사방에 귀와 눈이 있어 빙글빙글 도는 게 답차(踏車)의 모양과도 같은 금가면(金假面)을 착용하고는 칼을 휘두르면서 말을 달려 앞으로 다가오자 장병들이 겁내어 떨었다. 그러나 김성일은 조대곤과 편안히 걸상에 마주 앉아 있었는데 왜적은 그가 꼼짝하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고, 부채를 휘두르면서 걸어오는 왜적 수십 명이 그 뒤에 있었다. 김성일이 군관 20여 명을 시켜 앞에 가 그들을 쏘게 하고 또 용맹한 군사를 골라 돌격하게 했으나, 다들 서로 돌아보며 먼저 나가라고 미루는 것이었다. 김성일은 특히 김옥을 불러서 말하기를, “네 기왕에 먼저 나서서 공을 세우겠다고 하여 놓고 지금에 와서 회피할 수 있겠느냐.” 하니, 김옥이 곧 앞장 서서 말에 올라 수 리 밖에까지 쫓아가서 그 금가면의 말탄 왜적을 쏘아 거꾸러뜨리고는, 이긴 기세를 타고 추격하여 금안장[金鞍]ㆍ준마(駿馬)ㆍ보검(寶劍) 등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왔다. 이 전투는 병졸이 1천 명도 되지 않고 병기도 쓸어낸 듯이 없었건만, 적의 날카로운 칼날을 좌절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군의 사기가 약간 진작되매, 곧 군관 원사립(元士立)과 이숭인(李崇仁)을 시켜 괵수(䤋首)를 바치고 장계(狀啓)를 올리게 했다. 그리고 나서야 보졸들을 앞에 가게 하고 김성일은 맨 뒤에서 고삐를 조여잡고 천천히 갔다. 이날 밤 김성일이 함안으로 진을 옮기고, 내상(內廂)을 수습하려고 하였는데 자기를 체포하라는 어명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충성스런 분기에 격동되어 사졸들이 목숨을 내놓고 죽기를 무릅쓰면서 힘을 내어 싸워 강한 왜적이 부지하지 못했는데 당시의 장병들은 왜 이것을 거울 삼지 않았는가.
○ 김수가 합천에서 지례(知禮) 쪽으로 도망쳤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21일. 우도(右道)의 왜적은 영산(靈山)을 거쳐 창녕(昌寧)ㆍ현풍(玄風) 등지를 지나서 깡그리 태워 없앴고, 중도(中道)의 왜적은 청도(淸道)로부터 경산(慶山)과 대구(大丘)를 지나가 홍수가 밀어닥치듯 산과 들을 메웠으니, 이때부터 강 좌우의 길이 막혀 버렸으며 좌도(左道)의 왜적은 울산(蔚山) 좌병영(左兵營) 등지를 향해 전진했다. 이각(李珏)은 서산(西山)으로 나가서 진을 쳤는데, 그때 열세 읍의 군사들이 모두 도착하여 성에 들어갔다. 안동 판관(安東判官) 윤안성(尹安性)이 동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각이 성을 비우고 나가서 진을 치려고 하자 윤 안성이 말하기를, “어찌 성을 버리고 나가서 진을 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니 이각이 대답하기를, “공은 우후(虞候) 등 여러 수령(守令)과 성을 지키면 되오. 공이 가지고 있는 석전군(石戰軍)을 나에게 예속시켜 주기를 바라오. 나는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나가 서산에 진을 치고 왜적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안팎에서 협공하겠소.” 하다. 마침내 이각이 서문으로 해서 성을 나가더니 윤안성 등을 돌아보고 태화강(太和江)을 가리키면서, “너희들은 왜적의 선봉이 이미 저곳에 꽉 차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하고는, 곧 서산으로 향해 달려 가니, 윤안성이 흥분하여 꾸짖으며 칼을 잡고 그를 노렸다. 우후(虞候) 원응두(元應斗) 역시 도망칠 생각을 갖자, 윤안성이 성을 내며 힐책하기를, “주장이 까닭없이 성을 나갔으니 그 죄는 마땅히 참형을 받아야 한다. 그나마 너희들을 남겨두고 성을 지키게 했는데, 너희들까지 또 도망가려는 거냐.” 하니, 원응두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적병의 또 한 패가 언양(彦陽)으로부터 사잇길로 해서 전진하여 경주를 함락시켰다. 그때 부윤(府尹) 윤인함(尹仁涵)은 포망장(捕亡將)으로 서천(西川)에 있었고, 판관(判官) 박의장(朴毅長), 장기 현감(長鬐縣監) 이수일(李守一) 등은 성 안에 있었다. 왜적의 기병(騎兵) 한 명이 동문 밖에까지 달려와서 패문(牌文)을 꽂아 놓고 갔다. 그것을 가져다 보니, “도주(島主)가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니, 판관은 속히 성을 나와 명령을 듣도록 하라.” 하고 씌여 있으매, 박의장 등은 성을 비우고 도망가 버렸다. 용궁 현감(龍宮縣監) 우복룡(禹伏龍)은 계원장(繼援將)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모양(牟陽)까지 달려가고 있었고 하양(河陽)의 대장(代將) 역시 군사 5백여 명을 거느리고 경주로 가고 있었는데, 하양은 본래 방어사의 소속이었으므로, 병사가 하양 대장으로 하여금 물러가 방어사의 지휘를 받게 하다. 우복룡이 막 길가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가 하양의 군사들이 후퇴하여 돌아가는 것을 보자, 그들이 왜적의 선봉이 된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여 불러다 물어보게 하다. 대장이 사실대로 대답하였으나, 우복룡은 몰래 자기 군중(軍中)에 호령하여, “이들은 왜적의 앞잡이가 아니면 틀림없이 도망하는 군사들이다.” 하고는 자기 군사들을 시켜 하양의 군사들을 포위해 잡아다가 점검을 가장하고 깡그리 죽여버리니, 흘린 피가 개울을 이루다. 하양 한 고을의 군민이 이로 인하여 탕진돼 버리다. 우복룡은 곧 토적(土賊)을 잡아 목베었다고 방어사에게 사후 보고를 내다. 《경상도 순영록》에 나온다. 흉악한 왜적에게는 의기를 떨치지 못한 채 도리어 무고한 군사들에게 독수(毒手)를 옮겨 쓰고도 전혀 후회하지 않고 보고를 작성하여 공(功)을 요구했으니, 그런 못된 꼴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22일. 김성일(金誠一)이 체포 명령에 응하여 길을 떠나다. 앞서 김성일이 일본에서 돌아와 어탑(御榻) 앞에서, “일본은 반드시 군사를 출동시키지 않을 것이니 근심할 일이 없을 것을 보증합니다.” 하고 아뢴 적이 있었는데, 왜적의 변란이 일어나자 임금이 전번에 아뢴 말의 책임을 추궁하여 이 명령을 내린 것이다. 김성일이 체포 명령이 도달하리라는 소식은 들었지만 길이 막혀서 아직 당도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금의 말씀이 아직 내리지 않았고 큰 적은 앞에 닥쳐 있는데, 병사로서 어떻게 진(鎭)을 쉽사리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김성일은, “군명(君命)을 오래 지체시켜서는 안 된다.” 하고 곧 길을 떠난 것이다. 이날 우후(虞候)와 이협(李俠)이 군기(軍器)를 못물[池水] 속에 가라앉히고 창고를 태우고서 도망갔으며, 창원 부사(昌原府使) 장의국(張義國) 역시 성을 버리고 달아나다. 김성일이 가는 도중에 김수(金晬)가 나와 만나보고 그의 피체(被逮)를 위로하니, 김성일은 말이나 안색에 전연 나타내지 않고 다만,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원컨대 영공(令公)께서는 힘써 왜적을 토벌해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시오.” 하였다. 영리(營吏)들이 서로 말하기를, “체포된 것은 근심하지 않고, 나랏일만 걱정하고 있으니 참으로 충신이다.” 하다. 조대곤(曹大坤)이 용서를 받아 다시 병사가 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왜적이 좌병영을 함락시키니, 이각(李珏)과 원응두(元應斗)는 이미 먼저 도망가 버렸고, 열세 읍의 군사들은 다 무너지다. 이각은 무예(武藝)가 뛰어났는데, 본직(本職 즉 좌병사)을 제수하자 그는 포를 쏠 때 탄환(彈丸) 대신 탄환 만한 10여 두(斗)의 해마석(海磨石)을 가지고 시험했는데 소리와 힘이 모두 격렬하니, 사람들이 그를 중진으로 여기게 되다. 그러나 한정없이 탐욕을 부렸고 천성은 또 겁이 많아 왜적이 지경을 침범해 왔다는 소리를 듣기만 하면 허둥지둥 어쩔줄을 몰랐으며, 동래(東萊)가 함락되자 몸을 빼어 달아났고, 병영이 포위되었을 때도 성을 비우고 먼저 도망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당시 장수들은 겁이 많은데다 또 탐욕스러웠다. 자기 몸을 청렴하게 갖고 군사를 사랑하며 적을 막아 나라에 보답하는 자는 거의 없었으니, 이들은 실로 한(漢) 나라의 공명(孔明)이거나 송(宋) 나라 붕거(鵬擧)의 죄인들이다. 이각의 겁은 적을 보기도 전에 드러났고 이각의 탐욕은 국가가 어수선할 때에 나타났으니, 비단 옛 훌륭한 장수에 대한 죄인일 뿐 아니라 실로 당시 장병들의 죄인이기도 한 것이다.
○ 유학(幼學) 곽재우(郭再祐)가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宜寧) 사람이다. 처음에 그는 여러 성이 연달아 함락되고 여러 진(鎭)의 주장들과 방백ㆍ수령들이 모두 깊은 산으로 피하여 감히 교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섭게 나무라며 말하기를, “성스러운 조정에서 2백여 년 동안이나 신하들을 길러 왔건만, 갑자기 위급한 사태가 일어나자 모두 자신을 보전할 계책이나 찾고 임금의 난경(難境)은 돌보지 않으니, 지금 만약 초야에 묻힌 몸이라 하여 일어나지 않는다면 전국 3백 주(州)를 통틀어 남자란 하나도 없는 결과가 될 것이다. 어찌 만고의 수치가 아니겠느냐.” 이리하여 자기 가산을 전부 뿌려 흩어진 군졸들을 모으고, 자기가 입은 옷을 벗어선 전사(戰士)에게 입히고, 처자의 옷을 벗겨서는 전사들의 처자에게 입혔으며, 또 충의로써 군사들을 격려하였다. 이때부터 모집된 전사들 중에 심대승(沈大承)ㆍ권란(權鸞)ㆍ장문장(張文章)ㆍ박필(朴弼) 등 10여 인은 다 용감하고 활 잘 쏘는 사람들로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곽재우와 함께 죽기를 원하였다. 이날 서로 같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정하고 수하의 용사 50여 명을 시켜 의령(宜寧)ㆍ초계(草溪)에 있는 창고의 곡식을 풀어 내고, 또 기강(岐江)에 거둬들인 배의 조세미(租稅米)를 가져다가 모집한 군사들을 먹이니,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여 어떤 사람은 그가 발광한다고 생각하였고, 어떤 사람은 그가 도적질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합천 군수(陜川郡守) 전현룡(田見龍)도 그를 토적(土賊)이라고 순찰사(巡察使)에게 보고하여 군졸들이 다 흩어져 버렸었는데, 그때 마침 초유사(招諭使)가 내려와 그의 이름을 듣고는 그를 불러다 만나 보고야 의병을 일으키라고 격려하니, 이리하여 군졸들이 되돌아왔다. 이에 곽재우는 더욱 힘을 내어 왜적을 토벌하였다. 적이 많고 적은 것을 묻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나아가고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한 사람으로 열 명을 당해내었다. 그가 싸울 때는 반드시 붉은 생초[紅綃]에 안을 댄 옷을 착용하고 당상관(堂上官)의 입식(笠飾 융복(戎服)의 갓에 갖추던 장식을 말함)을 갖춘 갓을 쓰고,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자호(自號)하고 말을 달려 적진을 빼앗곤 했는데, 그가 내왕하는 동작이란 잽싸게 출몰하는 것이어서 왜적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런 후에 그는 말을 빙그르 돌리고 북을 치면서 천천히 가는 것을 군사를 움직이는 절차로 삼으니, 왜적들은 그의 군사가 많은지 적은지를 몰라서 감히 바싹 다가오지 못하였다. 그는 진을 친 곳으로부터 왜적이 있는 곳에까지 이르는 길의 2, 3식경(食頃)의 거리마다 잇달아 척후소를 두어 이상(異狀)의 유무를 은밀하게 보고하도록 마련하였으니, 왜적이 1백 리 밖에 도착해도 진 안에서 그를 먼저 알고 미리 준비하고 있는지라 언제나 편하고 힘이 들지 않았으며 언제나 조용하고 시끄럽지 않았다. 만약 왜적이 많이 오면 그들이 바라보이는 산에다 사람들을 시켜 손잡이 하나에 가지가 다섯씩 달린 횃불을 밤새도록 들고서 무서운 함성을 올리며 서로 호응하게 하여 천병 만마(千兵萬馬)가 있는 것같이 하였으니, 왜적들은 바라보다가 곧 달아나 버렸다. 또 정예한 군인을 골라서 요새지에 잠복시키고는 사람이 없는 것같이 잠자코 있다가 왜적이 오면 곧 쏘아 죽이게도 하였으니, 왜적 역시 그를 ‘홍의장군’이라 하고 감히 상륙하여 불사르고 노략질을 하지 못하였다. 곽재우는 또 군사들을 단속하여 말하기를, “요(要)는 왜적을 죽여야 하는 것뿐이다. 목을 베어다 공(功)을 요구해서 무엇하겠느냐. 만약 후일 공의 대가(代價)를 받기 위해서 왜적을 토벌한다면 그것은 성심에서 우러나 하는 일이 아니다.”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좇아 끝내 수급(首級)을 바치는 일이 없었다. 순찰사의 진에 있던 무사 김경로(金景老)ㆍ김경납(金景納) 등이 곽재우를 모함하자, 곽재우 역시 김수(金睟)가 하는 짓에 분개하여 격문을 돌려 그의 죄를 성토하고 그를 토벌하려 하였지만, 김수가 곽재우를 모반죄로 몰아서 장계를 올리는 바람에 곽재우는 헤아릴 수 없는 죄에 빠져들게 되었는데, 초유사가 양편을 조정해 준 덕으로 마침내 무사하였다. 또 초유사가 삼가(三嘉)의 군사를 곽재우에게 주니, 곽재우는 두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윤탁(尹鐸)을 대장(代將)으로, 박사제(朴思齊)를 도총(都摠)으로, 허자대(許子大)를 군기제조(軍器製造) 책임자로, 정연(鄭演)을 독역사(督役使)로, 권란(權鸞)을 돌격장(突擊將)으로, 이운장(李雲長)을 수병장(收兵將)으로, 심대승(沈大承)과 배맹신(裵孟伸)을 선봉장(先鋒將)으로, 허언심(許彦深)을 군 급량(給糧) 책임자로, 강언룡(姜彦龍)을 무기 수리(武器修理) 책임자로 하였다. 초유사는 또 전 목사 오운(吳澐)을 소모관(召募官)으로 하여 그 수(즉 모집한 군사들의 수효)를 파악하는 일까지 겸임시키고, 성세(聲勢)를 이루어 곽재우를 돕게 하였다. 시골의 넉넉한 집에서는 쌀을 내고 소를 잡아 매일 돌려가며 군사들을 먹이니, 군의 성세가 크게 떨쳤다. 강의 아래 위에 있는 10여 개 소의 얕은 여울목마다 모두 척후를 잠복시켜, 왕래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아 서로 응원하니 왜적이 감히 물을 건너 오지 못하였고, 여러 고을 백성들은 평화시와 다름없이 농사를 지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초야에서 일어나 충의(忠義) 두 글자를 받들고 수륙에서 승리를 거두어 왜적 1백 급(級)을 쏘고 베고 하여 죽였다.
○ 한성 판윤(漢城判尹) 신립(申砬)을 도순변사(都巡邊使)로 하고, 전 목사 김여물(金汝岉)을 종사(從事)로 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였는데, 신립이 출동할 때엔 위의가 엄숙하여 사람들이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다. 우리나라의 장수는 비록 이름은 훌륭하지만 위엄과 용맹 하나뿐이다. 다른 나라에서 온 적들이 어찌 너를 살려 주겠는가. 아깝다! 어떻게 이 왜적을 제압할 건가.
23일. 중도(中道)로 오는 대부대의 왜적은 인동(仁同)을 불태워 버리고, 우도(右道)의 왜적은 현풍(玄風)으로 해서 길을 나누어 낙동강(洛東江)을 건너서는 성주(星州)를 불태워 버리니, 성주 판관(星州判官) 고현(高晛)은 도망쳐 달아났고, 목사 이덕렬(李德悅)이 겨우 몸만 살아 남아서 끝까지 고을을 지키다. 토적(土賊)이 성 안에 들어와 점거하고 있으면서 목사를 가칭(假稱)하고 우매한 백성들을 꾀어 모으자, 궁박해진 백성들은 의지할 데가 없어 토적에게 항복하고 부동하는 자들도 많다. 좌도(左道) 왜적의 한 떼는 경주(慶州)로부터 진격하여 영천(永川)을 함락시켰는데 군수 김윤국(金潤國)은 도망쳐 달아났고, 김해(金海)에 머물러 있던 왜적도 이날 진격하여 창원(昌原)을 함락시켜 병영을 모두 불태워 없애고, 이어 칠원(漆原)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다. 또 좌도 왜적의 한 떼는 장기(長鬐)로 향해 진격해 왔는데, 현감 이수일(李守一)이 경주로부터 후퇴하여 돌아와서 장기성 밖에 진을 쳤으나, 적병이 사방에서 진격해 와서 이수일은 곧 후퇴하고 말았다. 영천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신령(新寧)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고 이어 안동(安東)으로 향했는데, 부사 정희적(鄭熙績)은 도망쳐 달아났고, 좌방어(左防禦) 성응길(成應吉)과 조방장(助防將) 박종남(朴宗男)은 의흥(義興)에 머물러 있으면서 움츠리고 물러난 채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때 김수(金睟)는 지례(知禮)에 머물러 있으면서 다만 도순찰사의 지휘만 받고 있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24일. 중도(中道)의 대부대 왜적은 인동(仁同)으로 해서 낙동강을 건넌 다음 선산(善山)으로 진격하여 함락시켰고, 신령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의흥으로 옮겨 함락시키니 현감 노경복(盧景福)은 도망쳐 달아나다. 그때 김수가 박진(朴晉)과 배설(裵楔)에게 선산에 가서 왜적을 정탐하라 했는데, 도중에 죽패(竹牌)를 차고 있는 7명을 만났다. 그런데 그들은 박진 등이 왜적의 무리인가 의심하여, 말 앞에서 살려달라고 애걸하면서 꿇어앉아 왜의 글을 바치는 것이었다. 위쪽에는 크게 영(令) 자 한 자를 썼고, 그 아래에는 잔 글씨로, “군현의 백성들은 속히 옛집으로 돌아가 남자는 모를 심고 보리를 거두며, 여자는 누에를 치고 실을 뽑아 각각 자기 집 일에 힘쓰라. 만약 우리 군사가 법을 범하면 반드시 처벌한다. 천정(天正) 20년 월 일 습유시중(拾遺侍中) 평의지(平義智).” 라고 씌어 있고, 그 아래엔 이름까지 적혀 있다. 박진 등이 그들을 포박해 오다가, 졸지에 왜적을 만나자 버리고 달아났다. 그때 영남 사람으로 왜적에 항복하여 패(牌)를 받은 자가 부지기수라고 한다.
○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상주(尙州)에 이르렀는데 척후(斥候)에 밝지 못한지라, 왜적이 이미 선산을 지났다고 고하는 자가 있었는데도 이일은 그가 군중(群衆)을 현혹시킨다고 노하여 그를 목베어 죽인 다음 군중(軍中)에 돌려 보이니, 왜적이 이미 다가왔음을 듣고서도 감히 먼저 고하는 자가 없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어리석은 자라도 천 가지를 생각하면 반드시 한 가지는 아는 게 있기 마련인데, 가소롭다, 차라리 한 가지도 아는 게 없을 망정 척후로 정탐을 하는 것은 병가(兵家)의 요략이요, 사술(詐術)과 궤모(詭謀)는 명장(名將)도 사양하지 않는 것이건만, 정도(正道)만 지켜 패배를 기다린다는 일은 옛날에도 있었단 말을 못 들었다.
25일. 대부대의 왜적이 선산으로부터 상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매, 이일(李鎰)이 대패하여 달아났는데, 이날 새벽 안개가 자욱할 무렵 포성이 들려 오자 왜적의 선봉이 이미 죽현(竹峴)에 당도했음을 바로 알아채고 이일이 성 밖 북천(北川)에 나가 진을 치다. 왜적은 혹 칼을 번쩍이고 껑충거리며 들어오기도 하고 쥐새끼같이 엎드려 무릎으로 기어서 전진하기도 하여 순식간에 들판을 덮어버렸다. 아군이 저절로 붕괴되어 북천을 꽉 메우게 되매 왜적이 돌격하는 기병으로 짓밟게 하니 시체 쌓인 것이 산더미 같다. 종사관 박지(朴篪), 이일의 종사관이다. 이경류(李慶流), 변 기(邊璣)의 종사관이다. 윤섬(尹暹)과 판관 권길(權吉) 등은 다 살해되었고, 이일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달려 충주(忠州)로 돌아오다. 박지는 김수의 사위다. 그때 나이는 22세, 홍문관 교리로 조정에 있었는데 이일이 어명을 받았을 때 김수는 막 경상 감사가 되었었다. 박지가 자기 군중에 있으면 김수도 반드시 마음과 힘을 기울여 주리라 생각하여 자기의 종사관으로 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고, 임금이 그대로 윤허했었는데 이때에 와서 죽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박지는 왜적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고 산골짜기로 피해 들어가 있다가 함양(咸陽) 사람 인언룡(印彦龍)을 만나서, “나는 18세에 장원 급제하여 나라의 은혜를 받았건만 지금 전쟁이 불리해졌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용안(龍顔)을 뵙겠나.” 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한다.
26일. 흉악한 왜적이 상주(尙州)로부터 함창(咸昌)과 문경(聞慶)을 연달아 함락시키다. 문경 현감 신길원(申吉元)은 변란 초기부터 관청의 문을 떠나지 않았다. 이날도 막 대문 앞에 앉아서 관의 창고를 부수어 흩뜨린 토적(土賊)을 처형하고 있었는데, 왜적이 갑자기 방비가 허술한 문으로 해서 들어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흩어졌고, 신길원은 홀로 말을 타고 산 기슭으로 피해 들어갔다. 왜적이 쫓아가서 그를 항복시키려고 하였으나 신길원이 호되게 꾸짖고 굽히지 않자 왜적이 그의 사지를 절단한 후에 죽였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도 꾸짖는 소리가 입에서 끊어지지 않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그의 한 줄기 충절을 만고에 누군들 맞설 수 있으랴. 문경(聞慶) 전후로 오직 수양성(睢陽城)에서 순절한 장순(張巡)이 있을 뿐이다.
○ 좌도 왜적의 한 떼가 군위(軍威)를 불태워버리고 연달아 비안(庇安)을 함락시키니 현감 김인갑(金仁甲)이 도망쳐 달아났고, 한 떼는 장기(長鬐)로부터 영일(迎日)과 감포(甘浦)를 불태우고 약탈하다. 안동 판관 윤안성(尹安性)이 단기(單騎)로 부(府)에 돌아왔는데 부사가 도망쳤음을 알고서, 서쪽으로 풍기(豐基)에 가니 군수 윤극임(尹克任) 역시 성을 버리고 도망가다.
○ 김수(金睟)가 지례(知禮)로부터 거창(居昌)에 돌아와 초계 군수(草溪郡守) 이유검(李惟儉)을 목베다.
○ 신립(申砬)이 용인(龍仁)을 지나다가 왜적의 기세가 창궐한다는 소식을 듣고 밀계(密啓)를 올려, “왜적의 기세가 무척 성해서 정말 막아내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사세가 답답하고 절박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운운.” 하니, 도성에서는 신립을 간성(干城)같이 믿고 있었는데 답답하고 절박하다고 한 밀계의 소식을 듣고, 사민(士民)들이 들끓고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도망쳐 흩어지다.
○ 신립이 달려 충주(忠州)를 지나서는 조령(鳥嶺)을 막아 적의 길을 끊으려고 하였으나 길이 험하고 막힌 데가 많아서 말타고 활쏘기가 불편하겠기로 후퇴하여 충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도중에 이일(李鎰)을 만났다. 신립이 왜적의 정세가 어떤가를 물으니, 이일이 대답하기를, “이 적은 경오년(1570, 선조 3)과 을묘년의 그것과는 견줄 게 아니며, 경오년의 왜적은 겨우 웅천(熊川) 두어 고을을 함락시키고는 패하여 돌아갔고, 을묘년의 왜적은 달량(達梁)을 함락시켜 병사(兵使) 원적(元迪)을 죽이고는 잇달아 강진(康津) 등의 고을을 함락하여 영암(靈巖)에까지 왔다가 패하여 돌아갔다. 또 북쪽 오랑캐같이 쉽사리 제압되지도 않습니다. 이제 험준한 데를 점거하여 적의 길을 끊지 못하였으니 만약 넓은 들판에서 교전한다면 당해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후퇴하여 서울이나 지키십시오.” 하니, 신립이 성을 내어 말하기를, “너는 패군(敗軍)한 데다 또 군졸들을 경동(驚動)시키니 군법으로는 목베어야 마땅하다마는, 왜적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공을 세워서 속죄하여라.” 하고, 마침내 달천(㺚川)충주의 땅이다. 에 주둔하다.
27일. 전라 방어사 곽영(郭嶸)과 조방장(助防長) 이지시(李之詩)가 군사 5천을 거느리고 남원(南原) 운봉(雲峯)으로부터 함양(咸陽)으로 향하여 영남을 구원하러 가다.
○ 흉악한 왜적이 조령을 넘어 달천으로 달려 들어오니 신립은 패전하여 죽었다. 당초 적병은 두 재[嶺]의 넘기 어려움을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당도하자 산길은 고요하고 사람의 발자취도 전연 없는지라 마침내 크게 기뻐하여 날뛰면서 곧장 충주를 범했다. 한편 신립은 여러 도의 정병(精兵)과 무관 2천 명, 종족(宗族) 1백여 명, 내시위(內侍衛)의 군졸 등 도합 6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령으로부터 다시 충주로 후퇴하였는데, 종사 김여물(金汝岉)이 이일(李鎰)의 말에 따라 산길을 굳게 지키자고 요청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고, “바다를 건너온 왜적은 빨리 걷지 못한다.” 하고는, 마침내 달천을 등지고 탄금대(彈琴臺)에 진을 쳤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척후장(斥候將) 김효원(金孝元)ㆍ안민(安敏) 등이 달려와서, “왜적의 선봉이 이미 다가왔습니다.” 하고 고하자, 신립은 그들이 군중을 놀라게 한 일에 노하여 당장 그 두 사람을 목 베고 이어 영을 내려 진의 대오를 바꾸게 하였다. 그러나 적병이 이미 아군의 뒤로 나와 천 겹으로 포위하자 장병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모두 달천의 물로 뛰어들었다. 왜적이 풀을 쳐내듯 칼을 휘둘러 마구 찍어대니 흘린 피가 들판에 가득 찼고 물에 뜬 시체가 강을 메웠으며, 신립과 김여물도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정병은 충주와 상주 두 전투에서 다 섬멸되었다고 한다.
○ 경상 우병사 조대곤(曹大坤)이 후퇴하여 회산서원(晦山書院)에 숨다. 때마침 창원(昌原)에 잔류하고 있던 왜적 40여 기(騎)가 피란하는 사람들을 추격하면서 강물을 거슬러 건너와 의령(宜寧)의 신반(新反)을 약탈하고 마침내 빈틈을 타 성으로 들어가서는 관아와 성문을 불사르니, 조대곤이 마침 삼가(三嘉)에 있다가 대부대의 왜적이 닥쳐온 줄로만 생각하고 군기와 북을 버리고 숨었던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비안(庇安)의 왜적이 예천(醴泉)의 다인현(多仁縣)으로 나가 주둔하고 중도(中道)의 대부대 왜적이 인하여 충주를 함락시키니, 목사 이종장(李宗長)은 도망쳐 달아나다. 그때 충주 등지의 사람들은 신립의 대군만을 믿고 집에 있다가 변란을 당한 것인데 뜻밖에 신립의 군대가 패하였다. 적병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죽이고 약탈하고 하는 참상이란 더욱 말할 수 없다. 왜적이 우리나라에 말을 전해오기를, “정탁(鄭琢)과 이덕형(李德馨)을 내보내라. 운운.” 하다.
28일. 성주(星州)의 왜적이 개령(開寧)과 금산(金山)을 연달아 함락시키다. 우도의 방어사 조경(趙儆)과 그의 종사 이수광(李睟光)이 군사들을 거두어 가지고 추풍(秋風) 금산의 역 이름이다. 을 막아 적의 길을 끊었으나 군사들이 무너져 달아나다.
○ 경상 좌도의 조방장(助防將) 박종남(朴宗男)이 의성(義城)으로부터 사잇길로 해서 안동(安東)의 풍산(豐山)으로 후퇴하고는 창고를 깡그리 불사르고 가버리다. 왜적은 다인(多仁)에서 하풍진(河豐津)을 건너 함용(咸龍) 땅으로 전진하여 당교(唐橋)에다 진을 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 감사의 영리(營吏)인 이(李)란 사람이 전라감사에게 고목(告目)을 보내며 말하기를, “지금 도착한 소식통에 의하면 왜적들이 옷 안에 갑옷을 입었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으나, 옷 밖에는 모두 갑옷을 입지 않고 병기인즉 단지 철환(鐵丸)을 쏘고 칼을 쓸 뿐입니다. 다른 재주는 없으나 다만 철환을 쏘지 않는 사람은 없고, 그 쏘는 것이 빗발치듯 하여 그 때문에 그들을 제압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 고을의 군기고 외에 관사 같은 것은 태우지 않고, 읍내와 길가에서는 큰 집과 좋은 마을만을 골라서 불을 지릅니다. 중도(中道)의 왜적은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정도라서 그들은 동래(東萊)ㆍ양산(梁山)ㆍ밀양(密陽)ㆍ청도(淸道)ㆍ경산(慶山)ㆍ대구(大丘)ㆍ인동(仁同) 및 선산(善山)을 거쳐 오며 다 태워 버렸습니다. 적들이 상주(尙州)에 이르렀을 때 순변사(巡邊使)가 그들과 접전하였지만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어 패배당했습니다. 왜적의 무리는 상주와 함창(咸昌)도 태우고 이미 조령(鳥嶺)에 이르렀고 불일간 조령을 넘어갈 기세까지 있다고 합니다만, 넘었는지 안 넘었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우도의 왜적은 겨우 4, 5백 명으로 김해(金海)ㆍ창원(昌原)으로 해서 우병영을 불태웠는데, 이곳에 이르렀을 때 우병사가 그들과 접전했으나 이기지 못했습니다. 왜적은 함안(咸安)ㆍ칠원(漆原)ㆍ영산(靈山)ㆍ창녕(昌寧)ㆍ현풍(玄風)을 거쳐 오면서 모두 불태웠고, 거기서부터 둘 내지 세 대열로 나누어 편성했는데 한 대열은 2백여 명으로 지금 성주(星州)에 도달해서 막 그곳의 여러 마을을 수색하고 있고, 또 한 대열의 1백 5, 60명은 의령(宜寧)ㆍ삼가(三嘉)ㆍ합천(陜川)을 거쳐 고령(高靈)의 뒤로 향했는데 역시 그 후에 간 곳은 모르겠습니다. 또 흩어진 왜적 □3명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몰래 금산(金山)에 도착하자 우도의 방어사가 접전했는데 아군이 무너져 달아난 후 간 곳은 역시 모르겠습니다. 우도의 왜적이 어느 길로 해서 올라갈 계획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좌도의 경조(慶州) 길로 해서 가는 왜적이 올라갈지의 여부에 관해서도 한 번 변이 일어난 후로는 여러 고을이 텅 비고 도로는 끊기고 막히고 하여, 한 장의 소식도 받아 보지 못했습니다. 한편 왜선 20척이 부산포(釜山浦)를 떠나 이미 거제도(巨濟島)에 도달했는데, 우수사와 전라 좌수사가 지금 그를 공격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왜적이 가는 곳마다 젊은 남자는 모두 목 베고, 늙은이와 어린이 및 여인은 죽이지 않으나 예쁜 여자와 여염집에서 훔친 물건은 소와 말에 실려서 길에 연달아 있습니다. 싣고 가는 소와 말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을 시켜 끌고 가게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을 사로잡아다가 자기 무리로 삼은 것이 태반이나 됩니다. 이 밖에 소소한 행동을 낱낱이 들어서 말하기 어렵기에 대강 써 보냅니다. 운운.” 하다.
○ 우도의 왜적이 호서(湖西)로 들어가 황간(黃澗)ㆍ청산(靑山) 등의 고을을 불태우다. 이 길의 왜적은 그 수효가 사실 적어서 양호(兩湖)의 군사로 넉넉히 막아낼 수 있었는데, 장병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멀리서 왜적을 바라보고는 먼저 무너졌다. 비록 적군은 정예하고 아군은 둔하다고 하나, 사실은 장병들이 마음을 다하지 않은 데서 그렇게 된 것이다. 아깝다, 양호의 허다한 고을에 한 사람의 의사(義士)도 없었던가.
○ 적병이 충주(忠州)로부터 곧장 경기로 향하다. 임금은 신립(申砬)이 패전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 이어 적병이 이미 경기에 다가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드디어 서쪽으로 명 나라에 긴급한 사정을 고하기로 계획을 정하고 우선 이원익(李元翼)과 최흥원(崔興元)을 보내어 평안도ㆍ황해도를 순찰하게 하고, 또 대신에게 명해서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립하여 군사와 국무의 중대한 일을 감무(監撫)하도록 하게 하였다. 대신 유홍(兪泓)이 울며 간하기를, “종묘와 사직이 여기에 있고 신민들이 여기에 있는데, 전하께서 어디로 가십니까. 가벼이 움직여서 사람들의 마음을 놀라 흔들리게 하셔서는 안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곤룡포로 눈물을 닦으면서 긴 한숨을 내쉬고 나서, “내가 어디로 가겠소.” 하고는, 백성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 곧 성을 등지고 한바탕 싸워 볼 계획하에 애통한 교서를 내렸다. 판서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都元帥)로 하여 경기의 남은 장정을 있는 대로 거느리고 한강 가에 진을 치게 하고, 병조와 비변사(備邊司)에게는 성을 지키는 기구를 독려해 마련하도록 하였다. 열흘 가까이 되자 백성들이 모두 무너지고 아무도 말을 듣지 않는지라, 급히 명령을 내려 성문을 엄격히 지키고 사람이건 물건이건 출입을 허락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성 안의 사람들은 귀천 남녀 할 것 없이 밤낮으로 성에 줄을 걸고 내려가 다 달아났으며, 어떤 사람은 자기의 권속이 뿔뿔이 헤어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줄로 서로를 엮어 도망치기도 하였다. 서울 안의 불량한 무리들은 작당하여 고운 여인과 재물을 찾아다니다가 보기만 하면 곧 약탈하고 하였는데, 상대가 고관이라 해도 분별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피해자들이 길에 가득했고 부자(父子)와 부부가 서로 잃어버린 채 도망쳐갔다. 임금은 인심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적을 피하기로 결심하였다. 아깝다! 2백 년 동안 휴양한 끝에 어찌하여 인심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하늘과 땅에 부끄러움을 느낄 뿐 아니라 또한 흉악한 왜적의 무리에게까지도 부끄럽다.
29일. 전라감사 이광(李洸)이 여러 고을로 하여금 근왕병(勤王兵)을 징발하게 한 것이 10여만 명이 되었고, 경상 감사 김수(金睟) 역시 타고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양호(兩湖)의 군사와 함께 가고자 거창(居昌)에서 함양(咸陽)으로 가다. 그때 영남 60여 고을은 깡그리 함락되었고, 오직 우도의 6, 7읍만이 겨우 병화를 모면했으나 군졸들은 이미 흩어져 없었다.
30일. 거가(車駕)가 서행(西幸)하다. 이보다 수일 앞서, 서울 안이 싹 비어 버렸고 대소의 신료(臣寮)ㆍ근시(近侍)ㆍ위졸(衛卒)들이 일시에 흩어져 가 버리니, 임금은 가슴 아프게 울면서, “2백 년이나 길러온 그 속에 충신과 의사(義士) 없음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하고는, 밤중에 중전과 함께 여러 궁인(宮人)들을 거느리고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서 서울을 떠나서 아침에 벽제(碧蹄)에 이르렀다. 도중에 비를 만나 곤룡포는 다 젖었고, 동네가 텅 비어 팔진미(八珍味) 식사도 궐한 채 장단(長湍)으로 달려갔으나, 부사는 이미 도망했고 사방을 둘러 보았으나 사람이라곤 없어 일행이 모두 굶주린 채 잠시 쉬고는 곧 개성부(開城府)로 향하다. 이때에 편히 살며 침식(寢食)하는 백성들은 어찌하여 충의심을 일으키어 왜적을 토벌하지 않고 이날 같은 전례없는 비통을 남겼단 말이냐!
○ 전라 방어사 곽영(郭嶸)이 군사를 거느리고 금산(金山) 땅에 이르자 본도 우방어사 조경(趙儆) 등이 와 합세하여 금천역(金泉驛)에 이르러 왜적 5급(級)을 베었다. 이어 군(郡) 내에 잔류한 왜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사를 전진 포위하여 잡아 30여 급을 목 베었으며 아군의 피해는 50여 명이었다. 곽영이 곧 전라도에 돌아와서 막 접전할 때 한 왜적이 긴 칼을 가지고 마구 들어와 조경을 치려 하였는데, 조경이 맨손으로 그 왜적을 껴안고 오랫동안 버티고 있을 무렵 군관 정기룡(鄭起龍)이 돌진하여 그 왜적을 베니 조경이 살아날 수 있었다.
○ 전라 조방장(助防將) 이유의(李由義)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충청도로 향했다가 곧 전라도로 돌아가다. 애초에 선전관이 서울에서 본진(本陣 즉 전라도에 있는 이유의의 진을 말함)에 와서 교지를 전하기를,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충주(忠州)로 달려가서 신립(申砬)의 지휘를 받아라.” 하였다. 이유의가 어명을 받고 연산(連山)까지 갔었지만 신립이 이미 패하여 왜적이 경기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자, 군사를 끌고 돌아간 것이다.
○ 왜적이 우리나라 장병이 잘 무너짐을 알자, 소수의 군사로 깊이 들어가는 위험성에 대한 의구심도 갖지 않아 혹은 10여 명, 혹은 5, 6명으로 패를 지어 마구 돌아다니며 도적질을 하다.
5월 1일. 흉악한 왜적이 경기도에 가득 들어와 한강 이남이 연기와 화염으로 하늘이 자욱하고 포성이 땅을 뒤흔드니 용인(龍仁)ㆍ수원(水原)ㆍ광주(廣州) 등지가 깡그리 불타버리다.
○ 남원 부사(南原府使) 윤안성(尹安性)이 경내(京內)의 민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 개유첩(開諭帖)을 내리기를, “듣자니, 민간인들이 변란의 소문을 듣고 소요를 일으키며 다들 다른 데로 피해갈 계획을 하고 있다 하나, 호남과 영남 사이에 높은 산과 큰 개울이 있으니 졸지에 닥쳐올 근심은 전연 없다. 더구나 지금 경상 우수사가 왜적을 많이 잡아 승세(勝勢)가 크게 떨치고 있으니, 각기 마음을 놓고 생업에 안정하여 서로 경동(驚動)하지 말고 함께 농사일에나 힘써라.” 하다. 남원은 호남과 영남 사이에 있고 내가 본부, 즉 남원에 있었기 때문에 호남ㆍ영남 및 본부의 일을 기록하는 것이 퍽 상세한 것이다.
2일. 적병이 대거 진격하여 한강변[漢濱]ㆍ광나루[廣津]ㆍ마전(麻田)ㆍ사평(沙平)ㆍ동작(銅雀) 등처에서 일시에 떼[桴]를 타고 마구 건너왔는데, 강을 수비하던 군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배리(陪吏)가 원수(元帥)의 교의(轎椅) 밑에 엎드려서 고하기를, “적병이 강을 건너왔는데 군졸들이 다 흩어졌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하고 재삼 고하여도 전연 대꾸가 없기에 쳐다보았더니, 원수는 이미 간 데 없고 다만 빈 상(床)만 있을 뿐이었다. 왜적이 강을 건너와서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고려국엔 사람이 없다 해도 좋다. 험한 고개[嶺]에도 군사가 없고, 긴 강도 수비하지 않는다. 만약에 한 사나이라도 막았던들 우리는 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였는데, 군사를 전진시켜 동ㆍ남대문 밖에 이르자 성 안이 고요하고 전연 사람의 형적이 없는지라, 왜적이 의심하여 밖에 머무른 채 들어오지 못하다. 이것은 선봉으로 온 왜적이었고 대부대의 왜적이 가득 몰려오기까지는 4, 5일의 거리가 된다.
○ 거가(車駕)가 송도(松都)에 이르자 잠시 멈추고 김명원(金命元)에게 명해서 임진강(臨津江)을 차단하게 하고 정철(鄭澈)과 윤두수(尹斗壽)을 방면하여 좌ㆍ우의정을 시켰으며, 동인과 서인의 싸움으로 벌을 받았던 것이다. 교지를 내려 호남과 영남의 군사를 소집하다. 교지는 아래 14일 조에 있다.
3일. 왜적이 장안성(長安城) 안으로 들어오다. 하루 전날, 왜적이 성문 밖에서 머무르고 있을 때 성 안의 반도(叛徒)들이 나와서 맞이하면서, “나라는 비었고 임금이 없으며, 성은 버려져 지키지 않는다.” 하자, 왜적이 그제서야 성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이에 앞서 경상도 양산(梁山)의 관노(官奴) 황응정(黃應禎)이 포로가 되었는데, 왜적이 글을 써서 보여주기를, “너의 나라는 방어는 해서 무엇할 거냐. 불과 20일이면 틀림없이 서울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보니 과연 그 말대로였다. 왜적들이 지나가는 여러 고을에는 모두 두목[酋]을 남겨두어 원[宰]이라 칭하고, 우매한 백성들을 꾀어 모아서는 창고의 곡식을 풀어주었으며 겸하여 명패(名牌)를 만들어서 그들이 항복하여 내부(來府)하였음을 표시하게 하니, 이 때문에 백성들이 많이 고식적으로 따랐던 것이다. 부산(釜山)으로부터 서울과 개성(開城)에 이르는 세 길의 상하 30리마다 진(陣) 하나씩을 설치해서, 깊이 들어가다가 길이 막히게 될 우려에 대비하였다. 서울에 입성한 후에는 먼저 궁궐과 종묘를 불태우고 연달아 공사(公私)의 가옥을 태우며, 숨겨 둔 재물을 뒤져내어 매일같이 본토(즉 일본)에 보내고, 군사들을 휴식시켜 관서(關西)와 북쪽 길로 향할 계획을 세우다.
○ 경상 좌병사 이각(李珏)과 좌수사 박홍(朴泓)이 각각 우후(虞候)들을 거느리고 방어사 성응길(成應吉), 조방장(助防將) 박종남(朴宗男)ㆍ변응성(邊應星), 안동 판관(安東判官) 윤안성(尹安性), 풍기 군수(豐基郡守) 윤극임(尹克任), 예천 군수(醴泉郡守) 변양우(邊良祐) 등과 근왕(勤王)을 핑계 삼아 영남을 버리고 죽령(竹嶺)을 넘어갔는데, 그 후 원수(元帥)가 임진강에서 이각을 목 베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칠포만호(漆浦萬戶) 문관도(文貫道)는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순행(巡幸)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서쪽을 향해 재배하고 퍽 오랫동안 통곡하였는데, 호남과 영남에서는 그를 의리있다고 여기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에게 보낸 서한에, “대가가 서쪽으로 순행하고 서울은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나라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통곡하고 또 통곡할 일입니다. 오늘 할 일이 있다면, 오직 애통하고 절박한 취지로 격문을 띄워가지고 사방의 충의있는 동지를 불러 유시하여 지체없이 군사를 일으킴으로써 하늘에 사무치는 통분을 씻기나 바라야겠습니다만, 격문의 말이 만약 간절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길이 없으니 격문을 거칠고 엉성하게 지어서는 안 됩니다. 격문을 지으셔서 속히 보여주기를 감히 바랍니다. 오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한갓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할 따름입니다. 또 이 뜻을 사중(士重)김천일(金千鎰)의 자(字)이다. 등의 제공(諸公)에게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다.
○ 고경명이 이광에게 보낸 답서에, “나라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오직 매일같이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할 따름입니다. 방금 온갖 생각으로 어지러이 속태우고 있는 가운데 귀하의 글월을 지금 받았습니다만, 끝까지 다 펴 읽기도 전에 눈물이 마구 쏟아지는군요. 저 경명은 쇠병(衰病)으로 여생을 밭[田] 사이에 묻고 침상에 누워 있으면서, 위로는 행장(行裝)을 갖추고 급히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서 문안드리지 못하고 또 막부(幕府)로 가서 군사 계획을 곁에서 돕지도 못하니, 근심과 부끄러움에 몸 둘 곳을 모르며, 한 번 죽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따름입니다. 말씀하신 격문은 제가 비록 오랫동안 글 짓는 일에서 손을 떼었지만, 의리상 감히 피하지 못하겠기에 삼가 이에 지어 보내 드립니다. 생각하건대 말의 조리가 엉성하여, 귀하께서 말씀하신 충의지사(忠義之士)를 창도하여 거병(擧兵)하게 하라는 취지를 선양할 길이 없음이 한스럽습니다. 다만 저 경명이 월초(月初)부터 이 고을 동부에 있는 집으로 옮겨와 있는데, 지금 귀하의 글월을 보니, 3일에 낸 것인데 6일에야 군졸이 빈 집에다 전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오래 늦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늦어서 일에 맞춰 쓰이지 못할까 무척 근심하고 있습니다. 구구한 제 심정을 망령되이 진술할 것이 있어 별지(別紙)에 기록했습니다. 간절히 바라거니와, 귀하는 못난 이 사람이라 해서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을 버리지 마시고, 많은 사람들을 모아 충의의 뜻을 넓히시어 과연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우게 하십시오. 김사중(金士重)이 마침 편지를 보내왔기에 귀하의 뜻을 갖추어 전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운운. 나머지는 마음이 어지러워 이만 줄입니다.” 하고, 또 별지에, “오늘의 할 일 중엔 군대를 길러서 근왕(勤王)하는 것이 첫째 가는 충의입니다. 그리고 또 사람들의 마음을 굳게 단결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횡포한 왜적의 침범은 물론 그 소요스러움을 견딜 수 없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끝없이 군사를 불러 모은다면 백성들은 더욱 그들의 생업에 안정할 수 없습니다. 옛사람도 이르기를, ‘군사는 정예하기에 힘쓰지, 많기에 힘쓰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만약 잘만 쓴다면 지금 있는 군사로도 넉넉히 승리를 거둘 것이고, 만약 잘 쓰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들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다만 나라의 근본이 날로 흔들리고 나라의 일이 날로 빗나갈 뿐입니다. 대가가 서쪽으로 순행하셨는데, 기성(箕城 평양을 두고 한 말임)이 피폐하여, 백관과 유사(有司)의 수요를 공급해 줄 길이 없을 뿐 아니라 대관들의 식사 공급까지도 한심스럽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군산(君山)이 세미(稅米)를 바치러 강에까지 갔다가 돌아왔고, 법성(法聖)의 창고도 양곡을 실은 배가 아직 떠나지 않고 있다고 하는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많은 상을 내걸고 조졸(漕卒)을 후하게 모집하고 서해로 배를 몰아서 대동강의 나루에 도달하게 해서, 가령 그 반만이라도 행재소(行在所)까지 보낼 수 있다면 비단 군대와 국가의 수요가 그 덕으로 충족될 뿐 아니라 사방의 인심까지도 역시 그것이 힘이 되어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왜적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와서 천 리를 전진하며 전투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그들로 하여금 외람되이 서울을 점거하게 하여 육로가 이미 막혔다고는 하지만, 서쪽의 바닷길들은 그래도 아직 막히지 않았으니 이번에 계획하는 일에 있어서는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평상시의 사례처럼 못난 말석의 용렬한 장수 따위나 억지로 시켜서 가지고 가게 한다면 의외의 변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충성스럽고 용감한 사람으로 배질에 능통한 자를 뽑아가지고 정예한 군졸을 정해 주어 일면으로는 싸우고 일면으론 나아가는 계획을 행하게 한다면 군량이 무사히 도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행도(行都) 군사들의 사기 역시 조금은 진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야흐로 민심이 소란하여 군사 모으기가 쉽지 않으니, 서둘러 조치해서 조졸(漕卒)만을 시켜서 전례대로 가지고 가게 하는 것도 혹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열흘 정도나 지연되는 경우 저들 왜적이 약탈해 갈 생각을 내지 않으리라는 것도 모를 일입니다. 오늘날 조정의 호령이 군중에 이르지 않고 사방의 소식이 행도에 도달하지 않으니, 이야말로 통곡하며 눈물을 흘릴 일입니다. 만약 중한 값으로 보자기[鮑作]를 후히 모집해서 고기잡이를 하는 척하고 납서(蠟書)를 전달하게 하여 무사히 갔다 오면 관자(官資)에 보직(補職)해 주거나 혹은 미포(米布)를 넉넉하게 주는 두 가지 중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허락해 주고, 또 그 처자를 관□에 데려다 놓고 그가 돌아올 동안을 기한으로 매일 보통 지급하는 양보다 배가 되는 주식(酒食)을 지급해 주어, 밖으로 구휼하고 양육해 주는 은혜를 보이면서 안으로는 붙들어 두는 계획을 시행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서 사방의 여러 장수들이 힘을 합해 근왕(勤王)하게 되면, 요는 수륙으로 동시에 진격해야 하는 것이니 대군은 곧장 탄탄한 길로 해서 진격하고 기병(奇兵)은 간간이 바닷길로 나아가, 왜적들로 하여금 앞뒤로 적(敵)을 맡게 하여 빠른 우레에 귀를 가릴 사이가 없듯 공격한다면 이는 또한 병가(兵家)에서 쓰는 기정(奇正)의 방법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 전라도 도순찰사를 시켜 도내의 부로(父老)와 군민(軍民)들에게 유시하다. 아! 조그마한 왜적들이 독하기론 벌과 전갈이 모인 듯하고, 천성은 뱀을 타고났도다. 그들은 음흉하게도 중국을 어지럽힐 마음을 품고는, 마구 날뛰는 침략 행위를 감행하여 성을 수십여 군데나 함락시키고 장병을 몇 천만 명이나 도륙하였건만, 겁쟁이인 수비 담당의 신하들은 그 소문을 듣자 쥐같이 도망쳐 버렸고 우매하고 놀란 백성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자 굽이치며 달아났다. 영남의 산천은 깡그리 승냥이와 범 같은 왜적의 굴혈이 되었고, 호서의 초목은 반이나 개나 양같이 천한 왜적의 비린내로 물들었다. 석륵(石勒)의 도적들이 곧장 신주(神州)로 향하듯 쳐들어왔으니 종묘 사직의 수치가 한이 없고, 말갈(靺鞨 원문은 몰갈(沒喝))의 군대가 강가에 머무르려 하듯 한강에 임했으니 조정의 근심 또한 한정이 없다. 이 일을 생각하면 차라리 잠이 들어 깨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밤낮으로 애통한 조서(詔書)가 내리고 산과 강에 기도하는 정성을 드리게 되었으니, 온 땅끝까지의 피를 지닌 우리 모든 사람이 마음을 썩히며 팔를 걷고 나서야 할 일인 것이다. 누군들 주먹에 힘을 주고 창을 휘두르지 않겠는가.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 비록 서로 돕는 힘을 잃었다지만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것이니 마땅히 근왕(勤王)하는 충성을 다할 것이다. 우리가 차마 원수와 더불어 같이할 수 없는 하늘을 이고 살 것인가. 전례 없는 치욕을 씻기 바라는 바이다. 관운장(關雲長)ㆍ장비(張飛)와 같은 맹장들이 범처럼 무섭고, 매가 공격하듯이 날랜 용사들은 숲과 같이 많다. 조사아(祖士雅)가 중원(中原)을 평정하겠다고 맹세할 젠 간담이 말[斗]같이 컸고, 장숙야(張叔夜)가 들어가 경락(京洛)을 구원하였을 땐 눈물이 은하수를 매단 것 같았다. 범을 그리고 용을 그린 기[虎旌 龍旌]로 장막 위에서 제비 둥우리를 쓸어버리듯 하고, 사모(蛇矛)와 월극(月戟)으로 솥 속에서 노는 물고기를 잡듯 하길 기대한다. 너희들 호남은 본래 예의의 지방으로 일컬어져 왔거니와 실로 인재가 많은 고장이다. 모두 질풍(疾風) 앞의 억센 풀[勁草]같이 굳은 절개를 나타내고 함께 변란기의 충신이 되어 다오. 그리고 우리 왕실이 2백 년 동안 길러 준 은덕을 생각하고, 너희들 억만 인의 강개에 찬 뜻을 한결같이 하여라. 윗사람을 친애하고 그를 위해선 죽어도 좋다는 각오를 하며, 대의(大義)를 무기로 앞장서서는 장수를 목 베고 깃발을 뽑아 적의 수레바퀴 한 짝까지도 돌아가지 못하게만 한다면, 그것이 어찌 일대(一代)에 공이 높았던 충갑(冲甲) 성은 원(元)이다. 고려 때 사람인데, 필부로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하여 큰 난리를 평정하다. 아니면 후손에까지 은택을 미치게 했던 차달(車達)성은 유(柳)이다. 고려 때의 문화(文化) 사람이다. 난에 임하여 양곡이 모자라자, 차달이 수레를 가지고 개인의 양곡을 운반해다 군에 보급해 주었다. 난이 평정된 후, 차달이라고 이름을 내리고 녹훈(錄勳)하다. 만 못하다 하겠는가. 몸을 국가에 바치도록 권면하여 절조를 지키고 죽을 힘을 다하기를 기약할 것이요, 왜적 때문에 군부(君父)를 버리지 말고 힘을 다하고 목숨 버릴 것을 맹세하라. 격문이 도달하거든, 각각 충의로써 권면하여 장부들을 이끌고 밤낮을 가리지 말고 달려오라.” 하다. 이광(李洸)은 애초에 왜적이 서울 등지에까지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반역한 군사들의 유언비어가 아닌가 하고 의심했었다. 방백의 신분으로는 살아나기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고, 즉시 교서(敎書)ㆍ인신(印信)ㆍ절월(節鉞) 및 관대(冠帶)를 전주(全州)의 진전(眞殿)에 모아 두고는 고부(古阜)의 자기 본가로 피해 가다. 대중의 여론이 시끄럽게 일어나 그를 허물하자 그가 하는 수 없이 다시 군대를 맡아 보게 된 것이다. 이번에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향할 때 왜적의 소식이 희미하매, 본국의 역적이 왜적과 함께 서울로 올라간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는 사람도 퍽 많다.
○ 이광이 영남의 장병들에게 아래와 같이 격문을 내다.
우리 국가는 13대에 걸쳐 태만한 일도 없었고 황음(荒淫)한 일도 없어서 도덕을 잃지 않았고, 2백 년 동안 가는 사람 좇지도 오는 사람 막지도 않아서 전쟁을 일삼지 않았으며, 조심스러이 강토를 지키며 세심하게 준비를 해왔다. 근자에 추한 오랑캐[醜虞 왜인을 말함]가 성의를 표해 오기로 성군(聖君)의 포용있는 도량을 약간 보여주었고 조정은 그들을 회유할 셈으로 그들의 말을 경솔하게 신용하였더니, 오랑캐의 마음이란 흉악하기 짝이 없어 마침내 의리를 배반한 음모를 구사하여 독사가 물듯이 악독한 마음을 앞다투어 내고 벌과 전갈 같은 독을 함부로 쏘아 우리 장병을 살해한 것이 만이나 천 이상이었고, 우리 성을 함몰시킨 것도 어찌 수십으로 헤아릴 정도이겠는가. 안진경(顔眞卿)의, “본 적이 없다.” 한 말과 양만석(楊萬石)의, “어찌 그리 많으냐.” 한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요, 유총(劉聰)이 곧장 신주(神州)로 향하자 진실(晉室)의 위태로움이 다급하여지고, 말갈[沒喝]이 하상(河上)에 들어오자 송조(宋朝)의 치욕이 말할 수 없이 되었던 그 일에나 견줄 수 있겠나. 왜적의 죄는 이미 하늘까지 치닫아 귀신의 음주(陰誅)가 이미 의정(議定)된지라, 그들은 패하여 반드시 그 피를 땅에 칠하리니 우리 군사의 현륙(顯戮)을 가해야 할 것이다. 이제 충의를 무기로 삼는 삼군(三軍)으로 배성의 일전[背城之一戰]을 결행하려는 터에 누가 동창의 계교[東窓之計]를 내세우고, 서촉(西蜀)으로의 피란을 서둘러 권했단 말이냐. 깃발이 보일락 말락 봉천(奉天)으로 향하는 금 가마는 서리와 이슬에 젖었고, 처량하게 봉상(鳳翔)에 머무는 옥 수레에는 바람과 먼지가 날린다. 강(江) 위에 정정당당하던 우리 군사들은 물결처럼 달아나고 새같이 흩어졌으며, 서울 안의 높고 낮은 집들은 연기에 싸이고 구름 속에 잠겼다. 부고(府庫)의 정책은 소연(蕭然)하고 곳집에 저축해 둔 곡식은 몽땅 없어졌다. 이 일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나, 시대의 형편인지라 어찌 하리오. 조사아(祖士雅)가 중원을 평정하겠다고 맹세한 일에서 그 의분을 상상할 수 있거니와 장숙야(張叔夜)가 서울에 들어가 방위하였음은 충의심을 쏟은 것이다. 평탄하건 험악하건 언제든지 함께 힘을 다해 목숨을 바치기를 꾀해야 할 일이건만 위태롭고 모욕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차마 함께 하늘을 이고 구차하게 안일을 구하겠는가. 나 이광(李洸)은 재질이 예악의 고장에 노닐 사람이 못 되지만, 잘못 시서(詩書)의 장수로 임명을 받아, 두 차례나 방면(方面)의 지휘권을 장악하게 되매, 늘 나라만이 있을 뿐이라는 충성심을 품어 왔었다. 이에 이성(李晟 당 나라 때 충용을 겸비한 인물)의 충성을 다해서 정전(鄭畋 당 나라 말년 황소(黃巢)의 난을 수습한 인물)의 격문을 전한다. 심히 애통하고 심히 급히 급하니, 어찌 허수하게 하며 느긋하게 할 일이겠는가. 설경선(薛景仙)은 나룻길로 해서 먼저 공물(貢物)을 상납한 후 의병을 일으켰고, 한세충(韓世忠 송(宋)의 명장(名將))은 바닷길로 해서 행영(行營)으로 가 경기 지방을 회복하고자 바람에 날리는 깃발로 치는 호령에 산악 같은 위엄으로 강남을 번개같이 떠나서는 한강 북안을 무섭게 바라본다. 장군이 비오듯 눈물을 흘리며 우니, 누군들 주먹을 불끈 쥐고 적장의 기를 뽑으려 하지 않겠는가. 병졸은 노숙(露宿)을 하면서 모두 쓸개를 핥듯 복수를 다짐하고 손바닥에 침을 뱉어 적을 쳐부수길 원하고 있다. 만약 선수를 잡는 기회를 잃는다면 뒷수습을 잘하려는 계획은 크게 어긋날 것이다. 공(公)들은 다 임금의 고굉(股肱)이 될 좋은 자질을 가진 몸으로 모두 번진(藩鎭)에 처하고 있고, 함께 문화를 숭상하는 시대에 나서 어찌 나랏일에 이바지하는 정성을 떨치지 않으리오. 임금의 능에 경건히 참배하여 조종의 수치를 시원하게 씻고, 거가(車駕)를 공손히 맞아 부로(父老)들의 소망을 크게 위로하라. 불을 지펴 털을 사르듯 하기를 기약할 것이며, 태산을 들어 새알을 짓누르듯 할 것을 맹세하라. 아울러 천지에 빌어 청룡도(靑龍刀)로 의지(義智)의 머리를 자르고, 함께 산천에 맹세하여 적토마(赤兎馬)로 현소(玄蘇)의 피를 밟아라. 만약 머뭇거리다가 날짜가 늦어져 의병 징발에 기회를 놓친다면 천지의 신(神)에게 부끄럽고, 백 대를 두고 죄를 짓게 될 것이니, 그러고야 무슨 면목으로 다시 천지의 사이에 서겠는가. 아! 서관(西關) 하늘 끝으로 파천하시매, 북극성도 제자릴 옮겼도다. 가슴을 쳐도 그 슬픔 한이 없고, 분연히 날아가려 한들 길이 없다. 우리 호남ㆍ호서와 영동ㆍ영북의 모두는 멀고 가깝고를 물을 것 없이 계속 비휴(豼貅)같은 군사들을 일제히 몰고 가서 저곳 이곳에서 속속 앞뒤로 곧장 두들겨 대어, 천지에 가득찬 요망한 기운을 거두어 버리고 확청(廓淸)의 공을 이룩하게 하라. 왜적 때문에 임금을 버리지 말고 충의심을 떨치고 나아가 왜적 토벌하기를 기할 것이며, 자신을 희생하여 나라에 보답할 것이지 달아나서 목숨을 살려 치욕을 당하는 일 따위는 없기를 바란다.
○ 거가가 송도(松都)를 떠나 해서(海西)를 향하였는데, 관서(關西)의 노상에서 겪은 곤고(困苦)를 신민으로서 차마 들을 수가 없다.
하루는 산골짜기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밤새도록 식사를 올리지 못해 촌 여인이 울면서 조밥을 드렸다. 임금이 그것을 드시고 이르기를, “이 맛은 팔진미보다 낫다. 조의 귀중함이 이와 같구나, 이와 같아.” 하였다. 또 하루는 비가 심해 갈 수가 없어서 길가 촌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임금은 방앗간[杵室]에 들고, 신하들 거가를 호종한 자가 10여 명이었다.은 빗속에 엎드려 종일 굶주렸다. 비통하다. 우리 소중화(小中華)는 동이(東夷)와 북적(北狄) 사이에 끼어 있으니, 변란의 반발이 어느 대엔들 없었으랴. 그러나 함락의 비참과 파천의 치욕이 어찌 이러한 극단에까지 이른 적이 있었겠는가. 애석하다. 농사일을 장려하여 우리를 먹여준 군부(君父)가 여러 차례 궐선(闕膳)하기까지 하는 비참한 지경을 당했고, 세심하게 백성을 다스린 임금이 마침내 궂은 비에 괴로움을 당했으니, 이 적이야말로 만세를 두고도 잊을 수 없거든, 이 몸 한 번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까우랴. 신민된 자로서 비록 서쪽으로 퇴각하는 데에 달려가서 목숨을 바치지는 못하였더라도, 마땅히 동해에 몸을 던져 목숨을 버렸어야 할 것이다.
4일. 영남 초유사 김 성일(金誠一)이 남원(南原)에 도착하다. 김성일이 애초에 체포한다는 어명에 따라 직산(稷山)까지 갔으나 사면을 받고 도로 초유사의 책임을 받게 되었는데, 그때야 비로소 조정이 서쪽으로 옮겼음을 알고 통곡하면서 돌아오다. 호남과 호서의 길이 막혔기 때문에 충청도의 내로(內路)로 해서 내려오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이광(李洸)이 근왕병(勤王兵)을 거느리고 공주(公州)에 이르러서 왜적이 서울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자, 징을 울려 군대를 퇴각시키니 육군(六軍)이 무너져 돌아오다. 그때 곽영(郭嶸)은 조방장 이지시(李之詩), 종사관 이용순(李用諄) 등을 거느리고 금산(金山)으로부터 돌아와 전주(全州)에 주둔하였다.
○ 곽재우(郭再祐)가 의령(宜寧)ㆍ삼가(三嘉)ㆍ합천(陜川) 등 여러 고을을 수복하니, 우도의 왜적들 중에는 소문을 듣고 철거한 자들이 퍽 많았다. 곽재우가 정진(鼎津)에 진을 치고 낙동강 연변의 왜적을 추적해서 잡았다.
5일. 영남 초유사 김성일은 함양(咸陽)으로 향하고, 본도 도순찰사 김수(金睟)는 함양에서 출발하여 운봉(雲峯)으로 가는데, 도중에 초유사를 만났다. 초유사가 말하기를, “지방을 맡은 신하라면 마땅히 맡은 지방을 사수할 일이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단 말이오. 온 도를 다 잃으면서도 구하지 못한 주제에 단기(單騎)로 멀리 와봤자 무슨 구제할 길이 있겠소. 원컨대, 영공(令公)은 속히 돌아가시오.” 하매, 김수가 함양으로 돌아갔다가 이어 안음(安陰)으로 갔다. 김성일이 함양에 도달하니, 군수 이각(李覺)이 홀로 빈 관아에 앉아 있는데 다만 늙은 아전 수 명이 있을 뿐이었다. 김성일이 군수를 독려하여 고을 사람들을 불러 모으게 하자, 함안의 전 현감 조종도(趙宗道)와 전 직장(直長) 이노(李魯) 등이 다 모여들었다. 김성일이 그 자리에서 격문을 아래와 같이 기초하다.
초유사는 도내의 수령, 변장(邊將), 문ㆍ무 출신의 부로(父老) 자제와 한량(閑良), 군민(軍民) 등에게 유시(諭示)하노라. 국운이 중도에 비색하여, 섬 오랑캐가 외람되이 발동하여 나라 땅에서 마구 날뛰고 동서로 충돌하면서 웅장한 성과 큰 진(鎭)도 아랑곳없이 함락시켜 버리고, 10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이미 관령(關嶺)을 넘고 곧장 서울로 쳐들어갔다. 그리하여 임금은 파천하고 온 나라 사람이 도망쳐 달아나니, 이 동방의 나라가 생긴 이래로 오랑캐 화(禍)의 참혹하기가 오늘날과 같은 적은 없었다. 여러 병사(兵使)들은 국가의 간성(干城)인데 어떤 자는 풍문만을 듣고도 무너져 달아나고 어떤 자는 겁을 집어 먹고 움츠리기만 하며, 또 수령은 한 고을의 군장(君長)이건만 모두 처자를 이사시키고 무기고를 태워 버려서는, 한 사람도 의를 지켜 굽히지 않고 충성심을 발휘하여 먼저 나서서 왜적을 치는 자가 없으니, 슬프다. 우리 군사와 백성이 또 무엇을 믿고, 흩어져 달아나지 않겠는가. 미친 파도가 마구 몰려오듯 하여 막아낼 수가 없으매, 성마다 창을 멘 병졸이 없고 읍마다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신하가 없다. 그리하여 왜적이 가는 곳마다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하여 마침내 영남 한 도를 왜적의 굴혈로 만들었고, 흙더미가 무너지고 기왓장이 부서지듯 하여 아침 저녁 동안도 지켜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대체 무슨 변고인가. 그러나 이것이 어찌 한갓 변장과 수령의 허물뿐이겠는가. 군사와 백성도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옛날에 큰 변란을 당하고도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윗사람은 목숨을 내놓고 싸울 뜻을 지녔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위해 죽겠다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적이 오기도 전에 군사와 백성이 앞장서서 달아나 산림 속에 잠복하고는 구차스럽게 살아남을 계획이나 함으로써 백성이 없는 수령과 군사 없는 장수를 만들었으니, 앞으로 누구와 함께 적을 방어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추(鄒) 나라와 노(魯) 나라가 싸울 때 유사(有司)로서 죽은 자는 30여 명이나 되었지만 백성은 그들을 위해 죽은 자가 없었으니, 이는 노약(老弱)한 백성들이 구렁에 빠져 죽어도 유사들이 그들의 고난을 구제하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지금 도망쳐 무너지기만 하는 이 변은 맹자(孟子)가 말한, 「너한테서 나온 것이 너한테로 돌아가는 것이다.」한 그것이 아니냐.’ 하지만, 아! 그것이 무슨 말인가. 최근 몇 년 동안 부세(賦稅)가 중했고 부역이 많아서 백성은 과연 명령을 견뎌내지 못했다. 그러나 성지(城池)의 방비 기구(器具)는 모두 불의의 변에도 대비할 만큼 보전되어 있었으니, 지금 와서 볼 때 성스러운 임금이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려던 생각이 원대했던 것이다. 그것이 어찌 백성을 학대해서 자신의 이(利)나 꾀한 것이었겠는가. 하물며 추 나라와 노 나라의 싸움이 비록 승부는 있었으나, 같은 중국(中國)이었기 때문에 백성에게는 별 이해(利害)가 없다. 그러나 이 이[齒]에 물들인 무리는 우리 땅에 들어오자, 곧 차지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부녀자들을 사로잡아 처첩으로 삼고 장정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도륙하였으며, 마을을 습격하여 깡그리 불태웠고 공사(公私)의 소장품(所藏品)을 다 그자들의 소유로 하여, 그 해독이 사방에 두루하였고 피가 천리에 흘렀으니 백성들의 화(禍)는 차마 말할 수도 없다. 지금이야말로 정말 지사(志士)가 창을 베고 잠을 자야 할 때이며, 충신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때인 것이다. 그러나 67주(州) 가운데 여지껏 충의를 부르짖으며 팔을 걷고 나서는 사람이라곤 없었고, 오히려 도망쳐 살아나는 데 있어서 혹시 남보다 뒤지지 않을까 하는 일이나 또는 입산(入山)하는 일에 있어서 좀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것만을 염려하니, 어찌 이루 개탄할 수 있겠는가. 설사 산으로 들어가 왜적을 피해서 끝내 자기 몸과 집안을 보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열사(烈士)는 그리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거든, 하물며 보전할 도리가 만무한 경우에 있어서랴. 본관은 이 점을 철저하게 구명해서 군사와 백성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 주리라. 이 왜적은 서울을 범하는 데 마음이 급하여 군사를 지체하지 않고 가기 때문에 그 피해가 모든 고을에 두루 미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왜적이 뜻을 이룬 후, 그 흉악한 무리들이 국내에 충만하게 되면 산골짜기가 과연 죽음을 피하는 곳이 되겠는가. 이를테면 홍수의 흐름이 하늘에 치닿고 무서운 불길이 들판을 태우듯 할 터인데, 아! 우리 억만의 생령(生靈)이 또 어느 곳에 몸을 둘 것인가. 산골짜기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시간이 감에 따라 양식이 떨어져 다들 깊은 산 속의 시체가 될 것이고, 나온다 해도 부모 처자는 그자들의 포로가 되는 곤욕을 당할 것이다. 의관을 갖춘 사족(士族)들은 그자들의 어육(魚肉)이 되어서, 항복하면 영원히 효경(梟獍)의 족속이 될 것이고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 칼 맞아 죽은 귀신이 될 것이니, 이런 일이야 어찌 지혜로운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이해(利害)와 사생(死生)만을 가지고 말한 것일 뿐이다. 아! 군신 간의 대의(大義)는 하늘의 법도요 땅의 도리니, 이른바 백성의 떳떳한 양성(良性)인 것이다. 무릇 이 땅에서 혈기가 있고 곡식을 먹는 우리들로서, 임금이 몽진(蒙塵)하고 종묘 사직이 전복되려 하며 만백성이 어육으로 문드러지듯 하는 것을 우두커니 보기만 하고 조금도 근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하늘의 법도와 땅의 도리에는 어찌 되겠는가. 더구나 부모가 왜적의 칼을 맞고 골육이 서로 보전되지 못하여 개인적인 가문의 화(禍) 역시 참혹할 것이니, 자제 된 자가 머리를 움켜쥐고 쥐같이 달아나기나 하고 만 번이라도 죽을 힘을 내어 부모 보전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자식 된 도리에는 어찌 되겠는가. 다만 영남은 본래부터 인재가 많은 고장으로 1천 년의 신라, 5백 년의 고려, 그리고 우리 조정의 2백 년 동안 충신과 효자의 뛰어난 명성과 의열(義烈)이 청사(靑史)에 빛나고 절조와 의리의 아름다운 습속이 동방에서 첫째가는 것은 사람들이 다 함께 알고 있는 바이다. 근자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 해도, 퇴계(退溪)ㆍ남명(南溟 조식(曹植)의 호) 두 선생이 한 시대에 같이 나서 도학(道學)을 제창하여 사람의 마음을 맑히고 사람의 기강(紀綱)을 바로잡는 일을 자기의 책임으로 하자, 선비들도 그 감화에 점점 물들어 사숙(私淑)하는 자들이 많아졌다. 또 평소엔 허다한 성현의 책들을 읽어 그 얼마나 자신만만한 사람들이었더냐. 그런데 하루아침에 변란을 당하자 오직 살 길이나 탐내고 죽음을 회피하는 일만을 서둘러, 임금을 버리고 어버이를 뒤로 돌리는 죄악에 스스로 빠져 버리니 구차스러이 세상에 산다 한들 어떻게 머리로 하늘을 이고 살고, 지하에 죽어 가서도 또한 어떻게 우리 선대(先代)의 현자(賢者)들을 뵈올 것인가. 의관을 차리고 예악을 숭상하던 몸을 욕되게 할 수 있겠으며, 머리를 깎고 몸에 무늬 놓는 습속을 따를 수 있겠는가. 2백 년 동안 지켜온 종묘 사직을 차마 왜적의 손에 넘겨줄 수 있겠으며, 수천 리의 산천을 차마 왜적의 굴혈로 둘 수 있겠는가. 중화(中華)가 변하여 이적(夷狄)이 되고, 사람이 짐승이 되는 그런 일을 참을 수 있으며 또 할 수 있겠는가. 적의 머리를 베어 바치는 것을 으뜸가는 공로로 삼는 진(秦) 나라도 처음에는 순전한 이적(夷狄)은 아니었건만, 노중련(魯仲連)은 오히려 바다에 몸을 던져 죽는 것을 달갑게 여겼다. 풀로 엮은 옷을 입고 꿈틀거리는 섬 오랑캐가 얼마나 추잡한 종자인데, 그자들이 우리 땅을 훔쳐 차지하고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욕보이는 대로 내버려만 두고, 그자들을 몰아내고 목 베어 죽일 방법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자들은 용맹스러운데 우리는 겁이 많고, 저자들은 예리한데 우리는 둔하니 비록 군사를 일으켜도 성사할 수 없다.” 하니, 아! 그렇게도 생각하지 못한단 말이냐. 옛날의 충신과 열사는 성패로 인하여 뜻을 바꾸지 않았고 강약 때문에 지기(志氣)가 꺾이지 않아, 의리상 마땅히 해야 할 것이라면 비록 백 번 싸워서 백 번 패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빈 주먹을 버티며 흰 칼날을 무릅쓰고 끝까지 싸워 만 번 죽어도 뉘우치지 않았다. 하물며 이 왜적은 비록 강하다고는 하나 고군(孤軍)으로 깊이 들어왔으니 바로 병법의 금기(禁忌)를 범한 것이다. 어떻게 제대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 군사들이 비록 겁이 많다고는 하나, 용맹하거나 겁많은 것이 어찌 고정된 것이겠는가. 충의에 격동되면 약한 것을 강하게 만들 수도 있고, 적은 수효로 많은 수효를 대적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니, 단지 마음을 한 번 돌리는 데 달렸을 뿐이다. 지금 보건대, 도망치거나 무너진 졸병들이 산골짜기에 가득 깔려 있는데, 이들도 처음에는 비록 몸을 도망쳐서 살기를 바랐다가도 마침내 한 번 죽는 것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면 모두 스스로 분발하여 나라를 위해 힘을 다 바치려고 생각할 것이나, 다만 솔선하여 부르짖는 사람이 아직 없었을 뿐이다. 이러한 때에 있어서 만약 한 사람의 의사(義士)만이라도 분발하고 일어나 한 번 외치기만 한다면 원근의 장정들이 구름같이 모이고 메아리같이 호응해 올 것은 가만히 앉아서도 획책할 수 있는 일이다. 성상(聖上)께서 이미 애통한 교서(敎書)를 내렸으며, 또 이 소신(小臣)을 못난이로 여기지 않고 초유(招諭)하는 책임까지 맡기셨다. 당(唐) 나라 때의 씩씩한 무부와 표한(剽悍)한 병졸도 흥원(興元 당 덕종(唐德宗)의 제2 연호, 서기784)년에 덕종이 이회광(李懷光)의 반란 때 내린 조서에 울었거늘, 하물며 추로(鄒魯)의 공자와 맹자의 교훈을 받드는 우리 군사들이 어찌 주먹을 불끈 쥐고 의분에 차 임금의 위급을 구하기 위해 나가지 않겠는가. 진실로 원하건대, 이 격문이 도달하는 날에 수령은 온 고을의 사람들에게 똑똑하게 알려주고, 변장(邊將)은 장병들을 격려하여야 할 것이다. 문무(文武)의 조관(朝官)과 부로(父老)ㆍ유생(儒生) 등은 각각 서로 정해서 일러주어 동지들을 불러 모아서 의열(義烈)로 격려하여 혹은 마을을 보호하여 스스로 지키고, 혹은 군사를 끌고 전투를 도와야 할 것이다. 부유한 백성은 차달(車達)의 곡식을 운반해다가 군사들의 식량을 보급해 주고, 용맹한 군사는 충갑(冲甲)의 무기를 휘두르면서 왜적을 죽이도록 하라. 집집마다 사람마다 각자 전투에 임하기 위해 일시에 다 일어나면 아군의 성세가 크게 떨치고 사기가 백 배 되어 호미자루 창자루도 예리한 무기가 될 것이니, 아무리 왜적의 긴 창과 큰 칼인들 또 무엇이 무서울 게 있겠는가. 일이 성공하면 나라의 치욕을 씻는 데 만전을 기할 것이요,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의리 있는 귀신이 될 기회를 잃지 않을 것이니 제군들은 힘쓸지어다. 본관은 한 부유(腐儒)인지라 비록 군사에 관한 것은 배우지 못했지만 군신 간의 대의는 그래도 대강 들었다. 한 도가 다 결딴이 난 후에 임명을 받아, 초(楚) 나라를 보존시킬 마음은 간절하면서 아직 포서(包胥)의 충성을 바치지 못하였고, 사당[廟]에 곡하고 군사를 일으킴은 장순(張巡)의 의열(義烈)을 사모한 것일 뿐이니 오히려 의사들의 힘에 의뢰하여 해[日]를 취(取)하는 공을 이루기 바라고 있다. 조정의 포상 제도가 뒤에 있으니, 다들 잘 알지어다. 애초에 김성일이 문사(文士)를 시켜 격문을 기초하게 하였으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자기가 지었는데, 말이 감격에서 우러나 붓을 먹물에 적실 사이도 없이 단숨에 써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김륵(金玏)을 안집사(安集使)로 삼아 전지(傳旨)를 내리기를, “지금 영남의 부(府)ㆍ진(鎭)이 연이어 왜적에게 함락된 것은 한 도의 병력이 적어서가 아니다. 다만 변란이 창졸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각 읍의 군민(軍民)들이 소문만 듣고도 무너져 달아나서 와해(瓦解)되기에 이른 것이니, 그들의 본의야 어찌 항복해서 왜적에게 부동(附同)하려고 한 것이었겠느냐. 만약 식견이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똑똑하게 효유(曉諭)하고 충의로써 그들을 격려하여, 그들로 하여금 동지들을 규합하며 또 자제와 노복을 거느리고 관군(官軍)에 협력하여 결사적으로 싸우게 한다면, 지금이라도 구제할 길이 있는 것이다. 고려 시대에 원충갑(元冲甲)은 한낱 필부로서 의병을 일으켜 큰 적을 꺾어 물리쳤으니 그것이 한 가지 좋은 전례다. 행상호군(行上護軍) 김륵을 본도에 내보내어 그로 하여금 원근의 백성들을 두루 효유하고 충의로운 군사들을 격려하고 권면하여 목숨을 바쳐 근왕(勤王)하게 하노라.” 하다. 김륵은 경상도 영천(榮川) 사람이니, 그는 사잇길로 해서 영남에 도달할 수 있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모병통문(募兵通文)하다. 처음에 경상도 함안(咸安) 출신의 문신인 전 현감 조종도(趙宗道)와 전 직장(直長) 이노(李魯) 등이 서울에서 변란의 소식을 듣고는, 곧 본도에 달려 돌아왔다. 조종도가 이노에게 말하기를, “우린 고향 땅에 들어가면 의병을 일으켜야 합니다. 만일 성사하지 못한다면 동지들과 물에 빠져 죽을 망정 의리상 왜적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하더니, 이번에 여러 읍에 통문(通文)을 내었다. 다음 글은 의병을 모집하는 글이다. 임금의 고통을 급한 일로 여겨서 이적(夷狄)의 화(禍)를 물리치는 것은 충의(忠義) 중에서도 급선무요, 국가의 위기에 관하여 도모하여서 생사(生死)의 근심을 잊음은 정절(貞節) 중에서도 큰 것이다. 만물 중에서 가장 영묘(靈妙)하여 사람이 되고, 다같은 백성 중에서 뛰어나 선비가 된다. 왜 영묘하다 하는가? 사람은 군신과 부자의 윤리를 알기 때문이다. 왜 뛰어나다고 하는가? 선비는 의(義)와 이(利)의 향배(向背)를 분별할 줄 알기 때문이다. 이 땅에 나는 것을 먹고 살았으면 모두 신하이지, 어찌 많은 녹을 먹은 자만이 죽어야 하겠는가. 요량없는 비여(匪茹 자신을 요량하지 않는다는 뜻)로 적이 태원(太原)까지 왔던 일은 옛날에 어쩌다 있었던 일이라 하겠거니와, 곧장 서울에 침범하기론 이번의 일이 가장 극심하다. 임금은 파천하여 어디서 바람과 이슬에 시달리고 계신지 막연하고, 종묘 사직이 진동하여 놀랐으니 신령이 어디에 의지해서 오르내리시는지 슬프구나. 쥐같이 달아나고 새같이 숨어 거의가 다 임익(林翼)같이 창[戈]을 버렸고, 애첩을 죽이고 말을 잡아 먹어 장순(張巡)같이 결사적으로 지킨 사람이 있다 함은 들어보질 못했다.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이냐. 이는 실로 사람의 도리에 견디어 내기 어려운 일이다. 2백 년 동안이나 길러온 보람이 어디에 있는가. 60주(州)의 충의가 쓸은 듯이 없어졌다. 광야에 울어도 돌아갈 곳이 없고, 백일하에 고개를 들자니 낯이 없도다. 부모가 병이 들었는데 어찌 운명에만 맡겨 약을 쓰지 않으리오. 대세가 이미 기울어졌어도 혹 하늘에 힘입어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죽는 것이 비록 싫지만 천지에 그물이 쳐 있으니 도망갈 길 없고, 살 길을 설사 구차하게 얻고 싶어도 개 돼지 틈에서야 차마 살 수 있겠는가. 죽는 것이 같을 바엔 차라리 의에 죽을 것이다. 감히 살기를 바라는가. 인(仁)에 생명을 버려라. 나라를 배반하고 원수를 섬기면 편안할 수 있겠으며, 까까머리 되고 이[齒]에 물들이는 것을 견딜 수 있겠는가. 관군은 도망쳐 형벌을 겁내고 나오지 않으니, 의병이 힘차게 움직여 충의심을 떨치고 앞다투어 와주기를 바란다. 하물며 주상(主上)께서 서쪽으로 행차하시던 날에 애통하고 간절한 교서를 내리고, 따로 목숨을 바치는 신하를 골라서 특히 초유사로 보내셨다. 윤음(綸音)이 내리자 듣는 사람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고, 성유(星諭 초유사의 격문(檄文))가 이르는 곳마다 그를 본 사람들은 응당 목숨 바칠 생각을 했을 것이다. 진실로 바라거니와, 여러 군자들은 글을 읽어 평소 모두 나라에 보답할 뜻을 품고 있었을 것이니, 위급한 이때에 임하여 의당 임금을 위해 죽는 절개를 세워야 할 것이다. 각기 부형들을 권면하고 자제들을 격려하며, 이웃 마을 사람들을 불러 일으키며 노복들을 격려하여 거느리되, 혹은 활과 화살을 혹은 칼을 차고서 단결하여 부대를 편성하고 세차게 용기를 고무하여 이 초유에 부응하고 나라의 치욕을 씻도록 하라. 그렇게 한다면 이 어찌 나라만의 다행한 일이리오. 각 개인에 있어서도 문 앞의 원수를 없애는 일인 것이다. 한편 군대를 탈영하여 피해 숨은 자들까지도 모두 스스로 나타나 모일 것인즉, 그들에 있어서도 비단 전날의 죄가 다 용서될 뿐더러 회복된 후의 포상도 기대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다시 바라는 바는, 그들을 십분 타일러서 역(逆)과 순(順)에 화복이 매었음을 알게 해 줄 수만 있다면, 천만 다행한 일인가 한다. 정말 이렇게만 한다면 살아서는 씩씩한 사나이가 될 것이고 죽어서도 빛나는 혼이 될 것이며, 장사지낼 땐 포신(鮑信)의 형상을 새기게 될 것이고 능(陵)에는 방덕(龐德)의 형상을 그리게 될 것이니, 연약하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강개하게 죽는 것이 어떠한가. 만약 의병의 근왕(勤王)으로 말미암아 하늘 길이 다시 맑아짐을 볼 수 있게 된다면, 의병으로 나섰다고 해서 반드시 다 죽는 것도 아닌 데다가, 장차 함께 중흥(中興)의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마땅히 각각 힘쓸지어다. 아!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양성(良性)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사람의 기강(紀綱)인들 어찌 영원히 떨어지겠는가. 이 한 장의 통고문을 보면 반드시 천 번이나 기절하며 통곡하게 될 것이다. 조종도 등이 쓰다. 그 후 정유년(1597, 선조 30)에 조종도는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절개를 지키고 죽었으니, 그가, “차라리 의에 죽어야 한다.” 한 처음의 말을 저버리지 않았음을 넉넉히 알 수 있다.
○ 경상도 연해의 왜적이 거제도(巨濟島)로 향하니 원균(元均)은 우후(虞侯)한테 군영을 지키게 하고는 배천사(白川寺)까지 달려갔는데, 우리나라 어선을 보자 왜적의 배인 줄로 생각하고 창황히 달아나 노량(露梁)으로 물러났다. 우후가 그 소식을 듣고 나가길 독촉하니 온 성 안의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어지러이 길을 꽉 메웠다. 그러자 우후는 다함께 피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활을 당겨 마구 쏘아대자, 임신한 두 여인이 한 화살에 맞았는가 하면 그 밖에도 무고하게 죽은 자가 퍽 많았고, 온 섬의 장병들이 모두 소문만을 듣고도 흩어져 버렸다. 남해 현령(南海縣令) 기효근(奇孝謹)은 창고를 불사르고 달아났는데, 왜적은 아직 남해 땅을 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왜적의 장수 평청정(平淸正)ㆍ평행장(平行長) 등이 서울에서부터 길을 나누어 출발하다. 애초엔 왜적의 괴수 수길(秀吉)이 군사를 8부(部)로 나누었는데, 1부의 무리가 거의 10여만 명에 달했고 총대장(總大將)은 각각 4,5 명으로 해서 우리나라 8도를 나누어 맡기로 하였다. 그런데 북방은 군사의 비결에 꺼리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들 장수 가운데서도 가장 용맹스럽고 사나운 자를 택하여 함경도로 보냈던 바 평청정이 그를 맡은 것이었다. 이때에 와서 수길 등은 서울에 머물러 주둔한 채 남별궁(南別宮)에 들어가 있었고 평청정 등은 서울에서 동쪽 길을 잡아 강원도를 지나 함경도로 향했는데, 이들이 지나 가는 곳은 적지(赤地)가 되어 천 리를 가도 사람 사는 연기가 나지 않았다. 평행장ㆍ평의지(平義智) 등은 서울에서 서쪽 길을 잡아 해서(海西)로 향했는데,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이 신길(申硈)을 중군(中軍)의 장군으로 삼고 이빈(李薲)과 이천(李薦)을 좌우의 장군으로 삼아 임진(臨津)에서 방어하다.
14일.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또 근왕병 도합 10여 만을 동원하여 전주(全州)에 주둔하였는데 군량을 수송하는 자가 갑절로 늘어나다.
○ 군사를 징발하는 교지가 있었다. 당초에 조정이 송도(松都)에 머무르고 있을 때 호남과 영남에 교지를 내렸으나, 길이 막혀 전달되지 못하다가 이제와서야 본도에 도착한 것이다. 그 내용의 대략은, “왜적이 경기(京畿)에 가득 밀려 들어와 형편상 부득이 송도에 주차(駐箚)하면서 사방에 명령을 내려 왜적 토벌의 계획을 하게 하는 터이다. 경(卿)은 경상 우도에 은밀히 내통하여 경내(境內)의 군사를 총동원해 가지고 올라와 구원하도록 하라.” 하였다. 내린 교지는, 반 조각의 막종이에 잘게 써서 겨우 글자 모양을 이룬 것으로 시골집의 사사로운 편지 조각과도 같았으니, 백성으로서 그것을 본 사람 치고 눈물을 뿌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광이 그를 영남에 전송했다. 김수(金睟)가 안음(安陰)으로부터 함양(咸陽)에 가서, 방어사 조경(趙儆), 종사관 이수광(李睟光), 조방장 양사준(梁士俊) 등을 거느리고 함양으로부터 남원(南原)으로 향하니 그때 전라병사 최원(崔遠)이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에 와서 진을 쳤다.
18일. 김수(金睟)가 남원(南原)으로부터 전주(全州)에 갔는데, 이광(李洸)이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김수를 패군(敗軍)한 장수라 하여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니 김수 일행의 병마는 점점 도망쳐 흩어졌고 장병들은 각자 말을 끌고 가버렸다. 이윽고 김수도 이 광을 만나 약속하고 출발하다.
○ 순창(淳昌)과 옥광(玉果)의 군사들이 먼 곳에 가서 싸우는 것을 싫어한 끝에, 도리어 흉악한 음모를 꾸며 형대원(邢大元)과 조인(趙仁)을 맹주(盟主)로 추대하고는 노령(蘆嶺)을 근거지로 난동을 일으키다. 이윽고 본군(本郡)으로 군사를 돌이키고 향사당(鄕射堂)과 형옥(刑獄)을 불태우매, 군수 김예국(金禮國)이 단신으로 탈출하여 이광에게 달려가서 고하였다. 이광은 병사(兵使)에게 군령을 전달하여 군사를 전진시켜 토벌해서 잡으라 했는데, 그때 마침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경린(李景麟)이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로 가다가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한테 추격을 당하여 담양의 군사도 무너져 버리다.
19일. 이광이(李洸)이 전주(全州)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서울로 향하다. 군사 5만여 명은 이광이 통솔하였는데 전주 부윤과 나주 목사(羅州牧使) 등 수령 20여 명을 거느리고 익산(益山)으로 해서 충청도에 있는 내포(內浦)를 지나면서 진군하고, 군사 4만 8천여 명은 방어사 곽영(郭嶸)이 통솔하였는데 조방장 이지시(李之詩)와 김종례(金宗禮) 및 남원 부사(南原府使) 등 20여 명을 거느리고 여산(礪山)을 거쳐 충청도의 대로(大路)로 해서 진군하여서, 모두 진위(振威)에서 만나기로 약속하다. 김수(金睟)도 이광을 따라 내포로 향하다.
○ 본도 군량 수송의 수량은 감사의 분부에 따라 각 관아에서 인부 두 사람에 한 바리, 품관(品官)은 8명에 한 바리, 교생(校生)은 8명에 한 바리씩으로 한 것들과 공(功)을 세우려고 자진해서 군량 수송에 응모한 짐바리, 그리고 각 지방 관아의 수령과 여러 장병들의 개인적인 짐바리 등,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아 길에 잇달아 있다.
20일. 남원(南原)ㆍ구례(求禮)ㆍ순천(順天)의 군사 8천여 명이 전주(全州)에 와서 참전하다가 일시에 흩어져 마구 찌르는 창에 죽은 자들이 퍽 많았다. 이광(李洸)의 군관 옥경조(玉景祚) 등이 칼을 뽑아 후퇴하는 자들을 베어 죽이자, 무너져 가던 군사들이 옥경조를 에워싸고 전주까지 와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남원 부사 윤안성(尹安性)은 판관 노종령(盧從岭)에게 영(令)을 전하여, 흩어진 군사들을 타일러 모아 보내라고 했고, 구례 현감 조사겸(趙士謙) 등은 직접 본읍에 돌아가 군사들을 불러 모은 다음, 달려 돌아가서는 은진(恩津)까지 이르렀다. 전주ㆍ광주(光州)ㆍ나주(羅州)의 군사가 용안(龍安)에 도달해서 역시 일시에 흩어지자 수령 등이 길에서 불러 모아 봤지만, 무너진 군사들을 한데 모을 수는 없었다. 이광 역시 길에서 머뭇거리곤 하여 전진하기를 꺼리는 기색이 많았다.
○ 병사(兵使) 최원(崔遠)이 남원(南原)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순창(淳昌)으로 향했는데, 반란을 일으킨 군졸을 토벌하려는 것이다. 그는 우선 남원 판관 노종령을 시켜 달려가 실정을 탐지케 했는데, 김예국(金禮國)이 이미 조인(趙仁) 등을 잡아서 죽여 버렸는지라, 나머지는 다 불문에 부쳤다.
○ 김성일(金城一)이 함양(咸陽)으로부터 산음(山陰)에 도착하니, 현감 김낙(金洛)이 김성일에게 환아정(換鵝亭)에 사관(舍館)을 정해 주고 다반상[茶盤]을 대단스럽게 차려드렸다. 그러나 김성일이 변색을 하고 김낙을 불러 책망하기를, “이 같은 성찬은 신하로서 오늘날 차마 먹을 수 없는 것이다. 먹는다 해도 목구멍에 넘길 수 없다.” 하니, 김낙이 부끄러워하며 사죄하고 물러갔다. 산음현 사람 오장(吳長), 의령(宜寧) 사람 이지(李旨), 단성(丹城) 사람 김경근(金景謹) 등이 모두 칼을 집고 김성일을 찾아뵈니, 김성일이 오장 등에게 말하기를, “제군이 은근하게 찾아왔으니 반드시 기이한 계획이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하였다. 김경근이 말하기를, “김수(金睟)를 목 베지 않으면 대의를 펴고 나라를 회복하는 공을 이룩할 수 없습니다.” 하니, 김성일이 웃으면서, “부질없는 소릴. 일을 성사시키지는 못한다.” 하였다. 김낙이 군사를 모았는데 8백여 명에 달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흉악한 왜적이 진해(鎭海)ㆍ고성(固城) 등지를 불태워 재물을 없애버리니, 본도 우수사 원 균(元均)이 퇴각하여 남해(南海)의 노량(露梁)에 진을 치고 전라도의 수군에 구원을 청하다. 적병이 진주(晉州)로 향한다고 떠들썩하자, 목사 이경(李璥)과 판관 김시민(金時敏)은 지리산에 숨어 피하였다. 김성일이 이 소식을 듣고, 본주(本州 즉 진주)에 달려가니, 경내(境內)는 싹 비어 있었다. 판관은 김성일이 진주에 온다는 말을 듣고 나와서 기다렸으나, 이경은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았다. 김성일이 명령을 전하여 나오라 했는데, 이경은 등창이 발작하여 죽었다. 김성일이 김시민에게 영을 내려, 수천 명의 군사를 정돈하여 가지고 부대를 나누어 성을 지키게 하는 한편,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손승선(孫承善)을 수성유사(守城有司)로, 허국주(許國柱)와 정유경(鄭惟敬)을 복병장(伏兵將)으로, 하천서(河天瑞)를 군량 책임자로, 강기룡(姜起龍)을 병기 책임자로 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적병이 고성으로부터 사천(泗川)에 와 머무르면서 진주를 범하려 하자, 김성일이 군관 중에서 용맹하고 건장한 자 10여 명을 시켜 강을 건너가 쳐서 쫓으니 왜적이 곧 퇴각하였다. 다시 군사를 나누어 사천의 성 밑까지 진격해 들어가서는 그들의 나무하고 물 긷는 길을 끊어버리자, 왜적은 퇴각하여 고성으로 돌아갔다. 또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도소모관(都召募官)으로 하여 생원(生員) 한계(韓誡)ㆍ정승훈(鄭承勳)과 함께 군사 6백여 명을 모집하여 고성의 의병장 최강(崔堈) 등과 합병(合兵)해 가지고 혹은 유인하기도 하고 혹은 매복했다가 야습하게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왜적의 무리가 무너져 웅천(熊川)ㆍ김해(金海) 등지로 향하였다. 김대명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창원(昌原)의 마산포(馬山浦)로 들어가서 진을 쳤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각 도 사림(士林)들의 의병을 일으키는 격문이 빈번하게 나돌다. 이때부터 국가의 명맥에 활발한 기세를 얼마간 떨치게 되었다.
○ 경기 감사 권징(權澄)의 통서(通書)에, “평의지(平義智)가 조선에 온 것은 실은 모반한 백성들이 군사를 청한 데서였다. 그런데 수길(秀吉)에게 군공(軍功)을 보고할 때 모반한 백성들이 번번이 억눌리고 깎여 내리게 되자 분한 마음을 품게 되어 평의지를 쳐 죽이고 이때의 거짓 소문이 대부분 이러한 따위다. 모반한 백성들과 왜적이 두 군으로 나뉘었으니, 오래 가지 않아서 틀림없이 자연 무너져 흩어질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 한 대장이 겨우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모화관(慕華館)에서 왜적과 교전하여 꽤 많은 자들을 목베고 사로잡았는가 하면, 왜적은 북쪽으로 퇴각하여 신문(新門)으로 해서 들어가는데 먼저 들어가려고 다투다가 서로 죽인 것이 또한 많았다고 한다. 또 왜적의 장수 한 사람이 임진강을 건너려 하자, 김명원(金命元)이 강의 요지를 지키고 있어 많은 자들이 편전(片箭)에 맞아 왜적들이 건널 수 없었고, 왜적이 배 두 척을 구하여 그 군사들을 가득 실었는데 강 복판에서 뒤집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하였다.
○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 대부대의 왜적이 하루는 사람을 죽여서 시위하라는 영을 내리자, 동대문으로부터 남대문에 이르기까지 반식경에 쓰러진 시체가 길에 가득 차고, 왜적에게 항복하고 부동(附同)한 백성이 채 도망가지 못한지라, 피바다와 살더미의 참상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루가 지나서야 중지시켜 다시 살육을 엄금하고 각 문에다 방을 내걸기를, “남자는 농사에 힘써 자기 생업에 안정하고, 여인은 누에고치 길쌈을 일삼아라.” 하고, 또 강원도와 경기도에 글로 고시하기를, “대왕(大王)은 이미 도망갔고 중국도 지금 일본에 예속되었으므로 사자[使价]를 보내 각 도를 다스리려 하니, 나라의 선비들 및 촌 백성들이 일본에 복종하기를 전대(前代)에 복종한 것 같이 함에 어찌 이론(異論)이 없겠는가? 그러나 지금 군현(郡縣)의 관창(官倉)에 있는 미곡ㆍ옥백(玉帛)ㆍ사마(絲麻) 등은 흩어 없애지 말아야 한다. 또 모(某) 목사[牧主]ㆍ모(某) 현감이며, 백성 남녀들도 역시 아무데나 가지말고 사자를 섬기기를 바란다. 이 점 유의하라. 천정(天正 당시의 일본 연호) 임진년 월 일, 풍신수가(豐臣秀家)ㆍ행정(行貞)ㆍ길성(吉城) 등이 양도(兩道)의 이(吏)ㆍ호(戶)ㆍ예(禮)ㆍ형(刑)ㆍ공(工)의 백(伯 즉 그 관계 책임자를 말함) 등에게 부치노라.” 하였다. 흉악하고 해괴한 말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만 대를 두고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 삼도(三道)의 해군 함대[舟師]가 가덕도(加德島) 앞바다까지 왜적을 추격하여 크게 이기다. 이에 앞서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은 왜적들이 여러 성을 연달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해군 함대를 이끌고 가덕도로 향했는데, 왜적의 배가 바다를 덮고 있는 것을 보자 마침내 퇴각하여 돌아오고, 여러 장수들도 점점 흩어져 가버렸다. 원균은 아군의 전함을 다 침몰시키고는 육지에 올라가서 왜적을 피하려 하였으나, 옥포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이 안 된다고 하여 마침내 중지하였다. 원균이 이운룡 등의 몇 척의 배와 함께 노량(露梁)에 퇴각해 있는데 적병이 뒤따라 좇아오자, 이운룡이 전라도의 해군에 구원을 청하고자 곧 작은 배 하나를 타고 달려갔다. 그런데 당시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가 해군 함대를 거느리고 좌수영(左水營) 앞바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척후병(斥候兵)이 외쳐 보고하기를, 작은 배 한 척이 와두해(瓦頭海)로부터 달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급히 척후선을 시켜 물어본즉, “경상도 옥포만호 이 모요. 적병이 가득히 몰려와 여러 진(鎭)이 와해됐소. 우수사 원 모가 힘으로 지탱하지 못해 퇴각하여 노량을 지키고 있는데, 흉악한 왜적이 뒤쫓아 와서 이미 사천(泗川)과 남해(南海) 바다에 가득 차 있소. 전라도의 함대가 그 선봉을 격파하여 주기 바라오. 그렇지 않으면 영남의 바다는 끝장이 나고 화가 호남으로 닥쳐올 날이 멀지 않을 것이오. 장군께서는 이 점을 숙고하시오.” 하였다. 이순신 등이 그 말을 듣고는 다들 놀라서 서로 돌아보는 것이었다. 광양 현감(光陽縣監) 어영담(魚泳湛)이 그때 여러 장수 중의 한 사람으로 진중에 있었는데, 여러 장수들이 서로 미루고 칭탁하는 것을 보자 팔뚝을 걷어올리고 크게 소리치기를, “영남은 왕의 땅이 아닌가. 이 왜놈은 나라의 적이 아닌가. 영남 바다의 여러 진이 이미 다 함몰되고 단지 몇 척의 배만이 우리 경내에 와서 정박해 있으며 저 사나운 왜적이 요량없이[匪茹] 이미 그 뒤에 와 있다는데, 우리가 한 도의 완전한 군대를 가지고 여기서 관망이나 하면서 구원을 청하는 말을 듣고도 걱정 않고, 왜적이 온 것을 보고도 마음이 태연한 채 앉아서 영남 바다의 군사를 오늘 다 없어지게 만든다면, 내일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남의 위급한 것을 구해주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서 왜적을 기다린다면 겁 많고 나약한 게 아니오. 장군께서 헤아려 하시오.” 하니, 여러 장수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그를 질시하였지만, 이순신은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밤을 지냈다. 이튿날 새벽, 이순신이 장병들을 모아 놓고 어영담을 불러다 말하기를, “광양 현감은 영남을 구원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는데, 나도 생각해 보니 역시 이치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영남 바다에서의 왜적 토벌은 반드시 노량에서 끝나는 것은 아닐텐데, 깊고 먼 물길을 시험해 본 사람이 없으니 이 점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어영담이 말하기를, “그것은 내가 맡겠소이다. 나를 선봉으로 삼아 주기 바랍니다.” 하자, 이순신이 기뻐하면서, “광양의 말에 따라 분부하겠다.” 하고, 곧 장군기를 세우고 소라를 불며 대포를 터뜨리고서 어영담을 선봉으로, 방답귀선장(防踏龜船將) 신여량(申汝良)을 척후로, 순천 부사(順天府使) 권준(權俊)과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구사직(具思稷) 등을 중위(中衛)의 좌ㆍ우장으로 하고는 이억기(李億祺)의 군함과 합세하여 노량으로 향발(向發)하여 원균과 만나기로 했다. 먼저 떠난 배가 광주(光州)의 바다에 이르자, 왜적의 배 5, 6척이 노를 바삐 저어 퇴각했다. 아군이 이들을 쫓아가자 그 배들에 탔던 왜적은 육지로 올라가서 달아났다. 아군이 그 배들을 다 부숴버리니 아군의 군졸들은 기운이 났다. 날이 저물어 배를 돌려왔다. 이튿날 새벽, 또 영남 바다로 향하여 견내량(見乃梁)에 도착하였는데, 적선들이 바다를 덮고 와서 척후장 신여량은 이미 왜적에게 포위되어 있으면서 부채를 흔들어 뒷 군사들에게 물러가라고 신호했다. 이순신은 바다가 좁은 것을 보고 느릿느릿 퇴각하여 여러 배들이 차례로 나왔고, 이 억기는 이미 주도(柱島) 밖으로 달아나 있었다. 방답첨사(防踏僉使) 이순신(李純信)이 큰 소리로, “사또는 왜 우리 두 배의 장수만을 버리고 갑니까?” 외쳤으나, 이순신(李舜臣)은 대답하지 않았다. 적병은 아군이 후퇴하는 것을 보자 급히 노를 저어 쫓아왔다. 한산도(閑山島) 큰 바다에 이르렀을 때, 이순신은 소라와 나팔[角]을 불게 하여 일시에 기를 흔들고 함성을 지르며 배를 돌려 왜적과 맞붙어 싸웠다. 이억기도 노를 재촉하여 뒤따라 와서, 허다한 배들이 다 천지현전(天地玄箭 화살 가운데 천ㆍ지ㆍ현의 세 종류가 있음)을 발사하여 총소리가 바다를 뒤흔들고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가득 찼다. 접전한 지 얼마 안 되어 적선은 다 침몰되고 왜적은 불에 타고 물에 빠지고 하여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으며, 목을 벤 것만도 1백여 급이나 되었다. 그 이튿날, 어영담이 계속 선도(先導)가 되어 진해(鎭海) 바다를 거쳐 거제(巨濟)에 이르렀다. 당항포(唐項浦)ㆍ진도(珍島)의 배와 남도포(南桃浦)의 배가 앞서 가다가 왜적의 복병선(伏兵船) 2척을 만나 접전했는데, 왜적이 패배하고 육지로 내려 달아나자 그 배들을 불태워 버렸고, 이어 왜적의 배 25척을 만나 접전했다. 이달 5일, 삼도(三道)의 여러 배들이 합동으로 공격하여 왜적의 함대를 쳐 없애고 술시(戌時 지금의 하오 8~11시 동안의 시간을 말함)에 가서야 끝냈다. 6일, 경상 우수영의 전함이 전라도 보성(寶城)의 배와 합동으로 왜적의 큰 배 2척을 공격하여 불태워 없앴다. 그 이튿날, 왜적의 배들이 율포(栗浦)에서 떠나 일본으로 향하는 것을 삼도의 해군이 가덕도 앞바다까지 쫓아 갔는데, 적병은 우리 배들이 돌진하는 것을 보자 배를 돌려 우리 배들을 맞아 싸웠다. 소라 소리가 한 번 울리자 총통(銃筒)을 일제히 발사하였고 화살과 돌이 뒤섞여 쏟아지며, 섭불[薪火]을 요란하게 던지니 함성이 바다를 진동시키고 연기와 불길은 하늘에 가득 찼다. 왜적의 배가 부서진 것이 1백여 척이고, 불에 타고 물에 빠지고 하여 죽은 자가 무수하였으며, 수백 급의 목을 거두었다. 그 가운데 큰 배가 한 척 있었는데, 층루(層樓)가 마련되어 있고 그 높이는 3, 4장(丈) 가량에 10여 명을 앉힐 수 있었으며, 밖에는 붉은 깁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안에는 금은으로 장식된 병자(屛子)가 있어 생김새가 퍽 견고하여 쳐부수기 어렵게 만들어진 것으로, 이는 바로 왜적의 주장(主將)이 탔던 배였다. 그 배 안에서 금색의 둥근 부채 한 자루를 얻었는데, 한쪽 면의 중앙엔 ‘6월 8일에 수길이 서명함[六月八日秀吉着署]’이라고 씌어 있었으며, 그 오른편에는 ‘우시 축전수(羽柴筑前守)’의 5자가, 왼편에는 ‘타정류류수전(鼉井流流守殿)’의 6자가 씌어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수길이 축전수에게 표신으로 준 물건일 것이고, 그 배에서 목 베인 왜장(倭將)은 바로 축전수였을 것이다. 원균의 배들은 비록 그 수효는 적었지만 돌격을 잘했다. 이순신의 배 형상은 거북이 같았으며 위에 지붕 판자를 덮어 씌우고 두루 쇠못을 박았는데, 그것이 뾰족하고 날카로워 범접하기 어려웠고 또 퍽 견고하고 빨라서 전투에 나가기 편리했다. 거기다 어영담의 귀신 같은 지도(指導)를 얻어 전후의 전공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군영에 돌아와 장계를 올려 전후의 전승을 알렸다. 어영담은 경상도 함안(咸安) 사람으로 대담한 군략이 세상에 뛰어나고 유달리 강개하였으며, 과거하기 전에 이미 여도(呂島)의 만호가 되었고 급제 후에는 영남 바다 여러 진의 막하에 있었다. 그리하여 바다의 얕고 깊음과 도서(島嶼)의 험하고 수월함이며, 나무하고 물 긷는 편의와 주둔할 장소 등을 빠짐없이 다 가슴속에 그려 두었기 때문에, 해군 함대가 전후에 걸쳐 영남 바다를 드나들며 수색하거나 토벌할 때면 집안 뜰을 밟고 다니듯이 하여 한 번도 궁박하고 급한 경우를 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로 해군 함대의 전공은 어영담이 가장 높았는데도 단지 당상관에 올랐을 뿐, 선무훈(宣武勳)에는 참여하지 못하여 남쪽 사람들은 다들 애석히 여겼다.
○ 경기도 수원(水原)에 주둔한 왜적이 글로 고시하기를, “지난 20일 일본에서 사람을 서울로 보내 이 친구를 보내게 했다. 저 일본 사람이 길에서 조선 사람이 머리를 채취하는 것을 물은즉 그 이튿날 목을 벤 사람을 내놓고 그 수효를 세었다. 이것은 악한 사람이 한 짓이다. 또 조선 사람에게 기식(寄食)하던 5명을 사로잡았는데 그 가운데 4명에게는 사형을 집행했고 남은 한 사람은 명 나라를 다루는 계략에 통해서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지나가게 해준 것이다. 이 자가 양성부(陽城府)에 있는 거처로 돌아가는 것을 물어서 양성의 촌 백성이 그를 집에 돌려보내 주었다. 풍신행정(豐臣行貞)이 서울에서 수원으로 보내졌는데 그가 수원에 체류하는 동안 장군 수종(秀宗)이 지령서를 주어 이르기를, ‘백성 남녀는 집으로 돌아가게 할 것. 수원군을 예로 취하고 단속하라.’ [去二十日日本差人至京城使托差越斯友朋彼日本人於道問朝鮮採首則明日出人數右惡人打果又生擒寄食五人中四人行死罪一人者此通爲明計差過也此者問在陽城府居歸云陽城村氓爲歸家豐臣行貞從京城差越水原滯留之間將軍秀宗任旨書百姓男女令歸宅者水原郡禮取可束] 하였다.” 하다. 글 뜻이 알아보기 힘들어 재록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 역시 왜란 중에 일어난 한 가지 일이기 때문에 써둔다.
○ 서울에 머물러 있는 왜적이 선릉(宣陵)ㆍ정릉(靖陵) 두 능을 파내다. 선릉은 성종(成宗)과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이고 정릉은 중종(中宗)의 능이다. 진실로 이 왜적은 만세를 두고 잊어서는 안 되겠다.
○ 왜적의 장수 평행장(平行長)과 의홍(義弘) 등이 임진강을 건너고 신힐(申硈)이 이 싸움에 죽었으며, 김명원(金命元)ㆍ이빈(李薲) 등이 패하여 관서(關西)로 달아났다. 애초에 의지(義智) 등이 10여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임진강에 쇄도해서는 강에 방비가 있음을 알자 산골짜기에 군사들을 숨겨 두고 매일같이 약하게만 보였다. 신힐(申硈)은 왜적의 무리들을 엉성하게만 보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니, 잠복했던 왜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나 함성을 지르면서 닥쳐 오는 소리가 하늘에 치닿는 듯하고 그 형세가 바람에 불길 같아서, 손쓸 사이도 없이 혹은 칼에 맞아 죽고 혹은 물에 몸을 던지고 하여 한 사람도 빠져 나가질 못했다. 신 힐 역시 강물에 빠져 죽고 강을 수비하던 군사들도 일시에 놀라 흩어져 버렸다. 전 수사(水使) 유극량(劉克良)은 원수별장(元帥別將)으로 군에 있었는데, 그는 왜적의 모략을 염탐해 알았으므로 신힐에게 건너가지 말기를 청했지만 신힐은 그를 늙은 겁쟁이라고 나무라며 몰아세우고는 강을 건넜던 것이다. 마구 찍어댈 때에도 유극량은 조금도 자기 부서를 떠나지 않고 힘을 다해 싸우다 죽었다. 원수 종사관 홍봉상(洪鳳翔)도 원수에게 관광(觀光)의 일을 고하기 위해 강을 건넜는데 왜적이 마구 몰아댈 때 역시 물에 빠져 죽었다. 애석하다. 홍 종사는 양을 따라 범떼 속으로 들어갔으니 사람들은 쓸데없는 죽음을 당했다고 나무라지마는 소문만 듣고 달아나는 것보다는 나았다.
○ 피난하는 사람들은 각기 가깝고 편리한 대로 피난했다. 영남의 좌도 사람들은 산으로 들어 간 외에는 다 영동(嶺東)으로 들어가고 우도 사람들은 전라도로 넘어 들어갔으며, 호서 사람들 역시 그렇게 하고 경기 사람들은 다 강화(江華)ㆍ아산(牙山) 등지로 들어가다. 계사년(1593, 선조 26)에 왜적이 물러간 후 고향에서 살아갈 길이 없자 있던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계사년과 갑오년(1594, 선조 27)에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변고를 빚게 됐다.
○ 김해ㆍ동래(東萊) 등지의 사람들은 다 왜적에 붙어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며 여인을 더럽히고 하였는데 왜적보다 심하였다. 김해의 경우에 도요저(都要渚) 마을은 낙동강 연변의 큰 고장인데, 왜란 초기부터 왜적에 붙어서 도적질을 하고 혹은 지난날의 원수를 갚기도 했다. 한 서원(書員)은 일본에 들어가서 전세(田稅)를 마련하느라고 혹 뱀을 잡아다가 그 세미(稅米)에 충당하기도 했으니, 왜인이 천성으로 뱀 먹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창원(昌原)의 왜적은 전라 감사를 자칭했고, 향리(鄕吏) 현호준(玄虎俊)은 전라 감사의 배리(倍吏)라 자칭하여 선문(先文 관리 출장의 도착일을 미리 알리는 공문)을 발송하기도 하다. 본도의《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를 나누어 좌ㆍ우 순찰(巡察)을 두었는데, 이성임(李聖任)을 좌순찰로 했다. 당시 적병이 경상 좌우도에 가득 차 있어서 호령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어명이 내린 것이다.
○ 초유사(招諭使)가 다음과 같은 통유문(通諭文)을 내다.
해적이 도량(跳梁)하여 우리 성지(城池)를 공격하여 함락하고 우리 생령(生靈)을 도륙하였으며, 동서로 충돌하면서 무인지경을 들어오듯 하였으나, 67읍 중에서 한 사람도 충의를 제창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나라의 치욕을 씻은 자가 없었고 우두커니 앉아서 온 고장[道]을 왜적의 손에 넘어가게 하였습니다. 종묘 사직은 깃술[綴旒]보다 위태롭게 되었고 정기(正氣)라곤 쓸은 듯이 없어져 국토[山河]엔 수치만이 안겨 있으니, 무릇 혈기를 가진 자라면 누군들 통분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본관은 어명을 받들고 이 땅에 와서 눈물을 뿌리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이 왜적과 한 하늘을 함께 이고 살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여러 읍이 무너져 달아난 끝에 병력은 이미 꺾여진 터인지라 빈 주먹을 뻗고 흰 칼날을 무릅쓰면서 홀로 서서 분개하는 것입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귀하는 여염에서 분발하고 일어나 의병을 불러모아 가지고 강중(江中)에서 왜적의 배를 섬멸하여 의병의 명성을 한 고장에 날려 사람마다 기운을 돋구었다 하니, 선대부(先大夫)께서 훌륭한 자손을 두었다고 하시겠습니다. 그 뜻을 끝까지 관철하기에 힘쓰고 의병을 더욱 확장하여 역내(域內)에서 돼지 같은 왜적들을 죽이고 백성들을 도탄 속에서 구출하여, 위로는 임금의 원수를 갚고 아래로는 충효의 가문을 빛낸다면 또한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본관이 비록 노둔하고 졸렬하기는 하나 충의가 천성에 뿌리박고 있으니,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는 일에 있어서는 감히 남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동지를 규합하여 의열(義烈)로써 그들을 격려한 다음 족하(足下)들과 더불어 좌우로 제휴하여 함께 하늘을 받치고 태양을 맑히는 공을 이룩하기 원하고 있습니다만 귀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살아서는 충의로운 선비가 되고, 죽어서는 충의로운 귀신이 되는 일이니 귀하께서는 노력하십시오. 의령(宜寧)의 곽 의사(郭義士)께 내림.
○ 평의지가 송도를 함락하고 다시 해서의 여러 고을을 함락해서 깡그리 불타 없어지다.
○ 조정이 서경(西京 평양)에 이르러 행차를 멈추고[駐蹕]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한다는 교서를 팔도에 반포하다.
조종이 창업해 놓은 기업(基業)에 자리잡고 편안하게 지내느라 위험이 닥쳐올 일을 잊고 있다가 이미 전쟁의 핍박에 직면해 버린 이때 원량(元良)을 왕세자로 하고 신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노라. 왕위가 비록 불안하긴 하지만 난시(亂時)라 하여 어찌 경사를 잊겠는가. 이에 파천길을 옮겨야 하는 날에 즈음하여 널리 고유(告諭)하는 글을 선포하노라. 못난 이 몸이 명철하지 못하여 국가의 다난한 때를 만났다. 25년 동안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내 마음을 다하려 하였으나, 억만의 생령이 나를 떠나 버리니 앞으로 닥쳐올 백성의 원망을 어찌하리오. 다행히 이번에 인지(麟趾 세자를 가리킴)의 노래를 널리 폄은 실로 조종의 가호(加護) 있으심에 힘입은 것이로다. 백성을 무육(撫育)하는 방법에는 비록 부끄러움이 있지마는 왕세자를 세우는 것은 마땅히 일찍 해야 되는 줄로 생각하노라. 책봉의 예(禮)는 근엄하게 해야 한다는 한신(漢臣)의 장주(章奏)가 한갓 잦았거니와 날짜를 오래 늦추면 범진(范鎭)의 머리털이 허옇게 돼버린다. 다만 이 야만 오랑캐의 외침(外侵)이 마침 국내(國內)가 어지러운 틈을 타고 빚어져, 수도를 침범하고는 사방으로 파급되어 여러 성의 장벽이 일제히 무너졌다. 재앙이 내 신변에까지 다가와 칠묘(七廟)의 의관(衣冠)이 옮겨졌으니 나라의 운명은 다급하고 인심은 두려워하기만 한다. 내 어찌 양위(讓位)를 부질없이 고집하겠는가. 이때야말로 세자를 정하는[定本] 일을 서둘러야 할 시기인 것이다. 둘째 아들 광해군 혼(琿)은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철하며, 학문은 정밀하고 민첩하며, 어질고 효성스러움이 일찍부터 드러나 오랜 동안 억조 백성들의 촉망을 받아 왔고, 그들은 또 그의 덕을 구가(謳歌)하면서 그에게 귀의(歸依)하기를 생각하여 왔으니, 그는 선왕의 왕위를 계승할 만하다. 이에 그를 세자로 진봉(進封)하고 인하여 그로 하여금 군사를 위로하고 나라를 감독하게 하노라. 이 일이 비록 창졸간에 거행되는 것이기는 하나 그 계획은 사실 전에 정해진 것이니 모든 백관(百官)들은 내가 우연히 그렇게 했다고 말하지 말라. 나라의 근본이란 본래 급작스러이 처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번에 평양에 와서야 비로소 중외(中外)에 반포하게 되었다만, 전에 서울에서 이미 모든 백관의 축하까지 받았던 것이다. 온 나라 안[關中]에 소해(小海)의 은택이 미쳐 있고 길에서는 전성(前星)의 광휘(光輝)가 바라보인다. 황천(皇天)도 우리 조종을 보우하는데 사직(社稷)인들 어찌 한쪽 구석 땅에서 편안하겠는가. 적의 혼이 이미 가 버리자 한강의 바람과 물결이 맑아지기 시작하였고, 관군이 분발하려 마음먹자 우리 진터가 확청(廓淸)되어 간다. 용루(龍樓)에 문침(問寢)하는 예절이 갖추어질 것이고, 학금(鶴禁)은 구도(舊都)의 위의를 회복할 것이다. 아! 신민은 내가 고하는 뜻을 살펴 알아서 태자를 위해 죽음을 바치고 나 한 사람의 수치를 남기지 않게 하기를 원하노라. 성심으로 널리 고하니, 너희들은 다 나와서 들어 보아라. 아! 큰 강을 건너는 데 그 나루터조차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는 것과도 같구나. 어려움을 구출하기 위해 원자(元子 즉 왕세자)를 공경스러이 보호하라. 현명한 계승자를 택하여 세움으로써 사람들의 기대에 따른 것이다. 후일의 승평(昇平)은 실로 오늘의 이 일에 말미 암는 것이다.
○ 경상도 영천(永川) 사람 진사(進士) 정세아(鄭世雅), 신녕(新寧) 사람 봉사(奉事) 권 응수(權應銖), 하양(河陽) 사람 봉사 신해(申海), 고성(固城) 사람 봉사 최강(崔堈)이 다 군사를 모집해서 왜적을 토벌하다. 정세아가 그때 나이 67세였다. 왜적이 막 본성(本城)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정세아가 좌수(座首) 유몽서(柳夢瑞), 생원(生員) 조희익(曹希謚) 등과 더불어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모아 가지고 왜적을 잡아 목 벤 것이 무척 많았다. 그 후 성을 회복하고 큰 승리를 거둔 것은 다 정세아 등이 먼저 나서서 일한 힘이었다. 권응수는 애초에 수영(水營)의 군관으로 자제와 노복을 거느리고 상도(上道)의 토적(土賊)을 목 베어 죽이기도 하였고, 요로에다 군사를 잠복시켜 흩어져 다니는 왜적들을 목 베어 죽이기도 하였으며, 장정들을 모집하여 혹은 요격(邀擊)하고 혹은 추격하곤 하여 일찍이 두려워하고 피한 적이 없었고, 누차 습격도 당했으나 말[馬]이 씩씩하였기 때문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초유사가 그를 의병대장으로 하였던 것이다. 최강은 젊어서부터 글을 해득했고 늦게야 무과에 급제하였다. 담(膽)이 커서 무인이 승진 청탁 따위를 하는 짓을 수치스럽게 여겼고, 한편 성질이 강직해서 자기 뜻을 굽혀서 남에게 따르질 못했다. 이때에 와서 군사를 일으켰는데 군사는 비록 적었으나 그들한테서 인심을 얻었으며 전투에 당해서는 자신이 앞장서서 싸워 정기룡(鄭起龍)ㆍ안신갑(安信甲)과 함께 명성을 나란히 하였는데, 많은 사람을 통솔하는 재주에 있어선 이들보다도 나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운봉 현감(雲峯縣監)이 다음과 같이 치보(馳報)하다.
이번 5월 24일 자시에 도부(到付 문서가 도착한 것)한, 5월 23일 진주(晉州)에서 성첩(成貼 책임자가 문서에 서명하여 그 문서의 효력을 발생하게 하는 것)한 경상 초유사의 비밀 전통(傳通 차례로 서로 전하는 통문)에 말하기를, “당일 창원(昌原)에 사는 황봉찬(黃奉贊)의 종 침향(沉香)이 본 부사(府使)에 현납(現納)한, 퇴로한 호장[戶長] 황중명(黃仲明)이 5월 22일에 성첩하여 고목(告目)한 속에, ‘본부(本府)에 머물러 진수(鎭守)하고 있는 왜인은 2백여 명이나마, 늘 동리에 왜적이 혹 백여 명이 떼를 지어 횡행하고 미포(米布)와 잡물(雜物)을 깡그리 가지고 갈 뿐 아니라, 이달 22일 김해에서 온 왜적의 말에 의하면 당일 부(府)에 들어와 9백여 명을 받아들여 사용하며, 전라감사ㆍ어사ㆍ도사ㆍ찰방 네 행차의 칭호로 그 도에 나갔다 오고 또 부중(府中)에 머물러 있기도 하며, 함안(咸安)ㆍ의령(宜寧)ㆍ삼가(三嘉)ㆍ단성(丹城)ㆍ산음(山陰)ㆍ함양(咸陽)ㆍ운봉(雲峯)ㆍ남원(南原)ㆍ임실(任實)ㆍ전주(全州)에 선문(先文 출발하기 전 먼저 도착 일자를 알리는 글)을 내어 그곳을 향해 갈 것을 차례로 전통하였고, 동 행차의 배리(陪里) 현호준(玄虎俊), 마두(馬頭) 이녹상(李祿祥)이 당일 배행(陪行)할 것을 예정하고 계획하였다가 어제 비가 내려 오늘 떠나는 것이라고 하며, 다른 왜적은 혹은 웅천(熊川)의 길로 해서 혹은 김해의 길로 해서 혹은 백여 명 혹은 50여 인이 잇달아 부에 들어가고 혹은 서울로 올라간다.’ 고 고목이 되어 있으니 참고할 것이며, 왜적의 선성(先聲)은 믿을 수 없다고는 하나 우리나라 노리(老吏)가 방금 왜적 가운데서 왜적이 하는 바를 본 것이 이러하니, 이 고목과 같다면 왜적이 전주로 향해 가는 계획은 거짓이 아닌 것 같은데, 호남의 장병들은 쓸은 듯이 내지(內地)에 근왕하러 갔으니 극히 우려된다. 차례로 전통하여 방비하고 조치하여 날마다 새로이 변란에 대비하되, 본도의 순찰사와 좌우 수사가 있는 곳에 모두 치보하여 앞의 일을 전통할 것이다. 이것 역시 함안의 가장(假將) 이향(李享)이 진고(進告)한 것인데, 왜적으로 전라 감사를 칭호하는 자가 이미 함안ㆍ의령ㆍ정진(鼎津)에 도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황중명의 고목이 과연 거짓이 아니니 참고하여 시행할 것이다. 이상 순찰사에 보고함.
○ 세자에게 다음과 같이 하교하다.
큰 물을 건너는 데 나루터 없어 바야흐로 배와 노로 건널 바를 계획하고, 넘어진 나무에 싹이 돋은 것 같아서 오직 나랏일을 부탁하는 데 마땅한 사람 얻은 것을 다행하게 여겨, 이에 군사와 군정의 권한을 맡겨 부흥의 대업을 이룩하기 바란다. 돌아보건대 나는 덕이 엷은 몸으로 외람되이 나라의 큰 기틀을 지켜, 음우(陰雨)가 내리기에 앞서 뽕나무 껍질을 거두는 데 경계함이 있어서 매양 깊은 밤중에 썩은 새끼줄로 말을 모는 것같이 조심하였으니 어찌 백성의 병폐를 소홀하게 하였겠는가. 그러나 어찌 생각하였으리오. 바다 섬의 추악한 오랑캐가 사람과 짐승이 본성을 달리함을 생각지 않고, 처음에는 상국(上國 명(明) 나라)에 유감을 품고 하늘을 향해 활을 당겨 쏘려 하다가 끝내는 우리나라에 앙화를 전가하여 감히 사람을 씹는 입을 움직여서, 모든 백성들을 거의 남김없이 유린하고 서울에까지 급히 충돌해 온 것이다. 칠묘(七廟)가 불타 소진되었으니 폐허가 된 데 개탄함을 견디지 못하겠고 삼궁(三宮)이 별같이 사방으로 흩어져 파천하는 어려움을 함께 하였으니, 이미 사람과 귀신의 분노가 극도에 다다랐고 섶에 누워 쓸개를 핥으면서라도 그 원수를 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비록 나라의 운이 불행해서라고는 하지마는, 진실로 내가 덕이 적고 어리석어 그렇게 된 것이로다. 윤대(輪臺)에서 과오를 뉘우침이 이미 심하나 백성들은 그 덕을 알지 못하고, 봉천(奉天)에서 자기를 허물함이 한갓 간절하나 말이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어디로 돌아갈 건가’ 하는 원한은 바야흐로 깊고 깊은 물에 임하는 것 같은 두려움은 점차로 극심해지니, 제사를 주관하여 신주를 받들 중대한 자 아니면 나라를 일으키고자 하는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음을 생각하노라. 세자 혼(琿 광해군)은 훤칠하고 숙성하며 그의 인효(仁孝)는 본래부터 알려져 뭇 아래 사람들이 아껴 추대하니 넉넉히 중흥의 운을 족히 찬할 수 있는지라, 사방의 사람들이 그를 구가(謳歌)하여 다들 이르기를, “우리 임금의 아들이시로다.” 한다. 왕위를 물려줄 계획은 오래 전에 결정하였고, 군국의 대권을 총수(總帥)하는 명령을 의논할 수 있도다. 이에 혼으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섭리하게 하노니, 무릇 관작을 제배(除拜)하고 상벌을 시행하는 등의 일을 편의에 따라 스스로 결단하게 하노라. 아! 영무(靈武)의 의기(義旗)를 돌려와 이 나라의 건곤(乾坤)이 다시 열리는 것을 보게 되기를 바라거니와, 미앙궁(未央宮)의 수주(壽酒)를 놓고 부자가 다시 만나 기뻐할 때가 속히 오기를 목놓아 기다리노라. 나라 사람들은 각각 세자를 돕고 추대하는 마음을 격려하여 함께 평화를 가져오는 일을 이룩하라. 너희들 정부는 중외에 뚜렷이 일러주어 다들 이 일을 들어서 알게 하라. 그 때문으로 이에 교시하노니 마땅히 잘 알리라 생각하노라.
○ 남원 부사(南原府使) 윤안성(尹安性)이 은진(恩津)에 도달하여 본부(本府)의 선비들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다.
부관(府官)이 의병을 일으키기를 위하여서로다. 현풍(玄風)에 사는 선비[士子] 곽재우(郭再祐)본래는 현풍 사람인데 지금 의령(宜寧) 처의 고향에 산다 가 왜적에게 완전히 함락된 땅에서 단지 촌락의 군사를 거느리고 재차 적병을 구축(驅逐)하여 왜적의 배가 다시는 낙동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였는 바 그 의로운 명성과 높은 절조를 듣기만 하여도 모르는 결에 탄복하여 멀리서 배례(拜禮)하였다. 본도는 아름다운 풍속의 일컬어지는 것이 여러 도의 으뜸이로되 아직도 의병을 일으키는 사람이 없으므로 극히 수치스러웠는데, 듣자하니 김능성(金綾城)익복(益福)이 그때 본현을 맡고 있었다. 이 뜻을 같이 한 사람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왕업(王業)을 회복하려 한다 하는바 이로서도 족히 이곳에 인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의관 자제(衣冠子弟)들의 집에 통문(通文)하고 의논하여 나라가 2백 년 동안 휴양해 준 은혜를 생각하고 한 도의 전체가 충의를 느끼는 이름을 이룩하게 된다면, 영광이 한 몸에 가해지고 은택이 만 대에 미치며, 청사에 새겨진 공명(功名)이 사람들의 보고 듣는 가운데 밝게 빛날 것이니, 급속히 거행해서 신민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것이다.
○ 대군(大軍)이 서울에 다다른 뒤에 호남의 각 관아에서 남은 장정 및 품관(品官)ㆍ교생(校生)ㆍ팔결(八結)ㆍ연호(煙戶) 등의 군사들을 다 모아서 성의 방어에 대비시키다.
○ 경기도의 문신(文臣) 우성전(禹聖傳)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 병마절도사가 통지하는 사연으로 순찰사에게 도부(到付)한 관내(關內)에, 지금 도착한 충청 감사의 관내에 전하기를, “행재소의 도로가 갑자기 막혀 소식이 통하지 않으므로 사람을 모집해서 계본(啓本)을 가지고 상경케 하였더니, 당일로 동인(同人)이 비변사(備邊司)에 가지고 관내에 하교하신 것이 있었소. 5월 9일의 강원 감사의 글에, ‘전문(傳聞)하건대, 성에 들어온 왜적은 발이 붓고 기운이 빠져 밤에는 흩어져서 곤히 잠을 잡니다. 운운.’ 하거늘, 죽기를 무릅쓰고 싸울 군사 50명을 상을 내걸고 모집하여 하늘에 고하고 함께 맹세케 하여 어두운 틈을 타서 왜적을 마구 찍어 죽이려고 8일에 성 안으로 들여보내려 했더니, 5월 8일 도검찰사(都檢察使) 이양원(李陽元)의 서장(書狀)에, ‘군관 유정언(柳廷彦)을 시켜 성 밑에 잠입하여 왜적의 기세를 엿보게 했더니, 왜적의 기세가 급히 쇠해서 낮에는 오로지 약탈을 일삼고 밤에는 흩어져서 곤히 잠자느라 우리들이 왕래하는 것도 모른다 하며, 신의 서울집 종이 왜적 가운데서 빠져 나와 말하기를, 신의 집 역시 왜적에게 약탈당했는데 왜적의 형상을 보니, 단지 단검(短劍)을 가졌을 뿐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포로된 자들이 반이나 섞여서 흩어져 나가 도적질을 하고, 어떤 사람이든 총이나 활을 쏘면 검을 풀고 목숨 살려 주기를 요구합니다.’ 하기에, 그 기세가 곤궁한 것이 두려워할게 못 될 듯하여 곧 50명의 군사들과 더불어 많은 상을 걸고 결속하고서 10일을 기해 성에 들어가 왜적들을 마구 찍어 죽이기로 하였더니, 5월 10일의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의 서장에, ‘왜적의 무리들은 욕기(慾氣)가 방자스러워 꺼리는 것이 없는데, 적은 수로 출몰하여 약탈하던 무리 또한 우리나라 사람에게 많이 피살되니, 우리나라 사람 중에 왜적을 보면 다들 쏘아 죽이려고 했던 자들입니다. 당초에 우리나라는 헛된 소식에 두려워 동요하여 겁내지 않는 자가 없었고, 어리석은 백성 중에는 혹 애걸하여 구차스럽게 살아날 계획을 하는 자가 생기고는 했는데, 왜적이 서울을 점거하게 되자 온갖 하는 짓들 치고 해괴하지 않은 게 없어 무릇 혈기가 있는 자는 다 그 해독을 입기에 이르렀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왜적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자들 역시 흩어져 가버렸습니다. 그 시끄럽게 외치고 드나들던 자들 치고 기운이 빠지고 발이 붇지 않은 이가 없어 호통치던 기세는 없어지고 목숨을 내놓은 도둑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전날에 두려워하던 자들은 분격하고, 살아나기를 꾀하던 자는 원망하고 성내어 다들 왜적을 무찌를 것을 생각하여서 제창으로 보복하기를 생각하는데, 서울에서 왜적에 굽혔던 무리들 역시 왜적들을 저격할 계획을 합니다.’ 하였고, 5월 10일 검찰사의 글에, ‘왜적 가운데 포로가 되었던 사람 정인(鄭仁) 등 3인을 잡았는데 그 모두가 말하기를, 「왜적으로 철환(鐵丸)을 가진 자는 4, 5인 중에 겨우 한 사람이고, 한 사람이 가진 철환의 수효는 15, 16알에 불과하다. 왜적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으로 앞잡이 노릇을 하던 자가 5분의 1이 남아 있고, 여러 왜적이 동리에 갈라져 있으면서 평상시같이 숙면하면서 전혀 의심을 품지 않아서 아침에 세수를 하고서야 비로소 칼을 찬다. 장수는 대낮이 되어야 일어나고 혹은 10명씩 혹은 20명씩 모여 있으면서 별로 진을 치거나 변고에 대비하자는 생각이 없다.」하였습니다. 대개 왜적의 무리들이 재물을 얻고난 후에 소와 말을 많이 약탈해서 한강으로 보내는 걸 보니, 군사를 퇴각시킬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였소. 이상의 갖가지 서장은 계하한 것이니, 이에 앞서 우리나라 인민들이 왜적의 소식을 잘못 듣고 서로 겁을 내어 싸우지도 않고서 스스로 무너졌으니 모든 것이 다 극히 통분스러운 일이오. 지금 왜적의 기세가 이러하니 무릇 의기(義氣)가 있는 자는 분발하고 일어나서 왜적을 무찌르고 왜적을 잡아야 할 것이오. 각 도의 각 관원에게 급속하게 알려 주도록 하시오. 운운.” 하다.
○ 전 봉교(奉敎) 정경세(鄭經世)경상도 상주(尙州) 사람이다. 가 초유사(招諭使)에게 다음과 같은 계(啓)를 바치다.
작고 추한 것들이 중국을 어지럽히는 해독을 쌓아 수치스럽고 욕됨이 이미 종묘에까지 미쳤습니다. 한낱 필부이기는 하나 목숨을 바치겠다는 마음을 지니고 계획을 감히 사신께 고하고자, 계시는 천막을 바라보며 눈물을 뿌리고 울면서 글월에 부쳐 성심을 피력하는 터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국가가 아름다운 덕을 전해온 것은 실로 고대의 상(商) 나라와 주(周) 나라에 그 성대함을 비길 것입니다. 신령하고 성스러운 임금이 왕위를 계승해 내려온 13대 동안 위대하게 드러나고 위대하게 왕업을 계승하여 물품이 풍부하고 백성은 편안하였습니다. 2백 년 동안 모든 것이 풍부하여 군의 기록은 병란에 익숙하지 않았고 (즉 전쟁이 없었다는 말임) 백성들의 생업은 단지 농경과 양잠을 알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리오. 숨겨진 섬의 흉악한 괴수[凶酋]가 감히 나라를 무시하는 교활한 계교를 마구 부려 자기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아 악을 쌓은 것이 이미 궁(窮)과 한(寒)보다 심하였고, 그 군대를 몰아다가 우리 언덕에 버티고 있으니 불공함이 훈육(獯鬻)밀(密) 같은 점이 있습니다. 그 군사를 일으키는 데 핑계로 잡을 만한 말이 없음을 부끄러워하여,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으로 우리나라를 책하였습니다. 연교(燕郊)에서 말을 키우겠다고 소리쳐 말하니, 묵특[冒頓]의 서신이 지나치게 교만한 것이요, 덕진(德鎭)으로 교질(交質)해야 한다고 말하니 포악한 진(秦)의 공갈이 무궁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다 그 끝없는 흉악함에 성내니 하늘의 뜻이 어찌 역적을 돕는 데에 용납하겠습니까. 무릇 군대란 의리로 보아 곧지 못하여 굽으면 기운이 쇠하기 마련이고 소나기는 아침 내 계속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우리 임금께서 진노하여 왜적을 징벌하도록 명령하였으니 태산이 어찌 알을 짓눌러 깨는 일을 힘들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어찌된 국운입니까. 위태로운 때를 당해서 사람의 모의가 좋지 못하여 융성한 때를 빼앗았으니 외적을 막는 성을 구축하였으나 그것이 나라에 무슨 조그마한 이익인들 있겠으며, 거기다 가르치지 않은 백성을 모아다가 그들이 반드시 흩어져 버려 도저히 버텨내지 못할 땅을 준다는 것은 본래 삼척동자조차도 부끄러워하는 일입니다. 조정의 계획이 그 마땅함을 잃은 것이 이미 그러했거니와 변방을 지키는 신하가 군율(軍律)을 범함이 어찌 그다지도 심합니까. 병사(兵使)가 군영의 군사를 옹유하고 있으면서도 머물러 꺽이어 지척에서 부산(釜山)을 구해내지 못했습니다. 방백(方伯)은 왜적의 창끝을 피해서 교령(嶠嶺)에 머뭇거리며 호남ㆍ호서 경계에 있고, 그 아래로 주목(州牧)ㆍ부사(府使)에서 군수ㆍ현감에 이르기까지 칼날을 맞대고 창끝을 겨루어 본 일도 없이 아기(牙旗 상아로 만들어졌다는 대장의 기)는 들판 가운데에 끌리고는 하였으니, 이들은 평소 부절(符節)을 차고 성군의 은덕을 생각하고 살다가 위급한 때에 와서 그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사마의 법[司馬之法 군법(軍法)]이 만약 시행된다면 이런 사람들의 고기를 먹게 될 것입니다.(즉 사형을 가해 주살될 것이라는 말) 이러한 자들의 무책임한 소행 때문에, 마침내 새나 다닐 험준한 요새지가 지켜지지 않아 영남의 생령(生靈)들이 도륙되어 썩어 문드러지게 하였고, 임금이 몽진하니 빈교(邠郊)의 행색이 참담했습니다. 피비린내와 연기가 종묘의 악기를 그을리고 물들였으며, 원한에 찬 귀신들은 가시나무 덤불 속에서 소리쳐 울고 있습니다. 말을 하면 다만 마음 아픈 것을 더할 뿐, 고래로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태평세대에 살아남은 좁은 골목길의 지친 백성들로 밭을 갈고 우물을 파서 사는 것도 임금님의 인자하신 은혜가 아닌 것이 없으니, 사방이 흔연히 성군의 교지를 받아 풀 속에 엎드리고 물구렁에서 자며 구차하게 살아남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였으리오. 난리를 만나게 되어 집이 부서진 것은 잠시 버려둔다 하더라도 나라가 당한 치욕을 어디서 씻을 수 있겠습니까. 병법(兵法)을 모르면 참된 선비가 아닙니다. 설사 건곤을 변하게 할 웅대한 군략이 없다고 하더라도 오직 하늘에서 내려준 진정한 마음은 누구나 다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니, 누구인들 충군 애국하는 본성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이에 원수와 같이 하늘을 이고 사는 분함이 절박하여 마침내 창을 베고 잠을 잘 각오로 왜적과 싸울 모의를 하여 동지들을 모아 작전 계획을 하고, 흩어져 도망간 군졸을 불러 거두어 요해지를 택해서 복병을 설치해 왜적을 요격하여 흉악한 무리를 쳐 없애기로 한 것입니다. 다만 이 목사나 수령들이 피해서 달아난 끝이라 바로 민심이 극도로 흩어져 있으니, 군기(軍旗)와 군고(軍鼓)를 주관할 자가 없어 군중에 지휘할 사람이 없고 기율을 엄하게 하기 어려워 전진에 임해서 군사들이 달아나 버릴 우려가 있으므로, 세울 만한 좋은 계책이 없는 것이 아닌데도 막대한 근심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외람되이 생각하건대, 우리 주(州)의 지형은 사실 우리나라의 하늘이 내려 준 부고(府庫)입니다. 예의(禮義)가 행해지고 민간의 습속이 돈독하고 후한 것은 신라 1천 년의 여풍이 있음이요, 창고가 차 있고 호구는 많은 것은 진한(辰韓) 70주의 중심되는 요지(要地)인 것입니다. 크게 집중되는 여러 진(鎭)을 모을 수 있고 긴 강의 상류를 둘러 있으니, 하북(河北) 지역이 비록 흩어지고 수복되지 못했다고는 하나, 어찌 한 사람의 의사(義士)가 없겠습니까. 진실로 수양(睢陽)을 포기하고 지키지 아니한다면, 이는 1천 리 되는 강회(江淮)의 땅을 없애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좋은 계략을 헤아려 보건대, 이 성을 굳게 지키는 것 이상이 없습니다. 진실로 좋은 장수를 택해서 진무(鎭撫)케 하고 그로 하여금 의로운 외침을 피력하여 주선합니다. 정병을 골라서 낙동강[洛水]의 나루터를 지켜서 바닷길로 수송해 돌아가는 뱃길을 끊고, 곁 군(郡)에 격문을 내어 용추(龍湫)의 좁은 목을 거점으로 버티게 하여 고개를 넘어 도망해 돌아가는 관문을 막습니다. 가까이는 낙동강 좌안의 여러 주와 연락하고 멀리는 호남의 큰 군영과 호응해서 성세를 합해 멀리 몰고 간다면 군사들의 기세는 절로 배가할 것이요, 충의를 내걸고 곧장 전진한다면 그때에는 뭇 백성들의 마음이 다 돌아올 것입니다. 비록 바다를 건너가서 수길(秀吉)의 머리를 구하지는 못한다 하여도, 어찌 한강에 나아가 인의의 칼로 무도한 왜적의 고기를 저미는 것이 또한 어렵겠습니까. 엎드려 생각건대, 영공(令公)께서는 충신(忠信)이 만맥(蠻貊)의 땅에서도 행해지고 인의(仁義)는 성현으로부터 배운 바입니다. 악비(岳飛)가 갓 금패(金牌)를 받자 3군이 우레같이 통곡하였고, 장준(張浚)이 다시 황하가에 부임해 오자 백성들은 이마에 손을 얹고 좋아하였습니다. 영공의 마음 속은 귀신도 알아 증명하고, 군기[旋旗]는 부로(父老)들의 바람[望]이 매여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우리 무리가 발돋움하여 기다리는 것은 다른 고장에 비한다면 피나는 정성에서 우러난 것입니다. 1백 년 동안을 두고 이룩해 놓은 문물이 남김없이 없어진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긴다면 대의(大義)를 창도하여 분발하기를 생각하고, 한때 의로운 기운을 의탁할 곳이 없음을 염려하면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어디로 돌아갈지를 모르겠습니다. 유명한 장수를 바라나 만나기가 어렵고, 조그만 마음을 안고서 스스로 안타까워 하고 있습니다. 지성이면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 예가 없는 것이니 영공의 계극(啓戟 고관을 전도(前導)하는 붉은 칠을 한 창으로, 여기서는 초유사 자신을 두고 한 말임)이 어찌 내임(來臨)하는 것을 꺼리겠으며, 뜻을 지닌 자는 일이 반드시 이룩되는 것이니 비린내 나는 것들을 신속히 쓸어버릴 수 있을까 하나이다. 부디 광야에서 외뿔소도 아닌데 헤매고 있는 우리들을 가련하게 여겨, 저 들판의 당신의 얼룩말을 돌려 우리가 있는 곳으로 빨리 와 주소서. 아! 무릇 이 바다에 둘러싸인 땅 안에 살아있는 백성이면 누구인들 이씨(李氏)이 적자(赤子)가 아니겠습니까. 해바라기 같은 한 조각의 정성스러운 충심은 나라의 녹을 먹거나 먹지 않거나에 따라서 얕고 깊은 차이가 생기는 것이 아니요, 7척의 초개 같은 몸으로 왜적을 제거하느냐 하지 못하느냐를 보고서 사생을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죽백(竹帛 역사)에 이름을 남기느냐를 따질 것 없이, 다만 창과 칼 사이에 목숨을 바쳐야만 할 것입니다. 동해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 일이 이룩되지 않으면 그때에 가서 그곳에 빠져버려도 늦지 않을 것이고, 북극성이 실로 머리 위에 임해 있으니 의(義)는 마땅히 취해야 하고 사는 것은 구차하게 굴지 않을 것입니다. 사뢸 말씀은 대략 이상과 같으니 나머지 말은 이만 줄입니다. 영공의 안색을 받들게 될 때를 기다리며 마음속을 삼가 진술합니다.
24일. 이광(李洸)의 군대가 온양(溫陽)에 머물다. 충청 순찰사 윤선각(尹先覺)이 방어사 이옥(李沃), 병사 신익(申益)과 더불어 먼저 이미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다가, 이때에 와서 두 남도 순찰사와 같이 한때에 서울로 향하였다. 곽영(郭嶸)은 군대를 거느리고 공주(公州)를 지나 천안(天安)으로 향하였다.
26일. 대군이 다 진위평(振威坪)에 모이니 무릇 13만이다. 깃발이 해를 가리고 군량을 운반하는 대열이 1백여 리에 늘어섰다. 경호(京湖)의 피난민이 양떼를 몰고 가는 위세를 잘못 믿고 혹간 돌아와 모이는 자들도 있다.
○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이 또 전라도의 해군[舟師]에게 영남 바다에서 적을 토벌해 주기를 청하다. 6월의 좌수영 영리(營吏)의 고목(告目)에 보인다.
○ 전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정인홍은 경상도 합천(陜川) 사람이다. 처음에 관군이 무너져 흩어지고 왜적이 멀리 몰아가 곧장 서울을 향하였으므로 대가가 서북으로 몽진하자, 정인홍이 전 좌랑(佐郞) 김면(金沔)ㆍ박성(朴惺)ㆍ곽추(郭趨) 및 그 제자들과 함께 의거를 모의하고 여러 읍의 사민에게 통문을 냈는데, 들은 자치고 분발하기를 생각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제자인 하혼(河渾)ㆍ조응인(曹應仁)ㆍ문경호(文景虎)ㆍ권양(權瀁) 등 막료들로 유사를 갈라 정해서 그들로 하여금 병사를 모으게 하고, 또 박이장(朴而章)과 문홍도(文弘道)에게 군량을 모아 마련하는 임무를 맡기고, 첨사 손인갑(孫仁甲)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아 모집한 군대를 맡겼다. 손인갑이 초계(草溪)의 사막(沙幕)에서 전사하니, 현령 김준민(金浚民)으로 대신하게 했다가 오래지 않아 교체시켰다. 그후 전투에 임해서 장수를 정해 매복하고 습격하고 하는 것이 하나 둘로 계산할 수 없었다. 개산(開山)의 습격ㆍ언안(彦安)의 전승, 성현(星峴)과 정야(井野)의 포위, 단계(丹溪)와 가전(檟田)의 성공(成功) 같은 것들은 그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것이다. 그러나 정인홍은 전승을 보고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대부분 보고하지 않아 군공(軍功)은 남의 맨끝에 있었으나 사실인즉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킨 가운데에서는 정인홍이 첫째였다. 김수(金睟)는 삼가(三嘉)ㆍ초계(草溪)ㆍ성주(星州) 및 고령(高靈)의 군대를 그에게 맡겼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왜적이 전라 감사를 칭호하여 의령(宜寧)의 정진(鼎津)으로 몰려 닥쳐오니, 곽재우(郭再祐)가 의병(疑兵)을 설치해서 그를 물리치다.
○ 전라 좌우도의 선비들이 의병(義兵)을 일으킬 것을 제창하다. 좌도는 전 부사인 첨지 고 경명(高敬命)을 대장에 모셨고,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와 학관(學官) 양대박(梁大樸)을 종사(從事)로 하고, 정랑(正郞) 이대윤(李大胤)과 정자(正字) 최상중(崔尙重)ㆍ양사형(楊士衡)ㆍ양희적(楊希廸) 등을 모량유사(募糧有司)로 삼았다. 우도는 전 부사인 김천일(金千鎰)을 대장으로 모셨다. 고경명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전에 동래사(東萊府使)를 지냈고, 김천일은 나주(羅州) 사람으로 전에 수원사(水原府使)를 지냈다. 애초에 유팽로가 서울이 함락되어 거가가 서북으로 봉진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주야로 외쳐 울며 편안히 침식을 하지 못하고, 동지 양대박 및 양희적과 더불어 고경명을 찾아 가서 지방의 병사를 서둘러 일으켜 북으로 향해 근왕(勤王)할 것을 모의하니, 고경명은 그들이 먼저 생각해 낸 것을 기뻐하며 흔연히 그들을 따랐다. 즉일로 여러 읍에 격문을 돌려 추성(秋城)에 모이도록 불러 날을 정하고 깃발을 세웠다. 본도에서 의병을 제창한 것은 유팽로 등이 첫째였으므로, 호남에 삼창의(三倡義)라는 말이 생겼다.
○ 경상도 고령(高靈)의 선비 김응성(金應聖)이 1 천여 명의 군사를 모아 정인홍(鄭仁弘)에 예속하고, 정예한 군사를 골라서 전투에 참가하다. 무계(茂溪)의 싸움, 안언(安彦)의 승리, 성주(星州)에서 성(城) 태운 일 및 사대(沙代)ㆍ가천(伽川)의 전역(戰役)을 모두 도왔다. 또 낙동강의 왜적을 공격하여 온 배를 포획하니, 많게는 5, 6척에 이르렀다. 정인홍은 초유사에게 보고한 바, 소모관(召募官)의 막하에서 왜적을 목 벤 것 역시 30여 급에 이르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좌도는 감사(監使)와 병사(兵使)ㆍ수사(水使)가 없어 명령이 오랫동안 폐해졌고, 도로가 막혀 여러 읍의 일을 들어 알 수 없었다. 영덕 현감(盈德縣監) 안진(安璡)이 우순찰사에 치보(馳報)하여 이르기를, “좌도의 여러 읍은 다 왜적의 굴혈이 되었고, 오직 영해 부사(寧海府使) 한 효순(韓孝純), 용궁 현감(龍宮縣監) 우복룡(禹伏龍) 및 예안 현감(禮安縣監) 신지제(申之悌)가 각각 외로운 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운운.” 하였다. 세 고을이 성을 각각 지킬 수 있는 것은 세 읍이 왜적에게서 떨어져 있는 거리가 좀 멀기 때문이지, 죽기를 무릅쓰고 수비하며 버티고 싸우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전 목사 김홍민(金弘敏)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애초에 평의지(平義智)가 충주(忠州)에서 이덕형(李德馨)을 만나기를 청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염려하면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6월에 평의지가 대동강 변에 도달하여 또 이덕형을 만나고자 하니, 앞장서서 성을 나가 강 가운데 배를 띄우고 만나 보고서 물러 나왔다.
6월 1일. 절충장군 행부호군 지제교(折衝將軍行副護軍知製敎) 고경명(高敬命)이 도내 여러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치고(馳告)하다.
이번에 본도의 근왕군(勤王軍)이 금강(錦江)에서 퇴각하던 날 한 차례 무너지고 다시 여러 군(郡)에서 초유(招諭)할 때에 무너진 것은, 대개 단속하는 방법이 어긋나 기율이 없으므로 와전되는 말이 자주 일어나서 여러 병사들의 마음이 놀라고 의심스러워 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지금 비록 흩어져 없어진 나머지의 병사들을 수습하여도 사기가 꺾여 정예한 기운이 없어졌으니, 어떻게 긴급한 소용에 응하여 후일의 효력을 책할 수 있겠는가. 매번 생각하건대 승여(乘輿 임금이 타는 수레)가 파천했는데 관직 있는 자들이 달려가 문안드리는 일이 오래도록 없었고, 종묘 사직이 재가 되어 버렸는데 왕사(王師 왕의 군사)가 숙청하는 일은 아직도 멀었으니 이런 일에 언급하게 되면 아픔이 마음속까지 사무친다. 생각하면 우리 본도는 본래부터 병사와 말이 정예하고 강력하다고 일컬어져 왔다. ‘성조(聖祖 태조)께서 황산(荒山)에서 승리를 거두신 것은 우리 삼한(三韓)을 다시 이룩하신 공이 있고, 선대(先代 고려)가 낭산(朗山)영암(靈巖) 에서 전투할 때는 한 조각의 돛도 돌아가지 못했다.’ 는 노래가 있어 지금까지 혁혁하게 사람들의 이목에 빛나고 있는데, 그때 용기를 떨쳐 먼저 나서서 장수을 목 베고 적기(敵旗)를 뽑아온 자는 이 도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하물며 근년부터 유도(儒道)가 크게 일어나 사람들이 모두 뜻을 세워 학문을 하게 되었으니, 임금을 섬기는 대의(大義)를 그 누구인들 강론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유독 오늘날에 이르러서 의로운 소리는 없어지고 겁내어 혼란해져 스스로 무너져서 여지껏 한 사람도 기운을 내어 왜적과 창끝을 마주치고 싸우기를 생각하는 자는 없고, 앞다투어 자기 몸과 처자를 보전할 계책을 꾸며 머리를 끌어안고 쥐같이 달아나는 것만 혹시나 남에 뒤질까 두려워하니, 이것은 본도의 사람들이 나라의 은혜를 깊이 저버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지금인즉 왜적의 기세가 크게 꺾이었고 우리 임금의 위령(威靈)이 날로 뻗어나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대장부가 공을 세울 기회이고 임금에게 보답할 때인 것이다. 나 고경명은 경전(經典)의 장구(章句)나 따지는 우활한 선비로 학문은 병법에 어두우나 장수를 뽑는 이 자리를 위촉받아 망령되이 대장에 추대되었으니, 이미 흐트러진 사병들 마음을 수습하지 못해 나를 추대한 두세 명 동지들의 수치가 될까 두려워하는 터이다. 다만 신하의 의리로는 마땅히 국난에 죽어야 하는 것이고, 겸해서 군대는 의리상 곧은 것을 세다고 여기니 그 수효의 많고 적은 것에 달려 있지 않다. 오직 담을 크게 갖고 눈물을 뿌리며 전투를 하여 사병들의 앞장이 되기를 생각하여, 임금의 은혜에 약간이나마 보답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달 11일이 군사를 결집하는 기일이다. 무릇 우리 도내의 사람들은 아비가 아들에게 일러 주고 형이 아우에게 권면하여 의로운 군대를 규합해서 함께 일어나, 용맹스럽게 결단을 내려 선(善)에 따를 것을 바라나니 미혹되어 자신을 그르치지 말게 하라.
3일. 삼 도(三道)의 군대가 수원(水原)에 머무르다. 이광(李洸)이 독성(禿城)에 진을 쳤다. 본부의 왜적은 대군이 갑자기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이틀 전에 이미 도망쳐 용인(龍仁)의 왜적과 합세하였다.
○ 좌의병(左義兵)의 진중의 회문(回文)은 다음과 같다.
의병은 오는 11일에 떠난다. 여러 장비는 다 구비되었으나 군량만은 나올 데가 없다. 대장이 이미 모은 여러 사람의 의론으로는 가까운 곳의 각 고을에서 편의에 따라 빌릴 수 있는 것이나, 무릇 토지에서 생산된 식량으로 남아 쌓은 것이 있는 자는 모두 임의대로 양을 정하여 군사들의 식사에 댈 물자를 도와야 할 것이니, 이것이 우리들의 소망이다. 얻은 군량은 그 반이 수송 비용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사람과 말이 천 리를 가는 비용 같은 것이 다 그것에서 나가기 때문이다. 만약 정병(精兵)이나 군마(軍馬)나 짐 싣는 말 중에 자기가 소유하는 것에 따라 내놓아서 도와주면 심히 다행이겠다. 부전운량장(赴戰運糧將) 진사 박천정(朴天挺), 유학 양희적(楊希廸), 재향운량장(在鄕運糧將) 정랑 이대윤(李大胤), 정자 최상중(崔尙重) 등.
○ 적병이 해서로부터 돌려서 관서로 향하니 거가를 호종하는 여러 신하들이 흩어진 병사들을 거두어 모아 기성(箕城 즉 평양)을 수비하고 김억추(金億秋) 등을 대동강에 매복시켜 방어하게 하다.
○ 전 좌랑 김면(金沔)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김면은 경상도 고령(高靈) 사람이다. 처음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달려가 대가를 따라 가려고 했으나, 정인홍(鄭仁弘)이 김면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기를 원해서 김면은 고령에서 병사를 모았던 것이다. 김면은 왜적이 강줄기를 따라서 졸지에 고령현의 경내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이를 막았다. 김면은 고령 같은 쇠미한 고을로는 왜적을 막아내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드디어 거창(居昌)으로 달려갔는데, 거창의 선비들이 이미 적인(跡人) 속칭 산척(山尺)이라 한다. 약간을 모았으므로 그것을 김면에게 소속시켰다. 김면은 곧 여러 군사를 뽑아내게 하여 곽준(郭䞭)ㆍ문위(文緯)ㆍ윤경남(尹景男)ㆍ박정번(朴廷璠) 및 유중룡(柳中龍)을 참모와 장서기(掌書記 문서 맡는 사람)로 삼고 박성(朴惺)에게 군량을 모으도록 하였다. 4, 5일 사이에 병사 2천여 명을 모아서 2백여 명을 나누어 보내어 현 북부의 우현(牛峴)ㆍ상암(箱巖)ㆍ목통(木通)ㆍ마령(馬嶺) 등 여러 곳을 수비하게 하고, 대군을 영솔하여 고령으로 나가서 진을 쳤다. 왜적의 배가 강류(江流)를 따라 내려 온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독려하여 이를 요격하니, 마침내 성한 배 2척을 노획하고 왜적을 목 벤 것이 80여 급이나 되었다. 이 전투는 실은 박정완(朴廷琬)이 한 것으로 자세한 것은 아래 박정완전에 보인다. 그 노획한 배에 실려있는 물건들은 다 내탕(內帑)의 진귀한 보물이었다. 그중에서 금종이로 꾸민 장지[障子] 한 벌을 얻었는데 광묘(光廟 즉 세조, 휘는 유(瑈))의 어휘(御諱)가 쓰여 있었고, 제복(祭服) 두 벌과 붉은 신[赤舃 임금의 예복에 신는 신을 말함] 두 켤레가 있으므로 초유사에게 보내었다. 지례(知禮)의 적장이 우현을 넘으려고 할 때에 복병장 이형(李亨)이 전사하였다. 김면은 거창이 진주(晉州) 이상 일대 지역의 두뇌같이 중요한 지역이라 거창이 지켜지지 않으면 10여 읍 역시 지켜내기 어렵다고 여겨, 마침내 장수를 정해서 고령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 거창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례의 왜적을 막았다. 전 부사 서예원(徐禮元)을 중위장(中衛將)으로, 만호(萬戶) 황응남(黃應男)을 부장으로 삼았다. 지례에 웅거해 있던 왜적을 습격하여 종들을 대대적으로 많이 잡았는데, 배설(裵楔)이 명령에 따르지 않아서 다 섬멸하지 못하고 나머지 무리들은 밤중에 도망쳤다. 또 정인홍과 약속하고 성주(星州)의 왜적을 공격하여 양군이 합세해서 포위하였다. 왜적이 개령(開寧)으로부터 와서 지원하자, 배설을 시켜 그 길을 차단하게 하였으나 배설이 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러 군사들이 왜적의 구원병을 보자 크게 무너졌다. 김면이 마침내 거창으로 돌아왔다가 지례로 옮겨가서 진을 치고 복병을 나누어 보내 금산(金山)의 왜적을 저지하여 거창으로 충돌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감사가 함양(咸陽)ㆍ안음(安陰)ㆍ산음(山陰)의 군사를 김면에게 예속시켰다. 왜적의 기세가 한창 왕성하여 전투로 쉬는 날이 없자, 감사가 진주 목사 김시민(金時敏)을 시켜 김면을 위해 조방(助防)해 주게 하였다. 하루는 왜적이 또 수없이 밀려와 사랑암(沙郞巖) 지례의 땅이다. 을 지나가자 김면이 말을 달려 검을 휘두르며 김시민에게 이르기를, “국가에서 높은 벼슬자리로 공을 대우한 것은 요컨대 오늘에 쓰기 위한 것이오. 죽음이 있을 따름이지 퇴각해서는 안 되오.” 하니, 김시민이 마침내 말을 돌려서 달려 들어가 계속하여 두 명의 왜적을 쏘아 잡았다. 여러 군사들이 크게 외치며 왜적을 무너뜨리자, 왜적이 그제서야 퇴각하였다. 이때부터 금산과 개령의 왜적들이 뒤이어 약탈을 계속하여 9월부터 12월까지 전투를 하지 않은 날이 없어 장병들이 갑옷을 벗은 일이 없었으니, 혹은 밤중에 찍어 들어오고 혹은 유인해 내어 큰 전투가 10여 차례였고 꺾어 물리친 적이 30여 번이었다. 그 후 합도의병 도대장(合道義兵都大將)으로 승임(陞任)되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김면과 정인홍 두 장수가 곽재우에 이어서 일어나 강회(江淮) 즉 낙동강 일대를 막아 나머지 읍들을 보전하였으니, 만약 그들의 전공을 논한다면 물론 작은 것이 아니다. 다만 한스럽기는 김면이, 박정완(朴廷琬)이 왜적의 배를 노획하고 80여 급을 목 벤 공을 억눌러 나타내 주지 않았고, 손인갑(孫仁甲)이 사원동(蛇院洞)에서 복병을 쓴 작전을 도와 주지 않고 도리어 그가 여러 사람의 모의를 어기고 패군했다는 죄로 몰아넣었으니, 진실로 공(功)을 시기하여 모함한 흔적이 있음을 면할 수 없을까 하는 것이다.
5일. 이광(李洸)이 선봉장 백광언(白光彦)을 시켜 용인(龍仁)에서 왜적을 탐지하게 하다. 왜적이 현의 북쪽인 북두문(北斗文)이라는 작은 산에 진을 쳤는데, 진은 미약하고 군사는 쇠잔하여 그 기세가 외롭고 약한 것 같았다. 백광언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이것은 영세한 왜적이니, 급히 공격하고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하였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 율(權慄)이 방어사의 중위장으로 군중(軍中)에 있었는데, 이광에게 강력히 말하기를, “서울이 멀지 않고 큰 왜적이 앞을 막고 있는데, 작은 적과 다투어 교전해서 군사의 위세를 꺽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나, 이광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곧 조방장 이지시(李之時) 및 선봉인 수령 등을 백광언에게 주어 전투를 독촉하였다. 백광언 등은 적이 눈앞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육박해 들어가 도전했는데, 묘시부터 사시에 이르기까지 적병이 잠복하고 나오지 않자, 오시에 이르러 아군이 해이해졌다. 이때 왜적이 풀 속에 엎드려 무릎으로 전진해 와 검을 휘두르며 일제히 일어나 아군 가운데로 쳐들어오니, 왼쪽에서 목 베고 오른쪽에서 찍어대고 하여 아군의 전사자가 부지기수였다. 이지시ㆍ백광언, 고부 군수(古阜郡守) 이윤인(李允仁), 함열 현감(咸悅縣監) 정연(鄭淵) 등이 모두 이 전투에서 피살되어 대군의 기세가 꺾였다. 이날 교지가 서해로부터 용인의 진중에 도달하여 경상좌우순찰사와 좌감사 이성임(李聖任)을 도로 합하게 하니, 길이 막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6일. 삼도(三道)의 군대가 용인에서 무너지다. 이날 아침 이광(李洸) 등이 점차로 군사를 전진시켜 광교산(廣敎山)에 진을 치고 군에 영을 내려 조반을 먹게 하였는데, 밥 짓는 연기가 일어나자마자 왜적의 기병이 돌격해 왔다. 먼저 왜적 다섯이 왔는데, 금 가면을 쓰고 흰 말을 탔으며 흰 기를 가지고 검을 휘두르며 곧장 전진해 온 것이다. 충청 병사 신익(申益)은 선봉으로 앞에 있다가 왜적의 위세를 바라보기만 하고 먼저 무너져버려 10만의 장병이 일시에 다 흩어졌는데, 왜적이 기병 수 명으로 10여 리나 쫓아가다가 가버렸다. 이광 등 여러 장수들이 교서(敎書)ㆍ인신(印信)ㆍ절월(節鉞)ㆍ기휘(旗麾)와 군기(軍器)ㆍ군량 등 배수(倍數)로 수송해 온 물건들을 다 버려두었는데, 왜적이 횃불 하나로 그것들을 태워버렸다. 이때 서울에 머물러 있던 왜적의 장수 20여 명이 각각 은 가마를 타고 호위병을 대단스럽게 벌여 세우고서 모두 붉은 옷을 입고 모자를 썼으며, 부녀자들은 말을 타고 쌍을지어 나와 길을 가득히 채우고 앞으로 가는 것을 연일 계속하고 멈추지 않았다. 아군은 서울의 왜적이 우리 대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해 간다고 생각했다. 그 후 왜적에게 포로로 잡혔던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서울의 왜적은 나와서 광주(廣州)에 군사를 잠복시켰다가 아군이 양천(陽川)의 북쪽 포구에 도달하기를 기다려 남쪽으로부터 엄습하여 한강으로 몰아부치려고 하였는데 아군이 피해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다.” 하였다. 우리 대군이 무너져 돌아갈 때에 전일 경기와 양호 지방의 피난에서 돌아와 모였던 사람이 많이 짓밟혀 다치고 노약자들이 질겁을 해 달아났으며 곡성이 우레같이 울려났다.
○ 전라도 의병장 행부호군 고경명(高敬命)이 여러 도의 수재(守宰) 및 사민(士民)과 군인 등에게 다음과 같은 격문을 급히 보냈다.
근자에 국운이 중도에 비색한 때문으로 섬 오랑캐가 밖에서 짖어대어, 처음에는 역적 양(亮)이 맹약을 어긴 일을 본받아 하더니 마침내는 오랑캐 오(吳) 나라가 중국을 먹어 들어오던 짓을 자행해서, 우리가 경계하고 있지 않은 틈을 타 허한 데를 짓이겨대고 멀리 몰고 들어와 ‘하늘을 속일 수 있다’고 여기며 마음대로 곧장 올라왔다. 장수의 절월(節鉞)을 가진 자는 기로(岐路)에서 서성대고 한 군(郡)의 인신(印信)을 찬 자는 수풀 깊은 속으로 도망가서 왜적을 군친(君親)에게로 돌려버렸다. 이것을 참을 수 있는가. 지존(至尊)으로 하여금 사직을 근심하게 하고서 네 마음이 편안한가? 어찌 생각하였으랴, 1백 년이나 휴양해 온 백성 가운데 어찌 의기 있는 사나이가 하나도 없으랴. 고군(孤軍)으로 깊이 들어간 것은 여진(女眞)이 본래 병법을 몰랐던 것이요, 중행(中行)을 매질하지 않은 것은 대한(大漢)이 본래 책략이 없었던 것이다. 장강(長江)이 급작스레 그 천연의 요해지를 잃어버려서 흉악한 칼날이 이미 신경(神京)에 육박한 것이니, 남조(南朝)에 인물이 없었다는 조롱은 진실로 가슴 아프거니와, 북군(北軍)이 날아서 건너왔다는 말은 불행하게도 근사하구나. 이제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태왕(太王)이 빈(邠) 땅을 떠나던 마음으로 명황(明皇)이 촉(蜀) 땅으로 갔던 일을 하셨으니 이는 대체로 역시 종묘사직을 위한 지극한 계획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사방의 지방관이 잠시 애쓰는 것은 기탄하지 않거니와 공락(鞏洛)의 놀란 먼지 속에 임금의 안색에 자주 깊은 진념이 나타났고, 민아(岷峨)의 위험한 잔도(棧道)로 푸른 일산[翠華]이 긴 노정을 멀리 갔다.
하늘이 낸 이성(李晟)이 적을 숙청한 것은 바로 원로(元老)에 힘입었고, 조서를 초한 육지(陸贄)의 애통한 말은 또 성조(聖朝)에서 내렸다. 무릇 혈기를 가지고 생명을 지닌 자라면 그 누가 분개하고 죽으려 들지 않겠는가. 어찌하랴! 사람의 모의가 좋지 않아 국보(國步)의 간난(艱難)이 잦았도다. 봉천(奉天)의 거가(車駕)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상주(相州)의 군대가 이미 무너졌으며, 준동하는 저 벌이나 전갈 같은 무리[蜂蠆之醜]에게 고래나 상어 같은 힘으로 목을 베는 것이 아직도 늦어지고 있다. 그러나 성문에 임시로 쉬고 날아도는 것이 어찌 장막의 제비와 다르겠으며, 외람되이 기보(畿輔)에 버티고 있으니 그 날뛰는 것이 울 안의 원숭이와도 같다. 비록 하늘의 군사가 소탕해버릴 때가 있기는 하겠으나 역시 그 흉악한 무리가 뛰어 달아나기는 기대하기 어렵다. 나 고경명은 단심과 만년의 절개를 가지고 머리가 희어지도록 썩은 선비[腐儒]로 살아왔으나, 밤중의 닭소리를 듣고는 국가의 다난함을 견디지 못하여 중류(中流)에 뜬 배의 노를 치면서 스스로 외로운 충성을 허락하였노라. 한갓 개나 말이 주인을 그리는 정성을 품고 모기나 등에[虻]가 산을 지려 드는 것같이 턱없는 힘을 헤아리지 않고, 이에 의병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지향하고자 옷소매를 떨치고 단에 올라 눈물을 뿌리며 여럿과 맹세했다. 곰을 치고 표범을 끌어대는 군사들이 우레같이 세차고 바람같이 날며, 수레를 뛰어넘고 관문을 건너뛰는 무리가 구름같이 합치고 비같이 모였으니, 이는 대개 핍박한 후에 응하여 억지로 나가게 한 것이 아니고 오직 신하로서 충의에 찬 마음이 다 함께 지극한 본성에서 우러난 것이니, 존망의 위기에 임하여 감히 미미한 몸을 아끼겠는가. 군사는 의로써 이름 지었으니 본래 벼슬[職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군대는 곧은 것으로 말미암아 씩씩해지는 것이지 취약한가 견고한가를 따지는 것은 아니어서, 대소의 군대들이 모의하지 않고도 뜻을 같이하였고, 원근의 장정들이 소식을 듣고서 다 함께 분발했다. 아아! 우리 여러 군[列郡]의 수재(守宰)들과 여러 길[諸路]의 사민(士民)들의 충성이 어찌 임금을 잊었겠는가. 의리상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할 것이다. 혹은 병기(兵器)와 의장(儀仗)으로 도와 주고 혹은 양식으로 구제해 주며, 혹은 말을 달려 군사의 행렬 앞을 가고 혹은 쟁기를 놓고 밭에서 분기하여 힘이 미칠 만한 것을 헤아려 오직 의로운 데로 돌아가 임금을 고난으로부터 막아낼 수 있다면, 나는 그대들과 함께 일어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멀리서 생각하건대, 행궁(行宮)은 서쪽 땅에 멀리 있으나 묘당(廟堂)의 대계(大計)가 장차 정해지리니, 왕업(王業)이 어찌 한쪽에 치우쳐 안정할 것이랴! 잘 패[敗宮]하면 망하지 않나니 복덕(福德)이 바야흐로 오(吳) 나라 분야에 임했고, 깊은 근심으로 열어 주니 노래하고 읊조리는 데 더욱 한가(漢家)를 생각하게 된다. 호걸스럽고 준일한 인물이 시세를 바로잡을 제 신정(新亭)에서 마주보고 우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고, 부로(父老)들이 임금을 기다리니 곧 구도(舊都)에 임금이 돌아오는 것을 보리라. 생각하건대 마땅히 힘을 내서 앞서 나가야 할 것이므로 이상 마음속을 털어놓고 고하노라.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 전라도 의병장 행부호군 고경명이 삼가 제주절제사 양공(楊公) 그때 양대수(楊大樹)가 본주의 목사였다. 의 휘하에 치고(馳告)하나이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섬 오랑캐가 침략을 자행하여 임금께서 몽진하였는데, 지존으로 하여금 홀로 근심하게 해 놓고 처자를 보호할 계책만 먼저 생각하여 왼발을 들여다보고 먼저 응하니 그 누가 사직을 지키는 마음을 가졌겠소. 흥원(興元)의 거가는 돌아오지 않았는데 상주(相州)의 군대는 이미 무너져서, 이수(伊水)와 낙수(洛水)의 적을 빨리 소탕하여도 아직 회복할 기약은 멀었고, 군량은 버려져 도리어 원수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다행히 하늘의 뜻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그래도 국사를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고경명이 이에 의로운 깃발을 들고 요사한 무리를 숙청하러 나서자 소식을 듣고 그림자같이 모여들었는데 대부분 형초(荊楚)의 기특한 인재들이고, 예리한 무기를 들고 먼저 나서는 중에는 또한 연조(燕趙)의 검객도 들어 있습니다. 다만 한스럽기는, 보졸의 발[足]이 될 것이 없어 말을 채찍질하여 양(良)을 찌를 것을 바라기 어려운 것입니다. 멀리 생각건대, 바다 동쪽의 탐라(耽羅) 땅은 중국의 기북(冀北)과 다름이 없어서 골짜기를 뛰어넘어 다니며 사냥을 할 뿐만 아니라 전투 행진에 따라다녀 또한 목숨을 의탁할 만하다 하니, 만약 그곳에서 나는 말을 바닷배에 가득 실어 보내 주신다면 우리 군대의 위용이 크게 드러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귀관께서는 임금의 은혜를 깊이 받아 해역(海域)을 전제(專制)하고 계시니 글로써 호소하면 응당 한 곳의 여론을 일으킬 것이며, 팔뚝을 걷어올리고 외치면 어찌 10실(室)의 마을에 충신(忠信)한 사람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만약 장사 중에 나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또 그러한 인간의 상정을 막지 말기를 바랍니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고종후(高從厚)가 대신 지은 것이다.
○ 전라도 의병대장 장하사(張下士), 전 현령 고종후(高從厚)ㆍ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 유팽로(柳彭老) 등이 충청ㆍ경기ㆍ황해ㆍ평안 4도의 여러 읍의 수재 및 향교(鄕校)ㆍ당장(堂長)ㆍ유사에게 다음과 같이 삼가 재배(再拜)하고 통문(通文)하다.
외람되게 생각하건대, 섬 오랑캐가 불공함으로 임금께서 멀리 파천하고 7묘(七廟)가 재가 되어버렸으며 만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니, 이는 진실로 고금에 있어 본 일이 없던 변고이고, 충신(忠臣)과 의사(義士)가 몸을 버려 나라에 보답할 때입니다. 그러나 방진(方鎭)의 중신(重臣)들은 관망하면서 머뭇거려, 군사를 징집하는 교지가 한두 차례 내린 것이 아닌데도 한 사람도 머리를 북으로 향하고 적과 싸워서 죽은 자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사대부는 조정을 저버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외람되이 생각하건대, 호남은 본래 군사가 정예한 것으로 일컬어져 왔었는데, 근왕군이 겨우 금강(錦江)에 도달하자 도성이 함락되고 거짓말이 멀리 퍼졌으며 주장(主將)은 여러 사람의 의론을 널리 물어 볼 겨를도 없이 급히 진을 파하라는 영을 내려 10 만의 무리가 까닭 없이 그냥 돌아가버리고 온 도의 민심이 흉흉하여 흡사 미친 듯한 물결이 마구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두 번째의 군사 모집에 가서는 하천한 백성과 지극히 우매한 자들이 그 명령에 따르지 않으니 컴컴한 방안의 근심은 차마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사직의 복과 조종의 위령에 힘입어, 무너져 달아났던 병졸들이 매일같이 모여 와 군의 성세가 크게 진작되어 혹시나 궁금(宮禁)을 숙청하여 거가를 맞이할까 바랐더니, 사람의 모의가 좋지 못하였고 하늘이 내리는 앙화가 가시지 않아서 적은 수의 적이 겨우 나타나자 대군이 또 무너지고 군량을 버려 도리어 원수 왜적의 도움이 되었으니, 아아! 우리 역대 성군께서 수백 년 동안 함양한 나머지에 어찌 적개심에 찬 신하가 한 사람도 없습니까! 공론이 아래에 있는 것을 옛사람이 이미 불길하다고 하였으나, 황폐한 풀섶에서 의병을 창도하는 것은 역시 계략상 부득이했음을 알 것입니다. 군부(君父)가 환난 가운데 놓여져 있는데 그 밖의 일을 돌아볼 겨를이 있겠습니까. 거듭 생각하건대, 영남과 양호는 진실로 우리 동쪽 나라의 근저(根柢)입니다. 그런데 영남인즉 의병이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중간이 왜적의 굴혈에 막혀 있어서, 곧장 서울에 올라가 근왕(勤王)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호서 1천 리의 땅엔들 어찌 의기 있는 사나이가 없었겠습니까마는, 왜적들이 죽이고 빼앗는 여세에 겁을 집어먹고 역시 자신을 구해낼 겨를조차 없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늘날 중외에서 믿는 것은 호남 한 도에 있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막부(幕府 대장 있는 곳)에서 만 번 죽고서라도 기어이 관철해 낼 계획을 세우고 한 지방의 여러 사람을 격려한 결과, 민심은 왕실을 생각하고 열사들이 운집하여 보병과 기병의 수효가 이미 5만 2천에 이르러 바야흐로 북쪽으로의 길을 멀리 몰고 들어가 요사한 왜적의 무리를 소탕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1천 리의 길에 양곡을 운반하는 일은 사사로운 힘으로는 해내기 어렵습니다. 만약 의를 좋아하는 여러 군자들이 힘을 합해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면 비상한 큰 공이 어찌 한 사람의 손에서 다 나올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이 나라의 땅 치고 임금의 땅 아닌 곳이 없습니다. 양호(兩湖)의 군사는 이 나라를 부흥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제공께서는 함께 나라를 위해 따라 죽을 뜻으로 분발하고노적가리를 가리켜 내주던 의기를 다해서 각기 미곡을 내어 군의 식량을 도와 주신다면, 능히 양주(揚朱)와 묵적(墨翟)을 막겠다고 말하는 자 역시 성인(聖人)의 무리일 것입니다. 또 생각하건대, 산골짜기가 험준하고 평탄한 것과 도로가 우회하고 곧고 한 것은 그 고장의 군사가 가리켜 인도하지 않는다면 역시 창졸간에 당하는 곤란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그 고장의 사람을 모집해서 우리 군의 기세를 돋구게 해 주신다면, 비단 종묘 사직의 깊은 수치를 한바탕 씻어버릴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부자 형제로 창이나 화살에 죽은 이들 역시 황천 속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일은 비록 어리석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다 마음 아파하고 걱정하겠거늘, 하물며 여러 고을의 수재(守宰)들은 다 나라의 은혜를 받았는데 어찌 차마 근왕군의 곤란[秦瘠]을 좌시하겠습니까. 반드시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남의 밥을 먹으면 남의 일을 위해 죽는다.” 했거니와, 만약 소식을 듣고 강개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 자가 있다면, 원하건대 소반의 피를 입에 찍어 바르고 함께 왕의 일에 종사하겠거니와 혹 한 끼 양식과 자재를 군 앞에 수송해 주어도 역시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해서와 관서는 비록 도로가 통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마는 각각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해서 사잇길로 해서 나와 차례로 전해서 일각도 지체하지 않는다면 원근에서 그 소문을 듣고 혹 그것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 통문이 도착한 날 여러 고을 향교의 당장과 유사는 각각 한 통씩 베껴서 경내의 선비들에게 전해 그들로 하여금 모르는 사람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정기록》에 나온다.
○ 고경명과 김천일(金千鎰), 양산숙(梁山璹)과 곽현(郭玄)을 시켜 출사표(出師表)를 받들고 서해로 해서 행조(行朝)로 보내다. 그때 적병이 5, 6도(道)에 가득 차 있었고 경기와 황해가 더욱 심했기 때문에 서쪽으로 가는 길이 끊겼었는데 이때에 와서 비로소 수로가 통하게 되었다.
○ 각처의 왜적이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항복하고 붙좇는 자들을 나누어 여러 분탕된 고을의 수령으로 정하여 온 경내의 일을 맡아 다스리게 하니, 박무금(朴茂金)이 김해(金海)를, 중[僧] 찬희(贊熙)가 밀양(密陽)을 맡은 따위가 그것이다. 찬희는 성에 들어와 군민(軍民)을 꼬여 모으다가 박진(朴晉)이 몰래 잡아서 죽였고, 박무금은 그 후 도망쳐 나와 용서를 받았다.
○ 왜적이 창녕(昌寧)ㆍ현풍(玄風)으로부터 금산(金山)에 이르는 한 줄기의 큰 길을 닦고 위아래에 가득 차 있었다. 그 중간에 위치한 성주(星州)는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많아 왜적이 큰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는데, 현풍에서 좀 멀어서 무계(茂溪) 나루가 두 지점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요해지이므로, 왜적이 나루 서쪽 산 위에 주둔하여 수륙의 길을 통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강의 좌우편 도로가 막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다니지 못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이 손인갑(孫仁甲)에게 말하기를, “무계의 왜적이 현풍과 성주 사이에 끼어서 왕래하면서 서로 도와 주고 있으니 반드시 이 왜적을 먼저 제거해서 강길을 끊어 놓은 후에야 성주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손인갑이 옳다 여겼다. 마침내 정인홍을 군의 주장으로 추대하고 지난달 27일에 군사 행동을 시작했다. 초계(草溪)에서 위급을 고해 와 달려가니 왜적의 기병 백여 기가 마을의 집을 태우고 약탈하다가 군사가 온 것을 보고 강길로 향해 달아나므로 추적하였으나 따라가지 못하였다. 29일에 고령(高靈)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거창(居昌)의 군사를 불러 약속하기를, “함께 무계를 공격하자.” 하고 요구하였으나 김면(金沔)이 병장기가 완비되지 못해 5, 6일이 늦어질지 모른다 하니, 정인홍이, “군사는 많은데 양식이 적으니 날짜를 끌어서는 안 된다.” 하고, 군사를 전진시키기로 결의하였다. 손인갑이 먼저 가서 무계의 형세를 살피겠다고 요청하여 정인홍이 허락하니, 손인갑이 곧 두어 사람을 데리고 밀탐하고 돌아와 드디어 세 길로 진군할 계획을 결정하였다.
고령 영병장(高靈領兵將) 김응성(金應成), 성주 기군장(星州起軍將) 이승(李承) 등이 와서 모였다. 이달 4일 밤을 타서 진군하였는데, 군사들이 전투에 익숙하지 않아 여러 사람이 마음속으로 의심하고 두려워하다. 좌돌격(左突擊) 조응형(曹應亨)이 군사를 거느리고 재를 넘어가자 군졸들이 헛되이 놀라 스스로 무너졌다. 대장(大將)이 지휘하는 한 진(陣)만은 움직이지 않아서 그로 말미암아 약간 안정되어 도로 모였으나, 밤중에 쳐서 소굴을 불태우려는 계획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5일. 여명에 정인홍(鄭仁弘)이 우선봉 한여택(韓汝澤)ㆍ좌선봉 하종해(河宗海)를 시켜 군사를 끌고 오른쪽 재로 해서 곧장 무계역(茂溪驛)에 이르게 하고, 고령 대장(高靈代將) 정상례(鄭尙禮)를 시켜 왼쪽 재의 대로로 해서 진군하게 하였다. 또 전 군수 이언성(李彦誠)과 성정국(成定國)으로 하여금 성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언역(安彦驛)의 길에 매복하여 성주(星州)에서 후원해 오는 왜적을 끊게 하고, 정언충(鄭彦忠)을 시켜 노다촌(老多村)에 매복케 하여 강을 내려가는 왜적을 끊게 하였으며, 정인홍은 손인갑(孫仁甲)과 더불어 중위군을 거느리고 곧장 왜적의 군막을 짓이겨 대었다. 왜적이 약탈한 재보(財寶)를 무계의 역사(驛舍)에 가뜩 쌓고 횃불 하나로 태워버리고 소와 말을 빼앗았다. 한여택과 하종해가 몸을 솟구치고 나서서 역전(力戰)했는데, 왜적의 장수가 큰 기를 세우고 나와서 싸우다가 아군이 많고 정예한 것을 보고는 막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여러 군사들이 승전한 기세를 타고 사면으로 육박해 들어가 싸워서 그 양곡을 저장한 외막(外幕)을 불태우고 전진하고 후퇴하며 일제히 활을 쏘니, 왜적의 기세가 매우 군색해져서 자리ㆍ거적ㆍ땔나무 등으로 가리면서 자위(自衛)했는데 죽은 자가 퍽 많았다. 처음 철환(鐵丸)을 쏜 인시부터 사시에 이르자 포성은 끊어지고 곡성만이 났다. 아군이 다가가 불을 질러 태워버리려 했는데, 나머지 왜적이 달아나 강으로 들어가 배를 강물 복판에 끌고 들어갔다. 이때에 의외에도 구원하러 온 왜적 수백 명이 현풍(玄風)으로부터 갑자기 나루터 가로 왔다. 그때가 거사할 시초라 활과 화살이 넉넉하지 못했고 아군은 새벽에 진군해서 군사들이 다들 배부르게 먹지 못하고 힘을 다해 싸워 지쳐 빠져버렸는데, 갑자기 생생한 기운을 가진 적의 공격을 받았고 거기에 화살 또한 이미 다한지라 감히 무리한 전투를 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막(幕) 안에 있던 왜적은 6, 7명이 쫓아왔을 뿐인데 5리도 못 오고 돌아가버렸다. 수일 후에 합천(陜川)의 군사가 피난하였다. 포로가 되었던 사람을 잡았는데, 공술하기를, “막 안의 왜적은 1백 40여 명이었는데 죽은 자가 반이 넘고 나머지는 다 화살에 다쳐 한 떼의 왜적이 거의 다 이 전투에서 소탕되었으나, 불을 지르지 못하고 퇴각하여서 이로 말미암아 왜적이 군사를 증가시키고 주둔하는 군막을 더욱 넓히고 있습니다.” 하였다. 손인갑이 가리현(加利縣)으로부터 돌아와 고령에다 진을 치고, 정인홍은 하혼(河渾)ㆍ권양(權瀁)ㆍ이승(李承)ㆍ김응성(金應成) 등과 더불어 산 위와 가운데 길로 해서 돌아와 가림(檟林)에다 진을 쳤다가 곧 매촌(梅村)에 진을 합치고 싸운 공을 치보(馳報)하였다. 그때에 김면(金沔)이 거창(居昌)의 군사를 거느리고 비로소 와서 무계의 습격을 단독으로 거사한 것을 자못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그때 군졸들은 군법에 익숙하지 못해서 싸움터에서 각각 자기 집으로 돌아가 오래도록 돌아 오지 않고 단지 수백 명만이 뒤따르고 있었다. 손인갑이 이것을 근심하여, “군졸이 모이지 않으니 선생은 가르쳐 주시오.” 하자, 마침내 격문을 돌려 그들을 불러 모았는데 수일 동안에 다 모였다. 흩어져버렸던 끝이라서 사람들의 마음이 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처벌을 감행하지 못하고 다만 잘 타이르고 엄하게 경계할 따름이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왜적의 배 18척이 쌍산역(雙山驛) 현풍 북쪽 15리에 있다. 으로부터 올라와 정승 안국사(政丞安國寺)의 행차라 자칭하고 가야산(伽倻山)을 탐승하려고 했는데, 이 자가 바로 전날 전라 감사를 칭하고 창원(昌原)에서 선문(先文)을 띄웠던 자이다. 정진(鼎津)에 이르러 곽재우(郭再祐)에 의해 퇴각당하고 영산(靈山)ㆍ창녕(昌寧)으로 해서 기강(岐江)을 건너려 할 때 전라 감사라 칭하고 호남으로 향하면서 또 선문을 보내 맞이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초계(草溪)ㆍ의령(宜寧) 등지의 사민들은 두려워서 혹은 산으로 도망하여 나오지 않기도 하고, 우매한 자는 혹 환영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곽재우는 또 왜적 앞에까지 달려가서 도망한 사민(士民)을 끌어내어 의리로 타이르고 창고를 풀어 군사를 먹이며 병졸을 엄격하게 다루어 방비를 갖추었다. 왜적이 곽의 병졸이 부오(部伍)가 엄정(嚴整)함을 보고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이는 틀림없이 정진의 홍의장군이니 도저히 건너갈 수 없다.” 하고 퇴각하여 쌍산(雙山)으로 해서 성주(星州)로 향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안국사(安國寺)는 강항(姜沆)의 계문(啓文) 가운데 보인다.
○ 박진(朴晉)을 경상 좌병사로 삼다. 그때 박진은 김수(金睟)의 근왕군을 따라 온양(溫陽)까지 갔다가 명령을 받고 도로 내려와 본도에 도달했는데, 사천(泗川)ㆍ하동(河東)ㆍ곤양(昆陽) 및 진주(晉州)의 왜적의 기세가 막 성하기 때문에 낙동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김성일(金誠一)이 우도에서 글을 보내 이르기를, “장군께서는 포상하는 어명을 받들어 병권을 장악하고 변경에 임해 위엄 있는 명성이 이미 드러나 온 도가 간성(干城)같이 믿고 있는데, 다만 왼쪽 길이 막히고 끊어져 위무(威武)를 나타낼 길이 없습니다. 지금 진주가 적병의 공격을 받게 되어 정세가 심히 위급한데 본관의 수하에 비록 천으로 헤아리는 군사가 있기는 하지마는 저 같은 백발 서생은 군무에 익숙하지 않으니 어찌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습니까. 장군께서 만약 단기(單騎)로라도 이곳에 오신다면 의병을 다 장군의 휘하에 드리고자 합니다. 생각건대, 좌우의 병사가 안팎으로 호응하여 사천(泗川)의 소수 왜적을 토벌하여 큰 진(鎭)인 진주를 보전해서 내지(內地)를 지키게 되는 것은 장군께서 발을 한 번 드는 데 달려 있으니, 좌ㆍ우도의 책임이 다르다는 말로 사양하지 마시고 종전에 결심하였듯이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따라 죽겠다던 뜻을 실현하도록 하십시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15일. 적병이 평양을 함락시키고 조정은 의주(義州)로 향하다. 몇 일 전에 적병이 대동강에 다가들자 그곳을 수비하던 군사들이 다 무너졌다. 11일에 거가가 숙천(肅川)으로 가서 이덕형(李德馨)을 보내 요동(遼東)에 가서 위급함을 고하고 구원을 청하게 하였다. 중전(中殿)은 강계(江界)로,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은 함경도로 각각 나누어 보내고, 세자에게 명해 종묘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강원도로 가게 하였다. 거가가 정주(定州)에 이르러 기성(箕城)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동에 치자(馳咨)하여 내부(內附)하기를 청하고 이어 의주(義州)에 도달했는데 시종하는 관원으로 따라간 자가 단지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그때 중국 지방에서는, “조선이 왜를 향도한다.”는 헛말까지 나와 수도에까지 전해져서 병부(兵部)에서 차관(差官) 황응향(黃應陽) 등을 보내와 실정을 살펴보게 하였다. 임금이 그들을 용만관(龍灣館) 의주의 객사이다. 에서 접견하였는데, 담화하는 동안에 황응양이 왜적의 중[僧]인 현소(玄蘇) 등이 평양에서 본국의 예조에 보낸 글을 보고는 가슴을 두들기고 눈물을 쏟으면서 말하기를, “중국을 위해 대신 병화를 당하면서도 의롭다는 명성은 드러나지 않고 도리어 이 악명을 받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억울한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황응양이 사정을 퍽 자세하게 회보하여 명 나라 병부에서 강력히 상주(上奏)하여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때 사은사(謝恩使) 신점(申點)이 중국의 수도에서 곡소(哭訴)하고 병ㆍ예부 각 아문(衙門)에서 계속 상주하여 위급을 고하자, 중국 조정에서 부총병(副摠兵) 조승훈(祖承訓), 유격장(遊擊將) 사유(史儒) 등으로 하여금 요동병 3천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가게 하였다. 고사(考事)에 나온다.
○ 종실(宗室) 호성감(湖城監)을 양호(兩湖)로 파견하여 의병을 징집시키다. 호성감은 양호 땅에 도달하여 충의로운 내노(內奴)를 내놓아 군사로 하고 자진하여 근왕군에 나오는 자도 역시 허락하였다.
○ 좌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전주(全州)로 나아가 진을 치고 의병을 불러 모았으며, 이어 본도의 여러 고을에 글을 보내 이르다.
대장이 급히 구원을 요청하기 위한 것이다. 국가의 일이 이러한 극단에 이르렀으니 오늘의 소망은 오직 의병을 일으키는 데 있는데, 불러 모인 수효는 수백에 불과하다. 비록 강개(慷慨)에 찬 뜻이 당당하여 범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성세가 떨치지 않으니, 관군이 조력하는 것이 아니면 만전지계가 아닌 것 같다. 조전군(助戰軍)은 다소를 불구하고 단지 정예한 것을 택하고 전일 낙오한 사람을 극력 불러모아 충의로써 타일러 주야를 불문하고 급히 구원하러 보낼 것이다.
○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김수(金睟)와 더불어 전주로 도망해 돌아오다. 김수는 곧 함양(咸陽)으로 향하여 이어 거창에 도달하니, 그때 김성일(金誠一) 역시 본현에 머물러 있었다.
○ 성주(星州)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이 사방의 문에 봉명국(奉命國)이라고 써 붙이다.
○ 적장 청정(淸正)이 강원도를 지나 철령(鐵嶺)으로 쇄도하였는데, 철령 이전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함경 체찰사 김귀영(金貴榮)과 감사 유영립(柳永立)이 남병사(南兵使) 이 영(李榮)과 북병사 한극함(韓克諴)을 거느리고 도내의 기력이 왕성하거나 약한 남정(男丁) 5만여 명을 다 모아 가지고 철령을 지켰다. 선봉의 왜적이 연일 교전하다가 패하고 물러나자, 청정이 대군을 이끌고 뒤따라 도달해서 당장에 선봉장을 목 베고서는 영을 내리기를, “한 번 북이 울리면 개미같이 달라 붙어라. 감히 뒤지는 자는 죽는다.” 하고는 곧 자신이 말에서 내려 검을 휘두르며 독전하니, 적병은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나서서 그 기세가 바람에 타오르는 불과 울려나는 우레 같았다. 아군이 크게 무너지고 김귀영 등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육진(六鎭)으로 향해 달아났다. 청정이 철령에서 이기고 함경도로 들어와 불태워 없애고 도둑질을 하는데, 그 죽이고 노략질하는 것의 참혹함이 다른 도의 몇 갑절이나 되었다.
○ 전라 병사 최원(崔遠)이 군사 2만여 명을 동원하여 본도 우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군사 2천과 함께 근왕군으로 서울로 향하다.
○ 도원수(都元帥)가 팔도에 전한 격문은 다음과 같다.
군대를 일으키는 데 있어서는 곧아야 씩씩해진다. 바야흐로 왜적을 토벌하는 계획을 넓히고 의가 병들기 전에 서둘러야 하니, 감히 근왕하는 일을 늦추겠는가. 무릇 우리 동지들은 각기 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생각건대, 우리 국가는 신성한 임금이 계승하여 거듭 밝아 태평세월이 계속되어 누누이 백성들에게 인정(仁政)의 은택이 젖어 있고, 음우(陰雨 위험한 일)에 앞서 선처하여서 수천 리 땅에 옥촉(玉燭 계절 따른 기후)이 고루 조정되어 2백 년 동안 금사발[金甌 국가의 계승된 왕실]에 흠이 없었으므로 장차 안으로는 태평하고 밖으로는 안정되기를 기대하였더니, 도리어 문관은 안일에 흐르고 무장은 장난으로 여기게 되었다. 준동하는 저 바다섬의 간악한 오랑캐는 사실 천지간의 추악한 종자로, 처음에는 중국에 감정을 품고서 하늘을 쏘는 활을 당기려고 하다가 끝내는 우리나라에 앙화를 전가시키고 감히 사람을 씹는 부리를 놀렸다. 요(堯) 임금을 보고 짖는 개가 진(秦)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격으로, 저녁 봉화가 겨우 한궁(漢宮)에 도달하였는데 요사한 독기는 이미 상령(商嶺)을 둘러쌌다. 장강(長江 양자강)의 험한 요새를 잃어버렸으니 진실로 군대의 율법이 엄하지 않은 때문이었고, 임금이 몽진하였으니 조정의 계획이 길하지 않았음을 넉넉히 볼 수 있다. 종묘와 사직이 재로 타버리고 조정과 저자가 변천하였으며, 심한 독이 여염에 두루 미쳤고 더러운 소문이 원근에 뚜렷이 드러났다. 귀신과 사람의 분노가 이미 극도에 도달하였으니, 군부(君父)의 원수를 잊을 수 있겠는가.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여러 성이 흙같이 무너지는데 오직 성문을 열고 맞이해 절할 줄만 알고 뭇 장수들은 담이 떨어졌으니 누가 용기를 내어 먼저 나설 수 있겠는가. 우리가 고수하겠다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저들이 멀리 몰고 들어오는 위세를 도와 주었으니, 주여숙(柱厲叔)이 이것을 보았다면 어찌 예전에 알던 사람을 기다릴 것인가. 만일 안진경(顔眞卿)이 다시 살아난다면 마땅히 무슨 꼴을 할 것인가. 하물며 지금 저 왜적들은 미쳐 날뛰고 교만하고 게을러져 있으며 들떠 붙어 살고 외로이 매달려 있다. 힘은 이미 싸우고 공격하는 데 지쳐버렸으니 그 기세는 반드시 오래 가기 어려울 것이고, 욕망은 오직 약탈에만 있으니 뜻도 또한 알 수 있는 것이다. 한실(漢室)을 생각하는 이들은 앞다투어 노래를 바치고 적에게 붙었던 자도 또한 대부분 헤어졌으니, 이미 죽을 길에 놓인 도적이 되어버려 구차하게 살아날 꾀도 지니지 못하게 되었음에랴. 세성(歲星 5성의 하나, 목성(木星))이 기(箕 별자리 이름)의 분야를 지키니 복덕(福德)이 내릴 징조가 있음을 알겠고, 큰 하늘이 송(宋)을 도우니 어찌 나라를 회복하는 데 기약이 없으랴. 지금 나는 외람되이 추곡(推轂 대장에 임명하는 의식)하는 은혜를 받들고 흉적을 제거하는 책임을 전적으로 위임 받아 여러 도의 도순찰사를 겸임하여 군사 3천을 거느리고 이달 10일에 행재소를 배사(拜辭)하고 곧장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서 수레를 뛰어 넘던 날랜 사람들은 태반이 장교로 편입되었고, 관서의 장수를 넘어뜨리던 인재가 다 부오에 예속되어 있어 3군의 사기가 점차 진작되고 만민의 마음이 약간 소생했다. 이는 진실로 한 나라의 신자(臣子)가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해 몸을 잊고 순국할 때인 것이다. 생각건대, 각 도의 관찰사와 절도사들은 혹은 지방의 전권을 장악하고 혹은 병권을 위임 받아 한 도에서 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으니, 어찌 막고 보호하는 정성을 잊을 것인가. 서방(西方)에 미인(美人)을 바라볼 때에 드는 생각이 눈물을 뿌리는 아픔에 간절할 것이다. 의당 범이나 사자 같은 군대를 거느리고 뱀이나 돼지 같은 무리를 함께 쓸어내야 할 것이다. 수미(首尾)로 협공하여 번갈아 기각(掎角 두 편에서 서로 잡아당겨 협공으로 포획함)의 태세를 이루고 동서로 함께 진격하여 입술과 이와 같이 지원한다면, 구멍에 든 개미가 된 격이니 도망칠 수 있겠는가. 솥 안에 든 물고기가 된 형편이니 뭉글어뜨릴 것이다. 아래 옷을 찢어 발을 싸매고서라도 어찌 천리길의 수고를 꺼릴 것인가. 머리를 풀어 헤친 채 갓을 매어 쓰고서라도 한 집안을 구하는 데에 서둘러야 할 것이다. 각기 세상에 보기 드문 은혜를 갚고 힘써 비상한 공훈을 세울 것이니, 힘쓸지어다. 시기를 놓치지 말도록 하라. 때는 두 번 얻기 어려우니. 운운.
그때 김명원(金命元)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흩어진 군사들을 거두어 순안(順安)에서 왜적을 막고 있었다.
○ 요동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가 왜적의 변란에 관한 것으로 준분수도(準分守道)의 자문(咨文)에, “순무(巡撫)가 당보(搪報)를 우연히 본 바에 의하면, 왜왕 관백(關白)은 이미 그 나라 사람에게 사살되었다. 그래서 이 글을 전하는 것으로, 본사는 조선 국왕이 수고스러운 대로 왜의 인심이 흩어진 기회를 이용하여 관원들을 독려하고 통솔해서 힘써 회복을 꾀하도록 바란다. 모름지기 이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니, 자문을 예조에 내리기를, “수길은 유구(琉球) 사람에게 사살되어서 이것은 다 소문이다. 평양에서 기병 전투를 할 때 행장(行長)ㆍ의지(義智)ㆍ조신(凋信)이 장수가 되었다. 운운.” 하였다.
○ 좌수영 영리(左水營營吏)의 고목(告目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에,
“수사(水使)는 지난 5월 29일 영을 떠나 곧장 남해(南海) 경내의 노량(露梁)으로 가서 경상 우수사와 만났습니다. 같은 날 사천(泗川) 선창(船滄)의 왜인 4백여 명이 산에 올라 진을 치고 흰 기치(旗幟)를 세웠고, 누각 같은 적선이 13척이었는데 종일 접전하여 그 배들을 다 격파하였습니다. 화살에 맞고 죽은 왜적이 부지기수였고, 1급(級)을 목 베었습니다. 이달 2일에 당포(唐浦) 선창의 왜인 3백여 명이 포구에 들어와 분탕질하고 험준한 곳에 기대서 포를 쏘는데 왜선 9척의 크기가 판자집 같았습니다. 그중 한 척의 큰 배에는 층루(層樓)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층루 위에는 왜장이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화살에 맞아 추락하매 그를 목 베었고, 또 9급을 목 베고 그 배들을 깡그리 격파하였으며, 화살을 맞아 죽은 자들 역시 많았습니다. 5일에는 고성(固城)의 당항포(唐項浦)에 왜의 큰 배가 다수 숨어서 정박하고 있으므로 곧장 그곳으로 향하였고 본도 우수사가 뒤이어 구원하려 달려와서 그와 함께 같이 그 포구로 갔는데, 왜의 큰 배 12척, 작은 배 22척이 바다에 분산되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한 척의 큰 배에는 층루가 우뚝 솟아 있고 그 누 위에는 왜장이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화살에 맞아 추락하매 또 그 자를 목 베었습니다. 그 배에서 얻은 분군(分軍)한 서류 7축(軸)에 기재된 왜인의 수효는 5천여 명인데 각각 자기 이름 밑에 피로 물들인 서명이 있으니, 틀림없이 삽혈동맹(歃血同盟)일 것입니다. 그 배를 다 격파하고 43급을 목 베었습니다. 8일에는 거제 땅 율포(栗浦) 앞 바다에서 왜의 큰 배 6척을 추격 나포하고 또 37급을 목 베었으니 도합 89급을 목 베었습니다. 본도 우수사와 경상 우수사가 합해서 2백여 급을 목 베었고, 가덕(加德)ㆍ천성(天城)ㆍ몰운대(沒雲臺) 등지를 연 이틀 동안 샅샅이 뒤졌으나 전혀 왜적의 종적이 없었습니다. 10일에 영에 돌아왔을 때에야 겨우 아뢰었습니다. ” 하였다.
17일. 손인갑(孫仁甲)이 사원동(蛇院洞)성주(星州) 남쪽 20리에 있다. 에 복병을 매설했다가 불리하여 퇴각하고, 박응성(朴應星)이 용사(勇士) 장호(張浩)와 같이 적군에 달려가 죽다. 처음에 성주(星州)와 현풍(玄風)의 왜적이 강줄기를 따라 연달아 널리 목책(木柵)을 시설해서 짐바리를 운반하다 떠내려보냈다. 그러자 손인갑이 말하기를, “사원동ㆍ안언(安彦) 등지에 복병을 매설하면 되겠다.” 하고, 마침내 사군(射軍) 수백을 골라서 저녁을 이용해 떠났다. 김면(金沔)에게 지원군을 청했으나 김면 휘하의 장병들이 대부분 가려 하지 않자, 김면이 사람을 시켜 복병 작전을 그만두게 하였다. 그러나 손인갑이 듣지 않고 사동(蛇洞) 길에다 복병을 매설하였다. 이날 왜적 3백여 명이 성주에서부터 짐을 운반하다 흘러 내려 왔는데, 손인갑이 약정하기를, “주장이 포 쏘기를 기다려서 발사하라.” 하였다. 유격장 박응성이 약정을 어기고 돌출했는데 왜적의 무리가 많고 정예해서 아군이 패배하였다. 박응성 등은 힘을 내어 싸우다 죽었다. 박응성은 맨 먼저 응모하여 용감하게 힘내어 싸웠고 늘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적을 경시하다가 죽으니 전군이 그를 아까워 하였다. 이 거사에 있어서 손인갑은 매복할 곳은 많은데 사군(射軍)이 적어서 김면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김면이 구원해 주지 않아 일을 그르치게 되었으므로 자못 불만스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19일. 김면(金沔)이 군사를 거느리고 거창(居昌)으로 돌아가다. 그때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거창에 있었는데, 금산(金山)과 지례(知禮)에 있던 왜적의 기세가 창궐하여 장차 거창으로 마구 들어올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합천(陜川)과 고령(高靈)의 군대에게 영을 내려 우마현(牛馬峴)을 막으러 오게 하였다.
손인갑이 그 영을 듣고 곧 행장을 차리자, 정인홍이 말하기를, “금산의 왜적이 급하기는 하나 무계(茂溪)의 왜적 역시 소홀히 다뤄서는 안 된다. 지금 만약 군사를 철수하여 그곳으로 옮겨 간다면 고령과 합천은 장차 왜적의 소굴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가서 김공의 거동을 탐지해 보는 것만 못하다. 그가 만약 군사를 끌고 돌아오면 우리는 움직여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때 초유사의 전령을 가진 자가 금산의 진에서 나와 그것을 김면에게 내보이자, 김면이 답서를 쓰기를, “거창 현감(居昌縣監)이 문서로 운운한 것은 손인갑이 여러 사람의 의론을 어기고 복병을 매설했다가 패전하여 왜적이 반드시 충돌해 올 것이므로 사세가 돌아가기 어렵소.” 하니, 손인갑이 대노하여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죽이고 싶어하는 것이다. 군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구원해 주지 않고 나한테 허물을 돌리니 이것이 과연 군자의 생각인가. 그가 가지 않는 바에는 나는 불가불 초유사의 명령에 따라야 하겠다.” 하고, 곧 군사를 이끌고 권빈역(勸賓驛)까지 가서 말에 먹이를 먹이는데 그때 김면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곳을 달려 지나므로 손인갑이 더욱 그를 의심하였다. 그때 마침 초유사의 전령이 또 와서 영을 내리기를 오지 말라고 하여, 손인갑은 마침내 돌아와 버리고 정인홍이 혼자서 김성일을 가 만나보고 돌아왔다. 김면은 거창으로 간 후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정인홍ㆍ김면 두 사람의 군사가 두 갈래로 갈라져, 김면은 거창을 진수(鎭守)해서 우마현(牛馬峴)을 방어하고 정인홍은 고령을 진수해서 성주와 무계의 왜적을 방어하였다. 전치원(全致遠)과 이대기(李大期)는 초계(草溪)에 진을 치고 곽재우(郭再祐)는 의령(宜寧)에 진을 쳐 강우(江右) 일대가 그 덕분으로 보전되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낙동강에서 왜적의 배가 위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다가 두 척은 침몰하고 한 척은 노를 풀어 놓고 내려갔는데, 곽재우가 배를 고스란히 나포하여 27급을 목 베었다. 그 배에 실려있는 것은 다 궁중의 보물들이었는데, 태조가 착용했던 목화[靴]도 들어 있었다. 곧 그 보물들을 초유사에게 보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성주의 주부(主簿) 배설(裵楔)이 본 주의 가장(假將)이 되어 군사 수백 명을 모아 복병을 매설하여 왜적의 통로를 차단하고 목 벤 수효가 퍽 많아 포상되어 합천 군수로 승진하였다. 그의 부친 전 군수 배덕문(裵德文) 역시 왜적에 붙좇은 중[僧] 찬희(贊熙)를 잡아 목 베어 상으로 판사(判事)의 직을 받았다. 그때 찬희는 성주의 왜적에 붙좇아 들어가서 판관(判官)이라 가칭하고 창고를 풀어 백성들을 꾀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곽재우가 왜적 안국사(安國寺)와 정진(鼎津)으로부터 강을 격해서 서로 맞서 있으므로, 왜적이 강을 건너오지 못하고 강줄기를 따라 올라갔다. 곽재우 역시 서로 바라보며 좇아 올라가 성주 안언 역로(安彦驛路)에 이르러 정병을 거느리고 가만히 나가서 교전했으나,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겨우 몇 급의 목만을 얻어가지고 퇴각하였다.
○ 곽재우는 김수(金睟)가 도(道)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대단히 슬퍼하여 말하기를, “처음에 왜적이 왔을 때는 조금도 방어할 계획이 없었고 근왕하기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의리를 몰랐으니, 우리 도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감히 얼굴을 들고 다시 온 것이구나. 나는 군사를 옮겨 먼저 그를 쳐야 하겠다.” 하였는데, 김성일이 준책해서 그만두고 마침내 김수에게 아래와 같이 격문을 보냈다.
가슴 아프다. 우리 온 도를 무너져 흩어지게 만들었고 우리 서울을 함락하게 하였으며, 우리 성상을 파천하게 만들고 우리 온 나라 백성들의 간과 골을 땅바닥에 으깨지게 만든 것은 다 네가 한 것이다. 너의 죄악이 천지에 가득 찼는데도 네가 스스로 모른다면 이것은 우매한 인간이다. 네가 과연 우매한 인간인가. 너는 우매한 인간이 아니라, 재앙과 변란을 양성(釀成)하여 이 같은 극단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온 천하의 토끼털[필(筆)]을 다 모지라지게 해도 네 죄를 다 써내기에는 부족하고, 온 천하의 대[竹 옛날에는 대를 엮어 종이를 대신하였음]를 다 없앤다 해도 네 악을 다 써내기에는 부족하다. 사람들은 모두들, 기한을 정해서 성을 쌓게 해서 백성들을 학대한 것이 혹심했던 것을 너의 죄라고 하고, 군사를 절제(節制)하는 데 방법이 없어서 왜적으로 하여금 마구 들어오게 한 것을 너의 죄라고 하는데, 이것은 모르는 사람들의 말이다. 내지(內地)에 성을 쌓는 것은 비록 인심을 잃었다고는 하나 마음은 적을 방어하는 데 있었은즉 그것은 네 죄가 아니다. 군사를 절제하는 데 전도(顚倒)한 것은 비록 군사의 기밀을 패하게 하였다고는 하나 재주가 병란을 대응하는 데 모자라서 그랬은즉 역시 너의 죄는 아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너를 죄 준다면 어떻게 네 마음을 굴복시키겠느냐. 그러나 네 죄가 하나 있으니, 왜적을 환영한 일이다. 왜적을 환영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너는 온 도의 정병과 용사 5, 6백 명을 뽑아 인솔하고서 동래(東萊)가 함락되자 먼저 밀양(密陽)으로 달아났고, 밀양이 패하게 되자 또 가야(伽倻)로 도망쳤으며, 왜적이 상주(尙州)를 지나가자 거창(居昌)으로 물러나 숨었다. 한 번도 장병을 권면해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왜적을 치도록 한 적이 없어 마침내 왜적으로 하여금 무인지경에 들어가는 것같이 하여, 종내는 열흘 안에 수도가 함락되게 하였다. 자기 몸 붙일 곳이 없음을 스스로 알고 근왕을 칭탁하고 도망쳐 운봉(雲峯)을 넘어 갔으니, 사람을 속일 수 있겠느냐. 하늘을 속일 수 있겠느냐. 네 죄의 둘째가 있으니, 패전을 기뻐하는 것이다. 패전을 기뻐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늙은 겁장이 조대곤(曹大坤)은 본래 책망할 게 못 된다. 그러나 한 도의 원수(元帥)로 김해(金海)의 함락을 구해내지 못한데다가 왜적을 보기도 전에 먼저 있던 곳[主鎭]을 버리고 정진(鼎津)으로 퇴각해서 진을 쳤고, 정진은 왜적이 있는 곳에서 몇 백 리나 떨어져 있었는데 헛되이 놀라 무너져 회산서원(晦山書院)으로 도망쳐 들어가 마침내 여러 진(陣)과 각 읍들이 풍문만을 듣고 무너져 도망치게 만들었은즉, 조대곤의 죄는 주살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도 너는 그 자를 목 베어 내걸어 사람들의 마음을 경각시키지 않았으니, 너는 과연 성(城)을 버리고 패전한 군율을 모르는가. 네 죄의 셋째가 있으니, 나라의 은혜를 잊은 것이다. 은혜를 잊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듣건대, 네 조상은 10대의 주불(朱紱)이요 7대의 은장(銀章)이라고 하니, 녹도 후했고 은총 또한 융숭하였다. 그러니 의리상 마땅히 나라와 휴척(休戚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고 사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 만약 충의의 기운을 분발하고 강개한 마음을 발동하여 자신이 사졸에 앞서 죽겠다는 마음을 가졌다면, 무릇 우리 영남의 2 백여 년을 두고 배양해 온 사람들이 어찌 몸을 잊고 죽음을 무릅써서 나라의 치욕을 씻어버리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너는 군부(君父)의 파천을 기뻐하고 수도의 함락을 달갑게 여겼으니, 너는 과연 군부의 곤란을 서둘러 구해낼 줄 모르는 자인가. 네 죄의 넷째가 있으니, 불효다. 불효란 무엇을 말하는가? 듣건대, 네 아비는 비록 불행하게 일찍 세상을 떠났으나 참으로 강개하고 충의로운 선비이었다. 만약 네 아비로 하여금 지금의 변란을 당하게 했다면, 반드시 의병을 권장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았을 것이다. 땅속에 들어간 영령이 생각건대, 반드시 어두운 가운데에서 너의 한 짓을 가슴 아파하고 너의 불궤(不軌)함을 분해하며, “임금을 무시하고 어버이를 잊은 일이 내 자식한테서 나올 줄이야 어찌 생각했으랴.” 하고 말할 것이다. 네 죄의 다섯째가 있으니, 세상을 속인 것이다. 세상을 속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네가 조정에 출사할 때 조정에서는 강과경직(剛果耿直)하다고 지목하였고, 영남에 절(節)을 갖고 내려왔을 때 영남에서는 너를 총명재예(聰明才藝)하다고 일컬었다. 강과 경직하고 총명 재예한 사람이 정말로 절충(折衝)하고 어모(禦侮)할 마음이 있었다면 험준한 곳에 거점을 두고 견고하게 진지를 지켜서 멀리 몰고 들어오는 적을 막는 것이 고리를 굴리는 것[轉環]같이 쉬웠을 터이다. 그런데 너는 수수방관(袖手傍觀)하면서 한 가지 계책도 획책하지 않고 한 가지 모의도 시행하는 일이 없이 왜적이 도륙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은즉, 전일의 강과와 재예는 좋은 작위를 낚으려는 것이었으나 오늘의 우매한듯 겁내는듯 하는 것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이냐. 네 죄의 여섯째가 있으니, 무치(無恥)한 것이다. 무치란 무엇을 말하는가? 너는 영남을 왜적에게 버려 두고 운봉을 넘어 전라도로 들어가서 근왕군에 몸을 기탁했다가, 근왕군이 용인(龍仁)에 도달했을 때 왜적 6명을 보고는 군량을 버리고 군기(軍器)를 내던지고 금관자(金貫子)를 잃어버리고 달아났다고 한다. 이것은 미리 금관자를 버리고 군사 중에 섞여 왜적으로 하여금 알아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구차하게나마 살아 보자는 마음은 평소에 정해졌던 것이고, 구차하게 살아나는 꾀는 못하는 짓이 없었던 것이다. 네 죄의 일곱째가 있으니, 남의 성공을 꺼리는 것이다. 성공을 꺼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네가 도내에 있으면서 네가 왜적을 토벌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군사들의 마음이 저상해서, 앞장서서 적에게 나가는 자가 없게 되었다. 다행히 초유사가 충성심을 격발하고 의기(義氣)를 고무하여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만들어 동지들이 목숨을 내놓게 된 덕분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좀 가라앉고 성세가 자연 커져서 지역 내의 왜적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거가를 받들어 돌아오는 날을 가리키고 기다릴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런데 너는 부끄러움을 잊고 치욕을 참고서 얼굴을 들고 다시 와서 호령을 하고 지휘권을 발동해서 의병들로 하여금 흩어져 버리려는 마음을 갖게 하고 초유사로 하여금 다 이룩하게 된 공을 망치게 만들었은즉, 전의 악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하더라도 지금의 죄는 용서할 수 없다. 아아! 북쪽 하늘은 멀고 도로는 막혀서 왕법(王法)이 시행되지 않아 네 목이 아직도 온전한 것이다. 너의 가짜 기운과 떠도는 혼이 비록 천지 사이에서 보고 숨쉬고 있다고는 하지만, 너는 사실 머리 없는 시체다. 네가 만약 신하의 분수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네 군관을 시켜 네 머리를 베어 버리도록 하여 천하와 후세에 사과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내가 네 머리를 베어서 귀신과 사람의 분을 풀도록 할 것이다. 너는 알아 두라.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당초에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 군사의 위세가 날로 성해 가고 왜적을 죽인 것이 퍽 많았다. 우병사 조대곤이 그의 성공을 꺼려 계사(啓辭) 안에 의심하는 말을 써 넣었고 감사 김수(金睟) 역시 계문 안에 불측한 말을 꾸며 넣었다. 이에 이르러 곽재우 역시 앞의 격문에 든 김수의 죄목을 들어 상소하였다.
경상도 의령(宜寧)의 유학(幼學) 신 곽재우는 진실로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삼가 백 차례 큰절을 하고 주상전하께 말씀을 드리나이다. 엎드려 듣건대, 수도가 함락되고 거가 파천했다 하니, 북쪽을 바라보며 가슴이 미어지고 통곡을 억제하지 못하나이다. 왜적이 오자 씩씩한 사나이와 건장한 장수가 누구나 다 빠짐없이 소문만 듣고 무너져 달아난 것은 무기가 견고하고 예리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성지(城池)가 높고 깊지 않아서가 아니며, 단지 사람들의 마음이 흩어져서 흙같이 무너지는 탈이 있었기 때문이었나이다. 대저 사람들의 마음을 흩어지게 한 자는 바로 김수입니다. 김수는 두 차례에 걸쳐 이 도의 감사를 지냈는데 정치를 하는 것이 맹호보다 더 포학하여 성군의 은택이 막혀서 내려오지 않아 흙같이 무너질 형세가 이미 일이 생기기 전에 나타났습니다. 왜적이 오기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먼저 퇴각해 숨어버리고 온 도의 수장(守將)으로 하여금 한 번도 무기를 맞대고 싸우지 않고 성문을 열고 큰 적을 맞아 들여 혹시나 뒤떨어질까 두려워하게 만든 것이 마치 저 왜적이 우리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기뻐하는 것 같았으니, 김수의 죄는 비록 머리털을 잡아쥐고서 주살한다 해도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부족합니다. 그래서 신이 김수에게 격문을 보내 이르기를, “가슴 아프다. 운운. 너는 알아 두라.” 하였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혹 도주(道主)의 과오를 말한 것을 잘못한 짓이라고도 합니다. 평상시 무사한 날에 있어서는 물론 자기 도주를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마는, 이같이 위급하여 존망이 우려되는 때에 만약 다들 잠자코 있다면 그것은 단지 도주가 있는 것만 알고 전하가 계신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경상도 전체의 모든 사람이 전하의 신하라면 어찌 김수의 죄를 용인하고 이 나라가 망해가는 때에 전하를 저버리겠습니까. 송(宋) 나라의 고종(高宗)이 호전(胡銓)의 상소를 들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천하 후세의 원한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꼴 베고 나무하는 자의 말이라도 채납하여 주신다면 중흥의 공은 곧 이룩할 수 있게 될 것이니, 종묘 사직이 매우 다행할 것이고 신민들이 심히 다행할 것입니다. 신은 진실로 노둔(駑鈍)하여 강호(江湖)에 자취를 감추고 있었으나 이제 왜적의 변을 당해 종료 사직이 위태로우니, 스스로 조상 3대에 조정에서 벼슬 한 일을 생각할 때 신비한 모의와 계략은 비록 자방(子房 한 고조를 도운 군략가인 장량(張良))에 미치지 못하나 복수하겠다는 마음은 신이 정녕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 번 죽을 각오로 4월 22일에 의병을 모집하고 일어나서 왜적을 막아 왔던 것으로, 다행히 전하의 위령(威靈)에 힘입어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힘을 다해서 죽은 후에야 그만둘 것을 마음으로 맹서하거니와 이 하찮은 신의 심정은 전연 딴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니, 엎드려 원하옵건대 신의 광기와 참람함을 용서하시고 신의 어리석은 충정을 살피소서.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의령의 의병장 곽재우가 온 도의 의병 여러 군자에게 널리 고한다. 김수는 나라를 망하게 한 큰 역적이다. 《춘추(春秋)》의 대의를 가지고 논하자면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를 주살할 수 있다. 따지는 사람은, 혹 도주(道主)의 과오조차도 말할 수 없는 노릇인데 하물며 그 목을 베겠다고 말하는 것이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나, 이것은 단지 도주가 있다는 것만 알았지 임금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왜적을 영접하여 서울에 들여놓고 임금으로 하여금 파천하게 한 자를 도주라고 해서 되겠는가. 수수 방관하며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는 자를 신하라고 해서 되겠는가. 온 도의 사람들이 다 김수의 신하가 된다면 김수의 죄를 말하거나 김수의 머리를 베어서는 안 되겠지만, 온 도의 사람이 주상 전하의 신하 아닌 자가 없다면 나라를 망하게 한 역적을 사람들이 다 죽일 수 있고 패망을 기뻐하는 간악한 인간을 다들 목 벨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하는 사람은 혹 김수를 목 베는 것이 일의 체통에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한다. 나라의 원수를 갚고 나라의 역적을 치면 그것이 이른바 일의 체통이다. 김수가 일의 체통을 멸실한 지 오래되니 일의 체통이 어울리고 안 어울리는 것은 본래 따져서는 안 될 것이나, 먼저 간악한 인간을 목 베어 군대를 돌아가게 하라는 조서가 없게 만든 연후에 거가를 받들어 돌아와 중흥의 공을 세운다면 그것은 일의 체통에 크게 어울린다. 엎드려 원하건대, 의병으로 나선 여러 군자들은 격문을 자세히 보고 군사들을 거느리고 김수가 있는 곳에 모여 그 목을 베어 행재소에 바치라. 그렇게 하면 공(功)이 수길(秀吉)의 목을 바치는 것보다 갑절이 될 것이니 의사들은 이 점을 알아두라. 혹시 수령들이 나라가 망할 것과 임금에 대한 대의(大義)를 생각하지 않고 도적 김수에 부회(傅會)하여 그 고을 사람들로 하여금 의거를 못하게 한다면 김수와 함께 같이 주살할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그때 김 수는 거창으로부터 산음(山陰)으로 옮겨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홀연히 위의 격문을 보게 되어 분하고 놀라움을 견디지 못했다. 김경근(金景謹)이 또 치고(馳告)하기를, “곽재우가 영공(令公)을 해치려고 대군을 거느리고 오니 속히 피해야 하오,” 하여, 김수가 그날로 밤중에 함양으로 달려가 군수를 시켜 성을 지키고 계엄을 펴고 봉화(烽火)를 늘어놓고 기다리게 하고, 또 막하의 장수와 보좌관들에게 말하기를, “곽재우가 오면 응전하여 이를 방어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고, 이어 군관 김경눌(金景訥)을 시켜 곽재우에게 격문을 전하게 하였는데 그 격문에 이르기를,
역적 곽재우에게 격문을 보낸다. 곽재우야, 너는 네가 역적임을 아느냐. 의병을 일으킨다고 가탁(假托)하여 불궤(不軌)한 짓을 음모하다가 흉악한 모략이 실패하고 탄로가 나서 억만 년 후에까지 그 추악한 냄새를 남긴 자가 동탁(董卓)의 역적질이 아니었느냐. 옛 기록에 이르기를, “형벌은 대부에게는 올라가지 않는다.” 하였고, 또, “대부를 독단적으로 죽이지 말라.” 하였은즉, 서열이 높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비록 죽어야 할 법을 범했다 하더라도 그에게 임금의 생살지권(生殺之權)을 함부로 가하지 않는 것은 중신(重臣)을 대우하는 도리인 것이다. 본도의 순찰사는 일찍이 육경(六卿)을 지내고 두 차례나 옥절(玉節)을 잡았으며, 하물며 한 도의 도순찰사의 직책을 받았음에랴. 설사 순찰사가 직접 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임금으로부터 그 죄를 물어야 하지 조정에서도 처치할 것이 아닌데 하물며 본도의 사람이 그 어찌 법으로 처치할 수 있겠는가. 너 역적이 난리의 틈을 타서 사람들을 불러모아 죄를 나열하여 격문을 전한 것은 의거를 가탁하여 불궤한 짓을 음모하다가 흉악한 모략이 깨져서 탄로날 때를 위해 미리 자기를 보전하기 위한 계략이었음에 불과하다. 지금 왜적의 기세가 굳세고 거침없어 이미 수도를 함락시키고 거가가 파천하였으며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었으니 조금이라도 강개한 뜻을 가진 자라면 비록 녹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마땅히 창을 베고 자며 적개심으로 나라의 치욕을 씻어야 할 것이어늘 하물며 본도와 같이 병화를 면한 고을 사람들이겠는가. 낙동강 동쪽은 몇 번이나 함락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하여 근처의 주현(州縣)이 단지 7, 8군데가 남았을 뿐이다. 소수의 왜적이 모여서 주둔하고 있는데 지금 고성ㆍ성주ㆍ금산(金山)에 버티고 있으며, 또 금산(錦山)을 함락시키고 장차 거창을 함락시키려 하고 있으니, 나머지 7, 8개 읍도 마치 죽어가는 사람이 기식(氣息)이 엄엄(奄奄)하여 약이 넘어가지 않고 호흡이 불통하고 혈색이 단지 입술에만 남아 있어 살 길은 10분의 1밖에 없는 것과도 같다. 너 역적의 마음이 만약에 의기에 격동되어 나왔다면 마땅히 순찰사ㆍ초유사와 김송암(金松庵 김면)ㆍ정내암(鄭箂嵒 정인홍) 두 선생과 힘을 다해 왜적을 토벌하느라 여가가 없을 것인데, 오직 반역할 마음만으로 먼저 한 도의 대장을 제거하려고 죄를 늘어놓고 격문을 전해 그로 하여금 정벌하는 책모에 전심하지 못하게 하여, 남아 있는 7, 8개의 읍이 장차 승냥이와 범 같은 왜적이 횡행하는 데 직면하여 자매와 처첩이 깡그리 사로잡혀 가고 부자 형제가 다 어육이 되어 비참하게 도륙되었으니 부모 처자가 있는 자들이 어찌 네 몸뚱아리를 난도질하고 네 살을 씹으려 들지 않겠느냐. 너 역적이 감히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전후로 낭패(狼狽)하여 진퇴유곡으로 어찌할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왜냐하면, 너 역적이 처음 군사를 일으켰을 때 네 마음속에 작정하기로는, 국가가 공허할 때에 무뢰한 무리들을 많이 모아서 개인적인 은혜로 이들을 묶어 심복을 만들어 작은 왜적을 약탈하여 군의 성세를 크게 떨쳐 불행히 일이 가라앉으면 일대(一代)의 원훈(元勳)이 될 기회를 잃지 않을 것이고, 만약 요행히 나라가 망하면 또 새 왕조를 창립하는 대공을 이룩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화심(禍心)을 품고 의병을 가탁하여 초계(草溪)의 관곡(官穀)을 점취하고 진주(晉州)의 전세(田稅)를 탈취하는 등 공공연히 도적질을 자행했다. 네 도당 정대성(鄭大成)이 주살될 때, 순찰사가 역적인 네가 장수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음을 의심하고 막하에 자세히 캐어 물었었는데, 만약 안세희(安世熙)ㆍ김경눌(金景訥) 두 사람이 네가 역적이 아님을 힘써 진술하지 않았더라면 너의 머리와 발은 벌써 각각 따로 떨어졌을 것이고, 너 역적의 혼 역시 동탁과 지하에서 뉘우치고 있게 되었을 것이다. 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순찰사는 한 도의 방백에 불과했고, 방백이 거느린 것은 5, 6인에 불과하여서, 절제(節制 지휘권)가 병사와 수사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왜란이 일어나 버린 후에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로부터 밀양으로 달려갔고, 밀양ㆍ청도(淸道) 등 5, 6개 지방이 2, 3일 내에 연달아 함락되어 왜적이 성주를 범하게 되자 고령으로 달려갔으며, 왜적이 금산(金山)으로 향하자 달려서 지례(知禮)로 향했다. 도중에 성주 가천리(伽川里)를 지나 마을 가에 말을 멈추고 유생 등 4, 5인을 초치하여 의병을 일으킬 뜻을 타일러 주고서는 가야로 들어가지 않고 곧장 지례까지 갔는데, 그때에 비로소 도순찰사(都巡察使)의 임명을 받았으나 거느린 것이 역시 막하의 사람에 불과했을 따름이다. 도주한 패군 이유검(李惟儉)을 초치하여 목 베어 장대에 내걸고 죄를 청했고, 김해의 조대곤이 백의종군하는 것을 구원해 주지 않았으나 조대곤은 금산에서 독전(督戰)하여 수백 급을 목 베었고, 여러 읍에 장수를 정해서 포로와 수급을 많이 올리게 하였으니, 이것들은 다 순찰사의 절제가 탁월했음에 연유한 것이다. 이제 왜적이 이미 고개를 넘어갔고 서울이 이미 함락되어 버리자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하겠다는 뜻을 행재소에 치계(馳啓)하고 겨우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운봉(雲峯)까지 갔는데, 이어 초유사가 전라 순찰사가 공주로부터 돌아 내려오고 전주에서는 아직 군사를 조달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또 초유사의 강력한 만류에 따라 돌아와 안음(安陰)에 머물렀다. 급히 와서 구원하라는 교지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고 마음에 맹서하여 홀로 1백 명을 거느리고 수원까지 나가서 머물렀는데, 도중에서 소수의 왜적들을 만났으나 목 베어 죽인 것이 퍽 많아 왜적은 퇴각해 가 버렸다. 그 이튿날에 이르러 왜적의 무리가 진으로 돌격해 왔는데 양호의 순찰사들은 다 이미 달아나 버렸고 본도의 순찰사 막하의 장병은 이미 전투에 나가게 했으므로 단지 수삼 명이 남아 있을 뿐이었으나, 조금도 겁을 내지 않고 차고 있던 검을 뽑아서 퇴각하는 장수를 목 베이려고까지 하며 혼자서 후퇴하는 군대의 뒤를 따라가 우리 군대를 손상 없이 온전히 돌려왔으니 이런 것들이 충분(忠憤)의 분발이 아니겠느냐. 너 역적이 비록 살해하려고 가슴속의 흉악한 모략을 실제로 자행하기는 하나, 조정의 명령이 아직 팔방에 행해지고 대장의 명령 역시 한 도에 행해지고 있다. 한 도와 팔방의 사람들이 다 고개를 숙여 너 역적의 수하에 복종하고 순찰사가 해를 입는 것을 내버려 두겠는가. 극성스러운 왜적이 충돌해 오던 초기에 큰 진(鎭)을 연속하여 함락시키고 분탕하고 도륙하였으므로 태평시대의 백성들이 소문만 듣고 무너져 흩어졌으니 장수된 자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수풀을 찍듯[樧]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곧장 찌르고 유린해 들어와 도성에 마구 들어왔으니 이것은 순찰사가 절제하지 못한 소치는 아니다. 너 역적이 비록 ‘죄를 씌우려면 어찌 말 없는 것을 근심하랴’ 하여 감히 흉악 처참한 일을 하고 이미 막하의 사람들에게 격문을 전해 자객(刺客)의 일을 하도록 위협하였으나, 순찰사는 미치광이의 말로 버려 두고 일소에 부쳤을 따름이다. 너 역적은 또 순찰사에게 격문을 냈는데 거기에 지적한 말을 보니 다 거짓되고 사실이 없으나, 그 가운데 충의기절(忠義氣節)로 순찰사의 선인(先人)에 허락한 것이 있으니 이것은 천리(天理)가 민멸(民滅)하지 않은 곳이라 이를 수 있다. 옛부터 지금까지 충의기절을 지닌 사람은 이러한 때에 의를 제창하고 근왕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바가 한결같이 정대하고 거짓 없는 도리에서 나오기 때문에 남이 이간하지 못하고 행하는 일이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다. 송조(宋朝)의 여러 충성스러운 신하에 비길 인물은 당대의 김ㆍ정 두 선생이다. 너 역적은 본래 볼 만한 행실이 없었으면서도 의병을 칭탁하여 불궤(不軌)한 짓을 몰래 꾸몄고, 도당과 우익(羽翼)은 다 음험 무상하고 흉악 무도한 사람들인즉 지금이 흉악하고 참혹한 말은 너 역적만이 한 짓이 아니다. 네가 반역한 상황을 순찰사가 행조(行朝)에 치계하였고, 곰과 범 같은 장수와, 산을 뽑아낼 인재가 다 순찰사의 막하에서 서로 다투어 너를 잡아오겠다고 자청하고, 가슴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어 격문을 내어 여러 장수들을 불러 원문(轅門)에 묶어 오게 하여 불궤한 너를 효시(梟示)하자 한다. 네가 지금 와서 항복하면 멸족하는 화를 면할 수 있으니 길흉 화복 사이에서 너 역적 도당은 각각 거취를 살펴라. 또 너 역적이 평소에 행한 패역 무도한 정상은 말할 수는 있겠으나 말하면 추악해지니 잠시 내버려두고 거론하지 않는다. 잘 알아 두어라.
○ 경상도 순찰사 막하의 김경로(金敬老) 등이 곽 의사의 진중에 격문을 내어 다음과 같이 이르다.
곽재우의 도당에게 격문을 전한다. 무릇 천하의 일 중에 그 기미가 드러나지 않은 것은 지혜로운 자라도 혹 모르지마는, 기미가 이미 드러난 것은 비록 지극히 우매하다 하더라도 모르는 자가 없다. 이제 곽재우의 평소의 패악한 행실과, 기회를 이용하여 흉악한 짓을 자행하는 정상은 명백하여 보기 쉬우니 지혜로운 자를 기다린 연후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내의 사람들이 혹 다 알지 못해서 같이 도당에 들어가 함께 무도한 지경에 빠졌으니 남 몰래 제군을 아깝게 생각하는 터이다. 잠시 그중에서 여럿이 다 아는 것을 들어서 말할 터이니 제공(諸公)은 자세히 듣고 그 정상을 알아서 거취를 정하고 향배를 결정하라. 곽재우는 본래 탐욕스럽고 포악한 사람으로 부모의 세도를 믿어 오로지 할경(割耕 남의 밭을 침범해서 자기 농사를 짓는 일)을 일삼고 남의 소와 말을 빼앗으며, 그가 사귀는 것은 다 흉악한 이지(李旨) 같은 도배(徒輩)들인즉 그 마음이 바르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문덕수(文德粹)가 토주(土主)를 모략하여 죽이고 방백을 질책해 욕하며 병사를 고소한 것은 다 곽재우가 도와 주지 않은 것이 없은즉 그 마음의 음흉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왜적의 변란이 생긴 뒤 의병에 가탁하여 무뢰한 무리를 꾀어 모아서 먼저 초계의 창고를 파괴하고 군량ㆍ청밀(淸蜜) 및 군기(軍器)ㆍ잡물을 전부 훔쳐 갔으며, 또 의령현 창고의 곡식을 약탈하고 또 진주의 전세(田稅) 4백여 석을 개인 창고에 옮겨 넣고서, 인근의 무뢰한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은혜를 베푸는 거리로 삼았다. 그리하여 왜적을 쫓아내기 전에 흉계를 꾸며 표면으로는 왜적을 치는 것으로 보이고 속으로는 신하 노릇 하지 않을 모략을 간직하고 있었다. 먼저 방백을 제거하려고 군현(郡縣)에 격문을 전하고 읍재(邑宰)를 모략을 써서 죽여 위아래의 인민들을 공갈하고 말하기를, “방백은 백성을 독촉하여 성을 쌓느라고 생령(生靈)을 못살게 굴었고 방어를 하지 않아 왜적으로 하여금 마구 들어오게 만들었으니, 그 죄가 크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모해할 것이다.” 하니 멍청하고 우매한 백성들과 강(講)에 낙방한 유생(儒生)들은 날로 흉악하고 패란한 술수 속에 빠져 들어감을 모르고 충의의 고장으로 하여금 난폭한 곳으로 변하게 만들어 장차 온 도를 옥석이 함께 타게[俱焚] 하려고 하니, 천년 후에까지 악명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어찌 제공이 깊이 부끄러워 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또 곽재우가 애당초 거병한 것이 진정한 의거였던가. 만약 그것이 의거였다면 왜적이 막 성할 때에 직면하여서는 자기의 사적인 유감을 버리고 왜적 토벌에 전심하여 생령을 편안해지도록 구제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한 것에는 힘쓰지 않고 개인의 원한을 보복하고 윗사람을 무시하는 계략을 행했으니, 이 점으로 해서 곽재우의 마음 먹음을 사람들이 다 의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제공이 유독 그를 의심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또 이노(李魯)가 마음 쓰는 것은 천고에 찾아볼 수 없이 악한데 곽재우는 그의 재물을 탐내 그의 딸을 데려다 첩을 삼았으니, 곽재우의 마음 쓰는 것이 실로 개돼지 같아서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는 자라면 멀리서 바라보고는 되돌아 가 버리고 더럽혀질까 겁낼 터인데, 제공은 다 그에게 부동하여 오직 그 명령에만 복종하니 제공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설사 곽재우가 흉계를 실행할 수 있어서 우리 읍재를 죽이고 우리 방백을 해치며 마침내는 불궤한 짓을 꾸미는 날에 이르게 된다면, 제공은 그래 어떻게 처신하겠는가. 곽재우가 하는 일에 따라서 스스로 난동 반역의 죄에 빠지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곽재우가 하는 일에 따르지 않고 충신 열사가 되겠는가. 시비 이해와 길흉 화복은 오늘 하는 일에 판연하게 가름되는 것이다. 바라건대, 제공은 일찍이 반역과 충순의 이치를 분별하여 먼저 곽재우의 머리를 베어서 원문(轅門)에 가지고 와 바치면 모든 백성이 그 사기(士氣)를 기뻐할 것이고, 국가에서는 그 충의를 가상히 여겨서 꽃다운 이름을 영원토록 남기고 작록을 무궁토록 누릴 것이니 어찌 아름답고 좋지 않겠는가. 의를 사모하는 무리들이 그 모함하는 말을 가슴 아파하여 감히 그 거짓됨을 신변하여 이르기를, “초계와 의령에서 양곡을 취한 것 등의 일은 이미 초유사의 계사에 상세하므로 잠시 내버려 두고 변론하지 않겠거니와, 진주의 전세(田稅)에 관한 일인즉 평시 본주의 세미는 남강(南江)으로부터 배가 기강(岐江)으로 해서 가는데 이때에 와서는 배가 기강에 이르자 적병이 돌연히 닥쳐 와서 격군(格軍 : 뱃군 즉 선박의 승무원)이 배를 버리고 흩어져 쌀 실은 배만 빈 강에 홀로 떠 있은 것이 10여 일 되었다. 그러므로 도둑에게 줄 우려가 있어 의사가 거두어서 군량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 이른바 기강에 버려진 배의 세미라 한 것이 이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이 죄를 씌우려고 정당한 물건을 탈취했다고 하였으니 통탄할 일이다.
○ 삼가(三嘉)의 진사 윤언례(尹彦禮), 학유(學諭) 박사제(朴思齊) 등이 위의 격문을 보고는 곧 여러 읍에 통문(通文)을 내어 김경로 등이 의사를 모함한 죄를 폭로하여 다음과 같이 이르다.
요사이 순찰사의 군관배가 곽 의사에게 보낸 글 두 가지를 보니 하나는 “역적 곽재우에게 격문을 보낸다.” 하였고, 하나는 “곽재우의 도당에게 격문을 보낸다.” 하였다. 의사가 과연 역적이고 도당을 가진 자인가. 그 가운데 말한 것은 다 부회하고 날조한 말들로 단지 자기네들의 음흉하고 사특하며 정의를 해치는 마음을 드러내기에 족할 뿐이지, 곽 의사의 병폐를 만들어 내기에는 부족하다. 충의를 가리켜 역적이라 하니 그것은 진회(秦檜)의 흉악하고 교활한 묵은 술수다. 진회 하나로도 악비의 군대를 돌림으로 분을 풀기에 족했거늘, 하물며 여러 진회가 순찰사의 막하에 모였음에랴. 의병에 앞장서 일한 이가 어찌 그 때문에 한심해지지 않겠는가. 곽 의사가 여러 군대가 달아나고 무너질 때를 당해서 백 번 죽어도 돌아보지 않는 계책을 결행하여 충의가 과격하고 절실하며 이름이 올바르고 말이 순리함은 사람들이 이목이 있는 이상 췌언할 필요가 없거니와, 강회(江淮)를 차단하여 군현의 울타리 구실을 하였는데, 아! 충성이 곽 같고 의기가 곽 같은데도 역시 역적의 이름을 면치 못하니, 그 자들이 의사를 해치는 것은 바로 의병을 해치는 것으로 그 자들의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의사가 근자에 낸 격문에는 사실 경솔하게 움직인 점이 있기는 하지마는 그래도 충의에 분격한 지나친 행동에 불과한 것이니, 하필 그것을 깊이 허물해서 무엇하랴. 저 군관배는 한갓 왜적을 환영한 순찰사가 있는 것만 알았지 왜적을 토벌하는 의사가 있는 것은 모르고 곽에게 격문을 전해서 사적인 유감을 마음대로 부리려고 한다. 그 사적인 유감이라는 것은 이러하다. 김경눌(金景訥)과 이노(李魯)는 사이가 나빠진 지가 오래되어 여러 해 동안 이노를 모함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그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 이 변을 만나 자기 가슴속의 흉계를 실행하게 된 것을 기뻐하고 있던 차에 의사의 격문(檄文)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곽의 첩은 이의 딸이니 이노를 죽일 구실은 여기에 있을 게다.” 하고, 이노를 뒤에서 사주한 괴수로 만들고 곽을 사주당한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김경눌 역시 사람이니 어찌 곽공이 의사이고 충신임을 모르기야 하랴마는, 자기 원수를 갚으려고 의사를 가리켜 역적이라고 한 것이다. 이 뜻을 임금[宸聽]께 앙달(仰達)하고 싶으나 북쪽 하늘은 아득히 멀어 소리내어 외쳐도 도달하지 않는다. 엎드려 원하건대, 여러 곳의 의병소(義兵所)에서 각각 통문을 내어 의사의 명백한 마음으로 하여금 참소하고 모함하는 자에게 희생되지 않게 한다면 천만 다행한 일이다. 아! 올바른 도리를 지닌 타고난 본성은 사람이면 다 가지고 있고 역순(逆順)과 시비는 본래 공론(公論)이 있는데도 감히 대악 무도한 이름을 충신 의사의 위에 덮어 씌우려고 하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은가. 맹자가 이르기를, “정의를 해치는 자를 도적[賊]이라 한다[賊義者謂之賊].” 하였는데, 대의(大義)를 제창한 자를 역적이라고 하겠는가. 무죄한 자를 무고한 자를 역적이라고 하겠는가? 제군은 이 점을 깊이 살피라.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김경근(金景謹)이 거창에 갔는데 김성일(金誠一)이 막 자고 있었다. 김경근이 말씀드리기를, “곽재우가 순찰사를 살해하려고 합니다. 저 김경근이 이미 고하여 피하게 하였사오니 영공(令公)께서도 선처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김성일이 병을 핑계하여 면회를 거절하고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네가 산음(山陰)에서 나를 만났을 때 팔뚝을 걷어 올리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김수(金睟)를 목 베지 않으면 천지에 대의를 펼 길이 없다.’ 하였고, 곽재우는 어리석은 사내이니 너희들이 부탁한 게 아닌지 어떻게 알겠느냐?” 하고 전하니, 김경근은 부끄럽고 겁이 나서 물러갔다. 김수는 격문을 전해 곽재우를 크게 꺾어 놓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무척 두려워하는 마음이 들어 비밀리에 김성일에게 내통하여 곽재우를 타이르게 하였다. 김성일 역시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김수를 원망하는 것이 매우 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로 말미암아 불의의 변고를 초래하게 될까 두려워져 곧 곽재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의병장은 왜적의 변란이 일어난 시초부터 재산을 탕진해서 맨 먼저 의병을 일으키고 분발하여 자신은 돌보지 않고 한결같이 나라를 위해 왜적을 토벌하는 것만으로 마음을 먹고 살아왔으니 비록 옛날의 열사라 한들 어찌 그보다 더했겠습니까. 본관이 임지에 도착하자 곧 글을 보내 초청하였던 바 의병장은 늙고 졸렬한 본관을 함께 할 자가 못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단성(丹城)으로 와서 만나 주었고, 한 번 읍하는 사이에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을 뜻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후 고립 무원한 군사를 이끌고 낙동강 가를 횡행하여 먼저 나서서 왜적을 토벌하여 전후로 목을 베인 것이 퍽 많아, 왜적이 말을 몰고 전진하여 마구 들어오지 못해 그 일대의 여러 성들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보존되었고, 뛰어난 명성이 사방으로 빨리 퍼져 듣는 사람 치고 감동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원근에서 호응해 와서 왜적을 토벌해 버릴 공훈을 손꼽아 기대하였으니, 의병장의 영웅적인 풍도와 의열은 비단 한 대에 떨치고 빛날 뿐 아니라 또한 죽백(竹帛)에 기록되어도 부끄러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홀지(忽地)에 의병장이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문을 보내 감히 패만(悖慢)한 말을 마구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방백이 어떠한 관직이고 의병장이 어떠한 인물인데 감히 그러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방백이 비록 실제로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본래 조정이 있어 처치할 것이고 도민이 손을 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의사는 충의의 가문에서 태어나 왜적을 토벌하는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이 이룩되려고 하는데, 스스로 함정에 빠져 일족을 멸망시킬 곳으로 빠져 들어가리라고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당(唐) 나라의 반역한 병졸이 주장(主將)을 쫓아 내고서 □ 패란을 초래한 것이 무릇 몇 사람이었습니까. 전복한 수레의 전철을 그대로 밟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미혹했다가 되돌아 온다는 경계는 태역(大易)에서 교훈한 바이거니와 앙화를 바꿔 복으로 만드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취하는 것이니, 나의 충고를 따른다면 순조로워 복이 많아질 것이고 따르지 않으면 거슬러서 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 기미는 사이에 머리털도 안 들어갈 정도로 미묘하니 의병장은 이 점을 생각하십시오.
○ 김해에 주둔해 있는 왜적 1천여 명이 고성(固城)으로 옮겨 들어가다. 왜장이 은가마를 타고 감사를 자칭하고 진주를 범하려 하여 진주성 내의 장병이 본도 여러 진(鎭)에 구원을 청하였다. 곽재우 역시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달려갔는데 도중에 초유사의 글을 보고는 말을 세우고 답서를 다음과 같이 썼다.
곽재우는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삼가 초유사 합하(閤下)께 글을 올리나이다. 지금 타이르시는 글을 보고 극도로 감격하여 눈물을 떨구었습니다. 간곡하신 가르치심과 친절하신 타이르심은 다 저 곽재우로 하여금 장래 닥쳐올 앙화를 모면하고 막대한 공을 이룩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어찌 합하의 지극한 인애로우심으로 저 곽재우를 자식같이 보신 데서 그렇게 하신 것일 뿐이겠습니까. 또한 나라를 위한 마음이 지성에서 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왜적을 토벌하는 데 자기 몸을 잊게 하시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기는 하나 내리신 말씀은 억양이 너무 지나쳐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뻐하고 두려워하게 할 것이나, 저 곽재우는 그 때문에 기뻐하지도 않고 또 그 때문에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아! 합하가 순찰사를 위하여 꾀하시는 것은 충성스러우십니다. 다만 두렵기는 순찰사가 합하를 위해 꾀하는 것은 그렇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순찰사 역시 사람입니다. 어찌 자기 죄를 자기가 모르기야 하겠습니까. 순찰사가 말하는 것은 합하께서 고치게 만들 수 있으십니다. 순찰사가 하는 일은 합하께서 고치게 만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순찰사의 마음을 합하께서 고치실 수 있으시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비록 합하의 지성(至誠)과 후덕으로도 끝내 순찰사의 마음을 고치시지 못하신다면, 저 곽재우가 두려운 것은 합하를 모함하는 말이 반드시 순찰사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는 점입니다. 합하께서는 저 곽재우가 반드시 헤아릴 수 없는 처지에 빠질 것을 근심하였으나 저 곽 재우는 합하께서도 끝내는 그렇게 되는 것을 면치 못하실까 두려워합니다. 합하께서 저를 아끼시는 마음으로도 저를 비륜(非倫)하고 불궤(不軌)하다고 의심하시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에 있어서야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순찰사에 있어서야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저 곽재우와 공을 다투는 자에 있어서야 어떻겠습니까. 저 곽재우가 자신을 죽이고 일족을 멸망시키는 앙화가 반드시 닥쳐오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만두지 않는 것은, 천성에서 우러나 졸지에 고칠 수 없고 울분에 찬 마음을 급히 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합하는 임금이 보내신 분인즉 합하의 가르치심은 곧 왕의 말씀과 같으니, 어찌 감히 한낱 자기의 소견을 고집하고 합하의 가르치심을 어기겠습니까. 진주에서 긴급을 고해 와 군사를 거느리고 개금원(介金院)에 왔습니다. 군무가 복잡하여 만의 하나도 사뢰지 못하고 줄입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김수가 의병장 김면(金沔)에게 글을 보내 곽재우를 진정시켜 달라고 하니, 김면 역시 곽재우가 분에 못 견뎌 하는 마음을 알고 있어 의외의 환난이 생길까 두려워하여 곧 곽재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다.
막부(幕府)의 이름을 듣고 늘 흠앙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더운 날씨에 거느리신 군사들에게 도움이 있고 지휘가 만안하시길 바랍니다. 저 김면은 일개의 썩은 선비로 애써 군에 있으니 어찌 도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한갓 스스로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다만 사람의 책모가 좋지 않아서 왜적이 고개를 넘어가게 놓아주어 수도를 지키지 못해 어가[大駕]가 몽진(蒙塵)하기에까지 이르렀은즉 그 책임은 돌아갈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귀하께서는 조정의 명령이 아닌데도 백면서생으로 의병을 일으키셨습니다. 근심할 것은 의기(義氣)가 부족한 데 있지 않고 오직 처사가 마땅함을 잃을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지금 행재(行在)가 멀리 떨어져 있어 주청이 통하지 않으니, 우리 민간에서 거사한 사람들은 의뢰할 데가 없어 부득이 왕이 임명한 사람한테서 명령을 받은 연후에야 이름이 바르고 말이 순조로워 왜적을 공격할 수 있게 되고 근왕(勤王)할 수 있게 되며, 체통에 질서가 있게 되고 일을 해가는 데 조리가 있게 됩니다. 만약 일을 그르친 사람을 죄를 주어야 한다고 운운(云云)하는 바가 있다면, 의기가 당당한 점은 있지마는 순리로 공을 이룩하는 방법에는 아마도 미진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어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귀하께서 충성심을 떨쳐 한바탕 외치심에 천백 명이 그림자같이 따라 나서서 물에서 공격하고 뭍에서 전투하여 흉악한 왜적이 도망쳐 흩어졌으니, 낙동강 우안(右岸) 일대를 안도하고 근심없이 지내게 만든 것은 실로 의사의 공입니다. 이른바 강회(江淮)를 차단하여 그 기세를 막은 것은, 지금에도 역시 그 사람이 있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흠모하여 마지않게 합니다. 오직 원컨대 귀하께서 다행히 하찮은 말이라고 버리지 마시고 일에 임해서는 반드시 그것의 순리를 생각하셔서 그 이미 자란 것은 누루시고 그 지극하지 못한 것은 증진시키셔서 의를 모아 멀리 뻗어나가게 하여 결함이 없게 하신다면, 일대에 솟구쳐 나오고 만고에 빛나게 되실 것에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 마침 곽시리(郭是理)가 돌아가는 편을 인해서 구구하나마 사모하는 마음을 대략 적었습니다. 이만 줄이며 삼가 글월을 올립니다. 면배(沔拜).
○ 김수가 다음과 같이 치계하다.
소신(小臣)이 위로 성명(聖明)의 명철하심을 믿고 망령되이 생각하기를, 방비하는 제구를 만약 충분히 조치해 둘 수 있다면 왜적이 충돌해 오는 환난에 대해 막아낼 보탬이 거의 있으리라고 여겨, 임지에 도착한 초기에 방어하는 한 가지 일을 조금도 소홀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지에 성을 구축하는 데 교생(校生)들을 일시에 많이 징발해다 쓴 것이 신이 원한을 모은 근원이었으니, 사람들의 말을 돌아보지 않고 일을 이룩할 수 있기를 기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우병사 신할(申硈)이 마침 신과 뜻이 맞아 비록 날쌘 군사에게 지나치게 엄히 한 폐단이 있기는 하나, 그가 나랏일에 마음을 다한 정성은 실로 가상한 것이어서 그와 더불어 일을 같이 하여 무릇 군무에 관련된 일은 다 함께 의논하여 처치하였던 것이 □□□ 물정을 격하게 한 것입니다. 문덕수(文德粹)의 상서(上書)는 온 도의 사람들이 대부분 이성(異姓)의 삼촌질(三寸姪) 전 직장(前直長) 이노(李魯)의 조종이었다고 생각하여, 또 신이 전에 장계(狀啓)에서 약간 그 뜻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므로 이노가 소신을 해치려고 하는 생각을 어찌 잠시라도 잊었겠습니까. 국운이 불행하여 왜적의 기세가 창궐하였으니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신의 죄가 죽어야 마땅하겠으나,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백방으로 날조하고 모함하는 일은 더욱 못하는 짓이 없을 만큼 성해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딸을 첩으로 삼아 사위가 된 의령에 사는 곽재우는 시초에 의병을 일으켰을 때 곽월(郭越)의 아들이라 자칭하고 무뢰한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수종하게 하였으며, 나장(羅將 고을의 장교)들을 엄연히 대동하고 초계(草溪)의 남쪽 대로로부터 행군하여 관청에 돌입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먼저 지키는 자와 관가 사람을 묶고 관의 창고를 쳐부수었으며, 쌀과 밀가루 및 기름ㆍ꿀ㆍ찹쌀가루[眞末] 등 잡물까지 전부 훔쳤습니다. 또 사창(司倉)의 창고 문을 부수고 군량과 곡물을 깡그리 훑어내서 자기의 도당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고을의 삼공형(三公兄) 등이 문서[文狀]로 보고해 왔으나 신이 생각하기는, 곽월은 세족(世族)인데 세족의 아들이 어찌 도적질을 감행하는 일이 있겠는가. 틀림없이 무뢰한 육지의 도적들이 곽월의 아들을 가칭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시 듣고 보아서 보고하라 하여 역시 회송한 뒤에 병사 조대곤(曹大坤)이 이미 치계하였고 신 역시 공형의 문서만을 낱낱이 들어 계달(啓達)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또 듣건대, 의령의 신반현(新反縣)의 창곡(倉穀)을 초계에서 한 것같이 훔쳐 가졌고, 진주의 전세선(田稅船) 4척을 공공연하게 약탈해서 개인 창고에 옮겨 넣어가지고 근방의 못된 도배들에게 나눠 주어 은혜를 갚을 밑천으로 삼았습니다. 곽재우가 정말로 국가의 위급한 난국을 위해 의병을 이끌고 왜적을 공격하려는데 군량이 없었다면 마땅히 수령에게 고하거나 혹은 신이 있는 곳에 보고하여 법에 따라 받아 내다가 먹여야 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서 겁탈을 자행하여 극악한 왜적이 하는 짓과 같은 점이 있으므로 신은 그가 패역(悖逆)스러운 마음을 가졌음을 뚜렷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왜적을 토벌하는 데 급했고 또 그가 마음을 고치고 선에 따르게 되기를 바라 각 관원에 통유(通諭)하여 그로 하여금 와서 나타나게 하고 서서히 그 끝장을 보고서 다시 치계할 요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곽재우가 병사(兵使)의 체포령을 신이 시킨 것이라고 잘못 듣고는 흉악하고 참혹한 말을 공공연히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있는 곳에서 발설하였고, 신이 보낸 영리(營吏)를 죽이려고까지 하였는데 김성일이 극력 말려서 해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미신(微臣)의 구구한 생각은 그를 진정시키는 데 있으므로 불쾌한 감정을 안색이나 언사에 나타내지 않고 도리어 그를 위해 장계를 올려 그의 군공을 보고하여 그를 가장(嘉獎)하시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분노와 원한이 가시지 않아 시험에 떨어진 유생들을 꼬여내어 도당을 매일같이 많이 모아 이름을 위병이라고 칭해서, 겉으로는 왜적을 토벌하는 흔적을 나타내고 속으로는 불측한 계략을 품고 있으니, 모르는 사람은 의병이라고 생각하지마는 아는 사람은 그가 틀림없이 예측하기 어려운 환난을 빛어낼 것이라고 근심하여, 자제들에게 엄명을 내려 그들 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사람까지도 있었고 무도한 말을 지껄이는 것을 들은 사람도 많습니다. 신이 일찍 처치해 버리지 않은 것은 사세에 난처한 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먼저 소신 막하의 장병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자객의 짓을 하게 강요하였고, 또 신의 죄를 늘어놓아 여러 읍에 통문을 내어 군사를 일으켜 난동을 꾸미라고 권고하였는데, 수령 중에 고을 사람을 그것에 따르지 못하게 하는 자가 있다면 수령까지도 함께 죽이겠다는 뜻도 역시 그 통문 중에 언급하였습니다. 또 소신이 있는 곳에 격문을 보내왔는데 그 흉악한 말은 입으로 말할 수 없으나, 기한을 굳게 작정하여서 성을 구축하는 데 백성들을 못살게 학대하고 절제(節制)에 방법을 어겨 왜적이 마구 들어오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가 내세운 신의 죄입니다. 성을 구축한 일은 신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적이 마구 들어오게 만든 것은 과연 신의 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태평 시절 백 년에 사람들이 전쟁을 알지 못하니, 군졸들이 소문만 듣고 무너져 달아나고, 변방의 장수들은 죽기가 아까워 퇴각한 것이 어찌 다 신의 절제가 올바른 방법을 어겼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변란이 발생한 후 각 항의 절제의 득실(得失)은 다 어람(御覽)을 거쳤거니와, 한 도의 정병 용사 5, 6백 명을 뽑아서 거느리고 다니면서 동래가 함락되는데 먼저 밀양으로 달아나고 밀양이 함락되는데 또 가야로 도망갔으며, 왜적이 상주를 지나자 거창으로 퇴각해 숨었고 한 번 장병을 권면해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왜적을 공격하게 하지 않았으므로 그 자신이 몸둘 곳을 몰라 근왕을 칭탁하여 도망쳐 운봉을 넘어갔다고 지적하면서 신의 죄라고 합니다. 당초 신은 순찰사의 임무를 겸하고 있지 않아 원래 거느리고 다니는 군관이 없었습니다. 계청하여 8인을 보탠 가운데 홍윤관(洪允寬)과 김경로(金敬老)는 조방장을 겸했기 때문에 이미 좌ㆍ우도로 각각 파견하였고 이응성(李應星)은 변란이 생기기 전에 당포(唐浦)의 조전장(助戰將)으로 보냈으며, 강만남(姜晩男)과 장처문(張處文)은 변란이 생긴 후에 즉시 동래 등지로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구원하는 일을 맡게 하였고 김해 부사 서예원(徐禮元)이 있는 곳에 전령하여 정병 각 30명씩을 뽑아서 주도록 하였으니, 그것은 신의 수하에는 본래 군사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구전(口傳)으로 군관 6인과 안세희(安世熙) 등을 특명으로 치송(馳送)한 것을 추가한 것과 도내의 가솔군관(假率軍官) 약간 명 및 가덕 첨사(加德僉使) 최몽성(崔夢聖)ㆍ양산 군수(梁山郡守) 변몽룡(邊夢龍) 등을 다 합해도 단지 50인에도 차지 않았으니, 이른바 5, 6백명의 정병을 거느리고 다닌다고 한 것은 거짓으로 모함하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지난 4월 15일 아침 신이 진주에서 왜적이 경내를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갖추어 치계하고 오후에 출동하였는데, 도중에서 부산과 동래 두 진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없이 길을 재촉하여 16일 저녁에 밀양까지 달려갔으니, 이는 동래의 함락을 듣고 서둘러서 밀양으로 달려 들어간 것이지 동래로부터 퇴각해 달아난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성을 지키고서 변란을 기다리려고 하였으나, 본부(本府)의 성이 빗물에 태반이 무너졌는데 채 수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본부의 군사는 부사 박진(朴晉)이 능사창군(能事槍軍) 세 부대와 아울러 남은 군사 전부를 거느리고 동래ㆍ양산 등지를 구원하러 달려갔고, 성을 지키는 나머지의 사람은 노약자 겨우 백여 명뿐이었습니다. 인근에 있던 청도ㆍ영산(靈山)ㆍ창녕(昌寧)의 군사들 역시 가야 할 곳으로 가버렸으므로, 합세하여 함께 지킬 도리가 전연 없었습니다. 신이 만약 그 성에서 포위된다면 동서로 책응할 수 있는 길이 없어지기 때문에, 왜적이 본부의 작원(鵲院)을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퇴각하여 영산을 지켰고 밀양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또 초계로 퇴각하였으며, 왜적이 또 김해를 함락시키고 초계의 길로 향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합천으로 옮겨가서 주둔하였고 왜적이 성주를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고령으로 달려갔으며, 왜적이 금산(金山)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례로 달려갔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가까이에 있으면서 책응하기 위한 계획이었으며, 각처에 무너져 흩어진 졸병 겨우 4백여 명을 얻어 방어사 조경(趙儆)과 조방장 양사준(梁士俊)에게 나눠주어 그들로 하여금 달려가 금산을 구원하게 하였습니다. 조경ㆍ양사준 등이 한 차례 금산에서 접전한 후부터 군졸들이 다 흩어져 이때부터 비록 각 관원을 독려하여 수령으로 하여금 흩어진 군졸을 수습하여 거느리고 오게 하였으나, 도망간 군졸들이 죄책을 받을까 겁을 내어 깊은 산에 들어가 있으면서 오직 자기가 있는 곳이 깊지 않을까 두려워할 뿐이었습니다. 다시 생원ㆍ진사 및 유식한 품관(品官)을 시켜 흩어진 군졸을 소집하게 하였으나 생원ㆍ진사 역시 깊은 산으로 들어가 버려 급작스레 군졸을 모을 길이 없어졌고 방어사는 이미 군졸이 없는 장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왜적이 지례의 땅을 범하자 비로소 거창으로 왔는데 그때 왜적이 이미 의령ㆍ삼가(三嘉) 등지를 범했으므로 거창은 사실상 왜적이 침범한 복판에 있는 땅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것은 위아래로 책응하기 위한 계책에서였고, 변란이 발생한 후에 가야까지는 가보지도 않았습니다. 도망했던 군졸 중에는 신이 직접 전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자진해서 신이 있는 곳에 나타나는 자가 많았으나, 그들을 혹은 병사에게 보내고 혹은 방어사에게 보내고 하였더니 곧 도망가 버렸고 또 그렇게 나눠서 보냈기 때문에 역시 신이 있는 곳에도 자진해서 나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병사ㆍ방어사 등은 단지 군관만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신은 그래도 힘을 내어 싸우지 않는다고 누차 글을 보내서 신칙(申飭)하고 군관을 잡아다가 엄하게 교훈을 하였습니다. 곽영(郭嶸)ㆍ이지시(李之詩) 등이 호남에서 정병을 거느리고 지례에 와서 2일 동안 주둔하고 있었는데, 조경 등이 한군데 같이 있으면서 곧 전투하러 나가지 않았으므로 신이 그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신의 군관인 손인갑(孫仁甲)ㆍ강만남(姜晩男)ㆍ장처문(張處文) 등에게 전령을 발급하여 양사준(梁士俊) 등을 형벌 집행차 그곳으로 보내니, 곽영 등이 금산으로 달려가 왜적 20여 급을 목베었습니다. 이른바 밀양이 패전하자 또 가야로 도망갔고 왜적이 상주를 지나자 거창으로 퇴각하여 숨어버리고 한 번도 장병을 권면하여 왜적을 공격하게 한 일이 없다고 한 것이 또 거짓으로 모함한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왜적이 영로(嶺路)를 넘었는데 충청도의 여러 장병 역시 패해 왜적이 곧장 서울로 들어갈 앙화가 조석으로 박두하였으니, 이 일을 생각하면 울음 소리와 눈물이 다같이 나와 다른 일의 계획을 생각할 경황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타고남은 것들을 수습하여 호남 감사 이광(李洸)과 합세하여 근왕할 뜻으로 절차에 따라 장계로 올리고 군사 1천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전라도 운봉까지 갔습니다. 김성일(金誠一)을 통하여 비로소 어가가 서쪽으로 행행(行幸)하시어 서울이 이미 비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광 역시 전주로 군사를 철수해 버리고 정병을 더 뽑느라고 아직 출동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고군(孤軍)을 거느리고 혼자 가기에는 사세가 퍽 어렵고, 김성일이 강력하게 권하기를 군대를 돌리고 흩어진 군졸을 불러 모아 주부(州府)에 웅거하고 있는 왜적을 토멸하여 군현(郡縣)을 수복하고 의병을 규합하여 다시 근왕하는 군대를 일으키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군량이 단지 20일분뿐이어서 도중에 낭패할 근심이 생길까 두려워 잠시 본도를 돌아왔으니, 도망쳐 넘어가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도리어 근왕을 칭탁한 것으로 신의 죄를 삼는 것입니다. 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한 것은 급히 서둘러 경내의 왜적을 소탕하고 구원하러 오라 하신 □ 교지를 삼가 따른 것인데, 왜적에게 영남을 버려 두고 운봉을 넘어 전라도에 들어가 근왕을 칭탁하였다고 죄를 삼는 것은 또한 사실과 다르지 않습니까. 부끄러움을 잊고 치욕을 참으며 얼굴을 들고 다시 와서 호령을 내고 지휘권을 발동하여 의병으로 하여금 풀어져 흩어지려는 마음을 가지게 하고 초유사로 하여금 이룩되어가는 공을 무너뜨리게 하였다는 것으로 신의 죄를 삼았습니다. 대저 정인홍(鄭仁弘)ㆍ김면(金沔) 등이 의병을 일으킬 모의를 할 때에는 열 가지 책략을 조목조목 진술해서 신과 왕복하며 상의하였고, 군량ㆍ군기(軍器)의 준비와 문서류의 처리는 다 신에게 문의해서 시행하였습니다. 합천의 의병장 손인갑은 바로 신이 정해서 보낸 사람이니, 그 처사의 온건함은 진실로 곽재우의 황당함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신이 본도로 돌아온 후 온갖 대소사를 일일이 문서로 보고하였고 다른 곳의 의병 역시 다들 그렇게 하였으니, 만약 의병이 일호(一毫)라도 흩어져 버리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들이 그렇게 하려 들었겠습니까. 의병들의 일은 다 초유사 김성일과 의논해서 처치하였고 조금도 독자적으로 막은 일은 없었으며, 두 사람 사이(즉 김수와 김성일 사이를 말함)에 장병이 오가는 말은 믿거나 의심하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친절하게 만나서 약속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른바 이룩되려 하는 공을 깨뜨렸다고 한 것 역시 거짓입니다. 하물며 현존하는 여러 장수들을 통솔하고 의병을 규합하여 군현을 수복해서 곤경에 빠진 나라를 구하라는 성지(聖旨)가 간절하셨으니, 이른바 의병이라는 것을 신이 어찌 호령하고 지휘할 수 없겠나이까. 그런데 저렇게 운운(云云)하니 그 마음은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가령 그가 전해지는 말로 인하여 오해해서 무지하게 망령되이 굴었다 하더라도 반역한 백성이 된 결과를 면치 못하고 그가 왜적을 토벌한 공이 끝내 그 죄를 보상하기 어렵거늘, 하물며 이노(李魯)ㆍ문덕수(文德粹) 등이 다 한 집안에서 연결된 사람으로 세 사람의 유감이 위세를 빙자하고 있습니다. 이노는 매일 곽재우 곁에 있으면서 모해를 가르치고 꾀느라 있는 힘을 다하고 흉계를 실행하기를 바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초유사 김성일이 이러한 해괴한 소식을 듣고는 누차 글을 보내서 화복(禍福)을 진술하여 극력 타일러 진정하기를 바랐고, 김면ㆍ정인홍 및 다른 의병 역시 다들 그를 책하였습니다. 그가 혹시 그의 악한 마음을 뉘우치는 수가 있고 또 종내 진정한다면 그것이 신의 본뜻이니, 그가 정말로 얼굴을 고쳐서 깨닫는다면 신이 어찌 감히 그를 처음같이 대우해서 그의 공을 완성하게 해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앙화의 기틀이 이미 발동하였으니, 신의 생사는 아마도 열흘 안에 결정될까 염려하나이다. 신의 죄는 본래 조정에서 처치할 것이 있을 터인데 이렇게 진달하는 것은 스스로 변명하는 데 가까우니, 온당하지 못한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거짓으로 모함하는 정상을 죽기 전에 내내 생각하여 다 진술하면 지하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게 될까 합니다. 초유사 김성일에게 자초지종을 통문하여 그로 하여금 선처토록 하겠습니다만, 이미 변고를 당하고서도 다시 얼굴을 억지로 들고 그대로 머무르며 온 도에 호령할 수 없으니 속히 처치하여서 한 지방을 진정시키도록 하소서.
○ 초유사 김성일이 곽재우가 충열(忠烈)한 인물인데 모함을 당하는 것을 가슴 아파하여 그의 무죄함을 밝혀서 다음과 같이 치계하다.
의령 사람 곽재우가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토벌한 일은 이미 누차 계달하였습니다. 지금 의외의 변이 생각지 못한 데서 나와 적절히 처리할 길을 몰라 극히 근심하고 있나이다. 곽재우는 바로 고 통정대부 곽월(郭越)의 아들이고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손녀 사위입니다. 중간에 무예를 배우다가 버리고 글을 읽었는데 그 사람됨이 질박하고 문채가 없으며, 부모 상중에 슬픔을 다해 이웃에서는 다들 그를 효자라고 불렀습니다. 왜적의 변란이 발생한 초기에 병사와 수사가 뒤이어 달아나고 왜적이 밀양을 범하게 되자, 감사 김수는 지휘하는 장수가 포위된 성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영산으로 퇴각해 돌아왔다가 곧 초계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곽재우가 분연히 말하기를, “병사와 수사가 달아났는데도 형벌을 가하지 않고, 지금은 또 왜적이 좌도에 나왔는데 초계로 퇴각해 달아났으니, 감사 역시 목 베어야 한다.” 하고는, 검을 짚고 길에서 만나 죽이려 하기에 동향 사람들이 강력하게 말려 그만두었습니다. 그 후 우병사 조대곤(曹大坤) 및 방어사ㆍ조방장ㆍ수령 등이 하나같이 다 소문만 듣고 무너져 달아나 열흘지간에 왜적이 서울의 궁궐을 범하자, 곽재우는 팔뚝을 걷어올리며 강개하여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왜적을 보호해서 서울에 들어가게 하여 임금에게 화를 끼쳤으니 다 목 베어야 한다.” 하면서 많은 사람이 있는 넓은 자리에서 늘 큰 소리로 그렇게 말하다가, 하루아침에 집안의 재물을 풀어서 장병들을 모집하였습니다. 그의 첩이 말하기를, “왜 쓸데없는 죽음을 할 계획을 합니까.” 하였는데, 곽재우가 크게 노하여 검을 뽑아 목 베이려 하였고, 처자의 의복을 전사(戰士)의 처자들에게 풀어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여 굶주림을 면치 못하게 되자, 자기 처자를 매부인 허언심(許彦深)에게 맡기고, 모집한 장병들을 거느리고 왜적을 치겠다고 소리쳐 말했습니다. 고을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듣고 다들 곽재우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의령과 초계 두 읍이 패전하여 관아가 비어 있고 의령의 관고(官庫)는 이미 분탕되었으므로 곽재우의 군사는 가지고 있는 양곡이 없어서 초계 및 신반현(新反縣)의 관고에 있던 양곡을 풀어서 군사들을 먹였는데, 합천 군수 전현룡(田見龍)이 곽재우를 도적으로 몰아 병사에게 보고하였고 병사는 명을 내려 그를 체포하게 하였습니다. 곽재우의 군대에 응모했던 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 다들 흩어져 가 버릴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신이 갓 임지에 도착해서 즉시로 글을 보내서 불렀더니 곽재우 군대의 사기가 다시 진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계속 왜적을 쳤는데, 왜적이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곽재우는 반드시 먼저 나서서 달려가 돌격하기 때문에 그가 거느린 전사들은 용기가 백배하여 일당백(一當百)의 구실을 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곽재우는 전투할 때면 반드시 홍초첩리(紅綃帖裡)를 착용하고 당상관의 갓[堂上笠飾]을 갖추고는 홍의 천강장군(紅衣天降將軍)이라 자호하고, 말을 달려 적진을 스치며 오가는 것이 섬광같이 빨라서 왜적이 비록 일제히 철환(鐵丸)을 쏘아도 맞추지 못합니다. 혹은 말 위에서 북을 치며 천천히 가서 군사를 행진시키는 절도로 삼기도 하고, 혹은 사람을 시켜 피리를 불고 호드기를 불게 하여 겁내지 않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혹은 산 숲 속에 의병(疑兵)을 많이 만들어 놓고 호각을 불고 시끄럽게 북을 치기도 하고, 혹은 곳곳에 복병을 매설해서 사람이 없는 것같이 조용하게 있다가 왜적이 오면 곧 쏘아 죽이기도 합니다. 혹은 왜적의 배를 몰아 강 언덕에까지 가서 추격해 쏘기도 하고 하여 전투를 하지 않는 날이 없고, 전투를 하면 반드시 승리를 거두는데, 왜적의 수급(首級)을 베인 수효가 여러 장수들 중에서 가장 많고 왜적을 쏘아 죽인 것은 부지기수입니다. 왜적들은 그를 ‘홍의장군’ 이라 하고 감히 상륙하여 도적질을 하지 못하니, 의령ㆍ삼가 두 읍의 인민들은 다 생업에 안정하고 농사에 힘써 오곡의 풍성함이 평화시와 다름이 없습니다. 도내의 남은 백성들이 지금까지 보존된 것에는 곽재우의 공이 많습니다. 곽재우는 갑작스레 삼도의 군대가 수원에서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미친 사람같이 위험하고 망령된 말을 무수히 발설하였고, 순찰사가 글을 보내 그를 칭찬하고 장계를 올려 그의 공을 아뢰었어도 여전히 마음을 돌리지 않아 사람들 중에는 혹 그렇게 하면 앙화를 입게 될 것이라고 그를 경계하기도 하였으나, 곽재우는 반드시 검을 거머잡고 성을 내고는 하였습니다. 지금 곽재우는 갑작스레 두 차례나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문을 보내 죄를 차례로 늘어놓고 토죄하겠다고 떠들어대며, 또 여러 읍의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내어 토죄할 뜻을 말하였습니다. 신은 그 소식을 듣고 경악하여 모르는 결에 눈이 휘둥그래져 자리에서 떨어졌습니다. 순찰사가 신에게 공문을 보내서 의령의 관원을 시켜 곽재우를 잡아 가두라 하였으나, 신이 가만히 생각하기로는, 곽재우가 실제로 반역할 마음이 있다면 그가 한창 정병을 장악하고 있으니 한 역사(力士)에게 잡힐 상대가 아니고, 만약 반역할 마음이 없다면 글 한 장으로 족히 깨닫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곧 곽재우에게 친서를 내어 여러 가지로 비유를 들어 일깨워 주었고 김면 역시 글을 보내 경계하였던 바, 곽재우는 타이르는 말에 마음을 바꿔 순종하였고, 진주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구원하고자 이미 떠나갔다고 합니다. 곽재우가 일개 도민(道民)으로 도주(道主)를 범하려 하고 심지어 도주의 죄를 성토하여 격문을 보내고 하였으니, 비록 나라를 위해 분노하다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는 하지마는 형적이 난동을 부리는 백성이 된 바에는 곧 토죄해야 의당합니다. 그러나 곽재우는 온 나라가 함몰된 후에 고군(孤軍)으로 용기를 떨쳐 왜적을 격파해내어 도내의 남은 백성들이 그를 간성(干城)으로 의지하고 있는데, 지금 난언(亂言) 때문에 곧 주륙(誅戮)을 가한다면, 남은 성을 보존하고 왜적을 방어할 계책이 없어져 군사와 백성들은 그의 죄를 알지 못한 채 일시에 무너져 흩어질 것입니다. 신이 사태를 임시로나마 진정시킬 계획으로 재삼 경계하여 곽재우가 이미 순종하였는데 도순찰사에게 죄를 죄었으니 아마도 서로 용납하기 어려워 다른 변고를 야기시킬까 염려됩니다. 신이 듣기에는 을묘년 왜변 때 전라 감사 김주(金澍)가 영암군(靈嵒郡)으로부터 다른 읍으로 달아났던 바, 전 수원 부사 윤기(尹箕)가 그때 유생의 신분으로 포위된 성 안에서 검을 뽑아 그를 목 베려고 하였는데 김주는 성내지 않고 담소로 대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논자(論者)는 지금까지 윤기의 용기를 칭찬하고, 김주가 능히 용납하였던 것을 장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이제 곽재우의 일은 비록 심히 광기를 띠고 망령되기는 하나 그의 마음은 사실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감사 역시 김주가 대처한 것같이 하면 조용하고 아무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김수(金晬)에게 글을 보내 그로 하여금 선처하게 한다면 근심할 만한 변고는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김수가 곽재우를 반란한 역적으로 장계를 올려 아뢰었고 또 다른 사람이 사주하였다고 말하였으니, 과연 그렇게 죄를 씌운다면 비단 그가 그런 죄목에 불복할 뿐 아니라 온 도의 민심을 아마도 수습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극히 가슴 아픕니다. 그가 충의로 분발한 정상과 용기를 떨쳐 왜적을 토벌한 공은 온 도에 널리 알려져 아동과 주졸(走卒)까지도 다 곽 장군을 칭송합니다. 또 듣건대 곽재우는 군사를 잘 쓰고 장수의 재질이 있다고 하니, 만약 광기 띠고 망령된 자에 대한 주벌을 좀 늦춘다면 반드시 좋은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불행하게도 임명을 받은 후에 두 번이나 이러한 변고를 당했습니다. 신이 4월 중에 호남으로 길을 잡아 운봉현에 도달했었는데 호남 사람이 순찰사 이광이 근왕하는 데 늑장을 부린다고 그를 토죄(討罪)하려 한다고 어떤 사람이 신에게 몰래 말해 왔습니다. 신은 대의(大義)를 가지고 의사를 꺾어 말리고, 곧 이광에게 통지하여 대비하게 하고자 김수에게 의논했더니 김수가 말하기를, “그 사람은 근왕하는 것이 느리다고 해서 토죄하려고 하는 것이니, 의사라고 할 수 있소. 만약 그 사람을 죽인다면 온 도의 민심이 더욱 격해질 것이니 이광이 있는 곳에 통지해서는 안 되오.” 하여, 신은 그의 말에 따라 그만두었습니다. 지금 곽재우의 일이 바로 이와 유사합니다. 김수가 만약 호남의 의(義)에 대처하던 태도로 곽재우에게 대처한다면 난처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신 및 김면이 곽재우를 경계한 글과 그의 답서를 함께 베껴서 올려 보냅니다. 이 계사(啓辭)에서 넉넉히 공의 충후하고 깨끗한 마음을 알 수 있다.
○ 흉악한 왜적이 지례(知禮)에서부터 호남을 범하다. 적인(狄人) 5, 6명이 청학장군(靑鶴將軍)ㆍ백학장군(白鶴將軍)을 자칭하고 매복하여 왜적들을 사살하니 왜적이 좀 물러났다.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조금 있다가 대부대의 왜적이 무주현(茂朱縣)으로 마구 들어와 불태워 버리고 도적질을 하였다. 그때 본도 방어사 곽영(郭嶸)은 금산(錦山)에 진을 치고 조방장 이유의(李由儀)는 팔량(八良)에 진을 쳤으며, 이계정(李繼鄭)은 육십현(六十峴)에 진을 치고, 장의현(張義賢)은 부항(釜項)에 진을 쳤으며, 김종례(金宗禮)는 동을거지(冬乙巨旨)에 진을 쳐서 수비하며 왜적의 변란을 대기하였다. 적병이 또 옥천(沃川)으로부터 금산으로 향하자 방어사도 군(郡)의 성 안으로 퇴각해 들어가서 감사에게 구원을 청하니, 이광(李洸)이 군사 8백을 내어 장수를 정해서 금산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23일. 성주(星州)의 왜적 7백여 명이 양정(羊亭)으로 나와 진을 치고 가야산을 탐색하려 하였고, 또 한 떼는 지례(知禮)로부터 무주(茂朱)로 향하면서 순영(順英) 등 마을을 분탕질하다. 순영은 무주의 역 이름이다. 또 고성(固城)의 왜적 1천여 명이 고성의 성 밖에 나와서 주둔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서북을 잠식해 들어가는 왜적이 지나온 여러 도에 연속하여 진지를 마련해서 후면을 공격 당하는 데 대비하다.
○ 적병이 금산(錦山)으로 들어가다. 곽영(郭嶸)과 김종례(金宗禮)는 퇴각하여 고산(高山)에 숨었다. 왜적이 무주와 금산을 나누어서 점거하고 용담(龍潭)ㆍ진안(鎭安) 등지를 분탕질하였다. 어떤 사람이 왜적 속에서 나와 말하기를, “이 왜적은 바로 전날 창원(昌原)에서 전라 감사를 자칭하여 선문(先文)을 낸 자이다. 처음에는 이들이 곧장 전주(全州)로 향하려 하였으나 홍의장군에게 저지당하자, 우회해서 성주와 지례를 경유하여 이곳에 온 것이다. 운운.” 하였다. 본도 여러 읍에서 남은 장정을 찾아 모아가지고 길을 나누어 방어했는데, 왜적이 금산으로 막 들어오자 그때의 군수 권종(權悰)이 병으로 죽었다.
○ 이 광(李洸)은 전주에서 본주(本州) 사람 문관(文官) 이정란(李廷鸞)을 주의 수성장(守城將)으로 하여 이웃 읍의 군사를 모아 계엄을 펴고 왜적의 변란에 대비하게 하였고, 또 남원(南原)에 전령하여 군사를 모아 성을 지키게 하였다. 그때 본부(本府)의 선비들이 흩어진 군졸을 모집하여 향병(鄕兵)이라 칭하고 전 목사 정염(丁焰)을 장수로 추대하였다.
○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전주로부터 여산(礪山)으로 향발하여 비밀리 장병들과 의논하기를, “금산과 무주의 왜적이 이미 용진(龍鎭)으로 향했으니 이것은 틀림없이 전주와 남원에 뜻이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대군이 본진(本鎭)을 다 떠나가야 할 것이니 노약자만을 남겨서 수비시킬 것이다. 우리 군대가 진산(珍山)으로부터 그 자들이 생각하지 않은 곳으로 나가 나머지 무리들을 다 죽여버리고 뒤쫓아 추격하면, 그 왜적들은 전진해도 거점을 얻지 못하고 후퇴해도 돌아갈 곳이 없어 중도에서 낭패하여 스스로 황산(荒山)의 패전을 초래할 것이다.” 하고, 군사를 이끌고 은진(恩津)의 연산(連山)을 향해서 떠났다. 같은 진의 군량색(軍糧色)을 고목(告目 천한 사람이 높은 이에게 올리는 글)하기를, “가지고 있는 군량은 여산군(礪山郡)에서 수납(輸納)하겠나이다.” 하였다. 색리(色吏)는 남원의 색리이고 군량은 남원의 군량이다. 대체로 의병을 돕는 일은 각 읍이 다 그러했다. 대장의 행차가 22일 전주를 떠나 23일 여산에 머물렀다. 당일 도부(到付)한 금산의 전통(傳通)에, 옥천(沃川)의 양산현(陽山縣)을 분탕질한 왜적이 본군을 지향해 와 진을 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24일 동군(同郡)의 전통에는, 10리 거리에 진을 칠 것이라 했고, 서울의 왜적은 신립(申砬)과 윤두수(尹斗壽)가 각각 좌우 대장이 되어 1천여 명을 잡았다는 것이었으며, 여산군수가 구전(口傳)한 내용은 의병이 은진ㆍ연산ㆍ금산으로 지양한 것과 우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행차와 병사(兵使)가 일시에 직산(稷山)으로부터 진위(振威)로 향한 것이었다.
○ 조방장 이유의(李由義)가 남원 판관 노종령(盧從岭) 등을 거느리고 팔량(八良)으로부터 금산의 송현(松峴)으로 진을 옮겨서, 왜적이 남쪽으로 부딪쳐 내려올 우려에 대비하였다.
○ 합천 의병장 손인갑(孫仁甲)은 초계(草溪)의 마진(馬津)에서 큰 전투를 하여 강 연안의 왜적을 깡그리 죽이고, 손인갑은 물에 빠져 죽었다. 이에 앞서 손인갑은 강 연안의 왜적이 물을 따라 내려간다는 초계에서의 치보(馳報)를 듣고, 손인갑이 밤중에 군사를 전진시켰으나 초계의 의병이 이미 강 연안의 왜적을 토멸해 버렸으므로 드디어 군사를 끌고 돌아왔다. 그런데 안장을 채 내려 놓기도 전에 초계의 보고가 오기를, 강 연안의 왜적이 또 많이 닥쳐왔다고 하였다. 손인갑은 시간을 다퉈 달려갔고 또 정인홍에게 보고하였다. 정인홍은 여명에 길을 떠났다. 왜적의 배 12척이 약탈한 물건을 무겁게 싣고 초계를 지나가는데 초계와 고령의 군대는 고립되고 약해 감히 잡지 못해서 손인갑이 그들과 합세하여 왜적과 크게 싸워 깡그리 섬멸하였다. 떠가는 배가 강을 덮었는데 그중 배 한 척이 노를 급히 저으며 도망갔으나 모래 여울의 물이 얕아서 급히 배질할 수 없었다. 손인갑은 승전한 기세를 타고 물에 들어가서 추격했는데 모래턱이 부드러워 사람과 말이 함께 물에 빠졌다. 여러 군사들이 미처 건져내지 못했으므로, 온 전진(戰津)의 군사들이 참담하고 사기가 저상하여 수급(首級)을 벨 생각도 없어지고 크게 통곡하며 돌아왔다. 대체로 이때에는 군사들이 전투에 익숙하지 않아서 주장(主將)이 몸소 사병에 앞서 나가지 않으면 적에게 나가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손인갑은 전투할 때마다 먼저 자신이 적의 칼날과 맞섰기에, 한 좋은 장수를 잃기에까지 이르른 것이다. 사병들 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고, 촌락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역시 모두 슬프게 울었다. 정인홍은 김준민(金俊民)을 감사에 □계청하여 손인갑이 거느리던 군대의 가장(假將)으로 삼았다. 김준민은 처음에 거제(巨濟)의 현령으로 있었는데 왜적의 변란이 갓 일어나자 성지(城池)를 수선해 가지고 사수할 계획을 세웠다. 김수(金晬)가 근왕을 칭탁하여 군관을 데리고 다니다가 용인(龍仁)에서 무너져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감사의 휘하에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정인홍이 권양(權瀁)을 보내 김준민으로 손인갑이 맡았던 자리를 대신 맡도록 해달라고 청해 김수가 허락하고 그를 보냈다. 용감할 수 있고 겁낼 수 있고 하는 것은 병가(兵家)의 기략(奇略)이다. 물에 들어가서 죽은 것은 혹 황하수를 맨몸으로 건너려는 아둔한 짓이라는 나무람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목숨을 탐내어 나라를 잊는 도배와 비한다면 이 손인갑은 살기를 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인 것이다. 슬프도다.
○ 금산(錦山)ㆍ무주(茂朱)에 있는 왜적의 기세가 매우 거세어서 내지(內地)로 쳐들어오므로 백성들이 공포심에 싸여 있었다. 이때에 정염(丁焰)이 남원(南原)의 향병장(鄕兵將)이 되어 남정(南亭)에 머물고 있었는데 부사 윤안성(尹安性)이 정염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의 추물(醜物 첩(妾)을 말한 것임)이 일가집 사람으로 언어를 좀 알아 들을 만한데, 오늘 아침에 전주(全州)에 윤씨의 첩은 전주 기생이다. 와서 왜적의 동향과 그 밖의 소식을 전하였다. 그 내용에, 방어사(防禦使)와 조방장(助防將)이 금산(錦山)의 왜적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관군(官軍)은 적의 떼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덮쳐 공격하려 하였다. 이윽고 왜의 복병이 한꺼번에 일어났는데 관군은 수가 많지 않아서 감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고산(高山)으로 후퇴하여 전주 감사(全州監司)에게 구원을 청하자, 8백 명을 뽑아 보냈다 하니, 길가에서 패해 무너졌다는 것은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서울에 있는 적은 크게 패하여 서울 안에는 남은 적이 없기 때문에 병사(兵使)가 군사를 돌이켜 방금 고산으로 향하는 중이라 하고 후군(後軍)인 의병도 역시 고산으로 향한다 하며, 왜적이 옥천(沃川) 경계에 주둔하고 감히 금산(錦山) 지대를 들어오지 못한다 하니 이것으로써 적의 수효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컨대 각 진영에 선포하여 적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 말도록 하라. 신립(申砬)ㆍ윤두수(尹斗壽) 제군이 적의 무리를 모조리 무찔렀다고 하니 하느님이 우리 종묘 사직을 도와 주려는 것이라 매우 기쁘다.
○ 전라도 의병장 행 부호군(行副護軍) 고경명(高敬命)이 본도 도순찰사(都巡察使) 절하(節下 순찰사를 말한 것)에 다음과 같이 격문을 발송하다.
섬 오랑캐가 난리를 일으켜 임금의 행차가 멀리 순행길을 떠나시니 중외(中外)에서 믿는 것은 오직 호남(湖南)밖에 없는데, 겨우 군사를 일으키라는 어명(御命)을 받들자 갑자기 근왕(勤王)하는 군대를 해산하라고 하니 절하의 마음 속에는 반드시 어떤 계획이 있어서 그렇겠지만 절하의 실지 행동에 있어서는 납득될 만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조정의 명령은 비록 막혀 끊어졌다 하더라도 한 도내의 물의도 역시 두려운 것이외다. 지난번 용인(龍仁)에서 무너진 것은 실로 선봉장이 패전한 때문이었으나 절하가 주장(主將)이 되어 있는 이상 그 책임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절하는 오늘의 입장에 있어 어떻게 계획하시렵니까? 행여 지나간 실패를 잘 수습하여 주상전하의 남쪽에 대한 근심을 덜어드림으로써 기왕의 허물이 씻겨지고 새로운 업적이 역사에 찬란하게 된다면, 비단 성조(聖朝)에서 난리를 다스리고 정상으로 돌려놓는 기초일 뿐만 아니라 절하에 있어서도 역시 화가 복이 되는 날일 것이외다. 본도 의병이 당초 북도로 향해서 난리를 평정시키고 전하의 행차를 모셔 오려고 했었는데, 길에서 들으니 윤 정승[尹左相]이 서ㆍ북의 정병을 거느리고 서울에 머물러 있는 적을 토벌한다 한즉, 북방의 일은 염려가 없음이 거의 보증됩니다. 그러나 호서(湖西)의 적이 금산(錦山)으로 들어오는데, 방어할 군사가 아직도 용계(龍溪)에 주둔하고 한 사람도 다짐하며 앞서 나오는 자가 없으니, 절하가 이 시기에 있어 진정 병력을 널리 모집하여 형세를 크게 벌리지 않으시면 가엾은 우리 호남 한 지방 백성들은 모두 적의 칼날에 목숨을 빼앗기고 말 것이외다. 그렇게 되면 절하는 위로 국가를 회복하지 못하고 아래로 강회(江淮)를 보장(保障)하지 못하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적이 다 쓰러지고 전하께서 돌아오시어 교서(敎書) 한 장을 내려 사방에 포고한다면, 비단 호남 사람들만 천지간에 용납되지 못할 뿐 아니요 절하 역시 무엇으로써 충성을 바치고 허물을 보상하겠습니까. 절하가 혹 저 왜적이 워낙 사나워서 맞붙어 싸우기 어렵다고 군사를 나누어 험한 곳을 지켜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 때로 기병(奇兵)을 내어 그 날카로운 기세를 꺾어 버리면, 적의 성집이 경망하고 조급한지라 지구전은 계속하지 못할 것이니 열흘이 넘지 않아서 큰 공을 이룰 수 있는 것이외다. 다 같이 왕의 신하가 되어 나랏일을 함께 하는지라, 피차의 사이가 있을 수 없고 형세를 서로 의지하는 처지니, 각자 소견을 자세히 참작해야 할 것인즉 부디 계획을 잘하여 후회를 끼침이 없기 바랍니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고종후(高從厚)가 지었다.
임진년 6월 일 만력(萬曆 명(明) 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20년 전라도 의병대장 행 부호군 고경명(高敬命)은 해남(海南)ㆍ강진(康津) 두 고을의 사군(使君)으로 있는 의병장 휘하에 다음과 같은 격문을 보냈다.
나 고경명은 전일 추성(秋城 담양(潭陽))에서 의거(義擧)하던 당시에 가슴속의 끓는 피를 편지 한 장에 쏟아서 각 읍 수령에게 두루 고하여 함께 어려운 고비를 극복해 나가자고 호소했으나, 정성이 사람을 감동하지 못해서 아무리 외쳐도 반응이 없으니 초야의 인생이 다만 빈주먹만 두들길 뿐이어서 무기와 군량의 뒷받침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던 참이었습니다. 이윽고 들은즉 격문을 받아 보고서 정병을 내어 응원해 준 사람은 호남 50주(州) 중에 유독 두 고을의 원님이 있어, 그 소문이 미치는 곳마다 사기가 백배나 더함과 동시에 정의의 군사를 기다려서 적의 무리를 쓸어버리려 했던 것이외다. 그런데 뜻밖에 병사(兵使)가 격문을 띄워 부르고 있으니 앞으로의 거취가 자유스럽지 못할까 깊이 염려됩니다. 지금 금산의 왜적이 청진(淸鎭)의 왜적과 형세가 서로 연접되어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이 자유로우므로, 한 부대는 이미 용담(龍潭)을 함락시키고 또 한 부대는 무주(茂朱)를 함락시켜 세 군데 소굴을 만들고서 완산(完山 전주(全州))을 침범하기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완산 고을은 비단 호남 지방의 근본이 될 뿐만 아니라 진전(眞殿)을 모신 곳으로서 실로 우리 성조(聖朝)의 발상지이므로, 나 고경명은 의기(義旗)를 그쪽으로 돌이켜 적의 칼날을 방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본즉 저 왜적이 본래 잔꾀가 비상한데다 진산(珍山)의 병력은 극히 약하니, 만약 적으로 하여금 진산ㆍ연산(連山) 같은 험하고 좁은 곳을 넘어서서 은진(恩津)ㆍ여산(礪山) 같은 평탄한 길로 돌진하게 한다면 어찌 다만 호남만 앞뒤로 공격을 받을 뿐이겠습니까. 금강(錦江)의 군사마저 장차 동요가 될 것이외다. 그래서 호서(湖西)가 불통되고 적의 세력이 치성하면 호남의 군량을 어떻게 수원(水原)에 수송할 것이며, 이때 본도 병사 최원(崔遠)ㆍ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이 군사를 거느리고 수원에 주둔하였다. 조정의 소식을 어떻게 사방에 전달하겠습니까. 이에 군사를 옮겨 진산으로 들어가서 금산(錦山)에 있는 적의 후방을 공격하여 용담ㆍ무주의 적으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는 염려를 버리지 못하게 하고, 서서히 두 고을 군사를 기다려서 곧장 적의 굴혈을 엄습하여 흉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나아가나 물러가나 근거가 없게 만들어 놓으면, 국가를 보전하는 상책이 될 뿐만 아니라 이 역시 완산부(完山府)를 구원하는 하나의 좋은 계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공들이 지금 만약 예전 상도만을 고수하고 변통할 줄을 모른다면 나 고경명 역시 군사는 외롭고 힘은 적어서 선뜻 움직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호남의 적도 쉽게 전제(剪除)할 수 없고 수원의 아군이 혹시라도 또 시일만 허송하게 될 것입니다. 병사가 거느린 군사는 모두 호남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만약 적의 무리가 오늘에 아무 지대를 통과하고 내일에 아무 현(縣)에 침입한다는 소문을 듣는다면, 식량은 공급되지 않고 군의 정세는 흉흉할 것이니, 이야말로 목전에 닥친 위급이라 비록 지혜있는 자가 아니라도 짐작하고 남음이 있을 것이외다. 그렇다면 두 원님이 합세해서 금산의 적을 치는 것은 다만 호남을 보장하는 계책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병사를 위하여 서로 응원하는 꾀도 될 것입니다. 옛 사람의 말에, “장수가 밖에 있어서는 경우에 따라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않을 수 있다.” 하였으니, 이는 일의 기미에 임하여 융통성이 있는 것을 귀하게 여김이요, 마치 교주고슬(膠柱鼓瑟 변통할 줄 모른다는 뜻)하듯이 외곬으로 나가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병사가 멀리 천리 밖에 있어 이 도리를 알지 못하고 지극히 위급한 처지에 빠졌으니, 어찌 가까운 데 있는 적을 버리고 후회를 남겨서야 되겠습니까. 사사로운 생각으로는, 두 원님이 위로 수원의 기한에도 미치지 못하고 아래로 금산의 약속도 돌아보지 않는다면 뒷날의 공론이, “적의 칼날을 도피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하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스스로 계획을 잘해서 남의 비난을 듣지 말도록 하시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고종후(高從厚)가 지었다.
○ 재상(宰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올리다.
양산(梁山)ㆍ밀양(密陽)이 연달아 함락된 뒤로 적의 군사가 승세를 타서 이미 거침없이 몰고 갈 기세가 있다는 것을 듣고, 식자 계급에서는 적들이 우리의 허점을 찔러 곧장 올라갈 것을 근심하여 간담이 써늘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순찰사(巡察使)가 나주(羅州)에 있을 적에 사람들이 모두 하루빨리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가서 응원해 줄 것을 바랐고 광주 목사(光州牧使) 정윤우(丁允祐) 역시 순찰사를 보러 가서 빨리 근왕(勤王) 길에 나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으나, 순찰사가 막연히 들으며 염려하지 아니하니 정 공이 민망히 여기며 그저 물러 나오고 온 도내 사람들은 한갓 두 주먹만 움켜쥐며 통분해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징병하라는 교지가 내리자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온 도내 군사를 모두 일으켜 일제히 여산(礪山)으로 치닫게 하였는데, 집합 일자는 너무 촉박하고 겸하여 장맛비가 열흘에 걸쳐 내렸습니다. 그러자 각 읍의 수령들은 기약에 뒤졌다는 꾸지람들을 받을까 두려워서 길에서 마구 몰아쳐 밤낮 없이 달리는지라 군사들은 배고픔과 목마름이 자심하여 스스로 길가에서 목을 매어 죽는 자까지도 있었으니, 그 괴로운 형상이 이처럼 심했습니다. 그러나 감히 원망하고 배반하지 않는 것은 모두 근왕(勤王)의 일이 시급하여 정의로써 군사를 일으킨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순찰사가 공주(公州)에 당도하여, 서울이 지켜지지 못하고 임금께서 서도(西道)로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 한 군관(軍官)을 시켜서 손에 전령패(傳令牌)를 가지고 말을 달려와 외치게 하기를, “진을 파하라. 진을 파하라.” 하니, 모든 군사가 아연하지 않는 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두 수령이 공주로 달려가서 순찰사를 보고 진을 파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말했으나, 순찰사가 듣지 않았습니다. 이에 모든 군사가 한꺼번에 모두 흩어져 함부로 욕하고 길에 가득히 들어차서 모두 하는 말이, “순찰사는 근왕에 전력할 뜻이 없으면서 다만 우리들만 괴롭힌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부터 군중들이 모두 짜증을 내며 비로소 해산할 생각이 나자 마치 물이 내리 쏟아지듯 하여 억제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 후 두 번째 군사를 징집하게 되자 여러 고을의 군사 중에 도중에서 무너져 흩어진 자가 서로 잇달았으며, 비록 더러 불러서 집합시키기도 했으나 막 집합시켜 놓으면 바로 무너져 그렇게 하기를 두 번 세 번 가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광주로 말하면 박광옥(朴光玉) 군과 더불어 흩어져 도망간 군사를 분주히 개유(開諭)하고 수습해서 천자(賤子)인 고종후(高從厚)와 고인후(高因厚)로 하여금 나누어 거느리고 수원(水原)의 전소(戰所)에 가서 광주 목사에게 교부(交付)하게 하였습니다. 이때에 순찰사는 도중에서 머뭇거리며 모든 군사를 돌려 진위(振威)에 당도하여 4, 5일 동안 유숙하노라니 사람은 모두 비를 맞고 서 있었습니다. 용인(龍仁) 싸움에 이르러 왜적의 군사는 수도 적고 형세도 궁해서 산마루 험한 곳에 진을 치고 울을 막아 스스로 방위하고 있는데, 충청도 순찰사ㆍ절도사의 병력과 전라도 순찰사ㆍ방어사의 병력이 수효가 십만으로 헤일 만하니 그런 조그마한 무리쯤이야 족히 깃발 한 번 휘두르면 박멸할 수 있었을 것이어늘, 불행히도 백광언(白光彦) 등 여러 사람들이 적을 경솔히 여겨 먼저 올라가다가 한꺼번에 진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대부대가 아직 건전한 이상 승리를 거두는 것이 어렵지 않았는데, 갑자기 3명의 왜적이 앞장서서 곧장 전진하는 것을 보고서 충청 절도(忠淸節度)의 군사가 먼저 무너지고 여러 진이 계속 무너져 화약ㆍ총통(銃筒)ㆍ전마(戰馬)를 모두 적에게 버려두었습니다. 나 고경명이 몸소 전사(戰士) 4, 5명을 만나본 바 매우 자상히 말하는데 마치 약속이나 한 것같이 모두 동일하며, 장성 현감(長城縣監) 백수종(白守宗)이 하는 말도 역시 전사들과 서로 같았으니, 고금 천하에 싸우다 패한 자가 퍽 많지만 이와 같이 통분하고 애석한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순찰사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와서 충청도 내포(內浦)를 경유하여 임피(臨陂)에 당도하자 곧 도내 열읍에 공문을 띄워 정병을 징발하여 바닷길로 임진(臨津)에 도달하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소란하여 선뜻 명령에 응하지 아니하니 비록 억압하여 몰아댄다 해도 마침내는 반드시 전과 같이 분산될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순찰사가 지금 태인(泰仁)에 있으면서 의논할 일이 있다고 칭탁하고 격문(檄文)을 띄워 좌수사(左水使) 이순신(李舜臣)과 무주(茂朱)의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을 불러 모두 태인에 모이게 하였는데, 태인은 좌수영(左水營)과의 거리나 무주와의 길이 모두 너무 머니, 오늘날 적병이 국내에 밀어닥쳐 변란이 숨 한 번 쉴 만큼 짧은 시간에 달려 있는데 순찰사가 의논한다는 일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나 고경명이 이때 전주에 있으면서 이계정이 달려 가는 것을 보고 또 각관(各官)에서 전달한 보고를 얻어 본즉, 왜적이 무주의 속현(屬縣)에 들어와 민가를 불태웠고 적의 배 두 척이 또 순천(順天)에 침범하여 온 경내가 계엄 속에 들었으니, 대개 왜적이 우리나라 사람을 이용하여 간첩으로 삼기 때문에 빈틈을 타서 몰래 들어온 것입니다. 순찰사의 전후 처사를 더듬어 보면, 실로 그 의도가 무엇을 하려고 함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도사(都事) 최철견(崔鐵堅)ㆍ부윤(府尹) 권수(權燧)를 만나본즉, 이때 최철견은 전라 도사가 되었고, 권수는 전주 부윤이 되었다. 역시 순찰사의 의도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니 괴이한 일이요, 통분할 일입니다. 당초 병사(兵使) 최공(崔公)이 의병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얼굴에 나타내며, 도울 수 있는 일이면 힘을 다했습니다. 그때 순찰사가 다른 지방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에 병사는 순찰사에게 공문을 보내 각 고을의 남은 무기를 의병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의병을 일으킨 후로 약간의 무기를 지나는 여러 고을에서 얻었으나 대개는 묵고 헐어서 쓰지 못할 물건들이며 그나마 수효도 많지 않아서 일행 중에 군관(軍官)까지도 다 갖지 못했는데, 하물며 싸우는 마당에 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듣자니 순찰사가 용인에서 패전한 후부터는 매양 본도의 인심이 고약하다고 트집을 잡으며 오직 도망친 군사들에게만 허물을 돌리어 뒷날 자신을 합리화할 계책을 하고 있다가, 마침내 의병이 한 번 일어나서 모집에 응하는 자가 구름같이 모이는 것을 보고서 순찰사가 마음이 몹시 달갑지 않아서, “군고(軍庫)를 함부로 열었다.” 하고 명목을 잡는데 까지 이르고 있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요 두려운 일입니다. 무릇 수령 가운데 의거에 따르기를 원하는 이도 역시 많으나 순찰사에게 간섭을 받아[掣肘] 끝내 의병 노릇을 할 수 없게 되고 수령들도 또한 순찰사의 행동을 본받은 자가 있어 다방면으로 저해하여 의거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좌절시켜서 심지어 의병 모집에 응한 자의 처자를 잡아다 가두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래도 다시 종군을 하고 떠나려고 하지 않으니 진실로 슬픈 일입니다. 요즘에 각 도의 근왕군(勤王軍)은 한 번도 왜적과 더불어 싸운 일이 없이 양경(兩京)을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마침내는 적이 무서워서 임금을 버리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취화(翠華 임금의 수례)가 길을 떠나 멀리 함경도[咸關]로 순행하고 계시니 구구히 기대할 바는 오직 의병을 한 번 일으키는 데 있거늘, 순찰사의 뜻이 이와 같고 조정은 천리 밖에 떨어져 있어 대궐 문앞에 나아가 호소할 길이 없은즉, 원한을 품고 스스로 불칙한 죄망에 걸려 죽을까 심히 두렵습니다. 믿는 바는 먼 데나 가까운 데나 모두 소문을 듣고 호응하여 힘세고 날랜 자들이 발이 부르트도록 쉬지 않고 모여들고 있으니, 오직 벌판에 나아가 눈물을 뿌리며 이 심정을 밝힐 것을 생각할 따름입니다.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것은 고금의 정론이니, 성공하고 못할 것은 계산할 바가 아닙니다. 오직 바라건대 상공(相公)은 비생(鄙生)의 일편단심을 통찰하시어 곡단(曲端)과 같이 원통하게 죽지 않도록 하여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태헌(苔軒)의 수초(手草)로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 전주 전 만호(萬戶) 황박(黃璞)이 자원한 군사 2백여 명을 모아 웅현(熊峴)에 복병을 설치하니, 웅현은 바로 전주와 진안(鎭安)의 경계이다. 이때에 이광(李洸)이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과 김제 군수(金堤郡守) 정감(鄭湛) 등을 복병장으로 삼아 웅현을 파수하게 했는데 황박이 가서 조력한 것이다.
○ 경상 초유사(慶尙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전 현풍 군수(玄風郡守) 엄홍(嚴泓)을 본군의 병장으로 삼고, 곽찬(郭趲)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았다. 이때에 현풍 등지의 유수한 집안들은 모두 낙동강(洛東江)을 건너 가야산(伽倻山)이나 덕유산(德裕山) 등지로 들어갔는데, 김성일이 영지(令旨)를 전달하여 엄홍 등을 불러 본임(本任)으로 정하고, 또 격문을 띄워 이민(吏民)을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
나라의 운수가 극히 비색하여 칠치(漆齒 왜적을 이름)가 몰아 들어오니 임금은 파천(播遷) 길을 떠나시고 종묘 사직은 먼지를 무릅쓰게 되었다. 슬프다! 사람이면 다 양심이 있는 법이니, 무릇 이 땅에 살며 밥을 먹는 자는 누구나 의리와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지 않겠는가. 생각건대 영남(嶺南)은 본시 추로(鄒魯 문명의 나라를 이름)의 고장이라 일컬어져 왔거니와 현풍 한 고을은 더욱이 선비의 집단지가 되어 있으니, 그 사이에 절의를 위해 죽은 이를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지금 적이 성중을 점령하고 사방으로 나와 불을 지르고 있으니 그 해를 입는 자는 부모가 아니면 곧 처자다. 위로 군부(君父)의 원수와는 한 하늘 밑에 함께 살 수 없는 것이요, 아래로 형제의 원수와는 더불어 하루도 같이 할 수 없는 것이니, 나는 알건대, 산중에 엎드려 있는 자는 창을 베고 자며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뜻이 일찍이 잠시도 마음에 잊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 한 사람도 의병을 일으켜 분개하며 적을 토벌한다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워낙 극성스러운 적의 무리가 가득 몰려들어 우리 백성이 싸워 볼 만한 여지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충의의 선비는 죽고 사는 것으로 지조를 바꾸지 않고, 용맹 있는 사람은 강하고 약한 것으로 기운이 꺾이지 않는 법이니, 원컨대 긴밀히 서로 연락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그 힘이 능히 적을 막을 수 있다면, 고을에 있으면서 충갑(冲甲)의 군사처럼 떨쳐도 좋고, 형세가 능히 자립할 수 없거들랑 군사를 이끌고 병사의 진영으로 가도 좋다. 혹시 당면한 직책을 버릴 수 없다고 여긴다면 강을 건너 의거에 참여해도 무엇이 불가할 것 있겠느냐. 지난 번에 합천(陜川)과 의령(宜寧)에서 정인홍(鄭仁弘)의 경우와 고령(高靈)에서 좌랑(佐郞) 김면(金沔)의 경우에 충성을 떨치고 의기를 다하여 한 번 외치자 각 고을이 호응하였고, 요즘 와서는 군사의 성세가 크게 떨치니 나라를 회복할 가망이 거의 확실하다. 본군의 백성들이 왜놈의 위력에 겁내지 말고 더욱 의열(義烈)의 기운을 가다듬어 한결같이 임금의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충의로운 분기가 격동하여 용기가 백 배나 솟을 것이니 저 왜적이 어찌 감히 우리를 당적하겠는가. 하물며 지금 왜적이 얼마 안 되는 군사를 끌고 깊이 들어와서 그 흉악한 기운이 이미 개성(開城)의 청석(靑石)에서 꺾이었고 서경(西京 평양)의 대동강에 침몰되었으며, 철령(鐵嶺)을 넘어 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에게 빼앗기고 명(明) 나라 병사 5만 명이 이미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조(祖)ㆍ곽(郭)ㆍ왕(王) 세 대장이 각기 정병 여러 만 명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달려와 응원하며, 해군 10만 명이 산동성(山東省)으로부터 곧장 왜놈의 소굴을 공격하고 있으니 우리 세력은 저절로 확장되고 적은 망할 날이 머지 않은즉 이야말로 뜻있는 선비가 옷소매를 떨치며 공을 세울 절호의 시기다. 만약 시일을 끌다가 앉아서 기회를 잃는다면 화란을 안정시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장차 군신(君臣) 간의 대륜(大倫)에 비추어 죄를 얻게 될 것이니 그렇다면 무슨 면목으로 천지간에 서겠는가. 다만 무식한 서민은 임금을 섬기는 의를 모를 수도 있은즉 그들에게는 오직 상과 벌로 권하고 징계할 수 있으니, 그들은 조정에서 내린 방목을 보지 못했는가. 공천(公賤)이나 사천(私賤)을 막론하고 적의 목 하나나 둘을 베어 바친 자에겐 육품(六品)의 관직을 주고 목 셋을 바친 자에겐 통정(通政 삼품)을 주고, 왜의 장수를 베어 바친 자에겐 가선(嘉善 종이품(從二品))을 주어 공을 기록한다 하였다. 무부(武夫)와 용사가 급히 의병에 참여하여 날랜 기운으로 전쟁에 임한다면, 높게는 통후(通侯)의 인(印)을 받을 수 있고 낮아도 공신의 반열에 서게 되어 영화가 한 세상에 빛나고 덕택이 후손에게까지 미칠 것이니, 또한 아름답지 않겠는가. 만약 혹시 계책이 이에 미치지 못하고 여전히 숲 속에만 숨어 있다면, 비록 왜놈의 칼날은 벗어날지 모르나 깊은 산중에서 굶어 죽는 신세를 면하겠는냐. 가령 만에 하나로 목숨을 유지한다 해도 하루아침에 난리가 평정되면 국가에는 엄연한 형벌이 있으니 비단 제 자신만 목이 달아날 뿐 아니라 그 처자된 사람까지도 사형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몸소 싸워 큰 공을 이루고 중한 상을 받는 것에 비하면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이 어떠하겠느냐. 살아서는 열사(烈士)가 되고 죽어서는 충혼이 될 것이니 너희들은 부디 힘쓸지어다. 비안(庇安) 등 여러 읍에 모두 이 격문을 띄웠다.
○ 중외(中外)의 대소 신민에게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리다.
왕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내가 이치를 살피는 것이 밝지 못하여 정가가 그 요령을 잃었고, 어진 덕도 실지로 있지 아니하여 은택이 아래로 미치지 못했으며, 토목(土木)의 공사는 연이어 거듭 백성의 힘을 곤하게 했고, 궁중(宮中)을 엄밀히 단속하지 못하여 조그마한 이끗으로 백성을 죄망에 몰아넣었다. 심지어 바깥 지방의 산택(山澤)까지도 세력가에게 점령을 당하여 뭇 백성들의 원망이 자자한데, 나는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오직 변방의 근심만 생각하여 성을 쌓고 못을 파며 군사를 훈련하고 무기를 수선하여 기어이 민생을 보호해서 적의 칼날을 면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백성의 원망은 더욱 쌓이고 이로 인해서 인심은 더욱 이반되어, 적의 군사가 경내에 가까이 오자 형세를 바라보고 먼저 무너지니 백성을 보호하자는 설비가 마침내 도적에게 필요한 물자가 되고 말았다. 말이 이에 미치니, 스스로 용납할 길이 없구나. 나는 생각건대, 영남은 실로 인재의 부고로서 부로들은 충성과 효도를 가르치고 자제들은 시서(詩書)를 익혀서, 저 옛날 김유신(金庾信)은 강개(慷慨)한 결심으로 난리를 평정하고 김춘추(金春秋)는 앞장서서 적진에 달려 들었는데, 이 모두 본 지방 인물들이니 도내 80여 고을에 어찌 충의의 선비가 없겠느냐. 그런데 오직 너희 사서(士庶)는 네 아비와 네 할아비가 국가의 후한 은혜에 젖었는데 하루아침에 난리를 당하자 이내 나를 버리고자 하니, 나는 너희들을 허물하지 않으나 너희가 차마 나를 버린단 말이냐. 윤대(輪臺)에서 내린 한제(漢帝)의 한 장 조서(詔書)는 바로 평시에 지난 일을 후회한 것 뿐인데도 한 나라 백성이 오히려 감격했거늘, 하물며 지금 난리 중에 성상(聖上)께서 애통하심이 이에 이르고 허물을 자책하심이 이에 이르렀음에랴. 이는 실로 초목ㆍ곤충도 모두 감동할 일인데, 더구나 양심을 지니고 윤리를 아는 우리 사람임에랴. 더구나 의리를 알고 충성을 품은 선비들임에랴. 진실로 마땅히 전장에서 목숨을 던져 적개심을 다해야 할 터인데, 한 사람도 북면(北面)하고 근왕(勤王)하여 임금을 위급한 시기에 구출하는 자가 없어 임금으로 하여금 오래도록 용만(龍灣) 천리 밖에 머무르게 하니, 원통도 하다.
○ 명(明) 나라 장수 조승훈(祖承訓)ㆍ사유(史儒)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의주(義州)에 당도하다.
○ 경상도 고령(高靈) 선비 박정완(朴廷琬)이 장사 4백여 명을 모집하여 강 기슭에 복병을 설치하고, 사재를 기울여 군량을 구입하여 활과 화살을 준비하여 창녕(昌寧)ㆍ현풍(玄風)ㆍ성주(星州)에 왕래하며 충돌하는 적들을 많이 잡았다. 그리고 또 배를 수선하고 수장(水杖)을 설치하여 강을 타고 내려 오는 적을 막았다. 김면(金沔)이 무계(茂溪)에서 승첩한 것은 실로 박정완의 힘이 컸는데 공을 나누는 데는 참여하지 못했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긴다. 《경상 순영록(慶尙巡營錄)》에 나온다.
○ 경상도 초계(草溪)의 전치원(全致遠)ㆍ이대기(李大期)ㆍ전우(全雨) 등이 군사를 모집해 일으켜 정인홍(鄭仁弘)에게 소속되어 무계 및 낙동강에 왕래하는 적을 토벌하는 데 협조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가을 7월 2일. 적병이 용담(龍潭)으로부터 장수(長水)로 향하자 조방장(助防將) 이유의(李由義) 등은 군사를 버리고 도망가다. 남원 판관(南原判官) 노종령(盧從岭)이 본부로 달려가서, “적의 부대가 이미 장수를 지나갔으니 곧 두 관아(官衙)의 권속을 남산 밖 산동촌(山洞村)으로 보내어 대피시키고 묘봉사(妙峯寺)로 들어가라.” 외치고, 노종령도 단신으로 도망쳐서 이날 밤에 원천촌(原川村)으로 들어가 잤다. 내 집에 유숙하였다. 이튿날 산동(山洞)으로 가본즉 수성원군(守城元軍)ㆍ팔결연호군(八結煙戶軍) 및 향병(鄕兵)은 모두 다 흩어져 달아나고 부사(府使) 윤안성(尹安性) 만이 홀로 부 남쪽 술산(述山)에 남아서 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은 적병이 오지 않았다.
이유의의 분산된 군사는 모두 중도에 떠도는 자들이라, 성중에 함부로 들어와 창고의 곡식과 군기를 마구 가져가니 교방(敎坊)ㆍ관청이 일시에 탕진되고, 경내 사람들도 역시 성중에 들어와 그 나머지 물건을 훔쳐냈다. 윤안성은 적이 오지 않는 것을 알고 또 난병(亂兵)이 들어와 노략질하는 것이 심하다는 것을 듣자, 말을 돌이켜 달려 들어와 그중 심한 자를 목 베고 임춘루(臨春樓)에 주둔했다. 동문루의 이름이다. 부사는 바로 나의 아버지와 한 마을에 살던 옛친구 분이시라, 때마침 내가 난리를 피해서 용추동(龍湫洞)에 있다가 그 연유를 듣고 달려가 뵈니 부사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민간을 방문해서 도로 집합하게 하라는 뜻으로 각 방(坊)에 첩지를 내려라. 운운” 하였다.
3일. 적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떠도는데 관부의 물건을 옮겨 둘 방법이 없으니, 마침내 왜적의 소득이 될 바에야 백성에게 나누어 주는 것도 무방하다고 여겨 심히 금지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사창(司倉)ㆍ관청 각처의 잡물이 전부 탕진되어 조석의 지공(支供)조차 나올 데가 없었다. 형편이 부득이 하여 팔결군(八結軍)은 따로 지출을 하는데 명분 없는 징수는 역시 심히 미안하므로 각 방(坊)에 관청 물건을 가져간 사람들을 잘 개유하여, “자진해서 다시 바치면 원래 도덕질해 간 것이 아니니 죄를 따질 까닭이 만무하며, 많은 수효를 바친 사람에게는 그 수효 중 삼분의 일을 상으로 줄 터이니 급히 실행하라.” 하였다.
○ 전날 김면(金沔)ㆍ곽재우(郭再祐) 양군(兩軍)에서 노획한 왜놈 장물 가운데 궁중의 물건이 많이 들어 있으므로 김 성일(金誠一)은 남원 고을이 적과 거리가 멀다 여겨 보내어 보관하게 했는데, 3일 난병이 도적질해 가서 전부 없어졌다.
4일. 전 도사(都事)는 조헌(趙憲)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기로 나서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沃川) 사람인데 처음에 귀양가 있던 곳으로부터 임금의 은혜를 입어 본현(本縣) 마을 집에 와 있으면서 낮에는 농사 짓고 밤에는 글 읽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다. 이윽고 서울이 무너지고 임금께서 서도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자, 통곡하고 분주히 의병을 모집하여 이날에 공주(公州)에서 깃발을 들었는데 모집에 응한 자가 천여 명이었다. 손수 격문을 초하여 삼도(三道)에 전달했다. 그 격문은 다음과 같다.
하늘과 땅의 큰 덕은 생(生)이니 만물이 각기 제 자리를 얻게 할 것을 생각하라. 귀신과 사람이 미워하는 것은 적(賊)이니 원수를 같이 쳐서 그 고을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자. 모두들 보고 들으면, 거의 분개하고 미워하리라. 저 침략해 오는 왜적을 보면 버릇없는 묘민(苗民)보다 심하구나. 사람 죽이기를 풀 베듯이 하여 원한이 온 나라에 가득찼고, 군장(君長)을 시해하기를 여우와 토끼 사냥하듯 하니 죄가 하늘에 사무쳤다. 저 한착(寒浞 은(殷) 나라의 역적)처럼 스스로 넘어질 줄을 모르고, 역량(逆亮 금(金) 나라 임금)이 멀리 치러 갔던 것을 본떴다. 달콤한 말과 간사한 꾀로 처음에는 이익을 제공하여 사람을 속이더니, 자취를 감추고 군사를 숨기어 마침내 바다를 넘어 땅을 차지하려 드는구나. 태평한 지 오래라, 비록 막아낼 만한 군사가 없다지만 유린해서 깊이 들어오니 이처럼 번질 것은 생각지 않았다. 조령(鳥嶺)이 마침내 무너지니 한강(漢江)에서 무기가 번뜩이는 것이 원통하고, 용여(龍輿 임금의 수레)가 멀리 순행하니 변방에서 북두별 바라보는 것이 슬프도다. 어찌 생각했으랴! 수백 고을에 끝내 한 명의 남아가 없을 줄이야. 남의 자식을 고아로 만들고 남의 아내를 과부로 만들어도 오히려 화기[和光]를 손상하여 재앙을 이룬다 하거늘, 백성의 집안을 도륙하고 백성의 살림을 불태우면 어찌 악이 차서 죄를 부르지 않을까 보냐. 서민의 원한은 날로 쌓이고 의사의 기운은 달로 더하다. 하물며 남의 나라의 죄 짓고 도망간 사람들을 수용하는 것이 탐욕 많은 금수(禽獸)보다 심함에랴. 사람의 꼴을 지녔으면 양심이 있을텐데 측은하고 수치스러운 생각이 전혀 없으니, 하늘의 명령을 받들면 반드시 천벌을 봉행(奉行)하게 되는 것이다. 어찌 힘세고 강포한 자를 무서워하랴. 전쟁을 잘하는 자는 최상의 형(刑)을 받는 것이니, 전에는 백기(白起 진(秦) 나라 장수)가 사형을 받았다. 죽이길 좋아하는 자는 대벽(大辟 목 베어 죽이는 형)을 범하는 것이니, 뒤에는 황소(黃巢 당(唐) 나라 역적)가 패해 처단되었다. 그러므로 문명인이나 야만인이나 모두 이 왜적을 떳떳이 죽일 것을 생각한다 들었고, 또한 반드시 산천 귀신이 이미 추악한 무리를 음주(陰誅)하기로 의논했으리라. 그런데 우리 군사를 이끌어 가는 규율을 생각하면, 대개 《주역(周易)》에 나타난장인(丈人)의 원길(元吉)이 아니다. 누가 황금으로 띠를 두르고 백마(白麻 사장령)의 소중한 선고를 받았는가. 영호(嶺湖)를 돌고 돌면서 군부(君父)의 근심과 급함도 모르고 경기 근처에 머뭇거리면서 단단한 오랑캐를 앉아서 불러들이며, 삼도(三道)를 끼고 있으면서 앞서 출전한 자를 구원하지 않고 한 번 패함으로 인해 영영 뒤에 일어날 기회조차 잃었으니, 그 도적을 기른 큰 죄상을 따진다면 어찌 분곤(分閫 임금의 특명을 받은 대장)의 대권을 맡을 수 있으랴.
묘당(廟堂 조정)은 격리되어 머나먼데, 적진은 빙 둘러서 첩첩하구나. 군사의 기세는 누차 꺾이어 한탄만 하고 민생이 다시 소생할 길은 끊어졌으니, 만약 그대로 내버려두면 반드시 미란(糜爛 죽이 풀어진 것같이 썩어 문드러짐)되고 말 것이다. 장차 기자(箕子)가 끼친 풍화로 하여금 영원히 야만의 지역이 되게 한단 말이냐. 하늘이 이 나라를 도와서 아직도 호남 한 지역이 온전하니, 백성이 주도(周道 조국)를 생각하매 어찌 초호(楚戶)의 세 집이 없을쏜가. 우격(羽檄 징병하는 격문)이 강을 지나는 것을 조목조목 보니, 과연 한 마디 말이 중함을 알겠다. 고 동래(高東萊)는 적을 잘 추적하고 김 수원(金水原)은 군사를 잘 쓰며, 곽 장군(郭將軍)은 영남(嶺南)에서 군사를 이끌어 용감한 기운이 있고 김 진사[上舍]는 바다 고을에서 격문을 날려 열렬한 위엄을 지녔다. 이 분들은 모두 세상을 바로잡을 영재들이라 반드시 사람을 움직일 묘법이 있을 것이니, 머지 않아 비후(豼貅) 같은 용감한 군사가 왕성하게 모여서 개나 쥐 같은 오랑캐를 없앨 것이다. 하물며 호서(湖西)의 선비들 풍습은 진실로 등군(鄧君)의 본뜻에 갑절은 되어 앞다투어 적개심을 품고 있으니 어찌 역사에 남길 공이 없을쏘냐. 청컨대 한 번의 수고를 꺼리지 말고 세 번 이기는 공을 이루도록 기약하세. 의당 뜻이 같으면 서로 호응할 것이니, 응당 온 나라가 멀리 합세하리라. 인헌(仁憲)의 기특한 꾀를 쓰니 단정코 손녕(孫寧)의 낯가죽을 벗기게 될 것이고, 무목(武穆)의 묘한 계산을 생각하니 모름지기 올출(兀朮)이 수염 깎는 꼴을 볼 것이다. 뜻이 해이하지 않으면 귀신이 감동하고 사람이 따르는 것이요, 일을 이루고자 하면 하늘이 돕고 땅이 보호하나니, 어찌 무도한 도적으로 하여금 밝은 나라에 오랫동안 불법을 범하게 할까보냐. 원충갑(元冲甲)이 한 번 북을 울리고 용맹을 떨치자 합단(哈丹)을 계악(鷄嶽)에서 무찌르고 금(金) 원후(元侯)가 한 번 활을 쏘아 적을 죽이자 몽고병(蒙古兵)을 황민(黃岷)에서 물리쳤으니, 이들은 선비와 승려로서 무력이 있는 명장이 아니지만 한 번 생각을 잘함으로써 천추에 꽃다운 이름을 남겼느니라. 이 나라 강산을 돌아보면 실로 인재의 부고(府庫)이다. 전조(前朝) 말엽에 해적이 여러 번 침략했으나 선배들의 힘을 입어 물리쳤고, 을묘년 여름에 갑자기 변방의 난리가 일어났으나 호걸들이 나서서 평정했다. 이제 백 년 동안이나 백성을 잘 길러냈는데, 어찌 만갑(萬甲 만군(萬軍))을 가슴속에 감춘 이가 없으랴. 혹은 백 보 밖에서 쏘아 버들잎도 뚫고 혹은 큰 산에 들어가 맨손으로 범을 잡으니, 문무(文武)를 차별해 보는 것은 정책의 그릇됨이 한탄스럽다. 생각건대 국가를 제 몸같이 여겨 신하된 도리를 다하는 자를 보기 어렵구나. 환란을 당하면 어찌 뒷 조심을 경솔히 하랴. 옛일을 거울 삼는 자는 마땅히 사전에 방비해야 한다. 진실로 천지를 돌려놓을 만한 계략이 있다면 어찌 황하(黃河)가 띠 되고 태산이 숫돌 되도록 영원하자는 맹서를 아끼겠는냐. 삼도의 힘을 합하여 위급을 해결하는 것이 오직 이때요, 일생의 재주를 다하여 어려운 고비를 극복하는 것이 바로 이날이다. 뜻을 같이한 우리 여러 선비는 이 얻기 어려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용감한 무인들과 결속하여 위급한 국맥(國脈)을 이어 나가도록 하자꾸나. 우리의 활을 당기고 우리의 화살을 먹여서 먼저 아지발도(阿止拔都)의 목구멍을 쏘고 그대의 창을 들고 그대의 방패를 나란히 하여 괴자(拐子)의 발을 연이어 찍는다면 적은 저절로 놀라 달아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며 백성은 응당 도로 모일 가망이 있을 것이다. 밭을 매는 자는 늦은 곡식을 가꾸게 되고 나무 베는 자는 불에 탄 집을 수리하며, 호남과 영남의 한 길을 시원스레 터서 장사꾼들이 사방에 영원히 통할 것이다. 당 나라 현종(玄宗)을 파촉(巴蜀)에서 모셔 왔듯이 우리 성주를 모셔 오면 당연히 애통히 여기는 조서가 내릴 것이고, 순(舜) 임금이 조정의 사목(四目)을 밝혔듯이 우리 이목을 밝혀 약석(藥石) 같은 말을 모아들이면, 옛날의 폐단이 절로 제거되고 좋은 세상의 은택이 미쳐올 것이니, 한 번 싸움에 힘을 다해야만 후손에게 복을 끼치리라.
5일. 적병이 진안(鎭安)으로부터 전주(全州)로 향하니 이광(李洸)이 이정란(李廷鸞)을 시켜 본부의 각종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지키게 하였다. 자신은 각 읍 군졸을 거느리고 만경대(萬頃臺) 산성으로 나가 진을 치고, 영남으로 공문을 발송하여 이르기를, “금산(錦山)의 왜적이 이미 무주(茂朱)ㆍ용담(龍潭)ㆍ진안 등지를 점령하고 또 전주에 침범하여 혹은 감사(監司)ㆍ안무사(安撫使)의 명령이라 칭탁하고 오로지 군사의 모집을 일삼으니, 놈들이 지나가는 열읍에는 우매한 백성들이 앞다투어 서로 따라붙는데 금산ㆍ용담이 더욱 심하다.” 하였다. ‘공문을 발송하여’ 이하는《경상 순영록(慶尙巡營錄)》에 나온다.
○ 경상 좌병사 박진(朴晉)이 고령(高靈)으로부터 밤에 낙동강(洛東江)을 건너 먼저 공문을 발송해 이르기를, “상사(上使)에 관한 것이다. 병사가 감사의 근왕(勤王)하는 군사를 따라 온양(溫陽)에 당도하여, 명을 받고 도로 내려와 각 읍의 군병(軍兵)을 완전히 정돈하여 적을 토벌하고자 당일에 안동(安東) 등지로 떠나는 중이다. 여러 군사와 빠졌던 장정을 수색해 내서 요로에 복병을 설치하여 국가의 치욕을 씻을 것이며, 각종 군량과 잡색 군사는 주장이 인솔하고 아병(牙兵)ㆍ업무(業武)ㆍ무재(武才)ㆍ전마(戰馬)ㆍ쇄마(刷馬)ㆍ수군ㆍ육군은 따로 정하여 상사에게 문서를 작성해 올려서 전령을 기다리도록 하며, 적들이 왕래하는 것을 잇달아 빨리 알리되 함락당한 각 읍에 대해서는 당초 접전한 상황과 함락당한 절차를 장계에 일일이 따져서 보고해야 한다. 용궁(龍宮)ㆍ예천(醴泉)의 적이 깃발을 올리고 물러가기를 서두르고 있으니 각 읍 수령들은 군졸을 집합하고 복병을 설치해 요격해서 큰 원수를 갚도록 할 것이다. 운운.” 하다. 박진이 샛길로 밀양(密陽)ㆍ풍각(豐角)에 당도하여 흩어진 백성을 불러들이는데, 박진이 전에 본군 부사를 지냈기 때문에 종군을 자원하는 자가 5백여 명이었다. 언양 현감(彦陽縣監) 김옥(金玉)과 봉사(奉事) 김대허(金大虛) 등 20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안동을 점령할 양으로 신녕(新寧)에 도착하였는데 안동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신녕 의병장인 봉사 권응수(權應銖)를 조전장(助戰將)으로 삼아 청송(靑松)ㆍ안덕(安德)으로 전향하여 진보(眞寶)에 당도했다. 안동 사람 진사(進士) 신경립(辛敬立)이 찾아와 안동 지세와 적이 주둔한 형상을 자세히 진술하면서, “적병이 만 명이 채 못 되니 오히려 쳐부술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박진이 말하기를, “내 앞에 거느린 군사가 겨우 8백 명밖에 되지 않고 그나마도 모두 하도(下道)의 군사들이라 본부(本府) 도로가 멀고 가까움과 굽고 곧은 상황을 알지 못하니, 반드시 가까운 지역 사람을 더 모집하여 본부 사람을 길잡이로 삼은 연후라야 진격할 수 있소. 그러니 경솔히 행동할 일이 아니오.” 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비안(庇安)에 주둔한 적이 방을 써서 붙이기를, “당도자(當途者) 일본국 재상(宰相)이 어명(御命)을 받든 것은 세상을 교화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목적이니, 군내(郡內)의 사람이 산중이나 혹은 해외로 피난간 자는 집으로 돌아와 전과 같이 편안히 살라. 일본 사람으로 당인(唐人)의 처자를 빼앗은 자는 포박해서 죽이고 있으니, 농업에 종사하는 자는 부지런히 밭을 갈고 물을 대고 풀을 제거하여 가을 수확을 기다리라. 조선(朝鮮)에서 만약 무기를 가지고서 우리 군사의 왕래를 방해한다면 모조리 잡아서 형벌할 것이며, 만약 도망한 백성이 하소연할 일이 있으면 기록해서 개령(開寧) 우리 장군의 진으로 아뢰라. 이상 조목에 대하여 혹시 의심할지 모르나 하느님이 밝게 내려다보니 절대 어기지 않을 것이다. 천정(天正) 20년 7월 일. 안예 재상(安藝宰相) 대리 완호원차 삼보원충(完戶元次三寶元忠).” 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적의 장수는 휘원유로(輝元留老)이니, 개령ㆍ비안(庇安)의 적은 필시 휘원의 부하일 것이다. 그 사연을 보니 흉악하고 간사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6일. 이광이 막하 군사를 시켜 노종령(盧從岭)을 잡아다 곤장을 때려 사실 무근인 일에 놀라게 한 죄를 다스리다.
○ 경상도 삼가(三嘉)의 학유(學諭) 박사제(朴思齊) 형제가 군사를 모집하여 9백여 명을 얻었고, 봉사(奉事) 노흠(盧欽), 유생(儒生) 권양(權瀁)과 단성(丹城) 사람 권세춘(權世春)ㆍ권제(權濟) 등이 또한 의병을 일으키니, 김성일(金誠一)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당일로 장계를 올려 함안(咸安) 사람 이정(李瀞)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았다. 이때 군수 유숭인(柳崇仁)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는데 이날에야 임소로 돌아와서 일을 함께 했다. 이정은 군사 천여 명을 모집하여 군수에게 소속시켜 진해(鎭海)ㆍ창원(昌原)에서 충돌하는 적을 대항하였는데, 매번 싸움에 이기면 선뜻 공을 군수에게 돌리고 자신은 참여하지 않았다. 박사제(朴思齊)는 봉사 윤탁(尹鐸)을 대리 장수로 삼아 그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곽재우(郭再祐)에게 부속시켜 영산(靈山)ㆍ창녕(昌寧)을 왕래하는 적을 방어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고경명(高敬命)이 연산(連山)에 머물러 진을 치고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에게 영(令)을 전달하여 금산(錦山)에 남아 뒤처진 적을 치자고 약속했는데, 이광이 군관을 시켜 고경명에게 군사를 돌이켜 함께 지키기를 청하였다. 고경명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연산에서 떠나 진산(珍山)으로 전진하면서 정예부대를 뽑아서 길을 나누어 정탐하게 했다. 이광이 곽영에게 영을 전달하여, “달려오라.” 했는데, 곽영이 듣지 아니하고 의병을 따라 금산으로 향하였다.
○ 경상도 금산(金山) 소모관인 박사(博士) 여대로(呂大老)가 군사를 모집하여 적을 토벌하면서 권응성(權應星)을 임시 장수로 삼았는데, 김면(金沔)의 지례(知禮)ㆍ금산 싸움에 권응성이 협조해 공격한 공이 있었다. 그 후 권응성은 적에게 습격을 당하여 힘껏 싸우다 죽었다.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창녕(昌寧)의 생원 신방즙(辛邦楫), 충의위(忠義衛) 성천희(成天禧), 정자(正字) 성안의(成安義), 유학(幼學) 곽찬(郭趲) 등이 군사 7백여 명을 모아 복병을 설치하고 적을 쳐서 서로 계속 적의 귀를 베어 바쳤다. 보인(保人) 조열(曹悅)과 성천희 등은 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창녕을 포위하여 종일토록 교전하는데, 적 한 놈이 백마(白馬)를 타고 자칭 고을 원님이라 하므로 마침내 그 놈을 쏘아 당장 죽게 하였다. 그런 지 3일 후에 적은 울을 불태우고 도망갔다. 전 의령 목사(宜寧牧使) 소모관 오운(吳澐)이 한 고을을 개유(開諭)하여 군사 2천여 명을 얻었다.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8일. 적이 웅현(熊峴)을 넘으니 복병장(伏兵將) 김제 군수(金堤郡守) 정담(鄭湛)이 싸우다 죽다. 처음에 도복병장인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이 중봉(中峯)에 진을 치고 황박(黃璞)이 그 위에서 지키며 정담은 그 아래서 지키는데. 이광(李洸)이 장병을 더 보내어 군의 위세를 도왔다. 이날 동이 틀 무렵에 거의 수천 명에 달하는 왜적의 선봉 부대가 모두 기(旗)를 등에 꽂고 칼을 휘두르며 곧장 우리 진 앞으로 들어오는데 고함 소리가 하늘에 잇닿고 쏘는 탄환이 비오듯 하였다. 이복남 등이 결사적으로 먼저 나와 활을 쏘아 낱낱이 명중시키며 군사들이 모두 죽음을 걸고 싸우니 적병이 점점 퇴각하였다. 아침 해가 동으로 올라와, 뒤의 적이 산과 골짜기를 덮으며 크게 몰려오는데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산중턱을 육박하여 여러 부대로 나누어 들어와 싸우는데 흰 칼날이 어울려 번쩍이고 나는 탄환이 우박 쏟듯 하였다. 뒤를 이어 응원하는 적이 얼마 안 있다가 또 와서 합세하여 치열한 싸움을 벌이니, 형세가 바람 앞에 불과 같았다. 황박은 화살도 떨어지고 힘도 다 되어 무너져 나주 진중으로 들어갔다. 적병이 승세를 타고 충돌하여 고갯마루로 오르니 나주의 진 역시 무너졌다. 정담이 말하기를, “차라리 적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한 걸음도 후퇴하여 살 수는 없다.” 하고, 용감히 적과 더불어 육박전을 벌이다 죽었다. 이복남 등은 싸우면서 후퇴하여 안덕원(安德院)에 전주 동쪽 10리 길에 있다. 군사를 주둔하였다. 그 후 만력(萬歷) 23년 을미년(1595, 선조 28)에 김제군의 유생(儒生) 조성립(趙誠立) 등이 정담의 덕과 의를 사모한 나머지 그 공적이 드러나지 못한 것을 애석히 여겨 김찬(金瓚)에게 신원장(申寃狀)을 올렸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조성립 등이 검찰사(檢察使) 상공(相公) 합하(閤下)에 글월을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착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포상하고 공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주는 것은 국가의 권면하는 법전입니다. 작고한 군수 정담은 사람됨이 충직하고 강개하며, 난리가 한창 심할 적에 본군 원으로 오게 되자 충성심을 분발하여 적을 토벌하였으며 용맹 있는 장정들을 뽑아들여 소 치고 술 걸러 배부르게 먹이니 병사들이 감격하여 그 밑에서 일하기를 원했습니다. 공산(公山)으로부터 진을 파하던 날에 공산은 곧 공주(公州)이니, 이광(李洸)이 처음 근왕(勤王)한 곳이다. 전 현감 어득준(魚得濬)과 더불어 울며 말하기를, “경성이 이미 함락되었는데 근왕하는 군사를 일으키지 않으니 주장(主將)의 뜻을 알 수 없다. 장차 의병을 이끌고 멀리 전하의 행차를 따를 생각을 하면서, 육지를 거쳐 좇으려고 하는가. 경기의 왜적이 그득히 퍼져서 바다를 건너 고을로 진군하고 있으니, 연해(沿海)가 아니면 본래 배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 전하께서 계신 데까지 이를 것인가.” 하였습니다. 매양 밥상을 대하면 문득 송구하게 여겨 달게 먹지 않으면서 장좌(將佐)들을 돌아보고 하는 말이, “나물 한 가닥 쌀 한 톨이 모두 주상께서 주신 것이다. 지금 우리 주상께서 서도(西道)로 파천하시어 기갈(飢渴)이 매우 심하실텐데 나는 너희들과 더불어 차마 이 밥을 먹고 있으니 이 어찌 신하로서 감히 마음에 편안할 일이겠느냐.” 하였습니다. 또 일찍이 본군 선비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아무 해에 과거에 올라 아무 해에 아무 벼슬이 되었다가 지금 또 급이 올라서 이 고을에 오게 되었으니 임금의 은혜를 이미 후히 입었다. 하물며 아들 하나가 있어 집안 일을 맡길 만하니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한들 무슨 유감이 있겠느냐. 나의 뜻은 결정되었으니 그대들은 내가 하는 것을 보라.” 하고, 인하여 목이 마르도록 눈물을 흘렸습니다. 또 일찍이 조방장(助防將) 백광언(白光彦)에게 왕래하여 합심해서 적을 토벌하기로 하였으므로, 온 도내가 이 사실을 듣고 모두 국사(國士)의 기풍이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서 용감한 자들이 마음을 의지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복병장이 되어 웅현(熊峴)에 방어하러 갈 적에는 주효를 조촐하게 장만하여 고사를 지내고 떠났으며, 그곳에 가서 보고는 험준한 데를 가려서 나무를 베어 울을 막고 군사들과 더불어 맹서하기를, “절대 싸워야 하며 후퇴란 있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적병 만여 명이 고개로 올라오자 군수가 활쏘는 군사를 독려하여 거느리고 진 앞에 서서 활을 쏘는데, 하나도 적중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적의 무리가 쓰러져 여러 번 퇴각하였습니다. 적의 괴수 한 놈이 백마를 타고 붉은 기를 꽂고 그 무리를 독려하여 곧장 진 앞으로 다가오자, 군수가 다시 두어 걸음을 앞으로 나가 화살을 뽑아 활에 먹이며 여러 장령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이 화살로 반드시 저 괴수놈을 떨어뜨릴 것이다.” 했는데, 과연 그 화살에 맞아 넘어지므로 모두가 탄복하였습니다. 혹자가 나가서 그 적의 귀를 베어 오려고 하자 군수가 꾸짖고 말리며 말하기를, “네가 내 진중에 있는데 어찌하여 공을 탐내느냐.” 하고, 중지시켰습니다. 적이 군수의 진은 마침내 침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나주 진의 허술한 곳으로부터 돌격해 들어오니 그 진의 장병이 모두 흩어졌습니다. 비장(裨將) 한 사람이 바삐 와서 말하기를, “저쪽 진이 이미 무너져 적의 선봉이 충돌해 들어오니 조금 후퇴하여 형세를 관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군수는 눈을 부릅뜨고 크게 꾸짖으며 종사관 이봉(李葑) 및 보좌관 몇 명과 더불어 굳건히 서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기를, “차라리 적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차마 이 몸을 끌고 달아나서 적으로 하여금 길게 몰아치게 할 수는 없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더욱 세차게 활을 쏘니 뒤미처 오는 적이 일시에 사방을 포위하여 마침내 힘이 다해 죽었습니다. 아! 슬픈 일입니다. 본군 사람들이 가서 군수의 시체를 찾는데, 쌓인 시체 속에서 옷섶에 성명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정확한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 싸우다 죽을 뜻은 평소부터 정해졌던 것입니다. 살아 돌아온 각 읍 장병들이 오며 가며 서로 말하기를, “아무 고을 군수는 적을 토벌할 적에 활을 쏘면 반드시 맞히고 맞히면 반드시 꿰뚫었다. 그가 단독으로 죽인 것이 수백 명이며 또 그가 죽인 적의 장수는 가장 괴걸한 자인데, 그 적이 바로 전라 감사라 자칭하던 자다. 적은 글월을 만들어 제사하며 통곡하고 돌아갔다. 흉악한 왜적이 마침내 전주에 충돌하지 못한 것도 모두 정담의 힘이니 어찌 난리가 평정된 이날에 힘을 모아 사당을 세워 풍패(豐沛 전주)를 보존한 공을 보답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하며, 경내에 초빈을 하고 초하루ㆍ보름과 세시(歲時)에 곡하고 제를 지내니 본군 사람들이 의를 사모하는 것은 이에 그칠 따름입니다. 지금 흉적이 물러갔으니 죽은 이의 충렬을 위로하고 장래의 용사를 격려하는 것이 국가에 있어 어찌 조금인들 소홀히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합하는 조정에 장계하여 이 사적이 없어지지 않게 하여 주소서.
9일. 적병이 양양역(襄陽驛)으로 전진하여 여염집에 불을 질러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했다. 이튿날 적의 떼가 거침없이 날뛰어 완산성(完山城) 밖에서 진을 치고 드나들며 도적질을 하니, 이광(李洸)이 금구(金溝)로 도망해 가서 만경대(萬頃臺) 군사들이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다. 적이 우리 군사가 분주하는 것을 보고 자기의 뒤를 습격할까 의심하여 그날 밤으로 금산(錦山)ㆍ무주(茂朱)로 돌아갔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전주가 다행히 보전되었으니, 산성이 무너진 것이 도리어 유리하게 되었다. 한창 적병이 성 아래에서 충돌할 적에 경기전 주관(慶基殿主官) 오씨(吳氏)가 어영(御影)을 받들고 옥구(沃溝)로 달아나 뱃길로 서해 바다를 거쳐 임금이 계신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하니, 주상 전하께서 울며 절을 드리시고 친히 제사하신 후 예조(禮曹)에 명령하여 영변(寧邊)에 고이 모시게 하셨다. 그 후 만력 42년 갑인년(1614) 광해군(光海君) 7년 가을 9월 18일에 다시 전주에 모셨다.
○ 경상도 영산(靈山)에 사는 공휘겸(孔撝謙)이란 자가 난리 초반에 적에게 붙어 함께 서울에 와서 자기 집에 편지를 보내기를, “내가 당연히 경주 부윤(慶州府尹)이 될 것이요, 낮아도 밀양 부사(密陽府使) 벼슬은 차지할 것이다.” 하고, 또 주상전하께 범하는 말이 있으므로 곽재우(郭再祐)가 듣고 몹시 분개하였다. 하루는 공휘겸이 제 집에 돌아오는 것을 곽재우가 포박해 다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쾌하게 여겼다. 이때에 거세고 사나운 남의 집 종들이 많이 주인을 죽이고 횡포를 부려 혹은 칼질을 하며 혹은 간음을 하므로, 곽재우가 들을 적마다 즉시 잡아 죽였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지례(知禮)의 적이 거창(居昌)을 범하는데 적의 장수가 은가마를 타고 큰 기 세 개를 세우고 고함을 치며 들어오자, 김면(金沔)이 힘껏 싸워 후퇴시키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상주(尙州) 사람 진사(進士) 김각(金覺), 교서관 정자(正字) 이준(李埈)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데 그 격문은 다음과 같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임금께서는 서쪽으로 파천하시어 돌아오지 못하시고 세상은 몹시 어지러우니, 적개심을 분발할 책임은 신하된 도리상 당연히 져야 한다. 묻노니, 밤낮으로 와신상담하는 나머지에 가슴속에 계획하는 여러 가지 일이 족히 흉한 적의 심장을 쳐부술 수 있겠는가. 지금 여러분이 다스리고 있는 두어 고을만은 적의 부대가 이미 물러갔으나 그 밖에는 아직도 가득 차 있으니, 국가에 보답하는 의거와 울타리를 굳건히 할 계책을 마련하는 것이 타는 불길을 잡는 것보다 급한데 같은 배에 풍파를 만났으니 어찌 구원을 늦출 수 있겠는가. 함께 협조하고 성의를 다하여 각기 부족한 힘을 합쳐서 방휼(蚌鷸)의 형세를 좌절시킴이 오직 이때이다. 나 이준은 하늘에다 활을 쏘는[射天] 흉적을 없앨 마음이 분발하여 취일(取日 몽진한 임금을 도로 모셔옴)의 공을 이루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일찍이 동지 2, 3사람과 더불어 흩어진 군사 약간 명을 모집하여 서울에 침범한[侵鎬] 적을 무찔러 서쪽으로 파천하신[踰梁] 군색함을 위로해 드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불행히 본주가 난리를 겪은 나머지 농작물을 수확하지 못하고 무기창고도 불에 타 없어졌으니, 군량은 반쪽의 콩도 저장된 것이 없고 무기는 한 개의 화살촉도 남은 것이 없어서, 저 옛날 제(齊) 나라 군사가 밥을 배부르게 먹었던 것처럼 먹이기는 어렵고 주(周) 나라 군사가 창을 겨누고 섰듯이 무기를 대주지 못하고 있다. 우레처럼 공격하고 번개처럼 달리는 날랜 군사는 모두 다 빈 보따리뿐이요 구정(九鼎)을 들 수 있고 적의 깃발을 빼앗을 만한 힘센 무리는 태반이 빈 주먹이라, 적을 토벌할 뜻은 있으나 무력을 써볼 수 있는 바탕이 없어 실로 오늘날의 큰 근심이 되는 것이외다. 생각건대, 제공(諸公)들이 다스리는 고을은 난리를 겪은 것이 본 고을같이 심하지는 아니하니 만약 한계를 구별하지 않고 적을 토벌하는 준비에 힘을 같이해 주신다면, 저 허세를 부려 날뛰는 놈들쯤은 바로 한 바다에 거꾸러져 사라져가는 잿더미와 같은 격이니 한 도내의 많은 병력으로 어찌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개미처럼 모여서 그 독을 부리는 것을 걱정하리까. 엎드려 바라건대, 각기 역량이 미치는 대로 혹은 한 바리의 곡식이나 혹은 부스러기 쇠붙이라도 모아서 보내주시면, 제공에게 힘 되는 것은 극히 미세하지만 군수에 소용되는 것은 매우 긴요할 것입니다. 군사는 먹을 양식이 있어 싸 가지고 가는 데 근심이 없고 무기는 마음껏 쓸 수 있어 만족을 느끼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적은 부뚜막에 걸린 솥 속의 고기라 문드러지게 삶아낼 것이요 우리는 진흙 속과 이슬 속에서 헤매는 부끄러움을 쾌히 씻을 것입니다. 힘을 다하여 서로 구원해주신 공이 중흥하는 즈음에 힘입은 바 클 것입니다. 이에 무기와 군량을 조달하는 책임자 두 사람을 보내어 편지를 올려 속마음을 피력하는 것입니다. 만약 월(越) 나라와 진(秦) 나라가 서로 형편을 상관하지 않듯이 여기고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형세를 무시한다면, 기대했던 본의가 심히 아닐 것이며, 협력하여 일을 같이 하자는 청원을 또 어느 곳에 구하리까.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금산(錦山)에 진을 친 왜적이 다음과 같은 글월을 고시하다.
대일본(大日本) 대왕은 정치의 도를 조선에 베풀어 백성들을 구휼하려 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바다와 육지의 길을 막아 도리어 원수를 사는가. 이른바 당랑(蟷蜋 사마귀)이 수레바퀴를 항거하고 비부(蚍蜉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든다는 말이 바로 이것인가. 이로 인해 깊은 여항(閭巷)을 찾아 들어가서 기병ㆍ보병이 깃발을 드날리고 칼날을 비껴 드니, 성문은 소실되고 집집마다 포성이 진동하였다. 역당들을 모조리 잡아 목을 잘라 죽이려고 했으나 죄과의 많고 적음을 구별하기 어렵고, 또 그 부모 처자가 가엾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하여 굶주림을 구원해서 생명을 보존하게 했다. 비록 이같이 했으나 싸우려 달겨드는 자는 살해할 것이다. 지난번 무관으로 들[野]에 있었던 사람이 전일의 잘못을 뉘우치고 옛집으로 돌아가서 해를 따라 풍속이 변하기를 바란다면 정리하여 편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일본 황제가 조선 황제와 더불어 반드시 회합을 갖게 될 것이니 너희들은 어찌 알지 못하느냐. 아무쪼록 이 말을 산중의 무관에게 알리어 활과 칼을 버리고 와서 항복한다면 무슨 죄를 당하겠느냐. 만약 이 뜻을 위반하는 일이 있으면 거듭 이 땅에 주둔하여 수백 명의 병관(兵官)을 거느리고 다시 살륙을 가할 것이다. 장협(長鋏) 오장대왕(吾將大王)이 거듭 안무하여 옛 조정에서 이 나라 천자를 위하니, 또한 천행(天幸)의 은혜가 내리기를. 이만 줄인다. 천정(天正) 20년 부상(扶桑) 신 안국사(安國寺). 이것을 보면 과연 전라 감사라고 칭호한 자이다.
또 투서(投書)를 얻어 보니, ‘야운(野雲)’이라 했다. 고경명(高敬命)이 해석하기를, “넓은 들에 희미한 구름 끊어지고, 빈 산에 조각달이 비끼었구나.” 하였다.
○ 이광이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을 남원(南原)의 수성장(守城將)으로 임명하였는데, 권율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남원을 지키면서 도내 각 읍에 공문을 띄워 이광이 근왕(勤王)하는 데 오지 않은 죄상을 들어 공격하기로 하였다.
○ 합천(陜川)의 의병대장 정인홍(鄭仁弘)이 가장(假將) 김준민(金俊民)과 더불어 군사 2천 8백여 명을 거느리고 안언(安彦)의 적을 공격하여 다 섬멸했다. 이때 김준민은 처음 와서 재주를 시험해 본 바 없었고, 성주(星州) 가리현(加利縣) 이홍우(李弘宇)의 군사는 이부산(伊傅山)에 있었으며, 고령(高靈)ㆍ합천의 군사는 가천(伽川) 성주 서면의 마을 이름이다. 에 있고 문여(文勵)의 군사도 역시 성주에 있어 모두 정인홍의 지휘를 받았다. 정인홍이 군중(軍中)에 명령하기를, “반드시 대부대의 적을 만난 연후에야 나가 싸우되, 무릇 우리 장병은 앞서 나가 적을 공격하여 끝까지 추격해서 많이 죽이는 것을 으뜸가는 공으로 삼는다. 적을 쏘아 죽이는 것이 그 다음이요, 공을 요청하기 위해 적의 머리를 베어 오는 것이 최하이다.” 하였다. 이날 밤에 성주 대교천(大橋川) 위에 머물러 진을 치고 새벽을 기다리는데, 큰 비가 갑자기 쏟아져서 도저히 싸울 수 없으므로 부득이 회군하여 고령 마을 집으로 돌아왔다. 정인홍이 말하기를, “종묘 사직은 빈 터가 되고 적의 세력은 날로 더해가고 있다. 우리들이 이곳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은 본시 힘을 다해 한 번 결전하여 적개심을 분발하기로 한 것인데, 사세가 지연되어 앉아서 시일만 허비했으며 하느님이 돕지 아니하여 오늘도 또 이러하니 이는 실로 내가 국가를 위하는 정성이 박약한 소치이다. 이를 장차 어찌하랴.” 하며, 목이 메어 눈물만 흘리고 말을 못하였다. 김준민이 옆자리에 있다가 감격한 얼굴로 일어나 절하며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어쩔 도리 없으나 내일 만약 비가 갠다면 마땅히 마음과 힘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즉시 전령하여 다시 약속을 정하고 밤중에 군사를 내서 사원동(蛇院洞) 안언(安彦) 길 옆에 진을 치고서 군사를 6, 7개소에 매복시키되, 서로 한두 마장 거리를 떨어지게 하였다. 정인홍은 중위(中衛)를 인솔하여 높은 언덕에 진을 치고서 굽어보며 지휘하여 싸움을 독려하였다. 이튿날 적이 무계(茂溪)로부터 떠나서 성주로 향하는데 4백여 명이 왕래하는 적이 날마다 이러하였다. 소ㆍ말 백여 바리에 짐을 싣고 많은 깃발을 벌여 두어 마장에 연이어 뻗쳤다. 그중 혹은 금은의 가면(假面)을 쓰고 금은의 갑옷과 투구를 하였으며, 혹은 닭의 깃으로 만든 옷을 입고 포를 쏘며 칼을 휘두르니 사람마다 간담이 서늘했다. 이윽고 합천의 좌선봉 한 부대가 대응해 포를 쏘며 돌연히 일어나자, 적들이 행군하지 않고 길 왼편에 집결하여 고갯마루를 차단하여 실은 짐들을 중간에 두고 칼 쓰고 총 쏘는 군사를 앞뒤로 배열하였다. 김준민ㆍ정방준(鄭邦俊)이 활 쏘는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말을 달려 산을 내려가 일시에 발사하자, 적도 역시 고함을 치며 칼을 휘두르고 나왔다. 맨 앞에 선 왜의 한 장수가 청흑색을 지닌 큰 준마를 탔는데, 말 위에서 닭의 털로 만든 옷을 입고 금으로 된 가면을 썼으며 붉은 자루로 된 큰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칼 쓰는 군사 수백이 그 뒤를 따라서 크게 외치며 돌격해 오니, 우리 군사는 일시에 놀라 퇴각하였다. 청흑색 말이 워낙 빨라서 날듯이 산으로 올라오자, 우리 군사들이 함께 쇠뇌를 쏘아서 그 말의 뒷다리를 맞혔다. 말이 곧 놀라 뛰어 오르는 바람에 왜장이 우리 진 앞에 떨어지자, 곧 그 말을 빼앗고 그 장수를 베니, 남은 적은 화살을 맞아 다리를 끌고 후퇴해 달아났다. 고령 군사는 남쪽에서 기세를 타고 들어오고, 성주 군사는 북쪽에서 기세를 타고 들어왔다. 김준민ㆍ정방준 등은 결사적으로 혼전을 벌이고 복병은 사방에서 일어나, 고함 소리가 골짜기를 진동하며 좌우의 산상에서는 화살이 비오듯 했다. 적은 포위망을 헤치고 달아날 양으로 포수ㆍ검수(劍手)로써 뒤를 막게 하고 성현(星峴)을 향해 달아났는데, 정인홍이 산상에서 깃발을 휘두르며 싸움을 독려하여 적 한 놈도 빠져 달아나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적은 군수품과 깃발들을 모두 버리고 달아났다. 가천 군사가 또 불의에 돌격해 나오니 적은 대항해 싸울 생각조차 못하였다. 여러 군대가 20여 리를 추격하며 죽였으므로, 죽은 시체가 서로 이어지고 흐르는 피가 들판에 가득했다. 남은 적은 화살을 맞은 채 성현을 넘어 들어갔는데, 성현은 성주 읍과 가까운 곳이라 우리 진은 드디어 군사를 정돈해 돌아왔다. 이 싸움에 적의 한 진을 쾌히 무찔러서 여러 군이 활기를 띠었다. 다만 장령이 적의 목을 베어 오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았으므로 머리 수효는 많지 않고, 빼앗은 것으로는 짐 싣는 말이 백 50여 필, 해와 달이 그려진 큰 기 3개, 그리고 철환(鐵丸)과 화약 등속이 매우 많았다. 빼앗은 준마는 이마 사이에 육각(肉角)이 있어 길이가 한 치 남짓하며 잘 달려 날아가는 것 같아서, 김준민은 매양 그 말을 타고 싸움에 나가 군 앞에 기세를 올렸다. 가장 큰 칼은 버들 판자에 도금한 것이었다. 오래지 않아서 김준민이 또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노다촌(老多村)을 육박하니 바로 무계(茂溪) 진 밖이었다. 적이 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는데, 돌과 나무토막으로 막은 울이 심히 견고하여 쳐부술 수 없으므로 곧 기세만 올리고 되돌아왔다. 얼마 안 되어 무계의 적은 철거하여 성주의 적과 합하고, 현풍(玄風)의 적은 철거하여 대구(大丘)의 적과 합했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곽재우(郭再祐)가 경상 우도 열개의 읍을 수복하니 적병이 모두 좌도로 달아났다. 처음에 현풍ㆍ창녕(昌寧)ㆍ영산(靈山)에 주둔한 적이 매우 성하여 구름과 잇닿을 만큼 진을 높이 치고 오르내리는 길을 만들어 성주와 상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곽재우는 본래 신기한 꾀가 많은지라, 정예 부대 수백 명을 뽑아서 현풍으로 끌고나가 혹은 산상에서 군사를 보고 혹은 성 밖에서 말을 달려 백 가지로 싸움을 거니, 적이 시종 감히 나오지 못했다. 곽재우가 또 한 자루에 다섯 가지가 난 횃불을 만들어 밤중에 고갯마루에 올라 일시에 불을 붙여 들어 불빛이 적진에 비치게 하고,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포를 쏘고 고함을 치며 여럿이 서로 응하여 말하기를, “하늘에서 내려온 홍의장군(紅衣將軍)이 여기 있으니 내일 접전하게 되면 반드시 다 죽이고 말 것이다. 너희들은 후회하지 말라.” 하고, 곧 불을 꺼버리고 몰래 물러났다. 그리고 밝은 새벽에 보니 현풍의 적이 간밤에 이미 도망가 버렸다. 이 거사는 마침 무계의 싸움과 같은 때였기 때문에 적은 더욱 공포심이 생겨서 도망간 것이다. 그 후 5일 만에 창녕의 왜적이 역시 소문을 듣고 철거했는데, 오직 영산의 적이 군사가 많고 강함을 믿고서 오래도록 옮기려 하지 아니하였다. 곽재우가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에게 고하여, 삼가(三嘉)ㆍ의령(宜寧)ㆍ합천(陜川) 등의 군사를 내게 하여, 합천ㆍ삼가의 군사는 윤탁(尹鐸)이 영솔해서 후원을 하게 하고, 의령의 군사는 곽재우가 거느리고 적진과 마주 보는 봉 위에 들어가 진을 쳤다. 3진으로 나누어 곽재우가 중앙에 있었으므로 적의 선봉부대 기병 백여 명이 말을 달려 돌격하여 곧장 중앙으로 범하는데, 곽재우는 조금도 놀라지 아니하고 적의 전봉(前鋒)으로 갑옷 입은 자를 쏘았으며 5, 6명을 연달아 넘어뜨렸다. 적의 탄환이 비오듯 하는데도 곽재우는 태연자약하였다. 군사들이 자기 몸으로 곽재우를 가리며 결사적으로 어울려 싸워 화살과 돌을 마구 던지니, 적의 선봉 말 수십 필이 넘어져 죽고 적도 매우 많이 죽었다. 남은 적이 잠깐 후퇴하자 성 안에 있는 적이 격전하는 것을 바라보고 한꺼번에 나란히 나오니, 윤탁의 군사가 무너져 흩어지므로 적은 승세를 타서 육박했다. 곽재우는 형세가 서로 대적하지 못하게 되어 한편 싸우며 한편 후퇴해서 산으로 올라가 적을 회피하니 적도 역시 감히 끝까지 추격하지 못하였다. 저물녘에 흩어진 군사를 모아보니 하나도 사상을 당한 자 없었다. 곽재우가 윤탁이 구원하지 아니하고 먼저 도망간 죄를 책하여 장차 형에 처하려 하였는데, 윤탁이 다음에 공을 세워 형을 보상하기를 자원하므로 마침내 다시 약속하기를, “명일에 나가 싸워 불리하거든 또 명일에 나가 싸우고 그래도 불리하면 3, 4일을 한하여 기어코 반드시 이기도록 하라. 운운.” 하였다. 이튿날 새벽녘에 곽재우가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들어가 고개 위에 진을 치고 사람을 보내서 정탐하였다. 성문이 활짝 열리고 밥 짓는 연기도 전혀 나지 아니하여 아무런 동정이 없으므로 그들이 무슨 계획이 있는가 의심했는데, 밝은 아침에 사람을 시켜 살펴보니 적은 밤중에 군막을 불태우고 이미 도망하여 까마귀 까치만 성첩에 날고 있을 뿐이었다. 이로부터 창녕 한 길은 적병이 단절되고, 오직 중간 길로 밀양(密陽)ㆍ대구에서 인동(仁同)ㆍ선산(善山)에 이르기까지가 적이 왕래하는 길목이 되었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전지(傳旨)로 인하여 군공(軍功)에 내리는 상의 격식을 알게 된 뒤로부터 혹은 굶주린 백성이나 도망갔다 돌아온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 적의 머리라 속여 바치고 관작과 상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는데, 군공으로 출신(出身)한 자는 흔히 이런 수법에서 나왔다. 경상도 의흥현(義興縣)에서 굶주린 백성 두 사람의 머리를 베어 터럭을 깎아버리고 머리를 바친 자가 있다 하므로 순찰사가 본군 원을 시켜 조사해 보게 하였다. 곧 수령으로서 공을 요청한 자의 행위인 듯한데 확실치 못해서 마침내 덮어 두고 묻지 않았다. 의성현(義城縣)에서 왜놈의 머리를 베어 바치고 출신한 현령인 정희현(鄭希賢)이 관가에 잔치를 베풀어서 축하하니 조정의 한 벼슬아치가 시를 지어 조롱하기를,
주린 백성 머리 위에 계화가 둥실 떴고 / 飢民頭上桂花浮
붉은 첩지 가운데 원망의 피 흘렀구려 / 紅紙群中怨血流
원님의 잔치자리 술이 응당 있을텐데 / 太守慶筵知有酒
어찌 남은 술 나누어 우는 귀신 위로하지 않는가 / 盍分殘瀝慰啾啾
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경상도 예안(禮安) 고을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키는데 진사(進士) 이숙량(李叔樑)이 격문을 지어 열읍을 효유하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안집사(安集使) 김늑(金玏)이 영천(榮川)에서 훈련봉사(訓鍊奉事) 권희순(權希舜)을 의성(義城) 수성장으로, 박사(博士) 황서(黃曙)를 풍기(豐基) 수성장으로, 전 현감 이유(李愈)를 예천(醴泉) 수성장으로, 유학 박연(朴淵)을 의흥(義興) 수성장으로 삼아서 한 고을 군무를 각자 담당하게 하였으니 대개 열읍 수령들이 모두 도망간 때문이다. 이유가 안동(安東)의 생원인 김익(金翌), 진사(進士) 김윤사(金允思), 정로위(定虜衛) 안숙(安淑) 등과 더불어 각각 마을 안의 장정들을 모집하여 다인(多仁)의 적을 방어하였다. 다인은 예천의 속현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안집사 김늑이 안동에 당도하니 선비와 벼슬아치들 50여 명이 찾아왔다. 그래서 전 도사(都事) 안제(安霽), 전 검열(檢閱) 김용(金涌)을 수성장으로, 출신(出身) 권전(權詮)을 영병장(領兵將)으로 삼았다. 인하여 각 읍에 영을 전달하여 도피한 수령들은 관아에 돌아와 일을 보게 하였다. 이때에 적의 군사가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수령들이 제 마음대로 도망갔는데, 유독 예안 현감 신지제(申之悌)만은 관문에 군사를 모으고 말에 재갈을 물리고서 변란을 대비하며 토적(土賊)을 잡아 죽이고 창고를 굳건히 지켰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안동의 생원 임흘(任屹)이 열읍에 격문을 보내어 충의로써 개유(開諭)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양식을 모아서 함께 나라의 적을 토벌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김해(金海)에 진을 친 적의 배 5백여 척이 제포(薺浦)로 옮겨 정박하였다. 창녕(昌寧)ㆍ영산(靈山)의 적이 강가에 나와서 진을 치고는 혹은 의령(宜寧) 원이라 칭하고 혹은 초계(草溪) 원이라 칭하고서 장차 두 고을로 향하려 하는데 곽재우(郭再祐)가 의병(疑兵)을 설치하여 물리쳤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이는 직전에 아직 수복하지 못했을 때의 일인 듯하다.
○ 대가(大駕)는 의주(義州)로 행차하시고 학가(鶴駕 세자의 행계(行啓))는 이천(伊川)으로 이주(移駐)했다. 이는 충청 감사가 전하는 통문도 있거니와 영남 순영(巡營) 마도(馬徒) 강만택(姜萬澤)이 행조(行朝)로부터 와서 말한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적의 장수 청정(淸正) 등이 북도 20여 고을을 모두 함락시켜 천 리의 주위에 농작물이 하나도 없으니, 봄철의 제비가 집 지을 곳이 없어 숲 속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놈들은 그래도 두만강까지 밀고 나가서 야인(野人)의 마을 6, 7부락을 불태워 없애고 돌아갔다.
10일. 전라좌도 의병대장 고경명(高敬命)이 금산(錦山)에서 적을 토벌하다 패하여 전사하다. 하루 앞서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과 군사를 합하여 좌ㆍ우익을 만들어 금산 성문 밖 10리 지점에 나가 진을 쳤다. 고경명이 먼저 날랜 기병 수백 명을 발동하여 들락날락하며 적을 쏘아대는데, 군관 김정욱(金廷昱)이 말에서 낙상하여 후퇴해 달아나자 적의 군사가 그 기회를 타서 육박하므로 우리 군사가 차츰 퇴각했다.
석양 무렵에 이르러 적병이 성 안으로 들어가므로 고경명이 재주 부리는 사람 30여 명을 시켜 성 밑으로 토성(土城) 들어가게 하고, 성 밖의 관사와 민가를 모두 불태웠다. 또 진천뢰(震天雷 대포(大砲))를 쏘아 성 안의 창고를 불태우니, 적에게 사로잡혀 간 부녀자들이 물을 길어다 불을 껐다. 해가 저물자, 각기 군사를 거두어 진을 치고 지켰다.
이튿날 동틀 무렵에 관군ㆍ의병 여러 진이 적의 처소로 진격하였다. 고경명은 추촌(楸村) 앞산에 웅거하여 진지를 정하고 곽영은 사직당(社稷堂) 뒷산에 머물러 결진하여, 관군은 북문에서 싸우고 의병은 동문에서 싸웠다. 적의 무리가 마침내 진지를 비우고 나와 고함치는 소리가 하늘에 연이어지니, 형세가 바람 앞에 불길과 같았다. 먼저 관군에게 덤벼드니, 선봉장 영암군수(靈嵒郡守) 김성헌(金成憲)이 말을 달려 먼저 달아났다. 적이 인하여 광주(光州)ㆍ흥덕(興德) 등의 진을 육박하니, 곽영이 관망하다 도망해 달아났다. 의병의 진도 따라서 무너지고, 고경명 및 그 아들로 문신인 고인후(高因厚)와 종사관 유팽로(柳彭老), 장서기(掌書記)인 유학 안영(安瑛) 등이 다 죽었다. 고경명의 큰 아들 전 현령 고종후(高從厚)는 무너져 흩어질 적에 아버지와 아우가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무너지는 군사 속에 끼어 나왔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
○ 그 후 고종후가 이적(李適)에게 답장을 냈는데 다음과 같다.
섬 오랑캐가 난리를 꾸며 임금께서 멀리 파천해 계시니 한 집안의 삼 부자가 함께 벼슬에 오른 이상, 재주는 비록 천박하나 차마 앉아서 국가가 전복되는 것을 볼 수 없어 도내 인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것입니다. 저 고종후는 죽은 아우와 더불어 먼저 본주의 무너진 군사들을 개유시켜 거느리고 가서 수원(水原)의 진에 부속시키고, 장차 평양으로 향하려 하다가 길이 막혀 돌아왔습니다. 죽은 아우는 와서 담양[秋城]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날에 참여했고, 저 고종후는 여산(礪山) 중로에서 병이 들어 고생하다가 와서 태인현(泰仁縣)을 거쳐 폐한 금구현(金溝縣)에 당도하여 인원을 모집하는 한편, 바닷길로 격문을 제주도에 전하여 사슴 쫓는 빠른 말을 보내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죽은 아우는 선친(先親)을 모시고 전주[完山]로 향하여 남원 일대의 군사와 회합하고 저 고종후는 김제(金堤)ㆍ임피(臨陂) 등 고을을 경유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수합해서 여산에 모이기로 기약했습니다. 죽은 아우는 또 전주로부터 휘하(麾下) 용사를 거느리고 진안(鎭安)ㆍ무주(茂朱) 등지에 복병하여 영남에서 침범하는 적의 군사를 막았고, 선친은 여전히 전주에 머물러 변을 대기하였던 것입니다. 얼마 안 되어 무주에 침범했던 적병이 도로 영남으로 향한 연후에야 비로소 군사를 정돈하여 북으로 올라갈 계획을 하고 삼 부자가 여산(礪山)에 모여 호서(湖西)ㆍ경기(京畿)ㆍ해서(海西)에 격문을 띄워 평안도에 전달되게 하고서 길을 떠나 은진(恩津)에서 유숙하고 장차 이산(尼山)으로 향하려 하는데, 황간(黃澗)ㆍ영동(永同)의 적이 금산(錦山)을 넘어왔다는 말을 듣자 휘하 군사들이 모두 돌아가서 본도를 구원하려 하였습니다. 상의한 끝에 연산(連山)으로 나가 주둔하여 험하고 굳건한 지대를 점령함으로써 양호(兩湖)의 군사와 양식을 바탕 삼아 서서히 적의 형세를 관찰하여 남으로 내려가든지 북으로 올라가든지 하자 하고, 마침내 연산으로 향하여 두 길을 보려고 했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전주부의 형세가 날로 급하므로 부득이 군사를 옮겨 진산군(珍山郡)으로 들어갔다가, 진산에서 금산으로 들어가서 방어사와 군사를 합하여 좌우익을 만들어, 의병이 종일토록 고전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적에게 밀려 10여 리를 후퇴해 달아났다가 도로 적병을 토성(土城)에서 제압하여 성 밖의 객사(客舍)를 불태우고 진천뢰(震天雷)를 써서 성 안의 창고를 연소시키니, 적에게 사로잡혀 간 부녀자들이 힘을 합해 물을 길어다 불을 껐습니다. 관군이 만약 힘을 합하여 격전했다면 싸움이 하루도 다 걸리지 않았을텐데, 관군이 힘을 쓰지 아니하고 또 해가 저물자 싸움을 중지하니 방어사가 진산 군수를 보내 내일의 일을 의논하였습니다. 저 고종후가 부친께 말씀드리기를, “오늘은 우리 군사가 이득을 보았으니 이 이긴 기세를 타서 군사를 온전히 하여 회군했다가 형세를 보아 다시 와서 들락날락하며 적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적과 대치하여 이 밤을 묵는다면 밤중에 적이 쳐 들어올 염려가 있습니다.” 하였더니, 부친께서 말씀하시길, “너는 부자의 정으로써 내가 죽을까 두려워하는 모양이나, 나는 국가를 위하는 일인데 한 번 죽은들 무엇이 유감되랴.” 하시므로, 저 고종후가 감히 더 말씀드리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방어사는 이날 저녁에 여러 장수들 중에서 힘껏 싸우지 아니한 자를 치죄하였습니다. 적들은 이날 밤에 의병의 진영을 침범하기로 모의하고 있었는데 복병해 있던 우리 장교가 듣자니, 사람이 물 건너는 소리가 나므로 한 졸병을 보내 밭 가운데서 기다려 보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먼저 와서 밭 가운데 잠복해 있던 왜적이 이를 보고서 자기들의 계획이 의병에게 발각되었다고 여겨 마침내 후퇴해 달아났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진격하였는데, 적의 떼가 갑자기 자기 진을 비우고 몰려와 우리 방어진(防禦陣)의 여러 장수에게 덤벼드니, 영암 군수(靈嵒郡守) 김성헌(金成憲)이 대번에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서 한 번도 맞서지 못하고, 광주(光州)ㆍ흥덕(興德) 두 진도 모두 포위를 당하자 방어진은 바라만보고 무너졌습니다. 의병의 큰 진은 방어진과 서로 바라보며 마주 진치고 있었으므로 이미 그들이 후퇴해 달아난 것을 알고, 오히려 단독으로 적을 당할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싸움에 나간 의병이 관군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드디어 퇴각해 달아나 중군진으로 들어와서 진중이 소란했으나, 아직도 든든히 마음을 갖고 대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뒤에 와서 방어진을 바라보고 문득 놀라며 외치기를, “방어가 퇴각해 달아났다.” 하자, 의병의 진이 드디어 무너져 흡사 거센 물결이 가로지르는 듯하여 다시 억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의병의 진이 무너지지 않았을 때 선친은 맨 가운데 계셨고 저 고종후는 한쪽 가에 있었으며, 죽은 아우는 독전소(督戰所)로부터 와서 한쪽 가에 있었는데, 무너질 때 저 고종후의 말이 가시덤불에 걸려 넘어져서 말을 다시 굴레 지어 가노라니 여러 군은 이미 멀어져서 그 뒤를 따라 달려갔습니다. 그래서 부자 형제를 서로 잃고 홀로 구차히 살아서 오히려 말하고 밥먹으니 천지에 죄를 진 몸이라, 날로 신의 꾸지람을 기다릴 따름입니다. 선친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말타기가 익숙하지 못하니 불행히 싸우다 패하면 오직 죽는 것밖에 없다. 우리들이 성공하고 못하는 것에 국가의 안위가 매여 있으니 어찌 한 몸의 화와 복에 그칠 따름이랴.” 하셨습니다. 군사가 무너지던 날 말에서 떨어져서 말이 빨리 달아나니 모시고 가던 유생(儒生) 안영(安瑛)은 작고한 판서(判書) 이후백(李後白)의 외손인데 말에서 내려 자기의 말을 바치고 걸어서 따라가다가 안영도 역시 적의 손에 죽었습니다. 종사관(從事官) 유팽로(柳彭老)가 건장한 말을 타고 먼저 나와서 그 종에게 묻기를, “대장이 포위망을 벗어났느냐?” 하니, 종이 답하기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였습니다. 유팽로가 즉시 고삐를 돌려 말을 채찍질하여 선친을 난군(亂軍) 속에서 시종하니, 선친이 돌아보고 말씀하시기를, “나는 반드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먼저 나가지 않는가.” 하자, 유군이 대답하기를, “내 어찌 대장을 버리고 구차히 살려 하겠습니까?” 하고, 여러 번 말해도 선뜻 가지 아니하고 종시 보호했던 것입니다. 아! 통분하외다. 불초한 몸이 능히 전장에서 죽지 못하고 유독 두 열사로 하여금 선친과 같은 날에 죽게 하였으니 천지간에 한 죄인이라, 통곡밖에 무슨 말을 하리까. 아우는 뒤에 떨어져서 이미 무너진 군사를 정돈하려 하다가 진에서 죽었고, 군사들은 모두 먼저 달아나서 다행히 함께 죽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의병과 승군(僧軍)의 조력을 얻어 시체를 수습해 왔으며 선친도 변을 당한 즉시 몰래 산중에 매장했다가 역시 의병과 승군의 주선을 입어 입관(入棺)해 와서 두 상(喪)은 이미 고이 장사지냈으니 불초는 비록 죽어도 유감은 없습니다. 병든 몸이 항상 하루도 보전 못 할까 염려했었는데, 변란이 생긴 후에는 죽음을 기약하고 4월 이후로는 노상 말 위에 있었으며 비를 무릅쓰고 들판에서 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끝내 의병을 수행하다가 이 대고(大故 선친의 상(喪)을 말함)를 만나니 친구들이 모두 장사를 치루기 전에 죽지나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완악한 목숨이 조금 연장되어 무사히 장사를 치렀습니다. 이와 같이 구차히 산 것은 병든 어머님과 어린 아우를 위하려는 생각이요, 또 죽은 아우의 4남 1녀를 길러 그들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다만 병의 뿌리가 깊이 박혀 한 번 발작하면 비록 편작(扁鵲 중국 전국 시대의 명의(名醫))이라도 역시 손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호남의 의병이 두 번째 일어난 것은 대개 선친이 남긴 서업(緖業 사업)으로 인한 것이며, 용감한 군사와 건장한 말은 바로 선친이 제주도에 격문을 보내어 불러온 것입니다. 저 고종후가 그 군사를 따르려고 하니, 친구들이 모두 말하기를, “슬픔을 머금고 병든 몸을 부지하라. 반드시 죽어서 유익할 것이 없다.” 하며, 또 생각해 보니 이 몸이 한 번 죽으면 아버지의 친상(親喪)과 아우의 시체를 수습하는 일이 아우나 조카로는 외롭고 약하여 해내기가 어려우므로 참고 기다렸습니다. 장사를 지낸 다음날 영위(靈位)에 곡하고 떠나 의병의 도청(都廳)으로 가서 여러 친우와 일을 같이 하여 선친의 소원을 조금이나마 풀어 드릴 생각이며,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처분에 맡길 뿐입니다. 어버이 원수를 갚지 못하고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면 살아서 무엇하리까. 다만 한 번 분명하게 죽는 것이 원입니다. 운운. 부자 형제가 함께 전진(戰陣)에 있다가 패전을 당하여 서로 잃고 홀로 구차히 목숨을 유지하여 지금까지 천지의 사이에 숨을 쉬고 있으니 신명이 용서하지 못할 바라, 오직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 보내주신 편지를 받들어, 어머니를 모시고 적을 피하여 온 집안이 평안하심을 알았습니다. 저 고종후는 처자에 힘입어 보전하고 있으나 한결같이 비감할 따름입니다. 쇠한 병으로 본시 편한 날이 없었는데 또 이 대고(大故)를 만나니 비록 조금이나마 완악한 목숨을 연장하여 어머니와 아우를 보전하고 또 죽은 아우의 고아들을 기르고 싶으나, 기력이 끝내 지탱하지 못할 것을 스스로 두려워합니다. 부자간의 슬픔이란 남에게 말할 수 없거니와, 죽은 아우는 본시 활 쏘고 말 달리는 기술이 없었는데 한갓 구구한 충의로써 옷소매를 털고 일어나서 노상 건장한 군사를 거느리고 홀로 진의 전면을 담당하며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는 노상 말하기를, “오늘날 일은 비록 제 몸을 희생하고 가족을 함몰시킬지라도 오히려 후회할 것이 없다.” 하여, 친한 이들은 대개 다 들었습니다. 그는 군사가 무너지자 뒤에 남아 목숨을 바쳤는데 무상한 이 몸은 홀로 몸뚱이를 보전하였으니, 못[池] 가에 봄 풀이 나면 혜련(惠連)의 꿈을 누가 꾸며 비바람 치는 한 밤중에 옛 언약을 어디서 찾으리오.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간장이 무너지나 그 영특한 모습은 눈앞에 완연합니다. 곧장 저승으로 따라 가고 싶으면서도 오히려 말하고 밥 먹으니 무슨 사람이라 하리까.
또 별지(別紙)에,
우리 온 집안이 무예(武藝)를 배우지 않은 것은 여러 사람들이 다 아는 바입니다. 오직 구구한 충의로써 인심을 격동해 일으키려는 것이었는데, 죽은 아우는 본래 의기에 찬 남아라 죽음을 결심하였습니다. 일찍이 적병이 조령(鳥嶺)을 넘은 뒤로 의병을 불러일으키고자 하여 형제가 함께 격문을 지었는데 그 대략에, “조령은 평탄한 길과 다름이 없고 한강(漢江)은 넓이가 허리띠 하나 만하니, 이때를 당하여 국가의 안위는 비록 대신에게 달렸지만 이처럼 방심해서 되겠는가. 모두 싸움터에 나가서 죽어야지.” 하였고, 또 이르기를, “2백 년을 이 땅에서 옷 입고 밥 먹은 것은 모두 여러 선왕이 생성(生成)해주신 은덕인데, 수천 리 예의(禮義)의 나라에 어찌 남자다운 사람 하나가 없단 말인가.” 하였으며, 그 끝 구절은 죽은 아우가 단독으로 지은 것인데 이르기를, “저놈들이 몰려들면 노중련(魯仲連)처럼 동해(東海)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전단(田單)이 제(齊) 나라를 도로 찾듯 하는 일을 바랄 뿐일세.”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역시 그 마음가짐을 징험해 알 수 있습니다. 격문이 완성되었으나 여러 친구들은 응종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본도 관군이 아직 온전하니 나라를 위해 싸우는 데는 군사가 모자랄 염려가 없으며, 서로 좋아하지 않는 자가 혹시 군사 일으킨 것을 가지고서 모함한다면 어찌하랴.” 하고, 우리 온 가족도 역시 이르기를, “격문을 띄웠으나 호응하지 않으면 유익은 없고 도리어 해가 있을 것이다.” 하여, 마침내 일을 중지하였습니다. 이광(李洸)이 금강(錦江)에서 군사를 후퇴한 뒤로 인심이 흉흉하여 장차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나주(羅州)의 김천일(金千鎰) 영공(令公)이 편지를 보내 다짐하며, 격문을 돌려 그 군사를 혁파한 연유를 들어 죄를 성토한 다음에 의병을 일으키려 한다 하였습니다. 저 고종후의 일가가 답보(答報)하기를, 순찰사가 나랏일에 성실하지 못한 것은 진실로 죄가 있다 하겠으나 이와 같이 처리한다면 사체에 어긋날 염려가 있으며, 더구나 순찰이 방금 다시 거사하는 마당에 있어 도내 선비들이 말을 모아 성토한다면 순찰이 도내를 호령할 수 없게 되는 동시에 군(軍)과 민간이 복종하지 않을 염려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김천일은 이광과 사돈 간이 되므로 절실히 권하여 순찰사로 하여금 최후의 효과를 거두도록 선도하여 과연 순찰사가 군사를 일으켰는데, 각 읍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금강(錦江)에서 아무 까닭 없이 진을 파하고서 지금 무엇하자고 다시 군사를 일으켜 백성을 괴롭히려 하는가.” 하며, 곳곳마다 흩어져 도망가 있었습니다. 국가에 대한 근심이 실로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므로 각 읍 관리와 선비들이 함께 설유하여 간신히 떠나 보냈으나, 도중에서 계속 없어져 산중으로 들어가기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의병을 일으킬 계획으로 한편으로는 민심을 진정시키고 한편으로는 대군을 계속 원조하려 하였습니다. 삼도(三道)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무너지고 의병은 격문을 돌려 북으로 올라가면서 근거지인 전주를 구원하려 하다가 금산에서 실패하였으니, 비록 공은 세우지 못했지만 당시에 만약 의병이 없었던들 호남 지방이 어육(魚肉)의 화를 입게 되었을 것은 왜놈이 들어왔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김천일 영공이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약속했으나 그 군사는 다만 나주(羅州) 한 고을에서만 징발하였기 때문에 먼저 출발하게 된 것이요, 가친은 몸소 다니며 여러 고을의 군사를 수합했기 때문에 맨 뒤에 출발하였습니다. 가친이 일찍이 편지에 이르기를, “적이 어찌 하루인들 호남을 잊으랴. 대개 반드시 근왕(勤王)하는 의병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기다리는 모양이다.” 하였습니다. 김 영공은 이미 북쪽으로 향하여 지금 강화(江華)로 들어갔고, 선친은 군사를 호서(湖西)에 머무르게 했던 초기에 본도에서 경보가 있어 조정에까지 멀리 가지 못하고 땅속에서 한을 품게 되었으니 아! 원통합니다. 선친께서 일찍이 가족에게 말씀하시기를, “금년에 천문[天象]을 본즉 장성(將星)이 좋지 아니하니 장수에게 반드시 이롭지 못한 일이 있으리라.” 하였으니, 그러고 보면 가친은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이미 반드시 죽을 것을 각오하셨던 것입니다. 지난 해 7월에 선대에서 손수 심은, 집 앞의 큰 나무 두 그루가 바람에 뽑혔고, 금년 5월에 본 고을 객사(客舍) 향소문(鄕所門) 앞에 선 수백 년 된 고목이 또 바람에 뽑혀 향소문을 눌러서 문이 부서지고 담이 무너졌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괴이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어찌 알았겠습니까. 본 고을에서 의병을 먼저 일으켜서 내 한 집만 유독 그 화를 받을 것을. 아! 원통합니다. 이광이 두 번째 군사를 일으킬 적에 격문을 우리 집에 부탁하므로 우리 형제가 합작해서 글월을 이루어 보냈는데 도착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격문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다만 그가 과오를 인증하고 죄를 보상하여 국가에 충성을 다하기만 원했는데, 그가 도리어 의병에게 감정을 품고 선친이 국사에 몸바친 뒤에 장계를 올리면서 사실과 틀리게 했으며, 함께 죽은 여러 사람의 사적도 또한 자세히 기록하지 아니한 채 조정에 올렸으니, 조정에서 어찌 이 경위를 다 알 수 있으리까. 아! 원통합니다. 또 생각하건대, “태조(太祖)께서 대업을 창건하신 것은 실로 하느님의 뜻을 받드신 것이다. 압록강(鴨綠江)에서 군사를 돌이켜 대의가 천하에 빛났고 황산(荒山)에서 왜적을 무찔러 공덕이 강역을 덮었으니, 신령은 끝내 반드시 힘입을진대 은택을 어찌 잊을쏜가.”라는 이 글월은, 그 당시 격문 가운데 든 것인데 사람들에게 두루 알리고자 하여 아울러 기록해 올립니다. 이상은 모두《정기록》에 나온다.
○ 그 후 3년 만에 동궁(東宮)에서 치제(致祭)하였는데,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만력 22년 갑오년(1594, 선조 27) 정월 20일 기해(己亥) 왕세자(王世子)는 삼가 신하 익위사 부솔(翊衛司副率) 이희간(李希幹)을 보내어 증직 판서(判書) 고 공(高公)의 영에 제사를 드립니다. 대략(大略) 취해 읊은 3천 수의 시는 몇몇 곳에 벽사롱(碧紗籠) 있던 예전에 지은 것이요, 편의한 방략(方略) 12조목은 2번이나 고향에 남긴 사랑이로다. 국가의 다난한 때를 당하여 충의를 외치며 전장에 나섰구려. 옷소매를 걷고 일어서니 무부(武夫)들도 입이 닫히고 기가 눌리며, 당상에 올라 맹서하니 3군이 팔목을 내밀며 죽음을 결단했지요. 군중은 공을 맹주로 추대했고 사람들은 공의 의거를 흠모했소. 조정에서 군사를 훈련한 지 30년에 적을 토벌하는 것은 도리어 서생(書生)에게서 나왔고,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2백 년에 충성을 바친 것을 다행히 이번에야 보았도다. 어찌하여 장성(長城)이 갑자기 무너졌는가. 마침내 일목(一木)이 지탱하기 어려웠구려. 혈전(血戰)을 벌여 천금의 몸을 범의 입에 몰아넣었고, 남아란 죽을 자리에 죽는거라, 7척의 몸을 홍모(鴻毛)보다 가벼이 여겼소. 큰 공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장한 뜻을 품은 채 순절하다니, 일의 성패는 운명이니 다시 말해 무엇하리. 하늘이 착한 사람을 보답한다는 것을 누가 과연 측량하리까. 한 집안에서 나랏일에 죽은 자가 세 분이라, 1개월 사이에 화를 받은 것이 가장 혹심했소. 죽어도 썩지 않아서 영령의 상기도 남아 있으리니, 혼이여! 알거든 다 흠양하시라. 《정기록》에 나온다.
○ 그 후 윤근수(尹根壽)가 다음과 같이 서(敍)를 지었다.
아! 이 책은 임진왜란의 초기에 참의(參議) 고 공이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킬 적에 쓴 격문과 통문(通文) 및 왕복한 편지 등을 모아 만든 것이다. 글이 참의의 수필이 아니면 임피(臨陂) 형제의 수필로서, 한 집안 충의의 사연이 모조리 들어 있어 열렬한 기백이 말 밖에 넘치니, 아! 공경할 만한지고. 사라지는 강상(綱常)이 이에 힘입어 보존되었으며 직언(直言)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실천에 옮겼으니, 이야말로 신하가 국난에 임하여 절개를 다하는 행동을 권장한 것이 자못 무궁하다 하겠다. 아! 공이 그 아들과 함께 국가를 위해 싸우다 죽은 것은 실로 변성양(卞成陽 변호(卞壺))과 같은데, 문장으로 말하자면 변성양은 전하는 것이 없이 장원 급제한 몸으로 적의 손에 순절하였다. 공은 또 문신국(文信國 문천상(文天祥))과 같은데, 문신국의 두 아들은 다만 길 가에서 병들어 죽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또 공의 두 아들이 전후로 순절한 것에 비할 것이 아니니, 공의 한 집에서 이루어진 것이 어찌 보기 드물만큼 우뚝 뛰어났다고 이르지 않겠는가. 승명각(承明閣 옥당(玉堂))에 있을 적에는 사가(賜暇)를 받아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노란 인끈을 띠고 큰 고을 맡아서는 청렴 결백으로 소문이 났으며, 가마귀 떼 같은 군사로 날래고 강한 적과 항거하여서는 다만 대의로써 격려했노라.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지라 뜻과 같이 되지 않았으니, 몸을 던져 순절하여 마침내 충절로써 나타났네. 공이야말로 한 세상의 전인(全人)이 아니겠는가. 세상에서 날마다 문인(文人)더러 실용성이 적다고 헐뜯는 자가 많으나, 이를 보면 어찌 잘못된 생각이었다고 뉘우치지 않겠는가. 옛날 나일봉(羅一峯)이 문문산(文文山)의 첩(帖)에 발(跋)을 쓰면서 스스로 이르기를, “글자 하나에 눈물 한 방울이라.” 하였는데, 이 기록을 읽는 자는 글자 글자마다 울움이 터질 것이니 글자 하나에 눈물 한 방울 정도가 아니다. 을미년(1595, 선조 28)에 내가 영남(嶺南)을 다녀오다 봉성(鳳城)에 머물렀는데, 공의 아들 유후씨(由厚氏)가 나를 공의 지기지우(知己之友)라 하여 객관(客館)으로 찾아와 보고 이 책을 보이면서 책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므로 나는《정기록(正氣錄)》이라 쓰고 아울러 서문의 청탁마저 허락했다. 그러나 이내 이루지 못하고 여러 해를 지나는 동안에 유후씨도 역시 세상을 떠났으니 슬픈 일이다. 지금 그 아우 용후씨(用厚氏)가 또 예전의 청을 거듭하는데 내 어찌 감히 죽은 이에게 허락했던 것을 이제 와서 그만두겠는가. 더구나 이로 인해 감개 무량한 바 있으니, 《정절집(靖節集 도잠(陶潛))》ㆍ《문산집(文山集 문천상(文天祥))》 등을 간행하게 한 것이 특명에서 나왔으며 바로 병란 직전의 일인즉, 성상의 깊으신 생각으로 오늘날이 있을 것을 짐작하시고 미리 절의를 배양하기 위해 생각한 것같이 되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과 서로 합치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라 하겠는가. 이 《정기록》이 세상의 교화에 관계되는 것이 실로 《문산집》 등과 더불어 나란할 것이니, 어찌 한 집안에만 수장하는 데 그쳐서야 되겠는가. 난리가 평정되고 의논이 문사(文事)에 미친다면 신하를 위해 충성을 권하는 것이 이 책보다 앞설 것이 없으니, 판각해서 세상에 반포하기를 나는 공수(拱手)하고 기다리는 바이다. 만력 기해년(1599, 선조 32) 10월 □일 수충공성 익모수기 광국공신 보국숭록대부 해평부원군 겸지 경연사(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輔國崇祿大夫海平府院君兼知經筵事) 윤근수(尹根壽)는 서(敍)함. 《정기록》에 나온다.
○ 비문(碑文)은 유명 조선국 증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행 통정대부 공조참의 지제교 겸 초토사 고공 신도비명(有明朝鮮國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行通政大夫工曹參議知製敎兼招討使高公神道碑銘)이라 하다. 만력 임진년(1592, 선조 25)에 나라에 왜난(倭難)이 있자 참의 고공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온 절개를 나타냈다. 이윽고 십여 년이 지났으나 신도비문이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하루는 공의 자제 용후(用厚)가 나를 찾아보고 청하기를, “선친이 공의 형제와 종유한 바 있으니 선친이 나랏일에 몸을 바친 전말은 공께서 분명히 아는 바이므로, 감히 공의 비문 한 장을 얻어서 이 사적을 묻히지 않게 하는 것이 원입니다.” 하고, 또 그 자당의 명을 말하였다. 아! 공의 사적을 이야기하면 눈물이 나며 슬픔이 그지없으니, 내 비록 글은 잘 못할망정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왜적이 크게 몰려와 침범할 즈음에 공은 광주(光州) 향리에 있었다. 우리 군사가 싸울 적마다 무너져 조령(鳥嶺)의 요새를 잃어버리게 되었는데 호남 순찰사가 왕실(王室)을 호위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공은 홀로 아들 고종후(高從厚)ㆍ고인후(高因厚)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했다. 이윽고 또 임금께서 서도로 파천하시고 도성(都城)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공은 밤낮으로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순찰사가 근왕병(勤王兵)을 영솔하고 금강(錦江)에 당도하자 서울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허둥지둥 진을 파하여 온 도내 인심이 흉흉하였다. 공이 순찰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뒤에라도 잘하도록 책망했는데 말이 진지하고 절실했으나 반성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공은 국가가 기울어 가는 것을 통분하게 여기고, 나주 사람 전 부사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흥복(興復)할 것을 계획하며 편지 왕래가 많았다. 공은 맨 먼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5월 무자일에 담양부(潭陽府)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옥과(玉果) 사람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 등이 공을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으니, 공은 본시 군사면에 익숙하지 못하지만 개연히 장단(將壇)에 오르며 늙고 병든 것으로써 사양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내에 격문을 발송하여, 모집에 응한 자가 날마다 모여 들었다. 6월 기해일에 공이 담양부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나섰다. 이때 삼도(三道)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무너져 호서(湖西)ㆍ호남이 더욱 흔들렸는데 유독 공을 의지하여 자중했다. 공은 전주로부터 군사를 정돈하여 북으로 올라가 여산(礪山)에 당도하자 손수 격문을 초하여 여러 도에 고하여 관서(關西)로 도달하게 했다. 공이 장차 이산(尼山)으로 향하려 하는데, 적이 황간(黃澗)으로부터 금산(錦山)으로 넘어올 때 군수가 패전하여 죽었으므로 적의 형세가 더욱 성하다는 소식을 듣자, 부하 군사들이 앞다투어 돌아가 본도를 구원하고자 하였고 공도 역시 그렇게 여겼다. 7월 경신일에 공이 마침내 군사를 진산(珍山)으로 옮겨 금산의 적을 치려 하는데, 날랜 군사로 모집에 응한 자가 갈수록 많아서 군(軍)의 기세가 더욱 떨쳤다. 병인일에 드디어 장병들에게 부서를 정하여 금산으로 들어가서 방어사 곽영(郭嶸)과 더불어 좌ㆍ우익이 되었다. 공이 먼저 정병 수백 기(騎)를 보내어 곧장 적의 소굴로 내닫게 하였는데, 그들이 적에게 눌려 후퇴하게 되었다. 공이 북을 울려 싸움을 독려하니, 군사들이 모두 죽음을 걸고 싸워 도로 적병을 토성(土城)에서 제압했다. 성 밖의 관사(館舍)를 불태우고 또 대포를 쏘아 성 안을 연소시키자 기세가 올랐다. 적이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해 나오므로 의병이 사면으로 포위 공격하니 적은 사상자가 많아서 감히 더 나오지 못했다. 마침 날이 저물고 관군이 또 싸움에 조력하고자 아니하였으며, 토성이 두텁고 완전하여 졸기에 무너뜨릴 수 없으므로, 마침내 퇴군하여 진으로 돌아왔다. 이날 저녁에 방어사가 사람을 보내어 명일에 협력하여 싸울 것을 약속하니, 공의 맏아들 고종후가 공에게 말하기를, “오늘 우리 군사가 이득을 보았으니 이 승리의 기세를 가지고 군사를 온전히 하여 돌아갔다가 기회를 살펴 다시 나와 적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며, 적과 대치하여 들에서 잔다면 혹시 야습(夜襲)을 당할까 염려됩니다.” 하자, 공이 말하기를, “너는 부자의 정으로써 나 죽는 것을 두려워하느냐. 나는 나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이 직분이다.” 하다. 이날 밤에 적이 과연 침범하기를 모의하고 몰래 나와 복병을 설치하려 하다가 순라군(巡羅軍)에게 발각되었다. 이튿날 정묘일에 공이 방어사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는데, 공은 적과 5리쯤 떨어져서 진을 머물러 방어의 진과 마주 보게 되었다. 공이 8백여 명의 기병을 보내어 싸움을 걸어 미처 어울리지 못했는데, 적이 자기네 진지를 비우고 몰려 나와 먼저 관군에게 범하니 방어사 관하 장수 김성헌(金成憲)이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도망갔다. 적이 광주(光州)ㆍ흥덕(興德) 두 진을 덮치니 방어의 진이 그 바람에 따라 무너지므로 공은 단독으로 담당할 계획을 하고 군사로 하여금 모두 자신만만하게 가지고 대기하게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갑자기 외치기를, “방어의 진이 무너졌다.” 하니, 의병의 진도 따라서 무너졌다. 공은 진작부터 하는 말이, “나는 말타기가 익숙하지 못하니 불행히 싸움에 패하면 오직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좌우에서 공더러 말을 타고 뛰라고 청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구차히 죽음을 모면하려 하겠는가.” 하였다. 공의 부하가 공을 부축하여 말에 올려 앉혔는데, 공은 이내 말에서 떨어지고 말은 빠져 달아나므로 공의 부하 유생(儒生) 안영(安瑛)이 말에서 내려 공을 태우고 자기는 도보로 시종했다. 공의 종사관(從事官) 유팽로(柳彭老)가 탄 말은 몹시 날래서 먼저 나오게 되어 그 마부에게 묻기를, “대장이 벗어났느냐?” 하자, 마부가 벗어나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유팽로가 문득 말을 몰고 도로 난병(亂兵) 속으로 들어가 공을 모시니, 공이 돌아보고 말하기를, “나는 반드시 면하지 못할 것이니 너는 빨리 벗어나라.” 하니, 유팽로가 대답하기를, “제가 어찌 차마 대장님을 버리고 살 길을 찾겠습니까.” 하였다. 적의 칼날이 마침내 공에게 미쳐 공이 결국 죽고 유팽로는 제 몸으로 공을 막다가 다 함께 죽었으며, 안영도 죽었다. 공의 둘째 아들 고인후(高因厚)가 무사(武士)를 거느리고 앞 줄에서 화살과 돌 속을 출입하다가 군사가 무너지자 말에서 내려 그 부하들을 정제하고 진에서 전사했다. 근처 고을 백성들은 공이 패했다는 말을 듣자 노소간에 모두 짐을 짊어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우리들은 이제 다 죽었다.” 하며, 곡성이 들판에 진동하였다. 진은 무너졌으나 군사들이 공의 생사를 모르고 차츰 와 모였는데, 마침내 공이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고 모두 울부짖으며 해산했다. 남도 백성들은 알건 모르건 간에 다 서로 조문하며 원통하게 여겼다. 공이 백발 늙은 서생으로 국가가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정의를 부르짖고 일어서서 호남 의병의 선창이 되자, 비록 어리석고 조급한 군졸이나 산중에 도피한 자들이 모두 소문을 듣고 다투어 모여들어 한 달 이내에 의병의 수효가 수천 명에 달했으니, 대개 공의 의기가 지성에서 우러나서 남을 감동시킬 만했기 때문이다. 공이 임진년(1592, 선조 25) 봄에 천문(天文)을 쳐다보고 집안 사람에게 말하기를, “금년에 장성(將星)이 좋지 않으니 장수에게 반드시 불리한 점이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공은 진실로 생사의 이치에 밝음과 동시에 의거하는 날부터 벌써 목숨을 던질 것을 결정했던 것이다. 마침내 금산에 있는 왜적을 토벌하게 되자 사위 박숙(朴橚)에게 편지를 주어 집안일을 부탁하였으니, 공이 처사한 것을 보면 대개 본래부터 마음을 결정했던 모양이다. 왜적이 금산에 웅거해 있을 적에 병권을 장악한 문신ㆍ무신의 장수들이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방황하고 있는데, 유독 공은 일의 성패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친히 범의 소굴로 들어가서 적과 더불어 혈전(血戰)을 벌여 몸을 나라에 바쳐 순절했다. 비록 승첩을 올려 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공이 순절한 후로 공이 전장에 나가 죽는 것을 보고서 적을 공격하는 자가 계속해 일어났기 때문에, 적이 비록 여러 번 이겼으나 사상자가 역시 반을 넘었으며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밤에 도망했은즉 국가에서 호남을 보유하여 뒷날 국토를 회복하는 근거지가 된 것에 대하여 그 공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공의 체백(體魄)이 몰래 금산 산중에 묻혔었는데, 적의 군사가 가로막고 있어 바로 곧 거두어 묻지 못하고 8월 모일에야 그 아들 고종후(高從厚) 등이 의병ㆍ승병(僧兵)을 청하여 공의 시체를 발굴해 내서 무릇 40여 일만에 비로소 염습했다. 성상께서 용만(龍灣)에 계시던 날에 공이 의병을 일으켜 온다는 말을 들으시고 기뻐하는 빛이 얼굴에 가득하여 공에게 공조참의 겸 초토사(工曹參議兼招討使)를 제수하고 글월을 내려 위로했는데 그 글월에, “열읍(列邑)을 지휘하여 모든 것을 조달해서 도성을 회복하게 하라.” 하신 말이 있었다. 이때에 공조 좌랑(工曹佐郞) 양산숙(梁山璹)이 행재소(行在所)로부터 남으로 돌아오게 되자, 성상께서 면대하여 타이르시기를, “돌아가거든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에게 말하라. 그대들이 하루빨리 강토를 회복해서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얼굴을 볼 날이 있게 하라.” 하였는데, 벼슬이 전달되기 전에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이 사실이 보고되자 성상께서는 매우 슬퍼하시고 관작을 위에 있다. 추증하도록 명령했으며, 뒤에 다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의 증직을 내렸다. 공이 순절하자 순찰사는 예전 혐의로써 심지어, “어두운 밤에 군사를 몰고 가다가 군사가 무너져 죽었다.” 하며, 공을 모함하여 장계를 올렸는데 그 이후 이정엄(李廷馣)이 순찰이 되어 공을 표창하여 나랏일에 죽었다는 장계를 올렸다. 그 글에, “고 모는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에 나섰으며 몸소 적의 진지에 들어가 적과 혈전을 벌이다가 불행히 패하여 부자가 함께 죽었다.” 하여, 비로소 그 실상을 파악했다고 한다. 을미년(1595, 선조 28) 여름에 유사(有司)를 명하여 정문(旌門)을 세우게 했고, 신축년(1601, 선조 34) 가을에 문생 전 현감 박지효(朴之孝) 등의 상소로 인하여 특명으로 광주에다 사우(祠宇)를 건립하게 하여 액호(額號)를 포충사(褒忠祠)라 내리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고 이어 봄가을로 제향을 받들어 대대로 끊어지지 말게 하라고 했으니, 아! 이로써 군신 간의 의를 볼 수 있다. 공의 휘(諱)는 경명이요, 자(字)는 이순(而順)이며, 파계는 제주(濟州)에서 나왔는데, 그 선세에서 장흥(長興)으로 관향(貫鄕)을 받아 장흥 고씨가 되었다. 가정(嘉靖) 계사년(1533, 중종 28) 11월 30일 무진일에 태어났으며, 아들 6형제를 두었다. 맏아들은 고종후인데 정축년(1577, 선조 10)에 무과(武科)에 급제했으며 상차(喪次)로부터 군사를 일으켜 아비의 원수를 갚기로 맹서하고 영(嶺) 밖에서 전전(轉戰)하여 싸우다가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되자 강에 빠져 죽었다. 그 후에 도승지(都承旨)의 증직을 내렸다. 그리고 그 다음은 곧 고인후이니 기축년(1589, 선조 22)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공을 따라 함께 진중에서 죽어 예조 참의(禮曹參議)의 증직을 내렸다. 운운. 윤근수(尹根壽)는 찬(撰)함.
○ 그 후 또 치제하였는데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만력 31년 계묘 8월 모일에 국왕(國王)은 신하 호조 정랑(戶曹正郞) 조엽(趙曄)을 보내 판서 고경명의 영(靈)에 제사한다. 영은 성화(聲華)가 일찍부터 드러나고 재주와 학식이 다 우수하며, 문필은 천 사람보다 뛰어나고 가슴속에 수만 군사가 들었었네. 선(先) 조정에 뽑히어 무오년(1558, 명종 13)에 문과 했다. 여러 번 장솔(張率)의 벼슬에 옲겼고, 중간에 이르러 침체되어 안진경(顔眞卿)의 얼굴을 보지 못했도다. 하루아침에 왜적이 침입하자 여러 고을이 파도처럼 휩쓸려서 곽주영(郭州營) 안에 성유(成裕)처럼 모두 밤에 도망을 치니 수양성(睢陽城) 안에 장순(張巡)마냥 사수할 자 누구던가. 유독 의기를 분발하여 군사를 모아서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려고 맹서했네. 성지(城池)나 무기가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어느 누가 몰아치는 오랑캐를 막아내리오. 먼 데나 가까운 데나 크나 작으나 모두 호응하니, 실로 의열(義烈)을 먼저 외친 때문이로다. 외로운 충성을 스스로 허락하는데 한 번 죽는 것이 어찌 어려우랴. 정의의 군사란 강한지라, 순(順)과 역(逆)이 이미 구별되었다. 곧은 편은 언제나 씩씩한 법이라, 많고 적은 것으로 어찌 따지리오. 피를 마시고 단에 오르며, 주먹을 들고 칼날을 무릅썼네. 싸움을 잘못한 탓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과연 알기 어려운 법이라오. 죽을 곳을 얻었으니 글 읽는 선비더러 담력 없다 이르지 마오. 충효(忠孝)의 대절(大節)은 부자(父子) 세 사람일세. 매양 묘소를 수축할 겨를이 없어 한이더니, 이제 영을 모실 곳이 있음을 기쁘게 여기네. 사당 모양이 매우 엄숙하니 족히 절개 굳은 장부의 기풍을 상상할 만하고, 향화(香火)가 해마다 끊어짐이 없으니 한 고을 선생으로 제사하는 정도가 아니외다. 이는 조정에서 거행한 것이 아니라, 바로 선비들의 주선에서 나왔구려. 절개를 천추(千秋)에 표시하고자 하니 사당이 어찌 편액(扁額)이 없을쏜가. 포충(褒忠)이란 두 글자를 내리니 실상과 이름이 서로 알맞네. 시골 마을이 찬란하여 빛이 나니 어찌 조청헌(趙淸獻 조림(趙林))의 이표(里表)에 비할 뿐이랴. 길손이 손으로 가리키며 눈물을 떨어뜨리니 반드시 현산(峴山)의 귀부(龜趺 양고(羊祜)의 비석돌)만이 아니로세. 제사를 드리기 위해 조관(朝官)을 보내는데 관작을 추가(追加)함에 있어 판서(判書)가 오히려 부족하오. 천운이라 어찌하리, 정충(精忠)은 구천에서 다시 보기 어려우리니, 혼이여! 돌아와서 박한 제물이나마 한 잔 술에 흠양하시라. 모두《정기록》에 나온다.
○ 경기도 수원 충의위(忠義衛) 홍언수(洪彦秀)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였다. 홍언수가 미천한 몸에서 낳은 아들이 있으니, 이름은 홍계남(洪季男)으로 용맹과 힘이 무리중에서 뛰어났다. 경인년(1590, 선조 23)에 통신사(通信使)의 군관이 되어 황진(黃進)과 더불어 일본을 다녀왔기로 그놈들의 강약을 자세히 알고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아비의 군사를 따라 적을 쳐서 여러 번 싸워 승첩을 올렸다. 전후로 적의 귀를 베어 온 것이 백여 개에 달했으므로, 인근에 진을 친 적들이 위축되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곧 군공(軍功)을 들어 본부(本府)의 판관을 제수했다.
○ 충청도 전 찰방(察訪) 박춘무(朴春茂)가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 전라도(全羅道) 전 보성 현감(寶城縣監) 임계영(任啓英)ㆍ박광전(朴光前) 등이 능성 현령(綾城縣令) 김익복(金益福) 등과 더불어 삼가 두 번 절하며 열읍 여러 벗님에게 돌리는 글월은 다음과 같다.
아! 국가가 믿고서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래 삼도(三道)가 건재하기 때문이었는데, 경상ㆍ충청은 이미 무너져 적의 소굴이 되었고 오직 호남만이 겨우 한 모퉁이를 보전해서 군량의 수송과 군사의 징발이 모두 이 한 도만을 의지하고 있으니, 국가를 부흥할 기틀이 실로 이에 있다. 그런데 이제 서울이 급박하다 하여 순찰(巡察)은 정병을 거느리고 바닷길로 올라갈 계획을 하고 있고, 병사(兵使)는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이미 금강(錦江)을 넘었으며, 두 의병장의 진 역시 각기 근왕(勤王)을 위하여 이미 본도를 떠났다. 열읍의 장사(將士)들도 장차 나가기로 결정되어 남은 군사가 몇이 없으므로 적이 들어오는 중요한 길목에 방비가 극히 허술하고 호서(湖西)의 적이 이미 본도 경계선을 범했으니, 석권(席卷)의 형세가 장차 이루어질 터인데 극복할 희망은 무엇을 믿겠는가. 국가의 일이 너무도 위태하니 진실로 통곡할 일인 동시에 이야말로 의사(義士)가 분발할 때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적이 성 밑에 당도할 때, 우리 장정들을 무찔러 죽일 것은 뻔한 일이다. 슬프다! 우리 민생이 몸 둘 곳이 어디며 실가(室家)는 어느 곳에 둔단 말이냐. 영남에서 이미 이렇게 당한 것은 귀로도 들었고 눈으로도 보았으니, 산중으로 도망가 숨을 수도 없고 구차히 목숨을 보전하여 살길도 없어서 결국 죽고 말 것이다. 기왕 죽을진대 어찌 나라를 위해 죽지 않겠는가. 하물며 만에 하나라도 중요한 길을 막아 지켜서 적의 세력을 저지시킨다면 사지(死地)에서 살아나는 것도 이 기회요, 부끄럼을 씻고 나라를 회복하는 것도 이 때인 것이다. 대체로 우리 도내에는 반드시 누락된 장정과 흩어져서 도망간 군사가 있을 것인즉, 만약 식견있는 선비들이 서로 함께 불러 들여 권면하고 격려해서 힘을 모아 일어나 스스로 한 군단을 편성하고 적의 향하는 바를 감시하여 굳건히 요충지대를 지킨다면 위로 관군의 성원이 될 것이요, 아래로 한 지방의 생명을 안보할 것이다. 이 시기에 미처 일을 도모하기는 영남 사람 만한 이가 없는데 영남 사람은 적을 만난 처음에 한 마음으로 단결하여 막아 내려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망치는 것만 일을 삼았다. 이는 비록 허둥지둥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데서 나온 까닭이었으나, 오늘날 생각하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다. 나중에 적의 세력이 팽창하여 가옥들이 불에 타고 처자들이 능욕을 당하고서야 의사가 분연히 일어나서 많은 수효의 적들을 목 베거나 사로잡았으니, 비록 사람의 마음을 비교적 강인하게 하였다고 하겠으나 역시 이미 늦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제군들은 모두 이와 같은 일을 징계 삼아 나태한 습성을 버리고 남보다 먼저 출발하여 기약한 날짜에 뒤지지 않도록 하라. 우리들은 본시 활 쏘고 말 달리는 재주가 없고 병법도 알지 못하니 지휘하여 적을 물리치는 데 있어서는 너무도 생소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남보다 먼저 창의한 것은 한편으로 의사의 뜻을 격려하고 한편으로 용사의 기운을 분발하자는 바이니, 인간의 양심이 일찍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반드시 흥기하는 바 있을 것이다. 이 격문이 도착하는 날에 곧 뜻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온 고을을 효유하여 군인들을 기록해 가지고 이달 20일 보성(寶城) 관문으로 와 모이도록 하라. 한번 기회를 놓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임금이 욕을 당해도 구원할 줄 모른다면 어찌 사람이라 하리오. 모두 전말을 생각하여 창의할 것이니, 여러분은 도모하시라.
○ 송제민(宋濟民)의 격문은 다음과 같다.
삼가 나 송제민(宋濟民)이 지난달 23일에 의병장을 따라 수원산성(水原山城)에 당도하여 5일 동안 머물렀는데, 서울에 있는 적이 아직 치성하고 청주(淸州)ㆍ진천(振川) 등지의 유동하는 적이 역시 날뛰는데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가면 군량을 수송하지 못할 염려가 있었으므로, 온 진중이 모두 비생(鄙生)을 추천하여 충청도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여 길을 막고 있는 적을 소탕하고, 구원 오는 군사를 통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와서 충청도의 사우(士友)들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한 바 20일 사이에 정병 2천여 명을 얻어서 공론에 따라 전 도사(都事) 조헌(趙憲)을 추대하여 좌의대장(左義大將)을 삼아 황간(黃澗)ㆍ영동(永同) 이하의 적을 방어하게 하고, 전 찰방(察訪) 박춘무(朴春茂)를 우의대장(右義大將)으로 삼아 금강(錦江) 이상의 적을 방어하게 하려던 것이었는데, 일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금산(錦山)의 패보(敗報)를 들었으니 시운인가, 천명인가, 그렇지 않으면 인사(人事)를 제대로 극진히 하지 않은 탓인가. 말을 돌이켜 남쪽으로 돌아와 의병이 흩어지기 전에 다시 또 소집해 볼 계획이었는데, 은진(恩津)에 당도하자 비로소 대군이 흩어져 어찌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아! 사람이 누군들 죽음이 없으리오만 죽을 자리를 얻어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섬 오랑캐가 한창 극성을 부리던 날을 당하여 강병과 용장들도 역시 모두 관망하지 않으면 달아나서 구차스레 목숨을 유지하는데, 고제봉(高霽峰)은 유아(儒雅)한 문관으로서 본시 군사면에 대한 일을 알지 못했으나 하루아침에 군중의 추대를 받아 문득 장단(將壇)에 올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임금에게 보답했다. 그 아들은 아비를 따라 죽어서 충성과 효도가 아울러 한 집안에 났으니 죽어도 영화가 남아서 열렬한 빛이 있는지라, 사람마다 한 번 죽음은 있는데 고제봉은 유독 그 도리를 다하고 그 자리를 얻었으니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깊이 애통할 일은 임금님께서 서도를 순행하시고, 종묘와 사직이 잿더미가 되었으며, 조선 7도가 모두 흉한 왜적에게 유린을 당했는데 오직 호남 한 도만이 아직까지 다행히 보전되었으니 국가를 회복할 기본이 실로 이곳에 있거늘, 장수는 태만하고 군사는 교만하여 걸핏하면 무너져 흩어지고 마는 것이다. 대개 창의한 후부터 인심이 비로소 진정되어 모두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번 싸워 패하자 의기가 꺾여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 도리어 나태한 장수와 교만한 군사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아! 저 완악하고 패역한 군졸들이 공(功)을 좋아하고 이욕을 탐내어 유익하면 나가고 해로우면 피하는 것은 본시 그들의 제 몸을 꾀하는 상투 수단이라, 무엇을 책하며 무엇을 나무라겠는가마는, 일찍이 호남은 예의의 지방으로 선왕이 휴양(休養)해 주신 은혜에 젖은 지가 수백여 년인데 평시에 선비라 자칭하여 인의(仁義)를 자랑하는 자들도 이미 공명만 탐내어 피하기를 꾀하며, 수천의 굳센 졸병들도 일시에 무너져 흩어져서 한 사람도 장수의 죽음을 막아낸 자가 없으니 이 어찌 무식한 무리들의 웃음거리만이랴. 실로 흉한 오랑캐에게 부끄럼이 될 것이다. 아! 피를 입에 바르고 장수에게 다짐하던 추성(秋城 담양)의 부정(府庭)이 저기 있고, 마음으로 천지 신명에게 맹서하여 밝은 해가 내리비침이 저러하니 모르겠도다. 장차 무슨 면목으로 천지간에 용납을 받을 것인가. 아! 인의가 마음에 박힌 것은 실로 하늘에서 받은 바라 다른 사람이나 나나 마찬가지이니 진실로 피차의 다름이 없지만, 물욕에 팔리어 그 본심을 상실한 자가 간혹 있으니 사람의 형상을 하고 짐승의 마음을 지닌 자도 역시 있을 것인 즉, 충성과 효도를 어찌 사람들 모두에게 책할 수 있으랴. 그러나 이 왜적을 토벌하는 일은 역시 불충하고 불효하는 자들도 함께 원하는 바이니, 어찌 충신이나 의사의 사사로운 원수일 뿐이겠는가. 이미 당한 바를 들어 말하면 남의 처자 자매를 잡아다가 열 놈이 다투어 간음하여 죽게 하는 일이 잇달아 일어나고, 부형을 찔러 죽이고 아이들을 삶아 죽이며, 동네 인가를 불태우고 재물을 약탈하며, 남의 소와 말을 몰아가고 남의 노복을 부려먹으며, 좋은 전답을 탈취하고 남의 선산을 헐어 버리어 궁흉 극악(窮兇極惡)이 천지에 가득 차니 무고한 백성들이 난을 피해 도망가다 길가에 넘어지고 구렁창에 빠져 죽어 그 수효가 몇천만 명인지 헤아릴 수 없는 정도다. 요즘 7도(道)가 탕진되고 또 5고을이 함락되었는데, 그 5고을은 실로 호남의 함곡관(函谷關) 같은 존재로 사방이 막혀서 산을 의지해 험하고 굳건하니 이쪽에서는 공격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저 왜적놈들은 팔을 내뻗는 편리함이 있다. 이 형세를 따지면 이미 쉽고 어려운 차이가 있으며, 우리 군사는 이제 막 꺾이어 사기가 □저상되고 적은 이미 승세를 탔으니 왜의 세력은 저절로 확장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웅현(熊峴)의 혈전(血戰)에 힘입어 적의 기세가 조금 꺾였고 전주가 방비 태세를 갖추고 있으므로, 놈들이 힘을 요량하여 스스로 물러가니 형세가 몰아 쫓아낼 가망이 있다. 호서(湖西)의 의병이 은진(恩津)ㆍ연산(連山)ㆍ진안(鎭安)ㆍ옥구(沃溝)를 옹위하여 수비하는 품이 질서가 있고, 대장 조헌(趙憲), 참장(參將) 이천준(李天駿)이 시대에 부응하는 인물로서 천심을 측정하고 시국을 관찰하여 적을 요량해서 승리를 결정하여 옛사람에게 못지 않다. 형세상 놈들이 서쪽으로나 북쪽으로 달아나지는 못할 것이며 반드시 무주(茂朱)를 경유하여 동으로 영남을 향해 도망갈 것이나, 김(金)ㆍ곽(郭) 두 장수가 군사를 쓰는 것이 귀신과 같아서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할 것이니 반드시 영(嶺)을 넘어서지 않으려 들 것이며, 중국 군사 5만 명이 우리 근왕(勤王)의 군사와 함께 천지를 뒤흔들며 북으로부터 남으로 내려오면 송도(松都)ㆍ한양(漢陽)에 있는 적의 도망병과 충청도에 있는 적의 남은 부대가 내리 밀려서 돌아갈 길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금산(錦山)의 적과 합세하여 서ㆍ남으로 충돌하되 궁지에 빠진 신세라 죽음을 걸고 달려들 것이니, 후퇴하기 좋아하는 장수로 무너지기 잘하는 군사를 몰아친다면 어찌 반드시 지탱할 것을 보장하랴. 이것이 실로 호남 부로(父老)와 사민(士民)들의 막대한 근심거리인 것이다. 아! 옛사람은 천하의 백성을 나의 동포로 삼았는데 하물며 우리 본도 선비들은 조상 때부터 이 땅에서 태어나고 이 땅에서 살았으니 선인들의 혼백이 깃들여 있는 곳이요, 부모 처자가 편안히 살던 곳이요, 형제 자손들이 생식(生息)한 곳이요, 이웃 친구들과 교유하던 곳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변을 만나 오랑캐 놈들의 신첩(臣妾)과 노복(奴僕)이 된다면 이 이상의 욕됨이 있겠는가. 한 번 죽는 것이 오히려 영광일 것이다. 더구나 흉한 참변이 계속되어 골육과 친척이 함께 적의 손에 도륙됨에 있어서랴 기왕 죽을 바에야 오히려 적과 싸워서 죽는 것이 낫지 않은가. 이제 만약 한 번 싸움을 피하고 반드시 살 길을 찾고자 할진대 그 살 길을 마침내 얻지 못한다면 오늘날 같은 참화가 있을 뿐이요, 그렇지 않고 한 번 싸움을 결심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꼭 죽을 이치도 없는 것이며 결국 참혹한 화를 면하고 길이 무궁한 복을 받을 것이니, 이는 모두 절박하여 결코 그만둘 수 없는 거사이다. 어찌 반드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우러난 연후에만 그러하겠는가. 아! 배를 함께 타다 물에 빠지면 서로 건져주는 것은 호(胡)와 월(越)도 한 마음이라 했는데, 무릇 한 도(道) 안에서 함께 사는 우리로서는 실로 배를 같이 탄 형세로서 서로 물에 빠질 염려가 조석에 임박했으니, 비록 호ㆍ월의 사람이라도 부득불 마음과 힘을 일치하여 어려움을 면해야 하겠거늘 하물며 산천의 기품(氣稟)이 서로 흡사하고 학문의 취향도 서로 같아서 실로 형제의 의(義)가 있은즉 옛사람이 이른바 막연한 동포라는 말 따위에 그칠 바가 아니다. 무릇 우리 도내 각읍 부로(父老)들은 아비가 그 자식을 권장하고 형이 그 아우를 권면하여 지조와 절개를 가다듬고 다시 의병을 일으켜 흉한 칼날을 막아서, 위로 임금의 원수를 갚고 사람과 귀신의 분을 씻으며 아래로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를 보전하여 길이 그 가업을 편안히 하면 천만다행일 것이다.
○ 호성감(湖城監)이 양호(兩湖)에서 군사를 수합하여 2천여 명을 얻어 아산(牙山)을 경유하여 서해(西海)로 배를 타고 행재소(行在所)로 향하여 근왕(勤王)의 길을 떠나다.
○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이 남원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진안으로 향하다가, 순찰사가 다시 나누어준 군사를 진산(珍山) 이현(梨峴)으로 전진시켜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 등과 더불어 험한 곳에 웅거하여 복병을 설치하다.
○ 곽영(郭嶸)이 금산(錦山)에서 무너져 전주에 도착하였는데, 영(營)에 머물고 있는 영리(營吏)의 고목(告目)이 있어 그대로 전주에 머물게 하다. 그 종사관(從事官) 한 사람 이용순(李用諄) 이 한산(韓山)에서 집안에 우환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머물러서 아직 영에 돌아오지 않았다. 금산에 돌아와 모인 적이 사방으로 흩어져 불을 놓고 수색하여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여 전보다 배나 참혹했다. 20일에 진산(珍山) 관사를 불태우고 다시 금산으로 들어와 혹은 옥천(沃川)으로 물자를 실어내며, 무주(茂朱)의 적도 역시 물자를 지례(知禮)로 실어내어 모두 후퇴해 도망갈 계획을 하는 것 같다고 동현(同縣)의 현감 장 별장(張別將)과 어 복병장(魚伏兵將) 등이 보고해 왔다. 진산(珍山)과 동원(東院)은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 무안 현감(務安縣監)ㆍ해남 현감(海南縣監) 등이, 이현(梨峴)은 강진 현감(康津縣監)이, 저고리(苧古里)는 영광 군수(靈光郡守)가, 추현(杻峴)은 고산 현감(高山縣監)이, 송치(松峙)는 부안 현감(扶安縣監)이, 함평(咸平)은 무장 현감(茂長縣監)이, 조림원(照臨院)은 남평 현감(南平縣監)이, 순찰사 군관 전몽성(全夢星), 별장(別將) 남응길(南應吉)은 장수(長水)로부터 무주(茂朱) 지경을, 순창(淳昌)은 보성 군수(寶城郡守)ㆍ장수 현감이, 탄전(炭田)ㆍ죽치(竹峙) 등지는, 임실현감(任實縣監)ㆍ진안 현감(鎭安縣監) 등이 방어하되 형세를 보아 진격하라는 명령도 역시 전달하여 발송했다. 그리고 임피 현령(臨陂縣令)에게 군사 8백 명을 거느리고 황화정(皇華亭)에서 결진(結陣)하여 성원할 것을 어제 전령(傳令)하여 발송했다. 명(明) 나라 군사가 7일에 평양(平壤)을 포위하니 적의 떼가 이미 도망하여 서울의 적과 함께 모두 노량(露梁)을 건너고 청계산(靑溪山)에서 진위(振威)까지 잇대어 결진하여 아산(牙山)으로 향했다고 한다. 교동(喬桐) 공생(貢生) 고언백(高彦伯)이 밤에 평양에 들어가 적을 놀라게 하여 적의 무리 2백여 명이 저희들끼리 서로 쳐 죽이고 이로 인해 후퇴해 도망갔으므로 곧 그 사람을 등용하여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삼았다고 한다.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의 군관 이충(李冲)이 행재소(行在所)로부터 도총도사(都摠都事)의 직을 제수 받아 옥과(玉果)를 지나가면서 말하기를, “주상께서는 용천(龍川)으로 옮기시고 동궁(東宮)의 행차는 이미 강계(江界)에 도착했으며, 온갖 관원은 나누어 정해지고 두 곳의 비빈(妃嬪)은 다만 칠가(七駕)가 시종하고 있으며, 임해(臨海)는 이미 북도로 파천했다. 대개 인심이 조금 안정되었으며 주상께서도 안녕하시다. 명 나라 군사 3만 명이 이미 용천(龍川)에 도착했으며, 뒤이어 구원병도 와서 강변에 진을 치고 있다. 요동 윤(遼東尹) 이성량(李成樑)요동 자사(遼東刺史)인데 아들 이여송(李如松)ㆍ이여남(李如楠)ㆍ이여백(李如栢)ㆍ이여매(李如梅)ㆍ이여판(李如板)ㆍ이여회(李如檜)ㆍ이여오(李如梧) 8형제를 두어 세상에서 8장군이라 칭한다. 의 후임으로 조승훈(祖承訓)이 대장이 되고 왕(王)ㆍ양(楊)ㆍ곽(郭)ㆍ사(史) 등 여러 장수가 그 부관이 되어,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게 된다는 생각으로 급급히 싸움을 서두르니 그 성의가 지극하다 하겠다. 지난번 대동강 싸움에 적의 진중에서는 평의지(平義智)가 대장이 되고 행장(行長)ㆍ현소(玄蘇)ㆍ평수장(平秀長)이 부장이 되어 삼위(三衛)로 나누어 군사를 거느렸는데, 한 위(衛)의 수효가 많을 적에는 3천여 명에까지 달했다. 그래서 부중(府中)에 머무른 여러 장수들이 여러모로 계획을 세워 일제히 만여 개의 화살을 쏘아 한 위의 적을 모조리 죽였다. 우리 군사가 굳건히 지키고 적이 이미 기운이 꺾였는데, 뜻밖에 간사한 술책을 내어 밤에 얕은 여울물을 건너 어둠을 타서 내려 몰아치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평양을 함락당했다. 적이 주둔하던 날에 관서(關西) 용사 두어 사람이 밤에 적의 진중으로 들어가 4장수 중에 가장 나이 젊은 자 한 놈을 쏘아 죽였는데 실로 이 놈은 의지(義智)였다. 그래서 남은 적은 해서(海西)로 도망해 내려가고 서울에 머물던 적도 그 수가 역시 얼마 되지 않으니, 국토를 회복할 것이 손꼽아 기대된다. 평양 윤(平壤尹) 송언신(宋言愼) 이 싸움에 진 책임으로써 교체되었다.
○ 금산의 적 수천여 명이 진산(珍山)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약탈하니 이현(梨峴)의 복병장(伏兵將)인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 동복 현감 황진 등이 군사를 독려하여 막아 싸웠다.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퇴각하는 바람에 적병이 진채(陣寨)로 뛰어드니 우리 군사들이 놀라 무저지는지라, 권율이 칼을 뽑아들고 후퇴하는 아군을 베며 죽음을 무릅쓰고 먼저 오르고 황진도 역시 상처를 움켜쥐고 다시 싸워 우리 군사 한 명이 백 명의 적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적병이 크게 패하여 기계를 다 버리고 달아났는데 30여 명을 베었다.
○ 곽영(郭嶸)이 광주 판관ㆍ보성 군수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무주의 적을 탐색하고,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은 금산에 들어와 적을 탐색하다가 모두 무너져 도망갔다. 이때에 본도 장병이 여러 번 적의 두 소굴을 공격했으나 한 번도 승첩을 거두지 못하고 매양 무너지고 마니 이 어찌 반드시 저 왜적이 용감하고 날래서만이겠는가. 아! 어찌 남자다운 사람 하나가 없단 말이냐.
○ 영남 초유사(招諭使)의 공문 내에, “금월 23일 창원 부사(昌原府使)가 보고해 온 것을 보면 금월 19일에 성중에서 항시 머물러 있는 왜적과 계병부(桂兵部) 도합 33명이 성 안에 사는 잡인(雜人) 10명을 불시에 잡아다가 물건을 짊어지게 하고 기관(記官) 박춘정(朴春丁)과 함께 김해(金海)ㆍ해양(海洋)의 선척(船隻)을 간망(看望)하러 나갔다 돌아왔다고 하며, 항상 머물러 있는 왜적도 역시 본토로 돌아갈 생각이 있다고 했다. 지금 김해에 나갔다 온 사람을 만나서 적의 거취를 물은즉 김해ㆍ해양 각처의 적선이 즐비하고 좌우 산기슭에는 가설된 집들이 잇대어 있으며, 김해ㆍ밀양(密陽)에 교통하는 사람들과는 소를 치고 술을 빚어 서로 함께 마시고 씹어서 이웃 마을 사람과 같이 지냈다. 이렇게 지나는 10여 일 사이에 왜적 6명이 서울로부터 내려와서 귀에 대고 말을 전해주자, 뭇 왜적이 일시에 통곡하며 두 고을을 교통하는 사람을 남녀도 가려내지 않고 모조리 베어 죽여 2백여 명에 달했으며, 각처의 가설된 집들도 수효대로 불을 놓았고 강에 가득하던 배는 하룻밤 사이에 다 내려갔으니 군사를 거두어 도망갈 계획을 하는 것 같다. 귀도(貴道)의 금산ㆍ무주에 있는 왜적은 어느 곳으로 향하는지 통지해 달라.” 하다. 이상은 전라도에 보낸 공문이다.
○ 좌의병(左義兵) 진중의 사자(士子)들이 흩어진 군사 8백여 명을 소집하여 전 화순 부사(和順府事) 최경회(崔慶會)를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고 금월 26일 광주에서 기고(旗鼓)를 세웠는데, 골(鶻) 자로 장표(章標)를 만들었다. 우도(右道)로부터 군사를 모아 남원으로 향하면서 우의병(右義兵)이라 일컬었다. 거사하던 날에 여러 군(軍)에 다음과 같이 통시(通示)하였다.
한 사람을 상 줌으로써 천만 사람을 권하는 것이다. 지금 의병의 패전에 유학(幼學) 안 영(安瑛)은 그 주장이 탄 말이 놀라는 것을 보고서 자기가 탄 말을 주장에게 주어 대신 타게 하고 도보로 포복(匍匐)하다가 달갑게 죽음을 당했으며,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는 왜적의 칼날이 어지럽게 번쩍일 때 노복들이 모두 달려나가 적의 칼날을 피하라고 간청하자, 성내어 거절하며 말하기를, “내가 만약 달아난다면 주장을 어느 곳에 두겠느냐.”하고, 그 주장의 노복이 다 흩어져서 말이 전진할 수 없음을 보자 자기 종을 명하여 주장을 보호해서 나가게 함과 동시에 자신이 뒤를 따라 적을 막다가 갑자기 칼에 맞아 죽었다. 아! 인심이 극도로 어지러운 이즈음을 당하여 임금을 배반하고 나라를 잊어버리며 목숨을 탐내어 구차히 살아가는 것이 곳곳마다 다 그러하고, 윗사람에게 친히 하며 어른을 위해 죽는 일은 전혀 들을 수 없는데, 이 두 사람은 이익을 꾀하거나 공을 계산하는 마음이 없어서 마침내 목숨을 버리고 의(義)를 취하여 분연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만약 급급히 그 절의(節義)를 드러내어 한때의 이목(耳目)을 솟구치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꺾여진 사기를 일으켜 세우며 무너진 강상(綱常)을 붙잡을 수 있으랴. 일이 시급하지 않은 것 같지만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하니, 바라건대 각 읍 향교(鄕校)ㆍ향소(鄕所)에 각각 부물(賻物)을 거두어 되는 대로 사람을 시켜 그 집에 조문하고, 의거(義擧)한 뒤에 그 해골을 거두어 제사를 드리고 말미를 갖추어 위에 아뢰어 정문을 세워 의기를 고무시키도록 하라.
○ 호남ㆍ영남 수군이 견내량(見乃梁)에 거제(巨濟)ㆍ고성(固城)의 경계이다. 모여 왜적의 큰 배 10척, 중ㆍ소선 70여척을 발견하고 접전하였다. 우리 군사가 두 번째 총통(銃筒)을 쏘았으나 전혀 깨어질 형세가 없으므로, 한산도(閑山島) 큰 바다로 퇴진하여 다시 삼도의 여러 선박과 더불어 약속하고 북채를 두들기며 한꺼번에 나가 거의 다 무찔렀다. 적선 10척이 포위망을 벗어나 달아나니 진도 군수(珍島郡守) 선거이(宣居怡)가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다. 10일 적선 70여 척이 안골포(安骨浦) 선창에 결진하고 있으므로 삼도의 여러 전선 백여 척이 돌진하여 접전을 벌였으나 다 깨뜨리지는 못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전 현감 임계영(任啓英)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다. 임계영은 전라도 보성(寶城) 사람으로, 처음에 본도 관군과 의병이 함께 근왕(勤王) 길에 나가고 온 도내가 공허하게 되자 흉한 왜적이 틈을 타서 경내에 쳐 들어오니 충돌당할 근심이 조석에 박두하여 내지(內地)의 위태로움이 그릇을 기울여 물을 쏟는 것보다 더하므로, 임계영은 동지 여러 사람과 더불어 격문을 띄워 군사를 모집해서 방어할 계획을 했다. 그래서 본군에서 출발하여 낙안(樂安)ㆍ순천(順天)을 경유하여 남원으로 향해 다니면서 군사를 수합하여 천여 명을 얻어 좌의병(左義兵)이라 칭하고, 호(虎) 자로 장표(章標)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범을 그려 만들었다가 나중에 호 자의 인(印)을 만들었다.
○ 김천일(金千鎰)ㆍ최원(崔遠)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수원(水原)으로부터 인천(仁川)으로 향하면서 본도에다 구원병을 요청하니, 이광(李洸)이 조방장 이유의(李由義)와 진도군수 선거이(宣居怡)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 구원하게 하다.
○ 영남의 왜적이 몰려 전일에 해인사(海印寺)에서 밥을 빌어먹던 막실(莫失)ㆍ막돌[莫石]을 호남으로 보내어 형세를 엿보게 하다. 초유사의 비밀이다.
○ 경기도 과천 현감(果川縣監)이 전달한 통문 내용에, “적병 한 부대가 개성부(開城府) 청석동(靑石洞)에 진을 치고 있다가 우리 군사에 패하였고, 신립(申砬)이 충주(忠州)에서 패전한 뒤로 왜놈의 의복을 바꾸어 입고 몰래 도성으로 들어와 적 2백여 명을 마구 베었으며, 도원수 윤두수(尹斗壽)의 소속 군사가 또 적 1천여 명을 베어서 서울에 있는 적이 후퇴해 달아났다.” 하다.
○ 영남 초유사(嶺南招諭使)의 공문 내에, “본도 우도(右道) 여러 의병 2만여 기(騎)가 날마다 적을 공격하여 고령(高靈) 이하는 이미 회복되었으며, 서울에서 내려오는 적이 진퇴를 마음대로 못하고 나왔다 도로 들어가는 형편이니, 산중에 피란간 사람들에게 급히 이 기별을 전해서 사람마다 분연히 일어나 적을 치게 할 것이다.” 하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도순찰사(都巡察使)가 소식을 알리기 위하여 당일로 병사에게 도부(到付)된 첨지를 보면, “지금 도착한 어지(御旨) 내에, ‘요동(遼東)에서 크게 정병 5만 명을 풀어서 강변에 머물러 성원을 하게 하고, 광녕총병관(廣寧總兵官) 양원(楊元)이 귀순한 오랑캐 5천 명을 친히 거느리고 앞서 와 요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으며, 조 총병(祖總兵)ㆍ곽 유격(郭遊擊)ㆍ왕 유격(王遊擊) 세 대장이 각기 수천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이미 압록강을 건넜고, 사 유격(史遊擊)은 정예부대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었다. 어제 저녁 의주 목사(義州牧使)가 등초해 보낸 관전보(寬奠堡) 표첩(票帖) 내에 중국에서 산동도(山東道) 수군 10만으로 하여금 수로를 경유하여 곧장 왜적의 소혈(巢穴)을 두들길 모양이라 했으니, 경(卿)은 아무쪼록 연해 각 읍에 이 연유를 적어 관문이나 길거리에 방(榜)을 걸어 두루 알리라.’ 하셨다. 어지가 협정에 의거하여 이러하기에, 중국의 구원병이 이미 압록강을 건너와서 군의 형세가 크게 떨쳤으니 왜적을 무찔러 없애고 국토를 회복할 날을 손꼽아 기약한다. 이 역시 민간에 알려 모두 듣게 하라.” 하다. 이상 공문은 각읍에 보낸 것임.
○ 왜적이 평양에 들어온 뒤로 매일 나가 도적질을 하되 부산(斧山) 밖을 벗어나지 않고 돌아오며 마치 무엇이 두려워서 감히 못하는 것이 있는 듯이 보이니 예언[讖記]의 말도 다 거짓은 아닌 듯싶다. 부산(斧山)은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이때에 참언(讖言)에, “왜적 난리 7년에 부산으로부터 부산까지 오고, 왜놈 난리 10년에는 압록으로부터 압록까지 온다.” 하였다.

[주D-001]안 상산(顔常山) : 당 현종(唐玄宗) 때의 충신 안고경(顔杲卿)이니, 원문의 안 상산(顔常山)은 안 평원(顔平原)의 잘못인 듯하다. 안평원 열전(列傳)에 ‘신무상죄당사(臣無狀罪當死)’라는 말이 있다.
[주D-002]문 신국(文信國) : 남송(南宋) 말년의 충신인 문천상(文天祥)이니, 위왕(衛王) 때 신국공(信國公)을 봉했다.
[주D-003]내상(內廂) : 여기서는 안쪽 지방[內地] 즉, 함안ㆍ창원ㆍ이령 등지를 말한 듯하다.
[주D-004]한(漢) 나라의 …… 나라 붕거 : 중국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승상인 제갈공명(諸葛孔明)과 남송 말년의 명장 악비(岳飛)이니, 붕거(鵬擧)는 악비의 자(字)이다. 이 두 사람은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주D-005]장순(張巡) : 당(唐) 나라 때의 사람이다.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기병(起兵)하여 안녹산을 토벌했는데, 허원(許遠)과 수양을 지키고 있다가 수양성이 함락되매 안녹산을 역적이라 꾸짖고 피살되었다.
[주D-006]납서(蠟書) : 편지를 납덩이 속에 넣어서 물이 새어들지 않게 한 것이다. 《송사(宋史)》
[주D-007]석륵(石勒) : 진(晉) 나라 때 중국을 침범하여 후조(後趙)를 세운 갈인(羯人 : 중국의 변경 민족)이다.
[주D-008]조사아(祖士雅) : 진 나라 때의 명장 조적(祖逖)의 자(字)이다. 조적이 진 원제(晉元帝) 때 군사를 통솔하여 북벌하기를 자청하자, 원제는 그를 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하였다. 그가 북벌군을 거느리고 장강을 건너갈 때 노를 치며 맹서하기를, “중원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고 다시 건너게 된다면, 이 강물에 빠져 죽겠다.” 하였던 바, 조적은 마침내 석륵을 격파하여 황하 이남의 땅을 회복하였다.
[주D-009]장숙야(張叔夜) : 송 나라 때의 사람으로 금(金) 나라 군대와 싸워 용맹을 떨쳤다. 《송사(宋史)》
[주D-010]사모(蛇矛)와 월극(月戟) : 사모는 창의 한 종류로 전장에 쓰는 무기이니, 장팔사모(丈八蛇矛)라고도 한다. 월극도 창의 일종으로, 날이 초생달같이 굽어 그리 칭한 것이다.
[주D-011]안진경(顔眞卿) : 당 나라 때 사람으로 그가 평원 태수(平原太守)로 있을 때 안녹산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진경이 군사를 일으켜 안녹산을 토벌하자 북방의 여러 군에서는 그를 맹주로 추대하여 하북초토사(河北招討使)로 하였다.
[주D-012]유총(劉聰) : 진(晉) 나라 때 흉노의 황제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진 나라를 침략하였다.
[주D-013]동창의 계교 : 송(宋) 나라 진회(秦檜)가 부인 왕씨와 동창에서 귤(橘)을 희롱하면서 악비(岳飛)를 죽이려는 계획을 하였다.
[주D-014]서촉(西蜀)으로의 피란 : 당 현종(唐玄宗)이 서촉으로 피란하였으므로, 선조의 거가가 서행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15]봉천(奉天)으로 향하는 …… 먼지가 날린다 : 당 덕종(唐德宗) 부자가 금(金)의 군사에게 잡혀 봉상현 봉천으로 끌려간 고사가 있는 바, 선조의 파천을 형용한 말이다.
[주D-016]이에 물들인 무리 : 왜적들은 이빨에 칠을 하였으므로 칠치(漆齒)라 부른다.
[주D-017]포서(包胥)의 충성 : 춘추 시대 초 나라의 대부 신포서(申包胥)가 초 나라의 보전을 위해 힘을 다한 바 있다. 《춘추(春秋)》정공(定公) 4년
[주D-018]포신(鮑信) : 중국 후한 말년의 절개가 있던 인물로, 황건적(黃巾賊)과 접전하다 죽었다. 《후한서(後漢書)》
[주D-019]방덕(龐德) : 중국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으로, 변경 민족인 저강(氐姜)의 침공을 격파하였다.
[주D-020]범진(范鎭)의 머리털이 허옇게 돼버린다 : 범진은 북송(北宋) 때의 명신이다. 인종(仁宗)이 재위 35년에 후사가 없으매, 범진이 종실의 근속(近屬) 중에서 현량한 자를 골라 황제의 지위를 계승시킬 준비를 하라고 건의하였으나, 집정자의 저지로 실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범진은 굽히지 않고, 인종에게 여러 차례 되풀이하면서 우니, 인종도 울면서 말하기를, “짐은 경의 충성을 아오. 경의 말이 옳소. 하지만 다시 2, 3년을 기다려야 할 것이오.” 하였다. 범진이 장주를 10여 차례 바치고 1백여 일 동안 어명을 기다린 끝에 수염과 머리가 희어지자, 조정에서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음을 알았다. 《송사(宋史)》권 337
[주D-021]소해(小海) : 세자를 가리킨다. 《산해경(山海經)》에 “원고(元臯) 위에서 남으로 유해(幼海)를 바라본다.”는 말이 있으니, 유해는 소해(小海)이다. 그러므로 천자(天子)는 대해(大海)에 비하고, 태자(太子)는 소해에 비한 것이다.
[주D-022]전성(前星) : 세자를 가리킨다. 진(晉) 나라 천문지(天文志)에, “심(心)이란 별이 있는데, 중간 별[中星]은 천자(天子)를, 앞 별[前星]은 태자(太子)를, 뒷 별[後星]은 서자(庶子)를 가리킨다.” 하였다.
[주D-023]용루(龍樓) : 한(漢) 나라 성제기(成帝紀)에 있는 말로, 성제가 태자(太子)로 있을 때 계궁(桂宮)에 거처하였는데 임금이 태자를 불러 용루문(龍樓門)으로 나오게 했었다.
[주D-024]학금(鶴禁) : 한 나라 궁궐소(宮闕疏)에 있는 말로, 학궁(鶴宮)은 태자(太子)가 거처하는 궁인데 어느 사람이라도 드나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학금(鶴禁)이라 하였다.
[주D-025]칠묘(七廟) : 중국의 고제(古制)에 의하면, 천자가 칠묘를 두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서울에 있는 종묘를 그렇게 말한 것이다. 《예기(禮記)》〈王制〉
[주D-026]윤대(輪臺)에서 과오를 뉘우침 : 윤대는 중국 신강성 서남쪽에 있는 지명으로 한 나라 무제(武帝)가 중앙아시아(당시에는 서역(西域)이라 했다)를 정벌하여 군사가 그곳까지 가 있었으나, 무제가 병으로 죽을 때에 윤대에 군사 보낸 것을 후회하는 조서를 내렸다.
[주D-027]봉천(奉天)에서 자기를 허물함 : 봉천은 당 나라 때 섬서성(陝西省)에 있던 현이다. 덕종(德宗)이 주자(朱泚)의 반역을 피하여 그곳으로 파천하였는데, 그곳에서 과거를 뉘우치고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는 조서(詔書)를 내리니 그것을 죄기조(罪己詔)라 한다.
[주D-028]영무(靈武)의 의기(義旗) : 당 나라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현종(顯宗)은 촉(蜀)으로 파천했는데, 그의 아들 숙종(肅宗)이 영무(靈武)에서 즉위하고 안녹산을 물리쳐 당 나라를 수복했다. 그 고사를 가지고 세자 혼(琿 즉 후의 광해군)에게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광복시킬 것을 기대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주D-029]미앙궁(未央宮)의 수주(壽酒) : 미앙궁(未央宮)은 중국 한(漢) 나라 때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 서북의 장안의 고성(故城) 안에 세웠던 궁전 이름. 새해를 축복하는 뜻으로 마시는 술. 미앙궁의 수주는 서울의 궁전을 회복하기를 고대하는 선조의 마음을 나타낸 말.
[주D-030]중국 : 하(夏)를 옮긴 말이다. 여기서는 글의 서두로 감개를 나타내는 대목에 쓰인 것이므로 반드시 중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D-031]궁(窮)과 한(寒) : 궁과 한은 모두 중국 고대 하 나라 시대의 역적으로 궁은 유궁후예(有宮后羿)의 약한 것이니, 그는 하 나라를 역적질하였고 한은 한착(寒浞)이니 후궁유예의 아들로 역적질한 아비를 죽이고 그 아비의 자리를 빼앗았던 역적이다.
[주D-032]훈육(獯鬻) : 중국 고대의 변경 족속인 흉노(匈奴)의 별칭으로, 중국을 자주 침범하여 포악한 짓을 자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D-033]밀(密) : 주 문왕(周文王) 때의 조그마한 나라이다. “밀인이 불공하여 감히 큰 나라를 거역하였다[密人不恭, 敢距大邦].” 하였다. 《시경(詩經)》〈대아(大雅)〉
[주D-034]연교(燕郊)에서 말을 키우겠다 : 연교는 중국 북방의 수도(首都)가 있는 곳의 교외로, 그곳에 말을 치겠다는 것은 중국을 점령하겠다는 말이다.
[주D-035]덕진(德鎭)으로 교질(交質)해야 한다 : 덕진은 주민에게 은덕을 베푸는 산이니, 덕진으로 교질하겠다고 하는 것은 중국의 명산을 내놓으라는 말이 된다.
[주D-036]조정의 계획 : 원문에는 묘(廟) 밑에 한 글자가 탈락되어 있다. 여기서는 묘산(廟算)으로 보고 ‘조정의 계획’으로 옮겼다.
[주D-037]교령(嶠嶺)에 머뭇거리며 : 원문에 교영(喬英)이라 한 말은 ‘교만하게 굴며’라고 해석이 되는데, 나는 교(嶠)와 영(嶺)의 오서라 보므로 모두 영남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준순교영(逡巡喬英)’을 영남에서 머뭇거리고 있다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주D-038]빈교(邠郊) : 빈(邠)은 옛날 주 문왕의 조부인 태왕(太王)이 있던 도읍이었는데, 적(狄)의 침략으로 그곳에서 쫓겨나 기산(岐山)으로 옮겼다 한다.
[주D-039]하북(河北) 지역이 비록 흩어지고 :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황하 이북이 모두 안녹산에게 항복하였다는 말이다.
[주D-040]수양(睢陽) :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商丘縣) 남부에 있던 지명으로, 당 나라 때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그곳을 굳게 지켜 장강(長江)과 회하(淮河) 일대의 땅을 막아 안녹산 군이 침입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주D-041]악비(岳飛)가 갓 …… 우레같이 통곡하였고 : 악비는 중국 남송 초기의 명장이다. 여러 차례의 무공으로 태위소보(太尉少保)에까지 올라 하남북제로초토사(河南北諸路招討使)가 되어 금군(金軍)을 대파하고 수일 내로 황하를 건너가 실지(失地)를 광복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진회(秦檜)는 금과의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하루에 12번 금자패(金字牌)를 내려 악비를 소환했다. 삼군이 통곡한 것은 그때의 일이다. 그 후 진회는 만사설(萬俟卨) 등을 시켜 악비를 탄핵해서 체포 투옥하여 처형하여, 39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주D-042]장준(張浚) : 남송 초기 주전파의 거물이다. 송 나라 고종(高宗) 때 천섬경서제로선무사(川陝京西諸路宣撫使)로 금을 제어하고 있다가 주화파인 진회에게 몰려 영주(永州)로 좌천되었다. 효종(孝宗) 때에 가서 추밀사(樞密使)를 제수받고 강회(江淮)의 군사를 도독(都督)하였으니, 주전파로 널리 민간의 환영을 받았다.
[주D-043]해바라기 : 해바라기는 해를 항상 처다본다 하여, 충신이 항상 임금을 향하는 데 비유한다.
[주D-044]동해가 바로 …… 않을 것이고 : 옛날 전국 시대 말기에 진(秦) 나라가 강성하여서 여러 나라를 침략하자 진 나라를 황제로 존칭하고 종주국을 삼자는 의논이 생겼는데 이때 노중련(魯仲連)이라는 선비가, “나는 차라리 동해를 밟고 죽을지언정 진 나라같이 악독한 나라를 황제국으로 섬길 수 없다.” 하고 반대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D-045]의병(疑兵) : 군사가 많은 것처럼 거짓으로 꾸미는 것, 또 그렇게 꾸민 군사를 말한다.
[주D-046]역적 양(亮)이 …… 어긴 일 : 북송 때에 여진족(女眞族)이 금(金) 나라를 건국하고 송(宋) 나라를 침략하여 송 나라가 강남으로 쫓겨 갔으므로 이때부터 남송이라 한다. 남송에서는 금 나라에게 신하가 되겠다는 서약을 올리고 겨우 두 나라의 평화를 유지하였는데 금 나라에서 황족인 완안량(完顔亮)이 임금을 죽이고 자기가 황제가 되었으므로 역적인 양이라 하여 역량(逆亮)이라고 부른다. 그 완안량은 남송과 평화의 약조를 깨뜨리고 남송을 침략하다 남송의 반격을 받아 대패하고 자신까지 부하 군대의 손에 살해되었다.
[주D-047]중행(中行)을 매질하지 않은 것은 : 중행률(中行律)은 원래 한(漢) 나라 사람인데, 흉노족(匈奴族)에 항복하여 흉노의 참모가 되어서 도리어 한 나라를 괴롭혔다.
[주D-048]장강(長江)이 급작스리 …… 날아서 건너왔다 : 중국이 남북조로 갈렸을 때, 양자강(揚子江)을 하늘이 만들어 준 참호[天塹]라 하여 그 강을 건너오려거든 날아서 건너오라 하였으나 그 장강을 건너게 하였다면 남조에는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이라는 말이다.
[주D-049]태왕(太王)이 빈(邠) …… 떠나던 마음 : 주(周) 나라의 조상 태왕은 빈(邠 : 豳)에 살았는데 융적(戎狄)의 침입을 받았다. 나라 사람들은 융적과 싸우려고 했으나 태왕은 전쟁에 군사들이 죽는 것을 측은하게 여겨 기산(岐山) 밑으로 옮겨가 살았는데 빈에 살던 사람들이 다 그를 따라와 살았다. 태왕은 그때에 가서 비로소 주라는 국호를 정하고 융적의 습속을 물리치고 성곽과 궁실을 세워 나라를 경영했다. 아들 문왕(文王) 대에 주는 크게 팽창하고 손자 무왕(武王)의 대에 이르러서는 중국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태왕은 무왕이 추존한 칭호이고 그 이전에는 고공단보(古公亶父)로 불리웠다.
[주D-050]명황(明皇)이 촉(蜀) …… 갔던 일 : 당 나라 때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이 위태로워지자 현종(玄宗)은 몽진하여 촉으로 파천했다.
[주D-051]공락(鞏洛) : 공현(鞏縣)은 지금의 중국 하남성 영양현(榮陽縣) 서부의 낙수(洛水) 동안(東岸)에 있었는데, 안녹산 반란 때에 당 나라 군사가 이곳에서 패했으므로 황제가 서울을 버리고 달아났다.
[주D-052]민아(岷峨)의 위험한 …… 멀리 갔다 : 당 현종이 촉으로 들어갈 때 그러한 험준한 길을 가야 했다. 민아(岷峨)는 촉 땅의 산으로 민은 민산(岷山), 아는 아미산(峨嵋山)이다. 취화(翠華)는 임금이 탄 수례의 장식이니, 그것을 타고 가는 임금을 말하는 뜻으로 쓰인다.
[주D-053]이성(李晟) : 당 나라 때의 사람으로 덕종(德宗) 때 주자(朱泚)의 반란을 평정하여 수도를 수복하였고, 황제가 봉천(奉天)에 포위되어 있을 때 그 포위를 풀어 황제를 구출했다.
[주D-054]육지(陸贄) : 당 덕종의 신하로 덕종이 봉천에 포위되어 있을 때 측근에서 시종하였다. 임금이 매일 백으로 헤아릴 만큼 많은 조서를 내리는데 붓을 휘둘러 그것을 써내리기를 생각이 샘솟듯하여 다 사정을 곡진하게 나타내고 그때 그때의 필요에 잘 맞춰 나갔다고 한다.
[주D-055]상주(相州) : 중국 하남성 안양현(安陽縣)에 있었는데, 당 나라에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구절도(九節度)의 군대가 반란군에 의해 궤멸되었다.
[주D-056]장막의 제비 : 장막을 버티고 있는 나무에 제비가 집을 짓고도 그 천막이 곧 없어질 것을 모르고 찍찍거린다는 것으로 대단하지 않아 소탕해 버리는 것이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주D-057]밤중의 닭소리 : 밤중에 닭이 우는 것은 난리가 날 징조라 한다.
[주D-058]중류(中流)에 뜬 …… 노를 치면서 : 중국에 여러 호족(胡族)이 침략하여 서진(西晉)이 멸망하고 황족 한 사람이 강남으로 쫓겨가서 동진(東晉)을 건국하였는데, 그때에 조적(祖逖)이라는 사람이 군사를 거느리고 양자강을 건너서 호족을 정벌하러 떠날 적에 양자강 중류에서 배의 노를 치면서, “만일 저 오랑캐를 쳐서 평정하지 못한다면 저 강물과 같이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고 맹서하였으나 그는 중간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주D-059]복덕(福德)이 바야흐로 …… 분야에 임했고 : 하늘의 복덕성(福德星)이 비치는 땅을 침략하면 침략하는 나라가 도리어 패한다고 한다.
[주D-060]노래하고 읊조리는 …… 생각하게 된다 : 한(漢) 나라가 중간에 왕망(王莽)에게 역적질을 당한 때가 있었는데 왕망이 정치를 하도 포악하게 하여서 백성들은 노래하는 데도 한 나라 옛적을 생각하였다
[주D-061]신정(新亭) : 중국 강소성 남경시 남쪽에 있었던 정자로, 동진 때 시세가 혼란하여 명사들이 이곳에 모여 서로 보고 개탄하였다 한다.
[주D-062]흥원(興元) : 흥원은 당 나라 서울 서북쪽에 있는 땅으로 당 나라 희종(僖宗)이 황소(黃巢)의 반란군을 피하여 그곳으로 파천하였었다.
[주D-063]형초(荊楚)의 기특한 인재들 : 옛날 중국 초 나라에는 뛰어나게 용맹한 인물들이 많이 났다는 것을 취해서 쓴 말임.
[주D-064]연조(燕趙)의 검객 : 옛날 중국 연ㆍ조 지방에서는 검술에 비상한 인물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D-065]말을 채찍질하여 …… 찌를 것 : 관우(關羽)가 조조(曺操)에게 있을 때에 원소(袁紹)의 대장 안량(顔良)이 대군을 거느리고 조조를 공격해 왔으므로 조조도 군대를 내어서 응전하게 되었다. 양군이 대진하면서 안량은 수백 명의 부장들에게 옹위되어 진두에 나섰는데 그때에 관우는 조조에게 적토마(赤兎馬)라는 좋은 말을 선사 받았다. 그래서 관우는 그 말을 몰고 달려가서 안량의 진으로 들어가 안량을 단번에 찔러 죽였다. 그것은 그 좋은 말의 힘이 많았던 것이다.
[주D-066]기북(冀北) : 기북은 중국의 북경 근처로 예전부터 좋은 말의 산지로 유명하였다.
[주D-067]노적가리를 가리켜 내주던 의기 : 중국 삼국 시대에, 오(吳) 나라 주유(周瑜)가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노숙(魯肅)의 집에 들러 군량을 달라고 청했다. 노숙의 집에는 양곡 노적가리가 둘이 있었는데 각각 3천 곡(斛)씩이 들어 있었다. 노숙이 그 중의 하나를 가리켜 그것을 주유에게 주었다는 고사이다.
[주D-068]양주(揚朱)와 묵적(墨翟) : 유가에서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자 양주의 사상이나 극단적인 박애주의자 묵적의 사상을 이단으로 극력 배척한다. 양주와 묵적을 배척하는 자는 곧 선비를 의미하는 말이다.
[주D-069]곤란 : 중국의 진(秦) 나라는 서북에 위치하여 있고 월(越) 나라는 동남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래서 ‘월 나라 사람이 진 나라 사람이 수척한 곤란을 보고도 모른 체한다’는 말이 있다.
[주D-070]봉명국(奉命國 : 천명을 받든 나라라는 뜻으로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입장에서 일본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라 생각된다.
[주D-071]주여숙(柱厲叔)이 이것을 …… 기다릴 것인가 : 춘추 시대의 사람으로, 거(莒)의 오공(敖公) 밑에서 벼슬을 살다가 그 재능이 알려지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바닷가에서 살면서 극도의 빈곤에 쪼들렸다. 오공이 변란을 당하자 그는 벗들과 하직하고 오공에게 가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나섰다. 주여숙의 이러한 행동은 후세의 임금 중에 인물을 못 알아 보는 자를 부끄럽게 하는 동시에, 임금의 은총을 받고도 임금의 급난에 자신만을 보전하려 드는 신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주D-072]안진경(顔眞卿)이 다시 …… 할 것인가 : 당 나라 안녹산의 반란 때에 하북 17군(郡)이 모두 붕괴하여 안녹산에게 항복하였는데 오직 평원 태수(平原太守) 안진경만이 성을 지켰으므로, 현종이 “짐은 안진경이 어떻게 생겼는지[作何狀] 모르나 참 장한 사람이다.” 하였다.
[주D-073]세성(歲星)이 기(箕)의 …… 기약이 없으랴 : 이 글에서 한실과 송은 다 중국의 한족이니 변경의 침략적인 족속과 비교해서 나타낸 말이다. 즉 여기서는 곧 조선의 왕실 내지 조선을 말한 것이다. 세성이 기의 분야를 지켜서 복덕이 내릴 징조가 있다고 한 것은, 기를 조선의 분야로 보고서 한 말로 고래의 점성술(占星術)에 기대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74]서방(西方)에 미인 : 미인은 임금을 나타낸 말이다. 《시경(詩經)》〈패풍(邶風)〉
[주D-075]순무(巡撫)가 당보(搪報)를 …… 되었다. 운운. : 이것은 명 나라 때의 자문인데, 형식이 특이하고 원문 전후에 약간의 혼란이 있어 모호한 부분이 없지 않다. 자(咨)는 동등한 기관 사이에 쓰는 공문 형식이다. 원문의‘須至’의 ‘至’는 ‘知’의 와오일 것이고, ‘吉’자 위에는‘秀’자가 오탈했을 것이고, ‘凋信’의 ‘凋’자는 ‘調’의 와오일 것이다.
[주D-076]10대의 주불(朱紱)이요 7대의 은장(銀章)이라 : 주불은 붉은 색의 치마 같은 무릎 덮개로, 고관 대작이 수레에 탈 때 사용하였다. 은장은 은으로 만든 인장으로 고제(古制)에 의하면 2천 석의 녹을 타는 벼슬을 하면 그 관인을 은으로 만들고 ‘모관지장(某官之章)’이라 새겼다 한다.
[주D-077]금관자(金貫子) : 금으로 만든 관자이다. 관자는 망건에 달아 망건 줄을 꿰는 작은 고리로, 금관자는 종2품의 벼슬하는 사람이라야 붙였다.
[주D-078]호전(胡鈿) : 호전은 주화파의 괴수 진회(秦檜)를 목 베고 금에 항전(抗戰)할 것을 상소했다. 곽재우는 호전이 진회를 목 베라고 주장한 것이 정당한 것같이 자기가 김수를 목 베자고 하는 것도 정당하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주D-079]동탁(董卓) : 중국 동한(東漢) 말년의 사람으로, 전공(戰功)이 있어 영제(靈帝) 때 전장군(前將軍)이 되었고 병주목(幷州牧)의 벼슬을 얻었다. 영제가 죽자 하진(何進)의 부름에 호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수도에 들어가 환관을 죽이고 그 일이 평정되자 자기가 상국(相國)이 되어 소제(少帝)를 폐하고 하태후(何太后)를 시해(弑害)하고 헌제(獻帝)를 세웠다. 음란하고 흉폭하여 그 해독이 조야에 퍼져 원소(袁紹) 등이 군사를 일으켜 그를 토벌하였는데, 동탁은 헌제를 끼고 장안으로 천도하여 자기가 태사(太師)가 되어 가지고 제위를 찬탈할 생각을 품었다. 왕윤(王允)이 역사(力士) 여포(呂布)를 꾀어 동탁을 자살(刺殺)시키고 그 족속을 멸했다.
[주D-080]형벌은 대부에게는 올라가지 않는다 : 본래 대부 이상에는 형벌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대부 이상이면 형벌을 받을 행동을 하지 않으므로 형벌을 적용할 필요가 없고 또 형벌을 받을 만한 죄를 대부가 범했다면 형벌을 받기 전에 자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이 글에서는 그런 뜻으로 쓴 것은 아니고 곽재우를 공격하기 위한 근거의 하나로 그 말을 내세운 것이라 하겠다. 《예기(禮記)》〈곡례(曲禮)〉
[주D-081]옥절(玉節)을 잡았으며 : 지방 장관이 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82]강회(江淮)를 차단하여 …… 구실을 하였는데 : 낙동강 연안을 지켜 그 일대를 안온하게 만든 것을 말한다.
[주D-083]정의를 해치는 자를 도적이라 한다 : 《맹자(孟子)》 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이나 약간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원문에는 ‘적인자 위지적(賊仁者謂之賊)’이 아니라, ‘적의자 위지잔(賊義者謂之殘)’이라 하였다.
[주D-084]근왕(勤王) : 왕실에 힘을 다한다는 말이다. 《춘추(春秋)》에, 호언(狐偃)이 진후(晉侯)에게 말하기를, “제후(諸侯)를 구하려면 근왕하는 것밖에 없다.” 하였으므로, 후세에 의병을 일으켜 왕실을 구원하는 것을 근왕이라 하였다.
[주D-085]간섭을 받아 : 사람을 시켜 일을 하게 하고 뒤에서 방해한다는 말이다. 복자천(宓子賤)이 선보(單父) 고을의 원님이 되자 글씨 잘 쓰는 사람을 청하여 글씨를 쓰라 하고 뒤에서 팔목을 끌어당기며 글씨가 잘 되지 않으면 성내니, 글씨 쓰는 자가 돌아 가서 노(魯) 나라 임금께 고했다. 노 나라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복자천이 내가 자기 일을 간섭할까 두려워서 한 짓이다.” 하였다. 《설원(說苑)》
[주D-086]곡단(曲端) : 송(宋) 나라 사람으로 금인(金人)과 싸워 공이 있었는데, 뒤에 다른 사람의 참소를 만나 옥중에서 죽었다.
[주D-087]한착(寒浞)처럼 스스로 넘어질 줄 : 한착은 하대(夏代)의 사람으로 유궁후예(有窮后羿)가 제위를 빼앗아 하 나라 대신 유궁씨(有窮氏)로 일컬을 때 그의 재상이 되었다가 후일 예(羿)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후에 소강(小康)에게 멸망되었다.
[주D-088]장인(丈人)의 원길(元吉) : 《주역》의 지수사(地水師) 괘에 보인다.
[주D-089]초호(楚戶)의 세 집 : 초(楚) 나라 남공(南公)이 예언하기를, “초 나라 3집만 남아도 진(秦) 나라를 멸할 수 있다.” 하였다.
[주D-090]혜련(惠連) : 혜련이 10살 때 이미 글을 잘 지으니 그 형 사영운(謝靈運)이 매양 혜련을 대하면 좋은 글구가 저절로 나왔다. 영운이 일찍이 영가(永嘉) 서당(西堂)에서 시를 사색하다 못이루었는데 꿈에 문득 혜련을 보고, “못 가에 봄 풀이 돋아난다 [池塘生春草].” 하는 글귀를 얻었다 한다. 《남사(南史》〈사혜련전(謝惠連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