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고향 忠義 고장 宜寧/의령관련 각종 기록(기사) 1

우륵관련 기사 (우륵은 대가야 출신이다 ) 최근 의령이 고향이라는 주장으로 자료를 수집하여본다

아베베1 2014. 9. 29. 05:35

 

 

동사(東事) 2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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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사(東事) 2
신라세가 중

 


지증왕이 즉위하여 국호를 새로 정하여 신라라고 하고, 처음으로 왕이라고 일컬었다. 상복(喪服) 제도를 확립하고 순장(殉葬)을 없앴다.

주(州), 군(郡), 현(縣)의 제도를 정하였다.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때맞추어 얼음을 보관하게 하고, 소를 이용해 밭 가는 법을 가르치게 하고, 배를 만들게 하였다. 우산국(于山國)이 항복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우산과 실직곡(悉直谷)은 동해(東海) 가운데의 작은 나라로 울릉(鬱陵)이라고 한다. 왕이 졸하고, 태자 원종(原宗)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법흥왕(法興王)이다.

왕이 즉위하여 처음으로 병부령(兵部令)을 두었으며,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관제(官制)를 확립하고, 복색(服色)을 7등급으로 정하였다. 각간(角干)과 대아찬(大阿湌)은 ‘자주색 옷〔紫衣〕’, 아찬과 급찬(級湌)은 ‘붉은색 옷〔緋衣〕’에 ‘상아홀〔牙笏〕’이고, ‘청색 옷〔靑衣〕’, ‘황색 옷〔黃衣〕’, ‘비단 관〔錦冠〕’, ‘붉은색 관〔緋冠〕’, ‘실로 짠 갓끈〔纓組〕’에 차등을 두었다.
양(梁)나라 보통(普通) 1년에 사신을 보내 양나라와 통교하면서 불법(佛法)이 행해지기 시작하였다. 많은 신하가 모두 말하기를,
“부도(浮屠)는 그 말이 괴이하니, 그 법을 따르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마침내 영을 내려 도살(屠殺)을 금하였다.
가락국의 군주 구형(仇衡)이 항복하니, 가락이 망하였다. 이때는 천하가 분열된 시기로 비로소 연호를 칭하여 ‘건원(建元)’이라고 하였다. 왕이 훙(薨)하고, 동생 입종(立宗)의 아들 다맥종(多麥宗)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진흥왕(眞興王)이다. 나이가 겨우 7세였으므로 모태후(母太后)가 대신 정사를 처리하였다.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쳤다.

어질고 착한 어린 남자 아이를 뽑아 효제(孝弟)와 충신(忠信)을 가르쳤다. 이사부(異斯夫)를 병부령으로 삼아 군사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다. 거칠부(居漆夫)를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여 10개 고을을 취하였다. 부도(浮屠) 100좌(座)를 만들어 강회(講會)를 열고, 팔관법(八關法)을 세웠다. 백제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정벌할 모의를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이에 고구려가 덕이 있다고 여겨 신라와 연합하니, 백제 왕 명례(明禮)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신라의 관산(管山)을 공격하였다. 군주(軍主) 김무력(金武力)이 백제 왕을 격살(擊殺)하고 좌평(佐平) 4인을 참살(斬殺)하였다. 졸병 2만 9600명 중에 살아서 돌아간 사졸이 없었다.
이사부가 또 대가야를 멸망시켰다. 이에 앞서 가야의 정치가 혼란에 빠지자, 악사(樂師) 우륵(于勒)이 악기를 가지고 도망 왔다. 국원(國原)에 관사를 정하여 머물게 하고, 지법(知法), 계고(階古), 만덕(萬德)에게 명하여 가야 12곡(曲)을 전수받게 하였다. 우륵이 십이현금(十二絃琴)을 만들고 또 현금(玄琴)을 만들었다. 이에 귀척(貴戚)의 대성(大姓)과 육부의 호걸들을 국원으로 옮겨 살게 하고, 국원을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도승(度僧)을 허락하고, 불사(佛寺)를 널리 일으켜 황룡사(皇龍寺)를 짓고, 3만 5000근(斤)의 무게가 나가는 종을 주조하였다. 연호를 ‘홍제(弘濟)’로 고쳤다. 이사부의 건의로 왕이 대아찬 거칠부에게 명하여 문학(文學)하는 사람들을 초빙하여 국사(國史)를 저술하게 하였다.

왕산악(王山岳)이 칠현금(七絃琴)을 얻어 그 제도를 변경하고 ‘현금(玄琴)’이라고 명명하였다. 옥보고(玉寶高)라는 자가 있어 30곡을 지어서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하고, 속명득이 귀금(貴金)에게 전하고, 귀금이 안장(安長)에게 전하고, 안장이 자기 아들 극종(克宗)에게 전하였으며, 극종이 7곡을 지었다. 극종 이후로 우조(羽調)와 평조(平調)를 합하여 모두 187곡이 전한다. 향비파(鄕琵琶)를 만들었는데, 궁조(宮調), 칠현조(七賢調), 봉황조(鳳凰調)를 합하여 모두 212곡이다.
왕이 어려서 즉위하여 부도를 존숭하고 믿었는데, 즉위한 지 37년에 삭발하고 승려가 되어 법호(法號)를 법운(法雲)이라고 하고, 왕비는 비구니가 되었다. 아들 금륜(金輪)을 세우니, 이 사람이 진지왕(眞智王)이다. 훙하고, 죽은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 백정(伯淨)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진평왕(眞平王)이다. 연호를 ‘건복(建福)’으로 고쳤다.

왕이 수렵을 좋아하였다. 이찬 후직(后稷)이 간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후직이 죽기 전에 자기 아들에게 말하기를,
“나를 사냥하는 길가에 장례하라. 이렇게라도 해서 왕이 마음을 깨우치기를 기대한다.”
하였다. 나중에 왕이 누구의 무덤인가를 묻고, 울며 말하기를,
“살아서 간하고 죽어서도 임금을 잊지 못하니, 충직한 신하의 의리이다.”
하고, 왕이 종신토록 다시 수렵을 나가지 않았다.

예부(禮部)를 두어 예식(禮式)을 관장하게 하고, 조부(調府)를 두어 공부(貢賦)를 관장하게 하고, 승부(乘府)를 두어 거승(車乘)을 관장하게 하였다.

큰 홍수가 나 민호(民戶) 3만 360호가 잠겼다. 곡식을 풀어 진휼하였다.

수(隋)나라 개황(開皇) 14년에 왕을 책봉(冊封)하여 낙랑군공 신라 왕(樂浪郡公新羅王)으로 삼았다. 당(唐)나라 무덕(武德) 1년에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입공하니, 황제가 사신의 노고를 치하하고, 답례로 사신을 보내 새서(璽書)와 채색 비단 300순(純)을 하사하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백제가 서쪽 변방을 공격하여 두 성을 함락하고, 대대적으로 병력을 출동하여 웅진(熊津)에 주둔하였다. 사신을 보내 당나라로 가서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백제의 사신이 마침 이르자 황제가 새서로 꾸짖어 유시하고 서로 침략하지 말도록 하였다. 백제가 이에 공격을 멈추었으나 서로 원수로 지내는 것은 여전하였다.

왕이 말리(末利)와 서현(舒玄)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형세가 이롭지 못하자 서현의 아들 유신(庾信)이 정예병을 거느리고 가서 격파하여 낭비(狼臂)를 함락하였다.

정관(貞觀) 6년에 왕이 훙하였다. 자식이 없어 나라 사람들이 장녀 덕만(德曼)을 세웠으니, 이 사람이 선덕왕(善德王)이다.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쳤다. 나라 안의 홀아비, 과부, 고아, 홀로 지내는 노인을 위문하였다. 당나라가 여주(女主)를 책봉하여 주국 낙랑군공 신라 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으로 삼았다.
왕궁 서쪽에 있는 옥문지(玉門池)에 개구리가 잔뜩 모여들었다. 여주가 말하기를,
“개구리는 전쟁을 상징한다. 남쪽 변방 골짜기의 옥문에 아마도 병사가 있을 것이니, 군사를 보내 그곳을 치라.”
하였는데, 과연 백제의 매복한 군사가 있어 변방 고을을 습격하려고 하므로 급히 쳐서 모두 죽였다. 칠중(七重) 남쪽에 있는 큰 돌이 저절로 옮겨졌다. 자제들을 당나라로 보내 입학시켰다.

백제 왕 의자(義慈)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미후성(獮猴城) 등 40여 개의 성을 쳐서 취하고, 또 고구려와 함께 당항(黨項)을 쳐서 취하여 당나라와 교역하는 길을 끊었다. 여주가 당나라에 급보(急報)를 고하는 한편, 백제를 치려고 이찬 춘추(春秋)를 보내 고구려에 군사를 요청하게 하였다. 처음에 대야(大野)의 전투에서 품석(品釋)이 죽고, 그의 처도 따라서 죽었는데, 그의 처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떠나기에 앞서 유신에게 다짐하기를,
“60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면 왕께 청하여 고구려를 치시오.”
하였다. 고구려에 도착하고 보니, 출병(出兵)할 뜻은 없고 도리어 말하기를,
두 고개의 땅은 본래 우리 땅이다. 그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출병하지 않겠다.”
하였다. 춘추가 말하기를,
“백제가 무도하여 우리 임금께서 대국의 위세에 의지하여 그 죄를 정벌하고자 하신(下臣)으로 하여금 하집사(下執事)에게 명을 드리게 한 것인데, 출병할 뜻은 없고 사람을 겁주어 땅을 돌려 달라 하시니, 신은 죽음이 있을 따름입니다.”
하자, 왕이 노하여 그를 가두었다. 춘추가 6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유신이 왕에게 청하고 전사(戰士) 3000명을 모집하여 고구려를 치려고 하자, 고구려가 그 소식을 듣고 춘추를 후하게 예우하여 돌려보냈다.
사신이 당나라에 도착하였는데, 태종(太宗)은 벌써 먼저 동쪽을 정벌하려는 뜻이 있었다. 이에 이르러 황제가 직접 고구려를 정벌하자 여주가 3만의 무리를 일으켜 당나라를 도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백제가, 신라가 나라를 비우고 왕사(王師)를 도우러 간 틈을 타 서쪽 변방을 습격하여 7개의 성을 취하니, 유신을 보내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 이때 귀신(貴臣) 비담(毗曇)ㆍ염종(廉宗)이 거병(擧兵)하여 여주를 폐위하려고 하였는데, 유신이 돌아와 그들을 쳐서 참수하였다.

첨성대(瞻星臺)를 지었다. 여주가 훙하고, 동모제 국반(國飯)의 딸 승만(勝曼)을 세우니, 이 사람이 진덕왕(眞德王)이다. 키가 7척(尺)이고 손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다.

여주가 유신을 보내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 12개의 성을 함락하여 2만 명의 수급(首級)을 베고 9000인을 사로잡았으며, 또 9개의 성을 도륙하여 9000명의 수급을 베고 600인을 사로잡았다. 명분을 대야의 전투에 대한 보복이라고 하였다. 백제가 품석과 품석의 처의 유골을 신라에 돌려주었다.
여주가 이찬 춘추를 당나라로 보냈다. 당나라 태종이 춘추의 외모가 출중한 것을 보고 예로써 대우하기를 매우 두텁게 하고, 조용히 묻기를,
“하고 싶은 말이 있소?”
하니, 대답하기를,
“백제가 강함을 믿고 소방(小邦)의 수십 개 성을 침략하여 조공(朝貢)의 길을 끊었습니다. 폐하께서 천자의 위엄을 빌려 주시지 않으면 소방이 술직(述職)할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태종이 장군 소정방(蘇定方)에게 명하여 군사 20만 인을 출동시켜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 춘추가 태학(太學)을 관람하고 장복(章服)을 청하여 가지고 돌아왔다. 영휘(永徽) 연호를 쓰고, 백관의 관복(冠服)을 정하였다.

여주가 〈태평송(太平頌)〉을 지어 비단에 수로 놓아 바쳤다.

영휘 5년(654)에 여주가 훙하였다. 뭇 신하들이 춘추를 맞이하여 세우니, 이 사람이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으로, 진지왕(眞智王)의 손자이다.


[주D-001]실직곡(悉直谷) : 《국역 동사강목》 제1하 임인년 8월 조에 지금의 삼척부(三陟府)라고 되어 있다. 옛날에 우산국이었던 울릉도와 관련이 없고 섬도 아니므로 기록상의 오류로 보인다.
[주D-002]각간(角干)과 …… 두었다 : 《국역 동사강목》 제3상 경자년 1월 조를 보면 각간부터 대아찬까지는 자주색 옷에 상아홀이고 아찬부터 급찬까지는 붉은색 옷에 상아홀이라고 되어 있다. 이로 보아 상아홀은 각간부터 급찬까지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청색 옷은 대내마부터 내마까지, 황색 옷은 대사(大舍)부터 선저지(先沮知)까지, 비단 관은 이찬과 잡찬, 붉은색 관은 파진찬과 대아찬, 실로 짠 갓끈은 상당대내마(上堂大奈麻)와 적위대사(赤位大舍)가 착용한다고 되어 있다.
[주D-003]보통(普通) 1년 : 보통은 양 무제(梁武帝)의 연호로, 1년은 서기 520년이다.
[주D-004]이때는 …… 시기로 :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시대를 말한다.
[주D-005]국원(國原) : 지금의 충주(忠州)이다.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인데, 신라에서 빼앗아 소경(小京)을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이 중원경(中原京)으로 하였다가 고려 태조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 충주목》
[주D-006]지법(知法) : 《국역 동사강목》 제3상 신미년 1월에는 ‘대내마 법지(法知)’로,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 충주목〉에는 ‘주지(主知)’로 되어 있어 각각 다르다.
[주D-007]도승(度僧)을 허락하고 : 국가에서 승려가 되는 것을 공식적으로 허락한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 도(度)는 ‘건너다〔渡〕’는 뜻으로, 생사(生死)의 바다를 건너 바라밀(波羅蜜) 즉 열반(涅槃)의 피안(彼岸)에 이르는 것을 말하는데, 세속을 떠나 출가하였다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관에서 출가한 승려에게 도첩(度牒)을 지급하여 승려의 자격을 인정하였는데, 도첩을 받아 인정된 승려를 도승이라고 한다.
[주D-008]왕산악(王山岳)이 …… 현금(玄琴) : 왕산악은 당시에 제2상(第二相)으로, 진(晉)나라에서 들어온 칠현금을 개조하여 육현금으로 만들어서 연주하였는데, 현학(玄鶴)이 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그 이름을 ‘현학금(玄鶴琴)’이라고 하고, ‘학’ 자를 생략하여 ‘현금’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국역 동사강목 제5상 병술년 10월》
[주D-009]개황(開皇) 14년 : 개황은 수 문제(隋文帝)의 연호로, 14년은 서기 594년이다.
[주D-010]무덕(武德) 1년 : 무덕은 당 고조(唐高祖)의 연호로, 1년은 서기 618년이다.
[주D-011]말리(末利)와 서현(舒玄) : 《국역 동사강목》 제3하 기축년 8월 조에 “왕이 이찬(伊湌) 임말리(任末里)ㆍ소판(蘇判)ㆍ대인(大因), 대장군(大將軍) 용춘(龍春)ㆍ백룡(白龍)ㆍ서현(舒玄)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하였으니, 말리는 이찬 임말리이고, 서현은 김유신(金庾信)의 아버지이다.
[주D-012]정관(貞觀) 6년 : 정관은 당 태종(唐太宗)의 연호로, 6년은 서기 632년이다.
[주D-013]칠중(七重) : 지명으로, 《국역 동사강목》 제3하 무술년 3월 조에 ‘칠중성(七重城)’으로 되어 있고, ‘지금의 적성현(積城縣)’이라고 주가 달려 있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1권 〈경기 적성현〉에는 본래 고구려 칠중현(七重縣)인데, 신라 경덕왕 때 중성(重城)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적성현으로 고쳤다고 되어 있다.
[주D-014]대야(大野)의 전투 : 백제 장수 윤충(允忠)과의 전투를 말한다. 대야는 《동사강목》에 대야성(大耶城)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의 합천(陜川)이다. 《국역 동사강목 제3하 임인년 8월》
[주D-015]두 고개 : 《국역 동사강목》 제3하 임인년 11월 조에 마현(麻峴)과 죽령(竹嶺)으로 나온다. 551년(진흥왕12)에 고구려를 쳐서 빼앗은 땅이다. 《국역 동사강목 제3상 신미년 9월》
[주D-016]술직(述職) :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제후가 천자에게 조회하는 것을 술직이라고 한다.” 하였다.
[주D-017]영휘(永徽) : 당 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종(高宗)의 연호이다. 영휘 1년(650)은 신라 진덕여왕 4년으로, 법흥왕(法興王) 때부터 쓰던 자국의 연호를 쓰지 않고 이때부터 중국의 연호를 썼다. 《국역 동사강목 제4상 경술년 6월》

 

동사(東事) 2
대가야(大伽倻)

 


대가야는 이진아치로부터 9세를 내려와 이뇌(異腦)가 있었고, 이뇌로부터 7세를 내려와 도설지(道設智)에 이르러서 신라에 멸망하니, 모두 16세에 527년을 전하였다. 이진아치의 시대가 500년간 부강(富强)하였다. 혹 전하기를,
“가실(嘉悉)의 시대에 영인(伶人) 우륵(于勒)이 있었는데, 진(秦)나라의 쟁(箏)을 배워 십이현금(十二絃琴)을 만들었다.”
하였다.

 

동사강목 제3상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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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년 신라 진흥왕 12년, 고구려 양원왕 7년, 백제 성왕 29년(북제 문선제 천보 2, 551)

 


춘정월 신라가 연호(年號)를 개국(開國)으로 고치었다.
○ 가야국 악사 우륵(于勒)이 신라에 망명하여 왔다.
처음에 가야왕 가실(嘉實)이 당(唐)의 악부(樂部)에 쟁(箏)이 있는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여러 나라의 방언(方言)이 각각 다르니 성음(聲音)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이에 쟁(箏)을 모방하여 십이현금(十二絃琴)을 만드니, 이것은 12월을 상징한 율(律)이다. 이에 악사인 성열현(省熱縣)지금은 미상 사람 우륵(于勒)을 시켜 하가야(下伽倻)ㆍ상가야(上伽倻) 등 12곡(曲)을 만들어 가야금(伽倻琴)이라 이름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우륵(于勒)이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이라 하여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들어갔다. 왕이 낭성(娘城)지금의 청주부(淸州府)이다 을 순회하다가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을 안다는 말을 듣고, 하림궁(河臨宮)에 머물면서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두 사람이 각각 새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왕은 기뻐서 그들을 국원(國原)지금의 충주부(忠州府)이다 에 두고, 대내마인 법지(法知)ㆍ계고(階古)와, 대사(大舍)인 만덕(萬德) 등 세 사람에게 그들의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그 사람들의 재능에 맞추어 가르쳤는데, 계고에게는 거문고[琴]를,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세 사람이 이미 12곡을 배우고 서로 말하기를,
“이 음악이 번거롭고 음란하니, 아악(雅樂)이 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간추려서 다섯 곡조를 만들었다. 우륵이 처음에는 이 말을 듣고 노하였으나, 다섯 곡을 듣고서는 감탄하기를,
“즐거우면서도 음란한 데 흐르지 않고, 구성지면서도 슬픔에 치우치지 않으니 정악(正樂)이라 말할 수 있다.”
하였다.
수업을 마치고 이를 연주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후한 상(賞)을 내렸다. 간신(諫臣)들이 아뢰기를,
“망한 가야의 음악은 취할 것이 못됩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가야왕은 음란하여 스스로 멸망한 것이지 음악과 무슨 관계 있는가? 성인(聖人)이 음악을 제정한 것은 인정에 맞게 만든 것이니 나라의 치란(治亂)이 음조(音調)에 연유된 것은 아니다.”
하고, 마침내 이를 시행하여 대악(大樂)으로 삼았는데, 하림(河臨)과 눈죽(嫰竹) 두 곡조가 있으며, 모두 1백 85곡이다.
【안】 공자가 이르기를,
“음악이라 음악이라 말하지만, 종(鐘)과 북[鼓]을 말한 것이겠는가?”
하였고, 맹자가 이르기를,
“지금의 음악은 옛날 음악과 같은 것이다.”
하였으며, 선유들이 이르기를,
“음악은 하나의 화(和)이다.”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화는 음악의 근본(根本)이요, 악기는 지엽(枝葉)이다. 예컨대, 정치가 이루어지고 백성들이 화평하면 파유(巴渝) 같은 시골의 것이라도 음악이 될 수 있고, 혹 정치가 문란하고 백성들이 조화되지 못하면, 함(咸 황제(黃帝)의 음악)ㆍ영(韺 제곡(帝嚳)의 음악)ㆍ소(韶 순(舜)의 음악)ㆍ호(頀 탕(湯)의 음악)라도, 마침내 백성들의 원망만 더해줄 뿐이니, 진흥왕(眞興王)의 말이 옳은 것이다. 그러나 진흥왕은 국가의 재물을 털어서 부처 받들기를 마지않았으니, 그의 정치는 알 만한 것이다.
다시 상고하건대, 악이라는 것은 천지의 화(和)한 기운이다. 사람은 천지의 기운을 받아서 태어났다.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물론하고 본연의 화(和)는 일찍이 그침이 없는 것이다. 대저 갓난아이가 기뻐하며 웃고, 동자(童子)들이 노래하고 읊조리는 것이 모두 악(樂)의 시초인 것이다. 국가[方隅]는 비록 다를지라도 음악은 같은 것이다. 하대(夏代)와 상대(商代)에 동이(東夷)가 악(樂)과 무(舞)를 바친 일이 있었다. 《주례(周禮)》에,
“동이(東夷)의 악(樂)은 주리(侏㒧)인데 양기(陽氣)가 통하는 곳에는 만물이 땅에서 생겨 자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였고, 《오경통의(五經通義)》에는,
“동이(東夷)의 악(樂)은 창[矛]을 잡고 춤을 춤으로써, 시양(時養)을 돕는다.”고 하였다. 이를 본다면 동이(東夷)에 악(樂)이 있은 지 이미 오래다. 기자(箕子)가 동(東)으로 올 때에 예악(禮樂)도 함께 왔을 것이니, 반드시 악률(樂律)도 말할 만한 것이 있었을 것이나 사서(史書)에 전하는 것이 없고, 그 백성들의 노래에도 황하(黃河)와 숭산(嵩山)의 곡(曲)이 있었는데 고증할 문헌이 없으니 애석한 일이다. 이 이후로는 중국 사서에 약간 의거할 만한 것이 있다. 《후한서(後漢書)》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무제(武帝) 때에 고취(鼓吹)와 기인(伎人)을 하사하였으며, 그 풍속은 남녀가 떼를 지어 노래하고 춤추며 즐긴다.”
하였고, 《북사(北史)》에는,
“고구려의 악(樂)에는 오현금(五絃琴)ㆍ쟁(箏)필률(筆篥)횡취(橫吹)소고(簫鼓) 등이 있는데 갈[蘆]을 불어서 곡(曲)을 만들었다. 백제에는 고각(鼓角)ㆍ공후(箜篌)쟁우(箏竽)지적(篪笛) 등의 악(樂)과 투호(投壺)저포(樗蒲)농주(弄珠)악삭(握槊) 등의 놀이가 있다.”
하였고, 《삼국유사》에는,
“신라 사람들이 축국(蹴踘)으로 농주(弄珠)의 유희를 삼는다.”
하였고, 《남사(南史)》에는,
“고구려(高句麗)가 가무(歌舞)를 좋아하여 국중(國中)의 읍락(邑落)에서 남녀가 떼를 지어 밤마다 노래하고 즐긴다.”
하였다.
《두씨통전(杜氏通典)》과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예ㆍ맥(濊貊)에서는 해마다 10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데 이것을 무천(儛天)이라 하였다. 그 악(樂)은 대략 부여와 같으나, 다만 그 쓰임이 다를 뿐이다. 삼한(三韓)은 그 풍속이 귀신을 믿어서 해마다 5월이 되면 제사를 지내고, 주야로 술을 마시면서 비파를 타며 노래하고 춤추며 땅을 밟음으로 박자를 삼는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는 또 이와 같이 한다. 마한국(馬韓國)에서는 항상 5월에 파종(播種)을 마치면 곧 귀신에게 제사하고, 밤낮으로 모여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수십인이 땅을 밟으면서 몸을 굽혔다가 젖혔다가 하고 손발로 가락을 맞추기를 마치 탁무(鐸舞)와 같이 한다. 농사가 끝나면 또 그와 같이 한다. 부여(扶餘)는 12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연일 크게 모여서 먹고 마시고 노래부르며 춤추는데, 이것을 영고(迎鼓)라 한다. 행인(行人)들도 늘 노래 부르기를 즐기어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고구려의 악공(樂工)은 자주빛 비단 모자에 새깃으로 꾸미고, 큰 소매로 된 누른 옷을 입고 자줏빛 비단 띠를 매고, 통이 큰 바지를 입고 붉은 가죽신을 신고, 오색(五色) 실로 땋은 선을 두른다. 춤출 적에는 4인이 한 조인데, 상투를 뒤쪽에 짜고 붉은 물감을 이마에 바르고 금당(金鐺)으로 장식한다. 4인 중 2인은 누른 치마 저고리에 붉고 누른 바지를 입으며, 2인은 붉고 누른 치마 저고리에 바지를 입으며, 소매를 길게 하고 검은 가죽신을 신고 쌍쌍이 마주서서 춤을 춘다. 악기에는, 타는 거문고[彈箏] 하나, 퉁기는 거문고[搊箏] 하나, 봉황머리 모양의 공후[鳳首箜篌]와 눕혀 놓고 타는 공후[臥箜篌] 각각 하나, 세워 놓고 타는 공후[竪箜篌] 하나, 비파(琵琶) 하나를 쓰는데 뱀의 가죽으로 바탕[槽]을 만들되 두께가 한 치 남짓하고 비늘 모양의 껍데기[鱗甲]를 붙이며, 가래나무[楸]로 앞[面]을 만들고 상아(象牙)로 채[捍撥]를 만들며, 국왕의 형상을 그렸다.
또 호선무(胡旋舞)에는 춤을 추는 자가 둥근 공[毬] 위에 서서 공을 굴리기를 바람같이 빨리하며, 오현금(五絃琴) 하나, 의취적(義觜笛) 하나, 생(笙) 하나, 호로생(胡蘆笙) 하나, 횡적(橫笛) 하나, 소(簫) 하나, 소필률(小篳篥) 하나, 대필률(大篳篥) 하나, 도피필률(桃皮篳篥) 하나, 요고(腰鼓) 하나, 제고(齊鼓) 하나, 구두고(龜頭鼓) 하나, 철판구(鐵板具) 하나, 담고(擔鼓) 하나, 패(貝) 하나 등이 있다. 수(隋)와 당(唐)의 구부악(九部樂)에 고려기(高麗技)가 있었는데, 무후(武后) 때에도 25곡(曲)이 남아 있었으나 정원(貞元) 말엽에는 겨우 1곡(曲)만이 수집되었고, 의복도 또한 점차로 쇠퇴하여 그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괴뢰병월조(傀儡幷越調)와 이빈곡(夷賓曲)은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격파하고 바친 것이다. 송(宋) 건덕(乾德) 4년에는 진주(鎭州)에서 영관(伶官) 28인을 보냈는데, 고구려의 부악(部樂)을 잘 익혔으므로 의복(衣服)과 은대(銀帶)를 하사하고 본도(本道)로 돌려보낸 일이 있다.
백제악(百濟樂)은 송(宋) 초기에 수입된 것으로서 후위(後魏)의 태무(太武)가 북연(北燕)을 멸하고 얻었으나, 잘 갖추어지지 못하였다. 주(周)의 무제(武帝)가 제(齊)를 멸하자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가 각각 악(樂)을 바치니, 주(周)인이 악부(樂部)에 편입하고, 국기(國伎)라 일컬었으며, 당(唐)이 백제를 멸하고는 그 악(樂)과 악공을 모두 가져왔는데, 중종(中宗) 때에 공인(工人)들이 도망하여 흩어졌다. 개원(開元) 연간에는 기왕(岐王) 범(範)이 태상경(太常卿)이 되어 다시 건의하여 이를 두었다. 그 악기에는 쟁(箏)ㆍ적(笛)ㆍ도피필률(桃皮篳篥)ㆍ공후(箜篌)가 있었고, 그 노래에는 반섭조(般涉調)가 들어 있었다. 이것은 설인귀(薛仁貴)가 백제를 쳐서 깨뜨리고 노획(鹵獲)하여 바친 것이다. 노래는 다섯 가지가 있고, 춤은 두 사람씩 추는데, 이들은 자색(紫色)으로 된 통이 큰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장보관(章甫冠)을 쓰고 가죽신을 신었다.”
하였다. 장보(章甫)는 상(商)나라의 관(冠)인데 동이(東夷)가 이를 썼으니, 그것이 상(商)의 유제(遺制)인 듯하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예(禮)가 없어지면 동이(東夷)에서 찾아라.”
하였으니, 옳은 말이다. 그 악기는 중국과 발해(渤海)를 모방한 것이 많고, 풍속은 세시(歲時) 마다 모여서 악(樂)을 즐기었는데, 먼저 노래와 춤에 익숙한 사람 몇을 시켜서 앞에 가게 하고, 사녀(士女)들이 이를 따라서 선창하면 따라 화답하면서 빙빙 도는데 이를, ‘답추(踏鎚)’라고 불렀다.
신라는 해마다 8월 15일이 되면 악(樂)을 베풀고 백관들로 하여금 활쏘기를 시켜 말[馬]과 베[布]를 상으로 주었다. 당(唐) 정관(貞觀) 연간에는 악(樂)을 잘하는 여자 둘씩을 바치었다. 송(宋)의 지도(至道) 원년에는 정주(定州)에서 보고하기를,
“신라(新羅)의 번 지키는 사람[設番人] 20명이 거란(契丹)으로부터 도망쳐 왔다.” 하므로 황제가 편전(便殿)에 나아가 만나보니, 모두 손에 큰 나팔을 들었는데 다섯 되[五升]들이 그릇만하였으며, 말하기를,
“거란(契丹)에서 11년간 머무르는 사이에 우리에게 나팔부는 것을 배운 자가 50명이나 됩니다.”
하였다. 제가 불어 보게 하니, 소리가 중탁(重濁)하고 억세어서 대략 각성(角聲)과 같았다. 그 곡을 물으니, 선우곡(單于曲)이라 하였다. 그들을 모두 군대에 편입시켰다. 동사(東史)로 말하면 고구려ㆍ백제의 것은 상고할 수 없고, 신라 악기는 대[竹]로 만든 것과, 줄[絃]로 만든 것이 각각 세 가지와, 박판대고(拍板大皷)가 있었다. 가무(歌舞)는 두 사람이 하였는데, 방주복두(放舟幞頭)에다 자주색 큰 소매, 통옷[公襴]과 붉은 가죽띠, 금칠을 한 요대(腰帶)와 검은 가죽신이었다. 삼현(三絃)은, 현금(玄琴)ㆍ가야금(伽倻琴)ㆍ비파(琵琶)이고, 삼죽(三竹)은 대함(大笒)ㆍ중함(中笒)ㆍ소함(小笒)인데, 함(笒)은 즉 피리[笛]이며 각각 곡조(曲調)가 있고, 향악(鄕樂)은 유리왕(儒理王) 때에 비롯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악지(樂志)에,
회악(會樂) 신열악(辛熱樂)은 유리왕(儒理王) 때에 돌아악(突阿樂)은 탈해왕 때에, 기아악(技兒樂)은 파사왕(婆娑王) 때에, 사내악(思內樂)은 내해왕(奈解王) 때에 가무(笳舞)는 내물왕(奈勿王) 때에, 우식악(憂息樂)은 눌지왕(訥祗王) 때에 만들었고, 대악(碓樂)은 자비왕(慈悲王) 때에 백결(百結) 선생이, 우인(芋引)은 지증왕(智證王) 때에 천상욱개자(川上郁皆子)가 만들었다. 미지악(美知樂)은 법흥왕(法興王) 때에, 도송가(徒頌歌)는 진흥왕(眞興王) 때에 만들었고, 날현인(捺絃引)은 진평왕(眞平王) 때에 승(僧) 담수(淡水)가, 사내기물악(思內奇物樂)은 원랑도(原郞徒)가 만들었다. 내지(內知)는 일상군(日上郡)의 악(樂)이요, 백실(白實)은 곤량군(坤梁郡)의 악이요, 덕사내(德思內)는 하서군(河西郡)의 악이요, 석남사내도(石南思內道)는 동벌군(同伐郡)의 악이요, 사중(祀中)은 북외군(北偎郡)의 악이다. 모두 지방민들이 악을 즐겨서 만든 것이며 모두 18곡이다. 성기(聲器)의 수와 가무(歌舞)의 모양은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고, 악공(樂工)을 척(尺)이라 하였는데 가척(歌尺)ㆍ무척(巫尺)이 이것이다.
하였고, 최치원(崔致遠)의 시(詩)에 향악잡영(鄕樂雜詠) 다섯 수(首)가 있는데, 금환(金丸)ㆍ월전(月顚)ㆍ대면(大面)ㆍ속독(束毒)ㆍ산예(猴猊)로 모두 잡희(雜戱)를 말한 것이다.

추9월 돌궐(突厥)이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돌궐(突厥)은 흉노(凶奴)의 별종(別種)이다. 연연(蠕蠕)이 쇠약하여지매 돌궐이 다시 북막(北漠)에서 일어나더니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를 공격하여 왔다. 신성(新城)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매, 옮기어 백암성(白岩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장군 고흘(高訖)을 보내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항전케 하여 이를 이기고 4천여 급(級)을 사로잡았다.
○ 신라가 고구려를 침략하여 10성(城)을 취하였다.
신라 왕이 거칠부(居漆夫)와 구진비대(仇珍比臺) 등 여덟 장수에게 명하여 백제와 합병하여 고구려를 치니, 백제가 먼저 공격하여 격파하였는데, 거칠부 등이 이긴 기회를 타서 죽령(竹領) 밖과 고현(高峴) 안의 10군을 취하였다.
○ 신라가 처음 백좌강(百座講)과 팔관회(八關會)를 설치하였다.
거칠부 등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에 중 혜량(惠亮)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도좌(道左 길 가를 말한다)에서 보고, 드디어 함께 왕을 알현(謁見)하였다. 이에 왕이 이를 승통(僧統 중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으로 삼았고, 비로소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팔관법(八關法)을 설치하였다. 그 법은 매해 11월[仲冬]에 궁궐의 뜰에 중을 모아놓고, 윤등(輪燈)은 좌(座)에 걸고 향등(香燈)은 사방에 별여 걸며, 채붕(彩棚) 둘을 매어 달고는 온갖 놀이와 가무(歌舞)를 하면서 복을 빌었다. 팔관(八關)이라는 것은,
“첫째 살생하지 않고, 둘째 도둑질하지 않고, 셋째 음란하지 않고, 넷째 거짓말하지 않고, 다섯째 술을 마시지 않고, 여섯째 높고 큰 상에 앉지 않고, 일곱째 사치스러운 옷을 입지 않고, 여덟째 관람을 즐기지 않는다.”
는 것이다. 관(關)은 막는다는 뜻으로 여덟 가지 죄를 금하고 막아서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씨[崔溥]는 이르기를,
“이것은 일종의 고고(枯槁) 적멸(寂滅)의 계율이요, 진실로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일에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자는 스스로 경계가 있는 것이다. 하늘을 공경하여 백성에게 시절(時節 농사 때)을 주는 것은 요(堯)의 경계요, 조심하고 조심하라, 하루에 만 가지 기미가 일어난다고 한 것은 순(舜)의 경계요, 색(色)에 빠지거나 사냥에 빠지거나 술을 즐기거나 집을 사치하게 꾸미는 것은 우(禹)가 자손에게 경계한 것이요, 삼풍 십건(三風十愆)은 탕(湯)이 지위에 있는 이를 경계한 것이요, 먼저 백성의 어려움을 알고 검소한 옷차림으로써 백성을 평안하게 하여 농사에 힘쓰게 하고, 놀고 사냥하기를 즐기지 말라고 한 것은 주(周)의 문왕(文王)ㆍ무왕(武王)이 후왕(後王)을 경계한 말이다. 이렇게 하여야 천명과 민심을 보전하여 나라가 오래도록 융성하는 것인데, 팔관회(八關會)의 회의는 황당무계함과 허수아비로 만든 죄 크다 할 수 있다.”
하였다.


 

[주D-001]12곡(曲) : 우륵(于勒)이 만든 곡(曲)인데, 다음과 같다. 하가라도(下加羅都)ㆍ상가라도(上加羅都)ㆍ보기(寶伎)ㆍ달기(達己)ㆍ사물(思勿)ㆍ물혜(勿慧)ㆍ하기물(下奇物)ㆍ사자기(帝子伎)ㆍ거열(居烈)ㆍ사팔혜(沙八兮)ㆍ이사(爾赦)ㆍ상기물(上奇物).
[주D-002]파유(巴渝) : 지방 이름인데, 파(巴)는 사천성(四川省) 파현(巴縣) 지방이고, 유(渝)는 호북성(湖北省) 유수(渝水)를 말한다. 《후한서》 남만전(南蠻傳)에는 “파유(巴渝)의 풍속이 노래와 춤을 좋아하였는데, 한 고조(漢高祖)가 이를 보고 ‘이것은 주 무왕(周武王)이 주(紂)를 칠 때의 노래다.’ 하고, 악인을 명하여 이를 익히니, 이것이 이른바 파유부(巴渝府)이다.” 하였다.
[주D-003]주리(侏㒧) : 서방(西方)의 악(樂)을 말한다. 원래 동서남북 사방에 대한 악(樂)이 있었는데, 동방은 말(靺), 남방은 임(任), 북방은 금(禁), 서방은 주리로 되어 있다. 《周禮 卷24 四夷之樂》
[주D-004]시양(時養) : 여름의 생성을 말하는 것으로 《주례》 사이지락(四夷之樂)에 동이(東夷)는 창을 가지고 봄[時生]을 돕고, 남이(南夷)는 활[弓]을 가지고 여름[時養]을, 서이(西夷)는 도끼[鉞]를 가지고 가을을, 북이(北夷)는 방패를 가지고 겨울[藏]을 돕는다고 하였다. 이로 보면 분명히 동이는 창[矛]을 가지고 봄을 도와야 하는데도 여름을 돕는다 라고 되어 있으니, 이것은 여름이 아니라 봄일 것이다.
[주D-005]쟁(箏) : 비파류(琵琶類)에 속하는 것으로서 당 이전에는 12현(絃)이었으나, 당 이후에는 1현이 더해져 13현이다.
[주D-006]필률(篳篥) : 젓대류[笛類]로 외부는 일곱 구멍, 내부는 한 구멍이다.
[주D-007]횡취(橫吹) : 젓대[笛]로서 서역으로부터 전래되었다.
[주D-008]소고(簫鼓) : 소(簫)는 소관(小管)을 배열하여 봉황(鳳凰)의 날개 모양으로 된 악기이다. 길이는 1척 2촌, 1척 4촌, 1척 5촌 등 세 가지이고, 관수(管數)는 13 혹은 16ㆍ17ㆍ21ㆍ23ㆍ24로서 일정하지 않다. 태고(太鼓)와 항상 같이 쓰이는 악기이다.
[주D-009]공후(箜篌) : 현악(絃樂)의 일종으로서 백제금(百濟琴)이라고도 한다. 이 공후(箜篌)에는 수공후(竪箜篌)ㆍ와공후(臥箜篌)ㆍ봉수공후(鳳首箜篌)가 있다. 수공후는 서구(西歐)의 하프와 비슷하고 와공후는 비파류이다. 《통전(通典)》에는 “그 모양은 비파와 같으며 굽었고 길고 현(絃)으로 되어 있으며, 가슴에 대고 두 손으로 탄다.” 하였다.
[주D-010]쟁우(箏竽) : 퉁소의 일종. 길이는 중국 척(尺)으로 7척 2촌, 36개의 혀[舌]가 있었으나, 후세에 와서는 9개로 줄었다. 《周禮 春官 笙師》
[주D-011]지적(篪笛) : 피리의 일종. 횡적(橫笛)의 하나. 대[竹]로 만들었는데, 긴 것은 1척 4촌, 짧은 것은 1척 2촌, 여덟 구멍 혹은 일곱 구멍으로 되어 있고, 위의 한 구멍으로 소리를 낸다. 《呂覽 仲憂》
[주D-012]투호(投壺) : 단지를 놓고 화살을 던져 넣는 놀이.
[주D-013]저포(樗蒲) : 백제 때 유희의 한 가지. 3백 60알을 3분해서 두 관(關)을 만들고, 사람이 알을 쥐고, 그 알 다섯 개만은 위가 검고 아래를 희게 해서 검은 것에 두 눈을 새기니, 이것이 독(犢)이고, 흰 것도 둘을 새기니 이를 치(雉)라 하고, 던져서 다 검은 것은 노(盧)가 된다. 그 채(采)가 16이요, 둘이 희고, 셋이 검은 것은 치(雉)니, 그 치가 14요, 둘이 검고 셋이 흰 것은 독(犢)이니, 그 채가 10이요, 다 흰 것은 백(白)이라 하니, 그 채가 8이다. 넷은 귀채(貴采)라 하고, 여섯은 잡채(雜采)라 한다.
[주D-014]농주(弄珠) : 쟁반에서 구슬돌리기.
[주D-015]악삭(握槊) : 일명 쌍륙(雙陸)이라 하는데, 장기류로서 판과 알이 있다.
[주D-016]의취적(義觜笛) : 혀가 있는 횡적(橫笛)이다. 고구려의 음악에는 탄쟁(彈箏)ㆍ추쟁(搊箏)ㆍ봉수(鳳首)ㆍ공후(箜篌)ㆍ비파(琵琶)ㆍ의취적(義觜笛) 등이 있는데, 이것은 횡적(橫笛)으로서 부리[觜]가 있으며, 이를 서량악(西凉樂)이라 한다. 《唐書 禮樂志 山裳考索》
[주D-017]생(笙) : 관악기의 한 가지. 형태는 우(竽)와 같은데 19관(管) 또는 13관이다. 옛날에는 관(管)을 박[瓠] 속에 나열해서 만들고, 적(笛)을 관(管) 끝에 끼웠는데 서서 옆으로 부는 악기이다. 《爾雅注疏 卷5 釋樂》
[주D-018]호로생(胡蘆笙) : 만이(蠻夷)가 부는 6관(管)의 악기이다.
[주D-019]횡적(橫笛) : 횡으로 부는 피리. 후한(後漢) 시대의 마융부(馬融賦)를 보면 염(剡) 위에 구멍이 다섯이 있는데, 한 구멍은 뒤까지 뚫려 있다. 지금의 척팔(尺八)과 같다. 이선위(李善爲)의 주(註)에는 일곱 구멍이 있고, 길이가 1자 3치라 하였으니, 이것이 지금의 횡적(橫笛)이다. 《夢溪筆談 樂律1》
[주D-020]요고(腰鼓) : 큰 것은 기와로 되어 있고, 작은 것은 나무로 되어 있는데, 모두 머리는 넓고 몸통이 가늘다. 《文獻通考 卷135 樂8》
[주D-021]제고(齊鼓) : 칠통(漆桶)과 같이 크고, 북 얼굴[鼓面]이 배꼽처럼 튀어나와서 마치 사향[麝]의 배꼽과 같으므로 제고(齊鼓)라고 한다. 《唐書 音樂志》
[주D-022]담고(擔鼓) : 항아리보다 좀 작은 것으로서 가죽을 씌워 칠한 것. 《文獻通考 卷136 樂9》
[주D-023]패(貝) : 큰 조개와 같은데, 약 2근(斤) 가량의 크기이다. 이것을 불어서 악을 맞춘 것으로서 남만(南蠻)에서 나온 악이라 한다. 《通典 卷144 樂四》
[주D-024]삼풍 십건(三風十愆) : 관직에 있는 자를 경계한 말. 삼풍(三風)은, 항상 춤추고 취하여 노래하는 것은 무풍(巫風), 재화와 색(色)에 빠지거나, 놀고 사냥을 즐기는 것은 음풍(淫風), 성언(聖言)을 업신여기고, 충직(忠直)하지 않고, 덕 있는 이를 멀리 하고, 사나운 자를 가까이 하는 것은 난풍(亂風)이다. 또한 이 세 가지 나쁜 풍습을 이루는 열 가지 내용이 십건(十愆)이다. 《書經 伊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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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사(東事)
《기언(記言)》 동사(東事) 서(序)

 


신시(神市)ㆍ단군(檀君)의 시대는 중국 제곡(帝嚳)ㆍ요(堯)ㆍ순(舜)의 시대에 해당한다. 군신(君臣)의 제도가 비로소 있었으나, 인민이 희소하고 세상이 적막하여 문자로 기술(記述)할 만한 것이 없었다.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을 다스림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조두(俎豆)를 사용하는 예속(禮俗)의 정치가 있었으나, 위만(衛滿)으로부터 삼한(三韓 마한(馬韓)ㆍ진한(辰韓)ㆍ변한(弁韓)을 가리킴) 시대로 내려오면서 끊임없는 전쟁으로 없어진 것이 많았으며, 사적(史籍)마저 갖추어지지 않아 문헌상으로 증거할 만한 것이 없다. 후세에 전기(傳記)에 섞여 나온 것들이 많으나 부루(扶婁)ㆍ주몽(朱蒙)ㆍ혁거세(赫居世)ㆍ온조(溫祚) 등의 세대는 고사(古事)를 전하는 것뿐이다.
위로는 단군 시대로부터 아래로는 신라 말엽에 이르기까지, 큰 나라가 여섯이었고, 부용국(附庸國)이었던 작은 나라가 열아홉이었다. 당초에는 군장이 없다가 신시 때부터 처음으로 생민(生民)의 정치를 가르쳤으며 단군 때에 와서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정하였다. 그러므로 ‘단군세가’를 지었다. 기자는 조선을 다스리면서 여덟 가지 교화를 세웠으므로 ‘기자세가’를 지었다.
숙신씨(肅愼氏)는, 주공(周公) 단(旦)이 성왕(成王)을 보필할 때에 고시(楛矢)와 석노(石砮)를 조공하였다. 그러므로 ‘숙신열전’을 지었다.
위만(衛滿)은, 본래 망명해 온 사람인데, 조선을 점령하고 옛 진 나라 운장(雲障) 땅을 병합하여 군사력과 재물을 가지고 땅을 개척한 것이 1천여 리였다. 그러므로 ‘위만세가’를 지었다.
부여(扶餘)는 본래 해부루(解扶婁)의 땅인데, 좋은 말과 초피(貂皮 담비의 가죽)와 놜피(豽皮 삵의 가죽)와 아름다운 구슬을 내어 진(晉)에 입공(入貢)하였다. 그러므로 ‘부여열전’을 지었다.
왕(王) 준(準)은 위만에게 쫓겨나 마한(馬韓)을 세우고, 50여 부족국을 병합하여 2백 년을 전승하였고, 진한(秦韓)과 변한(弁韓)도 각각 군장이 있었다. 삼한은 속국이 78국이었다. 그러므로 ‘삼한열전’을 지었다.
신라(新羅)는 박(朴)ㆍ석(昔)ㆍ김(金) 3성(姓)이 1천여 년을 계승하며 덕 있는 정치를 하였다. 그러므로 ‘신라세가’를 지었다.
고구려(高句麗)는 국경이 중국과 맞닿아 강대한 정치로 7백여 년을 전승하였다. 그러므로 ‘구려세가’를 지었다.
백제(百濟)는 마한(馬韓)을 병합하였으며 나라가 부강하여 6, 7백 년을 전승하였다. 그러므로 ‘백제세가’를 지었다.
예맥(穢貊)은 바다 모퉁이 산택 간의 나라인데, 나라를 세운 것이 가장 오래되었다. 말갈(靺鞨)은 강대해지자 뒤에 발해(渤海)라 일컫고, 거란(契丹)에게 망하여 동거란(東契丹)이 되었다. 그러므로 ‘예맥열전’과 ‘말갈열전’을 지었다.
가락(駕洛)은 신명(神明)스러운 정치를 하였고, 대가야(大伽倻)는 십이현금(十二絃琴 우륵(于勒)의 가야금(伽倻琴))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가락열전’과 ‘대가야열전’을 지었다.
탁라(乇羅)는 남해(南海) 가운데에 있는 작은 나라로 좋은 말과 진주[蠙珠]와 대모(玳瑁)가 나는데, 처음으로 신라(新羅)와 통교하고 국호를 탐라(耽羅)라 하였다. 그러므로 신라 다음에 붙였다.

직방(職方)ㆍ지원(地員)ㆍ화식(貨殖)의 체제를 따라 ‘지승(地乘)’ 2천 언(言)을 지었다.

흑치(黑齒)는 동해(東海) 가운데에 있는 만이(蠻夷)의 강국인데, 7도(道), 61주(州), 611현(縣)이다. 그러므로 ‘흑치열전’을 지었다.
상(上 현종(顯宗)을 가리킴) 14년 계축(1673) 6월에 공암(孔巖) 허목(許穆)은 서(序)한다.


 

[주D-001]신시(神市) : 여기서 신시는 환웅을 가리킨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환웅(桓雄)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정(太白山頂)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왔다. 이를 신시라 하고 환웅 천왕이라 한다.” 하였다.
[주D-002]주공(周公) 단(旦) : 주공은 작호(爵號), 단(旦)은 이름이다. 주 문왕(周文王)의 아들이며 무왕(武王)의 아우로, 노(魯) 나라의 시조(始祖)이다. 그는 무왕을 도우면서 예(禮)와 악(樂)을 제작(制作)하였고, 무왕이 죽자 성왕(成王)을 도와 섭정(攝政)하였다.
[주D-003]고시(楛矢)와 석노(石砮) : 고시는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이며, 석노는 돌로 만든 화살촉인데, 둘 다 숙신 지방에서 생산되는 유명한 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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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사(東事)
신라세가(新羅世家) 중

 


지증왕(智證王)이 즉위하여 국호(國號)를 정하여 ‘신라(新羅)’라 하고, 처음으로 왕이라 칭하였다. 상복(喪服)의 제도를 정하고 순장(殉葬)을 폐지하였다.

주(州)ㆍ군(郡)ㆍ현(縣)을 정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때에 맞추어 얼음을 저장하게 하고, 백성에게 소를 부려 밭갈이하는 법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배를 만들게 하였다. 우산국(于山國)이 항복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우산(于山)ㆍ실직곡(悉直谷)은 동해 가운데의 작은 나라인데 ‘울릉(鬱陵)’이라 이름지었다. 왕이 졸하고 태자(太子) 원종(原宗)이 즉위하니, 이가 법흥왕(法興王)이다.

법흥왕이 즉위하여 처음으로 병부령(兵部令)을 두고 율령(律令)을 반포하였으며, 관의 제도[官制]를 세워 복색(服色)을 7등으로 정하니, 각간(角干)ㆍ대아찬(大阿飡)은 자의(紫衣), 아찬(阿飡)ㆍ급찬(級飡)은 비의(緋衣)에 모두 아홀(牙笏)을 쥐며 청의(靑衣)ㆍ황의(黃衣)ㆍ금관(錦冠)ㆍ비관(緋冠)ㆍ영조(纓組) 등의 차등을 두었다. 그리고 양(梁) 보통(普通) 원년(520, 법흥왕7)에 사신을 보내어 양(梁)과 통교하였다.
이때에 불법(佛法)이 처음으로 행하여졌는데 군신(君臣)들이 모두 말하기를,
“부도(浮屠)는 그 말이 궤이(詭異)하여, 그 법을 따르게 되면 후회하게 될까 걱정됩니다.”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곧 영을 내려 도살(屠殺)을 금지하였다. 가락국(駕洛國) 임금 구형(仇衡)이 항복하니 가락이 망하였다. 그때 천하가 분열(分裂)되었는데, 비로소 연호(年號)를 ‘건원(建元)’이라 칭하였다. 왕이 훙(薨)하고 아우 입종(立宗)의 아들 다맥종(多麥宗)이 즉위하니 이가 진흥왕(眞興王)인데, 겨우 일곱 살이어서 모태후(母太后)가 청정(聽政)하였으며 연호를 고쳐 ‘개국(開國)’이라 하였다.

남자 아이로 어질고 착한 자를 선발하여서, 효제 충신(孝弟忠信)을 가르쳤다. 이사부(異斯夫)를 병부령으로 삼아 군사의 일을 다스리게 하고, 거칠부(居漆夫)를 보내어 고구려(高句麗)를 쳐서 10군(郡)을 빼앗았다. 그리고 부도(浮屠) 1백 좌(座)를 만들어 강회(講會)하고 팔관법(八關法)을 세웠다.
백제(百濟)가 신라(新羅)와 고구려 정벌을 모의하였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으니 고구려에서는 그것을 덕으로 여겨, 신라와 연화(連和)를 맺었다. 그러자, 백제 왕 명농(明禯 성왕(聖王))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의 관산(管山)을 공격하니 군주(軍主) 김무력(金武力)이 반격하여 백제 왕을 죽이고, 좌평(佐平) 4인(人)과 졸개 2만 9천 6백 명을 목 베니, 사졸(士卒)로 살아 돌아간 자가 없었다. 이사부(異斯夫)가 대가야(大伽倻)를 멸망시켰다.
이에 앞서 가야국(伽倻國)의 정치가 혼란하여 악사(樂師) 우륵(于勒)이 악기(樂器)를 가지고 도망해 왔는데, 국원(國原 충북 충주시(忠州市))에다 관사를 정해 주고 지법계(知法階)ㆍ고만덕(古萬德) 등에게 명하여 가야(伽倻)의 12곡(曲)을 전수받게 하니, 우륵이 십이현금(十二絃琴 가야금)을 만들고, 또 현금(玄琴 거문고)을 만들었다. 귀척 대성(貴戚大姓)과 육부(六部) 호걸(豪傑)들을 국원에 옮기고 ‘소경(小京)’이라 하였다. 백성들에게 중 되는 것[度僧]을 허락해 주고 널리 불사(佛寺)를 일으켜 황룡사(皇龍寺)를 지었으며, 종을 주조(鑄造)하였는데, 무게가 3만 5천 근이었다. 연호를 ‘홍제(弘濟)’라 고쳤다. 이사부(異斯夫)가 왕에게 주언(奏言)하니 왕이 대아찬(大阿飡) 거칠부(居漆夫)에게 명하여 문학자(文學者)들을 불러 국사(國史)를 지으라 하였다.

왕산악(王山岳)이 칠현금(七絃琴)을 얻어서, 그 만드는 제도를 변경시켜 이름을 현금(玄琴 거문고)이라 하였다.
옥보고(玉寶高)가 20곡(曲)을 만들어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하니, 속명득은 귀금(貴金)에게, 귀금은 안장(安長)에게, 안장은 아들 극종(克宗)에게 전하고, 극종이 또 7곡을 지었다. 극종의 뒤로 우조(羽調)ㆍ평조(平調) 등 합하여 187곡이 전해진다. 향비파(鄕琵琶)를 만들어, 그 소리로 궁조(宮調)ㆍ칠현조(七賢調)ㆍ봉황조(鳳凰調) 등 합하여 212곡을 지었다.
왕이 어려서 즉위하여 극진히 부도(浮屠)를 믿더니, 즉위한 지 37년 만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호(號)를 ‘법운(法雲)’이라 하였으며 왕비도 여승이 되었다. 아들 금륜(金輪)을 세우니, 이가 진지왕(眞智王)이다. 왕이 훙하고 고(故) 태자(太子) 동륜(銅輪)의 아들 백정(伯淨)이 즉위하니, 이가 진평왕(眞平王)이다. 연호를 ‘건복(建福)’이라 고쳤다.

왕이 사냥을 좋아하므로, 이찬(伊飡) 후직(后稷)이 간(諫)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후직이 죽을 때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나를 왕이 사냥 다니는 길목에 장사 지내다오. 왕의 마음을 깨닫게 하련다.”
하였다. 그 뒤에 왕이 그의 무덤에서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듣고,
“살아서는 간하고 죽어서도 임금을 잊지 않으니, 충신(忠臣)의 의(義)이다.”
하고, 평생 다시는 사냥에 나가지 않았다.

예부령(禮部令)을 두어 예식(禮式)을, 조부령(調府令)을 두어 공부(貢賦)를, 승부령(乘府令)을 두어 거승(車乘)을 각각 맡게 하였다.

큰물이 나서 민호(民戶) 3만 360채가 물에 잠겼다. 곡식을 내어 기민을 먹였다.

수(隋) 나라 개황(開皇) 14년(594, 진평왕16)에 왕을 책봉하여 낙랑군공 신라왕(樂浪郡公新羅王)을 삼았다. 당(唐) 나라 무덕(武德) 원년(618, 진평왕40)에 사신을 보내어 당에 입공(入貢)하니, 당제(唐帝)가 사자에게 위로하며 안부를 묻고, 사신을 보내 와 보빙(報聘)하게 하고 새서(璽書)와 채금(彩錦) 3백 순(純)을 하사하였으며, 왕을 책봉하여 신라왕으로 삼았다. 백제가 서쪽 변방을 침공하여 두 성(城)을 함락하고 크게 출병(出兵)하여 웅진(熊津)에 주둔하니, 사신을 보내어 당 나라에 가서 구원을 애걸했는데 때마침 백제의 사신도 왔으므로, 제(帝)가 새서(璽書)로써 책유(責諭)하여 서로 침범하지 말라 하니, 백제가 곧 침공을 중지하였다. 그러나 서로 원수로 여기기는 그전과 마찬가지였다.

왕이 말리(末利)인 김서현(金舒玄)을 보내어 고구려를 치게 하였는데, 전세가 불리하였다. 김서현의 아들 김유신(金庾信)이 정병(精兵)을 거느려 고구려 군사를 쳐부수고 낭비성(狼臂城 충북(忠北) 청주(淸州))을 함락시켰다.

정관(貞觀) 6년(632, 선덕여왕1)에 왕이 훙(薨)하니, 아들이 없어서 나라 사람들이 그의 장녀(長女) 덕만(德曼)을 세웠는데, 이가 선덕왕(善德王)이다.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나라 안의 환과고독들을 위문하였다. 당 나라에서 여주(女主 선덕여왕을 가리킴)를 책명(冊命)하여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으로 삼았다. 왕궁(王宮)의 서쪽 옥문지(玉門池)에 두꺼비가 많이 모인 적이 있었는데, 여주가,
“두꺼비는 군사의 형상이다. 남변골[南邊谷] 옥문(玉門)에 적병이 있을 듯하니, 군사를 보내어 쳐라.”
하였다. 과연 백제의 잠복한 군사가 있어 변읍(邊邑)을 습격하려 하므로 급히 쳐서 다 죽였다. 칠중(七重 경기 연천군(漣川郡))의 남쪽에서 큰 돌이 저절로 옮겨졌다. 자제(子弟)들을 보내어 당(唐) 나라에 들어가 학문을 배우게 하였다.

백제 왕 의자(義慈)가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선후(獮猴) 등 40여 성을 쳐서 점령하고, 또 고구려와 당항(党項)을 점령하여 당 나라와 교통하는 길을 끊으니, 여주(女主)가 당 나라에 급함을 알리고 백제를 치기 위하여 이찬(伊飡)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군사 원조를 청하였다. 앞서 대야(大野)의 싸움에서 품석(品釋)이 전사했을 때, 그 아내도 따라 죽었는데 그는 김춘추의 딸이었다. 김춘추가 떠날 때 김유신(金庾信)과 맹세하기를,
“60일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왕에게 청하여 고구려를 치시오.”
하고, 고구려에 갔는데 고구려에서는 군사를 출동시킬 생각은 하지도 않고 겨우 하는 말이,
두 영[二嶺] 땅은 본래 우리 땅이오. 그 땅을 돌려주지 않으면 군사를 출동시키지 않겠소.”
하므로, 김춘추가,
“백제가 무도(無道)하므로, 과군(寡君)께서 대국(大國)의 위엄에 의지하여 죄 있는 자를 치려고 신(臣)을 시켜 하집사(下執事)에게 명을 올리게 하였는데, 출병할 뜻은 없으시고 사람을 겁박하여 땅을 돌려 달라 하시니, 신은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니, 왕이 노하여 그를 가두었다. 김춘추가 떠난 지 60일이 되었어도 돌아오지 않자 김유신이 왕에게 청하고 전사(戰士) 3천을 모집하여 고구려를 치려는 참이었는데 고구려에서 그 소문을 듣고 김춘추에게 두터운 예우(禮遇)를 하여 돌려보냈다.
또한 신라의 사자가 당 나라에 이르니, 태종(太宗)도 이미 동벌(東伐)할 뜻이 있었던 터이므로, 이때에 와서 태종은 친히 고구려 정벌길에 나서게 되었다. 여주(女主)는 3만의 무리를 징발하여 그를 도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백제에서는 신라가 나라를 비워 두고 왕사(王師)를 도울 것이라 여기고 서쪽 변방 7성(城)을 습격하여 탈취하니 김유신을 보내어 백제를 치게 하였는데, 마침 귀신(貴臣)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군사를 들어 여주를 폐하려 하므로, 김유신이 돌아와 쳐서 그들을 참하였다.

첨성대(瞻星臺)를 만들었다. 주(主)가 훙(薨)하자, 그의 모제(母弟) 국반(國飯)의 딸 승만(勝曼)을 세우니 이가 진덕왕(眞德王)인데, 키가 7척이었으며 팔을 늘어뜨리면 무릎을 지나쳤다.

여주(女主)가 김유신을 보내어 백제를 쳐서 12성(城)을 함락시켜 머리 2만 급(級)을 베고 9천 인을 생포하였으며, 또 9성을 도륙하여 머리 9천 급을 베었고 포로 6백 인을 잡았는데, 그것은 대야의 싸움을 보복한 것이라 한다.
백제가 품석(品釋)과 품석 아내의 해골(骸骨)을 신라에 돌려보냈다. 여주가 이찬(伊飡) 김춘추를 보내어 당 나라에 가게 하였는데, 태종은 김춘추의 상모가 위엄 있음을 보고 예로 접대하기를 매우 두텁게 하면서 조용히,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김춘추가 대답하기를,
“백제가 강함을 믿고 우리나라 수십 성을 침략하여 조공의 길을 끊어 놓았습니다. 폐하께서 천위(天威)를 빌려 주지 않으신다면 우리나라는 술직(述職)할 길이 없습니다.”
하니, 태종이 장군 소정방(蘇定方)에게 명하여 20만 인을 출병시켜 백제를 정벌케 하였다. 김춘추가 태학(太學)을 관람하고 장복(章服)을 요청하여 돌아와서 영휘(永徽)란 당 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 백관(百官)의 관복(冠服)을 제정하였다.

여주가 태평송(太平頌)을 지어 비단에 짜서 바쳤다.

영휘(永徽) 5년(654, 무열왕1)에 여주가 훙하자, 군신(群臣)들이 김춘추를 맞아 세우니, 이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며 진지(眞智)의 손자이다.


 

[주D-001]복색(服色)을 …… 두었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잡지(雜志) 색복(色服)에 “법흥왕이 명하여 대각간부터 대아찬까지는 자의(紫衣)를, 대내마는 청의(靑衣)를, 대사부터 저지까지는 황의(黃衣)를, 이찬과 잡찬은 금관(錦冠)을, 상당대내마와 적의대사는 영조(纓組)를 입으라.” 하였다.
[주D-002]팔관법(八關法) : 불가(佛家)의 말인데 여덟 가지 악(惡)을 금지한 법으로 팔관은 팔계(八戒)와 같은 말이다. 《十善戒經》
[주D-003]새서(璽書) : 천자(天子)가 조서(詔書)를 써서 봉함하고 어인(御印)을 눌러 내린 문서를 말한다.
[주D-004]선후(獮猴) : 《삼국사기》 백제본기6에는 의자왕 2년에 ‘신라를 침략하여 미후(彌猴) 등 40여 성을 항복시켰다.’라고 되어 있다.
[주D-005]두 영[二嶺] : 마목현(麻木峴)과 죽령(竹嶺)을 말한다. 《三國史記 卷41 金庾信傳》
[주D-006]장복(章服) : 보(黼)와 불(黻) 등의 수놓은 비단으로 만든 옷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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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물문(萬物門)
가야금(伽倻琴)

 


신라 진흥왕 때에 가야국왕(伽倻國王) 가실(嘉悉)이 당(唐) 나라 악부(樂部)의 쟁(箏)을 본받아 12현(絃) 거문고를 만들었는데, 이는 12개월을 상징한 것이다. 그의 악사(樂師) 우륵(于勒)은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줄 알고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투항하여 그 거문고 이름을 가야금이라 하였다.
이규보(李奎報)는, “가야금은 대개 옛날 진쟁(秦箏) 따위인데, 다만 줄[絃] 하나가 없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급취장(急就章)》 주에 상고하니, “쟁(箏)은 슬(瑟) 따위로서 본래는 12현이던 것이 지금은 13현으로 되어 있다. 이는 대개 진 나라에서 만든 것인 까닭에 이름을 진쟁(秦箏)이라 하며, 또는 진 나라 풍속이 각박하고 악독하여 부자간에 슬(瑟)을 서로 가지려고 다투는 자가 있어 각기 반절씩 쪼개어 갖게 되었던 까닭에, 그 당시 쟁이란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 슬이 본디 25현이었다면, 12현 혹은 13현 따위는 슬에 비해 반절밖에 되지 않는데, 쟁이란 이름은 변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로 본다면 가야금이란 것이 진쟁과 뭐 다르겠는가? 이규보는 이런 것을 상고하지 않은 듯하다.
또 한 무제 본기(漢武帝本紀)를 상고한즉, “태제(泰帝)가 소녀(素女)에게 50현의 슬을 타도록 했는데, 곡조가 너무 구슬펐다. 태제는 차마 들을 수 없어 금지시켰으나 금지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슬을 깨뜨려 25현으로 만들었다.” 하였으니, 태제는 바로 황제(黃帝)이다. 그런즉, 슬은 처음 50현이던 것이 그 반인 25현으로 되었고, 또 그 반인 〈13현의〉 쟁으로 되었으니, 쟁과 가야금이란 처음부터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이의산(李義山)의 시에,


하였으니, 옛날 슬도 일찍이 없어지지 않았다. 다만 명칭을 금슬로 바꾸어 구별했을 뿐이었다.


 

[주C-001]가야금(伽倻琴) : 《類選》 卷5下 人事篇 器用門. 《芝峯》 卷18 技藝部 音樂.
[주D-001]〈급취장(急就章)〉 : 〈급취편(急就篇)〉을 말함, 원문은 즉 한 나라 사유(史游)가 찬하고, 주는 당 나라 안사고(顔師古)가 달았는데, 물명(物名)ㆍ인명(人名) 따위가 수록되었음.
[주D-002]소녀(素女) : 선녀(仙女)와 같음. 《회남자(淮南子)》에 의하면 황제(黃帝) 때 술수 부리던 여자라 함.
[주D-003]황제(黃帝) :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
[주D-004]이의산(李義山) : 의산은 당 나라 이상은(李商隱)의 호.
[주D-005]금슬은 무단히 오십 현으로 되었구나 : 이 시구는 금슬시(琴瑟詩)로서 “一絃一柱思華年”의 대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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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교전교(政敎典故)
음악(音樂)

 


동방(東方)에는 신라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아악(雅樂)이 없었는데, 고려 예종(睿宗) 때에 사신(使臣) 안직숭(安稷崇)이 송 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에 송 나라 휘종(徽宗)이 새 악기[新樂器]와 보결(譜訣)을 주었고, 예종이 악기와 곡보를 받은 답례사(答禮使)로 왕자지(王字之)와 문공미(文公美)를 보내어 치사하였더니 그 자리에서 또 대성악(大晟樂)을 주었다. 휘종(徽宗) 때에 서촉(西蜀)의 도사(道士) 위한률(魏漢律)이 우(禹) 임금의 몸이 척도가 된다는 옛글을 인용하여 휘종의 가운데 손가락의 가운데 마디를 척도(尺度)로 삼아 억지로 이론을 부연하여 악기를 만들고, 이름을 ‘대성악’이라 하였다.
○ 공민왕 때에 명 나라 태조가 악기를 보내 주므로, 조정에서는 강사찬(姜師賛)을 명 나라 서울에 보내어 명 나라 태조에게 여러 음(音)에 정통하고 기예를 겸비한 악공(樂工)을 보내 주어 전업(傳業)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더니, 명 나라 태조가 명하여 태상시(太常寺)의 악공을 서울에 보내 주어 음악을 익히게 하여 주었다.
○ 태조 4년 문묘(文廟)가 낙성되었을 때에 임금이 친히 잔을 드리어 제사하고자 하여 민안인(閔安仁)에게 고전(古典)을 밝게 익히게 하고, 악기를 수리하라고 명하였다.
○ 정종 2년에 예조에서 대송반악도(大宋頒樂圖)를 상고하기를 청하였다.
○ 태종 5년에 명 나라 예부(禮部)에 보내는 자문(咨文)에, “본국의 종묘와 사직의 악기가 옛날 것이어서 파손되었으므로 사람을 시켜 값을 보내어 명 나라 서울에 가 사서 갖추어 쓰겠다.”고 청하였더니, 명 나라 예부의 회자(回咨)에 이르기를, “성지(聖旨)를 받들어 공부(工部)에서 악기를 조성(造成)하여 내사(內史) 박린(朴麟) 등을 시켜 편종(編鐘) 16개, 편경(編磬) 16편(片), 금(琹) 4장(張), 슬(瑟) 2상(牀), 생(笙) 2찬(櫕)과 소(簫) 4관(管)을 주관케 하여 보낸다.” 하였다.임금(태종)이 명 나라 임금이 보내 준 것을 받은 다음 사신을 태평관(太平館)으로 안내하여 잔치를 베푸는 동시에 김승주(金承霔)와 이응(李膺)을 명 나라 서울로 보내어 사례하고 6년부터 비로소 종묘에 명 나라의 악기를 사용하였다.
○ 11년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고려조 때에 광종(光宗)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당 나라의 악기와 악공을 청하여 익힌 다음 그 자손이 대대로 그 업(業)을 지켜왔으며, 충렬왕 때에 이르러서는 김여영(金呂英)이 맡아 보았고, 충숙왕(忠肅王) 때에는 그 손자 득우(得雨)가 또 맡아 보았습니다.《송사(宋史)》에 있는 악서(樂書)에도 이르기를, ‘원풍(元豐) 연간에 고려가 악공을 보내 주기를 청하므로 보내어 가르쳤다.’ 하였으니, 우리나라의 음악은 중국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세상에 전해 내려온 지가 오래되어 혹 와전(訛傳)이 있을까 두려우니, 바라옵건대, 관습도감(慣習都監)과 함께 상세하게 심찰(審察)하는 동시에 그 구보(舊譜)를 찾아 당(唐)ㆍ송(宋)의 유음(遺音)을 좇아서 성조(盛朝))의 정악(正樂)을 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좇았다.
○ 악장(樂章)에서 몽금척(夢金尺)과 수보록(受寶籙)을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태종조 조에 상세하다.
○ 세종이 아악(雅樂)을 바로잡았다. 세종조 제작조에 상세하다.
○ 세조 4년에 임금이 이르기를, “향악(鄕樂)과 아악은 본래 별개의 것이 아니니, 따로 두 서[二署]를 두는 것은 실속이 없는 무익한 일이다.” 하여, 합하여 장악서(掌樂署)로 하였다. 장악원(掌樂院) 조에 상세하다.
○ 9년에 임금이 이르기를, “세종이 만드신 정대업(定大業)과 보태평(保太平)의 음곡과 춤과 가사(歌詞)의 구수(句數)가 많아서 잠깐 동안에 지내는 제사에는 모두 연주하기 어려우니, 그 뜻을 본받아 악장(樂章)을 만들라.” 하여, 최항(崔恒)이 그 가사를 지었다.
○ 성종 24년 계축에 성현(成俔) 등에게 명하여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케 하여 아악ㆍ당악(唐樂)ㆍ향악 3편으로 구분하였는데, 악조(樂調)와 성률(聲律)을 첫머리에 넣고 서적을 널리 인용하여 이해하기 쉽게 하였다.
○ 영녕전(永寧殿)에 쓰는 음악은 종묘에 쓰는 음악과 달랐다. 예조 판서 이파(李坡)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세조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옵는데, ‘오목청묘(於穆淸廟)의 글장은 문왕(文王)을 제사하는 시(詩)인데, 교(郊)의 제사에도 쓰고, 묘(廟)에도 썼으니, 우리나라의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의 악은 종묘와 영녕전에 통용하여도 좋다.’ 하셨습니다.신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시를 보니, 한갓 태조의 공덕만을 찬술한 것이 아니고 환왕(桓王) 이상의 4조(四祖)의 공덕을 겸해 기록한 것이니, 영녕전에 쓰는 악도 세조의 하교에 의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성종이, “그렇게 하라.” 하였다. 《명신록》
○ 명종 8년 계축에 본국의 율관(律管)이 오래되어 점차로 그 본음(本音)을 잃게 되었으므로 악관(樂官) 1명과 악사(樂師) 3명을 선출하여 하지사(賀至使) 민기(閔箕)가 명 나라 서울로 가는데 딸려 보냈더니, 명 나라 예부에서 태상시(太常寺)를 시켜 음률에 정통한 악무생(樂舞生) 2명을 선발하여 우리나라에서 보낸 악관ㆍ악사와 함께 날마다 교정하게 하였는데, 민기는 먼저 돌아오고, 악관 송림(宋琳) 등은 북경에 두 달 동안 머물고서 율관 1부(部)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 범위가 좁고 형체가 기울어졌었다.이는 대개 악관이 고국에 빨리 돌아오고 싶어서 빨리 완성하기를 재촉하여 공인(工人)들이 구차하게 충당한 때문이었다. 송림 등은 또 당악의 전습(傳習)을 부지런히 하지 않고 돌아왔으므로, 예조 판서 정사룡(鄭士龍)이 힐문(詰問)하니, 송림 등이 아무런 대답을 못하였다.
율관(律管)은 영락(永樂) 3년에 명 나라 황제가 보내 준 것이다. 이에 이르러 해가 오래 되어서 율관이 파손되었다는 것으로 명 나라 예부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사들이기를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본래 쓰던 율관은 이미 오래되어 그 본래의 음에서 조금 틀리는 정도에 그치지 아니할 뿐 아니라, 더욱이 해시(該寺)의 여러 음악을 전습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와전(訛傳)이 와전을 낳아 점점 그 본래의 것을 잃게 되었습니다.음악은 종묘와 사직에 쓰고, 연례(宴禮)에도 써서 신(神)과 사람을 화합하게 하는 것이므로, 이제 악관 1명과 악사 3명을 선발하여 그 가포(價布)를 싸가지고 하지배신(賀至陪臣)의 뒤를 따라 서울로 보내오니, 청컨대 황제께 전달하여 특별히 사들이기를 허가해 주고, 태상시의 악공들과 함께 교정하게 함으로써 명 나라 조정의 율(律)ㆍ도(度)ㆍ양(量)ㆍ형(衡)의 제도와 같이 하게 하여 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다.자문 중에서 말한 ‘해시의 여러 음악’이라 한 것은 당악을 가리키는 것이니, 지금의 당비파(唐琵琶) 따위가 그것이다. 명 나라 예부에서 회자(回咨)하였는데 그 대략에, “조선은 우리나라를 섬김에 있어 공물(貢物)을 대단히 삼가서 바쳐 왔고, 우리 조정에서도 조선을 대우하는 데 은혜와 예의를 본래 후하게 하여 왔으며, 정월 삭일(朔日 초하룻날)로부터 양(量)ㆍ형(衡)에 이르기까지 꼭 같은 것을 사용하고 있다.하물며 관약(管籥)의 음률은 곧 예악(禮樂) 중에 큰 것이니, 어찌 감히 조정에 청하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스스로 제작하겠는가. 마땅히 태상시에 이첩(移牒)하여 음률에 정통한 악사ㆍ악생 2명을 선발하여 보내온 악관ㆍ악사와 함께 낱낱이 교정하게 할 것이며, 그 율관에 있어서는 사들이려는 것을 응당 좇지 않을 리 없으나, 다시 특별한 은혜로써 반사(頒賜)하여 후한 예(禮)를 보이라는 성지(聖旨)를 받들어 율관을 내려줄 것이니, 이 뜻을 공경히 받들어 조회한다.율관은 음악의 근본이니 반드시 정밀하게 제조하여야만 소리와 기운이 잘 맞는 것이므로, 열흘이나 한 달 동안에 가히 정밀히 제조할 것이 못 되니, 통사 1명과 악사 3명과 종인(從人) 1명을 북경에 머물러 있게 하여 제조가 완료되는 것을 기다려서 완전히 영수(領受)하여 가지고 돌아가게 하고, 그 배신(陪臣 사신을 말한다) 등 관리는 먼저 돌아가도록 하라는 성지를 받들었다.” 하였다. 이에 논평하는 이들이, “피차간에 모두 체통을 얻었다.” 하였다. 《해동야언》
○ 인조 을축년에 장차 세자의 관례(冠禮)를 행하려 하는데, 예조 판서 이정귀(李廷龜)가 아뢰기를, “임금이 출입하실 때는 북을 치고 피리를 부는 헌가악(軒架樂)이 있고, 대소의 행행(行幸) 때에도 모두 앞뒤에 고악(鼓樂)이 있으니, 이는 이른바, 화란(和鑾)을 울리어 임금의 거둥에 절주(節奏)를 맑게 한다는 것이지, 노는 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며, 실로 위의(威儀)에 관계되므로 상례(喪禮)와 재변이 아니고는 폐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전하께서 즉위하시던 처음에 노추(奴酋)를 평정하기까지는 음악을 쓰지 말라는 하교가 있어 평상시의 거둥에는 항상 악을 사용하지 아니하니, 이것은 참으로 전례에 없는 상규(常規)를 벗어난 예(禮)입니다. 천하에 악이 없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길사(吉事) 때의 하례(賀禮)에 일찍이 악이 없는 일은 아직 없었습니다.관례에 이르러서는《의례(儀禮)》에 이르기를, ‘선비의 관례에는 악이 없다.’ 하였는데, 이는 삼가(三加 관례(冠禮) 때, 세 번 관을 갈아 씌우던 의식)하고 초례(醮禮)할 때를 말한 것입니다.《춘추전(春秋傳)》에 이르기를, ‘임금의 관례에는 금석악[金石樂]으로 연주한다.’ 하였는데, 허신(許愼)은 말하기를, ‘사부(士夫)의 관례에는 악이 없으나 임금은 밥상을 올릴 때에도 반드시 악을 연주하는데, 관례 때에 악이 없는 것은 예의 본의가 아니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임금의 관례에 악을 쓰는 것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오례의(五禮儀)》에 세자가 삼가(三加)하고 초례할 때에 악을 사용하는 절차는 없으나, 임금이 나와서 빈(賓)과 찬(賛)을 지명할 때에 북을 치고 피리를 부는 헌가악이 있으니, 이는 대개《의례》와《춘추전》을 참작한 것입니다. 예에 따라 주악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좇았다.
○ 4년 병인에 연신(筵臣) 오윤겸(吳允謙)의 아룀으로 임금이 명하기를, “세종 이후의 묘악(廟樂)을 실록에서 상고해 낸 후에 실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면 추가해 만들어서 사용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실록 중에는 다만 익조(翼祖)에서 세종에 이르기까지 7실(室)의 악장(樂章)만이 있는데 《악학궤범》에 실려 있는 가사와 전연 같지 않습니다.《악학궤범》은 성종 말년에 완성되었는데, 문종ㆍ세조 이하의 묘악은 실려 있지 않습니다. 대개 태묘(太廟)의 악장은 비단《악학궤범》에만 실려 있을 뿐만 아니고,《오례의》에도 상세하게 실려 있는데, 인입(引入)과 인출(引出)을 제외하고, 초헌(初獻)ㆍ아헌(亞獻)ㆍ종헌(終獻)에 각각 9장(章)을 한 곡무[一曲舞]로 하여 갖추어 있고, 영녕전(永寧殿)에 있어서는 악무(樂舞)가 종묘와 꼭 같다고 하였습니다.이것으로 보면 4조(祖)를 이미 영녕전으로 조천(祧遷)해 모신 후에도 태묘에 그대로 4조의 악장을 사용하였고, 영녕전에도 역시 태조와 태종의 악장을 사용한 것이 분명합니다. 대개 각실(各室)의 악을 쓴다면 악장은 길고 잔을 드리는 것은 쉬워서, 겨우 연주하면 벌써 철상하게 되어 곡무(曲舞)를 이루지 못하므로, 한 악장을 만들어 처음에는 선대의 공덕을 찬양하고, 끝에는 열성(列聖)의 공덕을 찬양하여 통용하는 악으로 삼은 것이니, 그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비록 유신(儒臣)이 상고한 것으로 말씀드리더라도, 서한(西漢)은 다만 공덕이 많은 임금께만 악을 마련하였고, 송(宋)과 원(元)은 각실의 악이 있는 것 같사오나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으며, 명 나라 태조와 태종은 각각 악장이 있고, 인종 이하는 통용하고 있습니다. 《악학궤범》은 필연코 이것을 모방하여 한 것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선조묘는 당연히 따로 악장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였고, 대신 윤방(尹昉)과 신흠(申欽)의 의견도 모두 같아서 드디어 대제학에게 명하여 ‘중광 일장(重光一章)’을 찬술하여 초헌 정명(貞明)의 아래에 첨입(添入)하였다. 《월사남궁록(月沙南宮錄)
○ 20년 임오에 호군(護軍) 한명욱(韓明勖)이 소를 올리기를, “향사(享祀)에 음악을 폐지하는 일은, 신은 옳은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난(亂)을 만나면 음악을 할 수 없다고 한다면 공자(孔子)는 진(陳) 땅에서 액(厄)을 당하였을 때, 현가(絃歌)를 폐하지 않았고, 광(匡) 땅에서 포위를 당하였을 때에도 노래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성인은 난을 당하였다 하여 그 음악을 폐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소장(疏章)을 비변사에 내리어 의논하도록 하였다.
○ 24년에 병술에 종묘에 고하고 명년 춘향(春享)부터 음악을 사용하였다.
○ 현종 을사년에 송준길(宋浚吉)이 차자를 올리기를. “태묘(太廟) 여러 실(室)에 9장(章) 11성(聲)으로 통용하고 있사온데, 문소전(文昭殿)을 파하기 전에는 각실(各室)마다 각각 악장이 있던 것은 그 의의를 알 수 없습니다. 선조조에 예조 판서 황정욱(黃廷彧)이 태묘 1실마다 각각 1장씩을 지을 것을 청한 일이 있으며, 인조조에 오윤겸(吳允謙)도 역시 이와 같이 청한 일이 있었사오나 모두 채용되지 못하였고, 다만 선조를 위하여 따로 악장을 지었습니다.효종조에 장악정(掌樂正) 권우(權堣)가 인조의 악장을 따로 지을 것을 청하였사오나, 여러 대신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이미 선조(宣祖)를 위하여 따로 악장을 지은 것이온데, 위로 세조ㆍ성종ㆍ중종 같으신 임금께와 아래로 인조와 효종 같으신 임금께만 홀로 따로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까. 또 태묘의 악은 비록 이름은 한 가지 악을 통용한다 하나, 실제는 각실마다 1장을 연주하고 있습니다.그러하온데, 태묘는 이제 10실이 되었으니 제 10실에는 사용할 만한 음악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못하여 인도해 나올 때에 연주하는 인출곡(引出曲)과 역성장(繹成章)을 쓰고 인도해 나올 때도 역시 그 악장을 중첩으로 쓰고 있습니다. 영녕전에 주악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이 얼마나 존엄한 자리인데, 예와 악이 전도(顚倒)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또 그 지은 악장도 길고 짧은 것이 고르지 않아 그 매우 짧은 것은 예를 마치기도 전에 주악이 먼저 끝나므로, 악공과 광대[伶人]들이 간혹 그 악장을 두 번 연주하기도 하니, 이는 대단히 미안한 일입니다.” 하였다.
○ 숙종 원년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무릇 대사(大祀 종묘ㆍ영녕전ㆍ사직단ㆍ원구단(圓丘壇)의 제사)에는 졸곡(卒哭) 후에 음악을 쓴다는 것이 예문(禮文)에 명백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날 기우제(祈雨祭)를 친히 행할 때는 대신에게 수의(收議)한 후에 음악을 썼습니다. 이번에 친체(親祭)하시는 것은 백성을 위해 하늘에 혜택을 비는 것이오니, 옛날의 예에 따라 음악을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좇았다.
○ 남구만(南九萬)이 병자년에 올린 차자에, “종묘와 영녕전에 연주하는 악장은, 초헌(初獻)에는 보태평(保太平) 11성(聲)을 쓰는데, 인도해 들일 때에 쓰는 희문장(熙文章)과 인도해 나갈 때에 쓰는 역성장(繹成章)의 두 악장을 제하면, 그 동안에 사용하는 성음은 실제는 9장이 되는 셈입니다.아헌(亞獻)과 종헌(終獻)에는 모두 정대업(定大業) 11성을 쓰는데, 인도해 들인 때의 소무(昭武)와 인도해 나갈 때의 영관(永觀)의 두 악장을 제하면, 그 동안에 사용하는 소리 역시 9장이 됩니다. 이 밖에도 또 초헌을 하기 전에 신령(神靈)을 맞는 영신(迎神)ㆍ전폐(奠幣)ㆍ진찬(進饌)의 3장과 종헌을 마친 후에 연주하는 철변두(撤籩豆)ㆍ송신(送神) 2장이 있습니다.대개 우리나라의 예악(禮樂)이 제작된 것이 태종조에 비롯하여 세종조에 완성되고 성종조에 정하여졌습니다. 그러므로 두 악장에 그 조종(祖宗)의 공덕을 칭송한 것이 목조(穆祖)의 바다를 타고 옮긴 것에서 비롯하여 세종의 왜를 정벌한 데에서 그쳤습니다. 그 뒤에 비록 세조의 중흥(中興)한 것과 성종의 태평을 이룬 데 대하여 모두 칭송한 바가 없는 것은 진실로 악장이 이미 수(數)를 갖추어서 더 첨가할 수 없기 때문이요, 의심나는 곳이 있어 비워 두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상(商) 나라와 주(周) 나라의 성탕(成湯), 고종(高宗) 및 후직(后稷)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을 칭송하는 묘악(廟樂)이 각각 있어 그 공업(功業)을 형상한 것은, 옛날의 종묘 제도는 도궁(都宮) 안에 혹은 7위(位) 혹은 9위를 각각 그 사당을 세우고 각각 그 제사를 따로따로 지냈기 때문에, 역시 각각 그 악이 있었던 것입니다.서한(西漢)의 종묘 제도는 비록 도궁(都宮)과는 다른 점이 있으나, 각각 사당이 있고 각각 제사를 지낸 것만은 일찍이 다른 것이 없었기 때문에, 문제(文帝)와 무제(武帝)의 제사에 모두 묘악이 맞지 않는다고 말하여 소덕무(昭德舞)와 문시무(文始舞)를 따로 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나라 명제(明帝) 이후에 이르러 태묘는 모두 한 사당 안을 사용하였으며, 서쪽을 상(上)으로 삼는 제도를 만들어 사당을 각각 세우지 아니하였으니, 음악도 역시 각각 쓸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우리나라 악장을 반드시 9장으로써 숫자를 갖춘 것은 《주례(周禮)》에 이르기를, ‘종묘 안에서 악을 연주하여 아홉 번 변하면 사람과 귀신이 모두 예를 이룰 수 있다.’ 한 것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성장에 이르기를, ‘악이 이미 아홉 번 변하였으니 진미 진선(盡美盡善)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초에 악을 정하고 수를 채운 뒤에 열성(列聖)의 승부(陞祔 종묘에 부묘하는 것)하는 대로 신위마다 악장을 만들어 9장 이외에 더 첨가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인조조에 지은 바 있는 선조조의 중광(重光) 1장은 더욱 미안한 일입니다.만일 조종(祖宗)의 공덕으로 말한다면 악을 정한 뒤에 세조ㆍ성종ㆍ중종ㆍ선조는 모두 세실(世室 영구히 제사를 받들 위패(位牌)를 모신 종묘의 신실(神室))인데도 다만 선조조에만 1장을 찬술하여 마치 세실 중에서도 취사(取舍)하는 바가 있는 것 같고, 또 첨가해서 10장이 되었으니, 주악은 반드시 아홉 번 변한다는 뜻에 현격한 차이를 가져온 것입니다.만약 반드시 변통하려고 할 것 같으면, 초헌과 아헌에는 전과 같이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의 9장을 쓰고, 종헌에 이르러서 전일 거듭 사용하던 정대업의 규정을 변경하여 따로 한 악을 이루어서 9장을 갖추고, 그 9장 속에서 세실 9위의 공덕을 칭송하면, 그 구악(舊樂)에 있어서도 조금도 첨가하는 두려움과 개정하는 혐의가 없을 것이요, 중광 1장도 역시 그 수에 넣어서 사용할 수 있어 약간 온당할 것 같습니다.다만 생각하옵건대, 성조(聖朝)의 역대[曆數]가 장차 한량이 없을 것인데, 현재의 세실 9위 이외에 대대로 공덕으로 미루어 보아, 또 얼마의 사당이 있을지 알지 못할 것이니, 종헌을 이미 갖춘 뒤에 다시 첨가하기 어려움이 또 반드시 오늘날과 같은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에 꼭 합당한 도리를 얻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전 부제학 이봉징(李鳳徵)의 상소에, ‘신실(神室)마다 각각 1장을 더하자.’는 청이 있었고, 해조에서 또, ‘인조의 신실에만 따로 악장을 짓자.’고 청하였으나, 신의 생각으로는 모두 시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였다.
○ 영종 18년에 전교하기를, “신(神)을 감동하게 하는 법이 전혀 음악에 있는 것인데, 지금의 아악은 장단(長短)과 곡조가 능히 서로 조화되지 않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지럽게만 하니, 이는 반드시 악률(樂律)이 잘못된 소치일 것이다.” 하고, 필선(弼善) 이연덕(李延德)이 음률에 자못 밝으므로 장악정(掌樂正)에 임명하고, 악기도감(樂器都監)을 설치하여 연덕에게 낭청을 겸하게 하여, 악기를 잘 검사하고 교정하게 하였는데, 창덕궁(昌德宮)과 경희궁(慶熙宮)의 악가(樂架)의 동경(動磬)을 보니, ‘계축(癸丑)’이라고 많이 새겨져 있었으니, 이는 곧 세종 때에 박연(朴堧)이 제조한 것이다.또 사직 악기고(樂器庫)의 쓰레기 속과 비변사의 우물 속에서 석경(石磬) 24개를 얻었는데, 무릇 ‘계축’이라고 새긴 것이 15개나 되었다. 세종이 일찍이 고종(古鐘) 2개를 못 가운데에서 얻어 곧 아악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이 더욱 분발하여 아악을 갱신(更新)하려는 생각이 있어 재자관(賷咨官)을 명 나라에 보내어 생황(笙簧) 제조법을 사들여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에게 신칙하여 부지런히 하는 자를 권장하여 상 주고, 게을리하는 자를 징계하고 벌주게 하여 실효(實效)를 거두도록 하였다.
○ 보(補) : 고려조의 ‘황풍악(皇風樂)’이란 것은 당 나라 때의 정악(正樂)의 음률을 모방한 것으로, 왕씨(王氏)가 비로소 고려를 일으킨 공덕을 칭송한 것이다. 조선 건국 초에 세종이 정인지(鄭麟趾) 등에게 명하여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찬술하였다. 그 가운데에 상 7장과 하 3장이 여민락(與民樂)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황풍악의 곡조에 노래를 맞춘 것으로, 노래는 즉 사언(四言)으로 되어 있어 옛날것과 맞는 것인데, 이것을 우리 태조(太祖)의 묘악으로 삼았다.그러나 그 가사가 야비하고 고상하지 않아서, 거의가 사저(私邸)에 있을 때, 활 쏘기와 사냥과 격구(擊毬)와 잡희(雜戲) 등의 일을 제 일의(第一義)로 삼고 있어, 반드시 후세에 기롱을 살 것이다. 역대의 왕조에서 항상 서교(西郊)로 조사(詔使)를 맞이할 때에 전폐(殿陛)에서부터 여민락 악장의 연주를 시작하면 숭례문(崇禮門) 안에 이르러 바로 이를 마치고, 다시 주악을 시작하면 모화관에 이르러 바로 마쳤다. 선조 초년에 주악의 음정(音程)이 점점 빨라져서 전폐에서 광통교(廣通橋)에 이르면 벌써 마치었다.이때 식자들이 이를 우려하더니, 얼마 안 되어 임진왜란이 있었다. 소위 헌선도(獻仙桃)ㆍ수연장(壽延長)ㆍ오양선(五羊仙)ㆍ포구락(抛毬樂)ㆍ연화대(蓮花臺)ㆍ무고(舞鼓)의 6조는 곧 고려악(高麗樂)이었는데, 국조에서도 준용하였다. 또 몽금척(夢金尺)ㆍ수보록(受寶籙)ㆍ근천정(覲天庭)ㆍ수천명(受天命)ㆍ하황은(荷皇恩)ㆍ하성명(賀聖明)ㆍ육화대(六花隊) 등의 악장은 대개 내력이 있고 고상한 제목이 많으나 기악(妓樂)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으며, 육화대와 같은 것은 아이들의 놀이가 아닌 것이 없었는데, 3백여 년을 그대로 사용하여 오면서도 변동하지 못하였다.음악이란 화평스럽고 담담한 것을 위주로 하고, 정욕을 인도하려는 것이 아닌데, 조정에 일이 있으면 팔방(八方)의 기녀(妓女)를 뽑아 올려서 얼굴에 분을 바르고 뺨에 연지를 붉게 칠하여, 넓은 뜰에서 많은 사람들이 분잡하게 놀아서, ‘춤 잘 추는 비연(飛燕) 석가세존(釋迦世尊)’이라는 등의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남부끄럽게 하였다. 세종조에 아악만을 쓰고 여악(女樂)은 쓰지 아니한 사실이 영릉(英陵)의 비문에 기재되어 있어 알 수 있다. 세상에 이를 주달하여 준행할 자가 없는 것이 한스럽다. 《성호사설》
○ 우리나라 사람이 올량합(兀良哈)의 춤을 본받아 머리를 흔들며 눈을 크게 뜨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팔을 굽히고 두 다리와 열 손가락을 동시에 굽혔다 폈다 하여, 혹은 활을 쏘는 형상을 하고, 혹은 개가 걷는 형상도 하고, 혹은 나무를 잡고 늘어지듯이 늘어지고, 새가 공중을 날아 다리를 쭉 뻗듯이 뻗기도 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갈 때는 휙 바람이 났다.공경대부(公卿大夫)로부터 사(士)ㆍ서인(庶人)ㆍ창우(倡優)ㆍ여자에 이르기까지 음률을 알고 몸이 민첩한 자는 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이것을 ‘호무(胡舞)’라 칭하였고 악기로 반주까지 하였는데, 우찬성(右贊成) 어유소(魚有沼)가 가장 잘하였다. 안응세(安應世)는 말하기를, “사람에게 아첨하는 행위와 부드럽고 모양내는 태도는 사람의 할 바가 아니다. 하물며 오랑캐는 금수(禽獸)에 비유하고 있는데, 어찌 내 몸에다가 금수의 일을 가하겠는가” 하였다. 《추강냉화》
○ 고려 초에 악관(樂官)이 당 나라 때의 협계정악(夾階正樂)의 음을 모방하여 황풍악(皇風樂)을 제작하였는데, 악장에 왕씨가 고려를 처음 일으킨 공덕을 칭송하고, 무릇 국왕의 대조회(大朝會)와 행행(行幸)할 때에는 반드시 이를 주악하였다. 국초에 이르러 문사(文詞)를 맡은 신하에게 명하여 《용비어천가》 5권을 제작하고, 상 7장과 하 3장을 취하여 ‘여민락(與民樂)’으로 삼았는데, 이 여민락은 황풍악 곡조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임금이 명 나라의 조칙(詔勅)을 서교(西郊)로 나가 맞이할 때에 대궐 뜰에서부터 주악하기 시작하여 숭례문(崇禮門) 안에 이르러 한 곡조가 끝났고, 또다시 주악하여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러 임금이 연(輦)에서 내리면 마쳤었다. 선조 초년에 와서는 악이 점점 빨라져서 한 곡이 으레 광통교(廣通橋)에 이르면 이미 끝나므로 악관이 그 악의 음절이 빠른 것을 대단히 우려하더니, 얼마 안 되어서 임진왜란이 있었다. 광해 때에는 소리가 슬프고 빠르고 음란해서 거의 수습할 수 없었다. 《지소록》
○ 우리나라의 악기에 현금(玄琴)은 옛날 오현금(五絃琴)을 본떠서 1현(絃)을 더한 것이요, 가야금은 옛날의 비파를 본뜬 것으로 13현을 줄여서 만든 것이다. 속악(俗樂)에는 풍입송(風入松)ㆍ서자고(瑞鷓鴣)ㆍ수룡음(水龍吟)ㆍ오운봉서도(五雲捧瑞圖) 등의 악장이 있는데, 송 나라 휘종(徽宗)이 보내 준 대성악(大晟樂)이다. 《지소록》
○ 삼국(三國)에 각각 음률과 악기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세하게 알 수 없고, 오직 현금(玄琴)은 신라에서 나왔고, 가야금은 금관(金官) 김해(金海) 에서 나온 것이다. 대금(大笒)은 당적(唐笛)을 본떠서 만든 것인데, 그 소리가 가장 장엄하였고, 향비파(鄕琵琶) 역시 당비파(唐琵琶)를 본뜬 것인데, 줄을 거는 것은 현금과 같다. 전악(典樂)으로 있는 송태평(宋太平)이 잘 탔고, 그 아들 전수(田守)는 그 법을 전한 것이 더욱 기묘하여, 그 소리는 마고(麻姑) 선녀가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듯, 그 가늘고 아름다운 소리는 듣는 사람이 싫어할 줄을 몰랐다.전수는 또 당비파도 잘 타서 도선길(都善吉)과 함께 이름이 있었다. 선비나 서인(庶人)이 음악을 배울 때는 반드시 먼저 비파를 배웠다. 그러나 여러 사람 중에 뛰어난 자가 없었고, 오직 김신번(金臣蕃)만이 도선길의 지법(指法)을 모두 터득하였는데, 호방(豪放)한 점은 오히려 뛰어났다. 맹인(盲人) 이반(李班)은 현금을 잘 탔으므로 세종의 은총을 입어 금중(禁中)에 출입하였으며, 김자려(金自麗)는 금(琴) 연주를 잘하였다. 악공 김대정(金大丁)ㆍ이마지(李亇知)ㆍ권미(權美)ㆍ장춘(張春)은 모두 같은 시대의 사람인데, 그때 논평하는 이들이, “대정(大丁)의 간엄(簡嚴)함과 마지의 요초(要抄)는 각각 그 궁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였다.그런데 대정은 일찍 주살(誅殺)되고, 장춘과 권미는 모두 평범하였으나, 오직 이마지를 사림(士林)들이 매우 중하게 여겨 성현(成俔)ㆍ안침(安琛)ㆍ채수(蔡壽) 등이 일찍이 가서 배웠으며, 마지가 죽은 후에 그 음악이 세상에 성행하여 지금 사대부 집의 여복(女僕)들도 역시 능한 자가 있다. 또 전악 김복근(金福根)과 악공 정옥경(鄭玉京)이 제일 명수였고, 기생 상림춘(上林春) 역시 근사하였다.가야금은 황귀존(黃貴存)과 김복산(金卜山)이 잘 탔고, 맹인 정범(鄭凡) 역시 능하였다. 세종조에는 허오(許吾)가 있었고, 이어 이승련(李勝連)ㆍ서익성(徐益成)이 있었는데, 이승련은 세조에게 은우(恩遇)를 받아 군직(軍職)에 임명되었었고, 서익성은 일본에 갔다가 죽었다. 김소재(金小材)는 아쟁(牙箏)을 잘 타더니 역시 일본에 갔다가 죽었다. 《용재총화》
○ 음악을 하는 데는 세 가지가 있는데, 오음 십이율(五音十二律)의 근본을 알아서 쓰는 자가 있고, 음절의 완급을 알아서 악보를 만드는 자가 있고, 손에 정숙(精熟)해서 천지 조화의 오묘한 경지에 이른 자도 있다. 황효성(黃孝誠)은 능히 쓸 줄도 알고, 악보를 많이 지었으므로 세조에게 은우(恩遇)를 받아 벼슬이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으며, 지금의 박곤(朴)이란 자는 금천군(錦川君) 박강(朴薑)의 서자(庶子) 경(耕)의 아우 로서 재주가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하여 음악을 배우는 자가 그 문하로 많이 모여들었다. 《용재총화》
○ 김일손(金馹孫)이 육현금(六絃琴) 등[背]에 쓰기를, “순(舜)은 오현(五絃)이었고, 문왕(文王)은 칠현(七絃)이다.” 하였으니, 육현은 옛 제도가 아니다. 진(晉) 나라에서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내니, 왕산악(王山岳)이 이것을 가지고 손익(損益)을 가하여 육현을 만든 것을 지금까지 쓰고 있으니, 육현금이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역시 오래된 것이다. 명(銘)을 지어 이르기를,

만물은 외로운 것이 없다. 응당 짝을 만나느니라 / 物不孤當遇匹
그러나 백세(百世)를 지나도 혹은 꼭 만난다고 기필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 曠百世或難必
아아, 이 물건이 나를 놓지않았구나 / 噫此物不我失
서로 기다리지 않았건만 누구를 위해 나왔느냐/非相待爲誰出

하였다. 《해동잡기》
○ 장악원(掌樂院)에는 음률을 잘 아는 사람을 관원으로 삼았는데, 박연(朴堧)과 정침(鄭沈)은 모두 낭료(郞僚)로부터 마침내 제조(提調)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박씨(朴氏) 성 가진 관인(官人)이 있었는데, 나이 늙고 직을 잃어 《율려신서(律呂新書)》를 대충 배우고는 상소하여 악관(樂官)이 되기를 청하였더니, 조정에서 속을 모르고 임용하여 드디어 주부(主簿)를 겸하였다가 첨정(僉正)에 승진(陞進)하였다. 이 사람이 항상 사람을 대하여 오음 십이율의 찌꺼기[糟粘]를 논하니, 사람들이 모두 음악을 아는 것으로 말을 했으나 실상은 하나도 몰랐었다. 《용재총화》
○ 무릇 속악(俗樂)은 으레 진풍정(進豐呈)과 같은 내연(內宴)에 모두 주악하였는데, 쌍화점(雙花店)의 한 곡도 불가하거늘, 하물며 관음찬(觀音讚)이야 더욱 주악할 수 없는 것이다. 소위 ‘관음찬’이란 것이 어느 때부터 비롯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반드시 고려 시대에 시문에 능하고 아첨하는 자가 지었을 것이다. 구절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말이 있으며, 또 그 전편(全篇)의 뜻도 오로지 불도(佛道)를 찬송한 것인데, 지금까지 몇 해가 되어도 이를 논하여 폐지해 버리는 이가 없으니, 탄식할 일이다. 《패관잡기》
○ 악원(樂院)에 보존되어 있는 네 개의 거문고에 써 있는 것을 보면, 하나는 ‘정대(靜對)’라 하였고, 하나는 ‘풍요옥패(風搖玉珮)’라 하였고, 하나는 ‘구소명패(九霄鳴珮)’라 하였으며, 또 하나에는 ‘청고(淸古)’라 하는 네 구(句)로 된 금명(琴銘)이 있고, 송 나라 황제가 서명한 글자가 있다. 또 ‘복고전(復古殿)’이란 세 글자를 새긴 어필로 된 옥새가 찍혀 있는데, 복고전은 소흥부(紹興府)에 있는 것으로 고종(高宗)이 세운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이 거문고는 휘종이 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고종이 선제(先帝)가 고려를 후대한 뜻을 본받아 특별히 준 것이 아닌가 한다.
○ 신라 옛 기록에 이르기를, “처음에 진(晉) 나라 사람의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냈는데, 고구려 사람이 비록 그것이 악기인 줄은 알았으나 그 성음(聲音)과 타는 법을 알지 못하여, ‘본국 사람으로서 능히 탈 줄 아는 자는 상을 후하게 주겠다’고 널리 구하였더니, 이때에 제 이상(第二相) 왕산악(王山嶽)이 그 본래의 모양을 그대로 두고서 자못 그 법제를 조금 바꾸어 만들고, 겸하여 악곡 백여 곡을 지어 탄주(彈奏)하였다.이때 현학(玄鶴)이 날아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드디어 ‘현학금(玄鶴琴)’이라 이름하였는데, 뒤에는 다만 ‘현금(玄琴)’이라고 불렀다. 신라 사람 옥보고(玉寶高)는 지리산(智異山)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서 거문고를 학습한 지 50년에 스스로 신조(新調) 30곡을 지었다.
○ 가야금은 신라 옛 기록에 이르기를, “가야국(伽倻國) 가실왕(嘉實王)이 당 나라의 악기를 보고 제조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여러 나라의 방언(方言)이 각각 다른데, 성음(聲音)이 어찌 같을 수 있느냐.’ 하고, 곧 악사(樂師) 우륵(于勒)에게 명하여 12곡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나라가 장차 어지럽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악기를 가지고 신라 진흥왕(眞興王)에게 투항하였더니,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간신(諫臣)들이 아뢰기를, ‘가야국의 나라를 망친 음악은 취할 것이 못 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가야국의 왕이 음란하여 자멸(自滅)한 것인데, 음악이 무슨 죄냐.’고 하였다.” 한다.
○ 태조 3년 갑술에 서북면(西北面) 도절제사(都節制使) 최영지(崔永沚)가 보낸 가족을 이끌고 항복해 온 사람 1명이 퉁소를 잘 불었다. 말하기를, “이것은 ‘태평소(太平簫)’이다.” 하였다. 태평소는 본래 군중(軍中)에서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정대업(定大業)의 악에 겸해 쓰고 있다.
○ 처용놀이[處容戲]는 신라 헌강왕(憲康王)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한 신인(神人)이 바다 가운데로부터 개운포(開雲浦)에 나타나서 왕도(王都 경주)로 들어왔는데, 그 사람됨이 기이하고 쾌활하였으며, 노래와 춤을 잘하였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시(詩)에 이른바,

자개 이빨 붉은 얼굴로 달밤에 노래하고 / 貝齒頳顏歌夜月
솔개 어깨 자줏빛 소매는 봄바람에 춤을 추네 / 鳶肩紫袖舞春風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처용놀이는 처음에는 한 사람이 검은 도포에 사모를 쓰고 춤을 추었는데, 그 후에 와서는 오방 처용(五方處容)이 있었다. 세종이 그 율동을 따라 가사를 고쳐 지어 이름하기를, ‘봉황취(鳳凰吹)’라 하였는데, 드디어 묘정(廟廷)의 정악(正樂)으로 삼았다. 세조가 드디어 그 제도를 보태어 크게 음악을 벌이고 연주하였는데, 처음에는 승도(僧徒)들이 염불을 하면, 여러 기생이 영산회불보살(靈山會佛菩薩)을 합창하면서 바깥 뜰로부터 사방에서 둥그렇게 원을 지으며 들어가면, 악공과 광대가 각각 악기를 잡고 있고, 한 쌍의 학으로 된 사람과 처용(處容) 5명과 가면을 쓴 10명이 모두 따라가며 소리를 낮추어 천천히 ‘봉황취’를 세 번 부르고 들어가서 자리에 나아간다.이에 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큰북[大鼓]을 치면 악공ㆍ광대ㆍ기생이 몸을 흔들며 발을 움직이다가 조금 후에 파한다. 이리하여 연화대놀이[蓮花臺戱]가 시작되는데, 이보다 먼저 향산(香山)과 지당(池塘)을 설치해 놓고 둘레에 채색꽃[彩花]을 꽂아 놓는데, 높이는 한 길[一丈]이 넘으며, 좌우에 역시 그림 그린 등롱[畫燈籠]이 있어 거기에 달린 꽃술[流蘇]이 그 사이로 어른거리며 비친다.못[池] 앞의 동ㆍ서에 큰 연꽃 봉우리를 설치하여 두고, 작은 기생이 그 가운데로 들어가면 보허자(步虛子)의 곡조를 주악한다. 쌍학이 곡조에 따라 왔다갔다 하며 날개를 펴고 춤을 추면서 연꽃을 부리로 쪼면, 작은 기생 2명이 연꽃 봉우리를 헤치고 나와서 혹은 서로 맞보기도 하고 혹은 서로 등지기도 하면서 뛰며 춤을 추는데, 이것을 ‘동동(動動)’이라 이른다.이에 이르러 쌍학이 물러가고 처용이 들어온다. 처음에 만기(縵機)를 연주하면 처용이 열을 지어 서서 때때로 소매를 꾸부리며 춤을 춘다. 다음에 중기(中機)를 연주하면 처용 5명이 각각 오방(五方)으로 나누어 서서 소매를 펄럭이며 춤을 추고, 다음에 촉기(促機)를 연주하고, 계속하여 신방곡(神房曲)을 연주하면 너울너울 어지럽게 춤을 추고, 끝으로 북전(北殿)을 연주하면 처용이 물러나서 제자리에 나란히 선다.이리하여 기생 한 사람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陁佛)’을 부르면, 여러 사람이 따라 화창(和唱)하고, 또 관음찬을 부르는데, 세 번, 네 번 돌고 그친다. 항상 섣달 그믐날 밤이면 새벽녘에 창경ㆍ창덕 두 궁전 뜰에 들어가서 창경궁에는 기악(妓樂)을 쓰고, 창덕궁에는 가동(歌童)을 써서, 날이 새도록 주악하며, 악공ㆍ광대ㆍ기생에게는 포물(布物)을 각각 내리어 주었다. 이는 모든 사기(邪氣)를 물리치기 위함이었다. 《용재총화》
○ 보(補)ㆍ삼국의 악부(樂府) : 백제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였는데, 나라가 멸망한 후에 곧 흩어져 잃어버렸으며, 고구려는 당 나라 무후(武后) 때에 이르기까지도 20곡이 남아 있었다. 신라는 삼죽(三竹)ㆍ삼현(三絃)이 1천 4백 51곡이며, 향악은 회소(會蘇)ㆍ신숙(辛熟)ㆍ돌아지아(突阿枝兒)ㆍ사뇌(詞惱)ㆍ우식(憂息)ㆍ미지(美知)ㆍ도령가(都領歌)ㆍ날현인(捺絃引) 등 여러 곡이 또한 많았는데, 이는 모두 태상시(太常寺)의 기록뿐이고,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여암고(旅菴藁)》


 

[주D-001]초례(醮禮) : 아들이 장가갈 때에 아버지가 술 한 잔을 부어 주며 훈계하고, 딸이 시집갈 때는 어머니가 술 한 잔을 부어 주며 훈계한다.

 

 

우륵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하다 ( 551년 03월(음) )

三月王巡守次娘城校勘 024 及其弟子尼文知音樂特喚之王駐河臨宮令奏其樂二人各製新歌奏之先是加耶嘉悉王製十二弦琴以象十二月之律乃命于勒製其曲及其國亂操樂器投我其樂名加耶琴

 

 

 

卷第四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   眞興王  >   十三年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도록 하다(552년 (음))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도록 하다 ( 552년 (음) )

十三年王命階古 校勘 025 萬德三人學樂於于勒 于勒量其人之所能敎階古以琴敎法知以歌敎萬德以舞業成王命奏之曰與前娘城之音無異厚賞焉

 

 

 

 

卷第四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   진흥왕(眞興王)  >   十二年春三月 우륵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하다(551년 3월 (음))

우륵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하다 ( 551년 03월(음) )

3월에 왕이 순행(巡幸)을 하다가 낭성(娘城) 118 에 이르러서 우륵(于勒) 119 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 120 이 음악을 잘한다는 것을 듣고 [그들을] 특별히 불렀다. 왕이 하림궁(河臨宮) 121 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는데, 두 사람이 각각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이보다 앞서 가야국(加耶國)의 가실왕(嘉悉王)이 12줄 현금(弦琴)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12달의 음률을 본뜬 것이다. 122 이에 우륵에게 명하여 곡을 만들게 하였는데,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우륵은] 악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귀의하였다. 그 악기의 이름은가야금(加耶琴)이다.

註 118
지금의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114쪽 주 91) 참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15, 청주목(淸州牧) 건치연혁조 에 의하면 이곳은 본래 백제의 상당현(上黨縣)이었는데, 낭성(娘城) 또는 낭자곡(娘子谷)이라고도 하였다고 기록되었다.
註 119
대가야(大加耶)의 성열현(省熱縣) 사람이며, 가실왕(嘉實王)의 명으로 가야금 12곡을 지었는데, 그 명칭이 《삼국사기》권32, 잡지(雜志)1 악(樂)조 에 전하고 있다. 대가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귀화하여 진흥왕으로부터 환대를 받고 국원경(國原京)에 머무르면서 계고(階古) 등에게 가야의 음악을 전수하였다.
註 120
우륵(于勒)의 제자로 ‘이문(泥文)’이라고도 하였다. 그가 지었다는 곡조 3곡의 명칭이 《삼국사기》권32, 잡지(雜志)1 악(樂)조 에 전하고 있다.
註 121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 남한강 가에 있었던 별궁(別宮)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가야금의 2가지 조율(調律) 중에 하림조(河臨調)는 551년(진흥왕 12)에 하림궁에서의 연주곡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115쪽).
註 122
東洋의 12음계는 1년 12달에 부는 바람에 비정한다. 즉 黃鍾은 11월(정북풍), 大呂는 12월(동북풍), 太簇는 1월(동북풍), 夾鍾은 2월(정동풍), 姑洗은 3월(동남풍), 仲呂는 4월(동남풍), 蕤賓은 5월(정남풍), 林鍾은 6월(서남풍), 夷則은 7월(서남풍), 南呂는 8월(정서풍), 無射은 9월(서북풍), 應鍾은 10월(서북풍)의 바람소리를 본떠서 만들었다.

신라고기에서 이르는 우륵의 신라 귀화

후에 우륵(于勒)이 그 나라가 어지러워져 악기를 가지고 신라 진흥왕(眞興王) 228 에게 귀부하였다. 왕이 받아들여서 국원(國原) 229 에 편안히 두었다.

註 228
신라 24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540~576년이다. 본명은 삼맥종(彡麥宗), 혹은 심맥부(深麥夫)라고도 한다. 법흥왕(法興王) 의 동생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 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김씨(金氏)이다. 비(妃)는 사도부인(思道夫人) 박씨(朴氏). 7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즉위 초에는 왕태후(王太后)인 법흥왕비(法興王妃) 가 섭정하였다. 진흥왕 은 즉위 후부터 불교를 받들었고, 말년에 이르러는 삭발한 후 승복(僧服)을 입고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칭했다. 왕비 역시 출가하였다(신라본기, 제4 진흥왕 및 역주 표영관).
註 229
지금의 충주(忠州)이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 66쪽).
주제분류
문화>예술>음악>樂人
정치>외교>인적교류>귀화
색인어
이름 : 우륵 , 진흥왕
지명 : 국원

 

 

 卷第三十二 卷第三十二 雜志 第一  >   음악[樂]  >   우륵이 지은 12곡()

우륵이 지은 12곡

우륵(于 233 勒)이 지은 12곡은 1은 하가라도(下加羅都) 234 , 2는 상가라도(上加羅都) 235 , 3은 보기(寶伎), 4는 달이(達已) 236 , 5는 사물(思勿) 237 , 6은 물혜(勿慧) 238 , 7은 하기물(下奇物) 239 , 8은 사자기(師子伎), 9는 거열(居烈) 240 , 10은 사팔혜(沙八兮) 241 , 11은 이사(爾赦) 242 12는 상기물(上奇物) 243 을 말한다.

註 233
중종간행본 《삼국사기》에서는 “干”로 나와있으나, 顯宗實錄字本《삼국사기》에서는 “于”로 나와 이를 교감하여 따랐다.
註 234
금관국(金官國)으로 지금의 김해시(金海市)이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 69쪽).
註 235
대가야국(大加耶國)으로 지금의 고령(高靈)으로 비정한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 69쪽).
註 236
지금의 전남(全南) 여수(麗水)와 돌산읍(突山邑) 일대로 비정한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 69쪽).
註 237
지금의 경남(慶南) 사천시(泗川市) 사천읍(泗川邑) 지역으로 비정한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 70쪽).
註 238
지금의 전남(全南) 광양시(光陽市) 광양읍(光陽邑) 지역으로 비정한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 70쪽).
註 239
지금의 전북(全北) 장수군(長水郡) 반암면(蟠巖面), 임실군(任實郡) 지역으로 비정한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 70쪽).
註 240
지금의 경남(慶南) 거창군(居昌郡) 지역으로 비정한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 71쪽).
註 241
지금의 경남(慶南) 합천군(陜川郡) 초계(草溪)지역으로 비정한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 71쪽).
註 242
지금의 경남(慶南) 의령군(宜寧郡) 부림(富林)지역으로 비정한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 71쪽).
註 243
지금의 전북(全北) 남원(南原)지역으로 비정한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 71쪽).

 

성호사설 제4권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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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물문(萬物門)
가야금(伽倻琴)

 


신라 진흥왕 때에 가야국왕(伽倻國王) 가실(嘉悉)이 당(唐) 나라 악부(樂部)의 쟁(箏)을 본받아 12현(絃) 거문고를 만들었는데, 이는 12개월을 상징한 것이다. 그의 악사(樂師) 우륵(于勒)은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줄 알고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투항하여 그 거문고 이름을 가야금이라 하였다.
이규보(李奎報)는, “가야금은 대개 옛날 진쟁(秦箏) 따위인데, 다만 줄[絃] 하나가 없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급취장(急就章)》 주에 상고하니, “쟁(箏)은 슬(瑟) 따위로서 본래는 12현이던 것이 지금은 13현으로 되어 있다. 이는 대개 진 나라에서 만든 것인 까닭에 이름을 진쟁(秦箏)이라 하며, 또는 진 나라 풍속이 각박하고 악독하여 부자간에 슬(瑟)을 서로 가지려고 다투는 자가 있어 각기 반절씩 쪼개어 갖게 되었던 까닭에, 그 당시 쟁이란 명칭을 붙이게 되었다. 슬이 본디 25현이었다면, 12현 혹은 13현 따위는 슬에 비해 반절밖에 되지 않는데, 쟁이란 이름은 변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로 본다면 가야금이란 것이 진쟁과 뭐 다르겠는가? 이규보는 이런 것을 상고하지 않은 듯하다.
또 한 무제 본기(漢武帝本紀)를 상고한즉, “태제(泰帝)가 소녀(素女)에게 50현의 슬을 타도록 했는데, 곡조가 너무 구슬펐다. 태제는 차마 들을 수 없어 금지시켰으나 금지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슬을 깨뜨려 25현으로 만들었다.” 하였으니, 태제는 바로 황제(黃帝)이다. 그런즉, 슬은 처음 50현이던 것이 그 반인 25현으로 되었고, 또 그 반인 〈13현의〉 쟁으로 되었으니, 쟁과 가야금이란 처음부터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이의산(李義山)의 시에,


하였으니, 옛날 슬도 일찍이 없어지지 않았다. 다만 명칭을 금슬로 바꾸어 구별했을 뿐이었다.


 

[주C-001]가야금(伽倻琴) : 《類選》 卷5下 人事篇 器用門. 《芝峯》 卷18 技藝部 音樂.
[주D-001]〈급취장(急就章)〉 : 〈급취편(急就篇)〉을 말함, 원문은 즉 한 나라 사유(史游)가 찬하고, 주는 당 나라 안사고(顔師古)가 달았는데, 물명(物名)ㆍ인명(人名) 따위가 수록되었음.
[주D-002]소녀(素女) : 선녀(仙女)와 같음. 《회남자(淮南子)》에 의하면 황제(黃帝) 때 술수 부리던 여자라 함.
[주D-003]황제(黃帝) :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
[주D-004]이의산(李義山) : 의산은 당 나라 이상은(李商隱)의 호.
[주D-005]금슬은 무단히 오십 현으로 되었구나 : 이 시구는 금슬시(琴瑟詩)로서 “一絃一柱思華年”의 대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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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악부(海東樂府)

 

낭성곡〔娘城曲〕

 


진흥왕(眞興王) 12년(551)에 임금이 낭성(娘城)에 갔다.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을 하림궁(河臨宮)으로 불러 만나 보고,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두 사람이 각각 하림조(河臨調)와 눈죽조(嫩竹調) 두 가지 곡조를 지어서 연주하였다. 곡조가 모두 185곡이었다.
이전에 가야국(伽倻國)의 가실왕(嘉悉王)이 중국 악기(樂器)의 쟁(箏)을 본떠 12현(絃) 금(琴)을 만들었는데, 열두 달을 형상한 것이다. 이에, 여러 나라의 방언(方言)이 각기 달라 성음(聲音)을 통일하기 어렵다고 하여, 악사(樂師) 우륵에게 명하여 12곡을 만들게 하였다. 뒤에 우륵 등이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투항하니, 왕이 그들을 국원(國原)에 두었다.
왕이 법지(法知), 계고(階古), 만덕(萬德) 등에게 명하여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이 그들이 재능에 따라, 계고에게는 금(琴)을 가르치고 법지에게는 노래〔歌〕를 가르치고 만덕에게는 춤〔舞〕을 가르쳤다. 학업이 완성되자 그것을 연주하게 하니, 왕이 말하기를 “전에 낭성에서 들었던 것과 다름이 없다.” 하고, 이에 후하게 상을 주었다.
세 사람이 12곡을 전수받고 나서, 서로 말하기를 “이 음악은 번다하고 음란하여 단아(端雅)하지 못하다.” 하고는, 드디어 줄여서 5곡으로 만들었다. 우륵이 처음에는 노여워했다가, 음악을 들어 보고는 마침내 찬탄하기를 “즐거우면서도 지나치지 않고 애절하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樂而不流 哀而不悲〕 정악(正樂)이라 할 만하다.” 하고, 드디어 그것을 연주하니, 임금이 매우 기뻐하였다.
간언(諫言)하는 자가 말하기를 “망한 나라 가야의 음악은 취할 것이 못 됩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가야 왕이 음란하여 스스로 멸망한 것이니, 음악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대개 성인(聖人)이 음악을 만든 것은 인정(人情)을 따라서 절주(節奏)를 삼은 것이다.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 것과 어지러워지는 것은 음악의 곡조 때문이 아니다.” 하였다. 드디어 그 음악을 사용하고, 그 금(琴)을 가야금(伽倻琴)이라고 이름 지었다.

가야금 열두 줄 / 伽倻琴十二絃
두 줄에 기러기발 그 소리 아름답네 / 二絃柱柱聲宛轉
우륵 악사 연주 솜씨 천지 기운 담아내니 / 于勒師發天和
많은 퉁소 함께 울고 구름 환히 걷혔다네 / 衆籟齊鳴雲倏捲
우는 곤충 우는 새가 시름에 젖었더니 / 啾蛩冤鳥正愁絶
우조 각조 그 소리가 맑은 소리로 변하였네 / 拂羽動角新聲變
전에 순행하며 옛 음악 찾던 일 회상하니 / 憶曾巡遊訪古樂
아름다운 음향이 하림 궁전에 울렸었지 / 匀韶響徹河臨殿
낭성의 옛 음악이 문득 귀에 들어오니 / 娘城舊譜忽傾耳
기쁜 안색 봄날처럼 군왕 얼굴에 가득했네 / 喜色春入君王面
노래하고 춤을 추며 각각 솜씨 발휘하니 / 歌喉舞袖各獻巧
법주로 함께 취하는 궁궐의 잔치 자리 / 法酒共醉金宮宴
맑아라 호파가 바닷가에서 신곡을 연주하듯 / 淸如瓠巴臨海動新操
물결 속에서 고무되어 어룡이 나타나고
/ 波間鼓舞魚龍見
아득히 구령의 신선이 봉황 타고 지나가듯 / 杳如緱嶺仙子騎鳳過
삼청의 옥피리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오네 / 三淸玉簫來風便
오호라, 가야금 소리 끊이지 않아서 / 嗚呼伽倻琴聲不盡
오늘날까지 향악으로 우리나라에 퍼져 있네 / 至今鄕樂東華徧


[주B-001]해동악부(海東樂府) : 악부(樂府)는 중국 한(漢)나라 때에 각 지역의 음악을 채집하여 정리하는 관서(官署) 명칭이었는데, 나중에는 채집된 음악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시대가 흐르면서 악곡(樂曲)은 분리되고 가사(歌詞)만 남아 시(詩)의 형태로 변화하였다. 해동(海東)은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니, 해동악부는 우리나라의 역사나 문물을 소재로 사용한 악부를 말한다. 특히 성호의 해동악부와 같이 역사 사실을 소재로 사용한 악부를 영사악부(詠史樂府)라고 한다.
[주D-001]진흥왕(眞興王) : 신라 제24대 임금이다. 법흥왕의 아우인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이다.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국경 지방을 순수(巡狩)하고 순수비(巡狩碑)를 세웠으며 거칠부(居柒夫)를 시켜 국사(國史)를 편찬케 하였다.
[주D-002]낭성(娘城) : 《동사강목》 제3상 진흥왕 12년 조에는 “지금의 청주부(淸州府)이다.”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청주목(淸州牧)〉에는 그 옛 군명(郡名)으로 실려 있다.
[주D-003]우륵(于勒) : 가야국 가실왕(嘉悉王) 때의 가야의 악사(樂師)로, 진흥왕 때에 신라로 투항하였다. 현재의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 지역에 있던 성열현(省熱縣) 사람이다. 가실왕은 기록에 따라 실(悉)과 실(實) 두 가지로 쓰이는데, 대가야의 하지왕(荷知王)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주D-004]12곡 : 우륵이 지었다는 12곡은 《삼국사기》 권32 〈잡지(雜志) 악(樂)〉에 그 이름이 실려 있다.
[주D-005]국원(國原) : 충주의 옛 이름이다.
[주D-006]즐거우면서도 …… 않으니 : 《논어》 〈팔일(八佾)〉에 공자가 《시경》의 〈관저(關雎)〉를 평론하여 “즐거워하되 넘치지 않고 슬퍼하되 손상하게 하지 않는다.〔樂而不淫 哀而不傷〕”라고 한 말이 실려 있다. 대개 즐거움과 슬픔이 중도(中道)를 넘지 않았다는 뜻이다.
[주D-007]천지 기운 : 당나라 원결(元結)의 악부시 〈천사음(賤士吟)〉에 “남풍이 천화를 발하니 화기가 천하에 흐르네. 만물을 피어나게 할 수 있지만 나그네 수심은 달래지 못하네.〔南風發天和 和氣天下流 能使萬物榮 不能變羈愁〕” 하였다. 천화(天和)는 천지자연의 조화로운 기운을 뜻한다.
[주D-008]많은 …… 울고 : 《장자》 〈제물론(齊物論)〉에 안성자유(顔成子游)가 남곽자기(南郭子綦)에게 “지뢰(地籟)는 뭇 구멍들〔衆竅〕이 이것이고, 인뢰(人籟)는 비죽(比竹)이 이것입니다. 감히 천뢰(天籟)를 여쭙니다.”라고 묻는 말이 나온다. 뇌(籟)는 퉁소인데, 바람이 통과할 때에 소리를 내는 모든 것을 말한다.
[주D-009]우조(羽調) …… 소리가 : 원문의 불우동각(拂羽動角)은 곤충이 날개를 비벼 소리를 내고 새들이 부리로 노래를 부른다는 뜻이다.
[주D-010]아름다운 음향 : 원문의 균소(勻韶)는, 균(勻)은 균(鈞)으로 천상(天上)의 음악인 균천광악(鈞天廣樂)이며, 소(韶)는 순 임금의 음악 이름이다. 여기서는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연주한 가야금 소리를 가리킨다. 균(鈞)이 선조(宣祖)의 휘이므로 균(勻)으로 피휘한 것이다.
[주D-011]궁궐 : 원문의 금궁(金宮)은 금으로 만든 궁궐인데, 후대에는 임금의 궁궐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사기》 권28 〈봉선서(封禪書)〉에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 세 신산(神山)이 발해 바다에 있는데, 그곳에 신인(神人)이 살고 선약(仙藥)이 있다. 그곳에는 새와 짐승들이 모두 흰색이고 금은(金銀)으로 궁궐을 만들었다.” 하였다.
[주D-012]맑아라 …… 나타나고 : 호파(瓠巴)는 고대에 슬(瑟)을 잘 타던 사람이다. 《순자(荀子)》 권1 〈권학(勸學)〉에 “옛날에 호파가 슬을 연주하니 물고기가 물속에서 나와서 들었고, 백아(伯牙)가 금(琴)을 연주하니 육마(六馬)가 머리를 들고 들으면서 꼴을 먹었다.” 하였으며,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호파가 금을 연주하니 새가 춤을 추고 물고기가 뛰었다.” 하였다.
[주D-013]구령(緱嶺)의 …… 지나가듯 : 《열선전(列仙傳)》 권상 〈왕자교(王子喬)〉에 “왕자교는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太子) 진(晉)이다. 생황〔笙〕을 잘 불어 봉황의 울음소리를 내면서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지역을 노닐었는데, 도사(道士) 부구공(浮丘公)이 그를 데리고 숭산(嵩山)으로 들어갔다. 30년이 지난 뒤에 신선이 되어 백학(白鶴)을 타고 7월 7일에 구지산(緱氏山) 정상에 날아왔다가 갔다.” 하였다.
[주D-014]삼청(三淸) : 도교(道敎)에서 말하는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 세 청경(淸境)을 가리키기도 하고, 그곳을 맡아 다스리는 신선 옥청경(玉淸境)의 원시천존(元始天尊), 상청경의 영보천존(靈寶天尊), 태청경의 도덕천존(道德天尊)을 가리키기도 한다. 후세에는 선경(仙境)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眞興王十二年。王如娘城。召見于勒及其弟子尼文于河臨宮。令奏其樂。二人各制河臨嫰竹二調奏之。調共一百八十五曲。先是伽倻國王嘉悉。法唐樂部箏而製十二絃琴。以象十二月。乃以諸國方言各異。聲音難一。命樂師于勒造十二曲。後于勒等知國將亂。攜樂器來投。王置之國原。王命法知,階古,萬德等學樂於于勒。于勒因其材敎階古以琴。法知以歌。萬德以舞。業198_163c成奏之。王曰與前娘城無異。乃厚賞焉。三人旣傳十二曲。相謂曰此樂繁淫不雅。遂約爲五曲。于勒始聞而怒。及聽終歎曰。樂而不流。哀而不悲。可謂正也已。遂奏之。王大悅。諫者言伽倻亡國之音不足取也。王曰伽倻王淫亂自滅。於樂何有。蓋聖人制樂。緣人情以爲節。國之理亂。不由音調。遂用之。名其琴曰伽倻。
伽倻琴十二絃。二絃柱柱聲宛轉。于勒師發天和。衆籟齊鳴雲倏捲。啾蛩寃鳥正愁絶。拂羽動角新聲變。憶曾廵遊訪古樂。匀韶響徹河臨殿。娘城舊譜忽傾耳。喜色春入君王面。歌喉舞袖各獻巧。法酒共醉金宮宴。淸如瓠巴臨海動新操。波間鼓舞魚龍見。杳如緱嶺仙子騎鳳過。三淸玉簫來風便。嗚呼伽倻琴聲不盡。至今鄕樂東華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