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 의령공 휘 충성 ,지성 등/휘 계성 관련기록

상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유생 최계성(崔繼成) 등 3인을

아베베1 2010. 1. 5. 16:07

중종 13년 무인(1518,정덕 13)  9월15일 (임자)

 

 

사정전에 나아가 유생 최계성 등 3인을 강하고 정광필 등에게 《대학》을 강론하게 하다


상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유생 최계성(崔繼成) 등 3인을 강(講)하고, 이어서 입시 재상(入侍宰相) 정광필 등에게 《대학(大學)》을 강론하게 하였다. 정광필이,
“여기서 말한 ‘남의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 남의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물고, 남의 아버지가 되어서는 자(慈)에 머물고, 남의 자식이 되어서는 효(孝)에 머물고, 나라 사람과 사귐에는 신(信)에 머문다.’ 등의 말은 사람들이 보통으로 하는 말인데, 임금에게만 반드시 ‘인(仁)’이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는 부제학 조광조를 지목하며, “부제학 등이 자세히 말하시오.”
하니, 조광조가 아뢰기를,
“남의 임금이 되어서 인에 머문다는 것은 임금 혼자만이 하는 것이요 다른 사람은 인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이란 천지(天地)가 만물을 낳는 이치로서 끊임없이 낳고 낳아서 가장 긴절한 것입니다. 임금은 천하에 임금 노릇하고 일국을 다스리므로 인덕(仁德)을 체득하여 만물이 각각 그 본성을 얻게 한 뒤에라야 천지에 동참(同參)할 수가 있습니다. 인(仁)은 사덕(四德)을 모두 다 포함하고 있으므로 인도(仁道)를 다 실행하게 되면 예(禮)·의(義)·지(智) 세 가지는 자연 그 속에 다 있게 됩니다.”   하고, 김정은,
“천지의 대덕(大德)을 ‘낳는 것[生]’ 이라 하는데, 인은 낳는 이치이므로 천지의 큼과 만물의 번성함도 다 인에 포함되었습니다. 임금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려서 하늘과 다름이 없으므로 인이 큰 것입니다.”
하고, 이계맹은,
“인도(仁道)가 지극히 크니, 인(仁)을 행하면 절로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신용개가,
“임금은 형벌하고 죽이는 일이 있는데도 인(仁)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하니, 조광조가,
“인도(仁道)를 다하게 되면 부당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임금은 인에만 힘쓰고 다른 것은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지공 지정(至公至正)하고 광명 정대(光明正大)하여 사의(私意)가 털끝만큼도 없으면 힘을 쓰지 않고도 일마다 다 이치에 합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저 하늘은 봄에는 만물을 내고 여름에는 만물을 자라게 하고 가을에는 만물을 거두어들이고 겨울에는 만물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천리(天理)와 절문(節文)은 인(仁)과 예(禮)이고, 재제(裁制)하고 계교(計較)하는 것은 의(義)와 지(智)이나, 지극한 곳에 이르러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하고, 고형산은,
“임금의 도는 만물을 내는 것을 주재하므로 ‘인에 머물렀다.’ 한 것이며, 또 각각 한 가지 일을 들어서 문왕(文王)의 덕을 아름답게 여긴 것이요, 임금이 홀로 인(仁)을 행할 뿐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고, 이계맹은,
성인(聖人)이 말하기를 ‘내가 인을 좋아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하였고, 또 ‘성(聖)과 인은 내가 어찌 감히 당하랴!’ 하였으며, 안자(顔子)는 아성(亞聖)이었으되 석 달 뒤에도 인에 어그러짐이 없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도(仁道)는 지극히 커서 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조광조는
“순일한 도리가 심원(深遠)하여 조금도 끊임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 털끝만한 사욕(私慾)이 있어 천도(天道)처럼 쉬지 않게 된다면 안자(顔子)라도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고 이계맹은,
“사람마다 다 ‘안자는 아성(亞聖)이었는데도 끊임없이 행하지 못하였으니 우리가 어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끝내 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조광조는,
“나에게 관계되는 일을 참으로 하고자 한다면 본연(本然)의 이치가 처음부터 부족한 것이 아닌데, 어찌 하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안당이,
“《대학》에서는 인(仁)만 말하였는데, 사마광(司馬光)이 또 명(明)·무(武) 2자를 덧붙인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조광조가,
“이 말은 지(智)·인(仁)·용(勇) 삼달덕(三達德)의 말과 같습니다. 대개 이미 인(仁)하였더라도 사리의 당부(當否)를 변석(辨析)하지 못하면 임금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밝게 살피는 것이요, 이미 밝았더라도 쓰고 버릴 때에 과단하게 하지 못하면 또한 임금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용감하게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마공(司馬公)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하고, 신용개는,
“인도(仁道)가 순일(純一)한 천리(天理)에 이르게 되면 더할 나위가 없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유약한 데에 빠지기 쉬우므로 반드시 인(仁)과 무(武)가 서로 도와 나가야 폐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온공(溫公)이 인을 말하면서 명(明)과 무(武)를 아울러 말한 것입니다.”
하고, 이유청은,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송 진종(宋眞宗)은 인유(仁柔)는 넉넉하였으나 강단(剛斷)은 부족하였다.’ 하였으니, 반드시 인(仁)·명(明)·무(武) 세 가지가 구비한 뒤에야 가합니다. 한 장제(漢章帝)의 우유부단하고 자혜(慈惠)한 것을 인(仁)이라 할 수 없고, 한 선제(漢宣帝)의 명실(名實)을 따져서 밝힌 것을 명(明)이라 할 수 없고, 한 무제(漢武帝)의 전쟁을 남용하여 무덕(武德)을 손상한 것을 무(武)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고, 김정은,
“합하여 말하면 다 인(仁)의 일로서, 인을 행하는 데 명(明)과 무(武)를 갖추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천도(天道)로써 말하면, 봄에는 생장(生長)하고 가을에는 숙살(肅殺)하니, 숙살하는 것은 곧 굳게 응결(凝結)하는 것으로 이것 역시 기르는 마지막 일입니다.”
하고, 조광조는,
“실과로 비유하면 알이 찬 뒤에 씨앗이 생겨서 후일에 다시 나니, 이것이 이른바 ‘끊임없이 낳고 낳는다.’는 뜻입니다.”
하였다. 신용개가,
“《대학》에서 인(仁)을 말하되, 평천하장(平天下章)에 이르러 혈구(絜矩)를 논하면서 그 뜻을 다하였으니, 혈구는 곧 인(仁)의 공용(功用)입니까, 공효(功効)입니까?”
하니, 김정은,
“혈구는 곧 서(恕)이니, 서가 익숙해지면 곧 인이 됩니다. 《대학》은 학자(學者)의 일을 주로 말하므로 인을 말하고서 또 혈구를 말하였습니다. 성인의 전체(全體)는 다만 인뿐이요,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은 학자의 일로서 한 발자국, 반 걸음으로 이를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서를 행함이 있어야 안에 이르게 됩니다.”
하고, 조광조는,
“위에 있는 이가 늙은이를 늙은이로 대접하면 백성이 효도하는 기풍이 일어나며, 위에 있는 이가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면 백성이 공손하는 기풍이 일어나니, 혈구(絜矩)의 도리를 다하면 일마다 물건마다 각각 그 적의함을 얻어서 인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아! 계속 밝혀 공경하여 머무신다.[於緝熙敬止]의 경(敬) 한 자는 한 편(篇)의 주의(主意)입니다.”
하고, 김정은,
“이 경(敬)자는 인(仁)·경(敬)·효(孝)·자(慈)·신(信) 다섯 가지의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조광조가,
“그 자세한 것을 들을 수 있습니까?”
하니, 김정이,
“경(敬)은 위로 천리와 아래로 인사에 관통하는 공부이니, 초학(初學)으로부터 ‘중(中)과 화(和)를 이루어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생장하는 것[中和位育]’과 ‘독실히 공손하매 천하가 태평해지는 일[篤恭而天下平之事]’에 이르기까지 다 경(敬) 한 자에서 나왔습니다.”
하였다. 조광조가,
“무슨 말입니까?”
하니, 김정이,
“경(敬)자의 뜻은 모두 자기 혼자만을 삼가는[謹獨] 데 있습니다. 비록 은미(隱微)하고 혼자 있을 때라도 방심(放心)을 거두어들여서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조금도 사심이 없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조광조가,
“나의 기(氣)가 정숙(整肅)하면 자연 전일을 주력하여 마음이 다른 데로 가지 않아서, 사물(事物)이 닥치면 응접함이 정세(精細)하고 마땅히 한 가지 말과 한 가지 행동도 모두 예에 알맞게 됩니다. 보통 사람을 기가 흐려서 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못합니다.”
하고, 김정이,
“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은 다 경(敬)에서 나오므로,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전일하면 온갖 이치가 밝게 갖추어지며, 움직이는 곳에만 보일 뿐 아니라 조용한 속에서도 스스로 공경하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적연(寂然)히 움직이지 않는 중에도 마른 나무나 죽은 재와는 같지 않고 마음에 주장하는 바가 있어서, 보고 듣지 않더라도 보고 듣는 이치는 다 갖추어졌습니다.”
하였다. 이유청(李惟淸)이,
“‘아, 계속 밝혀 고경하여 머문다[於緝熙敬止]’는 경(敬)이 ‘남의 신하가 되어서는 경에 머문다[爲人臣止於敬]’는 경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하니, 김정이,
“‘공경하여 머문다[敬止]’는 경은 대강(大綱)이고 ‘경에 머문다[止於敬]’는 경은 소목(小目)입니다. 대개 음식이나 은미(隱微)한 속에서도 부끄러운 일이 하나도 없으면 바깥에 나타나는 것이 광명 정대해지며, 조정에서의 일도 모두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경을 독실히 하면 천하가 태평해진다.’ 한 것이고, 하룻동안 마음에 공경을 다하면 천하가 곧 태평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는 까닭의 이치는 진실로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하고, 신용개는,
“잠깐 사이에라도 마음이 혹 흐트러지면 사욕(私慾)이 끼어듭니다. 처음에 조금 잘못되면 마침내는 매우 심하게 잘못되므로 선유(先儒)가 경(敬)으로써 성학(聖學)의 시종을 이루는 것으로 삼았습니다. 비록 성인이라도 이 경(敬)이 없으면 그 마음을 전일하게 하지 못합니다.”
하고, 조광조는,
“경(敬) 한 자는 말로 형용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항상 분명하여 게으르고 해이한 때가 없고, 전일을 주력하여 다른 데로 가지 않으며,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엄정하게 하는 것은 곧 마음이 흐리거나 게을러지지 않는 공부입니다.”
하고, 김정은,
“마음이 감촉해도 움직이고 감촉하지 않아도 움직이는 것은 마음의 출입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움직여도 경(敬)을 지키는 것은 오히려 할 수 있지만, 적연히 조용하게 있을 때에는 마음이 정착하는 바가 없어서 경을 지키는 공부가 어려우므로 선유(先儒)들도 흔히 흐트러지고 그른 마음이 끼어든 것입니다.”
하였다. 조원기(趙元紀)가,
‘왕은 경(敬)으로 처소를 삼으소서[王敬作所]’의 경(敬)과 위에서 말한 경(敬)의 뜻이 같습니까?”
하니, 조광조가,
“같습니다. 이 편은 임금의 일을 주로 말한 것입니다. 임금은 천하와 일국을 주재하므로 능히 공경으로 임하면 천하가 공경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권벌(權橃)이,
“인도(仁道)는 지극히 크니, 하늘에 있어서는 원(元)이 되어 만물을 생장하게 하고, 사람에 있어서는 인(仁)이 되어 만물로 하여금 그 본성대로 성취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임금의 도는 인(仁)보다 더 큰 것이 없으므로 《대학》에서 ‘남의 임금이 되어서는 인에 머문다.’ 하였으며, 선유(先儒)가 인(仁)의 뜻을 해석하기를 ‘사욕이 없고 천리(天理)에 합치한다.’ 하였습니다. 지금 좌우의 신하에게 인도를 강론하게 하니 매우 아름다운 뜻입니다. 그러나 말할 적에만 강론하고 시행하는 데에는 나타나지 않으면 이는 인정(仁政)을 행한다는 소문뿐입니다. 전하께서 아랫사람을 인애(仁愛)하는 마음이 지극하다고 하겠으나, 신은 사정에 치우친 마음이 죄다 버려지지 못하였다고 여깁니다.
노산군(魯山君)은 후사가 없어서 제사가 끊어지게 되었으니, 동종(同宗) 사람으로 후사를 삼아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 것이 무슨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태까지 그렇게 하지 않으시니 마음이 지공 지정(至公至正)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전에 노산군 부인 송씨(宋氏)가 상언(上言)하여 ‘노비(奴婢)를 해평군(海平君)【정미수(鄭眉壽)이다.】에게 주도록 해달라.’ 하였습니다. 해평군은 노산군에게 외친(外親)이 되는데, 자식이 없어 죽고 부인만 있습니다. 부인이 죽으면 노산군의 제사가 끊어질 것은 틀림없습니다. 옛날 성왕(聖王)이 망한 나라를 일으켜 주고 끊어진 세대(世代)를 이어준 것은 천하를 공평하게 하는 마음입니다. 옛날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나라를 쳐서 이기고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을 봉해 주었으니, 보통 사람의 심정으로 본다면 아비를 죽이고 아들을 봉해 주는 것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동종 사람을 노산군의 후사(後嗣)로 삼아서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 것이 무슨 혐의가 있겠습니까? 지하에 계시는 조종(祖宗)의 영혼도 어두운 저승에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노산군의 일은 선왕(先王)의 후사(後嗣)를 사가(私家)에서 제사지내게 할 수 없으므로 이 일을 의논한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 결정하지 못하였다. 대신의 의견에는 어떠한가?”
하매, 정광필이 아뢰기를,
“전에 신이 이미 후사를 세울 수 없다는 뜻으로 말씀드렸습니다.”
하고, 신용개는,
“이는 매우 큰일입니다. 전일 의논할 때에 신이 이미 다 말씀드렸습니다.”
하고, 안당은,
“전일 의논할 때에 신도 남곤(南袞)과 의논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일이 대체로는 좋으니, 지금 노산군의 후사를 세우더라도 어찌 딴마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논의를 결정할 경우에는 사세가 또한 난처합니다.”
하였다.
김정국이 아뢰기를,
“인(仁)이란 마음의 덕이고 사랑의 이치인데, 마음의 덕은 인의 전체(全體)이고 사랑의 이치는 인의 한 단서입니다. 천도(天道)로써 말씀드리면 인은 곧 원(元)이고, 형(亨)과 이(利)·정(貞)이 그 속에 포함됩니다. 천도는 원에서 형, 형에서 이, 이에서 정에 이르고, 정에 이르면 다시 원이 됩니다.
임금의 덕도 인에 극진하게 되면 의(義)와 예(禮)·지(智)가 다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비근한 예로 말씀드리면 은애(恩愛)로 구휼하는 것은 인이고 형벌(刑罰)로 제재하는 것은 의입니다. 그러나 죄가 있는데도 형벌로 다스리지 않아서 다시 죄에 빠지게 하면 인도(仁道)가 따라서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허물이 있는 사람을 다스려서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여 유사(有司)에게 간범(干犯)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인입니다. 저 사마광(司馬光)이 반드시 인(仁)·명(明)·무(武) 세 가지를 말한 것은 일을 거행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의 대체는 천리(天理)가 순수하여 사욕이 털끝만큼도 없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사욕이 있으면 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국가에서 노산군과 연산군(燕山君)의 후사(後嗣)를 세우지 않은 것은 매우 공평정대한 일이 아닙니다. 당우(唐虞)와 삼대(三代)의 일은 오래되었거니와, 삼가 국초(國初)의 일을 상고해보건대 정순군 이방번(定順君李芳蕃)·소도군 이방석(昭悼君李芳碩)이 태종조(太宗朝)에 현륙(顯戮)을 당하였으나, 세종(世宗)께서 즉위하여 마음에 측은(惻隱)하게 여겨 성심(聖心)으로 결단하시어 특별히 명하여 광평대군 이여(廣平大君李璵)·춘성군 이당(春城君李璫)을 정순군과 소도군의 후사로 삼으셨는데, 어찌 노산군의 후사 세우는 것에 의심하십니까? 이로써 본다면 인을 행하는 도리에 거리가 먼 것입니다.”
하고, 문근(文瑾)은 아뢰기를,
“노산군의 후사를 세우는 일은 대신과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태종께서 방석을 죽이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세종께서 아랫사람의 논의를 기다리지 않고 특별히 예조(禮曹)에 명하여 그 후사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이제 노산군의 일로써 본다면 조종(祖宗)의 뜻을 더욱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고, 권벌이 아뢰기를,
“심온(沈溫)·이방석 등은 모두 태종께 죄를 졌는데 심온의 자손은 세종조가 끝나도록 녹용(錄用)되지 못하였고, 이방석과 이방번은 즉위하신 초기에 다른 일을 할 여가가 없는데도 맨 먼저 후사를 세우게 한 것은 종성(宗姓)을 중히 여겨서입니다. 대저 천하와 국가를 위하는 이는 천하를 공도(公道)로 삼으므로 비록 삼대(三代)의 일일지라도 다 힘써 행해야 하는데, 하물며 우리 조종께서 일찍이 행하시던 것임에리까? 말할 적에만 강론하고 시행하는 데에는 나타나지 않으면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인은 사랑하는 이치이며, 선왕(先王)의 후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니, 측은하게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조광조가 아뢰기를,
“지금 아뢴 이 말이 매우 아름답고 행하기도 어렵지 않습니다. 또 권벌·문근·김정국은 망령된 사람이 아니니,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 이와 같이 아뢰겠습니까? 이 일은 지난해에 의논하였으나, 논의하는 이가 서로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하기 때문에 그 의논이 중지되었으니, 성상의 마음으로 결단하여 행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신인들 어찌 그 일의 시비를 모겠습니까만, 조종의 일이기 때문에 감히 가벼이 의논하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바야흐로 신하들이 성덕(聖德)을 믿으므로 자기의 뜻을 앞을 다투어 진달(陳達)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맑고 밝지 못하면 간사한 무리가 오히려 이 말로써 화를 꾸밀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아랫사람이 감히 반드시 행하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전하께서 만기(萬機)의 여가에 생각이 미치지 못할까 염려해서입니다. 그리고 노산군의 일은 신 등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고, 연산군은 생령(生靈)에게 해독을 끼친 임금입니다. 신 등이 그 사이에 무슨 사의(私意)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노산군의 후사를 세우는 일은 어찌 사의가 있어서 어렵게 여기는 것이겠느냐? 다만 선왕께서 행하지 않으신 것을 과인(寡人)의 대에 와서 결단하여 후사를 세움은 옳지 못한 듯하다.”
하매, 안당이 아뢰기를,
“이는 바로 소릉(昭陵)을 회복한 일과 같습니다. 예로부터 임금이 대명(大命)을 받을 적에 하늘이 주고 사람이 귀복(歸服)하니 어찌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세가 난처함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노산군의 후사를 세우은 것은 소릉을 회복하는 것과는 경중(輕重)이 다르다. 무왕(武王)의 덕으로써 비교하면 좋겠다.”
하매, 김정이 아뢰기를,
“능호(陵號)를 회복하는 것은 가벼운 듯하나 실지로는 어렵고, 후사를 세우는 것은 중한 듯하나 실지로는 쉽습니다. 그러나 망한 나라를 일으켜 주고 끊어진 세대를 이어주는 것은 제왕(帝王)의 지정 지공한 도입니다. 이제 노산군의 후사를 세운다 하더라도 현재나 후세에 누가 감히 이의(異議)가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이른바 ‘전대의 공렬(功烈)보다 더 빛난다.’ 한 것이 이 한 일의 거행에 있습니다.”
하고, 김정국이 아뢰기를,
“온공(溫公)이 인(仁)·명(明)·무(武)를 임금의 대도(大道)로 삼은 것은 끊어진 세대를 측은히 여기는 것은 인(仁)이 되고, 끊어진 세대를 이어야 함을 아는 것은 명(明)이 되기 때문인데, 상께서 다 갖추셨습니다만 결단하는 데는 무(武)로 하시지 못할 뿐입니다. 임금의 도는 이 세 가지에 벗어나지 않으니, 과연 이 세 가지에 능하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고 신용개가 아뢰기를,
“일마다 다 스스로 독단(獨斷)해서는 불가하고 여러 사람의 의논을 채택하여야 합니다.”
하고, 이계맹은 아뢰기를,
“이와 같은 일은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해서는 불가하고 위에서 결단해야 합니다.”
하고, 신용개가 아뢰기를,
“어찌 노산군의 후사를 세우는 데에 감히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다만 형세가 난처함이 있을 뿐입니다.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하고, 정광필이 아뢰기를,
“어찌 여러 차례 의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김정이 아뢰기를,
“하(夏)·은(殷)·주(周)는 시대가 다른데도 성인(聖人)이 망한 나라를 일으켜 주고 끊어진 세대를 이어준 것은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마음이 있어서입니다. 노산군 등의 일과 같은 것은 더욱 측은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전대(前代)에 죄를 당한 종실의 자손이 먼 변방에 나누어 유배(流配)되어, 천적(賤籍)에 이름이 오르고 노예(奴隷)들의 사이에서 심부름하면서 매를 맞는 고초를 면하지 못하는 사람이 흔히 있으니, 지극히 공정한 마음으로 본다면 또한 생각함직한 일입니다. 잔미(孱微)한 후손이 어찌 선조(先祖)의 일에 간여하겠습니까? 본부(本府)는 또 들으니 이 같은 사람이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하면 자못 금지하고 매질한다 하는데, 그것은 그 정상을 다 캐내어 계품(啓稟)해서 그 죄를 다스리고자 해서입니다. 조종(祖宗)의 골육(骨肉)으로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성치(聖治)에 흠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선조의 죄는 경중(輕重)이 어떠한지 모르겠으니 모름지기 사리를 헤아리고 경중을 따져서 비록 선원적(璿源籍)에는 올리지 못하더라도 천역(賤役)을 면하게 해주고, 적몰(籍沒)한 물건을 돌려주어서 그 생활을 도와주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원전】 15 집 480 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 *사상-유학(儒學) / *왕실-종친(宗親) / *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주D-001]강(講) : 강독 시험.
[주D-002]사덕(四德) : 인(仁)·의(義)·예(禮)·지(智)의 덕을 말한다. 《중용(中庸)》 30장.
[주D-003]절문(節文) : 일을 알맞게 갖추는 것.
[주D-004]성인(聖人)이 말하기를 ‘내가 인을 좋아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하였고, 또 ‘성(聖)과 인은 내가 어찌 감히 당하랴!’ : 여기서 말한 성인은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위의 말은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나오는데 덕(德)을 이루는 일이므로 보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아래 글은 《논어》 술이(述而)에 나오는데, 공자가 겸양하여 하는 말이다.
[주D-005]안자(顔子)는 아성(亞聖)이었으되 석 달 뒤에도 인에 어그러짐이 없지는 못하였습니다. : 안자는 공자의 제자로 이름은 회(回). 맹자(孟子)와 함께 아성(亞聖)으로 불린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공자가 ‘회(回)는 그 마음이 석 달을 인(仁)에 어그러지지 않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날로 한 번, 달로 한 번 이를 따름이다.’ 했다.” 하였다. 인(仁)이란 마음의 덕으로, 마음이 인에 어그러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욕이 없고 그 덕을 지닌다는 뜻이다. 주자(朱子)는 여기에 대해 “안자도 석 달 뒤에는 어그러짐이 없지는 않으나 석 달 뒤에 한결같이 어그러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도리(道理)에 있어서 오랜 뒤에 잠깐 끊어지고, 한 번 끊어졌다가는 곧 접속된다. 만약 조금도 간단이 없으면 곧 성인이니 안자가 성인에게 한 계단 미달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하였다.
[주D-006]삼달덕(三達德) : 이 말은 《중용》 20장(章)에 나온다. 달덕이란 천하 고금의 사람이 행해야 할 덕이다.
[주D-007]온공(溫公) : 사마광의 시호.
[주D-008]인(仁)을 말하되, 평천하장(平天下章)에 이르러 혈구(絜矩)를 논하면서 그 뜻을 다하였으니, : 《대학(大學)》 9장(九章)에 “한 집이 인(仁)하면 일국이 인에 흥기된다.” 하였고, 《대학(大學)》 10장(十章)에 “소위 천하를 평치함이 그 나라를 다스림에 있다 함은……이 때문에 군자는 혈구의 하는 도가 있다.” 하였는데, 이를 평천하장(平天下章)이라 한다. 혈구는 척도(尺度)에 맞추어 헤아려 아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혈구를 빌어서 비유한 것인데,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서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도덕상의 법칙, 곧 서(恕)의 도이다.
[주D-009]전체(全體) : 완전한 본체.
[주D-010]‘중(中)과 화(和)를 이루어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생장하는 것[中和位育]’과 ‘독실히 공손하매 천하가 태평해지는 일[篤恭而天下平之事]’ : ‘중(中)과 …생장하는 것[中和位育]’은 《중용(中庸)》 1장(章)에 나오는 말이고 ‘독실히 태평해지는 것[篤恭而天下平之事]’은 《중용(中庸)》 33장(章)에 나오는 말인데, 위의 것은 학문의 최고의 공효로서 성인이 해야 할 일을 말한 것이고, 아래의 것은 성인의 지극한 덕이 오묘하고 정미한 자연의 결과로서 중용의 최고의 공효를 말한 것이다. 중(中)은 내 마음의 바름이고, 화(和)는 내 기(氣)가 순함을 말한다.
[주D-011]‘왕은 경(敬)으로 처소를 삼으소서[王敬作所]’ : 《서경(書經)》 주서(周書) 소고(召誥)에 나오는데 소공(召公)이 성왕(成王)에게 고한 말이다.
[주D-012]원(元) : 사덕(四德)의 하나.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원(元)은 선(善)의 으뜸이다.” 하였는데, 그 주석에 “원(元)은 만물을 생장하는 시초이다. 천지의 덕이 이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므로 사시에 배분하면 봄이 되고, 사람에는 인(仁)이 되어 뭇 선의 으뜸이다.” 하였다. 형(亨)·이(利)·정(貞)과 함께 사덕(四德)이라 한다.
[주D-013]노산군(魯山君) : 복위되기 전 단종의 군호.
[주D-014]해평군은 노산군에게 외친(外親)이 되는데, : 해평군(海平君)은 정미수(鄭眉壽)의 봉호로 문종(文宗)의 부마(駙馬)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의 아들이다. 노산군(魯山君) 즉 단종(端宗)에게는 생질(甥姪)이 된다.
[주D-015]무경(武庚) : 이름은 녹보(祿父).
[주D-016]형(亨)과 이(利)·정(貞) : 원(元)과 함께 사덕(四德)이라 하는데, 이는 천지가 만물을 화육(化育)하는 덕이다.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형(亨)은 아름다움의 모임이고, 이(利)는 의리의 조화이고, 정은 일의 근간이다.” 하였는데, 주석에 “형은 만물을 생장하여 통달시키는 것이다……시절로는 여름이 되고 사람에게는 예(禮)가 된다. 이는 만물을 생장하여 각기 완수하는 바가 있게 하는 것이다……시절로는 가을이 되고 사람에게는 의(義)가 된다. 정(貞)은 만물을 생장하여 성취시키는 것이다……시절로는 겨울이 되고 사람에게는 지(智)가 된다.” 하였다.
[주D-017]당우(唐虞) : 요순(堯舜) 시대.
 
중종 35년 경자(1540,가정 19) 7월16일 (을사)
동반은 정3품 이상, 서반은 2품 이상에서 각각 일사를 천거하다

상이, 동반(東班)은 정3품 이상, 서반(西班)은 2품 이상에게 각각 일사(逸士)를 천거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윤은보는 진사 김사근(金思謹)을 천거하고, 좌의정 홍언필은 생원 권습(權習)을 천거하고, 좌찬성 소세양은 생원 최계성(崔繼成)과 최언충(崔彦沖)을 천거하고, 우찬성 윤인경(尹仁鏡)은 진산 남세빈(南世贇)을 천거하고, 한성부 판윤 김안국(金安國)은 생원 서경덕(徐敬德)과 유학(幼學) 유인선(柳仁善)을 천거하고, 형조 판서 유인숙은 유학 성수침(成守琛)과 진사 조성(趙晟)을 천거하고, 형조 참판 김정국(金正國)은 전 별좌(別坐) 우성훈(禹成勳)과 유학 김취성(金就成)을 천거하고, 형조 참의 채세걸(蔡世傑)은 유학 신덕응(申德應)과 진사 윤내신(尹來莘)을 천거하고, 예조 참의 이찬(李澯)은 생원 권습과 유학 성수침을 천거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유보는 생원 정세구(鄭世球)와 유학 신덕응을 천거하고, 부제학 김만균(金萬鈞)은 생원 이세명(李世嗚)과 유정(柳貞)을 천거하고, 병조 참판 신광한(申光漢)은 유학 성수침과 생원 윤우형(尹友衡)을 천거하고, 공조 참판 홍경림(洪景霖)은 진사 권습과 이충남(李沖南)을 천거하고, 병조 판서 유관(柳灌)은 생원 신백령(辛百齡)과 전 찰방 이이건(李以乾)을 천거하고, 병조 참의 박우(朴祐)는 유학 성수침과 정심(鄭深)을 천거하고, 병조 참지(參知) 이임(李霖)은 유학 성수침과 조식(曺植)을 천거하고, 대사성 이언적(李彦迪)은 유학 김취성과 조식을 천거하고, 판결사(判決事) 김수성(金遂性)은 진사 정취(鄭聚)와 경수문(慶秀文)을 천거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권벌(權橃)은 생원 금축(琴軸)과 유학 이희안(李希顔)을 천거하고, 공조 판서 윤임(尹任)은 진사 신주(申鑄)와 권지(權軹)를 천거하고, 한성부 우윤 한윤창(韓胤昌)은 충순위(忠順衛) 이공구(李公矩)를 천거하고, 좌참찬 이귀령(李龜齡)은 생원 안백증(安伯增)과 유학 성수침을 천거하고, 대사헌 남효의(南孝義)는 생원 정홍익(鄭弘翼)을 천거하고, 상호군(上護軍) 원팽조(元彭祖)는 여절 교위(勵節校尉) 이문간(李文幹)과 유학 양윤보(梁允補)를 천거하고, 예조 판서 정옥형(丁玉亨)은 유학 유인선(柳仁善)과 생원 김지손(金智孫)을 천거하고, 대사간 최보한(崔輔漢)은 생원 최여주(崔汝舟)와 진사 남세빈(南世贇)을 천거하고, 동지중추부사 남세웅(南世雄)은 진사 정기(鄭耆)를 천거하고, 상호군(上護軍) 이기(李芑)는 진사 이고(李皐)를 천거하고, 호조 판서 조계상(曺繼商)은 생원 안순(安珣)과 정기를 천거하고, 호조 참판 김섬(金銛)은 유학 남순손(南舜孫)과 윤세신(尹世愼)을 천거하고, 호조 참의 장적(張籍)은 전 직장(直長) 김대유(金大有)와 진사 양담(梁澹)을 천거하고, 상호군 방호의(方好義)는 유학 유인선과 홍덕윤(洪德潤)을 천거하고, 상호군 이현보(李賢輔)는 생원 박형(朴珩)을 천거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일사를 빠뜨리지 않고 향리에서 천거해 등용하는 것은 왕정의 중대한 일이다. 기묘년에 현량과(賢良科)를 두어서 많은 인재가 흥기하여 볼만했었는데 사림의 화가 이로 말미암아 격렬하게 일어났으니, 이는 소인들에게 분노를 많이 샀기 때문인 것이다. 이번에 일사를 천거하라고 명하여 40여 명에 이르렀으니 이 역시 매우 많다. 다만 천거를 받은 자들 모두가 참으로 자수(自守)하는 선비로서 국가에서 어진이를 구하는 아름다운 뜻에 부응할 수 있을지? 천거에 든 자가 혹은 적임자가 아니어서 물고기 눈알이 구슬에 섞였다는 의논이 있었는데, 이는 곧 마땅한 사람이 아니고 맡길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원전】 18 집 401 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 *역사-사학(史學)


[주D-001]서경덕(徐敬德) : 성리학에 밝았고 또 부모의 상에 여막(廬幕)을 지어 3년을 지내면서 능히 성효(誠孝)를 다하여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였다.
[주D-002]유인선(柳仁善) : 효도로 소문이 나서 정문(旌門)을 세웠다.
[주D-003]성수침(成守琛) : 과거에 응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다.
[주D-004]유정(柳貞) : 기묘년에 천거과(薦擧科)로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가 사화가 일어난 후 다시 과거볼 뜻이 없었고 벼슬을 구하지도 아니했다.
[주D-005]기묘년 : 1519 중종 14년.
국조보감 제20권  중종조 3 35년(경자, 1540)
 
○ 7월. 문무 2품 이상에게 명하여 유일(遺逸)의 선비를 천거하게 하였다. 좌의정 홍언필(洪彦弼)은 권습(權習)을, 좌찬성 소세양(蘇世讓)은 최계성(崔繼成)을, 판윤 김안국(金安國)은 서경덕(徐敬德)을, 형조 판서 유인숙(柳仁淑)은 성수침(成守琛)과 조성(趙晟)을, 형조 참판 김정국(金正國)은 우성훈(禹成勳)을, 병조 판서 유관(柳灌)은 신백령(辛百齡)을, 대사성 이언적(李彦迪)은 김취성(金就成)과 조식(曺植)을, 지중추부사 권벌은 금축(琴軸)을, 대사헌 남효의(南孝義)는 정홍익(鄭弘翼)을, 호조 참판 장적(張籍)은 김대유(金大有)를 천거했는데, 모두 한 시대의 인사 중에서 최대한 가려 선발한 것이었으며, 그 밖의 수십 명도 모두 이름난 선비였다. 상이 전조(銓曹)에 명하여 재능을 헤아려 관직을 제수하도록 하였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0권   전모편(典謨編)
어진 이 구하기[求賢]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진 사람을 보려고 하면서 그 도리로 하지 않으면 마치 그 사람이 들어오기를 원하면서 문을 닫아 버리는 것과 같다. 대저 의리는 길이요, 예절은 문이니, 군자(君子)만이 이 길을 밟고 이 문을 출입하는 것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대동(大東)에, ‘주도(周道)의 평탄하기가 숫돌 같으니, 그 곧기가 화살과 같도다. 군자가 밟는 바요 서민이 우러러보는 바이다.’ 하였다.” 하였다.

○ 선조조(宣祖朝)에 부제학 이이(李珥)가 경연에서 아뢰기를, “옛날에는 ‘학문(學問)’이란 명칭이 없어, 일상의 사람이 행하는 도리가 모두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할 바로서 별도로 정해진 명목이 없었으니, 군자는 오직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행할 뿐이었습니다. 후세에는 이 도리가 밝지 않아 이에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행하는 사람을 ‘학문하는 선비’로 이름하였습니다. 이 이름이 서게 되자 도리어 세상 사람들의 지목하는 바가 되어, 터럭을 불어 흠을 찾아 혹은 위선(僞善)이라 지목하여,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숨겨서 점차 학문이라는 이름을 피하도록 만들었으니, 이것이 후세의 큰 근심입니다. 임금은 모름지기 학문을 주장하여 세속에서 이러니저러니 비방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학문이란 어찌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단지 일상생활 속에서 옳은 것을 찾아 그것을 행할 뿐입니다.” 하였다.
○ 효종조(孝宗朝)에 《시경(詩經)》 백구장(白駒章)을 강론하였는데, 그 주(註)를 외우며 이르기를, “이 주는 참으로 적절하고 타당하다. 예부터 임금과 신하 사이는 뜻이 부합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한신(韓信)이 초(楚)나라 사신을 대하여 역시 ‘말하면 들어 주고 계획하면 따라 준다.’는 등의 말로 물리쳤으니, 과연 말하면 들어 주고 계획하면 따라 준다면 어진 이가 어찌 임금을 떠나려고 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 상이 보위에 오른 초기에 전 참의 김집(金集), 전 지평 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 전 자의(諮議) 권시(權諰)ㆍ이유태(李惟泰), 전 현감 최온(崔蘊)이 제일 먼저 소명(召命)을 받고 왔는데, 객지에서 겪을 음식에 대한 어려움을 염려하여 쌀과 고기를 내렸으며, 송시열과 이유태의 어머니가 늙고 또 병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쌀과 반찬 및 약물(藥物)을 보내 주도록 하였다. 그들을 부르는 데 지성스러웠던 면으로 말하자면, 올라올 때 가교(駕轎)를 탈 것을 명하였고, 그들을 추운 날씨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 주려고 초구(貂裘)를 벗어 주기까지 하였다. 장령 조극선(趙克善)이 병들었을 적에는 털옷을 내려 덮어 주고 내의(內醫)를 보내 구완하게 하였으며, 그가 죽자 호조 낭관에게 명하여 상사(喪事)를 돌보게 하고 또 날마다 중사(中使)를 보내어 감호하게 하였다. 무릇 ‘선비’라는 이름이 있는 이들을 모두 수소문하였고 그들을 등용하고서는 보살핌이 매우 넉넉하였으니, 유학을 숭상하는 성대함이 시종 한결같았다.
○ 비국(備局)이 아뢰기를, “초야에서 부름을 받은 사람으로서 경연(經筵)을 겸임하는 일은 이미 재결을 받았습니다. 파격적인 겸대가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만, 듣기에 선조조(宣祖朝) 때 유신(儒臣) 성혼(成渾)이 경연을 겸하지 않고 단지 한관(閒官)의 직함으로 경연에 입시하였다고 하니, 선조조의 예에 따라 다만 각각 본직의 직함으로 참여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 상이 언젠가 사대부들이 술을 좋아하고 노닐며 담소하는 풍조를 근심한 적이 있었는데, 이후원(李厚源)이 대답하기를, “조광조(趙光祖)가 국정을 담당하였을 적에 조심하여 행동을 고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때에도 역시 그러하였으니, 임금이 유학을 숭상하는 효험이 이와 같습니다. 지금 만약 덕이 무르익은 어진 선비가 조정에 있다면, 어찌 감히 술에 취하여 길거리를 누비고 농담과 장난으로 일을 그르치겠습니까.” 하였다.
○ 숙종조(肅宗朝)에 고상(故相) 최석정(崔錫鼎)이 차자를 올리기를, “후세의 유학자들이 또한 어찌 다 기용하기에 꼭 알맞겠습니까. 그들로 하여금 재화와 식량을 관장하게 함이 꼭 나라를 여유롭게 하려는 계책은 아니며, 무기와 병사를 다루게 함이 꼭 군사 전력을 증강하려 함은 아닙니다. 비록 그러나 경서를 담론하고 옛것을 좋아하여 명예와 조행을 갈고 닦는 선비가 조정에 많이 있으면, 관료는 공경하여 꺼리는 바가 있고 서민은 보고 본받는 바가 있어 세상 풍속이 필시 크게 무너지는 데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니, 국가에 있어 어찌 도움이 적다 말하겠습니까. 지난해 수차례 글을 올려 천거하였는데, 임용된 몇 사람은 고작 고을 원으로 나가거나 하급 관료를 담당하는 데 불과하고 사간원, 사헌부, 변방 막부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명령에 응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는 인심이 예스럽지 못하고 습속이 투박하여 조금이라도 남다른 기치를 세우면 먼저 지적하는 비판을 가하고 거듭 조정의 여러 사람이 어지럽게 제재하여 발을 붙이기가 더욱 어려우니, 그들이 거취에 대해 스스로 가볍게 하려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를테면 지난번에 서원리(徐元履), 윤순거(尹舜擧), 정양(鄭瀁) 등 여러 사람이 모두 천거로 나왔는데, 이미 나온 뒤에는 처지에 따라 직무에 이바지하고, 평범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반드시 명예로운 벼슬자리를 사양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나라를 걱정하는 자들이 반드시 ‘붕당(朋黨)’을 말하는데, 신의 생각에는 도학(道學)의 쇠퇴가 더 큰 걱정입니다. 만약 교육시키고 감화시켜 인재를 육성하여 조금이나마 이목(耳目)을 새롭게 함이 없다면, 또한 어떻게 이를 구제하겠습니까.” 하였다.
○ 선유(先儒) 김창협(金昌協)이 말하기를, “대저 우리나라가 과거(科擧)를 통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지만 유학을 더욱 중시하였으니, 위의 예우를 더한 바와 아래의 추천한 바가 항상 초야에 숨은 사람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본시 고고하게 자처하여 가벼이 세상에 나오지 않고 세상의 명망 또한 이미 막중하니, 만약 맹자(孟子)가 말한 천민(天民)의 일과 순경(荀卿)이 말한 대유(大儒)의 효험을 기대한다면 그 형세가 실로 더욱 스스로 닫아 감추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혹 강권에 못 이긴 뒤에야 나오면 또 부득불 두텁게 자임해야 할 것이니, 결과적으로 어긋나고 실망하여 어떤 일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에서는 마침내 유학자가 사람과 국가에 무익하다고 하지만, 그 근심은 바로 책임과 여망이 너무 지나친 데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 태조조(太祖朝)에 문무 양부(兩府)와 육조(六曹), 대간(臺諫)에 명하여 각각 현량(賢良)과 유일(遺逸)을 천거하게 하였다.
○ 정종조(定宗朝)에 6품 이상에게 명하여 각각 현량을 추천하게 하였다.
○ 세종조(世宗朝)에 하교하기를, “우리나라가 과거(科擧)로 선비를 선발하고 덕행(德行)으로 가려 천거하는 법이 없어서, 조급하게 다투는 풍조가 점점 이루어지고 청렴하게 사양하는 도리는 거의 사라졌으니, 이 점은 탄식할 만하다. 만약 몸가짐이 방정하여 절의가 있는 자, 마음가짐이 비분강개하여 곧은 말을 할 수 있는 자, 그리고 선비로서의 행실이 우뚝하여 본시 고을에 알려진 자, 재능이 특이하여 사람들에게 믿음을 받는 자가 있으면 제도(諸道)의 관찰사가 수소문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또 하교하기를, “정치의 요체는 사람을 얻는 데에 있으니, 벼슬이 그 직분에 맞으면 모든 일이 다 다스려진다. 자리에 있는 문무 관원들로 하여금 각각 용맹과 지혜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변방을 지킬 수 있는 자, 공정하고 총명하여 수령을 맡길 수 있는 자, 일의 조리를 분명하고 자세히 알아 번거롭고 까다로운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자를 천거하게 하라. 만약 사정(私情)을 따라 그릇되게 천거하여 탐관오리가 정치를 어지럽혀 그 피해가 민생에 미치게 되는 경우가 있으면, 법에 따라 죄를 적용하여 결코 용서함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 문종조(文宗朝)에, 동반(東班)의 시산(時散) 6품 이상, 서반(西班)의 시산 4품 이상에게, 각각 몇 사람을 천거하되 감히 사정을 따라 그릇되게 천거하는 자가 있으면 처벌하고 용서하지 않겠다고 명하였다.
○ 세조조(世祖朝)에 제도(諸道)의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산간 초야에 깊숙이 숨어 있으면서 평소에 명망이 있지만 자천(自薦)할 수 없는 자를 계수관(界首官 지방 각도의 감영이 있는 우두머리 고을)으로 하여금 천거하게 하라.” 하였다.
○ 중종조(中宗朝)에 제도(諸道)에 명하여, 유일(遺逸)을 수소문하되 만약 탁월한 자가 있으면 재능에 따라 녹용(錄用)하게 하였다. 또 태학(太學)에 명하여, 유생 중에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통하고 정치 체제를 잘 아는 자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 상이, 전조(銓曹)가 온갖 일 처리에 있어 쓸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을 근심한다는 말을 듣고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대신(大臣)이 평소에 재능 있는 사람을 많이 천거하였다면 어찌 사람이 부족하다는 한탄이 있겠는가.” 하자, 조광조(趙光祖)가 아뢰기를, “국가가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 비록 과거 시험을 중요시하지만, 대단히 어진 사람이 있다면 어찌 과거에 구애될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 조사(朝士)들이 대신(大臣)을 보려 하지 않는 이유는, 청탁하는 것으로 비칠까 봐 부끄러워하기 때문입니다. 대신이 만약 성심으로 찾는다면 어찌 인재가 없음을 근심하겠습니까. ‘좋은 사람이 없다.[無好人]’는 말은 도 있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공(周公)은 성인인데도 먹던 음식을 뱉어 내고 감던 머리를 움켜쥔 채 뛰어나갈 만큼 선비를 찾는 데에 다급하였는데, 더구나 지금의 대신이겠는가.” 하였다.
○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본도(本道) 가운데 행동이 올바르고 학식과 재능이 있는 선비 노진(盧珒), 김옹(金顒) 등 30여 인을 천거하였는데, 대부분 김종직(金宗直)과 김굉필(金宏弼)의 문인들이었으므로 사림(士林)이 흥기하였다.
○ 문무 2품 이상에게 명하여 유일(遺逸)의 선비를 천거하게 하니, 좌의정 홍언필(洪彦弼)은 권습(權習)을, 좌찬성 소세양(蘇世讓)은 최계성(崔繼成)을, 판윤 김안국(金安國)은 서경덕(徐敬德)을, 형조 판서 유인숙(柳仁淑)은 성수침(成守琛)과 조성(趙晟)을, 형조 참판 김정국(金正國)은 우성훈(禹成勳)을, 병조 판서 유관(柳灌)은 신백령(辛百齡)을, 대사성 이언적(李彦迪)은 김취성(金就成)과 조식(曺植)을, 지중추부사 권벌(權橃)은 금축(琴)을, 대사헌 남효의(南孝義)는 정홍익(鄭弘翼)을, 호조 참판 장적(張籍)은 김대유(金大有)를 천거하였는데, 모두 한 시대의 뛰어난 인물들을 선발한 것이고, 그 나머지 수십 명의 사람들 역시 이름이 알려진 선비들이었는데, 상이 전조(銓曹)에 명하여 재능에 따라 관직을 제수하게 하였다.
○ 명종조(明宗朝)에 제도(諸道)에 명하여 유일의 선비를 천거하도록 하니, 경기에서는 성수침(成守琛)과 조욱(趙昱)을 천거하고, 청홍도(淸洪道)는 성제원(成悌元)을 천거하고, 경상도에서는 조식(曺植)과 이희안(李希顔)을 천거하였는데, 마침내 6품의 직책에 바로 서용할 것을 명하였다.
○ 생원과 진사 가운데 경학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사람을 이조와 예조로 하여금 대신과 의논하여 아뢸 것을 명하였는데, 학생 이항(李恒), 전 참봉 성운(成運), 전 별좌(別座) 한수(韓修), 전 참봉 남언경(南彦經), 전 참봉 임훈(林薰), 진사 김범(金範), 이상 여섯 사람이 명에 응하자 아울러 6품의 직책에 특별히 서용하였으며, 역마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도록 하였다.
○ 선조조에 유일의 선비를 천거하도록 명하니, 경기 관찰사 윤현(尹鉉)이 성혼(成渾)을 천거함으로써 명령에 응하였다.
○ 인조조(仁祖朝)에 팔도에 명하여 향거 이선(鄕擧里選 지방의 인재를 중앙의 관리로 뽑아 올리는 제도)의 법을 거듭 밝히도록 하였으니, 이조가 아뢴 말을 따른 것이다.
○ 상이 하교하기를, “몸가짐이 방정하고 덕행이 있는 자, 의리를 탐구하고 학술이 있 는 자, 압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히 공무를 집행할 수 있는 자, 용맹과 지혜가 남보다 뛰어나서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자, 지기(志氣)와 절개가 확고하여 직간(直諫)할 수 있는 자, 세상의 사무에 통달하여 일 처리가 밝고 민첩한 자를 벼슬자리에 있는 문무 관리들로 하여금 각각 아는 바를 천거하도록 하라. 또 제도(諸道)의 감사로 하여금 수소문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문무 3품 이상이 각각 두 사람씩을 천거하였다.
○ 또 하교하기를, “하늘은 한 시대의 인재를 내어 한 시대의 쓰임에 이바지하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쇠란(衰亂)의 원인은 세상에 인재가 부족한 데에 있지 않고 다만 어진 이를 구하는 마음이 지극하지 못한 데에 있다. 어진 이는 자신을 천거할 리가 없고 군자는 쉬이 물러가는 의리가 있으니, 만약 공경대부가 추천하여 뽑고 끌어올리지 않는다면 그 어찌 공훈과 업적을 떨쳐 일으켜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겠는가. 정부(政府) 및 팔도 감사로 하여금 나의 지극한 마음을 인식하여 인재를 수소문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 숙종조(肅宗朝)에 영상 김수항(金壽恒)이, 일전에 박세채(朴世采)와 이상(李翔)이 진달한 ‘인재를 널리 찾아야 한다’는 사안에 대하여 널리 물어서 처리할 것을 요청하니, 좌상 민정중(閔鼎重)과 이조 판서 이숙(李䎘)이 아뢰기를, “종전에 별도의 천거는 단지 조사(朝士)를 시켜서 하였기 때문에 견문이 넓지 못하여 천거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정조(政曹) 역시 착실하게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만 형식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여 특별히 방백(方伯)과 주군(州郡)에 인재를 선발하여 추천하도록 신칙해서 임용한다면 인재를 얻는 길이 넓을 것입니다.” 하므로, 상이 정조(政曹)에 명하여 절목을 의정(議定)해서 시행하도록 하였다.
○ 상이 하교하기를, “인재의 묘연함이 요즘보다 심한 적이 있지 않았다. 별도로 선발하는 방법이 없을 수 없으니, 삼공(三公)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및 육경(六卿)과 삼사(三司)의 장관들로 하여금 재능과 인망이 있는 사람을 각각 세 사람씩 천거하여 녹용(錄用)의 바탕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 선조조에 고상(故相) 이준경(李浚慶)이 연중(筵中)에서 아뢰기를, “오직 대신(大臣)만이 사람을 천거할 수 있고 사람을 임용하는 방법에는 또 순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백인걸(白仁傑)이 감히 관례를 뛰어넘어 사람을 천거하여 6품에 특별 제수하였고, 천거된 사람은 또 인망에 맞지 않으므로 일이 매우 부당합니다.” 하니, 유성룡(柳成龍)이 나아가서 아뢰기를, “천거된 사람이 만약 수상(首相)의 말대로라면 진실로 취하기에 부족하지만, 수상의 말도 병폐가 있음을 면하지 못합니다. 가령 백인걸이 과연 어진 이로서 이미 재상의 반열에 있다면 어찌 감히 천거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만약 반드시 대신이 추천하여 이끌기를 기다린 뒤에 임용한다면, 초야의 어진 이가 누락되었다는 한탄이 필시 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하였다. 물러 나온 뒤에 이준경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유 아무개가 나의 실수를 지적하여 의논한 것은 그 말이 매우 옳다.” 하였다.
○ 인조조에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선조조에 재신(宰臣) 노수신(盧守愼)이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을 천거하였으니, 역시 사람을 알아보았다고 이를 만하다. 큰 재목은 평범한 곳에서 나오지 않은 적이 없으니, 만약 단지 재주와 모양이 똑똑하고 민첩한 사람만을 취한다면 어떻게 사업을 이룩하겠는가.” 하였다.
○ 대제학 정경세(鄭經世)가 경연에서 아뢰기를, “이항복(李恒福)이 선조조에 이순신을 애써 천거하였고 정충신(鄭忠信)을 발탁하였으며, 기타 재능에 따라 임용한 사람도 대부분 이항복이 좌우에서 찬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의논하는 자들이 임진왜란을 극복한 공로를 평가함에 있어 이항복을 으뜸으로 추대하였습니다.” 하였다.
○ 숙종조에 고상(故相)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기를, “재능이 있는 사람은 난세를 만나면 장수로서의 역할을 잘하고 치세를 만나면 정승으로서의 역할을 잘하여 상황에 따라 하지 못하는 것이 없지만, 만약 때를 만나지 못하면 단지 보통 사람일 뿐입니다. 선조조의 인재들을 예로 들면, 이항복, 이덕형(李德馨), 이원익(李元翼), 윤두수(尹斗壽), 유성룡 같은 여러 신하들의 경우 평시에는 단지 글이나 잘 짓고 이름만 화려할 뿐이었으니, 어떤 사람이 ‘이들이 난리를 평정하고 중흥의 위업을 세울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나라 사람들이 모두 옳게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큰 공로를 세우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 재주와 위업이 한(漢)나라의 등우(鄧禹)와 마원(馬援)보다 못하지 않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순신의 경우는 본래 보잘것없는 말단이었고 권율은 본시 명망이 없었으니, 만약 때를 만나지 못하여 미관말직으로 늙어 죽었다면 사람들은 그들이 불세출의 재주를 품고 있었는지 알지 못한 채 지금은 사라진 지 오래일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늙어 죽는 사람들 가운데 또 어찌 몇 명의 권율이나 이순신과 같은 인재가 있는 줄 알겠습니까. 신은 또 생각건대, 비록 그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직책으로 시험해 보지 않으면 또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 고상 이원익(李元翼)이 차자를 올리기를, “편안히 물러나 스스로를 지키는 사람은 향곡(鄕曲)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더욱 조정의 사이에서 찾아야 합니다. 대체로 조정에 벼슬하는 선비는 그 마음에 간직한 세리 염치(勢利廉恥)가 서로 경중(輕重)이 됩니다. 세리가 경하면 염치가 중하니, 행하여 부합하지 않는 점이 있으면 구차스럽게 용납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주D-001]말하면 …… 따라 준다 : 한신(韓信)이 한왕(漢王) 유방(劉邦)을 도와 초군(楚軍)을 대파한 공로로 제왕(齊王)에 봉해지자, 그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낀 초왕(楚王) 항우(項羽)가 무섭(武涉)을 사자로 보내어, 옛날에 자신을 섬겼던 친분도 있고 하니 한(漢)을 버리고 자신을 따라 천하를 삼분(三分)하자고 제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신이, 옛날에 자기가 항우의 밑에 있을 적에는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지만 지금 유방의 밑에서는 자신의 능력에 맞는 충분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강하게 피력하여, 그 제의를 거절하면서 한 말이다.
[주D-002]맹자(孟子)가 …… 효험 : 맹자가 신하의 부류를 논하면서, 출세하여 자기의 도(道)를 온 천하에 행할 수 있으면 나가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이름 없이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사람을 천민(天民)이라고 지칭하였고, 순자(荀子)가 말하기를, “대유(大儒)는 아무리 궁하게 살더라도 왕공(王公)이 그와 명성을 다투지 못하고, 대부(大夫)의 지위에 있으면 한 나라가 그를 독차지하지 못하며, 백 리의 땅을 다스리면 천 리를 가진 나라가 그와 승부를 다투지 못한다. 현달하면 천하를 통일시키고 곤궁하면 홀로 그 이름을 귀하게 하니, 중니(仲尼)와 자궁(子弓)이 이런 사람이다.” 하였다.《孟子 盡心上》 《荀子 儒效》
 
保晩齋集卷第九 達城徐命膺君受著  雜著  崔繼成
崔繼成字紹先。全州人也。國家當中廟初載。慕齋金安國。倡學于前。靜菴趙光祖。行道於後。故士多作興。敦實行黜虛騖。而嶺湖尤號彬彬。若其一門之內233_251d父子兄弟步武牽聯。則全州崔氏是已。崔氏。高麗侍中文成公阿之後。至霮始仕我朝。爲修文殿直提學。霮生匡之。集賢殿提學。匡之生生明。京市殿直。以學行載名輿地勝覽。生明生秀孫。擧進士不仕。號固窮堂。又以學行配食文貞公金坵廟。秀孫生弼成及繼成。又以孝友卓異。朝廷旌其閭。載名三綱行實。人比之大連少連。二人者之才與行同矣。而趙光祖薦弼成曰。奉母至孝。才兼文武。於繼成則不及者。繼成時尙少也。未幾。己卯禍作。繼成幼有異質。家庭之間。旣得師友。又以戊午賢良。成仲淹爲外從兄。相追逐講233_252a劘。故雖負經濟之志。甘晦迹終老。一擧進士不復仕。所居甕泉。扁其室曰處庵。以見志。探討經籍。尤長於易。遠方士有欲來學者。亦不拒也。由是戶屨常滿。其學一以孝弟爲本。其尤著稱塗人耳目者。母病乳癰。醫言蝮虵爪可已也。時方隆冬。繼成求而得之。卒乃效。妹壻宋自啓死於疫。繼成躬自殯殮。家育其女如己出。他皆類此。故子孫親法。亦各興於孝弟。繼成以弘治戊申生。壽六十九。嘉靖丙辰終。葬扶安席洞山。四男。曰河,曰溫,曰活曰沫。活奉事。沫正郞。河與溫嘗同行過恩津之沙橋。溫墜水。河救之不能得。遂幷溺233_252b水中。初。思庵朴淳與繼成相友善。至是爲解衣殮二人屍。哭之以詩曰。昔聞父子淵。今見兄弟川。孝友元無異。芳名萬古傳。繼成所著述。經亂無徵。獨其流風餘韻。尙留在一鄕。一鄕章甫相議腏享于淸溪祠。先是。弼成已配食于固窮云。
外史氏曰。大夫而動國人易。匹夫而動鄕人難。何則。大夫有位以表望之。有業以宣昭之。動固其勢也。匹夫則不然。人相忘於其鄕。如魚之相忘於江湖。非有實德實行弸于中彪于外。則夫孰有樂趨而仰之哉。當時之人。樂趨而仰之且難矣。况能於數百年之後。233_252c咨嗟嚮慕而尸祝之哉。珠璧沉海。漁人不能知。而百世之下。得其光輝。如在几案之上。繼成之謂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