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 의령공 휘 충성 ,지성 등/휘 계성 관련기록

고궁당 휘 계성관련 자료

아베베1 2014. 6. 29. 20:44

 

 
 保晩齋集卷第九 達城徐命膺君受著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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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雜著
崔繼成傳 


崔繼成字紹先。全州人也。國家當中廟初載。慕齋金安國。倡學于前。靜菴趙光祖。行道於後。故士多作興。敦實行黜虛騖。而嶺湖尤號彬彬。若其一門之內233_251d父子兄弟步武牽聯。則全州崔氏是已。崔氏。高麗侍中文成公阿之後。至霮始仕我朝。爲修文殿直提學。霮生匡之。集賢殿提學。匡之生生明。京市殿直。以學行載名輿地勝覽。生明生秀孫。擧進士不仕。號固窮堂。又以學行配食文貞公金坵廟。秀孫生弼成及繼成。又以孝友卓異。朝廷旌其閭。載名三綱行實。人比之大連少連。二人者之才與行同矣。而趙光祖薦弼成曰。奉母至孝。才兼文武。於繼成則不及者。繼成時尙少也。未幾。己卯禍作。繼成幼有異質。家庭之間。旣得師友。又以戊午賢良。成仲淹爲外從兄。相追逐講233_252a劘。故雖負經濟之志。甘晦迹終老。一擧進士不復仕。所居甕泉。扁其室曰處庵。以見志。探討經籍。尤長於易。遠方士有欲來學者。亦不拒也。由是戶屨常滿。其學一以孝弟爲本。其尤著稱塗人耳目者。母病乳癰。醫言蝮虵爪可已也。時方隆冬。繼成求而得之。卒乃效。妹壻宋自啓死於疫。繼成躬自殯殮。家育其女如己出。他皆類此。故子孫親法。亦各興於孝弟。繼成以弘治戊申生。壽六十九。嘉靖丙辰終。葬扶安席洞山。四男。曰河,曰溫,曰活曰沫。活奉事。沫正郞。河與溫嘗同行過恩津之沙橋。溫墜水。河救之不能得。遂幷溺233_252b水中。初。思庵朴淳與繼成相友善。至是爲解衣殮二人屍。哭之以詩曰。昔聞父子淵。今見兄弟川。孝友元無異。芳名萬古傳。繼成所著述。經亂無徵。獨其流風餘韻。尙留在一鄕。一鄕章甫相議腏享于淸溪祠。先是。弼成已配食于固窮云。
外史氏曰。大夫而動國人易。匹夫而動鄕人難。何則。大夫有位以表望之。有業以宣昭之。動固其勢也。匹夫則不然。人相忘於其鄕。如魚之相忘於江湖。非有實德實行弸于中彪于外。則夫孰有樂趨而仰之哉。當時之人。樂趨而仰之且難矣。况能於數百年之後。233_252c咨嗟嚮慕而尸祝之哉。珠璧沉海。漁人不能知。而百世之下。得其光輝。如在几案之上。繼成之謂也。
 
기묘록 속집(己卯錄續集)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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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과시 천거인

별과시(別科時)에 천거한 사람들로 서울 밖에서 천거된 사람은 모두 1백 20명인데 천과(薦科)에 오른 사람은 28명이며 따로 14명이 전하는데, 나머지 78명은 아마도 그 착한 행실이 아주 없어질까 두려워 똑같이 기록한 듯함.

경외관동천인


참봉 노우명(盧友明)은 본관이 함양(咸陽)으로 조행(操行)과 명망이 있었으며 학술이 있고 단정하였으며 성품이 깨끗하고 담박 고요하였다.
참봉 유맹달(柳孟達)은 본관이 임천(林川)으로 천성이 순정(淳正)하였으며 성질이 활달하고 효행이 두드러졌으며 재능이 있었다.
이상 두 참봉은 유일(遺逸)로서 벼슬을 받았다가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유학 박계효(朴繼孝)는 본관이 삼가(三嘉)로 학행과 재질이 있었고 기개와 도량이 강정했다. 예의를 다하여 상례를 모셨다.
생원 송석현(宋錫賢)은 본관이 영광(靈光)으로 마음이 투철하고 효우가 돈독하였으며 재행(才行)이 뛰어났고 재능이 있었다.
생원 임말손(林末孫)은 본관이 수원(水原)으로 조행이 있고 언행이 청렴하였으며 남을 가르치기에 부지런하였다.
생원 변벽(卞碧)은 본관이 거창(居昌)으로 학행과 기식(器識)이 있어 어버이를 섬김에 거스름이 없었다.
생원 형사보(邢士保)는 본관이 거창으로 효행과 학문이 있었다. 임오과(壬午科)에 올라 벼슬이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유학 유자방(柳子房)은 본관이 거창으로 조행과 기식이 있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우에게 믿음이 있으며 경사(經史)에 두루 통하였다.
좌랑 정경(鄭瓊)은 효행이 드러났으며 학문이 두루 통하였다. 이하는 모두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다.
판관 박찬(朴璨)은 재행과 효렴이 있었다. 이상 두 사람은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생원 이종경(李宗慶)은 학행과 기식이 있었는데, 연경(延慶)의 아우이다.
생원 신겸(愼謙)은 조행이 있었고, 여유가 있었다.
진사 정세경(鄭世卿)은 재행과 효행이 있었다. 추천으로 벼슬에 올랐다가 파직되었다.
참봉 김석홍(金錫弘)은 학행과 조행이 있었다.
진사 홍등(洪縢)은 선을 좋아하고 잘못을 반성하여 잘 고쳤으며,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일찍이 유일(遺逸)로 벼슬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생원 신광록(申匡祿)은 학행이 있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벗을 지성으로 사귀어 자상하게 인정을 다하였다.
유학 이후(李煦)는 재식이 있어 집에 있으면서 고요히 심성을 길러 옛사람의 학풍이 있었다.
진사 여희단(呂希端)은 학행과 재행이 있었다.
사부(師傅) 목희증(睦希曾)은 조행이 있었으며 성질이 질박하고 유순하였다.
진사 이문건(李文楗)은 침중(沈重) 숙성(夙成)하였으며 효우(孝友)에 돈독하였다. 충건의 아우가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承旨)에 이르렀는데, 을사년에 집안에 화를 당하여 귀양갔다가 죽었다.
사부 여희림(呂希臨)은 효심이 많았다.
진사 김안도(金安道)는 배우기를 좋아하고 검행(檢行)하였다. 영상 김령(金鈴)의 아들로 음직을 받아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진사 이백록(李百祿)은 배우기를 좋아하고 검행하였다.
진사 신명화(申命和)는 순후하고 삼가며 효행이 있었다.
생원 김인손(金麟孫)은 경학에 밝고 지조가 있었다. 후에 이름을 단(亶)이라 고치고 임오과에 올라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다.
생원 허금(許䃢)은 결백하고 조심스러웠는데 벼슬이 부사에 이르렀다.
참봉 김만억(金萬億)은 언행을 삼가고 학문을 좋아했다.
도사(都事) 홍사부(洪士俯)는 결백하고 언행을 조심하여 벼슬이 부사에 이르렀다.
참봉 김창(金琩)은 언행을 아주 조심했다.
유학 김진종(金振宗)은 향하는 바가 견실하고 확고하였다. 무자년에 급제하여 을사년에 벼슬이 전적에 이르렀다가 귀양가 죽었다.
진사 원계채(元繼蔡)는 지조가 있는데 을묘년 식년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생원 박세훈(朴世勳)은 재주와 식견이 있는데 세희(世熹)의 형이다.
군수 이은(李誾)은 지조가 있고 결백하였으며 학식이 있었다.
전 도사 이세번(李世蕃)은 학식과 지조가 있었다.
생원 이선장(李善長)은 학식과 지조가 있었다.
생원 우순필(禹舜弼)은 학행이 있었다.
전 현감 최상(崔祥)은 조행이 있었다.
진사 이세웅(李世雄)은 뜻이 돈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치부를 하지 않았다.
유학 박두남(朴斗南)은 몸가짐을 잘하여 조행이 특이하였다.
생원 송미창(宋彌昌)은 재행이 있었다.
유학 윤거신(尹居莘)은 학행이 있었다.
참봉 이광식(李光植)은 효행과 일을 잘 처리하는 국량이 있었다.
생원 박번(朴蕃)은 효행과 학술이 있었다.
유학 문준(文濬)은 뜻이 돈독하여 옛것을 좋아하였다.
유학 문회지(文繪地)는 뜻을 돈독하게 행하였다.
유학 한계유(韓繼愈)는 뜻이 돈독 견실하였으며 학문에 재능이 있었다.
유학 김인범(金仁範)은 기절(氣節)과 재능이 있었다.
유학 진건(陳騫)은 뜻이 돈독하여 옛것을 좋아하였으며 재주와 문식이 있었다.
유학 허초(許礎)는 지조가 떳떳하였으며 재기(才氣)가 있었다.
진사 허자(許磁)는 재행이 있어 계미년 알성별시(謁聖別試)에 올라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으며 을사년 위공원훈(僞功元勳)으로 삭탈되었다.
유학 김시창(金始昌)은 학행이 있었다.
생원 박훈(朴薰)은 근실하여 실행력이 있었다.
생원 이영우(李永祐)는 마음씀이 거침없었으며 뜻을 세우는 데 지조가 있었다.
유학 유여주(兪如舟)
생원 신세경(申世卿)
유학 김윤종(金尹宗)은 김식(金湜)의 문인으로 명천(明川)에 귀양갔다가 풀려 상주(尙州)의 집에서 죽었다.
유생(儒生) 서경덕(徐敬德)은 본관이 개성(開城)으로 스스로 고향으로 내려가 거처하니, 남들이 향거(鄕擧 향리에서 위로 인재를 천거함)하였다.
유학 윤환(尹瓛)은 본관이 여주(驪州)로 지절(志節)이 방정하고 효행과 학술이 있었다.
유학 정소(鄭韶)는 본관이 남양(南陽)으로 문학을 좋아하였으며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랐다.
유학 이윤문(李允文)은 본관이 충주(忠州)다.
유학 김증(金增)은 본관이 청주(淸州)다.
생원 상진(尙震)은 본관이 임천(林川)으로 기묘년 동별시(冬別試)에 올라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를 성안군(成安君)이라 추증하였다.
유학 김극양(金克讓)은 본관이 보령(保寧)으로 문음으로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는데, 좌의정 극성(克成)의 아우다.
생원 김숭종(金嵩宗)은 본관이 음성(陰城)이다.
진사 이난손(李蘭孫)은 본관이 온양(溫陽)으로 갑신년 별시에 올라 벼슬이 정랑에 이르렀다.
이상 일곱 사람은 모두 학식이 있었다.
생원 이해(李蟹)는 본관이 나주(羅州)로 재주와 덕행을 겸비하여 실천력이 독실하였으며, 경(經)에 밝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과거공부를 일삼지 않았다.
생원 박이홍(朴以洪)은 본관이 창평(昌平)으로 마음씀이 순박하고 독실하였으며,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였다.
생원 장응두(張應斗)는 본관이 장수(長水)로 효제(孝悌)ㆍ충신(忠信)이 남달리 뛰어났으며 재학(才學)을 겸비하였다.
진사 최필성(崔弼成)은 본관이 부안(扶安)으로 지극한 효도로 부모를 섬기고 문ㆍ무의 재주를 겸비하였으며 빈한하면서도 구차하게 취함이 없었다.
유학 어득한(魚得漢)은 본관이 고성(固城)으로 학식이 있었다.
진사 김응청(金應淸)은 본관이 영덕(盈德)으로 학식이 있었고 몸가짐이 성실했으며, 착한 것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고 빈곤하면서도 잘 사는 것을 도모치 않았다.
생원 김세보(金世寶)는 본관이 청도(淸道)로 거상(居喪)에는 죽을 마시었으며 또한 재예(才藝)가 있었다.
진사 김상(金湘)은 본관이 문경(聞慶)이며 말이 적었고 벼슬에 나아가 군수에 이르렀다.
진사 손계돈(孫季暾)은 본관이 경주(慶州)로 청렴하고 강직하며 학식이 있다.
진사 이인견(李仁堅)은 본관이 영천(榮川)으로 마음 가짐이 청렴하고 뜻을 이루기 위해 나아감에 구애됨이 없었으며 학식이 있었다.
생원 이정(李涏)은 본관이 인동(仁同)으로 재주와 학식이 뛰어났다.
생원 박덕손(朴德孫)은 본관이 함안(咸安)으로 문학을 좋아하고 웃어른을 공경했으며 고향에서 공순하였다.
진사 금원정(琴元貞)은 본관이 봉화(奉化)며, 수차에 걸쳐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로웠다.

미란시 인물


난리 이전 정부의 육조ㆍ대간ㆍ시종ㆍ팔도 방백은 다음과 같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좌의정
우의정 안당(安瑭)
좌찬성 최숙생(崔淑生)
우찬성
좌참찬 이자(李耔)
우참찬 이유청(李惟淸)
좌사인(左舍人) 이청(李淸)
우사인(右舍人)
검상(撿祥) 장옥(張玉)
이조 판서 신상(申鏛)
참판 윤은보(尹殷輔)
참의 정충량(鄭忠樑)
정랑 정완(鄭浣)
정옥형(丁玉亨)
이충건(李忠楗)
좌랑 구수복(具壽福)
이인(李認)
호조 판서 고형산(高荊山)
예조 판서 남곤(南袞)
병겸판(兵兼判) 이장곤(李長坤)
참판 방유녕(方有寧)
참지 성운(成雲)
형판(刑判) 김정(金淨)
공겸판(工兼判) 김령(金鈴)
한성 판윤 한세환(韓世桓)
대사성 김식(金湜)
판결사 이세정(李世貞)
도승지 유인숙(柳仁淑)
좌승지 윤자임(尹自任)
우승지 공서린(孔瑞麟)
좌부승지(左副承旨) 박세희(朴世熹)
우부승지(右副承旨) 홍언필(洪彦弼)
동부승지(同副承旨) 박훈(朴薰)
주서(注書) 이기(李芑)ㆍ안정(安珽)
대사헌(大司憲) 조광조(趙光祖)
집의(執義) 박수문(朴守紋)
장령(掌令) 김인손(金麟孫)
최산두(崔山斗)
지평(持平) 이연경(李延慶)
이희민(李希閔)
대사간(大司諫) 이성동(李成童)
사간(司諫) 유여림(兪汝林)
헌납(獻納) 송호지(宋好智)
정언(正言) 김과(金鈛)ㆍ이부(李阜)
예문제학(藝文提學)
봉교(奉敎) 채세영(蔡世榮)
조구령(趙九齡)
대교(待敎) 권예(權輗)
이공인(李公仁)
검열(檢閱) 이구(李構)
신잠(申潛)
김신동(金神童)
강은(姜㶏)
대제학(大提學) 남곤(南袞)
제학(提學) 김정(金淨)
부제학(副提學) 김구(金絿)
직제학(直提學)
전한(典翰)ㆍ정응(鄭譍)
응교(應敎) 기준(奇遵)
부응교(副應敎) 장옥(張玉)
교리(校理) 조우(趙佑)
부교리(副校理)
수찬(修撰) 권적(權磧)
부수찬(副修撰) 심달원(沈達源)
박사(博士)
저작(著作) 경세인(慶世仁)
정자(正字) 권장(權檣)
김명윤(金明胤)
감사(監司)
경기(京畿) 한효원(韓效元)
충청(忠淸) 신공제(申公濟)
전라(全羅) 김안국(金安國)
경상좌(慶尙左) 이항(李沆)
상동(上同) 문근(文瑾)
강원(江原) 김굉(金硡)
황해(黃海) 김정국(金正國)
함경(咸鏡) 손중돈(孫仲暾)
평안(平安) 허굉(許硡)
개유수(開留守)ㆍ조원기(趙元紀)

난후 인물


난 후 추죄(追罪) 때에 정부 6조(六曹)ㆍ대간(臺諫)ㆍ시종(侍從)은 다음과 같다.

영의정(領議政) 김령(金鈴)
좌의정(左議政) 남곤(南袞)
우의정(右議政) 이유청(李惟淸)
좌찬성(左贊成) 이계맹(李繼孟)
우찬성(右贊成) 장순손(張順孫)
좌참찬(左叅贊) 한세환(韓世桓)
우참찬(右叅贊)
이조 판서(吏曹判書) 심정(沈貞)곤(袞)으로 대신하다.
참판(叅判) 김근사(金謹思)
참의(叅議)
호판(戶判) 고형산(高荊山)
예판(禮判) 신상(申鏛)
병판(兵判) 권균(權鈞)
형판(刑判) 홍숙(洪淑)
공판(工判)
한판윤(漢判尹)
판결사(判決事) 이세정(李世貞)
대사성(大司成)
병참판(兵叅判) 방유녕(方有寧)
대사헌(大司憲) 이항(李沆)
집의(執義) 유관(柳灌)
장령(掌令) 서후(徐厚)
채침(蔡忱)
지평(持平) 오준(吳準) 이순(李純)으로 바꾸다.
이영부(李英符)
대사간(大司諫) 이빈(李蘋)
사간(司諫) 남세준(南世準)
헌납(獻納) 남효의(南孝義)
정언(正言) 조침(趙琛)ㆍ한승정(韓承正)
도승지(都承旨) 윤희인(尹希仁)근사(謹思)로 대신하다.
좌승지(左承旨) 박호(朴壕)
우승지(右承旨) 성운(成雲)
좌부(左副) 윤은필(尹殷弼)
우부(右副) 조옥곤(趙玉崑)
동부(同副) 김희수(金希壽)
주서(注書) 정세호(鄭世虎)
이기(李巙)
대제학수(大提學守) 이행(李荇)
제학(提學) 이항(李沆)
부제학(副提學) 이사균(李思鈞)
직제학(直提學)
전한(典翰) 이지(李遲)
응교(應敎) 유부(柳溥)
부응교(副應敎) 김영(金瑛)
교리(校理) 임추(任樞)
부교리(副校理)
수찬(修撰) 권예(權輗)
부수찬(副修撰) 손수(孫洙)ㆍ이환(李芄)
박사(博士)
저작(著作)
정자(正字)

 
부안현(扶安縣)

동쪽으로 김제군(金堤郡)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3리, 남쪽으로 고부군(古阜郡)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8리, 흥덕현(興德縣)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52리, 북쪽으로 만경현(萬頃縣)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2리, 서쪽으로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11리, 서울과의 거리는 5백 77리이다.
【건치연혁】 부령현(扶寧縣)은 본래 백제 개화현(皆火縣)이었는데, 신라 때 부령 혹 계발(戒發)이라고도 칭한다. 으로 고치어 고부군에 붙였고, 고려 때에도 그대로 붙여 두었다가 후에 감무를 두어 보안(保安)을 겸임하였다. 보안현은 본래 백제 흔량매현(欣良買縣)이었는데, 신라 때 희안(喜安)으로 고치어 고부군에 붙였고, 고려 때 보안으로 고치어 고부군에 그대로 붙여 두었다가, 후에 부령감무로 겸임하게 하였으며, 신우 때에 두 현에 각각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종 14년에 보안을 다시 부령에 합쳤고, 15년에 또 나누었다가 8월에 다시 합쳤으며, 다음해 7월에 또 나누었다가 12월에 두 현을 또 합치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익년(翌年)에 흥덕진(興德鎭)을 파하여 본현에 옮겨서 부안진(扶安鎭)이라고 부르고, 병마사(兵馬使)로써 판사(判事)를 겸하게 하였고, 세종 5년에 규례대로 고치어 첨절제사(僉節制使)로 만들었다가 후에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개화ㆍ부령(夫寧)ㆍ계발(戒發)ㆍ보안ㆍ낭주(浪州)ㆍ흔량매ㆍ희안.
【성씨】 【부령】 김ㆍ장(張)ㆍ황(黃)ㆍ이(李)ㆍ신(辛), 심(沈). 내성(來姓)이다. 보안 한(韓)ㆍ송(宋)ㆍ황(黃)ㆍ호(扈)ㆍ안(安)ㆍ임(林)ㆍ임(任). 고촌 호(扈).
【풍속】 풍속은 단자(蜑子 중국 남방 해변가에서 생활하는 종족)와 같다. 이규보의 시에, “습속은 남방 단자와 많이 같으니 현으로 된 것이 잠총국(蠶叢國)으로부터 시작된 줄 어느 누가 믿으랴.” 하였다.
【형승】 변산천부(邊山天府) 이규보의 시에, “변산(邊山)은 예로부터 천부(天府)로 불리면서, 긴 재목 잘 뽑아 동량(棟樑) 재목에 대비하네.” 하였다. 강산청승(江山淸勝) 앞 사람의 시에, “강과 산의 맑고 좋음은 영주(瀛洲)ㆍ봉래(蓬萊)와 겨룰 만하니, 옥을 세우고 은을 녹인 듯 만고에 변하지 않는다.” 하였다.
【산천】 변산 보안현에 있다. 지금 현과의 거리는 서쪽으로 25리인데, 능가산으로도 불리고, 영주산으로도 불린다. 혹 변산(卞山) 이라고도 하는데, 말이 돌아다니다가 변(邊)으로 되었다 한다. 변한(卞韓)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 이 때문이라 하나 그런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봉우리들이 백여 리를 빙 둘러 있고 높고 큰 산이 첩첩이 싸여 있으며, 바위와 골짜기가 깊숙하여, 궁실과 배의 재목은 고려 때부터 모두 여기서 얻어 갔다. 전하는 말에는 호랑이와 표범들이 사람을 보면 곧 피하였으므로 밤길이 막히지 않았다 한다. ○ 이규보의 기에, “변산은 나라 재목의 부고(府庫 창고)이다. 소를 가릴 만한 큰 나무와 찌를 듯한 나무 줄기가 언제나 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층층의 산봉우리와 겹겹의 산등성이가 올라가고 쓰러지고 굽고 퍼져서, 그 머리와 끝의 둔 곳과 밑 뿌리와 옆구리의 닿은 곳이 몇 리나 되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옆으로 큰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하였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우강(禺强 신의 이름이다. 《장자(莊子)》에 우강을 얻어 북극(北極)을 세웠다 함.)이 힘써 옮긴 뜻 상상하니, 까마득한 몇 만년 땅의 주축(主軸)을 누르기 위함일세. 성루[譙樓]는 바로 높은 푯말[標]과 맞섰고, 바다는 이내 짙은 안개 걷혀 시원하다. 울창한 좋은 재목 일천 봉우리에 모였고, 소담한 보찰(寶刹 큰절)은 뭇 마귀(魔鬼)들도 알고 있네. 산 가운데 몇 개의 황망한 일은, 춘경(春卿 이규보의 자)의 백 마디 시 끌어 냄일세.” 하였다. 행안산(幸安山)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석불산(石佛山)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바다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동진(東津) 통진(通津)이라고도 한다. 벽골제(碧骨堤)와 눌제(訥堤)의 물이 합해져 북쪽으로 흘러 이 나루가 된다. 현의 동쪽 16리에 있다. 사포(沙浦)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장신포(長信浦)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유포(柳浦) 현의 남쪽 50리에 있다. 덕달포(德達浦)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굴포(堀浦)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구도(鳩島) 현의 서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둘레가 20리이다. 위도(蝟島) 현의 서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둘레가 30리이며, 어량(魚梁 살을 매어 고기를 잡는 장치)이 있다. ○ 설문우(薛文遇)가 시어(侍御) 최함일(崔咸一)이 위도로 귀양가는 것을 전송한 시에, “곧은 절개라야 참 오부(烏府 어사대)인데, 변변찮은 내 재주로 치관(豸冠 어사)을 더럽혔네. 수놓은 비단같은 재주야 어찌 같으랴만 배 속에 들어 있는 보배 서로 쏟았었네. 성대(盛代)에서 보탠 것은 비록 없지만, 동료들은 모두 다 높이 보았네. 임금을 착하게 하려는 마음 버리지 못해, 나라 걱정에 두 귀밑털 헛되이 쇠는구나. 간사한 무리들은 장우(張禹) 따위가 많은데, 서로 알아주는 비간(比干) 같은 이는 너무 적다. 이 때에 갈라져서 그대는 가고 나는 머무르니, 어느 곳에서 평안함을 물을 것인가. 시루는 깨어졌는데 누가 애석해 하나. 하늘은 높아도 듣기는 어렵지 않다네. 용천(龍泉)은 도리어 옛 옥터로 돌아갔는데, 위도(蝟島)는 이 새 벼슬이로다. 두 곳에는 외로이 둥근 달 떴는데, 조각배엔 한 낚싯대로다. 다시 만날 날이 있을 터이니, 잘 가서 먹는 것 조심하게나.” 하였다. 계화도(界火島) 현의 서쪽 30리에 있는데, 조수가 물러나면 육지와 연결된다. 우진암(禹陳巖) 변산 꼭대기에 있다. 바위가 둥글면서 높고 크며 멀리서 보면 눈빛이다. 바위 밑에 3개의 굴이 있는데, 굴마다 중이 살고 있으며, 바위 위는 평탄하여 올라가 바라볼 수 있다.
【토산】 조기[石首魚]ㆍ오징어[鳥賊魚]ㆍ청어ㆍ은어[銀口魚]ㆍ홍어(洪魚)ㆍ준치[眞魚]ㆍ웅어[葦魚]ㆍ붕어[鯽魚]ㆍ숭어[秀魚]ㆍ갈치[刀魚]ㆍ새우ㆍ조개[蛤]ㆍ게[蟹]ㆍ굴[石花]ㆍ송이[松蕈]ㆍ모시[苧]ㆍ죽전(竹箭) 도이곶(都邇串) 및 모든 섬에서 난다. ㆍ사기그릇(磁器). 『신증』 사슴.
【성곽】 읍성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1백 88척, 높이가 15척이요, 안에 샘물이 12개 있으며, 동쪽 서쪽 남쪽 3면에 모두 성문다락[譙樓]을 세웠다. 『신증』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6천 4백 58척, 높이가 15척이요, 안에 샘물이 16개 있다. ○ 김종직의 시에, “천길 산봉우리 누관(樓觀)이 기이하여 억지로 쇠약하고 피로한 몸 이끌고 높은 곳에 의지했네. 금을 녹여 낸 듯한 해는 군산도(群山島)에 떨어지고, 흰 것을 묶어 세운 듯한 연기는 벽골피(碧骨陂)에 비꼈어라. 몸이 반 공중에 있으니, 눈 가는 곳이 멀고, 시는 일만 형상 더듬자니 술잔 놓기 더디구나. 능가산은 예로부터 천부(天府 하늘이 마련한 창고)로 불렸는데, 오늘날 쇠잔한 용모 대할 줄 어찌 기약했으랴.” 하였다.
【관방】 금모포영(黔毛浦營) 현의 남쪽 51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인.
【봉수】 월고리산 봉수(月古里山烽燧) 현의 서쪽 75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무장(茂長) 소응포산(所應浦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점방산(占方山)에 응한다. 점방산 봉수(占方山烽燧) 현의 서쪽 61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월고리에 응하고 북쪽으로 계화도(界火島)에 응한다. 계화도 봉수 북쪽으로 만경현 길관봉수에 응하고 남쪽으로 점방산에 응한다.
【누정】 취원루(聚遠樓) 곧 성의 남쪽 문루(門樓)인데, 서쪽으로 변산(邊山)을 대하고, 북쪽으로 큰 바다를 바라보며, 동쪽과 남쪽은 큰 들을 임하였다. ○ 이행(李行)의 시에, “높은 봉우리는 석보(石堡)를 이고 섰고, 상위(象緯 하늘)는 누 가운데 닿았네. 바다 위 돋은 해는 벌겋게 물결 흔들고, 구름에 잠긴 산은 푸른 것이 공중을 찌른다. 옷 가다듬고 세속 먼지 털어버리니, 탈태하여 신선 궁에 오른 듯하네. 해질 녘에 긴 수풀 아래서는, 두 겨드랑이에 신선한 바람 스며든다.” 하였다. ○ 허종(許琮)의 시에, “높은 누 바람불어 흥취가 유유한데, 해 저문 들 밖에는 말 한 필 오는구나. 아득하게 외로이 뜬 배는 어디로 가는 것이냐? 그대에게 부탁하여 같이 타고 봉래산 찾아가련다.” 하였다. 청원루(淸遠樓) 객관 동쪽에 있는데, 현감 성수겸(成守謙)이 세웠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소쇄(潚洒 산뜻하고 깨끗한 모양)함이 참으로 팔영루(八詠樓)와 같은데, 순식간에 지어진 화려한 누각 성후(成侯 성수겸을 말한다)에게 하례한다. 외딴 마을 조석(潮汐)은 시 읊는 소리에 응하고, 먼 산의 구름 안개 바라보는 속에 걷혀진다. 공무를 벗어나서 마음 놓고 술잔 잡는데, 무더위 힘 없어지니 어느덧 가을이네. 돌아가기 허락 받은 병든 손이 맑은 흥에 취하여, 바다 머리 장기(瘴氣) 속에 머물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노라.” 하였다. 김영(金瑛)의 시에, “바다 산 1천 리에 웅장한 누 있는데, 태수(太守)의 재명(才名), 곽세후(郭細侯)이네. 3월이라 들꽃은 혼연(渾然)히 떨어지려 하는데, 한 주렴의 봄 안개는 전부 걷히지 않는구나. 작은 연꽃 화장하고 처음으로 물에 뜨고, 푸른 대엔 우수수 유달리 가을 기운 모였어라. 담담한 아지랑이, 방초(芳草) 우거진 물가에서 미인(美人)들은 공연히 바라보다 몇 번이나 머리 긁었나.” 하였다. 망해대(望海臺) 변산에 있다. 『신증』 개풍루(凱風樓) 김종직의 시에, “개풍루 위 마음대로 올라와 보니, 발해(渤澥 서해) 동쪽 빈 터는 지형 더욱 깊숙하네. 낚싯대 두 길쯤 솟은 해는 불그스레 은은하고, 천 두락 맑은 못은 푸른 것이 침침하다. 거민(居民)들은 고기잡이의 이익을 다투어 찾는데, 게으른 손은 상궐(象闕 하늘같은 대궐)에만 마음이 달려 있네. 당발(棠發 감사를 말함) 2년에 무슨 일 하였나. 난간에 의지하여 그런대로 세상 마음 씼었노라.” 하였다.
【학교】 향교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역원】 부흥역(扶興驛)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동진원(東津院) 동진 언덕에 있다. 수세원(手洗院) 현의 남쪽 60리에 있다. 금설원(金設院) 현의 남쪽에 있다.
【불우】 소래사(蘇來寺) 신라의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한 것인데, 크고 작은 두 소래사가 있다. ○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옛 길은 적막하여 솔뿌리 엉겼는데, 하늘이 가까워 북두칠성 만질 수 있네. 뜬구름 흐르는 물 따라 손이 절에 이르고, 붉은 단풍 푸른 이끼 속에 중은 문을 닫았구나. 가을 바람 다소 차갑게 지는 해에 불고, 산 달 점점 맑아오니 잔나비 맑게 운다. 기이하다, 수북한 눈썹의 한 늙은 중이여, 오랜 세월 인간 세상 꿈꾸지 않았구나.” 하였다. ○ 이곡(李穀)의 시에, “높고 뛰어난 해안산(海岸山)이라 일찍 들었는데, 한가함을 틈타서 마음 놓고 등반 하였네.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 사다리가 1천 척이요, 중은 구름과 반 칸 집을 나누었다. 고요하게 있어도 아직껏 얽맨 세상 벗지 못했으니, 세상의 인연을 어찌 감히 상관할쏘냐. 푸른 산속 어느 날에나 내 머무름 용납할까, 대지팡이 짚신으로 날마다 왕래한다.” 하였다. ○ 중 원감(圓鑑)의 시에, “바닷가에 명산(名山) 있음을 옛날부터 들었더니, 다행히도 찾아가서 오랜 소원 풀었어라. 일만 골짜기의 연기와 안개는 가고 쉬는 속에 있고, 일천 겹 싸인 섬들 돌아보고 바라보는 사이에 있네. 의상암(義湘庵 절 이름) 높이 솟아 하늘이 기둥에 잇닿아 있고, 자씨당(慈氏堂 당(堂) 이름) 깊숙하여 돌이 관문(關門) 되어 있네. 세상 피해 높이 살긴 이만한 곳 없으리니, 고달픈 새 미리 알고 돌아온 것 자랑한다.” 하였다. ○ 중 선탄(禪坦)의 시에, “바위 아래 잔잔한 옥같은 시냇물, 산인(山人 산속에 사는 중을 말함)의 꿈 끊어지니 밤기운 쓸쓸하구나. 두견새도 역시 서루(西樓)의 달 좋아해서 밤이면 배꽃 핀 가지 위에서 울고 있다오.” ○ “한 평생 가는 곳마다 낮은 등잔처럼 설움 받으니, 사해의 풍진(風塵) 속에 부평처럼 붙여 사네. 5경의 산 기운 물처럼 서늘한데, 누워서 베개 위에 떨어지는 남계(南溪) 소리 듣는다.” ○ “안장한 말 타고 세상일에 바쁘다가 머리 반백(半白)되었는데, 능가(楞伽)에서 병얻어 일찍 와서 쉬었노라. 한 줄기 강 안개 비에 서산은 저무는데, 성근 주렴 길게 걷고 누에 내리지 않는구나.” 하였다. 도솔사(兜率寺) 내(內)ㆍ외(外)의 두 도솔이 있다. ○ 이곡의 시에, “산 찾는 것이 신선 찾기 위함은 본시 아니지만, 천리를 유람함이 어찌 우연이겠나. 호겁(浩劫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큰 재화(災禍))이 인연 되어 내원(內院 도솔천(兜率天)의 내부인데, 곧 미륵 보살의 처소를 말함)으로 돌아와서, 상방(上方 산 위의 절) 세계에서 모든 하늘[諸天 불교에서는 하늘이 여덟으로 되어 있는데, 그 여러 하늘은 마음을 수양하는 경계를 따라서 나뉘어 있으며, 이 여덟의 모든 하늘을 말함]에 고백한다. 학(鶴)이 와서 암두(巖頭)에 전각 일찍 지었고, 용은 가도 돌 틈의 샘물 아직 남아 있다. 심히 부끄럽다. 향산(香山) 백거사(白居士)처럼 결사(結社)를 못했는데, 머리 이미 희었구나.” 하였다. 의상암(義湘庵) 신라 중 의상(義湘)이 살던 곳이다. ○ 김극기의 시에, “기묘한 일만 겹 바위 높은 하늘에 비껴 있어, 위로 구름 끝까지 올라가니, 길 비로소 끊어졌다. 홀연히 의상대사의 여운(餘韻) 있음이 기쁘고, 하늘에 닿은 옛 잣나무 어둠 속 바람에 읊조린다.” 하였다. 청림사(淸臨寺) 중 선탄의 시에, “구름 떠돌아도 옛 산을 생각하고, 사슴은 숨어서 깊은 숲으로 돌아가네. 부귀영화는 다만 흙같은 것인데, 높고 한가함을 금주고 산 다네. 솔 바람에 학의 울음소리 들려오고, 고개 마루 뜬 달은 거문고에 가득하네. 이 뒤로는 세상의 좋은 경치 사람이 와도 찾을 곳이 없으리.” 하였다. 원효방(元曉房) 신라 때 중 원효(元曉)가 거처하던 곳인데, 방장(方丈 절의 주지가 거처하는 방)은 지금도 남아 있다. ○ 이규보의 시에, “산 따라 높은 사다리 지나고, 발 포개어 좁은 길 걷는다. 위에 백 길 산꼭대기 있는데, 효성(曉聖 원효대사의 별칭)이 일찍 방 지었도다. 신령스러운 발자취 어딘지 아득하고, 유영(遺影 화상)은 아소(鵝素 종이폭)에 남아 있구나. 다천(茶泉)은 찬 구슬처럼 고였는데, 한 웅큼 마셔보니 젖같은 단맛이라. 이 땅에 옛날에는 물이 없어서 불도들이 머무르기 어려웠더니, 원효대사 한 번 와서 머문 뒤로는 맑은 물이 바위 구멍에서 솟아 났다네. 우리 스님 그 높은 자취 이어 받아서, 짧은 갈옷 입고 여기 와 살고 있다네. 여덟 자 방을 한 번 둘러보니, 오직 한 켤레의 신발만이 남아 있도다. 옆에서 모시는 이 또한 없어서 홀로 앉아 아침저녁 보내고 있네. 소성(小性 원효대사)이 이 세상에 다시 나오신다면, 감히 허리 굽혀 절하지 않을 쏜가.” ○ “좋은 일 들은 지 오래였는데, 신령한 자취 아득해 찾을 수 없네. 깊은 곳 다람쥐는 배고파서 굴을 나오고, 외 학은 고달파서 숲에 앉는다. 탑 그림자는 그늘져 끊어지고, 종소리는 멀리 가서 잠잠하네. 언제나 묵수(墨綬 검은 인끈인데 곧 지방관을 말함) 풀고 자유 몸 되어 여기다 깊숙히 띠집 지을꼬.” 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육방성(六方聖 육방은 동ㆍ서ㆍ남ㆍ북ㆍ상ㆍ하를 말하며, 육방성은 모든 부처님을 말한다.)을 아득히 생각하니, 남긴 자취 어디서 찾으려나. 다만 들 사슴같이 돌아왔을 뿐이니, 계림(鷄林)에 간 것 무슨 흠이리. 각수(覺樹 보리수임. 부처님이 정각(正覺)을 이루던 곳을 덮었던 나무라 하여 말한 것임)에는 천가지 꽃 떨어지고, 진공(眞空)에는 달 하나 침침하구나. 아직도 남은 것은 무진장하여 산과 물이 스스로 높고 깊도다.” 하였다. 불사의방장(不思議方丈) 신라 때 중 진표(眞表)가 살던 곳인데, 1백 척 높이의 나무 사다리가 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면 곧 방장(方丈)에 이를 수 있고, 그 아래는 모두 무시무시한 골짜기이며, 쇠줄로 그 집을 잡아 당겨서 바위에 못질하였는데, 세상에서는 바다의 용이 만든 것이라 한다. ○ 이규보의 시에, “무지개 같은 사다리 발 밑에 길다랗구나. 몸을 돌려 곧장 내리면 만길이 넘는다. 지인(至人 도덕이 극치에 이른 사람)은 이미 가고 자취마저 없는데, 옛 집은 누가 붙들었기에 아직도 쓰러지지 않았나. 장육(丈六 1장 6척의 불상 이라는 뜻)은 어느 곳으로부터 나타나는고. 대천(大千) 세계는 그 가운데 감추었네. 완산(完山)에 이은(吏隱)하는 세상 일 잊은 나그네, 손 씻고 와서 한 조각 향 태운다.” 하였다. 문수사(文殊寺) 진표가 세운 것인데, 돌 부도(浮屠)가 있다. 실상사(實相寺) 이상의 불우(佛宇)는 모두 변산에 있다.
【교량】 동진교(東津橋) 동진 위에 있다. 신우(辛禑) 초년에 왜선(倭船) 50여 척이 웅연(熊淵)에 배를 대어 적현(狄峴)을 넘어서 부령현(扶寧縣)을 노략질하고, 동진교를 헐어서 우리 군사로 하여금 더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상원수(上元帥) 나세(羅世)가 변안열(邊安烈) 등과 더불어 밤에 다리를 구축하고, 군사를 나누어 적을 공격하여 마침내 크게 승리하였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고읍성(古邑城) 현의 동쪽에 있는데, 둘레가 5백 척이고, 안에 샘이 6개 있다. 보안폐현(保安廢縣)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고촌향(鼓村鄕) 현의 남쪽 27리에 있다. 신덕소(申德所)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신증』 【명환】 본조 소효식(蘇效軾)
【인물】 고려 김구(金坵) 희종조(熙宗朝)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문장이 그 당시에 으뜸이었다. 매양 표문(表文)을 짓는데, 일을 따라 문장을 꾸민 것이 모두 이치에 맞았다. 원 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왕악(王鶚)이 매양 표사(表辭)를 볼 때마다 반드시 잘 했다고 칭찬하면서 그의 얼굴 보지 못함을 한하였다. 『신증』 본조 성중엄(成重淹)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가 되었으며,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연산조(燕山朝)에 사화(史禍)를 만나 귀양갔다가 마침내 피살되었다. 지금의 임금 초년에 부제학을 추증하였다.
『신증』 【효자】 본조 송세정(宋世貞)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아버지가 종기를 앓는데, 상처를 빨아 병이 나았다. 아버지가 죽자 3년 동안 묘에 여막을 짓고 살았다. 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하더니, 병이 되어 죽었으므로 정문을 세웠다. 이성간(李成幹) 젊었을 때 어머니가 종기를 앓는데, 상처를 빠니 병이 곧 나았다. 아버지가 오랜 병이 있었는데, 몇 년 동안 밤낮으로 시약(侍藥)하고, 옷을 벗지 않았다. 병이 위태하자 똥을 맛 보았고, 죽자 3년 동안 죽을 마셨다. 문랑(文郞) 아버지가 악질(惡疾)을 앓는데, 손가락을 잘라 술에 타서 먹이니 병이 나았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최필성(崔弼成) 어머니가 유종[乳癰]을 앓는데 입으로 빠니 병이 나았다. 아버지가 오랜 병으로 백약(百藥)이 무효하고, 의사의 말은, “박쥐가 있으면 고칠 수 있다.” 하였다. 때는 추운 겨울이라 구하여도 얻지 못하여 울면서 하늘에 호소하니, 박쥐가 저절로 나오므로 잡아 약에 타서 먹였더니 병이 과연 나았다. 후에 또 병이 위태하자 똥을 맛보았고, 죽자 매우 슬퍼하며 예를 다하였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상으로 벼슬을 내렸다.【열녀】 본조 김씨(金氏) 일찍 남편을 여의었는데, 부모들이 다시 시집보내려 하자, 김씨는 다른 사람에게는 시집가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강물에 빠져 죽으려 하니, 부모들이 그만 두었다. 김씨는 한평생 흰 옷을 입고 제사를 받들며 고기를 먹지 않았다.
【제영】 입촌봉연사(入村逢燕社) 이규보의 시에, “직무를 수행하느라고 겨를이 없어, 역말 타고 평탄한 들 달려 가는데, 길가에는 꽃이 어지럽고, 뉘집인지 대나무가 동산 덮었네. 등나무는 얽히어 넘어지는 덩굴 붙들고, 괴화나무는 쓰러져 외로운 뿌리를 드러낸다. 달리는 수레는 학을 모는 듯하고, 가벼운 복장은 잔나비도 따를 만하구나. 호숫가에는 봄 안개 자욱하고, 만점(蠻店)에는 장운(瘴雲 독기가 어린 구름)이 따스하네. 이끼 살아나니 새 빛이 더해지고, 조수 사나우니 옛 흔적 지나누나. 마을로 들어오니 연사일이라 바다를 바라보며 오번(鰲番)을 묻는다. 옛 방죽은 새벽에 수문 여는데, 빈 성은 낮에도 문 닫았구나. 군의 아전은 도로에서 맞이하고, 읍 수령은 나와서 술 항아리 연다. 고달픈 것은 모두 나라일이고, 마음에 흥겨움도 또한 임금의 은혜이네. 모래 가에는 갈매기 홀로 춤추고, 숲 밖에는 새들이 조잘대누나. 늙은이들 놀라서 피하지 말라. 서생(書生)은 높은 체하지 않는다네.” 하였다. 만리장도분백마(萬里壯濤奔白馬) 앞사람의 시에, “한 봄에 이 강머리 세 번을 지났는데, 나라일이니 어찌 한 번인들 쉬지 못한 것 원망하랴. 만리의 세찬 물결 백마가 달리는 듯하고, 천년 묵은 늙은 나무 푸른 용이 누운 듯하다. 바다 바람은 불어 만촌(蠻村)의 피리와 어울리고, 모래 위 달은 갯가의 나그네 배를 맞는구나. 호위하고 가는 추동(騶童)은 응당 날 괴이하게 여기리라. 좋은 경치 만나면 오래 서서 머물렀으니.” 하였다. 고석낭용평작려(古石浪舂平作礪) 앞사람의 시에, “흐르는 물소리 속에 저녁 되고 다시 아침 되니, 바다 마을 울타리는 그리도 쓸쓸하구나. 호수가 맑으니 마음의 달은 교묘하게도 도장 찍은 듯하고, 개포 넓으니 포구로 이른 조수 마구 삼킨다. 오래된 돌 물에 잠겨 편평한 숫돌 되었고, 부서진 배 이끼에 싸여 다리 되었네. 강과 산 일만 경치 노래로 표현 다 못하겠으니, 단청하는 화필(華筆)을 청하여 묘사하리라.” 하였다. 호로혜혜음상엽(蝴蟧嘒嘒吟霜葉) 김극기의 시에, “언덕 위의 싸늘한 바람 짤막한 쑥대 굴리니, 나부껴 떠도는 것 도리어 나그네 신세와 한가지네. 매미는 맴맴 단풍잎을 노래하고, 귀뚜라미 귀뚤귀뚤 달빛을 지저귄다. 오직 눈송이[雪華]만 귀밑을 침노할 뿐, 다시는 세상의 일 가슴 속에 이르지 않네. 슬피 노래하느라 아직은 고향 꿈 이루지 못하고서, 앉아서 동헌(東軒)의 새벽 해 붉어오는 것 기다린다.” 하였다. 수학소다교목로(水鶴巢多喬木老) 이첨(李詹)의 시에, “봄 추위는 손을 속여 옷 속에 스며드는데, 들 넓고 하늘 낮아 저물도록 못 돌아가네. 물학이 많이 깃드니 높은 나무 늙었고, 현관(縣官)의 문닫으니 아전 백성 드물다.” 하였다. 계산원근누대호(溪山遠近樓臺好) 중 선탄의 시에, “산과 시내 원근에 있어 누대도 좋고, 연기 오르는 동서쪽엔 촌락(村落)이 이루어졌네.” 하였다. 설진암변애일신(雪盡巖邊愛日新) 앞사람의 시에, “바위 가엔 눈 다하여 날로 새로워지니 좋고. 금구(錦鳩) 나는 동네 밖에는 태평스러운 봄일세. 봄바람은 마치 사군(使君 원님)의 덕과 같아서, 마을이나 산중이나 한모양으로 고르구나.” 하였다. 도서미망표묘간(島嶼微茫縹緲間) 안숭선(安崇善)의시에, “멀리 푸른 바다 보고 가까이 산을 보니, 섬들은 아득한 사이에서 가물거리네. 해가 날마다 채찍으로 재촉하되 제대로 하지 못할까 두려우니, 봄바람 쉽게 불어 붉은 얼굴 늙어간다.” 하였다. 해문잔월낙한조(海門殘月落寒潮) 서거정의 시에, “하늘에는 보슬비 늦은 아침에도 내리는데, 누가 황금 빚어 버들가지 물들였나. 골짜기의 맑은 바람 먼 소리를 내는데, 해문(海門 해협(海峽))에 지는 달은 찬 조수에 떨어진다. 한 누각 고요하여 편히 잠자기에 마땅한데, 옛 나루는 쓸쓸하여 다만 누운 다리뿐일세. 가는 곳마다 강산은 시 짓기에 알맞은데, 졸필이라 끝내 묘사 못해 부끄럽구나.”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동도(東道) 끝이 5리. 서도(西道) 끝이 10리. 남상(南上) 끝이 10리. 남하(南下)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상동(上東) 끝이 10리. 하동(下東) 처음이 5리, 끝이 15리. 상서(上西)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하서(下西) 처음이 10리, 끝이 30리. 일도(一道) 북쪽으로 끝이 10리. 이도(二道)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염소(鹽所)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 소산(所山)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 건광(乾光)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 입상(立上) 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 입하(立下)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 좌산내(左山內) 서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70리. 우산내(右山內) 서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60리. ○ 고촌향(鼓村鄕)은 남쪽으로 27리이며, 신덕소는 동쪽으로 5리이다.
【성지】 우금성(禹金城) 우금암(禹金巖) 기슭에 있다. 둘레는 10리인데, 묘향사(妙香寺)가 그 안에 있다. 점모포진(點毛浦鎭) 남쪽으로 50리에 있다. 성지(城池)는 지금은 폐했고 창(倉)이 둘이다. ○ 수군만호(水軍萬戶)가 1인. 혁폐(革廢) 격포진(格浦鎭) 서쪽에 있으며 변산(邊山) 서쪽 기슭 끝 바닷가에 있다. 조수가 차면 호수를 이루고 썰물 때는 갯바닥이 된다. 인조 때에 처음으로 진(鎭)을 설치하고 별장(別將)을 두었는데, 숙종 4년 성을 쌓은 후에 감영(監營)에 속하게 하고, 제방(堤坊)을 쌓고 물을 막았는데, 헌종 9년에 폐했다. 옛 군영(軍營) 장신포(長信浦) 남쪽에 있다. 국초(國初)에 부안현에다 진을 두었을 때에 영(營)을 둔 곳이다.
【창고】 창(倉) 5 읍내에 있다. 북창(北倉) 북쪽으로 10리. 해창(海倉) 서쪽으로 30리. 사창(社倉) 남쪽으로 30리이다.
【진도】 동진(東津) 동쪽으로 15리. 김제와 전주로 통한다.
【교량】 대교(大橋) 서쪽으로 10리. 중교(中橋) 위와 같다. 장교(長橋) 남쪽으로 10리이며 동진 상류이다.
【토산】 대[竹]ㆍ옻[漆]ㆍ뽕[桑]ㆍ감ㆍ호두ㆍ잣.

[주D-001]현으로……잠총국(蠶叢國)으로부터 시작 : 유사 이전에 촉(蜀) 지방에 잠총국(蠶叢國)이 있었다 한다. 여기에서는 태고적부터 있었던 오랜 고을이라고 한 것이다.
[주D-002]간사한 무리들은……많은데 : 한(漢) 나라 사람이니, 자는 자문(子文)이다. 경서(經書)를 분명히 익혀 박사(博士)가 되었으며, 원제(元帝) 때 태자에게 《논어》를 가르쳤다. 성제(成帝)가 즉위한 뒤, 사부(師傅)의 예로 높였고, 하평(何平) 말년에 안창후(安昌侯)를 봉하였다. 병으로 물러가기를 청했는데, 나라에 큰 정사가 있으면 반드시 함께 의논하여 정하였다. 성제가 왕씨(王氏)를 의심하고 일찍이 우한테 물었는데, 자기는 늙고 자손들은 약하여, 감히 왕씨 배척하는 바른 말을 못하였다. 그랬더니 주운(朱雲)이 장우를 지목해서 아첨하는 신하라고 하였다는 고사이다.
[주D-003]고달픈……자랑한다 :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새도 고달프면 돌아갈 곳을 안다.”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주D-004]이은(吏隱) : 하급 관리로 그럭저럭 지내는 것을 이은(吏隱)이라고 한다.
[주D-005]바다를……묻는다 : 오(鼇)는 큰 자라인데, 바다에 있는 삼신산을 큰 자라 세 마리가 각각 메고 다닌다 한다. 그러므로 바다를 바라보면서 삼신산을 이고 있는 큰 자라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는 말이다.

 

○ 금산(錦山) 원님 최극성(崔克成)은 부안인(扶安人)이다. 젊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모친을 항상 즐겁게 해드렸다. 출신(出身)한 후에도 오로지 편하게 봉양하기만을 힘쓰고 벼슬길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 모친이 병이 나서,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위중하고 온갖 약이 효과가 없었다. 의원은 제비 고기를 구해서 약으로 쓴다면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 하였으나, 한창 추울 때여서 사방에 눈이 가득하였다. 앉아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엎치락뒤치락 걱정하다가, 밤중에 밖으로 나가 배회하는데, 무엇이 가슴을 치는 것이었다. 공이 급히 손으로 더듬어보니 바로 제비였다. 곧 약을 지어 먹였더니 묵은 병이 금방 나았다. 이웃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감탄하여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 하였다. 이 이야기는 최극성의 조카 최위지(崔謂之)가 전한 말이다. 어떤 사람은, 최극성의 형 최필성(崔必成)이 그 아비가 학질(瘧疾)을 앓을 적에 박쥐가 저절로 온 것을 잡아서 효험을 본 일이라고도 한다.

 송와잡설의내용중에

부안 도동서원에 부자배향

 고궁당 과 함께   

 

전라도(全羅道)

임실(任實) 구고사우(九臯祠宇) 경자년에 세웠다. : 김천일(金千鎰)ㆍ박번(朴蕃) 호는 인덕정(仁德亭), 벼슬은 교수(敎授)이다.ㆍ박훈(朴薰) 호는 수심정(收心亭), 진사이다.ㆍ홍붕(洪鵬) 호는 경재(敬齋), 벼슬은 첨정(僉正)이다. 추향되었다.ㆍ이흥순(李興淳) 호는 운암(雲巖), 사간(司諫)을 지냈다.ㆍ조평(趙平) 호는 운학(雲壑), 벼슬은 세마(洗馬)이다.
부안(扶安) 도동서원(道洞書院) 가정(嘉靖) 갑오년에 세웠다. : 김구(金坵) 고려 평장사(平章事)이다.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ㆍ김여맹(金汝孟) 구(坵)의 아들이며 문한학사(文翰學士)이다.

 최수손(崔秀孫) 호는 고궁당(固窮堂), 진사이다.ㆍ 성중엄(成重淹) 무오화적(戊午禍籍)ㆍ김석홍(金錫弘) 호는 옹천(瓮泉), 군수(郡守)를 지냈다.ㆍ홍익한(洪翼漢)ㆍ

 최필성(崔弼成) 수손(秀孫)의 아들이다.ㆍ 김계(金啓) 호는 설강(雪江), 참판을 지냈다.
파산서원(巴山書院) 계유년에 세웠는데 지금의 이름은 동림서원(東林書院)이다. : 유형원(柳馨遠) 호는 반계(磻溪)이다.ㆍ유문원(柳文遠) 호는 삼우당(三友堂), 진사이다.ㆍ김서경(金瑞慶) 호는 담계(澹溪)이다.
유천서원(柳川書院)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허진동(許震童) 호는 동상(東湘), 판관(判官)을 지냈다.ㆍ김택삼(金宅三) 호는 농암(礱岩), 벼슬은 주부(主簿)를 지냈다.
청계서원(淸溪書院) 무자년에 세웠다. : 송세정(宋世貞) 호는 도봉(道峯), 진사이다.ㆍ이승간(李承幹) 호는 석호(石湖)이다.
담양(潭陽) 의암서원(義巖書院) 만력(萬曆) 계축년에 세웠다. 숙종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 유희춘(柳希春) 을사년의 명신(名臣)이다.
귀산서원(龜山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송순(宋純)ㆍ송정순(宋廷筍) 호는 물염(勿染), 벼슬은 예조 정랑(禮曹正郞)이다.ㆍ김언욱(金彦勗) 호는 서석(瑞石), 벼슬은 사평(司評)을 지냈다.ㆍ김응회(金應會) 호는 청계(淸溪), 벼슬은 별제(別提)를 지냈다.ㆍ이안눌(李安訥)ㆍ나무춘(羅茂春) 호는 구봉(九峯),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다.ㆍ송희경(宋希璟) 호는 노송(老松)이며 벼슬은 판결사(判決事)이다.ㆍ송징(宋徵) 호는 율옹(栗翁), 진사이다.ㆍ김대기(金大器) 호는 만덕(晩德), 처사이다.
익산(益山) 남촌서원(南村書院) 천계(天啓) 계해년에 세웠다. : 이공수(李公遂) 호는 남촌(南村)이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고려 때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해졌다.ㆍ소세량(蘇世良) 호는 곤암(困庵), 대사간을 지냈다.ㆍ소세양(蘇世讓)ㆍ이약해(李若海) 명종조에 들어 있다.ㆍ소동도(蘇東道) 호는 면와(眠窩), 감사를 지냈다.ㆍ소영복(蘇永福) 호는 발영당(發永堂), 진사이다.ㆍ소광진(蘇光震) 호는 후천(后泉), 벼슬은 교리(校理)다.
전주(全州) 화산서원(華山書院) 만력(萬曆) 무인년에 세웠으며 임인년에 사액하였다. : 이언적(李彦迪)ㆍ송인수(松麟壽)
서산사우(西山祠宇) 인조 병술년에 세웠다. : 최양(崔瀁) 호는 만육(晩六), 대제학을 지냈다.ㆍ최덕지(崔德之)ㆍ송영구(宋英耈)ㆍ이계맹(李繼孟)ㆍ이흥발(李興浡)ㆍ이기발(李起浡) 호는 서귀(西龜),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인봉사우(麟峯祠宇) 숭정(崇禎) 병술년에 세웠다. : 최명룡(崔命龍) 호는 석계(石溪), 진사이다.ㆍ김동준(金東準) 호는 봉곡(鳳谷), 감찰을 지냈다.
학봉사우(鶴峯祠宇) 현종 기유년에 세웠다. : 이정란(李廷鸞)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지냈다.ㆍ신중경(申重慶) 호는 금서당(琴書堂)이다.ㆍ이상진(李尙眞) 숙종 때의 정승이다.
진도사우(珍島祠宇) : 노수신(盧守愼)ㆍ이경여(李敬輿)ㆍ정홍익(鄭弘翼)ㆍ김수항(金壽恒)ㆍ남이성(南二星) 호는 의졸(宜拙), 예조 판서를 지냈다.ㆍ신명규(申命圭) 호는 적안(適安), 집의(執義)를 지냈다.ㆍ이민서(李敏叙)ㆍ조태채(趙泰菜)
나주(羅州) 경현서원(景賢書院) 만력 계미년에 세웠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김성일(金誠一)
정렬사(旌烈祠) 만력 병오년에 세웠으며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김천일(金千鎰)ㆍ김상건(金象乾)ㆍ양산숙(梁山璹)ㆍ임회(林檜)
월정서원(月井書院) 경자년에 세웠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 박순(朴淳)
반계서원(潘溪書院) 갑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박상충(朴尙衷)ㆍ박소(朴紹)ㆍ박세채(朴世采)ㆍ박태보(朴泰輔)
미천서원(眉泉書院) 숙종 임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허목(許穆)
죽봉사우(竹峯祠宇) 갑진년에 세웠다. : 유준(柳浚) 호는 사교당(四矯堂), 벼슬은 판관(判官)이다.ㆍ유상운(柳尙運) 숙종 때의 정승이다.
송재사우(松齋祠宇) 임오년에 세웠다. : 나세찬(羅世纘)ㆍ임형수(林亨秀)
창계서원(滄溪書院) 경인년에 세웠다. : 임영(林泳)
설재서원(雪齋書院) 무진년에 세웠다. : 정가신(鄭可臣) 호는 설재(雪齋), 벼슬은 중찬(中贊)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ㆍ정식(鄭軾)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경무공(景武公)이다. 가신(可臣)의 5대손이다.ㆍ신장(申檣) 호는 암헌(巖軒)이며 숙주(叔舟)의 아버지이다.
영광사우(榮光祠宇) 숙종 임진년에 세웠다. : 이원(李黿) 무오당적(戊午黨籍)에 들어 있다.ㆍ이해(李懈) 호는 모산(茅山), 진사이다.ㆍ이영우(李永祐) 호는 야은(野隱), 진사이다.ㆍ이유경(李有慶) 호는 오풍(五楓), 사부(師傅)를 지냈고 정랑(正郞)에 증직되었다.
서하사우(西河祠宇) 숙종 갑신년에 세웠다. : 이민서(李敏叙)ㆍ이건명(李健命)ㆍ이관명(李觀命)
□□영당(□□影堂) : 오자치(吳自治) 참판을 지냈으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양평공(襄平公)이다.
장성(長城) 필암서원(筆菴書院) 만력 경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김인후(金麟厚) 인종 때의 명신(名臣)
모암서원(慕巖書院) 전조(前朝) 때 세웠는데 인조 무자년에 중수(重修)하였다. : 서능(徐稜) 고려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절의(節義)와 효도가 지극하였다.ㆍ조영규(趙英圭) 군수를 지냈다. 앞에 있다.ㆍ조정로(趙廷老) 영규(英圭)의 아들인데 별검(別檢)에 증직되었다.ㆍ최학령(崔鶴齡) 호는 율리(栗里), 진사이다.ㆍ정운룡(鄭雲龍) 호는 하곡(霞谷),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다.
봉암서원(鳳巖書院) 정축년에 세웠다. : 변이중(邊以中) 호는 망암(望庵), 벼슬은 종정(宗正)을 지냈고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변경윤(邊慶胤) 호는 자하(紫霞), 예조 정랑을 지냈으며 참의에 증직되었다.
추산서원(秋山書院) 을유년에 세웠다. : 기건(奇虔)ㆍ기효간(奇孝諫)ㆍ기정익(奇挺翼) 호는 송암(松巖), 참봉이다.
□□영당 임인년에 세웠다. : 김영렬(金英烈) 병조 참판을 지냈으며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의성군(義城君)을 봉했고 시호는 양효공(良孝公)이며, 호는 맹암(孟巖)이다.
학림서원(鶴林書院) 임진년에 세웠다. : 김영렬(金英烈)ㆍ박희중(朴熙中) 호는 위남(葦南), 벼슬은 직학(直學)을 지냈다.ㆍ김은(金穩) 호는 학천(鶴川), 벼슬은 부사(府使)를 지냈다.ㆍ김응두(金應斗) 호는 서천(逝川), 응교(應敎)를 지냈다.ㆍ박준철(朴濬哲) 호는 기양(岐陽), 진사이다.
영광(靈光) 수강서원(壽崗書院) 기묘년에 세웠다. : 송흠(宋欽)ㆍ이장영(李長榮) 호는 죽곡(竹谷), 대사간을 지냈다.
용암사우(龍巖祠宇) 임술년에 세웠다. : 윤황(尹煌)ㆍ윤선거(尹宣擧)
장천사우(長川祠宇) 임진년에 세웠다. : 심우신(沈友信)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사절(死節)하였다.ㆍ이제형(李齊衡) 호는 취수헌(醉睡軒), 군수를 지냈다.ㆍ이단석(李端錫) 호는 쌍호(雙壺), 문과 병사(文科兵使)를 지냈다.
용계사우(龍溪祠宇) 임자년에 세웠다. : 강항(姜沆) 임진록(壬辰錄)에 있다.ㆍ윤순거(尹舜擧)
무장영당(畝長影堂) 태종이 화상(畫像)을 내렸다. : 이천우(李天祐)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백산사우(栢山祠宇) 경종 계묘년에 세웠다. : 이세필(李世弼)
백산영당(栢山影堂) 임진년에 세웠다. : 이제현(李齊賢)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峯書院) 숭정(崇禎) 병술년에 세웠으며 효종 을미년에 사액하였다. : 박상(朴祥)ㆍ박순(朴淳)ㆍ기대승(奇大升)ㆍ김장생(金長生)ㆍ김집(金集)
포충사(褒忠祠) 만력 신축년에 세웠으며 신묘년에 사액하였다. : 고경명(高敬命)ㆍ고종후(高從厚)ㆍ고인후(高因厚)ㆍ유팽로(柳彭老)ㆍ안영(安瑛)
의열사(義烈祠) 만력 갑진년에 세웠으며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 박광옥(朴光玉) 자는 중수(重粹), 호는 회재(懷齋)이다. 지평(持平)을 지냈고 율곡의 문인이다.ㆍ김덕령(金德齡)ㆍ오두인(吳斗寅)
천동사우(泉洞祠宇) 갑신년에 세웠다. : 이민서(李敏叙)ㆍ이건명(李健命)
경렬사우(景烈祠宇) 갑신년에 세웠다. : 정지(鄭地) 삼도절제사(三道節制使)가 되었으며, 시호는 경렬공(景烈公)이다.ㆍ정충신(鄭忠信)ㆍ김상의(金尙義) 귀성 부사(龜城府使)이다.
운암서원(雲巖書院) 병진년에 세웠다. : 송제민(宋濟民) 호는 해광(海狂), 처사이다.ㆍ권운(權韗)ㆍ송타(宋柁) 호는 화암(禾庵), 진사이다.
태인(泰仁) 남고서원(南皐書院) 만력 정축년에 세웠으며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이항(李恒)ㆍ김천일(金千鎰)
무성서원(武城書院) 만력 을묘년에 세웠으며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최치원(崔致遠)ㆍ신잠(申潛)ㆍ정극인(丁克仁) 호는 불우헌(不憂軒), 정언(正言)을 지냈다.ㆍ송세림(宋世琳) 호는 눌암(訥庵), 예조 정랑을 지냈다.ㆍ정언충(鄭彦忠) 호는 묵재(默齋), 참봉을 지냈다.ㆍ김약묵(金若默) 호는 성재(誠齋), 양주(楊州) 목사를 지냈다.ㆍ김관(金灌) 진사
모충사(慕忠祠) 병오년에 세웠다. : 백광언(白光彦) 첨사(僉使)를 지냈으며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김덕린(金德麟)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지냈다.
보성(寶城) 정충사(旌忠祠) 숙종 정사년에 세웠으며 경오년에 사액하였다. : 안홍국(安弘國) 보성(寶城) 군수를 지냈으며 찬성(贊成)에 증직되었다.
용산사우(龍山祠宇) 만력 정미년에 세웠으며 숙종 정해년에 사액하였다. : 박광전(朴光前) 호는 죽천(竹川), 벼슬은 익위(翊衛)를 지냈으며 승지에 증직되었다. 퇴계의 문인이다.
대계서원(大溪書院) 효종 정유년에 세웠으며 숙종 갑신년에 사액하였다. : 안방준(安邦俊)
양산사(梁山祠) 신묘년에 세웠다. : 염세경(廉世慶) 효자(孝子)이다.
무장(茂長) 충현사(忠賢祠) 만력 무신년에 세웠으며 광해군 때에 사액하였다. : 이존오(李存吾)ㆍ유희춘(柳希春)
도암향현사(道巖鄕賢祠) 신미년에 세웠다. : 김질(金質) 호는 영모당(永慕堂), 진사이다.
죽산향현사(竹山鄕賢祠) 숙종 계유년에 세웠다. : 오익창(吳益昌) 호는 사호(沙湖), 공조 정랑을 지냈다.
순천(順天) 옥천서원(玉川書院) 가정(嘉靖) 갑자년에 세웠고, 무진년에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
정충사(旌忠祠) 계묘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장윤(張潤)
충민사(忠愍祠) 만력 경자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순신(李舜臣)ㆍ이억기(李億祺)ㆍ안홍국(安弘國)
지봉서원(芝峯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이수광(李晬光)
겸천서원(謙川書院) 숙종 경인년에 세웠다. : 조유(趙瑜) 호는 처곡(處谷), 고려조의 절신(節臣)인데, 태조조(太祖朝)에 들었다.ㆍ조숭문(趙崇文) 유(瑜)의 아들이며,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화를 입었다. 병사(兵使)를 지냈고, 추향되었다.ㆍ조철산(趙哲山) 숭문(崇文)의 아들이요, 성승(成勝)의 사위다. 육신(六臣)의 변에 함께 화(禍)를 입었다.
청사사(靑莎祠) : 정소(鄭沼) 호는 청사(靑莎), 진사이다.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여산(礪山) 죽림서원(竹林書院) : 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김장생(金長生)ㆍ성혼(成渾)ㆍ송시열(宋時烈)
향현사(鄕賢祠) 임진년에 세웠다. : 남명한(南溟翰) 호는 취은(醉隱), 주부(主簿)에 증직되었다.ㆍ남두건(南斗健) 호는 경재(敬齋)ㆍ이계맹(李繼孟) 기묘록(己卯錄)에 들어 있다.ㆍ이순인(李純仁) 호는 고담(孤潭), 승지를 지냈다.
김제(金堤) 용암서원(龍巖書院) 임자년에 세웠다. : 조간(趙簡) 호는 열헌(悅軒), 시호는 문량공(文良公)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ㆍ이계맹(李繼孟)ㆍ나안세(羅安世) 호는 달계(達溪), 교리를 지냈다.ㆍ윤추(尹推) 호는 농은(農隱), 장령을 지냈다.ㆍ이세필(李世弼)ㆍ나응삼(羅應參) 호는 구산(龜山), 처사이다.
백석사우(白石祠宇) 계사년에 세웠다. : 유읍(柳揖) 호는 백석(白石), 벼슬은 자의(諮議)를 지냈으며 지평에 증직되었다.ㆍ조속(趙涑)
임파(臨陂) 봉암서원(鳳岩書院) 경오년에 세웠으며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김집(金集) 앞에 있다.ㆍ김구(金絿)
동복(同福) 도원서원(道源書院) 무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최산두(崔山斗)ㆍ정구(鄭逑)ㆍ임억령(林億齡)ㆍ안방준(安邦俊)
금산(錦山) 성곡서원(星谷書院) 만력 정사년에 세웠으며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 김신(金侁) 중국에 가서 참정(參政)을 지냈다.ㆍ윤택(尹澤) 호는 율정(栗亭), 찬성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본관은 무송(茂松)이며, 공민왕 때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으며 고향인 금주(錦州)에 돌아가 죽었다.ㆍ길재(吉再)ㆍ김정(金淨)ㆍ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
종용사(從容祠) 숭정(崇禎) 갑술년에 세웠으며 현종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 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ㆍ고인후(高因厚)ㆍ변응정(邊應井)ㆍ안영(安瑛)ㆍ유팽로(柳彭老)ㆍ이광륜(李光輪)ㆍ조택기(趙宅基)ㆍ한순(韓楯)ㆍ승 영규(僧靈圭)
향현사(鄕賢祠) : 한교(韓皦) 벼슬은 직학(直學)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ㆍ이유택(李惟澤) 호는 송곡(松谷), 현감을 지냈다.
반계서원(磻溪書院) : 이유태(李惟泰) 용강서원(龍江書院) : 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ㆍ유계(兪棨) 산천사(山泉祠) : 윤선거(尹宣擧)ㆍ윤증(尹拯)ㆍ윤추(尹推) 부이영당(富移影堂) : 길재(吉再)의 네 군데 서원(四院)은 모두 영종 신유년에 철폐(撤廢)하였다.
무안(務安) 송림서원(松林書院) 정해년에 세웠으며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권(金權)ㆍ유계(兪棨)
녹동서원(鹿洞書院) 숭정 경오년에 세웠으며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최덕지(崔德之)ㆍ최충성(崔忠成) 덕지(德之)의 손자이다. 호는 산당(山堂), 진사이다.ㆍ김수항(金壽恒)ㆍ김창협(金昌協)
죽정사우(竹亭祠宇) 신유년에 세웠다. : 박성건(朴成乾) 호는 오한(五恨), 현감을 지냈다.ㆍ박권(朴權) 호는 고광(孤狂), 벼슬은 정언이다.ㆍ박규정(朴奎精) 호는 수옹(壽翁), 생원이다.ㆍ이만성(李晩成)
서하사(西河祠) 정사년에 세웠다. : 조행립(曺行立)
고부(古阜) 정충사(旌忠祠) 숭정 신미년에 세웠으며 정유년에 사액하였다. : 송상현(宋象賢)ㆍ신호(申浩) 군수를 지냈으며 판서에 증직하였다. 시호는 무장공(武壯公)이다.ㆍ김준(金浚) 목사를 지냈으며 찬성에 증직되었다. 정묘록에 들어 있다.
도계서원(道溪書院) 계축년에 세웠다. : 이희맹(李希孟) 호는 익재(益齋), 시호는 문안공(文安公)이다.ㆍ김재(金齋) 호는 오봉(鰲峯), 장령을 지냈다.ㆍ최안(崔安) 호는 모암(慕庵), 직장(直長)을 지냈다.ㆍ김지수(金地粹) 호는 태천(苔川), 승지를 지냈다.ㆍ김제안(金齊顔) 호는 죽헌재(竹軒齋), 민(閔)의 아우이다.
흥양(興陽) 쌍충사(雙忠祠) 임술년에 중건(重建)하였고, 사액하였다. : 이대원(李大源) 벼슬은 녹도 만호(鹿島萬戶)이다. 명조조 을묘왜변에 상세하다.ㆍ정운(鄭運)
정읍(井邑) 충렬사(忠烈祠) 경신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
고암서원(考巖書院) 갑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장흥(長興) 예양서원(汭陽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웠다. : 이색(李穡)ㆍ남효온(南孝溫)ㆍ김광원(金光遠) 호는 월봉(月峯), 진사이다.ㆍ신잠(申潛)ㆍ유호인(劉好仁) 호는 육방(六放), 진사에 급제하여 참봉을 지냈고 율곡의 문인이다.
연곡서원(淵谷書院) 무술년에 세웠으며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 민정중(閔鼎重)ㆍ민유중(閔維重)
월천사우(月川祠宇) 임오년에 세웠다. : 문익점(文益漸)ㆍ문위세(文緯世) 호는 풍암(楓巖), 목사이다.
양강사우(楊江祠宇) 경진년에 세웠다. : 김경추(金景秋) 호는 죽정(竹汀) 또는 송정(松亭)이다.
충렬사우(忠烈祠宇) 신미년에 세웠다. : 한온(韓薀) 벼슬은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ㆍ정명세(鄭名世) 호는 독곡(獨谷), 현감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포충사(褒忠祠) 숙종 을유년에 세웠다. : 선세강(宣世綱) 호는 매곡(梅谷), 영장(營將)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죽천사우(竹川祠宇) 을사년에 세웠다. : 위덕의(魏德毅) 호는 청계(聽溪), 병조 좌랑을 지냈고, 참의에 증직되었다.
감호영당(鑑湖影堂) 숙종 정사년에 세웠다. : 전녹생(田祿生) 호는 야계(壄溪), 벼슬은 고려조의 사인(舍人)이다.ㆍ전유추(田有秋) 호는 송담(松潭)
남평(南平) 봉산서원(蓬山書院) 숭정 경인년에 세웠으며 현종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백인걸(白仁傑)
풍산사우(楓山祠宇) 숙종 무오년에 세웠다. : 정준일(鄭遵一) 호는 향북당(向北堂), 참봉이다.ㆍ김만영(金萬英) 호는 남포(南浦), 벼슬은 세마(洗馬)이다.ㆍ임세정(任世鼎) 호는 일신재(日新齋), 지평을 증직하였고, 추향되었다.ㆍ정익신(鄭翊臣) 호는 초심당(草心堂), 참봉이다.
용구사우(龍丘祠宇) 병술년에 세웠다. : 서봉령(徐鳳齡) 호는 용구(龍丘), 참봉이다.ㆍ조상우(趙相愚) 추향되었다.
능주(綾州) 죽수서원(竹樹書院) 융경(隆庚) 경오년에 세웠으며 갑오년에 사액하였다. : 조광조(趙光祖)ㆍ양팽손(梁彭孫) 기묘록(己卯錄)에 들어 있다.
포충사우(褒忠祠宇) 만력 을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최경회(崔慶會)ㆍ조현(曺顯) 병사(兵使)에 증직되었다.ㆍ문홍헌(文弘獻) 진사인데 지평에 증직되었고 계사년에 전사(戰死)하였다.
도산사우(道山祠宇) 효종 병신년에 세웠다. : 안방준(安邦俊)
용담(龍潭) 삼천서원(三川書院) 현종 정미년에 세웠고 숙종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안자(顔子)ㆍ백정자(伯程子)ㆍ숙정자(叔程子)ㆍ주자(朱子)ㆍ제갈무후(諸葛武侯)
순창(淳昌) 화산서원(花山書院) 만력 정미년에 세웠다. : 신말주(申末舟) 호는 귀래공(歸來公), 형조 참의를 지냈다.ㆍ김정(金錚)ㆍ김인후(金麟厚)ㆍ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
남원(南原) 노봉서원(露峯書院) 기축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홍순복(洪順福) 호는 고암(顧庵)이며 진사인데 기묘 명현(己卯名賢)이라 부른다.ㆍ최상중(崔尙重) 호는 미능재(未能齋), 사간(司諫)을 지냈다.ㆍ오정길(吳廷吉) 호는 해서(海西), 벼슬은 정자(正字)다.ㆍ최온(崔薀) 호는 폄재(砭齋), 승지를 지냈다.ㆍ최휘지(崔徽之) 호는 오주(鰲州), 벼슬은 익위(翊衛)이다.
현계서원(玄谿書院) 숙종 신사년에 세웠다. : 이능간(李凌幹)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영천부원군(寧川府院君)에 봉해졌다.ㆍ정염(丁焰) 호는 만헌(晩軒)이며 광주 목사이다.ㆍ변유(邊瑜) 호는 정묵재(靜默齋), 추향되었다.ㆍ정견(丁涀) 호는 육졸(六拙), 추향되었다.
요계서원(蓼溪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김화(金澕) 호는 재간당(在澗堂), 참봉이다.ㆍ이상형(李尙馨) 호는 천묵재(天默齋), 수찬을 지냈고 부제학에 증직되었다.ㆍ김지순(金之純) 호는 담암(澹巖), 참봉이다. 추향되었다.ㆍ김지백(金之白) 호는 용암(舂巖), 참봉이다. 추향되었다.
고암서원(高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진극순(陳克純) 호는 환성당(喚醒堂), 처사이다.ㆍ황신귀(黃信龜) 호는 운계(雲溪), 벼슬은 도사(都事)이다.
영천서원(寧川書院) 만력 무오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안처순(安處順) 호는 사재당(思齋堂), 판관을 지냈다.ㆍ정환(丁煥) 호는 회산(檜山), 벼슬은 도사이다.ㆍ정황(丁熿) 을사록(乙巳錄)에 들어 있다.ㆍ이대유(李大㕀) 호는 활계(活溪), 좌랑을 지냈다.
방산서원(方山書院) 계미년에 세웠다. : 노진(盧禛)ㆍ윤효손(尹孝孫)ㆍ최행(崔荇) 호는 성만(星灣), 좌윤(左尹)을 지냈다.ㆍ이경석(李景奭) 인조 때의 정승
우룡서원(右龍書院) 만력 기묘년에 세웠고 사액되었다. : 노진
충렬사(忠烈祠) 만력 임자년에 세웠고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정기원(鄭期遠)ㆍ이복남(李福男)ㆍ임현(任鉉)ㆍ김경로(金敬老)ㆍ신호(申灝)ㆍ이덕회(李德恢)ㆍ이원춘(李元春)ㆍ오흥업(吳興業) 추향되었다. 정유왜란 때에 순국했다. 칠충신사(七忠臣祠)라고도 한다.
정충사(旌忠祠) 인조 기축년에 세웠으며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 황진(黃進)ㆍ고득뢰(高得賚) 군수를 지냈으며 우윤(右尹)에 증직되었다.ㆍ안영(安瑛)
용호영당(龍湖影堂) 영종 갑자년에 세웠다. : 송 여남전(宋呂藍田)ㆍ주자(朱子)
곡성(谷城) 덕양사우(德陽祠宇) 만력 기축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신숭겸(申崇謙) 선조 22년에 세웠고 숙종 21년에 사액하였다.
□□영당 정사년에 세웠다. : 안유(安裕)
강진(康津) 서봉서원(瑞峯書院) 만력 경인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이후백(李後白)ㆍ백광훈(白光勳)ㆍ최경창(崔慶昌)
월남영당(月南影堂) : 이의경(李毅敬) 고금도(古今島)의 관왕묘(關王廟)에 진린(陳璘)과 이순신을 배향하였다. 제사조(諸祀條)에 들어 있다.
장수(長水) 창계서원(滄溪書院) 기축년에 세웠다. : 황희(黃喜)ㆍ황수신(黃守身) 세조 때의 정승ㆍ유호인(兪好仁)ㆍ장응두(張應斗) 호는 송탄(松灘), 생원이다.
옥과(玉果) 영귀서원(詠歸書院) 계유년에 세웠다. : 김인후(金麟厚)ㆍ유팽로(柳彭老)ㆍ이흥발(李興浡)ㆍ신이강(辛二剛) 호는 청파(靑坡)이다.
용안(龍安) □□영당 : 이단하(李端夏)ㆍ이세필(李世弼)
운봉(雲峯) 용암서원(龍巖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박광옥(朴光玉)ㆍ황일호(黃一皓)ㆍ변사정(邊士貞) 호는 도탄(桃灘), 첨정(僉正)을 지냈다.ㆍ노형필(盧亨弼) 호는 운제(雲堤), 벼슬은 사부(師傅)이다.ㆍ서식(徐湜) 호는 명암(銘巖), 효자(孝子)이다.
창평(昌平) 송강서원(宋江書院) 임오년에 세웠으며 을유년에 사액하였다. : 정철(鄭澈)
절산사우(節山祠宇) 숙종 기축년에 세웠다. : 박이관(朴以寬) 호는 보옹(葆翁), 벼슬은 보덕(輔德)을 지냈다.ㆍ박이홍(朴以弘) 이관(以寬)의 아우이다. 호는 월영(月暎), 진사이다.
내동사우(內洞祠宇) 계해년에 세웠다. : 우유일(禹惟一) 호는 이우당(二友堂), 벼슬은 전적(典籍)이다.
죽림사우(竹林祠宇) 숙종 무자년에 세웠다. : 조수문(曺秀文) 호는 죽림(竹林), 진사이다.ㆍ조호(曺浩) 호는 운곡(雲谷), 수문(秀文)의 아들이다.ㆍ조부(曺溥) 호는 삼청당(三淸堂), 벼슬은 전적이다.
함평(咸平) 기산사우(箕山祠宇) 숙종 을유년에 세웠다. : 박정원(朴鼎元) 호는 동호(東湖), 벼슬은 도사다.ㆍ이후정(李后定) 호는 만안(晩安), 응교를 지냈고 기묘년에 절개를 지켰다.
월산사(月山祠) : 이순신(李舜臣)ㆍ이덕일(李德一) 벼슬은 우후(虞侯)이다. 추향되었다.
수산사우(水山祠宇) 숙종 기축년에 세웠다. : 임영(林泳)
증산사우(甑山祠宇) 숙종 임오년에 중건하였다. : 김덕생(金德生) 호는 증산(甑山), 용력(勇力)과 기절(氣節)이 있었고, 벼슬은 좌명공신(佐命功臣)이다. 태종의 잠저(潛邸) 때 몸바쳐 보호하였다. 뒤에 원통하게 죽었다. 세종 때에 증직되었다.
모평사우(牟平祠宇) : 이유인(李有仁) 호는 파우(破愚), 참봉이다.
금구(金溝) 귀성사우(龜城祠宇) 숙종 신사년에 세웠다. : 윤순거(尹舜擧)ㆍ윤증(尹拯)
육송사우(六松祠宇) 현종 계묘년에 세웠다. : 김관(金瓘)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공양공(恭讓公)이다.ㆍ김승서(金承緖) 호는 귀암(龜巖), 참봉이다.ㆍ송정기(宋廷耆) 호는 죽계(竹溪), 추향되었다.ㆍ김천서(金天瑞) 참봉이다. 추향되었다.
해남사우(海南祠宇) 경인년에 세웠다. : 이순신(李舜臣)ㆍ유형(柳珩)ㆍ이계년(李桂年)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ㆍ이유길(李有吉) 현령(縣令)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이 두 사람은 추향되었다.
흥덕(興德) 동산서원(東山書院) 숙종 신사년에 세웠고, 경종 신축년에 사액하였다. : 이경여(李敬輿)ㆍ이민서(李敏叙)ㆍ이건명(李健命)ㆍ이관명(李觀命)
창효사(彰孝祠) 신해년에 세웠다. : 오준(吳浚) 직장(直長)에 증직되었다.
고산(高山) 화산서원(華山書院) 갑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
제주(濟州) 귤림서원(橘林書院) 만력 무인년에 세웠고 숙종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정(金淨)ㆍ송인수(宋麟壽)ㆍ정온(鄭薀)ㆍ김상헌(金尙憲)ㆍ송시열(宋時烈) 별사(別祠)ㆍ이약동(李約東)ㆍ이회(李禬) 호는 만오(晩悟), 제주 목사를 지냈다.
광양(光陽) 향현사(鄕賢祠)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최산두(崔山斗)
무주(茂朱) 주계영당(朱溪影堂) 영종 을사년에 세웠다. : 주자(朱子)
죽계(竹溪) 향현사(鄕賢祠) 계사년에 세웠다. : 김신(金侁) 고려조의 참정(參政)이다.ㆍ장필무(張弼武)
진안(鎭安) 모혜사(慕惠祠) : 이우성(李羽成)ㆍ이현익(李顯益)
화순(和順) 추모영당(追慕影堂) 인조 무자년에 세웠다. : 홍명하(洪命夏)ㆍ홍우익(洪禹翊) 현감

 

 
일방 등록〔一房謄錄〕

무술년(1778, 정조2) 2월 13일 회동

품목(稟目) 모음

본방의 당상 4원(員)과 낭청 5원이 날마다 좌기(坐起)할 처소의 방사(房舍)를 급히 수리하고, 도배 등의 일도 잘 계산하여 마련하여 진배하라고 각 해당 관사에 감결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수결하고,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호조, 선공감 -

본방의 당상과 낭청이 좌기할 때 다모(茶母) 1명 및 방사의 수직군(守直軍) 2명을 등록에 따라 정하여 보내도록 각 해당 관사에 감결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수결하고,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병조, 호조, 위장소 -

본방의 당상과 낭청이 쓸 사책(史冊)을 담을 자물쇠가 달린 궤짝 2부(部), 서안(書案) 9부, 곳간에 봉표(封標)하기 위한 자물쇠 1부, 낭청이 사용할 서판(書板) 2부, 갑(匣)이 있는 자연(紫硯) 9부, 다모가 사용할 놋새옹〔鍮沙用〕 1부, 놋대야〔鍮大也〕 1좌, 질동이〔陶東海〕, 약탕관(藥湯罐) 각 2개, 받침대가 있는 차보시기〔茶甫兒〕 2좌, 휘수건(揮手巾) 각 2건 등의 물품을 쓰고 나서 돌려주는 조건으로 진배하도록 각 해당 관사에 감결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수결하고, 군직(軍職)인 당상과 낭청에게만 진배하라고 하였다. ○ 호조, 공조, 제용감, 평시서 -

당상이 산절(刪節)할 때 사용할 반주홍(磻朱紅) 3냥, 하인이 들어가 머물 처소에 깔 빈 가마니 5닢(立), 저주지(楮注紙) 2장, 백지(白紙) 5권, 공사하지 백휴지(公事下紙白休紙) 2권, 미추(尾箒) 2자루, 풀가루〔膠末〕 1되, 싸리나무〔杻木〕 1단을 등록에 따라 다달이 정해진 식으로 진배하도록 감결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수결하고,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공조, 제용감, 장흥고, 광흥창, 선공감, 예빈시, 군자감, 사섬시 -

본방의 당상 4원이 사용할 황필(黃筆) 각 1자루, 백필(白筆) 각 2자루, 참먹〔眞墨〕 각 1정(丁), 낭청 5원이 사용할 황필 각 2자루, 참먹 각 1정, 서리(書吏) 4인이 사용할 붓과 먹 각 하나씩을 달마다 정해진 식으로 진배하고, 접시〔貼匙〕 4닢(立), 사타구(沙唾口) 7개, 분패(粉牌) 1면(面), 긴 서안 1부, 우산(雨傘) 2부, 관디걸이〔冠帶巨里〕 2좌, 광명대(光明臺) 2좌, 요강 2좌, 뒷발막〔北分土〕 2좌, 다모가 사용할 밥솥〔食鼎〕 1좌, 받침대가 있는 사기잔〔沙盞〕 1좌, 사발 3닢 등의 물품을 쓰고 나서 돌려주는 조건으로 진배하도록 각 해당 관사에 감결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수결하고,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호조, 공조, 평시서, 선공감 -

당상과 낭청이 사용할 연도(硯刀) 4개, 숫돌〔礪石〕 1괴, 전판(剪板) 4개, 문서를 담을 버들고리〔柳筽〕 1부, 당상과 낭청의 진지(進止)에 사용할 받침대가 있는 흰 사기주발〔白磁碗〕 2개, 다모가 사용할 목표(木瓢)와 과표(果瓢) 2개, 서리가 사용할 갑(匣)이 있는 자연(紫硯) 1면(面), 깔기 위한 6장짜리 지의(地衣) 1부(浮)를 쓰고 나서 돌려주는 조건으로 진배하도록 감결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수결하고,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공조, 평시서, 장흥고, 군기시, 기인(其人), 선공감, 당사기계(唐沙器契), 도자전(刀子廛), 반사기계(盤沙器契) -

당상과 낭청이 날마다 사진할 때 온돌에 불을 때는 데 쓸 땔나무 매일 각 1단씩, 등유(燈油) 1홉, 망홰〔望炬〕는 들어가는 대로 진배하며, 서리가 들어가 머물 곳에 쓸 점화목(點火木) 매일 반 단씩, 등유 1사(夕), 당상과 낭청이 좌기할 때 쓸 노탄(爐炭) 매일 각 3되씩, 서리가 쓸 노탄 매일 3되씩을 등록에 따라 정해진 식으로 진배하며, 다모가 사용할 자물쇠가 달린 궤짝 1부, 소통(小桶)과 탁자 각 1부, 목관자(木貫子) 1개, 매다는 노끈이 달린 목정개(木鼎盖) 1개 등의 물품을 쓰고 나서 돌려주는 조건으로 진배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수결하고,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공조, 선공감, 사재감, 의영고, 와서, 제용감 -

본방의 당상과 낭청 1원이 날마다 상직(上直)할 때 땔 온돌목(溫堗木) 매일 1단씩, 등유 1홉씩, 서리의 상직방에 땔 온돌목 매일 반 단씩, 등유 1사 등의 물품을 등록에 따라 진배하도록 감결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수결하고,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사재감, 의영고 -

본방의 원역(員役) 등이 날마다 대령하고 있으니 동역(洞役)에 동원하지 말라고 감결을 보내고, 사책(史冊)이 들어 있는 곳간을 수직하기 위해 좌경군(座更軍) 1패(牌)를 정하여 보내라고 분부하며, 포도 군관(捕盜軍官)이 많은 군사를 인솔하고 날마다 대령하여 잡인을 금단하는 등의 일에 대해 등록에 따라 역시 감결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수결하고,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 한성부, 해당 부(部), 좌우 포도청 -

○ 감결(甘結) 모음

다음과 같이 감결합니다.
본방의 당상과 낭청이 좌기할 때 사용할 방석 5닢(立), 안식(案息) 5좌(坐), 등메〔登每〕 3닢에 들어갈 물종 및 문서에 사용할 백지(白紙) 1권, 공사하지(公事下紙) 1권, 갑(匣)이 있는 자연(紫硯) 7부, 당상 4원이 사용할 황필(黃筆) 각 1자루, 백필(白筆) 각 2자루, 참먹〔眞墨〕 각 1정, 낭청 5원이 사용할 황필 각 2자루, 참먹 각 1정씩, 서안(書案) 9부, 서판(書板) 2개, 문서를 담을 자물쇠가 달린 궤짝 1부, 버들고리〔柳筽〕 1부, 다모가 사용할 흰 사기주발 2좌, 받침대가 있는 보시기 2좌, 사발(沙鉢) 2닢, 사타구(沙唾口) 4개, 요강 1좌, 위리(圍里)를 갖춘 질화로〔土火爐〕 3개, 노탄(爐炭) 매일 3되씩, 서리(書吏)에게 노탄 3되씩을 진배하며, 하인이 머물 곳에 깔 빈 가마니 5닢과 찌〔籤〕를 붙이는 데 사용할 풀가루〔膠末〕 1되, 미추(尾箒) 2자루를 진배할 일입니다. - 호조, 공조, 장흥고, 선공감, 사섬시, 제용감, 와서, 사복시, 광흥창, 군자감, 사기계(沙器契) -

다음과 같이 감결합니다.
시정기(時政記)를 봉안할 곳과 당상과 낭청의 방사(房舍)를 도배하는 데 사용할 백휴지(白休紙) 4근, 창호(窓戶)에 쓸 저주지(楮注紙) 5장, 얇은 유둔(油芚) 3번(番), 풀가루 3되, 땔나무 2단을 진배하며, 도배군 4명과 복병군(伏兵軍) 2명도 급히 대령할 일입니다. - 호조, 장흥고, 선공감, 평시서, 사섬시, 사재감, 예빈시, 좌우 포도청 -

다음과 같이 감결합니다.
본방의 하인 등이 머물 곳인 임시 가옥〔假家〕 2칸에 들어갈 잡물을 규례에 따라 진배할 일입니다. - 호조, 선공감, 양창(兩倉) -

다음과 같이 감결합니다.
본방의 낭청 방을 도배할 후백지(厚白紙) 2권을 진배할 일입니다. - 호조, 장흥고 -

다음과 같이 감결합니다.
본방의 다모가 사용할 뚜껑이 있는 밥솥 1좌, 뚜껑이 있는 놋새옹〔鍮沙用〕 1좌를 진배하며, 도배에 쓸 풀가루가 부족하니 2되를 진배할 일입니다. - 호조, 공조, 예빈시 -

다음과 같이 감결합니다.
본방의 당상과 낭청 방을 수리할 새벽〔沙壁〕 2바리〔駄〕, 마조(馬槽) 1부(部), 땔나무 5단을 진배할 일입니다. - 호조, 사재감, 해당 부(部), 마계(馬契) -

다음과 같이 감결합니다.
본방의 당상과 낭청이 쓸 측간 1칸을 만드는 데 들어갈 것을 규례에 따라 진배하며, 다모가 사용할 질동이〔陶東海〕 2부를 진배하고, 찌를 붙이는 데 쓸 백휴지 1근을 진배할 일입니다. - 공조, 장흥고, 선공감, 사섬시, 양창 -

다음과 같이 감결합니다.
본방의 사역이 더할 나위 없이 시급한데 원역(員役)이 부족하여 각 관사에 숫자를 늘려 분정하였으니, 이상의 옮겨 차임할 서리는 젊고 일을 잘 아는 자로 즉각 정하여 보낼 일입니다. - 호조, 병조 -

다음과 같이 감결합니다.
본방의 서역(書役)이 더할 나위 없이 시급하여 사령(使令) 1명을 더 차임하였으니, 젊고 영리한 자로 즉각 정하여 보낼 일입니다. - 군자감 -

다음과 같이 감결합니다.
본방의 측간에 쓸 매유판(每流板) 1부를 진배하며, 좌기 때 다모(茶母)가 사용할 다미(茶米) 매달 2되씩, 땔나무 매일 반의반 단씩, 숯〔炭〕 2되씩, 포수건(布手巾) 1건 등의 물품을 진배할 일입니다. - 호조, 선공감, 사재감, 군자감, 제용감 -

다음과 같이 감결합니다.
본방의 등록에 실제로 들어갈, 출초(出草)할 백지 1권, 백휴지 1권을 진배할 일입니다. - 장흥고, 사섬시 -

다음과 같이 감결합니다.
태목(笞木)을 규례에 따라 진배하고, 분배(分排) 및 찌를 붙이는 데 쓸 백지(白紙)를 다 썼으므로 1권도 진배할 일입니다. - 장흥고, 전옥서 -

무술년(1778, 정조2) 2월 13일에 회동하여 작업을 시작하였다.

○ 전후 당상과 낭청을 모두 기록함

당상

형조 판서 채제공(蔡濟恭) 무술년 2월 6일 계하(啓下), 10일 근무
병조 판서 이휘지(李徽之) 무술년 2월 6일 계하, 11일 근무
강화부 유수 이복원(李福源) 무술년 2월 6일 계하, 근무 없음
이조 판서 김종수(金鍾秀) 무술년 2월 6일 계하, 19일 근무
행 부사직 이연상(李衍祥) 무술년 2월 6일 계하, 근무 없음
서유경(徐有慶) 무술년 3월 6일 계하, 7일 근무
이보행(李普行) 무술년 3월 11일 계하, 12일 근무
오재순(吳載純) 무술년 3월 22일 계하, 3일 근무
이재협(李在協) 무술년 3월 6일 계하, 16일 근무
홍낙성(洪樂性) 무술년 3월 6일 계하, 근무 없음
이치중(李致中) 무술년 3월 13일 계하, 4일 근무
대사성 유당(柳戇) 무술년 3월 17일 계하, 8일 근무
행 부사직 정광한(鄭光漢) 무술년 3월 25일 계하, 근무 없음
이조 참의 이의익(李義翊) 무술년 3월 17일 계하, 3일 근무
행 부사직 김노진(金魯鎭) 무술년 3월 25일 계하, 3일 근무


낭청
전 수찬 윤행수(尹行修) 무술년 2월 6일 계하, 근무 없음
부수찬 김희(金憙) 무술년 2월 6일 계하, 6일 근무
병조 정랑 조시위(趙時偉) 무술년 2월 6일 계하, 8일 근무
부사과 박우원(朴佑源) 무술년 2월 6일 계하, 근무 없음
수찬 안성빈(安聖彬) 무술년 2월 25일 계하, 2일 근무
수찬 박재원(朴在源) 무술년 2월 28일 계하, 24일 근무
봉상시 정 이겸빈(李謙彬) 무술년 2월 25일 계하, 21일 근무
부사과 심유진(沈有鎭) 무술년 2월 24일 계하, 29일 근무
종부시 정 남주로(南柱老) 무술년 2월 25일 계하, 22일 근무
병조 좌랑 정연순(鄭淵淳) 무술년 3월 7일 계하, 17일 근무


서리(書吏) 최필성(崔弼成) 병조
이상렴(李尙濂) 제용감
안정윤(安廷允) 사재감
정계흥(鄭啓興) 군기시
사령(使令) 김건이(金健伊) 등 3명
군사(軍士) 거복(巨福) 등 2명
다모(茶母) 1명



[주D-001]품목(稟目) : 관청에서 상관에게 보고하거나 묻는 문서이다. 실록청에서는 낭청이 일일이 총재관에게 물었다기보다는 당상관에게 물어 처리한 듯하다.
[주D-002]수결하고 …… 하였다 : 원문은 ‘手決內依’인데, ‘手決依’로 된 곳도 있다. 문서를 받고 나서, 결정하거나 지시할 것이 있으면 ‘제사(題辭)’를 적었으니 제사가 있으면 제사 내용대로, 제사가 없으면 문서 내용대로 하라는 뜻인 듯하다.
[주D-003]다모 : 원문은 ‘荅母’인데, 다수 용례에 근거하여 ‘荅’을 ‘茶’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분패(粉牌) : 원문은 ‘粉板’인데, 〈이방등록 품목 모음〉과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粉牌’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각 방에서 산절(刪節)을 하고 있는 단계여서 아직 분판이 필요하지 않다.
[주D-005]1단 : 원문은 ‘一介’인데, 다수 용례에 의거하여 ‘介’를 ‘丹’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백지(白紙) : 장서각본에는 ‘白休紙’로 되어 있다.
[주D-007]당상 …… 1자루 : 원문과 장서각본에는 없으나, 〈이방등록(二房謄錄)〉에 의거하여 ‘堂上四員所用黃筆各一柄’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08]얇은 유둔(油芚) : 장서각본에는 ‘薄陸油芚’으로 되어 있다. ‘芚’은 원문은 ‘屯’인데, 다수 용례에 의거하여 ‘芚’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9]2단 : 원문은 ‘二介’인데, 다수 용례에 근거하여 ‘介’를 ‘丹’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0]서역(書役) : 장서각본에는 ‘事役’으로 되어 있다.
[주D-011]매유판(每流板) : 원문은 ‘每流板每流板’인데, 장서각본에 ‘每流板’이라 한 것에 의거하여 ‘每流板’ 3자를 연문(衍文)으로 보아 번역하지 않았다.
[주D-012]포수건(布手巾) 1건 : 원문은 ‘布手巾一件一件’인데, 전사 과정의 연문으로 보아 ‘一件’ 2자를 번역하지 않았다.
[주D-013]분배(分排) 및 : 원문은 ‘分排及’인데, 장서각본에는 빠져 있다.

 

 

 
중종 21년 병술(1526,가정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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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3일 (갑신)
전라도 관찰사 유관이 장계를 올려 도내의 효행과 절의를 보고하다

전라도 관찰사 유관(柳灌)이 장계(狀啓)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내(道內) 각 고을에 효행(孝行)이 뛰어난 자들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담양부(潭陽府) 서원(書員) 권복(權福)은 일찍 어미를 여의었으므로 은혜에 보답하지 못함을 매우 슬프게 여겨, 매달 1일과 15일에 정성을 다해 제사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비를 섬길 적에는 아침 저녁으로 꼭꼭 문안했고, 아비가 죽어서는 밤낮으로 섧게 울었습니다. 삼년상(三年喪)을 치른 뒤에도 기일(忌日)이 든 달에는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장수현(長水縣) 유학(幼學) 김경손(金敬孫)은 아비가 죽자 빈소(殯所)를 떠나지 않고 몸이 바싹 여위어 예(禮)에 지나치게 슬퍼했습니다. 물고기와 짐승을 잡아 팔아 어미를 봉양하면서도 항상 맛있는 음식을 사다 드렸기 때문에 1백 살이 넘어서야 죽었습니다. 경손의 나이도 70이었지만 3년 동안 물만 마시고 슬피 울면서 여묘살이를 했습니다. 그간에는 집에 급하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흥덕현(興德縣) 녹사(錄事) 오준(吳俊)은 아비가 종기를 앓을 적에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기도 하고 인분(人糞)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아비가 죽어서는 예에 지나치게 슬피 울면서 양념 친 음식과 채과(菜果)를 먹지 않았습니다. 나주(羅州) 정병(正兵) 최치강(崔致江)의 양녀(良女) 출신 아내인 능금(能今)은 남편이 죽자 아침저녁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섧게 울었고, 봄 가을로 의복을 만들어서 제사지낸 뒤 불에 태웠습니다. 지금 19년이 되었는데도 처음 마음을 변치 않은 채 슬피 울면서 예(禮)를 끝까지 지킴은 물론이고 고기도 먹지 않았습니다.
부안현(扶安縣) 진사(進士) 최필성(崔弼成)은 어미가 유종(乳腫)을 앓아 심한 고통을 당했었습니다. 그런데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자 입으로 종기를 빨아 치유시켰습니다. 아비인 진사 최수손(崔秀孫)이 악질(惡疾)에 걸려 백약이 무효인 채 달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의원이 ‘박쥐를 잡아야 치유시킬 수 있다.’ 했으나 때마침 겨울이라서 아무리 잡으려 찾아보아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부르며 통곡하자 박쥐가 절로 날아왔으므로 이것으로 약을 만들어 먹이니, 그 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전 직장(直長) 한숭석(韓崇錫)은 어미가 악성 종기를 앓아 거의 죽게 되자 이를 입으로 빨아서 치유시켰고, 어미가 죽어서는 슬퍼하면서 극진히 삼년상을 치렀습니다. 또 아비 상(喪)을 당해서는 직접 제물을 마련했고, 여묘살이와 제사에 한결같이 지성을 다했습니다. 강진(康津) 별시위(別侍衛) 고수검(高守儉)은 부모상을 당했을 때 아울러 삼년 간 여묘살이를 했고, 이어 분묘 곁에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제사지냈습니다. 국기일(國忌日)에는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또 검소한 음식으로 제사지내 온 지 25년이 되었지만 조금도 해이함이 없었기 때문에 온 고장이 효자로 추대하고 있습니다. 고부군(古阜郡) 향리(鄕吏) 이성호(李成浩)의 아내 금이(今伊)는 남편에게 쫓겨나자 그 동생이 개가(改嫁)시키려 했으나 죽기로 맹세하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친정에서 도망하여 시집으로 다시 찾아가니, 이를 딱하게 여긴 시아버지가 아들 성호에게 다시 동거(同居)하게 했습니다. 남편이 죽자 주야로 통곡하면서 삼년상을 치른 뒤에도 그대로 상복을 입은 채 방에다 영좌(靈座)를 설치해 놓고 아침저녁으로 제사지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살았을 때와 똑같이 의복을 철따라 만들어 두었습니다.
별시위(別侍衛) 이숙손(李叔孫)은 어미 상을 당하여 예(禮)에 지나치게 슬퍼했고 여묘살이를 하면서는 한 번도 집에 내려오지 않았으며, 삼 년 동안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옥구현(沃溝縣) 별시위 두세준(杜世俊)은 그 어미가 병이 들어 50여 일동안 누워 있었지만 의대(衣帶)를 벗지 않은 채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는가 하면 인분(人糞)을 맛보아 병 증세를 증험하기도 했습니다. 어미가 죽은 뒤에는 집사람들과 이야기하지 않았고, 어미가 즐기던 물건이면 힘껏 구해다 영전에 바쳤습니다. 또 삼년상을 끝내도록 밤낮으로 통곡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장성현(長城縣) 단암 역리(丹巖驛吏) 차순년(車舜年)은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겨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어버이에게 바쳤습니다. 가절(佳節)을 맞을 때마다 어버이를 위해 잔치를 베풀고 헌수(獻壽)했으며, 반드시 고장의 부로(父老)를 초청해서 함께 즐기게 했습니다. 그 아비 차인보(車仁甫)가 임질(淋疾)에 걸려 소변이 막혀 기절해서 쓰러지자, 순년은 아비를 끌어안고 하느님을 부르면서 살려달라고 애걸했습니다. 이어 아비의 양경(陽莖)을 2일간 입으로 빨자 요도(尿道)가 트였습니다. 이리하여 소변이 통하게 되어 다시 살아났습니다. 전주부(全州府) 생원(生員) 박세직(朴世直)은 타고난 성품이 충후해서 나이 10여 세에 어미를 여의자 3년 동안 애모(哀慕)했고, 늘 어미를 끝까지 섬기지 못한 것을 슬퍼했습니다. 그래서 아비 섬기기를 더욱 삼갔고, 음식물을 봉양함에 있어 아비의 마음에 맞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아비가 죽자 삼 년 동안 죽만 마시고 양념 친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짚신에 저장(苴杖)을 짚고 동구(洞口) 밖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사노(私奴) 김천동(金千同)은 어미가 악성 종기를 앓자 즉시 손가락을 잘라 태워서 이를 술에 타 먹였습니다. 그랬더니 어미의 병이 즉시 치유되었습니다.
유학(幼學) 박형문(朴衡文)의 처 김씨(金氏)는 남편의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머리를 빗지 않았고 아침저녁으로 직접 제물을 올렸으며, 밤낮으로 통곡하였습니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도 철따라 옷을 만들어 분묘 앞에 가 곡제(哭祭)한 다음 이를 신주(神主) 앞에 놓아두었고, 철이 바뀌면 전의 옷을 치우고 새옷으로 바꿔놓고는 깨끗한 곳을 가려 울면서 전의 옷을 태웠습니다. 반혼(返魂)하여 제사 지냄에 있어 지금까지 태만하지 않았습니다. 김제군(金提郡) 사노(私奴) 난금(難今)은 그 어버이가 살았을 때는 마음을 다해 효성으로 봉양했고, 어미가 죽은 뒤에는 삼년 간의 여묘살이를 끝낸 다음 이어 분묘 곁에 살았습니다. 또 부지런히 주인(主人)을 섬겼으므로 주인이 늘 궁핍함을 우려해서 마음을 다해 도와주고 있습니다. 또 철따라 수확하는 물건도 주인에게 바치지 않고는 차마 먼저 맛보지 않았습니다. 유학 윤사인(尹師仁)의 아내 박씨(朴氏)는 25세 때 남편을 여읜 뒤 지금까지 16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흰 옷에 검소한 밥을 먹으면서 절일(節日)과 기제(忌祭) 때는 몸소 분묘 앞에 가 초상 때처럼 섧게 울었습니다. 학생(學生) 서치명(徐致明)의 양녀(良女) 출신 아내인 마비(馬非)는 30세 때 남편을 여의었습니다. 그 뒤 21년 간 상복(喪服)을 벗지 않은 채 위판(位版)을 모시고 흰 장막을 쳐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겨울 여름으로 의복을 만들어 영전 앞에 가져다 놓았고, 아침저녁으로 제사지냈습니다. 만경현(萬頃縣) 최치강(崔致江)의 양녀 출신 아내인 금이(今伊)는 37세에 자식도 없이 남편을 여의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17년이 되도록 흰 옷을 입고 있고, 고기를 먹지 않은 것은 물론 양념 친 반찬도 먹지 않았습니다. 평상과 장막을 갖추어 신주(神主)를 모신 뒤 향로와 꽃병을 놓고 아침저녁으로 상식(上食)했고, 철따라 나는 새 음식물도 갖추어 올렸습니다. 또 철따라 옷을 만들어 영전에 가져다 놓는데, 전의 옷을 새옷으로 바꿀 때는 그 때마다 반드시 전의 옷을 불태웠습니다. 매달 1일이나 15일, 속절(俗節)에는 병을 앓거나 비바람이 치지 않는 한 반드시 분묘에 올라갔습니다.”
【원전】 16 집 517 면
【분류】 *윤리-강상(綱常)


[주D-001]빈소(殯所) : 발인(發靷)할 때까지 관(棺)을 놓아두는 방을 말한다.
[주D-002]헌수(獻壽) : 오래 살라는 뜻으로 술잔을 올리는 것.
[주D-003]저장(苴杖) : 상중(喪中)에 짚는 검은 지팡이.
[주D-004]절일(節日) : 철따라 드는 명절을 말한다.

 

중종 23년 무자(1528,가정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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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21일 (경신)
예조가 효자와 절부에게 상과 복호·정문하여 표창할 것을 건의하다

예조가 효자와 절부(節婦) 등에 관한 공사를 가지고 입계하기를,
“전일에 상께서, 쇠퇴한 세상에 이런 효자와 절부가 있는 것은 그 행실이 가상한 일이니, 포상(褒賞)하는 절목(節目)을 다시 마련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분부하셨습니다. 신들이 정표(旌表)할 만한 것을 고찰해 보건대, 대개 단지(斷指)를 한 것은 특히 일시적인 성의와 감격으로 인해 하는 것이고, 오랜 해가 되도록 효행이 변함 없는 사람이라야 그 효행이 더욱 높은 법인데, 단지한 사람을 옛적의 준례에도 정표했으므로 약간의 사람은 정표해야 합니다. 지난 조광조(趙光祖) 때에 효행이 더욱 특이한 사람을 각도에 이첩하여 모두 뽑아서 신보(申報)하도록 했었는데, 이번의 이 사람들은 그때에 현저하지 못했었으니 실적이 차이가 있었는가 싶습니다. 그러나 보고 듣기에 비록 특이하지는 않을망정 한 가지 일이라도 효행에 관한 것이 있다면 마땅히 물품으로 상을 주고, 그 중에 조금 특이한 사람은 복호(復戶)하고, 또 그 중에 몸을 아끼지 않은 소행이 뚜렷한 사람은 정문(旌門)하여 표창해야 합니다. 문안(文案)으로 본다면, 이 중 특이한 사람은 비록 《삼강행실(三綱行實)》에 실린 사람이라 하더라도 더 할 것이 없으니 마땅히 정문하여 표창해야 합니다. 다만 상께서 절행(節行)을 아름답게 여겨 포상하시려는 뜻을 궁벽한 시골이나 항간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전교하신 뜻을 이 공사에다 판부(判付)하여 이문(移文)한다면, 외방에서 또한 상의 뜻이 있는 데를 알고 더욱 권면 장려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뜻은 알았다.”
하였다. 그 공사는 다음과 같다.
“전주(全州) 사노(私奴) 김천동(金千同)·강릉(江陵) 유학(幼學) 최응록(崔應祿)·진사(進士) 신명화(申命和)의 아내 이씨(李氏)·함종(咸從) 유학 노인석(盧仁碩)·안주(安州) 군사(軍士) 박호(朴好)의 딸 박덕(朴德)·중부(中部) 사비(私婢) 말덕(末德)·포천(抱川) 한량(閑良) 권거경(權居敬)은 부모를 위하고, 개천(价川) 양녀(良女) 막시(莫時)는 지아비를 위해 육신을 아끼지 않고 손가락을 끊어 태워서 약에 타먹였는데 모두 병에 차도가 있었습니다. 충주(忠州) 전(前) 혜민서 참봉(惠民署參奉) 하숙륜(河叔崙)은 다리의 살을 베고 또한 손가락을 끊어 어미의 병을 치료하였고, 우봉(牛峯) 충순위(忠順衛) 이윤동(李潤童)의 아내 홍씨(洪氏)는 전에 절행이 특이한 때문에 복호(復戶)하여 권장했는데, 그 뒤에도 20여 년이나 정성과 공경이 나태해지지 않고 지절(志節)이 더욱 굳었습니다. 이들의 특이한 행실은 비록 《삼강행실》에 실린 효자나 열부(烈婦)라 하더라도 이들 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담양(潭陽) 서원(書員) 권복(權福)·장수(長水) 유학 김경손(金敬孫)·흥덕(興德) 녹사(錄事) 오준(吳俊)·부안(扶安) 진사(進士) 최필성(崔弼成)·전 직장(直長) 한숭석(韓崇錫)·강진(康津) 별시위(別侍衛) 고수검(高守儉)·고부(古阜) 별시위 이숙손(李叔孫)·옥구(沃溝) 별시위 두세준(杜世俊)·장성(長城) 역리(驛吏) 차순년(車舜年)·전주(全州) 생원(生員) 박세직(朴世直)·삼척(三陟) 유학 김숭손(金崇孫)·양구(楊口) 호장(戶長) 유담(柳潭)·함종 전 여수(旅帥) 유인달(劉仁達)·순안(順安) 전 참봉(參奉) 박만근(朴蔓根)·고원(高原) 유학 서상인(徐尙仁)·옥천(沃川) 교생(校生) 임세화(林世華)·결성(結城) 유학 유항(兪恒)·김제(金堤) 사노 난금(難金)·홍산(鴻山) 수군(水軍) 김원손(金元孫)·중부 사노 박달(朴達)·옥천 역리 양노(梁老) 등은 각기 부모를 위하여 생전에는 효도를 다하고 사후에는 예법을 다해 조행이 특이했습니다.
나주(羅州) 양녀(良女) 능금(能今)·고부 양녀 금이(今伊)·김제 양녀 마비(馬非)·만경(萬頃) 양녀 금이·가산(嘉山) 갑사(甲士) 방권(方權)의 아내 윤씨(尹氏)·옥천 역리 양녹(梁祿)의 아내 막장(莫藏)·덕산(德山) 양녀 보덕(寶德)·남부(南部) 고 부사(府使) 최계사(崔季思)의 아내 남씨(南氏)·김제 고 유학 윤사임(尹師任)의 아내 박씨(朴氏)·전주 유학 박형문(朴衡文)의 아내 김씨(金氏)·옥천 양녀 석을금(石乙今)·서부(西部) 고 첨지(僉知) 정석희(鄭錫禧)의 첩 양녀 정금(貞今)·운산(雲山) 고 유학 유해(兪諧)의 첩 양녀 중지(中之) 등은 지아비가 죽은 뒤에 상례(喪禮)를 거행하기에 정성이 극진하였는데,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아 절행이 가상했습니다. 담양 정병(正兵) 정이(鄭利)·정한(鄭漢)·정진(鄭進)·정윤(鄭倫)은 함께 한 장내(場內)에서 살면서 어미를 봉양하되, 효도하고 우애하는 정이 지성에서 나와 또한 가상했습니다.
전항의 김천동·최응록·하숙륜·신명화의 아내 이씨·노인석·권거경·박덕·말덕·막시·이윤동의 아내 홍씨 등은 《대전》대로 정문하고 복호하며, 서원 권복·유학 김경손·진사 최필성·별시위 두세준·생원 박세직·유학 유항·녹사 오준 등은 관직으로 상주고, 유학 서상인·양녀 능금·양녀 금이·양녀 마비와 금이·사노 박달·역리 차순년과 양노 등은 복호하고 물품으로 상주며, 한숭석·고수검·이숙손·김숭손·유인달·박만근·임세화·김원손·유담·난금·박형문의 아내 김씨·윤사임의 아내 박씨·유해의 아내 중지·방권의 아내 윤씨·양녀 석을금·보덕·정금·막장·최계사의 아내 남씨·정이 정한 정진 정윤은 물품으로 상을 주어 권장함이 어떻겠습니까?”
【원전】 17 집 28 면
【분류】 *윤리-강상(綱常) / *군사-군역(軍役) / *인사-관리(管理) / *신분(身分)


[주D-001]여수(旅帥) : 5대(隊)인 1백 25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우두머리이다.

 
명종 15년 경신(1560,가정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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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17일 (임오)
예조에서 효성이 뛰어난 최필성의 문려에 정표하기를 청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최필성(崔弼成)이 효성이 뛰어나고 집에서 몸을 단속했던 일에 대해서는 온 고을이 탄복하였습니다. 그런데 작위가 내려지기도 전에 죽어서 성상께서 효도를 다스리는 정사를 끝내 베풀 곳이 없게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해 주시어 경박한 풍속을 경계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원전】 20 집 554 면
【분류】 *윤리(倫理)
 
知退堂集卷之十三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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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黃兎記事下
別科被薦 凡一百二十人。登科二十八人。餘九十二人。 a_058_21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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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敬德]
○徐敬德字可久。母韓氏夢入夫子廟生公。自幼聡明英果。年近志學。受尙書至朞三百。其師不肯授曰。此非但吾所不學。擧世鮮曉者。公恠之。退而精思十五日通之。乃知書之可以思得也。天性至孝。居憂讀禮。至始死皇皇等語。未嘗不三復流涕。平生惡崖異之行。與鄕人處。終日言笑。不見有異也。家至貧。或連日不炊而常晏如。鄕隣化其德。有爭辨則不之官府。而來咨决焉。己卯薦科。辭不赴。辛卯。以058_215b母氏之命。到京得司馬而皈。除厚陵參奉。不起。年五十八卒。贈편001議政。諡文康。學者稱爲花潭先生。孫佑申。登武科爲節度使。

[睦世秤]
○睦世秤字公達。金大成之表弟也。受業於其門。有深造之功。己卯。被選入試。不對。禍作後不復爲擧業。日與同里申命仁,尹壽等詩酒自娛。天性明敏。學究義理。對人言論。觸事無礙。號玄軒。子詹登文科爲左尹。孫敍欽,長欽,大欽。曾孫取善,性善,行善。皆登科。

[成守琛]
○成守琛字仲玉。天分甚高。德器渾成。受業靜庵門下。筆法亦臻妙。性至孝。自少稱孝兒。父母之喪。躬執奠具。朝夕058_215c展墓。祁寒盛暑。未嘗一廢。每値忌日。哀痛如初。晨必謁廟。出入必告。隱居坡平。自號聽松居士。子渾官至四宰。號牛溪。

[成守琮]
○成守琮字叔玉。己卯及第。以觸忤削名。時安貞愍爲命官。靜庵見試卷曰。如此文藻。非成守琮不能作。竟得參。禍作後歸咎靜庵容私試取。削名於榜。今上朝。子耳上書陳寃。特命復科。門人私諡節孝先生。

[生貟尙震]
○生貟尙震字起夫。世居林川。少孤鞠於姊夫夏山君成夢井。夢井深服其德器。大司成柳雲見其課製。大加褒稱。至訪于家曰。見公論議。知有經綸之才。被薦於別科。不製。058_215d是冬登科。明廟朝。官至領相。諡成安。

[朴紹]
○朴紹字彦胄。高麗直臣朴尙衷之後也。眞率無僞。表裏如一。見之者皆謂玉人。篤志好古。且有文藻。被薦於別科。先登式年壯元。以是免禍。庚寅。爲司諫。與同僚議去金安老。約以明日啓之。時權輗爲大諫。蔡無擇爲正言。仕罷。公往見友人任楗言之。楗曰。君之同席者。皆可信乎。公愕然。初不料蔡其黨也。卽往大諫家。謀先逐正言。正言已到權家。心旣爲一。翌日見敗。歸陜川田里而卒。子應南,應福。皆登科爲大憲。應順以國舅封潘城府院君。孫東賢,東老及東善,東說,東望,東亮。曾孫恒,燁,炡,潢,漪登科。多至宰列。

058_216a[權檣]
○權檣字濟甫。橃之弟也。先登式年科。拜弘文正字。陞博士。被斥爲龍宮縣監。憤恚縱酒而死。

[進士李文楗]
○進士李文楗。忠楗之弟也。沈厚夙成。篤於孝友。戊子。及第。官至承旨。乙巳。被禍。

[生貟全顔齡]
○生貟全顔齡。沃川人。有學識。甲申。及第。官至正言。沃川人立書院祀之。

[進士金湘]
○進士金湘。聞慶人。沈靜寡言。登科官至郡守。

[進士元繼蔡]
○進士元繼蔡有志操。先登式年科。官至判書。

[金振宗]
○金振宗所尙堅確。戊子及第。乙巳。以典翰被謫而卒。

[生貟金麟孫]
○生貟金麟孫。改名舋。壬午。登科官至參議。

058_216b[進士許]
○進士許。癸未。及第。官至贊成。以僞勳削奪。

[生貟邢士保]
○生貟邢士保。居昌人。有孝行。壬午。登科官至典籍。

[進士趙光佐]
○進士趙光佐字季良。以薦拜持平。禍作見罷。辛巳。杖殞。

[生貟尹光齡]
○生貟尹光齡字彦叟。以薦拜刑正。謫于庇仁。丁酉。蒙放。爲林川郡守。轉拜副正而卒。林川父老聞公死。悲悼不已。各出奠具。來祭墓下。號懶齋。

[宋好禮]
○宋好禮。好智之兄也。兄弟同赴薦科。不第。爲報恩縣監。以恪謹職事。賜表裡。己卯。削奪。辛巳。杖流而卒。

[朴遂良]
○朴遂良字君擧。江陵人。朴訥無華。孝行甚篤。中廟命㫌閭。以遺逸拜龍宮縣監。剖决如流。庭無留訟。己卯。罷皈。058_216c自號三可亭。與朴公達詩酒自娛而終。

[盧㻶]
○盧㻶。固城人。少時遇術士問命。術士曰。君遇歲편002寅。擢魁。翌年己卯。當按本道。第恨一欠耳。書一句儷文曰。屛去螓首蛾眉。三韓失色。案絶熊掌豹胎。百獸率舞。公曰。余本無意科第。且至戊寅。當過五十。豈有登第按節之理。士歎曰。第記之。及至戊寅。以遺逸徵。直拜主簿。翌年。拜本道都事。適因監司有故。受符印行公。幾至數月。時罷女樂减膳品。其言皆驗。遆拜正郞。十二月。奪資還鄕里。

[進士李思儉]
○進士李思儉。禮山人。性本廉謹。處貧自若。孝行卓異。戊寅。以遺逸授參上職。累轉監察。己卯。罷職歸鄕里。病革。戒058_216d子曰。吾無行稱墓表。只書進士李某之墓。

[生貟奉文祥]
○生貟奉文祥字祥之。薦授禧陵參奉。先時祭享。海松子皆齒决。公始用鍼鉗壓破之。至今遵用。己卯。坐罷。辛巳。被誅。

[崔澐]
○崔澐字澐之。世居全義。嘗與冲庵同游學。薦科不第。以遺逸爲黃磵縣監。政簡訟理。吏畏民悅。己卯。坐罷歸鄕。李信告金大成嘗言容我者。崔澐與李允儉而已。拿推。全家徙江界而卒。

[參奉盧友明]
○參奉盧友明。咸陽人。學術端正。禍作罷。

[參奉柳孟達]
○參奉柳孟達。林川人。孝行卓異。禍作罷。

058_217a[佐郞鄭瓊]
○佐郞鄭瓊。孝行卓異。學問該通。

[師傅睦希曾]
○師傅睦希曾。有操行。

[生貟許䃢]
○生貟許䃢。廉介謹愼。官府使。

[都事洪士俯]
○都事洪士俯。廉謹自守。

[參奉金琩]
○參奉金琩。謹愼不苟。

[參奉李光植]
○參奉李光植。有學行幹局。

[都事李世蕃]
○都事李世蕃。有學行操守。

[金克讓]
○金克讓。保寧人。左相克成之弟也。官至郡守。

[縣監崔祥]
○縣監崔祥。有操行。

[郡守李誾]
○郡守李誾。有學行操守。

058_217b[進士金安道]
○進士金安道。有學行。領相銓之子。官至郡守。

[師傅呂希臨]
○師傅呂希臨。存心不苟。

[參奉金萬億]
○參奉金萬億。謹愼好學。

[參奉金錫弘]
○參奉金錫弘。有學行。禍作罷。

[生貟愼謙]
○生貟愼謙。有操行。官至郡守。

[判官朴璨]
○判官朴璨。孝廉有才。官至郡守。

[進士李若水]
○進士李若水字止源。若氷之弟也。禍作日。以䟽頭被拿。諸生爭先就囚。如恐不及。囹圄已盈。械杻亦乏。以蒿索係頸者。聚於鍾樓。大臣請勿問。乃赦之。辛巳。拷訊流平海。移禮山而卒。

058_217c[朴繼孝]
○朴繼孝。三嘉人。氣度剛正。居喪盡禮。

[生貟宋錫賢]
○生貟宋錫賢。靈光人。孝友有幹能。

[生貟林末孫]
○生貟林末孫。水原人。有操行。敎誨不倦。

[生貟李宇慶]
○生貟李宇慶。延慶之弟也。有學行器識。

[進士鄭世卿]
○進士鄭世卿。有孝行。

[生貟申匡祿]
○生貟申匡祿。有學行。孝友至誠。

[李煦]
○李煦有才識。居家靜養。有古人風。

[進士李百祿]
○進士李百祿。有行撿。

[進士申命和]
○進士申命和。醇謹有學行。

[生貟朴世勳]
○生貟朴世勳。世熹之兄也。有才識。

058_217d[生貟禹弼舜]
○生貟禹弼舜。有學行。

[進士李世䧺]
○進士李世䧺。篤志好學。不苟營生。

[朴斗南]
○朴斗南。持身不苟。操行特異。

[文濬]
○文濬。篤志好古。

[韓繼兪]
○韓繼兪。篤實志學有才。

[魚得漢]
○魚得漢。固城人。有學術。

[陳騫]
○陳騫。篤志好古有才。

[金始昌]
○金始昌。有學行。

[生貟卞璧]
○生貟卞璧。居昌人。有學問器識。事親無違。

[兪如舟]
○兪如舟

058_218a[金胤宗]
○金胤宗 詳見儒士中

[尹瓛]
○尹瓛。驪州人。志節方正。有學行。

[李允文]
○李允文。忠州人。

[生貟金嵩宗]
○生貟金嵩宗。陰城人。

[生貟朴以洪]
○生貟朴以洪。昌平人。用心醇謹。孝悌夙著。

[進士崔弼成]
○進士崔弼成。扶安人。奉母至孝。才兼文武。

[進士金應淸]
○進士金應淸。盈德人。所守謹誠。責人以善。

[進士李仁堅]
○進士李仁堅。榮川人。存心廉直。不苟進取。

[生貟朴德孫]
○生貟朴德孫。咸安人。好學敬長。上順鄕里。

[進士琴元貞]
○進士琴元貞。奉化人。孝養其母。友愛兄弟。

058_218b[生貟李涏]
○生貟李涏。仁同人。才行過人。

[進士孫季暾]
○進士孫季暾。聞慶人。廉直剛正。有學術。

[生貟金世寶]
○生貟金世寶。淸道人。居喪啜粥。且有才藝。

[生貟張應斗]
○生貟張應斗。長水人。孝悌忠信。才學兼備。

[生貟李蠏]
○生貟李蠏。羅州人。才行兼備。踐履篤實。

[進士李蘭孫]
○進士李蘭孫。溫陽人。

[金增]
○金增。淸州人。

[鄭韶]
○鄭韶。南陽人。好文學。母喪斷指。

[生貟申世卿]
○生貟申世卿

[生貟李永佑]
○生貟李永佑。用心不苟。立志耿介。

058_218c[許礎]
○許礎。志操不苟。有才氣。

[金仁範]
○金仁範。有氣節有才。

[文繪地]
○文繪地。有志篤行。

[生貟朴蕃]
○生貟朴蕃。有孝行學術。

[尹居莘]
○尹居莘。有學行。

[生貟宋彌昌]
○生貟宋彌昌。有才行。

[生貟李善長]
○生貟李善長。有操守。

[進士吳希端]
○進士吳希端。學行有才。

[進士洪縢]
○進士洪縢。好善樂誨。不應擧。授官不起。

[柳子房]
○柳子房。居昌人。有操行。孝親信友。通經史。

 
중종조 3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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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종조 3
35년(경자, 1540)

○ 7월. 문무 2품 이상에게 명하여 유일(遺逸)의 선비를 천거하게 하였다. 좌의정 홍언필(洪彦弼)은 권습(權習)을, 좌찬성 소세양(蘇世讓)은 최계성(崔繼成)을, 판윤 김안국(金安國)은 서경덕(徐敬德)을, 형조 판서 유인숙(柳仁淑)은 성수침(成守琛)과 조성(趙晟)을, 형조 참판 김정국(金正國)은 우성훈(禹成勳)을, 병조 판서 유관(柳灌)은 신백령(辛百齡)을, 대사성 이언적(李彦迪)은 김취성(金就成)과 조식(曺植)을, 지중추부사 권벌은 금축(琴軸)을, 대사헌 남효의(南孝義)는 정홍익(鄭弘翼)을, 호조 참판 장적(張籍)은 김대유(金大有)를 천거했는데, 모두 한 시대의 인사 중에서 최대한 가려 선발한 것이었으며, 그 밖의 수십 명도 모두 이름난 선비였다. 상이 전조(銓曹)에 명하여 재능을 헤아려 관직을 제수하도록 하였다.

 
전모편(典謨編)
어진 이 구하기[求賢]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진 사람을 보려고 하면서 그 도리로 하지 않으면 마치 그 사람이 들어오기를 원하면서 문을 닫아 버리는 것과 같다. 대저 의리는 길이요, 예절은 문이니, 군자(君子)만이 이 길을 밟고 이 문을 출입하는 것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대동(大東)에, ‘주도(周道)의 평탄하기가 숫돌 같으니, 그 곧기가 화살과 같도다. 군자가 밟는 바요 서민이 우러러보는 바이다.’ 하였다.” 하였다.

○ 선조조(宣祖朝)에 부제학 이이(李珥)가 경연에서 아뢰기를, “옛날에는 ‘학문(學問)’이란 명칭이 없어, 일상의 사람이 행하는 도리가 모두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할 바로서 별도로 정해진 명목이 없었으니, 군자는 오직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행할 뿐이었습니다. 후세에는 이 도리가 밝지 않아 이에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행하는 사람을 ‘학문하는 선비’로 이름하였습니다. 이 이름이 서게 되자 도리어 세상 사람들의 지목하는 바가 되어, 터럭을 불어 흠을 찾아 혹은 위선(僞善)이라 지목하여,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숨겨서 점차 학문이라는 이름을 피하도록 만들었으니, 이것이 후세의 큰 근심입니다. 임금은 모름지기 학문을 주장하여 세속에서 이러니저러니 비방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학문이란 어찌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단지 일상생활 속에서 옳은 것을 찾아 그것을 행할 뿐입니다.” 하였다.
○ 효종조(孝宗朝)에 《시경(詩經)》 백구장(白駒章)을 강론하였는데, 그 주(註)를 외우며 이르기를, “이 주는 참으로 적절하고 타당하다. 예부터 임금과 신하 사이는 뜻이 부합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한신(韓信)이 초(楚)나라 사신을 대하여 역시 ‘말하면 들어 주고 계획하면 따라 준다.’는 등의 말로 물리쳤으니, 과연 말하면 들어 주고 계획하면 따라 준다면 어진 이가 어찌 임금을 떠나려고 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 상이 보위에 오른 초기에 전 참의 김집(金集), 전 지평 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 전 자의(諮議) 권시(權諰)ㆍ이유태(李惟泰), 전 현감 최온(崔蘊)이 제일 먼저 소명(召命)을 받고 왔는데, 객지에서 겪을 음식에 대한 어려움을 염려하여 쌀과 고기를 내렸으며, 송시열과 이유태의 어머니가 늙고 또 병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쌀과 반찬 및 약물(藥物)을 보내 주도록 하였다. 그들을 부르는 데 지성스러웠던 면으로 말하자면, 올라올 때 가교(駕轎)를 탈 것을 명하였고, 그들을 추운 날씨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 주려고 초구(貂裘)를 벗어 주기까지 하였다. 장령 조극선(趙克善)이 병들었을 적에는 털옷을 내려 덮어 주고 내의(內醫)를 보내 구완하게 하였으며, 그가 죽자 호조 낭관에게 명하여 상사(喪事)를 돌보게 하고 또 날마다 중사(中使)를 보내어 감호하게 하였다. 무릇 ‘선비’라는 이름이 있는 이들을 모두 수소문하였고 그들을 등용하고서는 보살핌이 매우 넉넉하였으니, 유학을 숭상하는 성대함이 시종 한결같았다.
○ 비국(備局)이 아뢰기를, “초야에서 부름을 받은 사람으로서 경연(經筵)을 겸임하는 일은 이미 재결을 받았습니다. 파격적인 겸대가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만, 듣기에 선조조(宣祖朝) 때 유신(儒臣) 성혼(成渾)이 경연을 겸하지 않고 단지 한관(閒官)의 직함으로 경연에 입시하였다고 하니, 선조조의 예에 따라 다만 각각 본직의 직함으로 참여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 상이 언젠가 사대부들이 술을 좋아하고 노닐며 담소하는 풍조를 근심한 적이 있었는데, 이후원(李厚源)이 대답하기를, “조광조(趙光祖)가 국정을 담당하였을 적에 조심하여 행동을 고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때에도 역시 그러하였으니, 임금이 유학을 숭상하는 효험이 이와 같습니다. 지금 만약 덕이 무르익은 어진 선비가 조정에 있다면, 어찌 감히 술에 취하여 길거리를 누비고 농담과 장난으로 일을 그르치겠습니까.” 하였다.
○ 숙종조(肅宗朝)에 고상(故相) 최석정(崔錫鼎)이 차자를 올리기를, “후세의 유학자들이 또한 어찌 다 기용하기에 꼭 알맞겠습니까. 그들로 하여금 재화와 식량을 관장하게 함이 꼭 나라를 여유롭게 하려는 계책은 아니며, 무기와 병사를 다루게 함이 꼭 군사 전력을 증강하려 함은 아닙니다. 비록 그러나 경서를 담론하고 옛것을 좋아하여 명예와 조행을 갈고 닦는 선비가 조정에 많이 있으면, 관료는 공경하여 꺼리는 바가 있고 서민은 보고 본받는 바가 있어 세상 풍속이 필시 크게 무너지는 데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니, 국가에 있어 어찌 도움이 적다 말하겠습니까. 지난해 수차례 글을 올려 천거하였는데, 임용된 몇 사람은 고작 고을 원으로 나가거나 하급 관료를 담당하는 데 불과하고 사간원, 사헌부, 변방 막부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명령에 응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는 인심이 예스럽지 못하고 습속이 투박하여 조금이라도 남다른 기치를 세우면 먼저 지적하는 비판을 가하고 거듭 조정의 여러 사람이 어지럽게 제재하여 발을 붙이기가 더욱 어려우니, 그들이 거취에 대해 스스로 가볍게 하려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를테면 지난번에 서원리(徐元履), 윤순거(尹舜擧), 정양(鄭瀁) 등 여러 사람이 모두 천거로 나왔는데, 이미 나온 뒤에는 처지에 따라 직무에 이바지하고, 평범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반드시 명예로운 벼슬자리를 사양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나라를 걱정하는 자들이 반드시 ‘붕당(朋黨)’을 말하는데, 신의 생각에는 도학(道學)의 쇠퇴가 더 큰 걱정입니다. 만약 교육시키고 감화시켜 인재를 육성하여 조금이나마 이목(耳目)을 새롭게 함이 없다면, 또한 어떻게 이를 구제하겠습니까.” 하였다.
○ 선유(先儒) 김창협(金昌協)이 말하기를, “대저 우리나라가 과거(科擧)를 통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지만 유학을 더욱 중시하였으니, 위의 예우를 더한 바와 아래의 추천한 바가 항상 초야에 숨은 사람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본시 고고하게 자처하여 가벼이 세상에 나오지 않고 세상의 명망 또한 이미 막중하니, 만약 맹자(孟子)가 말한 천민(天民)의 일과 순경(荀卿)이 말한 대유(大儒)의 효험을 기대한다면 그 형세가 실로 더욱 스스로 닫아 감추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혹 강권에 못 이긴 뒤에야 나오면 또 부득불 두텁게 자임해야 할 것이니, 결과적으로 어긋나고 실망하여 어떤 일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에서는 마침내 유학자가 사람과 국가에 무익하다고 하지만, 그 근심은 바로 책임과 여망이 너무 지나친 데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 태조조(太祖朝)에 문무 양부(兩府)와 육조(六曹), 대간(臺諫)에 명하여 각각 현량(賢良)과 유일(遺逸)을 천거하게 하였다.
○ 정종조(定宗朝)에 6품 이상에게 명하여 각각 현량을 추천하게 하였다.
○ 세종조(世宗朝)에 하교하기를, “우리나라가 과거(科擧)로 선비를 선발하고 덕행(德行)으로 가려 천거하는 법이 없어서, 조급하게 다투는 풍조가 점점 이루어지고 청렴하게 사양하는 도리는 거의 사라졌으니, 이 점은 탄식할 만하다. 만약 몸가짐이 방정하여 절의가 있는 자, 마음가짐이 비분강개하여 곧은 말을 할 수 있는 자, 그리고 선비로서의 행실이 우뚝하여 본시 고을에 알려진 자, 재능이 특이하여 사람들에게 믿음을 받는 자가 있으면 제도(諸道)의 관찰사가 수소문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또 하교하기를, “정치의 요체는 사람을 얻는 데에 있으니, 벼슬이 그 직분에 맞으면 모든 일이 다 다스려진다. 자리에 있는 문무 관원들로 하여금 각각 용맹과 지혜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변방을 지킬 수 있는 자, 공정하고 총명하여 수령을 맡길 수 있는 자, 일의 조리를 분명하고 자세히 알아 번거롭고 까다로운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자를 천거하게 하라. 만약 사정(私情)을 따라 그릇되게 천거하여 탐관오리가 정치를 어지럽혀 그 피해가 민생에 미치게 되는 경우가 있으면, 법에 따라 죄를 적용하여 결코 용서함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 문종조(文宗朝)에, 동반(東班)의 시산(時散) 6품 이상, 서반(西班)의 시산 4품 이상에게, 각각 몇 사람을 천거하되 감히 사정을 따라 그릇되게 천거하는 자가 있으면 처벌하고 용서하지 않겠다고 명하였다.
○ 세조조(世祖朝)에 제도(諸道)의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산간 초야에 깊숙이 숨어 있으면서 평소에 명망이 있지만 자천(自薦)할 수 없는 자를 계수관(界首官 지방 각도의 감영이 있는 우두머리 고을)으로 하여금 천거하게 하라.” 하였다.
○ 중종조(中宗朝)에 제도(諸道)에 명하여, 유일(遺逸)을 수소문하되 만약 탁월한 자가 있으면 재능에 따라 녹용(錄用)하게 하였다. 또 태학(太學)에 명하여, 유생 중에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통하고 정치 체제를 잘 아는 자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 상이, 전조(銓曹)가 온갖 일 처리에 있어 쓸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을 근심한다는 말을 듣고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대신(大臣)이 평소에 재능 있는 사람을 많이 천거하였다면 어찌 사람이 부족하다는 한탄이 있겠는가.” 하자, 조광조(趙光祖)가 아뢰기를, “국가가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 비록 과거 시험을 중요시하지만, 대단히 어진 사람이 있다면 어찌 과거에 구애될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 조사(朝士)들이 대신(大臣)을 보려 하지 않는 이유는, 청탁하는 것으로 비칠까 봐 부끄러워하기 때문입니다. 대신이 만약 성심으로 찾는다면 어찌 인재가 없음을 근심하겠습니까. ‘좋은 사람이 없다.[無好人]’는 말은 도 있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공(周公)은 성인인데도 먹던 음식을 뱉어 내고 감던 머리를 움켜쥔 채 뛰어나갈 만큼 선비를 찾는 데에 다급하였는데, 더구나 지금의 대신이겠는가.” 하였다.
○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본도(本道) 가운데 행동이 올바르고 학식과 재능이 있는 선비 노진(盧珒), 김옹(金顒) 등 30여 인을 천거하였는데, 대부분 김종직(金宗直)과 김굉필(金宏弼)의 문인들이었으므로 사림(士林)이 흥기하였다.
○ 문무 2품 이상에게 명하여 유일(遺逸)의 선비를 천거하게 하니, 좌의정 홍언필(洪彦弼)은 권습(權習)을, 좌찬성 소세양(蘇世讓)은 최계성(崔繼成)을, 판윤 김안국(金安國)은 서경덕(徐敬德)을, 형조 판서 유인숙(柳仁淑)은 성수침(成守琛)과 조성(趙晟)을, 형조 참판 김정국(金正國)은 우성훈(禹成勳)을, 병조 판서 유관(柳灌)은 신백령(辛百齡)을, 대사성 이언적(李彦迪)은 김취성(金就成)과 조식(曺植)을, 지중추부사 권벌(權橃)은 금축(琴)을, 대사헌 남효의(南孝義)는 정홍익(鄭弘翼)을, 호조 참판 장적(張籍)은 김대유(金大有)를 천거하였는데, 모두 한 시대의 뛰어난 인물들을 선발한 것이고, 그 나머지 수십 명의 사람들 역시 이름이 알려진 선비들이었는데, 상이 전조(銓曹)에 명하여 재능에 따라 관직을 제수하게 하였다.
○ 명종조(明宗朝)에 제도(諸道)에 명하여 유일의 선비를 천거하도록 하니, 경기에서는 성수침(成守琛)과 조욱(趙昱)을 천거하고, 청홍도(淸洪道)는 성제원(成悌元)을 천거하고, 경상도에서는 조식(曺植)과 이희안(李希顔)을 천거하였는데, 마침내 6품의 직책에 바로 서용할 것을 명하였다.
○ 생원과 진사 가운데 경학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사람을 이조와 예조로 하여금 대신과 의논하여 아뢸 것을 명하였는데, 학생 이항(李恒), 전 참봉 성운(成運), 전 별좌(別座) 한수(韓修), 전 참봉 남언경(南彦經), 전 참봉 임훈(林薰), 진사 김범(金範), 이상 여섯 사람이 명에 응하자 아울러 6품의 직책에 특별히 서용하였으며, 역마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도록 하였다.
○ 선조조에 유일의 선비를 천거하도록 명하니, 경기 관찰사 윤현(尹鉉)이 성혼(成渾)을 천거함으로써 명령에 응하였다.
○ 인조조(仁祖朝)에 팔도에 명하여 향거 이선(鄕擧里選 지방의 인재를 중앙의 관리로 뽑아 올리는 제도)의 법을 거듭 밝히도록 하였으니, 이조가 아뢴 말을 따른 것이다.
○ 상이 하교하기를, “몸가짐이 방정하고 덕행이 있는 자, 의리를 탐구하고 학술이 있 는 자, 압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히 공무를 집행할 수 있는 자, 용맹과 지혜가 남보다 뛰어나서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자, 지기(志氣)와 절개가 확고하여 직간(直諫)할 수 있는 자, 세상의 사무에 통달하여 일 처리가 밝고 민첩한 자를 벼슬자리에 있는 문무 관리들로 하여금 각각 아는 바를 천거하도록 하라. 또 제도(諸道)의 감사로 하여금 수소문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문무 3품 이상이 각각 두 사람씩을 천거하였다.
○ 또 하교하기를, “하늘은 한 시대의 인재를 내어 한 시대의 쓰임에 이바지하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쇠란(衰亂)의 원인은 세상에 인재가 부족한 데에 있지 않고 다만 어진 이를 구하는 마음이 지극하지 못한 데에 있다. 어진 이는 자신을 천거할 리가 없고 군자는 쉬이 물러가는 의리가 있으니, 만약 공경대부가 추천하여 뽑고 끌어올리지 않는다면 그 어찌 공훈과 업적을 떨쳐 일으켜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겠는가. 정부(政府) 및 팔도 감사로 하여금 나의 지극한 마음을 인식하여 인재를 수소문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 숙종조(肅宗朝)에 영상 김수항(金壽恒)이, 일전에 박세채(朴世采)와 이상(李翔)이 진달한 ‘인재를 널리 찾아야 한다’는 사안에 대하여 널리 물어서 처리할 것을 요청하니, 좌상 민정중(閔鼎重)과 이조 판서 이숙(李䎘)이 아뢰기를, “종전에 별도의 천거는 단지 조사(朝士)를 시켜서 하였기 때문에 견문이 넓지 못하여 천거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정조(政曹) 역시 착실하게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만 형식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여 특별히 방백(方伯)과 주군(州郡)에 인재를 선발하여 추천하도록 신칙해서 임용한다면 인재를 얻는 길이 넓을 것입니다.” 하므로, 상이 정조(政曹)에 명하여 절목을 의정(議定)해서 시행하도록 하였다.
○ 상이 하교하기를, “인재의 묘연함이 요즘보다 심한 적이 있지 않았다. 별도로 선발하는 방법이 없을 수 없으니, 삼공(三公)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및 육경(六卿)과 삼사(三司)의 장관들로 하여금 재능과 인망이 있는 사람을 각각 세 사람씩 천거하여 녹용(錄用)의 바탕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 선조조에 고상(故相) 이준경(李浚慶)이 연중(筵中)에서 아뢰기를, “오직 대신(大臣)만이 사람을 천거할 수 있고 사람을 임용하는 방법에는 또 순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백인걸(白仁傑)이 감히 관례를 뛰어넘어 사람을 천거하여 6품에 특별 제수하였고, 천거된 사람은 또 인망에 맞지 않으므로 일이 매우 부당합니다.” 하니, 유성룡(柳成龍)이 나아가서 아뢰기를, “천거된 사람이 만약 수상(首相)의 말대로라면 진실로 취하기에 부족하지만, 수상의 말도 병폐가 있음을 면하지 못합니다. 가령 백인걸이 과연 어진 이로서 이미 재상의 반열에 있다면 어찌 감히 천거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만약 반드시 대신이 추천하여 이끌기를 기다린 뒤에 임용한다면, 초야의 어진 이가 누락되었다는 한탄이 필시 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하였다. 물러 나온 뒤에 이준경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유 아무개가 나의 실수를 지적하여 의논한 것은 그 말이 매우 옳다.” 하였다.
○ 인조조에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선조조에 재신(宰臣) 노수신(盧守愼)이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을 천거하였으니, 역시 사람을 알아보았다고 이를 만하다. 큰 재목은 평범한 곳에서 나오지 않은 적이 없으니, 만약 단지 재주와 모양이 똑똑하고 민첩한 사람만을 취한다면 어떻게 사업을 이룩하겠는가.” 하였다.
○ 대제학 정경세(鄭經世)가 경연에서 아뢰기를, “이항복(李恒福)이 선조조에 이순신을 애써 천거하였고 정충신(鄭忠信)을 발탁하였으며, 기타 재능에 따라 임용한 사람도 대부분 이항복이 좌우에서 찬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의논하는 자들이 임진왜란을 극복한 공로를 평가함에 있어 이항복을 으뜸으로 추대하였습니다.” 하였다.
○ 숙종조에 고상(故相)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기를, “재능이 있는 사람은 난세를 만나면 장수로서의 역할을 잘하고 치세를 만나면 정승으로서의 역할을 잘하여 상황에 따라 하지 못하는 것이 없지만, 만약 때를 만나지 못하면 단지 보통 사람일 뿐입니다. 선조조의 인재들을 예로 들면, 이항복, 이덕형(李德馨), 이원익(李元翼), 윤두수(尹斗壽), 유성룡 같은 여러 신하들의 경우 평시에는 단지 글이나 잘 짓고 이름만 화려할 뿐이었으니, 어떤 사람이 ‘이들이 난리를 평정하고 중흥의 위업을 세울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나라 사람들이 모두 옳게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큰 공로를 세우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 재주와 위업이 한(漢)나라의 등우(鄧禹)와 마원(馬援)보다 못하지 않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순신의 경우는 본래 보잘것없는 말단이었고 권율은 본시 명망이 없었으니, 만약 때를 만나지 못하여 미관말직으로 늙어 죽었다면 사람들은 그들이 불세출의 재주를 품고 있었는지 알지 못한 채 지금은 사라진 지 오래일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늙어 죽는 사람들 가운데 또 어찌 몇 명의 권율이나 이순신과 같은 인재가 있는 줄 알겠습니까. 신은 또 생각건대, 비록 그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직책으로 시험해 보지 않으면 또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 고상 이원익(李元翼)이 차자를 올리기를, “편안히 물러나 스스로를 지키는 사람은 향곡(鄕曲)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더욱 조정의 사이에서 찾아야 합니다. 대체로 조정에 벼슬하는 선비는 그 마음에 간직한 세리 염치(勢利廉恥)가 서로 경중(輕重)이 됩니다. 세리가 경하면 염치가 중하니, 행하여 부합하지 않는 점이 있으면 구차스럽게 용납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주D-001]말하면 …… 따라 준다 : 한신(韓信)이 한왕(漢王) 유방(劉邦)을 도와 초군(楚軍)을 대파한 공로로 제왕(齊王)에 봉해지자, 그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낀 초왕(楚王) 항우(項羽)가 무섭(武涉)을 사자로 보내어, 옛날에 자신을 섬겼던 친분도 있고 하니 한(漢)을 버리고 자신을 따라 천하를 삼분(三分)하자고 제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신이, 옛날에 자기가 항우의 밑에 있을 적에는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지만 지금 유방의 밑에서는 자신의 능력에 맞는 충분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강하게 피력하여, 그 제의를 거절하면서 한 말이다.
[주D-002]맹자(孟子)가 …… 효험 : 맹자가 신하의 부류를 논하면서, 출세하여 자기의 도(道)를 온 천하에 행할 수 있으면 나가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이름 없이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사람을 천민(天民)이라고 지칭하였고, 순자(荀子)가 말하기를, “대유(大儒)는 아무리 궁하게 살더라도 왕공(王公)이 그와 명성을 다투지 못하고, 대부(大夫)의 지위에 있으면 한 나라가 그를 독차지하지 못하며, 백 리의 땅을 다스리면 천 리를 가진 나라가 그와 승부를 다투지 못한다. 현달하면 천하를 통일시키고 곤궁하면 홀로 그 이름을 귀하게 하니, 중니(仲尼)와 자궁(子弓)이 이런 사람이다.” 하였다.《孟子 盡心上》 《荀子 儒效》
 
중종 13년 무인(1518,정덕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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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15일 (임자)
사정전에 나아가 유생 최계성 등 3인을 강하고 정광필 등에게 《대학》을 강론하게 하다

상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유생 최계성(崔繼成) 등 3인을 강(講)하고, 이어서 입시 재상(入侍宰相) 정광필 등에게 《대학(大學)》을 강론하게 하였다. 정광필이,
“여기서 말한 ‘남의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 남의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물고, 남의 아버지가 되어서는 자(慈)에 머물고, 남의 자식이 되어서는 효(孝)에 머물고, 나라 사람과 사귐에는 신(信)에 머문다.’ 등의 말은 사람들이 보통으로 하는 말인데, 임금에게만 반드시 ‘인(仁)’이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는 부제학 조광조를 지목하며,
“부제학 등이 자세히 말하시오.”
하니, 조광조가 아뢰기를,
“남의 임금이 되어서 인에 머문다는 것은 임금 혼자만이 하는 것이요 다른 사람은 인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이란 천지(天地)가 만물을 낳는 이치로서 끊임없이 낳고 낳아서 가장 긴절한 것입니다. 임금은 천하에 임금 노릇하고 일국을 다스리므로 인덕(仁德)을 체득하여 만물이 각각 그 본성을 얻게 한 뒤에라야 천지에 동참(同參)할 수가 있습니다. 인(仁)은 사덕(四德)을 모두 다 포함하고 있으므로 인도(仁道)를 다 실행하게 되면 예(禮)·의(義)·지(智) 세 가지는 자연 그 속에 다 있게 됩니다.”
하고, 김정은,
“천지의 대덕(大德)을 ‘낳는 것[生]’ 이라 하는데, 인은 낳는 이치이므로 천지의 큼과 만물의 번성함도 다 인에 포함되었습니다. 임금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려서 하늘과 다름이 없으므로 인이 큰 것입니다.”
하고, 이계맹은,
“인도(仁道)가 지극히 크니, 인(仁)을 행하면 절로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신용개가,
“임금은 형벌하고 죽이는 일이 있는데도 인(仁)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하니, 조광조가,
“인도(仁道)를 다하게 되면 부당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임금은 인에만 힘쓰고 다른 것은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지공 지정(至公至正)하고 광명 정대(光明正大)하여 사의(私意)가 털끝만큼도 없으면 힘을 쓰지 않고도 일마다 다 이치에 합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저 하늘은 봄에는 만물을 내고 여름에는 만물을 자라게 하고 가을에는 만물을 거두어들이고 겨울에는 만물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천리(天理)와 절문(節文)은 인(仁)과 예(禮)이고, 재제(裁制)하고 계교(計較)하는 것은 의(義)와 지(智)이나, 지극한 곳에 이르러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하고, 고형산은,
“임금의 도는 만물을 내는 것을 주재하므로 ‘인에 머물렀다.’ 한 것이며, 또 각각 한 가지 일을 들어서 문왕(文王)의 덕을 아름답게 여긴 것이요, 임금이 홀로 인(仁)을 행할 뿐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고, 이계맹은,
성인(聖人)이 말하기를 ‘내가 인을 좋아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하였고, 또 ‘성(聖)과 인은 내가 어찌 감히 당하랴!’ 하였으며, 안자(顔子)는 아성(亞聖)이었으되 석 달 뒤에도 인에 어그러짐이 없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도(仁道)는 지극히 커서 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조광조는
“순일한 도리가 심원(深遠)하여 조금도 끊임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 털끝만한 사욕(私慾)이 있어 천도(天道)처럼 쉬지 않게 된다면 안자(顔子)라도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고 이계맹은,
“사람마다 다 ‘안자는 아성(亞聖)이었는데도 끊임없이 행하지 못하였으니 우리가 어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끝내 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조광조는,
“나에게 관계되는 일을 참으로 하고자 한다면 본연(本然)의 이치가 처음부터 부족한 것이 아닌데, 어찌 하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안당이,
“《대학》에서는 인(仁)만 말하였는데, 사마광(司馬光)이 또 명(明)·무(武) 2자를 덧붙인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조광조가,
“이 말은 지(智)·인(仁)·용(勇) 삼달덕(三達德)의 말과 같습니다. 대개 이미 인(仁)하였더라도 사리의 당부(當否)를 변석(辨析)하지 못하면 임금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밝게 살피는 것이요, 이미 밝았더라도 쓰고 버릴 때에 과단하게 하지 못하면 또한 임금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용감하게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마공(司馬公)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하고, 신용개는,
“인도(仁道)가 순일(純一)한 천리(天理)에 이르게 되면 더할 나위가 없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유약한 데에 빠지기 쉬우므로 반드시 인(仁)과 무(武)가 서로 도와 나가야 폐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온공(溫公)이 인을 말하면서 명(明)과 무(武)를 아울러 말한 것입니다.”
하고, 이유청은,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송 진종(宋眞宗)은 인유(仁柔)는 넉넉하였으나 강단(剛斷)은 부족하였다.’ 하였으니, 반드시 인(仁)·명(明)·무(武) 세 가지가 구비한 뒤에야 가합니다. 한 장제(漢章帝)의 우유부단하고 자혜(慈惠)한 것을 인(仁)이라 할 수 없고, 한 선제(漢宣帝)의 명실(名實)을 따져서 밝힌 것을 명(明)이라 할 수 없고, 한 무제(漢武帝)의 전쟁을 남용하여 무덕(武德)을 손상한 것을 무(武)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고, 김정은,
“합하여 말하면 다 인(仁)의 일로서, 인을 행하는 데 명(明)과 무(武)를 갖추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천도(天道)로써 말하면, 봄에는 생장(生長)하고 가을에는 숙살(肅殺)하니, 숙살하는 것은 곧 굳게 응결(凝結)하는 것으로 이것 역시 기르는 마지막 일입니다.”
하고, 조광조는,
“실과로 비유하면 알이 찬 뒤에 씨앗이 생겨서 후일에 다시 나니, 이것이 이른바 ‘끊임없이 낳고 낳는다.’는 뜻입니다.”
하였다. 신용개가,
“《대학》에서 인(仁)을 말하되, 평천하장(平天下章)에 이르러 혈구(絜矩)를 논하면서 그 뜻을 다하였으니, 혈구는 곧 인(仁)의 공용(功用)입니까, 공효(功効)입니까?”
하니, 김정은,
“혈구는 곧 서(恕)이니, 서가 익숙해지면 곧 인이 됩니다. 《대학》은 학자(學者)의 일을 주로 말하므로 인을 말하고서 또 혈구를 말하였습니다. 성인의 전체(全體)는 다만 인뿐이요,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은 학자의 일로서 한 발자국, 반 걸음으로 이를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서를 행함이 있어야 안에 이르게 됩니다.”
하고, 조광조는,
“위에 있는 이가 늙은이를 늙은이로 대접하면 백성이 효도하는 기풍이 일어나며, 위에 있는 이가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면 백성이 공손하는 기풍이 일어나니, 혈구(絜矩)의 도리를 다하면 일마다 물건마다 각각 그 적의함을 얻어서 인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아! 계속 밝혀 공경하여 머무신다.[於緝熙敬止]의 경(敬) 한 자는 한 편(篇)의 주의(主意)입니다.”
하고, 김정은,
“이 경(敬)자는 인(仁)·경(敬)·효(孝)·자(慈)·신(信) 다섯 가지의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조광조가,
“그 자세한 것을 들을 수 있습니까?”
하니, 김정이,
“경(敬)은 위로 천리와 아래로 인사에 관통하는 공부이니, 초학(初學)으로부터 ‘중(中)과 화(和)를 이루어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생장하는 것[中和位育]’과 ‘독실히 공손하매 천하가 태평해지는 일[篤恭而天下平之事]’에 이르기까지 다 경(敬) 한 자에서 나왔습니다.”
하였다. 조광조가,
“무슨 말입니까?”
하니, 김정이,
“경(敬)자의 뜻은 모두 자기 혼자만을 삼가는[謹獨] 데 있습니다. 비록 은미(隱微)하고 혼자 있을 때라도 방심(放心)을 거두어들여서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조금도 사심이 없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조광조가,
“나의 기(氣)가 정숙(整肅)하면 자연 전일을 주력하여 마음이 다른 데로 가지 않아서, 사물(事物)이 닥치면 응접함이 정세(精細)하고 마땅히 한 가지 말과 한 가지 행동도 모두 예에 알맞게 됩니다. 보통 사람을 기가 흐려서 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못합니다.”
하고, 김정이,
“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은 다 경(敬)에서 나오므로,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전일하면 온갖 이치가 밝게 갖추어지며, 움직이는 곳에만 보일 뿐 아니라 조용한 속에서도 스스로 공경하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적연(寂然)히 움직이지 않는 중에도 마른 나무나 죽은 재와는 같지 않고 마음에 주장하는 바가 있어서, 보고 듣지 않더라도 보고 듣는 이치는 다 갖추어졌습니다.”
하였다. 이유청(李惟淸)이,
“‘아, 계속 밝혀 고경하여 머문다[於緝熙敬止]’는 경(敬)이 ‘남의 신하가 되어서는 경에 머문다[爲人臣止於敬]’는 경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하니, 김정이,
“‘공경하여 머문다[敬止]’는 경은 대강(大綱)이고 ‘경에 머문다[止於敬]’는 경은 소목(小目)입니다. 대개 음식이나 은미(隱微)한 속에서도 부끄러운 일이 하나도 없으면 바깥에 나타나는 것이 광명 정대해지며, 조정에서의 일도 모두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경을 독실히 하면 천하가 태평해진다.’ 한 것이고, 하룻동안 마음에 공경을 다하면 천하가 곧 태평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는 까닭의 이치는 진실로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하고, 신용개는,
“잠깐 사이에라도 마음이 혹 흐트러지면 사욕(私慾)이 끼어듭니다. 처음에 조금 잘못되면 마침내는 매우 심하게 잘못되므로 선유(先儒)가 경(敬)으로써 성학(聖學)의 시종을 이루는 것으로 삼았습니다. 비록 성인이라도 이 경(敬)이 없으면 그 마음을 전일하게 하지 못합니다.”
하고, 조광조는,
“경(敬) 한 자는 말로 형용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항상 분명하여 게으르고 해이한 때가 없고, 전일을 주력하여 다른 데로 가지 않으며,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엄정하게 하는 것은 곧 마음이 흐리거나 게을러지지 않는 공부입니다.”
하고, 김정은,
“마음이 감촉해도 움직이고 감촉하지 않아도 움직이는 것은 마음의 출입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움직여도 경(敬)을 지키는 것은 오히려 할 수 있지만, 적연히 조용하게 있을 때에는 마음이 정착하는 바가 없어서 경을 지키는 공부가 어려우므로 선유(先儒)들도 흔히 흐트러지고 그른 마음이 끼어든 것입니다.”
하였다. 조원기(趙元紀)가,
‘왕은 경(敬)으로 처소를 삼으소서[王敬作所]’의 경(敬)과 위에서 말한 경(敬)의 뜻이 같습니까?”
하니, 조광조가,
“같습니다. 이 편은 임금의 일을 주로 말한 것입니다. 임금은 천하와 일국을 주재하므로 능히 공경으로 임하면 천하가 공경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권벌(權橃)이,
“인도(仁道)는 지극히 크니, 하늘에 있어서는 원(元)이 되어 만물을 생장하게 하고, 사람에 있어서는 인(仁)이 되어 만물로 하여금 그 본성대로 성취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임금의 도는 인(仁)보다 더 큰 것이 없으므로 《대학》에서 ‘남의 임금이 되어서는 인에 머문다.’ 하였으며, 선유(先儒)가 인(仁)의 뜻을 해석하기를 ‘사욕이 없고 천리(天理)에 합치한다.’ 하였습니다. 지금 좌우의 신하에게 인도를 강론하게 하니 매우 아름다운 뜻입니다. 그러나 말할 적에만 강론하고 시행하는 데에는 나타나지 않으면 이는 인정(仁政)을 행한다는 소문뿐입니다. 전하께서 아랫사람을 인애(仁愛)하는 마음이 지극하다고 하겠으나, 신은 사정에 치우친 마음이 죄다 버려지지 못하였다고 여깁니다.
노산군(魯山君)은 후사가 없어서 제사가 끊어지게 되었으니, 동종(同宗) 사람으로 후사를 삼아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 것이 무슨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태까지 그렇게 하지 않으시니 마음이 지공 지정(至公至正)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전에 노산군 부인 송씨(宋氏)가 상언(上言)하여 ‘노비(奴婢)를 해평군(海平君)【정미수(鄭眉壽)이다.】에게 주도록 해달라.’ 하였습니다. 해평군은 노산군에게 외친(外親)이 되는데, 자식이 없어 죽고 부인만 있습니다. 부인이 죽으면 노산군의 제사가 끊어질 것은 틀림없습니다. 옛날 성왕(聖王)이 망한 나라를 일으켜 주고 끊어진 세대(世代)를 이어준 것은 천하를 공평하게 하는 마음입니다. 옛날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나라를 쳐서 이기고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을 봉해 주었으니, 보통 사람의 심정으로 본다면 아비를 죽이고 아들을 봉해 주는 것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동종 사람을 노산군의 후사(後嗣)로 삼아서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 것이 무슨 혐의가 있겠습니까? 지하에 계시는 조종(祖宗)의 영혼도 어두운 저승에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노산군의 일은 선왕(先王)의 후사(後嗣)를 사가(私家)에서 제사지내게 할 수 없으므로 이 일을 의논한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 결정하지 못하였다. 대신의 의견에는 어떠한가?”
하매, 정광필이 아뢰기를,
“전에 신이 이미 후사를 세울 수 없다는 뜻으로 말씀드렸습니다.”
하고, 신용개는,
“이는 매우 큰일입니다. 전일 의논할 때에 신이 이미 다 말씀드렸습니다.”
하고, 안당은,
“전일 의논할 때에 신도 남곤(南袞)과 의논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일이 대체로는 좋으니, 지금 노산군의 후사를 세우더라도 어찌 딴마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논의를 결정할 경우에는 사세가 또한 난처합니다.”
하였다.
김정국이 아뢰기를,
“인(仁)이란 마음의 덕이고 사랑의 이치인데, 마음의 덕은 인의 전체(全體)이고 사랑의 이치는 인의 한 단서입니다. 천도(天道)로써 말씀드리면 인은 곧 원(元)이고, 형(亨)과 이(利)·정(貞)이 그 속에 포함됩니다. 천도는 원에서 형, 형에서 이, 이에서 정에 이르고, 정에 이르면 다시 원이 됩니다.
임금의 덕도 인에 극진하게 되면 의(義)와 예(禮)·지(智)가 다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비근한 예로 말씀드리면 은애(恩愛)로 구휼하는 것은 인이고 형벌(刑罰)로 제재하는 것은 의입니다. 그러나 죄가 있는데도 형벌로 다스리지 않아서 다시 죄에 빠지게 하면 인도(仁道)가 따라서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허물이 있는 사람을 다스려서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여 유사(有司)에게 간범(干犯)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인입니다. 저 사마광(司馬光)이 반드시 인(仁)·명(明)·무(武) 세 가지를 말한 것은 일을 거행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의 대체는 천리(天理)가 순수하여 사욕이 털끝만큼도 없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사욕이 있으면 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국가에서 노산군과 연산군(燕山君)의 후사(後嗣)를 세우지 않은 것은 매우 공평정대한 일이 아닙니다. 당우(唐虞)와 삼대(三代)의 일은 오래되었거니와, 삼가 국초(國初)의 일을 상고해보건대 정순군 이방번(定順君李芳蕃)·소도군 이방석(昭悼君李芳碩)이 태종조(太宗朝)에 현륙(顯戮)을 당하였으나, 세종(世宗)께서 즉위하여 마음에 측은(惻隱)하게 여겨 성심(聖心)으로 결단하시어 특별히 명하여 광평대군 이여(廣平大君李璵)·춘성군 이당(春城君李璫)을 정순군과 소도군의 후사로 삼으셨는데, 어찌 노산군의 후사 세우는 것에 의심하십니까? 이로써 본다면 인을 행하는 도리에 거리가 먼 것입니다.”
하고, 문근(文瑾)은 아뢰기를,
“노산군의 후사를 세우는 일은 대신과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태종께서 방석을 죽이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세종께서 아랫사람의 논의를 기다리지 않고 특별히 예조(禮曹)에 명하여 그 후사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이제 노산군의 일로써 본다면 조종(祖宗)의 뜻을 더욱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고, 권벌이 아뢰기를,
“심온(沈溫)·이방석 등은 모두 태종께 죄를 졌는데 심온의 자손은 세종조가 끝나도록 녹용(錄用)되지 못하였고, 이방석과 이방번은 즉위하신 초기에 다른 일을 할 여가가 없는데도 맨 먼저 후사를 세우게 한 것은 종성(宗姓)을 중히 여겨서입니다. 대저 천하와 국가를 위하는 이는 천하를 공도(公道)로 삼으므로 비록 삼대(三代)의 일일지라도 다 힘써 행해야 하는데, 하물며 우리 조종께서 일찍이 행하시던 것임에리까? 말할 적에만 강론하고 시행하는 데에는 나타나지 않으면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인은 사랑하는 이치이며, 선왕(先王)의 후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니, 측은하게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조광조가 아뢰기를,
“지금 아뢴 이 말이 매우 아름답고 행하기도 어렵지 않습니다. 또 권벌·문근·김정국은 망령된 사람이 아니니,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 이와 같이 아뢰겠습니까? 이 일은 지난해에 의논하였으나, 논의하는 이가 서로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하기 때문에 그 의논이 중지되었으니, 성상의 마음으로 결단하여 행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신인들 어찌 그 일의 시비를 모겠습니까만, 조종의 일이기 때문에 감히 가벼이 의논하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바야흐로 신하들이 성덕(聖德)을 믿으므로 자기의 뜻을 앞을 다투어 진달(陳達)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맑고 밝지 못하면 간사한 무리가 오히려 이 말로써 화를 꾸밀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아랫사람이 감히 반드시 행하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전하께서 만기(萬機)의 여가에 생각이 미치지 못할까 염려해서입니다. 그리고 노산군의 일은 신 등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고, 연산군은 생령(生靈)에게 해독을 끼친 임금입니다. 신 등이 그 사이에 무슨 사의(私意)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노산군의 후사를 세우는 일은 어찌 사의가 있어서 어렵게 여기는 것이겠느냐? 다만 선왕께서 행하지 않으신 것을 과인(寡人)의 대에 와서 결단하여 후사를 세움은 옳지 못한 듯하다.”
하매, 안당이 아뢰기를,
“이는 바로 소릉(昭陵)을 회복한 일과 같습니다. 예로부터 임금이 대명(大命)을 받을 적에 하늘이 주고 사람이 귀복(歸服)하니 어찌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세가 난처함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노산군의 후사를 세우은 것은 소릉을 회복하는 것과는 경중(輕重)이 다르다. 무왕(武王)의 덕으로써 비교하면 좋겠다.”
하매, 김정이 아뢰기를,
“능호(陵號)를 회복하는 것은 가벼운 듯하나 실지로는 어렵고, 후사를 세우는 것은 중한 듯하나 실지로는 쉽습니다. 그러나 망한 나라를 일으켜 주고 끊어진 세대를 이어주는 것은 제왕(帝王)의 지정 지공한 도입니다. 이제 노산군의 후사를 세운다 하더라도 현재나 후세에 누가 감히 이의(異議)가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이른바 ‘전대의 공렬(功烈)보다 더 빛난다.’ 한 것이 이 한 일의 거행에 있습니다.”
하고, 김정국이 아뢰기를,
“온공(溫公)이 인(仁)·명(明)·무(武)를 임금의 대도(大道)로 삼은 것은 끊어진 세대를 측은히 여기는 것은 인(仁)이 되고, 끊어진 세대를 이어야 함을 아는 것은 명(明)이 되기 때문인데, 상께서 다 갖추셨습니다만 결단하는 데는 무(武)로 하시지 못할 뿐입니다. 임금의 도는 이 세 가지에 벗어나지 않으니, 과연 이 세 가지에 능하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고 신용개가 아뢰기를,
“일마다 다 스스로 독단(獨斷)해서는 불가하고 여러 사람의 의논을 채택하여야 합니다.”
하고, 이계맹은 아뢰기를,
“이와 같은 일은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해서는 불가하고 위에서 결단해야 합니다.”
하고, 신용개가 아뢰기를,
“어찌 노산군의 후사를 세우는 데에 감히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다만 형세가 난처함이 있을 뿐입니다.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하고, 정광필이 아뢰기를,
“어찌 여러 차례 의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김정이 아뢰기를,
“하(夏)·은(殷)·주(周)는 시대가 다른데도 성인(聖人)이 망한 나라를 일으켜 주고 끊어진 세대를 이어준 것은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마음이 있어서입니다. 노산군 등의 일과 같은 것은 더욱 측은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전대(前代)에 죄를 당한 종실의 자손이 먼 변방에 나누어 유배(流配)되어, 천적(賤籍)에 이름이 오르고 노예(奴隷)들의 사이에서 심부름하면서 매를 맞는 고초를 면하지 못하는 사람이 흔히 있으니, 지극히 공정한 마음으로 본다면 또한 생각함직한 일입니다. 잔미(孱微)한 후손이 어찌 선조(先祖)의 일에 간여하겠습니까? 본부(本府)는 또 들으니 이 같은 사람이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하면 자못 금지하고 매질한다 하는데, 그것은 그 정상을 다 캐내어 계품(啓稟)해서 그 죄를 다스리고자 해서입니다. 조종(祖宗)의 골육(骨肉)으로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성치(聖治)에 흠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선조의 죄는 경중(輕重)이 어떠한지 모르겠으니 모름지기 사리를 헤아리고 경중을 따져서 비록 선원적(璿源籍)에는 올리지 못하더라도 천역(賤役)을 면하게 해주고, 적몰(籍沒)한 물건을 돌려주어서 그 생활을 도와주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원전】 15 집 480 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 *사상-유학(儒學) / *왕실-종친(宗親) / *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주D-001]강(講) : 강독 시험.
[주D-002]사덕(四德) : 인(仁)·의(義)·예(禮)·지(智)의 덕을 말한다. 《중용(中庸)》 30장.
[주D-003]절문(節文) : 일을 알맞게 갖추는 것.
[주D-004]성인(聖人)이 말하기를 ‘내가 인을 좋아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하였고, 또 ‘성(聖)과 인은 내가 어찌 감히 당하랴!’ : 여기서 말한 성인은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위의 말은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나오는데 덕(德)을 이루는 일이므로 보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아래 글은 《논어》 술이(述而)에 나오는데, 공자가 겸양하여 하는 말이다.
[주D-005]안자(顔子)는 아성(亞聖)이었으되 석 달 뒤에도 인에 어그러짐이 없지는 못하였습니다. : 안자는 공자의 제자로 이름은 회(回). 맹자(孟子)와 함께 아성(亞聖)으로 불린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공자가 ‘회(回)는 그 마음이 석 달을 인(仁)에 어그러지지 않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날로 한 번, 달로 한 번 이를 따름이다.’ 했다.” 하였다. 인(仁)이란 마음의 덕으로, 마음이 인에 어그러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욕이 없고 그 덕을 지닌다는 뜻이다. 주자(朱子)는 여기에 대해 “안자도 석 달 뒤에는 어그러짐이 없지는 않으나 석 달 뒤에 한결같이 어그러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도리(道理)에 있어서 오랜 뒤에 잠깐 끊어지고, 한 번 끊어졌다가는 곧 접속된다. 만약 조금도 간단이 없으면 곧 성인이니 안자가 성인에게 한 계단 미달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하였다.
[주D-006]삼달덕(三達德) : 이 말은 《중용》 20장(章)에 나온다. 달덕이란 천하 고금의 사람이 행해야 할 덕이다.
[주D-007]온공(溫公) : 사마광의 시호.
[주D-008]인(仁)을 말하되, 평천하장(平天下章)에 이르러 혈구(絜矩)를 논하면서 그 뜻을 다하였으니, : 《대학(大學)》 9장(九章)에 “한 집이 인(仁)하면 일국이 인에 흥기된다.” 하였고, 《대학(大學)》 10장(十章)에 “소위 천하를 평치함이 그 나라를 다스림에 있다 함은……이 때문에 군자는 혈구의 하는 도가 있다.” 하였는데, 이를 평천하장(平天下章)이라 한다. 혈구는 척도(尺度)에 맞추어 헤아려 아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혈구를 빌어서 비유한 것인데,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서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도덕상의 법칙, 곧 서(恕)의 도이다.
[주D-009]전체(全體) : 완전한 본체.
[주D-010]‘중(中)과 화(和)를 이루어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생장하는 것[中和位育]’과 ‘독실히 공손하매 천하가 태평해지는 일[篤恭而天下平之事]’ : ‘중(中)과 …생장하는 것[中和位育]’은 《중용(中庸)》 1장(章)에 나오는 말이고 ‘독실히 태평해지는 것[篤恭而天下平之事]’은 《중용(中庸)》 33장(章)에 나오는 말인데, 위의 것은 학문의 최고의 공효로서 성인이 해야 할 일을 말한 것이고, 아래의 것은 성인의 지극한 덕이 오묘하고 정미한 자연의 결과로서 중용의 최고의 공효를 말한 것이다. 중(中)은 내 마음의 바름이고, 화(和)는 내 기(氣)가 순함을 말한다.
[주D-011]‘왕은 경(敬)으로 처소를 삼으소서[王敬作所]’ : 《서경(書經)》 주서(周書) 소고(召誥)에 나오는데 소공(召公)이 성왕(成王)에게 고한 말이다.
[주D-012]원(元) : 사덕(四德)의 하나.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원(元)은 선(善)의 으뜸이다.” 하였는데, 그 주석에 “원(元)은 만물을 생장하는 시초이다. 천지의 덕이 이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므로 사시에 배분하면 봄이 되고, 사람에는 인(仁)이 되어 뭇 선의 으뜸이다.” 하였다. 형(亨)·이(利)·정(貞)과 함께 사덕(四德)이라 한다.
[주D-013]노산군(魯山君) : 복위되기 전 단종의 군호.
[주D-014]해평군은 노산군에게 외친(外親)이 되는데, : 해평군(海平君)은 정미수(鄭眉壽)의 봉호로 문종(文宗)의 부마(駙馬)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의 아들이다. 노산군(魯山君) 즉 단종(端宗)에게는 생질(甥姪)이 된다.
[주D-015]무경(武庚) : 이름은 녹보(祿父).
[주D-016]형(亨)과 이(利)·정(貞) : 원(元)과 함께 사덕(四德)이라 하는데, 이는 천지가 만물을 화육(化育)하는 덕이다.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형(亨)은 아름다움의 모임이고, 이(利)는 의리의 조화이고, 정은 일의 근간이다.” 하였는데, 주석에 “형은 만물을 생장하여 통달시키는 것이다……시절로는 여름이 되고 사람에게는 예(禮)가 된다. 이는 만물을 생장하여 각기 완수하는 바가 있게 하는 것이다……시절로는 가을이 되고 사람에게는 의(義)가 된다. 정(貞)은 만물을 생장하여 성취시키는 것이다……시절로는 겨울이 되고 사람에게는 지(智)가 된다.” 하였다.
[주D-017]당우(唐虞) : 요순(堯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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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戊寅日記 五月十五日。至十一月六日。承宣時。
正德十三年 中宗大王十三年 戊寅 a_019_423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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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月〕
十五日。晴。夕地震。是日親政。新授右副。兩殿先肅拜。以在成均館時射烏之變。辭免者再。皆不允。○酉時。地大震。至夜不止。上軫災變。御簷下。引見政府堂上及禮判南衮。迎訪闕失。都承旨及臣入參。旣出歸家。○三更臺諫請面對。從之。
十六日。雨。大妃殿先肅拜。後坐與同副直。○午初。上御簷下。引見六曹堂上及曾經六卿都入參。酉019_423b時罷。翰林柳成春等求面對。傳曰。翰林以近侍故。求面對盡言。政院豈無所欲言。其進對。○持平金湜,正言李希閔。以合司意上箚。論兵曹判書張順孫凶險媢嫉狀。許面對。而出後院。及藝文館入對。夜幾三鼔矣。
十七日。陰。上御思政殿。卯時。引見領議政鄭光弼,右議政安瑭,參贊柳聃年,崔淑生。以臺諫駁張順孫事問之。光弼等對曰。心術不正則不知。但不堪任。請遞兵曹判書。崔淑生曰。臣久同竄謫。然不能詳知其心不正事。物議則有之云云而退。命遞本職。未時。019_423c臺諫合司。來請竄逐。又云。曺繼商昨於迎訪。欲陷害士族。請皆竄逐。蓋繼商於迎訪啓云。小人希旨人主。人主慕古則以慕古悅之。虛僞成風。此人雖無人禍。必有天刑。其志欲害善類也。上皆不允。許進對。唯許兩司長官高荊山,孔瑞麟入。○五月初七日。黃海道雨雹書狀來。○酉時。忠淸監司李世膺,都事朴世熹。遣海美縣監曺世健。馳啓地震之故。初昏。上御簷下。引見世健。問道路所經震處。
十八日。雷震而雨。午後霽。太白晝見。○臣以成均館直宿。焚香時殿宇奉審不參事。歸家待命。命行公019_423d推考。午時出仕。○臺諫,弘文館合司。來啓張順孫,曺繼商事。曺則命罷職。○命臣進奏弘文館所啓辭。
十九日。晴。經筵臣入。上御經筵。○持平金湜,正言李希閔。論張,曺事。不允。○兩司弘文館合啓張順孫,曺繼商請竄逐。不允。○平安道地震書狀又來。
二十日。密雲。有朝啓經筵。○未時。命罷張順孫職。兩人皆盡奪告身。聽弘文館之言也。○副提學趙光祖入侍經筵。○臺諫合司來。不啓而退。大019_424a憲始出。○有政。高荊山戶曹判書。柳聃年兵曹判書。金淨兼同知經筵。孫澍嘉善禮曹參判。李耔嘉善大司憲。鄭忠樑直提學。柳仁淑執義。鄭瓊崔澐主簿。
二十一日。晴。卯巳午。地震。夜又震。御朝晝講。右入。○巳時。引見主簿安遇,盧㻶等。領鄭光弼,右安瑭,橃入侍。治所學及治道。上治字疑咨 㻶薦河艇才堪將帥。○兩司持平任權,正言李希閔來啓。金克愊。平常人也。資憲加不合。卜禧達。舒川郡守不合。皆不允。○夜雨。
二十二日。雨。經筵都公入。○命選有將才者陞019_424b用。從經筵高荊山,柳聃年之議。因災變慮有邊警也。○左議政申用漑差病肅拜。上引見問地震之災。○兩司所啓金克愊加,卜禧達郡守,都摠府都事李守義不合。皆不允。○昏傳旨下五原副守寶丁于義禁府獄。以沈末孫奪嫡僞造文記。看證著名罪也。
二十三日。晴。國忌無事。
二十四日。晴。午後雨。國忌。
二十五日。陰雨。母忌謁告在家
二十六日。陰雨。在家
019_424c二十七日。陰雨。御經筵。右副入。左議政申用漑,特進孫澍,金鐺,同知金淨,侍讀奇遵,說經李弘楗。○夕講大學畢。○巳時。引見薦擧人佐郞朴薰,司紙鄭琓,主簿朴遂良。遂良請均田政。議啓曰。均田誠爲美事。然重難。未可遽行。○全羅右道水使李菤牌招。命速赴任。
二十八日。始大雨。朝啓昌寧鄕吏河仁義。怨其縣監金世琬。射中罪絞待時。依允。又樂安人朴哲孫毆殺其妻罪。依允。皆賜覆。停朝講。雨且日晏故也。○議政府六曹,漢城府判尹以上。會議賓廳。○019_424d停晝講。亦雨故。
二十九日。陰雨。午後乍晴。停經筵。雨故。○宣醞于院與弘文館。○有政。崔淑生同知經筵。方有寧兵曹參判。尹煕平工曹參判。韓忠應敎兼藝文應敎。尹倬司成。李孝彥奉常僉正。朴世熹吏曹正郞。盧㻶長興庫令。鄭瓊戶曹佐郞。朴潤卿兵曹佐郞。黃士祐忠淸都事。
三十日。晴。有朝夕講。御經筵。左公文入。○政府遣舍人李元幹啓曰。昨政。主簿盧㻶爲長興庫令。草茅之士初職。參職已爲過矣。㻶今爲五品職。官爵至019_425a爲猥濫。吏曹爲政非矣。請改正。傳曰。其改之。○院啓曰。盧㻶五品職改正。殊無待賢之意。一人進退。所關非輕。敢稟命更問于三公以不可遞之意。○文招殿參奉鄭汝寬暴死。遣醫藥救之不甦。命給棺。

[六月]
一日。晴。夕大雨。御經筵。橃與同副入。○侍從,臺諫極論盧㻶不可遞之意。○檢詳柳墩來啓政府意曰。盧㻶初授參職。上來未數月。未見功能。卽爲五品職。至爲猥濫。不可不遞。已前以循資陞遷者。豈無如盧㻶者乎。且今薦擧中。必有優於㻶者矣。成019_425b宗朝。安良生以學行薦。初拜參奉。後登第爲六品職。金宏弼以師表可當人。初拜參奉。循資陞爲佐郞。見死於廢朝。祖宗朝。雖賢者。必歷試有實跡。然後陞敍。今亦歷試。有卓異之行。則遷擢爲當。
二日。大雨。自昨夕連夜。停經筵。雨故。有晝講。都公入侍。○日暈。午時。太白見於未地。○陽城地。去五月二十七日申時。風急下土雨。大木斯拔。京畿監司李自華書狀來。又江華及南陽地。去月二十七日。地震。○兵曹參判方有寧以本曹事務。請遞成均同知。依允。○夕。弘文館上疏。副提學趙光祖等。
019_425c三日。大雨。視事後。御經筵。右副入。旣出。引見富寧府使方好義,淮陽府使李萬孫。深戒愛民恤刑之意。○停晝講。雨故。○薦擧科目條件來啓。院啓曰。只以四館,成均館,六曹,漢城府各擧所知。似不廣。傳曰。雖令廣薦。猶慮應擧之人不多。以院所啓之意。更問于政府,禮曹。○司諫院啓。奉常正朴認,右通禮金綴文,訓鍊正郭順宗。皆階梯職也。右人等雖陞堂上。不合於參議。而他司正則可爲矣。請遞之。不允。○右議政安瑭。以禧陵奉審事。肅拜而出。
四日。雨。御經筵。右入侍。○權勝酷刑殺人推考。019_425d從大司憲李耔經筵啓也。○左議政申辭免。以弘文館上疏論也。○領議政鄭光弼,左議政申用漑。以屢被謗毀辭免。上命引對。陳細務而退。
五日。晴。停朝講。右議政安瑭。回自禧陵復命。因請罷免。不允。○有夕講。左承旨文入侍。○政府再請罷撰集廳。待豐年復設。皆不允曰。此廳書冊開刊。干於學問之事。不可停罷也。
六日。晴。視事。停經筵。○恤囚事馳書八道。告諭以多死囚。推刑曹官吏不愼刑恤囚之罪。
七日。晴。御經筵。同副入侍。○有晝講○憲府合司019_426a來啓。刑曹以不愼刑恤囚被推。府囚亦有死者。待罪。○傳京中外方死囚。每六月及年終。罪名及某年月囚禁。幾次受刑。物故緣由。啓聞事下刑曹。○本月初三日。京圻喬桐縣地震。
八日。晴。御經筵領事申用漑臣入侍。○有晝講○吏曹正郞金絿以堂上意來啓曰。朝廷近日多闕。而無可塡差者。且國小而貧。事簡而員宂。年又荒凶。稅入少而俸祿多。乞勿充差。且紓國用。兩便與政府議爲何如。傳曰。祖宗設官分職。已有定額。似不可輕改。然其以此意。明日賓廳議得時幷議。可也。
019_426b九日。雨。終夜雷電而雨。無事。議得故。○賓廳,議政府,堂上,刑曹,漢城府堂上,司憲府議獄囚及徵債等事。依議。命減死二人。免徵者亦多。
十日。雨。晨大雨。右李卯而仕。都韓辰而仕。○無事。雨故○決死囚。再覆啓下。先銜待罪。○咸鏡北道兵使申公濟爲下直而來。雨不發。設小酌而歸。○午時。傳曰。有暑證。停經筵。待更敎。○雨司依前來啓。憲府又啓曰。各營繕處甚多。今當避殿修省之時。請計歇處停之。依允。
十一日。陰雨夕晴。藥房提調申用漑金詮,韓效元等019_426c問安。傳曰。服藥後。氣候復常。○都公,右公因議褒貶而出。不還院。○憲府請吏曹考功司掌文官功過,勤慢,休暇。而近日擧行懈弛。請申明。從之。○憲府公事。啓許確淹延公事罪。永不敍用。命安徐判付。
十二日。晴。太白經天。左公歸司甕褒貶。○諫院始啓新本宮賜與福城君。而增制加作。以啓奢侈之端。又撤去窮人等屋。圓覺,貞陵兩寺基代折給。兩司又啓許確永不敍用。李希雍功臣削籍事。諫院啓朴認,金綴文,郭順宗階梯堂上職不合。憲府啓金克愊019_426d資憲不合。尹汝弼,尹之任,邊修,鳳山君提調不合事。傳曰。新本宮。非賜與福城君。君祿藏其家。故人言如是爾。其家舊無行廊。故內需司請造爾。餘皆不允。
十三日。陰。余袒忌。乍見次野而還。 無事。
十四日。大雨。以忌在家 無事。
十五日。陰。無事。○文昭殿提調蓮城君,戶曹參判李自堅來啓殿事。命報該曹。
十六日。晴。命議政府及六曹,漢城府曾經六卿以上。臺諫,弘文館。議勘改奏本。○下金守墩疏示。三公019_427a啓曰。觀疏意甚美。但多有改作之事。妨於成憲。似難施行。然豈無可行之事。請下該司。傳曰可。○兩司新啓楊州牧使李翰元,仁川府使柳軾不合守令。不允。
十七日。晴。無事。
十八日。陰。右公仍病。○以漕船摘奸事。左副,同副如龍山。○兵曹啓住張哈作耗於城底野人農作者之事。請招三公及知邊事黃衡,李長坤,高荊山,尹希平,崔漢弘于賓廳議得。傳曰。其亟招議之。○大妃殿誕日賀禮。命以權停禮行之。避殿故也。
019_427b十九日。晴。御經筵。副提學趙光祖,正字李認,承旨金正國入侍。講近思錄。○應敎韓忠覲親于忠淸道淸州。來路有一儒生。陳時弊三事。一言學校廢弛。二言非禮之祀當去。如昭格署,太一殿,文昭殿,延恩殿。皆非禮之祀。三。宦寺夫婦。有戾陰陽之道。宜禁絶之。言甚激切。終不言其名。命忠親啓。又牌招議政府。迎問其事可否云。所啓皆當。但文昭殿等事。先王所爲。雖非前古帝王之制。臣子勢難改變。右相安瑭曰。祭祀煩瀆。三時行之。似不甄潔。然先王所爲。不可輕議云云。竟不能施行。
019_427c二十日。晴。無事。○兩司所啓仁川府使柳軾,楊州牧使李翰元命罷職。李宗仁,申玉衡,皇甫謙。姑勿敍用。餘皆不允。
二十一日。立秋 晴。有不時經筵。同副入侍。○持平金湜,獻納柳庸謹。始啓革昭格署。不允。○ 是夕。宿于元沖家。老泉大椿從宿。
二十二。 舍人李元幹以三公意來啓曰。避殿已久。節亦改矣。請復正殿。傳曰。近來。災變已甚。不可復殿。○領議政鄭光弼來啓正案過半畢。
二十三日。雨陰。軍威訓導朴世亨上疏陳弊。○傳019_427d忠淸道監司李世應本職遞差。以臺諫啓也。
二十四日。雨。校書正字鄭承周上小學。進上四十件。○撰集廳堂上金詮,南衮,崔淑生。磨勘小學諺文反譯畢來上。呂氏鄕約幷入。
二十五日。雨。大妃殿誕日。承旨等問安于殿門。饋酒三巡而退。○午。宣醞餠果于院。
二十六日。陰。都目政事始。是日。右李成童嘉善爲監司。忠淸 成童病不求退。物議譏之。至是遷官。
二十七日。晴。夕陰。夜大雨。判中樞金詮來啓曰。聞臣昨日禮曹判書受點。禮曹掌典禮。非臣所能堪。臣019_428a又嬰病。氣力不足。尤不能堪任。請遞之。三啓。依允。○鄭忠樑爲同副。
二十八日。陰。政。下批南衮崇政左贊成,知經筵,弘文館大提學。李繼孟崇政禮曹判書,知經筵。丁壽岡兵曹參判。李沆特加嘉善大司憲。李成童特加嘉善忠淸監司。朴好謙吏曹參議。朴壕右承旨。權橃左副承旨。金正國右副承旨。鄭忠樑同副承旨。新授成雲判決事。終制 申光漢典翰。鄭士龍司諫。蘇世讓司成。金世準奉常副正。曺致雲內贍副正。南世準掌令。金守墩司藝。許安國內資僉正。柳庸謹吏曹正郞。019_428b崔山斗持平。丁玉亨獻納。金安老慶州府尹。李思鈞全州府尹。河艇金海府使。
二十九日。陰。午驟雨。巳時。不時召對。講近思錄。副應敎閔守元,承旨文瑾入言將來將帥柳栽等以外官徑遞爲京職未便事。○政府專數。禮曹判書李繼孟議奏請使事。仍啓光州判官柳栽,永興判官金秀淵有將才。徑遞爲都摠府經歷未便。傳曰。仍任。○忠淸監司李成童。以無才德且病。辭免三啓。不允。○ 孝道與李認來話

[七月]
一日。晴。韓忠來言。前日所啓儒生。乃稷山居權019_428c鐸也。卽啓之夕。京畿監司李自華得權鐸所居。馳啓來入。○憲府所啓南世準掌令不合。李成童監司不合。金璠其行邪穢。勿齒仕版。江西縣令李暢一字不知。不合守令。德山縣監李孟華不辨是非。請皆遞之。○祈晴祭命停。晴故也。○傳曰。掌令遞差。餘皆不允。○申時。咸鏡監司書狀。住張哈爲其兄莽哈。報復設計。數來侵掠城底野人。野人等號泣來告請救援。不救援則請入城避難。不然。從便散去云云事。命明早會賓廳議得。
二日。晴。御不時經筵。仍引見政府,兵曹及知邊事019_428d黃衡,高荊山,李長坤,尹希平,崔漢弘,金克成等議邊事。領相鄭光弼以衆議啓曰。住張哈不可輕擊生釁。請待兵使招致敎後。答辭更議云云。高嶺僉使林千孫。防禦則可矣。無應變才。請遞。從之。○傳于戶兵曹判書曰。將帥可爲人及北道軍糧。無爲布置。可也。○曹潤孫所納火燻兵符。改造。
三日。晴。正言李忠楗來啓曰。司諫鄭士龍有才藝。然於朋友失信。夫婦恩薄。嫡妾紊亂。不合諫官。傳曰。此人豈不可爲諫官。但勢不相容。其遞差。○第十四密符改造。○諫院又啓襄陽府使秦澹老病。○019_429a傳曰。典艦提調尹之任,司甕提調鳳山君墩,邊修,忠淸監司李成童,吏曹參議朴好謙,德山縣監李孟華遞差。
四日。 有政○襄陽府使秦澹,宣川郡守申永徹命遞之。從諫也。○崔淑生特加崇政議政府右贊成。趙元紀右參贊。李自健工曹判書。柳雲特加嘉善忠淸監司。孔瑞麟吏曹參議。徐克哲大司諫。申光漢特超六級大司成。柳仁淑超二資弘文直提學。○ 夜往弘文館。見孝直李認打話。
五日。晴。太白晝見已久。諫院啓大司諫徐克哲長019_429b官不合。執義金鏐臺諫不合。命皆遞之。○ 夕見次野
六日。晴。太白晝見。有政。○午後。持平崔山斗來自其鄕光陽。啓曰。臣到本道。聞六月儒生都會。試官潭陽府使朴以寬,淳昌郡守兪仲翼。以文廟從祀鄭文忠公爲賦題。儒生篇中有孟軻戰國之寒士。兩程伊洛之黨流等語。仲翼稱善。以寬以爲不可。仲翼堅執以爲善。只抹此句而置第一。使士流不知趣向。請罷仲翼。推以寬。從之。○柳仁淑超四級大司諫。朴守儒執義。
七日。晴。宗廟,永寧殿秋享大祭香祝親傳。○獻019_429c官領議政鄭光弼,南陽君洪景舟。○實錄閣開閉。考見太祖請諡行狀事入啓。依允。奏請使意也。○兩司來啓前所啓。諫院獨啓工判李自健不合六卿。仁川府使柔懶不合守令。尙衣直長權世憲迷劣。重林察訪曺景文年老躁妄。請罷黜。且六品以上。則曾已沙편001。參外官則未沙편002。庸流溷雜。請令該曹沙편003。傳曰。不允。李自健。果是老病人也。然今無當次宰相。且自健豈不能爲工曹判書乎。權世憲,曺景文等事。問于該曹處置。○副修撰權雲來啓曰。本館官員多闕。請充差。命塡差。
019_429d八日。雨。兩司以前辭來啓。憲府又啓。崔淑生今爲貳相人也。有文武之材。用心亦善。然贊成貳公。弘化之職。而次輔三公。未 拔擢用之。奉常副正李允湜。猥瑣不合本職。忠翊府都事金義錫。侵刻其弟元錫。元錫雖狂悖。然乃其父寵子也。不念父意。薄待如此。彝倫斁矣。請罷職。○吏曹郞李希閔啓曰。重林察訪曺景文。年老生員。謂其可用故用之。權世憲庸劣事未及聞。而以別坐例遷。臺諫豈無所聞而啓之。宜皆편004去。傳曰。金義錫,權世憲,曺景文。皆改差。餘皆不允。○兵曹啓薦擧文科別試啓下。武科何以019_430a爲之。傳曰。其問于政府。
九日。晴。永川居生員曺龍謙上箋。請奏請使請字。以正改之。傳曰。問于三公。舍人啓曰。此事未可施行。○ 夕與都左公。訪次野于伯王第飮。夜分而歸。
十日。陰。夜李孝叔來話 ○無事。
十一日。雨。有朝講。同副入。○右議政安瑭啓。吏曹正郞柳庸謹。文武兼全。有將才。宜升堂上預養。察訪金麟孫。亦有武才而文。年過四十。宜爲邊方府使。府使朴英。有識武臣。年將五十。亦宜升堂上云云。○同副啓柳雲以大司成爲監司。爲人宜於師表。乞停019_430b監司。爲本館同知。上曰。師表雖重。監司亦不可輕。右議政啓曰。聞儒生之議。副提學趙光祖宜爲同知。光祖進以後進年少。力辭曰。今吏曹參判金淨有物望。宜爲同知。相讓極力。○有政。
十二日。晴。視事。○晉州人殺人偸鷹。同副進啓。鷹進上有弊。至有如此殺人者。宜革。傳曰。祖宗朝內鷹房。今皆廢革。只爲上殿與祭祀。鷹牌猶存。而累次減數封進。今其更加磨鍊減數事。問于兵曹。○執義尹自任來啓。辭職甚力不得。午時退去。○撰集廳左議政申用漑,判中樞金詮,左贊成南衮。進續019_430c東文選幷箋。且啓曰。序使某製進。傳曰。在下可製者製之。可也。
十四日。晴。視事。○辰時。上御思政殿。引見赴京使。奏請南衮。正朝方有寧。奏請副李耔。兼掌令韓忠。質正官崔世珍。書狀官盧克昌。酒五行。賜各弓袋筒箇。○三公,六承旨,史官等入。○成均館兼同知趙光祖來辭甚懇。不允。退去不肅拜。○典翰柳庸謹上辭職箚子。傳曰。合於其任。故不聽。
十五日。晴。卯時。上率百官拜表。○生員金山居崔光濟疏入。黃鍾疏亦入。言朴君孝曖昧事。
019_430d十六日。晴。御經筵。特進官李坫云。金國光有經濟之才。掌令尹自任曰。安有人貪而能經濟者乎。世祖朝大臣。無一可人矣。○右尹黃孟獻以親在尙州。呈歸養狀。不允。再啓不得。○兼成均館同知趙光祖來又力辭。不允退去。○崔光濟疏。命下攸司。黃鍾疏無可施行。留院事傳敎。○向化生員金渭上疏。論三公不職及雉岳山上元寺作佛事事。
十七日。雨。大丘私奴。其主田致寬殺害事及晉州京子銀孫殺麻田事三覆。皆允。○辰時。御經筵。右副入。○上元寺作佛事事。命下書推考以啓。○019_431a命遞大同察訪金世鈞。○冠禮,祭禮報府事。宋洗精聽去。
十八日。晴。御經筵。左副入。○左尹黃孟獻,修撰孝獻,都事世獻。病母相見事呈辭。受由而去。○命遞金瑛慶尙左道敬差官,李坤承文院提調。從臺論也。○傳曰。薦擧別試時。宜講經事。問于政府。啓曰。薦擧必少。若講經則入格者數少。於事體埋沒。請勿講。他別試亦宜臨時取稟定規。○持平崔山斗。以昭格署無縣幡祈禱事誤啓。待罪。
十九日。雨。病不仕。○密陽僵柳自立書狀來。
019_431b二十日。晴。視事。御經筵入侍。○量田巡察使安潤德以病辭。允之。
二十一日。晴。御朝夕講。同副入。○憲府始論有災怪。留浦船亦無。倭變可慮。而慶尙左道兵使成世貞。年老儒生。雖優於撫御。有變則短於防禦。請遞差。
二十二日。朝雨。是日。都韓加拜兵曹參判。○御經筵○有政。韓效元嘉善兵曹參判。文瑾都承旨。 朴壕左承旨。 權橃右承旨。 金正國左副。 鄭忠樑右副。 柳仁淑同副。 宋欽大司諫。柳沃鍾城府使。朴薰持平。朴遂良龍宮縣監。太斗南開寧。沈希佺丹019_431c城。
二十三日。灑雨或晴。八月節國忌無事。
二十四日。晴。正言金光復以院意啓曰。大司諫宋欽陪八十病母。今在靈光。前任全州尹。以母病辭。今未可必其來也。而院無長官。獻納魚泳濬亦在外。官員多闕。請遞大諫。傳曰。可遞。急速政事。○義城民來獻麥穗三岐。院以今年麥不盛。却之不啓。
二十五日。陰。是日受由。
二十六日。早朝發行。過廣州。見牧使柳思敬。夕到利川。見府使同年慶。俶。仍宿。
019_431d二十七日。曉。照火而發。到陰竹。縣監權恰出見。朝飯後。到可興驛。洗足穩憩。晝飯。向忠州。牧使金欽祖出對。飮酒至夜。
二十八日。平明發行。到安阜朝飯。踰嶺到聞慶。縣監朴堧出見。晝食後。到幽谷而宿。尙州判官權愚將如京。先到驛矣。對話良久。
二十九日。欲明而起。察訪具思兼來見。自監司行次。夜半馳到矣。朝發。由徑路到龍宮。龍宮前縣監金煕壽率妻子將發。相見于衙內。乍酌而出。校理張玉陪其慈堂將發。見我小酌先出。金希說亦來在矣。姜世019_432a亨,全懷瑾姪審言來見。朝飯。向醴泉。見郡守成世俊,榮川郡守權五紀,前判官李守英,家兄伯懼于西軒房。生員韓從傑,辛耆,洪彥國亦來見。俄向東軒見監司。韓都事,辛孟卿設酌。李守英,洪彥國,成世俊亦參。未罷先出。到家兄家。與兄及應祥兄,濟甫弟同宿。朝。成世俊以監司意來問起居。設酌。韓洪辛三生員及鄭雅,鄭繼繼到。呈壺果。行酒後向安東。到金地。謁伯叔于亭。智用,士鈞,仲吉,張以文等十餘人先來。招妓設酌矣。乍飮而出。到伯叔家又飮。夜已昏矣。夜發路險。危苦而行。到岐村。省覲家君。已上皆晴

019_432b[八月]
一日。兩城主來見設酌。暮。兩公向豐山。欲見張玉也。
二日
三日。向乃城酉谷。省叔父母于避病所。俄謁母墳。泣拜而歸。朴瑨亦到。欚亦在矣。
四日。奉化縣監甄繼宗持酒來見。不拔叔亦到。通仲,虞卿,訓導金龜息皆來。飮罷而散。
五日。早向安東。道入南參奉家朝飯。而行到刀只村。點心少憩。入府見監司韓公瑞。都事辛孟卿,張校理玉。亦先到矣。暮。監司設酌。酒闌。府使,判官。皆入行酒。019_432c醉後。歸別室下處。監司與都事,校理,府使共到。再飮而罷。
六日。朝食後。與張子剛見監司。辭出。遂與都事國老,府使棐仲。歸見一亭。點心後。上舟到映湖樓下小酌。晡時先出。往所等村齋庵。夜已深矣。仲吉與朴瑨兄弟三人先待矣。共宿。
七日。行祭于祖父母墳前。鄭長水,朴上將與叔父來參。伯父則來而不參。還寺飮福後。向刀只村留宿。
八日。向榮川見姊氏。俄而李謙,朴珩,金連同等來訪小酌。點心後。向乃城。道見金安鼎震卿。遂拜器之柩019_432d前。又發。道見李進士。暮到酉谷。
九日。步至川石中。待震卿不來。金劉持酒來。與叔父,叔泛。以素飮酒而還。宿于齋庵。
十日。朝行祭于外祖父母墳及母墳。食後。鳳城守設酌于川邊。伯玉以江原災傷敬差亦來。至夜而罷。伯玉。文瓘字也。
十一日。告行。來安東家。
十二日。行祭于先妣祖父母與外祖父母。亦以紙牋祭。夕。安東判官德璋來見。
十三日。午後。張子剛與權叶之來。飮酒點心後。叶之019_433a歸甕泉宿。子剛宿于奴幕。
十四日。行茶禮。家君與伯父,叔父參焉。仲父以病不來。客則兵使柳湄,張玉,權五紀,李賢輔,醴泉成世俊,禮安申撙,察訪李連枝,南宣,義興縣監浩原,敎授仲舒,義城林萬根,安東敎授金演。劇飮而罷。
十五日。鄭長水,朴上將,鄭僑,朴琛來設酌。午時。告辭。道謁伯父家。到所夜祭曾祖父母兩墳。伯父與五寸叔叔均,進士彥倫,趙孟文,裵碩宗曁諸宗人。來到飮福。乘昏到豐山。十四日。客皆先到矣。見張玉與兵使。困甚不得玩月。
019_433b十六日。子剛行榮宴于仇多本。余及兵使柳湄,敬差官文瓘,府使李賢輔,判官朴璨,尙牧鄭宗輔,榮川叶之,醴泉成世俊,義城縣令林萬根,軍威縣監趙忠孫,義興縣監李洺,其子前博士李胖,察訪南宣,判官秦澹令玉。作新來戲。金希說以直赴殿試。亦參新來戲。飮後。兵使先出。余次出。宿于多仁縣。
十七日。兵使餞余設小酌。成世俊,趙忠孫亦參。食後。兵使先發。余次出。到洛東遞馬點心。到善山。善守兪啓沃出對。敍舊懽飮。見月出而發。到開寧。知禮縣監安瓘。先以事到縣見余。
019_433c十八日。朝食後。到賀老省婦翁。洞中知舊多來見。
十九日。星牧金祐吉甫,安瓘來訪。曺伸及察訪李仁孫亦來。婦翁以庶母服制行素。夕。婦翁先入下庭。開樂而飮。已上皆晴
二十日。雨。告辭而出。到金泉驛。吉甫李仁孫先在樓待之。與登樓飮餞而出。値雨著蓑帽而行。困甚到供城。日已暮矣。點心後到尙州。夜已二鼓矣。
二十一日。朝對牧使小酌。點心後發行。牧使先到北川。鋪筵見待。不得已飮餞。金匡律。進士同年也。來謁參飮。後到咸昌猪谷。縣監與洪彥昇,柳希任等。待于019_433d江頭。洪彥邦又到。飮飯後。入柳希任家設酌。俄而文瑞,濟甫。自醴泉來參。夜深各散。余與文瑞,濟甫留宿。
二十二日。朝食而發。濟甫,柳希任從行。見頤叔于里安蔡承權第。暫話而別。踰嶺到嘉恩小憩。點心後。聞縣西北數里許有石窟。馳往照火以入。有石柱玲瓏。如張蓋數丈。仰觀有石乳錯落。如玉雕鎪。天巧可愕。深入則有流川淸淺。凜乎其不可入。遂還出。夕。到曦陽山洞口。盤石淸溪。數里不止。山形如畫。眞仙境也。有石山中立。屹然半空。高大可仰。所謂曦陽山也。有石在洞口溪邊。其大如屋。問之則前八九年時。雷雨019_434a後所墜也。觀一大碑龜趺龍首。乾德三年立者。荒基遺礎。蕎麥離離。所謂陽山寺也。小西有巨刹。所謂鳳巖寺也。寺中又有靑石大碑。羅時學士崔致遠所撰。高大且剝落。讀不可連文。借僧榻以憩。夜未久。聞寺僧喧鬨索火聲。乃太守朴堧尋我來也。夕食散宿。頤叔。金安老字。
二十三日。朝食。更與朴堧等流覽寺中。登彌勒殿。觀南山拱揖而前。霜葉初丹如錦繡。間以松柏。可敬可愛。未午各跨馬。入寺上洞口數里。觀所謂白雲洞者。層巒疊石。澗水如練。松杉落落。赤葉如渥。煮松蕈膾019_434b雉膏。酒數行。朴堧先醉嘔吐。日已暮。興未闌而出。西行數里。泉石淸幽。亦可愛也。檣也從我而行踰嶺。昏到延豐。
二十四日。朝見縣監金壽昌。飯後發向槐山。見主守申濂。飯後到陰城。日已暮矣。見縣監羅俔孫對飯。有韓孝騫者。自京來。招見于亭。
二十五日。蓐食而發。丁彭者來見濟甫。到無極點心。過竹山佐贊。暮至陽智。
二十六日。曉發到龍仁。見主守洪義孫。點心而發。見公碩于廬所。又到洛生點心。到良才遞馬入京。日已019_434c入矣。已上皆晴○公碩。金世弼字。
二十七日。晴。肅拜。○臺諫呈辭。以請革昭格署不得也。弘文館亦啓。
二十八日。晴。臺諫如前呈辭。弘文館如前。
二十九日。晴。三公來啓請從臺諫之言。臺諫呈辭。弘文館亦啓。院與藝文館亦啓。皆不允。
三十日。晴。三公,六卿來啓請從臺諫之言。以東堂臨近故也。藝文館弘文館亦啓。院亦啓。○午時。命遞臺諫。以其不署經監察。無試官。將罷東堂故也。是日政事。三更而罷。

019_434d[九月]
一日。晴。國忌。○弘文館副提學趙光祖,應敎閔守元,著作沈達源來啓請革昭格署。○新大司諫申光漢,執義金希壽,司諫閔壽千等肅拜後。來啓前臺諫遞差未便。請革昭格署。否則不可就職。累啓。不允。○持平丁玉亨,正言具壽福,黃士裕,獻納崔山斗等。肅拜後一啓。以未署經退去。院亦啓。○趙光祖請面對。上出丕顯閣引見。都承旨參入。夜而罷。
二日。小雨。申光漢,金希壽,閔壽千等呈辭而去。命招就職。累辭。弘文館終日啓。入夜亦啓。傳曰。吾019_435a計已定。欲罷之矣。今日。大臣不來。故不得議之耳。明日。當與大臣議爲之矣。院請罷漏時。開門召大臣爲之。允可。○儒生五上書。宗親嵩善正等亦上書。
三日。首相鄭光弼,左相申用漑未明而至。右相日出後至。○傳衆議欲革昭格署。俯從輿情革之。○是日。東堂三所試官差出。
四日。正言具壽福來啓曰。李希雍功臣削事。曾已盡啓。禮賓正金克恢貪汚。且非理好訟。請罷黜。以上前啓 忠淸都事鄭嗣宗。暗劣不合掌令。李世茂。放浪不端謹。不合。請遞差。不允。
019_435b五日。經筵朝夕講始。○濫入儒生等二十三人及入門官推考事。昨日來啓。命推。○忠淸都事鄭嗣宗。於經筵命遞。○東西蠶室絲看品。○兩司來駁人物。○憲府獨啓古阜郡守文敬仝浮放。不合臨民。請遞之。皆不允。
六日。視事。○兩司啓文敬仝,金克恢事。宋蕆不勤職。司評不合事。金敬思無賢能。升爲判官事。李世弘被駁未久。不宜升爲訓練僉正事。許䃢不宜爲正郞。金克恢事。依允改正。
七日。國忌。
019_435c八日。國忌。
九日。臺啓宋蕆司評遞差。○ 夜招見校理子敬,修撰朴潤卿。校書正字李迪亦來。直長金雍來。
十日。有朝啓。
十一日。李自堅以典醫提調來啓。提調李耔赴京。醫科試取時。獨試與否。問于該曹與三公。
十二日。無事。
十三日。御經筵。右副鄭入侍。○政府,兵曹,知邊事大臣。會議于賓廳。以住張哈招來與否及巡邊使下送與否也。○醫科提調李耔赴京。今在提調李自堅019_435d與禮曹堂上。一同試取事。傳說。
十四日。御經筵。左公朴入侍。得病先出去。○夕講入侍。○文敬仝古阜郡守遞差。
十五日。受朝賀。午時。御思政殿。儒生崔繼成,朴恒,安士彥講書。侍客三公。禮判李繼孟,戶判高荊山,刑判李惟淸,參贊趙元紀,大司憲金淨,副提學趙光祖入侍論難後。臣橃啓魯山燕山立後事。三公與繼孟沮抑不行。
十六日。陰乍雨。御經筵。左副金正國。以公事不親啓。推考而出。○遣將習陣。○有政。憲府啓今日019_436a政。忠淸都事崔灝庸碎不合。工曹正郞權義庸劣不合。六曹須及今日改正二政事罷去。不允。
十七日。晴。視事。
十八日。御經筵。○聖節望闕禮習禮。都公與臣參。○典籍鄭嗣宗,李迪被諫駁而遞。○吏曹被推。
十九日。御經筵。右副鄭入。○書房色簡擇。劉五敬落點。
二十日。視事。○強奸一。造印一。殺人二皆死。依允。○夕講。副提學請上命論難。○傳曰。昭格署器皿。成均館,四學,讀書堂分給。有餘則開城府給。
019_436b二十一日。御經筵。有輪對。都令公入。○李陌進來推考。憲府來啓。傳曰。壓良爲賤。罪加朝官。非輕。事干推閱。
二十二日。國忌。無事。兒始疾
二十三日。書頒賜件踏印。○吏曹參議孔瑞麟。以覲病母。歸龍安縣。
二十四日。聖節望闕禮親行。○憲府啓都正李陌壓良爲賤事進來推考。依允。
二十五日。是日。同副朴英出。○有經筵政事。○工曹正郞許䃢及權義不合與否。問于吏曹。
019_436c二十六日。陰。夜雨。水深三分。分疑尺御經筵。○謝恩使權鈞,副金安國。還自燕京。○ 國弼仕進後。出迎國卿于門外。
二十七日。御經筵。○諫院啓常服色厖駁未便。請改爲純色。不允。又啓江陵府使柳世雄性暴戾。不愛儒士。屢爲守令。皆見罷。請遞差。不允。
二十八日。視事。停朝講。
二十九日。晦。御經筵。○京畿監司韓效元來啓曰。齊陵親往奉審。東西北隅低微。冬節則無妨。霾雨則未安。請▒春後修築。傳曰。以此語禮曹。

[十月]
一日。御經筵。○停咸鏡道私賤推刷考準。○ 019_436d夕見大憲元▒。投宿弟讀書處。
二日。寒甚。遣史官火禁摘奸。
三日。御經筵。
四日。御經筵。入侍。○下李陌義禁府。○ 與國弼。往宿國卿第。
五日。停朝講。三政丞有故也。○晝不時召對。講近思錄。講官副提學趙光祖,承旨金正國。講論經理。上亦論難亹亹。或至談笑。
六日。未明時。親傳宗廟冬享大祭香祝。初獻官左議政申用漑。禮當從東西向跪受。而直傳北向受之。失禮也。
019_437a七日。雨。停經筵。大祭故也。○ 夕宿于淸平家
八日。寒風灑雪。御經筵。右副入侍。○應敎奇遵,大諫申光漢,貳相崔淑生等。論啓呂氏鄕約註解未便事。○李陌勿囚。長命等代受刑訊時。事干推閱事。傳敎。○憲府啓別坐黃純,安點,李壽康,趙叔珪,權憶等請편005。皆庸劣云云。問于吏曹。
九日。停經筵。○拜表以權停禮行。正朝使李世應也。
十日。雨。御思政殿。吏文殿講。○禁府堂上任由謙,沈貞。啓李陌事干。似與陌符同。其餘則皆其奴。不019_437b可推也。傳曰。刑推。
十一日。御經筵。
十二日。御經筵。朝夕講。
十三日。御朝講。○有政○命召三公詣賓廳。議京畿災傷差錯守令。分輕重。罷陽川縣監李光文。抱川縣監吳世雲。
十四日。午後。不時召對。○舍人尹自任啓曰。三公意駙馬不得再娶。於前古帝王之法無之。此無理事也。是故。祖宗法章不著。帝王偏私之政。莫是過也。鄭顯祖妻李氏。士族婦女。成禮成婚。故依牒呈施019_437c行事啓目。今後。公翁主卒而改娶。欲爲萬世通例耳。傳曰。我非問駙馬再娶之事。河城尉取李氏之時。欺貞熹王后曰。取良女爲妾。事覺被罪。論以爲妾。特問李氏不可爲嫡耳。更遣注書問之。
十五日。陰。月食。同副承旨朴英。肅拜入直。○無事。
十六日。陰。視事。決罪囚三人。○御經筵。○淸州牧使李元幹。謝恩肅拜。
十七日。御經筵。
十八日。御經筵。都公入侍。○掌令任樞。以其父由謙禁府知事。被駁於本府。在府未安。再啓。不允。019_437d退去。待朝廷處置事入啓。
十九日。視事。停朝講。○ 與張子剛。會宿于濟甫。
二十日。掌令任樞來啓。父被推於本府。不可安心在職。非徒一己未安。朝廷事體有妨。請遞臣職。○京畿監司韓效元肅拜。○任樞遞差與否。問于本院。回啓曰。臺員遞差。果爲重難。然其父被駁。在職實難。命遞差。吏曹啓明日爲政。
二十一日。受朝參。御朝講。○工曹判書金安國啓。方爭訟日興。傷害骨肉。敗壞風俗。又有以其祖上孼子孫爲補充隊遺漏云云陳告者亦多。請皆立大限。019_438a以杜爭訟之風。又啓軍額量減事。領議政鄭光弼。又從而照之收議。○候氣重室試驗事。女妓革罷。各官男樂仍設事。令禮曹施行。○有政。持平金湜爲掌令。魚得江爲獻納。
二十二日。中宮誕日。政院問安色承旨監進表裏。○司諫閔壽干啓。獻納魚得江。廉退可用人也。但聞有病。其上來與否不知。正言黃士祐在外時。在官數少。請遞魚得江獻納。傳曰。遞差。○宣醞于院。
二十三日。無事。
二十四日。無事。
019_438b二十五日。無事。
二十六日。無事。
二十七日。無事。
二十八日。御思政殿視事。御夕講。上曰。師長可當人。雖非正科出身。兼帶學官職檢察。可也。○ 夜趙光輔與金雍來話
二十九日。無事。
三十日雨。憲府杖殺私奴金仇知,金三父兄及其奴一口。院閔其冤欲啓。議不一而止。

[十一月]
一日。晴。御經筵。夕講。上曰。近來。學校019_438c不興。雖非科目出身。而其人器可當。則差學官兼官何如。禮曹判書李繼孟不對。臣等曰。差兼官。有形跡。不若差 官。以盡其職。○命輪次堂上。前期一日。書名以入。蓋欲遣內臣視學也。○臺諫所啓。命承旨親啓。不允。
二日。晴。冬至習禮。○是日。都承旨文瑾爲刑曹參判。崔命昌爲同副。
三日。小雪。承旨等謝恩肅拜。余以外祖母忌出去。
四日。忌。
五日。坐。
019_438d六日。冬至 有夜對。右副朴入侍。○停經筵○是日。成均館輪次堂上坐起。臣承命陪宣醞往饋堂上及儒生。儒生等令升坐月臺。四五人升堂講論。前此儒生等饋於庭。升飮月臺自此始。○左議政申用漑,同知崔淑生,工曹判書金安國,同知趙光祖,大司成尹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