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택당 이식의 고시

술에 취하고 나서

아베베1 2010. 1. 19. 21:53

택당선생 속집(澤堂先生續集) 제1권

 

술에 취하고 나서


술자리 파한 뒤 흩어진 객과 벗들 / 罷酒賓朋散
창을 여니 희맑은 달 찾아오누나 / 開軒皓月來
나뭇가지 엉겨 있는 시골의 저녁 연기 / 村煙留羃樹
솔 이슬 축축히 벋어 가는 푸른 이끼 / 松露暗滋苔
천지간에 조각 마음 멀리 치달리며 / 天地片心遠
강호간에 두 눈동자 높이 치켜 보노라 / 江湖雙眼嵬
자연스레 툭 터지는 맑은 분위기 / 自然淸曠處
즐거움도 없거니와 슬픔 또한 없도다 / 無樂亦無哀

 

 

큰비가 오는 날 밤에 앉아서 계묘년


폭풍우 몰아치는 칠흑 같은 밤 / 風雨夜如漆
창문을 난타하는 덜그렁덜그렁 바람 소리 / 摐摐亂打窓
무너진 찬 아궁이 병중(病中)이라 더 싫은데 / 病嫌頹竈冷
쏟아지던 수마조차 시름에 달아났네 / 愁伏睡魔降
새는 빗물 피하려고 베개 옮겨 다니면서 / 屋漏頻移枕
흐려진 불빛 밝혀 보려 등잔을 자꾸만 갸우뚱 / 燈昏屢側缸
내일 아침이면 아마도 장관 보게 될걸 / 明朝應壯觀
높은 물결 하얗게 강을 뒤집어엎을 테니 / 高浪白翻江

 

 

무더위에 시달리며


이글거리는 붉은 태양 하루가 마치 일 년 / 赫日長如歲
빈집에 적막하게 홀로 앉아 있어라 / 空堂坐寂寥
강과 호수 메말라 바닥을 다 보일 듯 / 江湖焦欲涸
하늘과 땅 가마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누나 / 天地烘爲窯
구름은 떠 있어도 비 올 기색 전혀 없고 / 不雨雲猶住
풀만 혼자 흔들릴 뿐 바람결 한 점 일지 않네 / 無風草自搖
마을 장정 찡그리며 투덜대는 말 / 村丁蹙頞語
밭두둑에 갓 난 싹 모두 말라 죽었다고 / 田隴有枯苗
밤에 절간에서 향을 사르며

누가 몸의 주재자(主宰者)로 마음을 임명하였기에 / 誰命心官宰此身
고요히 있다 무한대로 신령스런 경지를 펼치는고 / 寂然靈境大無垠
중간에 추호(秋毫)라도 기미가 발동하면 / 中間些子幾微動
남북으로 선리의 양 갈래 길 나눠지네 / 南北雙岐善利分
컴컴한 골에 이따금씩 귀물이 생겨나다가도 / 暗谷有時生鬼物
태양이 뜨면 다시금 음기(陰氣)가 말끔히 씻기나니 / 太陽還復破陰氛
옛 철인(哲人)이 깨우쳐 준 가르침을 되새기며 / 却將先哲惺惺旨
맑은 창을 마주하고 한 가닥 향연(香煙) 피우노라 / 靜對晴窓一炷薰

[주D-001]고요히 …… 펼치는고 :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상(上)에 “생각도 없이 함도 없이 고요히 움직이지 않다가 일단 감응하면 천하의 모든 일에 두루 통한다.[無思也 無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라는 말이 있다.
[주D-002]선리(善利) : 선(善)을 좋아하는 마음과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을 말한다.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순(舜) 임금과 도척(盜跖)의 차이를 알고 싶은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과 선을 추구하는 마음의 차이일 따름이다.[利與善之間也]”라는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