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관련 기록/도봉산 관련기록 (문헌)

도봉(道峯)은 옛날 영국사(寧國寺) 유지(遺址)가 있던 곳이다

아베베1 2010. 2. 4. 13:42

한수재선생문집(寒水齋先生文集) 제22권
 기(記)
소광정기(昭曠亭記)


도봉(道峯)은 옛날 영국사(寧國寺) 유지(遺址)가 있던 곳이다. 봉만(峯巒)이 빼어나고 수석(水石)이 깨끗하여 본디부터 기내(畿內) 제일의 명구(名區)로 일컬어졌다. 만력(萬曆 명 신종) 계유년에 사옥(祀屋)이 창건되어 마침내 서울 동교(東郊)의 대유원(大儒院)이 되었다. 그런데 그 사체와 규모가 성균관에 다음가므로, 서울의 선비들이 여기에 많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강당(講堂)의 서쪽으로 백 보를 다 못 가서 시내 위에 조그마한 대(臺)를 지어 무우(舞雩)라 이름하고, 대의 동쪽으로 문(門)을 내어 이를 영귀(詠歸)라 이름하였으니, 대체로 증점(曾點)이 무우에서 바람 쐬고 읊으며 돌아오겠다던 뜻을 취한 것이다.
대의 남쪽 시내 건너편에는 푸른 절벽이 우뚝 솟아 있는데, 여기에는 동춘 선생(同春先生)이 쓴 여덟 대자(大字)가 있고, 그 아래에는 큰 바위가 시내 위에 가로 뻗치어 있는데 여기에는 우재 선생(尤齋先生)이 회옹(晦翁)의 시(詩) 두 구(句)를 한데 써서 모아 놓은 것이 있는바 그 필세(筆勢)가 매우 힘차서 만장봉(萬丈峯)과 기세가 서로 등등하다. 그런데 계사년 여름에 큰비가 와서 홍수가 산을 삼켜버림으로 인하여 절벽이 갈라지고 암석이 빠져 떠내려감으로써, 무우대와 영귀문은 주춧돌이 뽑히었고 두 선생의 필적도 어지러이 표류되었으니, 참으로 고금에 없던 변고였다. 그로부터 수년 뒤에는 대(大)가 물러가고 소(小)가 옴으로써 소인들의 중상(中傷)이 두 선생의 묘향(廟享)에까지 미칠 뻔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이 사문(斯文)의 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먼저 그 조짐을 보여 준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리하여 친구 파평(坡平) 윤봉구 서응(尹鳳九瑞膺)이 바야흐로 원사(院事)를 주관하여 이에 침류당(枕流堂) 남쪽 가 빈 땅에다 영귀문을 세우고, 조금 아래 시냇가의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를 편편하게 닦아서 무우대를 지었다. 이는 대체로 구기(舊基)가 이미 파여서 못 쓰게 됨으로써 부득불 겁수(劫水)에도 안전할 수 있는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짓게 되었으니, 또한 기이하지 않겠는가.
무우대 아래에 두어 길쯤 되는 폭포가 있고, 폭포 밑 오목한 암석 바닥에는 물이 돌아들어 담(潭)을 이루었으며, 담 남쪽에는 울퉁불퉁한 흰 암석이 있어 5, 60인이 앉을 만하니, 맑은 경치가 이전에 건축한 곳보다 나았다. 담 북쪽에는 기수(沂水) 두 글자를 새겼으니, 이는 무우와 영귀의 뜻이 본래 기수에 목욕한다는[浴沂] 데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두 선생이 옛날에 쓴 필적의 진본을 돌에 새기고 또 무우대(舞雩臺) 세 글자를 그 곁에 새겨 놓으니, 이에 문(門)과 대(臺)의 필적이 한결같이 다 복구되어, 사람들이 모두 중신(重新)한 것임을 모를 정도이다.
그러나 새로 지은 건물 좌우에는 그 위를 그늘지어 줄 소나무나 노송나무가 없으므로, 이곳에 오르는 이들이 이를 흠으로 여겼다. 그러자 서응(瑞膺)이 등나무와 풀숲 속을 헤치고 들어가 남쪽 비탈의 층암(層巖) 위에서 조그마한 돈대(墩臺) 하나를 찾아내어 이곳의 잡초 등 지저분한 것들을 깨끗이 제거하고 나니, 사방의 넓이가 기둥 4개를 세울 만하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보면 저 돌아드는 물과 깔려 있는 암석은 바로 눈 밑에 있고, 무우대와 두 석각(石刻)과 튼튼한 장옥(墻屋)과 우뚝우뚝 솟은 봉만(峯巒)들이 모두 조망(眺望) 가운데 죽 배열되었으니, 그 누가 이렇게 그윽한 속에 이토록 밝게 탁 트인 지경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겠는가. 혹 조화옹(造化翁)이 짐짓 이곳을 비장(秘藏)해 두었다가 호사자(好事者)를 기다려서 내놓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기에 모정(茅亭) 한 칸을 지어 소나무와 노송나무의 그늘을 대신하니, 그 제도가 정밀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아서 산중의 한 가지 진기한 완상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서응의 성근한 뜻이 아니면 그 누가 이 일을 해냈겠는가.
서응이 하루는 나에게 와서 이 모정의 이름을 묻기에, 내가 말하기를 “학자가 학문을 끝까지 힘써 연구하다가 활연관통(豁然貫通)의 경지에 이르면 고인(古人)이 이를 일러 소광(昭曠)의 근원을 보았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동(洞)에 들어온 이들도 언덕을 경유하고 골짜기를 찾아서 여기에 오르고 나면 가슴이 시원하게 탁 트일 것이니, 그 기상이 저 소광의 근원을 본 것과 서로 같을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소광정(昭曠亭)이란 세 글자로 제명(題名)하고 아울러 그 전후의 사실을 기록하여 문지방 사이에 걸도록 하노니, 후일 이 원(院)에 노닐고 이 정자에 오르는 이들은 이 명칭을 돌아보아서 더욱 힘쓰기 바라는 바이다.


[주D-001]증점(曾點)이 …… 뜻 :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자의 뜻을 물었을 때, 증점이 말하기를 “늦은 봄에 봄옷이 이루어지면 관자(冠者) 5, 6명과 동자(童子) 6, 7명으로 더불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읊으며 돌아오겠습니다.”고 한 것을 말한다. 《論語 先進》
[주D-002]대(大)가 …… 옴으로써 : 대는 양(陽)으로서 군자의 도를 뜻하고, 소(小)는 음(陰)으로서 소인의 도를 뜻한다. 《周易 否卦》
[주D-003]겁수(劫水) : 불가(佛家)의 말로, 세계가 괴멸(壞滅)할 때에 일어난다는 큰 수재(水災)를 말한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제32권
 석지(釋志)
명승(名僧)

○ 정 법사(定法師) : 정 법사는 고려 사람이다. 《고시기(古詩紀)》 ○ 살펴보건대, 정 법사의 영고석시(詠孤石詩) 한 수가 《진시(陳詩)》에 실려 있으며, 고려는 바로 고구려이다.
○ 신성(信誠) : 당나라 고종(高宗) 총장(總章) 원년(668) 12월에 고구려를 격파하고 승 신성을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삼았는데, 먼저 항복한 데 대해 상을 내린 것이다. 《책부원귀(册府元龜)》 ○ 신성에 대한 일은 본서 인물고(人物考) 천남생전(泉男生傳)에 상세하게 나온다.
혜관(慧灌) : 일본 추고천황(推古天皇) 32년(624)에 고려(高麗)의 승 혜관이 와서 조회하자, 그로 하여금 원흥사(元興寺)에 머물게 하였다. 그해 여름에 크게 가물자 기우(祈雨)하도록 명하였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혜자(慧慈) : 일본 추고천황 때 고려의 사문(沙門) 혜자가 와서 태자(太子)의 사(師)가 되었는데, 백공(百工)이 모두 혜자를 조사(祖師)로 삼았다. 《상동》
혜편(慧便) : 일본 민달천황(敏達天皇) 13년(584)에 파마국(播磨國)에서 수행(修行)하는 자를 찾아 고려의 승으로서 환속한 자를 찾아내었는데, 이름이 혜편이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 살펴보건대, 이상의 혜관, 혜자, 혜편 세 승은 백제의 승인 듯하나, 상고할 수가 없다.
○ 진표(眞表) : 진표는 백제 사람이다. 집이 금산(金山)에 있으며, 대대로 수렵을 일삼았는데, 뒤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칼로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러고는 고통스럽게 참회하면서 온몸을 들어 땅에다가 짓찧었으며, 뜻이 계법(戒法)을 구하는 데 있었다.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자신에게 계법을 전해 주기를 서원(誓願)하면서 밤을 낮삼아 공력을 쏟았는데, 빙빙 돌면서 물동이를 두드리되, 마음 마음마다 간단(間斷)이 없었고 생각 생각마다 부지런히 하였다. 7일이 지난 다음 아침이 되자, 지장보살(地藏菩薩)이 현신하여 손으로 쇠로 된 석장(錫杖)을 흔들면서 진표를 위하여 가르침을 발하고 계율을 발하였으며, 이어 앞에서 방편(方便)을 주었다. 그러자 진표는 이 상서로움에 감동하여 전보다 더욱더 용맹하게 정진하였다. 14일이 되자, 어떤 커다란 귀신이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진표를 바위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는데, 진표의 몸이 상한 곳이 없었다. 이에 기어서 석단(石壇) 위로 올라가자, 다시금 마귀의 형상이 끊임없이 나타났는데, 백 가지 천 가지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21일째 되는 날, 아침 동이 틀 무렵에 길한 상서를 나타내는 새가 울면서 말하기를, “보살이 온다.” 하였는데, 이에 보니 흰 구름이 자욱하게 깔려 높고 낮음을 분간할 수가 없고, 산천이 평탄하여 은색의 세계를 이루었다. 도솔천(兜率天)의 주인이 그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석단 주위를 돌았는데, 향기로운 바람과 꽃비가 한꺼번에 어우러져 모여들었다. 조금 있다가 자씨(慈氏)가 천천히 걸어 나와서 석단 앞에 이르러서는 손을 드리워서 진표의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선재(善哉)라. 대장부가 계법을 구함이 이와 같아 두 번에 이르고 세 번에 이르렀구나. 소미로(蘇迷盧)는 손으로 밀쳐 버릴 수 있지만 너의 마음은 물리칠 수가 없구나.”
하고는, 이어 계법을 주었다. 진표는 몸과 마음이 화락해지면서 마치 삼선(三禪)의 경지와 같아져, 의식(意識)이 낙근(樂根)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였다. 그리고 4만 2천 가지의 복하(福河)가 항상 흘러 일체의 공덕(功德)에 의해 이윽고 천안(天眼)이 트였다. 자씨(慈氏)가 직접 세 벌의 법의(法衣)와 와발(瓦鉢)을 주고는 다시 진표(眞表)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또 무릎 아래에서 두 개의 물건을 꺼내었는데, 상아도 아니고 옥(玉)도 아닌 것이 바로 첨(籤)과 같은 것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에는 구자(九者)라고 씌어 있고, 다른 하나에는 팔자(八者)라고 씌어 있어 각각 두 자씩 씌어 있었는데, 이것을 진표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만약 사람이 계법을 구하고자 할 경우에는 마땅히 먼저 죄를 참회하여야만 하는데, 죄와 복은 성품을 지키는 것[持性]과 성품을 범하는 것[犯性]이다.”
하였다. 다시금 108개의 첨을 더 주었는데, 각 첨 위에는 백팔 번뇌(百八煩惱)의 명목이 씌어 있었다. 여래(如來)가 사람에게 계법을 줌에 있어서는 혹 90일 동안이나 40일 동안이나 21일 동안을 고통을 참으면서 정진하여 참회해 기한이 다 차면 구자첨(九者籤)과 팔자첨(八者籤) 두 첨에다가 백팔 번뇌의 첨을 합하여서 부처 앞에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첨을 던지는데, 땅에 떨어진 첨을 보고서 그 죄가 없어졌는지 그대로 남아 있는지를 징험한다. 만약 백팔 개의 첨이 사방으로 날아가고 오직 팔자첨과 구자첨만이 단(壇) 한가운데 우뚝하게 서 있을 경우에는 바로 상상품계(上上品戒)를 얻는다. 만약 여러 첨이 비록 멀리 날아갔다 하더라도 혹 한두 개의 첨이 날아와서 팔자첨과 구자첨에 부딪치면 이 첨을 뽑아 보고서 거기에 무슨 번뇌의 이름이 씌어 있는가를 보고,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참회하게 한다. 그런 다음 다시 참회한 번뇌첨을 가지고 구자첨과 팔자첨과 함께 던져서 그 번뇌첨이 날아간 자는 중품계(中品戒)라 이름한다. 만약 여러 첨이 팔자첨과 구자첨을 뒤덮으면 죄가 없어지지 않아서 계를 얻을 수가 없으며, 다시금 더 참회해서 90일이 지나면 하품계(下品戒)를 얻는다. 자씨가 다시금 거듭 고하면서 가르치기를,
“팔자첨은 신훈(新熏)이고, 구자첨은 본유(本有)이다.”
하면서, 여러 차례 부탁하였다. 자씨의 행차가 이미 돌아감에 산천을 덮었던 구름이 걷혔다. 이에 진표가 천의(天衣)을 가지고 천발(天鉢)을 잡았다. 그런데도 진표는 오히려 오하(五夏)를 더 비구(比丘)로 있으면서 수행한 다음 길을 따라 산을 내려왔다. 그러자 초목들이 가지를 낮게 드리워서 길을 덮음에 계곡이 높고 낮음이 없이 평탄하게 되었으며, 새와 짐승이 다 진표의 발걸음 앞에 엎드려 있었다. 또 공중에서 소리가 울려 촌락과 고을에 고하기를,
“보살이 산에서 나오는데 어찌하여 영접하지 않는가.”
하였다. 그러자 남녀의 백성들이 머리카락을 펴서 진흙을 덮는 자도 있었고, 옷을 벗어서 길에 까는 자도 있었고, 천과 담요로 발을 감싸는 자도 있었고, 꽃자리와 아름다운 방석으로 구덩이를 메우는 자도 있었다. 이에 진표가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곡진히 부응하여 일일이 다 밟고 지나갔는데, 어떤 여자가 반 단(端)의 백첩(白氎)을 가지고 와서 길 가운데에 폈는데, 진표는 이를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를 피하여 다른 길로 갔다. 그 여자가 불평등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괴이하게 여기니, 진표가 말하기를,
“내가 자비심이 없어서 평등하게 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마침 보니 그 천 사이에는 모두 도야지 새끼가 있기에 내가 산 목숨을 상하게 될까 염려되어 밟지 않고 피해 간 것이다.”
하였다. 그 여자는 본디 도축하는 집의 여자로 고기를 팔아서 이 포(布)를 산 것이었다. 이때부터 항상 호랑이 두 마리가 있어 진표의 좌우에 붙어서 따라다녔는데, 진표가 호랑이에게 말하기를,
“나는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이 길을 인도하라.”
하였다. 그러고는 가다가 수행할 만한 곳을 만나면 천천히 걸어서 갔다. 호랑이가 30리쯤 가다가 어느 산 언덕으로 올라가서는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에 진표가 주장자를 나뭇가지에 걸고서 풀을 깔고 단정히 앉으니, 사방의 신자들이 권하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왔다. 그들과 함께 가람(伽藍)을 짓고는 금산사(金山寺)라고 이름하였다. 《신승전(神僧傳)》
○ 도침(道琛) : 현경(顯慶) 5년(660)에 백제(百濟)를 평정하자, 부도(浮屠) 도침이 주류성(周留城)에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신당서》 ○ 백제세기(百濟世紀)에 상세하게 나온다.
관륵(觀勒) : 일본 추고(推古) 10년(602)에 백제국의 승 관륵이 와서 천문지리서(天文地理書)와 역서(曆書), 둔갑방술서(遁甲方術書)를 바쳤다. 《화한삼재도회》
법명(法明) : 대직관겸족(大織冠鎌足)이 집정(執政)할 때 백제의 선니(禪尼)인 법명이 대마도(對馬島)에 와서 오음(吳音)으로 《유마경(維摩經)》을 읽었는데, 그때 오음으로 읽었으므로 “대마도에서 읽은 것이 일본에서 오음으로 불경을 읽게 된 기원이다.” 한다. 《일본유마회연기(日本維摩會緣起)》
묵호자(墨胡子) : 사문(沙門) 묵호자는 신라 사람이다. 눌지왕(訥祗王) 때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이르자, 군인(郡人) 모례(毛禮)란 사람이 자기 집에 토굴(土窟)을 짓고 그를 거기에서 살게 하였다. 이때 양(梁)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왕에게 향(香)을 하사하였는데, 임금과 신하가 그것의 용도와 이름을 몰랐다. 이에 묵호자가 말하기를,
“이것을 사르면 향기가 아름답게 퍼져 신성(神聖)에게 치성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른바 신성이란 것은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첫 번째는 불타(佛陀)이고, 두 번째는 달마(達摩)이고 세 번째는 승가(僧伽)입니다. 만약 이를 살라서 축원을 드리면 반드시 영검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왕녀(王女)의 병이 위독하였는데, 묵호자가 향을 사르고 축원을 드리자 병이 얼마 있다가 나았다. 이에 왕이 기뻐하면서 몹시 후하게 보답하였다. 《화한삼재도회》 ○ 살펴보건대, 이것이 신라 불교의 시초인데,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실려 있는 것과 내용이 같다.
○ 무루(無漏) : 석(釋) 무루의 성은 김씨(金氏)로, 신라국왕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 바다 배를 따라 중국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오천축국(五天竺國)으로 가서 팔탑(八塔)을 예배하려고 하였다. 이미 사막(沙漠)을 건너서 우전국(于闐國)을 지나 서쪽으로 가 총령(蔥嶺)에 이르러서 큰 절에 들렀는데, 그 절의 비구(比丘)들은 모두 예측할 수 없는 중들이었다. 중들이 무루가 천축으로 가는 뜻을 물어보고는 기절(奇節)이 없으면서 천축으로 간다고 여겼다. 이에 승들이 말하기를,
“옛 기록에 이름나지 않은 사람은 천축으로 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곳에는 독룡(毒龍)이 사는 연못이 있는데, 그곳에 가서 독룡을 교화하여 징험이 있으면 그곳을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무루가 그들의 요청에 의하여 연못가의 언덕에 올라가 보니, 오직 호상(胡床) 하나만 보였다. 이에 그 호상에 앉아 있었다. 밤이 장차 다하려고 할 때에 이르러서 우레와 번개가 치더니 그 괴물이 기운(氣運)을 토하매 갖가지로 변화가 일어나면서 밝았다가 어두워지곤 하였다. 무루는 눈을 감은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 뒤에 큰 뱀이 나타나서는 그의 무릎 위에서 머리를 쳐들었다. 이에 무루는 그를 몹시 불쌍하게 여겨 삼귀(三歸)를 받게 하자 뱀이 떠나갔다. 그러고는 다시 노인의 형상으로 변하여 와서는 감사해하면서 말하기를,
“법사의 덕분에 도탈(度脫)하게 되었으니, 의리상 이곳에 오래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3일 후에 비늘이 덮인 몸을 받은 고통에서 벗어나 좋은 곳에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가면 반석(盤石)이 있는데, 그곳이 이 제자가 형체를 버린 곳이니, 역시 저의 유해를 찾아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무루가 묵묵히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자 또 말하기를,
“모름지기 천축국에 가고자 하는 사람은 이곳에 관음성상(觀音聖像)이 있는데, 그곳에다 기도하면 영검이 있으니, 기도하면서 고해야 합니다. 그러면 길하고 상서로운 조짐을 얻을 것이니,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무루가 이에 관음성상 앞에 서서 선정(禪定)에 들어갔다. 이와 같이 하여 49일이 지나자 온몸에 종기가 생겨 몸을 지탱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곧바로 탄알만 한 크기의 쥐새끼가 나타나 왼쪽 넓적다리에서 누런 색깔의 고름을 여러 말 빨아내자 종기가 모두 나았다. 무루가 기한이 다 되어 응험을 얻자, 여러 중들이 말하기를,
“선사를 보건대 화연(化緣)이 마땅히 당나라 땅에 있겠다.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교화할 뜻을 간직하고 있으면 이익되는 바가 많을 것이다.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부질없이 보고 듣는다 하더라도 억지로 교화할 수 없다는 것을 선사는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무루는 성현(聖賢)의 말이 반드시 헛된 말이 아닐 것이라고 여겨 즉시 되돌아왔는데, 출발할 즈음에 중들이 무루에게 말하기를,
“난(蘭)을 만나면 즉시 그곳에 머물러라.”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산의 이름에 난(蘭) 자가 들어간 곳이 있었다. 이에 말[馬] 앞에서 그 말을 기억해 내고는 드디어 그 산속으로 들어가서 백초곡(白艸谷)이란 곳을 찾아내어 집을 짓고 그곳에서 살았다. 얼마 뒤에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나 숙종(肅宗)이 영무(靈武)에서 군사를 훈련시키고 있었는데, 여러 차례 금색(金色)을 한 사람이 어전(御前)에서 보승불(寶勝佛)을 염불하는 꿈을 꾸었다. 다음 날에 꿈속에서 있었던 일을 가지고 좌우의 신하들에게 묻자, 어떤 사람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사문(沙門) 가운데 행적이 일반 중들과 다른 사람이 이 산에 살고 있는데, 항상 그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그를 불러오자, 황제가 보고서 이르기를,
“참으로 꿈속에서 본 그 사람이다.”
하고는, 곧바로 내사(內寺)에 있게 하고 공양하였다. 무루는 여러 차례 표장(表章)을 올려서 예전에 숨어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게 해 주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마음에 그를 몹시 아꼈으므로 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얼마 뒤에 없어졌다. 어느 날 갑자기 내문(內門)의 오른쪽 미닫이 위에 두 발이 생겨났는데, 땅 위로 몇 자가량 떠 있었다. 문지기가 이 사실을 상주하자, 황제가 보련(步輦)을 타고 직접 그곳에 임하여, 옛날에 숨어 살던 산 아래에 장사 지내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유표(遺表)를 찾아내었다. 이에 즉시 그대로 하게 하고는 중사(中使)를 파견하여 상여를 호송해 가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무루가 회원현(懷遠縣)에서 교화를 많이 행하였으므로, 그를 인하여 그곳에다 집을 짓고는 하원(下院)이라고 불렀는데, 상여가 이곳에 이르러서는 신좌(神座)를 들 수가 없었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별도로 당우(堂宇)를 지어 그곳에다 안치하였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도 진체(眞體)가 단정하게 그대로여서 변하거나 부서지지 않았다. 《신승전(神僧傳)》
○ 무루(無漏)는 신라의 승이다. 현종(玄宗)이 어느 날 저녁에 어떤 사문(沙門)이 온몸에 금빛을 띠고 보승여래(寶勝如來)의 이름을 외우고 있는 꿈을 꾸었는데, 이에 대해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하란(賀蘭) 백초곡(白艸谷)에 이름이 무루라고 하는 신라의 승이 있는데, 항상 이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있으니, 자못 이상합니다.”
하였다. 이에 황제가 그를 불러 행재소(行在所)에서 만나 보고는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참으로 꿈속에서 본 바로 그 승이다.”
하고는, 드디어 호승(胡僧) 불공(不空)과 더불어 행궁(行宮)에 머물면서 기도하게 하였다. 입적(入寂)할 때는 합장을 하고서 땅에서 몇 자가량 공중에 뜬 채로 죽었다. 예전에 그가 살던 골짜기에 장사 지내려고 하였는데, 호송하여 가다가 회원현(懷遠縣)의 하원(下院)에 이르자 문득 시신을 들 수가 없었다. 이에 마침내 향니(香泥)를 전신에 바른 다음 하원에 두었다. 《속문헌통고》
지장(地藏) : 석(釋) 지장의 속성(俗姓)은 김씨(金氏)로, 신라국왕의 지속(支屬)이다. 마음은 자비로웠으나 얼굴 모습이 추악하였으며, 천부적으로 영오(穎悟)함을 타고났다. 머리를 깎고 출가한 다음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지양(池陽)에 이르러서 구자산(九子山)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몹시 좋아하였다. 이에 곧바로 산봉우리로 올라가서 그곳에서 살았다. 지장이 일찍이 독충(毒蟲)에 쏘이고도 단정히 앉아서 무념 상태에 있었는데, 잠시 뒤에 어떤 아름다운 부인이 예를 올리고는 약을 먹이면서 말하기를,
“소아(小兒)가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원컨대 샘물을 나오게 하여 허물을 보충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말을 마치고는 사라졌는데, 앉은 자리의 좌우를 보니 샘물이 펑펑 솟아올랐다. 그러자 당시 사람들이 “구자산의 신령이 샘물을 솟아나게 하여 쓸 수 있게 한 것이다.” 하였다. 지덕(至德) 연간 초에 제갈절(諸葛節)이란 사람이 촌부들을 데리고 산기슭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갔는데, 아주 깊이 들어가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직 지장만이 홀로 석실(石室) 안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방에는 다리가 부러진 솥이 있었고, 솥 안에는 흰 흙과 쌀을 섞어서 밥을 지어 먹고 있었다. 여러 아이들이 이를 보고는 경탄하면서 말하기를,
“화상(和尙)이 이와 같이 고생하고 있는 것은 산 아래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잘못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서로 더불어서 선방(禪房)을 지었는데,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큰 절이 되었다. 신라에서도 그 소문을 듣고 바다를 건너 서로 찾아왔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아짐에 따라 그들을 먹일 길이 없었다. 이에 지장이 돌을 헤쳐서 청백색의 흙을 얻었는데, 껄끄럽지가 않고 국수와 같아서 그것을 대중들에게 먹였다. 그의 대중들이 법설(法說)을 들어 정신을 기르기를 청하면서 음식으로 목숨을 기르지 않으니, 남방 사람들이 ‘삐쩍 마른 대중[枯槁衆]’이라고 부르면서 모두들 숭앙하였다. 용담(龍潭)의 곁에 흰 흙무더기가 있었는데, 아무리 취해도 없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대중들을 모아 놓고 이별을 고하였는데, 간 곳을 알 수가 없었고, 단지 산이 울고 돌이 떨어지며 종이 울리는 소리만 들렸다. 결가부좌한 채 죽으니, 나이 99세였다. 그의 시신을 함 속에 앉혀 두었다. 그 뒤 3년이 지나서 탑 속에 넣으려고 하였는데, 얼굴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시신을 마주 들 즈음에는 골절(骨節)이 마치 쇠로 된 사슬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신승전》
○ 김지장(金地藏)은 신라국의 승이다. 지덕(至德) 연간에 바다를 건너와 청양(靑陽)의 구화산(九華山)에 살았다. 일찍이 바위 틈에 있는 흰 흙을 밥과 섞어 먹자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나이 99세에 갑자기 대중들을 불러 모은 다음 이별을 고하였는데, 단지 산이 울고 바위가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으며, 잠시 뒤에 함 속에서 입적(入寂)하였다. 3년이 지난 뒤에 장차 탑 속에 넣으려고 하면서 보니 얼굴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 같았으며, 마주 들 때에는 골절이 모두 쇠사슬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속문헌통고》 ○ 《전당시(全唐詩)》에, “김지장은 신라국의 왕자이다. 지덕(至德) 초에 바다를 건너와 구화산(九華山)에서 살았다.” 하였다. ○ 《구화산록(九華山錄)》에, “화성사(化城寺)가 구화산에 있는데, 절이 매우 아름답다. 당나라 때 신라의 왕자 김지장이 수행하던 곳이다. 김지장탑(金地藏塔)이 또 절 뒤에 있다.” 하였다. ○ 주필대(周必大)의 《성재집(省齋集)》에 실려 있는 ‘김지장탑을 배알하다.[謁金地藏塔]’는 시는 다음과 같다. “덩굴 잡고 험산 타긴 재빠르기 원숭인데, 돌 모서리 옷 걸리고 신발 자주 뚫어지네. 멀리서 김지장탑 찾아온 걸 이상하게 생각 말라, 일찍이 옥계 앞을 천천히 걸었노라.[攀蘿度險捷猱猿 石角鉤衣屨屢穿 莫訝遠尋金地藏 也曾徐步玉階前]”
도수충(屠粹忠)의 김지장찬(金地藏贊)에,
밥에는 진흙이 뒤섞이어 있었고 / 食飯雜泥
함 열자 골상이 생시처럼 나타났네 / 開函見骨
산봉우리 어찌하여 구 자로 이름했나 / 峯何取九
살아 백 년 채우지 못하였네 / 生不滿百
하였다. 《삼재조이(三才藻異)》
○ 금사(金師) : 승 금사는 신라 사람이다. 수양(雎陽)에 살았는데, 녹사참군(錄事參軍) 방완(房琬)에게 이르기를,
“태수(太守) 배관(裴寬)이 바뀔 것입니다.”
하였다. 방완이 언제 바뀔 것인가를 묻자, 말하기를,
“내일 오전에 칙서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리고 공과 더불어 군(郡)의 서남쪽 모퉁이에서 서로 만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방완이 칙서가 오는가를 살피고 있었는데, 오전에 역사(驛使)가 두 차례 봉첩(封牒)을 가지고 왔으나 그런 내용이 아니었으므로, 방완은 금사의 말이 틀린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정오가 되자 또 한 역사가 봉첩을 가지고 와서는 말하기를,
“배공(裴公)의 관직이 바뀌어 안륙별가(安陸別駕)로 되었다.”
하였다. 이에 방완이 수레를 보내어 금사를 맞이해 오게 하고, 또 자신이 직접 갔는데, 과연 군의 서남쪽 모퉁이에서 배관을 만났다. 금사를 불러다 물으니, 금사가 말하기를,
“관직은 비록 바뀌었으나, 복장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 생질들은 각각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 뒤에 칙서가 도착해서 별가에 제수하였는데, 자주빛 인끈은 그대로 있었고, 생질들은 각자 흩어지게 되었다. 《신승전》
○ 무상(無相) : 석(釋) 무상은 신라국 사람으로, 그곳 왕의 셋째 아들이다. 현종(玄宗)이 불러다 보고는 선정사(禪定寺)에 있게 하였는데, 호를 무상(無相)이라 하였다. 마침내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 바위 아래에서 좌선(坐禪)하였다. 검은 소 두 마리가 있어 앉아 있는 자리의 아래에서 뿔을 마주 댄 채 빙빙 돌면서 몸 가까이 다가와 아주 위태로웠고, 차갑기가 얼음 같은 털북숭이 손이 소매 속으로 들어와서는 몸을 더듬으면서 배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도 무상은 조금도 경동하지 않았다. 매번 입정(入定)에 들 때마다 대부분 5일을 기한으로 하였는데, 눈이 많이 쌓이자 갑자기 맹수 두 마리가 다가왔다. 그러자 무상은 스스로 몸을 깨끗이 씻고 알몸으로 맹수 앞에 누워서 자신의 몸을 맹수에게 보시(普施)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두 마리의 짐승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냄새를 맡으면서 빙빙 돌다가는 그대로 떠났다. 무상은 가끔씩 밤중에 좌상(坐床) 아래로 내려가 호랑이의 수염을 움켜잡고 있었다. 얼마 뒤에 산에서 산 지 조금 오래되자 옷은 떨어지고 머리카락은 길게 자라 사냥꾼들이 이상한 짐승인 줄 알고 활로 쏘려다가는 멈추곤 하였다. 다시 무덤 사이에 정사(精舍)를 짓고 사니, 성도 현령(成都縣令) 양익(楊翌)이 사람들을 현혹시킨다고 의심하였다. 이에 그곳에 와서는 그의 무리 20여 명에게 명해서 그를 잡아 끌고가게 하였다. 그런데 그의 무리들이 무상의 몸 가까이 다가가자 모두들 몸이 떨리면서 정신을 잃었다. 조금 뒤에는 큰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면서 모래와 돌이 바람에 날려 곧장 청사(廳舍) 안으로 날아들었으며, 발과 장막이 바람에 날아갔다. 이에 양익은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려 절하면서 숨이 차서 감히 말을 못하였다. 양익이 잘못을 뉘우치자 바람이 그쳤다. 이에 무상을 받들어 모시고 예전에 있던 곳으로 되돌려 보냈다.
무상이 성도(成都)에 이르렀을 때 홀연히 어떤 역사(力士) 한 사람이 나타나서는 말하기를,
“저의 힘을 희사하여 땔나무를 베어 스님께서 밥 지을 때 쓰도록 공양하겠습니다.”
하였다. 무상의 동생이 신라에서 새로 왕이 되었는데, 무상이 갑자기 본국으로 돌아와서 나라를 위태롭게 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장차 자객을 보내어 죽이려고 하였는데, 무상은 이런 사실을 이미 모두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말하기를,
“땔나무를 하는 현자(賢者)는 잠시 이리 오라.”
하고는, 그에게 말하기를,
“오늘 밤에 작연(灼然)이라는 손님이 올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불자(佛子)가 상하지 않게 하라.”
하였다. 밤이 되자 땔나무를 하는 자가 칼을 가지고 방석을 끼고는 선자(禪者)의 곁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얼마 뒤에 벽 위에서 어떤 물체가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는 드디어 몸을 날리면서 칼을 휘두르니, 거한의 몸체와 목이 나누어져 땅에 떨어졌다. 뒷문에 본디 큰 구덩이가 있었으므로 그를 끌어다가 그곳에 매장한 다음, 다시 흙으로 덮어 그 흔적을 없애 버리고는 땔나무를 하던 자가 떠나갔다. 날이 밝으려고 할 때 무상이 땔나무를 베던 자를 불러서 사례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보이지 않았다. 무상이 일찍이 부도(浮圖) 앞에 있는 잣나무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잣나무가 탑 높이와 똑같아지면 탑이 무너질 것이다.”
하였다. 회창(會昌 841~846) 연간에 이르러서 탑이 무너졌는데, 잣나무와 탑의 높이가 똑같았다. 또 말하기를,
“절 앞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연못은, 왼쪽은 국이고 오른쪽은 밥이다.”
하였는데, 대중들에게 먹일 때 음식이 모자라면 사람들을 시켜서 그것을 퍼내게 하니, 과연 사람들을 먹일 수 있었다. 그의 신이(神異)함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지덕(至德) 원년(756, 경덕왕15)에 죽으니, 나이 77세였다. 《상동》
현광(玄光) : 석 현광은 해동(海東) 웅주(熊州)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으며, 형산(衡山)으로 가서 사대화상(思大和尙)을 만나 본 뒤에 강남(江南)에 머물러 있었다. 본국에서 온 배에 부탁하여 몸을 싣고 해안을 떠났는데, 이때 채색 구름이 해를 가리더니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러면서 붉은 깃발과 오색 깃발이 휘날리며 하늘에 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천제(天帝)께서 해동(海東)의 현광 선사(玄光禪師)를 부르신다.” 하였다. 현광이 공수(拱手)의 예를 올리고는 사양하여 피하니,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서 앞에서 인도하였다. 조금 뒤에 궁성(宮城)으로 들어갔는데, 인간 세상의 궁전이 아니었다. 호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물고기들이었으며, 귀신들도 간간이 섞여 있었는데, 누군가 말하기를,
“오늘은 천제께서 용왕궁(龍王宮)에 내려오셔서 선사의 법설을 들어 친히 법문(法門)을 증득(證得)하려고 하신다. 우리들 수부(水府)에서도 선사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
하였다. 이미 보전(寶殿)에 올라간 다음에 다시 높은 대(臺)로 올라가서는 물음에 따라서 말해 주었다. 대략 7일간 그렇게 한 다음에 용왕이 몸소 나와 전송하였다. 그가 탔던 배는 바다에 떠 있는 채 가지 않고 있었다. 현광이 다시 배에 오르자, 뱃사람이 반나절이 지났을 뿐이라고 하였다. 현광이 웅주(熊州)의 옹산(翁山)에 집을 짓고 머물렀는데, 그 집이 사찰로 되었다. 그 뒤에는 간 곳을 모른다. 《상동》
○ 법융(法融), 이응(理應), 순영(純英) : 조열지(晁說之)의 《반야경소(般若經疏)》 서문에 이르기를,
“진(陳)나라에서 수(隋)나라로 넘어오는 사이에 천태산(天台山)의 지자대사(智者大師)가 멀리 용수(龍樹)에게 연원(淵源)을 대어 하나의 대교(大敎)를 세웠는데, 아홉 번 전하여 형계(荊溪)에 이르렀고, 형계가 다시 전하여 신라에 이르러서 법융, 이응, 순영에게 전하였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이 일본(日本)에 전파되어 해외에서 성하여졌다.”
하였다. 《석문정통(釋門正統)》
○ 원효(元曉) : 당나라 초기에 해동(海東)에 원효란 자가 있었는데, 성은 설씨(薛氏)이다. 동해(東海)의 상주(湘州)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마음을 내어 불법(佛法)으로 들어와 스승을 따라 배웠으며, 항상 떠돌아다녀 있는 곳이 일정하지 않았다. 의리의 굴레를 용감하게 깨뜨리고 법문(法文)의 진(陣)을 마음대로 넘나듦에 씩씩하고도 굳세어서 앞으로 나아감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이에 그곳 사람들이 만인(萬人)을 상대할 사람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상법사(湘法師)와 더불어 당나라로 들어갔으나 인연이 닿지 않아 당나라로 들어갈 마음이 없어졌다. 얼마 뒤에는 말투가 미치광이 같고 행동거지가 제멋대로여서 거사(居士)와 같이 술집과 사창가를 돌아다녔는바, 마치 지공(誌公)이 쇠칼과 쇠지팡이를 잡고 다니는 것 같았다. 혹 소(疏)를 지어서 저잣거리에서 강론하기도 하고, 혹 가야금을 뜯으면서 사우(祠宇)에서 노닐기도 하였으며, 혹 여염집에서 자기도 하고 산속에서 좌선(坐禪)하기도 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인연에 따라 행동하여 전혀 정처가 없었다. 이때 국왕이 백좌(百座)를 두고 《인왕경(仁王經)》을 강하면서 널리 덕이 높은 사람을 찾았다. 그러자 본주(本州)에서 그의 명망이 높다는 이유로 천거하여 나아가게 하였는데, 덕이 높다고 하는 여러 사람들이 원효의 사람됨을 싫어하여 왕에게 들이지 말라고 참소하였다. 얼마 뒤에 왕이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구하였다. 왕이 대안성자(大安聖者)를 불러 보충하게 하였다. 그런데 대안은 헤아릴 수 없는 사람으로, 형상과 복장이 특이하였으며, 매번 시장 바닥에서 동발(銅鉢)을 두드리면서 ‘대안대안(大安大安)’이라는 소리를 외쳐댔으므로 그렇게 불렀다. 대안이 말하기를,
“속히 원효에게 가져다주어야만 강론할 수가 있습니다. 나머지 다른 사람은 안 됩니다.”
하였다. 이때 원효가 상주(湘州)에 있었는데, 사자(使者)에게 말하기를,
“이 경(經)은 시본이각(始本二覺)으로 종지(宗旨)를 삼는다. 그러니 나를 위하여 각승(角乘)을 마련하라.”
하였다. 그런 다음 책상을 가져다가 두 뿔 사이에 놓고 벼루와 붓을 다시 그 위에 놓아두었다. 그러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 수레 위에서 소(疏)를 저술해 5권을 이루었다. 또 《약소(略疏)》 3권을 지어 황룡사(皇龍寺)에서 강론하였다. 그러자 왕과 신하와 도사(道士)와 속인(俗人)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법당을 에워쌌는데, 원효가 설법하는 것이 위의가 있고 어지러운 것을 풀어 감에 있어서 법도가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큰소리로 말하기를,
“지난날에 백 개의 서까래를 뽑을 때에는 내가 비록 참여되지 못하였지만, 오늘 아침에 대들보 하나를 건너지르는 데는 오직 나만이 할 수가 있다.”
하니, 당시의 덕이 높다고 이름난 여러 사람들이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운 기색을 띠었으며, 마음속으로 참회하였다. 처음에 원효가 자취를 보이는 것을 알기가 어렵고 사람을 교화함에 있어서 일정하지 않아, 혹 쟁반을 던져서 대중을 구하고 물을 뿜어 불을 끄기도 하였으며, 혹 여러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혹 천지 사방에 죽었다고 고하기도 하였으니, 역시 배도(盃渡)나 지공(誌公)의 무리이다. 《탐현기(探玄記)》에 이르기를,
“원효 법사는 이 경소(經疏)를 저술하여 사교(四敎) 등급을 세웠다.”
하였다. 《회현기(會玄記)》
○ 당나라 초기에 해동의 원효 법사(元曉法師)가 역시 사교(四敎)를 세웠는데, 첫 번째 삼승교(三乘敎)는 사제(四諦)와 연기(緣起)에 관한 경(經)이고, 두 번째 삼승통교(三乘通敎)는 《반야경(般若經)》, 《해심밀경(解深密經)》 등이고, 세 번째 일승분교(一乘分敎)는 《범망경(梵網經)》 등이고, 네 번째 일승만교(一乘滿敎)는 《화엄경(華嚴經)》 등이다. 《현담(懸談)》 ○ 삼가 살펴보건대, 원효는 바로 신라 사람 설총(薛聰)의 아버지이다.
○ 의상(義湘) : 의상은 해동 화엄종(華嚴宗)의 초조(初祖)이다. 원효(元曉)와 함께 당나라로 들어가다가 밤중에 고총(古塚)에서 자게 되었는데, 이를 인하여 유심(唯心)의 진리를 통달하게 되었으므로 원효는 신라로 돌아가고 의상은 당나라로 들어갔다. 종남산(終南山)에 가서 현수 국사(賢首國師)와 함께 지상(至相)을 섬겨 화엄종을 전수받아 해동으로 돌아와 크게 넓혔다. 《회현기(會玄記)》
○ 홍혜(弘惠) : 피일휴(皮日休)의 ‘신라 홍혜상인을 전송하며[送新羅弘惠上人]’라는 시의 서문에, “경인년(870) 11월에 신라의 홍혜상인이 신라의 동서(同書)와 더불어서 나에게 영취산(靈鷲山) 주 선사(周禪師)의 비문(碑文)을 지어 주기를 청하여, 이를 가지고 돌아감에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하였다. 《전당시(全唐詩)》
○ 《전등록(傳燈錄)》에 실려 있는 신라의 여러 승은 다음과 같다.
남악(南嶽) 양 선사(讓禪師)법사(法嗣)에 신라국 본여 선사(本如禪師)가 있다.
서당(西堂) 장 선사(藏禪師)의 법사에 계림(鷄林) 도의 선사(道義禪師), 신라국 혜철 선사(慧徹禪師), 신라국 홍척 선사(洪陟禪師)가 있다.
마곡(麻谷) 철 선사(徹禪師)의 법사에 신라 무염 선사(無染禪師)가 있다.
장경(章敬) 운 선사(惲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현욱 선사(玄昱禪師), 신라국 각체 선사(覺體禪師)가 있다.
남전(南泉) 원 선사(願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도균 선사(道均禪師)가 있다.
염관(鹽官) 안 선사(安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품일 선사(品日禪師)가 있다.
대매(大梅) 상 선사(常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충언 선사(忠彦禪師), 신라국 가지 선사(迦智禪師)가 있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하니, 가지 선사가 말하기를, “네가 과두(裹頭)해 가지고 오기를 기다려서 너에게 말해 주리라.”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대매 선사(大梅禪師)의 종지(宗旨)입니까?” 하니, 가지 선사가 이르기를, “낙(酪)과 근본[本]을 동시에 던져 버리라.” 하였다.
귀종(歸宗) 상 선사(常禪師)의 법사에 신라 대모화상(大茅和尙)이 있다. 대모화상이 설법을 하러 당(堂)에 올라가서 말하기를, “부처님의 스승을 알고자 하면 무명(無明)의 마음속에서 알아차려야 할 것이며, 상주(常住)하여 마르지 않는 성품을 알고자 하면 만물(萬物)이 변천하는 속에서 알아차리라.”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대모화상의 경계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기봉(機鋒)을 드러내지 않겠노라.”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기봉을 드러내지 않습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맞설 자가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신라(新羅) 증 선사(證禪師)의 법사에 문성대왕(文聖大王)과 헌안대왕(憲安大王)이 있다.
신라 척 선사(陟禪師)의 법사에 흥덕대왕(興德大王)과 선강태자(宣康太子)가 있다.
천룡화상(天龍和尙) 법사에 신라 언충 선사(彦忠禪師)가 있다.
앙산(仰山) 적 선사(寂禪師)의 법사에 신라 오관산(五冠山) 순지 선사(順支禪師)가 있는데, 본국에서는 요오대사(了悟大師)라 부른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하니, 순지 선사가 불자(拂子)를 세웠다. 승이 말하기를, “그것만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순지 선사가 불자를 놓아 버렸다. 승이 묻기를, “이(以) 자도 아니고 팔(八) 자도 아니면 그것이 무슨 자입니까?” 하니, 순지 선사가 원상(圓相)을 그려 보였다. 어떤 승이 선사의 앞에서 다섯 꽃으로 된 원상을 그리니, 순지 선사가 그 그림을 지워 버리고 따로 하나의 원상을 그렸다.
임제(臨濟) 현 선사(玄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지리산화상(智異山和尙)이 있다. 어느 날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겨울이 춥지 않으니 섣달 뒤에 보리라.” 하고는, 문득 자리에서 내려갔다.
석상(石霜) 저 선사(諸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흠충 선사(欽忠禪師), 신라 행적 선사(行寂禪師), 신라 낭 선사(朗禪師), 신라 청허 선사(淸虛禪師)가 있다.
동산(洞山) 개 선사(价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금장화상(金藏和尙)이 있다.
구봉(九峯) 건 선사(虔禪師)의 법사에 신라 청원화상(淸院和尙)이 있다. 승이 묻기를, “말을 달려 공을 다투면 누가 그것을 얻습니까?” 하니, 청원화상이 이르기를, “누가 그것을 얻지 못하는 자이겠는가?”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다투지 않는 것이 좋겠군요.” 하니, 청원화상이 이르기를, “다투지 않더라도 역시 허물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어찌하여야만 허물이 없게 할 수 있습니까?” 하니, 청원화상이 이르기를, “요컨대 애당초 잃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잃지 않는 곳을 어떻게 하면 단련할 수 있습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두 손으로 떠받들어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운개(雲蓋) 원 선사(元禪師)의 법사에 신라 와룡화상(臥龍和尙)이 있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대인(大人)의 상(相)입니까?” 하니, 와룡 선사가 이르기를, “자라장(紫羅帳) 속에는 손을 드리우지 않는다.”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손을 드리우지 않습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존귀하지 않아서이다.” 하였다. 승이 묻기를, “12시 가운데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합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원숭이가 털 있는 짐승을 잡아먹었다.” 하였다.
곡산(谷山) 장 선사(藏禪師)의 법사에 신라 서암화상(瑞巖和尙)이 있다. 승이 묻기를, “흑과 백이 모두 없어지고 불안(佛眼)이 열렸을 때는 어떠합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네가 속[內]으로만 집착할까 염려된다.”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새로 탄생한 왕자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깊은 궁궐에 있어서 끌어내어도 나오지 않는다.” 하였다. 또 신라의 박암화상(泊巖和尙)이 있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선(禪)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옛 무덤은 집이 되지 못한다.”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한갓 거마(車馬)의 자취만 남겼구나.”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교(敎)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패엽(貝葉)으로는 다 거두어들이지 못한 것이니라.” 하였다. 또 신라의 대령화상(大嶺和尙)이 있다. 승이 묻기를, “겨우 동관(潼關)에 와서 그만둘 때에는 어떠합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그것은 단지 길거리의 살림이니라.”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그 가운데의 살림이 어떠합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체득하면 얻으나 맞닥뜨리면 얻지 못하느니라.”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체득하면 얻는데 어찌하여 맞닥뜨리면 얻지 못합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체득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 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그 가운데의 일이 어떠합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존귀하지 않느니라.” 하였다.
설봉(雪峯) 존 선사(存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대무위 선사(大無爲禪師)가 있다.
운거(雲居) 응 선사(膺禪師)의 법사에 신라 경유 선사(慶猷禪師), 신라 혜 선사(慧禪師), 신라 운주화상(雲住和尙)이 있다. 승이 묻기를, “여러 부처님들이 말씀하시지 못한 것을 어떤 사람이 말합니까?” 하니, 운주화상이 이르기를, “노승이 말할 수 있느니라.”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여러 부처님들이 말씀하시지 못한 것을 화상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하니, 운주화상이 이르기를, “여러 부처님들이 바로 나의 제자이니라.”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화상께서는 그 뜻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운주화상이 이르기를, “군왕(君王)을 상대하지 않았더라면 20방(棒)은 때렸어야 하겠구나.” 하였다.
백조(白兆) 원 선사(圓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혜운 선사(慧雲禪師)가 있다.
장경(長慶) 능 선사(稜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구산화상(龜山和尙)이 있다.
홍주(洪州) 백장산(百丈山)명조(明照) 안 선사(安禪師)는 신라 사람이다.
영주(郢州) 파초산(芭蕉山)의 혜청 선사(慧淸禪師)는 신라국 사람이다.
육조대사(六祖大師)가 입적(入寂)하였을 때 흙덩이 속에 넣으면서 철엽(鐵葉)과 칠포(漆布)를 가지고 목 부분을 감쌌는데, 육조대사가 일찍이 말하기를, “5, 6년 뒤에 어떤 사람이 와서 나의 머리를 가져갈 것이다.”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 뒤에 장만(張滿)이란 자가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에서 신라의 승 김대비(金大悲)에게 돈 2만 냥을 받고는 육조대사의 머리를 가지고 해동(海東)으로 가서 공양하게 하였다. 그런데 한밤중에 탑을 열다가 발각되었다. 《이상 모두 전등록》
○ 신라의 무명승(無名僧) : 상주(商州) 사람 가운데 병이 들어서 수족(手足)이 제대로 자라지 않아 걸음을 못 걷는 자가 있었는데, 수십 년 동안 병을 잘 고치는 의원들이 온갖 처방을 하였으나, 치료하지 못하였다. 이에 집안사람이 길가에다 놓아두고는 구해 줄 자를 찾았는데, 우연히 어떤 신라의 중이 보고는 고하기를,
“이 병은 약초 하나면 치료할 수가 있는데, 이 땅에도 그 약초가 있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그러고는 병자를 위하여 산으로 들어가서 그 약초를 찾아내었는데, 바로 위령선(威靈仙)이었다. 병자로 하여금 이를 복용하게 하니, 며칠이 지난 뒤에는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뒤에 산인(山人) 등사제(鄧思齊)가 이를 알고는 드디어 그 사실을 전하였다. 《본초도경(本草圖經)》
부(附) 신라의 무착 선사(無著禪師) -《전당시(全唐詩)》에 석법조(釋法照)의 ‘무착 선사가 신라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送無著禪師歸新羅國]’라는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신라의 승 아각(雅覺) -《문원영화(文苑英華)》에 장교(張喬)의 ‘승 아각이 신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送僧雅覺歸新羅]’라는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도신(道侁) : 조선(朝鮮)의 최씨(崔氏) 집 채마밭에서 자란 오이[瓜]의 길이가 한 자 남짓하였는데, 여자가 이를 먹고 임신을 하였다. 아들을 낳아 7일 동안 버려두었는데, 비둘기와 제비가 날아와 날개로 아이를 덮어서 길렀다. 자라나서 승이 되어 당나라로 들어와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전수받았다. 《삼재조이(三才藻異)》 ○ 살펴보건대, 도신은 신라 말기에 당나라로 들어가서 일행의 지리법을 배웠는바, 세상에서는 동방지리가(東方地理家)의 시조라고 칭한다.
도수충(屠粹忠)의 도신찬(道侁贊)에,
후손을 하늘이 이어 줌에 / 瓜瓞天綿
칠일 동안 새들이 날개로 덮었다네 / 鳥覆其七
법중들의 가슴속 포부 가운데 / 法衆胸羅
승이 그 가운데 하나를 얻었도다 / 僧得其一
하였다. 《상동》
제관(諦觀) : 송나라 태조(太祖) 건륭(建隆) 원년(960, 광종11) 10월이다. 당초에 천태교(天台敎)의 경전이 오대(五代) 때의 난리를 겪으면서 불에 타 완질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오월왕(吳越王) 숙(俶)이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日本)과 고려(高麗)로 가서 이를 구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고려에서 사문(沙門) 제관(諦觀)을 파견하여 천태교에 관한 논소(論疏)의 여러 글을 가지고 나계(螺溪)에 이르러서 적 법사(寂法師)를 알현하게 하니, 일종(一宗)의 교문(敎文)이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나계(螺溪)가 이를 보운(寶雲)에게 전수하고, 보운이 이를 법지(法智)에게 전수하고, 법지가 크게 강설(講說)을 열어 드디어 교관(敎觀)을 중흥시켰다는 이름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오월왕전(吳越王傳)》
○ 여가(如可) : 송나라 단공(端拱) 2년(989, 성종8)에 고려가 승 여가를 파견하여 표문을 가지고 와 알현하면서 《대장경(大藏經)》을 내려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이를 내려 주고, 이어 여가에게 자의(紫衣)를 하사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송사》
○ 의천(義天) : 의천의 성은 왕씨(王氏)로, 고려국 인효왕(仁孝王)의 넷째 아들이다. 영화를 버리고 출가하여 우세 승통(祐世僧統)에 봉해졌다. 원우(元祐) 초에 중국으로 들어가 도를 묻자, 주객(主客) 양걸(楊傑)에게 칙명을 내려 의천을 전당(錢塘)의 혜인원(惠因院)에 가서 법(法)을 전수받게 하였다. 금산(金山)에 이르자, 불인(佛印)이 앉은 채로 그의 예를 받았다. 이에 양걸이 놀라서 불인에게 물으니, 불인이 말하기를,
“의천은 이국(異國)의 중일 뿐입니다. 만약 내가 도를 굽히고 세속의 방식을 따라 제방(諸方)이 이미 한쪽 눈을 잃은 것처럼 행동한다면 무엇을 가지고 중국의 선법(禪法)을 보여 주겠습니까.”
하니, 조정에서는 그가 예를 아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전당의 혜인원에 이르러서 《화엄소초(華嚴疏鈔)》를 가지고 의심나는 부분을 자문받아 깨우치면서 해가 바뀌어서야 끝마쳤다. 이에 화엄(華嚴) 일종(一宗)의 글 뜻이 없어졌다가 다시 전해졌다. 《속문헌통고》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의천이 선종(宣宗) 2년(1085) 을사에 송나라로 들어갔는바, 바로 원풍(元豐) 8년이다. 그 뒤에 원우(元祐) 4년(1089, 선종6)에 수개(壽介) 등을 파견하여 정원(淨源)에게 제전(祭奠)을 올리고, 겸하여 금탑(金塔)을 바쳤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원우 초에 중국으로 들어가서 도를 물었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송 원풍(元豐) 8년에 고려국의 왕자 승통(僧統) 의천(義天)이 들어와 조공을 바쳤는데, 인하여 정원 법사(淨源法師)에게 수교(首敎)를 배우기를 청하면서 금으로 쓴 한역본(漢譯本) 《화엄경(華嚴經)》 3백 본을 절로 들이고, 금을 시주하여 화엄대각(華嚴大閣)과 화엄장탑(華嚴藏塔)을 건립하여 숭배하니, 영종(寧宗)이 화엄경각(華嚴經閣)이라고 쓰고 이종(理宗)이 이암(易庵)이라고 썼다. 원나라 연우(延祐) 4년(1317, 충숙왕4)에 고려의 심왕(瀋王)이 조서를 받들고서 이곳에서 향(香)을 올리고 경(經)을 읽었으며, 지정(至正) 말년에 절이 불탔다가 조선 초에 중수하였는데, 세속에서는 고려사(高麗寺)라고 칭한다.
원우 4년에 고려의 승통 의천이 정원(淨源)에게 제전(祭奠)을 올린다는 명분으로 탑 2개를 바쳤는데, 이때 마침 소자첨(蘇子瞻)이 항주(杭州)의 지사(知事)로 있다가 상소를 올려 이르기를,
“금탑(金塔)을 바치는 것을 거절하여 그가 오고자 하는 뜻을 끊어 버리소서.”
하니, 신종(神宗)이 따랐다. 《이상 모두 서호지(西湖志)》 ○ 살펴보건대, 《동파집(東坡集)》에 이르기를, “원우 4년에 고려의 승통 의천이 수하시자(手下侍者) 수개(壽介)ㆍ계상(繼常)ㆍ영류(領流)와 원자(院子) 김보(金保)ㆍ배선(裵善) 등 5명을 데리고 와서 항주(杭州)에서 죽은 승을 제사하였다.” 하였는데, 예문지(藝文志)에 상세하게 나온다.
일찍이 상고해 보건대, 고려사(高麗寺)는 본디 선종(禪宗)의 사찰로, 천성(天成) 2년(927)에 오월(吳越)의 충무왕(忠武王)이 실로 절을 창건하고 칙명을 내려 혜인사(慧因寺)라고 이름하였으며, 송나라 신종조(神宗朝)에 이르러서 진수 법사(晉水法師)란 자가 있어서 마명대사(馬鳴大士)의 가르침을 전하면서 《화엄경(華嚴經)》의 여러 경의(經義)에 주석을 내고 해석하였는데, 이것이 사람들에게 유전(流傳)되었다. 고려의 세자가 -살펴보건대, 왕자 의천(義天)은 세자가 아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조회함에 미쳐서는 사문(沙門)이 되어 모시면서 스승의 법을 전해 받기를 청하였다. 이에 고려사(高麗寺)라고 칭하게 되었다. 지금에 이르러 남아 있는 법파(法派)는 고려의 세자로부터 이미 17대나 전해졌다. 신종조(神宗朝) 때에는 좌승(左丞) 포맹종(蒲孟宗)이 항주(杭州)를 안무(安撫)하면서, 혜인사(慧因寺)가 고려사(高麗寺)로 바뀌었고 선종(禪宗)이 교종(敎宗)으로 바뀌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 돌에 이름을 새기기를 주청하였다. 그 뒤로 종(宗)과 교(敎)가 번갈아 나왔는데, 《전등록(傳燈錄)》에서 칭한 회상사(懷祥寺), 의령사(義寧寺)는 바로 선종이다. 《서하집(西河集)》
살펴보건대, 《고려사》 종실열전(宗室列傳)에 이르기를, “문종(文宗)의 넷째 아들 대각 국사(大覺國師) 왕후(王煦)는 자(字)가 의천(義天)인데, 송나라 철종(哲宗)의 휘(諱)를 피하여 자로서 불리어졌다. 왕후는 문종 19년(1065) 을사에 출가(出家)하였는데, 천성이 총명하여 오교(五敎)를 문득 통달하고 널리 유술(儒術)을 섭렵하여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에 호(號)를 우세 승통(祐世僧統)이라 하였다. 왕후가 송나라로 들어가서 불법(佛法)을 구하려고 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선종(宣宗) 2년(1085) 4월에 이르러서 왕후가 몰래 제자 두 사람을 데리고 송나라 상인 임영(林寧)의 배를 따라 송나라로 갔다. 송나라에 도착하자 황제가 수공전(垂拱殿)에서 인견하였는데, 객례(客禮)로 대우하면서 총애함이 지극하였다. 왕후가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불법을 묻기를 청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주객원외(主客員外) 양걸(楊傑)을 관반(館伴)으로 삼아 오중(吳中)의 여러 사찰을 두루 돌아다니게 하였다. 그 뒤 조서를 받들고서 동쪽으로 돌아오자, 왕이 태후(太后)를 모시고 봉은사(奉恩寺)에서 왕후를 맞이하였다. 왕후가 석전(釋典) 및 경서(經書) 1천 권을 바쳤다. 그리고 또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할 것을 주청한 다음, 4천 권이나 되는 많은 서책을 요(遼)나라와 송나라에서 사와 이를 모두 다 간행하였다. 처음으로 천태종(天台宗)을 창시하여 국청사(國淸寺)에 두었다. 그 뒤에 해인사(海印寺)로 물러나 있다가 숙종(肅宗) 때에 졸하니, 책봉하여 대각 국사(大覺國師)라고 추증하였다.” 하였다.
또 살펴보건대, 동파(東坡) 소식(蘇軾)이 올린 상소에 이르기를, “복건(福建)의 상인이 항주(杭州)에서 고려의 화물(貨物)을 받아 본문 사이에다 주석을 달면서 《화엄경(華嚴經)》을 만드는데, 비용을 아주 많이 들여 인판(印板)을 만들어서는 공공연하게 배로 실어 가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렇다면 왕후(王煦)가 바친 석전(釋典)은 항주에서 새겨 만든 것인가? 우리나라의 해인사(海印寺)에 있는 장경판(藏經板)은, 고지(古志)에 “신라 애장왕(哀莊王) 정묘년에 새겨 만든 것이다.”고 하였는데, 애장왕이 재위한 19년 동안에는 정묘년이란 해가 없다. 이는 대개 선종(宣宗) 4년 정묘년에 의천(義天)이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서 간행한 것인데, 애장왕 정묘년으로 잘못 전해진 것이다. 의천이 해인사로 물러나 있었으니, 해인사에 판(板)을 보관하는 것 역시 안 될 것이 없다.
○ 진각(眞覺) : 항주(杭州) 용화사(龍華寺)의 영조(靈照) 진각 선사(眞覺禪師)는 고려 사람이다. 거처함에 있어서 오직 납의(衲衣) 한 벌만 입고 지냈으므로 민중(閩中) 사람들이 ‘조포납(照布衲)’이라고 불렀다. 승이 묻기를,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하였다는데, 어떤 것이 보리수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크기가 고련수(苦楝樹)만 하다.”
하였다. 승이 그 까닭을 물으니, 이르기를,
“본디 좋은 말[馬]이 아닌데 어찌하여 수고롭게 채찍질을 해 대는가.”
하였다. 천복(天福) 정미년(947, 정종2)에 항주의 대자산(大慈山)에서 입적하여 탑에 안치되었다. 《속문헌통고》
○ 《전등록》에 실려 있는 고려의 여러 승은 다음과 같다.
천룡(天龍) 기대사(機大師)의 법사(法嗣)에 고려 설악산(雪嶽山) 영광 선사(令光禪師)가 있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화상의 가풍(家風)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분명히 기억하라.”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제법(諸法)의 근원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지시한 데 대해 사례하노라.” 하였다.
청량(淸涼) 익 선사(益禪師)의 법사에 고려 도봉산(道峯山) 혜거 국사(慧炬國師)가 있다. 처음에 정혜(淨惠)의 문하에서 기봉(機鋒)을 발하였는데, 고려의 왕이 그를 사모하여 사신을 보내어 돌아오기를 청하자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갔다. 국왕이 마음의 법문을 듣고 예우하기를 아주 극진하게 하였다. 어느 날 왕궁으로 들어오기를 청하자 설법을 하러 당(堂)에 올라갔다. 혜거 국사가 위봉루(威鳳樓)를 가리키면서 대중에게 이르기를, “위봉루가 여러 상좌(上座)들을 위하여 벌써 다 거량을 마쳤다. 여러분들은 알겠는가? 만일 알았다면 어떻게 알았는가? 모른다 하면 어째서 위봉루를 모르는가? 진중(珍重)하라.” 하였다. 혜거 국사의 설법은 중국에 퍼지지 않았으며, 또한 어디에서 죽었는지도 모른다. 또 고려 영감 선사(靈監禪師)가 있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청정한 가람(伽藍)입니까?” 하니, 영감 선사가 이르기를, “소의 외양간이 그것이다.”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니, 영감 선사가 이르기를, “저 어리석은 놈을 끌어내라.” 하였다.
보문(普門) 변 선사(辨禪師)의 법사에 고려국 혜홍 선사(慧洪禪師)가 있다.
육왕(育王) 심 선사(諶禪師)의 법사에 고려국 탄연 국사(坦然國師)가 있는데, 왕위를 버리고 사문(沙門)이 되었다. 《이상 모두 전등록》 ○ 살펴보건대, 《전등록》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의 여러 승들은 드러난 사실이 별로 없으므로, 지금 각자 별도로 조목을 세워 기록하지 않고, 단지 신라와 고려로 구분하여 조목을 세운 다음 합쳐서 기록하였다.
환상인(幻上人) -《원시선(元詩選)》에 부약금(傅若金)의 ‘환상인이 고려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送幻上人還高麗]’라는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식무외(式無外) -《원시선》에, 장저(張翥)의 ‘식무외가 고려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送式無外歸高麗國]’라는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 살펴보건대, 고려 정포(鄭誧)의 《설곡집(雪谷集)》에 ‘식무외상인이 연경에서 노닐다가 장차 강남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며[送式無外上人遊燕京將往江南]’라는 시가 있다.-
엄상인(嚴上人) -《열조시집(列朝詩集)》에 유기(劉基)의 ‘차운하여 신라 엄상인의 가을날에 부쳐 보인다는 시에 화답하다.[次韻和新羅嚴上人秋日見寄]’라는 시 2수와 ‘거듭 운을 써서 신라 엄상인의 시에 답하다.[重用韻答新羅嚴上人]’라는 시 2수가 실려 있다. ○ 살펴보건대, 신라는 마땅히 고려로 되어야 한다.-
굉연(宏演) -《열조시집》에 조선의 석(釋) 굉연의 ‘자청궁에서 노닐며[遊紫淸宮]’라는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 송운대사(松雲大師) : 일본 경장(慶長) 11년(1606, 선조39)에 조선의 송운대사가 와서 강화(講和)를 요청하였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 무명 선사(無名禪師) : 강희(康煕) 30년(1691, 숙종17)에 내가 자성(慈聖) 현 선사(賢禪師)를 보내어서 고려사(高麗寺)로 들어가 당에 올라가 설법하게 하였는데, 그때 재관(宰官)과 사민(士民)들 몇 명이 당 아래에 늘어서서 절을 하였다. 그러고는 모두들 말하기를,
“선사가 고려의 선사에게 법을 받았는데, 현 선사에게 법을 준 고려 선사가 아직도 방장(方丈)으로 있다.”
하였다. 이에 모두들 첨앙하는 예를 올릴 생각으로 그를 찾았으나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얼마 뒤에 음식의 공양을 마치고 수희(隋喜)를 하고자 하여 욕당(浴堂)에 이르니, 노납(老衲)이 흰머리를 드리우고 화로를 끼고 있는 것이 보였는데, 다 떨어진 가사를 입은 채 두 눈을 감고 구부리고 앉아 있었다. 따르는 자가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그 노선사(老禪師)이다.”
하였다. 이때 보고 있던 사람 수십 명이 모두 공경하는 마음으로 우두커니 서 있으면서 그를 놀라게 하지 않고 있다가, 얼마 뒤에 모두 탄식하면서 흩어져 갔다. 《서하집(西河集)》

[주D-001]혜관(慧灌) :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때의 승으로, 수나라에 가서 길장(吉藏)에게 삼론종(三論宗)의 종지를 배우고 돌아와, 영류왕 7년(624)에 일본으로 가 삼론종을 선양하여 일본 삼론종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주D-002]고려(高麗) : 고구려이다. 《일본서기》에서는 고구려를 통상 고려로 표기하고 ‘고마’로 읽고 있는데, 이러한 훈독(訓讀)은 맥(貊)에서 연유한 듯하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41쪽》
[주D-003]혜자(慧慈) : 영양왕(嬰陽王) 6년(595)에 일본에 건너가 백제의 승 혜총(慧聰)과 함께 법흥사(法興寺)에 살면서 포교하였으며,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스승으로 있었다.
[주D-004]혜편(慧便) :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 불도를 펴려 하였으나, 일본의 백성들이 너무 미개하여 속세에 숨어 있었다. 그러다가 평원왕(平原王) 26년(584)에 백제의 사신 녹량(鹿梁)이 미륵불상(彌勒佛像)을 가지고 오자, 일본의 대신인 소아마자(蘇我馬子)가 불상을 모시고 봉향(奉香)할 사람을 구함에 혜편이 마침내 뽑혔다. 이에 소아가 혜편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그의 세 딸을 혜편에게 보내어 비구니(比丘尼)가 되게 하였는데, 이것이 일본 비구니의 시초이다.
[주D-005]파마국(播磨國) : 현재의 일본 병고현(兵庫縣) 일대에 있었다.
[주D-006]금산(金山) :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진표전간(眞表傳簡)에는 진표의 출생지를 완산주(完山州) 만경현(萬頃縣)이라고 하였다.
[주D-007]도솔천(兜率天)의 주인 : 미륵보살(彌勒菩薩)을 가리킨다. 도솔천은 욕계(欲界) 육천(六天) 가운데 제4천(天)으로,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되는 곳에 있는 천계(天界)이다.
[주D-008]자씨(慈氏) : 미륵보살(彌勒菩薩)을 말한다.
[주D-009]소미로(蘇迷盧) : 수미산(須彌山)을 가리킨다. 수미산은 불교(佛敎)의 세계설(世界說)에서 세계의 한가운데에 높이 솟아 있다고 하는 산으로, 꼭대기에는 제석천(帝釋天)이 살고 있고, 중턱에는 사천왕(四天王)이 살고 있다고 하는데, 높이는 물 위로 8만 유순(由旬)이고 물 아래로 8만 유순이며, 가로의 길이도 그와 같다고 한다.
[주D-010]삼선(三禪) :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 가운데 색계의 제삼선천(第三禪天)을 말한다. 이 천(天)을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라 하며, 심묘(深妙)의 선정(禪定)에 따라 심신(心身)의 쾌락이 생긴다.
[주D-011]천안(天眼) :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의 오안(五眼) 가운데 하나로, 색계(色界)의 천인(天人)이 가지고 있는 눈을 말한다. 사람 가운데에서도 선정(禪定)을 닦으면 얻을 수 있으며, 색계(色界) 사대(四大)로 만든 청정한 안근(眼根)이 거칠고 자세하고 멀고 가까운 일체의 모든 색(色)과 중생(衆生)의 미래에 있을 생사(生死)의 상(相)을 미리 알 수가 있는데, 여기에는 선정(禪定)에 의하여 수득(修得)한 천안과 태어나면서부터 얻는 생득(生得)한 천안이 있다.
[주D-012]와발(瓦鉢) : 흙으로 만든 바리때로, 부처가 제자들에게 쓰게 한 것이다.
[주D-013]첨(籤) : 첨은 끝이 뾰족하여서 물건을 꿸 수 있도록 만든 도구인데, 여기서는 점을 치는 대쪽인 간(簡)의 뜻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진표전간(眞表傳簡)에는 간자(簡子)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주D-014]하나에는 …… 있어 : 《삼국유사》 권4 진표전간에는 이 부분에 대해 “미륵보살이 감응해 나타나 189개의 간자(簡子)를 주면서 이르기를, ‘이 가운데에서 제8간자는 새로 얻은 묘계(妙戒)를 비유한 것이요, 제9간자는 구족계(具足戒)를 얻은 것에 비유한 것이다. 이 두 간자는 나의 손가락뼈이며, 나머지는 모두 침향(沈香)과 단향(檀香)으로 만든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주D-015]신훈(新熏) : 신훈종자(新熏種子)를 가리킨다. 유식종(唯識宗)에서 팔식(八識) 가운데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 중에 있는 종자로, 후천적으로 여러 가지 정신 작용에 의하여 훈부(熏附)한 것을 말한다.
[주D-016]본유(本有) : 본유종자(本有種子)를 가리킨다. 신훈종자의 반대 개념으로, 아뢰야식에 잠재되어 있는 종자로서, 훈습(薰習)에 의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존재한 것을 가리킨다.
[주D-017]오하(五夏) : 5년 동안 수행하였다는 뜻으로, 하(夏)는 하안거(夏安居)를 뜻한다.
[주D-018]주류성(周留城)에 …… 일으켰다 : 주류성은 지금의 충청남도 한산(韓山) 지방에 있던 백제의 성으로, 지라성(支羅城)이라고도 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금강(錦江) 하류의 한산 부근에 있는 건지산성(乾至山城)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백제 부흥 운동의 중심지였다.
[주D-019]관륵(觀勒) : 삼론(三論)의 대가로, 무왕(武王) 3년(602)에 일본에 건너가 원흥사(元興寺)에 있으면서 불교 전파에 힘썼다.
[주D-020]법명(法明) : 백제의 비구니로, 의자왕(義慈王) 15년(655)에 대마도에 가서 오음으로 《유마경》을 독송하였다.
[주D-021]대직관겸족(大織冠鎌足) : 일본의 대신으로, 천지천황(天智天皇) 8년(669)에 내대신(內大臣)이 되었다. 《해행총재(海行摠載)》 권1 일본국기(日本國紀)에는 대직관(大職冠)으로 되어 있다.
[주D-022]오음(吳音) : 중국 오월(吳越) 지방에서 쓰인 음으로, 일본에서는 불교도가 경전을 독송(讀誦)할 때 대개 오음으로 읽으며, 불교어(佛敎語)는 대개 오음으로 발음된다.
[주D-023]묵호자(墨胡子) :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흑호자(黑胡子)로 표기되어 있다.
[주D-024]일선군(一善郡) : 지금의 선산(善山)이다.
[주D-025]승가(僧伽) : 범어 Samgha의 음역으로, 입도자(入道者)를 뜻한다. 불제자(佛弟子), 비구(比丘), 사문(沙門)이라고도 한다.
[주D-026]오천축국(五天竺國) : 동, 서, 남, 북, 중의 다섯 천축국을 말한다.
[주D-027]팔탑(八塔) : 팔대영탑(八大靈塔)을 가리킨다. 팔대영탑은 석존(釋尊)과 관계가 깊은 성지(聖地) 여덟 곳에 세운 탑으로, 부처가 탄생한 가비라국(迦毘羅國) 남비니원(藍毘尼園)의 탑, 성도(成道)한 마가타국(摩迦陀國) 이련하원(泥連河園)의 탑, 최초로 설법한 파라내국(波羅奈國) 녹야원(鹿野園)의 탑, 신통력을 나타낸 사위국(舍衛國) 기타원(祇陀園)의 탑, 도리천(忉利天)에서 칠보(七寶)의 계단으로 내려온 승가시국(僧伽尸國) 곡녀성(曲女城)의 탑, 대중을 교화하여 돌아오게 한 마갈타국(摩竭陀國) 왕사성(王舍城)의 탑, 수량(壽量)을 생각하여 열반(涅槃)에 들 것을 예언한 비야리성(毘耶離城)의 탑, 입멸(入滅)한 구시나성(拘尸那城)의 탑을 말한다.
[주D-028]우전국(于闐國) :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로, 총령(蔥嶺)의 북쪽에 있으며, 우전(于殿), 계단(谿丹), 굴단(屈丹), 구달살라(瞿怛薩那) 등으로도 표기한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는 경전(經典)이 모두 이곳을 경유하여 들어왔다.
[주D-029]총령(蔥嶺) : 지금의 파미르 고원(高原)에 뻗어 있는 큰 산맥을 말한다. 옛날에 중국에서 인도로 가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넘어야 하던 산맥이다.
[주D-030]삼귀(三歸) : 불문(佛門)에 처음 귀의할 때 하는 의식으로, 불(佛), 법(法), 승(僧)에 귀의함을 말한다. 삼귀의(三歸依), 삼귀계(三歸戒)라고도 한다.
[주D-031]도탈(度脫) : 생사(生死)의 바다를 건너서, 미계(迷界)를 벗어나 오계(悟界)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주D-032]화연(化緣) : 교화하는 인연을 말한다. 부처와 보살이 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은 교화할 인연이 있는 까닭이므로, 만일 이 화연이 다하면 곧 열반(涅槃)한다.
[주D-033]산의 …… 곳 : 하란산(賀蘭山)이다.
[주D-034]안사(安史)의 난(亂) :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일으킨 난을 말한다.
[주D-035]영무(靈武) : 당나라 때 현(縣)을 두었던 곳으로, 신성(新城)의 서북쪽에 있었다.
[주D-036]보승불(寶勝佛) : 금강계(金剛界) 만다라(曼茶羅) 팔엽연대(八葉蓮臺)의 남방월륜(南方月輪) 중앙에 위치해 있는 부처를 말한다. 일체의 재물과 보배를 맡은 부처이다. 보생불(寶生佛)이라고도 한다.
[주D-037]불공(不空) : 진언종(眞言宗)의 부법(付法) 제6조(祖)로, Amoghavajra의 음역이다. 불공금강(不空金剛)이라고도 한다. 사자국(獅子國) 사람으로, 남양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16세 때 중국에 들어와 밀학(密學)을 닦아 부법의 조(祖)가 되었다. 현종(玄宗)이 그에게 귀의하여 궁중에 단을 만들고 관정(灌頂)을 받았다.
[주D-038]지장(地藏) : 중국에서 활동한 우리나라의 승으로, 그가 죽을 때 대중(大衆)에게 고하고 함 속에 들어가 가부좌하고 죽었는데, 함 속의 얼굴이 3년 뒤에도 그대로였다 한다. 그 자리에 탑을 세웠는데, 최근에 그 탑 속을 확인한 결과 아직도 죽을 때의 모습과 같이 유체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그를 육신보살(肉身菩薩)로 추앙하고 있으며, 그가 있던 곳에 육신전(肉身殿)을 세웠다.
[주D-039]도수충(屠粹忠) : 청나라 정해(定海) 사람으로, 호가 지암(芝巖)이며, 《삼재조이》의 저자이다.
[주D-040]방완(房琬) : 원문에는 ‘方琬’으로 되어 있다. 《신승전(神僧傳)》 권6에 의거하여 ‘房琬’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1]부도(浮圖) : 범어인 Stupa의 음역으로, 탑(塔)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승의 사리나 유골을 넣은 석종(石鐘)을 부도라고 한다.
[주D-042]현광(玄光) : 신라 진흥왕 때의 승으로, 중국 진(陳)나라로 가서 형산(衡山)의 혜사(慧思)에게 《법화경(法華經)》 안락행품(安樂行品)을 배운 다음 돌아왔다. 뒤에 남악(南岳)의 조영당(祖影堂)에 28인을 그렸는데, 그 가운데 들었고,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의 조당(祖堂)에도 들었다.
[주D-043]웅주(熊州) : 신라 9주의 하나로, 지금의 공주(公州)이다.
[주D-044]조열지(晁說之) : 송나라 사람으로 자가 이도(以道)이며, 사마광(司馬光)을 흠모하여 호를 경우(景迂)라고 하였다. 소식(蘇軾)의 천거에 의해 관직에 나왔으며, 여러 서책을 박람하였고, 서화에 뛰어났다.
[주D-045]지자대사(智者大師) : 수(隋)나라의 승으로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한 지의(智顗)를 말한다. 《법화경(法華經)》을 중심으로 해서 불교를 통일하여 천태종을 완성하였으며, 진왕(陳王) 양광(楊廣)에게서 지자대사(智者大師)의 호를 받았다. 《법화현의(法華玄義)》, 《법화문구(法華文句)》 등의 저서가 있다.
[주D-046]용수(龍樹) : 인도의 대승 불교(大乘佛敎)를 크게 드날린 Nagarjuna의 음역이다. 마명(馬鳴)의 뒤에 세상에 나와 대승 법문(大乘法文)을 성대히 선양하매 대승 불교가 이로부터 발흥하였다. 제2의 석가(釋迦), 팔종(八宗)의 조사(祖師)라고 일컫는다.
[주D-047]형계(荊溪) : 중국의 승으로 형계(荊溪)에 살았던 잠연(湛然)을 가리킨다. 잠연은 천태종의 5세로, 종풍(宗風)을 선양하고, 주석서(註釋書)를 많이 지었다. 묘락대사(妙樂大師), 기주 법사(記主法師)라고도 한다.
[주D-048]상주(湘州) 사람이다 : 원문에는 ‘相州’로 되어 있는데, 《송고승전(宋高僧傳)》 권4에 의거하여 ‘湘州’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원효의 출생지가 《삼국유사》 권4에는 압량군(押梁郡) 불지촌(佛地村)이라고 되어 있는데, 지금의 경산군(慶山郡) 압량면(押梁面) 신월동(新月洞) 부근으로 추측된다.
[주D-049]상법사(湘法師) : 원문에는 ‘相法師’로 되어 있는데, 《송고승전》 권4에 의거하여 ‘湘法師’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0]지공(誌公) : 원문에는 ‘志公’으로 되어 있는데, 《송고승전》 권4에 의거하여 ‘誌公’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지공은 양(梁)나라의 승 보지(寶誌)로, 성은 송씨(宋氏)이고, 시호는 묘각대사(妙覺大師)이다. 음식을 수시로 먹었고, 머리카락의 길이가 몇 자나 되었으며, 신통한 일을 많이 나타내었고, 예언을 많이 하였다.
[주D-051]백좌(百座) : 《인왕경(仁王經)》을 강독하는 불교의 법회로, 인왕회(仁王會), 인왕도량(仁王道場)이라고도 하는데,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호국적(護國的)인 성격이 강하였다.
[주D-052]인왕경(仁王經) :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과 당나라 불공(不空)이 번역한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 두 종류가 있다. 부처가 16국 왕으로 하여금 그 나라를 보호하고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는 반야바라밀을 수지(受持)하여야 한다고 말한 경이다.
[주D-053]대안성자(大安聖者) : 신라 진흥왕 때부터 선덕왕 때까지 활동하였던 고승으로, 원효가 그에게 사사(事師)하였던 듯하다.
[주D-054]시본이각(始本二覺) :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을 말한다. 본각은 우주 법계의 근본 본체인 진여(眞如)의 이체(理體)를 말하고, 시각은 수행에 의하여 증(證)한 각체(覺體)를 말한다. 기신론(起信論)은 심생멸문(心生滅門)의 아리야식(阿梨耶識)을 무명(無明)인 불각(不覺)과 진여(眞如)인 각(覺)으로 나누며, 각은 다시 시각과 본각으로 나눈다.
[주D-055]각승(角乘) : 각(覺)과 각(角)이 음이 같으므로 소의 두 뿔로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을 비긴 것이고, 승(乘)은 불법(佛法)을 수레에 비긴 것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635쪽 주》
[주D-056]약소(略疏) : 원효의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말하는데, 중국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주D-057]배도(盃渡) : 진(晉)나라의 승으로, 기주(冀州) 사람이며, 성명은 미상이다. 항상 나무로 만든 잔[盃]을 타고 물을 건넜으므로 사람들이 배도화상(盃渡和尙)이라고 불렀다. 세세한 행실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신통력이 탁월하였는데, 세상에서는 그의 유래를 알지 못하였다.
[주D-058]탐현기(探玄記) : 당나라 법장(法藏)이 지은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를 말한다. 모두 20권으로 되어 있다.
[주D-059]경소(經疏) : 원효가 지은 《반야삼매경소(般若三昧經疏)》, 《반야심경소(般若心經疏)》, 《금강반야경소(金剛般若經疏)》 등을 말한다.
[주D-060]사교(四敎) : 이른바 원효사교(元曉四敎)를 말한다. 원효사교는 원효가 부처의 일생 동안의 가르침을 판단하여 4교로 나눈 것으로, 삼승교(三乘敎), 삼승통교(三乘通敎), 일승분교(一乘分敎), 일승만교(一乘滿敎)를 말한다.
[주D-061]사제(四諦)와 …… 경(經) : 사제는 사성제(四聖諦)라고도 하며, 고(苦), 집(集), 멸(滅), 도(道)를 말한다. 제(諦)는 불변여실(不變如實)의 진상(眞相)이란 뜻이다. 연기(緣起)는 범어 Pratiyasamutpada의 음역으로 인연생기(因緣生起), 즉 연이 되어서 결과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경은 이들 내용이 실려 있는 《아함경(阿含經)》을 말한다.
[주D-062]유심(唯心)의 …… 들어갔다 : 원효가 34세 때 동학(同學)을 하던 의상(義湘)과 함께 불법을 닦으러 당나라로 가던 길에, 요동(遼東)에 이르러서 어느 무덤 사이에서 자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다음 날 아침에 깨어 보니 해골 속에 있는 더러운 물이었음을 알았다. 이에 급히 토하다가 깨닫기를, “마음이 나면 여러 가지 법이 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해골과 둘이 아니다. 부처님 말씀에, 삼계가 오직 마음뿐[唯心]이라 하셨으니, 부처님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하고는 곧바로 본국으로 돌아왔다.
[주D-063]현수 국사(賢首國師) : 중국 화엄종의 제3조인 법장(法藏)으로, 현수는 그의 자(字)이다. 속성(俗姓)이 강(康)이었으므로 강장 국사(康藏國師)라고도 한다.
[주D-064]지상(至相) :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에 주석(住錫)하면서 화엄종을 드날렸던 지엄(智儼)을 가리킨다. 지엄은 화엄종의 제2조로, 지상 존자(至相尊者), 지상대사(至相大師)라고도 칭한다.
[주D-065]피일휴(皮日休) : 당나라의 문장가로, 자가 습미(襲美), 일소(逸少)이며, 육귀몽(陸龜蒙)과 친하게 지내 당시에 피륙(皮陸)이라고 칭하였다. 함통(咸通 860~873) 연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주D-066]남악(南嶽) 양 선사(讓禪師) : 형산(衡山)의 남악(南嶽) 관음원(觀音院)에서 주석하였던 회양(懷讓)을 가리키는데,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전법(傳法) 제자로, 대혜 선사(大慧禪師)라고도 한다.
[주D-067]법사(法嗣) : 법통(法統)을 사속(嗣續)하는 제자라는 뜻으로, 스승의 인가(印可)를 받아 법을 전하는 자를 말한다.
[주D-068]서당(西堂) 장 선사(藏禪師) : 강서(江西)의 개원사(開元寺)에 있었던 서당지장(西堂智藏)을 가리킨다.
[주D-069]계림(鷄林) : 신라를 말한다. 중국에서는 흔히 계림과 신라를 혼용하였다.
[주D-070]도의 선사(道義禪師) : 법호는 원적(元寂)으로, 중국에 가서 강서(江西)의 개원사에서 법장에게서 의심을 결단하고 법을 이어받으니, 법장이 “불법을 전하는 것을 그대가 아니면 누구에게 하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이름을 도의(道義)라고 고쳤다.
[주D-071]혜철 선사(慧徹禪師) : 동리산파(桐裡山派)의 개조(開祖)로, 혜철(惠哲)이라고도 하며, 자는 체공(體空)이고 시호는 적인(寂忍)이다. 지장(智藏)이 이미 죽은 뒤에 중국에 들어가서 심인(心印)을 받았다.
[주D-072]홍척 선사(洪陟禪師) : 남한조사(南漢祖師)라고도 하며, 시호는 증각(證覺)이다. 당나라로 들어가서 법장에게 심인을 받았다.
[주D-073]마곡(麻谷) 철 선사(徹禪師) : 보철(寶徹)을 가리킨다. 마곡은 산서성(山西省) 하동현(河東縣) 남쪽에 있는 지명으로 보철이 이곳에 주석하면서 설법하였다.
[주D-074]무염 선사(無染禪師) : 신라 때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성주산파(聖住山派)의 개조로, 휘(諱)는 무주(無住)이고, 시호는 대랑혜(大朗慧)이다. 중국에 들어가 마곡 보철(麻谷寶徹)을 참방(參訪)하여 인가(印可)를 받고 여러 곳을 두루 찾아다님에 그의 이름이 알려져 동방대보살(東方大菩薩)이라 불리었다.
[주D-075]장경(章敬) 운 선사(惲禪師) : 당나라 때의 승인 회운(懷惲)을 가리킨다. 장경은 경조(京兆)에 있는 사찰의 이름이다.
[주D-076]현욱 선사(玄昱禪師) :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봉림산파(鳳林山派)의 개조로, 현육(玄育), 혜목(慧目)이라고도 하며, 시호는 원감(圓鑑)이다. 회운(懷惲)이 입적한 뒤에 중국에 들어가 인가를 받았다.
[주D-077]남전(南泉) 원 선사(願禪師) : 보원(普願)을 가리키는데, 남전(南泉)은 지명인 동시에 그의 호이다.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로, 지양(池陽)의 남전(南泉)에 선원을 짓고 30년 동안 내려가지 않았으며, 학인(學人)을 준엄하게 다루어서 남전참묘(南泉斬猫), 남전겸자(南泉鎌子), 남전모란(南泉牡丹) 등 많은 일화를 남겼다.
[주D-078]도균 선사(道均禪師) : 도윤(道允)을 가리키며, 도운(道雲)이라고도 한다. 호는 쌍봉(雙峰)이며, 시호는 철감(澈鑑)이다. 황해도 봉산(鳳山) 출신으로, 헌덕왕 17년(825)에 당나라로 들어가 남전 보원(南泉普願)에게 법을 받았으며, 문성왕 4년(842)에 귀국하였다.
[주D-079]염관(鹽官) 안 선사(安禪師) : 원문에는 ‘監官’으로 되어 있는데,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10에 의거하여 ‘鹽官’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제안(齊安)을 가리키며, 염관은 항주(杭州)에 있는 현(縣) 이름이다. 당나라 말기의 호법승(護法僧)으로, 지엄(智儼)에게서 배웠으며, 염관현의 해창원(海昌院)에서 강설하였다.
[주D-080]품일 선사(品日禪師) : 구산선문 가운데 도굴산파(闍崛山派)의 개조로, 범일(梵日)이라고도 하며, 시호는 통효(通曉)이다. 흥덕왕 6년(831)에 당나라에 들어가 제안 선사를 참방하여 제안 선사의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도이다.”라는 한마디 말에 크게 깨우치고 6년 동안 섬겼다.
[주D-081]대매(大梅) 상 선사(常禪師) : 법상(法常)을 가리킨다. 대매는 그의 호이면서 동시에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에 있는 산 이름으로, 그는 이곳에 호성사(護聖寺)를 짓고 종풍을 크게 떨쳤다.
[주D-082]서쪽에서 온 뜻 : 초조(初祖)인 달마(達磨)가 서천(西天)으로부터 중국에 와서 선법(禪法)을 전한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그 뜻을 참구(參究)하는 것이 바로 불조(佛祖)의 심인(心印)을 참구하는 것이다. 선문답에서 자주 인용되는 문구이다.
[주D-083]과두(裹頭) : 승들이 입는 가사(袈裟)로 머리를 싸매는 것으로, 선문답(禪問答)에서 자주 인용된다.
[주D-084]근본[本] : 근본은 낙(酪)을 만드는 근본인 우유(牛乳)를 뜻한다.
[주D-085]귀종(歸宗) 상 선사(常禪師) : 지상(智常)을 가리킨다. 귀종은 여산(廬山)에 있는 사찰의 이름이다.
[주D-086]상주(常住) : 이 부분이 원문에는 ‘常任’으로 되어 있는데,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0권에 의거하여 ‘常住’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87]기봉(機鋒) : 기(機)는 수행에 따라 얻은 심기(心機)이고, 봉(鋒)은 심기의 활용이 날카로운 모양을 뜻한다. 선객(禪客)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의 예민한 활용을 말한다.
[주D-088]신라(新羅) 증 선사(證禪師) : 대증 선사(大證禪師)를 가리킨다.
[주D-089]신라 척 선사(陟禪師) : 홍척 선사(洪陟禪師)를 가리킨다. 홍직 선사(洪直禪師)라고도 한다.
[주D-090]천룡화상(天龍和尙) : 중국 항주(杭州)의 승으로, 명주(明州) 대매산(大梅山) 법상 선사(法常禪師)의 법을 이어받았다.
[주D-091]앙산(仰山) 적 선사(寂禪師) : 혜적(慧寂)을 가리킨다. 앙산은 그의 호이며, 위앙종(潙仰宗)의 개조로, 대앙산(大仰山)에서 크게 선풍(禪風)을 드날렸다.
[주D-092]오관산(五冠山) 순지 선사(順支禪師) : 오관산은 장단(長湍) 주위에 있는 산이다. 순지는 헌안왕(憲安王) 3년(859)에 당나라에 가서 혜적(慧寂)에게서 법을 받았으며, 그의 시호(諡號)가 요오 선사(了悟禪師)이다.
[주D-093]불자(拂子) : 원문에는 ‘佛子’로 되어 있는데, 《경덕전등록》 권13에 의거하여 ‘拂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불자는 불가에서 벌레를 쫓거나 먼지를 터는 데 쓰는 도구이다.
[주D-094]임제(臨濟) 현 선사(玄禪師) : 의현(義玄)을 가리킨다. 임제종(臨濟宗)의 개조(開祖)로, 황벽 희운(黃蘗希運)의 제자이며, 임제는 그의 호이다.
[주D-095]석상(石霜) 저 선사(諸禪師) : 경저(慶諸)를 가리키며, 석상은 그의 호이다.
[주D-096]행적 선사(行寂禪師) : 문성왕(文聖王) 10년(848)에 당나라에 건너가 15년 동안 명산을 돌아다니면서 수도하였으며, 석상 경저에게서 심인(心印)을 받아 귀국하여 효공왕(孝恭王) 때 국사(國師)가 되었다. 시호는 낭공대사(朗空大師)이다.
[주D-097]동산(洞山) 개 선사(价禪師) : 조동종(曹洞宗)의 개조인 양개(良价)를 가리킨다. 동산은 그의 호이면서 동시에 강서성(江西省) 서주부(瑞州府) 고안현(高安縣)에 있는 산 이름으로, 동개가 이 산의 보리원(普利院)에서 크게 선풍(禪風)을 떨쳤다.
[주D-098]구봉(九峯) 건 선사(虔禪師) : 도건(道虔)을 가리킨다. 구봉은 균주(筠州)에 있는 산 이름이다.
[주D-099]운개(雲蓋) 원 선사(元禪師) : 지원(志元)을 가리킨다. 운개는 담주(潭州)에 있는 산 이름이다.
[주D-100]대인(大人) : 부처나 보살을 가리킨다.
[주D-101]자라장(紫羅帳) 속 : 자라장은 자색의 비단으로 된 휘장으로, 귀인이 있는 곳에 치는 장막이다. 선어(禪語)에서는 이를 가장 존귀한 곳인 제왕(帝王)의 거처를 뜻하는바, 일반 사람이 엿볼 수 없는 제왕의 거처를 상식적(常識的)인 사고가 미치지 못하는 절대적인 경지에 비유한 것이다.
[주D-102]12시 : 하루 24시간을 말한다. 예전에는 하루를 12시로 나누었다.
[주D-103]패엽(貝葉) : 불경(佛經)을 가리킨다. 패다라(貝多羅) 나무의 잎에다가 쓴 경문(經文)을 말한다.
[주D-104]동관(潼關) : 원문에는 ‘潼開’로 되어 있는데, 《경덕전등록》 권17에 의거하여 ‘潼關’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동관은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관문(關門)의 이름이다.
[주D-105]설봉(雪峯) 존 선사(存禪師) : 원문에는 ‘雲峯’으로 되어 있는데, 《경덕전등록》 권19에 의거하여 ‘雪峯’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의존(義存)을 가리킨다. 설봉은 복주(福州)에 있다.
[주D-106]운거(雲居) 응 선사(膺禪師) : 도응(道膺)을 가리킨다. 운거는 그의 호이면서 동시에 강서성(江西省) 건창(建昌)에 있는 산 이름으로, 도응이 이곳에 주석하여 동산(洞山)의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다.
[주D-107]경유 선사(慶猷禪師) :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까지 활동하였던 승려로, 시호는 법경(法鏡)이다. 진성여왕(眞聖女王) 2년(888)에 당나라에 들어가서 운거 도응의 가르침을 받고 귀국하였으며, 고려 태조는 그를 왕사(王師)로 섬겼다.
[주D-108]방(棒) : 막대로 때리는 것이다. 선가(禪家)의 종장(宗匠)이 사람을 대할 때 방으로 치거나 대갈(大喝)을 발하는데, 방은 덕산(德山)에게서 시작되고 갈(喝)은 임제(臨濟)에게서 나왔다.
[주D-109]백조(白兆) 원 선사(圓禪師) : 지원(志圓)을 가리킨다. 백조는 안주(安州)에 있는 산 이름이다.
[주D-110]장경(長慶) 능 선사(稜禪師) : 혜릉(慧稜)을 가리키며, 장경은 그의 호이다. 설봉(雪峯) 의존(義存)의 제자로 초경(招慶)과 장경(長慶) 두 곳에서 개당(開堂)하여 설법하였다.
[주D-111]홍주(洪州) 백장산(百丈山) : 강서성(江西省) 남창부 봉신현에 있는 산으로, 대웅산(大雄山)이라고도 하며, 백장대사(百丈大師)가 백장청규(百丈淸規)를 만들어서 선문(禪門)의 의식(儀式)을 제정한 곳이다.
[주D-112]명조(明照) 안 선사(安禪師) : 동산(洞山) 양개 선사(良价禪師)의 법사(法嗣)인 소산(疏山) 광인 선사(光仁禪師)의 법사를 이었다. 《경덕전등록》 권17에 그의 문답(問答)이 실려 있다.
[주D-113]영주(郢州) 파초산(芭蕉山)의 혜청 선사(慧淸禪師) : 앙산(仰山) 남탑(南塔) 광용 선사(光涌禪師)의 법사로, 《경덕전등록》 권12에 그의 문답이 실려 있다.
[주D-114]그 뒤에 …… 발각되었다 : 일설에는 김대비가 장정만(張淨滿)에게 돈을 주고 조계(曹溪)의 육조탑(六祖塔)에서 육조대사의 머리를 훔쳐 내어 해동으로 돌아와 공양하였는데, 지금의 지리산 쌍계사(雙溪寺) 탑전(塔殿)에 봉안한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이 그것이라고 한다.
[주D-115]위령선(威靈仙) :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 만목(蔓木)으로, 여름에는 희고 큰 꽃이 피는데, 주로 인가 부근에 관상용으로 심는다. 이 위령선의 뿌리는 한의(韓醫)에서 담이나 풍(風), 습(濕) 등을 다스리는 데 쓴다.
[주D-116]도신(道侁) : 신라 말기에 활동하면서 《도선비기(道詵秘記)》를 지은 도선(道詵)을 가리킨다.
[주D-117]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 : 일행은 당나라의 승으로, 밀교(密敎)를 익혀서 지리법에 능통했다고 한다. 일행이 죽은 해는 727년으로, 도선은 그보다 대략 2백 년 뒤에 활동하였으며, 또한 당나라에는 가지 않았는바, 도선이 일행의 지리법을 직접 전수받은 것은 아니다.
[주D-118]법중(法衆) : 불법(佛法)을 따르는 중승(衆僧)을 가리키는바, 출가한 오중(五衆)을 모두 칭한다.
[주D-119]제관(諦觀) : 고려의 승으로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를 지었다. 《천태사교의》는 각지에 유포되어 일본에도 전해졌다. 그가 천태종의 서적을 중국에 전하여 천태교가 중국에서는 다시 유행하였으나, 그가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여 고려 천태종의 맥은 끊기게 되었는데, 의천(義天)이 중국에 가서 천태교를 배운 다음 고려로 돌아와 천태종을 수립하였다.
[주D-120]오월왕(吳越王) 숙(俶) : 오월의 창건자인 전류(錢鏐)의 손자로, 자가 문덕(文德)이고 시호가 충의(忠懿)이다.
[주D-121]적 법사(寂法師) : 중국 천태종(天台宗)의 중흥조(中興祖)인 의적(義寂)을 가리킨다. 《송고승전(宋高僧傳)》 권7에 그의 전기(傳記)가 실려 있다.
[주D-122]나계(螺溪) : 나계 존자(螺溪尊者) 의적(義寂)을 가리킨다.
[주D-123]교관(敎觀) : 교상(敎相)과 관심(觀心)의 두 문(門)을 말한다. 교상은 이론이고 관심은 실천의 뜻이다. 교관이문(敎觀二門), 교문관문(敎門觀門)이라고도 한다.
[주D-124]인효왕(仁孝王) : 인효(仁孝)는 문종(文宗)의 시호(諡號)이다. 문종은 묘호(廟號)이다.
[주D-125]우세 승통(祐世僧統) : 우세는 “넓은 지혜로 가르침의 근본을 열고 큰 진리로 세상을 돕는다.[廣智開宗弘眞佑世]”라는 뜻의 별호이고, 승통은 승려를 다스리는 고위 직책이다.《金崙世, 東師列傳, 廣濟院, 1991, 64쪽 주》
[주D-126]원우(元祐) 초 : 《동사강목》 제7 하에는 송 신종 원풍(元豐) 8년(1085, 선종2) 4월에 왕의 아우 왕후(王煦)가 도망하여 송나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주D-127]전당(錢塘)의 혜인원(惠因院) : 이때 혜인원에 정원 선사(淨源禪師)가 있었다. 송 철종이 의천에게 법을 가르칠 만한 승을 천거하게 하자, 중국 불교계에서 동경(東京) 각엄사(覺嚴寺)의 유성 선사(有誠禪師)를 천거하였는데, 유성 선사가 다시 전당 혜인원의 정원 선사를 자기 대신 천거하였다.
[주D-128]불인(佛印) : 이름은 요원(了元)이며, 자는 각로(覺老)이다. 개선(開先) 선섬(善暹)의 법을 이었으며, 소식(蘇軾)과 서로 시를 지어 화답하기도 하였다.
[주D-129]제방(諸方) : 여러 종파의 승려들을 말한다.
[주D-130]정원(淨源) : 북송의 승으로, 호는 잠수(潛叟)이고, 자는 백장(伯長)이다. 항주(杭州)의 혜인원(惠因院) 등에 있었으며, 의천(義天)에게서 금으로 쓴 《화엄경(華嚴經)》 세 가지 역본(譯本) 180권을 받아서 장경각(藏經閣)을 짓고 봉안하였다.
[주D-131]수교(首敎) : 《동사열전(東師列傳)》 권1 대각국사전(大覺國師傳)에, “표문을 올려서 현수의 가르침을 전해 주기를 청하였다.[乞傳賢首敎]” 하였는바, 중국 화엄종의 제3조인 법장(法藏), 즉 현수 법사(賢首法師)의 가르침을 말한다.
[주D-132]오월(吳越)의 충무왕(忠武王) : 오월은 오대(五代) 시대 때 10국 가운데 하나이며, 충무왕은 오월을 개국한 전류(錢鏐)를 가리킨다.
[주D-133]진수 법사(晉水法師) : 정원 선사(淨源禪師)를 말한다. 진수는 그의 호이다.
[주D-134]마명대사(馬鳴大士) : 중인도(中印度) 마갈타국 사람으로, 부처가 죽은 지 6백 년 뒤에 세상에 나온 대승(大乘)의 논사(論師)이다. 북쪽으로 월지국(月支國)에 들어가서 대승 불교(大乘佛敎)를 전하였으므로 대승 불교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저서로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대장엄론경(大莊嚴論經)》, 《불소행찬(佛所行讚)》 등이 있다.
[주D-135]종(宗)과 교(敎) : 종은 종지(宗旨), 곧 불교의 근본 취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선종(禪宗)을 뜻하며, 교는 경론(經論)에 의해 표현한 언교(言敎)의 의미로 교종(敎宗)을 뜻한다.
[주D-136]오교(五敎) : 신라 불교가 한창 성하였을 때 경교(經敎)를 공부하던 불교의 다섯 가지 종파(宗派)로, 열반종(涅槃宗), 남산종(南山宗), 화엄종(華嚴宗), 법상종(法相宗), 법성종(法性宗)을 말한다.
[주D-137]고련수(苦楝樹) : 멀구슬나무로, 전단(旃檀)을 말한다.
[주D-138]천룡(天龍) 기대사(機大師) : 중기(重機)를 가리킨다. 천룡은 산 이름이며, 청원(淸原) 행사(行思)의 법손(法孫)이다.
[주D-139]청량(淸涼) 익 선사(益禪師) : 문익(文益)을 가리킨다. 청량은 건당(建唐)에 있는 절 이름이며, 법안종(法眼宗)의 개조이다.
[주D-140]보문(普門) 변 선사(辨禪師) : 원문에는 ‘普明辨禪師’로 되어 있는데, 《경덕전등록》 권26에 의거하여 ‘普門辨禪師’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희변 선사(希辨禪師)를 가리키며, 보문은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사찰의 이름이다.
[주D-141]육왕(育王) 심 선사(諶禪師) : 개심(介諶)을 가리킨다. 육왕은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에 있는 산 이름으로, 개심이 이곳에 있는 광리사(廣利寺)에 주석하였다.
[주D-142]탄연 국사(坦然國師)가 …… 되었다 : 탄연은 고려 의종(毅宗) 때의 승으로, 사위의송(四威儀頌)과 상당어구(上堂語句)를 중국 광리사의 개심(介諶)에게 써 보냈더니 찬탄하면서 가사(袈裟)와 의발(衣鉢)을 전해 왔다. 그의 속성은 손씨(孫氏)로, 여기에서 왕위를 버리고 사문이 되었다고 한 것은 잘못 말한 것이다.
[주D-143]경장(慶長) : 원문에는 ‘長慶’으로 되어 있는데, 《동양연표(東洋年表)》에 의거하여 ‘慶長’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144]수희(隋喜) : 남의 착한 일을 보고 따라서 기뻐하는 마음을 말하는데, 오회(五悔) 가운데 하나이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속집(續集) 제13권
 지리고(地理考) 13
산수(山水) 1 경내(境內)의 산(山)과 도서(島嶼)

○ 삼각산(三角山)ㆍ남산(南山)
《조선부(朝鮮賦)》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삼각산은 곧 왕경(王京)의 진산(鎭山)으로서 산세가 가장 높은데, 왕궁은 그 산의 산허리에 있다. 산마루를 바라보니 높은 산들이 마치 톱니처럼 생겼다. ○ 홍제원(弘濟院) 동쪽으로부터 반 리도 채 못 가서 하늘이 한 관문(關門)을 만들었는데, 북쪽으로는 삼각산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남산에 접하였으며, 그 사이로는 말 한 필만이 통과할 수 있어서 험하기가 이보다 더할 수가 없다. ○ 동쪽으로 여러 산을 바라보면 모두 팔짱을 끼고서 둘러싸고 있는 형세이다. 삼각산에서 남산에 이르기까지 산빛은 모두 희면서도 약간 붉어 바라보면 마치 흰 눈이 온 것 같다.
○ 백악(白岳) -혹은 북악(北岳)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북악산은 한성부(漢城府)의 경내에 있다. 본조(本朝) 초에 조선국의 왕이 이 산에 의지하여 도읍하였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북악산은 국성(國城)의 북쪽에 있다. 만력(萬曆) 연간에 왜적들이 왕성에 웅거해 있으면서 북악산을 등지고 한수(漢水)를 향해 있었는데, 이 산이 바로 그 산이다.
《유서찬요(類書纂要)》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의 경기에는 백악이 있다.
○ 용두봉(龍頭峯) -혹은 용산(龍山)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산은 조선국의 한강 동쪽에 있다.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중국 사신이 조선에 이르면 한강 가에서 잔치를 하고 양화도(楊花渡)에서 배를 띄워 용두봉에 올라가 강산의 승경(勝景)을 두루 구경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각산은 경도(京都)의 진산(鎭山)으로, 남쪽으로 문수봉(文殊峯)에 이르러 백악(白嶽), 응봉(鷹峯), 인왕산(仁王山)이 되는데, 왕궁(王宮)이 거기에 있다. 낙산(酪山)이 그 왼쪽에 솟아 있고, 무악(毋岳)이 그 오른쪽에 걸터 있으며, 목멱산(木覓山)이 앞에서 공읍(拱揖)하고 있고, 한강이 그 남쪽을 흐르니, 이곳은 참으로 만대토록 영원할 크나큰 터전이고 하늘이 만들어 낸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요새이다. 백악은 혹 북악(北岳)이라고도 하는데, 도성 안 정북쪽에 있다. 목멱산은 바로 동월(董越)의 《조선부》에서 말한 남산이다. 용두봉은 바로 잠두봉(蠶頭峯)으로, 혹 용산이라고도 하며, 양화도의 동쪽 강 언덕에 있다.
○ 백두산(白頭山) -혹은 불함산(不咸山), 개마산(蓋馬山), 태백산(太白山), 도태산(徒太山), 백산(白山), 장백산(長白山),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隣)이라고도 한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황(大荒)의 가운데에 산이 있는데 이름을 불함산(不咸山)이라고 한다.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동옥저열전(東沃沮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개마는 현 이름으로 현도군(玄菟郡)에 속하며, 그 산은 지금의 평양성(平壤城) 서쪽에 있다. ○ 《대청일통지》에 이르기를, “개마대산은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 《한서(漢書)》 지리지를 보면, ‘현도군에 서개마현(西蓋馬縣)이 있다.’ 하였는바, 산을 인하여 현을 이름한 것이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이는 《후한서》 주석의 잘못된 설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후위서(後魏書)》 물길열전(勿吉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물길국의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나라의 말로는 태백산(太白山)이라고 한다. 그 산에는 호랑이, 표범, 큰곰, 이리가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산에서는 대소변을 보지 못하므로 산을 지나가는 사람은 모두 대소변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간다.
《괄지지(括地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말갈국(靺鞨國)은 옛 숙신이다. 그 나라에는 백산(白山)이 있는데, 조수(鳥獸)와 초목이 모두 희다.
《금사(金史)》 고려열전(高麗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옛 숙신의 지역에 산다. 그곳에는 산이 있는데, 백산이라고 한다. 대개 장백산(長白山)은 금나라가 일어난 곳이다.
《행정록(行程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주(同州)에서 40일을 가면 숙주(肅州)에 이르는데, 동쪽으로 대산(大山)이 바라보인다. 금나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곳은 신라산(新羅山)이다. 그 산속에서는 인삼(人蔘)과 백부자(白附子)가 산출되며 고구려와 경계를 접하였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산은 바로 장백산이다.
섭융례(葉隆禮)의 《요지(遼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냉산(冷山)에서 동남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데, 백의관음(白衣觀音)이 사는 곳이다. 그 산에 사는 금수(禽獸)는 모두 흰색이며, 사람들은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 산속에서 대소변을 보았다가 뱀 따위에게 해를 당할까 두려워서이다. 흑수(黑水)가 이곳에서 발원한다. 옛날에는 속말하(粟末河)라고 불렀는데, 태종(太宗)이 진(晉)을 격파하고서 혼동강(混同江)으로 고쳤다. 그곳의 풍속에는 나무를 파내어서 배를 만드는데, 길이가 8척가량 되며, 모양이 베틀의 북[梭]과 같이 생겼으므로 사선(梭船)이라고 한다. 배 가장자리에 노를 하나 매달아 놓았는데, 단지 고기잡이를 하는 데 쓴다. 수레를 건넬 때에는 두 척의 배를 나란히 잇대거나 혹은 세 척의 배를 잇댄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길림(吉林) 오라성(烏喇城)의 동남쪽에 있으면서 1000여 리에 걸쳐 길게 뻗어 있다. 동쪽으로 영고탑(寧古塔)에서 서쪽으로 봉천부(奉天府)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산이 모두 이 산에서 발맥(發脈)한다. 산꼭대기에는 못[潭]이 있어서 압록강(鴨綠江), 혼동강(混同江), 토문강(土門江) 세 강이 발원한다. 옛 이름은 불함산이며, 또한 태백산이라고도 하고 백산이라고도 한다. 《산해경》에는 “대황(大荒)의 가운데에 산이 있는데 불함산이라고 한다.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 하였으며, 《진서(晉書)》에는 “숙신씨는 불함산 북쪽에 있다.” 하였으며, 《후위서》에는 “물길국의 남쪽에는 도태산이 있는데, 위(魏)나라 말로는 태백이라고 한다. 그 산에는 호랑이, 표범, 큰곰, 이리가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산에서는 대소변을 보지 못하므로 산을 지나가는 사람은 모두 대소변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간다.” 하였다. 《금사》 세기(世紀)를 보면, “그 북쪽에는 혼동강과 장백산이 있다. 혼동강은 흑룡강(黑龍江)이라고도 부른다. 이른바 백산(白山)이니 흑수(黑水)니 하는 것은 이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하였으며, 또 예지(禮志)를 보면, “대정(大定) 12년(1172)에 장백산신(長白山神)을 봉해 흥국영응왕(興國靈應王)으로 삼고는 그 산 북쪽 지역에 묘우(廟宇)를 세웠다. 명창(明昌) 4년(1193)에 다시 책봉하여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로 삼았다.” 하였다. 섭융례의 《요지》를 보면, “장백산은 냉산(冷山)에서 동남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그 산에 사는 금수(禽獸)는 모두 흰색이며, 사람들은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 산속에서 대소변을 보았다가 뱀 따위에게 해를 당할까 두려워서이다.” 하였다. 《대명일통지》를 보면, “장백산은 삼만위(三萬衛)에서 동북쪽으로 1000여 리, 옛 회령부(會寧府)에서 남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1000리에 걸쳐서 길게 뻗어 있으며, 높이가 200리이다. 그 산꼭대기에는 못[潭]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며, 못의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압록강이고, 북쪽으로 흐르는 것이 혼동강이고,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야고하(阿也苦河)이다.” 하였다. 《성경통지(盛京通志)》를 보면, “장백산은 바로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隣)이다. 선창(船廠)에서 동남쪽으로 13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대명일통지》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야고하이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해 보건대, 서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압록강이고, 동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토문강이며, 북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혼동강으로, 아야고하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는바, 고금의 명칭이 다르게 변한 것이다. 금나라 때 세운 묘우는 무너졌으며, 조선조에서는 높여서 장백산지신(長白山之神)으로 삼았다. 사당은 길림성의 서남쪽에 있는 온덕항산(溫德恒山)에 있는데, 보름에 제사 지낸다. 강희(康煕) 17년(1678)에 황지(皇旨)를 받들어서 대신(大臣)인 각라오목눌(覺羅吳木訥) 등을 파견하여 장백산에 올라가 형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이들이 산에 올라가다가 산기슭 한 곳을 보니, 사방에 수풀이 빽빽하게 우거진 가운데 둥글고 평평한 지역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초목이 자라지 않았다. 숲을 나와서 1리쯤 가자 향나무가 줄지어 자라고 황화(黃花)가 향기를 자욱하게 풍기고 있었는데, 산 중턱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위로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 이에 여러 대신들이 꿇어앉아서 황지(皇旨)를 읽자, 구름과 안개가 확 걷히면서 산의 형세가 환하게 드러나, 작은 산길이 있어서 올라갈 수가 있었다. 그 중간에 섬돌 모양으로 된 석대(石臺)가 있었는데, 평탄하여서 사방을 둘러보기에 좋았다. 산꼭대기는 둥근 형세를 이루고 있었는데, 눈이 쌓여서 환하게 밝았다. 그 위에 올라가 보니 다섯 개의 봉우리가 부(府)처럼 빙 둘러 솟아 있었고, 남쪽에 있는 한 봉우리가 조금 낮아서 문(門)과 같았다. 그 가운데 있는 연못은 몹시 깊었는데, 절벽에서의 거리가 50장(丈)가량 되었으며, 둘레가 40여 리 정도 되었다. 산의 사방 주위에서는 수많은 샘물이 분출하였는데, 바로 세 개의 큰 강이 발원하는 곳이었다. 강희 23년(1684)에 다시 주방협령(駐防協領) 늑출(勒出) 등을 파견하여 다시금 주위를 돌면서 산의 형세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너비와 길이 및 길게 뻗은 것이 《대명일통지》에서 말한 것과 같았다. 산꼭대기에는 다른 나무는 자라지 못하였고, 풀들은 대부분이 흰 꽃이 피어 있었다. 남쪽 산기슭은 길게 뻗어 엉켰다가 두 줄기로 나뉘어졌다. 그 가운데 서남쪽을 향한 한 줄기의 동쪽 경계는 압록강이고, 서쪽 경계는 통가강(通加江)인데, 산기슭이 다한 곳에서 이 두 강이 모였다. 다른 한 줄기는 산의 서쪽을 돌아서 북쪽으로 수백 리를 뻗쳐 있는데, 여러 물이 나뉘어지는 곳이므로 구지(舊志)에서는 이를 통틀어 분수령(分水嶺)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서쪽으로 흥경(興京) 주변에 이르기까지 수목이 무성하고 빽빽하여 하늘의 해를 가리는데, 그 지방 토착민들은 이를 납록와집(納綠窩集) -삼가 살펴보건대, 와집(窩集)은 바로 수림(樹林)을 칭한다.- 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부터는 서쪽으로 흥경의 문(門)에 이르러서 마침내 개운산(開運山)이 된다. 납록와집에서부터 북쪽으로 뻗은 한 산등성이는 그 길이가 40여 리나 되는데, 토착민들은 이를 가이민주돈(歌爾民朱敦) -삼가 살펴보건대, 가이민주돈은 바로 장령(長嶺)의 칭호이다.- 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영액변문(英額邊門)으로 들어가서 마침내 천주산(天柱山)과 융업산(隆業山)이 되는데, 빙빙 돌면서 굽이져 뻗어 호랑이가 웅크리고 용이 서린 것과 같다. 그 사이에는 땅을 인하여 이름을 지어 산(山)이 되고 영(嶺)이 된 것이 한두 곳이 아닌데, 그 모두가 장백산의 지맥(支脈)이다. 장백산의 신령스럽고 기이함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일컬어져 왔거니와, 신성(神聖)한 황조(皇朝)가 발상(發祥)하여 지금에 와서 흥성해졌는바, 억만년토록 영원할 크나큰 왕업은 이 산과 더불어 끝이 없을 것이다. 살펴보건대, 《통지(通志)》에 이르기를, “선창(船廠)에서 동남쪽으로 13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해 보니, 이 장백산은 실제로는 주(州)에서 동남쪽으로 600리 되는 곳에 있다.
《대청개국방략(大淸開國方略)》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높이가 200여 리이고, 1000여 리에 걸쳐서 뻗어 있다. 웅대한 모습으로 우뚝하니 높이 솟아 있어 영기(靈氣)가 모인 곳이다. 산 위에는 못[潭]이 있는데, 달문(闥門)이라고 한다. 못은 둘레가 80리이며, 근원이 깊고 흐름이 넓어 압록강, 혼동강, 애호강(愛滹江) 세 강의 물이 나온다. -삼가 살펴보건대, 애호강은 바로 아야고하(阿也苦河)의 음이 변한 것이다.
《강희기가격물론(康煕幾暇格物論)》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오라(烏喇)의 남쪽에 길게 뻗어 있다. 장백산의 사방 주위에는 수많은 샘물이 솟아나와 송화강(松花江), 압록강(鴨綠江), 토문강(土門江) 세 큰 강의 근원이 된다. 그 남쪽 산기슭은 두 개의 큰 줄기로 나눠지는데, 서남쪽으로 향한 한 줄기는 동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통가강에 이른다. 대개 고려의 여러 산들은 모두 그 지맥(支脈)이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북쪽 달단(韃靼)의 남쪽 경계에는 큰 산이 있는데, 이름이 백두산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백두산은 회령부(會寧府)에서 서쪽으로 7, 8일 걸리는 곳에 있다. 옛날의 불함산으로, 중국 사람들은 장백산이라고 한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광종(光宗) 10년(959)에 압록강 바깥쪽의 여진(女眞)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 살게 하였다.” 하였는데, 백두산이라는 칭호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후한서》에 이른 바 개마산(蓋馬山) 역시 백두산이다. 《대명일통지》와 《대청일통지》에는 평양의 서쪽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고, 《대청일통지》에는 또 지금의 개평현(蓋平縣)이 그곳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고려의 윤관(尹瓘)이 여진의 갈라전(曷懶甸)을 격파하고 9성(城)을 설치한 곳이 지금 함흥(咸興) 북쪽 지역인데, 임언(林彦)의 구성기(九城記)를 보면,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북쪽은 개마산에 끼어 있고, 남쪽으로는 장주(長州)와 정주(定州)에 접하고 있다.”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개마가 백두산인 것이 분명하다.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은 일찍이 개마산을 백두산이라고 하면서, “참으로 개(蓋)의 초성(初聲)은 실로 해(奚)와 같은데, 우리나라의 음은 백(白)을 일러 해(奚)라고 하고, 마(馬)를 일러 말[摩尼]이라 하고, 두(頭)를 일러 역시 머리[摩尼]라 한다. 개마(蓋馬)란 것은 해마니(奚摩尼)이며, 해마니는 백두(白頭)이다.” 하였는데, 이 설이 그럴 듯하다.
○ 마천령(磨天嶺)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천령은 함흥부의 동북쪽에 있으며, 조선에서는 동북의 웅관(雄關)이라고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마천령은 단천부(端川府)의 동쪽에 있다.
○ 극적혼산(克敵昏山)
《금사》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연골사호(烏延鶻沙虎)는 갈라로(曷懶路) 극적혼산 사람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갈라로는 지금의 함흥부 북쪽 지역인바, 이 산은 마땅히 그 지역에 있어야 한다.
○ 영강산(永岡山)ㆍ올평산(兀平山)
《화한삼재도회》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영강산은 함흥 주변에 있다. 또 올평산이 함흥에서 북쪽으로 80리 되는 곳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두 산은 상고할 수가 없다.
○ 을리골령(乙離骨嶺)
《금사》 세기(世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동북계연혁 오국성조(五國城條)에 나온다.
○ 철령(鐵嶺) -안변부(安邊府)의 남쪽에 있다.
《명사》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동북계연혁 철령위조(鐵嶺衛條)에 나온다.
○ 소백산(小白山) -바로 백두산의 남쪽 봉우리로 압록강이 발원하는 곳이다-ㆍ충천령(沖天嶺) -삼수부(三水府)의 서쪽에 있다-ㆍ증산(甑山) -단천부(端川府)의 서쪽에 있다-ㆍ회산(檜山) -이원현(利原縣)의 서쪽에 있다-ㆍ성대산(聖代山) -북청부(北靑府)의 북쪽에 있다-ㆍ입원산(立元山) -상고할 수가 없다-ㆍ도안산(道安山) -정평부(定平府)의 남쪽에 있다-ㆍ비백산(鼻白山) -정평부의 북쪽에 있다-ㆍ우선산(遇仙山) -상고할 수가 없다-ㆍ대박산(大博山) -영흥부(永興府)의 서쪽에 있다-ㆍ반룡산(盤龍山) -문천군(文川郡)의 서남쪽에 있다-ㆍ검화산(劍華山) -바로 검봉산(劍峯山)의 잘못된 표기로, 안변부(安邊府)의 서남쪽에 있다.
《수도제강(水道提綱)》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소백산 이하는 압록강조(鴨綠江條)에 나오고, 증산은 두만강조(豆滿江條)에 나오고, 회산 이하는 해조(海條)에 나온다.
○ 적유령(狄踰嶺)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삭주(朔州)의 서북쪽에 적유령이 있는데, 조선에서는 그것을 서북의 웅관(雄關)이라고 한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적유령은 강계부(江界府)의 남쪽에 있다.
○ 소철산(小鐵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소철산은 압록강의 동쪽 강 언덕, 의주(義州)의 경내에 있는데, 강을 건너는 곳이다. 또 서남쪽은 요동 경내의 승복도(僧福島)와 피도(皮島)라고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소철산은 상고할 수가 없다.
○ 용골산(龍骨山) -어떤 데에는 용호산(龍虎山)으로 되어 있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골산은 용주성(龍州城)의 동쪽에 있다. 용주는 동녕로(東寧路)에 속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원나라 때 동녕로를 평양에 설치하였다. 용주는 지금의 용천군(龍川郡)이며, 용골산은 용천군의 동쪽에 있다.
《조선부》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호산은 용천군의 진산(鎭山)이다.
○ 웅골산(熊骨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웅골산은 철산군(鐵山郡)의 진산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웅골산은 철산군의 동쪽에 있다.
○ 장화산(長花山)ㆍ천성산(天聖山)ㆍ영산(靈山)ㆍ향산(香山)ㆍ웅화산(熊花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화산은 철주(鐵州)의 서남쪽에 있다. 철주는 정융진(定戎鎭)을 관할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철주는 지금의 철산군이며, 장화산은 철산군의 서남쪽에 있다.- 천성산은 은주(殷州)의 동북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은주는 지금의 은산현(殷山縣)이며, 천성산은 은주현의 동북쪽에 있다.- 영산은 선주(宣州)의 동남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선주는 지금의 선천부(宣川府)이며, 영산은 선천부의 동남쪽에 있다.- 향산은 연주(延州)의 동남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연주는 지금의 영변부(寧邊府)이며, 향산은 영변부의 동쪽에 있는데, 어떤 데에는 묘향산(妙香山)이라고 하였다.- 웅화산은 곽주(郭州)의 동북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곽주는 지금의 곽산군(郭山郡)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는 이 글을 인용하여 곽산군의 능한산성(陵漢山城)을 웅화산에 해당시키는데, 옳은지의 여부는 모르겠다.- 이상의 주(州)는 모두 동녕로에 속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성산은 은주의 동북쪽에 있고, 영산은 선주의 서남쪽에 있고, 웅화산은 곽주군의 동북쪽에 있다. 또 육령산(育靈山)이 선주군의 동남쪽에 있으며, -삼가 살펴보건대, 육령산은 영산(靈山)인데 잘못하여 겹쳐 기록한 것인 듯하다.- 용골산(龍骨山)은 용천군(龍川郡) 성의 동쪽에 있다.
○ 굴암산(屈巖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굴암산은 정원부(定遠府) 성의 동쪽에 있는데, 바위 골짜기가 구불구불해서 이렇게 부른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정원부는 지금의 구성부(龜城府)이다. 《여지승람》에는 굴암산(窟菴山)으로 되어 있는데, 굴암산은 구성부의 동쪽에 있다.
○ 천마산(天馬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마산은 정주(定州)의 진산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여지승람》에는 마산(馬山)으로 되어 있다. 천마산은 옛 정주의 북쪽에 있다.
○ 능한산(凌漢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곽산군 성은 산꼭대기에 있는데, 지서(志書)에는 능한성(凌漢城)이라고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능한산은 곽산군의 동북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정강(大定江) 서쪽 강 언덕에 능한산이 있다.
○ 봉두산(鳳頭山)ㆍ가산령(嘉山嶺)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봉두산은 바로 가산군의 진산이다. 압록강에서 동쪽으로 가면 가산령이 가장 높은데, 그 꼭대기에는 ‘효성(曉星)’이라고 하고 ‘망해(望海)’라고 하는 곳이 있으니, 모두 사신들이 지나가는 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봉두산은 가산군 북쪽에 있다. 가산령이 《여지승람》에는 서문령(西門嶺)으로 되어 있는데, 가산군의 서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가산령은 가산군의 서쪽에 있다. 가산군이라는 이름은 이로 인한 것이다.
○ 마두산(馬頭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두산은 영주(寧州)의 동쪽에 있다. 영주는 동녕로에 속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영주는 지금의 안주(安州)이며, 마두산은 안주의 남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두산은 영주(靈州)의 동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영주는 지금의 의주(義州)이다. 의주에서 남쪽으로 80리 되는 곳에 역시 마두산이 있다. 《대청일통지》에서 이른 마두산과 《대명일통지》에서 이른 마두산은 바로 한 산이다. 영주는 영주(寧州)의 음이 와전된 것인 듯하다.
○ 천보산(天寶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보산은 조선에 있는데, 산에는 사리(舍利)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천보산은 영유현(永柔縣)의 남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보산은 조선 국성(國城)의 서쪽 경계에 있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이여송(李如松)이 장수를 파견해 천보산에 주둔해 있으면서 왜적을 막게 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 마읍산(馬邑山)
《신당서(新唐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삭(龍朔) 1년(661)에 고구려를 정벌할 때 소정방(蘇定方)이 패강(浿江)에서 고구려를 격파하고 마읍산을 빼앗아서 마침내 평양(平壤)을 포위하였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읍산은 평양성 서남쪽에 있다. 당나라 소정방이 마읍산을 빼앗고서 마침내 평양을 포위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여지승람》에서는 이 글을 인용하여 마읍산이 평양부의 서쪽에 있다고 하였다.
○ 노양산(魯陽山) -혹은 용산(龍山), 구룡산(九龍山)이라고도 한다-ㆍ금수산(錦繡山)
《통전(通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평양성 동북쪽에 노양산이 있는데, 노성(魯城)이 그 위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노양산은 평양부의 북쪽에 있다.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산은 일명 구룡산이라고도 하고 노양산이라고도 한다. 금수산에서 북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있는데, 산꼭대기에는 99개의 못[池]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금수산은 평양부의 북쪽에 있는데, 바로 평양의 진산(鎭山)이다.
○ 위산(葦山)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평양성에서 서남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위산이 있는데, 남쪽으로 패수(浿水)에 임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위산은 평양부의 서남쪽에 있다.
○ 모란봉(牧丹峯)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계사년(1593)에 대군(大軍)이 평양성에 다가가자 왜적들이 모란대(牡丹臺)를 지키면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모란봉은 금수산에 있다.
○ 토산(兔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기자묘(箕子墓)는 평양성 서북쪽 모퉁이의 토산에 있는데, 평양성과의 거리가 반 리도 채 안 되며, 산세가 몹시 높다. -삼가 살펴보건대, 토산은 평양부의 북쪽에 있다.
○ 건복산(乾伏山)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임진년(1592)에 심유경(沈惟敬)을 보내 왜적과 통하게 하였는데, 소서행장(小西行長)과 평양의 건복산 기슭에서 만났다.
○ 관문산(觀門山)ㆍ화산(花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관문산은 토산현(土山縣)의 북쪽에 있다. 토산현은 원나라 때에는 동녕로(東寧路)에 속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토산은 지금의 상원군(祥原郡)이다. 《여지승람》에는 관음산(觀音山)으로 되어 있다. 관문산은 상원군의 북쪽에 있다.- 화산은 토산현의 동남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화산은 상원군의 동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관문산은 토산현의 북쪽에 있고, 화산은 토산현의 동남쪽에 있는데, 모두 토산현 경계의 큰 산이다.
○ 금당산(金堂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당산은 황주(黃州) 삼화현(三和縣)의 서북쪽에 있다. 황주는 동녕로에 속하며, 안악현(安岳縣), 삼화현(三和縣), 용강현(龍岡縣), 함종현(咸從縣), 강서현(江西縣) 다섯 현을 관할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금당산은 삼화부의 서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당산은 황주 삼화현의 서북쪽에 있다. 지(志)에 이르기를, “삼화는 황주에서 서남쪽으로 10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 정방산(政方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방산은 황주의 경계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정방산은 황주의 남쪽에 있다.
○ 자비령(慈悲嶺)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자비령은 평양성에서 동쪽으로 160리 되는 곳에 있다. 원나라 때에는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자비령은 평양에서 동쪽으로 160리 되는 곳에 있다. 송나라 순희(淳煕) 2년(1175)에 고려의 서경 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자비령에서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40여 성을 들어 금나라에 붙고자 하였으나, 금나라에서 받아들이지 않아 조위총이 복주(伏誅)되었다. 원나라 지원(至元) 6년(1269)에 고려의 신하인 이연령(李延齡) 등이 서경(西京) 이하 60성을 들어 원나라에 귀부하자, 원나라에서는 이로 인하여 동녕로를 설치하고는 자비령을 경계로 하였다고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자비령은 서흥부(瑞興府)에서 서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는데, 평양에서 경도(京都)로 통하는 옛길이다. 원나라 때에는 이곳을 그어 국경으로 삼았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강역고(高麗疆域考)에 상세하게 나온다.- 일명 파령(巴嶺)이라고도 한다. 《중주집(中州集)》을 보면, 왕적(王寂)의 ‘송장중모사삼한시(送張仲謀使三韓詩)’에 이르기를, “압강에선 도엽이 아침에 건너는 걸 맞이하고, 파령에선 송화로 밤중에 탕 끓이리라.[鴨江桃葉朝迎渡 巴嶺松花夜煮湯]” 하였는바, 중국 사람들도 파령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있었다.
또 살펴보건대, 《대명일통지》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의 산 이름 가운데에서 평안도 지역이 특별히 상세하여, 매번 이르기를, “주(州)는 동녕로에 속하였다.” 하였다. 이는 대개 원나라 때 절령(岊嶺) 북쪽 지역이 동녕로에 속하여 산천의 이름이 원나라의 판도(版圖)에 실려 있으므로 《대명일통지》를 찬수하는 자가 상세하게 실을 수 있었던 것이다.
○ 개막산(蓋幕山) -삭주(朔州)의 북쪽에 있다-ㆍ수양산(首陽山) -해주(海州)의 동쪽에 있다-ㆍ구금산(駒芩山) -황주에 있는 구현(駒峴)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다-ㆍ악산(嶽山) -바로 약산(藥山)의 잘못된 표기로, 영변부의 서쪽에 있다-ㆍ이산(耳山) -영변부의 북쪽에 있다-ㆍ백벽산(白碧山) -운산군(雲山郡)의 서쪽에 있다-ㆍ태조산(太祖山) -안주(安州)의 동쪽에 있다-ㆍ대목산(大木山) -바로 대박산(大朴山)의 잘못된 표기로, 강동현(江東縣)의 북쪽에 있다-ㆍ무학산(舞鶴山) -강서현(江西縣)의 북쪽에 있다-ㆍ부석산(傅石山) -바로 박석산(縛石山)의 잘못된 표기로, 송화현(松禾縣)의 남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막산 이하는 해조(海條)에 나오고, 악산 이하는 청천강조(淸川江條)에 나오고, 백벽산은 대령강조(大寧江條)에 나오고, 태조산 이하는 대동강조(大東江條)에 나온다.
○ 성불령(成佛嶺)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불령은 북쪽으로는 산을 베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베고 있다. 산꼭대기를 바라보면 구름 위로 높이 솟아 있다. 그 북쪽은 곧 자비령으로, 원나라 때에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고개는 평산부(平山府)의 서쪽에 있다.
○ 총수산(蔥秀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총수산은 벽처럼 우뚝 솟아 물가에 임해 있는데, 삐쭉 솟아 있어서 빼어나게 아름답다. 옛 이름은 총수산(聰秀山)인데, 내가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면서 일찍이 기문(記文)을 지은 것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총수산은 평산부의 북쪽에 있다.
○ 노고달령(奴古達嶺)
《요사》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통화(統和) 28년(1010)에 고려를 정벌할 적에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자 동주(銅州), 곽주(霍州), 귀주(貴州), 영주(寧州)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소배압(蕭排押)이 북도(北道)를 경유해 진격하여 노고달령에 이르러 적병을 만나 패주시켰다. -삼가 살펴보건대, 《요사》 소배압열전(蕭排押列傳)을 보면, “소배압이 북도를 경유해 진격하여 개경 서쪽의 고개에 이르러서 적병을 격파하였다.” 하였는바, 노고달령이 개성의 서쪽에 있음을 징험해 알 수가 있다.
○ 송악(松嶽) -혹은 숭산(崧山)이나 신숭산(神嵩山)이라고 하기도 한다.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성부는 북쪽으로 숭산에 의지해 있다.
《원사(元史)》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대(五代) 시대 때 고려는 송산(松山)으로 천도(遷都)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송악은 개성부의 북쪽에 있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숭산은 개성부에 있는데, 일명 숭악(嵩岳)이라고도 한다. 후당(後唐) 때 왕건(王建)이 이 산에 의지하여 도읍을 세웠다.
○ 성거산(聖居山)ㆍ천마산(天磨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거(聖居), 송악(松嶽), 천마(天磨)는 모두 산 이름이다. 송악은 바로 개경의 진산(鎭山)이다. 성거산과 천마산은 동북쪽에서 뻗어나왔다. 다섯 봉우리가 있는데, 모두 하늘에 꽂힌 듯이 솟아 있다. 그 가운데 세 봉우리는 마치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 같은데, 가운데 한 봉우리는 더욱 높고 좌우의 두 봉우리는 조금 낮아서 마치 시자(侍者)의 모습과 같다. 산에는 항상 안개와 구름이 끼어 있어 보기에 매우 좋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성거산과 천마산은 모두 송악의 북쪽에 있다.
《삼재도회속집(三才圖會續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흥동(大興洞)은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에 있는데, 수목이 울창하고 천석(泉石)이 깨끗하다. 여름이면 녹음이 땅을 덮고 목련화(木蓮花)가 피어 맑은 향기가 골짜기에 가득하며, 가을이면 붉은 단풍과 누런 잎새가 물 밑까지 비쳐, 참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낸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는 바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오봉봉(五鳳峯)
《무몽원집(無夢園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의 지(志)를 보면, 오봉봉은 개성부에 있는데, 봉 아래에 감로사(甘露寺)라는 절이 있다.
○ 오관산(五冠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오관산은 경기 장단부(長湍府)에서 서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있다. 산꼭대기에는 다섯 봉우리가 있어 마치 관(冠)과 같이 둥글게 모여 있으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역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평산령(平山嶺)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평산령은 개성부에서 1리 되는 곳에 있는데, 흙 빛깔이 모두 붉다. -삼가 살펴보건대, 평산령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도봉산(道峯山)
《전등록(傳燈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청원(淸源) 아래 제9대인 청량(淸涼) 익 선사(益禪師)의 법사(法嗣)에 고려 도봉산(道峯山) 혜거국사(慧炬國師)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도봉산은 양주(楊州)의 남쪽에 있다.
○ 금강산(金剛山)
《화엄경(華嚴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북쪽 바다 가운데에 금강산이 있는데,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1만 2000보살과 더불어서 항상 《반야경(般若經)》을 설법한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강산은 조선의 강원도에 있다. 우리나라의 금강산과 그 이름이 같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이로부터 동방에 금강산이 있어 법희보살(法喜菩薩)이 불사(佛事)를 일으킨다.” 하였는데, 두 나라에서 모두 이로 인하여 금강산이라고 한 것이다.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폭동(萬瀑洞)은 금강산 안에 있다. 일백 곳에서 흘러나와 날리는 샘물이 골짜기 속으로 쏟아져 내려 그 형상이 하나가 아니므로 만폭동이라고 한 것이다. 골짜기 어귀에 산봉우리가 있어 오인봉(五人峯)이라고 부르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푸른 학이 그 모퉁이에 살고 있다.” 한다. 깊고 큰 물이 하나 있는데, 관음담(觀音潭)이라고 한다. 관음담 가의 돌벼랑은 푸른 이끼로 덮여 있는 탓에 미끄러워서 사람들이 다 칡넝쿨을 부여잡고서야 지나갈 수 있으므로, 그 이름을 수건애(手巾崖)라고 한다. 돌 가운데가 방아 절구같이 움푹 패인 곳이 있는데, 세속에 전하기를, “관음보살이 빨래를 한 곳이다.” 한다.
보덕굴(普德窟) 앞에 이르면 빠른 여울물이 돌에 엉키면서 벼랑에 부딪치는데, 물방울이 눈처럼 휘날려 맑은 대낮에도 어두컴컴하다. 돌바닥은 물이 깊어서 푸른 쪽빛과 같다. 또 두어 걸음 가면 성난 폭포가 구슬을 뿜고 눈을 흩날리면서 쏟아져 내리는데, 그 가운데 큰 것은 12층이고, 작은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므로 만폭동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 아래의 못을 주연(珠淵)이라고 한다. 또 돌이 하나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거북이 못 가운데에 엎드려 있는 것과 같아 귀담(龜潭)이라고 부른다. 또 한 못이 있어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는데, 화룡담(火龍潭)이라고 한다. 그 위에 봉우리가 있는데, 사자암(獅子巖)이라고 한다.
만폭동 안에 보덕굴이 있는데, 절벽을 파서 판자를 걸치고 구리쇠 기둥을 바깥쪽에 세운 다음 작은 방 3칸을 그 위에다가 만들고는 관음각(觀音閣)이라고 하였다. 관음각을 쇠사슬로 묶어서 바윗돌에 못 박아 놓았는데, 공중에 떠 있어서 사람이 올라가면 흔들린다. 그 안에 부처를 모신 함을 안치하고 구슬과 옥으로 장식하였으며, 바깥쪽에는 철망(鐵網)을 둘러서 손으로 만질 수 없게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아래에 나오는 《삼재도회속집》에서 인용한 세 조항은 모두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포구산(浦口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포구산은 강원도 고성군(高城郡)에서 동쪽으로 9리 되는 곳에 있다. 고성포(高城浦)에는 우뚝 솟은 바위가 계단과 같이 층층으로 되어 있는데, 그 위에는 100여 명이 둘러앉을 만하다. 그 바위 북쪽에 또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모두 돌로 이루어졌다. 동쪽으로 바다 가운데를 바라보면 5리쯤 되는 곳에 돌로 된 봉우리가 있는데, 마치 병풍을 둘러친 듯하다. 봉우리 아래에 돌이 있는데, 용이 끌어당기고 범이 움켜잡는 것 같은 기이한 모습이다. 또 돌 두 개가 서로 마주 보고 있어서 마치 사람이 함께 말하는 것 같은데, 돌의 빛깔은 모두 희어서 푸른 바다에 광채가 비쳐,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 한계산(寒溪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계산은 강원도 인제현(麟蹄縣)에서 동쪽으로 50리 되는 곳에 있다. 산 위에는 성(城)이 있다. 냇물이 성안으로부터 흘러나와서 곧바로 폭포를 이루어 내려가는데, 수백 척이나 떨어져 내려 바라보면 마치 흰 무지개가 하늘에 드리워진 것 같다. 원통역(圓通驛)으로부터 동쪽은 왼쪽과 오른쪽이 모두 큰 산이어서 동부(洞府)는 깊숙하며, 계곡의 물은 이리저리로 흘러서 무려 36번이나 건너야만 한다. 나무들은 마치 갈대자리를 말아 세운 듯이 위로 하늘에 솟았고 곁에는 가로 뻗은 가지가 없는데, 소나무와 잣나무가 더욱 높아서 그 꼭대기를 볼 수가 없다. 또 그 남쪽에는 봉우리가 절벽을 이루었는데,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어 이루 형언할 수 없이 기괴하며, 너무 높아서 나는 새도 지나가지 못한다. 그 아래에는 맑은 샘물이 바위에 부딪쳐서 못을 이루었으며, 반석이 평평하여 둘러앉을 만하다. 또 동쪽의 몇 리는 동구(洞口)가 매우 좁으며, 가느다란 길이 벼랑에 걸려 있는데, 바위 구멍은 입을 벌리고 있고 봉우리들은 높이 솟아 있다. 이에 마치 용이 끌어당기고 범이 움켜잡을 것 같다. 층층다리를 겹쳐 놓은 것 같은 것이 수없이 많아서 그 좋은 경치는 영서(嶺西)에서 으뜸이다.
○ 분려산(分黎山)
《한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낙랑군 탄열현(呑列縣)에는 분려산이 있다. 분려산은 열수(列水)가 나오는 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열수는 바로 한수(漢水)이다. 분려산은 한수의 근원이 있는 곳이니, 금강산이 아니면 바로 오대산(五臺山)이다.
○ 오대산(五臺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강의 근원은 금강산과 오대산에서 나온다.
《열조시집(列朝詩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강릉(江陵)은 옛 명주(溟州)로, 오대산 아래에 있다. 삼한(三韓)에는 12동천(洞天)이 있는데, 이곳이 두 번째 동천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오대산은 강릉부의 서쪽에 있다.
단단대령(單單大嶺)
《후한서》 예열전(濊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단대령(單大嶺) 동쪽의 옥저, 예, 맥이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
《삼국지(三國志)》 예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단단대산(單單大山)의 고개 서쪽은 낙랑에 속하여 동부도위(東部都尉)가 통치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문헌비고(文獻備考)》를 보면, “함경도 검산(劍山)의 분수령(分水嶺)에서부터 철령, 금강산, 오대산에 이르기까지가 대관령인데, 1000여 리에 걸쳐 뻗쳐 있는바, 바로 단대령이다.” 하였다.
○ 황룡산(黃龍山) -흡곡현(歙谷縣)의 서쪽에 있다-ㆍ추지령(秋池嶺) -바로 추지령(楸池嶺)의 잘못된 표기로, 통천군(通川郡)의 서쪽에 있다-ㆍ두사산(頭蛇山) -바로 두타산(頭陀山)의 잘못된 표기로, 양구현(楊口縣)의 북쪽에 있다-ㆍ장산(張山) -상고할 수가 없다-ㆍ오갑산(五甲山) -바로 오신산(五申山)의 잘못된 표기로, 김화현(金化縣)의 북쪽에 있다-ㆍ공작산(孔雀山) -홍천현(洪川縣)의 동쪽에 있다-ㆍ치악산(雉岳山) -원주(原州)의 동쪽에 있다-ㆍ우두산(牛頭山) -바로 용두산(龍頭山)의 잘못된 표기로, 제천현(堤川縣)의 북쪽에 있다-ㆍ관악산(冠岳山) -과천현(果川縣)의 서쪽에 있다-ㆍ수리산(修理山) -안산군(安山郡)의 남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황룡산 이하의 산들은 해조(海條)에 나오고, 오갑산 이하의 산들은 한강조(漢江條)에 나온다.
○ 임존산(任存山)
《자치통감(資治通鑑)》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임존성(任存城)은 백제 서부(西部)의 임존산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임존성은 지금의 대흥군(大興郡)인바, 이 산은 마땅히 그 지역에 있어야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임야기산(任射岐山)으로 되어 있다.
○ 부용산(富用山)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부용창산(富用倉山)은 바로 뱃사람들이 말하는 부용산(芙蓉山)이다. 그 산은 홍주(洪州)의 경내에 있으며, 산 위에는 창고가 있고, 또 쌓아 둔 곡식이 많은데, 변경(邊境)에 비상사태가 일어났을 때 쓰기 위해 대비해 놓은 것이므로 부용(富用)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 홍주산(洪州山)ㆍ동원산(東源山)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홍주산은 자운섬(紫雲苫)의 동남쪽 수백 리 지점에 있는데, 고을이 그 아래에 이루어져 있다. 또 동쪽에는 금이 산출되는 산 하나가 범같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것을 동원(東源)이라고 한다. 작은 산 수십 개가 성같이 둘러싸고 있으며, 그 산 위에는 못[潭]이 하나 있는데, 맑기가 거울 같고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다. -삼가 살펴보건대, 두 산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홍주산은 충주(忠州)의 서쪽 경계인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명일통지》를 보면, “홍주가 이 산 아래에 세워져 있으며, 조금 동쪽에 동원산이 있는데, 금이 산출된다.” 하였다.
○ 소석산(小石山)
《후위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의 왕이 표문을 올려서 말하기를, “신의 나라 서쪽 경계에 있는 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의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발견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폐하의 사신이 신의 나라로 오는 것을 긴 뱀처럼 흉악한 것 -삼가 살펴보건대, 고구려를 가리킨다.- 이 길을 막고 바다에 침몰시킨 것입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소석산은 지금의 충청도 서해 바닷가에 있어야 한다.
○ 월악산(月嶽山)
《명산장왕향기(名山藏王享記)》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원나라 헌종(憲宗) 5년(1255)에 차라대(車羅大)가 고려를 정벌하면서 충주를 도륙하자, 사람들이 월악사(月嶽祠)로 올라가서 피란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월악산은 충주의 동쪽에 있다.
○ 속리산(俗離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속리산은 충청도 보국현(報國縣) -삼가 살펴보건대, 보은현(報恩縣)의 잘못된 표기이다.- 동쪽에 있다. 산봉우리 아홉 개가 뾰족하게 솟아 있기 때문에 구봉산(九峯山)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속리악(俗離嶽)이라고 일컬었고 중사(中祀)에 올렸다. 산꼭대기에는 문장대(文藏臺)가 있는데, 층층이 쌓인 돌이 천연적으로 이루어져 공중에 높게 솟았다. 그 높이는 몇 길인지조차 알 수가 없으며, 그 너비는 사람 3000명이 둘러앉을 만하다. 문장대 위에는 가마솥만 한 구덩이가 있어서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오는데,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불어나지 않는다. 이 물이 세 줄기로 나누어져서 허공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洛東江)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錦江)이 되고,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으로 흘러 달천(達川)이 되어 금천(金遷)으로 흘러 들어간다.
산 아래에는 팔교(八橋)와 구요(九遙)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산 양쪽 언덕이 넓어져서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면 멀고 멀어서 마치 땅 끝인 듯 의심스럽다가 거기까지 가서 보면 또다시 멀고 멀다. 이렇게 아홉 번을 구불어지다가 비로소 법주사(法住寺)에 닿기 때문에 구요라고 한 것이다. 구요 속에는 물 한 줄기가 돌고 돌아 굽이져서 흐르는데, 한 굽이마다 하나의 다리가 있어, 도합 여덟 개이기 때문에 팔교라고 한다. 첫 번째 다리는 수정교(水精橋)로, 다리 위에 비각(飛閣)이 있어 사람들이 그 각 속으로 다닌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갈령(葛嶺) -마땅히 부여현(扶餘縣)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 한다.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백제 성읍조(百濟城邑條)에 나온다.
○ 차현산(車見山) -바로 차현(車峴)의 잘못된 표기로, 공주(公州)의 북쪽에 있다-ㆍ가야산(加耶山) -해미현(海美縣) 북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해조(海條)에 나온다.
○ 조령(鳥嶺) -주흘산(主屹山)을 덧붙인다.
《광여기(廣輿記)》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령은 충주에 있는데, 70여 리나 넓게 뻗어 있다. 가파른 벼랑이 깎아지른 듯하며, 그 사이로 길 하나가 실처럼 통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령은 경주(慶州)의 서북쪽 경계에 있으며, 서쪽으로는 상주(尙州)의 경계에 접해 있다. 70여 리나 넓게 뻗어 있는데, 가파른 벼랑이 깎아지른 듯하며, 그 사이로 길 하나가 실처럼 통해 있다. 관목(灌木)이 우거져 있어서 말을 타고 줄지어서 갈 수가 없다. 조선에서는 이를 남도(南道)의 웅관(雄關)이라고 한다. 명나라 만력(萬曆) 21년(1593)에 왜적들이 왕경(王京)을 버리고 도망치자, 별장(別將) 유정(劉綎)이 상주에서 왜적들을 추격해 조령에 이르렀는데, 왜적들이 험고한 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별장 사대수(査大受)가 충주에서 괴산감(槐山監)으로 넘어가 조령의 뒤편으로 나아가자, 왜적들이 크게 놀라 부산포(釜山浦)로 옮겨 가 있으면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계책을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조령은 문경현(聞慶縣)에서 서쪽으로 27리 되는 곳에 있다. 주흘산은 문경현 북쪽에 있으면서 문경현의 진산(鎭山)인데, 조령과는 서로 연이어져 있다. 《명시종(明詩綜)》을 보면, 조선 사람인 이효칙(李孝則)의 조령(鳥嶺) 시가 실려 있는바, 그 시에 이르기를, “갈바람에 누런 잎 우수수 떨어지고, 주흘산 높아 반쯤 구름 속에 잠겼네.[秋風黃葉落紛紛 主屹山高半沒雲]” 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 죽령(竹嶺)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죽령은 충주의 동쪽에 있는데, 구부러진 길이 빙빙 돌아서 자못 험준하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왜적들이 왕경을 버리고 죽령을 넘어서 경상도로 달아났는데, 거기가 바로 이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죽령은 풍기군(豐基郡) 북쪽에 있다.
○ 노음산(露陰山)
《정지거시화》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사람 조운흘(趙云仡)은 상주의 노음산 아래로 물러나 살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노음산은 상주의 서쪽에 있다.
○ 빙산(氷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빙산은 경상도 의성현(義城縣)의 동남쪽 40리 되는 곳에 있다. 빙산의 큰 바위아래에 돌구멍[石穴]이 있는데, 구멍의 입구는 높이가 3척, 폭이 4척 8촌, 가로의 길이가 5척 1촌이다. 이것을 풍혈(風穴)이라고 한다. 또 하나의 구멍이 바위 아래에서 곧장 밑으로 나 있는데, 너비가 한 길이며, 길이는 겨우 한 길까지만 잴 수 있으며, 그 아래로는 구부러져서 깊이를 잴 수가 없다. 입하(立夏)가 지난 뒤부터 얼음이 엉기기 시작하여 아주 더우면 얼음이 굳게 얼다가 장마가 들면 얼음이 풀린다. 봄가을로는 춥지도 덥지도 않으며, 겨울에는 따뜻한 기운이 봄과 같다. 이것을 빙혈(氷穴)이라고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도산(島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도산은 울산군(蔚山郡) 남쪽에 있다. 명나라 만력 25년(1597)에 마귀(麻貴) 등이 울산에 있는 왜적들을 공격하자, 왜적들이 모두 도산으로 달아나 산 앞에 연이어서 세 개의 성채(城寨)를 세우고 버티면서 지켰다. 도산은 울산성보다 높은 데다가 왜적들이 또 그 위에 새로 석성(石城)을 쌓아 몹시 견고하였다. 이에 중국 군사들이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다가 얼마 뒤에는 패해 돌아왔다. -삼가 살펴보건대, 도산은 울산부(蔚山府)의 남쪽에 있다.
○ 백석산(白石山) -바로 백암산(白巖山)의 잘못된 표기로, 영양현(英陽縣)의 동쪽에 있다-ㆍ청량산(淸涼山) -영양현의 서쪽에 있다-ㆍ모자산(母子山) -영천현(永川縣)의 북쪽에 있다-ㆍ파음산(巴音山) -바로 웅이산(熊耳山)의 잘못된 표기로, 상주(尙州)의 서쪽에 있다-ㆍ적암산(赤巖山) -바로 적상산(赤裳山)의 잘못된 표기로, 무주부(茂州府)의 동쪽에 있다-ㆍ화악산(華岳山) -밀양부(密陽府)의 북쪽에 있다-ㆍ금오산(金鼇山) -경주(慶州)의 남쪽에 있다-ㆍ윤산(輪山) -동래부(東萊府)의 북쪽에 있다-ㆍ웅산(熊山) -웅천현(熊川縣)의 북쪽에 있다-ㆍ무계산(武溪山) -상고할 수가 없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낙동강조(洛東江條)에 나온다.
○ 지리산(智異山) -혹은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한다.
《두시전주(杜詩箋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지(志)를 보면, 지리산은 남원부(南原府)에서 동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여진(女眞)에 있는 백두산(白頭山)의 산맥이 뻗어 내려와서 이곳까지 이른다. 또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며,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두보(杜甫) 시(詩)의 ‘방장삼한외(方丈三韓外)’에 대한 주석과 《통감집람(通鑑輯覽)》에서 모두 “방장은 대방군(帶方郡)에 있는데, 바로 남원의 남쪽이다.” 한 것이 바로 이를 말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글과 아래에 나오는 《삼재도회속집》에서 인용한 두 조항은 모두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청학동(靑鶴洞)은 지리산 속에 있다. 길이 몹시 좁아서 겨우 한 줄로 통해 있다. 몸을 구부리고 올라가 몇 리쯤 가면 넓게 트인 지경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곳은 사방이 모두 기름진 옥토(沃土)라서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청학(靑鶴)이 그 안에서 살고 있으므로 청학동이라고 부른다. 대개 옛날에 속세를 피해 사는 사람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담이 아직도 남아 있다. 세속(世俗)에 전하기를, 최치원(崔致遠)이 노닐던 곳이라고 한다.
○ 구정봉(九井峯)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석(動石)은 월출산(月出山) 구정봉 아래에 있다. 세 개의 돌이 층암(層巖) 위에 튀어나와 있는데,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된다. 서쪽으로는 산꼭대기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있는데, 그 무게는 비록 수백 명을 동원해도 움직일 수 없으나 한 사람이 흔들면 떨어질 듯하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석(靈石)이라고 칭하며, 군(郡)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구정봉은 영암현(靈巖縣) 월출산에 있다.
○ 황산(黃山)
《유서찬요》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충청도는 옛 마한(馬韓)의 영역으로, 황산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황산은 전라도 금구현(金溝縣)의 서쪽에 있는바, 충청도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모악산(母岳山) -태인현(泰仁縣) 동쪽에 있다-ㆍ무목산(無木山) -바로 무등산(無等山)의 잘못된 표기로, 광주(光州)의 동쪽에 있다-ㆍ송경산(松京山) -바로 송광산(松廣山)의 잘못된 표기로, 순천부(順天府)의 서쪽에 있다-ㆍ천관산(天冠山) -장흥부(長興府)의 남쪽에 있다-ㆍ용잠산(龍岑山) -바로 용천산(龍泉山)의 잘못된 표기로, 담양부(潭陽府)의 서쪽에 있다-ㆍ추월산(秋月山) -담양부의 서쪽에 있다-ㆍ한라산(漢拏山)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모악산은 금강조(錦江條)에 나오고, 무목산 이하의 산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한라산은 제주(濟州)의 남쪽에 있다. 그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노인성(老人星)을 볼 수가 있다. 세속에서는 이 산을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운급서(雲笈書)》에 이르기를, “태상노군(太上老君)이 부라악(浮羅岳)에 내려왔다.” 하였고, 한유(韓愈)의 ‘송정상서서(送鄭尙書序)’에, “해외의 여러 나라 가운데 탐부라(耽浮羅), 유구(琉球), 모인(毛人) 등의 나라는 동남쪽으로 천지(天池) 가에 있다.” 하였다. 탐부라는 지금의 제주이니, 부라악은 과연 한라산을 가리키는 것인가?
○ 서산(瑞山)
《화한삼재도회》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이르기를, “고려 목종(穆宗) 10년(1007)에 탐라(耽羅)의 바다 속 남쪽에서 산이 솟아올랐다. 그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이 처음 솟아오를 때에는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땅이 뒤흔들려서 우레가 치는 듯하였는데, 7일 밤낮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갰다. 산의 높이는 100여 길이나 되고 둘레는 40여 리이다. 초목이 없고 연기가 그 위를 덮고 있어서 바라보면 마치 석유황(石硫黃) 같다.’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태학박사(太學博士) 전공지(田拱之)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는데, 전공지가 그 산 아래에 가서 그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 올렸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서산은 정의현(旌義縣)에 있다.

이상은 경내에 있는 산(山)이다.

○ 장자도(獐子島)
《초학집(初學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계(天啓) 정묘년(1627)에 적(敵)이 조선을 약탈하여 황해도(黃海道)를 차지하고 있었다. 주문욱(周文郁)이 수군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가다가 배가 뒤집혔는데, 장자도(獐子島)에 신인(神人)이 있어서 그로 하여금 나뭇등걸을 타고 바다에 떠 있게 해 살아날 수 있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장자도는 지금의 신도(薪島)로, 용천부(龍川府)의 남쪽에 있다.
○ 석도(蓆島)ㆍ초도(椒島)ㆍ가도(椵島) -혹 피도(皮島)라고도 한다.
《원사(元史)》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녕로(東寧路)의 선주(宣州)는 석도진(蓆島鎭)을 관할한다. ○ 맹주(孟州)는 초도진(椒島鎭)과 가도진(椵島鎭)을 관할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석도는 바로 석도(席島)인 듯한데, 은율현(殷栗縣) 서쪽에 있다. 초도는 풍천부(豐川府) 서쪽에 있고, 가도는 철산부(鐵山府) 남쪽에 있다.
《명사(明史)》 조선열전(朝鮮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계(天啓) 1년(1621)에 모문룡(毛文龍)이 조선을 구원하러 갔다가 피도에 군진(軍鎭)을 설치하였다. 피도는 또한 동강(東江)이라고도 하는데,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의 대해(大海) 가운데에 있으며, 둘레가 80리이고, 초목이 자라지 않는다. 북쪽 해안에서 바닷길로 80리를 가면 바로 청(淸)나라 경계이며, 그 동북쪽 바다 너머는 바로 조선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피도는 바로 가도이다.
○ 위도(葦島)
《명산장왕향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염주(鹽州)의 바다 가운데 위도(葦島)란 섬이 있는데, 10여 리쯤 되는 평탄한 개펄에 해조(海潮)가 넘나든다. 예전에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방경(金方慶)이 백성들을 시켜 이곳에 제방을 쌓아 큰 못을 만들고는 개간하여 벼를 심었는데, 백성들이 이에 의지하여 생활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염주는 지금의 연안부(延安府)이며, 위도는 정주(定州) 앞바다에 있다. 《고려사》에 이르기를, “김방경이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이 되었을 때 몽고의 군사들이 여러 성을 공격해 오자 위도로 들어가서 지켰다. 김방경이 백성들에게 제방을 쌓고 종자를 뿌리게 하여, 백성들이 처음에는 몹시 괴롭게 여겼다. 가을이 되자 풍년이 들어 사람들이 이에 의지하여 살아났다.” 하였다.
○ 대청서(大靑嶼)ㆍ소청서(小靑嶼)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청서는 멀리서 바라보면 울창한 숲이 진한 눈썹과 같으므로 고려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소청서는 대청서와 모양새가 같은데, 다만 그 산이 약간 작고 주위에 초석(礁石)이 많을 뿐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청도와 소청도는 모두 장연현(長淵縣)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청도는 광주(廣州)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일명 대청서라고도 한다. 원나라 문종(文宗)이 그의 형의 아들인 타환첩목아(妥歡帖木兒)를 고려로 내쫓고서는 그로 하여금 대청도에 살게 하였다가, 얼마 뒤에 광서(廣西)의 정강(靜江)으로 옮겼는데, 바로 이곳이다. 대청도와 가까운 곳에 또 소청서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 대청도 안에는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궁궐 터가 있어 부서진 기왓장이 많이 남아 있는데, 모두 청요(靑瑤)이다.
○ 몽금도(夢金島) -장연현(長淵縣)의 서쪽에 있다-ㆍ정족도(鼎足島) -초도(椒島) 근처에 있다-ㆍ사야구미(沙也九味) -대청도 근처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 백령도(白翎島) -대청도 서쪽에 있다-ㆍ교동도(喬桐島) -강화부(江華府)의 서쪽에 있다-ㆍ각화도(覺華島) -바로 강화도이다-ㆍ연자도(硯子島) -상고할 수가 없다-ㆍ대부도(大富島) -남양부(南陽府)의 서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 합굴(蛤窟)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합굴은, 그 산이 그리 높거나 크지 않으며, 주민들도 많이 산다. 산등성이에 용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뱃사람들이 오가면서는 반드시 제사를 드린다. 바닷물이 이곳에 이르러서는 급수문(急水門)과 비교해 볼 때 물빛이 황백색으로 변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합굴은 마땅히 예성강(禮成江)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합굴은 개성부(開城府) 남쪽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산등성이에 용을 모신 사당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합굴은 광주(廣州)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산이 그다지 높지 않으며, 사는 백성들도 매우 많다. 산등성이에는 용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바다를 오가는 자들은 모두 제사 지낸다.
○ 자연도(紫燕島)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자연도는 바로 광주이다. 산에 기대어 관사(館舍)를 지었는데, 방(榜)에 ‘경원정(慶源亭)’이라고 쓰여 있다. 주민들이 사는 초가집도 많이 있다. 그 산의 동쪽 한 섬에 제비가 많이 살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자연도는 인천부(仁川府)의 서쪽에 있다.
○ 마전도(麻田島)ㆍ고사도(古寺島) -이들 두 섬은 마땅히 초도(椒島) 남쪽 지역에 있어야 한다-ㆍ득물도(得勿島) -어떤 데에는 덕물도(德勿島)로 되어 있으며, 남양부의 서쪽에 있다.
《신당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신라 성읍조(新羅城邑條) 및 해조(海條)에 나온다.
○ 구두산(九頭山)ㆍ당인도(唐人島)ㆍ쌍녀초(雙女礁)ㆍ화상도(和尙島)ㆍ우심서(牛心嶼)ㆍ계심서(鷄心嶼)ㆍ섭공서(聶公嶼)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9일에 마도(馬島)를 출발하여 사각(巳刻)에 구두산을 지나갔다. 그 산에는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하는데, 멀리서 바라보니 그리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숲이 무성하여 맑고 윤기가 도는 것이 보기 좋았다. ○ 당인도(唐人島)는 그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으며, 산은 구두산과 가깝다. 이날 오각(午刻)에 배가 이 섬 아래를 지나갔다. ○ 쌍녀초는 그 산이 아주 커서 도서(島嶼)와 다름이 없다. 앞에 있는 산은 초목이 있기는 하나 그리 빽빽하지는 않았다. 뒤에 있는 산은 퍽 작고 중간이 끊어져 문이 되어 있으나, 아래에 암초가 있어 배가 지나가지는 못한다. 이날 사각(巳刻)에 배가 당인도에서 출발해 이어 이 쌍녀초를 지나갔다. ○ 화상도는 산세가 중첩되어 있고 골짜기가 깊고 숲이 무성하다. 산속에는 호랑이가 많이 산다. 옛날에 불도(佛道)를 배우는 사람이 거기에 살고 있었는데, 산짐승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고 하며, 지금의 엽로사(葉老寺)가 바로 그 유적(遺蹟)이다. 그러므로 고려 사람들이 그 섬을 화상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날 미각(未刻)에 배가 그 아래를 지나갔다. ○ 우심서는 작은 바다 가운데에 있다. 한 봉우리가 유독 솟아나 있어 그 형상이 엎어 놓은 바리[盂]와 닮았는데, 가운데가 좀 뾰족하다. 고려 사람들은 그것을 ‘소의 염통[牛心]’이라고 하는데, 이런 것은 어디를 가나 흔히 볼 수 있다. 또 형체가 이 산과 닮고 약간 작은 것을 계심서(鷄心嶼)라고 한다. 이날 미시(未時) 정각에 배가 이 섬을 지나갔다. ○ 섭공서는 성(姓)으로 이름을 삼은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몹시 뾰족한데 바짝 다가가서 보면 마치 담과 같다. 대개 그 형체가 납작해서 가로로 보는 것과 세로로 보는 것이 각각 다르다. 이날 미시 말에 배가 그 아래를 지나갔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화상도는 광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그 위에는 엽로사(葉老寺)가 있다. ○ 당인도는 청주(淸州)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구두산과 서로 가깝다. ○ 쌍녀초는 《고려도경》을 보면 섬과 같다고 하였는데, 순전히 돌로 이루어진 섬을 초(礁)라고 한다. 청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구두산은 광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으며, 숲의 나무가 몹시 무성하게 자라 있다. ○ 우심서는 청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이곳과 서로 가까운 곳에 또 계심서가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원씨액정기(元氏掖庭記)》를 보면, 고려의 당인도에서는 만화초(滿花草)가 산출된다고 하였는데, 《고려도경》에서 이른 바 당인도는 바로 이곳이다. 이제 《고려도경》의 해도일록(海道日錄)을 근거해 보면, 8일에 해미현(海美縣)의 마도(馬島)에서 출발해 북쪽을 향해 가 9일에 구두산, 당인도, 쌍녀초, 화상도, 우심서, 섭공서 등 여러 섬을 지나고, 이날 인천부(仁川府)의 자연도에서 묵었다. 그런즉 이들 여러 섬은 모두 태안(泰安) 앞바다 북쪽에서 인천 앞바다 남쪽 지역에 있는 것이다.
○ 아자섬(鵶子苫)ㆍ마도(馬島)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아자섬은 또한 알자섬(軋子苫)이라고도 한다. 고려 사람들은 삿갓[笠]을 알(軋)이라고 하는데, 그 산의 형태가 그것과 유사해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 마도는 대개 청주(淸州)의 경내이다. 샘물은 달고 풀은 무성한데, 나라 안의 관마(官馬)를 평상시에는 이곳에 방목(放牧)해서 기르므로 마도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객관(客館)이 있는데, 안흥정(安興亭)이라고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도는 청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나라 안의 방목지(放牧地)이다. 예전에는 객관이 있었는데, 안흥정이라고 하였다. 알자섬과 가깝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알자섬은 청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마도는 해미현의 서쪽에 있으며, 알자섬은 바로 태안군(泰安郡)의 갈도(葛島)이다. 《고려도경》에 이르기를, “고려 사람들은 삿갓을 알(軋)이라고 한다.” 하였고, 《계림유사(鷄林類事)》에 이르기를, “고려의 방언에 삿갓을 개(蓋)라고 한다.” 하였는데, 그 본주(本注)에 “개(蓋)의 음은 갈(渴)이다.”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알(軋)과 갈(葛)은 같은 음임이 분명하다.
○ 용도(龍島) -태안군의 북쪽에 있다-ㆍ원산도(元山島)ㆍ오평도(烏平島) -이들 두 섬은 모두 태안군의 서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 군산도(羣山島)ㆍ횡서(橫嶼)ㆍ자운섬(紫雲苫)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군산도(羣山島)는, 산의 열두 봉우리가 잇닿아 둥그렇게 둘러 있는 것이 마치 성과 같다. 군산정(羣山亭)이 있으며, 서쪽의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산 위에는 오룡묘(五龍廟)와 자복사(資福寺)가 있다. 주민들의 집은 10여 호가 있다. ○ 횡서(橫嶼)는 군산도의 남쪽에 있는데, 한 산이 특히 크며, 안섬(案苫)이라고도 한다. 앞뒤에 작은 암초 수십 개가 돌 밑뿌리를 둘러 있다. 한 개의 동굴은 그 깊이가 두어 길이나 되는데, 높고 넓은 것으로 유명하며, 밀물이 들어와 물을 치면 그 소리가 우레와 같다. ○ 횡서에서 묵었다. 일찍 출발하였다. 남쪽으로 하나의 산이 보였는데, 그것을 자운섬(紫雲苫)이라고 하였다. 가로지른 봉우리가 들쭉날쭉 포개져 있었는데, 그 뒤쪽에 있는 두 산은 더욱 멀어 흡사 한 쌍의 눈썹에 푸른빛이 엉겨 있는 것 같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군산도는 만경현(萬頃縣) 서쪽에 있는데, 지금은 고군산도(古羣山島)라고 한다. 횡서와 자운섬은 마땅히 군산도의 남쪽에 있어야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군산도는 전주(全州)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열두 개의 봉우리가 연이어져서 성(城)과 같다. 그 남쪽에는 횡서가 있는데, 역시 안섬이라고도 한다.
○ 궤섬(跪苫)ㆍ춘초섬(春草苫)ㆍ빈랑초(檳榔礁)ㆍ보살섬(菩薩苫)ㆍ죽도(竹島)ㆍ고섬섬(苦苫苫)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궤섬(跪苫)은 백의도(白衣島)의 동북쪽에 있는데, 그 산은 여러 섬들보다 훨씬 크다. 여러 개의 산이 잇닿아 있고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부서진 암초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 춘초섬(春草苫)은 궤섬의 바깥쪽에 있는데, 뱃사람들은 그것을 외서(外嶼)라고 부른다. 그 위에는 모두 소나무와 노송나무 등이 자라는데, 바라보면 울창하다. ○ 빈랑초(檳榔礁)는 형태가 빈랑나무와 비슷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얻은 것이다. 대체로 바다 가운데의 암초는 멀리서 바라보면 대부분 이런 형상을 하고 있지만, 오직 춘초섬과 가까운 것만을 가리켜서 뱃사람들이 빈랑초라고 한다. ○ 보살섬(菩薩苫)은 고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위에서 일찍이 기이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어서 그렇게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 죽도(竹島)는, 그 산은 여러 겹이고 숲의 나무들이 짙푸르게 무성하였으며, 그 위에는 역시 주민들이 살고 있고, 주민들 가운데에는 또한 장(長)이 있다. 산 앞에는 흰 돌로 된 암초가 수백 덩어리 있는데, 크기가 같지 않고 흡사 쌓아 놓은 옥과 같다. ○ 고섬섬(苦苫苫)은 죽도에서 그리 멀지 않으며, 그 산의 생김새가 비슷한데, 역시 주민이 살고 있다. 고려의 습속으로는 고슴도치의 털을 고섬섬이라고 한다. 이 산의 나무들은 무성하나 크지 않아 마치 고슴도치털 같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보살섬, 자운섬, 고섬섬, 춘초섬, 궤섬은, 《고려도경》을 보면 서(嶼)보다 작으면서 초목이 있는 것을 섬(苫)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 섬들은 모두 전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 빈랑서(檳榔嶼)는 전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수서(隋書)》를 보면, “대업(大業) 4년(608)에 문림랑(文林郞)과 배세청(裴世淸)을 파견하여 왜국(倭國)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는데, 백제국을 건너 죽도(竹島)에 이르러서 남쪽으로 바라보니, 탐라국(耽羅國)이 큰 바다 가운데 있었다.” 하였다. 지금 해미(海美), 태안(泰安), 남포(藍浦), 흥덕(興德) 등지에서 죽도라고 칭하는 섬이 한두 곳이 아닌바, 《고려도경》 및 《수서》에서 칭한 죽도가 어느 섬을 가리키는지는 상세하지가 않다. 고섬섬은 바로 부안현(扶安縣)의 위도(蝟島)이다. 그 밖의 다른 섬은 전라도 서해에 있는 섬들이다.
○ 월서(月嶼)ㆍ난산도(闌山島)ㆍ백의도(白衣島)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월서(月嶼)는 둘인데, 흑산(黑山)에서의 거리가 아주 멀다. 앞의 것을 대월서(大月嶼)라고 하는데, 달같이 둘러싸고 있다. 예전에 그 위에 양원사(養源寺)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뒤의 것을 소월서(小月嶼)라고 하는데, 문같이 대치하고 있어서 작은 배가 그 사이로 통행할 수가 있다. ○ 난산도(闌山島)는 천선도(天仙島)라고도 하는데, 그 산은 높고 험하다. 멀리서 바라보면 벽같이 우뚝 서 있으며, 앞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암초는 마치 거북과 자라의 형상 같다. ○ 백의도(白衣島)는 세 개의 산이 잇닿아 있고, 앞에는 작은 암초가 붙어 있는데, 비스듬히 자란 노송과 쌓여 있는 차조기는 푸르고 윤기가 있어 보기가 좋다. 또한 백갑섬(白甲苫)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의도와 난산도는 모두 전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 대월서와 소월서는 모두 전주의 남쪽 바다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위에서 말한 세 섬은 나주(羅州)의 서쪽 바다 가운데에 있어야 한다.
○ 흑산도(黑山島)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흑산(黑山)은 백산(白山)의 동남쪽에 있는데, 서로 바라다보일 정도로 매우 가깝다. 처음에 바라보면 극히 높고 험준한데, 바짝 다가서면 산세가 중복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앞의 한 작은 봉우리는 가운데가 굴같이 비어 있고, 양쪽 사이가 깊숙이 들어가 있어서 속에다가 배를 감출 만하다. 옛날의 바닷길을 보면, 이곳 역시 사신의 배가 묵는 곳이라고 하였는바, 그 당시의 관사(館舍)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런데 지금은 가는 길을 바꿨으므로 여기서 더 이상 정박하지 않는다. 섬 위에는 주민들이 사는 부락이 있는데, 나라의 대죄인(大罪人)으로서 죽음을 면한 자들이 흔히 이곳으로 유배되어 온다. 항상 중국 사신의 배가 이를 적마다 밤이 되면 산마루에서 봉화를 밝히고, 여러 산들이 차례로 서로 호응하여서 왕성까지 전달하는데, 봉화를 올리는 것이 이 산에서부터 시작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송사(宋史)》를 보면, “명주(明州) 정해현(定海縣)에서 순풍을 타면 3일 만에 바다에 들어가고, 다시 5일 만에 고려의 흑산에 도착한다.” 하였고, 《원사》를 보면, “지원(至元) 5년(1268)에 일본의 정벌을 의논하면서 탈타아(脫朶兒) 등에게 명하여 흑산도와 일본으로 가는 길을 살펴보게 하였다.” 하였다. 이 섬은 송나라와 원나라 때 해도(海道)의 요충지로써, 고려에서는 흑산현(黑山縣)을 두었으며, 뒤에 나주에 속하였다. 나주에서의 거리가 뱃길로 900리이며, 둘레가 35리이다.
○ 백산(白山)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배도(排島)에서 동북쪽으로 바라보면 한 산이 보이는데, 아주 큰 것이 마치 성같이 잇닿아 늘어서 있으며, 햇빛이 쬐는 곳은 마치 옥같이 희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산과 흑산은 모두 전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산은 전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바로 백수산(白水山)이다. 당나라 함형(咸亨) 3년(672)에 고간(高侃)이 고구려의 남은 백성들을 백수산에서 쳤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백산은 흑산의 서쪽에 있는 섬이다. 그런데 《대청일통지》에서는 압록강 서쪽에 있는 백수산을 끌어다 대었는바, 전혀 잘못된 것이다.
○ 구룡도(九龍島)ㆍ고금도(鼓金島)ㆍ가덕도(加德島)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6년(1598)에 진린(陳璘)이 해상을 전담하여 관할하면서 왜적들을 막았는데, 부총병(副摠兵) 진잠(陳蠶), 등자룡(鄧子龍) 등이 모두 그에게 소속되었다. 전함(戰艦) 수백 척을 모두 가덕도(加德島), 거제도(巨濟島), 고금도(鼓金島) 등 여러 섬에 정박시켜 두었다. 충청도에 구룡도란 섬이 있는데, 수족(水族)들이 신령스럽고 괴이스럽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절수영(浙水營)의 중군(中軍) 방일신(方一新)이 절병(浙兵) 3000명을 거느리고 의주(義州)에서 고금도에 주둔해 있는 등자룡에게 가다가 9월 29일에 이 섬에 도착하였다. 밤중에 시각을 알리는 총을 쏘아 수족들을 놀래키자, 태풍이 갑자기 일면서 파도가 솟구치는 바람에 누선(樓船)의 머리와 꼬리 부분이 모두 떨어져 나가 한꺼번에 뒤집어져서 몰사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고금도는 바로 고금도(古今島)의 음이 변한 것으로, 고금도는 강진현(康津縣)의 남쪽에 있다. 가덕도는 웅천현(熊川縣)의 남쪽에 있고, 구룡도는 상고할 수가 없다.
○ 추자도(楸子島)
《대청회전(大淸會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건륭(乾隆) 5년(1740)에 소전현(蕭田縣)의 백성이 바다로 나아가 무역을 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였는데, 조선국의 추자도에 이르러서 구원을 받아 살아났다. -삼가 살펴보건대, 추자도는 영암군(靈巖郡)의 남쪽에 있다.
○ 한산도(閒山島) -어떤 데에는 안산도(鴈山島)로 되어 있다-ㆍ칠산도(漆山島)
《명사》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1597) 7월에 왜적들이 양산(梁山)과 삼랑(三浪)을 빼앗고서 마침내 경주(慶州)로 들어가고 한산(閒山)을 침입하였다. 통제사(統制使) 원균(元均)의 군사가 궤멸되어 드디어 한산도가 함락되었다. 한산도는 조선의 서해 입구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한산도는 고성군(固城郡) 남쪽에 있다.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에 총병(摠兵) 마귀(麻貴)가 울산(蔚山)에 있는 왜적들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에 계금(季金)과 우승은(于承恩)에게 남병(南兵)을 거느리고서 조선의 수병(水兵)과 함께 장기(長鬐), 진도(珍島)를 경유해 안산도(鴈山島)에 이르러서 의병(疑兵)을 펼쳐 방비하게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안산도는 한산도의 음이 와전된 것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산도는 경주의 서남쪽에 있는데, 조선의 서해 입구이다. 오른쪽으로는 전라도의 남원부(南原府)가 막고 있어서 전라도의 외번(外藩)이 된다. 이곳을 한번 잃으면 연해변에 방비가 없게 되어, 천진(天津)과 등주(登州), 내주(萊州)가 모두 돛을 한 번만 올리면 다다를 수 있게 된다. 한산도와 가까운 곳에 또 칠산도(漆山島)가 있다. 명나라 만력 25년에 왜적들이 경주에 들어오고 한산도를 침입하면서 밤중에 칠산도를 습격하였는데, 관군이 궤멸되어 달아나 마침내 한산도를 잃었다. 이에 왜적들이 진격하여 남원을 포위해서 함락시켰다.
○ 죽도(竹島)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죽도는 경주의 서남쪽 바닷가에 있다. 만력 25년에 왜적들이 부산에 배를 정박시키고는 죽도를 왕래하면서 점차 양산(梁山), 웅천(熊川)을 핍박하였다. 얼마 뒤에 양산을 빼앗고서 마침내 경주로 들어왔다. -삼가 살펴보건대, 죽도는 울산부의 남쪽에 있다.
○ 송도(松島)ㆍ우산도(于山島)ㆍ울릉도(鬱陵島)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에 왜적들이 송도, 울산, 부산에 나누어 주둔해 있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문헌비고》를 보면, “우산도는 바로 왜적들이 이른바 송도(松島)이다.” 하였고, 《여지승람》을 보면, “우산도와 울릉도는 본디 한 섬으로, 사방 100리이다. 신라 지증왕(智證王) 때 그 나라를 토벌하여 정복하였다. 지금의 울진현(蔚珍縣)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하였고, 《수도제강》을 보면, “울진에서 동쪽으로 바다 건너편에 있는 섬을 천산도(千山島)라고 하는데, 완릉도(菀陵島)라고도 한다.” 하였다. 천산도는 바로 우산도의 잘못된 표기이며, 완릉도는 바로 울릉도이다. 《습유기(拾遺記)》를 보면, “봉래산(蓬萊山)은 그 높이가 2만 리인데, 울이국(鬱夷國)이 있다.” 하였고, 왕유(王維)의 ‘송일본조감서(送日本晁監序)’에, “부상(扶桑)은 냉이 같고 울도(鬱島)는 부평(浮萍) 같으리라.” 하였는데, 울이국이나 울도는 울릉도를 가리키는 듯하다.
○ 절영도(絶影島) -동래부의 남쪽에 있다-ㆍ국도(國島) -안변부(安邊府)의 동쪽에 있다-ㆍ저도(豬島)ㆍ웅도(熊島) -두 섬은 영흥부(永興府)의 동쪽에 있다-ㆍ묘도(卯島) -바로 난도(卵島)의 잘못된 표기로, 단천부(端川府)의 동쪽에 있다-ㆍ신도(薪島)ㆍ연도(連島) -두 섬은 덕원군(德源郡)의 동쪽에 있다-ㆍ화도(花島) -함흥부(咸興府)의 남쪽에 있다-ㆍ사도(沙島) -상고할 수가 없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이상은 도서(島嶼)이다.

[주D-001]대황(大荒) : 중국에서 아주 먼 지역을 말한다.
[주D-002]개마대산(蓋馬大山) : 현재의 백두산을 가리킨다는 설과 낭림산맥(狼林山脈) 일대를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 북한의 이지린은, “개마(蓋馬)는 ‘곰’으로 해석되며, 곰산[熊岳]이 요동에 있다.” 하였다. 《고조선연구 307쪽》
[주D-003]각라오목눌(覺羅吳木訥) : 각라(覺羅)는 청나라 종실(宗室)의 성이다. 각라무목눌(覺羅武穆訥)로도 표기된다.
[주D-004]통지(通志) : 《성경통지》 권27에는 이 부분이 ‘舊志’로 되어 있는데, 이는 《성경통지》에 나오는 안설(按說)을 《대청일통지》를 찬한 자가 자신의 안설(按說)로 만들면서 ‘通志’로 바꾼 것인 듯하다. 여기에서의 안설은 모두 《성경통지》의 안설이다.
[주D-005]영재(泠齋) : 원문에는 ‘冷齋’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두(頭)를 …… 한다 : 원문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07]철주는 정융진(定戎鎭)을 관할한다 : 원문에는 ‘州領定戎二鎭’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州領定戎一鎭’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8]봉두산은 …… 있다 : 원문에는 ‘鳳頭山在郡此’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鳳頭山在郡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9]도엽(桃葉) : 진(晉)나라 왕자경(王子敬)이 그의 첩(妾)인 도엽을 위하여 지은 악부(樂府)의 청상곡(淸商曲) 이름인데, 여기서는 가기(歌妓)를 가리킨다.
[주D-010]청원(淸源) : 청원 행사 선사(淸原行思禪師)의 별호(別號)로, 길주(吉州)의 청원산(靑原山)에 머물렀으므로 선서(禪書)에서는 흔히 청원(靑原)으로 표기한다.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문하에 청원과 남악(南岳) 두 제자가 있어 2대 법통(法統)이 나왔는데, 청원의 법은 조계(曹溪)로 흘렀고, 남악의 말류(末流)는 임제(臨濟)가 되었다.
[주D-011]청량(淸涼) 익 선사(益禪師) : 문익(文益)을 가리킨다. 청량은 건당(建唐)에 있는 절 이름이며, 법안종(法眼宗)의 개조이다.
[주D-012]돌바닥은 …… 같다 : 원문에는 ‘石底水蔚始翠藍’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47에 의거하여 ‘石底水蔚如翠藍’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3]그 형상이 …… 같아 : 원문에는 ‘形如龜狀潭中’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47에 의거하여 ‘形如龜伏潭中’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4]바깥쪽에는 철망(鐵網)을 둘러서 : 원문에는 ‘外施銅鐵’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47에 의거하여 ‘外施鐵網’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5]단단대령(單單大嶺) : 안정복은 “단단대령은 지금의 철령(鐵嶺) 안팎에서 대관령(大關嶺)에 이르는 한 가닥 산령(山嶺)이 바로 그것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 대관령을 또한 대령(大嶺)이라고 칭하였으니, 아마 옛 이름이 없어지지 않았던가 보다.” 하였고,《동사강목 부록 권하 지리고》 이병도는 “위지에서 이른 바 단단대령은 지금의 대관령이 아니라, 지금의 함경도와 평안도 양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분수령(分水嶺)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였으며,《韓國古代史硏究 192쪽》 북한의 이지린은 “단단대령이란 영은 요동반도를 좌우로 나누는 산맥의 최고산인 현 마천령이다.” 하였으며,《고조선연구 310쪽》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중국의 천산산(天山山) 줄기로 보고 있다.《조선전사 제2권, 113쪽》
[주D-016]단대령(單大嶺) : 원문에는 ‘單大領’으로 되어 있는데, 《후한서》 권115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하도 같다.
[주D-017]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 :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나, 마한(馬韓) 54국 가운데 하나인 소석색국(小石索國)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견해가 있다.《역주삼국사기 3책 676쪽》
[주D-018]길이 …… 있다 : 원문에는 ‘路其隘狹’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30에 의거하여 ‘路甚隘狹’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9]무너진 …… 있다 : 원문에는 ‘頹垣壤塹’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30에 의거하여 ‘頹垣壞塹’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0]배가 …… 지나갔다 : 원문에는 ‘舟過舟下’로 되어 있는데, 《고려도경》 권38에 의거하여 ‘舟過其下’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1]만화초(滿花草) : 만화석(滿花席), 즉 여러 가지 꽃무늬를 수놓은 방석을 만드는 풀로, 골풀을 말한다. 골풀은 줄기는 원기둥형이고 1m 이상 자라는 풀로, 말린 줄기로 자리를 짠다. 등심초(燈心草), 석용추(石龍芻), 골속, 용수초(龍鬚草)라고도 한다.
[주D-022]우승은(于承恩) : 원문에는 ‘千承恩’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해동잡록 1 본조(本朝)
조광조(趙光祖)

○ 본관은 한양으로 자는 효직(孝直)이요, 호는 정암(靜菴)이다. 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을 가졌으며, 과거(科擧)의 학문을 즐겨하지 않았다.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 선생이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가서 배워서 학문하는 큰 방도를 들었다. 을해년(중종(中宗) 10년)에 효도하고 청렴함으로써 천거되어 사지(司紙) 벼슬을 임명 받았고, 이 해 가을에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4년 간에 특진하여 대사헌(大司憲)을 배명 받았다. 사문(斯文 유학)을 일으키고, 임금과 백성을 요순(堯舜)의 임금과 백성으로 만드는 것으로 자기의 임무를 삼았다. 신무문(神武門)의 변이 일어나자, 성균관과 사학의 학생들이 대궐을 지키고 호곡(號哭)한 자 천백(千百)에 달했으나, 결국은 능성(綾城 능주)으로 귀양을 갔다가 사사(賜死)되었다. 후에 특히 영의정에 증직되고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하였다.
○ 선생은 《소학(小學)》을 독신하고 《근사록(近思錄)》을 존숭하면서 모든 경전(經傳)에서 그 정신을 발휘하였다. 〈행장(行狀)〉
○ 선생은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여묘(盧墓)살이를 했는데 항상 반드시 묘를 대하여 앉았으며, 전곡(奠哭 음식을 차리고 곡하는 것)의 여가에는, 묘의 주위를 두루 살펴서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잠시도 그치지 않았다. 복을 마치고도 오히려 애절한 슬픔을 품고서 이에 묘 옆에다 터를 잡아 초당 두어 칸을 지어서 영구히 사모하기 위한 장소로 하고, 또 그 옆에 시냇물을 당겨들여 못을 만들고 섬돌을 구축하여, 연(蓮)과 잣나무를 심어놓고 항상 여기에 와서 놀았으니, 이는 평소 고아함을 즐기는 회포였다.
○ 조광조는 난(鸞)새가 앉아 있는 듯, 봉황새가 버티어 선 듯, 옥(玉)처럼 윤택하며, 금(金)처럼 정간하며, 아름다운 난초가 향기를 뿌리는 듯, 밝은 달이 빛을 내는 듯하였다.
○ 일찍이 천마산(天磨山)과 용문산(龍門山)에 들어가, 글을 읽고 익히는 여가에 오뚝히 앉아 해가 다하도록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지신명을 대하듯 경건히 하여 수양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니, 사람들의 미치지 못할 바였다.
○ 조정에 나아가면 하루 세 번씩 임금이 접견하고, 물러나오면 사람들이 다투어가며 존경하여 우러러보니 이것은 가위 상하(上下)가 어울려 기뻐하기 천재일우의 기회라 하겠다.
○ 선생은 앉으면 반드시 단정히 꿇어앉고, 손은 반드시 팔꿈치를 맞잡았으므로 입은 옷은 꼭 팔꿈치와 무릎 부분이 먼저 떨어졌다.
○ 첫째 불행은 급제(及第)하여 너무 빠르게 벼슬이 진급한 것이요, 둘째 불행은 벼슬을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요, 셋째 불행은 귀양간 땅에서 최후를 마친 것이다.
○ 매양 임금과 대할 때는 반드시 마음을 정제하고, 생각을 숙연히 하여, 신명(神明)을 대한 것 같이 하며, 아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없고, 하는 말은 충직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 매일 닭이 울면, 세수하고 빗질하고 우러러 생각하여 반드시 몸소 체득함을 기하였으며, 한 번도 체득하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한계(限界) 지은 적은 없었다.
○ 선생이 능성(綾城)에 귀양가 있을 때, 사약을 내리는 왕명이 이르자, 목욕하고 관대하여, 안색을 변치 아니하고 조용히 죽음에 나아가고 조금도 원망하고 허물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말하기를, “임금을 사랑함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같고, 나라를 근심함은 내 집을 근심함과 같았다.” 하고, 또 말하기를, “백일(白日)이 하토(下土)에 임하리니, 밝고 밝게 나의 붉은 마음을 비추리라.” 하였다. 동상
○ 선생이 왕명을 받아 〈계심잠(戒心箴)〉을 지어 바쳤으니, 이르기를, “하늘의 이치가 흐리고 어두우면, 기운도 또한 막히고, 사람의 도리가 무너지며 만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였다. 〈계심잠〉
○ 선생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사대부의 집에서 검약하게 하여 스스로 견지한다면 그 자손은 오래도록 패(敗)하지 않으나, 연락(宴樂)하며 스스로 방자하면, 집은 곧 기울고 가산은 탕멸하나니, 폐조(廢朝 연산군 시대) 말년에 사대부가 오락에 탐닉하고 사치에 쏠리게 되어 국가가 거의 위태하였는데, 지금의 유식한 자들도 역시 습속(習俗)을 따라서 검약한 것을 가리켜 쓸쓸하다고 하고, 놀고 잔치하는 것으로써 큰 기상이 있다고 하니, ‘한 말로 나라를 망친다.’는 말은, 바로 이를 이름입니다.” 하였다. 《유선록(儒先錄)》
○ 선생이 말하기를, “세간에는 말[馬]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화초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거위와 오리 기르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나, 만일 마음이 외물로 내달리게 되면, 반드시 집착하기에 이르러 끝내 도(道)의 지경에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소위, ‘물건을 완성하다가 뜻까지 상실하고 만다.’는 것이다.” 하였다.
○ 젊어서 김굉필(金宏弼)에게 사사(師事)를 하였고, 장성함에 이르러 스스로 깨닫고 분발하매 그 한때의 사람으로 그를 헐뜯고 비방하는 자가 퍽 많아서, 혹자는 화근(禍根)거리라고까지 하고, 친구들이 모두 관계를 끊고 사귀지 않았으나 선생의 입지(立志)는 심히 독실하여 조금도 흔들려 굴하지 않았다. 처음에 그의 학문으로 후진을 창도하니, 깨닫고 분발한 자가 많았다.
○ 선생이 지은 춘부(春賦 봄을 읊은 글)에 스스로 서문(序文)을 지어 이르기를, “봄이란 것은, 천리의 으뜸이다. 사시(四時)는 봄으로부터 시작되며, 사단(四端)은 인(仁)으로부터 발현되나니, 봄이 없으면 시절의 차례가 성립되지 못하고, 인(仁)이 없으면, 선심(善心)의 실마리가 이루어지지 못한다. 하늘은 욕심이 없어 봄이 행하여 사시가 이루어지고, 사람은 욕심이 있어 인(仁)을 상실하여 선심의 실마리를 확충시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음속으로 스스로 슬퍼져서 부(賦)를 짓는다.” 하였다. 동상(同上)
○ 선생이 천마산(天磨山)과 성거산(聖居山)에 올라 한적한 곳에 이르면 천천히 걸으며 가만히 읊조리니, 소연(蕭然)히 진세(塵世)를 벗어난 듯한 감상이 있었다. 〈비서(碑序)〉
○ 급히 등용되어서 융화되어 통할 수 없었고, 일찍이 생을 마쳤으니 말을 세울 수 없었으나, 가르침을 베풀고 인도할 때에는 재질과 천품을 따라서 품평하여 알아보았으며, 그 기량과 식견을 취하였다.
○ 일찍이 천마산(天磨山)의 절에 우거할 때, 우뚝히 있는 모양은 소상(塑像) 같았으며, 괴로움을 겪고 담식(淡食)하기를 중들과 같이하였다.
○ 기묘년(중종(中宗) 14년)에 사화가 일어나서 선생과 제공(諸公)들이 금부(禁府)에 하옥되었고, 선생은 능성으로 귀양갔었는데, 담장[墻]을 짚고 북쪽을 바라보며, 임금을 생각하는 연연한 정을 폈었다.
○ 매양 진강(進講 임금께 나아가 강독하는 것) 전날 저녁에는 단정하게 앉아서 익히 읽기를 임금의 곁에 있는 것같이 하고, 새벽이 되면 나아가서, 숙연(肅然)히 대해 모시어서 반드시 감동하시기를 바랐었다.
○ 선생은 일찍이 치도(治道)에 대하여 개진(開陳)하였다. 성(性)과 정(情)ㆍ선(善)과 악(惡)ㆍ의(義)와 이(利)의 분변에서부터 천(天)과 인(人)ㆍ왕(王)과 패(覇)ㆍ옳음과 사특함의 구분에 이르기까지 기울여 내어 벌려놓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날이 저물어도 권태를 몰랐다.
○ 몸을 살피며 사욕을 극복함을 우선으로 삼고, 경(敬)을 잡아지키며 정(靜)을 주로함을 힘쓸 것으로 삼아, 침잠하고 각고하며, 정밀히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였다.
○ 선생이 대사헌이 되어, 입대할 때마다 예(例)를 이끌어 의리(義理)를 깨우쳤는데 종횡으로 드나들어 한 가지 언사도 그 사이에 끼어들 수 없게 하여 비록 극히 추운 날이나 몹시 더운 여름이라도 해가 한낮이 될 때까지 그치지 아니하니, 말한 것은 허락하지 않은 일이 없었으나, 같이 모시고 있는 자는, 이것을 괴롭게 여겨서 모두 싫어하는 빛을 가졌었다. 《척언(摭言)》
“□□바치는 물건이 과다하므로 백성은 날로 곤핍하게 되나니, 경비 쓰는 것을 적당히 감한 후에라야 거의 백성이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경연진설(經筵陳說)》
○ “옛일을 몸소 체득하여 어떤 일은 배울만하고, 어떤 일은 배우지 못할 것이라 하여 공력(功力)을 누적해감으로써 탐구하신다면 비록 한 번에 한 장을 강(講)한다 하여도 얻은 바가 많을 것이요, 그렇지 않는다면 비록 한번에 10장을 강한다 해도 다만 헛된 형식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였다.
○ 아버지가 아들을 알아주지 못한다면 아들이 근심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임금이 신하를 잘 알지 못한다면, 신하가 충성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인금과 신하는 대개 아버지와 아들과 한가지인 것이다.
○ 뜻이 큰 사람은 비록 경륜의 대업(大業)을 못할지라도 큰일에 임하여 능히 그 지조를 잃지 않나니, 산을 오름에 비유한다면, 정상에 가기를 목표한 자는 비록 정상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여도 산 중턱까지는 오르게 되나, 산 중턱까지만 오르려 한 자는 산 밑을 떠나지 못해서 반드시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 임금된 이는 마땅히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가려내야 하는데, 소인을 가려내기란 지극히 어렵고, 군자를 가려내기란 쉬운 것 같으니, 먼저 그 알기 쉬운 것을 가려 쓰면 비록 소인이 있더라도 스스로 방자하지 못하옵니다.
○ 이원(利源 이익이 생기는 근원)이 한 번 열리면 그 해가 대단히 큽니다. 선비된 자 평시에는 그 지론이 비록 정직한 것 같으나, 일단 일이 있으면 손발이 황당하고 어지럽사오니, 이원은 곧 국가의 병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완전히 끊은 후에라야 오래도록 그 아름다움을 보존할 수가 있습니다.
○ 임금께 몸을 맡겨서 신하가 되었다면 마땅히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섬겨야 하며, 한 몸의 근심과 재앙은 헤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착한 자는 항상 적고 착하지 못한 자는 항상 많으므로, 재앙과 근심을 헤아리지 아니할 수 없어, 만약 일단 일이 있으면 놀라고 의심하고 위축하지 않음이 없어서 임금 앞에 낯을 들고 극간(極諫)하는 자가 드물게 되는 것입니다.
○ 중인(中人 자질이 중급 정도인 사람) 이하는 선한 일을 하건 악한 일을 하건 간에 시대의 숭상하는 것을 따르나니, 위에 있는 사람들이 어찌 권려(勸勵)하는 도(道)를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선비의 습성이 부정한 것을 밑에 있는 자에게 책임을 돌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 폐조(廢朝 연산군) 때에는 환관들이 선동하여 소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대신(大臣)들이 부정하고 음험하여 왕의 뜻만을 엿보고, 자기의 사사로운 원한을 마음대로 갚았으니, 성종조(成宗朝) 초년부터 양성한 선비들을 일망타진하고 하나도 남는 자가 없었습니다. 동상(同上)
○ 가정(嘉靖) 임오년(중종 17년)에 몹시 가물었다. 강령현(康翎縣)에서 세 사람이 같이 김을 매다가, 한 사람이 말하기를, “가뭄이 이같이 심하니, 틀림없이 흉년이 들 것이다. 듣자니, 재상(宰相) 조광조(趙光祖)는 청백하고 간결하여 각 도(道)ㆍ주(州)ㆍ군(郡)에는 절간(折簡 호출장)이 일체 없어져 이에 따라 마을에는 소리 치는 아전들이 없었는데 지금 들으니 귀양가서 죽었다 하니, 천재(天災)가 이로써 연유한 것 같다.” 하였다. 그 중 한 사람이 서울에 와서 고해 바치자, 말한 농부를 곧 잡아다 고문하여 결국 극형을 받았고, 한 사람은 같이 김을 매었으면서도 고해 바치지 않았다는 죄(罪)를 입었고, 고해 바친 자는 상을 받았다. 《 수언(粹言)》
○ 기묘년에 조정암(趙靜菴)과 여러 관원들이 귀양을 갔다. 황계옥(黃季沃)이란 자는 먼저 구제를 위한 소(疏)를 짓고는, 또 윤세정(尹世貞)과 이래(李來) 들과 연명하여 죄를 청하는 소를 올렸다. 정암은 마침내 이것으로써 화를 입게 되었다. 황계옥은 조정암을 구하는 소와 죄를 청하는 두 가지 소를 지어서 흉악한 짓을 행하였으니, 그 간특하고 사휼한 형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패관잡기》
○ 기묘년 가을에 남곤(南袞)이 조광조와 같이 시관(試官)으로 있을 때, 성수종(成守琮)의 시권(試券)을 보고, 정암이 말하기를, “성수종 아니면 이와 같은 문사(文辭)를 능히 짓지 못하리라.” 하였는데, 과연 합격하였다. 화가 일어나자, 그 허물을 정암에게 돌려서 문리(文理)가 연결되지 않는 데 사정을 두어 시험에 뽑았다 하며 이름을 방목(榜目 합격한자 명부)에서 삭제하였다.
○ 기묘년 10월에 좌상(左相) 신용개(申用漑)가 죽었다. 왕이 예(禮)에 의하여 애도를 표하려 하니, 대신(大臣)들이 의논하여 난처하다고 하므로 거행하지 못하였다. 후에 조광조가 입대하여서 아뢰기를, “신이 듣기로는 유관(柳寬)이 죽었을 때 세종의 곡(哭)소리는 바깥까지 들렸다 하여 지금까지도 그 말을 듣는 이가 송동(竦動)하지 않는 이 없습니다. 전일에 하교하신 뜻이 심히 아름다웠으나, 대신들이 별전(別殿)에서나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으니, 그 능히 임금의 좋은 점을 그대로 받들어 시행하지 못함이 심하였습니다. 세종(世宗) 때에 유관(柳寬)과 유정현(柳廷顯)의 죽음에 금천교(禁川橋) 밖에다 악차(幄次 천막)를 설치하고 애도를 표하였다 하나이다.” 하였다. 《잡기(雜記)》
○ 기묘년 10월에 대사헌 조광조 등이 합사(合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을 3사(司)라 하는데, 합사(合司)란 어떤 문제를 두고 이들이 합동하여 청함을 말함)하여 합문밖에 엎드려 병인반정(丙寅反正) 때에 공이 없으면서 외람되게 녹공(錄功)된 자가 많음을 논하고 외람된 자를 삭제하도록 청하였다. 부제학(副提學) 김구(金絿) 등도 합사하여 차자를 올리고, 대신과 6경(卿)이 또한 아뢰었으나 임금이 듣지 않으므로 양사(兩司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에서 사직하기에 이르렀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매우 어렵다는 뜻으로써 타일렀으나, 조광조가 극력 임금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말하니, 임금이 윤허하여 2, 3 등의 잘못 녹공된 자는 뽑아서 삭제하고, 4등은 모두 삭제하였다. 광조 등이 패하게 되자 전대로 환원되어 버렸다. 동상(同上)
○ 태학생(太學生) 박근원(朴謹元) 등이 상소하여, 조광조의 학술의 정대함과 선왕(先王)이 여러 소인에게 속은 것을 극론하고, 직첩(職牒)을 도로 주어 선비들의 나갈 길을 바르게 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인종도 매우 아름답게 여겨 장려하였고, 조정 신하 중에도 역시 말하는 자가 있었으나 신중을 기하려고 급하게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기다리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6월 말에 인종이 위독하게 되자 대신에게 전교하기를, “광조(光祖) 등의 복직과 현량과(賢良科 조광조 등이 주장하여 시행한 특별 과거인데 광조가 죽게 되어서 삭제해 버렸다.)를 회복하는 일은 선왕 때의 일이므로 조용히 처리하려 했으나, 지금 나의 병세가 이러하니 조광조 등의 직첩 및 현량과를 복구시키시오.” 하였다. 동상(同上)
○ 조광조는 처음에 능성(綾城)으로 귀양가 있다가 얼마 안 가서 사사(賜死)되었다. 고례(故例)에 무릇 재상(宰相)에게 사사할 때에는 임금의 옥새가 찍힌 문서가 있지 않고, 다만 왕지(王旨)를 받들어서 시행하였으므로 금오랑(金吾郞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이 조광조가 귀양살이하는 곳에 이르러 왕의 교지를 전달하니, 공(公)은, “국가에서 대신(大臣)을 대접함이 이와 같이 허술하게 할 수 없는 것이며, 이 폐단은 장차 간사한 사람으로 하여금 미운 사람을 마음대로 죽이게 할 수 있을 것이라.” 하고, 한 마디 상소하려 했으나 결국 하지 못하고, 목욕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뜰로 나와 무릎을 꿇고 왕의 옥체 안녕을 묻고, 다음에 3공 6경(三公六卿)의 성명을 물으니, 도사(都事) 유흡(柳潝)이 핍박하여 재촉하므로 공이 흐느껴 탄식하기를, “옛사람 중에는 조서(詔書)를 부둥켜 안고, 여관에 엎드려 통곡한 자도 있었다는데(후한 영제(靈帝) 때 범방(范滂)을 처형할 때 고사) 어찌 그리도 다른고?” 하고, 또 말하기를,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했으니 하늘에 있는 해가 나의 붉은 충성을 비춰 주리라.” 하고, 드디어 약을 마시고 이불을 쓰고 있었으나 죽지 않자 목졸라 죽였다. 《해동야언(海東野言)》
○ 선생은 성화(成化 명(明) 나라 헌종(憲宗)의 연호(年號)) 임인년(성종(成宗) 13년)에 출생하였다. 천품이 매우 특이하고, 어려서부터 강개(慷慨)히 큰 뜻이 있어 넓게 배우고 힘써 행하여 29세에 진사 시험에 장원으로 합격되었다. 중종 을해년에 이조 판서 안당(安瑭)이 아뢰기를 “조광조(趙光祖)는 경서에 밝고 행동이 의로우니 마땅히 발탁하여 쓰되 만약 자격이 구애된다면 예(例)로 참봉(參奉)에 조용(調用)할 것이온 바 그러면 사림(士林)을 권장함에 부족하오니, 청컨대, 6품(六品)의 관직을 제수하옵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고 곧 사지(司紙 조지서(造紙署)이 한 관원)를 제수하였다. 이해 가을에 알성별시(謁聖別試 대성전(大成殿) 공자(孔子) 묘(廟)에 임금이 참배하고 보이는 과거)에서 을과(乙科 제2등급) 제일(第一)로 합격하였다. 정언(正言)을 배명하게 되자 대간(臺諫 양사(兩司)의 총칭) 권민수(權敏手)와 이행(李荇) 등이 스스로 언로(言路)를 막는 실수를 탄핵하였고, 정축년에 수찬(修撰)ㆍ교리(校理)ㆍ응교(應敎)를 거쳐 전한(典翰)을 제배하니 사양하여 아뢰기를, “소신은 학문에 뜻을 두었사오나 그 힘을 실용하지 못하겠사오니, 바라건대, 궁벽한 고을이라도 허락하여 주신다면 백성을 다스리는 틈을 타서 학술에 힘을 쓰게 되면 백성을 다스리는 일과 학문을 다스리는 일이 둘 다 온전하게 될까 합니다. 소신은 완성되지 못한 사람으로 하루아침에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입사오니 어찌 가히 그 지위에 처하겠나이까.”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무인년 정월에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진되고 다시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옮기었다. 우승지(右丞旨) 김정(金淨)이 아뢰기를, “조광조는 경연에 있어 보익(補益)함이 크고 많을 것입니다. 승지는 임금의 목과 혀의 지위인지라 진실로 마땅히 가려서 임명할 것이오며, 또한 입시하여 논난하기는 하오나 그 임무를 전담시킴만 같지 못할까 합니다.” 하니, 수일 후에 도로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매양 입대하여 어떤 날은 저물 때까지 이르렀으나, 임금은 다 허심탄회하게 경청하였다. 동상
○ 회령성(會寧城) 밑에 있는 야인(野人 여진족) 속고내(束古乃)가 몰래 먼 곳에 있는 야인들과 함께 갑산부(甲山府)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많이 노략해 갔으므로 남도 병사(南道兵使)가 비밀리 장계를 올렸다. 임금이 명하여 세 정승과 해당되는 조(曹)를 불러 이것을 의논하고 먼저 본도(本道)에 밀지(密旨)를 내리고 또 무기를 보내고, 이지방(李之芳)을 명하여 특별히 어의(御衣)와 활과 화살을 주며 그날로 떠나게 하고,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거둥하여 전송의 연회를 베풀었는데, 승지 김정국(金正國)이 아뢰기를, “부제학 조광조가 입대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곧 윤허하였다.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것은 곧 도적이 기미를 노려 속임수를 쓰는 모의와 같습니다. 당당한 대 조정으로써 한 일개 조그만 추한 오랑캐 때문에 도적의 모의를 행한다는 것을 신은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합니다.” 하니, 임금이 중의를 물리치고 파견할 것을 철회해버렸다. 공이 3품의 관원으로서 능히 짧은 말로써 왕의 뜻을 움직여 조정대의(朝廷大議)를 바로잡으니,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겼다. 동상
○ 정덕(正德 명(明) 나라 무종(武宗) 연호(年號)) 무인년(중종(中宗) 13년)에 대간(臺諫)에서 소격서(昭格署 하늘과 땅과 별에게 제사를 지내는 도교(道敎)를 맡은 관서(官署))를 혁파할 것을 청하였고, 홍문관(弘文館) 역시 날마다 논하여 아뢰었으나, 다 윤허하지 않았다. 하루는 공이 손수 차자를 지어 동료에게 말하기를, “오늘 윤허를 얻지 못하면 가히 물러가지 못하오.” 하더니, 날이 저물자 대간(臺諫)은 다 물러나고, 옥당(玉堂 홍문관의 별칭)만이 그대로 아뢰어 새벽 닭이 울기까지 그치지 아니하니, 임금이 부득이 윤허하였다. 그때 승지들은 책상에 기대어 깊이 졸고 있었으며, 모두 괴로워하고 싫어하는 빛이었다.
○ 기묘년(중종(中宗) 14년) 5월에 공이 다시 대사헌이 되어 아뢰기를, “국가에서 폐했던 것을 다시 닦아 행하는 일은 선조(先朝)에서 다 결론하지 못한 바이오니, 다른 날 소인들이 만약 계승해서 하여야 한다는 말을 내세우고 중상한다면 선하 자가 위태롭습니다. 요사이 노산(魯山 단종(端宗))을 제사하고 소릉(昭陵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을 복구한 것은 모두 뜻있는 선비들이 행하고자 하되 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성세(聖世 중종 재위 당시를 가리킴)에 이르러 건의하여 행하게 되었고, 또 신씨(愼氏)를 왕후로 복위시키자는 의논에는 김정(金淨)과 박상(朴祥) 등이 상소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역시 정론(正論)이었는데 그 당시 논의하는 자들은 대죄로 다스리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소인의 구실인 것이며 선비들의 화근이옵니다. 사람들이 사귀고 왕래하는 것은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며 임금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기는 도(道)를 강론하기 위한 것이옵니다. 자고로 정직한 무리들이 세상에 성행하면 반드시 큰 화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지금 벗들 간에 종유하며 학문을 강론함에 어찌 그 사람이 없겠습니까. 항간에서는 큰 화가 반드시 조석간에 일어날 것이라고 하니, 이는 전날에 겪은 바가 깊어서입니다.” 하였다. 동상(同上)
○ 일찍이 주강(晝講 낮 시간에 하는 강)하는 자리에서 승지 박세희(朴世熹)가 아뢰기를, “조광조는 젊어서 김굉필(金宏弼)에게 사사하여 도학에 잠심하였사온데, 시속 사람들은 헐뜯어서 비방하며 혹자는 미쳤다 하고 혹자는 화근이라 하여 벗들이 절교를 하였습니다마는, 반정(反正) 초에 비로소 그 학문을 가지고 후생을 창도하였으니, 신(臣)과 같은 것이 개발됨도 다 이 사람에게서 연유된 것입니다.” 하였다. 동상
○ 대간이 정국공신(靖國功臣)의 남록(濫錄)된 자를 삭제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조정의 의논을 모아 보라고 명하였다. 남곤은 예조 판서로서 그 의논을 피하고자 배릉 헌관(拜陵獻官)을 요구하여 되었다. 그 후에 공(公)이 입시(入侍)하여 아뢰기를, “근자에 숭품 6경(崇品六卿 숭록(崇祿)ㆍ숭정(崇政)의 품계로 판서 지위에 있는 자)이 능헌관(陵獻官)이 되었으니, 그 사람은 반드시 일을 피하기를 꾀한 것입니다. 신하된 자로 이같이 자기 몸을 아낀다면 다른 것은 더 볼 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남곤도 함께 입시했다가 부끄럽고 황공하여 이내 물러갔다. 동상
○ 남곤과 심정(沈貞)이 청류(淸流) 선비들에게 용납되지 못하자 공(公)이 지우(知遇)를 받고 백성들로부터 칭송 받음을 이용하여 이것으로 구실을 삼아 공을 얽어 잡으려고 홍경주(洪景舟)로 하여금 비빈(妃嬪 홍 희빈(洪姬嬪)을 말함)을 통해, 인심이 모두 조씨(조광조를 말함)에게로 돌아간다고 하여 임금의 마음을 동요시키게 하고, 또 상도에 어긋나는 참문(讖文 길흉화복을 예고(豫告)하는 글)으로써 거짓으로 비원 꽃 나무 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 넉 자를 써서, 이것으로 왕에게 공포심을 일으키게 하여 공을 죄의 두목이 되게 하였다. 다행히 재상 정광필(鄭光弼)이 울면서 옷깃을 잡은 데 힘입어 임금의 엄엄한 위엄이 조금 가시게 되었으나, 하옥되기에 이르러서는 향도(香徒)들이 궁성을 둘러 지키고,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선비들이 대궐 뜰에 엎드려 통곡하니 이로 말미아마 임금의 의혹이 더욱 심하였다. 공술(供述)하기를,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 믿는 바는 임금의 마음일 뿐이요, 조금도 딴 생각은 없다.” 하였다. 처음에는 사율(死律)에 처하려 하였으나, 이내 장형(杖刑)을 하여 능성(綾城)으로 귀양보냈다가 얼마 안 있어 적소에서 사사(賜死)하니, 곧 12월 20일로 나이는 38세였다. 이 날 흰 무지개가 해를 둘렀는데 동서로 각 두 겹, 남북으로 각 한 겹이었고, 남북에 둘러진 무지개 밖에 각각 두 줄기의 무지개가 있어 큰 띠를 늘어뜨린 것같이 하늘에 뻗쳐 있었다. 또 서남쪽에 별도로 한 줄기의 무지개가 있어 길이가 한 길[丈]이 넘었는데 모두 때가 지나서야 없어졌다. 이듬해에 용인(龍仁) 선영(先塋)의 묘역(墓域)에 장사하였으니, 유지(遺志)에 따른 것이다. 아들 정(定)은 나이 5세, 용(容)은 2세였는데 정은 일찍 죽고 용은 벼슬하여 문천(文川) 군수에 이르렀으나, 아들이 없어 종질(從姪)인 순남(舜男)으로 뒤를 이었다. 능성 사람들이 서원을 짓고 제사하니 죽수서원(竹樹書院)이라 사액(賜額)하고, 또 서적(書籍)을 하사하여 장려하였다. 양주 목사(楊州牧使) 남언경(南彦經)이 또 도봉산(道峯山) 밑에 서원을 지었고, 고향 사람이 또 용인(龍仁) 묘 밑에 서원을 지었다. 선조(宣祖) 2년에 태학생(太學生) 홍인헌(洪仁憲) 등이 상소하여 문묘(文廟 공자묘(孔子廟))에 배향할 것을 청하니, 양사(兩司) 및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서로 이어 계청하고, 옥당(玉堂)에서도 차자를 올려 대관(大官)과 좋은 시호(諡號)를 주자고 청하였다. 이에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하고 문정(文正)이라 시호하도록 명했다. 만력(萬曆 명(明) 나라 신종(神宗)의 연호(年號)) 신해년(광해군(光海君) 3년)에 문묘에 종사(從祀)하였다. 《기묘록》
○ 조 부자(趙夫子 조정암(趙靜菴)의 존칭)는 집에 있으면서 몸가짐이 옛사람에 부끄럽지 않았으니, 학문을 독실히 하였고 꿇어 앉음이 오랜 습관이 되었으며, 의관을 반드시 단정히 하여 아침부터 해저물 때까지와 땅거미가 질 때부터 삼경(三更)까지 오뚝히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으며, 맑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곤 했는데, 비록 밤이 짧은 한여름에도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 학문을 추상해 보건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또한 멀지는 않았었다. 다만 베풀어 실행한 것이 갑작스럽게 불행한 데 이르렀으니, 그 당시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으랴. 《홍치재일록(洪恥齋日錄)》

[주D-001]신무문(神武門)의 변 : 기묘(己卯)의 사건을 고발하는 자들이 보통 출입하는 정문을 피하여 경복궁의 뒷문인 신무문으로 들어가서 고발하였다.
[주D-002]신씨(愼氏) : 신씨는 중종의 첫번 아내였다. 그 신씨가 연산군 때의 정승으로 있던 신수근(愼守勤)의 딸이었는데 반정할 때에 신수근을 죽였으므로 반정을 주장한 사람들이 후일에 무슨 화가 있을까 겁내어 왕에게 억지로 청하여서 내어보냈었다.
[주D-003]‘주초위왕(走肖爲王)’ : 주초(走肖)는 조(趙)라는 글자를 나눈 것이니, 이 주초위왕 넉 자를 비원 나뭇잎에다 꿀로 써 놓아서 벌레가 꿀을 먹느라고 잎새를 긁어 놓게 하고 그 잎새를 따서 임금에게 바쳐서 조광조를 겁내게 한 것이다. 조광조는 이것으로 인하여 죽은 것이다.
숙종 22년 병자(1696,강희 35)
 1월10일 (정묘)
송시열을 도봉 서원에 향사하고 이에 반대하는 소를 올린 이제억 등을 벌하다

진사(進士) 이제억(李濟億)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삼가 듣건대, 국가에서 장차 죄로 죽은 신하 송시열(宋時烈)을 도봉 서원(道峰書院)에 아울러 향사(享祀)한다 하니, 아! 이것이 무슨 거조(擧措)입니까? 송시열의 죄악은 신들이 감히 두루 지적하여 입을 더럽힐 수 없으나, 이미 죄받은 것을 말해 보건대, 장서(長庶)의 논(論)을 창도(倡道)하여 군부(君父)를 폄강(貶降)하며 적통(嫡統)을 효종(孝宗)께로 돌리지 않았고, 원자(元子)를 정호(定號)하실 때에는 남몰래 좋아하지 않는 마음을 품고 국본(國本)을 동요하였습니다. 참으로 이른바 《춘추(春秋)》의 무장(無將)이고, 한법(漢法)의 부도(不道)이니, 송시열처럼 뭇 악(惡)을 갖추어 가진 자는 없습니다. 그밖에 널리 당여(黨與)를 심어 멀리 조정의 권세를 잡고, 척리(戚里)와 결탁해 선류(善類)를 해친 것은 단지 그 작은 일일 뿐입니다. 전하께서 시원하게 강단하여 전형(典刑)을 바로 하시자 엄한 징토(懲討)를 볼 수 있었는데, 얼마 안되어 특별한 은전(恩典)을 도리어 더하셨으므로 원근(遠近)의 보고 듣는 자로서 놀라 의혹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당(餘黨)을 길러 세력을 믿고 기회를 타서 선현(先賢)을 제사하는 곳이 이런 모욕을 받게 하니, 사림(士林)의 분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저 정호(鄭澔)는 어떠한 사람이기에 천위(天威)를 가까이한 자리에서 버젓이 속이고 교묘하게 아울러 향사한다는 말을 만들어 농락하는 태도를 자행하는 것입니까? 제 마음은 속일 수 있으나, 하늘을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도봉 서원은 곧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의 신주(神主)를 모신 곳인데, 이제 죄가 차고 악이 쌓여서 처형된 송시열을 외람되게 제사받는 줄에 끼게 하니, 조광조의 영특하고 밝은 영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옛일을 두루 보아도 송시열처럼 크게 교활하고 크게 악한 자는 없었으므로, 전하의 일월(日月)같이 밝은 결단으로 간사한 자를 주벌(誅罰)하고 죄악을 성토하는 의리가, 이미 전후의 비망기(備忘記)에 상세하였습니다. 열 줄의 사륜(絲綸)은 천고(千古)의 결안(結案)이므로, 전하께서 송시열의 죄상을 모르시는 것이 아닌데, 현혹하는 말에 견제되어 함께 제사하는 전례(典禮)를 가볍게 윤허하시니, 천백대(千百代)에 비평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유학(幼學) 박해(朴繲) 등이 상소하기를,
“선정신 조광조는 실로 우리 나라 도학(道學)의 정종(正宗)이니, 뒷 사람이 견줄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서원(書院)을 창건한 이래로 전혀 추배(追配)하여 아울러 향사(享祀)한 일이 없었으니, 그 뜻이 어찌 까닭없이 그러한 것이었겠습니까? 이제 국가에서 고(故) 상신(相臣) 송시열(宋時烈)을 아울러 향사하도록 허가하니, 신(臣)들은 송시열의 처심(處心)·행사(行事)에 무엇이 조금이라도 조광조와 닮은 것이 있기에, 반드시 아울러 향사하여 마치 도(道)가 같고 덕(德)이 맞는 것이 있는 듯이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송시열의 평생은 이미 전하께서 환히 아시는 바이고, 나라 사람이 함께 분하게 여기는 바인데, 송시열을 숭상하는 자가 넌지시 선정(先正)에게 견주니, 또한 매우 우습지 않겠습니까? 한편의 편파한 논의 때문에 마땅히 올리지 않아야 할 곳에 올리니, 신들은 사정(祠庭)이 외람되게 더렵혀지는 것은 통탄하여 이에 감히 진심을 드러내어 일제히 호소합니다.”
하였다. 두 상소가 함께 정원(政院)에 올라왔는데, 이날 승지(承旨)들이 다 신시(申時)에 물러가고, 윤덕준(尹德駿)·심평(沈枰)만이 함께 직숙(直宿)하였다. 심평이 말하기를, ‘이 소는 매우 도리에 어그러지니 무단히 봉입(捧入)할 수 없다.’ 하고, 윤덕준에게 연명(聯名)하여 아뢰자고 요청하였으나, 윤덕준이 말하기를, ‘나는 평소에 송상(宋相)의 사람됨에 불복(不服)한다. 태조(太祖)의 추시(追諡)를 의논하고, 효종(孝宗)의 세실(世室)을 청한 것은 본디 매우 변변치 않거니와, 송상이 스스로 그 폄박(貶薄)하는 비방을 면하려고 짐짓 이런 논의를 하였으니, 그 심술(心術)이 어떠한가?’ 하였다. 이것은 대개 기사년에 뭇 흉악한 자들이 송시열을 무함한 큰 제목인데, 윤덕준이 다시 그 말을 이어받았으니, 인심이 함닉(陷溺)한 것이 이에 이르렀다. 심평이 홀로 아뢰기를,
“이제억(李濟億)·박해(朴繲) 등이 선정신 송시열을 도봉(道峰)에 합향(合享)하는 일 때문에 공공연하게 바른 사람을 헐뜯는 말을 하면서 제멋대로 현혹하였는데, 이제억의 소는 더욱 지극히 흉악하고 참혹합니다. 박해는 이제억과 차이가 있기는 하나, 뜻이 향하는 바는 모두 헐뜯는 것입니다. 이미 생각한 바가 있었으므로 아울러 아룁니다.”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이제억 등의 소어(疏語)에 경중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바른 사람을 해치는 말을 주워 모아서 뉘우쳐 죄를 씻어준 뒤에 어지럽히는 것은, 그 뜻이 오로지 아울러 향사하는 데에 있지 않으니, 일이 매우 놀랍기가 이보다 심할 수 없다. 선정을 비방한 죄는 엄중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소두(疏頭) 이제억은 먼 변방(邊方)에 정배(定配)하고, 박해는 정배하고 이 소는 도로 내어 주라.”
하였다. 이때 남인(南人)이 다시 들어온다는 말이 중외(中外)에 자자하였다. 사람들이 그 시작과 끝을 몰랐으나, 흉얼(凶孼)의 여당(餘黨)은 갖가지로 엿보았다. 이제억은 남인이고 박해는 소북(小北)이니, 그 소는 다 시험하여 보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인데, 이제억의 소가 더욱 의기(意氣)가 넘쳐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었다. 오래지 않아 과연 업동(業同)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사기(事機)가 망측하였는데, 성명(聖明)이 위에 있음에 힘입어 간사한 꾀가 조금 그쳤다.
【원전】 39 집 408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인물(人物) / *풍속-풍속(風俗) / *역사-전사(前史)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주D-001]사륜(絲綸) : 조칙(詔勅).
[주D-002]기사년 : 1689 숙종 15년.
[주D-003]소두(疏頭) : 연명(聯名)으로 올리는 상소에 맨먼저 이름을 적은 주동이 되는 사람.
숙종 29년 계미(1703,강희 42)
 1월20일 (병인)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여, 군정의 폐해 등을 논의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병조 판서 이유(李濡)가 아뢰기를,
“금위영(禁衛營)을 폐지한 후에 비로소 문안(文案)을 상고해 보니, 임진 왜란(壬辰倭亂) 후에 선조(宣祖)께서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과 의논하여 훈국(訓局)을 설치하였는데, 원래의 전세(田稅)외에 따로 삼수량(三手粮)을 정하여 양병(養兵)의 밑천으로 삼았으며, 1년의 방료(放料)가 4만 7천 석이었는데, 풍년에는 거두는 바가 혹 6만여 석에 이르고, 중년(中年)에도 5만 5천 석을 밑돌지 않았습니다. 결원(缺員)이 있더라도 보충하지 말도록 하자는 의논은 처음에 군사의 식량을 주기 어려움을 염려한 것인데, 삼수량이 본래 양병을 위해 설치한 것임을 이미 알았으니, 그 식량이 있는데 어찌 혁파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다시 상량(商量)하여 처리하소서.”
하고 우의정(右議政) 신완(申琓)이 말하기를,
“이 일은 신도 자세히 알지 못하였으므로 당초에 위복(違覆)하지 못하였는데, 이제야 비로소 삼수량(三手粮)의 전말(顚末)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군사의 급료를 줄 수 있는데, 어찌 폐지할 수 있겠습니까? 결원(缺員)이 있더라도 보충하지 말게 하는 것은 10년 안에 효과를 볼 일이 아니며, 군병(軍兵)은 저절로 굳은 마음이 없어질 것이니, 이제 구원(久遠)한 보람을 위하여 먼저 군졸의 마음을 잃는다면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니, 형조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과 유계(兪棨)가 일찍이 효종조(孝宗朝)에서 또한 도감(都監)에서 양병(養兵)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 일찍이 변통하려고 하였으니, 두 신하가 어찌 삼수량의 출처를 알지 못하여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만약 결원(缺員)이 있더라도 보충하지 않아서 군사의 심정이 서운하게 된다면, 훈련 도감과 금위영(禁衛營)을 합쳐서 하나로 만들어 폐단을 덜고 뒷처리를 잘하는 계책으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삼수량을 조용(調用)할 방도로 여겨 반드시 그대로 두려고 한다면, 신은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기하(李基夏)가 말하기를,
“국가에서 군사를 훈련한 지 수십 년에 이미 수하(手下)의 정병(精兵)이 되었는데, 하루 아침에 혁파한다면 신은 아마도 군정(軍情)을 수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훈련 도감의 군사에 결원이 있더라도 보충하지 않는다면, 군심(軍心)의 실망이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금위영(禁衛營)은 역시 파할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하자, 이유가 말하기를,
“이기하의 말은 비록 이와 같을지라도, 성상의 처분은 진실로 백성의 고통을 염려하시어, 이러한 큰 변통을 하여 백골징포(白骨徵布)의 폐해를 없애려 하시는 것이니, 이는 바로 이른바, ‘진실로 백성에게 이로움이 있으면, 내가 어찌 머리털과 살을 아끼겠는가?’라는 뜻입니다. 그 사이의 절목(節目)은 비록 간섭 제지됨이 있을지라도, 바야흐로 묘당(廟堂)과 더불어 강구하여 시행하려고 하는데, 어찌 이제 막 파하기로 했다가 도로 그대로 두어서 아이의 장난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므로, 이기하가 말하기를,
“일이 진실로 적당함을 잃으면, 비록 열 번 바꾸더라도 무엇이 방해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혁파하기를 결심한 것은 뜻을 둔 바가 있다. 어제 좌상(左相)의 차자(箚子)를 윤허해 따르지 아니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하였다. 이유가 말하기를,
“각 군문(軍門)의 군사는 이제부터 액수(額數)를 자세히 정할 것이며, 외방(外方)의 감영(監營)·병영(兵營)의 군사는 일찍이 정한 수가 없고 각 영장(營將)과 각 진보(鎭堡)의 소속은 모두 지나치게 많으니, 또한 일체로 정원을 정해야 합니다.”
하고, 민진후가 말하기를,
“경중(京中)의 양역(良役)의 유(類)도 마땅히 사정(査正)하여 지나치게 많은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임금이 북성(北城)을 쌓는 것이 적당한가 않은가를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신완은 말하기를,
강도(江都)의 수세(水勢)는 예전과 다르고, 남한(南漢)의 외로운 성(城)은 마침내 오래 머물 곳이 못되는데, 만일 위급한 사변이 있으면 장차 어디로 가서 의지하겠습니까? 도성(都城)의 내맥(來脈)이라는 말과 피인(彼人)과 조약한 일은 모두 깊이 염려할 것이 못되는데, 조정의 의논이 일치(一致)하지 않으니, 어느 때에 결정되겠습니까?”
하고, 이유는 성을 쌓는 것이 적당하다고 말하였다. 예조 판서 김진귀(金鎭龜)와 호조 판서 김창집(金昌集)은 말하기를,
“그 형세(形勢)가 어찌 적당하고 좋지 아니하겠습니까마는 도성과 거리가 너무 가까와서, 적(賊)이 만약 도성을 오래 점거하면 주필(駐蹕)하는 곳이 다만 한 성(城)만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므로, 인심이 동요하기 쉬워서 흩어질 근심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신완은 아뢰기를,
“조금 멀면 먼 것을 어려워하고 조금 가까우면 가까운 것을 싫어합니다. 주필(駐蹕)하는 곳은 적(賊)이 반드시 이르는 바인데, 진실로 흩어질 마음이 있다면 어느 곳인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민진후와 이기하는 도성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을 힘써 주장하였는데, 어영 대장(御營大將) 윤취상(尹就商)이 말하기를,
“도성은 넓어서 지키기 어렵고 북성(北城)의 기지(基址)는 지세(地勢)가 매우 좋으니, 널리 의논하여 새로 쌓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사영(李思永)이 말하기를,
“임진란에 마귀(麻貴)와 양호(楊鎬)가, ‘도성은 지키기 어렵다.’라고 말하였으니, 신은 결단코 지킬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김우항(金宇杭)은 대흥산성(大興山城)이 매우 좋은 점을 말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도성은 넓고 커서 지키기 어렵고, 대흥 산성은 주필(駐蹕)할 곳이 못되니 버리는 것이 좋겠다.”
하자, 부제학(副提學) 김진규(金鎭圭)가 말하기를,
“북성(北城)은 신이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만 도성(都城)과 서로 닿았으니, 옛일로써 살펴보건대, 큰 성(城)을 지키지 못하면서 자성(子城)을 능히 보존한 경우는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 못해 이 성을 쌓아야 한다면, 다만 마땅히 이곳에만 전력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강도(江都)와 남한(南漢)까지 합쳐서 세 곳을 보장(保障)으로 삼으려고 한다면 그 보람을 얻지 못하고 먼저 그 해(害)를 받을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급한 일은 인심을 수습하는 데 있습니다.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도(道)를 좇아 덕(德)을 기르고 언행을 삼가해 자신을 나타내지 아니하며, 허세(虛勢)만 떠벌려서 인심이 떠나고 국본(國本)이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유가 또 진달하기를,
“홍복 산성(弘福山城)은 사방에 규봉(窺峯)이 없고 물과 풀이 매우 무성하며, 앞에는 도봉산(道峯山)과 삼각산(三角山)이 있어 백악(白岳)에 이르니, 사민(士民)이 피난하는 길이 될 만하고, 북문(北門)이 험하고 막혀서 수레 두 채가 나란히 갈 수 없으며, 기름진 들에 서로 접(接)해 있고 또 수리(水利)가 있으므로, 들어가면 지킬만하고 나가면 농사를 지을 수 있으니, 형세가 좋기로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하고, 김창집도, 홍복 산성은 도성과 가깝지도 아니하고 멀지도 아니하며, 또 나루가 막힌 근심도 없어서 축성(築城)하기에 적당하다고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성은 넓어서 결코 지킬 수 없는데, 이미 새 성을 쌓고 또 도성을 지킨다면 더욱 넓어지게 된다. ‘적이 도성을 점거하면 인심이 동요되기 쉽다.’라는 말은 또한 의견(意見)이 있다. 강도(江都)는 해구(海寇)를 피할 곳은 못되고 남한산성은 한 조각 외로운 성인데 형세로 말하면 홍복 산성이 조금 나을 듯하니, 밖에 있는 대신과 서로 의논하여 하라.”
하였다. 임금이 나홍좌(羅弘佐)·유중기(柳重起) 등을 석방하기를 명하였는데, 나홍좌는 늙은 어머니가 있고 유중기는 늙은데다가 또 대사(大赦)를 거쳤기 때문이었다.
김우항(金宇杭)이 송도(松都)의 조폐(凋弊)한 상황을 진달하고, 돈을 주조(鑄造)하여 용도(用度)에 보태쓰기를 청하니, 신완이 말하기를,
“경외(京外)에서 주전(鑄錢)하는 것은 남잡(濫雜)함이 많아 주전을 막은 지 오래입니다.”
하여, 임금이 허가하지 아니하였다.
【원전】 40 집 3 면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역(軍役) / *군사-관방(關防) / *재정-전세(田稅) / *사법-행형(行刑) / *금융-화폐(貨幣)


[주D-001]삼수량(三手粮) : 삼수란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포수(砲手)·사수(射手)·살수(殺手). 이의 훈련에 쓰기 위한 세미(稅米)를 삼수량이라 함.
[주D-002]중년(中年) : 평년.
[주D-003]강도(江都) : 강화도.
[주D-004]피인(彼人) : 청나라.
[주D-005]보장(保障) : 요새(要塞).
[주D-006]규봉(窺峯) : 풍수학(風水學)의 용어로, 숨어서 엿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안산(案山). 이런 산이 있으면 화(禍)를 받는다고 함.
영조 9년 계축(1733,옹정 11)
 6월16일 (을축)
《절작통편》을 강하고 조명겸이 진휼할 것과 도봉 서원에 세금 면제하기를 청하다

소대(召對)를 행하여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조명겸(趙明謙)이 글뜻으로 인하여 아뢰기를,
“주자(朱子)가 남강(南康)에서 백성을 진휼(賑恤)할 때 거듭 기근(飢饉)이 든 나머지 농사가 조금 풍년이 들 기미가 있으므로 구황(救荒)하는 데 적절한 일들을 진계(進戒)하면서 추위에 상하여 큰 병을 앓은 사람에게 비유하였으니, 이는 대개 풍년이 들었다 하여 백성을 구휼하지 않으면 연달아 흉년이 든 나머지 미처 소생(蘇生)하지 못하면 생활을 보전할 수 없기 때문이니 이는 바로 오늘날의 일과 서로 유사합니다. 올해에 비록 풍년이 든다 하더라도 성상의 생각을 해이하게 갖지 말고 끝까지 부지런히 구휼한 다음에야 백성들이 은혜를 입어 보전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은 참 절실하다.”
하였다. 조명겸이 또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도봉 서원(道峰書院)은 주문공(朱文公)의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과 서로 비슷합니다. 도봉 서원은 산수(山水)의 수려함이 8도(八道)에 거의 비교할 곳이 없는데,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와 송시열(宋時烈)을 향사(享祀)하는 서원입니다. 옛날에 전답(田畓)을 내려 준 것이 있었는데, 지금 세금을 내는 가운데로 들어갔으니, 청컨대 종전대로 환급(還給)케 하소서.”
하자, 임금이 허락하였다.
【원전】 42 집 360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사급(賜給) / *구휼(救恤) / *정론(政論)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고종 37년 경자(1900, 광무 4)
  6월15일 (을유, 양력 7월 11일)
 함녕전에서 산릉을 간심한 도감의 당상 이하를 소견할 때 비서원 승 김덕한 등이 입시하여 간심한 결과에 대해 논의하였다
○ 3경(三更).
상이 함녕전(咸寧殿)에 나아갔다. 산릉을 간심한 도감의 당상 이하가 입시하였다. 이때 입시한 비서원 승 김덕한, 비서원 낭 정규년ㆍ박제황,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이도재(李道宰), 궁내부 대신서리 윤정구(尹定求), 학부 대신 김규홍(金奎弘), 장례원 소경 심상황(沈相璜), 학부 기사 이병헌(李秉憲)이 차례로 나와 엎드리고, 상지관(相地官) 홍종혁(洪鍾爀), 오택영(吳擇泳), 제갈형(諸葛炯), 박인근(朴寅根), 이종설(李鍾卨), 오성근(吳聖根), 최석영(崔錫永), 정해준(鄭海準)이 차례로 나와 기둥 밖에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이어 도감 당상 이하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니, 이도재 등이 앞으로 나왔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신하들이 가서 본 곳들 중 어느 곳이 가장 낫던가?”
하니, 김규홍이 아뢰기를,
“신은 본디 풍수지리(風水地理)에 어두워 감히 우러러 아뢰지 못하겠습니다만, 여러 지사(地師)가 대령하였으니 하문하시면 자세히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지사는 순서대로 입시하여 각기 소견을 아뢰라.”
하니, 이병헌이 아뢰기를,
“소신이 이번 간심하러 갈 때에 방외(方外) 상지관을 거느리고 여러 곳을 자세히 간심하였습니다만, 소신이 본래 학식이 없고 산에 대한 안목이 넓지 못한 데다 더구나 지극히 중차대한 일이니 어찌 감히 논의하여 주달하겠습니까. 너무나 황송합니다. 여러 지사가 대령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차례로 나와 아뢰라.”
하였다. 홍종혁이 아뢰기를,
“이번에 간심한 곳들 가운데 금곡(金谷)이 용맥(龍脈)과 혈(穴)이 모두 좋았습니다. 그러나 용요(龍腰)가 낮고 수색(水色)이 멀리 보이고 혈의 면(面)이 평평하여 얕게 구덩이를 이루었으니, 크게 쓰기에는 온당치 못한 곳입니다. 군장리(軍藏里)는 용맥과 혈은 모두 왕성하게 살아 있는데, 혈당(穴堂)에 물이 비스듬히 쏟아지고 용세(龍勢)는 웅강(雄强)한 형세가 없는 것이 조금 흠입니다. 차유현(車踰峴)은 용맥이 웅장하게 뻗어 있고 혈이 두툼하게 형성되어 있으며 사(砂)수(水)는 관쇄(關鎖)가 잘 되어 있으므로 별다른 흠이 없으나, 다만 국세(局勢)가 협착합니다. 분수원(分水院)은 용맥과 혈, 사(砂), 수(水), 배포(排布)가 크게 쓰일 곳이 될 만합니다. 문봉리(文峯里)는 용맥과 혈은 훌륭하나 기맥(氣脈)이 평탄하고 유장(悠長)하며 낮고 약해서, 크게 쓰일 곳은 아닙니다. 원당리(元堂里)는 용맥과 혈이 모두 허하고 실속이 없으니 본디 고려할 곳이 아닙니다. 이외에는 다시 우러러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하고, 오택영이 아뢰기를,
“금곡은 천마산(天摩山)으로부터 용맥의 기(氣)가 묶인 것이 협곡을 건너가고 또 입묘봉(立妙峯)의 중심에서 맥(脈)이 뻗어 나와 봉우리로 솟아 용맥이 세 마디를 이룬 다음 평평한 언덕의 용맥이 되었다가 목처럼 가늘게 잘록한 모양으로 혈을 이루었고 양쪽의 사가 혈을 호위합니다. 그러니 수색이 멀리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산의 골육(骨肉)을 왕성하게 하는 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멀리 보이는 수색이 과연 많이 보이지 않는가?”
하자, 오택영이 아뢰기를,
“산을 왕성하게 하는 원수(源水)가 혈을 호위하며 혈당(穴堂)을 지나가니, 이것은 만궁(彎弓)한 물이고 멀리 보이는 물이 아닙니다. 군장리는 묘적산(妙積山)의 가운데 허리 부분에서 뻗어 나온 용맥이 거듭하여 구불구불 감돌아 왕자맥(王字脈)이 있고 맥 아래 또 세 봉우리로 솟았다가 도로 조산(祖山)을 향하며 혈을 이루는데, 국세가 주밀(周密)하고 용호(龍虎)가 겹으로 안고 있으며 주작(朱雀)이 날아올라 춤추는 형국이니, 필시 영원히 창성할 땅일 것입니다. 차유현은 묘적봉으로부터 왼쪽으로 용맥이 꿈틀거리듯 뻗어 나와 혈을 이루었는데 국세가 주밀하고 혈형(穴形)이 풍후(豐厚)하며 수구(水口)나성(羅星)이 있으니 길격(吉格)이라 하겠지만, 안산(案山)이 특히 높으니 필시 곡요사주격(曲腰事主格)일 것입니다. 원당리는 뻗어 온 용맥이 삼각산(三角山)의 중간 허리 부분에서 세 마디를 이루며 봉우리로 솟아 혈을 만들었는데 혈형이 미미하고 얕으니, 금지옥엽이 들어갈 만한 땅이라고들 하나 청룡(靑龍)이 낮고 잔약하며 야색(野色)이 멀리 보이고 백호(白虎)가 물을 따라 가로질러 가는 형국이므로, 자손이 고향을 떠나게 되는 탄식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분수원은 용맥이 비록 멀리서 뻗어 와 봉우리가 솟지 않았지만 청수(淸秀)하니 형국을 이룬 것이 매우 좋습니다. 혈이 바르게 뻗어 있고 풍후하나, 안산이 가까이에 마주 서 있고 밖으로 조응(照應)하는 조산(祖山)이 없습니다. 이외에는 다시 아뢸 말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을 택하여 아뢰라. 본 바대로 차례로 주달하라.”
하자, 제갈형이 아뢰기를,
“이번 첫 번째 간심을 위해 여러 곳을 두루 관찰하여 보니 크게 쓰일 곳은 단지 다섯 곳뿐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섯 곳은 다 좋다고 하던가?”
하자, 제갈형이 아뢰기를,
“금곡은 을좌(乙坐)이고 혈의 언저리가 둥글고 실하며 우각(牛角)이 옆에서 돕고 있으니 상지(上地)라 할 만한데, 다만 혈이 얕은 것이 불만스럽습니다. 군장리는 임좌(壬坐)이고 삼태산(三台山)이 주산(主山)이 되고 혈당(穴堂)이 풍후하고 용호가 중첩해 있으며 삼장(三帳)이 구비되어 있으니 상지라 할 만합니다. 차유현은 임좌이고 개장(開帳)이 선명하고 혈의 언저리가 실하고 둥글며 혈을 중심으로 한 사방의 용맥이 완전하니, 군자가 자리잡을 곳으로서 상등(上等)이라 할 만합니다. 화접동(花蝶洞)은 술좌(戌坐)이고 소조산(少祖山)이 특히 높으며 뻗어 온 용맥이 거미줄 같고 평지에서 혈을 이루었는데, 높이 솟아 기복(起伏)을 이루었고 용맥은 살아 있고 혈은 분명하니 상지라고 할 만합니다. 이외에는 주목할 곳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지관은 차례로 아뢰라.”
하였다. 박인근이 아뢰기를,
“이번 각처를 간심하니 화접동은 용맥의 기운이 특이하고 자기(紫氣)가 혈을 이루었고 사(砂)와 물이 격에 맞으므로 크게 쓰일 곳으로 적합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화락지형(梅花落地形)은 혈이 한두 곳이 아니라고 하던데 과연 그런가?”
하자, 박인근이 아뢰기를,
“지사의 말이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장리는 웅장한 산에서 용맥이 뻗어 나왔는가?”
하니, 박인근이 아뢰기를,
“군장리는 용맥이 왕방(旺方)에서 뻗어 나와 생왕방(生旺方)으로 이어져 혈을 맺었고 금수(金水) 방향으로 개장하였는데, 장(帳) 가운데 귀인이 단정히 있고 긴 유형(乳形)의 혈을 이루었으며 수법(水法)이 격에 맞으니 크게 쓰일 땅이라고 할 만합니다. 금곡은 용맥이 천마산(天馬山)에서 중첩해서 개장하며 뻗어 나왔는데, 얕은 와형(窩形)의 혈을 이루었고 안팎의 사세(砂勢)가 주밀하고 수법이 격에 맞으니 크게 쓰일 곳이라고 할 만합니다. 분수원은 뻗어 온 용맥이 마디마다 송영(送迎)을 하고 중첩해서 개장하며 귀성(貴星)이 특별히 높고 긴 유형의 혈을 이루었으며 명당(明堂)이 평평하고 바르며 사와 수가 격에 맞으니 크게 쓰일 땅일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가장 우수한 것을 택하여 재차 간심하라.”
하였다. 김규홍이 아뢰기를,
“재차 간심할 때 총호사가 없어서는 안 되는데 현재 신병이 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총호사의 병세가 조금 낫기를 기다려 며칠 뒤에 재차 간심하라.”
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청계산(淸溪山)도 거론할 곳이 있다.”
하니, 이도재가 아뢰기를,
“지사의 말도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지사는 차례로 아뢰라.”
하니, 이종설이 아뢰기를,
“금곡은 천마산(天馬山)에서 뻗어 온 용맥이 마디마다 기복을 이루고 다시 목처럼 가늘게 잘록한 모양이 되었다가 혈을 이루었습니다. 혈이 화심(花心)과 같아 소국(小局)이라고들 하나 화심으로 국(局)을 이루었기 때문에 국이 작은 것입니다. 군장리는 묘적산에서 뻗어 나온 용맥이 세 봉우리로 기복을 이루고 혈을 이루었는데 혈형이 풍후하고 용호가 긴밀히 끼고 있으며 안산이 바로 마주 대하고 있고 조산(朝山)이 공읍(拱揖)하고 있으니 상지(上地)라 할 만합니다. 차유현은 묘적산 왼쪽 귀에서 뻗어 나온 용맥이 중심에서 벗어나 있고, 혈형이 풍후하며 수구(水口)에 나성(羅星)이 있습니다. 그러나 국세가 좁고 안산이 특히 높으니 큰 흠인 듯합니다. 화접동은 불암산(佛巖山) 아래 한 줄기 미미한 용맥이 혈을 이룬 곳에 이르러 중간에서 끊어져 형체가 없는데, 기두(起頭)가 높이 솟았고 혈형이 정밀합니다. 그러나 물이 사방(巳方)으로 흘러들어 가니, 이것이 작은 흠이 됩니다. 더는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건지산(乾芝山)은 그림으로 보면 매우 높은 듯한데 조경단(肇慶壇)에 비하면 높은 것이 아닌 듯하다.”
하니, 김규홍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오성근이 아뢰기를,
“이번 간심한 여러 곳 가운데 분수원, 차유현, 군장리, 금곡 등 네 곳은 용맥과 혈, 사(砂), 수(水)가 모두 격에 맞으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가장 길한 땅으로 보입니다. 그 나머지는 의법(倚法)에 따라 쓸 곳입니다. 이외에는 다시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하였고, 최석영이 아뢰기를,
“군장리의 용맥과 혈은 단정하고 두툼합니다. 그러나 연운(年運)이 어떨지 모를 것 같고, 금곡은 용맥과 혈이 살아 있고 분명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 혈장(穴場)이 낮고 짧은 것이 작은 흠이 될 듯합니다. 차유현은 높은 곳에서 용맥이 시작하여 금수 방향으로 넓게 개장하였는데, 지룡(枝龍)이 주맥이 되었고 순미(純美)하게 혈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정중(正中)하게 결국(結局)하지 않은 것이 거슬립니다. 청제산(靑帝山)은 하늘 높이 솟구친 목성(木星)으로 물을 에워싸고 있고 우뚝 서 있으며 용세(龍勢)가 웅장하고 혈형(穴形)이 분명하니 상지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내당(內堂)의 물이 곧게 흐르니, 이것이 큰 흠입니다. 현달산(見達山)은 용맥과 혈이 특이하고 단정하여 자체가 하나의 형국(形局)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현무(玄武)가 곧바로 곧게 내려가니, 이것이 작은 흠입니다. 문봉리(文峯里), 이는 기이(奇異)한 형국인데, 세상에서 칭하기를 ‘보검(寶劍)이 궤 속에서 나오는 형상[寶劒出匣形]’이라고 합니다. 용맥과 혈이 분명하지만, 백호(白虎)에 각(角)이 뾰족하고 긴 사(砂)가 있고 청룡(靑龍)에 부분적으로 격에 맞지 않은 외사(外砂)가 있으니 큰 흠인 듯합니다. 분수원은 용세가 기묘하고 멀리서 뻗어 왔으며 혈형은 두툼하고 단정합니다. 그리고 내외의 명당이 길격(吉格)에 들어맞습니다. 그러나 다만 조응하는 외안산(外案山)이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원당리는 도봉산(道峯山)과 망월산(望月山)에서 용맥이 뻗어 나와 중첩하여 개장하였고 용맥과 혈이 살아 있고 분명합니다. 그러나 용신(龍身)이 파괴되어 생기가 점차 쇠하니 큰 흠인 듯합니다. 이외에는 다시 삼가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하였고, 정해준이 아뢰기를,
“이번 간심한 여러 곳 가운데 화접동은 용호(龍虎)가 기절(奇絶)하고 특히 빼어나며 장중(帳中)에서 맥이 뻗어 나와 평지대와돌형(平地大臥突形)을 만들었고 혈형이 두툼하고 용세가 웅장하며 명당이 광활합니다. 신의 얕은 견해로는 제일가는 대지(大地)로 보입니다. 금곡은 용세가 웅장하고 맥이 평평한 산등성이로 이어졌으며 용맥의 마디마다 기복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혈형이 짧고 좁아 압도하는 모양이 없으며 명당이 좁아 손이 주인보다 나은 상이니, 크게 쓰기에는 맞지 않은 듯합니다. 군장리는 용호가 중첩해 있고 마디마디가 생왕하는 형국이고 혈형이 두툼하며 내외의 명당이 과연 수법(水法)에 부합되니 크게 쓰일 땅이라고 할 만합니다. 차유현은 골짜기 가운데에 큰 형세의 용맥이 있고 오이 덩굴처럼 혈을 이룬 관계로 기(氣)가 전일하지 못하니, 크게 쓰일 땅으로는 적합하지 못한 듯합니다. 분수원은 용호가 중첩해 있고 용맥의 마디마디가 영송을 하여 마치 비룡(飛龍)이 구름 위에 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혈당이 살아 있고 분명하며 주산(主山)과 안산(案山)이 다정하게 마주하고 있고 산들의 기운이 호대(浩大)하니 크게 쓰일 땅이 될 만합니다. 원당리는 용호가 길격에 해당한다 하나 혈이 열려 있고 얕은 와형(窩形)이니, 이것이 작은 흠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당리의 윤총(尹塚)은 누구의 무덤인가?”
하자, 윤정구가 아뢰기를,
“윤관(尹瓘)의 무덤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윤관이라면 북관(北關)에서 공로가 있었던 그 사람인가?”
하니, 윤정구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책이 다섯 수레[書有五車矣]’라는 말이 있는데, 풍수지리 서적도 다섯 수레라고 할 만하다. 이 서적들은 청(淸) 나라에서 온 것인가, 우리나라에도 있는 것인가?”
하니, 김규홍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온 것도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자(朱子)의 주의(奏議)에도 능을 천봉(遷奉)하는 논(論)이 있다.”
하니, 김규홍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사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이어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 나왔다.
[주D-001]혈(穴) : 신의 정기(精氣)가 응결하는 곳을 말한다. 이곳에 시신을 묻는다.

[주D-002]사(砂) : 혈(穴)을 중심으로 하여 전후 좌우에 나열된 산, 물, 암석, 지형(地形), 건물, 수목(樹木) 등 모든 환경 조건을 말한다.

[주D-003]수(水) : 강(江), 바다, 호수, 못, 시내, 도랑을 포함한 모든 물을 일컫는다. 뿐만 아니라 실제 물이 고이지 않은 낮은 지대와 흐르지 않는 내, 개울, 도랑도 수라 한다.

[주D-004]조산(祖山) : 혈(穴)의 처음 근원이 되는 태조산(太祖山)에서 혈이 있는 산인 주산(主山)에 이르는 사이에 태조산 다음으로 높고 큰 산이 소조산(少祖山)이고, 그 다음으로 높고 큰 산이 종산(宗山)이고 주산 뒤에 그보다 높이 솟은 산이 부모산(父母山)이고, 이 부모산 뒤에 그보다 높이 솟은 산이 조산이다.

[주D-005]용호(龍虎) : 청룡(靑龍)과 백호(白虎)를 말한다. 사신(四神) 가운데 동쪽을 맡은 신은 청룡이고, 서쪽을 맡은 신은 백호이고, 남쪽을 맡은 신은 주작(朱雀)이고, 북쪽을 맡은 신은 현무(玄武)이다. 여기서 유래하여 혈(穴)을 기준으로 하여 동쪽에 있는 용맥을 청룡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용맥을 백호라 하고, 남쪽에 있는 용맥을 주작이라 하고, 북쪽에 있는 용맥을 현무라 한다. 용호는 이 가운데 청룡과 백호를 말하는 것인데, 혈의 뒤를 북쪽, 앞을 남쪽으로 하는 법을 따르면 왼쪽이 동쪽이 되고 오른쪽이 서쪽이 되므로,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라 한다.

[주D-006]수구(水口) : 혈(穴)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의 물을 한 곳으로 모아 빠져나가게 하는 고장지(庫藏地)를 말한다. 고장지는 진(辰), 술(戌), 축(丑), 미(未)를 말하는데, 이것으로 혈의 사대국(四大局)이 결정된다. 곧 고장지가 진일 경우는 수국(水局), 술일 경우는 화국(火局), 축일 경우는 금국(金局), 미일 경우는 목국(木局)이다.

[주D-007]나성(羅星) : 나성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반듯하고 둥그스름한 큰 암석이 수구를 막는 것을 말하고, 또 하나는 주위의 먼 산들이 성(城)같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말한다.

[주D-008]안산(案山) : 혈(穴) 앞쪽에 솟아 있는 산을 말한다.

[주D-009]우각(牛角) : 혈(穴) 바로 뒤나 가까운 옆에 송아지 뿔 모양으로 솟은 것이 있으면 이를 우각사(牛角砂)라 하여 매우 좋은 사(砂)로 본다. 그 가운데 진혈(眞穴)이 있다는 증거다.

[주D-010]개장(開帳) : 조산(祖山)으로부터 용맥(龍脈)이 뻗어 나가는 모습으로, 양쪽으로 팔뚝을 활짝 벌려 안을 것 같은 모양을 이룬 것을 말한다. 그 가운데로 중심맥이 출맥(出脈)하게 되는데, 이를 천심(穿心)이라고 한다.

[주D-011]소조산(少祖山) : 혈(穴)의 처음 근원이 되는 산인 태조산(太祖山)에서 혈이 있는 주산(主山)에 이르는 사이에 태조산 다음으로 높고 큰 산이 소조산이다.

[주D-012]기복(起伏) : 용맥(龍脈)이 위로 솟은 것을 기(起)라고 하고, 아래로 엎드려 있는 것을 복(伏)이라고 한다.

[주D-013]송영(送迎) : 산의 정기(精氣)를 다음 산으로 보내고 다음 산은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주D-014]조산(朝山) : 안산(案山) 너머로 멀리 높게 솟은 산들을 말한다.

[주D-015]의법(倚法) : 작혈법(作穴法)의 하나이다. 혈(穴)이 있는 자리에서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약간 당겨 붙이는 방법을 말한다.

[주D-016]현무(玄武) : 사신(四神) 가운데 동쪽을 맡은 신은 청룡(靑龍)이고, 서쪽을 맡은 신은 백호(白虎)이고, 남쪽을 맡은 신은 주작(朱雀)이고, 북쪽을 맡은 신은 현무(玄武)이다.

[주D-017]외안산(外案山) : 안산(案山)이 중첩되어 있는 경우에 혈에서 가까운 산을 내안산(內案山)이라 하고, 이 내안산의 뒤에 있는 산을 외안산(外案山)이라고 한다.

태종 9년 기축(1409,영락 7)
 7월3일 (계유)
강풍과 폭우로 경기·강원 등지의 많은 인명과 가축들이 죽다

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며, 우뢰와 번개가 몹시 심하여, 도봉산(道峯山)이 무너졌다. 양주(楊州)에서 산이 무너진 것이 더욱 심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임금에게 아뢰고 서운 감후(書雲監候) 김종선(金種善)을 보내어 시찰하게 하니, 벽제(碧蹄)와 고령(高嶺) 사이에 산이 무너진 곳이 2백 70곳이나 되었는데, 고령사(高嶺寺) 아랫 마을에서 한 가족 22인이 모두 압사(壓死)하였다. 경기(京畿) 도관찰사(都觀察使)가 아뢰기를,
“이달 초3일 수재(水災)에 산이 무너져, 양주(楊州)·포천(抱川)·풍양(豐壤) 등처에서 사람이 죽은 자가 55명이나 되고, 소가 죽은 것이 5두(頭), 말이 죽은 것이 5필(匹)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울면서 말하기를,
“예전에 제왕(帝王)이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행실을 닦은 이가 있었는데, 어떤 것이 행실을 닦는 일이 되는가?”
하였다. 개성 유후사(開城留後司)에 표류(漂流)한 민가(民家)가 9호(戶)이고, 강원도(江原道) 조종현(朝宗縣)에 산이 무너져 압사(壓死)한 자가 남녀 20명이고, 말이 죽은 것이 7필, 소가 죽은 것이 3두였다.
【원전】 1 집 497 면
【분류】 *과학-천기(天氣) / *과학-지학(地學) / *왕실-국왕(國王) / *사상-불교(佛敎)

선조 37년 갑진(1604,만력 32)
 1월17일 (무진)
김굉필과 조광조의 서원에 편액 하사를 허락하다

희천(熙川)의 유생(儒生) 김윤(金輪) 등이 희천군 감영의 동쪽에 있는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과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의 서원(書院)을 중수(重修)하고 은편(恩扁)을 하사할 것을 상소하였는데, 예조에 계하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김윤 등이 천리를 와서 상소하기를 ‘스승을 높이는 것은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찾는 것이다.’라고까지 하였는데, 그 말이 또한 사리에 맞는 듯합니다. 대저 김굉필과 조광조는 과연 선조(先朝)의 유현(儒賢)이고, 희천은 김굉필과 조광조가 도학(道學)을 서로 전수한 곳으로 쌍계(雙溪)나 도봉(道峯)처럼 잠시 지났던 곳만은 아니니 한 서원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더구나 향사(饗祀)할 제구와 공억(供億)할 비용이 이미 다 마련되었으니, 편액을 내리더라도 무방할 듯합니다. 위에서 재결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윤허하였다.【일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원전】 24 집 561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영조 9년 계축(1733,옹정 11)
 6월16일 (을축)
《절작통편》을 강하고 조명겸이 진휼할 것과 도봉 서원에 세금 면제하기를 청하다

소대(召對)를 행하여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조명겸(趙明謙)이 글뜻으로 인하여 아뢰기를,
“주자(朱子)가 남강(南康)에서 백성을 진휼(賑恤)할 때 거듭 기근(飢饉)이 든 나머지 농사가 조금 풍년이 들 기미가 있으므로 구황(救荒)하는 데 적절한 일들을 진계(進戒)하면서 추위에 상하여 큰 병을 앓은 사람에게 비유하였으니, 이는 대개 풍년이 들었다 하여 백성을 구휼하지 않으면 연달아 흉년이 든 나머지 미처 소생(蘇生)하지 못하면 생활을 보전할 수 없기 때문이니 이는 바로 오늘날의 일과 서로 유사합니다. 올해에 비록 풍년이 든다 하더라도 성상의 생각을 해이하게 갖지 말고 끝까지 부지런히 구휼한 다음에야 백성들이 은혜를 입어 보전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은 참 절실하다.”
하였다. 조명겸이 또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도봉 서원(道峰書院)은 주문공(朱文公)의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과 서로 비슷합니다. 도봉 서원은 산수(山水)의 수려함이 8도(八道)에 거의 비교할 곳이 없는데,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와 송시열(宋時烈)을 향사(享祀)하는 서원입니다. 옛날에 전답(田畓)을 내려 준 것이 있었는데, 지금 세금을 내는 가운데로 들어갔으니, 청컨대 종전대로 환급(還給)케 하소서.”
하자, 임금이 허락하였다.
【원전】 42 집 360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사급(賜給) / *구휼(救恤) / *정론(政論)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정조 16년 임자(1792,건륭 57)
 9월11일 (정미)
광릉을 참배하다

광릉(光陵)에 전배(展拜)하였다. 아침에 양주목을 출발해서 축석령(祝石嶺)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앉아서 쉬었다. 이때 새벽비가 살짝 지나가고 아침 햇살이 깨끗하였는데, 사방의 산들이 수려함을 다투는 듯 영롱히 빛났다. 상이 승지 서영보에게 이르기를,
“이 축석령은 백두산(白頭山)의 정간룡(正幹龍)이요, 한양(漢陽)으로 들어서는 골짜기이다. 산의 기세가 여기에서 한 번 크게 머물렀다가 다시 일어나 도봉산(道峰山)이 되고 또 골짜기를 지나 다시 일어나 삼각산(三角山)이 되는데, 그 기복(起伏)이 봉황이 날아오르는 듯하고 용이 뛰어오르는 듯하여 온 정신이 모두 왕성(王城) 한 지역에 모여 있다. 산천은 사람의 외모와도 같은 것이어서 외모가 좋은 산천은 기색(氣色) 또한 좋다. 어제 오늘 지나온 산천은 모두가 좋은 기색이거니와 더구나 아침에 비가 개인 모습은 더욱 명랑하고 수려함을 깨닫게 한다. 예전 병진년 행행 때에도 마치 이번처럼 아침에 비가 내리다 금방 개였는데 이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였다. 능에 이르러 작헌례(酌獻禮)를 행한 다음 홍살문 밖으로 걸어 나와 좌의정 채제공에게 이르기를,
“본릉(本陵)의 형국(形局)은 옛부터 매우 좋다고 칭해 왔었는데 문서로만 보다가 이번에 와서야 그 진면목을 보게 되었다. 누원 동쪽으로 무수한 산봉우리들이 차례차례 겹겹이 나타나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는데 웅장하고 깨끗한 기색을 말로 형용할 수 없다. 비로소 눈으로 보는 것이 귀로 듣는 것보다 크게 나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하였다. 대가가 동구(洞口)에 이르러 선전관에게 명하여 봉선사(奉先寺)의 중을 위로하고 무휼하게 하였는데, 봉선사는 광묘(光廟)의 원당(願堂)이다. 포천 경계에 이르렀을 때 현감 오태첨(吳泰詹)이 부로(父老)들을 이끌고 공경히 맞이하니 상이 대가를 멈추고 위로하였다. 축석령으로 되돌아왔을 때 구경 나온 백성들이 산과 들을 가득 메웠다. 상이 백성의 고통에 대해 두루 묻자, 백성들이 ‘한 집에서 받는 조곡(糶穀)이 10여 석에 이르기도 하는데 모두 군포(軍布)로 바치고 남는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감사와 수령이 있으니 조정에서는 그들을 신칙하여 너희들이 해롭고 지치는 일이 없게 하고 금년의 적모(糴耗)는 특별히 감면시켜 줄 것이다. 칙수(勅需)나 군향(軍餉)에 소용되는 곡식은 아무리 흉년이 든 해라 할지라도 원래 견감시켜 주는 규례가 없으나 이 또한 규례에 매이지 않고 모두 제거해 주도록 하겠다. 조관(朝官)과 사서인(士庶人) 중에서 70세 이상 된 자들은 자급을 올려 주고 유생(儒生)과 무사(武士)는 과장(科場)을 베풀어 선발할 것이다. 그리하여 위로는 선조(先朝)의 융성한 덕을 몸받고 아래로는 백성의 소원을 위로해 줄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이 뜻을 알도록 하라.”
하였다. 양주에 이르러서도 고을의 부로들을 불러 포천에서와 같이 면유(面諭)하고 저녁에는 양주목에서 묵었다.
【원전】 46 집 333 면
【분류】 *왕실(王室) / *구휼(救恤)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인사(人事) / *윤리(倫理)

태종 9년 기축(1409,영락 7)
 7월3일 (계유)
강풍과 폭우로 경기·강원 등지의 많은 인명과 가축들이 죽다

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며, 우뢰와 번개가 몹시 심하여, 도봉산(道峯山)이 무너졌다. 양주(楊州)에서 산이 무너진 것이 더욱 심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임금에게 아뢰고 서운 감후(書雲監候) 김종선(金種善)을 보내어 시찰하게 하니, 벽제(碧蹄)와 고령(高嶺) 사이에 산이 무너진 곳이 2백 70곳이나 되었는데, 고령사(高嶺寺) 아랫 마을에서 한 가족 22인이 모두 압사(壓死)하였다. 경기(京畿) 도관찰사(都觀察使)가 아뢰기를,
“이달 초3일 수재(水災)에 산이 무너져, 양주(楊州)·포천(抱川)·풍양(豐壤) 등처에서 사람이 죽은 자가 55명이나 되고, 소가 죽은 것이 5두(頭), 말이 죽은 것이 5필(匹)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울면서 말하기를,
“예전에 제왕(帝王)이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행실을 닦은 이가 있었는데, 어떤 것이 행실을 닦는 일이 되는가?”
하였다. 개성 유후사(開城留後司)에 표류(漂流)한 민가(民家)가 9호(戶)이고, 강원도(江原道) 조종현(朝宗縣)에 산이 무너져 압사(壓死)한 자가 남녀 20명이고, 말이 죽은 것이 7필, 소가 죽은 것이 3두였다.
【원전】 1 집 497 면
【분류】 *과학-천기(天氣) / *과학-지학(地學) / *왕실-국왕(國王) / *사상-불교(佛敎)

동국이상국전집 제35권
 비명(碑銘)ㆍ묘지(墓誌)
고(故) 화장사 주지 왕사 정인대선사 추봉 정각국사(華藏寺住持王師定印大禪師追封靜覺國師)의 비명(碑銘) 봉선술(奉宣述)

대저 도(道)란 본래 자연한 것인데 누가 누르거나 올리거나 하겠는가. 이것은 세상과 사람을 요할 뿐이다. 대개 사람이 능히 도(道)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란 진실로 얻기 어려운 것이어서, 천백 년 만에 혹 만나게 되기도 하니, 곧 세상과 사람이 둘이 서로 만난 뒤에야 도가 행해지는 것이다. 하물며 도의 최상인 선(禪)임에랴. 선이란 문구(文句)에 얽매인 것이 아니고 자신이 가진 한 신령한 마음을 곧바로 깨닫는 그것일 뿐이다.
말세에 와서는 망령된 법에 집착 고수하여, 불(佛)이 바로 나의 물(物)이란 것은 모르므로 팽개치고 밖에 가서 도적을 자식으로 인식하는 자가 많다. 그러나 도(道)란 끝내 비색하지 않는 것이니, 세상이 장차 옛날로 회복되리라. 그래서 진인(眞人)이 나와 도(道)와 꼭 합하고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얻어 생령(生靈)을 도주(陶鑄)하니, 이는 바로 우리 국사(國師)인 것이다.
국사는 성이 전씨(田氏), 휘(諱)가 지겸(志謙), 자가 양지(讓之)인데, 세계(世系)는 영광군(靈光郡)의 태조 공신(太祖功臣)인 운기장군(雲騎將軍) 종회(宗會)에서 나왔고, 광묘조(光廟朝)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추밀원사(樞密院使)에 이른 휘 공지(拱之)의 6대손이다. 증조부 휘 개(漑)는 검교 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요, 조부 덕보(德普)는 대창서 영(大倉署令)이요, 부친 의(毅)는 검교 태자첨사요, 모친은 남궁씨(南宮氏)인데 양온 영(良醞令) 영(榮)의 딸이다.
모친의 꿈에 중이 집에 와서 유숙하기를 청하였다. 그길로 임신하여 낳으니 골상(骨相)이 준상(峻爽)하고 기신(機神)이 영매(英邁)하여 어릴 때에도 희롱을 좋아하지 않고 항상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처럼 하였다. 홀연히 비범한 중을 만났는데, 그 중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진세(塵世)에서는 정착할 곳이 없다.”
하였다. 국사는 이때부터 비린내 나는 음식물을 끊고 나이 겨우 아홉이 되던 해에 출가(出家)하기를 간청하였다. 열한 살 때에 선사(禪師) 사충(嗣忠)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금산사(金山寺)의 계단(戒壇)에 나아가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국사는 천품이 영특하였고, 외전(外典 불전 이외의 서적)에 널리 통하여 이것으로 윤색(潤色)을 하였다. 그런 때문에 무릇 문대사변(問對詞辨)에 있어서 민첩하고 빠르기가 마치 기아(機牙)가 화살을 발사시키듯 막을 수가 없었다. 당시의 공경(公卿)ㆍ명유(名儒)ㆍ운사(韻士)들이 그의 풍채를 흠모하여 교제하기를 원하였으니, 젊을 때부터 이처럼 명망이 있었다.
명묘(明廟) 원년에 비로소 승과(僧科)를 거행하였다. 이때 내시 정중호(鄭仲壺)가 고선(考選)을 관장하였는데, 그의 꿈에 신인(神人)이 말하기를,
“명일에 왕자(王者)의 스승을 얻을 것이다.”
하더니, 이날 국사가 과거에 급제하였다.
국사의 예전 휘(諱)는 학돈(學敦)이었다. 이해 삼각산(三角山)에 노닐다가 도봉사(道峯寺)에서 자는데, 꿈에 산신(山神)이 말하기를,
“화상(和尙)의 이름은 지겸(志謙)인데, 왜 지금의 이름을 쓰는가?”
하였다. 그래서 결국 지겸으로 고쳤던 것이다.
대정(大定) 기유년(1189, 명종 19)에 비로소 등고사(登高寺)에 머물렀으며, 명창(明昌) 4년(1193, 명종 23)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에 임명 되었고, 7년에는 선사(禪師)로 승진되었으며, 태화(泰和) 4년(1204, 신종 7)에는 또 대선사(大禪師)로 승전되었다.
국사의 이름이 이미 사방에 알려지자, 무릇 중앙과 지방에서 선회(禪會)를 열 때에는 곧 국사를 청해다가 주관하게 하였고, 국사도 또한 종승(宗乘)을 부담하고 법을 전하여 사람을 제도하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승안(承安) 4년(1199, 신종 2)에 욱금사(郁錦寺)로 이주하였다. 이 해에 진례군(進禮郡)에서 선회를 베풀고 주관할 사람을 청하니, 임금이 국사에게 명하여 가게 하였다. 이 선회가 있을 때 현령(縣令) 이중민(李中敏)의 꿈에 천인(天人)이 말하기를,
“불법을 펴는 국토에 어찌 감옥이 비지 않는가?”
하였다. 이중민은 꿈을 깨자 온몸에 땀이 흘렀다. 몸소 감옥에 가서 죄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모두 놓아 주었다. 이 소문을 들은 자는 모두 경탄하였다. 태화 무진년에 한발이 심하자, 임금이 국사를 내도장(內道場)으로 받아들여 설법하게 하였다. 5일이 되어도 비가 내리지 않으니, 국사는 분발하여 부처에게 빌기를,
“불법은 저절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고 모름지기 국왕의 힘을 입어서 행해지는 것인데, 이제 만약 비를 내리지 않는다면 영험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자, 얼마 후에 비가 쏟아졌다. 당시 그 비를 화상우(和尙雨)라고 불렀다.
국사는 효성이 지극하였다. 무릇 시주를 얻을 때 기이한 음식이 있으면 먼저 홀어머니에게 보내고 나서 자신이 먹었다. 하루는 모친이 작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석(帝釋)에게 빌기를,
“만일 어머니의 타고난 수명이 다 되었다면 이 자식의 수명으로 대신하게 하소서.”
하였더니, 얼마 후에 가동(家僮)이 달려와서,
“마님이 이미 일어났습니다.”
하였는데, 당시 효성으로 감격시킨 소치라고 하였다.
태안(泰安) 신미년에 국청사(國淸寺)로 이주하였다. 숭경(崇慶) 2년에 강왕(康王)이 즉위하자 조종(祖宗)의 구례(舊例)에 따라 석문(釋門)의 중망자(重望者)를 얻어서 스승을 삼으려고 하였다. 이때에 진강공(晉康公 최충헌(崔忠獻))이 국정을 맡고 있어, 임금을 위하여 스승을 간택하게 되었다. 무릇 양종(兩宗) 오교(五敎)를 통하여 큰 임무를 감당할 만한 자를 구하니, 국사보다 나은 이가 없었으므로 드디어 국사를 추천하였다. 임금이 중신(重臣)을 보내어 제자의 예를 행하기를 처하니, 국사는 표를 올려 굳이 사양하였다. 임금이 다시 사자를 보내어 재삼 돈유(敦諭)하니, 국사는 부득이 그 청을 수락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상장군(上將軍) 노원숭(盧元崇) 등 두 사자를 보내어 국사가 우거한 보제사(普濟寺)에 가서 예를 갖추어 높이 책봉하였더니, 국사는 책봉을 받고 나서 드디어 대내(大內)로 들어가서 친히 사례(師禮)를 받았다.
임금이 광명사(廣明寺)가 궁궐에 가까우므로 거기에 머물기를 청하고 따라서 거돈사(居頓寺)를 본사(本寺)로 삼아 향화(香火)의 경비를 충당하게 하였다.
가을 8월에 임금이 편찮고 국사도 등창이 났다. 문인들이 기도하기를 청하자, 국사는 노기를 띠며 말하기를,
“상의 몸이 편찮으신 중에 내가 다행히 병이 났으므로 상의 병을 내 몸에 옮기려 하는 마음 간절한데, 너희는 기도하려 하는가?”
하였다. 임금이 승하하고 지금의 임금이 왕위를 계승하자 영고(寧考)의 스승이므로 다시 사례를 높이니, 은우(恩遇)가 더욱 성대하였다. 진강공도 사랑하는 아들을 그에게 보내어 삭발하고 문인이 되게 하였고, 그 밖의 사대부들 또한 그렇게 하였으니, 제자들의 많음이 근고에 없었던 일이었다.
정우(貞祐) 5년에 갑자기 문인에게 말하기를,
“나는 한미한 집에서 태어나 왕자의 스승까지 되었으니 분에 족한데, 어찌 은총을 탐내어 계속 머무를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글을 올려 물러가기를 매우 간곡하게 비니, 임금은 부득이 윤허하였다. 화장사(花藏寺)가 환경이 깨끗하고 신수(薪水)가 풍족하므로 거기에 가서 편히 지내기를 청하였다. 떠나려 할 때 진강공은 국사를 맞이하여 전별연을 베풀었는데, 공은 나가서 절하고 친히 국사를 부축하여 뜰에 올랐으며, 떠날 때에는 보마(寶馬)를 증정하고 또 문객(門客) 등을 보내어 국사를 호위하게 하였다. 국사가 비록 천리 밖에 있었으나 그를 돌봐 주는 임금의 마음은 간단이 없어, 자주 근신(近臣)을 보내어 문안하였고, 선물을 보내는 일 또한 거르는 달이 없었다.
절에 내려온 지 13년인 기축년 6월 15일에 우레가 사납게 일고 큰 돌이 무너져 떨어졌다. 이날 국사가 병이 났다. 국사가 7월 2일 새벽에 일어나 관세(盥洗)하고 문인 현원(玄遠)을 불러 편지 세 통을 쓰게 하였는데, 즉 국왕 및 지금의 상국 진양공(晉陽公 최우(崔瑀))과 고승(高僧) 송광사 주(松廣社主)에게 영원히 떠난다는 것을 고하는 내용이었다. 쓰는 일을 마치자 한참 후에 국사는 말하기를,
“오늘은 떠나는 것이 온당치 못하니 후일에 떠나겠다.”
하고 드디어 취침하였다. 8일에 국사가 갑자기 일어나서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하였다. 어떤 중이 묻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뒷날 밤 달이 처음 밝을 때 내 장차 홀로 가리라’ 하였는데, 어디가 바로 화상이 홀로 갈 곳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푸른 바다 광활하고 흰 구름 한가로운 데다. 터럭만큼도 그 사이에 덧붙이지 말라.”
하였다. 말을 마치자, 두 손을 마주 잡아 가슴에 대고 홀연히 앉아서 운명하였는데, 낯빛은 분을 바른 것 같고 입술 빛은 붉고 윤택하였다. 국사의 운명 소식을 듣고 먼 곳에서나 가까운 곳에서나 첨례(瞻禮)에 달려가지 않은 자가 없었다. 상은 부고를 받고 매우 슬퍼하며 근신인 장작소감(將作少監) 조광취(趙光就)와 일관(日官) 등에게 명하여 상사를 보살피게 하였다. 드디어 절의 서쪽 언덕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주워서 등선산(登禪山)의 기슭에 장사하고, 이어 제서(制書)를 내리어 정각국사(靜覺國師)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향년이 85세이며 승랍(僧臘)이 75년이었다.
국사는 사람됨이 조금도 외면을 꾸미는 일이 없이 천성대로 이치대로 할 뿐이었다. 비록 큰 절의 주지를 차례로 역임하였으나, 매양 재식(齋食)할 때에는 여러 사람보다 먼저 나아가서 손수 바리때를 들고 서서 기다렸으며, 변변치 않은 밥과 멀건 국으로 여러 중들과 똑같이 먹고 별도로 음식을 마련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불사(佛事)에 지성을 다하였다. 비록 몹시 추운 겨울이나 매우 더운 여름이더라도 조금도 몸을 기울이거나 게을리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렇게 하기란 늙은이로서는 어려운 일인데 능히 행하였으니, 아! 참으로 보살의 화신(化身)이로다. 그 감응의 영이(靈異)한 일들은 비록 많으나 모두 도(道)의 경지에 있어서는 미세한 것이요, 또 후인들이 괴탄히 여길까 염려하여 여기에 기재하지 않는다.
문인 대선사(大禪師) 확운(廓雲)등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국사가 작고한 지 오랜데, 비석이 아직 서지 않았으므로 신들은 깊이 한스럽게 여깁니다. 글을 지어 돌에 새겨서 영구히 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소신에게 명하여 글을 짓게 하고, 이어 모비(某碑)라고 액(額)을 하사하였다. 신은 감히 피하지 못하여 삼가 재배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달마(達摩)의 마음을 전하여 영광(靈光)이 동방에 빛나는데, 후학들은 거꾸로 보니 마치 거울을 등지고 비치기를 구한 격이다. 밝고 밝은 국사이시여. 태양처럼 걸으시니, 한 번 연기를 틔우매 몽매함이 모두 사라졌다. 법왕(法王)이 세상에 나오시니 조사의 달이 다시 빛나고, 깨닫는 길이 남쪽을 맡으니 배우는 자 돌아갈 곳을 알리라. 제자들이 수풀처럼 많은데 친히 젖을 먹이고, 또 날개로 새끼를 덮어 주고 내놓아 날개 해 주었네. 복을 심음이 오래니 윤택을 흘려 보냄이 끝이 없고, 천자가 높음을 굽히어 북면하고 배움을 청하였다. 살아서는 임금의 사범이 되고 죽어서는 나라의 스승이 되었는데 귀감이 이제 없어졌으니 어디에서 법칙을 취할 것인가. 임금이 소신에게 명하여 사적을 전하기로 기약하시매, 신은 절하고 비명을 새겨 산과 함께 짝을 짓노라. 오가는 자들이여, 말 타고 가거든 말에서 내릴지어다. 차라리 부처에게는 절하지 않을지언정 오직 이 비에만은 절할진저.

[주D-001]정법안장(正法眼藏) : 부처가 당시에 말한 무상(無上)한 정법(正法)이다.
[주D-002]구족계(具足戒) : 비구(比丘)와 비구니(比丘尼)가 지켜야 할 일체의 계(戒)로 사미계(沙彌戒)를 받은 자에게 준다.
[주D-003]양종(兩宗) 오교(五敎) : 양종은 교종(敎宗)과 선종(禪宗). 오교는 화엄종(華嚴宗)ㆍ남산율종(南山律宗)ㆍ열반종(涅槃宗)ㆍ법상종(法相宗)ㆍ신인종(神印宗).
[주D-004]정광(定光)은……나타난다 : 공안(公案)으로 한 말인 듯한데, 뜻은 미상(未詳)이다.
[주D-005]첨례(瞻禮) : 우러러 보며 예배하는 일이다.

상촌선생집 제20권
 시(詩)○칠언절구(七言絶句) 166수
유희경 시축에 제하다[題劉希慶軸] 2수

유생(劉生)은 시장에 사는 사람이지만 십분에 일의 이윤을 추구하는 장사치를 하지 않고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따라 놀기를 좋아했으며 시례(詩禮)로 몸단속을 하였다. 도봉산(道峯山) 아래다 집을 짓고 여유 있는 생활을 즐기고 있는데, 지금 나이 칠십 구세지만 몸놀림이 가볍고 건강하며 얼굴도 동안(童顔)이어서 내 그의 사람됨을 좋아하고 있었다. 지금 와서 시를 써달라기에 이렇게 읊어 그에게 주었다.

수레 앞에 여덟 추졸 그도 나는 소용없고 / 車前八騶吾不管
재상이고 삼공이고 그도 모두 부질없어 / 兩府三事都悠悠
흰구름이 항상 있고 흐르는 물 옥과 같은 / 白雲長在水如玉
시내 머리에 집을 지은 그대가 제일 부럽네 / 羨爾結廬溪上頭

기이(其二)
십년 동안 쫓겨났다 이제야 돌아오니 / 十年放逐今始還
이도 머리도 다 빠지고 허리 다리 뻣뻣하다네 / 齒髮已空腰脚頑
뺨 고이면 아침에 시원한 기운 있으리니 / 柱笏朝來有爽氣
시가 되거든 그대의 그림 속 산에다 쓰려네 / 詩成題爾畵中山

송자대전(宋子大全) 부록(附錄) 제2권
 연보(年譜) 1
만력(萬曆) 46년 무오. 선생 12세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배웠다.
수옹공이, 선생이 출생할 때 아름다운 징험이 있어 특이한 자질을 타고났고 도량과 재주가 탁월하여 남보다 뛰어나므로, 언제나 성현(聖賢)이 되는 사업으로써 책임 지우며 격려하기를,
“주자(朱子)는 후세의 공자이고 율곡(栗谷)은 후세의 주자이니,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고, 드디어 율곡 선생의 《격몽요결》을 가르쳤는데, 선생이 이미 다 배우고서 말하기를,
“이 글처럼 하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다.”
하며, 척연(惕然)히 스스로 분발하는 뜻이 있었다. 수옹공이 손수 《기묘록(己卯錄)》과 《해동야언(海東野言)》 등을 등초(謄抄)하여 주면서 말하기를,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을 배우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고, 또한 청교(靑郊)에서 시를 지어 보이기를,
매월당 앞 물 흐르고 / 梅月堂前水
도봉산 위 구름 끼었네 / 道峯山上雲
하였으니, 대개 겸하여 김열경(金悅卿 김시습(金時習))도 사모하게 하려 한 것이다.
 청장관전서 제9권
 아정유고 1(雅亭遺稿一) - 시 1
서씨(徐氏)의 동장(東莊)에 놀면서

짝짝이 손을 잡고 발걸음 가지런히 하여 / 儔侶聯翩步屧齊
도봉산 서편에 있는 서씨의 정자 찾아가네 / 徐家亭子道峯西
그윽한 꽃은 중을 만나 이리저리 떨어지고 / 幽花漠漠逢僧落
밝은 달은 부산히 손을 맞느라 낮게 뜨네 / 白月紛紛向客低
전처럼 얽힌 마름은 그림자 많은 나무인 듯 / 依樣亂萍多影樹
칠분쯤 차가운 비는 잘 울리는 시내인 듯 / 七分寒雨善鳴溪
두 번째 유람 때맞추어 제비 따라와서 / 重遊政逐新來燕
함께 잠자니 도리어 대대의 깃듦과 같네 / 幷宿還同對待栖
시냇가에 말없이 우뚝 섰으니 / 溪頭無語立亭亭
고운 아지랑이 끝없이 푸르구나 / 嵐靄娟鮮透底靑
봄 만난 기수 이제 막 싹이 트고 / 祇樹逢春初蘊秀
비 내린 구암 더욱더 신비롭다 / 癯巖歷雨最鍾靈
술값은 사시사철 빚만 질 것인가 / 酒錢未必尋常負
꽃 소식 이제부터 이십번풍(二十番風) 지났구나 / 花信從它二十零
나무와 돌뿐인 곳에 담박하게 살았지만 / 木石之濱棲澹泊
도리어 예스런 모습 개운한 기상 다시금 보겠네 / 却看貌古又神醒

[주C-001]서씨(徐氏) : 서상수(徐常修)를 가리킨다.
[주D-001]이십번풍(二十番風) : 꽃소식인 이십사번 화신풍(二十四番花信風)을 말한다. 한 달이면 기(氣)가 둘, 후(候)가 여섯으로 소한(小寒)에서부터 곡우(穀雨)까지 4개월에 걸쳐 모두 24후로서 5일마다 한 후씩 계산하여 꽃 한 가지에 해당시키는 방법이다.《焦氏筆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