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고향 忠義 고장 宜寧/2010.3.7. 퇴계 이황의 덕곡서원

조선의 유학자이신 퇴계 이황 선생의덕곡서원 주변 스케치

아베베1 2010. 3. 9. 11:52

종 목 문화재자료   제131호 (의령군)
명 칭 덕곡서원(德谷書院)
분 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서원
수량/면적 1동
지 정 일 1985.11.14
소 재 지 경남 의령군  의령읍 하리 621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덕곡서원
관리자(관리단체) 덕곡서원
상 세 문 의 경상남도 의령군 문화체육과 055-570-2223
일반설명 | 전문설명

퇴계 이황(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이황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백운동서원을 ‘소수’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만들었다. 이 소수서원이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퇴계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하여 퇴계 학파를 형성해왔고, 일본 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덕곡서원은 효종 5년(1654)에 세웠고, 현종 원년(1660) 나라에서 ‘덕곡’이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하지만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으로 목조건물 전부가 철거되었다. 그 후 고종 39년(1902) 유림들이 강당과 솟을대문을 복원하였고, 다시 1992년 사우각을 다시 지었다.

강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사원】 덕곡서원(德谷書院) 효종 병신년에 세웠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이황(李滉) 문묘 편에 보라.

 

  자료 : 문화재청

 

 

추강집 제8권 의 기록

 부록(附錄)
덕곡서원(德谷書院)에 봉안(奉安)하려 했던 글 의령(宜寧)에 있다.


조임도(趙任道)

거친 강물의 지주이고 / 橫流砥柱              어두운 길의 태양이라 / 冥途太陽
정절의 신하를 드러내어 / 表著貞臣           강상을 밝게 펼쳐 보였네 / 昭揭綱常
피를 뿌리며 대궐에 아뢰어 / 瀝血叫閽       국가의 명맥을 부식시키니 / 扶樹國脈
영풍은 의기를 치솟게 하고 / 英風竪髮       천 길 절벽이 서 있는 듯하네 / 千仞壁立
우뚝한 선생이여 / 卓乎先生                     백세의 높은 행적이니 / 百世高躅
무릇 보고 듣는 사람이면 / 凡在瞻聆          모두가 흠앙하고 탄복하네 / 莫不欽服
하물며 이곳 고향 마을이야 / 矧伊貫鄕       경모함을 감히 게을리 하랴 / 景慕敢懈
자굴산(闍崛山) 아래는 / 闍山之下            그 옛날 가업이 있는 곳이니 / 舊業所在
여태 사당을 건립하지 못함은 / 尙稽建祠    후인들이 부끄러워하는 바이네 / 後死之羞
뒤늦게 새로운 사당을 지으니 / 晩營新廟    하늘이 만든 좋은 구역이라오 / 天作勝區
문순공과 매우 가까이 있으니 / 密邇文純    아름다운 덕은 외롭지 않다네 / 馨德不孤
뒷날의 어려움이 없게 하시고 / 俾無後艱     우리들 어리석음을 열어주소서 / 啓我群愚

 

덕곡서원(德谷書院) :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 의령읍에 있다. 1656년(효종7)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지주(砥柱) : 황하의 거센 흐름 속에 우뚝 서 있는 바위산이다.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절조를 지키는 군자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문순공(文純公) : 계 이황의 시호이다.

 

 

퇴계선생속집 제1권
 시(詩)
늦봄에 우연히 짓다


살구꽃 떨어져 하나 없는데 / 杏花落已空
복숭아꽃 여기저기 피어나네 / 桃花參差開
빈 뜰에 사흘 동안 이어 온 비에 / 空庭三日雨
풀은 우거지고 이끼는 새로 났다 / 草積生莓苔
난간에 기대어 비 갠 풍경 바라니 / 憑欄眺新霽
봄 시름 하도 많아 누르기 어려워라 / 春愁浩難裁
어디서 미친 바람 땅 흔들고 일어나 / 狂風動地起
눈이 어지럽도록 마구 눈을 뿌리네 / 亂眼飛雪催
흩날리고 나부껴 자세히 보기 어려운데 / 飄翻難具知
어수선하게 휙휙 오락가락 하여라 / 散漫倏往回
나는 저 등육(滕六)이 변화 부려 / 我疑滕六逞
잠깐 사이 내려왔나 의심하고선 / 變幻頃刻來
수염을 흔들며 눈을 읊으면서 / 掀髯吟雪句
추위를 녹이려 술을 달라 청하였다 / 煖寒呼酒杯
곁의 사람 어리석다 비웃으며 / 傍人笑我癡
이웃집 담 모퉁이를 가리키네 / 指我隣墻隈
거기 두어 그루 배나무 있어 / 兩條梨花樹
흔들려 꽃이 지네, 아아 가엾어라 / 擺落吁可哀
가지에는 이미 몇 송이 없고 / 枝上已無多
바람 따라 더러운 땅에 버려지네 / 隨風委塵埃
풍기는 향기 온 집 안에 가득하고 / 吹香滿一院
문 앞 길에는 하얗게 쌓여 있다 / 門徑堆皚皚
한 식경 동안이나 참인 줄 혼동했다가 / 混眞一餉閒
깨어나서는 한숨을 지었네 / 悟處令人欸


[주D-001]등육(滕六) :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 전집(前集) 권4 〈등육강설(滕六降雪)〉 조에 《유괴록(幽怪錄)》의 말을 인용하여 눈을 내리게 하는 신(神)을 말한다. 《유괴록(幽怪錄)》에 “진주 자사(晉州刺史) 소지충(蕭至忠)이 납일(臘日)에 사냥을 나가려 하였는데, 그 전날 한 나무꾼이 곽산(霍山)에서 보니, 늙은 사슴 한 마리가 황관(黃冠)을 쓴 사람에게 애걸하자, 그가 말하기를, ‘만약 등육(滕六)을 시켜 눈을 내리게 하고 손이(巽二)를 시켜 바람을 일으키면, 소군(蕭君)이 사냥하러 나가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다음 날 새벽부터 종일토록 눈보라가 치자 소 자사(蕭刺史)가 사냥하러 가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주D-002]수염을 …… 읊으면서 : 원문이 ‘掀髯吟雲句’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감정이 격발되어 수염이 흔들리도록 입을 벌려 눈을 소재로 한 시구를 읊조려 본다는 뜻이다.

 

 

 

 

 

 

 

 

 

 

 

 

 

 

 

 

 

 

 

 

 

 

퇴계선생과 의령 가례마을


우리 나라 대표적 유학자는 누구인가? 라고 물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퇴계 이황 선생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경남일보 창간 주필을 지냈던 위암 장지연 선생은 “바른 학문을 널리 알리고 후학들을 깨우침으로써 공자 맹자 정자 주자의 도를 환히 우리 동방에 밝힌 사람은 오직 퇴계 선생 한 분밖에 없다”라고 하면서 퇴계 선생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퇴계선생은 경상북도 안동 사람이다. 1501년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퇴계 선생은 안동사람이지만 경상남도 지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첫 번째 처가가 의령이고, 두 번째 처가도 거창이다. 곧 퇴계 선생의초취, 재취 부인의 집이 모두 경남에 있었다.

의령읍에서 서쪽으로 2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가례면(嘉禮面)이 있다. 이 마을 이름을 퇴계 이황 선생께서 지으셨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례라고 하면 ‘혼례’ 를 뜻한다고 알고 있다. 아마도 퇴계 선생이 이 마을 허씨 댁으로 장가들고서 가례로 지어신 것이 아닌가싶다.

퇴계 선생은 21세 때 진사 허찬(許瓚)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허찬의 집이 현재 의령군 가례면(嘉禮面)에 있었다. 허찬은 본관이 김해로, 그 아버지 허원보(許元輔)가 고성에서 의령으로 이사를 하면서 의령에 살게 되었다.

하지만 퇴계가 장가 들 당시에는 장인 허찬이 의령에 살고 있지는 않았다. 퇴계 장인 허찬이 처가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찬은 당시 영주(현재 경북 영주시)에 사는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허찬의 장인은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 벼슬을 지낸 분으로,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욕심이 없고 해학을 좋아 하였다. 그러나 슬하에 딸만 둘이 있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허찬은 맏사위로서 문경동의 집에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허찬은 의령과 영주에 집과 토지를 소유하고서 이 두 곳을 자주 왕래를 했다.

퇴계의 부인인 허씨는 1501년 영주에서 태어났다. 퇴계가 사는 예안과 영주는 거리가 거리 멀지 않았다. 그리고 문경동이 퇴계의 숙부인 송재 이우와 같은 시기에 조정에 벼슬을 하면서 서로 교분이 있었다. 그래서 퇴계의 인물됨을 알고 문경동이 외손서로 삼은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퇴계와 허씨 부인은 21살 동갑으로 영주에서 혼인식을 올렸다. 의령 허씨 집안으로 장가든 퇴계는 7차례 정도 의령을 방문하였다.

의령 처가에 들른 퇴계 선생은 청향당 이원등 지역 선비들과 교유를하는 한편, 때때로 낚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다.

이때 퇴계 선생이 낚시를 하던 곳이 현재 가례면 뒷산 밑 ‘가례동천’이라고 바위에 새긴 곳이라고 전해온다. 지금은 마을이 들어서 옛날 이곳에서 어떻게 낚시를 하였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 당시는 큰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퇴계 선생은 처가를 찾으면 낚시를 했던 장소에 ‘가례동천(嘉禮洞天)’이라는 친필 글씨를 남겼다. 가례동천은 ‘병풍을 둘러 친 듯이 아름다운 곳’이란 뜻으로 주변경치가 그야말로 절경이라는 의미이다.

지금은 마을 한가운데 자리잡아 절경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지만, 퇴계 선생은 이곳 경치에 반해 글을 남겼으리라 생각된다.

5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퇴계 선생의 친필 글씨는 비바람에 많이 마모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 고을 선비들이 가례동천 암벽 옆에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퇴도이선생유허비(退陶李先生遺墟碑)를 세웠다. 이 비문은 한말 대쪽같은 선비이며 우국지사인 수파(守坡) 안효제(安孝濟)가 지었다.

이뿐만 아니다. 가례면 소재지에서 자굴산 정상쪽으로 6킬로미터 쯤 가면 큰 저수지가 나온다. 가례면 괴진리 우곡마을에 있는 이 저수지를 이 마을 사람들은 서암제(書巖堤)라고 부른다. 저수지 이름이 ‘서암’이라는 것이 특이해 연유를 알아보니, 저수지 안쪽 벼랑에 퇴계선생이 친필로 서암’이라고 새긴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아쉽게도 저수지 공사 때 서암이라고 새긴 부분이 없어졌다고 한다. 아무튼 퇴계 선생이 남긴 흔적들이 약 5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으니, 그 덕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의령사람들은 퇴계선생과의 인연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다. 1654년 당시 의령현감 윤순거가 퇴계선생의 덕을 추모하고 교훈을 길이 새기기 위해 선생의 유적지 가까운 곳에 서원을 지었다. 그로부터 6년 뒤 1660년 조정에서 덕곡서원(德谷書院)이란 이름을 내려주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매년 음력 2월 20일이면 퇴계선생을 위해 제례를 올리고 있다.

퇴계선생의 처가 동네 의령 가례마을.

지금 비록 처가 후손들은 얼마 살지 않지만, 퇴계 선생이 우리 마을로 장가들었다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선생이 남긴 덕을 이어가고자 노력하고 있다./강동욱기자kdo gnnews.co.kr

 

퇴계(退溪) 선생께서, [말을 바꾸어서] 그 마 허씨네들은 초처(初妻)가 자기 허씨(許氏)라 이래 카고,(1)[주]허씨네의 주장으로는 퇴계 선생의 첫부인이 허씨라 하고. 또 딴 사람은 후처(後妻)가 결국 말하자면 허씨 아이가(아닌가) 이래 말해 쌓는데, 그거는 자기 각자 그 식견에 맡길 요량하고.

에, 그 지끔도 그 저 칠곡(七谷面)에 도산(陶山) 허씨네들 그 집안이 퇴계 선생의 처갑니다. 처간데, 그 처가로 봐서 그랬는가 어쨌는가, 여게


[86 쪽]

마 유생(儒生)들이 많아서 그랬는강(그랬는지), 여게 와서 그 서산(西山) 밑에 고기로 낚았답니다. 지금 가례동천(嘉禮東川)이라고 써 놘 데 거게 고기를 낚고 계싰는데, 그러이 고 당시로 봐서는 그 가례가 허촌(許村)이더랍니다.

예, 허촌인데, 에 허씨네, 그 말하자면은 마 자기 그 퇴계 선생의 처갓집이 아주 그 요부했더랍니다. 요시(요새) 석수로 칠라 카마(2)[주]요즘의 석(섬)으로 따지면. 마 만석군이든지 이만석군이라도 가당챦은데(굉장한데), 마 삼만 석 했답니다. 그런데, 퇴계 선생을 만 석을 디맀다고 해요. [조사자: 저쪽에서?] 예, 이 소리 하머 저짝(저쪽)에서 뭐라 칼란가(할런지) 모르지만도, 퇴계 선생측에서 자손들이 뭐라 칼란가 몰라도, 그거는 지금 허씨네들이 그 지금 고증을 하고 있어요.

있는데, 그라머 그 만 석을 가지고 그 퇴계 선생이 유생들을 모아 놓고 그 포, 포덕을 하고, 참 유교의 그 참말로 에 마 무학도 하고 이래 많이 그 활약을 했다는 이런 말도 있읍니다. 이래서 있기 때미레(때문에) 지끔 현재 자필 글씨로 가례동천(嘉禮東川)이라고 썼다. 예, 거어 지끔 현재 보머 그 뭐 내(川)가 쪼깬치마는도(조그맣지마는), 그 전에는 거어 고기를 낚을 만한 그 웅덩이도 있고, 또 내가 컸더랍니다.

예, 이런데, 그라머 지금 거어 가례는 허씨네들이 별 사는 바 없고, 지금 칠곡면 도산리 가서 허씨네들이 있읍니다. 있는데, 에, 지끔도 그 허씨네들이 그 저 뭐꼬 도산 서원에 가면은 외갓집에서 왔다고 상당히 그 하고.

그 퇴계 선생의 마느래가 좀 불출이라 캐요. [테이프 뒤집음] 그래서, 그 참 난서(難書)를 가지고 활용을 잘 하고, 무학도 잘 하시고 이래 했는데, 그 지금 현재 허씨내측 이약을 들으믄, 그 그 허부인이 좀 마 불출이라요.

불출인데, 퇴계선생이 그 저 형님이 계시더랍니다. 그라머 친척들이 제사를 지낼 때, 제삿상을 올리기 전에, 참 방금 그 저게 뭐꼬 설상(設床)


[87 쪽]

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과실 채린 거 묵고 그래 한께, 형님이, 퇴계 선생 형님이 이 혀를 끌끌 차인께(차니까), 에, 퇴계 선생이,

“형님, 아무래도 묵을 꺼, 아부지는 버(벌써) 이미 봤은께 말이지, 죽은 영혼이 봤으니께 마 그냥 놔 두시는 기 안 좋겠읍니까?”

이래 카인께(말하니까) 퇴계 선생 형 되시는 분은 참 웃더라꼬. 그런데 마, 사람은 부잣집 딸이라도 좀 마 불출이더라 카는 그런 전설이 있겠읍니다.

 

寓軒先生文集卷之三
 
黃錦溪辨誣疏 代儒生作 a_147_048a


伏以臣等之在下土也。竊伏聞宰臣李選以故儒臣黃俊良從享先正臣文純公李滉書院爲非。陳章貶斥。至有命本道査覈之擧。臣等相顧驚愕。莫知其所以然也。夫俊良平生言行。旣爲李滉之所奬許。而今玆從享。亦出於尊信李滉之意。則一道士林之公論。於此可見。而意外一縣無賴之徒。摘抉搆誣。始焉作變於廟庭。終焉喧播於遠邇。乃有此斯文之不幸。則147_048b以臣等淺近之見。雖不敢妄議。而先覽之緖論則亦嘗聞之矣。其何敢默然而已乎。此臣等所以不避僭越。欲有所辨明者也。惟聖明之裁擇焉。今夫宰臣所陳。蓋本於故相臣盧守愼,沈喜壽兩人所撰康惟善誌碣文。而臣等亦有援據而可辨者。請就李滉遺集。以證其不然也。盧守愼碣文曰當仁廟在位。多士拭目。於是太學生上章請復趙靜庵官爵。皆君筆也。未幾上賓。國空虛矣。君乃奉母南歸。學正黃俊良言君嘗在泮。好爲異論。將文致焉。賴有力救得免。猶停赴擧。是冬爲公西之志。旣盡誠信云云。所謂公147_048c西之志。卽指其外舅李延慶之喪也。沈喜壽所撰誌文則曰戊申冬灘叟先生之喪。公獨當經紀云云。所謂灘叟先生。卽李延慶。以此兩說。互相參考。則盧守愼所謂是冬。卽沈喜壽所謂戊申冬。而猶停赴擧之說。在於是冬二字之上。則康惟善之戊申被停。固是明白之證。而但李滉所撰黃俊良行狀則曰。甲申陞學正。乙巳以承文院殿考。出爲尙州敎授。丁未秋入爲博士。其冬例陞典籍。明年以工曹佐郞丁外艱云云。所謂明年。卽戊申也。未知惟善之被停。在於某月。而是年俊良之職。乃是工曹郞官。又遭其親喪。則惟147_048d善之停擧。出於俊良之手云。不待辨破。而決知其爽實也。李滉,盧守愼皆是一時之人。而彼此記事之相左。厥有由然者。蓋盧守愼遠謫絶島。十九年而還。撰其碣文。又在於數十年之後。則其時之事。非親見而爲之者也。只因惟善子復誠狀而紀述之。故其文有曰按復誠狀。略加點綴云云。復誠以遺腹孤兒。及其成立之後。掇拾傳聞。以爲家狀。則傳聞之訛。宜無足怪也。大凡行狀者。記實之文也。若使俊良果有是事。則李滉於所撰行狀中。雖欲回護爲說。何曾無初年失脚等語耶。李滉不喜作人行狀。平生所撰。只是先147_049a正臣文正公趙光祖,文元公李彥迪,孝節公李賢輔,忠定公權橃及黃俊良五人行狀而已。其難愼之意此可見。而俊良若果黨奸而害正。則李滉亦豈肯撰其行狀也。況所謂權臣。卽李芑等也。康惟善被禍之後。大禍蔓延。李滉之兄監司李瀣。爲李芑所陷。竟被栲訊而死。則其時權臣。實李滉不反兵之讎也。若使俊良果有附托權臣之事。則俊良何得以出入李滉之門。李滉亦何以稱道愛重。至於此哉。又況俊良之死也。李滉遣瀣子㝯爲文而祭之。則所謂黨奸之說。益見其誣矣。且宰臣疏中有曰黃俊良得罪於士論。147_049b不齒於人。後乃改心從李滉講學。頗見許可。然終未能得踐名路而死云云。此亦錯認失實之甚者也。俊良入贅於李賢輔之門。與李滉所居相去密近。從遊講劘。蓋自此始。故李滉行狀中有曰滉初識公於先生之門。相與遊從。最久且密。愚陋無聞。得公而警發者多云云。其曰先生。卽李賢輔也。以此觀之。俊良之見許師門。實自少時。則其謂之初得罪於士論。晩從遊於李滉云者。恐未及細考也。且李滉於俊良行狀。有曰拜司憲府持平。時有姓韓人在言路。嘗有求於公。公不應。爲所中論遞。又曰公之名已登於弘文養147_049c才之選。又曰廷臣爲議啓。欲召公處以文翰之職。雖旋以同進者惎間而止。其爲一時諸公所賞識可知云云。祭文又曰胡僅試於霜臺。已讒人之售嫉。續將處以文翰。又同進之間尼。玆實係於命途。豈公身之玷缺云云。其屈跡州郡。終世坎軻者。足見其自守之卓然矣。其不踐名路。豈可爲俊良之疵累乎。宰臣疏中又言黃俊良沒地百餘年。未有爲立祠者。向時豐榮之人。不恤公議。乃敢以俊良配享於李滉書院。終有還出位版之擧。則又訐訴於土主道臣。刑扑狼藉。遂至還配云云。此有委折。而遠外傳聞。未得其詳故147_049d也。臣請悉陳從享顚末及順興人悖亂之狀焉。向臣等所謂一縣無賴之徒。卽指順興人而言也。豐基乃李滉遺愛之地。而邑殘力綿。尊祀之擧。久而未遑。逮今壬寅。始建書院。立祠之時。一道士論。皆以爲李滉高弟。莫如俊良。從祀一廟。允合事宜。不謀僉同。曾無異意。而獨順興一縣若干人。敢生橫議。醜正作戲。故道內士論。益加激發。乃於己酉冬。一道齊會。始爲陞祀矣。越六年甲寅春。順興人徐璨,權聖基等二十四人。乘曉突入於廟中。撤出俊良位版。水滌粉面。刀刮字畫。棄擲於齋舍庭下。此實斯文莫大之變也。一道147_050a多士。齊會施罰。郡守張世良枚報巡營。則監司李觀徵摘發首倡。略施刑訊。論以法文。此亦末減矣。翌年乙卯冬。一道多士。更爲齊會。改造位版。還爲從享。則士論公議。此焉可見。而豐基有李滉書院。乃在百年之後。則壬寅立祠。己酉陞祀。不過差遲七年之間。豈可以俊良之今始從享。謂之非出公議也。旣配俎豆之列。永爲矜式之地。則此非一縣無賴輩所可突入擅出。而況其所爲。若是悖惡。爲多士者所當鳴鼓而攻之。爲道臣者所當據法而治之者也。所謂訐訴刑扑。箝制勒配等語。臣等或恐宰臣之見誣於順興人147_050b也。俊良之從享於李滉之廟。非獨豐基一邑。本道新寧縣白鶴書院。亦有從享。一道士論之洽然。於此可見矣。且宰臣疏中有先正之論以俊良所著朱書跋文。齒在於李滉序文之下。猶以爲當去云云。宰臣所謂先正。臣等所見孤陋。姑未知爲誰某。而以李滉之遺文考之。則大有所不然者。李滉於俊良行狀中。有曰得朱子書而讀之。深有所感發而大耽樂之。又曰其志益勵。其功益深。夜以繼日。忘寢與食。편001편002不倦云云。以此觀之。俊良之得力於朱書者爲如何哉。又於答俊良請朱書序文之書曰。弁首之文。豈敢多讓。147_050c只以抄節先賢之文。已極僭踰。不欲重負罪累。欲望盛文略述所以抄節印行之意於卷末云云。其後答書又曰今見跋語。甚善且好。得此在書尾。可以掩滉妄作之罪。又可以分受指目之謗。又曰妄以私見。略加增損云云。則其撰著跋文。出於李滉之意。亦可見矣。然則俊良有功於朱書。見許於師門。不惟若是之深切。況其跋語。又經李滉之增損。則謂當拔者。抑何意耶。古人有言鄒魯之人。不敢自信而信其師。臣等所篤信者李滉也。李滉於俊良行狀中。有云求一世之所不求。味衆人之所不味。不知非笑之爲非笑。禍147_050d福之爲禍福。俛焉日有孶孶。死而後已。若其擇術之正。嚮道之勤。所以爲可尙也哉云云。則其所以推許道學者。實當時及門者所罕得也。及其歿也。訃至而哭之。再爲文以祭之。編其遺稿。撰其行狀。至於所居精舍。慮其荒廢。屬諸邑宰。俾之完護。則悼念嗟惜之意。亦非尋常奬許之比。其於死生存亡之際。推許愛重者。至於如此。則此固爲百世定論。豈可以傳訛記誤之文字。爲今日斷案乎。噫。宰臣所執順人之所證。不過康惟善停擧一事。年月之不同。職名之相左。不但爲伸辨之明證。且李滉於祭文中。有曰指虛無而147_051a銷骨。知盡出於怨隙。世豈無止丸之甌臾。付公道於信筆云云。雖未知李滉所指者何等謗語。而蓋當時俊良已困於多口。故傷讒之意。溢於辭表。今者順人之誣毀俊良者。至引李滉贈俊良詩一絶。以爲欛柄。此固不足多辨。而其見解回互。爲此不成說之謗。則臣等請以此一款破其搆毀之巧計也。其詩曰行止失初難善後。親疏爲道肯趨時。冷雲欲雪重城暮。袖手無言有所思云云。臣等竊觀詩意。則蓋李滉歲晏懷歸之際。自歎出處之難。而又示其不趨時之意者。今可想見。而惟彼順興之人。敢以失初趨時四字。勒147_051b成俊良附權之證。噫。是何言也。李滉若以俊良爲失身附勢之人。而有所譏貶於尋常吟詠之間。則何獨於往復書尺祭文行狀中。鋪張稱譽。若是其深。而無半辭瑕玷處耶。此則誠未滿一哂也。順興人呈書中或有身死而聯名者。或有呈書後請削其名於査官者。至於外派子孫亦皆書之。於此益見其若干倡爲醜正之說。敢抗一道之公論。而勒書諸人姓名。欲售取勝之計者也。是可忍也。孰不可忍也。蓋臣等之所取證者。李滉之信筆也。順人之爲資斧者。康復誠之傳訛也。今若取復誠傳訛之說。俾售順人搆誣之計。147_051c捨大賢記實之文。而不採一道公共之論。則人心波漡。士趨乖異。終必至於不可隄防之域矣。臣等非不知朝家處分得其正。而斯文重事。固非一査官所可左右也。臣等玆敢裹足千里。瀝血九閽。此非獨爲俊良也。乃所以爲士林也。爲世道也。爲國家也。士論之得失。而世道之陞降係焉。世道之陞降。而國家之汚隆判焉。此豈不大可懼者哉。臣等敢冒鈇鉞之誅。猥辨儒賢之誣。而辭不達意。語亦無脊。伏願殿下恕其狂瞽。留神澄省。廓揮乾斷。昭示是非。則國家幸甚。斯文幸甚。


[편-001]舋 :
[편-002]舋 :

고봉집 제3권
 [비명(碑銘)]
퇴계(退溪) 선생 묘갈명(墓碣銘) 명문(銘文)은 선생이 스스로 짓고 아울러 썼다.


태어나서는 크게 어리석었고 / 生而大癡
장성하여서는 병이 많았네 / 壯而多疾
중년에는 어찌 학문을 좋아했으며 / 中何嗜學
말년에는 어찌 벼슬에 올랐던고 / 晩何叨爵
학문은 구할수록 멀기만 하고 / 學求猶邈
관작은 사양할수록 몸에 얽히네 / 爵辭愈嬰
세상에 진출하면 실패가 많았고 / 進行之跲
물러나 은둔하면 올발랐네 / 退藏之貞
국가의 은혜에 깊이 부끄럽고 / 深慙國恩
성인의 말씀이 참으로 두려워라 / 亶畏聖言
산은 높이 솟아 있고 / 有山嶷嶷
물은 끊임없이 흐르는데 / 有水源源
선비의 옷을 입고 한가로이 지내니 / 婆娑初服
뭇 비방에서 벗어났네 / 脫略衆訕
내 그리워하는 분 저 멀리 있어 볼 수 없으니 / 我懷伊阻
나의 패옥 누가 구경해 주리 / 我佩誰玩
내 고인을 생각하니 / 我思故人
실로 내 마음과 맞는구나 / 實獲我心
어찌 후세 사람들이 / 寧知來世
지금의 내 마음을 모른다 하랴 / 不獲今兮
근심스러운 가운데에 낙이 있고 / 憂中有樂
즐거운 가운데에 근심이 있네 / 樂中有憂
조화를 타고 돌아가니 / 乘化歸盡
다시 무엇을 구하리 / 復何求兮

융경(隆慶) 4년(1570, 선조3) 봄에 퇴계 선생은 나이가 70세였는데, 재차 전문(箋文)을 올려서 치사(致仕)할 것을 청했으나 상(上)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가을에 또다시 치사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신축일에 선생께서 별세하시어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은 크게 애도하시며 영의정을 추증하고 장례는 의정(議政)의 예를 쓰도록 명하였다. 멀고 가까운 지방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모두들 슬퍼하고 애석해하며 서로 곡하고 조문하였다. 다음 해 3월 임오일에 집 동쪽의 건지산(搴芝山)에 안장하였다.
선생의 성은 이씨이고, 휘는 황(滉)이며, 자는 경호(景浩)이다. 일찍이 퇴계(退溪)에 집터를 정하여 살고 인하여 스스로 호로 삼았으며, 뒤에 도산(陶山)에다가 서당을 짓고 또 도수(陶叟)라고도 불렀다. 그 선대는 진보현(眞寶縣) 사람이었다. 6대조 석(碩)은 고을의 아전으로서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고 밀직사(密直使)에 추증되었다. 아드님인 자수(子修)는 벼슬이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에 이르렀으며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는데, 이분이 안동(安東) 주촌(周村)으로 이거(移居)하였다. 고조의 휘는 운후(云侯)인데 벼슬이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으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으며, 고조비는 숙인(淑人) 권씨(權氏)이다. 증조의 휘는 정(禎)인데 벼슬이 선산 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로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증조비는 정부인(貞夫人) 김씨(金氏)이다. 조(祖)의 휘는 계양(繼陽)인데 성균 진사(成均晉士)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이분이 예안(禮安)으로 이거하여 온계리(溫溪里)에 거주하였다. 조비는 정부인 김씨이다. 선고(先考)의 휘는 식(埴)인데 성균 진사로 여러 번 추증을 받아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이르렀으며, 선비(先妣)는 의성 김씨(義城金氏)와 춘천 박씨(春川朴氏)로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선생은 출생하신 지 한 돌이 못 되어 부친을 여의고, 어려서는 숙부인 송재공(松齋公)에게 수학하였다. 이미 장성해서는 학문에 힘쓰고 뜻을 가다듬어 더욱더 스스로 각고하였다. 가정(嘉靖) 무자년(1528, 중종23)에 진사가 되고, 갑오년(1534)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가 박사(博士)로 옮겼으며,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과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정유년(1537) 겨울에 모친상을 당했으며, 그 후 삼년상을 마치고는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었다. 그 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과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형조 정랑(刑曹正郞)과 홍문관부교리 겸 세자시강원문학(弘文館副校理兼世子侍講院文學),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을 지냈으며, 다시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옮기고,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과 성균관사예 겸 시강원필선(成均館司藝兼侍講院弼善),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과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임명되었는데, 성균관 사성으로 있을 때에는 휴가를 얻어 성묘하였다.
다음 해인 갑진년(1544) 봄에는 홍문관 교리로 소환되어 좌필선(左弼善)에 임명되고, 홍문관 응교와 전한(典翰)으로 천직되었다가 병으로 면직되었으며, 사옹원 정(司饔院正)이 되었다가 전한에 다시 임명되었다. 이때 간신 이기(李芑)가 삭탈관직하도록 계청(啓請)하였다가 얼마 후 이기가 또다시 삭탈관직하지 말도록 청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임명되었다.
병오년(1546, 명종1) 봄에는 휴가를 받아 외구(外舅)를 장례하고 병으로 체직되었다. 다음 해인 정미년(1547) 가을에는 응교로 임명되고 부름을 받았으나 서울에 도착한 다음 병으로 면직되었다. 무신년(1548) 1월에는 외직으로 나가 단양 군수(丹陽郡守)가 되었다가 풍기(豐基)를 맡았다. 기유년(1549) 겨울에는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곧바로 돌아갔다가 탄핵을 받아 두 품계를 박탈당하였다.
임자년(1552) 여름에는 교리에 임명되어 부름을 받아 조정에 돌아와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부응교로 옮겨졌다가 성균관 대사성으로 승진되었다. 그 후 병으로 면직되었다가 다시 대사성이 되고, 형조 참의와 병조 참의가 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면직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을묘년(1555) 봄에 휴가로 있던 중 해직되자 배를 세내어 동쪽으로 돌아왔다. 그 후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임명되고 연달아 부르는 명을 받았으나 모두 병으로 사양하였다.
무오년(1558) 가을에는 상소하여 면직되기를 청하고 부르는 명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은 비답(批答)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이 도성에 들어가 사은하니 대사성에 임명되고, 얼마 후에는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선생은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 해 봄에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고 세 번이나 글을 올려 면직되기를 청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을축년(1565) 여름에는 글을 올려 간곡히 사양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기거하였다. 겨울에 상이 특지를 내려 부르고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하였다. 병인년(1566) 1월에 선생은 병을 무릅쓰고 길에 올라 글을 올려 치사하기를 청했는데, 서울에 올라오는 도중 공조 판서에 임명되고 또 대제학에 겸직되었다. 선생은 마침내 새로 내린 벼슬을 극력 사양하고 집에 돌아와 죄를 받기를 기다렸다. 그리하여 벼슬이 체직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정묘년(1567, 명종22) 봄에는 명나라 사신이 서울에 오게 되었으므로 부르는 명이 있었다. 선생은 6월 도성에 들어갔는데, 이때 마침 명종이 승하하고 금상(今上 선조)이 뒤를 이었다. 금상이 선생을 예조 판서로 임명하자, 선생은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 후 병으로 면직되고 즉시 동쪽으로 돌아왔다. 10월에 부르는 명을 받고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곧바로 상이 교서를 내려 올라올 것을 재촉하자 선생은 상소를 올려 간곡히 사양하였다.
무진년(1568, 선조1) 1월에 의정부 우찬성에 임명되자, 선생은 다시 상소하여 받기 어려운 의리를 극구 말하였다. 또 교서를 내려 올라올 것을 재촉하자 선생은 글을 올려 간곡히 사양하니 체차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7월에 선생은 대궐에 나아가 사양하고 글을 올려 6개 조항을 아뢰었으며 또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렸다. 그 후 대제학과 이조 판서, 우찬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극력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기사년(1569) 3월에는 차자(箚子)를 올려 돌아갈 것을 요청하였는데, 차자를 네 번이나 올리면서 그치지 않았다. 상은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음을 아시고는 인견(引見)하여 타이르시고 역졸로 하여금 보호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이달에 선생은 집에 도착한 다음 글을 올려 사은하고 인하여 치사할 것을 청하였다.
처음에 선생은 병환이 위중해지자 아들인 준(寯)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죽으면 예조에서는 반드시 준례에 따라 예장(禮葬)을 하도록 청할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나의 유명(遺命)이라 칭하고 상소하여 굳이 사양하며, 또 비석을 쓰지 말고 다만 작은 빗돌에다가 전면(前面)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고 세계(世系)와 행실을 뒤에다 간략히 서술하여 《가례(家禮)》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여야 한다.” 하셨다. 그리고 또 말씀하기를 “이 일을 만일 남에게 부탁하여 할 경우 아는 사람 중에 기고봉(奇高峯) 같은 이는 반드시 실상이 없는 일을 장황히 늘어놓아 세상에 비웃음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일찍이 스스로 나의 뜻을 기술해서 미리 명문을 짓고자 하였으나 미뤄 오다가 끝내지 못하고 난고(亂稿) 가운데 보관되어 있으니 찾아서 써야 한다.” 하였다. 준은 이 경계를 받고 선생이 별세하자 두 번이나 상소하여 예장을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자 감히 끝까지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묘도(墓道)의 표(表)는 유계(遺戒)에 따라 그 명문을 그대로 썼다.
아, 슬프다. 선생의 훌륭한 덕과 큰 업적이 우리 동방에 으뜸임은 당세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후세의 학자들도 선생이 말씀하고 저술한 것을 관찰한다면, 장차 반드시 감발(感發)되고 묵계(默契)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명문 중에 서술하신 것은 더욱 그 은미한 뜻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활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나는 선생의 장려를 받아 성취되었으니 부모와 천지의 은혜보다도 더한데 선생이 별세하니, 태산이 무너진 듯 대들보가 꺾인 듯하여 의귀(依歸)할 곳이 없다.
남기신 경계 말씀을 엎드려 생각하니 감히 어길 수가 없으나, 묘도에 게시하여 후세에 알리는 것을 또한 안 할 수 없으므로 그 대략을 기록하고 이에 대한 말을 붙인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질서가 있었으며, 장성하여서는 더욱 함양하고 결점을 고쳐 나갔다. 중년 이후로는 부귀공명을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 탐구에 힘써서 미묘한 진리를 환히 꿰뚫어 충적(充積)하고 발양하여 사람들이 측량할 수가 없었는데, 선생은 겸허하고 공손하시어 마치 아무것도 없는 듯이 하였다. 날마다 공부를 새롭게 하고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여 그치지 않았다.
출처와 거취의 문제에 있어서는 때를 보고 의리를 헤아려 자신의 마음에 편안한 바를 추구하고 또한 끝내 굽히지 않았다. 그 논저는 반복하고 무궁하며 광명하고 위대하여 한결같이 순수하게 정도(正道)에서 나왔으니, 저 공맹(孔孟)과 정주(程朱)의 말씀으로 헤아려 봄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적다. 선생 역시 천지에 세워도 어그러지지 아니하고 귀신에게 질정하여도 의심이 없다고 이를 만하니, 아, 훌륭하다.
선생은 재취하였다. 먼저는 모군(某郡) 허씨(許氏)에게 장가들었는데 그는 진사 허찬(許瓚)의 따님으로 두 아들을 생산하였으며, 뒤에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봉사 권질(權礩)의 따님이니, 모두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아들은 장자 준은 봉화 현감(奉化縣監)이고, 채(寀)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손자는 셋인데, 안도(安道)는 신유년 생원이고, 다음은 순도(純道)와 영도(詠道)이다. 딸은 둘인데 장녀는 선비인 박려(朴欐)에게 시집갔다. 측실의 아들로는 적(寂)이 있다.


 

[주D-001]성균 진사(成均晉士) : 진(晉)은 본디 진(進) 자이나 고봉 자신의 아버지 이름자가 진(進)이므로 휘(諱)하여 뜻과 음이 같은 진(晉) 자로 쓴 것이다.
 
중종 31년 병신(1536,가정 15)
 1월24일 (경진)
사헌부가 의령에 새로운 관원의 파견과 안현의 추고를 건의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지금 안현(安玹)이 아뢴 것을 보니, 의령(宜寧)의 토호(土豪) 정은견(鄭銀堅) ·정승희(鄭承熙)·강득수(姜得壽)·남세필(南世弼)·허찬(許瓚)·이충영(李忠榮)·옥지형(玉之珩)·설확(薛確)·정옥견(鄭玉堅)·정승아(鄭承雅)·철문(哲文)·돌산(乭山)·산중(山中)·돌시(乭屎) 등은 형을 받고 물고(物故)되었으나 곤장을 참으면서 승복하지 않기도 하고 승복하기도 하고 도망하기도 하여 절반도 추문하지 못했다고 하니, 철저히 규명하여야 합니다. 더구나 관속인(官屬人)의 자손들을 추쇄(推刷)하는 일은 아직 거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불가불 다시 다른 관원(官員)을 보내어 추문을 마친 뒤에 추쇄한 노비(奴婢)의 장적을 만들어 올려보내게 해야 합니다. 바라건대 원주(原州)의 예(例)에 따라 다른 관원을 택차(擇差)하여 어사(御史)로 결함(結銜)해서 빨리 내려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또 안현의 병이 가벼운지 위중한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식한 조관(朝官)으로서 명을 받들고 나와 담당한 일을 마치지 못했으면 병이 위독하다 하더라도 한 번쯤은 계달(啓達)하여 조정의 명을 기다렸어야 합니다. 이제와서 며칠 사이에 번거로이 치계(馳啓)하여 올라오게 할 것을 바랐습니다. 옛 사람은 죽어가면서도 왕명을 계달한 자가 있었는데 남의 신하된 자가 의리상 어찌 이러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폐단은 그 시초를 열어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계달하는 말에는 반드시 규범이 있는 법인데 돌아가기를 구하는 사연에 모만(冒慢)스런 말이 많아 매우 경악스럽습니다. 전지를 받들어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원전】 17 집 634 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정론-간쟁(諫諍) / *신분-양반(兩班) / *신분-천인(賤人) / *신분-중인(中人)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사법-탄핵(彈劾)


[주D-001]추쇄(推刷) : 부역(賦役) 또는 병역(兵役)을 기피한 자와 상전(上典)에게 의무를 다하지 않고 다른 지방으로 도망한 노비(奴婢)를 모두 찾아내어 본고장으로 돌려보내는 것
 퇴계집 ( 退溪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退溪先生文集(原集)
판심제  退溪先生文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843年刊
권책  目錄 2권, 原集 49권, 別集 1권, 外集 1권, 年譜 4권 합 30책
행자  10행 18자, 연보는 10행 20자
규격  21.3×17.3(㎝)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古3428-482
총간집수  
권수제  退溪先生續集(續集)
판심제  退溪先生續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764年頃刊
권책  目錄, 續集 8권 4책
행자  10행 18자
규격  20.2×17.3(㎝)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3601
총간집수  
권수제  退溪先生文集攷證(文集攷證)
판심제  退溪先生文集攷證
간종  목판본
간행년  1891年刊
권책  8권 4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0.3×16.8(㎝)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811.97이황-퇴-유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29~31
 저자
성명  이황(李滉)
생년  1501년(연산군 7)
몰년  1570년(선조 3)
 景浩
 退溪, 陶山
본관  眞寶
시호  文純
특기사항  文廟 및 宣祖의 廟庭에 배향
 가계도
 李繼陽
 
 李埴
 進士
 義城金氏
 正郞 金漢哲의 女
 李潛
 忠順衛
 權錘의 女
 
 李河
 訓導
 朴華의 女
 
 女
 
 辛聃
 
 春川朴氏
 司正 朴緇의 女
 李瑞麟
 未冠早卒
 李漪
 早卒
 李旱雨의 女
 
 李瀣
 大司憲
 온계일고(溫溪逸稿)
 金復興의 女
 
 李澄
 察訪
 琴致韶의 女
 
 李滉
 
 金海許氏
 進士 許瓚의 女
 李寯
 縣監
 李寀
 
 安東權氏
 奉事 權礩의 女
 側室
 
 李寂
 
 李堣
 參判, 松齋
 송재집(松齋集)

기사전거 : 墓碣銘(奇大升 撰), 墓誌銘(朴淳 撰, 思菴集 卷4), 李埴行狀草 (李滉 撰), 先妣朴氏墓碣識 (李滉 撰) 등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연산군 7 1501 신유 弘治 14 1 11월 25일, 禮安縣 溫溪里에서 태어나다.
연산군 8 1502 임술 弘治 15 2 6월, 부친 贊成公의 상을 당하다.
중종 7 1512 임신 正德 7 12 숙부 松齋 李堣에게 「論語」를 배우다.
중종 16 1521 신사 正德 16 21 進士 許瓚의 딸과 혼인하다.
중종 22 1527 정해 嘉靖 6 27 가을, 경상도 鄕試에 응시하여 진사시와 생원시에 모두 합격하다. ○ 11월, 부인 許氏가 졸하다.
중종 23 1528 무자 嘉靖 7 28 봄, 進士 會試에 합격하다.
중종 25 1530 경인 嘉靖 9 30 奉事 權礩의 딸과 혼인하다.
중종 27 1532 임진 嘉靖 11 32 문과 별시 초시에 합격하다.
중종 28 1533 계사 嘉靖 12 33 성균관에 유학하다. ○ 가을, 고향으로 내려오다. 도중에 驪州에서 慕齋 金安國을 뵙다.
중종 29 1534 갑오 嘉靖 13 34 3월, 式年文科에 乙科로 급제하다. ○ 4월, 承文院權知副正字가 되다. 예문관 검열에 천거되었으나 장인 權礩이 安處謙 獄事의 연루자 權磌의 형이라는 이유로 체직되다. ○ 6월, 正字에 오르다. ○ 10월, 著作이 되다. ○ 12월, 博士가 되다.
중종 30 1535 을미 嘉靖 14 35 6월, 호송관에 차임되어 東萊로 倭奴를 호송하다.
중종 31 1536 병신 嘉靖 15 36 6월, 典籍이 되다. ○ 9월, 호조 좌랑이 되다.
중종 32 1537 정유 嘉靖 16 37 10월, 모친 朴氏의 상을 당하다. ○ 12월, 溫溪 樹谷에 모친을 장사 지내다. 여막에 있으면서 讀書錄인 戊戌日課를 저작하다.
중종 34 1539 기해 嘉靖 18 39 12월, 수찬이 되다.
중종 35 1540 경자 嘉靖 19 40 1월, 정언이 되다. ○ 3월, 승문원 校檢을 겸하다.○ 4월, 지제교가 되다. 지평이 되다. ○ 6월, 형조 좌랑이 되다. ○ 7월, 副司直이 되다. ○ 9월, 부교리가 되다. ○ 10월, 교리가 되다. 이후 누차 경연에 입대하다. ○ 12월, 정언을 겸하다.
중종 36 1541 신축 嘉靖 20 41 3월, 경연에 입대하다. ○ 賜暇讀書하다. ○ 4월, 지평이 되다. ○ 5월, 수찬이 되다. ○ 咨文點馬의 일로 義州에 가다. ○ 9월, 경기도 災傷御史로 나가다. ○ 10월, 세자시강원 문학을 겸하다. ○ 11월, 지평이 되다. ○ 12월, 형조 정랑이 되다.
중종 37 1542 임인 嘉靖 21 42 2월, 부교리가 되다. ○ 3월, 검상이 되고 이어 御史에 제수되어 충청도의 흉년구제상황을 조사하고 4월에 복명하다. ○ 5월, 舍人이 되다. ○ 8월, 災傷御史가 되어 강원도에 가다. 關東日錄을 짓다. ○ 12월, 장령이 되다.
중종 38 1543 계묘 嘉靖 22 43 1월, 丹城에서 上京하는 길에 安陰에 들러 丈人 權礩을 뵙다. ○ 2월, 병으로 사직하다. 다시 장령이 되고 이어 典設司 守로 옮기다. ○ 「朱子全書」의 교정을 계청하다. ○ 7월, 성균관 司藝가 되다. ○ 8월, 사간이 되었으나 병으로 취임하지 못하고 이어 司僕寺 僉正이 되다. ○ 10월, 司成이 되다. ○ 11월, 禮賓寺 副正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중종 39 1544 갑진 嘉靖 23 44 2월, 교리에 제수되어 상경하다. ○ 4월, 장령이 되다. ○ 6월, 병으로 사직하다. 高城 郡守를 희망하였으나 이루지 못하다. 종친부 典籖이 되다. ○ 7월, 狎鷗亭에서 독서하다. ○ 8월, 응교가 되다.
인종 1 1545 을사 嘉靖 24 45 2월, 〈國恤服製議〉를 찬진하다. ○ 6월, 응교가 되다. ○ 7월, 仁宗이 승하하고 明宗이 즉위하다. ○ 錦湖 林亨秀와 함께 제술관에 뽑히다. ○ 상소하여 倭의 강화요청에 대하여 허락하기를 청하다. ○ 8월, 通禮院 相禮가 되다. ○ 9월, 다시 典翰이 되다. ○ 10월, 李芑의 계청에 따라 삭직되었으나, 다시 직첩이 환수되다. ○ 司僕寺 正이 되다. ○ 11월, 영접도감 낭청이 되다.
명종 1 1546 병오 嘉靖 25 46 3월, 말미를 내어 하향하여 장인 權礩의 장사를 치르다. ○ 5월, 병으로 상경하지 못하여 해직되다. ○ 7월, 부인 權氏가 졸하다. ○ 8월, 교서관 교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홀로 孤山을 유람하다. ○ 11월, 禮賓寺 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退溪의 동쪽 바위에 養眞庵을 짓다.
명종 2 1547 정미 嘉靖 26 47 3월, 月瀾庵에 머물다. ○ 5월, 聾巖 李賢輔의 초대로 簟巖을 유람하다. ○ 7월, 安東 府使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8월, 응교가 되어 조정으로 돌아가다. ○ 9월, 朝講에 입시하다. ○ 12월, 병으로 사직하고 다시 儀賓府 經歷이 되다.
명종 3 1548 무신 嘉靖 27 48 1월, 外職을 구하여 丹陽 郡守가 되다. ○ 2월, 아들 李寀의 상을 당하다. ○ 5월, 龜潭을 유람하다. ○ 11월, 豐基 郡守가 되다.
명종 4 1549 기유 嘉靖 28 49 白雲洞書院에서 강학하다. ○ 2월, 향교에서 釋奠을 행하다. ○ 4월, 小白山을 유람하다. ○ 9월, 병으로 사직하다. ○ 12월, 監司에게 白雲洞書院의 사액과 書籍의 頒賜를 위한 계문을 요청하다. ○ 세 번이나 감사에게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회답이 없자 그대로 귀향하다.
명종 5 1550 경술 嘉靖 29 50 1월, 마음대로 임소를 이탈한 것에 대하여 告身 二等을 추탈당하다. ○ 2월, 처음으로 退溪의 서쪽에 거처를 정하고 寒栖庵을 짓다. ○ 4월, 光影塘을 파다. ○ 8월, 兄 李瀣가 李芑의 무함을 받고 유배 도중 졸하니 竹嶺으로 가서 迎柩하다.
명종 6 1551 신해 嘉靖 30 51 11월, 33인의 廉謹人 선발에 들다.
명종 7 1552 임자 嘉靖 31 52 臨江寺로 聾巖 李賢輔를 방문하다. ○ 4월, 교리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올라가다. ○ 5월, 경연에 입시하다. 執義가 되다. ○ 6월, 부응교가 되다. ○ 7월, 대사성이 되다. ○ 11월, 병으로 사직하고, 상호군이 되다.
명종 8 1553 계축 嘉靖 32 53 4월, 대사성이 되다. ○ 6월, 金浦의 屬公田을 學田으로 하사받다. ○ 7월, 병으로 사직하고 부호군이 되다. ○ 9월, 상호군이 되다. ○ 10월, 鄭之雲의 〈天命圖〉를 改訂하다.
명종 9 1554 갑인 嘉靖 33 54 5월, 형조 참의가 되다. ○ 6월, 병조 참의가 되다. ○ 7월, 周世鵬을 곡하다. 盧守愼에게 편지를 보내 〈夙興夜寐箴註解〉를 논하다. ○ 景福宮에 새로 지은 건물의 편액을 쓰다. ○ 「延平答問」의 발문을 쓰다. ○ 9월, 상호군이 되다. ○ 11월, 첨지중추부사가 되다. ○ 12월, 〈景福宮重修記〉를 찬진하다.
명종 10 1555 을묘 嘉靖 34 55 2월,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다. 상호군이 되다. ○ 첨지중추부사가 되다. ○ 6월, 聾巖 李賢輔를 곡하다. ○ 겨울, 淸凉山에 들어가 달을 넘기고 돌아오다.
명종 11 1556 병진 嘉靖 35 56 5월, 부제학이 되었으나 사직하여 체차되다. ○ 6월, 첨지중추부사가 되다. 「朱子書節要」가 완성되다. ○ 8월, 제자들에게 朱子書를 강의하다. ○ 9월, 溪南書齋를 세우다. ○ 12월, 鄕約의 초안을 완성하다.
명종 12 1557 정사 嘉靖 36 57 3월, 丹砂를 유람하고 書堂의 건립지를 찾아보다. ○ 4월, 太紫山을 유람하고 大方洞을 찾다. ○ 7월, 「啓蒙傳疑」가 완성되다.
명종 13 1558 무오 嘉靖 37 58 3월, 滄浪臺(후에 天淵臺로 개명)를 건립하다. ○ 4월, 鰲潭을 유람하고 禹倬의 서원건립처를 물색하다. ○ 5월, 自省錄을 완성하다. ○ 6월, 魚得江 詩集의 발문을 쓰다. ○ 윤7월,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는 비답을 내리자 상경하다. ○ 10월, 대사성이 되다. ○ 11월, 병으로 사면하고 상호군이 되다. ○ 12월, 공조 참판이 되다.
명종 14 1559 기미 嘉靖 38 59 2월, 말미를 내어 고향으로 내려와 焚黃하다. ○ 3월, 배를 타고 귀향하는 도중 龜潭에서 李之蕃, 丹陽 郡守 黃俊良과 함께 유람하다. ○ 7월, 사직하여 공조 참판에서 체차되어 동지중추부사가 되다. ○ 9월, 「古鏡重磨方」이 완성되다. ○ 12월, 「宋季元明理學通錄」의 편찬을 시작하다.
명종 15 1560 경신 嘉靖 39 60 1월, 南冥 曺植의 頭流錄에 발문을 쓰다. ○ 11월, 高峯 奇大升에게 답서하여 四端七情에 대하여 논변하다. ○ 陶山書堂이 낙성되다. ○ 12월, 召命을 받다.
명종 16 1561 신유 嘉靖 40 61 1월, 召命을 받고 부임하려다 말에서 떨어져 병으로 사직하다. ○ 3월, 節友社를 건립하다. ○ 秋巒 鄭之雲을 조문하다. ○ 4월, 濯纓潭을 유람하다. ○ 11월, 〈陶山記〉를 짓다.
명종 17 1562 임술 嘉靖 41 62 9월, 「近思錄」을 강의하다.
명종 18 1563 계해 嘉靖 42 63 3월, 錦溪 黃俊良을 곡하다. ○ 4월, 편지로 奇大升과 出處之義에 대하여 논하다.
명종 19 1564 갑자 嘉靖 43 64 4월, 諸生과 淸凉山을 유람하다. ○ 6월, 風月潭을 유람하다. ○ 7월, 紫霞峯을 유람하다. ○ 9월, 靜菴 趙光祖의 행장을 짓다.
명종 20 1565 을축 嘉靖 44 65 4월, 동지중추부사를 사직하니 윤허하다. ○ 諸生과 朞三百의 산법과 律呂의 법에 대하여 연구하다. ○ 8월, 雲巖寺를 유람하며 易東書院의 건립처를 물색하다. ○ 「易學啓蒙」을 강의하다. ○ 景賢錄을 개정하다. ○ 12월, 「心經」을 강의하다. ○ 특명으로 다시 동지중추부사가 되다.
명종 21 1566 병인 嘉靖 45 66 1월, 召命으로 榮川까지 갔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豐基에서 대명하다. ○ 2월, 임금이 內醫를 보내 문병하다. ○ 공조 판서가 되어 사직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다. 鶴駕山으로 들어가다. ○ 3월, 兩館의 대제학을 겸하다. ○ 4월, 동지중추부사가 되다. ○ 5월, 溪莊으로 돌아가 海州本 「朱子書節要」를 개정하다. ○ 10월, 晦齋 李彥迪의 행장을 짓고 문집을 교정하다. ○ 12월, 朱子書를 강의하다.
명종 22 1567 정묘 隆慶 1 67 5월, 召命을 받고 상경하다. ○ 6월, 都城에 들어오다. ○ 明宗이 승하하다. ○ 7월, 大行王行狀修撰廳 당상이 되어 明宗의 행장을 찬하다. 예조 판서가 되다. ○ 8월,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다. ○ 10월, 大護軍이 되다. 지중추부사가 되다.
선조 1 1568 무진 隆慶 2 68 8월, 양관 대제학이 되었으나 사직하여 체차되고 판중추부사가 되다. ○ 9월, 康陵에서 獻官으로 치제하다. 實錄撰集都廳堂上이 되다. ○ 11월, 홍문관에서 〈西銘〉을 교정하다. ○ 12월, 〈聖學十圖〉를 올리다.
선조 2 1569 기사 隆慶 3 69 1월, 이조 판서가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 다시 판중추가 되다. ○ 2월, 慕義殿에 치제하다. ○ 文昭殿儀軌를 상고하고 廟圖를 올리다. ○ 우찬성이 되었으나 사직하여 체차되다. ○ 3월, 판중추부사가 되다. ○ 陶山으로 돌아오다. ○ 4월, 〈聖學十圖〉가 간행되다.
선조 3 1570 경오 隆慶 4 70 1월, 치사를 청하는 箋을 올리다. ○ 3월, 다시 箋을 올려 치사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 5월, 易東書院에서 제생과 모이다. ○ 7월, 易東書院에서 「心經」을 강의하다. ○ 8월, 易東書院이 낙성되다. ○ 9월, 箋을 올려 치사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 다시 陶山으로 가서 「啓蒙」과 「心經」을 강의하다. ○ 10월, 高峯 奇大升에게 편지를 보내 心性情圖를 논하다. ○ 11월, 기대승에게 편지를 보내 致知格物說을 개정하다. ○ 12월 8일, 卒하다. ○ 영의정에 추증되다.
선조 4 1571 신미 隆慶 5 - 3월, 禮安 搴芝山의 南麓에 장사 지내다.
선조 6 1573 계유 萬曆 1 - 8월, 유생들이 상소하여 문묘종사를 청하다. ○ 상이 문집의 인출을 명하다. ○ 11월, 伊山書院에 위판을 봉안하다.
선조 7 1574 갑술 萬曆 2 - 봄, 陶山의 남쪽에 書院을 건립하다. ○ 2월, 유생들이 상소하여 문묘종사를 청하다.
선조 8 1575 을해 萬曆 3 - 여름, 書院이 낙성되자 ‘陶山書院’이라 사액되다.
선조 9 1576 병자 萬曆 4 - 2월, 陶山書院에 위판을 봉안하다. ○ 廬江書院에 위판을 봉안하다. ○ 4월, 유생들이 상소하여 문묘종사를 청하다. ○ 12월, ‘文純’의 시호가 내리다.
선조 29 1596 병신 萬曆 24 - 윤8월, 誌石을 묻다.
선조 33 1600 경자 萬曆 28 - 5월, 陶山에서 문집이 간행되다. (趙穆의 文集告成文)
광해군 2 1610 경술 萬曆 38 - 5월, 館學 및 팔도 유생, 臺諫, 政府가 차례로 글을 올려 五賢(金宏弼, 鄭汝昌, 趙光祖, 李彥迪, 李滉)의 문묘종사를 청하다. ○ 9월, 宣祖의 廟庭에 배향되다.

기사전거 : 年譜(柳成龍 撰), 退溪先生年譜補遺(李野淳 撰, 丁淳睦 譯 退溪學報 連載),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는 평소에 자신의 저작을 매우 유의하여 정리해 놓았던 듯하다. 생전에 自省錄이라는 책을 편집한 것이라든지, 1807년에 후손 李野淳이 편찬한 「退溪先生年譜補遺」의 범례에 선생의 文集, 逸集, 雜錄, 手本, 日記, 來歷, 草記 등에 의하여 추보하였다고 한 사실, 1869년 이른바 「陶山全書」를 편찬할 때 陶山書院의 光明室에 소장되어 있던 「退陶集」, 「退溪先生集」,「先生文集草本」,「文集草本」, 「退溪先生文集拾遺」 등을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은 저자의 저술의 잘 보전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생전부터 잘 보전된 유문에 대한 정리는 저자가 몰한 직후인 1571년부터 시작되었다. 저자의 高弟인 月川 趙穆을 중심으로 그의 제자들은 1571년부터 易東書院에 모여 유문을 정리하는 한편, 각처에 있던 제자들은 각자 정리한 초고를 易東書院으로 보내왔다. 그리고 1573년(선조 6)에는 宣祖가 柳成龍 등의 요청에 따라 「退溪集」을 校書館에서 印出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따라 1578년(선조 11)에 저자의 손자인 李安道가 어느 정도 정리된 草稿를 가지고 서울로 왔으며, 이 초고는 在京門徒 柳成龍을 중심으로 乙覽을 위한 編輯 및 校正, 그리고 淨寫가 진행되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완성되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乙覽 계획도 무산되었다.
이후의 편집은 대개 禮安에 있던 趙穆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月川年譜 甲申年(1584)條에 의하면 9월에 「退溪先生文集」을 裒集하였다고 하였으며, 柳雲龍의 연보에서도 같은 해 9월 陶山書院에서 모여 「退溪先生文集」을 교정하였다고 하였고 그 밑의 각주에 당시 참여자인 趙穆, 琴應壎, 權宇, 金澤龍, 金垓, 洪汝栗 등의 성명이 실려 있다. 이때에 대략 초고의 편집이 완성되고 草本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草本의 교정과 편찬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鶴峯 金誠一이 1586년(선조 19)경 趙穆에게 보낸 편지(鶴峯集 續集 권4, 23판)를 보면, 문집의 草本이 趙穆을 중심으로 琴應壎, 琴應㚒 등에 의해 일단락되었다는 위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초본은 저자의 모든 저작을 수록하였으며, 심지어 手錄本의 詩稿에서 저자가 산절한 것까지도 別集 등으로 편차하여 이 草本에 편입하였다.
이렇게 문집의 草本이 완성된 후 유성룡은 1586년 조목에게 편지(西厓集 권10, 14판)를 보내어 “편집 원칙은 次第가 분명해야 하고 상세하고 간명한 것이 모두 적당해야 합니다”.라고 하며 删節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1587년(선조 20) 5월에 趙穆, 柳雲龍, 金誠一이 廬江書院에서 모였다. 그러나 이 회합에 柳成龍이 참석하지 않아 删節에 대한 분명한 방향이 정해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모임에서는 문집의 草本에 대한 校正의 方案과 分擔이 결정된 것으로 보이며, 删節이 결정된 것은 같은 해 8월 屛山의 會合에서였다. 이때 산절에 부정적인 趙穆과 산절을 주장한 柳成龍의 대립을 金誠一이 仲裁하여 일단 유성룡의 의견에 따라 산절을 하기로 결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柳成龍은 1588년(선조 21) 초까지 산절을 모두 마쳤으며, 이를 다시 繕寫하여 中草本을 만드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 중초본의 작성은 유성룡의 주관하에 진행되었고, 이해 6월 15일에는 병산에서 중초본에 대한 교정 및 편집회의가 열렸으며, 대개 유성룡을 중심으로 교정을 진행하여 조속히 간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물론 유성룡의 산절본으로 중초본이 작성되는 것에 반대한 趙穆은 참여하지 않았으며, 禹性傳과 같이 선생의 片言隻字라도 버려서는 안된다는 全稿收錄의 원칙을 견지하는 門徒도 상당수 있었다. 그리고 이해 10월 柳成龍이 형조 판서에 제수되어 入京하자 그를 따라 서울에서 중초본의 작업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중초본의 작성은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기축옥사로 인하여 지지부진해진 것으로 보이며, 1592년 임진왜란 이후에는 완전히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본집의 간행은 1600년에 陶山書院에서 趙穆의 主導로 이루어졌다. 조목의 〈文集告成文〉에 의하면 기해년(1599) 봄부터 여러 동지와 함께 開刊을 의논하였다고 하여 간행을 위한 준비를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목은 유성룡이 산절한 中草本을 무시하고 산절되지 아니한 草本으로 간행하였다. 이는 유성룡이 1606년경 李好閔에게 보낸 편지(西厓集 別集 권3, 23판)를 보면 알 수 있는데, “宣城人(趙穆을 가리킴)이 갑자기 草本으로 板刻할 줄은 몰랐다.”고 하여, 조목이 유성룡의 中草本이 아닌 자기가 편집한 草本을 바탕으로 간행하였으며, 간행에서 유성룡이 배제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초간본인 庚子本이다. 《庚子初刊本》이 본은 현재 玉山書院 및 계명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이 경자본이 간행되자마자 유성룡을 중심으로 改刊이 의논되었다. 위의 이호민에게 보낸 편지에는 또 “평소에 이 문집을 펴볼 때마다 개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 힘이 다 쓰고 버린 빗자루 같아서 개간할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하여, 경자본에 대한 불만을 강력하게 토로하고 있다. 이러한 개간 의도는 우선 경자본을 교정하는 일로 표현되었는데, 柳成龍의 제자인 鄭經世 등이 이를 교정하기도 하였지만, 실제로 改刊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庚子本 이후의 본집의 간행은 모두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크게 두 가지 계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庚子本이 간행된 직후에 庚子本에서 발견된 오류를 교정하여 그 교정부분만을 改刻하거나, 교정이 어느 정도 완료된 후 전체를 다시 판각한 庚子本類이다. 庚子本補刻本, 擬庚子本, 庚子本覆刻本 등으로 불리우는 이런 본은 경자본이 간행된 1600년에서 멀지않은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서, 본집이 어느 정도 완전한 본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생성된 과도기적 성격을 가진 板本으로 보인다. 따라서 修正이 상당부분 진행된 경자본복각본을 제외하고는 그 유포도 비교적 넓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한 「退溪全書」의 일부는 이 경자본복각본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둘째는 重刊本類이다. 중간본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이른바 “中本”으로서 그 실체가 분명하지 아니한 것과 甲辰本(1724년)과 癸卯本(1843년)이 그것이다.
丁丑補刻本(1817년)의 刻板日記에 李頤淳이 쓴 〈題文集改刊日記後〉(後溪集 권7)에 의하면 “선생의 文集은 여러 번 刊板되어 모두 세 가지 本이 있게 되었다. 初本은 萬曆 庚子年(1600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이는 年譜의 文集告成文을 보면 알 수 있다. 中本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그리고 英廟 甲辰年(1724)간에 傍祖인 三嘉公이 洞主로서 다시 刊板하였는데 당시의 일기가 本家에 있다고 하며 이 본이 현재 통행되는 본이다.”라고 하여 中本은 그 판본의 존재에 대해서만 언급하였을 뿐 그 간행의 시기나 경위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다고 하여 당시에도 이미 그 본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甲辰本은 위의 李頤淳의 글에서도 나타나듯 英祖 甲辰年(1724)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 본은 庚子本의 체계를 그대로 이어받은 본으로서, 처음으로 頭註가 添刻되었다. 현재 전존된 본 중 상당수가 이 갑진본인 것을 보면 많은 숫자가 쇄출되었으며, 유포도 매우 넓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板木의 마모에 따라 補刻도 수시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甲辰重刊本》
그리고 이 甲辰本에 대대적으로 補刻된 경우가 있었는데 위의 先祖文集改刊日記가 바로 그때의 경위를 기술한 것이다. 즉 정축년인 1817년에 대략 전체의 10분의 1에 달하는 200판 정도가 補刻되었다. 이때 廣瀨 李野淳의 箚疑 100여 조 등을 頭註로 첨각하였는데, 새로 刻板한 것이 아닌 舊板에 頭註를 첨각할 때는 板頭에 나무를 대고 철판을 붙이는 등 견고하게 하려고 하였지만 이미 많은 부분이 떨어져 나가 오래 보전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 200판의 보각은 극히 불량한 부분을 대상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重刊이 불가피한 형편이었던 것이다. 《甲辰重刊補刻本》
癸卯本은 정축보각본 이후 26년 만인 1843년에 간행된 중간본이다. 이 본의 간행 경위에 대하여는 「退溪先生文集重刊時日記」(李謙魯 所藏)가 있어서 상세하게 알 수 있다. 이 본은 癸卯校正重刊本이라고도 불리는데 嶺南의 전체 士林이 완정한 본을 만들기 위해 교정 등 여러 가지 노력을 경주하였고 실제로 문집도 이전본에 비하여 일신되었다. 이 본은 甲辰本처럼 頭註가 첨각되었으며 전체적으로 板式이 嚴格하고 字體도 楷正하여 당시의 노력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계묘본은 원집 49권, 별집, 외집, 연보 4권의 30책으로 간행되었는데, 연보에는 憲宗 5년(1839)에 내린 致祭文까지를 수록하고 있다. 《癸卯重刊本》 현재 규장각(古3428-482),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1091a) 등에 소장되어 있다.
續集은 저자의 후손 李守淵이 도산서원에 소장된 拾遺를 바탕으로 자신이 10여 년간 수집한 저작을 더하여 1764년에 편찬한 것이다. 그의 발문을 보면 속집의 편찬은 간행을 위한 것이 아니라 후손으로서 보존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 편자인 이수연이 간행까지 간여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續集의 간행에 대해서는 다른 정확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1788년경 편찬이 완료된 文集考證에 續集도 포함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1764년에서 멀지 않은 시기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속집 초간본》 현재 규장각(奎3601)에 소장되어 있다.
文集攷證은 1891년에 柳建鎬가 간행한 것이다. 처음에 柳道源(1721~1791)이 자신의 隨錄과 洪汝河(1621~1678)가 詩卷에 隨記한 訓解, 그리고 金江漢이 書簡부분을 주석한 溪集考證을 합하여 1788년 정리 편집하였다. 이후 그의 현손인 柳建鎬가 저자의 후손 李野淳이 隨記한 要存錄을 각 권말에 첨부하여 1891년에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다.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811. 97이황-퇴-유)에 소장되어 있다.
이 외에도 저자의 모든 시문을 수집하여 정리한 寫本인 「退溪先生全書」가 3種이 있는데 樊南本과 上溪本, 下溪本으로서 이 중 下溪本은 아직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樊南本은 1869년 저자의 후손 癡翁 李彙溥 (1809~1869)가 禮安의 유림과 함께 陶山書院의 光明室에 소장된 문집 초본을 바탕으로 전존된 저자의 모든 詩文을 수집 정리한 것이다. 이때 광명실에 소장되어 있던 초본을 보면, 최초의 초본이라고 하는 「退陶集」20책, 일명 中本으로 불리우는 「退溪先生集」 40책, 庚子本의 底本이라고 하는 「退溪先生文集」30책 및 「退溪先生手簡」2책, 「先生文集草本」1책, 「文集草本」2책, 「退溪先生集拾遺」12책 등이다. 가장 양적으로 풍부한 中本 즉 「退溪先生集」40책을 기준으로 삼아 여러 稿本 중 이 中本에 수록되지 않은 저작을 모두 遺集 13책으로 편차하였으며 李彙溥가 외부에서 수집한 것도 추가하였다. 따라서 전체는 目錄 1책, 逸書目錄 1책, 原集 66권 49책, 外集 1권 1책, 別集 2권 2책, 續集 8권 6책이고, 遺集은 卷次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의 13책이며 기타 편차가 분명하지 않은 잡저 2책으로 구성되어 있어 편찬이 완성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본집과 비교하면 대략 1000편 정도의 저작이 본집보다 많으며, 동일한 저작에 있어서도 1000여 군데 이상이 본집에서보다 더 첨가되어 있다고 한다. 이 75책은 경비를 전담한 李彙溥가 자신의 樊南家塾에 두었기 때문에 이를 樊南本이라고 한다. 이 본은 1980년 정신문화연구원에서 「陶山全書」로 영인 출간하였다.
上溪本은 1910년 이후에 후손들이 상기 樊南本을 저본으로 하여 재정리한 것으로 上溪의 光明室에 두었기 때문에 상계본이라고 한다. 이 상계본은 原集目錄 1책, 原集 66권 26책, 續集 8권 3책, 別集 1권 1책, 外集 1권 1책, 遺集 20권 6책으로서 모두 40책으로 정리된 것인데 이 중 몇 책은 전란으로 遺失되었다고 한다.
본서의 저본은 原集은 1843년 간행된 계묘중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고, 續集은 초간본으로 역시 규장각장본이며, 文集攷證은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이다.

기사전거 : 退溪先生文集과 退溪先生全書에 대하여(李源周, 退溪學譯註叢書), 退溪先生文集 刊行經緯 硏究(徐廷文, 北岳史論 3), 退溪學譯註叢書, 退溪全書(退溪學硏究院), 陶山全書(韓國精神文化硏究院), 退溪全書(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原集 49권, 別集 1권, 外集 1권, 年譜 4권, 續集 8권, 그리고 退溪先生文集攷證 즉 文集攷證 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原集의 권1~5는 詩이다. 권5에는 續內集이라는 副題가 卷首題의 아래에 붙어 있다. 저자가 自編한 것이 內集이며, 그것의 속편을 續內集으로 편차한 것으로 보인다.
詩는 대개 저작 연대순에 따라 편차되어 있는데, 권1은 1533년(중종 28, 33세)부터 1549년(명종 4, 49세)까지, 권2는 1551년(명종 6, 51세)부터 1559년(명종 14, 59세)까지, 권3은 동년인 1559년(명종 14, 59세) 가을부터 1564년(명종 19, 64세)까지, 권4는 1565년(명종 20, 65세)부터 1567년(명종 22, 67세)까지, 권5는 1568년(선조 1, 68세)부터 1570년(선조 3, 70세)까지의 작품이다.
권6~8은 公擧文이다. 권6에는 敎書 3편과 上疏 5편이, 권7에는 箚子, 經筵講義, 啓議가 있다. 그리고 권8에는 辭狀, 啓辭 및 일본과의 외교문서인 書契修答 3편이 있다. 敎書는 1558년 함경도 관찰사 李浚慶, 1542년 경상도 관찰사 李淸, 그리고 1547년 황해도 관찰사 權應挺에게 내린 것인데 편년하지 않은 것을 보면 대개 인물의 高下에 따라 편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上疏와 箚子는 대부분 1568년(선조 1) 및 1569년(선조 2)에 걸쳐 올려진 것으로서 선조 즉위 초에 누차 내려진 소명을 저자가 사양한 내용이다. 그중 〈聖學十圖箚〉는 어린 선조를 위하여 지어진 것으로 性理學을 그림으로 설명한 것이다. 經筵講義는 「周易」 乾卦와 〈西銘〉에 대한 것이다. 啓議는 文昭殿의 位次에 대한 것과 宣祖의 私親인 德興君을 大院君으로 추숭하자는 것에 대한 의논으로 모두 擬書이다. 辭狀과 啓辭는 모두 사직을 청하는 글인데 1549년 豐基 郡守를 사직하는 것으로부터 1570년 致仕를 요청하는 것까지 모두 51편이 실려 있다.
권9~40은 書이다. 분량으로 보아 대략 원집의 3분의 2를 상회하는, 따라서 본집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편지는 대략 90여 명에게 보낸 것이다. 이 書簡의 구성은 대략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李賢輔 등 官爵을 중심으로 편차한 권9의 한 권, 둘째는 曺植, 盧守愼, 成渾, 李珥, 奇大升 등 저자와 交遊한 인물에게 보낸 것을 편차한 권 10~19의 열 권, 셋째는 저자에게 직접 수학한 李楨, 趙穆, 鄭惟一, 金誠一, 柳成龍 등 弟子에게 보낸 것을 편차한 권21~39의 열아홉 권, 마지막으로 저자의 형 李瀣, 아들 李寯, 손자 李安道 등 가족에게 보낸 권41의 한 권이다. 편지는 모두 인물 중심으로 편차되었으며, 동일한 인물 내에서는 쓰여진 시기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이러한 편차는 기본적으로 인물에 대한 평가를 전제로 가능한 것이며, 이는 대개 본집의 편찬에 주도적 역할을 한 月川 趙穆 계열 문인들의 판단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서간문의 편차에 대하여는 西厓 柳成龍이 분명한 편찬 원칙을 제시하였는데 그 주된 내용은, 안부를 묻는 閑漫한 편지는 수록대상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것과 중복된 問目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西厓集 卷10, 與金士純書 및 答南義仲書) 그리고 이러한 원칙에 따라 서애가 초본을 산절하여 중초본을 만들었지만, 판각은 초본으로 되었다는 것은 이미 언급하였다. 그러나 문목의 경우 본 문집총간색인을 통해서 볼 때 중복된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아서 간행 전에 어느 정도 정리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편집의 방법에 있어 인물 중심의 편찬은 필연적으로 특정 주제를 대상으로 한 편지들에 대한 처리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본집에서는 이런 편지들은 대개 그와 관련된 인물의 아래에 수록하였다. 문목을 제외하고 타인의 글이 수록된 것은 奇大升의 편지가 유일하다. 저자가 奇大升과 四端七情에 대하여 논한 편지 아래에 있는 奇大升의 편지가 그것인데, 「兩先生往復書」에 수록된 것과 비교해 보면 본집에서는 논점과 관련이 없는 부분은 모두 산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권41은 雜著이다. 이 잡저는 저자의 학문적 경향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저작들이다. 〈天命圖說後敍〉는 鄭之雲의 〈天命圖說〉을 보고 지은 것으로서 朱子의 圖說과 비교하면서 太極, 理氣, 五行 등을 논한 글이며, 〈心經後論〉은 「心經」을 읽은 뒤에 쓴 것으로서 朱子의 心學이 陸象山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설파한 글이다. 〈心無體用辯〉은 心에 體와 用의 구분이 없다고 한 李球의 이론을 비판한 글이다. 그리고 〈遊小白山錄〉은 1549년 풍기 군수로 재임할 때에 소백산을 유람한 기행문이며, 〈伊山院規〉는 伊山書院의 교과 과정, 공부 방법 등을 규정한 서원 규칙이다.
권42는 序와 記, 권43은 跋, 권44는 箴銘, 表箋, 上樑文, 권45는 祝文과 祭文이다. 序에는 〈朱子書節要序〉, 〈啓蒙傳疑序〉 등 모두 5편의 서문이 있다. 저자는 1543년 43세 때에 처음으로 「朱子大全」을 접하고 그 책을 깊이 탐독하였다. 그는 특히 주자가 제자들에게 보낸 書簡文에 매료되어 이 「朱子書節要」를 편찬하게 되는데, 그 序文에 보면 성리학적 문제를 언급하면서도 현학적이거나 현실과 유리된 논리가 아닌 실제적이며 수용가치가 있는 것을 뽑고, 그 편지 중에서도 불필요한 부분을 과감하게 산절하여 그야말로 精髓만을 모은 것이라고 하였다. 〈鄕立約條序〉는 禮安縣의 鄕約을 직접 마련하고 그 취지를 밝힌 글이다. 記에는 伊山書院, 迎鳳書院, 易東書院에 대한 記文이 들어 있는데, 서원창설운동을 일으킨 저자의 書院觀이 나타난 글이다. 跋文은 書冊에 대한 것은 몇 편 되지 않고 詩帖, 題詠, 書帖, 屛風 등 記念物에 붙인 것이 대부분이다. 서책에 붙인 발문으로는 〈延平答問跋〉, 〈魚灌圃詩集跋〉, 〈傳道粹言跋〉, 〈養心堂集跋〉, 〈新刊啓蒙翼傳跋〉 등이 있다. 箴銘 중에 〈靜存齋箴〉은 李湛의 齋號인 ‘靜存’의 뜻을 풀어쓴 글이다. 表箋은 明 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글을 저자가 대신 지은 것, 임금의 誕日이라든지 冬至 등을 축하하는 것, 致仕를 청하는 것 등이다. 上樑文은 東宮의 資善堂과 思政殿에 대한 것이며, 祝文과 祭文에는 祈雨文, 祈雪文, 祈晴文, 告廟文과 서원에 올린 제문, 그리고 南景霖, 洪仁祐 등에 대한 제문이 실려 있다.
권 46~47은 墓碣誌銘이고 권48~49는 行狀이다. 墓碣誌銘은 저자의 先考 李埴, 先妣 義城金氏, 生母 春川朴氏, 叔父 李堣의 것을 시작으로 처외조부 文敬仝, 再娶 夫人의 父 權礩, 初娶 夫人의 父 許瓚 등 親姻戚에 대한 것과 柳成龍의 조부인 柳公綽, 朴承任의 모친인 禮安金氏, 洪仁祐의 부친인 洪德演 등 저자의 門人들의 선조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다. 行狀은 明宗을 비롯하여 李賢輔, 黃俊良, 趙光祖, 李彥迪, 權橃 등에 대한 것이다.
別集과 外集은 모두 詩로서 별집에는 254題 356首, 外集에는 98題 199首가 수록되어 있다. 이 詩가 왜 별집과 외집으로 편찬되었는지는 간행이 종료된 후 李埈이 그의 스승인 柳成龍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난다. 1600년(庚子)에 보내진 이 편지에는 “退陶의 詩 중에서 퇴계 자신이 手錄한 것은 약간 편뿐이며 그 나머지는 모두 刪節된 것입니다. 그러나 宣城人(趙穆)이 이미 删節된 것을 모아서 모두 文集에 수록하여 外集이라 하고 別集이라 하여 모두 三集을 만들었습니다.”(蒼石集 卷8, 上西厓先生)라고 하여 그 경위를 보여 주고 있다. 즉 저자가 이미 산절해 버린 詩를 다시 모아서 만든 것이라는 뜻이다. 별집을 살펴보면 원집과 같이 33세때부터 시작되며 59세까지의 시를 편년하고 간간이 저작 연대를 간지로 표기하였다. 그러나 외집에서는 저작 연도가 표시된 시가 한 편도 보이지 않는다. 또한 3판에 〈挽金綏之〉가 나오는데 5판에 〈寄題金綏之濯淸亭〉이 있어 編年도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같은 저자의 註로 판단됨에도 불구하고 12판의 〈出山明月…〉에는 自註라고 명시하였으나 다른 주석에는 그러한 표기가 없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위의 李埈이 산절한 것을 모았다고 말한 것은 별도로 편차할 것이라는 뜻의 別集으로 보이며, 외집은 內集의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內集이 저자의 초고를 바탕으로 편차한 것이므로 外集은 草稿 外에서 수집한 것을 편차한 것으로 보인다.
續集은 모두 8권이다. 편차는 원집의 그것을 그대로 준용하였으며, 특히 분량에 있어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書簡文의 편차는 원집의 그것을 그대로 잉습하였다. 권1~2는 詩, 권3~7은 書, 권8은 序ㆍ跋ㆍ碣銘ㆍ雜著이다. 속집에서도 분량에 있어 서간문의 비중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詩는 원집과 같이 저작 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그 時期도 역시 33세 이후의 것이 대부분이다. 권1은 첫 수와 15세에 지은 〈石蟹〉를 제외하고는 1533년(중종 28, 33세)부터 1548년(명종 3, 48세)까지 지어진 것이며, 권2는 1549년(명종 4, 49세)부터 1565년(명종 20, 65세)까지 지어진 것이다. 서간문의 배열도 원집의 배열을 그대로 준용하였다. 권3은 李浚慶, 李珥, 奇大升 등에게 보낸 것이고, 권4~6은 李楨, 趙穆 등 제자에게, 권7은 아들 李寯 및 손자 李安道에게 보낸 것이다. 권8에는 「理學通錄」과 自省錄의 서문이 있으며, 「伊洛淵源錄」의 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雜著에는 〈天命圖說〉이 실려 있는데 天命圖와 그 序文은 원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 〈天命圖說〉은 天命圖에 대하여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답변을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 질문은 天命의 뜻을 묻는 것으로부터 存養省察에 대한 질문까지 모두 열 개이다. 이 圖說의 末尾에는 月川 趙穆의 발이 있는데 그 내용은 이 도설이 1553년 서울에서 저자가 秋巒 鄭之雲과 함께 완성한 것이나 1555년 귀향한 후에 다시 많은 부분을 수정하였다는 내용으로, 이 도설에 있어서 저자의 역할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목 자신이 간행을 주관한 원집에 이 도설이 실리지 않은 것을 보면 당시에도 이미 저자의 저작 범위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鄭之雲의 天命圖說이 1640년경 이미 간행된 상황에서 續集에 이 圖說을 포함시킨 것은 본 속집이 편찬ㆍ간행될 당시의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이다.
끝에는 이 속집의 편찬자인 저자의 6대손 李守淵의 발문이 있다.
年譜는 모두 4권이다. 권1~2는 연대기이며, 권3~4는 부록이다. 연보는 柳成龍이 편찬한 것으로 저자의 宦歷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특히 1568년(선조 원년)부터 1569년까지 2년간의 기록이 매우 자세하다. 저자는 선조 원년 7월에 累召에 따라 입경하여 8월에 兩館 大提學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六條疏를 올리고 누차 경연에 입시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3월 夜對에서 사직을 허락받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연보에는 이 부분의 기사가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부록에는 言行總錄, 墓碣銘, 墓識 등과 祭文, 書院 奉安文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趙穆이 찬한 墓碣銘은 위의 연보에 비하여 주로 저자의 자질, 학문, 인품, 제자 양성 등 향촌에서의 활동에 치중하고 있으며, 특히 연보에서 중시한 환력에 대하여는 거의 서술하지 않고 있어 둘 사이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부록의 말미에는 柳成龍의 발문이 있다.
文集攷證은 모두 8권으로 그 순서는 原集, 別集, 外集, 續集으로 되어 있다. 범례에 의하면 物名 및 故事를 비롯하여 글자의 訛誤, 해당 저작과 관계된 저자의 이력, 관련 인물의 성명 및 이력 등 참고될 만한 것을 두루 수집하였다고 하였다. 실제로 내용을 살펴보면 표제어의 아래에 여러 가지 문헌에서 관련 구절을 추출하여 기록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權文海의 「大東韻府群玉」과 매우 흡사한 형태이다. 인용문헌은 李白, 杜甫, 蘇軾 등의 詩를 비롯하여 「一統志」, 「文選」, 「宋史」, 「老子」, 「莊子」 등 매우 다양한데 ‘史’, ‘古詩’와 같이 그 출전이 분명하지 아니한 것도 있다.

필자 : 辛承云

퇴계선생문집 제1권
 시(詩)
《도연명집(陶淵明集)》에 실린 음주에 화운하다

술 없으면 딱하게도 기쁨일랑 없나니 / 無酒苦無悰
술 있으면 이내 바로 그것을 마신다네 / 有酒斯飮之
한가해야 비로소 즐거움을 얻나니 / 得閒方得樂
즐거운 일 있거들랑 그때 바로 즐겨야지 / 爲樂當及時
훈훈한 저 바람이 만물을 고무시켜 / 薰風鼓萬物
무성한 아름다움 이제 이와 같구나 / 亨嘉今若玆
만물과 내가 함께 즐거움을 누리거늘 / 物與我同樂
가난하고 병든 것을 걱정할 것 있으리 / 貧病復何疑
저 세상 영화로움 내 어찌 모르랴만 / 豈不知彼榮
헛되고 헛된 이름 오래가기 어려워라 / 虛名難久持

나의 생각 닿는 곳 그 자리가 어드메뇨 / 所思在何許
하늘의 끝자락과 대지의 한 모퉁이 / 天涯與地隅
높고도 또 높아라 세상 소리 멀어지고 / 迢迢隔塵響
넓고도 또 넓어라 길은 마냥 이어지네 / 浩浩綿川塗
사람의 인생살이 아침 이슬 같은데 / 人生如朝露
희어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몰아대네 / 羲馭不停驅
손에 있는 녹기금은 / 手中綠綺琴
줄 끊어져 슬픔만 남아 / 絃絶悲有餘
오직 하나 잔 속에 채워진 이 술만이 / 獨有杯中物
외로운 이내 삶을 때때로 위로하네 / 時時慰索居

순 임금도 주 문왕도 오래 전에 세상 떠나 / 舜文久徂世
조양에는 봉새가 이르지 않는구나 / 朝陽鳳不至
상서로운 기린마저 이미 멀리 떠났으니 / 祥麟又已遠
말세는 어두워라 정신없이 취한 듯이 / 叔季如昏醉
낙양과 민중 땅을 멀리서 우러르니 / 仰止洛與閩
현인들이 비늘처럼 뒤이어 일어났네 / 群賢起鱗次
내 어이 때 늦고 외진 곳서 태어났나 / 吾生晩且僻
혼자선 귀한 본성 닦을 길을 모르겠네 / 獨昧修良貴
아침에 도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 / 朝聞夕死可
이 말씀 진실로 깊은 뜻이 있구나 / 此言誠有味

우리나라 예로부터 추로라 부르나니 / 吾東號鄒魯
선비들이 모두들 육경을 읽는다네 / 儒者誦六經
그것이 좋은 줄 모르는 이 없건마는 / 豈無知好之
어느 누가 이를 과연 성취해 내었는가 / 何人是有成
높이 뛰어났어라, 정오천이여 / 矯矯鄭烏川
목숨 바쳐 지키며 끝내 변치 않았네 / 守死終不更
뒤를 이은 점필재는 쇠한 사문(斯文) 일으켜 / 佔畢文起衰
도 구하는 선비들 그 문정에 가득했네 / 求道盈其庭
쪽빛에서 나온 청색 쪽빛보다 더 푸르니 / 有能靑出藍
김한훤과 정일두가 서로 이어 울렸네 / 金鄭相繼鳴
그들의 문하에서 섬겨 보지 못했으니 / 莫逮門下役
이내 몸 돌아보며 마음 상해 하노라 / 撫躬傷幽情

술 가운데 묘한 이치 있다고들 하지만 / 酒中有妙理
사람마다 반드시 다 얻지는 못한다네 / 未必人人得
취하여 고함치며 즐거움을 구하는 건 / 取樂酣叫中
그대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 아닌가 / 無乃汝曹惑
잠시 잠깐 거나하게 취기가 올라오면 / 當其乍醺醺
하늘과 땅 사이에 호연지기 가득차서 / 浩氣兩間塞
온갖 번뇌 풀어 주고 인색한 맘 녹이나니 / 釋惱而破吝
괴안국의 영화보다 훨씬 더 나으리라 / 大勝榮槐國
필경 이런 경지를 기다려야 할 것이니 / 畢竟是有待
바람 앞에 도리어 부끄러워 침묵하네 / 臨風還愧默


[주-001]희어(羲馭) : 요(堯) 임금 때에 희(羲)와 화(和)는 해[日]를 맡은 관직이므로, 여기서는 해를 희어(羲馭)라 하였다.
[주D-002]녹기금(綠綺琴) : 한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양왕(梁王)으로부터 하사받은 거문고이다.
[주D-003]낙양(洛陽)과 민중(閩中) : 낙양은 정자(程子), 민중은 주자(朱子)가 살던 곳이다.
[주D-004]추로(鄒魯) : 공자와 맹자가 살던 곳이다.
[주D-005]정오천(鄭烏川) : 정몽주(鄭夢周)가 오천군(烏川君)이다.
[주D-006]김한훤(金寒暄)과 정일두(鄭一蠹) : 김굉필(金宏弼)과 정여창(鄭汝昌)을 말한다.
[주D-007]괴안국(槐安國)의 영화 : 당나라 순우분(淳于棼)이 꿈에 대안국에 가서 남가 태수(南柯太守)가 되어 부귀를 누리다가 깨어 보니 괴목(槐木) 밑에 큰 개미굴이 있었다는 고사가 있다. 《異聞集》
[주D-008]이런 …… 것이니 : 《장자(莊子)》에 이르기를, “열자(列子)가 바람을 타고 공중에 다니다가 보름 만에 돌아왔다. 그러나 이것은 바람을 기다려서야 되는 것이다. 천지(天地)의 정기(正氣)를 타고 무궁(無窮)에 노는 성인(聖人)은 무엇을 기다림이 없이 소요(逍遙)하고 논다.” 하였다. 여기서는 성현(聖賢)은 술이 없이도 도의(道義)의 호기(浩氣)가 가득하다는 뜻이다.
퇴계선생문집 제2권
 시(詩)
봄날 한가히 지내면서 노두(老杜)의 시를 차운하여, 절구 여섯 수를 짓다

어제는 구름이 땅 위에 드리우더니 / 昨日雲垂地
오늘 아침 비내려 진흙을 적시었네 / 今朝雨浥泥
수풀을 틔워내어 들사슴 다니게 하고 / 開林行野鹿
버들가지 엮어서 뒤뜰의 닭을 막네 / 編柳卻園雞

산꽃이 어지러이 피어도 상관없네 / 不禁山花亂
길가의 풀마저도 오히려 어여쁜 걸 / 還憐徑草多
그 사람 기약두고 이르지 아니하니 / 可人期不至
이 옥빛 술동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 奈此綠尊何

물소리는 골짜기 어구를 삼키는데 / 水聲含洞口
구름 기운 산 허리를 감싸고 도는구나 / 雲氣帶山腰
조는 학은 모래톱에 가만히 서 있는데 / 睡鶴沙中立
놀란 듯 다람쥐는 나무 위로 오르네 / 驚鼯樹上跳

산속의 밭일망정 콩과 조가 잘 자라고 / 山田宜菽粟
약초 심은 밭에는 싹과 뿌리 무성해라 / 藥圃富苗根
북쪽의 징검다리 남쪽으로 통해 있고 / 北彴通南彴
새로 이룬 촌락은 옛 마을과 닿았구나 / 新村接舊村

나무꾼은 한가로이 골짝에서 나오고 / 樵人閒出谷
어린 새들 다투어 처마 끝에 깃들인다 / 乳雀競棲簷
조그만 집 마련하니 하윤과 같거니와 / 小閣同何胤
높이 솟은 누대는 송섬과는 다르구나 / 高臺異宋纖

푸르게 물든 것은 천 가지 버들이요 / 綠染千條柳
빨갛게 타는 것은 만 송이 꽃이러라 / 紅燃萬朶花
웅장하고 호방한 건 산꿩의 천성이요 / 雄豪山雉性
사치하고 화려한 건 들사람의 집이라네 / 奢麗野人家

[주C-001]노두(老杜) : 두보(杜甫)를 말한다. 두목지(杜牧之)는 소두(少杜)라 하였다.
[주D-001]조그만 …… 같거니와 : 양(梁)나라 처사(處士) 하윤(何胤)이 진망산(秦望山)에서 서당(書堂)을 지어 여러 제자를 가르치면서, 그 옆에 따로 작은 각(閣)을 바위 속에 만들고 거기서 거처하면서 자신이 손수 열었다 잠갔다 하며, 하인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주D-002]송섬(宋纎) : 진(晉)나라 처사인 송섬은 주천(酒泉) 남산(南山)에 숨어 살았는데, 태수 마급(馬岌)이 찾아갔으나 높은 누대에서 문을 잠그고 만나 주지 않았다 한다.
 

11.퇴계선생과 의령 가례마을 
 

우리 나라 대표적 유학자는 누구인가? 라고 물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퇴계 이황 선생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경남일보 창간 주필을 지냈던 위암 장지연 선생은 “바른 학문을 널리 알리고 후학들을 깨우침으로써 공자 맹자 정자 주자의 도를 환히 우리 동방에 밝힌 사람은 오직 퇴계 선생 한 분밖에 없다”라고 하면서 퇴계 선생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퇴계선생은 경상북도 안동 사람이다. 1501년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퇴계 선생은 안동사람이지만 경상남도 지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첫 번째 처가가 의령이고, 두 번째 처가도 거창이다. 곧 퇴계 선생의초취, 재취 부인의 집이 모두 경남에 있었다.
의령읍에서 서쪽으로 2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가례면(嘉禮面)이 있다. 이 마을 이름을 퇴계 이황 선생께서 지으셨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례라고 하면 ‘혼례’ 를 뜻한다고 알고 있다. 아마도 퇴계 선생이 이 마을 허씨 댁으로 장가들고서 가례로 지어신 것이 아닌가싶다.
퇴계 선생은 21세 때 진사 허찬(許瓚)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허찬의 집이 현재 의령군 가례면(嘉禮面)에 있었다. 허찬은 본관이 김해로, 그 아버지 허원보(許元輔)가 고성에서 의령으로 이사를 하면서 의령에 살게 되었다.
하지만 퇴계가 장가 들 당시에는 장인 허찬이 의령에 살고 있지는 않았다. 퇴계 장인 허찬이 처가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찬은 당시 영주(현재 경북 영주시)에 사는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허찬의 장인은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 벼슬을 지낸 분으로,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욕심이 없고 해학을 좋아 하였다. 그러나 슬하에 딸만 둘이 있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허찬은 맏사위로서 문경동의 집에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허찬은 의령과 영주에 집과 토지를 소유하고서 이 두 곳을 자주 왕래를 했다.
퇴계의 부인인 허씨는 1501년 영주에서 태어났다. 퇴계가 사는 예안과 영주는 거리가 거리 멀지 않았다. 그리고 문경동이 퇴계의 숙부인 송재 이우와 같은 시기에 조정에 벼슬을 하면서 서로 교분이 있었다. 그래서 퇴계의 인물됨을 알고 문경동이 외손서로 삼은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퇴계와 허씨 부인은 21살 동갑으로 영주에서 혼인식을 올렸다. 의령 허씨 집안으로 장가든 퇴계는 7차례 정도 의령을 방문하였다.
의령 처가에 들른 퇴계 선생은 청향당 이원등 지역 선비들과 교유를하는 한편, 때때로 낚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다.
이때 퇴계 선생이 낚시를 하던 곳이 현재 가례면 뒷산 밑 ‘가례동천’이라고 바위에 새긴 곳이라고 전해온다. 지금은 마을이 들어서 옛날 이곳에서 어떻게 낚시를 하였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 당시는 큰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퇴계 선생은 처가를 찾으면 낚시를 했던 장소에 ‘가례동천(嘉禮洞天)’이라는 친필 글씨를 남겼다. 가례동천은 ‘병풍을 둘러 친 듯이 아름다운 곳’이란 뜻으로 주변경치가 그야말로 절경이라는 의미이다.
지금은 마을 한가운데 자리잡아 절경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지만, 퇴계 선생은 이곳 경치에 반해 글을 남겼으리라 생각된다.
5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퇴계 선생의 친필 글씨는 비바람에 많이 마모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 고을 선비들이 가례동천 암벽 옆에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퇴도이선생유허비(退陶李先生遺墟碑)를 세웠다. 이 비문은 한말 대쪽같은 선비이며 우국지사인 수파(守坡) 안효제(安孝濟)가 지었다.
이뿐만 아니다. 가례면 소재지에서 자굴산 정상쪽으로 6킬로미터 쯤 가면 큰 저수지가 나온다. 가례면 괴진리 우곡마을에 있는 이 저수지를 이 마을 사람들은 서암제(書巖堤)라고 부른다. 저수지 이름이 ‘서암’이라는 것이 특이해 연유를 알아보니, 저수지 안쪽 벼랑에 퇴계선생이 친필로 서암’이라고 새긴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아쉽게도 저수지 공사 때 서암이라고 새긴 부분이 없어졌다고 한다. 아무튼 퇴계 선생이 남긴 흔적들이 약 5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으니, 그 덕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의령사람들은 퇴계선생과의 인연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다. 1654년 당시 의령현감 윤순거가 퇴계선생의 덕을 추모하고 교훈을 길이 새기기 위해 선생의 유적지 가까운 곳에 서원을 지었다. 그로부터 6년 뒤 1660년 조정에서 덕곡서원(德谷書院)이란 이름을 내려주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매년 음력 2월 20일이면 퇴계선생을 위해 제례를 올리고 있다.
퇴계선생의 처가 동네 의령 가례마을.
지금 비록 처가 후손들은 얼마 살지 않지만, 퇴계 선생이 우리 마을로 장가들었다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선생이 남긴 덕을 이어가고자 노력하고 있다./강동욱기자kdo gnnews.co.kr


경남에 있는 퇴계선생 유적

경남에는 퇴계 선생의 유적들이 많다. 처가를 방문하고 나서 틈을 내어 가야산 해인사, 지리산 쌍계사 등 경남 곳곳을 유람하며 이 지역 선비들과 교유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시로 나타내기도 하였다. 퇴계선생의 발길이 닿았던 몇 군데를 소개한다.

▲청곡사
진주시 문산면 갈전리 월아산 기슭에 있는 절로서 879년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 1507년 퇴계선생의 셋째형 이의와 넷째형 이해가 숙부 송재 이우를 따라와 청곡사에서 공부를 하였다. 1533년에 퇴계가 청곡사를 지나면서 옛일을 회상하면서 시를 짓기도 하였다.

▲작도정사(鵲島精舍)
사천시 서포면 남해고속도로 남쪽 10리쯤에 있다. 퇴계가 관포 어득강과 놀던 곳으로, 1914년 이지역 유림들이 그 일을 기념하여 정사를 세웠다,

▲사락정
거창군 마리면 영승촌에 있다. 퇴계 장인 권질이 우거하던 곳으로, 사락정(四樂亭)이라는 정자 이름은 장인의 요청으로 퇴계가 지은 것이다.
(2000-04-08)  
 

俛宇先生文集卷之百四十九
 
密陽朴氏嘉禮洞遺墟碑 壬子 a_344_143c


朴氏新羅之胄也。大啓東宇。澤于黔黎。其遺祚蕃延。世爲國中鉅望。其分封銀山。其麗尤不億。在勝國之季。有忠肅公松隱先生天翊。挺歲寒之節。與圃牧諸賢齊其聲烈。其子拙堂翁聰仕聖朝。以直道黜遯于三岐。子姓承之。簪組猶不替。至兵馬公芸始居于宜春之嘉禮洞。盖甥于許氏而344_143d仍舘焉。許氏多名宦宿德。時退陶李先生亦聘于許。往來游從。題嘉禮洞四大字于石。公之居正當其面。有亭臺之勝。徜徉嘯傲以老焉。號修誠齋。其沒也。南冥曺先生以詩哭之曰鰲角三峯底。於君高大門。鄰舂不相杵。零落半山雲。盖讚其家門之盛。而歎墟里之亡善人也。其子士信判事。如成浮査汝信,李葛村潚,姜長鬐德龍。並以女壻出入其門。風采斌蔚。其子瑞輝慷慨有志節。嘗築皷琴亭以自娛。壬辰之亂。與金松菴郭忘憂兩義將相往還。嘗遇賊于鼎津。單騎突其夥。奪劒亂斫。賊怯而遁。亂定錄原從勳。歷官至海南縣事。逮光海失德。恥立於朝。遂折帽而歸。自號退休齋。有五子曰瑾別提。曰瑠僉正。曰璡宣敎郞。曰璟副司果。曰琥直長。驥騀贙峙。俊譽競爽。輝溢門闌。其來滾滾。益滋而繁。墻宇彌巷。冠裾成林。奕然爲鄕邦之品題。世機迭更而人事從以乘除焉。則遺裔之轉徙于四方者日益衆。其盤桓依繫於桑梓之蔭者。僅若干員。歲時有會。相與指點某丘。想344_144a像前光。彷徨咨嗟。瞻慕而不能去。於是議郞君膺和歎息而言曰山麝之馥而春往則歇。鐵罏之步。世改則不省其爲名。嘉禮一區。卽吾家之鐵罏。而吾先子之克世厥美於玆焉者。不啻若麝之過也。余懼其世改而春往則名有時而不足徵也。馥有時而或沬也。盍勒于石。以羹墻於雲仍。而標幟於輿人之矚也。遂躬捐巨貲。伐豐珉鎭于閭右。使其子煕尙曁族子鍾權。請余爲辭以章之。辭之屢而卒不能獲。敬爲之銘曰。
闍崛嶙峋。寔開靈壑。嘉禮有洞。上仁之宅。煌煌大字。宗儒之蹟。坦腹于床。許氏有客。洸洸英姿。銀山之朴。其門高大。傑于鰲角。我棟之成。我泉我石。有飣有醑。有圖有籍。樂我佳賓。武跡儒格。厥謨訏訏。來胤之錫。鼎津滔滔。有鯨噴薄。我忠爲冑。我馬電躍。爾刀爾刳。爾靡而馘。亦粤昏庸。人紀之瀆。炳幾若凂。靑冥一鵠。我皷我琴。憂中有樂。英英五秀。燦其盈目。詵詵緜緜。以永其祿。閭井有光。其光濯濯。子孫不忘。視今如昔。維桑可恭。維屨可躅。344_144b英靈蠁肸。是降是陟。瞻仰靡追。其何以淑。有石穹然。托以不泐。爰述厥懿。詔之來百。惟爾夙夜。毋墜厥德。
寒沙先生文集卷之五
 上梁文
德谷書院上梁文 b_024_582d


遺風猶有存者。羹墻久憑於禮村。斯文不在玆乎。祠宇新創於德谷。固公議百年而定。伊匠事不日乃成。伏惟退溪先生。天分淸純。學力精詣。讀易而羸瘁成疾。粤自弱冠之初。求退而潛玩硏經。已在強仕之歲。三辭一揖之義。內重外輕。居敬窮理之工。日乾夕惕。謂知行不可偏廢。顧博約要在兩全。格致誠正。與修其身。曾闢門於入德。學問思辨。而行之篤。庸示序於登高。故河南閩建之淵源。以車輪鳥翼而取譬。尋遺024_583a經之旨訣。表裏交修。理絶絃之徽音。軆用兼括。其積之也厚。其養之也深。占慳秘之名區。擅藏修之樂事。天淵臺逈。潑潑心地之眞君。光影塘澄。浩浩源頭之活水。咀道腴之芻豢。薄外慕之浮雲。通錄有編。所以明道學之緖。四七有辨。所以闡理氣之微。頎頎問業之徒。自西自東自南自北。諄諄難疑之誨。如切如磋如琢如磨。不但褒衣博帶之英。盡執經於函丈。抑又釋褐簪筆之彦。咸考德於臯比。玩樂齋左圖右書。探討性命之奧。靜習堂明窓棐几。涵養昭曠之原。蔚然才俊之興。盛哉薰陶之益。士林之歸仰也則江漢之024_583b朝宗于海。聖世之寵異也則麟鳳之翔走于郊。赴召趍朝。亨九五之利見。尊德樂道。賁千一之休光。出處關繫于汚隆。朝野想望其風采。秘閣陞對考亭。端出治之源。邇英講書伊川。重君德之養。竊觀十筵之陳啓。庶幾一揆乎前賢。六條封事。盡治己治人之術。十圖聖學。極成始成終之要。奚止一代之嘉謨。實是萬世之大訓。禮遇繾綣。賓舘之日月踐更。去就從容。故山之松桂依舊。年彌高而道彌卲。業益廣而樂益眞。負杖歌興。積浩歎於安倣。易簀世遠。昧大明於昏衢。睠下邑一同之宜春。是先正貳舘之仁里。盖還往信024_583c處之跡。不泯者存焉。而指點慕用之長。所由來久矣。層巒簇簇。想山立之有儀。碧溪沄沄。認川流之無間。八十年揭虔之尙闕。尋常間有識之所嗟。玆遇知縣尹侯。名舜擧 詩禮名家。儒先宅相。吾有受也。學期乎君子儒。人無間然。行踐於眞實地。筆追顔筋柳骨。文尙西馬東斑。舃化仙鳧綰銅章而星駕。軒馴乳翟對玉軫而晨鳴。用武城割鷄之刀。布文翁蹲鴟之化。撫先生之遺躅。恨乏右文之䂓。指後死之迷塗。聿胥尙德之宇。剗薈翳而事圭臬。正面勢而卜淸幽。鏡臺南馳。鎭仁山之融結。鼎津東注。環智水之縈回。傾月俸而024_583d爲資。輿情雷動。操風斤而就役。衆工雲趍。詢事勢之便宜。先搆講塾。待基壤之墠築。爰建廟楹。以礎以階。採不磷之虎質。爲棟爲桷。斲後凋之龍鱗。上聳重霄映奎躔之燦爛。前臨遙浦拱洛水之淸泓。人稱天作之奇。士歸地主之力。世相後地相去。乃景慕之如斯。道所存師所存。諒矜式之有所。取諸大壯。謹依白鹿之謨。終焉允臧。豈假靑烏之卜。恭伸燕賀。善頌翬飛。拋梁東。一氣冲融坱圠中。生意統天資始物。悠然三月坐春風。拋梁南。一氣流形長養覃。雨施雲行嘉會盛。優優天秩得參三。拋梁西。露浥庭梧月似珪。這裏024_584a靜觀和義妙。推思一氣見端倪。拋梁北。品彙歸藏天地肅。貞復爲元元復貞。回環一氣無容息。拋梁上。斗極昭回列宿向。玉宇崢嶸絶滓氛。晴宵獨立擧頭望。拋梁下。一帶淸溪流不舍。混混歸程萬里賖。波瀾日向滄溟瀉。伏願上梁之後。士趍克正。人文載宣。竝囿絃誦之場。輔仁以友。常閒俎豆之軌。式禮莫愆。依然警欬。怳承音於陶山。宛爾儀刑。如撰杖於亦樂。入孝出悌。恭襲芝蘭之馨。秋禮冬詩。毋負菁莪之化。遵四科而學孔。期有道之彬彬。服三物而賓周。致以寧之濟濟。萬物皆備於我。一善未足爲多。示我同人。申此024_584b善禱。

記言別集卷之二十四
 丘墓文
承政院右承旨姜公墓碣銘 a_099_296b


公諱大遂。字學顏。姓姜氏。其先本晉陽人。高麗太師民瞻之後也。累世居陜川。爲陜人。曾祖仁壽。贈司憲府執義。祖世倬。贈同副承旨。父翼文。司諫院司諫贈禮曹判書。以公貴故。得推恩三世。母貞夫人陜川李氏。萬曆十九年辛卯十月三日公生。聰明嗜學。自少時。得才名甚099_296c盛。聞者多慕與之交。三十。選國子試。後年。登第。初授侍講院兼說書。尋陞司書。遷司諫院正言。明年甲寅。光海殺永昌。鄭公蘊諫而當死。公以爭論。幷得罪。時鄭仁弘方貴用。公嘗指之曰。執拗私意。喜人佞已。以故深疾之。至此。因擠陷不已。初削官。竟付處淮陽。公刻苦勵行。能得處困之正。人皆賢之。癸亥春。仁祖旣反正。釋爲寧邊府判官。卽改戶曹佐郞。秋。陞禮曹正郞。明年。以正言移司憲府持平。尋陞掌令兼編修官。丙寅。復爲掌令知製敎。丁卯。有虜亂。爲號召使099_296d鄭公經世從事。出嶺南。募諭尙慶子弟。收召義兵。三月。虜旣和親。乃罷兵。四月。陞司諫院司諫。累轉宗簿寺正。戊辰。出順天。三年。以病去。當罷。上命遞職而已。辛未。入玉堂。爲副修撰兼經筵檢討官。後年春。陞修撰。尋陞副校理兼經筵侍讀官。夏。改軍資監正兼侍講院文學。秋。出爲靈光。癸酉。復召爲修撰。甲戌。在玉堂。論追崇之失禮。凡五箚累千言。乙亥秋。由司諫。移濟用監正。冬。以繡衣。廉問湖西。去守令不用法尤甚者。丁丑春。爲副應敎。戊寅夏。復以司諫。出南原。099_297a明年。陞通政。爲東萊。辛巳。爲晉川。三年。以疾罷。甲申春。爲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至右承旨。夏。改兵曹參知。尋陞參議。論海西軍案積弊變通事。上從之。冬。出尹東都。明年冬。以副護軍。上東宮喪制疏。丁亥。由判決事。復出密陽。明年。以父憂去。孝宗元年庚寅。應旨上萬言疏。冬。復以判決事。再入政院。後年三月。爲全州大尹。一年去。此後連有召命。而以母老皆不起。丙申春。又應旨言時事。有奢侈太盛。私意橫流之戒。戊戌四月十九日卒。年六十八。葬宜寧洛099_297b西。上以禮賜祭。而遠近皆曰。賢大夫亡矣。公立朝近五十年。恪心謹愼。裨益旣多。而又賢於治郡。去後皆有遺愛。晩年自號寒沙晩隱。好讀易。日誦一卦。以潛玩焉。作石泉書齋。以待學者。同郡。作伊淵書院。宜寧。作德谷書院。眷眷於儒者緖業。而考其家狀。公重儒術。尙溫雅。恭儉謙廉。爲平生受用之大法云。公三娶而有二男三女。前夫人宗室寧堤君錫齡之女。生一男。曰徽衍。後夫人參奉李㲄之女。生一男三女。男曰徽萬。壻三人。縣令李堂揆,士人金庭翊,李時格。末099_297c娶鄭夫人。縣監暄之女。無子。又有側室子。曰徽潤。銘曰。
惟恪惟謹。惟大夫之飭也。惟儉惟恭。惟大夫之式也。
寒沙先生文集卷之七
 [附錄○墓碣銘]
墓碣銘 並叙 [許穆] b_024_615a


公諱大遂字學顔姓姜氏。其先本晉陽人。高麗大師民瞻之後也。累世居陜川爲陜人。曾祖仁壽贈司憲府執義。祖世倬贈承政院同副承旨。父翼文行副護軍贈禮曹判書。以公貴故得推恩三世。母貞夫人李氏。萬曆十九年辛卯十一月三日公生。聦明嗜學。自少時才名甚盛。聞者多善行之交。二十選國子試。三年壬子登第。初授侍講院024_615b兼說書。尋陞司書。遷司諫院正言。明年甲寅。光海殺永昌。鄭公蘊諫而當死。公以爭論幷得罪。同郡仁弘方貴用。公甞指之曰執拗私意。喜人佞己。以故深疾之。至此因擠陷不已。初削官。竟付處淮陽者十年。公刻苦勵行。能得處困之正。人皆賢之。癸亥春。仁祖旣反正。釋爲寧邊府判官。卽改戶曹佐郞。秋陞禮曹正郞。明年以言移司憲府持平。尋陞掌令兼敎修官。丙寅復爲掌令知製敎。丁卯有虜亂。爲務召使鄭公經世從事。出嶺南爲諭慶尙子弟。收召義兵。三月虜旣和親乃罷兵。四月陞024_615c司諫院司諫。累轉宗簿寺正。戊辰出順天。三年以病去官罷。上命遆職而已。辛未入玉堂爲副修撰兼經筵撿討官。後年春陞修撰。尋陞副校理兼經筵侍讀官。壬申夏改司憲府執義知製敎兼講院文學。尋遷軍資監正。秋出爲靈光。癸酉復召爲修撰。甲戌在玉堂。論追崇之失禮凡五箚畧千言。乙亥秋。由司諫移濟用監正。冬以經文廉問湖西。去守令不用法尤甚者。丁丑春。爲副應敎。戊寅夏。以司諫出南原。明年陞通政爲東萊。辛巳爲晉州。三年以病罷。甲申春。爲同副承旨兼024_615d經筵參贊官左右承旨。夏改兵曹參知。尋陞參議。論海西軍案積弊變通事。上從之。冬出尹東都。明年夏以前府上東宮喪制䟽。丁亥由判决事復出密陽。明年以父憂去。孝宗元年庚寅。應旨上萬言䟽。冬復以判决事每入政院。後年三月爲全州大尹。二年去。此後連有召命。而以母老皆不起。而中春又有旨言時事。有奢侈太盛私意橫流之戒。戊戌四月十九日卒。年六十八。葬宜寧洛西。上以禮賜祭。而遠近皆曰賢大夫亡矣。公入朝近五十年。修心謹愼。裨益旣多。而又賢於治024_616a郡。去後皆有遺愛。晩年自號寒沙晩隱。好讀易。日日誦一卦以潛翫焉。作石泉書齋。以待學者。同郡作伊淵書院。宜寧作德谷書院。眷眷於儒者緖業。而重儒術尙溫雅。恭儉謙廉。爲平生受用之大法云。公三娶而有二男三女。前夫人寧禔君錫齡之女。生一男曰徽衍。後夫人參奉李殼之女。生一男三女。男曰徽萬。婿三人。參判李堂揆,士人金廷翊,李時格。末娶鄭夫人縣監暄之女。無子。又有副室子曰徽潤。婿李命吉。銘曰。
惟恪惟謹。惟大夫之行也。惟儉惟恭。惟大夫之式024_616b也。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許穆撰。


의령(宜寧) 덕곡서원(德谷書院) 갑오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이황(李滉)

 

합천(陜川) 이연서원(伊淵書院) 만력 병술년에 세웠으며 사액하였다.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

【사원】 덕곡서원(德谷書院) 효종 병신년에 세웠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이황(李滉) 문묘 편에 보라.


퇴계선생연보 제1권
연보(年譜) 1


효종(孝宗 명나라 황제) 홍치(弘治) 14년 연산군 7년 (신유) 11월 25일 기해 진시(辰時) 에, 선생은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에서 나셨다. 선생의 선조는 진보현(眞寶縣)에 살았는데, 5대조 송안군(松安君)이 왜적을 피하여 안동부 풍산현(豐山縣) 남쪽 마애리(磨崖里)로 이사하여 살았다. 뒤에 또 주촌(周村)으로 옮겼고, 조부 판서공 때에 이르러 예안현 북쪽 온계리의 빼어난 산수를 사랑하여 비로소 거기에 살게 되었다.
15년 (임술) 2세 6월에 찬성공이 별세하다. 선생이 지은, 선비(先妣 돌아가신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박씨(朴氏)의 묘갈(墓碣)을 보면 “선군(先君)이 병으로 돌아가셨을 때 큰형이 겨우 장가들었고, 그 나머지 어린 것들이 앞에 가득하였다. 부인은, 사내 자식은 많은데 일찍 홀몸이 되어 장차 집안을 유지하지 못할까 매우 염려해서, 더욱더 농사와 양잠 일에 힘써서 옛 살림을 잃지 않으셨다. 여러 아들이 점점 장성하자, 가난한 중에도 학비를 내어 먼 데나 가까운 데나 취학을 시켜서 늘 훈계하였으니, 문장에만 힘쓸 뿐 아니라 특히 몸가짐과 행실을 삼가는 것을 중하게 여겨서, 항상 간절히 타이르기를, ‘세상에서는 보통 과부의 자식은 옳게 가르치지 못하였다고 욕을 한다. 너희들이 남 보다 백배 더 공부에 힘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런 비난을 면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하니, 이것을 보면 선생은 비록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그 학문을 성취할 수 있었던 데는 어머니의 영향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년 (계해) 3세
17년 (갑자) 4세
18년 (을축) 5세
무종(武宗) 정덕(正德) 원년 중종대왕 원년 (병인) 6세 처음으로 글 읽을 줄 알게 되다. 이웃에 어떤 노인 한 분이 제법 천자문을 알고 있었으므로, 선생이 가서 배웠다. 아침이면 반드시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가서 울타리 밖에서 가만히 전날 배운 것을 여러 차례 속으로 외어 본 후에 들어가서, 엎드려 배우기를 마치 엄격한 스승에게 하듯 하였다.
2년 (정묘) 7세
3년 (무진) 8세 ○ 둘째 형이 칼에 손을 다쳐 선생이 붙들고 울자, 어머니께서 “너의 형은 손을 다쳤는데도 울지 않는데, 네가 왜 우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형은 울지 않으나, 피가 저렇게 흐르는데 어떻게 손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 선생은 온순하고 공손하며 겸손하고 우애가 있었다. 존장자를 대할 때에는 감히 태만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고 밤중에 깊이 잠들었다가도 어른이 부르면 곧 깨어나서 바로 대답하고 매우 조심하였다. 6, 7세 때부터 벌써 그러하였다.
4년 (기사) 9세
5년 (경오) 10세
6년 (신미) 11세
7년 (임신) 12세 숙부 송재공(松齋公) 이우(李堣)에게 논어를 배우다. “제자가 들어가면 효도하고, 나가면 공순하여야 한다.”는 대목에 이르자, 근심하여 스스로 경계하기를, “사람 된 도리가 당연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하루는 이(理)라는 글자로 송재공에게 묻기를, “모든 일에 있어 옳은 그것이 이(理)입니까?” 하니, 송재공이 기뻐하면서, “네가 벌써 글의 뜻을 알았구나.” 하였다. 송재공은 성격이 근엄하여 자제(子弟)들에게 인정해 주는 일이 적었으나, 선생이 형 대헌공(大憲公) 이해(李瀣)와 함께 글을 배울 때에, 송재공이 늘 칭찬하면서, “죽은 형이 이 두 아들을 두었으니, 죽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고, 또 선생을 가리켜 말하기를, “우리 가문을 유지할 자는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8년 (계유) 13세
9년 (갑술) 14세 글 읽기를 좋아하여, 비록 여러 사람이 많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도 반드시 벽을 향하여 가만히 속뜻을 음미하였다. 도연명의 시를 좋아하고 그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10년 (을해) 15세
11년 (병자) 16세
12년 (정축) 17세
13년 (무인) 18세 〈봄에 노닐며 들판의 연못을 읊다〉 절구시에,
이슬 맺힌 풀 곱게 물가에 둘러 있고 / 露草夭夭繞水涯
작은 못 맑고 깨끗해 티끌도 없네 / 小塘淸活淨無沙
구름 날고 새 지나는 것이 본래 제 나름대로나 / 雲飛鳥過元相管
때때로 제비 와서 물결 찰까 두려울 뿐이다 / 只怕時時燕蹴波
하였다.
14년 (기묘) 19세 심사(心事)를 읊은 시에,
유독 초당의 만 권 책을 사랑하여 / 獨愛林廬萬卷書
한결같은 심사로 지내온 지 십여 년 / 一般心事十年餘
근래에는 근원의 시초를 깨달은 듯 / 邇來似與源頭會
내 마음 전체를 태허(太虛)로 여기네 / 都把吾心看太虛
하였다.
15년 (경진) 20세 주역을 읽고 그 뜻을 강구하느라, 거의 먹고 자는 것을 잊다. 이로부터 항상 파리하고 고단한 병이 있게 되었다. 뒤에 선생이 조사경(趙士敬)에게 준 편지에, “내가 어린 나이로 일찍이 망녕되게 뜻한 바 있었으나, 그 방법을 몰라서 단지 너무나 지나치게 고심하기만 했던 탓으로 파리하고 고단하여지는 병을 얻었다.” 하였다.
16년 신사 21세 부인 허씨에게 장가들다. 진사 이찬(李瓚)의 딸
세종(世宗) 가정(嘉靖) 원년 (임오) 22세
2년 (계미) 23세 10월에 아들 준(寯)이 출생하다. ○ 이해에 선생이 처음으로 태학에 유학(遊學)하다. 이때는 기묘(己卯)의 화를 거친 뒤였으므로 선비들의 풍습이 부박(浮薄)하여서, 선생의 법도 있는 행동거지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비웃을 뿐이요, 서로 상종하는 이는 오직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한 사람 뿐이었다. 얼마 안 되어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하서가 작별시를 지어 주었는데, “그대는 영남의 수재요, 이(李)ㆍ두(杜)의 문장에 왕ㆍ조의 글씨라.”라는 구절이 있었다.
3년 (갑신) 24세
4년 (을유) 25세
5년 (병술) 26세
6년 (정해) 27세 가을, 경상도 향시(鄕試)의 진사시(進士試)에서 수석을 차지하고 생원시에서 2위에 입격(入格)하다. ○ 10월, 둘째 아들 채(寀)가 출생하다. ○ 11월, 부인 허씨가 죽다.
7년 (무자) 28세 봄, 진사시 회시 2등에 입격하다.
8년 (기축) 29세
9년 (경인) 30세 부인 권씨에게 장가들다. 봉사 권질(權礩)의 딸
10년 (신묘) 31세 6월, 측실(側室)에게서 아들 적(寂)이 출생하다.
11년 (임진) 32세 선생이 사마시(司馬試 진사시)에 합격한 뒤로는 과거 보는 데 뜻이 없었으나, 형 대헌공(大憲公)이 어머니에게 여쭈어 권하므로 과거에 나가게 되었다. 이해에 문과 별시의 초시(初試)에 2위로 입격하였다.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가의 촌사(村舍)에서 자다가 밤중에 도둑이 들었는데, 동행들은 모두 놀라 어쩔 줄을 몰랐으나 선생은 태연히 앉아서 동요하지 않았다.
12년 (계사) 33세 반궁(泮弓 성균관)에 유학하다. 동료들이 모두 존경하고 마음으로 선생을 좇았다. 가을,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여주(驪州)를 지나는 길에 모재(慕齋) 김 선생(金先生)을 뵙게 되다. 이번 길은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을 따라 동행한 것이다. 모재는 이름이 안국(安國)이니 이때에 벼슬을 사퇴하고 여주 이호촌(梨湖村)에 살고 있었다. 선생이 만년에 스스로 말하기를, “모재를 뵙고 비로소 정인군자(正人君子)의 언론을 들었다.”라고 하였다. 경상도 향시에 응시해서 1위로 입격하다.
13년 (갑오) 34세 3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게 되다. 4월, 선발되어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천거되었으나 곧 체차되어 도로 승문원 부정자가 되다. 선생의 장인인 권질은 정언(正言) 권전(權磌)의 형이었다. 권전은 기묘 사류(己卯士類)로서 안처겸(安處謙)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죄를 입고 죽었다. 권질도 연좌되어 내쳐지게 되었다. 이때에 간관이 권력층의 사주를 받아 “아무개(선생을 가리킴)는 권질의 사위이니, 사관(史官)이 될 수 없고, 그를 천거한 자도 역시 옳지 못합니다.”라고 아뢰어, 예문관관(藝文館官)을 추고(推考)하고 선생을 사관직에서 체차시킬 것을 청하였다. 그 때문에 의논이 분분하여, 예문관 관원이 모두 파면되고, 선생도 드디어 갈리게 되었다. 영천군(榮川郡)에 김안로의 논밭이 있었는데, 그곳은 전 부인 허씨의 친정이 있는 곳이었다. 김안로가 동향이라는 이유로 선생을 만나자고 하였으나, 선생이 가서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때부터 앙심을 품고 대간을 사주하여 탄핵하게 하였던 것이다. ○ 6월, 정자(正字)로 승진되다. ○ 7월, 휴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가 근친(近親)하다. ○ 10월, 저작(著作)으로 승진되어 서울로 돌아오다. 정시(廷試)의 시제(試題)가 〈문신기영회도(文臣耆英會圖)〉였고 10운의 배율시로 짓는 것이었는데, 선생이 장원을 차지했다. 12월, 무공랑(務功郞) 박사(博士)로 승진되다.
14년 (을미) 35세 6월, 호송관(護送官)에 임명되어 왜노(倭奴)를 동래(東萊)로 이송하다. 여주(驪州)를 지나다가 목사 이순(李純)과 신륵사(神勒寺)에서 노닐며 지은 시가 있는데,
수를 물어서 이치의 속을 더듬는 것이 가능할까 / 問數可能深理窟
신선을 말할 때는 곧 시속 무리들을 사절코자 하노라 / 談仙直欲謝時流
하고, 선생이 스스로 주를 달아 “공이 《황극경내편(皇極經內篇)》을 주석하느라 공을 들인 지 20여 년 만에 비로소 완성했다.” 하였다. 이날 《황극경내편》과 《참동계(參同契)》의 수련하는 법을 논하였다. ○ 이번 길에 고향에 들러서 어머니를 뵙고 갔다.
15년 (병신) 36세 3월, 선무랑(宣務郞)이 되다. ○ 6월, 성균관 전적에 오르고, 중학 교수(中學敎授)를 겸임하다. ○ 7월, 휴가를 얻어 근친하다. ○ 9월, 호조 좌랑에 임명되다.
16년 (정유) 37세 4월, 선교랑이 되다. ○ 5월, 승훈랑(承訓郞)이 되다. ○ 9월, 승의랑(承議郞)이 되다. ○ 10월, 어머니 박씨의 상사(喪事)를 당하다. 선생이 6품에 오르면서부터 지방관으로 나가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편하게 하려 했으나, 요직에 있는 자에게 저지되었다. 이때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듣고 서울로부터 급히 달려갔다. 초상을 치르는 동안에 꼬챙이처럼 말라 병을 얻으니, 거의 생명을 잃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12월, 갑자일에 박부인을 온계리(溫溪里) 수곡(樹谷) 언덕에 장사 지내다.
17년 (무술) 38세
18년 (기해) 39세 12월, 삼년상을 마치다. ○ 홍문관 부수찬에 임명되다. 이날, 수찬지제교 겸 경연검토관에 승진되다. 이때에 김안로가 이미 실각하였으므로, 선생이 옥당(玉堂)에 선발되어 들어가게 되었으나, 형 대헌공이 의정부 사인으로서 춘추관을 겸하였기 때문에, 선생이 상피(相避)로 기사관은 겸하지 않았다.
19년 (경자) 40세 1월, 사간원 정언으로 임명하는 임금의 부르심을 받고 조정에 돌아오다. ○ 2월, 봉훈랑(奉訓郞)이 되고, 봉직랑(奉直郞)으로 승진되다. ○ 3월,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을 겸하다. ○ 4월, 지제교가 되다. 이로부터 통정대부 이하의 내직(內職)에 임명되면 으레 겸하게 되었다.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다. 경연(經筵)에 들어가서 아뢰기를, “근래 가뭄이 너무 심하온데 정전(正殿)을 피하여 거처하신다든지 수라에 반찬의 가짓수를 줄인다든지 하는 일이 비록 모두 형식적인 일이긴 하나, 지성으로 행하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가뭄으로 인하여 자주 사면을 내리는 것은 매우 불가하니, 옛사람도 ‘자주 사면을 내리면, 여러 착한 사람이 해를 입고 간사한 무리들이 기뻐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새 간사한 자들이 생각하기를 극도로 가물게 되면 반드시 사면이 있을 것이라 여겨, 죄를 범한 자가 희망을 갖게 되고, 고의로 범죄한 자가 거리낌이 없어져서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간언을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형조 정랑으로 옮겼다가, 얼마 안 되어 사정으로 인하여 파직되다. ○ 9월, 서용(叙用)되어 다시 형조정랑 겸 승문원교리에 임명되고, 홍문관부교리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이 되다. ○ 10월, 교리로 승진되다. ○ 11월, 통선랑(通善郞)이 되다.
20년 (신축) 41세 3월, 경연에 들어가 일을 아뢰다. 이때에 우역(牛疫)이 심하였기에 선생이 아뢰기를, “《오행지(五行志)》에 이르기를, ‘토(土)가 만물을 낳는 것인데 토기(土氣)를 길러 주지 않으면 농사가 잘 되지 못하며, 그래서 소의 화가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난겨울에는 지진의 변괴가 있었는데, 이제 전염병과 우역이 한꺼번에 일어났으니 옛사람의 말이 참으로 거짓이 아닙니다. 게다가 봄에 가뭄이 들까 염려되고, 토맥(土脈)이 윤택하지 못하여 흉년이 들 징조가 이미 나타나고 있으니, 농사 역시 가히 점칠 수 있습니다. 재앙과 이변(異變)이 겹쳐서 일어남이 오늘날보다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주상께서는 더욱더 수양과 반성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그 뒤에 석강(夕講)에 들어가 또 아뢰기를, “한나라 명제(明帝) 때에 날이 가물어서 종리의(鍾離意)가 상소하여 간하니, 명제가 즉시 토목 공사하던 것을 중지시키고, 백관들에게 자기의 허물을 효유하였더니 즉시 큰비가 내렸습니다. 근래 재변이 있었을 때 주상께서 근심하시고 놀라시어 ‘죄가 내게 있다.’ 하신 말씀이 역시 매우 간절하셨기 때문에, 하늘이 때맞추어 비를 내렸습니다. 이것으로 보아도 하늘과 사람이 서로 응한다는 이치는 틀림이 없으니, 대개 마음속으로 진실하게 정성을 다하면 그에 알맞은 보응이 오는 법입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군자가 종일토록 부지런히 힘써 매진하며 저녁에 허물이 없었는가 하여 가다듬으면 허물이 없다.’ 하였고, 《중용》에 이르기를, ‘중화(中和)를 이룩하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에 있어서 만물이 생육된다.’ 하였으니, 모든 행사를 일반 인심에 화합하도록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인심이 화합하면 재앙이나 이변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다 독서당이 동호(東湖)에 있으니, 그것은 국가에서 인재를 기르는 곳이었다. 문학하는 선비를 극히 엄선하여 충원하였으며 번갈아 글을 읽게 하니 거기에 선택된 자는 영광스럽기가 영주(瀛州)에 오른 것에 비견되었다. 그러나 선발된 사람 대부분이 나돌아 다니며 편안히 지내는 자가 많았는데, 선생은 늘 자기 차례가 되면 반드시 갔고, 가면 반드시 글 읽는 일에만 힘을 썼다. 남쪽 누대 왼편에 조그만 집을 지어 문회당(文會堂)이라 이름하였는데, 해마다 이 서당에서 주고받은 시작(詩作)이 여러 편 있다. 4월,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다. ○ 5월,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다. ○ 자문(咨文 중국 관청에 보내는 편지) 점마관(點馬官 말을 점검하는 관원)으로 의주에 가다. 〈의주잡영(義州雜詠)〉 12수가 있다. 부교리로 승진되어 빨리 오라는 재촉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오다. ○ 10월,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겸임하다. ○ 11월,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다. ○ 12월,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고, 또다시 형조 정랑에 임명되다.
21년 (임인) 42세 2월,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되고, 전직은 겸하였다. 3월에 경연 자리에 입시하여 글을 보다가 아뢰기를, “한 시대가 흥하는 데는 반드시 그렇게 될 만한 규모가 있는 법입니다. 동한(東漢) 광무제(光武帝)는 외척을 중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망하게 되어서는 오로지 외척의 손에서 망하게 되었습니다. 창업한 임금들이 친히 규모를 세웠다지마는, 그 자손들은 이를 지키지 못하고 나랏일을 그르쳤습니다. 장제(章帝)도 어진 임금이었으나, 그때부터 비로소 외척이 세도를 부리는 조짐이 생겼던 것입니다. 대개 역사책을 읽을 때는 모름지기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혼란해지게 되는 까닭을 살펴야 유익할 것입니다.” 하였다. ○ 선생의 취향은 높고 깨끗하여, 항상 거리낌 없이 선뜻 물러나겠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비록 영예로운 벼슬자리에 있어도 즐겨하지 않았다. 이해 봄에 옥당에서 숙직하고 있으면서 매화를 그린 시가 있었는데,
뜰에 매화 한 그루, 가지에 눈이 만발한데 / 一樹庭梅雪滿枝
세상 풍진에 품었던 꿈이 어긋났구나 / 風塵湖海夢差池
옥당에 앉아서 봄 밤의 달을 대하니 / 玉堂坐對春宵月
기러기 우는 소리에 생각되는 바 있도다 / 鴻雁聲中有所思
하였으니, 그의 고결하고도 단아한 마음이 있는 바를 엿볼 수 있다.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에 임명되었다가 이내 어사가 되어 충청도에 내려가서 군ㆍ읍에서 흉년 구제 작업이 잘되고 있는지를 검찰(檢察)하다. 4월, 돌아와 결과 보고를 하다. 임금이 인견(引見)하여 흉년 구제 상황을 물으니, 선생이 아뢰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3년을 지탱할 저축이 없으면 나라 꼴이 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제 한 해 흉년이 들었다고 공사 간에 군색하고 결핍됨이 이러하니, 금년에도 만일 농사일이 실패된다면 흉년 구제는 모양새를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보통 때에 경비를 절약해서 저축하여 두어야 예상치 못한 재해가 있더라도 군색하고 급히 서두를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공주 판관(公州判官) 인귀손(印貴孫)은 못되고 탐욕스러우며, 흉년 구제를 잘 수행하지 않았으니 그 죄를 다스리소서.” 하여,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회재(晦齋) 이 선생(이언적(李彥迪))을 남쪽 교외에서 전송하다. 그때에 회재가 경주로 돌아갔다. 5월, 통덕랑(通德郞)이 되고, 사인(舍人) 겸 승문원교감 시강원문학으로 승진하다. ○ 8월, 농암(聾岩) 이공(李公 이현보(李賢輔))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 송별시가 있다. 재해를 시찰하는 어사로 임명되어 강원도로 가다. 과청평산(過淸平山) 시서(詩序)가 있다. ○ 12월,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다.
22년 (계묘) 43세 2월,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에 임명되었다가 또 장령에 임명되고, 전설사수(典設司守)로 옮기다. ○ 6월, 조봉대부(朝奉大夫)가 되다. ○ 7월, 성균관사예 겸 승문원교감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에 임명되다. ○ 8월, 조산대부(朝散大夫)가 되고 사간원 사간으로 승진되었으나, 병으로 임명되지 못하고, 사복시 첨정에 제수되다. 수찬 김후지(金厚之)가 휴가를 얻어 귀성하는 것을 전송한 시가 있으니,
내가 지난날 그대와 더불어 반궁(泮宮 성균관)에서 노닐 적에 / 我昔與子遊泮宮
한마디로 도가 맞아 기꺼이 서로 사귀었지 / 一言道合欣相得
그대는 세상살이가 빈 배와 같음을 알았고 / 君知處世如虛舟
나는 저력(樗櫟)처럼 쓸모없다 믿었지 / 我信散材同樗櫟
부귀영화가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은 것 / 富貴於我等浮雲
우연히 얻었을 뿐 내가 구한 바 아니었네 / 偶然得之非吾求
가을바람 소슬하게 한강 물에 부는데 / 秋風蕭蕭吹漢水
바닷길 산길 천리에 그대 먼저 가네그려 / 海山千里君先去
하였다. ○ 10월, 성균관 사성으로 임명되다. ○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 성묘하다. ○ 11월,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살피건대, 선생이 뒤에 조남명(曺南冥 남명 조식(南㝠曺植))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어릴 때부터 옛 성현을 사모하는 마음만 있었을 뿐이나, 집이 가난하고 모친이 노쇠하다는 연유로 친구들이 억지로 과거를 통해 이록(利錄)을 얻을 것을 권하였습니다. 내 그때에 실로 식견이 없어서 곧 그 권유에 마음이 움직여 추천하는 글에 이름을 걸고 보니, 세상일에 골몰하느라 날마다 겨를이 없거늘, 다른 것은 말하여 무엇 하겠습니까. 그 뒤에 병이 더욱 심하고, 또 스스로 생각하여도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사업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제야 비로소 뒤돌아 보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서 옛 성현의 글을 많이 가져다 읽었습니다. 이에 크게 깨달아 그 길을 따라서 길을 고치고 방향을 달리하여 상유(桑楡)의 경(景)을 거두려 합니다. 사직을 청해 벼슬자리를 떠나서 옛 서적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가 아직 미처 이르지 못한 것을 구하고자 하는데, 혹시라도 하늘의 도움을 얻어서, 차츰차츰 조금씩 쌓은 끝에 만에 하나라도 보탬이 된다면, 이 일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10년 이래의 뜻이요 소원이나, 성은이 하찮은 자를 포용하시고, 헛된 명예가 사람을 몰아부쳐서 계묘년(1543, 중종38)부터 임자년(1552, 명종7)에 이르는 동안 세 번 물러났으나 세 번 불려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늙고 병든 정력으로 공부도 전심하지 못하였는데 이러고서도 무엇이 이루어질까를 바란다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고, 정유일(鄭惟一)이 지은 〈언행록〉에도, “선생은 본래 벼슬할 마음이 적었고, 또 그때의 시국이 크게 어려운 사정이 있음을 보고, 계묘년부터 벼슬에서 물러나 쉬기로 뜻을 정하고, 그 뒤에는 여러 번 불려 돌아와도, 항상 조정에 오래 있지 않았다.” 하였다. 12월, 봉렬대부(奉列大夫)가 되다.
23년 (갑진) 44세 2월, 홍문관 교리로 불려 조정에 돌아오다. 독서당 매화가 늦은 봄에 비로소 피었기 때문에, 소동파의 운을 따라 지은 시 2수가 있다. 4월, 세자시강원 좌필선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숙배하지 않다.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다. ○ 6월,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성균관 직강으로 옮겨 제수되다. 또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체차되고 종친부 전첨에 제수되다.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가 북경으로 갈 때에 지어 준 시가 있다. 8월, 홍문관응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편수관 승문원교감이 되다. ○ 9월,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가다. ○ 10월, 조정으로 돌아오다. ○ 11월, 중종이 승하하다. 조정에서 중국에 사신을 보내 부고를 전하고 또 시호를 청하였는데, 두 표문은 모두 선생이 짓고 쓴 것이었다. 중국에 가니, 예부의 관원이 찬탄하며 말하기를, “표문의 글이 매우 좋고, 서법 또한 기묘하다.” 하여, 사신이 돌아와서 그 일을 보고하였다. 선생에게 말[馬]을 주게 하였다.
24년 인종 원년 (을사) 45세 1월,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이 되었으나 병으로 가지 못하다. 의주로 가는 임사수(林士遂)를 전송하는 시가 있다. 3월, 병으로 사직하고, 내섬시 첨정(內贍寺僉正)에 제수되다. ○ 4월, 봉정대부(奉正大夫)가 되고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에 임명되다. ○ 5월, 중훈대부(中訓大夫)가 되다. ○ 6월, 홍문관 응교로 임명되고, 전한(典翰)으로 승진되었으며, 겸직은 전과 같다. ○ 7월, 인종(仁宗)이 승하하고, 명종(明宗)이 즉위하다. 상소하여 왜인들이 강화하자고 비는 것을 허락하자고 청하다. 지난 경오년(1510, 중종5) 삼포(三浦)의 왜적들이 난을 일으켜서 변장을 죽였기 때문에, 조정에서 유담년(柳耼年)과 황형(黃衡) 등을 보내어 토벌하여 평정하고 마침내 왜와 절교하여 왕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왜인이 여러 차례 강화하기를 애걸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지난 일 때문에 또 거절했다. 이때 국가에 큰 초상이 있었고, 인심이 흉흉하였으므로 선생은 혹시 왜인들이 틈을 타서 화를 일으킬까 염려해서 상소하여 이에 대해 논하였다. 그 개략은 이러하다. “예전에 섬 오랑캐가 일으킨 사량포(蛇梁浦)의 변란은 개나 쥐와 같은 도둑에 불과했습니다. 이미 적도를 소탕하여 죽여서 물리쳤고, 또 왜관에 있는 자까지 쫓아냈으니, 국위를 이미 떨친 데다가 왕법도 역시 바로잡혔습니다. 저들이 마침내 우리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잘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마음을 새로이 하고 허물을 고치며, 머리를 숙여 불쌍히 여기심을 빌고, 꼬리를 흔들며 불쌍히 여겨 줄 것을 애걸하고 있습니다. 왕도는 탕탕하여 거짓일까 미리 예측하지 않으며, 미덥지 못할까 억측하지 않으니, 진실로 저와 같은 마음으로 온다면 받아들일 뿐입니다. 지금 천변은 위에서 보이고 인사(人事)는 아래서 어긋나 큰 화가 중첩하고 나라의 운수가 군색해지고 막혔으니, 이것은 우리나라의 어떤 시국입니까. 또, 나라에서는 이미 북쪽 오랑캐와 분쟁이 벌어졌는데, 만일 남ㆍ북의 두 오랑캐가 한꺼번에 일어난다면, 무엇을 믿고 이 일을 극복하여 내겠습니까. 조정에서 왜국과 절교하여야 한다는 청이 있다 함을 듣고는, 내심 한탄하였습니다. 이 일은 백 년 사직에 관계되는 근심이요, 억만 백성의 생명에 걸리는 일이라 생각되오니, 신의 이 글월을 자전(慈殿)께 여쭈시고, 널리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에게 의논하셔서 잘 절충하시어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8월, 중직대부(中直大夫)가 되었으나, 병으로 홍문관직을 사임하니,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에 제수되다. ○ 9월, 사옹원 정에 제수되고, 다시 홍문관 전한에 임명되었으며, 겸직은 전과 같다. ○ 10월, 이기(李芑)가 선생의 관직을 삭탈(削奪)할 것을 계청(啓請)하다. 이때에 간사한 권력배들이 세도를 부리니, 사화가 크게 일어나 죽이고 귀양 보내는 일이 잇따랐기 때문에, 사람들이 두려워 꼼짝도 못하였다. 우상 이기는 더욱 흉험하여, 선비의 여론이 찬성하지 않음을 알고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자를 다 몰아내어 여러 입을 틀어막으려고, 대궐에 들어가 홀로 아뢰기를, “근일에 죄목을 정한 것이 각기 그 죄에 적당하였사오나, 다만 조정의 관리 중에는 죄로 인해 파직될 자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천계(李天啓)ㆍ이황(李滉)ㆍ권물(權勿)ㆍ이담(李湛)ㆍ정황(丁熿) 등을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였다. 이 때문에 선생과 정황 등 몇 사람이 같은 날에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조야가 모두 놀라고 분하게 여겼다. ○ 12일에 인종의 재궁(梓宮)을 산릉(山陵)으로 발인하였는데, 선생은 반열에 들어가지 못하였기 때문에, 홀로 교외로 나가서 망곡하여 예를 행하였다. 관직 첩지(牒旨)를 돌려주라고 명하다. 이기(李芑)의 조카인 교리 이원록(李元祿)이 평소부터 선생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기에게 힘써 간하였고, 이기의 당인 임백령(林百齡) 역시 이기에게 말하기를, “이 아무개는 근신하여 제 할 일만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아는 일인데, 지금 만약 이 사람을 죄준다면, 사람들이 필시 전날의 죄 입은 사람도 모두 모함에 빠져서 억울하게 죄를 입었다 할 것입니다.” 하니, 이기가 또 대궐에 들어가 전번에 잘못 아뢴 것을 사죄하고 직첩을 도로 줄 것을 청하였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서용되어 사복시정 겸 승문원참교에 임명되다. ○ 11월, 통훈대부가 되고 영접도감 낭청(迎接都監郎廳)에 임명되다.
25년 명종(明宗) 원년 (병오) 46세 2월,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서 장인 권질(權礩)의 장사를 지내다. ○ 5월, 병으로 조정에 돌아오지 못하였기 때문에 관직에서 해임되다. ○ 7월, 부인 권씨가 죽다. ○ 8월, 교서관 교리 겸 승문원 교리가 되다. ○ 11월, 예빈시 정(禮賓寺正)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다. ○ 양진암(養眞菴)을 퇴계(退溪)의 동쪽 바위 위에 짓다. 이보다 먼저 작은 집을 온계리 남쪽 지산(芝山) 북쪽에 지었으나, 인가가 조밀하므로 아늑하고 고요하지 못하였다. 이해에 처음으로 퇴계 아래의 두서너 마장 되는 곳에 집을 빌려 살면서, 동쪽 바위 옆에 작은 암자를 짓고, 양진암(養眞菴)이라 이름하였다. 시내는 속명이 토계(兎溪)였으나, 선생은 토(兎) 자를 퇴(退) 자로 고치고, 이것으로 자신의 호를 삼았다.
26년 (정미) 47세 7월, 안동 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 8월, 홍문관 응교로 임명되고, 겸직은 전과 같다. 부름을 받고 조정에 돌아오다. 〈고의(古意)〉ㆍ〈설죽가(雪竹歌)〉ㆍ〈병중에 사서를 읽고 느끼는 바가 있어서[病中讀史有感]〉라는 시가 있다. 12월, 병으로 사직하니 의빈부 경력(儀賓府經歷)에 제수되다. 이때에 나라의 의논이 더욱 엇갈려서 양사(兩司)와 홍문관이 서로 상소하여, 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 ○ 중종의 왕자)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다. 선생은 만류할 힘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 병이라 핑계하고 사직하였다.
27년 (무신) 48세 1월, 외직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하여 단양 군수에 임명되다. 선생이 외직을 요청한 것은, 깊은 뜻이 있어서였다. 보내 줄 것을 요청했던 청송(靑松) 대신 단양 군수에 제수된 후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푸른 솔에 흰 학은 비록 연분이 없으나 / 靑松白鶴雖無分
푸른 물 붉은 산은 과연 인연이 있구나 / 碧水丹山信有緣
○ 선생은 고을을 정성스럽고 미더우며 백성을 측은히 여기는 태도로 다스렸고, 정사(政事)가 청렴하고 간결하였기 때문에, 아전이나 백성들이 모두 편하게 여겼다. 군내에는 특이한 명승지가 많았는데, 구담(龜潭)ㆍ도담(島潭) 등이 더욱 아름다웠다. 선생은 행정을 보다 틈이 나면 그런 곳에 가서 노닐며 시를 읊거나 풍광을 감상했는데, 그럴 때면 마치 조용히 세속을 벗어나 있는 듯한 흥취가 있었다. 단양의 산수 가운데 가히 놀 만한 곳을 적은 속기(續記)와 이락루(二樂樓)ㆍ화탄(花灘) 등의 여러 시가 있다. 2월, 둘째 아들 채(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 8월, 향교에서 석전례(釋奠禮)를 행하다. ○ 9월, 휴가를 얻어서 고향에 돌아가 성묘하다. ○ 10월, 풍기 군수로 전임되다. 형 대헌공이 충청 감사가 되자, 단양이 그 관내에 들어가기 때문에 바꾼 것이다.
28년 (기유) 49세 2월, 향교에서 석전례를 행하다. ○ 한식에 선영(先塋)에 성묘하다. ○ 4월, 소백산을 유람하다. 유산록(遊山錄)과 석륜사(石崙寺)에서 이백(李白)의 〈자극궁유감(紫極宮有感)〉이라는 시의 운을 따라 지은 여러 시가 있다. 9월, 병으로 감사에게 사장(辭狀)을 올리다. ○ 12월, 감사에게 글을 올려 백운동서원의 편액(扁額)과 서적을 청하였더니, 감사가 왕에게 아뢰어 내려 주다. 백운동은 군의 북쪽 소백산 아래 죽계(竹溪) 위쪽에 있었는데, 전조(前朝)인 고려 때의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 살던 곳이었다. 주세붕(周世鵬)이 군수가 되었을 적에, 비로소 그곳에 서원을 세워 문성공을 제사하고, 또한 여러 선비들이 학문을 하는 곳으로 삼았다. 선생은 ‘옛날에는 우리나라에 서원이 없었다가 이제 처음으로 생겼기 때문에, 위에서 시켜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면 혹시 그대로 없어져 버릴까’ 염려하여, 감사에게 글을 올려서 임금에게 보고하여 송나라의 고사에 의거해서 책을 내려 줄 것과 편액을 왕명으로 내려 줄 것과 겸하여 토지와 노비를 주어서 배우는 자가 의지할 곳이 있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감사 심통원(沈通源)이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에서는 서원의 이름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하고, 대제학(大提學) 신광한(申光漢)을 시켜 기문(記文)을 짓게 하며,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등의 책을 내려 주었다. 서원의 흥성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병으로 감사에게 세 번이나 사장을 올려 관직에서 해임해 주기를 청하고, 회보를 기다리지 않은 채 돌아오다. 행장이 쓸쓸해서 오직 책 두어 상자 뿐이었다.
29년 (경술) 50세 1월, 함부로 임소(任所)를 버리고 갔다 하여 고신(告身) 2등을 빼앗기다. ○ 2월, 처음으로 퇴계 서쪽에 자리를 잡고 살다. 이보다 먼저 하명동(霞明洞) 자하봉(紫霞峯) 아래에 땅을 얻어 집을 짓다가 끝내지 못했고, 다시 죽동(竹洞)으로 옮겼으나 또 골이 좁고 시냇물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마침내 계상(溪上)으로 정하였으니 무려 세 번이나 옮겨 살 곳을 정한 것이다. 한서암(寒栖菴)을 짓다. 집의 이름을 정습(靜習)이라 하고, 그 안에서 글을 읽었다. 시가 있는데,
벼슬에서 물러나니 어리석은 분수대로 편안하나 / 身退安愚分
배움은 퇴보하여 늦은 나이 근심스럽네 / 學退憂暮境
시내 위에 비로소 살 곳을 정하니 / 溪上始定居
흐르는 물에 임하여 날로 반성함이 있으리 / 臨流日有省
하였다. 이로부터 배우러 오는 선비가 날로 많아졌다. 농암(聾岩) 이공을 분천(汾川)에 가서 뵙다. 소동파가 〈달밤에 살구꽃 아래서 술을 마시며[月夜飮杏花下]〉 지은 시에 운을 맞춘 시가 있다. 4월, 광영당(光影塘)을 파다. 한서암 앞에 있으니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에서 뜻을 취해서 이름 지은 것이다. 8월, 형 좌윤공(左尹公) 이해(李瀣)가 별세하였다는 부음을 듣다. 좌윤공이 전에 사헌부에 있을 때에, 이기(李芑)가 정승이 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논한 일이 있었다. 이에 이기의 모함에 빠져 곤장을 맞고 귀양 가던 길에 죽은 것이다.
30년 (신해) 51세 이해에는 선생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집에 있다. 여러 사람과 주고받은 시 14수가 있다. 3월, 안동 마명동(馬鳴洞) 선영에 가서 성묘하다.
31년 (임자) 52세 입춘시 2수가 있는데, 그 하나는 다음과 같다.
서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여 / 黃卷中間對聖賢
밝고 빈 방에 초연히 앉았노라 / 虛明一室坐超然
창가에 매화 또 봄 소식을 전하니 / 梅窓又見春消息
거문고 줄 끊어졌다 탄식 말아라 / 莫向瑤琴嘆絶絃
농암을 임강사(臨江寺)로 찾아 뵙다. 시가 있다. 4월, 홍문관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 승문원교리에 임명되어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오다. ○ 5월 8일, 입시하여 진강(進講)하다. 글을 보다가 아뢰기를, “선행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고, 선행을 쌓지 않는 집에는 반드시 재앙이 있습니다. 대개 사람이 악한 일을 할 때에 스스로 이만한 일이 무슨 해가 되겠는가 하겠지만, 그 악이 점점 쌓이면 종국에는 큰 화가 이르게 되는 법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선을 좇음은 올라가는 것과 같고 악을 좇는 것은 무너지는 것과 같다.’ 하였습니다. 위로는 제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 마땅히 정일집중(精一執中)의 훈계를 가슴에 새기고, 한결같이 이것을 지켜 사사로운 마음이 섞이지 아니하면 간사한 마음이 자연 싹트지 아니하고, 그 마음가짐이 한결같이 공정(公正)하여 공과 사(私), 의(義)와 이(利)가 구별될 것이니 주상께서는 반성하시고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매 사임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 6월, 동료들과 함께 차자를 올려 일을 논하고,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홍문관 부응교에 임명되다. ○ 7월, 통정대부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다. 이때에 대사성의 자리가 비었기 때문에, 이조에서 대신의 뜻으로 계청하여 당하관 중에서 글 잘하고 재주 있고 실행력 있는 자를 택하여 의망(擬望)하였는데 선생이 수망(首望)에 올랐기 때문에 품계를 뛰어넘어 발탁된 것이다. ○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의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에 발문(跋文)을 썼다. 11월, 병으로 사임하고 상호군(上護軍)이 되다.
32년 (계축) 53세 4월, 대사성에 임명되다. 임금이 학교가 피폐하고 해이해졌다 하여, 권학 절목(勸學節目)을 내려서 분명하게 거행하게 하니, 선생이 사양하여 사임하고 다시 사장(師長 대사성)을 선발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사학(四學)에 통문을 돌려서 생도들을 타이르다. 그 개략을 들면, “학교는 풍습과 교화의 근원이요, 다른 곳보다 나은 곳입니다. 선비는 예의를 밝히는 주인이요, 원기가 모여 있는 곳입니다. 나라에서 학교를 설치하여 선비를 기르는 데는 그 뜻이 매우 높으니, 스승과 학생 사이에는 마땅히 예절과 의리를 앞세워서, 스승은 엄하고 학생은 공경하여, 각각 도리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 생도 여러분은 모든 일상생활을 의리 속에서 행하여, 서로 신칙하고 격려해서 묵은 습관을 씻어 버리기에 힘을 다할 것이며, 들어와서 아버지와 형을 섬기는 마음으로 나가서는 어른과 윗사람을 섬기는 예절로 삼을 것이며, 안으로는 충성과 믿음을 주로 하고, 밖으로는 온순하고 공손한 것을 실행하여, 나라에서 문화를 숭상하고 교화를 일으키기 위하여 학교를 설치하고 선비를 기르는 뜻에 부응해야 합니다.” 하였다. 6월, 상께서 학전(學田)을 하사하였기 때문에 여러 생도들을 거느리고 전(箋)을 올려 사례하다. ○ 7월, 대왕대비의 환정교서(還政敎書)를 지어 올리다. ○ 병으로 사직하여 부호군(副護軍)에 제수되다. ○ 8월, 친시 대독관(親試對讀官)에 선출되다. ○ 9월 병진, 경복궁에 화재가 났으므로 종묘를 위안하는 제문을 지어 올리다. ○ 충무위 상호군에 임명되다. 홍응길(洪應吉)의 〈유금강산록(遊金剛山錄)〉에 서문을 써 주었다. 10월,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天命圖)〉를 개정하다. 정지운의 자는 정이(靜而)요, 호는 추만(秋巒)이다. 〈천명도〉를 짓고 또 그 설명이 있었는데, 선생이 그를 위하여 정정해 주고 그 뒤에다 서(叙)를 써 주었다. 그 개략을 들면, “내가 벼슬하기 시작할 때부터 한양에 와서 서쪽 성문 안에 우거한 지 20년이나 되었으나 그래도 이웃에 사는 정정이(鄭靜而)와 서로 사귀어 왕래하지 못했었다. 하루는 이른바 〈천명도〉라는 것을 얻었는데, 그 그림과 설이 잘못된 것이 상당히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시켜 정이를 찾아서 원래의 도면을 보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또 정이를 만나자고 청하였더니, 말이 몇 차례 오간 뒤에 만나게 되었다. 정이가 말하기를, ‘지난번에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ㆍ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두 선생 문하에서 배우면서 그 의론은 들었으나, 원래 성리학은 미묘하기 때문에 어디 가서 질문하여 밝힐 곳이 없음을 근심하였습니다. 시험 삼아 주자의 학설을 가져다가 여러 설을 참고하여 천명도를 만들어 그것을 선생(모재ㆍ사재)께 가지고 가서 그 그릇된 것을 지적해 줄 것을 청했더니, 선생께서는 공을 쌓지 않고 가볍게 의논할 것이 못 된다고만 하셨습니다. 그 후에 잘못된 곳을 자각하여 고친 것이 역시 많지마는 아직도 완성본은 아닙니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두 선생께서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 한 것은 반드시 깊은 뜻이 있을 것이나, 오늘 우리들이 학문을 강구하다가 타당하지 못한 데가 있으면, 어찌 구차하게 동조하거나 억지로 감싸주며, 그 옳고 그른 것을 가려내지 아니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태극도와 그 학설을 끌어다 증거하고 지적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잘못되었으니 고쳐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필요 없으니 삭제해야 할 것이다. 저것은 부족하니 보충하여야겠는데 어떠한가.’ 하니, 정이가 모두 다 알아듣고 수긍하였으며 노여워하거나 아끼는 빛이 없었다. 오직 내 말에 타당하지 않은 점이 있으면 반드시 극력 변론하여 지극히 타당한 데로 귀착되어야 그만두었다. 게다가 다시 호남 선비 이항(李恒)이 논한 ‘정(情)은 기(氣)의 권내(圈內)에 둘 수 없다.’는 말을 들어서 여러 사람의 장점을 모으는 자료로 삼았다. 그런 지 두어 달 만에 정이가 그 개정한 그림과 그에 따른 설명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다시 서로 참고하고 교정하여 완성하였다. 과연 그릇된 것이 없지나 않은지 알지 못하겠으나, 우리들이 본 바로는 거의 할 수 있는 것은 다한 것이었다. 이에 이것을 앉는 자리 좌우에 걸어 두고 조석으로 마음을 가라앉혀서 보고 완미하여, 그림으로 인하여 깊은 속을 밝혀내어 조금이나마 진취하고 유익함이 있기를 기대한다.” 하였다.
33년 (갑인) 54세 2월, 동궁(東宮)의 상량문을 짓다. ○ 4월, 사정전(思政殿)의 상량문을 짓다. ○ 5월, 형조 참의에 임명되다. ○ 6월, 병조 참의로 옮기다. ○ 7월, 주신재(周愼齋 주세붕)의 죽음에 곡하다. 만사(挽詞)가 있다. 노이재(盧伊齋 노수신(盧守愼))에게 편지를 보내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에 주해한 것을 논하다. 이재가 이때에 진도(珍島)로 귀양 가 있으면서 〈숙흥야매잠〉을 주해하였다. 선생이 편지로 이것을 논하였는데, 개략을 들면, “〈숙흥야매잠〉은 옛날에 나 역시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그래도 조리의 치밀함이나 공부의 과정에 엄격함이 이같이 지극한 줄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주해한 것을 보니 장(章)을 나누어 구절을 분석하였고, 정대하고 숭고한 이론으로 가장 골자가 되어 있는 곳을 마음껏 파헤쳐서 밝고 넓은 경지에 홀로 도달하였으니 탄복하여 마지않습니다. 혹 그중 몇 군데 해석에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기에 삼가 집어내어 별지에 적어 보내니, 바로잡아 주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경복궁에 새로 지은 여러 전각의 편액을 쓰다. ○ 《연평답문(延平答問)》에 발(跋)을 쓰다. 청주에서 그 답문을 새로 판에 새기고 목사 이정(李楨)이 편지를 보내어 청하므로 그 뒤에 발문(跋文)을 썼다. 9월, 체차되어 상호군에 임명되다. ○ 10월, 사정전(思政殿)에 〈대보잠(大寶箴)〉을 써 올리다. ○ 11월, 상사(上舍) 홍인우(洪仁祐)의 죽음에 곡하다. 선생이 어느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이 사람은 학문이 있고 문장이 있었는데 갑자기 죽게 되어 매양 깊이 탄식하며 아까워하였습니다.” 하였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다. ○ 12월, 〈중수경복궁기(重修景福宮記)〉를 지어 올리니, 상께서 말을 하사하시다.
34년 (을묘) 55세 2월, 강녕전(康寧殿)에 칠월편(七月篇)을 써 올리다. ○ 병으로 세 번 사직하여 해직되자 즉시 도성을 나가 배를 사서[買舟] 고향으로 돌아가다. 이날 상호군에 제수되다. ○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고 음식을 하사하였으며, 패초하는 교지를 내려 서울에 와서 의원에게 보이라고 명하다. 선생이 전(箋)을 올려 은혜에 감사하고 소명(召命)은 사양하였으나, 상께서 윤허하지 않고 5월에 다시 부르다. 선생이 귀향한 뒤에 이귀수(李龜壽)가 아뢰기를, “이황이 병으로 귀향한 지 거의 한 달이 되었는데도 성상께서는 알지 못하시니, 옛사람이 이른 바, ‘지난날에 등용하였던 자가 오늘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지 못한다.’라는 말은 필시 이런 경우를 말하는 것인가 하옵니다. 이황의 사람됨이 문장과 절조가 있는데 산야(山野)로 조용히 물러갔으니, 이런 사람을 높여서 장려하면 가히 선비의 기풍을 격려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하였고, 신여종(申汝悰)이 또 아뢰기를, “서울에 있으면 의원을 찾아 약 쓰기에 편할 것이오니, 올라오게 하는 것이 옳을까 하옵니다.” 하므로, 이에 고쳐서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고 불러오게 하였다. 선생은 전(箋)을 올려 감사한 뜻을 진술하고, 병으로 벼슬을 해임하여 주시기를 빌었다. 얼마 후 정유길(鄭惟吉)이 또 아뢰기를, “이황은 학술과 뛰어난 재주가 있습니다. 한 시대에 인재가 한도가 있는데, 이 같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므로 다시 부르게 되었다. 교지에, “오직 그대는 문한(文翰)의 재주를 가졌고 맑고 신중한 덕을 갖추었기 때문에 서울에 두고 고문(顧問)으로 대비하게 하려 했더니, 어찌 한 가지 병이 있다 하여 급거 고향으로 물러갔는가. 이제 사직하는 글과 감사하는 전을 보니, 내 마음이 허전하다. 마음 편히 조리하여 시기를 따지지 말고 언제든 올라오라.” 하였다. 가묘에 제사 지내어 고유(告由)하다. 은사(恩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6월, 농암(聾巖)이 별세하였으므로 그 집에 가서 곡하다. 선생이 행장을 지었다. 선비(先妣) 정부인(貞夫人) 김씨와 박씨의 묘표(墓標)를 짓다. 선생은 박씨 소생이요. 김씨는 먼젓번의 어머니였다. 겨울, 청량산(淸凉山)에 갔다가 한 달이 지나서야 돌아오다. 산을 유람하며 지은 시가 여러 수 있다.
35년 (병신) 56세 5월, 홍문관부제학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에 임명되어 부름을 받다. 이보다 전에 좌의정 상진(尙震)이 조사수(趙士秀)와 같이 경연 석상에서 선생을 부르기를 청하였다. 사수가 아뢰기를, “아무개의 사람됨이 퇴폐되어 가는 풍속을 붙들 만합니다.” 하여서 임금이 어찰로 불렀는데, 그 편지에 “그대는 성품이 월등하게 맑고 간결하며, 세상에 드문 문장으로 공명을 탐내지 않고 시골에 한가로이 살고 있다. 조용히 물러가려는 그대의 뜻을 가상하게 여기고 항상 서울로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렸으나, 어진 사람을 구하는 내 정성이 부족하여 조정에 벼슬하지 않으려 하니, 내 마음이 매우 섭섭하다. 내 비록 상문(尙文)의 덕은 없으나 그대는 어찌 부춘(富春)에 숨어 사는 것을 좋아하는가. 빨리 올라와 벼슬자리에 나와 내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부응하라.” 하고, 또 음식을 하사하였다. 얼마 후에 부제학을 제수하고 또 불렀다. 두 번째로 사직하여 부제학에서 체차되다. ○ 6월, 첨지중추부사에 제수하고, 내린 교지에, “그대의 정상과 뜻이 간절하므로 마지못해 들어주는 것이니 안심하고 병을 조리하라.” 하다. ○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차(編次)하여 완성하다. 선생은 《주자대전》 중에 있는 편지들은 바로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제자ㆍ친구들과 문답을 교환한 글로서 각각 그 재주와 품성의 정도와 학문의 수준에 따라 억제하기도 하고 높여 주기도 하며 인도하고 가르친 것이기 때문에 더욱 배우는 자에게 절실하나, 다만 그 분량이 너무 방대하여서 그 가리킨 뜻을 좀처럼 알기가 어렵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중에 더욱 학문에 관계되고 실용에 절실한 것을 골라, 편찬하여 이름을 《주자서절요》라 하였다. 8월, 일가 사람들을 모아 안동(安東)에서 고조와 증조의 묘에 제사 지내다. ○ 9월 9일, 온계리의 여러 친족과 낙모봉(落帽峯)에 오르다. ○ 12월, 향약(鄕約)을 초안(草案)하였다. 이때에 국가에서 향도(鄕徒)의 영(令)이 있었기 때문에 선생이 향약으로 초하였으나, 다른 일로 인하여 실행되지 못하였다. 《주자서절요》에 서문을 쓰다.
36년 (정사) 57세 3월, 〈수곡암기(樹谷庵記)〉를 짓다. 수곡은 선생의 선영이 있는 곳이다. 도산(陶山) 남쪽에 서당 지을 터를 마련하다. 다시 서당 지을 땅을 정하고 감상이 있어서, 〈두 번째 가서 도산 남쪽 골을 보면서〉라는 등의 시를 지었다. 4월, 태자산(太紫山)에 유람하고 대방동(大方洞)을 찾다. ○ 7월, 《계몽전의(啓蒙傳疑)》가 완성되다. 선생의 자서(自序)를 대강 추리면, “이(理)와 수(數)의 학문은 그 범위가 넓고 크며 미묘하여 연구하기 쉽지 않다. 혹 숨은 경전이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서적에서 나온 것은 반드시 상고하여 의논한 뒤에 그 뜻을 알 수 있고, 숨겨져 있는 오묘한 뜻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을 수 없고, 전사하거나 인쇄하는 과정에서의 잘못된 점은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곱하고 나누는 것은 상세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혹 생각하다가 깨달은 것이 있거나, 옛것을 상고하다가 증명된 것이 있으면, 그때그때 조목대로 직접 기록하여 상고해 보는 데 편리하게 하였다.” 하였다.
37년 (무오) 58세 3월, 창랑대(滄浪臺)를 지었다. 후에 천연대(天淵臺)라 고쳤다. 4월, 오담(鼇潭)에서 노닐다. 좨주(祭酒) 우탁(禹倬)을 위해 오담 근처에 서원을 세우고자 하여 그 터를 둘러 보았다. 6월, 어관포(魚灌圃 어득강(魚得江))의 시집에 발(跋)을 쓰다. ○ 윤7월, 상소하여 치사(致仕)하기를 빌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을 내려 부름을 받고 도성에 들어오다. 이보다 앞서 6월에 영의정 심연원(沈連源)과 대제학 정사룡(鄭士龍)이 경연 석상에서 선생에게 경관직(京官職)을 제수하고 감사로 하여금 잘 말하여 올려 보내게 할 것을 계청하였다. 선생이 그 말을 듣고 드디어 상소하여 질병으로 벼슬하기 어렵다는 뜻을 극력 설명하였다. 그 개략을 들면, “신이 비록 무식하오나 젊을 때부터 임금 섬기는 도리를 들었으니, 어찌 말에 멍에 메우기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명을 받는 것이 공경함이 되는 줄 모르겠습니까만 그 한 구석만을 굳게 지켜 중론의 비난과 누적된 의심 안에 처해 있으면서도 변함이 없는 것은 바로 자신이 벼슬에 나아가는 것이 임금을 섬기는 의리에 크게 어긋날까 두려워서입니다. 무엇을 의(義)라 하겠사옵니까. 사리에 마땅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것을 숨기면서 벼슬자리를 도둑질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겠사옵니까. 병으로 폐인이 된 자가 녹을 도둑질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겠사옵니까. 헛된 명성으로 세상을 속이는 것이 마땅한 것이겠사옵니까. 잘못인 줄 알면서도 무릅쓰고 벼슬에 나아가는 것이 마땅한 것이겠사옵니까.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면서도 물러나지 않는 것이 마땅한 것이겠사옵니까. 이 5가지 마땅하지 못함을 가진 채 조정에 선다면 그 신하 된 자로서 의가 어떻겠습니까. 엎드려 비오니, 신의 사정에 어둡고 어리석은 것을 살피시옵고, 신의 잔피(孱疲)하고 수척한 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전에 제수하신 그대로 길이 시골에 물러 나와, 허물을 고치고 병을 조리하게 하여 여생을 마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였다. 임금이 친히 편지를 내려 이르기를, “이제 상소의 말을 보니 그간에 물러나려던 일을 다 기록하고, 다섯 가지 마땅하지 못한 점을 진술하며 오지 못하겠다고 굳게 고집하니, 내가 비록 마땅한 사람을 얻어서 정치답게 하여 보려고 하지만 어찌 그 뜻을 빼앗을 수 있겠는가. 내가 실로 덕이 없고 사리에 어두워 함께 큰일을 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그대가 도를 지키고 의를 지키면서 도와줄 뜻이 없는 것이니, 내가 매우 부끄럽노라. 마땅히 내 뜻을 알라.” 하였다. 선생이 마지못해 명을 좇아 길을 떠나 9월 그믐에 서울로 들어왔다. 10월,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다. 임금이 은밀히 불러 선생이 정원에 나오니 이르기를, “학교는 풍속을 교화하는 근원인데 퇴폐하여 미약함이 너무 심하고 선비의 기풍은 마땅히 바르게 길러야 하는데도, 경박하고 방탕하여 아름답지 못하다. 이것은 비록 나의 불민한 탓이기는 하나, 제대로 고무(鼓舞)하고 교화하지 못한 소치이기도 하니 또한 사장(師長 대사성)과도 연관이 있지 않겠는가. 그대는 문장에 능하고 청렴하며 근실하여 교육하는 소임에 합당하기 때문에 내가 그대에게 위임하는 것이니,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서 정성을 다하여 부지런히 교화시켜 학교를 진흥시키고 선비의 기풍을 바로잡으라.” 하고, 담비 가죽으로 된 귀마개를 하사하였다. 선생이 이르기를, “신의 병이 심하여 전에도 두 번이나 이 임무를 맡았어도 모두 감당하지 못하였사옵니다. 이제 또 맡기시니 또 전과 같이 감당해 내지 못할까 근심이 되옵니다.” 하였는데 또 술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11월, 병으로 사양하여 상호군에 제수되다. ○ 12월, 임금이 친필로 써서 특별히 가선대부 공조 참판에 승진시켰으나 병으로 사양하다. 허락하지 않아 재삼 사양하였으나 모두 허락되지 않아 할 수 없이 명을 받다. 또다시 극력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38년 (기미) 59세 2월,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 분황(焚黃)하다. 병으로 조정에 돌아가지 않고 장계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이때에 선생이 분황차 물러 나와 돌아가지 아니하니, 어떤 이가 의아하게 여기고 물었다. 선생이 편지로 대답하기를, “옛사람도 매우 부득이한 처지에 이르게 되면 또한 다른 일을 빌려서 거취를 정하였으니, 어찌 임금을 섬기는 데 정성이 없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싫어하는 바가 가탁하는 것보다 심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내가 분황하려 휴가를 청한 것은 원래 법례대로 따른 것이며, 병으로 조정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기에 그대로 물러날 것을 청한 것인데, 이 어찌 남들 말처럼 일을 가탁하여 성실하지 못한 것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옛 의리는 살피지 않고 남을 너무 가혹하게 책망합니다.” 하였다. 5월, 또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7월, 또 사직하니 임금이 마지못해 허락하여 참판을 체차하고 동지중추부사에 제수하고 본도(本道)에 명하여 식량을 주게 하다. ○ 황중거에게 보내는 답서에서 《백록동규집해(白鹿洞規集解)》를 논하다. 《집해》는 송당(松堂) 박영(朴英)이 서술한 것인데, 잘못된 곳이 있어서 선생이 사리대로 따져 해석하였다. 〈이산서원기(伊山書院記)〉를 짓다. 편액을 쓰고 서원의 규약을 정하였다. 12월,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을 편찬하기 시작하다. 주자 이후로 도학하는 선비가 매우 많았으나, 기록이 여기저기에서 나와 그 논한 바의 차이와 시비, 학문의 깊이와 수준을 모두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배우는 자들이 이것을 병통으로 여겼다. 선생이 주자서와 어류(語類), 실기(實記), 사전(史傳), 일통지(一統志) 등의 서적에 의거하여, 그 언행과 사적(事蹟)을 채택, 수집해서 각각 종류에 따라 분류하여 송나라가 강남으로 건너간 뒤로부터 원(元)ㆍ명(明)에까지 이르렀고, 이름하기를 《이학통록(理學通錄)》이라 하였다. 육구연(陸九淵)의 학문을 하는 자에게는 별도로 외집(外集)을 만들어서 그 뒤의 부록으로 삼아 학술이 통일될 수 있게 하였다.
39년 (경신) 60세 1월, 조남명의 《유두류록(遊頭流錄)》의 발(跋)을 썼다. ○ 11월에 기고봉(奇高峯)의 편지에 회답하여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변론하다. 기대승(奇大升) 명언(明彦)이, “천명도(天命圖)의 사단칠정을 이(理)와 기(氣)에 분속시킨 것은 너무나 심하게 분리시킨 것이고, ‘이(理)와 기(氣)는 갈라져서 두 물(物)이 되며, 칠정은 이(理)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사단은 기를 타지 않는다.’라고 한 말은 뜻에 병폐가 없지 않다.”고 편지를 보내와 변론하였다. 선생이 회답하였는데, 개략을 들면, “사단은 정(情)이요, 칠정도 역시 정입니다. 다 같이 정이면서 어째서 사단과 칠정이란 다른 이름이 있겠습니까. 보내온 말에 이른바 ‘말한 바 대상이 달랐기 때문이다.’ 함은 옳은 말입니다. 대개 이와 기가 본래 서로 힘입어 체(體)가 되고, 서로 기다려 용(用)이 되니, 본래 이 없는 기도 있을 수 없고, 또한 기 없는 이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하는 바 대상이 같지 않다면 역시 분별이 없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성(性)이라는 글자 하나를 가지고 말하자면, 자사(子思)의 이른바 천명의 성[天命之性]과 맹자의 이른바 성선의 성[性善之性]에서 두 성(性) 자가 가리키는 뜻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와 기의 타고난 성품 가운데로 나아가서 이 이치의 근원이 되는 본연(本然)의 곳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가리킨 바가 이에 있고 기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순수한 선이며 악이 없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와 기가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기를 겸하여 말한다면, 이것은 이미 성의 본연이 아닐 것입니다. 대개 자사나 맹자와 같이 도체(道體)의 전부를 환하게 본 사람들이 이 같은 말을 주장한 것은, 그 하나만 알고 그 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로 기를 섞어서 성을 말한다면 성 본연의 선(善)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자(程子)와 장자(張子) 등 여러 사람들이 기질의 성[氣質之性]이 있다고 논한 것은 부득이한 까닭이요, 남보다 많은 것을 구하고, 색다른 의논을 세우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적하여 말한 것은 선천적으로 받아 나온 뒤에 있기 때문에, 또 본연의 성을 가지고 섞어서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내 생각으로, 정(情)이 사단칠정으로 나누어지는 것은 성의 본연과 타고난 기질의 다름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성을 이미 이와 기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면, 정에 있어서만 홀로 이와 기로 나누어 말할 수 없겠습니까. 측은히 여길 줄 안다든지,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불선(不善)을 미워할 줄 안다든지, 사양한다거나 시비할 줄 안다는 것이 어디서부터 발하여 나온 것입니까. 그것은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의 성에서 발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희(喜)ㆍ노(怒)ㆍ애(哀)ㆍ구(懼)ㆍ애(愛)ㆍ오(惡)ㆍ욕(欲)은 어디서부터 발하여 나온 것입니까. 그것은 외물(外物)이 그 형상에 부딪치고 안에서 동(動)하여서 경계를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사단이 발하여 나오는 것을 맹자가 이미 심(心)이라 하였으니, 심은 진실로 이(理)와 기(氣)가 합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가리켜 말하는 바가 이(理)를 주로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인ㆍ의ㆍ예ㆍ지의 성은 순수하게 안에 있는 것으로서, 이 네 가지는 그 발현의 단서인 것입니다. 칠정이 발하여 나오는 것을 정자는 ‘안에서 나오는 것’이라 하였고, 주자도 ‘각각 해당한 바가 있다.’고 말하였으니 본래 이ㆍ기를 겸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리켜 말하는 것이 기에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외물이 오는 것은 느끼기 쉽고, 먼저 동하는 것은 형기(形氣)와 같은 것이 없으니, 이 일곱 가지는 곧 사물의 근원입니다. 사단은 모두 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네 가지의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하였고, 또 ‘그 정(情)은 가히 선이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칠정은 근본이 선한 것이나 악에 흐르기 쉽기 때문에 그 발하여 나와서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 한번 있을 때 잘 살피지 못하면 마음은 이미 바르게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면 두 가지(사단ㆍ칠정)가 다 비록 이와 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나, 그 근원하는 바[所從來]로 연유하여 각각 주장한 것을 가리켜 말한다면, 어떤 것은 이가 된다 하고, 어떤 것은 기가 된다고 하지 못할 게 무엇입니까. 대개 의리의 학문은 심오하고 미묘함의 극치인데, 모름지기 마음을 크게 두고 안목을 높게 가지며, 결코 먼저 한 가지 설만으로 주장을 삼지 말고 마음을 겸허하게 하여 심기를 안정시킨 뒤에 천천히 그 뜻과 취지를 보아서, 같은 속에 다른 점이 있음을 알고, 다른 속에도 같은 점이 있음을 알며, 나누어져 둘이 되었다 하여도 일찍이 떨어진 일이 없었다고 하는데 문제되지 않고, 합하여 하나가 된다 하여도 실은 서로 섞이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귀착하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두루 알고 편벽됨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그대가 변론한 바는 이와 달라서, 합하는 것을 기뻐하고 떨어지는 것을 미워하며, 뭉쳐서 온전한 것을 좋아하고 분석하는 것을 싫어하여, 사단칠정의 근원하는 바는 규명하지 아니하고, 대체로 이와 기를 겸하여 선과 악이 있다 하여 깊이 분별하여 말하는 것을 옳지 않다 하니, 이것은 바로 이와 기를 한 물건이라 여겨 분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근세에 나정암(羅整菴 명나라의 학자 나흠순(羅欽順))이 이와 기는 서로 다른 물건이 아니라는 말을 주창하여 주자의 말을 옳지 않다고 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나는 평소에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뜻밖에도 보내온 편지의 말이 이와 비슷합니다. 대체로 학문을 강구하려고 하면서 분석함을 싫어하고, 합하여 하나로 만들기만 힘쓰는 것을 옛사람은, ‘대추를 통째로 꿀떡 삼킨다.’고 하였으니, 그 병폐가 적지 않습니다. 계속 이와 같이 하면, 차츰차츰 기를 가지고 성을 논하는 폐단으로 들어가 인욕(人欲)을 오인(誤認)하여 천리(天理)라고 하는 낭패에 떨어질 것이니, 어찌 옳다고 하겠습니까. 보내온 편지를 받은 이후로부터 즉시 나의 소견을 보낼까 하였으나, 그래도 감히 나의 견해가 반드시 의심의 여지가 없이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오래도록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근래 《주자어류(朱子語類)》를 보니, 맹자의 사단을 논한 글의 마지막 한 조목에 바로 이 일을 논하였으니, 그 말에 ‘사단은 이 이(理)에서 발하여 나온 것이요, 칠정은 이 기(氣)에서 발하여 나온 것이다.’ 하였습니다. ‘감히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그 스승을 믿는다.’라고 옛사람이 말하지 아니하였습니까. 이 말을 본 뒤에 비로소 어리석은 나의 소견이 크게 틀리지 않았음을 믿게 되어 이에 감히 구구한 것을 대강 진술하여 가르침을 청합니다.” 하였다. 명언이 또 조목조목 변론하여 편지 왕래가 서너 번 있었는데 마지막에 선생이 회답하기를, “의리를 변론하여 해석하는 데는 마땅히 치밀하고 폭넓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대가 논한 것을 살펴보니 그 변론한 조목과 줄거리가 너무나 번거롭고 말씀이 산만하여, 왕왕 임시로 옛날 선비의 말을 찾아다 자기가 모자란 답변의 자료로 삼으니, 이것은 과거 보는 선비가 과거 장소에 들어가 시험 제목을 보고 옛날 사실을 주워 모아 답안을 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설사 그것이 십분 옳고 당연하다 하더라도 자신에게는 한 터럭만큼도 밀착된 것이 없는데도 다만 부질없이 다투어 성인(聖人)의 문하에서 크게 금하는 것을 범할 뿐입니다. 하물며 참으로 능히 옳고 마땅하지도 못한 것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전번과 같이 선뜻 회답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그 뒤에 명언이 비로소 이전의 자기 견해가 그릇되었음을 깨달아 자신의 학설을 버리고 선생을 따라 사단ㆍ칠정설을 지어서 말하기를, “맹자가 사단을 논함에 있어서, 대개 사단이 나[我]에게 있는 것을 모두 확충(擴充)할 줄 안다.” 하였으니, 대체로 이 사단이 있고 그것을 확충하고자 한다면, 사단이 이(理)가 발하여 나온 것이라 함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정자가 칠정을 논하여 말하기를, “‘정이 이미 왕성하여 더욱 방자해지면 그 성(性)이 뚫린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는 자신의 정을 단속하여 중(中)에 합하게 한다.’ 하였으니, 대개 칠정이 왕성하여 더욱 방자하게 될 때 그것을 단속하여 중(中)에 합하게 한다면 칠정은 이 기에서 발하여 나온 것이라 함이 옳지 않겠습니까. 이로써 본다면, 사단ㆍ칠정을 이(理)와 기(氣)로 분속하게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것은 1년 동안의 일은 아니나, 변론의 시발과 귀착한 곳을 보기 위하여 모두 여기에 기록하였다. 도산서당(陶山書堂)이 완성되다. 이로부터는 또 호를 도옹(陶翁)이라 하였다. 당(堂)은 3칸인데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 하였고, 방은 완락재(玩樂齋)라 하였다. 정사는 7칸인데, 농운정사(隴雲精舍)라 이름하였다. 선생이 매양 도산에 이르면 항상 완락재에 거처하면서 좌우에 도서를 쌓아 놓고 고개 숙여 읽으며 우러러 사색하기를 밤낮으로 계속했다. 집이 가난하여 나물과 잡곡밥으로 겨우 끼니를 이어 나갔기 때문에 각고(刻苦)한 공부와 담박한 생활을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견뎌 내지 못할까 염려하였으나 선생은 넉넉한 듯하였다. 선생은 도에 더욱 근접해 갔고 조예도 더욱 깊어져서 스스로 즐겼고, 바깥 물정을 부러워하지 않은 까닭에, 비록 궁하고 모자라는 가운데에서도 여유가 있고 스스로 터득한 바가 있어서 늙음이 다가오는 것도 알지 못하는 듯하였다. 그 뒤에 학생들이 정사 서쪽에 집을 짓자 그곳에 거처하면서 이름을 역락(亦樂)이라 하였으니, 논어의 ‘자원방래(自遠方來)’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12월에 임금의 부름을 받다. 중국 사신이 올 것이므로 송순(宋純)ㆍ임억령(林億齡) 등과 같이 불렀다.


[주D-001]이해에 …… 유학(遊學)하다 : 선생이 김하서 작별시의 뒤쪽에 손수 쓴 작은 서문[小序]에 말하기를 “계사년(1533, 중종28) 가을에 서(西)로 가서 반궁(泮宮)에 들어갔다.” 하였으니, 이 조목은 마땅히 반궁에 갔다는 계사년 조목 아래 있어야 할 것이다.
[주D-002]이(李)ㆍ두(杜) :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주D-003]왕ㆍ조 : 왕희지(王羲之)와 조맹부(趙孟頫)를 가리킨다.
[주D-004]문신기영회도(文臣耆英會圖) :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늙어 관직에 물러나 낙양(洛陽)에 있으면서, 명망 있는 노인들과 결사(結社)하여 기영회(耆英會)라 이름하고,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여기서는 국가에서 설치한 기로소(耆老所)에 든 사람들의 모임을 그림으로 그린 것을 말하는데, 기로소는 문관 이품(二品) 이상으로 60세가 넘은 사람을 입소(入所)시켜 공경하여 대접하는 곳이다.
[주D-005]군자가 …… 없다 : 《주역》 〈건괘(乾卦) 구삼(九三)〉의 효사(爻辭)이다.
[주D-006]중화(中和)를 …… 생육된다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나온다.
[주D-007]사가독서(賜暇讀書) : 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讀書堂)에서 공부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8]영주(瀛州)에 오른 것 : 영주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신선이 사는 선계(仙界)에 오른다는 것을 말한다. 당 태종(唐太宗)이 문학관(文學館)을 짓고 18학사를 선발하자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여 “영주에 올랐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新唐書 褚亮列傳》
[주D-009]조정으로 돌아오다 : 이 구절 다음에 “9월, 경기도의 재해를 시찰하는 어사가 되다.”라는 조목이 빠졌다.
[주D-010]세상살이가 …… 알았고 : 텅 빈 마음으로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떠돌아다니는 빈 배와 같다는 뜻으로, 《장자(莊子)》 〈산목(山木)〉에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다가와 부딪히면 비록 마음이 편협한 사람도 성을 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주D-011]저력(樗櫟)처럼 쓸모없다 믿었지 : 가죽나무[樗]와 상수리나무[槡]는 《장자(莊子)》의 〈인간세(人間世)〉와 〈소요유(逍遙遊)〉에서 대표적인 쓸모없는 나무[散材]로 거론되었다.
[주D-012]상유(桑楡)의 …… 합니다 : 상유는 서쪽에 태양이 지는 곳이며, 경은 햇빛이다.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가 풍이(馮異)에게 말하기를, “처음에 비록 동쪽에서 잃었으나 상유에서 거두었다.” 하였으니, 곧 처음에 실패하였다가 뒤에 회복하였다는 말이며, 여기서는 만년(晩年)에 공부를 성취한다는 뜻이다.
[주D-013]삼포(三浦) : 조선 시대에 왜인들이 와서 있도록 허락하여 준 곳으로 부산(釜山)의 부산포(富山浦), 울산(蔚山)의 염포(鹽浦), 웅천(熊川)의 제포(薺浦) 세 곳이다.
[주D-014]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 : 주희(朱熹)의 시에, “반 이랑 네모진 연못이 한 거울을 열었으니, 하늘빛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한다.[半畒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비유한 도학적(道學的)인 시이다.
[주D-015]정일집중(精一執中) : 정밀하게 살펴 사욕이 없게 하고 의리의 정도(正道)를 한결같이 지켜야 참으로 중도(中道)를 잡을 거라는 뜻으로,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나온다. 송(宋)의 주희(朱熹)는 이를 요(堯)ㆍ순(舜)ㆍ우(禹)의 전수심법(傳授心法)이라 하였다.
[주D-016]환정교서(還政敎書) : 그때까지 왕대비가 관여하던 정사를 왕에게 완전히 돌려 줌을 선포하는 교서이다.
[주D-017]연평답문(延平答問) : 주희(朱熹)가 그의 스승 이연평(李延平)과 문답한 것을 기록한 책이다.
[주D-018]칠월편(七月篇) : 《시경(詩經)》에 칠월편(七月篇)이 있는데, 사시(四時)의 농사짓는 풍경을 읊은 시이다. 주공(周公)이, 자기의 선대에서 왕업(王業)을 일으킬 때에 농사에 힘썼다는 것을 임금에게 알리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주D-019]상문(尙文)의 …… 좋아하는가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9장 “천하를 다스리는 데는 세 가지 중함이 있다.[王天下有三重焉]”라는 구절에 대한 정현(鄭玄)의 주석에 “하와 상과 주는 각각 충과 질과 문을 숭상하였다.[夏尙忠 商尙質 周尙文]”라는 말이 있다. 부춘산(富春山)에 숨어 살던 사람은 한의 엄광(嚴光)으로 광무제(光武帝)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주D-020]향약(鄕約) : 송나라 남전(藍田)의 여씨(呂氏) 형제들이 향약(鄕約)을 처음 만들었는데, 그것은 향촌(鄕村)에서 풍속을 교화하기 위하여 실천할 규약을 설정한 것이다. 이 강령(綱領)은 네 가지인데, “덕업으로 서로 돕고, 예속으로 서로 사귀며, 과실을 서로 충고하고, 환난에 서로 구조한다.[德業相勸 禮俗相交 過失相規 患難相恤]”이다. 후세에 이 여씨의 향약을 모방하여 실행하는 데는, 강령은 그대로 두고 세밀한 조목은 시대와 지방에 따라 각각 달리하였다.
[주D-021]우탁(禹倬) : 세상에서 역동(易東) 선생이라고 일컫는 고려 말기의 명현이다.
[주D-022]자원방래(自遠方來) : 《논어》의 첫 장에,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란 구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