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기본 이론/재미풍수 이야기

건원릉과 바꾼 남재의 `딴릉`등 명문가 묘지 (스크랩)

아베베1 2010. 3. 14. 13:38

제목

건원릉과 바꾼 남재의 `딴릉"
작성자 유영봉     2004/08/18

 

 

 

 

5. 건원릉과 바꾼 남재의 `딴릉`

사릉 앞을 지난 버스가 390번 도로에 올라 퇴계원 역을 향해 나아간다. 근래에 들어 퇴계원도 고층 아파트의 군락으로 바뀌어, 모처럼 이곳에 온 나는 낯이 설었다. 역전을 지나 강물을 끼고 계속 직진하던 버스가 의정부를 가리키는 43번 도로로 우회전을 한다.
차창에 하얀 바위로 맵씨를 낸 불암산이 장중하게 나타난다. 화접초등학교 가까이 `신광산업입구`란 표지판 앞에서 좌회전을 한 버스가 전방의 들판 중앙에 우뚝 솟아 얼른 눈에 띄는 남재(南在; 서기 1351∼1419) 선생의 묘소를 찾아간다. 행정구역으로는 남양주군 별내면 화접리에 속하는 곳이다.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불암산 중간 즈음에서 내려온 중출맥 한 줄기가 어느덧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강하고 험한 바위산의 기운이 숲에 이르러 육산(肉山)이 되었다. 여기서 `육`이란 흙을 가리킨다. 바위산에서 나와 차츰 흙으로 변해 가는 용맥의 흐름은 거친 기가 순화되고 정제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용맥은 마을을 지나 보일 듯이 보이지 않게 도로를 따라 흘러 내렸다. 마을길을 따라 묘역을 향해 들어간 용맥은 그대로 길이 되었다.
주산 불암산은 한북정맥에 속하는 광릉수목원의 뒷산 용암산에서 깃대봉과 수락산을 지나 덕릉 고개를 넘어 솟아오른 산이다. 불암산은 해발이 508m가 된다.
불암산의 넘치는 기운을 싣고 내려온 용맥은 마침내 앞쪽의 용암천을 만나 더 이상 진행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세찬 기운으로 들판 위에 동산 하나를 널찍하게 펼쳤다. 주변이 들이라서 시각적으로 상당히 우뚝하다. 그곳에 정제된 기가 단단히 뭉쳐 혈 한 자리가 만들어졌다.
이 용은 평지룡(平地龍)이다. 평지를 따라 존재를 잘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기세를 잃지 않은 살아있는 용이다. 그리고 마을로 향한 콘크리트 포장길에서 묘역으로 들어가는 소로가 갈라지는 작은 삼거리가 이 용의 과협처이다. 행룡을 하던 용이 물을 만나 혈을 맺기 위해 평지의 논과 밭 사이를 뚫고 나와 혈 근처에서 몸통을 조이며 살(煞)을 털어 과협을 한 천전과협(穿田過脇)의 형상이다. 천전과협이란 밭을 뚫고 과협을 했다는 말이다.
묘역 앞에는 제실과 신도비가 양쪽에서 각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남씨의 시조 영의공(英毅公) 남민(南敏)은 본래 중국 당(唐)나라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 사람 김충(金忠)이었다. 그는 신라 경덕왕 14(서기 755)년 당나라 현종(玄宗)의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오던 중 현해탄에서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우리 나라 해안에 떠밀려 왔다. 그가 처음 기착한 곳은 지금의 경북 영덕군 축산면 축산동에 해당하는 신라의 유린(有隣) 땅 죽도(竹島)였다.
죽을 고비 끝에 신라의 해안에 쓸려온 그는 마침내 귀국을 포기하였다. 산 좋고 물이 맑은데다 인심까지 순후한 신라인들을 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이에 경덕왕은 그의 귀화를 흔쾌히 허락하고, `여남` 출신인 그에게 `남`이란 성을 하사하였다. `여남(汝南)`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너는 남(南)이다`란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영양현(英陽縣)을 그의 식읍(食邑)으로 삼도록 하였는데, 이에 김충은 이름까지 민(敏)으로 바꾸었다. 그 후 한동안 남씨들에 관련된 기록은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다만 이들은 오늘날에도 영양(英陽) 김씨(金氏)를 같은 집안으로 여기고 있다. 김충이 남씨로 성을 바꾸기 전, 중국에서부터 데리고 왔던 아들 김석중(金錫中)이 영양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고려 중기가 되어, 남민의 후손 홍보(洪甫), 군보(君甫), 광보(匡甫) 삼형제는 각각 관향(貫鄕)을 나누어 각 파의 중시조가 되었다.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홍보가 양양을, 추밀원(樞密院)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군보가 의령(宜寧)을, 고성군(固城君)에 봉해진 광보가 고성(固城)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 후 다시 3대가 흘러 군보의 증손으로 을번(乙蕃), 을진(乙珍), 을경(乙敬) 3형제가 있었다. 이들 삼형제는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이라는 정치적 혼란기를 맞이하여 제각각 서로 다른 정치적 행보를 하였다.
을번(서기 1320∼1395)은 고려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는데, 조선 초에 개국공신이 된 두 아들―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곳의 비문에 손자로 되어있다.― 재(在)와 은(誾)의 공으로 검교시중(檢校侍中)을 지냈다.
그러나 을진은 고려가 멸망의 길로 접어들자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상패리의 사천(沙川)으로 은거하여, 끝까지 충절을 지켰다. 조선이 개국한 후 몇 차례 태조의 간곡한 부름이 있었지만, 을진은 결코 응하지 않았다. 이에 그의 충절에 감동한 태조는 그를 후세에 길이 기리기 위해 사천백(沙川伯)으로 봉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을진은 도리어 자신이 수모를 당하였다고 여겨 머리를 풀고 통곡한 다음, 상패리 감악산(紺嶽山)의 깊숙한 석굴에 숨어 충절로 일관된 삶을 마쳤다. 그가 죽은 뒤 그 굴은 남선굴(南仙窟)로 불려졌다.
을번의 아들 남재(南在)와 남은(南誾) 형제는 조선 태조를 도와 건국에 큰공을 세웠다. 특히 남은은 이방원(李芳遠),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중추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제1차 왕자의 난 때에 정도전과 함께 방석(芳碩)의 편에 가담하였다가 후일 태종이 된 이방원에게 주살을 당하였다.
남재의 이름은 본래 남겸(南謙)이었다. 그는 이색(李穡)의 문인으로,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여 조선을 건국하는데 큰공을 세웠다. 그는 경제에 밝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수리(數理)에 대단히 능하여 당시 `남산(南算)`으로 불렸다고 한다.
조선의 역사가 시작되던 1392년, 남겸은 포상을 피하여 포천의 왕방산으로 숨었으나, 마침내 태조에게 처소가 알려지고 말았다. 이에 태조가 `거기에 있었구나[在]!` 감탄을 하고는, `재`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남재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중추원학사(中樞院學士)에서 벼슬을 시작한 그는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며 쓰시마를 정벌하기도 하였는데, 태종 때는 영의정(領議政)에까지 올랐다.
현전하는 남재의 묘 자리는 본래 태조 이성계가 자신을 위해 잡아놓은 신후지지(身後之地)였다. 남재 또한 오늘날 이태조 묘소가 된 동구릉의 건원릉(健元陵)에 자신의 자리를 잡아두었었다. 그런데 이 두 자리는 우연한 일로 서로 맞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그 야화이다.

어느 날이다. 이태조는 무학 대사와 남재를 대동하고 인근을 지나다가, 자랑삼아 이곳을 방문했었다. 이때 남재가 `제 자리는 저 너머에 잡았는데, 매우 좋은 자리입니다`라고 덩달아 자랑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태조가 `멀지 않으니 그곳에 한번 가보자`고 불쑥 제의하였다. 드디어 지금의 건원릉 자리를 찾아간 태조가 아주 좋은 자리라고 연신 칭찬을 하자, 남재는 서로 바꿀 것을 제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신 남재는 `예로부터 왕이 잡아놓은 자리에 묘를 쓰면 후손 가운데 역적이 나온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걱정스럽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자 남재의 자리가 탐이 난 태조는 `만약 후일 역적이 나오더라도 당대의 당사자만을 문제삼겠다`고 약조를 하였다. 그 날 교환을 약속하고 망우리 고개를 넘던 이성계는 어찌나 기뻤던지, 당시 아들 방원과의 갈등으로 계속되던 근심을 씻은 듯이 잊고 말았다.

그런데 이 일화에서 남재가 우려한대로, 뒷날 남재의 4대손 남이(南怡) 장군이 나와 역적으로 몰렸다. 그러나 그 처벌은 태조와의 약속에 따라 당대의 남이 장군 하나로 끝이 났다는 설이 전한다. 그리고 그 날 도성을 향해 돌아오던 중, 근심[憂]을 잊고[忘] 넘었다는 그 고개는 `망우리(忘憂里)`란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후로 남재의 묘는 `딴릉`으로 불리게 되었다. 왕의 자리로 쓰려고 했다가 쓰이지 못해, 결국 `능`이 되지 못한 `다른 능`이란 뜻이다.
묘역에 올라보니, 제일 윗자리는 장방형의 묘소로 본래 다른 곳에 있던 남을번과 경주(慶州) 최씨(崔氏)가 함께 옮겨온 곳이다. 그 아래로는 역시 장방형 묘에 남재가 잠들어있고, 그 아래에는 신인(愼人) 남씨가 조선 후기에 반원형 묘로 자리를 잡았다. `신인`은 정삼품(正三品) 당하관(堂下官)이나 종삼품(從三品) 벼슬을 지낸 사람의 부인에게 주는 품계이다.
제일 뒤에서 후방을 바라보니, 날씨가 쾌청한 탓인지 엄중하면서도 고운 자태의 불암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그 한가운데에서 빠져 나온 용맥은 중간에다 양쪽이 퍼진 초생달 모양의 산을 차례로 두 개 솟아 올렸다. 뒤쪽의 것이 크고, 앞쪽의 것은 조금 작은 크기인데 약간 비껴 앉았다.
좌우 양쪽으로 퍼진 초생달 모양을 한 산을 옥대사(玉帶砂)나 아미사(蛾眉砂)라고 부른다. 그런데 아래쪽에 물이 없는 경우는, 마치 높은 벼슬아치들이 허리에 두르는 옥대(玉帶)의 모습과 같다고 해서 옥대사라고 부른다. 물이 있는 경우에는, 아래쪽에 촉촉한 눈망울을 지닌 고운 여인의 눈썹 모양이라고 해서 아미사라고 부른다. 대체로 산중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봉우리는 옥대사요, 평지나 물가의 것은 아미사에 속한다.
사격(砂格)에서 옥대사나 아미사는 모두 귀하게 여긴다. 옥대사는 남자에게 높은 벼슬아치를 예고하고, 아미사는 여자에게 왕비를 예고하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짧은 거리를 행룡하는 중출맥에 옥대사와 아미사가 모두 존재한다. 이는 극히 보기 드문 현상으로, 이곳이 그만큼 귀한 자리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아가 변화가 많은 용으로써, 그만큼 씩씩한 기상이 넘치고 순수한 정기를 자아내는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오죽했으면 이태조가 처음에 자신의 자리로 점지했을까?
들판을 지나 과협한 용은 좌우에 자그마한 호종사(護從砂)를 끌고 와 상당히 큰 혈판을 만들었다. 너무 크다보니, 들판에 홀로 솟은 외로운 산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는 주변의 기를 모두 끌어 모으는 상당히 좋은 형국이다. 그리고 실제 보기에도 시원스럽고 장엄하기까지 하다.
아울러 명당은 무지하게 넓고 크다. 사방의 산들이 저 멀리 물러앉아 둥그렇게 빙 둘렀다. 그 안에는 넓고 넓은 논들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평탄하고 원만하며 밝고 깨끗한 명당 안에는 곳곳에서 흘러 들어온 물들이 논들을 질펀하게 적시는 중이다. 도처의 재물이 흘러드는 명당이다.
그런데 파구(破口)가 너무 먼 것이 흠이다. 이곳 저곳에서 들판을 적시던 물이 하나가 되어 흘러가는 파구는 아득히 청룡과 백호가 만나는 지점이다. 묘역에서 보아 43번 도로의 오른쪽 끝이다.
파구가 너무 멀다는 것은 지출이 많다는 뜻이다. 명당 안에서 합쳐진 뒤 하나가 되어 빠져나가는 물의 양만큼 큰돈이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재물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오는데, 또 그만큼 나가는 명당이다.
그러나 정말 걱정스러운 것은 후방 왼쪽의 어깨가 시리다는 점이다. 수락산 우측 끝자락이자, 청룡 자락의 출발점이기도 한 고개 마루가 너무 휑하다. 더욱이 수락산은 서울 근교의 산들 중에 유일하게 서울을 등지고 솟아서, 무학 대사에게 미움을 받아 `반역산`으로 불리기도 한 산이다.
혹시 모르겠다. 나중에야 결백이 밝혀졌지만, 당대에 `반역`의 죄를 뒤집어 쓴 남이 장군이 나온 것은 혹 저 산자락의 저 바람 탓이 아닐까?
그리고 안산이 모호하다. 문필봉 하나가 정답기는 하지만, 혈장과는 전혀 상관없이 좌측의 후방으로 치우쳤다. 당당하게 마주하는 안산이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이런 저런 연유에서 이곳을 건원릉 자리에 비교해본 이태조가 침을 흘렸나보다.
이 혈은 `호승예불형(胡僧禮佛形)` 또는 `노승예불형(老僧禮佛形)`이라고 부른다. 불암산이 이역에서 온 인도 승려나 나이 먹은 노승을 상징하고, 평지에 둥두렷이 튀어나온 이 혈판이 목탁을 상징하는 탓이다. 목탁을 치는 채의 역할은 겹겹의 백호 앞쪽에서 혈을 바라보며 길고도 얕게 깔린 능선이 맡았다.
둘러보면 워낙 좋은 국세이다. 그래서일까? 주변 곳곳에 또 많은 혈이 아직도 숨어있을 듯 은근히 기대가 일어나는 그런 곳이다.
이 묘역의 진혈처는 남재의 자리이다. 묘소의 뒤쪽에 크고도 단단한 입수도두처가 불룩하고, 선익사도 묘를 감싸고 있다. 묘 앞의 순전도 제법 솟았다.
남재의 묘는 술좌진향(戌坐辰向)이다. 명당에 들어오는 큰 물줄기인 용암천은 좌측에서 우측으로 흐르고, 혈 앞에는 작은 물줄기는 우측에서 흘러나와 양수 협출을 한다. 파구 방향은 손사향(巽巳向)이다. 그래서 정묘향(正墓向)에 포함되는 좋은 향법이다.
정묘향은, 물이 좌수도우하고 우측에서 또 작은 물이 나와 양수협출(兩水挾出)해야 하며, 곤신파(坤申破)에 정미향(丁未向), 건해파(乾亥破)에 신술향(辛戌向), 간인파(艮寅破)에 계축향(癸丑向), 손사파(巽巳破)에 을진향(乙辰向)이 이에 속한다. 정묘향은 부귀를 함께 불러오는데다가, 자손들이 번창하고 건강하며 장수를 한다는 향이다.
남씨는 희성(稀姓)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시대에 많은 인재를 배출한 집안이다. 조선을 통틀어 정승이 6명, 대제학이 6명을 나왔는데, 문과 급제자는 140명을 상회한다. 특히 대제학을 6명이나 배출한 기록은 주목할만하다. 그런데 의령 남씨들이 풍수지리학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위 기록들은 시사해 주는 점이 많다고 하겠다.
오늘의 일정표에 의하면, 이곳과 맞바꾼 이태조의 건원릉을 향한 걸음이 앞에 남았다. 과연 얼마나 좋은 곳이기에 이곳과 바꿨을까? 모두들 기대감으로 인해 한껏 생기가 도는 표정들을 하고 버스에 오른다

 

광산김씨 사계 김장생

조선 예학의 거두 광산 김씨 사계 김장생 묘

조선 예학(禮學)의 거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묘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다. 호남고속도로 서대전 인터체인지에서 4번 국도 논산 방향으로 가다보면 1번 국도와 만나게 되는데 계속 논산 쪽으로 가면 연산리를 지나 좌측으로 "사계 선생 유적지 입구"라는 푯말이 나온다. 그 아래쪽으로 난 농로 길을 따라 곧장 내려가면 고정리가 나오고, 우측으로는 좌의정을 했던 김국광 선생 묘를 비롯한 광산 김씨 선영과 양천 허씨 정려가 보인다. 사계 선생 묘는 계속 길을 따라 가면 마을을 지나 고정산 자락에 있다.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달성 서씨(達成 徐氏), 연안 이씨(延安 李氏)와 함께 조선 3대 명문에 속한다. 그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가문이 광산 김씨다. 이들 문중(門中)에서도 달성 서씨는 약봉(藥峰) 서성(徐 )의 가문, 연안 이씨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가문, 그리고 광산 김씨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가문을 명문(名門)으로 꼽는다. 광산 김씨의 시조는 김흥광(金興光)으로 신라의 왕자였다고 한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고 나라가 혼란해지자 난리를 피해 가족을 데리고 지금의 광주인 무진주(武珍州) 서일동(현 담양군 평장동)으로 피난을 하여 터를 잡고 자연을 벗삼아 살았다. 그후 고려 태조가 그를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하자후손들이 광산(光山)을 본관으로 삼았다.

광산 김씨를 흔히 광김(光金)이라고도 하는데 세도가 당당했던 집안이라기보다는 대대로 석학(碩學), 거유(巨儒)를 많이 배출한 집안으로 알아준다. 성리학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金集)은 유학(儒學)의 시작이자 끝이라 할 수 있는 예학(禮學)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사후에 해동18현(海東18賢)에 추앙되어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文廟)에 배향되는 영예를 얻었다. 해동 18현이란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를 말하는데 우리 나라 역사상 학문과 도덕이 깊어 온 백성이 나라의 스승으로 우러러 받드는 명현(名賢)들이다. 문묘 배향은 일문 일대만이 아니라 대대손손의 영광이자 자랑이었다. 더욱이 문묘에 배향된 18현 중 한 가문에서 2명이 배향되기는 은진 송씨(恩津 宋氏)의 송시열, 송준길과 광산 김씨(光山 金氏)뿐인데 부자가 나란히 배향되기는 김장생, 김집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또 송시열과 송준길은 모두 김장생이 키워낸 수제자들인데 부자와 사제가 모두 문묘에 배향(配享)되어 사계 선생의 학문과 도덕이 얼마나 큰가를 짐작할 수 있다.

김흥광이 서일동에 터를 잡은 후 고려 때 그의 후손들 8명이 평장사(平章事, 정2품직)가 되자 세상 사람들이 그곳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불렀고, 지금의 전남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 지명이 유래되었다. 광산 김씨는 이미 고려 때부터 빛을 내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빛을 낸 가문이다. 여기에는 사계 김장생의 7대조 할머니 양천 허씨(陽川 許氏) 역할이 컸다. 양천 허씨 부인은 조선 태조 때 대사헌을 지낸 허응(許應)의 딸로 광산 김씨인 김문(金問)에게 시집을 왔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김문은 한림원의 벼슬을 하였으나 뜻하지 않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 허씨 부인은 불과 17세의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러자 딸의 신세를 가엾게 여긴 친정 부모는 몰래 다른 곳으로 개가(改嫁)를 시키려고 혼처를 알아보고 다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허씨 부인은 그 길로 개성을 떠나 유복자인 아들 김철산(金鐵山)을 데리고 시가(媤家)가 있는 연산(논산) 고정리(高井里)까지 500리를 걸어서 내려 왔다. 김문의 아버지 김약채(金若采)는 광산 김씨로는 처음으로 이 마을에 터를 잡아 살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허씨 부인이 산길을 걸으면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서 지켜주었는데 연산 시댁에 무사히 도착하자 곧바로 사라졌다고 한다.

허씨 부인은 시부모를 모시며 살림을 알뜰히 가꾸고 자식과 손자들을 훌륭히 키웠다. 김철산은 좌의정을 지낸 김국광(金國光), 김겸광(金謙光) 등 아들 4형제를 낳았고 다시 김국광의 5대손 김장생이 태어났으니 오늘날 고정리 마을은 허씨 부인의 정절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씨 부인은 1455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이곳 고정산에 묻혔는데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세조는 마을 입구에 정려(旌閭)를 세워 세상의 귀감으로 삼았으며, 허씨 부인은 정경부인(정1품)으로 추증(追贈)되었다. 김국광은 조선 5백년 역사에 광산 김씨의 뿌리를 깊게 내린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세조 13년 병조판서로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광김 최초의 우의정이 되었고, 그후 예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으로 승진 최항(崔恒),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했다. 성종 2년에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책록되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김국광의 5대손 김장생은 조선 선조 때 서인의 중진이며 대사헌인 아버지 김계휘(金繼輝)의 아들로 지금의 서울 정동부근에서 태어나 13세 때 기호학파의 대가인 이율곡과 송익필(구봉)의 문하에 입문 예학(禮學)을 전수 받아 수제자로 학문에만 정진하느라 과거도 포기하였다. 30세가 되었을 때 뛰어난 학문을 인정받아 창릉 참봉에 천거되었고, 임진왜란 때에는 호조정랑이 되어 명나라 군사의 군량조달을 담당하였으며, 난 이후 선조말과 광해군 초에는 주로 지방관을 역임하여 단양, 남양, 양근, 안성, 익산, 철원 등을 맡아 다스렸다. 철원부사로 재직할 때인 광해군 5년(1613년) 서얼들이 일으킨 역모사건인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처벌 위기를 맞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때 서제인 김경손, 김평손은 모두 잡혀가 고문을 당하여 죽었다. 이후 인목대비 폐모 논의가 일어나고 북인이 득세하는 등 조정이 어지럽자 미련 없이 관직을 포기하고 연산(논산)으로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반정 주역인 김류와 이귀가 산림처사로 추천하여 장령(掌令), 사업(司業) 등에 제수 되었으나 병을 핑개 삼아 사양하였다. 이후에도 조정에서 계속 사람을 보내 동지중추부사, 행호군 등 여러 관직을 제수했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러자 인조는 친히 쓴 글과 수레를 보내어 한양으로 올라올 것을 청하자 병을 무릎 쓰고 조정에 나갔다. 그는 대신들에게 임금의 덕을 잘 보도하고 묵은 폐단을 개혁하며 형벌을 신중히 하고 염치를 존중하며 검약을 실천하는 현실 개혁의 여러 방도를 주장하였다. 그는 집의(執義)와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내고 다시 낙향했는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노령임에도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의 직함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아 행제소에 보냈으며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데 앞장섰다. 조정이 청나라와 화해하려 하자 오랑캐와는 가깝게 지낼 수 없다며 끝까지 반대했으며, 인조가 그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을 왕으로 추존하려고 하자 그것의 불가함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하였다.

1630년 인조는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임명하고 조정에 출사할 것을 간곡히 요청했으나 더 이상 나가지 않고 향리에 머물면서 성리학과 예학을 깊이 연구하고 제자들과 강학(講學)에만 열중하다가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본래 시호는 왕실의 종친과 문무관 중에서 정2품 이상의 실직을 지낸 사람이 죽으면 주는 것인데 임금의 특별한 교시로서 퇴계 이황(문숙공), 김광필(문경공), 정여창(문헌공), 서경덕(문강공), 조광조(문정공), 김장생(문원공)과 같이 벼슬은 못했어도 학문이 높은 유현(儒賢)에게 시호를 추증하였다. 사계 김장생은 스승인 율곡 이이와 구봉 송익필로부터 학문의 정통을 물려받아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성리학을 발전시켰으며 예학에 밝아 당시 예에 대한 의문이 있으면 모두 그에게 와서 문의를 하였다고 한다. 오늘날에 전해지는 상례와 제례 등의 예도 그의 저서 <가례집람(家禮輯覽)>과 <상례비요(喪禮備要)>에서 전해지는 것들이다. 이러한 그의 학문은 아들 김집과 우암 송시열, 동춘 송준길을 비롯해서 이유태, 강석기, 이후원, 신미일 등에 전승되어 예학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고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김장생의 후손은 아들 김집(金集)이 예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좌찬성을 하여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김반(金槃)은 참판을 하였다. 김반의 아들 김익희(金益熙)는 병자호란 때 척화신의 한사람으로서 효종 때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낸 명신이자 대학자였다. 또 익희의 동생 김익겸(金益兼)은 유명한 서포 김만중의 아버지로 병자호란 때 청군에 대항하여 강화성을 지키다 성이 함락되자 분신 자결하였다. 익겸의 아들 김만기(金萬基)는 숙종의 왕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아버지로 대제학을 하였다. 만기의 동생 김만중(金萬重)은 유복자로 태어나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암행어사와 대제학을 하였으며 순한글 소설인 `구운몽`, `사씨남정기`, `서포만필`를 지은 국문학의 선구자다. 김만기의 아들 김진규(金鎭圭)는 예조판서, 대제학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김양택(金陽澤)은 영조때 대제학과 영의정을 하였고, 김만중의 증손자 김춘택(金春澤)은 숙종 때의 문인으로 시재(詩才)가 뛰어나 명망이 높았다. 또 김천택(金天澤)도 우리 나라 최초의 시가집(詩歌集)인 청구영언(靑丘永言)을 지어 지금도 귀중한 국문학의 자료가 되고 있다. 광산 김씨는 김만기, 김만중 형제 대제학에 김만기, 김진규, 김양택 3대 대제학을 배출하였으니 이것을 가문의 긍지와 자부심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

광산 김씨 고정리 선영(先塋)에는 사계 김장생 묘를 비롯하여 양천 허씨 부인 묘, 김철산과 부인 묘, 김겸광(金謙光), 김공휘(金公輝), 김선생(金善生) 등 여러 정승과 판서의 묘가 즐비하게 있는데 주산은 고정산(高井山)이다. 고정산은 백두산에서 출발한 백두대간룡이 지리산 천왕봉까지 가는 도중 영취산(1076m)에서 금남호남정맥으로 분맥하여 진안 마이산을 거쳐 주화산까지 와서 남으로는 호남정맥을 뻗고, 북으로는 금남정맥이 되어 운장산(1126m)과 왕사봉(634m)을 거쳐 대둔산(878m)을 기봉하는데 이곳의 태조산이 된다. 대둔산에서 낙맥한 주룡은 월성봉(650m)과 바랑산(555.4m)으로 내려와 곰치재를 넘고 호남고속도로를 건너 깃대봉(393m)을 기봉한다. 여기서 다시 국사봉(333m)을 만들고 매봉(146m)을 향해 가는데 용맥은 들판을 건너 천전과협(穿田過峽)하였다. 매봉에서 다시 방향을 바꾼 주룡은 왕대골과 동성골 들판을 지나 고정(145m)을 기봉한다.

고정산에서 출맥한 주룡은 계백장군 묘의 주산인 충장산으로 넘어가기 전 중간에서 약간 머무른 듯 작은 봉우리를 기봉하고 옆으로 맥을 뻗어 위이 하면서 계속 내려왔다. 주룡의 변화가 기세 장엄하지는 않으나 밝고 순하고 후덕하다. 이를 용의 12격룡으로 나누어 보자면 순룡(順龍)과 복룡(福龍)에 해당된다. 용진처에 다다른 주룡은 입수도두를 만들어 기를 응축시킨 다음 두 개의 맥을 뻗어 왼쪽으로는 사계 김장생 선생 묘의 혈을 만들고, 오른쪽으로는 사계 선생 묘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면서 변화 생동하여 김철산과 그 부인의 묘혈을 계속 연주형으로 결지 하였다. 청룡과 백호는 유정하고 다정하게 혈을 끌어안아 주었고, 청룡 백호가 감싸준 공간인 명당은 평탄 원만하며, 득수처는 여러 곳이나 파구는 한 곳으로 좁게 관쇄 해주었다. 파구의 방위는 계축(癸丑破)이고 물은 우수도좌(右水倒左)하므로 곤좌간향(坤坐艮向)을 하여 팔십 팔향법으로 자생향(自生向)이다. 청룡 백호 밖 조산과 나성들은 모두 이곳을 배반한 곳 하나 없이 귀하고 수려한 산들이 혈을 비추어 주고 있다. 이곳은 기세 장엄하기보다는 순하고 점잖은 분위기다. 아마 사계 선생의 성품이 이와 같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보았다.

달성서씨 (조선3대명문)

의정부에서 포천 가는 43번 국도를 따라 축석령 고개를 넘고 송우리를 지나면 좌측으로 해룡산이 보인다.1291 군부대 담장을 끼고 돌면 경기도 포천군 포천읍 설운리로 약봉(藥峰) 서성(徐 )의 묘와 그의 아버지고(固)와 할아버지 해( )의 묘가 있다. 광산김씨(光山金氏) 사계 김장생, 연안이씨(延安李氏) 월사 이정구와함께 달성서씨(達城徐氏) 약봉 서성의 후손들은 조선조 3대 명문으로 유명하다.

서씨는 7관(貫)이 있는데 이천서씨(利川徐氏)가 신라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에서 기원했고 달성서씨와 대구서씨도 모두 이천서씨에서 갈라져 나왔다. 대구, 달성 서씨는 같은 성씨로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판도(版圖), 판서(判書)등을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대구의 옛 이름인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진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는 판도공파(版圖公派)와 고려조 조봉대부(朝奉大夫)로 군기소윤(軍器少尹)을 지낸 서한(徐 )을시조로 하는 소윤공파(少尹公派) 두 계통이 있다. 이 두파는 모두 대구(달성)에서 세거 하였으므로 같은 성씨로 알고 있으나 문헌이 없어 정확한 관계를 지금도 밝히지 못하고 있다.

달성 서씨는 고려조에서는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세종 때 사가정(四佳正) 서거정이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 때까지 6대왕을 섬기면서 45년 동안 6조 판서와 대제학을 지내 가문의 세력을 잠시 떨쳤다. 그러나 그 후 다시 단한(單寒)해졌다. 그러다가 선조와 인조 때 약봉 서성이 5도 관찰사, 3조 판서를 지내면서 가문의 기반을 구축하고, 서성의 네 아들을 비롯한 자손 중에서 3대 정승, 3대 대제학, 3대 대학자가 계속 배출되면서 1백여 년에 걸쳐 가장 현달한 가문 중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서성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서경우(徐景雨)는 인조 때 우의정, 넷째 아들 서경주는 선조의 딸 정진옹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으며, 서경우의 아들 서원리(徐元履)는 현종 때 병조참판을 역임하고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고 그의 아들 서문중(徐文重)은 숙종 때 영의정을 하였다. 약봉의 둘재 아들 서경수(徐景需)의 증손 서종제(徐宗悌)의 딸은 영조의 왕비인 정성왕후다.

서종태(徐宗泰)는 숙종 때 영의정을 했고, 그의 둘째 아들 서명균(徐命均)은 영조 8년에 우의정과 좌의정을지냈으며, 명균의 아들 서지수(徐志修)는 영조 42년에 영의정을 지내 서경주의 집안에서 3대에 걸쳐 정승이나왔고, 또 서지수의 아들 서유신(徐有臣)이 순조 때 대제학, 그의 아들 서영보(徐榮輔)가 대제학, 손자 서기순(徐箕淳)도 대제학을 하여 3대에 걸쳐 대제학이 배출되었다. 즉 6대에 걸쳐 3대 정승과 3대 대제학을 배출하여 가문의 명성을 날렸다.

서종태의 사촌 형제인 서종옥(徐宗玉)은 이조판서를 했고, 그의 자손은 3대에 걸쳐 대학자가 나왔는데 아들 서명응(徐命膺)이 영조 때 6조 판서와 대제학, 손자 서호수(徐浩修)가 정조 때 이조판서와 직제학, 증손인 서유구(徐有 )가 현종 때 좌찬성과 대제학이 되었다. 서명응의 동생 서명선(徐命善)은 정조 때 영의정을 하였다. 또 서성의 넷째 아들 경주의 셋째 아들 서진이의 4대손 서매수(徐邁修)는 순조 때 영의정이 되었다.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현손인 서용보(徐龍輔)도 순조 때 영의정을 하였다.

달성 서씨가 조정의 고관에 가장 많이 진출했을 때는 순조 때다. 서유방, 서유린, 서능보, 서경보, 서공보, 서유보, 서희순, 서형순, 서헌순,등이 이조와 공조 판서를 비롯하여 6조에 있었고, 서유대가 도총관이고, 서좌보, 서재보, 서영순이 형조 판서를 역임했으며, 서준보도 이조와 공조 판서를 하였다. 이보다 시기는 조금 뒤떨어지지만 고종때 서상우(徐相雨)가 형,공,예조 판서를 지냈으며 서명균의 증손 서당보(徐堂輔)는 좌의정을거쳐 영의정을 하였다.

야사에 의하면 왕이 용상에 앉아 만조백관을 바라보니 고관대작들이 거의가 서씨 일문(一門)이므로 농담하기를 "어미 쥐가 새 끼 쥐를 거느리고 나다니는 듯 하구나"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조정에는 서씨 일가가 많았으며 서씨들의 영화를 한눈에 보는 듯 하였다.근대 인물로는 김옥균 등과 함께 개화파인 서광범(徐光範), 의병장 서상렬(徐相烈), 독립신문을 발간한 서재필(徐載弼)이 있다.

서거정 이후 뚜렷한 인물이 없어 별다른 배경도 없던 가난했던 서씨 집안이 이처럼 번창한 것은 약봉 서성의어머니 고성이씨(固城李氏) 때문이다. 가난한 집안에 약봉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진사와 참위의 낮은 벼슬을 하였지만 약봉이 어렸을 때 멀리 귀양을 갔다가 귀양지에서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약봉의 어머니는 앞을볼 수 없는 소경이었는데 효부였던 그녀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유골을 고향으로 모시기 위해 어린 약봉을 업고 귀양지에서 유골을 수습하여 경북 안동군 일지면 망호동으로 가는 도중 날이 저물어 쉬어갈 곳을 찾았다.인적이 드문 산중에 인가는 하나도 보이지 않아 어쩔 수없이 노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장님의 환상이었을까? 갑자기 커다란 기와집이 보이는 것이었다. 주인한테 사정을 하고 하루 밤 신세를 졌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기와집은 온데 간데 없고 야트막한 산의 풀밭이었다. 이상하기도 했지만 다시 길을 떠나기 위해 유골이든 관을 들려고 하자 관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혼자 힘으로 아무리 애를 써봐도 움직이지 않아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다 모시기로 하고 땅을 파니 훈훈한 기운이 감돌고 흙은 부드러우면서도 홍황자윤한혈토였다. 신이 눈 먼 며느리의 효성에 감동하여 명당을 잡아 주었구나 생각하고 장사를 모두 마친 다음 친정집이 있는 서울 약현에 올라와 술과 떡 장사를 하면서 어린 자식을 훌륭하게 키웠다.

오늘날 전통 한식인 약과, 약식, 약주들의 명칭이 약봉의 어머니가 약현에서 만들어낸 음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머니의 정성어린 뒷바라지로 성장한 서성은 29세 때인 선조19년(1586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로 모시었다. 그 후 경상, 강원, 함경, 평안, 경기 각 도의 관찰사를 역임하고 광해군 5년(1613년) 영창대군 문제에 연루되어 11년간 귀양살이도 하였다. 인조반정 후 다시 형조, 병조판서가 되었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는 인조를 모시고 피난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하다가 인조9년(1631년) 4월 향년 74세로 타계하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단명한 반면에 그는 생전에 다섯 아들과 손자 13명, 증손 34명을 보는 등 천수를 다하였으며 부인 여산 송씨와 할아버지와 아버지 묘 청룡 능선에 합장으로 안장되었다.

별 두각을 나타나지 않던 서씨 집안이 갑자기 번성하게 된 것을 보고 사람들은 포천에 있는 약봉 할아버지와아버지 그리고 약봉 묘의 발복 때문이라고 하여 그 묘를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로 꼽는다. 언뜻 보아서는 들판에 있는 평범한 묘 같은데 과연 천하 대명당(大明堂)이다. 우선 산세를 살펴보자. 혈의 기세와 크기는 용에달려 있다고 하였다.

백두산을 출발한 백두대간이 수도 서울을 만들기 위해서 추가령에서 한북정맥을 분맥하여 평강 백암산(1110M), 김화 적근산(1073M), 대성산(1175M), 광덕산을 거쳐 포천 이동에 있는 백운산(904M), 국망봉(1168M), 도성고개, 강씨봉(830M), 오뚜기고개, 포천 일동면 청계산(849M), 원통산(567.3M), 형등사가 있는 운악산(935.5M), 진접에서 이동면 가는 47번 도로 운학힐사이드 휴게소가 있는 고개를 넘고 다시 포천에서 가평 현리로 이어지는 54번 도로인 굴고개를 넘어 수원산, 포천 내촌면 국사봉(546.9M), 큰넉 작은넉 고개를 넘고 소흘읍 고모리에 있는 죽엽산(600.6M), 광능의 주산인 운악산(234.8M), 광릉수목원 뒤 용암산(476.9M),을 지나 의정부에서 포천가는 43번 도로 축석령을 가로질러 백석이 고개까지 온다.

여기서 한북정맥은 서남 방향으로 의정부를 거쳐 도봉산으로 향하게 하고, 한맥은 다시 분맥하여 역으로 돌아 북으로 향하니 천보산맥이다. 소흘읍에서 주내가는 350번 도로 어야고개를 지나 석문령, 귀율동 마을로하여 송우리에서 덕정가는 316번도로 회암령을 넘어 회암사 주산인 천보산으로 하여 서성 묘의 주산인 해룡산(660.7M)을 특이하게 기봉하고 다시 오지재고개에서 과협한 다음 산맥은 왕방산(737.2M), 국사봉(754M),동두천에 있는 소요산(539M)으로 가서 한탄강을 만나 멈춘다. 서성 묘의 주룡은 오치재고개에서 과협 한 다음 동남으로 방향을 돌려 평지로 개장천심, 기복, 박환등 수많은 변화를 하면서 내려와 부대 건너편에 있는 현무봉을 수려 단아하게 기봉한다. 현무봉에서 중출로 내려온 용은 평지에 바짝 깔려 내려오면서 수많은 요도지각을 뻗치며 위이하면서 행룡하여 부대를 지나고 멈춘 다음 생기를 융취하여 혈을 결지한다. 묘에서 주룡을 살피면 거대한 산줄기가 앞에서부터 뒤로 한바퀴 돌아 감아주었고 주산인 해룡산은 보이지는 않지만 천보산이 뒤에서 밀어주고 있으며, 용은 험한 살기를 모두 탈살하고 들판으로 내려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같이 지각을 뻗치며 행룡하였다.

물은 포천천이 축석령 고개에서 남에서 북으로 역수하여 38도선 영평천을 만나 한탄강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 하천이 대부분 북에서 남으로 동에서 서로 흐르는 반면에 포천천은 산의 흐름을 따라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 입수도두와 선익, 순전, 혈토가 분명하게 있으며 혈 앞에서는 하수사가 우에서 좌로 감아 돌아 혈의 생기가 더 이상 앞으로 빠져나갈 수 없도록 하였다. 좌우 청룡 백호는 낮지만 마치 비단 병풍을 두른 듯 몇 겹으로 감싸 안아 주었다. 특히 청룡보다는 백호가 더 발달하여 장손보다는 지손과 여자가 더 발복할 자리다. 내백호는 혈 바로 옆의 능선이며 외백호가 야트막하게 혈을 감싸면서 43번 도로까지 나가 외수구를 만들었다. 안산은 조금 멀기는 하지만 태봉산이 봉황새 모양으로 수려하고 단정하게 있으며, 안산 뒤 조산은 층층이여려 층으로 감싸주면서 혈을 향해 있다. 보국 안의 명당은 평탄 원만하며 해룡산의 여러 골짜기에서 나온 물이 내명당에 모였는데 서류동출(西流東出)이고 구곡육수(九谷六水)가 당전취합(堂前聚合)하였다. 좌향은 계좌정향(癸坐丁向)이며 물은 우측에서 나와 좌측으로 흘러 외수구인 손사(巽巳) 방위로 파구(破口)되므로 팔십 팔향중 최고 길향인 정양향(正養向)이다. 형국은 해룡이 목이 말라 높은 산에서 물이 있는 평지로 기어 내려와 물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라 하여 해룡입수혈(海龍入水穴)이라고 한다.

조선 왕조 중기와 후기에 번창했던 달성 서씨 후손들은 지금도 사회 각계 각층에서 역할을 다하고 있지만, 천하 대명당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주변이 개발되면서 많은 손상이 되었다. 평지로 내려온 해룡의 주 능선을 파해 쳐 도로를 만들고, 주택을 짖고 특히 군부대가 들어서 주룡의 지기를 꼼짝 못하도록 누르고 있다.

 

 파평윤씨

강감찬(姜邯贊, 948-1031년), 최영(崔塋, 1316-1388년) 장군과 더불어 고려시대 대표적 명장인 윤관(尹瓘, 1040-1111년)장군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다.
서울 구파발 삼거리에서 1번 국도인 통일로를 따라가다가 벽제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의정부 방향 39번 도로를 타고 가면 좌측에 용미리, 광탄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가다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좌측 길로 들어서 해음령을 넘으면 서울시립공원묘지가 있는 용미리(龍尾里)다. 보물 제93호인 용미리 석불입상을 지나 조금만 더 가면 우측에 넓은 주차장, 커다란 신도비, 홍살문, 사당인 여충사(麗忠祠)와 함께 크고 웅장한 묘역이 있다.
또 다른 길은 통일로를 따라 계속 올라가면 봉일천을 지난 뒤 우측에 307번 광탄 가는 도로가 나온다. 광탄에서 용미리 쪽으로 우회전하여 조금만 가면 좌측에 있다.

파평윤씨(坡平尹氏)는 고려왕조 34대 475년과 조선왕조 27대 519년을 합쳐 약 천년동안 삼한의 대표적인 문벌로서 번성을 누린 가문이다. 고려 개국 공신 윤신달과 조선 개국공신 윤호(尹虎)를 비롯하여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조선조에 418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는데 이는 전주이씨(全州李氏) 844명에 이어 가장 많은 숫자다.
또 왕비 4명을 배출해서 청주한씨(淸州韓氏) 5명에 이어 여흥민씨(驪興閔氏)와 함께 두 번째에 해당된다. 그러나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까지 포함하면 5명으로 청주한씨와 맞먹는 수다.
조선시대에 총 정승수가 365명이었는데 이중 전주이씨(全州李氏) 22명, 안동김씨(安東金氏) 19명, 동래정씨(東萊鄭氏) 13명, 청주한씨(淸州韓氏) 12명, 여흥민씨(驪興閔氏) 12명, 파평윤씨(坡平尹氏) 11명으로 6위를 차지하는 등 파평윤씨가 명문(名門)이었다는 것은 자타가 인정하고 있다.
이처럼 파평윤씨들이 번창한 것은 5세조(五世祖)인 윤관 장군 묘가 조선8대 명당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현무봉에서 혈까지 입수룡(入首龍)이 36절룡(節龍)이어서 발복이 36대(代) 약 천년에 이른다고 하는 곳이다.

파평 윤씨 시조는 고려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공을 세워 통합삼한벽상익찬공신(統合三韓壁上翊贊功臣) 2등에 책록되고,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오른 윤신달(尹莘達)이다. 파평(坡平)은 문산에서 적성 가는 중간 임진강변에 있는 파평산(495.9m)을 주산으로 한 면소재지다.
파평 윤씨들은 잉어의 자손이라 하여 잉어를 잡거나 먹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시조 윤신달과 윤관 장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 파평(坡平)의 파평산 기슭에 용연(龍淵)이라는 연못이 있었다. 어느 날 용연에 난데없이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서리면서 천둥과 벼락이 쳤다.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향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윤씨(尹氏) 성을 가진 할머니가 연못 한 가운데 금으로 만든 궤짝이 떠 있는 것을 보았다. 금궤를 건져서 열어보니 한 아이가 찬란한 금빛 광채 속에 누워있었다. 금궤 속에서 나온 아이의 어깨 위에는 붉은 사마귀가 돋아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잉어 비늘이 나 있었다. 또 발에는 황홀한 빛을 내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윤씨 할머니는 이 아이를 거두어서 길렀으며 할머니의 성을 따서 윤씨가 되었다."

"윤관이 함흥 선덕진 광포(廣浦)에서 전쟁 중에 거란군에게 포위되었다.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강가에 이르렀지만 건널 배가 없었다. 이때 잉어 떼가 나타나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윤관은 무사히 강을 건너 탈출하였다. 적군이 장군의 뒤를 쫓아와 강가에 이르자 잉어 떼는 어느 틈에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파평 윤씨는 잉어의 자손이며 또한 선조에게 도움을 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파평 윤씨들은 파주(坡州)와 장단(長湍) 일대에 터를 잡고 살아온 토착 호족(豪族)세력이었다. 윤신달(尹莘達, 1세) 이후 아들 윤선지(尹先之, 2세)와 손자 윤금강(尹金剛, 3세), 중손 윤집형(尹執衡, 4세)은 계속 고려 중앙정부의 관직에 나가 고관에 이르렀다.
그러나 가문이 더욱 크게 번창한 것은 5세조인 윤관(尹瓘)이후부터다. 파평윤씨 세계(世系)는 시조이래 5세 윤관 장군까지는 단계(單系)로 이어지다가 윤관이 여섯 아들을 두어 그 아랫대로 내려가면서 수십 파(派)로 갈라진다. 따라서 파평윤씨들은 모두 윤관 장군의 후손들이다. 윤관의 여섯 아들은 윤언인(尹彦仁), 윤언순(尹彦純), 윤언암(尹彦巖), 윤언식(尹彦植), 윤언신(尹彦 ), 윤언민(尹彦旼)이다.
이중 윤언민만 아들 대 이후 자손이 끊겼을 뿐, 후손들이 모두 번창하여 현달(顯達)했는데 특히 다섯째 아들인 윤언신(尹彦 )의 후손이 대대로 고관 및 학자들을 가장 많이 배출했다.

문강공(文康公) 윤언신(尹彦 )은 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송나라에 다녀왔으며, 1135년 묘청(妙淸)의 난 때는 원사(元師) 김부식(金富軾)의 막료로 출전하여 서경(西京)함락 때 큰공을 세워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그의 아들 삼 형제 윤인첨(尹鱗瞻), 윤자고(尹子固), 윤돈신(尹惇信)은 모두 대과에 급제하였다. 윤인첨(尹鱗瞻)은 의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금나라에 다녀왔고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원사(元師)가 되어 이를 정벌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된 인물이다.
윤인첨의 아들 3형제 윤종악(尹宗 ), 윤종성(尹宗誠), 윤종양(尹宗양)도 대과에 급제하여 양대(兩代)에 걸쳐 3형제씩 대과급제함으로써 이들 집안을 `삼제택양사택(三第宅兩師宅)`이라 불렀다. 또 이들 후손 중에 참판공(參判公) 윤민신(尹民新)이 있었는데 그의 다섯 아들이 모두 대과급제하였고 이중 한 사람이 장원급제하였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참판공이 사는 마을을 `오자등과(五子登科) 터`라 불렀다고 한다. 이밖에도 파평윤씨 가문에는 급제자가 많은 만큼 과거(科擧)에 얽힌 수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파평윤씨 가문은 크게 번성했다. 이 태조를 도와 조선 개국공신이 된 윤호(尹虎),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협조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어 이조판서에 오른 윤곤(尹坤), 태종 때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지낸 윤향(尹向), 수양대군의 장인이며 대사헌, 우참찬을 지낸 윤번(尹 ), 윤번의 아들 3형제인 윤사분(尹士昐), 윤사윤(尹士 ), 윤사흔(尹士昕)은 각각 우의정, 예조판서, 우의정에 올랐다. 윤번의 딸은 제7대왕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다.
또 윤사분과 윤사흔 집안에서는 같은 시기에 왕비가 2명이 나왔다. 제11대 중종의 제1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로 장경왕후(章敬王后)다. 그녀는 제12대 왕인 인종(仁宗)을 낳았다. 제2계비(繼妃)는 윤지음의 딸로 제13대 명종(明宗)의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다. 그런데 장경왕후의 동생 윤임(尹任)과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은 같은 종씨이면서도 서로 세력을 잡으려고 반목하여 세간으로부터 대윤(大尹, 윤임), 소윤(小尹, 윤원형)의 지목을 받았다. 이들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비롯하여 20년 간 서로 죽고 죽이는 일가상잔의 비극을 초래하였다.
제9대 성종(成宗)의 왕비 정현왕후(貞顯王后)도 파평윤씨(坡平尹氏) 영원부원군 윤호(尹濠)의 딸이다.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윤필상(尹弼商), 이시애 난 때 공을 세워 우의정에 오른 윤희재(尹希齋), 청백리로 녹선되고 시문에 능해 호당(湖堂)에 뽑힌 윤현(尹鉉), 중종 때 우의정인 윤인경(尹仁鏡), 송시열의 문하에서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난 윤증(尹拯), 현종 때 좌의정을 지낸 윤지선(尹趾善), 영조 때 영의정인 윤동도(尹東度), 일제치하 중국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을 죽이고 한국 독립의지를 만방에 과시한 윤봉길 의사도 파평윤씨다.
이처럼 파평윤씨가 명문대가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윤관 장군 묘의 음덕(蔭德)이라고 후손들은 믿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유명한 묘도 시련이 있었다.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 ?-1565년)이 문정왕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 때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그도 문정왕후가 죽자 삭직 당하고 귀양가서 죽음을 당했다. 그때 윤원형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그의 선조인 윤관장군 묘를 파헤치려 하자 이 사실을 안 후손들이 유골이나마 온전히 보호하기 위해서 봉분을 헐어 평장(平葬)을 하였다. 장군의 묘를 파헤치려고 왔던 사람들은 묘를 찾지 못해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약100년이 흘렀다.
조선 인조와 효종 때 세도가이며 영의정을 역임한 청송심씨(靑松沈氏) 심지원(沈之源, 1593-1662년)이 죽자 그 후손들은 명당으로 소문난 이곳에 묘지를 섰다. 그런데 윤관 장군 묘보다는 약간 위에 쓰게 되었다. 명당을 골라 쓴다고 했지만 결인속기처(結咽束氣處) 위에 씀으로서 결과적으로 과룡지장(過龍之葬)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또 약100년이 지난 후인 영조(제21대 왕 재위기간 1724-1776) 때 파평 윤씨 후손들은 선조인 윤관 장군 묘를 되찾았다. 그런데 묘 바로 뒤에 심지원 묘가 있어 용맥을 차단한다며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가문의 위세로 따지면 파평 윤씨 못지 않은 청송 심씨 후손들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 때문에 두 가문은 다투게 되었다. 윤씨들은 윤관 장군 묘 뒤에다 담을 높이 쌓아 심지원 묘 앞을 답답하게 가려 버렸다. 청송 심씨들은 담의 철거를 요구했으나 듣지 않았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들은 오늘날까지도 이에 대한 산송(山訟)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윤관 장군 묘는 36대(代)까지는 발복(發福)이 지속된다고 하는 자리다. 1대(代)를 30년으로 잡는다면 약1,080년 동안 발복하므로 계산대로라면 지금도 발복이 남아 있다고 하겠다.
용미리에서 광탄리로 가면서 윤관 장군 묘로 뻗어 내려가는 산줄기를 보면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도 대단한 기세를 느낄 수가 있다. 주산인 박달산(369m)에서부터 잘생긴 봉우리가 연속적으로 이어져 내려가는 모습은 마치 기치창검을 높이든 백만 대군이 행진하는 모습과도 흡사하다. 산봉우리마다 이름이 있을 테지만 지도상에는 무명고지로 표시되어 있다.
홍살문에서 묘지뒤쪽을 바라보면 단아한 탐랑체인 현무봉이 있고 그 뒤 좌우에는 균형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좌천을(左天乙) 우태을(右太乙)이 버티고 있다. 좌천을 우태을이란 귀인이나 장군이 앉아 있으면 그 뒤 양쪽에서 호위하고 서있는 장수를 말한다. 사람도 경호원이나 수행원을 거느릴 정도면 귀한 사람이지만 산도 귀하게 본다. 때문에 좌천을 우태을의 보호를 받는 봉우리에서 중심 맥으로 이어진 용맥(龍脈)에 혈을 맺으면 대개 대혈(大穴)에 속한다.

현무봉에서 혈까지 내려오는 용맥을 살피기 위해서 묘지 뒷산을 오르면 매우 급하게 내려오는 능선을 발견할 수 있다. 일직선으로 곧장 내려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현자(之玄字)로 계속 굴곡(屈曲)하면서 마디인 절(節)을 형성하고 있다. 현무봉 정상까지 기세 있게 변하는 절수(節數)를 제대로 셀 수 없을 정도니 36절룡(節龍)이라는 것이 과장이 아니다.
급하게 내려간 용이 마지막에 결인속기(結咽束氣)하여 기를 묶어주고 혈을 맺었다. 결인속기처는 담장 바로 뒤 약간 잘록한 부분이다. 여기서 기를 묶어주었기 때문에 보이는 대로라면 혈의 결지 방법은 결인속기법(結咽束氣法)에 해당된다. 그러나 묘역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하수사 등이 잘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좌우선룡법(左右旋龍法)과 태식잉육법(胎息孕育法)에도 해당될 것 같다.
태조산을 출발한 주룡이 수많은 변화 과정을 거치면서 강하고 험한 기운을 모두 털어 버리고 순수한 생기(生氣)만 모아 혈을 맺는다. 이때 생기가 흩어지지 않고 뭉치도록 하여 혈을 결지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결인속기법으로 최종적으로 용맥의 목을 잘록하게 묶어 기를 모으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좌우선룡법으로 내룡(來龍)의 생기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도록 용맥의 끝이 좌측이나 우측으로 돌아 마무리하는 방법이다. 이때 물이 우측에서 흘러나오면 용맥은 좌측으로 돌아야 하고, 물이 좌측에서 나오면 용맥은 우측으로 돌아야 음인 용과 양인 물이 서로 음양교합을 할 수 있다. 이를 좌선수(左旋水)에 우선룡(右旋龍), 우선수(右旋水)에 좌선룡(左旋龍)이라는 표현을 쓴다. 세 번째는 태식잉육법으로 현무봉 중출로 처음 나오는 용을 태(胎), 과협이나 결인속기처럼 잘록하게 변화하는 것을 식(息), 혈장의 입수도두(入首倒頭)에 기를 모아 마치 아이밴 모습과 같은 잉(孕), 아이를 출산하여 기른다는 뜻으로 혈을 육(育)이라 부른다.
용맥이 혈을 결지(結地)하였는지 여부를 살필 때는 이 세 가지 방법 중에서 한 가지 이상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때로는 세 가지 현상 모두가 있을 때도 있는데 윤관 장군 묘가 이에 해당되는 것 같다. 그렇지만 묘역을 성역화하면서 너무 많은 정비를 하여 이를 자세히 살필 수가 없어 아쉬웠다.

답사를 다닐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문화재 관리에 문제점이 있는 것 같다. 많은 예산을 들여 성역화(聖域化)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화재는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꼭 대대적인 사업을 해서 원형을 훼손한다면 그것은 보존이 아니라 파괴다. 또 문화재는 조형물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그 자리에 있도록 한 지형도 중요하다. 주변 땅을 파헤치고 석축(石築)을 쌓으면 물길과 지기(地氣)가 변해 문화재에 나쁜 영향을 준다. 이러함에도 대대적인 정비만이 최선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 앞으로 문화재 범위에는 지형까지 포함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이곳까지 이어진 산맥은 백두산을 출발한 백두대간이 철령 위 추가령에서 한북정맥을 분맥하여 백암산, 적근산, 대성산, 백운산, 운악산(현등산), 수원산, 죽엽산, 광릉 용암산을 거쳐 축석령을 지난 다음 양주군 주내면 불국산(470m)을 만든다. 여기서 다시 한북정맥은 산성, 호명산을 이루고 의정부 뒤 산맥을 따라 남진하여 서울의 태조산인 도봉산(716.7m)으로 이어진다.
파주 일대로 오는 산맥은 의정부 뒷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칠봉을 만들고 장흥유원지를 이루는 꾀꼬리봉과 앵직봉(621.8m), 계명산(621.3m)을 지나 뒷박고개를 넘은 다음 박달산을 만드니 이곳의 소조산(小祖山)이다. 박달산에서 기세 장엄하게 광탄 쪽을 향하던 산맥은 분수리에서 방향을 우측으로 틀어 넓은 국세(局勢)를 만들고 행룡을 멈추었다.

주산과 현무봉이 탐랑(貪狼) 목성(木星)체이므로 혈은 유두혈(乳頭穴)이 진혈이다. 유두혈이란 혈판이 마치 풍만한 여자의 젖가슴처럼 생겼고 혈심은 젖꼭지부분에 해당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용맥은 잘록하게 결인속기 한 후 수평으로 길게 늘어져 가는데 위는 가늘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차 넓어지다 다시 좁아져 끝을 맺는다. 이를 상세하거(上細下巨) 형태라 하는데 혈은 가장 넓은 부분에 자리한다.
윤관 장군 묘는 혈심(穴心) 보다 약간 위에 자리잡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장 넓은 양 선익(蟬翼) 끝이 아니라 그 보다 위에 있기 때문이다. 혈 앞 순전(脣氈)이나 하수사(下水砂) 등은 너무 많은 인공적인 조장을 했기 때문에 확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묘 아래로 길게 뻗은 능선 또한 자연 상태를 알 수 없어 설명하기 곤란하다.

청룡 백호는 여러 겹으로 감싸주면서 혈장을 보호하고 있다. 안산은 작고 귀하게 생긴 반월형(半月形)이다. 주변 사격은 사방(巳方)에 문필봉(文筆峰), 오방(午方)에 옥녀봉(玉女峰), 정방(丁方)에 거문성(巨門星), 유방(酉方)에 천마사(天馬砂), 신방(辛方)에 문필봉(文筆峰)등이 수려하게 있어 보국(保局) 안에 장엄한 기운이 감돌게 한다.
그러나 이곳도 흠은 있다. 명당은 평탄하나 원만하지 않고, 명당 가운데로 흐르는 물길은 혈을 감싸주지 못하고 반배(反背)하였다. 안산은 똑바로 혈과 조응하지 못하고 약간 비껴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용과 혈은 좋으나 주변 산이나 물이 완벽하게 보호를 못해준다. 이러한 곳은 똑똑한 인물은 나오나 그를 도와주는 사람보다는 시기하고 모함하는 자가 있어 이로 인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곳이다. 돌이켜보면 윤관 장군 생애와 비슷한 자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답사를 하면 할수록 느끼는 거지만 묘 자리도 살아 생전 그 주인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공덕을 쌓지 않으면 절대로 명당에 못 들어간다고 강조한 것 같다.

들판의 물을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꼭 우측에서 좌측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물 나가는 파구를 정미(丁未) 방향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데, 물은 좌측 용미리 쪽에서 나와 우측 광탄 쪽으로 흐른다. 물은 반드시 산 따라 흐르기 때문이다.
파구는 경유(庚酉) 방향이며 좌는 간좌곤향(艮坐坤向)을 하여 문고소수(文庫消水)에 해당된다. 문고소수 향은 이른바 녹존유진(祿存流盡)이면 패금어(佩金魚)라 하여 총명수재하고 문장이 특출하여 부귀상전(富貴雙全)하는 길향(吉向)이다. 그러나 혈이 아닌 곳에서는 이 향을 놓으면 음탕하지 않으면 바로 패절(敗絶)한다 했으니 함부로 쓰면 안 되는 향이기도 하다.

윤관 장군의 생애

윤관 장군은 태어날 때 아버지가 용마를 타고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일찍이 학문에 눈이 트여 잠시도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특히 오경을 즐겨 봤다. 일곱 살 되던 해는 뽕나무를 소재로 하여 칠언절구의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술에도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073년(문종 27)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요직을 거친 다음 1104년 2월 동북면 행영도통으로 임명되어 여진 정벌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북쪽 국경인 압록강에서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경계로 그 위쪽 지역에 살고 있던 여진족은 고려를 상국 혹은 모국이라 하여 조공도 바치고 더러는 귀화도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점차 국경 일대에 새롭게 일어난 동여진이 그 세력을 확대하고 고려의 국경 요새 등을 잠식하기 시작하였다. 1103년 부족장에 우야소가 그 자리에 올랐을 때에는 그 세력이 함흥 부근까지 들어와 주둔할 정도였다. 이리하여 고려군과 우야소의 여진군은 일촉즉발의 충돌 상태에 놓였으며, 1104년 초 완안부의 기병이 먼저 정주관 밖에 쳐들어왔다. 이에 숙종은 무력으로 여진 정벌을 결심하고 문하 시랑평장사 임간을 시켜 이를 평정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여진군에게 패퇴하고 말았다.

윤관은 이때부터 왕명을 받고 여진 정벌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추밀원사로 있던 2월 21일 정벌의 책임자로 임명받고 전장에 나가 3월에 여진과 싸웠으나, 이번에도 여진의 강한 기병부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아군의 태반이 죽고 적진에 함몰되는 패전의 장수가 되었다. 결국 임기응변으로 화약을 맺고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패전 뒤 왕에게 전투력의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진언하여 같은 해 12월부터 여진 토벌을 위한 준비 확장에 전력을 기울여 나갔다.

그 결과 신기군, 신보군, 강마군으로 구성된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창설하였다. 이와 같이 군제를 개편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킴과 동시에 양곡을 비축하여 여진 정벌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1107년(예종 2)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변방의 긴급보고를 접하게 되었다. 이때 원수가 되어 왕으로부터 지휘관을 상징하는 부월을 하사 받고 17만 대군을 이끌고 정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휘하에 5만 3,000명을 거느리고 정주에 도착한 뒤 육지와 바다로부터 공격하였다.

이같이 기세 등등한 고려군의 위세에 눌린 여진군이 동음성으로 숨자 정예부대를 동원해서 이를 격파하였으며, 여진군이 숨은 석성을 공격하여 적의 태반을 섬멸시켰다. 이 전투에 135개 처에 달하는 적의 전략적인 거점을 점령하였고, 적의 전사자 4,940명, 그리고 생포 130명이라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즉시 조정에 승전보를 올리고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확정하고 그 주변에 9성을 축조하였다. 이어 남쪽에 사는 백성들을 이곳으로 이주 시켜 남도 지방민들이 국경지방 일대에 개척하며 살게 하였다. 오랑캐 땅을 개척한 것이 사방 700여 리에 달했고, 선춘령에 경계비를 세워 고려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이렇게 고려군이 함경도 일대를 석권하게 되자, 그곳을 근거지로 웅거하던 완안부의 우야소는 1108년 다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윤관의 일사분란한 지휘와 부하인 척준경의 용맹과 지략으로 이를 완전히 패주(敗走)시켰다. 그는 개선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한편 전투에 패한 여진은 서쪽으로 강력한 요나라와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와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여진족은 조공을 바치고 끝까지 배반하지 않는 조건 아래 평화적으로 성을 돌려주기를 애원하였다. 여진이 적극적으로 강화교섭에 나오자 당시 고려왕인 예종은 육부를 소집하고 9성 환부를 논의하였다.

예부낭중 한상이 반대하였으나 나머지 28명이 환부에 찬성하는 등 육부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대신들은 화평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여진을 공략할 때 당초에 한 통로만 막으면 여진의 침입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고려의 예측이 맞지 않았다는 점, 둘째 개척한 땅이 수도에서 너무 멀어 안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점, 셋째 근거지를 잃은 여진족의 보복이 두려웠다는 점, 마지막으로는 무리한 군사 동원으로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나리라는 점등이었다.

그리하여 다음해 7월 3일 회의를 열고 9성 환부를 결의하여 7월 18일부터 9성 철수가 시작되었다. 결국 자신이 장병들과 더불어 목숨을 걸고 회복하였던 9성 일대의 땅이 아무 의미 없이 다시 여진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더욱이 여진정벌에 대한 패장의 모함을 받고 문신들의 시기 속에 관직과 공신호조차 삭탈 당하였다. 아무 명분 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하였다 하여 처벌하자는 주장까지 대두되었고, 회군해서는 왕에게 복명도 하지 못한 채 사저로 돌아갔다.

반대파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계속 상소를 올려 그의 사형을 주장하였다. 임금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달래기 위하여 윤관의 관직과 공신의 호를 빼앗기에 이르렀다. 이후 예종이 재상이나 대간들의 주장을 물리치며 비호해 준 덕으로, 1110년 다시 시호가 내려졌으나 사의를 표하였다. 말년을 우울한 심정으로 서재에 파묻혀 평소 좋아하던 경서를 읽으며 지냈다.
그러다 1111년 5월 "호국일념의 뜻을 받들어 나라를 위해 끝까지 분투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쓸슬히 눈을 감았다.

윤관은 많은 선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어진 성품과 학식을 겸비했다고 전한다. 1130년 예종의 묘정과 조선 문종대에 이르러 왕의 명으로 숭의전에 배향되었다. 파주 여충사에 봉사하고 청원의 호남사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처음에 문경이었으나 후에 문숙으로 고쳐졌다. 척지대업을 이룩한 해동명장이라는 명성으로 지금까지 후대에 널리 추앙 받고 있다.

그의 묘를 떠나면서 하루 빨리 남북이 통일되고 고구려와 고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북방정책 같은 것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제목 남대문 현판 숭례문(崇禮門)과 광화문
작성자 형산 정경연     2004/08/03
제목 : [1].....남대문 현판 숭례문(崇禮門)과 광화문 ...

등록자 : 형산 정형산,  조회 : 1447   등록일 : 2001-06-05 오후 1:07:29



1) 앞 해태상에 관한 이야기
풍수적으로 부족한 땅의 기운을 인위적으로 보충해주는 것을 비보(裨補)라고 한다.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자리라 하여도 한 두 가지 단점은 있기 마련인데 서울도 마찬가지다.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은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남향을 하고 있다. 옛날부터 궁궐에 크고 작은 화재가 자주 일어났는데 병향(丙向)은 오행으로 큰불을 상징하는 양화(陽火)인데다 궁궐 정면에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관악산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관악산의 화기를 한강수가 차단해준다고는 하지만 역부족하여 수성(水性)이 강한 물짐승인 해태상을 대궐문 앞에 관악산을 바라보게 하여 세웠다. 또 남대문의 현판을 `숭례문(崇禮門)`이라고 하여 다른 문과 다르게 세로로 세웠는데 관악산의 화기를 화기로 제압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숭례문(崇禮門)에서 숭(崇)자는 불꽃이 위로 타오르는 듯한 모양이고, 례(禮)는 오행으로 화(火)이며 방위로는 남쪽을 나타낸다. 즉 숭례(崇禮)는 불이 타오르는 풍수적 의미의 문자가 된다. 글씨를 가로로 하면 불이 잘타지 않기 때문에 세로로 세워 불이 잘 타게 함으로서 불은 불로 막는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2) 동대문의 흥인지문(興仁之門)과 옹성(甕城)
동대문은 경복궁에서 볼 때 좌청룡으로 동쪽에 있다. 경복궁을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주산 현무봉인 백악산과 우백호인 인왕산 그리고 안산인 목면산(남산)이 높고 큰 것에 비하여 좌청룡인 낙산은 낮고 약하다. 한양은 동쪽이 약해 동쪽 방향에 있는 외적의 침입을 많이 받는다고 보았다. 이 약한 기를 보충해주기 위해서 군사적 목적이 아닌 풍수적 목적에 의해서 옹성을 쌓았다. 또 현판인 `흥인지문(興仁之門)`도 다른 문은 모두 글자가 3자인데 4자로 한 것은 동쪽의 허함을 풍수적으로 보충해주기 위해서 `지(之)` 하나를 더 넣었다.  흥인(興仁)이라고 이름 한 것은 흥(興)은 번창한다는 뜻이 있고, 인(仁)은 오행으로 목(木)이고 방위는 동쪽을 나타낸다. 따라서 동쪽이 흥하여 허함을 막으라는 풍수적 뜻이 담겨져 있다.


3) 창의문(彰義門) 지붕의 닭 모양 조각
경복궁 서쪽인 창의문(자하문)의 의(義)는 오행으로 금(金)이고 서쪽을 나타낸다. 창의(彰義)는 서쪽을 빛나게 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런데 다른 곳과 달리 지붕 위에 닭 조각이 있다. 이는 창의문 밖의 지세가 마치 지네 모양이기 때문에 지네의 천적인 닭을 조각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기 위한 풍수 비보책이다.


4) 덕수궁 돌담길에서 데이트를 하면 왜 헤어지게 된다고 할까?
얼마전 SBS `호기심천국`에서 덕수궁 돌담길에 대한 소문이 풍수지리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프로로 만들겠다고 우리 학회로 자문을 구하러 온 적이 있었다. 정감이 있어야 할 고궁길이 이별로 이어진다는 소문이 궁금하면서도 호기심이 갔다. 그러나 풍수적 해석을 하자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돌담길에 얽힌 전설이나 설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길을 걷는 연인에 따라 다를 것인데 굳이 풍수적 해석을 할 필요가 있을까? 서울시 정밀지도를 펴놓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풍수지리에서 길은 물을 나타내는데 음양이 교배가 이루어지려면 물은 안쪽으로 감고 돌아야 한다. 그런데 덕수궁 돌담길은 약간씩 바깥으로 굽어 있다. 이러한 물을 풍수에서는 반배수라고 하는데 배신을 나타낸다. 또 풍수에서 물은 여러 곳에서 득수하여 한곳으로 빠져나가야 진혈을 만들 수 있고 보국이 안정되는데 덕수궁 길은 가다보면 여러 갈래로 길이 나누어진다. 모서리를 돌아 또 가다보면 다음 모서리에서 또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데 이러한 지형의 특성이 사람의 심리에도 작용하는 것인지..,

제목 동대문의 흥인지문(興仁之門)과 옹성(甕城)
작성자 형산 정경연     2004/08/03
2) 동대문의 흥인지문(興仁之門)과 옹성(甕城)

동대문은 경복궁에서 볼 때 좌청룡으로 동쪽에 있다. 경복궁을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주산 현무봉인 백악산과 우백호인 인왕산 그리고 안산인 목면산(남산)이 높고 큰 것에 비하여 좌청룡인 낙산은 낮고 약하다. 한양은 동쪽이 약해 동쪽 방향에 있는 외적의 침입을 많이 받는다고 보았다. 이 약한 기를 보충해주기 위해서 군사적 목적이 아닌 풍수적 목적에 의해서 옹성을 쌓았다. 또 현판인 `흥인지문(興仁之門)`도 다른 문은 모두 글자가 3자인데 4자로 한 것은 동쪽의 허함을 풍수적으로 보충해주기 위해서 `지(之)` 하나를 더 넣었다.
흥인(興仁)이라고 이름 한 것은 흥(興)은 번창한다는 뜻이 있고, 인(仁)은 오행으로 목(木)이고 방위는 동쪽을 나타낸다. 따라서 동쪽이 흥하여 허함을 막으라는 풍수적 뜻이 담겨져 있다.

 
3) 창의문(彰義門) 지붕의 닭 모양 조각

경복궁 서쪽인 창의문(자하문)의 의(義)는 오행으로 금(金)이고 서쪽을 나타낸다. 창의(彰義)는 서쪽을 빛나게 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런데 다른 곳과 달리 지붕 위에 닭 조각이 있다. 이는 창의문 밖의 지세가 마치 지네 모양이기 때문에 지네의 천적인 닭을 조각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기 위한 풍수 비보책이다.
제목 덕수궁 돌담길에서 데이트를 하면 왜 헤어지게 된다고 할까?
작성자 형산 정경연     2004/08/03
4) 덕수궁 돌담길에서 데이트를 하면 왜 헤어지게 된다고 할까?

얼마전 SBS `호기심천국`에서 덕수궁 돌담길에 대한 소문이 풍수지리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프로로 만들겠다고 우리 학회로 자문을 구하러 온 적이 있었다. 정감이 있어야 할 고궁길이 이별로 이어진다는 소문이 궁금하면서도 호기심이 갔다. 그러나 풍수적 해석을 하자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돌담길에 얽힌 전설이나 설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길을 걷는 연인에 따라 다를 것인데 굳이 풍수적 해석을 할 필요가 있을까? 서울시 정밀지도를 펴놓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풍수지리에서 길은 물을 나타내는데 음양이 교배가 이루어지려면 물은 안쪽으로 감고 돌아야 한다. 그런데 덕수궁 돌담길은 약간씩 바깥으로 굽어 있다. 이러한 물을 풍수에서는 반배수라고 하는데 배신을 나타낸다. 또 풍수에서 물은 여러 곳에서 득수하여 한곳으로 빠져나가야 진혈을 만들 수 있고 보국이 안정되는데 덕수궁 길은 가다보면 여러 갈래로 길이 나누어진다. 모서리를 돌아 또 가다보면 다음 모서리에서 또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데 이러한 지형의 특성이 사람의 심리에도 작용하는 것인지..,

제목 풍수사(風水師) 지관(地官) 이야기
작성자 형산 정경연     2004/08/03
5) 풍수사(風水師) 지관(地官) 이야기
지리와 풍수술에 능통하여 땅의 길흉을 점지하는 사람을 풍수사, 지사, 지관이라고 부른다. 지관(地官)이라는 명칭은 처음에는 왕의 능을 만들 때 지리를 살피기 위해서 땅 보는 일을 맡게 된 자를 가르킨데서 유래한다.
왕릉을 선정할 때 나라 전체의 풍수사 가운데서 우수한 몇 명만을 선정하여 상지관(相地官)으로 임명하였는데 일단 지관에 임명되면 실력이 인정되었고 풍수사 중에서 첫째라는 권위가 주어졌다. 다른 벼슬도 마찬가지이지만 한번 지관에 임명되면 퇴임 후에도 지관이라는 호칭은 계속 쓰여졌다. 그러나 실제 지관에 임명된 일이 없는 풍수하는 사람도 경칭으로 지관이라고 불렀으며, 특별히 나라의 일에 관여하기 위해서 뽑은 풍수를 국풍(國風)이라고 불렀다.

풍수는 한문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공부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승려나 상류계층이 아니면 풍수사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풍수사의 지위는 다른 점복술(占卜術)을 하는 사람과는 달리 사회에서 대우와 존경을 받았다. 풍수사에 대한 보수는 일정하지가 않았다. 학문하는 사람은 누구나 풍수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리를 잡아주는데 일정액의 보수를 정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자신의 부모가 안주할 좋은 묘지를 선정해 주었기 때문에 부모에게 효도를 했다는 기쁨과 그 묘지의 발복으로 자손들이 부귀번창 할거라는 기대에서 될 수 있는 한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 그러나 풍수설화의 대부분은 명당(明堂)은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기고 있다가 효자나 효부(孝婦) 등 착한 심성을 가지고 남에게 공덕을 많이 베푼 사람에게는 풍수에 통달한 승려나 풍수사가 우연히 나타나 좋은 자리를 점지해주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풍수사들은 대부분 지관으로서 꼿꼿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부(富)보다는 명예를 존중하였다.  <참고서적: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 조선의 풍수, 민음사>  다음의 설화(說話)는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어느 날 숙종 임금이 평복을 입고 민심을 살피려고 밀행을 다니는데 가난하게 생긴 한 부부가 슬프게 울면서 냇가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장사 지내려는 것을 보았다. 풍수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던 임금이 깜짝 놀라 가까이 가서 보니 광중(壙中)에는 어느새 물이 가득 차 있었다. 가난한 부부는 물이 차 오른 광중을 보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더욱 슬프게 울고만 있었다. 숙종 임금은 아무리 가난하고 무지한 백성이라고는 하지만 묘를 쓰려면 산에 써야지 어찌 냇가에 쓰는지 의아하고 기가 막혔다. 임금은 두 부부에게 물었다. "여보게! 물이 금방 이렇게 솟아나는 곳에 어찌 묘를 쓰려고 하는가?" "저희들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제 밤에 오랜 병환 끝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아침에 저기 저 높은 언덕에 사시는 지관 어른이 찾아와서 저희들의 평소 효심에 감동했다 하면서 오늘 이 시간에 이 자리에다 장사를 지내야 발복한다고 자리를 잡아 주었습니다. 그 분은 이 지방에서는 아주 유명한 분인데 이런 자리일 줄은 몰랐습니다." 임금은 수행한 신하에게 쌀 백 가마를 효성이 지극한 이 부부에게 주라 명령하고, 또 상지관을 불러 좋은 자리를 잡아주라고 하였다. 화가 난 임금은 자리를 잡아 준 지관이 살고 있는 언덕 위의 집으로 갔다. 지관은 다 쓰러져 가는 집에서 아주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임금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크게 꾸짖었다.
"나는 한양 사는 이 서방이라고 하는데 듣자니 당신이 지리를 좀 안다하던데 어찌 착하고 가난한 사람을 골탕 먹이려고 냇가에다 자리를 잡아 주었는가?" 그러자 지관은 껄껄껄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저 자리는 시신이 광중에 들어가기도 전에 쌀 백 가마가 생기는 금시발복 할 자리며, 나라의 국풍이 나서서 다시 좋은 자리로 옮겨줄 자리란 말이오. 내 저들 부부의 효성에 감동하여 자리를 잡아 준 것인데 무엇이 잘못되었소." 임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금방 자신이 조치한 내용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임금은 다시 물었다. "영감님은 그렇게 잘 알면서 호의호식하지 않고 어찌하여 이런 오막살이에서 살고 있오?" 그러자 지관은 다시 한번 크게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내가 잘 살려면 남을 속이고 도둑질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요. 여기는 비록 오막살이 이기는 하지만 나라의 임금이 찾아올 자리요. 이 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단 말이요" 임금은 대경 실색을 하고 말았다.


6) 여의도(汝矣島)는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 형국
국회의사당과 KBS, MBC, SBS 등 방송국을 비롯해서 대한생명 63빌딩과 각 증권 회사 건물,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는 여의도는 한강에 있는 섬이다. 조선시대 도성인 경복궁에서 보았을 때 여의도는 한강 물이 서울을 감싸고 흘러 마지막으로 빠져나가는 외수구(外水口)로서 율도인 밤섬과 함께 나란히 있다. 크고 작은 두 섬이 한강 물 가운데 있으므로 유속을 조절하고, 서울을 형성하는 보국의 기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즉, 서울을 만들기 위해서 백두산에서부터 출발하여 천리를 넘게 달려온 음(陰)인 용(산맥)과 역시 천리 이상을 흘러온 양(陽)인 한강수가 음양교배를 하여 서울이라는 큰 보국(保局)을 만든다. 이때 한강수가 빠르게 흘러 나간다면 용과 물의 충분한 음양교배가 어렵고 서울을 둘러싼 보국 안의 생기(生氣) 역시 흩어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여의도와 밤섬이 있으므로 한강의 유속을 느리게 하여 양인 물의 기운을 충분하게 공급해주고 있는 것이다. 서울이 확장되기 시작하면서 1968년 여의도 개발을 착수하여 밤섬을 폭파하고 그 흙과 모래를 모두 파다가 여의도 섬을 돋았는데 이로 인해 한강의 자연 환경과 생태계가 심하게 파괴되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의도 개발로 얻은 득보다는 실이 더 크게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최근에는 여의도와 밤섬의 생태계가 복원되어가고 있어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처럼 여의도는 서울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면서 자체적으로는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있어 수세국(水勢局)의 명당을 이룬다. 혈의 생기는 물이 보호하는데 사방에 물이 있기 때문에 기가 하나도 흩어지지 않는 명당이다. 여의도 전체적인 모습은 마치 배가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행주형(行舟形)의 모습을 하고 있다. 풍수지리에서 행주형 명당은 부(富)를 상징한다. 배에는 승객뿐만 아니고 값나가는 곡식과 금은 보화를 가득 싣고 가기 때문이다. 배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야 더욱 힘을 쓰고 발전이 있는 것이지 물 따라 흘러가면 힘과 발전이 없다. 우연인지 일부러 그렇게 배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의도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행주형에 맞게 건물이 배치되었다. 63빌딩은 마치 배 머리에 있는 돛대와 같고, 국회의사당은 배 뒤편에 있는 기관실이며, 가운데에 있는 아파트 단지는 선실이고, 금융가와 상가가 있는 곳은 금은 보화로 가득 찬 화물실에 해당된다. 배가 순조롭게 항해하기 위해서는 기관실이 건재해야 한다. 나라가 편안하고 발전을 하려면 기관실인 국회가 제대로 역할을 해야 한다. 항상 시끄럽고 요란한 국회와 여의도에 초고층 건물을 짖는다는 뉴스를 보면서 혹시나 배가 균형이 맞지 않아 침몰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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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여송 이야기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조선을 구원하러 와 보니 조선 조정에는 인재들이 매우 많았다. 이여송은 그 까닭이 조선 산수가 수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가는 곳마다 산천의 혈맥을 끊었다. 왜군이 물러간 후 그는 귀국하면서 백두산 근처에 있는 한 묘를 보았는데 왕후지지(王侯之地)로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다스릴 자손이 나올 자리였다. 이여송은 곧 묘의 혈을 자르도록 하였다. 그러자 묘에서는 피가 흘러 나와 병사들이 혼비백산하였다. 이여송이 귀국해서 부친께 그 사실을 이야기하자, 부친이 깜짝 놀라면서 그 묘가 바로 이여송의 조부 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로부터 얼마 후 이여송은 조정에서 물러났으며, 후손들은 모두 절단이 났다.


8) 방안 풍수와 작대기 풍수
우리 속담에 `방안 풍수 집안 망친다`는 말이 있다. 방안 풍수란 집안에서는 큰소리치지만 밖에 나가서는 제대로 일을 못하는 사람을 가르친다. 방안에서 배운 이론이 아무리 논리 정연하다 할지라도 실제 현장의 상황과 맞지 않으면 일을 망친다는 말이다. 세상살이 모든 일이 그렇듯이 풍수에서도 마찬가지다. 책에서 배운 이론만 가지고 실제 산에 가보면 아무 것도 안 보인다. 방안 풍수에 비교되는 말이 작대기 풍수인데 아무런 이론도 논리도 없이 오직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일을 하는 사람을 가르친다. 오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홀로 주어진 일은 잘 할지 모르지만 설득력이 부족하여 남을 이해시킬 수 없으며, 더 이상 발전이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풍수에서도 마찬가지로 작대기를 들고 산을 많이 다녀 보아서 자리는 잘 잡는다 할지라도 그곳이 왜 명당이 되는지를 모른다면 신뢰성은 떨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풍수지리를 공부하려는 사람은 이론적인 공부와 현장 답사를 병행하여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사물을 분간 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하겠다.


9) 금시발복지지(今時發福之地)
묘를 쓰고 발복이 빠르게 나타나는 것을 속발(速發) 또는 금시발복(今時發福) 한다고 한다. 흔히 인시하관(寅時下棺)에 묘시발복(卯時發福), 사시하관(巳時下棺)에 오시발복(午時發福)한다는 말이 있는데 장사를 지내고 집에 돌아오면 이미 발복이 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옛 설화나 전설에 자주 등장한다. 그 설화 중 하나를 소개한다. 깊은 산골에 대대로 머슴살이를 해온 총각이 병든 홀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주인집은 천석지기 부자였으나 몇 해전 돌림병이 돌아 모두 죽고 젊은 며느리만 홀로 되어 있었다. 착하고 성실한 총각이 어느 날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배고픔에 지쳐 쓰러져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 자신이 갖고 있던 점심을 대접해 드렸다. 지관인 노인은 그 근처의 명당을 찾으러 왔다가 길을 잃고 산 속을 헤매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이틀을 쓰러져 있었다. 총각이 노인의 다친 다리를 치료 해주자 이를 고맙게 여긴 지관은 자신이 찾은 명당을 가르쳐 주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여기다 묻으라고 일러주고 떠나갔다. 총각의 지극한 효성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죽자 총각은 노인이 말한 그 자리에다 장사를 지냈다. 마을의 머슴들이 무덤을 만드는 사이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서 집에 오자 종들은 아무도 없고 며느리 혼자 있었다. 밥할 쌀을 꺼내려 광에 들어갔을 때 그 들은 곧 눈이 맞아 인연을 맺고 말았다. 총각과 젊은 과부는 그 날로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멀리 떠나 신분을 감추고 부자로 행복하게 살았으며,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후에 정승이 되었다고 한다.


10) 서울은 설(雪)울에서 유래되었다.
나는 두 아들에게 틈틈이 한문을 가르친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종원이와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종환이에게 한문의 원리와 뜻을 설명해 주면 매우 흥미 있어 한다. 하루는 한문으로 집 주소 쓰는 법을 가르치는데 `서울`만 한글로 쓰자 왜 서울은 한문이 없냐고 질문을 한다. 아이들에게 서울의 역사와 유래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한 다음 새로운 궁궐(경복궁)을 짓고 도성을 쌓으려 할 때 어디서 어디까지 쌓아야 할지 난감했다. 어는 날 큰 눈이 내려 살펴보니 눈이 하나의 선을 따라 선 밖에는 눈이 쌓여 있고, 선 안쪽에는 눈이 없었다. 이 태조는 이러한 현상은 우연이 아니고 필시 하늘에서 내린 뜻이라 생각하고 그 선을 따라 도성을 쌓도록 하였다. 도성은 산의 능선을 따라 북악산, 인왕산, 남산, 동대문에 있는 낙산을 연결하는 것으로 둘레가 40리(약17Km)에 이른다. 사람들은 눈이 한양의 울타리를 만들었다고 하여 도성을 눈설(雪)자를 써서 `설(雪)울`이라고 불렀고 설울이 서울로 발음되면서 오늘날 서울이 유래 된 것이다.


11) 붉은 바위에 얽힌 전설
필자의 고향은 전북 순창의 복흥면으로 내장산에서 백양사 가는 중간지점에 있다. 해발 400m가 넘는 분지에 있는 복흥은 내장산 입구에서 좌회전하여 갈재라고 불리는 추령을 올라가 산 정상에 이르면 평평한 곳에 일개 면이 소재하고 있다. 옛날부터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로 전란, 흉년, 전염병이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산이 높고 험하여 마을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다. 때문에 외적이 침입하더라도 다른 곳으로 지나쳐 가버렸고, 산 위에는 수량이 풍부한 넓은 평지와 전답이 있어 밖으로부터 식량을 들여오지 않더라도 자급자족이 가능했으며, 외부와 접촉이 없다보니 돌림병인 전염병이 들어 올 리가 없었다. 가까운 예로 6.25 당시 인접한 쌍치면과 회문산 일대는 빨치산 본부가 있을 만큼 치열한 격전지로 양민의 피해가 컸는데 복흥면은 큰 피해를 보지 않았다. 당시 필자의 조부님도 전남 장성에 사시다가 난을 피해 복흥으로 피난하러 들어오시었는데 전쟁이 끝나고도 복흥의 산수에 반해 그대로 자리를 잡고 사신 것이 우리 집안이 일문을 이룬 계기가 되었다. 험한 노령산맥(호남정맥)의 줄기에 있으면서도 복흥은 산세가 순하고 야트막하여 도선국사 유산록과 각종 결록에 수많은 명당이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산세 때문인지 작은 산골 마을에 불과하지만 인물도 많이 나왔다. 최근의 인물로는 우리 나라 초대 대법원장을 지내면서 청렴결백으로 유명한 가인 김병로 선생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홍영기씨가 이 고장 출신이다. 이처럼 산세가 뛰어나다 보니 전해오는 전설도 수없이 많다. 그 중 필자 고향마을에 있는 붉은 바위에 얽힌 전설을 소개하려고 한다. 복흥면에는 세 개의 장군대좌형 혈이 있는데 갈재(추령)에 있는 갈재 장군, 대각산 아래에 있는 대각 장군, 내장산 최고봉인 신선봉 아래에 있는 대가 장군이다.
이 세 장군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나 백성들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나타나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했다고 한다. 일제가 강제적으로 조선을 합방하고 그들의 식민지 통치를 위해 전국에 걸쳐 토지 조사를 했는데 이때 이곳에 와서 산세를 보니 큰 인물이 나와 자신들을 쫓아낼 것 같았다. 그들은 석유 탐사를 한다는 구실을 붙여 혈맥이 있을만한 곳은 모두 자른다고 잘랐는데 쉽게 혈맥은 잘라지지 않았다. 대가 장군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은 아무래도 하천 가에 있는 바위로 된 큰산이 마음에 걸렸다. 마을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바위산은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 듯 위협을 주고 있었다. 일본인은 날카로운 칼로 바위의 복부에 해당하는 곳을 깊이 찔렀다. 그러자 갑자기 천둥 번개가 요란하면서 바위 중간에서 피가 흘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그 자리에 붉은 색이 있는데 사람들은 붉은 바위라고 불렀으며 대가 장군이 칼을 맞아 죽었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아마 일본의 풍수 침략으로 조선 민중들로 하여금 독립의 뜻을 저버리고 자신들에게 복종하라는 뜻에서 교묘하게 꾸며낸 이야기로 추측된다. 즉 마을 사람을 지켜주는 대가 장군이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조선을 이끌어갈 인물은 나오지 않을 것이니 어쩔 수 없이 일본을 섬겨야 한다는 식민지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조선 민중들이 희망을 저버릴 민족이 아니다. 비록 대가 장군은 죽었다고 하나 갈재 장군과 대각 장군이 있기 때문에 마을을 지켜 주리라 믿고 있다. 지금은 그 일대가 온천이 난다고 개발 중인데 구암 온천이 바로 그곳이다. 또 명당을 찾는 사람들이 갈재 장군혈과 대각 장군 혈을 찾기 위해 수없이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12) 눈 먼 손자가 나온 노사 기정진의 할머니 묘 황앵탁목혈
(내용 중에 김두규 저 <한국 풍수의 허와 실, 동학사>를 일부분 인용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고향 이야기가 나온 김에 순창군 복흥면에 있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선생 조모 묘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노사 기정진 선생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조선 성리학의 6대가 중 한사람이며 이 고장 복흥 출신으로, 인근의 장성에서 경학을 공부하려고 전국에서 모여드는 선비들을 가르쳤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년),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년),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년), 녹문(鹿門) 임성주(壬聖周, 1711-1788년),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6년),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1818-1886년) 선생을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6대가로 일컬어 말한다. 눈 하나가 먼 노사 선생은 8,9세에 이미 경서와 사기에 통달했고, 유학에 전심하여 진사에 합격한 후 참봉에서 호조참판까지 여러 번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고향 사람들은 흔히 기참판(奇參判)으로 노사 선생을 부르고 있다. 노사 선생은 다음 일화로 유명하다. 중국에서 조선에 인물이 있는지를 실험하기 위해서 조선 조정에 시 한편을 보내 뜻을 물었다. 인물이 없으면 자신들이 조선을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전부터 해오던 조선 조정을 파악하는 방법이다.

"용단호장 오경루하 석양홍(龍短虎長 五更樓下夕陽紅)"
직역을 하자면 "용은 짧고 호랑이는 길다. 오경루 아래 석양은 붉네"

조선 조정에서는 무슨 뜻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 애를 태웠다. 그렇다고 아무런 답변을 해주지 않으면 중국으로부터 무시당할 일이었다. 할 수 없어 사람을 보내 장성에 있는 노사에게 뜻을 물었다. 노사는 글을 읽고 다음과 같은 답을 써 보냈다.

"동해유어 무두무미무척(東海有魚 無頭無尾無脊)
화원서방 구월산중 춘초록(畵圓書方 九月山中 春草綠)"
직역을 하자면 "동해에 고기가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등도 없다. 그림으로 그리면
원으로 둥글고, 글씨로 쓰자면 각이 졌다. 구월산중에 봄 풀이 푸르다."

글 모두 직역만 가지고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두 글은 모두 해(日)를 주제로 표현 한 것이다. 겨울철에는 해가 용을 상징하는 진시(오전 7시정도)에 떠오르므로 해의 길이(낮의 길이)가 짧고, 여름철에는 해가 호랑이를 상징하는 인시(오전 5시정도)에 떠오르므로 해의 길이(낮의 길이)가 길어 용단호장(龍短虎長)이라고 표현 한 것이며 오경루는 중국에 있는 누각으로 석양의 경치를 노래한 것이다. 이에 대한 노사의 시도 마찬가지다. 동해에 떠오르는 해는 고기와 같은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등지느러미도 없다. 그림으로 그리면 둥글고 글씨로 쓰자면 각이 졌다(日자를 암시) 중국은 오경루에 지는 석양이지만 조선은 구월산에 새로 돋아나는 봄 풀이다라고 비교 표현하였다. 시를 보고 중국 사신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조선 임금은 서울의 수많은 사람들이 장성 고을의 눈 하나 없는 사람 보다 못하다 하여 `장안만목 불여장성일목(長安萬目 不如長城一目)이라고 하였다.


노사 기정진 선생은 할머니 묘 발복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순창 복흥면 소재지에서소양 가는 도로로 가다보면 대방리 용지 마을 건너편으로 금방동 들어가는 산길이 나온다. 한참을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마을이 나타난다. 금방동은 산이 나선형으로 돌아 감아준 곳이다. 마치 고동(다슬기) 안에 있는 곳과 같다하여 영라하수형(靈螺下水形)이라고 하는데 깊은 산골로 논하나 없지만 옛날부터 부자가 많이 나온 동네다. 마을 뒤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큰 나무 한 그루가 고갯마루에 서있다. 여기서 왼쪽 길로 조금만 가다보면 산 중턱에 석물 하나 없는 봉분이 나타난다. 이곳이 노사 기정진 조모 묘인 황앵탁목혈(黃鶯啄木穴)이다. 황앵탁목혈이란 노란 꾀꼬리가 나무를 쪼는 명당이다. 이

제목 우리 나라 풍수 원조(元祖) 도선국사(道詵國師)
작성자 형산 정경연     2004/08/03
 
23. 학교에서 배운 산맥은 산맥이 아니다.

풍수지리의 원리는 산의 정기가 용(龍)이라고 불리는 산맥(산줄기)을 통하여 혈에 전달되는 과정이다. 이는마치 인체의 심장에서 나온 피가 혈관을 통하여 온몸에 전달되는 과정과 같은 이치다. 인체 혈관이 절단되거나 막혀 피가 통하지 않는 다면 그 아래 신체 조직은 섞어 버리듯이 산맥도 중간에 끊기거나 잘린다면 산의 정기가 전달되지 않아 그 땅은 섞거나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오늘날까지 전국 어디에 있는 산이든 들판이 존재하고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산의 정기가 산맥(용, 산줄기)을 통하여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초등학교와 중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에서 배운 산맥 개념이 잘못되어 있다. 학교에서 우리 나라 산은 모두 백두산과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치면서도 태백산맥이니, 소백산맥이니, 노령산맥이니 등으로 배운 산맥을 따라 가보면 중간 중간에 강을 만나 산맥이 끊기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 지리학의 핵심 원리인데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산맥은 이 원리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산맥의 명칭은 1900년부터 1902년까지 불과 2년도 안 되는 기간에 일본 동경제국 대학 이학 박사이며 지리학자인 고또분지로(小藤文次郞)가 우리 나라 지형을 연구하면서 붙여 놓은 이름이다. 우리 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 나라의 모든 산줄기가 백두산에서부터 시작하여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 정맥으로 나누어져 있고, 모든 산줄기는 끊김이 없이 모두 이어져 있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나 신경준의 산경표를 비롯해서 고려와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도는 백두대간과 여러 정맥 그리고 거기서 분맥된 산줄기를 뚜렷하게 잘 그려 놓았다.

이러한 훌륭한 지리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 정통 산맥은 무시되고 일본인들에 의해 그들의 식민지 통치와 일본 기업들의 국내 시장 침투, 그리고 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만든 지리를 지금까지도 그대로 교과서에 수록하여 배우고 있는 현실이다.

일본은 한일 합방을 전후하여 금을 비롯해서 조선의 광산물을 수탈해 가기 위해 한반도의 지질 및 광물 조사를 빈번하게 실시하였다. 그때 광물 탐사의 학술 책임자가 바로 일본의 지리학자 고또분지로(小藤文次郞)였다. 그는 땅위보다는 땅 속의 지질 구조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지질학자 및 광산 기술자 등을 동원하여땅 속 구조를 치밀하게 조사하여 `조선 남부의 지세(1901년)` `조선 북부의 지세(1902년)`을 논문으로 발표하고 이를 종합하여 `조선의 산악론`과 `지질구조도`를 발표하였다. 그후 일본의 정치 지리학자 야쓰쇼에이(시진창영, 矢津昌永)는 고또분지로의 연구를 토대로 오늘날 장백산맥, 적유령산맥, 묘향산맥, 평안산맥, 함경산맥, 마식령산맥, 광주산맥, 태백산맥, 차령산맥, 소백산맥, 노령산맥이라 불리는 산맥도를 만들어 당시의 지리 교과서인 `고등소학대한지지(高等小學大韓地誌)`에 실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초등학교와 중 고등학교,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우리 나라의 지리 교육 현실이며 우리 국토의 산맥이다.

산맥이란 산의 정기가 맥을 통하여 전국에 이어지는 것을 뜻하는데 일제가 만들어 놓은 지도상의 산맥은 산줄기가 아닌 큰산과 큰산을 직선으로 죽죽 그어 놓았기 때문에 산줄기가 강을 만나 뚝뚝 잘린 부분이 많다. 이것이 어떻게 산줄기 산맥이 될 수 있으며, 모든 산이 백두산과 연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땅위서 생활하는 인간을 위해 편리하게 제작된 우리의 정통 인문 지리서에 비해 일제가 그린 지리서는 땅속의 지질구조선을 기준으로 그렸기 때문에 땅위의 지형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지질이나 지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이 땅속 지질 구조를 분석하여 "시생대, 원생대, 고생대, 중생대 층의 분포와 화강암, 화강 편마암, 결정 편마암이 국토의 70%를 차지하며 퇴적암은 30%를 차지하고, 사질토가 많고 침식 분지가 많으며, 쥐라기 중엽과 말엽에 대 습곡 작용과 지각 운동에 의해 단층이 형성되었다." 등을 알아서 실재 생활에 얼마나 적용하여 살아가며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겠는가? 대부분 사람들은 땅속보다는 땅위 산줄기와 산 따라 흐르는 하천이나 강에 의해서 생활권과 생활 양식에 영향을 받는다. 즉 사람의 교류가 비록 직선 거리로는 가깝다할지라도 산 넘어 마을보다는 산줄기 따라 흐르는 강을 따라 같은 유역에 있는 마을과 더 활달하게 이루어진다. 고대 문명과 생활권이 한강 유역, 금강유역, 낙동강 유역, 섬진강유역 등으로 발전한 것처럼 인간의 삶과 문화는 땅위 산줄기와 강의 흐름에 큰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1)마천령산맥, 2)함경산맥, 3)낭림산맥, 4)강남산맥, 5)적유령산맥, 6)묘향산맥, 7)언진산맥, 8)멸악산맥, 9)마식령산맥, 10)광주산맥, 11)태백산맥, 12)차령산맥, 13)소백산맥, 14)노령산맥은 일제의 식민지 침략과 수탈의 잔재로 더 이상 한반도의 산맥일 수 없다. 우리 나라의 전통 산맥인 1대간(백두대간), 1정간(장백정간), 13정맥(낙남정맥, 청북정맥, 청남정맥, 해서정맥, 임진북예성남정맥, 한북정맥, 낙동정맥, 한남금북정맥, 한남정맥, 금북정맥, 금남호남정맥, 금남정맥, 호남정맥)이 진정한 우리의 산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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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우리 나라의 산맥

우리 나라 산줄기의 갈래를 알기 쉽도록 만든 지리서는 조선 후기 영조 때 실학자인 여암 신경준(1712-1781)의 산경표(山經表)를 비롯해서 고산자 김정호(?-1864)의 대동여지도가 대표적이다. 산경표에의하면 우리 나라 산줄기는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모두 15개다. 즉 백두산에서 시작해 지리산 천왕봉까지 한반도를 세로 지르고 있는 백두대간을 기둥으로 여기서 분맥한 장백정간과 낙남정맥, 청북정맥, 청남정맥, 해서정맥, 임진북예성남정맥, 한북정맥, 낙동정맥, 한남금북정맥, 한남정맥, 금북정맥, 금남호남정맥, 금남정맥, 호남정맥이다.

대간, 정간, 정맥은 모두 주맥으로 어떤 것도 도중에 끊기지 않고 바다에 이르고 산맥 양쪽에는 산줄기 따라흐르는 강을 끼고 있다. 1대간, 1정간,13정맥에서 다시 가지를 친 산줄기를 지맥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크고긴 산줄기라 할지라도 바다에 이르지 못하고 강이나 하천을 만나 끝나고 있다.

1) 백두대간(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해 원산(圓山) 두류산, 마대산, 원산(元山) 두류산, 백봉, 매봉산, 속리산, 영취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뻗은 한반도를 세로 지르며 뻗은 제일 큰 산줄기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도상거리 1625Km로 한반도의 모든 물줄기를 동서로 갈라놓는다. 현재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에서 남쪽의 백두대간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향로봉까지 690Km다. 요즈음 산악인들 사이에서 백두대간 종주 열풍이 불고 있는데 이 구간을 종주 하는데 보통 60일에서 70일 정도 걸린다고 한다. (도상거리라는 뜻은 25,000:1 지도나 50,000:1 지도를 놓고곡선자를 이용해 거리를 측정한 것으로 오차가 있을 수 있으며, 산악인들에 의하면 실제 산행거리는 도상거리의 대략 2배정도 된다고 한다.) 장백정간과 13정맥은 모두 백두대간에서 분맥하여 산맥을 형성한다.

2) 장백정간(長白正幹)
백두대간의 원산 두류산에서 궤상봉, 관모봉, 고무산, 백사봉, 송진산 등 함경북도 내륙을 서북향으로 관통하여 두만강 하구의 섬 녹둔도 앞 서수라에서 멈춘 산줄기다.

3) 낙남정맥(洛南正脈)
백두대간의 끝 지리산(정확히는 지리산 영신봉)에서 시작하여 옥산, 무선산, 봉대산, 천황산, 대곡산, 무량산,성지산, 영봉산, 대곡산을 거쳐 마산의 무학산, 김해 낙동강 하구의 분산에서 끝난 산줄기다. 북으로는 낙동강을 접하고, 서쪽으로는 섬진강을 보내고 진주 남강을 이끌고 끝에서는 낙동강을 접한다.

4) 청북정맥(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마대산에서 서쪽으로 분맥한 산줄기가 낭림산에서 청천강을 사이에 두고 두 줄기로 갈리는데 청천강 이북의 산세가 서쪽으로 향하여 갑현령, 적유령, 구현, 대암산, 삼봉산, 우현령, 동림산, 단풍덕산, 비래봉, 천마산, 법흥산 등 평안북도 내륙을 관통하고 신의주 앞 바다 압록강구의 미곶산에서 끝나는 산줄기다.

5) 청남정맥(淸南正脈)
낭림산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청천강 이남으로 묘향산, 알일령, 용문산, 서래봉, 강룡산, 만덕산, 광동산, 청룡산, 오석산을 거쳐 서해와 접하는 대동강 하류 광량진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다.

6) 해서정맥(海西正脈)
백두대간의 원산 두류산에서 한 산맥이 서남쪽으로 뻗어 가다가 화개산에서 예성강을 사이에 두고 두 줄기로갈리는데 예성강 이북의 산맥이다. 곡산 대각산과 언진산, 오봉산, 천자산, 멸악산, 운봉산, 해주 수양산, 장연 불타산을 거쳐 서해 장산곶까지 뻗은 산줄기다.

7)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
임진강 북쪽과 예성강 남쪽의 산줄기로 화개산에서 개연산, 학봉산, 수릉산, 성거산을 거쳐 개성의 송악산까지 이어지고 서해와 접하는 임진강과 한강의 합수처인 개성의 진봉산까지 뻗은 산줄기다.

8) 한북정맥(漢北正脈)
백두대간의 추가령 근처 백봉에서 시작하여 한강 북쪽으로 백암산, 적근산, 대성산, 백운산, 운악산, 축석고개, 도봉산, 북한산, 노고산, 고봉산을 지나 서해와 접하는 임진강과 한강의 합수처인 교하의 장명산까지 뻗은 산줄기다.

9) 낙동정맥(洛東正脈)
백두대간의 매봉산에서 백두대간과 헤어져 백병산, 응봉산, 통고산, 백암산, 주왕산, 단석산, 가지산, 취서산,부산 금정산을 거쳐 부산 앞 바다 다대포의 물운대까지 뻗은 산맥이다. 낙동정맥은 낙동강 동쪽에 있으면서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10)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백두대간의 속리산 문장대에서 시작하여 청주의 상당산성을 향하여 동쪽으로 돌아 좌구산, 보현산을 거쳐 죽산의 칠현산까지 이어진 산줄기다. 칠현산에서 북으로 한남정맥, 서남으로는 금북정맥이 갈라진다.

11) 한남정맥(漢南正脈)
칠현산에서 서북으로 향하여 칠장산, 백운산, 성륜산, 보개산, 수원의 광교산, 안양의 수리산, 소래산, 성주산, 계양산, 가현산을 거쳐 강화도 앞 문수산까지 뻗은 산줄기다.

12) 금북정맥(錦北正脈)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향하여 뻗은 산맥으로 금강 북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칠현산, 안성 서운산,천안 흑성산, 국사봉, 광덕산, 차유령, 청양 일월산, 오서산, 보개산, 수덕산, 예산 가야산을 거쳐 서해 태안반도로 건너가 안흥진까지 이어진 산줄기다.

13)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이 지리산에 이르기 직전 영취산에서 시작하여 장안산, 수분현, 팔공산, 성수산, 마이산, 부귀산을 거쳐 영취산까지 이어진 산맥이다.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이며 주화산에서 금남정맥과 곰재(곰치)에서 호남정맥으로 갈린다.

14) 금남정맥(錦南正脈)
금강 남쪽에 있는 산맥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주화산(모래재 터널 북쪽 0.6Km 지점)에서 시작하여 운장산, 왕사봉, 대둔산, 천호산, 계룡산, 널티, 망월산, 부여 부소산, 조룡대로 달려 금강에서 끝나는 산줄기다.

15) 호남정맥(湖南正脈)
전주 동쪽 곰재(곰치)에서 시작하여 만덕산, 경각산, 내장산, 추월산, 무등산, 천운산, 제암산, 사자산, 일림산, 존제산, 송광산, 조계산, 도솔봉을 거쳐 남해의 섬진강 하류지역인 광양의 백운산과 망덕산에 이르러 멈춘 산줄기다. 동쪽은 섬진강이 남해로 흐르고, 서쪽은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탐진강이 서해로 흐른다.

제목 성씨(姓氏)의 유래(由來)
작성자 형산 정경연     2004/08/03
성씨(姓氏)의 유래(由來)

성씨(姓氏)의 발생근원은 정확힌 기록이 없어 상세히 알수는 없으나 원시 씨족사회(原始氏族社會)에서는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이 필요했다. 그것이 성(姓)으로 나타나고, 점차적으로 다른 부족을 정벌하여 그 부족을 통솔하기 위한 통치자(統治者)의 칭호가 필요했는데 그것을 또한 성(姓)으로 썼으며 고대사회(古代社會)로 접어 들면서 지방세력(地方勢力)이 중앙귀족화(中央貴族化)되면서 정치적 신분을 표시하는 중요한 의미로 성씨(姓氏)를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성씨(姓氏)를 사용 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중국(中國)의 성씨제도(姓氏制度)의 영향을 받아 고조선시대(古朝鮮時代)에 왕족(王族)에서부터 사용한 것으로 전해 온다.

성(姓)은 초기에는 왕실(王室)이나 귀족(貴族)에서만 국한되어 사용하다가 국가에 공이 큰 공신(功臣)들이나 귀화인(歸化人)들에게 세거지역(世居地域)이나 강(江), 산(山)의 명칭을 따서 성(姓)을 하사(下賜)하면서 확대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왕실이나 귀족중심의 성(姓)이 고려 문종(文宗 서기 1047)이후부터 과거제도(科擧制度)가 발달 되면서 보편화 되었고, 상민(常民)이나 노비(奴婢)를 포함한 일반 서민들이 모두가 성을 갖게 된 것은 조선말(朝鮮末) 개혁정치가 시행되면서부터다. 중세사회(中世社會)에 이르기까지 성씨(姓氏)는 왕족이나 귀족과 같은 지배계급(支配階級)에서만 사용함으로써 정치적(政治的),사회적(社會的) 신분계급(身分階級)의 상징이었으나 오늘날에는 평등한 조건에서 누구나 갖게 됨으로써 인간존중의 사회적 진보가 달성되었다.또 씨족끼리의 일체감 속에 자기를 귀속 시키고 자기 자신을 확인 시킴으로써 사회적으로나 신분적으로 안정감을 갖게 하고 나가 민족유대(民族紐帶)를 강화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38. 본관(本貫) 유래(由來)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성씨(姓氏)가 점차적으로 확대 되면서 같은 성씨라 하더라도 계통(系統)이 달라 그 근본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웠으므로 동족(同族) 여부를 가리기 위해 등장하게 된 것이 본관(本貫)이다. 본관(本貫)이란 본(本), 관향(貫鄕), 관(貫)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관(貫)은 돈을 의미하는 것으로 옛날에는 엽전(葉錢)을 한 줄에 꿰어 묶어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이 친족(親族)이란 서로 관련성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꿰일관(貫)』자를 썼다. 본관(本貫)은 또 최근까지만 해도 주민등록증이나 민원서류에 본적란이 있었듯이 본적(本籍)이란 뜻의 본관향적지(本貫鄕籍地)로 사용되었다. 본관은 대개 그 집안의 시조(始祖)나 중시조(中始祖)의 출신지(出身地)나 혹은 정착세거지(定着世居地)를 근거로 호칭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특별히 나라의 공이 있거나 귀화인들에게 임금이 하사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의 본관수는 1930년 국세조사의 기록에 의하면 정씨(鄭氏)가 35본(本), 김씨(金氏) 85본, 이씨(李氏) 103본, 박씨(朴氏) 34본, 최씨(崔氏) 34본 등으로 되어 있다.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같은 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동성동본(同性同本)의 동족부락(同族部落)이 발달하였는데 이들은 가문(家門)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자치적으로 상호 협동하여 집안 일을 해결해 나가는 특이한 사회조직의 한 형태를 이루었다. 개인의 업적이나 명예가 결국은 가문(家門)에 부착되고 가문을 통해 계승된 다는 사실을 볼 때 한 개인의 사회적 성공이나 출세는 그 가문 구성원 모두의 사회적 신분을 높여 줄뿐만 아니라 가문에 대한 사명의식과 자부심을 고취 시켜 자아발전의 도구로 여겨졌다.

15. 우리 나라 풍수 원조(元祖) 도선국사(道詵國師)
도선(道詵)은 신라 말 덕흥왕 2년(827년)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 아래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 혹은 최씨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호는 옥룡자(玉龍子)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전라도 해안지방은 당나라와 교역이 활발했던 곳으로 당의 선진 문물을 빨리 받아들일 수 있는 교역의 요충지였다. 당시 당에서 유행하던 풍수지리설도 다른 지방보다 빨리 이 지방에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도선이 자라면서 풍수지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와 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선은 15세에 지리산 화엄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고 불경을 공부하여 4년 만인 문성왕 8년(846년) 대의(大義)를 통달하여 신승(神僧)으로 추앙 받았다. 이때부터 수도 행각에 나서 동리산(桐裡山)의 혜철(惠哲)을 찾아 무설설무법법(無說說無法法)을 배웠으며 23세에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당시의 선승(禪僧)들은 가르침을 베푼 스님의 인가를 받으면 그 스님을 떠나서 혼자서 전국 각지의 명산대첩을 떠돌아다니며 고행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히 산하에 대해서 많은걸 보고 배울 수 있어서 지리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유명한 풍수사들이 대부분 스님이었던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풍수지리에 통달한 도선이 전국을 답사하면서 한반도 산천의 순역(順逆)을 삼국도(三國圖)로 그려 작성하였다. 이것은 산수의 형세에 따라 명당을 설정하고 그 곳을 중심으로 작성한 삼한(三韓)의 지도다.


신라말기 혼란기에 지방호족들은 대부분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명당으로 내세워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고 세력 확장의 명분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경주 중심의 전통적인 신라의 국토관(國土觀)이 와해되고 국운은 날로 기울어 갔기 때문에 도선은 신라의 국운을 회복하기 위하여 전 국토에 비보사찰을 건립하고 허약한 땅에는 탑을 세웠다. 그는 국가를 운영하는 원리로서 비보풍수사상(裨補風水思想)을 내세웠는데 이것이 중국에서 수입된 풍수와 다른 한국의 자생 풍수다. 현존하는 풍수지리 이론서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발간된 것들인데 땅을 고쳐 쓸 수 있다는 내용은 거의 없다. 도선은 이 비보풍수로 전국을 답사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결함이 있는 땅은 사찰을 세우거나 탑을 세워 보완 해 주었다.
이러한 비보풍수는 다음 일화로 유명하다.

도선 국사가 백두산에 올라갔다가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송악 근처를 지날 때 왕건의 아버지 왕륭(王隆)이 새로 집을 짓는 것을 보고 "제( , 느릎나무)를 심을 땅에 왜 마(麻, 삼베)를 심었을까?" 하자 왕륭이 도선을 극진히 대접하고 자문을 구하였다. 도선은 뒷산에 올라가 산수의 맥을 살펴보고 위로는 천문(天文)을 보고 아래로는 시수(時數)를 살핀 다음 말하기를 "송악산의 맥은 멀리 임방(壬方)에 있는 백두산에서 출발하여 수모목간(水母木幹)으로 뻗어내려 와서 마두(馬頭)에 떨어져 명당을 일으킨 곳이다. 그대는 수명(水命)이니 물의 대수(大數)를 따라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삼십육구(三十六區)로 만들고 송악산이 험한 바위로 되어 있으니 소나무를 심어 암석이 보이지 않게 하면 천지의 대수가 부응하여 명년에는 반드시 신성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고 짓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도선의 말처럼 1년 후 왕건이 태어났으며 그는 장차 성장하여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워 태조가 되었다.

도선 국사가 풍수설을 누구한테서 배웠는가 하는 설은 여러 학설이 있다. 도선이 죽은지 252년이 지난 고려시대에 최유청이라는 사람이 지은 비문에 의하면 도선이 출가하여 지리산 구령에 머물 때 세상을 피해 숨어사는 이상한 이인(異人)에게서 배웠는데 그 이인은 도선에게 모래를 쌓아 산천의 순역(順逆)을 보여 주면서 풍수를 전수했다고 한다. 또 다른 주장은 도선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승려인 장일행(張一行)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일행(一行)은 선종 계통의 승려로 당나라 조정에서 우리 나라의 이조판서에 해당되는 이부상서(吏部尙書)라는 높은 벼슬에 있던 사람으로 벼슬을 버리고 입산 수도하여 천문지리에 정통한 대학자가 되었다. 그는 당 현종의 칙명으로 승 홍사(泓師)와 함께 진나라 사람 곽박(郭璞)이 저술한 금낭경(장서)을 해석했는데 산수의 형세를 설명하면서 실제 사례를 드는 실증법(實證法)을 사용하였다. 그는 또 중국의 국토를 남쪽부터 북쪽까지 위도를 측량하여 <구당서(舊唐書)>, <율역지(律歷志)>, <천문지(天文志)>를 저술하였으며, 당나라 전체를 지세에 따라 양자강 유역은 화식지지(貨殖之地, 재화가 많이 나는 땅), 황하의 중상류 지역은 용문지지(用文之地, 학자가 많이 나오는 땅), 사천과 산서 지방은 용무지지(用武之地, 무장이 많이 나오는 땅)로 나누어 자연 환경을 관찰하는 등 지극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도선은 신라 덕흥왕 2년(서기 827년)에 태어나 효공왕 2년(서기898년)까지 살았고, 일행은 당 현종 때 인물(서기 712년-756년)로 도선과는 약 100년 정도 시대 차이가 난다. 또 도선 전기(傳記)에도 당나라에 갔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도선이 당나라에서 일행한테서 풍수지리를 배웠다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본다. 도선이 불교에 입문하였을 때는 신라 귀족 중심의 불교인 교종(敎宗)이 쇠퇴하고 일반 대중을 상대로 각 개인이 스스로 사색하여 진리를 깨닫는 다는 선종(禪宗)이 보급되고 있는 시기였다. 선종은 대부분 당나라에 유학한 승려들에 의해서 유입되었는데 그들은 선종을 일반 대중에게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풍수지리를 이용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당나라에서 배운 풍수지리는 일행의 지리법(地理法)이었다. 도선의 스승인 혜철도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왔는데 아마 도선이 스승과 다른 선승(禪僧)들에게 중국의 풍수이론을 간접적으로 배우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풍수지리를 배운 많은 선승들과 그 이전에도 한반도 전역에는 한국의 자생 풍수가 있었을 텐데 왜 도선을 우리 나라 풍수의 원조(元祖)로 보는 것일까? 도선은 한반도 전역을 답사하면서 경험을 통하여 국토에 대한 각종 비기(秘記)와 답산가(踏山歌)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산천의 형세를 유기적으로 파악했다. 즉 단순히 풍수지리 이론의 적용이 아닌 국토 공간에 결함이 있는 곳을 보완해주기 위해 인공 산을 만들고 제방을 쌓고 비보사탑을 세워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면서 독특한 한국의 풍수사상을 정립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선은 37세가 되던 경문왕 4년(서기 864년) 지금의 전라남도 광양군인 희양현(曦陽縣)에 있는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에 35년간 머물면서 전국에서 구름처럼 모여드는 학도들을 가르치다 효공왕 2년(898년) 72세로 입적하였다. 그의 풍수지리 사상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가치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신라 효공왕은 죽은 도선에게 요공국사(了空國師)라는 시호를, 고려 현종은 대선사(大禪師), 고려 숙종은 왕사(王師)를 추증했고, 고려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의종은 비를 세웠다. 도선에 관한 설화가 옥룡사 비문 등에 실려 있으며 도선의 저서로는 <도선비기(道詵秘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등이 전한다고는 하나 진짜로 도선의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누군가 도선의 이름을 도용하여 작성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참고서적>
이몽일 저 `한국풍수사상사` 명보문화사
신광주 저 `정통 풍수지리 원전 1권` 명당출판사
최창조 저 `한국의 자생풍수 1권` 민음사
한동환, 성동환, 최원석 공저 `자연을 읽는 지혜(우리 땅 풍수기행)` 푸른나무
무라야마지쥰(村山智順) 저 최길성 역저 `조선의 풍수`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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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도선국사(道詵國師)의 국역진호설(國域鎭護說)
<무라야마지쥰(村山智順) 저 최길성 역저 `조선의 풍수`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국역진호설이란 국가 영토의 기운이 과한 것은 진압하고 결여된 것은 보호해준다는 뜻으로 도선국사의 독특한 학설이다. 아래 내용은 도선국사실록에 소개된 것으로 조선 영조 때 중간(重刊)된 것이며 저자 미상이다.
문장은 한문이며 문체는 화려하지 않다. 저자명을 밝히지 않고 조선조를 아조(牙彫)라 표현한 점으로 보아 조선조에 들어와서 작성된 것이며, 문장에 능통하지 않은 자가 민간에 전하고 있던 도선 설화를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하튼 이 책은 영조 19년에 중간된 인본(印本)으로서 당시 민간 신앙계에 이 국역풍수 신앙이 중추를 이루고, 많은 신봉자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을 추측하게 해준다.

도선이 가난한 조선을 구제하고 바람기를 빼고 방기(邦基, 나라의 기초)를 굳게 하여 백성을 안전하게 하고자 하였다. 우리나라의 지형은 행주(行舟, 항해하는 배)같은 것이고, 태백산 금강산이 그 머리이고, 월출산, 영주산이 배 꼬리이며, 부안의 변산이 그 타( :배의 방향을 잡는 키)이다. 영남의 지리산은 배의 노이며, 능주의 운주산이 선복(船腹, 배의 중앙부분)이다. 그런데 배가 물에 뜨는 것은 물건이 있어 배의 머리와 꼬리 등과 배를 눌러 주어야 하고, 타즙( 楫, 키와 배 젖는 기구)으로 진로를 잡아야 선체가 흔들리지 않고 가라앉지 않는다. 이에 사탑과 불상을 세워서 위험한 곳을 진압해야 한다. 특히 운주산(전남 화순군 도암면) 아래 완연규기( 糾起, 지세가 꿈틀거리듯 일어나는 곳)하는 곳에는 별도로 천불천탑(千佛千塔)을 설치하여 그 등과 배를 실하게 하였다. 또 금강산과 월출산에는 탑을 건조하여 정성을 다했다. 이 두 산이 행주(배)의 수미(首尾, 배 머리와 꼬리)이고 가장 중요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월출산을 소금강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진압(鎭壓)을 끝낸 도선은 지팡이를 짚고 천리 길 여정에 올라 팔도강산에 발자취를 남기지 않은 곳이 없었다. 도선은 국토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절을 둘만한 곳은 절을 세웠고, 절을 둘 만한 곳이 아니면 부도(부처)를 세우고, 탑을 세울 곳이 아니면 불상을 세우고, 결함이 있는 곳을 보충하고, 비뚤어진 곳은 바로 세웠다. 또 월출산 천왕봉 아래에 보제단(普濟壇)을 설치해 매년 5월 5일에 제사를 지내 복을 기도하고 재앙을 물리쳤다. 이리하여 그 후 조선의 지리에는 변화가 나타나 산의 흐름은 계곡이 아름답게 되고 지맥이 꿈틀거리는 곳이 변하여 부(富)를 모으게 되고 나라에 분쟁의 우환도 없이 사람들이 한탄할 일도 없었다. 고려가 삼한을 통일한 것도, 조선조가 북방을 개척해서 육진(六鎭)을 설치 영토를 확장하는 등 국운이 발전한 것도 이 도선의 진호(鎭護)의 힘에 연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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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중환의 택리지는 한반도를 노인의 형상에 은유하였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 산수총론(山水總論)> 대저고인(大抵古人)
대체로 옛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위아국위노인형(胃我國爲老人形)
우리 나라는 노인의 형상이며

이해좌사향(而亥坐巳向)
해좌사향으로서

향서개면(向西開面)
서쪽으로 향하여 앞이 열려있어

유공읍중국지상(有拱揖中國之狀)
중국에 읍하고 있는 형상이므로

고자석친닐어중국(故自昔親 於中國)
옛날부터 중국과 친하고 가까이 지냈다.

이차무천리지수(而且無千里之水)
그리고 천리되는 물이 없고

백리지야(百里之野)
백리되는 들판이 없는 까닭에

고불생거인(故不生巨人)
옛날부터 큰 인물이 나지 못하였다.

서융북적여동호여진(西戎北狄與東胡女眞)
서쪽, 북쪽, 동쪽의 오랑캐와 여진족이

무불입제중국(無不入帝中國)
중국에 들어가서 왕이 되지 않은 나라가 없는데

이독아국무지(而獨我國無之)
우리 나라만 홀로 그런 일이 없으며

유근수봉역(惟謹守封域)
오직 강토만 조심스레 지켜 오면서

불감의타(不敢意他)
감히 다른 뜻을 품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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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고서(古書)에 나타난 팔도의 인물 비교
조선시대 지리학자들은 조선 팔도의 풍수지리적 해석을 하면서 땅이 인간의 심성에 미치는 영향을 논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하여 지리인성론(地理人性論)이 발달해 왔는데 학자들 사이에 상당한 의견의 일치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 그대로 수용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사회로 변화하면서 수많은 인구이동과 지역간 교류가 활성화되고 문화공간이 확산되면서 과거와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점을 이해하고 여기서는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참고만 하기를 바란다.

1) 나학천(羅鶴天)의 팔도 인물평
임진왜란 때 이여송의 지리참모로 조선에 왔던 두사충(杜師忠)의 사위인 나학천은 중국 남경의 건주(建州) 출신으로 장인과 함께 조선에 귀화한 인물이다. 그는 조선 팔도의 형상을 인체와 동물에 각각 비유하여 팔도의 인물평을 하였다.

.함경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머리(頭,두)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장어다
함경도 사람은 우직하지만 지혜를 가졌다. <우직지협(愚直知夾)>

.평안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얼굴(面,면)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매다.
평안도 사람은 의지가 강하고 용감하며 날쌔다. <견강용예(堅剛勇銳)>

.황해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손(手,수)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소다.
황해도 사람은 느리고 어리석어 용골 차지 않다. <우준무실(愚蠢無實)>

.경기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가슴(胸,흉)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범이다.
경기도 사람은 앞에는 억세고 뒤로는 부드럽다. <선용후유(先勇後柔)>

.강원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갈빗대(脇,협)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꿩이다.
강원도 사람은 자기 거처에 가만히 있고 아는 것이 부족하다. <칩복지단(蟄伏知短)>

.충청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배(腹,복)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까치다.
충청도 사람은 행동이 경솔하지만 용맹스럽다. <부경용호(浮輕勇豪)>

.경상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다리(脚,각)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돼지우리다.
경상도 사람은 어리석고 순하고 질박하지만 참된 기질이 있다. <우순질신(愚順質信)>

.전라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발(足,족)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원숭이다.
전라도 사람은 속임이 많고 교활하고 가벼우나 예술성이 있다. <사교경예(詐巧輕藝)>

2)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의 팔도 인심론
<택리지(擇里志) 복거총론(卜居總論), 인심(人心)편>

무엇으로서 인심을 말할 것인가? 공자께서 "마을의 풍속이 착하면 아름다운 것이 된다. 아름다운 곳을 가려서 살지 아니하면 어찌 지혜롭다 하리오."하시었고, 옛날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이나 집을 옮긴 것은 아들을 훌륭하게 가르치고자 함이었다. 사람이 살 고장을 찾을 때에 그 착한 풍속을 가리지 않으면 비단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자손에게도 해가 있어서 반드시 좋지 못한 풍속이 스며들 우려가 있다. 그러니 살 곳을 가리는데 그 땅의 세상 풍속을 보지 아니하면 안 된다.

우리 나라 팔도 가운데 평안도 인심은 순후(醇厚)하여서 제일이요, 다음은 질실(質實)한 경상도 풍속이다. 함경도는 오랑캐와 접경하여 백성이 모두 굳세고 사나우며, 황해도는 산수가 험악한 까닭으로 백성들이 거의가 사납고 모질다. 강원도는 산골짜기 백성으로 몹시 불손하고, 전라도는 오로지 교활함을 숭상하여 그른 일
에 움직이기 쉽다. 경기도는 도성 밖의 야읍(野邑)은 백성들의 재물이 시들어 쇠하였고, 충청도는 오로지 세도와 재리(재리)에만 따른다. 이것이 팔도 인심의 대략이다. 그러나 이는 서민을 두고 논한 것이요, 사대부의 풍속에 이르러서는 또한 그렇지 않다.

3) 정조 때 규장각 학자인 윤행임(尹行恁)의 팔도 백성의 성격
.함경도 사람은 이중투구(泥中鬪狗)로 진흙 속에 개들이 싸우는 격으로 강인한 의지와 인내력이 있다.
.평안도 사람은 맹호출림(猛虎出林)으로 사나운 호랑이가 숲 속에서 나오는 격으로 용맹하고 과단성이 있다.
.황해도 사람은 석전경우(石田耕牛)로 돌밭을 일구는 소와 같은 격으로 고난을 이겨내는 근면성이 있다.
.경기도 사람은 경중미인(鏡中美人)으로 거울 앞에 선 미인 격으로 이지적이고 명예를 존중한다.
.강원도 사람은 암하노불(岩下老佛)로 바위 아래에 앉아 있는 부처님 격으로 누가 알아주든지 말든지 자기 할 일을 해 나간다.
.충청도 사람은 청풍명월(淸風明月)로 깨끗한 바람과 밝은 달 격으로 풍류를 즐기는 고상한 면이 있다.
.경상도 사람은 태산교악(泰山喬嶽)으로 크고 높고 험한 산 격으로 웅장하고 험악한 기개가 있다.
.전라도 사람은 풍전세류(風前細柳)로 바람에 쉽게 흔들리는 버들 나무 가지 격으로 시대에 민감하게 적응하면서 살아간다.

4) 성호 이익과 청담 이중환의 영호남 인물 비교
영조 때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경상도는 산수가 모두 취합하고 바람 소리와 풍기(風氣)와 습관 또한 흩어지지 아니하며 옛날 풍속이 그대로 지켜져 명현(名賢)이 배출되는 국내 최대의 길지인 반면 전라도는 산수가 모두 산발체(散髮體)를 이루면서 흩어져 나가 국면(局面)을 이루지 못하므로 그 지방에는 재주와 덕행이 드물고 인정도 고약하다 하였다. 반면에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은 그의 저서 택리지(擇里志)에서 전라도의 풍속이 노래와 여색, 부(富)함과 사치를 숭상하고 사람들이 흔히 영리하고 경박하며, 기교를 다하여 문학을 중요시하지 않는 까닭에 과제(科第)에 현달한 자는 경상도에 비해 떨어지나 인걸은 지령인지라 역시 전라도에도 인재가 적지 아니하다. 고봉 기대승은 광주인이고, 일재 이항은 부안인 이고, 하서 김인후는 장성인 인데 모두 도학(道學)으로써 이름이 있었다. 제봉 고경명과 건재 김천일은 다 광주인 인데 모두 절의(節義)로 이름이 있고, 고산 윤선도는 해남인 이고, 묵재 이상형은 남원인으로 모두 문학(文學)으로서 이름이 있었다. 장군 정지와 금남군 정충신은 나주인과 광주인 인데 장수(將帥)로 이름이 있었고, 찬성 오겸도 광주인 이고, 의정 이상진은 전주인 인데 재상(宰相)으로 현달 하였다. 그리고 문장가(文章家)로서는 고부의 옥봉 백광훈과 영암의 고죽 최경창이 있고, 우거(寓居)로서는 부윤 신말주가 순창에 살았고, 이상 이계맹이 김제에 살았고, 판서 이후백이 해남에 살았고, 판서 임담이 무안에 살았다. 단학(丹學)으로서는 도사 남궁두가 함열인 이고, 청하 권극중은 고부인 인데 또한 방술을 수련하여 유명하다. 이들은 모두 공명 정대하고 사내답게 뛰어나 명성을 후세에 남긴 사람들이다.

19. 풍수사(지관)의 칭호

우리는 흔히 풍수사(風水師)를 지칭할 때 속안(俗眼) 또는 범안(凡眼)이니, 법안(法眼)이니, 도안(道眼)이니, 신안(神眼)이니 하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속안(俗眼)과 범안(凡眼)은 같은 말로 매우 상식적으로 풍수지리를 이해하는 수준의 풍수사를 가르친다. 산세를 보고 주산, 현무, 청룡, 백호, 안산, 조산 등을 분별할 수 있는 단계다. 그러나 정확한 진혈지(眞穴地)를 찾는데는 어려움이 있다.

법안(法眼)은 우주의 순환 이치를 이해하고 태조산, 중조산, 소조산, 현무를 거치는 주룡의 행룡(行龍) 과정과 결혈(結穴)의 이치를 음양오행의 법칙으로 파악할 수 있는 단계다. 심혈(尋穴)과 점혈(點穴)을 풍수지리 산서(山書)에 근거하여 할 수 있다. 풍수지리 이법론에 정통하여 용혈사수(龍穴砂水)를 보고 이법(理法)에 맞추어 좌향(坐向)을 정확하게 놓을 수 있는 수준의 풍수사다. 보통 일반인도 어느 정도 공부를 하면 법안의 정도에는 도달 할 수 있다.

도안(道眼)은 법에만 의존하지 않고 산세를 보면 대세를 파악하여 주산에서 출맥한 주룡의 용진처(龍盡處)를 찾아 진혈지를 점지할 수 있는 수준의 풍수사다. 한 눈에 국세를 파악하여 혈의 길흉화복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도선국사나 무학대사 같은 풍수 도사들이 도안의 경지에 이른 풍수사다.

신안(神眼)은 귀신의 눈을 가졌다는 뜻으로 큰 대지를 찾을 수 있는 풍수사를 말한다. 대혈(大穴)은 천장지비(天藏地秘)로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기고 있다가 유덕지인(有德之人)에게 하늘이 점지해 주는데 이때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이 신안이다. 대 명당에는 그 명당을 쓰게된 전설이 있는데 전설에 나오는 풍수사가 신안 들이다.

요사이 혹세무민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신안이니 신안계니 하면서 과장하여 스스로를 광고하는데 진짜 신안은 세상에 나오지 않는 법이다.


20. 풍수 기인 남사고(南師古) 이야기

조선 중기의 학자인 남사고는 본관이 영양(英陽)이고 호는 격암(格庵)이다. 효행과 청렴으로 이름이 났으며 소학(小學)을 즐겨 읽었던 그는 역학, 풍수, 천문, 복서, 관상의 비결에 도통하여 많은 예언을 하였는데 꼭 들어맞았다고 한다. 명종 말년에는 동서분당(선조8년,1575년)을 예언했고, 명종 19년에는 "내년에 필연코 태산을 봉하리라"했는데 이듬해 문정왕후가 죽어 태릉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는 또 임진왜란을 예언했는데 "살기가 심히 악하여 임진년에 왜적이 크게 쳐들어올 터이니 부디 조심하라"고 다른 사람한테 말했는데 과연 그해 임진왜란이 터졌다. 특히 그는 풍수지리학에 조예가 깊어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문집에는 격암일고(格庵逸槁)가 있다. 남사고가 묘결(妙訣)을 얻은 데는 진위를 가릴 수 없는 많은 일화가 전해져 온다.

그가 어린 시절 서당에 다닐 때 이유 없이 자꾸 야위어 갔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훈장이 까닭을 물어보니 서당에 올 때마다 여우목 고개에 예쁜 여자가 나타나 입맞춤을 하자면서 자신을 희롱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묘령의 여자는 입맞춤을 할 때마다 입 속에 구슬을 가지고 논다고 하였다. 훈장은 여우가 여자로 둔갑한 것임을 알고 다시 입맞춤을 할 때 여자 입 속의 구슬을 빼앗아 삼키고 도망치라고 일러주었다. 다음날 서당에 오는데 또 예쁜 여자가 입맞춤을 하자면서 따라오자 남사고는 스승이 시킨 대로 얼른 여자의 입 속에 있는 구슬을 삼키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처녀가 구슬을 내놓으라고 뒤쫓아오자 너무 당황한 나머지 땅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처녀는 늙은 여우로 변하면서 슬피 울다가 되돌아갔다. 허겁지겁 서당에 온 남사고를 보고 훈장은 넘어질 때 어디를 제일 먼저 보았냐고 묻자 땅을 제일 먼저 보았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훈장은 탄식을 하면서 "아깝도다! 넘어질 때 하늘을 먼저 보았으면 천문에 능했을 텐데 땅을 보아 지관에 머물겠구나"하였다 한다.

남사고가 젊었을 때 경북 울진 불영사를 가던 길에 승려를 만났다. 둘은 같이 유람하다가 소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었는데 중은 갑자기 소리를 내지르더니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한참만에 모습을 드러낸 승려는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고 남사고는 "무엇이 두려운가"라고 태연히 대답하였다. 그러자 승려는 "그대는 능히 두려워하지 않으니 내가 가르칠 수 있다. 그대는 범상한 인물이 아니니 힘써 보라"하면서 비결을 주고 사라져 버렸다. 남사고는 이로부터 명지관이 되었고 세상일을 정확하게 예언을 하여 지금도 `남사고결록` `격암유록`등이 전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책이 실재로 남사고가 쓴 책인지 아니면 후세에 누군가 남사고의 이름을 도용하여 쓴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천하의 유명한 남사고가 세상일을 정확하게 예언했다 하지만 자신의 어머니 묘 하나도 제대로 명당에 묻지 못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명당을 구해 장사 지냈는데 다음에 와서 보니 명당이 아니었다. 다시 명당을 구해 이장하고 다음에 와보면 역시 명당이 아니었다. 이러기를 아홉 차례나 반복하였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 대지를 구해 어머니 유골을 안장하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오는데 밭을 갈던 한 농부가 노래를 부르면서 말하기를 "아홉 번을 옮기고 열 번째 장사한 구천십장(九遷十葬) 남사고(南師古)야! 용이 하늘을 날 듯이 올라가는 형국인 비룡상천(飛龍上天) 좋아하지 마라. 죽은 뱀을 나무에 걸쳐놓은 형국인 고사괘수(枯蛇掛樹)가 아닌가 하거늘." 남사고가 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산형(山形)을 자세히 보니 과연 사룡(死龍)이었다. 급히 밭을 갈던 농부를 찾으니 그는 홀연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남사고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대지(大地)는 필히 그 주인이 있는 법이니 평소 덕을 쌓지 않은 어머니를 억지로 명당에 모시려고 해도 아무나 얻는 것은 아니구나" 하면서 욕심을 버리고 무해지지(無害之地)를 찾아 이장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명당 대지는 천장지비(天藏地秘)하는 것으로 유덕지인(有德之人)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며 풍수 술법에도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제목 십승지(十勝地) 이야기
작성자 형산 정경연     2004/08/03
21. 십승지(十勝地) 이야기

십승지란 천지 대개벽이 일어날 때 재앙을 피하기에 좋은 10군데의 지역을 말한다. 정감록이나 격암유록에따르면 가까운 미래에 엄청난 천재지변이 일어나 인간은 끔찍한 질병과 굶주림, 추위와 더위, 공포에 시달리게 되고 대다수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함으로서 인류는 절멸의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십승지에 들어가는 사람은 이러한 끔찍한 재앙으로부터 목숨을 보전하고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으며 자손이 끊기지 않고 후세에까지 보존될 것이라고 하여 재난을 피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십승지의 정확한 위치는 책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십승지를 언급한 책은 <정감록>, <남서고 비결>, <남격암 산수 십승보길지지>, <감결>, <징비록>, <운기구책>, <유산록> 등 60여종이 있다. 이 예언서들은 파자(破字)등으로 기록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표현 또한 직설법이 아닌 우회적으로 하여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또한 책을 쓴 저자와 시기가 불분명한데 당시에는 이러한 책들이 나라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라하여 소지하거나 배포하는 것을 금한 금서(禁書)였기 때문이다. 또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한 시기에 일일이 손으로 베껴 쓴 필사본이기 때문에 쓰는 사람에 따라 실수든 의도적이든 내용을 누락 삭제하거나 첨가하여보충하였기 때문에 똑같은 책이라도 내용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십승지에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 십승지를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라 하여 흉년, 전염병, 전쟁이 들어 올 수 없는 곳이라고 한다. 십승지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은 태백산, 소백산, 덕유산, 가야산, 지리산등 명산에 자리잡고 있으며, 산이 높고 험하여 외부와의 교류가 차단되어 있는 곳이다. 십승지는 외부 세계와 연결하는 통로가 대개 한 곳 밖에 없는데 물이 빠져나가는 곳으로 험한 계곡과 협곡으로 되어 있다. 또 산이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공간에 수량이 풍부한 평야가 있어서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하여 1년 농사지어 3년을 먹고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대개 십승지는 정치, 경제, 사회, 군사적으로 가치가 별로 없는 곳으로 발전이 없으며 전쟁이 일어나도 적들의 접근이 전혀 없다. 결론적으로 십승지는 발전보다는 미래에 다가올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피난과 자손 보존의 땅이다. 따라서 한때 난리를 피하기는 좋은 곳일지는 모르지만 여러 대를 살면서 번창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한 곳이다.

이러한 십승지가 있다고 하는 곳은 다음 열 곳이다.

1. 영월 정동 상류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연하리 일대)
2. 봉화 춘양 일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일대)
3. 보은 속리 난증항 일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과 경북 상주군 화북면 화남리 일대)
4. 공주 유구 마곡 두 강 사이 (충남 공주시 유구읍 사곡면 일대)
5. 풍기 차암 금계촌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일대)
6. 예천 금당동 북쪽 (경북 예천군 용궁면 일대)
7. 합천 가야산 남쪽 만수동 일대 (경북 합천군 가야면 일대)
8. 무주 무풍 북쪽 덕유산 아래 방음 (전북 무주군 무풍면 일대)
9. 부안 변산 동쪽 호암 아래 (전북 부안군 변산면 일대)
10. 남원 운봉 두류산 아래 동점촌 (전북 남원시 운봉읍 일대)


22. 정감록(鄭鑑錄)

정감록은 저자나 연대가 미상으로 미래의 국운을 대화 형식으로 예언한 도참서다. 고려와 조선조의 흥망을예언하고, 정씨 왕조가 계룡산에 출현하여 800년 동안 도읍을 하면서 도탄에 빠진 민중들을 구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갖가지 전쟁과 폭정, 억압과 착취, 가난과 질병에 처한 조선 민중의 마음속에서는 해방과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과 위안을 심어 주는 것이었으며 동학혁명을 비롯해서 민중봉기의 이념적 사상을 심어주는 책이기도 했다. 정감록(鄭鑑錄)이란 성이 정씨(鄭氏)이고 이름이 감(鑑)이라는 사람이 예언한 것이라는 뜻이다. 정감록 내용인 <감결(鑑訣)>의 원문과 이것을 해석한 책들을 참고하여 필자가 재구성하여 설명하였다.

완산백으로 임명된 한융공(漢隆公)에게는 아들 셋이 있는데 큰아들은 일찍 죽고, 둘째 심(沈)과 셋째 연(淵)이 정감(鄭鑑)이라는 사람을 만나 8도를 유람하였다. 그런데 정감이라는 사람은 삼국지에서 나오는 유비의은사(隱士)인 수경선생 사마휘나 지략가 제갈 공명보다도 더 나은 사람이었다.

이들은 경치가 빼어나고 기이한 금강산을 구경하면서 "천지는 음양의 주장으로 이루어 졌다"는 이야기를 서로 돌아가면서 하였다. 형인 심이 "산수의 법이 기이하고 경치가 참으로 빼어나 도다"라고 말하자, 정감이대답하기를 "곤륜산으로부터 온 산맥이 백두산에 이르고 원기(元氣)가 평양에 이르렀지만 평양은 이미 천년운세가 지났고, 이제는 송악으로 옮겨졌다. 송악은 500년 도읍 할 땅이기는 하지만 요사스런 중과 궁녀가 난을 일으켜 땅의 기운이 떨어지고 천운(天運)이 다하게 되면 한양으로 원기가 옮겨질 것이다. 대강 살펴보건데 전쟁은 평정되지 않고 충신은 죽었으니 세상이 긴 밤중이로다. 교룡(蛟龍)은 남쪽으로 건넜는데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반드시 흰소(白牛)을 따라 종성(從城)으로 달아나야 한다."라고 말했다.

심이 말을 받아 대답하기를 "내맥(來脈)의 운수가 금강산으로 옮겨진 다음 안동에 있는 태백산, 순흥에 있는소백산에 도착해서 산천의 기운을 뭉치고 계룡산으로 들어갔으니 이곳은 정씨(鄭氏)가 800년 도읍 할 땅이고, 다시 원맥(元脈)은 가야산으로 들어갔으니 이곳은 조씨(趙氏)가 1000년 도읍 할 땅이며, 전주(全州)는 범씨(范氏)가 도읍 할 땅이다. 또한 송악은 운수가 되돌아와서 왕씨(王氏)가 다시 일어나는 땅이다. 그러나 나머지는 자세히 알지 못해 말할 수가 없도다."

이어서 정감이 삼각운대에 앉아 말하기를 "어떤 해를 거쳐서 어떤 해에 이르면 지각이 있는 사람이 살고, 지각이 없는 사람은 죽게 될것이다."라고 했다. 심이 "그 때가 언제인가?"라고 묻자 정감이 대답하기를 "너의자손 말년에 궁중 과부가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하고, 어린 임금이 스스로 일을 내 맡기면 나라의 일은 장차 그르쳐지고 단신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져서 집집마다 인삼이요, 마을마다 물방아요, 집집마다 급제하고,사람마다 진사가 나올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며, 후에 현인이 있어 이러한 일들의 잘못됨을 논하게 될 것이다. 선비가 갓을 비뚤어지게 쓰고, 신인(神人)이 옷을 벗고, 주변(走邊)에 몸을걸쳐 성인(聖人)의 이름에 8자를 더하고, 계룡의 돌이 흰색으로 변하고, 청포(淸浦)의 대나무가 흰색으로 변
하고, 초포(草浦)에 조수(潮水)가 생겨 배가 다니고, 누런 안개와 검은 구름이 사흘 동안 천지를 덮고, 혜성이진성(軫星, 28수의 하나) 머리에서 나와 은하수 사이 또는 북두(北斗)로 들어갔다가 자미원(紫薇垣)을 범한후 두미(斗尾)로 옮겨갔다가 두성(斗星) 또는 은하 사이에 이른 후 남두(南斗)에서 그 끝을 마치면 대중화(大中華: 중국)와 소중화(小中華: 조선)가 함께 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심이 "삼각산이 규봉이 되고, 백악이 주산이 되고, 한강이 허리띠가 되고, 계락산이 청룡이 되고, 안현이 백호가 되고, 관악산이 안산이 되고, 목멱이 남산이 되었도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도둑이 4번이나 들어 도둑질을 하지만 반드시 2번은 다시 일어설 것이고, 관악산이 안산이 되었으니 왕궁에 화재가 3번 일어날 것이며, 단우에 불꽃이 일어날 것이다. 위에서는 근심하고, 아래에서는 흔들릴 것이며, 아전이 태수를 죽일 것이고, 삼강오륜이 영영 없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심이 "우리 세 사람이 서로 마주 하였으니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신년(申年) 봄 3월과 성세 가을 8월에 인천과 부평 사이에 밤에 배 1천척이 닿고, 안성과 죽산 사이에 송장이 산처럼 쌓이며, 여주와 광주 사이에 사람의 그림자가 영영 끊어지고, 수성과 당성 사이에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며, 한강 남쪽 1백리에 닭과 개의소리가 없어지고, 사람의 그림자가 아주 없어질 것이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장차 이 일을 어찌 할 것인가?"라고 탄식했다.

이에 심이 말하기를 "몸을 보존할 땅이 열 군데 있으니, 첫째는 풍기 예천이고, 둘째는 안동 화곡이며, 셋째는 개령 용궁이고, 넷째는 가야이며, 다섯째는 단춘이고, 여섯째는 공주 정산 마곡이며, 일곱째는 진천 목천이고, 여덟째는 봉화이며, 아홉째는 운봉 두류산으로 이곳은 영구히 살만한 땅이어서 어진 정승과 훌륭한 장수가 계속하여 날 것이고, 열째는 태백이다."라고 하였다. 심은 계속하여 말하기를 "곡식 종자는 양백(兩白:태백과 소백)에서 구할 것이니 앞서 말한 열 곳은 병화가 들어오지 않고, 흉년이 들지 않으며, 백의적(白衣賊)을 만나면 결혼을 하고 형제처럼 되어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즐겁게 지낼 것이다. 영가 사이에 화기애애한기운이 성하다고 하였는데 영가는 바로 대소백(大小白)이다. 금강산 서쪽과 오대산 북쪽은 12년 동안 적의소굴이 될 것이고, 9년 동안 수재(水災)가 들며, 12년 동안 병란이 있을 것이니 누가 이 변고를 피할 수 있겠는가? 십승지(十勝地)에 들어가는 사람만이 그 때를 알아 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감이 "해가 저물었으니 서쪽으로 돌아가자.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라고 말하며 서쪽 암자로 돌아가니 경쇠 소리가 멀리 흰 구름 속에서 들려오고, 쏟아지는 폭포가 귀를 씻어주며 갖가지 형상의 구름이 산골짜기를 덮었다.

이튿날 세 사람은 금강산을 떠나 가야산에 이르렀다. 정감이 "후세 사람 중에 지각이 있는 사람은 먼저 십승지에 들어갈 것이니, 가난한 사람은 살고 부자는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이 "어째서 그런가?"라고 묻자
정감이 대답하기를 "부자는 돈과 재산이 많기 때문에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고, 가난한 사람은 재산이 없으니 어디에 간들 가난하고 천하게 살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때를 살펴 행동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심이 "황해도 평안도 두 서쪽 땅은 1천리 지경에 3년 동안 사람의 연기가 없을 것이고, 동쪽 산골 강원도 땅은 마땅 꺼려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산과 물의 형세가 이러저러하니 천 년 후의 일을 자세히 알수 있다."라고 말했다. 심이 "적이 전주에서 일어나 호중(湖中)의 진(津)과 화(華) 사이에서 세력을 키워 1만척의 배로 강을 가로막을 것이니 이것이 큰 재난이로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그것은 그렇게 큰 걱정거리가되지 않는다. 말세에 이르면 아전이 수령을 죽이는 일을 조금도 꺼려하지 않고, 위와 아래의 분별이 없어지며, 삼강오륜의 변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임금의 힘이 없어지고 나라가 위태한 지경에이르러 비틀거리게 되면 대대로 국록을 먹는 신하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정감은 "말세의 재앙을 상세히 이야기하자면, 9년 동안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나무껍질을 먹고 살 것이며, 4년 동안은전염병이 돌아 전체 백성의 반 이상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사대부의 집은 인삼으로 망하고, 벼슬아치의집은 이익을 탐하다가 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이 "후세에 미련한 사람들은 용문산을 은신하기에 적당한 곳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산수를 보는 법에 따라 살펴보면 용운산은 겉으로 드러나는 생기만 있을 뿐 모든 기운을 한양에 빼앗겼기 때문에 가운데의 기세는 모두 죽은 혈뿐이다. 따라서 후세 사람들이 이 산에 오면 오대산 북쪽 도둑들의 침범을 받아 1년도 못되어 일만 명에 달하는 목숨이 재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산수 생긴 것이 이렇게 괴상하고 패역하니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심이 "후세 사람들이 지각이 있어 십승지로 들어가려 하더라도 반드시 미련한 사람들이 말릴 것이다. 공과 사의 대소를 막론하고 길흉화복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참으로 형용하기 어렵도다."라고 말했다.

정감이 말하기를 "계룡산의 돌이 희어지고, 평평한 모래밭 30리에 남문이 다시 일어나고, 너의 자손 끝에 쥐얼굴에 범의 눈을 가진 사람이 생기고, 때때로 흉년이 들고, 호환으로 사람이 상하고, 물고기와 소금이 지극히 천하고, 냇물이 마르고 산이 무너지면 백두산 북쪽에 있는 오랑캐의 말이 길게 울고, 평안도와 황해도 양서 사이에 원통한 피가 하늘에 넘칠 것이다. 한양 남쪽 백 리에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연이 "목멱산은 해산하는 여자의 음부 형상과 같아서 사대부의 추행이 있으면 온 나라가 무례해질 것이니 이것을 어찌 하겠는가?"라고 말하자, 정감이 "그것은 걱정할 것이 없다. 음풍을 막으면 황씨가 무후(無后)하게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심이 "계룡산에 개국하면 변씨(卞氏) 정승과 배씨(裵氏) 장수가 일등 개국 공신이 될 것이고, 방성(房姓)과 우가(牛哥)가 수족과 같이 될 것이고, 대백과 소백 사이의 묵은 양반들이 복고할 것이니 후세 사람 중에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자손을 대백과 소백 사이에 간직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감이 "대개 세상에 몸을 피하려면 산도 이롭지 않고, 물도 이롭지 않고 양궁(兩弓)이 가장 좋다. 너의 자손 끝에 나라 운수가 팔임(八壬)에 다하고, 목하(木下)에 어지러워지면 나의 자손에 의해 끝을 마치게 될것이다."라고 말하자, 심이 "나의 자손이 너의 자손을 죽이고, 너의 자손이 나의 자손을 죽일 것이다."라고말했다.

연이 "십승지가 세상에서 피신하기에 가장 좋은 땅이나 새재(조령) 앞뒤의 큰길은 어찌할 것인가?"라고 말하자, 정감이 "새재에 성을 쌓으면 큰 군사가 바다에 떠서 배를 타고 와서 남쪽으로 해서 전주로 들어가고, 호중(湖中)의 도둑 백성들이 당(黨)을 모으면 화(華), 진(津)과 양서의 백성들이 살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열곳은 난리가 들어오지 않고, 흉년이 들지 않는 곳으로 이곳을 버리면 사람이 어디 살겠는가? 장씨(張氏)가의병을 일으켜 난을 시작하는 시기가 경염(庚炎)이 있으니 지각이 있는 사람은 이때 십승지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먼저 들어가는 자는 되돌아오고, 중간에 들어가는 자는 살고, 나중에 들어가는 자는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이 이어서 "이 열 곳은 비록 12년 동안 병란이 있어도 피해가 없지만 육도(六道)의 백성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이 열 곳은 사면이 이러이러해서 흉년이 들지 않으니 참으로 산수의 법은 기이하다. 뒤에 지각 있는 자가 비록 빌어먹으며 들어가더라도 좋은 것이다. 신년(新年) 섣달과 임년(壬年) 3월에 일이 없으면 요행이고,비록 일이 있더라도 들로 향하면 편안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은 또한 "계룡산 남쪽 밖 네 고을 또한 백성들이 몸을 보존할 곳이다."라고 말했다. 정감은 "이곳은 경기 강원보다도 낫고, 일이 허다하여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첫째는 풍기 차암 금계촌으로 소백산 두 물 골 사이에 있다. 둘째는 화산 소령의 고기로 청양현에 있으며, 동촌으로 넘어 들어간다. 셋째는 보은 속리산 네 증항 근처로 난리를 당해 몸을 숨기면 만 명중에 한 사람도 다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넷째는 운봉 행촌(杏村)이다. 다섯째는 예천 금당실로 이 땅에는 난리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임금의 수레가 이 땅에 다다르면 달라질 것이다. 여섯째는 공주 계룡산 유구 마곡 사이로 물 골 사이의 둘레가 2백 리나 되어 난을 피할 만 하다. 일곱째는 영월 정동쪽 상류로 어지러운 세상에 종적을 감출만하나 수염이 없는 자가 먼저 들어가면 달라질 것이다. 여덟째는 무주 무봉산 북쪽동방 상동(相洞)으로 난을 피하지 못할 곳이 없다. 아홉째는 부안 호암(壺岩) 아래쪽이 가장 기이하다. 열째는합천 가야산 만수봉으로 둘레가 2백 리나 되어서 영구히 몸을 보전 할 수가 있다. 동북쪽 상원산(上元山) 계류봉 또한 가하다."라고 말했다.


  
21. 십승지(十勝地) 이야기

십승지란 천지 대개벽이 일어날 때 재앙을 피하기에 좋은 10군데의 지역을 말한다. 정감록이나 격암유록에따르면 가까운 미래에 엄청난 천재지변이 일어나 인간은 끔찍한 질병과 굶주림, 추위와 더위, 공포에 시달리게 되고 대다수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함으로서 인류는 절멸의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십승지에 들어가는 사람은 이러한 끔찍한 재앙으로부터 목숨을 보전하고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으며 자손이 끊기지 않고 후세에까지 보존될 것이라고 하여 재난을 피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십승지의 정확한 위치는 책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십승지를 언급한 책은 <정감록>, <남서고 비결>, <남격암 산수 십승보길지지>, <감결>, <징비록>, <운기구책>, <유산록> 등 60여종이 있다. 이 예언서들은 파자(破字)등으로 기록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표현 또한 직설법이 아닌 우회적으로 하여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또한 책을 쓴 저자와 시기가 불분명한데 당시에는 이러한 책들이 나라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라하여 소지하거나 배포하는 것을 금한 금서(禁書)였기 때문이다. 또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한 시기에 일일이 손으로 베껴 쓴 필사본이기 때문에 쓰는 사람에 따라 실수든 의도적이든 내용을 누락 삭제하거나 첨가하여보충하였기 때문에 똑같은 책이라도 내용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십승지에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 십승지를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라 하여 흉년, 전염병, 전쟁이 들어 올 수 없는 곳이라고 한다. 십승지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은 태백산, 소백산, 덕유산, 가야산, 지리산등 명산에 자리잡고 있으며, 산이 높고 험하여 외부와의 교류가 차단되어 있는 곳이다. 십승지는 외부 세계와 연결하는 통로가 대개 한 곳 밖에 없는데 물이 빠져나가는 곳으로 험한 계곡과 협곡으로 되어 있다. 또 산이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공간에 수량이 풍부한 평야가 있어서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하여 1년 농사지어 3년을 먹고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대개 십승지는 정치, 경제, 사회, 군사적으로 가치가 별로 없는 곳으로 발전이 없으며 전쟁이 일어나도 적들의 접근이 전혀 없다. 결론적으로 십승지는 발전보다는 미래에 다가올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피난과 자손 보존의 땅이다. 따라서 한때 난리를 피하기는 좋은 곳일지는 모르지만 여러 대를 살면서 번창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한 곳이다.

이러한 십승지가 있다고 하는 곳은 다음 열 곳이다.

1. 영월 정동 상류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연하리 일대)
2. 봉화 춘양 일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일대)
3. 보은 속리 난증항 일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과 경북 상주군 화북면 화남리 일대)
4. 공주 유구 마곡 두 강 사이 (충남 공주시 유구읍 사곡면 일대)
5. 풍기 차암 금계촌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일대)
6. 예천 금당동 북쪽 (경북 예천군 용궁면 일대)
7. 합천 가야산 남쪽 만수동 일대 (경북 합천군 가야면 일대)
8. 무주 무풍 북쪽 덕유산 아래 방음 (전북 무주군 무풍면 일대)
9. 부안 변산 동쪽 호암 아래 (전북 부안군 변산면 일대)
10. 남원 운봉 두류산 아래 동점촌 (전북 남원시 운봉읍 일대)


22. 정감록(鄭鑑錄)

정감록은 저자나 연대가 미상으로 미래의 국운을 대화 형식으로 예언한 도참서다. 고려와 조선조의 흥망을예언하고, 정씨 왕조가 계룡산에 출현하여 800년 동안 도읍을 하면서 도탄에 빠진 민중들을 구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갖가지 전쟁과 폭정, 억압과 착취, 가난과 질병에 처한 조선 민중의 마음속에서는 해방과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과 위안을 심어 주는 것이었으며 동학혁명을 비롯해서 민중봉기의 이념적 사상을 심어주는 책이기도 했다. 정감록(鄭鑑錄)이란 성이 정씨(鄭氏)이고 이름이 감(鑑)이라는 사람이 예언한 것이라는 뜻이다. 정감록 내용인 <감결(鑑訣)>의 원문과 이것을 해석한 책들을 참고하여 필자가 재구성하여 설명하였다.

완산백으로 임명된 한융공(漢隆公)에게는 아들 셋이 있는데 큰아들은 일찍 죽고, 둘째 심(沈)과 셋째 연(淵)이 정감(鄭鑑)이라는 사람을 만나 8도를 유람하였다. 그런데 정감이라는 사람은 삼국지에서 나오는 유비의은사(隱士)인 수경선생 사마휘나 지략가 제갈 공명보다도 더 나은 사람이었다.

이들은 경치가 빼어나고 기이한 금강산을 구경하면서 "천지는 음양의 주장으로 이루어 졌다"는 이야기를 서로 돌아가면서 하였다. 형인 심이 "산수의 법이 기이하고 경치가 참으로 빼어나 도다"라고 말하자, 정감이대답하기를 "곤륜산으로부터 온 산맥이 백두산에 이르고 원기(元氣)가 평양에 이르렀지만 평양은 이미 천년운세가 지났고, 이제는 송악으로 옮겨졌다. 송악은 500년 도읍 할 땅이기는 하지만 요사스런 중과 궁녀가 난을 일으켜 땅의 기운이 떨어지고 천운(天運)이 다하게 되면 한양으로 원기가 옮겨질 것이다. 대강 살펴보건데 전쟁은 평정되지 않고 충신은 죽었으니 세상이 긴 밤중이로다. 교룡(蛟龍)은 남쪽으로 건넜는데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반드시 흰소(白牛)을 따라 종성(從城)으로 달아나야 한다."라고 말했다.

심이 말을 받아 대답하기를 "내맥(來脈)의 운수가 금강산으로 옮겨진 다음 안동에 있는 태백산, 순흥에 있는소백산에 도착해서 산천의 기운을 뭉치고 계룡산으로 들어갔으니 이곳은 정씨(鄭氏)가 800년 도읍 할 땅이고, 다시 원맥(元脈)은 가야산으로 들어갔으니 이곳은 조씨(趙氏)가 1000년 도읍 할 땅이며, 전주(全州)는 범씨(范氏)가 도읍 할 땅이다. 또한 송악은 운수가 되돌아와서 왕씨(王氏)가 다시 일어나는 땅이다. 그러나 나머지는 자세히 알지 못해 말할 수가 없도다."

이어서 정감이 삼각운대에 앉아 말하기를 "어떤 해를 거쳐서 어떤 해에 이르면 지각이 있는 사람이 살고, 지각이 없는 사람은 죽게 될것이다."라고 했다. 심이 "그 때가 언제인가?"라고 묻자 정감이 대답하기를 "너의자손 말년에 궁중 과부가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하고, 어린 임금이 스스로 일을 내 맡기면 나라의 일은 장차 그르쳐지고 단신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져서 집집마다 인삼이요, 마을마다 물방아요, 집집마다 급제하고,사람마다 진사가 나올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며, 후에 현인이 있어 이러한 일들의 잘못됨을 논하게 될 것이다. 선비가 갓을 비뚤어지게 쓰고, 신인(神人)이 옷을 벗고, 주변(走邊)에 몸을걸쳐 성인(聖人)의 이름에 8자를 더하고, 계룡의 돌이 흰색으로 변하고, 청포(淸浦)의 대나무가 흰색으로 변
하고, 초포(草浦)에 조수(潮水)가 생겨 배가 다니고, 누런 안개와 검은 구름이 사흘 동안 천지를 덮고, 혜성이진성(軫星, 28수의 하나) 머리에서 나와 은하수 사이 또는 북두(北斗)로 들어갔다가 자미원(紫薇垣)을 범한후 두미(斗尾)로 옮겨갔다가 두성(斗星) 또는 은하 사이에 이른 후 남두(南斗)에서 그 끝을 마치면 대중화(大中華: 중국)와 소중화(小中華: 조선)가 함께 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심이 "삼각산이 규봉이 되고, 백악이 주산이 되고, 한강이 허리띠가 되고, 계락산이 청룡이 되고, 안현이 백호가 되고, 관악산이 안산이 되고, 목멱이 남산이 되었도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도둑이 4번이나 들어 도둑질을 하지만 반드시 2번은 다시 일어설 것이고, 관악산이 안산이 되었으니 왕궁에 화재가 3번 일어날 것이며, 단우에 불꽃이 일어날 것이다. 위에서는 근심하고, 아래에서는 흔들릴 것이며, 아전이 태수를 죽일 것이고, 삼강오륜이 영영 없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심이 "우리 세 사람이 서로 마주 하였으니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신년(申年) 봄 3월과 성세 가을 8월에 인천과 부평 사이에 밤에 배 1천척이 닿고, 안성과 죽산 사이에 송장이 산처럼 쌓이며, 여주와 광주 사이에 사람의 그림자가 영영 끊어지고, 수성과 당성 사이에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며, 한강 남쪽 1백리에 닭과 개의소리가 없어지고, 사람의 그림자가 아주 없어질 것이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장차 이 일을 어찌 할 것인가?"라고 탄식했다.

이에 심이 말하기를 "몸을 보존할 땅이 열 군데 있으니, 첫째는 풍기 예천이고, 둘째는 안동 화곡이며, 셋째는 개령 용궁이고, 넷째는 가야이며, 다섯째는 단춘이고, 여섯째는 공주 정산 마곡이며, 일곱째는 진천 목천이고, 여덟째는 봉화이며, 아홉째는 운봉 두류산으로 이곳은 영구히 살만한 땅이어서 어진 정승과 훌륭한 장수가 계속하여 날 것이고, 열째는 태백이다."라고 하였다. 심은 계속하여 말하기를 "곡식 종자는 양백(兩白:태백과 소백)에서 구할 것이니 앞서 말한 열 곳은 병화가 들어오지 않고, 흉년이 들지 않으며, 백의적(白衣賊)을 만나면 결혼을 하고 형제처럼 되어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즐겁게 지낼 것이다. 영가 사이에 화기애애한기운이 성하다고 하였는데 영가는 바로 대소백(大小白)이다. 금강산 서쪽과 오대산 북쪽은 12년 동안 적의소굴이 될 것이고, 9년 동안 수재(水災)가 들며, 12년 동안 병란이 있을 것이니 누가 이 변고를 피할 수 있겠는가? 십승지(十勝地)에 들어가는 사람만이 그 때를 알아 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감이 "해가 저물었으니 서쪽으로 돌아가자.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라고 말하며 서쪽 암자로 돌아가니 경쇠 소리가 멀리 흰 구름 속에서 들려오고, 쏟아지는 폭포가 귀를 씻어주며 갖가지 형상의 구름이 산골짜기를 덮었다.

이튿날 세 사람은 금강산을 떠나 가야산에 이르렀다. 정감이 "후세 사람 중에 지각이 있는 사람은 먼저 십승지에 들어갈 것이니, 가난한 사람은 살고 부자는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이 "어째서 그런가?"라고 묻자
정감이 대답하기를 "부자는 돈과 재산이 많기 때문에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고, 가난한 사람은 재산이 없으니 어디에 간들 가난하고 천하게 살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때를 살펴 행동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심이 "황해도 평안도 두 서쪽 땅은 1천리 지경에 3년 동안 사람의 연기가 없을 것이고, 동쪽 산골 강원도 땅은 마땅 꺼려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산과 물의 형세가 이러저러하니 천 년 후의 일을 자세히 알수 있다."라고 말했다. 심이 "적이 전주에서 일어나 호중(湖中)의 진(津)과 화(華) 사이에서 세력을 키워 1만척의 배로 강을 가로막을 것이니 이것이 큰 재난이로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그것은 그렇게 큰 걱정거리가되지 않는다. 말세에 이르면 아전이 수령을 죽이는 일을 조금도 꺼려하지 않고, 위와 아래의 분별이 없어지며, 삼강오륜의 변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임금의 힘이 없어지고 나라가 위태한 지경에이르러 비틀거리게 되면 대대로 국록을 먹는 신하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정감은 "말세의 재앙을 상세히 이야기하자면, 9년 동안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나무껍질을 먹고 살 것이며, 4년 동안은전염병이 돌아 전체 백성의 반 이상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사대부의 집은 인삼으로 망하고, 벼슬아치의집은 이익을 탐하다가 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이 "후세에 미련한 사람들은 용문산을 은신하기에 적당한 곳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산수를 보는 법에 따라 살펴보면 용운산은 겉으로 드러나는 생기만 있을 뿐 모든 기운을 한양에 빼앗겼기 때문에 가운데의 기세는 모두 죽은 혈뿐이다. 따라서 후세 사람들이 이 산에 오면 오대산 북쪽 도둑들의 침범을 받아 1년도 못되어 일만 명에 달하는 목숨이 재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산수 생긴 것이 이렇게 괴상하고 패역하니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심이 "후세 사람들이 지각이 있어 십승지로 들어가려 하더라도 반드시 미련한 사람들이 말릴 것이다. 공과 사의 대소를 막론하고 길흉화복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참으로 형용하기 어렵도다."라고 말했다.

정감이 말하기를 "계룡산의 돌이 희어지고, 평평한 모래밭 30리에 남문이 다시 일어나고, 너의 자손 끝에 쥐얼굴에 범의 눈을 가진 사람이 생기고, 때때로 흉년이 들고, 호환으로 사람이 상하고, 물고기와 소금이 지극히 천하고, 냇물이 마르고 산이 무너지면 백두산 북쪽에 있는 오랑캐의 말이 길게 울고, 평안도와 황해도 양서 사이에 원통한 피가 하늘에 넘칠 것이다. 한양 남쪽 백 리에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연이 "목멱산은 해산하는 여자의 음부 형상과 같아서 사대부의 추행이 있으면 온 나라가 무례해질 것이니 이것을 어찌 하겠는가?"라고 말하자, 정감이 "그것은 걱정할 것이 없다. 음풍을 막으면 황씨가 무후(無后)하게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심이 "계룡산에 개국하면 변씨(卞氏) 정승과 배씨(裵氏) 장수가 일등 개국 공신이 될 것이고, 방성(房姓)과 우가(牛哥)가 수족과 같이 될 것이고, 대백과 소백 사이의 묵은 양반들이 복고할 것이니 후세 사람 중에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자손을 대백과 소백 사이에 간직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감이 "대개 세상에 몸을 피하려면 산도 이롭지 않고, 물도 이롭지 않고 양궁(兩弓)이 가장 좋다. 너의 자손 끝에 나라 운수가 팔임(八壬)에 다하고, 목하(木下)에 어지러워지면 나의 자손에 의해 끝을 마치게 될것이다."라고 말하자, 심이 "나의 자손이 너의 자손을 죽이고, 너의 자손이 나의 자손을 죽일 것이다."라고말했다.

연이 "십승지가 세상에서 피신하기에 가장 좋은 땅이나 새재(조령) 앞뒤의 큰길은 어찌할 것인가?"라고 말하자, 정감이 "새재에 성을 쌓으면 큰 군사가 바다에 떠서 배를 타고 와서 남쪽으로 해서 전주로 들어가고, 호중(湖中)의 도둑 백성들이 당(黨)을 모으면 화(華), 진(津)과 양서의 백성들이 살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열곳은 난리가 들어오지 않고, 흉년이 들지 않는 곳으로 이곳을 버리면 사람이 어디 살겠는가? 장씨(張氏)가의병을 일으켜 난을 시작하는 시기가 경염(庚炎)이 있으니 지각이 있는 사람은 이때 십승지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먼저 들어가는 자는 되돌아오고, 중간에 들어가는 자는 살고, 나중에 들어가는 자는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이 이어서 "이 열 곳은 비록 12년 동안 병란이 있어도 피해가 없지만 육도(六道)의 백성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이 열 곳은 사면이 이러이러해서 흉년이 들지 않으니 참으로 산수의 법은 기이하다. 뒤에 지각 있는 자가 비록 빌어먹으며 들어가더라도 좋은 것이다. 신년(新年) 섣달과 임년(壬年) 3월에 일이 없으면 요행이고,비록 일이 있더라도 들로 향하면 편안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은 또한 "계룡산 남쪽 밖 네 고을 또한 백성들이 몸을 보존할 곳이다."라고 말했다. 정감은 "이곳은 경기 강원보다도 낫고, 일이 허다하여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첫째는 풍기 차암 금계촌으로 소백산 두 물 골 사이에 있다. 둘째는 화산 소령의 고기로 청양현에 있으며, 동촌으로 넘어 들어간다. 셋째는 보은 속리산 네 증항 근처로 난리를 당해 몸을 숨기면 만 명중에 한 사람도 다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넷째는 운봉 행촌(杏村)이다. 다섯째는 예천 금당실로 이 땅에는 난리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임금의 수레가 이 땅에 다다르면 달라질 것이다. 여섯째는 공주 계룡산 유구 마곡 사이로 물 골 사이의 둘레가 2백 리나 되어 난을 피할 만 하다. 일곱째는 영월 정동쪽 상류로 어지러운 세상에 종적을 감출만하나 수염이 없는 자가 먼저 들어가면 달라질 것이다. 여덟째는 무주 무봉산 북쪽동방 상동(相洞)으로 난을 피하지 못할 곳이 없다. 아홉째는 부안 호암(壺岩) 아래쪽이 가장 기이하다. 열째는합천 가야산 만수봉으로 둘레가 2백 리나 되어서 영구히 몸을 보전 할 수가 있다. 동북쪽 상원산(上元山) 계류봉 또한 가하다."라고 말했다.


  
21. 십승지(十勝地) 이야기

십승지란 천지 대개벽이 일어날 때 재앙을 피하기에 좋은 10군데의 지역을 말한다. 정감록이나 격암유록에따르면 가까운 미래에 엄청난 천재지변이 일어나 인간은 끔찍한 질병과 굶주림, 추위와 더위, 공포에 시달리게 되고 대다수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함으로서 인류는 절멸의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십승지에 들어가는 사람은 이러한 끔찍한 재앙으로부터 목숨을 보전하고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으며 자손이 끊기지 않고 후세에까지 보존될 것이라고 하여 재난을 피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십승지의 정확한 위치는 책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십승지를 언급한 책은 <정감록>, <남서고 비결>, <남격암 산수 십승보길지지>, <감결>, <징비록>, <운기구책>, <유산록> 등 60여종이 있다. 이 예언서들은 파자(破字)등으로 기록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표현 또한 직설법이 아닌 우회적으로 하여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또한 책을 쓴 저자와 시기가 불분명한데 당시에는 이러한 책들이 나라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라하여 소지하거나 배포하는 것을 금한 금서(禁書)였기 때문이다. 또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한 시기에 일일이 손으로 베껴 쓴 필사본이기 때문에 쓰는 사람에 따라 실수든 의도적이든 내용을 누락 삭제하거나 첨가하여보충하였기 때문에 똑같은 책이라도 내용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십승지에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 십승지를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라 하여 흉년, 전염병, 전쟁이 들어 올 수 없는 곳이라고 한다. 십승지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은 태백산, 소백산, 덕유산, 가야산, 지리산등 명산에 자리잡고 있으며, 산이 높고 험하여 외부와의 교류가 차단되어 있는 곳이다. 십승지는 외부 세계와 연결하는 통로가 대개 한 곳 밖에 없는데 물이 빠져나가는 곳으로 험한 계곡과 협곡으로 되어 있다. 또 산이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공간에 수량이 풍부한 평야가 있어서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하여 1년 농사지어 3년을 먹고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대개 십승지는 정치, 경제, 사회, 군사적으로 가치가 별로 없는 곳으로 발전이 없으며 전쟁이 일어나도 적들의 접근이 전혀 없다. 결론적으로 십승지는 발전보다는 미래에 다가올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피난과 자손 보존의 땅이다. 따라서 한때 난리를 피하기는 좋은 곳일지는 모르지만 여러 대를 살면서 번창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한 곳이다.

이러한 십승지가 있다고 하는 곳은 다음 열 곳이다.

1. 영월 정동 상류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연하리 일대)
2. 봉화 춘양 일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일대)
3. 보은 속리 난증항 일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과 경북 상주군 화북면 화남리 일대)
4. 공주 유구 마곡 두 강 사이 (충남 공주시 유구읍 사곡면 일대)
5. 풍기 차암 금계촌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일대)
6. 예천 금당동 북쪽 (경북 예천군 용궁면 일대)
7. 합천 가야산 남쪽 만수동 일대 (경북 합천군 가야면 일대)
8. 무주 무풍 북쪽 덕유산 아래 방음 (전북 무주군 무풍면 일대)
9. 부안 변산 동쪽 호암 아래 (전북 부안군 변산면 일대)
10. 남원 운봉 두류산 아래 동점촌 (전북 남원시 운봉읍 일대)


22. 정감록(鄭鑑錄)

정감록은 저자나 연대가 미상으로 미래의 국운을 대화 형식으로 예언한 도참서다. 고려와 조선조의 흥망을예언하고, 정씨 왕조가 계룡산에 출현하여 800년 동안 도읍을 하면서 도탄에 빠진 민중들을 구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갖가지 전쟁과 폭정, 억압과 착취, 가난과 질병에 처한 조선 민중의 마음속에서는 해방과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과 위안을 심어 주는 것이었으며 동학혁명을 비롯해서 민중봉기의 이념적 사상을 심어주는 책이기도 했다. 정감록(鄭鑑錄)이란 성이 정씨(鄭氏)이고 이름이 감(鑑)이라는 사람이 예언한 것이라는 뜻이다. 정감록 내용인 <감결(鑑訣)>의 원문과 이것을 해석한 책들을 참고하여 필자가 재구성하여 설명하였다.

완산백으로 임명된 한융공(漢隆公)에게는 아들 셋이 있는데 큰아들은 일찍 죽고, 둘째 심(沈)과 셋째 연(淵)이 정감(鄭鑑)이라는 사람을 만나 8도를 유람하였다. 그런데 정감이라는 사람은 삼국지에서 나오는 유비의은사(隱士)인 수경선생 사마휘나 지략가 제갈 공명보다도 더 나은 사람이었다.

이들은 경치가 빼어나고 기이한 금강산을 구경하면서 "천지는 음양의 주장으로 이루어 졌다"는 이야기를 서로 돌아가면서 하였다. 형인 심이 "산수의 법이 기이하고 경치가 참으로 빼어나 도다"라고 말하자, 정감이대답하기를 "곤륜산으로부터 온 산맥이 백두산에 이르고 원기(元氣)가 평양에 이르렀지만 평양은 이미 천년운세가 지났고, 이제는 송악으로 옮겨졌다. 송악은 500년 도읍 할 땅이기는 하지만 요사스런 중과 궁녀가 난을 일으켜 땅의 기운이 떨어지고 천운(天運)이 다하게 되면 한양으로 원기가 옮겨질 것이다. 대강 살펴보건데 전쟁은 평정되지 않고 충신은 죽었으니 세상이 긴 밤중이로다. 교룡(蛟龍)은 남쪽으로 건넜는데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반드시 흰소(白牛)을 따라 종성(從城)으로 달아나야 한다."라고 말했다.

심이 말을 받아 대답하기를 "내맥(來脈)의 운수가 금강산으로 옮겨진 다음 안동에 있는 태백산, 순흥에 있는소백산에 도착해서 산천의 기운을 뭉치고 계룡산으로 들어갔으니 이곳은 정씨(鄭氏)가 800년 도읍 할 땅이고, 다시 원맥(元脈)은 가야산으로 들어갔으니 이곳은 조씨(趙氏)가 1000년 도읍 할 땅이며, 전주(全州)는 범씨(范氏)가 도읍 할 땅이다. 또한 송악은 운수가 되돌아와서 왕씨(王氏)가 다시 일어나는 땅이다. 그러나 나머지는 자세히 알지 못해 말할 수가 없도다."

이어서 정감이 삼각운대에 앉아 말하기를 "어떤 해를 거쳐서 어떤 해에 이르면 지각이 있는 사람이 살고, 지각이 없는 사람은 죽게 될것이다."라고 했다. 심이 "그 때가 언제인가?"라고 묻자 정감이 대답하기를 "너의자손 말년에 궁중 과부가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하고, 어린 임금이 스스로 일을 내 맡기면 나라의 일은 장차 그르쳐지고 단신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져서 집집마다 인삼이요, 마을마다 물방아요, 집집마다 급제하고,사람마다 진사가 나올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며, 후에 현인이 있어 이러한 일들의 잘못됨을 논하게 될 것이다. 선비가 갓을 비뚤어지게 쓰고, 신인(神人)이 옷을 벗고, 주변(走邊)에 몸을걸쳐 성인(聖人)의 이름에 8자를 더하고, 계룡의 돌이 흰색으로 변하고, 청포(淸浦)의 대나무가 흰색으로 변
하고, 초포(草浦)에 조수(潮水)가 생겨 배가 다니고, 누런 안개와 검은 구름이 사흘 동안 천지를 덮고, 혜성이진성(軫星, 28수의 하나) 머리에서 나와 은하수 사이 또는 북두(北斗)로 들어갔다가 자미원(紫薇垣)을 범한후 두미(斗尾)로 옮겨갔다가 두성(斗星) 또는 은하 사이에 이른 후 남두(南斗)에서 그 끝을 마치면 대중화(大中華: 중국)와 소중화(小中華: 조선)가 함께 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심이 "삼각산이 규봉이 되고, 백악이 주산이 되고, 한강이 허리띠가 되고, 계락산이 청룡이 되고, 안현이 백호가 되고, 관악산이 안산이 되고, 목멱이 남산이 되었도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도둑이 4번이나 들어 도둑질을 하지만 반드시 2번은 다시 일어설 것이고, 관악산이 안산이 되었으니 왕궁에 화재가 3번 일어날 것이며, 단우에 불꽃이 일어날 것이다. 위에서는 근심하고, 아래에서는 흔들릴 것이며, 아전이 태수를 죽일 것이고, 삼강오륜이 영영 없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심이 "우리 세 사람이 서로 마주 하였으니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신년(申年) 봄 3월과 성세 가을 8월에 인천과 부평 사이에 밤에 배 1천척이 닿고, 안성과 죽산 사이에 송장이 산처럼 쌓이며, 여주와 광주 사이에 사람의 그림자가 영영 끊어지고, 수성과 당성 사이에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며, 한강 남쪽 1백리에 닭과 개의소리가 없어지고, 사람의 그림자가 아주 없어질 것이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장차 이 일을 어찌 할 것인가?"라고 탄식했다.

이에 심이 말하기를 "몸을 보존할 땅이 열 군데 있으니, 첫째는 풍기 예천이고, 둘째는 안동 화곡이며, 셋째는 개령 용궁이고, 넷째는 가야이며, 다섯째는 단춘이고, 여섯째는 공주 정산 마곡이며, 일곱째는 진천 목천이고, 여덟째는 봉화이며, 아홉째는 운봉 두류산으로 이곳은 영구히 살만한 땅이어서 어진 정승과 훌륭한 장수가 계속하여 날 것이고, 열째는 태백이다."라고 하였다. 심은 계속하여 말하기를 "곡식 종자는 양백(兩白:태백과 소백)에서 구할 것이니 앞서 말한 열 곳은 병화가 들어오지 않고, 흉년이 들지 않으며, 백의적(白衣賊)을 만나면 결혼을 하고 형제처럼 되어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즐겁게 지낼 것이다. 영가 사이에 화기애애한기운이 성하다고 하였는데 영가는 바로 대소백(大小白)이다. 금강산 서쪽과 오대산 북쪽은 12년 동안 적의소굴이 될 것이고, 9년 동안 수재(水災)가 들며, 12년 동안 병란이 있을 것이니 누가 이 변고를 피할 수 있겠는가? 십승지(十勝地)에 들어가는 사람만이 그 때를 알아 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감이 "해가 저물었으니 서쪽으로 돌아가자.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라고 말하며 서쪽 암자로 돌아가니 경쇠 소리가 멀리 흰 구름 속에서 들려오고, 쏟아지는 폭포가 귀를 씻어주며 갖가지 형상의 구름이 산골짜기를 덮었다.

이튿날 세 사람은 금강산을 떠나 가야산에 이르렀다. 정감이 "후세 사람 중에 지각이 있는 사람은 먼저 십승지에 들어갈 것이니, 가난한 사람은 살고 부자는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이 "어째서 그런가?"라고 묻자
정감이 대답하기를 "부자는 돈과 재산이 많기 때문에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고, 가난한 사람은 재산이 없으니 어디에 간들 가난하고 천하게 살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때를 살펴 행동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심이 "황해도 평안도 두 서쪽 땅은 1천리 지경에 3년 동안 사람의 연기가 없을 것이고, 동쪽 산골 강원도 땅은 마땅 꺼려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산과 물의 형세가 이러저러하니 천 년 후의 일을 자세히 알수 있다."라고 말했다. 심이 "적이 전주에서 일어나 호중(湖中)의 진(津)과 화(華) 사이에서 세력을 키워 1만척의 배로 강을 가로막을 것이니 이것이 큰 재난이로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그것은 그렇게 큰 걱정거리가되지 않는다. 말세에 이르면 아전이 수령을 죽이는 일을 조금도 꺼려하지 않고, 위와 아래의 분별이 없어지며, 삼강오륜의 변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임금의 힘이 없어지고 나라가 위태한 지경에이르러 비틀거리게 되면 대대로 국록을 먹는 신하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정감은 "말세의 재앙을 상세히 이야기하자면, 9년 동안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나무껍질을 먹고 살 것이며, 4년 동안은전염병이 돌아 전체 백성의 반 이상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사대부의 집은 인삼으로 망하고, 벼슬아치의집은 이익을 탐하다가 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이 "후세에 미련한 사람들은 용문산을 은신하기에 적당한 곳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산수를 보는 법에 따라 살펴보면 용운산은 겉으로 드러나는 생기만 있을 뿐 모든 기운을 한양에 빼앗겼기 때문에 가운데의 기세는 모두 죽은 혈뿐이다. 따라서 후세 사람들이 이 산에 오면 오대산 북쪽 도둑들의 침범을 받아 1년도 못되어 일만 명에 달하는 목숨이 재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산수 생긴 것이 이렇게 괴상하고 패역하니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심이 "후세 사람들이 지각이 있어 십승지로 들어가려 하더라도 반드시 미련한 사람들이 말릴 것이다. 공과 사의 대소를 막론하고 길흉화복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참으로 형용하기 어렵도다."라고 말했다.

정감이 말하기를 "계룡산의 돌이 희어지고, 평평한 모래밭 30리에 남문이 다시 일어나고, 너의 자손 끝에 쥐얼굴에 범의 눈을 가진 사람이 생기고, 때때로 흉년이 들고, 호환으로 사람이 상하고, 물고기와 소금이 지극히 천하고, 냇물이 마르고 산이 무너지면 백두산 북쪽에 있는 오랑캐의 말이 길게 울고, 평안도와 황해도 양서 사이에 원통한 피가 하늘에 넘칠 것이다. 한양 남쪽 백 리에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연이 "목멱산은 해산하는 여자의 음부 형상과 같아서 사대부의 추행이 있으면 온 나라가 무례해질 것이니 이것을 어찌 하겠는가?"라고 말하자, 정감이 "그것은 걱정할 것이 없다. 음풍을 막으면 황씨가 무후(無后)하게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심이 "계룡산에 개국하면 변씨(卞氏) 정승과 배씨(裵氏) 장수가 일등 개국 공신이 될 것이고, 방성(房姓)과 우가(牛哥)가 수족과 같이 될 것이고, 대백과 소백 사이의 묵은 양반들이 복고할 것이니 후세 사람 중에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자손을 대백과 소백 사이에 간직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감이 "대개 세상에 몸을 피하려면 산도 이롭지 않고, 물도 이롭지 않고 양궁(兩弓)이 가장 좋다. 너의 자손 끝에 나라 운수가 팔임(八壬)에 다하고, 목하(木下)에 어지러워지면 나의 자손에 의해 끝을 마치게 될것이다."라고 말하자, 심이 "나의 자손이 너의 자손을 죽이고, 너의 자손이 나의 자손을 죽일 것이다."라고말했다.

연이 "십승지가 세상에서 피신하기에 가장 좋은 땅이나 새재(조령) 앞뒤의 큰길은 어찌할 것인가?"라고 말하자, 정감이 "새재에 성을 쌓으면 큰 군사가 바다에 떠서 배를 타고 와서 남쪽으로 해서 전주로 들어가고, 호중(湖中)의 도둑 백성들이 당(黨)을 모으면 화(華), 진(津)과 양서의 백성들이 살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열곳은 난리가 들어오지 않고, 흉년이 들지 않는 곳으로 이곳을 버리면 사람이 어디 살겠는가? 장씨(張氏)가의병을 일으켜 난을 시작하는 시기가 경염(庚炎)이 있으니 지각이 있는 사람은 이때 십승지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먼저 들어가는 자는 되돌아오고, 중간에 들어가는 자는 살고, 나중에 들어가는 자는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이 이어서 "이 열 곳은 비록 12년 동안 병란이 있어도 피해가 없지만 육도(六道)의 백성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이 열 곳은 사면이 이러이러해서 흉년이 들지 않으니 참으로 산수의 법은 기이하다. 뒤에 지각 있는 자가 비록 빌어먹으며 들어가더라도 좋은 것이다. 신년(新年) 섣달과 임년(壬年) 3월에 일이 없으면 요행이고,비록 일이 있더라도 들로 향하면 편안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은 또한 "계룡산 남쪽 밖 네 고을 또한 백성들이 몸을 보존할 곳이다."라고 말했다. 정감은 "이곳은 경기 강원보다도 낫고, 일이 허다하여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첫째는 풍기 차암 금계촌으로 소백산 두 물 골 사이에 있다. 둘째는 화산 소령의 고기로 청양현에 있으며, 동촌으로 넘어 들어간다. 셋째는 보은 속리산 네 증항 근처로 난리를 당해 몸을 숨기면 만 명중에 한 사람도 다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넷째는 운봉 행촌(杏村)이다. 다섯째는 예천 금당실로 이 땅에는 난리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임금의 수레가 이 땅에 다다르면 달라질 것이다. 여섯째는 공주 계룡산 유구 마곡 사이로 물 골 사이의 둘레가 2백 리나 되어 난을 피할 만 하다. 일곱째는 영월 정동쪽 상류로 어지러운 세상에 종적을 감출만하나 수염이 없는 자가 먼저 들어가면 달라질 것이다. 여덟째는 무주 무봉산 북쪽동방 상동(相洞)으로 난을 피하지 못할 곳이 없다. 아홉째는 부안 호암(壺岩) 아래쪽이 가장 기이하다. 열째는합천 가야산 만수봉으로 둘레가 2백 리나 되어서 영구히 몸을 보전 할 수가 있다. 동북쪽 상원산(上元山) 계류봉 또한 가하다."라고 말했다
25. 고시래 이야기

들에 나가 일을 하다 새참이나 점심을 먹을 때 또는 야외에서 식사를 할 때 첫 숟가락을 떠서 들판에 던지며 "고시래"라고 말하는 풍속이 있다. 그래야 풍년이 들고 복을 받는다고 한다. 여기에는 도선국사 또는 진묵대사, 그 외 이름난 지사의 이야기라고 하는 설화가 있다.

고씨 성을 가진 예쁘고 착한 처녀가 있었다. 하루는 냇가에서 빨래를 하는데 탐스럽게 생긴 복숭아가 하나 떠내려와 남몰래 건져서 먹었다. 그런데 그 후로 잉태하여 배가 불러오더니 아들을 낳았다. 처녀의 부모가 이를 망칙한 일이라 하여 어린아이를 개울가에 갖다 버렸다. 그때는 마침 엄동설한이라 몹시 추운 날이었는데 갑자기 까마귀 수천 마리가 무리를 지어 날아와서는 날개를 서로 이어 어린아이를 덮어주고 먹이를 구해다 주어 수십 일이 지나도 어린아이가 죽지 않았다. 이를 보고 처녀의 부모가 이상히 여겨 다시 데려다 길렀다. 그리고 복숭아를 먹고 낳은 아들이라 하여 이름을 도손(桃孫)이라고 지어 주었다.

도손은 자라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으며 중국에 건너가 도통한 스승으로부터 천문과 지리와 음양의 비법을배워 풍수지리에 통달하게 되었다. 그가 귀국하자 시집도 못 가고 혼자 산 어머니가 죽었다. 도손은 명당을찾아 어머니를 묻기로 했다. 그러나 다른 자식도 없고 복숭아를 먹고 태어난 자신도 중이 되었기 때문에 발복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하면서 어머니를 산에 묻지 않고 들 한가운데에 묻었다. 사람들은 풍수지리에 통달한 사람이 어머니를 산에 묻지 않고 들에다 묻었다고 욕하였다. 그러나 도손은 "여기가 배고프지 않은 명당이다."하며 그대로 두었다.

농사철에 근처의 농부가 일을 하다가 점심을 먹을 때 제사를 지내주는 자손도 없는 묘를 보니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농부는 들에서 일하다가 밥을 먹을 때면 "고씨네-"하면서 그 여자의 성을 부르며 밥 한술 을 던져주었다. 그런데 그 해에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다른 집들은 농사가 다 망쳤는데 그 농부의 농사만 풍년이 들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고씨네 무덤에 적선을 했기 때문이라며 그 다음부터 서로 묘에 음식을 갖다주며 "고씨네-"하고 불렀다.

그 후로 들에 밥 한술을 던지며 "고시래"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26. 한국 풍수사상과 지배 이데올로기와 반 지배 이데올로기

풍수사상이 개국(開國)의 이념적 바탕과 혁명의 당위성을 확립시켜 주는데 역사적으로 큰 역할을 해왔다. 지배 권력자에게 있어서도 그들의 지배 논리를 제공하였고, 여기에 저항하여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는 민중들에게도 변혁과 혁명의 이념을 심어 주었다.

1) 나말여초(羅末麗初)

신라 말 중앙 귀족들의 왕위 쟁탈전은 왕권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지배 질서를 붕괴시켜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일찍이 지방에 파견되었던 지방 수령과 본래부터 지방에 토착하여 살고 있는 호족(豪族)들은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독자적으로 그들의 세력 기반을 확대해갔다. 그들은 그들의 지배권이미치는 영역에다 성을 쌓아 스스로 성주(城主)라 칭하면서 경제적인 것은 물론 군사와 행정에 이르기까지 지배권을 확대하여 독립적인 지위를 행사하였다.

당시 지방 호족들에게 지배 이념을 제공한 것은 풍수설을 터득하고 이론을 확립한 선종(禪宗)계통의 승려들이었다. 그들은 지방 호족들의 전략가 역할을 하면서 신라의 서울인 경주가 국토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어 정치 지리학적으로 적절치 못하다는 논리로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확장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은 경주를 단봉포란형(丹鳳抱卵形)이라고 설명하면서, 경주 남산이 단봉(丹鳳, 붉은 색의 상서로운 봉황새)인데 애석하게도 경주에는 알이 없으므로 봉황이 날아갈 것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이것은 곧 신라가 망할 것이라는 소문을 나게 함으로서 지방 호족들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이들은 알이 없는봉황이 날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봉황이 먹을 물을 마련해 주어 빨리 알을 낳게 해야 한다며 깊은 우물을 파도록 하였다. 그런데 실재 경주는 행주형(行舟形)의 대길지로 우물을 파면 지기가 쇠퇴하는 곳이다.경주라는 거대한 배 밑에 우물이라는 구멍을 뚫어 배(신라, 경주)를 침몰시키겠다는 의도였다.

나말여초의 후삼국시대에 왕건을 비롯한 지방호족들이 신라에 반하여 그들의 독자적인 세력을 확보하고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풍수 사상을 이용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많은 호족 세력 중 송악을 근거지로 한 왕건은 도선의 제자 경보(慶甫)와 천문 지리에 능한 최지몽(崔知夢)과 같은 학자의 도움으로 삼한을 통일하여마침내 고려를 개국하게 된다.

2) 고려시대(高麗時代)

풍수설을 신봉한 태조 왕건은 왕이 되어서 그의 통치 논리를 풍수에서 찾았다. 왕건은 그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제2항 모든 사원(寺院)의 터는 도선이 산수의 순역(順逆)을 보아서 추점(推占)한 것이니 함부로 다른 곳에 창건치 말라. 다른 곳에 사원을 함부로 지으면 지덕(地德)을 손상시켜 국운이 길하지 못하다."했는데이는 사찰을 중심으로 한 지방 호족 세력들의 기반을 원천적으로 없애려는 고도의 정치적 의도였다.

"제5항 짐(왕건)은 삼한 산천의 음우(陰佑)를 받아 대업을 이룩한 것이다.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와 우리 나라의 지맥의 근본이므로 대업을 이룰 수 있는 만대지지다. (후대 왕들은) 의당 사계절에 한번씩 순유(巡遊)하여 백일을 유(留, 머물다)하라. 그래야 나라가 안녕(安寧)하다."했다. 이 내용은 자신의 고려 건국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서경을 예찬하여 고구려 영토 회복의 대업을 이룰 수 있는 전진기지로 삼을 것을 은연중에 강조한 북방정책이었으며, 침체된 국정의 기운을 쇄신하기 위한 서경 천도의 의도가 숨어있는 대목이다.

"제8훈 차현(車峴, 차령산맥) 이남의 공주강(금강) 외에 있는 산형지세(山形地勢)가 병추배역(竝趨背逆,)하였으므로 인심 역시 그러할 것이니 그 지방 사람이 혹 조정에 참여하거나, 왕후국척(王侯國戚)과 혼인을 하거나, 국정을 맡게 되면 혹 국가를 변란하고 병합에 대한 원한이 남아 있으므로 필시 난이 일어 날 것이므 설령 양민(良民)일지라도 벼슬자리에 앉히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재통일하면서 후백제인들의 끈질긴 저항을 받아 자신이 죽음의 직전까지 빠진 경험이 있었고, 견휀과 그의 아들 신검의 폐륜적 내분에 대한 혐오감이 금강 이남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재로 왕건을 측근에서 보좌한 사람들은 경보와 최지몽 등 대개 나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 사람들이었는데 왜 이러한 말이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왕건이 풍수지리설을 교묘하게 역이용한 지역 차별 정책은 오늘날까지도 호남 인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시초가 되었다.

그후 역대 왕들은 수도 개경(개성)을 비롯하여 서경(평양), 동경(경주), 남경(한양)의 사경(四京)을 설치하여풍수지리 적으로 지덕을 얻고자 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지방 호적들의 세력을 견제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고려 건국 이후에도 풍수지리설은 크게 성행되어 왕권강화 정책에 이용되었는데, 고려 건국 초기에는 건국공신(建國功臣)세력뿐만 아니라 호족들의 세력이 대두하여 지방 행정은 호족에 의하여 좌우되는 형상이 계속되었다. 고려의 삼한 통일은 호족들의 연합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일정 부분 기득권을 가지고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것은 왕권신장(王權伸長)을 크게 저하하여 이를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고려 왕실은 지방 호족의 자녀를 서울에 머물게 하여 불모로 삼는 기인제(其人制)를 실시하고, 과거제도를 시행하고, 중앙에서 장관(長官)을 파견하여 지방 행정을 다스리게 하고, 지덕(地德)을 입는다는 명분으로 왕도수시로 순시를 하여 그들을 견제하였다. 이렇게 풍수지리설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왕권 강화 정책은 광종 때중앙 집권체제 강화에 따라 지방 호족을 중앙 귀족으로 흡수시키거나 일반 향리(鄕吏)의 지위로 전락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지방 호족을 견제하려던 중앙집권정책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 시켰다. 개경의 중앙 귀족으로 성장한새로운 지배층은 새로운 문벌(門閥)을 형성하여 정치, 경제의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개경 중심의 정책을 폈는데 그들은 그들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보다 나은 귀족과 통혼(通婚)하고, 특히 최고의 귀족인 왕실과의 통혼은 왕실의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여 권세와 영화를 누리려고 하였다. 이들 권문세족(權門勢族)이 정권을 장악하여 왕위계승 문제에도 종종 간섭을 하여 복잡한 사태를 자아내기도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왕실과 중복된 외척관계를 맺은 인주(仁州) 이씨(李氏) 이자겸(李子謙)이었다.

인주 이씨는 문종 임금부터 인종 임금까지 무려 7대 80여 년간을 왕실과 외척을 맺어온 집안으로 15대 임금인 숙종만이 인주 이씨와 혼인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숙종의 아들 예종(16대)과 손자 인종(17대)은 이자겸의 장녀와 3, 4녀 둘을 각각 왕비로 맞아들였다. 이들 인종비와 예종비 사이는 친누이이면서 동시에 시어머니, 며느리 관계가 되었다. 이는 이자겸이 예종 및 그의 아들 인종과 동시에 사돈을 맺고 다른 가문으로부터왕비의 유입을 극구 막아 엄청난 위세를 떨치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왕의 장인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왕을 위협하고, 방자와 탐학으로 국정을 전횡하더니 지어 십팔자참(十八子讖) 즉 이(李)씨가 왕이 된다는 예언을믿고 왕위를 탐내고 난을 일으켜 왕을 독살하려 하다가 실패하였다. 이자겸의 난은 귀족 사회의 대립과 분쟁을 자아내게 하여 고려 사회를 크게 동요시켰다.

내적으로는 귀족 정치가 동요되고 있을 때 대외적으로는 고려가 야만 시 했던 여진족이 성장하여 금(金)나라를 건국하더니만 고려를 신하의 나라로 취급하며 군신(君臣)의 관계를 요구하자 당시 실권자였던 이자겸과척준경이 국제 정세와 고려 영토의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여 금의 요구를 받아들이자 고려인들은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되었다. 개경 중심의 귀족들의 권세와 횡포 그리고 금에 대한 굴욕적인 외교로 고려 사회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해지자 지역 차별 철폐와 민족의 자주적 독립과 새로운 유신정치를 기도한 일군의 정치세력이 풍수지리사상을 이념으로 하여 나타났다.

음양가인 승 묘청을 중심으로 문신 정지상, 일관 백수한 등 서경인(평양인)들은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서경에는 왕기(王氣)가 있으니 마땅히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 왕이 그 곳에서 거처하면 천하를 가히 병합할 수 있고, 금도 저절로 와서 항복을 할 것이며, 그밖에 36개 나라가 조공을 받치러 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이들은 왕을 황제로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세울 것과 금의 정벌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는고려인의 자주정신과 주체성을 강조하여 당시 왕인 인종의 관심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리하여 인종은 직접 서경에 가서 임원역(林原驛) 땅에 대화궁(大花宮)을 짖고 자주 그궁궐에 왕래하였다. 그러나 개경을 중심으로 한 귀족 세력의 반발을 사게 되어 사대주의에 찌든 김부식 같은유신(儒臣)은 금에 대한 군신(君臣)의 명분론을 내세워 묘청을 반대하였고, 임원주와 같은 유신은 황당무계한 설로서 민심을 현혹시키고 왕을 기만한다고 하여 묘청의 주살(誅殺)을 강청 하였다.

이와 같은 귀족세력의 집단적인 반대가 심해지고 묘청에 대한 배척 운동이 크게 일어나 인종도 서경 행차를중단하게 되자 묘청은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그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하여서경에서 난을 일으켜 개성의 귀족세력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묘청 반대파의 거두인 김부식의 지휘를 받은중앙 군대에 의하여 1년만에 서경이 함락됨으로써 붕괴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풍수지리는 변혁을 시도하려 했던 개혁파에게 명분과 수단을 제공하였다. 사실 개경은 태조 왕건이 도읍을 정한이래 200여 년간 고려의 수도였고, 귀족 세력의 전통적인 본거지였기 때문에 서경천도 운동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고 금국정벌 역시 당시의 국제 정세로 보아 실현성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묘청 등이 난을 일으킨 것은 지역 차별에 대한 반발이었고, 서경으로 도읍을 옮김으로서 국가적으로 유신(維新)의 새로운 기풍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그 자신은 중흥의 공신이 되어 서경인 중심으로 정권을 장악하여 보려는 의도가 있었다. 결국 풍수지리설을 이용한 묘청의 난은 고려의 귀족 정치를 크게 동요케 하였으며, 이후 정치 상황은 정중부 등에 의한 무인정권 수립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고려 귀족 정치의 문치주의는 무신을 정치의 실제에서 소외시키고 문벌 귀족 정치의 모순이 극도에 달해 관직을 독점하고 농장을 확대하는데 광분하였으며, 뇌물이 공행(公行)하였고 농민에 대한 수탈이 극심히 자행되어 정치 기강이 문란하여지고 국가의 재정난이 심하여지자 정중부, 이의방 등이 쿠테타를 일으켜 개경의귀족 문신들 대부분을 학살하고 무인 정권을 수립하였다.

문인정권이 모화사상(慕華思想)으로 중국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점에 비해 무인정권은 몽고와의 근 30년동안 항쟁을 할만큼 대외적으로 주체성이 매우 강해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성향이 강했다. 이때는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문신의 학대를 받던 무신이 문신을 호령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천한신분 층에서 귀한 자리에 오른 자가 많이 생겨났으며, 학대에 신음하던 노비 등 하부 층에서 신분해방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전통적 신분 질서에 동요가 생기자 이에 자극을 받은 농민, 노비 등 하층민 등이 전국 각지에서 민란을 일으켰는데 그 중에서도 동경(경주)을 중심으로 한 김사미, 효심 등의 민란이 가장 치열하였다. 이들은 "개경의 지기가 다해 고려의 왕업이 끝나고 동경의 신라가 다시 지기를 얻어 부흥할 것이다."라는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였다. 또 경주 출신인 이의민(李義旼)은 도참에 나오는 "용손십이진(龍孫十二盡) 갱유십팔자(更有十八字)"의 설 즉 왕씨(王氏)가 12대에 그치고 이씨(李氏)가 득국(得國)한다는 설을 이용하여 신라 부흥의 야망을가지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신라 부흥을 구호로 삼았지만 이는 경상도 일대의 호응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또 신분 해방운동을 위한 노비, 농민들의 투쟁은 개성의 사노(私奴) 만적의 봉기가 최충헌에 의해 진압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지만 신분해방 운동은 역사적으로 크게 주목을 끄는 거사로서 노비, 농민 등 하층민들에게 혁명의 이념과 그들이 서로 규합하여 지역별로 연합할 수 있게끔 한 수단은 역시 풍수지리설이었다.

여기서 풍수지리는 집권세력뿐만 아니라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개혁세력과 소외되어 천대받던일반 민중들에게도 신분타파의 혁명적 반 지배 이데올로기적 이념을 제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는 14세기 중엽에 들면서 외환(外患)과 내우(內憂)가 겹치고 경제질서의 붕괴, 정치기강의 해이, 신진세력의 대두 등으로 사회가 크게 동요되어 혼란할 때 31대 공민왕은 반원자주정책을 수행하고 내정쇄신에 힘써 각종의 개혁으로서 강력한 기반을 가진 권문세족의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서 어느 세력과도 관련이 없고,신분적으로도 계급을 초월한 사비 승 신돈을 국사로 등용하였다. 신돈은 권세가와 부호들이 점령하고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조사 정리하여 이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노비로서 양인이 되기를 원하면 이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이로서 신돈은 하층민들 사이에서는 크게 환영을 받았지만 상층 계급에서는 원한과 비난을 받았다. 이와 같은 신돈의 전민(田民)정책은 급진적이었고 혁명적이었지만 정치 경험이 없는 일개 중에 지나지않아 권세가 들의 줄기찬 반대에 봉착하게 된다.

그는 권세가 들의 세력을 꺾기 위해 권문세족의 본거지인 개성에서 도읍을 옮길 필요성 때문에 도선비기(道詵秘記)를 들어 서경과 충주를 그 후보지로 추천하여 왕에게 권하고 이를 서둘게 하였다. 그러나 개성에서의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권문세족들에 의해서 개혁정책은 실패하고, 신돈은 국왕 살해의 혐의로 유배되었다가마침내 주살 되고 만다. 고려 말기 공민왕과 신돈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 한 것은 풍수지리설이었고 신돈은 풍수설로서 인심을 다스려했으며 자기의 세력 기반을 닦으려 하였다.

고려말 내적으로는 귀족들의 권력 다툼과 외적으로는 원과 명나라의 세력 교체기에 외교정책을 둘러싸고 귀족간에 대립이 오래 계속되었다. 최영은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에 대항하여 요동 정벌에 나서자 이성계는 이에 반대하여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세웠다. 그는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구귀족 세력기반을 빼앗는 동시에 이성계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세력기반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친명외교, 억불숭유, 사전개혁 등 여러 정책을 통하여 집권의 지도이념을 세웠으나 역성혁명에 대한 거부감과 지나치게 명에 대한 사대사상 때문에 고려 왕씨를 추종하는 구세력이 뿌리 깊게 남아있는 개경을 떠나새로운 땅에 도읍을 옮기고 국가의 면목과 인심을 새롭게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무학대사의 풍수지리 의견을 들어 개경의 지덕이 이미 쇠했기 때문에 새로운 국도 후보지를 모색하여 1394년(태조 3년)에 지덕이 왕성하다는 남경(한양)으로 천도하였다. 여기서 이성계는 풍수지리 사상을 자신의 역성 혁명에 대한당위성과 명분을 쌓는데 이용하였다.

3) 조선시대(朝鮮時代)

조선 왕조는 유교를 지배이념으로 삼았는데 풍수는 유교의 기본 전제인 효(孝) 사상과 결합하여 큰 발전을 보게 된다. 풍수지리 논리에 의하여 궁전인 경복궁을 위시하여 종묘, 사직을 짓고, 전장 17Km나 되는 도성이 연인원 19만7천명이나 동원하여 축조되었다. 또 북악산, 인왕산, 남산 등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민가의 하수구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모아 흐르게 하는 청계천 공사를 하였고, 종로를 도시의 심장부를 이루게 하는 시가 건설을 시행하였고, 각 고을의 도읍을 정하였다. 이러한 것은 도시 계획 등 국토의 재편성 사업과 도읍의행정체제 정비에도 풍수지리가 학문적 이론을 제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풍수지리가 도읍의 결정과 도성 및 궁궐의 수축, 각지방의 행정체제 정비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주산 문제를 두고 인왕산과 북악산으로 나누어 첨예한 대립을 한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으로 주산을 삼고 북악산으로 청룡, 남산으로 백호를 삼아 유좌묘향(酉坐卯向)으로 궁궐을 동쪽으로 향하게 하자며 풍수지리 이론을 적용하였다. 반면에 정도전은 예로부터 군주는 남쪽을 바라보며 정사를 펼쳐야하는 만큼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아 인왕산을 백호, 낙산을 청룡으로 하여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유신인 정도전의 주장대로 북악산을 주산으로 한 경복궁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풍수 이론가인 무학대사와 현실 정치가인 정도전 사이의 풍수 논쟁에서 풍수가인 무학대사가 밀리자 조선 풍수는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왔다. 양기양택 위주의 풍수가 음택 중심으로 치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양반 관료체제로 안정되던 조선사회가 건국 지배이념인 성리학이 발전하면서 당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理)와 도(道)를 중요시하며 보수적 성향이 강한 퇴계학파(退溪學派) 동인(東人)과 기(氣)를 중요시하며 진보적 성향이 강한 율곡학파(栗谷學派) 서인(西人)으로 분파 되어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당쟁과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양란을 거치면서 왕권은 약화되고, 외척세력이 발호 하여 세도정치를 실시하였다. 세도정치는 정치를 부패시키고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 등 삼정(三政)이 문란하게 하여 민중에 대한 수탈이 심하여졌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민중의 항거로 나타나게 되는데 조선정부를 비난하고 저주하면서 비기(秘記)와 도참설(圖讖說)이 민간에 널리 유행하였다. 비기와 도참은 풍수지리 사상을 바탕으로 도탄에빠진 민중들을 구한다는 내용이다. 풍수 사상이 고난과 고통에 처한 민중들에게 희망과 혁명의 이념을 심어주고 신분해방을 위한 투쟁을 할 수 있도록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 처음이 바로 홍경래의 난(1811년)이다.

청강의 풍수지사(風水地師) 홍경래와 가산의 풍수지사 우장서, 태천의 역사 김사용의 주도하에 민중들은 세도정치의 반대와 반봉건적인 사회건설을 외치면서 서북지방에서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을 주도한홍경래는 농민과 광산노동자, 반정부적인 지식인, 몰락 잔반층, 소외된 토호층, 신흥 사상층을 회유하고 규합할 때 풍수지리설로 그 방편을 삼았다. 당시 반란 주도자들은 풍수사로 지칭하여 관서지방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사회 기층 세력을 규합하였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일반 서민들은 공간활동의 제약을 받았지만풍수사들은 언제 어느 때라도 행정구역에 상관없이 왕래할 수 있었다. 이는 조선사회가 효를 중요시하는 유교사회였기 때문에 조상의 묘 자리를 찾아다니는 풍수활동은 제약을 받지 않았다.

홍경래의 반란과 같은 체제에 대한 항거가 자주 일어나 사회질서가 더욱 혼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일족전제적(一族專制的)인 세도정치는 안동 김씨(安東 金氏)에 와서 왕권은 쇠약해지고, 사회 기반은 피폐되어 조선은 대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오랜 세도정치 하에서 왕실 종친의 인물들이 모두 희생되기도 하였다.이때 온갖 박해와 수모를 당하면서 남다른 기지와 위장된 탕행으로 인내하면서 왕실의 복권을 꿈꾸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흥선군 이하응이었다. 그는 왕실의 복권을 위하여 대 명당을 찾아 아버지 남연군을 이장하고 그 발복으로 태어난 둘째 아들 명복을 보았다.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열두 살의 어린 아들을 즉위케 한후 대원군으로서 섭정의 정권을 잡고 과단성 있는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우선 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안동 김씨 일파를 몰아내고, 문벌과 지방 차별을 철폐하고, 능력과 기능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지방 세력의 본거지이고 당쟁의 소굴이었던 서원 철폐를 단행하고, 외세 침략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천주교를 탄압하고 쇄국정책을 실시하였다. 대원군이 세계 열강들의 개방 압력을 강경하게 물리치고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하자 통상의 압력과 침략이 번번하게 실패했던 외세는 대원군의 기세가 충청도 덕산 땅 가야산에 있는 그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 기운에서 나온다는 조선 천주교 신도들의말을 믿고,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여 유골을 가지고 대원군에게 압력을 넣기 위해 야밤에 도굴을 강행한다. 그러나 분묘 내부가 견고하여 실패하고 마는데 이 사건은 조선 정부로 하여금 서양인에 대한 반감을 한층 더강렬하게 하였으며, 쇄국의 결의를 더욱 굳게 하였다. 여기서 풍수지리는 외세의 침략 도구로서도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결국 풍수사상에 의한 남연군묘 도굴 사건은 역사적으로 우리 근세사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풍수사상은 민족 주체의 사상으로 구미 열강의 다툼 속에서 외세에 대항하여 민족적, 반 외세적 저항을 할 수 있는 자극을 주었다.

조선 왕조의 사회질서를 확립하는데 절대적 역할을 했던 성리학이 더 이상 지배 사상이 될 수 없게 되자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동학이 창도되었다. 인간은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신조로 제시된 동학은초세속적(超世俗的)인 윤리관만으로는 민중을 흡수할 수 있는 힘을 지니지 못해 여기에 주술(呪術)로서 악질을 치료할 수 있다는 민간신앙과 풍수지리설을 이용한 정감록 등을 이용하였다. 개벽사상과 함께 퇴폐적인 양반사회를 일소하고 외세도 물리칠 수 있다는 민족주의를 강조하여 일반 민중들을 폭넓게 흡수하였다. 동학의 지도자 전봉준은 비기를 믿어 천하의 명당이라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일시적으로 머물기를 좋아하였는데 세력을 규합할 때는 풍수사로 가장하여 돌아다녔다. 그런데 동학 난의 주모자 전봉준을 잡기 위해조정에서 파견된 토벌군 대장 박동진은 상복으로 변장하고 나머지 병사들은 하인으로 변장하여 태인으로 내려가 전봉준에게 쉽게 접근하여 체포하였다고 한다. 동학혁명의 주모자는 풍수설을 신봉하였고 또 그를 잡아들이기 위해서 풍수설을 이용한 것이었다. 동학혁명을 통하여 표출된 자주적 민족적 반외세적 이념에는 풍수지리 사상이 이었던 것이다.

4) 일제시대(日帝時代)

한일합방에 성공한 일제는 그들의 식민지 통치를 위하여 민족정신 말살정책을 폈다. 그들은 조선침략 정책의 일환으로 실시한 한반도의 쌀이나 지하자원을 수탈해 가기 위해서 전국에 걸쳐 토지조사를 실시하였다.이때 풍수지리에 밝은 조선인 13명을 선정하여 소위 "13인 위원회"를 만들어 이 땅의 명당 즉 장군이 나올만한 자리라든가, 큰 인물이 나올만한 장소를 물색하여 혈맥을 끊었다. 도로나 철로를 내면서 고의로 산맥을 자르고, 험준한 산악지대같이 혈맥을 끊을 수 없을 때는 쇠말뚝을 박아 산의 정기를 끊으려했다. 이것은 매우 교활한 민족정기 말살정책의 하나였다. 당시 풍수사상은 민족사상으로서 고통과 고난받는 민족과 백성들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고 있었다. 각 고장의 마을이나 산, 바위 등에는 장군봉 이라는 이름으로 전설이 있는데 나라가 어지럽고 백성이 고난을 당할 때 장군이 나타나 나라와 백성을 구해준다는 것이다. 일반 백성들은이를 통하여 독립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일제에 항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토지관이자 인문지리관인 풍수사상을 미신화 시킴으로서 민족사상을 비하하고 말살하려는 정책을 썼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한반도의 지형이 나약한 토끼 형국이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육당 최남선은 한반도 지형은 호랑이가 발을 들고 동아 대륙을 향하여 나르는 듯 생기 있게 달려드는 형상이라고 반박하였다. 일제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왕이 집무하던 경복궁 근정전 앞에 있는 건물을 허물고 근정전 앞을 가로막는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지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대(大)자인 북악산과 일(日)자인 조선총독부 건물, 본(本)자인 경성 시청(현 서울시청)과 어울려 대일본(大日本)자의 형상을 한 것이다. 일제는 민족문화를 말살하기 위해서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신사의 위치를 각 도읍의 진산 정혈(正穴)에다 설치하였다. 또한 일제는 매장 및 화장에 대한 취재규칙을 제정하여 개인 묘지를 일체 불허하고 공동묘지만을 허용하고 화장을 적극 장려하였는데 이는 우리의 전통 풍속과 관습을 무시한 조치였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으로 풍수사상은 침체되었고 왜곡되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5) 현대(現代)

일제의 탄압으로 침체된 풍수사상이 해방 후에도 미신으로 격하되었다. 6.25전쟁을 통하여 물밀 듯이 들어온 서구문화의 영향으로 풍수사상 뿐만 아니라 우리 전통문화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천시를 받았다. 그러나 풍수사상은 국가의 큰일에 나름대로 역할을 하였다. 국립묘지의 선정이라든지 정신문화원 터 등을 잡을 때풍수지리 적인 입지 조건을 제일 먼저 고려했던 것이다. 또한 정통성이 없는 정권이 그들의 정권에 대한 필연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풍수사상을 이용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구미 금오산 자락에 있는 할머니 묘가 제왕을 나오게 하는 자리이므로 박정희라는 인물을 배출하여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로 5.16쿠테타에 대한 필연성을 강조했다. 또 전두환 대통령은 합천에 있는 아버지 묘가 천교혈로서 제왕지지이므로 5공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논리를 폈다. 그밖에 수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졌는데 모두 자신들을 합리화하려는 의도성이 숨어있는 것들이다.

80년 이후 경제가 발전하고 민족의 주체성이 강화되면서 전통 풍습에 대한 정부와 국민들의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풍수지리도 젊은 학자들 사이에서 연구가 활발해지고 일반 국민들도 미신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 자연지리 현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27. 고양이 바위를 깨뜨린 장씨 며느리

강원도 홍천에서 인제 가는 길 44번 도로 옆에는 홍천강 상류 장남천이 흐른다. 홍천군 두촌면 장남리는 매봉산(800.3m) 줄기로 만석꾼인 장자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의 집터는 고양이 형국으로 집 뒤에는 고양이 바위가 있고, 집 앞에는 쥐 산이 있는데 그의 집은 곳간에 해당되는 자리로 재산이 자꾸 늘어 큰 부자가 되었다. 인심 좋은 장자는 지나가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대접을 극진히 하여 하루에도 손님이 수 십 명이 드나들었다. 날마다 손님 대접에 시달린 장자의 큰며느리는 하루하루가 고달프기만 했다. 자신이 손님을 치르려고시집을 온 것인지 아니면 죽도록 일만 하려고 온 것인지 불평불만이 쌓여갔다. 이러한 며느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아버지인 장자는 재산 관리에 흥미가 없다는 듯 가난한 선비가 오든, 떠도는 거지가 오든 언제나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또 하루를 쉬든 며칠을 묵든지 간에 개의치 않았다. 이러다 보니 매일 장작불을때서 많은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며느리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잠시 쉴 틈도 없이 바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탁발을 하는 한 스님이 찾아왔다. 며느리는 곳간에서 쌀을 고봉으로 한 말을 담아 스님의 시주자루에 담아 주고 스님에게
"뭘 좀 물어봐도 좋을까요?"라고 말을 건넸다.
"나무아미타불. 무엇인지요?"
"실은 우리 집에 너무 많은 손님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매일 식사 준비에 지쳤으니 손님이 오지 않게 하는좋은 방도가 없을까요? "
스님은 집 주위를 살피더니
"방도야 있지요. 하지만 이 집은 이렇게 손님이 매일 찾아 들어와야 복을 받을 집입니다. 만약 손님이 찾아오는 것을 막는 방도를 쓰면 곧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며느리는 손님을 막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스님에게 부탁을 하였다. 할수 없다는 듯이 스님은
"나를 따라오시오."
하면서 앞장을 서더니 집 뒤로 돌아가 고양이 바위를 가르치면서
"이 고양이 바위를 앞에서 보이지 않게 거적으로 가리시오. 그러면 손님이 적게 올 것입니다." 하고는 길을 떠났다.
며느리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손님이 전혀 오지 않게 하려면 고양이 바위를 아예 없애 버리면 될 것 같았다. 다음날 며느리는 시아버지 몰래 집에서 부리는 머슴들을 불러 바위를 파 들어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바위가쉽게 파지지 않자 망치와 정으로 깨뜨리도록 하였다. 영문도 모르는 머슴들이 바위를 깨자 바위에서 갑자기피가 솟기 시작했다. 머슴들이 당황하여 일을 멈추자 며느리는 "상관하지 말고 계속 깨뜨려라."라고 하였다.머슴들이 바위를 다 깨뜨리자 며느리는 입 단속을 시켰다.

이로부터 두 달쯤 지났을 때 어느 날 만석꾼 집에 복면을 한 도둑이 들어 돈과 값나가는 물건을 모두 떨어갔다. 장자는 속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어 다시 열심히 재산을 모았다. 그러자 또 도둑이 들어 그 재산을 모두떨어갔다. 이러기를 몇 번 하자 그 많던 재산은 모두 없어지고 가난해져 아무도 그 집을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하루는 유명한 지관이 이 마을에 왔다가 인심 좋은 장자 집에 들렸는데 예전같이 않고 집안이 망한 것을 보고 "왜 이렇게 좋은 터에 있는 집이 망하여 폐가처럼 되었을까?"
고 이상히 여겨 집안을 살펴보다가 깨진 바위 조각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것이 고양이 형상을 한 바위가 아닌가? 이 집은 곳간 형상의 집터로 집 앞 쥐 산의 쥐들이 호시탐탐 이 집곳간의 곡식들을 노리고 기어들어 오려고 하는데 고양이 때문에 겁이 나 못 들어 왔다. 그런데 고양이가 없어지자 마음놓고 들어와 모든 곡식을 훔쳐 갔구나. 그게 바로 도둑놈들이다."하였다.
이 소리를 듣고 며느리는 자신의 행동을 크게 후회했다. 지관은 인심 좋았던 장자의 선행에 감명을 받은 듯 "고양이 바위가 있던 자리에 고양이 형상을 한 바위를 깎아 만들어 놓고, 집에 고양이를 키우면 예전 같지는않지만 다시 재물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일러주고 다시 먼길로 떠났다. 그 후로 장자는 열심히 일하여 다시 부자가 되었고 며느리는 어떤 손님이찾아와도 반갑게 맞아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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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동기감응(同氣感應) 이야기

진나라 때 곽박(郭璞)이 지은 금낭경(錦囊經)이라 불리는 장서(0葬書) 제1장 기감편(氣感篇)에는 "동산서붕(銅山西崩) 영종동응(靈粥應)"이라는 글귀가 나온다. 중국 한나라 때 미앙궁(未央宮)에는 동(銅)으로 만든커다란 종(鐘)이 있었는데, 이 종은 서촉에 있는 동산(銅山)에서 캐어낸 동을 원료로 해 만든 것이었다. 어느날 이 종이 누가 건드리지 않았는데 저절로 울렸다. 황제가 너무 이상하여 동방삭(東方朔)에게 종이 울린 원인을 물으니 동방삭이 대답하기를
"서촉에 있는 동산이 붕괴되었습니다."라고 했다.
과연 얼마 되지 않아 서촉에서 동산이 붕괴되었다는 보고가 들어 왔으며, 산이 무너진 때가 바로 미앙궁에 있는 영종(靈鐘)이 울린 때였다. 황제가 다시 동방삭에게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니 동방삭이 대답하기를
"이 종은 동산에서 캐어낸 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동질의 기(氣)가 서로 감응(感應)을 일으켜서 발생한 일입니다."라고 했다.
그때 황제가 크게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이와 같이 미천한 물질도 서로 감응을 일으키는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조상과 후손 사이에 얼마나 많은 감응을 일으킬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 글귀는 고사(故事)에 연유한 것으로 서촉에 있는 동산이 붕괴하니 동쪽에 멀리 떨어진 미앙궁에 있는 종이 감응을 일으켜 울린다고 하여 어미 산이 무너지니 그 자식이 애통하여 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때부터 풍수지리가 생기기 시작하여 부모의 뼈를 잘 묻으면 자손이 잘된다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동기 감응에 관련된 우리 나라 설화 하나를 소개하겠다. 산속에서 십 년 동안 풍수지리 공부를 하고 나오던 지관이 정승지지(政丞之地)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런데그렇게 좋은 자리에 묘는 없고 해골 하나만 굴러다니는 것이었다. 지관은 해골의 오른쪽 눈을 막대기로 찔러두고 내려왔다. 그때 나라의 정승이 갑자기 눈이 아파 온갖 약을 다 써도 효과가 없으므로 백방으로 용한 의사를 구한다는 소문이 들어왔다. 지관은 정승을 찾아가 사흘 안에 고쳐주겠다고 약속하고, 조상의 묘를 보고싶다고 하였다. 그런데 정승이 가르쳐준 곳에 가보니 치산은 잘해 놓았으나 정승이 날만한 자리가 아니었다.지관은 정승과 같이 자신이 발견한 정승지지에 가서 해골의 눈에 찔러 두었던 막대기를 빼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정승의 눈이 씻은 듯이 나았다. 지관은 자초지종을 이야기 해주며 지금 섬기고 있는 묘는 친아버지 묘가 아니고, 굴러다니는 이 해골이 진짜 정승의 아버지라고 일러주었다. 정승은 펄쩍 뛰면서 지관을 벌주라고하였으나 아무래도 이상하여 어머니에게 달려가 사실을 다그쳤다. 그러자 어머니는 한평생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며 옛날 일을 실토하였다. 어느 날 한 종과 눈이 맞아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지금의 정승이란다. 아이가 태어나자 후환이 두려운 종은 그 날로 도망가서 소식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이었다. 정승은 기가 막혔지만 친아버지인 해골을 그 자리에다 잘 묻어주고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드리고 명절때면 평복을 입고 하인도 없이 그 묘에 성묘를 하였다 한다.

참고자료 : 오상익 주해 『장경』동학사, 신월균 『풍수설화』 밀알



29. 악덕 앞에는 지관의 뛰어난 지술(地術)도 필요 없다.

덕을 쌓아야 명당을 얻을 수 있다. 풍수 설화에 무수히 나오는 이야기다. 또 천장지비(천장지비) 대지를 지관이 발견하면 그 주인을 찾아 주기 위해서 많은 실험을 해본다. 과연 명당을 쓸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실험 후 덕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될 때 그 명당을 소개 해준다. 그러나 아무리 자손이 덕이 있다하더라도 죽은 사람이 덕을 쌓지 않고 악행을 하였다면 하늘이 지관으로 하여금 실수케 하여 응징을 하는 것이다.
다음 설화는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청주 고을에 좌수가 살고 있었는데 백성에게 재물을 약탈하여 재산이 많았다. 하루는 좌수의 아들이 생각해 보니 재산만 많았지 벼슬이 없으니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마침 좌수가 죽어 지관을 구하는데 함경도 땅에 진학장이라는 유명한 풍수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들은 사람을 시켜 많은 재물을 실어 진학장에게 보내고 꼭 와주기를 청했다. 진학장은 몇 백 리 길을 사람을 보낸 정성이 갸륵하여 기꺼이 따라나서기로 했다. 길이 하도 멀어 중간중간 주막에서 잠을 자고 며칠씩 걸려 거의 청주 근처까지 왔다. 당나귀를 타고 가던 진학장은 몸이 몹시 고단하여 잠시 나귀에서 내려 눈을 감고 낮잠을 자는데 꿈에 웬 초립 동이가 나타나더니 갑자기 진학장의 눈을 지팡이로 찌르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진학장이 눈을 떠보니 초립 동이는 간데 없고 저쪽에 정승이 셋이나 나오고 판서가 여덟이나 나올 삼상팔판지지(三相八判之地)가 눈에 띄는 것이었다.

진학장은 명당을 발견한 기쁨에 피곤한 것도 잊고 다시 당나귀를 타고 좌수의 집에 도착하였다. 좌수의 아들은 상중에도 불구하고 기가 막히게 좋은 음식을 대접하였다. 진학장은 좌수 아들의 덕을 실험하기 위해서 일부러 먹고 놀기만 하였다. 그러나 아들은 급히 산을 잡으라는 말도 없이 계속 최고의 음식과 옷으로 석 달을 한결같이 칙사 대접을 하였다.
석 달째가 되어서야 좌수의 아들은 자기 소원을 말했다.
"실은 재산은 많이 있으나 벼슬을 하고 싶어서 고관대작이 나올 만한 명당을 꼭 잡아달라고 모셔왔으니 좋은 자리를 부탁합니다."
진학장은 이미 삼상팔판지지를 보고 온 터라 곧 그 자리를 쓰게 하였다. 자리를 잡아주고 이제 함경도 집으로 돌아오는데 똑 같은 자리에서 잠깐 졸음이 와 눈을 감았는데 초립 동이가 나타나더니 진학장의 눈을 쓰다듬고 사라졌다. 졸음 깬 진학장이 참으로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집에 돌아왔다.

그 후 칠 년이 지나 진학장은 청주 지방을 지나게 되었다. 그는 좌수네가 궁금하여 근처 사람에게 물어 보았다. 그런데 좌수 집이 변고를 당하여 모두 죽고 완전히 망해버렸다는 것이었다. 이상히 여기며 자신이 잡아 준 묘 터에 가보니 그 자리는 삼 년 안에 망할 자리였다. 진학장이 가슴을 치며 통탄을 하는데 그때의 초립 동이가 나타나더니 "좌수가 생전에 고을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재산을 빼앗아 명당에 들지 못하도록 내가 당신 눈을 찔렀다."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30. 문화 유씨는 호랑이를 구해주고 명당을 잡았다.

문화 류씨 시조에 얽힌 이야기다.

문화 류씨는 원래 황해도에 살았고 제일 윗대 산소가 황해도 구월산에 있다. 문화 류씨 시조가 살림이 곤궁하여 나무를 팔아 근근히 살아가는데 어느 날 아버지 상을 당했다. 지관을 부를 형편이 안되어 산밑에 아버지를 묻었다. 삼 년이 흘렀다. 그 날도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는데 후미진 산길에 커다란 호랑이가 눈은 빨갛고 입은 딱 벌린 채로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류씨는 무서워 몸이 얼어붙었으며 꼼짝 못하고 서 있었다. 그런데 호랑이가 좀 이상했다. 상주는 범도 안 물어 간다더니 정말로 류씨를 헤칠 생각은 안하고 몹시 괴로운 표정을 하고는 눈물까지 흘리는 것이었다. 류씨가 자세히 살펴보니 호랑이 목에 무엇이 걸려 있는 듯 하였다. 류씨는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호랑이 입에 손을 넣고는 목이 다치지 않도록 살살 그것을 꺼내 주었다. 사슴을 통째로 잡아먹은 듯 호랑이 목에는 짐승의 뼈가 걸려 있었던 것이었다. 류씨는 섬찟하였으나 호랑이는 몹시 기뻐하며 류씨에게 등에 올라타라는 시늉을 했다. 류씨가 등에 타자 호랑이는 그야말로 비호같이 달려 황해도 구월산으로 오르더니 한 자리에 딱 멈추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땅을 파는 시늉을 하면서 이곳이 명당이라는 표시를 하였다. 다시 류씨를 등에 태워 집에 까지 데려다주고 호랑이는 절을 하고 사라졌다. 류씨는 아버지 유골을 수습하여 그 자리에다 묻었다. 그 후 문화 류씨는 번창하게 되었고 지금도 호랑이가 자리를 잡아 주었다 하는 도신산(都神山)이 황해도 구월산에 있다한다.

참고서적 : 신월균 저 『풍수설화』 밀알

증직(贈職)에 대해서

묘지의 비석에는 망자의 생전 업적과 벼슬 등을 기록한 비문이 있다. 비석 앞면에는 망자의 벼슬 품계와 소속 관청, 그리고 직위(관직)를 표시하고 있는데 증직(贈職)과 실직(實職)을 구분하여 기록하였다.

추증(追贈)이라고도 하는 증직은 죽은 뒤에 관직을 부여하는 것으로 가문을 빛나게 하는 일종의 명예직이다. 여기에는 원칙이 있다. 추봉(追封) 또는 추증(追贈)의 기준은 왕실의 종친과 생전 실제 벼슬이 종이품(從二品) 이상인 문무관(文武官)에게는 그의 3대를 추증하였다. 그의 부모는 본인의 품계에 준하고, 조부모는 본인보다 한 단계 낮은 품계를 주고, 증부모는 본인보다 두 단계 낮은 품계를 추증하였다. 죽은 처는 그 남편의 품계에 준하였다. 또 비록 벼슬이 직위가 낮더라도 친공신(親功臣)은 정삼품(正三品)을 증직하였다.

예를 들어 홍길동이라는 사람이 실직으로 정2품인 이조판서를 하였다면 그의 죽은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贈 吏曹判書)"가 되고, 그의 할아버지는 이보다 한 단계 낮은 종2품인 "증이조참판(贈 吏曹參判)"이 되고, 그의 증조부는 이 보다 한 단계 더 낮은 정3품인 "증 이조참의(贈 吏曹參議)"를 추증하였다. 또 홍길동의 부인은 실직인 "정부인(貞夫人)"이고, 죽은 어머니는 "증 정부인(贈 貞夫人)"이고 할머니는 "증 정부인(贈 貞夫人) : 정2품, 종2품 부인의 품계는 모두 貞夫人 임"이며, 그의 증조모는 "증 숙부인(贈 淑夫人)"이 된다.

왕실의 경우 왕의 장인이 죽으면 정1품인 영의정(領議政), 세자의 장인이 죽으면 정1품인 좌의정(左議政), 대군의 장인이 죽으면 정1품인 우의정(右議政), 그리고 왕자의 장인이 죽으면 종1품인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하였다.

32. 계(階), 사(司), 직(職)과 행수법(行守法)

고려말부터 조선시대에는 관직의 정식 명칭을 품계(品階)인 계(階)와 소속 관청인 사(司), 그리고 관직(직위)인 직(職)의 순서로 기록하였다. 예를 들어 영의정인 경우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이라고 하는데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는 정1품인 품계인 계(階)이고, 의정부(議政府)는 소속관청인 사(司)이며, 영의정(領議政)은 관직인 직(職)이다.

그런데 품계와 관직이 똑같이 않고 다른 경우가 있는데 품계가 높고 관직이 낮은 계고직비(階高職卑)의 경우는 `행(行)`이라 하고, 반대로 품계는 낮은데 관직이 높은 계비직고(階卑職高)의 경우는 `수(守)`라 한다. 행과 수는 소속관청 앞에 붙이는데 이를 행수법(行守法)이라 한다.

예를 들어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를 가진 사람이 정2품 이조판서가 되면 "숭정대부행이조판서(崇政大夫行吏曹判書)"라 하였고, 반대로 종2품인 가선대부(가선대부)의 품계를 가진 사람이 정2품인 이조판서를 하였다면 "가선대부수이조판서(嘉善大夫守吏曹判書)"라고 하였다.
이때도 숭정대부, 가선대부는 품계인 계(階)이고, 이조는 소속관청인 사(司)이며, 판서는 관직인 직(職)이다.
제목 시호(諡號)
작성자 형산 정경연     2004/08/03
시호(諡號)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시호는 가장 영예로운 표창으로 존중되어 족보(族譜)에는 물론 묘비(墓碑)에 기입되어 있다. 시호를 받는다는 것은 그 자손과 일족(一族)의 명예를 드높이는 일이었다. 왕실(王室)의 종친(宗親)과 문무관(文武官)중에서 정2품(正二品) 이상의 실직(實職)을 지낸 사람이 죽으면 시호를 주었는데 생전의 행적(行跡)에 따라 알 맞는 글자를 조합하여 두 자를 만들고 시호아래 "공(公)"자를 붙이어 부른다.

시호를 정하는 법은 중국고대 시법(諡法)이 많이 적용되었는데 <주공시법(周公諡法)>, <춘추시법(春秋諡法)>등이 있으며 시호에 적용된 글자는 문(文), 충(忠), 정(正), 공(恭), 양(襄), 정(貞), 효(孝), 장(莊), 안(安),경(景), 익(翼), 무(戊), 경(敬)등 120여자인데 한자 한자마다 뜻이 있어 그 사람의 행적에 따라 정의(定義)하였다. 그런데 고려말, 조선시대에는 숭문주의(崇文主義)로 인한 문반(文班)우위의 시대였던 만큼 "문(文)"자시호를 최고의 영예로 여겨 자손들이 이를 자랑으로 삼는 것이 당시의 통념이었다.

무인(武人)의 시호로는 충무공(忠武公)이 가장 영예로웠는데 충무공하면 이순신 장군의 대명사처럼 알려져있지만 그밖에도 조영무(趙英茂), 귀성군준(龜城君浚), 정충신(鄭忠信), 김시민(金時敏), 김응하(金應河), 이수일(李守一), 남이(南怡), 구인후(具仁 )등 충무공(忠武公)이 8명이나 더 있었다. 시호를 둘러싸고 시비와논란도 많았는데 시호 중에서도 "문(文)"자와 "충(忠)"자가 들어간 시호를 가장 존귀하게 여겨 뒷날에 이르러개시(改諡)를 요구하는 일도 많았다. 한편 정2품(正二品)의 벼슬을 못하여도 임금의 특별한 교시(敎示)가 있을 때에는 시호를 추증 받았는데 유현(儒賢)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문순공(文純公), 김광필(金광弼) 문경공(文敬公), 정여창(鄭汝昌) 문헌공(文獻公), 서경덕(徐敬德) 문강공(文康公), 조광조(趙光祖) 문정공(文正公), 김장생(金長生) 문원공(文元公)등이 있다.

시호의 결정은 시호를 받을 사람이 죽으면 그의 자손들이 먼저 자기들이 선정한 행장(行狀)을 예조(禮曺)에내면 예조에서는 봉상시(奉尙寺)에 전하며, 다시 홍문관(弘文館)에 보내어 봉상시의 정(正)과 홍문관의 응교(應敎)이상이 한자리에 모여 시호를 정한다. 이 때 시호를 받을 사람의 공적을 보아 시호를 내린다.




34. 초명(初名)과 자(字)와 호(號)

현대사회에서는 호적(戶籍)에 오른 이름만 통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예전의 인명록을 살펴보면 본명(本名)외에 어려서 부르던 아명이라고도 하는 초명(初名)이 있고 자(字)가 있고, 호(號)가 있다. 초명(初名)이란 아이가 출생하면 그 집안의 항렬자에 따라 지은 이름을 말한다. 자(字)는 아이가 성장하여 20세가 되면관례(冠禮)라 해서 성년의식을 갖추는데 서당의 훈장이나 가문의 덕망 있는 어른이 이름을 지어내려 주는 것을 말한다. 호(號)는 학문을 연구하는 선비가 어느 한계를 깨우치고 진리를 터득했을 때 그를 인정한다는 뜻으로 스승이 호를 내려 주었는데 스승으로부터 호를 받는 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알았다.

또 동문수학(同文修學)한 벗끼리 호를 지어 불러주기도 했고, 뜻이 맞는 시우(詩友)나 문우(文友)끼리 호를지어 존경해주기도 했으며, 자기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비유하여 호를 짓기도 했는데 이를 자호(自號)라고 한다. 호는 한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이 여러 호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제목 이성계는 아버지를 흥왕지(興王地)에 장사 지내고 왕이 되었다.
작성자 형산 정경연     2004/08/03
이성계는 아버지를 흥왕지(興王地)에 장사 지내고 왕이 되었다.

조선 태조인 이성계가 아직 어릴 때의 이야기다. 그는 함경남도 함흥에서 아버지 상을 당했다. 이성계는 아버지를 좋은 명당에 장사지내려고 남몰래 초조해 하고 있었다. 그때 함흥 땅에 두 사람의 행각승이 지나갔는데그들은 풍수지리에 능통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들은 길가에 쉬면서 다음과 같이 대화하였다.
스승인 스님이 제자에게 동쪽에 있는 산을 가르치며 말하기를
"저기에 장사지내면 자손이 왕이 될 터인데, 너는 알겠느냐.?"라고 하자
제자 승이 대답하기를
"저 세 개의 지맥 가운데 중앙의 지맥이 낙하하여 짧은 기슭을 이루고 있으니 바로 그 곳이 정혈인 듯 합니다."
그러자 다시 스승이 말하기를
"너는 아직 자세히 모르는구나, 사람의 양손도 오른 손이 중요한 것처럼 저 오른쪽 지맥의 기슭이 진혈이다."하였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이성계 집의 하인이 이 말을 듣고 바로 달려가 이성계에게 고하였다. 이성계는 급히 말을 달려서 두 스님의 뒤를 쫓아 달려가 겨우 함관령 기슭에서 만났다. 그는 그들을 정중하게 모시고 가서 그들이 노상에서 나누었던 땅을 점쳐 받았다. 이성계는 아버지를 그 자리에다 장사 지냈는데 그 발복이 놀랍게도빨리 왔다. 얼마 되지 않아 이성계는 고려를 망하게 하고 조선을 세워 태조가 되었다. 이 승려들이 스승은 나옹화상이며, 제자는 무학대사였다. 이 묘는 정릉(定陵)으로 함흥군 북주 동면 경흥리에 있다.
<참고문헌 : 조선의 풍수>


36. 신돈은 스스로 왕이 되려고 오봉산(五峰山)을 쌓았다.

경기도 개성군 진봉면 흥왕리에는 오봉산이 있다. 높이가 약100m 정도의 산이 논 가운데 나란히 서 있다. 이산은 고려 말엽 미천한 신분으로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권세를 부린 신돈이 왕위 찬탈의 욕망을 이루려고 자기 집의 빈터 공허한 부분을 풍수적으로 비보하기 위해서 축조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비참한 최후를맞았지만 그 혈통에서 왕위에 오른 자가 나왔다고 한다.
<참고문헌 : 조선의 풍수>

제목 성씨(姓氏)의 유래(由來)
작성자 형산 정경연     2004/08/03
성씨(姓氏)의 유래(由來)

성씨(姓氏)의 발생근원은 정확힌 기록이 없어 상세히 알수는 없으나 원시 씨족사회(原始氏族社會)에서는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이 필요했다. 그것이 성(姓)으로 나타나고, 점차적으로 다른 부족을 정벌하여 그 부족을 통솔하기 위한 통치자(統治者)의 칭호가 필요했는데 그것을 또한 성(姓)으로 썼으며 고대사회(古代社會)로 접어 들면서 지방세력(地方勢力)이 중앙귀족화(中央貴族化)되면서 정치적 신분을 표시하는 중요한 의미로 성씨(姓氏)를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성씨(姓氏)를 사용 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중국(中國)의 성씨제도(姓氏制度)의 영향을 받아 고조선시대(古朝鮮時代)에 왕족(王族)에서부터 사용한 것으로 전해 온다.

성(姓)은 초기에는 왕실(王室)이나 귀족(貴族)에서만 국한되어 사용하다가 국가에 공이 큰 공신(功臣)들이나 귀화인(歸化人)들에게 세거지역(世居地域)이나 강(江), 산(山)의 명칭을 따서 성(姓)을 하사(下賜)하면서 확대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왕실이나 귀족중심의 성(姓)이 고려 문종(文宗 서기 1047)이후부터 과거제도(科擧制度)가 발달 되면서 보편화 되었고, 상민(常民)이나 노비(奴婢)를 포함한 일반 서민들이 모두가 성을 갖게 된 것은 조선말(朝鮮末) 개혁정치가 시행되면서부터다. 중세사회(中世社會)에 이르기까지 성씨(姓氏)는 왕족이나 귀족과 같은 지배계급(支配階級)에서만 사용함으로써 정치적(政治的),사회적(社會的) 신분계급(身分階級)의 상징이었으나 오늘날에는 평등한 조건에서 누구나 갖게 됨으로써 인간존중의 사회적 진보가 달성되었다.또 씨족끼리의 일체감 속에 자기를 귀속 시키고 자기 자신을 확인 시킴으로써 사회적으로나 신분적으로 안정감을 갖게 하고 나가 민족유대(民族紐帶)를 강화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38. 본관(本貫) 유래(由來)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성씨(姓氏)가 점차적으로 확대 되면서 같은 성씨라 하더라도 계통(系統)이 달라 그 근본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웠으므로 동족(同族) 여부를 가리기 위해 등장하게 된 것이 본관(本貫)이다. 본관(本貫)이란 본(本), 관향(貫鄕), 관(貫)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관(貫)은 돈을 의미하는 것으로 옛날에는 엽전(葉錢)을 한 줄에 꿰어 묶어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이 친족(親族)이란 서로 관련성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꿰일관(貫)』자를 썼다. 본관(本貫)은 또 최근까지만 해도 주민등록증이나 민원서류에 본적란이 있었듯이 본적(本籍)이란 뜻의 본관향적지(本貫鄕籍地)로 사용되었다. 본관은 대개 그 집안의 시조(始祖)나 중시조(中始祖)의 출신지(出身地)나 혹은 정착세거지(定着世居地)를 근거로 호칭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특별히 나라의 공이 있거나 귀화인들에게 임금이 하사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의 본관수는 1930년 국세조사의 기록에 의하면 정씨(鄭氏)가 35본(本), 김씨(金氏) 85본, 이씨(李氏) 103본, 박씨(朴氏) 34본, 최씨(崔氏) 34본 등으로 되어 있다.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같은 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동성동본(同性同本)의 동족부락(同族部落)이 발달하였는데 이들은 가문(家門)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고 자치적으로 상호 협동하여 집안 일을 해결해 나가는 특이한 사회조직의 한 형태를 이루었다. 개인의 업적이나 명예가 결국은 가문(家門)에 부착되고 가문을 통해 계승된 다는 사실을 볼 때 한 개인의 사회적 성공이나 출세는 그 가문 구성원 모두의 사회적 신분을 높여 줄뿐만 아니라 가문에 대한 사명의식과 자부심을 고취 시켜 자아발전의 도구로 여겨졌다.

제목 도둑이 잡아준 명당
작성자 형산 정경연     2004/08/03
도둑이 잡아준 명당

전라남도 해남에 송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송씨는 타향 땅에 할아버지 묘가 있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지관을 통하여 해남에 좋은 자리를 잡아놓고 할아버지 유골을 이장하기로 마음먹었다. 멀리 있는 할아버지 묘를 찾아가 무덤을 파서 뼈를 추린 다음 정성스럽게 궤짝에 넣어 지게에 짊어지고 해남으로 향해 걸었다. 한참을 걷다보니 날이 저물어 어느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송씨는 해골을 방안에까지 가지고 들어갈 수 없어 바깥벽에다 지게를 기대어 놓고 방에 들어가 잠을 잤다. 그때 주막에 도둑이 들어 지게에 실린 궤짝을 보고 틀림없이 값나가는 보물이라 생각하고 지게를 짊어지고 멀리 달아났다. 무게가 제법 무거운 것이 큰 횡재를 했다며 속으로 좋아했다. 어느 만큼 가서는 이제 누구도 뒤따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궤짝에 든 보물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여 그래도 남에게 발각될지 몰라 사방으로 산이 가린 곳으로 들어가 궤짝을 열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기대했던 보물이 아니고 해골만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도둑은 남의 뼈를 그냥 버릴 수가 없어 조금 볼록한 땅에 흙을 긁어 파고 묻어주었다.

주막에서 잠을 자고 일어난 송씨는 할아버지 유골이 없어지자 `이젠 집안이 망했구나`하고 낙심을 하여 빈 몸으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할아버지를 명당에다 모시려고 했는데 오히려 유골을 잃어버렸으니 불효를 어떻게 용서받아야 할 지 몰라 열심히 일만 하였다. 그런데 하는 일마다 마음먹은 대로 잘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몇 년 후 큰 부자가 되었다. 할아버지 유골을 잃어버린 것이 마음에 걸린 송씨는 지나가는 과객들에게 대접을 잘해주고 또 갈 때는 노자도 듬뿍 주었는데 이 소문이 사방에 퍼져 그에 집에는 항시 과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어느 날 도둑도 이 집을 찾아 대접을 잘 받으며 며칠을 묵었는데 과객들끼리 서로 자기가 겪은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하면서 밤을 보내고 있었다. 도둑도 몇 해전 자기가 보물인줄 알고 훔친 궤짝이 나중에 보니 해골이었다고 이야기를 하자 모두들 배를 움켜쥐고 웃었지만 주인 송씨는 `옮지 이제야 찾았구나!` 하고는 그 도둑에게 그 유골 임자가 자신이라고 밝히고 도둑을 앞세워 뼈 묻은 곳을 찾았다. 그리고는 해남에 잡아둔 자리에 묘를 제대로 쓰려고 지관을 불렀는데 지관이 그 자리를 보더니 이 자리는 보기 드문 명당이므로 옮기지 말라고 하였다. 송씨는 할아버지 묘에 치산을 잘하여 가꾸었고 자손들도 대대로 부귀를 다하면서 지냈다. 결국 도둑이 잡아준 명당으로 집안이 일어났고 송씨는 덕을 베풀어 다시 할아버지 묘를 찾은 것이다.

<참고문헌 : 풍수설화, 신월균, 도서출판 밀알>



40. 덕을 쌓아 명당 묻힌 아버지

어느 총각이 장가를 갔는데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새색시가 아기를 낳았다. 남편과 집안 사람들은 깜짝 놀라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집안 사람들은 불륜을 저지른 년이라고 모두들 쫓아내야 한다고 난리였다. 남편은 사실은 아홉 달 전에 자기가 남몰래 새색시를 겁탈하여 생긴 아이라고 말하여 부인을 위기에서 모면하게 해주었다. 남편은 부인이 낳은 아이를 자기 아들처럼 대하고 잘 키웠다. 그들 부부는 아들 둘을 더 낳고 잘 살았는데 아이는 어느 날 자기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 길로 집을 떠난 아이는 떠돌다가 우연히 기인을 만나 풍수지리를 배우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자기를 친자식처럼 잘 키워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아버지 은혜를 갚기 위해 그가 평소에 보아둔 명당에 묘 자리를 잡아주었다. 곧 발복이 되어 동생 둘이 부자가 되고 동생들이 장가를 가서 낳은 아이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얻으니 집안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비록 자신은 부귀영달을 못했지만 아버지 은혜에 보답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41. 여자는 친정보다는 시댁에 발복을 준다는 전설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 박산포지(朴山匏地)라고 일컬어지는 구릉 묘가 있다. 이 묘는 연대 미상으로 약 200년 전에 쓰여진 것으로 반남 박씨 집안으로 시집간 신씨 성을 가진 규수의 무덤이라고 전해진다. 이 무덤의 덕으로 반남 박씨가 번영했다고 하는데 이와 관한 애처로운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씨 집안과 박씨 집안 사이에 혼약이 성립되어 이루어졌으나 어찌된 까닭인지 박씨 집에서 그 여자를 시집오자마자 친정으로 쫓아보냈다. 신부 신씨는 친정 부모 뵐 면목이 없어 고민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신씨 집안에서는 출가 외인이므로 박씨 집안에 연락을 하여 시신을 가져가 장사를 지내라고 하였으나 박씨 집안은 이를 거절하였다. 하는 수 없이 신씨 집안은 선산이 있는 박산포지에다 묻어주었다.

그후 10년쯤 지나서 박씨가 갑자기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매우 이상하게 여겨 여러모로 생각해 보았더니 조상 묘의 발복말고는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없었다. 유명한 지관을 불러 어느 묘의 발복으로 집안이 번창하게 되었는지를 알아보았는데 시집오자마자 소박을 하여 쫓아버린 신씨 며느리 묘지의 발복으로 박씨 집안이 번창하게 되었다고 한다. 죽은 신씨가 비록 박씨 집안에서 살지 않았고 자손도 없지만 일단 박씨와 결혼한 이상 박씨 가문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씨 성을 가진 여인네는 박씨의 조상이니 박씨 후손들에게 발복했다고 한다. 그 후 박씨들은 그 묘를 정성스럽게 관리하였고 해마다 제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박씨 집은 더욱 번영해서 그 자손 가운데 대신이 많이 나왔다. 한편 신씨 집안은 이로 인해 자기들 묘지를 박씨 집에 빼앗겼기 때문에 가문이 번영할 수 없었다고 전한다.
<참고서적 : 조선의 풍수, 무라야마 지쥰(최길성 옮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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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과객을 정성으로 대접하고 명당을 얻은 이야기

늙은 어머니와 아들이 남의 집일을 해주며 어렵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과객이 와서 하룻밤 묵고 가기를 청하였다. 방도 없고 대접할 양식도 없어 곤란하였으나 그냥 보낼 수가 없어 모자가 부엌에서 자고 과객을 방에서 자게 하였다. 다음날 아침밥을 지어야 하는데 늘 먹던 조밖에 없었다. 쌀이라고는 아버지 제사 때 쓰려고 매달아 둔 것 한 주머니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모자는 할 수없이 그 쌀을 꺼내어 정성껏 밥을 지어 과객을 대접했다. 아침을 먹고 나자 과객은 아버지 묘 자리를 봐주겠다며 산으로 올라가더니 자리를 하나 잡아주고 그리로 아버지를 이장하면 바로 부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멀리 떠나갔다. 아들은 지관인 과객이 일러준 자리에다 아버지 묘를 이장하고 저녁 양식이 없어 주인 과부댁으로 양식을 꾸러갔다. 그때 마을에서 제일 부자인 과부댁은 잠을 자고 있었는데 용이 들어 오는 꿈을 꾸다 문소리에 그만 꿈에서 깨었다. 이상히 여긴 과부는 대길한 꿈을 버리고 싶지 않아 양식을 꾸러온 아들을 보고 안방으로 들어오게 하여 관계를 맺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아들은 주인집 과부와 결혼하게 되었고 모자는 부자로 잘살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서적 : 풍수설화, 신월균 지음, 도서출판 밀알>
제목 벌 명당을 쓰고 번창한  반남 박씨 이야기
작성자 형산 정경연     2004/08/16
43. 벌 명당을 쓰고 번창한 반남 박씨 이야기

반남 박씨(潘南 朴氏)는 조선조에서 세도를 했던 명문이다. 문과급제자만 215명을 냈고 정승을 7명을 배출했으며, 인종의 왕비와 선조의 왕비가 반남 박씨이고, 임금의 사위인 부마가 5명이나 되었다. 반남박씨의 시조는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낸 박응주인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박의가 효심이 깊어 유명한 지관을 모셔다가 명당자리 한 곳을 부탁했다. 지관은 산을 둘러보고 위쪽에 자리를 잡아 주었다. 그러나 박의가 보기에는 조금 아래쪽이 더 좋은 자리일 것 같았다. 그러나 유명한 지관의 말이라 우선 표를 해놓고 아무래도 미심쩍어 지관의 뒤를 쫓아 가보았다. 지관은 자기 집으로 들어가더니 부인에게 "오늘 본 자리는 너무 큰 명당이라 그 자리를 잡아 주었다가는 아무래도 천기를 누설하여 내가 화를 당할까 두려워 그 자리를 피해 조금 위쪽에 자리를 잡아 주었소."하는 것이었다. 이 소리를 엿들은 박의는 "그러면 그렇지"하고 그 집을 빠져 나와 이튿날 그의 선친 산소를 지관이 말해준 자리 아래에다 정하고 일을 시작했다.

다음날 지관이 와서 보니 자신이 정해준 자리 보다 아래에 묘 터를 파고 있으므로 깜짝 놀라 "어인 일로 내가 정해 준 자리에다 쓰지 않는가?"하고 묻자 박의가 대답하기를 "지관 어른이 정해준 자리는 저나 제 후손이 쓰기로 하고 이 자리가 아버님 운과 맞을 것 같아 지관님의 뜻을 어겼습니다."라고 능청을 떨며 말하였다. 지관은 사색이 되어 "이것이 모두 천운이로구나! 사실 자네가 파고 있는 그곳이 천하 명당일세. 내가 그 자리를 정해주면 천기누설이 되어 내가 화를 입으니 말하지 않았던 것인데 자네가 이를 알아냈으니 자네 가문의 복일세. 아무래도 나는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나 한가지 방법은 있네. 내가 이 고개를 넘어 가면 그때 일을 해주기 바라네."라고 하였다. 박의는 지관의 부탁이라 잠깐 쉬었다가 일을 계속하였는데 지관이 미처 고개를 넘지 못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묘 자리에서 새처럼 큰 벌들이 수 백 마리 나오더니 고개로 날아가 지관의 뒤통수를 마구잡이로 쏘아 결국 지관은 죽고 말았다. 이때부터 이 고개는 벌고개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묘 자리는 벌명당으로 불리었다. 박남 박씨는 이 명당의 음덕으로 발복이 시작되어 수많은 정승과 왕비, 부마를 배출하게 된 것이다.

지관의 말을 엿들어 그의 아버지 묘를 쓰게 된 박의는 그의 성급한 욕심 때문에 지관을 죽였다고 생각하여 지관을 성대하게 장사 지내주고 그의 가족들을 보살펴주었다. 또 매년 10월 보름날에는 제사를 지내 주었는데 오늘날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참고서적 : 풍수전설, 임학섭 저, 이화문화출판사>

44. 조산 마을 이야기

강원도 양양에 조산 마을이라는 곳이 있다. 옛날부터 인심 후하고 농사도 잘되어 풍요하게 살았으나 큰 인물이 나지 않았다. 하루는 정자나무 아래서 노인들이 장기를 두고 있는데 금강산에서 왔다는 노승이 마을을 두루 살피고 다니는 게 보였다. 노인들은 웬일이냐고 그 이유를 묻자 노승은 "지세가 하도 좋아 살피고 다녔는데 먹고살기는 걱정이 없으나 큰 인물이 나오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점이 이 마을의 유일한 걱정거리였는데 노인들은 어떻게 하면 인재를 배출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노승은 설악산의 주맥이 이 마을에 와서 끊겼으니 인공적으로나마 산 하나를 만들어 맥을 이어주면 설악산의 정기를 받아 인물이 배출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마을에서는 모두들 힘을 합쳐 인공적으로 산을 만들었더니 그 뒤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조산(造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서적 : 풍수설화, 신월균 지음, 도서출핀 밀알>
달성서씨

의정부에서 포천 가는 43번 국도를 따라 축석령 고개를 넘고 송우리를 지나면 좌측으로 해룡산이 보인다.1291 군부대 담장을 끼고 돌면 경기도 포천군 포천읍 설운리로 약봉(藥峰) 서성(徐 )의 묘와 그의 아버지고(固)와 할아버지 해( )의 묘가 있다. 광산김씨(光山金氏) 사계 김장생, 연안이씨(延安李氏) 월사 이정구와함께 달성서씨(達城徐氏) 약봉 서성의 후손들은 조선조 3대 명문으로 유명하다.

서씨는 7관(貫)이 있는데 이천서씨(利川徐氏)가 신라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에서 기원했고 달성서씨와 대구서씨도 모두 이천서씨에서 갈라져 나왔다. 대구, 달성 서씨는 같은 성씨로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판도(版圖), 판서(判書)등을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대구의 옛 이름인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진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는 판도공파(版圖公派)와 고려조 조봉대부(朝奉大夫)로 군기소윤(軍器少尹)을 지낸 서한(徐 )을시조로 하는 소윤공파(少尹公派) 두 계통이 있다. 이 두파는 모두 대구(달성)에서 세거 하였으므로 같은 성씨로 알고 있으나 문헌이 없어 정확한 관계를 지금도 밝히지 못하고 있다.

달성 서씨는 고려조에서는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세종 때 사가정(四佳正) 서거정이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 때까지 6대왕을 섬기면서 45년 동안 6조 판서와 대제학을 지내 가문의 세력을 잠시 떨쳤다. 그러나 그 후 다시 단한(單寒)해졌다. 그러다가 선조와 인조 때 약봉 서성이 5도 관찰사, 3조 판서를 지내면서 가문의 기반을 구축하고, 서성의 네 아들을 비롯한 자손 중에서 3대 정승, 3대 대제학, 3대 대학자가 계속 배출되면서 1백여 년에 걸쳐 가장 현달한 가문 중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서성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서경우(徐景雨)는 인조 때 우의정, 넷째 아들 서경주는 선조의 딸 정진옹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으며, 서경우의 아들 서원리(徐元履)는 현종 때 병조참판을 역임하고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고 그의 아들 서문중(徐文重)은 숙종 때 영의정을 하였다. 약봉의 둘재 아들 서경수(徐景需)의 증손 서종제(徐宗悌)의 딸은 영조의 왕비인 정성왕후다.

서종태(徐宗泰)는 숙종 때 영의정을 했고, 그의 둘째 아들 서명균(徐命均)은 영조 8년에 우의정과 좌의정을지냈으며, 명균의 아들 서지수(徐志修)는 영조 42년에 영의정을 지내 서경주의 집안에서 3대에 걸쳐 정승이나왔고, 또 서지수의 아들 서유신(徐有臣)이 순조 때 대제학, 그의 아들 서영보(徐榮輔)가 대제학, 손자 서기순(徐箕淳)도 대제학을 하여 3대에 걸쳐 대제학이 배출되었다. 즉 6대에 걸쳐 3대 정승과 3대 대제학을 배출하여 가문의 명성을 날렸다.

서종태의 사촌 형제인 서종옥(徐宗玉)은 이조판서를 했고, 그의 자손은 3대에 걸쳐 대학자가 나왔는데 아들 서명응(徐命膺)이 영조 때 6조 판서와 대제학, 손자 서호수(徐浩修)가 정조 때 이조판서와 직제학, 증손인 서유구(徐有 )가 현종 때 좌찬성과 대제학이 되었다. 서명응의 동생 서명선(徐命善)은 정조 때 영의정을 하였다. 또 서성의 넷째 아들 경주의 셋째 아들 서진이의 4대손 서매수(徐邁修)는 순조 때 영의정이 되었다.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현손인 서용보(徐龍輔)도 순조 때 영의정을 하였다.

달성 서씨가 조정의 고관에 가장 많이 진출했을 때는 순조 때다. 서유방, 서유린, 서능보, 서경보, 서공보, 서유보, 서희순, 서형순, 서헌순,등이 이조와 공조 판서를 비롯하여 6조에 있었고, 서유대가 도총관이고, 서좌보, 서재보, 서영순이 형조 판서를 역임했으며, 서준보도 이조와 공조 판서를 하였다. 이보다 시기는 조금 뒤떨어지지만 고종때 서상우(徐相雨)가 형,공,예조 판서를 지냈으며 서명균의 증손 서당보(徐堂輔)는 좌의정을거쳐 영의정을 하였다.

야사에 의하면 왕이 용상에 앉아 만조백관을 바라보니 고관대작들이 거의가 서씨 일문(一門)이므로 농담하기를 "어미 쥐가 새 끼 쥐를 거느리고 나다니는 듯 하구나"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조정에는 서씨 일가가 많았으며 서씨들의 영화를 한눈에 보는 듯 하였다.근대 인물로는 김옥균 등과 함께 개화파인 서광범(徐光範), 의병장 서상렬(徐相烈), 독립신문을 발간한 서재필(徐載弼)이 있다.

서거정 이후 뚜렷한 인물이 없어 별다른 배경도 없던 가난했던 서씨 집안이 이처럼 번창한 것은 약봉 서성의어머니 고성이씨(固城李氏) 때문이다. 가난한 집안에 약봉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진사와 참위의 낮은 벼슬을 하였지만 약봉이 어렸을 때 멀리 귀양을 갔다가 귀양지에서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약봉의 어머니는 앞을볼 수 없는 소경이었는데 효부였던 그녀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유골을 고향으로 모시기 위해 어린 약봉을 업고 귀양지에서 유골을 수습하여 경북 안동군 일지면 망호동으로 가는 도중 날이 저물어 쉬어갈 곳을 찾았다.인적이 드문 산중에 인가는 하나도 보이지 않아 어쩔 수없이 노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장님의 환상이었을까? 갑자기 커다란 기와집이 보이는 것이었다. 주인한테 사정을 하고 하루 밤 신세를 졌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기와집은 온데 간데 없고 야트막한 산의 풀밭이었다. 이상하기도 했지만 다시 길을 떠나기 위해 유골이든 관을 들려고 하자 관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혼자 힘으로 아무리 애를 써봐도 움직이지 않아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다 모시기로 하고 땅을 파니 훈훈한 기운이 감돌고 흙은 부드러우면서도 홍황자윤한혈토였다. 신이 눈 먼 며느리의 효성에 감동하여 명당을 잡아 주었구나 생각하고 장사를 모두 마친 다음 친정집이 있는 서울 약현에 올라와 술과 떡 장사를 하면서 어린 자식을 훌륭하게 키웠다.

오늘날 전통 한식인 약과, 약식, 약주들의 명칭이 약봉의 어머니가 약현에서 만들어낸 음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머니의 정성어린 뒷바라지로 성장한 서성은 29세 때인 선조19년(1586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로 모시었다. 그 후 경상, 강원, 함경, 평안, 경기 각 도의 관찰사를 역임하고 광해군 5년(1613년) 영창대군 문제에 연루되어 11년간 귀양살이도 하였다. 인조반정 후 다시 형조, 병조판서가 되었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는 인조를 모시고 피난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하다가 인조9년(1631년) 4월 향년 74세로 타계하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단명한 반면에 그는 생전에 다섯 아들과 손자 13명, 증손 34명을 보는 등 천수를 다하였으며 부인 여산 송씨와 할아버지와 아버지 묘 청룡 능선에 합장으로 안장되었다.

별 두각을 나타나지 않던 서씨 집안이 갑자기 번성하게 된 것을 보고 사람들은 포천에 있는 약봉 할아버지와아버지 그리고 약봉 묘의 발복 때문이라고 하여 그 묘를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로 꼽는다. 언뜻 보아서는 들판에 있는 평범한 묘 같은데 과연 천하 대명당(大明堂)이다. 우선 산세를 살펴보자. 혈의 기세와 크기는 용에달려 있다고 하였다.

백두산을 출발한 백두대간이 수도 서울을 만들기 위해서 추가령에서 한북정맥을 분맥하여 평강 백암산(1110M), 김화 적근산(1073M), 대성산(1175M), 광덕산을 거쳐 포천 이동에 있는 백운산(904M), 국망봉(1168M), 도성고개, 강씨봉(830M), 오뚜기고개, 포천 일동면 청계산(849M), 원통산(567.3M), 형등사가 있는 운악산(935.5M), 진접에서 이동면 가는 47번 도로 운학힐사이드 휴게소가 있는 고개를 넘고 다시 포천에서 가평 현리로 이어지는 54번 도로인 굴고개를 넘어 수원산, 포천 내촌면 국사봉(546.9M), 큰넉 작은넉 고개를 넘고 소흘읍 고모리에 있는 죽엽산(600.6M), 광능의 주산인 운악산(234.8M), 광릉수목원 뒤 용암산(476.9M),을 지나 의정부에서 포천가는 43번 도로 축석령을 가로질러 백석이 고개까지 온다.

여기서 한북정맥은 서남 방향으로 의정부를 거쳐 도봉산으로 향하게 하고, 한맥은 다시 분맥하여 역으로 돌아 북으로 향하니 천보산맥이다. 소흘읍에서 주내가는 350번 도로 어야고개를 지나 석문령, 귀율동 마을로하여 송우리에서 덕정가는 316번도로 회암령을 넘어 회암사 주산인 천보산으로 하여 서성 묘의 주산인 해룡산(660.7M)을 특이하게 기봉하고 다시 오지재고개에서 과협한 다음 산맥은 왕방산(737.2M), 국사봉(754M),동두천에 있는 소요산(539M)으로 가서 한탄강을 만나 멈춘다. 서성 묘의 주룡은 오치재고개에서 과협 한 다음 동남으로 방향을 돌려 평지로 개장천심, 기복, 박환등 수많은 변화를 하면서 내려와 부대 건너편에 있는 현무봉을 수려 단아하게 기봉한다. 현무봉에서 중출로 내려온 용은 평지에 바짝 깔려 내려오면서 수많은 요도지각을 뻗치며 위이하면서 행룡하여 부대를 지나고 멈춘 다음 생기를 융취하여 혈을 결지한다. 묘에서 주룡을 살피면 거대한 산줄기가 앞에서부터 뒤로 한바퀴 돌아 감아주었고 주산인 해룡산은 보이지는 않지만 천보산이 뒤에서 밀어주고 있으며, 용은 험한 살기를 모두 탈살하고 들판으로 내려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같이
지각을 뻗치며 행룡하였다.

물은 포천천이 축석령 고개에서 남에서 북으로 역수하여 38도선 영평천을 만나 한탄강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 하천이 대부분 북에서 남으로 동에서 서로 흐르는 반면에 포천천은 산의 흐름을 따라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 입수도두와 선익, 순전, 혈토가 분명하게 있으며 혈 앞에서는 하수사가 우에서 좌로 감아 돌아 혈의 생기가 더 이상 앞으로 빠져나갈 수 없도록 하였다. 좌우 청룡 백호는 낮지만 마치 비단 병풍을 두른 듯 몇 겹으로 감싸 안아 주었다. 특히 청룡보다는 백호가 더 발달하여 장손보다는 지손과 여자가 더 발복할 자리다. 내백호는 혈 바로 옆의 능선이며 외백호가 야트막하게 혈을 감싸면서 43번 도로까지 나가 외수구를 만들었다. 안산은 조금 멀기는 하지만 태봉산이 봉황새 모양으로 수려하고 단정하게 있으며, 안산 뒤 조산은 층층이여려 층으로 감싸주면서 혈을 향해 있다. 보국 안의 명당은 평탄 원만하며 해룡산의 여러 골짜기에서 나온 물이 내명당에 모였는데 서류동출(西流東出)이고 구곡육수(九谷六水)가 당전취합(堂前聚合)하였다. 좌향은 계좌정향(癸坐丁向)이며 물은 우측에서 나와 좌측으로 흘러 외수구인 손사(巽巳) 방위로 파구(破口)되므로 팔십 팔향중 최고 길향인 정양향(正養向)이다. 형국은 해룡이 목이 말라 높은 산에서 물이 있는 평지로 기어 내려와 물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라 하여 해룡입수혈(海龍入水穴)이라고 한다.

조선 왕조 중기와 후기에 번창했던 달성 서씨 후손들은 지금도 사회 각계 각층에서 역할을 다하고 있지만, 천하 대명당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주변이 개발되면서 많은 손상이 되었다. 평지로 내려온 해룡의 주 능선을 파해 쳐 도로를 만들고, 주택을 짖고 특히 군부대가 들어서 주룡의 지기를 꼼짝 못하도록 누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