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기본 이론/재미풍수 이야기

포은 정몽주와 저헌 이석형 묘 (스크랩)

아베베1 2010. 11. 12. 22:35

포은 정몽주와 저헌 이석형 묘
작성자 형산 정경연     2004/08/16

첫 번째 이야기
[ 포은 정몽주와 저헌 이석형 묘 ]


[포은 정몽주와 저헌 이석형의 묘]

[산맥도]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는 연일(延日) 정씨(鄭氏)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과 연안(延安) 이씨(李氏)인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 선생의 묘가 나란히 있다. 선산(先山)에 조상을 같이 모시는 우리에게는 비록 이석형이 정몽주의 증손녀(曾孫女) 사위라고는 하지만 가문(家門)이 다른 두 사람의 묘가 한 곳에 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여기에는 전해오는 일화가 있다.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 이성계의 간곡한 회유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절개를 저버리지 않은 정몽주를 이방원은 그의 부하들을 시켜 선죽교에서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고려의 충신을 살해하고도 반역이라는 죄명으로 그의 시신을 아무렇게나 저자 거리에 내다 버리고 시신을 치우지 못하게 하였다. 이를 본 송악산 스님들이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풍덕군(豊德郡)에 묘를 만들어 주었는데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정몽주가 죽자 살아남은 고려의 충신들을 모두 숙청한 이성계는 3개월만에 조선왕조의 태조(太祖)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왕자들의 왕위 다툼으로 정국은 혼란해졌는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권력 장악에 성공하였다.
이성계는 자식들 사이에 살육전이 벌어지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선덕왕후 강씨의 소생 방번과 방석이 죽자 이방원에 정나미가 떨어져 고향 함흥으로 가 칩거하면서 노여움에 치를 떨었다. 정종(正宗)에 이어 왕위에 오른 태종(太宗) 이방원은 그의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왕권강화와 흩어진 민심수습에 나섰다. 그는 왕권강화의 한 방법으로 충성심을 신하들에게 강조하기 위해 충절을 지킨 정몽주를 복권시키기로 했다.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그의 묘를 고향인 영천(永川)에 이장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후손과 많은 유림의 선비가 뒤따르는 가운데 유골을 상여에 메고 고향 영천으로 가는 도중 지금의 용인시 수지읍을 지날 때였다. 상여 행렬의 맨 앞장에 세운 명정(銘旌)이 갑자기 불어온 회오리바람에 의해서 날아가기 시작했다. 명정을 잡기 위해 쫒아 가보면 명정은 잡힐 듯 하면서 다시 날아가기를 반복하면서 지금의 이석형 묘가 있는 자리에 떨어졌다. 명정이 떨어진 곳을 이상하게 여긴 후손이 지관을 불러 물어보니 이 자리가 보기 드문 명당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늘이 충신을 알아보고 자리를 잡아 주었구나" 감탄하면서 경북 영천까지 갈 필요 없이 이 곳에다 안장(安葬)하기로 하고 광중(壙中)을 팠다. 그러나 날이 저물어 하관(下棺)은 할 수가 없었다. 몇몇 인부들에게 광중을 지키도록 하고 먼 행렬에 피곤한 후손들과 유림의 제자들은 곤한 잠이 들었는데 한 사람 잠을 자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정몽주의 증손녀였다. 이곳이 명당이라는 말을 듣고 친정집 보다는 시댁과 자신의 자손들을 위해서 자리에 욕심을 냈다. 숙소에서 살짝 빠져 나온 그녀는 독한 술과 맛있는 안주를 준비하여 광중을 지키는 인부들에게 가 고생이 많다며 짐짓 위로하는 척 하면서 술과 안주를 권하였다. 얼마 안 가서 독한 술을 마신 인부들은 곤한 잠에 골아 떨어졌고 정씨 부인은 묘 밑에 있는 연못에서 물을 길어다 밤새 부었다. 다음날 정몽주 선생을 모시려고 보니 광중에는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닌가. "명당인 줄 알았더니 물이 나는구나" "잘못 본 것이로구나" 하고 탄식하면서 옆 언덕을 보니 그곳도 명당이었다. 그래서 정몽주 선생을 그 곳에다 모시었다.

후에 정씨 부인은 이석형 선생이 돌아가시자 명정이 떨어진 그 자리에다 장사 지냈고 자신도 그 자리에 들어갔다. 이와 같은 일화가 말해주듯이 포은 선생의 묘보다는 저헌 선생의 묘가 더 큰 혈(穴)임에는 틀림없다. 용혈을 보아도 그렇지만 포은의 후손보다는 저헌의 후손들이 더욱 번창하였다. 광산 김씨(光山金氏) 달성 서씨(達城徐氏)와 함께 조선의 삼대 명문중의 하나가 연안 이씨(延安李氏)이며 이석형의 후손들이다. 이석형의 4대 손자부터 발복 하여 우리 역사상 한문학의 대가이며 선조 때 대제학(大提學)을 한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를 비롯하여 그의 아들인 이명한(李明漢)이 인조 때 대제학을 했고 손자 이일상(李一相)이 효종 때 대제학(大提學)을 하는 등 3대에 걸쳐 대제학을 배출하였다. 또 이석형의 5대손 이귀(李貴)는 인조반정의 공을 세워 연안이씨(延安李氏) 가문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하여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이 되었고 그의 아들 이시백(李時白)은 효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사도세자의 스승이었던 이후(李厚)는 좌의정, 이천보(李天輔)는 영조 때 영의정, 이복원(李福源)과 그의 아들 이만수(李晩秀)는 영조 때 대제학을 지내 2대가 연속 대제학을 하였고 이복원 큰아들 이시수(李時秀)는 영의정을 지내는 등 연안 이씨는 조선조에 들어와서 총 250명의 문과급제를 배출했고 정승 8명, 대제학 8명, 청백리 7명을 각각 배출하여 조선의 명문으로 위세를 떨쳤다. 반면에 포은의 후손들은 현종 때 우의정에 오른 9대손 정유성(鄭維城)과 판서 2명이 있었을 뿐 크게 벼슬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포은의 후손들은 포은의 손자라 하여 극형을 받을 것도 형이 감형되는 등 조선왕조의 회유책으로 배려를 받았으나 오히려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에만 힘쓰는 가풍을 만들어 왔다.

같은 장소에 비슷한 형태로 있는 두 묘가 이처럼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 의문점은 묘 뒤를 가보면 금방 풀린다. 혈을 결지(結地)하기 위해서는 생기(生氣)를 공급해주는 용이 좋아야 하고 생기를 저장하는 입수도두(入首倒頭)가 있어야 한다.

입수도두는 승금(乘金) 또는 구(毬)라고도 하는데 혈 뒤의 볼록한 흙덩어리로 용에서 받은 생기를 정축(渟 )해놓았다가 혈에서 필요한 만큼의 생기를 조절하여 공급해주는 역할을 한다.
생기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에 약간 둥그렇고 단단하게 뭉쳐진 것이 특징이며 입수도두가 크면 그 만큼 생기를 많이 저장하고 있기 때문에 혈의 발복도 크고 오래간다. 정몽주 묘는 입수도두가 뚜렷하지 않은 반면에 이석형 묘는 크고 단단하며 아름다워 마치 정랑 주머니 같다. 두 묘의 차이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입수도두가 크다는 것은 그 만큼 용의 기세가 크다는 것을 나타낸다. 포은 묘의 입수룡은 주룡(主龍)에서 옆으로 거의 직각에 가깝게 내려와 힘이 약한 반면에 이석형 묘의 입수룡은 힘을 몰아 휘어져 내려 왔기 때문에 힘이 강하고 기세가 있어 보인다. 이것을 권투에 비교하면 정몽주 묘의 입수룡이 견제를 위하여 앞으로 뻗은 주먹과 같다면 이석형 묘의 입수룡은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휘어 치는 주먹과 같이 힘이 실려 있다.
정몽주 묘의 입수룡을 묘 바로 뒤에서 살펴보면 마치 뱀이 물위를 좌우로 몸을 흔들면서 구불구불하게 오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용의 위이( )라고 하는데 혈을 결지 할 수 있는 용이다. 그러나 용맥(龍脈)이 땅위로 드러날 만큼 얕게 내려왔는데 너무 깊게 파서 묘를 쓴 것 같다. 장사(葬事)는 유골을 생기 위에 모셔야 하는 것인데 생기 밑까지 깊게 파면 파혈(破穴)될 우려가 있다. 광중을 팔 때 혈토(穴土)가 나오면 멈추고 혈토 위에 유골을 모시는 것이 풍수지리의 원칙이다. 그런데 왕실(王室)를 비롯해서 일부 가문에서는 10자(약 3미터)를 파야 일자(一字)모양인 지표면과 지하면이 십자(十字)와 합쳐져 왕자(王字)가 되어 지기(地氣)를 제대로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정몽주 묘는 입수룡과 비교하여 너무 깊게 묘를 써서 파혈 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생겼지만 혈토(穴土)를 확인하기 위해 광중을 파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두 묘의 차이는 순전(脣氈)과 하수사(下水砂)에서도 발견 할 수 있다. 순전(脣氈)은 혈 앞에 약간 두툼하게 흙이 뭉쳐져 있는 것으로 사람에게 비유하면 턱과 같은 것이다. 순전은 혈을 아래에서 지탱해주고 혈의 생기가 앞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 두 산소 모두 순전이 있는데 포은 묘의 순전은 사람이 많이 다녀서 약간 파이고 빗물에 씻겨 나간 흔적이 있는데 이것은 혈을 아래에서 지탱해주는 힘이 약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반면에 저헌 묘의 순전은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함은 물론 순전 밑에 혈장을 지탱해주기 위한 작은 요석이 여러개 박혀있다. 요석이 있는 것은 용의 기세가 강하기 때문에 순전이 혈의 생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흙만으로는 감당 할 수 없어 자연적으로 돌이 박힌 것이다. 화복론(禍福論)을 말할 때 요석 하나에 정승과 판서가 하나라고 말하는데 그만큼 귀한 귀석(貴石)이며 기세 왕성한 용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수사(下水砂)는 혈장을 지탱해주고 용맥을 보호하면서 따라온 원진수(元辰水)가 직거(直去)하지 않고 역수(逆水)하게 함으로서 혈의 생기가 흩어지지 않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 두묘 모두 하수사가 잘 발달되어 우측에서 좌측으로 혈장을 감아 주면서 연못 있는 곳까지 뻗어 나갔는데 이석형 묘의 하수사는 끝을 왼쪽으로 살짝 돌려 오른쪽에서 나오는 물을 걷어주는 반면에 정몽주 묘의 하수사는 물 흐르는 방향대로 오른쪽으로 향해 있어 물을 완전히 걷어주지 못하고 있다. 하수사가 물을 걷어 주어야 양(陽)인 물과 음(陰)인 용혈(龍穴)이 음양조화를 이루어 생기를 응결(凝結)할 수 있는 것으로 정몽주 묘도 하수사 아래 부분에 작은 능선이 여러개 나와 물을 걷어주므로 음양조화는 충분히 되고 있지만 이석형 묘가 더욱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두 묘에 서있어 보면 이석형 묘가 더 안정감이 있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혈을 보호 해주는 청룡과 백호 때문이다. 청룡 백호는 혈을 감싸 보호해주는 능선으로 두 묘가 모두 같은 장소에 있기 때문에 차이점이 없을 것 같아도 그렇지가 않다. 외청룡 외백호는 같이 보국(保局)을 감싸주고 있지만 내청룡 내백호는 다르다. 포은 묘가 있는 능선은 바로 저헌 묘의 내백호가 되어 혈을 완전하게 끌어 안아준 반면에 저헌 묘가 있는 능선은 포은묘의 내청룡으로 완전하게 감싸주지 못하고 연목 쪽으로 향했다.

산 따라 흐르는 물도 마찬가지로 이석형 묘는 두 묘 사이에서 나오는 우측의 물이 가깝게 혈을 감싸주고 연못 쪽으로 흘러간 반면에 정몽주 묘는 우측의 물이 이석형 묘에 비해 멀리서 감싸주고 있다. 이 물은 이석형 묘를 이중으로 감싸주는 역할도 한다.

이상과 같이 두 묘를 비교해보면 차이가 있지만 주룡(主龍), 보국(保局), 파구(破口), 안산(案山), 조산(朝山)등은 모두 똑같다. 주룡은 우리 나라 모든 산의 원조(元祖)인 백두산(白頭山)에서 출발한 백두대간(白頭大幹)이 지리산 천왕봉까지 가는 도중에 속리산에서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으로 분맥(分脈)하고 이 용맥은 다시 칠현산(七賢山)에서 한남정맥(漢南正脈)으로 안성 동쪽 백운산을 지나 구봉산과 용인 동남쪽 부아산을 거쳐 용인 정신병원 뒤 보개산(寶蓋山)을 만든다. 여기서 한남정맥은 서쪽 수원 광교산으로 해서 김포까지 나가고, 보개산에서 갈라져 나온 다른 한 맥은 영동고속도로 용인 에버랜드 입구 오른쪽에 있는 석성산(石城山, 471.5M)을 들어올리는데 두 묘의 태조산(太祖山)이 된다.

석성산에서 내려온 용이 작고개에서 크게 과협(過峽)한 다음 제일성봉(第一星峰)으로 할미성(349.3M)이 있는 봉우리를 기봉하고 다시 에버랜드 뒷산으로 하여 무명산(無名山)인 456M, 457.4M, 405M 산을 만들면서 369M 봉우리까지 온다. 주룡은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고 다시 한번 안골고개에서 크게 과협을 한 다음 문수산(文殊山, 222M)을 수려하고 단아하게 기봉(起峰)하니 이 묘의 소조산(小祖山)이며 주산(主山)이다.

풍수지리에서 용맥이 태조산에서 낙맥(落脈)한 후 제일 처음 기봉(起峰)한 산을 제일성봉(第一星峰)이라 하는데 제일성봉의 모양에 따라 앞으로 행룡(行龍)할 용의 근본 오행(五行) 정신이 결정된다. 태조산을 출발한 주룡은 제일성봉에서 오행 정신을 부여받은 다음 기(氣)를 정제 순화시키기 위해서 과협(過峽), 기복(起伏), 박환(剝換), 개장(開帳), 천심(穿心)등 수많은 변화 과정을 거치면서 수백리 혹은 수십리를 행룡하는데 결혈(結穴)하고자 할 때에는 제일성과 똑 같은 형태와 정신을 가진 산을 기봉(起峰)한다.
이를 소조산(小祖山) 또는 주산(主山)이라고 하며 제일성과 혈(穴)을 상응(相應)시킨다 하여 응성(應星)이라고도 하는데 주룡의 정신을 뚜렷하게 나타내는 산이다. 이 주산이 탐랑(貪狼) 목성(木星)이면 유두혈(乳頭穴)을 결지하고, 거문(巨門) 토성(土星)은 겸차혈(鉗 穴), 녹존(祿存) 토성(土星)은 겸차혈(鉗 穴) 또는 소치혈(梳齒穴), 문곡(文曲) 수성(水星)은 장심혈(掌心穴), 염정(廉貞) 화성(火星)은 여벽혈( 壁穴), 무곡(武曲) 금성(金星)은 원와혈(圓窩穴), 파군(破軍) 금성(金星)은 첨창혈(尖槍穴), 좌보(左輔) 토성(土星)은 연소혈(燕巢穴)이나 괘등혈(掛燈穴), 우필(右弼) 금성(金星)은 은맥으로 행룡하여 와중미돌혈(窩中微突穴)을 결지하는 것이 원칙이다.

주산인 문수산이 제일성봉인 할미성이 있는 봉우리와 똑같은 모양으로 탐랑 목성이기 때문에 중출맥(中出脈)으로 출맥한 주룡은 행룡이 끝나는 용진처(龍盡處)에서 유두혈을 결지해야 진혈이 된다. 문수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는 마치 암소가 누워있는 모습처럼 보이는 와우형(臥牛形)이고, 혈은 암소의 기운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인 유방 자리에 쌍유(雙乳)로 나란히 있는데 바로 정몽주와 이석형 묘다.

백호는 주산에서 개장한 능선이 혈을 끌어 안 듯 감싸주면서 혈 앞을 지나 신도비가 있는 곳까지 내려 왔고, 청룡은 주룡이 두 입수룡을 보내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회전하여 백호 끝과 만나니 이곳이 바로 수구(水口)가 된다. 청룡 백호는 마치 사람이 두 팔을 벌려 포옹하듯 감싸 안고 있으며 두 팔 사이의 공간은 평탄 원만한 명당으로 물이 흘러가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이니 재물이 풍족할 명당이다.
청룡 백호 끝이 만나는 수구에는 귀사(龜蛇) 한문( 門)이 있어 유속을 느리게 하고 수구를 불능통주(不能通舟)로 관쇄(關鎖)하고 있어 백세부귀(百世富貴)를 기약 할 수 있는 대혈(大穴)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안산(案山)이 특출하게 뛰어난 산이 없는 것이 흠이기는 하지만 조산(朝山)은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과 검단산으로 향해 가는 능선이 중첩으로 혈을 향해 열립(列立)하고 있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바람을 막아주고 명당 안의 보국을 안정시켜 혈의 생기를 보호해주고 있다.

묘에서 나경패철의 8층 천반봉침으로 수구(水口)의 방위를 측정하면 신술(辛戌)이다. 좌향(坐向)은 손좌건향(巽坐乾向)으로 물이 우측에서 나와 좌측으로 흘러가므로 우수도좌(右水倒左)하여 팔십 팔향법(八十八向法)으로 부귀왕정(富貴旺丁)하는 자생향(自生向)이다.

좌향을 결정하는데는 수많은 이법(理法)이 있다. 그 중에서 우주의 순환과정인 12 포태법(胞胎法)을 이용한 팔십 팔향법과 하늘의 북두칠성과 좌보성(左輔星), 우필성(右弼星)을 합한 구성(九星)이 지상의 산천과 인간의 길흉화복을 지배한다고 보는 구성법(九星法)이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법론은 통일성이 없이 길흉화복이 제각각 이어서 어느 법이 맞고 어느 법이 틀리는지 현재까지 알 수 없는 실정이다. 혈을 둘러싼 지리 여건과 지관에 따라 이법을 달리하는데 두 묘는 모두 팔십 팔향법을 이용하여 좌향을 결정하였다.

정몽주(鄭夢周)
고려 충숙왕 6년(1337년) - 고려 공양왕 4년(1392년)

고려말의 학자이며 충신으로 초명은 몽란(夢蘭), 몽룡(夢龍)이고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으로 본관은 연일(延日)로 경북 영천(永川) 출신이다. 공민왕 9년(1360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 수찬 등을 거쳐 1363년 종사관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가하였고, 우왕 2년(1376년) 성균대사성으로 이인임등이 주장하는 배면친원(排明親元)의 외교정책을 반대하다가 언양에 유배되고 이듬해 풀려 일본에 사신으로 가 왜구의 단속을 청하고 왜구에게 잡혀간 고려 백성 수백 명을 귀국 시켰다. 1383년 이성계와 함경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토벌하고 정당문학에 올라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대명(對明)국교를 세우는데 큰공을 세웠다. 당시 이성계의 위세가 날로 커서 조준, 남은 정도전등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숙청할 기회를 노리던 중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나중 나갔던 이성계가 낙마하여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이방원에 의해서 실패하였다.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는 도중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에게 격살되었다.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불교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유학을 보급했고, 성리학에 뛰어난 동방이학(東方理學)으로 추앙되었다. 고려의 혼란한 법질서를 바로잡고 외교정책과 군사정책에도 관여하여 기울어지는 국운을 바로 잡고자 하였으나 이성계 등의 신흥세력에 꺾였다.

시문에 능하여 시조 단심가 이외에도 많은 한시가 전하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의 한 사람으로서 조선조 태종1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翼陽府院郡)에 추봉되었으며 중종 때 문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이석형(李石亨)
조선 태종 15년(1415년) - 성종 8년(1477년)

조선 세조 때의 명신으로 자는 백옥(伯玉)이며 호는 저헌(樗軒)이고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연안 이씨의 시조는 이무(李茂)다. 이무는 중국 당나라의 중랑장(中郞將)으로 신라 무열왕 7년 소정방의 부장으로 참전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다. 그는 황해도 해주 근처인 연안에 터를 잡아 세거하면서 후손들이 연안을 관향(貫鄕)으로 삼은 것이다.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진 이석형은 조선초 연안이씨의 번성을 가져온 중흥조다. 그는 세종23년 문과에 장원한 이후로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6대를 섬긴명신이었다. 문종 1년 직제학(直提學)에 올랐고, 춘추관기주관을 겸직하면서 정인지 등과 고려사(高麗史), 치평요람(治平要覽)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홍경손과 함께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을 편찬하였다.
세조 즉위 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었고, 세조의 총애를 받아 한성부윤에 올랐다. 팔도체찰사(八道體察使)로 나가 지방의 호패법 시행을 감찰하였고, 세조가 죽은 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지중추부사(知中 樞府事)를 거쳐 예종 1년 정일품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 성종 1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고 다음해 좌리공신(佐理功臣)4등으로 연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