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 관련 금석문등 /우리나라 족보 이야기

의령남씨 족보서 (약천집) 의령본관인 성씨

아베베1 2010. 6. 30. 14:50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족보 서(族譜序)

남씨(南氏)가 성을 얻은 것은 처음 신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唐)나라 천보(天寶) 14년에 안녹산(安祿山)의 난리가 일어나자 현종(玄宗)이 촉(蜀)으로 파천하였는데, 이때 수행하던 신하 김공(金公) 휘 충(忠)이 안렴사(按廉使)로서 사명(使命)을 받들고 일본에 갔다가 표류하여 신라의 예주(禮州)에 이르니, 바로 지금의 영해(寧海)이다. 공은 말하기를, “중국과 외국이 똑같은 천하이니, 황제의 땅 아님이 없다. 이곳에 살기를 원한다.” 하니, 경덕왕(景德王)은 천자에게 아뢰고 공이 우리나라에 살려는 소원을 허락해 주었으며, 중국의 여남(汝南) 사람이라 하여 남씨(南氏) 성을 하사하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영의공(英毅公)에 봉하였는데, 영양(英陽)에 거처를 정하여 그대로 본적(本籍)을 받았다고 한다.
뒤에 고려조에 이르러 삼 형제가 있었으니, 군기시 주부동정(軍器寺主簿同正) 휘 홍보(洪甫), 추밀원 직부사(樞密院直副使) 휘 군보(君甫), 고성군(固城君) 휘 광보(匡甫)이다. 홍보는 그대로 영양을 관향으로 삼았고 군보는 의령(宜寧)으로 관향을 옮겼으며 광보는 고성(固城)으로 관향을 옮겨서 족보가 비로소 셋으로 나누어졌다. 군보의 후손 휘 재(在)는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을 보좌하여 개국 공신이 되고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영의정으로 충경(忠景)이라는 시호를 받고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이로부터 의령 남씨가 번창하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의 현달한 자들은 대부분 그 후손이다.
구보(舊譜)와 신보(新譜) 두 족보가 있는데, 연대가 아득히 멀어서 기재한 내용이 매우 소략하다. 고(故) 판서 선(銑)이 자료를 모으고 수정하였으나 또한 미비한 점이 많았는데, 지난번에 고 참판 익훈(益熏)이 여러 종인(宗人)들에게 묻고 보태어서 권질(卷帙)을 만든 다음 북도(北道 함경도)의 관찰사가 되어 목판에 새겨서 널리 인쇄하여 집안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하여 먼 후손과 미천한 후손들로 하여금 모두 성씨를 얻게 된 유래와 파가 나뉜 까닭을 알게 하였으니,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과 종족을 수합하는 정의(情誼)가 부지런하고 또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다.
이제 족보에 기록된 것을 보면 본적을 받은 뒤로부터 관향을 옮길 때까지가 500여 년이 되는데 보첩(譜牒)에 기록된 것은 겨우 6대뿐이니, 유실된 것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천보 연간에 현종이 촉으로 파천할 때에 수행한 신하로서 사명을 받고 일본에 갔다가 표류하여 신라에 온 사실은 《당서(唐書)》와 우리나라 역사책에 모두 기록된 것이 없으며 안렴사라는 직함은 또 천보 연간에 있었던 벼슬이 아니니, 이는 모두 후세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한 것을 들은 대로 기록하여 고증할 수가 없다. 지금에 와서는 오직 밀직공(密直公) 이상은 의심스러운 내용을 의심스러운 대로 전하고 밀직공 이하는 믿을 만한 내용을 사실대로 전할 뿐이다.
민마보(閔馬父)가 《시경(詩經)》의 내용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일컫기를 ‘옛날부터〔自古〕’라고 하였고, 옛날을 ‘재석(在昔)’이라 하였고, 예전을 ‘선민(先民)’이라 하였으니, 이는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서이다.” 하였다. 이제 의심스러운 것과 믿을 수 있는 것이 유래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어찌 감히 사실을 없앨 수 있겠는가.
내가 들으니 성주(成周)의 제도에 성(姓)을 받은 것을 관장하기 위하여 사상(司商)이라는 관직이 있었고, 세계(世系)를 정하기 위하여 소사(小史)라는 직책이 있었으니, 성씨와 세계가 국가의 정치에 무슨 상관이 있기에 관청을 만들고 관직을 세우기를 이와 같이 거듭하고 또 많이 하였단 말인가.
내가 짐작건대 천하는 한 나라를 미루어 넓힌 것이요, 한 나라는 한 집안을 미루어 넓힌 것이요, 한 집안은 한 사람을 미루어 넓힌 것이다. 지금 한 사람의 몸이 성씨가 있어 그 적(籍)을 나타내고, 집안이 있어 그 종(宗)을 세우고, 족보가 있어 그 대수(代數)를 기록하여, 계통이 후세에 밝아져서 유풍이 그대로 보존되고, 친애하는 마음이 먼 선조에까지 미쳐서 남긴 가르침이 없어지지 않게 한다면 이는 한 사람의 교화가 한 집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집안으로부터 나라에 이르고 나라로부터 천하에 이르러 교화가 점점 이루어짐이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이니, 성왕(聖王)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성씨와 세계를 소중히 여긴 것이 어찌 아무 이유가 없겠는가. 이와 같기 때문에 족보를 만들어서 뿌리를 상고하고 계파를 분별함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니, 이는 선조의 덕을 높이고 어짊을 본받아서 낳아 주신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영의공(英毅公)은 타국에서 온 나그네 신하로 몸을 삼가 후손을 도와서 끝내 해동의 명문거족(名門巨族)을 이루었고, 충경공(忠景公)은 나라가 혼란할 때를 당해서 개국하는 시기에 경륜하여 마침내 대려(帶礪)의 훌륭한 공신이 되었으니, 이는 실로 후손들이 그 공렬(功烈)을 잇고 그 발자취를 계승해서 무궁한 후세에 이르도록 실추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제 만약 단지 세차(世次)를 드러내고 벼슬과 지위를 기록해서 집안의 높고 낮음을 비교하고 가문의 갑을(甲乙)을 정하려고만 한다면 어찌 오늘날 이 족보를 편찬하는 본의이겠는가.
익훈(益熏)의 중씨(仲氏) 치훈(致熏)이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있을 때에 바닷길로 이 목판본을 수송해 갔고, 해임하여 돌아오게 되자 또 밀직부군(密直府君)의 묘소가 있는 의령으로 판본을 옮겨 왔으며, 막내인 지훈(至熏)은 현재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있으면서 판각을 보관할 집을 경영하여 오래도록 보관할 계획을 하고 있다.
숭정(崇禎) 기원(紀元) 후 주갑(周甲)이 되는 정축년(1697, 숙종 23) 8월에 후손인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구만(九萬)은 삼가 쓰다.

[주D-001]민마보(閔馬父)가 …… 하였다 : 민마보는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대부(大夫)로 민자마(閔子馬)라고 칭하기도 하며 선민(先民)은 옛날의 성인(聖人)을 이른다. 《시경(詩經)》 상송(商頌) 나(那)에 “예로부터 옛적에 선민들이 공경한 일을 하였으니, 아침저녁으로 온화하고 공손하여 일을 집행함에 공경하였다.〔自古在昔 先民有作 溫恭朝夕 執事有恪〕” 하였는바, 민마보는 이 시를 인용하여 옛 성인들은 이 공경하는 도를 자신이 처음으로 했다고 하지 않고 ‘자고(自古)’니 ‘재석(在昔)’이니 ‘선민(先民)’이라고 하여 반드시 옛날에 근본하였으니, 이는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國語 卷5 魯語》
[주D-002]대려(帶礪) : 나라와 함께 복록을 누릴 공신이란 뜻으로 흔히 개국 공신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평정한 뒤 공신들을 봉작(封爵)하면서 맹세하기를, “황하가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닳아도 나라가 길이 보존되어 후손에게까지 미치게 하겠다.〔使河如帶 泰山若礪 國以永寧 爰及苗裔〕”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史記 卷18 高祖功臣侯者年表》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족보 서(族譜序)



[주D-001]민마보(閔馬父)가 …… 하였다 : 민마보는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대부(大夫)로 민자마(閔子馬)라고 칭하기도 하며 선민(先民)은 옛날의 성인(聖人)을 이른다. 《시경(詩經)》 상송(商頌) 나(那)에 “예로부터 옛적에 선민들이 공경한 일을 하였으니, 아침저녁으로 온화하고 공손하여 일을 집행함에 공경하였다.〔自古在昔 先民有作 溫恭朝夕 執事有恪〕” 하였는바, 민마보는 이 시를 인용하여 옛 성인들은 이 공경하는 도를 자신이 처음으로 했다고 하지 않고 ‘자고(自古)’니 ‘재석(在昔)’이니 ‘선민(先民)’이라고 하여 반드시 옛날에 근본하였으니, 이는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國語 卷5 魯語》

남씨(南氏)가 성을 얻은 것은 처음 신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唐)나라 천보(天寶) 14년에 안녹산(安祿山)의 난리가 일어나자 현종(玄宗)이 촉(蜀)으로 파천하였는데, 이때 수행하던 신하 김공(金公) 휘 충(忠)이 안렴사(按廉使)로서 사명(使命)을 받들고 일본에 갔다가 표류하여 신라의 예주(禮州)에 이르니, 바로 지금의 영해(寧海)이다. 공은 말하기를, “중국과 외국이 똑같은 천하이니, 황제의 땅 아님이 없다. 이곳에 살기를 원한다.” 하니, 경덕왕(景德王)은 천자에게 아뢰고 공이 우리나라에 살려는 소원을 허락해 주었으며, 중국의 여남(汝南) 사람이라 하여 남씨(南氏) 성을 하사하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영의공(英毅公)에 봉하였는데, 영양(英陽)에 거처를 정하여 그대로 본적(本籍)을 받았다고 한다.
뒤에 고려조에 이르러 삼 형제가 있었으니, 군기시 주부동정(軍器寺主簿同正) 휘 홍보(洪甫), 추밀원 직부사(樞密院直副使) 휘 군보(君甫), 고성군(固城君) 휘 광보(匡甫)이다. 홍보는 그대로 영양을 관향으로 삼았고 군보는 의령(宜寧)으로 관향을 옮겼으며 광보는 고성(固城)으로 관향을 옮겨서 족보가 비로소 셋으로 나누어졌다. 군보의 후손 휘 재(在)는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을 보좌하여 개국 공신이 되고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영의정으로 충경(忠景)이라는 시호를 받고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이로부터 의령 남씨가 번창하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의 현달한 자들은 대부분 그 후손이다.
구보(舊譜)와 신보(新譜) 두 족보가 있는데, 연대가 아득히 멀어서 기재한 내용이 매우 소략하다. 고(故) 판서 선(銑)이 자료를 모으고 수정하였으나 또한 미비한 점이 많았는데, 지난번에 고 참판 익훈(益熏)이 여러 종인(宗人)들에게 묻고 보태어서 권질(卷帙)을 만든 다음 북도(北道 함경도)의 관찰사가 되어 목판에 새겨서 널리 인쇄하여 집안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하여 먼 후손과 미천한 후손들로 하여금 모두 성씨를 얻게 된 유래와 파가 나뉜 까닭을 알게 하였으니,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과 종족을 수합하는 정의(情誼)가 부지런하고 또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다.
이제 족보에 기록된 것을 보면 본적을 받은 뒤로부터 관향을 옮길 때까지가 500여 년이 되는데 보첩(譜牒)에 기록된 것은 겨우 6대뿐이니, 유실된 것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천보 연간에 현종이 촉으로 파천할 때에 수행한 신하로서 사명을 받고 일본에 갔다가 표류하여 신라에 온 사실은 《당서(唐書)》와 우리나라 역사책에 모두 기록된 것이 없으며 안렴사라는 직함은 또 천보 연간에 있었던 벼슬이 아니니, 이는 모두 후세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한 것을 들은 대로 기록하여 고증할 수가 없다. 지금에 와서는 오직 밀직공(密直公) 이상은 의심스러운 내용을 의심스러운 대로 전하고 밀직공 이하는 믿을 만한 내용을 사실대로 전할 뿐이다.
민마보(閔馬父)가 《시경(詩經)》의 내용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일컫기를 ‘옛날부터〔自古〕’라고 하였고, 옛날을 ‘재석(在昔)’이라 하였고, 예전을 ‘선민(先民)’이라 하였으니, 이는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서이다.” 하였다. 이제 의심스러운 것과 믿을 수 있는 것이 유래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어찌 감히 사실을 없앨 수 있겠는가.
내가 들으니 성주(成周)의 제도에 성(姓)을 받은 것을 관장하기 위하여 사상(司商)이라는 관직이 있었고, 세계(世系)를 정하기 위하여 소사(小史)라는 직책이 있었으니, 성씨와 세계가 국가의 정치에 무슨 상관이 있기에 관청을 만들고 관직을 세우기를 이와 같이 거듭하고 또 많이 하였단 말인가.
내가 짐작건대 천하는 한 나라를 미루어 넓힌 것이요, 한 나라는 한 집안을 미루어 넓힌 것이요, 한 집안은 한 사람을 미루어 넓힌 것이다. 지금 한 사람의 몸이 성씨가 있어 그 적(籍)을 나타내고, 집안이 있어 그 종(宗)을 세우고, 족보가 있어 그 대수(代數)를 기록하여, 계통이 후세에 밝아져서 유풍이 그대로 보존되고, 친애하는 마음이 먼 선조에까지 미쳐서 남긴 가르침이 없어지지 않게 한다면 이는 한 사람의 교화가 한 집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집안으로부터 나라에 이르고 나라로부터 천하에 이르러 교화가 점점 이루어짐이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이니, 성왕(聖王)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성씨와 세계를 소중히 여긴 것이 어찌 아무 이유가 없겠는가. 이와 같기 때문에 족보를 만들어서 뿌리를 상고하고 계파를 분별함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니, 이는 선조의 덕을 높이고 어짊을 본받아서 낳아 주신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영의공(英毅公)은 타국에서 온 나그네 신하로 몸을 삼가 후손을 도와서 끝내 해동의 명문거족(名門巨族)을 이루었고, 충경공(忠景公)은 나라가 혼란할 때를 당해서 개국하는 시기에 경륜하여 마침내 대려(帶礪)의 훌륭한 공신이 되었으니, 이는 실로 후손들이 그 공렬(功烈)을 잇고 그 발자취를 계승해서 무궁한 후세에 이르도록 실추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제 만약 단지 세차(世次)를 드러내고 벼슬과 지위를 기록해서 집안의 높고 낮음을 비교하고 가문의 갑을(甲乙)을 정하려고만 한다면 어찌 오늘날 이 족보를 편찬하는 본의이겠는가.
익훈(益熏)의 중씨(仲氏) 치훈(致熏)이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있을 때에 바닷길로 이 목판본을 수송해 갔고, 해임하여 돌아오게 되자 또 밀직부군(密直府君)의 묘소가 있는 의령으로 판본을 옮겨 왔으며, 막내인 지훈(至熏)은 현재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있으면서 판각을 보관할 집을 경영하여 오래도록 보관할 계획을 하고 있다.
숭정(崇禎) 기원(紀元) 후 주갑(周甲)이 되는 정축년(1697, 숙종 23) 8월에 후손인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구만(九萬)은 삼가 쓰다.

[주D-002]대려(帶礪) : 나라와 함께 복록을 누릴 공신이란 뜻으로 흔히 개국 공신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평정한 뒤 공신들을 봉작(封爵)하면서 맹세하기를, “황하가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닳아도 나라가 길이 보존되어 후손에게까지 미치게 하겠다.〔使河如帶 泰山若礪 國以永寧 爰及苗裔〕”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史記 卷18 高祖功臣侯者年表》
 
圭齋遺藁卷四 宜寧南秉哲子明
 
族譜重刊序 a_316_621a


南氏本姓金。中國汝南人。其先不知也。鼻祖東使。始得姓爲南氏。而史傳闕然無可攷。後數世。系牒又缺畧而失其傳。至樞密院直副使。三分籍英陽,宜寧,固城。而宜寧最盛。自是以降。世系族派。乃可知也。舊譜刊於英宗戊寅。至于今九十有一年。若子若孫。益繁昌。其麗百千。京鄕宗族。懼其愈久而忘也。相與收牒補編。合爲畧干卷。祖先之名德閥閱。子姓之內外姻屬具載焉。譜旣成。屬序於不肖曰。昔雷淵文淸公先生。實序舊譜。子其後也。盍一言以述之。不肖固不敢以不文辭。竊惟系譜之作。所以尊祖德而垂宗法也。南氏自古多君子。盖始於新羅。歷高麗至本朝千有餘載。以淸族名於世。豈非以祖德宗法。可法於天下後世也歟。系譜之續編。推原本始。聯合親疎。其尊祖收族。庶乎無愧於古之君子。然君子處世。或仕於朝。或隱於野。顯晦有不同。而舊譜原序。致勉於成周功德之世。興感於正學盛衰之誠。其意遠矣。俾後人能隨所遇而處其宜。則君子之道。豈外是哉。要其所以爲淸族。繇於尊祖收族。不忘先訓。而觀於是譜。始焉闕疑。中而紀畧。終亦無溢辭。又深得古史世表之遺意。皆可書也。於是乎書。以爲南氏家法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세승 서(世乘序)

청양(靑陽)의 사군(使君) 남반 유안(南磐幼安)은 바로 나의 10대조인 충경공(忠景公)의 11대 종손이다. 하루는 그가 손수 기록한 가승(家乘)을 나에게 보여 주었는데, 충간공(忠簡公) 이상은 선조가 나와 똑같았고 의령군(宜寧君) 이하는 유안(幼安)과 계파가 나뉘었다. 우리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그 선대부(先大夫 조고친)에 이르기까지 채택함에 근거가 있고 기재함에 빠뜨림이 없어서 가풍(家風)을 기술하고 세덕(世德)을 열거하였으니, 어찌 부화함과 과시를 일삼은 반악(潘岳)의 글과 육기(陸機)의 부(賦)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어려서부터 문견이 적었고 늙을수록 더욱 혼미하고 우둔해져서 선대의 모든 유문(遺文)과 고사(故事)에 대해 실로 모르는 것이 많았는데, 지금 유안이 편집한 책을 보고서 비로소 그동안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었으니, 어찌 매우 다행스럽지 않겠는가. 아, 유안은 백세토록 체천(遞遷)하지 않은 불천위(不遷位)를 모시고 있어 집안사람들이 공경히 섬기는 종손(宗孫)이 되었으니, 이 사업에서 선조에게 부끄럽지 않은 자손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이점에 대해 남모르게 감동하는 마음이 있었다.
우리 선조인 충경공과 충간공은 조선 초기에 국운이 흥왕(興旺)하여 지극히 성할 때를 당해서 조손이 연달아 정승이 되어 공적이 기상(旂常)에 기록되고 사적이 역사책에 찬란하게 빛나 우뚝이 천지에 남아 있으니, 진실로 신도비에 새겨 드러낼 필요가 없다. 그러나 후손들의 추모하는 뜻을 가지고 말한다면, 유택(幽宅)에 묘표를 세워서 단지 몇 글자를 새긴 조각돌만으로서는 너무 지나치게 검소해서 크게 걸맞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우리 후손들이 선조의 남은 음덕(蔭德)을 입고 벼슬을 이어 대대로 고관을 지내어서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있는데, 마침내 국전(國典)의 장례 법령에 있어 행할 수 있는 것을 행하지 못한 지가 이제 수백 년이 되었으니, 모든 우리 후손들이 어찌 마음에 서운함이 없지 않겠는가.
유안이 먼 선조를 추모하는 효성이 돈독하여 이미 이 가승을 지었으니, 바라건대 또 그 뜻을 미루어 우리 집안사람들을 힘써 인솔해서 힘이 미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하여 용머리에 거북 좌대(座臺)로 된 신도비를 두 선조의 묘역에 세워 무궁한 후손에게 길이 보여야 할 것이니, 이는 실로 종손이 해야 할 일이요, 또한 집안사람들이 바라는 바이다.
무인년(1698, 숙종 24) 2월 5일에 종인(宗人) 구만은 재배하고 삼가 쓰다.

[주D-001]반악(潘岳)의 …… 부(賦) : 반악과 육기(陸機)는 진(晉)나라 문장가로 육기는 《변망론(辨亡論)》과 《호사부(豪士賦)》 등을 지었고, 반악은 무제(武帝)가 친히 적전(籍田)을 갈 때에 그 일을 찬미하는 부를 지어 재명(才名)을 세상에 날렸다.
[주D-002]기상(旂常) : 《주례(周禮)》 춘관(春官) 사상(司常)에 “용의 형상을 서로 어긋나게 그린 것을 기(旂)라 하고, 해와 달을 그린 것을 상(常)이라 한다.” 하였는데, 옛날 신하 가운데 국가에 공덕이 있으면 여기에 기록하여 드러내어 밝혔다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세승 서(世乘序)

청양(靑陽)의 사군(使君) 남반 유안(南磐幼安)은 바로 나의 10대조인 충경공(忠景公)의 11대 종손이다. 하루는 그가 손수 기록한 가승(家乘)을 나에게 보여 주었는데, 충간공(忠簡公) 이상은 선조가 나와 똑같았고 의령군(宜寧君) 이하는 유안(幼安)과 계파가 나뉘었다. 우리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그 선대부(先大夫 조고친)에 이르기까지 채택함에 근거가 있고 기재함에 빠뜨림이 없어서 가풍(家風)을 기술하고 세덕(世德)을 열거하였으니, 어찌 부화함과 과시를 일삼은 반악(潘岳)의 글과 육기(陸機)의 부(賦)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어려서부터 문견이 적었고 늙을수록 더욱 혼미하고 우둔해져서 선대의 모든 유문(遺文)과 고사(故事)에 대해 실로 모르는 것이 많았는데, 지금 유안이 편집한 책을 보고서 비로소 그동안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었으니, 어찌 매우 다행스럽지 않겠는가. 아, 유안은 백세토록 체천(遞遷)하지 않은 불천위(不遷位)를 모시고 있어 집안사람들이 공경히 섬기는 종손(宗孫)이 되었으니, 이 사업에서 선조에게 부끄럽지 않은 자손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이점에 대해 남모르게 감동하는 마음이 있었다.
우리 선조인 충경공과 충간공은 조선 초기에 국운이 흥왕(興旺)하여 지극히 성할 때를 당해서 조손이 연달아 정승이 되어 공적이 기상(旂常)에 기록되고 사적이 역사책에 찬란하게 빛나 우뚝이 천지에 남아 있으니, 진실로 신도비에 새겨 드러낼 필요가 없다. 그러나 후손들의 추모하는 뜻을 가지고 말한다면, 유택(幽宅)에 묘표를 세워서 단지 몇 글자를 새긴 조각돌만으로서는 너무 지나치게 검소해서 크게 걸맞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우리 후손들이 선조의 남은 음덕(蔭德)을 입고 벼슬을 이어 대대로 고관을 지내어서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있는데, 마침내 국전(國典)의 장례 법령에 있어 행할 수 있는 것을 행하지 못한 지가 이제 수백 년이 되었으니, 모든 우리 후손들이 어찌 마음에 서운함이 없지 않겠는가.
유안이 먼 선조를 추모하는 효성이 돈독하여 이미 이 가승을 지었으니, 바라건대 또 그 뜻을 미루어 우리 집안사람들을 힘써 인솔해서 힘이 미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하여 용머리에 거북 좌대(座臺)로 된 신도비를 두 선조의 묘역에 세워 무궁한 후손에게 길이 보여야 할 것이니, 이는 실로 종손이 해야 할 일이요, 또한 집안사람들이 바라는 바이다.
무인년(1698, 숙종 24) 2월 5일에 종인(宗人) 구만은 재배하고 삼가 쓰다.

[주D-001]반악(潘岳)의 …… 부(賦) : 반악과 육기(陸機)는 진(晉)나라 문장가로 육기는 《변망론(辨亡論)》과 《호사부(豪士賦)》 등을 지었고, 반악은 무제(武帝)가 친히 적전(籍田)을 갈 때에 그 일을 찬미하는 부를 지어 재명(才名)을 세상에 날렸다.
[주D-002]기상(旂常) : 《주례(周禮)》 춘관(春官) 사상(司常)에 “용의 형상을 서로 어긋나게 그린 것을 기(旂)라 하고, 해와 달을 그린 것을 상(常)이라 한다.” 하였는데, 옛날 신하 가운데 국가에 공덕이 있으면 여기에 기록하여 드러내어 밝혔다.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14대 조고(祖考) 고려 통헌대부(通憲大夫) 추밀원 직부사(樞密院直副使) 부군 묘추지(墓追誌)

고려 때 통헌대부 추밀원 직부사를 지낸 남공(南公) 휘 군보(君甫)는 영양(英陽)에서 의령현(宜寧縣)으로 관향을 옮겨 묘소가 또한 이 고을에 있는데, 세대가 멀어서 실전(失傳)되었다가 후손들의 꿈에 나타나 잃었던 산소를 찾아서 다시 봉분하고 비석을 세워 처음 장례할 때와 같이 하였는바, 이 일이 간이(簡易) 최립(崔岦)이 지은 묘표 음기(墓表陰記)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제 백년이 지나서 글자 획을 거의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종인 지훈(至熏)이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있으면서 묘표를 다시 새기고 음기는 자기(磁器)를 구워 지석(誌石)을 만들어서 장차 유택에 묻으려 한다고 하였다.
내가 들으니, 토지와 노비를 장만하여 재계하는 사찰에 주고 또 부역을 면제하여 묘소를 지키게 한 것은 실로 우리 고조인 승지공이 처음 시작하였는데, 본도의 우병사 이흥(以興), 순찰사 훤(翧), 통제사 두병(斗柄), 의령 현감 두장(斗長), 군위 현감(軍威縣監) 득붕(得朋), 송라 찰방(松蘿察訪) 종백(宗伯), 고성 현령(固城縣令) 몽뢰(夢賚), 의령 현감 두추(斗樞), 칠곡 부사(漆谷府使) 취성(聚星), 동래 부사(東萊府使) 익훈(益熏), 의성 현령(義城縣令) 상훈(尙熏), 신녕 현감(新寧縣監) 치훈(致熏)이 또 앞뒤로 봉급을 내어서 노비와 토지를 더 장만하였으며, 순찰사 선(銑)이 또 담장을 쌓고 문을 세워 때때로 여닫게 하였다고 한다. 지금 비석을 다시 세운 것은 우도 병마우후 택(澤)이 이 일을 주관하였으며, 상훈이 또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고 치훈이 또 경주 부윤(慶州府尹)이 되어서 힘을 합해 이룬 것이다.
숭정 기원 후 주갑이 되는 정축년 8월 일에 14대손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구만은 삼가 쓰다.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12대 조고 고려 봉정대부(奉政大夫) 지영광군사 증 문하시중(知靈光郡事贈門下侍中) 부군 묘표(墓表)

공은 성이 남씨(南氏)이고 휘가 천로(天老)이니, 고려 때 추밀원 직부사를 지낸 조고 군보(君甫)가 처음으로 의령을 관향으로 삼았다. 선고인 풍저창 부사(豐儲倉副使) 익지공(益胝公)이 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로 있었는데, 한가한 날에 영광군의 속현인 삼계(森溪) 봉서동(鳳棲洞)에 놀러 나왔다가 한 언덕을 얻고는 좋아하여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여기에 장례하라.” 하였다. 공이 관청에서 별세하자 집안사람들은 “전에 말씀하셨던 것을 그대로 따를 것이 없다.” 하여 고향의 산소에 반장(返葬)하려 하였는데, 영구가 봉서동에 이르자 꼼짝도 하지 않아 나아갈 수 없으므로 마침내 이곳에 장례하였다.
공은 3남을 두었으니, 을번(乙蕃)은 문하시중(門下侍中) 경렬공(敬烈公)이고 을진(乙珍)은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이고 을경(乙敬)은 찬성사이다. 경렬공의 두 아들은 의정부 영의정 충경공(忠景公) 재(在)와 삼군 도총제(三軍都摠制) 강무공(剛武公) 은(誾)이니, 모두 우리 태조대왕을 보좌하여 개국 원훈(開國元勳)이 되었다. 이 이후로 명성과 덕망이 서로 이어져서 의관의 성대함이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는바, 지류를 거슬러 올라가 근원을 찾아보면 실로 공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러하니 공이 몸소 노력하여 후손들을 도와주어 훈계한 것을 알 수 있으나 연대가 멀고 행적이 없어져서 전해 들어 증거할 것이 없으니, 아, 애석하다.
가정(嘉靖) 정사년(1557, 명종 12)에 7대손 치근(致勤)이 이 도의 절도사가 되어서 묘소 입구에 표석을 세웠는데, 비석이 이제 마멸되어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11대손 담양 부사(潭陽府使) 필성(弼星)과 12대손 장흥 부사(長興府使) 취성(聚星)과 13대손 고창 현감(高敞縣監) 언창(彦昌)이 공인(工人)들을 모아 비석을 세웠다.
12대손 좌의정 구만이 삼가 글을 짓고 써서 후손에게 보이니, 때는 숭정 기원 후 43년인 병인년(1686, 숙종 12) 5월 일이다.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10대 조고 순충분의동덕개국 공신(純忠奮義同德開國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춘추관서운관사 수문전대제학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春秋館書雲觀事修文殿大提學世子師)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 증시 충경공(忠景公) 부군 신도비명(神道碑銘)

우리 남씨(南氏)는 영의공(英毅公) 휘 민(敏)이 영양(英陽)에 본적(本籍)을 받음으로부터 높은 벼슬이 서로 이어졌다. 고려 중엽에 이르러 추밀원 직부사 휘 군보(君甫)가 관향을 의령으로 옮겼는데, 이 어른이 풍저창 부사(豐儲倉副使) 휘 익지(益胝)를 낳았고, 이 어른이 영광 군사(靈光郡事) 휘 천로(天老)를 낳았고, 이 어른이 검교 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경렬공(敬烈公) 휘 을번(乙蕃)을 낳았으니, 이상이 공의 4대 선조이다. 선비(先妣) 계림 최씨(雞林崔氏)는 참의 최강(崔茳)의 따님이다.
공은 충정왕(忠定王) 3년인 신묘년(1351)에 출생하였으니, 처음 휘는 겸(謙)이다. 신해년(1371, 공민왕 20)에 이색(李穡)이 지공거(知貢擧)를 맡았을 때에 공이 동(同) 진사(進士) 제 5 인으로 급제하였으나 지낸 관직은 상고할 길이 없다. 당시는 고려 말기로 지극히 혼란하였다. 성조(聖祖) 태조가 일어나려 할 때 공은 경세제민(經世濟民)에 뜻을 두어 범을 따르는 바람과 용을 따르는 구름처럼 뜻이 서로 부합하였는데, 혁명하는 즈음을 당하여 공(功)을 사양하고 상(賞)을 피하려는 뜻을 품고 먼 외지로 은둔하였다.
태조는 천명을 받은 다음 공을 몹시 그리워하여 찾아서 만나게 되자 ‘재(在)’라는 이름을 하사하였으니, 이는 아직도 생존해 있음을 기뻐한 것이었다. 공은 스스로 경지(敬之)라고 자를 지었으니, 이는 군주가 이름을 하사해 준 것을 공경하는 뜻이었다. 개국 공신 1등에 책록되고 중추원학사 겸 사헌부대사헌에 제수되었으며, 의성군(宜城君)에 봉해졌다. 공은 이때 상소하여 왕조를 창업(創業)할 때의 급선무 11가지 일을 아뢰었다.
태조 2년(1393) 계유 6월에 주문사(奏聞使)에 임명되어 명나라의 도성인 남경(南京)에 가게 되었는데, 상은 공의 아우인 장군 지(贄)를 보내어 의복과 술을 하사하였다. 9월 남경에서 돌아와 황제가 후대하고 또 지금 이후로는 3년에 한 번 조회할 것을 명하였다고 아뢰었다.
3년(1394) 갑술에 황제가 우리나라에서 올린 표문(表文)이 오만함을 괘씸하게 여기니,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변명하려 하였다. 이때 태종은 정안군(靖安君)이었는데 명나라에 갈 것을 자청하였다. 온 조정이 모두 가는 것을 위태롭게 여기자 공은 말하기를, “정안군이 이번 사행에 가시는데 우리들이 베개를 베고 이곳에서 편안히 죽는다면 되겠는가.” 하고는 또한 부사(副使)로 갈 것을 자청하였다. 이때 사신으로 간 자들 중에는 혹 정안군을 모심에 공경을 다하지 않는 자가 있었으나 오직 공만은 예를 지켜 매우 공손하였다. 남경에 이르자 일이 잘 해결되어 황제가 우대하고 예우하여 보냈다.
4년(1395) 을해 2월에 경렬공의 상을 당하였는데, 7월에 상은 편전(便殿)에서 공을 인견하고 생강과 계피 등의 양념을 넣은 음식을 먹을 것을 권하였다.
5년(1396) 병자 12월에 예문관춘추관 태학사(藝文館春秋館太學士)로 도병마사(都兵馬使)가 되고, 도통처치사(都統處置使) 김사형(金士衡)을 따라 일기도(一岐島)와 대마도(對馬島) 등의 왜적을 정벌하였는데, 이때 상은 남대문 밖으로 나와 전별하였다. 공은 다음 해 1월에 회군(回軍)하였다.
7년(1398) 무인에 정당 문학(政堂文學)으로서 왕명을 받들고 송악(松岳)에 치제(致祭)하러 갔는데, 방석(芳碩)의 난이 일어나 아우 은(誾)이 죄의 괴수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돌아와 여러 왕자를 뵈었다. 이때 공을 함께 해치려는 자가 있었는데, 태종은 말하기를, “남재(南在)는 평소 남은(南誾)과 마음을 함께하지 않았으니, 내 집으로 돌아가 있으라.” 하였다. 일이 진정되자 용서받아 외지로 추방되었다가 얼마 후 소환되었다.
경진년(1400) 1월에 정종(定宗)이 즉위하자, 공은 대궐의 뜰에서 큰소리로 말하기를, “지금 당장 정안군을 세워서 후사로 삼아야 하니,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이에 하륜(河崙)이 공의 말을 따라 정종에게 상언하기를, “하늘의 뜻과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으니, 일찍 세제(世弟)의 위호(位號)를 정하소서.” 하자 정종이 이를 허락하였으니, 태종이 세제로 책봉된 공은 공이 실로 첫 번째로 발의한 데 있는 것이다.
태종은 즉위하자 맨 먼저 세자 서연관(世子書筵官)을 설치하고 조준(趙浚) 및 공, 정총(鄭摠)을 학식이 높아 권강(勸講)에 대비할 만하다 하여, 각각 관직의 품계에 따라 세자의 사부(師傅)와 빈객(賓客) 등의 직책을 제수하였다.
3년(1403) 계미에 경상도 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상은 공이 금주령(禁酒令)으로 인해 술을 끊고 직무에 근로한다는 말을 듣고는 병이 날까 염려하여, 12월에 내온(內醞)을 임소에 내렸으며, 인하여 이후로는 약을 먹을 때에 술을 마시도록 명하였다.
4년(1404) 갑신 5월에 의정부 찬성사에 제수되었다. 10월에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이거이(李居易)의 당이라 하여 공을 탄핵하자, 상은 삼성(三省)의 관원을 순금사(巡禁司)에 하옥하여 국문하게 하고 공에게 명하여 사무를 보게 하였다. 공이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고 또 옛날 위급하고 어려웠을 때에 힘을 다한 일을 아뢰자, 상은 이르기를, “경이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내 어찌 모르겠는가. 경은 절대로 의심하지 말라.” 하였다.
8년(1408) 무자에 지평 최자해(崔自海)가 일을 논하다가 상의 뜻을 거슬러 강제로 집으로 돌아가게 하니, 집의 권우(權遇) 등이 모두 대죄하였다. 공은 이때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상에게 아뢰기를, “대간은 군주의 귀와 눈이니, 말이 비록 사리에 맞지 않더라도 죄를 내려서는 안 됩니다. 이는 언로를 열어 보고 들음을 넓혀서 만대의 계책으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 하니, 상은 즉시 최자해 등에게 직무를 보도록 명하였다.
14년(1414) 갑오에 우의정 의령부원군 감춘추관사에 제수되고 시험을 관장하여 선비를 뽑았다. 상이 이르기를, “권도(權蹈), 성개(成槩), 이하(李賀), 이수(李隨)가 모두 조정의 신하들인데, 이들 중 이번 시험에 급제한 자가 없으니, 장시관(掌試官)의 공정함을 볼 수 있다.” 하였다.
상은 《고려사(高麗史)》에 공민왕(恭愍王) 이하의 사실이 대부분 진실하지 않다 하여 하륜과 공에게 명하여 고려사를 다시 편수하게 하였다. 같은 해에 승진하여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며, 15년(1415) 을미에 정승의 직책을 해임하고 훈봉(勳封 공신과 부원군의 봉호)으로 수문전 대제학과 세자부를 겸하였다. 16년(1416) 병신에 영의정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 면직하였다.
세종(世宗) 원년(1419) 기해 12월 14일에 훈봉으로 집에 있다가 별세하니, 조정에서는 조시(朝市)를 정지하고 부의를 내리고 장례에 쓰는 도구를 도왔으며, 태상(太常)에서는 시호를 의논하여 충경(忠景)이라 하였다.
상은 법가(法駕)를 갖추어 백관들을 인솔하고 공의 집에 행차하여 치제(致祭)하고 상주들을 조문하였는바, 그 제문에 대략 이르기를, “경은 조정의 훌륭한 자품이요, 산하의 빼어난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 제자백가의 학문을 두루 통하고 만 가지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재주가 있어서 성조(聖祖)를 도와 추대하고 억만년의 무궁한 큰 복을 열었다. 우리 상왕(上王 태종)께서 명나라 조정에 나아가 황제를 뵈올 때에 경은 상왕을 배종(陪從)하고 먼 길을 발섭(跋涉)하여 온갖 어려움을 막아냈으며, 즉위함에 이르러서는 도움이 매우 많았다. 그리고 나이 어린 나에게는 더욱 약석(藥石)이 되었다. 더구나 경은 과인에게 있어 옛날 스승으로 학문을 가르쳐 준 은혜가 있고 경의 손자는 우리 왕실과 혼인하여 연척이 되는 경사가 있었다. 그리하여 백관의 의표(儀表)가 되어서 네 왕조를 보필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제 이미 끝났으니 내 어찌 슬픈 마음을 가누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상왕은 재신(宰臣) 윤회(尹淮)를 보내어서 전교를 내리고 치제하였는바, 그 제문에 대략 이르기를, “경은 성품과 자품이 영명하고 호걸스러우며 식견이 고매하였다. 대의를 내세우고 계책을 결단하여 창업의 큰 규모를 은밀히 정하였고, 하늘의 뜻과 사람의 마음에 순응하여 개국하는 큰 업적을 협찬하였다. 내가 명나라에 조회 갔을 때에 마침내 부사(副使)의 관원이 되어서 발섭하는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았고 밤낮으로 고락을 함께하였다. 내가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뒤로는 더욱 보필하는 공을 폈는데, 한 번 병이 나서 갑자기 구천에 갈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이것을 말하니 슬픈 마음이 끝이 없다.” 하였다.
처음에 태조가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고는 친히 건원릉(健元陵)에 능침(陵寢)을 정한 다음 건원릉 밖 불암산(佛巖山) 주동(注洞)의 산을 공에게 하사하여 후일 배장(陪葬)하게 하였으며, 또 부근의 토지와 노비들을 하사하고 후손 대대로 영원히 전하여 묘소를 지키는 민가로 삼게 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경렬공을 장례하고 뒤이어 공을 장례하였다.
공의 옛집은 한양 남부 명철방(明哲坊) 두 번째 마을 성 아래였으니, 또한 국초에 도읍을 정할 때에 풍수가가 성상의 명령에 따라 좋은 터를 가려서 하사한 것이었다. 공은 집의 서남쪽 모퉁이에 당(堂) 하나를 별도로 짓고 취미(翠微)라는 당호를 걸었으니, 이는 실로 종남산(終南山)의 정상에 못 미쳐서 있었다. 집 옆에 바위 하나가 있었는데 그 모양이 거북과 비슷하였으므로 공은 이로써 구정(龜亭)이라 자호하였다.
공은 성격이 활달하고 큰 도략이 많아서 밖으로는 자신을 검속하지 않는 듯하였으나 안으로는 실로 분명하게 살폈으며 문장이 평정하고 깨끗하니, 논하는 자들이 “경세제민의 기국을 갖추었으며 활달하고 깊고 고상하다.”고 지목하였다. 산술(算術)을 널리 통하여 옛사람이 미처 풀지 못한 것을 연구하니, 세상에서는 공을 일러 남산(南筭)이라 하였다.
4년(1422) 임인에 상왕의 명령에 따라 태조의 묘정에 추배(追配)하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치제하였으며 배향하기를 예법대로 하였다. 건원릉의 비음(碑陰)에 공신 40인을 나열하였는데 공이 열네 번째에 있으며 그 뒤 헌릉(獻陵 태종의 능)의 비음에도 이름이 나열되었다.
전배(前配)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시중 윤관(尹瓘)의 후손이요, 판삼사사(判三司事)로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진 정후공(靖厚公) 윤호(尹虎)의 따님이다. 공보다 먼저 별세하여 송도(松都)의 천수원(天壽院) 뒤에 장례하였다. 후배(後配) 숙안택주(淑安宅主)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관찰사 홍이(洪彛)의 따님인데 장례한 곳은 실전(失傳)되어 알지 못한다.
윤씨 부인은 2남을 길렀으니, 장남 경문(景文)은 병조 의랑(兵曹議郞)이고, 차남은 경무(景武)이다. 의랑은 3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좌의정 지(智)이고 차남은 직제학 간(簡)이고 다음은 의산군(宜山君) 휘(暉)이다. 의산군은 태종의 따님인 정선공주(貞善公主)에게 장가들었다.
공은 세상에 드문 재주로 약관(弱冠) 시절에 벼슬에 올라 초창기에 국가를 경륜하였으며 만년에는 정승에 올라 국가가 번성할 때에 도왔으니, 훌륭한 말과 계책으로 천지에 우뚝하고 해와 달처럼 찬란한 실상이 생각건대 이루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연대가 이미 멀어 가승(家乘)을 대부분 잃었으며, 금궤(金匱)와 석실(石室)에 보관된 국가의 기록으로 말하면 또 외인들이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야사의 단편들을 주워 모으고 자손들이 입으로 전해 오는 말을 수습해서 간략히 위와 같이 문자를 이루었다. 아, 이것이 어찌 선조의 빛나는 공렬을 충분히 드러내어 후손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당시 사실을 기록한 말 중에 헌릉(獻陵 태종)과 영릉(英陵 세종) 두 임금의 치제문이 다행히 남아 있으니, 공의 거룩한 법도와 훌륭한 공렬을 여기에서 또한 그 대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옛날 한(漢)나라가 천하를 얻고 종묘사직을 안정시킬 적에 진평(陳平)의 공이 많았다. 그러나 진평은 음모를 많이 꾸민 것을 스스로 서글퍼하여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즉시 패망하여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송나라의 여러 공신 중에 조한(曹翰) 같은 자는 그의 몸이 죽자 자손이 몰락하여 길거리에 다니면서 구걸하는 자까지 있었다. 그러나 조빈(曹彬)만은 홀로 후한 덕을 후세에 물려주어 후손들이 대대로 현달한 관직에 올랐다. 그런데 공으로 말하면 여러 손자들이 공이 생존해 있을 때에 이미 귀하고 번성하였으며, 별세한 지 지금 300년이 되었는데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오래될수록 다하지 않으니, 이는 또 조씨가 미칠 수 없는 것이다.
아, 물의 근원을 알려거든 그 흐름의 가깝고 멂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요, 나무의 뿌리를 알려거든 그 잎의 무성하고 시듦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니, 이제 공의 덕을 고찰하고자 한다면 증거할 만한 것이 여기에 있다. 일을 기록함에 상세하고 간략함을 또 어찌 따질 것이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하늘이 신무한 분을 명하여 / 天命神武
어려운 때를 구원하려 하면 / 拯濟荒屯
얽어서 만드는 공을 / 締構之功
반드시 훌륭한 신하에게 의뢰하네 / 必藉良臣
고려의 국운이 끝나려 하자 / 麗運欲訖
성조께서 크게 일어나시니 / 聖祖勃興
기이한 재주와 뛰어난 사람들이 / 奇才異人
메아리처럼 호응하였네 / 如響斯應
이때 계책을 도운 분으로는 / 維時協策
충경공이 있었으니 / 曰有忠景
공훈은 개국 공신이요 / 勳則開國
지위는 의정이었다오 / 位則議政
이미 창업을 돕고 / 旣贊其創
다스림을 보좌하니 / 且佐其治
소하(蕭何)의 법과 조참(曹參)의 지킴 / 蕭法曹守
겸하여 소유하였다오 / 兼而有之
네 조정을 차례로 섬기고 / 歷事四朝
두 능에 공신으로 새겨지며 / 鐫功二陵
침원에 모셔 장례하고 / 陪葬寢園
묘정에 배향되었네 / 配食廟庭
드러나고 드러난 훌륭한 덕 / 顯顯令德
하늘에서 복을 받았네 / 受祿于天
살아서는 영화롭고 죽어서는 슬퍼하였으니 / 生榮死哀
그 누가 공과 견주겠는가 / 其孰與肩
또 어진 손자가 있어 / 又有賢孫
황각(黃閣)에 뒤이어 올랐으며 / 黃閣繼登
남은 경사가 멀리 이어져 / 餘慶之遠
후손에게까지 미쳤네 / 及于雲仍
너희 후손들 번성하게 함은 / 俾爾熾昌
실로 공이 감싸 준 것이니 / 維公是庇
모든 우리 동종들은 / 凡我同宗
그 유래를 생각해야 하네 / 宜念所自
유풍을 바라보고 사모하니 / 睠慕流風
이미 삼백 년이 지났으나 / 年已三百
묘도에 신도비가 없으니 / 墓道無樹
이는 후손들의 책임이었네 / 裔人之責
이에 옛날 들은 것을 엮어서 / 玆綴遺聞
명문을 붙이고 / 系之以詩
이것을 새겨 영원한 후대에 보여 / 刻眎永世
무궁한 후세에 기약하노라 / 期以無期

[주D-001]내온(內醞) : 임금이 신하에게 내려 주는 술을 이른다.
[주D-002]소하(蕭何)의 …… 지킴 : 소하와 조참(曹參)은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개국 공신이다. 소하는 자신의 후임으로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조참을 천거했는데, 소하가 죽고 조참이 이어 정승이 되자 한결같이 소하의 법을 준수해서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漢書 卷39 蕭何曹參傳》
[주D-003]황각(黃閣) : 정승이 집무하는 청사로 한나라 때 승상의 청사 문을 황색으로 칠하여 궁궐과 구분했던 데에서 유래되었다.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10대 조비(祖妣)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파평 윤씨(坡平尹氏) 묘표(墓表)

조선조에 영의정을 지내고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가 충경(忠景)인 구정(龜亭) 남공(南公) 휘 재(在)의 원배(元配)인 변한국대부인 파평 윤씨의 묘는 바로 장단부(長湍府) 북쪽에서 40리가 좀 넘는 전재궁리(田齋宮里)에 있으니, 바로 송도(松都)의 동대문 밖에서 10리가 채 못 되는 가까운 천수원(天壽院) 뒤 골짜기 자좌(子坐)의 산이다.
성화(成化) 연간에 증손 칭(偁)이 송도 판관(松都判官)으로 있으면서 표석을 세웠는데 이제는 글자가 마멸되었다. 숭정 기원후 두 번째 되는 무진년(1688, 숙종 14)에 칭의 8대손 익훈(益熏)이 승지로 있다가 외직으로 나와 부사(府使)가 되어 묘소 앞에는 상석(床石)을 설치하고 뒤에는 담장을 둘러쳤으며 왼쪽에 새로 비석을 세우고 글을 새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인의 10대조 관(瓘)은 시중이고, 고조 보(珤)는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이고, 증조 암(諳)은 소부윤(少府尹)이고, 조고 해(侅)는 대광 전서(大匡典書)이고, 선고 호(虎)는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낸 정후공(靖厚公)이며 선비는 지선주사(知善州事) 이원후(李元厚)의 따님이다. 남씨의 옛집은 송도의 태평관(太平館) 동쪽에 있었는데, 미처 한양으로 이사하기 전에 부인이 별세하였으므로 이곳에 장례하였다. 얼마 후 부군인 구정공(龜亭公)을 건원릉 밖 주동(注洞)의 산에 배장(陪葬)하였으므로 부장(祔葬)하지 못하였다.
부인은 2남을 길렀는데, 장남 경문(景文)은 병조 의랑이고 차남은 경무(景武)이다. 손자에 좌의정 지(智), 직제학 간(簡), 의산군(宜山君) 휘(暉)와 증손에 의령군(宜寧君) 윤(倫), 참판 의(儀)와 현손에 판서 이(怡), 정랑 제(悌), 대사간 율(慄), 승지 흔(忻)이 현달한 자이다. 후세에 명망과 지위가 세상에 알려진 자로는 의성위(宜城尉) 치원(致元), 의천위(宜川尉) 섭원(爕元), 참판 세웅(世雄)ㆍ세준(世準)ㆍ세건(世健), 절도사 효원(孝元), 추강거사(秋江居士) 효온(孝溫), 판윤(判尹) 효의(孝義)ㆍ치근(致勤), 참판 응운(應雲), 참의 응룡(應龍), 승지 언순(彦純), 부윤(府尹) 언경(彦經), 좌의정으로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에 봉해진 이웅(以雄), 참판 이신(以信), 의춘군(宜春君) 이흥(以興), 판서 이공(以恭)ㆍ선(銑), 참지(參知) 두첨(斗瞻), 참판 두병(斗柄)ㆍ노성(老星), 판서 이성(二星), 관찰사 훤(翧)이 있으며, 현재 문신의 적에 올라 조정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자로는 정언 유성(有星), 장령 필성(弼星), 대제학 용익(龍翼), 교리 치훈(致熏), 좌랑 지훈(至熏)ㆍ언창(彦昌)이 있다.
구정공은 개국 공신 1등으로 불천위의 사당에 모셔지고 부인이 배향되었는데, 11대손 반(磐)이 실로 제사를 주관한다. 부인이 남기신 규범과 교훈을 세대가 멀어서 증거할 곳이 없어 기록할 수 없으므로 이제 그 세계(世系)와 자손 및 남은 경사가 무궁함을 기록해서 앞에 근원이 넉넉하면 뒤에 흐름이 풍부함을 증명하는 바이다.
10대손 영의정 구만은 삼가 기록하고 아울러 쓰다.
무진년(1688, 숙종 14)에 부사 익훈(益熏)이 비석을 장만하여 글자를 새기려 하였는데, 마침 체직하고 돌아와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갑술년(1694)에 9대손 필성(弼星)이 전직 승지로 나와 부사가 되어서 을해년(1695) 7월에 비로소 비석을 다듬어서 글자를 새겨 묘소 왼쪽에 세웠다.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10대 종조(從祖) 개국 공신 판상서사 의흥삼군부도총제(判尙書事義興三軍府都摠制) 의성군(宜城君) 증시 강무공(剛武公) 묘표

공은 성이 남씨(南氏)이고 휘가 은(誾)이고 관향이 의령(宜寧)이니, 고려 때 시중을 지낸 을번(乙蕃)의 아드님이다. 공민왕 갑오년(1354)에 출생하였는데, 천성이 호방하고 고매하여 속박을 받지 않았으며 기이한 계책을 좋아하였다. 처음에 사직단 직(社稷壇直)에 보임되었는데, 이때 삼척(三陟)에 왜구가 기세를 떨쳐 지키기가 어려웠다. 공은 지군사(知郡事)를 자청하고 10여 명의 기병으로 왜구를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그리하여 비로소 이름이 알려졌으며, 부름을 받아 높고 중요한 직위를 제수받았다. 위화도(威化島) 전투에서 우리 태조를 도와 회군하게 하고는 공신에 기록되고 토지를 하사받았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삼사 우윤(三司右尹)과 군부 전서(軍簿典書), 개성 윤(開城尹), 밀직 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였다.
임신년(1392, 태조 1)에 개국하자 1등 공신에 책훈(策勳)되고 의성군에 봉해졌으며 판상서사 겸 의흥삼군부도총제에 제수되니, 위임하고 예우하는 융숭함이 공보다 더한 자가 없었다. 무인년(1398) 방번(芳蕃)의 난리에 별세하여 용인현(龍仁縣) 처인면(處仁面)에 있는 화동(花洞) 자좌(子坐)의 산에 장례하였다.
세종 3년(1421)에 태종은 이때 태상왕으로 있었는데, 여러 신하들을 불러 하교하기를, “남은은 공로가 많으니, 하늘에 계신 태조의 영령(英靈)이 어찌 그를 묘정에 배향하고자 하지 않으시겠는가. 후일에 비록 죄가 있었으나 예전의 공을 폐할 수 없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공경히 하교를 받들어 예법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명하여 집안에 제사를 지내어 고유하게 하고 ‘강무(剛武)’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묘전(墓田)을 하사하였다.
부인은 공부 전서(工部典書)를 지낸 강릉(江陵) 김보손(金寶孫)의 따님인데, 가순택주(嘉順宅主)에 봉해졌는바, 장지는 공의 묘소 아래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다. 4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경수(景壽)는 후손이 없고, 차남 경우(景佑)는 판중추원사로 의령군(宜寧君)에 습봉(襲封)되었고, 다음은 경복(景福)ㆍ경지(景祉)이며, 딸은 사산군(蛇山君) 이기(李玘)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나의 10대조인 영의정 휘 재(在)의 아우이므로 삼가 가승(家乘)의 내용을 뽑아 이와 같이 묘표를 짓는다.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9대 조고 병조 의랑(兵曹議郞) 부군 묘전기(墓田記)

광주(廣州)의 남한산성 남문 밖 10리쯤 되는 곳에 구만의 9대 조고인 병조 의랑 부군의 묘소가 있는데, 조비(祖妣) 숙녕택주(淑寧宅主) 방씨(方氏)를 부장하였으니, 바로 한이산(寒移山) 삼현(三峴) 신좌(辛坐)의 산이다.
부군은 3남을 두었으니, 좌의정 지(智), 의산군(宜山君) 휘(暉), 직제학 간(簡)이다. 생각하건대 처음 이곳에 묘소를 장만했을 때는 반드시 맡아서 수호하는 노비와 향화(香火)를 받들어 올릴 토지가 있었을 터인데, 연대가 아득히 멀고 여러 번 난리를 겪어 지금은 한 가지도 알 길이 없다. 후손들이 비록 많으나 사방에 흩어져 살아서 제때에 성묘하지 못할 뿐 아니라 해마다 한 번 제사하는 시향(時享)의 예(禮)도 행하지 못한 지가 또한 오래되었다.
지난해 종인(宗人) 중에 자기 어버이를 같은 산 날등에 장례한 자가 있었는데, 매년 시절의 제사 때가 되면 차마 선대의 산소에 제사를 폐할 수가 없어서 술과 과일을 나누어 올리니, 제수를 임시로 장만하여 구차하고 소략해서 정성스럽지 못하였다. 이는 심히 정성으로 올리는 도리가 아니어서 선조의 영령이 돌아보고 흠향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후손들이 서글픈 감회를 이기지 못하였다.
근자에 선조의 8대손 극성(極星), 9대손 우석(禹錫), 10대손 하영(夏永), 11대손 준(埈)이 마침 모두 선조의 묘소 아래에 가까이 살고 있었다. 이들이 합의하고 협력하여 가까운 곳에 저절로 말라 죽은 잣나무를 가져다가 쪼개 두 개의 관(棺) 재목을 만들어서 시세대로 팔아 돈을 장만하고 이자를 불려 선조의 묘소 아래에 있는 아홉 두락(斗落)의 논과 아침나절이면 갈 수 있는 정도의 밭을 사서 종인이 둔 잉금(芿金)이란 묘지기로 하여금 이 땅을 부쳐 먹되 그 반을 내어서 시속의 명절과 사시의 제사 비용을 대게 하였다. 그리고 여러 종인들이 제수를 장만하는 것을 관리하고 살피며 번갈아 제사에 참여하니, 지금부터 이후로는 거의 오랫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갈 것이다.
또 생각건대 지금 사들인 토지가 많지 못하니, 장만하는 제수도 장차 줄어들어서 제사하는 모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 혹 제사를 올리기도 하고 올리지 않기도 하였으며, 혹 올려도 올리지 않은 것이나 똑같았던 것에 비한다면 그래도 제수를 장만함에 전일함이 있고 제사에 일정한 규칙이 있어서 다행스럽다. 그러나 맨 처음 제도를 정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었을 때에는 어찌 다만 오늘날에 행하는 것보다 열 배만 나을 뿐이었겠는가. 그런데도 이미 아득히 없어져서 물을 곳이 없게 되었다.
지금 비록 여러 종인들이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으로 이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으나 또다시 제사를 폐지함에 이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입의(立議)하게 된 전말을 자세히 쓰고 또 토지의 소재지와 결부(結負)의 숫자를 써서 세 본을 만들어 관청에 올리고 관인을 찍어 문서를 만들어서, 한 본은 관부(官府)에 보관하고 한 본은 종손인 영춘 현감(永春縣監) 반(磐)의 집에 보관하고 한 본은 선조의 묘소 아래에 있는 여러 종인들이 사는 곳에 보관해서 후일에 상고하고 준행하게 하는 바이다.
금상 36년(1710) 경인 11월 1일에 9대손인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치사(致仕) 봉조하 구만은 삼가 기록하다.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8대 조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 감춘추관사 세자부 의성군(宜城君) 증시 충간공(忠簡公) 부군 신도비명

우리 남씨(南氏)는 성씨를 얻은 이래로 멀리 대를 이어 왔는바, 영의정 의령부원군 충경공(忠景公) 휘 재(在)의 비석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충경공은 2남을 두었는데, 장자 휘 경문(景文)은 병조 의랑으로 일찍 별세하여 끝내 세상에 쓰이지 못하였는바 영의정 부사(領議政府事)에 추증되었으며, 배위는 숙녕택주(淑寧宅主) 온양 방씨(溫陽方氏)이니 참의 방순(方恂)의 따님이다. 3남을 두었는데 공이 바로 장남으로 휘가 지(智)이며 생년과 자(字)는 상고할 수 없다.
공은 총명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풍채와 의표가 단정하고 후중하며,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고 담력과 지조가 있어 당시에 추앙과 신임을 받았다. 약관 시절에 벼슬하여 사헌부 감찰이 되었는데, 이때 충경공이 여전히 건강하였다. 공이 공청(公廳)에서 물러 나오면 충경공은 반드시 일한 것을 묻곤 하였는데, 하루는 돌아와 아뢰기를, “오늘 하리 한 사람이 창고에 들어가서 몰래 비단을 훔쳐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다시 창고로 들어가게 하여 이와 같이 하기를 두세 번 하였더니, 하리가 비로소 그렇게 한 뜻을 알아차리고는 비단을 놓아두고 나왔습니다.” 하니, 충경공은 말하기를, “나는 네가 어린 나이에 관원이 되었기 때문에 매번 공청에서 한 일을 물어 잘잘못을 알고자 한 것이었는데 지금부터는 내가 묻지 않아도 되겠다.” 하였다.
세종 원년(1419) 기해에 충경공이 별세하니, 상은 친히 왕림하여 조문하고 치제하였다. 이때 공은 사손(嗣孫)으로 상주가 되어서 길 왼쪽에 엎드려 맞이하였으며, 제사를 올릴 때에 명을 받들어 술잔을 올렸다. 대가가 돌아갈 때에 길 왼쪽에 엎드려 곡하니, 상은 몸을 굽히고 그 앞을 지나가 예우하였다.
7년(1425) 을사에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으로 있다가 영남의 막료로 나가 경력(經歷 도사(都事))이 되었다. 이때 경재(敬齋)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이 이 도의 관찰사가 되었는데, 공이 온다는 말을 듣고 걱정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양반집 자제로 나이가 젊으니, 반드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것이다. 내 어찌한단 말인가.” 하였다. 공이 처음 들어와 뵙자, 문효공은 마침내 판별하기 어려운 공사(公事)의 서류철을 뽑아서 맡기며 말하기를, “이것을 판별해서 가지고 오라.” 하였다.
공이 물러가자 문효공은 사람을 시켜 살펴보게 하였는데, 공은 한창 손님들과 장막 안에서 술을 많이 마시고 있었다. 공은 다음 날 술이 깨어 일어나서 서류철을 한 번 펴보고는 손톱으로 그어서 표시를 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아무 글자는 오자이니 고쳐야 하고, 아무 일은 잘못되었으니 분별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문효공은 크게 놀라고 탄복하여 소중히 여겼다. 이로부터 공무를 자문하는 이외에 때때로 농담을 주고받았으며, 허여하고 친밀하게 대해서 예로부터 사귄 친한 벗처럼 여기고 나이와 지위를 가지고 스스로 높은 체하지 않았다.
돌아와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도승지 조서로(趙瑞老)에게 유박(帷薄)의 비난거리가 있었으나 사람들이 감히 먼저 말하지 못하였다. 공은 조참(朝參)에 나가서 소유(所由 사헌부의 이속(吏屬)) 20여 명을 거느리고 조서로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소유들로 하여금 그 구사(丘史)들을 모두 포박하게 하고 즉시 조방(朝房)에서 국문하여 법을 바로잡으니, 온 조정이 숙연하였다.
장령으로 승진하고 장단 부사(長湍府使)와 개성부 유후(開城府留後)로 나갔으며 의성군(宜城君)에 습봉되었다. 17년(1435) 을묘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중국에 갔는데, 이때 서적을 내려 줄 것을 주청하였다. 21년(1439) 기미에 대사헌에 제수되고 호조 참판으로 옮겼으며, 경상도 관찰출척사(慶尙道觀察黜陟使)로 나갔다가 임기가 차자 형조 판서로 발탁되고 호조 판서로 옮겼다. 공은 태평한 세상에 군주의 신임을 받는 것에 감격하여 밤낮으로 봉직하고 게을리 하지 않으니, 군주의 신임과 조정의 명망이 공보다 더한 자가 없었다.
28년(1446) 병인에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승하하니, 수릉관(守陵官)에 적임자를 얻기가 어려웠다. 이때 공은 겨우 사사로운 상(喪)을 마쳤는데, 대궐 아래에 엎드려서 수릉관이 될 것을 자청하니, 당시 공론이 대단히 훌륭하게 여겼다.
31년(1449) 기사에 판원사(判院事)로 우의정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문효공이 막 좌의정이 되었다. 공이 나와서 사은하던 날에 첫 번째로 문효공의 집을 찾아가자, 문효공은 공을 맞이하여 문에 들어오게 하고 돌아보며 말하기를, “수령관(首領官)과 늙은 감사가 한 발짝만 어긋났으면 말을 나눌 수 없을 뻔하였네.” 하였으니, 이는 옛날 막료로서 함께 의정부에 올라 벼슬해서 발자취가 서로 이어짐을 기뻐한 것이었다.
32년(1450) 경오에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文宗)이 즉위하였는데, 2년(1452) 임신에 또다시 문종이 신하와 백성들을 버리니, 공은 좌상으로 있으면서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우의정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고명(顧命)을 받았다. 이때 국상(國喪)이 서로 이어지니, 중외의 사람들이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하였으나 공이 바로잡고 진정시켜 대신의 도리가 있었으니,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공에게 의지하였다.
이해 10월에 중풍에 걸려 말을 못 하고 병환이 심하므로 정승의 직책을 해임하고 영중추원사에 옮겨 제수되었는데 얼마 안 있어 별세하였으니, 나이는 상고할 수가 없다. 진천현(鎭川縣) 남쪽 양천산(楊泉山) 이치(梨峙) 임좌(壬坐)의 산에 장례하였다.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부정(副正) 이문간(李文幹)의 따님인데, 출생 연도와 별세한 연월을 또한 상고할 수 없으며, 장지는 공의 묘소 뒤쪽 20여 보쯤 되는 신좌(辛坐)의 산에 있다.
5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관찰사 윤(倫)이고 차남은 부정(副正) 칭(偁)이며 다음은 군수 구(俅), 별좌(別坐) 휴(休), 참판 의(儀)이며, 장녀는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의춘군(宜春君) 이우직(李友直)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조무영(趙武英)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게서 1남 동(仝)을 낳았다. 손자와 증손 이하는 대대로 높은 관직에 올라 지금까지도 명문거족으로 일컬어진다.
단종(端宗) 원년(1453) 계유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난이 있었는데, 사위인 이우직은 바로 이용의 아들이었다. 부자가 모두 죄로 죽었으나 공은 인척의 집안으로서 화가 미치지 않았으니, 이는 병을 앓아 조정의 정사에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은 별세한 뒤에도 오히려 이우직 때문에 추증하는 은전을 받지 못하다가 세 조정을 지나 성종(成宗) 20년(1489) 기유에 이르러 공의 손자인 승지 흔(忻)이 조정에 올려 청하니,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여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공은 처음에 문음(門蔭)으로 어린 나이에 조정에 올라 벼슬하였고, 낮은 벼슬로부터 높은 벼슬에 이르러서 명성과 공적이 날로 성하였다. 공은 스스로 성명(聖明)한 군주의 신임을 받아 마침내 정승의 지위에 올랐으며, 시작도 있고 끝마침도 있어 세상의 유명한 신하가 되었고, 별세한 뒤에 애도하고 영화롭게 함이 또한 이미 갖추어졌다. 그러나 지금 200여 년이 넘도록 아직 신도비에 새긴 비문이 없으니, 어찌 후손들의 마음에 서운함이 없겠는가.
이제 종손 반(磐)이 이것을 서글퍼하여 여러 종인들과 함께 의논하고 돌을 깎아 비문을 새겨서 후손들이 보게 하려 할 적에 구만에게 또한 후손이 된다 하여 서문을 쓰고 명문(銘文)을 짓게 하였다. 구만은 이에 대하여 비록 감당할 수 없으나 또한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그러나 공이 별세한 뒤로 공사 간에 이미 연고가 많았으며, 연대가 또 점점 멀어져서 조정의 문헌도 증빙할 만한 것이 적고 집에 보관된 옛 가승(家乘)도 병란에 모두 없어졌으며, 사적(史籍)의 비문(秘文)은 또 사사로이 볼 수가 없다.
이제 공의 덕을 기록하고자 한들 장차 무엇을 근거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기회를 놓치고 도모하지 않으면 이제 겨우 들어서 알고 있는 것마저 장차 더욱 매몰됨에 이를 것이다. 이것을 두려워하여 종인들의 보첩(譜牒)과 관부(官府)의 장고(掌故) 및 세상에 전해 오는 자질구레한 기록과 여러 이야기들을 상고해서 의심스러운 것을 빼고 믿을 만한 것을 취하여 그 선후를 차례로 엮기를 위와 같이 하였다. 그러나 공이 평소 조정에서 좋은 계책을 아뢰고 자손들에게 훌륭한 교훈을 남겨서 국가의 법이 되고 집안의 모범이 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기록하지는 못하였으니, 그 소략함이 또한 심하다. 그러나 공이 남기신 유풍과 법도로 생시를 방불케 하는 모습이나마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으로는 다행히 선배들의 말이 남아 있다.
내가 들으니, 공이 영남 관찰사가 되었을 적에 완역재(玩易齋) 강석덕(姜碩德)이 시를 지어 보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공은 치관의 장관이 되어 / 惟公長豸冠
명광궁에서 상소를 올리니 / 抗疏明光宮
지존께서는 온화한 얼굴을 펴시고 / 至尊開天顔
강직한 신하의 충성 가상히 여기셨네 / 骨鯁嘉精忠
승냥이와 이리 감히 멋대로 날뛰겠는가 / 豺狼敢縱橫
송골매가 가을 하늘 높이 날고 있다오 / 鷹隼當秋空
오래된 측백나무 더욱 우뚝하니 / 古柏更亭亭
차가운 서릿발 세찬 바람을 띠고 있네 / 嚴霜帶烈風
의리를 바루고 도를 밝히니 / 正誼與明道
현하와 같은 언변 끊임이 없었다오 / 懸河辯不窮
또다시 영남의 절월(節鉞)을 잡아 / 又杖嶺南節
깃발이 남방을 가리키니 / 旌麾指祝融
이 조정의 재목을 거두어감은 / 撤此廊廟材
본래 곤궁한 백성 일으키려고 해서이네 / 本欲起疲癃
굳세고 강직하여 훌륭한 정사 이룩해서 / 行行樹佳政
융숭한 공업 기약하노라 / 功業期盛隆
하였다.
그리고 선조(宣祖) 때에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상소하기를, “세종대왕은 우리 동방의 성주(聖主)이신데, 인재를 등용하시되 자신으로 생각하여 오직 현자와 유능한 자를 발탁하셨습니다. 남지(南智)는 문음 출신이었으나 젊은 나이에 삼공(三公)에 임명되었으며, 김종서(金宗瑞)는 남들의 비난을 크게 받았으나 자신의 소견대로 육진(六鎭)을 개척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지위가 그 재주에 걸맞으면 종신토록 고치지 않았으며 하루아침에 발탁하면 계급에 제한하지 않았으니, 이는 참으로 옛날 성스러운 황제와 현명한 왕들이 현자에게 맡기고 유능한 자를 부린 것과 같은 법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공의 현손 언기(彦紀)는 문장을 잘하였으나 지조를 지켜 벼슬하지 않았는데, 공을 칭송하여 말하기를,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신기하고 특이하였으나 사람들에게 재능을 보여 주려고 하지 않았다. 책을 읽을 때에 일곱 줄을 한꺼번에 보았으며 눈으로 한 번만 보면 잊지 않았다. 과거 공부를 좋아하지 않아 한 번도 과장에 들어간 적이 없으나 어릴 때부터 사람들이 모두 공경(公卿)이 될 인물로 기대하였다. 세종의 인정을 받아 품계의 차례를 밟지 않고 특별히 발탁되니, 의지하고 맡기기를 매우 소중히 하였다. 문종의 병환이 심해지자 고명(顧命)을 받고 어린 군주를 보필하여 건의한 일이 많았는데, 마침 병으로 집에 있다가 별세했다.” 하였다.
공의 공렬과 덕업을 지금 비록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명신(名臣)의 많음과 인재 등용의 마땅함이 세종과 문종의 즈음보다 더 성대한 적이 없는데, 공은 이때를 당하여 백관의 위에 올라 어린 군주를 부탁받았으니, 그렇다면 그 인품을 알 수 있다. 공의 유사(遺事)를 생각해 보건대 없어진 것이 이미 많으니, 남아 있는 것이 더욱 소중하다. 이 때문에 지금 이 세 가지를 인용하면서 글이 번잡한데도 줄이지 아니하여 길게 늘어놓아 부족한 뜻을 다하는 바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나라에 세신이 있으면 / 國有世臣
이것을 오래된 나라라 이르네 / 是謂故國
군주가 어리고 나라가 의심스러울 때에는 / 主少國疑
오직 정승에게 달려 있으니 / 惟相之屬
이 중책을 맡을 자 / 任斯重者
공이 아니면 그 누구이겠는가 / 匪公其孰
대를 이어 정승이 되니 / 繼世作輔
무현(巫賢)과 이척(伊陟)과 같고
/ 若賢與陟
유지(遺旨)를 받아 어린 군주 도우니 / 受遺擁幼
단(旦)과 석(奭)과 같았다오 / 如朝及奭
세종과 문종의 현명함으로 / 二宗之明
선택을 잘하였으며 / 不失其擇
공의 충성 / 公之忠藎
또한 직책을 저버리지 않았네 / 亦不負職
공이 병환으로 집에 계실 때에 / 臮公告病
난이 비로소 일어나니 / 難始有作
마치 집이 무너지려 함에 / 若廈將傾
높은 기둥이 먼저 기우는 것과 같았다오 / 高棟先仄
하늘이 막 딴 임금을 일으키려 하니 / 天方有興
어찌 인력으로 될 수 있겠는가 / 豈容人力
돌아가신 분을 전송하고 살아 계신 분을 섬김에 / 送往事居
공은 부끄러움이 없었네 / 公則無恧
공의 자손들은 / 公之子孫
공의 덕을 본받아 / 象公之德
후손에 이르러 / 及于雲仍
번성하고 또 훌륭하였네 / 旣蕃且碩
모두 남은 음덕을 입어 / 咸荷餘休
대대로 국록을 먹었네 / 世有祿食
홀로 생각건대 유허에 / 獨念遺墟
신도비가 없으니 / 牲繫無石
길 가는 사람들도 오히려 한탄하는데 / 行路猶嗟
하물며 우리 동족들이겠는가 / 矧我同族
이에 헤아리고 이에 물으니 / 是度是詢
그 누가 협조하지 않겠는가 / 疇有不勗
마음을 합하고 함께 일하여 / 齊心並事
큰 비석에 드러내어 새겼네 / 克蕆顯刻
그 시가 매우 아름다워 / 其詩孔好
외울 만하고 읽을 만하네 / 可誦可讀
풍성을 길이 생각하니 / 永懷風聲
이에 공의 모습 보는 듯하여라 / 於焉如覿

[주D-001]유박(帷薄)의 비난거리 : 유박은 유박불수(帷薄不修)의 준말로 안방의 장막과 발이 정돈되지 못하였다는 뜻인데, 가문에 음행(淫行)이 있을 경우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돌려서 말할 때 쓰는 말이다. 옛날에는 사대부의 죄에 대해서도 죄명을 직접 말하지 않고 이렇게 표현했다.
[주D-002]구사(丘史) : 임금이 종친과 공신에게 구종(驅從)으로 준 관노비를 이르는바, 품위(品位)에 따라 숫자가 정해져 있었다.
[주D-003]수령관(首領官) : 지방의 각 감영과 유수부에 두었던 경력과 도사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주D-004]치관(豸冠)의 장관이 되어 : 치관은 옛날 어사가 쓰던 해치관(獬豸冠)으로, 어사대 즉 사헌부의 관원이 되었음을 말한다. 해치는 신양(神羊)인데, 곡직(曲直)을 잘 분별하므로 초왕(楚王)이 항상 이를 잡아다가 관을 만들었다 한다. 《後漢書 卷30 輿服志下》
[주D-005]대를 …… 같고 : 무현(巫賢)은 무함(巫咸)의 아들이고 이척(伊陟)은 이윤(伊尹)의 아들이다. 무함은 은(殷)나라 중종(中宗)의 어진 신하로, 무무(巫戊)라고도 하며, 이윤은 은나라의 탕왕(湯王)의 신하로 탕왕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였다.
[주D-006]단(旦)과 석(奭) : 단은 원문에 조(朝)로 되어 있는바,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이름을 휘(諱)하여 조로 쓴 것이다. 단은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아들로 무왕(武王)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주(周)에 봉해져 주공(周公)이라 칭하였으며, 석 또한 주나라의 종친으로 소(召)에 봉해져 소공(召公)이라 칭하였다. 주공과 소공은 뒤에 삼공(三公)이 되어 성왕(成王)을 도와 훌륭한 공을 이루었으므로 명재상의 대명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충경(忠景)과 충간(忠簡) 두 선조의 관교(官敎)에 대한 발문(跋文)

위의 10대 조고 충경공에게 내린 관교(官敎) 한 통에는 그 내용에 이르기를, “왕지(王旨)이다. 남재(南在)는 순충분의동덕개국 공신(純忠奮義同德開國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 수문전대제학 세자부(修文殿大提學世子傅)가 된 자이다. 영락(永樂) 13년(1415, 태종 15) 9월 21일이다.” 하였고 보전(寶篆)의 글에는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고 되어 있으며, 8대 조고 충간공에게 내린 관교 한 통에는 그 내용에 이르기를, “교지(敎旨)이다. 남지(南智)는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가 된 자이다. 경태(景泰) 3년(1452, 문종 2) 10월 1일이다.” 하였고 보전의 글에는 ‘시명지보(施命之寶)’라고 되어 있다.
우리 두 선조의 후손 중에 현재 대대로 벼슬을 이어서 서울에 거주하는 자가 무려 수십 가호인데, 당시에 전해 내려오는 옛 물건을 하나도 전하여 지켜 오는 것이 없고, 오직 이 두 관교만을 마침내 5대 조고 첨지 부군의 서제(庶弟)인 치려(致勵)의 후손으로 덕산(德山)에 살고 있는 자에게서 얻었으니, 이 어찌 “예(禮)를 잃으면 변방에서 구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이 두 장의 종이는 후손들이 소중히 여김이 진실로 큰 벽옥(璧玉)보다도 더하며, 국가의 전장(典章)을 상고하고 장고(掌故)의 빠진 글을 구비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종이의 폭으로 말하면 길이가 사방 한 자에 지나지 않고 두께는 얇은 비단에 지나지 않으니, 지금 상신(相臣)의 관교가 길이가 몇 길이나 되고 가죽처럼 두꺼운 것에 비한다면 사치하고 검소함이 어떠한가. 글자의 획으로 말하면 오로지 행초(行草)로 썼는데 굳세고 빼어나 법도가 있어서 바쁠 때에 쉽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건대 당시에 이것을 쓴 자는 여러 낭리(郞吏)의 손을 벗어나지 않았을 터이니 반드시 명필로 이름난 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와 같으니, 당시의 인문(人文)의 성함을 오늘날 관조(官曹)의 기주(記注)가 구차하고 소략하며 누추하고 속된 것에 비한다면 그 공교하고 졸렬함이 어떠한가.
또 충경공의 훈호(勳號)를 여기에는 순충분의동덕개국이라 하였는데, 충훈부의 기록에는 “홍무(洪武) 25년(1392, 태조 1) 임신 7월 일에 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 등 39명을 개국 공신으로 책록(策錄)하되, 혹은 순충좌명(純忠佐命)이라 하고 혹은 분의좌명(奮義佐命)이라고 하였는바, 일등(一等)이 15명이고 중등이 13명이다. 의령부원군 남모(南某)는 계급이 좌의정에 이르고 시호가 충경공(忠景公)으로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어 있다.” 하였다. 그리고 태묘(太廟)에 배향된 위판(位版)에는 태조의 묘실(廟室) 세 번째 자리에 ‘좌의정 의령부원군 문경공 남모(左議政宜寧府院君文景公南某)’라고 써 있으며, 종가의 불천위 신주에는 ‘순충분의좌명개국 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춘추관서운관사 수문전대제학 세자사 의령부원군 충경공(純忠奮義佐命開國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春秋館書雲觀事修文殿大提學世子師宜寧府院君忠景公)’이라 써 있고, 묘표에는 ‘개국 공신 의정부 영의정 충경공 남모지묘(開國功臣議政府領議政忠景公南某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공신의 칭호를 가지고 말하면, 이 관교에는 ‘동덕(同德)’ 두 자가 있으나 충훈부에 기록된 것과 가묘의 제주(題主)에는 모두 ‘동덕’이 없고 ‘좌명(佐命)’이 있으니 이것이 첫 번째 어긋나는 부분이며, 직함을 가지고 말하면, 이 관교에는 마침내 정승을 해임하고 옮겨 임명한 것이니 영의정인지 좌의정인지를 증명할 수 없는데, 신주와 묘표에는 모두 영의정이라고 기록되었고 충훈부와 태묘의 촬요(撮要)에는 모두 좌의정이라고 기록되었으니 이것이 두 번째 어긋나는 부분이며, 시호를 가지고 말하면, 제주(題主)와 묘표, 충훈부의 촬요에는 모두 충경공이라고 되어 있는데 오직 태묘에만 문경공이라고 써 있으니 이것이 세 번째 어긋나는 부분이다.
국가와 사가의 문서에서 이제 취하여 상고한 것이 다섯 종류가 있는데 서로 어긋남이 마침내 이와 같으니, 이는 진실로 후손들이 선조의 덕을 닦아 밝히고 이력을 드러내어 사람들의 귀와 눈에 분명하게 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국가의 문헌 또한 매우 미비하다고 이를 만하다. 지금 고증하여 믿을 수 있는 것으로는 다행히 이 관교가 있으니, 훈호는 관교를 근거로 삼아야 하고, 직함과 시호는 묘표와 제주를 믿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충훈부와 태묘의 오류로 말하면 여러 번 병란을 겪어 추후에 기억을 잘못한 데서 나온 듯하니, 이것을 어찌 똑같이 논열하여 조정에 청해서 시정할 수 있겠는가.
또 생각하건대 ‘조선국왕지인’은 바로 우리 태조께서 개국하던 초기에 명나라 고황제(高皇帝)가 반사(頒賜)한 것으로, 계속하여 여러 왕조에 이르러서 모든 신하들에게 관직을 제수할 때에 모두 이 인장(印章)을 사용하였다. 그 당시에는 오로지 한마음으로 대국을 섬겼으니, 나라에 다른 보인(寶印)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찌 수백 년 뒤에 마침내 천지가 번복하는 변고가 있어서 우리나라로 하여금 이 보인과 서로 시종을 함께하지 못하게 될 줄을 생각하였겠는가. 아, 슬픔을 어찌 말로 할 수 있겠는가.
옛날 구양공(歐陽公 구양수(歐陽脩))은 황폐한 터에서 부러진 비석의 탁본을 얻고도 오히려 보물로 소중히 여겨서 옛일을 상고함에 도움이 있다고 말하였는데, 하물며 종이와 먹이 아직 완전하고 보장(寶章)이 휘황찬란한 조종조의 융성했던 시절의 유문(遺文)에 있어서랴. 지금 이것을 얻음은 진실로 예기치 못했던 다행이니, 후손된 자가 어찌 열 겹으로 쌓아 깊이 감추고 철궤에 넣어 튼튼히 봉함해서 천만년토록 보호하여 지킬 계책을 세우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루어짐이 있으면 훼손됨이 있고 얻음이 있으면 잃음이 있는 것 또한 물건의 떳떳한 이치이다.
하후씨(夏后氏)의 관석(關石)과 화균(和勻), 주(周)나라의 적도(赤刀)와 대훈(大訓) 또한 지금까지 전해 온단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이 사대부 집안에 전해 오는 옛 종이 조각이 어찌 장구한 후세에 길이 보존되기를 기필할 수 있겠는가. 후일 궤짝이 부서지고 진주 자개가 없어지면 여기에 기재된 문자까지 함께 없어질까 매우 두렵다. 그러므로 삼가 이것을 발문의 내용에 자세히 기록하며, 또 옛날에 대해 느낀 것을 기록하노니, 행여 쟁반과 사발, 종이(宗彛 종묘의 제기)와 솥이 그 기물은 비록 남아 있지 않으나 관지(款識 금석에 새긴 글자)의 내용은 오히려 간책(簡策)에 전해져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숭정 기원 후 주갑이 지난 정축년(1697, 숙종 23) 8월 초하루에 후손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구만은 재배하고 공경히 발문을 쓰다.

[주C-001]관교(官敎) : 교지(敎旨)를 이르는데 4품 이상의 벼슬아치에게 임금이 직접 내리는 사령장(辭令狀)이다.
[주D-001]예(禮)를 …… 구한다 : 중국에 예가 없어지면 먼 시골이나 변방에 그 예가 아직 남아 있음을 이른다. 공자는 말하기를, “예가 없어지면 들에서 구한다.〔禮失而求諸野〕” 하였다. 《漢書 卷30 藝文志》
[주D-002]천지가 번복하는 변고 : 명나라가 멸망하고, 우리나라가 오랑캐인 청(淸)나라에게 항복한 사실을 가리킨다.
[주D-003]관석(關石)과 화균(和勻) : 관(關)은 통함이고 화(和)는 고르다는 뜻이며 석(石)과 균(勻)은 모두 중량의 단위로 120근을 석이라고 하고 30근을 균이라 한다. 《서경(書經)》 오자지가(五子之歌)에 “관석과 화균이 왕부에 있다.〔關石和勻 王府則有〕” 하였는바, 왕부는 국가의 물품을 보관하는 곳을 이른다. 옛날 정치에는 도(度), 량(量), 형(衡)을 중요시하여 표본이 되는 저울, 자, 되 등을 잘 보관하고 이것을 법도의 기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균(勻)은 균(鈞)으로도 쓴다.
[주D-004]적도(赤刀)와 대훈(大訓) : 적도는 주나라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할 때에 사용했다는 붉은 칠을 한 칼로서 주나라의 보물 가운데 하나이고, 대훈은 삼황(三皇)ㆍ오제(五帝)의 글과 문왕ㆍ무왕의 가르침을 이른다. 《서경》 고명(顧命)에 “옥을 오중으로 하며 보물을 진열하니, 적도와 대훈과 홍벽과 완염은 서서에 있고 대옥과 이옥과 천구와 하도는 동서에 있다.〔越玉五重 陳寶 赤刀 大訓 弘璧 琬琰 在西序 大玉 夷玉 天球 河圖 在東序〕” 하였다.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6대 조고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행 어모장군 충좌위부사과 부군 묘표

공은 성이 남씨(南氏)이고 휘가 계(悈)이고 관향이 의령(宜寧)이니, 영의정을 지낸 충경공(忠景公) 휘 재(在)의 현손이고, 병조 의랑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휘 경문(景文)의 증손이며, 좌의정을 지낸 충간공(忠簡公) 휘 지(智)의 손자이고, 간성 군수(杆城郡守)로 호조 참판에 추증된 휘 구(俅)의 아들이다. 선비는 정부인에 추증된 광릉 안씨(廣陵安氏)이니, 세자우림위장(世子羽林衛將) 안격(安鬲)의 따님이다.
공은 훈음(勳廕)으로 품계가 어모장군에 이르렀고 관직은 군함(軍銜)으로 행 충좌위 부사과이다. 공은 향년이 길지 못하였고 집안의 문적이 병란에 없어져서 표덕(表德 자(字))과 생몰한 해를 모두 상고할 수가 없다. 오직 공의 아드님인 첨지중추부사 치욱(致勖)의 행장에 이르기를, “공은 숨어서 덕을 쌓고 벼슬하지 않았다. 집안에 있을 때에 효성과 우애가 순수하고 돈독하였으며, 제사를 모심에 정성과 공경을 지극히 하였다. 비록 길 가는 사람이라도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불러다 음식을 먹였다.” 하였으니, 이 행장은 바로 첨지의 아들인 별좌(別坐) 언기(彦紀)가 지은 것이다. 배위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대사헌으로 전성군(全城君)에 봉해진 양간공(襄簡公) 이서장(李恕長)의 따님이다.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바로 첨지인 치욱이고 막내는 판윤 치근(致勤)이니, 그의 귀함으로 인하여 공에게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추증하였다. 첨지는 4남을 두었으니, 승지 언순(彦純), 부윤(府尹) 언경(彦經), 사평(司評) 언진(彦縝)이고 막내는 바로 행장을 지은 첨지 언기이다. 첨지와 판윤, 승지는 모두 무과(武科)에 장원하였다. 첨지는 여러 고을을 맡아 다스릴 때에 청렴결백함으로 세상에 모범이 되었고, 판윤은 무략과 전공으로 세상의 유명한 무신이 되었으며, 승지는 깨끗한 지조와 훌륭한 명망이 있으며 겸하여 문장과 글씨를 잘 썼고, 부윤은 학행으로 대각(臺閣)의 벼슬을 지냈고 훌륭한 명망이 있었으며, 별좌는 고상한 풍모와 뛰어난 절의가 있어 여러 번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으니, 모두 당시 사대부들이 부러워하고 칭찬하는 바가 되었다. 이것을 보면 공이 후손들에게 훌륭한 교훈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공의 고모인 임영대군(臨瀛大君)의 부인이 일찍 과부가 되고 공에게 의지하여 살다가 별세하니, 적성(積城)의 북면(北面) 고동(高洞)의 산에 장례하였는데, 공을 그 아래에 장례하고 이 부인(李夫人)을 부장(祔葬)하였다.
묘소에 옛날 표석이 있었는데, 전면에는 공과 부인의 관작과 성씨를 새기고 후면에는 두 줄의 글을 새기기를 “정덕(正德) 9년(1514, 중종 9) 10월 일에 장례하고 홍치(弘治) 16년(1503, 연산군 9) 2월 일에 장례했다.” 하였다. 그러나 내외를 구분한 말이 없어서 공과 부인 중 누구를 먼저 장례하고 누구를 뒤에 하였는지 알 수 없다.
자손들은 세대가 점점 멀어져서 제때에 성묘를 못하니, 표석이 부러져 두 동강이 나서 다시 세울 수가 없었다. 이제 다시 비석을 마련하고 글자를 새겨서 세운 자는 5대손 장단 부사 필성(弼星)이고, 전면과 후면에 기록하고 글씨를 쓴 자는 6대손 의정부 영의정 구만이다. 을해년(1695, 숙종 21) 8월에 세웠다.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남 장군(南將軍) 휘 이(怡) 의 묘소에 제사한 글 묘소는 남양(南陽) 북면 10리쯤 되는 대전리(大田里)에 있는데, 해룡(亥龍)에 임감입수(壬坎入首)이고 병향(丙向)이다.

유세차(維歲次) 경인년(1710, 숙종 36) 10월 임진삭(壬辰朔) 9일 경오에 6대 재종손(再從孫)인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치사 봉조하 구만은 이미 늙고 또 병들어서, 슬픈 마음을 일으키는 묘소에 직접 가지 못하고, 삼가 삼종질(三從姪)인 진사 학증(鶴增)으로 하여금 맑은 술과 여러 가지 제수를 받들어 고(故) 남 장군의 묘소에 밝게 아룁니다.
아, 장군은 양반 가문에서 출생하였고 천부적으로 신묘한 용맹을 타고나셨습니다. 뜻은 쇠와 돌처럼 굳세고 충성은 해와 달을 꿰뚫었습니다. 성명한 군주를 만나 약관 시절 조정에서 벼슬하여 배반한 적을 북로(北路)에서 무찌르고, 또 반역한 오랑캐를 건주(建州)에서 섬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본조에서는 공신에 책록되고 명나라 황제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웅장한 지략과 뛰어난 명성이 중국과 오랑캐 지방에 진동하였는데, 뜻밖에 모함을 받아 죄 없이 죽음을 당하시니, 깊고 지극한 원통함을 실로 하늘에 하소연하려 해도 할 길이 없습니다.
또 생각하건대 이미 참혹한 화를 당하시고 또 후손이 없어서 묘역이 황폐해지고 향화(香火)가 미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어찌 더욱 의사(義士)들의 슬픈 마음을 일으키고 지사(志士)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지 않겠습니까. 다행스러운 것은 위엄스러운 명성이 없어지지 않고 신령스러운 기운이 아직도 혁혁해서 시골 노인과 촌백성들이 동요와 민담으로 서로 전하여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에 한 고을의 높고 낮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증명한 바를 얻어 묘소라고 지적하는 곳에 봉분을 만들고 유허를 구획해서 반드시 믿을 만하고 의심할 바 없음을 증명하였습니다. 이에 감히 도백에게 글을 올리고 본부(本府)에 하소연해서 가장 가까이 투장(偸葬)한 두세 무덤을 파서 옮겼는데, 이제 장차 봉분을 더 쌓아 올리고 다시 사초(莎草)하며 신정(神庭)을 깨끗이 청소해서 처음 장례할 때처럼 하려 합니다. 옛날과 지금을 생각함에 서글픈 마음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나간 사적이 아득히 멀고 상고할 만한 문적이 없으니, 화변(禍變)이 일어나던 초기에 여기에 묘소를 경영한 것은 과연 어떠한 사람이었으며, 연대가 요원하고 수호할 사람이 없어 한식절(寒食節)에 보리밥을 올리지 못한 것이 또 언제부터입니까. 지금의 계책으로는 몇 자의 비갈에 비문을 새겨 묘소 앞에 세워서 후세 사람들에게 밝게 보여 주는 것만 한 방도가 없으니, 이렇게 하면 불량하고 의롭지 못한 무리들이 다시는 묘소에 침범함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여러 종인들 중에 다시 큰 뜻을 품고 큰 권력을 소유한 자가 있기를 실로 후일에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흠향하소서.

[주D-001]유세차(維歲次) : 유(維)는 조사이고, 세(歲)는 세성(歲星) 곧 목성(木星)을 가리키며, 차(次)는 머무름을 뜻한다. 세성은 12년 만에 한 번씩 돌므로 이 세성이 어디에 머무르고 있음을 뜻하는바, 제문(祭文)의 첫머리에 연도를 가리키는 말로 쓰는 말이다.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5대 조고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행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부군 묘표



공은 휘가 치욱(致勖)이고 자가 욱지(勖之)이고 관향이 의령이니, 충경공(忠景公) 휘 재(在)의 5대손이고, 충간공(忠簡公) 휘 지(智)의 증손이고, 병조 판서에 추증된 휘 계(悈)의 아들이다. 선비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대사헌 이서장(李恕長)의 따님이다.
공은 홍치(弘治) 갑인년(1494, 성종 25)에 출생하여 무과에 일등으로 급제하고 사온서 주부(司醞署主簿)에 제수되었으며, 사헌부 감찰로 옮기고 정주 판관(定州判官),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 어천 찰방(魚川察訪), 철산 군수(鐵山郡守), 보성 군수(寶城郡守), 선공감(繕工監)ㆍ예빈시(禮賓寺)ㆍ사섬시(司贍寺)의 첨정(僉正), 장흥 부사(長興府使), 훈련원 정을 역임하였으며, 함경북도 우후(咸鏡北道虞侯)로 승진하였는데 배반한 오랑캐들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경흥 부사(慶興府使)로 승진하였다. 그 후 안주 목사(安州牧使), 만포 첨사(滿浦僉使),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 영흥 부사(永興府使), 철원 부사(鐵原府使)를 역임하고, 융경(隆慶) 기사년(1569, 선조 2)에 별세하였으며, 아들의 귀함으로 인하여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배위 진주 유씨(晉州柳氏)는 좌참찬에 추증된 유한평(柳漢平)의 따님이다.
장남 언순(彦純)은 좌승지이고 차남 언경(彦經)은 부윤이고 다음 언진(彦縝)은 감찰, 언기(彦紀)는 별좌(別坐), 언봉(彦綘)은 현신교위(顯信校尉)이다. 장녀는 왕손 사부(王孫師傅) 한윤명(韓胤明)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별좌 고대축(高大畜)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너그럽고 신중하였으며 충신하고 후덕하였다. 집안에 있을 때에는 장난하는 일이 없었으며, 조정에 있을 때에는 청탁을 받지 않았다. 관청에 출입하며 녹봉을 먹은 지가 40년이 넘었으나 집안에 남은 재물이 없고 타고 다닐 살진 말이 없었다. 비록 무과로 출신하였으나 학문을 좋아하여 매일 일찍 일어나서 관과 띠를 정돈하고 종일토록 책을 읽어 일과로 삼았으며 가정 훈육을 잘하였다. 그리하여 아들 승지공은 무과로 출신하여 추천을 받고 청현직(淸顯職)에 올랐으며, 부윤공은 학문이 이루어지고 행실이 돈독하여 세상의 유명한 학자가 되었으니, 아, 여기에서 자제들을 의로운 방법으로 가르쳤음을 볼 수 있다.
부인은 얌전하고 엄숙하고 단정하였으며, 예의로써 몸가짐을 단속하여 여사(女士)의 풍모가 있었다. 여러 자녀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사대부가 명예를 실추시키고 죄를 지음은 모두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요, 대부분 처첩에게 더럽힘을 당해서이다. 나는 이제 미망인이 되었으니 남편에게 누를 끼침을 면하게 되었다. 너희들도 이러한 뜻을 알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아, 이것으로 그 나머지를 대략 알 수 있다. 공보다 5년 늦게 태어나고 공보다 9년 뒤에 별세하여 양주(楊州) 수락산(壽樂山) 서쪽 기슭 갑좌(甲坐)의 산에 합장하였다.
5대손 의정부 영의정 구만은 삼가 표문(表文)을 짓다.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5대 조고의 묵적(墨蹟)에 대한 발문



가정 43년(1564, 명종 19) 갑자 9월 18일에 장손인 즙(楫)의 아내에게 별도로 준 것인데, 묵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부(新婦)의 용모가 단정하여 제사를 받드는 임무를 맡길 만하니, 지극히 가상하다. 이에 적성(積城)의 계집종 순춘(順春), 장흥(長興)의 노복 공기지(公其知)와 계집종 억수(憶守), 고양(高陽) 서면(西面)에 있는 양자답(量字畓) 15두락을 떼어 주되 모두 장성하기를 기다려 사용하게 한다.”
자필(自筆)로 ‘조부 전 부사 남(南)’이라 쓰고 착압(著押)하였다.

5대 조고인 첨지 부군이 별세하신 뒤 한 주갑(周甲)이 되던 해에 내가 비로소 태어나서 증조부와 조고는 섬길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고 미련하여 부군의 유사(遺事)에 대해 조금도 듣지 못하였으며, 집안에 전해오던 문적은 이미 임진년 병란에 모두 없어져서 상고할 만한 것이 없다.
내가 이미 장성하자 4대 숙조(叔祖 종고조(從高祖))인 별좌공(別坐公)이 지은 행장과 사암(思菴) 박 상국(朴相國 박순(朴淳))이 지은 지문(誌文)과 퇴도(退陶) 이 선생(李先生)이 지은 만시(挽詩)를 얻어 보아 먼 선조를 추모하는 회포를 다소나마 위로하였으나 문자와 손수 쓴 필적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얻어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제 삼종질인 학수(鶴壽)가 연산(連山)으로부터 도성으로 와서 부군이 손수 쓴 한 필첩(筆帖)을 나에게 보여 주니, 바로 가정 갑자년에 장손 판관공(判官公)이 부인을 맞이했을 때에 특별히 노비를 내려 준 문건이었다. 이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육십갑자가 이미 두 번 돌고 8년이 넘었다. 중간에 변란이 많아 국가의 금궤(金匱)와 석실(石室)에 보관한 문적들도 모두 불타 없어져서 보존된 것이 매우 드문데, 지금 이 한 자쯤 되는 작은 종이 조각이 오직 아무 탈 없이 보존되어 자손들이 소중히 여겨 지키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필법의 높고 낮음으로 말하면 말할 겨를이 없으며 또한 감히 논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남기신 유묵을 받들어 보고 유풍을 감상해 보니, 운필(運筆)의 정신이 아직도 종이와 먹 사이에 혁혁하게 드러나 있는바, 어찌 끝까지 침묵하고 말 수 있겠는가.
이때 부군은 연세가 이미 칠순에 가까웠으니, 생각건대 붓과 벼루를 일삼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을 것이고, 또 모지라진 붓으로 거친 종이에 마음대로 휘갈겨 써서 글자를 아름답게 쓸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터인데, 첫머리의 두서너 줄은 온화하고 단정하며 수려하고 굳세어서 저절로 필획의 법도에 맞으며 그 아래는 뛰어난 기상이 드러나니, 또한 필획을 통하여 마음을 볼 수 있다.
아, 훌륭하다. 부군의 여러 아들들은 필법으로 세상에 유명한 분이 많다. 장자인 승지공은 바로 나의 고조고인데 초서로 일가를 이루었는바, 지금 이 필첩 가운데에 운필하고 결구(結構)한 것을 보니, 매우 서로 비슷하다. 이것을 시학(詩學)에 견준다면 실로 두심언(杜審言)이 자미(子美)에게 전함이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차자인 부윤공은 호가 동강(東岡)이고, 다음 차자인 별좌공은 호가 고반(考槃)인데 이 이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로지 송설체(松雪體)만을 익혔으나 진(晉)나라 사람의 필법을 배운 것은 두 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동강공은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선생은 자주 공을 칭찬하였으며 또 필법의 진전을 칭찬하셨다. 그리고 고반공은 김하서(金河西 김인후(金麟厚))에게 수학하고 동복(同福)에 거주하였는데,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과 사는 곳이 서로 가까워서 공의 유풍을 듣고 흠모하여 글씨를 이루었다 한다. 아, 물과 나무가 성대함은 반드시 근원과 뿌리에 의지하고 기구(箕裘)의 배움은 또한 궁야(弓冶)에서 연유하니, 이 어찌 다만 소소한 필찰(筆札)일 뿐이겠는가. 모든 우리 후손들은 이 필첩을 보고서 감동하고 분발하여 작은 것으로 인해 큰 것을 힘써서 반드시 선조를 욕되게 하지 말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신미년(1691, 숙종 17) 윤7월 26일에 5대손 구만은 신병으로 서강(西江)의 농암(籠巖) 위에 우거하면서 베개에 엎드려 삼가 쓰다.


[주D-001]착압(著押) : 자기의 성명이나 직함 아래에 도장 대신 일정한 자형(字形)으로 사인(寫印)함을 이른다.
[주D-002]두심언(杜審言)이 자미(子美)에게 전함 : 두심언은 당(唐)나라의 이름난 시인으로 두보(杜甫)의 종조부이고, 자미는 두보의 자(字)이다.
[주D-003]송설체(松雪體) : 원(元)나라 조맹부(趙孟頫)의 글씨체를 가리킨다. 조맹부는 자가 자앙(子昻)이고 호는 송설도인(松雪道人)이며, 죽은 뒤에 위국공(魏國公)에 추봉되었다. 고려의 충선왕(忠宣王)이 원나라에 들어가 교유한 관계로 우리나라에 그의 글씨체가 크게 유행하였다.
[주D-004]진(晉)나라 사람 : 진나라의 명필가인 왕희지(王羲之)를 가리킨다.
[주D-005]기구(箕裘)의 …… 연유 : 기구는 대를 이어 가업을 잇는 것을 이르며 궁야(弓冶)는 활을 만드는 궁인(弓人)과 대장장이를 이르는바,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반드시 갖옷을 만드는 것을 배우고, 훌륭한 궁인의 아들은 반드시 키를 만드는 것을 배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5대 종조 자헌대부 한성부판윤 겸 지훈련원사 오위도총부도총관 공 묘지명



고(故) 판윤 남공(南公)은 무용(武勇)과 전공(戰功)으로 명종(明宗) 때에 여러 번 이름을 날려 패전한 군대를 이끌고 적장의 목을 베어 바치는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국가의 위엄이 다시 떨쳐지고 성상의 마음이 편안해졌으니, 호남(湖南)과 해서(海西)의 백성들이 고향 마을에서 베개를 베고 편안히 잠자리에 눕게 된 것은 모두 공의 덕이다. 그러나 지금 100년이 지난 뒤에 집안을 이을 사람이 없어서 묘소에 행적을 기술한 비석이 없으니, 상산(象山)의 봉분(封墳)이 다만 행인들이 손으로 가리키며 서글퍼하는 곳이 될 뿐이었다.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인 홍군 우익(洪君禹翊)이 나에게 이르기를, “나는 공에게 외손이 됩니다. 힘이 비록 미치지 못하여 신도비를 세울 수는 없으나 마음속으로 먼저 유택(幽宅)에 묘지문을 마련하고자 하니, 그대가 글을 지어 주기 바랍니다.” 하였다. 공은 바로 구만의 5대 조고인 첨지 부군의 아우이다. 홍군이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이 일에 힘을 다하지 않겠는가.
삼가 가승(家乘)을 살펴보니 공은 휘가 치근(致勤)이고 자가 근지(勤之)이고 관향이 의령이다. 증조는 좌의정을 지낸 충간공(忠簡公) 휘 지(智)이고, 조고는 호조 참판에 추증되고 간성 군수(杆城郡守)를 지낸 휘 구(俅)이고, 선고는 병조 판서에 추증되고 부사과를 지낸 휘 계(悈)인바, 두 대가 추증된 것은 공의 귀함 때문이었다. 선비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대사헌 이서장(李恕長)의 따님이다.
공은 일찍 부친을 여의고 엄용공(嚴用恭) 선생에게 글을 배웠는데, 스승으로부터 매우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장성하자 무과에 응시하여 가정 무자년(1528, 중종 23) 식년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공의 형인 첨지 부군과 첨지의 아들 승지가 모두 무과에 장원하니, 세상에서는 한 집안에 세 장원이 났다고 칭찬하였다.
공이 지낸 벼슬은 대부분 기록이 없어져 알 수 없고 우선 증거할 만한 것을 가지고 말하겠다. 내직으로는 동지중추부사, 한성부 판윤, 지훈련원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경연 특진관(經筵特進官)을 지냈고, 외직으로는 용강 현령(龍岡縣令), 이산 군수(理山郡守), 만포 첨사(滿浦僉使), 회령 부사(會寧府使), 나주 목사(羅州牧使), 제주 목사(濟州牧使)와 함경북도ㆍ충청도ㆍ경상도ㆍ평안도ㆍ전라도의 병마절도사를 지냈는데, 전라도 절도사는 두 번을 하였고 전라도의 좌방어사(左防禦使)와 순변사(巡邊使)를 지냈으며, 경기도ㆍ황해도ㆍ평안도 삼도 토포사(三道討捕使)를 겸하였으나 선후의 순서는 또한 자세히 다 알지 못한다.
명종 임자년(1552, 명종 7)에 왜구가 제주(濟州)를 습격하였는데, 목사 김충렬(金忠烈)이 왜구를 막아 내지 못하자, 특별히 공을 보내어 대신하게 하였다. 공은 방략을 마련하여 왜군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며 또 왜선 두 척을 포획하여 바치니, 품계를 올리는 포상이 있었다. 임기가 차서 돌아오자 김수문(金秀文)이 대신 목사가 되었는데, 공의 조처를 따라 왜적을 물리치고 성을 보전한 다음 글을 올려 공에게 전공을 돌렸다고 한다.
을묘년(1555)에 왜구가 또다시 크게 몰려와 호남 지방으로 들어와서 병사(兵使) 원적(元績)과 장흥 부사(長興府使) 한온(韓蘊)을 살해하고 영암 군수(靈巖郡守) 이덕견(李德堅)을 사로잡은 다음 연이어 달량(達梁), 어란포(於蘭浦), 마도(馬島)와 장흥부의 병영, 강진현(康津縣)의 가리포(加里浦)를 함락하니, 국내가 크게 진동하였다.
조정에서 공을 본도 좌방어사로 임명하자, 공은 밤낮으로 달려갔다. 맨 먼저 남평현(南平縣)에서 왜적을 맞아 싸워 격파하였는데, 장병들의 사기가 배가하여 왜적을 쫓아 국경 밖으로 몰아냈다. 며칠이 지난 다음 왜적들이 또다시 녹도성(鹿島城)을 포위하고 맹렬히 공격하자, 공이 흥양(興陽)에서 달려가 구원하니, 왜적들은 깃발만 바라보고도 도망하였다. 공은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크게 섬멸하였다. 이 전쟁에서 여러 장수들이 군율을 범하여 처벌된 자가 많았으나 공만은 재능이 있다 하여 그대로 본도 병마절도사를 제수하였다. 공은 불타고 남은 잿더미를 쓸어내고 영부(營府)를 세우며, 성과 참호를 보수하고 병기를 수선하며, 병졸들을 훈련시키고 기강을 떨치니, 인심이 비로소 크게 안정되었다. 그리하여 비록 부녀자와 어린아이들도 모두 적을 만나 도피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이로 인하여 병진년 여름과 가을에 왜적이 또다시 침략하였는데, 왜적이 오는 즉시 섬멸하여 한 척의 배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무오년(1558)에 또다시 왜적들이 해상으로 침범한다는 소식이 있자 공을 본도의 순변사로 올려 제수하였는데, 보좌관인 두 막료와 30명의 비장(裨將)에 대해서는 조정에 명망이 있는 사람으로 공이 직접 선발하여 쓰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해방(海防)을 순찰할 적에 관찰사는 공의 통제를 받고 병마수군절도사는 모두 동개를 갖추어 교외로 나와 선봉 부대를 맞이하였으니, 위임받음이 이와 같이 중하였다. 돌아오자 특별히 자헌대부로 승진되고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다.
왜구가 처음 발동할 때에 사람들이 군대를 보지 못한 지가 50여 년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회오리바람처럼 몰려든 많은 왜적들을 만나자 군사와 백성들이 놀라고 겁먹어 곳곳마다 도망하여 무너졌다. 게다가 왜적들은 명나라 해적들에게 총과 탄환을 사용하는 법을 새로 배워서 탄환 한 발이 4, 5명을 관통하고 두세 겹의 갑옷을 꿰뚫으니, 막아 낼 수가 없었다.
의정부의 여러 재상들은 서로 돌아보기만 하고 아무런 계책도 없었는데, 공이 전선(戰船)을 만드는 방책을 제창하고 말하기를, “한신(韓信)이 배수진(背水陣)을 친 뜻을 쓸 수 있다.” 하였다. 사람들이 혹 비웃고 위태롭게 여겼으나 공은 노여워하지도 않고 꺾이지도 않고 3층의 비루(飛樓)가 있는 몽충선(蒙衝船)을 크게 만들어서 아래에는 군량을 싣고 가운데에는 노수(櫓手)를 배치하여 노를 젓게 하고 위에서는 화살을 발사하게 하였으며, 사방의 둘레에는 방패를 높이 세워서 적의 탄환을 막게 하였다. 그리하여 화포(火砲)가 앞에서 공격하고 당간(撞竿)으로 뒤에서 탄약을 쟁여 넣으며 많은 전선들이 달려가 쫓는 것이 나는 새처럼 빠르니, 적선이 부딪히면 부서지고 침범하면 불타서 섬멸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고 기타 질려(蒺藜)와 발화(發火) 도구를 마구 적선에 던지니, 배가 출동하기만 하면 적선은 발만 동동 구를 뿐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자를 구원하지 못하였다. 이는 모두 공이 창안한 것으로 후일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공은 도서(島嶼) 간의 거리, 해곡(海曲)의 지형에 따른 험난함과 평탄함, 군읍(郡邑)의 강약, 진수(鎭戍)의 허실, 적선이 정박하는 곳과 왕래하는 길을 모두 직접 가서 보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여, 공격하고 구원하며 추격하고 맞이할 계책을 세웠는데, 손바닥 위에 놓고 가리키듯 하여 시험하면 그때마다 효험이 있었다. 녹도(鹿島)에서 승전하자, 도원수 이준경(李浚慶)이 치계(馳啓)하여 공을 칭찬하기를, “왜적들로 하여금 우리의 주사(舟師)가 쓸 만하고 수전(水戰)이 두렵다는 것을 알게 하였으니, 육지의 승리에 비하여 더욱 빛이 납니다.” 하였다. 옛날 사람들의 배수진은 그 뜻이 본래 군사들을 사지(死地)에 몰아넣기 위한 것인데 공은 그 뜻을 본받아 배에 사용하였으니, 배는 사면이 모두 사지이므로 흩어진 병졸들을 모아 승리할 수 있었다.
기미년(1559)에 사나운 도둑인 임꺽정(林巨正)이 해서(海西)에서 발호하였는데, 처음에는 강도짓을 하여 사람을 죽였고 종말에는 대낮에 길을 막고 관청의 옥사(獄舍)를 깨부수며 형리(刑吏)들을 찍어 죽이기까지 하였다. 서울에서 관서(關西)에 이르기까지 일로(一路)의 관리와 백성들 가운데 은밀히 결탁하지 않은 자가 없어서 그 일당들이 남몰래 돌아다녀 서울에도 많이 숨어 있었으므로 조정의 동정을 서로 정탐하여 알려 주곤 하였다. 선전관(宣傳官)이 왕명을 받들고 임꺽정을 추적하러 갔다가 구월산(九月山) 아래에서 사살당하였으며, 또 장연(長淵), 풍천(豐川) 등 4, 5개 고을에서 관군(官軍)을 징발하고 군장(軍將)에게 이들을 거느리고 가서 체포하도록 명하여 서흥(瑞興)에 주둔하였는데, 도둑 떼가 밤에 습격하자 관군이 궤멸하여 도망하였다. 그러자 적도들은 더욱 꺼리는 바가 없어서 수백 리 사이에 도로가 거의 끊길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공에게 경기ㆍ황해ㆍ평안 삼도 토포사를 겸하게 하고 재령(載寧)에 나가 주둔하게 하였다.
공은 먼저 적의 모주(謀主)를 사로잡아 적의 허실을 다 알아내고는 군사와 말들을 많이 모아서 적의 소굴을 몇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호령이 엄하니 한 명의 도둑도 도망하지 못하였다. 도둑들이 곤궁하고 다급해져 와서 항복하는 자들을 잡는 대로 참수하였으며 끝내 그 괴수를 효시하고 돌아오니, 조정에서는 노비 100명과 토지 50결(結)을 상으로 내렸다. 이때는 도둑떼가 발호한 지 3년이나 되어서 온 도(道)가 피폐하였으나 조정이 제압하지 못하여 적도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음이 마치 장각(張角)의 대방(大方)ㆍ소방(小方)과 같았다. 말하는 자들은 “공의 위엄과 지략이 아니었으면 도둑의 괴수가 필경 목을 바쳤을지 기필할 수 없다.” 하였다.
공의 생년은 상고할 길이 없으나 장형인 첨지 부군이 홍치(弘治) 갑인년(1494, 성종 25)에 출생하였으니, 공의 출생을 계산해 보면 장형보다 2, 3년 또는 4, 5년 정도 뒤였을 것이다. 융경 경오년(1570, 선조 3) 7월에 임소인 평안도 병영에서 별세하여 양주(楊州) 군장리(群場里) 금동(金洞) 갑좌(甲坐)의 산으로 반장(返葬)하였다.
전취 부인 김씨(金氏)는 두 아들을 낳았으나 모두 요절하였고, 후취 부인 허씨(許氏)는 첨정 허연(許衍)의 따님인데 한 딸을 두어 생원 조지(趙摯)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은 3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언진(彦縉)ㆍ언신(彦紳)ㆍ언찬(彦纘)이고, 딸은 단천 부정(端川副正) 이수곤(李壽鵾)과 오천군(烏川君) 이굉(李鍧)에게 시집갔다. 조지는 1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대사성 조존세(趙存世)이고 딸은 판관 박안효(朴安孝), 대사헌 신경진(辛慶晉), 전부(典簿) 원사열(元士悅)에게 출가하였다. 조존세는 2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진사에 장원한 조석형(趙碩亨)과 조석창(趙碩昌)이고 딸은 봉사(奉事) 이사정(李士精), 감역(監役) 홍우직(洪友直)ㆍ이국충(李國忠)에게 출가하였다. 증손과 현손은 너무 많아 다 거론하지 못하며, 현달한 자를 가지고 말한다면 조석창의 손녀사위인 승지 홍수주(洪受疇)와 홍우직의 아들인 좌윤 홍전(洪瑑)이 있으며, 원사열의 아들인 원숙(元䎘)과 손자인 원상(元相)은 모두 통제사이고, 증손 원덕휘(元德徽)는 병사이며 지금의 홍군 우익은 바로 이사정의 외손이다.
옛날 우리 명종이 재위에 있을 때 태평성대가 이어지니, 문신은 안일하고 무신은 나태하여 섬오랑캐들이 속으로 업신여기고 도둑 떼가 발호하였다. 부월을 잡고 적진에 임한 자들은 적의 화살 소리만 들어도 다리를 떨고, 병기를 잡고 성에 오른 자들은 북소리만 들어도 저절로 떨어졌으니, 이는 예로부터 국가가 중엽에 이르러 안일해졌을 때 난을 만나면 전복되고 마는 늘 있는 우환이었다. 이때를 당하여 만일 공이 위엄과 용맹을 떨쳐 제때에 박멸하지 않았다면 지극한 화변(禍變)이 끝내 종묘사직의 우환이 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옛날 한(漢)나라의 서강(西羌)과 송(宋)나라의 농지고(儂智高)는 그 형세가 모두 천하의 안위와 상관이 없었으나 조영평(趙營平)과 적무양(狄武襄)의 공을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칭송하고 있으니, 공이 당한 일을 가지고 논한다면 또 어찌 조영평과 적무양에 비할 뿐이겠는가.
또 세상에서 말하는 자들은 모두 공의 무공을 훌륭히 여기면서도 혹 사람을 너무 많이 죽인 것을 허물하여 심지어는 공이 후손이 없는 것으로 그 증거를 삼기까지 한다. 아, 어찌 그 말이 옳겠는가. 살기를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모든 동물의 일반적인 심정이나 전쟁은 사지(死地)이다. 시퍼런 칼날이 앞에 있는데, 장수된 자가 만일 그 부하들로 하여금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장수를 두려워하게 하지 못한다면 그 누가 기꺼이 시퍼런 칼날을 무릅쓰고 싸워 적을 향해 죽으려 하겠는가.
만약 명령을 따르지 않는 부하 몇 명을 차마 죽이지 못해서 끝내 삼군이 패하고 수많은 백성이 어육(魚肉)이 되는 지경에 이른다면 국가의 존망과 일신의 공죄(功罪)는 말할 것도 없고, 단지 사람의 목숨을 아까워하는 입장만 가지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 경중과 다소가 어떠하겠는가. 이는 “위엄이 사랑을 이기고, 살리는 방도로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것으로 여러 경서에 가르침이 나와 있는 이유이다. 마침내 이것을 가지고 공의 후사가 없음을 의심하니, 이는 또 한퇴지(韓退之)가 사관(史官)에 대한 일을 논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금계(錦溪) 박동량(朴東亮)의 잡기(雜記)에 공이 전라도 방어사가 되었을 때의 일을 기록하여 이르기를, “용문(龍門) 조욱(趙昱)이 유일(遺逸)로 있다가 6품직으로 나가 장성 현감(長城縣監)에 제수되었는데, 군대의 비용을 제대로 대지 못하여 포박되어 잡혀 왔다. 조개가루 재를 얼굴에 뿌리고는 참형에 처하려 하였는데, 공이 이윽고 곤장을 쳐서 내쫓으라고 했다.” 하였고, 상국(相國) 이준경(李浚慶)의 유고(遺稿)에 공이 전라 병사가 되었을 때의 일을 논하기를, “내가 그의 정사한 행적을 들어 보니, 나의 소망에 매우 위로되었다. 모든 일에 오로지 유순한 도를 숭상하니, 도내의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여 이르기를, ‘만일 과연 이와 같다면 당초 우리들이 두려워하던 생각은 모두 공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위엄과 명망이 평소에 드러나 은혜와 신의가 모두 행해진다.’라고 하니, 나는 이 말을 듣고 기쁨을 이길 수 없었다.” 하였다. 지금 이 두 말씀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병서(兵書)에 “유순함을 베풀 곳이 있고 강함을 베풀 곳이 있으니, 유순할 때에는 유순하고 강할 때에는 강해서 마땅함에 맞추어야 한다.” 하였는바, 공과 같은 자는 여기에 얻음이 있다 할 것이다.


[주D-001]상산(象山)의 봉분(封墳) : 상산은 승전(勝戰)한 곳의 산을 본떠 봉분을 만듦을 이른다. 전한(前漢) 때에 곽거병(霍去病)과 위청(衛靑)이 흉노를 크게 혁파하였는데, 이들이 죽자 무제(武帝)는 곽거병을 위하여 기련산(祁連山)을 본떠 무덤을 만들게 하였고, 위청을 위하여 여산(廬山)을 본떠 무덤을 만들게 하였다. 그 후 당나라 이정(李靖)이 북쪽 오랑캐들을 평정하자, 곽거병과 위청의 고사를 따라 그의 무덤을 철산(鐵山)과 같게 하였다.
[주D-002]한신(韓信)이 …… 뜻 : 배수진(背水陣)은 강이나 바다를 등지고 치는 진으로, 한(漢)나라 장군 한신은 조(趙)나라를 공격할 때에 조군(趙軍)의 성벽에 한나라의 붉은 깃발을 꽂아 놓고 배수진을 쳐서 대승을 거두는 등 연전연승하였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주D-003]당간(撞竿) : 대포에 탄약이나 화약을 장전(裝塡)하기 위하여 밀어 넣는 데 쓰던 막대 모양의 기구를 이른다.
[주D-004]장각(張角)의 대방(大方)ㆍ소방(小方) : 장각은 후한(後漢) 때 거록(鉅鹿) 사람으로, 부적과 주술(呪術)로 병을 치료하고 태평도(太平道)라고 칭한 다음 신도들을 규합하여 머리에 황색 두건을 쓰고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당시 이들을 황건적(黃巾賊)이라 칭하였는데 뒤에 관군의 토벌을 받고 궤멸되었다. 방(方)이란 집단의 명칭으로, 대방은 1만여 명, 소방은 6, 7천 명이었다.
[주D-005]한(漢)나라의 …… 있으니 : 조영평(趙營平)은 한(漢)나라 때 영평후(營平侯)에 봉해진 조충국(趙充國)을 가리킨다. 조충국은 선제(宣帝) 때 서강(西羌)이 반란을 일으키자 70세의 늙은 나이로 나가 싸워서 이를 평정한 다음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군사를 정돈하여 돌아왔다. 《漢書 卷69 趙充國傳》적무양(狄武襄)은 송(宋)나라 때의 명장인 적청(狄靑)을 가리키는바, 무양은 그의 시호이다. 인종(仁宗) 때 광원주(廣原州)의 야만족인 농지고(儂智高)를 평정하고 돌아와 추밀사(樞密使)를 제수받았다. 《宋史 卷290 狄靑傳》
[주D-006]위엄이 …… 한다 : 《서경》 윤정(胤征)에 “위엄이 사랑을 이기면 진실로 성공할 것이요, 사랑이 위엄을 이기면 진실로 공이 없을 것이다.〔威克厥愛 允濟 愛克厥威 允罔功〕” 하였고,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편안하게 해주는 방법으로 백성을 부리면 비록 수고롭더라도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고, 살려 주는 방법으로 백성을 죽이면 비록 죽더라도 죽이는 자를 원망하지 않는다.〔以佚道使民 雖勞不怨 以生道殺民 雖死不怨殺者〕” 하였다.
[주D-007]한퇴지(韓退之)가 …… 것 : 한퇴지의 ‘사관에 대해 논하여 유 수재에게 답한 편지〔答劉秀才論史書〕’가 《한창려집(韓昌黎集)》 외집(外集)에 실려 있는바, “공자(孔子)는 성인(聖人)이셨으나 《춘추(春秋)》를 짓고서 곤욕을 당하고 끝내 불우하게 별세하셨으며, 제(齊)나라 태사씨(太史氏)는 형제가 거의 다 죽었고, 좌구명(左丘明)은 춘추(春秋) 시대의 일을 기록하여 이 때문에 실명(失明)하였으며,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를 짓고서 형벌을 받았고, 《한서(漢書)》를 지은 반고(班固)는 수척하여 죽었으며, 《삼국지(三國志)》를 지은 진수(陳壽)는 등용되었다가 폐출(廢黜)을 당하여 끝내 또한 이룬 바가 없었고, 《진서(晉書)》를 지은 왕은(王隱)은 비방을 받고 물러나 집에서 죽었으며, 《한진춘추(漢晉春秋)》를 지은 습착치(習鑿齒)는 발 하나가 잘려 없어졌고, 《위사(魏史)》를 지은 최호(崔浩)와 《후한서(後漢書)》를 지은 범엽(范曄)은 또한 처형되었으며, 《위서(魏書)》를 지은 위수(魏收)는 요절하였고, 송효왕(宋孝王)은 처벌을 받아 죽었으며, 족하(足下)가 칭찬한 《측천실록(則天實錄)》 등을 지은 오긍(吳兢) 또한 몸이 귀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이제 그 후손이 알려진 것이다. 사책(史冊)을 짓는 자는 사람의 원망이 있지 않으면 하늘의 형벌이 있으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고 가볍게 짓겠는가?” 하였다. 유종원(柳宗元)은 한유와 이 일을 논하여 보낸 편지에서 그 불가함을 극구 지적하고, 사관이 된 자는 자신의 직임을 다할 뿐, 형벌과 화는 두려워할 바가 아니라고 하였다.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고조고(高祖考)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부군 묘표



공은 휘가 언순(彦純)이고 자가 성보(誠甫)이니, 첨지로 참판에 추증된 휘 치욱(致勖)의 장자이다. 선비 진주 유씨(晉州柳氏)는 좌참찬에 추증된 유한평(柳漢平)의 따님이다. 가정 계미년(1523, 중종 18)에 출생하였는데, 일찍부터 경서를 배워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다가 식적(食積)이 생겼다. 이에 병을 치료하려고 활쏘기를 배웠는데, 작은 고리를 매달아 표적으로 삼고 활을 쏘면 맞추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다.
무과에 응시하여 서총대(瑞蔥臺) 정시(庭試)에서 일등으로 급제하고, 선전관, 도총부 도사, 토산 현감(兎山縣監), 상주 판관(尙州判官), 해주 판관(海州判官), 양산 군수(梁山郡守), 단천 군수(端川郡守), 경원 부사(慶源府使),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를 역임하고 승지로 발탁되어 서열이 좌승지에 이르렀으며 병조 참의와 함경남도 절도사를 지냈다. 만력(萬曆) 무인년(1578, 선조 11)에 부친상을 당하고는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을 훼손해서 졸곡(卒哭)이 지나자 별세하였다.
공은 대대로 무과로 벼슬하였으나 성품이 온순하고 삼가며 행실이 돈독하였고 학자로 문장을 익히니 온 세상 사람들이 추앙하였다. 또 필법이 청신(淸新)하고 굳세어서 일반적인 필법의 밖에서 초연히 자득하였다. 승정원에 들어가서 을사 위훈(乙巳僞勳)을 삭제할 것을 주청하였는데, 그 의논이 매우 준엄하였다. 이때 위훈에 기록된 사람의 인척이 동료의 장관 자리인 도승지에 있었는데, 곁눈질하고 감히 공과 함께 앉지 못하였다. 마침 임금이 내려 주신 소병(素屛)이 있었는데, 승정원에서 공에게 글씨를 쓸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공이 붓을 잡고 휘갈겨 쓰자 글씨가 매우 뛰어나니, 당시의 서예가들이 감히 따르지 못하였다.
집안에 거할 적에 여러 아들을 엄하게 가르쳐서 자식들이 모시고 밥을 먹을 때에 감히 물을 달라고 하지 못하고 그릇을 두드려 자신의 뜻을 나타냈다고 한다. 공이 별세했을 때에 여러 아들이 아직 성취하지 못하였고, 또 병란을 겪어 관직을 역임한 차례도 간혹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며, 후손에게 남긴 아름다운 교훈도 남아 있는 것이 매우 적어서 겨우 100년이 지났으나 유풍이 점점 없어지니, 아, 애석하다.
배위 죽산 박씨(竹山朴氏)는 참봉 박환(朴煥)의 따님인데, 부인의 도리를 삼가 닦아서 후손들을 잘 키웠다. 장남 즙(楫)은 판관이고 차남은 추(樞)이고 다음 타(柁)는 부호군이며, 딸은 판서 허성(許筬)에게 출가하였다. 부인은 공보다 1년 늦게 태어났는데, 별세한 다음 양주(楊州) 수락산(壽樂山)에 있는 참판 부군의 묘소 왼쪽 자좌(子坐)의 산에 합장하였다.
현손인 의정부 영의정 구만은 삼가 표문을 짓다.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고조고의 유묵에 대한 발문



이상은 아침 해가 붉게 떠오르는 그림에 행초(行草)를 쓴 한 폭이니, 고조고인 승지 부군의 유묵이다. 부군은 비록 무과로 등용되었으나 문학과 고아함으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향년이 길지 못하였고, 또 임진왜란을 겪어서 서적이 모두 없어졌다. 지금 구만이 전해 듣건대 시장(詩章)은 다만 절구 한 편과 율시 한 편이 있고, 보관하고 있는 필적은 오직 초서 8폭과 시험 삼아 쓴 황석공(黃石公)의 글 한 책이 있을 뿐이다. 하루는 삼종제(三從弟) 계하(啓夏)가 시골에서 올라와 이 작은 서폭을 보여 주니, 바로 그의 집에서 옛날부터 보관해 온 것이었다.
아, 지금 부군의 세대가 겨우 100여 년이 지났는데도 글과 글씨가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매우 드물어 얻어 보기 어려움은 아주 오래된 상(商)나라의 종이(宗彛)와 주(周)나라의 솥보다도 더하니, 비록 이 화폭이 짧고 작으며 중간이 또 찢어진 부분이 있으나 후손들이 보물로 여기고 귀중하게 여김이 또한 어찌 공안국(孔安國)이 과두문자(蝌蚪文字)로 쓴 죽간을 얻고 지영(智永)이 잠견지(蠶繭紙)에 쓴 글씨를 지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 필체와 서법의 높고 낮음으로 말하면 불초 구만이 감히 알고 논할 수 있는 바가 아니며, 다만 선배들에게 들은 것을 가지고 말하겠다. 구만이 일찍이 창강(滄江) 조공 속(趙公涑)을 뵈었더니 말하기를, “남 승지의 초서는 바로 오흥(吳興)의 변체(變體)인데, 청신(淸新)하고 호건(豪健)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 이후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하였다. 그리고 창석(蒼石) 이공 준(李公埈)이 지은《상산지(商山志)》에는 이르기를, “판관 남모(南某)는 무인(武人)인데 명망이 있었다. 그가 승지로 있을 적에 승정원에 소병(素屛)이 있었는데, 공이 마음껏 이 병풍에 휘갈겨 쓰니 서법이 절묘하여 사람들이 모두 소아(疎雅)함을 칭찬했다.” 하였다.
그리고 구만이 청주(淸州)에 부임했을 때에 보관하고 있던 초서 8폭을 모각(模刻)해서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송 선생에게 보냈더니, 답서에 이르기를, “선조의 글씨는 지극히 아름다워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씻고 보게 한다. 지금 세상에는 이와 같은 기골과 이와 같은 호건함이 없을 듯하니, 여러 명필가들 사이에 놓는다 하더라도 쉽게 우열을 가리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아, 부군의 유묵은 이 서폭 외에는 다시 보기가 어렵고, 세 분과 같은 감상가를 또한 어찌 다시 쉽게 만날 수 있겠는가.
신미년(1691, 숙종 17) 1월 3일에 현손(玄孫) 구만은 절하고 공경히 쓰다.


[주D-001]공안국(孔安國)이 …… 것 : 공안국은 한나라 곡부(曲阜) 사람으로 공자(孔子)의 12세손이고 자는 자국(子國)이다. 신공 배(申公培)에게 《시경》을 배우고 복생(伏生)에게 《서경》을 배웠다. 한 무제(漢武帝) 때 노 공왕(魯恭王)이 집을 증축하려고 공자의 옛집을 헐다가 벽 속에서 고문의 《상서》ㆍ《논어》ㆍ《효경》을 얻었는데 이것이 과두문자(蝌蚪文字)로 되어 있어서 제대로 읽는 사람이 없었으나 공안국이 금문(今文)으로 읽고 조칙을 받아서 《서전(書傳)》을 지어 58편을 전하였다. 《漢書 卷88 儒林傳》지영(智永)은 진(晉)나라의 명필가인 왕희지(王羲之)의 7세손이다. 왕희지는 일찍이 누에고치처럼 윤택한 잠견지(蠶繭紙)에 서수필(鼠鬚筆)을 사용하여 난정서(蘭亭序)를 썼는데 필법이 매우 신묘하였다. 그 후 당 태종은 그의 7세손 지영으로부터 난정서의 진적(眞跡)을 얻어 매우 아낀 나머지, 이를 모각(摹刻)하여 황자(皇子)와 근신(近臣)들에게 주고 진본은 자기 무덤에 순장하게 하였다. 《蘭亭考》
[주D-002]오흥(吳興) : 조맹부(趙孟頫)를 가리키는바, 조맹부가 오흥 사람이므로 칭한 것이다.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고중조(高仲祖) 통정대부 수 전주부윤 전주진병마절제사(守全州府尹全州鎭兵馬節制使) 공 유사(遺事)

공은 휘가 언경(彦經)이고 자가 시보(時甫)이니, 중년에 서울 동대문 밖에 터를 잡고 스스로 동강(東岡)이라 호하였다. 공은 가정 무자년(1528, 중종 23)에 출생하였는데, 어릴 때부터 총명과 지기(志氣)가 동류들 중에 특별히 뛰어났으며, 천성이 온화하고 낙천적이며 순수하여 온화한 기운이 사람들에게 스며들었다.
젊었을 때에 서화담(徐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또 퇴계(退溪) 선생을 사사하였는데 왕복한 편지에 장려하고 허여함이 지극하였으며 정재기(靜齋記)를 지어 주었다. 또 의심스러운 뜻을 강학할 때에 공의 질문으로 인하여 개정한 것이 많았는바, 《퇴계집(退溪集)》 가운데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일찍이 도산(陶山)에 가서 묻고 배울 때에 경사(經史)를 거론하면 그때마다 전문(全文) 네댓 줄을 외웠는데 한 글자도 틀리지 않으니, 퇴계 선생은 탄복하여 미칠 수 없다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공이 병들어 충주(忠州)에 우거하자 퇴계 선생은 사람을 보내어 계속하여 문병하였으며, 심부름 갔던 사람이 돌아오면 반드시 식사량의 다과와 소변의 빈도를 직접 묻곤 하였으니, 서로 사랑하고 소중히 여김이 이와 같았다.
명종 때에 한수(韓脩) 등 여러 분들과 함께 특별히 천거되어 포의(布衣)로 편전(便殿)에서 소견(召見)하였는데, 대답한 내용이 성상의 뜻에 맞아 헌릉 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고 6품으로 승진하여 공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외직으로 나가 지평 현감(砥平縣監)이 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병으로 체직하고 돌아오니, 이로부터 행실이 더욱 닦아지고 지위가 더욱 높아졌다. 역임한 벼슬 중에 기록할 만한 것은 내직으로는 지평, 집의, 참의, 승지이고 외직으로는 청풍 군수(淸風郡守), 양주(楊州)ㆍ파주(坡州)ㆍ광주(廣州)ㆍ여주(驪州)의 목사, 전주 부윤(全州府尹)이다.
공은 율곡(栗谷) 선생과 매우 친하여 서로 왕래하였으며, 또한 우계(牛溪 성혼(成渾)) 선생과 서로 친하여 우계 선생이 상중에 있을 때에 여막으로 방문하고 조카인 벌(橃)을 부탁하여 수학하게 하였다.
하루는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함께 참의 안자유(安自裕)의 집에 모였는데, 송강이 절구 한 수를 짓기를,
그대의 집에 술이 있는데 시고도 짜니 / 君家有酒酸且鹹
신맛 역시 정계함과 똑같네 / 酸味還同鄭季涵
나라에나 집에나 모두 쓸모가 없으니 / 於國於家俱不用
돌아가 강남에 눕는 것만 못하다오 / 不如歸去臥江南
하였다. 공이 차운(次韻)하기를,
인간의 사표는 안 참의요 / 人間師表安參議
천하의 풍류는 정계함이라오 / 天下風流鄭季涵
별도로 정처 없이 표류하는 나그네 있으니 / 別有飄飄無定客
이름과 자를 알지 못하고 다만 남가라 하네 / 不知名字但云南
하였다.
연세가 높아지고 덕망이 높아지자 문생들이 모여들었는바, 경안 영(慶安令) 이요(李瑤), 무주 현감(茂朱縣監) 성호(成浩), 정자 윤광원(尹光遠)이 모두 세상에 유명한 자들이다. 공은 일찍이 혈병(血病)을 앓고는 이로 인하여 유편(兪扁)의 기술을 익혔다. 선조(宣祖)가 편찮아서 약을 써도 효험이 없자 조야에서는 모두 경황이 없었는데, 공이 상소하여 병이 난 이유와 조섭하는 방법을 아뢰니, 상은 공이 처방한 약을 먹고 좋은 효험을 보아 회복되었다. 이에 내의원에서는 약을 처방하는 데 함께 참여하게 할 것을 계청하였다.
선조 기축년(1589, 선조 22)에 전주 부윤이 되었는데, 이때 역적 정여립(鄭汝立)의 사건이 일어나니, 백유함(白惟咸) 등은 공 또한 정여립을 칭찬하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모함하였다. 공은 면직하고 양근(楊根)의 영천촌(靈川村)으로 돌아와 일생을 마칠 계책을 하였다. 이때 공은 여러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세상일을 살펴보니 오래지 않아 반드시 병란이 있을 것이다. 이곳은 병란을 피할 수 있는 곳이니, 우리 집안사람들은 모두 이곳으로 돌아오도록 해야 한다.”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쟁의 참혹함이 온 팔도에 미쳤으나 영천은 서울과 매우 가까운데도 유독 노략질이 미치지 않아서 종족들이 많이 화를 면할 수 있었으니, 신기하다.
공이 지은 문자와 집에서 거처하고 벼슬살이할 때에 기록한 것이 많았으나 병자호란에 없어져 한마디 말과 한 글자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이제 문중의 노인들이 입으로 서로 전하는 것을 기억하여 이와 같이 기록할 뿐이니, 너무 소략하고 누락되어서 공의 만분의 일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 이후로 또다시 멀어지면 더욱 어두워질까 두려우므로 우선 이것을 기록하는 바이다.
공이 별세한 뒤 95년 되는 무진년(1688, 숙종 14) 봄에 족현손(族玄孫) 구만은 삼가 기록하다.

[주D-001]정계함(鄭季涵) : 계함은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자(字)이다.
[주D-002]유편(兪扁) : 황제(黃帝) 때의 의원인 유부(兪跗)와 주(周)나라 때의 의원인 편작(扁鵲)으로, 모두 뛰어난 명의(名醫)이다.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고숙조(高叔祖) 증 통훈대부 사복시 정 행 통훈대부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 공 묘지명



공은 성이 남씨(南氏)이고 휘가 언진(彦縝)이고 자가 경보(敬甫)이니, 영의정으로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충경공(忠景公)인 휘 재(在)의 6대손이다. 고조는 좌의정을 지낸 충간공(忠簡公) 휘 지(智)이고, 증조는 간성 군수(杆城郡守)로 호조 참판에 추증된 휘 구(俅)이고, 조고는 충좌위 부사과(忠佐衛副司果)로 병조 판서에 추증된 휘 계(悈)이고, 선고는 첨지중추부사로 병조 참판에 추증된 휘 치욱(致勖)이다. 선비 진주 유씨(晉州柳氏)는 의정부 좌참찬에 추증된 유한평(柳漢平)의 따님이다. 가정 신묘년(1531, 중종 26)에 공을 낳았다.
공은 집안 대대로 예법을 돈독히 지키고 여러 형들은 유현(儒賢)들과 종유(從遊)하였는데, 공도 일재(一齋) 이항(李恒)에게 묻고 배워서 몸을 수고롭게 하고 뜻을 독실하게 함으로 사문(師門)에서 인정을 받았다.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는데, 만년에 녹봉을 받기 위해 벼슬하여 선전관에 보임되었다. 융경 정묘년(1567, 명종 22)에 생원ㆍ진사 두 시험에 입격하고 얼마 후 6품에 올랐으며, 내직으로는 사헌부 감찰, 장례원 사평을 지냈고 외직으로는 함열 현감(咸悅縣監)으로 나갔다. 현감을 해임하자 나이가 이미 늙었으므로 벼슬길에 뜻이 없어 고요히 한 방을 지키면서 비록 가난하여 끼니를 자주 굶었으나 태연하였다.
만력 임진년(1592, 선조 25) 봄에 왜구의 소식이 점점 나빠졌으나 국내에서는 나라가 무사태평한 지 오래되어 조야에서는 오히려 개의치 않았는데, 공만은 홀로 이것을 근심하여 말씀하기를, “덕산현(德山縣)은 지역이 궁벽하여 병란을 피할 수 있다.” 하고, 집안 식구를 데리고 가서 살았다. 이해 여름에 왜구가 과연 크게 몰려와서 전쟁이 6, 7년 동안 이어졌다. 전쟁의 참혹함이 팔도에 두루 미쳤으나 오직 호서(湖西) 일대만은 왜적의 칼날이 끝내 미치지 않으니, 사람들은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그대로 본현의 수덕현(修德峴) 남쪽에 거주하니, 산이 감돌고 물이 굽이치며 토질이 비옥하고 풍속이 순박하였다. 띠풀을 베어 지붕을 이고 못을 파며 나무와 꽃을 심고 그 사이에서 한가로이 산보하며 시를 읊고 즐거워하니, 유천(柳川) 한준겸(韓浚謙)이 팔영시(八詠詩)를 지어 주었다.
나이 77세에 별세하여 태안군(泰安郡) 동쪽 금굴산(金堀山) 유좌(酉坐)의 산에 장례하였다. 뒤에 사복시 정에 추증되니, 증손 오성(五星)으로 인해 추은(推恩)한 것이었다. 배위는 정종대왕(定宗大王)의 몇 대손인 서성군(西城君) 이숭조(李崇祖)의 따님인데, 공보다 11년 먼저 별세하여 공의 묘소 뒤에 장례하였다.
1남 벌(橃)을 두었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로 부사(府使)를 지내고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며, 벌은 1남 황(熀)을 두었는데 진사에 입격하고 봉사(奉事)로 참판에 추증되었다. 황은 5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두성(斗星)은 첨지중추이고 다음은 정언 유성(有星), 참판 필성(弼星), 정랑 몽성(夢星)이고 다음은 바로 통제사 오성이며, 딸은 부정(副正) 이세형(李世亨)에게 출가하였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너무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은 비록 덕을 많이 쌓았으나 벼슬한 자취가 미미하고 향년이 비록 높았으나 물러나 한가로이 지낸 지가 오래였다. 더구나 이제 유풍(流風)이 이미 멀어져서 전해지는 것이 별로 없으나 대략 들어 보면 근신함으로 처신하고 겸손함으로 남을 대하여 흠잡을 만한 행실이 없고 버릴 만한 말이 없었다.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고 얻고 잃음을 가슴속에 담아 두지 않아서 온종일 화락하게 지내 화기가 사람들에게 스며들었다 하니, 이는 실로 천품(天稟)의 아름다움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남이 있어서이나 대대로 익혀 온 미덕의 교훈과 스승에게 훈도한 유익함을 또한 어찌 작게 여길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큰 복을 받고 이 때문에 후손에게 복록을 물려준 것이니, 옛날에 이른바 ‘너그럽고 화락하여 잘 마쳐서 자손들이 번성한다.’는 것은 공을 두고 말함일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품부받은 것은 많으나 쓰임은 적었고 / 豐賦嗇施
지위는 낮으나 연세가 높았네 / 位庳年尊
후손에게 복록을 돌려주어 / 歸贏于後
훌륭한 아들과 손자 두었다오 / 有子若孫
면면히 이어가는 오이 덩굴과 같고 / 綿綿如瓜
멀리 가지 뻗는 추나무와 같으니 / 遠條如椒
선을 권장할 만함이 / 善之可勸
이에 매우 분명하네 / 於焉孔昭
유허를 돌아보니 / 睠言遺墟
금굴의 언덕인데 / 金堀之岡
시를 새겨 유택에 묻어서 / 刻詩埋幽
아득한 후손을 기다리노라 / 以俟茫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