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 관련 금석문등 /우리나라 족보 이야기

씨족(氏族) 해동역사 (펌)

아베베1 2010. 9. 18. 15:05


해동역사 제31권
 관씨지(官氏志) 2
씨족(氏族)



○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여 그의 자손이 조선을 식읍(食邑)으로 삼았으므로, 인하여 씨(氏)로 삼았다. 《풍속통(風俗通)》 ○ 《청일통지(淸一統志)》에, “기자가 조선에 도읍하였는데, 분야(分野)로는 기성(箕星)의 분야에 해당되었으므로 이를 씨(氏)와 국명(國名)으로 삼았다.” 하였다.
○ 기자의 지자(支子)인 중(仲)이 우(于) 지방을 식읍으로 삼았으므로, 인하여 선우(鮮于)를 씨(氏)로 삼았다. 《성원(姓苑)》
○ 기준(箕準)이 달아나 바닷가로 들어가 한(韓) 땅에 살면서 한왕(韓王)이라고 스스로를 호칭하였으므로, 기준의 자식과 친척으로서 조선에 남아 있던 자들이 이를 인하여 한씨(韓氏) 성을 썼다. 《삼국지 및 위략》
살펴보건대, 평안도(平安道)에 지금 선우(鮮于)란 성씨가 있는데, 이는 기자(箕子)의 후예이다. 그러므로 평양(平壤)의 숭인전 참봉(崇仁殿參奉)은 선우씨(鮮于氏)가 맡고 있으면서 대대로 기자의 제사를 받들고 있다. 《씨족대전(氏族大全)》을 상고해 보면, 역시 “기자가 조선에 봉해지고, 그의 소자(少子)가 우(于)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이 선우씨가 되었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선우씨는 바로 기자의 소자(少子)의 후예이지 기준(箕準)의 후예가 아니다. 또 《씨족원류(氏族源流)》에는, “마한(馬韓)의 후기에 잔손(孱孫) 3인이 있었는데, 친(親)과 양(諒)과 평(平)이다. 친(親)은 신라(新羅) 탈해왕조(脫解王朝)에 벼슬살이하면서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옛 나라를 인하여 한씨(韓氏)로 성씨를 삼았으니, 이것이 상당 한씨(上黨韓氏)가 되었다. 양(諒)은 용강(龍岡)의 오석산(烏石山)으로 들어가 그대로 선우씨(鮮于氏)를 이었다. 평(平)은 평강(平康)으로 돌아가 기씨(奇氏)가 되었는데, 지금 양덕(陽德)의 기씨는 모두 그 후예이다.” 하였다.
○ 주몽(朱蒙)은 흘두골성(紇斗骨城)에 살면서 스스로 고구려(高句麗)라고 칭하면서 이어 고씨(高氏)로 성을 삼았다. 《후주서》
살펴보건대, 《제왕운기(帝王韻紀)》의 주(注)에 이르기를, “주몽이 처음 탄생하자, 온 나라가 그를 높였으므로 고씨로 성을 삼았다.” 하였고, 권문해(權文海)의 《운옥(韻玉)》에는 이르기를, “주몽은 본디 성이 해씨(解氏)인데 스스로 천제(天帝)의 아들로 햇빛을 타고 태어났다고 하여 드디어 고(高)로 성씨를 삼았다.” 하였다.
○ 고구려(高句麗)에는 모두 5족(族)이 있는데,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노부(桂奴部)이다. 《후한서》 ○ 살펴보건대, 5족이 뒤에 5부(部)로 되었는데, 관제조(官制條)에 상세히 나온다.
고화(高和)는 고구려(高句麗)의 지서(支庶)인데 스스로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므로 고(高)로 성씨를 삼았다. 《진서(晉書)》
○ 후연(後燕)의 고운(高雲)은 본디 고구려(高句麗)의 지속(支屬)으로, 모용보(慕容寶)의 양자가 되어 성씨가 모용씨(慕容氏)가 되었으며, 그 뒤에 연왕(燕王)의 자리에 즉위하여서는 고씨 성을 회복하고 고구려에 통호(通好)하였다. 《자치통감》
○ 후위(後魏)의 우진씨(羽眞氏)는 본디 고구려의 고씨(高氏)로, 우진씨로 고친 것이다. 《속문헌통고》
○ 고려(高麗)의 우씨(羽氏)는 성씨를 고쳐 고씨(高氏)가 되었다. 《통지(通志) 씨족략(氏族略)》
살펴보건대, 우씨(羽氏)에 대해서는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유리왕(琉璃王) 24년에 왕이 기산(箕山)의 들판에서 사냥을 하다가 이인(異人)을 얻었는데, 양쪽 겨드랑이에 깃털이 있었으므로 우씨 성을 하사하였다고 하였다.
○ 요(遼)의 장호(張浩)는 본디 성이 고씨(高氏)로, 동명왕(東明王)의 후예인데, 증조인 고패(高覇)가 요나라에 벼슬살이하면서 장씨(張氏)로 성을 바꾸었다. 《금사》
○ 을지씨(乙支氏)는 동이(東夷)의 복성(複姓)으로,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있다. 《급취편(急就篇) 성씨(姓氏) 주》
개소문(蓋蘇文)은 고구려 사람으로, 성이 천씨(泉氏)인데, 스스로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을 미혹시켰다. 《신당서》 ○ 《급취편》 주에, “천씨(泉氏) : 고구려 개소문의 성이 천씨로, 그의 아들은 천남생(泉男生)이고, 천남생의 아들은 천헌성(泉獻誠)이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개소문의 본성(本姓)은 연씨(淵氏)로, 인물고조(人物考條)에 상세히 나온다.
○ 사선씨(沙先氏) : 당나라 무덕(武德) 연간에 사선영문(沙先英問)이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으로 있었는데, 본디 고구려의 종족이었다. 《만성통보(萬姓統譜)》
○ 곽리씨(霍里氏) : 조선(朝鮮) 사람 곽리자고(霍里子高)가 있다. 《상동》
○ 비씨(卑氏)는 비리국(卑離國)의 후예로, 공손연(公孫淵)의 대장군(大將軍) 비연(卑衍)이 있다. 《자치통감》 ○ 살펴보건대, 《삼국지》를 보면, 마한(馬韓)의 50국 가운데 비리국(卑離國)이 있다.
○ 척왕씨(拓王氏)의 본디 성은 왕씨(王氏)로, 낙랑(樂浪) 사람이다. 원조(遠祖)인 왕비(王羆)가 후위(後魏)의 복파장군 진무후(伏波將軍鎭武侯)가 되었는데, 척왕씨로 성씨를 하사하였다.
살펴보건대, 《만성통보(萬姓統譜)》를 보면, “을불씨(乙弗氏)에는 고구려의 왕인 을불리(乙弗利)가 있다.”고 하였는데, 고구려 왕의 성은 고씨(高氏)로, 한나라 때부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성씨가 바뀐 적이 없었으니,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미천왕(美川王)의 이름은 을불(乙弗)이다.”고 한 것과, 《통감》에 “고구려 왕 을불리(乙弗利)가 자주 요동을 공격하였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능적지(凌迪知)는 오랑캐들에게 복성(複姓)인 을불씨(乙弗氏)가 있는 것을 보고 고구려 왕의 성씨가 을불이라고 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
백제 왕의 성씨는 여씨(餘氏)이다. 《북사(北史)》
○ 백제는 부여(夫餘)의 별종(別種)으로, 왕의 성씨는 부여씨(夫餘氏)이다. 《후주서》 ○ 《만성통보》에, “부여씨(夫餘氏) : 백제국 왕 부여관(夫餘寬)이 부여장(夫餘璋)을 낳았는데, 대방군왕(帶方郡王)이라 불렀고, 이가 부여의자(夫餘義慈)를 낳았는데, 당나라에서 대방군왕(帶方郡王)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를 제수하였으며, 이가 부여융(夫餘隆)을 낳았는데, 웅주도독대방군왕(熊州都督帶方郡王)이 되었고, 이가 부여문선(夫餘文宣)을 낳았는데, 사선경 좌위대장군 낙랑군공(司膳卿左衛大將軍樂浪郡公)이 되었다.” 하였다.
○ 부유씨(鳧臾氏)는 백제의 부여씨(夫餘氏)가 음이 변하여 부유씨(鳧臾氏)로 된 것이다. 《통지(通志) 씨족략(氏族略)》 ○ 《속통고(續通考)》에, “부여씨가 부유씨(鳧臾氏)로 된 것은, 이는 대개 잘못 와전되어서 고쳐진 것이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백제의 선조는 부여(夫餘)에서 나왔으므로 혹 여씨(餘氏)라고도 칭하고 혹 부여씨라고도 칭하며, 또 와전되어서 부유씨로도 되어 있는데, 사실은 똑같은 것이다.
○ 백제국 안에는 대성(大姓)이 8종족(種族)이 있는데, 사씨(沙氏), 연씨(燕氏), 협씨(劦氏), 해씨(解氏), 진씨(眞氏), 국씨(國氏), 목씨(木氏), 구씨(氏)이다. 《수서》
백제의 8성(姓)은, 첫 번째는 진씨(眞氏)이고, 두 번째는 사씨(沙氏)이고, 세 번째는 여씨(刕氏) -음은 여(黎)이다.- 이고, 네 번째는 해씨(解氏)이고, 다섯 번째는 목씨(木氏)이고, 여섯 번째는 연씨(燕氏)이고, 일곱 번째는 국씨(國氏)이고, 여덟 번째는 백씨(苩氏)이다. 《만성통보》
살펴보건대, 협씨(劦氏)는 《북사(北史)》에는 역(力) 자 세 개를 써서 음이 협(協)이라 하였고, 《만성통보》를 지은 능적지(凌迪知)는 조(刁) 자 세 개를 써서 음이 여(黎)라 하였다. 그리고 《통지》에는, 백제전(百濟傳)에서는 여씨(刕氏)는 음이 여(黎)라 하고, 또다시 씨족략(氏族略)에서는 음이 협(俠)이라 하여, 한 책에서 두 가지 음으로 표기하였다. 그런즉 협제(夾漈) 역시 소루하게 한 것이다. 《자서(字書)》를 상고해 보면, 도(刀) 자 세 개를 쓴 여(刕) 자는 있으나 조(刁) 자 세 개를 쓴 여() 자는 없는데, 도(刀) 자 세 개를 쓴 글자는 음이 여(黎)이니, 그렇다면 아마도 잘못하여 조(刁) 자 세 개를 쓴 것으로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구씨(氏)는, 《수서》에서는 초두변[艹]에 구(臼) 자를 써서 구씨(氏)로 하였고, 능적지(凌迪知)는 《만성통보》에서 초두변에 백(白) 자를 써서 백씨(苩氏)로 하였는데, 구() 자의 음은 구(舊)이고, 백(苩) 자의 음은 백(白)이다. 《운회(韻會)》에는 “백제에는 백씨(苩氏)가 있으니, 초두변 아래에 백(白) 자를 쓰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고, 《통지》에도 역시 음이 백(白)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북사》에는 또 묘씨(苗氏)로 되어 있는데, 이는 백(苩) 자가 와전된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무령왕(武寧王) 원년에 좌평(佐平) 백가(苩加)가 가림성(加林城)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였으니, 백제에 백씨(苩氏) 성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 난씨(難氏)는 백제 사람이다. 《급취편 성씨 주》
○ 흑치씨(黑齒氏)는 백제 서부인(西部人)으로, 당나라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연국공(燕國公) 흑치상지(黑齒常之)가 있다. 《통지 씨족략》
○ 사타(沙吒)는 오랑캐의 복성(複姓)으로, 백제의 별장(別將) 사타 상여(沙吒相呂)가 있다. 《자치통감 주》
○ 대씨(大氏) : 당나라에서, 고구려 유민으로 발해(渤海)를 세운 대조영(大祚榮)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삼았다. 《급취편 성씨 주》
호삼성(胡三省)이 말하기를, “《풍속통(風俗通)》에 ‘대씨 성은 대정씨(大庭氏)의 후예로, 대관(大款)이 전욱수(顓頊帥)가 되었다.’ 하였다.” 하였다.
《예기(禮記)》를 살펴보니, “대련(大連)이 거상(居喪)을 잘하였는데, 동이(東夷)의 후예이다.”고 하였는바, 대개 동이에 대씨 성이 있은 지가 오래되었다. 《자치통감 주》
○ 신라 왕의 성은 김씨(金氏)이고, 귀인(貴人)의 성은 박씨(朴氏)이며, 백성들은 성이 없고 이름만 있다. 《신당서》
신라의 대족(大族)은 김씨와 박씨이다. 《오대사》
○ 고려의 사인(士人)들은 문벌(門閥)을 중하게 여기며, 유씨(柳氏), 최씨(崔氏), 김씨(金氏), 이씨(李氏) 4성을 귀족(貴族)으로 꼽는다. 《송사》
○ 김씨는 고려 사람 김행성(金行成)이 있고, 박씨는 고려 사람 박인량(朴寅亮)이 있다. 《급취편 성씨 주》
○ 육합(六合)에 박씨(朴氏) 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 대부분 박(樸)과 같이 부르는데, 실은 음이 표(瓢)로, 고려의 성씨이다. 《인수옥서영(因樹屋書影)》
살펴보건대, 박(朴)의 음은 표(瓢)로, 이것은 중국의 음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박(樸)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방언(方言)이다. 대개 신라의 시조(始祖)가 알[卵]에서 나와 박(朴)으로 성씨를 삼은 데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시조가 나온 알이 표주박[瓢]과 비슷하였는데, 방언에 표주박을 박이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또 박(朴) 자와 박(樸) 자는 중국 사람들 역시 통용하였으니, 《전당시(全唐詩)》의 고비웅(顧非熊)이 쓴 ‘송박처사귀신라시(送樸處士歸新羅詩)’라는 시에서 박씨(朴氏)를 박씨(樸氏)라고 하였다.
○ 유(妞)의 음은 유(紐)로, 성씨인데 고려에 있다. 《자휘(字彙)》
○ 북(北)은 고려의 성씨이다. 《만성통보》 ○ 살펴보건대, 《정자통(正字通)》에도 역시 이것을 인용하였다.
○ 금(金)나라의 본명은 여진(女眞)으로, 숙신씨(肅愼氏)의 유종(遺種)인 발해(渤海)의 별족(別族)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삼한(三韓) 가운데 진한(辰韓)의 역나씨(役拏氏)는 그 지역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미천하다.” 하고, 혹은 또 이르기를, “처음에는 추장(酋長)이 본디 신라 사람으로, 완안씨(完顔氏)라고 하였는데, 완안은 중국말의 왕(王)과 같은 말이다.” 하였다. 《금사》
○ 홍씨(洪氏)의 선조는 중국 사람으로, 당나라에서 재자(才子) 8명을 파견하여 고려로 가서 가르치게 하였는데, 홍씨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의 자손들이 삼한(三韓)에서 대대로 귀하게 되어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하여 당성(唐城)이라 하였다. 《원사》 ○ 살펴보건대, 당성은 지금의 남양부(南陽府)로,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모두 그의 후예이다.
○ 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25년(1365, 공민왕14)에 차황후(次皇后)인 고려의 기씨(奇氏)를 세워 황후로 삼고, 기씨를 고쳐서 숙량합씨(肅良合氏)로 삼았다. 《상동》
○ 철령 이씨(鐵嶺李氏)는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樑) 때부터 벌열(閥閱)로 이름을 드러내었다. 이씨의 선조는 조선(朝鮮)에서 나왔으며, 양평(襄平)으로 이사한 것은 이영시(李英始)부터였다. 《왕어양집(王漁洋集)》
살펴보건대, 《지봉유설(芝峯類說)》을 보면, 우리나라의 벽성(僻姓)으로 성주(星州)에 소씨(㸴氏)가 있는데, 음은 ‘소(小)’이고 뜻은 없다. 소(㸴) 자는 돌석[石] 자 아래에 소우[牛] 자를 쓰기 때문에 음이 소(小)이며, 소의 언음(諺音)은 ‘쇼’로, 세속에서는 우(牛)를 ‘쇼’라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성원(姓苑)》을 보면, 석우씨(石牛氏)가 있으니, 바로 복성(複姓)이다. 소씨는 본디 석우씨인데, 석(石) 자와 우(牛) 자가 합하여져 소씨가 된 것인가? 또 《금사》의 국어해(國語解)를 보면, 석말한(石末漢)의 성은 소(蕭)라고 하였는데, 고려 때 석말천구(石抹天衢)가 있었는바, 말(末) 자가 잘못 우(牛) 자로 되고, 이 두 글자가 합해져서 소(㸴) 자로 된 것을 인해서 음이 소(蕭)로 된 것인가? 소(蕭) 자 역시 언음(諺音)은 ‘쇼’이다.
또 궉씨(鴌氏) 성이 있는데, 음은 권(權)과 억(億)의 반절(半切)로 -언음(彦音)은 ‘’이다.-, 《지봉유설》에 이르기를, “순창(淳昌)에 궉씨가 있다.”고 하였고, 《앙엽기(盎葉記)》에는 이르기를, “선산에 궉씨촌((鴌氏村)이 있다.”고 하였다. 궉(鴌) 자에 대해서 혹자는 우리나라에서 창제한 글자라고 하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살펴보건대, 《증정편해(證正篇海)》를 보면, ‘鴌’의 음은 봉(鳳)이라고 하였고, 《오음정운(五音正韻)》를 보면, ‘鴌’ 자는 고문(古文)의 봉(鳳) 자라고 하였다. 그러니 궉씨(鴌氏)는 글자의 음과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이와 같이 평이하게 잘못 권(權)과 억(億)의 반절로 한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앙엽기》를 보면, 광주(廣州)에 왹씨(氏) 성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자칭 음은 와(臥)와 억(億)의 반절이라고 하였다. -언음(彦音)은 ‘왹’이다.- 왹() 자는 《증정편해》를 보면 어(魚)와 열(列)의 반절로, 그 음이 얼(孽)로 되어 있고, 《자휘보(字彙補)》에는 “문왹(門)이다.”고 하였다.
또 연안(延安)에 헝씨(遤氏)가 있는데, 음은 훤(喧)과 응(應)의 반절이며 -언음은 ‘헝’이다.-, 자서(字書)에는 이런 글자가 없다. 또 《강화지(江華誌)》에는 할씨(㔛氏) 성이 실려 있는데, 자서(字書)에 ‘할(劼)’ 자가 있고, 《집운(集韻)》에는 음이 힐(詰)이라고 하였고, 《설문(說文)》에는 삼간다[愼]는 뜻이라고 하였고, 《서경(書經)》 주고(酒誥)에는, “너는 은나라의 어진 신하들에게 힘써 삼가도록 해야 하니[汝劼毖殷獻臣]”라 하였으니 ‘할(㔛)’ 자는 혹 할(劼) 자가 종으로 연결된 것은 아닌가? 또 흥양(興陽)의 목자(牧子) 가운데 뼘씨(乀氏) 성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관향(貫鄕)은 밀양(密陽)이고, 음은 ‘뼘’이다.
그리고 천씨(千氏), 돈씨(頓氏), 승씨(承氏), 야씨(夜氏), 편씨(片氏), 골씨(骨氏), 공씨(公氏), 옹씨(邕氏), 방씨(邦氏), 일씨(一氏), 먀씨(乜氏) -음은 미(彌)와 야(也)의 반절로, 언음(諺音)은 ‘먀’이다.- 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으나, 역시 우리나라의 벽성(僻姓)이다.


[주D-001]기준의 …… 썼다 : 이 부분의 원문은 ‘其子及親留在國者因冒姓韓氏’이다. 이에 대하여 이병도는, “《위략》의 찬자는 준왕이 ‘자호한왕(自號韓王)’이라 하였기 때문에 고국에 억류된 그의 아들과 친족들도 인하여 한씨(韓氏)를 모칭(冒稱)한 것 같이 말하였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조선왕 기준이 남쪽으로 도망해 오기 이전의 반도 중부 이남에는 아직 한(韓)의 칭호를 가진 지방이 없었고, 기준이 한왕이라 칭한 것도 본디 자신의 성이 본래 한씨였기 때문에 그렇게 자칭한 것이다. 또 고국에 억류된 친족들도 새삼 한씨를 모성한 것이 아니라 그의 본성 역시 그러한 까닭에 한씨라고 인성(因姓)한 것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50쪽》
[주D-002]마한(馬韓)의 …… 후예이다 : 이에 대하여 《동사강목》 부록 상권 고이조(考異條)에는, “이정귀(李廷龜)가 쓴 기자숭인전비(箕子崇仁殿碑)에 ‘마한 말기에 잔손(孱孫) 3인이 있었는데, 친(親)이란 사람은 뒤에 한씨(韓氏)가 되고 평(平)이란 사람은 기씨(奇氏)가 되고 양(諒)이란 사람은 선우씨(鮮于氏)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말한 친(親)은 바로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 말한 ‘기준의 아들 우친이 머물러 있다가 한씨로 모성하였다.[其子友親留在國者因冒姓韓氏]’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이병도는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세보(世譜)를 보면 그들의 원조(遠祖)를 기자(箕子)로 삼고 있다. 이것은 《위략(魏略)》의 글에 의거한 것인데, 그 세보에는 《위략》에 운(云)이라 하고 기자의 후에 우친(友親), 우평(友平), 우량(友諒)이 있어, 그중에 우량이 마한을 공격하여 이기고 상당 한씨(上黨韓氏)가 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는 너무도 심한 날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날조자는 《위략》의 글에 ‘其子及親留在國者因冒姓韓氏’ 운운의 급(及) 자가 《문헌통고》와 같은 서적에 잘못 우(友) 자로 와전된 것을 그대로 보아, 그 밑의 친(親) 자와 합하여 ‘우친(友親)’이란 인명으로 오독(誤讀)한 후 진일보하여 우 자의 항렬을 붙이어 우평, 우량 두 허위 인물을 더 추가한 것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51쪽》
[주D-003]흘두골성(紇斗骨城) :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도 표기한다. 주몽(朱蒙)의 고구려 건국 위치에 대하여 광개토왕릉비에는 홀본(忽本)으로, 《위서(魏書)》 고구려전에는 흘승골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환인현(桓仁縣)의 혼강(渾江) 일대로 비정되는 동일한 지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D-004]고화(高和) : 이병도는, “고화는 앞서(고국원왕 12년 12월) 전연(前燕)의 왕 모용황(慕容皝)이 고구려의 국도인 환도성(丸都城)을 무찌르고 남녀 5만여 구를 노략하여 갔을 때 잡혀간 포로 가운데 한 사람으로, 대대로 연(燕)의 신하가 된 자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285쪽 주》
[주D-005]고운(高雲) : 고화(高和)의 손자로, 연왕 모용보의 양자가 되었는데, 그 뒤에 연왕으로 있던 모용희(慕容煕)가 실정(失政)을 하자, 풍발(馮跋)에 의해 연왕으로 추대되었다.
[주D-006]개소문(蓋蘇文)은 …… 천씨(泉氏)인데 : 이병도는, “개소문에 대하여는 《신당서》 고려열전(高麗列傳)에 ‘개소문이란 자가 있는데, 혹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은 천씨이다.[有蓋蘇文者 或號蓋金 姓泉氏]’라고 한 구절이 있는데, 이에 의거하면 소문의 완칭은 천개소문(泉蓋蘇文)이요, 다른 한 이름은 개금(蓋金)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6년 및 10년 조에 보이는 고구려 대신 연정토(淵淨土)가 《당서》의 ‘소문의 동생 정토[蘇文弟淨土]’와 같은 사람임을 보면, 천씨(泉氏)는 본래 연씨(淵氏)였던 것이 당나라 고조 이연(李淵)의 휘를 피하여 소문의 아들 남생(男生)이 당나라에 투항한 뒤 천(泉) 자로 대신한 것이 아닌가 함이 통설(通說)이다. 《삼국유사》 보장봉노조(寶藏奉老條)에 적힌 ‘스스로 성은 개이고 이름은 금이라고 칭하였으며, 지위가 소문에 이르렀는데, 바로 시중의 직책이다.[自稱姓蓋 名金 至位蘇文 乃侍中職也]’라 하여 소문(蘇文)을 관직명이라 한 것은 고려할 가치도 없다고 본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21쪽 주》
[주D-007]백제 …… 여씨(餘氏)이다 : 백제 왕족의 성씨는 본디 부여씨(扶餘氏)인데, 흔히 여씨(餘氏)로 약칭한다.
[주D-008]협제(夾漈) : 《통지》를 지은 정초(鄭樵)를 말한다. 정초가 협제산(夾漈山)에 살았으므로 사람들이 협제 선생(夾漈先生)이라 칭하였다.
[주D-009]가림성(加林城) : 임천(林川)의 성흥산성(聖興山城)이다.《國譯三國史記 401쪽》
[주D-010]앙엽기(盎葉記) : 이덕무(李德懋)가 지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안에 들어 있는 서명(書名)이다.
[주D-011]할씨(㔛氏)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앙엽기(盎葉記) 2에는 음이 ‘할(轄)’이라고 하였다.
[주D-012]뼘씨(乀氏)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53 제계고(帝系考) 씨족(氏族)에, “음은 사폄념(沙貶念)의 절(切)이다.” 하였다.
 
해동역사 제31권
 관씨지(官氏志) 2
관제(官制) 2

○ 고려의 국관(國官)들은 한 달에 여섯 번 참알(參謁)하며, 문반(文班)은 710명이고, 무반(武班)은 540명이다. 《계림유사(鷄林類事)》
○ 고려의 관직 제도에는 국상(國相)에 시중(侍中), 태위(太尉), 사도(司徒),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시랑(侍郞)ㆍ평장사(平章事)ㆍ참지정사(參知政事), 좌복야(左僕射), 우복야(右僕射), 정당문학(政堂文學),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추밀사(樞密使), 추밀 부사(樞密副使), 동지원주사(同知院奏事) 등의 관원이 있으며, 근시(近侍)에는 좌상시(左常侍), 우상시(右常侍), 어사 대부(御史大夫), 좌승(左丞), 우승(右丞), 육상서(六尙書), 한림 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이 있으며, 종관(從官)으로는 어사 중승(御史中丞), 간관(諫官), 급사(給事), 시랑(侍郞), 주목(州牧)의 유수(留守)ㆍ사(使)ㆍ부사(副使), 합문(閤門)의 집찬(執贊), 육상서(六尙書)의 직관(直官), 도지병마(都知兵馬), 사부(四部)의 호사(護使) 등이 있으며, 경(卿)과 감(監)으로는 육시(六寺)의 경(卿)과 이(貳), 성(省)과 부(部)의 승(丞)과 낭(郞), 국자감(國子監)의 유관(儒官), 비서성(秘書省)의 전직(典職) 등이 있으며, 조관(朝官)으로는 사업(司業), 박사(博士), 사관(史館)의 교서(校書), 태의성(太醫省)과 사천성(司天省)의 녹사(錄事) 등이 있다. 서관(庶官)은 진사(進士)에서부터 관직에 들어가 성(省)과 조(曹)의 보리(補吏), 주현(州縣)의 영위(令尉), 주부(主簿), 사재(司宰) 등이 된다.
○ 좌춘궁(左春宮)은 왕의 세자(世子)가 거처하며, 관속(官屬) 10여 명을 두었다. 《이상 모두 고려도경》
○ 고려 백관(百官)의 명칭(名稱), 품계(品階), 훈위(勳位), 공신호(功臣號), 검교(檢校) 등은 자못 중국과 서로 비슷하다. 《송사》
고려는 인재들이 아주 많아, 나라에 벼슬하는 자라야 귀신(貴臣)이 되어 족망(族望)을 서로 겨루며, 그 나머지 사람들은 진사(進士)가 되어 관원으로 뽑히거나 혹 재물(財物)을 바치고 관원이 되기도 하는데, 세록(世祿)과 이직(吏職)도 모두 등급이 있으므로, 직(職)이 있고, 계(階)가 있고, 훈(勳)이 있고, 사(使)가 있고, 검교(檢校)가 있고, 공신(功臣)이 있고, 여러 위(衛)가 있다. 이것들은 본조(本朝)의 관제(官制)를 본받되, 개원(開元 713~741) 연간의 예(禮)를 참고한 것이다. 그러나 명실(名實)이 맞지 않고 청탁(淸濁)이 혼동되어 한갓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 《고려도경》 ○ 또 이르기를, “지금 그 관칭(官稱)과 훈질(勳秩)이 왕왕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였는데, 혹 그 이유를 캐물으니, ‘개원(開元) 연간의 고사(故事)를 준용한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원(元) 세조(世祖) 지원(至元) 12년(1275, 충렬왕1) 11월 갑오에 고려국의 관직 제도가 참람하다는 이유로 사신을 파견하여 유지(諭旨)를 내려 성(省), 원(院), 대(臺), 부(部)의 관명(官名) 가운데 중국 조정과 비슷한 것들을 모두 고치게 하였다.
○ 16년(1279, 충렬왕5)에 고려 첨의부(簽議府)에게 정4품 도장을 하사하였다.
○ 18년(1281, 충렬왕7) 윤8월에 고려 첨의부를 올려 종3품으로 삼았다.
○ 30년(1293, 충렬왕19) 2월에 고려의 왕 왕춘(王暙)이 첨의부를 올려 첨의사(簽議司)로 삼고 2품의 도장을 내려 주기를 요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성종(成宗) 원정(元貞) 2년(1296, 충렬왕22) 7월에 고려의 첨의사를 올려 2품으로 삼았다.
○ 대덕(大德) 3년(1299, 충렬왕25) 정월에 승상 완택(完澤) 등이 말하기를, “세조 때 어떤 사람이 고려에서 참람되게 성(省), 원(院), 대(臺) 등을 설치하였다고 말하므로 조서를 내려서 폐지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고려에서 마침내 첨의부(簽議府), 밀직사(密直司), 감찰사(監察司)로 이름을 고쳐 설치하였습니다. 지금 고려의 왕인 왕원(王謜)이 그의 신하인 조인규(趙仁規)에게 사도(司徒), 사공(司空), 시중(侍中)의 직을 더하여 주었고, 또 왕거(王昛)는 조인규의 딸을 높여서 영비(令妃)로 만들었으며, 또 자정원(資政院)을 설립하고서 최충소(崔冲紹)를 흥록대부(興祿大夫)로 삼았습니다. 그러니 조서를 내려서 경계시키십시오.” 하였다.
○ 4년(1300, 충렬왕26) 2월에 정동행성 평장(征東行省平章) 활리길사(闊里吉思)가 말하기를, “고려국왕이 스스로 설치한 관청이 358개소이고 관원이 4055명이나 됩니다.” 하니, 사신을 파견하여 가서 바르게 고치고서 아뢰도록 하였다.
○ 5년(1301, 충렬왕27) 7월에 왕거(王昛)가 표문(表文)을 올려 말하기를, “지금 밝으신 조서를 받들고서 관부(官府) 90여 개소를 혁파하고, 관리 270여 명을 파면시켰습니다.” 하였다. 《이상 모두 원사(元史)》
태사(太師) -《고려도경》을 보면, 이자겸(李資謙)이 왕해(王楷)를 세운 뒤 난을 평정한 공으로 태사(太師)에 올려 봉해졌다.- 검교태사(檢校太師) -《경의고(經義考)》를 보면, 김인존(金仁存)이 예종(睿宗) 때 검교태사로 있었다.- 태부(太傅) -《고려도경》을 보면, 김연(金緣)이 지은 보문각기(寶文閣記)에 ‘수 태부상서령 대방공 신보(守太傅尙書令帶方公臣俌)’라 하였다.- 태보(太保) -《고려도경》을 보면, 보문각기(寶文閣記)에 ‘수 태보(守太保) 신 김연(臣金緣)’이라 하였다.- 태위(太尉) -《금사(金史)》 교빙표(交聘表)에, “대정(大定) 12년(1172, 명종2)에 검교태위(檢校太尉) 김우번(金于蕃)을 파견하여 책봉해 준 것에 대해 사은하였다.” 하였다.- 사도(司徒) -《고려도경》에 나오는데, 위에 보인다.- 수 사공(守司空) -《금사》 교빙표에, “대정 2년(1162, 의종16)에 수 사공 김영윤(金永胤)을 파견하여 진봉(進奉)하였다.” 하였다.- 검교사공(檢校司空) -《유환기문(游宦記聞)》에, “선화(宣和) 6년(1124, 인종2)에 검교사공 이자덕(李資德)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진봉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가 삼사(三師)가 되고, 대위(大衛) -바로 태위(太尉)이다.-, 사도(司徒), 사공(司空)이 삼공(三公)이 되는데, 문종(文宗)이 삼사와 삼공을 각 1명으로 정하였으며, 모두 정1품이었다.
내의 시랑(內議侍郞) -《송사(宋史)》에, “개보(開寶) 5년(972, 광종23)에 내의 시랑 서희(徐煕)를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 하였다.-, 중서령(中書令) -《고려도경》을 보면, 김인규(金仁揆)의 아버지 김경융(金景融)이 왕옹(王顒) 때 태부 수 중서령(太傅守中書令)이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문하부(門下府)는 고려 초기에 내의성(內議省)이라고 칭하였고, 문종 때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으로 고치고, 충렬왕 원년(1275)에 상서성(尙書省)과 아울러서 첨의부(僉議府)로 만들었고, 19년(1293)에 원나라에서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로 고치고, 공민왕 5년(1356)에 다시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이라 칭하고 별도로 상서성(尙書省)을 두었으며, 18년(1369)에 문하부(門下府)로 고쳤다.
문하시중(門下侍中) -《경의고(經義考)》에, “김인존(金仁存)은 예종(睿宗) 때 문하시중을 역임하였다.” 하였다.- 첨의중찬(僉議中贊) -《원사》에, “지원(至元) 13년(1276, 충렬왕2)에 첨의중찬 김방경(金方慶)을 파견하여 송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하였다.-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 -《열조시집(列朝詩集)》에, “공민왕 17년(1368)에 도첨의시중 유탁(柳濯)이 영전(影殿)을 건립하는 것에 대해 극간(極諫)하였다.” 하였다.- 시중(侍中) -《열조시집》에, “홍무(洪武) 21년(1388, 우왕14)에 시중 이색(李穡)이 경사(京師)로 왔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시중은 성종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1명을 두었는데, 품계는 종1품이었으며, 충렬왕 때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고치고서 좌, 우 각 1명씩을 두었고, 충선왕 때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고쳤고, 공민왕 때 다시 시중으로 고쳤다.
문하시랑(門下侍郞) 중서 시랑(中書侍郞) -《고려도경》 보문각기(寶文閣記)에, “문하시랑 신(臣) 위(偉), 중서 시랑 신 중장(仲璋)”이라 하였다.-
중서문하 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 -《고려도경》에, “사신을 영접하고 전송하는 것은 개부의 동삼사 수 태보 중서시랑 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太保中書侍郞中書門下平章事) 김약온(金若溫), 개부의 동삼사 수 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최홍재(崔洪宰), 개부의 동삼사 수 태보 문하시랑 겸 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太保門下侍郞兼中書門下平章事) 임문우(林文友)가 맡았다.” 하였다.- 찬성사(贊成事) -《일하구문(日下舊聞)》에, “공민왕 때 찬성사 이공수(李公遂)가 원나라에 갔다.” 하였다.-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명사》에, “홍무(洪武) 5년(1372, 공민왕21)에 문하 찬성사 강인유(姜仁裕)를 파견하여 말을 조공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찬성사는 성종 때 설치하였고, 문하시랑은 문종(文宗) 때 문하시랑 평장사와 중서시랑 평장사 각 1명씩으로 정하였고, 또 중서성과 문하성에 각각 평장사를 두었는데, 이들 모두는 직질(職秩)이 정2품이었다. 충선왕(忠宣王) 때 다시 찬성사라 칭하였으며, 공민왕 18년(1369)에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로 고쳤다.
참지정사(參知政事) -《고려도경》의 보문각기에, ‘참지정사 신(臣) 교(皎)’라 하였다.-
살펴보건대, 목종(穆宗) 때 참지정사가 있었으며, 뒤에 문하 평리(門下評理)로 고쳤다.
정당문학(政堂文學) -《열조시집(列朝詩集)》에, “정몽주(鄭夢周)가 신우(辛禑) 9년(1383)에 정당문학이 되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정당문학은 문종 때 1명을 두는 것으로 정하였으며, 직질은 종2품이었다.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고려도경》 보문각기에, “좌산기상시 신 홍관(洪灌)이 교지를 받들어서 쓴다.” 하였다.- 좌상시(左常侍) 우상시(右常侍) -《고려도경》에 나오는데, 위에 보인다.-
살펴보건대, 목종 때 좌산기상시, 우산기상시가 있었고, 문종 때 좌, 우에 각각 1명씩을 두는 것으로 정하였는데, 직질은 정3품이었으며, 뒤에 좌상시, 우상시로 고쳤다.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원사》에, “중통(中統) 3년(1262, 원종3)에 좌간의대부 박륜(朴倫)을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 태종(太宗) 12년(1240, 고종27)에 우간의대부 조수(趙修)가 들어와서 조알하였다.” 하였다.-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경의고》에, “권근(權近)은 신우(辛禑) 때 좌사의대부이다.” 하였다.- 우사의(右司議) -《열조시집》에, “공민왕 14년(1365)에 정추(鄭樞)가 우사의가 되어 신돈(辛旽)의 간사함에 대해 극간하여 논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목종(穆宗) 때 좌간의대부, 우간의대부가 있었고, 문종 때 좌, 우 각각 1명으로 정하였고, 직질은 정4품이었다. 예종 때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고쳤다.
중서 사인(中書舍人) -《금사》 교빙표(交聘表)에, “대정(大定) 5년(1165, 의종19)에 중서 사인 윤돈신(尹敦信)을 파견하여 존호(尊號)를 올린 것을 축하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태조 13년(930)에 내의사인(內議舍人)을 두었고, 문종 때 중서 사인으로 고치고 1명을 두는 것으로 정하였으며, 직질은 종4품이었다.
정언(正言) -《명시종(明詩綜)》에, “이첨(李詹)은 공민왕 때 급제하여 세 번 승진해서 정언이 되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예종 11년(1116)에 좌습유(左拾遺), 우습유(右拾遺)를 고쳐서 좌정언(左正言), 우정언(右正言)으로 고치고, 각각 1명씩 두는 것으로 정하였는데, 직질은 종6품이었다.
녹사(錄事) -《원사》에, “태종 4년(1232, 고종19)에 녹사 홍거원(洪巨源) 등을 파견하여 국신(國贐)과 첩문(牒文)을 보내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목종 때 문하녹사(門下錄事)가 있었는데, 직질은 종7품이었다.
중서주서(中書注書) -《원사》에, “태조 14년(1219, 고종6)에 중서주서 최일(崔逸) 등을 파견하여 화친(和親)을 맺고 첩문(牒文)을 보내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문종이 내사주서(內史注書)를 고쳐서 중서주서(中書注書)로 삼고, 1명을 두는 것으로 정하였으며, 직질은 종7품이었다.

이상은 모두 문하부(門下府)에 소속된 관직이다.

광평 시랑(廣評侍郞) -《오대사(五代史)》에, “후당(後唐) 동광(同光) 원년(923, 태조6)에 광평 시랑 한신일(韓申一)을 파견해 보내왔다.” 하였다.- 광평 원외랑(廣評員外郞) -《송사》에, “개보(開寶) 5년(972, 광종23)에 광평 원외랑 유은(劉隱)을 파견하여 방물(方物)을 바쳤다.” 하였다.- 상서령(尙書令) -《고려도경》에, “이자덕(李資德)은 태사(太師)로 승진되고, 위(位)가 상서령(尙書令)에 이르렀다.” 하였다.- 검교상서(檢校尙書) -《금사》에, “명창(明昌) 2년(1191, 명종21)에 검교상서 문득품(文得品)을 파견하여 황태후의 상(喪)에 제전(祭奠)을 올렸다.” 하였다.-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 -《고려도경》에 나오는 내용은 위에 보인다.- 검교 상서 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 -《금사》에, “대정 29년(1189, 명종19)에 검교 상서 우복야 이영진(李英搢)을 파견하여 회장(會葬)하는 데 참여하였다.” 하였다.- 상서 좌승(尙書左丞) 상서 우승(尙書右丞) -《원사》에, “지원(至元) 8년(1271, 원종12)에 세자 왕심(王愖)이 상서 우승 송빈(宋玢) 등을 거느리고 와서 입시하였다.” 하였다.- 좌사낭중(左司郞中) -《고려도경》에, “임금을 사사로이 만날 때와 선물을 보내는 일은 좌사낭중 이지보(李之甫)가 맡아보았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태조 때 광평성(廣評省)을 두어 백관을 총괄하여 다스렸는데, 시중(侍中), 시랑(侍郞), 낭중(郞中), 원외랑(員外郞)의 관직이 있었고, 성종 때 상서도성(尙書都省)으로 고치고, 문종 때 상서령(尙書令) 1명에 직질은 종1품, 좌복야와 우복야 각 1명에 직질은 정2품, 좌승(左丞)과 우승(右丞) 각 1명에 직질은 종3품, 좌사낭중(左司郞中)과 우사낭중(右司郞中) 각 1명에 직질은 정5품으로 정하였다.
내봉 경(內奉卿) -《송사》에, “개보(開寶) 5년(972, 광종23)에 내봉 경 최업(崔鄴)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태조 때 또 내봉성(內奉省)이 있었다.
삼사 좌사(三司左使) 삼사 좌윤(三司左尹) -《명시종(明詩綜)》에, “공민왕 때 정몽주(鄭夢周)가 삼사 좌사로 승진되었고, 김구용(金九容)이 삼사 좌윤에 제수되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삼사(三司)는 중외(中外)의 전곡(錢穀)을 출납하고 회계하는 일을 관장하였는데, 충렬왕 때 좌사(左使)와 우사(右使)를 두었고, 공민왕 때 좌윤(左尹)과 우윤(右尹) 각 1명에 직질은 종3품으로 정하였다.
추밀원사(樞密院使)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고려도경》 보문각기(寶文閣記)에, “추밀원사(樞密院使) 신(臣) 궤(軌),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신 자지(字之),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신 안인(安仁)”이라 하였다.-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밀직사사(密直司使) -《원사》에, “지원(至元) 3년(1266, 원종7)에 추밀원 부사 송군비(宋君斐)를 파견하여 흑적(黑的) 등을 인도하여 일본(日本)으로 가게 하였다. 18년(1281, 충렬왕7)에 밀직사사 한강(韓康)을 파견하여 성탄절(聖誕節)을 하례하였다.” 하였다.-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명시종(明詩綜)》에, “조운흘(趙云仡)이 신창(辛昌) 때 동지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 하였다.-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使) -《명시종》에, “공민왕 때 이숭인(李崇仁)은 관직이 첨서밀직사사에 이르렀다.” 하였다.- 지신사(知申事) -《명시종》에, “이첨(李詹)이 공민왕 때 지신사를 역임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밀직사(密直司)는 출납(出納), 숙위(宿衛), 군기(軍機)에 관한 정무를 관장한다. 헌종(獻宗) 원년(1095)에 중추원(中樞院)으로 고치고 추밀원사(樞密院使) 2명, 지원사(知院事) 1명, 동지원사(同知院事) 1명을 두었는데, 직질은 모두 종2품이었고, 부사(副使) 2명은 직질이 정3품이었다. 충렬왕 원년(1275)에 밀직사로 고치고 밀직사사(密直司使) 1명,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3명을 두었는데, 직질은 모두 종2품이고, 지신사(知申事) 1명은 직질이 정3품이었다. 공민왕 11년(1362)에 다시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使)를 설치하였는데, 직질은 종2품이었다.
도지병마(都知兵馬) -《고려도경》에 나오는데, 위에 보인다.- 도평의사(都評議司) -《엄주별집(弇州別集)》에, “홍무(洪武) 24년(1391, 공양왕3)에 조반(趙胖) 등이 고려의 도평의사(都評議司)가 올리는 주본(奏本)을 가지고 왔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려는 초기에 도병마사(都兵馬使)가 있다가 충렬왕 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고쳤는데, 나라에 큰일이 있을 경우에는 사(使) 이상의 관원이 모여서 회의하였다.
우군총제(右軍摠制) -《명시종》에, “정도전(鄭道傳)은 관직이 우군총제이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공양왕(恭讓王) 5년에 전군(前軍)과 후군(後軍)을 줄이고 단지 중군(中軍), 좌군(左軍), 우군(右軍)만 둔 다음,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만들어 중외의 군사에 관한 일을 통괄하게 하였다.
판개성 부사(判開城府事) -《명시종》에, “이색(李穡)이 공민왕 16년(1367)에 판개성부사 겸 대사성(判開城府事兼大司成)으로 있었다.” 하였다.- 경부소감경(京府少監卿) -《금사》에, “대정(大定) 25년(1185, 명종15)에 경부소감경 최소(崔素)를 파견하여 칙서(勅書)와 제사(祭祀)를 내려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문종 때 지개성 부사(知開城府事)를 두었는데, 판사(判事) 및 윤(尹)은 모두 도평의사(都評議司)를 겸하였다. 그리고 충렬왕 때 또 부윤(府尹) 이하의 관원을 두었으며, 도성 안을 관장하는 일은 경부감경(京府監卿)이 맡았는데, 역시 충렬왕이 설치한 것이다.
선관시랑(選官侍郞) -《송사》에, “단공(端拱) 2년(989, 성종8)에 선관시랑 한인경(韓藺卿)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하였다.- 판상이부사(判尙吏部事) -《고려도경》에 나오는데, 위에 보인다.- 이부 상서(吏部尙書) 상서이부 시랑(尙書吏部侍郞) -《금사》에, “대정(大定) 5년(1165, 의종19)에 이부 상서 이지침(李知琛)을 파견하여 존호(尊號)를 올린 것을 하례하였다. 14년에 상서이부 시랑 최균(崔均) 등을 파견하여 정조(正朝)를 하례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이조(吏曹)는 문관의 선발과 훈봉(勳封)에 관한 정사를 관장한다. 고려 초에는 선관(選官)이라고 칭하였으며, 어사(御事), 시랑(侍郞)이 있었다. 성종 때 상서이부(尙書吏部)로 고쳤고, 문종 때 판사(判事)는 1명으로 재신(宰臣)이 겸직하고, 상서(尙書)는 1명으로 직질은 정3품, 시랑(侍郞)은 1명으로 직질은 정4품으로 정하였다.
병부 경(兵部卿) -《오대사(五代史)》에, “진(晉) 개운(開運) 2년(945, 혜종2)에 사신으로 병부 경 유숭관(劉崇觀)이 왔다.” 하였다.- 병관 낭중(兵官郞中) -《송사》에, “단공(端拱) 2년(989, 성종8)에 사신으로 병관 낭중 위덕유(魏德柔)가 와서 공물을 바쳤다.” 하였다.- 상서병부 시랑(尙書兵部侍郞) -《고려도경》에, ‘동 관반 수 병부시랑(同館伴守兵部侍郞) 이지미(李之美)’라 하였다.- 총부 상서(摠部尙書) -《명사(明史)》에, “홍무(洪武) 2년(1369, 공민왕18)에 총부 상서 성유득(成惟得)을 파견하여 천수절(天壽節)을 하례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병조는 무관의 선발과 군무(軍務), 의위(儀衛), 우역(郵驛)에 관한 정사를 관장한다. 태조 원년(918)에 병부 경(兵部卿)을 두었고, 그 뒤에 병관(兵官)이라 칭하였다. 성종 때 상서병부(尙書兵部)로 고쳤고, 문종 때 시랑(侍郞)은 2명으로 직질은 정4품으로 정하였다. 공민왕 18년(1369)에 다시 총부(摠部)라 고치고 상서(尙書)라고 칭하였다.
어사민관 시랑(御事民官侍郞) -《송사》에, “대중상부(大中祥符) 8년(1015, 현종6)에 어사민관 시랑 곽원(郭元)을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 하였다.- 상서호부 시랑(尙書戶部侍郞) -《금사》에, “대정(大定) 7년(1167, 의종21)에 사신으로 상서호부 시랑 유덕객(柳德客)이 와서 만수절(萬壽節)을 하례하였다.” 하였다.- 호부 낭중(戶部郞中) -《송사》에, “함평(咸平) 6년(1003, 목종6)에 사신으로 호부 낭중 이선고(李宣古)가 와서 조알하였다.” 하였다.- 호부 상서(戶部尙書) 호부 시랑(戶部侍郞) -《금사》에, “대정(大定) 16년(1176, 명종6)에 호부 상서 오광척(吳光陟)을 파견하여 사례를 올렸다. 17년에 사신으로 호부 시랑 정수필(丁守弼)을 파견하여 공물을 올렸다.” 하였다.- 민부 상서(民部尙書) -《오학편(吾學編)》에, “홍무(洪武) 2년(1369, 공민왕18)에 민부 상서 자온(子溫)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호조(戶曹)는 호구(戶口), 공부(貢賦), 전량(錢糧)에 관한 정사를 관장한다. 고려 초기에는 민관(民官)이라 칭하였고, 어사(御事), 시랑(侍郞)이 있었다. 성종 때 상서호부(尙書戶部)라고 고쳤고, 문종 때 시랑(侍郞)은 2명인데 직질은 정4품으로, 낭중(郞中)은 2명인데 정5품으로 정하였다. 공민왕 5년(1356)에 다시 민부(民部)를 고쳐서 호부(戶部)라 하였고, 상서시랑(尙書侍郞)이라 칭하였다. 18년에 다시 판도사(版圖司)를 고쳐서 민부(民部)로 삼고 상서(尙書)라 칭하였다.
어사형관 시랑(御事刑官侍郞) -《송사》에, “천희(天禧) 원년(1017, 현종8)에 어사형관 시랑 서눌(徐訥)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하였다.- 상서형부 시랑(尙書刑部侍郞) -《금사》에, “대정(大定) 14년(1174, 명종4)에 상서형부 시랑 차인규(車仁揆)를 사신으로 보내 공물을 올렸다.” 하였다.- 형부 상서(刑部尙書) -《원사》에, “지원(至元) 6년(1269, 원종10)에 형부 상서 김방경(金方慶)이 권국(權國) 왕창(王淐)의 표문을 받들고 왔다.” 하였다.-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 -《명시종》에, “조운흘(趙云仡)이 형부 원외랑으로서 공민왕을 따라 남쪽으로 행행(幸行)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형조(刑曹)는 법률(法律), 송사(訟事), 옥사의 처결 등에 관한 정사를 관장한다. 고려 초기에는 의형대(義刑臺)를 고쳐 형관(刑官)으로 삼았는데, 어사(御事), 시랑(侍郞)이 있었다. 성종 때 상서형부(尙書刑部)로 고쳤고, 문종 때 상서는 1명으로 직질은 정4품, 시랑은 2명으로 직질은 정4품, 원외랑은 2명으로 직질은 정6품으로 정하였다.
춘부 소경(春部少卿) -《오대사》에, “후당 동광(同光) 원년(923, 태조6)에 사신으로 춘부 소경 박암(朴巖)을 보내왔다.” 하였다.- 어사예관 시랑(御事禮官侍郞) -《송사》에, “천희(天禧) 5년(1021, 현종12)에 사신 어사예부 시랑 한조(韓祚) 등이 와서 사은(謝恩)하였다.” 하였다.- 상서예부 시랑(尙書禮部侍郞) -《금사》에, “대정(大定) 3년(1163, 의종17)에 상서예부 시랑 김순부(金淳夫)를 파견하여 공물을 올렸다.” 하였다.- 예부 상서(禮部尙書) -《고려도경》에, “명을 전달하고 앞에서 인도하는 일은 예부 상서 김부일(金富佾)이 담당하였다.” 하였다.-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 -《경의고(經義考)》에, “문종 12년(1058)에 시 예부 원외랑(試禮部員外郞) 이정공(李靖恭)이 《삼례도판(三禮圖版)》을 올렸다.” 하였다.- 예의 판서(禮儀判書) -《명사》에, “홍무(洪武) 17년(1384, 우왕10)에 예의 판서 김진의(金進宜)를 파견하여 말을 진공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예조(禮曹)는 예의(禮儀), 제향(祭享), 조회(朝會), 교빙(交聘), 학교(學校), 과거(科擧)에 관한 정사를 관장한다. 고려 초기에는 예관(禮官)이라 칭하였고, 어사(御事), 시랑(侍郞)이 있었다. 성종 때 이를 고쳐서 상서예부(尙書禮部)로 삼았고, 문종 때 상서(尙書)는 1명에 직질은 정3품, 시랑(侍郞)은 1명에 직질은 정4품, 원외랑은 2명에 직질은 정6품으로 정하였으며, 공민왕 21년(1372)에 다시 예의사(禮儀司)로 고치고 판서(判書)라고 칭하였다.
어사공관 시랑(御事工官侍郞) -《송사》에, “대중상부(大中祥符) 7년(1014, 현종5)에 사신으로 어사공관 시랑 윤증고(尹證古)가 와서 조공하였다.” 하였다.- 상서공부 시랑(尙書工部侍郞) 검교공부상서(檢校工部尙書) -《금사》에, “대정(大定) 26년(1186, 명종16)에 상서공부 시랑 최인(崔仁)을 파견하여 정조(正朝)를 하례하기를 청하였다. 29년(1189, 명종19)에 검교공부상서 황청(黃淸)을 파견하여 회장(會葬)하는 데 참여하고, 아울러 세종(世宗)의 상(喪)에 제전(祭奠)을 올렸다.” 하였다.- 공부 낭중(工部郞中) -《고려도경》에, “임금을 사사로이 만나 보거나 선물을 보내는 일은 공부 낭중 윤준(尹俊)이 맡아보았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공조(工曹)는 산택(山澤), 공장(工匠), 영조(營造)에 관한 일을 관장한다. 고려 초기에는 공관(工官)이라 칭하고 어사(御事), 시랑(侍郞)이 있었으며, 성종 때 이를 고쳐서 상서공부(尙書工部)로 삼았으며, 문종 때 상서(尙書)는 1명에 직질은 정3품으로, 시랑(侍郞)은 1명에 직질은 정4품으로, 낭중(郞中)은 2명에 직질은 정5품으로 정하였다.
어사 대부(御史大夫) 어사 중승(御史中丞) -《고려도경》에 나오는데, 모두 위에 보인다.- 시어사(侍御史) 어사(御史) -《원사》에, “중통(中統) 2년(1261, 원종2)에 시어사 장일(張鎰)을 파견하여 들어와 사례하였다. 태종(太宗) 4년(1232, 고종19)에 어사 설신(薛愼) 등을 파견하여 들어와 조알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사헌부(司憲府)는 시정(時政)을 논하고 풍속(風俗)을 바로잡으며, 규찰하고 탄핵하는 일을 관장한다. 성종 때 사헌대(司憲臺)를 고쳐서 어사대(御史臺)로 삼고, 대부(大夫), 중승(中丞), 시어사(侍御史), 감찰어사(監察御史)를 두었으며, 문종(文宗) 때 대부는 1명에 직질은 정3품으로, 중승은 1명에 직질은 종4품으로, 시어사는 2명에 직질은 종5품으로, 감찰어사는 10명에 직질은 종6품으로 정하였다.
한림 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원사》에, “태조(太祖) 13년(1218, 고종5)에 한림 학사승지 조충(趙沖)을 파견하여 합지길(哈只吉) 등과 더불어 육가(六哥)를 토멸(討滅)하게 하였다.” 하였다.- 직한림원(直翰林院) -《경의고(經義考)》에, “김인존(金仁存)은 나이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여 직한림원이 되었다.” 하였다.- 예문 간열(藝文簡閱) -《명시종(明詩綜)》에, “이첨(李詹)은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 간열에 제수되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예문관(藝文館)은 사명(詞命)을 찬술하는 일을 관장한다. 현종(顯宗) 때 학사원(學士院)을 고쳐서 한림원(翰林院)으로 삼았고, 문종 때 학사승지(學士承旨)는 1명에 직질은 정3품으로, 학사(學士)는 2명에 직질은 정4품으로, 직원(直員)은 4명으로 정하였으며, 충숙왕 때 예문관(藝文館)과 춘추관(春秋館)으로 나누고 예문관에는 검열(檢閱) 2명을 두었는데 직질은 정9품이었다.
감수국사(監修國史) -《고려도경》 보문각기(寶文閣記)에, “수 태보 겸 문하시랑 감수국사(守太保兼門下侍郞監修國史) 신(臣) 김연(金緣)은 전교를 받들어서 찬한다.” 하였다.-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명시종》에, “공민왕 때 정몽주(鄭夢周)가 지춘추관사가 되었고, 이숭인(李崇仁)이 동지춘추관사가 되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춘추관(春秋館)은 시정(時政)을 기록하는 일을 관장한다. 고려 초기에는 사관(史館)이라 칭하고, 감수국사는 시중(侍中)이 겸임하였다. 충숙왕 때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나누고, 춘추관에는 지춘추관사와 동지춘추관사를 두었는데, 2품관 이상이 맡았다.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고려도경》에, “통봉대부(通奉大夫)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신(臣) 홍관(洪灌)은 전교를 받들고서 보문각연기(寶文閣燕記)를 쓴다.” 하였다.- 지경연(知經筵) -《명시종》에, “정몽주(鄭夢周)는 공양왕 때 지경연이 되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예종(睿宗)이 청연각(淸燕閣) 곁에 별도로 각(閣)을 설치하고 보문각(寶文閣)이라 한 다음 대학사(大學士) 1명을 더 두었고, 충목왕(忠穆王) 초에 서연관(書筵官)을 두었으며, 공양왕 2년(1390)에 경연(經筵)이라 고치고 지경연사(知經筵事)를 두었다.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 -《명시종》에, “정몽주(鄭夢周)는 공민왕 9년(1360)에 과거에 급제해서 여러 관직을 거쳐 진현관 대제학이 되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충렬왕 29년(1303)에 진현관(進賢館)을 설치하고, 얼마 뒤에 다시 진현관대제학을 두었는데, 직질은 종2품이었다.
국자사업(國子司業) -《금사》에, “대정(大定) 6년(1166, 의종20)에 국자사업 조인귀(趙仁貴)를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 하였다.- 국자 좨주(國子祭酒) -《금사》에, “대정 12년(1172, 명종2)에 국자 좨주 최보(崔誧)를 파견하여 존호(尊號)를 올린 것을 하례하였다.” 하였다.-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국자직강(國子直講) -《명시종》에, “정몽주(鄭夢周)는 진현관대제학으로서 성균대사성을 겸직하였고, 조운흘(趙云仡)은 형부 원외랑(刑部員外郞)으로서 국자직강으로 옮겼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성균관(成均館)은 유학(儒學)과 교회(敎誨)의 직임을 관장한다. 성종 때 국자감(國子監)을 두었는데, 사업(司業)과 박사(博士)가 있었으며, 문종 때 좨주(祭酒)는 1명에 직질은 종3품으로, 사업(司業)은 1명에 직질은 종4품으로, 박사(博士)는 1명에 직질은 정7품으로 정하였다. 예종 때 판사(判事)를 고쳐서 대사성으로 삼았는데, 직질은 정3품이었으며, 직강(直講)의 직질은 종6품이었다.
비서성(秘書省) -《경의고(經義考)》에, “숙종 3년(1098)에 비서성의 서적(書籍)을 국자감으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하였다.- 비서감(秘書監) -《원사》에, “지원(至元) 8년(1271, 원종12)에 비서감 박항(朴恒)을 파견하여 하례하였다.” 하였다.- 비서 소감(秘書少監) -《금사》에, “대정 3년(1163, 의종17)에 비서 소감 김거실(金居實)을 파견하여 선유(宣諭)한 데 대해 사은하였다.” 하였다.- 비서 승(秘書丞) -《고려도경》에, “사사로이 임금을 만나거나 선물을 보내는 일은 조산랑 비서승(朝散郞秘書丞) 김단(金端)이 담당하였다.” 하였다.- 판비서시(判秘書寺) -《원사》에, “지원 18년(1281, 충렬왕7)에 판비서시 주열(朱悅)을 파견하여 왕의 이름을 바꾼 것을 고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전교시(典校寺)는 경적(經籍)과 축소(祝疏)를 관장한다. 성종 14년에 내서성(內書省)을 고쳐 비서성(秘書省)으로 삼고, 감(監), 소감(少監), 승(丞)을 두었다. 문종 때 감은 1명에 직질은 종3품으로, 소감은 1명에 직질은 종4품으로, 승은 2명에 직질은 종5품으로 정하였으며, 뒤에 전교시(典校寺)로 삼고 판사(判事)를 두었는데, 직질은 정3품이었다.
합문사(閤門使) 합문 부사(閤門副使) 합문 지후(閤門祗候) -《고려도경》에, “사사로이 임금을 만나거나 선물을 보내는 일은 합문사 김보신(金輔臣), 합문 지후 고당유(高唐愈)가 담당하였고, 명을 전하고 앞에서 인도하는 일은 합문 부사 유문지(劉文志)가 담당하였다.” 하였다.- 판합문사(判閤門事) -《원사》에, “지원 11년(1274, 원종15)에 판합문사 이신손(李信孫)을 파견하여 표문(表文)을 받들고 들어와서 사은하였다.” 하였다.- 지합문사(知閤門事) 합문 인진사(閤門引進使) 합문 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고려도경》에, “명을 전하고 앞에서 인도하는 일은 지합문사 심안지(沈安之), 합문 인진사 김의원(金義元), 합문 통사사인 심기(沈起)가 담당하였다.” 하였다.- 권지 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 -《원사》에, “태조 14년(1219, 고종6)에 권지 합문지후 윤공취(尹公就)를 파견하여 화친을 맺은 데 대한 첩문(牒文)을 보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통례문(通禮門)은 조회(朝會)와 의례(儀禮)를 관장한다. 목종 때 합문사, 합문 부사, 합문 지후가 있었고, 문종 때 판합문사의 직질은 정3품으로, 지합문사는 겸관(兼官)으로, 합문사의 직질은 정5품으로, 합문 인진사는 2명에 직질은 정5품으로, 합문 부사는 정6품으로, 합문 통사사인은 4명으로, 합문 지후는 4명에 정7품으로, 권지 합문지후는 6명으로 정하였다.
태상랑(太常郞) -《열조시집(列朝詩集)》에, “정몽주(鄭夢周)가 지은 ‘김 태상랑을 위한 만시[輓金太常郞詩]’가 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전의시(典儀寺)는 제사(祭祀)와 증시(贈諡)를 관장하는데, 목종조(穆宗朝) 때 태상 경(太常卿)과 재랑(齋郞)이 있었다.
전중감(殿中監) 전중 소감(殿中少監) -《금사》에, “천덕(天德) 2년(1150, 의종4)에 전중감 박순중(朴純中)을 파견하여 보위(寶位)에 오른 것을 하례하였다. 대정(大定) 3년(1163, 의종17)에 전중 소감 김거실(金居實)을 파견하여 선유(宣諭)한 데 대해 사은하였다.” 하였다.- 판종부사(判宗簿事) -《명사》에, “홍무(洪武) 8년(1375, 우왕1)에 판종부사 최원(崔原)을 파견하여 고애(告哀)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종부시(宗簿寺)는 족속(族屬)의 보첩(譜牒)에 관한 일을 관장한다. 목종조에 전중성(殿中省)의 감(監)과 소감(少監)이 있었고, 문종 때 전중감은 1명에 직질은 종3품으로, 전중 소감은 1명에 직질은 종4품으로 정하였으며, 충선왕 2년(1310)에 종부시로 고치고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를 두었는데, 직질은 정3품이었다.
내군 경(內軍卿) -《오대사》에, “진(晉) 개운(開運) 2년(945, 혜종2)에 내군 경 박예언(朴藝言)이 왔다.” 하였다.- 위위 경(衛尉卿) 위위 소경(衛尉少卿) -《금사》에, “태화(泰和) 원년(1201, 신종4)에 위위 경 진언광(秦彦匡)을 파견하여 생일(生日)에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대정(大定) 3년(1163, 의종17)에 위위 소경 이공로(李公老)를 파견하여 만춘절(萬春節)을 하례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위위시(衛尉寺)는 의물(儀物)과 기계(器械)를 관장하는데, 태조 원년(918)에 내군 경(內軍卿)을 두었고, 성종 때 위위시로 고쳤으며, 문종 때 위위 경은 1명에 직질은 종3품으로, 위위 소경은 1명에 직질은 종4품으로 정하였다.
사복 정(司僕正) -《명사》에, “홍무(洪武) 17년(1384, 우왕10)에 사복 정 최연(崔涓)을 파견하여 말[馬]을 바쳤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사복시(司僕寺)는 여마(輿馬)와 구목(廐牧)을 관장한다. 충렬왕 때 태복시(太僕寺)를 고쳐 사복시로 삼고 정(正) 2명을 두었는데, 직질은 정3품이었다.
예빈성(禮賓省) -《송사》에, “희령(煕寧) 2년(1069, 문종23)에 고려국의 예빈성에서 복건성(福建省)의 전운사(轉運使)에게 첩문(牒文)을 보내었다.” 하였다.- 예빈 경(禮賓卿) -《송사》에, “천희(天禧) 2년(1018, 현종9)에 예빈 경 최원신(崔元信)을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 하였다.- 예빈 소경(禮賓少卿) -《금사》에, “대정(大定) 3년(1163, 의종17)에 예빈 소경 허세수(許勢修)를 파견하여 보위(寶位)에 오른 것을 하례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예빈시는 빈객(賓客)과 연향(燕享)을 관장하는데, 태조(太祖) 4년(921)에 예빈성을 두었고, 문종 때 예빈 경 1명에 직질은 종3품으로, 예빈 소경 1명에 직질은 종4품으로 정하였다.
태부 경(太府卿), 태부 소경(太府少卿), 태부감 경(太府監卿), 태부 소감(太府少監) -《금사》에, “태화(泰和) 원년(1201, 신종4)에 태부 경 이승백(李承白)을 파견하여, 책봉해 준 데 대해 사은하였다. 대정 6년(1166, 의종20)에 태부 소경 이세의(李世儀)를 파견하여 정조(正朝)를 하례하였다. 승안(承安) 원년(1196, 명종26)에 태부감 경 유응거(劉應擧)가, 명창(明昌) 5년(1194, 명종24)에 태부 소감 유택(柳澤)이 모두 공물을 바쳤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내부시(內府寺)는 재화(財貨)와 늠장(廩藏)을 관장하는데, 문종 때 태부시경 1명에 직질은 종3품으로, 태부 소경 2명에 직질은 종4품으로 정하였으며, 공민왕 5년(1356)에 태부감으로 고쳤다.
소부승(少府丞) -《송사》에, “단공(端拱) 2년(989, 성종8)에 소부승 이광(李光)을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소부시(少府寺)는 공기(工技)와 보장(寶藏)을 관장하는데, 광종 때 물장성(物藏省)을 고쳐 소부감(少府監)으로 삼고, 소부승 2명에 직질은 종6품으로 정하였다.
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 -《엄주별집(弇州別集)》에, “홍무 24년(1391, 공양왕3)에 판선공시사 양천식(楊天植)을 파견하여 사들인 말을 올렸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선공시(繕工寺)는 토목(土木)과 영선(營繕)을 관장하는데, 충렬왕 때 판선공시사는 정3품으로 정하였다.
판사재사(判司宰事) -《원사》에, “중통(中統) 원년(1260, 원종1)에 판사재사 한즉(韓卽)을 파견하여 즉위한 것을 하례하였다.” 하였다.- 사재 소경(司宰少卿) -《금사》에, “대정(大定) 7년(1167, 의종21)에 사재 소경 반함유(潘咸有)을 파견하여 정조(正朝)를 하례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사재시(司宰寺)는 어량(魚梁)과 천택(川澤)을 관장하는데, 문종 때 설치하고, 판사재사의 직질은 정4품으로, 사재 소경은 1명에 직질은 종4품으로 정하였다.
군기감(軍器監) -《원사》에, “지원(至元) 8년(1271, 원종12)에 세자 왕심(王愖)이 군기감 설공검(薛公儉) 등을 거느리고 입시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군기시(軍器寺)는 영조(營造)와 병기(兵器)를 관장하는데, 문종 때 군기감 1명에 직질은 정4품으로 정하였다.
영서운관사(領書雲觀事) -《명시종(明詩綜)》에, “정몽주(鄭夢周)가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으로서 영서운관사가 되었다.” 하였다.- 사천성녹사(司天省錄事) -《고려도경》에 나오는데, 위에 보인다.-
살펴보건대, 서운관(書雲觀)은 천문(天文), 역수(曆數), 측후(測候), 각루(刻漏)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데, 현종 때 태복감(太卜監)을 고쳐 사천대(司天臺)로 삼았고, 예종 때 사천감(司天監)으로 고쳐 칭하였으며, 그 뒤에 서운관(書雲觀)으로 칭하였다.
태의성 녹사(太醫省錄事) -《고려도경》에 나오는데, 위에 보인다. 《고려도경》에 또 이르기를, “약국(藥局)을 두고 세 등급의 관원을 두었는데, 첫째는 태의(太醫), 둘째는 의학(醫學), 셋째는 국생(局生)이라 하며, 푸른색의 옷에 목홀(木笏) 차림으로 날마다 직에 임한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전의시(典醫寺)는 의약(醫藥)과 치료(治療)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데, 목종조에 태의감(太醫監)이 있어 관원을 두었다.
양온령(良醞令) -《경의고(經義考)》에, “예종 11년(1116)에 청연각(淸讌閣)에 임어하여 내시인 양온령 지창흡(池昌洽)에게 명하여 《예기(禮記)》 2편을 강론하게 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사온서(司醞署)는 주례(酒醴)를 올리는 일을 관장하는데, 문종 때 양온서령(良醞署令) 2명에 직질은 정8품으로 정하였다.
내전숭반(內殿崇班) 전전승지(殿前承旨) -《고려도경》에, “사사로이 임금을 만나거나 선물을 보내는 일은 내전숭반 호인영(胡仁穎)과 전전승지 임총(林寵)이 담당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액정국(掖庭局)은 성종 때 액정원을 고쳐 액정국으로 삼았고, 문종 때 내전숭반 4인에 직질은 정7품으로, 전전승지 8명에 직질은 정9품으로 정하였다.
사(使) 부사(副使) 판관(判官) 녹사(錄事) -《송사》에, “진봉사(進奉使)인 내의 시랑(內議侍郞) 서희(徐煕), 부사인 내봉 경(內奉卿) 최업(崔鄴), 판관인 광평 시랑(廣評侍郞) 강예(康禮), 녹사인 광평 원외랑(廣評員外郞) 유은(劉隱)을 파견하였다.” 하였다.- 절급(節級) -《책부원귀》에, “후당(後唐) 청태(淸泰) 3년(936, 태조19)에 왕자로 대상(大相)인 왕규(王規), 부사인 광평 시랑(廣評侍郞) 최유(崔儒) 및 절급(節級) 30여 명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하였다.-
접반(接伴) 동접반(同接伴) -《고려도경》에, “접반은 정봉대부(正奉大夫) 형부상서주국 사자금어대(刑部尙書柱國賜紫金魚袋) 윤언식(尹彦植)이고, 동접반은 통봉대부(通奉大夫) 상서예부시랑 상호군 사자금어대(尙書禮部侍郞上護軍賜紫金魚袋) 김부식(金富軾)이었다.” 하였다.- 관반(館伴) 동관반(同館伴) -《고려도경》에, “관반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 사공 동지추밀원사 상주국(守司空同知樞密院事上柱國) 김인규(金仁揆)이고, 동관반은 정의대부(正議大夫) 수 상서병부시랑 상호군 사자금어대(守尙書兵部侍郞上護軍賜紫金魚袋) 이지미(李之美)였다.” 하였다. ○ 《고려도경》에 또 이르기를, “고려에서 상국의 사신을 접대함에 있어서는 접반관(接伴官), 관반관(館伴官)이 있는데, 이들은 신하들 가운데서 영민한 자를 가려 뽑아 이 직책을 맡겨 맞이하는 예를 행하게 한다.” 하였다.-
일본국신사(日本國信使) -《원사》에, “지원(至元) 4년(1267, 원종8) 9월에 고려 왕이 그 나라의 기거사인(起居舍人) 반부(潘阜), 서장관(書狀官) 이정(李挺)을 국신사(國信使)로 삼아 서신을 가지고 일본으로 가게 하였다.” 하였다.-
상주국(上柱國) 주국(柱國) -《유환기문(游宦記聞)》에, “선화(宣和) 6년(1124, 인종2)에 사(使) 검교사공 상주국(檢校司空上柱國) 이자덕(李資德)과 부사(副使) 상서예부시랑 주국(尙書禮部侍郞柱國) 김부철(金富轍)을 파견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훈(勳)의 두 품계에는 상주국과 주국이 있는데, 문종 때 상주국은 정2품으로, 주국은 종2품으로 정하였다.
후(侯) 백(伯) -《명시종》에, “공민왕 때 설손(偰遜)이 고창백(高昌伯)에 봉해졌다가 다시 부원후(富原侯)에 봉해졌고, 이색(李穡)이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졌다.” 하였다.- 개국후(開國侯) 개국남(開國男) -《고려도경》에, “개부의 동삼사 수 태보 겸 문하시랑 감수국사 상주국 강릉군개국후 식읍일천삼백호 식실봉삼백호(開府儀同三司守太保兼門下侍郞監修國史上柱國江陵郡開國侯食邑一千三百戶食實封三百戶) 김연(金緣), 통봉대부(通奉大夫) 보문각학사 좌산기상시 상호군 당성군개국남 식읍삼백호 사자금어대(寶文閣學士左散騎常侍上護軍唐城郡開國男食邑三百戶賜紫金魚袋) 홍관(洪灌)”이라 하였다.-
살펴보건대, 작위(爵位)는 다섯 등급으로,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이 있다. 문종 때 공과 후는 식읍 3천 호에 정2품으로, 군공(郡公)은 식읍 2천 호에 종2품으로, 현후(縣侯)는 식읍 1천 호, 현백(縣伯)은 7백 호에 모두 종5품으로, 현남(縣男)은 3백 호에 종5품으로 정하였으며, 충렬왕 이후로는 폐지하였다. 공민왕 5년(1356)에 다시 공, 후, 백, 자, 남을 사용하였으며, 모두 정1품으로 하였다.
부원군(府院君) 군(君) -《명시종》에, “이색(李穡)은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고, 정몽주(鄭夢周)는 처음에는 영원군(永原君)에 봉해졌다가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다시 봉해졌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이성(異姓)의 여러 군(君)은 고려 초기에는 역시 다섯 등급의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직질은 정1품이었다. 그러다가 공민왕 5년에 여러 군을 고쳐 공(公), 후(侯), 백(伯)으로 삼았고, 11년에 다시 부원군(府院君)은 직질을 정1품, 여러 군은 직질을 종1품으로 고쳤다.
대상(大相) -《책부원귀》에, “후당 청태(淸泰) 3년(936, 태조19)에 왕자(王子)로 대상(大相)인 왕규(王規)를 파견하여 와서 조공을 바쳤다.” 하였다.-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고려도경》에 나오는데, 위의 개국남조(開國男條)에 보인다.- 흥록대부(興祿大夫) -《원사》에 나오는데, 위의 대덕삼년조(大德三年條)에 보인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고려도경》에 나오는데, 위의 관반조(館伴條)에 보인다.-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고려도경》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이부 시랑(吏部侍郞) 박승중(朴昇中)”이라 하였다.- 정의대부(正議大夫) -《고려도경》에 나오는데, 위의 동관반조(同館伴條)에 보인다.- 통의대부(通議大夫) -《고려도경》에, “통의대부(通議大夫) 전중감(殿中監) 정담(鄭覃)”이라 하였다.- 태중대부(太中大夫) -《유환기문(游宦記聞)》에, “부사(副使)는 태중대부 상서예부시랑 김부철(金富轍)이다.” 하였다.- 조산대부(朝散大夫) -《금사》에, “대정(大定) 4년(1164, 의종18)에 조산대부(朝散大夫) 위위 소경(衛尉少卿) 정효칭(鄭孝偁)을 파견하여 만춘절(萬春節)을 하례하였다.” 하였다.- 정봉대부 통봉대부 -《고려도경》에 나오는데, 위의 접반조(接伴條)에 보인다.- 중시대부(中侍大夫) -《고려도경》에, “중시대부 황군상(黃君裳)”이라 하였다.- 중량대부(中亮大夫) -《고려도경》에, “중량대부 지합문사 심안지(沈安之)”라 하였다.-, 조산랑(朝散郞) -《고려도경》에 나오는데, 위의 비서승조(秘書丞條)에 보인다.- 중위랑(中衛郞) 중량랑(中亮郞) 충훈랑(忠訓郞) 성충랑(成忠郞) 보의랑(保義郞) 승절랑(承節郞) -《고려도경》에, “사사로이 임금을 만나거나 선물을 보내는 일은 중위랑 유급(劉及), 중량랑 팽경(彭京), 충훈랑 왕승(王承), 성충랑 이준기(李俊畸), 보의랑 이준이(李俊異), 승절랑 허의(許宜)가 담당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려 초기에는 관계(官階)가 문관과 무관으로 나뉘어지지 않고 신라(新羅)와 태봉(泰封)의 제도를 뒤섞어 썼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태조(太祖)가 대광(大匡), 대승(大丞), 대상(大相)의 칭호를 썼고, 성종(成宗) 14년(995)에 비로소 문관과 무관의 관계를 나누어, 문관의 대광을 고쳐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대승을 흥록대부(興祿大夫)로 하였다. 문종(文宗) 때 관제(官制)를 고쳐, 문반(文班)의 산계(散階)는 모두 29품계로, 종1품은 개부의동삼사 -공민왕 5년(1356)에 정1품으로 고쳤다.-, 종2품은 금자광록대부 -공민왕 때 종1품으로 고쳤다.-, 정3품은 은청광록대부 -공민왕 때 정2품으로 고쳤다.-, 정4품 상(上)은 정의대부 -충선왕 때 정3품으로 고쳤다.-, 정4품 하(下)는 통의대부 -충선왕 때 종3품으로 고쳤고 공민왕 때 정3품으로 고쳤다.-, 종5품 상은 대중대부(大中大夫) -충선왕 때 정4품으로 고쳤고, 공민왕 때 종3품으로 고쳤다.-, 종5품 하는 조산대부 -공민왕 때 종4품으로 고쳤다.-, 종7품 하는 조산랑이라 하였다. 충렬왕 24년(1298)에 충선왕(忠宣王)이 정2품을 고쳐 흥록대부(興祿大夫)라 하고, 종2품을 정봉대부(正奉大夫)라 하였다. 그 뒤에 관계(官階)를 고친 것이 일정하지 않았다. 통봉대부, 중시대부, 중량대부 등 여러 대부와 중위랑 이하의 여러 낭관에 대해서는 《고려사》를 참고해 보아도 상고할 수가 없는바, 고치는 즈음에 사관(史官)이 빠뜨리고 기록하지 않음을 면치 못하였으니, 참으로 탄식할 뿐이다.
○ 고려의 군사를 제어하는 방략(方略)은, 군(軍)에는 장(將)을 두고, 장에는 영(領)을 두며, 대오(隊伍)에는 정보(正步)를 두고, 열(列)에는 등(等)을 둔다. 열은 육군(六軍)으로 되어 있는데, 용호(龍虎), 신호(神虎), 흥위(興衛), 금오(金吾), 천우(千牛), 공학(控鶴)이며, 이를 나누어서 양위(兩衛)를 만들고, 이를 다시 3등으로 구별하여 선군(船軍), 해군(海軍), 맹군(猛軍)이라 한다. 《고려도경》
상장군(上將軍) 대장군(大將軍) 장군(將軍) -《원사》에, “지원(至元) 8년(1271, 원종12)에 상장군 정자여(鄭子璵)를 파견하여 진도(珍島)를 평정한 것을 사례하였다. 6년에 대장군 강윤소(康允玿)를 파견하여 권신(權臣)을 죽였다고 아뢰었다. 태종(太宗) 4년(1232, 고종19)에 장군 김보정(金寶鼎)을 파견하여 들어와 조회하였다.” 하였다.- 상호군(上護軍) -《고려도경》에 나오는 내용은 위의 접반조(接伴條)에 보인다.- 중랑장(中郞將) 낭장(郞將) 별장(別將) -《원사》에, “태종 4년에 중랑장 지의원(池義源)을 파견하여 나라에서 보내는 선물과 첩문(牒文)을 보내었다. 지원 8년에 낭장 최유엄(崔有渰)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치고 하례하였다. 또 고려에서 별장(別將) 서칭(徐稱)을 파견하여 조양필(趙良弼)을 인도해서 일본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다.” 하였다.-
용호좌우친위군장(龍虎左右親衛軍將) 용호좌우친위기두(龍虎左右親衛旗頭) -《고려도경》에, “용호좌우친위군장은 왕이 출입할 경우에 10여 명이 우선(羽扇)과 금월(金鉞)을 잡고서 따른다. 용호좌우친위기두(龍虎左右親衛旗頭)는 대개 군위(軍衛)의 대장(隊將)이다.” 하였다.- 상육군좌우위장군(上六軍左右衛將軍) 상육군위중검랑장(上六軍衛中檢郞將) -《고려도경》에, “상육군좌우위장군은 갑옷과 투구 차림을 하였는데, 궁전 문 위에 서 있으며, 오직 천자의 조서를 받거나 천자에게 올리는 표문에 절하고 보내는 날에는 회경전(會慶殿) 중문(中門)에 8명, 양쪽 곁문에 4명이 서 있다. 상육군위중검랑장은 대개 왕실에 공이 있는 사람을 차례로 옮겨 보직하는데, 왕이 이들을 믿어 이들의 힘을 빌어서 내외를 보전하고 막는다.” 하였다.- 천우위대장군(千牛衛大將軍) -《명사》에, “홍무 2년(1369, 공민왕18)에 천우위대장군 김갑량(金甲兩)을 파견하여 천수절(天壽節)을 하례하였다.” 하였다.- 감문위호군(監門衛護軍) -《명사》에, “홍무 7년(1374, 공민왕23)에 감문위호군 주의(周誼)가 와서 조공하였다.” 하였다.- 궁부문위교위(宮府門衛校尉) -《고려도경》에, “궁부문위교위(宮府門衛校尉)가 맡은 직임은 군사의 계급을 총괄하며, 왕부(王府)에 머무르면서 여러 문을 수위(守衛)한다.” 하였다.- 영군낭장(領軍郞將) 영병상기장(領兵上騎將) -《고려도경》에, “영군낭장의 복식(服飾)은 자색 비단으로 만든 전포(戰袍)를 입고, 영병상기장의 복식은 전각복두(展脚幞頭)를 썼다.” 하였다.- 산원기두(散員旗頭) -《고려도경》에, “육군(六軍)의 산원기두는 또한 군중(軍中)의 총령자(總領者)이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려 태조 초기에는 마군장군(馬軍將軍), 대장군(大將軍)이 있었는데, 이는 무관직(武官職)이었으며, 2년에 육위(六衛)를 두었는데, 좌우위(左右衛), 신호위(神虎衛), 흥위위(興威衛), 금오위(金吾衛), 천우위(千牛衛), 감문위(監門衛)였다. 목종 5년(1002)에 육위에 각각 상장군(上將軍), 대장군(大將軍), 장군(將軍), 중랑장(中郞將), 낭장(郞將), 별장(別將), 산원(散員), 대정(隊正)을 두었으며, 그 뒤에 다시 응양군(鷹揚軍)과 용호군(龍虎軍) 이군(二軍)을 두었는데, 직급이 육위의 위에 있었다. 공양왕 때 이군과 육위를 아울러서 팔위(八衛)라 칭하였다.
행영중군사(行營中軍使) 중군지병마사(中軍知兵馬事) 중군지병마부사(中軍知兵馬副使) 좌군사(左軍使) 좌군지병마사(左軍知兵馬事) 좌군지병마부사(左軍知兵馬副使) 우군사(右軍使) 우군지병마사(右軍知兵馬事) 우군지병마부사(右軍知兵馬副使) -《화한삼재도회》에, “몽고(蒙古)에서 일본(日本)을 정벌하면서 고려를 향도(嚮道)로 삼았는데, 고려 삼익군(三翼軍)의 중군사는 김방경(金方慶), 중군지병마사는 박지량(朴之亮)과 김흔(金忻), 중군지병마부사는 임개(任愷)이고, 좌군사는 김신(金侁), 좌군지병마사는 위득유(韋得儒), 좌군지병마부사는 손세정(孫世貞)이고, 우군사는 김문비(金文庇), 우군지병마사는 나유(羅裕)와 박보(朴保)이고, 우군지병마부사는 반부(潘阜)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성종 8년(989)에 동서북면병마사(東西北面兵馬使) 1명, 지병마사(知兵馬事) 1명, 지병마부사(知兵馬副使) 2명을 두었다. 또 옛 제도에, 변경에 일이 있을 경우 양부(兩府)의 재신(宰臣)에게 명해서 변경으로 가서 군대의 일을 전담하게 하고는 이를 대번병(大番兵)이라고 불렀는데, 문종 원년(1047)에 이를 고쳐서 행영병마사(行營兵馬使)로 삼았다.
배융부위(陪戎副尉) -《몽계필담(夢溪筆談)》에, “가우(嘉祐) 연간에 소주(蘇州)의 바다에서 표류해 온 사람이 글 한 통을 내어 보였는데, 바로 둔라도수령(屯羅島首領) 배융부위(陪戎副尉)에게 고칙하는 내용이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둔라(屯羅)는 바로 탐라(耽羅)이며, 부위(副尉)는 고려의 관직명이다. 《고려사》를 보면, 성종 14년(995)에 무산계(武散階)를 정하였는데, 모두 29품계였으며, 종9품의 아래를 배융부위라 하였다. 또 의종(毅宗) 계유년(1153, 의종7)에 탐라에서 부위(副尉) 중련(中連)과 진직(珍直) 등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좌승(佐丞) 좌윤(佐尹) -《책부원귀》에, “주(周) 현덕(顯德) 6년(959, 광종10)에 왕자(王子) 좌승(佐丞) 왕긍(王兢), 좌윤(佐尹) 황보위광(皇甫魏光) 등을 파견하여 와서 진봉(進奉)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려 초기에는 무관(武官)도 역시 대상(大相)과 좌승(左丞)으로 품계를 삼았는데, 이른바 좌승(佐丞)이니 좌윤(佐尹)이니 하는 것이 무관직인지는 모르겠다.
○ 고려에는 2경(京), 6부(府), 9절도(節度), 1백 20군(郡)이 있다. 《오대사》
○ 고려의 사신 곽원(郭元)이 말하기를, “본국에는 주군(州郡)이 1백여 개가 있으며, 10로(路)에 전운사(轉運使)를 두어 통괄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송사》
살펴보건대, 고려 초기에는 제도(諸道)의 전운사가 있었으나 현종 20년(1029)에 혁파하였으며, 또 절도사(節度使)가 있었는데, 현종 3년(1012)에 혁파하였으며, 그 뒤에 안찰사(按察使)를 두었다.
○ 고려에는 3경(京), 4부(府), 8목(牧)이 있으며, 또 방어(防禦)하기 위한 군(郡) 118개, 현진(縣鎭) 390개, 주도(洲島) 3700개를 설치하였으며, 여기에는 모두 수령(守令), 감관(監官)을 두어 백성을 다스린다. 오직 목(牧), 수(守), 도호(都護)의 관사(官舍)만이 여러 칸이고, 영장(令長)은 소재(所在)에 따라 백성들의 집에 거처한다. 《고려도경》
안렴사(按廉使) -《명시종(明詩綜)》에, “조운흘(趙云仡)은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해서 전라도(全羅道), 해서도(海西道), 양광도(楊廣道) 세 도의 안렴사를 역임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충렬왕 2년(1276)에 안찰사를 고쳐서 안렴사로 삼았고, 그 뒤에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고쳤으며, 공양왕 4년(1392)에 다시 안렴사를 두었다.
도통령(都統領) 서경 도통(西京都統) -《원사》에, “지원(至元) 6년(1269, 원종10)에 도통령 최탄(崔坦)이 50여 성을 이끌고 귀부(歸附)하였다. 또 서경 도통 이연령(李延齡)이 군사를 더 보태어서 토벌하기를 청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려사》의 지(志)를 보면 공민왕 18년(1369)에 각도(各道)에 도통사(都統使)를 두었다고 하였는데, 《원사》를 보면 지원 연간에 도통령, 서경 도통 등의 관직이 있다. 그렇다면 도통(都統)이라는 칭호는 이미 원종(元宗) 때부터 있었던 것이지, 공민왕 때 창제된 것은 아니다.
인주 도령(麟州都領) 신기 도령(神騎都領) -《원사》에, “홍복원(洪福源)의 아버지 홍육선(洪六宣)을 도령(都領)으로 삼아 인주(麟州)를 진압하게 하였고, 홍복원을 신기 도령(神騎都領)으로 삼아 거기에 있게 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려사》의 지(志)에서는 상고할 수가 없는데, 도통령(都統領)과 비슷한 관직으로 생각된다.
사부호사(四府護使) -《고려도경》에 나오는데, 위에 보인다.-
살펴보건대, 현종 때 제도(諸道)의 안무사(安撫使)를 혁파하고서 사도호사(四都護使)를 두었으며, 문종 때 비로소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4명을 두었다.
서경 유수(西京留守) -《금사》에, “대정(大定) 15년(1175, 명종5)에 고려의 서경 유수 조위총(趙位寵)이 40여 성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킨 다음 내부(內附)하였다.” 하였다.- 유수사(留守使) 부유수(副留守) -《고려도경》에 나오는데, 모두 위에 보인다.
살펴보건대, 성종 때 동경 유수사(東京留守使)와 부유수(副留守) 각 1명씩을 두었고, 또 지서경 유수사(知西京留守事)와 부유수 각 1명씩을 두었다. 문종 때 남경 유수(南京留守)와 부유수 각 1명씩을 두었고, 인종 때 서경 유수사(西京留守使)를 두었는데, 유수사는 3품 이상이었고, 부유수는 4품 이상이었다.
계림부윤(鷄林府尹) -《명시종(明詩綜)》에, “조운흘(趙云仡)은 공양왕 2년(1390)에 계림부윤으로 나갔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성종 때 경주(慶州)를 동경(東京)으로 삼고 유수사를 두었으며, 충렬왕 34년(1308)에 계림부(鷄林府)로 고치고 윤(尹)을 두었다.
지남원부사(知南原府事) -《경의고(經義考)》에, “문종 12년(1058)에 지남원부사 시 예부원외랑(知南原府事試禮部員外郞) 이정공(李靖恭)이 《삼례도판(三禮圖板)》을 올렸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태조가 신라(新羅)의 소경(小京)을 고쳐서 신하들에게 맡기면서 부사(府使)를 두었다가 뒤에 다시 지사(知事)를 두었다.
지주(知州) -《고려도경》에, “주목(州牧)에서 영접하는 일은 예부 시랑 지청주(禮部侍郞知淸州) 홍약이(洪若伊), 호부 시랑 지광주(戶部侍郞知廣州) 진숙(陳淑), 형부 시랑 지전주(刑部侍郞知全州) 오준화(吳俊和)가 담당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세 주(州)는 고려 때 모두 목사(牧使)를 두었는데, 직질은 3품 이상으로 대도호부(大都護府)와 같았다. 그리고 옛 제도에 외임에 보임되는 자는 모두 경관직(京官職)을 띠고 부임하였으며, 만약 직질이 높은 자가 외임에 보임되어 품질(品秩)이 서로 맞지 않을 경우에는 본직(本職)에 전(前) 자를 띠고서 부임하였다.
동래 현령(東萊縣令) -《명시종》에, “공민왕 14년(1365)에 정추(鄭樞)가 좌사의(左司議)가 되어 신돈(辛旽)의 간사함에 대해 극론하다가 동래 현령으로 쫓겨났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문종 때 각 현마다 영(令) 1명에 직질은 7품 이상으로, 위(尉) 1명에 직질은 8품으로 정하였다.
안동서기(安東書記) -《명시종》에, “조운흘이 공민왕 6년(1357)에 과거에 급제하여 안동 서기로 등용되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려의 제도에 대도호부 및 중도호부에는 모두 서기 1명이 있었는데, 6품과 7품 이상이었다.
군산도주사(群山島注事) -《고려도경》에, “선화(宣和) 5년(1123, 인종1) 6월 6일에 군산도에 도착하니, 푸른색 도포를 입은 관리가 홀(笏)를 바로잡고서 배 안에서 읍을 하면서 군산도주사라고 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주사(注事)는 바로 섬의 진장(鎭將)으로, 본조(本朝)의 첨사(僉使)의 칭호와 같은 것인데, 《고려사》의 지(志)에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천호(千戶) -《명사》에, “홍무(洪武) 21년(1388, 우왕14)에 고려의 천호 진경(陳景)이 와서 항복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천호 역시 주도(洲島)의 진장(鎭將)에 대한 호칭으로, 《원사》에, “대덕(大德) 8년(1304, 충렬왕30)에 대(臺), 성(省), 원(院)의 관원에게 명해서 고려의 천호 석천보(石天輔)를 매를 때리고 안서(安西)로 옮겨 살게 하라고 명하였다.” 하였다.-

이상은 고려의 관직 제도에 관한 것이다.

[주D-001]간관(諫官) : 중서문하성의 정4품 벼슬인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와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를 가리킨다.
[주D-002]합문(閤門)의 집찬(執贊) : 이 부분이 원문에는 ‘閤門執贄’로 되어 있는데, 송징강본 《고려도경》 권7에 의거하여 ‘閤門執贊’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합문 집찬은 종4품이다.
[주D-003]사부(四部)의 호사(護使) : 사부는 군사적 중요 도시인 안북(安北), 안남(安南), 안동(安東), 안변(安邊)을 말하며, 여기에 도호부(都護府)를 두고 도호부사라는 관직을 두었다.
[주D-004]육시(六寺)의 경(卿)과 이(貳) : 상서육부(尙書六部) 소관하의 여러 시, 즉 태상시(太常寺), 위위시(衛尉寺), 태복시(太僕寺), 예빈시(禮賓寺), 대부시(大府寺), 사농시(司農寺), 사재시(司宰寺) 등의 경(卿)과 소경(少卿)을 말한다.
[주D-005]국자감(國子監)의 유관(儒官) : 국자감의 사업(司業)을 가리킨다.
[주D-006]비서성(秘書省)의 전직(典職) : 비서성의 감(監)과 소감(少監)을 말한다.
[주D-007]주현(州縣)의 영위(令尉) : 주현의 으뜸 벼슬아치를 말한다.
[주D-008]왕춘(王暙) : 충렬왕(忠烈王)의 이름이다.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간행한 신교본(新校本) 《원사》에는 왕춘(王賰)으로 되어 있다.
[주D-009]왕원(王謜) : 왕원은 충선왕(忠宣王)의 이름이다. 이 당시는 충렬왕이 즉위해 있었는데, 원나라에서 충렬왕 24년 1월에 세자로 있던 충선왕 왕원을 즉위하게 하고, 충렬왕을 봉하여 일수왕(逸壽王)이라고 하였다. 그 뒤 충선왕이 관제(官制)를 개정하는 등 개혁 정치를 실시하자, 원나라에서는 8월에 사신을 보내어 충선왕의 왕인(王印)을 회수한 다음 원나라로 불러들여 숙위하게 하고, 충렬왕을 복위(復位)시켰다.
[주D-010]왕거(王昛) : 충렬왕의 고친 이름이다. 충렬왕의 처음 이름은 왕춘(王暙)이다.
[주D-011]사신을 …… 하였다 : 이때 원나라에서 산동 선위사(山東宣慰使) 탑찰아(塔察兒)와 형부 상서(刑部尙書) 왕태형(王泰亨)이 사신으로 나왔다.
[주D-012]영전(影殿) : 공민왕의 비(妃)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영전(影殿)으로, 이해에 왕륜사(王輪寺)에 있던 영전을 지금의 개성부 성균관 앞에 있는 마암(馬巖)으로 옮겨 지었는데, 유탁이 이에 대해 간하다가 투옥되었다.《東史綱目 第15上》
[주D-013]지원(至元) …… 하였다 : 이때 원나라 세조가 일본과 우호하고자 하여 병부 시랑(兵部侍郞) 흑적(黑的)을 국신사(國信使)로 파견하면서, 고려가 일본과 이웃하여 있으므로 길을 인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 고려로 하여금 길을 인도하게 하였다. 그러자 고려에서는 추밀원 부사 송군비와 예부 시랑(禮部侍郞) 김찬(金贊) 등을 보내 길을 인도하게 하였으나, 일본까지 도착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元史 卷208 外夷列傳》
[주D-014]한강(韓康) : 원문에는 ‘韓’이라고 한 밑에 “나의 선조인 문혜공으로 휘가 강이다.[先文惠公諱康]”라고 소주(小註)가 달려 있다.
[주D-015]공양왕(恭讓王) 5년 :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는 고려 공양왕 3년(1391)에 설치되었다가, 조선 태조 2년(1393)에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개편되었다. 공양왕의 재위 기간은 1389년에서 1392년이므로 5년은 3년의 오기이다.
[주D-016]만수절(萬壽節) : 금나라 황제의 생일이다.
[주D-017]권국(權國) 왕창(王淐) : 권국은 권지국사(權知國事)로, 중국의 인준을 받지 못한 왕에 대한 호칭이며, 왕창은 안경공(安慶公)을 말한다. 지원 6년은 원종(元宗) 10년(1269)으로, 이해에 정권을 잡고 있던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위(廢位)시켜 태상왕(太上王)이라 하고, 안경공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그 뒤 몇 달 만에 몽고의 간섭으로 안경공은 다시 폐위되었으며, 임연은 몽고의 입조(入朝) 요구에 울화병이 나서 죽었다.
[주D-018]의형대(義刑臺) : 고려 초기에 태봉(泰封)의 관제에 따라 설치한 형부(刑部)의 전 이름이다.
[주D-019]이름을 …… 고하였다 : 충렬왕의 원래 이름은 왕심(王諶)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왕춘(王暙)으로 바꾸었으며, 그 뒤 충렬왕 19년(1293)에 왕거(王昛)로 다시 바꾸었다.
[주D-020]최원(崔原)을 …… 고애(告哀)하였다 : 최원은 《고려사》 신우(辛禑) 원년 정월 조에 보이는 최원(崔源)의 잘못이다. 한 해 전인 홍무 7년(1374)에 공민왕이 이인임(李仁任)에게 피살된 것을 부고한 것이다.
[주D-021]목홀(木笏) : 나무로 만든 홀이다. 홀은 벼슬아치가 조정에 들어갈 때 조복에 갖추어 손에 쥐는 것이다.
[주D-022]충선왕(忠宣王) : 이 당시는 충렬왕이 즉위해 있었는데, 원나라에서 충렬왕 24년 1월에 세자로 있던 충선왕 왕원(王謜)을 즉위하게 하고 충렬왕을 봉하여 일수왕(逸壽王)이라고 하였다.
[주D-023]지원(至元) …… 사례하였다 : 원나라의 간섭에 항거한 삼별초(三別抄)가 진도로 들어가 대항하자, 원나라에서 흔도(忻都), 사추(史樞), 홍다구(洪茶邱)를 파견하여 대패시키고 삼별초군이 왕으로 추대하였던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목 베었는데, 김통정(金通精)은 탐라(耽羅)로 도망해 들어가 계속 항거하였다.《元史 卷208 外夷列傳》
[주D-024]강윤소(康允玿)를 …… 아뢰었다 : 강윤소(康允玿)는 《고려사》에는 ‘康允紹’로 되어 있다. 권신(權臣)은 김준(金俊)으로, 김준은 최이(崔怡)의 후계자인 최의(崔竩)를 죽이고 권력을 잡아 세도를 부리다가 임연(林衍)과 알력을 빚어 원종 9년(1268)에 피살되었다.
[주D-025]우선(羽扇)과 금월(金鉞) : 우선은 새의 깃으로 만든 부채이고, 금월은 금으로 만든 도끼로 모두 의장(儀仗)의 하나이다.
[주D-026]8명 : 송징강본 《고려도경》 권11에는 6명으로 되어 있다.
[주D-027]김갑량(金甲兩) : 《명실록(明實錄)》에는 김갑우(金甲雨)로 되어 있다.
[주D-028]궁부문위교위(宮府門衛校尉) : 송징강본 《고려도경》 권12에는 관부문위교위(官府門衛校尉)로 되어 있다.
[주D-029]조위총(趙位寵)이 …… 내부(內附)하였다 : 고려 명종 4년(1174)에 조위총이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등의 무신정권(武臣政權)에 반기를 들어 처음에는 여러 차례 관군(官軍)을 격퇴시켰으나, 형세가 불리해지자 자비령(慈悲嶺) 이북의 40여 성을 들어 내부하는 조건으로 금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금나라에서 이를 거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명종 6년에 서경이 함락되어 반란이 실패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