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 호조참의공 휘 담/월담공 휘 담 유허비문

有明朝鮮通政大夫戶曹參議集」 최담유허비(崔霮遺墟碑)

아베베1 2010. 7. 8. 16:51

 

 

 

 

 

 전주최문  문성공 휘아 시조공  휘    아  (고려문화시중)

                               2세손   휘 용봉  (고려중랑장)

                               3세손   휘 을인  (사온직동정)

                               4세손   휘   담   (호조참의)

                              

                   최담유허비(崔霮遺墟碑)

 

 

有明朝鮮通政大夫戶曹參議集」賢殿直提學月塘崔公遺墟碑」崇禎紀元後四戊子五月日立」
全州府南門外溪山擅勝▨山之陽玉流洞有月塘崔公遺墟今去公之世已屢百」
年矣而巖臺諸刻尙宛然人之過之者猶指點而咨嗟焉夫豈一時繁華之盛直以」
致然㢤公全州人諱霮烟村先生德之之考也烟村公手錄公實蹟求文字於人有」
曰吾先君生扵至正丙戌五月▨日甫九歲而孤性好學擧業中司馬試於壬寅仕」
内侍拜叅官又中丁巳文科不勝將母之念退于桑鄊子職極修而仍喜遯自非不」
求宦達丙子為賢相所薦以奉常少卿應▨命戊寅拜中訓知珍州事庚辰解組▨」
鄊日以花木詩勾為事而優逰自▨丙申蒙優老▨恩陞檢校戶曹㕘議集賢殿提」
學又曰接人謙恭康强無比八旬以後騎馬無人扶持徒步無杖提携而遍行郷閭」
遇孫侄軰亦下馬受禮而鄊中慶吊迎餞無不與焉嘗餞府尹子月塘樓上呼两妓」
執紙立書一絶有願入岐陽朝罷後湖南湏記一閒人之勾甲寅六月得疾言語動」
止無異平日似不極苦以其二十五日倐然而逝此其始終大畧而所謂丁巳」
皇明洪武十年而丙子我▨朝受命之五年也嗚呼公旣有厚德復享淸福當時名」
勝多作詩讚頌之者其爲後人之所誦說不衰固冝矣今寒碧堂亦公之江亭舊址」
而且巖臺諸刻若光風霽月鳶飛魚躍公之襟懷意趣有足以想像者而所與逰是」
金節齊權陽村崔晩六諸公則又豈非不見其山願見其木者耶公有四男長匡之」
次直之皆集賢直提學次得之典農少尹季卽烟村以淳德髙節為」
世文兩朝名臣官藝文直提學後承繁衍文武顯達不▨盡述而孫生明曾孫秀孫」
忠成玄孫弼成繼成連孫六世孫命龍八世孫安俱以忠孝學行與爼豆之享今公」
子孫之賢若是其多讚詩序所謂積善餘慶之正理者信不誣矣遺墟乆為他人所」
有公諸後孫合力▨取之而將立石以識之来求余文者曰觀錫謙錫也余感其爲」
先之誠意不以蕪拙辭而畧書之如此云」
崇禎四丁亥孟春 日 恩津宋稺圭撰 幷書前面」
有司十二世孫存中」
十四世孫一性」
十五世孫穆欽十六世孫偰謹書」

 

 

 

최담(崔霮) 유허비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戶曹參議)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 월당(月塘) 최공(崔公) 유허비(遺墟碑)

전주부(全州府) 남문(南門) 밖에 계곡과 산의 경치가 뛰어난 금산(錦山)의 남쪽 옥류동(玉流洞)에 월당(月塘) 최공(崔公)의 유허가 있다. 지금은 공이 살던 시대로부터 수백 년이 흘렀으되 암대(巖臺 : 바위로 된 대)에 새긴 글씨는 아직도 완연하여 지나는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탄식하고 있으니 무릇 어찌 한때 성대한 영화를 누렸다 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공은 전주 사람으로 휘(諱)는 담(霮)이니, 연촌(烟村) 덕지(德之) 선생의 부친이다. 연촌공(烟村公)은 손수 공의 실제 행적을 기록하여 나에게 문자로 써 줄 것을 부탁하며 말하기를, “우리 선군(先君)께서는 바로 이곳에서 병술년(충목왕 2, 1346년) 5월 일에 태어나셨는데 겨우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셨다. 성품이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임인년(공민왕 11, 1362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내시(內侍)에서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참관(參官)에 제수되었다. 또 정사년(우왕 3, 1377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는데 어머니를 모시려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여 사퇴하고 향리로 물러났으니 자식의 도리를 극진히 다하고 기꺼이 물러나 자락(自樂)하고 벼슬길을 구하지 않았다.
병자년(태조 5, 1396년)에 어진 정승의 추천을 받아 봉상시 소경(封常寺少卿)으로 부임하였다. 무인년(태조 7, 1398년)에 훈지진주사(訓知珍州事)에 제수되었으나 경진년(정종 2, 1400년)에 해임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날마다 꽃이나 나무를 읊는 시를 짓는 것으로 일삼았으며 느긋하게 노닐며 자적하였다. 병신년(태종 16, 1416년)에 노직(老職)으로 검교(檢校) 호조참의(戶曹參議)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에 제수하였으며 또 ‘사람들을 접함에 겸손하고 공손하며 건장하기가 비할 데 없다.’하였으니 팔순이 넘어서도 말을 탈 때는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타고 내릴 수 있었으며 걸을 때도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나 지팡이가 없이도 두루 마을길을 돌아다녔는데, 손자나 조카들을 만나면 또한 말에서 내려 인사를 받았으며 마을의 경조사에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일찍이 월당루(月塘樓)에서 부윤(府尹)을 전별(餞別)할 때 기생 두 명을 불러 종이를 잡게 하고 곧바로 “
기양(歧陽)에 들어가 조회(朝會)가 끝난 후에 호남(湖南) 한인(閑人) 한 사람을 기억해 주옵소서(願入歧陽朝罷後 湖南須記一閑人)”라는 구절이 들어간 절구(絶句) 한 수를 써내려 갔다.
갑인년(세종 16, 1434년) 6월에 병이 들었으나 말이나 행동이 평소와 다른 것이 없었으며 몹시 고통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달 25일에 홀연 세상을 떠나셨다. 이에 그 시종(始終)을 대략 기술하여 이른바 -몇 자 판독 불능- 명(明)나라 홍무(洪武) 10년(우왕 3, 1377년)이었으며 병자년(태조 5, 1396년) 우리 태조께서 명을 받으신지 5년 되던 해이다.
아, 공은 후덕(厚德)이 있는 데다 또 청복(淸福)까지 누려 당시에 뛰어난 경치를 보고 시로 짓고 문장으로 기리고 읊은 것이 많은데, 후인들이 그것을 외우고 말하는 것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지금 한벽당(寒璧堂) 또한 공이 노닐던 강가의 정자에 있던 옛터인데 암대(巖臺)에 새겨진 ‘광풍제월(光風霽月)’, ‘연비어약(鳶飛魚躍)’ 같은 글귀에서 공의 마음속 의취(意趣)를 상상해 볼 수 있으며, 김절재(金節齋), 권양촌(權陽村), 최만육(崔晩六) 제공(諸公)이 공과 더불어 이곳에서 노닌즉 어찌 ‘그 산을 보지 못했다면 그 나무라도 보기를 바라노라.’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아들 넷을 두었으니, 장남은 광지(匡之)이고 차남은 직지(直之)이니 모두 집현전 직제학이며 삼남은 득지(得之)이니 전농시(典農寺) 소윤(少尹)이며 막내아들은 연촌(烟村)이 순덕(淳德)하고 절개가 높다고 여겼는데 -몇 자 판독 불능- 세종과 문종 양조의 명신(名臣)으로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지냈으며, 후손들이 번창하였고 문무(文武)의 관리로 현달(顯達)하였으되 다 기술하지 못하지만 -이하 몇 자 의미 불명- 6세손 명룡(命龍), 8세손 안(安)은 모두 충효와 학행으로 향사(享祀)를 받고 있다.
오늘날 공의 자손으로서 어진 자가 이와 같이 많으니 시서(詩序)를 지어 이른바 선을 쌓은 집안에 남은 경사(慶事)가 있는 것이 올바른 이치로 믿을 만하며 조금도 거짓이 없음을 나타내는 바이다. 유허(遺墟)가 타인의 소유가 된 지 오래되었으므로 공의 후손이 힘을 합해 먼 조상의 자취를 더듬어 비석을 세워 기록하고자 함에 나를 찾아와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으니 관석(觀錫)과 겸석(謙錫)이다. 선조를 기리는 그 성의에 감동하여 거칠고 보잘것없는 글로나마 대략 이와 같이 쓴다.

숭정후 네 번째 정해년(순조 27, 1827년) 4월 일 은진(恩津) 송치규(宋穉圭)가 짓고 아울러 전면 글씨를 썼다.

유사(有司) 12세손 존중(存中), 14세손 일성(一性), 15세손 목흠(穆欽), 16세손 설(偰) 삼가 쓰다.

 
 
 

 

寒碧堂在府南五里城隍山西麓石壁削立俯臨若墜臺下有川流故參議崔霮剗去石甬構
成亭閣肅廟癸亥按使李師命别創層閣侈以丹雘爲一州之名勝年久頽圮英廟癸丑通判
具聖弼重修 觀察使趙顯命重修記
寒碧堂名於國久矣己酉余以奉安使過宿豐沛館與李方伯匡徳乗夜肩輿以往時初月微
明但見山色蒼然四圍欄外溪聲汵然滿聼也其後五年癸丑余又按節來乘暇往遊之槪有
削壁臨水而止鑿其半腰而堂拪焉後楹安於壁前楹則累高石承之而檻出虛空其制作之
妙殆若鬼斧成之通判具侯聖弼以屋者傾敗捐俸構工而新之與萬化拱北諸樓一時董新
不閱月咸告訖焉所需蓋千金云夫魯縞至簿也弩不能穿者力盡故也本府近凋弊甚侯又
新莅無節蓄以徒手活數萬飢口斯已難矣然侯之力則宜已盡矣顧又穿過重革何其能也
斯堂也無異觀而惟其架鑿也見其工侯之斯擧也而非異績而惟當板蕩也故見其能夫非
韓昌黎所謂因難而見巧者耶侯本綺紈家而居官惡衣食觀其操尙所存雖山陰一錢蓋將
搖手而謝之矣然則侯之淸政與斯堂也爭寒而競碧豈直因難見巧之爲相同而已哉是爲記

 

 

1827( 27) . () () () () () () () () .
1346( 2) 1434( 11) . () () .
, 1970 .
 
(), 1979 1,
     

 

최담유허비(崔霮遺墟碑)

 
 
 
     
  최담(崔霮) 유허비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戶曹參議)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 월당(月塘) 최공(崔公) 유허비(遺墟碑)

전주부(全州府) 남문(南門) 밖에 계곡과 산의 경치가 뛰어난 금산(錦山)의 남쪽 옥류동(玉流洞)에 월당(月塘) 최공(崔公)의 유허가 있다. 지금은 공이 살던 시대로부터 수백 년이 흘렀으되 암대(巖臺 : 바위로 된 대)에 새긴 글씨는 아직도 완연하여 지나는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탄식하고 있으니 무릇 어찌 한때 성대한 영화를 누렸다 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공은 전주 사람으로 휘(諱)는 담(霮)이니, 연촌(烟村) 덕지(德之) 선생의 부친이다. 연촌공(烟村公)은 손수 공의 실제 행적을 기록하여 나에게 문자로 써 줄 것을 부탁하며 말하기를, “우리 선군(先君)께서는 바로 이곳에서 병술년(충목왕 2, 1346년) 5월 일에 태어나셨는데 겨우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셨다. 성품이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임인년(공민왕 11, 1362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내시(內侍)에서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참관(參官)에 제수되었다. 또 정사년(우왕 3, 1377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는데 어머니를 모시려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여 사퇴하고 향리로 물러났으니 자식의 도리를 극진히 다하고 기꺼이 물러나 자락(自樂)하고 벼슬길을 구하지 않았다.
병자년(태조 5, 1396년)에 어진 정승의 추천을 받아 봉상시 소경(封常寺少卿)으로 부임하였다. 무인년(태조 7, 1398년)에 훈지진주사(訓知珍州事)에 제수되었으나 경진년(정종 2, 1400년)에 해임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날마다 꽃이나 나무를 읊는 시를 짓는 것으로 일삼았으며 느긋하게 노닐며 자적하였다. 병신년(태종 16, 1416년)에 노직(老職)으로 검교(檢校) 호조참의(戶曹參議)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에 제수하였으며 또 ‘사람들을 접함에 겸손하고 공손하며 건장하기가 비할 데 없다.’하였으니 팔순이 넘어서도 말을 탈 때는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타고 내릴 수 있었으며 걸을 때도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나 지팡이가 없이도 두루 마을길을 돌아다녔는데, 손자나 조카들을 만나면 또한 말에서 내려 인사를 받았으며 마을의 경조사에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일찍이 월당루(月塘樓)에서 부윤(府尹)을 전별(餞別)할 때 기생 두 명을 불러 종이를 잡게 하고 곧바로 “기양(歧陽)에 들어가 조회(朝會)가 끝난 후에 호남(湖南) 한인(閑人) 한 사람을 기억해 주옵소서(願入歧陽朝罷後 湖南須記一閑人)”라는 구절이 들어간 절구(絶句) 한 수를 써내려 갔다.
갑인년(세종 16, 1434년) 6월에 병이 들었으나 말이나 행동이 평소와 다른 것이 없었으며 몹시 고통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달 25일에 홀연 세상을 떠나셨다. 이에 그 시종(始終)을 대략 기술하여 이른바 -몇 자 판독 불능- 명(明)나라 홍무(洪武) 10년(우왕 3, 1377년)이었으며 병자년(태조 5, 1396년) 우리 태조께서 명을 받으신지 5년 되던 해이다.
아, 공은 후덕(厚德)이 있는 데다 또 청복(淸福)까지 누려 당시에 뛰어난 경치를 보고 시로 짓고 문장으로 기리고 읊은 것이 많은데, 후인들이 그것을 외우고 말하는 것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지금 한벽당(寒璧堂) 또한 공이 노닐던 강가의 정자에 있던 옛터인데 암대(巖臺)에 새겨진 ‘광풍제월(光風霽月)’, ‘연비어약(鳶飛魚躍)’ 같은 글귀에서 공의 마음속 의취(意趣)를 상상해 볼 수 있으며, 김절재(金節齋), 권양촌(權陽村), 최만육(崔晩六) 제공(諸公)이 공과 더불어 이곳에서 노닌즉 어찌 ‘그 산을 보지 못했다면 그 나무라도 보기를 바라노라.’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아들 넷을 두었으니, 장남은 광지(匡之)이고 차남은 직지(直之)이니 모두 집현전 직제학이며 삼남은 득지(得之)이니 전농시(典農寺) 소윤(少尹)이며 막내아들은 연촌(烟村)이 순덕(淳德)하고 절개가 높다고 여겼는데 -몇 자 판독 불능- 세종과 문종 양조의 명신(名臣)으로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지냈으며, 후손들이 번창하였고 문무(文武)의 관리로 현달(顯達)하였으되 다 기술하지 못하지만 -이하 몇 자 의미 불명- 6세손 명룡(命龍), 8세손 안(安)은 모두 충효와 학행으로 향사(享祀)를 받고 있다.
오늘날 공의 자손으로서 어진 자가 이와 같이 많으니 시서(詩序)를 지어 이른바 선을 쌓은 집안에 남은 경사(慶事)가 있는 것이 올바른 이치로 믿을 만하며 조금도 거짓이 없음을 나타내는 바이다. 유허(遺墟)가 타인의 소유가 된 지 오래되었으므로 공의 후손이 힘을 합해 먼 조상의 자취를 더듬어 비석을 세워 기록하고자 함에 나를 찾아와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으니 관석(觀錫)과 겸석(謙錫)이다. 선조를 기리는 그 성의에 감동하여 거칠고 보잘것없는 글로나마 대략 이와 같이 쓴다.

숭정후 네 번째 정해년(순조 27, 1827년) 4월 일 은진(恩津) 송치규(宋穉圭)가 짓고 아울러 전면 글씨를 썼다.

유사(有司) 12세손 존중(存中), 14세손 일성(一性), 15세손 목흠(穆欽), 16세손 설(偰) 삼가 쓰다

 

     
  有明朝鮮通政大夫戶曹參議集」
賢殿直提學月塘崔公遺墟碑」
崇禎紀元後四戊子五月日立」
全州府南門外溪山擅勝▨山之陽玉流洞有月塘崔公遺墟今去公之世已屢百」
年矣而巖臺諸刻尙宛然人之過之者猶指點而咨嗟焉夫豈一時繁華之盛直以」
致然㢤公全州人諱霮烟村先生德之之考也烟村公手錄公實蹟求文字於人有」
曰吾先君生扵至正丙戌五月▨日甫九歲而孤性好學擧業中司馬試於壬寅仕」
内侍拜叅官又中丁巳文科不勝將母之念退于桑鄊子職極修而仍喜遯自非不」
求宦達丙子為賢相所薦以奉常少卿應▨命戊寅拜中訓知珍州事庚辰解組▨」
鄊日以花木詩勾為事而優逰自▨丙申蒙優老▨恩陞檢校戶曹㕘議集賢殿提」
學又曰接人謙恭康强無比八旬以後騎馬無人扶持徒步無杖提携而遍行郷閭」
遇孫侄軰亦下馬受禮而鄊中慶吊迎餞無不與焉嘗餞府尹子月塘樓上呼两妓」
執紙立書一絶有願入岐陽朝罷後湖南湏記一閒人之勾甲寅六月得疾言語動」
止無異平日似不極苦以其二十五日倐然而逝此其始終大畧而所謂丁巳」
皇明洪武十年而丙子我▨朝受命之五年也嗚呼公旣有厚德復享淸福當時名」
勝多作詩讚頌之者其爲後人之所誦說不衰固冝矣今寒碧堂亦公之江亭舊址」
而且巖臺諸刻若光風霽月鳶飛魚躍公之襟懷意趣有足以想像者而所與逰是」
金節齊權陽村崔晩六諸公則又豈非不見其山願見其木者耶公有四男長匡之」
次直之皆集賢直提學次得之典農少尹季卽烟村以淳德髙節為」
世文兩朝名臣官藝文直提學後承繁衍文武顯達不▨盡述而孫生明曾孫秀孫」
忠成玄孫弼成繼成連孫六世孫命龍八世孫安俱以忠孝學行與爼豆之享今公」
子孫之賢若是其多讚詩序所謂積善餘慶之正理者信不誣矣遺墟乆為他人所」
有公諸後孫合力▨取之而將立石以識之来求余文者曰觀錫謙錫也余感其爲」
先之誠意不以蕪拙辭而畧書之如此云」
崇禎四丁亥孟春 日 恩津宋稺圭撰 幷書前面」
有司十二世孫存中」
十四世孫一性」
十五世孫穆欽十六世孫偰謹書」

 

고종 2년 을축(1865, 동치4)

   

 

02-01-09[25] 송정화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송정화(宋廷和)를 도총관으로, 손양석(孫亮錫)을 선전관으로, 남궁두(南宮㺶)ㆍ조중진(曺重振)ㆍ조병길(趙秉吉)ㆍ최관석(崔寬錫)ㆍ임병주(林秉周)를 오위장으로, 유태로(柳泰魯)를 충익위장으로, 최제동(崔濟東)ㆍ한석범(韓錫範)을 경복궁 위장으로, 김준기(金俊基)ㆍ이병희(李秉喜)를 경희궁 위장으로, 이근주(李根周)를 훈련원 주부로, 이희정(李熙正)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이겸희(李兼熙)를 통제 중군으로, 이유호(李孺虎)를 경주 영장으로, 이지혁(李志赫)을 전라도 병마우후로 삼았다. 통제 우후 이유호는 감하(減下)하는 일로 전지를 받들었다.

 ○ 以宋廷和爲都摠管, 孫亮錫爲宣傳官, 南宮㺶·曺重振·趙秉吉·崔寬錫·林秉周爲五衛將, 柳泰魯爲忠翊將, 崔濟東·韓錫範爲景福將, 金俊基·李秉喜爲慶熙將, 李根周爲訓鍊主簿, 李熙正爲武兼, 李兼熙爲統制中軍, 李孺虎爲慶州營將, 李志赫爲全羅兵虞侯, 純虞侯李孺虎減下事承傳。再政, 以尹滋悳爲副摠管, 白希洙爲訓鍊都正, 尹一成爲訓鍊主簿, 金炳善爲武兼, 李文欽爲守門將, 趙翼顯爲禁衛把摠, 判中樞單金炳國, 同知單南宮㺶, 僉知單曺重振。三政, 以申觀浩爲知事, 朴元陽爲宣傳官, 曺秉斗爲守門將, 同知單趙秉吉, 副摠管單宋廷和

 

고종 2년 1월 13일 (기유) 원본2685책/탈초본127책 (26/27)
1865년 同治(淸/穆宗) 4년

 

 

○ 兵批, 參判李景夏進, 以趙然昌爲都摠管, 宋欽翼爲副摠管, 崔東翼·金鍾顯·金益洪·李春成爲五衛將, 李圭振·陰始弘爲景福將, 尹公麟爲慶熙將, 許奎爲多大僉使, 同知單崔寬錫, 僉知加設單李敎獻, 兩西運餉使單李鎬俊, 井浦萬戶崔學植, 今加折衝加資事, 覆啓判下。再政, 以具鳳祖爲宣傳官, 同知單崔濟東

 

 

 

 02-01-13[23] 신병이 있는 오위장 남궁두 등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병조의 계

 

○ 병조가 아뢰기를,
“오위장 남궁두(南宮㺶)ㆍ조중진(曺重振)ㆍ조병길(趙秉吉)ㆍ최관석(崔寬錫), 경복궁 위장 최제동(崔濟東)ㆍ한석범(韓錫範), 경희궁 위장 이병희(李秉喜)는 모두 신병이 있어 직임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정장(呈狀)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니, 모두 개차(改差)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02-01-13[26] 병비의 관원 현황
○ 병비(兵批)에, 참판 이경하(李景夏)가 나왔다.
조연창(趙然昌)을 도총관으로, 송흠익(宋欽翼)을 부총관으로, 최동익(崔東翼)ㆍ김종현(金鍾顯)ㆍ김익홍(金益洪)ㆍ이춘성(李春成)을 오위장으로, 이규진(李圭振)ㆍ음시홍(陰始弘)을 경복궁 위장으로, 윤공린(尹公麟)을 경희궁 위장으로, 허규(許奎)를 다대포 첨사(多大浦僉使)로 삼았다. 동지에 최관석(崔寬錫)을 단부하고, 첨지 가설에 이교헌(李敎獻)을 단부하고, 양서 운향사(兩西運餉使)에 이호준(李鎬俊)을 단부하였다. 정포 만호(井浦萬戶) 최학식(崔學植)에게 지금 절충장군을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도록 복계(覆啓)하여 판하(判下)를 받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