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 호조참의공 휘 담/월담공 휘 담 유허비문

有明朝鮮通政大夫戶曹參議集」賢殿直提學月塘崔公遺墟碑」

아베베1 2010. 9. 10. 15:18

전주최 문성공파 중랑장공파 4세손 호조참의공 유허비문

20 대조 선조님의 비문    

 

1827( 27) . () () () () () () () () . 
1346( 2) 1434( 11) . () () .  , 1970 .

有明朝鮮通政大夫戶曹參議集」
賢殿直提學月塘崔公遺墟碑」
崇禎紀元後四戊子五月日立」
全州府南門外溪山擅勝▨山之陽玉流洞有月塘崔公遺墟今去公之世已屢百」
年矣而巖臺諸刻尙宛然人之過之者猶指點而咨嗟焉夫豈一時繁華之盛直以」
致然㢤公全州人諱霮烟村先生德之之考也烟村公手錄公實蹟求文字於人有」
曰吾先君生扵至正丙戌五月▨日甫九歲而孤性好學擧業中司馬試於壬寅仕」
内侍拜叅官又中丁巳文科不勝將母之念退于桑鄊子職極修而仍喜遯自非不」
求宦達丙子為賢相所薦以奉常少卿應▨命戊寅拜中訓知珍州事庚辰解組▨」
鄊日以花木詩勾為事而優逰自▨丙申蒙優老▨恩陞檢校戶曹㕘議集賢殿提」
學又曰接人謙恭康强無比八旬以後騎馬無人扶持徒步無杖提携而遍行郷閭」
遇孫侄軰亦下馬受禮而鄊中慶吊迎餞無不與焉嘗餞府尹子月塘樓上呼两妓」
執紙立書一絶有願入岐陽朝罷後湖南湏記一閒人之勾甲寅六月得疾言語動」
止無異平日似不極苦以其二十五日倐然而逝此其始終大畧而所謂丁巳」
皇明洪武十年而丙子我▨朝受命之五年也嗚呼公旣有厚德復享淸福當時名」
勝多作詩讚頌之者其爲後人之所誦說不衰固冝矣今寒碧堂亦公之江亭舊址」
而且巖臺諸刻若光風霽月鳶飛魚躍公之襟懷意趣有足以想像者而所與逰是」
金節齊權陽村崔晩六諸公則又豈非不見其山願見其木者耶公有四男長匡之」
次直之皆集賢直提學次得之典農少尹季卽烟村以淳德髙節為」
世文兩朝名臣官藝文直提學後承繁衍文武顯達不▨盡述而孫生明曾孫秀孫」
忠成玄孫弼成繼成連孫六世孫命龍八世孫安俱以忠孝學行與爼豆之享今公」
子孫之賢若是其多讚詩序所謂積善餘慶之正理者信不誣矣遺墟乆為他人所」
有公諸後孫合力▨取之而將立石以識之来求余文者曰觀錫謙錫也余感其爲」
先之誠意不以蕪拙辭而畧書之如此云」
崇禎四丁亥孟春 日 恩津宋稺圭撰 幷書前面」
有司十二世孫存中」
十四世孫一性」
十五世孫穆欽十六世孫偰謹書

 

최담(崔霮) 유허비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戶曹參議)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 월당(月塘) 최공(崔公) 유허비(遺墟碑)

전주부(全州府) 남문(南門) 밖에 계곡과 산의 경치가 뛰어난 금산(錦山)의 남쪽 옥류동(玉流洞)에 월당(月塘) 최공(崔公)의 유허가 있다. 지금은 공이 살던 시대로부터 수백 년이 흘렀으되 암대(巖臺 : 바위로 된 대)에 새긴 글씨는 아직도 완연하여 지나는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탄식하고 있으니 무릇 어찌 한때 성대한 영화를 누렸다 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공은 전주 사람으로 휘(諱)는 담(霮)이니, 연촌(烟村) 덕지(德之) 선생의 부친이다. 연촌공(烟村公)은 손수 공의 실제 행적을 기록하여 나에게 문자로 써 줄 것을 부탁하며 말하기를, “우리 선군(先君)께서는 바로 이곳에서 병술년(충목왕 2, 1346년) 5월 일에 태어나셨는데 겨우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셨다. 성품이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임인년(공민왕 11, 1362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내시(內侍)에서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참관(參官)에 제수되었다. 또 정사년(우왕 3, 1377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는데 어머니를 모시려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여 사퇴하고 향리로 물러났으니 자식의 도리를 극진히 다하고 기꺼이 물러나 자락(自樂)하고 벼슬길을 구하지 않았다.
병자년(태조 5, 1396년)에 어진 정승의 추천을 받아 봉상시 소경(封常寺少卿)으로 부임하였다. 무인년(태조 7, 1398년)에 훈지진주사(訓知珍州事)에 제수되었으나 경진년(정종 2, 1400년)에 해임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날마다 꽃이나 나무를 읊는 시를 짓는 것으로 일삼았으며 느긋하게 노닐며 자적하였다. 병신년(태종 16, 1416년)에 노직(老職)으로 검교(檢校) 호조참의(戶曹參議)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에 제수하였으며 또 ‘사람들을 접함에 겸손하고 공손하며 건장하기가 비할 데 없다.’하였으니 팔순이 넘어서도 말을 탈 때는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타고 내릴 수 있었으며 걸을 때도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나 지팡이가 없이도 두루 마을길을 돌아다녔는데, 손자나 조카들을 만나면 또한 말에서 내려 인사를 받았으며 마을의 경조사에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일찍이 월당루(月塘樓)에서 부윤(府尹)을 전별(餞別)할 때 기생 두 명을 불러 종이를 잡게 하고 곧바로 “기양(歧陽)에 들어가 조회(朝會)가 끝난 후에 호남(湖南) 한인(閑人) 한 사람을 기억해 주옵소서(願入歧陽朝罷後 湖南須記一閑人)”라는 구절이 들어간 절구(絶句) 한 수를 써내려 갔다.
갑인년(세종 16, 1434년) 6월에 병이 들었으나 말이나 행동이 평소와 다른 것이 없었으며 몹시 고통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달 25일에 홀연 세상을 떠나셨다. 이에 그 시종(始終)을 대략 기술하여 이른바 -몇 자 판독 불능- 명(明)나라 홍무(洪武) 10년(우왕 3, 1377년)이었으며 병자년(태조 5, 1396년) 우리 태조께서 명을 받으신지 5년 되던 해이다.
아, 공은 후덕(厚德)이 있는 데다 또 청복(淸福)까지 누려 당시에 뛰어난 경치를 보고 시로 짓고 문장으로 기리고 읊은 것이 많은데, 후인들이 그것을 외우고 말하는 것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지금 한벽당(寒璧堂) 또한 공이 노닐던 강가의 정자에 있던 옛터인데 암대(巖臺)에 새겨진 ‘광풍제월(光風霽月)’, ‘연비어약(鳶飛魚躍)’ 같은 글귀에서 공의 마음속 의취(意趣)를 상상해 볼 수 있으며, 김절재(金節齋), 권양촌(權陽村), 최만육(崔晩六) 제공(諸公)이 공과 더불어 이곳에서 노닌즉 어찌 ‘그 산을 보지 못했다면 그 나무라도 보기를 바라노라.’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아들 넷을 두었으니, 장남은 광지(匡之)이고 차남은 직지(直之)이니 모두 집현전 직제학이며 삼남은 득지(得之)이니 전농시(典農寺) 소윤(少尹)이며 막내아들은 연촌(烟村)이 순덕(淳德)하고 절개가 높다고 여겼는데 -몇 자 판독 불능- 세종과 문종 양조의 명신(名臣)으로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지냈으며, 후손들이 번창하였고 문무(文武)의 관리로 현달(顯達)하였으되 다 기술하지 못하지만 -이하 몇 자 의미 불명- 6세손 명룡(命龍), 8세손 안(安)은 모두 충효와 학행으로 향사(享祀)를 받고 있다.
오늘날 공의 자손으로서 어진 자가 이와 같이 많으니 시서(詩序)를 지어 이른바 선을 쌓은 집안에 남은 경사(慶事)가 있는 것이 올바른 이치로 믿을 만하며 조금도 거짓이 없음을 나타내는 바이다. 유허(遺墟)가 타인의 소유가 된 지 오래되었으므로 공의 후손이 힘을 합해 먼 조상의 자취를 더듬어 비석을 세워 기록하고자 함에 나를 찾아와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으니 관석(觀錫)과 겸석(謙錫)이다. 선조를 기리는 그 성의에 감동하여 거칠고 보잘것없는 글로나마 대략 이와 같이 쓴다.

숭정후 네 번째 정해년(순조 27, 1827년) 4월 일 은진(恩津) 송치규(宋穉圭)가 짓고 아울러 전면 글씨를 썼다.
유사(有司) 12세손 존중(存中), 14세손 일성(一性), 15세손 목흠(穆欽), 16세손 설(偰)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