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 봉사공 휘 언청 등/휘 언청 관련기록

承訓郞行濟用監副奉事 彥淸之

아베베1 2010. 9. 17. 12:28

白軒先生集卷之三十五 文稿
 行狀

處士成公行狀 a_096_309c



 

 

公諱輅。字重任。其先昌寧人。代有衣冠。五代祖曰槪。嘉善大夫。京畿都觀察黜陟使。高祖諱熹。朝散大夫。承文院校理。贈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曾祖諱聃命。成均生員。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祖諱雲。資憲大夫。兵曹判書兼世子右賓客。贈諡景肅公。考諱永國。奉正大夫。行通禮院引儀。妣

全州崔氏。承訓郞行濟用監副奉事彥淸之096_309d女。奉事公。乃一蠹鄭先生之外孫也。有至行。崔氏誠孝卓異。生公於嘉靖庚戌。幼而穎秀。纔勝冠。受業于松江鄭相公之門。有能詩聲。中庚午進士。游泮宮。言論凜然有正直氣。多士推重。自少時。已無宦情。不事擧子業。乃書九容,九思。揭諸座右。常自省察。所與友善。多一代名公卿。行誼著聞。薦剡交加。初授司饔院參奉。再除齊陵參奉而皆不起。松江爲時輩所吹毛。公以其門徒。亦困於唇舌。益無意於世。惟麴糱是托。醉則悲咤歌呼。放形骸於風塵之表。好善嫉惡。出乎其性。如其人之善也。則雖疏如舊識。笑語訢訢。惟096_310a恐其不我欲也。如其人之不善。則羞與之同席。叫號傲睨。若無覩焉。知公者謂公放達。不知公者誚公之狂。所著詩篇。動盈箱篋。而一夕盡取以焚之。今所存一卷。收聚於散逸者耳。家于西湖之上。謝絶人事。隣翁置酒相邀。則輒造飮。自號石田。亦曰三一堂。曰潛巖。常戴蔽陽子。又自稱曰平涼子。公嘗自序曰。先生不知何許人也。見水底有一石狀甚奇古。水淸則見。水濁則不見。因以爲號。又號三一堂。三一者。民生於三。事之如一之義也。又號石田。蓋取其土薄不用也。性嗜酒。自謂陶靖節死後。獨得其妙爾。抱迂守拙。無096_310b意人間事。又不喜讀書。只解作絶句。自吟自遣。好談仙方。醉酒則高聲放歌。或長吟景翳翳而將入撫孤而盤桓之句。唏噓歎息。年老而氣不衰。遇酒必大呼痛飮。人皆笑之而不知人之笑之也。平生有詩曰。男子心懷一嘯中。仰看天日俯書空。此其大略也而然。見此則可想其氣槩矣。公十三而孤。奉偏親以禮。朝夕進飯。必先嘗躬奉。己食。必斂其盤器。盛之一櫃。晨昏愉惋。滫瀡備供。亦不苟求人。以誠饋。侍側不以褻服。常衣直領衣。嘗有親癠月有旬餘。日夜憂煎。年未四十。而鬚髮爲之白。旣復常。白者還黑。壬辰。慈親患096_310c目疾不能視。且足病不良。逢亂。親負以避。得船便。自江都轉往湖南海隅。蚩甿猶知感慕。餉遺相繼。甘旨之奉。得如平日。戊戌丁憂。公年已衰而致毀不少懈。公以少孤不克秉禮。至老孺慕不衰。家廟朔望之參。大小之祭。靡不致愨。且必親莅。公有一妹。有無共之。於其所求。無所靳焉。至於生產。未嘗留意。倭變時。見友人子被俘。欲贖無銀。爲之解裝。盡與其五六大銀器。其輕財重義類此。常願不作呻吟。醉臥長逝。一日飮酣而寢。仍不起。傍人莫之覺。卽萬曆乙卯三月五日也。得年六十六。月沙李相公賦挽以哭之。谿谷張096_310d相公操文以祭之。是年五月。竁于高陽某村某山某向之原引儀公墓左。與公配李氏同兆。李氏系出國姓。長水縣監孜之女。事姑孝。事公敬。先公三十年而歿。生二女。公以爲再娶而或不賢。則反害於事親。以此不娶。亦不畜妾。獨處以終。生來不喜巫覡。家庭肅然。若於酒筵。見歌舞之兒。則時或玩戲。而一不近之。世間尤物。無足以累其心者。其天稟然也。公無子而不立後。乃曰。吾長女誠孝出天。此可爲慰。長女適士人趙嶸。栗谷李文成公之甥也。早寡。節行最著。旌其閭。季女適工曹佐郞鄭沄。松江之孫也。趙君有男成096_311a後。後公而奉祀事。生四男。佐郞生一女。嗚呼。公有才有行而自放於江湖之上。托跡於無何之鄕。一臥長寐。竟如其願。公可謂不羈之士不凡之流。殆非俗兒曹所可窺其涯者也。然公之不赴擧不拜職。非果於忘世。蓋不偶於世也。而若無天只之諒焉。則亦何得而從其所好。夫惟公之素行。有足以感慈親之心。慈親之愛信之也。亦克度越乎常情。故廢科而不之勸。不仕而不之強。酣飮而不之禁。卒使潛魚泳水。倦鳥歸林。息偃俯仰。惟意之適。又何奇也。公與石洲權公特相好。石洲坐詩案死。公常悲痛涕泣。其焚藁在於096_311b甲寅年間。自此不復出庭外。癸丑以來。時事大變。搢紳名勝之骨機辟者踵相接。而公獨斂蹤逃世。危遜隨時。全歸於昏亂之際。非有見識之遠。烏能如此哉。謹据家狀。撮其梗槩云。

휘언청 의 묘가있었던 금불암

 

 서울 노량진에 있는 '장승백이'는 예부터 장승이 붙박아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땅이름이다.

  옛날 남도 길손들은 한양에서 남문을 나와 노들나루를 건너 아차고개(지금의 사육신 묘 근처)를 넘어 이 장승백이 앞을 지나 시흥 땅을 거쳐 수원을 거쳐 갔다.

  장승은 주로 마을 앞 길가에 세워졌고, 큰길에는 대개 10리에 하나씩 세워졌다.


□ 정조의 명에 의해 장승 세워

  노량진 장승백이에 장승이 세워진 데는 나름대로 다른 곳과는 좀 다른 데가 있다.

  조선 중기, 사도세자가 그 부왕에 의해 뒤주 속에서 참혹하게 죽은 뒤, 그의 아들인 정조는 1777년에 왕위에 올랐다. 그 아버지 사도세자를 잊지 못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수원 병점 근처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명복을 빌었다.

  정조는 묘소를 갈 때엔 꼭 이 장승백이를 지나면서 쉬었다 가곤 했었다. 그러나, 이 곳은 숲이 우거지고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으스스했다. 정조는 자신이 쉬어 가는 이 곳에 장승을 세우도록 어명을 내렸다. 그리하여 이 곳에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과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고 쓰인 두 개의 장승이 세워지게 되고, 이후부터 정조 임금은 이 곳을 안심하고 지날 수 있게 되었단다.


□ 변강쇠전에 나오는 노들 장승

  이 곳 장승백이는 판소리 <변강쇠전>에도 나오는데, 그 글에서 변강쇠와 옹녀는 탕남, 탕녀로 그려지고 있다.

  여주인공 옹녀는 사주팔자에 과부살이 끼어 있었다.

  열 다섯에 얻은 첫 서방은 급살로 죽고, 열 일곱 살에 얻은 서방 용천병으로 가고, 열 여덟에 얻은 서방 벼락맞아 죽고 마니, 서방에 퇴가 나고 송장치기 신물난다.

  그러더니, 천하에 오잡놈 변강쇠를 오다가다 만나게 돼 함양땅 지리산 골짜기에 들어가 살림을 이룩해 살게 된다.

  "어려서 못 배운 글 지금 공부할 수 없고, 손재주 없으니 장인질 할 수 없고, 밑천 한 푼 없으니 상매(商賣)질 할 수 있나? 그 중에 할 노릇이 상일밖에 없으니,……오늘부터 지게 지고 나무나 하여 옵쇼."

  나무하러 나간 변강쇠는 둥구 마천 백모천이라는, 지리산의 한 골짜기로 나무를 하러 갔는데, 그 곳이 지금의 함양군 마천면 강천리의 백무동 칠산 계곡에서 의탄 일대가 되는 벽송사 입구 부근이다.

  낮잠으로 하루를 보낸 그가 장승을 발견하고,

  "애 안 쓰고 좋은 나무 거기 있다."

  하며 그 장승을 떼어 내려 하니, 그 장승이 화를 내어 낯에 핏기 올리고서 눈을 딱 부릅뜨지만, 아랑곳없이 달려들어 그 장승을 불끈 안고 엇두름 쑥 빼어 집으로 돌아왔다.

  "애겨, 이거 웬말인가. 나무하러 간다더니 장승 빼어 왔네그려. ……장승 패어 땐단 말은 언문책 잔주에도 듣도 보도 못한 말……"

  옹녀는 이렇게 말리지만,

  "나무로 깎은 장승 인형을 가졌은들, 패어 때어 관계한가?"

  하며 변강쇠는 땔감으로 써 버리고 만다.

  "이 때에 장승 목신(木神) 무죄히 강쇠 만나 도끼 아래 조각나고 부엌 속에 잔 재 되니 오죽히 원통켔나."

  하고 이 판소리는 '아니리'를 통해 해설하고 있다.

  이 지리산 장승은 너무 억울하고 원통해서 팔도 장승의 우두머리격인 한양 노들 강변의 장승(지금의 노량진 장승백이 장승)을 찾아가 원을 풀어 달라고 소청을 한다.

  노들 장승은 팔도 장승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려 날짜를 정해 밤중에 노들 한강 새남터 모래밭에서 변강쇠 규탄 장승 궐기 대회를 연다.

  "……그리하여, 조선 지방 있는 장승 하나도 낙루 없이 기약한 밤 다 모이어 새남터(지금의 용산구 서부이촌동)에 배게 서서 시흥 읍내까지 빽빽하구나."

  이 자리에는 팔도 99만 9천 9백 장승이 다 모이는데, 여기서는 변강쇠에게 99가지 병으로 온 몸을 도배시켜 서서히 죽어 가도록 결의를 한다.


□ 마을의 수호신 구실까지

  왕중왕(王中王)이듯이 장승 중의 장승은 이 곳 노들 장승백이의 장승이다. 이 곳이 한양에서 강을 건너와 첫번째로 길이 갈라지는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여기의 장승을 팔도 장승의 우두머리로 쳐 왔는지도 모르겠다.

  장승은 우리 공동체 문화의 표상이었다. 공동체적 상상력에 의해 인간적이면서도 동시에 신적(神的)인 성격을 부여받아 온 장승은 동구 밖에 세워져 병액(病厄)이 드는 것을 막는 수호신 구실을 해 오기도 했다.

  장승은 대개 투박하고 못 생긴 모습을 띠고 있다. 시인 신경림의 시에 '못 난 것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즐겁다'는 구절이 있는데, 한국 장승이 바로 그러하다. '장승제'로서 마을 사람들의 위함을 받기도 하였으나, 더러는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개가 장승 무서운 줄 알면 오줌 눌까?'

  '개 오줌만 받는 장승 신세.'

  '귀신같이 먹고 장승같이 간다.'

  '차라리 장승 하고 말을 하지.'

  '장승'에 관한 우리의 속담들이다.

 

□ 장승백이 근처의 옛 땅이름

  우두머리 장승으로 쳐 왔던 원래의 노들 장승은 언제인지 없어지고 말았지만, 최근 그 자리에 다시 세 장승을 세워 놓았다. 그러나, 민간 신앙을 꺼려하는 이들에 의해 이 장승은 불에 타고 밑둥이 잘리는 등 두 번이나 수난을 당했었다.

  이 근처의 마을 이름은 여기 서 있던 장승 때문에 오랫동안 '장승백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장승백이'라고 하면 서울 사람들은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서울시에서도 이러한 점을 감안해서 노량진 세거리 즉 수산 센터 앞에서 현대 병원을 거쳐 삼거리 시장 앞을 지나 장승백이 세거리까지 이르는 950m의 길을 '장승백이길'이라 하고, 도로 표지판 등에도 그렇게 붙여 놓았다. 그러나, 일부 안내 표시나 지도 또는 버스 행선지 표시에는 '장승배기', '장승백', '장승박' 등으로 마구 표기되고 있어 표기의 혼란이 일고 있다.

  이 곳의 행정구역상의 정확한 위치는 상도동과 노량진2동의 경계가 된다.

  장승백이 일대는 전에는 경기도 과천군 하북면 일부였다.

  일제 때 과천군이 시흥군에 합쳐짐으로써 시흥 땅이 돼 버린 이 곳은 북면의 노량진리로 행정구역이 변해 버린다.

  옛날엔 크게 말해서 이 곳까지 '노들'이라고 불렀으나, 작은 언덕 이 곳 저 곳에 있는 마을들마다는 모두 따로 그 고유의 토박이 땅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이 지역에 있던 마을로는 장승백이를 비롯하여 독을 구워 만든 점말(옹막리.甕幕里), 동이점(옹점리.甕店里)가 있었고, 그 밖에도 곰말, 새말, 높은절이(고사리.高寺里), 솔모탱이, 송학대(松鶴臺) 등의 마을이 있었다.     

  90년대 초, 동작구에서는 이 곳에 '장승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두 개의 장승을 세워 놓았다. 그러나, 옛날에 섰던 자리와는 조금 그 위치가 다르다.  


□ 장승백이 이웃 동네 상도동

  상도동(上道洞)은 1910년 이전에는 경기도 시흥군 동면 상도리(上道里)였다. 그 이전에는 과천 땅이었다. 1936년 경성부(서울시)에 편입하여 상도정(上道町)이 되었고, 1944년 영단 주택촌이 신설되면서 주택들이 갑자기 증가, 동부정회(東部町會), 서부정회(西部町會)를 따로 두게 되었다. 해방 1년 후인 1946년에 상도동부동(上道東部洞)과 상도서부동(上道西部洞)으로 개칭하였고, 1955년에 와서 이 이름은 상도1동과 2동으로 하였다.

  관악산 남쪽 기슭인 상도동은 일대에 고개들이 많았다.

  유명한 고개가 '장승백이고개'이고, '노들고개', '사당이고개', '살피재고개', '종동고개' 등도 잘 알려진 고개들에 속했다.

  사당이고개는 매우 가파른 고개로, 옛날에 과천 나무장수들이 상도동으로 나무 팔러 올 때 코가 고갯길에 닿을 정도로 비탈이 몹시 급했다. 근처 심방뜰 곁 산자락에선 밤이면 가끔 여우 우는 소리도 들리곤 했다. 근처엔 '미륵당'이란 마을과 '살피재마을', '장승백이마을' 등이 있었고, 지금의 상도동 221번지에는 세종임금의 형인 양녕대군의 묘도 있다.

  그 묘 아래엔 '지덕사'라는 사당이 있는데, 일제 때에 중구 도동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다. 지금도 사당에는 세조 임금이 쓴 현액이 있다.

  이 일대엔 또 옛날에 금이 났었다는 금불암 마을이 있었고, 능으로 자리잡았었다는 '능고개'라는 고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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