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두선생행장 行狀[從子希參]
글을 강하며 한 번도 서로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으며, 일찍이 시종신(侍從臣)으로 있을 때에는 조정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설 때마다 번번이 탈것을 보내 모셔와, 임금께 무슨 일을 주청할지 고하였는데, 매양 고금(古今)의 역사를 끌어다 점검하고 확인하느라 새벽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언어(言語)와 기상(氣象)을 보통 사람과 같게 하고 일찍이 달리하지 않았으나, 속마음은 맑게 깨어 있었다. 중년(中年)에 공이 사람들과 정도에 지나치게 술을 마셔서 대부인(大夫人)께서 매우 근심한 일이 있었는데, 그 뒤로는 종신토록 술을 마시지 않았다. 향회(鄕會) 때에 소를 잡은 자가 있어 국금(國禁)으로 관아에 고발되어 장차 처벌을 받을 상황이 되었는데, 대부인께서 또 마치 자기 일처럼 놀라고 안절부절못하니, 공이 다시는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 일찍이 현(縣)을 다스릴 때에 행하였던 수십 가지의 과조(科條)는 지금까지 50여 년에 이르도록 대대로 지켜 의궤(儀軌)를 삼아, 비록 포악한 아전이나 잔인한 사람일지라도 감히 함부로 고치지 못하였다. 고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삼로(三老)들과 여러 아전들이 뜰에서 거듭거듭 쟁론하여 반드시 승낙을 얻어 내고야 말았다. 이 때문에 거행(擧行)하는 것이 마치 국전(國典)과 같았다. 이런 일들은 공에게는 비록 자잘한 일들이지만, 작은 것을 미루어 큰 것을 헤아릴 수가 있다. 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 고을의 아전들이 세시(歲時)에는 반드시 부인에게 나아가 절을 올렸으며,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이 마치 자기 부모를 장사 지내듯이 와서 일을 도왔다. 이들은 반드시 당시에 은택을 입은 사람들이 아닌데도 그 자손들이, 그 즐겁게 해 줌을 즐거워하고 그 이롭게 해 줌을 이롭게 여겨, 추모하는 마음이 깊고 간절하기가 이러하였으니, 세상에 없어도 잊지 못하는 분이라고 이를 만하다.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과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도 일찍이 공을 공경하고 찬탄하였다. 추강이 일찍이 공에 대한 전(傳)을 지어 집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아는 사람이 드물다. 중묘조(中廟朝)에 조정의 의논이 “정몽주(鄭夢周), 정여창, 김굉필(金宏弼)은 동국(東國) 이학(理學)의 종주이니, 크게 포숭(褒崇)함으로써 그들을 존경하고 숭상하는 뜻을 보여 선비들이 추향할 바를 밝게 알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를 인하여 의정부 우의정을 추증하고, 그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봄과 가을로 그 사당에 몸소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며, 부인에게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작위를 내리고 평생 동안 해마다 늠료를 주고, 아울러 그 자손들을 녹용(錄用)하게 하였다. 아, 동방이 기자(箕子) 이후로 수천여 년 동안 사람들이 학문을 알지 못하고 추향할 바를 몰랐는데, 오직 정 문충공(鄭文忠公)이 고려 말에 우뚝 나오시어 우리 동방 이학의 비조(鼻祖)가 되셨다. 그 뒤 그 학맥을 전승한 이가 없다가 공이 다행히 한훤(寒暄)과 같은 시대에 함께 태어나 발분하여 학문에 힘써서 오천(烏川 정몽주(鄭夢周))의 학맥을 이었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이락(伊洛 정자(程子) 형제)으로 본보기를 삼았고, 독서를 함에 있어서는 궁리(窮理)로 핵심을 삼았으며, 처심(處心)을 함에 있어서는 불기(不欺)로 기둥을 삼았다. 무릇 몸가짐과 일 처리를 함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성경(誠敬)으로써 일용 공부를 삼았다. 그러면서 국가를 다스리는 율령(律令)과 격례(格例)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극치를 궁구하였다. 그런데도 당세에 크게 시행해 보지 못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공은 종실(宗室) 도평군(桃平君) 이말생(李末生)의 따님을 아내로 맞았으니, 공정대왕(恭靖大王)의 손녀이다. 자녀 6인을 낳았다. 장남 희직(希稷)은 직장(直長)인데, 적자(嫡子) 후사(後嗣)가 없다. 다음 희설(希卨)은 정랑(正郞)인데, 당제(堂弟) 희삼(希參)의 아들 언남(彦男)을 취하여 후사를 삼았다. 장녀는 부사직(副司直) 최호문(崔浩文)에게 시집가서 아들 최언청(崔彦淸)을 낳았고, 사위는 관찰사 임호신(任虎臣)이다. 차녀는 생원 조효온(趙孝溫)에게 시집가서 아들 조안수(趙安壽)를 낳았다. 삼녀는 이현손(李賢孫)에게 시집가서 아들 이승수(李承壽)를 낳았다. 사녀는 설공순(薛公諄)에게 시집가서 아들 설선(薛璿)을 낳았다. 공의 형제는 셋인데 여유(汝裕)는 현감이고 여관(汝寬)은 생원이다. 누이는 종실 영인군(寧仁君) 이순(李楯)에게 시집갔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45년이 지나 지금의 본도 관찰사 임호신(任虎臣)이 돌을 세워 표식을 하고자 하여 삼가 대개(大槪)를 갖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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