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 봉사공 휘 언청 등/휘 언청 관련기록

일두 정여창 선생 행장 (부사공 장인 )

아베베1 2015. 11. 23. 02:02

 

 

 

 

 

 

  일두선생은  

 전주최공 문성공 8세손   호문  16대 조고 부사직의 장인이되시고

                        ↓  사위  풍천인  임호신  청백리 관찰사                                           

                        9세손   휘  언청 15조고  제용감 부봉

                        10세손 휘  희수 14  조고  안동판관  

    

   

 

 

 일두선생행장 行狀[從子希參]
公諱汝昌。字伯勖。河東人。曾大父諱之義。判宗簿寺事。大父諱復周。判典農寺事。父諱六乙。贈漢城府左尹。公其長子也。左尹通判義州時。公八歲。天使張寧見之。歎異良久。作說名之。蓋以能昌其家也。公早失先考。不煩敎戒。勇於爲義。好讀書。務篤實。不爲崖岸斬絶之行。與金宏弼。遊畢齋門下。日講說道義。以相磨礱。然不015_486c以爲有得。入智異山三年。發憤勵志。明五經。究其歸趣。尤精於魯論。深探性理之源。遂窮體用之學。歲庚子。成廟論成均館。求經明行脩。館中擧公爲第一。知館事徐居正。將進公講經。公不就。癸卯。入上庠。同列以理學推尊之。嘗與群友寢。齋中鼾睡而獨不寐。人無知者。惟崔鎭國知之。播告諸友。館中以爲有思道之功。尤加敬焉。公居家。常以不及事先君爲恨。在母側如嬰兒。未嘗遠違。凡母之所爲。不至於不義。不敢忤焉。母之志。亦不欲以非義傷公之心。故母無過015_486d擧。子無苟順之失。人謂一家行義。丙午夏。母夫人病痢。公嘗糞。日號天請代。見聞者皆感泣下。及沒。祭如儀。葬用禮。期歠粥。不食蔬果。未嘗一日脫麻衣。三年不出山口。服闋。與二弟遊智異山。見晉山岳陽洞。愛之。率妻子築室于蟾津之口。種竹蒔梅。蓋將老焉。庚戌。寺正趙孝仝,參議尹兢。薦孝行學識士林無比。成廟特召爲昭格署參奉。公謂人子分內事。上書固辭。成廟題疏尾褒之曰。聞爾之行。予不覺出涕。行不可掩。而今猶如此。是汝之善。不允。是年冬。登丙015_487a科。補藝文館檢閱。遷侍講院說書。轉導以正。東宮不悅。甲寅。除安陰縣監。人謂理邑非其能。始至。知民疾苦在賦斂。遂作便宜數十條。行之期年。而政淸民悅。境內相戒莫以欺詐負公。方伯重之。凡獄事之盤錯未易解者。用律之未審精當者。必巡面質。然後乃行。由是。道之決疑者。遠近咸歸。辨而不得意者。皆不恨其敗。稱其神明。莅事之暇。選邑之聰明子弟。親加敎誘。日課講讀。學者聞之。自遠方來。春秋行養老禮。設內外廳。內則以夫人待之。有子女貧無資。久未婚嫁015_487b者。尤厚賙之。使不失時。一境大賴。然不樂居官。將有歸田之志。戊午。坐史禍配鍾城。七年甲子夏四月一日卒。返葬于咸陽昇安洞先公墓左。享年五十五。公性端重沈靜。不喜交遊。與金寒暄堂。許以爲知己。論道講書。未嘗相離。嘗爲近侍。出家輒遣乘迎致。告以所奏於上者何如。每引古今商確。以至達曙。與衆處則言語氣象如恒人。未嘗有異。而內實惺惺焉。中年。公與人飮酒過度。大夫人憂甚。遂終身不飮。鄕會。有敎牛者。以國禁訟于官。將抵罪。大夫人又驚惶如015_487c己事。復廢食牛肉。嘗爲縣時。所行數十科條。今至五十餘年。世守爲儀軌。雖暴吏殘人。不敢擅改。有欲改之者。則三老群吏。庭爭申申。必頷乃已。是故。擧行如國典。如此之類。於公雖細事。可以推小而測大。公歿之後。縣之吏。歲時則必進拜于夫人。夫人之沒。來役者如葬其父母。此非必當時蒙澤之人。而其子孫樂其樂利其利。追慕之深切如此。可謂沒世不忘者也。朱溪君深源,南秋江孝溫。亦嘗敬歎之。秋江嘗立傳家藏。而人鮮知者。中廟朝。朝廷議以鄭夢周,鄭汝015_487d昌,金宏弼東國理學之宗。宜極褒崇。以示尊尙之義。以明士趨。因贈議政府右議政。令邑守。春秋躬祭其廟。賜夫人爵貞敬。歲廩終其身。幷錄試其子孫。嗚呼。東方自箕子以後數千餘年。人不知學。昧失所趨。惟鄭文忠公。挺生麗末。爲我東理學之祖。厥後其傳無人。公幸與寒暄。生竝一時。奮然力學。以續夫烏川之緖。其爲學。一以伊洛爲法。讀書。以窮理爲要。處心。以不欺爲主。凡持己行事。一以誠敬爲日用工夫。至於治平之律令格例。無不究其極致。而不得大施015_488a於當世。惜哉。公娶宗室桃平君末生之女。恭靖大王之孫也。生子女六人。男希稷。直長。嫡無嗣。希卨。正郞。取堂弟希參之子彥男爲後。女長適副司直崔浩文。生子彥淸。壻觀察使任虎臣。二女適生員趙孝溫。生子安壽。三女適李賢孫。生子承壽。四女適薛公諄。生子璿。公之兄弟三人。曰汝裕。縣監。曰汝寬。生員。妹嫁宗室寧仁君楯。公沒之四十五年。今本道觀察使任虎臣。欲立石爲表。謹具大槩。

 일두선생행장 行狀[從子希參]

 

 

글을 강하며 한 번도 서로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으며, 일찍이 시종신(侍從臣)으로 있을 때에는 조정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설 때마다 번번이 탈것을 보내 모셔와, 임금께 무슨 일을 주청할지 고하였는데, 매양 고금(古今)의 역사를 끌어다 점검하고 확인하느라 새벽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언어(言語)와 기상(氣象)을 보통 사람과 같게 하고 일찍이 달리하지 않았으나, 속마음은 맑게 깨어 있었다.
중년(中年)에 공이 사람들과 정도에 지나치게 술을 마셔서 대부인(大夫人)께서 매우 근심한 일이 있었는데, 그 뒤로는 종신토록 술을 마시지 않았다. 향회(鄕會) 때에 소를 잡은 자가 있어 국금(國禁)으로 관아에 고발되어 장차 처벌을 받을 상황이 되었는데, 대부인께서 또 마치 자기 일처럼 놀라고 안절부절못하니, 공이 다시는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
일찍이 현(縣)을 다스릴 때에 행하였던 수십 가지의 과조(科條)는 지금까지 50여 년에 이르도록 대대로 지켜 의궤(儀軌)를 삼아, 비록 포악한 아전이나 잔인한 사람일지라도 감히 함부로 고치지 못하였다. 고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삼로(三老)들과 여러 아전들이 뜰에서 거듭거듭 쟁론하여 반드시 승낙을 얻어 내고야 말았다. 이 때문에 거행(擧行)하는 것이 마치 국전(國典)과 같았다. 이런 일들은 공에게는 비록 자잘한 일들이지만, 작은 것을 미루어 큰 것을 헤아릴 수가 있다.
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 고을의 아전들이 세시(歲時)에는 반드시 부인에게 나아가 절을 올렸으며,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이 마치 자기 부모를 장사 지내듯이 와서 일을 도왔다. 이들은 반드시 당시에 은택을 입은 사람들이 아닌데도 그 자손들이, 그 즐겁게 해 줌을 즐거워하고 그 이롭게 해 줌을 이롭게 여겨, 추모하는 마음이 깊고 간절하기가 이러하였으니, 세상에 없어도 잊지 못하는 분이라고 이를 만하다.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과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도 일찍이 공을 공경하고 찬탄하였다. 추강이 일찍이 공에 대한 전(傳)을 지어 집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아는 사람이 드물다.
중묘조(中廟朝)에 조정의 의논이 “정몽주(鄭夢周), 정여창, 김굉필(金宏弼)은 동국(東國) 이학(理學)의 종주이니, 크게 포숭(褒崇)함으로써 그들을 존경하고 숭상하는 뜻을 보여 선비들이 추향할 바를 밝게 알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를 인하여 의정부 우의정을 추증하고, 그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봄과 가을로 그 사당에 몸소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며, 부인에게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작위를 내리고 평생 동안 해마다 늠료를 주고, 아울러 그 자손들을 녹용(錄用)하게 하였다.
아, 동방이 기자(箕子) 이후로 수천여 년 동안 사람들이 학문을 알지 못하고 추향할 바를 몰랐는데, 오직 정 문충공(鄭文忠公)이 고려 말에 우뚝 나오시어 우리 동방 이학의 비조(鼻祖)가 되셨다. 그 뒤 그 학맥을 전승한 이가 없다가 공이 다행히 한훤(寒暄)과 같은 시대에 함께 태어나 발분하여 학문에 힘써서 오천(烏川 정몽주(鄭夢周))의 학맥을 이었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이락(伊洛 정자(程子) 형제)으로 본보기를 삼았고, 독서를 함에 있어서는 궁리(窮理)로 핵심을 삼았으며, 처심(處心)을 함에 있어서는 불기(不欺)로 기둥을 삼았다. 무릇 몸가짐과 일 처리를 함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성경(誠敬)으로써 일용 공부를 삼았다. 그러면서 국가를 다스리는 율령(律令)과 격례(格例)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극치를 궁구하였다. 그런데도 당세에 크게 시행해 보지 못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공은 종실(宗室) 도평군(桃平君) 이말생(李末生)의 따님을 아내로 맞았으니, 공정대왕(恭靖大王)의 손녀이다. 자녀 6인을 낳았다. 장남 희직(希稷)은 직장(直長)인데, 적자(嫡子) 후사(後嗣)가 없다. 다음 희설(希卨)은 정랑(正郞)인데, 당제(堂弟) 희삼(希參)의 아들 언남(彦男)을 취하여 후사를 삼았다. 장녀는 부사직(副司直) 최호문(崔浩文)에게 시집가서 아들 최언청(崔彦淸)을 낳았고, 사위는 관찰사 임호신(任虎臣)이다. 차녀는 생원 조효온(趙孝溫)에게 시집가서 아들 조안수(趙安壽)를 낳았다. 삼녀는 이현손(李賢孫)에게 시집가서 아들 이승수(李承壽)를 낳았다. 사녀는 설공순(薛公諄)에게 시집가서 아들 설선(薛璿)을 낳았다.
공의 형제는 셋인데 여유(汝裕)는 현감이고 여관(汝寬)은 생원이다. 누이는 종실 영인군(寧仁君) 이순(李楯)에게 시집갔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45년이 지나 지금의 본도 관찰사 임호신(任虎臣)이 돌을 세워 표식을 하고자 하여 삼가 대개(大槪)를 갖춘다.

 

 


 

[주D-001]사도(思道) : 눈을 감고 깊이 몰입하여 도(道)를 생각하는 것을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