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시조공에 대한 기록/高麗國大匡完山君諡文眞崔公墓誌銘

추성 양절공신 중대광 광양군 최공 묘지명(推誠亮節功臣重大匡光陽君崔公墓

아베베1 2010. 9. 18. 13:51

동문선 제124권
 묘지(墓誌)
추성 양절공신 중대광 광양군 최공 묘지명(推誠亮節功臣重大匡光陽君崔公墓誌銘) 병서(幷序)


이제현(李齊賢)

완산 최씨(完山崔氏)는 예부 낭중(禮部郞中) 균(鈞)이 서 동(東)으로 된 판본도 있다 적(西賊)의 난리 때 순절한 후부터 이름난 집안이 되었다. 그의 아들 보순(甫淳)은 고왕(高王)의 정승이며,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문정은 봉어(奉御) 윤칭(允偁)을 낳았고, 봉어는 학사(學士) 소(佋)를 낳았으며, 학사는 찬성사(贊成事) 비일(毗一)을 낳았다. 비일이 사재경(司宰卿) 신 홍성(辛洪成)의 딸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공은 이름을 다섯 번 바꾸었는데, 부(阜)ㆍ당(璫)ㆍ수(琇)ㆍ실(實)이요, 맨 나중 이름이 성지(誠之)이다, 자는 순부(純夫)이며 호는 송파(松坡)이다. 20세 전에 진사로서 지원(至元) 갑신년(충렬왕 원년) 과거에 급제하여 계림(鷄林)의 관기(管記)가 되었다가 사한(史翰)에 보직받았다. 춘관속(春官屬)으로 뽑혀 덕릉(德陵 충선왕)을 따라 원 나라에 조회하러 갔는데, 집정관들이 덕릉을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백가지 꾀로 달래어 가도록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궁하고 영달함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이해에 동요됨은 선비가 아니다.” 하였다. 대덕(大德) 말년에 황태제(皇太弟)를 부호하여 내란을 평정하고 무종황제(武宗皇帝)를 옹립하였는데, 공이 항상 좌우에 기거하면서 일을 도왔으나 사람들은 아는 자가 없었다. 조현총랑(朝顯摠郞)에서 여섯 번 전직하여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니, 관품은 봉익(奉翊)이다. 얼마 후에 첨의평리 삼사사 첨의찬성사(僉議評理三司使僉議贊成事)로 영전되니, 관품은 중대광(重大匡)이요,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의 호를 받고 광양군(光陽君)에 봉해졌다.
덕릉이 토번(吐藩)으로 가는데, 공의 아들 문도(文度)가 이 소문을 듣고 달려가 도중에서 만나 공과 함께 관서(關西)까지 따라가는 도중, 때마침 중 원명(圓明)이 배반하여 중남(中南)에서 군사(軍事)가 막아서 앞으로 더 갈 수 없었다. 일이 평정되어 농서(隴西)를 넘어 임조(臨洮)에 닿았는데, 험악한 지경은 단기(單騎)로 갈 수 없으므로 임조에서 반년을 머무르다가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 본국 사람들이 패당을 지어 서로 소송하므로 조정에서 성(省)을 세워내지(內地)와 같이 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공과 전 재상(宰相) 김정미(金廷美)ㆍ이제현(李齊賢) 등이 글을 올려 이해(利害)를 진술하여 마침내 그 의논을 중지하게 하였다. 심부(瀋府)의 관원들이 또 국가의 잘잘못을 지목하여 장차 묘당(廟堂)에 말하려고 하는데, 공이 홀로 서명하지 않으니 나중에는 주모자들이 부중(府中)에서 함께 앉아 녹사(錄事)를 시켜 지필(紙筆)을 가져다가 서명하기를 청하였다. 공이 목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재상을 지냈는데, 여러 녹사들이 나를 협박하려고 하는가.” 하니, 여러 사람들은 기가 꺾여 그만 그치었다. 태정(泰定) 갑자년(충숙왕 17년)에 상서(上書)로 물러나기를 청하여 임금의 윤허를 얻었다. 광양군(光陽君)으로서 집에 있는데, 소리하는 기생을 두고 손님들을 청해다가 청담아소(淸談雅笑)로 세월을 보내고 세상일을 묻지 않았다. 지순(至順) 경오(충숙왕 17년)에 병이 들어 7일만인 계해일에 집에서 세상을 마쳤으니 나이 65세였다. 나라 관원이 상사(喪事)를 다스리고, 시호를 문간공(文簡公)이라 하였다. 공은 성품이 굳세고 곧아서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자획(字畫)이 해정(楷正)하고, 시는 순후하고 여유로워 즐길 만하였으며, 더욱 음양추보법(陰陽推步法)에 조예가 깊었다. 법관ㆍ선거(選擧)ㆍ천문ㆍ사원(詞苑)에 임명되기 또한 20년이었는데, 덕릉의 후한 대우는 종시 공보다 앞선 이가 없었다. 일찍이 과거를 보일 때 안진(安震) 등 33명을 뽑았는데, 그중에는 명사(名士)들이 많았다. 부인(夫人) 김씨는 찬성사 둔촌거사(贊成事鈍村居士) 훤(晅)의 딸로서 행실이 어질었는데, 공보다 3년 먼저 죽었다. 아들은 하나인데 전 상호군(上護軍) 문도(文度)이다. 글을 읽되 정주학(程朱學)을 좋아하였고, 선진(先進)들과 교제하였다. 딸은 하나인데 만호 밀직부사(萬戶密直副使) 권겸(權謙)에게 출가하였다.

명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 爲名家之嗣
그 임금을 얻어 그 뜻을 펴고 / 得其君而伸其志
예로써 벼슬에 나아가고 / 進以禮
의리로써 물러났도다 / 退以義
어진 아내가 공의 평생을 봉향하였고 / 有賢妻以養其生
착한 아들이 공의 죽음을 보내도다 / 有良子以送其死
지금 시대에서 구하면 / 求之今時
열에 한 둘이 못 되네 / 十無一二
아, 광양군이여 / 嗚呼光陽
유감이 없으리로다 / 可無憾矣


[주D-001]성(省)을 세워 : 우리 나라를 완전히 원(元) 나라 영토로 하고, 지방청인 성(省)을 두어 중국 본토와 같이 행정하게 하자는 의논이 그때에 있었다.
[주D-002]심부(瀋府)의 관원들 : 충선왕은 고려왕과 심양왕을 겸하였는데, 고려왕의 왕위는 충숙왕(忠肅王)에게 넘겨주고 심양왕의 왕위는 작은 아들 고(暠)에게 전해 주었으나, 심양왕이란 말뿐이요, 실제로 국토가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항상 그것 때문에 여러 가지 말썽을 일으켰다.
[주D-003]음양추보법(陰陽推步法) : 일월(日月)과 오성(五星)의 도수(度數)를 추산하여 책력을 만드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