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시조공에 대한 기록/휘 최성지 묘지명

推誠亮節功臣重大匡光陽君崔公墓誌銘 幷序 (李 齊 賢) (스크랩)

아베베1 2010. 10. 29.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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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성양절공신 중대광 광양군 최공의 묘지명(推誠亮節功臣 重大匡 光陽君 崔公 墓誌銘)

완산(完山 : 지금의 전주) 최씨는 예부낭중(禮部郎中)인 균(鈞)이 서적(西賊 : 혹은 東賊이라 하기도 함)의 난때 순절하면서 명가(名家)가 되었다. 균의 아들 보순(甫淳)은 고종때 재상이고,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문정은 봉어(奉御)인 윤칭(允偁)을 낳았고, 봉어는 학사(學士) 소(佋)를, 학사는 찬성사(贊成事) 비일(毗一)을 낳았다. (비일은) 사재경(司宰卿) 신홍성(辛洪成)의 딸과 혼인하여 공을 낳았다. 공은 다섯 번 이름을 바꾸었다. 부(阜) 당(瑭) 수(琇) 실(實)이었고, 마지막 이름이 성지(誠之)이다. 자는 순부(純夫), 호는 송파(松坡)이다.
약관(弱冠)이 되기 전에 진사로서 지원(至元) 갑신년(충렬왕 10, 1284) 과거에 급제하여 계림(鷄林)의 관기(管記)가 되었다. 중앙으로 들어와 사한(史翰)에 임명되었고, 춘관속(春官屬 : 세자를 모시는 관원인 동궁관)에 선발되었다. 덕릉(德陵 :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입조하였다. 당시 (원나라) 집정(執政)이 덕릉을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갖은 수단을 써서 공이 덕릉을 떠나게 하려고 하였다. 공은 웃으며 “출세하고 못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있고, 이익에 따르는 것은 선비가 아니다” 고 말하였다. 대덕(大德 : 1297~1307)말 (충선왕이) 황대제(皇大弟 : 황제의 동생)를 도와 내란을 평정하고 무종황제(武宗皇帝)를 옹립할 때 공은 늘 좌우에 있으면서 도왔다. 아는 사람이 없었다.
조현총랑(朝顯摠郞)에서 6번 승진하여 삼사좌사(三司左使)에, 관계(官階)는 봉익(奉翊)이 되었다. 조금 있다가 첨의평리 삼사사 첨의찬성사(僉議評理 三司使 僉議贊成事)에, 관계(官階)는 중대광(重大匡)이 되었다. 또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公臣)의 호를 받고 광양군(光陽君)에 봉해졌다.
덕릉이 토번(吐蕃)으로 유배될 때 공의 아들 문도(文度)가 소식을 듣고 달려가 길에서 공을 만나 함께 관서(關西)까지 쫓아갔다. 승(僧) 원명(圓明)의 반란으로 남쪽 길이 막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난리가 평정된 뒤에 농서(隴西)를 넘어 임조(臨洮)까지 갔으나 단기(單騎)로는 더 이상 갈 수 없어 임조 근처에 반년을 머물다 돌아왔다.
마침 본국인들이 편을 나누어 서로 원나라 조정에 (고려에) 성(省)을 설치하여 중국 본토와 같이 할 것을 건의하였다. 공은 전에 재상이었던 김정미(金廷美)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원나라에 그 이해를 논하는 글을 올려 마침내 그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게 하였다. 심왕부(瀋王府)의 관원들이 다시 국가의 득실을 적어 원나라 조정에 보고하려고 하였으나, 공은 홀로 서명하지 않았다. 최후에 주모자가 함께 부에 앉아 있으면서 녹사(錄事)를 시켜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 하여 서명할 것을 청하였다. 공은 성난 목소리로 “내가 재상의 위치에 있었는데 어찌 녹사로 재상을 위협할 수 있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무리의 기세가 꺾였다.
태정(泰定) 갑자년(충숙왕 11, 1324) 글을 올려 물러날 것을 청하여 허락받고 광양군(光陽君)으로서 집에 머물렀다. 노래 잘 하는 기생을 데리고 손님을 불러 담소를 나누며 즐길뿐 세상 돌아가는 일은 묻지 않았다. 지순(至順) 경오년(충혜왕 즉위, 1330)에 병에 걸려 7월 계해일에 집에서 별세하였다. 나이 65세였다. 관청에서 장례를 준비하고 문간공(文簡公)의 시호가 내렸다.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 글자의 획이 단정하고, 시는 깊이가 있고 즐거움을 주었다. 음양준보의 법(陰陽准步之法)에 특히 뛰어났다. 풍헌(風憲) 선거(選擧) 성관(星官) 사원(詞苑) 등을 관장한 것이 20년이었고, 지속적으로 덕릉의 인정을 받은 사람 가운데 공보다 나은 사람이 없었다. 과거를 관장하여서 안진(安震) 등 33인을 뽑았는데, 명사들이 많았다.
부인은 김씨로 찬성사(贊成事)인 둔촌거사(鈍村居士) 훤(晅)의 딸이다. 어진 행실이 있었다. 공보다 3년 먼저 돌아갔다. 아들은 전상호군(前上護軍) 문도(文度)이다. 독서하고 정주학(程朱學)을 좋아하여 선배들이 모두 그와 교유하였다. 딸은 만호 밀직부사(萬戶 密直副使)인 권렴(權謙)에게 시집갔다.
명(銘)에 이르기를,
명가의 후손이 되어 좋은 임금 만나 자신의 뜻을 폈다.
예에 맞게 나아가고 의롭게 물러났다.
어진 부인이 있어 평생을 봉양했고
훌륭한 아들이 있어 장례를 치루었다.
이런 사람을 지금에 찾으면 열에 하나도 힘들 것.
아, 우리 광양군은 아쉬움이 없으리라.

 

推誠亮節功臣重大匡光陽君崔公墓誌銘 幷序 (李 齊 賢)

完山崔氏自禮部郞中鈞死節西(一作 東)賊爲名家其子甫淳相高王謚文定文定生奉御允偁奉御生學士佋學士生賛成事毗一嬰司宰卿辛洪成之女生公公五易名阜璫琇實最後名誠之字純夫號松坡未弱冠以進士及至元甲申第管記雞林入補史翰選爲春官屬隨德陵朝元執政畏惡德陵百計誘之使去公咲曰窮達在天怵於利非士也及大德末扶皇太弟定內難擁立武宗皇帝公常居左右贊襄之人無知者由朝顯摠郞六遷爲三司左使階奉翊尋轉僉議評理三司使僉議贊成事階重大匡號推誠亮節功臣封光陽君德陵如吐蕃公之子文度聞難馳赴道遇公與俱追至關西僧圓明叛阻兵中南不得前事定踰隴抵洮鬼蜮之境單騎不可行留洮上半年方還會本國人分黨相訴朝廷議立省比內地公與前宰相金廷美李齊賢獻書陳列利害遂寢其議瀋府僚佐又疏國家得失將言之廟堂公獨不肯署最後主謀者同坐府中令錄事持紙筆請署公厲聲曰吾甞備立宰相僉錄欲相脅耶衆沮喪泰定甲子上書求退得允以光陽君家居畜聲妓召賓客淸談雅咲不問人間事至順庚午感疾至七日癸亥卒于第壽六十五有司庀喪事謚文簡公公性剛直不妄語字畫楷正詩醞籍可 喜尤邃陰陽推步之法任風憲選擧星官詞苑且二十年德陵眷遇終始無出右者甞闢春場取安震等三十三人名士居多夫人金氏贊成事鈍村居士晅之女賢有行先三年亡一子前上護軍文度讀書喜程朱學先進皆從之遊一女適萬戶密直副使權謙云爲名家之嗣得其君而伸其志進以禮退以義有賢妻以養其生有良子以送其死求之今時十無一二嗚呼光陽可無憾矣

〔출전 : 『益齋亂藁』 권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