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시조공에 대한 기록/휘 최성지 묘지명

광양군 시호 문간공 휘 성지

아베베1 2013. 10. 5. 16:53

 

 

 

 

 

 

양촌선생문집 제3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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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현사략(東賢事略)

찬성 최성지(崔誠之)


공은 자는 순부(純夫)요,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호는 송파(松坡)이다. 5대조 균(均)은 예부 낭중(禮部郞中)으로 절개를 지켜 서적(西賊 조위총(趙位寵)을 가리킨다)에게 죽었고, 그 아들 보순(甫淳)은 고종(高宗)을 도와 평장사를 지냈고, 네 번 예위(禮圍)를 맡았으며,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문정이 봉어(奉御) 윤칭(允偁)을 낳고, 봉어가 한림학사 소(佋)를 낳고, 소가 찬성사(贊成事) 비일(毗一)을 낳으니, 곧 공의 아버지다.
공은 충렬왕 갑신년(1284)에 급제하였는데 충선왕을 따라 입조(入朝)하였다. 대덕(大德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 말년에 내란(內亂)을 평정하고 무종황제(武宗皇帝)를 옹립(擁立)하였으며 늘 좌우에 있으면서 도왔다. 왕이 무고를 입고 토번(吐蕃)으로 유배(流配)될 때에, 공은 아들 문도(文度)와 함께 난을 듣고 달려와서 같이 관서(關西)에 이르렀는데, 중 원명(圓明)이 반하여 군사를 풀어 저지하므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일이 평정되매 농산(隴山)을 넘어 임조(臨洮)에 가서 반년간 머물다 돌아왔다. 마침 본국 사람이 분당(分黨)하여 서로 쟁송(爭訟)하니, 조정(朝廷 원 나라를 가리킨다.)에서 성(省)을 내지(內地)와 같이 세울 것을 의논하므로, 공이 재상을 지낸 김정미(金廷美)ㆍ이제현(李齊賢) 등과 글을 올려 호소하여 그 의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심부 요좌(瀋府寮佐)가 또 나라의 득실을 글로 써서 성당(省堂)에 말하려 하였으나 공만이 서명하지 않았다. 최후에는 주모자가 같이 부중(府中)에 앉아서 관리를 시켜 서명을 요구하니, 공이 소리를 가다듬어,
“내가 일찍이 재상을 역임하였는데, 첨의녹사(僉議錄事)가 협박하는가.”
하니, 모두 기가 질렸다. 충숙왕 계축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를 지냈으며, 태정(泰定 원 진종(元晉宗)의 연호) 갑자년(1324, 충숙왕11)에 글을 올려 치사하기를 청하니, 광양군(光陽君)에 봉하였다. 지순(至順 원 문종(元文宗)의 연호) 경오년에 65세로 졸하였는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공은 성품이 강직하여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글씨를 해정하게 썼으며, 더욱이 음양추보법(陰陽推步法)에 조예가 깊었다.


 

 

 

동문선 제7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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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記)
춘헌 기(春軒記)


이곡(李穀)

객 중에 춘헌에 와서 헌(軒)이라고 이름 지은 뜻을 묻는 이가 있었는데, 주인이 대답하지 않으니, 객이 다시 나아가서 말하기를, “대기(大氣)가 큰 땅에 퍼지면 양기가 올라가서 서로 화합하여 물건의 의사가 그것으로 발생하게 되고, 사람의 마음도 따라서 펴지고 화창해지며 여러 가지 꽃이 곱고, 백 가지 새 소리가 즐거운 듯, 그 빛은 화락하고 그 풍경은 화창해진다. 그러므로 그 춘대(春臺)에 오른 것 같고 봄바람에 선 것 같다는 뜻을 취한 것이냐.” 하기에, 대답하기를, “아니다.” 하니, “원(元)이라 함은 하늘과 땅이 물건을 창조하는 처음이고, 봄이라 함은 하늘과 땅이 물건을 나오게 하는 때이고, 인(仁)이라 함은 하늘과 땅이 물건을 만드는 마음이니, 그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그 이치인즉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 피폐하고 병들고 불구된 것들도 그 기름을 얻게 되고, 곤충ㆍ풀ㆍ나무들도 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모두 다 이치로 된다는 뜻이냐.” 하기에, “아니다. 기어코 말하라고 한다면, 온화하다는 것이다. 여름에는 덥고 비 오고 겨울에는 몹시 춥고 가을은 쌀쌀하고 맑으니, 사람에게 좋은 것은 봄의 온화한 것이 아니겠는가. 객이 말하는 것을 내가 어찌 감당하겠는가.” 하니, 객이 웃고 물러갔다. 내가 마침 그 자리에 있다가 말하기를, “덕이 있으면서도 있는 체하지 않는 것은 오직 군자라야 그러한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주인의 가슴 속이 유연(悠然)하여서 모든 몸을 지키고 물건을 접하는데 마음에 쌓였다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화한 기운이 아님이 없으니, 이는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바람쐬고 노래하며 돌아온다는 무리이다. 그 취하는 바가 어찌 온화한 데에 그칠 뿐이겠는가. 객의 물음이 어찌 그렇게 늦느냐.” 하고서 드디어 붓을 달라고 하여 그 말을 벽에 쓴다.
주인은 완산 최씨로 문정공(文定公 최보순(崔甫淳))의 후손이고, 문간공(文簡公 최성지(崔誠之))의 아들이다. 널리 배우고 잘 기억하였는데, 더욱 성리학에 깊어서 의심나는 것을 물으려는 동방의 문사들이 모두 이 사람에게 찾아간다.


 

[주D-001]기수(沂水)에 …… 돌아온다 :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한 말로, 몇몇 제자들의 소원은 모두 정치에 있었으나 그는 이렇게 한가하게 자연을 즐기며 살고 싶은 것이 소원이라 하였다.


 

【인물】 고려 최균(崔均) 어려서부터 열심히 공부하여 출중하였으며, 인종(仁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자주 벼슬이 올라 소부(少府) 주부(主簿)가 되었다. 그때의 재상(宰相) 최윤의(崔允儀)가 봉지(奉旨)하고, 문사(文士)를 택하여 예의(禮儀)를 상정(詳定)함에 있어서 최균(崔均)을 제일 먼저 뽑았다. 뒤에 최윤의가 임종할 때에 홀로 최균을 천거하여 임금은 각문지후(閣門祗侯)를 제수하였다. 명종(明宗) 때에 예부시랑으로서 병마부사(兵馬副使)를 겸임하였는데, 서경(西京)의 조위총(趙位寵)을 공격하다가 잡혀 해를 입었으며 예부상서로 추증되었다. 최척경(崔陟卿) 아전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의종(毅宗) 초에 경산부(京山府) 판관(判官)이 되었다. 임기가 만료되어 서울에 돌아와서는 10여 년간 권문세가에 드나들지 아니했다. 뒤에 다시 탐라령(耽羅令)이 되었다가 자주 옮겨 감찰어사가 되고, 좌정언 지제고(左正言知制誥)에 제수되었다가, 예부시랑 비서감(禮部侍郞祕書監)까지 지냈다. 맑은 이름과 굳은 절개는 늙어서도 쇠하지를 아니했다. 애초에 박춘령(朴椿齡)이 완산(完山)을 지킬 때, 연구(聯句 몇 사람이 함께 연철(聯綴)해서 시를 완성하는 형식)로써 군동(群童)을 뽑는데, 최척경ㆍ최균(崔均)ㆍ최송년(崔松年)을 얻었다. 교체되어 돌아갈 때에 함께 데리고 가서 권하여 학문을 시켜, 뒤에 세 사람이 다 명사(名士)가 되었으니, 당시에 완산 삼최(完山三崔)라 불렀다. 이준양(李俊陽) 청백함으로 유명하고, 의종(毅宗) 때에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최보순(崔甫淳) 최균(崔均)의 아들인데 벼슬은 평장사,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유광식(柳光植) 풍도와 모습이 매우 크고 청검하고 절약하였으며 신중하고 말이 적었다. 중외(中外)로 여러 직책을 역임하였는데 모두 치적을 올렸다. 고종(高宗) 때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치사하고 소요자적(逍遙自適)하였는데, 세칭 수부쌍전(壽富雙全)하다고 하였다. 시호는 대숙(戴肅)이다. 유소(柳韶) 유광식의 아들인데 성품은 강직(剛直)하고 꿋꿋했으며 남을 인정함이 적었고, 집안 살림에 관심을 두지 아니했으며 벼슬은 평장사에 이르렀다. 최성지(崔誠之) 최보순(崔甫淳)의 4세손이며 충선왕(忠宣王) 때 사람인데, 벼슬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광양군(光陽君)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성품은 강직하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아니했고 글씨는 매우 반듯하였다. 시(詩)는 온자(溫藉)해서 좋고 음양 술수를 잘했다. 풍헌(風憲)과 어사직(御史職), 선거(選擧)와 이부직(吏部職)ㆍ성관(星官 천문관직(天文官職))ㆍ예원(藝苑 한림원직(翰林院職)) 등을 20년간 역임을 했다. 유방헌(柳邦憲)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지내고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최득평(崔得枰) 성품이 염정(廉靜)하고 스스로 지조를 지켜서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벼슬은 이부(吏部)의 전서(典書)로 치사(致仕)하였는데, 충렬(忠烈)ㆍ충선(忠善)ㆍ충숙(忠肅)의 삼조(三朝)를 섬겼다. 그 중에 충선왕이 더욱 중용하였다. 최재(崔宰) 최득평(崔得枰)의 아들이다. 충숙왕(忠肅王)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임금이 그가 자기 아버지의 풍도를 지녔다고 하여, 감찰지평(監察持平)을 제수하였다. 충혜왕(忠惠王)이 즉위한 뒤 면직되었다. 임금이 원 나라로 끌려간 뒤 임금이 설치한 것은 모두 다시 바뀌었는데, 도감(都監)을 세우고 최재(崔宰)를 판관(判官)으로 삼으니 최재는 탄식하고 말하기를, “임금의 실덕은 임금 자신이 한 것이 아니요, 좌우에서 임금의 과실을 유도하여 인도한 것이다. 앞에서 맞이하고 뒤에서 맞아 들쳐 올리니, 내가 실로 이것을 부끄러워한다.” 하고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아니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완산군(完山君)으로 봉하고 문정(文貞)이라 시호하였다.
최용갑(崔龍甲) 1등으로 뽑혀 급제하였다. 이자을(李資乙) 1등으로 뽑혀 급제하였다. 최용갑(崔龍甲)과 함께 문명(文名)이 있었다. 이곡(李穀)의 〈완산도중시(完山途中詩)〉에, “장원(壯元)한 최(崔)ㆍ이(李)의 재명(才名)이 크고, 경계 머리[界首] 완산(完山)이 전라도에 기상이 웅장하구나. 과객은 신분이 귀한 것을 자랑하지 말라. 공경(公卿)이 이 한 고을에서 많이 나왔네.” 하였다. 최칠석(崔七夕) 장수(將帥)의 재량이 있었다. 이문정(李文挺) 지순(至順) 경자년 과시에 뽑히어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최부(崔府) 벼슬은 판서이며,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이백유(李伯由) 이문정(李文挺)의 손자인데 개국공신이며, 완성군(完城君)에 봉하였다. 이의손(李義孫)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은 이조 참판이며 문명(文名)이 있다. 이사철(李思哲) 과거에 급제하고 정난공신(靖難功臣)에 들었으며 벼슬은 좌의정이다. 최경지(崔敬止) 함열(咸悅) 우거(寓居) 편에 보인다. 이경동(李瓊仝) 이문정(李文挺)의 4대손이며, 임오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중시(重試)와 발영시(拔英試) 과에도 합격하여 벼슬은 병조 참판까지 이르렀고, 문명(文名)이 높았다.
『신증』 유헌(柳軒) 과거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대사간(大司諫)이었으며 기량(器量)이 있었다. 유숭조(柳崇祖)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 동지(同知)를 지냈다.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데 부지런하였다.
【효자】 본조 박진(朴晉) 아버지가 병이 들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시중하였는데, 언제나 옆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아니하였으며, 약을 달이면 꼭 먼저 맛을 보았다. 아버지는 병이 위태하자 시를 지어 박진(朴晉)에게 주어 말하기를, “나이 80에 병상[蟻床]에 누우니, 육순된 아들이 약을 먼저 맛보네. 사생(死生)은 운명이기에 끝내 피할 수 없으니, 네 어머니 묘 가까이에 수당(壽堂 생존시에 지어 두는 묘)을 세워 두라.” 하였다. 아버지가 작고하자 장례와 제사를 예로써 하고, 묘막에서 3년을 지내니 고을에서 칭송하였다. 태조 7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으며 벼슬은 지군사(知郡事)를 지냈다. 박유성(朴有誠) 나이 50세 때에 부모가 죽자 6년간 묘막 생활을 했다. 상을 마친 뒤에는 부모의 형상을 그려 벽에 붙이고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그치지 아니했다. 성종(成宗) 6년에 이 일이 임금께 알려져 특별히 광흥창(廣興倉) 봉사(奉事)에 제수되었다. 복윤문(卜閏文) 효행이 있었다. 『신증』 오영로(吳齡老) 생원(生員)인데 계모의 상을 입고 기년(期年)에야 비로소 소식(疏食)을 시작했다. 연산(燕山) 때에 아버지가 작고했는데, 그때 단상법(短喪法)이 엄했는데도, 오영로는 오히려 예대로 상을 입었다. 금상 4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박세직(朴世直) 생원(生員) 나이 10세에 어머니를 잃고, 3년 동안 슬프게 울었으며, 아버지가 작고해서는 묘막에서 죽으로 3년상을 마치었다. 금상 23년에 상으로 벼슬을 주었다. 김천동(金千同) 사노였으며 어머니가 종기를 앓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금상 23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열녀】 고려 임씨(林氏) 낙안군사(樂安郡事) 최극부(崔克孚)의 처이며, 왜구가 마을에 쳐들어왔는데, 임씨가 피난하여 달아나자 왜구가 쫓아와서 욕보이려 하였다. 굳게 항거하니 왜구가 한 팔을 끊었는데 그래도 따르지 아니했고, 또다시 다른 팔을 끊어도 끝내 따르지 않고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그 집과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본조 이씨(李氏) 최이원(崔以源)의 처인데 나이 19세에 남편이 죽었다. 부모가 그 뜻을 뺏고자 하니 이씨는 밤에 시부모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부모가 후회하고 개가시킬 것을 포기하였다. 세종 24년에 일이 임금께 알려져서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김씨(金氏) 박형문(朴衡文)의 처이며 남편이 죽자 3년간 머리를 빗지 아니했다. 조석으로 직접 상식을 올리고 상복을 벗은 뒤에는 시절에 따라 옷을 지어 신주(神主)에 바치었다. 금상 23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욕방의관비왕사(欲訪衣冠悲往事) 이색(李穡)의 시에, “견성(甄城)의 경치가 오르기를 권하니, 옛 사람을 위무(慰撫)하며 유연히 웃음을 머금도다. 의관을 찾고자 하니 지나간 일들이 슬퍼지고 부질없이 도기(圖記)만을 가지고 옛 궁터를 말하네. 술은 황국(黃菊)에 맑은 서리 내린 후 맛을 다하고, 주렴(珠簾)은 청산(靑山) 낙조(落照) 사이에 걷혀 있네. 고금(古今)의 영웅이 지나가는 새와 같으니, 피곤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돌아갈 줄을 알아야 하겠네.” 하였다. 견훤농병지(甄萱弄兵地) 정추(鄭樞)의 시에, “중간에 길이 산과 강을 갈라 놓으니, 남주(南州)의 물색(物色)이 구분되었네. 얽힌 소나무는 옛날 역원(驛院)을 알리고, 긴 대나무는 이전의 마을을 표시하고 있네. 말[馬] 그림자는 거치른 다리에 비치고, 까마귀 소리는 황폐한 절간의 구름 속에서 들리네. 견훤이 군병을 지휘하던 땅, 물가에 임하여 싸립문이 걸렸네.” 하였다. 천년종왕기(千年鍾王氣) 권근(權近)의 시에, “큰 고을이 남과 북을 갈라 놓으니, 완산(完山)이 가장 특기하도다. 천년의 왕기가 모여 있으니, 일대에 큰 토대를 열었구나.” 하였다. 완산거진승남양(完山巨鎭勝南陽) 설장수(偰長壽)의 시에, “완산(完山)의 거진(巨鎭)은 남양(南陽)에 뛰어나고, 성한 기운이 제향(帝鄕)에 아련하여라.” 하였다. 세마기가누근수(洗馬幾家樓近水) 석선탄(釋禪坦)의 시에, “완산의 4월 완화(浣花) 앞에, 하늘 기운은 사람을 가두어 취한 듯이 잠이 오네. 말을 씻기는 집은 몇 집인고, 누(樓)는 물가에 있는데. 모래 물가에 우는 비둘기, 비는 촉촉이 내리네.” 하였다. 남리임구제효우(南里林鳩啼曉雨) 성임(成任)의 시에, “남리(南里) 수풀 속 비둘기는 새벽비에 울고, 동풍(東風) 연기 속 버들은 봄 성(城)에 어둡다.” 하였다. 압계공업서하산(鴨鷄功業誓河山)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대세(大勢)를 반드시 휼방(鷸蚌)의 고사를 참고로 해서 보아야 하네. 오리와 닭의 공업(功業)을 산하(山河)에 맹세하도다. 추풍이 한 번 견훤을 위하여 웃으니, 노발(怒髮)은 무단히 관을 들먹거리는구나.” 하였다. 완산가려고명도(浣山佳麗古名都)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완산은 곱고 새뜻하니 옛날의 명도(名都)로다. 용호(龍虎)가 서리고 걸터앉은 듯 울성하게 얽혀 있네. 정령(精靈)이 쌓여 지키고 도우니, 기운(氣運)도 아름다워라. 때에 발설하니 바른 부서(符瑞) 이루었네. 국조의 근원이 이곳에서 비롯되니, 대대로 맑은 덕음(德陰)이 동우(東隅)에 덮였어라. 신풍(新豐) 계견(鷄犬)을 어찌 족히 비기리요. 충후(忠厚)는 빈풍(豳風)과 다를 것이 없도다.” 하였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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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문전고(天文典故)
역법(曆法)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때에 대내마(大奈麻) 덕복(德福)이 당 나라에 들어가서 역법을 배워 와서, 처음으로 그 법을 써서 역서를 만들었다. 《문헌비고》
○ 고려(高麗) 때에는 별로 역서를 두지 않고 당 나라 《선명력(宣明曆)》을 그대로 본받아 사용하였는데, 장경(長慶) 임인년으로부터 그 후 태조(太祖)가 개국할 때까지 자못 1백 년이 지나자 그 역서가 이미 틀려졌다. 그 전에 틀려진 것은 당 나라에서는 이미 역서를 고쳐, 이로부터 역서를 모두 22차례 고쳤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그냥 사용하다가, 충선왕 때에 이르러 원 나라 《수시력(授時曆)》으로 고쳐 사용하였으나 개방(開方)의 수학(數學) 방법은 전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교식 일절(交食一節)은 오히려 선명력의 옛 방법을 그대로 사용했으니, 휴식 가시(虧食加時)는 천문(天文)에 합하지 아니하였다. 일관(日官)이 제멋대로 앞뒤를 억지로 맞추었으나 맞지 않는 것이 있었다. 고려 말까지 능히 고치지 못하였다. 정인지의 《고려사》
○ 세종 계□에 예문 제학(藝文提學) 정인지 등에 명하여 《칠정산 내외편(七政算內外編)》을 지었다. 처음에 고려 최성지(崔誠之)가 충선왕을 따라 원 나라에 들어가서 《수시력법(授時曆法)》을 얻어 돌아와서 추보(推步)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일월 교식(日月交食)하는 것과 오성(五星)이 행하는 도수는 오히려 곽수경(郭守敬)의 산술(算術)을 알지 못하였다. 우리나라가 개국하여서도 역법은 《수시력》을 그대로 썼다.《수시력》에 일월 교식과 오성의 입성(立成)이 빠졌으므로 임금이 정인지ㆍ정초(鄭招)ㆍ정흠지(鄭欽之) 등에게 명하여 추보(推步)하도록 하니, 명 나라 《대통통궤(大統通軌)》를 취하여 조금 첨삭해서 합하여 《내편(內篇)》을 만들고, 또 《회회역법(回回曆法)》을 얻어 이순지(李純之)ㆍ김담(金淡) 등에게 명하여 상고하고 바로잡게 하여 《외편(外篇)》을 만들었다.
○ 인조(仁祖) 갑신년에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 김육(金堉)이 상소하기를, “황제(黃帝) 때 이래로 옛 역법 육가(六家)의 뒤에 한 나라 무제(武帝) 때에 이르러 낙하굉(洛下閎)이 《태초력(太初曆)》을 만들었는데, 동한 말까지에 무릇 세 번 역서를 고치고, 위 나라로부터 수 나라에 이르는 동안에 13번 고치고, 당 나라 역서는 8번 고치며, 오대(五代)의 여러 나라에는 팔가(八家)의 역서가 있었고, 남송과 북송 때에는 역서를 11번 고쳤습니다.이렇게 다만 역서가 오래되어 차이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사람마다 보는 것이 각각 정밀하기도 하고 거칠기도 하여 역서를 이와 같이 자주 고쳤습니다. 원 나라 초에 이르러 곽수경ㆍ허형(許衡) 등이 역법에 밝아서 입차(立差)를 매우 정밀하게 하여 영(盈)하고 축(縮)하며 더디고 빠르며 더하고 감하는 차이가 있었습니다.지원(至元) 18년 신사년을 역원(曆元)으로 하여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데 무릇 3백 65년이 되도록 일식ㆍ월식이 조금도 틀림이 없으니, 후세에서 교묘한 역서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천문(天文)의 운행이 쉬지 않으므로 조그만 차이가 날로 쌓여 많아져서 저녁과 새벽의 중성(中星)의 위차(位次)가 조금씩 틀려지고, 주천(周天) 도수가 이미 꽉 찼으니 마땅히 변할 것입니다.서양(西洋) 역서가 마침 이때에 나왔으니 이야말로 역서를 고칠 기회이나 다만 한흥일(韓興一)이 가져 온 책에 이론만 있고 입성(立成)이 없습니다. 대개 이 글을 지을 만한 사람이라야 능히 이 글을 알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비록 10년을 연구하여도 처음과 끝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중국에서 병자ㆍ정축년 사이로부터 이미 역서법을 고쳤으니, 곧 내년의 신력(新曆)에는 반드시 우리나라 역서와는 틀린 것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신력 중에 만약 묘하게 합치되는 곳이 있거든 마땅히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도모하소서. 이번 사신 중에 일관 한두 사람을 동행시켜 흠천감(欽天監)에 탐문하여 역법을 추고하고, 의심나고 어려운 점을 알아 오면 추측하여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문헌비고》
○ 효종(孝宗) 계사년에 처음으로 시헌력법(時憲曆法)을 행하였다.
○ 만력(萬曆) 때에 서양 사람 리마두(利瑪竇)가 중국에 들어왔는데, 천문력법(天文曆法)에 있어서 산법(算法)과 혼천의(渾天儀)를 운용하는 것이 옛날보다 매우 뛰어났다. 숭정(崇禎) 때에 예부 상서(禮部尙書) 서광계(徐光啓)와 우참정(右參政) 이천경(李天經)이 서양의 방법에 의거하여 《일월오성력지(日月五星曆指)》 및 《혼천의설(渾天儀說)》을 바치었으니, 이것이 《시헌력(時憲曆)》의 기본이 되었다.
○ 서양 사람 탕약망(湯若望)이 시헌력을 만들었다. 숭정 초년에 비로소 그 법을 사용하여 중국에서 시행하였으며, 청 나라에서도 그대로 계승하여 썼는데 그 법이 매우 정묘하였다. 김육이 관상감 제조로 있을 때에 그 법을 배워 익히기를 아뢰어 청하였다. 병술년에 사신이 되어 연경에 들어갈 때에 역관(曆官) 두 사람을 거느리고 가서 탕약망에게 배우려 하였다.그러나 경비가 삼엄하여 출입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책만 사가지고 돌아왔다. 김상범(金尙範) 등을 시켜 힘을 다해서 정밀히 연구하여 대략 그 개요를 알았다. 신묘년 겨울에 또 김상범을 보내어 많은 뇌물을 주고 흠천감에서 배워 와서 계사년으로부터 처음으로 그 법을 사용하여 역서를 행하였다. 그러나 오성산법(五星算法)은 아직 알아 오지 못하였기 때문에, 을미년에 또 김상범을 보냈으나 불행하게도 도중에서 죽었으므로 그 법을 마침내 다 전하지 못하였다. 《잠곡집(潛谷集)》
○ 숙종(肅宗) 무자년에 관상감 추산관(推算官) 허원(許遠)이 연경에 들어가서 시헌법(時憲法) 칠정표(七政表)를 흠천감에서 사가지고 돌아와서 그대로 추보하여 비로소 시헌력 오성법을 사용하였다.
○ 영종(英宗) 원년에 ‘신수시헌칠정법(新修時憲七政法)’으로 고쳐 사용하였다.
○ 서광계가 지은 《숭정력지(崇禎曆指)》에 숭정 원년 무진 천정동지(天正冬至)를 역원(曆元)으로 삼았더니, 우리나라 숙종조에 이르러 쌓인 위차(位差)가 점점 많아졌다. 매각성(梅瑴成)이 《숭정력지》를 미루어 넓혀 숭정 후 57년 갑자년 천정 동지를 역원으로 삼으니 곧 우리나라 숙종 10년 갑자이다. 칠정(七政)도 모두 여기에서부터 계산을 시작하였다.영종 을사년부터 처음으로 그 법에 의하여 일월과 오성의 교식(交食)을 추보하였다. 요즈음 서양사람 갈서니(噶西尼)가 또 말하기를, “태양과 지구가 반경(半徑)의 차이가 있다.” 하고, 각성(瑴成)은 3분이라고 정하였다. 그러나 지금 추측으로는 겨우 10초(秒)의 청기(淸氣)ㆍ몽기(蒙氣)의 차이가 있다. 각성은 지평상(地平上)이 34분이 되고, 높이가 45도이니 다만 5초가 있다고 정하였다.그러나 지금 추측에는 지평상이 겨우 32분이며, 높이가 45도요, 오히려 59초가 있다. 일월ㆍ오성의 천(天)에 관한 것을 각성이 ‘평원(平圓)’이라고 정하였으나, 지금 추측에는 타원이 되어 두 끝의 직경이 길고 두 허리의 직경이 짧다고 하였다. 이 세 가지의 경도ㆍ위도가 모두 조금씩 차이가 있으므로 드디어 숭정 후 96년 계묘를 역원으로 삼아서 일전(日躔)ㆍ월리(月離)의 교식을 고쳤다. 영종 갑자년부터 전리 교식(躔離交食)은 갈서니의 법을 따라 하고, 오성은 매각성의 법을 썼다. 《문헌비고》
○ 《금헌휘언(今獻彙言)》에, “동지 후의 나머지 날수로 명년 윤달을 정한다.” 하였는데, 가령 하루가 남으면 내년 1월에 윤달이 있고 이틀이 남으면 2월에 윤달이 있으며, 만약 나머지가 13일이 되면 명년에는 윤달이 없다 한다. 융경(隆慶) 5년 신미 선조 4년 에 동지 후의 나머지 날수가 4일인데 6년 임신에 일관이 2월을 윤달로 하였더니, 학관(學官) 어숙권(魚叔權)이 일찍이 《휘언》을 보았으므로 윤달을 잘못 만들었다고 고집을 세워서 영관상감사(領觀象監事)를 시켜, “다시 추산(推算)하라.” 하였다.그러나 일관이 오히려 자기 소견대로 고집하여 잘못되지 않았다고 힘써 변명하였는데, 그 뒤에 《대통력(大統曆)》을 보니 과연 그해 윤달이 2월에 있었으므로 일관이 죄책을 면하였다. 일관 남응년(南應年)이 말하기를, “《작력식언(作曆式言)》에 동지 후의 나머지 날수로 윤달을 정하면 이 법이 혹 부합하지 않는 곳이 있었으므로 그달 안에 중기(中氣)가 없는 달을 윤달로 하는 것이 바로 역수(曆數)에 합당하다.”고 말하였으니,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월정만록(月汀漫錄)》
○ 현종(顯宗) 기유년 강희(康熙) 8년 에 예부(禮部)에서 흠천감에 통첩하기를, “이미 반포한 역일(曆日)을 다시 계산해 보니 윤달이 8년 12월에 들 것이 아니라 9년 정월에 들 것이다. 법에 의하여 본월(本月)의 일월ㆍ오성을 추산하라.” 하였다.
○ 보(補): 고(故) 정승 최석정(崔錫鼎)이 성력(星曆)을 알았으므로 일찍이 관상감 교수(敎授)를 겸한 일이 있었다. 《일득록(日得錄)》

 

우리나라에서 별호(別號)가 중첩으로 나오는 경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서계(西溪) 양홍주(梁弘澍), 정세호(鄭世虎), 남주(南趎), 박세당(朴世堂), 김담수(金聃壽), 이덕윤(李德胤).
졸암(拙菴) 이충작(李忠綽), 이직언(李直彦).
동계(桐溪) 정온(鄭蘊), 이흘(李屹), 권달수(權達手).
송암(松菴) 권항(權伉), 권징(權徵), 유관(柳灌).
송당(松堂) 조준(趙浚), 권맹손(權孟孫), 박영(朴英), 김광재(金光載).
노봉(老峯) 김극기(金克己), 민정중(閔鼎重).
풍암(楓巖) 권식(權寔), 임복(林復), 문위세(文緯世).
초려(草廬) 고려조(高麗朝)의 김진양(金震陽), 조선조(朝鮮朝)의 이유태(李惟泰).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주박(周博), 남계하(南啓夏), 김수일(金守一), 권덕린(權德麟), 신명인(申命仁).
쌍백당(雙栢堂) 최기(崔沂), 홍중주(洪重疇), 이세화(李世華), 홍순각(洪純慤).
동명(東溟) 황윤중(黃允中), 최기백(崔基銆), 정두경(鄭斗卿), 김세렴(金世濂).
동강(東岡) 조상우(趙相愚), 최후상(崔後相), 김첨경(金添慶), 김우옹(金宇顒), 허요(許窰).
회곡(晦谷) 신유(申愈), 조한영(曺漢英), 남선(南銑), 조광좌(趙光佐).
송정(松亭) 신명화(申命華), 김수(金洙).
묵재(默齋) 김관(金瓘), 김홍익(金弘翼), 홍언필(洪彦弼), 최유해(崔有海), 이심원(李深源), 심안세(沈安世).
송강(松江) 조징(趙澄), 정철(鄭澈), 조사수(趙士秀).
현주(玄洲) 조찬한(趙纘漢), 이명한(李明漢).
성재(誠齋) 권고(權皐), 민이승(閔以升), 유탁(柳濯), 박은(朴誾), 오억령(吳億齡).
만취당(晩翠堂) 김맹권(金孟權), 권율(權慄), 김위(金偉).
잠곡(潛谷) 김의정(金義貞), 김육(金堉).
옥봉(玉峯) 이원(李媛), 백광훈(白光勳).
서하(西河) 고려조의 임춘(林椿), 조선조의 이민서(李敏敍).
행촌(杏村) 고려조의 이암(李喦), 조선조의 민순(閔純).
저촌(樗村) 심육(沈錥), 이정섭(李廷燮).
쌍계(雙溪) 송응상(宋應祥), 이복원(李福源), 김뉴(金紐).
운곡(雲谷) 송한필(宋翰弼), 이광좌(李光佐), 이택(李澤), 최계훈(崔繼勳), 최수(崔授), 남노성(南老星).
사우당(四友堂) 송국택(宋國澤), 한명회(韓明澮).
석탄(石灘) 고려조의 이양중(李養中)과 이존오(李存吾), 조선조의 한효중(韓孝仲)과 이신의(李愼儀).
간이(簡易) 한숙(韓淑), 최립(崔岦).
현석(玄石) 한인급(韓仁及), 박세채(朴世采).
석봉(石峯) 한수(韓脩), 한호(韓濩).
퇴우당(退憂堂) 김수흥(金壽興), 박승종(朴承宗).
백석(白石) 남탁(南晫), 허직(許稷), 박태유(朴泰維).
규봉(圭峯) 심연(沈演), 심봉의(沈鳳儀).
양촌(陽村) 고려조의 권근(權近), 조선조의 정재희(鄭載禧)와 이겸지(李謙之).
눌재(訥齋) 박증영(朴增榮), 이태연(李泰淵), 이예(李芮), 이충건(李忠楗), 양성지(梁誠之), 박상(朴祥), 김찬(金瓚).
봉암(鳳巖) 한홍조(韓弘祚), 한몽린(韓夢麟).
도곡(陶谷) 한술(韓述), 이필중(李必重), 이양원(李養源).
약봉(藥峯) 이탁(李鐸), 심단(沈檀), 서성(徐渻), 김극일(金克一).
보만재(保晩齋) 한명상(韓命相), 이육(李堉), 서명응(徐命膺).
동고(東皐) 강신(姜紳), 김노(金魯), 이명(李蓂), 이준경(李浚慶), 성준득(成準得), 이수록(李綏祿), 박이서(朴彝敍).
성암(省菴) 박필전(朴弼傳), 송준(宋駿), 김효원(金孝元), 성호(成浩), 조명국(趙鳴國), 이지번(李之蕃).
송파(松坡) 조휘(趙徽), 이덕민(李德敏), 남응침(南應琛), 남세주(南世周), 서문상(徐文尙), 최성지(崔誠之), 이해창(李海昌).
둔촌(遁村) 고려조의 이집(李集), 조선조의 조문형(趙文衡).
약천(藥泉) 조계원(趙啓遠), 남구만(南九萬).
치암(恥菴) 고려조의 박충좌(朴忠佐), 조선조의 송질(宋鑕), 구사민(具思閔), 한세양(韓世讓), 이지렴(李之濂).
농암(聾巖) 심지명(沈之溟), 이현보(李賢輔).
만사(晩沙) 심우승(沈友勝), 서경우(徐景雨), 심지원(沈之源).
일재(一齋) 민회현(閔懷賢), 권한공(權漢功), 이항(李恒).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성담중(成聃仲).
사암(思菴) 박순(朴淳), 성세장(成世章).
추담(秋潭) 성만징(成晩徵), 오달제(吳達濟), 김우급(金友伋).
어은(漁隱) 오국헌(吳國獻), 민제(閔霽), 허회(許淮).
설정(雪汀) 이흘(李忔), 조문수(曺文秀).
설봉(雪峯) 박찬(朴燦), 강백년(姜栢年), 허홍(許烘), 윤수(尹燧).
죽계(竹溪) 안순(安純), 문관(文瓘), 최경장(崔慶長).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안처순(安處順).
약포(藥圃) 이희수(李喜壽), 안숙(安璹).
초당(草堂) 강경서(姜景敍), 구면(具), 허엽(許曄).
양파(陽坡) 홍언박(洪彦博), 정태화(鄭太和).
고은(皐隱) 안지(安止), 이규보(李圭輔).
석문(石門) 이경직(李景稷), 임규(任奎), 오이익(吳以翼), 윤봉오(尹鳳五).
동리(東里) 윤옥(尹玉), 정세규(鄭世規).
화곡(華谷) 정종명(鄭宗溟), 이경억(李慶億).
구천(龜川) 어효첨(魚孝瞻), 이세필(李世弼).
백곡(栢谷) 정곤수(鄭崑壽), 김득신(金得臣).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 유희령(柳希齡), 최철견(崔鐵堅).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 손처눌(孫處訥).
매계(梅溪) 목서흠(睦敍欽), 문근(文瑾).
율곡(栗谷) 이이(李珥), 조명욱(曺明勗).
옥산(玉山) 이우(李瑀), 이석(李晳).
남곡(南谷) 이후(李垕), 조정서(趙正緖).
창해(滄海) 이사호(李士浩), 허격(許格).


 

 

 
해동역사 제1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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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력지(星曆志)
역(曆)

○ 백제(百濟)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을 이해한다. 송(宋)나라 《원가력(元嘉曆)》을 채용하여 인월(寅月)로 세수(歲首)를 삼는다. 《후주서》
살펴보건대, 《갑자회기(甲子會紀)》를 보면, 송 문제(文帝) 원가(元嘉) 22년(445) 을유 정월(正月) 초하루에 비로소 하승천(何承天)이 찬한 《원가신력(元嘉新曆)》을 시행하면서 여러 나라에 반포하였다. 원가 을유년은 바로 백제 비유왕(毗有王) 19년이다.
○ 당(唐) 고조(高祖) 무덕(武德) 7년(624) 2월 정미에 고구려 왕 고건무(高建武)가 사신을 보내어 역서(曆書)를 반포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자치통감》
살펴보건대, 《당서》를 보면, 당 고조 무덕 2년(619) 기유에 도사 전인균(傳仁均)이 《무인력(戊寅曆)》을 올리고 고종(高宗) 인덕(麟德) 2년(665) 을축에 비로소 이순풍(李淳風)이 찬한 《인덕력(麟德曆)》을 반포하여 시행하였으니, 7년에 반포한 것은 《무인력》이다. 무덕 7년 갑신은 바로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7년이다.
또 살펴보건대,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신라는 국초부터 역(曆)을 사용하였으나, 그 법은 전하지 않는다. 문무왕(文武王) 14년(674) 정월에 이르러서 새 역을 채용하였는데, 이때 대나마(大奈麻) 덕복(德福)이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면서 역술(曆術)을 배워 돌아와 드디어 그 법을 채용한 것이다. 문무왕 14년은 바로 당 고종(高宗) 상원(上元) 1년 갑술이며, 이순풍(李淳風)이 《인덕력》을 찬한 것은 이보다 9년 전으로, 당나라에서는 이미 이 《인덕력》을 반포하여 시행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덕복(德福)이 전한 것은 바로 이 《인덕력》의 역법이다.
○ 송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9년(1016, 현종7)에 고려의 사신 곽원(郭元)이 돌아갔다. 고려 왕에게 역일(曆日)을 하사하였다. 《송사》
살펴보건대, 《원사(元史)》 역상지(曆象志)를 보면, 송 진종 함평(咸平) 4년(1001, 목종4) 신축에 사서(史序)가 《의천력(儀天曆)》을 만들어 반포하여 시행하였다. 그러니 곽원이 전한 것은 마땅히 이 《의천력》이다. 또 《고려사》를 보면, 현종 13년(1022) 4월 병자에 한조(韓祚)가 송나라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건흥력(乾興曆)》을 하사하였다.
○ 고려 왕은 납일(臘日)을 대송(大宋)의 역법에 의거하여 술일(戌日)로 쓴다. 또 충렬왕(忠烈王) 때에는 일찍이 봄가을 중월(仲月)의 원술일(遠戌日)사일(社日)로 삼았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 송 원풍(元豐) 원년(1078, 문종32) 12월에 사천감(司天監)에 조서를 내려 요(遼)나라 및 고려ㆍ일본국의 역법이 《봉원력(奉元曆)》과 같고 다름을 상고하게 하였다. 고려의 무오년 삭(朔)은 봉원력과 합치되었으나 절기(節氣)에는 같지 않은 점이 있었다. 무오년은 요(遼) 태강(太康) 4년이다. 《요사》
살펴보건대, 《봉원력(奉元曆)》은 신종(神宗) 희령(煕寧) 7년(1074, 문종28) 갑인에 위박(衞朴)이 만든 것이다. 그리고 요 태강 4년은 바로 송 원풍(元豐) 원년이며, 고려 문종 32년이다.
○ 고려에서 기록한 《대요고금록(大遼古今錄)》에는, “통화(統和) 12년(994, 성종13)에 비로소 역법을 고치고 정삭(正朔)을 반포하였다.” 하였다. 《상동》
살펴보건대, 《요사》 본기에, “통화 12년에 가한주 자사(可汗州刺史) 가준(賈俊)이 새 역법을 올렸으니, 바로 《대명력(大明曆)》이다.” 하였다.
○ 고려에서 올린 《대요사적(大遼事蹟)》에는 제왕(諸王)들의 책문(册文)이 실려 있으며, 자못 월삭(月朔)이 보이기에 인하여 첨부하여 기록하는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종(聖宗) 통화(統和) 13년(995, 성종14) 11월 초하루 고려 계묘
태평(太平) 3년(1023, 현종14) 정월 초하루 고려 병인
흥종(興宗) 중희(重煕) 12년(1043, 정종9) 8월 초하루 고려 을미
18년(1049, 문종3) 정월 초하루 고려 갑오
도종(道宗) 청녕(淸寧) 3년(1057, 문종11) 정월 초하루 고려 무인
함옹(咸雍) 원년(1065, 문종19) 정월 초하루 고려 신유
태강(太康) 10년(1084, 선종1) 정월 초하루 고려 신축
태안(太安) 원년(1085, 선종2) 11월 초하루 고려 신묘
천조(天祚) 건통(乾統) 8년(1108, 예종3) 3월 초하루 고려 신해
태종(太宗) 회동(會同) 10년(947, 정종2) 7월 고려 윤(閏)
성종(聖宗) 통화(統和) 9년(991, 성종10) 2월 고려 윤
11년(993, 성종12) 10월 고려 윤
태평(太平) 11년(1031, 현종22) 9월 고려 윤
흥종(興宗) 중희(重煕) 8년(1039, 정종5) 12월 고려 윤
17년(1048, 문종2) 정월 고려 윤
19년(1050, 문종4) 11월 고려 윤
태안(太安) 4년(1088, 선종5) 12월 고려 윤 《상동》

○ 금(金) 천회(天會) 살펴보건대, 희종(煕宗)이 즉위하고 개원(改元)하지 않았다. 14년(1136, 인종14) 정월 계유에 고려에 역서(曆書)를 반포하였다. 《금사》
살펴보건대, 《금사》 역상지(曆象志)를 보면, “천회 5년 정미에 사천(司天) 양급(楊級)이 비로소 《대명력(大明曆)》을 만들어 15년 정월 삭에 비로소 반포하여 시행하였다.”고 하였으니, 14년에 고려에 반포한 것은 바로 이 《대명력》이다.
○ 고려국에는 《구집력(九執曆)》이 있다. 그 법은 하늘은 왼쪽으로 돌고, 해와 달 역시 왼쪽으로 돈다. 하루의 밤과 낮은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 해가 3백 65도 4분의 1을 운행하면 하늘이 도는 것에 비해 한 바퀴가 적은데, 날마다 하늘의 운행에 미치지 못하는 바를 28수(宿)로써 계산하여 도수를 잰다. 대개 28수는 바로 경성(經星)으로 하늘에 붙어서 운행해 움직이지 않으므로 이를 기준으로 하여 도수(度數)를 잴 수가 있다. 그리고 땅의 거리를 잴 수가 있다고 하는데, 만약에 천리의 주군(州郡)에 정해진 장소가 있어서 사람들이 모두 그곳을 알고 있을 경우, 이곳을 가지고 기준점으로 삼아서 거리를 재는 것이다. 《유환기문(游宦記聞)》
살펴보건대, 《구집력(九執曆)》은 혹 《궤집력(几執曆)》으로도 되어 있다. 본디 서역(西域)에서 나온 것으로, 당나라 개원(開元) 6년(718, 성덕왕17)에 태사감(太史監) 구담실달(瞿曇悉達)에게 명하여 번역하게 하였다. 《명사(明史)》에서는 그 법이 아주 소략하다고 하여 배척하였으며, 어느 때 고려로 흘러 들어와 전해졌는지 모르겠다. 또 《고려사》 세가(世家)를 보면, “문종(文宗) 6년에 태사(太史) 김성택(金成澤)에게는 《십정력(十精曆)》을 찬하고, 이인현(李仁顯)에게는 《칠요력(七曜曆)》을 찬하고, 한위행(韓爲行)에게는 《견행력(見行曆)》을 찬하고, 양원호(梁元虎)에게는 《둔갑력(遁甲曆)》을 찬하고, 김정(金正)에게는 《태일력(太一曆)》을 찬하라고 명하였다.” 하였는데, 비록 그 법에 대해서는 상세히 모르지만, 아마도 지금의 《천세력(千歲曆)》이나 《칠정력(七政曆)》의 유와 같은 것인 듯하다.
○ 원(元) 세조(世祖) 중통(中統) 3년(1262, 원종3) 정월 경오에 고려국에 역일(曆日)을 하사하였다. 10월에 또 조서를 내려서 중통 4년의 역일을 하사하였다. ○ 4년 11월에 중통 5년의 역일을 하사하였다. ○ 지원(至元) 원년(1264, 원종5) 11월 을축에 지원 2년의 역일을 국왕에게 하사하였다. ○ 2년 12월 정축에 조서를 내려서 지원 3년의 역일을 하사하였다. ○ 3년 12월에 조서를 내려서 지원 4년의 역일을 하사하였다. ○ 5년 정월 경술에 새 역일을 하사하였다. ○ 6년 정월에 고려 사신에게 역일을 하사하였다. ○ 7년 윤11월 초하루 정묘에 세자 왕심(王愖)이 돌아갔다. 고려의 왕에게 지원 8년의 역일을 하사하였다. ○ 8년 동 10월 기미에 지원 9년의 역일을 하사하였다. ○ 9년 11월 초하루 을축에 지원 10년의 역일을 하사하였다. ○ 13년 12월에 지원 14년의 역일을 하사하였다. ○ 14년 12월에 지원 15년의 역일을 하사하였다. ○ 15년 12월에 지원 16년의 역일을 하사하였다. ○ 16년 10월 갑진에 지원 17년의 역일을 하사하였다. 《이상 모두 원사》
살펴보건대, 《원사》를 보면, “지원 4년에 서역(西域) 사람 찰마로정(札麻魯丁)이 《만년력(萬年曆)》을 올렸다.”고 하였으니, 5년에 하사한 새 역법은 이 《만년력》이다. 또 《고려사》 세가를 보면, “충렬왕 7년 정월 초하루 무술에 원나라에서 왕통(王通) 등을 파견하여 새로 만들어진 《수시력(授時曆)》을 반포하였는데, 이는 바로 허형(許衡)ㆍ곽수경(郭守敬) 등이 찬한 것이다.”고 하였다. 고려에서는 태조 때부터 당나라 서앙(徐昻)의 《선명력(宣明曆)》을 받아 사용하였으며, 이때에 이르러서 《수시력》을 반포하였으나, 오히려 사용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충선왕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 법을 전해 받아 시행하였다. 또 《일본기(日本紀)》를 보면 “청화천황(淸和天皇) 때 발해국 사람 마효신(馬孝愼)이 와서 선명력을 바치자 반포하여 시행하였다.”고 하였으니, 《선명력》은 발해와 고려에서 같이 사용하면서 고치지 않은 것이다.
○ 명 태조(太祖) 홍무(洪武) 초에 고려 왕 왕전(王顓)에게 《대통력(大統曆)》 1본을 하사하였다. 《엄주별집(弇州別集)》
살펴보건대, 《명사(明史)》를 보면, 태조(太祖)가 오왕(吳王)이 되어 3년(1367, 공민왕16) 정미에 《무신력(戊申曆)》을 반포하였고, 홍무(洪武) 17년(1384, 우왕10) 갑자에 이르러서 누각박사(漏刻博士) 원통(元統)이 《대통력(大統曆)》을 만들었는데, 홍무 갑자년으로 역원(曆元)을 삼았으며, 비로소 천하에 반포하여 시행하였다. 그리고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를 보면, 공민왕(恭愍王) 19년 5월에 황제가 설사(偰斯)를 파견하여 《대통력(大統曆)》 1본을 하사하였으며, 또 성준득(成准得)이 귀국할 때 조서를 내려서 홍무 3년 《대통력》을 하사하였다. 공민왕 19년은 바로 홍무 3년 경술이니, 설사가 반포한 것은 바로 《무신력(戊申曆)》이지 원통(元統)이 찬한 《대통력》이 아니다.
《고려사》에는, “정인지(鄭麟趾)는 이르기를, ‘고려는 따로 역(曆)을 만들지 않고 당나라의 《선명력(宣明曆)》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썼는데, 장경(長慶) 임인년부터 고려 태조가 개국(開國)할 때까지는 거의 1백 년이 지났으므로, 역술(曆術)에 있어서 이미 차이가 났다. 이보다 앞서 당나라에서는 이미 역을 고쳤고, 이때부터 모두 22번을 고쳐 썼는데도 고려에서는 오히려 《선명력》을 그대로 써 온 것이다. 그러다가 충선왕(忠宣王) 때에 이르러서 원나라에서 《수시력(授時曆)》을 받아 고쳐서 썼다. 그러나 개방(開方)에 대한 역술(曆術)이 전해지지 않았으므로 교식(交食)에 대한 일절(一節)은 오히려 옛 《선명력》의 방법을 그대로 따랐다. 이에 일식(日食)ㆍ월식(月食)의 시각이 하늘에서 일어나는 실제와 맞지 않았으나, 고려가 끝날 때까지 고칠 수가 없었다.’ 하였다.” 하였다.
○ 명나라에서 역서(曆書)를 반포하는 규례는, 유구(琉球)ㆍ점성(占城) 등 외국(外國)과 같은 경우에는 정통(正統) 연간 이전에는 모두 조공(朝貢)하는 것을 인하여 매번 돌아갈 때 왕력(王曆) 1본과 민력(民曆) 10본씩을 주었다. 지금 일정하게 항상 주는 나라는 오로지 조선국(朝鮮國)뿐으로, 왕력 1본과 민력 1백 본을 준다. 《대명회전(大明會典)》
○ 성조(成祖) 영락(永樂) 원년(1403, 태종3) 11월 초하루 을해에 조선국에 《대통력(大統曆)》을 반포하는 것을 법령으로 정하였다. 《명사》
살펴보건대, 고려 때 최성지(崔誠之)가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나라로 들어가 수시력법(授時曆法)을 구해 돌아와 추보(推步)하여 준용(遵用)하였다. 그러나 일월(日月)의 교식(交食)과 오성(五星)의 행도(行道)에 대해서는 아직도 곽수경(郭守敬)의 산술법(算術法)을 몰랐다. 조선이 개국하여서도 홍무(洪武)의 정삭(正朔)을 받아 《대통력(大統曆)》을 준용하였으나, 역법(曆法)에 있어서는 《수시력》을 그대로 썼다. 세종 15년(1433) 계축에 정인지(鄭麟趾)ㆍ정초(鄭招)ㆍ정흠지(鄭欽之) 등에게 명하여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찬하게 하였다. 명나라의 《대통통궤(大統通軌)》를 취해 약간의 오류를 수정한 다음 합하여 내편(內篇)을 만들고, 이어 《수시력(授時曆)》의 지원(至元) 18년 신사(辛巳)를 역원(曆元)으로 삼았으며, 또 회회력법(回回曆法)을 구해 이순지(李純之)ㆍ김담(金淡) 등에게 교정하여 외편(外篇)을 만들게 하였는데, 윤월(閏月)은 쓰지 않았다. 인조 22년(1644) 갑신에 관상감제조 김육(金堉)이 서양 사람 탕약망(湯若望)의 《시헌력(時憲曆)》을 쓰기를 청하였다. 효종 4년 계사에 이르러서 비로소 시헌력법을 시행하였으나, 오성(五星)의 산법(算法)에 대해서는 오히려 알아오지 못하였다. 숙종 34년(1708) 무자에 추산관(推算官) 허원(許遠)을 파견해 연경(燕京)으로 들여보내 흠천감(欽天監)에서 칠정표(七政表)를 사 가지고 오게 하여 비로소 《시헌력》의 오성법(五星法)을 썼다. 영종(英宗) 원년(1724) 갑진에 새로 수찬한 《시헌칠정법(時憲七政法)》을 썼는데, 일월(日月)의 교식(交食)에 대해서는 서양 사람 갈서니(噶西尼)의 법을 쓰고, 오성(五星)에 있어서는 매각성(梅殼成)의 법을 그대로 썼다. 대개 숭정(崇禎) 초기부터 비로소 《시헌력》을 써서 중국에 시행되어 지금까지 이를 준용해 오고 있는데, 그 법이 아주 정밀하다.

[주D-001]원가력(元嘉曆) : 남북조 시대 때 하승천(何承天)이 만든 역법(曆法)으로, 445년부터 509년 사이에 송(宋)나라에서 이를 채용하였다. 그동안에 문헌상으로는 백제에서 이 역(曆)을 사용한 것은 알려져 왔었는데, 그것이 실제로 증명된 것은 1972년 7월로, 그해에 공주(公州)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 출토된 지석(誌石)에 6세기 초의 연월일(年月日)과 간지(干支)가 나타나고, 그것이 《원가력(元嘉曆)》과 맞았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478쪽 주》
[주D-002]고건무(高建武) : 고구려 제27대 왕인 영류왕(榮留王)의 이름이다. 고건성(高建成)으로도 표기한다.
[주D-003]원술일(遠戌日) : 해당되는 달의 일진(日辰) 가운데서 가장 늦게 든 술일(戌日)을 말한다.
[주D-004]사일(社日) : 풍년을 기원하기 위하여 토신(土神)에게 제사 지내는 제삿날을 말한다.
[주D-005]정삭(正朔) : 정(正)은 연시(年始), 삭(朔)은 월초(月初)를 말한다. 정삭은 제왕이 새로 반포한 역법을 말하는데, 옛날에 나라를 새로 세운 왕은 반드시 정삭을 고쳤다. 그 통치권이 행하여지는 곳에서는 반드시 그 역법을 썼다.
[주D-006]경성(經星) : 항성(恒星)을 말한다.
[주D-007]찰마로정(札麻魯丁) : 페르시아 사람인 djemal uddin의 음역(音譯)이다. 천문 역법에 대한 기술이 있어서 원 세조 때 원나라의 관원이 되었다. 찰마라정(札麻刺丁)으로도 표기한다.
[주D-008]개방(開方) : 평방근(平方根)이나 입방근(立方根), 즉 세제곱근이나 제곱근을 산출하는 공식을 말한다.
[주D-009]교식(交食) : 일식과 월식을 일컫는 말로, 황도(黃道)와 백도(白道)의 교차점에서 일식과 월식이 생기기 때문에 교식이라고 한다.
[주D-010]점성(占城) : 안남(安南)의 남쪽에 있던 참(Cham)족의 나라인 참파(Champa)를 말한다. 2세기 말엽에 건국하여 17세기 중엽에 멸망하여 청나라에 예속되었다.
[주D-011]회회력법(回回曆法) : 현재에도 쓰이고 있는 유일한 순태음력(純太陰曆)으로, 회교력(回敎曆)ㆍ이슬람역ㆍ마호메트역 등으로 불린다. 이 《회회력》은 원나라와 명나라 시대에 중국으로 들어와 많은 영향을 끼치고, 다시 우리나라에 들어와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의 모체가 되었다.
[주D-012]매각성(梅殼成) : 청나라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가학(家學)을 이어 천문(天文)과 산법(算法)에 밝았다. 《역산총서(曆算叢書)》 등의 책이 있다.

 

가정집 제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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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序)
최 시승(崔寺丞)이 등제(登第)한 것을 축하한 시의 서문


인재를 뽑는 제도가 시행된 지 오래되었다. 그 과목을 늘리고 줄인 것은 시대에 따라 같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인재를 빈객으로 예우하고 작록을 수여하면서 문호(文虎 문신과 무신)로 임용한 것은 일찍이 다른 적이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당초에는 육예(六藝)가 삼물(三物)의 하나를 차지하면서 사(射)와 어(御)도 그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인데, 후세에 와서 호예(虎藝 무예)의 과가 별도로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문호의 경로를 통하지 않고 들어와서 벼슬하는 자들을 이(吏)라고 하였으니, 이는 대개 고대에 도필(刀筆 문서 기록)의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벼슬하는 길이 마침내 셋으로 나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각 시대마다 숭상하는 풍조에 따라서 경중의 차이가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당(唐)나라 진신(搢紳)의 경우에는 인신(人臣)으로서 최고의 지위에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진사과(進士科)의 고시를 거치지 않은 자들은 그다지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송(宋)나라의 전성기에 이르러서는 이 과거 출신자들을 특히 더 중시하였다.
본국은 당나라와 송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대대로 문사(文士)를 존중해 왔다. 그리하여 시종(侍從)과 헌체(獻替)의 관직이나 선거(選擧)와 전사(銓仕)의 직책 등은 실제로 문사들이 모두 독점하였고, 호반(虎班)이나 이속(吏屬) 등은 감히 이 자리를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은 성스러운 원나라가 문치를 숭상하여 과거에 대한 조칙을 거듭 내리고 있는 때인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래서 글공부를 하는 선비들이 있는 힘을 모두 발휘하고 용맹심을 한껏 과시하며 서로 다투어 기예를 다투는 시험장에 나아가 실력을 겨루려 하고 있는 것이다.
지원(至元) 6년(1340, 충혜왕 복위 1) 겨울에 삼사사(三司使) 김공(金公 김영돈(金永旽))과 전법 판서(典法判書) 안공(安公 안축(安軸))이 춘관(春官 예조(禮曹))에서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이때 춘헌(春軒 최문도(崔文度)) 최공(崔公)의 아들 예경(禮卿 최사검(崔思儉))이 그 시험에 급제하였다. 최공은 손님을 좋아하기로 동방에서 제일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축하하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어깨가 서로 부딪칠 정도였다.
내가 춘헌에게 나아가 축하한 다음에 물러 나와 예경에게 말하기를,
“과거에 등제하려고 하는 것은 벼슬길에 오르려고 해서이다. 본국의 옛날 제도를 보건대, 관직이 일단 6품에 이른 자는 더 이상 유사에게 나아가서 시험을 보지 못하게 했다. 그대는 일찍이 낭장(郞將)을 거쳐 감찰 규정(監察糾正)을 겸임하였고 전객시 승(典客寺丞)에 전임되었으며, 나이도 한창 장년(壯年)으로서 날로 발전해 마지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근래의 규례를 원용하여 백의의 무리와 함께 과거 시험장에서 붓과 종이를 희롱하였다. 그대는 장차 녹명(鹿鳴)의 노래를 부르고는 계해(計偕 연경(燕京)의 회시(會試) 응시생들)와 함께 천자의 뜰에 나아가서 대책을 묻는 시험 문제를 쏘아 맞히려고 하는 것인가? 그대는 장차 헌체하여 우리 임금의 허물을 보완하고 아름다운 점을 받들어 따르려고 하는 것인가? 그대는 장차 전선(銓選 인사 행정)에 참여하여 사류(士流)를 품평하면서, 혹 꾸짖고도 벼슬을 주고 혹 웃고도 주지 않는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호부(虎夫)가 호기를 부리며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괴롭게 여기고, 이원(吏員)이 정신없이 경쟁하며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 징계된 나머지, 우리 유자(儒者)의 오활한 점에 몸을 기대고서 사림(詞林)이나 취향(醉鄕)으로 달아나 스스로 숨으려고 하는 것인가?”
하니, 예경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임금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기는 것에 대해서는 원래 가훈이 있다. 하지만 부귀와 이달(利達) 같은 것은 구하는 데에 방법이 있고 얻는 데에 명이 있는 것이니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 집안은 예부공(禮部公) 휘 균(均) 이하로부터 서로 잇따라 5대에 걸쳐서 등제하였다. 그리고 예부공의 아들인 문정공(文定公) 휘 보순(甫淳)은 충헌왕(忠憲王 고종(高宗))의 명상(名相)으로서 네 차례나 예위(禮圍 과거 시험)를 관장하였고, 조부 문간공(文簡公 최성지(崔誠之))은 또 덕릉(德陵 충선왕(忠宣王))의 재상으로서 문형(文衡)을 주관하였다. 그러다가 존공(尊公 부친) 때에 와서는 어려서 국자제(國子弟 왕세자와 공경대부의 자제)를 따라 천조(天朝)에서 숙위(宿衛)하였기 때문에 과거 공부를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일찍이 조모 김씨(金氏)가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이르시기를 ‘네가 과거에 급제하여 가업을 회복하는 것을 본다면 여한이 없겠다.’라고 하신 것이다. 자애로운 그 모습은 지금 뵐 수 없게 되었어도 그때 해 주신 말씀은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구구하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하였다.
내가 이 말을 듣고는 의롭게 여겨지기에 술잔을 들어 권하면서 말하기를,
군자의 가르침을 보면, 옛날로 회귀하여 시조를 추모하게 하였으니, 이는 대개 자기가 태어난 근원을 잊지 않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더군다나 부지런히 배우기를 좋아하면서 기필코 가업을 이으려고 하는 자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뒷날에 입신양명할 것을 이를 통해서 알 수가 있겠다. 사람들은 거자가 올해 주사(主司)를 제대로 만났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주사가 올해 거자를 제대로 얻었다고 여겨지는데, 이는 예경을 보면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가 있다.”
하였더니, 객들도 모두 그렇다고 하고는 각자 시를 짓고 나서 나의 말을 시권(詩卷)의 첫머리에 적어 넣게 하였다.


 

[주D-001]인재를 빈객으로 예우하고 : 주(周)나라 때에 향대부(鄕大夫)가 소학(小學)에서 현능(賢能)한 인재를 천거할 적에 그들을 향음주례(鄕飮酒禮)에서 빈객으로 예우하며 국학(國學)에 올려 보낸 것을 말한다. 《주례(周禮)》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에 “향학(鄕學)의 삼물 즉 세 종류의 교법(敎法)을 가지고 만민을 교화한다. 그리고 인재가 있으면 빈객의 예로 우대하면서 천거하여 국학에 올려 보낸다. 첫째 교법은 육덕이니 지ㆍ인ㆍ성ㆍ의ㆍ충ㆍ화요, 둘째 교법은 육행이니 효ㆍ우ㆍ목ㆍ연ㆍ임ㆍ휼이요, 셋째 교법은 육예이니 예ㆍ악ㆍ사ㆍ어ㆍ서ㆍ수이다.〔以鄕三物敎萬民而賓興之 一曰六德 知仁聖義忠和 二曰六行 孝友睦婣任恤 三曰六藝 禮樂射御書數〕”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진사과(進士科) : 조선 시대의 문과(文科)와 유사한 형태의 과거 제도이다. 참고로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 전집(前集) 권26 사진부(仕進部) 중진사과(重進士科)에 “진사과는 수나라 대업(大業) 연간에 시작되어, 당나라 정관ㆍ영휘 연간에 전성기를 맞았다. 인신(人臣)으로서 최고의 지위에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진사과의 고시를 거치지 않은 자는 그다지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람들이 급제자들을 추중하여 백의 경상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백의의 신분에서 경상의 지위에 나아갈 수 있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었다.〔進士科始隋大中 盛貞觀永徽之際 縉紳雖位極人臣 不由進士者 不以爲美 其推重謂之白衣卿相 以白衣之士卽卿相之資也〕”라는 말이 나오는데, 가정이 본문에서 이 글의 일부분을 그대로 인용해서 쓰고 있다.
[주D-003]헌체(獻替) : 행해야 할 일을 진헌(進獻)하고 행해서는 안 되는 일을 폐지하도록 임금에게 건의한다는 헌가체부(獻可替否)의 준말로, 중대한 국사를 조정에서 의논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4]녹명(鹿鳴) :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본래는 임금이 신하를 위해 연회를 베풀며 연주하던 악가(樂歌)인데, 후대에는 군현의 장리(長吏)가 향시에 급제한 거인(擧人)들을 초치하여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베풀어 주며 그들의 전도를 축복하는 뜻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
[주D-005]임금의 …… 것인가 : 《효경(孝經)》 사군(事君)에 “군자가 임금을 섬김에,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나서는 허물을 보완할 것을 생각하여, 임금의 아름다운 점은 받들어 따르고 임금의 잘못된 점은 바로잡아 구제한다.〔君子之事上也 進思盡忠 退思補過 將順其美 匡救其惡〕”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06]구하는 …… 것이니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구하는 데에 방법이 있고 얻는 데에 명이 있는데도, 이런 것을 구하려 든다면 꼭 얻는다고 할 수가 없으니, 이것은 구하는 대상이 나 자신의 밖에 있기 때문이다.〔求之有道 得之有命 是求無益於得也 求在外者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7]군자의 …… 것이다 : 제사를 지내는 목적에 대해서 말한 《예기》 제의(祭義)의 내용을 풀어서 인용한 것이다.

 

 
고려사절요 제2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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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숙왕(忠肅王)
무오 5년, 원 연우 5년

○ 봄 정월에 왕과 공주가 연경궁에서 연회하고 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 위에서 요안도(姚安道)가 지은 〈현종 타구도시(玄宗打毬圖詩)〉를 기억하여, “궁전(宮殿)의 천문(千門)이 대낮에 열렸는데, 삼랑(三郞)이 몹시 취하여 공을 치고 돌아온다. 장구령(張九齡)은 이미 늙고 한휴(韓休)는 죽었으니, 내일은 간쟁(諫諍)하는 상소도 오지 않겠네. [金殿千門白晝開 三郞沈醉打毬回 九齡已老韓休死 明日應無諫疏來]"하고 오랫동안 읊조렸다. 이튿날 권한공ㆍ윤신걸(尹莘傑) 등을 불러 시를 지었는데, 즐거움이 무르익었을 때에 한참 동안 또 〈타구도시(打毬圖詩)〉를 읊었다.
사신(史臣) 장항(張沆)이 말하기를, “왕이 이 시를 두 번씩이나 읊은 것은 무슨 의도였을까. 경계한 의도로 하였다면 황음(荒淫)하기가 현종(玄宗)과 다름이 없었으니, 아아, 재상으로서 함께 연회한 자가 그 시에 나오는 장구령ㆍ한휴의 이름을 듣고 이마에 땀이 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였다.
대제학 최성지(崔誠之)를 원 나라에 보내어 천추절(千秋節)을 축하하게 하였다. ○ 첨의찬성사 김사원(金士元)에게 명하여 온천에서 잡은 짐승으로 태묘(太廟)에 천사(薦祀)하게 하였다. 사선(司膳)ㆍ전의(典儀)는 제사에 나오지 않았고, 규정(糾正)은 뒤에 왔다. 사원이 이 일을 여쭈니 왕이 이르기를, “조상을 제사하는 것은 보본(報本)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몸소 사냥하여서 조상의 제사에 바치는 것인데, 담당관원들이 그러하단 말인가. 내가 깊은 궁중에 있으니 경이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 제사에 환관 박인평(朴仁平)이 그 짐승을 훔쳐 가고 제 집의 말라빠진 고기로 대신하였으나 왕이 알고도 죄주지 못하였다. 인평은 내시들 중에서도 가장 간사하고 교활한 자였다.
○ 최원무(崔元茂)ㆍ윤신걸ㆍ백원항 등을 불러 시를 지어 창화(唱和)하고, 모두 붉은 가죽띠를 하사하였다.
○ 2월 기해일에 지진이 있었다. ○ 태안군(泰安君) 이공보(李公甫)를 원나라에 보내어 성절(聖節)을 축하하게 하였다. ○ 왕의 이름자 쓰는 것을 금지하였다. ○ 박인평(朴仁平)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인평이 측근자들에게 뇌물을 주어서, 쫓겨 귀양가는 것을 모면하니, 식자들이 탄식하였다. ○ 제주(濟州) 백성 사용(使用)과 김성(金成)이 흉악한 무리를 불러모아서 모반하여 성주 왕자(星主王子)를 내쫓았다. 검교평리 송영(宋英)을 보내서 안무(安撫)하게 하였다. 그가 제주에 도착하기 전에 반란군의 무리가 스스로 저희들의 괴수 2명을 참(斬)하고 와서 항복하였다. 곧 영을 목사로 임명하였다. ○ 왕이 흥천사(興天寺)의 들에서 사냥을 하였다.
○ 여름 4월에 왕이 상왕의 명령으로 대호군(大護軍) 장공윤(張公允)과 제주부사(濟州副使) 장윤화(張允和)를 순군옥에 가두었다가, 조금 뒤에 다 귀양보냈다. 대저 탐라(耽羅)에 반란군이 일어난 것은, 이 두 사람이 탐(貪)하고 횡포하였기 때문이다. ○ 주(州)ㆍ군(郡)의 사심관(事審官)를 폐지하니,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권력 있는 토호들이 다시 스스로 〈사심관이〉 되니, 폐해가 전보다 더 심하였다.
○ 5월에 상호군 배정지(裵廷芝)를 보내어 탐라존무사(耽羅存撫使)로 삼았다. ○ 사헌집의 김천일(金千鎰)을 경상ㆍ전라ㆍ충청도에 보내고, 지평 장원조(張元祖)를 서북면(西北面)에 보내어 백성들의 고통을 살피게 하였다. 그때 상왕이 원 나라에 있으면서 모든 나라 일을 멀리서 교지를 전하여 시행하였으므로, 호종(扈從)한 재상 권한공ㆍ최성지ㆍ이광봉(李光逢) 등 4, 5명의 무리가 권력을 휘둘러, 친척과 친구들과 뇌물을 주는 자에게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지 않고 높은 벼슬을 마구 주자, 왕이 자못 불평(不平)스러운 마음을 품었었다. 상왕이 일찍이 채홍철(蔡洪哲)에게 명해서 5도(道)를 순방하고 공부(貢賦)를 재량하여 결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신(新)ㆍ구(舊)의 공부(貢賦)가 균등하지 못한 것이 많아 백성이 괴로워했으며, 또 홍철은 탐욕스러운 성품이어서 사리(私利)를 취하기를 즐겨 백성의 전지를 많이 탈취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왕이 비록 그의 하는 짓을 옳지 않게 여겼지만, 상왕에게 총애를 받으며 또 권한공ㆍ최성지와 사이가 좋으므로 감히 건드리지 못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바로잡고자 하여 천일과 원조를 각 도에 보내고 하교(下敎)하여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건해야만 나라는 편안하다. 근래에 괴로운 일이 많아서 백성은 향토에 편안하게 살지 못하고 고을은 시들어 피폐한데도, 존무(存撫)와 제찰(提察)과 수령들이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사헌부의 신하들을 보내서 백성의 고통을 묻고 상벌(賞罰)을 엄중히 시행하려 한다. 만약 사신이 사욕을 좇고 공정한 마음을 버린다면 역시 감히 용서하지 못하겠다." 하였는데, 천일이 사정을 품고 속여서 규찰하여 적발하는 것이 없었다. 왕이 안뜰에서 곤장을 쳐서 파면시켰다. 원조 또한 재주가 졸렬하여 적발한 것이 없고, 재상 김정미(金廷美)만이 피폐(皮幣)를 불법으로 징수한 사실을 들춰 내었다. 상왕이 이런 사실을 들었지만, 그때 정미는 왕을 호종하였기 때문에 원조만 인월도(引月島)에 귀양보냈다. ○ 제폐사목소(除弊事目所)를 설치하였다.
○ 6월에 중찬치사(中贊致仕) 송분(宋玢)이 졸하였다. ○ 윤신걸을 지밀직사사로, 송영을 동지밀직사사로 임명하였다. 예문검열(藝文檢閱) 안진(安震)이 제과(制科 원 나라의 과거)에 합격하였으므로, 발탁하여 예문응교(藝文應敎)에 임명하였다. 총부직랑(摠部直郞) 권적(權適) 이후로는 안진이 처음으로 제과에 급제하였다.
○ 제폐사목소를 고쳐 찰리변위도감(察理辨違都監)으로 하고, 세력있는 자들이 강점한 전민를 모조리 찾아 내어 그 주인에게 돌려 주니, 중앙과 지방에서 매우 기뻐하였다. 다만 세력있는 자들이 근심하여 상왕에게 호소해서 찰리변위도감을 폐지하게 하였다.
○ 가을 7월에 원 나라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 복안필도적(卜顔必闍赤) 매려(賣驢)를 보내 와서, 위왕(魏王)을 위로해 대접한 일과 탐라(耽羅)의 반란 상황을 힐책(詰責)하여 따져 물었다. ○ 대호군 손기(孫起)를 원 나라에 보내어 모시베를 바치게 하였다. ○ 연경궁에 거둥하는데, 3백 명의 사람들이 수레 앞에서 변위도감(辨違都監)을 다시 둘 것을 호소하였다. 그 청을 좇았다가, 얼마 안 가서 다시 폐지하였다. ○ 강녕군(江寧君) 홍신(洪侁)이 졸하였다.
○ 9월에 왕이 경천사(慶天寺)의 들에서 10일 동안 사냥하고 돌아왔다.
○ 겨울 11월에 왕이 임강(臨江)에서 사냥하였다.
○ 12월에 대사헌 민적(閔頔)을 원 나라에 보내어 신년을 축하하게 하였다. ○ 영왕(營王)과 편비(偏妃)가 왔다. 왕이 교외로 나가 맞이하고, 서교(西郊)에서 사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