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경인년 산행/2010.11.14. 회암사지 칠봉산

회암사지선각왕사비(檜巖寺址禪覺王師碑) 조선왕조실록 등 (스크랩)

아베베1 2010. 11. 14. 22:07

회암사지선각왕사비(檜巖寺址禪覺王師碑)    禪覺王師之碑 (題額)

고려국(高麗國) 왕사(王師)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근수본지(勤脩本智) 중흥조풍(重興祖風) 복국우세(福國祐世) 보제존자(普濟尊者) 시선(諡禪) 각(覺) 탑명(塔銘)과 아울러 서문 전조열대부(前朝列大夫)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좌우사랑중(左右司郞中)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 중대광(重大匡) 한산군(韓山君)예문관사(藝文館事) 겸성균대사성(兼成均大司成 ) 신(臣) 이색(李穡)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상호군(上護軍) 제점(提點) 서운관사(書雲觀事) 신(臣) 권중화(權仲和)는 교지(敎旨)에 따라 단사(丹砂)로 전액(篆額)과 글씨를 쓰다

현릉(玄陵)께서 재위(在位)한 지 20년만인 경술(庚戌) 9월 10일 스님을 개경(開京)으로 영입(迎入)하여, 16일에 스님이 주석하는 광명사(廣明寺)에서 양종(兩宗) 오교(五敎)에 속한 제산(諸山)의 납자(衲子)들이 스스로 얻은 바를 시험하는 공부선(功夫選) 고시장을 열었는데 스님도 나아갔으며, 임금께서도 친히 행차(幸次)하여 지켜 보았다. 스님은 염향(拈香)을 마친 다음 법상(法床)에 올라 앉아 말씀하기를 “금고(古今)의 과구(窠臼)를 타파하고, 범성(凡聖)의 종유(蹤由)를 모두 쓸어버렸다. 납자의 명근(命根)을 베어버리고, 중생의 의망(疑網)을 함께 떨쳐 버렸다. 조종(操縱)하는 힘은 스승의 손아귀에 있고, 변통(變通)하는 수행은 중생의 근기(根機)에 있다. 삼세(三世)의 부처님과 역대(歷代)의 조사(祖師)가 교화 방법은 동일한 것이니, 이 고시장에 모인 모든 스님들은 바라건대 사실대로 질문에 대답하시오”라 하였다. 이에 모두 차례로 들어가 대답하되 긴장된 모습으로 몸을 구부려 떨면서 진땀을 흘렸다.그러나 모든 응시자의 대답은 맞지 아니하였다. 혹자는 리(理)에는 통하였으나 사(事)에는 걸리고, 어떤 이는 중언부언 횡설수설하다가 일구(一句)의 질문에 문득 물러가기도 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본 공민왕의 얼굴 빛이 언짢은 듯이 보였다. 환암혼수선사(幻庵混脩禪師)가 최후에 와서 삼구(三句)삼관(三關)에 대하여 낱낱이 문답하였다.
이 공부선(功夫禪) 고시(考試)가 끝나고 스님은 회암사(檜嵒寺)로 돌아갔다. 신해년(辛亥年) 8월 26일 공부상서(工部尙書)인 장자온(張子溫)을 파견하여 친서(親書)와 직인과 법복과 발우(鉢盂) 등을 보내어 “왕사(王師)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근수본지(勤脩本智) 중흥조풍(重興祖風) 복국우세(福國祐世)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법칭(法稱)과 함께 왕사로 책봉하였다. 이어 송광사(松廣寺)는 동방(東方) 제일의 도량이므로 왕명으로 거주토록 하였다.
임자년(壬子年) 가을에는 지공(指空)스님이 지시한 “삼산양수지간(三山兩水之間)”에서 주석하라는 기별(記莂)이 우연히 생각나서 곧 회암사(檜嵒寺)로 이석(移錫)하려 하였는데, 때마침 왕의 부름을 받아 회암사 법회(法會)에 나아갔다가 여기에 주거(住居)해 달라는 청을 받았다. 스님이 이르기를 “선사(先師)인 지공스님께서 일찍이 이 절을 중창하려고 계획하였는데 병화(兵火)로 불타버렸으니 감히 그 뜻을 계승하지 않겠는가?” 하고, 이에 대중 스님과 협의하여 전당(殿堂)을 확장하여 공사(工事)가 모두 끝나고 병진년(丙辰年) 4월에 크게 낙성법회(落成法會)를 열어 회향하였다. 이 때 대평(臺評)이 유생(儒生)의 입장에서 불교의 왕성(旺盛)함을 시기하여 말하기를 “회암사는 서울과 매우 가까운 거리이므로 청신사(淸信士)와 청신녀(淸信女)들의 오고 감이 계속 이어져 밤낮으로 왕래가 끊이지 않아혹은 지나치게 맹신(盲信)하여 생업(生業)을 폐하는 지경에 이르니 금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교지(敎旨)를 내려 나옹스님을 서울과 멀고 벽지(僻地)인 형원사(瑩原寺)로 이주(移住)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출발을 재촉하여 가던 도중에스님이 마침 발병(發病)하였다. 출발 당시 가마가열반문(涅槃門)을 통과할 때 모든 대중(大衆)이 무슨 이유인지를 의심하면서 실성 통곡하므로, 스님께서 그들을 돌아보시고 말하기를 “노력하고 또 거듭 노력하여 나로 인하여 슬픔에 잠겨 중도에 그만두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가다가 마땅히 여흥(驪興)에서 그칠 뿐이다”라고 하였다. 한강(漢江)에 이르러 호송관(護送官)인 탁첨(卓詹)에게 이르기를 “내 병세가 심하니 뱃길로 가자” 하여 배(주(舟))로 바꾸어 타고 7일간 소류(遡流)하여 여흥에 이르렀다. 이 때 또 탁첨에게 부탁하기를 “몇일만 머물러 병을 조리하고 떠나자”고 하니 탁첨이 그 뜻을 받아들였다. 신륵사(神勒寺)에서 머물고 있는데 5월 15일에 탁첨이 또 출발하기를 독촉하므로 스님께서 이르기를 “그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곧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라 하고, 이 날 진시(辰時)에 조용히 입적(入寂)하였다. 군민(郡民)들이 바라보니 오색(五色) 구름이 산정(山頂) 에 덮여 있었다.

화장(火葬)이 끝나고타다 남은 유골을 씻으려는 순간, 구름 한 점 없는 청천(靑天)에서 사방 수백보(數百步)의 이내에만 비가 내렸다. 사리(舍利)가 155과가 나왔다. 기도하니 558과로 분신(分身)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재 속에서도 얻어 개인이 스스로 비장(秘藏)한 것도 부지기수였으며, 3일 간 신광(神光)이 비추었다. 석달여(釋達如) 스님은 꿈에 화장장 소대(燒臺) 밑에 서려 있는 용을 보았는데, 그 모양이 마치 말(馬)과도 같았다. 상주(喪主)를 태운 배회암사(檜嵒寺)로 돌아오는데, 비가 내리지 않았는 데도 갑자기 물이 불어났으니, 이 모두가 여룡(驪龍)의 도움이라 했다. 8월 15일에 부도(浮圖)를 회암사 북쪽 언덕에 세우고,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 조장(厝藏)하였으니, 열반한 곳임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이 사리를 밑에 모시고 그 위에 석종(石鐘)으로서 덮었으니, 감히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함이다. 스님이 입적한 사실을 조정(朝廷)에 보고하니 시호를 선각(禪覺)이라 추증하고, 신(臣) 색(穡)에게는 비문(碑文)을 짓고 신(臣) 중화(仲和)로 하여금 단사(丹砂)로 비문과 전액(篆額)을 쓰게 하였다.
신(臣)이 삼가 스님의 행적을 살펴보니, 휘는 혜근(惠勤)이고 호는 나옹(懶翁)이며 처음 이름은 원혜(元惠)였다. 세수는 57년을 살았고 법랍은 38하였다. 고향은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寧海)이며, 속성은 아씨(牙氏)이다. 아버지의 휘는 서구(瑞俱)이니 벼슬은 선관령(膳官令)을 지냈다.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니 영산군(靈山郡) 사람이다. 어머니 정씨가 꿈에 금색(金色) 새가 날아와 그의 머리를 쪼다가 오색(五色)이 찬란한 알을 떨어뜨려 가슴으로 들어오는 태몽(胎夢)을 꾸고, 임신하여 연우(延祐) 경신년(庚申年) 1월 15일에 탄생하였다. 나이 겨우 20살 때이웃에 사는 친한 벗이 사망하므로, 슬픔에 잠겨 부로(父老)들에게 묻기를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하니, 모두 말하되 “어느 곳으로 가는지 알 수 없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가슴이 답답하여 슬픔만 더하였다. 그리하여 그 길로 공덕산(功德山) 대승사(大乘寺) 묘적암(妙寂庵)으로 달려가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 몸을 던져 삭발하고 사미계를 받았다. 요연선사가 이르되 “너는 무슨 목적으로 출가(出家)하였는가”라 하니, 대답하기를 “삼계(三界)를 초월하여 생사(生死)를 해탈(解脫)하고, 중생을 이익(利益)케 하고자 함입니다”라 하고 또 스님의 지도를 청하였다. 스님이 말하기를 “네가 여기에 온 정체가 무슨 물건인가”라 하니, 대답하기를 “능히 말하고 능히 듣고 능히 여기까지 찾아온 바로 그 놈입니다. 다만 닦아 나아갈 방법을 알지 못하나이다”라 하였다. 요연(了然)스님이 말씀하되 “나도 너와 같아서 아직 알지 못하니, 다른 명안종사(明眼宗師)를 찾아가서 묻고 배우라”고 하였다.
지정(至正) 갑신년(甲申年)에 회암사로 가서 주야로 홀로 앉아 정진하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이로 말미암아 중국에 가서 선지식을 참방(參訪)하고 유학할 뜻을 굳히고, 출국하여 무자년(戊子年)3월 연도(燕都)에 도착하여 지공(指空)스님을 참방하고 법(法)을 물었는데 서로간의 문답이 계합(契合)하였다. 10년 경인(庚寅) 정월(正月)에 지공스님이 대중을 모아놓고 법어(法語)를 내리니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으나, 혜근(惠勤)이 대중 앞에 나와서 몇 마디의 소견(所見)을 토출(吐出)한 다음, 삼배(三拜)하고 물러나왔다. 지공은 서천(西天)의 백팔대(百八代) 조사(祖師)이다. 그 해 봄에는 남쪽으로 강절(江浙) 지방을 두루 순례하고 8월에는 평산처림(平山處林)을 친견하였더니, 평산(平山)이 묻기를 “나에게 오기 전에 누구를 친견하였는가”라 하니, 대답하되 “서천의 지공스님을 만나 뵈었는데 일용천검(日用千劒)하라 하더이다”라 하였다. 평산이 이르기를 “지공천검(指空千劒)은 그만두고 너의 일검(一劒)을 한 번 보여 보아라”고 하였다. 혜근이 좌구(坐具)로 평산을 덮여 씌워 끌어 당겼다. 평산은 선상(禪床)에 거꾸러져서 “도적이 나를 죽인다”라고 고함을 질렀다. 혜근이 이르되 “나의 이 칼은 능히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또한 능히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라고 하면서 평산을 붙들어 일으켰다. 이 때 평산은 설암(雪嵒)이 전수(傳授)한 급암종신(及庵宗信)의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신물(信物)로 주었다.
신묘년(辛卯年) 봄에는 보타낙가산(寶陁洛迦山)에 이르러 관세음보살상에 예배하고, 임진년(壬辰年)에는 복룡산(伏龍山)에 이르러 천암(千嵒)스님을 친견하였다. 천암은 그 때 마침 일천여명의 납자(衲子)를 모아 놓고 입실(入室) 자격고시(資格考試)를 열고 있었다. 이 때 천암이 혜근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혜근이 대답하니, 천암이 이르기를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기 전에는 어느 곳에서 왔는가?” 하니, 혜근이 이르되 “오늘은 4월 2일입니다”라 하니, 천암이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 해에 북방(北方)으로 돌아가서 연도(燕都) 법원사(法源寺)에 있는 지공스님을 두 번째로 친견하였다. 이 때 지공은 법의와 불자와 범서(梵書)를 신물로 전해 주었다. 이에 다시 연대(燕代)의 산천(山川)을 두루 돌아 보았으니, 소연(蕭然)한 한 한가로운 도인(道人)으로써 그 이름이 원조(元朝)의 궁내(宮內)에까지 들렸다. 을미년(乙未年) 가을에는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명을 받들어 대도(大都)광제사(廣濟寺)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병신년(丙申年) 10월 15일 지공(指空)으로부터 수법(受法)한 기념법회(紀念法會)를 가졌는데, 순제는 원사(院使)를 보내어 축하하였고, 야선첩목아(也先帖木兒)는 금란가사(金襴袈裟)와 폐백(幣帛)을 하사하였으며, 황태자(皇太子)도 금란가사와 상아불자(象牙拂子)를 가지고 와서 선사하였다. 혜근스님이 가사 등의 선물을 받고 대중에게 묻기를 “담연공적(湛然空寂)하여 본래부터 일물(一物)도 없는 것이다. 이 가사의 휘황하고 찬란함이여! 이것이 어디로부터 나왔는가” 하니, 이에 대하여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스님께서 천천히 말씀하시기를 “구중궁(九重宮) 금구중(金口中)에서 나왔느니라” 하고, 곧 가사를 입고 염향(拈香)하고 성복(聖福)을 축원한 다음 법상(法床)에 올라 앉아 주장자(柱杖子)를 가로 잡고 몇 말씀 하고 곧 내려왔다.
무술년(戊戌年) 봄에는 지공스님을 하직하고 기별(記莂)을 받아 귀국길에 올라 동쪽으로 돌아오는 도중 머물기도 하고 계속 오기도 하면서 청중의 근기(根機)에 맞추어 설법해 주었다. 귀국한 후 경자년(庚子年)에는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거주하였다.
신축년(辛丑年) 겨울에는 공민왕이 내첨사(內詹事) 방절(方節)을 보내어 스님을 개경(開京)으로 영입하여 법문을 청해 듣고 만수가사(滿繡袈裟)와 수정불자(水精拂子)를 하사하였고, 공주(公主)는 마노불자(瑪瑙拂子)를 헌납하였으며, 태후(太后)도 직접 찾아와서 포시(布施)를 하였다. 임금께서 신광사(神光寺)에 주지하도록 청하였으나, 스님은 이를 사양하였다. 이 때 임금께서도 매우 섭섭하여 실망 끝에 말하기를 “이젠 불법(佛法)에 손을 떼겠습니다”라고 하므로, 부득이 신광사로 가게 되었다. 11월에 이르러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여 경기(京畿) 지방을 유린하였으므로 거국적(擧國的)으로 국민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스님들도 공포에 휩싸여 스님께 피난을 떠나시라 간청하였다. 스님께서 말하기를 “오직 생명은 이미 정해져 있거늘 적(賊)들이 어찌 침해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요지부동하였다. 수일 후 피난을 떠나시라고 간청함이 더욱 화급(火急)하였다. 이 날 밤 꿈에 한 신인(神人)을 보았는데, 얼굴에 검은 반점이 있었다. 의관(衣冠)을 갖추고 스님께 절을 올리고 고하기를 “만약 대중이 절을 비우고 떠나면 적들이 반드시 절을 없애버릴 것이오니, 원컨대 스님의 뜻을 고수(固守)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다음 날 토지신장(土地神將)탱화를 보니그 얼굴에 검은 점이 있는 것이 꿈에 만난 신인과 같았다. 신인의 말대로 홍건적들은 과연 들어오지 아니하였다.

계묘년(癸卯年)에는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갔다.공민왕께서 내시(內侍)인 김중손(金仲孫)을 파견하여 개성으로 돌아오도록 청했다. 그리하여 을사년(乙巳年) 3월 궁궐로 나아가서 있다가 퇴산(退山)을 간청하여 비로소 윤허(允許)를 받아 용문(龍門)·원적(元寂) 등 여러 산을 순례하였다. 병오년(丙午年)에는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갔으며, 정미년(丁未年) 가을부터는 청평사(淸平寺)에 주석하였다. 그 해 겨울에는 보암(寶嵓)스님이 원(元)나라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편에 지공(指空)스님의 가사(袈裟)와 편지를 가지고 와서 스님에게 전달하면서 말하기를 “지공스님이 유언하신 내용이다”라고 하였다. 기유년(己酉年)에는 다시 오대산에 들어가 머물렀으며, 경술년(庚戌年) 봄에는 원나라 사도(司徒)인 달예(達睿)가 지공스님의 영골(靈骨)을 모시고 왔으므로 회암사에 조장(厝藏)하고 스님은 스승의 이 영골탑(靈骨塔)에 예배를 올렸다. 이어 왕의 부름을 받아 광명사(廣明寺)에서 여름 결제(結制)를 맺어 해제(解制)를 마치고 초가을에 회암사로 돌아와 9월에 공부선(功夫選) 고시를 베풀었다.
스님이 살던 거실(居室)을 강월헌(江月軒)이라 하였다. 스님은 평생에 걸쳐 세속문자(世俗文字)를 익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어떤 선비이든 시(詩)를 음영(吟詠)하자고 청해오면 붓을 잡자마자 곧 시게(詩偈)를 읊고, 마음 속으로 깊이 구상하지 않으나 시가 담고 있는 내용은 심원(深遠)하였다. 만년(晩年)에는 묵화로 산수(山水) 그리기를 좋아하여 수도(修道)에 방해가 되는 일이라고 비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오호라! 도(道)가 이미 통달되었으면 다방면에 능한 것이 또한 마땅함이 아니겠는가! 신(臣) 색(穡)은 삼가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비명(碑銘)을 지었다. 명(銘)하여 이르되

살피건대 위대(偉大)하신 선각선사(禪覺禪師)여!
기린 뿔이 하나이듯 희귀(稀貴)하도다.
역대 임금 지극 정성 왕사(王師)로 모셔
인천중(人天衆)의 안목(眼目)이며 복전(福田)이로다.        ①
만납자(千萬衲子) 한결같이 귀의(歸依)하옴이
샛강물이 바다에로 모임과 같아
나옹(懶翁)스님 높은 경지(境地) 아는 이 없어
갈고 닦은 그 도덕(道德)은 깊고도 넓네.              ②
스님께서 태어날 때 혁혁(赫赫)한 새 알
떨어뜨린 그 새 알이 회중(懷中)에 들다.
열반(涅槃) 때의 그 용마(龍馬)는 팔부(八部)인 천룡(天龍)!
입비사(立碑事)를 건의하여 윤허(允許)를 받다.           ③
신비하신 그 사리(舍利)는 백오십오과(百五十五粿)
기도(祈禱) 끝에 분신(分身)함은 오백오십팔(五百五十八)
여천(驪川) 강물 길고 넓어 도도히 흘러
천강(千江) 유수(流水) 천강월(千江月)의 밝은 달이여!      ④
분신(分身)이신 그 보체(寶體)는 공색(空色)을 초월(超越)
하늘 높이 비춘 달이 물 속에 왔네!
높고 높은 스님의 덕(德) 헤일 수 없고
만고(萬古)토록 우뚝하게 불멸(不滅)하소서.            ⑤
선광(宣光) 7년 6월 일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4】(1997)]

 

 

회암사지선각왕사비(檜巖寺址禪覺王師碑)

 

위치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회암리 산 8-1 회암사지 해제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회암리 회암사에 있던 고려 말의 고승 선각왕사 혜근(先覺王師 惠勤 : 1320(충숙왕 7년)~1376(우왕 2년))의 비. 고려 말의 유학자 이색(李穡)이 짓고 권중화(權仲和)가 써서 왕사가 입적한 이듬해인 1377년(우왕 3년)에 세웠다. 비문은 글자가 일부 마모된 상태로 보존되었는데 몇 년 전에 산불이 보호각을 덮쳐 조각조각 완전히 파손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일반 비와 달리 생애를 처음부터 기술하지 않고 왕사가 1370년(공민왕 19년)에 왕이 행차한 자리에서 공부선을 주관하고 회암사에 돌아가자 왕사로 책봉하고 송광사에 주석하도록 하였으며 회암사를 중창하고 낙성법회를 열어 회향하였더니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상소하여 영원사에 이주하도록 왕명을 내려 내려가던 중 신륵사에서 입적하자 그곳에서 다비하고 회암사로 돌아와 탑을 세우고 정골사리를 신륵사에 봉안하였다는 데서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서 왕사가 영해 출신으로 출가하여 수행하다 중국에 가서 인도 출신의 지공을 참방하고 평산처림과 문답하여 법을 전수받았으며 다시 지공을 만나 법을 전해 받고 광제사 법회에서 원(元) 순제 등으로부터 우대를 받았으며 고려에 돌아와 오대산에 주석하다 공민왕의 우대를 받아 신광사에 주석하고 여러 산을 순례 수행하고 회암사에 주석하던 생애를 기술하였다. 선각왕사의 비는 간략한 내용의 신륵사비도 있고 영전사 탑지로 추정되는 탑지도 있어 비문 자료가 다수이다.

 

禪覺王師之碑(題額)」高麗國」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脩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諡禪覺▨▨▨▨▨▨塔銘幷序」

      前朝列大夫征東行中書省左右司郎中推忠保節同德賛化功臣
      重大匡韓山君藝文館事兼成均大司成臣李穡奉 敎撰
      輸忠賛化功臣匡靖大夫政堂文學藝文館大提學上護軍提點書雲  
      觀事臣權仲和奉 敎書丹幷篆額」


玄陵在位之二十年庚戌秋九月十日 召師入京十六日就師所寓廣明寺大會兩宗五敎諸山衲子試其所自得號曰功夫選」
上親幸觀焉師拈香畢升法坐乃言曰破却古今之窠臼掃盡凡聖之蹤由割斷衲子命根抖擻衆生疑罔操縱在握變通在機三世諸佛歷代祖師其揆一也在會諸德請以實答於是以次入對曲躬流」 汗皆曰未會或理通而礙於事或狂甚而失於言一句便退
上若有弗豫色然幻庵脩禪師後至歷問三句三關會罷還檜嵒辛亥八月二十六日遣工部尙書張子溫賷書降印法服鉢盂皆具封爲」
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總攝勤脩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謂松廣寺東方第一道場迺命居之壬子秋偶念指空三山兩水之記欲移錫檜嵒會以 召赴是寺法會得請居焉師曰先師指」 空盖甞指畫重營而燬于兵敢不繼其志迺謀於衆增廣殿宇工旣告畢丙辰四月大設落成之會臺評以謂檜嵒密邇京邑士女往還晝夜絡繹或至廢業禁之便於是有旨移住瑩原寺逼迫上道師適」
疾作輿出三門至池邊自導輿者從涅槃門出大衆咸疑失聲號哭師顧曰努力努力無以余故中輟也吾行當止於驪興耳至漢江謂護送官卓詹曰吾疾劇乞舟行遡流七日方至驪興又」 謂卓曰欲少留俟病間卽行卓勉從之寓神勒寺五月十五日卓又督行急師曰是不難吾當逝矣是日辰時寂然而逝郡人望見五釆雲盖山頂旣火之洗骨旡雲而雨者方數百步得舍利一百五十五」
粒禱之分爲五百五十八四衆得之灰中以自秘者莫知其數神光炤耀三日乃巳釋達如夢見龍盤燒臺下其狀如馬及以喪舟還檜嵒旡雨而水漲皆驪龍之助云八月十五日樹浮圖於寺」之北崖頂骨舍利厝于神勒寺示其所終也覆以石鐘戒其無敢訛也事聞于朝諡曰禪覺命臣穡爲文臣仲和書丹篆額臣謹案師諱惠勤號懶翁初名元惠享年五十七法臘三十八寧海府人也」
俗姓牙氏考諱瑞俱膳官令母鄭氏靈山郡人也鄭夢見金色隼飛來啄其頭忽墜卵五釆爛然入懷中因而有娠以延祐庚申正月十五日生年甫冠鄰友亡問諸父老曰死何之皆曰所不知也中」心痛悼走入功德山投了然師祝髪師曰汝爲何事出家對以超三界利群生且請開示曰汝之來此是何物耶曰此能言能聽者能來爾但未知脩進之術曰吾亦如汝猶未之知可往求之有餘師」
至正甲申至檜嵒晝夜獨坐忽得開悟尋師中國之志决矣戊子三月至燕都叅指空畣問契合十年庚寅正日空集衆下語無能對者師出衆吐數語三拜而出空西天百八代祖也是春南游江浙」
秋八月叅平山山問曾見何人曰西天指空日用千劒山云且置指空千劒將汝一劒來師以坐具提山山倒在禪床大呌賊殺我師曰吾劒也能殺人能活人乃扶起山以雪嵒所傳及庵衣拂子表」
信辛卯春抵寳陁洛迦山拜觀音壬辰至伏龍山叅千嵒適集江湖千餘人選入室嵒問所自師旣荅嵓云父母未生前從甚處來師曰今朝四月初二日嵓許之是歲北還再叅指空空授以法衣拂」 子梵書於是游涉燕代山川蕭然一閑道人也名聞于 內乙未秋奉」
聖旨住大都廣濟寺丙申十月望設開堂法會」帝遣院使也先岾木兒賜金襴袈裟幣帛」
皇太子以金襴袈裟象牙拂子來錫師受袈娑問衆曰湛然空寂本無一物粲兮爛兮從何而出衆無對徐曰 九重宮
金口中乃披拈香祝」 聖升坐橫按柱杖下數語便下戊戌春辭指空得受記東還且行且止隨機說法庚子入臺山居焉辛丑冬」
上遣內詹事方節迎入京請說心要賜滿繡袈裟水精拂子」公主獻瑪瑙拂子」
太后親施布施請住神光寺因辭」上曰於法吾亦退矣不得巳卽行十一月紅賊蹂躪京畿擧國南徒僧徙震懼請避賊師曰唯命是保賊何能爲數日請益急是夕夢一神人面有黒誌具衣冠作禮曰衆散賊必滅寺願固師志明日至土」
地神坐視其㒵則夢所見也賊果不至癸卯入九月山遣內侍金仲孫請還乙巳三月詣 闕乞退始得夙願遊龍門元寂諸山丙午入金剛山丁未秋住淸平寺其冬猊寳嵓以指空袈裟手書授師」曰治命也已酉再入臺山庚戌春司徒達睿奉指空靈骨來厝于檜嵒師禮師骨因赴召結夏廣明寺秋初還檜嵒九月卽功夫選也師所居室曰江月軒平生未甞習世俗文字有請題詠操筆立」
書若不經意理趣深遠晚好墨戱山水逼道權鳴呼道旣通多能也宜哉臣穡謹拜手稽首而爲之銘銘曰」
展也禪覺 惟麟之角 王者之師 人天眼目 萬納宗之 如水赴壑 而鮮克知 所立之卓 隼夢赫靈 在厥初生 龍神護喪 終然允藏 矧曰舍利 表其靈異 江之闊矣」 皎皎明月 空耶色耶 上下洞澈 邈哉高風 終古不滅」
 宣光七年六月 日」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下篇 (1984)]

 

檜巖寺指空禪師浮屠碑

西天提納薄陁尊者浮屠銘幷序」
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侍中判典理司事領孝思觀書筵藝文館春秋館事右文館大提學上護軍韓山府院君李穡奉 敎撰」
通訓大夫黃州牧使黃州鎭兵馬僉節制使李義玄追書」 迦葉百八傳提納薄陁尊者禪賢號指空泰定間見天子于難水之上論佛法稱 旨命有司歲給衣粮曰吾不爲是也去而東游高勾麗禮金剛山法起道場有旨趣還燕天曆初 詔與所幸諸僧講法內庭 天子親臨聽焉諸僧恃恩頡頑作氣勢惡其軋己」沮不得行未幾諸僧或誅或斥而師之名震暴中外至正 皇后皇太子迎入延華閣問法師曰佛法自有學者專心御天下幸甚又曰萬福萬福萬中缺一不可爲天下主所獻珠玉辭之不受天曆以後不食不言者十餘年旣言時自稱我是天下主又斥后妃」
曰皆吾侍也聞者恠之不敢問所以久而聞于 上上曰渠是法中王宜其自負如此何與我家事耶中原兵將興師於廣坐語衆曰汝識吾兵馬之多乎某地屯幾萬某地屯幾萬師所居寺皆高麗僧一日忽語之曰汝何故叛耶欲鳴鼓攻之而止數日遼陽省馳」
奏高麗兵犯界京師省衆之聚也每語其人曰速去之旣而 天子北狩中原兵入城立府曰北平師豈偶然者哉師自言吾會祖諱師子脇吾祖諱斛飯皆王伽毗羅吾父諱滿王摩竭提國吾母香志國公主吾二兄悉利迦羅婆悉利摩尼吾父母禱于東方大」
威德神而生吾吾幼也性樂淸凈不茹酒腪五齡就師受國書及外邦之學粗通大義葉去父病醫莫效筮者曰嫡子出家王病可痊父詢三子吾卽應父大喜呼吾小字曰婁恒囉哆婆及能如是耶母以季故初甚難之割愛願舍父病立愈八歲備三衣送那闌陁」
寺講師賢所剃染五戒學大般若若有得問諸佛衆生虗空三境界師云非有非無是眞若可往南印度楞伽國吉祥山普明所硏窮奧旨時年十九奮發獨行禮吾師于頂音菴師曰從中笁抵此步可數否吾不能荅退坐石洞六閱月吾乃悟欲起兩脚相貼」
其王召醫圭藥立愈告吾師曰兩脚是一步吾師以衣鉢付之摩頂記曰下山一步便是師子兒座下得法出身二百四十三人於衆生皆少因緣汝其廣吾化其往懋哉號之曰蘇那的沙野華言指空吾以偈謝師恩己語衆曰進則虗空廓落退則萬法俱沉大」
喝一聲初吾之尋吾師也歷囉囉許國有講法華者吾說偈觧其疑且哆國男女雜居裸形吾示以大道香至國王聞吾至喜曰吾甥也▨留不肯華嚴師廣說二十種菩提心吾喩以一卽多多卽一迦陵伽國海岸龜峰山梵志居之其語曰萬丈懸崖投身而死」
當得人天王身吾曰修行在心何與於身令修六度十地等法結夏摩利支山乃至楞加國焉辭吾師而下山也無縫塔主老僧中路相迓知吾有得也請吾演法吾頌塔而去于他國主信外道以吾有殺盜邪淫之戒召妓同浴吾帖然如亡人王嘆曰是必異人」
也其外道以木石作湏彌山人於頭胷腿安立一山以酒膳祠山男女合於前名陰陽供養吾擧人天迷悟之理勘破邪宗佐理國主信佛吾以偈白之王答以偈吾復偈之王施以珍珠數珠會中有尼越衆問曰彼師此弟中間是誰吾一喝尼大悟有針眼中象王」
過之頌獅子國有如來鉢佛足跡一鉢飯能飫萬僧佛跡時放光明吾皆瞻禮麽哩耶囉國信梵志吾不入哆囉縛國正那俱信吾據座下語有尼默契迦羅邪國亦信外道其王見吾喜甚吾示以大莊嚴功德寶王經摩醯莎羅王因地品王曰法外更有正法外道」
欲害吾吾卽出城日己黑有虎至侍者知鳥音升木以避曰汝旣知禽語吾所說法能知否侍者無語痛行二十棒乃悟神頭國流沙茫茫不知所適有樹其實如桃飢甚摘食二枚未竟神勾到空居廣殿老人正座云賊何不作禮吾曰吾佛徒也何得禮汝老罵」
旣稱佛徒何偸果爲吾曰饑火所逼老云不與而取盜也今且放汝其善護戒使閉目須臾己至彼岸煎湯臥木之上乃大蟒也的哩囉兒國女求合以飢欲求食若將應之而問其馬之良者以實告吾卽騎之而走果如飛便至他境忽一人縛吾去使牧其羊會大」
雪入洞入定七日夜白光出洞其人除雪而入見吾趺坐大喜施以衣寶不受男女俱發心示吾正路行且久未見人忽遇諸途心甚悅其人捉吾至王所面跪曰天旱必此妖 請殺之王曰且縱之三日不雨殺何遲吾燒香一祝大雨三日嵯楞陁國有顚僧見人」
來以牛頭三列於地置蒲團其上默而坐吾一見火之彼呌曰山河大地成一片矣阿耨池僧道巖居其傍以草作小菴人來則焚之呌曰救火救火吾至才呌救火踢到凈甁道巖曰可惜來何遲末羅婆國事佛甚謹而邪正雜糅吾說破邪論外道歸正矣城東寶」
和尙墾其所居四面爲田置菜種一器人至則治田而己無一言吾以菜種從而下之僧呌曰菜生矣菜生矣
其城中有織紗者人至不言織不▨吾以刀斷之其人曰多年之織畢矣阿耨達國僧省一居窰中見人來以煤塗面出舞而復入吾以偈相喝早娑國僧」
納達居道傍數年見來者曰好來見去者曰好去吾便與三棒彼迴一拳的哩侯的國婆羅門法盛行吾縮手而去挺佉哩國眞邪同行遇盜裸剝稱伽羅國王迎入內請說法有寶峰者說經吾與之互相宣說東行數日有高山曰鐵山無土石草木日照朝陽其勢」
如火又名火熖行七八日可達山頂有國土几十七八所橫接天▨北不知其幾千萬里其東河水出焉兩岸高聳▨橋以渡氷雪不消故號雪山孤身飢窮啖野果以達西蕃之境焉吾之行化于中國也遇北印度摩訶班特達於西蕃偕至燕京居未久西游安西」
王府與王傅可提相見提請留學法吾志在周流語之曰我道以慈悲爲本子之學倍是何耶提言衆生無始以來惡業無筭以眞言一句度彼超生受天之樂吾云汝言妄也殺人者人亦殺之生死相讐是苦之本提曰外道也吾云慈悲眞佛子反是眞外道王」
有獻郤之西蕃摩提耶城其人可化呪師疾吾以毒置茗飮適使臣至自都請吾同還欲師班特達互爲揚化不契又去伽單呪師欲殺吾吾乃去蝦城主見吾大喜大外道妬之打折吾一齒及將去欲要於路必殺之其主護送至蜀禮普賢臣像坐禪三年大毒河遇」
盜又赤立走羅羅斯地界有僧施一禪被有女施一小衣乃應檀家供同齋僧得放生鵝欲烹而食之吾擊其婦婦哭僧怒見逐吾聞土官塑吾像水旱疾疫禱必應金沙河關吏見吾婦人衣髮又長恠而問奚自吾言語不通書西天字又非所知也於是留之晩」
隈石隙而臥不覺少間至彼岸渡子異吾禮拜雲南城西有寺上門樓入定居僧請入城至祖變寺坐桐樹下是夜雨旣明衣不濡赴其省祈晴立應坐夏龍泉寺書梵字般若經衆聚乏水吾命龍引泉濟衆大理國吾却衆味但食胡桃九枚度日金齒烏撤烏蒙一」
部落也禮吾爲師塑像廟之吾聞無賴子以吾像禪捧擲之地而不能擧悔謝取安如故安寧州僧問昔三藏入唐伏土知音時吾己會雲南語應曰古今不同聖凢異路請說戒經燃頂焚臂官民皆然中慶路諸山請演法凢五會太子禮吾爲師羅羅人素不知佛」
僧吾至皆發心飛鳥亦念佛名貴州元帥府宮皆受戒猫蠻猺獞靑紅花竹打牙獦狫諸洞蠻俱以異菜來請受戒鎭遠府有馬王神廟舟過者必肉祭不然舟損吾一喝放舟行常德路金剛白鹿二祖師觀音自塑之像洞庭湖靈異頗多能住風雨吾行適風作」
浪湧爲說三歸五戒唐梵互宣先時祭者夜獻絲屨明則屨皆破後皆却其獻從素祭湖廣省參政欲逐吾去吾曰貧道西天人也遠謁 皇帝助揚正法汝不欲我祝 皇帝壽耶過盧山東林寺見前身塔巋然骨猶未朽淮西寬問般若意吾曰三心不可得」
楊州太子以舟送吾至都大順丞相之室韋氏高麗人也請於崇仁寺施戒旣而至灤京泰定之遇是己嗚呼師之游歷如是哉信乎其異於人也師自天歷褫僧衣大府大監察罕帖木兒之室金氏亦高麗人也從師出家買宅澄淸里闢爲佛宮迎師居之師題其」
額曰法源盖天下之水自西而東故取以自比焉師辮髮白髯神氣黑瑩服食極其侈平居儼然人望而畏之至正二十三年冬內侍至師曰爲我奏爾主我生日後去耶生日前去耶章佩卿速哥帖木兒囘 旨留師小住一冬師又曰天壽寺吾影堂也是歲十一」
月二十日示寂于貴化方丈師所搆而師所名也有 旨省院臺百司具儀衛送龕于天壽寺明年御史大夫圖堅帖木兒平章伯帖木兒凾香謁師用香▨泥布梅桂水團塑肉身戊申秋兵臨城茶毗四分達玄淸慧法明內正張祿吉各持而去其徒達玄航海司」
徒達叡從淸慧得之俱東歸▨壬子九月十六日以王命樹浮屠於檜巖寺將入塔灌骨得舍利若干粒師自西天携文殊師利無生戒經二卷而來參政危大朴序其端手書圓覺經歐陽承旨跋其尾師之偈頌甚多別有錄皆行于世雲南悟無見能言七歲授師」
出家時己云師年甲子一周矣悟七十五而師乃寂吉文江釋仁杰云門人前林觀寺住持達蘊謀載道行愈久而愈厪司徒達叡間關數千里奉師骨如事存以致送死無憾焉懶翁弟子某曰吾師亦甞師師師吾祖也與師之弟子凈業院住持妙藏比丘尼買燕」
石將樹之檜巖之崖揆諸天屬不曰孝子順孫歟事聞于 內有 旨臣穡銘臣脩書臣仲和篆額臣穡曰師之身旣大而四分之矣未知其餘立塔於何地而求銘以謀其傳者誰歟秉其筆者誰歟又未知指空師在此歟在彼歟無亦視爲蟬蛻不復」
顧藉而爲其徒者思報其恩强而爲之歟臣於是不能無感焉祇慄承敎系之以銘銘曰 維師之跡發軔西域滿王之子普明之嫡灤京遇知允也其時延華之訪云何其遲囘視我轍靡國不歷屋建之瓴水投之石天曆幸僧拂我以增服今之服道譽愈騰狂」
言戱譃匪人攸測談兵未釁如析白黑先見之明乃道之精或疑或謗師心則平舍利旣赫罔不竦息孰謂人性不協于極胥斯檜巖樹石以劖無敢或訛于永厥監
崇禎紀元後四戊子五月 日立

追記
東國三祖師指空懶翁無學浮圖及事蹟碑在楊州天寶山檜巖寺之北崖指空懶翁兩碑牧穩李文靖撰韓 脩權仲和書麗季所竪也無學碑卽」
我」
太宗踐祚之十年庚寅奉 上王命命詞臣卞季良製孔俯書幷竪于兩師碑塔之下寺近廢而碑獨存今 上二十一年辛巳有李膺峻者與術」
人趙大鎭毀浮圖而瘞其親指空無學二碑俱被撞碎道臣聞于朝 上震駭李與趙幷 命島配掘其瘞仍 敎曰所碎之碑國初所命至今日」
而不能保存者亦甚怵然分付畿營更爲竪建如是處分豈爲釋敎而然一則爲國初所重也一則爲國綱也於是自度支劃錢三千兩出付僧德」
俊等使之重建而畿營主其事指空碑屬文靖後孫牧使義玄改書無學碑碎不甚模舊刻孔俯書刻之戊子秋工始就竪于舊址盖指空懶翁自」
中國來演釋敎於麗季無學師其道在我國初定鼎時其功多有可紀者檜巖寺之同竪三碑良以此也于今四百餘年之後忽遭破毀抑亦佛家」
之一刧而乃我聖上惕然憾懷爰命有司一擧而重新之使湮晦之古蹟賴而復顯其傳益遠豈不有光於 大聖人追舊紀功之盛典歟茲具」
顚末記之石右」崇祿大夫行龍驤衛上護軍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原任 奎章閣提」
學五衛都摠府都摠管 世子右賓客金履喬追記」嘉善大夫京畿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水原府留守開城府留守江華府留守廣州府留」 守巡察使金鐮書」
崇禎紀元後四戊子五月 日立」
主事都監董仁峯堂德俊 奉恩寺首禪宗判事釋會善 城庵堂永哲」副看役奇庵堂義寬 前判事喚虛堂等還」
物力次知嘉善熙行 奉先寺首敎宗判事平松堂普蔡」南漢都摠攝翠峯堂寬活 公員嘉善釋最仁」
中軍嘉義釋義察 道庵堂聖麒」 北漢都摠攝嘉義釋性黙 影漳堂玉印」
中軍嘉義釋道聞 秋潭堂三學」龍珠寺都摠攝諸方大法師肯俊 印城堂宜賢」
中軍嘉善釋正愚 山人信瓊」 刻手朴枝春」
石手朴宗錫 文守兆」

 

회암사 지공선사 부도비(檜巖寺 指空禪師 浮屠碑)

서천(西天 : 인도) 제납박타존자부도명 병서(提納薄陁尊者浮屠銘 幷序)
벽상 삼한 삼중대광 문하시중 판전리사사 영 효사관 서연 예문관 춘추관사 우문관 대제학 상호군 한산부원군(壁上 三韓 三重大匡 門下侍中 判典理司事 領孝思觀 書筵藝文館 春秋館事 右文館大提學 上護軍 韓山府院君) 이색(李穡)이 왕명을 받들어 짓고,
통훈대부(通訓大夫) 황주목사 황주진병마첨절제사(黃州牧使 黃州鎭兵馬僉節制使) 이희현(李羲玄)이 쓰다.

가섭(迦葉) 108대 법손으로 백팔전(百八傳)을 이어받은 제납박타존자(提納薄陁尊者) 선현(禪賢)을 지공(指空)이라한다.
태정(泰定) 연간에 난수(難水) 가에서 천자를 뵙고 불법을 강론한 것이 천자의 뜻에 맞았다. 천자께서 담당 관리에게 해마다 옷과 양식을 하사하도록 지시하셨다. 대사께서 “이것을 위함이 아니다.”하시고는, 곧 동쪽으로 길을 떠나 고려 금강산(金剛山) 법기도량(法起道場)에서 예불을 올렸다. 그러나 천자께서 다시 부르시니 연경(燕京)으로 돌아가셨다.
천력(天曆) 초, 천자께서 조서를 내려 총애하는 중들에게 궁궐 안뜰에서 불법을 강론토록 하고 친히 참석하여 들었다. 이때 중들이 천자의 평소 은총만 믿고, 대사에게 대항하며 기세를 부렸으며, 자기들과 의견이 맞지 않음을 미워하여 불법을 강론하지 못하게 했다. 얼마 안 되어 중들은 목이 베이거나 물리침을 당하였으며, 대사의 명성은 더욱 국내외에 떨쳐 드러났다.
지정(至正) 연간, 황후와 황태자께서 연화각(延華閣)으로 대사를 모시고 법을 물으니, 대사께서 “불법을 배울 자는 따로 있으니, 오로지 한 마음으로 천하를 다스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하시고는 또 “만복을 누리소서. 만복 중에 하나가 모자라도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하셨다.
대사께 바치는 주옥(珠玉)을 사양하며 받지 않으셨다. 천력(天曆) 연간 이후 10여 년 동안 잡숫지도 말씀하시지도 않으셨다. 입을 여시자 “나는 천하의 주인이다.”하시고, 또 후비들을 꾸짖어 “다 내 시녀로구나.”하셨다. 듣는 이들이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였으나 아무도 그 까닭을 묻지 못하였다. 오랜 뒤에 위에 알려지자, 천자께서 “그는 불법의 왕이니 마땅히 그리 자부할 것이다. 어찌 우리 속세의 일과 관계있겠느냐!” 하셨다.
중원(中原)에 병난이 일려고 할 때, 대사께서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너희들은 아느냐? 나의 군사가 많다는 사실을. 아무 곳에 몇 만 명이 있고, 아무 곳에 몇 만 명이 있다.”하셨다. 거처하시는 절에 고려의 중들이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어찌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느냐? 내 북을 쳐 공격할까 하다 그만두었다.”하셨다. 며칠 후 요양성(遼陽省)에서 급히 아뢰기를, “고려의 병사가 국경을 넘었습니다.” 하였다.
경사(京師 : 서울)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대사께서 항상 경사의 사람들에게 “속히 떠나라.”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자께서 북으로 출정한 사이에, 중원의 병마가 입성하여 부(府)를 세우고 북평(北平)이라 하니, 대사께서 말씀 하신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는가!
대사께서는 자신의 일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증조할아버지 이름은 사자협(師子脇)이요, 할아버지 이름은 곡반(斛飯)이니, 모두 가비라국(伽毗羅國)의 왕이시다. 나의 아버지 이름은 만(滿)으로 마갈제국(摩竭提國)의 왕이시고, 나의 어머니는 향지국(香志國)의 공주셨다. 형이 두 분이셨는데 이름은 실리가라파(悉利迦羅婆)와 실리마니(悉利摩尼)이다. 부모님께서 동방대위덕신(東方大威德神)에게 기도를 드려 나를 낳으셨다.
나는 어려서도 맑고 깨끗함을 좋아하여 고기와 술을 먹지 않았고, 다섯 살에 스승에게서 외교 문서와 외국의 학문을 교육 받았지만 대략적인 뜻을 알았을 때 이들을 떠났다. 아버님께서 병이 드셨는데 약을 써도 효험이 없었다. 점치는 이가 말하기를, “정실부인의 아드님께서 출가하신다면, 왕의 병환이 나으실 것입니다.”하였다. 아버지께서 우리 형제에게 출가할 뜻을 물으셨을 때, 내가 얼른 대답하였다. 아버님께서 몹시 기뻐하시며, 어렸을 때 부르던 이름으로 부르시면서, “누달라치파(婁恒囉哆婆)야, 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하셨다. 어머님께서는 내가 막내라 처음에는 매우 어렵게 여기셨으나, 애정을 끊고 출가하기를 바라시니 아버님의 병환이 곧 나으셨다.
여덟 살 때에 삼의(三衣 : 비구가 입는 세 가지 가사)를 갖추고 나란타사(那闌陁寺)의 강사(講師) 율현(律賢)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가사와 오계를 받았다.『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密多經)』을 배우다가 얻은 바가 있는 듯하여, 부처님과 중생과 허공과의 세 경계를 여쭈었더니, 스승께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이 참 반야(般若)이니, 남인도 능가국 길상산(楞伽國 吉祥山)의 보명(普明)에게로 가서 더욱 깊은 진리를 연구하라.” 하셨다. 그때 내 나이 19세로, 분발해서 혼자 걸어서 스승을 정음암(頂音菴)에서 뵙고 인사를 드렸다. 스승께서 “중천축(中笁抵)에서 여기까지 걸어왔으니 걸음 수효를 알겠구나?”하시거늘, 나는 대답하지 못하였다. 물러나 암석 동굴에서 6개월을 좌선을 하고 나서야 깨달았으나 두 다리가 붙어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 나라의 왕이 의사를 불러 약으로 치료하자 바로 일어섰다. 나는 스승에게 “두 다리가 한 걸음입니다.”하니, 스승께서 가사와 바리때를 주시고 정수리를 만지며 수기(摩頂受記)하시기를, “산을 내려가는 한걸음이 곧 사자아(師子兒)구나! 내 법좌 밑에서 법을 얻어 세상에 나간 이가 243명인데 모두가 중생과 인연이 드물었다. 네가 나의 교화를 널리 퍼뜨려라. 가서 힘쓰라!”하시고, 호(號)를 소나적사야(蘇那的沙野)라 하시니 중국어로 지공(指空)이다. 나는 게(偈)를 지어 스승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대중에게 “나아가면 허공이 활짝 트이고 물러서면 만법이 함께 완전히 가라앉는다.”라고 한 마디 크게 갈(喝) 하였다.
내가 처음 스승님을 뵈러 갈 때, 라라허국(囉囉許國)을 지나가는데『법화경』을 강론하는 자가 있기에, 내가 게(偈)로 그의 의심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단치국(旦哆國)에서는 남녀가 벌거벗은 채 섞여 살고 있었는데, 내가 그들에게 대도(大道)를 보여주었다. 향지국왕(香至國王)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면서 “내 조카이다.”하면서 가지 못하게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화엄경(華嚴經)』을 강의하는 사(師)가 스무 가지의 보리심을 허황되게 말하고 있기에, 내가 ‘하나가 곧 여럿이요, 여럿이 곧 하나’라는 이치를 깨우쳐 주었다. 가릉가국(迦陵伽國) 바닷가의 구봉산(龜峰山)에는 범지(梵志)가 살고 있었다. 그가 “만 길(대략 30㎞)의 가파른 벼랑에서 떨어져 죽으면 인간계와 천상계에서 왕이 될 것이다.”하기에, “수행은 마음에 달린 것, 어찌 몸과 관계있겠느냐?”하고, 육바라밀(六度)과 십지(十地) 등의 법을 닦으라고 하였다.
마리지산(摩利支山)에서 하안거(夏安居)를 지내고 바로 능가국(楞加國)에 이르렀다. 스승님께 하직인사를 드리고 산에서 내려올 때, 무봉탑(無縫塔)을 지키는 노승이 길까지 마중 나와서, 내가 터득한 것이 있음을 알고 설법을 청하였지만, 나는 탑만을 찬송하고 떠났다. 우지국(于地國) 군주는 이단사설을 믿었다. 내가 불살생(不殺生) · 부도(不盜) · 불사음(不邪淫)의 계(戒)를 지킨다는 것을 알고 기생을 불러 함께 목욕을 하라 하기에, 내가 죽은 사람같이 태연히 행동하였더니, 군주가 탄복하며 “이 사람은 비범한 사람임에 틀림없다.”하였다. 그 나라는 이단들이 나무나 돌로 수미산(湏彌山)을 만들면, 사람들은 머리 · 가슴 · 다리에 산 하나씩을 고정시키고 술과 안주를 차려 산에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많은 남녀가 그 산 앞에서 교합하였는데, 그들은 이것을 음양공양이라 하였다. 나는 인간계와 천상계, 미혹과 깨달음의 이치를 들어 그들의 사악한 근본을 살펴서 타파해 주었다.
좌리국(佐理國) 군주는 부처를 믿기에 내가 게로 아뢰니, 왕도 게로 답하였다. 내가 다시 게를 읊으니, 왕이 진주 몇 알을 시주하였다. 이 모임에 있던 비구니가 대중 앞으로 나와 “저 스승 이 제자의 중간은 누구입니까?” 하기에, 내가 갈(喝)을 한 번 하자, 비구니가 크게 깨닫고는 ‘바늘귀 속을 코끼리가 통과한다.’는 내용의 게송을 읊었다. 사자국(獅子國)에는 여래(如來)의 바리때와 부처의 발자국이 있다. 여래(如來)의 바리때 한 개만으로 만 명의 중을 배불리 먹이며, 부처의 발자국에서는 때때로 밝은 빛이 난다. 나는 모두를 보고 예불하였다.
마리야라국(麽哩耶囉國)은 범지(梵志)의 불법을 믿으므로 나는 들리지 않았다. 차라박국(哆囉縛國)은 불법과 이단을 함께 믿었는데, 내가 법좌에 기대어 한 마디 하니, 비구니 중에 말없이 뜻을 깨달은 이가 있었다. 가라나국(迦羅那國)도 이단의 도를 믿었다. 그 왕이 나를 보고 매우 기뻐하기에 내가『대장엄공덕보왕경(大莊嚴功德寶王經)』의「마류수라왕인지품(摩醯莎羅王因地品)」을 보여주니, 왕이 “법 밖에 또 바른 법이 있었소이다.”하였다. 이단의 무리가 해치려 하기에 바로 성을 빠져나오니, 날이 벌써 저물었다. 호랑이가 다가오는 것을 시자(侍者)가 새 울음소리로 알아듣고, 나무로 올라가서 화를 피하였다. 내가, 시자(侍者)에게 “너는 새의 말을 들을 줄 아니, 나의 설법도 알겠구나?”하였더니, 시자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몽둥이로 스무 대쯤 아프게 때렸더니 이내 깨달았다.
신두국(神頭國)은 사막이 너무 넓어 어디로 가야 좋을지 모를 형편이었다. 마침 열매가 복숭아처럼 생긴 나무가 있었다. 배가 너무 고파 따서 먹었다. 그런데 두 개를 다 먹기도 전에 공신(空神)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집으로 끌고 가버렸다. 넓은 전각에 몸을 바로하고 앉아 있던 노인이 “도둑아! 어째서 절을 하지 않느냐?”하였다. 내가 “나는 불도(佛徒)이다. 어찌 너에게 절을 하겠느냐?”하니, 노인은 꾸짖으며 “불도라면서 어째서 남의 과일을 훔쳤느냐?”하기에, “굶주림과 더위에 시달려서 그랬소.”하였더니, 노인이 다시 “주지 않은 것을 가진 것은 도둑질이다. 이제 너를 놓아주겠으니 계율이나 잘 지켜라.”하고는 “눈을 감아라.”하였다.
잠깐 사이에 이미 강 언덕 이쪽에 와 있었다. 쓰러진 거목 옆에서 차를 끓였는데, 알고 보니 그 나무란 것이 바로 큰 구렁이였다. 적리라아국(的哩囉兒國)에서는 여인이 교합할 것을 요구했다. 배가 고프므로 음식이나 구하려고, 허락하는 체 하면서 좋은 말이 어느 것이냐고 물었더니 사실대로 일러주었다. 내가 얼른 올라타고 달리니, 과연 나는 듯이 이내 다른 나라 국경에 이르렀다. 이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를 묶어 가더니 자기네 양을 지키라 하였다. 때마침 큰 눈이 내려 동굴로 들어가 7일 밤낮을 선정을 닦으니, 흰 광채가 굴 밖으로 뻗었다. 그 사람이 눈을 치우고 들어와, 내가 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옷과 보물을 시주하였지만, 받지 않았다. 남녀가 모두 보리심을 보이기에, 내가 길을 바로잡아 주었다.
얼마를 걸어도 사람을 볼 수 없었는데, 갑자기 길에서 사람을 만나 매우 기뻤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붙잡아 자기 왕 앞에 데리고 가 무릎을 꿇리며 “날이 가무는 것은 반드시 이 요물 때문인가 합니다. 이 요물을 죽이십시오.”하니, 왕이 “놓아주었다가 3일 뒤에 비가 오지 않거든, 그때 죽여도 늦진 않을 것이다.”하였다. 내가 향을 사르고 한 번 빌었더니 큰 비가 3일 동안 내렸다.
차릉타국(嵯楞陁國)에 있는 미치광이 중은 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 소머리 세 개를 땅에 늘어놓고 부들로 만든 둥근 방석을 그 위에 두고 말없이 앉는다. 내가 보고 불을 질러 태워버리니, 그가 “산하대지가 한 조각이 되었구나.”하며 부르짖었다.
아누지(阿耨池)의 중 도암(道巖)이 그 곁에다 풀로 지붕을 이은 작은 암자를 짓고 살았다. 그러다 사람이라도 오면 불을 지르며 “불을 끄라, 불을 끄라!”하며 부르짖었다. 내가 이르자마자 역시 “불을 끄라!” 함에, 내가 물병을 걷어차니, 도암(道巖)이 “애석하다, 오는 것이 왜 그리 늦는가?” 하였다.
말라파국(末羅婆國)에서는 부처 섬기기를 매우 부지런히 하였으나 이단과 정도(불교)가 뒤섞여 있었다. 내가 파사론(破邪論)을 설했더니 이단의 도들이 바른 길(불교)로 돌아왔다. 성의 동쪽에 있는 보화상(寶和尙)은 그가 살고 있는 사방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었다. 그리고 씨앗을 담은 그릇 하나 놓아두곤 사람이 오면 김만 맬 뿐 아무 말도 없었다. 내가 씨앗을 들고 그의 뒤를 따르면서 뿌리니, 중이 “채소가 돋았다. 채소가 돋았다!”하며 외쳤다. 그 성 안에는 비단을 짜는 이가 있는데, 사람이 와도 말도 않고 비단만 짰다. 내가 칼을 들어 비단을 몽땅 끊어버렸더니, 그 사람이 “여러 해 동안의 길쌈을 오늘에야 끝냈구나.”하였다.
아누달국(阿耨達國)의 중 성일(省一)은 기와 굽는 굴속에 살면서 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 그을음을 얼굴에 바르고 춤을 추고는 다시 들어갔다. 내가 게로써 꾸짖어 주었다. 조사국(早娑國)의 중 납달(納達)은 수년을 길가에 살면서 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 “어서 오시오.” 하고, 가는 사람을 보면, “잘 가시오.” 하거늘, 내가 방망이로 세 대를 때려 주었더니, 나에게 주먹 한 방을 날렸다.
적리후적국(的哩侯的國)에는 바라문의 법이 성행하므로 아무런 손도 쓰지 않고 지나쳤고, 정거리국(挺佉哩國)은 진종(眞宗 : 불교)과 이단이 똑같이 행해지고 있다. 도적을 만나 알몸이 되기도 하였다. 녜가라국(禰伽羅國)왕은 나를 궁궐 안으로 맞아들여 설법을 청했다. 보봉(寶峰)이란 분이 경전을 강론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와 번갈아 법을 강연했다.
동쪽으로 여러 날을 걸어가니 높은 산이 나왔는데 철산(鐵山)이라 하였다. 흙도 돌도 풀도 나무도 없으며, 햇볕이 내리쬐는 아침의 태양은 그 기세가 불같아서 화염산(火熖山)이라고도 했다. 7~8일을 걸어야 산의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었다. 17~8개의 나라가 가로로 이어져 하늘에 닿았으며, 그 북쪽은 몇 천만리인지 알 수 없지만, 동쪽으론 강이 흘렀다. 양쪽 기슭이 높이 솟구쳐있어 다리를 놓아 건넜으며, 얼음과 눈이 녹질 않아 설산(雪山)이라 불렀다.
혼자 몸으로 굶주리다, 들에 있는 과일을 따먹으면서 서번(西蕃)의 경계에 도달했다. 내가 중국을 교화시키러 다니던 중에 북인도의 마가반특달(摩訶班特達)을 서번(西蕃)에서 만나 함께 연경(燕京)까지 왔다. 연경(燕京)에 거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쪽 안서왕부(安西王府)로 가서 왕의 스승인 가제(可提)를 만났다. 가제(可提)는 그곳에 머물면서 법을 배우라고 하였으나, 나의 뜻은 두루 다니는 데 있었으므로 “나의 도는 자비(慈悲)가 근본이고, 당신의 학문은 이와 반대이니 어쩌려는가?” 하니, 가제(可提)가 “중생은 먼 과거로부터 지은 악업(惡業)이 헤아릴 수 없다. 내가 진언(眞言) 한 마디로 그들을 구제하면, 생사를 벗어난 하늘의 쾌락을 누릴 수 있다.” 하였다. 내가 “그대의 말은 망언이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람이 또 그를 죽이니, 살거나 죽거나 간에 서로 원수가 된다. 이것이 괴로움의 근본이다.” 하니, 가제(可提)가 “이단의 도이다.” 하였다. 내가 “자비(慈悲)는 참 불자요, 이를 거스르는 것이 그야말로 이단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선물을 주었으나 물리쳤다.
서번(西蕃)의 마제야성(摩提耶城)에서는 사람들은 교화할 만하였다. 주술사는 나를 미워하여 독약을 섞은 차를 마시라고 했다. 때마침 사신이 수도로부터 와서 나에게 함께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반특달(班特達)을 스승으로 하여 서로 불법을 선양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떠났다. 가단(伽單)에서도 주술사가 나를 죽이려 하기에 떠나갔다.
하성(蝦城) 성주는 나를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이단의 무리들은 질투하여 나를 패서 이 한 대를 부러뜨렸다. 떠나려는 데도, 이단의 무리들은 반드시 죽이겠다며 길목에서 기다리므로 하성(蝦城)의 성주가 나를 촉(蜀)까지 호송해주도록 했다.
거대한 보현보살(普賢菩薩)상에 예불한 뒤 3년 동안 좌선하였다. 대독하(大毒河)에서 도적을 만나 다시 알몸으로 달아났다. 라라사(羅羅斯) 지역에 이르자, 중이 가사 한 벌을 주었고 여인이 작은 옷 한 벌을 주었다. 비로소 절에 시주하는 집안(檀家)의 공양 요청에 응할 수 있었다. 공양 요청을 받고 함께 간 중이 풀어 놓고 키우는 거위를 잡아서 삶아 먹으려 하였다. 내가 공양주(供養主)의 부인을 쳤더니, 부인이 그것을 보고 통곡을 했고, 중은 되레 화를 냈지만 쫓겨났다. 듣자니, 그 지방 관리들이 나의 모습을 조각해 세우고, 장마가 지거나 가물거나 질병이 돌 때면 빈다고 하는데, 빌면 반드시 효험이 있다고 하였다.
금사하(金沙河)의 관문을 지키는 아전이 내가 여인의 옷을 입었고 머리칼도 자란 것을 보고 수상히 여겨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말이 통하지 않아 인도의 글씨를 써서 보였으나 역시 알지 못하므로 억류되었다. 날이 저물어 후미진 바위틈에 누웠는데, 나도 모르는 잠깐 사이에 강 건너에 닿았다. 뱃사공이 나를 기이하다 여기고 절을 하였다.
운남성(雲南城) 서쪽에 있는 절의 다락집에 올라가 선정에 들었더니 그곳에 사는 중들이 와서 성으로 들어오라고 청하였다. 조변사(祖變寺)에 이르러 오동나무 밑에서 좌선을 했다. 그날 밤 비가 왔고, 날이 샌 뒤에도 비가 왔으나 옷이 젖지 않았다. 성(省)에 가서 비가 개기를 빌자 효험이 있었다.
용천사(龍泉寺)에서 여름 안거를 하면서 범어(산스크리트어)로『반야경(般若經)』을 썼다. 대중이 모여 살기엔 먹는 물이 부족해 용에게 물을 끌어들여 대중을 구제케 했다. 대리국(大理國)에서는 모든 음식을 물리치고 매일 호도만 9개씩 먹으며 살았다. 금치오(金齒烏)는 철오몽(撤烏蒙)의 한 부락이다. 나를 스승으로 예우하고 나의 모습을 만들어 사당에 모셨다. 그런데 무뢰한들이 나의 찰흙상이 쥐고 있는 선봉(禪棒 : 禪師의 몽둥이)을 땅에 던졌으나 들지를 못하였다. 뉘우치고 사죄하고서야 제자리에 둘 수 있었다고 한다.
안녕주(安寧州)의 중이 “옛날에 삼장(三藏)이 당(唐)에 들어와서 땅에 엎드려 소리를 들을 줄 알았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때 나는 이미 운남(雲南)의 말을 알고 있었던 터라 “옛날과 지금이 같지 않고, 성인과 범인은 길이 다르다.” 하였다. 그러자 중이 계(戒)와 경(經)을 설해 달라고 청하기를 정수리가 타고 팔이 타는 것처럼 재촉하였고, 관리와 백성들 모두 그리 하였다. 중경로(中慶路)의 여러 산에 있는 절에서 설법해 주기를 청하였다. 무릇 다섯 차례의 법회를 여니, 태자께서 나를 스승으로 예우하였다. 라라(羅羅) 사람들은 원래 부처도 중도 몰랐는데, 내가 라라(羅羅)에 온 뒤로 모두가 발심하여, 나는 새들도 염불을 할 줄 알게 되었다.
귀주(貴州)에서는 원수부(元帥府)의 관리들이 모두 계를 받으니 묘(猫) · 만(蠻) · 요(猺) · 동(獞) · 청(靑) · 홍(紅) · 화(花) · 죽(竹) · 타(打) · 아(牙) · 갈(獦) · 노(狫) 등 모든 오랑캐가 모두 기이한 채소를 가지고 와서 계 받기를 청하였다. 진원부(鎭遠府)에는 마왕신(馬王神)의 사당이 있다. 사당 앞을 지나는 배는 모두 고기로 제사를 지내야지 그렇지 않으면 배가 부서진다고 하였다. 내가 한 번 큰 소리로 꾸짖고 배를 놓아 보냈다. 상덕로(常德路)에서는 금강(金剛)과 백록(白鹿) 두 조사와 관음(觀音)이 자신들의 모습을 조각했다는 상(像)에 예불하였다.
동정호(洞庭湖)에는 신령스럽고 기이한 일이 자못 많았다. 비바람을 멈추게 했던 것은, 내가 동정호를 지나갈 때, 마침 바람이 불고 파도가 용솟음쳤기 때문에, 삼귀(三歸)와 오계(五戒)를 중국어와 범어(산스크리트어)를 섞어서 설법했다. 이보다 앞서 제사를 지내는 이가 밤에 실로 짠 신을 올리고, 날이 밝으면 실로 짠 신을 모두 뜯어버렸다. 이후부터는 바치는 물건을 모두 없애고 소박하게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호광성(湖廣省)의 참정(參政)이 나를 쫓아버리려 하기에 “빈도는 인도 사람이다. 멀리서 황제를 뵙고 바른 법 펴시는 일을 도우려 왔다. 그런데 너는 내가 황제를 위해 축수하는 것을 원치 않으냐?” 하였다. 여산(盧山)의 동림사(東林寺)를 지날 때 눈앞에 신탑(身塔)이 우뚝이 섰는데 뼈조차 아직 썩지 않았다. 회서(淮西)의 관(寬)이 반야(般若)의 뜻을 묻기에, “삼심(三心 : 지성심, 심심, 회향발원심)을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니라.” 하였다. 양주(楊州)의 태자(太子)가 자기의 배를 내어주어 나를 도성까지 전송해 주었다. 대순승상(大順丞相)의 부인 위(韋)씨는 고려인인데, 숭인사(崇仁寺)에서 시행하는 계(戒)에 나를 초대했다. 이윽고 난경(灤京)에 이르니, 이것이 태정제(泰定帝)의 지극한 대우를 받게 된 동기였다. 아! 대사의 여정이 이러하시니 실로 특이하신 분이라 하노라.
대사께서는 천력(天歷) 연간에 승복을 벗었다. 대부대감찰(大府大監察)인 한첩목아(罕帖木兒)의 부인 김(金)씨도 고려인인데 대사를 따라 출가하였다. 김(金)씨는 징청리(澄淸里)에 집을 사서 절로 개조하고 대사를 맞이하여 거처하시도록 하였다. 대사께서 절의 편액을 법원(法源)이라 하신 것은, 천하의 물이 서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가는 뜻을 취하여 자신을 여기에 비유하신 때문이다.
대사께서는 변발을 하고 하얀 수염에, 신기(神氣)는 검은빛으로 빛났고 옷과 음식 매우 사치스러웠다. 평상시 거처하실 때엔 근엄하여 사람들이 바라보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지정(至正) 23년(공민왕 12, 1363년) 겨울에 내시가 오니, 대사께서 “나를 위해 임금에게 알려다오. 내가 생일 전에 떠나야 좋으냐? 생일 뒤에 떠나야 좋으냐?” 하시니, 장패향(章佩鄕) 속가첩목아(速哥帖木兒)가 왕명을 받들고 돌아와서 대사를 만류하매 한 겨울 잠시 머무셨다.
대사께서 또 “천수사(天壽寺)는 나의 영당(影堂 : 畵像을 모신 곳)이라.” 하시었다. 그해 11월 20일 귀화방장(貴化方丈)에서 돌아가셨다. 귀화방장(貴化方丈)은 대사께서 세우시고 대사께서 이름 지으신 곳이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성(省) · 원(院) · 대(臺)의 뭇 관리들이 위의를 갖추어 천수사(天壽寺)에 감실(龕室)을 모셨다. 다음 해 어사대부(御史大夫) 도견첩목아(圖堅帖木兒)와 평장백첩목아(平章伯帖木兒)가 향을 싸 가지고 와서 대사를 뵙고, 사용한 향과 진흙 바른 베, 매계수(梅桂水)를 모아서 육신을 소상(塑像)하였다.
무신년(공민왕 17, 1368년) 가을에 병란이 임박함에 성에서 다비식(茶毗式)을 하고 유골을 넷으로 나누어 달현(達玄) · 청혜(淸慧) · 법명(法明) · 내정인 장길록(內正 張祿吉)이 제각기 가지고 갔다. 대사의 도제인 달현(達玄)은 바다로 떠났고, 사도 달예(達叡)는 청혜(淸慧)에게 나눠 받은 유골과 함께 고려로 돌아왔다.
임자년(공민왕 21, 1372년) 9월 16일, 왕명에 따라 회암사(檜巖寺)에 사리탑을 세우고 탑에 넣으려고 뼈를 씻다가 약간의 사리를 얻었다. 대사께서 인도로부터 오실 때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사리와『무생계경(無生戒經)』2권을 가지고 오셨는데, 참정(參政)인 위대박(危大朴)이 서문을 썼다. 손수『원각경(圓覺經)』을 쓰셨는데 구양(歐陽)이 왕명을 받들어『원각경(圓覺經)』말미에 발문(跋文)을 썼다. 대사의 게송은 매우 많아 따로 기록하였으며 모두 세상에 퍼져있다.
운남(雲南)의 오(悟)는 보지 않은 일을 말할 수 있었는데, 7세 때에 대사를 따라 출가했다. 그 때 이미 대사의 나이는 환갑이셨고, 오(悟)의 나이 75세 되는 해에 대사께서 돌아가셨다.
길문강(吉文江) 인걸(仁杰) 스님의 말에 의하건대, ‘문인인 임관사(林觀寺)의 전 주지 달온(達蘊)은 불도를 수행하기 위해 갈수록 더욱 부지런히 했고, 사도인 달예(達叡)는 수 천리 밖에서 대사의 유골을 산 사람 섬기듯 하여 죽은 이를 전송함에 유감이 없게 하였다.’한다. 나옹(懶翁)의 제자인 아무개(某)의 말에 따르면, ‘우리 스승께서도 일찍이 스승으로 모시었으니, 대사께서는 나의 조(祖)가 되신다.’하고, 대사의 제자이신 정업원(凈業院) 주지 묘장(妙藏) 비구니와 함께 연석(燕石)을 사서 회암사(檜巖寺) 벼랑에 세우고자 하니, 천륜으로 비유하면 효자이며 공손한 후손들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일이 대궐에 알려져 신 색(穡)은 명(銘)을 짓고, 신 수(脩)는 글씨를 쓰고, 신 중화(仲和)는 전자로 편액하라는 왕명이 있었다. 신 색(穡)은 말한다. “대사의 몸은 이미 화장되어 네 곳으로 나누어졌다. 나머지 세 곳의 행방은 알 수도 없는데, 어느 곳에 탑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명문을 지어서 전승되기를 도모하는 자 누구이며, 붓을 들고 쓰려는 자는 누구인가. 모르겠다! 지공선사(指空禪師)께서는 여기에 계시는가? 저기에 계시는가? 자취를 더듬고자 하나 매미가 허물을 벗듯 흔적을 남기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스승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억지로 하는 일인 듯하다.
신은 이에 대하여 유감이 없지 않으나 다만 황공스럽게 교지를 받들었으니 명을 붙인다. 명은 이러하다.

대사의 발자취는 서역에서 시작하였다.
만왕(滿王)의 아들이요, 보명(普明)의 수제자이다.
난경(灤京)에서 지우를 만나니, 참으로 좋은 때로다!
중화의 땅을 방문하는 일이 왜 그리 더디었던지.
님의 발자취가 가지 않은 나라 없으니
지붕 위의 암키와요 물에 던진 돌이라.
천력제가 승려를 사랑하여 불법은 더더욱 퍼졌다.
속세의 옷을 입고 계셔도 도의 명성은 더더욱 높아지고,
미친 듯 익살맞은 말씀은 사람들이 헤아릴 바 아니었고
병란을 예언하심에 빈틈없이 분명하니
선견지명 이러하심은 그대로가 도력의 정수라
의심하거나 비방하여도 대사의 마음은 평온하다.
사리가 환히 나타나자 숨을 죽이지 않은 이 없으니
누가 사람의 성품이 극에 맞지 않는다고 하리오.
이 땅 회암사에 자리 잡고 돌을 세워 기록해 두노니
혹시라도 와전됨이 없이 영겁까지, 영원하시라.

숭정기원후 네 번째 무자년(순조 28, 1828년) 5월 일에 세우다

 

회암사지공선사부도비(檜巖寺指空禪師浮屠碑)

 

위치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 회암사 해제 :인도 출신의 승려로 중국에서 활동한 지공대사 선현(指空大師 禪賢 : 1300~1361)을 기리는 비. 지공이 원(元)에 간 나옹을 만나 법을 전해 주었고, 중국에서 입적한 지공의 유골이 1370년에 개경에 도착하여 1372년에 나옹이 회암사에 지공 승탑을 세우고, 나옹 사후 1378년에 지공탑비가 세워졌다. 지공의 유적은 화장사와 안심사에도 세워졌다. 이 비문은 조각난 비편 16조각이 동국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일부 내용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남아 있는 비문의 내용은 지공의 인도의 108대 조사라는 것과 황제 등의 우대를 받았다는 것, 그리고 반야를 공부했다는 것 정도이다

 

회암사지공선사부도비(檜巖寺指空禪師浮屠碑)

 

檜巖寺指空禪師浮屠碑

西天提納薄陁尊者浮屠銘幷序」
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侍中判典理司事領孝思觀書筵藝文館春秋館事右文館大提學上護軍韓山府院君李穡奉 敎撰」
通訓大夫黃州牧使黃州鎭兵馬僉節制使李義玄追書」
迦葉百八傳提納薄陁尊者禪賢號指空泰定間見天子于難水之上論佛法稱 旨命有司歲給衣粮曰吾不爲是也去而東游高勾麗禮金剛山法起道場有旨趣還燕天曆初 詔與所幸諸僧講法內庭 天子親臨聽焉諸僧恃恩頡頑作氣勢惡其軋己」
沮不得行未幾諸僧或誅或斥而師之名震暴中外至正 皇后皇太子迎入延華閣問法師曰佛法自有學者專心御天下幸甚又曰萬福萬福萬中缺一不可爲天下主所獻珠玉辭之不受天曆以後不食不言者十餘年旣言時自稱我是天下主又斥后妃」
曰皆吾侍也聞者恠之不敢問所以久而聞于 上上曰渠是法中王宜其自負如此何與我家事耶中原兵將興師於廣坐語衆曰汝識吾兵馬之多乎某地屯幾萬某地屯幾萬師所居寺皆高麗僧一日忽語之曰汝何故叛耶欲鳴鼓攻之而止數日遼陽省馳」
奏高麗兵犯界京師省衆之聚也每語其人曰速去之旣而 天子北狩中原兵入城立府曰北平師豈偶然者哉師自言吾會祖諱師子脇吾祖諱斛飯皆王伽毗羅吾父諱滿王摩竭提國吾母香志國公主吾二兄悉利迦羅婆悉利摩尼吾父母禱于東方大」
威德神而生吾吾幼也性樂淸凈不茹酒腪五齡就師受國書及外邦之學粗通大義葉去父病醫莫效筮者曰嫡子出家王病可痊父詢三子吾卽應父大喜呼吾小字曰婁恒囉哆婆及能如是耶母以季故初甚難之割愛願舍父病立愈八歲備三衣送那闌陁」
寺講師賢所剃染五戒學大般若若有得問諸佛衆生虗空三境界師云非有非無是眞若可往南印度楞伽國吉祥山普明所硏窮奧旨時年十九奮發獨行禮吾師于頂音菴師曰從中笁抵此步可數否吾不能荅退坐石洞六閱月吾乃悟欲起兩脚相貼」
其王召醫圭藥立愈告吾師曰兩脚是一步吾師以衣鉢付之摩頂記曰下山一步便是師子兒座下得法出身二百四十三人於衆生皆少因緣汝其廣吾化其往懋哉號之曰蘇那的沙野華言指空吾以偈謝師恩己語衆曰進則虗空廓落退則萬法俱沉大」
喝一聲初吾之尋吾師也歷囉囉許國有講法華者吾說偈觧其疑且哆國男女雜居裸形吾示以大道香至國王聞吾至喜曰吾甥也▨留不肯華嚴師廣說二十種菩提心吾喩以一卽多多卽一迦陵伽國海岸龜峰山梵志居之其語曰萬丈懸崖投身而死」
當得人天王身吾曰修行在心何與於身令修六度十地等法結夏摩利支山乃至楞加國焉辭吾師而下山也無縫塔主老僧中路相迓知吾有得也請吾演法吾頌塔而去于他國主信外道以吾有殺盜邪淫之戒召妓同浴吾帖然如亡人王嘆曰是必異人」
也其外道以木石作湏彌山人於頭胷腿安立一山以酒膳祠山男女合於前名陰陽供養吾擧人天迷悟之理勘破邪宗佐理國主信佛吾以偈白之王答以偈吾復偈之王施以珍珠數珠會中有尼越衆問曰彼師此弟中間是誰吾一喝尼大悟有針眼中象王」
過之頌獅子國有如來鉢佛足跡一鉢飯能飫萬僧佛跡時放光明吾皆瞻禮麽哩耶囉國信梵志吾不入哆囉縛國正那俱信吾據座下語有尼默契迦羅邪國亦信外道其王見吾喜甚吾示以大莊嚴功德寶王經摩醯莎羅王因地品王曰法外更有正法外道」
欲害吾吾卽出城日己黑有虎至侍者知鳥音升木以避曰汝旣知禽語吾所說法能知否侍者無語痛行二十棒乃悟神頭國流沙茫茫不知所適有樹其實如桃飢甚摘食二枚未竟神勾到空居廣殿老人正座云賊何不作禮吾曰吾佛徒也何得禮汝老罵」
旣稱佛徒何偸果爲吾曰饑火所逼老云不與而取盜也今且放汝其善護戒使閉目須臾己至彼岸煎湯臥木之上乃大蟒也的哩囉兒國女求合以飢欲求食若將應之而問其馬之良者以實告吾卽騎之而走果如飛便至他境忽一人縛吾去使牧其羊會大」
雪入洞入定七日夜白光出洞其人除雪而入見吾趺坐大喜施以衣寶不受男女俱發心示吾正路行且久未見人忽遇諸途心甚悅其人捉吾至王所面跪曰天旱必此妖 請殺之王曰且縱之三日不雨殺何遲吾燒香一祝大雨三日嵯楞陁國有顚僧見人」
來以牛頭三列於地置蒲團其上默而坐吾一見火之彼呌曰山河大地成一片矣阿耨池僧道巖居其傍以草作小菴人來則焚之呌曰救火救火吾至才呌救火踢到凈甁道巖曰可惜來何遲末羅婆國事佛甚謹而邪正雜糅吾說破邪論外道歸正矣城東寶」
和尙墾其所居四面爲田置菜種一器人至則治田而己無一言吾以菜種從而下之僧呌曰菜生矣菜生矣
其城中有織紗者人至不言織不▨吾以刀斷之其人曰多年之織畢矣阿耨達國僧省一居窰中見人來以煤塗面出舞而復入吾以偈相喝早娑國僧」
納達居道傍數年見來者曰好來見去者曰好去吾便與三棒彼迴一拳的哩侯的國婆羅門法盛行吾縮手而去挺佉哩國眞邪同行遇盜裸剝稱伽羅國王迎入內請說法有寶峰者說經吾與之互相宣說東行數日有高山曰鐵山無土石草木日照朝陽其勢」
如火又名火熖行七八日可達山頂有國土几十七八所橫接天▨北不知其幾千萬里其東河水出焉兩岸高聳▨橋以渡氷雪不消故號雪山孤身飢窮啖野果以達西蕃之境焉吾之行化于中國也遇北印度摩訶班特達於西蕃偕至燕京居未久西游安西」
王府與王傅可提相見提請留學法吾志在周流語之曰我道以慈悲爲本子之學倍是何耶提言衆生無始以來惡業無筭以眞言一句度彼超生受天之樂吾云汝言妄也殺人者人亦殺之生死相讐是苦之本提曰外道也吾云慈悲眞佛子反是眞外道王」
有獻郤之西蕃摩提耶城其人可化呪師疾吾以毒置茗飮適使臣至自都請吾同還欲師班特達互爲揚化不契又去伽單呪師欲殺吾吾乃去蝦城主見吾大喜大外道妬之打折吾一齒及將去欲要於路必殺之其主護送至蜀禮普賢臣像坐禪三年大毒河遇」
盜又赤立走羅羅斯地界有僧施一禪被有女施一小衣乃應檀家供同齋僧得放生鵝欲烹而食之吾擊其婦婦哭僧怒見逐吾聞土官塑吾像水旱疾疫禱必應金沙河關吏見吾婦人衣髮又長恠而問奚自吾言語不通書西天字又非所知也於是留之晩」
隈石隙而臥不覺少間至彼岸渡子異吾禮拜雲南城西有寺上門樓入定居僧請入城至祖變寺坐桐樹下是夜雨旣明衣不濡赴其省祈晴立應坐夏龍泉寺書梵字般若經衆聚乏水吾命龍引泉濟衆大理國吾却衆味但食胡桃九枚度日金齒烏撤烏蒙一」
部落也禮吾爲師塑像廟之吾聞無賴子以吾像禪捧擲之地而不能擧悔謝取安如故安寧州僧問昔三藏入唐伏土知音時吾己會雲南語應曰古今不同聖凢異路請說戒經燃頂焚臂官民皆然中慶路諸山請演法凢五會太子禮吾爲師羅羅人素不知佛」
僧吾至皆發心飛鳥亦念佛名貴州元帥府宮皆受戒猫蠻猺獞靑紅花竹打牙獦狫諸洞蠻俱以異菜來請受戒鎭遠府有馬王神廟舟過者必肉祭不然舟損吾一喝放舟行常德路金剛白鹿二祖師觀音自塑之像洞庭湖靈異頗多能住風雨吾行適風作」
浪湧爲說三歸五戒唐梵互宣先時祭者夜獻絲屨明則屨皆破後皆却其獻從素祭湖廣省參政欲逐吾去吾曰貧道西天人也遠謁 皇帝助揚正法汝不欲我祝 皇帝壽耶過盧山東林寺見前身塔巋然骨猶未朽淮西寬問般若意吾曰三心不可得」
楊州太子以舟送吾至都大順丞相之室韋氏高麗人也請於崇仁寺施戒旣而至灤京泰定之遇是己嗚呼師之游歷如是哉信乎其異於人也師自天歷褫僧衣大府大監察罕帖木兒之室金氏亦高麗人也從師出家買宅澄淸里闢爲佛宮迎師居之師題其」
額曰法源盖天下之水自西而東故取以自比焉師辮髮白髯神氣黑瑩服食極其侈平居儼然人望而畏之至正二十三年冬內侍至師曰爲我奏爾主我生日後去耶生日前去耶章佩卿速哥帖木兒囘 旨留師小住一冬師又曰天壽寺吾影堂也是歲十一」
月二十日示寂于貴化方丈師所搆而師所名也有 旨省院臺百司具儀衛送龕于天壽寺明年御史大夫圖堅帖木兒平章伯帖木兒凾香謁師用香▨泥布梅桂水團塑肉身戊申秋兵臨城茶毗四分達玄淸慧法明內正張祿吉各持而去其徒達玄航海司」
徒達叡從淸慧得之俱東歸▨壬子九月十六日以王命樹浮屠於檜巖寺將入塔灌骨得舍利若干粒師自西天携文殊師利無生戒經二卷而來參政危大朴序其端手書圓覺經歐陽承旨跋其尾師之偈頌甚多別有錄皆行于世雲南悟無見能言七歲授師」
出家時己云師年甲子一周矣悟七十五而師乃寂吉文江釋仁杰云門人前林觀寺住持達蘊謀載道行愈久而愈厪司徒達叡間關數千里奉師骨如事存以致送死無憾焉懶翁弟子某曰吾師亦甞師師師吾祖也與師之弟子凈業院住持妙藏比丘尼買燕」
石將樹之檜巖之崖揆諸天屬不曰孝子順孫歟事聞于 內有 旨臣穡銘臣脩書臣仲和篆額臣穡曰師之身旣大而四分之矣未知其餘立塔於何地而求銘以謀其傳者誰歟秉其筆者誰歟又未知指空師在此歟在彼歟無亦視爲蟬蛻不復」
顧藉而爲其徒者思報其恩强而爲之歟臣於是不能無感焉祇慄承敎系之以銘銘曰 維師之跡發軔西域滿王之子普明之嫡灤京遇知允也其時延華之訪云何其遲囘視我轍靡國不歷屋建之瓴水投之石天曆幸僧拂我以增服今之服道譽愈騰狂」
言戱譃匪人攸測談兵未釁如析白黑先見之明乃道之精或疑或謗師心則平舍利旣赫罔不竦息孰謂人性不協于極胥斯檜巖樹石以劖無敢或訛于永厥監
崇禎紀元後四戊子五月 日立

追記
東國三祖師指空懶翁無學浮圖及事蹟碑在楊州天寶山檜巖寺之北崖指空懶翁兩碑牧穩李文靖撰韓 脩權仲和書麗季所竪也無學碑卽」
我」
太宗踐祚之十年庚寅奉 上王命命詞臣卞季良製孔俯書幷竪于兩師碑塔之下寺近廢而碑獨存今 上二十一年辛巳有李膺峻者與術」
人趙大鎭毀浮圖而瘞其親指空無學二碑俱被撞碎道臣聞于朝 上震駭李與趙幷 命島配掘其瘞仍 敎曰所碎之碑國初所命至今日」
而不能保存者亦甚怵然分付畿營更爲竪建如是處分豈爲釋敎而然一則爲國初所重也一則爲國綱也於是自度支劃錢三千兩出付僧德」
俊等使之重建而畿營主其事指空碑屬文靖後孫牧使義玄改書無學碑碎不甚模舊刻孔俯書刻之戊子秋工始就竪于舊址盖指空懶翁自」
中國來演釋敎於麗季無學師其道在我國初定鼎時其功多有可紀者檜巖寺之同竪三碑良以此也于今四百餘年之後忽遭破毀抑亦佛家」
之一刧而乃我聖上惕然憾懷爰命有司一擧而重新之使湮晦之古蹟賴而復顯其傳益遠豈不有光於 大聖人追舊紀功之盛典歟茲具」
顚末記之石右」
崇祿大夫行龍驤衛上護軍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原任 奎章閣提」
學五衛都摠府都摠管 世子右賓客金履喬追記」
嘉善大夫京畿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水原府留守開城府留守江華府留守廣州府留」
守巡察使金鐮書」
崇禎紀元後四戊子五月 日立」
主事都監董仁峯堂德俊 奉恩寺首禪宗判事釋會善 城庵堂永哲」
副看役奇庵堂義寬 前判事喚虛堂等還」
物力次知嘉善熙行 奉先寺首敎宗判事平松堂普蔡」
南漢都摠攝翠峯堂寬活 公員嘉善釋最仁」
中軍嘉義釋義察 道庵堂聖麒」
北漢都摠攝嘉義釋性黙 影漳堂玉印」
中軍嘉義釋道聞 秋潭堂三學」
龍珠寺都摠攝諸方大法師肯俊 印城堂宜賢」
中軍嘉善釋正愚 山人信瓊」
刻手朴枝春」
石手朴宗錫 文守兆」

 

회암사 지공선사 부도비(檜巖寺 指空禪師 浮屠碑)

서천(西天 : 인도) 제납박타존자부도명 병서(提納薄陁尊者浮屠銘 幷序)
벽상 삼한 삼중대광 문하시중 판전리사사 영 효사관 서연 예문관 춘추관사 우문관 대제학 상호군 한산부원군(壁上 三韓 三重大匡 門下侍中 判典理司事 領孝思觀 書筵藝文館 春秋館事 右文館大提學 上護軍 韓山府院君) 이색(李穡)이 왕명을 받들어 짓고,
통훈대부(通訓大夫) 황주목사 황주진병마첨절제사(黃州牧使 黃州鎭兵馬僉節制使) 이희현(李羲玄)이 쓰다.

가섭(迦葉) 108대 법손으로 백팔전(百八傳)을 이어받은 제납박타존자(提納薄陁尊者) 선현(禪賢)을 지공(指空)이라한다.
태정(泰定) 연간에 난수(難水) 가에서 천자를 뵙고 불법을 강론한 것이 천자의 뜻에 맞았다. 천자께서 담당 관리에게 해마다 옷과 양식을 하사하도록 지시하셨다. 대사께서 “이것을 위함이 아니다.”하시고는, 곧 동쪽으로 길을 떠나 고려 금강산(金剛山) 법기도량(法起道場)에서 예불을 올렸다. 그러나 천자께서 다시 부르시니 연경(燕京)으로 돌아가셨다.
천력(天曆) 초, 천자께서 조서를 내려 총애하는 중들에게 궁궐 안뜰에서 불법을 강론토록 하고 친히 참석하여 들었다. 이때 중들이 천자의 평소 은총만 믿고, 대사에게 대항하며 기세를 부렸으며, 자기들과 의견이 맞지 않음을 미워하여 불법을 강론하지 못하게 했다. 얼마 안 되어 중들은 목이 베이거나 물리침을 당하였으며, 대사의 명성은 더욱 국내외에 떨쳐 드러났다.
지정(至正) 연간, 황후와 황태자께서 연화각(延華閣)으로 대사를 모시고 법을 물으니, 대사께서 “불법을 배울 자는 따로 있으니, 오로지 한 마음으로 천하를 다스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하시고는 또 “만복을 누리소서. 만복 중에 하나가 모자라도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하셨다.
대사께 바치는 주옥(珠玉)을 사양하며 받지 않으셨다. 천력(天曆) 연간 이후 10여 년 동안 잡숫지도 말씀하시지도 않으셨다. 입을 여시자 “나는 천하의 주인이다.”하시고, 또 후비들을 꾸짖어 “다 내 시녀로구나.”하셨다. 듣는 이들이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였으나 아무도 그 까닭을 묻지 못하였다. 오랜 뒤에 위에 알려지자, 천자께서 “그는 불법의 왕이니 마땅히 그리 자부할 것이다. 어찌 우리 속세의 일과 관계있겠느냐!” 하셨다.
중원(中原)에 병난이 일려고 할 때, 대사께서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너희들은 아느냐? 나의 군사가 많다는 사실을. 아무 곳에 몇 만 명이 있고, 아무 곳에 몇 만 명이 있다.”하셨다. 거처하시는 절에 고려의 중들이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어찌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느냐? 내 북을 쳐 공격할까 하다 그만두었다.”하셨다. 며칠 후 요양성(遼陽省)에서 급히 아뢰기를, “고려의 병사가 국경을 넘었습니다.” 하였다.
경사(京師 : 서울)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대사께서 항상 경사의 사람들에게 “속히 떠나라.”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자께서 북으로 출정한 사이에, 중원의 병마가 입성하여 부(府)를 세우고 북평(北平)이라 하니, 대사께서 말씀 하신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는가!
대사께서는 자신의 일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증조할아버지 이름은 사자협(師子脇)이요, 할아버지 이름은 곡반(斛飯)이니, 모두 가비라국(伽毗羅國)의 왕이시다. 나의 아버지 이름은 만(滿)으로 마갈제국(摩竭提國)의 왕이시고, 나의 어머니는 향지국(香志國)의 공주셨다. 형이 두 분이셨는데 이름은 실리가라파(悉利迦羅婆)와 실리마니(悉利摩尼)이다. 부모님께서 동방대위덕신(東方大威德神)에게 기도를 드려 나를 낳으셨다.
나는 어려서도 맑고 깨끗함을 좋아하여 고기와 술을 먹지 않았고, 다섯 살에 스승에게서 외교 문서와 외국의 학문을 교육 받았지만 대략적인 뜻을 알았을 때 이들을 떠났다. 아버님께서 병이 드셨는데 약을 써도 효험이 없었다. 점치는 이가 말하기를, “정실부인의 아드님께서 출가하신다면, 왕의 병환이 나으실 것입니다.”하였다. 아버지께서 우리 형제에게 출가할 뜻을 물으셨을 때, 내가 얼른 대답하였다. 아버님께서 몹시 기뻐하시며, 어렸을 때 부르던 이름으로 부르시면서, “누달라치파(婁恒囉哆婆)야, 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하셨다. 어머님께서는 내가 막내라 처음에는 매우 어렵게 여기셨으나, 애정을 끊고 출가하기를 바라시니 아버님의 병환이 곧 나으셨다.
여덟 살 때에 삼의(三衣 : 비구가 입는 세 가지 가사)를 갖추고 나란타사(那闌陁寺)의 강사(講師) 율현(律賢)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가사와 오계를 받았다.『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密多經)』을 배우다가 얻은 바가 있는 듯하여, 부처님과 중생과 허공과의 세 경계를 여쭈었더니, 스승께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이 참 반야(般若)이니, 남인도 능가국 길상산(楞伽國 吉祥山)의 보명(普明)에게로 가서 더욱 깊은 진리를 연구하라.” 하셨다. 그때 내 나이 19세로, 분발해서 혼자 걸어서 스승을 정음암(頂音菴)에서 뵙고 인사를 드렸다. 스승께서 “중천축(中笁抵)에서 여기까지 걸어왔으니 걸음 수효를 알겠구나?”하시거늘, 나는 대답하지 못하였다. 물러나 암석 동굴에서 6개월을 좌선을 하고 나서야 깨달았으나 두 다리가 붙어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 나라의 왕이 의사를 불러 약으로 치료하자 바로 일어섰다. 나는 스승에게 “두 다리가 한 걸음입니다.”하니, 스승께서 가사와 바리때를 주시고 정수리를 만지며 수기(摩頂受記)하시기를, “산을 내려가는 한걸음이 곧 사자아(師子兒)구나! 내 법좌 밑에서 법을 얻어 세상에 나간 이가 243명인데 모두가 중생과 인연이 드물었다. 네가 나의 교화를 널리 퍼뜨려라. 가서 힘쓰라!”하시고, 호(號)를 소나적사야(蘇那的沙野)라 하시니 중국어로 지공(指空)이다. 나는 게(偈)를 지어 스승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대중에게 “나아가면 허공이 활짝 트이고 물러서면 만법이 함께 완전히 가라앉는다.”라고 한 마디 크게 갈(喝) 하였다.
내가 처음 스승님을 뵈러 갈 때, 라라허국(囉囉許國)을 지나가는데『법화경』을 강론하는 자가 있기에, 내가 게(偈)로 그의 의심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단치국(旦哆國)에서는 남녀가 벌거벗은 채 섞여 살고 있었는데, 내가 그들에게 대도(大道)를 보여주었다. 향지국왕(香至國王)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면서 “내 조카이다.”하면서 가지 못하게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화엄경(華嚴經)』을 강의하는 사(師)가 스무 가지의 보리심을 허황되게 말하고 있기에, 내가 ‘하나가 곧 여럿이요, 여럿이 곧 하나’라는 이치를 깨우쳐 주었다. 가릉가국(迦陵伽國) 바닷가의 구봉산(龜峰山)에는 범지(梵志)가 살고 있었다. 그가 “만 길(대략 30㎞)의 가파른 벼랑에서 떨어져 죽으면 인간계와 천상계에서 왕이 될 것이다.”하기에, “수행은 마음에 달린 것, 어찌 몸과 관계있겠느냐?”하고, 육바라밀(六度)과 십지(十地) 등의 법을 닦으라고 하였다.
마리지산(摩利支山)에서 하안거(夏安居)를 지내고 바로 능가국(楞加國)에 이르렀다. 스승님께 하직인사를 드리고 산에서 내려올 때, 무봉탑(無縫塔)을 지키는 노승이 길까지 마중 나와서, 내가 터득한 것이 있음을 알고 설법을 청하였지만, 나는 탑만을 찬송하고 떠났다. 우지국(于地國) 군주는 이단사설을 믿었다. 내가 불살생(不殺生) · 부도(不盜) · 불사음(不邪淫)의 계(戒)를 지킨다는 것을 알고 기생을 불러 함께 목욕을 하라 하기에, 내가 죽은 사람같이 태연히 행동하였더니, 군주가 탄복하며 “이 사람은 비범한 사람임에 틀림없다.”하였다. 그 나라는 이단들이 나무나 돌로 수미산(湏彌山)을 만들면, 사람들은 머리 · 가슴 · 다리에 산 하나씩을 고정시키고 술과 안주를 차려 산에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많은 남녀가 그 산 앞에서 교합하였는데, 그들은 이것을 음양공양이라 하였다. 나는 인간계와 천상계, 미혹과 깨달음의 이치를 들어 그들의 사악한 근본을 살펴서 타파해 주었다.
좌리국(佐理國) 군주는 부처를 믿기에 내가 게로 아뢰니, 왕도 게로 답하였다. 내가 다시 게를 읊으니, 왕이 진주 몇 알을 시주하였다. 이 모임에 있던 비구니가 대중 앞으로 나와 “저 스승 이 제자의 중간은 누구입니까?” 하기에, 내가 갈(喝)을 한 번 하자, 비구니가 크게 깨닫고는 ‘바늘귀 속을 코끼리가 통과한다.’는 내용의 게송을 읊었다. 사자국(獅子國)에는 여래(如來)의 바리때와 부처의 발자국이 있다. 여래(如來)의 바리때 한 개만으로 만 명의 중을 배불리 먹이며, 부처의 발자국에서는 때때로 밝은 빛이 난다. 나는 모두를 보고 예불하였다.
마리야라국(麽哩耶囉國)은 범지(梵志)의 불법을 믿으므로 나는 들리지 않았다. 차라박국(哆囉縛國)은 불법과 이단을 함께 믿었는데, 내가 법좌에 기대어 한 마디 하니, 비구니 중에 말없이 뜻을 깨달은 이가 있었다. 가라나국(迦羅那國)도 이단의 도를 믿었다. 그 왕이 나를 보고 매우 기뻐하기에 내가『대장엄공덕보왕경(大莊嚴功德寶王經)』의「마류수라왕인지품(摩醯莎羅王因地品)」을 보여주니, 왕이 “법 밖에 또 바른 법이 있었소이다.”하였다. 이단의 무리가 해치려 하기에 바로 성을 빠져나오니, 날이 벌써 저물었다. 호랑이가 다가오는 것을 시자(侍者)가 새 울음소리로 알아듣고, 나무로 올라가서 화를 피하였다. 내가, 시자(侍者)에게 “너는 새의 말을 들을 줄 아니, 나의 설법도 알겠구나?”하였더니, 시자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몽둥이로 스무 대쯤 아프게 때렸더니 이내 깨달았다.
신두국(神頭國)은 사막이 너무 넓어 어디로 가야 좋을지 모를 형편이었다. 마침 열매가 복숭아처럼 생긴 나무가 있었다. 배가 너무 고파 따서 먹었다. 그런데 두 개를 다 먹기도 전에 공신(空神)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집으로 끌고 가버렸다. 넓은 전각에 몸을 바로하고 앉아 있던 노인이 “도둑아! 어째서 절을 하지 않느냐?”하였다. 내가 “나는 불도(佛徒)이다. 어찌 너에게 절을 하겠느냐?”하니, 노인은 꾸짖으며 “불도라면서 어째서 남의 과일을 훔쳤느냐?”하기에, “굶주림과 더위에 시달려서 그랬소.”하였더니, 노인이 다시 “주지 않은 것을 가진 것은 도둑질이다. 이제 너를 놓아주겠으니 계율이나 잘 지켜라.”하고는 “눈을 감아라.”하였다.
잠깐 사이에 이미 강 언덕 이쪽에 와 있었다. 쓰러진 거목 옆에서 차를 끓였는데, 알고 보니 그 나무란 것이 바로 큰 구렁이였다. 적리라아국(的哩囉兒國)에서는 여인이 교합할 것을 요구했다. 배가 고프므로 음식이나 구하려고, 허락하는 체 하면서 좋은 말이 어느 것이냐고 물었더니 사실대로 일러주었다. 내가 얼른 올라타고 달리니, 과연 나는 듯이 이내 다른 나라 국경에 이르렀다. 이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를 묶어 가더니 자기네 양을 지키라 하였다. 때마침 큰 눈이 내려 동굴로 들어가 7일 밤낮을 선정을 닦으니, 흰 광채가 굴 밖으로 뻗었다. 그 사람이 눈을 치우고 들어와, 내가 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옷과 보물을 시주하였지만, 받지 않았다. 남녀가 모두 보리심을 보이기에, 내가 길을 바로잡아 주었다.
얼마를 걸어도 사람을 볼 수 없었는데, 갑자기 길에서 사람을 만나 매우 기뻤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붙잡아 자기 왕 앞에 데리고 가 무릎을 꿇리며 “날이 가무는 것은 반드시 이 요물 때문인가 합니다. 이 요물을 죽이십시오.”하니, 왕이 “놓아주었다가 3일 뒤에 비가 오지 않거든, 그때 죽여도 늦진 않을 것이다.”하였다. 내가 향을 사르고 한 번 빌었더니 큰 비가 3일 동안 내렸다.
차릉타국(嵯楞陁國)에 있는 미치광이 중은 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 소머리 세 개를 땅에 늘어놓고 부들로 만든 둥근 방석을 그 위에 두고 말없이 앉는다. 내가 보고 불을 질러 태워버리니, 그가 “산하대지가 한 조각이 되었구나.”하며 부르짖었다.
아누지(阿耨池)의 중 도암(道巖)이 그 곁에다 풀로 지붕을 이은 작은 암자를 짓고 살았다. 그러다 사람이라도 오면 불을 지르며 “불을 끄라, 불을 끄라!”하며 부르짖었다. 내가 이르자마자 역시 “불을 끄라!” 함에, 내가 물병을 걷어차니, 도암(道巖)이 “애석하다, 오는 것이 왜 그리 늦는가?” 하였다.
말라파국(末羅婆國)에서는 부처 섬기기를 매우 부지런히 하였으나 이단과 정도(불교)가 뒤섞여 있었다. 내가 파사론(破邪論)을 설했더니 이단의 도들이 바른 길(불교)로 돌아왔다. 성의 동쪽에 있는 보화상(寶和尙)은 그가 살고 있는 사방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었다. 그리고 씨앗을 담은 그릇 하나 놓아두곤 사람이 오면 김만 맬 뿐 아무 말도 없었다. 내가 씨앗을 들고 그의 뒤를 따르면서 뿌리니, 중이 “채소가 돋았다. 채소가 돋았다!”하며 외쳤다. 그 성 안에는 비단을 짜는 이가 있는데, 사람이 와도 말도 않고 비단만 짰다. 내가 칼을 들어 비단을 몽땅 끊어버렸더니, 그 사람이 “여러 해 동안의 길쌈을 오늘에야 끝냈구나.”하였다.
아누달국(阿耨達國)의 중 성일(省一)은 기와 굽는 굴속에 살면서 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 그을음을 얼굴에 바르고 춤을 추고는 다시 들어갔다. 내가 게로써 꾸짖어 주었다. 조사국(早娑國)의 중 납달(納達)은 수년을 길가에 살면서 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 “어서 오시오.” 하고, 가는 사람을 보면, “잘 가시오.” 하거늘, 내가 방망이로 세 대를 때려 주었더니, 나에게 주먹 한 방을 날렸다.
적리후적국(的哩侯的國)에는 바라문의 법이 성행하므로 아무런 손도 쓰지 않고 지나쳤고, 정거리국(挺佉哩國)은 진종(眞宗 : 불교)과 이단이 똑같이 행해지고 있다. 도적을 만나 알몸이 되기도 하였다. 녜가라국(禰伽羅國)왕은 나를 궁궐 안으로 맞아들여 설법을 청했다. 보봉(寶峰)이란 분이 경전을 강론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와 번갈아 법을 강연했다.
동쪽으로 여러 날을 걸어가니 높은 산이 나왔는데 철산(鐵山)이라 하였다. 흙도 돌도 풀도 나무도 없으며, 햇볕이 내리쬐는 아침의 태양은 그 기세가 불같아서 화염산(火熖山)이라고도 했다. 7~8일을 걸어야 산의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었다. 17~8개의 나라가 가로로 이어져 하늘에 닿았으며, 그 북쪽은 몇 천만리인지 알 수 없지만, 동쪽으론 강이 흘렀다. 양쪽 기슭이 높이 솟구쳐있어 다리를 놓아 건넜으며, 얼음과 눈이 녹질 않아 설산(雪山)이라 불렀다.
혼자 몸으로 굶주리다, 들에 있는 과일을 따먹으면서 서번(西蕃)의 경계에 도달했다. 내가 중국을 교화시키러 다니던 중에 북인도의 마가반특달(摩訶班特達)을 서번(西蕃)에서 만나 함께 연경(燕京)까지 왔다. 연경(燕京)에 거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쪽 안서왕부(安西王府)로 가서 왕의 스승인 가제(可提)를 만났다. 가제(可提)는 그곳에 머물면서 법을 배우라고 하였으나, 나의 뜻은 두루 다니는 데 있었으므로 “나의 도는 자비(慈悲)가 근본이고, 당신의 학문은 이와 반대이니 어쩌려는가?” 하니, 가제(可提)가 “중생은 먼 과거로부터 지은 악업(惡業)이 헤아릴 수 없다. 내가 진언(眞言) 한 마디로 그들을 구제하면, 생사를 벗어난 하늘의 쾌락을 누릴 수 있다.” 하였다. 내가 “그대의 말은 망언이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람이 또 그를 죽이니, 살거나 죽거나 간에 서로 원수가 된다. 이것이 괴로움의 근본이다.” 하니, 가제(可提)가 “이단의 도이다.” 하였다. 내가 “자비(慈悲)는 참 불자요, 이를 거스르는 것이 그야말로 이단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선물을 주었으나 물리쳤다.
서번(西蕃)의 마제야성(摩提耶城)에서는 사람들은 교화할 만하였다. 주술사는 나를 미워하여 독약을 섞은 차를 마시라고 했다. 때마침 사신이 수도로부터 와서 나에게 함께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반특달(班特達)을 스승으로 하여 서로 불법을 선양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떠났다. 가단(伽單)에서도 주술사가 나를 죽이려 하기에 떠나갔다.
하성(蝦城) 성주는 나를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이단의 무리들은 질투하여 나를 패서 이 한 대를 부러뜨렸다. 떠나려는 데도, 이단의 무리들은 반드시 죽이겠다며 길목에서 기다리므로 하성(蝦城)의 성주가 나를 촉(蜀)까지 호송해주도록 했다.
거대한 보현보살(普賢菩薩)상에 예불한 뒤 3년 동안 좌선하였다. 대독하(大毒河)에서 도적을 만나 다시 알몸으로 달아났다. 라라사(羅羅斯) 지역에 이르자, 중이 가사 한 벌을 주었고 여인이 작은 옷 한 벌을 주었다. 비로소 절에 시주하는 집안(檀家)의 공양 요청에 응할 수 있었다. 공양 요청을 받고 함께 간 중이 풀어 놓고 키우는 거위를 잡아서 삶아 먹으려 하였다. 내가 공양주(供養主)의 부인을 쳤더니, 부인이 그것을 보고 통곡을 했고, 중은 되레 화를 냈지만 쫓겨났다. 듣자니, 그 지방 관리들이 나의 모습을 조각해 세우고, 장마가 지거나 가물거나 질병이 돌 때면 빈다고 하는데, 빌면 반드시 효험이 있다고 하였다.
금사하(金沙河)의 관문을 지키는 아전이 내가 여인의 옷을 입었고 머리칼도 자란 것을 보고 수상히 여겨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말이 통하지 않아 인도의 글씨를 써서 보였으나 역시 알지 못하므로 억류되었다. 날이 저물어 후미진 바위틈에 누웠는데, 나도 모르는 잠깐 사이에 강 건너에 닿았다. 뱃사공이 나를 기이하다 여기고 절을 하였다.
운남성(雲南城) 서쪽에 있는 절의 다락집에 올라가 선정에 들었더니 그곳에 사는 중들이 와서 성으로 들어오라고 청하였다. 조변사(祖變寺)에 이르러 오동나무 밑에서 좌선을 했다. 그날 밤 비가 왔고, 날이 샌 뒤에도 비가 왔으나 옷이 젖지 않았다. 성(省)에 가서 비가 개기를 빌자 효험이 있었다.
용천사(龍泉寺)에서 여름 안거를 하면서 범어(산스크리트어)로『반야경(般若經)』을 썼다. 대중이 모여 살기엔 먹는 물이 부족해 용에게 물을 끌어들여 대중을 구제케 했다. 대리국(大理國)에서는 모든 음식을 물리치고 매일 호도만 9개씩 먹으며 살았다. 금치오(金齒烏)는 철오몽(撤烏蒙)의 한 부락이다. 나를 스승으로 예우하고 나의 모습을 만들어 사당에 모셨다. 그런데 무뢰한들이 나의 찰흙상이 쥐고 있는 선봉(禪棒 : 禪師의 몽둥이)을 땅에 던졌으나 들지를 못하였다. 뉘우치고 사죄하고서야 제자리에 둘 수 있었다고 한다.
안녕주(安寧州)의 중이 “옛날에 삼장(三藏)이 당(唐)에 들어와서 땅에 엎드려 소리를 들을 줄 알았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때 나는 이미 운남(雲南)의 말을 알고 있었던 터라 “옛날과 지금이 같지 않고, 성인과 범인은 길이 다르다.” 하였다. 그러자 중이 계(戒)와 경(經)을 설해 달라고 청하기를 정수리가 타고 팔이 타는 것처럼 재촉하였고, 관리와 백성들 모두 그리 하였다. 중경로(中慶路)의 여러 산에 있는 절에서 설법해 주기를 청하였다. 무릇 다섯 차례의 법회를 여니, 태자께서 나를 스승으로 예우하였다. 라라(羅羅) 사람들은 원래 부처도 중도 몰랐는데, 내가 라라(羅羅)에 온 뒤로 모두가 발심하여, 나는 새들도 염불을 할 줄 알게 되었다.
귀주(貴州)에서는 원수부(元帥府)의 관리들이 모두 계를 받으니 묘(猫) · 만(蠻) · 요(猺) · 동(獞) · 청(靑) · 홍(紅) · 화(花) · 죽(竹) · 타(打) · 아(牙) · 갈(獦) · 노(狫) 등 모든 오랑캐가 모두 기이한 채소를 가지고 와서 계 받기를 청하였다. 진원부(鎭遠府)에는 마왕신(馬王神)의 사당이 있다. 사당 앞을 지나는 배는 모두 고기로 제사를 지내야지 그렇지 않으면 배가 부서진다고 하였다. 내가 한 번 큰 소리로 꾸짖고 배를 놓아 보냈다. 상덕로(常德路)에서는 금강(金剛)과 백록(白鹿) 두 조사와 관음(觀音)이 자신들의 모습을 조각했다는 상(像)에 예불하였다.
동정호(洞庭湖)에는 신령스럽고 기이한 일이 자못 많았다. 비바람을 멈추게 했던 것은, 내가 동정호를 지나갈 때, 마침 바람이 불고 파도가 용솟음쳤기 때문에, 삼귀(三歸)와 오계(五戒)를 중국어와 범어(산스크리트어)를 섞어서 설법했다. 이보다 앞서 제사를 지내는 이가 밤에 실로 짠 신을 올리고, 날이 밝으면 실로 짠 신을 모두 뜯어버렸다. 이후부터는 바치는 물건을 모두 없애고 소박하게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호광성(湖廣省)의 참정(參政)이 나를 쫓아버리려 하기에 “빈도는 인도 사람이다. 멀리서 황제를 뵙고 바른 법 펴시는 일을 도우려 왔다. 그런데 너는 내가 황제를 위해 축수하는 것을 원치 않으냐?” 하였다. 여산(盧山)의 동림사(東林寺)를 지날 때 눈앞에 신탑(身塔)이 우뚝이 섰는데 뼈조차 아직 썩지 않았다. 회서(淮西)의 관(寬)이 반야(般若)의 뜻을 묻기에, “삼심(三心 : 지성심, 심심, 회향발원심)을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니라.” 하였다. 양주(楊州)의 태자(太子)가 자기의 배를 내어주어 나를 도성까지 전송해 주었다. 대순승상(大順丞相)의 부인 위(韋)씨는 고려인인데, 숭인사(崇仁寺)에서 시행하는 계(戒)에 나를 초대했다. 이윽고 난경(灤京)에 이르니, 이것이 태정제(泰定帝)의 지극한 대우를 받게 된 동기였다. 아! 대사의 여정이 이러하시니 실로 특이하신 분이라 하노라.
대사께서는 천력(天歷) 연간에 승복을 벗었다. 대부대감찰(大府大監察)인 한첩목아(罕帖木兒)의 부인 김(金)씨도 고려인인데 대사를 따라 출가하였다. 김(金)씨는 징청리(澄淸里)에 집을 사서 절로 개조하고 대사를 맞이하여 거처하시도록 하였다. 대사께서 절의 편액을 법원(法源)이라 하신 것은, 천하의 물이 서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가는 뜻을 취하여 자신을 여기에 비유하신 때문이다.
대사께서는 변발을 하고 하얀 수염에, 신기(神氣)는 검은빛으로 빛났고 옷과 음식 매우 사치스러웠다. 평상시 거처하실 때엔 근엄하여 사람들이 바라보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지정(至正) 23년(공민왕 12, 1363년) 겨울에 내시가 오니, 대사께서 “나를 위해 임금에게 알려다오. 내가 생일 전에 떠나야 좋으냐? 생일 뒤에 떠나야 좋으냐?” 하시니, 장패향(章佩鄕) 속가첩목아(速哥帖木兒)가 왕명을 받들고 돌아와서 대사를 만류하매 한 겨울 잠시 머무셨다.
대사께서 또 “천수사(天壽寺)는 나의 영당(影堂 : 畵像을 모신 곳)이라.” 하시었다. 그해 11월 20일 귀화방장(貴化方丈)에서 돌아가셨다. 귀화방장(貴化方丈)은 대사께서 세우시고 대사께서 이름 지으신 곳이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성(省) · 원(院) · 대(臺)의 뭇 관리들이 위의를 갖추어 천수사(天壽寺)에 감실(龕室)을 모셨다. 다음 해 어사대부(御史大夫) 도견첩목아(圖堅帖木兒)와 평장백첩목아(平章伯帖木兒)가 향을 싸 가지고 와서 대사를 뵙고, 사용한 향과 진흙 바른 베, 매계수(梅桂水)를 모아서 육신을 소상(塑像)하였다.
무신년(공민왕 17, 1368년) 가을에 병란이 임박함에 성에서 다비식(茶毗式)을 하고 유골을 넷으로 나누어 달현(達玄) · 청혜(淸慧) · 법명(法明) · 내정인 장길록(內正 張祿吉)이 제각기 가지고 갔다. 대사의 도제인 달현(達玄)은 바다로 떠났고, 사도 달예(達叡)는 청혜(淸慧)에게 나눠 받은 유골과 함께 고려로 돌아왔다.
임자년(공민왕 21, 1372년) 9월 16일, 왕명에 따라 회암사(檜巖寺)에 사리탑을 세우고 탑에 넣으려고 뼈를 씻다가 약간의 사리를 얻었다. 대사께서 인도로부터 오실 때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사리와『무생계경(無生戒經)』2권을 가지고 오셨는데, 참정(參政)인 위대박(危大朴)이 서문을 썼다. 손수『원각경(圓覺經)』을 쓰셨는데 구양(歐陽)이 왕명을 받들어『원각경(圓覺經)』말미에 발문(跋文)을 썼다. 대사의 게송은 매우 많아 따로 기록하였으며 모두 세상에 퍼져있다.
운남(雲南)의 오(悟)는 보지 않은 일을 말할 수 있었는데, 7세 때에 대사를 따라 출가했다. 그 때 이미 대사의 나이는 환갑이셨고, 오(悟)의 나이 75세 되는 해에 대사께서 돌아가셨다.
길문강(吉文江) 인걸(仁杰) 스님의 말에 의하건대, ‘문인인 임관사(林觀寺)의 전 주지 달온(達蘊)은 불도를 수행하기 위해 갈수록 더욱 부지런히 했고, 사도인 달예(達叡)는 수 천리 밖에서 대사의 유골을 산 사람 섬기듯 하여 죽은 이를 전송함에 유감이 없게 하였다.’한다. 나옹(懶翁)의 제자인 아무개(某)의 말에 따르면, ‘우리 스승께서도 일찍이 스승으로 모시었으니, 대사께서는 나의 조(祖)가 되신다.’하고, 대사의 제자이신 정업원(凈業院) 주지 묘장(妙藏) 비구니와 함께 연석(燕石)을 사서 회암사(檜巖寺) 벼랑에 세우고자 하니, 천륜으로 비유하면 효자이며 공손한 후손들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일이 대궐에 알려져 신 색(穡)은 명(銘)을 짓고, 신 수(脩)는 글씨를 쓰고, 신 중화(仲和)는 전자로 편액하라는 왕명이 있었다. 신 색(穡)은 말한다. “대사의 몸은 이미 화장되어 네 곳으로 나누어졌다. 나머지 세 곳의 행방은 알 수도 없는데, 어느 곳에 탑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명문을 지어서 전승되기를 도모하는 자 누구이며, 붓을 들고 쓰려는 자는 누구인가. 모르겠다! 지공선사(指空禪師)께서는 여기에 계시는가? 저기에 계시는가? 자취를 더듬고자 하나 매미가 허물을 벗듯 흔적을 남기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스승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억지로 하는 일인 듯하다.
신은 이에 대하여 유감이 없지 않으나 다만 황공스럽게 교지를 받들었으니 명을 붙인다. 명은 이러하다.

대사의 발자취는 서역에서 시작하였다.
만왕(滿王)의 아들이요, 보명(普明)의 수제자이다.
난경(灤京)에서 지우를 만나니, 참으로 좋은 때로다!
중화의 땅을 방문하는 일이 왜 그리 더디었던지.
님의 발자취가 가지 않은 나라 없으니
지붕 위의 암키와요 물에 던진 돌이라.
천력제가 승려를 사랑하여 불법은 더더욱 퍼졌다.
속세의 옷을 입고 계셔도 도의 명성은 더더욱 높아지고,
미친 듯 익살맞은 말씀은 사람들이 헤아릴 바 아니었고
병란을 예언하심에 빈틈없이 분명하니
선견지명 이러하심은 그대로가 도력의 정수라
의심하거나 비방하여도 대사의 마음은 평온하다.
사리가 환히 나타나자 숨을 죽이지 않은 이 없으니
누가 사람의 성품이 극에 맞지 않는다고 하리오.
이 땅 회암사에 자리 잡고 돌을 세워 기록해 두노니
혹시라도 와전됨이 없이 영겁까지, 영원하시라.

숭정기원후 네 번째 무자년(순조 28, 1828년) 5월 일에 세우다.

 

순조 24권, 21년(1821 신사 / 청 도광(道光) 1년) 7월 23일(신미) 1번째기사
형조에서 회암사의 부도 등을 파괴한 이응준에 대한 법의 적용을 대신들에게 묻다

 

광주(廣州)의 유학(幼學) 이응준(李膺峻)양주(楊州)회암사(檜巖寺) 부도(浮圖)4313) 와 비석을 파괴하고 사리를 훔친 후 그곳에다가 자신의 아버지를 묻었다. 지공(指空)·나옹(懶翁)·무학(無學)4314) 세 선사(禪師)의 부도(浮圖)와 사적비(事蹟碑)가 회암사 북쪽 산비탈에 있었는데, 무학의 비석은 곧 태종(太宗)의 분부를 받아 글을 지어 세운 것이다. 경기의 관찰사가 이 사실을 장계로 아뢰자, 형조에서 법의 적용 여부에 대해 대신들에게 물었다. 영의정 한용귀는 말하기를,
이응준은 매우 악한 범죄를 저질렀으므로 중죄에 처해야 합당하겠습니다만, 그 형량을 참고할 만한 법이 없으니, 그냥 그대로 심리를 해야 합니다. 만일 그가 사리를 훔친 짓에 대하여 논한다면 관(棺)을 열어 시신을 본 죄에 비길 만하고, 그 비석을 파괴한 죄에 대하여 논한다면 임금이 지은 글을 훼손한 죄에 해당되므로, 모두 사형(死刑)을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그를 살려줄 수 있겠습니까? 옛날부터 그 죄가 사형에 관계되면 다만 그 법에 의하여 처단하였지 엇비슷한 다른 법을 적용한 사례가 없었습니다. 이 예를 한번 터놓으면 그 후환이 말할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구구한 저의 소견을 말씀드린다면 그에게는 특별히 사형을 감하여 엄중한 형장을 가하고 외딴섬으로 유배하되, 대사면령이 반포되기 전에는 용서하지 않는 것이 실로 공평한 의의에 부합될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남공철과 우의정 임한호가 말하기를,
“형조에서 그를 중죄에 처하든 살려주든간에 하나의 율을 정하는 것이 실로 사리에 맞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죄안(罪案)에 관한 의논을 묘당(廟堂)에까지 의논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법관이 처리해야 한다.’는 의의로 볼 때 이와 같이 처리해서는 안됩니다. 해당 당상관을 먼저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국가의 큰일 중에서 사형보다 더 중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형관(刑官)이 의심난 일이 있으면 대신들에게 묻기를 청하고, 임금이 의심난 일이 있으면 대신들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이는 살리고 죽이는 권한이 오직 임금과 대신들에게 있기 때문이니, 고금에 공통된 의의이다. 그런데 이번에 좌상과 우상은 가부를 논하지 않고 대신에게 물어보라고 한 형관을 질책하였으니,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죄수를 관대하게 처결하거나 복계(覆啓)할 때에 대신들이 꼭 참여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또한 죄수를 죽이든 살리든간에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을 셈인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영상은 이미 자기의 의견을 말하였으니, 영상 이외에 좌상과 우상에게는 다시 한 가지를 지적하여 의논을 거두어 오도록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8책 181면
【분류】 *사법-치안(治安) / *사법-탄핵(彈劾) / *풍속-예속(禮俗) / *사상-불교(佛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