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경인년 산행/2010.11.14. 회암사지 칠봉산

양주 천보산 회암사 칠봉산 산행 (금지샘)

아베베1 2010. 11. 15. 21:36

       재경 의령칠곡금지샘 산악회 11월정기산행

  일시 :2010.11.14. 양주 회천면 천보산  회암사지,  칠봉산산행

  참석인원 : 재경 칠곡면 금지샘 산악회 36명

  산행시간

  11:00-  15:30 식사시간 포함 (4시간 30분)  

 

   ▶ 식사후 단체사진

   ▶ 회암사지 입구

    ▶  간단한 인사후 산행시작

    ▶ 고려시대 고찰인 회암사지터

 

 

   ▶ 동국제일이며 목은 이색이 회암사의 대한 기록을 남겼다는 안내판  

   ▶  옥정지구 택지개발지역과 수락산돠 도봉불곡산이 한눈에

 

   ▶ 산을 열심히 오르시는 회원님 ..

 

 

 

 

 

 

 

 

 

 

목은문고 제2권
 기(記)
천보산(天寶山) 회암사(檜巖寺) 수조기(修造記)

 

[주D-001]방할(棒喝) : 선사(禪師)가 제자의 깨달음을 유도하기 위하여 언어 대신에 파격적으로 보여 주던 일종의 선기(禪機)로, 덕산 선사(德山禪師)의 몽둥이와 임제 선사(臨濟禪師)의 고함소리라는 뜻의 ‘덕산방 임제할(德山棒臨濟喝)’이 유명하다.
[주D-002]불상(佛像)을 …… 없다 : 불심천자(佛心天子)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불교를 숭상하며 불사(佛事)를 많이 일으켰던 양 무제(梁武帝)가 달마(達磨)에게 자신의 공덕이 어떠하냐고 물었을 때 달마가 “무(無)”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碧巖錄 1則 評唱》

牧隱文藁卷之二
 
天寶山檜巖寺修造記 a_005_015d


檜巖住持倫絶磵嘗語穡曰。普濟旣寂。浮屠銘立石矣。寺之功。宜錄始末。以彰普濟所以區區是寺之意於無窮。亦惟子是托耳。幸無讓。予曰。諾。未幾。門人覺田又來曰。吾師旣逝矣。吾徒皆散而之四方矣。寺之得如前日。未可知也。嗚呼悲夫。吾師之道。非世之所能重輕也。然寺之興替。在乎後之人。吾徒之能振否也。又不可以前知也。嗚呼悲夫。吾師之肇功於此。其指畫之地。坐立之所。猶夫前日也。而音聲容貌之邈然。吾師之闡法於此。其祝禱之規。捧喝之風。猶夫前005_016a日也。而威儀號令之索爾。院宇之闃寂。香火之蕭條。江月之境平。沈於野霧矣。雖然。佛性在人。後生可畏。安知他日亦有靑出於藍者哉。此吾徒之所以自慰也。第念是寺。鐵山書額於前。指空量地於後。其山水之形。宛同西竺蘭陀之寺。又指空之所自言也。其爲福地。蓋甚明矣。後之人或不知此。指爲新造。撤而去之。則普濟門人所以劬躬締美之意。磨滅而不傳。田也竊悲焉。敢以圖來。權先生筆之。予案。普光殿五間。面南。殿之後說法殿五間。又其後舍利殿一間。又其後正廳三間。廳之東西方丈二所。各三楹。東方丈之005_016b東。羅漢殿三間。西方丈之西。大藏殿三間。入室寮在東方丈之前。面西。侍者寮在西方丈之前。面東。說法殿之西曰祖師殿。又其西曰首座寮。說法殿之東曰影堂。又其東曰書記寮。皆面南。影堂之南。面西曰香火寮。祖師殿之南。面東曰知藏寮。普光殿之東。少南曰旃檀林。東雲集面西。西雲集面東。東雲集之東曰東把針。面西。西雲集之西曰西把針。面東。穿廊三間。接西僧堂。直普光殿。正門三間。門之東廊六間。接東客室之南。門之西悅衆寮七間。折而北七間曰東寮。正門之東面西五間。東客室。其西面東五間曰西客005_016c室。悅衆寮之南曰觀音殿。其西面東五間曰浴室。副寺寮之東曰彌陀殿。都寺寮五間面南。其東曰庫樓。其南曰心廊七間。接彌陀殿。其北曰醬庫十四間。庫樓之東十二間。庫有門。從樓而東四間。又折而北六間。又折而西三間。缺其西直正門少東曰鍾樓三間。樓之南五間曰沙門。樓之西面東曰接客廳。樓之東北向知賓寮。接客之南面東曰養老房。知賓之東面西曰典座寮。折而東七間曰香積殿。殿之東庫樓之南曰園頭寮三間。面西。殿之南四間曰馬廏。凡爲屋二百六十二間。凡佛躬十五尺者七。觀音十尺。覺田005_016d所化也。宏壯美麗。甲于東國。遊覽江湖行遍者皆曰。雖中國。未之多見。非誇言也。予素不樂釋氏。然玄陵嘗師師。故敬慕之不敢置。況奉旨譔銘。獲詳師之平生。尤知其非常人也。造佛造塔。片無功德於師之道。非所論也。絶磵之請。覺田之勤。不可以虛辱。故問其功役終始。則以某年某月對。予曰。能哉。何其成之易也。非師之道能有以動人之心。而師之弟子。又有幹事之才。疇克至此哉。雖然。創基垂統。爲可繼者。君子也。不顧其後。不量其器。縱吾之欲。以極其侈。君子鄙之。雖然。師旣有前知之明。普濟之願。安知道場005_017a當益興而不少替乎。予是以樂爲之記。


 

목은시고 제20권

 시(詩)
회암(檜巖)

 


목멱이라 동방의 빼어난 기운 모인 가운데 / 木覓東方秀氣中
회암사의 푸른빛이 갠 하늘에 기대었네 / 檜巖蒼翠倚晴空
조정에서 이처럼 어진 정사를 행하거니 / 朝廷若是行仁政
예악이 끝내 예전 풍도를 회복하고말고 / 禮樂終然復古風
해와 달은 밝디밝게 불전을 임해 있고요 / 日月明明臨佛殿
하늘땅은 광대하게 왕궁을 둘러 있도다 / 乾坤蕩蕩繞王宮
백발의 문학은 연래에 절뚝발이 되었는데 / 白頭文學年來躄
감천부나 짓자 해도 필력 또한 궁하구려 / 欲賦甘泉筆力窮


 

[주D-001]감천부(甘泉賦) : 한 무제(漢武帝) 때 양웅(揚雄)이 지은 문장 제목이다. 양웅이 일찍이 천자의 부름을 받고 대궐에 들어갔다가 뒤에 천자를 따라 감천궁(甘泉宮)을 다녀와서 감천부를 지어 올리자, 천자가 그것을 보고는 아주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목은시고 제23권
 시(詩)
회암사(檜巖寺)로부터 온 이가 있어 그를 인하여 짓다.


강월은 아름답게 회암사를 비추건만 / 江月嬋姸照檜巖
스님네도 요즘에는 참소를 근심한다지 / 浮圖近日亦憂讒
이끼는 땅 가득고 찾아오는 이 드무니 / 蒼苔滿地人來少
그 누가 청주의 옛 베장삼을 받을런고 / 誰領靑州舊布衫
일대에 교는 일켰으나 다시 적막해졌고 / 一代敎興還寂寞
두 비문은 졸렬한데도 억지로 새기었네 / 兩碑文拙強鐫鑱
다만 이 몸이 많은 우환 속에 있는지라 / 只緣身在多憂患
이렇듯 소금도 없는데 짠맛을 어찌 알랴 / 若是無鹽豈識醎


 

[주C-001]회암사(檜巖寺) : 양주(楊州) 천보산(天寶山)에 있는 절인데, 저자가 일찍이 왕명(王命)에 의하여 지공 선사(指空禪師)에 대한 서천제납박타존자부도명(西天提納薄阤尊者浮屠銘)과 나옹 선사(懶翁禪師)에 대한 보제존자시선각탑명(普濟尊者諡禪覺塔銘)을 지어 두 비(碑)가 이 절에 세워졌다.
[주D-001]강월(江月) : 나옹 선사의 호가 강월헌(江月軒)이기도 하다.
[주D-002]그 …… 받을런고 :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에게 묻기를,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거니와,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 겁니까?[萬法歸一 一歸何處]” 하니, 조주가 말하기를, “내가 청주에 있을 적에 베장삼 한 벌을 만들었더니, 그 무게가 일곱 근이더라.[我在靑州 作一領布衫 重七斤]”고 한 화두(話頭)에서 온 말로, 전하여 여기서는 불제자(佛弟子)의 수업(受業)을 의미한다.
[주D-003]이렇듯 …… 알랴 : 몹시 빈곤함을 이른 말이다.

 

목은시고 제31권
 시(詩)
총지종(摠持宗) 도대 선사(都大禪師)에게 부치다.

구룡산의 윤필암은 고찰(古刹) 연화사 / 九龍潤筆古蓮花
백련사와는 고개 하나 노을을 격했을 뿐 / 與白蓮分一嶺霞
북의 신수 남의 혜능 다른 족속 아닌데 / 北秀南能非異族
동쪽 언덕 서쪽 기슭 어찌 남의 집이리요 / 東崖西麓豈他家
유자가 불도를 믿는다면 모른 체해선 안 될 텐데 / 儒門信道難乖矣
스님이 위세를 부린다면 그것이 또한 될 말이요 / 僧籙揚威亦是邪
단지 원하는 것은 담장을 지금부터 헐고 / 但願從今撤屛牆
왕래하며 밤도 굽고 차도 끓여 드시기를 / 往來燒栗或烹茶
[주D-001]윤필암(潤筆菴) : 윤필은 글을 지어 주는 대가로 받는 일종의 사례금으로써 집필료(執筆料)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8 지평현(砥平縣) 불우(佛宇) 조에 “이색이 왕명을 받들고 나옹의 부도명을 지어 주자, 문도들이 윤필의 재물을 마련하여 사례하였는데, 이색이 그것을 받지 않고 허물어진 절을 수리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윤필암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李穡以王旨撰懶翁浮屠銘 其徒致潤筆物 穡不受使修廢寺 因名之]”라고 하여 윤필암의 유래를 설명한 대목이 나온다. 목은은 나옹의 사리탑이 있는 신륵사(神勒寺)와 회암사(檜巖寺)를 비롯해서, 나옹의 문도들이 묘향산ㆍ금강산ㆍ소백산ㆍ사불산(四佛山)ㆍ치악산(雉岳山)ㆍ용문산(龍門山)ㆍ구룡산(九龍山) 등 일곱 곳에 진당(眞堂)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했을 때에도 모두 기문(記文)을 써 준 인연을 갖고 있다.
[주D-002]백련사(白蓮社) : 목은이 백련회(白蓮會)를 결성하고 원로 및 동료들과 모임을 갖던 사찰을 말한다.
[주D-003]북의 …… 혜능(慧能) : 중국 선종(禪宗)의 2대 종파인 북종(北宗)의 시조 신수(神秀)와 남종(南宗)의 시조 혜능을 말한다. 달마(達磨)가 중국에 건너온 뒤로 5대를 거쳐서 혜능이 영남(嶺南)에서 돈오(頓悟)를 주장하였고 신수가 영북(嶺北)에서 점수(漸修)를 주장하였으므로 흔히 남돈 북점(南頓北漸)이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의 선불교는 혜능의 남종을 이어받은 것이다.
성호사설 제27권
 경사문(經史門)
나옹(懶翁)

고려(高麗) 신우(辛禑) 원년에 중 나옹이 문수회(文殊會)를 양주(楊州) 회암사(檜巖寺)에서 여니, 중외(中外)의 사녀(士女)들이 몰려들어 금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옹을 경상도 밀성(密城)으로 추방했는데, 도중에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에 이르러 죽었으므로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나옹을 밀성으로 추방했다.”고 하였다.
내가 일찍이 절에 갔다가 그의 사리탑[舍利碑]를 보니, 법명(法名)은 혜근(惠勤), 혹은 보제(普濟)라고도 하고 속성(俗性)은 아씨(牙氏)이며, 이른바 나옹은 그의 호이다. 그런데, 어찌 당당한 사필(史筆)이 중의 호를 써야만 했는지 우리 동방 사람들의 자세하지 못함이 번번이 이러하다.
보제(普濟)가 이미 죽자, 무릇 사리를 1백 55개나 찾아냈는데 두들겨서 5백 58개로 나누었고, 사방 군중들이 잿속에서 찾아내어 숨긴 숫자도 그 수를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연전에 신륵사의 동쪽 대탑(臺塔)이 무너졌는데 내가 우연히 그 곳에 갔다가 그 소장된 사리를 보게 되었다. 크기가 기장 알[黍粒]만한 것이 2개였으며, 철(鐵)로 집을 만들고 그 속에는 쟁반에다 칠보(七寶)를 올려 놓았으며, 또한 수정(水精)을 호로(葫蘆)에 저장하였는데 빛깔이 약간 푸르며 모양은 모래알과 다름이 없었다.
고려사절요 제35권
 공양왕 2(恭讓王二)
신미 3년(1391), 대명 홍무 24년

○ 2월 기미일에 왕이 남경으로 떠났다. 임술일은 왕의 탄신일이므로 회암사(檜巖寺 경기 양주)에서 중에게 밥을 먹이고, 베 1천 2백 필을 주니, 정당문학 정도전이 간하기를, “탄일에 중에게 밥을 먹이는 일은 선왕의 전례(典禮)가 아니라 신자(臣子)의 정에서 나온 것일 뿐이며, 임금이 스스로 복을 빌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성호사설 제9권
 인사문(人事門)
무학(無學)


신우(辛禑)가 이미 보제(普濟)를 유배(流配)하고서도 그가 죽자 그를 위해 시호를 선각(禪覺)이라 내리고 부도(浮屠)를 세워 영광과 은총이 극에 달했으며, 모든 관원들도 입을 모아 함께 청을 올렸고, 목은(牧隱) 같은 대유(大儒)가 그를 위해 사적을 기술하였으니 습속의 변하기 어려움이 이와 같았다.
그가 당시 귀양가게 된 것에 대해서는 어느 담 큰 사람이 있어 그런 일을 능히 해냈는지 모르지만, 이에 이르러서는 온 조정이 분주하게 법을 받드는데도, 어찌 조용히 한 마디 말이 없었는가!
보제는 일찍이 두 번 중국에 들어가서 강제(江淛)를 두루 노닐어 도를 지공(指空)에게 배웠는데, 지공이란 이는 서천(西天) 가섭(迦葉)의 백팔전(百八傳)인 존자(尊者)이다. 보제가 연(燕)에 노닐 적에 묘엄존자(妙嚴尊者) 무학(無學)이 역시 연에 노닐어, 먼저 지공을 뵈어 허여함을 받았고, 또 나옹(懶翁)에게 뵈어 뒤에 함께 본국으로 돌아와 드디어 그 의발(衣鉢)을 전하였다. 고려 말엽에 임금의 부름을 받고도 가지 않았는데, 마침내 임신년(1392, 조선이 건국되던 해)에 이 태조(李太祖)와의 계우(契遇)가 있었다. 그래서 터를 가려 국도(國都)를 세우기 위하여 계룡산 신도(新都)에 다 호종(扈從)하였으며 마침내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였다.
속성(俗姓)은 박씨요, 삼기군(三岐郡) 사람인데, 이름은 자초(自超)요, 무학은 그 별호며, 계월헌(溪月軒)은 그가 살던 곳이다. 지금 양주(楊州) 회암사(檜巖寺)에 탑명(塔銘)이 있는데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것이다. 그 학(學)의 전수가 비범하여 지금의 행각글율(行脚吃栗)에 비할 바 아니라, 사람들이 곧잘 오염되는 것도 괴이할 것이 없다.


 

[주C-001]무학(無學) : 여말 선초(麗末鮮初)의 고승. 법명(法名)은 자초(自超). 공민왕(恭愍王) 때 연경(燕京)에 가서 지공(指空) 대사를 찾고 나옹(懶翁) 등에게 배운 다음 이 태조(李太祖) 등극 후에 왕사(王師)가 되어 회암사(檜巖寺)에 주하였다. 한양 전도(漢陽奠都)의 사실로 유명하다.
[주D-001]행각글율(行脚吃栗) : 마을을 돌며 구걸하는 중. 글율(吃栗)은 글율다(吃栗多) 곧 범어(梵語) 크리타(Krita)의 음역(音譯)으로 천자(賤者) 또는 노예(奴隸)를 가리키는 말이다.

 

양촌선생문집 제37권
 비명류(碑銘類)
유명 조선국 보각국사비명(普覺國師碑銘) 병서(幷序)


상이 즉위한 지 3년이 되던 해 봄 2월 기해일에, 회암사(檜巖寺)에 행차하여 근(近)에게 명하기를,
“수국사(脩國師)가 전조(前朝)에서 그 도덕과 행검이 한 세상을 압도하였는데, 내가 즉위하자 죽으므로 몹시 슬퍼하였다. 이제 승도(僧徒)들이 석탑을 쌓아 사리를 안치하고 또 비(碑)를 새겨 후세에 보이고자 하니, 그대는 마땅히 명(銘)을 지으라.”
하였다. 근은 명을 받고 두려워 감히 글재주가 없다고 사양하지 못하였다. 선사(先師)의 휘(諱)는 혼수(混脩)요, 자는 무작(無作)이요, 호는 환암(幻菴)이요, 본성은 조씨(趙氏)로서 광주(廣州) 풍양현(豊壤縣)이 그 본관이다. 아버지의 휘는 숙령(叔鴒)으로 헌부(憲府)의 산랑(散郞)이요, 어머니는 경씨(慶氏)로서 본관이 청주(淸州)이니, 모두 사족(士族)이다. 헌부가 용주(龍州)의 원으로 나가,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경신년(1320, 충숙왕7) 3월 13일에 선사를 관사에서 낳았다. 하루는 사냥을 나갔는데, 사슴 한 마리가 달아나다가 우뚝 서 두 번씩이나 뒤돌아보는 것을 보고 활을 당기려 하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뒤돌아보니, 사슴 새끼가 그 어미를 뒤따라오고 있었다. 헌부는 곧 “짐승이 새끼를 생각하는 것이 사람과 무엇이 다르랴.” 하고 탄식하면서 곧 사냥을 그만두었는데, 몇 달 안 되어 임소인 용주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그 어머니는 상(喪)을 받들고 그 어린아이와 함께 귀향하였다. 선사께서 어렸을 때 병을 앓아 점을 친 일이 있는데, 그 점쟁이의 말이 “이 아이가 집을 나가면 병도 없을 것이요, 위대한 화상(和尙)이 되리라.”고 하였다. 나이 겨우 12세가 되자 그 어머니께서 선사에게 이르기를 “네가 갓 태어났을 때 너의 아버지가 몹시 귀여워하였다. 그리하여 사슴의 모정(母情)에 감동되어 곧 사냥을 그만두었으니, 이는 너의 살리기 좋아하는 인자한 도의가 이미 강보(襁褓)에 있을 때부터 나타난 것이다. 하물며 점쟁이의 말이 그러함에랴.” 하고, 대선사(大禪師)인 계송(繼松)에게 보내 머리 깎고 내외 경전(經典)을 익히게 하였는데, 특이한 총명과 지혜가 달로 열리고 날로 더하여져 높은 명성을 떨쳤으며, 드디어 그 스승 다음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신사년(1341, 충혜왕2)에 선시(禪試)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로 합격, 유생과 석문의 친구들이 날로 붙좇았으나, 자신은 항상 생명의 환화(幻化)가 일정하지 못함을 탄식하며 초연히 명리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을 두었다. 그러자 갑자기 외가 동네에 비명에 죽은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더욱 비감(悲感)한 생각이 들어 입산하기로 결심하였다. 어머니를 하직하고 떠나갈 무렵에 둥근 해가 선사의 얼굴을 비치는 꿈을 꾸었다. 이미 경사로운 징조임을 깨닫고 곧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갔으니, 지정 8년 무자(1348, 충목왕4) 가을로 이때 선사의 나이는 29세였다. 마음을 다잡고 잠도 자지 않으며 잠시도 몸을 눕히지 않았다. 이와 같은 공부를 2년 동안 정진한 후, 그 어머니가 애태우며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 즉시 돌아와 어머니를 뵙고는 경산(京山)에 우거하면서 멀리 나가지 않았다. 5~6년 동안 이와 같이 지내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사람을 시켜《대자법화경(大字法華經)》을 써서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선원사(禪源寺)에 가서 식영감화상(息影鑑和尙)을 배알하고, 그에게《능엄경(楞嚴經)》을 배워 깊이 그 진리를 터득하였다.
작고한 재상 조공 쌍중(趙公雙重)이 휴휴암(休休菴)을 새로 짓고 선사를 맞이하여《수릉(首楞)》의 요지를 강연하게 하였는데, 청아하게 뽑아내는 말재주가 있어 마음대로 사람을 울리고 웃기었다. 여기에 3년 동안 머물다가 충주(忠州) 청룡사(靑龍寺)로 갔다. 청룡사 서쪽 산기슭에서 시내를 따라 올라가면 산봉우리가 사방에 둘러있고 주위가 고요한 옛 집터가 있는데, 선사께서 몸소 목재와 돌을 날라다가 기탄없이 경영하여 일이 완성되자 연회암(宴晦菴)이란 편액을 걸었으니, 대개 그 자신의 심적(心迹)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현릉(玄陵)이 선사의 행적이 바른 것을 높이 여겨 회암사(檜巖寺)에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가지 않고, 곧 금오산(金鰲山)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신성암(神聖菴)에 거처하였다. 이때 나옹(懶翁) 혜근화상(惠勤和尙) 또한 고운암(孤雲菴)에 있었기 때문에 자주 접견하여 도(道)의 요지를 질의하였는데, 나옹은 뒤에 금란가사(金襴袈裟)ㆍ상아불(象牙拂)ㆍ산형장(山形杖)을 선사에게 주어 표신을 삼았다.
신축년(1361, 공민왕10) 가을에 강릉도 안렴사(江陵道按廉使)에게 명하여 선사를 모셔다 대궐에 나가 강단(講壇)의 자리를 주장하게 하니, 선사는 도중에 도망쳐 산수(山水) 속에 자취를 감추고 명산을 편력하여 그 지조가 더욱 굳어졌다. 기유년(1369, 공민왕18)에는 백성군(白城郡) 사람 김황(金璜)이 원찰(願刹) 서운사(瑞雲寺)에 선사를 맞이하였는데, 선사께서 이르자 승당(僧堂)을 열고 낭무(廊廡)를 수리하여 선회(禪會)를 크게 여니, 사방의 승려들이 소문을 듣고 와 배알하는 자가 많았다.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3년 경술(1370, 공민왕19) 가을 7월에, 상이 공부선장(功夫選場)을 열어 선교(禪敎)의 여러 승려를 모아 나옹을 명하여 그들을 시험하게 한 다음, 상이 친히 이를 지켜보았다. 나옹이 한 마디 말을 내어 묻자 여러 승려들은 한 사람도 이에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상은 그만 불쾌하여 자리를 파하려 하였는데, 선사께서 맨 뒤에 이르러 위의를 갖추고 당문(堂門) 섬돌 아래 서 있었다. 나옹이 “무엇이 당문구(當門句)냐?” 고 물으니, 선사께서 즉시 섬돌에 올라가 “좌측이나 우측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앙 한복판에 서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입문구(入門句)를 물으니, “들어오니 도리어 들어오지 않았을 때와 같다.”고 대답하고, 또 문내구(門內句)를 물으니 “안과 밖이 본래 공(空)인데 중(中)이 어떻게 성립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나옹이 또 삼관(三關)으로 묻기를 “산은 어찌하여 멧부리에서 그치는가?” 하니, “높으면 곧 낮아지고 낮아지면 곧 그치게 됩니다.”라고 대답하고, “물은 어찌하여 개울을 이루는가?” 하니, “바다가 숨어 흐르는 곳마다 개울이 됩니다.”라고 대답하고, “밥은 어찌하여 백미로 짓는가?” 하니, “만약 모래를 찐다면 어떻게 좋은 음식이 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나옹이 곧 고개를 끄덕이자, 상이 유사(攸司)를 명하여 문답한 구절을 입격문(入格文)으로 만들어 쓰게 하고 종문(宗門)에 머물게 하였는데, 선사께서는 상이 내원(內院)에 머물게 하고 싶어하는 줄 알고 남몰래 도성을 빠져나가 위봉산(圍鳳山)에 숨어 있었다.
5년 임자(1372, 공민왕21)에는 상의 명에 못 이겨 불호사(佛護寺)에 머물렀었고, 이듬해에는 왕명으로 내불당(內佛堂)에 불려 들어갔으나, 선사께서는 깊은 밤을 이용하여 남몰래 빠져 나와 곧바로 평해(平海) 서산(西山)으로 갔다. 조정에서 팔도에 칙명을 내려 찾기를 마지아니하므로 곧 나와서 왕명에 응하였다. 갑인년(1374, 공민왕23) 정월에 비로소 내원에 들어 갔는데, 상이 자주 법요(法要)를 물었고 왕대비(王大妃)가 더욱 존경하였다. 9월에 상이 승하하자 강선군(康宣君)이 계승하여 광통무애 원묘대지보제(廣通無礙圓妙大智普濟)의 존호를 내렸다. 을묘년(1375, 우왕1) 가을에는 송광사(松廣社)에 이주하였고, 병진년 3월에는 글을 올려 내원을 떠나서 서운사(瑞雲寺)로 돌아갔다. 무오년(1378, 우왕4)에 치악산(雉岳山)으로부터 연회암(宴晦菴)으로 돌아왔다. 하루는 문 앞에 손이 찾아오자 선사께서는 곧 침실로 들어가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는데, 그 손은 과연 중사(中使 내시(內侍))였다. 선사에게 광암사(光巖寺)를 맡아 달라고 청하였는데, 선사가 병으로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여 끝내 나왔다. 겨우 3년을 지내고 나서 다시 물러가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회보가 없자, 선사께선 즉시 밤에 도망쳐 원주(原州) 백운암(白雲菴)으로 갔다. 이후부터 용문(龍門)ㆍ청평(淸平)ㆍ치악산(雉岳山) 등을 편력하면서 다시는 주지가 되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계해년(1383, 우왕9) 2월에 조정의 의논이 옛 제도에 따라 석문(釋門)에서 덕망이 있는 사람을 골라 세워서 사범을 삼고자 하였는데, 당시 물망이 모두 선사에게로 주목되었다. 선사께서 이 말을 듣고 은퇴하기를 꾀하니, 문인 감로 장로(甘露長老) 경관(慶觀)이 말하기를 “이는 스스로 안정하려는 계책뿐입니다. 지금 나라 임금이 불법(佛法)을 존숭하는 의미에서 이 일을 거행하려는 것이니, 그 취지가 매우 훌륭합니다. 선사께서는 사범이 되어 다소나마 안정하여 함부로 움직임이 없게 하소서.” 하였다. 선사께서 끝내 가지 않자, 여름 4월 초1일 갑술에 왕이 상신(相臣) 우인열(禹仁烈) 등에게 어서(御書)ㆍ인장(印章)ㆍ법복(法服)ㆍ예폐(禮幣)를 받들어 보내 선사가 계신 연회암에 나와서 국사(國師)로 책봉하는 동시,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오불심종 흥자운비복국이생 묘화무궁도대선사 정변지웅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悟佛心宗興慈運悲福國利生妙化無窮都大禪師正遍智雄尊者)의 존호를 올리게 하고, 충주의 개천사(開天寺)로 상주하는 곳을 삼았다. 그해 가을에 서운산(瑞雲山)으로 가니, 왕은 또 정랑(正郞) 박원소(朴元素)에게 안마(鞍馬)를 주어 보내 모셔 오게 하였다.
이듬해 갑자년에 해적(海賊)이 깊이 들어와 충주를 침범하므로, 조정에서는 걱정하기를 “개천사 주위가 해적의 소굴이 될 터인데 선사께서 거기에 머무니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하여, 왕에게 아뢰어 사람을 보내 광암사(光巖寺)로 맞아 왔다. 광암사에 이르자 상언(上言)하기를,
“노승(老僧)이 개천사를 사양하지 못하고, 또 광암사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절 하나를 맡는 것도 노승의 본뜻에는 어긋나는데 둘을 겸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노승으로 하여금 선군(先君)의 명복을 비는 데 전심하게 하시려면 개천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개천사는 선사께서 끝까지 머물러 있어 그 음덕을 입을 곳이요, 광암사는 내가 청하여 연법(演法)하게 한 곳이니, 둘 다 겸한들 무엇이 해로우랴.”
하므로, 선사께서는 사양하지 못하였다.
을축년(1385, 우왕11) 가을에 50일 동안의 백산개도량(白傘蓋道場)을 설치하여 온갖 재변을 물리치게 하였는데, 명망 높은 유생들과 학식 있는 승려들이 많이 와서 청강하였고, 마지막에는 임금까지 행차하여 예를 베풀었다. 병인년에는 대비(大妃) 안씨(安氏)가 현릉(玄陵)을 좋은 곳으로 천도하기 위하여 보국사(輔國寺)에 불정회(佛頂會)를 베풀고 선사를 초청하였으며, 왕은 또 수창궁(壽昌宮)에 초대하여 소재석(消災席 재앙의 소멸을 비는 자리)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돌아갈 때에는 대언(代言) 이직(李稷)을 딸려보내 존경을 표하였다. 무진년(1388, 우왕14) 여름에 왕이 외지에서 손위하고 어린 임금(창왕을 가리킴)이 그 뒤를 계승하자, 선사께서 개천사로 돌아갈 것을 청하니, 창왕이 특별히 사람을 시켜 호행(護行)하게 하였고, 기사년 겨울에 공양군(恭讓君)이 즉위하자, 표문(表文)을 올리며 인(印)을 봉하여 조정에 드리고 치악산으로 들어갔는데, 몇 달 안 되어 다시 국사(國師)로 봉하고 사람을 보내 개천사로 도로 모셔오게 하였다. 지금의 주상께서 잠저(潛邸)에 있을 때 선사와 함께 대장경(大藏經)의 완성을 염원하였는데, 신미년(1391, 공양왕3) 가을에 장정과 교정의 일이 끝나므로 서운사에 두고 크게 경회(慶會)를 베풀었다. 이때 공양군은 내신(內臣)을 명하여 향(香)을 내리고 선사를 맞아 증사(證師)를 삼게 하였다.
임신년(1392, 태조1) 가을 7월에 우리 주상께서 혁명하여 왕업을 열자 선사께서는 즉시 표문을 올려 축하하고, 얼마 뒤에 노병으로 그 직위와 절[寺]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여 전문(牋文)과 함께 인(印)을 보낸 다음 청룡사로 행장을 옮겼다. 시자(侍者) 담원(湛圓)이 전문과 인을 받들고 대궐에 나가니, 상의 뜻이 전과 같이 스스로 섬기고자 해서 곧 인을 되돌려 보냈다. 담원이 선사에게 와 아뢰니, 선사는 이마를 찌푸리면서 “내 늙고 또한 병들어 오래 지탱할 수 없거늘, 명철한 주상께선 어찌하여 나의 소원을 막느냐.”고 말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이질(痢疾)에 걸려 10여 일 동안 낫지 않았다.
용변이 잦았으나 남에게 부축을 받지 않았으며, 피곤하여도 편히 눕지 않고 언제나 꼿꼿이 앉아 있었다. 9월 18일 병신일에 유서(遺書)를 쓰게 하면서 문인에게 이르기를 “내가 갈 때가 오늘 저녁이라, 고을의 관원을 불러 인(印)을 봉해야 하겠다.”고 하더니, 저녁때가 되자 앉아서 말하기를 “지금 죽을 때가 되었다. 나는 운명하겠노라.” 하고, 곧 게(偈)를 베푼 다음 묵묵히 시적(示寂)하였다. 8일 동안 상(床)에 앉았으되 얼굴이 평시와 같았다.
25일 계묘에 문인들이 연회암 북쪽 산기슭에 섶을 쌓고 다비(茶毗) 하였는데, 전날 밤에 비가 오기 시작하여 아침까지 그치지 않다가 다비를 시작할 무렵에 구름이 걷히고 맑게 개므로 신명의 도움이 있는 듯하였다. 다음날 새벽에 뼈를 모으니 그 빛이 눈[雪]과 같이 희었는데, 정골(頂骨 이마 뼈)이 더욱 두텁고 정결하였다. 문인 소안(紹安)이 유서를 받들어 알리니, 상이 애도하는 심정에서 유사를 명하여 시호는 보각(普覺), 탑은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는 칭호를 하사하고, 내신(內臣)을 보내 그의 유골을 수장(收藏)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는 한편, 공인들에게 명하여 부도(浮屠)를 만들게 하였다. 그해 연말 12월 갑신일에 청룡사 북쪽 봉우리에 하관하는데, 전날 밤 청명하여 별빛이 빛나더니 계명(鷄鳴) 때부터 비가 내리다가 돌을 쌓아올릴 무렵에 이르러 그치므로, 뭇사람들은 기이한 일이라고들 말하였다. 춘추가 73세에 하랍(夏臘)이 60세였다.
선사께서는 청수한 얼굴에다 맑고 온화한 기상으로 예절이 바르고 말씨가 간절하므로 사람들은 모두 친애하고 공경하였다. 계율(戒律)을 가짐에 굳건하였고 도(道)를 지킴에 조심하였다. 지위가 높을수록 마음은 더욱 겸허하였고, 연세가 높을수록 행동은 더욱 굳세었다. 선교(禪敎)의 모든 경전(經典)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거의 스승에게 배우지 않고 자통(自通)하였다. 남을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고 강해(講解) 또한 자상하고 밝음으로 이르는 곳마다 제자가 많았고, 그 문하에 들어간 자는 석덕(碩德)들이 많았다. 글짓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붓만 들면 그 말이 정미하게 내려갔으며, 더욱 간독(簡牘 편지)에 능하여 식자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그의 문인들이 부도 곁에 비(碑)를 세우고자 그의 제자 만우(卍雨)로 하여금 행장(行狀)을 찬(撰)하게 하고, 소안(紹安)이 이를 받들어 상에게 알림으로써 근(近)에게 이 명이 내려졌다.
조용히 생각하건대, 불씨(佛氏)의 도는 선(禪)보다 더 높은 것이 없으나, 그 말이 기괴하여 측량할 수 없는 것이 많으니, 마삼근(麻三斤)ㆍ간시궐(乾屎橛)
같은 유가 더욱 해괴하다. 그 전통이 멀어갈수록 말이 더욱 허황하되 조계(曹溪)의 대감(大鑑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시호) 선사가 말한 심평(心平)ㆍ행직(行直) 등이 이치에 맞고 평이하며, 도가 더욱 높아 모든 조사(祖師) 중에 뛰어나서 요즈음 선(禪)을 배우는 자가 모두 그를 높인다. 지금 선사께서 선장(選場)에서 대답한 말을 보니 사리가 뚜렷하고 분명하고 절실하며, 또 평소 학자들을 반드시 진상(眞常)으로 훈도하여 배우는 자로 하여금 알아듣기 쉽도록 하였으니, 그 교법(敎法)이 대감과 같은 분이라 해괴하고 허황함을 말하는 다른 파와는 비교할 수 없다. 이 참으로 도의 근본이 평탄하고 진실하며 선사의 조예가 심원함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선사께서는 이미 아름다운 자품(資稟)을 지녔고, 또 공력의 근실함을 더하여 그의 소득이 다른 이들과 특이하니, 또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 이 참으로 명(銘)할 만하기에 다음과 같이 명한다.

성해(性海)는 미묘하고 담담하여 마치 물거품처럼 저절로 생겼다 사라졌다 해도 그 자취가 없이 항상 깊고 맑도다. 우리 선사는 덕을 제대로 대성(大成)하였으니 그 깨달음이 출중하여 일찍부터 명성이 높았도다. 감탄하고 분발하여 어머니를 하직하고 집을 떠났으며, 마음을 다잡고 힘을 다하며 기대거나 눕지도 않았도다. 좌우에 치우치지 않아 중도(中道)를 잡았으며, 속세를 멀리해 자비의 햇빛이 항상 밝았도다. 궁벽한 산중에 자취를 감출 땐 병(甁) 하나 석장(錫杖) 하나이지만, 문답이 서로 부합될 땐 임금도 기뻐하였도다. 많은 승려들이 그 기풍을 따랐고 온 나라가 그 덕을 추앙했으니, 나가면 사빈(師賓)이 되었고, 들어오면 종단이 활기를 얻었도다. 처음에 둥근 해를 꿈꾸어 그 영험이 빛났으며, 마침내 죽어서는 징험이 있어 법우(法雨)가 널리 흡족하였도다. 왕명으로 비(碑)를 만들어 거기에 이 글을 새기나니, 무궁한 내세(來世)에 모두 보각(普覺)을 스승 삼으리.


 

[주D-001]백산개도량(白傘蓋道場) : 오불정(五佛頂)의 하나. 결백 청정한 자비로써 널리 법계 중생에게 두루 덮어 주는 것이, 마치 일산이 사람을 덮는 것과 같다 하여 백산개라 한다.
[주D-002]증사(證師) : 법회(法會)를 증명할 임무를 맡은 법사(法師).
[주D-003]게(偈) : 산문체로 된 경전의 1절의 끝이나, 맨 끝에 4자로 된 글귀로 묘한 뜻을 읊어 놓은 운문(韻文).
[주D-004]하랍(夏臘) : 중이 된 해부터 세는 나이. 납(臘)은 세말(歲末)을 일컫는 말인데, 비구는 해마다 여름 90일 동안을 한 곳에 머물러 수행하고, 이것을 하안거(夏安居)라 하여 나이를 세기 때문에 하랍이라 한다.
[주D-005]마삼근(麻三斤)ㆍ간시궐(乾屎橛) : 선문답(禪問答)에서의 화두(話頭). 어떤 중이 동산 수초(洞山守初)에게 “부처가 어떤 것이냐?” 고 묻자 “마삼근”이라 대답하였고, 또 어떤 중이 운문(雲門)에게 “어떤 것이 부처냐?”고 묻자 “간시궐이니라.”고 대답하였다 한다.

 

연려실기술 제11권
 명종조 고사본말(明宗朝故事本末)
요승 보우(普雨)가 귀양 가다 을축년(1565) 6월

중 보우는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어, 승(僧)ㆍ속(俗)이 다 우러러보게 되어 궐내에 알려져서 위로 문정왕후(文定王后)를 속여 세력을 얻고, 불사(佛事)를 크게 베풀어 양종(兩宗)의 선과(禪科)를 설치하고 도를 깨달았다고 자칭하며 궐내에 거처하였다. 《석담일기》
○ 기유년에 명하여 새 인수궁(仁壽宮)을 옛 정업원(淨業院) 자리에 짓게 하였다. 신해년에 다시 양종을 세워 선과를 베풀었다. 이때에 문정왕후가 불사를 숭상하자, 보우가 방자히 떠벌려서 이교(異敎)가 크게 성하므로, 양사와 홍문관이 해가 지나도록 간하여도 듣지 않고, 대신 또한 백관을 거느리고 궁정(宮庭)에 나아가 논핵하여도 윤허하지 않았다. 윤원형(尹元衡)만이 시종 참여하지 않았으니, 대비의 뜻을 거역하지 않으려 함이었다. 《동각잡기》
과거에 궁중에서 바야흐로 불교를 숭상하니, 감사 정만종(鄭萬鍾)이 요승 보우를 천거하여 크게 불법을 펴, 봉은사(奉恩寺) 정릉(靖陵) 곁에 있다. 는 선종(禪宗), 봉선사(奉先寺) 광릉(光陵) 곁에 있다. 는 교종(敎宗)으로 삼았다. 이듬해 임자년부터 선과초시(禪科初試)를 베풀고, 회시(會試)에 강경(講經), 제술(製述)로 시험하고 합격자에게 첩(牒)을 주어 문과의 제도를 대강 모방하였다.8도의 사찰이 일시에 새로워지니, 삼사에서 이를 간하고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궁정에 나아가 보우의 죄상을 논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성균관 유생이 보우를 죽일 것을 여러 차례 상소하여 청하였으나, 또한 윤허하지 않으니, 권당(捲堂)하고 나갔다. 임금이 날마다 승지와 사관(史官)을 보내어 유생을 타일러서 식당에 나아가게 하여도 유생이 나아가지 않으니, 조정에서 유생의 부형이 되는 조정의 관원을 불러 이들로 하여금 각각 자제들에게 관에 나아가도록 권유하게 하였는데, 한 달 남짓이나 이렇게 하였다. 《서애잡기(西厓雜記)》
○ 과거에 중들이 계통이 없는 것을 염려하여 대신과 의논하여 양종(兩宗)을 세웠는데, 영상 심연원(沈連源)과 좌상 상진(尙震)은 아첨하여 어기지 않고 한 마디 말로도 그 불가함을 다투지 않았다. 심지어 임금이 대신에세 물을 때 바로 깨우칠 수 있었는데도 상진은 직언을 하기는커녕, 도리어 부드러운 말로 순종하여 마침내 선과(禪科)를 다시 회복하였다. 연원(連源)은 경술년에 죽었다.
○ 함경도 어사 왕희걸(王希傑)의 장계에, “북도 사람에게 들으니, 중 보우가 역적 유(瑠)의 종으로 중이 된 자와 안변 황룡사(黃龍寺) 초암(草菴)에 같이 있었는데, 유가 망명해 오자 굴 속에 있게 하였다가 크게 수색한다는 소식을 듣고, 보우는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석왕사(釋王寺)로 옮겼는데, 유의 종 무응송(無應松)이 작은 쪽지를 보우에게 주니, 보우가 보고, ‘요새는 길일(吉日)이 없으니 너는 수일 동안 물러가 있거라.’ 하고는 쌀을 꾸어 깊은 산골짜기에서 여러 차례 재를 올렸는데, 쌀을 꾸어 온 중이, ‘아직도 석왕사에 있다.’ 합니다.” 하였다.정원(政院)에서 법관에게 추문할 것을 청하니, 전교하기를, “보우를 해하려는 자의 지어낸 말이 분명하니, 추문하지 말라.” 하였다. 양사와 대신이 추문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송세형(宋世珩)이 홀로 아뢰기를, “보우의 권세가 중하고 너무 교만하여 모든 국민이 다 우러러 받들기를 군부(君父)와 같이 하여도 한 사람도 말하는 이가 없으니, 불칙한 화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수백 가지 패악한 소행을 역력히 들어 말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동각잡기》
○ 보우가 오래도록 봉은사 주지로 있으면서 중종의 능을 절 곁으로 이장하여, 그 절의 세력을 굳히고자 문정왕후를 기만하여, “선릉(宣陵) 근처가 길한 조짐이 있으니, 중종의 능을 그리로 옮기기를 청하나이다.” 하였다. 문정왕후가 그 말을 믿고, 윤원형(尹元衡)이 대비의 뜻을 맞추어 영합하여 대신을 위협하니, 대신 안현(安玹) 등이 아부에 따라 어기지 않아 마침내 이장하는 계책을 이루었다.장차 문정왕후가 죽으면 역시 거기에 함께 장사하려 하였으나, 지세가 낮아서 매년 강물이 넘쳐 들어오므로, 문정왕후의 장지는 부득이 다른 곳에 정하고, 공론이 다 중종의 능을 이장하려 하였으나, 두 번 옮겨 모시는 것이 어렵다 하여 중지되었다. 《석담일기》
○ 20년 을축에 문정왕후가 승하하니, 대간이 태학생 김충갑(金忠甲) 등 과 더불어 계속 상소하여, 보우를 죽이기를 청하여 제주로 귀양 보내었는데, 목사 변협(邊協)이 다른 일로 매를 때려 죽이니 사림(士林)이 통쾌하게 여겼다. 《석담일기》ㆍ《지봉유설》
과거에 보우가 불사를 굉장하게 베풀고, 거처가 참람하게 임금에 비겼으며, 또 회암사(檜岩寺)에서 무차회(無遮會)를 여는데, 그 비용이 매우 많이 들었다. 이때에 이르러 대간의 아룀과 유림의 상소로 인하여, 밖으로 축출하고 경산(京山)에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더니, 포마(鋪馬)를 훔쳐 타고 달아나다가 인제에서 붙들려서 제주로 귀양 갔다. 《고사촬요》
○ 보우가 마음대로 떠벌려 불교가 크게 성하니, 사월 초파일에 회암사에서 무차대회를 행하려 할 때 비용이 국고를 거의 다 비게 하고, 8도의 승려와 백성들이 분주히 몰려드는데, 때는 곧 4월 7일이었다. 문정왕후가 갑자기 이날 승하하니 승려와 백성들이 놀라 흩어졌다. 당초에 수천 석의 쌀로 밥을 지으니 그 빛이 붉어 피로 물들인 것 같아서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기었더니, 불사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태천일기(苔泉日記)》
○ 병인년에 양사에서 아뢰어 양종선과(兩宗禪科)를 파하였다.

[주D-001]무차대회(無遮大會) : 불교에서 행하는 행사로 중을 불러 공양을 할 때, 중의 수를 제한하지 않고 오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주D-002]양종(兩宗) :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에 불교의 여러 종파가 있던 것을 조선 시대에 와서 불교를 도태시키기 위하여 선ㆍ교(禪敎)의 양종(兩宗)으로 합쳤다.

용재총화 제6권
용재총화 제6권


고려 재신(宰臣) 지□배(池□陪)는 살림을 꾸리는데, 설날과 한식(寒食)날마다 묘지에 사람을 보내어 지전(紙錢)을 주워 오게 하여 도로 종이를 만들었고, 또 버린 짚신을 주워서 땅에 묻고 동과(冬瓜) 씨를 심었는데 동과가 매우 잘 되어 많은 이익을 얻었다. 또 도문(都門) 밖에서 친구를 전송하는 잔치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술과 안주를 갖고 와서 늘어놓는데, 지□배만은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고 단지 소매 속에 작은 술잔을 감추어 갖고 와서는, 떠나는 친구에게 술잔을 올릴 때에 그 술잔에 남의 술을 얻어서 드리고 술상 앞에 엎드려, “변변치 못한 음식이라 드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또 남의 제삿날에 먹으러 가는데 부조로 쌀 1말을 가지고 가면서 하인은 10명이나 데리고 가서 절에서 포식하였다. 돌아올 때에는 언제나 반쯤 와서 하인들에게서 수저 한 개씩을 거두는데 하인 한 사람이 우물우물하며 내놓지 않자 그 까닭을 물으니, 하인이 사죄하여 말하기를, “쇤네는 수저를 얻지 못하고 바리때를 얻었습니다.” 하니, 지□배는 웃으며, “내가 욕심내던 것은 사발이었다.” 하였다.
한봉련(韓奉連)은 본래 우인(虞人)인데 활을 잘 쏘아 세조(世祖)의 지우(知遇)를 받았다. 그 활쏘는 힘은 매우 약했으나 맹호(猛虎)를 보면 가까이 걸어가 힘껏 당겨 반드시 한 화살로 맞혀 죽였는데, 평생 동안에 죽인 수를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일찍이 궁궐 안에서 나회(儺會)를 하는데 광대들이 호랑이 가죽을 쓰고 앞으로 달리니, 한봉련에게 호랑이를 쏘는 시늉을 하라고 명하였다. 한봉련이 작은 활과 쑥대로 만든 화살을 가지고 뛰어 나오다가 발을 잘못 디뎌 계단에서 떨어지면서 팔이 부러지자 사람들은 모두 진짜 호랑이에게는 용감한데 가짜 호랑이에게 겁을 낸다 하였다. 영순군(永順君) 댁의 잔치에 조정의 문사(文士)들이 모두 참석하였는데, 세조의 명으로 한봉련이 선온(宣醞 궁중에서 쓰는 술)을 싸 가져가니 좌중이 모두, “너는 천사(賤士)지만 어명으로 왔으니 천사(天使)이다.”하면서, 상좌에 앉혔다. 곱게 단장한 미인이 온 사방에서 하늘을 찌르듯 노래를 불렀으나, 한봉련은 부끄러워 말 한 마디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투어 술을 권하니 나중에는 크게 취해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팔을 휘두르며, 눈을 부릅뜨고 호랑이 쏘는 시늉을 하면서 큰 소리로 고함을 치니,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우스워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반궁(泮宮)이 비록 예법 있는 곳이라고 한지만, 유생은 대부분이 명문가의 자제들이라 호탕하여 제약을 받지 않았다. 동지사(同知事) 홍경손(洪敬孫)과 임수겸(林守謙)은 모두 나이가 들어 늙어서 백마를 타고 다녔는데, 어느 유생이 지은 시에,
손이여 손이여 / 有客有客
그 말이 백마로다 / 亦白其馬
백마의 흰색이나 / 白馬之白
흰 머리의 흰색이나 다를 것이 없구나 / 無以異於白人之白
하였다. 그 후에 어느 유생이 지은 시에,
태학이 현관이라 누가 말했던가 / 誰云太學是賢關
진부하고 용렬한 이들이 높은 벼슬만 차지했네 / 陳腐庸流尸厥官
홍가는 이미 죽고 임가만 남았고 / 洪同已逝林同在
이학이 겨우 가니 조학이 돌아오네 / 李學纔歸趙學還
하였는데, 이는 홍경손은 이미 죽었고 임수겸만 남았으며, 학관(學官) 이병규(李丙奎)가 체직(遞職)되니, 조원경(趙元卿)이 다시 학관이 되었다는 뜻이다.
궁한 누이 돌보지 않으니 얼굴은 어이 그리 두터우며 / 窮妹不恤顔何厚
어버이 안 섬기니 행실 또한 잔악하구나 / 將父未遑行亦殘
하였는데, 이는 동지중추부사 유진(兪鎭)의 누이가 과부가 되었으나 돌보지 않았고, 또 직강(直講)으로 있는 자가 고향에 계신 늙은 아비를 찾아가 뵙지 않았다는 말이다.
추량(방강(方綱)) 송적(송원창(宋元昌))은 어찌 따질 것이 있겠는가 / 鶖梁宋籍何須數
첩이 많으니 보잘것없다 / 衣綠方盛不足觀
하였는데, 이는 전적(典籍) 송원창(宋元昌)과 사성(司成) 방강(方綱)이 모두 첩을 두고 본처를 돌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조정에서 이 사건을 국문하였는데 삼관(三館) 및 여러 유생까지 연루되어 옥에 갇힌 자가 수십 명이었고, 더러는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진상을 알아내지 못하고 모두 석방하였다.
○ 사문(斯文) 안(安)ㆍ권(權) 두 선비가 충주(忠州)로 향하려 할 때 안(安)은 노(盧)의 집에서 푸른 구슬로 만든 갓끈을 빌리고, 권은 박(朴)의 집에서 자줏빛 띠[帶]를 빌렸는데, 안의 별명은 연취(鳶鷲)라 하고 권의 별명은 봉시관(奉時官)이라 했다. 권은 항상 수염을 쓰다듬었는데 충주에 이르러 안은 기생 죽간매(竹間梅)를 사랑하고, 권은 기생 월하봉(月下逢)을 사랑하였다. 4군(郡)을 두루 다니며 수십 일을 지내다가 달천(獺川)가에서 이별하며 서로 붙들고 통곡하니, 사문(斯文) 금생(琴生)도 옆에 있다가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그들이 앉아 있던 돌을 교리석(校理石)이라고 한다. 사문(斯文) 유공(柳公)이 시를 짓기를,
고삐를 나란히 하고 재갈을 연하여 화산을 떠나는데 / 竝轡聯鏕發華山
예성을 동쪽으로 바라보니 길은 멀도다 / 蕊城東指路漫漫
자줏빛 박의 띠(朴帶 박씨 집에서 빌린 띠)는 허리를 두른 것이 가늘고 / 紫芝朴帶圍腰細
푸른 구슬 노의 갓끈(盧纓 노씨 집에서 빌린 갓끈)은 얼굴에 비쳐 싸늘하도다 / 靑玉盧纓照臉寒
대나무 사이에 날개를 펴니 목마른 독수리가 다다른 듯하고 / 張翅竹間臨渴鷲
달빛 아래 수염을 내미니 봉시관이로다 / 掀髥月下奉時官
수십 일 동안 운우(남녀간의 사랑)로 남의 웃음거리요 / 數旬雲雨供人笑
4군의 풍류는 빼어난 구경거리라네 / 四郡風流絶勝觀
배 위에서 두 낭군 눈물을 뿌리며 헤어지고 / 船上兩郞揮淚別
밭 두둑 길에 두 기생은 노래부르며 돌아가도다 / 陌頭雙妓放歌還
우습도다 금공은 어떤 손이길래 / 堪笑琴公何許客
병신처럼 이별을 함께 서러워하는고 / 籧篨同作別離難
하였다.
강인재(姜仁齋)는 모습이 비대하여 돼지고기를 좋아하고 의복을 화려하게 입으며, 성품은 유약하여 월과(月課 다달이 보이는 시험)의 시문을 짓지 아니하였다. 성근보(成謹甫)가 시를 지어 희롱하기를,
돼지고기는 성성이가 술을 좋아하듯이 하고 / 猪肉猩嗜酒
월과는 여우가 화살을 피하듯 하도다 / 月課狐避箭
거완은 공연히 옷만 화려하게 입고 / 去頑空媚衣
경항은 헛되이 밥만 배불리 먹는구나 / 景恒徒飽飯
하였다. 선비 박거완(朴去頑)은 집안이 넉넉하여 옷을 화려하게 입고, 중 경항은 밥을 많이 먹어서, 두 사람의 비대함이 강인재와 서로 같음을 말한 것이다.
동지(同知) 홍경손(洪敬孫)이 젊었을 때 성균관에서 발원시(發願詩)를 짓기를,
이석형의 글씨 조계의 활쏘기 이인견의 젊음과 / 亨書棨射少仁堅
신숙주의 눈 이문형의 얼굴 손차면의 음(양기)을 한 몸에 지니고 / 舟目炯顔鳥次綿
등과하기를 항상 정인지와 같게 하리라 / 登科每似鄭鱗趾
하고, 미처 아래 구절을 잇지 못하자 중추(中樞) 이계전(李季專)이 이때 옆에 있다가 말하기를, “내 이름으로 협운(協韻)하면 그대가 이을 수 있으리라.” 하여, 홍경손이 드디어 아래 구절을 이어 말하기를,
위장병은 이계전과 같지 말 것이다 / 傷食毋如李季專
하니, 모두 포복절도하였다. 이 시의 뜻은 대개, 이석형은 글씨를 잘 쓰고, 조계는 활을 잘 쏘며, 이인견은 나이가 어리고 이문형은 얼굴이 아름다우며, 신숙주는 눈이 아름답고, 손차면은 성욕(性欲)이 강하고, 정인지는 두 번 장원 급제하였으나, 이계전은 위장병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유생 김윤량(金允良)이란 사람은 성품이 화합하지 못하고 용모가 보잘것없으며, 의복이 거칠고 헤진데다 밤낮으로 다만 성균관의 밥만 기다리자, 김복창(金福昌)이 찬(贊)을 지어 희롱하기를, “식모가 하는 일에 항상 머리를 흔들며 □밥을 덜고 좌우를 돌보며 딴 이야기를 하도다. 일강(日講)ㆍ월강(月講)에는 조(粗)와 불(不)이 서로 연속하니, 귀신을 쫓는다고 복숭아나무 가지 위에서 뛰고, 의(疑)ㆍ의(義)ㆍ시(詩)ㆍ부(賦)는 재시험을 면치 못하니 괴정(槐庭) 밑에서 분주하도다.” 하였다. 김윤량은 점치는 법을 조금 알아서 김복창의 명을 점치기를, “반드시 일찍 죽으리라.” 하니, 복창이 크게 노하여 불붙은 숯을 입속에다 집어넣고 가버렸다.
○ 옛날에 한 처녀가 있었는데 중매하는 사람이 많았다. 어떤 이는 문장에 능하다 하고, 어떤 이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한다 하고, 어떤 이는 못가에 좋은 밭 수십 이랑이 있다 하고, 어떤 이는 양기가 왕성하여 돌이 든 주머니를 거기에 매달고 휘두르면 머리를 넘긴다 하였다. 처녀가 시를 지어 그 뜻을 보이며 말하기를,
문장이 활발하면 노고가 많고 / 文章闊發多勞苦
활을 쏘고 말을 타는 재능은 싸우다가 죽을 것이요 / 射御材能戰死亡
못가에 밭이 있으면 물로 손해를 볼 것이니 / 池下有田逢水損
돌이 든 주머니를 휘둘러 머리 위로 넘기는 것이 내 마음에 들도다 / 石囊踰首我心當
하였다.
○ 전목(全穆)이 충주 기생 금란(金蘭)을 사랑하였는데, 그가 서울로 떠나려 할 때 금란을 불러 타이르기를, “경솔히 남에게 몸을 허락하지 말라.” 하니, 금란의 말이, “월악산(月嶽山)은 무너질지라도 내 마음은 변치 않으리라.” 하였으나, 뒤에 단월역(斷月驛)의 승(丞 관명)을 사랑하게 되었다. 전목이 이 소문을 듣고 시를 지어 보내기를,
듣자니 네가 문득 단월역 승을 사랑하여 / 聞汝便憐斷月丞
깊은 밤 항상 역을 향해 달려간다 하니 / 夜深常向驛奔騰
언제나 삼릉장(세모진 형장)을 잡고 / 何時手執三稜杖
돌아가 월악산 무너져도 마음은 변치 않는다던 맹세를 물어볼고 / 歸問心期月嶽崩
하니, 금란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북쪽에 전군이 있고 남쪽에는 승이 있으니 / 北有全君南有丞
첩의 마음 정할 수 없어 뜬구름 같도다 / 妾心無定似雲騰
만약 맹세한 바와 같이 산이 변할진대 / 若將盟誓山如變
월악이 지금까지 몇 번이나 무너졌는고 / 月嶽于今幾度崩
하였다. 이것은 모두 사문(斯文) 양여공(梁汝恭)이 지은 것이었다.
○ 어떤 경사(經師)의 아내가 그의 남편이 외출한 사이에 이웃집 남자를 방에 맞아들여, 이제 막 서로 흥을 즐기는 찰나에 그 남편 때마침 돌아왔다. 아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 두 손으로 치마를 쥐고 남편의 눈을 가리려 뛰면서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경사는 어디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하니, 남편은 아내가 자기에게 장난을 치는 줄로만 알고 자기도 뛰면서 나아가 말하기를, “북택재신(北宅宰臣)의 장사를 치르고 오는 길이다.” 하였다. 아내가 치마로 남편의 머리를 싸안고 눕자 이웃 사람은 마침내 도망갔다.
낙산사(洛山寺) 중 해초(海超)가 우리 문중에 출입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하루는 와서 부처에게 공양할 것을 요구하였다. 유본(有本)이 방에 있다가 말하기를, “높은 집에다 단청을 칠하고 나무에다 진흙을 칠하여 부처를 만들어, 밤낮으로 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올린들 무슨 이익이 있는고.” 하니, 중이 즉석에서 대답하기를, “높은 집에 단청을 칠하고 밤나무를 깎아 신주를 만들고, 사철의 중월(仲月)에 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올린들 무슨 이익이 있는고.” 하니, 유본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참판(參判) 안초(安超)가 일찍이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나주(羅州)에 이르러 순찰사 김상국(金相國)과 서로 만났는데, 그때 제주 목사가 푸른 귤 한 상자를 보내왔다. 안공은 그 빛이 푸르고 껍질이 쭈굴쭈굴한 것을 보고 못쓰겠다 싶어, 그 자리에서, “목사는 어찌하여 먼 길에 수고롭게 익지도 않은 작은 감을 보냈는고.”하고, 기생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한 기생이 순찰사 방에 가지고 갔다. 순찰사가, “어디서 났느냐.” 하여, 기생이 사실대로 고하자, 순찰사는 나누어주지 않은 나머지를 찾아가지고 안공 앞에서 먹으며 말하기를 “감사께서는 싫어서 버렸지만 나는 이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안공도 한 개를 달라 하여 맛보고는 그제서야 그 맛을 알았다.
손님을 거절하였다는 이유로 볼기를 맞은 수원 기생이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어우동(於宇同)은 음란한 것을 좋아하여 죄를 얻었는데, 나는 음란하지 않다 하여 죄를 얻었으니, 조정의 법이 어찌 이처럼 같지 아니한가.”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옳은 말이라 하였다.
김복창(金福昌)은 성품이 소탈하고 호탕하여 살림을 꾸리지 않고 항상 남의 집을 빌려 거주하였다. 송려성(宋礪城)은 말하기를, “재상 못지 않은 사람이 어찌 남의 집을 내 집으로 삼는가.” 하니, 김복창은 그 자리에서 대답하기를, “재상 못지 않은 사람이 어찌 남의 자식을 제 자식으로 삼는가.” 하였다. 이 말은 송려성이 자식이 없어 조카를 후사로 삼았음을 기롱한 것이다.
나의 백씨(伯氏)는 세 번째 황주(黃州) 선위사(宣慰使)가 되었는데, 안악(安岳) 기생과 서로 용천관(龍泉館 외국 사신을 묵게 하는 집) 앞의 못가에서 이별하고, 그 뒤에 또 주(州)의 기생과 함께 못가에서 작별하였는데, 임서하(任西河)도 또한 평양 선위사로서 기생을 거느리고 와서 이곳에서 이별하였다. 그때 어떤 사람 이 희롱하여 시를 짓기를,
시냇물의 오열함이여 / 川嗚咽而如泣兮
떠오르는 아침 햇살 처량하도다 / 旭朝暾之淒涼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 못을 오열탄(嗚咽灘)이라 하였다. 상국(相國) 서강중(徐剛中 강중은 서거정의 자)이 시를 지어 희롱하기를,
황공탄 앞에 황공한 마음이요 / 皇恐灘前皇恐意
희환산 밑에 희환한 정 이로다 / 喜懽山下喜懽情
어찌하여 오열하는 용천수는 / 如何嗚咽龍泉水
문득 정인들이 울며 헤어지는 소리 같은고 / 却似情人哭別聲
황주관 속에 꽃이 만발하였는데 / 黃州館裏花滿開
전번에 왔던 유랑(당의 시인 유우석(劉禹錫))이 세 번째 왔도다 / 前度劉郞三度來
오열하는 여울 소리는 어느 날에나 다할고 / 嗚咽灘聲何日歇
아침마다 이별하며 우는 소리 우레와 같도다 / 朝朝送別哭如雷
하였다. 상국 노반자(盧胖子 반자는 노사신의 자)의 시에 이르기를,
이 여울이 본래 장광설을 알아서 / 此灘元解廣長舌
당시의 이별하는 소리를 근심하게 하도다 / 愁殺當年送別聲
본디 인심이야 미오함이 다르거니와 / 自是人心迷悟異
흐르는 물은 두 가지 소리가 있는가 / 流溪那有兩般聲
누 밑의 청강은 거울처럼 잔잔하며 / 樓下淸江鏡面開
용이 보옥을 끼고 돌아오는 것 같도다 / 龍應抱寶每歸來
그리하여 무한한 상사의 눈물로 / 故知無限相思淚
앞 여울의 물을 넘치게 하여 흐르는 것이 우레 소리와 같도다 / 漲起前灘流似雷
하였고, 상국 신범옹(申泛翁 범옹은 신숙주의 자)의 시에는,
고관이 쓸쓸하고 적막한 물가에 / 古館蕭條寂寞濱
정인은 한 번 이별하고 소식이 막혔도다 / 情人一別隔音塵
낭군의 한을 부칠 곳이 없는데 / 郞君寓恨眞無處
문밖에 여울이 흘러 사람을 비웃는구나 / 門外灘流笑殺人
맛좋은 술과 명화(아리따운 기생)에 돈을 쓸 필요가 없고 / 美酒名花不用錢
청가와 호무에 술통 앞에서 취하도다 / 淸歌胡舞醉樽前
사람을 만남에 다정하여 괴로움을 면하지 못하니 / 逢人不免多情惱
한번 당시를 생각하니 이미 망연하도다 / 一念當時已惘然
시판 위에 쓴 제공은 모두 젊은 나이인데 / 板上諸公摠妙齡
청시가 눈에 가득하여 다정함을 위로하도다 / 淸詩滿眼慰多情
그 속의 객지 신세야 응당 같은 가락이요 / 箇中旅況應同調
만물의 무성함이 유성함을 막았도다 / 萬物無聲隔有聲
얼마나 많은 인생들이 입을 열었던고 / 人生有口幾多開
비락이 순환하여 서로 따르도다 / 悲樂循環相逐來
헤어지고 또 새로 만나는 일은 예로부터 있는 일인데 / 生別新知從古事
제공이 여기에 부화뇌동하였도다 / 諸公於此墮同雷
하였고, 진산(晉山) 강경순(姜景醇)의 시에 이르기를,
용천의 여울가에 와서 / 訪到龍泉灘水濱
시판을 보고 청진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다 / 看題一一訪淸塵
처량하게 해뜰 때 시냇물은 느껴 울기만 하니 / 凄涼旭日川嗚咽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사람을 애가 타게 하는구나 / 滿目無非惱殺人
지난 해의 느릅나뭇잎이 비로소 돈 모양을 이루었는데 / 去年楡葉始成錢
그대가 명화 앞에서 쓸쓸한 것을 보겠도다 / 看君落拓名花前
오늘 내가 와서 또 적적하여 / 今日我來且寂寞
시를 지으며 날을 보내니 응당 망연하리라 / 作詩送我應茫然
산양의 피리는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을 느끼게 하는데 / 山陽笛感懷人意
사곡의 방울 소리는 섭섭한 심정을 슬프게 하였도다 / 斜谷鈴悲愴悵情
지금이나 옛날이나 정든 여울은 변함이 없을 것이니 / 今古情灘應不變
누구를 위하여 또다시 작별하는 소리를 내겠는가 / 爲誰飜作別般聲
푸른 물은 맑고 깨끗하여 거울처럼 열렸는데 / 碧水溶溶一鑑開
여울에 와서는 패옥의 소리가 되어 흘러오도다 / 到灘聲作佩環來
부질없이 근심하고 사람의 귀에 들어감으로써 / 自從枉入愁人耳
슬픈 울음소리 은은하여 우레인 줄 잘못 알겠도다 / 錯認悲鳴殷似雷
하였고, 서하(西河) 임자심(任子深)의 시에 이르기를,
선녀가 귀고리를 울리면서 이 낙수가로 내려오니 / 仙子鳴鐺下洛濱
가볍게 걸어가는 비단 버선엔 티끌이 일지 않도다 / 凌波羅襪不生塵
별안간 하직하고 다시 안개를 타니 / 瞥然辭去還乘霧
문득 유유히 꿈속 사람을 한하도다 / 却恨悠悠夢裏人
하늘과 땅이 장구하듯이 한을 다할 길이 없고 / 地久天長無盡恨
청산과 녹수 모두 깊은 감상을 느끼게 하도다 / 山靑水綠摠傷情
옛날에 흐느껴 울던 여울 앞 물은 여울 앞에 흘러서도 소리나지 않도다 / 流到灘前不作聲
인생의 즐거운 것에 좋은 마음이 열리어 / 人生樂處好懷開
드디어 청루를 향하여 갔다가 또 오도다 / 故向靑樓去又來
늙은 사람은 그 속에서도 흥이 얕지 않으니 / 老子於中興不淺
때를 만나매 와부로도 또한 우레 소리 같도다 / 逢時瓦釜亦鳴雷
하였다. 백씨(伯氏)가 이에 답하기를,
깨끗한 고루가 물가에 있는데 / 瀟灑高樓近水濱
바람이 잔 경면 수면에는 저절로 티끌이 없도다 / 風恬鏡面自無塵
정중히 우정리에게 말하노니 / 丁寧爲向郵亭吏
몇 번이나 서쪽에서 석별하는 사람을 보았는고 / 幾見西來惜別人
한 번 웃는 웃음이 만 냥짜리인 줄 알겠으니 / 一笑須知直萬錢
어찌 화루 앞에서 차마 헤어지겠는고 / 可堪分手畫樓前
이 세상에서 마침내 만날 날이 있다면 / 此生會有相逢日
파경이 다시 둥글어져 다시 찬연하리로다 / 破鏡重圓更粲然
죽은 재처럼 쓸쓸해서 살 마음이 없으니 / 死灰索爾無生意
사람이 진실로 은혜 없으면 정에 가깝지 않도다 / 人苟無恩不近情
느껴 우는 여울물 속에 마음이 어지러운데 / 鳴咽灘頭心緖亂
어찌 이별하여 애끊는 소리를 가볍게 들어 넘기게 하겠는가 / 豈容輕聽斷腸聲
제공이여 웃는 입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 諸公笑口莫輕開
은수에 보답하는 것이 한 번은 왔다 가리라 / 報答恩讐一往來
대동강과 압록강도 원망스러운 이별을 다같이 지녔으니 / 浿水龍灣同怨別
여울이 있는 어느 곳엔들 우레 소리가 있지 않겠는가 / 有灘何處不成雷
하였으니 이것은 강경순이 의주(義州) 선위사(宣慰使)가 되고 임자심이 평양(平壤) 선위사가 되어 모두 관서 지방에 마음을 두어 읊은 것이다. 조대허(曺大虛)의 시에는,
10리 강산 적적한 물가에 / 十里江山寂寞濱
소루가 깨끗하여 티끌을 밟지 않도다 / 小樓淸絶不踏塵
누 앞에서 획획 흐르는 차가운 물은 / 樓前㶁㶁寒流水
마치 당년의 흐느껴 울던 사람 소리 같도다 / 正似當年嗚咽人
만 냥을 들여서 아름답게 단장하고 / 珠翠粧成費萬錢
동풍에 뽐내며 난간 앞에 섰도다 / 東風脈脈小欄前
해마다 자주 낭군을 보내니 / 年年慣送郞君去
여울물 속에 눈물 뿌려 한으로 정신이 아득하도다 / 淚灑灘頭恨黯然
처량하게 뜨는 해는 고루에 밝은데 / 凄涼旭日明高樓
어찌 동풍에 이별한 뒤의 정을 견디리오 / 可耐東風別後情
그리하여 인심이 곳에 따라 달라지니 / 自是人心隨處異
여울 소리가 치우치게 애끊는 소리를 이룩하였도다 / 灘聲偏作斷腸聲
눈썹은 한에 잠겨 펼 수가 없는데 / 眉峯鎖恨不能開
느릿느릿 쌍만은 땅에 붙어서 오도다 / 緩緩雙彎襯地來
문득 이별한 넋이 느낌에 동하여 발작할까 하노니 / 却怕離魂易髑撥
모름지기 여울가에서 시끄러운 우레 소리를 듣지 말지니라 / 不須灘上聽奔雷
하였다.
옛날에 유생 세 사람이 시장(試場)으로 나아가려 할 때, 한 사람은 거울이 땅에 떨어지는 꿈을 꾸었고, 한 사람은 허수아비가 문 위에 걸린 꿈을 꾸었으며, 또 한 사람은 바람이 불어 꽃이 떨어지는 꿈을 꾸어, 모두들 해몽하는 사람의 집으로 갔더니, 해몽하는 사람은 없고 그의 아들이 혼자 있으므로, 세 사람이 나아가 물으니 그 아들이 점을 쳐 말하기를, “모두 상서롭지 못한 것이니, 소원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해몽하는 사람이 와서 그 아들을 꾸짖고 시를 지어주면서 말하기를,
허수아비는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바요 / 艾夫人所望
거울이 떨어지면 어찌 소리가 없겠는가 / 鏡落豈無聲
꽃이 떨어지면 응당 열매가 있을 것이니 / 花落應有實
세 분이 함께 이름을 이루리라 / 三人共成名
하였는데, 세 사람이 과연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나옹(懶翁 이름은 혜근(惠勤), 고려 말의 승려)이 회암사(檜巖寺)에 머물 때에, 남녀가 물결처럼 모여들었다. 어떤 유생 세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저 머리 깎은 것이 무슨 요술을 부리기에 사람을 이와 같이 놀라게 하는고. 우리가 가서 보고 이를 눌러버리리라.”하고 마침내 방장(方丈 높은 중이 있는 절)에 갔다. 옹은 평상에 걸터앉아 있는데, 용모가 웅위(雄偉)하고 눈빛이 밝아서 바라보니 근엄하였다. 이런 찰나에 별안간 큰 소리로 외치면서, “세 사람이 같이 왔으니 그 중에는 반드시 지혜로운 사람이 하나는 있을 것인데, 지혜로써 이르지 못하는 곳의 한 구절을 가지고 오너라.”하자, 세 사람은 정신이 나가 정례(頂禮)하고 돌아갔다.
중 혼수(混修 고려말의 승려. 본성은 조(趙), 자는 무작(無作)의 호는 환암(幻庵)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겨우 나이 13세에 아저씨 영(鴒)을 따라 요외에 사냥을 나갔는데, 사슴 한 마리가 달아나다가 돌아다보며 무엇을 기다리는 듯하더니, 조금 있다가 새끼 사슴 한 마리가 좇아왔다. 이것을 보고 크게 느껴, “짐승이 그 새끼를 생각하는 것이 사람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하고 곧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여 사냥을 그만두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불경을 배우니, 명성이 자자하여 같은 무리들이 감히 그를 능가하지 못하였다. 금강산에 들어가서 나무 열매를 먹고 베옷을 입고 자리에 눕지도 않으면서 장차 생을 마칠 것 같더니, 그의 어머니가 문에 서서 자기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을 것을 생각하여, 드디어 돌아가면서 게(偈 불가의 시사〈詩詞〉를 지어 이르기를,
바위 앞의 송백에게 말을 하노니 / 寄語巖前松栢樹
다시 와서 너와 더불어 일생을 마치리라 / 重來與爾終天年
하였다. 그 뒤에 식영암(息影庵)에게 사사(師事)하여, 능가경(楞伽經)을 배우니, 다른 중들은 그저 거죽은 훑었으나 혼수만이 홀로 깊이 오묘한 도를 깨달았다. 현릉(玄陵 공민왕께서 광명사(廣明寺)에 도량(道場)을 세우고 나옹(懶翁)으로 주관하게 하니 당시의 중[衲子]으로서 당에 오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임금이 체후(體候)가 편치 않으시어 저물녘에 파장(罷場)하려 하는데, 장사(場師)가 나중에 오니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맞아들였다. 사(師)가 문 밖에 서 있을 때 나옹이 “어떤 것이 당문구(當門句)가 되겠는가.”하고 물으니, 사가 대답하기를, “좌로도 우로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중간에 섰습니다,” 하였다. 그러면, “어떤 것이 입문구(入門句)가 되겠는가” 하니, 사가 곧 문 안으로 들어서며 대답하기를, “들어왔지만 들어오지 않았을 때와 같습니다.” 하였다. 또, “문내구(門內句)는 무엇인고.” 하니 대답하기를, 안팎이 본래 공중이거늘 무엇을 일러 섰다 하리오.” 하였다. 다시 묻기를, “산이 어찌하여 봉우리의 기슭에서 끝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높은 것을 만나면 곧 낮아지고 낮은 것을 만나면 곧 끝납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물이 어디로부터 와서 개천을 이루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대해(大海)가 스며 흘러 도처에 개천을 이루었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밥은 어찌하여 흰 쌀로 만드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모래나 돌을 찧을 것 같으면 어찌 좋은 밥이 되겠습니까.” 하니, 깊이 인정하였고 신우(辛禑)가 드디어 국사(國師)로 삼았으나 사(師)는 소문을 듣고도 기뻐하지 아니하며, 게(偈)를 짓기를,
30년 동안 속세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 三十年來不入塵
물가와 수풀 밑에서 참된 성정을 길렀는데 / 水邊林下養情眞
누가 시끄러운 인간사를 가지고 소요하며 / 誰將擾擾人間事
자재(구속과 방해가 없음)하는 몸을 속박하고자 하는고 / 係縛逍遙自在身
하였다. 하루는 청룡사(靑龍寺)에 있을 때에 병이 들자 문인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기를, “내가 저녁 때 가야겠구나.”하고 저녁이 되자 담[墻]에 기대어 게를 지어 이르기를,
천운에다 맡기고 마음대로 일생을 보냈는데 / 任運騰騰度一生
병중의 소식이 또한 분명하도다 / 病中消息更惺惺
뉘라서 나 돌아가는 곳을 알리오 / 無人識得吾歸處
창 밖에 흰 구름이 푸른 병풍에 비꼈도다 / 窓外白雲橫翠屛
하고 엄연히 서거하였다. 사가 일찍이 윤평(尹評)에게 청하여 산수화 12폭을 그리게 하고, 또 윤소종(尹紹宗)에게 청하여 시를 짓게 하니, 윤소종은 눈을 들어 그림을 바라보고 붓을 휘둘러 시를 지었다. 윤소종이 나가자 사가 문인에게 말하기를, “이 시가 좋긴 하나 병풍에 쓰기는 어려우니, 목로(牧老 이색)를 맞아 온 것만 같지 못하다.”하고, 드디어 목은(牧隱)을 맞아오니 목은이 방에 와서 병풍을 펴고 그 속에 앉아 오래도록 생각하다가 먼저 제목을 쓰기를, “이것은 황학루(黃鶴樓)요, 이것은 등왕각(滕王閣)이다.” 하여 하나하나 이름을 붙인 뒤에 붓을 들어 시를 지으니, 시사(詩思)가 신묘한 경지에 이른 듯하였다. 드디어 손수 병풍에 쓰고 가니, 사가 말하기를,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노련한 솜씨다.”하고 보배로 여겨 완상하였는데 그 뒤에 광평 부원군(廣平府院君) 이인임(李仁任)의 소유가 되었다. 내가 젊어서 유생 가요청(儒生歌謠廳)에서 이 글씨를 보았는데, 필적이 소탈하면서도 힘이 넘쳤으니, 바로 목은의 수필(手筆)이었다.
중 둔우(屯雨)는 환암(幻庵 혼수(混修))의 고제(高弟)이다. 어려서부터 학업에 힘써 경전(經傳)을 탐독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뜻을 정밀하게 연구하였다. 또 시에도 능하여 시사(詩思)가 청절하여 목은(牧隱)ㆍ도은(陶隱) 등 선생과 더불어 서로 시를 주고 받았다. 아조(我朝)에서는 불교를 숭상하지 않아 명가의 자제는 머리를 깎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승려로서 글을 아는 자가 없어 사(師)의 이름이 더욱 나타났으며 사방의 학자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고, 집현전의 선비들도 모두 탑하(榻下)에 나아가 글을 물으니, 성대하게 유석 사림(儒釋士林)의 사표가 되어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였다. 나의 백형과 중형이 일찍 회암사(檜巖寺)에서 글을 읽을 때, 사의 나이가 90여 세였는데 용모가 맑고 파리하며, 기체가 여전히 강하여 혹은 이틀쯤 밥을 먹지 않아도 그다지 배고파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밥을 올리면 혹은 몇 그릇을 다 먹되, 또한 배부른 빛이 없고 며칠이 지나도록 변소에 가지 아니하며, 항상 빈 방에 우뚝 앉아서 옥등을 달고 깨끗한 책상을 놓고, 밤새도록 책을 보아 작은 글자까지 하나하나 연구하며 졸거나 드러눕는 일이 없으며, 사람을 물리쳐 옆에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부를 일이 있으면 손으로 소쟁(小錚)을 쳐서 제자들이 수응하도록 하였으며, 큰소리를 지르지 아니하였다. 일본 국사인 중 문계(文溪)가 시를 구하여 진신(縉紳) 중에서 시를 지은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되었는데, 사도 또한 명을 받들어 시를 지었다. 그 시에,
수국고정 / 水國古精
상쾌한 무위의 사람이로다 / 灑然無位人
빨리 달리는 것도 응당 스스로 그칠 것이요 / 火馳應自息
고목처럼 섰으니 다시 누구와 친하리오 / 柴立更誰親
풍악에는 구름이 발 아래에서 일고 / 楓岳雲生屨
분성에는 달빛이 성문에 가득하도다 / 盆城月滿闉
바람 맞은 돛은 해천이 넓고 / 風帆海天闊
매류는 고원의 봄이로구나 / 梅柳故園春
하였다. 당시에 춘정(春亭 변계량)이 문형(文衡)을 주관(主管)하였는데, 쇄연무위(灑然無位)의 글귀를 고쳐서 “소연절세인(蕭然絶世人 쓸쓸히 세상과 인연을 끊은 사람)이라 하니, 스승이 말하기를, “변공(卞公)은 참으로 시를 모르는 사람이로다. 소연(蕭然)이 어찌 쇄연(灑然)만 하며, 절세(絶世)가 어찌 무위(無位)만 하겠는가. 이것은 자연무위(自然無爲)의 뜻을 깎아 없앨 뿐이로다.”하고, 항상 문사를 보면 섭섭해 마지않았다. 지금 천봉집(千峯集)이 세상에 전해진다.
국초(國初)에 중 장원심(長遠心)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키가 커서 길을 가면 우뚝히 무리중에 눈에 띄고 손으로 장랑(長廊)에 걸린 현판을 만질 수 있을 정도였다. 또 그 사람됨이 익살스럽고 사심도 없고 욕심도 없으며, 사는 곳이 일정하지 않았으며 그 사는 지경 밖을 벗어나지 않고, 밤이면 담에 의지한 채 새벽을 맞고 병이 나서 시중에 드러누우면 시인(市人)이 다투어 와서 밥을 주었고 공후(公侯)ㆍ재추(宰樞)의 집에서 합(榼)을 가지고 와서 먹을 것을 보내는 사람도 또한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나라에 수해나 가뭄이나 요사한 재해가 있으면, 제자를 모아 정성껏 기도를 드렸는데 혹 응답하는 바도 있었다. 천금을 받더라도 기뻐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잃더라도 성내지 아니하며, 사람이 주면 남녀의 의복을 가리지 않고 모두 몸에 걸쳤다가 누가 혹 달라고 하면 모두 벗어주어, 옷이 있으면 몸을 가리고 옷이 없으면 벗으며, 혹 풀을 엮어 옷을 삼고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혹 비단옷을 입어도 영화롭게 여기지 않으며, 남에게서 받은 물건이 한이 없으나 남에게 준 것도 또한 셀 수 없었다.
공경(公卿)을 보았다고 해서 반드시 공경을 표하지 않았으며, 우부(愚婦)를 보아도 또한 서로 말을 나누었으며, 시체를 보면 짊어지고 가서 묻어주었다. 하루는 구렁 속에 있는 시체를 보고 통곡하여 몹시 슬퍼하고 일으켜 업었는데, 시체가 등에 붙어서 3일 동안이나 떨어지지 아니하여, 그 제자들이 부처에게 기도하여 겨우 면하였는데 이후로는 시체를 업지 않았다.
일찍이 그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뼈를 불에 태워 화신(化身)하고자 한다.” 하니, 그 무리가 땔나무를 쌓아 대(臺)를 만들었는데, 장원심이 그 위에 꿇어앉아 있다가 불빛이 점점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 괴로움을 참지 못하여 몰래 연기를 따라가 빠져나와 방장(方丈)에 돌아와 있었다. 그 무리가 스승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여, 서로 울면서 절에 왔는데, 장원심이 엄연히 선실(禪室)에 않아 있는 것을 보고 절을 하고 그 연고를 물으니, 장원심이 말하기를, “내가 서천(西天)으로부터 왔으니 사대(四大 불가에서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을 말함. 즉 몸을 말한다)는 이미 화해서 사라졌으나, 법신(法身)은 상주하여 멸하지 않는다.”하고,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어떤 중이 있었는데 몸이 작고 한쪽 발을 좀 절었다. 항상 장안에 살면서 날마다 성중을 두루 돌아다니며, 부잣집과 지체 높은 댁을 찾아다니지 않는 곳이 없었다. 항상 손뼉을 쳐서 닭의 날개치는 시늉을 하며 입을 움츠리고 소리를 내어 혹 수탉이 우는 소리를 하고, 혹 두 닭이 서로 싸우는 소리를 내며, 혹은 닭이 알을 낳는 소리를 내어 그 흉내내는 소리와 모양이 그럴듯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혹 촌닭이 응하여 우는 것이 있으면 또 노래를 지어 몸을 흔들며 부르기를, “인생이여. 인생이여. 한 칸 초가라도 마음에 즐겁도다. 인생이여. 인생이여. 옷이 헤져 백번을 기워 입어도 또한 싫지 않도다. 염라대왕의 사자(使者)가 잡으러 오면 아무리 세상에 살고자 한들 어찌 그리 되겠는가.”하고 또 부르기를, “관음제석(觀音帝釋)이여, 제석관음(帝釋觀音)이여, 이 몸이 만약 죽으면 완전히 지옥에 떨어지리라.” 하니, 그 노래가 대부분 이런 것이었다. 곡조가 농가(農歌)와 비슷하여 수많은 어린이들이 떼를 지어 따라다니니 중이 항상 말하기를, “내 하인배가 많은 것은 삼공(三公)이라 할지라도 미치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루에 얻는 것이 많게는 섬 곡식에 이르러 이것으로 먹고 입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닭중[鷄僧]이라 불렀다.
신수(信修)라고 하는 중은 나의 향리 파주(坡州)에서 생장하여 낙수(洛水)의 남쪽에 초가를 짓고 살았다. 성품이 방탕하고 익살맞아서 말만 하면 포복절도(抱腹絶倒)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또 재물을 쓰는 데 인색하고 물건을 아끼는 법이 없어서 가산(家産)과 전지(田地)를 모두 여러 조카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보습과 호미로 밭갈지 아니하고도 여름에 항상 쌀밥을 먹었다. 중이 늙어서 얼굴이 탈바가지[假面] 같았는데, 머리를 흔들고 눈을 굴리며 16나한(羅漢 부처의 제자들)의 형상을 하되, 하나하나가 모두 다르고, 또 다른 사람의 행동거지를 보면 문득 그 모양을 시늉하며, 비록 평소 알지 못하던 높은 벼슬아치도 한번 보면 구면인 것같이 이름을 부르며 서로 너, 나 하였다. 절 앞에 사는 늙은이에게 젊은 아내가 있어 중이 그 여자와 더불어 서로 정을 통하였다. 늙은이가 집안이 어려워서 중의 덕을 입고자 하여 아내를 데리고 절 속에 와서 붙여 살았는데, 중도 또한 늙은이를 사랑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많이 주었다. 세 사람이 한 이불을 덮고 함께 자되 서로 시기하지 아니하여 사내아이 하나와 계집애 하나를 낳았는데 중은, “노인의 자식이다.”하고 “노인은 또한 화상(和尙)의 자식이다.” 하였다. 중이 절에 있으면 노인은 산에 가서 나무를 하거나 밭에서 채소를 가꾸었으며, 중이 만약 길을 떠나면 노인이 짐을 지고 그의 종이 되곤 하였다. 절에서 산 지 몇 해 만에 아내가 죽었는데, 여전히 중을 따라 살았으니 그 의(義)가 형제와 같았다. 노인이 죽자 중이 업고 가서 장사를 지내주었다. 중이 술마시기를 좋아하여 엄청난 양의 술을 고래가 물마시듯 하였다. 사람들이 혹 속여서 심지어 쇠 오줌이나 흙탕물 같은 다른 것을 갖다주어도 한번에 쾌히 마시고 나선, “이 술은 아주 쓰다.” 하였다. 또 밥을 잘 먹어 마른 밥이나 단단한 떡이라도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잠깐 동안에 먹어 치웠다.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도 공공연히 어육(魚肉)을 먹었으므로 사람들이 보고 비웃으면, “이것은 토(土 오자(誤字)인 듯하다)이다. 내가 죽인 것이 아닌데 먹는다고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하였다. 경인(庚寅) 연간에 내가 상(喪)을 당해 파주에 있을 때 중이 항상 왕래하였는데, 나이가 70을 넘었는데도 기운은 여전히 정정하였다. 혹 어떤 사람이, “무슨 까닭으로 아내를 두고 고기를 먹느냐.”라고 물으면 중은 말하기를, “이 세상 사람은 망령되이 사념을 일으켜서 이욕(利慾)으로 서로 싸우며, 혹은 마음속에 포악함을 감추고 혹은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저 이름난 출가자(出家者)들도 또한 모두 이와 같아, 향기로운 고기 냄새를 맡고서도 억지로 침을 삼키며,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도 흔들리는 마음을 힘써 바로잡는다. 나는 이와 달라 맛있는 것이 있으면 먹고 여색(女色)을 보면 취하기를 물이 쏟아지듯이 하며, 흙이 구덩이를 메우듯이 하여 물건에 마음이 없고 작은 사심도 모두 없앴으니, 내가 내세(來世)에 여래(如來)가 되지 못하면 반드시 나한(羅漢)이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제 재물을 아껴서 축적하는 데 힘쓰는데, 이 몸이 한번 죽으면 곧 다른 사람의 것이 될 것이니, 생전에 맛있는 음식 먹고 즐김만 같지 못하다. 대개 남의 자식이 되어 그 아비를 섬김에 있어서 모름지기 큰 떡을 만들고, 맑은 꿀 한 되와 빚은 술과, 썬 고기로 아침 저녁으로 올릴지니, 죽은 뒤에 마른 것과 마른 과일, 남은 술잔과 식은 불고기를 관 앞에 놓고 울며 제사지낸들 죽은 사람이 이를 먹겠느냐. 자네는 미처 이렇게 어버이를 섬기지 못했을지라도, 자네 자식에게는 이와 같이 하여 자네를 섬기도록 함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때로 밥을 앞에다 놓고 방울을 흔들어 경(經)을 외면서 스스로 혼을 부르기를, “신수(信修) 신수여, 죽어서 정토(淨土)에 태어나거라. 살아서는 비록 도리를 어기고 날뛰었으나 죽어선 마땅히 진실하여라.”하고, 곧 소리내어 크게 울었는데 그 소리가 매우 처량하였다. 그후 손뼉을 치며 크게 웃고는 주인에게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바랑을 메고 사라져버렸다.
박거경(朴巨卿)이 홍문관 전적(典籍)으로서 어사(御史)를 겸하고 호남 과장(科場)에 가서 감독할 때, 고와남양(高臥南陽) 시(詩)로 선비를 시험하고 수원부(水原府)에 돌아왔는데, 부사가 나와 맞이하지 않으므로 박거경이 동헌(東軒)에 나아가 크게 노하여 아전을 불러 죄를 주려 하다가, 바깥 문 사이에서 따르는 자들이 서로 대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의심스러워 물어보니, 바로 서울에서 온 정비초(政批草 관직 발령장)로 박거경을 남양 부사(南陽府使)에 제수한 것이었다. 박거경이 얼굴빛이 달라지며 누워버리니 당시 사람들이 시(詩)를 지은 것이 예언이 되어버린 소치라 하였다.
세종이 종학(宗學)을 신설하여 종족(宗族)을 모아 글을 읽게 하였는데, 순평군(順平君)은 나이 40이 넘도록 한 자도 알지 못하였다. 처음으로 《효경(孝經)》을 읽을 때, 학관이 ‘개종명의장 제일(開宗明義章第一)’이란 일곱 자를 가르쳤으나, 순평군은 도무지 읽지 못하고, “내가 지금 늙고 둔하니 다만‘개종(開宗)’두 자만 알면 족하다.”하고는 드디어 말 위에서도 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또 종에게 말하기를, “너희들도 또한 ‘개종’두 자를 잊지 않고 있다가 내가 막힐 때 가르쳐다오.” 하였다. 죽을 때 처자를 모아놓고 유언하기를, “사생(死生)이 지대하니 어찌 마음이 쓰이지 않으리오마는, 다만 영구히 종학을 이별하는 것이 대단히 통쾌하다.” 하였다.
우리 이웃에 박가(朴家) 성을 가진 유생이 유가(柳家)의 사위가 되어 그 집에 함께 살았는데, 항상 두 종년을 사랑하였으나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였다. 어느 날 한밤중에 종년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집안에 있는 어린 마부가 보고 도둑이라 의심하여, “도둑이 아무개 방에 들었다.”하고 일러바쳤다. 장인이 크게 노하여 나오니 사방의 이웃이 이를 보고 다투어 활과 몽둥이를 가지고 잠깐 사이에 구름과 같이 몰려들었다. 사위가 문을 밀고 보니 바깥으로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발로 벽을 박찼으나 단단하여 깨뜨릴 수가 없어 나가려 해도 나갈 수 없고 손발이 모두 상하고 땀이 온몸에 흘렀다. 창 틈으로 내다보니 불빛 속에 평소 알고 지내는 이웃 사람이 서 있으므로, 사위는 몰래 불러서 구해 달라고 불러보았으나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듣지 못하다가, 잠시 후에 그 소리를 듣고는 그가 사위인 것을 알고 말하기를, “도둑은 큰 도둑이 아니니 잡을 필요가 없다.”하자, 이때 장인도 웃으며 들어가고 이웃 사람들도 흩어졌다. 사위는 매우 부끄러워하여 몇 달 동안을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 선비 정 모(鄭某)가 상처(喪妻)를 한 뒤, 남원에 부잣집 과부가 산다는 말을 듣고 배우자로 삼으려고 날을 가려 정혼하고, 정(鄭)이 먼저 군청에 이르러 예물을 갖추었는데, 과부가 계집종을 보내어 그 행동거지를 보게 하였다. 계집종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수염이 많은데다가 털모자까지 썼으니 늙은 병자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였다. 과부가 말하기를, “내가 나이 젊은 장부(丈夫)를 얻어서 늘그막을 즐기고자 하였는데, 이런 늙은이를 어디다 쓰리오.” 하였다. 군청 관리들은 휘황하게 촛불을 켜들고 둘러싸서 과부 집으로 갔으나, 과부는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정은 들어가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되돌아갔다. 또 악관(樂官) 정 모가 만년에 또한 배우자를 잃은 뒤, 부잣집 여자를 첩으로 삼고자 하여 어느날 부잣집에 가보니, 그림 병풍을 치고 만당(滿堂)에 붉은 털요를 깔고 당중에다 비단요를 펴놓았다. 정이 자리에 나아가 스스로 계략을 잘했다고 생각하였는데, 여자가 들여다보고 말하기를, “70살이 아니면 60살은 넘었으리라.”하고, 탄식하면서 좋지 않은 기색이 있었다. 밤을 틈타 여자의 방에 뛰어들어가니 여자가 정을 꾸짖기를, “어느 곳에 사는 늙은이가 내 방에 들어오는가. 용모가 복이 없을 뿐 아니라 말소리까지도 복이 없구나.”하고 밤중에 창을 열고 나가버리니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그뒤 어떤 유생이 희롱하여 시를 짓기를,
어지럽게 욕탁(정교하는 것)하여 얼마나 기쁘게 날뛰었던고 / 粉粉浴啄幾騰讙
두 정의 풍류가 일반이로다 / 二鄭風流是一般
호연을 맺으려다가 도리어 악연을 맺었으니 / 欲作好緣還作惡
이렇게 되느니 홀아비 신세가 더 나은 것을 / 早知如此不如鰥
하였다.
○ 사문(斯文) 최세원(崔勢遠)은 익살맞고 말주변이 좋았다. 항상 매 한 마리를 길렀는데, 꿩은 잘 잡지 못하고 아침저녁으로 닭을 잡아먹었다. 배불리 먹고는 구름 속으로 날아가버리자 최세원이 불러보았으나 돌아오지 않으므로, 이웃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이것 좀 보소. 이것 좀 보소. 닭도둑이 달아납니다.” 하였다. 그의 동생 최윤(崔奫)도 또한 말을 잘하였는데, 소갈질(消渴疾 당뇨병)에 걸려 오미자탕(五味子湯)을 즐겨 마셨다. 이로 말미암아 이가 모두 빠졌으나 정신은 쇠하지 아니하여 만년에 한 고을을 맡고자 하였다. 이웃 친구가 말하기를, “이가 없어 어찌 하겠느냐.” 하니, 취윤은 말하기를, “나에게 입으로 개암을 깨라 하면 이것은 못하겠거니와, 조정(朝廷)이 이를 가지고 군(郡)을 다스리게 하겠는가.” 하여, 사람들이 모두 포복절도하였다.
세조가 내경청(內經廳)을 설치하여 조정 선비를 모아 경서를 쓰게 하여, 나의 백형(伯兄)과 홍익성(洪益城)ㆍ강인제(姜仁齊)ㆍ정동래(鄭東萊)ㆍ조치규(趙稚圭)ㆍ이기수(李期叟)의 무리가, 항상 궁에 갇혀 밖에 나와 놀지 못하였다. 백형이 장난 삼아 시를 짓기를,
손에 붓을 들고 / 手執毛錐子
따분하게 한 봄을 보내었도다 / 辛勤過一春
자욱한 꽃 그림자 속에서 / 濛濛花影裡
술 취한 사람은 그 누구인고 / 爛醉是何人
하였다. 화사(畫史 도화서의 종6품) 홍천기(洪天起)는 여자인데 그 얼굴이 당세절색이었다. 마침 일을 저질러 사헌부에 나가 추국(推鞫)을 받을 때, 서달성(徐達城)이 젊었을 적에 여러 연소한 패들과 같이 활를 쏘고 술을 마시다가 또한 잡혀 와 있었다. 서달성이 홍천기의 옆에 앉아서 눈을 떼지 않으니, 이때 상공(相公) 남지(南智)가 대사헌이었는데, 보다 못해 말하기를, “유생이 무슨 죄가 있느냐. 속히 놓아주어라.” 하였다. 서달성은 나와서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무슨 공사(公事)가 이처럼 빠르냐. 공사는 마땅히 범인의 말을 묻고 또 고소장을 받아서, 곡직(曲直)을 분별해서 천천히 해야지, 어찌 이렇게 급하게 하는가.” 하였다. 이것은 다 홍천기의 옆에 오래 있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 한 말이므로, 친구들이 듣고 모두 웃어 마지 않았다.
○ 내 친구 손영숙(孫永叔)은 벼슬하지 않은 선비 시절에 장난삼아 10여 명이 떼를 지어 절에 돌아다니며, 몽둥이로 중을 때리고 물건을 빼앗는 짓을 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모두 의금부에 갇혀서 국문(鞫問)을 받았다. 이때 금법(禁法)이 엄하지 못하여 조정의 선비들이 모두 들어가 볼 수 있었으므로, 아침저녁으로 주찬(酒饌)이 많이 쌓이게 되었다. 손영숙이 말하기를, “구복(口腹)을 채우기에는 이곳만한 데가 없으니, 만약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면 무엇을 먹을꼬.” 하니,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그뒤에 대간(大諫)이 되어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마침 형옥의 폐단에 대해 논하자, 손영숙이 아뢰기를, “젊어서 옥(獄)에 있어 보니 옥은 죄인을 가두어두고 괴롭게 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영화로운 곳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옛 사람의 말에, ‘땅에 금을 그어놓고 옥이라 하여도 들어가지 않았다.’ 하였으니, 옥이 아름답다고 한들 사람이 어찌 영화롭게 생각하겠느냐.” 하니, 좌우가 모두 놀랐다. 손영숙은 진실하고 다른 뜻은 없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말을 실수한 것이었다.
○ 이차공(李次公)은 우스개 소리를 잘하여 잠시도 말을 그치지 않았다. 좌랑(佐郞) 신건(辛鍵)이 유장(儒將)에 뽑혀 어전(御前)에서 말을 타고 활을 쏠 때, 쏜 화살이 그의 발에 잘못 맞아 피가 신바닥에 흘렀다. 이차공이 말하기를, “1등 재주로다. 오발오중(吾發誤中 ‘내 발에 잘못 맞았구나’라는 말을 오발오중(吾發誤中)의 음만 빌어 비꼬아 쓴 것임)을 하였구나.” 하였다. 속어에 족(足)을 발이라 하고 말타고 활쏘기에서 오발오중(五發五中)을 상(上)으로 삼았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영릉(英陵 세종왕릉)의 사토(莎土)가 허물어졌으므로, 김은경(金殷卿)이 예조 참판이 되어 영의정과 재추(宰樞)로 하여금 여주(驪州)에 가서 새로 사토를 하게하고, 돌아오는 길에 김은경이 형조판서에 배수 되었는데, 재추가 배 안에서 술자리를 마련하고 위로할 때, 김은경이 마침 이질(痢疾) 증세가 있어 갑자기 설사를 하여 온 자리에 배설물이 가득 찼는데 이차공이 이 말을 듣고, “이것은 진(秦) 나라 목공(穆公)이 패왕(覇王)이 된 때와 같다.” 하였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이차공은 말하기를, “목공이 강을 건너고는 배를 불살라 버리지 않았소[濟河焚舟]”.” 하였다. 분(焚)과 분(糞)의 음이 같음을 두고 한 말이다. 어떤 벼슬아치가 향실(香室 대소 제사에 쓰는 향과 제문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곳)에 앉아서 장기를 두는데, 마(馬)와 장(將)의 두 장기말이 없었으므로, 단향(檀香) 조각으로 마를 만들고 사기 조각을 장으로 삼았다. 저쪽 마가 마침 이쪽 장궁(將宮)에 들어오므로, 장이 나아가 이를 치니 이차공이 이를 보고 말하기를, “이 전옥(典獄)의 사장(沙將)이 도둑의 향군(鄕君)을 사로잡았다.” 하였다. 그가 하는 말들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생원(生員) 최탁(崔倬)은 성질이 고고하여 사람들에게 굽실거리지 아니하였는데, 일찍이 태학생(太學生)이 되어 삼공 육경(三公六卿)에 뜻을 두었다. 하루는 학궁(學宮)에서 도보로 집에 돌아오다가 길에서 이조 정랑 이휘(李徽)를 만나서 말하기를, “자네가 전부 낭관(銓部郞官)이 되었으니 벼슬이 비록 화려하나, 나도 오늘 관중(館中)에서 또한 이조 판서가 되었으니, 그 맡은 바는 다르지만 종잇장 위의 허명(虛名)이긴 마찬가지이다.” 하였다. 생원 이시번(李時蕃)은 일찍이 말하기를, “어렸을 때 망령되이 높은 뜻을 품고 김구(金鉤) 선생에게 《주역(周易)》을 배워, 깊이 역(易)의 이치를 깨닫고 스스로 가슴속이 찬연하다 생각하여 다른 사람은 나에게 미치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루는 이시번이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을 나올 때, 파평군(坡平君) 윤암(尹巖)이 의금부 제조(提調)가 되어 관청 하인이 쌍쌍이 앞을 인도하고 여러 구종(驅從)들이 뒤를 옹위하여 오거늘,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저 사람이 비록 벼슬은 높지만 어찌 역(易)의 이치를 알리오.”하고, 하루살이 보듯 하였다. 그뒤에 이휘는 죽임을 당하고 윤암은 일찍 죽었으며, 최탁과 이시번은 모두 늙어서 죽었으니, 세상의 성쇠란 헛된 것이 아니다.
손영숙(孫永叔)이 이조 정랑이 되어 사신으로 호남(湖南)에 가서 옥사(獄事)를 추국할 때 나주(羅州) 기생 자운(紫雲)을 사랑하였는데, 그는 서울에서 자라 이원(梨園 기방) 제일부(第一部)에 있다가 죄를 지어 나주에 귀양온 것이었다. 손영숙은 세상 사정에 어두운 학자요, 자운은 명기(名妓)라, 비록 관(官)의 위엄이 두려워서 수청을 들기는 하지만, 항상 마음에 차지 않게 여겼다. 하루는 유생이 그가 지은 시문을 가지고 와서 품제(品題)를 해줄 것을 청하니, 기생이 말하기를, “어떻게 우열을 판별하오리까.” 하니, 손영숙은, “가장 좋은 것이 상상(上上), 상중(上中), 상하(上下)요, 그 다음은 이상(二上), 이중(二中), 이하(二下)요, 또 그 다음은 삼상(三上), 삼중(三中), 삼하(三下)이며, 품(品)에 들지 못하는 것은 차상(次上), 차중(次中), 차하(次下)요, 가장 떨어지는 것은 경지경(更之更)이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영숙이 일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고, 조치규(趙稚圭)가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어 나주에 이르러 또한 자운을 사랑하였다. 잠자리에 들어 서로 즐길 때 조치규가 묻기를, “너는 사람을 많이 겪었는데 나와 같은 자는 몇 등에 들겠는가.” 하니, 기생이 말하기를, “영공(令公)은 겨우 삼하에 들 뿐입니다.” 하였다. 조치규가 또, “어디에서 이렇게 말하는 법을 배웠느냐.” 하니, 기생은, “손영숙이 나에게 가르쳐주었소이다.” 하였다. 조치규가 다시, “손영숙은 몇 등의 사람인가.” 하니 기생은, “그야말로 진실로 경지경이요, 오직 군수 정문창(鄭文昌)이 충분히 이등(二等)에 들 만합니다.” 하였다. 노희량(盧希亮)이 시를 지어 희롱하기를,
호남 사신 중에 그 누가 당황하였던고 / 湖南奉使孰荒唐
이부 낭중 사북량이라 / 吏部郞中絲北良
3년 풍류를 사람들이 회자하더니 / 三載風流人膾炙
정문창이 있는 줄을 알지 못했노라 / 不知時有鄭文昌
하였는데, 이는 대개 당시(唐詩)를 본받은 것이었다. 병신년 중시(重試) 때 손영숙의 대책 (對策)이 처음으로 장원을 했을 때 겸선(兼善 홍귀달(洪貴達)의 자)이 시관이었는데, 편지를 보내어 축하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지금 지은 사책(射策)이 일지일(一之一)이 되었으니, 다시는 옛날의 경지경이 되지 않으리라.” 하였다. 그 뒤에 임금이 학궁(學宮)에 행행(行幸)하여 존사(尊師)의 예를 행하고자 할 때, 손영숙이 예방 승지(禮房承旨)가 되어 길에서 기지(耆之) 채수(蔡壽)를 만났는데, 손영숙이 근심하는 빛이 있으므로 기지가 말하기를, “자네는 어디가 몹시 불편한가?” 하니, 손영숙이 말하기를, “영산(永山 영산 부원군 김수온(金守溫))은 부처를 좋아하고, 하동(河東 하동 부원군 정인지)도 또한 논의가 있는 사람인데, 이와 같이 성대한 일에 기일이 이미 닥쳤으나, 지금까지도 시관(試官)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이렇게 걱정하고 있는 것이네.” 하였다. 기지가 말하기를, “임금이 대신과 논의하여 정할 일이니, 그대가 혼자 근심할 일이 아니네. 부득이한 경우엔 뽑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 하였다. 손영숙이 안색을 고치고 적임자를 물으니 기지가 말하기를, “파주 부원군 집 앞에 사는 첨정(僉正) 이삼경(李三更)은 그야말로 삼로(三老)이다. 족하(足下)가 자운의 평을 받아 이미 이경(二更)이 되었으니, 만약 또 3명에게 평을 받게 되면 곧 오경(五更)이 되리라.” 하니, 모든 사람이 포복절도하였다. 사북량이란 것은 손영숙이 젊었을 때에 생원시(生員試)에 응시했는데, 방(榜)이 나붙은 것을 보니 성명을 흘려 써놓았다. 손영숙이 겁을 먹고 안색이 변해서 말하기를, “방에 내 이름이 없다.”하자, 그의 친구가 방을 가리키며, “저 몇째 줄에 있는 것이 자네 이름이다.” 하니, 손영숙이, “저것은 손비장이 아니라 사북량이다.”하여, 지금까지도 그 말을 듣는 사람이 모두 웃는다.
어함종(魚咸從)이 젊었을 때 힘이 뛰어나게 세어, 그의 동생 아성(牙城)과 함께 무리를 모아 동네를 횡행하면서 날마다 닭을 잡아 손으로 쳐죽이는 것으로 일삼았는데, 광천(廣川)ㆍ광원(廣原)ㆍ청릉(淸陵)ㆍ현보(賢甫) 등은 모두 이름난 선비이지만,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저항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관(館)에 있을 때 대개 먹을 것이 생기면 반드시 빼앗아 혼자 먹어버리고, 관방이 차가우면 무리로 하여금 먼저 자리를 깔고 차례로 이불을 따뜻하게 한 뒤에 알몸으로 들어가 잤다. 온몸에 부스럼이나 옴이 난 사람을 보면, 어함종은 한 사람을 시켜 부스럼 딱지를 떼어내어 떡에 싸서 먹게 하니, 부스럼 딱지를 뜯기는 사람은 아파서 울고 먹은 사람은 토하고 재채기를 하니, 어함종은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모든 무리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저 사람이 힘을 믿고 우리를 못살게 구는데 우리는 끌려다니고만 있으니, 어찌 괴로움을 참겠느냐. 그가 예상치 못한 틈을 타서 꾀로써 제지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하루는 함종이 창부(窓阜)에 와서 걸터앉아 있을 때, 한 사람이 뒤에서 머리칼을 잡아 흔들고 다른 사람들은 각각 손발을 잡아 넘어뜨렸다. 어함종이 몸을 뿌리치고 일어나자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 도망갔는데, 광원이 잡히자 광천이 기둥 뒤에 숨어서 말하기를, “내 동생이 죽는다.” 하였다. 어함종이 여러 가지로 괴롭히고 욕을 보여서, 흙을 먹게 하면 흙을 먹고, 자부(姊夫)라 하라 하면 자부라 불렀다. 그런데 또 아버지라고 부르라 하자 광천이 듣고 있다가 멀리서 말하기를, “조금만 더 괴로움을 참고 부디 아버지라고는 부르지 말라.” 하였다. 병자년에 과시(科試)가 다가오자 어함종은 다섯 사람과 더불어 관방에서 글을 읽었다. 상사(上舍 진사 생원) 유조(兪造)가 잠에서 깨어 말하기를, “간밤의 꿈이 반은 길하고 반은 흉하다.” 하니, 어함종이 그 까닭을 물었다. 유조가 대답하기를, “뱀 다섯 마리가 방 속에서 하늘로 날아 올라가다가 뱀 한 마리는 공중에서 떨어졌다.” 하니, 어함종이 말하기를, “우리 다섯 사람 모두가 학업에 힘써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은 급제하고자 한 것인데, 그대는 어찌 상서롭지 못한 말을 하느냐. 그대는 마땅히 ‘땅에 떨어진 것은 나다.’라고 크게 소리지르라.” 하니, 유조가 드디어 그렇게 외쳤다. 어함종이 말하기를, “어찌 범연(泛然)히 나라고만 부르느냐.” 하니, 유조가, “땅에 떨어진 것은 조(造)다.”하고 외쳤다. 이듬해 네 사람은 급제하여 그뒤에 모두 대신이 되고 빛나는 공적이 겸하여 나타났으나, 유조만 홀로 만년까지 어렵게 살았으며 명관을 차지하는 데도 나아가지 못하였다.
사문(斯文) 변구상(卞九祥)은 문학은 넉넉하였으나 관리(官吏)로서 재간이 부족하였다. 한성 참군(漢城參軍)이 되었을 때 공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소송이 모여드는데 갑(甲)이 호소해도, “네 말이 옳다.”하고, 을(乙)이 호소해도, “네 말도 옳다.” 하여, 끝내 그 가부를 가리지 못하니, 조정에서 이 소문을 듣고 이 사람을 갈아버렸다. 당시 사람들이 세상의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켜 ‘변구상 공사(卞九祥公事)’라 하였다.
또 사문(斯文) 조백규(趙伯珪)는 다년간 유학 교수로 지냈는데, 하루는 헌납을 제수받고는 사문이 매우 기뻐하며 제자 김(金)을 불러 말하기를, “하손씨(賀孫氏 송((宋) 섭미도(葉味道), 처음 이름은 하손(賀孫), 시호는 문수(文修))야말로 정사를 제대로 한다.”하더니, 얼마 안 되어 다시 교수가 되자 사문이 또 김을 불러 말하기를, “하손씨 이 사람이 어찌 정사를 한다 하겠느냐.” 하여, 사림(士林)에서 웃음거리로 전해진다.
조사(朝士) 가운데 신(辛)이란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성품이 허황되어 항상 부자(富者)임을 자랑하고자 하였다. 하루는 쌀 한 주먹을 가지고 문 밖에 뿌린 뒤, 손님을 맞아들이면서 땅을 내려다보고 종을 꾸짖기를, “어찌해서 하늘에서 내린 물건을 함부로 하느냐. 그저께 충청도 사람이 쌀 2백 곡(斛)을 보내왔고, 어제 전라도 사람이 쌀 3백 곡을 보내왔다고 이와 같이 어지럽혔단 말이냐.” 하였다. 또 희첩(姬妾)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자 하여 항상 지분(脂粉)을 뿌려 방 벽에 바르고, 손님을 맞아들일 때 종을 꾸짖기를, “어째서 창 벽을 더럽혔느냐. 어제 아무 기생이 이 방에 와서 자더니, 새벽에 화장할 때 낯을 씻으며 이렇게 해놓았구나.” 하였다. 또 헝겊 조각을 종에게 주었다가 손님이 와서 당에 앉았을 때, 종이 뜰 아래 꿇어앉아 말하기를, “아무 아가씨가 비단신에 수놓은 것을 화아(花兒)에게 쓸까요, 운아(雲兒)에게 쓸까요?”하면, 선비는 말하기를, “대운아(大雲兒)에게 쓰는 것이 좋겠다.”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한때의 명기(名妓)였다.
또 교우(交友)를 자랑하고자 하여 미리 권세 있는 재추(宰樞)의 명함을 써서 종에게 주고는, 손님이 와서 앉았을 때 종이 명함을 가지고 와서 바치면, 선비는 그것을 옆에 놓고 일부러 오래 보지 않다가, 손님이 이것을 보니 노상(盧相)의 이름이라, 놀라 달아나려 하면 선비는 말리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친한 친구이니 동요하지 말라.” 하였다. 조금 있다가 종이, “노상이 그냥 돌아갔습니다.” 하니, 선비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오랫동안 이 사람을 보지 못하다가 지금 보고자 했는데, 어찌 그리 급하게도 갔느냐.” 하였다. 이런 줄을 아는 사람은 모두 그 비루함을 비웃었다.
신재추(辛宰樞)는 성품이 매우 급하였다. 파리가 밥그릇에 어지럽게 몰려들어 들어 날려 보내도 다시 모여들자, 재추는 크게 노하여 그릇을 땅에 던져버렸다. 부인이, “무지한 미충(微蟲)을 놓고 어찌 이다지도 화를 내시오.” 하니, 재추는 눈을 똑바로 뜨고 꾸짖기를, “파리가 네 서방이냐. 어째서 두둔하느냐.” 하였다.
진일(眞逸 성간(成侃)) 선생이 일찍이 서후산(徐后山 서강(徐岡))과 더불어 한림원에 들어갔었다. 서후산은 왕비의 조카뻘이 되는 사람으로 글로 이름이 나 있었으며, 세조가 장차 크게 발탁해서 등용하려 하여 은총이 비할 데 없었는데, 선생이 조정에서 물러나와 문득 백씨(伯氏)에게 말하기를, “서후산은 제 명(命)에 죽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백씨가 놀라면서 그 까닭을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사람됨이 너무 강하고 사나워서 할 말을 다하기를 좋아하니, 그가 어찌 죽음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피살되자, 사람들이 모두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주D-001]강인재(姜仁齋) : 강희안(姜希顔)의 호. 자(字)는 경우(景愚). 세종 신유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다.
[주D-002]성성이[猩] : 상상 속의 동물로 머리가 길고 붉으며 소리가 어린애 우는 것과 같으며 술을 좋아한다.
[주D-003]조(粗)와 불(不) : 강론의 성적을 조(粗)ㆍ불(不)ㆍ통(通)ㆍ약(略)의 네 자로 표하는데, 조ㆍ불은 그 최하의 성적이다.
[주D-004]괴정(槐庭) …… 분주하도다 : 주중세시기(奏中歲時記)에 괴화황 거자망(槐花黃 擧子忙)이라는 글이 있는데, 음력 7월경 괴화꽃이 필 때 과거보는 사람이 바쁜 것을 두고 이른 말이다.
[주D-005]산양(山陽)의 피리 : 《진서》 〈향수전(向秀傳)〉에 진(晉) 나라 향수가 산양(山陽)의 구거를 지나며 피리 소리를 듣고 회구심을 일으켰다고 한다.
[주D-006]사곡(斜谷) : 중국 섬서성에 있는 골짜기 이름인데, 〈촉지(蜀志)〉 제갈량전(傳)에 이르기를, 건흥(建興) 12년에 제갈량이 대중을 거느리고 사곡에서 나왔다고 되어있다.
[주D-007]와부(瓦釜) : 현지(賢智)한 자가 때를 만나지 못했을 때 어리석은 자가 높은 지위에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초사(楚辭)〉에 나온다.
[주D-008]돌아가신 …… 생각하여 : 원문(原文)에 죽은 아비를 생각하였다 하였으나, 이것은 저자 성현(成俔)이 혼수 아비의 휘(諱)가 숙령(叔鴒)인 것을 아재비[叔]라고 잘못 풀이한 데서 온 착오인 듯하다. 혼수가 열세 살 때 사냥간 것은 그 아비와 같이 갔었던 것으로 아비는 그 뒤에 죽었다.
[주D-009]수국고정(水國古精) : 한 글자가 빠져 내용이 자세치 않다.
[주D-010]목공이 …… 않았소[濟河焚舟] : 진(秦) 나라 목공(穆公)이 진(晉) 나라를 칠 때 퇴로를 막아서, 군사들로 하여금 싸움에 진력하게 하느라고 타고 온 배를 불지른 고사를 두고 이른 말이다. 여기서는 분(焚)과 분(糞)의 음이 같으므로 강을 건너다가 배 안에서 똥을 쌌다는 것을 이렇게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주D-011]삼로(三老) : 삼로오경(三老五更)에서 나온 말로 임금이 부형(父兄)의 예로 대우하던, 삼공(三公)의 벼슬에서 물러난 노인을 이른다.
[주D-012]저것은 …… 사북량이다 : 손영숙의 이름은 손비장(孫比長)으로, 방에 이름이 흘려 써져서 사북량(絲北良)으로 보인 것을 말한다.

 

 

춘정속집 제1권
 명(銘)
조선국(朝鮮國) 왕사(王師) 묘엄 존자(妙嚴尊者) 탑명(塔銘) 병서(幷序). 경인년(1410)


우리 태조 원년 10월에, 사(師)는 부름을 받고 송경(松京)에 왔다. 태조는 이달 11일이 탄신일인 것을 계기로 법복(法服)과 기물(器物)을 갖추어, 사(師)를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傳佛心印辯智無碍扶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妙嚴尊者)에 봉하였는데, 그 자리에는 양종(兩宗)과 오교(五敎)의 여러 절 승려들이 다 있었다.
왕사가 좌석에 올라 향을 사르고 복을 빌기를 마친 뒤에 불자(拂子)를 일으켜 세워 대중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은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이 말하지 않았으며, 역대(歷代)의 조사(祖師)들이 전하지 않았는데, 대중들이 도리어 알 수 있을까. 심사(心思)와 구설(口舌)로써 계교(計較)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우리 선종(禪宗)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고, 태조에게 아뢰기를, “유교에서는 인(仁)을 말하고 불교에서는 자비(慈悲)를 말하지만, 그 용(用)은 한가지입니다. 갓난아이를 돌보듯 백성을 보호한다면 곧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고, 지극히 어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나라에 임한다면 자연히 성수(聖壽)는 끝이 없고 자손들은 길이 창성하여 사직이 편안할 것입니다. 개국한 초창기인 지금 형법(刑法)에 걸린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 모두를 동일하게 사랑하시고 다 용서하셔서 여러 신하와 백성들이 함께 인수(仁壽)의 영역에 이르게 하소서. 그러면 이것은 우리 국가의 끝없는 복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주상이 듣고 좋게 여겨, 즉시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놓아 주었다. 당시에 한산(韓山) 목은(牧隱) 이문정공(李文靖公)이 시를 지어 왕사에게 보내왔는데, ‘성주는 용이 되어 하늘에 날고, 왕사는 부처로 세상에 나왔네.[聖主龍飛天 王師佛出世]’라는 구절이 있었다.
주상은 회암사(檜巖寺)의 나옹(懶翁) 스님이 거처하던 대도량(大道場)에 들어가 지내라고 왕사에게 명하였다. 정축년(1397, 태조 6) 가을에 절의 북쪽 벼랑에 탑을 지으라고 명했는데, 왕사의 스승 지공(指空)의 부도(浮屠)가 있는 곳이었다. 무인년(1398, 태조 7) 가을에 늙었다는 이유로 사임하고 돌아가 용문사(龍門寺)에 살았다. 임오년(1402, 태종 2) 5월에 지금의 우리 주상 전하께서 또 왕사에게 명하여 회암사에 들어가 지내라고 하였다. 다음해 정월에 또 사임하고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더니, 을유년(1405, 태종 5) 9월 11일에 입적(入寂)했다.
3년 만인 정해년(1407, 태종 7) 12월에 왕사의 유골을 회암사 탑에 안치하고, 또 4년 만인 경인년(1410, 태종 10) 7월에 상왕(上王)이 태조의 뜻으로 주상에게 말하니, 주상이 신 계량(季良)에게 명하여 그 탑에 이름을 붙이게 하고 또 명(銘)을 짓도록 하였다.
신 계량이 삼가 그 제자 조림(祖琳)이 지은 행장(行狀)을 살펴보니, 왕사의 휘는 자초(自超), 호는 무학(無學), 당호(堂號)는 계월헌(溪月軒)이라고 했고, 향년은 79세이며, 법랍(法臘)은 61세였다. 속성(俗姓)은 박씨(朴氏)로 삼기군(三岐郡) 사람이다. 부친의 휘는 인일(仁一)이니 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 문하 시랑(門下侍郞)이고, 모친은 고성 채씨(固城蔡氏)이다. 채씨가 꿈에 아침 햇살이 품속에 비치는 것을 보고 임신하여 태정(泰定) 정묘년(1327, 충숙왕 14) 9월 20일에 왕사를 낳았다.
왕사는 겨우 강보(襁褓)를 면하게 되었을 때부터 곧 청소를 했으며, 글을 배우게 되어서는 남이 감히 앞서지 못했다. 18세가 되어서 훌쩍 세상을 벗어나려는 뜻이 있어서 혜감국사(慧鑑國師)의 수제자인 소지선사(小止禪師)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용문산(龍門山)에 이르러 혜명국사(慧明國師) 법장(法藏)에게 법을 물었다. 국사가 법을 가르쳐 주고 나서 곧 말하기를, “바른 길을 얻을 자가 너 아니고 누구겠느냐.” 하고, 드디어 부도암(浮屠菴)에 살게 했다. 하루는 암자 안에서 화재가 일어났는데 왕사가 홀로 정좌(靜坐)하여 나무 인형처럼 있으니, 여러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병술년(1346, 충목왕 2) 겨울에 《능엄경(楞嚴經)》을 보다가 깨달은 것이 있어 돌아가 그 스승에게 고하니, 스승이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이로부터 잠도 자지 않고 밥먹는 것도 잊은 채 참구(參究)에만 전념하였다.
기축년(1349, 충정왕 1) 가을에 진천(鎭川)의 길상사(吉祥寺)에 이르러 살았다.
임진년(1352, 공민왕 1) 여름에는 묘향산(妙香山) 금강굴(金剛窟)에 머물렀는데, 공부가 더욱 진전되었다. 간혹 졸게 되면 마치 종이나 경쇠를 쳐서 깨우는 자가 있는 것 같았는데, 이때에 환하게 깨닫는 바 있어서 스승을 찾아 질의(質疑)하고 싶은 마음이 급급하였다.
계사년(1353, 공민왕 2) 가을에 분연히 떨쳐 일어나 연도(燕都)로 달려갔는데, 서천(西天 인도(印度))의 지공(指空)에게 참례하여 절하고 일어나 “3800리를 와서 화상(和尙)의 면목을 친견했습니다.” 하니, 지공이 “고려 사람을 모두 죽였구나.” 하였는데, 대개 허여하는 뜻이었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매우 놀랐다.
이듬해 갑오년(1354, 공민왕 3) 1월에 법천사(法泉寺)에 이르러 나옹에게 참례하È, 나옹이 한 번 보고서 큰 그릇으로 여겼다. 무령(霧靈)을 유람하고 오대산(五臺山)을 지나 서산(西山) 영암사(靈巖寺)에서 거듭 나옹을 만나보고 몇 해를 머물렀다. 왕사가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에는 밥먹을 때가 되어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으니, 나옹이 보고 말하기를, “네가 죽였느냐?” 하자, 왕사가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나옹이 하루는 왕사와 함께 섬돌 위에 앉았다가 묻기를, “옛날 조주(趙州)가 수좌(首座)와 더불어 앉아서 돌다리를 보고 묻기를, ‘이것은 누가 만들었느냐?’ 하니, 수좌가 답하기를, ‘이응(李膺)이 만들었습니다.’ 하였다. 조주가 말하기를, ‘어느 곳에 먼저 손을 대었겠느냐?’ 하니, 수좌가 대답이 없었다. 이제 누가 묻는다면 너는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하였다. 왕사가 곧 두 손으로 섬돌을 잡아 보이니, 나옹이 말을 그치고 갔다. 그날 밤에 왕사가 나옹의 방에 가니, 나옹이 “오늘에야 비로소 내가 너를 속이지 않은 것을 알았다.” 하였다. 뒤에 왕사에게 말하기를, “서로 아는 사람이 천하에 가득하나 마음을 아는 사람이 능히 몇 사람이나 되겠느냐. 너와 나는 일가(一家)을 이루었구나.” 하였다. 또, “도가 사람에게 있는 것은 코끼리에게 상아(象牙)가 있는 것과 같아서, 비록 감추고자 하나 될 수 없는 것이다. 훗날 네가 어찌 남에게 앞서는 인물이 되지 않겠느냐.” 하였다. 왕사가 깨달은 바를 질정(質正)함에 있어서는 거의 의심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산천을 두루 유람하고 스승과 벗을 찾아 나설 뜻은 거두지 않았다. 장차 강소(江蘇)와 절강(浙江) 지방을 유람하려 했으나, 마침 남쪽 지방에 변란이 있어 길이 막혔으므로 중지하였다.
병진년(1356, 공민왕 5) 여름에 우리나라로 돌아오고자 작별을 고하니, 나옹이 손수 한 장의 종이에 글을 써서 전송하기를, “일상 생활의 모든 기틀을 보니 세상 사람과 다른 데가 있다. 선악(善惡)과 성사(聖邪)를 생각지 않고, 인정(人情)과 의리(義理)에 따르지 않는다. 말을 함에 있어서 기운을 토해내는 것은 화살촉이 서로 부딪치는 것 같고, 글귀의 뜻이 기틀에 맞는 것은 물이 물로 돌아가는 것 같다. 한 입으로 빈주구(賓主句)를 삼키고, 몸으로 불조(佛祖)의 관문을 투과했다. 갑자기 떠난다고 하기에, 내가 게송(偈頌)을 지어 송별(送別)하노라.” 하였다. 그 게송에,
이미 주머니 속에 별천지가 있음을 알겠노니 / 已信囊中別有天
동서로 삼현을 쓰도록 일임해 둔다 / 東西一任用三玄
누가 너에게 선(禪)의 뜻을 묻는 이 있거든 / 有人問爾參訪意
면전에서 쳐서 거꾸러뜨리고 다시 말하지 말라 / 打倒面門更莫言
하였다. 왕사가 돌아오고 나니, 나옹도 지공으로부터 삼산(三山)과 양수(兩水)가 있는 곳에 머물면 불법이 흥성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고 돌아와 천성산(天聖山) 원효암(元曉菴)에 머물렀다.
기해년(1359, 공민왕 8) 여름에 왕사가 가서 만나니 나옹이 불자(拂子)를 주었다. 나옹이 신광사(神光寺)에 있게 되어 왕사도 갔으나, 나옹의 무리 중에 왕사를 꺼리는 자가 있었다. 왕사가 알고 떠나가니, 나옹이 왕사에게 이르기를, “법맥을 전하는 데 있어서 옷과 바리때〔衣鉢〕는 말과 글귀보다 못하다.” 하고, 시를 지어 왕사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한가한 중들이 남과 나를 구분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망녕되게 시비를 말하니, 매우 옳지 않다. 산승이 다음의 네 구절 게송으로써 길이 뒷날의 의심을 끊어주노라.” 하였다. 그 게송에,
작별에 임하여 특별히 헤아릴 것 있으니 / 分衿別有商量處
누가 알랴 그 가운데 다시 현묘한 뜻을 / 誰識其中意更玄
사람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더라도 / 任爾諸人皆不可
내 말은 공겁 이전을 투과했다 / 我言透過劫空前
하였다. 왕사는 고달산(高達山) 탁암(卓菴)에 들어가 도를 닦았다.
신해년(1371, 공민왕 20) 겨울에 전조(前朝)의 공민왕이 나옹을 봉하여 왕사(王師)로 삼았는데, 나옹이 송광사(松廣寺)에 머물면서 의발(衣鉢)을 왕사에게 전하니, 왕사가 게송을 지어 사례하였다.
병진년(1376, 우왕 2) 여름에 나옹이 회암사로 옮겨 가서 크게 낙성회(落成會)를 열었는데, 급히 편지를 보내어 왕사를 불러다가 수좌(首座)를 맡기려 하였다. 왕사가 극력 사양하니, 나옹이 말하기를, “일을 많이 맡는 것이 많이 물러나느니만 못한 것이지. 옛적 임제(臨濟)와 덕산(德山)은 수좌를 하지 않았었다.” 하고, 편실(便室)에 있게 하였다. 나옹이 세상을 떠나니, 왕사가 여러 산에 노닐면서 자신을 감추고 남에게 알리고자 하지 않았다. 전조의 말기에 명리(名利)로써 왕사를 불러 왕사로 봉하고자 했으나, 왕사가 모두 가지 않더니, 마침내 임신년(1392, 태조 1)에 태조의 지우(知遇)가 있었으니, 왕사의 거취가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계유년(1393, 태조 2)에 태조가 지리를 살펴 수도를 세우고자 하여 왕사에게 명하여 행차를 따르게 하니, 왕사가 사양하였다. 태조가 왕사에게 이르기를, “예나 지금이나 서로 만난다는 것은 반드시 인연이 있는 것이다. 세인(世人)이 터를 잡는 것이 어찌 도인의 안목만 하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계룡산(鷄龍山)과 신도(新都)를 순행(巡幸)할 때 왕사가 모두 호종(扈從)하였다.
그해 9월에 왕사가 선사(先師)인 지공ㆍ나옹의 두 탑의 명칭에 관한 일과 나옹의 진영(眞影)을 거는 일로써 교지(敎旨)를 받들어 회암사(檜巖寺)에 탑명(塔名)을 새기고,광명사(廣明寺)에 진영을 거는 불사(佛事)를 크게 열었다. 손수 나옹의 진영찬(眞影贊)을 짓기를,
지공의 천검과 평산의 할을 받고 / 指空千劍平山喝
어전에서 승려들 공부를 시험했네 / 選擇工夫對御前
최후에 신령한 빛 사리를 남기시니 / 最後神光留舍利
삼한의 조실로서 만년토록 전해지리 / 三韓祖室萬年傳
하였다.
10월에 나라에서 대장경(大藏經)을 옮겨 보관한 데 대한 불사를 연복사(演福寺)에서 개설하고 왕사에게 명하여 주석(主席)하게 하였다. 왕사가 무인년(1398, 태조 7)에 사퇴한 뒤로부터는 대중을 대하는 데 뜻이 없어, 비록 임금의 명령으로 다시 회암사로 갔으나 곧이어 금강산 진불암(眞佛菴)으로 들어갔다.
을유년(1405, 태종 5) 봄에 병세가 약간 있어 모시는 자가 의약(醫藥)을 드리고자 하니, 왕사가 물리치며 “나이 여든에 병들었는데 약은 써서 무엇한단 말이냐.” 하였다. 4월에 금장암(金藏菴)에 옮겨갔으니, 바로 왕사가 입적(入寂)한 곳이다. 8월에 의안대군(義安大君)이 왕사에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왕사의 회답 편지에, “멀리 산중에 살고 있어서 만나 뵈올 기약이 없습니다. 후일 불회(佛會)에서 뵙고자 합니다.”라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대중에게 말하기를, “머지 않아 나는 갈 것이다.” 하더니, 얼마 뒤 과연 입적하였다.
왕사의 병이 위독해지자 중이 묻기를, “사대(四大)가 제각기 흩어짐에 어느 곳을 향해 갑니까?” 하니, 왕사는 “모른다.” 하였다. 또 물으니, 왕사가 성난 목소리로 “모른다.” 하였다. 또 중이 묻기를, “화상(和尙)은 병든 가운데 도리어 병들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니, 왕사가 손으로 곁에 있는 중을 가리켰다. 또 묻기를, “육신(肉身)이라는 것은 본디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일 뿐이니 모두 없어지는 데로 돌아가는데, 어느 것이 곧 진정한 법신(法身)입니까?” 하니, 왕사가 두 팔로 버티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곧 그것이다.” 하였다. 대답을 마치고 고요히 떠나니 한밤중이었다.
당시에 화엄종(華嚴宗)의 승려 찬기(贊奇)가 송경(松京)의 법왕사(法王寺)에 있었다. 꿈에 왕사가 공중(空中)의 부처 정수리 연화(蓮花) 위에 서 있는데 부처와 연화의 크기가 하늘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꿈에서 깨어 마음으로 이상하게 여기고 절 사람들에게 그 꿈을 이야기하니, 듣는 이들이 그것은 심상한 꿈이 아닌 것 같다고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부고가 왔는데, 왕사가 입적한 시간이 바로 그 꿈을 꾼 때였다.
왕사가 지은 저서로 《인공음(印空吟)》이 있는데,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이 그 첫머리에 서문(序文)을 썼으며, 인간(印刊)한 대장경은 용문사(龍門寺)에 봉안했는데, 문정공이 그 말미에 발문을 썼다.
왕사는 질박함을 숭상하여 문채나게 꾸미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스스로 봉양(奉養)하는 것은 매우 박하게 하고, 남은 것은 곧 남에게 베풀었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8만 가지 행(行) 중에서 영아행(嬰兒行)이 제일이다.” 하면서, 모든 행위를 그와 같이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 사람을 대하는 공손함과 사물을 사랑하는 정성이 지극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지 억지로 힘써서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대체로 그 천성이 그러했던 것이다. 신 계량은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그 탑을 ‘자지홍융(慈智洪融)’이라 명명하고, 또 명(銘)을 붙인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왕사의 도 우뚝이 높으심이여 / 師之道卓
보통 사람 생각할 바가 아니니 / 匪夷所思
선각의 적통이요 / 禪覺之嫡
태조의 스승이었네 / 祖聖之師
왕사가 평상시엔 / 師在平居
어린아이와 같다가 / 嬰兒之如
안목을 갖춘 사람 만나면 / 具眼之遇
화살촉이 서로 부딪치는 것 같았네 / 箭鋒相柱
옷 한 벌 바리때 하나로 / 一鉢一衣
지극히 겸손하게 스스로 낮추었으나 / 謙謙自卑
더할 나위 없이 존숭을 받아도 / 尊崇無對
마치 본디 그러한 듯 자연스러웠네 / 若固有之
자신의 거취에 있어서 / 或去或就
선견지명으로 구차히 하지 않았으니 / 先見不苟
하늘이 주신 수명 / 天錫佛壽
일흔 아홉이었네 / 七旬有九
어디에서 오셨던가 / 來也何從
햇살이 품속에 비쳤고 / 日射懷中
어디로 가셨는가 / 去也何向
부처의 정수리 연화 위였네 / 蓮花之上
곳곳의 많은 제자들 / 處處其徒
왕사의 행적 드러내길 도모하니 / 圖表厥跡
천지 사이에 견고하기로는 / 兩間之堅
돌보다 오래가는 것 없기에 / 無久惟石
비석에 명을 새겨 / 刻此銘章
무궁한 후세에 보이노라 / 垂示罔極

 

[주D-001]빈주구(賓主句) : 임제(臨濟)가 제창한 4구(句)의 빈주 구조를 말한다. 빈간주(賓看主), 주간빈(主看賓), 주간주(主看主), 빈간빈(賓看賓)이 그것으로, 이를 통해 선기(禪機)를 제시하였다.
[주D-002]삼현(三玄) : 임제종(臨濟宗)의 법을 나타내는 세 강령으로, 현중현(玄中玄)은 그것으로서의 진실(眞實)을, 구중현(句中玄)은 말이나 인식상에 나타나는 진실을, 체중현(體中玄)은 실천 속에 나타난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臨濟錄》
[주D-003]교지(敎旨)를 …… 새기고 : 이 부분은 뜻이 통하지 않아 초간본에, “봉지각탑명(奉旨刻塔名)”이라 되어 있는 것을 참고로 하여 번역하였다.
[주D-004]지공(指空)의 …… 할(喝) : 나옹이 평산(平山)을 찾아갔을 때, 평산이 나옹에게 어디에서 왔는가를 묻자, 지공에게서 왔다고 한다. 평산이 지공의 일상생활을 묻자, “지공은 날마다 천검(千劍)을 쓴다.”고 했다. 평산이 “지공의 천검은 그만두고 그대의 일검을 가져오라.” 하니, 나옹이 방석으로 평산을 쳤다. 평산이 거꾸러지면서 크게 외치기를, “이 도적놈이 나를 죽인다.” 하니, 나옹이 “내 칼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살리기도 한다.” 하였다. 이에 평산이 크게 웃었던 일을 말한다.《懶翁集 行狀》
[주D-005]어전(御前)에서 …… 시험했네 : 홍무 경술년(1370, 공민왕 19) 9월에 나라에서 공부선(功夫選)을 베풀고 양종 오교의 여러 승려들을 모아 그들의 공부를 시험할 때 나옹에게 주맹(主盟)이 되도록 하였던 일을 말한다.《懶翁集 行狀》
[주D-006]사대(四大) : 육신(肉身)을 구성하는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의 네 가지 요소를 말한다.
[주D-007]영아행(嬰兒行) : 《열반경(涅槃經)》에서 말한 오행(五行)의 하나이다. 자리(自利)의 뜻으로 해석하면, 보살의 대행(大行)은 분별을 여읜 영아와 같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 하고, 이타(利他)의 뜻으로 해석하면, 인천(人天), 성문(聲聞), 연각(緣覺)의 제승(諸乘)이 영아와 같은데 보살이 이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대비심(大悲心)으로 이들과 같이 소선(小善)을 시현(示現)한다는 것이다.
[주D-008]선각(禪覺) : 스승인 나옹(懶翁)의 시호이다.
[주D-001]빈주구(賓主句) : 임제(臨濟)가 제창한 4구(句)의 빈주 구조를 말한다. 빈간주(賓看主), 주간빈(主看賓), 주간주(主看主), 빈간빈(賓看賓)이 그것으로, 이를 통해 선기(禪機)를 제시하였다.
[주D-002]삼현(三玄) : 임제종(臨濟宗)의 법을 나타내는 세 강령으로, 현중현(玄中玄)은 그것으로서의 진실(眞實)을, 구중현(句中玄)은 말이나 인식상에 나타나는 진실을, 체중현(體中玄)은 실천 속에 나타난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臨濟錄》
[주D-003]교지(敎旨)를 …… 새기고 : 이 부분은 뜻이 통하지 않아 초간본에, “봉지각탑명(奉旨刻塔名)”이라 되어 있는 것을 참고로 하여 번역하였다.
[주D-004]지공(指空)의 …… 할(喝) : 나옹이 평산(平山)을 찾아갔을 때, 평산이 나옹에게 어디에서 왔는가를 묻자, 지공에게서 왔다고 한다. 평산이 지공의 일상생활을 묻자, “지공은 날마다 천검(千劍)을 쓴다.”고 했다. 평산이 “지공의 천검은 그만두고 그대의 일검을 가져오라.” 하니, 나옹이 방석으로 평산을 쳤다. 평산이 거꾸러지면서 크게 외치기를, “이 도적놈이 나를 죽인다.” 하니, 나옹이 “내 칼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살리기도 한다.” 하였다. 이에 평산이 크게 웃었던 일을 말한다.《懶翁集 行狀》
[주D-005]어전(御前)에서 …… 시험했네 : 홍무 경술년(1370, 공민왕 19) 9월에 나라에서 공부선(功夫選)을 베풀고 양종 오교의 여러 승려들을 모아 그들의 공부를 시험할 때 나옹에게 주맹(主盟)이 되도록 하였던 일을 말한다.《懶翁集 行狀》
[주D-006]사대(四大) : 육신(肉身)을 구성하는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의 네 가지 요소를 말한다.
[주D-007]영아행(嬰兒行) : 《열반경(涅槃經)》에서 말한 오행(五行)의 하나이다. 자리(自利)의 뜻으로 해석하면, 보살의 대행(大行)은 분별을 여읜 영아와 같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 하고, 이타(利他)의 뜻으로 해석하면, 인천(人天), 성문(聲聞), 연각(緣覺)의 제승(諸乘)이 영아와 같은데 보살이 이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대비심(大悲心)으로 이들과 같이 소선(小善)을 시현(示現)한다는 것이다.
[주D-008]선각(禪覺) : 스승인 나옹(懶翁)의 시호이다.

임하필기 제26권
 춘명일사(春明逸史)
회암사(檜巖寺)가 없어진 일


양주(楊州)의 칠봉산(七峯山)에 회암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기내(畿內)의 큰 사찰이었다. 문정왕비(文定王妃) 때에 수륙재(水陸齋)를 지내 중들을 먹인 일이 있는데 거의 1천 섬이나 되는 쌀로 밥을 지었다. 그런데 밥이 익자 색이 붉어졌고, 얼마 안 가 국휼(國恤)이 있었으며, 그 뒤에 전갈이 많다는 이유로 폐사(廢寺)되었다. 3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단의 주춧돌 밑에 아직 전갈들이 떼로 모여 사는데 그 색이 모두 하얗고, 영남(嶺南)의 폐사에도 이따금 이와 같이 괴이한 일이 있다고 한다.


 

[주D-001]문정왕비(文定王妃) : 조선 중종(中宗)의 왕비로 파평 윤씨(坡平尹氏) 윤지임(尹之任)의 딸이다. 명종(明宗) 때 8년 동안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고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남동생인 윤원형(尹元衡) 일파가 정권을 쥐게 하였으며 불교를 독실히 믿어 중 보우(普雨)를 신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