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 관련 금석문등 /영조대왕의 생모 숙빈최씨

淑嬪崔氏의 神主를 새로운 祠宇에 봉안할 때 堂上 등의 服色을 어떻게 할

아베베1 2010. 11. 29. 15:47
1725년 雍正(淸/世宗) 3년

 (승정원

영조 원년 12월 22일 (갑신[을유]) 원본607책/탈초본33책 (13/21)

일기)

 

 淑嬪崔氏의 神主를 새로운 祠宇에 봉안할 때 堂上 등의 服色을 어떻게 할 지를 묻는 禮曹의 계

趙榮世, 以禮曹啓啓曰, 淑嬪神主, 移奉于新祠宇時, 本曹堂上·郞廳各一員, 禮貌官二員, 當爲陪進, 而取考謄錄, 則辛巳年國恤後, 仁嬪神主移奉時, 以淺淡服, 磨鍊擧行矣。今此祠宇移奉時, 陪衛服色, 亦依此磨鍊乎? 敢稟。傳曰, 依爲之。

 

 

영조 3년 3월 12일 (기해) 원본634책/탈초본34책 (24/28)
1727년 雍正(淸/世宗) 5년

 

 淑嬪崔氏의 祠宇에 거둥할 때 趙榮福 등이 배종함


○ 雍正丁未三月十二日淑嬪祠宇擧動, 卯時。上出仁政門外, 乘輦出敦化門。都承旨趙榮福, 左承旨安重弼, 右承旨洪好人, 左副承旨羅學川, 右副承旨洪龍祚, 同副承旨金致垕, 記事官沈聖希·閔亨洙·鄭益河, 〈事變〉假注書尹得和, 陪從。大駕至舊布廛前路上, 駐輦, 下敎于承旨曰, 前路甚廣, 而駕前侍衛, 錯雜如此, 問于兵曹, 可也。承旨洪龍祚, 奉敎傳于兵曹佐郞李彙恒處, 使之問來。上曰, 王命奉傳, 豈有文武之異, 而宣傳官例爲親往傳命, 則今此騎郞, 只送一軍卒, 而不爲親自進去, 事甚駭然, 從重推考, 使之親往問啓。出擧條 大駕至祠宇門外, 降輦, 御輿, 至幄次仍入祠宇。承旨·史官, 皆落後在外。藥房·政院·玉堂問安。答曰, 知道。傳于羅學川曰, 兵判卽爲牌招, 使之還宮時陪從, 可也。

 

숙종 61권, 44년(1718 무술 / 청 강희(康熙) 57년) 3월 9일(무오) 2번째기사
숙빈 최씨의 졸기

 

숙빈 최씨(淑嬪崔氏)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예장(禮葬)18668) 등의 일을 예에 의하여 거행하게 하였다. 관판(棺板)을 수송하게 하고 또 제수(祭需)를 넉넉히 보내도록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1책 9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註 18668]예장(禮葬) : 국가에서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는 것

 

영조 59권, 20년(1744 갑자 / 청 건륭(乾隆) 9년) 1월 19일(정유) 2번째기사
예에 있어 중요한 의문(儀文)과 함께 잘못된 묘현의도 고쳐서 내리게 하다

 

 

임금이 진연(診筵)에서 승지 홍상한(洪象漢)에게 말하기를,
“의문(儀文)은 예(禮)에 있어 중요한 것인데 《오례의(五禮儀)》를 지금 바로잡아 고치고 있으니, 중궁(中宮)·빈궁(嬪宮)의 묘현의(廟見儀) 가운데 잘못된 것도 고쳐서 내리게 하라. 묘현례 때 전하(殿下)의 대차(大次)는 종묘(宗廟)동문(東門) 밖의 재전(齋殿) 안에다 설치하고 중궁전(中宮殿)의 위차는 재전의 동쪽의 마땅한 지점에 설치하게 되어 있으며【만약 왕세자가 수가(隧鴐)할 경우에는 소차(小次)를 재전 안의 적당한 곳에 따라 설치하며 세자빈도 같이 행례(行禮)할 경우에는 소차를 중궁전의 위차(位次) 뒤에 적당한 곳에 설치한다.】 전하의 판위(版位)는 묘정(廟庭)과 영영전(永寧殿)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또【왕세자의 판위는 상의(常儀)와 같게 한다.】 입위는 종묘와 영녕전의 문밖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다고 하여【왕세자는 단지 전알(展謁)만 행하고 묘문(廟門) 밖 소차에 머물러 있고 만약에 세자빈도 같이 행례(行禮)할 경우에는 왕세자의 입위는 전하의 입위 뒤에 동쪽으로 가깝게 하되 서쪽을 향하게 한다.】이 책의 전의 의문(儀文)에 ‘하루 전에 설치한다[前一日設]’고 한 아래와 전의가 설치한다.[殿儀設]’고 한 위의 사이에 첨서(添書)하며, 종묘와 영녕전에서의 왕세자빈의 묘현의에는 왕세자의 배위(拜位)는 묘정(廟庭)과 영녕전의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고,【만일 어린 나이여서 전하가 데리고 행할 경우에는 전하의 판위 뒤에다 상의(常儀)와 같이 설치한다.】 또 입위(立位)는 종묘와 영녕전의 문 밖에다 동쪽으로 가깝게 하여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며,【전하가 데리고 행할 경우에는 중궁전의 묘현의와 같다.】 세자빈의 배위(拜位)는 조계(阼階) 위에다 동쪽으로 가깝게 하여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고 했는데, 이를 그책 전의(前儀) 속의 하루 전에 설치한다[前一日設]고 한 아래와 그날[某日]이라고 한 위의 사이에 첨서(添書)하여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상신(相臣)에게 묻게 하여 의주(儀註) 가운데 부록(附錄)하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사서(士庶)의 동추(同樞)도 오히려 3대를 으레 추증하는데, 더구나 국군(國君)의 사친(私親)을 아버지만 추증해서야 되겠는가?”
하고, 이어 이조에 명하여 인빈 김씨(仁嬪金氏)·숙빈 최씨(淑嬪崔氏)에게 아울러 3대를 추증하게 하고 이묘(二廟)에 고유(告由)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3책 124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應製錄

水村集卷之六

 

 

 

 淑嬪崔氏喪。遣內侍致祭文

 

   惟靈柔嘉淑質。塞淵雅性。蚤歲入宮。藹然懿行。自詠參昴。載頌樛葛。命安衾裯。禮恭巾櫛。翼翼小心。夙夜敬止。吉協熊夢。慶毓麟趾。鸞誥加封。象服增榮。彌自謹飭。戒在滿盈。逮予愆豫。至誠侍疾。焦熬不懈。八載如一。積憂致傷。無乃成痾。云胡一病。功蔑扁華。退就149_134a外第。竟未復起。仁而不壽。福善難恃。椒掖舊班。環佩永闃。九原莫回。六宮咸惻。身後有托。逝者何憾。撫念平昔。予深傷感。玆遣內侍。陳此泂酌。不昧者存。庶幾來格

 

 

 

 

 

숙빈최씨(淑嬪崔氏)에 대하여
1670년(현종 11)∼1718년(숙종 44).

조선 숙종(肅宗)의 후궁으로 영조(英祖)의 어머니이다.

증조부(曾祖父)는 통정대부 최말정(崔末貞)이고, 조부는 학생 최태일(崔泰逸),아버지는 행충무위부사과 최효원(崔孝元)이며 어머니는 홍계남(洪季男)의 딸이다.

숙빈최씨는 7세에 궁중에서 주로 청소, 설거지 등의 허드렛일을 하는 여자종인 무수리로 입궁하였다.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장희빈이 왕비가 되자 최씨인현왕후를 위해 기도를 드리는 중에 숙종의 은총을 받아 1693년 아들 영수군(永壽君)을 낳았다. 그러나 영수군은 두 달만에 세상을 떠났고, 1694년 인현왕후가 복위된 후에 그 해 9월 13일에 연잉군(延礽君) 이금(李昑)을 낳았으니 후에 영조(英祖)이다. 이어 1698년(1698)년 아들 하나를 더 낳았으나 태어난지 사흘만에 죽었다.

숙빈최씨의 인품은 온화하고 신중하였으며, 겸손하였으며, 예의와 배려가 깊었다고 한다.

최씨숙종 19년 4월에 숙원(淑媛)이 되었으며 1694년(숙종 20) 6월에 숙의(淑儀)가 되고, 1695년(숙종 21)에 귀인이 되었다. 1699년(숙종 25)에는 단종의 복위를 축하하면서 정1품 숙빈(淑嬪)으로 봉해졌다.

1716년(숙종 42) 경 갑작스럽게 숙빈최씨에게 병색이 있었으며, 병세는 점점 깊어 갔다. 숙종의 권유로 사저에 나가 요양을 하기도 하였으나 1718년(숙종 44) 3월에 4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716년 5월 12일 양주(楊州) 고령동(高嶺洞) 옹장리(瓮場里)에 장례를 지냈다. 1725년 영조가 즉위한 후에 휘덕(徽德)이라는 호를 올린다. 존호는 휘덕안순수복(徽德安純綏福)이다.

능원은 소령원(昭寧園)이고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267에 있다.

 

 

1725년 雍正(淸/世宗) 3년

 (승정원

영조 원년 12월 22일 (갑신[을유]) 원본607책/탈초본33책 (13/21)

일기)

 

 淑嬪崔氏의 神主를 새로운 祠宇에 봉안할 때 堂上 등의 服色을 어떻게 할 지를 묻는 禮曹의 계

趙榮世, 以禮曹啓啓曰, 淑嬪神主, 移奉于新祠宇時, 本曹堂上·郞廳各一員, 禮貌官二員, 當爲陪進, 而取考謄錄, 則辛巳年國恤後, 仁嬪神主移奉時, 以淺淡服, 磨鍊擧行矣。今此祠宇移奉時, 陪衛服色, 亦依此磨鍊乎? 敢稟。傳曰, 依爲之。

 

 

영조 3년 3월 12일 (기해) 원본634책/탈초본34책 (24/28)
1727년 雍正(淸/世宗) 5년

 

 

 淑嬪崔氏의 祠宇에 거둥할 때 趙榮福 등이 배종함


○ 雍正丁未三月十二日淑嬪祠宇擧動, 卯時。上出仁政門外, 乘輦出敦化門。都承旨趙榮福, 左承旨安重弼, 右承旨洪好人, 左副承旨羅學川, 右副承旨洪龍祚, 同副承旨金致垕, 記事官沈聖希·閔亨洙·鄭益河, 〈事變〉假注書尹得和, 陪從。大駕至舊布廛前路上, 駐輦, 下敎于承旨曰, 前路甚廣, 而駕前侍衛, 錯雜如此, 問于兵曹, 可也。承旨洪龍祚, 奉敎傳于兵曹佐郞李彙恒處, 使之問來。上曰, 王命奉傳, 豈有文武之異, 而宣傳官例爲親往傳命, 則今此騎郞, 只送一軍卒, 而不爲親自進去, 事甚駭然, 從重推考, 使之親往問啓。出擧條 大駕至祠宇門外, 降輦, 御輿, 至幄次仍入祠宇。承旨·史官, 皆落後在外。藥房·政院·玉堂問安。答曰, 知道。傳于羅學川曰, 兵判卽爲牌招, 使之還宮時陪從, 可也。

 

숙종 61권, 44년(1718 무술 / 청 강희(康熙) 57년) 3월 9일(무오) 2번째기사
숙빈 최씨의 졸기

 

숙빈 최씨(淑嬪崔氏)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예장(禮葬)18668) 등의 일을 예에 의하여 거행하게 하였다. 관판(棺板)을 수송하게 하고 또 제수(祭需)를 넉넉히 보내도록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1책 9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註 18668]예장(禮葬) : 국가에서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는 것

 

영조 59권, 20년(1744 갑자 / 청 건륭(乾隆) 9년) 1월 19일(정유) 2번째기사
예에 있어 중요한 의문(儀文)과 함께 잘못된 묘현의도 고쳐서 내리게 하다

 

 

임금이 진연(診筵)에서 승지 홍상한(洪象漢)에게 말하기를,
“의문(儀文)은 예(禮)에 있어 중요한 것인데 《오례의(五禮儀)》를 지금 바로잡아 고치고 있으니, 중궁(中宮)·빈궁(嬪宮)의 묘현의(廟見儀) 가운데 잘못된 것도 고쳐서 내리게 하라. 묘현례 때 전하(殿下)의 대차(大次)는 종묘(宗廟)동문(東門) 밖의 재전(齋殿) 안에다 설치하고 중궁전(中宮殿)의 위차는 재전의 동쪽의 마땅한 지점에 설치하게 되어 있으며【만약 왕세자가 수가(隧鴐)할 경우에는 소차(小次)를 재전 안의 적당한 곳에 따라 설치하며 세자빈도 같이 행례(行禮)할 경우에는 소차를 중궁전의 위차(位次) 뒤에 적당한 곳에 설치한다.】 전하의 판위(版位)는 묘정(廟庭)과 영영전(永寧殿)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또【왕세자의 판위는 상의(常儀)와 같게 한다.】 입위는 종묘와 영녕전의 문밖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다고 하여【왕세자는 단지 전알(展謁)만 행하고 묘문(廟門) 밖 소차에 머물러 있고 만약에 세자빈도 같이 행례(行禮)할 경우에는 왕세자의 입위는 전하의 입위 뒤에 동쪽으로 가깝게 하되 서쪽을 향하게 한다.】이 책의 전의 의문(儀文)에 ‘하루 전에 설치한다[前一日設]’고 한 아래와 전의가 설치한다.[殿儀設]’고 한 위의 사이에 첨서(添書)하며, 종묘와 영녕전에서의 왕세자빈의 묘현의에는 왕세자의 배위(拜位)는 묘정(廟庭)과 영녕전의 길 동쪽에다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고,【만일 어린 나이여서 전하가 데리고 행할 경우에는 전하의 판위 뒤에다 상의(常儀)와 같이 설치한다.】 또 입위(立位)는 종묘와 영녕전의 문 밖에다 동쪽으로 가깝게 하여 서쪽을 향하여 설치하며,【전하가 데리고 행할 경우에는 중궁전의 묘현의와 같다.】 세자빈의 배위(拜位)는 조계(阼階) 위에다 동쪽으로 가깝게 하여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고 했는데, 이를 그책 전의(前儀) 속의 하루 전에 설치한다[前一日設]고 한 아래와 그날[某日]이라고 한 위의 사이에 첨서(添書)하여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상신(相臣)에게 묻게 하여 의주(儀註) 가운데 부록(附錄)하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사서(士庶)의 동추(同樞)도 오히려 3대를 으레 추증하는데, 더구나 국군(國君)의 사친(私親)을 아버지만 추증해서야 되겠는가?”
하고, 이어 이조에 명하여 인빈 김씨(仁嬪金氏)·숙빈 최씨(淑嬪崔氏)에게 아울러 3대를 추증하게 하고 이묘(二廟)에 고유(告由)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3책 124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應製錄

水村集卷之六

 

 

 

 淑嬪崔氏喪。遣內侍致祭文

 

   惟靈柔嘉淑質。塞淵雅性。蚤歲入宮。藹然懿行。自詠參昴。載頌樛葛。命安衾裯。禮恭巾櫛。翼翼小心。夙夜敬止。吉協熊夢。慶毓麟趾。鸞誥加封。象服增榮。彌自謹飭。戒在滿盈。逮予愆豫。至誠侍疾。焦熬不懈。八載如一。積憂致傷。無乃成痾。云胡一病。功蔑扁華。退就149_134a外第。竟未復起。仁而不壽。福善難恃。椒掖舊班。環佩永闃。九原莫回。六宮咸惻。身後有托。逝者何憾。撫念平昔。予深傷感。玆遣內侍。陳此泂酌。不昧者存。庶幾來格

 

 

 

 

 

숙빈최씨(淑嬪崔氏)에 대하여
1670년(현종 11)∼1718년(숙종 44).

조선 숙종(肅宗)의 후궁으로 영조(英祖)의 어머니이다.

증조부(曾祖父)는 통정대부 최말정(崔末貞)이고, 조부는 학생 최태일(崔泰逸),아버지는 행충무위부사과 최효원(崔孝元)이며 어머니는 홍계남(洪季男)의 딸이다.

숙빈최씨는 7세에 궁중에서 주로 청소, 설거지 등의 허드렛일을 하는 여자종인 무수리로 입궁하였다.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장희빈이 왕비가 되자 최씨인현왕후를 위해 기도를 드리는 중에 숙종의 은총을 받아 1693년 아들 영수군(永壽君)을 낳았다. 그러나 영수군은 두 달만에 세상을 떠났고, 1694년 인현왕후가 복위된 후에 그 해 9월 13일에 연잉군(延礽君) 이금(李昑)을 낳았으니 후에 영조(英祖)이다. 이어 1698년(1698)년 아들 하나를 더 낳았으나 태어난지 사흘만에 죽었다.

숙빈최씨의 인품은 온화하고 신중하였으며, 겸손하였으며, 예의와 배려가 깊었다고 한다.

최씨숙종 19년 4월에 숙원(淑媛)이 되었으며 1694년(숙종 20) 6월에 숙의(淑儀)가 되고, 1695년(숙종 21)에 귀인이 되었다. 1699년(숙종 25)에는 단종의 복위를 축하하면서 정1품 숙빈(淑嬪)으로 봉해졌다.

1716년(숙종 42) 경 갑작스럽게 숙빈최씨에게 병색이 있었으며, 병세는 점점 깊어 갔다. 숙종의 권유로 사저에 나가 요양을 하기도 하였으나 1718년(숙종 44) 3월에 4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716년 5월 12일 양주(楊州) 고령동(高嶺洞) 옹장리(瓮場里)에 장례를 지냈다. 1725년 영조가 즉위한 후에 휘덕(徽德)이라는 호를 올린다. 존호는 휘덕안순수복(徽德安純綏福)이다.

능원은 소령원(昭寧園)이고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267에 있다.

 

 

 

 

 

 

 

 

 

정선필육상묘도
이미지제목

 정선필육상묘도

 

이미지부분명칭1  *
이미지부분명칭2  *
문화재지정사항  보물 제873호
요약설명  조선 중기의 화가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이 1739년에 그린 기록화. 서울 궁정동에 있는 육상묘와 그 뒤에 있는 백악산을 그림. 육상묘는 본래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사친인 숙빈 최씨(淑賓崔氏)의 신주를 봉사하기 위하여 1725년(영조 6년)에 세워진 것.


 

정선필육상묘도

 

1718( 44) () () () (). () () (1693) () ()·() , (1699) . 3 . (1718) 3 49 5 12 () () () (:) . () 1 , 3 2 . .
 
(),, , 1919

 

숙빈최씨신도비(淑嬪崔氏神道碑)  
 
 
     
  淑嬪崔氏神道碑
朝鮮國 淑嬪崔氏神道碑銘(并序)
綏祿大夫錦平尉兼五衛都摠府摠管臣朴弼成奉 敎譔
顯祿大夫礪山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臣枋奉 敎書
綏德大夫西平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臣橈奉 敎篆
我 殿下受命踐阼之元年乃 先淑嬪崔氏旣卒之八年也因有司考例陳請 命樹麗牲之石其文則不以 命詞臣而以 命臣弼成旣又 敎曰誇張之辭屢所不取亦非 先嬪平日小心謹愼之意其念哉臣弼成承 命悸恐屢辭終不獲 命則謹稽行錄崔氏系出首陽曾祖諱末貞階通政祖諱泰逸學生考諱孝元行忠武術副司果妣洪氏通政繼南女也以 顯廟庚戌十一月己未生 嬪丙辰選入宮甫七歲
肅宗大王十九年癸酉始拜 淑媛甲戌進 淑儀乙亥陞 貴人越四年己卯封 淑嬪女官極品也 嬪天姿沈凝簡默喜怒不形於色奉侍 兩殿夙夜靡懈莊敬戒愼戰兢自飾其接諸嬪曁宮人旣遜旣和俱得其懽心 上心重之奧我 仁顯王后曁我 惠順慈敬大妃亦殊遇之 嬪益自謙畏尤不喜言人短長侍御者或有言輒加誨責一宮之內翕然稱美焉 嬪同氣之籍軍門者自 嬪封爵辭遆其任 嬪謹愼之心實使之然也 上初以梨峴宮爲 嬪私第辛卯 命屬之內司 嬪知 聖意出公節儉克賛不色吝自丙申遘疾三載次淹間有因 上命出第調治而久闕承 俟常懷靡安或少出間輒即詣闕雖在疾病而其誠敬之不替如此戊戌三月九日戊午卒于彰義洞私第春秋四十九寔 肅宗四十四年也三殿遣中宮吊祭賵賜特厚哀榮備至以是年五月庚申禮葬于楊州高嶺洞瓮場里枕酉之原 嬪生三男惟我 主上殿下序居第二伯季生即天我 殿下初封延礽君辛丑册 王世弟甲辰誕承大統 中宮殿下徐氏 贈領議政達城府院君宗悌女也 王世子邸下靖嬪李氏所誕初封敬義君乙巳進册 儲副王女和順翁主幼未下嫁竊伏念 嬪柔嘉其性淑愼其儀敦重靚穆溫恭和順承 寧考思遇垂三十戴而勤儉自持卑巽以牧閔敢以榮貴少移所守肆惟 壺闈之間德意之融洽誠信之篤至於無間可以輝暎彤管儷美徃牒則其迓迎天篤生聖人承 列聖艱大之投綿 宗祊千億之祚者其必有由然矣臣於摭實之文寧質無華庶有以仰體 聖意而仍又繼之以銘曰/
天鍾異姿 旣淑且靈 塞淵其德 繄自穉齡 夙被 睿眷 承以巽順 誠心內蘊 孚洽宮壹乃膺禎嘏 誕我 聖躬 卜叶大橫 天佑吾東丕承丕顯 命靈長 善慶之徵厥理式章 鬱彼崇岡 有碑斯豊 稽首綴銘 用詔無窮/
皇明崇禎紀元後九十八年乙巳 月 日建/

 

 

 

 

 

 

 

 

 

 

 

 

 

 

 

정선필육상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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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필육상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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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부분명칭2  *
문화재지정사항  보물 제873호
요약설명  조선 중기의 화가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이 1739년에 그린 기록화. 서울 궁정동에 있는 육상묘와 그 뒤에 있는 백악산을 그림. 육상묘는 본래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사친인 숙빈 최씨(淑賓崔氏)의 신주를 봉사하기 위하여 1725년(영조 6년)에 세워진 것.


 

정선필육상묘도

 

1718( 44) () () () (). () () (1693) () ()·() , (1699) . 3 . (1718) 3 49 5 12 () () () (:) . () 1 , 3 2 . .
 
(),, , 1919

 

 
 
 
     
   

 

淑嬪崔氏神道碑
朝鮮國 淑嬪崔氏神道碑銘(并序)
綏祿大夫錦平尉兼五衛都摠府摠管臣朴弼成奉 敎譔
顯祿大夫礪山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臣枋奉 敎書
綏德大夫西平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臣橈奉 敎篆
我 殿下受命踐阼之元年乃 先淑嬪崔氏旣卒之八年也因有司考例陳請 命樹麗牲之石其文則不以 命詞臣而以 命臣弼成旣又 敎曰誇張之辭屢所不取亦非 先嬪平日小心謹愼之意其念哉臣弼成承 命悸恐屢辭終不獲 命則謹稽行錄崔氏系出首陽曾祖諱末貞階通政祖諱泰逸學生考諱孝元行忠武術副司果妣洪氏通政繼南女也以 顯廟庚戌十一月己未生 嬪丙辰選入宮甫七歲
肅宗大王十九年癸酉始拜 淑媛甲戌進 淑儀乙亥陞 貴人越四年己卯封 淑嬪女官極品也 嬪天姿沈凝簡默喜怒不形於色奉侍 兩殿夙夜靡懈莊敬戒愼戰兢自飾其接諸嬪曁宮人旣遜旣和俱得其懽心 上心重之奧我 仁顯王后曁我 惠順慈敬大妃亦殊遇之 嬪益自謙畏尤不喜言人短長侍御者或有言輒加誨責一宮之內翕然稱美焉 嬪同氣之籍軍門者自 嬪封爵辭遆其任 嬪謹愼之心實使之然也 上初以梨峴宮爲 嬪私第辛卯 命屬之內司 嬪知 聖意出公節儉克賛不色吝自丙申遘疾三載次淹間有因 上命出第調治而久闕承 俟常懷靡安或少出間輒即詣闕雖在疾病而其誠敬之不替如此戊戌三月九日戊午卒于彰義洞私第春秋四十九寔 肅宗四十四年也三殿遣中宮吊祭賵賜特厚哀榮備至以是年五月庚申禮葬于楊州高嶺洞瓮場里枕酉之原 嬪生三男惟我 主上殿下序居第二伯季生即天我 殿下初封延礽君辛丑册 王世弟甲辰誕承大統 中宮殿下徐氏 贈領議政達城府院君宗悌女也 王世子邸下靖嬪李氏所誕初封敬義君乙巳進册 儲副王女和順翁主幼未下嫁竊伏念 嬪柔嘉其性淑愼其儀敦重靚穆溫恭和順承 寧考思遇垂三十戴而勤儉自持卑巽以牧閔敢以榮貴少移所守肆惟 壺闈之間德意之融洽誠信之篤至於無間可以輝暎彤管儷美徃牒則其迓迎天篤生聖人承 列聖艱大之投綿 宗祊千億之祚者其必有由然矣臣於摭實之文寧質無華庶有以仰體 聖意而仍又繼之以銘曰/
天鍾異姿 旣淑且靈 塞淵其德 繄自穉齡 夙被 睿眷 承以巽順 誠心內蘊 孚洽宮壹乃膺禎嘏 誕我 聖躬 卜叶大橫 天佑吾東丕承丕顯 命靈長 善慶之徵厥理式章 鬱彼崇岡 有碑斯豊 稽首綴銘 用詔無窮/
皇明崇禎紀元後九十八年乙巳 月 日建/

 

楊州 淑嬪崔氏墓表
有明朝鮮國後宮淑嬪首陽崔氏之墓(表 面)
(裏面)
嬪姓崔氏其先海州人 顯義光倫睿聖英烈主上殿下後」
宮也癸酉始封淑媛歷淑儀貴人己卯陞淑嬪女官極品也」
嬪凡生三 王子伯季生卽夭仲名昑封延礽君主管宗親」
府兼司饔院宗簿寺都提調又兼五衞都摠府都摠管娶郡」
守徐宗悌女嬪在宮中疾甚 上命出壯洞私第調治醫藥」
無效年四十九以戊戌三月初九日卒實 上之四十四年」
也五月十二日禮葬于楊州高嶺洞瓮場里卯向原」
皇明崇禎紀元戊辰後九十一年我 主上殿下卽阼之四」
十四年戊戌九月 日立

 

有明 朝鮮國 後宮 淑嬪首陽崔氏의 묘(表面)
(裏面)
嬪의 姓은 崔氏이고 그 선조는 海州人으로 顯義光倫睿聖英烈主上殿下(肅宗)의 후궁이다. 癸酉年(1693년)에 처음으로 淑媛에 봉해지고 淑儀·貴人을 거쳐, 己卯年(1699년)에 淑嬪으로 승급했으니 여관의 최고 품계이다. 嬪은 세 왕자를 낳았는데 첫째와 막내는 태어나서 곧 요절하고 둘째의 이름은 昑으로 延礽君에 봉해져 宗親府 兼 司饔院 宗簿寺 都提調를 주관하고 또 五衛都摠府 都摠管을 겸하였는데, 군수 徐宗悌의 딸과 혼인하였다. 嬪이 궁중에 계시면서 병이 깊으니, 上께서 壯洞 사제로 나가 의약으로 잘 치료할 것을 명하셨으나 효험이 없었다. 49세에 戊戌年(1718년) 3월 초 9일에 졸하니 실로 上이 즉위하신지 44년이다. 5월 12일에 楊州 高嶺洞 瓮場里 卯向(동쪽) 들에 장례지냈다.

皇明 崇禎紀元戊辰後 91년 우리 주상전하 즉위 44년 戊戌(1718년) 9月 日에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