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시조공에 대한 기록/휘 만육공 관련 기록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문정공(文定公) 최보순(崔甫淳)의 5세손 휘 문도

아베베1 2010. 12. 19. 16:24

가정집 제2권
 기(記)
춘헌기(春軒記)


어떤 객이 춘헌(春軒)에 와서 춘(春)이라고 이름 붙인 뜻을 물어보았으나, 주인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객이 다시 앞으로 나앉으며 말하였다.
“우주 사이의 원기가 조화의 힘에 의해 퍼져서 땅에 있는 양(陽)의 기운이 위로 올라가 하늘과 막힘없이 통하게 되면, 만물의 생동하는 뜻이 발동할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덩달아 활짝 펴지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봄이 오면 온갖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고 새들이 즐겁게 노래하니, 봄의 풍광은 사람의 기분을 마냥 들뜨게 하고 봄의 경치는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 주는 법이다. 그래서 봄 누대에 오른 듯도 하고 봄바람 속에 있었던 듯도 하다는 그 뜻을 취해서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인가?”
주인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자 객이 또 말하였다.
“원(元)은 천지가 만물을 내는 근본이요, 춘은 천지가 만물을 내는 시절이요, 인(仁)은 천지가 만물을 내는 마음이니, 이름은 비록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이치는 매한가지이다. 그래서 노쇠하고 병든 자들이 봉양을 받을 수 있고 곤충과 초목이 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이러한 이치 때문이라는 그 뜻을 취해서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인가?”
이에 주인이 말하기를,
“아니다. 굳이 그 이유를 대야 한다면 온화하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여름에는 장맛비가 지겹게 내리고 겨울에는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고 가을에는 썰렁해서 몸이 으스스 떨리니, 사람에게 맞는 것은 온화한 봄이 아니겠는가. 객이 말한 것이야 내가 어떻게 감히 감당하겠는가.”
하자, 객이 웃으면서 물러갔다.
내가 그때 자리에 있다가,
“그만한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자처하지 않는 것은 오직 군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알기에 주인은 흉금이 유연(悠然)해서 자기를 단속하고 남을 대할 적에 속에 쌓였다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화기(和氣) 아닌 것이 없으니, 대개 기수(沂水)에 가서 목욕하고 바람 쐬며 노래하는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 주인이 취한 뜻이 어찌 온화하다고 하는 정도로 그치겠는가. 그런데 객이 어찌하여 그런 것은 물어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하고는, 마침내 붓을 잡고 이 내용을 벽에다 써 붙였다.
주인은 완산 최씨(完山崔氏)로, 문정공(文定公)의 후손이요 문간공(文簡公)의 아들이다. 박학강기(博學强記)한 데다가 특히 성리(性理)의 글에 조예가 깊어서, 동방의 문사들이 질의할 것이 있으면 모두 그를 찾아가서 묻곤 한다.


 

[주D-001]봄 누대에 …… 하고 : 《노자(老子)》 제 20 장에 “사람들 기분이 마냥 들떠서, 흡사 진수성찬을 먹은 듯도 하고 봄 누대에 오른 듯도 하네.〔衆人熙熙 如享太牢 如登春臺〕”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봄바람 …… 하다 : 주희의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권4에 “주공섬(朱公掞)이 여주(汝州)에 가서 명도(明道) 선생을 만나 보고 돌아와서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한 달 동안이나 봄바람 속에 앉아 있었다.〔某在春風中坐了一月〕’라고 했다.”는 말이 실려 있다.
[주D-003]기수(沂水)에 …… 부류 :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벗 대여섯 명과 아이들 예닐곱 명을 데리고 기수에 가서 목욕을 하고 기우제 드리는 무우에서 바람을 쏘인 뒤에 노래하며 돌아오겠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자신의 뜻을 밝히자, 공자가 감탄하며 허여한 내용이 《논어》 선진(先進)에 나온다.
[주D-004]주인은 …… 아들이다 : 주인의 이름은 최문도(崔文度)이다.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문정공(文定公) 최보순(崔甫淳)의 5세손이요, 광양군(光陽君)에 봉해진 문간공(文簡公) 최성지(崔誠之)의 아들이다. 자는 희민(羲民)이고, 관직은 첨의 평리(僉議評理)에 이르렀다. 1345년(충목왕 1)에 죽었으며,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아들의 이름은 사검(思儉)이다.

동문선 제70권
 기(記)
춘헌 기(春軒記)


이곡(李穀)

객 중에 춘헌에 와서 헌(軒)이라고 이름 지은 뜻을 묻는 이가 있었는데, 주인이 대답하지 않으니, 객이 다시 나아가서 말하기를, “대기(大氣)가 큰 땅에 퍼지면 양기가 올라가서 서로 화합하여 물건의 의사가 그것으로 발생하게 되고, 사람의 마음도 따라서 펴지고 화창해지며 여러 가지 꽃이 곱고, 백 가지 새 소리가 즐거운 듯, 그 빛은 화락하고 그 풍경은 화창해진다. 그러므로 그 춘대(春臺)에 오른 것 같고 봄바람에 선 것 같다는 뜻을 취한 것이냐.” 하기에, 대답하기를, “아니다.” 하니, “원(元)이라 함은 하늘과 땅이 물건을 창조하는 처음이고, 봄이라 함은 하늘과 땅이 물건을 나오게 하는 때이고, 인(仁)이라 함은 하늘과 땅이 물건을 만드는 마음이니, 그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그 이치인즉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 피폐하고 병들고 불구된 것들도 그 기름을 얻게 되고, 곤충ㆍ풀ㆍ나무들도 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모두 다 이치로 된다는 뜻이냐.” 하기에, “아니다. 기어코 말하라고 한다면, 온화하다는 것이다. 여름에는 덥고 비 오고 겨울에는 몹시 춥고 가을은 쌀쌀하고 맑으니, 사람에게 좋은 것은 봄의 온화한 것이 아니겠는가. 객이 말하는 것을 내가 어찌 감당하겠는가.” 하니, 객이 웃고 물러갔다. 내가 마침 그 자리에 있다가 말하기를, “덕이 있으면서도 있는 체하지 않는 것은 오직 군자라야 그러한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주인의 가슴 속이 유연(悠然)하여서 모든 몸을 지키고 물건을 접하는데 마음에 쌓였다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화한 기운이 아님이 없으니, 이는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바람쐬고 노래하며 돌아온다는 무리이다. 그 취하는 바가 어찌 온화한 데에 그칠 뿐이겠는가. 객의 물음이 어찌 그렇게 늦느냐.” 하고서 드디어 붓을 달라고 하여 그 말을 벽에 쓴다.
주인은 완산 최씨로 문정공(文定公 최보순(崔甫淳))의 후손이고, 문간공(文簡公 최성지(崔誠之))의 아들이다. 널리 배우고 잘 기억하였는데, 더욱 성리학에 깊어서 의심나는 것을 물으려는 동방의 문사들이 모두 이 사람에게 찾아간다.


 

[주D-001]기수(沂水)에 …… 돌아온다 :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한 말로, 몇몇 제자들의 소원은 모두 정치에 있었으나 그는 이렇게 한가하게 자연을 즐기며 살고 싶은 것이 소원이라 하였다.

 

동문선 제126권
 묘지(墓誌)
고려국 대광 완산군 시 문진 최공 묘지명 병서 (高麗國大匡完山君謚文眞崔公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완산(完山)최씨(崔氏)의 보계(譜系)에서 상고하여 볼 만한 이로 순작(純爵)이라는 이가 있는데, 벼슬이 검교 신호위 상장군(檢校神虎衛上將軍)에 이르렀다. 그가 숭(崇)을 낳았는데 중랑장이요, 중랑장이 남부(南敷)를 낳았는데, 벼슬은 통의대부 좌우위 대장군 지공부사(通議大夫左右衛大將軍知工部事)에 이르렀고, 공부(工部)가 전(佺)을 낳았는데, 좌우위 중랑장(左右衛中郞將)이요, 중랑장이 득평(得枰)을 낳았는데, 벼슬은 통헌대부 선부전서 상호군 치사(通憲大夫選部典書上護軍致仕)로, 청렴하고 정직하게 몸을 지켜 사람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였으며, 충렬ㆍ충선ㆍ충숙 등 세 임금을 내리 섬겼는데, 그 중에서도 충선왕이 더욱 그를 나라의 그릇으로 알고 중히 여겼다. 충선왕은 비록 왕위를 전해 주었으나 나라의 정사에 반드시 참여하였기 때문에, 사대부의 승진과 파면이 충선왕에게서 오는 것이 많았는데, 득평이 대직(臺職)에 있으면 기강이 섰고, 형부(刑部)에 있으면 형벌이 맑았으며, 김해(金海)와 상주(尙州)의 수령으로 고을을 다스리자 백성들이 그 은혜를 잊지 못하였고, 두 번 전라도를 안찰하자 백성들은 그의 풍의(風儀)를 두려워하였고, 전토를 측량하여 세액을 조정할 때에는 재상(宰相)채홍철(蔡洪哲)을 도와서 전라도 각 주현(州縣)의 전토를 나누어 처리하였는데, 법을 해이하게 하지도 않고 백성들을 요란하게 하지도 아니하였으며, 75세의 수명을 누렸다. 선부가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감찰대부 문한학사 승지 세자원빈 곽예(郭預)의 딸에게 장가들어 대덕(大德) 계묘년 4월 계유일에 공을 낳았는데, 공의 이름은 재(宰)요 자는 재지(宰之)이다. 지치(至治) 원년에 동대비원 녹사(東大悲院錄事)에 보직되었고, 태정(泰定) 갑자년에 내시(內侍)로 들어갔고, 4년에 산원(散員)에 제수되었으며, 다음해에 별장으로 전직되었다. 천력(天歷) 경오년에 순흥군(順興君) 안문개(安文凱)공과 심악군(深岳君) 이담(李湛)공이 같이 고시(考試)를 관장하였는데 공은 그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6년이 지난 뒤에 단양 부주부(丹陽府注簿)로 임명되었고, 또 4년 후에 비로소 중부령(中部令)에 제수되어 승봉랑(丞奉郞) 관계(官階)를 받았다. 얼마 안 되어 지서주사(知瑞州事)가 되었으나, 모친의 상중(喪中)이라 하여 부임하지 않았으니, 이는 복제를 마치려는 것이었다. 다음해에 충숙왕이 필요 없는 관원을 도태할 때에 공을 천거하는 자가 있으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본래 그 아비의 풍모와 법도가 있음을 알고 있으니, 이 사람을 가벼이 쓸 수는 없다.” 하고, 감찰지평(監察持平)에 제수하니 공은 사양하다 못하여 벼슬에 나갔으나, 공민왕(恭愍王)이 직위하자 그 관직에서 갈리었다. 고(高)씨의 난이 일어나자 무릇 임금이 설치한 것을 모두 개혁하려 하여, 도감을 설립하고 공을 판관으로 삼자, 공은 매우 즐거워하지 아니하여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아니하니, 상부(相府)에서 자못 독족 하고 또 협박도 하므로 공이 천천히 자리에 나아가서 그 판사(判事)의 재상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실로 덕을 잃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하로서 임금의 아름답지 못한 점을 들추어내는 것이 공의 마음에는 편하던가. 임금의 악한 일이란 임금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그 좌우에 있는 자들이 임금에게 아첨하여 그 악을 맞아 들여서 하도록 한 것인데, 먼저는 맞아들여 하도록 해놓고, 뒤에 다시 그 일을 들추는 것을 나는 실로 부끄러워한다.” 하니, 그 재상은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고 처음 정사에서 공에게 전법정랑을 제수하였고, 그 해 겨울에 지흥주(知興州)가 되어 나갔는데, 모든 백성에게 편의를 도모하는 일이라면 시행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전적(田籍)이 오래되고 해어져 있었으므로 공이 이것을 수정하여 구장본(舊藏本)과 서로 대질ㆍ교정하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인정승(印政丞)이 정권을 잡게 되자, 그는 평소에 공을 꺼렸으므로 벼슬을 갈아버렸는데, 정해년에 정승 왕후(王煦)와 김영돈(金永暾)이 임금의 교지를 받들어 전민(田民)의 송사를 정리하게 되어, 공을 천거하여 판관으로 삼고 역마를 달려 보내어 급히 불렀다. 공이 이른즉 두 정승은 또 말하기를, “장흥부(長興府)는 지금 다스리기 어렵기로 이름난 곳이니, 최모가 아니면 안 된다.” 하고 다시 나가게 하였다. 공이 장차 임지로 부임하려 할 즈음에, 두 정승이 또 말하기를, “최모가 지난번 지평직에 있을 때에 위엄과 명망이 있었으니, 어찌 이런 사람을 풍헌(風憲)직에 머물어 재임하게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그때 마침 공의 외씨(外氏)인 곽영준(郭迎俊)이 그 관아의 대부로 있었으므로, 법제상 서로 피하게 되어 전법 정랑(典法正郞)으로 전임되었다. 무자년에 경상도 안찰사가 되고, 1년 만에 두 번 옮겨 전객 부령(典客副令)ㆍ자섬 사사(資贍司使)가 되어, 안팎의 비용과 물품을 공급하는 일을 겸하여 다스려서, 그것에서 남는 것을 모두 백성에게 돌려주니, 전에 있던 폐단이 근절되었다. 기축년에 지양주(知襄州)가 되어 나갔더니, 나라에서 향(香)을 내려 주는 것을 받들고 온 사자(使者)가 존무사(存撫使)를 능욕하는 것을 보고 공이 말하기를, “이는 예가 아니다. 장차 나에게도 미칠 것이다.” 하고 즉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집정하던 이가 기뻐하여 임금에게 아뢰어서 감찰장령(監察掌令)을 제수하니, 대관의 강기가 다시 떨쳤으나 1년 만에 파직하고 말았다. 신묘년에 현능(玄陵 공민왕)이 즉위하고 대신(臺臣)을 선임하자 다시 장령이 되었고, 다음 해에 개성 소윤(開城少尹)으로 옮겨 갔다가 사직하고 청주(淸州)로 돌아갔다. 이때에 조일신(趙日新)의 난이 일어났던 것이다. 갑오년에 다시 불러서 전법 총랑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판도(版圖)로 옮기고, 그 해 가을에는 복주 목사(福州牧使)로 나가서 민정을 살피고 약조를 지키더니, 공이 떠나던 날 백성들은 부모를 잃은 것처럼 마음 아파하였고, 그가 시설한 바를 지금까지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을미년 가을에 중현대부 감찰집의 직보문각(中顯大夫監察執義直寶文閣)으로 불렀는데, 그때 군사 선발을 토지에 의해 한 것은 그 법이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것인데, 공에게 명하여 도감사(都監使)로 삼았다. 지금까지의 법을 보면 한 사람이 전토를 받으면, 그 자손이 있으면 자손에게 전하고, 없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받게 되며 그 받은 자가 죄가 있어야만 그 전토를 회수하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고 보니 사람마다 토지를 얻으려 하게 되어 번잡한 사건이 생기게 되는 것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백성으로 하여금 재물을 서로 주고 빼앗도록 경쟁시키는 것이니, 이래서야 되겠는가.” 하고, 이에 마땅히 받을 사람 한 사람에게만 주고 그치도록 하니, 송사도 조금 간단하게 되었다. 병신년에 대중대부 상서우승(大中大夫尙書右丞)에 임명되고, 정유년에는 정의대부 판대부시사(正議大夫判大府寺事)에 승진되니, 이때 공의 나이 55세였으나 의지가 조금도 쇠하지 않고 더욱 직무에 근실하여, 한 달 사이에 창고에 곡식이 차게 되었다. 공민왕이 이르기를, “판대부(判大府)로서 그 직책을 다한 이는 최모 뿐이다.” 하였다. 기해년에 공주목(公州牧)으로 나가니, 그의 행정과 백성들의 사모함이 앞서 복주목(福州牧)에 있을 때와 같았다. 신축년에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나갔는데, 그 해 겨울에 온 국가가 병란을 피하여 남쪽으로 옮겨 가고, 다음해 봄에 임금이 상주로 거둥하니, 모든 수요와 공급과 설비의 판출에 진력하면서도, 오직 털끝만치라도 백성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으므로, 무엇을 요구하다가 얻지 못한 무리들은 이를 비방하기도 하였다. 3월에 봉익대부 전법판서(奉翊大夫典法判書)로서 본경(本京 개성)에 분사(分司)로 가게 되어 공이 하직하니, 공민왕이 인견하여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고 당부하였다. 갑진년에 감찰대부 진현관제학 동지춘추관사에 임명되고, 그 해 겨울에 중대광 완산군(重大匡完山君)에 봉하였다. 다음해에 전리 판서로 옮기고, 또 다음해에 개성 윤(開城尹)으로 옮겼으며, 기유년에 새로운 관제(官制)가 시행됨으로써 영록대부(榮祿大夫)로 관제를 고쳐 받았다. 신해년에 안동(安東)의 수신(守臣)이 궐원이 되자 공민왕이 이르기를, “안동의 원은 내가 이미 그 적임을 얻었다.” 하고, 곧 비지(批旨)를 내리고는 위사(衛士)를 보내어 공의 부임을 독촉하였으니, 이는 공이 혹 사퇴하고 가지 않을까 하여 염려함이었다. 갑인년 봄에 나이 많음으로써 사퇴를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 해 가을 9월에 공민왕의 승하하니 공은 곡반(哭班)에 나가 곡하고 애통의 정을 다하였다. 금상(今上)이 밀직부사 상의(密直副使商議)에 임명하자 공은 굳이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가기를 청하니, 완산군(完山君)에 봉하고 계급을 대광계(大匡階)로 올렸다. 다음해 봄에 수레를 준비하도록 명하여 강릉(江陵)에 있는 밀직 최안소(崔安沼)를 가서 보고 돌아왔으니, 이는 대개 이 세상에서의 최후 결별을 하기 위함이었다. 9월에 경미한 병환이 생겼는데 여러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꿈을 꾸었는데 이인(異人)이 날더러 말하기를, ‘오년(午年)에 이르면 죽는다.’고 하더라 금년이 무오년(戊午年)이고, 또 병이 이와 같으니, 내 필연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마침내 10월 기사일에 돌아가니 향년 76세였다. 12월 임인일에 그가 살던 집에서 동쪽에 있는 감방(坎方) 산기슭에 장사지냈는데, 이는 평일의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아, 공은 가히 유속(流俗)을 벗어나고 사물에 달관한 분이라고 이를 만하다. 공은 두 번 결혼하였는데, 영산군부인(靈山郡夫人) 신(辛)씨는 봉익대부 판밀직사사 예문관제학 치사(奉翊大夫判密直司事藝文館提學致仕) 천(蕆)의 딸이요, 다음 무안군부인(務安郡夫人) 박(朴)씨는 군부 정랑(軍簿正郞) 윤류(允鏐)의 딸이다. 신씨는 2남을 낳았는데, 장남 사미(思美)는 봉익대부 예의판서(奉翊大夫禮儀判書)이며, 차남 덕성(德成)은 급제하여 중정대부 삼사좌윤(中正大夫三司左尹)이요, 박씨는 자녀 3명을 낳았는데, 아들 유경(有慶)은 중정대부 종부령 지전법사사(中正大夫宗簿令知典法司事)이며, 맏딸은 성근익대공신 광정대부 문하평리 상호군(誠勤翊戴功臣匡靖大夫門下評理上護軍) 우인열(禹仁烈)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선덕랑 선공시승(宣德郞繕工寺丞) 조영(趙寧)에게 시집갔다. 손자에 남녀 약간 명이 있으니 판서의 자녀가 5명인데, 장남 서(恕)는 호군(護軍)으로서 지금 전라도안렴사이고, 다음은 원(原)이니 중랑장이며, 그 다음은 각(慤)이니 별장이요, 딸은 예의 총랑(禮儀摠郞) 송인수(宋仁壽)에게 출가했고 다음은 아직 어리다. 좌윤(左尹)은 자녀 4명을 두었는데, 장남 복창(復昌)은 별장이고 다음 세창(世昌)도 별장이며, 다음 사창(仕昌)은 아직 벼슬하지 않았고 딸은 어리다. 종부령은 자녀 3명을 낳았는데, 장남 사위(士威)는 낭장(郞將)이고, 그 다음은 모두 어리며, 평리(評理)는 자녀 3명을 낳았는데, 아들 양선(良善)은 영명전직(英明殿直)이고 딸은 모두 어리며, 시승(寺丞)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좌윤 덕성(德成)은 나의 벗이다. 성격이 쾌활하여 술도 잘하고, 관직에 있으면 가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그가 와서 명(銘)을 청하는 것이다. 명하기를,

오직 공은 곧았고 / 惟公之直
또 공은 맑았다 / 惟公之淸
오직 공은 덕이 있었으며 / 惟公之德
또 공은 이름이 높았다 / 惟公之名
그 이름과 그 덕은 / 惟名惟德
이 세상의 준칙이 될 것인데 / 惟世之則
어찌 크게 쓰여져 / 胡不大用
우리 왕국을 바로잡지 못하였던가 / 正我王國
이미 우리 임금을 도와 / 旣相我王
묘당에서 주선하였고 / 周旋廟堂
76세의 고령으로 / 年七十六
아직도 강강하였건만 / 尙爾康强
공은 결단코 물러났으니 / 公退則決
진실로 밝고 슬기로웠다 / 允矣明哲
아, 최공이여 / 嗚呼崔公
온 세상이 그 풍모를 흠모하리로다 / 世歆其風

하였다.


 

동문선 제112권
 소(疏)
박량 최선사를 천도하는 소[薦泊良崔禪師疏]


석복암(釋宓菴)

가을 연못에 달이 비치는 것은 자연이 사정(私情)이 없이 응현(應現)함이옵고, 밤에 도랑에서 배를 움직이려면 힘 있는 이가 짊어지고 가게 됩니다.
박릉(博陵)의 가신 영혼은 우리 성교(聖嶠)의 옛 벗입니다. 행적이 서로 달랐으므로 한 가지 지나지는 못하였으나, 사귀는 마음은 매우 깊어서 평생 서로 잊지 못하였습니다. 아직 환갑[耳順]도 되기 전에 그렇게 저승으로 빨리 가십니까. 비록 인생은 덧없는 것이라 하지만, 추도하는 생각이 침통합니다. 이제 칠칠재를 맞이하여 삼삼보에 공양을 올리오니, 작은 공력이오나 감응을 두루하소서. 엎드려 원합니다. 운운. 새로운 착한 일을 자뢰하고, 오래 훈습한 것을 나타내서 9품의 연화대 위를 한 걸음에 바로 오르고, 7겹의 보배 그물 속에서 여러 성현과 더불어 같이 놀으소서.


[주D-001]박릉(博陵) : 선사의 본관이 박릉 최씨로서, 최씨는 중국의 명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에서는 덩달아서 최씨라면 박릉 최씨라고 과장해 말하는 것이다.
[주D-002]환갑[耳順] :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나는 60에 귀가 순했다[六十而耳順].”한 말이 있으므로 그 후에는 60살을 이순(耳順)이라고 말한다.

 


동문선 제67권
 기(記)
왕륜사 장륙금상 영험수습기(王輪寺丈六金像靈驗收拾記)

이규보(李奎報)

살펴보건대 불법(佛法)이 삼한(三韓)에 파급되자 중앙에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벌려선 사찰(寺刹)들이 서로 바라다보이며, 불상(佛像)을 모시지 않은 절이 없다. 다만 모든 부처는 한 몸인데 무릇 불상을 모신 곳 중에서 영험(靈驗)이 드러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이것은 범부(凡夫)의 생각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곳이니, 그것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더라도, 여러 부처와 보살의 신통(神通)하는 방편(方便)은 자유자재로 변화하여 가능한 것도 없고 불가능한 것도 없는 것이니, 또한 눈에 보이는 빛깔과 형상에서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광명과 영험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잠깐 그 작용을 감추었을 뿐이다. 때로는 기미에 감응하여 그 영험을 나타냄과 같은 것은, 이것도 또한 자연이 방편으로 보이는 바로서 세세한 사람의 일에까지 미친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평범한 눈으로 본다면 어찌 놀랍고 또 신기하게 여겨져서, 깊은 신앙심을 더욱 두텁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실한 신앙심이 두터워지면 부처는 문득 이에 감응할 것이니, 그리하여 그 신령한 감응은 또 더욱 드러날 것이다. 이것이 세상에서 어느 절 어느 불상은 매우 영험이 있다고 소란하게 전하는 것일 뿐이다.
지금 도성(都城)의 북쪽에 왕륜사(王輪寺)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은 해동의 종파가 항상 모든 법의 힘을 전파하는 사찰(寺刹)이다. 이 절에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장륙금상(丈六金像 높이 16척의 황금 불상) 하나가 있다. 들으니, 옛날 거빈(巨貧)과 교광(皎光)이라 하는 두 사람의 비구(比丘)가 있었다. 둘이서 황금 불상을 주조(鑄造)할 것을 발원(發願)하고 속된 말로 동량(棟梁)이란 것을 하였다. 동량이란 것은 무릇 중이 남에게 시주(施主)하기를 권유하여 불사(佛事 부처에게 봉사하는 일)를 영위(營爲)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거빈이 그 일을 주관하고 교광이 보조하였는데, 거빈이 하루는 갑자기 보조자 교광에게 말하기를, “일이 나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많다. 더구나 나이도 늙었으니 반드시 일을 마칠 수 없을 것이다. 마땅히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서 스스로 분신(焚身)하여 죽어야 하겠다. 너는 나의 사리(舍利)를 수습하여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시주하기를, 권유한다면 즐겨 시주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한 뒤라야 일이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하고, 말을 마치자 곧 그 산에 들어가 도(道)를 닦았다.
병신년 8월 15일에 이르러 마하연(摩訶衍) 방장(方丈)의 북쪽 봉우리에서 산 채로 그의 몸을 살랐다. 교공(皎公)이 그의 유언에 의하여, 사리를 거두어 상자에 담아 스스로 짊어지고 서울에 돌아왔다. 사람들에게 시주하기를 권하니 위에서부터 높은 벼슬아치와 선비들과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시주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재물이 산같이 쌓였다. 판방리(板方里)에 산직(散職 보직〈補職〉이 없는 벼슬)으로 있는 장관(將官)이 있었는데, 빈궁하여 재물은 시주할 수 없고 다만 13 세쯤 된 딸이 있었다. 이 딸을 바쳐서 심부름이나 시켜주기를 원하자 교공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때 성남(城南)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장군 한 사람이 있었는데, 나이가 늙었으나 자식이 없었으므로 속전(贖錢)을 바치고, 이 계집아이를 데려다가 양녀(養女)로 삼기를 원하고 베[布] 5백 필을 바쳤다. 또 성대동(星臺洞)에 과부가 있었는데 집이 가난하여 시주할 만한 좋은 물건이 없어서 그가 보배롭게 여기던 큰 거울을 시주하면서 말하기를, “이 거울은 오랫동안 남에게 가 있어서 지금도 아직 돌려받지 않았으므로 당장에 갖다 바칠 수는 없습니다만 쇠를 녹여 붓는 날까지는 꼭 찾아다가 갖고 가겠습니다.” 하였다. 교공이 “좋습니다.” 하고 승낙하였다. 그런데 그 쇠를 녹여 붓는 때에 이르러서 그동안 시일(時日)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깜박 잊고 거울 임자에게 통하지 못한 채 쇠를 녹여 부었다. 불상(佛像)이 이루어졌을 때 모든 모양이 잘 갖추어져서 만족할 만하며, 단아(端雅)하고 근엄(謹嚴)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오직 가슴에 이지러진 데가 있었다. 중이 매우 불안하여 마침내 채워서 녹여 부을 것을 의논하였다. 그런데 거울의 주인이 불상이 이미 주조되었다는 말을 듣고 매우 슬퍼하고 한탄한 다음 이미 시주한 것이므로 그 거울을 갖고 가서 바치었다. 그 거울을 불상의 가슴에 있는 이지러진 자리에 가져다 놓아보니, 그 이지러진 틈이 거울과 더불어 잘 맞물렸다. 그래서 임시로 끼워두고 내일로 늦추어 글자를 새긴 뒤에 때워 넣기로 하였다. 그런데 새벽이 되어서 보니 거울이 이미 제 스스로 합하여져서 꼭 녹여 부은 것같이 조금도 흔적이 없었다. 도성에서 보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게 되었으며, 놀라고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것이 영험한 첫 번째 일이다.
불상이 이루어졌으므로 절 안으로 들어가서 이날로 금당(金堂)에 안치(安置)하고자 하였으나 문이 낮아서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을 기(期)하여 문 위의 중방(中枋)을 떼낸 뒤에 들여놓기로 하였다. 아침이 되어서 보니 불상(佛像)이 이미 단정하게 제자리에 들어가 있었다. 이것이 영험한 두 번째 일이다. 시중(侍中) 최정안(崔精安)이 항상 장륙금상(丈六金像)을 깊이 존경하였다. 그 집이 절의 남쪽 이웃에 있었으므로 매번 관아(官衙)에 출근할 때 절의 문앞에 이르러서는 문득 말에서 내려 불상을 향하여 예배(禮拜)한 뒤에 갔으며, 퇴근할 때 조종문(朝宗門)에 이르면 말에서 내려 두 번 절하고 걸어서 절문을 지난 뒤에 말을 타곤 하였다. 무릇 새로 나는 물건을 얻으면 반드시 먼저 불상 앞에 바친 뒤라야 감히 맛보았고, 이따금 법당(法堂)에 가서 손수 차(茶)를 끓여서 공양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홀연(忽然)히 꿈에 장륙금상이 이르기를, “네가 나를 섬기는 것이 진실로 정성스럽고 부지런하다. 그러나 절의 남쪽 마을 응양부(鷹揚府)에 사는 늙은 군사의 귀의(歸依)하는 마음만은 못하다.” 하였다. 공이 이튿날 사람을 시켜서 그 집을 찾으니 과연 한 명의 늙은 군사가 있었다. 공이 친히 가서 방문하고 묻기를, “네가 항상 아무 절의 장륙상(丈六像)을 존경한다고 들었는데 정말이냐. 또 그를 존경해서 특별히 어떤 일을 하느냐.” 하였다. 대답하기를, “늙은 제가 중풍 때문에 일어나지 못한 지가 이미 7년이 되었습니다. 다만 저녁과 새벽 종소리를 들으면 그곳을 향하여 합장(合掌)할 뿐입니다. 어찌 따로 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늙은 내가 부처 섬기는 것이 너만큼 정성이 지극하지 못하구나.” 하였다. 이것으로 인하여 그 사람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녹봉(祿俸)을 받을 때마다 문득 1곡(斛)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것이 영험한 세 번째 일이다.
또 최 시중(崔侍中)이 녹봉을 받는 날에 검정 베옷을 입은 중이 문앞에 와서 밥을 비는 것이었다. 공이 밥을 주어 먹게 하고, 그가 마시고 씹는 모습을 보니 보통 사람과 다른 데가 있었다. 그래서 따로 밥 한 말을 지어서 가져다 주니 다시 다 먹어 버리고 남기는 것이 없었다. 공이 매우 이상하게 여겨 녹봉의 한 휘[斛]를 시주하고 하인을 시켜 지고 따라가게 하였는데, 문밖에 나가자 굳이 종을 돌려보내고 스스로 지고 돌아갔다. 공이 듣고 급히 사람을 시켜 찾아보았으나 그의 종적을 알 수 없었다. 공이 친히 나가서 쫓아가는데 쌀을 짊어진 중 한 사람이 왕륜사(王輪寺)의 문으로 들어간 자가 있었다는 소리를 듣고 곧 절에 들어가 찾았으나 또 그의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마침 장륙금상(丈六金像)을 예배하고자 하여 금당(金堂)에 들어가보니, 녹미(祿米) 한 휘가 불상의 향탁(香卓) 위에 있었다. 여기에서 그 중이 바로 장륙금상의 권화(權化)라는 것을 크게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영험한 네 번째 일이다.
이런 이야기는 다 옛날의 수좌승 걸(傑)이 종문(宗門)의 대사(大士)인 정림(正林)이란 자에게 전한 것이다. 정림은 뒤에 또한 승관(僧官)이 되었으니, 다 불문(佛門)의 노장(老匠)들로서 신실하고 독실한 대화상(大和尙)이다. 어찌 이런 이야기를 망령되게 전하였겠는가. 그리고 옛 늙은이들이 전하는 것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입에 분명하게 전파되고 있는 것을 들어보면, 장륙금상을 바야흐로 절에 모시려 할 때, 큰 수레에 싣고 끄는 자가 무려 백만 명이나 되어 큰길을 메웠다고 한다. 그중에는 돼지고기를 파는 상인(商人)들도 있어서 또한 수희심(隨喜心 남의 좋은 일을 보고 따라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켜 힘을 모아 수레를 밀고 있었다. 여러 사람의 힘이 이와 같건만 수레가 갑자기 움직이지 않았다. 일을 맡은 중이 이상하게 여겨 높은 언덕에 올라가 바라보니, 돼지떼가 수레바퀴를 잡고 가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이것이 악업(惡業)으로 인해 장애(障碍)가 된 것을 깨닫고 그 사람들에게 수레를 밀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그렇게 한 뒤에 수레는 곧 움직여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영험한 다섯 번째 일이다.
또 옛날과 지금의 온 나라 사람들이 직접 본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나라에 장차 무슨 변고(變故)가 일어나려 할 때에는 장륙금상이 먼저 땀을 흘리게 되며 좌우의 진흙으로 빚은 보처(補處 장차 부처가 될 후보자인 보살)의 소상(塑像)과 돌에 새긴 《화엄경(華嚴經)》 속에 있는 모든 여래세존(如來世尊)ㆍ불(佛)ㆍ보살(菩薩)이란 글자도 또한 다 젖으나, 그 밖의 글자는 그렇지 않았다 한다. 이것은 장륙금상이 우리 국가를 수호(守護)하여 사전에 깨우쳐 타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영험한 여섯 번째 일이다. 교공(皎公)이 이 불상을 주조(鑄造)한 것은 고려 성종(成宗) 8년, 송(宋) 나라의 단공(端拱) 원년인 무자년부터 시작하여 정유년에 이르기까지 무릇 10년이 걸려서 완성하였다. 상고하여 보니 걸공(傑公)의 전하는 말에 따른다면, “절이 일찍이 화재를 만나 모든 문적(文籍)과 장륙영험기(丈六靈驗記) 십여 조항이 모두 불타버렸다. 이제 빈도(貧道 중이 자신을 낮추어 일컫는 말)가 전하는 바는 다만 없어지고 빠져버린 나머지일 뿐이다.” 하였다. 이런 면에서 말한다면 영험은 이것만은 아닌 것이다. 뒤에 그 빠진 것의 기록이 발견되면 추가하여 여기에 덧붙여도 좋겠다.
다만 최 시중이 중을 대접하였다는 이야기에 대하여는 말들이 같지 않다. 걸공(傑公)의 말에는 검정 베옷을 입은 중이 문 앞에 와서 밥을 빌었다고 하였고, 불도를 닦고 있는 늙은이들의 지금 말하는 바는 이러하다. 공이 날마다 중 한 사람씩에게 밥을 대접하는데, 그의 종에게 시키기를, “네가 나가서 중을 찾아올 때는 제일 먼저 만난 중이 인연 있는 중이니, 반드시 그 사람을 맞아 오너라.” 하였다. 어느 날 종이 나가서 중을 찾는데, 옷이 남루하고 형상과 얼굴이 지극히 추(醜)하게 생긴 중이 있었다. 종이 그를 피하고 다시 중을 찾았으나 또 그 중이 나타났다. 이렇게 하기를 너댓 번 거듭하였으나 종이 그가 추한 것을 보고 싫어하여 선뜻 맞아오려 하지 않고 돌아와 상황을 공(公)에게 사뢰니, 공이 성내어 말하기를, “그 사람이 바로 내가 말한 인연 있는 중이다. 너는 빨리 가서 맞아오너라.” 하였다. 종이 속히 나가 보니 또 그 중이 있어서 즉시 집으로 맞아들이어 공이 음식을 준 것이라 한다. 이 이야기는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으며 두 가지가 다 이상한 데가 있으므로, 다 기록하여 둔다.
나라에서 장륙상을 안치한 전각(殿閣)이 무너지고 낡았다고 하여 바야흐로 수리를 명하였다. 지금 상국(相國) 청하 최공(淸河崔公)이 매우 진력한 바 있다. 공은 또 불개(佛盖)와 당개(幢盖)가 많이 낡고 해졌다는 것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런 것들은 다 불교 의식(佛敎儀式)의 대표적인 것이다. 성대하게 꾸미지 않으면 불교 의식의 가장 큰 것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하고 곧 공장(工匠)에게 명령하여 짓게 하니, 온갖 보배가 빛이 나고 밝아서 찬란함에 눈이 부시었다. 정말 예전에는 보지 못하던 바이다. 공이 장륙금상의 영험에 대한 남은 기록을 보고 감탄해 마지 아니하였다. 다만 그 기록이 다 방언(方言)과 상말로 되어 있어서 오래 전할 수 없으므로 나에게 명하여 글로 쓰라 하였다. 소자(小子)가 감히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기(記)를 쓰고, 다시 송(頌)을 지어 찬양(讚揚)하였다.

맑고 깨끗한 부처의 한 몸은 / 淸淨一體
달이 가을 물에 비친 것같다 / 月映秋水
가까이 가면 환하게 밝건마는 / 卽之朗然
잡으려면 멀도다 / 攬之邈矣
비로자나의 경지는 / 毘盧境地
본래부터 생각과 의논을 초월한 것이니 / 本絶思議
그 상을 만든 것도 꿈이요 / 造像者夢
그것을 찬양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 讚者亦爾

[주D-001]권화(權化) :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려고 잠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화신(化身)을 말한다.
[주D-002]청하 최공(淸河崔公) : 청하라는 곳은 중국 땅이다. 그곳은 중국 최씨들의 본관되는 땅이요, 최씨는 중국의 명문이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최씨와는 관계도 없는데 최씨라 하여 청하에다 끌어댄것은 사대 사상의 악습이라 하겠다.

동문선 제68권
 기(記)
선원사 재승 기(禪源寺齋僧記)


최해(崔瀣)

대개 천지 사이에 태어나서 혈기(血氣)가 있는 자는 모두 먹는 것을 우러러서 삶을 유지하나니, 비록 성현(聖賢)이라도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는 것이다. 먹는 것이 진실로 농사에서 나오지만 농사를 짓지 않고 먹는 자도 각각 그 마음과 힘을 수고하여 서로 길러주고 서로 악하게 함이 없는 것이다. 불씨(佛氏)의 법이 중국에 행해진 지가 이미 1천 2백 64년이 된다. 그 무리가 대개 사민(四民)보다 배가 되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다투어 보시하기를 좋아하여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모이는 까닭으로, 능히 무리를 지어 살고 편안히 먹는 것이다. 참으로 천하에 크게 음덕(陰德)이 있는 자가 아니라면 누가 능히 이러하겠는가. 선원사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둘째 가는 절인데, 식구가 항상 수천ㆍ수만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근자에 송파(松坡)의 재상이 멥쌀 1백 50석을 희사하여 영구히 상주(常住)하는 데 충당하고, 해마다 그 이익을 불려 셋으로 나누어 매양 7월 3일 왕비 변한부인(卞韓夫人) 김씨(金氏)의 제삿날과 정월 초하루의 죽은 아들 헌부의랑(讞部議郞) 문진(文進)의 제삿날에 오로지 한 재(齋)를 올려 명복(冥福)을 빛나게 하고, 또 정월 19일에 공(公)의 일생을 위하여 중들에게 밥을 대접하여 복을 빈다. 나의 글을 받아서 뒷사람에게 보여 오래도록 폐추(廢墜)되지 않게 하려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불교는 아득하여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이나, 참으로 성심껏 기꺼이 보시한다면 아름다운 과보(果報)를 명명(冥冥)한 가운데서 얻게 되는 이치가 의심이 없는 것이다. 송파는 추성량절공신 중대광 광야군(推誠亮節功臣重大匡光陽君)이 스스로 지은 호(號)로, 이름은 성지(誠之)이고, 성은 최씨(崔氏)이다. 그 또한 일찍이 돌아간 부모를 위하여 천화선사(天和禪寺)를 수리하고 큰 도량을 지었으니, 그 근본에 부답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데에 있어서 정성껏 하지 않음이 없다. 만일 부처의 말로 본다면 이른바 재궁(宰宮)을 나타내고 몸소 보살도(菩薩道)를 행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