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시조공에 대한 기록/휘 만육공 관련 기록

만육공 관련자료 (전주최공 완산인 두문동 72현중의 한분 )

아베베1 2011. 10. 13. 05:00

 

     이미지 사진은 도봉산 안개능선의 정상부이다

 

 

 

만륙유고 (晩六遺稿)(15-16c)

간략서지 奎 15379晩六 崔瀁의 문집. 1책.   
간략해제 序文이나 跋文이 수록되어 있지 않으며 刊年은 미상이다. 규장각 소장본은 필사된 것으로 그 연대나 필사 경위 등도 밝혀져 있지 않다. 문집의 내용 중 최양의 저술은 詩 6首뿐이며‚ 그 밖에 부록으로 <墓誌>·<神道碑文>·<金鑑錄>·<杜門洞不朝峴言志錄> 등 최양의 행적을 기술한 기록과‚ <讚>·<出卞牛山券賦>·<讚先生節義詩> 등 최양의 절의를 찬양한 내용의 글‚ 그리고 <全羅監司狀啓>·<全羅道幼學臣金洛龍等上言>·<禮曹判書徐俊輔回啓>·<完營關文>·<諡狀>·<禮曹回啓>·<敎旨> 등 최양에게 諡號를 내리는 과정에 관한 기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편저자 최양 (崔瀁)
저자개요 1351-1424(?) (고려 충정왕3-세종6?)字: 百函‚ 號: 晩六·藏六堂‚ 本貫: 全州‚ 父: 贄‚ 母: 迎日 鄭氏
저자내용 고려 말의 문신으로 정몽주의 甥姪이다. 정몽주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376년(고려 우왕 2)에 문과에 급제하여 吏部尙書·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384년 예문관 직제학으로 있을 때 이성계를 따라 서북면 정벌에 참여하였으며‚ 1385년(우왕 11)에는 정몽주를 따라 明에 성절사로 가서 조공 문제를 타결하고 돌아왔다. 그 뒤에 대사간·문하찬성사에 이르렀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전주 大勝洞 鳳崗里에 은거하였으며‚ 태조가 친구로 대우하여 여러 차례 관직과 田祿을 하사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이후 계속 전주에서 은거하다가 사망하였다. 본서에 실려 있는 묘지명에는 최양의 몰년을 1424년(세종 6)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묘지명>을 쓴 사람이 陽村 權近(1352-1409)인 것으로 보아 후대에 필사하면서 착오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전주 西山祠에 제향되었으며 1829년(순조 29)에 忠翼의 시호가 내려졌다.
내용제목 晩六遺稿 내용개요 청구기호 奎 15379
권수 권제목:
제목 없음. 龜讚詩‚ 與七老宰臣陪輦主報恩驛詠遣‚ 附七宰臣詩‚ 次廉梅軒壁上詩‚ 與旌閭孝子進士朴晉‚ 題松岳寺壁上‚ 牛山券古蹟
墓誌 (3) 權近이 지은 崔瀁의 墓誌銘이다. 글의 내용을 보면 먼저 최양의 선조가 경상도 尙山에서 全州로 이주하여 왔음을 말한 다음‚ 그의 가계를 기록하였다. 이어서 최양의 어머니가 태몽을 꾸고 그의 이름을 ‘養’이라고 지었고 8세 때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스승이 그의 총명함을 보고 ‘瀁’이라고 이름을 고치도록 한 일을 기록하였다. 이후에는 최양의 행적을 기술하였는데‚ 14세 때에 정몽주에게 나아가 수학하였으며‚ 1376년(우왕 2)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32세 때에 李穡과 교유하면서 ‘成均講學之官’의 설치를 주장하였으며 이후 이색에 의해 발탁되어 成均館司藝·藝文館直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33세 때에는 林堅味·李士庸 등의 간신들을 물리치고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듬해에는 이성계의 종사관으로서 서북면 정벌에 나갔다. 35세 때인 1385년(우왕 11)에 정몽주를 따라 명에 聖節使로 가서 歲貢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歲貢을 면제받고 긴장관계에 있던 對明關係를 회복시키는 공을 세우고 돌아왔다. 이어 1389년(창왕 1)에도 明太子冊封의 축하사절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공양왕 즉위후 문하찬성사에 올랐다. 이후 정몽주가 죽고 고려가 망하자 中台山에 들어가 3년간 은거하였다가 全州 大勝洞 鳳崗里로 퇴거하였으며‚ 1395년(태조 3)에 태조가 영의정의 벼슬을 제수하며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1400년(정종 2)에 태조가 온양에 행차하여 최양을 부르자 처음에는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다가 다시 趙英茂를 보내 두번째 부르자 잠시 布衣로 나와 태조를 만났다. 이 때 태조가 전주의 田畓 800결을 하사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고 다시 은거하여 살다가 1424년(세종 6)에 사망하였다. 권근은 글의 말미에서 최양의 유자가 글을 부탁하여 지었다고 하면서 자신과 최양간의 교유관계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필사 과정에서 착오가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神道碑文 (9) 1852(철종 3). 徐俊輔(1770-1856)가 지은 최양의 神道碑文이다. 글의 서두에서 최양을 정몽주·이색과 함께 고려 말의 三仁이라고 평가하였다. 이어서 최양의 가계와 그의 행적‚ 그리고 최양 후손들의 행적과 관력‚ 1829년(순조 29)에 최양에게 忠翼의 시호가 내려진 일 등을 기술하였으며 최양의 충절과 절개를 箕子에 비유하여 칭송하였다. 그리고 최양이 이성계를 따라 정벌에 나아갔다가 이성계에게 전주 牛山 지역의 소유권을 청하여 받은 후‚ 이성계가 온양에서 불렀을 때에 그 牛山券을 보이고 ‘田吾田宅吾宅’이라 하면서 이성계에게 稱臣하지 않았던 일화를 소개하고 그가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말하였다.
金鑑錄 (14) ≪金鑑錄≫ 이라는 책에서 최양의 행적에 관한 부분만을 발췌하여 기록한 것인데 ≪金鑑錄≫이 어떤 책이었는지는 미상이다.
讚 (16) 최양의 절의를 찬양한 내용으로 두 편이 실려 있다. 첫번째 것은 1609년(광해 1)에 居士 成晉善이 지은 것으로 최양의 선조 羣玉이 伊川先生과 교분이 있어 중국에서도 명성이 있었는데 그 후손 최양이 또한 충의와 절행이 높으므로 이를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는 내용이다. 두번째 것은 崔恒(1409-1474)이 지은 것으로 道에 합하고 義理에 순하여 天下萬世의 大節을 이룬 사람만이 참으로 높고 밝다고 할 수 있는데‚ 최양이 바로 이러한 大節을 지닌 사람이라고 칭송한 내용이다.
出示牛山券賦 (20) 崔嶢製가 지은 賦이다. 최양이 태조에게 牛山券을 청하여 얻은 후‚ 온양에서 태조를 만났을 때에 이를 보이면서 稱臣하지 않았던 일을 노래한 것으로 최양이 선견지명이 있었음과 충절이 높았음을 찬양하였다.
全羅監司狀啓 (21) 1756(영조 32). 閔百祥(1711-1761)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올린 장계이다. 바른 정치를 위해서는 顯忠褒善의 道에 먼저 힘써야 한다고 하면서‚ 전라도 지역의 志士 중에 최양이 道學과 貞節이 뛰어났음에도 지금까지 褒揚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국가의 큰 정치에 누가 되는 일이라고 말한 내용이다.
全羅道幼學臣金洛龍等上言 (22) 1829(순조 29). 전라도의 유생 金洛龍 등이 올린 상소로서 최양의 義節과 學問이 정몽주·길재 등과 비견할만 한데도 褒揚의 恩典이 유독 최양에게만 빠져 있다고 하면서 최양에게 諡號를 내려 줄 것을 청한 내용이다.
禮曹判書徐俊輔回啓 (24) 1829. 김낙용의 상소에 대하여 禮曹判書 徐俊輔가 계문한 것으로 시호의 恩典은 천단할 수 없는 것이므로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를 계문한 내용이다.
完營關文 (25) 1829. 전라도 관찰사에게 내린 關文이다. 전라도 유학 김낙용의 상소 내용을 소개하고 이어서 최양의 후손이 전주·남원·금구 등지에 살고 있다는 말이 있으니 그에 대해 알아보도록 명한 내용이다.
諡狀 (26) 1829. 李止淵(1777-1841)이 지은 최양의 諡狀이다. 최양이 정몽주의 甥姪이며 李穡(1328-1396)의 畏友로서 節行과 道學을 겸비한 인물이라고 칭송하면서‚ 전라도 유생 김낙용 등이 시호를 내려 줄 것을 청하므로 이에 예조에 명하여 ‘忠翼’이라는 시호를 내린다는 내용이다.
禮曹回啓 (31) 최양에게 시호를 내리는 문제에 대하여 禮曹判書 徐俊輔가 계문한 것으로 고려 말의 志士들이 다 褒揚됨을 입었는데 유독 최양만이 지금까지 빠져 있었다고 하면서 최양에게 特恩을 내릴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은 내용이다.
敎旨 (32) 최양에게 忠翼의 시호를 내린다는 내용의 敎旨이다.
題主慰安告由祝文 (33) 최양의 위패를 처음 만들어 西山祠에 봉안하고 告由祭를 지낼 때에 올린 축문이다.
延諡祝文 (33) 최양에게 忠翼의 시호가 내려진 후 제사를 지낼 때에 올린 축문이다.
書院位板改題祝文 (33) 최양에게 시호가 내려진 후 西山祠에 봉안된 최양의 위패를 바꾸면서 제사할 때에 올린 축문이다.
杜門洞不朝峴言志錄 (33) 1392년 조선 개국 후에 조선에 臣服하지 않고 杜門洞으로 들어간 사람들의 言行을 기록한 것으로 각 사람들이 신복하지 않으려는 자신들의 의지를 말한 내용과 어느 곳에 은거하였는가 등이 기록되어 있다. 최양이 中台山에 은거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讚先生節義詩 (35)

 

 

최양의 절의를 칭송한 시 14수가 실려 있다. 저자들의 이름을 보면 丁焰‚ 崔鐵堅(1548-1618)‚ 李民覺‚ 趙翊(1556-1613)‚ 李大㐕‚ 朴以恒‚ 趙三聘‚ 奇蘭‚ 李尙吉(1556-1637)‚ 韓興一(1587-1651)‚ 崔是翁(1646-1730)‚ 李燾(1639-1713)‚ 鄭東益‚ 梁克選 등이다. (강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