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휘 덕지 등/연촌공 녹동서원 치제문

녹동서원(鹿洞書院) 사제문(賜祭文숙종 계사년(1713, 숙종39) [어유귀(魚有

아베베1 2010. 12. 22. 13:45

 

 전주최씨 문성공 휘아  5세손 휘 연촌공 휘 덕지  저의 20  대조

                              7세손  휘 산당공 휘 충성 (연촌공 손자) 관련 자료    

농암집 별집 제2권
 부록(附錄) 1
녹동서원(鹿洞書院) 사제문(賜祭文) 숙종 계사년(1713, 숙종39) [어유귀(魚有龜)]


지제교 어유귀(魚有龜) 지음

계사년 6월 병자삭 12일 정해에 국왕은 신 예조 정랑 길경조(吉景祖)를 보내어 고 직제학(直提學) 최덕지(崔德之), 고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고 사인(士人) 최충성(崔忠成), 고 판서 김창협(金昌協) 네 신하의 영전에 하유하고 제사를 지낸다. 국왕은 다음과 같이 이르노라.

도학이며 절행은 / 道學節行
세상이 존경하고 따라야 할 일 / 世所矜式
어질고 덕 있는 자 향사하라는 / 祀賢饗德
이 나라에 정해진 법이 있다네 / 邦有典則

강직하고 올곧은 학문을 지녀 / 侃侃直學
명망과 내실 모두 성대했는데 / 望實俱赫
영릉이라 세종 때 마침 만나서 / 遭際英陵
만리 전도 앞길이 창창하다가 / 進途方闢
고을 수령 인끈을 던져 버리고 / 一投州紱
월출산 산기슭에 편히 누워서 / 高臥月出
문 닫고 성현 글을 익혔었는데 / 杜門講學
무엇보다 맹자의 말씀 궁리해 / 玩賾鄒說
존양이란 편액을 걸어 붙이고 / 堂扁存養
힘쓰기를 깊고도 정밀히 하자 / 用功微密
문종께서 마침내 가상히 여겨 / 文廟乃嘉
조정이라 대궐로 불러와서는 / 召致內閣
순결하고 진실함 치하하시어 / 賞其純實
은총이며 예우가 두터웠건만 / 恩顧優渥
상소로 물러감을 자청하고서 / 尺疏乞骸
처음의 신분으로 다시 돌아와 / 復遂初服
심산계곡 속에서 생을 마치니 / 終身邱壑
무너진 세상 풍속 감화되었네 / 風勵頹俗

그 뒤에 가정교훈 영향을 받아 / 庭訓所漸
태어난 손자 또한 어질었나니 / 有孫亦賢
스승의 문하에서 덕성 기르고 / 薰德師門
어린 나이 묘령에 도에 뜻 두어 / 志道妙年
식견이 고매하고 행실 독실해 / 識高行篤
마침내 가문 전통 계승하였네 / 遹紹家傳

어허, 나의 어질고 유능한 보좌 / 繄我良佐
이 나라의 귀감이 분명했거니 / 邦國蓍龜
충직하고 순수한 절조에다가 / 忠純其操
씩씩하고 공손한 자질을 지녀 / 莊穆其資
이름난 조부에게 직접 배우고 / 親炙名祖
큰 스승 문하에서 갈고닦은 뒤 / 切磋大老
들은 바를 높이고 아는 걸 행해 / 尊聞行知
평소에 지닌 포부 크게 펼쳤네 / 大展抱負
세상의 도덕 풍속 책임지고서 / 身任世道
음기를 억누르고 양기 붙들며 / 抑陰扶陽
한 절개로 세 조정 섬기는 동안 / 一節三朝
도덕 업적 한층 더 빛이 났었네 / 德業彌章
의정부 들어온 게 네 번이었고 / 四入中書
남쪽에 귀양 간 게 두 번이거니 / 再遷南裔
오로지 우리 경의 진퇴에 따라 / 惟卿進退
시운의 길흉 성쇠 점칠 수 있어 / 占時否泰
무진 기사 그 당시 생각노라면 / 永言龍蛇
슬픔이며 후회를 어이 가누랴 / 曷勝悼悔
저기 저 영암 땅을 돌아다보면 / 睠彼朗山
충성스런 경의 넋 서린 곳으로 / 是卿湘沅
내 남쪽 선비들을 계도했는데 / 迪我南士
남긴 교훈 아직도 그대로 있어 / 餘敎斯存
학문을 강습하던 생각 일어나 / 淇竹興思
세상 떠날 때까지 잊지 못하네 / 沒世不諼

그리고 또 상서는 지혜 출중해 / 嶷嶷尙書
선대의 아름다운 자취를 밟아 / 趾美先躅
시례의 가업 전통 계승하였고 / 業承詩禮
재덕의 도량 인품 가슴에 품어 / 器鞰珪璧
경연에서 왕도정치 토론을 하고 / 經幄討論
바른말로 임금을 인도하다가 / 昌言啓沃
불행히도 중도에 변고를 만나 / 中罹變故
황량한 골짝으로 은둔하였네 / 遯于荒谷
성현 학문 부단히 스스로 닦아 / 俛焉自修
일심으로 도리를 탐구하였고 / 一心求道
주자 연원 거슬러 올라가서는 / 探溯紫陽
빗장 열고 심오한 이치 더듬어 / 叩抽鍵奧
진정으로 알았고 실천했기에 / 眞知實踐
조예가 날로 더욱 정밀해지자 / 造詣益精
유학을 붙들어서 보호하였고 / 扶植世敎
후생이 따라 배울 모범이 되니 / 模範後生
기풍이며 영향이 두루 미치어 / 光塵所曁
선비들 너나없이 흠모하였네 / 衿紳均慕

앞 시대와 뒤 시대 현인 네 사람 / 前後四賢
이 고장에 자취를 남기었는데 / 跡留斯土
조부와 손자 서로 대를 이었고 / 祖孫相望
부자가 아름다움 함께 하였네 / 父子並美
선비들이 다 함께 상의한 끝에 / 多士協謀
사당 세워 제사를 지내 주면서 / 立廟以祀
오른쪽 위치에다 배향을 하되 / 齊享于右
차례대로 줄지어 봉안하였네 / 列配其次
아름다운 편액을 이에 내리어 / 玆宣華額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했는데 / 俾聳瞻聆
백록동 서원 이름 서로 같아서 / 名叶鹿洞
천년을 사이 두고 함께 빛나네 / 輝映千齡
제관 보내 제물을 올리게 하니 / 遣官致酹
희생도 살 오르고 술맛도 좋다 / 牲酒肥香
영령들이여 부디 강림을 하여 / 靈其來格
아무쪼록 이 술잔 받아 들게나 / 庶歆此觴

 

[주C-001]녹동서원(鹿洞書院) 사제문(賜祭文) : 녹동서원은 1630년(인조8)에 전라도 영암(靈巖)에 세웠는데, 1713년(숙종39)에 사액하면서 고유한 글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최덕지와 함께 배향된 성종 때의 학자 최충성 및 농암의 부친 김수항, 농암 등의 순으로 열거하며 공덕을 기렸다.

 

 

 농암집 제7권
 소차(疏箚)
영암(靈巖) 유생을 대신하여 지은 연촌서원(煙村書院)의 사액(賜額)을 청하는 소 경신년(1680)

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예로부터 조정에서 벼슬했던 인물들 중에 일단 들어가면 물러나지 않고 녹을 끌어안고 총애를 탐하다가 신세를 망친 사람은 많고, 결연히 물러나 부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겨우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 상황을 고찰하여 논하자면, 이들은 또 모두 쇠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화를 당하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자신을 온전히 할 방도를 궁리한 끝에 벼슬하지 않은 경우이거나, 이미 최고의 명성과 지위를 누렸기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 그리한 것일 뿐입니다. 성군(聖君)의 시대를 만나 임금이 크게 등용할 의향이 여전한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떠난 경우는 수백 수천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더구나 절조(節操) 하나만으로 자족하지 않고 대도(大道)에 뜻을 두며, 유유자적 한가로이 지내지 않고 실천에 힘쓰는 경우로 말하자면 어찌 더욱 뛰어나 그와 같은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신들은 먼 고을의 어리석은 선비로서 견문이 넓지 못하지만 한 가지 들은 것이 있습니다. 세종(世宗), 문종(文宗) 때에 신(臣) 최덕지(崔德之)가 있었으니, 그는 한림원(翰林院)에서 출발하여 옥당(玉堂)과 대각(臺閣)을 거치고,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있다가 물러나 영암에서 지내면서 서재를 지어 존양(存養)이라고 편액을 달고 두문불출하였는데, 당시는 세종의 만년이었습니다. 문종이 즉위했을 때 불러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제수하고 순수하고 진실하다고 칭찬하며 계속 등용하려 하였는데, 조정에 있은 지 2년도 못 되어 사직소를 올리고 돌아와서 끝내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의 정치와 교화는 세종, 문종 때보다 더 융성한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뛰어난 인재들이 시운(時運)을 타 구름같이 모여들고 경학과 문장에 밝은 선비들이 진기하고 뛰어난 식견으로 줄지어 조정에 서서 모두 공명(功名)을 떨쳤으니, 이는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시절이었습니다. 최덕지의 그 훌륭한 재주로 그들과 어울릴 때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으니 만일 느긋하게 따라가며 시운에 편승하였더라면 경상(卿相)의 자리에 올라 공명이 찬란했을 터인데, 벼슬을 버리고 멀리 떠나서 변방 산천에 은둔한 채 일생을 마쳤습니다. 이는 경중의 구분에 밝고 영욕(榮辱)의 경계를 초월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니, 저들 기미를 살펴 화를 피하는 자들과 지위가 극도에 이른 뒤에야 그만두는 자들의 경우는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리고 예로부터 은둔한 선비는 대부분 스스로 고상함을 표방하여 가장 훌륭하다고 여기고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면서 마음 쓰는 것이 없었으니, 이들이 비록 부귀의 유혹에 빠져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는 자들보다는 낫다 하나, 그 역시 도(道)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 지금 최덕지는 귀향하여 마침내 맹자(孟子)가 말한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한다.[存心養性]’는 말을 택하여 거처하는 집의 이름을 지었으니, 그가 바른 학문에 마음을 두고서 덕을 향상시키고 학업을 닦는 일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부귀와 빈천을 취하고 버리는 기준이 분명해진 뒤에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는 공부가 치밀해지고,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는 공부가 치밀해지면 부귀와 빈천을 취하고 버리는 기준이 더욱 명백해진다.” 하였는데, 최덕지로 말하면 이에 가깝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에 기록된 것이 소략하여 그의 말과 풍격을 상세히 상고해 볼 수 없으니 애석합니다.
그러나 그 높은 지조와 바른 마음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 후세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손자 대에 이르러 최충성(崔忠成)이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특출한 재주와 독실한 학문으로 수제자라 일컬어졌으니, 이는 그 사우(師友)의 연원이 본디 그럴 만했을 뿐만 아니라 선조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최덕지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이미 200여 년이 흘렀는데도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도 변치 않아서 남쪽 고장을 찾아오는 사대부는 반드시 이른바 존양루(存養樓)라는 곳을 방문하여 그의 초상 앞에 예모를 갖추고 탄식하며 발걸음을 떼지 못하곤 하니, 그가 남기고 간 영향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 또한 깊다 하겠습니다.
지난 경오년(1630, 인조8)에 온 읍의 선비들이 힘을 모아 사당(祠堂)을 세워 최덕지를 향사하고 최충성을 배향하였는데, 향사하는 일이 세월이 아무리 오래 지나도 여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먼 지방의 고루한 곳인 관계로 아직까지 조정에 사액(賜額)을 요청하지 못하여 사류(士類)의 수치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삼가 보건대 성상께서는 현인을 높이고 도를 중시하여 선비들이 행하고 싶어하는, 사문(斯文)의 누락된 전례(典禮)를 모두 흔쾌히 행하고 계시니, 신들은 지금 이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감히 여럿이 함께 와서 대궐문 아래에서 명을 청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최덕지의 출처의 전말과 학문의 대체가 사류의 존경을 받을 만함을 살피시고 특별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시어 편액을 하사함으로써 그를 표창하시어 먼 지방의 선비들이 현인을 존경하는 성심을 이룰 수 있도록 하시고, 후세에도 보고 느끼는 점이 있어 분발하게 하시기를 바라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신들은 우러러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주C-001]영암(靈巖) …… 소 : 작자의 나이 30세 때인 1680년(숙종6)에 지은 소로서, 작자의 부친인 김수항(金壽恒)이 전라도 영암에서 귀양살이할 당시에 작자가 부친을 만나기 위해 그곳에 여러 번 왕래한 적이 있었던 인연으로 대작한 듯하다. 연촌서원은 세종과 문종 때의 문신인 최덕지(崔德之)와 그의 손자 최충성(崔忠成)을 향사(享祀)하는 서원으로, 전라남도 영암의 사류들이 1630년(인조8)에 세운 것이다. 당시에 최덕지의 생존시에 그린 초상화인 영정(影幀)이 그가 거처하던 존양루(存養樓)에 봉안되어 있었다. 《煙村遺事》
[주D-001]존양루(存養樓) : 최덕지가 남원 부사를 그만두고 내려와서 건립하여 거처하던 곳으로 영암 덕진면(德津面) 영보리(永保里)에 있는데, 존양당(存養堂)이라고도 한다.

 

해동야언 2
성종(成宗)

○ 성종은 뜻이 학문에 독실하여 삼시(三時)로 강서(講書)를 하고, 밤이 되면 옥당(玉堂)에서 입직하는 선비들을 불러들여 그들과 강론하며, 강론이 끝나면 술을 주면서 조용히 고금치란(古今治亂)과 민간의 이해(利害)에 대해 묻곤 하였는데, 언제나 서로 평복으로 대하였으며, 각중(閣中)에는 촛불을 단지 하나만 켤 따름이었다. 신하들이 밤이 깊어서 크게 취하여 나가면 어전(御前)의 촛불을 주어 원(院)에 돌아가게 하였는데, 이는 곧 김연거(金蓮炬)의 유의(遺意)이다. 《용재총화》이하 동
○ 성묘(成廟)는 학문이 깊고 박식하며 문장을 넓고 엄숙했다. 문사(文士)에게 명하여 《동문선(東文選)》,《여지승람(輿地勝覽)》,《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케 하고, 또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책을 인쇄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는데, 이를테면《사기(史記)》ㆍ《좌전춘추(左傳春秋)》ㆍ《전후한서(前後漢書)》ㆍ《진서(晉書)》ㆍ《당서(唐書)》ㆍ《송사(宋史)》ㆍ《원사(元史)》, 그리고 《강목통감(綱目通鑑)》ㆍ《동국통감(東國通鑑)》ㆍ《대학연의(大學衍義)》ㆍ《고문선(古文選)》ㆍ《문한유선(文翰類選)》ㆍ《사문유취(事文類聚)》ㆍ《구소문집(歐蘇文集)》ㆍ《서경강의(書經講義)》ㆍ《천원발미(天原發微)》ㆍ《주자성서(朱子成書)》ㆍ《자경편(自警編)》ㆍ《두시(杜詩)》ㆍ《왕형공집(王荊公集)》ㆍ《진간재집(陳簡齋集)》같은 것인테, 이것음 모두 내(성현)가 기억하는 바요, 그 밖의 인쇄한 제서(諸書)가 또한 많다. 또 서강중(徐剛中)의 《사가집(四佳集》ㆍ강경순(姜景醇)의 《사숙재집(私淑齋集)》ㆍ신범옹(申泛翁)의 《보한재집(保閑齋集)》을 취집하여 간행하였는데, 다만 이윤보(李胤保)와 우리 문안공(文安公 성임(成任))의 시문(時文)은 산일(散逸)이 되어서 인쇄를 못하였으므로 한스럽다.
○ 선묘(宣廟 성종)는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양성(兩聖 세종ㆍ세조)을 이어받았고 유림을 사랑하고 장려함이 보통 규모에서 멀리 뛰어났으므로, 당시 문장력이 걸출한 선비가 옥서(玉署 홍문관)에 찬란하게 빛났으니, 이를테면, 매계(梅溪 조위)와 삼괴당(三魁堂 신종호)이며, 뇌계(㵢溪 유호인) 그리고 나의 선대인(先大人) 김흔(金訢) 같은 이들은 더욱 많은 은총을 입어서 항상 지은 바를 매월 써서 올리게 하였다. 매계와 뇌계는 모두 부모가 늙었다 하여 외직(外職)을 청하므로, 특별히 쌀과 콩을 주어 그 부모에게 넉넉하도록 하였다. 뇌계가 외직에 가면서 한 시구를 올리기를,
북쪽을 바라보니 군신간이 멀어졌고 / 北望君臣隔
남으로 내려오니 모자가 같이 사네 / 南來子母同
라고 하였는데, 임금이 조용히 감상하며 이르기를, “호인(好人)이 몸은 비록 외방에 있으나, 마음은 군(君)을 잊지 않는구나.” 하고, 또 매계가 상사를 당하였을 때는 제사를 내려 영화롭게 하여 은총이 죽고 산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사람마다 감동해 일어났다. 인재를 고무(鼓舞)하고 사기를 진작함에 있어 진실로 천세에 드물게 볼 수 있는 성사라고 하겠다. 영상 성희안(成希顔)이 홍문관의 정자(正字)로서 상사를 만나 벼슬을 그만두었다가 복을 마치자 다시 벼슬을 주니, 전례대로 은명(恩命)을 사례하였다. 임금이 다시 불러 합문(閤門) 밖에 오게 하여 위로하고,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매(鷹) 하나를 팔에 얹어 가지고 와서 하사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노모가 있으니, 공사에서 물러나 틈이 있으면 교외에 가서 사냥하며 자미(滋味)를 봉양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라.”고 하였다. 또 밤에 입대(入對)하니, 주과(酒果)를 하사하셨는데, 공은 소매 속에 감귤을 열두어 개나 넣고는 인하여 취해서 엎드려 인사를 가리지 못하는지라 중관이 업고 나갔는데, 소매 속에 넣은 감귤이 모두 땅에 떨어진 줄도 깨닫지 못하였다. 다음날 임금은 감귤 한 쟁반을 옥당에 보내며 이르기를, “어제 성희안이 귤을 소매에 감춘 것은 그 노친에게 드리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하사한다.” 하였다. 공이 뼈에 새기고,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 하더니, 마침내 정국(靖國)의 거사로 보은하였다. 선묘(宣廟)의 선비를 대우하는 데 지성스러움과 사람을 알아보는 명철한 식견이 진실로 사람이 충성을 다하게 한 것이었으나, 공은 위태한 것을 개혁(중종반정)하여, 나라를 안정하게 하고 공훈이 사적에 오르니 역시 지우(知遇)를 저버리지 아니하였다. 《용천담적기》이하 동
○ 문성 양성(文成兩聖 문종ㆍ성종)은 해서(楷書)의 필법에 정밀하였다. 문묘(文廟)는 곧고 단단하고 생동한 진체(眞體 정자로 쓰는 것)는 진인(晉人 왕희지)의 오묘(奧妙)함을 빼앗았지만, 다만 석각(石刻)한 수본(數本)만이 있을 뿐이고, 세상에 전하는 지극한 보배는 귀신이 감추어서 진적(眞跡)은 보기 드무니 아깝도다.
○ 성묘(成廟)의 글씨는 곱고 예쁘고 단아하고 무게가 있어서 자연스레 조송설(趙松雪)의 규도(規度)에 깊이 들어갔다. 임금이 또 가끔 먹 장난에 뜻을 두고 소화(小畫)를 그렸는데, 그것은 모두 하늘이 내려주신 재능으로 별로 모습(模習)조차 아니 하여도 그 오묘함이 옛 법도에 이르렀다. 온갖 정무를 보는 여가에 청연(淸讌)의 자리가 있으면 때때로 한묵(翰墨)과 친하여 간략하게 붓을 휘두르곤 했는데, 한 치 되는 쪽지나 한 자 되는 폭도 세상에 산락(散落)되어 그것을 얻은 사람은 공경하여 애완하여 깊이 싸두는 것이 아름되는 옥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상사생(上舍生) 박원령(朴元秢)은 글씨를 좀 잘 썼는데, 성묘가 이를 보고 가상히 여기며 그 고을에 글을 내리어 지필을 주게 하여 장려하니 영화가 향려(鄕閭)에 빛나서 경동(驚動)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무릇 재예 세기(才藝細技)가 어찌 족히 임금의 기림을 움직였으리오 마는 성능(聖能)하다 하여 그것을 폐하지 아니하였으니, 권장하기를 융성히 함은 이처럼 성심에서 나왔다. 이로 말미암아 문장(文章)ㆍ서화(書畵)ㆍ공기(工技)ㆍ백술(百術)이 그 격려에 힘입어 정진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이에 성인의 고무(鼓舞) 전이(轉移)의 계기가 다만 한 번 빈소(嚬笑)하는 순간에 있음을 알았다. 만일 그 성의가 범정(凡情)에서 크게 초월한 것이 아니라면, 비록 백방으로 권칙(勸勅)하더라도 엄정한 정과(正課)를 세움에 있어 다만 소란하여 점차 쇠퇴하고 말았을 것이다. 어찌 사람의 심정을 감동하는 데 이같이 깊음이 있으리오.
○ 성묘(聖廟)는 왕대비(王大妃)를 위하여 날마다 곡연(曲宴)을 베풀고 내수비(內需婢) 5ㆍ6명을 뽑아 속악(俗樂)을 익히게 하였는데, 그중 한 명이 용모가 아름답고 재주가 뛰어났다. 그가 항시 성종에게 눈짓을 마지않는지라 성묘가 그것을 보고 그 부모에게 명하여 시집보내게 하고, 다시는 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더니, 이로부터 곡연도 파하게 되었다. 또 성묘는 굳이 볼 일이 없으면 하루 세 차례 경연(經筵)을 열었으며, 또 날마다 세 번 왕대비전(王大妃殿)에 문안드리곤 하였다. 또 종실(宗室)을 데리고 후원(後苑)에서 활을 쏘고 난 뒤에는 종실과 마주 대하고서 반드시 소작(小酌)을 베풀었는데, 거기에는 기악(妓樂)이 따랐으니, 이는 진실로 태평성사(太平盛事)였다. 그러나 어떤 의론하는 자는 혹 연산군(燕山君)이 연락(宴樂)을 탐한 것은 눈과 귀에 익숙해져서 그러하였다 하니, 아까운 일이다. 김흔의《전언왕행록》
○ 궁에서 나온 사람이 있었는데, 상자 속에 거두어둔 절지 찰한(截紙札翰)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에 이르기를,
깊숙한 정자에서 흐르는 물줄기 바라보니 / 幽亭瞰流水
높은 나무는 잔잔한 시냇가에 늘어졌다 / 高樹俯潺湲
화류(대추빛깔의 준마)가 푸른 풀언덕에서 우니 / 驊騮嘶靑草
봄이 푸른 아지랑이 속에 있도다 / 春在翠微間
또,
절벽은 천 길이나 되는 듯 솟았는데 / 絶壁立千仞
솔바람은 불어 마지않네 / 松風鳴未休
난간에 비기고 섰는 무한한 회포 / 憑欄無限意
약속이나 한 듯이 고향 산천에도 가을이 들었으리라 / 依約故山秋
하였다. 또,
새 외를 처음 맛보니 수정같이 산듯하다 / 新瓜初嚼水精寒
형제의 정 친한 것으로 어찌 차마 홀로 보랴 / 兄弟情親忍獨看
또,
형에게 묻노니 무엇으로 세월을 보내시오 / 問兄何事送羲娥
멀리 생각하니 양금과 위가일 것이리 / 遙想洋琴與渭歌
또,
친척과 모이기를 기약하고 / 期會親戚
아리따운 기생을 맞이했네 / 聘招佳妓
의(義)는 비록 군신이나 / 義雖君臣
은혜로 말하면 형제로세 / 恩則兄弟
라고 하였으니, 보는 자가 성묘가 평소 장난삼아 썼다가 버린 것임을 알겠다. 위에 두 절구는 반드시 그림에 쓴 시일 것인데, 누구의 소작인지 알지 못하겠고, 나머지는 모두 월산대군(月山大君)에게 준 편지 초고이다. 성묘는 매양 월산대군을 내전에 데려다가 곡연(曲宴)을 베풀고, 나가면 편지로 수창(酬唱)한 것을 보내지 않는 날이 없었으니, 대개 그 우애가 지극한 것이었다. 《소문쇄록》
○ 세종은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유명한 문사 20명을 골라 경연(經筵)을 겸하고, 모든 문한의 일은 모두 다 위임하였다. 아침 일찍 들어와서 밤늦게 서야 파하였는데, 일관(日官)이 시간을 알린 후에야 나갔으며, 조석 식사는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손님 대접하듯이 하니, 그 융숭하게 대접하는 뜻이 지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다투어 가며 서로 권면하여서 뛰어난 재주 큰 선비가 많이 나와서 문원(文苑)에 유명한 자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세조는 병자난(丙子難 사육신사건) 때에 집현전을 파하고, 문신 수십 명을 골라 예문(藝文)이라고 겸칭하며 날마다 불러들여 의논하고 생각을 하였다. 성묘가 즉위하여서는 옛날의 집현전에 의하여 다시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고, 본관(本官)으로 경연을 겸하게 하며, 더욱 후하게 대우하였다. 매양 선온(宣醞)을 주고 승지를 불러 모아서 같이 마시게 하였고, 또 많은 노비를 주어 심부름하는 데 대비하도록 하였으며, 또 조예(皁隸)들로 하여금 모두 은패(銀牌)를 차게 하였다. 게다가 용산강(龍山江) 가에 별당을 짓고 관관(館官)을 분번(分番)하여 독서하도록 하였고, 또 상사(上巳 3월 3일)와 중양(重陽) 가절에는 주악(奏樂)을 주어 교외에서 유흥으로 즐기게 하였으니, 그 은총과 영광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문(文)으로 이름난 자는 세종 때의 성대함만은 못하였다. 《용재총화》이하 동
○ 신라와 고려 때는 불교를 숭상하여 오로지 불공과 반승(飯僧 중에게 밥 먹이는 것)을 상례로 하였다. 우리 태종이 비록 사사(寺社) 노비를 혁신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유풍이 오히려 남아 있었다. 으레 공경(公卿)이나 선비의 집이라도 빈소(殯所)에는 중들이 모여 앉아 불경을 읽었는데, 이것을 불석(佛席)이라 하였고, 또 산사에서는 칠칠재(七七齋)를 지내는데, 부자는 다투어 호화스럽고 사치하게 하고, 가난한 집에서도 관례에 의하여 갖추어 베풀므로 물과 곡식을 소모함이 심히 컸었다. 또 친척과 붕료(朋僚)들은 포물(布物)을 가지고 와서 시주하였는데, 이를 식재(食齋)라고 하였다. 또 기일에는 중을 맞이하여 먼저 밥을 먹인 뒤에 혼을 불러 제사지냈는데, 이것을 승재(僧齋)라고 한다. 성묘는 정학(正學)을 숭상하고 이단을 배척하여 모든 불사에 대해 다 고치면서 그 폐단을 극언하였다. 이로부터 사대부의 집에서는 법과 물의를 두려워하여 비록 상사와 기일을 당하여도 다만 법에 의하여 제사를 행할 뿐이고, 중과 부처를 공양하지 않았다. 그대로 인습하고 폐하지 않는 자는 오직 무뢰한 백성들이었으니, 이들도 멋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또 도승(度僧)의 법을 엄하게 금하여, 주군(州郡)에까지 단속하여 중으로서 첩(牒)이 없는 자는 머리를 길러 속세로 돌아오게 하니, 안팎 사찰이 모두 비게 되었다. 물(物)이 성하면 쇠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 성균관은 교훈을 전장(專掌)하였는데, 국가에서는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고 관관(館官)으로 겸임하게 하여 항상 유생 2백 명을 양성하게 하였는데,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가 아뢰어 존경각(尊經閣)을 세워서 많은 경적을 인쇄하여 간직하게 하였으며, 광천군(廣川君) 이극증(李克增)이 아뢰어 전사청(典祀廳)을 짓게 하였고, 나(성현)도 아뢰어 향객청(享客廳)을 건설하게 하였다. 그 후 성전(聖殿)의 동서 행랑과 식당을 모두 짓고, 또 포목 5백 필과 쌀 3백여 석을 주며, 또 학전(學田)을 두어 관중(館中)의 모든 수요를 충당하게 하였다. 이극증이 아뢰기를, “이제 성은을 받아 많은 미포를 받았으니, 주식을 준비하고 조정의 문사 및 제생을 모이게 하여 더욱 사문(斯文 유림)의 성사(盛事)가 되게 하여 주소서.” 하니, 성묘가 윤허하는지라, 이에 문사 대회를 명륜당에서 열었는데, 찬품(饌品)이 극히 정결하였다. 승지가 선온(宣醞)과 어주(御廚)의 진미를 주었는데 계속 끊어지지 않았다. 계축년 가을에 성균관에 거둥하여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제사지내고 물러와 하연대(下輦臺)에 마련한 장전(帳殿)에 앉으니, 문신 재추(宰樞)가 모두 전(殿) 안으로 들어와 모시고 당하관(堂下官) 문신들은 뜰에 열지어 앉았으며, 8도 유생이 구름과 같이 서울에 모였으니, 무려 만여 명이나 되었다. 상하 할 것 없이 모두 꽃을 꽂고 잔치에 참여하였으며, 또 새로 악장(樂章)을 지어 연주하여 흥을 돕고, 각 관청에서 나누어 맡아서 주찬(酒饌)을 설비하게 하고, 임금은 자주 내신(內臣)을 보내어 감독하고 살피게 하니, 사람마다 취하고 배불렀다. 이 같은 일은 옛날부터 들어볼 수 없는 성사였다.
○ 태종이 영락(永樂 명 성조의 연호) 원년에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무릇 정치는 반드시 전적(典籍)을 널리 보아야 하는 것인데, 우리 동방은 해외에 있으므로 중국의 서책은 드물게 이르고, 이미 있는 판각은 닳아 없어지기가 쉬우며, 또 천하의 글을 모두 판각으로 하기도 어려우므로 내가 구리로 본떠 주자(鑄字)를 만들어서 글을 얻는 데 따라 인쇄하여 이를 세상에 널리 전하면 진실로 무궁한 이익이 될 것이다.” 하고, 드디어《고주(古註)》ㆍ《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좌씨전(左氏傳)》의 자본(字本)으로 주자를 만드니, 이것이 주자의 시초인데, 그 이름을 ‘정해자(丁亥字)’라고 하였다. 세종이 또 경자년에, 주자가 글자가 크고 고르지 못하다고 해서 다시 개주(改鑄)하니, 그 모양이 작으면서 바른지라 이로부터 인쇄하지 않은 서책이 없었는데, 그 이름을 ‘경자자(庚子字)’라고 하였다. 또 갑인년에 위선음즐(爲善陰騭) 등서의 자(字)를 본으로 하여 주자를 만들었는데, 경자자에 비하여 좀 큰 편이나, 자체가 매우 좋았다. 또 세조에게 명하여 《강목(綱目)》의 대자(大字)를 쓰게 하고, 드디어 연(鉛)을 주조하여 주자를 만들어서 강목을 인쇄하였으니, 이것은 지금 이른바 “훈의(訓義)”라는 것이다. 임신 연간에 문종(文宗)이 경자자를 다시 녹여, 안평대군에게 명하여 쓰게 하였는데, 이것을 ‘임신자(壬申字)’라고 한다. 을해년에 세조가 임신자를 녹여 강희안(姜希顔)에게 명하여 쓰게 하고, 그 이름을 ‘을해자(乙亥字)’라고 하였는데, 지금까지 활용하고 있다. 그 후 을유년에 원각경(圓覺經)을 인쇄하고자 정난종(鄭蘭宗)에게 명하여 쓰게 하였는데, 자체가 바르지 못하였다. 그것을 ‘을유자(乙酉字)’라고 하였다. 성종 신묘년에 왕형공(王荊公)과 구양공(歐陽公)의 문집을 자본(字本)으로 한 주자를 만들었는데, 그 자체가 경자자보다 작으면서도 더욱 정밀하였다. 그것을 ‘신묘자(辛卯字)’라고 하였다. 또 중국에서 신판 《강목(綱目)》의 자본을 얻어 주조한 주자를 만들었는데, 이를 ‘계축자(癸丑字)’라고 한다.
○ 성묘가 폐비 윤씨를 사사(賜死)하면서 그 전지(傳旨)에 이르기를, “윤씨는 그 성질이 본래 흉험(凶險)하며, 인륜에 어긋난 불순한 행실이 많다. 지난번 궁중에 있을 때에 날로 포악함이 심해지고, 이미 삼전(三殿 정희왕후ㆍ소혜왕후ㆍ안순왕후)에 불순히 하였을 뿐 아니라, 방자하게 과인(寡人)의 몸에 흉처(凶處)를 내고, 노예같이 대우하는가 하면, 지나칠 때는 족적(足跡 자손인 듯)을 삭거(削去)하겠다고까지 악담을 한다. 이것은 다만 작은 일이므로 논할 것도 못 된다. 심지어는 역대모후가 어린 아들을 내세우고 정치를 마음대로 한 것을 보고 스스로 기쁨으로 여겨서 항상 독약을 지니고 다니면서 혹 품속에 품고 다니고, 어느 때는 상자에 감추어 두곤 하였는데, 그것은 오직 자기가 꺼려하는 자만 제거하자는 것이 아니라, 장차 과인의 몸에도 해를 끼치려함이다. 또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오래 살면 장차 할 일이 있다.’고 하니, 이는 무도한 죄이다. 종사(宗社)에 관계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대의(大義)로 차마 끊지 못하고, 다만 서인(庶人)으로 폐하여 그 친정집에 있게 하였던바, 이제 외인(外人)들이 원자(元子)가 점차로 자라남을 봄으로써 전후의 분규되는 일이 대부분 이것으로 말썽이 될 것이다. 비록 당시에 있어서는 깊게 염려할 것이 못 되지만, 후일의 화는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흉험한 성질로써 후일 위복(威福)의 권세를 잡게 되면 원자가 현명하여도 또한 반드시 그 사이에서 훌륭한 일을 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 날로 더욱 방자하여질 것이니, 한(漢)의 여후(呂后)와 당(唐)의 무후(武后)의 화를 머리 들고 기다리게 될 것이다. 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매우 한심스럽다. 이제 만일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면서 일찍 대계를 정하지 못하였다가 국사가 구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후회한들 소용이 없어서 내가 실로 종사의 죄인이 되고 말 것이다. 옛날 구익부인(鉤弋夫人)은 죄가 없어도 한 무제(漢武帝)가 오히려 만세의 계책을 세웠는데, 항차 이같이 흉험하고 또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는 것이겠느냐.” 하고 이에 이달 16일에 그 사제에서 사사(賜死)하였으니, 종사대계(宗社大計)이므로 부득이한 일이었다. 《소문쇄록》이하 동
○ 임인년 10월 4일에 당양공주(唐陽公主)가 죽었는데,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공주가 죽어서는 조시(朝市)를 정지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하루의 조회를 정지하고 홍문관으로 하여금 전사(前事)를 상고하게 하였더니, 홍문관에서 말하기를, “송 나라 장공주(長公主)가 죽었을 때에 5일의 조회를 정지한 일이 있다.”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에도 이같을진대 지금이라고 어찌 그렇게 아니 하리요.” 하고, 3일간 조회를 정지하였다.
○ 성화(成化 명 나라 헌종의 연호) 계유년 5월에 경상 감사가 예조에 공문을 보냈는데, 그에 이르기를, “영해부(寧海府 지금의 경북의 영덕군)에 지화(地火)가 났는데, 낮에는 연기가 나고, 밤에는 화광이 있으며, 나무를 던지면 불이 일어난다. 길이가 8척이요, 넓이가 20척이나 된다.”고 하였는지라, 임금이 홍문관에 명하여, 고사를 상고하게 하니, “진(晉)의 혜제(惠帝) 원희(元熙) 연간에 지연(地燃)이 있었고, 조(趙)의 석호(石虎)와 후진(後秦)의 부견(苻堅) 때에, 그리고 당의 정관(貞觀) 때에 백주(白洲 지금의 황해도 배천)에서 지화가 있었고, 본조에 들어와서 세종 때에 영해(寧海)에서 이 같은 해염이 있었으며, 또 문종 때에는 상주(尙州)에서 지화가 있었다.”고 하는지라, 내신(內臣) 이효지(李孝智)에게 명하여 가서 살피게 하였더니, 불에 탄 석괴(石塊)를 가지고 왔는데, 숯같이 검으며, 불에 넣으면 불꽃이 일어났다.
○ 갑진년 9월에 봉상시(奉常寺)에서 김양경(金良璥)의 시호를 올렸는데, 공위공(恭威公)ㆍ편숙공(褊肅公) 그리고 제극공(齊克公)이라 하였다. 임금이 승정원에 물으니, 대답하기를, “김양경은 평소에 마음이 치우친 병통이 있었으므로 시호 역시 그러하나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김국광(金國光)과 윤계겸(尹繼謙)의 시호를 정할 때에 고치고자 하였으나, 후폐가 있을까 두려워서 고치지 못하였는데, 이제 정직한 사람이 그 붕우들의 사사 청탁을 받지 아니한다고 하여 모두 그 마음을 편급(偏急)하다고 하며, 조의(朝儀) 또한 쏠리듯 따라가니, 정직으로써 편급의 시호를 얻는 것을 어찌 옳다 하겠는가. 내가 이 시호를 고치고자 하는데, 경들은 어떠하오.” 하니, 정원에서 말하기를, “봉상시(奉常寺)에서 시호를 이미 정하였으므로, 고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직한 사람을 어찌 편급하다고 칭호하겠습니까. 대개 편급으로 득명한 자는 그 부당한 일을 가지고 편벽되게 고집부리고 억지로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김양경의 편급한 병통은 생각하건대 공론이 모두 그러한 것 같으니, 이제 만일 고쳐 정하면 후폐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다만 봉상시에서 의진(擬進)한 6자(공위ㆍ편숙ㆍ제극) 중에서 임금께서 정하시는 것이 어떠할까 하나이다.” 하였다. 공숙공(恭肅公)이라고 어필로 써서 내렸으니, 일에 공순하게 하고, 위에 봉공하는 것을 공(恭)이라 하며, 마음가짐이 결단성이 있는 것을 숙(肅)이라고 한다. 갑진년 11월에 봉상시에서 이계손(李繼孫)이 시호를 의진(擬進)하였는데, 장경공(長敬公)과 정헌공(玎憲公)이라 하였다.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함을 장(長)이라 하고, 뜻 이루기를 힘쓰지 아니함을 정(玎)이라고 한다. 김 문간공(金文簡公)이 마침 경연에 있다가 아뢰기를, ”이계손(李繼孫)은 영안도(永安道) 관찰사로 있으면서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양성하여 그 중에서 과거한 자도 많습니다. 그러나 남을 부지런히 가르쳤다는 말은 그에 맞지 않습니다. 회기불권(誨人不倦)은 김구(金鉤)와 김말(金末) 같은 사람에게 타당합니다. 이계손으로 말하면, 감사로 있으면서 학문을 진흥시켰을 뿐이고, 스스로 가르치지는 않았는데, 어찌 이같은 시호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계손은 사람됨이 재상의 체모가 있어서 선인군자(善人君子)입니다만, 장(長) 자를 굳이 쓰지 않더라도, 다른 좋은 시호를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술의불면(述義不勉)도 맞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는 일찍이 죄를 얻어 귀양간 일이 있으므로 정(玎) 자는 불가하나이다.”하니, 임금이 드디어 경헌공(敬憲公)이라고 써서 내렸다.
○ 성화(成化 명 나라 헌종의 연호) 병오년에 직제학(直提學) 김흔(金訢)은 그의 외증조되는 성개(成慨)가 쓴 위징(魏徵)의 십점소(十漸疏)를 드리면서 아울러 규경(規警)을 삼으라는 차자(箚子)를 올렸더니, 임금은 전에 입었던 흰 비단 첩리(帖裏 속옷)와 흑서피(黑黍皮 서는 쥐와 같다.)의 신을 주고, 또 금전지(金箋紙)에 손수 쓴 글을 보냈다. 그 글에 “전번에 보내준 차자와 위징 소축(疏軸)은 깊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위징의 이 말은 실로 만세의 시귀(蓍龜)가 된다. 일찍이 그대의 부친이 그대에게 권면하기를, 위 정승(위징)으로 자부하도록 하였고, 그대가 또 나에게 권하여 당우(唐虞)와 같은 정치를 하라고 하니, 이는 아비는 그 아들을 사랑하고, 신하는 그 임금을 사랑하는 것이라 할 만하다. 내가 비록 현숙하지 못하나, 어찌 그를 감히 잊으리오. 그대의 성의를 가상히 여겨서 상주어 표창하니, 항시 좌우에 두고 스스로 경계하라.”고 하였다. 그 글씨는 혜정(楷正)하나, 굳이 취할 바가 없었으나, 김흔은 공조 참의로, 그 아버지인 김우신(金友臣)은 단양 군수(丹陽郡守)로 삼았다.
○ 무신년 2월 6일에 세자(世子) 빈(嬪)을 납궁(納宮)하였는데, 아침부터 풍우가 심하게 이는지라, 그 빈부(嬪父)인 좌참찬(左參贊) 신승선(愼承善)에게 손수 쓴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세속은 혼일(婚日)에 풍우가 있는 것을 꺼린다고 하나, 무릇 바람으로써 동하게 하고, 비로써 윤택히 하여 만물이 자람에 있어 풍우의 공이 아님이 없다.”고 하였다. 전하여 듣는 것이므로 비록 다 기록하지는 못하였지만, 진실로 제왕의 말이로다. 정오부터 날씨가 개고 청명하였다. 충민공(忠敏公) 《잡기》
○ 성묘조에 물재(勿齋) 손순효(孫舜孝)는 연산군이 부하(負荷 임금의 큰 직무)를 이기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하루는 임금을 어탑(御榻)에 가까이 가서 용상을 어루만지며 청한 것이 있었는데, 대간(臺諫)에서는 죄주기를 청하고, 또 어떤 밀계(密啓)인지 듣고자 하였지만, 임금은 “호색으로 나를 경계한 것일 뿐이다.” 하곤 끝까지 말하지 아니하였다. 《병진정사록》
○ 고려 때의 문사는 모두 《시경》과《이소경》으로 학업을 일삼더니, 오직 정포은(鄭圃隱)이 성리학(性理學)을 처음으로 제창하였고, 아조(我朝)에 이르러서 권양촌(權陽村 권근)ㆍ권매헌(權梅軒 권눌) 형제가 능히 경학에 밝고 또 문장에 능하였다. 권양촌은 사서 오경의 구결(口訣)을 정하고 또 《천견록(淺見綠)》과《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어서 유학에 우익(羽翼 보조)한 공이 적지 않다. 그 후임으로 스승된 자는 황현(黃絃)ㆍ윤상(尹祥)ㆍ김구(金鉤)ㆍ김말(金末)ㆍ김반(金泮)이다. 황현의 학문은 잘 들을 수 없고, 윤상은 경전이 가장 정결하며, 작문(作文)도 조금은 할 줄 알았다. 김구와 김말은 경전과 작문이 모두 정밀하였는데, 김말은 고집스러움을 면치 못하고 항시 의논이 있을 때면, 상하를 가리지 않고 다투어 마지않으며, 수업(受業)하는 자도 역시 두 가지를 갖추었다. 두 공(김구ㆍ김말)이 모두 세조의 알아주심을 얻어서 벼슬이 1품에 이르렀다. 김반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가 나이 늙어서 치사(致仕)하였는데, 끝내 그 고향에서 아사(餓死)하였다. 또 그 다음을 들어 말하면, 공기(孔頎)ㆍ정자영(鄭自英)ㆍ구종직(丘從直)ㆍ유희익(兪希益)ㆍ유진기(兪鎭頎)인데, 그들은 익살스럽고 말은 잘하나, 작문하는 데는 편지 같은 작은 문구도 한마디 못 지어서 남으로부터 편지를 받고도 회답을 하지 못했다. 하루는 생원 김순명(金順明)이 마침 방에 있다가 말하는 것에 따라 답장을 썼는데, 그 사어(辭語)가 심히 아름다우므로 기(頎)가 감탄하며 말하기를, “자네가 나에게서 배웠는데, 자네는 글을 잘 쓰고 나는 글을 쓰지 못하니, 진실로 청(靑)이 쪽풀에서 나왔으나, 쪽풀보다 푸르다는 말이 이를 두고 이름이다.” 하였다. 정자영(鄭自英)은 오경만 잘 알 뿐 아니라, 또한 능히 제사(諸史)를 널리 섭렵하였고,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구종직은 용모가 매우 출중하여 세조의 발탁을 받아 벼슬이 1품에 이르렀고, 유희익은 그다지 현달하지 못하였으며, 유진기는 고집으로 사리에 불통하였다. 근자에는 노자형(盧自亨)과 이문흥(李文興)이 오랫동안 학관에 있었으므로 성종이 연로하다고 하여 우대하여 당상관으로 승진시켰는데 모두 고향에 가서 죽었다. 《용재총화》
○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는 정자를 한수(漢水) 남쪽에 짓고 그 이름을 압구정(押鷗亭)이라고 하였다. 임금을 옹립한 공을 한 충헌공(韓忠獻公 충헌은 송 나라 명신인 한기(韓琦)의 시호)에게 견주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가 명예를 얻고자 하였다. 늙었으므로 강호(江湖)로 사퇴하겠다고 말은 하면서도 작록에 미련이 남아 있어 가지 못하더니, 임금이 작별의 시를 지어주니, 조중 문사(朝中文士)가 서로 다투어 화운(和韻)을 하여 수백 편이 되었다. 그중 판사 최경지(崔敬止)의 시가 제일이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세 번 불러 보심이 은근하여 두터운 총애를 받았으니 / 三接慇懃寵渥優
정자가 있어도 돌아가서 쉴 생각 없네 / 有亭無計得來遊
가슴 속에 기심(機心) 고요해지면 / 胸中自有機心靜
벼슬하는 마당에서도 백구는 친할 수 있으리 / 宦海前頭可押鷗
라고 하였더니, 한명회가 미워하여 현판 다는 데 끼워넣지 아니하였다. 《추강냉화》
○ 충정공(忠貞公) 허종(許琮)은 어릴 때부터 출중 하여 보통 아이들과 같지 아니하였다. 나이 12ㆍ3세 때에 여러 아이들과 같이 절에 가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야반에 도적이 와서 아이들의 옷과 신발을 도적질해 갔다. 이튿날 여러 아이들은 겁이 나서 모두 흩어졌으나, 허종은 홀로 끄떡도 하지 아니하고 베개를높이하고 길게 누워 붓을 들고 벽에 글을 쓰기를, “내 옷은 탈취해 갈지라도, 내 신은 훔치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인데, 옷도 신도 모두 탈취해 갔으니, 내 생각에는 도선생(盜先生)을 위하여 좋지 않게 여기노라.”라고 하여 듣는 자들이 이미 그 바탕이 비범함을 알았다. 《사재척언》
○ 양천군(陽川君) 허종은 생김새가 훤칠하고 풍채가 점잖아서 당시에 대인군자로 추중하였다. 젊어서부터 박식하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천문(天文)ㆍ역률(曆律)ㆍ의복(醫卜)의 기술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또 궁마(弓馬)에도 능하였으므로 국가에 대사가 있으면 반드시 공을 원수로 삼았다. 그러나, 가산(家産)은 돌보지 아니하여 사는 집은 겨우 바람과 햇볕을 가릴 정도이면서도 항시 공은 담담하게 여겼다. 《청파극담》
○ 홍치(弘治 명 나라 효종의 연호) 무신년에 시강(侍講) 동월(董越)과 급사(給事) 왕창(王敞)이 효종의 등극 조서를 반포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오는데, 허 충정공(許忠貞公)이 원영사(遠迎使)로 의주에 마중갔는데, 양사(兩使)는 잘난 체하며 사람을 업신여기며, 좌우의 집사(執事)가 조금만 실수하면 성내어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 나라의 환관이 아니다. 어찌 이렇게 무례하냐.” 하고 꾸짖었으니, 이는 지난날 봉사자(奉仕者)가 대부분 우리나라에서 중국에 들어가서 환관된 자이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허종을 만나니, 공의 큰 키와 단정히 서 있는 자태며 의관이 위연(偉然)함을 보고, 양사는 깜짝 놀라며 서로 눈짓하고 말하기를, “당당한 인품이로다. 이 사람이여.”라고 하더니, 이로부터 엄하고 모난 것이 조금 누그러져서 좌우에서 혹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모두 따지지 않았고, 매양 공을 보면 붙들고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서로 경사(經史)를 토론하면, 밤이 깊어야 파하더니, 하루는 왕 급사(王給事)가 사신으로 촉(蜀)에 간 일이 있다고 말하니, 공이 묻기를, “촉을 가려면 두 길이 있습니다. 곧 육로는 포사(褒斜)에서 들어가고, 수로는 형문(荊門)에서 들어가는데, 공은 어느 길로 들어갔습니까.” 하니, 왕 급사가 답하기를, “강을 타고 들어갔소.” 하는지라, 공이 또 묻기를, “강이 민강(岷江)에서 시작하여 기산(■山)의 동쪽 골짜기에 이르러 물이 극히 험하다가, 이릉(夷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천천히 흐른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던가요.” 하였다. 다시 말을 이어, 강이 모모(某某)란 곳에 이르는 강 연안 위아래의 양(襄)ㆍ번(樊)ㆍ형(荊)ㆍ악(鄂) 등지의 수천 리 사이를 산천의 원근과 호구(戶口)의 다과며 고금 영웅들의 뺏고 차지하고 나누어 점령한 것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들어 세니, 양사가 심복하고 공의 손을 잡으며, “만일 가슴속에 만권 서책을 갈무리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와 같겠소.”라고 말하였다. 또 공이 중국 전고(典故)를 물으면 비록 궁중에서 금하는 비결이라도 공을 위하여 모두 말하고 조금도 숨김이 없었다. 양사가 돌아가려고 강에 왔을 때에는 섭섭하여 차마 작별을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공이 빨리 조회하러 사신 와서 중국 사람으로 하여금 해외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다.” 하였다. 환조하여 진신(縉紳)들에게 떠들고 찬양하며 말하기를, “천상(天上)은 알지 못하는 바이지만, 인간으로서는 짝할 이가 없다.” 하였다. 그 후에 낭중(郞中) 애복(艾璞)이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는데, 사람됨이 거만하고 외람되어 경상(卿相) 같은 귀인을 만나도 모두 흘겨보면서 예를 하지 아니하였는데, 국경에 들어와 첫말에 공의 기거(起居)를 묻더니, 공을 본 뒤에는 얼굴빛을 고치고 기색을 화하게 하여 대하고, 영송(迎送)하는 데 자신을 낮추며 대우하는 예법이 심히 정중하였다. 《패관잡기》
○ 이음애(李陰崖 이자)가 상우당(尙友堂 허종) 시집에 발문(跋文)하여 이르기를 “국조의 명신으로 말하면 영릉(英陵 세종) 때는 황희(黃喜)ㆍ허주(許稠)요, 선릉(宣陵 성종) 때는 허공이니, 휘(諱)는 종(琮)이요, 자(字)는 종경(宗卿)이요, 호는 상우당(尙友堂)이다. 처음 벼슬할 때에 불교를 만만(謾謾)히 본다고 역정을 받아 광릉(光陵 세조)이 지나친 위엄으로 눌러서 그 뜻가짐을 시험하고서야 곧 벼슬을 승진시킬 것을 명하였는데, 조용하게 위의를 잃지 않고 있었다. 이로부터 화려한 명성이 날로 드러나서 순서를 뛰어 재상에 이르렀고, 계급을 따르지 아니하였다. 체격과 용모가 훤칠하고 풍채가 화하고도 엄숙하여, 마치 가을 하늘과 겨울 날씨 같아서, 멀리서 바라보면 엄숙한 듯하고 가까이 나아가 대하면 온화한 성품이었다. 특히 성리학(性理學)을 좋아하여 차분히 상고하고 연구하였으니, 대부분 그가 자득한 것은, 한 푼어치씩 쌓고 한 치 길이씩 덧붙여서 이목(耳目)에 칠한 정도의 자와는 비유가 되지 아니했다. 또한 모든 역사에 통달하였는데, 주문공(朱文公)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20일 만에 끝마치니, 그 정근(精勤)하고 준민(俊敏)함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나라 일을 처리한 것이 모두 본받아 법으로 삼을만했다. 선릉(宣陵)에게 지우(知遇)되어 그 덕이 원수(元首 임금)와 비등하여, 들어와서는 고요(皐陶) 기(夔) 같은 명신(名臣)이 되고, 나아가서는 방숙(方叔)과 소호(召虎) 같은 중신(重臣)이 되었다. 기뻐하고 고무되어 대유(大猷 큰 성과)를 기대하였는데, 급작스레 죽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느냐. 그의 시와 문도 그 덕망과 같아서, 깎고 다듬는 일을 일삼지 아니하여서도 혼후(渾厚)하면서 단정하고 정성스러워서 자연히 성률(聲律)에 맞았다.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말이 있다더니, 어찌 사실이 아니겠는가.” 하였다.《병진정사록》
○ 손 판원(孫判院 손순효)은 삼휴설(三休說)과 사휴설(四休說)을 취합하여 칠휴거사(七休居士)라고 하였다. 사람됨이 순수하고 근실해서 다른 일이 없었으며, 매양 곧은 뜻으로 곧은 행실을 하였으나, 풍속과 강상(綱常)에 관한 일에는 반드시 먼저 뜻을 가다듬었으며, 취하면 호기스런 말이 그치지 않았다. 강원도 감사로 있을 때에 마침 크게 가물어 기우제를 지내도 효과가 없자, 공이 말하기를, “비가 오지 않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수령(守令)의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만일 성심이 하늘을 감동시키면 하늘이 감동하여 반드시 응해 줄 것이다.” 하며, 드디어 재계(齋戒)하고 몸소 나가서 기우제를 지냈더니, 그 날 밤중에 빗소리가 들렸다. 기뻐하여 일어나서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하늘에 감사를 드리겠노라.” 하고, 관복을 입고 뜰 가운데 서서 무수히 하늘에 절하였다. 우세가 점차 급하여, 한 아전이 우산을 가져다가 받치고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높으신 어른 앞에서, 어찌 우산이 필요하랴.” 하고, 명하여 가져가게 하니, 의복이 다 젖어 있었다. 또 경상 감사로 있을 때에는 효자와 열녀문을 지날 때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재배하며, 비록 비가 올지라도 피하지 아니하였는데, 그때에 도사(都事) 이집(李緝)이 도롱이를 두르고 밭에 앉아 있는지라 공이 재배를 마치고 도사에게 말하기를, “족하(足下)는 무엇을 하고 있소.” 하니, 이집이 대답하기를, ”나는 영감(令監)보다 먼저 절하였습니다.” 하므로, 좌우에서 입을 가리고 웃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언젠가 또 평양에 갔을 때에는, 기자묘(箕子廟)를 보고 말에서 내려 우러러 보고 절하며 말하기를,“ 동쪽 사람으로 예의(禮義)의 나라에 살게 된 것은 오로지 태사(太師)의 교훈 때문이었다.” 하였다. 또 한번은 천령(穿嶺)에서 사냥에 배행한 일이 있었는데, 맹호를 포위하자 공이 술에 취하여 나무화살을 뽑아 활에 메고 말을 달려 들어가서 쏘려고 하였다. 여러 사람이 극력 만류하여 그만두었는데, 하는 일들이 모두 이와 같았다. 항시 임금의 앞에서 충서(忠恕) 두 자를 써서 지성스럽게 진계(陳啓)하니, 성종이 충직하다고 여겨 드디어 크게 등용하였다. 공은 지위가 높을수록 마음가짐이 더욱 검약하여 매양 술상에는 흑두채(黑豆菜)나 고채(苦菜 씀바귀)가 아니면 송아(松芽) 같은 것으로 안주로 삼았고 오로지 번화한 것은 싫어하였다. 《용재총화》
○ 정포은(鄭圃隱) 문충공(文忠公)의 사당이 예전에는 영천현(永川縣)에 있었다. 손문정(孫文貞) 칠휴공(七休公)이 이 도(경상도)의 안찰사(按察使)로 순찰하여 영천(永川) 군경을 지나다가, 마상에서 술이 취하여 잠이 들어 혼혼(昏昏)히 졸면서 포은촌(圃隱村)을 지나가는데 꿈에 빈발(鬢髮)이 하얗고 의관이 점잖은 한 노인이 희미하게 나타나서 스스로 포은(圃隱)이라 하며 말하기를, “사는 집이 퇴폐하여 풍우를 가리지 못한다.” 하면서 부탁의 뜻이 있는 듯한지라, 칠휴가 놀라 깨어 이상히 여기고 옛 노인에게 물어서 그 고지(古趾)를 찾아서 군민들을 권면하여 사당을 짓게 하였다. 사당이 완성되자 제물을 갖추어 몸소 전을 드리고 낙성식을 하였으며, 스스로 큰 잔을 들어 마시고 취하여 벽에 글을 쓰기를, “문 승상(文承相 남송 말기의 충신인 문천상(文天祥))과 충의백(忠義伯 포은의 봉호가 충의백임) 두 선생은 간담(肝膽)이 서로 비치도다. 일신을 잊어버리고 인간의 기강을 세웠으니, 천만 세를 두고 경앙(景仰)하여 마지않는도다. 이(利)가 있는 곳을 찾아 고금이 분주하건만, 서리와 같이 맑고 눈같이 희며, 송백(松栢)과 같이 창창(蒼蒼)하도다. 여기에 한 칸 집을 얽어서 풍우를 가리게 하였으니, 공의 영혼이 편안할 때, 내 마음도 편안하도다.” 하였다. 가만히 생각하면, 충성된 혼과 굳센 넋은 천지간에서 애연(藹然)한 화기로 조화원기(造化元氣)와 같이 흐르나니, 어찌 구구히 사당집의 성하고 헐어진 것으로써 인간에게 청구하는 바가 있으리오마는, 생각건대 이 늙은이의 흉중이 평화하고 아름다우며 평소에 충서(忠恕)로써 마음을 삼았으므로 혹 황홀한 사이에 서로 감통(感通)할 수 었었던 것인가. 《용천담적기》
○ 칠휴가 열읍(列邑)을 안행(按行)하면서 길가에 있는 효자와 열녀의 정문을 보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전배(展拜)하며 지나는데, 어느 날은 금오산(金烏山) 아래에 있는 길재(吉再) 선생의 고거(故居)에 나아가서 글을 지어 전드리기를, “사당 아래서 우러러 절하니, 생시의 모습이 방불하외다. 오직 오산(烏山)과 낙수(洛水)는 예 같은데, 선생을 생각함이여, 어디 계신지요. 누른 파초 열매와 붉은 여자(荔子 과일 이름)를 전드리니 영령(英靈)이여 흩어지지 않을 것을 바라나이다.” 하였다. 이 늙은이는 문자를 깎고 다듬는 데에 뜻이 없으면서도 흉중에서 나오는 바가 자연히 이와 같았으니, 그 풍개(風槩)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용천담적기》
○ 손물재(孫勿齋 손순효)가 방백(方伯)으로 있을 때에 가뭄을 만나면 매양 재계하고 정성을 들여서 비를 비는데, 문득 응하여 비가 오면 모르되, 그렇지 아니하면 노(怒)하여 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비를 너에게 빌었는데, 너는 비를 주지 아니하니, 어찌 된 것이냐.” 하였으니, 신을 노하게 하는 말은 비록 스스로 반성하는 도리는 아니나, 만일 자신이 정성스럽지 아니하였으며, 반드시 능히 이 같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병진정사록》
○ 무릇 사람이 죽으려고 할 때에는 정신이 어지럽지 아니하나, 귀화자(歸化者 죽는 자)가 정도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면, 진실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상(二相) 손순효(孫舜孝)는 항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고통이 없이 죽기를 원한다.” 하더니 하루는, 재상들과 밤새 술을 마시며 담화하고는, 새벽에 일어나서 그 부인에게 말하기를, “나의 기운이 불편하니 아이들을 불러오고 속히 밥을 지으라.” 하고, 이어 말하기를, “내가 어릴 때에 책을 끼고 사문(師門)에 다니던 것을 흉내내 보겠다.” 하고는 이에 한 권의 책을 끼고 계단을 두어 차례 오르내리더니, “피곤하다. 내 쉬겠다.” 하고서는, 가만히 베개에 누우니, 집안 식구는 잠들었으리라 생각하였는데 얼마 후 보니, 숨이 끊어져 있었다. 좋은 소주를 큰 병에 넣어 영석(靈石) 아래 묻어 두라고 전부터 명(命)하여서, 그같이 하였다. 《소문쇄록》
○ 참판(參判) 권경우(權景祐)는 성묘조 때에 감찰로 있으면서 서장관이 되어 중국 사신으로 간 일이 있었다. 그때 역관들이 과대하게 물화를 가져오므로 역로(馹路)가 떠들썩하였다. 그 물화를 부탁한 것은 권귀의 집안과 많이 관련되었는데, 공은 일체를 탐색하여 아뢰게 하되 한 필의 직물이라도 부탁한 자는 모두 조옥(詔獄 의금부)에서 국문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세 품계를 뛰어 승진하게 되었다. 정언이 되어서는 대간을 창도하여 임사홍(任士洪)의 축출을 청하였는데, 말이 매우 강직하였다. 임사홍이 그날 밤에 공의 집에 가서 거짓 모르는 체하고 말하기를, “누가 감히 이런 언론을 하였는가.” 하니, 공이 솔직히 대답하기를, “오직 나라야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소.” 하니, 임사흥은 기가 막히어 감히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홍문관에 있을 때 말하기를, “폐비가 비록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여염(閭閻)집에 함부로 처해 있을 수는 없다.”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이르기를, “너는 음흉하게 세자에게 붙어서 후일의 영화를 바라는 것이로구나.” 하면서, 하옥을 명하고 많이 힐책하니, 공이 조금도 막히지 아니하고 정성을 다하여 역대 임금의 폐비에 대한 일을 끌어다 증거로 진술하니, 그 말이 더욱 개절(剴切)한지라, 임금이 이에 노여움을 풀고 그의 관직만 파하였다. 《패관잡기》
○ 판서 정석견(鄭錫堅)은 시원스러워서 작은 예절에 구애하지 아니하였다. 홍문관은 본래 구사(丘史)가 없고, 다만 선노(選奴) 하나만 있었다. 그러므로 관원들이 출행할 때에는 타사(他司)에서 구사를 빌리는 것이 예(例)로 되어 있는데, 정석견은 응교(應校)가 되어서도 홀로 구사를 빌리지 아니하고, 다만 납패(蠟牌)를 든 조졸(皁卒)이 앞에서 인도하여 가운데서 말을 타고, 그 뒤에 종 하나만 따라가는지라, 길에서 보는 자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비웃으며 말하기를, 산자관원(山字官員 셋만 늘어선 것이 산(山) 자와 같음을 가리킨 말)이라고 하였다. 동료가 희롱하기를, “한 번 구사를 빌리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대의에 어긋나기로 이같이 위엄을 잃느냐.” 하니, 정석견이 웃으며 말하기를, “구사를 빌리는 것은 남의 눈앞의 일이요, 호위하는 자의 많고 적은 것은 등 뒤의 일이다. 보이지도 않는 일을 하기 위하여 남의 앞에서 구차한 말을 하는 것은 내 맹세코 하지 않겠다. 차라리 산자관(山字官)이 될지언정, 남에게 구사를 빌리는 것은 원치 아니한다.” 하니, 듣는 자들이 모두 대소하였다. 《사재척언》
○ 청성군(淸城君) 한치형(韓致亨)이 형조 판서가 되어서 근무가 심히 성실하여 그 밑에 있는 낭관들이 아침저녁으로 견디지 못하고 매우 괴로워하였다. 그 족질인 한건(韓健)이 정랑으로 있었는데, 어느 날 틈이 있을 때에 문안차 가서 조용히 말하기를, “함종군(咸從君) 어세겸(魚世謙) 같은 이는 비록 늦게 출근하여 일찍이 파하여도 오히려 아무 일이 없는데, 존숙(尊叔)은 어찌 노고를 이렇게 많이 하시나이까.” 하니, 한 청성군이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대답하기를, “함종은 도덕과 문장이 모두 우수하여 비록 송사를 결단함에 게으르더라도 취할 바가 있지만, 나와 너는 하나도 잘하는 것이 없으니, 다만 직무에 부지런한 것이 좋지 아니하냐. 나의 뜻은 이렇다.” 하니, 한건이 부끄러워하면서 물러갔다. 《충민공잡기》
○ 강응정(姜應貞)의 자는 공직(公直)이요, 호는 중화재(中和齋)며 은진(恩津)에 살았고, 효행으로 칭찬이 있었다. 일찍이 어머니 병환에 3년 동안 띠를 풀지 아니하고 약은 반드시 친히 맛보고 드리더니, 하루는 꿈에 천신이 뜰에 내려와서 강공직에게 말하기를, “내일 손님이 올 것이니, 반드시 너의 어머니 병을 치료하리라.” 하더니, 이튿날 아침에 과연 한 소년이 와서 이름은 원의(元義)이며 윤왕동(輪王洞)에 산다면서 유숙하기를 청하는지라, 공직이 쉬게 하였다. 어머니 병을 물으니, 소년이 과연 의약을 알므로 소년의 말에 따라 시험하였더니, 15일 만에 병이 나았다. 후일 부모상에 거할 때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행하고, 겨울에도 맨발에 솜옷을 입지 아니하였다. 이것을 나라에서 알게 되자, 정문을 짓고 그 집에는 정역(丁役)을 면하게 하였다. 강공직은 사람됨이 경서를 잘 외우며, 인명(人命)에 대해 추점(推占)을 하였고 또 의술을 알았고, 겸하여 《지리서(地理書)》에도 능통하였다. 소시에 태학(太學)에서 놀며 장안의 준사(俊士)와 함께 주문공의 향약(鄕約) 고사에 따라 아침과 밤에 《소학》을 강론하였는데, 당시의 저명한 선비들이 모두 모였다. 이를테면 김용석(金用石)자는 연숙(鍊叔)ㆍ신종호(申從濩)자는 차소(次韶)ㆍ박연(朴演)자는 문숙(文叔)ㆍ손효조(孫孝祖)자는 무첨(無忝)ㆍ정경조(鄭敬祖)자는 효곤(孝昆)ㆍ권주(權柱)자는 지경(枝卿)ㆍ정석형(丁碩亨)자는 가회(嘉會)ㆍ강백진(康伯珍)자는 자온(子蘊)ㆍ김윤제(金允濟)자는 자주(子舟) 들인데, 이들은 그 우두머리요,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이를 기뻐하지 아니한 자들이 있어 말하되, 소학계 혹은 효자계라고 지칭하며, 부자(夫子)의 사성(四聖)과 십철(十哲)에 비기며 조롱하였다. 공은 때를 만나지 못하여 고향에서 죽을 때까지 과거를 보지 아니하였다. 《남효온 사우명행록》
○ 김굉필(金宏弼)의 자는 대유(大猷)인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에게 수업하였고, 경자년의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현풍(玄風)에서 살았다. 행실이 견줄 수 없을 만큼 돈독하여, 평소에도 반드시 관대(冠帶)를 하였고 인정(人定)을 친 후에야 취침하며, 닭이 울면 곧 일어났다. 그리고 정실(正室) 이외에는 여색을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손에는 《소학》을 놓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이 혹 국가사를 물으면 반드시 대답하기를 “소학 동자가 어찌 대의(大議)를 알겠냐.”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문학을 배우면서 여전히 천기(天機)를 알지 못하여도 《소학》을 읽는 중에 지난날의 잘못을 깨우친다.”라고 하였는데, 점필재 선생이 평하기를, “이 글은 성인을 배우는 근본 터전이니, 노재(魯齊 원 나라의 허형) 후에 어찌 그만한 사람이 없으리오.”하였으니, 그를 추중함이 이와 같았다. 30세 후에야 다른 글을 읽었으며, 후진들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니, 곧 이현손(李賢孫) 명양부정(鳴陽副正)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이장길(李長吉)ㆍ이적(李勣)ㆍ최충성(崔忠成)ㆍ박한참(朴漢參)ㆍ윤신(尹信)이 모두 그 문하에서 나왔는데, 그들은 좋은 인재로서 독실한 행실이 또한 그 스승과 같았다. 나이가 더욱 많아지고 도가 더욱 높아지자 세상일을 돌이킬 수 없을 것과, 도가 행해지지 못할 것을 익히 알고서 빛을 감추고 자취를 숨기려 하였으나 세상 사람도 역시 알았다. 필재(畢齋) 선생이 이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아무런 건의하는 일이 없으니, 김대유(金大猷)가 시를 지어 보내기를,
도가 겨울에는 가죽옷을 입고, 여름에는 얼음물을 마시는 데 있다지마는 / 道在冬裘夏飮氷
개면 행하고 비오면 그치는 것이야 어찌 마음대로 할 수 있겠소 / 霽行潦止豈專能
난초가 만약 속된 것을 따른다면 결국 변할 것이니 / 蘭如從俗終當變
누가 소만이 밭갈고 말만을 탄다고 믿으리오 / 誰信牛畊馬可乘
라고 하였다. 선생이 화답하기를,
분수 밖에 벼슬을 하여 벌빙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 分外官聯到伐氷
임금을 돕고 세상을 바로잡는 데 내가 어찌 능할쏜가 / 匡君救俗我何能
후배들로 하여금 나의 우졸을 조롱하게 하였으나 / 從敎後輩嘲迂拙
권세와 이익을 구차하게 바라지 아니하네 / 勢利區區不足剩
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그 말을 싫어해서 지은 글이다. 이로부터 점필재와 달리하게 되었다. 정미년에 부상(父喪)을 만나서는 죽을 먹고 곡읍(哭泣)하는 슬픔이 지나쳐서 기절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였다. 대유는 《소학》에 의하여 몸가짐을 하며, 옛 성인으로써 준칙을 삼고, 또 후학(後學)을 불러들였는데, 순순(恂恂)히 쇄소(灑掃)하는 예를 지켜 행하고 육예(六藝)의 학을 닦는 제자가 전후에 가득한지라, 비방하는 여론이 바야흐로 비등하니, 정자욱(鄭自勗 정여창)이 그만둘 것을 권하였으나, 대유는 듣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중 행(陸行)은 선교(禪敎)를 베풀고, 제자 천여 명이 학업을 하는데, 그 벗이 만류하며 ‘화환(禍患)이 두렵다.’ 하니, 육행이 답하기를, ‘선지 선각(先知先覺)로 하여금 후지 후각자(後知後覺者)를 깨우쳐 주는 것이니, 내가 아는 것으로써 남에게 일러줄 뿐이다. 화복이 있는 것은 하늘이 하는 것이니, 내가 어찌 관여할 것이리요.’ 하였다. 육행은 비록 중이나, 어찌 취할 말이 없으리오. ” 하였으니, 그 말이 지공(至公)하다고 하겠다. 《추강냉화》
○ 김대유(金大猷)는 성리학에 연원(淵源)을 가지고 근면 독실하여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송묘조 때에 덕행으로 처음 등용되었다가 여러 번 천거되어 형조 좌랑에 추천되었다. 과거 수십 년 전에 나를 책망하기를, “군과 이미 절교를 하고자 하였으나, 인정상 차마 그러지 못하노라.” 하므로, 내가 그 이유를 물으니, 말하기를, “군이 결단할 것이 아니다.” 하므로, 다시 추궁하여 물은즉, “백공(伯恭 남효온)ㆍ백원(百源 이총)ㆍ정중(正中 이정은)ㆍ문병(文柄 허반)은 모두 진풍(晉風)이 있으니, 진(晉)은 청담(淸淡)이 누(累)가 되어 10년이 가지 않아서 화가 이들에게 있었느니라.” 하므로, 나도 그로부터 맹세하고 다시는 이들과 왕래하지 아니하였더니, 후에 모두 화를 면하지 못했다. 신영희(辛永禧)《사우언행록》
○ 정여창(鄭汝昌)의 자는 자욱(自勗)인데, 일찍이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서 3년을 나오지 아니하고 오경(五經)을 연구하여 궁극하고 심오한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사물의 본체와 작용이 근원은 같으나 나누어진 것이 다른 것을 알았으며, 선악이 본성은 같으나 기(氣)가 다름을 알았고, 유석(儒釋)이 도(道)는 같으나 행적(行迹)의 차가 있음을 알았다. 성리학에 잠심하여 성(性)을 깨달으니, 성한 사람이나 미친 사람들까지도 모두 공경하였다. 경자년에 왕이 성균관에 조서를 내려 경전에 밝고 덕행이 있는 유생을 구하라 하니, 관중에서 정자욱(鄭自勗)이 제일이라고 천거하였다. 지관사(知館事) 서거정(徐居正)이 장차 자욱에게 강경을 하도록 하려고 하니, 자욱이 그만 물러났다. 계묘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 부친인 정육을(鄭六乙)은 이시애(李施愛)의 난으로 죽었는데, 그때 자욱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상례 치른 일은 알 수 없으나, 후에 모친의 거상에는 전례(典禮)하는 법도와 죽 먹는 것을 일체 《주자가례》에 의하여 지극히 하였다. 경술년에 참의 윤긍(尹兢)이 그의 효행과 학행이 사림에서 견줄 이가 없다고 천거하여서, 특별히 조정에서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으로 삼았는데, 자욱이 상서하여 사면하니, 임금이 교지를 내려 포상한지라 이름이 더욱 중하여졌다. 자욱은 사람됨이 성품이 단중(端重)하여, 술을 마시지 아니하였고, 훈채(葷菜)를 먹지 아니하며, 또 우마육(牛馬肉)을 먹지 아니하였다. 겉으로는 평범한 말을 하지만, 내심은 분명하였다. 젊어서 학관에 있을 때 남과 같이 잠을 자되, 코를 골면서도 잠을 자지 아니하였으나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는데, 어느날 최진국(崔鎭國)에게 발견되었으므로 관중에서 정아무개가 참선(參禪)하고 잠을 안 잔다고 떠들어 대었다. 《사우언행록》
○ 정자욱 선생은 소시 때에 술을 즐겨하였는데, 하루는 벗들과 지나치게 술을 마시고 들판에 넘어져서 밤을 새고 돌아오니, 그 모부인이 꾸짖기를, “네가 이같으니 내가 누구를 믿고 의뢰하겠는가.” 하니, 선생은 깊이 자각하고 그 후로는 임금이 주는 술이나 음복주 이외엔 입에 대지 아니하였다. 《병진정사록》
○ 정 선생은 젊어서 두류산(頭流山 지리산) 기슭에 정자를 복축(卜築)하고 만년을 보낼 계획을 하고 있더니, 성묘(成廟)가 소격서 참봉을 주고 부르자 선생은 간곡히 사임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고 이에 나오게 되었다. 선생은 몸가짐이 심히 엄격하여, 종일토록 단좌하고 있으면서 비록 아주 더운 날이라도 그 처자도 살갗을 본 일이 없었다. 평소에 시짓기를 좋아하지 아니했으므로, 다만 한편의 시가 세상에 전하니, 그 시에 이르기를,
창포는 바람에 날려 가볍고 부드럽게 흔들리는데 / 風蒲獵獵弄泛柔
4월이라 화개에는 이미 보리가 가을이로세 / 四月花開麥已秋
두류산 천봉만학 다 보고서 / 看盡頭流千萬疊
한 척의 조각배로 다시 대강을 흘러 내려가네 / 孤帆又下大江流
라고 하였다. 이 시를 읊으면 흉중(胸中)이 쇄락(洒落)하고 세상의 속된 점이 하나도 없으니, 대개 이 사람의 사람됨을 알겠다. 화개(花開)고을 이름이다.
○ 포은(圃隱 정몽주) 이후에 우리나라 성리학은 실로 김대유(金大猷)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동지(同志)인 정 선생 자욱(自勗)도 성리학을 연구한 사람이다. 김대유는 이(理)에 정밀하고 정자욱은 수(數)에 정밀했는데, 아깝게도 상서로운 때를 만나서 못하여 비명으로 죽었으니, 창창(蒼蒼)한 저 하늘이 그를 어찌 하겠느냐. 중묘조 때에 다 영의정을 증직하였으며, 가묘(家廟)를 세우고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 남효온(南孝溫)의 자는 백공(伯恭)이요, 호는 추강(秋江) 또는 행우(杏雨)라고 한다. 재행(才行)이 탁월(卓越)하나 항시 의식(衣食)이 거칠고, 또 조랑말을 타고 다니므로 아동과 부녀자가 서로 따라다니며 손가락질하며 웃곤 하였다. 성질이 술을 즐기었는데, 그 모친의 꾸지람을 듣고서 지주부(止酒賦)라는 글을 짓고 10년을 마시지 아니하더니, 풍병이 나자 다시 마시었다가, 병세가 좀 가라앉자 다시 지주부를 짓고 5년을 마시지 아니하였다. 후에 병세가 위독해지자, 다시 술과 같이 생애하며 벼슬도 하지 아니하고, 그 집에서 세상을 마치었다. 폐조(廢朝)에서는 점필재 문도라고 하여 대유를 처형하였고, 또 소릉(昭陵)의 복위 상소를 하였다 하여 백공의 시체를 능지처참하였다. 옛날 범희문(范希文) 공이 말하되, “충신(忠信)한 분은 하늘이 돕는다고 하였는데, 두 사람은 하늘이 돕지 아니하였으니, 어찌된 이유일까.”《사우언행록》
○ 남추강(南秋江 남효온)은 성품이 강개(慷慨)하였는데, 일찍이 청한자(淸寒子 김시습)를 스승으로 삼고 물질 이외의 세상에 노닐면서 세속과는 아무 상관을 하지 않았다. 나이 18세에 성묘에게 상서하여 소릉의 복위를 청한 일이 있었고, 때로는 시사에 울분하면 무악산(毋岳山)에 올라가서 통곡하고 돌아왔는데, 시사를 논할 때는 위언격론(危言激論)을 가리지 아니하고, 비록 꺼리고 숨기는 일이라도 거리낌이 없는지라, 대유와 자욱이 경계하여 말렸으나,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김ㆍ정 두 공은 성리학에 밝고 모든 조행은《소학》을 법으로 삼으니, 그 하는 바가 실로 남추강과 다르다. 그러나 교분에 있어서는 서로 두터워 진실로 소위 ‘지란동취(芝蘭同臭)’라고 하겠다. 《병진정사록》
○ 남효온(南孝溫)의 자는 백공(伯恭)이요, 호는 추강(秋江)이다. 성품이 기개가 있어, 남에게 얽매이지 아니하고, 학문에 독실하며, 옛것을 좋아하고 지절(志節)이 있었다. 일찍이 상서하여 소릉의 복위를 청하였다가 귀양간 일이 있으나,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아니하였다. 주계정(朱溪正) 심원(沈源)과 안응세(安應世) 자정(子挺)과 벗이 되었다.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는 동문과 시험에는 나가지 아니하니, 그 자친이 권유하므로 때로는 시험에 나갔으나, 즐겨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끝내 급제하지 못하였다. 홍치(弘治) 임자년에 겨우 39세로 졸하였다. 성화(成化) 기해년에 내가 서울에 불려가 장차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남백공이 나의 시축을 구경하고 나를 한강에까지 전송한 일이 있었다. 이로부터 서로 사이가 좋아서 같이 송도에서 놀며 천마산(天磨山)에 올라가기도 하였다. 집이 고양(高陽)에 있었으므로, 당나귀를 몰아서 서로 찾아 압도(鴨島)에 가서 자면서 갈대로 불을 피우고 물고기와 게를 구워 먹으면서 운자(韻字)를 불러 시 짓는 것으로 밤을 새웠다. 나의 소개로 점필재를 호남에서 보았는데, 전부터 그의 시를 사랑한다면서 고인(古人)에 비교하였다. 그가 죽고 나자 남은 아들 충서(忠恕)가 미친병이 있어서 또 비명으로 죽었다. 나머지는 모두 사위뿐이어서 문집 초고를 모으지 않았다. 《소문쇄록》
○ 한훤(寒暄 김광필) 선생은 좌랑으로 있을 때에 진사 신영희(辛永禧)씨에게 달려가서 말하기를, “오늘 나는 마땅히 그대와 절교를 하겠다. 지금 사기(士氣)를 보면 동한(東漢)의 말과 같아서 어느 때에 무슨 화가 일어날지 모르겠는데, 나는 화가 박두하여 진퇴를 어찌할 도리가 없으나, 그대들은 멀리 고향에 가서 숨어 사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나는 곧 이 자리에서 절교하겠노라. 내 말을 잘 들어 주겠는가. 그렇지 아니하겠는가.” 하면서 다짐하는지라, 신공은 이로 인하여 직산(稷山)으로 내려가서 사산(斜山) 아래로 가서 안정(安亭)이라고 호하였다. 안정은 일찍이 남효온ㆍ홍유손(洪裕孫)과 같이 죽림(竹林) 우사(羽士 신선)를 맺은 일도 있어서 문장행의(文章行義)가 당시 영수였으므로, 남으로 지나는 자는 그 문에 예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경현록》
○ 강국오(姜菊塢) 경순(景醇)은 진산 강씨(晉山姜氏)의 세고(世稿)를 편찬하면서, 김 참판(金參判) 수령(壽寧)과 같이 그 시문을 메우고 고치고 하여 보는 사람의 마음을 유쾌하게 하였으며, 부조(父祖)의 시명을 후세에까지 떨쳤다. 사람들은 이것을 효행이라고 하지만 나는 불효라고 생각한다. 또 상사(上舍 생진과(生進科)에 합격한 사람) 신영희(辛永禧)의 집에는 그 조부 문희공(文禧公)의 시집이 있는데, 그 우인이 말하기를, “자네의 가집(家集)을 인쇄하여 세상에 전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신영희가 대답하기를, “나의 조부는 비록 글 잘한다는 명성이 세상에 으뜸이었으나, 가집(家集)에 실려 있는 것은 하나도 전할 것이 없고, 다만 한 문생의 만장 시에 말한, ‘32세에 졸하였으니, 불행한 것 안회(顔回)와 같도다.’ 라고 한 구절 외에 아름다운 시가 없으니, 어찌 가히 간행하겠는가.” 라고 하여서 사람들은 그것을 불효라고 하지만, 나는 효행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조부(祖父)의 행예(行藝)를 바른 대로 기술하여야 비로소 효행이라고 할 것이다. 가령 공교한 말과 허식하는 붓을 빌려다가 칭예한다면 그 부모의 영혼이 있을진대, 부끄러운 마음이 명명(冥冥)한 가운데에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추강냉화》
○ 남효온과 신영희는 모두 상사로 현달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그들은 사람됨이 옛 일을 좋아하고 기개가 있으며, 남에게 아부하지 아니하고 세속의 틀에서 벗어났다. 효온의 견흥시(遣興詩)에,
괴생이 안기(安期 예전 신선)와 벗을 삼으니 / 蒯生友安期
세상에서 뛰어난 늙은이인 줄을 알았다 / 知爲不世翁
대초를 어린아이같이 보고 / 豎兒看大楚
패공이라도 개미만하게 여겼다 / 蟻封視沛公
어찌하여 제왕에게 유세하여 / 如何說齊王
큰 공을 세우려 하였던가 / 顧欲作元功
만일 걸구의 변명이 아니었더면 / 若非桀狗辨
거의 대벽(大辟 사형)에 빠지고 말았으리 / 幾陷大辟中
또,
필부인 양왕손은 / 匹夫楊王孫
한 무제 때에 났다 / 生當漢武時
무제가 한창 서북방에서 일할 적에 / 帝方事西北
온 세상이 구치에 힘쓰건만 / 擧世務駈馳
허리띠를 늦추고 만호봉이 되었으나 / 緩帶食萬戶
다만 지리한 것 배웠어라 / 顧乃學支離
평소에 기후를 업신여기더니 / 平生殘祈侯
알몸으로 장사하기 기약대로 하였도다 / 稗葬得如期

사종(嗣宗 완적(頑籍))은 망위(亡魏)를 위하여 / 嗣宗爲亡魏
문제(文帝 진 나라 사마소)를 여우같이 여겼다 / 狐媚視文帝
미친 듯이 국생을 좋아하여 / 猖狂引麴生
60일 동안 취하여 끝장보았다 / 六旬托末契
위주(僞主)의 청혼을 물리친 것은 / 却得僞主婚
그 대절이 만세에 빛나리라 / 大節昭萬世
증적(曾賊)이 무례를 꾸짖으니 / 曾賊責無禮
우습구나. 제 생각 못하는 위인 / 可笑不自計

47회나 올린 상소 / 四十七奏疏
영수(靈修 임금)의 총명을 넓히려 하였건만 / 欲廣靈修聰
마지막 사자론도 / 終然四字論
귓등에 지나는 바람만도 못하였네 / 不啻耳過風
계통의 점친 것 의뢰하여 / 賴用季通筮
말년에는 둔옹이라 호 지었네 / 末路號遯翁
한천에 한 칸 집을 세운 것은 / 寒泉一間舍
꼭 참동계(參同栔 신선되는 글) 정하기에 합당하였네 / 端合訂參同

호원이 대송을 몰아내니 / 胡元駈大宋
양경은 황진에 어두웠네 / 兩京迷黃塵
노재 허문정공은 / 魯齊許文正
피발하고 그 신하가 되었다 / 被髮爲其臣
요 순의 도를 가져다가 / 欲將堯舜道
억지로 판옥인을 교화하려 하였건만 / 强敎板屋人
방(方)과 원(圓)은 같이할 수 없는 것이 / 方圓不能周
필경에는 새 백성 이루지 못하였다 / 畢竟無新民
라 하였고 신영희의 우의시(愚意詩)에는,
남복은 뜰을 소제하고 / 男僕掃庭除
여종은 규당을 쓰네 / 女僕掃閨堂
장부는 변진을 소탕하고자 뜻하는 것 / 丈夫掃邊塵
한 집안에 있지 않다 / 志不在門楣
두옥 아래에 높이 누워 / 高臥斗屋下
내 흉중이 있는 기를 흔드노라 / 掉我胸中旗
야인은 장부가 아니다 / 野人非丈大
장부는 각자 기이하리라 / 大夫各自奇

말달려 급한 언덕 내리달려 / 走馬下急坂
매를 불러 높은 구름가로 들어간다 / 呼鷹入雲際
눈이 녹은 곳 찾아 말에서 내리고 / 下馬雪消處
바위에 걸터앉아 조금 쉬자니 / 踞石時少憩
마부는 찬밥을 펼쳐놓고 / 僕夫開冷飯
불 피우고 물 끓인다 / 敲火湯沸細
집은 10리나 남았는데 / 家在十里餘
산허리에 석양이 곱게 비치었네 / 山腰夕陽麗
또,
꽃까지 꺾어 해진 갓 꽂았으나 / 花枝揷破笠
때묻은 소매 춤추는 팔 위에 펄럭인다 / 垢袂翻舞臂
하였다. 영희는 기개가 있었으나, 세상에는 뜻을 잃었다. 어느 사비(私婢)에게 장가들었다가, 그 상전에게 욕을 보고 화가 나서 세상을 떠났고, 효온도 죽은 뒤에 참화를 만났으니, 어찌 이들의 운명이 이렇게 기박할까. 《소문쇄록》
○ 김시습(金時習)은 강릉인(江陵人)이며, 신라의 후예이다. 자는 열경(悅卿)이요, 호는 동봉(東峯)ㆍ벽산청은(碧山淸隱) 또는 청한자(淸寒子)라고도 한다. 세종 을묘생인데, 5세에 능히 글을 지었으므로, 세종이 승정원에 불러서 부시를 짓게 하고, 크게 기이하게 여기어, 그 부친을 불러 이르기를, “이 아이를 잘 기르라. 내가 장차 크게 쓰리라.” 하였다. 을해년에 광묘가 섭정하자, 사문(沙門)에 들어가서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수락정사(水落精舍)에 거하면서 수도연형(修道煉形)을 하였다. 유생(儒生)을 보면, 말마다 공맹(孔孟)을 칭하고 입으로 불법은 이르지 아니하였다. 사람이 수련(修煉)의 일을 물어도 또한 즐겨 말하지 아니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의 좌화(坐化)한 일을 말하니, 설잠이 말하기를, “예(禮)에 좌화는 귀하게 여기지 아니한다. 나는 다만 증자(曾子)의 역책(易簀)자로(子路)의 결영(結纓)을 죽음에 있어 귀하게 여긴다. 그리고,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신축 연간에는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글을 지어 그 조부의 제사를 지냈는데, 그 글이 이르기를, “삼가 아룁니다. 제(帝)가 오륜(五倫)을 베풀었사온데,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먼저가 되고, 3천 가지 죄 중에서 불효가 제일 크다 합니다. 무릇 천지 사이에 살면서 누가 양육의 은혜를 저버리오리까. 그러므로 호랑(虎狼)이 같은 악수(惡獸)며, 수달(豺獺) 같은 미충(微虫)이라도 어버이를 사랑하는 성품을 온전히 할 수가 있고, 또 근본을 알며 갚은 정성을 삼가나이다. 이것은 모두 천리(天理)의 당연함 이어서 물욕(物慾)에 가려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우둔한 소자는 본지(本支)를 이으려고 젊어서는 이단(異端)에 침체되어 미몽(迷懵)하여 강구하지 못하였습니다만, 장차 수도(修道)로써 발탁될 것이요, 황설(謊說)로 윤회(輪回) 같은 것이 없음을 깨달았나이다. 젊어서는 그런대로 수도하였지만, 말년에 바야흐로 뉘우쳐서 이에 예전(禮典)과 성경(聖經)을 상고하고 찾아서 추원(追遠)하는 홍의(弘儀)를 고정(攷定)하였고, 청빈한 활계(活計)로 참작(參酌)하였나이다. 그리하여 간략(簡略)하면서 조촐히 할 것을 힘쓰며, 풍부히 하며 정성스럽게 하나니, 한 무제(漢武帝)는 70세에야 비로소 전천추(田千秋)의 말을 깨달았고, 원덕공(元德公)은 백 세가 되고서야 허노재(許魯齋)의 풍화에 감화되었나이다. 상로(霜露)에 젖음을 느끼고 세월이 감을 근심하니 경황(驚惶)함을 마지아니하며, 탄아(嘆訝)마저 진실로 많습니다. 그저 죄를 속(贖)할 수 있어서 천지의 양제(兩際)에서 용납된다면 혹시나 면목을 가지고 구원(九原)에서 조종(祖宗)을 뵈려고 하나이다.” 라고 하였다. 임인년 이후부터서는 세상이 쇠하려는 것을 보고 시달려 인간의 일은 하지 아니하고 여염간(閭閻間)에 버려진 사람이 되어, 날로 남과 더불어 장례원(掌隷院)에서 다투고 송사하였다. 하루는 술을 마시고 시중을 지나가다가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을 보고, “네 놈도 그만 쉬어라.” 하고 외치니, 정창손이 들은 척도 아니하며 지나갔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위태롭게 여겼으며 일찍이 교유하던 자들도 모두 절교하며 왕래하지 아니하였다. 홀로 시중의 정신병자들과 같이 재미있게 놀고 때로는 술에 취하여 길가에서 거꾸러지는가 하면, 늘 헛웃음을 웃고 하더니, 후일에 설악산(雪岳山) 또는 춘천산(春川山)에 들어가 있으면서 출입이 무상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한계를 알지 못하였지만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정중(正中 이정은)ㆍ자용(子容 우선언)ㆍ자정(子挺 안응세), 그리고 나남효온이다. 그가 시문을 지은 것이 수만 편인데, 옮겨갈 때에 흩어져서 거의 없어졌고, 간혹 조정의 신하와 유사들이 절취하여 자기 소작으로 만들었다. 《사우명행록》
○ 김시습은 유양양(柳襄陽 유자한)에게 수백 마디 편지를 보냈는데, 그 대략을 말하자면, “나는 난 지 8개월 만에 글자를 보고 알았다. 그리고 친척 할아버지 되는 최치운(崔致雲)이 나의 이름을 시습(時習)이라고 지어 주었다. 3세 때에 능히 글을 엮었는데, 거기에,
복숭아꽃은 붉고 버들잎은 푸르러 3월이 저물었는데 / 桃紅柳綠三月暮
구슬이 바늘에 꿰인 것은 솔잎에 이슬일세 / 珠貫靑針松葉露
라는 시를 지었다. 5세 때에는 《중용》과《대학》을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서 읽었는데, 그때 사예(司藝) 조수(趙須)가 자설(字說)을 지어 달라고 명하여 지어준 일도 있다. 정승 허조(許惆)가 나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노자(老字)를 운(韻)으로 시를 지어라.’ 하므로, 내가 그 소리에 응하여서
늙은 나무가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안 늙었네 / 老木開花心不老
라고 하였더니, 허 정승이 무릎을 치며 탄상하고, ‘이는 이른바 신동이라는 것이다.’ 하였다. 세종께서 이것을 들으시고 대언사(代言司)로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시험하라고 명하니, 박이창은 자기 무릎 위에 앉히고 벽화 산수도를 가리키면서, ‘네가 저 벽화를 두고 시를 지을 수 있겠느냐.’ 하기로, 내가 응하기를,
작은 정자에 배가 매인 집은 누가 사는고 / 小亭舟宅何人在
하였다. 이같이 작문 작시(作文作詩)한 것이 매우 많았다. 세종이 전지(傳旨)하기를, ‘내가 친히 데려다 보고자 하나 사람들이 듣고 해괴히 여길까 두려워한다. 가리고 숨겨 키워서 나이가 들고 학업이 성취함을 기다려서 장차 크게 쓰겠노라.’ 하면서, 물건을 주시고 집에 돌아가게 하였다. 13세 때에는 대사성 김반(金泮)의 문하에 가서 《논어》ㆍ《맹자》ㆍ《시전》ㆍ《서전》, 그리고 《춘추》를 읽었으며, 또 대사성 윤상(尹祥)에게 가서 《주역》과 《예기》, 그리고 제사(諸史)를 읽었다. 좀 장성하여서는 영달을 기쁘게 여기지 아니하고, 또 친척과 이웃에서 넘치게 칭찬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러다가 세상과 내 마음이 서로 어긋나서 곤란하게 되는 차에, 세종과 현릉(顯陵 문종)이 연이어 승하하셨고, 세종 초기에 원로(元老)와 대가들이 모두 귀신의 명부(鬼簿)에 오르고, 다시 이교(異敎 불교)가 크게 일어나 사문(斯文 유교)을 능멸하니, 나의 뜻은 이미 거칠 대로 거칠어졌다. 드디어 중과 짝을 하고 산수를 찾아 놀았으니, 세상 사람이 나를 보고 불교를 좋아한다고 하나, 나는 이도(異道)로써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자 하였으므로, 세조가 전지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모두 나가지 아니하고 몸가짐은 더욱 거칠고 방탕해졌다. 이로부터 사람 축에도 들지 못하여 나보고 어리석다 하고, 혹은 나를 미치광이라고 하면서, 우마(牛馬)와 같이 대하나, 나는 모두 그에 응해 준다. 이제 성성(聖上)이 등극(登極)하여 어진이를 등용하고 충간(忠諫)을 잘 들으시므로 벼슬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나로 말하면 10여 년 전후에 육적(六籍 여섯 가지 경서)을 익숙하게 연구하여 점차 정밀하여졌지만, 여러 번 내 몸과 세상이 서로 어긋나서, 둥근 도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것 같고, 옛 친구는 모두 죽고 새 사람은 낯이 익지 아니하니, 누가 나의 본뜻을 알아주리오. 그러므로, 다시 산수간에 방탕하였노라. 이것이 모두 사실이니, 공만은 알아주시오. ”하였다. 《패관잡기》
○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은 평소의 그 심회(心懷)를 세상 사람이 엿볼 수 없다. 그의 시집을 보면, 미궐(薇蕨) 두 자를 잘 사용하였는데, 그 본뜻이 있는 곳은 알지 못하겠다. 어느 날 내(김정국)가 늙은 중을 만나니 많은 현묘한 이치를 들은지라 그가 배운 스승을 물으니, 그가 답하기를, “젊을 때 사미(沙彌)로 있으면서 오세(五歲 김시습의 별칭)를 모시고 섬기었는데, 오세의 저술로 세상에 전하는 것은 겨우 백에 하나나 둘이 될까 합니다.”라고 말하므로, 그 이유를 물으니 그 중이 말하기를, “노승이 중흥사(中興寺)에서 오래도록 모시고 있었는데, 매양 비온 뒤에 산물이 불으면, 백여 장의 종이를 끊어 가지고는 나에게 필연(筆硯)을 들리고 뒤따르게 하여 물결을 따라 내려가 반드시 급류를 찾아 앉아서는, 절구ㆍ율시 또는 오언 고풍(五言古風)을 침음(沈吟)하여 시를 짓되, 조각 종이에 쓰고 물에 흘려 멀리 보내고 나서는, 또다시 써서 흘려 보내고 하기를 밤새도록 하여 조각 종이가 다 없어져야 집에 돌아옵니다. 어느 때는 하루에 백여 수의 시를 지어 읊었습니다.” 하였으니, 이 또한 그의 본뜻을 엿보기 어려운 점이다. 《사재척언》
○ 동봉(東峯) 김시습은 어려서부터 시문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세상 법규를 털어버리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서는, 그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고쳤다. 남추강(남효혼)과 더불어 세상 밖에 놀면서 미친 듯이 읊조리며 방랑하며 한 세상을 희롱하였다. 세상을 도피하여 불문(佛門)에 들어가서도, 그 계율(戒律)을 지키지 아니하니, 세상 사람이 미친 중으로 지목하였다. 시가(市街)에 지나가면서 어느 때는 한 곳만을 눈여겨보고는 돌아가기를 잊으며, 때로는 우두커니 서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는가 하면, 어느 때는 가로(街路)에서 똥오줌을 누어서 여러 사람이 보는 것도 피하지 아니하며, 또 뭇 아이들이 욕하고 웃으며 다투어 기와 쪽을 조약돌을 던지면서 쫓기도 하였다. 그가 소유한 노비(奴婢)와 전택(田宅)을 남들이 가져가고 도둑질하는 대로 맡겨두고 조금도 개의하지 아니하고 있다가, 얼마 뒤에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을 청하니, 그 사람이 좋아하지 아니하는지라 설잠은 관청에 고발하여 면대하여 공술하고, 싸우기를 시끄럽게 하고 시정(市井)에서 싸우듯이 하며, 마침내 승소하고 증서를 받아 품 안에 품고 관문을 나오더니,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크게 웃곤, 급히 증서를 내어 찢어서 개천물에 던졌으니, 그가 사람을 조롱하고 세상을 업신여김이 이와 같았다. 세조가 일찍이 법회(法會)를 내전에서 베풀면서, 설잠도 간선되어 그 회에 참여하였다. 새벽이 되자, 문득 도망쳐 어느 곳으로 갔는지 몰라 사람을 시켜 찾아 보았더니, 가로상에 있는 똥독 속에 빠져 있고, 겨우 얼굴만 보일 정도였다. 한 사미(沙彌)가 있었는데 그 목소리가 맑고 깨끗하여, 쟁쟁(錚錚)한 소리를 내면서 낭랑히 길게 읊으면, 그 소리가 창공에 울리어 처량한 여감(餘感)이 있으므로, 달빛 환한 밤을 만날 때마다 깊은 밤에 홀로 앉아 그 사미에게 이소경(離騷經)을 한 차례 읊게 하곤, 그때마다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젖게 하였다. 성질이 술을 좋아하였는데 취하면, “우리 영묘(세종)를 보지 못하는구나.”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매우 비통한 심정을 풀지 못하였다. 여러 비구(叱丘)들은 항시 신사(神師)로 추대하며, 온갖 정성을 다해 시중을 드리더니, 어느 날은 합사(合辭)하여 청하기를, “저희 제자들은 대사(大師)님을 모신 지 오래오나, 아직까지 일교(一敎)를 해 주시기를 꺼리오니, 대사님은 그 청정한 법안(法眼)을 끝내 누구에게 주시려고 하십니까. 제생들이 나아갈 방향을 헤매고 있으니 저희들의 소원은 금비(金篦)로 긁어내시는 것입니다.” 하고, 청하기를 더욱 간절히 하니, 설잠이, ‘그래라.’ 하고, 크게 법연(法筵)을 열어서 설잠이 몸에 가사와 법의를 갖추고 가부좌를 하니, 중들이 모여들어 합장하고 무릎을 꿇고 벌여 앉아서 귀를 기울이며 들으려고 한지라, 설잠이 말하기를, “소를 한 마리 끌어오라.”고 하였다. 모두들 이유를 헤아리지 못하고 소를 끌어다가 뜰 앞에 매어 두었다. 설잠이 또다시 꼴 한 뭇을 소 뒤에 두라고 하는지라, 그대로 행하니 설잠은 크게 웃으며, “너희들이 법을 듣는다는 것은 이와 같으니라.” 하니, 소란 축류(畜類) 가운데 가장 우둔한 것이니 사람의 미명(迷冥)하고 무식한 자를 시속에서 소 뒤에 꼴을 둔 것이라고 한다. 중들은 낯빛을 붉히며 물러갔다. 근대의 시승(詩僧)을 말하면 설잠이 그 영수(領袖)인데, 그 시가 법도에 맞고 중후하여 중의 티가 없다. 금오산(金鰲山)에 들어가서 저서(금오신화)를 석실(石室)에 감추고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설잠을 아는 이가 있으리라.” 하였다. 그 글은 대개 괴이한 것을 기술하여 우의(寓意)한 것인데, 전등신화(傳燈新話) 등을 본떠서 지은 것이다. 《용천담적기》
○ 심원(深源)의 자는 백연(伯淵)이요, 호는 성광(醒狂), 묵재(黙齊) 또는 태평진일(太平眞逸)이라고 한다. 태종의 현손이며 나(김정국)와 동년생으로 달과 날이 나보다 뒤졌다. 경서에 밝고 덕행이 있으며 겸하여 의술에 능하였다. 성품이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우며 무당과 불교를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며, 평소에도 갓과 띠를 두르고 손에는 책을 놓기 아니하였다. 전강(殿講)에서 사서와 오경을 통하여 명선대부(明善大夫)에 오르고, 주계부정(朱溪副正)의 행직을 받았다. 나이 25세를 전후하여 다섯 차례 치도(治道)를 상소하였는데, 어느 때는 윤허(允許)를 얻고 어느 때는 얻지 못하였다. 또 조정에서 고모부 임사홍(任士洪)의 무도하고 딴 마음이 있음을 논박한 일로 그의 조부에게 미움받아 장단(長湍)으로 귀양가고, 또 이천(伊川)으로 귀양갔었다. 병든 부모를 찾아 보아야겠다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글이 간곡하고 지극한지라 윤허를 얻었다. 정미년에는 종친과(宗親科) 시험에서 경사(經史)를 당하여 제1인으로 발탁되니 풍악과 술 그리고 2품을 내렸으나 군(君)에 봉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는 전에 그의 조부에게 불순히 한 허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우명행록》
○ 주계정(朱溪正) 심원은 다만 성리학에만 능숙할 뿐 아니라, 또한 시를 잘 지었다. 비온 뒤 저녁 때 바라보고 지은 시에 이르기를,
한 보지락 봄비에 살구꽃은 지고 / 一犁春雨杏花殘
여기저기 사람들은 맑은 물 속에서 밭갈이하누나 / 處處人耕白水間
홀로 창망한 강해 위에 섰으니 / 獨立蒼茫江海上
서운함을 이기지 못하고, 삼각산만 바라보누나 / 不勝惆悵望三山
하고, 또 운계사(雲溪寺)에 가서 읊기를,
나무 그늘 얼룩지고 돌은 서려 있는데 / 樹陰濃淡石盤陀
휘돌아드는 한 줄기 길은 시냇물 지나간다 / 一逕縈回透澗阿
확확 닥치는 향풍이 코에 스치니 / 陣陣春風通鼻觀
멀리 저 숲 아래 남은 꽃송이 있음을 알겠구나 / 遙知林下有殘花
하였다. 《소문쇄록》
○ 주계군 심원은 선견지명이 있었다. 성묘조 때에 자기 고모부 되는 임사홍(任士洪)의 간사함을 알고 상소하여 힘껏 사리를 밝히어 마침내 임사홍을 멀리 귀양보내었다. 연산조 말년 임사홍이 세도를 부릴 적에 드러내어 죽였는데, 중종이 즉위하여서는 그의 충의를 가상히 여기어 작위를 주고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으니, 대개 심원의 의향은, “내가 종친으로서 마땅히 나라와 흥망을 같이할 것이요, 어찌 한 사가(私家)의 고모부를 두둔하겠는가.” 한 것이었다. 상소를 읽으면 늠름한 생기가 떠오른다. 《패관잡기》
○ 정은(貞恩)의 자는 정중(正中)이요, 호는 월호(月湖), 풍곡(風谷) 또는 설창(雪牕)이라고 한다. 수천부정(秀泉副正)을 제수되었는데, 음률이 세상에 으뜸이어서 강개히 슬픈 곡조를 타면, 지나가던 행인들이 듣고 눈물을 흘렸다. 사람됨이 독후(篤厚)하고 스스로 겸손하며, 학식과 도량이 있었으며 총명하였다. 학문을 할 때에는 먼저 이(理)를 밝히고 난 후에 문(文)을 하므로 스승이 수고롭지 않았으며, 시를 지을 때에는 먼저 격(楁)에 맞추고 난 후에 문사를 꾸미므로 사람들이 싫어하지 아니한다. 또 덕(德)을 닦을 때에는 먼저 내심을 가다듬고, 후에 외형을 바르게 하므로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처신할 때에는 지위가 높은 것으로 사람을 억압하지 아니하여 가장 가난한 선비 같았다. 《사우명행록》
○ 종실인 수천부정 정은은 날마다 시주(詩酒)와 금파(琴琶)로 스스로의 즐거움으로 삼고, 시문과 음률이 백원(百源 이창)과 이름이 같았다. 김대유(金大猷)의 책망을 듣고 모든 구습을 버리고, 짐짓 속태(俗態)를 꾸미고 두문불출하고 과감히 친구와 왕래를 끊었더니, 과연 홀로 무사히 보존하였다. 참판 김유(金紐)는 그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솜씨가 시냇가에 피어 있는 매화의 격(格)과 같다고 감탄하였다. 그가 지은 입춘첩시(立春帖詩)에 이르기를,
가늘게 홍전을 오려 소춘에 걸었다 / 細剪紅箋架小春
하고 또 마상(馬上)에서 구두로 시를 읊기를,
뽕나무가 마르니 소가 혀를 토한다 / 桑乾牛吐舌
고 하였으니, 그의 시 짓는 솜씨가 대개 이와 같았다. 《사우언행록》
○ 국조(國朝)의 아악(雅樂)으로 말하면, 박연(朴堧) 후에 사족(士族)으로는 칭할 만한 자가 없더니, 성화(成化) 연간에 유추(有秋)임흥(任興) 가 처음 드러나고 이어 정중(正中 이정은)과 백원(百源 이창), 그리고 국문(國聞) 정자지이 한때에 같이 일어나서 구습(舊習)을 일소하였고, 향방을 교화하는데 있어서 위에서 말한 4명이 으뜸이었다. 나(남효온)는 음률을 알지 못하나, 날마다 사자(四子)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즐겁게 놀곤 하였다. 광대들의 논평을 들으면 대개 다음과 같으니, “유추(有秋)는 마음씨는 평화하면서 그 가락이 저하하고, 국문은 가락은 절묘한데 마음씨가 혹(酷)한 편이다. 또 백원은 웅혼(雄渾)하기는 하나 솜씨가 좀 잡되고, 정중은 곡조는 고상하나 기(氣)가 편벽된다.” 하였다. 내가 정중과 같이 송도(松都)에서 놀 때에 그가 거문고를 타면, 사인(士人)과 기녀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지 아니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서울에 돌아오는 날에 말에 오르기를 머뭇거리니 행인들도 서서 보았다. 백아(伯牙)가 죽은지 천 년 후인 오늘에 이 사람이 아니고 또 누가 있겠는가. 기(氣)가 편벽되다는 말은 지나치지 않다. 백원과 유추는 언제나 악기를 가지고 밤낮으로 연습하나, 정중은 집 안에 풍물(風物)이 없어 여기저기 가는 곳에서 우연히 다른 악기를 가지고도 그의 음률은 순수하였다. 나는 언제나 그 수예(手藝)가 매우 고상함에 감복한다. 그러나 음률을 아는 자는 간혹 조롱하여 말하기를, “정중의 거문고는 백아(伯牙)와 같으나, 때로는 백원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니, 어찌 제세경략(濟世經略)의 재주가 쌓여서 적은 기술에 돌아갔으므로 나오는 것이 편벽된 것이 아니랴. 나는 흐르는 눈물을 견디지 못하였으니, 아 뜻을 펴지 못함이여. 《추강냉화》
○ 현손(賢孫)의 자는 세창(世昌)이요, 신요(神堯 태조 이성계)의 후손으로 벼슬이 명양부정(鳴陽副正)에까지 이르렀다. 예에 맞게 행동하고 몸가짐을 독실히 하였으므로, 김대유(金大猷) 다음으로 꼽는다. 일찍이 관례(冠禮)를 행하려고 하자 대유가 만류하였다. 그 모친의 상사에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행하였다. 《사우언행록》
○ 종실(宗室) 명양부정은 성품이 조촐하여 속세에서 벗어났고, 글과 시 짓기를 좋아하였으니 그 사람됨과 같았다. 그의 견의시(遣意詩)에 이르기를,
병은 품은 채 세상 일을 멀리하고 / 懷疴謝塵事
종일토록 시편을 뒤적거린다 / 終日檢詩篇
마 넝쿨은 거친 벽을 뚫고 / 藥蔓穿疎壁
거미줄은 짧은 서까래에 쳐 있네 / 蛛絲掛短椽
술병을 기울여 남은 술을 다 마시고 / 傾壺盡餘酒
목침을 높이 베어 나는 솔개를 돌아본다 / 高枕眷飛鳶
가는 곳마다 생업이 있으리마는 / 到處生涯在
어찌 하필 성밭이 소용되리 / 何須負郭田
작은 비에 띠집이 젖었는데 / 小雨茅齋濕
새로 갠 후엔 베개와 자리가 시원하다 / 新晴枕席涼
물이끼는 주춧돌 따라 올라오고 / 水衣緣礎上
뜰풀은 담장보다 더 자라 있네 / 庭草過墻長
이슬이 외꽃을 씻어 깨끗하고 / 露浥苽花淨
바람은 혜엽(蕙葉)의 향기 머금고 있다 / 風含蕙葉香
유연히 낮잠을 깨고 나니 / 悠然午眠破
수풀 위에 석양이 아련하다 / 林杪淡夕陽
하였다. 가을 시에는,
하얀 이슬이 내린 뒤라 숲이 깨끗하고 / 白露園林淨
높은 바람에 나뭇잎이 쇠잔하다 / 高風草木衰
술잔을 엎어 죽엽(竹葉 술 이름)을 따르고 / 覆杯流竹葉
물길어 상지(桑枝 차 이름)를 달인다 / 汲井煮桑枝
지는 해에 기러기 변방에 줄지었고 / 落日雁橫塞
가을 창에는 벌레가 실을 토해낸다 / 秋窓虫吐絲
누가 병들고 가난한 사람 가련히 여기겠는가 / 誰憐貧病客
길게 초인사나 읊어보자 / 長吟楚人詞
또,
빈 소반에는 마치채(馬齒菜)가 남아 있고 / 空盤推馬齒
거친 후원에는 계장초(鷄腸草)만 늘어졌네 / 荒苑長鷄腸
수각에서는 청노(靑奴 풀 이름)가 냉냉하나 / 水閣坍奴冷
암전에서는 부비(腐婢 풀 이름)가 향긋하다 / 巖田腐婢春
이끼는 주춧돌에 두루 끼어 있고 / 苺苔侵礎遍
쑥대는 창을 둘러서 자란다 / 蓬艾繞窓長
자소의 잎은 도는 바람 따라 흔들거리고 / 紫蘇葉帶回風響
홍요의 꽃은 되비치는 햇빛에 붉었구나 / 紅蓼花含返照明
시냇가에 새는 비를 맞아 온몸이 젖었고 / 溪禽帶雨全身濕
산감은 서리 맞고 반볼이 붉었네 / 山枾經霜半臉紅
하였다. 항시 수척한 병이 있더니 30이 못 되어 죽었는데, 그가 평소에 읊은 감회시(感懷詩)를 보면, 가히 수하지 못할 징조를 볼 수 있었다. 그 시에 이르기를,
광음은 번개같이 잠깐인데 / 光陰如電瞥
세월은 나에게 빌려주지 아니하네 / 歲月不貸余
명예를 얻는 것이 비록 때가 있다지마는 / 成名雖及時
필경에는 허공이 돌아가네 / 畢竟空歸虛
형해는 나의 것이 아니니 / 形骸非我有
하루아침 다시 남음이 없으리라 / 一朝無復餘
영화를 어찌 의뢰할까 / 英華豈足賴
천지는 참으로 나그네 집이다 / 天地眞蘧盧
우습구나 저 궁도인이여 / 笑彼窮途人
통곡한들 마침내 무엇하리 / 痛哭終何如
하였다. 《소문쇄록》
○ 안응세(安應世)의 자는 자정(子挺)이요, 호는 월창(月窓)ㆍ구로주인(鷗鷺主人)ㆍ연파조도(煙波釣徒) 또는 여곽야인(藜藿野人)이라고 한다. 사람됨이 청담쇄락(淸淡洒落)하고 안빈희분(安貧喜分)하여, 공명을 구하지 아니하였고, 선불(仙佛)을 배우지 아니하며, 박혁(博奕)을 즐기지 않았다. 또 시에 능하며 특히 악부(樂府)를 잘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불의의 재물은 집을 돕는 데 그칠 뿐이요, 불의의 음식은 오장을 돕는 데 그칠 뿐이니, 더욱 참견할 것이 못 된다.” 하였으니 자정의 마음가짐이 대개 이와 같았다. 백옥(白玉)에도 티가 있으니 주색을 좋아하였다. 경자년에 진사가 되었고 이해 9월에 죽으니, 나이 26세로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 통탄해 마지아니않았다. 《사우언행록》이하 동
○ 안우(安遇)의 자는 시숙(時叔)인데, 효행이 지극하여 고을에서 으뜸이었으며, 그의 부친상에는 일체를 《주자가례》에 따라 행하였다. 점필재에게서 수업하였는데, 얼마 뒤 벼슬할 마음이 없어서 그때부터 점필재와 뜻이 달라졌다. 일찍이 그 고을에서 천거되어 서울에서 행하는 회시(會試)에 간 일이 있는데, 그때 사관(四館 사학(四學))에 있는 연소자들이 교만하고 방자하여 나이 많은 시골 선비들을 매로 때리려고 하니, 시숙이 이르기를, “어찌 부모의 유체(遺體)를 가지고 죄 없이 스스로 훼손하면서 명리를 구할 수 있겠느냐.” 하며 들어가지 아니하고 돌아왔다. 그 절조가 가히 동한(東漢)에 견줄 만하다고 하겠다.
○ 유종선(柳從善)은 진주인(晉州人)이며, 자는 여등(如登)인데, 산에서 살면서 스스로 세상과 인연을 끊으니, 친구나 친척이라도 그의 얼굴 보기 드물었다.
○ 우선언(禹善言)의 자는 덕보(德父)요, 호는 풍애(楓崖)이며 단성군(丹城君) 우공(禹貢)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기개가 있고 남에게 얽매이지 아니하였다. 신축년에 남쪽으로 영남에 가서 점필재 선생을 그 여막에서 뵈니, 선생은 기뻐하여, “자를 자용(子容)이라 하라.” 하였다.
○ 최하림(崔河臨)의 자는 진국(鎭國)이요, 호는 태허당(太虛堂)이다. 성품이 공명을 좋아하여 경자년에 진사가 되었는데, 이해 여름에 요승(妖僧) 학조(學祖)가 그의 제자 설의(雪儀)로 하여금 가만히 불상을 돌려 놓게 하고서, 세상 사람에게 말하기를, ‘부처가 스스로 걷는다.’고 하니, 곡식과 비단ㆍ베를 가지고 오는 자가 날로 천의 숫자로 헤아릴 정도였다. 태학(太學)에서 상서하여 다섯 차례나 요승을 죽이라고 청하였으나, 임금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상소문은 대개 최진국의 손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병오년 7월에 죽었는데, 그때 나이가 32세였다. 집이 가난하여 염장(斂葬)할 수 없었으므로 벗들이 치전(致奠)하여 장사지냈다. 그가 지은 안택기(安宅記)가 세상에 전한다.
○ 고순(高淳)의 자는 희지(熙之)요, 또 진진(眞眞) 또는 태진(太眞)이라고 하며 제주인(濟州人)이다. 귓병이 있어 땅에 글자를 써서 서로 뜻을 통했다. 무술년에 조서에 응하여 시사(時事)를 논하는 상서를 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망령하다는 이름을 얻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알리자, 고희지(高熙之)는 듣고 오히려 기쁘게 여기며 스스로 호를 망희지(妄熙之)라 하였다. 여러 선비들 사이 중에서 신덕우(辛德優)와 초면 인사를 하였는데, 선비들은 서로 주고받는 말이 떠들썩하였다. 고희지가 종이에 한 절구를 지었는데, 그에 이르기를,
소각에 봄바람이 고요하니 / 小閣春風靜
청담으로 모두 여흥이 났다 / 淸談摠有餘
귀먹은 나는 아무 재미가 없어 / 聾人無一味
홀로 머리를 숙이고 책을 본다 / 垂首獨看書,
하였는데, 신덕우는 기뻐하며 그 시에 화답하여 이르기를,
세상이 시끄럽고 혼탁하니 / 世聲聒溷濁
분양의 냄새나 다름이 없네 / 糞壤嗟鼻餘
부러워하오, 방로들보다 나은 그대를 부러워하노니 / 羡君勝房老
획 속에 천 권의 글을 숨기고 있네 / 晝隱千卷書
하고, 이후부터 지심(知心)의 벗이 되었다.
○ 고희지(高熙之)는 일찍이 귓병이 있었으나, 성품이 독실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하루는 시를 읊고 취침하였는데, 그의 돌아간 아버지 중추(中樞)-고수종(高守宗)-가 꿈에 나타나, 시를 주며 말하기를,
화발은 창창하여 예보다 줄었는데 / 華髮蒼蒼減昔年
외로운 몸 적적하게 산 앞을 지키고 있네 / 孤身寂寂守山前
백골이라서 지감 없다 말하지 말라 / 莫言白骨無知感
너의 읊는 소리에 나는 잠을 못하노라 / 聞汝吟詩我不眠
하였다. 내(남효온)가 그 시에 서문을 써 주었는데 그 대략에, “천지간의 한 기운은 이르면 펴지고 흩어지면 돌아가나니, 기실은 하나이다. 사람이 죽은 뒤에 그 기(氣)가 여러 자손들의 신상에 흩어져 있다가, 자손이 동하면 그 신명(神明)이 감동하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비록 그러하나 사람은 곧고 초연하여 마치 다시 부모의 척강(陟降)하는 거동을 항시 좌우에 모시고 있는 듯이 함을 보게 될 것이니, 고희지 같은 이는 이른바 오직 맑은 자라[淸者]고 할 것이다.” 하였다. 《추강냉화》이하 동
○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랑캐의 춤을 본받아서 머리를 내두르고 눈을 까며, 어깨를 솟구고 팔을 구부리고 두 다리와 열 손가락을 한꺼번에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구부리고 활을 쏘는 형상을 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개가 네 발을 헤매고 다니는 모양을 하기도 한다. 또 곰처럼 구부리고 새처럼 펴기도 하며, 혹은 물러가서 바람 소리를 낸다. 공경대부로부터 사서인(士庶人)이며 창기나 배우 여자에 이르기까지, 음률을 이해하고 몸이 성한 자는 하지 않는 자가 별로 없었다. 그 이름을 호무(胡舞)라고 하는데, 여기에 관현(管絃)을 같이 하면서 즐겼다. 의정부 우찬성인 어유소(魚有沼)는 더욱 잘하여서, 나도 또한 풍류로 해본 일이 있는데, 망우(亡友) 안자정(安子挺)이 그 잘못을 극언하여 비난하기를, “미인(媚人)의 행동과 유만(柔嫚)의 태도는 사람으로 할 바 아니거늘, 하물며 오랑캐는 금수와도 같은데 어찌 내 몸으로 금수 같은 일을 하겠는가.” 하므로, 나는 듣고 퍽 그렇지 않게 여겼는데, 그 후 《한서(漢書)》에서 개차공(蓋次公)의 효단장경 목후사(效檀長卿沐猴辭)를 읽고 난 연후에야 안자정의 말이 정론(正論)임을 알았으며, 이로 인하여 전현(前賢)이나 후현의 법규가 서로 같음을 알았다.
○ 경징(慶徵) 군의 휘는 연(延)이요, 자는 대유(大有)이며, 청주인(淸州人)이다. 겨울에 그의 부친이 병이 나서 어회(魚膾)를 먹고자 하는지라, 군이 얼음을 뚫고 그물을 쳐도 고기를 얻지 못하자, 군이 울며 말하기를,
“옛사람은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은 일이 있었는데, 나는 이제 그물을 치고도 고기를 잡지 못하니, 성감(誠感)이 부족하기 때문이리라.” 하고, 버선을 벗고 얼음 구멍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지내고 난 후에 검은 잉어를 얻어서 공양했다. 또 시금치를 먹고자 하는지라, 군이 밭에 있는 채근(菜根)을 보고 울부짖으니, 문득 시금치가 나와 그 부친을 봉양하였고, 이어 부친의 병이 나았다. 그 후 부친이 죽자, 3년을 시묘 살면서 죽ㆍ채소ㆍ과일 먹는 것까지 《가례》에 의하였으며, 그의 모친을 섬기기를, 매일 혼정신성(昏定晨省)을 하였는데, 나이 50이 넘어서도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모친이 죽자 그 부친의 초상 때와 같이 《가례》에 의하여 행하였다. 세조가 불렀으나 나가지 아니하였다가, 주상(성종) 9년, 부름에 응하여 사재감(司宰監) 주부(主簿)가 되었는데, 어느 날 불려서 내전에 들어가니 임금이 묻기를, “경은 집에 있을 때 얼음을 깨니 고기가 뛰었다는데, 과연 그런 일이 있는가.” 하였다. 군이 답하기를, “겨울은 고기가 없는 때라 부친은 잡지 못하리라 하였사온데, 그물을 치고서 애써 구하다가, 다행히 잡았습니다. 부친은 기뻐서 너의 효성에 감동한 까닭이라고 하며, 고을 사람들은 깊은 연유도 살피지 아니하고, 효성에 감동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나, 신은 실로 그와는 같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임금이 묻기를, “경은 무슨 책을 읽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서》와 《이경》을 읽었습니다.” 하니, 또 묻기를, “사서와 이경 중에서 어느 말이 제일 옳던가.” 하니, “사서 이경 중 《서전》에 순(舜)의 대효를 말하였사온데, 이는 신이 하고자 하는 바이오나 능하지 못하옵고, 또 주공(周公)의 충성을 말하였사온데, 신이 하고자 하오나 능히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듣고 오래도록 감탄하였다.
○ 청주(淸州)에 양수척(楊水尺) 3형제가 살면서 소행이 어질지 못하더니, 경징(慶徵) 군이 그의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말을 듣고는 감화하여, 그 나쁜 버릇을 버리고서 온화하고 공손하게 아들의 도리를 행하며, 또 혼정신성하였다. 부모의 초상 때에는 한 모금 물도 입에 대지 아니하고, 또 3년을 시묘살이 하면서 술과 과일을 먹지 아니하였다. 3년상을 마친 뒤에는 3형제가 같이 살면서 우애하는 환심이 극진하였고, 서로 경계하기를, “만일 우리가 좋지 않는 행실을 하여서, 경 생원(경징군)이 그를 들으면 그 또한 부끄럽지 않겠느냐.” 하였다.
○ 생원 유원(兪垣)은 면천인(沔川人)이다. 무신년간에 책을 끼고 궐문에 나가 배운 것 중에서 수천 가지 말을 진술하였는데, 그 말이 모두 조정의 병폐를 간절히 집어 내었다. 그런데, 사림들은 모여서 그저 웃곤 하였다. 유원은 자기가 거처하는 정자를 청풍정(淸風亭)이라 하고, 또 그 벗인 박생(朴生)은 그 재(齋)를 명월재(明月齋)라 편액하였는데, 진신(縉紳)들 사이에서 웃을 만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유청풍ㆍ박명월 같다고 조롱하였다. 두 사람은 불우하여 과거 시험을 보지 아니하였으며, 또한 일찍 벼슬에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하었다.
○ 임인년에 개령현(開寧縣) 송방리(松坊里)에 사는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옛 석불을 얻었는데, 이목구비가 모두 없어졌기로 그저 밭 언덕에 두었는데, 우연히 천식을 앓고 있는 어떤 사람이 와서 절하였더니, 병이 좀 나은 것 같은지라 드디어 영험이 있다 하며, 어느 사람은 무슨 빛이 비친다고 하므로, 이웃 여러 고을에서 오랜 병으로 시달리던 자며, 아들이 없는 사람과 아직 장가들지 못한 사람, 노비를 잃은 사람들, 무릇 마음속에 하려고 하는 것이 있는 사람은 기도하면 문득 징험이 있다고 하여, 남녀가 이리저리 돌아가며 미포(米布)와 지전(紙錢)이며, 향촉(香燭)ㆍ화과(花果)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한 중이 와서 향불 올리는 것을 주관하고 시주하는 자가 있어서, 기와집을 짓고 또 큰 절을 지으려 하니, 사족(士族) 부녀(婦女)들이 모두 친히 와서 기도 드리고, 개령 현감(開寧縣監)과 금산(金山) 고을 훈도(訓導) 같은 이들도 와서 자식의 병이 낫기를 빌었고, 혹은 후사를 이을 수 있도록 빌었다. 이때에 금산 군수 이인형(李仁亨)은 이 말을 듣고, 유생과 아전 포졸을 보내어, 그 중을 잡아오게 하고, 시주하는 사람들을 쫓아버리게 하였다. 이때 마침 김 문간공(文簡公 점필재)이 응교(應敎)의 명을 사퇴하고 금산에 있었는데, 이인형에게 하시(賀詩)를 주어 이르기를,
채전에 버려두어 몇 봄인지 모르던 것 / 抛擲菜田不記春
함부로 생긴 주먹만한 돌에 어찌 신이 있으리 / 頑然拳石有何神
애초에는 빌어먹는 목거사 같더니 / 初如求食木居土
점차 돈 모으는 토사인이 되었네 / 漸作撞錢土舍人
남녀 몇 집안이나 장차 더럽히려는가 / 男女幾家將汚染
향등은 1리나 그대로 따라 있네 / 香燈一里欲因循
우리 원님 곧은 것 그대로 빈주 원님일세 / 我侯直是邠州守
요호를 격파하고 맑은 세상 만드리라 / 擊破妖孤
하였더니,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기어서, “성조(聖朝)에 영웅 있는 줄 이제야 알겠노라.”는 글귀가 있기까지 하였다. 이제 개령의 석불은 요호보다도 더욱 괴상한데도, 누가 감히 쳐서 고혹된 것을 없애지 못하였는데, 명부(明府)가 다른 고을임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아전들을 보내어 요수(妖首)를 쫓아 잡아오고, 시주하는 지전(紙錢)을 태워서 우민으로 하여금 환하게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깨닫게 하였으니, 진실로 세상에 드문 하나의 기특한 일이라 하겠다. 《소문쇄록》
○ 응교(應敎) 최보(崔溥)는 나주인(羅州人)이며, 정자(正字) 송흠(宋欽)은 영광인(靈光人)이다. 동시에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함께 말미를 받아 고향에 온 일이 있었다. 그들 본집의 거리가 겨우 15리쯤 되었는데, 하루는 송 정자가 최 응교의 집을 찾아가서 말마디 하다가, 최 응교가 묻기를, “그대는 무슨 말을 타고 왔는가.” 하니, 송 정자가 답하기를, “역마를 타고 왔습니다.”고 하니, 최 응교가 다시 말하기를, “국가에서 준 역마를 자네 집에 매어둔 것과, 자네 집에서 우리 집에 오는 것은 사사일인데, 어찌 역마를 타고 왔는가.” 하며, 최 응교가 조정에 돌아가서 이 일을 알리고 파직시키려고 생각하였다. 송 정자가 응교에게 찾아가서 사과하자, 최 응교는, “자네 같은 연소한 사람들은 앞으로 마땅히 조심하는 것이 좋다.”고 일렀으니, 조종조(祖宗朝 성종) 때에 사대부들이 법을 지키며, 벗들 사이에 선(善)으로 권려하고, 의(義)로써 심복시킴이 이 같았으니, 가히 모든 일을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전언왕행록》
○ 성종이 승하하던 날에 성중에 있는 사대부며 거족으로서 혼인하는 집이 여러 집이었는데, 어떤 사람은 아침을 타서 가고, 어떤 사람은 오시(午時)가 되어서 가며, 어떤 사람은 모르는 체하고 갔었다. 그 후 이 일이 발각되어 이들 모두 벌받게 되었다. 그런데 죽성군(竹城君) 박지번(朴之蕃)은 무인으로 글자를 알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이었다. 이때 하루 전날 밤에 아들의 초례를 지내게 되어서 손님과 동료들이 다 모여 있는데, 갑자기 대궐 안에서 상왕의 병환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박지번이 이에 말하기를, “군부(君父)의 병이 위독하니, 어찌 신하로서 차마 혼례(婚禮)를 사사로이 행하리오.” 하고, 드디어 손님들과 동료들을 사절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당시에 어느 논란하는 자가 말하기를, “유림(儒林)이 오히려 무신보다 못하니, 한탄할 일이다.” 하였다. 《용재총화》

[주D-001]김연거(金蓮炬)의 유의(遺意) : 당 나라의 무종(武宗) 때에 한림학사를 지극하게 대접하여 밤 늦도록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숙직실로 돌아갈 때에 황제 방에 있던 금련 촛대를 내시에게 들려서 앞길을 밝혀 주게 한 고사.
[주D-002]조예(皁隸) : 각 관청의 사령들은 보통 검은 옷에 검은 벙거지를 쓰게 되었으므로, 그를 조예 혹은 검은 하인이라고 말한다.
[주D-003]구익부인(鉤弋夫人) : 한 나라 무제(武帝)의 후궁인데, 무제는 장성한 아들이 없이 늦게야 구익부인이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를 후계로 정하고, 후일에 황제의 모친으로 정권에 간여할까 염려하여 사랑하는 구익부인을 사약하여 죽였다.
[주D-004]벌빙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 대부의 지위에 올랐다는 말. 예전 중국에서는 대부(大夫)의 지위에 있으면, 각자가 빙고(氷庫)를 묻어놓고 겨울에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여름에 쓰게 되어 있었다.
[주D-005]걸구의 변명 : 괴생은 초한 시대(楚漢時代)의 괴철(蒯徹)이라 하는 웅변가인데, 그는 그때의 한 나라의 대장인 제왕 한신(齊王韓信)을 달래어서 한 나라와 분리하여 독립하기를 권하였으나, 한신이 듣지 아니하였다. 그 후에 한신이 실각하여 한 나라 임금에게 죽음을 당한 뒤에 한신을 반역하라고 꾀었다고 괴철을 체포해다가 심문할 적에 괴철의 말이 “걸주의 개가 요 순을 보고도 짖는 것은 요순이 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주인이 아니기 때문인데, 나도 내 주인이 아니라서 그랬다. 나도 내 주인인 한신을 위하여 충성할 뿐이었다.”고 답변하여 살려주게 되었다.
[주D-006]증자(曾子)의 역책(易簀) : 증자가 죽을 때에 노(魯) 나라의 정권을 잡은 계손씨(系孫氏)가 보내준 자리[簀]를 의리에 합당하지 않는다 하여 다른 자리로 바꾸어 깔고 죽었다 한다.
[주D-007]자로(子路)의 결영(結纓) : 자로는 위(衛) 나라의 내란에 싸우다가 창에 맞아 죽게 되었을 때, “군자는 죽을 때에도 갓을 버리지 못한다.” 하고, 끊어진 갓끈을 다시 매고 죽었다 한다.
[주D-008]금비(金篦) : 금으로 만든 칼. 그것으로 눈에 끼어 있는 백태를 긁어낸다고 한다.
[주D-009]초인사 : 전국 말기에 초 나라 사람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이 지은 글. 그 글은 모두 원체가 비대한 것이다.

농암집 제7권
 소차(疏箚)
영암(靈巖) 유생을 대신하여 지은 연촌서원(煙村書院)의 사액(賜額)을 청하는 소 경신년(1680)

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예로부터 조정에서 벼슬했던 인물들 중에 일단 들어가면 물러나지 않고 녹을 끌어안고 총애를 탐하다가 신세를 망친 사람은 많고, 결연히 물러나 부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겨우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 상황을 고찰하여 논하자면, 이들은 또 모두 쇠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화를 당하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자신을 온전히 할 방도를 궁리한 끝에 벼슬하지 않은 경우이거나, 이미 최고의 명성과 지위를 누렸기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 그리한 것일 뿐입니다. 성군(聖君)의 시대를 만나 임금이 크게 등용할 의향이 여전한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떠난 경우는 수백 수천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더구나 절조(節操) 하나만으로 자족하지 않고 대도(大道)에 뜻을 두며, 유유자적 한가로이 지내지 않고 실천에 힘쓰는 경우로 말하자면 어찌 더욱 뛰어나 그와 같은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신들은 먼 고을의 어리석은 선비로서 견문이 넓지 못하지만 한 가지 들은 것이 있습니다. 세종(世宗), 문종(文宗) 때에 신(臣) 최덕지(崔德之)가 있었으니, 그는 한림원(翰林院)에서 출발하여 옥당(玉堂)과 대각(臺閣)을 거치고,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있다가 물러나 영암에서 지내면서 서재를 지어 존양(存養)이라고 편액을 달고 두문불출하였는데, 당시는 세종의 만년이었습니다. 문종이 즉위했을 때 불러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제수하고 순수하고 진실하다고 칭찬하며 계속 등용하려 하였는데, 조정에 있은 지 2년도 못 되어 사직소를 올리고 돌아와서 끝내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의 정치와 교화는 세종, 문종 때보다 더 융성한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뛰어난 인재들이 시운(時運)을 타 구름같이 모여들고 경학과 문장에 밝은 선비들이 진기하고 뛰어난 식견으로 줄지어 조정에 서서 모두 공명(功名)을 떨쳤으니, 이는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시절이었습니다. 최덕지의 그 훌륭한 재주로 그들과 어울릴 때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으니 만일 느긋하게 따라가며 시운에 편승하였더라면 경상(卿相)의 자리에 올라 공명이 찬란했을 터인데, 벼슬을 버리고 멀리 떠나서 변방 산천에 은둔한 채 일생을 마쳤습니다. 이는 경중의 구분에 밝고 영욕(榮辱)의 경계를 초월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니, 저들 기미를 살펴 화를 피하는 자들과 지위가 극도에 이른 뒤에야 그만두는 자들의 경우는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리고 예로부터 은둔한 선비는 대부분 스스로 고상함을 표방하여 가장 훌륭하다고 여기고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면서 마음 쓰는 것이 없었으니, 이들이 비록 부귀의 유혹에 빠져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는 자들보다는 낫다 하나, 그 역시 도(道)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 지금 최덕지는 귀향하여 마침내 맹자(孟子)가 말한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한다.[存心養性]’는 말을 택하여 거처하는 집의 이름을 지었으니, 그가 바른 학문에 마음을 두고서 덕을 향상시키고 학업을 닦는 일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부귀와 빈천을 취하고 버리는 기준이 분명해진 뒤에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는 공부가 치밀해지고,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는 공부가 치밀해지면 부귀와 빈천을 취하고 버리는 기준이 더욱 명백해진다.” 하였는데, 최덕지로 말하면 이에 가깝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에 기록된 것이 소략하여 그의 말과 풍격을 상세히 상고해 볼 수 없으니 애석합니다.
그러나 그 높은 지조와 바른 마음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 후세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손자 대에 이르러 최충성(崔忠成)이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특출한 재주와 독실한 학문으로 수제자라 일컬어졌으니, 이는 그 사우(師友)의 연원이 본디 그럴 만했을 뿐만 아니라 선조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최덕지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이미 200여 년이 흘렀는데도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도 변치 않아서 남쪽 고장을 찾아오는 사대부는 반드시 이른바 존양루(存養樓)라는 곳을 방문하여 그의 초상 앞에 예모를 갖추고 탄식하며 발걸음을 떼지 못하곤 하니, 그가 남기고 간 영향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 또한 깊다 하겠습니다.
지난 경오년(1630, 인조8)에 온 읍의 선비들이 힘을 모아 사당(祠堂)을 세워 최덕지를 향사하고 최충성을 배향하였는데, 향사하는 일이 세월이 아무리 오래 지나도 여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먼 지방의 고루한 곳인 관계로 아직까지 조정에 사액(賜額)을 요청하지 못하여 사류(士類)의 수치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삼가 보건대 성상께서는 현인을 높이고 도를 중시하여 선비들이 행하고 싶어하는, 사문(斯文)의 누락된 전례(典禮)를 모두 흔쾌히 행하고 계시니, 신들은 지금 이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감히 여럿이 함께 와서 대궐문 아래에서 명을 청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최덕지의 출처의 전말과 학문의 대체가 사류의 존경을 받을 만함을 살피시고 특별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시어 편액을 하사함으로써 그를 표창하시어 먼 지방의 선비들이 현인을 존경하는 성심을 이룰 수 있도록 하시고, 후세에도 보고 느끼는 점이 있어 분발하게 하시기를 바라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신들은 우러러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주C-001]영암(靈巖) …… 소 : 작자의 나이 30세 때인 1680년(숙종6)에 지은 소로서, 작자의 부친인 김수항(金壽恒)이 전라도 영암에서 귀양살이할 당시에 작자가 부친을 만나기 위해 그곳에 여러 번 왕래한 적이 있었던 인연으로 대작한 듯하다. 연촌서원은 세종과 문종 때의 문신인 최덕지(崔德之)와 그의 손자 최충성(崔忠成)을 향사(享祀)하는 서원으로, 전라남도 영암의 사류들이 1630년(인조8)에 세운 것이다. 당시에 최덕지의 생존시에 그린 초상화인 영정(影幀)이 그가 거처하던 존양루(存養樓)에 봉안되어 있었다. 《煙村遺事》
[주D-001]존양루(存養樓) : 최덕지가 남원 부사를 그만두고 내려와서 건립하여 거처하던 곳으로 영암 덕진면(德津面) 영보리(永保里)에 있는데, 존양당(存養堂)이라고도 한다.

 

 農巖別集卷之二
 附錄 一
鹿洞書院賜祭文 肅宗癸巳○知製敎魚有龜製 a_162_533b


維歲次癸巳六月丙子朔十二日丁亥。國王遣臣禮曹正郞吉景祖。諭祭于故直提學崔德之。故領議政金壽恒。故士人崔忠成。故判書金昌協四臣之靈。王若曰。道學節行。世所矜式。祀賢饗德。邦有典則。侃侃直學。望實俱赫。遭際英陵。進途方闢。一投州紱。高臥月出。杜門講學。玩賾鄒說。堂扁存養。用功微密。文廟乃嘉。召致內閣。賞其純實。恩顧優渥。尺疏乞骸。復遂初服。終身邱壑。風勵頹俗。庭訓所漸。有孫亦賢。薰德師門。志道妙年。識高行篤。遹紹家傳。繄我良佐。邦國蓍龜。忠純其操。莊穆其資。親炙名祖。切磋大老。尊聞行知。大展抱負。身任世道。抑陰扶陽。一節三朝。德業162_533c彌章。四入中書。再遷南裔。惟卿進退。占時否泰。永言龍蛇。曷勝悼悔。睠彼朗山。是卿湘沅。迪我南士。餘敎斯存。淇竹興思。沒世不諼。嶷嶷尙書。趾美先躅。業承詩禮。器鞰珪璧。經幄討論。昌言啓沃。中罹變故。遯于荒谷。俛焉自修。一心求道。探溯紫陽。叩抽鍵奧。眞知實踐。造詣益精。扶植世敎。模範後生。光塵所曁。衿紳均慕。前後四賢。跡留斯土。祖孫相望。父子並美。多士協謀。立廟以祀。齊享于右。列配其次。玆宣華額。俾聳瞻聆。名叶鹿洞。輝映千齡。遣官致酹。牲酒肥香。靈其來格。庶歆此觴。

太虛亭詩集卷之一
 七言律詩
送崔直提學歸田。 三首。 a_009_168d

始終忠直荷恩綸。藉甚名高動縉紳。夬夬危機知足客。紛紛要路折腰人。無何鄕裏忘塵慮。存養堂난001009_169a中葆性眞。太史明朝應有奏。壽星還與少微隣。

昂昂獨鶴出群鷄。綽綽行藏命與偕。應鵠已能依日月。縶駒終得老山谿。紆靑有客爭彈指。垂白無人解乞骸。自笑悠悠俄十載。五湖風月夢中迷。

每詠何曾欲厚顏。果哉今古似君難。一區泉石誰爭所。四座琴書自適閑。淸夢幾曾尋綺陌。塵蹤那得訪仙關。離觴且擧江之滸。回首湖南思未闌。


[난-001]存養堂 : 存養堂乃完山崔德之

 

지사면_지사면 소개


연 혁

백제때 이곳을 중심으로 거사물현(居斯勿縣)이라고 하여 독립된 현(縣=고을)이었는데 그 관할구역은 현 남원시(南原市)북부 3개면(덕과,보절,사매)과 장수군(長水郡)산서면 본군의 남부 3개면(오수,삼계,지사)이었다.
통일신라(景德王16년757년)이후 청웅현(靑雄縣)이라하여 임실군에 속하고 고려초에 다시 거령현이 되어 남원부에 속하여 일명 영성(寧城)이라하였다.
조선조에 와서는 남원 48방중 하나인 지사방이 되었다.당시에는 1개방에 사액서원인 영천서원을 비롯한 관곡(館谷),덕암(德巖),주암(舟岩),현주(玄洲)등 5개의 서원이 있어 선비의 요람이기도 하였으며 1914년4월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임실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실군 동남방에 위치하여 임실읍에서 동남쪽으로 16㎞ 떨어진 면소재인 방계리를 중심으로하여 동쪽은 장수군 산서면,서쪽은 오수면,남쪽은 남원시 덕과면,북쪽은 성수면에 둘러싸인 해발 140m내외의 분지이다. 면적은 1,848㎡로 협소한 편이나 비옥한 논밭에 수리시설도 잘 되어있다.

일 반 현 황

  • 지리적 여건 : 임실군 동남방에 위치하여 임실읍에서 동남쪽으로 16㎞ 떨어진 면소재인 방계리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은 장수군 산서면,서쪽은 임실군 오수면,남쪽은 남원시 덕과면,북쪽은 임실군 성수면에 둘러싸인 해발 140m내외의 분지이다.
  • 면 적 : 18㎢ (농지:38%, 임야:46%, 기타:16%)
  • 가구및인구수 : 661세대 1,584명

행 정 구 역

  • 지사면은 7개 법정리 17개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마을의 명칭과 유래는 다음과 같다.
마을 뒷산이 둥그렇게 생겨 원산이라 불렀다고 하며 당초에는 시묘 터로 발전하였다는 설도 있다. 덕암서원이 있고 원산초등학교가 있던 곳이다.

 

지사면 연혁 및 명칭유래 현황
행정리 연혁 및 명칭유래
館基里
(관기)
약 500년전 합천 이씨 비암공(比巖公) 휘 형남(亨南)이 정착한 이래 밀양 박씨가 들어와 현재는 밀양 박씨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고가면서 이런 궁벽한 곳에도 객주집이 있다고 하여 객주집터라 하여 집관(館)자, 터기(基)자를 써서 관기라고 불리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사면의 맨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관곡서원과 안씨계당 팔초정등 유서깊은 건물과 장군바위 등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기도 하며 현재는 밀양 박씨, 합천 이씨, 순흥 안씨, 천안 전씨, 장수 황씨 등이 살고 있다.
圓山里
(원산)
1530년(중종25년)경 전주 최씨가 처음 정착하여 성주 이씨, 평강 채씨, 진주 소씨 등이 모여서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仙源里
(선원)
홍주 이씨가 1900년대에 정착한 이래 마을을 이루었고 당초는 선운리(船運里)라 하였다가 선경 도원(仙境 桃源)이라 하여 선원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한때 한천 이환용(寒泉 李桓溶)옹이 회당 홍순주(晦堂 洪淳柱) 선생을 훈장으로 모시고 서당을 세워 몽학을 할 당시는 인동은 물론 외지에서 많은 학동들이 모여들고 거유(巨儒)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마을이 매우 흥성하였으며 모두가 부러워하는 이상촌이기도 하였다. 마을 뒤에는 송림에 둘러싸인 모정이 있고 그 앞에는 문하생들이 세운 회당 선생 유허비각(遺墟碑閣) 과 마을 동쪽 청룡날 끝에는 순흥 안씨 양세기적비(안달섭의 선조비 전주 최씨, 선비 재령 이씨)가 서 있다.
新川里
(신천)
이 마을은 1434년(세종16년)경 진주 하씨가,그후 해주 오씨가 살았으며 그후 1787년(정조11년)경에 협계 태씨와 전주 최씨가 들어와 살게 되었다. 사촌의 안동네라는 뜻으로 새내라 불리워졌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자고로 피난터로 알려 졌으며 유명한 지관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雁下里
(안하)
고려때에 원씨가 살았다고 하며 그 후 평강 채씨가 살았다. 1450년(세종45년)전주 최씨가 정착하였고, 전주 이씨, 합천 이씨, 평산 신씨, 남원 양씨, 순흥 안씨, 협계 태씨 등이 모여 살고 있다.당초에 안화(安和)라고 부르다가 마을 뒤의 12연주(連珠)가 마치 기러기가 나는 모양 이라고 하여 안하(雁下)라 불리우게 되었으며, 장수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다.
大井里
(대정)
1650년(효종17년)경 부안 김씨, 경주 정씨가 살았으며 1782년? (정조6년)이후 전주 최씨,옥천 조씨, 전주 이씨, 동래 정씨 등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뒷산을 연화도수라 하였고 큰 석천이 있어 한우물이라 불리다가 일제초부터 대정이라 불리었다.
琴坪里
(금평)
1506년(성종10년)경 전주 최씨가 옥녀봉 아래 가무터에 정착하였다.옥녀봉아래의 가무터에 절터, 서골, 진등, 희곡 등에 산재한 가구가 모여서 금곡으로 불리다가 일제시에 목평과 합쳐서 금평이라 불렀다. 본 면에서는 맨 처음으로 1945년 원불교회관이 들어섰다.
牧坪里
(목평)
1761년(영조27년)경 전주 최씨와 은진 송씨가, 그후 수원 백씨 순흥 안씨 전주 유씨가 정착하게 되었다.산세가 아름답고 농토가 비옥하여 살기좋은 부자 마을로 알려져 있다.
寧川里
(영천)
이 마을은 고려 때에는 거령현 소재지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순흥 안씨가 정착한 이래 많은 성씨가 모여서 마을이 크게 형성되었으며 왜정 때에는 주조장, 정미소, 대장간 등 많은 소규모의 산업시설이 들어서 있어 본 면의 경제를 주름잡기도 하였다. 지방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된 유일한 사액서원인 영천서원이 있어 많은 유학생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沙村里
(사촌)
고려조 거령현 당시(1076년 경 고려 문종30년) 향교터로 형성되었으며 거령 이씨가 세거하면서 고려조의 문하시중 이능간(李凌幹)이 살기도 하였다. 1170년(고려 의종37년)경에는 전주 최씨가,1600년(조선 선조33년)경에는 합천 이씨,1780년(조선 정조4년)경에는 전주 이씨가 정착하여 마을이 크게 이루어졌다. 거령현 때에는 승상촌(丞相村=정승이 사는 마을)으로 불리워 졌으며 지사방의 소재지라 하여 지사랑 이라 불렀다가 행정구역 개편이후 사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 입구에는 전주 이씨 효열부 정려각이 있고 승상봉, 승상교,기암 쌍노암, 모정 관풍정,400여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정자나무 등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桂村里
(계촌)
이 마을은 1394년 (조선 태조3년)경에 벽진 이씨가 정착하였고 그후 전주 최씨, 합천 이씨, 문화 유씨 등이 정착하였다. 마을 뒤에는 명당설에 의하여 남원의 북속대지라는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의 명당에 영천 이씨 시조 이능간(李凌幹)의 묘가 있고 병자호란 때 사절신(死節臣)이요 병조참의를 지낸 벽진 이씨 충숙공 이상길(李尙吉)의 출생지이며 자고로 명당터라 하여 계촌이라 이름하였다. 마을 앞 다박솔과 모정이 인상적이다.
芳溪里
(방계)
지사면의 소재지로 재령 이씨가 정착한 후 1435년(세종17년)경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선생이 남원부사로 부임하여 이곳을 초도순시하면서 산수가 빼어남을 보고 큰아들 호군 조(凋)를 살게 한 이후 마을이 크게 형성되었다. 지리 풍수설의 행주형(行舟形)이라 하여 마을 앞에 배 모양의 바위가 있어 주암이라 부르다가 1910년 이후 실곡, 삼산을 합쳐 방계리라 불렀다. 마을 앞 송림속에는 만추정(晩秋亭)과 연촌선생 유허비가 서있고 그 앞에는 지사면 경노당이 있으며, 마을 중앙의 주암서원에는 연촌 선생의 영정(影幀)이 보존되어 있다.
三山里
(삼산)
300여년 전 진씨, 송씨가 거주하다가 암내의 맑고 깨끗함에 취한 금산김씨가 마을을 이루어 살게 되었다. 홈대를 이용하여 농 용수를 끌어들여서 홈몰이라 불렀으며 그후 마을 수구에 낮은산 3개를 쌓아 수구를 이루고 삼산이라 불렀다. 지금도 선돌 세 개가 서 있다.
實谷里
(실곡)
270여년 전 금산 김씨가 전남 곡성으로부터 이사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뒷산이 마치 황소가 건너는 형국이라 하여 황우도강(黃牛渡江)아라 하였고, 똥이 나오는 꼬리 밑에 마을이 있어 잘 산다는 것이다. 남원에 속했을 때 창(倉)이 있던 곳으로 북창이라 하였고 1910년 이후부터 실곡이라 불렀다.
溪山里
(계산)
목천 마씨가 처음 살았다 하여 마촌이라 했고 그후 정씨가 살게 되어 정촌이라 부르다가 장연 변씨, 진주 강씨가 살게 되어 마을이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마을 이름은 현주라 하였으나 조선 태조가 등극할 때 산신령께 기도드리기 위해 성수산으로 가는 도중 현주천을 건너려 하는데 물이 적으니 천(川)을 계(溪)로 하고 물이 없으니 현(玄)이라 했다 하여 현계(玄溪)라 불렀다. 1910년 이후 계산이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 현주서원(玄洲書院)이 있고 임실향교 전교를 역임한 송암 강범희(松唵 姜凡凞)공의 추사비각(追思碑閣)이 서있다.
鳳棲里
(봉서)
1911년 광주에 사는 이연희라는 사람이 산수가 아름답다고 들어온 후 김.송씨가 계속 들어와 마을을 형성했으며 옛날부터 한국의 8대명당인 권렴관시형(捲簾觀市形=주렴을 걷고 장터를 본다는 형국)의 대지가 있다고 하여 많은 술객들이 드나들었다. 처음엔 새골(鳥谷)이라 부르다가 봉황(鳳凰)이 깃든다고 하여 봉서라 부르게 되었다.
玉山里
(옥산)
이 마을은 1760년(영조36년)경에 광주이씨 이거만이 산수(山水)의 수려(秀麗)함에 매료되어 머물러 살게 되었으며 그후 장씨, 소씨, 송씨가 점차 이주해 마을이 크게 형성 되었다.마을 뒷산이 마치 옥을 꿰 놓은 것 같다하여 연주 산이라 불렀고 옥산사 라는 절이 있어 옥산이라 하였다는데 지금은 절의 흔적도 없고 서쪽은 돌이 빙 둘러져 성안에 들어가는 것 같으며 마을 앞에 벽옥제가 있어 옛날부터 시인 묵객이 많이 찾았으며 대대로 선비가 배출되기도 하였다.

 

농암집 제36권
 부록(附錄)
묘표(墓表) [김창흡(金昌翕)]


아우 삼연(三淵) 창흡(昌翕)

아, 이것은 농암(農巖) 김 선생(金先生)의 묘이다. 선생이 일찍이 조정에서 벼슬했음에도 불구하고 관직으로 칭하지 않고 초야에서 불리던 호를 내건 것은 만년에 쌓은 덕이 여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본관은 안동(安東), 휘(諱)는 창협(昌協), 자(字)는 중화(仲和)로, 좌의정 시호 문정공(文正公) 휘 상헌(尙憲)의 증손이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증(贈) 영의정 휘 광찬(光燦)의 손자이자, 영의정 휘 수항(壽恒)의 둘째 아들이다. 모친은 안정 나씨(安定羅氏)로 해주 목사(海州牧使) 휘 성두(星斗)의 따님인데, 숭정(崇禎) 신묘년(1651, 효종2) 1월 경진일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말을 배우면서부터 사람과 귀신을 구별할 줄 알았고, 어질고 너그러워 남의 처지를 이해할 줄 알았으며, 입에서 나오는 말이 대부분 공정한 말이었으니, 이 때문에 부모의 사랑을 받았다. 글을 읽을 줄 안 뒤로는 깊이 마음을 두고 탐구하여 바깥일에 눈을 돌리지 않았으므로 어른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기유년(1669, 현종10)에 사마시에 입격하고 임술년(1682, 숙종8)에 문과에 장원하여 규례대로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다. 병조 좌랑, 이조의 좌랑과 정랑, 장악원 정을 거치고 교서관 교리, 한학(漢學)과 중학(中學)의 교수, 지제교를 겸임하였고 중간에 영남 어사(嶺南御史) 및 북평사(北評事)가 되기도 하였다. 역임한 삼사(三司)의 관직으로는 옥당(玉堂)의 수찬과 교리, 사헌부의 지평과 집의, 사간원의 헌납과 대사간 등이며, 동부승지에서 대사성으로 옮겨졌다가 청풍 부사(淸風府使)로 나간 것으로 벼슬살이를 마감하였다.
선생은 경술(經術)이 당대에 최고였는데 조정에서 펼친 언론은 이에 뿌리를 둔 것이었으며, 마음 씀씀이가 공명정대하여 공연한 의심이나 막힘이 없이 평탄하였다. 전조(銓曹)에 있을 때는 주의(注擬)하는 것이 매우 공정하였으므로 당시 사류(士流)가 분파로 갈려 서로에 대한 질시가 심한 와중에도 선생에 대해서는 편당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옥당에 들어가서는 임금에게 진심으로 학문에 전념하고 신하에게 하문하기를 꺼리지 말라고 권면하였고, 경전의 뜻을 풀이함에 있어서는 명백하고 유창하며 절실하여 상하가 모두 귀담아들었다. 한번은 상소 하나를 올렸는데 임금의 학문이 노정하고 있는 문제점을 논한 것이 본말을 정확히 짚어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읽을 만하다고들 말하였다. 대사성으로 있을 적에는 인재를 육성하는 방법이 적절하여 유생들이 흥기하는 점이 많았고, 교지에 응하여 경계의 말씀을 올린 소는 깊이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는 임금의 본심을 지적하였으니 사람들이 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때문에 조정에 있기가 불안해져서 청풍 부사로 나갔다가 기사년(1689, 숙종15)에 벼슬을 그만두고 의정공(議政公 김수항(金壽恒))을 따라 진도(珍島)의 유배지에 갔는데, 마침내 그곳에서 부친이 사약을 받는 큰 화를 당하였다.
갑술년(1694, 숙종20)의 환국(換局) 뒤에 호조 참의에 제수되자 선생은 진정을 다해 상소하였는데, 그 대의는 다시는 영화로운 벼슬길에 서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가족들이 대부분 억지로라도 제명(除命)에 응하라고 권면하였으나 선생은 이르기를, “나는 머리에 사모(紗帽)를 쓰지 않겠다고 결단한 지가 오래되었다.” 하였다. 그 뒤로 대사간, 부제학, 좌승지, 우승지, 동부승지, 이조 참의에 연달아 제수되고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형조ㆍ호조ㆍ예조ㆍ병조ㆍ이조 참판, 대사헌에 승진되었으며 양관(兩館) 대제학으로서 새로 형조ㆍ예조 판서에 발탁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임금의 돈독한 권면이 더욱 지극해지고 백씨(伯氏) 의정공을 특별히 탑전(榻前)에 불러 면전에서 자상하고 간절히 유시하여 반드시 조정에 나오도록 권면하게 하였으니, 이는 고사에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처음 먹은 뜻을 단단히 지켜, 죄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나갈 수 없다는 뜻을 보이자 임금도 그 뜻을 뺏지 못하였다.
선생은 당시 이미 세상에 뜻을 끊고 학덕을 쌓는 데에 전념하여 때를 놓칠세라 부진런히 매진하였으니, 비록 계속되는 참척(慘慽)으로 병이 깊어졌어도 한 번도 손에서 경서를 놓아본 적이 없었다. 선생이 주(註)를 낸 주자의 저서는 심오한 뜻을 더욱 밝혀 놓았으니, 그 큰 뜻으로 논저하고 싶었던 것이 이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무자년(1708, 숙종34) 4월 11일에 양주(楊州) 삼주(三洲)의 정침(正寢)에서 별세하였으니, 향년 58세였다. 이해 6월 9일에 석실(石室)에 있는 선영의 갑향(甲向)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정관(靜觀) 선생 단상(端相)의 따님인데, 단정하고 엄숙하여 부인으로서의 법도가 있었으며 생몰년이 모두 선생과 같다. 뒤에 선생과 합장하였다. 아들은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이 숭겸(崇謙)으로, 뛰어난 재주를 지녔으나 일찍 죽었다. 그의 처 박씨(朴氏)에게 아들이 없자 선생이 조카 제겸(濟謙)의 아들 원행(元行)을 후사로 삼았는데, 지금 10세이다. 딸은 다섯을 두었는데 사위가 판관(判官) 서종유(徐宗愈), 이태진(李台鎭), 오진주(吳晉周), 박사한(朴師漢), 유수기(兪受基)이며, 이들이 낳은 아들딸이 모두 10여 명이다.
선생은 인자하고 명철한 자질을 지니고 대범하고 소탈한 심성을 지녀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용모와 태도에 자랑하는 모습이 없었고 행동에 구차히 어려운 일을 하는 경우가 없었으니,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따르는 데에서부터 집 안에 거처하고 손님을 접대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화순하게 할 뿐 다른 것이 없었다. 선생은 오직 포부가 커서 종신토록 벼슬을 단념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으며 문장의 수준이 높은 가운데 도(道)와 관련해서는 더욱 조예가 깊었다. 선생이 이룩한 이 위대한 경지를 사람들이 우러러보기는 하나 선생의 입장에서는 성품이 인자하고 효성스우며 식견이 고명함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 그렇게 하려고 하여 이룩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확고부동하게 지켜 뺏을 수 없는 것과 종일토록 힘쓰고 힘쓰는 것, 이 두 가지를 겸비하였으니, 군자가 체행하는 건괘(乾卦)의 덕에 가까웠다. 선생은 비록 스스로 《주역(周易)》을 배운 적이 없다고 말하였지만 나는 선생이 《주역》의 효용을 터득했음을 알겠다. 아, 훌륭하다.

             [주D-001]갑향(甲向) 언덕 : 남쪽으로 약간 비낀 서쪽을 등지고 북쪽으로 약간 비낀 동쪽을 향한 언덕을 말한다.

 

 

 

 

농암집 제36권

 부록(附錄)
묘지명(墓誌銘) 병서(幷序) [김창흡(金昌翕)]


선생은 성은 김씨(金氏), 휘는 창협(昌協),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이며, 장지(葬地)는 양주(楊州)에 있는 석실(石室)의 선영에 있다. 그곳에 선조 5대의 비문이 있어 그 성씨의 원류(源流)를 상고해 볼 수 있는데, 특히 조부 증(贈) 영의정의 비문에 더욱 상세히 나와 있다. 선생의 부친이 안정 나씨(安定羅氏) 해주 목사(海州牧使) 휘 성두(星斗)의 가문에 장가들어 여섯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둘째가 곧 선생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말을 배우면서부터 사람과 귀신을 구별할 줄 알았고, 어질고 너그러워 남의 처지를 이해할 줄 알았으며, 가부(可否)를 논하는 것이 대부분 공정한 말이었으니, 부모가 이 때문에 기특히 여기고 사랑하였다. 9세에 목사공을 따라 해주의 관아에 갔는데, 행동거지가 저절로 법도에 맞아 어른처럼 엄숙하였으며 서책을 보는 데에 마음을 다 쏟아 바깥일은 안중에 없었다. 그리고 동배 중에 혹 다툼이 생겨 목사공에게 시비를 가려 주기를 청하는 일이 있으면 선생의 한마디 말을 듣고 판가름하곤 하였다.
15세에 정관(靜觀) 이 선생(李先生)의 집안에 장가들었다. 당시에 이 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며 강석(講席)을 크게 열었는데, 사랑스럽게 선생을 불러 도학(道學)에 마음을 쓰라고 일러 주자 선생이 개연히 흥기하여 비로소 과거 공부 외에 마음을 쓸 곳이 있음을 알았다.
기유년(1669, 현종10)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였는데, 이해에 이 선생이 별세하였다. 선생은 의지할 곳을 잃고 서글픈 심정으로 더욱 스스로 경전의 가르침에 힘을 쏟고, 경학에 대한 조예가 깊고 넓어지자 이따금 고문(古文)을 익혀 한유(韓愈), 구양수(歐陽脩)의 경지로 빠르게 나아갔다. 그러나 공교로운 수사를 가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고 이치의 비중이 크도록 노력하였다.
갑인년(1674, 현종15)에 우재(尤齋 송시열(宋時烈)) 송 선생(宋先生)을 용문산(龍門山)에서 만났는데, 질문한 것이 대부분 인정을 받았다. 그 뒤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기대와 인정이 더욱 중해지더니 뒤에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지을 적에 태반은 선생의 설을 따랐으며 임종할 때에 이르러서는 멀리 선생에게 뒷일을 부탁했다고 한다.
을묘년(1675, 숙종1)에 부친이 영암(靈巖)으로 유배 갔다가 영암에서 철원(鐵原)으로 이배되는 등 이리저리 떠돌며 실의 속에 지낸 것이 모두 6, 7년이었다. 선생은 평소부터 세속의 일에 관심이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산림 속에 은둔하며 학문에 정진하기로 뜻을 정했다. 부친이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 아래에 한 구역 터를 잡고 은퇴하려 하였으나 은퇴하지 못하고 만년에 은거할 곳으로 정해 두었는데, 선생이 마침내 그곳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서실에 ‘은구암(隱求庵)’이라는 편액을 걸고 의리의 맛에 심취하여 여생을 마칠 것처럼 하다가 경신년(1680, 숙종6)에 환국(換局)이 단행되자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임술년(1682, 숙종8)에 증광시 문과(增廣試文科)에 장원하였다. 선생은 일찍부터 조정과 초야의 기대를 받아 왔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앞길이 크게 열린 것을 앞다투어 축하하였으나 선생의 즐거움은 여기에 있지 않았다. 선생은 이조의 좌랑ㆍ정랑, 홍문관의 수찬ㆍ교리, 사헌부의 지평ㆍ집의, 사간원의 헌납ㆍ대사간, 승정원 동부승지,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고 청풍 부사(淸風府使)로 벼슬살이를 마감하였다.
옥당(玉堂)에 있을 적에는 마음을 다하여 임금을 계도하였으니, 경서를 진강(進講)하는 연석(筵席)에 올라서는 번번이 상에게 진심으로 학문에 전념하고 신하들에게 하문하기를 꺼리지 말도록 권면하였다. 그리고 반복하여 미루어 밝힌 것이 모두 불안한 인심(人心)과 은미한 도심(道心)의 기미였는데, 온화한 표정과 부드러운 어조로 아뢰었으므로 듣는 이들이 모두 공경히 귀를 기울였고 과묵한 상도 선생과 이야기를 주고받기를 좋아하였다.
대사성으로 있을 적에는 매일 유생들을 데리고 강석(講席)에서 수업을 하였는데, 깊은 뜻을 밝히고 혼미함을 떨쳐 내도록 인도함에 있어 모든 의리를 빠짐없이 포괄하여 일러 주었다. 그리고 간간이 제기를 진설하고 시를 주고받으며 가르침이 푹 배어들어 발양되게 하였는데, 예로부터 전해지는 네 가지 어법에 들어맞아서 선비들이 상당히 흥기되었다.
전조(銓曹)에서 행한 인사 행정은 주의(注擬)가 매우 공정하였다. 당시 사류(士流)가 분파되어 서로에 대한 질시가 날로 깊어가는 상황이었으므로 과격한 입장을 견지하는 쪽에서는 엄격히 구분하여 뒤섞지 말라고 선생을 충동질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이르기를, “저들 청탁이 이미 판가름 난 자들이야 진정 어쩔 수가 없지만 지금 또 스스로 청탁을 갈라 도태시키는 것은 너무 각박하니 공정한 일인지 모르겠다.” 하고는 그들의 비방을 내버려 두고 인사 방침을 바꾸지 않았다. 오직 선생과 협력하여 심사를 깊이 아는 이들만은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는 선생의 태도에 감탄하였다. 선생은 또 묘당(廟堂)과 대각(臺閣)의 신료들이 화합하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여 들어가서는 집안 식구들을 잘 타이르고 나가서는 젊은 부류들과 가부를 논평하기를 지성으로 하였다. 그러나 일이 이미 여러모로 견제받아 뜻대로 되지 않자 밤낮으로 근심하고 한탄하며 벼슬살이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병인년(1686, 숙종12)에 이징명(李徵明)이 후궁에 관한 일을 말한 것으로 인하여 임금의 노여움이 정도를 지나치자 선생은 상소하여 경계의 말씀을 올렸다. 선생이 조정에서 펼친 의론 중에 경학의 연원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두 통의 상소가 있는데, 하나는 옥당에 있을 적에 임금의 학문이 노정하고 있는 폐단을 논한 것으로 본말을 모두 짚어내어 사람들이 따라 미치기 어려웠고, 또 하나는 이 상소이다. 이 상소는 깊이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는 임금의 본심을 지적한 것으로, 더욱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조정에 있기가 불안해져서 스스로 꾀하여 청풍 부사로 나가게 되었다.
청풍 부사로 있으면서는 다스림에 요점이 있고 기강이 잡혀 아전들은 엄숙하고 백성들은 편안하였으니, 선생은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각(閣)에 발을 드리우고 초연히 지냈다. 그러는 중에도 부친을 근심하고 임금을 사모하는 마음이 시에 드러나 이별의 시름을 품고 못내 그리워하는 뜻이 있었다.
기사년(1689, 숙종15)에 부친을 따라 진도(珍島)의 유배지에 갔다가 마침내 부친이 사약을 받는 큰 화를 당하였는데, 유언을 받들 적에 백운산(白雲山)에서 여생을 마치겠다고 고하자 부친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여하였다. 상여를 받들고 바다를 나왔을 때에 길이 멀어 장지에 도착하기가 힘들고 모든 일이 급작스러워 경황이 없자, 황망히 일을 행하려는 자가 있었다. 이에 선생은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오늘날 장례를 행하는 데에 있어 검소하게 하라는 선친의 유명을 따른다는 것은 종이 이불, 소달구지 따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 밖에 행할 수 있는 것으로 예컨대 제전(祭奠)과 곡용(哭踊) 같은 것은 《가례(家禮)》가 있는데 어찌 구차히 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우재(尤齋)가 탐라(耽羅)에서 서울로 압송되고 있었는데, 선생은 이 노인에게 불행한 일이 있게 되면 비문을 부탁할 곳이 없게 될 것을 염려하여 마침내 슬픔을 참고 글을 얽어 중도에 급히 사람을 보내서 묘문(墓文)을 청하여 받아 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경황이 없는 때에도 예법을 따르고 선친의 행적을 영원히 전하기 위한 계책이 모두 유감이 없게 되었다.
장사를 치른 뒤에 모친을 모시고 영평(永平)에 들어가 송로암(送老菴)에서 상을 치렀는데, 이른 아침과 저녁으로 슬프게 호곡(號哭)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기력을 다해 연구해서 주자(朱子)의 저서에 주석을 내어 심오한 뜻을 더욱 밝혔다. 그리고 스스로 이전에는 《소학(小學)》 공부에 소홀했다고 생각하여 한층 더 힘써 행실을 검속해서 무거운 책임을 자임한 뜻이 있었다. 이에 원근의 사우(士友)들이 너도나도 도덕의 종주로 추앙하였는데, 창계(滄溪) 임영(林泳) 같은 이는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어 “도(道)의 근원을 깊이 추구하여 세상 밖에 홀로 우뚝 서라.”고 돈독히 권면하기도 하였으니, 그는 선생이 결연한 뜻으로 벼슬을 멀리하고 이 일에 매진하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상복을 벗고 나서는 이른바 농암여사(農巖廬舍)에 거처하며 가족과 함께 농사를 짓고 뽕을 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갑술년(1694, 숙종20)에 선친이 신원되고 이어 호조 참의에 제수하는 명이 있자 선생은 진정을 토로하여 상소하였는데, 그 대지(大旨)는 영화로운 벼슬길에 서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친척과 벗들이 대부분 모쪼록 왕명을 받들 것을 권면하고 가족들 중에도 그런 말을 하는 이가 있었으나 선생은 이르기를, “나는 머리에 사모(紗帽)를 쓰지 않겠다고 결단한 지가 오래되었다.” 하였다. 그 뒤에 차례대로 승진되어 대제학, 예조 판서에 이르자 상의 돈독한 권면이 더욱 지극해지고 백씨(伯氏) 의정공을 특별히 탑전(榻前)에 불러 선생을 조정에 나오도록 타이르게 하였는데 그 유시가 자상하고도 간절하였다. 이는 관례에 벗어난 일이었으니, 사람들이 한번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입을 모았고 식견이 있는 사우(士友)들 중에도 한번 신하로서의 의리를 펴라고 말하는 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처음 먹은 뜻을 단단히 지켜, 죄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나가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다. 이에 임금도 강권하여 될 일이 아님을 알고 그 뒤로는 더 이상 부르지 않았다.
선생은 갑술년 이후로 모친이 서울 집에 있는 관계로 문안하고 모시기에 편하도록 양주(楊州)의 삼주(三洲)에 나가 머물며 집을 지어 거처하였는데, 그동안 농암에 왕래한 것이 7, 8년이었다. 그러다가 독자와 두 딸을 연달아 잃더니 계미년(1703, 숙종29)에 이르러 모친상을 당하였다. 선생은 본디 병을 잘 앓았는데 혹독한 화를 당한 뒤로는 야윌 대로 야위어 가까스로 형체를 유지하더니 이어 전후로 상을 당하면서 몸이 완전히 망가져 피를 토하는 증상이 갑자기 생겼다. 결국 무자년(1708, 숙종34) 4월 11일에 삼주의 정침(正寢)에서 별세하였으니, 선생이 태어난 신묘년(1651, 효종2) 1월 2일로부터 58년째 되는 해였다. 아, 애통하다. 임금도 애통해하며 부의를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장례를 치를 적에 원근의 선비들이 달려와 슬픔을 다해 곡하였으며, 문인 중에 가마(加麻)한 이가 거의 6, 7십 명에 이르렀다. 그해 6월 9일에 석실(石室)에 있는 선영의 갑향(甲向)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 이씨(李氏)는 엄숙하고 단정하여 부인으로서의 법도가 있었는데, 생몰년이 모두 선생과 같다. 뒤에 선생과 합장하였다. 아들은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이 숭겸(崇謙)으로, 뛰어난 재주를 지녔으나 일찍 죽었다. 그의 처 박씨(朴氏)에게 아들이 없자 선생이 조카 제겸(濟謙)의 아들 원행(元行)을 후사로 삼았는데, 지금 진사(進士)이다. 딸은 다섯을 두었는데 사위가 군수(郡守) 서종유(徐宗愈), 이태진(李台鎭), 현령(縣令) 오진주(吳晉周), 박사한(朴師漢), 유수기(兪受基)이다.
선생은 인자하고 명철한 자질을 지니고 대범하고 소탈한 심성을 지녀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용모와 태도에 자랑하는 모습이 없었고 행동에 구차히 어려운 일을 하는 경우가 없었으니,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따르는 데에서부터 집 안에 거처하고 손님을 접대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화순하게 할 뿐 다른 것이 없었다. 또한 사람들을 대할 적에는 마음을 매우 공평하게 가져 비록 못된 자들이 으시대는 가운데 원수와 맞닥뜨리게 되더라도 곧은 도(道)로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을 품어 교묘히 배척하려 하지 않았으니, 좋아하거나 미워하고 사랑하거나 증오함에 있어 언제나 공평하게 하고 친한 이에게나 소원한 이에게나 한결같이 모두 진심을 드러내어 간격을 두지 않았다.
나는 천하의 훌륭한 선비와 교유하는 것도 모자라 선현들을 벗삼을 만큼 뛰어난 선생의 자질이 예컨대 한(漢)나라의 제갈공명(諸葛孔明), 송(宋)나라의 남헌(南軒 장식(張栻)), 우리나라의 이 문성(李文成 이이(李珥)) 같은 분들과 부합하는 점이 있음을 아는 바이니, 만일 선생이 세상을 어루만져 능력을 발휘했더라면 이른바 성심을 열어 공도(公道)를 펼치고 선한 이들을 받아들여 붕당을 깨뜨리는 것을 선현들과 똑같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자 물러나 고정(考亭 주희(朱熹))을 본받았다. 그리하여 온갖 이치를 종합하여 여러 가지 말을 절충하였는데, 한결같이 자신의 공평한 잣대를 사용하여 아무리 고정의 말이라 해도 구차히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이 깊지 않으면 믿음이 독실하지 않게 된다.”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오랫동안 답답해하며 탐구하더니 나중에는 의심이 깨끗이 풀려 견해가 일치되었다. 그 결과 마음속에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붓끝, 혀끝에서 흘러나오는 것에 이르기까지 한 꿰미에 꿰어진 것처럼 분명하고 곧잘 근거를 대었으니, 한 번도 실없는 사람처럼 부질없는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의리가 집약된 문제를 만나서는 분석할 점이 털끝처럼 미세하면서도 관계된 것이 중대하였기에, 비록 선유와 선배들의 정설(定說)이 이미 있고 사람들이 그것을 불변의 진리로 여기고 있을지라도 반드시 거침없이 논변해 나가 그 잘잘못을 따지며 이르기를, “이것은 천하의 공변된 이치이니 떠받들고 감싸 주기만 하는 것은 이른바 참된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가 아니다.” 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이르기를, “주자(朱子)처럼 공부하지 않으면 주자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주자의 후대에 태어났다고 하여 자신이 직접 사물을 탐구하여 이치를 궁구하지 않는 것은 바로 세속 유자(儒者)들이 자신의 태만을 합리화하기 위한 말이니 그 구차함을 볼 수 있다.” 하였다.
선생은 평소에는 부드럽고 윤택하기가 옥빛과 같아서 온화한 기색이 얼굴에 가득하고 말을 할 때에는 남을 다치게 할까 걱정하는 것처럼 조심하였다. 그러나 논변할 일이 있으면 간혹 사특한 말과 회피하려고 꾸며대는 말이 도(道)를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하여 반드시 논파하고 그대로 두지 않았는데, 그럴 때에는 목소리가 높고 엄하였으며 기색이 강개하여 그 위엄 있는 기상을 범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찍이 한 번도 선입견을 고수한 적이 없었으니, 누군가 타당한 견해를 한번 말하면 즉시 자신의 견해를 버리고 그것을 따랐다.
그리고 후학들을 대할 적에는 상대의 수준에 따라 이끌어 주면서도 왕왕 정조(精粗)를 두루 말해 주고 상하(上下)를 다 통하게 해 줌으로써 우리 유학에 이러한 경지가 있음을 알고 기쁘게 흠모하는 마음이 일어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선생이 목소리를 길게 뽑아 시가(詩歌)로 그러한 뜻을 드러내면 그 소리가 금석(金石)을 울렸으니, 그 때문에 선생의 덕음(德音)을 한번 들으면 심취하여 오랫동안 머물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따금 무능한 사람이 질문을 한 것이 우연히 뜻에 맞으면 종일토록 힘을 다해 가르치며 양쪽 모두 배고픔과 목마름도 잊었으니, 혹 손님과 벗이 곁에 있다가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떠나가도 개의치 않았다.
마지막 몇 년 동안은 병석에 있는 때가 많아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드물었고 아울러 강론하여 가르쳐 주는 일도 드물었으며, 문장을 지어 달라는 청이 있어도 한결같이 거절하여 물리쳤고, 시는 아들을 잃은 뒤로는 결코 다시는 짓지 않았다. 선생은 이렇게 모든 일을 줄여 나가며 마침내 근신하여 편안히 쉬면서 스스로 마음을 전일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면서 간간이 기록한 차록(箚錄)이 있으니 대체로 심(心)과 성(性), 체(體)와 용(用) 및 유가와 불가의 같은 점과 차이점에 대한 논변이었고, 또한 병으로 신음할 때라도 이러한 공부를 그만두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선생은 도(道)와 이치에 대한 이해가 원숙해져 무엇이든 환히 알았다. 다만 충분히 음미하고 즐겨 깊이 체화하고, 본성을 보존하고 길러 심오하고 빈틈없는 경지에 이르러서, 혼연히 박문약례(博文約禮)하게 되어 공부가 바라던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그만한 세월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늘이 수명을 더 연장해 주지 않아 마침내 여기에서 그치고 말았으니, 선생께서는 큰 뜻을 품고 논저하고자 했던 것들의 실마리만 겨우 열고 붓을 놓고 만 것이다. 아, 애석하다.
선생은 세상에 보기 드문 밝은 지혜를 지니고 말세에 변방에서 태어나 공자 문하의 학문을 논하는 대열에 참여하여 안회(顔回), 단목사(端木賜)와 어울리지도 못하였고 또 오백풍(吳伯豐 오필대(吳必大)), 채계통(蔡季通 채원정(蔡元定)) 등과 함께 주자(朱子)의 무이산(武夷山)의 강석에 참여하지도 못하였다. 그리하여 홀로 경전을 껴안고 외로이 선창해도 화답하는 자가 적어 오직 한두 형제들과 창화(唱和)하며 답답한 심정을 풀어내었다.
무지하고 미련한 나 창흡(昌翕)은 선생의 선창에 화답할 능력이 없으나 어려서부터 귀를 가득 채우고 뱃속을 가득 채운 것이 모두 지극한 이치가 담긴 선생의 오묘한 언론이었기에 지금도 그 말을 기술할 수가 있다. 이를테면 “글은 자세히 읽지 않으면 안 되고, 이치는 익숙히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고, 마음 씀씀이는 공평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일을 할 때에는 고집하거나 기필해서는 안 되고, 사람을 대할 적에는 꾀를 써서는 안 된다.” 하였는데, 이는 바로 부자(夫子 김창협(金昌協)) 자신에 대한 말씀으로 제자들이 미처 배우지 못한 점이다.
선생은 또한 일찍이 말세의 실없이 들뜨고 과장하는 나쁜 풍속을 병통으로 여겨, 사람을 비길 적에 서로 격이 맞지 않게 하고 행적을 묘사하는 데에 있어 사실에 맞지 않게 하는 것을 깊이 탄식하였다. 지금 찬술하는 데에 있어서도 이 점을 조심해야 하는데 선생의 평소 가르침을 유념하지 않고 폐습을 답습한다면 이는 내 마음을 속이고 우리 형까지 속이는 일일 것이다. 나 창흡이 비루하고 고루하기는 하나 감히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안다. 아, 백 년, 천 년 뒤에 이 지문(誌文)을 읽고 선생이 인자하고 총명하며 대범하고 소탈하며 공정하고 사리에 통달했음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겠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하늘이 만물을 두루 내시니 / 天普萬物
그 도는 말하자면 공변됨일레 / 其道曰公
사람의 마음을 볼 것 같으면 / 若在人心
공평한 저울대와 텅 빈 거울을 / 衡平鑑空
잡고 걸기 아차 한 번 잘못했다간 / 持懸一差
천 겹의 장막으로 가로막히네 / 障膜千重
자질이 순수한 사람이라야 / 夫惟粹質
지혜 밝아 이치에 통달하는데 / 乃克明通
어허라, 참으로 우리 선생은 / 展矣先生
눈부시게 맑고 밝은 마음 지니어 / 八窓玲瓏
가려진 것 환하게 제거하시니 / 明以去蔽
공변됨이 저절로 그 속에 있어 / 公在其中
이치가 환하게 통하여지고 / 理事旣徹
사물의 현상이 궁구되었네 / 物態斯窮
수레 가득 귀신이요 진흙엔 돼지 / 鬼車豕塗
사람들 서로 한창 반목할 적에 / 衆方睽視
움푹한 구덩이에 구슬 멈추듯 / 歐臾流丸
당신께서 여러 붕당 조정하시니 / 我受其止
감동으로 평안함 되찾게 하면 / 感之而平
공평한 국가 정치 이루었으리 / 均國在是
세상에 아니 쓰고 거두었으나 / 斂焉莫施
도만은 당신에게 보존됐으니 / 道則屬己
선생이 떠받든 크나큰 법도 / 所奉弘規
회옹이라 부자에게 이어받은 것 / 晦翁夫子
천고의 일에 대해 시비 따지고 / 是非千古
만 가지 이치를 구별해 내어 / 差別萬理
도에 맞는 참이며 어긋난 거짓 / 情僞向背
갖가지 현상이며 오묘한 이치 / 費隱表裏
복잡한 그 관계를 통찰하여서 / 觀其會通
예리한 분석이 자유자재라 / 投刃皆虛
제각기 지극한 경지 이르니 / 各詣其極
의도적인 안배가 어찌 있으랴 / 何與於吾
거침없이 써 내려간 문장을 보소 / 沛然命辭
화순함을 그대로 펼쳐내었고 / 和順是敷
단단하고 꼿꼿한 품격과 절조 / 金聲玉色
선생 계신 주위에 충만하였네 / 覿德滿隅
이중 삼중 가린 덤불을 걷고 / 撤爾重蔀
크고 너른 거처를 가리키면서 / 指彼廣居
온 세상 사람들과 함께하려는 / 四海與共
소원이 마음 가득 넘쳐흘렀네 / 願則有餘
참담할사 후세를 깨우치려는 / 慘憺開來
생각은 다섯 수레 가득했건만 / 思鬱五車
저술하여 전해 주지 못하고 / 有不可傳
혼자서 지니고 세상 떠났네 / 持以永徂
삼주는 텅 비어 쓸쓸해지고 / 三洲寥闊
흰 구름만 걷혔다 끼곤 하는데 / 白雲卷舒
허명하게 빛나던 선생의 정신 / 虛明惟神
찌꺼기만 간신히 글 속에 있네 / 糟粕在書
크고 작은 면모 모두 엿볼 수 있어 / 精粗皆迹
선생의 법도가 남아 있으니 / 典刑不渝
굵은 나무 울창한 이 무덤을 / 有鬱拱木
후세 유자 모쪼록 공경하기를 / 式哉後儒
아우가 형의 명을 짓긴 했지만 / 弟作銘辭
맹세코 이 글은 아첨 아니네 / 自矢不諛


 

[주D-001]네 가지 어법 : 장소에 따라 말하는 네 가지 방법으로, 조정에서는 공경스럽고 안정감이 있게 말하고, 제사하는 곳에서는 아름다운 말로 순서에 따라 말하고, 군대에서는 바람을 막아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말하고, 상가(喪家)에서는 말이 부족한 듯 말하는 것이다. 《新書 容經》
[주D-002]갑향(甲向) 언덕 : 남쪽으로 약간 비낀 서쪽을 등지고 북쪽으로 약간 비낀 동쪽을 향한 언덕을 말한다.
[주D-003]수레 …… 돼지 : 《주역(周易)》 규괘(睽卦) 상구(上九)의 효사(爻辭)에 “상구(上九)는 어그러짐에 외로워 돼지가 진흙을 진 것과 귀신이 한 수레에 가득 실려 있는 것을 봄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어그러짐이 심한 나머지 육삼(六三)과 정응(正應)이면서도 마치 진흙 속에 뒹구는 돼지처럼 더럽게 보고 그의 죄악을 미워하여 없는 죄악까지 덧씌우기를 마치 형체가 없는 귀신이 수레에 가득 실려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과 같이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당시 사림이 붕당이 심하여 서로 반목하고 질시함을 말하는 것이다.
[주D-004]크고 너른 거처 :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천하의 너른 거처에 살고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서 천하의 큰길을 걸어간다.”고 하였는데, 주자(朱子)의 주(註)에 너른 거처는 인(仁)이라고 하였다.
[주D-005]생각은 …… 가득했건만 : 생각을 모두 책으로 저술했다면 그 분량이 다섯 수레를 채울 만큼 많았을 것이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