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휘 덕지 등/연촌공 녹동서원 치제문

代靈巖儒生請煙村書院賜額疏 庚申

아베베1 2014. 3. 9. 10:03

 

 

 19대조고 연촌공 휘덕지 서원인 녹동 서원 녹동서원사액을 청하는 소

 영암(靈巖) 유생을 대신하여 지은 연촌서원(煙村書院)의 사액(賜額)을 청하는 소

경신년(1680)

 

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예로부터 조정에서 벼슬했던 인물들 중에 일단 들어가면 물러나지 않고 녹을 끌어안고 총애를 탐하다가 신세를 망친 사람은 많고, 결연히 물러나 부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겨우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 상황을 고찰하여 논하자면, 이들은 또 모두 쇠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화를 당하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자신을 온전히 할 방도를 궁리한 끝에 벼슬하지 않은 경우이거나, 이미 최고의 명성과 지위를 누렸기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 그리한 것일 뿐입니다. 성군(聖君)의 시대를 만나 임금이 크게 등용할 의향이 여전한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떠난 경우는 수백 수천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더구나 절조(節操) 하나만으로 자족하지 않고 대도(大道)에 뜻을 두며, 유유자적 한가로이 지내지 않고 실천에 힘쓰는 경우로 말하자면 어찌 더욱 뛰어나 그와 같은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신들은 먼 고을의 어리석은 선비로서 견문이 넓지 못하지만 한 가지 들은 것이 있습니다. 세종(世宗), 문종(文宗) 때에 신(臣) 최덕지(崔德之)가 있었으니, 그는 한림원(翰林院)에서 출발하여 옥당(玉堂)과 대각(臺閣)을 거치고,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있다가 물러나 영암에서 지내면서 서재를 지어 존양(存養)이라고 편액을 달고 두문불출하였는데, 당시는 세종의 만년이었습니다. 문종이 즉위했을 때 불러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제수하고 순수하고 진실하다고 칭찬하며 계속 등용하려 하였는데, 조정에 있은 지 2년도 못 되어 사직소를 올리고 돌아와서 끝내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의 정치와 교화는 세종, 문종 때보다 더 융성한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뛰어난 인재들이 시운(時運)을 타 구름같이 모여들고 경학과 문장에 밝은 선비들이 진기하고 뛰어난 식견으로 줄지어 조정에 서서 모두 공명(功名)을 떨쳤으니, 이는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시절이었습니다. 최덕지의 그 훌륭한 재주로 그들과 어울릴 때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으니 만일 느긋하게 따라가며 시운에 편승하였더라면 경상(卿相)의 자리에 올라 공명이 찬란했을 터인데, 벼슬을 버리고 멀리 떠나서 변방 산천에 은둔한 채 일생을 마쳤습니다. 이는 경중의 구분에 밝고 영욕(榮辱)의 경계를 초월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니, 저들 기미를 살펴 화를 피하는 자들과 지위가 극도에 이른 뒤에야 그만두는 자들의 경우는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리고 예로부터 은둔한 선비는 대부분 스스로 고상함을 표방하여 가장 훌륭하다고 여기고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면서 마음 쓰는 것이 없었으니, 이들이 비록 부귀의 유혹에 빠져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는 자들보다는 낫다 하나, 그 역시 도(道)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 지금 최덕지는 귀향하여 마침내 맹자(孟子)가 말한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한다.[存心養性]’는 말을 택하여 거처하는 집의 이름을 지었으니, 그가 바른 학문에 마음을 두고서 덕을 향상시키고 학업을 닦는 일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부귀와 빈천을 취하고 버리는 기준이 분명해진 뒤에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는 공부가 치밀해지고,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는 공부가 치밀해지면 부귀와 빈천을 취하고 버리는 기준이 더욱 명백해진다.” 하였는데, 최덕지로 말하면 이에 가깝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에 기록된 것이 소략하여 그의 말과 풍격을 상세히 상고해 볼 수 없으니 애석합니다.
그러나 그 높은 지조와 바른 마음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 후세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손자 대에 이르러 최충성(崔忠成)이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특출한 재주와 독실한 학문으로 수제자라 일컬어졌으니, 이는 그 사우(師友)의 연원이 본디 그럴 만했을 뿐만 아니라 선조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최덕지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이미 200여 년이 흘렀는데도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도 변치 않아서 남쪽 고장을 찾아오는 사대부는 반드시 이른바 존양루(存養樓)라는 곳을 방문하여 그의 초상 앞에 예모를 갖추고 탄식하며 발걸음을 떼지 못하곤 하니, 그가 남기고 간 영향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 또한 깊다 하겠습니다.
지난 경오년(1630, 인조8)에 온 읍의 선비들이 힘을 모아 사당(祠堂)을 세워 최덕지를 향사하고 최충성을 배향하였는데, 향사하는 일이 세월이 아무리 오래 지나도 여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먼 지방의 고루한 곳인 관계로 아직까지 조정에 사액(賜額)을 요청하지 못하여 사류(士類)의 수치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삼가 보건대 성상께서는 현인을 높이고 도를 중시하여 선비들이 행하고 싶어하는, 사문(斯文)의 누락된 전례(典禮)를 모두 흔쾌히 행하고 계시니, 신들은 지금 이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감히 여럿이 함께 와서 대궐문 아래에서 명을 청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최덕지의 출처의 전말과 학문의 대체가 사류의 존경을 받을 만함을 살피시고 특별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시어 편액을 하사함으로써 그를 표창하시어 먼 지방의 선비들이 현인을 존경하는 성심을 이룰 수 있도록 하시고, 후세에도 보고 느끼는 점이 있어 분발하게 하시기를 바라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신들은 우러러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주C-001]영암(靈巖) …… 소 : 작자의 나이 30세 때인 1680년(숙종6)에 지은 소로서, 작자의 부친인 김수항(金壽恒)이 전라도 영암에서 귀양살이할 당시에 작자가 부친을 만나기 위해 그곳에 여러 번 왕래한 적이 있었던 인연으로 대작한 듯하다. 연촌서원은 세종과 문종 때의 문신인 최덕지(崔德之)와 그의 손자 최충성(崔忠成)을 향사(享祀)하는 서원으로, 전라남도 영암의 사류들이 1630년(인조8)에 세운 것이다. 당시에 최덕지의 생존시에 그린 초상화인 영정(影幀)이 그가 거처하던 존양루(存養樓)에 봉안되어 있었다. 《煙村遺事》
[주D-001]존양루(存養樓) : 최덕지가 남원 부사를 그만두고 내려와서 건립하여 거처하던 곳으로 영암 덕진면(德津面) 영보리(永保里)에 있는데, 존양당(存養堂)이라고도 한다.

 

代靈巖儒生請煙村書院賜額疏 庚申

 

伏以臣等。竊觀自古以來。朝廷之士。入而不出。懷祿耽寵。以失其世者多矣。其能決然勇退。不爲富貴所沒溺者。廑可指數。然考論其世。又皆遭時衰亂。怵迫禍患。思所以自全。而不者。亦以名位已極。無所覬於後耳。若乃處明聖之世。嚮用未艾。而能從容自引去者。千百無一焉。況能不以一節自喜。而志乎大道。不161_420b以閒散自適。而力於實踐者。豈不益卓絶難覯哉。臣等下邑蒙士。耳目不遠。而獨聞我世宗文宗之世。有臣崔德之。其仕。嘗自翰苑。歷玉堂臺閣。而後以南原府使。退居本邑。築書樓扁以存養。杜門不出。時則世宗晩年也。及文宗卽位。召拜藝文直提學。奬以純實。且將留用。而在朝不二年。上書乞骸骨歸。遂不復起焉。臣等竊念本朝治化。莫盛於世文兩廟之際。當是時。才俊應運。鱗集雲蒸。經學文章之士。瑰瑋卓犖。比肩立朝。咸以功名自奮。蓋亦千載一時也。以德之之賢。翺翔其間。亡所與讓。使其從容161_420c委蛇。附會時運。亦可以致位卿相。功名爛然矣。顧乃棄而不取。高蹈遠引。棲遯山海。以沒其身。此非審乎外內之辨。超乎榮辱之境者。不能也。彼世之審機逃禍。與位極乃止者。殆不足道也。且自古退遯之士。率多自標其高。以爲極致。而優游放曠。無所用心。是雖賢於沒溺富貴。終身不返者。而去道則亦遠矣。今德之之歸也。乃取孟氏所稱存心養性者。名其所居之室。則其留心正學。不忘進修之實。槩可見矣。昔朱子有言曰。取舍之分明。然後存養之功密。存養之功密。則其取舍之分。益明矣。若德之者。其庶乎此矣。惜乎161_420d史乘疎略。其言論風旨。無得以考其詳也。然其所立之高。所存之正。亦旣遠過於人。而足爲後來之師範矣。是以及其孫而有忠成者。學於文敬公金宏弼之門。茂材篤學。克稱高弟。是其師友淵源。固有然者。而亦不可謂不漸於先訓矣。蓋自德之之世。今已二百餘年。而人猶慕之不衰。士大夫之道南州者。必問其所謂存養樓者。瞻禮其遺像。咨嗟歎息而不能去。其遺風餘韻。感人亦深矣。往在庚午年間。一邑章甫協力建祠。以祀德之。且以忠成配焉。俎豆之事。久益不懈。而顧以遐遠固陋。尙未能請額于朝。以爲多士羞。161_421a今者竊見聖明尊賢重道。凡斯文曠典。士所願行者。無不樂施。臣等以爲此時不可失也。遂敢相率以來。請命于闕下。伏惟殿下覽察德之出處本末。學問大致。宜爲多士所尊奉。特命有司。宣賜恩額。以褒奬之。使下邑之士。得遂尊賢之誠。而來者有以觀感興起。不勝大願。臣等無任仰首祈懇之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