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 부사공 휘 호 문/휘 명손(휘 득지 후)

휘 명손 (동국통감의 편찬을 양성지가 맡고, 신숙주·권남이 감수하게 하다)

아베베1 2011. 1. 20. 14:29

세조 9년 계미(1463,천순 7)

 

 9월27일 (계미)
동국통감의 편찬을 양성지가 맡고, 신숙주·권남이 감수하게 하다

장의사(壯義寺)에 거둥하였다가 환궁(還宮)하니, 풍정(豐呈)을 바쳤다.
길창 부원군(吉昌府院君) 권남(權擥)을 불러서 말하기를,
“중궁(中宮)이 나의 탄일(誕日)에 이 찬치를 베풀고자 하였으나, 마침 이승손(李承孫)이 졸(卒)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금일에 베푸는 것을 내가 정지시키고자 하였으나, 진실로 지극한 정(情)에서 나오는 것이면 비록 미천(微賤)한 자일지라도 거절할 수 없는데, 하물며 중궁(中宮)이겠는가? 금일 장의사(壯義寺)에 왕래(往來)하느라고 몸이 몹시 피로하지만, 그런데도 이 잔치를 받는 것은 중궁(中宮)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하고, 효령 대군(孝寧大君)에게 이르기를,
“내가 어렸을 때 방장(方壯)한 혈기(血氣)로써 병을 이겼는데, 여러 해 전부터 질병이 끊어지지 않으니, 일찍이 온천(溫泉)에 목욕(沐浴)하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평생에 뜻을 두는 것은 내 한 몸을 위해서 백성들을 수고시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내 이런 행차는 하지 않았습니다. 말로는 기필(期必)할 수 없지만 만약 또 심해지면 어떨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뜻은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우승지(右承旨) 이파(李坡)와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 등을 불러서 말하기를,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수찬하는 데 반드시 많은 문신(文臣)들을 모을 것이 없다. 너희들이 신숙주(申叔舟)·권남(權擥)·최항(崔恒)에게 의논하라.”
하니, 권남이 말하기를,
“사람이 적으면 늦어질 것이고, 사람이 많으면 빨라질 것이니, 매한가지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옳지 않다. 다만 궐내(闕內)의 유생(儒生)들로 하여금 편찬하게 하라.”
하고, 이파로 하여금 그 적당한 인물을 써오게 하니, 이파가 세자 정자(世子正字) 최명손(崔命孫)·예문 봉교(藝文奉敎) 신숙정(申叔楨)·대교(待敎) 원숙강(元叔康)의 이름을 써서 바치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양성지(梁誠之)가 여러 유생(儒生)들을 거느리고 편찬하고, 신숙주·권남이 이를 감수(監修)하라.”
하였다. 이파가 왕명(王命)의 출납(出納)을 맡아보니, 효령 대군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파를 아들처럼 대접하고 내 소생(所生)과 다름이 없이 합니다.”
하고, 또 이파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의 아비와 심상(尋常)한 사이에 비할 수가 없다. 매양 너를 볼 적마다 항상 생각한다.”
하였다.
【원전】 7 집 589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