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금석문 등/청허당 서산대사비명

有明朝鮮國賜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淸虛堂大師碑銘)

아베베1 2011. 2. 6. 15:16

계곡선생집 제13권
 비명(碑銘) 9수(首)

유명조선국 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청허당대사 비명

(有明朝鮮國賜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淸虛堂大師碑銘) 병서


서산(西山) 청허대사(淸虛大師)가 입멸(入滅)하고 나서 28년이 지나 그 법사(法嗣)인 보진(葆眞), 언기(彦機), 해안(海眼), 쌍흘(雙仡) 등이 묘향산(妙香山)과 풍악산(楓岳山)에 비석을 세웠는데, 그때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호) 이상공(李相公)이 명(銘)을 지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 또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우리 스승의 영골(靈骨)을 이제 이곳에 봉안하기는 하였다마는, 속세에서 출가하여 법을 얻으신 것으로 말하면 실로 남쪽 지방에서 비롯되었고 또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야말로 스승께서 일찍이 주석(駐錫)하신 곳이니, 뭔가 글을 남겨 두지 않을 수가 없다.”
하였다. 이에 해안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서 쌍흘이 대표로 나의 집을 찾아와 나에게 글을 청하며 말하기를,
“임제(臨濟)로부터 18대를 전해 내려와 석옥 청공(石屋淸珙)에 이르는데 여조(麗朝)의 국사(國師)인 태고 보우(太古普愚)가 실로 석옥의 법을 전수 받았고, 이로부터 다시 6대를 전하여 우리 스승에게 이르게 되었다. 대체로 보건대, 여래(如來)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중국에 전해졌다가 다시 우리나라로 건너와 60여 세 만에 우리 스승에게 부촉(咐囑)되었는데, 그 원류(源流)가 이처럼 심원하니 이런 내용으로 명(銘)을 지어 주었으면 한다.”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그대 스승의 도에 대해서는 내가 본디 배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니 실제로 그렇게 주고받는지를 내가 장차 어떻게 알아서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하자, 쌍흘이 다시 말하기를,
“세간법(世間法)이나 출세간법(出世間法)이나 안팎으로 서로 위배되지 않는 것인데, 예로부터 공문(空門 불가(佛家))의 기숙(耆宿)들 가운데에는 왕사(王事)에 힘을 쏟은 분들이 보기 드물었다. 그런데 우리 스승께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납자(衲子)의 신분으로 한마디 말씀을 올렸다가 성조(聖祖 선조(宣祖)를 말함)의 지우(知遇)를 받고 임금의 글을 받는 은총을 입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왜란(倭亂)이 일어남에 미쳐서는 마침내 의(義)를 위해 떨쳐 일어나 무리를 한데 모은 뒤 명(明) 나라의 정토(征討) 사업에 협조하여 나라를 회복시키는 공을 세움으로써 중화(中華)와 이적(夷狄) 모두에게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스승의 마음으로 말하면 어찌 일찍이 작위적(作爲的)인 요소가 하나라도 있었던 것이겠는가. 인연을 따라 행동하다 보니 그렇게 공적이 탁월하게 나타난 것일 뿐으로서 공유(空有)에 처한 마음이 충의(忠義)의 일로 빛나게 된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감히 이런 점들을 빙자하여 굳이 청하게 된 것이다.”
하기에, 내가 훌륭한 말이라고 하면서 마침내 응낙을 하고 그 행장을 펼쳐 보았다.
대사의 법명(法名)은 휴정(休靜)이요 자(字)는 현응(玄應)이다. 청허당(淸虛堂)은 그의 호인데 서산(西山)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속성(俗姓)은 최씨(崔氏)로서 그 계보가 완산(完山)으로부터 비롯되는데 법에 저촉되어 안주(安州)로 옮긴 뒤 그곳에서 대대로 살게 되었다. 부친 세창(世昌)은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을 지내었다. 모친 김씨(金氏)가 대사를 임신했을 때 특이한 꿈을 꾸었는데, 태어난 지 3년이 지났을 때 홀연히 어떤 노인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어린 사문(沙門)이 보고 싶어서 왔다.”
하고는, 마침내 아이를 끌고가 몇 마디 주문(呪文)을 외웠다. 그러더니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하기를,
“이름은 운학(雲鶴)이라고 짓는 것이 좋겠다.”
하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문을 나갔는데 어디로 간지를 알지 못하였다.
어렸을 때 노는 것을 보면 반드시 불사(佛事)와 관계되는 일이었다. 조금 자라나면서부터 풍신(風神)이 빼어났으며 말을 하는 것이 사람을 놀라게 하였으므로 주목(州牧)의 사랑을 받으면서 기동(奇童)이라고 일컬어졌다.
10세에 양친을 모두 여의고 의지할 곳 없는 고독한 신세가 되자 주목(州牧)이 데리고 서울에 와 성균관에서 학업을 닦게 하였다. 그런데 여러 차례 응시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를 맛보자 뜻을 얻지 못한 답답한 심경에 마침내 남쪽으로 유력(游歷)하다가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경치 좋은 암굴(巖窟)을 찾아다니며 내전(內典 불경(佛經))을 두루 열람하다가 홀연히 출가(出家)할 마음을 품고는 동료들과 작별을 하며 시를 짓기를 ‘물 긷고 돌아가다 언뜻 머리 돌려 보니, 흰 구름 사이로 무수히 청산 솟아 있네.[汲水歸來忽回首 靑山無數白雲中]’ 하였다.
마침내 숭인 장로(崇仁長老)를 찾아가 낙발(落髮)을 하고 일선 화상(一禪和尙)에게서 수계(受戒)를 하였으니, 이때가 가정(嘉靖) 경자년(1540, 중종 35)으로서 대사의 나이 21세 되던 해의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뒤이어 영관대사(靈觀大師)를 참예(參詣)하여 인가(印可)를 받았다. 그러다가 뒤에 시골 마을을 유행(游行)하던 도중 한낮에 우는 닭 소리를 듣는 순간 홀연히 깨달음을 얻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한평생 바보같이 살아갈망정 문자 가르치는 선생 노릇 안 하리라.”
하고는, 붓을 들어 낙엽에 시를 짓기를 ‘머리털은 희어져도 마음은 희지 않는 것을 옛사람 일찍이 밝혀 놓았지. 이제 닭 울음 소리 한 번 듣고는 대장부 해야 할 일 모두 끝냈네[髮白心未白 古人曾漏洩 今聽一聲鷄 丈夫能事畢]’라 하였다.
이로부터 관동(關東) 지방의 명산(名山)들을 뜬구름처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경사(京師)에 들어간 기회에 선과(禪科)에 응시해서 선발되었으며, 계속 승진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의 지위에 이르렀는데, 얼마 있다가는 옷을 떨치고 풍악산(楓嶽山)에 들어가서 삼몽음(三夢吟)을 지었다.
일선 화상(一禪和尙)이 입적(入寂)할 즈음에 참언(讖言)을 남기기를 ‘누구엔가 주어야 할 나의 옷 한 벌, 나무 인형들이 푸른 눈빛 다투누나. 다리가 누군들 없을까마는, 남쪽 바다에서 누가 오리라.[單衣有債 木人爭靑 不是無脛來自南溟]’ 하였는데, 때마침 대사가 모처(某處)에서 이르러 화상의 사리(舍利)에 기도를 하니 신령스럽게 반응하며 환하게 빛이 났다.
대사가 비록 자취를 감추고 광채를 감췄으나 도인(道人)으로서의 명성이 갈수록 높아진 결과 괜히 뻐기면서 아만(我慢)에 사로잡힌 무리들까지 소문만 듣고도 마음속으로 존경하여 서로 다투어 스승으로 모시려 하였다.
기축년에 역옥(逆獄)이 일어났을 때 요승(妖僧)이 무함하는 바람에 체포되는 몸이 되었으나 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그 대답이 명쾌하였을 뿐 아니라 선묘(宣廟) 역시 평소 그 명성을 듣고 있었으므로 즉시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대사를 인견(引見)하여 어제(御製)의 절구시(絶句詩) 1수와 어화(御畫)로 된 묵죽(墨竹) 병풍을 하사하였는데, 대사가 그 즉시 시를 지어 바치며 사은(謝恩)을 하자 상이 더욱 칭찬을 하며 상을 후하게 내린 뒤 산사(山寺)로 돌아가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묘가 서쪽으로 피난을 하자 대사가 산에서 내려와 행재(行在)에 가서 알현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라에 큰 난리가 발생했는데 산인(山人)이라고 해서 어찌 스스로 편안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
하니, 대사가 눈물을 뿌리며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고 싶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상이 갸륵하게 여기면서 대사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의 직책을 수여하였다.
이에 대사가 여러 상족(上足)들에게 개별적으로 명하여 승병(僧兵)을 규합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유정(唯政)은 관동(關東)에서 일어나고 처영(處英)은 호남(湖南)에서 일어나 권공 율(權公慄)과 병력을 합친 뒤 행주(幸州)에서 왜적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대사 자신은 문도(門徒) 1천 5백인을 이끌고 중국 군사를 따라 진격해서 평양(平壤)을 수복하였다. 이때 명(明) 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및 삼협(三協) 총병(摠兵) 이하 장좌(將佐)들이 대사의 이름을 듣고서 다투어 첩(帖)을 보내 경의를 표하기도 하고 시(詩)를 증정하여 찬미하기도 하였는데, 그 말과 예우하는 뜻이 지극히 경건하였다.
경성을 수복하고 나서 상이 장차 대가(大駕)를 돌리려 할 적에 대사가 승병 수백 인을 이끌고 호가(扈駕)하며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상에게 청하여 아뢰기를,
“신은 나이가 많아 곧 죽을 몸이니 제자 유정 등에게 병사(兵事)를 맡겼으면 합니다.”
하고, 사직하면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자, 상이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허락하고, 인하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내렸다.
대사가 일단 묘향산(妙香山)에 돌아오고 나서는 무심하게 한가이 지내는 하나의 도인(道人)일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갑진년 정월 23일에 장차 원적암(圓寂庵)에서 입적(入寂)하려고 하였는데, 이날 가마를 타고서 폭설(暴雪)이 내리는 가운데 가까운 산의 암자들을 두루 찾아가 부처에게 절하고 설법을 한 뒤, 방장실(方丈室)에 돌아와 얼굴을 씻고 위의(威儀)를 갖추고 나서 불전(佛前)에 분향(焚香)을 하였다. 그리고는 붓을 잡고 자신의 화상(畫像)에 직접 제(題)하기를 ‘팔십년 전에는 그가 나로 되더니, 팔십년 후에는 내가 그로 되는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하고, 또 글을 써서 유정과 처영 등 두 문인과 작별을 하고는 가부좌(跏趺坐)한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때 대사의 세수(世壽) 85세요, 선랍(禪臘)은 65세였다. 특이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 차더니 며칠이 지나서야 사라졌다.
사유(闍維 다비(茶毘) 즉 화장(火葬)임)를 행하여 영골(靈骨) 1편(片)과 사리(舍利) 3립(粒)을 얻었으므로 보현사(普賢寺)와 안심사(安心寺)에다 탑(塔)을 세워 봉안하였다. 그리고 유정(唯政)과 자휴(自休) 등이 또 정골(頂骨) 1편을 받들고 풍악산에 와서는 사리 몇 과(顆)를 얻어 유점사(楡岾寺) 북쪽 언덕에 모셨다.
대사는 젊었을 적에 영관(靈觀)에게서 법을 얻은 뒤로 근대(近代)에 그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종풍(宗風)을 진작시켰다. 그리하여 제자가 1천여 인이나 되는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자들만도 70여 인에 달하였으며, 후학을 영도하면서 일방(一方)의 종주(宗主)가 된 자들 역시 4, 5인을 밑돌지 않았으니, 정말 성대했다고 할 만하다. 만년(晚年)에 이르러서는 통탈자재(通脫自在)한 면모를 보여 주었는데, 이에 대해서 피상적으로만 관찰하는 무리들이 계(戒)를 뛰어넘는 행동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였으나 식자들은 이를 병통으로 여기지 않았다.
대사가 저술한 《선가귀감(禪家龜鑑)》ㆍ《선교석(禪敎釋)》ㆍ《운수단(雲水壇)》ㆍ《삼가일지(三家一指)》 각 1권과 《청허당집(淸虛堂集)》 8권이 총림(叢林)에 유행되고 있는데, 그 시게(詩偈)를 보면 상랑(爽郞)하면서 놀랄 만한 말들이 많고 필적(筆跡) 또한 소경(疏勁)하여 운치가 있다고 한다. 행장에 서술된 내용이 대략 이와 같은데, 이쯤되면 또한 두루 구비되었다고 할 만하다.
아, 대사의 환신(幻身)은 이미 변화되어 티끌로 돌아갔지만 환(幻)이 아닌 그 무엇은 변화되어 사라진 적이 일찍이 없었으니, 한 조각 돌에 몇 장의 글을 새긴다 한들 대사를 불후(不朽)하게 하는 일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나 그 도를 존중하는 입장에서 보면 차마 그 자취를 민멸(泯滅)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하여 앞으로 영원히 전해지도록 하려는 그 문도들의 마음씨야말로 진정 근실하기 그지없는 것으로서 세교(世敎)에서도 또한 수긍하고 있는 바이다. 장주(莊周)가 말하기를 ‘꼭 해야 할 가치가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는데, 어쩌면 이런 경우가 거기에 해당될 것이다.
이에 마침내 명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처의 심인(心印) / 諸佛之心
조사가 전하였고 / 祖師傳之
조사의 의발(衣鉢) / 祖師之傳
청허가 받들었네 / 淸虛延之
청허의 경지 / 淸虛之學
본래면목(本來面目) 투득(透得)하여 / 得乎天全
한 올 걸림 없는 것이 / 一絲不罣
연못 속의 물고기라 / 如魚在淵
반쪽 게송에 철저히 깨닫고서 / 半偈徹聞
성인의 마음 말없이 계합(契合)했고 / 嘿契聖心
임금이 친서(親書) 내려 은총을 쏟아줌에 / 宸翰寵賁
그 영광 총림을 진동시켰네 / 光動叢林
국난당하여 의승군(義僧軍) 일으켜서 / 遘難奮義
나라의 중흥 협찬한 결과 / 贊我中興
존자(尊者)의 칭호 하사받았나니 / 錫號國一
그 영예 누구도 겨룰 수 없었어라 / 莫之與京
죽이고 살리는 일 방편이 자재(自在)하고 / 殺活自由
숨고 나오는 일 장애가 없어 / 隱見無累
세간과 출세간 두 가지 일을 / 世出世間
모두 완벽하게 처리했도다 / 兩盡能事
인연 다하여 이 세상 떠났으나 / 緣盡而逝
비유하면 다른 섶에 불을 다시 지핌이라 / 譬彼薪火
망망한 삼계 가운데에서 / 茫茫三界
누가 그이며 누가 나일런고 / 誰渠誰我
허깨비 같은 육신이야 사라졌어도 / 幻化雖滅
곡두 아닌 당체(當體)는 원래가 여여(如如)한 법 / 非幻自如
명산에 세워진 사리탑 속에 / 名山石龕
영롱한 사리 구슬 모셔져 있네 / 永閟玄珠
신령스런 이 구역 돌아다보니 / 睠玆靈區
실로 깨달음의 도량(道場)이라 할 만한데 / 實惟覺場
옥돌에 그의 행적 이곳에 새겨 / 鑱珉紀蹟
영원히 후세에 전하려 하는도다 / 昭眎無疆

 

[주D-001]삼몽음(三夢吟) :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인의 꿈 이야기 손에게 말을 하고, 손의 꿈 이야기 주인에게 말을 하네. 지금 꿈 얘기 하는 두 사람 역시, 사실은 꿈속의 사람이라오.[主人夢說客 客夢說主人 今說二夢客 亦是夢中人]”
[주D-002]꼭 …… 일이다 : 《장자(莊子)》 재유(在宥) 끝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3]다른 …… 지핌이라 : 생명의 연속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장작불 다 타들어 가도 불씨는 영원히 꺼질 줄을 모른다.[指窮於爲薪 火傳也 不知其盡也]”라고 하였다.

 

月沙先生集卷之四十五
 
有明朝鮮國賜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西山淸虛堂休靜大師碑銘幷序 a_070_237c


余不識釋家津筏。故平生不喜談釋。非故有意於排釋也。顧以文字竊虛聲。主盟騷壇三十餘年矣。釋子之逐名求詩者日踵門。如遇開僧韻釋。輒欣然應之。亦非故有意於耽釋也。余年尙少。已聞休靜師之名。其詩多傳誦人間。恒願一見而不可得。松雲惟正。卽師之傳法沙門也。其渡日本也。數訪我於京城。我之赴燕山也。贈詩於淸川江上。亹亹說師。窮日夜不倦。是時師之亡。已數070_237d年矣。緬挹淸芬。時往來于懷。一日公退獨坐。聞有三僧拱立於外。呼使之前。乃師之弟子葆眞,彥機,仡也。出示笈中書云。是淸虛堂遺稿。仍叉手而拜曰。吾師道業。有足傳後。而雲山深寂。恐久益泯泯。敢以門徒所記載者爲狀。宿齋緘封。千里來獻。願得相公一言。鑱之于石。以不朽吾師。余曰。爾師之道。以無爲有。以虛爲實。不待存而存。不待滅而滅。誰得而朽。誰得而不朽。吾夫子曰。道不同。不相爲謀。於師之道。吾何言哉。三僧起而對曰。道本不同。非敢苟同。然有同而異者。異而同者。伽葉正傳。獨闡宗風者。是固同而異者矣。居家爲孝。出世爲忠。070_238a豈非異而同者乎。唯相公之異其異而同其同者焉。吾師常慕相公之風。蓋有默契而冥感者。願相公之終惠也。僕僕跽拜。經歲不去。余嘉其誠而嘆曰。釋敎之專心所事。乃如是夫。按狀。師法名休靜。字玄應。自號淸虛子。以多在香山。故又號西山。俗姓完山崔氏。名汝信。外祖縣尹金禹。得罪燕山朝。謫居安陵。遂爲安州人。父世昌。鄕擧爲箕子殿參奉。不就。詩酒自娛。母金氏。老無子。一日夢一婆來曰。胚胎丈夫子。故爲娿㜷來賀云。明年庚辰三月。果誕師。三歲。父於燈夕醉臥。有老翁來謂曰。委訪少沙門耳。遂以兩手擧兒㕨數聲。摩其頂曰。以雲鶴070_238b名此兒。言訖出門。莫知所之。以故小字稱雲鶴。與群兒遊戲。或立石爲佛。或聚沙成塔。稍長。風神英秀。力學不懈。事親至孝。主倅愛之。九歲母亡。十歲父歿。伶仃無所依。主倅携至京。就學於泮齋。鬱鬱不適意。與同學數人。南遊智異山。窮覽形勝。探賾諸經。每愴早失怙恃。益感死生之義。忽得禪家頓悟法。遂聽法於靈觀大師。剃髮於崇仁長老。七八年間。遍踏名山。年三十。中禪科。自大選陞至禪敎兩宗判事。一日歎曰。吾出家本意。豈在此乎。卽解綬。以一筇還金剛。作三夢詞曰。主人夢說客。客夢說主人。今說二夢客。亦是夢中人。登香鑪峯作詩曰。070_238c萬國都城如垤蟻。千家豪傑若醯鷄。一窓明月淸虛枕。無限松風韻不齊。自此韜光鏟彩。不出山門。問道者日益衆。己丑之獄。妖僧無業。誣引師被逮。供辭明剴。宣廟知其冤。立釋之。徵詩稿覽之。嘉歎。御畫墨竹賜之。命賦詩以進。師卽進絶句。宣廟亦賜御製一絶。賞賚甚厚。慰遣還山。壬辰。大駕西幸龍灣。師卽仗劍進謁。宣廟敎曰。世亂如此。爾可弘濟耶。師泣而拜命。請曰。國內緇徒之老病不任行伍者。臣令在地焚修。以祈神助。其餘臣皆統率。悉赴軍前。以效忠赤。宣廟義之。命爲八道十六宗都摠攝。諭方岳禮遇之。於是。松雲率七百070_238d餘僧起關東。處英率一千餘僧起湖南。師率門徒及自募僧一千五百。合五千餘名。會于順安法興寺。與天兵爲後先。以助聲勢。戰牧丹峯。斬獲甚多。天兵遂克平壤。復松都。京城賊宵遁。師以勇士百人。迎大駕還京都。天朝提督李如松。送帖嘉奬。有爲國討賊。忠誠貫日。不勝敬仰之語。又題詩贈之曰。無意圖功利。專心學道仙。今聞王事急。摠攝下山巓。諸將官爭先送帖贈遺。賊退。師啓曰。臣年垂八十。筋力盡矣。請以軍事屬於弟子惟政及處英。臣願納摠攝印。還香山舊棲。宣廟嘉其志憫其老。賜號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070_239a樹敎普濟登階尊者。自是義益高名益重道益尊。往來於頭流,楓岳,妙香諸山。弟子千餘人。出世者七十餘人。甲辰正月二十三日。會弟子於妙香圓寂菴。焚香說法。取自家影幀。書于其背曰。八十年前渠是我。八十年後我是渠。作書付松雲,處英訖。趺坐而逝。年八十五。法臘六十七。異香滿室。三七日後始歇。弟子圓峻,印英等闍維奉靈骨一片。舍利三枚。樹浮圖於普賢安心寺。又一片。弟子惟政,自休等奉來蓬山。得神珠數枚。窆石於崳岾之北。吾東方太古和尙。入中國霞霧山。嗣石屋而傳之幻庵。幻庵傳之龜谷。龜谷傳之正心。正心傳之智嚴。070_239b智嚴傳之靈觀。靈觀傳之西山。此實臨濟之正派。而惟西山獨得其宗云。所著禪家龜鑑,禪敎釋雲水壇各一卷。淸虛堂集八卷行于世。噫。師之道。余雖未詳其淺深。師之稿。余旣玩繹而卒業矣。觀乎詩。足以知師自得之趣。觀乎文。足以知師造詣之高。雖其語或不雅馴。言言皆活。句句飛動。有似古劍出匣。霜風颯然。往往酷似開元大曆。渠家惠休,道林不論也。況也遇患難不失其守。乃能結主知於縲絏之中。徵稿命製之榮。御筆詩畫之錫。誠前古所未有之殊眷。而逮乎國難。糾義旅助天兵。收復三都。迎還大駕。便納賜印。拂衣還山。其出處070_239c之節。無愧古人。夫士生斯世。孰不欲遇知於時君。立功名以自顯。然而抱才不售。沒世無聞者何恨。今以山中一緇衣。乃能名達九重。聲施後世。孰謂禪門能辦此功業歟。銘如是。不愧吾筆歟。其銘曰。
金天之西。薩水之濱。淑氣亭毒。乃降眞人。仚婆抱送。釋老提携。天開寶光。帝借金鎞。靈符妙契。秀骨超凡。蚌珠出海。龍鏡發函。失怙無依。千里負笈。淹貫諸家。卓然自立。乃超覺路。遂登法席。祖月重輝。群昏一廓。餘事詩聲。上徹楓宸。殊恩異渥。榮耀千春。身雖岩穴。忠不忘君。遇難一呼。義旅如雲。協助天戈。憑仗靈祐。驅除腥穢。福我070_239d寰宇。出而濟世。名動華夷。入而修定。法闡宗師。在掌靈珠。虛明自玩。倘來榮辱。如夢一幻。瞻彼妙香。與夫金剛。寔唯淨界。宜我法王。來往諸天。百靈護持。乘化返眞。去又何之。功紀人間。道在山中。一片貞珉。萬古英風。
月沙先生集卷之四十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