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금석문 등/청허당 서산대사비명

임진(壬辰) 승장 중 휴정(休靜)과 유정(惟政) 등 관련자료

아베베1 2011. 12. 13. 12:17

 

 

 

 이미지 사진은 도봉산  정상부인 자운봉의 모습이다

 

 임진승장 휴정은 서산대사 이며 휴정은 전주 최씨 이며  임진승장 이시다

 

○ 휴정은, 자는 현응(玄應)이고, 속성(俗姓)은  전주최씨이다. 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어 중들 가운데 소문이 났다. 그가 금강산을 유랑한 때에 지은 시에,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임진(壬辰) 승장 중 휴정(休靜)과 유정(惟政)


묘향산(妙香山)의 늙은 중 휴정(休靜)은, 호가 서산대사(西山大師)이고 또 청허선사(淸虛禪師)라고도 한다. 덕행이 높고 계율을 엄히 지켰으며 불경에 두루 통하고 또 무장도 잘 지었다. 그의 뛰어난 제자들이 온 나라에 두루 퍼져 있었는데, 이때에 제자 수천 명을 모아 거느리고서 파천하는 임금을 뵈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나라의 환난이 이와 같은데 그대는 널리 구제할 수 없느냐.” 하였다. 휴정이 울면서 절하고, “국내의 늙고 병든 중들에게 이미 각기 있는 곳에서 불공을 드리고 수도해서 부처님과 신의 도움을 빌도록 하였고, 그 외에는 신이 모집하여 왔으니 군중에 나가고자 하나이다.신 등이 비록 일반 백성은 아니오나, 이 나라에서 태어나 임금의 길러주시는 은혜를 받자왔사온데, 어찌 한번 죽는 것을 아까와하겠습니까? 충성된 마음을 바치기를 원하나이다.” 하였다. 임금이 기뻐하여 ‘일국도 대사 팔도선교 도총섭 부종 수교 보제 등계 존자(一國都大士八道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堦尊者)’라는 칭호를 하사하게 하였다. 제자 의엄(義嚴)을 총섭으로 삼고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순안(順安) 법흥사(法興寺)에 주둔하면서 원수(元帥)를 응원하였다. 팔도의 사찰에 격문을 전하니 건장하고 용맹스러운 중들이 모두 달려왔고, 그의 뛰어난 제자 처영(處英)은 호남에서, 권율(權慄) 막하에 갔다. 유정(惟政)은 관동(關東)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 휴정은, 자는 현응(玄應)이고, 속성(俗姓)은 최씨이다. 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어 중들 가운데 소문이 났다. 그가 금강산을 유랑한 때에 지은 시에,

태평 성세에 요선(曜仙) 천길 노송나무[檜]인데 / 舜日曜仙千丈檜
숲을 사이에 두고 □□ 한 소리 물 여울이로다 / 隔林□□一聲灘

하는 것이 있었다. 기축년의 정여립 옥사에 명승(名僧)으로 잡혀 갇혔으나 임금의 특명으로 석방되고, 어제시(御製詩)와 의복을 하사하여 절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때(임진왜란)에 임금은 그를 불러서 중들을 거느리고 힘을 모아 적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지봉유설》 《소대기문》
○ 유정은, 자는 이환(離幻)이며, 호는 송운(松雲)이고 또 사명산인(泗溟山人)이라고도 한다. 속성은 임(任)씨이다. 용모가 헌걸스럽고 수염은 깎지 않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또 불경에도 달통하였다. 이때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에 있었는데, 적군이 절에 들어오니 중들이 모두 달아났으나 유정은 동요하지 않았다.적군은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혹은 합장하여 지극히 공경을 표하고 물러갔다. 국가에 충성하라는 교서와 휴정의 격문이 도착하니, 유정은 불탁(佛卓) 위에 펼쳐 놓고 모든 중들을 불러놓고 읽어 주면서 눈물을 흘렸다. 산중에 있는 중들을 모두 동원하여 서쪽으로 가면서 글을 사방에 띄워서 각각 승병을 일으키게 하였더니, 평양에 도착할 때에는 무리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성 동쪽에 주둔하면서 접전하지는 않았으나 경비를 잘하고 역사를 부지런히 하여 먼저 무너져 흩어지지 않으니 모든 도(道)에서 이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 영남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왜장 청정(淸正)이 만나기를 청하므로, 유정이 왜군 진영에 들어가니, 적군은 몇 리나 벌여 섰고 창검은 묶어 세워 놓은 것 같았다. 유정은 두려워하는 빛도 없이 청정을 보고 조용히 담소하였다. 청정이 유정에게, “귀국에 보물이 있는가.” 하니, 유정이, “우리나라에서 너의 머리를 천근의 금과 만호가 되는 고을을 주겠다고 현상하였으니, 네가 보배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대답하니, 청정이 크게 웃었다.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때 왜병의 방비가 매우 성하여 유정이 겨우 한 번 보고 물러나왔으니, 필시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잘못 전해진 것인 듯하다.”고 하였다. 10년 뒤에 강화 사건으로 일본에 갔는데 왜놈들은 그를 후히 대접하고 보냈다. 《지봉유설》 ○ 유정은 벼슬이 지중추(知中樞)고 사시(私諡)로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 하였다.


성소부부고 제13권
문부(文部) 10 ○ 제발(題跋)
풍간상첩(豐干像帖) 뒤에 쓰다


옛날 향산(香山)에 오도자(吳道子)가 그렸다는 풍간(豐干)의 상(像)이 있어 승가(僧家)에서 보물로 간직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내가 그것을 백방으로 찾았지만 얻지 못하였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이다. 가 죽을 임시에 그의 제자 원준(元俊)에게 말하기를,
“교산(蛟山 허균의 호)이 늘 이 그림을 갖고 싶어 하였지만 내가 숨겼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한 보물이므로 아무에게나 간직하게 할 수는 없다. 옹(翁)은 본시 선기(禪機 불교의 진리)를 아는 분이니 가져다 주도록 하라. 죽기 전에 틀림없이 우리에게 되돌려 줄 것이다.”
하였다. 이듬해 봄에 원준이 한 중을 시켜 보내왔기에 보니, 소폭화(小幅畫)로, 노승(老僧)은 호랑이를 타고 앉았고, 한 산동(山童)은 보따리를 지팡이에 걸어 어깨에 메고 뒤를 따르는 모습이었다. 비록 빛깔도 어둡고 그림도 벗겨지고 떨어져 나가곤 하였지만 필치는 신묘한 경지에 들어간 것이니 참으로 오래된 보물이다.
내가 생각건대, 오도현(吳道玄)은 개원(開元 당 현종(玄宗)의 연호) 이전의 인물이고 풍간도 그와 동시 사람이다. 이름은 비록 ‘같은 시대의 화가가 같은 시대의 인물을 그렸다.’고 드러나 있지만 그것은 무리인 것 같다. 만일 풍간의 상이라고 한다면 오도현의 그림이 아닐 것이며, 만일 오도현의 그림이라고 한다면 풍간의 상이 아닐 것이니, 반드시 이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의 작가가 당(唐) 나라 사람이라는 것은 매우 분명하니 보물로 여길 만하다.
이정(李楨)은 이 그림을 구경하고 삼주야(三晝夜)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이징(李澄)은 보고서 고화(古畫) 10여 점을 가지고 이것과 바꾸자고 애걸하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당대의 유능한 화가들이므로 반드시 그 진가를 알았을 것이다. 다만 배접을 해서 간직하였다가, 내가 죽을 때가 되면 반드시 다시 산문(山門)으로 돌려줄 생각이다.


 

[주D-001]풍간(豐干) : 당(唐) 나라 때 명승(名僧)의 이름. 이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화신(化身)이었다고 한다.

 

간이집 제8권
서도록(西都錄) 후(後)
청허당(淸虛堂)에서 정공(靜公)을 만나 보지 못하고 첩운(疊韻)


청허당에서 노년을 편히 지내는 이분이야말로 / 淸虛端爲養衰遲
산중의 절승(絶勝) 중에 최고로 꼽아야 할 것인데 / 應選山中第一奇
팔십 세의 노 선사(禪師)와 나이 예순 나그네가 / 八十禪翁六十客
이번에 길 어긋나면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거나 / 相違那復得相知


[주C-001]정공(靜公) :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으로, 그의 호가 청허(淸虛)이다.

 

간이집 제8권
환조록(還朝錄)
삼응(三應)의 시권에 차운하다. 그는 휴정(休靜)의 사미(沙彌)인데, 지금 계속해서 유정(惟政)을 섬기고 있다.


오늘날의 오조(五祖)와 육조(六祖)가 바로 / 今之五六祖
우리 스님의 과거와 현재 스승들이시라나 / 卽尒故新師
세상 구하러 세상 벼슬 교대해 받은 터에 / 捄世遞恩印
서울에 와서 기대는 곳은 여전히 절간이군 / 依京猶道祠
선종(禪宗)의 가풍이 스님의 몸에 엄존(儼存)하거니 / 家風玆乃在
의발(衣鉢)을 전한 법이 어디에 또 옮겨 가랴 / 衣法也非移
하지만 나는 머리에다 관을 씌워 주고픈데 / 顧我冠顚志
과연 어느 쪽이 잘 되고 못 되는 것일는지 / 孰成而孰虧
휴정과 유정이 서로 계속해서 승직(僧職)을 주고받았고, 유정이 현재 삼청(三淸)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1]오조(五祖)와 육조(六祖) : 중국 선종(禪宗)의 오조(五祖)인 홍인(弘忍)과 그의 제자인 육조대사 혜능(慧能)을 말하는데,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과 그의 제자인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2]하지만 …… 주고픈데 : 삼응(三應)을 유가(儒家)로 인도하여 환속시키고 싶다는 뜻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한유(韓愈)가 승려를 전송한 시 가운데 “지금 그대를 우리의 도로 끌어들여, 삭발한 머리에 유자(儒者)의 관을 씌워 주고 싶구려.[方將斂之道 且欲冠其顚]”라는 말이 나온다. 《韓昌黎集 卷2 送靈師》

 

시(詩)
탐진 풍속 노래[耽津村謠] 15수


누리령 잿마루에 바위가 우뚝한데 / 樓犁嶺上石漸漸
길손이 눈물 뿌려 사시사철 젖어 있다 / 長得行人淚灑沾
월남을 향하여 월출산을 보지 마소 / 莫向月南瞻月出
봉마다 모두가 도봉산 모양이라네 / 峯峯都似道峯尖
월출산은 강진(康津)에 있고, 도봉산은 양주(楊州)에 있음.
동백나무 잎들은 얼어도 무성하고 / 山茶接葉泠童童
눈 속에 꽃이 피면 붉기가 학 이마 같아 / 雪裏花開鶴頂紅
갑인년 어느 날에 소금비가 내린 후로 / 一自甲寅鹽雨後
유하나무 감귤나무도 모두 말라 없어졌다네 / 朱欒黃柚盡枯叢
바닷가 왕대나무 키가 커서 백 자러니 / 海岸篔簹百尺高
지금은 낚싯배 상앗대로도 못 쓴다네 / 如今不中釣船篙
정원지기가 날마다 새 대를 가꾸어서 / 園丁日日培新笋
죽력 내내 권문세가에 바치기 때문이야 / 留作朱門竹瀝膏
성벽은 다 무너져 언덕바지 설렁한데 / 崩城敗壁枕寒丘
해가 지면 징소리만 주춧돌을 울린다네 / 鐃吹黃昏古礎頭
여러 섬에 나무들을 해마다 베어만 내지 / 諸島年年空斫木
청조루를 중건하는 사람은 통 없다네 / 無人重建聽潮樓
무논에 바람 불면 보리물결 장관이고 / 水田風起麥波長
보리타작 할 무렵에 모를 게다 꽂는다 / 麥上場時稻揷秧
배추는 눈 속에서 새로 잎이 파랗고 / 菘菜雪天新葉綠
병아리는 섣달에 솜털이 노랗다네 / 鷄雛蜡月嫩毛黃
석제원 북쪽에는 갈림길이 하 많아서 / 石梯院北路多歧
예부터 낭자들이 이별하는 곳이라네 / 終古娘娘此別離
한도 많은 문 앞의 수양버들 나무들은 / 恨殺門前楊柳樹
그통에 다 꺾이고 남은 가지 몇 개 없어 / 炎霜摧折少餘枝
눈처럼 새하얀 새로 짜낸 무명베를 / 棉布新治雪樣鮮
이방에 낼 돈이라고 졸개가 와 뺏는구나 / 黃頭來博吏房錢
누전의 조세를 성화같이 독촉하여 / 漏田督稅如星火
삼월하고 중순이면 세 실은 배를 띄운다네 / 三月中旬道發船
왕적(王籍)에 누락된 민전(民田)이 6백 여 결(結)에 이르는데 그것을 재
결(災結)로 거짓 보고하고 있으니 국가 조세가 얼마나 많이 축이 나겠는가.

완주의 황옻칠은 맑기가 유리 같아 / 莞洲黃漆瀅琉璃
그 나무가 진기한 것 천하가 다 알고 있지 / 天下皆聞此樹奇
작년에 성상께서 세액을 견감했더니 / 聖旨前年蠲貢額
봄바람에 밑둥에서 가지가 또 났다네 / 春風髡蘖又生枝
오만족 총각인지 머리털은 더부룩한데 / 烏蠻總角髮如雲
써내는 글씨 보니 중국 문자 아니로세 / 寫出三倉法外文
자바섬이 아니면 루손섬에서 왔으렷다 / 不是瓜哇應呂宋
장미빛 옥합에서 야릇한 향내 풍기네 / 薔薇玉盒發奇芬
이때 표류선이 제주도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음.
백련사 누대 앞에 둥그렇게 비친 물결 / 蓮寺樓前水一規
봄이면 눈 같은 조수 문중방까지 오른다네 / 春潮如雪上門楣
유명한 절 다해봐야 두륜사가 으뜸이지 / 名藍總隷頭輪寺
서산대사 공적 기린 어제비가 있으니까 / 爲有西山御製碑
시골 애들 습자법이 어찌 그리 엉망인지 / 村童書法苦支離
점획과파 모두가 낱낱이 비뚤어져 / 點畫戈波箇箇欹
글씨방이 옛날에 신지도에 열려 있어 / 筆苑舊開新智島
아전들 모두가 이광사에게 배웠었는데 / 掾房皆祖李匡師
가시밭길 어느 때나 앞길이 트일는지 / 荊棘何年一路開
누른 띠밭 참대나무 주릿대 비슷하네 / 黃茅苦竹似珠雷
형방의 아전들이 소란 떠는 것이 / 形房小吏傳呼急
서울에서 누가 또 귀양을 왔군그래 / 知是京城謫客來
삼월이면 송지에 말시장이 열리는데 / 三月松池馬市開
오백 푼만 집어주면 천재마를 고르게 되지 방언에 좋은 말을 일러 천재마(天才馬)라고 함. / 一駒五百揀天才
흰말총 체라던지 검은말총 갓이랑은 / 白騣籮子烏騣帽
그 모두가 한라산 목장에서 온 거라오 / 都自拏山牧裏來
전복이야 옛날부터 점대에서도 즐겼지만 / 自古漸臺嗜鰒魚
동백기름이 창자 훑어낸다는 것 헛말이 아니로세 / 山茶濯䐈語非虛
성 안의 아전들 들창문 안에는 / 城中小吏房櫳內
규장각 학사들의 서찰이 다 꽂혔네 / 徧挿奎瀛學士書
도독 영문 둔 지가 이백 년이 되었는데 / 都督開營二百年
부두에는 왜놈 배를 다시 매지 못했었지 / 皐夷不復繫倭船
진린의 사당 속엔 봄풀이 우북한데 / 陳璘廟裏生春草
아낙들이 돌을 던져 아들 점지 해달란다네 / 漁女時投乞子錢


[주D-001]청조루 : 강진현(康津縣) 객관(客館) 남쪽에 위치한 누대. 현감(縣監) 오순종(吳舜從)이 건립한 것이라고 함. 《東國輿地勝覽》
[주D-002]오만족 : 중국 사천성(四川省) 남부, 운남성(雲南省) 동북부 등지에 흩어져 사는 종족들. 《唐書 南蠻傳》
[주D-003]점획과파 : 습자(習字)하는 기본법. 즉 점찍고, 건너긋고, 삐치고, 파임하는 것이다.
[주D-004]글씨방이 …… 있어 : 영조(英祖) 연간의 서예가요 양명학(陽明學)에 밝았던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나주(羅州) 벽서사건(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처음 회령(會寧)으로 유배되었는데, 그의 문필을 좋아하는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자 그를 다시 진도(珍島)로 이배하였다. 이광사는 그 배소에서 생애를 마칠 때까지 후학 지도에 몰두하였음. 《東國文獻筆苑編》
[주D-005]주릿대 : 형구(刑具)의 일종. 원래 주뢰(周牢)인데 여기서는 글자를 바꾸고 음만 취하여 주뢰(珠雷)로 표기한 듯함.
[주D-006]점대 : 대(臺) 이름. 한(漢) 나라 때 미앙궁(未央宮) 서쪽에 있었는데, 송(宋)의 소식(蘇軾)이 쓴 〈복어행(鰒魚行)〉에, “점대에 사람 없고 긴 활만 쏘던 시절, 처음에는 사람들이 복어 먹을 줄 몰랐다네.[漸臺人散長弓射 初噉鰒魚人未識] …… ” 하였음.
[주D-007]진린 : 정유 재란(丁酉再亂) 때 우리나라에 파견되었던 명(明)의 수군 제독.
다산시문집 제12권
변(辨)
송광사(松廣寺)의 옛 바리때[古鉢]에 대한 변증

어떤 객(客)이 나에게 묻기를,
“물건 가운데는 볼 수는 있으나 생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송광사(松廣寺)의 옛 바리때[古鉢]가 그것이다. 이 바리때는 옛날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물려준 그릇으로서 백동(白銅)으로 본떠 만든 것으로 모두 다섯 개인데, 정(丁)과 무(戊)를 갑(甲)과 을(乙)에 넣어도 들어가고, 을(乙)과 병(丙)을 갑(甲)과 무(戊)에 넣어도 들어간다. 내가 중[僧]들의 바리때를 많이 보았으나, 큰 것은 그 밖에 위치하고 다음 것은 그 다음에 위치하여 차서대로 층이 겹쳐지면서 적어질수록 더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었고, 그 갑(甲)과 을(乙)의 차서는 바꾸려 해도 바꿀 수 없었다. 그런데 서산(西山)의 바리때만은 이와 같으니, 어찌 이른바 영환괴궤(靈幻怪詭)하여 깊이 추구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하기에, 나는,
“그렇다.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다섯 개의 그릇이 서로 겹쳐졌을 때 그 그릇의 입이 어떠하던가? 대패[鉋]로 민 듯이 숫돌처럼 평평하던가, 아니면 밖에 있는 것이 조금 낮고 안에 있는 것이 조금 높아서 조금은 크고 작은 차이가 있던가?”
하니, 객이,
“조금 크고 작은 차이가 있기는 하나 그 차이는 겨우 기장 한 알[一黍]의 차이 뿐이었다.”
하였다. 나는,
“그러면 그 그릇의 제도가 위아래의 둘레와 직경(直徑)이 차이가 없고 형상이 죽통(竹筒)과 같던가, 아니면 위는 넓고 아래는 좁아서 조금이라도 넉넉하거나 훌쭉한 차이가 있던가?”
하니, 그가,
“두껍고 얇은[豐剡] 차이가 있어서 거의 손가락 하나만 하였다.”
하였다. 나는,
“그러면 그 그릇의 두께[厚]는 소나 말의 가죽만 하던가, 아니면 견지(繭紙)처럼 얇던가?”
하자, 그는,
“그 두께는 늙은 누에가 지은 고치만한데 조련(調練)이 아주 균일하였다.”
하므로, 내가,
“그렇다. 그렇다면 이 그릇은 지극히 범상한 물건이요, 이른바 ‘영환괴궤(靈幻怪詭)’한 물건이 아니다.”
하니, 그가,
“무엇 때문인가?”
하기에, 나는,
“그 그릇의 두께가 고치[繭]만하고 그 생김새는 위가 넓어서 다섯 개의 그릇 두께가 그 위의 넓이와 호발(毫髮)의 차이도 없게 만들었다면 갑(甲)과 을(乙), 을(乙)과 갑(甲)이 진실로 서로 들어갈 수 있으나, 그 그릇의 입에 이르러서는 한 알의 기장[黍]만한 차이는 없을 수 없다. 그러니 한 알의 기장만한 차이가 있어서 고치[繭]만한 두께가 있게 된 것인데 무엇이 이상한가. 그것을 만든 공인만은 양공(良工)임에 틀림없다.”
하니, 객이 껄껄 웃으면서,
“그대의 말을 듣고 보니 이 그릇은 과연 ‘영환괴궤(靈幻怪詭)’한 것이 아니네그려. 사람들이 이른바, 보기는 하면서도 생각으로는 알기 어렵다는 것을 그대는 보지 않고도 생각으로 알아내니, 그대야말로 박식(博識)한 사람이네.”
하므로, 나는 감당치 못해 머뭇거리면서 사양하기를,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오직 항상 존재하여 오래도록 전해지는 물건은 이른바 영환괴궤(靈幻怪詭)’한 것이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칼을 삼키고 불을 토하는 등의 요술은 바로 눈 한번 돌리는 동안에 벌어지는 일이요, 오래갈 수는 없는 것이다.”
하였다.
다산시문집 제17권
비명(碑銘)
화악 선사(華嶽禪師)의 비명(碑銘)

사문(沙門) 혜장(惠藏)이 보은(寶恩)의 산원(山院)에 있는 나에게 들러, 그의 법조(法祖) 화악(華嶽)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에게 묘비에 쓸 글을 청했다. 나는 그가 호매(豪邁)하되 불우(不遇)했던 것이 슬퍼서 이를 허락했다. 혜장의 말은 다음과 같다.
화악 선사는 색금현(塞琴縣 지금의 해남임)의 화산방(花山坊)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대둔사(大芚寺)에서 머리를 깎았다. 얼뜨기 같아 글자를 몰랐기 때문에, 가래[鏵臿]ㆍ괭이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팔아 배를 채웠으므로 비록 짚신을 삼아 파는 자일지라도 그를 천하게 여겼다.
하루는 매우 고달파서 상원루(上院樓) 아래에서 진 짐을 벗어놓고 쉬고 있었다. 그때 취여삼우 선사(醉如三愚禪師)가 대중을 모아 놓고 화엄종지(華嚴宗旨)를 강론하고 있었다. 선사는 누판(樓板) 아래에서 남몰래 그것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깨달아, 지고 있던 농기구[田器]를 모두 동료에게 주고 귀의했다. 위로 올라가 꿇어앉아 눈물을 흘리며 굳이 가르침을 청하니, 이날 온 와중이 크게 놀랐다는 것이다. 그때 마침 대둔사에는 토목 공사가 있었는데, 선사는 낮에는 도끼질과 벽 바르는 일을 도와 주고, 저녁에는 돌아와 솔방울[松子]을 주워 부엌에 불을 넣고 밤을 새워가며 불서(佛書)를 읽었다. 3년이 지나자, 그와 같은 서열에 있던 자들은 모두 뒤로 처졌다.
그는 사방을 구름처럼 떠돌며 참오(參伍)하여 인증(印證)을 받았는데, 마침내 취여삼우(醉如三愚)의 방에서 점향(拈香)하게 되었다. 이때 사미(沙彌)들이 몰려들어서 대둔사의 모임에는 배우는 자가 1천여 명이나 되었다. 그때 북방의 월저 선사(月渚禪師)가 소문을 듣고 와서 뵙고 그와 더불어 선지(禪旨)를 논하였다. 선사는 그 영도하던 대중을 모두 월저 선사에게 사양하니, 배우는 사람들이 크게 놀라 소란을 피웠다. 선사는 그들을 달래기를,
“너희들이 알 바가 아니다.”
하고는, 인솔하여 월저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스스로 방 한 칸을 쓸고는 두문 불출 하며 면벽(面壁)하였다. 월저는 돌아와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남쪽에 가서 육신(肉身)의 보살을 만났다.”
만년에는 술에 빠져 매일 밤 곤드레가 되어 커다란 절구공이를 들고 절의 주위를 몇십 번 혹은 몇백 번씩 돌았다. 그때 그는 절구공이로 집모퉁이 축대와 뜰의 낙숫물받이를 다지는데, 그 소리가 매우 야릇하고 시끄럽게 산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배우는 자들은 숨을 죽이고 감히 방문을 나오지 못하였는데, 다음날 아침 까닭을 물었으나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시적(示寂 승려의 죽음)하려 할 때에는 두륜산(頭輪山)에 천둥이 치더니, 다비(茶毗 화장(火葬)을 말함)한 뒤에는 사리(舍利) 두 알을 얻었다.
선사의 성은 김씨이고 법명(法名)은 문신(文信)인데, 강희(康熙 청 성조(淸聖祖)의 연호) 연간의 사람이다. 그의 전등(傳燈)의 연원은 위로 서산(西山)의 사점주(四點炷)를 이었고 아래로는 혜장(惠藏)의 사견발(四見跋)에 이르렀으니, 선사는 그 가운데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땅파는 가래 있으니 / 有趙
가래 호미 사라고 외쳤다네 / 買䤥
이에 그 짐을 풀고 / 迺釋其㓺
눈물 콧물 가로세로 흘렸다네 / 涕洟衡從
굶어도 밥을 못 얻으니 / 飢不値餼
쉰밥 찬밥 어찌 가리리 / 害餲害饛
무지개가 밤에 떠서 / 蝃蝀夜隮
하늘에 높이 솟았네 / 碧落穹窿
조창이 고요한데 / 槽廠闃廖
술 취한 절구공이 콩콩 울린다 / 醉杵銎銎
너를 아는 자 적어 / 知爾者寡
귀머거리마냥 웃기만 하네/褎如其聾
만 골짜기에 바람 일어 / 不若大驚
크게 놀라게 함만 같지 못하다 / 萬壑生風
백년 뒤에는 / 百年而逅
밝기가 발몽(發矇)한 것과 같으리 / 昭若發矇

[주D-001]취여삼우 선사(醉如三愚禪師) : 취여(醉如)는 조선의 스님인 삼우(三愚)의 별호. 얼굴이 붉다 해서 그의 전법사(傳法師)인 해운(海運)이 지어준 별호.
[주D-002]전등(傳燈) : 등은 어두운 데를 비쳐주는 것이므로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지혜롭게 하는 교법(敎法)에 비유하는데, 이 교법을 스승이 제자에게 서로 전하여 가는 것을 말한다. 법맥(法脈)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가는 것을 등불이 꺼지지 않는 데에 비유한 것.
[주D-003]서산(西山)의 사점주(四點烓) …… 혜장(惠藏)의 사견발(四見跋) : 서산대사(西山大師)에겐 네 명의 수제자가 있었으니 사점주란 그 네 명의 마음의 심지에 서산이 도(道)의 불을 붙여 주었다는 것을 말함. 그 네 명 중 소요 태능(消遙太能)의 계통이 화악 문신(華嶽文信)이고, 화악 문신의 재전 제자가 연파 혜장(蓮波惠藏)이다. 혜장은 네 명의 스승에게 배워 깊은 이치를 터득하였으니 사견발은 그것을 말함. 그 네 명의 스승은 아암 장공의 탑명에 나오는 춘계 천묵(春溪天黙)ㆍ연담 유일(蓮潭有一)ㆍ운담 정일(雲潭鼎馹)ㆍ정암 즉원(晶巖卽圓)임.
[주D-004]귀머거리마냥 …… 하네 : 유여(褎如)는 유여 충이(褎如充耳)의 준말. 유여 충이는 옷을 잘 입고 귀막이를 하였다는 뜻으로, 곧 외모는 훌륭하나 간언(諫言)이나 충언(忠言)을 듣지 않음을 비유

백호전서 제34권
잡저(雜著)
풍악록(楓岳錄)


임자년 윤7월 24일(정유) 맑음. 아침에 배와 대추 등 과일을 사당에다 차려놓고 풍악(楓岳)에 다녀오겠다는 뜻을 고하였다. 그리고 나서 출발하여 통제(統制) 외삼촌 댁에 도착하였다. 내가 가지고 가는 것이라곤 《주역》 두 권과 일기책 한 권뿐이고, 그 나머지 일행들의 필요한 여행 도구는 모두 외삼촌이 챙기셨다. 부평 사는 외삼촌도 오셔서 나더러 멀리 가 너무 오래 있지 말라고 타일렀다. 통제 외삼촌과 함께 출발하여 동소문 밖에 나가 누원(樓院)에서 말에 꼴을 먹이면서 지나가는 중 덕명(德明)이라는 자를 만났다. 그 중은 일찍이 풍악산 구경을 했던 자로서 우리에게 대충 풍악의 뛰어난 경치를 말해주었다. 늦게야 양주읍(楊州邑)에 도착하여 외삼촌은 양주 목사를 찾아가고 나는 민가에 부쳐 있었는데, 양주 목사 이원정(李元禎)이 찾아와서 간단한 술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유군 여거(柳君汝居)-이름은 광선(光善)임- 가 따라왔다. 유군은 원래 모르는 사이였는데 외삼촌을 통해 와 좌중에서 서로 인사를 나눈 사이이다. 그 민가에 벼룩이 많아 잠자리를 고을 서당(序堂)으로 옮겼는데 고을 주수의 아들인 정자(正字) 담명(聃命)이 찾아왔고 주좌(州佐)인 우(禹)와 한(韓) 두 사람도 왔다. 날씨가 매우 더웠다.

25일(무술) 맑음. 양주 목사 부자(父子)가 또 왔다. 아침에 출발하여 무성(蕪城) 고개를 넘어 감악산(紺嶽山)을 바라보고 가면서 유군(柳君)과 함께 홍복(弘福)ㆍ고령(高靈)ㆍ도봉(道峯)ㆍ불암(佛巖) 등지를 가리키기도 했다. 입암(笠巖) 율정(栗亭) 아래서 말에 꼴을 먹인 후 일행과는 일단 갈라섰다. 나는 송형 석우 계신(宋兄錫祐季愼)이 살던 곳을 묻고 송군 욱(宋君澳)의 초당에 들렀더니 매화나무 대나무는 옛 그대로이고 벽에는 내가 몇 해 전에 써 준 기문(記文)과 허장 미수(許丈眉叟)가 쓴 기(記)가 걸려 있어 읽어보니 지난날의 회포가 일어 눈물이 글썽했다. 송군 제(宋君濟) 부자를 다 조문하고 일행을 뒤쫓아 간파령(干波嶺) 아래서 만났다. 차근연(差斤淵)을 건너서는 유군과 서로 다른 길로 갈라서 가다가 저물어 신릉(新陵)정극가(鄭克家) 산장에 당도하여서는 함께 잤는데, 자해(紫蟹)에 홍주(紅酒)를 마시며 서로 흔쾌하게 보냈다.

26일(기해) 맑음. 정극가와 출발은 함께 했으나 길이 달랐다. 나는 진수동(眞樹洞)으로 이 참봉 언무 경윤(李參奉彦茂景允)을 찾아가서 그의 세 아들 태양(泰陽)ㆍ태징(泰徵)ㆍ태륭(泰隆)과 윤생 세필(尹生世弼)을 만나 보았다. 윤생은 이 참봉의 이모 아들로 우리 남원(南原) 윤씨라고 하였다. 이생 태양이 나를 따라왔다. 군영동(群英洞)에 이르러 허미수(許眉叟) 어른을 뵈었는데 일행들은 먼저 와 있었고, 미수 어른을 배알하는 자리에서 허생 함(許生)ㆍ송생 직(宋生溭)ㆍ정생 태악(鄭生泰岳)을 만났다. 미수 어른은 서실로 나가고 그들과 함께 은행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었는데 초가집에 온갖 화초가 그윽한 정취를 풍겼다. 미수 어른이 두류산(頭流山)ㆍ오대산(五臺山)ㆍ태백산(太白山) 등의 기록과 정허암전(鄭虛菴傳)ㆍ답자대부상서(答子代父喪書)를 꺼내 보여 주기에 나는 일찍이 지은 선계설(禪繼說)로 수답하였다.
또 짐 꾸러미에서 술과 과일을 내놓아 몇 순배 대작한 후 섬돌 위에 있는 일월석(日月石)을 구경하였다. 옛날에 석경(石鏡)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해와 달 그림자가 석면에 훤히 비쳤으며 미수 어른이 손수 그 세 글자를 조각했다고 한다. 얘기 도중 길을 떠나는 정표로 글을 지어달라고 청했더니 쾌히 허락하고 또 전서(篆書)로 광풍제월(光風霽月) 낙천안토(樂天安土) 수명안분(受命安分) 이렇게 열두 자를 써 주어 유군과 나눴는데 유군은 수명(受命) 이하 네 글자를 차지했다. 늦어서야 하직하고 출발했는데 외삼촌과 유군은, 오늘은 산 속의 신선늙은이를 만나 봤으니 헛걸음은 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징파도(澄波渡)를 건너 옥계역(玉溪驛)에서 잤는데 밤늦게까지 얘기를 나누었다.

27일(경자) 맑음. 아침을 먹고 출발하였다. 시냇가에서 말에 꼴을 먹이다가 길을 지나가고 있던 덕능(德能)이라는 산사람을 만났다. 풍악에 가면 서로 얘기할 만한 산인(山人)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유점암(楡岾菴)에 있는 나백(懶伯)과 장안암(長安菴) 곁에 사는 취양(就陽)이 있다고 대답했다. 식사를 끝내고 철원(鐵原) 고을을 향해 가다가 용담 고개 위에 올랐더니 동북으로 산이 확 트여 몇백 리가 훤히 바라다보였다. 길 가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거기가 평강(平康) 지경이라고 하였다. 한낮에 철원 읍내에 들렀더니 주수 권공 순창(權公順昌)이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고, 저녁에는 찾아와 간단한 술자리를 베풀어 주었는데 송이버섯ㆍ팥배ㆍ머루ㆍ다래 등 산중 별미를 두루 맛볼 수 있었다. 아침에 함께 북관정(北寬亭)에 오르기로 약속하고, 얘기 도중 권공과는 권수부(權秀夫) 얘기가 나와서 살아서 있고 죽어서 없고를 생각할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이어 앞길이 험난할 것이라는 쪽으로 말이 갔는데 이때 권공 말이, 앞길이 비록 험난하다 하더라도 노장(老將)이 일을 맡으면 실패는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우리 외삼촌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리하여 외삼촌 말씀이,
“이번 길에는 내가 사양하지 않고 용사를 할 것이니 우리 일행 모두도 내가 통솔하면서 좌지우지 할 것이네.”
하여, 서로 한바탕 웃었다.

28일(신축) 맑음. 아침에 주수가 와서 함께 북관정에 오르는데 펑퍼짐한 넓은 평야가 백 리 멀리 뻗쳐 있고, 서쪽에 우뚝 솟아 있는 것은 금학산(琴鶴山)인데 그것이 벋어 가서 보개산(寶蓋山)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들 가운데 서너 개 옹기종기 언덕이 있는데 그것은 보개산이 벋어나온 종적이라고 하였다. 간단히 술 한 잔 나누고 작별했는데, 그때 마침 시원한 바람이 잠시 스치고 지나가는데 높은 산 가파른 절벽 위에는 이미 가을빛이 역력하였다. 정자가 큰 평야를 내려다보고 있어 동으로는 궁예(弓裔)의 유허가 보이고 서북으로는 보개산ㆍ숭암산(嵩岩山) 등을 바라볼 수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높은 데 오르면 시상이 떠오른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으나 그때는 시구를 완성하지 못하였다. 이 시는 그 뒤에 쓴 것이다.

내 봉래산 구경의 꿈을 안고 / 我夢蓬萊好
가다가 북관정에 올라 보니 / 行行登北觀
중간에 산들이 확 트이고 / 萬山忽中闢
감돌아 물이 흐르는 곳 / 一水何縈灣
저리 광활한 곳 궁예의 옛터인가 / 曠蕩弓王宅
우뚝 솟아 있는 보개산이로세 / 穹隆寶蓋山
비옥한 들판도 천만 주나 되어 / 沃野千萬疇
함곡관 같은 천연의 요새로세 / 天府猶函關
영웅 호걸도 각기 한때인지라 / 雄豪亦一時
옛터엔 쓰러진 담만 남아있네 / 故墟惟頹垣
흥망이 몇 번이나 되풀이 되었을까 / 興亡機翻覆
국가 치란도 마찬가지라네 / 治忽迭相看
내가 왔을 때는 칠월이라서 / 我來屬流火
구름 사이론 기러기떼 날고 / 鴻鴈翔雲間
숲속에는 시원한 바람 일어 / 涼風起林木
고원에는 벌써 가을 기운인데 / 秋氣屯高原
삶과 죽음에 옛 감회가 깊고 / 存沒感舊懷
주인의 정은 끈끈도 하네 / 主人情惓懃
이별의 자리에 한 독 술이언만 / 離亭一樽酒
앞길은 얼마나 멀고 멀까 / 前路嗟漫漫
노장이 기율을 잃지 않아도 / 老將不失律
작별 앞두고 말에 파도가 이네 / 別語生濤瀾
석 잔 술로 말에 올라 떠나니 / 三杯上馬去
바람에 옷소매가 펄럭이네 / 征袂風翩翩

경재소(京在所)에서 말에 꼴을 먹이고 황 감사(黃監司) 정사에서 밥을 먹고 숨을 돌리는데, 푸르른 절벽 사이로 한 줄기 시내가 흐르고 있어 계산(溪山)의 정취가 물씬하였다. 우리를 맞으러 소년이 왔기에 성명을 물었더니 황응운(黃應運)으로 고 감사 경중(敬中)의 현손(玄孫)이며 수재(秀才) 석(錫)의 아들이라고 한다. 자기 선대의 유첩(遺帖)을 꺼내 보이는데 거기에 우리 선인(先人)이 황 감사를 전송하면서 읊으신 시 두 수가 적혀 있어 받들어 읽고는 슬픈 감회를 느꼈다. 황 수재를 시켜 그 시를 등사해 오게 하고 드디어 금화(金化)를 향해 출발하여 오다가 시냇가에서 쉬고는 금화 고을을 지나는데 앞길에서 바라보니 아름드리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고 그 앞에 비각(碑閣)이 하나 있는데 거기가 바로 홍 감사가 순의(殉義)한 곳이라고 하였다. 말에서 내려 읽어 보니, 평안도 순찰사 홍명구 충렬비(平安道巡察使洪命耈忠烈碑)라고 씌어 있었다.
내가 몇 해 전에 이를 두고 쓴 시가 있기에 유군에게 외워 보였는데 시제는 애부여(哀夫如)로, 부여(夫如)는 금화현의 별호이다. 시는 이렇다.

화의가 성립된 후 일이 크게 잘못 되어 / 和議之後事大謬
외로운 십제성이 위기일발 이었다네 / 十濟孤城危一髮
구름 같은 남쪽 군대 북도 한 번 못 울리고 / 南師雲屯鼓不揚
북군들은 도망가고 숨기에 정신없어 / 北師鳥竄旗先奪
우리 공이 소매 털고 눈물로 일어났다가 / 我公投袂涕淚起
애석하게 힘이 다해 중도에 죽었다네 / 嗚呼力屈中道死
일사보국 그 마음을 한평생 다졌기에 / 平生一死許報國
싸움터에서 시체되는 것 두려울 바 아니지만 / 橫屍軍前非所惴
단칼에 교졸의 목 베버리지 않았다가 / 恨不用釼斬驕卒
천하사를 그르친 것 그것이 한이라네 / 倉卒失計天下事
홍 감사ㆍ유 병사는 / 洪監司柳兵使
어찌하여 적군의 본거지로 쳐들어가 / 胡不提兵走遼碣
단숨에 천지를 바꿔놓지 않았던가 / 一擧可以旋天地
하늘이 우릴 돕지 않고 서생은 옹졸해서 / 天不佑我書生拙
투구 벗어 투항하고 안장 밑에서 살아남은 자도 있고 / 脫兜被髮鞍底活
고관 차림으로 들창 아래서 죽어간 자도 있었는데 / 披紫肘金牖下沒
그대 송산에서 밤중에 일어난 창황한 일 보지 않았던가 / 君不見松山半夜事蒼黃
십만 명 관군이 일시에 멸망하고 말았네 / 十萬官軍隨火滅

역리(驛吏)의 집에서 잤는데 그의 성명을 물었더니 진우운(秦遇雲)이라고 했다. 이날 극가(克家)가 얘기 도중 정군평(鄭君平)의 시 세 수를 외웠는데 좋았다. 나도 구경 나와서 옛 것을 찾고 싶은 감회가 있었기 때문에 그 시를 여기에다 적어 보았다.

이 나라에도 성인이 나셨는데 / 有聖生殊域
때는 방훈과 동시대였다네 / 于時並放勳
동천에 돋는 해 맞이하고 / 扶桑賓白日
박달나무는 청운을 꿰뚫는 듯 / 檀木上靑雲
이땅에 제후를 처음으로 세워 놓았으나 / 天地侯初建
산하는 아직 혼돈상태였다네 / 山河氣未分
무진년부터 천 년을 사셨으니 / 戊辰千歲壽
우리 임금 위해 축수하고 싶네 / 吾欲祝吾君
- 이상은 단군(檀君)이다 -

상 나라 서울에 제비는 돌아가고 / 亳社歸玄鳥
황하 배안에 백어가 나타나자 / 河舟見白魚
여덟 가지 법 조목 챙겨 가지고 / 還將八條敎
동쪽의 나라에 와 살았는데 / 來作九夷居
해외라서 주의 영향 받지 않고 / 海外無周粟
낙서 전수는 하늘의 뜻이었네 / 天中有洛書
지금은 몰락해 버린 옛 터에 / 故宮今已沒
은허인양 벼와 기장만 우거져 있네 / 禾黍似殷墟
- 이상은 기자(箕子)이다. -

웅장한 왕검성 도읍지에 / 王儉都雄壯
천손의 일 까마득하기만 하네 / 天孫事寂寥
흰구름 속에 말만 보이지 / 白雲空見馬
바다에 다리 소식 들을 길 없어 / 蒼海不聞橋
황홀하게도 신선이 되었으리니 / 怳惚神仙化
처량한 세대 멀기만 하여라 / 凄涼世代遙
그래도 문무정이 남아 있어 / 獨留文武井
전조의 것임을 알 수 있다네 / 猶得認前朝
- 이상은 동명왕(東明王)이다. -

29일(임인) 맑음. 역리들이 술과 과일을 가져와 대접하였다. 아침에 출발하여 직목역리(直木驛里)에서 말에게 꼴을 주고 외삼촌을 대신해서 회양 군수에게 편지를 써 역졸을 주면서 전하라고 했다. 중치(中峙)를 지나니 금화(金化)와 금성(金城)의 분계점이라는 돈대가 있었는데, 거기서부터 서쪽으로는 지세가 구불구불하면서 동쪽으로 높아지고, 동쪽으로는 지세가 점점 낮아져서 물이 모두 동으로 흐르고 있었다. 재를 넘어 10여 리를 더 가 큰 시냇가에 이르자 사람들 수십 명이 모여 물건을 교역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금성 장터이고 시내 이름은 남대천(南大川)이라고 했다. 시내를 끼고는 느릅나무ㆍ버드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고 짙어가는 가을빛 속에 나무 사이사이로 인가가 은은히 보였으며 마을은 널찍하고 확 트인데다 전답들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리고 인마(人馬)들도 오고가고 하였다.
말에서 내려 다릿 가에서 쉬고 있노라니 옷차림이 남루하고 얼굴도 깡마른 늙은 아전 하나가 앞에 와서 절을 하였다. 성명을 물었더니 지응룡(池應龍)이라고 하는데 함께 얘기해 보니 문자도 꽤 알고 또 말하는 것이 조리가 있었다. 그래서 글을 얼마나 읽었느냐고 물었더니, 소년 시절 사서(四書)와 이경(二經)을 읽고 이백(李白)ㆍ두보(杜甫)ㆍ한유(韓愈) 등 여러 문장가의 시를 일만여 수나 외웠으나, 과거에는 응했다가 합격을 못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지은 시가 있으면 외워보라고 했더니 그는,

하얀 이슬 갈바람 계절은 가을인데 / 白露西風八月秋
눈 같은 갈대꽃이 강주에 가득하네 / 蘆花如雪滿江洲
지사라면 누구나 감개가 많을 때인 것을 / 從知志士常多感
어찌하여 그때에 송옥만이 슬펐으랴 / 不獨當年宋玉愁

했고, 또 금강산에 가 놀면서 지은 것이라고 외우는데,

흰구름 가에 있는 영롱한 사찰 하나 / 玲瓏金刹白雲邊
누각 밑 숲 사이로 오솔길 하나 났네 / 踏閣攀林一徑穿
동문에는 용이 나와 언제나 비 뿌리고 / 龍出洞門常作雨
소나무에 학의 둥지 몇 해 됐는지 모른다네 / 鶴巢松樹不知年
전상에 중은 서서 밥때라고 종 울리고 / 僧從殿上鳴鍾飯
산중에 온 나그네는 자리 빌려 졸고 있네 / 客至山中借榻眠
밤들어도 이상하게 꿈 이루지 못하는 것은 / 恠底夜來難得夢
들창 밖 우는 샘을 갈바람이 맴돌아서라네 / 秋風窓外繞鳴泉

하였다. 그의 세계(世系)를 물었더니 고려 말기 지윤(池奫)의 후예라고 하였다. 지윤이 베임을 당하자 그 자손들은 아전으로 전락되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지윤이 문리(文吏)였기에 그 기류(氣類)가 서로 유전된 것 아니겠는가. 그 사람은 비록 늙고 쓸쓸해 보였지만 그 시는 읊을 만했으니 그 골몰한 꼴이 가련했다. 시내를 따라 내려오다가 금성 읍내에 있는 역리 김서립(金瑞立)의 집에서 잤다. 외삼촌이 주수에게 보낸 쪽지는 문지기에게 거절을 당하였다.

8월 1일(계묘)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창도역(昌道驛)에서 말에 꼴을 먹였다. 역관(驛館)의 벽위에 시 두 수가 걸려 있었는데 하나는 민 이상 제인(閔貳相齊仁)이 가정(嘉靖) 기해년에 읊은 것을 그의 원손인 민정중 대수(閔鼎重大受)가 각자하여 달아 놓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술년에 어느 과객이 쓴 것으로 그의 성명은 씌어 있지 않으나 다 읊을 만했다. 민제인의 시는,

사랑하고 먹여 주고 누가 그와 같으리오 / 寵恩榮養孰如之
종남산 돌아보니 그리운 님 생각 나네 / 回首終南尙戀思
북쪽 변방엔 찬구름 멀리멀리 가 버렸고 / 北塞寒雲歸去遠
동문엔 어제 진 해 언제 다시 뜬다던가 / 東門落日出來遲
들국화도 다 지도록 가을은 깊어가고 / 花殘野菊秋將老
우정을 산이 둘러 두 갈래로 길이 났네 / 山遶郵亭路自岐
도끼 짚고 강을 건너 노를 쳐부숴야지 / 杖鉞渡江聊擊楫
한평생 먹은 마음 저버릴 수 있다던가 / 一生安肯負心期

하였고, 과객의 시는 이렇다.

험난하고 어려운 일 맛볼 만큼 보았건만 / 艱難險阻備嘗之
객관에 찾아드니 위로해 줄 사람 없네 / 客館無人慰所思
지는 해에 외로운 구름 동으로 멀리 가고 / 落日孤雲東去遠
갈바람에 북으로 가는 수령 행차 더디어라 / 秋風五馬北歸遲
차라리 두보처럼 집 생각을 할지언정 / 寧同杜子瞻家室
양주 같이 기로에서 울고 있진 않으려네 / 不學楊公泣路岐
나라 은혜 입은 이몸 무엇으로 보답하리 / 身被國恩何以報
교화 책임 다해볼까 마음 기약 했었는데 / 承流盡責是心期

나도 길을 가면서 다음과 같이 절구 한 수를 읊어 두 군(君)들로 하여금 화답하도록 하였다.

헝클어진 세상사 가닥이 안 풀리어 / 世事如絲不可理
갈바람에 높은 산에나 올라볼까 생각이라네 / 秋風欲上望高峰
공자님 뒤를 따라 바다에서 떼를 탈까 / 倘從魯叟浮滄海
신선이 되어가서 적송자를 불러볼까 / 更擬飆輪喚赤松

이에 두 군이 다 화답을 하였다. 저녁이 되기 전에 하지성(夏遲城) 민가에서 묵기로 했는데, 집주인 성명은 이천봉(李天鳳)이었다. 그날 길가에서 풀 꽃 등을 꺾어 여러 일행들과 함께 그 꽃과 풀의 성미를 분석해보고, 혹은 마부에게 물어 보기도 하였다. 그 중에는 쑥 종류가 제일 많았고 또 이름이 있는 것들도 일곱 종류나 되는데, 그 지방 이름으로는 백양쑥ㆍ물쑥ㆍ참쑥ㆍ사자발쑥ㆍ다복쑥ㆍ제비쑥ㆍ벌쑥이었다. 혹자의 말로는, 백양쑥은 떨기로 나는 쑥으로 바로 옛날에 시초[蓍]라고 한 것이고 중국 사람이 만든 본초(本草)와는 맞지 않다고 했는데 과연 그런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가을이 되어 자색꽃이 피는 것이 그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아마 산국화 종류가 아닌가 싶었다. 이어 여러 사람들 말이, 천하에 쓸모 없는 물건은 없다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물론이다. 타고난 재목 그대로만 이용한다면 천하에 버릴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착하지 못한 자도 역시 써먹을 곳이 있을까?”
했더니, 모두 하는 말이,
“천하에 제일 못쓸 것이 착하지 못한 사람인데 그것을 어디에다 써먹을 것인가.”
하였다.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를,
“천하에 제일 쓸모 없는 것은 중간치인 것이다. 냉하지도 않고 화끈하지도 않고 아무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면서 취할 만한 좋은 점도 없고 그렇다고 꼬집어 말할 만한 악도 없는 그런 사람 말이다. 차라리 아주 불선한 사람은 그런 대로 써먹을 곳이 있는 것이다.”
했더니, 모두 이상하다는 듯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걸(桀)과 주(紂)가 지극히 불선했기에 탕(湯)과 무왕(武王)이 그들을 정벌하자, 하늘이 도와주고 백성들이 돌아오고 하여 천하를 통일해서 자손 만대에 전하였고, 항적(項籍)과 왕망(王莽)은 나쁜 중에도 더 나빠 한 고조(漢高祖)와 광무제(光武帝)가 각각 그들을 죽임으로써 천하를 진동시켰고 그 여풍이 백세를 두고 영향을 주어 한 나라 4백 년 사직이 유지될 수 있었으니, 그게 쓸모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뿐 아니라 전쟁과 병사 통솔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니 한 사람을 죽였는데 삼군(三軍)이 떨고 적국이 항복해 오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 영웅이나 패주(伯主)들이 사업을 경륜하면서 천하를 차지하는 데 밑천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을 얻지 못할까 염려했던 것이며 나도 그래서 쓸모가 있다고 한 것이다.”
했더니, 모두들 하는 말이,
“궤변은 궤변이지만 그래도 일리는 있어 사람 마음을 유쾌하게 해 주었다.”
하고서, 서로 한바탕 크게 웃었다.
또 길에서 행인 한 사람을 만났는데 자기 말이, 산삼을 캐는 사람이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 사람 동행했으면 좋겠습니다. 데리고 가다가 삼지구엽초(三枝九葉草)와 같은 영약이라도 캐면 그 역시 좋은 길동무 아니겠습니까.”
했더니, 외삼촌 말씀이,
“보아하니 그 사람 용렬해서 아무런 쓸모가 없겠다.”
하였다. 내가 다시 말하기를,
“용렬한 사람이기 때문에 쓸 만하다고 한 것이지요. 그가 만약 준수하고 영리하다면 우리에게 쓰일 사람이 아니겠지요. 옛날 허노재(許魯齋) 말이, ‘말은 상등 말을 타고, 소는 중등 소를 부리고, 사람은 하등 사람을 써야 한다. 말은 준마라야 탈 만하고 소는 유순해야 다룰 수 있고 사람은 못나야 부려먹기가 쉬운 것이다. 만약 그가 지혜 있고 약은 사람이면 나에게 쓰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가 그의 이용물이 되는 것이다.’ 했었고, 또 사마군실(司馬君實)에게는 종이 하나 있었는데, 와서 일한 지가 오래 되어 사마공의 지위가 비록 참정(參政)에까지 이르렀지만 그때까지도 군실 수재(君實秀才)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소자첨(蘇子瞻)이 왔는데, 그 종은 그때도 똑같이 그리 말하였으므로, 자첨이 그에게 타이르기를, ‘상공(相公)이 지금 이미 참정이 되었으니 대참상공(大參相公)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하여 그 종이 그 후부터서는 자첨이 가르쳐 준 그대로 부르자 공이 깜짝 놀라, ‘누가 너더러 말을 그렇게 하라고 하더냐?’ 하자, ‘지난번 소 학사(蘇學士)가 그리 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였다. 공이 탄식하며 하는 말이, 좋은 종을 자첨이 버려 놓았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모두 사람은 하등 사람을 써야 한다는 증험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또 한번 서로 웃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이 두 이야기가 모두 폐단이 없지는 않다. 왜냐하면 나쁜 사람을 쓸 만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를 측은히 여기고 도와 주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고, 용렬한 자를 부릴 만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 개인만 알고 이기심이 강하여 남을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못 주는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패자(伯者)나 하는 짓이지 인인군자(仁人君子)의 마음은 아니라는 것을 몰라서는 안 될 일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사리를 아는 자와 할 말이지 간웅(姦雄)에게는 할 말도 아닌 것이다. 말을 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다시 드는 것이다.

2일(갑진)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야음불천(也音不川)을 건너고 또 관음천(觀音遷)을 거쳐 보리진(菩提津)을 건너고 통구원(通溝院)을 지나 길가 민가에서 말에 꼴을 먹였는데, 주인 성명은 전기천(全起天)으로 우리에게 벌꿀과 과일을 대접하고 서울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드디어 단발령(斷髮嶺)을 오르는데 산 이름은 갈리치(葛离峙)이고 샛길이 험준하여 말을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여 영상에 올랐더니 회정(檜亭)이 있었다. 섬돌에 앉아 쉬면서 풍악산을 바라보았더니 풍악의 여러 모습이 모두 눈 앞에 역력히 전개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절구 한 수를 지어서,

도성문을 동으로 나와 여드레를 소비하며 / 東出都門八日行
금성을 지나치니 여기가 회양일레 / 金城踏盡是淮陽
마니령 마루에서 구름 헤치고 앉아 보니 / 摩尼嶺上披雲坐
일만이천 봉우리가 차례로 맞아 주네 / 萬二千峯次第迎

라고 읊고, 유군으로 하여금 화답하도록 하였다. 이 날은 신원(新院)에서 잤는데 집주인의 성명은 김세익(金世翊)이었고 서울에 오면 찾으라고 약속하였다.

3일(을사) 맑음. 신원의 물을 건너고 철이현(鐵伊峴)을 넘어 만폭동(萬瀑洞) 입구에 와서는 마부들을 시켜 시냇가에서 묵석(墨石)을 주워오게 하였다. 시내를 가로질러 이리저리 건넌 다음 길가 소나무 숲 아래서 휴식을 취하고는 한 동구에 이르니 소나무 노송나무가 줄을 이룬 사이로 해송도 드문드문 끼어 있어 산이 비로소 기특하게 보였고 수석(水石)도 더 맑아 보여 동천(洞天)의 정취가 물씬 풍겼다. 우천도(牛川渡)라는 시내를 건너 말에서 내려 걷다가 시냇물에 발을 씻고 송단사(松壇寺)에서 조금 쉬고 있노라니 승려 대여섯 명이 나와 맞아 주었다. 그들과 함께 절로 들어갔더니 문간에 우뚝한 누각 하나가 구름 닿게 지어져 있는데 앞에 마주 보이는 장경봉(長景峯)은 천 길이나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그 곁에 줄지어 있는 몇 봉우리도 모두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으면서 기괴웅장하여 이미 인간에서 보던 바가 아니었다. 절 이름은 장안사(長安寺)인데 그 절에 사는 중에게 물었더니, 원(元) 나라 순제(順帝)의 비 기씨(奇氏)의 원찰(願刹)로서 마룻대 들보 등 목재가 굉장하고 단청이 휘황찬란하기가 이 산 속에서 으뜸이라고 하였다. 그날은 절 문간 앞에서 산책하고 거닐었는데 수석이 너무 아름다웠다. 말라 죽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중의 말로는 계수나무라고 했다. 노송나무 몸통에 잣나무 껍질이었는데 가지와 잎이 다 떨어지고 없었다. 뒤따르던 승려 몇 사람이 젊은 중을 시켜 절간 앞에서 해송자(海松子)를 따 오라고 하더니 거기에다 꿀을 타서 새참으로 내왔는데 역시 산중의 별미였고 또 석지(石芝)를 아침저녁 상에 올렸는데 그 산에서 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4일(병오) 맑음. 장안사를 출발하여 정양사(正陽寺)로 가려는데 그 곳 승려가 남여(藍輿)를 준비해 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바위골짜기의 맑은 물, 살짝 물들여진 단풍잎을 걸음마다 앉아서 구경할 만하였다. 걷기도 하다가 남여로 타다가 했지만 다리가 건너질러진 길이나 돌무더기 비탈길은 사람이 나란히 갈 수가 없었다. 명연(鳴淵)에 이르러 조금 쉬었는데 물이 몇 길이나 깊어 보였지만 맑아서 바닥이 훤히 보이고 곤이(鯤鮞) 같은 잔 물고기들이 그 속에서 노닐고 있었는데, 승려 말에 의하면 여기가 만폭동(萬瀑洞) 입구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못 속에는 그래도 잔 물고기가 있지만 여기서부터 그 이상은 물고기가 올라갈 수가 없다고 했다.
한 곳에 다다르니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완연히 문을 이루고 있고 절벽 전면에는 세 불상이 새겨져 있었는데 나옹(懶翁)이 남긴 작품이라고 하였다. 그 앞에는 백화암(白華菴)이라고 하는 고색창연한 사찰이 있었으나 사는 중은 없고 부도(浮圖) 다섯 종류와 비 네 개가 서 있었다. 부도는 청허 휴정(淸虛休靜), 제월 경헌(霽月敬軒), 취진 의영(就進義瑩), 편양 언기(鞭羊彦機), 허백 명조(虛白明照), 풍담 의심(楓潭義諶)의 것으로, 경헌ㆍ의영ㆍ언기는 다 서산대사 청허의 제자이고, 명조ㆍ동산은 송월 응상(松月應祥)의 제자이며, 의심은 편양의 제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비는 월사 의정(月沙議政)ㆍ백주 천장(白洲天章)ㆍ이단상 유능(李端相幼能)ㆍ백헌 의정(白軒議政)이 지은 것이고 쓰기는 의창군 이광(義昌君李珖)ㆍ동양위 신익성(東陽尉申翊聖)ㆍ판서(判書) 오준(吳竣)ㆍ낭선군 이우(朗善君李俁)가 쓴 것으로, 큰 비에 훌륭한 각자가 산문을 훤히 비추고 있었다. 조금 머무르면서 그것을 다 읽고 나서 또 표훈사(表訓寺)로 갔는데 역시 규모가 큰 절이었다. 불당은 남쪽을 향하였고 부처는 동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이 절 승려 말에 의하면 이곳 지형이 가는 배 형국이어서 부처가 앉아서 키를 잡고 있는 것처럼 앉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 있다는 것이다. 옛날에 부처가 남향을 하고 앉았다가 만력(萬曆) 을사년에 홍수로 절이 무너졌었기 때문에 지금 다시 옛 모양대로 자리바꿈을 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궤변은 궤변이지만 역시 풍수가의 설이 아니겠는가.
조금 쉬었다가 정양사를 향해 가는데 산길이 더욱 가팔라서 걷다 쉬고 걷다 쉬고 해야 했다. 장안사에서 표훈사까지 오는 동안 남여를 버리고 걷기를 여러 번 하면서 회암(晦菴)의 ‘남악운(南岳韻)’에 차운을 해 보았다.

종들이 피로할까봐서 수레 내려 걸어가니 / 爲憫人疲舍輿行
그 마음 생기는 것 그게 영명 아니던가 / 此心生處是靈明
그 원두야 옛 현자가 이미 한 말이지만 / 昔賢已自原頭說
천하가 태평해야 이 마음도 태평이지 / 天下平時此心平

더위잡고 기어서 오르노라면 마치 계단을 걸러서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급기야 한 높은 등성이에 오르니, 천일대(天一臺)라고도 하고 또 천을대(天乙臺)라고도 하는 곳이었다. 산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어 사방이 확 트이고 바라보면 놀라울 정도인데, 정양사 승려 대여섯 명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늙은 선승 보원(普願)이라는 자도 와서 맞아 주었는데 낙건(絡巾)에 가사 차림으로 얼굴이 깨끗하고 정신과 기운이 맑아 보여 산중의 중에 대해 호감을 가짐직하였다. 그와 함께 솔뿌리 위에 앉아 사방을 두루 돌아보며 가리키고 묻고 했는데, 능호(凌灝)ㆍ영랑(永郎)ㆍ비로(毗盧)ㆍ중향(衆香)ㆍ향로(香爐)ㆍ혈망(穴網)ㆍ망고(望高)ㆍ백마(白馬)ㆍ장경(長景)ㆍ시왕(十王) 등의 봉우리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니, 옛사람이 이른바 ‘일천 바위가 수려함을 시새우고 일만 골짜기 물이 다투어 흐른다’고 했던 말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생각되었다.
그 중에서 비로봉이 가장 높고 중향봉은 더욱 기절했으며 혈망봉은 험준해 보이고 망고봉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것이 마치 저희들끼리 영웅을 겨루는 듯했고, 백마봉ㆍ장경봉은 멀리 보이는 것이 마치 병풍을 줄세워놓고 휘장을 쳐놓은 듯했으며, 영랑봉ㆍ향로봉ㆍ능호봉은 마치 서로 읍을 하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그리고 시왕봉과 그 이하 관음(觀音)ㆍ미륵(彌勒)ㆍ문수(文殊) 등의 봉우리들은 모두 불가(佛家)의 이름을 붙여 놓았고 또 마치 부처들이 줄지어 서고 나란히 앉아서 경을 읽고 도를 얘기하는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일만 골짜기에서 샘이 울고 거기에 솔바람 소리까지 섞여 있어 마치 비바람이 불어 오고 밑에서 뇌성벽력이 이는 것 같기도 했다. 승려들 말로는, 이 산 옛 기록에 일만 이천은 담무갈(曇無竭)이 머물던 곳이라고 했는데, 담무갈은 부처 이름이라고 하였다. 내 생각에는 담무갈이란 인도말인 듯한데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승려 얘기는 비루하고 허탄한 말이었다. 아마도 옛분들은 이 산의 일만 봉우리 일천 봉우리가 모두 산신령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같다.
이 날 따라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 오고 이슬기운이 차고 맑아 붉게 물들여진 모든 덩굴과 단풍잎으로 가을 기운이 산 속에 가득하였다. 게다가 또 푸르른 소나무 잣나무가 붉은색 사이에 섞여 있어 더욱 사랑스러웠다. 내가 여러 중더러 말하기를, 가을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는데 우리가 너무 일찍 구경 온 것이 아니냐고 하자 보원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대체로 무슨 물건이든지 구경을 하려면 한창이기 전에 해야지 한창인 때 하게 되면 때가 이미 지나쳐서 바로 사그라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막 무르익으려고 하는 이때 여유 있는 운치로 구경하는 것이 좋지요.”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노사(老師)의 말씀을 들으니 물건 보는 법을 잘 아시는 분이라고 하겠소. 옛사람 말에도, 꽃은 낙화되어 흩어질 때 보고 싶지 않고, 술은 곤드레 만드레 취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역시 노사를 두고 한 말이구려.”
하였다. 그리고 이어 두 군에게 말하기를,
“천지만물 모든 이치가 최고조에 달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네. 세상에서 부귀와 번화와 성색(聲色)을 누리고 있는 자들은 더구나 이 이치를 몰라서는 안 되네. 내가 언젠가 읊은 시 한 수가 있는데 그대들은 이 시를 기억해 주기 바란다.”
했더니, 극가(克家)가 그 시를 소기(小記)에다 적었다. 그리고 유군은 말하기를,
“이 시는 아마도 그대가 뜻을 이루었을 때 지은 시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시는 이렇다.

말 타고 느릿느릿 가다가 말다가 / 騎馬悠悠行不行
돌다리 남쪽 가에 동자 하나 청수하네 / 石橋南畔小童淸
봄구경을 그대는 어디에서 하려는가 / 問君何處尋春好
꽃이 아직 피기 전에 풀싹이 돋으려 한다네 / 花未開時草欲生

충암 김선생 원충(冲菴金先生元冲)이 중에게 준 비로봉시가 우연히 생각나 두 군에게 읊어주었다.

해 지는 비로봉 정상 / 落日毗盧頂
동해 바다 하늘 멀리 아득하네 / 東溟渺遠天
불 일구어 바위 틈에서 자고 / 碧嵒敲火宿
소매 맞잡고 속세를 내려가네 / 連袂下蒼煙

그리고 내가 말하기를,
“이 시야말로 고금의 시인들 작품 중에 절작이다. 이 시는 우리나라에만 없는 정도가 아닌데 애석하게도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이 시를 알아보는 자가 없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하니, 두 군들도 동감이었다. 그리하여 서로 읊고 또 읊고 했더니, 사람으로 하여금 표연히 산 정상을 버리고 동해로 가고픈 생각이 들게 했다.
회옹(晦翁)의 ‘남악운(南岳韻)’에 차운하여,

구월이라 서리 내리고 하늘 가득 바람인데 / 九秋霜露滿天風
천을대 앞에 와서 가슴 한번 활짝 열었네 / 天乙臺前一盪胸
시 읊으며 돌아간 곳 어디에서 찾아볼까 / 詠歸何處尋行迹
곧바로 봉래산 최상봉에 올라야지 / 直到蓬萊最上峯

하니, 다른 여러 사람이 화답을 하였다. 동루(東樓)에 가서 벽에 걸려있는 여러 사람들의 시를 보았다. 여러 사람들의 작품이 있었으나 그 중에서 기재(企齋)ㆍ호음(湖陰)ㆍ용주(龍洲)ㆍ청음(淸陰)ㆍ이천장(李天章)ㆍ김도원(金道源)ㆍ신백윤(申伯潤)의 시들이 읊을 만했고 거기에서도 기재ㆍ호음의 것이 최고여서 후인으로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세도와 인재의 부침(浮沈)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날 밤은 정양사에서 잤는데 보원과 얘기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밤에 일어나 별을 보고 방향을 알아보았더니 망고봉(望高峰)이 정동쪽이고 능호봉(凌灝峰)은 북에 있어 이 절 위치가 남을 향해 오위(午位)로 되어있고 동으로 아침 햇살을 받기 때문에 절 이름을 그렇게 지었던 모양이다. 용주의 시에 맹학창(盲壑彰) 이 세 글자가 있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누구도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자는 초서를 쓰면서 잘못 쓴 것이라고 하였고, 혹자는 벽자라고 하기도 하면서 서로 한바탕 웃었다.

5일(정미) 맑음. 중을 시켜 나옹(懶翁)의 안주(眼珠)ㆍ갈포(葛布)ㆍ가려(珈黎)ㆍ철발(鐵鉢)ㆍ마노(瑪瑙)ㆍ주미(麈尾) 등을 내오라고 하여 보았더니, 안주 하나는 색이 파랗고 작은 팥만한데 불가에서 말하는 사리(舍利)라는 것으로, 그것을 유리그릇에 담고 금으로 봉합한 다음 비단으로 겹겹이 싸 놓았는데 그 곳 중들이 아주 보물로 지킨다는 것이다. 내가 듣기에는 나옹은 제자가 많아 대중을 현혹시킨다 하여 국법으로 베임을 당한 자여서 그 슬기가 별것이 아니었는데, 지금 중들은 그가 성불(成佛)하였다고 하면서 저렇게 존경하고 있으니, 무슨 까닭일까 싶어 그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 중들 역시 그 사건 전말에 관해서는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사람 몸에서 구슬이 나온다는 것은 원래 없는 데서 나오는 것이 있다는 것으로 이치로 보아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나로서는 늘 의문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고금을 막론하고 승려 세계에서는 그 말을 절대 믿고 서로 전수하면서 높이 받들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깰 수가 없어 나로서도 끝까지 따질 수가 없었다.
팔각전(八角殿)의 석불(石佛)을 보았다. 그 벽에 해묵은 그림이 있었는데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것이라고 하지만 오도자가 조선에 왔었다고는 들은 바 없으니 그 역시 허탄한 소리인 것이다. 이 날 극가(克家)가 그 절의 대들보에다 이름을 썼다. 그리고 이 날 동쪽 누대를 두 번 올랐는데 누대 이름은 헐성(歇惺)이었다. 시가 있는데 기재(企齋)의 시는,

기이한 봉 일만하고 그리고 또 이천인데 / 一萬奇峯又二千
바다구름 다 걷히자 아름다운 옥이로세 / 海雲飛盡玉嬋姸
젊어서는 병만 앓다 이제는 늙었으니 / 少時多病今成老
백년 두고 이 명산 이름만 듣고 만 격이네 / 孤負名山此百年

하였고, 호음(湖陰)의 시는,

일만 이천 봉우리를 대강 짚고 돌아오니 / 萬二千峯領略歸
쓸쓸한 낙엽이 옷 위에 지네그려 / 蕭蕭黃葉打征衣
비 내리는 정양사 향불 피우는 밤에 / 正陽寒雨燒香夜
사십평생 잘못 산 걸 거백옥이 알았다네 / 籧瑗方知四十非

했으며, 청음의 시는,

밤 지새워 내리는 처마끝 비소리에 / 琳琅簷雨夜連明
산중의 폭포 소리 누워서 듣는다네 / 臥聽山中萬瀑聲
참모습이 나오도록 봉우리들 씻어 놓아 / 洗出玉峯眞面目
날 개이자 시인의 눈에 뜨이는 게 그것이네 / 却留詩眼看新晴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는 중 한 명을 데리고 혼자 천을대에 올라가서 이곳 저곳을 바라보면서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가리키며 알아보았는데, 그 중의 송라협(松蘿峽)은 신라(新羅)의 왕자가 있던 곳이고, 능호봉(凌灝峯)방광대(放光臺)는 고려 태조 왕건이 부처에게 절하던 곳이란다. 아, 왕자의 한 일은 장해서 한(漢)의 북지왕(北地王)과 그 열렬함을 겨룰 만하고, 고려 태조의 그 굉장한 규모나 후한 덕은 송(宋) 태조와 어깨를 겨눌 만도 했는데, 어쩌자고 이교(異敎)에 정신이 팔려 허탄한 말과 옳지 못한 유적을 후대에까지 남겨놓았는지.
그 곳 산과 구릉의 형세를 대략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 두었는데 후일 뛰어난 그림 솜씨를 만나게 되면 이 승경을 다시 그리게 하려고 해서이다. 또 시를 읊기를,

아득히 먼 송라협이요 / 邈邈松蘿峽
높고 높은 능호대여라 / 迢迢凌灝臺
휘파람 크게 한 번 부니 / 悠然發大嘯
만폭에서 천둥이 이네 / 萬瀑隱風雷

하였고, 또 읊기를,

구구한 영욕 놓고 놀랠 것이 뭐라던가 / 寵辱區區不足驚
구월에 중향성을 날아서 올라왔다네 / 九秋飛上衆香城
머리 풀고 곧바로 동해로 가 떼를 탈까 / 直將被髮桴東海
봉을 타고 하늘 높이 올라도 보고싶네 / 且欲驂鸞襲太淸

하였다. 보원이 하는 말이, 금년 봄부터 큰 새가 어디에서 왔는지 몰라도 산 속에 날아다니고 있는데 생김새는 야학(野鶴) 모양이고 목이 길고 꼬리는 검고 다리는 적색이고 몸은 껑충한데, 사람들이 보고 싶다고 말하면 반드시 제 몸을 돌려가며 보여주고 소리는 학의 소리를 내는데 아마 선학(仙鶴)인 것으로 지금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고 있지만 이 산 속 어딘가에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학은 우는 소리가 길고 맑아서 하늘에까지 들린다는 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시경》에서도, ‘학이 구고에서 우니 그 소리 하늘에까지 들리네’ 했고, 옛날 기록에도 역시 ‘난새와 봉황은 함께 무리 짓고 반드시 지대를 골라서 날며 때가 돼야 울기 때문에 그래서 선금(仙禽)이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그 새는 난봉(鸞鳳) 같은 벗도 없고 사광(師曠)의 거문고 가락도, 상악(相岳)의 북소리도 없는데 왔으며, 또 우는 소리가 여운도 없고 높지도 길지도 않아 저 혼자 그런 체하는 것이지, 사실은 학 같아도 학이 아니면서 선금 축에 끼어보려고 하는 것이리라. 진짜가 아니면서 이름이라도 빌려보려고 함은 모든 물건이 다 그 모양인데 왜 새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언젠가 치사헌(致思軒) 이원(李黿)이 쓴 《금강록(金剛錄)》을 보았더니, 거기에 이르기를, “바위 틈에다 둥지를 틀고 사는 새가 있었는데 대개 평범한 들새였다. 그런데 중들이 학으로 잘못 알고 저를 학이라고 불러주니, 그 새가 반드시 둥지에서 나와서 제가 학이 아니라는 사실도 모르고 사람들에게 춤을 추어보였다.” 한 곳이 있었는데, 지금 그 새도 저 자신을 학으로 자처하고 있고 사람들도 학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도 깃털을 뽐내면서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그렇게 이름만 내고 스스로 감출 줄은 모른다는 것인가. 어쩌면 산새 들새들도 진세의 속된 인간들과 똑같은 생각이란 말인가. 지금 이 일이 치사헌이 써 놓은 것과 아주 비슷하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학이라는 것도 신령한 새여서 나타나지 않고 있는 지가 지금 천 년이나 되었는데 비슷하면서 진짜는 아닌 것이 하필 오늘에 나타났으니 그것은 또 무슨 까닭일까. 내 그 모든 것을 듣고 묵묵히 앉아 마음속으로 탄식을 했었다. 유군이 회암의 ‘여산운(廬山韻)’을 내놓으면서 나더러 화답하라고 하기에 심심풀이 삼아 읊어 보았다.

삼한의 삼신산 중에 / 三韓三神山
금강산이 제일 걸출하다네 / 金剛最爲傑
둘레 오백 리를 깔고 앉아 / 盤根五百里
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 邈然與世絶
불가의 소굴되어 있는데 / 仙曇所窟宅
구름 속 나무는 보였다 말다하네 / 雲樹何明滅
내가 왔을 때 맑은 가을이어서 / 我來屬秋晴
빽빽이 줄서 있는 묏부리들 / 嶽峀正森列
기대 졸며 맑은 기운 들이키고 / 憑睡挹淸灝
지팡이 짚고는 높은 곳도 가소롭다네 / 杖策凌嵽嵲
구경은 이제부터 시작이라 / 勝遊自此始
내 두루 다 밟고야 말리 / 吾將窮跡轍

유군의 시는,

금강은 천하 절경이요 / 金剛天下勝
부자는 당대 영걸인데 / 夫子一代傑
명산이 고사와 만났으니 / 名山配高士
양절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 豈不稱兩絶
인과 지에 보탬 되려고 놀지만 / 遊爲資仁智
불자들 민망하기도 하지 / 志在憫寂滅
기마 꼬리에 붙어 온 이 존재야 / 賤子忻附驥
어떻게 나란히 서서 구경하겠습니까 / 陪賞豈行列
승경 읊은 공의 시를 보니 / 見公記勝詩
높기가 옥봉과도 같네요 / 高幷玉峰嵲
신선 사는 곳 구경 다하려고 / 丹丘興靡窮
그리로 가는 수레에 다시 기름칠했다네 / 復膏仙洲轍

하였다. 또 헐성루(歇惺樓) 시에도 차운했는데,

봉래산 일만 이천 봉우리가 / 蓬萊一萬二千峰
푸른 하늘 높이 솟아 태산과 마주섰네 / 高出靑天揖岱宗
옥 같은 봉우리들 우뚝하게 솟아 있고 / 玉巘竦奇形矗矗
장중을 자랑하는 은빛 같은 봉도 있어 / 銀巒鬪壯勢重重
바위 끝 고목에는 둥지 틀어 학이 살고 / 危巖古樹巢仙鶴
폭포 밑 깊은 못엔 독룡이 살고 있다네 / 怒瀑深湫毒龍
제일 좋긴 정양사에 가을비 개고 난 뒤 / 最是正陽秋霽後
소나무가 경쇠처럼 울어대는 소리라네 / 數聲淸磬發深松

라고 지어, 둘 다 써서 나에게 주었다.
내가 보원에게 이르기를,
“유가에는 지행(知行)이라는 것이 있고, 불가에는 정혜(定慧)라는 것이 있는데 혜가 정을 낳는 것입니까, 정이 혜를 낳는 것입니까?”
했더니, 그는,
“아마 정이 혜를 낳는 것이지요?”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우선 정혜의 이치를 모른다면 어떻게 정을 지킬 수 있을 것이며, 또 마음을 지키는 정력(定力)이 없고서야 마음의 진각(眞覺)이 또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하니, 보원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정이 당연히 혜를 낳는 것이지만 혜도 정을 낳을 수 있는 것이지요.”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유가에도 그러한 법이 있고 그에 관한 학설이 구구한데, 스님은 정말 말씀을 잘 했습니다. 다만 유가에는 모든 이치가 다 갖추어져 있으므로 그 이치를 알려고 하는 것은 장차 그대로 실행하기 위해서인데 불가에서는 공명(空明) 그것만을 지키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했더니, 그도 그렇다고 대답하고서 이어 우리 유가의 도통(道統) 연원에 대하여 묻기에 내가 대략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또 불가의 의발(衣鉢) 전수 관계를 물었더니, 그도 대답해 주었는데 그의 말은 달마(達摩)를 종(宗)으로 삼고 있었다. 내가 말하기를,
“달마는 벽을 향해 앉아 수도만 하다가 결국 남이 준 독약을 먹고 죽고 말았는데 도를 통했다는 자도 그럴 수 있습니까?”
했더니, 그의 대답이,
“달마는 각박한 세상 인심 그게 싫어서 일부러 입적한 분이니 그의 몸은 서방정토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기에, 내가 웃으면서,
“부도씨(浮屠氏)들은 원래 환설(幻說)을 많이 하니까요.”
하고 이어, 불가에는 선(禪)과 교(敎) 두 파가 있는데 대사는 어느 쪽이냐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경교(經敎)를 대강 듣고 염불이나 일삼고 있지 심학(心學)에 관한 공부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그와 이틀 밤을 함께 지냈는데 언제나 밤중이면 미타(彌陀) 소리가 들려왔다.
금강산(金剛山)이 높고 가파르고 수려하기 동방에서는 으뜸인데, 그 산맥은 장백산(長白山)에서 시작되어 검산(劍山)에서 높이 치솟고 철령(鐵嶺)을 가로질러 추지(楸池)에서 기복을 이루고 이어 여기에서 서려 이루어진 것이다.
툭 튀어난 봉우리가 능호봉(凌灝峯)인데 그 봉은 흙과 돌이 섞여 있고 돌무더기 산이 죽죽 뻗어가다가 펄쩍 뛰어올라 영랑재[永郞岾]가 되고 또 갑자기 높이 솟아 비로봉(毗盧峯)이 되었는데 바위 전체가 솟아 봉우리가 되었기 때문에 곧바로 하늘까지 치솟아 높고 거대하기로는 이와 맞먹을 봉우리가 없다. 비로봉에서 형세가 한풀 꺾여 내려오면서 험준하게 첩첩으로 싸인 것이 중향성(衆香城)인데 푸르른 바위 절벽이 둘러서서 성을 이루고 하얀 바위들을 바라보면 그 빛이 마치 분을 발라놓은 것 같다. 그리고 바위 사이로는 노송ㆍ잣ㆍ해송(海松)ㆍ만향(蔓香) 나무들이 하나의 무늬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연달아 일출봉(日出峯)ㆍ월출봉(月出峯)이 솟아 있고, 그 아래 가로로 줄서 있는 것이 백운대(白雲臺)ㆍ금강대ㆍ대향로(大香爐)ㆍ소향로(小香爐)이고, 그 시냇물은 만폭동(萬瀑洞)인데 백천동(百川洞)의 물과 만나서 남으로 흘러 회한(淮漢)의 상류가 된다. 그리고 또 서쪽으로 가서 망고봉(望高峯)이 되었는데 그 높이는 비로봉 다음 가고, 또 그 다음으로 백마(白馬)ㆍ현등(玄登) 등의 봉우리가 있는데 마치 서쪽을 향하여 엎드리려는 듯하다. 또 남으로 바닷가까지 나가서 들을 끼고 달려간 놈은 천후(天吼)ㆍ설악(雪嶽)ㆍ한계(寒溪)가 되었고, 서남으로 간 놈은 오대산이고, 곧바로 남으로 달려간 놈은 영(嶺)의 좌우 그리고 호(湖)의 서남쪽 줄기가 되고 있다.
비로봉 서쪽은 내산(內山)이라고 하는데, 바위가 우뚝우뚝 서있고 바람은 서풍을 받고 햇볕은 석양 햇볕을 받기 때문에 나무들이 그리 자라지 못하고 있다. 비로봉 동쪽은 바위 사이로 흙이 꽤 많고 아침 해가 비치는데다 바다가 가까이 있어 그 기운까지 받기 때문에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서 해를 가리고 구름 위까지 치솟아 있는데 그 쪽은 외산(外山)이라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동쪽으로 뻗은 가지는 백 리도 다 못가 동해에 이르러 끝나고, 서쪽으로 뻗은 가지는 회수(淮水) 서쪽을 끼고 바다까지 다 못 가서 양강(楊江)과 만나 거기에서 끝나는데 천 리 절반 정도로서 가깝고, 북으로 뻗은 가지는 높은 산이 첩첩이고, 둥그렇게 서려 한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것이 구룡연(九龍淵)이다. 만폭동은 바위낭떠러지가 수려하고 수석도 맑아 지팡이 짚고 신발 신고도 건널 만하기 때문에 구경 온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으나, 구룡연은 어두컴컴하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도 없으며 용과 새짐승들이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낮에도 풍정(風霆)이 일고 괴물이 나타나고 하여 인적이 미칠 수 없는 곳이다.
내 늙고 병들어 짧은 지팡이에 동자 관자 거느리고 비로봉 정상에 올라가서 운무(雲霧)를 딛고 비바람 맞으며 굽이굽이 모든 산천 다 구경하고 동서남북을 향해 내 영혼을 마음껏 드러내 보이지 못한 것이 한이고, 또 높은 봉우리 가파른 벼랑을 타고 넘어 구룡연 깊은 못가에 가서 괴물들이 사는 굴들을 훑어보고 험준하고 으슥하고 기기괴괴한 곳까지 다 구경함으로써 나의 이 가슴속에 쌓인 우울하고 답답한 회포를 다 털어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이다. 내가 벌써 이렇게 늙었단 말인가. 이율곡 숙헌(李栗谷叔獻)선생이 소년 시절 무슨 일로 인하여 집을 떠나 이 산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중들에게 물어보았으나 그 일에 대하여 들어서 알고있는 자가 없었다. 그 중들이야 물론 무식한 것들이지만 지금 1백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그 유향(遺響)이 아득할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밤에 보원과 얘기를 하는데 보원이, 정지상(鄭知常)은 어떤 인물이냐고 묻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고려 때 문사(文士)이고 그의 시가 깨끗하고 민첩하여 당인(唐人)의 기풍이 있었으나 요망한 중 묘청(妙淸)에게 현혹되어 나랏일을 그르치고 말았으니 보잘것 없는 사람이지요.”
했더니 또, 김부식(金富軾)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내 말이, 문장력이 있어 삼국사(三國史)를 썼고 장군이 되어 묘청의 난을 토평하기도 했다고 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내가 듣기에는 부식이 정지상과 명예 다툼을 했는데 번번이 이기지 못하자, 이어 지상을 모함해서 죽였다가 뒤에 결국 지상의 영혼에게 되죽음을 당했다고 합디다. 그게 무슨 좋은 사람이겠소.”
하면서, 부식이 죽은 일을 얘기했는데, 마치 두영(竇嬰)과 전분(田蚡) 사이에 있었던 일처럼 말하니 얘기가 매우 해괴하였다. 나는 전에 들은 바 없는 얘기이기에 여기에 써 두었다가 언젠가 누구에게 물어보기로 하겠다. 보원의 말에 의하면 김부식이 언젠가 시관(試官)으로 원(院)에 들어가 원의 문에다 시를 쓰기를,

촛불이 다하자 날은 새려고 하고 / 燭盡天將曉
시가 이루어지니 구절이 향기롭네 / 詩成句已香
뜰 가득히 사람들 시끌시끌한데 / 滿庭人擾擾
장원을 할 자는 뉘라던가 / 誰是壯元郞

했는데, 지상이 그 시를 보더니 즉석에서 붓을 들고 삼경(三更)ㆍ팔각(八角)ㆍ낙월(落月)ㆍ부지(不知) 이 여덟 자를 써서 다섯 자씩 된 위에다가 각기 얹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식이 자기 재주로는 그를 따르지 못할 것을 알고 드디어 모함을 하게 된 것이라고 운운하였다.

6일(무신) 맑음. 유점사(楡岾寺)를 가기 위하여 나서면서 시를 읊어 보원상인(普願上人)과 작별하였는데 충암(冲菴)의 ‘풍악증승운(楓岳贈僧韻)’을 차운하여,

금강산에 가을이 드니 / 秋入金剛洞
구름 걷히자 하늘은 쪽빛이로세 / 雲收蔚藍天
그대 만나 사흘 밤을 얘기하고 / 逢君三宿話
돌아가려니 소매에 창연이 이네 / 歸袂惹蒼煙

라고 읊고, 극가로 하여금 써 주게 했다. 드디어 견여(肩輿)를 타고 나와 만폭동을 향하였다. 표훈사를 다시 지나 서쪽으로 석문(石門)을 들어가는데 겨우 견여 하나가 빠져 나갈 정도이고 그것이 금강굴(金剛窟)이라고 하였다. 몇십보를 더 가니 왼편에는 오현(五賢), 바른편에는 학대(鶴臺)가 있고 두 시내가 마주치는 곳에 석봉(石峯)이 하나 솟아 있는데 그 이름은 향로(香爐)이고 거기가 바로 만폭동이다. 붉은 낭떠러지 푸른 절벽하며 돌은 희고 물은 맑았다. 집채만한 바위 하나가 시내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구경왔던 사람으로 그 바위에다 이름을 써 놓은 자들이 천 명이나 될 정도로 혹은 아주 새겨놓기도 했고 혹은 먹물로 써 놓기도 하였다. 시냇가에 또 널찍한 큰 바위가 있었고 거기에 양사언(楊士彦)이 쓴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岳元化洞天)’이라는 여덟 글자가 바위 면에 새겨져 있었는데, 글자 모양이 날아 움직이는 듯하여 볼 만했다. 그 곳 중에게, 여기에 학소암(鶴巢巖)이 있다는데 왜 학소암이냐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옛날에는 학이 여기에다 둥지를 틀고 살았으나 세월이 오래 되어 바위가 이지러지자 둥지도 기울어져 학은 날아가 버리고 다시는 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정극가가 그 바위에다 이름을 쓰기에 나도 그 바위에다 용문석(龍門石)이라고 썼다. 그랬더니 두 군들이 그 뜻을 묻기에 내가 말하기를,
“세상에서 말하기를 풍악에 와서 노는 자면 이름을 선적(仙籍)에 올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데, 자고 이래로 과연 상계(上界)로 뽑혀 올라간 자가 있었다고는 들은 바 없고, 다만 성명을 고기비늘 모양으로 그 밑에다 다닥다닥 써 놓은 것이 마치 용이 되기 위하여 용문(龍門)에 모여든 물고기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이마에 점찍고 꼬리 불태우고 용이 되어 올라 가기란 그리 쉽지 않은 것과 똑같아서 내 그 뜻으로 쓴 것이라네.”
하였다. 글씨를 쓰고 나서 시내를 따라 걸어가 보니 잎이 지고 단풍이 물들고 하늘이 시원한 것이 바야흐로 구월 같았다.
한 곳에 갔더니 맑은 물줄기가 옥을 뿜어대는데 감돌아 흐르기도 하고 그냥 내리쏟아지기도 했으며 하얀 바위가 펑퍼짐하여 그냥 앉거나 걸터앉을 만했는데 이름이 진주담(珍珠潭)이라고 했다. 내가,
“왜 진주담이라고 했을까?”
했더니, 유군이 말하기를,
“샘물이 펑퍼짐한 바위 위로 흘러 바위에 웅덩이가 생기고 그 웅덩이 가운데 마치 진주조개가 진주를 머금고 있는 것처럼 함괴(涵瑰)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겠지.”
하여, 내가,
“그렇구나. 그럴싸한 생각이다.”
라고 하였다. 또 조금 올라가니, 청룡담(靑龍潭)ㆍ구담(龜潭)ㆍ선담(仙潭)ㆍ화룡담(火龍潭)이라는 것들이 있는데, 물이 더 맑고 돌도 더 깨끗하고 굼틀굼틀 흘러내리는 폭포도 완연히 무지개가 구름을 가로지른 듯, 피륙이 공중에 뻗쳐 있는 듯했고 둘러싸인 산들의 푸르른 나무와 잎들이 맑은 운치를 더해주고 있어 사람들 모두가, 참으로 이곳이야말로 선계(仙界)이고 천하의 장관이라고 아우성이었다. 비록 곡림(曲林) 파곶(葩串)의 백석이나 송도(松都)의 박연폭포(朴淵瀑布)라도 여기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서로 갓끈을 씻으며 즐겼다.
내가 절구 한 수를 읊기를,

콸콸콸 쏟아지는 만폭동 / 虩虩萬瀑洞
밤낮없이 울려 퍼지는 물소리 / 奔流轟晝夜
용이 성나 일어나서 / 直恐龍怒作
천하를 비에 잠기게 할까 두렵네 / 雷雨盈天下

하여, 극가를 시켜 바위에다 쓰라고 했더니, 극가도 다음과 같이 한 수 읊어 바위에 썼다.

만옥봉 앞에는 벽옥이 흐르고 / 萬玉峯前碧玉流
흰구름에 단풍나무 동천이 그윽하네 / 白雲紅樹洞天幽
시 쓰려고 수시로 돌에 앉아 쉬기도 하고 / 題詩坐石時時歇
좋은 경치 찾아다니며 여기저기 머문다네 / 杖策探奇處處留
술독에는 술이 다해 취할 수가 없네그려 / 酒盡窪尊難一醉
신선이 봉래로 간 지는 몇천 년이 되었을까 / 仙歸蓬海機千秋
산신령은 늦게 온 것 이상하게 여기지마오 / 山靈莫怪尋眞晩
꿈 속에는 벌써부터 비로봉에서 놀았다오 / 慣向毗盧夢裏遊

벽하담(碧霞潭)에 이르러 한 곳을 바라보니 가파른 낭떠러지 아래 비각(飛閣) 하나가 은은히 보이고 구리기둥 하나가 그 밑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유군과 함께 그 비탈을 더위잡고 올랐는데, 그때 외삼촌께서는 늙어 다리힘이 없으니 견여를 타야겠다고 하셨고, 극가는 바위에 시를 쓰느라 함께 따라오지 못했다. 그 곳에 갔더니, 암자 하나가 있었는데 보덕굴(普德窟)이라고 편액만 달려 있고 중은 없었다. 벽에는 기(記)가 걸려 있었는데 조계선종(曹溪禪宗) 연(衍)이 쓴 것으로 글씨도 새가 날으는 듯 살아 있었고 내용 역시 문원(文苑)의 기운과 맛이 있어 읽을 만했다. 높다란 누대 굽은 난간에서 1천 길이나 되는 밑을 내려다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이 오싹하게 할 것 같아 나는 그 실내에만 들어가고 난간 쪽은 밟지 않았다. 이유는, 높은 데 오르지 말고 위태로운 데 가지 말라는 성인의 교훈이 생각나서였고 또 우물 내려다보는 데 관한 팽조(彭祖)의 경계에도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비탈길을 타고 다시 내려와 벽하담 남쪽으로 나와서 돌을 밟고 건너와 화룡담 바위 위에 앉아서 쉬었다. 거기서부터 위쪽으로는 물도 얕고 산도 갈수록 좁아 명승처는 거기에서 거의 끝났다. 드디어 견여가 앞서서 갔는데 잔도나 비탈길이 위험하여 걸어서 내려온 곳이 절반이나 되었다. 길 따라 오면서는 중들을 시켜 도로파초(都盧巴草)를 뜯게 하고 혹 직접 캐기도 했는데 이 풀은 이 산 높은 곳에서만 나는 풀로서 잎은 성근 솔잎 같고 뿌리는 가느다란 천궁뿌리 같으며 향기 역시 천궁 비슷한데 좀 특이한 향초이다. 올 때 허미수에게서 듣고 여기 와서는 중들에게 물어 캐게 된 것인데 중들도 그것을 간혹 부처 앞에다 쓰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 산중에 만향(蔓香)이 있는데 그것이 잣나무이긴 해도 가지가 덩굴로 자라고 바위 틈에 잘 나는데 그다지 크지 않아 잣나무로서 다른 종류이다. 비로봉 둘레는 온통 이 물건이 널려 있으니 중향(衆香)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이것을 이르는 말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해송과 노송나무ㆍ잣나무 그리고 적목(赤木)이 섞여 있는 가운데 단풍나무가 가장 많아 풍악(楓岳)이라는 산 이름 역시도 그래서 붙여진 것이 아니겠는가. 적목이라는 것은 몸통은 노송나무에 잎은 잣나무 잎이고 씨는 산호(珊瑚)처럼 생겼는데 어째서 적목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 날 지난 곳은 금강대(金剛臺)ㆍ백운대(白雲臺)ㆍ만회동(萬檜洞) 등이었으나 다 그냥 지나치기만 하였고, 사자암(獅子菴)에 왔더니 큰 바위가 사자 모양으로 생겼는데 암자만 있지 중은 없었다. 들어가서 보고 한 곳에 이르니 석조탑이 해를 가리고 있고 바위 사이에다는 장육상(丈六像)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는 나옹(懶翁)의 작품이라고 한다. 아, 불도들이 허황한 짓들을 하여 이 명산의 맑은 운치를 모두 더렵혀 놓았으니 가탄스러운 일이다. 묘길상(妙吉祥) 옛터를 지나 마하연(摩訶衍)에 이르니 옛스러운 사찰이 깨끗하고 소나무ㆍ노송나무가 숲을 이루었으며 지세가 편평하면서 아늑하고 바위 비탈은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중이 하나 혼자 살고 있으면서 생식을 하고 수좌(首座)라고 불렀는데 수좌라는 명칭은 그 무리들 중에서 참선하는 자를 이르는 말이다. 말을 시켜 보았더니 역시 배운 것은 없었다. 내가, 이렇게 산 속에 있으면 귀신이나 도깨비 같은 것이 무섭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만약 그런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여기에서 있겠습니까.”
했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아도 동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면서 산중에 아름다운 여색이 있다면 그게 바로 귀신이요 도깨비가 아니겠느냐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만약 귀신이나 도깨비가 아니라면 네 마음이 동하지 않음을 어떻게 알겠느냐.”
하고서, 이어 말하기를,
“인간의 대욕망으로 가장 억제하기 어려운 것이 음식과 남녀 관계인데 색욕은 그래도 억제할 수가 있으나 가장 참기 어려운 게 식욕인 것이다. 내가 옛날 들은 얘기지만 토당(土塘) 오 상공(吳相公)이 언젠가 이 산 구경을 왔는데 어느 한 궁벽한 곳 작은 절에를 갔더니 나이 젊은 화상(和尙) 하나가 살고 있으면서 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 피했다. 그를 불러 무엇을 먹느냐고 물었더니 뜰에 있는 송백을 가리키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얼굴빛이 청백한 것이 오랫동안 그것을 먹고 공이 많이 쌓인 자더라는 것이다. 그와 얘기하면서 꿩고기를 꺼내 숯불에다 구워 먹고 다른 절로 내려와서 자는데 밤중쯤 되어 누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기에 물어 보았더니, 바로 아침에 만났던 그 중이었고, 찾아온 까닭을 물었더니, 아침에 본 꿩구이 좀 먹는 것이 소원이라고만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은 그가 그 식욕을 억제할 수가 없어서 온 것을 알고 일행 중의 사람을 불러 그 고기를 내주게 하고 실컷 먹으라고 했더니, 그 중이 다 먹고 나서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숙이고 말하기를, ‘소승이 여러 해 곡식을 끊고 저 자신 공력이 깊다고 생각했었는데 아까 공의 행리 속에 있는 고기 반찬 냄새를 맡고는 식욕이 갑자기 동해 아무리 억제하려고 해도 안 되고 발광이 나서 이렇게 와 이 짓거리를 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하더라는 것이다. 공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게 식화(食火)라는 것으로 사람이면 다 있는 것인데 그를 금하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했더니 그 중이 사례를 하고 갔다고 하였다. 식욕과 색욕은 다 천성(天性)인데 불가에서는 그것을 금기하고 있으니 그게 어디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일이겠는가. 수좌가 하는 일은 우리가 할 일은 못 될 것 같다.”
하고서 서로 웃고 말았는데, 그 중도 대꾸가 없었다. 보기에 그의 사람 됨됨이가 자기들 도(道)에서 무엇인가 들은 것이 있어서가 아니고 다만 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 고상한 것으로만 생각한 것인데, 우리 유자(儒者)들로서 군자의 대도(大道)는 듣지 못하고 은미한 일이나 캐고 괴이한 짓이나 하여 후세에 무엇인가 남겨 보려고 하는 자들과 무엇이 다르랴. 역시 우리들로서도 경계해야 할 바인 것이다.
나무 한 그루가 절 앞에 서 있었는데 노송나무 몸통에 소나무 잎이고 씨 역시 솔씨와 같았으며 잎은 푸르른 것이 겨울을 나도 끄떡없는데, 장안사에서 보았던 계수나무였다. 하지만 냄새를 맡아보아도 향기가 없고 맛을 보아도 맵지 않으며 꼭 측백(側栢) 비슷한데, 혹시 《이아(爾雅)》에서 말한, 소나무 잎에 잣나무 몸통을 한 전나무라고 하는 것은 아닌지? 점심을 거기에서 먹고 출발하려고 할 때 나 혼자서 뒤 산등성이에 올라 오래도록 거닐면서 읊조리고 감상하였다.
마하연(摩訶衍)은 인도 말인데 여기서는 대승(大乘)을 말한 것으로 이 산에서 가장 좋은 곳을 말하며 그 곳에 있으면 성도(成道)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곳을 출발하여 내수재[內水岾] 등성이에 이르니 해는 이미 기울었고 외삼촌과 극가는 먼저 와서 재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중들 오륙십 명이 와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유점사(楡岾寺) 중들이 우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여부(輿夫)를 교체하기 위하여 온 것이었다. 거기에 와서 돌아다보니 푸르른 묏부리들이 아득히 멀리 보이고 비로봉은 우뚝 서 있어 두고 가기에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잠시 쉬었다가 그 재에서 출발했는데 중들 말에 의하면 내수재를 안문재[鴈門岾]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그 아래로는 소나무ㆍ노송나무가 빽빽히 들어서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견여를 타고 이십여 리를 오는 동안 금강산 동쪽 기슭에 기이한 바위 가파른 봉우리들이 나무끝 사이로 보였다 안 보였다 하였고 길은 평탄했으나 혹 걸어야 할 곳도 있었다. 그리고 시내를 따라 가노라면 수석이 맑고 아름다운 곳도 있었다. 한 곳에 다다르니 쉬어갈 만한 몇 칸짜리 판옥(板屋)이 있었는데, 하산할 때 점심 먹는 곳이라고 중이 말하였다. 내산(內山)에는 사찰은 많아도 중들의 생활이 모두 빈곤하여 견여를 메는 중들도 각 사찰에서 모아온 것이었으나, 여기 와서는 모두가 유점사 중들인데 메는 솜씨들이 잽싸고 빨라 마치 준마(駿馬)가 낯익은 길을 달리듯 하였다. 그리하여 잠깐 사이 이미 숨 한 번 돌릴 곳까지 왔는데, 동을 바라보니 큰 바위봉우리 하나가 가파르고 빼어난 것이 마치 내산의 면목과 같았고 이름은 만경대(萬景臺)라고 하였다.
해가 이미 저물어 유점사에까지 가서 자려면 구경할 틈이 없었다. 잠시 쉬었다가 또 한 곳에 이르러 낭떠러지를 따라가는데 무서워서 감히 바로 걷지 못하고 겨우겨우 건넜다. 또 치마바위[裳巖]라는 한 시내를 건넜는데, 이는 모양이 그리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대적암(大寂菴)을 지나 7, 8리쯤 가니, 중들 몇 십 명이 와서 인사를 하였다. 다섯 개의 부도(浮圖)와 비 셋이 서 있었는데, 부도는 서산 휴정(西山休靜)ㆍ동산 응상(東山應祥)ㆍ춘파 쌍언(春坡雙彦)ㆍ기암 법견(奇嵒法堅) 그리고 보운(普雲)의 것이고, 비갈은 동산 것은 정두경(鄭斗卿), 춘파 것은 김좌명(金佐明), 기암 것은 이관해(李觀海)가 쓴 것이었다. 잠시 쉬었다가 절로 들어가 운취당(雲翠堂)에서 쉬었는데 중이 다과를 들고 나와 접대했다. 그 절의 수승(首僧) 이름은 혜식(慧識)이고 삼보(三寶) 이름으로는 임관(任寬)이었다. 고성(高城)의 원 조카가 구경 왔다가 뵙기를 요청하였다. 그의 이름을 물었더니 만(晩)이라고 하면서 자기 서제(庶弟)인 천립(賤立)이라는 자와 고 제주 목사우량(宇亮)의 아들과 함께 왔다고 하였다. 밤중에 비가 조금 내렸다.

7일(기유) 아침에 비가 조금 오다가 금방 개었다. 절간을 두루 살펴보았더니 웅장하고 사치스럽기가 장안사보다 더하여 마치 귀신이 지은 솜씨 같았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갑인년에 완전히 불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 때 중전(中殿)의 원당으로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아, 만약 부처를 섬겨 복을 얻게 된다면 절을 이렇게도 잘 지은 복력(福力)은 흉한 재앙을 충분히 소멸시킬 수가 있었을 것인데 결국 면치 못하고 말았으니 어찌된 일인가. 더구나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 자기 일신의 행복을 축원하는 일이 어찌 흥왕(興王)으로서 할 일이겠느냐.”
하였다. 중이, -성화 6년(成化六年) 이 네 글자가 있는 본도 있음- 우리 성종 대왕이 사찰 전지에 대해 조세를 면제해 준 사패(賜牌) 및 원(元) 나라 태정(泰定) 2년 원 나라 황제의 호지고천축수성지(護持告天祝壽聖旨)ㆍ성유(省諭)ㆍ위이관(逶迤觀)ㆍ오탁정(烏啄井)ㆍ오불전(汙佛殿)ㆍ노춘당(盧偆堂) 및 세조 어실(御室)에 관한 것들을 꺼내 보였는데 그 중의 말이 이상야릇하여 더 캐물을 것이 없었다. 거기에서 나와 산영루(山映樓)에 올라 보니 역시 잘 지어진 집이었는데, 바위를 깎아 만든 홍문(虹門)으로 누대 아래의 물이 흐르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백헌(白軒)ㆍ북정(北汀)ㆍ박일성(朴日省)ㆍ최유연(崔有淵)ㆍ이지익(李之翼)이 남긴 시와 여러 구경 왔던 이들이 이름을 써 놓은 것들이 있었다. 그 절의 기적(紀蹟)을 보았더니, 절이 창건된 것은 한(漢)의 평제(平帝) 원시(元始) 2년인데, 신라 탈해왕(脫解王) 1년에 부처 57구(驅)가 돌로 만든 배에 실려 월지국[月氏]에서 바다를 건너 이곳에 왔는데 이른바 노춘(盧偆)이라는 자가 그 당시 고성(高城) 유수로서 그 곳에다 그 절을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불교가 우리나라에 온 것이 중국보다 먼저이겠으나 그러나 거기에서 말한 원시 2년이 신라 탈해왕 1년도 아닐 뿐만 아니라 돌배를 타고 월지국에서 바다 건너 왔다는 말이 너무 허탄하고 가소로워 믿을 것이 못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절이 사실은 금강산 동쪽 기슭 중앙에 위치하여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모든 산이 거기를 중심하여 둘러 있고 일백 시냇물도 그 곳을 중심으로 감돌아 흐르는데 그 속에 자리잡고 있는 들이 만마(萬馬)를 수용할 만큼 크고 넓고 또 해를 가리고 구름 높이 치솟은 빽빽한 나무들이 수도 없이 서 있는데 모두가 해송이 아니면 토삼(土杉)ㆍ적목들이다. 그리고 전우(殿宇)의 굉장하고 화려함, 문정(門庭)의 넓고 확 트임 또는 각 암자 자리 기타 시설물 그 밖의 기용(器用) 따위가 충분히 왕공(王公)과 맞먹을 정도이고, 금벽(金碧)의 장식이나 심지어 놀이개 도구 하나까지도 모두 최고의 사치를 다하고 있었다. 아, 불교는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이 정도로 혹세(惑世)를 하고 있고, 우리는 무엇을 잘못하여 이교(異敎)가 저렇게까지 판을 치고 있게 했단 말인가. 고인들이 천하 명산은 중들이 많이 차지하고 있다고 하더니, 참 서글픈 일이다.
조금 늦게 백련암(白蓮菴)에 있는 중 천오(天悟)라는 자가 왔는데 나이는 80이고 자기 말로 응상(應祥)의 도제(徒弟)이며 치언(雉彦)과는 동문이고 사명당 송운 유정(四溟堂松雲惟政)을 사숙(私淑)하고 있다고 하였다. 얘기를 나눠 보니 국내에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던지 산과 물의 원위(源委)를 많이 알고 있었다. 그 곳에 있는 중 계필(戒必)이란 자도 천오와 함께 종유하는 자인데 그와도 함께 얘기했다. 그리고 또 그의 말이, 금강산은 내산(內山)이 등이고 외산(外山)이 얼굴이며 장백산에서 발원하여 황룡(黃龍)에서 푹 솟고 추지(楸池)에서는 잠복했다가 힘차게 달려와서 여기에 와 이렇게 뭉치고는 다시 동해 쪽으로 가 머리를 수그리고 천후(天吼)ㆍ설악(雪岳)이 되었고 한 줄기는 서쪽으로 가 대산(臺山)이 되었으며, 또 한 줄기는 남쪽으로 달려가 태백(太白)ㆍ소백(小白)이 되고 유두(流頭)에서 마무리를 했다고 했는데, 그의 말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내가 말하기를,
“풍악산이 내산은 모두 바위뿐이어서 깎아지른 듯이 험준하기만 하고 풍후(豐厚)한 맛이 없는 데 반해 외산은 높으면서도 흙이 많이 있고 동해를 내리보고 있어 서로 자웅(雌雄)을 이루고 있는데 노사(老師)의 말씀이 대체로 맞는 말 같소이다.”
하고, 이어 만폭동에서 용문석(龍門石)이라고 썼다는 얘기를 했더니, 천오가 다 듣고는 두 손을 마주잡으면서 하는 말이,
“선생께서는 사물을 잘 묘사해 내는 분이라 할 수 있으니 산중의 고사(故事)가 되기에 충분하겠습니다. 이 노승(老僧)이 잘 기억해 두었다가 뒤에 오는 이들에게 전수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천오가 비백(飛白)을 잘 쓴다기에 몇 폭 부탁했더니, 일필휘지로 쓰는데 붓놀림이 민첩하고 빨라 이러한 서예에 노련한 자로 보였으며, 역시 애호할 만하였다. 그리하여 당인(唐人)의 시, 충암의 비로봉시, 차운하여 보원(普願)에게 준 나의 시 등을 써서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가졌다. 식후에는 극가 등 몇 사람과 앞 시내로 자석(磁石)를 캐러 갔었으나 캐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산 속 물이 차가운데 중들이 물 속에 들어서서 돌을 굴리면서 모래 이는 것을 보고는 그만두고 그 곳 중에게 청하여 자석을 얻었다. 그리고 그날 양양 태수(襄陽太守) 이구 대옥(李球大玉)이 사람을 보내 편지와 시를 부쳐 오면서 식량과 반찬 그리고 술에 안주까지 보내 왔다. 그의 시는 이러했다.

선구에서 지내는 그 자미가 어떠한가 / 仙區行色問如何
오르는 곳곳마다 흥미가 진진하리 / 處處登臨發興多
어느 때나 영랑호를 읊조리며 지나련가 / 吟過永郞湖幾日
명사에서 피리 불며 기다릴까 싶네마는 / 笙歌吾欲候鳴沙

이날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8일(경술) 아침 안개가 비로 변하여 온종일 멎지 않았다. 천오가 가겠다기에 작별 인사로 절구 한 수를 써 주었다.

동화를 마음 두고 삼 년을 다녔더니 / 三載東華志未平
흰구름 가을빛이 중향성에 가득하네 / 白雲秋色衆香城
산영루 앞에 와서 자기까지 하고 보니 / 更投山映樓前宿
불탑에 연기 녹고 야기가 그리 맑네 / 佛榻煙消夜氣淸

이렇게 써 주었더니, 천오가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하는 말이,
“노승은 죽을 날이 머지 않아 뒤에 다시 만날 기회가 없겠지만 이 시면 충분히 죽기 전의 면목(面目)이 되겠습니다.”
했는데, 그는 문자(文字)도 알고 얘기도 잘하고 비교적 올바른 정신이 있는 자였다. 대옥(大玉)이 보낸 심부름꾼이 돌아가는 편에 그의 시에 차운한 시를 보냈다.

내 자미가 어떠냐고 그대가 물었는데 / 君問吾行事若何
구월이라 가을빛이 안문에 짙다네 / 九秋風色雁門多
이번 길엔 기어코 호선의 뒤를 따라 / 此行且追湖仙躅
모래밭에 비치도록 예상을 보내려네 / 須遣霓裳映晩沙

유군 역시 절구 두 수를 지어 그는 그대로 보냈다.
이 날은 대적암(大寂菴)으로 가서 나백(懶伯)에게 물어 만경대(萬景臺)를 오르려고 했고, 또 절운(切雲)ㆍ은선(隱仙) 등의 대에도 올라 십이폭(十二瀑)을 구경하고 그리고 외산(外山)도 한번 살펴보려고 했었는데 비 때문에 그리 못하였으니 역시 안타까운 일이다.

9일(신해) 아침 비가 늦게 개었다. 출발하려 하면서 오자시(五字詩)를 지어 천오 대사에게 부쳐 주도록 계승(戒僧)에게 주었다.

구름 속에 사는 글 잘하는 중 / 雲間碧眼字
붓 휘두르자 벌레와 새가 꿈틀거리고 / 筆下生虫鳥
산수에 관한 얘기까지 잘해 / 況復談山水
나로 하여금 속세를 잊게 했네 / 令我俗緣了

운취당(雲翠堂)을 출발하여 산영루(山映樓)를 거쳐 명월교(明月橋)ㆍ백운교(白雲橋)ㆍ월운교(月雲橋)를 건너서 동으로 가노라니, 푸른 절벽의 단풍잎들이 좌우를 비추고 있고 비가 갠 뒤라서 맑은 바람 밝은 태양이 우리로 하여금 청명(淸明)한 기운을 더 느끼게 했다. 그리고 시냇가 수석(水石)들이 하나같이 신선 세계여서 도중에 절구 한 수를 읊어 두 군들로 하여금 화답하도록 했다.

비 지난 가을 산에 시원한 바람 불고 / 一雨秋山送晩凉
동천의 운물들 아침 햇살 받아 곱네 / 洞天雲物媚朝陽
절벽의 단풍나무 무지개다리 속이어니 / 丹崖錦樹虹橋裏
나더러 신선이란들 안 될 것이 뭐겠는가 / 呼我爲仙亦不妨

한 잿마루에 올랐더니 구현(狗峴)이라고 했다. 중의 말에 의하면 처음 유점사 터를 잡을 때 개가 앞을 인도하여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재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떠나 백천교(百川橋)를 건너는데 돌다리가 몇십 보 되는 골짜기를 가로질러 있고, 돌을 깎아 난간을 만들어 두었으니 흐르는 물 위를 가로질러 있으며, 수석이 기절하기 이를 데 없고 푸른 소나무가 길 옆으로 죽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다시 닦고 보게 하였다. 견여에서 내려 걸어서 건넌 뒤 소나무와 바위에 걸터 앉아 한참 있다가 떠났다. 거기에서는 또 견여를 타고 얼마쯤 가 외삼촌이 있는 곳까지 갔더니 내산(內山)에서 보내온 산외(山外)의 종과 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서 잠시 쉬면서 행장을 챙기고 누룽지를 꺼내 요기를 했는데, 견여를 메던 중들은 거기에서 모두 물러가고 이후로는 말을 타고 갔다. 절에서 여기까지는 20리(里)쯤 되었으며, 중들 몇이 뒤를 따랐는데 읍리(邑里)로 가는 자들이라고 했다.
산외에서 온 노복과 말들은 장안사(長安寺) 북쪽으로 산기슭을 따라 오다가 추지령(楸池嶺)을 넘고 통천(洞川)ㆍ고성(高城)ㆍ삼일포(三日浦)를 거쳐 산 아래까지 왔는데 거의 3백 리 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중의 말을 들으면 장안사에서 남쪽으로 나와 건봉(乾鳳)의 앞재를 거쳐 여기까지 오려면 이 길보다 꽤 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산이 자리잡고 있는 둘레는 5, 6백 리쯤 되는 것으로 옛날에, 8백 리라고 한 말은 허탄한 말인 것이다.
이 재는 금강산 동쪽 기슭의 한 가지로서 유점사에서 오자면 하나의 작은 재에 불과하지만, 이 재에서 동으로는 산마루가 그렇게 험준하고 구불구불 구절양장이어서 동해가 내려다보인다. 내가 중에게, 이 재 이름이 좋지 않아 내가 지금 망양령(望洋嶺)이라고 고쳤으니 뒤에 사람들이 오거든 그렇게 말하라고 했더니 중이 그리 하겠노라고 하였다. 그 재에서 내려가니 나뭇잎이 아직 단풍 들지 않아 마치 여름 같았다. 경구(京口)에서 말에게 꼴을 먹였는데, 여기가 유점사 중들 물방아 찧는 곳이라고 하며 물방아가 수십 군데 있었다. 재가 가파르고 길이 험해서 말이 갈 수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서 방아를 찧어가지고 지고 산으로 간다는 것이다. 고성 남강(南江)에 이르자 고성 주수의 조카 만(晩)이 원통(圓通)에서 뒤쫓아왔다. 그리하여 함께 남강을 건너 읍내 민가에서 여장을 풀었는데 주수가 사람을 시켜 고기반찬 등을 보내왔다. 이는 외삼촌이 오셨기 때문인데 자기는 병이 있어 와 보지 못한다고 심부름 온 자가 말하였다.

10일(임자) 맑음. 길을 떠나 외삼촌은 주수를 찾아보러 가시고 나와 두 군은 성 안으로 들어가 진동루(鎭東樓)에 올라 구경하였다. 또 해산정(海山亭)에 올랐더니 벽 위에 전인(前人)의 시판(詩板)이 많이 걸려 있었고, 그 중에서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이 지은 절구 한 수가 가장 운치가 있어 읊을 만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파도가 오밤중에 서광을 뿜어내더니 / 午夜溟波噴瑞光
여섯 용이 해를 들어 부상에 떠올리네 / 六龍擎日上扶桑
상서로운 구름들이 수도 없이 떠 있으니 / 彤雲紫蓋紛無數
뜬구름아 널랑은 태양 가까이 가지 말렴 / 莫遣浮雲近太陽

하였다. 정자가 동해를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으면서 서쪽으로는 금강산을 바라보고 있고 또 남강이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데다 바다 입구에는 포구산(浦口山)ㆍ석범산(石帆山)ㆍ칠성석(七星石) 등이 줄지어 눈 안에 들어오고 있어 참으로 경치가 좋았는데 정자 이름을 해산(海山)이라고 한 것도 아마 그래서 붙여진 것이 아닌가 싶었다. 다만 읍(邑)이라고 해야 민가가 열 집도 채 안 되고 성도 망루도 다 무너진 상태여서 읍의 꼴이 아닌 것이 흠이었다. 주수가 외삼촌을 통해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그 정자로 찾아와서 서로 인사를 나눈 다음 얘기 몇 마디를 끝내고 바로 일어나 삼일포(三日浦)로 향하였다. 주수가 미리 사공을 시켜 포구에다 배를 대어 놓게 하고 또 홍생(洪生)도 동행하게 하여 함께 배를 타고 사선(四仙)이 썼다고 하는 바위 사이의 단서(丹書)를 보았더니 글자 획이 모두 흐려져서 알아볼 수가 없고 판독할 수 있는 것은 ‘남석행(南石行)’ 이 세 글자뿐이었다. 용린석(龍麟石)을 구경하고 배를 그 바위 아래에서 돌려 사선정(四仙亭)에 올랐더니 홍귀달(洪貴達)ㆍ이관해(李觀海) 등 여러 사람이 읊은 시가 있어 읽어 보았다. 주수가 소주 몇 잔을 보내온 것이 있어 홍생과 대작하고 나서, 내가 시 한 수를 지어 읊어 주면서 그대로 주수에게 전해달라고 하였다.

고성 고을 태수가 어떤 인물이라던가 / 高城太守是何人
선왕조 때 바른말로 잘 간하던 신하였다네 / 曾在先朝諫諍臣
지금도 성상께선 나라 걱정에 애태우시니 / 聖主卽今臨食嘆
국가 치안 묘책을 돌아가서 아뢰구려 / 治安九策要歸陳

다시 호구(湖口)와 남강을 건너 간성(杆城)으로 향하며 또 시를 지었다.

열흘을 구경해도 흥은 아직 가시지 않아 / 十日金剛興未闌
구정의 가을빛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네 / 九井秋色更回看
사선암은 있건마는 신선들은 간 곳 없고 / 四仙嵒畔幽蹤遠
포구의 연파 속 배 안에 내가 있네 / 浦口煙波倚木蘭

이 날 해산정에서 이관해의 절구 몇 수를 읽어보고 그것을 베끼고 또 차운까지 해보려 하였으나 때마침 주수가 왔기 때문에 미처 못하고 말았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지나고 나서 생각을 더듬어 보았으나 기억에 떠오르지 않는다. 바다를 따라 남으로 내려가다가 중도에 길을 잃고 되돌아왔는데, 한 호수를 지나다 보니 물은 굽이쳐 흐르고 바위는 기이한데 바다 어구에 임해 있어 뛰어난 경치가 삼일포에 못지 않았다. 들에 있는 동자에게 그 호수 이름을 물었더니 감호(鑑湖)라고 하였다. 거기를 구경하고 세상에 알린 자가 아직 없었기 때문에 이름이 전해지지 않고 그렇게 묻혀 있는 것이니 이 역시 서글픈 일이었다. 말을 멈추고 눈여겨보았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자꾸 돌아다보게 만들었다. 조금 가다가 길가에서 말에게 꼴을 주고 현종석(懸鍾石)ㆍ석주(石舟) 등을 구경하면서 바위 위에 앉아 파도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그 석주니 현종석이니 하는 것들은 바로 유점사 사적에 기록되어 있는, ‘금불(金佛)이 서역국에서 올 때 석주를 타고 왔고 또 종을 이 바위에 매달았다’고 한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민간에 서로 전해 오고 있고 또 그 부근 마을 백성들은 그것을 다 사실로 여기고 있다. 대강역(大康驛)에서 잤는데 오늘 온 길은 25리쯤 되었다.

11일(계축)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운근역(雲根驛) 역리(驛吏) 집에서 말에 꼴을 주었다. 그 사람의 성명은 박성보(朴聖輔)였고 막걸리와 소금에 절인 전복을 내와 마시고 취하였다. 이 날은 일행 모두가 죽포역(竹浦驛) 역리 집에서 잤는데 그 집에서는 배를 내왔다. 이 날은 70리쯤 걸었으며 해변을 따라 걸었는데 이 날 따라 북풍이 세차게 불었기 때문에 바다에 파도치는 소리가 뇌성벽력 같았다. 바닷가 사람들 말에 의하면 바람 따라 물결이 용솟음치는 것을 일러 해악(海惡)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동풍ㆍ북풍이 불면 파도가 서로 마주치고 남풍ㆍ서풍이 불면 바람이 아무리 거세도 파도가 별로 일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두 군들에게 묻기를,
“사해(四海)의 물이 끝도 없이 넘쳐 흘러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르는데 과연 어디가 높고 어디가 낮을까?”
했더니, 극가가 하는 말이,
“듣기에 북극(北極)은 높고 남극(南極)은 낮다 하니 사해의 물 모두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것이 아닐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모든 시냇물은 동으로 흐른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동해에는 밀물과 썰물이 없고, 감(坎)은 북방이어서 물이 모두 그리로 가야 할 것이니, 그렇다면 사해의 물은 모두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것일 것이다. 한구암 명길(韓久菴鳴吉)도, 남해와 북해는 밀물 썰물이 있고 동해 서해에는 없는데 그것은 마치 사람이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여 나도 구암의 그 말이 사실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의 말대로라면 남해는 목구멍과 같아서 기운이 들고 나는 곳이라 치더라도 북해는 미려(尾閭)와 같아서 밀물 썰물이 당연히 없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지금 바람의 동정과 바닷물의 간만으로 미루어 봐도 북해는 가장 아래 있어 밀물 썰물이 없어야 하는 것이 이치로 보아 더욱 미더운 말인 것이다. 왜냐하면 기운이 잠겨 있으면 조수는 없고 바람이 역풍을 일으키면 파도가 일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극은 높고 남극은 낮다는 것은 천체의 은현(隱見)을 두고 한 말이지 지세(地勢)의 높낮음을 말한 것은 아닌 것이다.”
했더니, 극가의 대답이,
“그대 논리는 궤변이지 어디 그럴 이치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날 또 명사(鳴沙)를 밟고 지나가기도 했다. 서해의 해변은 모두가 뻘이어서 질컥질컥 빠지지만, 동해는 모두 하얀 모래 위에 맑은 파도뿐이니, 그 하얀 모래 위를 말을 몰고 가노라면 말발굽 사이에서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는 마치 눈을 밟는 소리 같기도 하며 또 혹은 새들이 서로 조잘대는 소리 같이 들릴 때도 있다. 그래서 이른바 명사(鳴沙)라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또 해당화가 길 옆으로 숲을 이루고 있는데 씨가 이미 여문 것도 있고 꽃이 아직 피어 있는 것도 있었다. 옛사람이 이른바, ‘명사십리해당홍(鳴沙十里海棠紅)’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인 것이다. 나도 시 한 수를 읊었다.

기구한 곳 다 지나고 이제 앞이 트이는가 / 歷盡崎嶇望始通
바다 위의 풍경들이 그야말로 창창하네 / 海天雲物正蒼蒼
인간에는 좋은 곳이 없다고 말을 말게 / 人間莫道無佳境
집집마다 벼와 기장 그 향기가 좋을씨고 / 千室稻粱滿地香

두 군들에게 들려 줬더니, 유군이 내 시에 화답하고 나서 또 두보(杜甫)의 기행시(紀行詩)를 외우고는 나에게 함께 차운할 것을 요구하였다. 내가 읊기를,

늙은 내가 구경 한번 해 보려고 / 吾衰事遠遊
힘에 부치는 것도 마다 않고 / 不辭筋力苦
늘 수석 그윽한 곳을 찾아 / 每探水石幽
예스런 곳이면 금방 앉곤 했네 / 頻坐嵒菴古
가고 또 가고 바닷가를 왔더니 / 行行出海邑
구름인지 물인지 서로 뒤엉켜 있고 / 雲水相呑吐
천둥소리가 땅속에서 나고 / 轟地中雷
반공중에선 세찬 비가 내리네 / 滃濛半天雨
산을 의지해 살고 있는 백성들 / 居民傍山多
셀 정도의 어부들 집이었네 / 蜑戶復可數
구이에 가 살고 싶다던 그 말씀 / 緬想居夷歎
옛 성인도 가늠이 있어 그랬겠지 / 先聖豈無取

기하(圻下)에서 영서(嶺西)를 거치는 동안 가을이 비록 풍년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두 자 빠짐- 경치가 좋아 추흥(秋興)이 꽤 있었다. 산으로 들어온 이후로는 들판의 경치며 농사 일이 모두 딴 세상 일로 생각되었는데 어제 경구(京口)에 와서야 비로소 곡식이 심어져 있는 전답을 보았다. 그런데 바닷가로는 옥토는 없고 빈 땅이 많았으며 마을이나 살고 있는 백성들이 사뭇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또 과수원이나 풍성한 숲도 없어서 새와 짐승들이 깃들 곳도 없었고 가을 농사 역시 영서 지방만 못하였다. 이곳 백성들은 모두가 게을러서 농사에 주력하지 않으며 가끔 고기잡고 해초 캐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단호(蜑戶)가 있기는 하였으나 지난 해에 흉년이 크게 들어 죽은 자가 거의 절반이었다고 하여 듣기에 슬펐다.

12일(갑인) 맑음. 주인의 집이 바다 부근에 위치해 있어 해돋는 광경을 볼 수 있었으므로 여러 벗들과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때마침 구름이 살짝 가렸다. 주인 말에 의하면, 언제나 해돋이 구경을 하려고 하면 구름과 안개가 늘 가려 버려 확실히 볼 수 있는 청명한 날은 드물다고 한다. 그 곳을 일찍 출발하여 간성(杆城)의 북천교(北川橋)를 건너고 읍성(邑城)을 지나 소나무숲 속으로 10여 리를 가니 중간에 둘레가 3리쯤 되어 보이는 호수 하나가 있었다. 남쪽에는 묏부리가 못 속까지 들어와 있고 고색창연한 바위에 모래알들은 하얀데 게다가 푸른 소나무가 울창하고 못 안에는 순채잎이 가득하여 그야말로 ‘천리호 순채국에다 된장만 풀지 않은 격’이었는데, 이른바 선유담(仙遊潭)이라는 곳이었다. 서로 말을 달려 올라가서 한참을 감탄하며 보다가 내가 일행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들 행색이 너무 맑아 흥을 도와 줄 만한 물건 하나 없으니 이곳 경치가 좋기는 하지만 무작정 오래 있을 수는 없겠네.”
하고, 드디어 길을 떠났다. 길가에 기러기들이 떼지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마부 한 사람을 시켜 총을 쏴 보라고 했으나 맞추지 못해 서로 한바탕 웃었다. 30여 리를 와 한 곳에 다다르니 붉은 기둥으로 된 높은 누각이 바다를 향하여 있고 어촌(漁村)이 저자를 이루고 있었는데 구름과 물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말에서 내려 난간에 올라 보니 마음까지 시원하였고, 옛날에 이른바 청간정(淸澗亭)이라는 곳이었다. 청간이라는 명칭은 역(驛)의 이름을 따라 붙여졌던 것인데 지금은 창해정(滄海亭)이라고 이르고 있다. 일행 모두가 하는 말이,
“우리가 지금까지 구경을 다녀 보았지만 이렇게 경치 좋은 곳은 일찍이 보지를 못했다. 참으로 한평생 제일 좋은 구경이요 천하의 장관이라고 하겠다.”
하고, 드디어 그 곳에서 유숙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 곳 벽 위에는 여러 사람들의 시가 걸려 있었는데, 노소재(盧蘇齋)ㆍ차식(車軾)ㆍ최간이(崔簡易)의 시 두 수를 차운하였다.

부상에는 아침에 해가 뜨고 / 扶桑朝出日
밤이면 창해에 바람 이네 / 滄海夜生風
속세 일들 누워 생각하니 / 臥想塵間事
허공의 한 점 구름일레라 / 如雲點太空

또 차운하기를,

저 멀리서 돛단배는 둘씩둘씩 오고 있고 / 天外風帆來兩兩
구름가 물새들은 쌍쌍으로 날아가네 / 雲邊水鳥去雙雙
창망한 예 오른 뜻 다 풀 길이 없어 / 蒼茫不盡登臨意
한밤중 창해루의 들창을 밀친다네 / 滄海樓中夜拓窓

했는데, 이 시는 차군(車君)의 작품을 다소 새로운 의미로 화답해 보았을 뿐이다. 노소재의 본운(本韻)은 이러했다.

하늘은 동해에 뜬 달을 아끼는가 / 天靳東溟月
한 밤중 바람에 시름을 못 이기네 / 人愁夜半風
선사가 아직 닿을 시간이 못 되어 / 仙槎應未泊
휘파람 불며 푸른 하늘 생각한다네 / 孤嘯想靑空

소재 아버지가 간성 원이 되어 왔을 때 소재가 따라왔다가 이 정자에 올라 이 시를 누대 기둥에다 써 놓고 그 곁에다, 군자(郡子) 노수신(盧守愼)이라고 써 놓은 것을 후인들이 현판을 만들어 걸었다고 하는데, 소년 시절의 작품이지만 이미 소[牛]를 삼킬 만한 기개가 있었다. 그리고 최간이의 시는 이렇다.

이 마음이 저 바다와 더 크기를 겨루다가 / 此心與海堪爭大
하늘 땅이 승락 안 해 쌍벽 이루고 말았다네 / 未許乾坤只作雙
끝까지 장애물이 없을 수는 없겠기에 / 終始不能無物障
연하 한 점 없는 곳에 들창문을 달았다네 / 煙霞盡處着軒窓

간이가 일찍이 이 고을 원을 지냈기 때문에 이 시를 쓴 것인데, 시가 매우 힘이 있기는 하지만 어딘가 억지로 다듬은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차식의 시는,

성긴 비에 갈매기는 둘씩둘씩 날아가고 / 疏雨白鷗飛兩兩
석양의 고깃배들 쌍쌍으로 떠 있네 / 夕陽漁艇汎雙雙
동천에 해가 돋는 그 모습 보기 위해 / 擬看晹谷金烏出
화각의 동쪽 머리에 창을 달지 않았다네 / 畫閣東頭不設窓

라고 읊었는데, 붓 끝이 생동감이 있고 퍽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속담으로 전해오고 있는, ‘양양백구비소우(兩兩白鷗飛疏雨)’라는 것이 바로 이 시의 선창이 아니겠는가.
차식(車軾)은 송도(松都) 사람으로 아들 둘을 두었는데 그들이 운로(雲輅)와 천로(天輅)이다. 늙은 소명윤(蘇明允)이라면 식(軾)과 철(轍) 두 아들을 두었던 것 역시 당연한 일일 것이다.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의 시는,

푸른 바다에 붉은 무리 해는 이미 한나절인데 / 碧海暈紅窺日半
이끼 푸르고 바위 흰 것 갈매기와 연파로세 / 蒼苔嵒白煙鷗雙
금은대 위에 앉아 휘파람 한 소리에 / 金銀臺上發孤嘯
드넓은 천지가 팔방으로 활짝 열리네 / 天地浩然開八窓

했는데, 이 시 역시 의사가 소통하고 보는 이를 깨우쳐 주는 점이 있어 그런 대로 좋았다. 그리고 또 벽 위에 걸려 있던 박 승지 길응(朴承旨吉應)의 시 두 수도 생각과 운치가 매우 좋았었는데, 미처 화답을 못했던 것이 한이고 지금은 기억할 수도 없다.
그날 만경대(萬景臺)에 올랐더니 소나무와 바위가 대를 형성하고 바다를 내리보고 있었고 그 좌우에는 1백 호(戶)나 되어 보이는 어민들이 살고 있었으며 배는 끊임없이 오가고 숱한 갈매기들이 날아들고 있었다. 한참을 구경하다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는 또 달빛어린 포구에 배를 띄우고 섬바위 위에 앉아 어부에게 뱃노래를 시켜놓고 듣고 있는데 그 가사가 모두 바람 걱정 물 걱정하는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고기잡는 장소를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앞바다에 가면 물마루[水脊]가 있는데 어부가 만약 바람을 타고 그 곳을 벗어나면 거기서부터서는 무변대해여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혹시 배를 댈 만한 섬이 있더라도 거기에는 갈대가 하늘을 찌르고 물새들이 떼를 지어 새끼를 치고 있고, 사람을 보면 제 새끼 잡아갈까봐서 뭇놈이 모여들어 쪼아대는 바람에 사람이 살아 돌아올 수가 없다. 또 식량과 물이 동나서 죽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뱃사람들은 그 곳을 저승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기잡이배가 아침에 나갔으면 반드시 저녁에 돌아와야지 만약 그날 돌아오지 않는 날이면 식구들이 죽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며, 또 그렇게 죽어간 자들이 늘 있어 뱃사람으로서 정작 늙어 죽은 자는 오히려 적은 편입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대들이 왜 그것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가?”
했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바닷가에 사는 백성들은 먹고 사는 길이 이것뿐인데다 관가(官家)로부터의 요구에 책임을 지고 응해야 하기 때문에 비록 죽음이 앞에 닥쳐올 것을 알고서도 별수없이 해야만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이 날 어부가 새로 따온 전복과 대구(大口)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전복은 회치고 대구는 삶고, 또 막걸리까지 사다가 흥풀이를 하였다. 달놀이를 마치고 정사(亭舍)로 돌아와 자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쓰고 두 군으로 하여금 화답하게 하였다.

아침 햇살에 먼지 한 점 없더니 / 旭日氛埃滅
갈바람에 큰 파도 일어 / 秋風大海波
태산에라도 오르는 기분으로 / 還將登岱興
달 아래 뗏목에 올랐었지 / 更上月邊槎

양양(襄陽) 주수가 관인(官人)을 시켜 우리 일행을 탐문하였다.

13일(을묘) 새벽에 일어나 일출 광경을 보았더니 구름이 가리고 있었으나 구름과 해가 서로 부딪치는 바람에 황금빛이 내리쏘이고 구름 속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있는 것 같아 보기에 매우 좋았다. 길 중간에 언덕이 하나 보였는데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고 대의 크기는 모두 화살 감이었으며 바다 속의 섬들도 모두 푸르른 대숲으로 되어 있었다. 노포(蘆浦)에 와서는 호수가 터져 건널 수가 없어서 뱃사람으로 하여금 바다의 배를 끌어다가 건너게 했었다. 내가 보기에 동해에 있는 배들은 통나무를 파서 만든 것으로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것이 마치 말구유 모양이고 몸통도 매우 적은데 그래야 배가 파도를 잘 탄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날은 큰 배 한 척을 보았는데 모양이 서해(西海)에서 부리는 배 같았고 모래 위에 정지해 있었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들 말이, 동해에는 그렇게 생긴 배가 없고 지난 큰 흉년 때 영남(嶺南) 백성들이 살 길이 없자, 그 배로 고기 잡고 해초라도 캐기 위해 파도를 무릅쓰고 동해로 들어왔던 것인데, 그들은 동해에서 고기잡이를 하여 생활을 꾸려가자는 속셈이었으며, 파도에도 역시 별 걱정이 없었다고 하였다. 내 그들 말을 듣고 생각해 보았을 때 동해의 작은 배들은 그것이 거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들 쓰기에 편리하게 만든 것이지만 저 큰 파도는 큰 배가 아니고서는 건널 수가 없는 것이다. 국가가 동해에는 파도가 거세지 않다 하여 관(官)의 힘으로 큰 배를 부리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동해에는 큰 배가 필요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지금 지난 흉년 때 들어왔다는 저 배를 놓고 보더라도 동해ㆍ서해를 배로 통행할 수 있음을 알지 않겠는가.
그날은 또 염막(鹽幕)을 지나다가 소금 굽는 법을 들어가서 보았는데 바닷물을 달여서 소금을 만드는 것이 우선 서해와 다르고 소금 맛도 너무 써서 음식을 만들면 달고 맛있는 서해 소금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이다. 서해안의 소금 만드는 법을 동해안에서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또 따뜻한 날씨에 동남풍이 불어 바닷물이 잔잔했는데 가끔 고래가 나와 노는 모습이 보였다. 큰 새처럼 생긴 몸집이 새까맣고 물을 뿜어대면 눈발 같았으며 소리는 소울음소리 같았다. 어부들의 말에 의하면 바닷고기로는 고래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또 황수차(黃水差)라고 하는 고기가 있는데 서로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고래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 황수차는 꼭 떼를 지어 다니다가 만약 고래를 만나게 되면 수컷 하나가 지휘자로 뒤에 딱 버티고 서서 그 무리들로 하여금 번갈아서 나가게 하여 꼭 죽여 놓고야 만다는 것이다. 만물이 다 종류별로 서로 제어를 하고 또 싸우는 기술까지 갖고 있다니 그 역시 자연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그로부터 20여 리를 더 가 건봉(乾鳳) 하류를 건너 낙산(洛山)을 바라보고 달리다가 산등성이로 올라 얼마를 더 가서 절 문간에 들어서니 중들이 견여를 메고 나와 맞이했다. 견여를 물리치고 걸어서 이화정(梨花亭)에 올라 앉아 있었다. 정자는 절 문간 밖에 있었는데, 그 절의 문정(門庭)이나 헌각(軒閣)이 웅장하여 바로 하나의 큰 아문(衙門)이었다. 절은 설악산을 등진 채 동해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지세가 편평하며 넓고 건물도 탁 틔어 넓었다. 당(堂)에 올라 보니, 금벽(金碧) 장식이나 용마루 등의 높이는 비록 장안사ㆍ유점사 등만 못해도 대문과 담의 꾸밈새나 전망이 좋기는 그 두 절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
양양 태수 이대옥(李大玉)이 온다는 시간에 대오지 못하고 한참을 기다린 뒤에 왔기 때문에 우리들이 옛날 산당(山堂)에서 있었던 일처럼 중들로 하여금 북을 울리게 하여 그가 시간에 대어 오지 못한 것을 장난삼아 책하고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앉아 있는데 대옥이 술과 안주를 차려가지고 와 함께 마시며 즐겼다. 얘기 도중 극가가 말하기를,
“고성 태수(高城太守)는 이 좋은 풍경 속에 앉아 있으면서, 천리 멀리 구경 나온 서울의 사우(士友)들을 만났는데도 서로 위로하는 술 한잔도 없으니 그 어디 풍류 있는 태수라고 하겠습니까. 사람은 존경할 만한 사람이지만 그 일은 배울 일이 아닙니다.”
하자, 외삼촌이 말씀하기를,
“고성 태수는 천성이 원래 깔끔해서 애당초 그 생각을 않은 것뿐이지 정의가 박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네.”
하였다. 내가 뒤이어 말하기를,
자신이 깔끔하기 때문에 남을 대우하는 것도 냉냉하게 하는 것이 물론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더구나 주식(酒食)에 빠져 그칠 줄 모르는 자에 비한다면 훨씬 더 고상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술을 마실 줄 아는 사람이라야 술 속의 취미도 알아서 사람을 운치 있게 대우하는 것이지,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야 마치 기와조각을 물고 있는 것처럼 그의 마음이 언제나 편안하고 차분할 때가 없는 것인데 남이 무슨 취미를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알 것이며, 또 그런 자와 어떻게 호산(湖山)의 승경을 논할 만하겠습니까.”
했는데, 그때 좌중에 술을 마시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서로 한바탕 웃고 나서 다시 한잔씩 들고는 밤이 깊어 파하고 함께 선당(禪堂)에서 잤다.
내가 시 한 수를 읊어 대옥에게 주니 대옥도 화답하였다.

삼천 길 설악산에 뭉게뭉게 구름인데 / 雲垂雪嶽三千丈
구만 길 동해에선 둥그렇게 달이 솟네 / 月湧東溟九萬尋
이화정 위의 오늘 가진 이 모임에 / 今日梨花亭上會
한 가락 아양곡은 고인의 마음이어라 / 峩洋一曲故人心

이상은 내 시인데, 그날 따라 하늘이 비가 내릴 듯 설악산 절반을 구름이 가리고 있었고 달이 중천에 오르자 비로소 빛이 있었다. 또 좌중에는 현금(玄琴)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시에서 이를 언급한 것이다. 대옥의 화답시는,

신선을 보자하고 높은 누대 올랐건만 / 獨上高臺望仙子
아득하다 봉래섬 어디메서 찾는단말가 / 蓬島微茫何處尋
거문고에 실어보는 아양곡 한 가락에 / 惟有峩洋琴一曲
두 사람 마주 앉아 우정을 다짐하네 / 兩人相對百年心

했고, 또 읊기를,

동쪽 바다 저멀리 이화정이 있거니 / 梨花亭逈海東傍
술을 들고 오르자 유흥이 절로 난다 / 杯酒登臨引興長
누가 그리 말했던가 낙양의 탐승객이 / 誰道洛陽探勝客
한때는 수운향을 너무 좋아했노라고 / 一時靑眼水雲鄕

하고서 나에게 화답을 구했으나 나는 술에 취해 자느라고 화답하지 못하였고 유군만이 화답하였다.
그날 밤 내 잠자리에는 기생들이 곁에 있었다. 내가 좌중의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꽃과 버들은 봄빛과는 잘 어울리는 것이어서 풍류로는 그만이지만 그러나 초 나라 군대가 한왕(漢王)을 겹겹으로 에워싸는 날이면 빠져 나올 길이 없을 것 같은데 이 일을 어쩌지?”
했더니, 대옥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이기고 지고는 내 하기에 달린 것인데 가까이하면 어떤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한 나라 군대가 사면에서 모두 초가를 부르다가 그들이 요란스럽게 장막 아래까지 다가오면 그때는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가려 해도 안 될 것이니 내 아예 자리를 걷어가지고 피하고 싶네.”
했더니, 모두들 웃으면서, 싸움을 해 보지도 않고 미리 도망치는 것은 속이 부족한 탓이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것은 제군들이 안 보았을 뿐이지 병법(兵法)에 있는 말일세.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아예 패배하지 않을 위치를 택하는 법이야.”
하고, 드디어 그 자리를 떴더니 유군 하는 말이,
“그대야말로 성문을 굳게 닫고 철저히 지키는 자로구먼.”
하였다. 외삼촌이 하신 말씀이,
“내가 자리를 바꿔 그 자리에 있어야 하겠다.”
하시기에, 내가 말하기를,
“외삼촌께서는 노장이어서 모든 일에 익숙하시기 때문에 패배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서 서로 농을 하며 한바탕 웃었다. 이어 외삼촌이 말씀하기를,
“옛날 개서막(開西幕)에 부임해 있을 때 명 나라 사신 뇌유령(雷有寧)이 바다를 통해 나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기일이 오래 지나도 오지 않아 원접사(遠接使) 이하 여러 명승들이 모두 모여 20여 일간이나 머무르고 있었지. 그때 원접사는 김신국(金藎國)이었고, 구봉서(具鳳瑞)ㆍ정태화(鄭太和)가 종사관(從事官)이었는데 감사(監司) 장신(張紳), 병사(兵使) 유림(柳琳)이 좌음(佐飮)을 위해 남북의 기생들을 모아 놓았기 때문에 한 사람당 각기 20여 명의 예쁜 여인들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너도나도 못하는 짓이 없이 별짓을 다했는데, 그 중에는 처음에는 돌아본 체도 아니하고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했다가도 결국에는 별수없이 한통속이 된 사람도 있다. 그때 조경(趙絅)이 문례관(問禮官)으로 함께 있었는데 그가 평소 청고(淸苦)하다는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여러 공들이 그의 지조를 시험해 보려고 그 중에서 예쁜 여인을 골라 조공을 꼭 품안에다 넣도록 당부를 했는데, 조공은 처음부터 난색 하나 보이지 않고 그와 함께 기거하며 날마다 앞에다 두고 부리는 등 모든 행동을 함께 하면서도 끝까지 지킬 것을 지켰기에, 우리는 거기에서 그 늙은이의 지조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했다. 그 말 끝에 일행 모두가 말하기를,
“그 늙은이를 혹 경멸하고 헐뜯는 자도 있지만 어쨌든 보통 사람에 비해 훨씬 단계가 높은 분이지요.”
하였다.

14일(병진) 새벽에 빈일료(賓日寮)에 나가 일출광경을 보려고 했는데 그날따라 하늘에 비가 올 징후가 있어 붉은 노을이 남북을 통해 하늘에 질펀하였고 만경창파 같은 구름물결이 끝도 없이 하늘을 띄워 보내고 해를 목욕시킬 듯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이 하늘 밖에 나가 놀게 만들었다. 조금 후 하늘은 금방 변하여 새벽빛이 다시 짙고 하늘끝도 희미했다. 태양은 비록 뜬구름에 가려 있었지만 구름이 변화하는 태도라든지 별스럽게 자꾸 바뀌는 모양은 보기에 이채로웠다. 그날은 기일(忌日)이었기에 혼자 빈일료에 앉아서 재계하였다. 늙은 중 비경(秘瓊)이라는 자를 불러 함께 얘기하다가 최간이(崔簡易)가 읊었다는 운(韻)자를 들었는데 운자만 있고 시는 없었다. 그 운자에 차운하여 써 주고, 또 벽상에 걸려 있는 홍녹문(洪鹿門)ㆍ정동명(鄭東溟) 운에도 차운하였다.

동해의 동쪽에는 낙산사가 있거니 / 洛寺寺臨東海東
부상에서 해가 뜨면 온 하늘이 붉어지네 / 扶桑出日滿天紅
절간의 이른 새벽 향 피우고 앉았으니 / 上方淸曉燒香坐
상서로운 구름 속에 떠 있는 듯하여라 / 身在祥雲紫氣中

위의 시는 간이의 운에 차운한 것이고,

설악산 동해 바다 그 사이 낙가정에서 / 雪嶽東溟洛伽亭
붉은 해가 푸른 하늘로 오르는걸 내 보았네 / 直窺紅日上靑冥
해산이 다한 곳에 이름난 고장 있어 / 海山窮處名區在
육경에 뛰어난 호걸스런 사람 같애 / 却似人豪出六經

위의 시는 동명의 운에 차운한 것인데, 다른 사람들도 함께 차운하였다.

우주 개벽 어느 때에 됐다던가 / 宇宙幾時闢
이 절은 신라 시대에 지었다네 / 禪宮羅代開
새는 구름 저 멀리로 사라지고 / 鳥向雲邊滅
돛단배 저 하늘 밖에서 오네 / 颿從天外來
바람 일자 파도는 태양을 흔들고 / 風生波盪日
가을 짙어 객은 누대에 오르네 / 秋晩客登臺
바닷가 삼천 리를 다 돌아보고나니 / 遵海三千里
이 정자가 참으로 장쾌하여라 / 玆亭實快哉

또 한 수는,

위치는 산수 좋은 곳 차지했고 / 地占山河勝
들창은 바다 쪽으로 향해 있네 / 窓臨溟海開
하늘 밖에서 흰구름 일고 / 白雲天外起
붉은 해가 밤중만 온다네 / 紅日夜中來
바람은 금선굴 흔들어대고 / 風撼金仙窟
파도는 의상대를 절구질하네 / 波舂義相臺
구이에 가 살고픈 뜻이야 있었다만 / 居夷夙有意
날 따를 자가 누구란 말가 / 從我其誰哉

했는데, 여러 사람이 다 함께 차운하였다. 정동명의 원운(元韻)은, ‘임지로 가는 유열경(柳悅卿)을 보내며’인데,

일만 그루 배나무꽃 바닷가 정자 / 萬樹梨花海上亭
낙산이 바닷가라 바다가 끝이 없네 / 洛山邊海海冥冥
문정에 송사 없고 종일토록 한가하리니 / 訟庭竟日閒無事
부상의 대제경이나 챙겨서 읽게그려 / 須讀扶桑大帝經

하였고, 홍녹문의 원운은, ‘낙산사에서 노두(老杜)의 운으로’인데,

이곳이 용왕의 집자린데 / 地卽龍王宅
어느 해에 절이 섰다던가 / 何年梵宇開
하늘은 푸른 바다에 떠 가고 / 天浮靑海去
산은 백두산에서 왔다네 / 山自白頭來
가을 풍경을 실컷 보기도 하고 / 縱目觀秋色
석대에 올라 쉬기도 했네 / 扶笻倚石臺
여기에 올라 세월의 무상함을 어루만지노라니 / 登臨撫今古
생각키는 이런 일 저런 일 끝이 없어라 / 俯仰恩悠哉

했으며, 손홍우 희(孫洪宇煕)는 차운하기를,

창파가 아득하여 끝이 없구나 / 滄波杳無際
천지는 언제쯤 개벽되었다지 / 天地幾時開
옛절엔 가을빛이 다해가는데 / 古寺秋光盡
모래밭으로 물새들이 오는고야 / 明沙海鳥來
시 읊조리며 옛일 더듬어도 보고 / 吟詩憶舊迹
먼 곳 바라보며 누대에 앉기도 하지 / 騁眺坐寒臺
황학이 한번 날아가더니 / 黃鶴一飛去
흰구름마저 왜 그리도 먼지 / 白雲何遠哉

하였다. 그리고 그날 비경이 최간이의 시 두 수를 가지고 왔었는데 그 하나는,

누대하면 해 뜨는 바다 장관이라 들었더니 / 樓觀海日昔聞奇
달로 치면 중추가절 햇수로는 일년이라 / 月得中秋一歲期
이 날이요 이때에 장마비를 만났으니 / 此日此時逢久雨
하늘이 날 영동에서 시 쓰라고 잡아 두었네 / 天公停我嶺東詩

라고 읊었으니, 이 시는 낙산(洛山)을 읊은 것이고, 또 십칠조(十七朝)라는 시는 이렇다.

높고 높은 저 하늘 달이 진 후 동쪽에서 / 玉宇迢迢落月東
갑자기 만경창파가 붉게 붉게 끓더니만 / 滄波萬頃忽翻紅
굼틀굼틀 괴물들은 모두 다 어디가고 / 蜿蜿百怪皆如畫
곱디고운 안개 속에 황금바퀴가 튀어 나오네 / 擎出金輪彩霧中

이상의 시들은 최공(崔公)이 간성 유수로 있을 때 판각해서 달아 두었던 것으로 언젠가 화재로 그 현판은 다 불타 없어지고 말았는데, 어느 선비 집에 남아 있던 이 시를 비경이 나에게 보여 주기 위해 베껴 온 것이다. 그리고 또 정수몽(鄭守夢)이 유수로 있으면서 비경에게 준 사운시(四韻詩)도 읊기에 그럴 만하여 역시 베끼게 하였다. 그리고 내가 좌중에다 말하기를,
“선배들은 별것 아닌 이 시 한 수까지도 그렇게 관심들을 가졌었는데 어찌해서 지금 후배들은 그에 대한 반응이 그렇게도 없는지 모르겠어.”
하였다. 정수몽의 시는 기억이 나지 않아서 적을 수가 없으니, 일행들에게 다시 물어 보아야겠다. 그 중의 시축에는 요즘 여러 사람들 시도 있었지만 그것들은 다 그렇고 그런 내용들이었다.

15일(정사) 흐림. 가랑비가 싸늘하게 뿌리다가 멎었다. 기신(忌辰)이라 좌재(坐齋)하면서 《주역》을 읽었고 부리(府吏)를 시켜 일록(日錄)을 베끼게 하였다. 또 어제 유군을 통해 눌승(訥僧)에게서 얻은 향언지로가(鄕言指路歌)는 퇴계(退溪)가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그 내용을 볼 때 학문에 조예가 없이는 지을 수 없는 내용이기에 역시 후일 아이들의 영가(詠歌) 자료로 삼기 위해 베껴 두게 하였다.
영덕 현령(盈德縣令) 심철(沈轍)이 지나다가 절에 들러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그는 고 판서(判書) 집(諿)의 손자이고, 사간(司諫) 동구(東龜)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날 또 두 군을 통해 김 장군 응하(金將軍應河)의 애사(哀詞) 두 편을 들었는데, 둘 다 읊을 만했다. 그러나 지금은 기억할 수가 없어서 추후 기록하기로 하겠다. 말이 난 김에 명(明) 나라 희종(熹宗)이 김응하를 포증(褒贈)한 일에 관해 말을 해야겠기에 내가 두 군들에게, 당시 명 나라에서 포증할 때 천자로부터 조서(詔書)가 있었는데 그 조서를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보았다고 하면서, 그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명문이 아니냐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건 그렇지 않다. 나도 그 조서를 읽어 보았지만 누가 초안한 것인지 알 수도 없거니와 천자가 자칭 과인(寡人)이라고 하면서 심지어 김군(金君)을 수양(睢陽)의 장순(張巡), 승상(丞相) 문천상(文天祥)에게 비유하여 말하기를, ‘장순(張巡)ㆍ허원(許遠)이 죽지 않았더라면 당(唐) 나라 왕실에 신하가 없는 폭이고, 문천상이 죽지 않았더라면 송(宋) 나라 왕실에 신하가 없는 폭이며, 장군이 죽지 않았던들 과인의 나라에 신하 없는 폭이 되었을 것이다.’ 했는데, 그 말뜻이 전도되고 사체(事體)를 모르는 정도가 심하였다. 또 문장의 표현 방법까지 서툴고 껄끄러워 마치 고문(古文)을 흉내내 보고자 하였으나 문장을 이루지 못한 것 같아 남의 웃음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천자 나라에서 외국 신하를 포증하려면 조서를 만들 때도 반드시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사람으로 하여금 쓰게 해야 할 것인데, 지어 놓은 글이 그 모양인 것을 보면 나라가 망해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만하지 않은가.”
하였다.
내 언젠가 또 숭정(崇禎) 연간에 황 감군(黃監軍)이 나왔을 때 그가 읊었다는 시를 보았는데, 내용이 말도 못하게 거칠고 추하고 졸렬한데도 그 자신은 그것마저도 모르는지라 장계곡(張谿谷)이 그의 작품을 써 놓고 비웃었다는 것이다. 듣기에 그 황은 진사(進士) 출신으로 조정에 오른 이후 우리나라를 왕래할 정도였으니 역시 한때 쟁쟁한 인물이었을 것인데도 그 모양이니 인재가 쇠할 대로 쇠해 세상이 오래 못 가리라는 징조인 것이다. 문장(文章)이라는 것이 비록 별것은 아니로대 한 시대의 성쇠가 거기에도 그렇게 반영되는 것이다. 아, 후세 사람들이 지금을 보면 지금 사람들이 옛날을 보는 것보다 오히려 더 못할런지 어떻게 알겠는가.

16일(무오) 새벽에 일어나 들창을 밀치고 일출 광경을 보았다. 그날 따라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바다도 활짝 개어 동쪽이 밝기도 전에 서광(瑞光)이 만 길이나 치솟고 있었고 뭇별들은 이미 드문드문해져 함께 빛을 겨룰 만한 것이 없었다. 처음에는 하늘가에 갑자기 구름 같은 것이 띄엄띄엄 생기면서 가릴 듯이 하더니 막상 붉은 기운이 점점 무르익자 그것들은 녹은 듯이 없어지고 다만 금물결이 만 리나 뻗어 하늘과 물이 서로 밀고 당기는 것과 같은 것만 보였다. 그것은 화륜(火輪)을 달구느라고 홍로(洪爐)가 너무 뜨거워 바다 전체가 끓고 있는 것과 같기도 했고, 또 어찌보면 태양 궤도가 잠겼다 떴다 하면서 뛰어도 뛰어도 오르기 어려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잠시 후 태양이 불끈 솟자 위아래에서는 서로 받들고 좌우에는 상서로운 구름 자색 서기가 무수히 깔려 있어 마치 그것들을 타고 올라온 것 같기도 했다. 이에 해는 둥실둥실 떠오르고 그 빛은 아래로 내리쪼여 바다는 바다대로 깊고 넓게만 보이고 하늘은 하늘대로 높고 크게만 보였으며, 상하 사방이 똑같이 밝아지고 삼라만상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실로 천지간의 일대 장관이었다. 날마다 기다렸지만 그때마다 뜬구름이 가리더니 오늘에야 비로소 장쾌하게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밝음 속에도 어딘가 일말의 그 무엇이 살짝 가리운 빛을 띠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아마 겸손해야 하고 밝음을 숨겨야 하는 천지 조화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뜻이 아닐런지 나로서는 감히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어 생각하면 모든 물건의 이치가 각기 종류별로 움직이고 형상에 의해 동화되고 있는데 그것을 달리 비유하면 마치 군자가 나오려고 하면 반드시 소인이 나타나 이간질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좋은 세상은 항상 드물고 어지러운 세상이 언제나 많은 것과도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군자가 참으로 당당한 위치를 확보하고 그리하여 세상이 치평을 향해 치닫게 되면 저 소인이라는 것들은 풀이 죽어 자취를 감추거나 아니면 과거를 청산하고 이 쪽으로 심복해 오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이다. 우리 쪽에 병통이 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우리의 말을 따르고 받들면서 우리 쪽의 쓰임이 될 것이다. 문제는 군자 자신이 자기를 소명하고 순수하고 밝은 덕을 길러 음(陰)을 저 땅 밑에서부터 철저히 배제하고 자기 스스로 높고 밝은 위치로 부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는 또 세상을 맡아 다스리는 자의 책임이기도 한 것이다. 양웅(揚雄)의 《태현경(太玄經)》에 이르기를,
“태양은 날고 음은 매달려 있으면 만물이 화락하리라.”
했는데, 그를 해설한 자의 말에 의하면, 태양은 군자를 말하고, 매달려 있다는 것은 녹아 없어짐을 뜻하며, 음은 소인을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군자의 기가 성하면 뭇 음은 저절로 없어진다는 뜻으로 바로 오늘에 필요한 점괘인 것이다.
이 날도 기신이어서 재계하면서 앉아 있었다. 밤에 비는 개고 달은 기망(旣望)이어서 바다에 뜨는 달을 또 구경하려고 했었는데, 생각지 않게 17일이 진짜 보름이어서 그런지 해가 서산에 채 지기도 전에 달이 이미 동천에 솟아 있었고, 막 눈을 들고 보려고 했을 때는 이미 달이 벌써 구름 끝에 나와 있었다. 저녁이 되어 중 몇 사람과 함께 걸어서 이화정(梨花亭)에 나갔더니 중천에 솟은 달이 바야흐로 빛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그 빛은 바다 밑까지 비치고 있었으며 만경창파는 은물결로 변하여 위아래가 모두 마치 벽유리(碧琉璃)와도 같았다. 이윽고 바람이 해면을 스치자 파도가 넘실대고 달은 그 속을 출몰하니, 마치 삼켰다 뱉았다 당겼다 놓았다 하는 것 같았고, 또 잠시 후 하늘을 보았더니 높고높은 푸른 하늘에는 외로운 달만이 천천히 옮겨 가고 있었다. 고인이 이른바, ‘사방에 구름 걷히고 은하마저 없는 하늘[纖雲四卷天無河] 일년 중에 오늘 밤 달이 제일 밝네그려[一年明月今宵多]’ 했던 것이 바로 오늘을 두고 한 말인 듯했다. 눈부시게 빛나는 아름다운 광채는 비록 일출을 볼 때만큼 장엄하지는 못했으나, 그러나 그 맑고 밝고 깨끗한 자태로 태양을 대신해서 비치고 있다는 점에서는 역시 천하의 훌륭한 구경거리였다. 천지 음양의 이치가 서로 양보라도 하듯이 하나가 차면 하나는 비는 것으로, 옛분들이 말했던, ‘백옥반(白玉盤)ㆍ요대경(瑤臺鏡)’ 같은 말로는 지금 이 광경을 비교 표현하기에 부족한 바가 있는 것이다. 중 비경 등이, 오늘 밤 달빛은 일년 중 보기 드문 달빛이라고 한 말에 대해 나도 동감을 하였다. 이미 일출 광경을 보았고 지금 또 중추(中秋)의 밝은 달까지 보았으니 이만하면 이번 걸음은 헛걸음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삼촌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나서 두 군들을 불러내어 같이 구경하다가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대고 밤 기운이 너무 시원해서 요사(寮舍)로 들어가 《주역》 계사(繫辭)를 종편까지 읽었다. 향을 가져와 피우게 했더니 중이 침향(沈香)이라고 하는 것을 가져왔기에, 내가 웃으면서 이르기를,
“그대들은 이름만 취택하고 실물은 취택하지 않는게로군. 중국에서 말하는 침향이라는 것은 바로 나무 이름인데 남국(南國)에서 나는 나무야. 지금 그대들이 물 속의 썩은 나무를 가져다가 부처 앞에다 피우면서 그것을 아주 향기로운 것으로 알고 있으니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에 현혹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하고, 다시 흑단(黑檀)을 가져와 피우게 하였다. 흑단은 시속 말로는 노가자(盧柯子)라고 하는 것으로 그 향기가 매우 맑았다. 또 중향성(衆香城)에서 얻어 왔다는 도로파(都盧芭)도 피워 보았는데 그것은 향기가 천궁 비슷하면서 역시 정신을 상쾌하게 해 주었다.
내 이어 생각해 보니, 광풍제월(光風霽月)은 주무숙(周茂叔)의 가슴 속을 상징하는 말이고, 서일상운(瑞日祥雲)은 정백순(程伯淳)의 가슴 속을 상징하는 말이며, 태산교악(泰山喬岳)과 해활천고(海闊天高)는 또 주회옹(朱晦翁)의 기상을 그린 것인데, 내 사실 이번 걸음에 그러한 것들을 다 직접 보고 정신적으로 느껴 보았고, 일만 겹의 봉래산과 동해의 구름 물결 그리고 해돋이 때의 눈부신 광채와 휘영청 밝은 가을 달도 내 모두 살펴보고 희롱해 보았다. 게다가 또 하늘까지도 우리에게 기회를 제공하여 비, 바람, 구름, 먼지 등으로 훼방을 놓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가령 안문(鴈門)의 가을비, 죽포(竹浦)의 거센 파도, 낙산(洛山)의 찬이슬 같은 것은 풍백(風伯)ㆍ우사(雨師)가 앞장서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준 작품들로서 누군가가 우리를 음으로 양으로 도와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이번의 이 기회를 단순히 구경만 했다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무엇인가 마음속으로 생각하여 터득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요산요수 그리고 호연지기라는 것과도 상통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천 년 전의 고인들을 만나 본 것과도 같을 것이다.
해돋이 구경에 관해서는 나중에 시를 지어 그 일을 적어 둔다.

바다를 바라보며 해 뜨는 곳 살핀 뜻은 / 看看海色候扶桑
떠가는 저 구름이 하늘을 더럽힐까였는데 / 常恐浮雲穢太淸
눈부신 해가 갑자기 나타나서 / 忽覩爀曦懸陰處
천 길이나 뻗는 광선 천지사방 다 비추네 / 千丈毫光六合明

그리고 낙산중추월(洛山中秋月)을 두고는 노소재(盧蘇齋)의 ‘청간정(淸澗亭)’ 운자로 읊었는데,

바다의 달빛 가을 들어 더 밝고 / 海月當秋白
거센 파도는 밤바람에 일어라 / 鵬濤入夜風
절 방에 외로이 누워 있노라니 / 禪窓孤臥處
뭇 생각이 싹 가시네그려 / 萬慮落眞空

하고, 또 읊기를,

티없는 것 중추의 달빛이요 / 霽色中秋月
파도소리 큰 바다 바람이어라 / 波聲大海風
그 소리 그 빛깔 말고도 / 須知聲色外
텅빈 하늘이 또 있다네 / 更有寂寥空

하였다.
아침에는 심군 철(沈君轍)이 왔다가 갔고, 저녁에는 간성 군수 윤세장(尹世章)이 동해신(東海神) 제사의 예차관(預差官)으로 와서 이 절을 지나다가 여러 사람들과 서로 만나고 또 나를 와서 보았는데, 윤(尹)은 바로 윤 상공 해원(尹相公海原)의 증손이요 윤 판서 이지(履之)의 손자라고 했다. 대옥 역시 동해신 제사 일로 저녁에 떠나면서 내일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감사(監司)와 도사(都事)가 부(府)에 온다는 말을 듣고 하직을 고하고 떠난 것이다.
낮에 그 곳의 중 몇 사람과 함께 의상대(義相臺)에 올라 관음굴(觀音窟)을 바라보았더니 작은 집 하나가 파도에 의해 무너져 있었다. 대(臺) 위에 앉아 잠시 물결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정(鄭)군과 유(柳)군이 내게로 와 함께 잤다. 그날 사눌(思訥)이라는 중이 영남 태백산에서 와 그 절을 위해 예불(禮佛)을 하고 있었다. 그 중은 방에서 혼자 거처하며 밤 5경이면 일어나서 불전에 향을 올리는데, 낮에도 자지 않고 밥도 하루 한 끼만을 먹으면서 언제나 시간 맞추어 염불을 했다. 내가 데리고 얘기해 보니 그는 선정(禪定)의 설을 듣고 거기에 종사하고 있는 자였다. 내가 묻기를,
“노선(老禪)께서 마음 공부를 하신 지가 오래인 모양인데 지금 부동심(不動心)의 경지에까지 갔습니까?”
하자, 그는 그렇다고 하면서 아무리 어지럽고 화사한 성색(聲色)을 듣고 보아도 그것을 안 보았을 때와 똑같이 마음에 아무런 느낌이 없다고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성색에 대한 생각은 그래도 제어하기가 쉽지만 마음에는 유주상(流注想)이라는 것이 있어 바로 온갖 잡념이 때없이 왕래하는데, 노선께서는 마음 공부를 하여 그러한 것들도 다 제거가 되었습니까?”
하니 그는,
“공부 초기에는 가장 제어하기 어려운 것이 그것이었는데 지금은 온전히 없어졌지요.”
하였다. 공부를 몇 년이나 했느냐고 물었더니, 이미 수십 년이 지났다고 하였고, 마음에 잡념 하나 일어나지 않고 혼자 훤한 것을 느낄 때가 있느냐고 했더니, 그가 이르기를,
“그게 바로 이른바 비치지 않고 있는 거울 같고 파도가 일지 않고 있는 물 같다는 것 아닙니까.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마음이란 불과 같다고 하는데 불은 다른 물건에 의지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은 풀에 붙거나 혹은 나무에 붙거나 또 혹은 다른 물건에 붙어야지 만약 그 물건들이 없다면 그 불도 없는 것입니다. 마음도 그와 같아서 비록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 발동은 없을지라도 잠깐 사이에 얼핏 스치는 생각이 없지는 않은 것인데 그 역시 마음이 동한 것입니다. 노선이 말씀하신 이른바, 거울이 비치지 않고 물이 파도치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한 것을 무엇으로 증험할 수 있습니까?”
했더니, 그가 이르기를,
“그것은 너무 극단적인 논리라서 이 노승(老僧)으로서도 잘 알아차릴 수가 없네요.”
하였다.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를,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 보시오. 전인들 화두(話頭)에 얽매이지도 말고 문자(文字)를 가지고 참조 고증할 것도 없고 다만 내 마음에 얻어진 것을 내 입으로 말할 수 있을 때 그때 다시 와서 내게 말하시오.”
했더니, 그 중이 그러겠다고 하고 떠나갔는데, 밤이 되어 간찰 하나를 부쳐왔다. 거기에 이르기를,
“마음의 허령(虛靈)이라는 것은 아무런 생각도 염려도 없고 형체도 소리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무엇인가를 지각하는 마음은 있는 것이외다.”
하고, 또 시가 있었는데,

휘영청 밝은 달은 언제나 그 빛이요 / 明明白月千秋色
옹기종기 푸른 산은 만고의 모습이어라 / 點點靑山萬古容
그나 내나 유별나게 다른 것이 뭐 있으리 / 伊我別無奇特事
불전에 분향하며 종이나 치는게지 / 焚香佛前打鳴鍾

했으며, 또 말하기를,
“마음에 모든 생각이 완전히 사라질 때가 물론 있기는 있으나 다만 그것은 순간이고 지속하기란 매우 어렵다.”
했기에, 내가 이르기를,
“그대 본 것이 매우 정밀하고 말도 다 좋은 말이오. 나도 시로 답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나 지금 기좌(忌坐)중이어서 내일로 미루어야겠소.”
했는데, 그 중은 그길로 물러갔다.

17일(기미) 맑음. 나도 재계가 끝났고 대옥도 제소(祭所)에서 돌아왔다. 나더러 동해신묘비문(東海神廟碑文)을 지으라고 하고 서로 손을 잡고 작별을 고했는데, 그날 모두 한번 실컷 즐기고 싶었으나 마침 관사(官事)가 바빠 부득이 서둘러 돌아가야 했기에 간성 군수 윤군이 행리 속에서 꺼내 온 술과 안주로 몇 순배 돌리고 각기 파했다. 중 사눌이 나를 보러 왔기에 내가 시로 답하였다.

휘황한 해와 달은 언제 봐도 그 빛이요 / 輝煌日月千秋色
높고 넓은 산과 바다 만국이 일반이지 / 嵬蕩山河萬國容
만약에 모든 것이 고요해야 된다면야 / 若道寂然爲究意
불전에서 종인들 어찌하여 치단말가 / 佛前那用打鳴鍾

중 사눌은 하직을 고하고 떠났고, 정극가는 강릉(江陵)을 다녀오기 위해 뒤에 머물렀다. 우리 일행이 서로 헤어지려 할 때 중들이 나와 전송하였는데, 모두 작별하기 아쉬워하는 빛을 보였다. 동구 밖을 나와 설악산을 바라보며 15리 남짓 가서 신흥사(神興寺)에 들렀더니 중들이 견여를 가지고 동구 밖까지 환영을 나왔다. 그 절은 설악산 북쪽 기슭에 있는 절로 동쪽을 향해 앉아 있었는데 전각(殿閣)이나 헌루(軒樓)가 역시 규모가 큰 사찰 중의 하나였고, 여기에서 바라다보이는 설악산과 천후산(天吼山)의 깎아지른 봉우리와 가파른 산세는 마치 풍악(楓岳)과 기걸함을 겨루기라도 하는 듯했다.
여기에 있는 육행(六行)과 쌍언(雙彦)이라는 중은 다 얘기 상대가 될 만하여 서울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는 외삼촌을 모시고 유군과 함께 견여로 5, 6리쯤 가 앞 시내의 수석(水石)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그날 대옥이 심부름꾼 한 사람에게 술과 안주를 보내왔기에 편지로 감사의 뜻을 전하고, 또 극가에게 부탁하여 금강산에서 얻었던 소마장(疏麻杖) 하나를 허미수(許眉叟)에게 가져다 드리도록 했는데 그 지팡이는 바로 금강산중이 말하는 산마(山麻)라는 것으로 색은 청록색이고 재질은 옹골지며 매끈하고 가벼워 지팡이 감으로 좋았다. 그런데 그것을 산마라고 하지만 초사(楚辭)에 이른바, ‘소마(疏麻)를 꺾음이여, 백옥같은 꽃이로다’라고 한 그것이 아닌가 싶어 드디어 소마로 명명한 것이다. 그리고 극가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부쳤다.

땡땡한 녹색 옥장을 / 鍧鍧綠玉杖
저 금강대에서 다듬었지 / 斲彼金剛臺
그대 통해 노인께 드렸지만 / 憑君奉老子
돌아올 때 풍뢰 조심하게나 / 歸路愼風雷

유군도 대옥에게 편지를 써 보냈는데 극가가 시와 함께 이름을 그 밑에다 적었으나 그 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날 밤 최간이(崔簡易)의 낙산시 운자로 절구 한 수를 읊어 유군에게 주었다.

동쪽 태산 남쪽 형산 천하의 명산이라 / 東岱南衡海內奇
공자도 주자도 그 마음 같았으리 / 仲尼元晦共心期
그 뉘라서 알았으랴 천 년 후에 이 땅에서 / 誰知千載東溟外
그 풍경 구경하고 짧은 시를 읊을 줄을 / 無限雲波屬短詩

이렇게 쓰고서 내 말이,
“이 시는 표현을 더 다듬어야 할 곳이 있는 것 같아 손질을 좀 해 달라는 것이네.”
하였다.

18일(경신)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뒷 고개를 넘어 외삼촌을 따라가다가 유군과 뒤떨어져 계조굴(繼祖窟)에 들어갔다. 바위에 나무를 걸쳐 처마를 만들어서 지은 절인데 지키는 중은 없었다. 앞에는 깎아지른 바위 하나가 서 있는데 그 이름이 용바위[龍巖]이고 아래는 활모양으로 된 바위 하나가 반석을 이고 있었다. 그 크기가 집채만 했는데 중 하나가 흔들어도 흔들흔들하여 이른바 흔들바위[動石]라는 것이다. 천후산 중간에 위치하여 남으로는 설악산과 마주하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임해 있어 역시 한번 구경할 만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 날은 바다가 침침해서 멀리 볼 수는 없었다.
그 절 벽상에 기(記)가 하나 걸려 있었는데 그 기를 보니,
“이 굴은 의상(義相)이 수도하던 곳이다. 동으로 부상(扶桑)을 바라보면 망망한 큰 바다에 해와 달이 떴다 잠겼다 하고, 남으로 설악을 바라보면 일천 겹 옥 같은 봉우리가 눈안에 죽 들어온다. 안개 낀 동정호(洞庭湖)의 물결이 제아무리 장관이라 해도 일천 겹 옥 같은 봉우리가 있다고는 들어보지 못했고, 여산(廬山)이 비록 도인(道人)들이 앞다투어 찾는 곳이라지만 역시 만경창파는 없는데, 여기는 그 모두를 다 겸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 승경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리가 비좁고 암자 모양도 왜소하여 경치 좋은 곳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중들 말에 의하면 몇 해 전에는 수계(守戒)하는 중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포악한 자에 의해 죽었다는 것이다. 이는 장주(莊周)가 이른바, ‘안으로는 수련을 쌓아도 겉은 표범이 먹는다’는 것으로서 이학(異學)의 무리들은 인간과 유리되고 세상과 동떨어진 일 하기를 좋아하면서 그것을 고상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므로, 그러한 일을 당해 마땅한 것이다.
그 굴 뒤로는 지상에서 몇 천 길 높이로 석부용(石芙蓉)이 치솟아 있는데 서쪽에서 달려온 것으로서 기기교교한 형상의 봉우리가 40여 개나 되었다. 어떤 것은 검극(劍戟) 같고, 어떤 것은 규벽(圭壁) 같고, 어떤 것은 종정(鍾鼎) 같고, 어떤 것은 기고(旗鼓) 같고, 어떤 것은 불꽃이 튀는 모양이고, 어떤 것은 용솟음치는 파도와도 같아 모양이 제각기 형형색색이고, 중간의 한 봉우리는 구멍이 나 있어 마치 풍악의 혈망봉(穴網峯)처럼 생겼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산을 소금강(小金剛)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 언제나 비바람이 있으려면 미리 울기 때문에 천후(天吼)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계조(繼祖)라고 한 것도 아마 이 산의 조산(祖山)이 풍악을 닮았다는 뜻 아니겠는가.
견여를 타고 산에서 내려와 미시령(彌時嶺) 재 아래 계시는 외삼촌 뒤를 좇아왔다. 재에 와서 재 아래 있는 여러 고을들을 내려다보며 내가 유군에게 이르기를,
“영동(嶺東) 한 구역을 옛날에는 창해군(滄海郡)이라고 불렀다. 장자방(張子房)이 이르기를, ‘동으로 가 창해국 임금을 뵙고 거기에서 역사(力士)를 만나 진시황에게 철퇴를 던지게 됐다.’고 했다 하니, 아마도 그가 여기까지 왔던 것이 아니겠는가?”
했었다. 또 견여를 타고 재를 넘어오는데 재가 높고 험해 걸음마다 마치 사다리와 같은 가파른 바위가 거의 30리나 뻗쳐 있었다. 난천(煖泉) 가에 와서 말을 쉬게 했는데, 이른바 난천이란 겨울에도 얼지 않아 길 가는 사람들이 눈에 막히고 해가 저물면 반드시 거기에서 자고 갔다는 것이다. 연도에는 꽤 아름다운 수석들이 있었으나 이미 풍악과 낙가(洛伽)의 승경을 구경한 우리들 눈에는 별로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큰 바다나 높은 산을 구경한 자에게는 어지간한 산과 물이 산과 물로 보이지 않는 것처럼 성인(聖人)의 문에서 노는 자에겐 도술(道術)로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재 위에 군데군데 옛 성터가 있다고 하는데, 이른바 고장성(古長城)인 것으로 금강산ㆍ설악산 정상에도 그러한 곳들이 더러 있었다. 우리나라 삼국(三國) 시절에 피란 나온 이들이 그렇게 만들어 놓고 모여 있으면서 서로 버티던 곳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가 3백여 년 태평을 유지하는 동안 성 단속을 하지 않았다가 중간의 왜놈 난리에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 이리저리 도망만 치다가 결국 문드러지고 말았다. 지금도 병진(兵塵)이 일어나지 않은 지 한 세기가 다 되어가고 있으니, 태평 뒤에는 비운이 반드시 오는 법이어서 염려가 안 될 수 없다.
도중에 천후산 흔들바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賦)를 지었다.

천후산 앞에 큰 바위 하나 어디에서 떨어져 계조암(繼祖菴) 가에 있을까. 한 명이 흔들어도 흔들리지만 옮기려면 천 명 가지고도 안 될 바위. 어찌보면 우(禹)가 구독(九瀆)을 뚫고, 구주(九州)를 개척하고, 구택(九澤)을 쌓고, 사경(四逕)의 물길을 낸 다음, 구주의 쇠붙이를 모아 만들어놓은 솥 같기도 하고, 또 진시황(秦始皇)이 이주(二周)를 삼키고 육왕(六王)을 죽이고 사해(四海)를 통일하고 오랑캐까지 제어한 다음, 천하 병기를 모두 녹여 주조한 종(鍾)과 같기도 하다. 그러나 솥이라고 해도 상제(上帝)께 술 한 잔 올릴 수도 없고, 종이라고 해도 꽝꽝 울지도 못한다. 기껏 중들만 이곳을 이용하여 절로 꾸며 두고, 구경꾼들만 그를 두고 별소리 다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월출산(月出山) 꼭대기에 바위 아홉 개가 있었는데 중화 도사(中華道士)가 서에서 와서 그 중 여덟 개를 쳐 없애버렸다고 들었지만, 나도 두보(杜甫)가 말했듯이 맹사(猛士)의 힘을 빌려 그를 들어다가 저 하늘 밖에다 던져버림으로써 사특한 말 편벽한 행동이 판치지 못하게 하고 싶다. 하지만 한편 천주(天柱)가 부러지고 지유(地維)가 찢어지고 귀신들이 울부짖고 미워하면서 갱혈(坑穴) 속에 가만히 있지 못할까 봐서 머뭇거리며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가슴을 어루만지며 탄식만 한다. 장자방을 데리고 창해군(滄海君)을 찾아가서 역사(力士)를 만나 300근 철퇴를 옷소매에 넣고 있다가 그를 저격하여 혼비백산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구나. 아, 신력(神力)이 없으니 어찌할 것인가.

그날은 남교역(嵐校驛)에서 잤는데 마을 앞에서 한계산(寒溪山)을 바라보니 그다지 멀지 않고 또 그 골이 깊고 수석도 기괴하다고 들었으나 가는 길목이 아니고 또 우회해야 하기 때문에 가보지 못했다. 주인의 성명은 함응규(咸應奎)라는 자였는데 우리에게 꿀차를 대접하였다. 또 문자를 꽤 알고 있었으며 점도 칠 줄 알았다. 내가 집을 떠나온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집 안부가 어떻겠느냐고 물었더니, 아무 걱정 없다고 하면서 옥녀상봉(玉女相逢)의 점괘가 나왔다고 하였다.

19일(신유) 아침에 짙은 안개가 끼었다. 안개를 무릅쓰고 일찍 출발하여 인제(麟蹄) 원통역(圓通驛)에 와서 말에게 꼴을 먹였다. 주인 성명은 박윤생(朴潤生)인데 꿀차를 대접했고, 역리(驛吏)들은 술과 과일을 대접했다. 춘천(春川)의 청원(淸源)을 보려고 홍천(洪川) 가는 큰길을 좌로 하고 굽은 시내를 건너 한 골짜기에 들어갔다가 과거보기 위해 떼지어 걸어가고 있는 선비들을 길에서 만나 말에서 내려 서로 읍을 했는데 그렇게 하기를 두 차례나 했다. 시내 하나를 열여섯 차례나 건너 산골의 민가를 찾아 잤는데 아주 궁벽한 곳이었다. 주인의 말이, 자기 나이는 70이고 아들이 셋, 딸이 넷인데 금년 봄에 굶고 병들어 모두 죽었으며 집안간에 죽은 자들이 30명도 더 되는데 아직 땅에다 묻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 땅을 버리고 떠돌이로 나서고 싶어도 자기 자신은 그 고을의 토착민이고 아들이 또 어궁졸(御宮卒)이어서 쉽사리 옮겨가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사정이 불쌍했고 산골짜기의 백성들 생활상이 그렇게도 맵고 고통스러워 장초지탄(萇楚之歎)이 없지 않았다. 슬픈 일이었다. 땅은 인제 땅이었고 마을 이름은 가음여리(加陰餘里)였다.

20일(임술) 맑음. 일찍 출발하여 광치(廣峙)를 넘는데, 재가 매우 가파르고 길이 전부 돌 뿐이어서 사람이나 말이나 힘들고 괴롭기가 미시령에 버금갔다. 원화촌(遠花村)윤동지(尹同知) 옛집에서 조반을 먹었는데 윤생 천민(尹生天民)이라는 자가 술과 과일을 가져와서 대접했다. 재를 넘고 골짜기를 벗어나니 들판이 매우 넓고 민가 수십 호가 여기 저기 살고 있었으며 지붕은 모두 기와로 덮었는데 그 모두가 선비들 집이라고 했다.
윤생의 말에 의하면 윤동지라는 자는 이름은 수(洙)이고 관향은 파평(坡平)인데 그의 증조부가 처음으로 그 곳에 들어와 농사에 주력하여 재산을 이루었고 그 고장에 삼(蔘)이 생산되는데 한 근 한 냥이 아니라 캐면 섬으로 캐기 때문에 가세가 매우 요족하고 곡식도 1만 석을 쌓아 두었다가 병자년 난리에 싸우러 가는 북로군(北路軍)이 모두 그 곳을 지나게 되어 그 군대들 먹을 것을 전부 그가 대었고, 그리하여 국가에서는 그에게 가선(嘉善)의 품계를 내렸다고 하였다. 난리로 인하여 세상이 그렇게 어지러울 때 자기 사재를 털어 국가의 다급함을 돕는다는 것은 복식(卜式)과 같은 사람인데, 국가에서 그에게 보답하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영직(影職)이나 공함(空啣)뿐이니 그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충성을 권장하고 공로에 보답할 것인가. 더구나 그 사람으로 말하면 자기 자력으로 치부하여 그 고을에서 우뚝하게 솟았고 또 자기의 힘이 많은 백성들에게 미치게 하였으니 그만하면 재질로나 힘으로나 기릴 만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에서 사람 쓰는 것은 꼭 쓰일 사람이 쓰이는 것도 아니고 쓰였다고 해서 꼭 쓸 사람도 아니어서 그 역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방법이 아닌 것이다.
그날 수인천(水仁遷)을 지났는데 매우 위험한 길이 거의 10여 리나 되었다. 수인역 마을에서 잤는데 그 곳은 양구(楊口) 땅으로 그날은 70여 리를 온 셈이다. 내가 역리 한 사람과 얘기해 보았는데 내가 말하기를,
“이 고장은 지대가 궁벽하고 산이 깊어 산삼이 날법하다.”
했더니, 그 역리 말이,
“이 고장에 물론 산삼이 나지요. 그러나 근년 들어 유랑민들이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고 밭을 일구는 바람에 산택(山澤)이 모두 몰골이 말이 아니고 또 남아난 재목도 없어 옛날과는 딴판입니다.”
하였다. 이렇게 서로 주고 받다가 내가 말하기를,
“내가 산중을 다녀 보니까 금강산도 내산 외산 할 것 없이 모두 황무지 개간한답시고 아무리 높은 데도 다 올라가고 아무리 깊은 곳도 다 들어가 초목도 자라지 못하여 새짐승도 붙어 살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서는 고기 못 먹고 가죽 옷 입지 못하는 것은 물론 집도 잘 지을 수 없고, 생활의 변화를 도모할 수도 없고, 의약(醫藥)도 제대로 쓸 수 없으며, 죽어서는 널마저도 쓸 수 없게 만들고 있어, 그로 인한 재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 뿐 아니라 그 곳에 살고 있는 자들은 부역(賦役)과 형벌을 피해다니며 국가로 하여금 저들을 기속하지 못하게 하는데, 일단 무슨 경급(警急)이라도 있으면 서로 모여 도둑으로 변해버리고 마니, 참으로 국가의 간민(姦民)인 것이다. 고을 수령들이 그 피해를 모르는 것이 아니면서도 그들이 원적(元籍)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조세 이외의 수입을 노려 그들을 사민(私民)으로 삼아 그들 요구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 폐단이 자꾸 번지고 있는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숲을 모두 태우거나 베어 내어 토석(土石)이 전부 드러나 있기 때문에 장마라도 한번 지는 날이면 모두 무너져 흘러내려 산은 산대로 깎이고 시내와 평원은 막히고 메워져서 옛날에는 숲이 울창하던 산과 물이 깊던 못들이 전부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와 짐승은 다 도망가고 물고기도 자라도 자리를 옮겨 근세 이후로 토지는 더욱 척박해지고 백성들은 더욱 가난에 찌들리며 산이 무너지고 시내가 말라 비구름도 일지 않고 수재 한재가 되풀이되고 있는데, 그 모두가 사람들이 살피지 않아서 그렇지 다 원인이 있어 그리 된 것이다. 그대도 그것을 알고 있겠지.”
하였다. 유군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지금 그것을 금하려면 무슨 방법을 써야 할 것인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지금이라도 만약 호구(戶口) 정책을 엄하게 하여 떠돌이의 길만 막는다면 옛날처럼 위 아래로 풋나무 새짐승까지도 다 제 삶을 즐기는 정책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를 다 설명하자면 말이 기네.”
했더니, 역리가 절을 하면서 하는 말이,
“상객(上客)의 말씀이 옳습니다. 꼭 할 말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 산에 들어가 경작하는 자들은 참으로 국가로 보아 간교한 백성들이고 그로 인한 피해는 산골 백성들이 더 입고 있습니다.”
하였다.

21일(계해) 아침날씨가 음산하더니 이어 가랑비가 내렸다. 조반 후 출발하여 부창현(富昌峴)을 넘어 부창역 마을에서 말에게 꼴을 주었다. 가랑비 때문에 늦게 출발하여 기락이천(祈樂伊遷)을 지났는데, 기락이는 방언으로 기어서 나온다는 말로서, 그 천의 길이 너무 좁고 또 바위 구멍이 있어서 누구나 그 곳을 가는 자는 반드시 기어서 나와야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천전(泉田)의 길가 큰 시내 위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날은 하루 내내 산골 험한 길만을 걸었는데, 여기에 이르자 산들이 확 트이고 그 가운데 큰 평야가 펼쳐 있었으며 강물이 굽이치고 돌아가 가슴이 탁 트이는 것을 느꼈다.
북쪽을 바라보니 높다란 산이 하나 있고 그 아래 민가 수십 호가 있었으며 뒤에는 소나무숲이 울창하고 느릅나무가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데 유군의 말로는 강릉 부사(江陵府使) 이후(李煦)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시냇가에 작은 저자가 하나 있었는데 이생 후평(李生后平)이 집에 있는가 물었더니, 지금 양양(襄陽)을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20여 리를 가면서 북으로는 청평산(淸平山)을 바라보고 남으로는 소양정(昭陽亭)을 가리키며 오다가 배로 앞 강을 건너 소양정에서 잠시 쉬었다. 그 곳 벽위에는 여러 사람들이 남긴 시가 걸려 있었는데, 그 중에서 월봉(月峯)ㆍ청음(淸陰)ㆍ백헌(白軒) 그리고 유창(兪㻛)의 것을 보고 드디어 춘천(春川) 읍내로 들어와 유군 종의 집에다 여장을 풀고 주수에게 소식을 전했더니, 주수는 병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비장(裨將) 신완(申椀)을 보내 왔다. 그리고 조금 뒤에 주수의 형 이생 석(李生錫)이 왔고, 또 최남(崔男)의 아들 상인(喪人)인 이억(爾嶷)도 왔으며, 이생을 통해 서울에 있는 집안 소식도 대강 들었다. 유군이 이르기를,
“듣기에 청평산에 이자현(李資玄)의 식암 영지(息菴影池)가 있다는데 식암은 자현이 홀로 앉았던 곳으로 동사(東史)에 이른바, ‘둥글둥글하기가 곡란(鵠卵)과 같다.’고 한 것이 그것이고, 영지는 식암 아래 있는 겨우 반묘(半畝)밖에 되지 않는 작은 못으로, 해 뜨는 아침, 달 돋는 밤이면 식암의 풍경과 사람의 동정까지도 모두 그 못 속에 비친다고 한다. 그리고 자현이 죽었을 때 불가의 법대로 화장을 하여 불에 탄 그 뼈를 아직까지 그 곳 중이 간직하고 있는데 빛이 푸르른 청옥(靑玉)과 같다. 그리고 용마루에는 또 김열경(金悅卿) 친필이 있다. 그래서 신상촌(申象村)의 송인시(送人詩)에, ‘이자현 유골은 풍류가 대단하고[李資玄骨風流遠], 김열경 글씨는 유일의 자취로세[金悅卿書逸躅存]’라고 하였으니, 그 모두가 다 값진 고적들이 아니겠는가.”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이자현으로 말하면 능히 세리(勢利)의 길에 초연하여 몸을 운수(雲水)에 의탁하고 거기에서 일생을 마쳤던 것이다. 퇴계(退溪)는 그를 위해 억울함을 밝혀 주고 그 사실을 영탄(咏嘆)했으며, 열경(悅卿)은 국가 위난을 평정한 세상에서 임금을 섬기지 않았던 뜻을 높이 샀는데, 사실은 동방(東方)의 백이(伯夷)인 것으로, 그의 청고한 풍도와 모범을 남긴 행위는 백세의 스승이 되기에 족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번 길에 그 유적지를 찾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다만 내가 탄 말이 걸음이 더디고 바탕이 둔해서 외삼촌을 따라가야겠기에 마음대로 못하겠네.”
하고, 서로 말이 나쁘다고만 탓했다. 내가 웃으면서, 재상상진(尙震)의 소에 관한 얘기를 들어 보았느냐고 물었다. 유군이 못 들었다기에 내가 얘기하기를,
“상진공이 언젠가 들을 지나는데 어느 늙은 농부가 쟁기로 밭을 갈면서 쟁기 하나에다 소 두 마리를 메워가지고 아주 힘들게 밭갈이를 하고 있더라네. 상진공이 한참 구경하다가 이어 말하기를, ‘농사일을 참 잘하시는구려, 그런데 그 소 두 마리 중에도 우열(優劣)이 있습니까?’ 했더니 그 농부가 대답을 하지 않더라는 거야. 그래서 상진공이 농부 앞으로 다가갔더니 그 늙은이가 이 쪽으로 와서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공이 물은 대로 두 소 중에 한 마리는 힘이 세고 옹골찬데 한 마리는 힘도 약하고 미련한데다 늙기까지 했지요.’ 하더라는 거야. 상진공이 말하기를, ‘그렇습니까. 그런데 처음에는 대답을 않고 지금 와서 귀에다 대고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그 늙은이 말이, ‘소는 큰 짐승이어서 사람 말을 알아듣고 또 부끄러워할 줄도 알지요. 내가 그 힘의 덕을 보고 그 놈을 부려먹으면서 그 놈 부족한 점을 꼬집어 그 놈의 마음을 상하게 해주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라오.’ 하더라는 거야. 상진공은 그 말끝에 크게 반성을 하고 그때부터는 한평생 남의 과실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겨 장점만 말하고 단점은 말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장후(長厚)한 군자가 됐다는 거야. 지금 우리들이 그 말들 힘으로 천리 길을 두루 돌면서 온갖 험난한 곳을 다 지나 여기까지 왔으니 그 말이 병들었거나 둔함을 그렇게 헐뜯을 일이 아닌데, 더구나 그들이 듣는 데서 그래서야 되겠는가. 사람도 꾸짖고 욕설을 하면 풀이 죽고 치켜세우면 흥을 내는 법인데, 저 말들이 오늘은 뽐내면서 달릴 기운이 더욱 없겠네. 그것은 우리가 대우를 잘못한 소치가 아니겠는가.”
했더니, 외삼촌이 말씀하기를,
“참으로 소나 말이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듣나 보다.”
하여, 서로 한바탕 웃었다.

22일(갑자) 맑음. 아침에 이생 석이 왔고, 최이억도 왔다. 조반을 먹고 출발하여 유군과 함께 봉의루(鳳儀樓)에 올라가 보았다. 그 고을 뒷산이 날아가는 봉의 형국이기 때문에 산 이름이 봉산이고 누대 역시 그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을이 모양은 매우 그럴싸했으나 거민이 100호도 안 되는데다 성지(城池)도 목석(木石)도 없어 국가를 지킬 요충지는 못 되었다. 만약 삼악산(三岳山)에다 관(關)을 설치하여 그 삼면을 막고 지킨다면 이 나라의 한 보장(保障)이 될 법했다. 우리들이 봉의루에 올라 있음을 주수가 듣고 술과 배를 가지고 와 행장에 챙겨주었다. 외삼촌을 뒤좇아 신연(新淵) 나룻가에 와서 만나고 신완(申椀)과도 서로 만났으며 만호(萬戶) 반예적(潘禮積)이라는 자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석파령(席破嶺)을 넘었는데 산 이름은 삼악(三岳)이었다. 재가 매우 높아 길은 평평했어도 길가로는 깎아지른 절벽이라 말에서 내려 걸었다. 재 너머 서쪽은 전부 산 아니면 깊은 골짜기뿐이고, 그 재에서 군(郡)까지의 거리는 20여 리였다. 거기에서 또 20리를 더 가 안보역(安保驛)에 다다르니 청풍부부인(淸風府夫人) 묘가 있었고, 그 아래 있는 재사(齋舍)가 매우 조용하여 거기에서 잤다. 저녁에는 나와 강가를 거닐었다.
이 날은 춘천(春川)을 떠났다. 이는 대개 청평산에 들어가 진락옹(眞樂翁)과 매월당(梅月堂)의 유적을 찾아 보려고 했던 것인데 계획대로 되지 않아 시 한 수를 읊어 유군에게 화답을 청했다.

춘주가 수려하기로 이름난 고을인데 / 春州素號水雲鄕
더구나 청평학사 별장까지 있음이랴. / 况有淸平學士莊
청연에 물이 고여 둥실둥실 배 떠있고 / 水積靑淵舟泛泛
구름 덮인 화악에는 바위 빛이 푸르다네 / 雲霾華岳石蒼蒼
희이자 뼈 푸르다니 신선 상징 분명하지 / 希夷骨碧仙蹤杳
매월당이 남긴 글씨 그 체취가 풍긴다네 / 梅月書留道韻長
서운하게 식암 영지 바라만 보단말가 / 惆悵菴池空入望
그들이 남긴 향기 누가 가서 맡으라고 / 澗蘅誰復嗅遺香

춘천(春川)과 잿마루와의 거리는 멀지 않은데, 물이 급류에다 여울이 얕다. 주(州)의 북쪽에 청연(靑淵)이라는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수심이 배를 띄울 만한데 여기는 바로 소양강(昭陽江) 상류이다. 그 강이 양구(楊口)의 강과 합류하여 신연도(新淵渡)를 이루고 평야 가운데로 굽이굽이 흘러 파강(巴江)의 형국을 이루고 있다. 경운(慶雲)의 북치(北峙) 서쪽에는 백운산(白雲山)이 있는데 일명 화악산(華岳山)이라고도 한다. 가파른 바위 산이 구름 높이 솟아 있어 영서(嶺西)에서는 화악만큼 높은 산이 없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경운은 청평의 원래 이름이다. 유군의 화답시는 이러하다.

진락공 그 명성이 이 고을에 자자한데 / 眞樂公名表此鄕
더구나 청평하면 그 있던 곳 아니던가 / 淸平況是故時莊
예스러운 못과 누대 지원처럼 경개 좋고 / 祗園勝槪池臺古
보지의 가을 풍경 나무들이 푸르러라 / 寶池秋容樹木蒼
치솟은 바위산과 겨룰 만한 높은 절의 / 淸節漫爭山骨聳
고상한 풍류는 장강유수 그것이라네 / 高風直與水流長
선구를 지척에 두고 계획이 틀려서 / 仙區咫尺違心賞
선생께 판향 하나 피워 올리지 못한다오 / 未薦先生一瓣香

23일(을축) 새벽에 안개가 잔뜩 끼었다. 일찍 출발하여 가평(加平) 길을 거쳐 초연대(超然臺)를 지나면서도 안개 때문에 올라가 구경하지 못하였다. 가평읍 아래 와서 조반을 먹고, 아현(芽峴) 남쪽에 와서 말에게 꼴을 먹였다. 청평(淸平) 언덕을 지나 굴운역(屈雲驛) 마을에서 잤는데 그 마을 북쪽에 있는 언덕의 형세가 매우 좋아 보여 올라가서 종을 시켜 치표(置標)를 해 두게 하였다. 그 주산(主山)의 이름을 물었더니 청취전(靑翠田)이라고 했는데, 그 산이 백운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운등산(云登山)이 되고 거기에서 또 동으로 달려가다가 회강(淮江)을 만나 거기에서 멎었는데 곱게 감싸고 있는 것이 마치 누군가의 장례를 받아들이고 싶은 듯이 보였다.

24일(병인) 흐렸다. 일찍 출발하여 천괘산(天掛山)을 향하여 가다가 마치현(摩蚩峴)을 넘어 그 고개 서쪽에서 조반을 먹고 여러 사람 무덤들을 가리키고 물어가면서 길을 가는데 시내 곁 단풍잎들이 마치 붉은 비단 같았다. 대개 평천(平川)의 가을 빛이 이제 와서야 비로소 무르익고 있었다. 풍양(豐壤)에 당도하여 왕숙천(王宿川)을 건너고 퇴가원(退駕院)을 지나 오릉(五陵) 밖에서 쉬노라니 백악(白岳)과 남산(南山)이 보이기 시작했다. 들은 넓고 시내는 편평하여 새삼스러운 감회가 있기에 율시 한 수를 읊었다.

만 겹이나 푸르른 봉래산을 꿈에 보고 / 夢入蓬萊翠萬重
구름 따라 동쪽 땅을 한 바퀴 다 돌았네 / 一笻東盡白雲求
아침이면 넓은 바다 부상의 해를 보고 / 朝看滄海扶桑日
밤에는 비로봉 가을 나무에 의지했다네 / 夜將毗盧碧樹秋
자장처럼 호탕하게 놀자는 뜻 아니었고 / 不因子長疏宕擧
나그네 모진 시름 달래려고도 아니었네 / 非關楚客慍惀愁
돌아와서 동산에 다시 올라 바라보니 / 歸來更上東山望
끝도 없는 연파가 한강 섬에 자욱하네 / 無限煙波江漢洲

늦게야 성안에 들어와 동소문(東小門) 안에서 외삼촌과 작별하고 집에 돌아와 사당에 무사히 돌아왔음을 고하였다.
풍악(楓岳)의 경치가 삼한(三韓)에서 으뜸이요 천하에 소문이 나 있어 내 늘 사영운(謝靈運)처럼 나막신을 장만하여 사마자장(司馬子長)같이 한번 마음껏 구경을 해보려고 벼르기는 했으나, 세상일도 뜻대로 되지 않고 병마에도 시달리다 보니 속절없는 풍진 세월에 흰머리가 이미 머리에 가득해갔다. 임자년 7월 내가 동성(東城)에 부쳐 있으면서 마침 유동(楡洞) 사시는 통제사 외삼촌과의 자리에서 옛 친구 정극가를 뜻밖에 만나 담소하던 차에 산수(山水) 구경 얘기가 나왔다. 외삼촌 말씀이,
“내가 진작부터 관동(關東) 구경의 뜻이 있었으나 몸이 무부(武夫)라서 미처 못했었는데 지금 마침 집에 있게 되었으니 구경갈 때는 바로 이때다. 극가도 같이 갈 생각이 있는가?”
하자, 극가가 대답하기를,
“그렇잖아도 지금 그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인데 안 가다니요.”
하였다. 외삼촌은 또 나더러도,
“너도 이번 걸음에 불가불 동행을 해야겠다.”
하시기에, 나 역시,
“가구말구요. 그것이 저의 평소 원이었는데요.”
하고, 드디어 중도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리하여 그 해 윤월(閏月) 정유일에 침석정(枮石亭)에서 내가 외삼촌과 만나 동소문을 출발했는데 유군 여거(柳君汝居)라는 자가 그 소식을 듣고 뒤좇아 왔다. 연산(漣山)에 가 미수(眉叟)에게 문안하고 석록(石鹿)에서 극가를 데리고 그로부터 9일 만에 풍악의 장안사에 도착하였다. 이틀 밤을 정양사에서 자고 천을대(天乙臺)를 구경하고 마하연(摩訶衍)으로 옮겼다가 안문(鴈門)으로 나와 남천(南川)을 끼고 동으로 갔었다. 유점사에서 사흘을 묵으면서 산영루(山暎樓)를 산책하고 만경대(萬景臺)를 바라보았으며 맑은 가을의 운물(雲物) 등 온갖 경치를 두루 감상하였다.
내 늙고 병들어 비록 비로봉 절정에 올라 깊은 구룡연을 내려다보면서 아주 높고 으슥하고 험한 곳까지 샅샅이 다 보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풍악산 겹겹이 쌓인 구름 속의 산빛이나 늦가을 풍경에 관하여는 그런대로 볼만큼 보았다. 그리고 나서 고성(高城)을 경유 해산정(海山亭)에 오르고, 삼일포(三日浦)를 거쳐 청간정(淸澗亭)에서 거닐었으며, 선유담(仙遊潭)ㆍ영랑호(永郞湖)에서 쉬기도 하였다. 또 양양의 낙산사(洛山寺)에서 묵으면서 동해를 바라보며 부상에 떠오르는 해를 구경하기도 하고 중추에 바다에 뜬 달도 완상했다. 그리고 다시 신흥사(神興寺)에 들러 설악산을 바라보고 천후산을 답사했으며, 또 춘천에 들러 회강(淮江)을 건너고 몽□(夢□)에 올라 우수(牛首 춘천의 옛이름) 평야를 굽어보고 경운산(慶雲山)ㆍ화악산(華岳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돌아왔다. 비록 사방을 두루 돌아보고 싶은 뜻을 다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평생의 소원을 다소는 풀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번 길에 들른 고을이 15개 주에 달하고, 길은 1천여 리 길이었으며, 왕복에 한 달이 걸렸다. 돌아다니는 동안 작은 일기책에다 날씨와 그날그날 가고 구경한 곳을 적어 옛분들 유행록(遊行錄)에 대신하였고, 또 동정부(東征賦) 한 편을 써서 거기에 나의 영귀(詠歸)의 뜻을 대강 펴 보았다.
임자년 9월 일 침석정(枮石亭)에서 쓰다.


 

[주D-001]상 나라……돌아가고 : 상(商) 나라가 망한 것을 뜻함. 고신씨(高辛氏)의 비(妃) 간적(簡狄)이 아들을 얻기 위해 기도를 올렸을 때 제비가 떨어뜨리고 간 알을 먹고 설(契)을 낳았다. 그 후손인 탕(湯)이 천하를 두었으므로 제비는 상 나라의 상징조가 된 것임.《詩經 商頌玄鳥》
[주D-002]황하……나타나자 :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하기 위해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너는데, 백어(白魚)가 배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무왕은 이를 은(殷)을 쳐서 이길 징조라고 생각하고 정벌에 임하였음. 《史記 周紀》
[주D-003]바다에 다리 : 고주몽(高朱蒙)이 형제와 사이가 좋지 않아 졸본부여(卒本扶餘)로 가기 위하여 물을 건너려 하자, 자라와 물고기떼들이 모여 다리를 놓아 주었다고 함. 《東史槪略》
[주D-004]장초지탄(萇楚之歎) : 사나운 정사를 원망하는 것. 정사가 번거롭고 조세가 무거워 백성들이 고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초목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 것이 낫겠다는 탄식을 이름. 《詩經 檜風》
[주D-005]복식(卜式) : 한(漢) 나라 때 사람. 양을 쳐서 부자가 된 후 자진해서 많은 사재를 내놓아 무제(武帝)의 변방 경영을 돕고 빈민 구제도 했다가 그 공로로 중랑장(中郞將)에서 어사대부(御史大夫)까지 되었음. 《漢書 卷58》
[주D-006]지원(祗園) : 지수급고독원(祗樹給孤獨園)의 약칭. 즉 그 정원 안에 있는 수목(樹木)은 지타태자(祗陀太子)의 소유이고 그 정원은 급고독의 소유라는 뜻으로 급고독이 그 정원을 지타태자에게서 구입하여 거기에다 정사(精舍)를 짓고 부처를 청하여 거기에서 살면서 설법을 하도록 하였다고 함. 
[주D-007]보지(寶池) :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팔공덕(八功德)의 물. 그 물을 마시면 모든 선근(善根)이 잘 자란다고 함. 《觀無量壽經》

성소부부고 제13권
문부(文部) 10 ○ 제발(題跋)
풍간상첩(豐干像帖) 뒤에 쓰다


옛날 향산(香山)에 오도자(吳道子)가 그렸다는 풍간(豐干)의 상(像)이 있어 승가(僧家)에서 보물로 간직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내가 그것을 백방으로 찾았지만 얻지 못하였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이다. 가 죽을 임시에 그의 제자 원준(元俊)에게 말하기를,
“교산(蛟山 허균의 호)이 늘 이 그림을 갖고 싶어 하였지만 내가 숨겼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한 보물이므로 아무에게나 간직하게 할 수는 없다. 옹(翁)은 본시 선기(禪機 불교의 진리)를 아는 분이니 가져다 주도록 하라. 죽기 전에 틀림없이 우리에게 되돌려 줄 것이다.”
하였다. 이듬해 봄에 원준이 한 중을 시켜 보내왔기에 보니, 소폭화(小幅畫)로, 노승(老僧)은 호랑이를 타고 앉았고, 한 산동(山童)은 보따리를 지팡이에 걸어 어깨에 메고 뒤를 따르는 모습이었다. 비록 빛깔도 어둡고 그림도 벗겨지고 떨어져 나가곤 하였지만 필치는 신묘한 경지에 들어간 것이니 참으로 오래된 보물이다.
내가 생각건대, 오도현(吳道玄)은 개원(開元 당 현종(玄宗)의 연호) 이전의 인물이고 풍간도 그와 동시 사람이다. 이름은 비록 ‘같은 시대의 화가가 같은 시대의 인물을 그렸다.’고 드러나 있지만 그것은 무리인 것 같다. 만일 풍간의 상이라고 한다면 오도현의 그림이 아닐 것이며, 만일 오도현의 그림이라고 한다면 풍간의 상이 아닐 것이니, 반드시 이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의 작가가 당(唐) 나라 사람이라는 것은 매우 분명하니 보물로 여길 만하다.
이정(李楨)은 이 그림을 구경하고 삼주야(三晝夜)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이징(李澄)은 보고서 고화(古畫) 10여 점을 가지고 이것과 바꾸자고 애걸하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당대의 유능한 화가들이므로 반드시 그 진가를 알았을 것이다. 다만 배접을 해서 간직하였다가, 내가 죽을 때가 되면 반드시 다시 산문(山門)으로 돌려줄 생각이다.


 

[주D-001]풍간(豐干) : 당(唐) 나라 때 명승(名僧)의 이름. 이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화신(化身)이었다고 한다.

연려실기술 제11권
명종조 고사본말(明宗朝故事本末)
윤원형의 세력에 붙은 사람들


임백령(林百齡)은, 자는 인순(仁順)이며, 본관은 선산이다. 중종 기묘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을사년에 녹훈(錄勳 숭선군(嵩善君))되어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다.
어머니 현씨(玄氏)는 성품이 엄하고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백령은 그 형 억령(億齡)과 함께 박상(朴祥)에게 수업하였다. 박상이 억령에게 《장자》를 가르치며, “너는 반드시 문장가가 되리라.” 하고, 백령에게 《논어》를 가르치며, “너는 관각(館閣) 문자에 능하리라.” 하였다. 억령은 천성이 소탈하고 또 행실이 얽매이지 않았으며, 백령은 단정하고 자상하여 잡된 일이 없으므로 그 어머니가 몹시 사랑하며, 자리에 눕고 일어날 때에 백령을 시켜 부축하도록 하였는데 모든 일을 다 마음에 맞게 하였다. 《기재잡기》
○ 임백령이 젊어서 과거 공부만 하고 경학(經學)을 공부하지 않더니, 식년초시(式年初試 5년에 한 번씩 보는 과거)에 합격한 뒤에 경전을 읽으려 하여도, 어디서부터 손을 댈지 몰라 쩔쩔매었다. 어느 날 밤에 어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한 노인이 와서, “너는 한 세상의 위인이 될 것이니,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라.” 하여 대답하기를, “제가 경학을 잘 모르니, 어찌합니까?” 하니, “네 이름을 괴마(槐馬)로 고치고, 또 강경할 때에 경서 중에서 어느 장(章)이 출제될 것이니, 그 장을 많이 읽어 익히고, 다른 데 정신을 낭비하지 말라.” 하였다. 꿈을 깬 뒤에도 역력히 기억할 수 있었으므로, 곧 불을 켜고 그 장을 뽑아 별도로 책자를 만들어 베꼈다.괴마(槐馬)로 개명하려 하였으나, 그것이 이름으로는 무리하므로 별호를 괴마라 하고, 마침내 베낀 경서의 장구를 읽어 하나하나 완전히 이해하였다. 시강(試講)하는 날 강석에 들어가 앉으니 문제를 장(帳) 밑으로 내보내는데 먼저 익힌 것과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강이 끝나자 시관들이 모두 경학에 정미함을 탄복하였다.시관 한 사람이 미소를 지으며, “이 유생이 반드시 괴마일 것이다.” 하므로, 백령이 깜짝 놀라 속으로 이상하게 여겼더니, 그 시관이 말하기를, “내가 어제 패(牌)를 받고 시장(試場)에 들어와서 밤에 꿈을 꾸었는데, 어떤 머리가 허연 노인이 ‘이번 방에는 괴마라는 사람이 한 세상의 위인이 될 것이요, 또 경학에 정통함도 비길 데 없으리라.’ 하더니, 이번 과거 보는 유생 중에 이만한 사람이 없으니, 자네가 괴마가 아닌가.” 하고, 또 묻기를 “자네가 반드시 괴마일걸세.” 하였다. 백령이 자기의 호가 괴마라고 대답하니 시관들이 모두 축하하였다. 출세하여서는 행동이 나쁘기가 저와 같았으니, 소인이 세상에 나는 것도 모두 시운과 관계가 있음을 알겠다. 《기재잡기》ㆍ《축수편》
○ 인종이 승하하자 유관(柳灌)이 빈청(賓廳)에서 울며, “신민이 복이 없어 이런 불세출의 임금을 잃었으니, 나라 일을 장차 어떻게 하랴.” 하는데, 임백령이 옆에 있다가, 유관의 띠 고리[帶鉤]를 잡으면서, “대감께서 은밀히 의논하시는 일에 소생도 참여하고자 합니다.” 하니, 유관이 놀라 눈물을 거두며, “새로 성군을 잃었으니, 종사의 불행이 되므로 한 말일 뿐인데, 공의 말은 무슨 말인가.” 하였다.백령이 물러나며 소리를 높여, “선왕의 한 아드님이 계신데, 국사를 근심할 게 무엇이오.” 하고, 나와서 떠들기를, “유관의 뜻이 반드시 있는 데가 있다.” 하고, 마침내 이기 등과 더불어 불측한 말을 조작하여 모함하니, 유관이 죽은 데는 백령의 중상한 힘이 많았다. 《축수록》
○ 병오년에 사은정사(謝恩正使)로 우의정을 차함(借啣 실직(實職)을 행하는 것은 아니고 벼슬의 명칭만 빌리는 것)하고, 북경에 가서 병이 나니, 백령이, “내가 일어나지 못하는가 보다. 의정 차함을 하고 또 오년(午年)을 만났으니, 신인이 말하던 괴마가 이를 이름이 아니겠는가.”하더니, 영평부(永平府)에 와서 죽었다. 《패관잡기》
○ 이전에 임백령의 시호를 소이(昭夷)라 의논하여 아뢰었다. 시법(諡法)에 용모가 단아함이 소(昭)요 행동거지가 편안하고 자상함이 이(夷)라 하였는데, 문정왕후가 알맞는 시호가 못된다고 매우 노하여 응교 박순(朴淳) 등을 파직시키고 마침내 시호를 고치라 하여 봉상시(奉常寺)에서 다시 의논하는데, 참봉 장응정(張應禎)이, “이 시호는 어려울 게 없다.” 하니, 여러 사람이, “왜 그러냐?”고 묻자, “내 생각에는 문정공(文正公)이 가장 합당하다.”라 하니 웃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문충(文忠)으로 고쳤다. 《기재잡기》
허자(許磁)는, 자는 남중(南仲)이요,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병진년에 나서 중종 병자년에 생원, 계미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히고, 을사년에 1등공으로 녹훈하여 병오년에 벼슬이 찬성에 이르고, 경술년에 홍원(洪原)으로 귀양 가서 신해년에 죽었다. 뒤에 사헌부의 아룀으로 인하여 직첩을 도로 주었다.
공은 풍도가 빼어나고 신채가 단정하며, 젊어서 김안국(金安國)에게 수학하여 당시에 명망이 있었다. 처음에 비록 정순붕(鄭順朋) 등과 같이 일을 하였으나, 반역의 명목으로 사람을 해치기까지 하는 것은 그 본심이 아니므로, 유관 등을 죄줄 때에도 그 죄명이 과중하다 하였고, 그 뒤에도 매번 사림을 구원하는 말을 하였다. 항상 스스로 한탄하기를, “내가 소인이 되었구나.” 하고, 병을 핑계하고 일을 많이 피하여 이기에게 미움을 받았고, 녹훈할 때에 공신의 자제까지 녹훈하라는 전교가 있었으나, 공이 일곱 번이나 굳이 사양하여 윤허를 받으니, 다른 공신의 자제도 다 녹훈되지 못하고, 다만 정순붕의 아들 현(礥)만이 녹훈에 참여되었다.이기가 정색하며, “공신은 마땅히 국가와 더불어 좋고 나쁜 것을 같이 해야 하는데, 지금 공신의 자제를 함께 녹훈하라는 전교를 공이 어찌 홀로 고사하는가.” 하고, 이로부터 이기가 더욱 불쾌히 여겼다. 공이 뒤에 이조 판서로 전의감 제조를 겸하니, 이기가 그 친한 의관 배우령(裴于齡)을 전의의 직에 오래도록 있게 하고자 하여, 녹사(錄事)를 시켜 정청(政廳)에 와서 청하니, 공이 노하여 그 녹사를 잡아내며 꾸짖기를, “내가 정청에서 붓을 잡는 아전이 아닌데, 네가 어찌 감히 이런 일로 와서 말하는가.” 하고, 듣지 않았다. 이때에 민제인(閔齊仁)이 또한 사류(士類)를 구원하다가 죄를 얻어 공주에 귀양 갔는데 의식을 스스로 마련할 수 없었다.공이 이 말을 듣고 그 아우 제영(齊英)을 당진 현감에 제수하였으니, 제인을 돌보게 하기 위함이었다. 간사한 무리가 이를 미워하더니, 마침 공이 친한 사람 최여주(崔汝舟)에게, “을사년 일로 녹훈까지 되어 마음속으로 항상 한스럽노라.” 하자, 여주가 그 말에 깊이 감복하여, 공이 이기와 사이가 벌어진 줄을 알지 못하고 이기에게 말하니, 이기가 모함하려 하여도 구실이 없던 참이므로, 여주의 말을 듣고 대사헌 진복창(陳復昌)ㆍ사간 이무강(李無疆) 등을 사주하여 탄핵하게 하였다. 진복창이 일찍이 사간으로 있을 때 공이 상소하여 복창을 탄핵하였었으므로 복창이 이를 원망하고, 이무강도 공에게 용납되지 않아 원망을 품고 있었는데 모두 이기의 심복이었다.세 사람이 공을 모함하여 탄핵하기를, “나라 일은 근심한다 칭탁하고 흉한 무리를 은밀히 보호하고, 나라 위하는 사람을 배척하여 시비가 뒤바뀌게 합니다.” 하고, 또 민제영으로 당진 현감을 시킨 일을 말하며, 처음에는 연안(延安)에 있게 하였다가 그날로 간성(杆城)에 귀양 보내고, 또 낙안(樂安)으로 옮기고, 이튿날 또 홍원(洪原)으로 옮기며, 1등훈을 3등으로 강등하였다.얼마 안 되어 이기가 공에게 죄를 더주어 사사(賜死)할 것을 청하려고, 아뢰는 글의 초고를 가지고 대궐에 들어갔다가 아뢰지 못한 채 이기가 궐내에서 갑자기 죽으니, 공이 죽음을 면하고 홍원에 일 년이 넘게 있다가 병으로 죽었다.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죄없이 모함된 사유로 극력 논하니, 임금이 또한 깨달아서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고 직첩을 돌려주었으며, 예법대로 장사 지내니, 가정(嘉靖) 신해년이었다. 《국조기사》
○ 경술년에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자기의 공이 수치스러우므로, 소인의 이름을 면하지 못하였다고 공공연하게 떠들어서 시비를 현란케 하였으니, 공을 삭제하고 멀리 귀양 보내소서.” 하였다. 《유분록》
○ 일찍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 청탁을 받지 않고 어진 이와 어질지 않은 이를 구별하여 형적이 너무 드러나서 마침내 이기에게 모함을 당하였다. 평생토록 의를 좋아하여, 녹봉을 받을 때마다 자기 쓸 것을 제하고 남은 것은 따로 두었다가, 이웃과 친척에 상사가 있으면 부의하고, 급한 일이 있으면 도와주었으므로, 죽던 날에 사람이 다 애석해 하였다. 《국조기사》
민제인(閔齊仁)은, 자는 희중(希中)이며, 호는 입암(立岩)이요,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중종 경진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 뽑히고, 을사년에 위훈(僞勳)으로 여원군(驪原君)이 되고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기유년에 죽으니 나이가 57세였다.
착한 선비들이 죄를 받아 죽은 뒤에 스스로 젊은이들의 청론에 배척됨을 알고 항상 마음에 불안해 하였다. 정언 김난상(金鸞祥)의 집이 같은 동네에 있었는데, 제인이 하루는 조정에 나가다가 난상의 집에 들려 명함을 들여 보내니, 조금 후에 젊은 여종이 나와서, “지금 머리를 빗으시니 우선 문안으로 들어오시오.” 하였다.제인이 몹시 부끄럽고 분하여 곧 집으로 돌아와서 한탄하기를, “내가 남에게 끌려 하루 아침에 죽는 일을 차마 못했다가 이웃 젊은이에게 욕을 당하니, 누구를 탓하랴.” 하였다. 항상 분하고 한스러워하며 다른 사람을 대하면 한탄하기를, “당초에 윤임(尹任)만 내치려 한 것인데 일이 점점 이 지경에까지 이르러서 녹훈되고 상을 받았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 하더니, 말에 새어 공이 삭제되고 관직이 삭탈되었다. 《유분록》
○ 무신년에 정승 윤인경 등이 아뢰기를, “동정하는 말로 죄인을 애석하게 여기고, 또 안명세(安名世)가 적은 사기(史記)를 고쳐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하여, 마침내 공이 삭제되었다. 《유분록》ㆍ《우암집(尤庵集)》 비문에 자세하다.
○ 만년에 스스로 뉘우치고 시를 짓기를,

이미 당시에 죄를 받았으니 / 旣被當時罪
응당 후세의 비방을 받을 것이로다 / 應逢後世譏

하였다. 상동(上同)
김광준(金光準)은, 자는 숙예(叔藝)이며, 본관은 상산(商山)이다. 중종 기묘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사벌국(沙伐國)은 상주(尙州)의 구호이다. 숭품재상 김광준은 그 아버지가 첩을 몹시 사랑하여 재산을 많이 주고, 적자에게는 박하게 한 것 때문에 항상 서모에게 감정을 품고 있었다. 임인년간에 그 아버지가 죽어 광준이 대사간으로 사벌에서 거상하고 있는데, 형이 또 병으로 죽으니, 그 형의 아내를 사주하여 관가에 소장을 내어, “서모와 서제가 요사한 술법으로 우리 아버지를 죽게 하였으니, 붙잡아 치죄하소서.” 하였으나, 목사 송희규(宋希奎)가 그 증거없음을 의심하여 죄로 다스리지 않았다. 광준이 몰래 희규에게 편지를 보내어 급히 치죄할 것을 청하여 마침내 네 차례나 형벌을 주었다.이언적(李彦迪)이 희규를 방문하였더니, 희규가 그 일을 말하므로 언적이, “아버지의 애첩과 애자를 어찌 차마 분명하지 않은 일로 거상 중에 수금할 수 있겠는가. 자네는 어찌 이런 일을 하는가.” 하였다. 희규가 광준의 편지를 보이며, “부득이한 일이었네.” 하였다. 언적이 함창(咸昌)에 와서 광준에게 편지를 부치고 그 일이 옳지 않다는 뜻을 밝혔더니, 답장에 분해하는 말이 많았다. 문경에 이르니 현감 안경우(安景祐)가 그 사건의 추관으로 그 잔인하던 형상을 보고 와서 자세히 말하였다.경우는 악한 것을 미워하고 말을 잘 참지 못하여서 사람만 보면 그 이야기를 하여 광준이 매우 의심을 받았다. 뒤에 대사간이 되어 사면할 때에 이 일을 거론하여 드러내 밝히고, 그 뒤에는 조정에서 당을 제거한다는 기회를 타서 전날 자기의 일을 아는 이들의 입을 봉하려 하여 본도 출신의 조정에서 벼슬하는 재상 및 사벌 이웃 고을에 사는 사람으로 그 일을 아는 이를 다 적어, 몰래 권신에게 넘겨 주어 모두 제거하게 하였으므로, 정미년 화변에 송ㆍ안이 다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 《회재집(晦齋集)》
송기수(宋麒壽)는, 자는 태수(台叟)이며, 호는 추파(楸坡)요,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정묘년에 나서 중종 신묘년에 진사, 갑오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 뽑히고, 을사년 위훈으로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러 기사(耆社)에 들고, 신사년에 죽었다.
기수는 인수(麟壽)의 종제이다. 을사년에 어떤 사람이 사림을 일망 타진할 계획을 기수에게 말하며, “규암(圭庵 인수의 호)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기수는, “동산에 가시덤불이 무성한데, 그 가운데 한 송이 매화가 있으면, 어찌 매화가 상한다고 가시덤불을 없애지 않겠는가.” 하여, 마침내 인수를 죽일 계획이 결정되었다. 기수는 끝내 위사훈(衛社勳)에 참록되었는데, 사람들이 형을 모함한 공신이라고 지목하였다. 《축수편》
○ 윤원형이 송기수에게, “규암이 죄명을 쓰고 죽으니, 마음에 참으로 미안하다.” 하니, “특별한 곳의 매화가 어찌 오래 보존되겠소. 사람의 생사는 모두 운수가 있는 것이니, 무슨 한할 것이 있겠소.” 하였다. 《패관잡기》ㆍ《유분록》
○ 김성일(金誠一)은 강직하여, 남이 하지 못할 말을 능히 하였다. 선조(宣祖) 때에 송기수가 특진관으로 경연에 나왔는데, 그 아들 응개(應漑)는 옥당으로, 응형(應泂)은 주서로 함께 들어왔다. 강이 끝난 뒤에 이야기가 을사사화에 미치니, 송기수가 울며 억울한 사정을 진술하여 좌우의 사람이 다 슬퍼하였다.김성일이 정언으로 경연에 있다가 아뢰기를, “송기수는 을사년에 권간에게 아부하여, 위훈에 녹훈되고 부귀를 20년 동안이나 누렸는데, 지금 어지신 임금이 위에 계시고 공론이 크게 행해지자, 이에 슬픈 말로 을사사화의 원통한 사정을 말하여 공론이라는 이름을 도적질하려 하니, 참으로 소인의 정상입니다.” 하니, 기수는 황공하여 물러났다. 삼부자가 일시에 병을 빙자하여 조정에 나오지 않으니, 듣는 이가 목을 움츠렸으나 성일은 말하는 태도가 태연스러웠다. 《부계기문》
○ 그 뒤 조강에서, “전하께서 송기수가 기록해 놓은 것을 보시면, 을사사화의 원통함을 더욱 잘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는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 선조는, “기수가 이미 간인들의 정상을 알았으면, 어찌 그때에 바로 말하지 않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때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선조가 이르기를, “그러면 어찌 병이라 핑계하고 물러가지 않고, 아직까지 녹훈과 관작을 보전하고 있는가.” 하였다. 《패관잡기》ㆍ《유분록》
김명윤(金明胤)은, 자는 회백(晦伯)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요, 극핍(克愊)의 아들이다. 계유년에 진사가 되었다. 선비로 있을 때에 헛된 이름을 얻어 조광조의 현량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저작이 되었다가, 합격이 취소된 뒤에 곧 벼슬하여 익위사 시직이 되고, 중종 갑신년에 다시 문과에 급제하여, 면목을 바꾸어 시세를 좇아 이익을 탐하며 뻔뻔스럽게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므로 세상 사람들이 더럽게 여겼다. 을사년에 위훈으로 광평군(光平君)이 되고,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다가 선조 때에 삭탈되고, 외방에 내쫓겨서 죽었다.
젊어서 선하다는 명망이 있어 현량과에 뽑히고, 합격이 취소된 뒤에 명윤은 도로 유건을 쓰고 과거장에 들어가서 급제하자, 시비를 가리지 않고 출세하기에만 급급하였다. 을사년 화란에 권간의 뜻을 받들어 봉성군(鳳城君)과 계림군(桂林君)을 무고하여, 큰 화가 하늘까지 닿아 사림이 일망타진되었고, 명종(明宗) 말년에 바른 의논이 다시 일어나 여러 간신들의 세력이 꺾이니, 명윤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을사사화에서 남은 무리들이 원통함이 많이 있으니, 원통을 풀고 치욕을 씻어서 인심을 위로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조식(曹植)ㆍ이항(李恒) 등이 부름을 받자, 명윤이 착한 선비들에게 아첨하려 하여 아뢰기를, “이들은 마땅히 대간이나 시종의 벼슬을 주어야 합니다.” 하였다. 시세를 따라 이익만을 취하는 술법은 늙을수록 더욱 교활하여 사람이 분개하고 미워하여, 선조 초년에 죄로 관작이 삭탈되고도 오히려 목숨을 보전하게 된 것을 사람들이 불쾌히 여기었다. 인종이 처음 왕위에 오르자 사헌부에서 사람들이 일어나 기묘사화의 원통함을 씻으려고 아뢰는 말에, “기묘년 일에 관계된 선비는 정직하지 않은 이가 없다.” 하자, 지평 백인걸(白仁傑)이 그 구절을 말소하자 하니, 동료 중에 노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인걸이 말하기를, “임금에게는 털끝만큼이라도 속여서는 안 된다.기묘년에 현인이 많았지마는, 어찌 다 정직한 사람이라 하겠는가. 현량과가 혁파된 뒤에 책보를 끼고 과거 보러 들어간 이도 또한 정직한 사람이었는가.” 하였다. 뒤에 인걸이 명윤에게, “당신은 천백 억의 화신[千百億化身]이다.” 하니 사람들이 꼭 맞는 말이라 하였다. 《석담일기》
○ 경진년 봄에 세자 익위사(世子翊衛司 세자를 보좌하고 호위하는 관청)를 설치하는데, 김명윤이 신잠(申潛)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다시 사모를 쓰게 되나보다.” 하였다. 그 까닭을 물으니, “내가 들으니 조정에서 현량과에서 취소된 사람으로 동궁의 신료에 충당한다 하더라.” 하였다. 신잠이 그 말을 믿고 홍유손(洪裕孫)에게 전하였더니, 유손이 웃으며, “이는 반드시 제가 하고 싶어서 자네의 뜻을 떠보는 것일세.” 하더니, 수일 후에 명윤이 과연 세마(洗馬 익위사의 벼슬)에 임명되고, 뒤에 부솔(副率 익위사의 벼슬)로서 다시 과거를 보아 급제하였다. 《기묘당적보》
○ 선조 초년에 김명윤의 삭작을 청하여 아뢰기를, “명윤이 얻으려고 걱정하고 잃을까 걱정하며 온갖 짓을 다하였으니, 어찌 일찍이 옥당 벼슬을 한 사람으로서 다시 과거 보는 유생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기에게 아첨하고 윤원형을 도와 앞장서서 큰 옥사의 단서를 열어 불측한 화를 조성하였으며, 이량(李樑)이 권력을 잡자, 옛 세력을 버리고 새 세력을 좇아 종의 낯을 하고 아비처럼 섬겨서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도모하여 꼬리를 흔들고 추태를 부려, 당시 사람들이 그를 이량의 시양자(侍養子)라 하며, 아버지는 젊은데 아들은 늙었다는 조롱까지 하였습니다.이량이 평안 감사로 나갈 제 아녀자처럼 서교(西郊)까지 따라가서 울며 작별하였는데, 윤원형을 찾아 봄으로써 옛 정을 다시 맺었습니다. 금방 원수를 잊고 달라붙으니 행동이 개ㆍ돼지와 같고, 음모는 귀역(鬼蜮)보다 심합니다. 권문(權門)이 연이어 패망하였는데 명윤의 벼슬은 전과 같으니, 자고로 소인들이 악한 일을 하나만 한 것이 아니로되, 이처럼 심한 자는 없었습니다. 선왕께서 무고한 죄를 씻으려는 것을 보고 이들의 추방을 주장하는 말을 아뢰었으니,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는 못하는 짓이 없었나이다.” 하였다. 《국조기사》
진복창(陳復昌)은, 자는 수초(遂初)이며, 본관은 여양(驪陽)이다. 중종 신묘년에 생원, 을미년에 송경(松京)의 친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진복창은 문벌이 미천하였다. 그 아버지 의손(義孫)이 녹사(錄事)로서 현감을 하였다. 혹 말하기를, “복창의 어미는 여러 사람을 거쳐 의손에게 왔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천하게 여겼다.” 하였다. 복창이 글을 잘 하고 글씨를 잘 쓰며, 또 교활하여 제 자랑을 잘 하므로, 구수담(具壽聃) 같은 무리들도 그에게 속아서 칭찬하고 천거하였다.윤원형이 정권을 잡고 사림을 마구 해치자 복창이 이에 아부하여 그의 주구가 되어 원형이 해치려고 하는 자는 복창이 곧 공격하여, 여러 번 큰 옥사를 일으키니, 일시의 명사들이 죽고 귀양 간 이가 극히 많아, 사람들이 그를 독사로 지목하고, 보는 이는 눈을 흘겼다. 구수담도 마침내 그에게 해를 당하였으며, 그 뒤 원형도 싫어하여, 복창을 삼수(三水)로 귀양 보내고, 또 유배 중에 나쁜 행동을 하였다 하여 가시울타리를 쳐서 못 나오게 하여 죽였다. 《동각잡기》 ○ 구수담이 경술년에 귀양 갔으니, 복창과 이무강(李無彊)이 귀양 간 것도 마땅히 경술년에 있었을 것이다.
○ 윤원형이 진복창을 사주하여 황헌(黃憲)을 탄핵하니, 복창이 상소를 정원에 바치고, 옥당에 나와 동료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금 권신을 탄핵하였으니, 반드시 중벌을 받을 것이다. 동료들과 다시 서로 만나지 못할 것이다.” 하고 흐느껴 울더니, 조금 있다가 어찰(御札)로 칭찬하기를, “나라를 위하여 몸을 잊는 정성은 고금에 드물거늘 주운(朱雲)ㆍ급암(級黯 한(漢) 나라 때의 직언(直言) 잘하는 신하)의 충성보다 나으므로, 매우 가상히 여기고 탄복하여 이에 중종(中宗)께서 입으시던 의복과 은잔을 주어 기특히 여기는 뜻을 보이니, 나라 위하는 충성을 시종 변하지 말라.” 하였다. 윤원형이 황헌을 죄주려는 뜻을 이미 대비에게 진달하여, 복창이 그 지시를 따라 한 일이니, 반드시 죄를 얻을 염려가 없는 것인데, 거짓으로 곧은 체하는 태도를 나타냈다. 그러나 어찌 방관하는 사람이 그 뱃속을 들여다 보듯 환히 아는 것을 알겠는가. 《동각잡기》
○ 함풍군(咸豐君) 계수(繼壽)의 집 뜰에 모란꽃이 한창 피었는데, 진복창이 와서 보고자 한다는 소식을 듣고 곧 꽃을 베어버리니, 사람들이 함풍군의 위태로움을 근심하였으나, 마침내 해를 가하지 못하였다. <함풍군 묘지(咸豐君墓誌>
이무강(李無彊)은, 자는 경휴(景休)이며, 본관은 양성(陽城)이다. 중종 임오년에 진사, 병신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다. 천성이 음험하여 진복창과 결탁하여 악한 일을 같이 하다가, 복창이 패망하자 무강 또한 경원(慶源)으로 귀양 갔다.
진복창이 부제학이 되어서 마침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에서 부제학을 선출 임명하는 기록)을 하는데, 모임 중에서 크게 말하기를, “이번에 경휴가 마땅히 수천(首薦)되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경휴는 무강의 자이다. 좌우에 있던 사람이 다 끄덕끄덕했는데, 권점(圈點)을 세어보니 이에 들어 있지 아니하였으므로, 좌중이 서로 보면서, “누가 권점을 아니하였는가.” 하고 서로 미루니, 듣는 이가 모두 웃었다. 《동각잡기》
○ 이무강이 일찍이 어사로 북도(北道)에 갔을 때, 그 지방 수령 중에 을사년 일로 귀양 온 사람을 돌봐준 이가 있으므로 이를 적발하여 죄를 주었다. 뒤에 무강이 경원에 귀양 오니, 수령들이 서로 경계하여, “이 사람은 전일에 귀양 온 사람을 돌봐준 수령을 죄주던 자이다.” 하고 도와주지 아니하니, 보는 이가 모두 제 자신이 앙갚음을 도로 받는다고 하였다.이준경(李浚慶)이 병조 판서로 있을 때에, 이무강이 탄핵하기를, “재주가 문무를 겸비하였으니, 병권을 잡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고 한 일이 있었다. 이준경이 순변사로 경원에 이르자, 역졸이 성안에 있는 작은 집을 가리키며, “이무강이 있는 집입니다.” 하니, 이준경이 먹을 것을 후히 주었다. 어떤 이는 원수를 은혜로써 갚는다고 비웃었으나, 준경은, “내가 은혜를 베풀려 한 것이 아니라, 그 곤궁함을 보니,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었다.” 하였다. 《동각잡기》
윤춘년(尹春年)은, 자는 언구(彦久)이며, 호는 창주(滄洲)요,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이조 참판 안인(安仁)의 아들이요, 윤원형의 족제(族弟)이다. 갑술년에 나서 중종 갑오년에 생원, 계묘년에 문과 청백리로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정묘년에 죽었다.
윤춘년이 윤원형에게 붙어서 원형의 형 윤원로를 치죄할 것을 상소하여, 이로 인하여 출세하여 갑자기 현달한 관직을 역임하여 경박하고 빙자하게 자신하였는데, 경박한 무리가 많이 좇아서 강학하였다. 윤춘년이 함부로 스스로 높고 큰 척하며 사도(師道)로 자처하였으니, 위인이 경박하고 학문이 매우 잡되어 불교와 노자의 도를 깨달았다고 스스로 자랑하며, 또 음률을 깊이 안다 하였다. 또 남이 지은 글 두어 구절만 보아도 그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않음과, 장수하고 요절할 것과, 귀하고 천할 것을 다 안다고 떠들었다.의논이 드날려서 걸핏하면 성현의 말을 인용하였는데, 그의 말에 “성인도 다를 것이 없다. 천심에 합하기만 하면 된다.” 하고, 시비와 의리를 가리지 않고, 일을 이루는 것만으로 천심에 합한다 하였다. 또 김시습(金時習)은 동방의 공자이니, 공자를 보지 못하였으면 열경(悅卿 김시습의 자)을 보면 된다 하였는데, 그가 김시습을 추앙하는 것도 다 세상에 떠도는 괴상한 행적이요, 실제로 시습이 한 일이 아닌 것이었다. 중 보우(普雨)를 보고 매우 특이하게 여겨서, 사람에게 말하기를, “보우가 선학(禪學)으로 말미암아 마음을 깨달았으나, 그침은 알아도 아직 안정함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하니, 그 허탄하고 망녕됨이 모두 이러하였다. 춘년이 주색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그 문도가 비록 주색을 몹시 좋아하더라도 춘년을 보면 반드시 주색을 끊었다 하여 서로 속이니,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다만 춘년이 조금 청렴하여 뇌물을 받지 않으므로, 혹 좋게 여기는 이가 있었다. 윤원형이 패망하자 예조 판서로서 탄핵을 당하여 파면되어, 선조 초년에 시골로 돌아가 심열(心熱)로 냉수만 마시다가 병이 나서 죽었다. 《석담일기》
○ 윤춘년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에 드나드는 잡객이 없고, 때때로 도승을 맞이하였다.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 같은 중을 초당으로 영접하여 산수를 얘기하니 세속을 떠난 생각이 있는 것같이 하고, 이조 판서로서 벼슬을 추천할 때에 반드시 깨끗한 명성이 있는 이를 등용하여 대각에 널리 배치하니, 비록 권력에 아부하는 주구들이 한둘 그 틈에 끼었어도 사류들이 그를 청론을 주장하는 사람이라 하였으나, 실은 모두 그의 농락하는 가운데 든 줄을 몰랐다. 《기재잡기》


 

[주D-001]관각(館閣) 문자 : 상소나 교서 등을 말하는 것으로 옥당ㆍ대간ㆍ예문관에서 짓는 문장들을 말한다.
[주D-002]신인이 …… 아니겠는가 : 괴(槐)는 정승의 고사(故事)에 관계 있는 나무이며, 오(午)는 말에 속하므로 괴마(槐馬)를 이렇게 풀이한 것이다.
[주D-003]주운(朱雲) : 한 나라 성제(成帝) 때에 주운이 임금에게, “참마검(斬馬劍)을 빌려 주시면 아첨한 신하인 장우(張禹)의 목을 베겠습니다.” 하였다.
[주D-004]권점(圈點) : 대제학ㆍ부제학을 선출할 때에 후보자의 성명에 동그라미를 찍는 것인데, 지금의 무기명 비밀투표와 비슷한 것이다.
[주D-005]그침은 …… 못하였다 : 《대학(大學)》에 있는 말인데, 지(止)와 정(定)을 수양하는 데 있어 한 단계로 말하였다.

연암집 제7권 별집
종북소선(鍾北小選)
염재기(念齋記)


송욱(宋旭)이 술에 취해 쓰러져 자다가 해가 떠올라서야 겨우 잠에서 깨었다. 누워서 들으니, 솔개가 울고 까치가 지저귀며, 수레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시끄러우며, 울 밑에서는 절구 소리가 나고 부엌에서는 그릇 씻는 소리가 나며, 늙은이의 부르는 소리와 어린애의 웃음소리, 남녀 종들의 꾸짖는 소리와 기침하는 소리 등 문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분별하지 못할 것이 없건만 유독 자신의 소리만은 들리지 않았다.
이에 몽롱한 가운데 중얼거리기를,
“집안 식구는 모두 다 있는데 나만 어찌하여 없는가?”
하며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저고리와 바지는 다 횃대에 놓여 있고 갓은 벽에 걸려 있고 띠는 횃대 끝에 걸려 있으며, 책들은 책상 위에 놓여 있고, 거문고는 뉘어져 있고 가야금은 세워져 있으며, 거미줄은 들보에 얽혀 있고, 쇠파리는 창문에 붙어 있다. 무릇 방 안의 물건치고 하나도 없는 것이 없는데 유독 자기만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급히 일어서서 제가 자던 곳을 살펴보니 베개를 남쪽으로 하여 요가 깔려 있으며 이불은 그 속이 드러나 있었다. 이에 ‘송욱이 미쳐서 발가벗은 몸으로 집을 나갔구나!’라고 생각하고는 매우 슬퍼하고 불쌍히 여겼다. 한편으로 나무라기도 하고 한편으론 비웃기도 하다가, 마침내 의관(衣冠)을 안고서 그에게 찾아가 옷을 입혀 주려고 온 길을 다 찾아다녔으나 송욱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성(城) 동쪽에 살고 있는 소경에게 가서 점을 쳐 보니, 소경이 점을 치며 말하기를,
서산대사(西山大師)가 갓끈이 끊겨 염주가 흩어졌구나. 저 부엉이를 불러다가 헤아려 보게 하자꾸나.”
하고는 엽전을 던지자 동그란 것이 잘도 굴러가 문지방에 부딪쳐서야 멈추었다. 소경이 엽전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축하하기를,
“주인은 여행을 나가고 나그네는 여의(旅衣)가 없구나. 아홉을 잃고 하나만 남았으니 이레가 지나면 돌아오리라. 이 점사(占辭)가 크게 길(吉)하니 마땅히 과거에 장원급제하리라.”
하였다. 송욱이 크게 기뻐하여 매양 과거가 열려 선비를 시험할 때면 반드시 유건(儒巾)을 쓰고 응시를 하였는데, 그때마다 제 시권(試券)에다 비점(批點)을 치고 나서 큰 글씨로 높은 등수를 매겨 놓았다. 그래서 한양(漢陽)의 속담에 반드시 이뤄질 수 없는 일을 두고 ‘송욱의 과거 보기〔宋旭應試〕’라고 말한다.
식자들이 이 말을 듣고서 말하기를,
“미치긴 미쳤으나 역시 선비답구나. 이러한 행동은 과거에 응시하면서도 과거에 뜻을 두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계우(季雨)는 성격이 소탈하여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목청을 높여 노래하면서 스스로 ‘주성(酒聖)’이라고 호를 지었다. 세상에 겉으로는 씩씩한 체하면서도 속으로는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을 보면 마치 자기 몸이 더렵혀지기나 한 듯 구역질을 하였다.
내가 그에게 장난삼아 말하기를,
하니, 계우가 수심에 잠겨 한동안 있다가,
“그대의 말이 옳소.”
하고는, 드디어 그 당(堂)의 이름을 ‘염재(念齋)’라 짓고 나에게 기(記)를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송욱의 일을 써서 그를 권면하는 바이다. 저 송욱은 미치광이이기는 하지만 그 또한 스스로 노력한 자이다.


 

[주D-001]여의(旅衣) : 여행 도중 입을 옷, 즉 행장(行裝)을 말한다.
[주D-002]계우(季雨) : 성명은 미상(未詳)이다. 《연암집》 권5 여중관(與仲觀)에 백우(伯雨)의 동생으로 언급되어 있다. 연암 후손가 소장 필사본 《종북소선집(鍾北小選集)》에는 이 글의 제목이 염재당기(念哉堂記)로 되어 있으며, 그와 함께 ‘계우’가 ‘숙응(叔凝)’으로 되어 있다. 숙응은 연암의 친구인 신광온(申光蘊)의 아우 신광직(申光直 : 1738 ~ 1794)의 자(字)로, 그의 호가 또한 염재(念齋)였다. 신광직은 젊은 시절 연암뿐만 아니라 홍대용(洪大容)과도 절친하여 담헌서(湛軒書)에도 ‘여신염재부증박연암지원(與申念齋賦贈朴燕巖趾源)’ 등 신광직과 관련된 시문이 몇 편 있다. 김영진의 「조선 후기의 明淸小品 수용과 小品文의 전개 양상」(고려대 박사학위 논문, 2003) 참고.
[주D-003]세상에 …… 하였다 : 공자는 ‘겉으로는 씩씩한 체하면서 속으로는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을 남이 알까 두려워하며 몰래 벽을 뚫고 담을 넘는 도둑에 비겨 비판하였고, 《論語 陽貨》 백이(伯夷)는 시골 사람과 서 있을 적에 그가 관을 올바로 쓰고 있지 않으면 뒤도 안 보고 가 버리면서 ‘마치 자기 몸이 더럽혀지기나 할 듯이 여겼다.〔若將浼焉〕’고 하며, 《孟子 公孫丑上》 오릉중자(於陵仲子)는 어머니가 만들어 준 거위 요리를 먹고 난 뒤 그 거위가 바로 형에게 선물로 들어온 것이었음을 알게 되자 ‘나가서 구역질을 하였다.〔出而哇之〕’고 한다. 《孟子 滕文公下》
[주D-004]술에 …… 않겠는가 : 《서경(書經)》 다방(多方)에 “성인이라도 반성하지 않으면 광인이 되고, 광인이라도 반성할 줄 알면 성인이 된다.〔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고 하였다. 개과천선(改過遷善)을 강조한 말이다. 본래 《서경》 다방에서의 ‘광인’은 ‘어리석은 사람’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송욱(宋旭)의 경우와 연계되어 쓰였으므로 ‘미치광이’로 새겼다.

완당전집 제5권
서독(書牘)
백파에게 주다[與白坡]


백파 노사(白坡老師) 선안(禪安)하신지요? 이미 더불어 거리낌없이 말을 마구 했는데 어찌 체면을 보아 자제할 이치가 있으리오. 전후 지묵(紙墨)의 사이에 일호라도 노여움을 숨겨 둔 뜻은 없었는데 보내 온 깨우침이 갑자기 이렇게 중언부언한 것을 보면 이는 사(師)가 스스로 갈등을 일으킨 것이라 나도 몰래 웃음이 터져 머금은 밥알이 튀어나와 서안(書案)에 가득하구려.
사의 나이 장차 팔십이요, 더구나 오늘날 선문(禪門)의 종장으로서 평소에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지 못했고 또 명안(明眼)의 사람을 보지 못했으니 기봉(機鋒)을 누가 들어서 발전(撥轉)해 주리오. 정문(頂門)도 따라서 인색(湮塞)하게 되어 침침한 귀굴(鬼窟) 속에 허다한 세월을 그저 넘기고 말다가 갑자기 목놓아 말하는 사람의 큰 사자후(獅子吼)를 부딪치니 의당 그 눈이 휘둥그레질밖에요.
내 비록 천박한 사람이지만 어찌 늙은 두타(頭陀) 한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고서 아울러 그 선장(先狀)에까지 언급하였겠소. 사는 하나의 속세 문자에 있어서도 오히려 깊이 궁구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심심(甚深)한 불지(佛旨)를 꿰뚫어 갈 수 있으리오. 이에 나아가 사의 무너지고 빠침이 여지가 없음을 알겠으니 어찌 더욱 터져 나오는 밥알이 서안에 가득하지 않겠소.
지금 이 열다섯 가지의 조례에 대하여 앞의 일설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뒤의 일설은 도로 다시 몽롱하여 수미(首尾)의 천 백 말이 한 구절도 마음에 터득되어 폐부 속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은 전혀 없고 예전 그대로 박잡하고 윤척(倫脊)이 없는 성어만을 주워 모아 구차스레 설명해 가는 것뿐이니 어찌하지요.
지난날에 한 산중의 노고추(老古錐)와 더불어 선(禪)을 논한 일이 있었는데 역시 이와 같은 말을 하여 묵은 먹과 식은 밥이 한 판에 찍어낸 것 같으니 이것이 바로 치문(緇門)의 베껴 전하는 묵은 종이[故紙]로서 굳을 대로 굳어져 깨뜨리지 못하는 것인지요?
이를테면 불설(佛說)은 화두(話頭)의 활구(活句)가 아닌 것이 없고 《법화경(法華經)》과 《화엄경(華嚴經)》은 바로 교적(敎迹)의 사구(死句)라 하였는데 두 경은 유독 불설이 아니던가요?
《소초(疏抄)》나 사기(私記)도 역시 묘유(妙有)이나 《법화》ㆍ《화엄》은 다 선문의 상승(上乘)이 될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 이른바 《소초》ㆍ《사기》는 별도의 한 서(書)로 수다장(修多藏) 속으로부터 새로 번역해 온 것이어서 이 두 경과는 판연히 두 건의 물(物)인데 또다시 두 경의 문자보다 뛰어나다는 말인가요? 경은 상승이 아니요 소초가 도리어 묘유라는 말은 듣지 못했소.
더구나 그 입을 열면 대기(大機)에 대용(大用)이요 마음에 발작하면 살인(殺人)과 활인(活人)이라 하지만 본지(本地)의 풍광(風光)에 대기ㆍ대용을 어디에다 쓸 것이며 청평(淸平)의 세계에 살인ㆍ활인도 장차 무엇을 할 건고? 대기ㆍ대용을 두 사람에게 나누어 맡긴 것도 족히 가소로운 일이며 살인ㆍ활인은 한 때의 기(機)에 당한 말인데 어찌 상투로 답습하여 평소의 능사로 삼으려 드는 건가?
진공(眞空)과 묘유(妙有)를 나누어 두 문으로 만들어 마치 아울러 서고 쌍으로 일어나는 것과 같이 하니 어찌 한 마음이 다심(多心)으로 반복하는 건지요? 이는 《기신(起信)》을 잘못 읽은 사람들로서 총림(叢林) 속의 잡설과 만담이 이와 같이 몰이해하여 그 내력이 이미 오래였으니 또 어찌 전혀 사만 허물할 게 있소.
염화(拈華)의 소식을 들어 보이자 오직 가섭(迦葉)만이 알고 아난(阿難)도 몰랐는데 누가 들어서 역력히 설명하여 이와 같이 적확하고 분명하게 말한단 말이오. 언어의 길이 끊긴 곳에는 문자가 역력하여 증거할 수 있어 마침내 묘유문(妙有門)이라 생멸문(生滅門)이라 수연(隨緣)이라 보리(菩提)라 관조반야(觀照般若)라 활인검(活人劍)이라 잡화포(雜貨鋪)라 이르지 않았소.
묘유ㆍ생멸ㆍ수연ㆍ보리ㆍ관조반야 등 어와 불설에 대하여는 경(經)치고 없는 데가 없어 팔만의 권속(眷屬)이 듣지 못한 사람이 없고 믿어 받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또 어찌 염화를 들어 중(衆)에게 보여 줄 것이 있겠으며 중이 다 모르는데 가섭만 유독 알았단 말이오?
염화의 소식이 만약 과연 이에 있다면 또 어찌 문자를 세우지 않은 데 있겠는가.
황면(黃面)의 노자(老子)도 오히려 이를 언어나 문자에 나타내지 못했는데 사(師)는 마침내 다반사(茶飯事)로 말하니 문자도 본시 한 선(禪)이요 문자를 세우지 않은 것도 한 선(禪)이란 말인가? 하나의 선인데 혹은 문자를 세우고 혹은 문자를 세우지 않았단 말인가? 이는 다 말이 되지 않는 거외다.
이는 또한 사 한 사람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후세의 선가(禪家)들이 거개 이와 같았는데 사 같은 이는 바로 또 그것을 주워 모아 구두선(口頭禪)을 만들어 주체(湊砌)하여 마지않고 천착하여 마지않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은가.
달마(達摩)가 서역에서 와서 진단(震旦)의 문자가 번역으로 와전되고 붓으로 받아 쓰는 데서 와전되고 윤색하다 와전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에 일체를 소제해 버리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했으니 이는 부득이한 일이었던 거요.
그러해도 달마는 오히려 《능가경(楞伽經)》을 이조(二祖)에게 부쳐 주어 서로 전하여 오조(五祖)에 이르렀는데 《능가》의 문자가 간회(艱晦)함으로써 《반야경(般若經)》으로 바꾼 것은 그것이 간직(簡直)하고 평이하여 사람마다 즐겨 따르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어렵고 쉬운 사이에 달마의 본지와는 사뭇 다름이 있었는데 사람이 다시 수정을 더한 일이 없어서 마침내 오늘날에 이르러 《능가》는 폐해지고 《반야》가 크게 행세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육조(六朝) 이래로 해석하는 자가 가장 많았는데 혹은 얕은 데 잃고 혹은 깊은 데 잃고 혹은 간략한 데 잃고 혹은 번다스러운 데 잃었던 거지요.
이를테면 삼십이분(三十二分) 같은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가소롭게 하는데 이는 사람이 망령되이 조명(照明)을 의탁한 것이니 바로 깎아버려도 되며 천친(天親)의 이십칠의(二十七疑)와 무차(无差)의 십팔주(十八住)는 반드시 보존하지 않아도 되며 또한 그것이 과연 두 대사(大士)의 손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는 거고요.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설은 이것이 바로 육조의 친필이란 말이오? 본래 글자를 모르는데 어떻게 가서 얻어왔단 말인가요. 구결(口訣) 두 글자는 곧 그것이 파탄나는 곳이니 이 역시 망탁(妄托)인 거요. 사는 헛설사로 한번 이마에 땀 쏟는 경우를 면치 못할 거외다.
함허(涵虛)의 설은 내유(來喩)로 보아 더욱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반야경》엔 어찌 여래선(如來禪) 조사선(祖師禪)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또 이미 공종(空宗)이라 일렀는데 내유를 들어 말하면 성종(性宗)이라 일러도 되고 조사종(祖師宗)이라 일러도 되지 않겠소? 매양 조사선을 위하여 따로이 문자를 세우고자 하니 역시 이상한 일이지요.
앞뒤가 비끗해지고 전부가 어긋져 떨어짐이 또 이와 같이 말한 자는 전혀 없으니 이는 망설이요 두찬(杜撰)인 것이며 지난날에 사의 말한 ‘생반삼분(生飯三分)’ 같은 것은 당초에 《대교왕경(大敎王經)》의 한 구절 한 대문도 얻어 보지 못하고서 함부로 만들고 함부로 풀이한 것인데 지금 또 《반야경》에다 사마귀를 붙이고 혹을 달 작정인가? 함허의 무리도 역시 이 병을 면치 못했는데 하물며 점점 끝이 되는 사 같은 이에 있어서랴.
화두는 지난날에 또한 누누이 말했는데도 마침내 반성하여 깨치지 못하고 또 이와 같이 황잡(荒雜)하게 말해 오니 비록 대방(大方)이라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거요.
화두는 비록 조주(趙州)의 화(話)로써 화두를 삼지만 조주가 어찌 일찍이 사람에게 화두를 가르쳤는가? 특히 조주뿐만 아니라 달마(達摩)가 이조(二祖)에게 화두로써 가르쳤던가? 삼조ㆍ사조도 역시 화두 속에서 왔는가? 오조가 육조에게 의발(衣鉢)을 전하면서도 역시 일찍이 화두에 미치지 않았으며 남악(南岳) 마조(馬祖) 백장(百丈) 황벽(黃蘗)들도 화두를 들어 사람을 가르쳤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화두는 조송(趙宋) 이후부터 차츰 행해진 것인데 지금은 마침내 불어(佛語)는 화두 아닌 것이 없어 의리(義理)로써 설파하면 교의(敎義)가 되고 몰의리(沒義理)로써 타파하면 화두가 된다고 이르니 조송 이후의 불을 섬기는 것은 무엇 때문에 미리 옮겨 쓰고 거슬러 취하여 혹은 의리(義理)로 설파하고 혹은 몰의리(沒義理)로 타파한다는 거요?
불설은 장경(藏經)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 장경 속의 팔만이 의리가 있지 않은 것은 없어 사람마다 이해할 수 있는데, 모르괘라, 어느 경이 몰의리의 경이 되는지요? 지금 화두를 불어(佛語)와 불의(佛意)로 삼는다면 세 곳에서 전심(傳心)할 때에 어찌 한 구절도 화두가 없었던가?
지금 교적(敎迹)을 사구(死句)로 삼아서 스스로 구하는 일도 끝내지 못했는데 스스로 구하는 일도 끝내지 못한 처지로서 어떻게 더 넓히어 팔만대장(八萬大藏)의 당상(唐喪)의 타진(唾津)을 하려 드는가?
화두로 사람 가르치는 것은 곧 상계(像季) 이래의 말법으로서 가장 강흔(剛狠)한 자들이 제멋대로 쓰는 것이니 화두로 사람 가르친 이후로는 다시 남악 마조 같은 이가 나왔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며 혹 한두 사람이 깨쳐 얻은 것이 있다 할지라도 심히 기특한 것은 없으며 그도 또한 열 백에 하나인 것이외다. 이 밖에는 허랑되이 세월만 낭비하여 오늘날 영남(嶺南)의 칠불선실(七佛禪室)과 같을 뿐이니 이 어찌 사람을 그르치는 것이 아니겠으며 대혜(大慧)가 그 화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어찌 면할 수 있으리오?
대혜의 문하에서 화두로부터 깨쳐 들어간 것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장자소(張子韶)보다 나은 사람이 없는데 꾀어서 자소를 데려다가 양인을 천인으로 만들었으니 그 자소를 가르친 것은 곧 하나의 음모(陰謀)와 비계(祕計)로서 심지어는 사람들이 여불위(呂不韋)에게 비한 일도 있는데 사의 두대(頭戴)한 것은 바로 곧 이와 같을 따름인 것이외다.
종풍(宗風)의 문(門)은 문대로 호(戶)는 호대로 서로서로 분열되고 서로서로 형극이 되었는데 사는 단지 대혜(大慧)만을 알고 대혜의 법형(法兄)인 법일(法一 임제종(臨濟宗) 황룡파(黃龍派), 호(號)는 설소(雪巢))을 알지 못하며 단지 청허(淸虛)만 알고 청허의 법형인 홍정(弘正)을 알지 못하니 이는 다 대혜ㆍ청허보다 한 등을 넘어선 자들이라오.
중고(中古)에 있어 외도(外道)를 변파한 주굉(袾宏)이나 근세에 반선(班禪) 서천의 활불 을 면척(面斥)한 달천(達天)이라든가 또는 육신(肉身)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덕청(德淸) 같은 이와 사리가 비[雨] 같았다는 성공(性空)의 여러 대덕들은 또 어찌 진묵(震黙)환성(喚醒)설파(雪坡)의 무리들에게 넘어 설 뿐이겠소.
사의 성문(聲聞)으로는 반드시 이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며 지금 칭술한 것은 편방(偏方)의 한 문호(門戶)의 작은 소견으로서 썩은 쥐새끼를 놓고 봉에게 소리 지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외다.
선(禪)의 교법(敎法)은 체식(體式)이라 이른 것은 도대체 선을 어떻게 체식한다는 거요? 이미 문자를 세워 놓고 또 하나의 체식을 더하니 어찌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는 것이 이와 같을 수 있는지 이는 모두가 진부한 것만 주워 모으고 하나도 신심(身心) 상의 체험ㆍ연구가 없이 날랜 이뿌리로 말만 늘어 놓는 것이며 또한 말을 가리지 못하고 떠들어댄 것이외다.
지난번에 《안반수의(安般守意)》를 읽으라고 권한 것은 어찌 《반야》와 《법화》를 몰라서리요. 특히 사의 근기(根器)와 식해(識解)가 이로 말미암아 들어가야만 문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며 《안반수의》로써 이 방편의 교체(敎體)를 세워 사람마다 다 그렇게 하라는 것은 아니지요. 비유하자면 《법화》중의 화성(化城)과 같아서 비유하여 말한 것이니 실로 사를 슬퍼하고 민망히 여겨서 그런 것이며 사를 얕잡아 보거나 업신여긴 것은 아니오.
사의 문하의 작은 도리(闍黎)도 항상 가벼이 여기지 않는데 하물며 사에게랴. 사는 끝내 이 의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사부(士夫)의 거만으로 여기니 어찌 평심하여 자세히 강구하지 못하시오. 사부의 거만도 오히려 불가한데 하물며 산승의 거만이겠소.
오늘날의 할 일을 위해서는 종전의 갈등을 일체 다 소제해 버리고 빨리 사의 신상에 나아가 회광반조(回光反照)하여 먼저 진ㆍ치(嗔癡)의 두 가지 독소를 도려내 버리고 다음으로 사분율(四分律) 오분율(五分律)과 갈마비니(羯磨毗尼) 등의 법을 취하여 한결같이 마감 증험해 나가면 거의 혹 앞에 나타나는 광명이 있을 것이나 사는 지금 늙지 않았소.
그러나 우리 성인의 말씀에 이르기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가하다.”하였으며 사의 가문(家門)에도 역시 "소 잡는 칼을 내려뜨리고 당장에 부처를 이뤘다.”는 말도 있으니 사의 앞길은 상기도 한량이 없지 않소. 격(格) 밖에 위로 향하는 그 한 구멍에 이르러는 또 문자나 언어로써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시험 삼아 다시 생각하고 또 거듭 생각하기 바라오.
개중(個中)의 설은 더욱 낙착이 없으니 만약 개중을 논한다면 어찌 초목 곤충의 유정(有情) 무정(無情)을 말할 게 있는가. 축생(畜生)과 아귀(餓鬼)에 이르러는 어떻게 개중을 들어 논하리오. 초목 곤충의 유정 무정에 대하여 그 소식을 탐득(探得)하면 장차 무엇을 하자는 거요?


 

[주D-001]선지식(善知識) : 지식은 그 마음을 알고 그 형(形)을 아는 뜻이다. 선(善)이란 나에게 유익함이 되어 나를 인도하는 것이다. 《법화문구(法華文句)》4에 “문명(聞名)을 지(知)라 하고 견형(見形)을 식(識)이라 하는데, 남이 나에게 보리(菩提)의 도를 더해주면 선지식이라 이름한다.” 하였고, 《법화경(法華經)》묘장엄왕품(妙莊嚴王品)에 “선지식이란 것은 바로 대인연(大夤緣)인데 이른바 화도(和導)하여 부처를 얻어보게 하여 아누다라삼막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발(發)하게 하는 것이다.” 하였음.
[주D-002]기봉(機鋒) : 석씨(釋氏)가 선(禪)을 말할 때 그 언사(言辭)는 적상(跡象)에 떨어지지 아니하면서 봉망(鋒鋩)이 예리한 것을 이름. 소식의 시에 “鈍根仍落箭鋒機”가 있음.
[주D-003]정문(頂門) : 침구(鍼灸) 법의 뇌문(腦門)으로부터 씻어내리는 침을 이름인데 이를 들어 행사(行事)의 액요(扼要)에 비유하여 씀.
[주D-004]두타(頭陀) : 범어(梵語)에 중을 칭하여 두타라 하는데 그 뜻은 번뇌를 두수(抖擻)한다는 것임. 세속에서는 승려의 행각 걸식(行脚乞食)하는 자를 말하며 또한 행자(行者)라고도 칭함.
[주D-005]윤척(倫脊) : 도리(道理)를 이름. 《시(詩)》소아(小雅) 정월(正月)에 “維號斯言 有倫有脊”이라 하였음.
[주D-006]노고추(老古錐) : 노고(老古)한 송곳도 능히 물건을 뚫는 용(用)이 된다는 것인데, 노고라는 것은 존칭이고 사가(師家)의 설득하는 기봉(機鋒)이 초준(峭峻)함을 말한 것임. 《허당백엄록(虛堂柏嚴錄)》에 “版齒生毛老古錐 夜深聽水爐邊坐”라 하였음.
[주D-007]치문(緇門) : 승려는 치의(緇衣)를 입으므로 승문(僧門)을 이름.
[주D-008]《소초(疏抄)》 : 《화엄대소초(華嚴大疏抄)》를 이름인데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抄)》의 약명으로 징관(澄觀)이 스스로 대소(大疏)를 해석한 것임.
[주D-009]묘유(妙有) : 불가의 용어인데 비유(非有)의 유(有)를 묘유라 함으로써 비공(非空)의 공(空)에 대하여 진공(眞空)이라 이름.
[주D-010]상승(上乘) : 상인(上寅)이라고도 하는데 대승(大乘)의 이명(異名)임. 《세친섭론(世親攝論)》에 “如是三藏 下乘上乘 有差別故 則成二藏”이라 하였음. 승(乘)은 운재(運載)로써 의(義)를 삼아서 교(敎)의 법을 이름한 것임.
[주D-011]수다장(修多藏) : 수다는 수다라(修多羅)인데 범어로 경(經)의 뜻임.
[주D-012]대기(大機)에 대용(大用) : 선가(禪家)의 종장(宗匠)이 언어로는 미치지 못하는 기미 징오(機微徵悟)를 들어 마음을 써서 학자(學者)에게 베푸는 것을 이름. 《곡향집(谷響集)》9에 “대기는 종사(宗師)에게 있고 학자에게 베푸는 것을 대용이라 한다.” 하였음.
[주D-013]살인(殺人)과 활인(活人) : 검(劍)을 지(智)에 비한 것인데 진성(眞性)의 기용(機用)을 부활(復活)하는 것을 이름.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6 암두전활조(巖頭全豁條)에 “不霜雖有殺人劍 但無活人劍”이라 하였음.
[주D-014]기신(起信) : 즉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약명임. 마명보살(馬鳴菩薩)이 지은 것으로 두 역(譯)이 있는데 하나는 양(梁) 진체(眞諦)의 역 1권이고 하나는 당(唐) 실차난타(實叉難陀)의 역이다. 정신(正信)을 일으키기 위하여 대승의 극리(極理)를 말한 것임.
[주D-015]염화(拈華)의 소식 : 《연등회요(聯燈會要)》석가모니불장(釋迦牟尼佛章)에 “세존(世尊)이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뽑아들어 중(衆)에게 보이니 모두 묵묵히 말이 없었는데 유독 가섭(迦葉)만이 파안미소(破顔微笑)하므로 세존이 말하기를 ‘나는 정법안장(正法眼藏)ㆍ열반묘심(涅槃妙心)ㆍ실상무상(實相無相)ㆍ미묘법문(微妙法門)에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교외(敎外)의 별전(別傳)이 있다.’ 하고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부촉(付囑)하였다.” 하였음.
[주D-016]황면(黃面)의 노자(老子) : 석가를 가리켜 말한 것임. 여래(如來)가 금색신(金色身)이 되기 때문에 황면이라 하였음. 《무문관(無門關)》에 “黃面瞿曇 傍若無人”이라 하였음.
[주D-017]주체(湊砌) : 포개진 것에 더 포갠 것으로 층첩비차(層疊比次)를 말한 것임.
[주D-018]달마(達摩) :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중으로 천축인(天竺人)인데 양 무제(梁武帝) 때에 영접하여 금릉(金陵)에 와서 불리(佛理)를 담론하고 강을 건너 위(魏)로 가서 숭산(崇山) 소림사(少林寺)에 들어앉아 면벽(面壁)한 지 9년 만에 화거(化去)하였다. 선종(禪宗)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주D-019]진단(震旦) : 인도의 고대에 중국을 진단이라 하였음. 《번역명의집(繙譯名義集)》에 “동방은 진(震)에 속하여 바로 해 돋는 지방이므로 진단이라 한다.” 하였음.
[주D-020]이조(二祖) : 선종(禪宗)을 이름인데 불교의 일파로서 곧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을 여래(如來)로부터 가섭(迦葉)에게 부촉(付囑)하여 제1조(第一祖)가 되었고 28세(世)를 전하여 달마(達摩)에 와서는 동토(東土)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양(梁) 나라 때 바다에 떠 광주(廣州)에 도달하여 숭산(崇山) 소림사(少林寺)에서 일생을 마쳤으며 의발(衣鉢)을 혜가(慧可)에게 전수하여 이조가 되었음. 혜가의 초명(初名)은 신광(神光)이요, 북위(北魏) 낙양(洛陽) 사람인데 달마대사가 소림사에 있을 때 도(道)를 청하기를 심히 진지하게 하여 눈이 내리는 어느날 밤에 그 왼팔을 자르니 달마가 보고 느껴서 허락하였다. 그래서 그 이름을 혜가라고 고쳤으며 뒤에 승(僧) 찬(璨)에게 전하여 삼조가 되고 도신(道信)이 사조가 되고 홍인(弘忍)이 오조가 되고 혜능(慧能)이 육조가 되었는데, 다 그 의발로써 서로 전하였음.
[주D-021]육조(六朝) : 오(吳)ㆍ동진(東晉)ㆍ송(宋)ㆍ제(齊)ㆍ양(梁)ㆍ진(陳)이 서로 이어 건강(建康)에 도읍하였으므로 육조라 이름.
[주D-022]천친(天親) : 사람 이름임. 범명(梵名)은 파수반두(婆藪槃豆), 또는 파수반타(婆修槃陀)라고 함. 혹은 천제(天帝)의 아우이기 때문에 천친이라 한다고 함.
[주D-023]함허(涵虛) : 조선 세종 때의 승(僧). 법호는 득통(得通), 속성(俗姓)은 유(劉)이고 충주(忠州) 사람임. 21세에 관악산(冠岳山) 의상암(義相庵)에서 중이 되었으며 세종대왕이 청하여 대자어찰(大慈御刹)에 머물기도 하였다. 저술로는 《원각소(圓覺疏)》ㆍ《반야경오가해설의(般若經五家解說誼)》ㆍ《현정론(顯正論)》ㆍ《반야참문(般若懺文)》ㆍ《윤관(綸貫)》 등이 있음.
[주D-024]생반삼분(生飯三分) : 생반은 출반(出飯)이라고도 함. 밥을 먹기 전에 중생을 위하여 밥을 조금 덜어 시여(施與)하는 것으로서 지계(持戒)하는 자의 법식임.
[주D-025]조주(趙州) : 제4권 주 38) 참조.
[주D-026]남악(南岳) 마조(馬祖) : 마조는 승명(僧名)으로 당(唐) 강서(江西) 도일선사(道一禪師)를 이름인데 남악양(南岳讓)의 법사(法師)가 되었다. 속성이 마씨이므로 당시에 마조라 칭하였고, 원화(元和) 중에 시호를 대적(大寂)이라 내렸다. 《전등록(傳燈錄)》6에 “육조(六朝) 혜능화상(慧能和尙)이 양(讓)에게 이르기를 ‘향후의 불법은 너의 변(邊)에서 나올 것이니 마구(馬駒)가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일 것이다.’ 하였는데, 그 뒤에 강서(江西)의 법사가 천하에 퍼져서 마조(馬祖)라 불렀다.” 하였음.
[주D-027]백장(百丈) 황벽(黃蘗) : 홍주(洪州) 황벽선사(黃蘗禪師)의 이름은 희운(希運)이요, 민인(閩人)인데 어렸을 때 복주(福州) 황벽산에서 출가(出家)하여 강서(江西)에 가서 백장사(百丈師)에게 참알(參謁)하여 종교(宗敎)를 부양(敷揚)한 지 무릇 40여 년에 그 도를 통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입실 제자(入室弟子)가 41인이었음.
[주D-028]세 곳에서 전심(傳心)할 때 : 선종(禪宗)을 이름. 세존(世尊)이 세 곳에서 가섭(迦葉)에게 전심하였는데 하나는 영산(靈山)에서의 염화미소(拈華微笑)요, 하나는 다자탑(多子塔)에서 반좌(半座)를 나눈 것이요, 하나는 쌍림수(雙林樹) 아래에서 관(棺) 속으로부터 발을 내민 것임. 《선종상감(禪宗象鑑)》에 “세존이 세 곳에서 전심한 것이 선지(禪旨)인데 한 시대에 말하는 자들은 교문(敎門)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禪是佛心 敎是佛語’라 한다.” 하였음.
[주D-029]당상(唐喪) : 미상함. 상(喪)은 장(裝)의 오자로서 당 나라 현장(玄裝)을 말한 것이 아닌가 함.
[주D-030]상계(像季) : 불가의 용어로 말세를 이름. 불멸(佛滅)한 뒤 5백 년은 정법(正法)이라 하고 정법 후 1천 년은 상법(像法)이라 하는데 법이 행할 때와 같다는 말임. 계(季)는 상법의 계세(季世)를 가리킴. 《서방요결후서(西方要訣後序)》에 “生居像季 去聖斯遙”라 하였음.
[주D-031]장자소(張子韶) : 송(宋) 염관인(鹽官人)으로 이름은 구성(九成)임. 소흥(紹興) 연간에 정시(廷試) 제일로 누천(累遷)하여 예부 시랑 겸시강(禮部侍郞兼侍講)으로 제수되었는데 진 회(秦檜)에게 거슬려 낙직(落職)하고 남안군(南安軍)에 거주하였다. 이에 앞서 경산(徑山) 승(僧) 종고(宗杲)가 선리(禪理)를 잘 이야기하여 종유하는 자가 많았는데 구성도 가끔 그 사이에 왕래하였다. 진회는 그가 자기를 거론할까 두려워서 사간(司諫) 첨대방(詹大方)을 시켜 그가 종고와 더불어 조정을 비방한다고 논죄하여 남안으로 귀양보냈던 것이다.
[주D-032]대혜(大慧) : 송(宋) 항주(杭州) 경산(徑山)의 불일선사(佛日禪師)로 이름은 종고(宗杲)인데 효종(孝宗) 융흥(隆興) 원년 8월 10일에 경단 명월당(明月堂)에서 입적하였다. 수(壽)는 75세, 시(諡)는 보각(普覺), 탑(塔)은 보광(寶光)이다. 《어록(語錄)》 30권이 있어 대장(大藏)에 칙입(勑入)하였음.
[주D-033]청허(淸虛) : 조선 승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법호임. 자는 현응(玄應)이고 속성(俗姓)은 최씨이며 안주(安州) 사람으로 묘향산(妙香山)에 오래 있어서 서산대사라 칭한다. 10세에 부친을 여의고 안주 목사를 따라 서울에 가서 성균관에서 공부하다가 동학(同學) 몇 사람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경전을 열람하다가 선가(禪家)의 돈오법(頓悟法)을 얻고 마침내 중이 되었음.
[주D-034]홍정(弘正) : 서산대사와 동시의 승인데 도력(道力)이 서산이나 한무외(韓無畏)의 위에 있었다고 함. 본집(本集) 권10 금선대시(金仙臺詩)의 완당 자주(自注)에 보임.
[주D-035]주굉(袾宏) : 명 나라 운서대사(雲棲大師)의 이름. 자는 불혜(佛慧), 호는 연지(蓮池)임. 처음에는 유생(儒生)으로 있었는데 30세 이후에 출가하여 다년간 행각(行脚)한 나머지 항주(杭州)의 운서산(雲棲山)에 머물러 선림(禪林)을 창건하고 염불을 장려하여 계율(戒律)을 엄히 하였음. 신종(神宗) 만력 43에 81세로 입적하였으며 32종의 저서가 있음.
[주D-036]덕청(德淸) : 명 나라 금릉(金陵) 전초인(全椒人)으로 속성은 채씨(蔡氏), 이름은 덕청, 자는 증인(澄印), 호는 감산(憨山)임. 11세에 출가의 뜻을 품고 이듬해 보은사(報恩寺) 서림(西林) 영녕(永寧)에게 투신하여 경교(敬敎)를 송습(誦習)하며 또 유학(儒學)을 닦다가 19세에 서하산(棲霞山) 운곡법회(雲谷法會)에 참알(參謁)하여 참선의 뜻을 결심하고 영녕에게 청하여 삭발하였음. 세상에서는 감산대사라 칭함. 저술로는 《감산대사몽유전집(憨山大師夢遊全集)》이 있음.
[주D-037]성공(性空) : 일본 승임. 《日本高僧傳》에 보임.
[주D-038]진묵(震黙) : 승명(僧名)은 일옥(一玉). 조선 때 만경(萬頃) 사람임. 7세에 출가하여 전주(全州) 서방산(西方山) 봉서사(鳳棲寺)에서 불경을 배워 글을 한번 보기만 하면 외웠다. 득도(得道)하여 신기한 이적(異迹)의 전설이 파다하였으며, 72세에 입적하였다. 저술로는 《어록(語錄)》이 있음.
[주D-039]환성(喚醒) : 속성(俗姓)은 정(鄭)이요, 충주(忠州) 사람임. 12세에 미지산 용문사(龍門寺)에서 중이 되어 상봉정원(霜峯淨源)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17세에 월담설제(月潭雪霽)의 법을 이어 경전을 힘써 연구하였음. 그 후 금산사(金山寺)에서 화엄대법회(華嚴大法會)를 베푸니 모인 학승(學僧)이 1천 4백 명에 달하였음. 저술로는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와 《환성시집(喚醒詩集)》이 있음.
[주D-040]설파(雪坡) : 속성은 이(李)요, 무장(茂長) 사람인데 어려서 어버이를 잃고 19세에 선운사(禪雲寺) 희섬(希暹)에게 계(戒)를 받아, 호암(虎巖)의 법을 잇고 33세에 용추사(龍湫寺) 판전(板殿)에서 개강(開講)하여 십여 년 동안 정업(淨業)을 닦다가 일생을 마쳤다. 나이는 85세, 법랍(法臘)은 66세요, 저술로는 《구현기(鉤玄記)》가 있음.
[주D-041]썩은……것 : 《장자(莊子)》추수(秋水)의 “夫鵷鶵 發於南海 而飛於北海 非梧桐不止 非練實不食 非醴泉不飮 於是鴟得腐鼠 鵷鶵過之 仰而視之曰嚇”에서 나온 말임.
[주D-042]화성(化城) : 불가어인데 일시에 화작(化作)한 성곽을 이름. 《법화경(法華經)》에 “화성의 유품(喩品)이 있는데 그 비유한 뜻은 일체 중생이 성불(成佛)하는 곳을 보소(寶所)라 하며 이 보소에 이르자면 길이 하 멀고 험악하다. 그러므로 가는 사람이 피로하여 퇴각할까 두려워서 가는 도중에 하나의 성곽을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머물러 쉬면서 그곳에서 정력을 길러 마침내 보소에 이르게 한 것이다.” 하였음.
[주D-043]도리(闍黎) : 범어(梵語)임. 또한 아도리(阿闍黎)라고도 하는데 승도(僧徒)의 스승이다. 행실을 바르게 하여 능히 제자의 품행을 규정(糾正)하는 승려를 이름.
[주D-044]회광반조(回光反照) : 도가(道家)의 수련하는 법을 이름. 《참동계(參同契)》 주(注)에 “사람이 능히 회광반조하여 출식(出息)은 미미(微微)하고 입식(入息)은 면면(綿綿)하여 간단(間斷)하게 말면 신기(神氣)가 뿌리로 돌아가서 오래오래 하면 호흡이 다 없어진다.” 하였음. 《태상순양진군경(太上純陽眞君經)》에 “回光返照中 神歸氣穴裏”라 하였음.
[주D-045]사분율(四分律) : 경(經)의 이름. 사율(四律)의 하나로 60권인데 오부(五部) 중 담무덕부(曇無德部)의 율장(律藏)임. 본서(本書)에 대한 주석 및 본서에 관한 저술은 《사분율소(四分律疏)》 6권 도부(道覆)의 찬(撰)과 《사분율소》 4권 혜광(慧光)의 찬과 《사분율소》 20권 당(唐) 법려(法礪)의 찬 등이 있음.
[주D-046]오분율(五分律) : 서명(書名)으로 《미사새부화해오분율(彌沙塞部和醢五分律)》의 약명인데 오부율(五部律) 중 미사새부의 율본(律本)을 말한 것임.
[주D-047]소 잡는……이뤘다 : 《산당사고(山堂肆考)》에 “도아(屠兒)가 열반회상(涅槃會上)에 있어 도도(屠刀)를 내려뜨리고 그 자리에서 부처가 되었다.”라 하였는데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빠름을 말한 것임.

 

임하필기 제27권
춘명일사(春明逸史)
불립(佛笠)


불립은 지금의 승립(僧笠)으로, 음(音)이 변하여 굴립(屈笠)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 제도는 멀리 당(唐)나라 때의 포대화상(布袋和尙)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우리나라의 무학(無學), 유정(惟正) 등의 스님들이 모두 착용하였는데, 이는 공복(公服)에 갖추어 쓴 것인 듯하다. 그런 까닭에 삿갓 위에 작은 대(臺)가 있는데, 이것은 옥로(玉鷺)를 붙이는 곳이다. 내가 서산대사(西山大師)의 화상(畫像)을 보고서 그것을 알았다.


 

[주D-001]굴립(屈笠) : 굴갓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벼슬을 가진 중이 쓰던 갓을 말한다. 대오리를 걸어 만드는데, 모자 위가 둥글게 되어 있다.
[주D-002]포대화상(布袋和尙) : 중국 후량(後梁)의 고승(高僧)이다. 배가 불룩하게 나온 뚱뚱한 몸에 지팡이를 들고 온갖 일용품을 담은 포대(布袋)를 둘러메고 거리를 다니며 남의 길흉과 날씨를 점쳤다고 한다.

임하필기 제27권
춘명일사(春明逸史)
불립(佛笠)


불립은 지금의 승립(僧笠)으로, 음(音)이 변하여 굴립(屈笠)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 제도는 멀리 당(唐)나라 때의 포대화상(布袋和尙)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우리나라의 무학(無學), 유정(惟正) 등의 스님들이 모두 착용하였는데, 이는 공복(公服)에 갖추어 쓴 것인 듯하다. 그런 까닭에 삿갓 위에 작은 대(臺)가 있는데, 이것은 옥로(玉鷺)를 붙이는 곳이다. 내가 서산대사(西山大師)의 화상(畫像)을 보고서 그것을 알았다.


 

[주D-001]굴립(屈笠) : 굴갓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벼슬을 가진 중이 쓰던 갓을 말한다. 대오리를 걸어 만드는데, 모자 위가 둥글게 되어 있다.
[주D-002]포대화상(布袋和尙) : 중국 후량(後梁)의 고승(高僧)이다. 배가 불룩하게 나온 뚱뚱한 몸에 지팡이를 들고 온갖 일용품을 담은 포대(布袋)를 둘러메고 거리를 다니며 남의 길흉과 날씨를 점쳤다고 한다.
청성잡기 제4권
성언(醒言)
승과(僧科)와 보우(普雨)

명종조에 선종(禪宗), 교종(敎宗) 두 종의 승과를 개설하고 보우가 시관(試官)이 되었는데, 청허당(淸虛堂)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이 선과에 장원을 하고 송운당(松雲堂) 유정(惟政 사명대사(四溟大師))이 교과에 장원을 하였다. 보우가 뽑은 인물이 이와 같으니, 그도 범속한 중은 아니다. 보우는 허응당(虛應堂)이라 자칭하였는데 나중에 제주도로 유배 가서 죽었고 두 종의 승과도 폐지되었다.

 

청성잡기 제4권
성언(醒言)
승과(僧科)와 보우(普雨)


명종조에 선종(禪宗), 교종(敎宗) 두 종의 승과를 개설하고 보우가 시관(試官)이 되었는데, 청허당(淸虛堂)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이 선과에 장원을 하고 송운당(松雲堂) 유정(惟政 사명대사(四溟大師))이 교과에 장원을 하였다. 보우가 뽑은 인물이 이와 같으니, 그도 범속한 중은 아니다. 보우는 허응당(虛應堂)이라 자칭하였는데 나중에 제주도로 유배 가서 죽었고 두 종의 승과도 폐지되었다.

   

   
   
해사록(海槎錄) 상
정미년(1607, 선조 40) 정월 작음
20일(갑신)


맑음. 아침에 수회촌을 떠나 조령(鳥嶺)을 넘어 용추(龍湫)에서 잠깐 쉬었다가 문경현(聞慶縣)으로 달려 들어가니, 해가 아직 저물지 않았다. 그리고 가랑비가 살짝 뿌렸다. 일행의 군관(軍官)ㆍ역관(譯官)들을 모아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김효순(金孝舜)이 큰 사발로 연달아 10여 잔이나 마셨다. 비변사 차관(備邊司差官)이, 송운(松雲) 스님이 일본 중에게 보내는 편지 및 예물(禮物)을 가지고 나중에 도착하였다. 이어서 본가의 평안하다는 편지를 받아 보았다.
〈송운(松雲) 스님의 편지는 다음과 같다.〉
원광원길(圓光元佶)장로(長老)에게 보냄 : 일찍이 노형과 더불어 서래곡(西來曲) 한 곡조를 불던 때가 어제 같은데, 춘추(春秋)가 두 번 바뀌었으니, 무정한 세월이 돌 불과 번개 그림자 같아 길이 탄식할 뿐입니다. 어찌하리까? 멀리서 생각건대, 노형은 무위진인(無位眞人)의 면목 위에서 능히 큰 광명을 발하여 모든 섬의 생령을 도탈(度脫)하였을 것이니, 훌륭하고도 훌륭합니다. 전번에 내가 선사(先師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유체(遺諦)로써 남쪽으로 대마도(對馬島)에 가서 놀 적에, 귀국에까지 가서 원광(圓光) 노형과 서소(西笑)장로(長老)ㆍ오산(五山)의 제덕(諸德)을 만나보게 되었는데, 임제(臨濟)의 광풍(狂風)을 성대히 논하여 종지(宗旨)를 별도로 밝힌 것이 또한 많지 않았습니까? 나의 본원(本願)은 다만 적자(赤子)를 다 데려옴으로써 선사의 ‘생령(生靈)을 보제(普濟)하라.’는 유결(遺訣)에 부응(副應)하려는 것이었는데,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매 서운함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귀국한 뒤부터 노병이 이미 깊어졌으며 그 길로 묘향산(妙香山)에 들어가, 스스로를 지키며 죽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는데, 마침 사신이 간다는 말을 듣고 즉시 한훤(寒暄 추운 것과 더운 것. 곧 문안 드리는 것) 두 글자를 가지고 멀리 노형의 조용한 봄잠[春睡]을 깨우는 것이니, 바라건대 형께서 나의 본 뜻을 어기지 말고 마땅히 도생원(度生願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소원)으로써 대장군에게 고하여 생령을 모두 돌려 보내어 주시어, 옛날의 맹세를 저버리지 않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변변치 못한 물품은 모두 웃고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운손(雲孫 문종이의 별칭) 1권, 청향(淸香) 4봉(封), 진홀(眞笏) 6속(束), 약삼(藥蔘) 1근, 관성(管城 붓의 별칭) 20자루.
승태서소(承兌西笑)장로에게 보냄 : 해성(海城)에서 한 번 헤어진 뒤, 성상이 두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거센 파도가 하늘에 닿을 듯하니, 머리를 돌이켜 본들 어쩌겠습니까? 모든 섬에 봄빛이 찾아왔습니다. 멀리서 생각건대, 노형은 때에 따라 진복(珍福)하고 도안(道眼)도 더욱 높아졌으리라 여겨집니다. 뒤바뀐 초청(이쪽에서 먼저 초청하는 것)을 하여 곧 서래(西來)의 인(印)을 찍어주어, 해외의 중생이 모두 은택을 받아 모든 부처의 막대한 은혜에 보답하게 하였으니, 경희(慶喜 문수보살의 딴 이름)의 이른바, ‘이 깊은 마음을 가지고 진찰(塵刹)을 받드는 것이 부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를 또한 체험하지 않습니까? 송운은 돌아온 뒤 노쇠한 병이 찾아들어 묘향산에 들어가 이 보신(報身 불가에서 말하는 육신(肉身))을 마치기로 기약하였더니, 바다를 건너가는 사신의 일행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안부편지를 부치는 것입니다. 전번에 송운이 선사의 유체(遺諦)를 받들어 보제(普濟 널리 중생을 건짐)를 임무로 삼고, 남쪽으로 대마도에서 놀다가 드디어 귀국에 가서 녹원(鹿苑) 대장로ㆍ서소(西笑) 사형(師兄)ㆍ원광장로ㆍ오산의 제덕(諸德)을 만나보고 종지(宗旨)를 성대히 논하여 소종래(所從來)를 밝혔는데, 형도 선사의 정안(正眼)에 욕되지 않았고, 나도 동종(同宗)의 일맥임을 알게 되어 동해(東海)에 매우 빛이 났었습니다. 이것 또한 숙연(夙緣)이지 어찌 인력으로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전번에 내가 이미 보제(普濟)를 임무로 삼고 갔으니, 이역(異域)에 빠져 있는 조선의 적자는 비유컨대, 물불[水火]에 빠진 사람과 같은 것인데, 이를 건져내지 못하고서야 마음이 어찌 만족하겠습니까? 장군이 애초엔 쇄환해 주려 하였는데, 마침내 실천하지 않아,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침 사신의 행차가 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니, 바라건대, 형께서 대장군에게 잘 보고하여 그때 돌려 보내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실어 보내어, 이전에 했던 말을 어기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이것이 노승에게 관계되는 일은 아니나, 사람을 건지려는 생각으로 멀리 돌아다니다가 대장군과 모든 장수, 모든 대장로를 알았기로 감히 이렇게 아뢰는 것이니, 형께서 잘 살펴주기 바랍니다. 변변찮은 물품은 웃고 받아주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운손 2권, 청향 4봉, 진홀 6속, 약삼 3근, 관성 30자루.
현소(玄蘇)에게 보냄 : 작별한 것이 어제 같은데, 성상이 두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서로 그리워하는 일념은 잠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다만 ‘온갖 풀의 위에 조사(祖師 달마대사(達磨大師))의 뜻이 있다’는 것으로써 스스로 위로하고 있을 뿐이니, 나머지야 어찌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고덕(古德 덕이 높은 옛 스님)은 망주정(望州亭)에서 서로 만나 보기도 하고, 오석령(烏石嶺)에서 서로 보기도 하였답니다. 그러므로, 도안(道眼)으로 본다면, 장로의 눈으로 송운이 보고, 송운의 눈으로 장로가 본다 하겠거늘 어찌 달리 생각하겠습니까? 나는 서쪽으로 돌아와 쇠병(衰病)이 찾아들어 서쪽에 있는 묘향산으로 들어갔으며, 그대로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사신이 간다는 말을 듣고 서로 그리는 문자를 보내서 노형의 안부를 만 분의 일이라도 물으려는 것입니다. 전번에 내가 선사의 유결(遺訣)에 따라 남방을 돌아다니다가, 귀도(貴島)에까지 가서 형 및 유천(柳川)과 더불어 일본에 가서 원광장로ㆍ오산의 제덕(諸德)을 만나 종지(宗旨)를 성대히 논하고, 또 소종래를 밝혔으니, 좋기는 좋으나 본원(本願)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으므로 서운함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바라건대, 형께서 다시 힘을 다해 생령들을 모두 돌려보내 주되 전번의 언약대로 하여주신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변변찮은 물품은 모두 웃으며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태수(太守)에게 고하는 문후(問候) 편지 : 병으로 깊은 산중에 누워 있느라고, 편지를 올리지 못하니,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또 뒤늦게 들으니, 유천(柳川)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몸이 건강하였는데, 이처럼 쉽게 죽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마음이 아픕니다. 풍전(豐前)에서 작별할 적에 청기와[靑瓦]ㆍ고연(古硯) 등 약간의 물품 구득을 말씀하셨는데, 내가 서쪽으로 돌아온 뒤부터는 곧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병으로 나다니지 못하였기에 사신의 편에 마련하여 부치지 못하니,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이 뜻으로 여러분에게 알려주기를 바랍니다.
운손 1권, 청향 4봉, 진홀 5속, 약삼 1근, 붓 20자루.
숙로선사(宿蘆禪師)에게 보낸 편지 : 도(道)는 형체가 없는 것인데 무슨 막히는 바가 있겠으며, 마음은 형적(形迹)이 없는 것인데 누가 감히 보내거나 붙잡겠소. 보내거나 붙잡음도 없고 형체와 자취도 없지만, 흥이 나면 정신과 더불어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 리 밖에 떨어져 있으면서도 같이 서로 보는 것이 스님과 나인데, 또한 어찌 우리 사이에 말할 필요가 있소. 스님도 이런 안목으로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변변찮은 물품이지만 모두 웃고 받아주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운손 1권, 청향 3봉, 진홀 3속, 붓 10자루, 약삼 1근.


 

[주D-001]도탈(度脫) : 불가(佛家)의 말로서 생사(生死)의 바다를 건너서 미계(迷界)를 벗어나 오계(悟界)에 들어가는 것을 일컫는다.
[주D-002]임제(臨濟) : 임제종(臨濟宗)의 준말. 선종(禪宗) 5가(家)의 하나. 남악(南嶽) 아래의 제4대 임제의현(臨濟義玄)을 말한다.
[주D-003]서래(西來)의 인(印) : 서래(西來)는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서천축(西天竺)에서 멀리 중국으로 온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인(印)은 불법의 지혜를 가리킨다.
[주D-004]진찰(塵刹) : 티끌 같이 많은 세계. 곧 온 우주 세계.

   

   
   
해유록(海遊錄) 하
부 문견잡록(附聞見雜錄)
부 문견잡록(附聞見雜錄)


일본은 8도(道) 66주(州) 6백 34군(郡)이 있었는데, 용명천황(用明天皇) 시대에 5기(畿) 7도(道)로 정하였고, 문무천황(文武天皇) 때에 나누어 66국(國)으로 만들었으니 산성(山城)ㆍ태화(太和)ㆍ하내(河內)ㆍ섭진(攝津)ㆍ화천(和泉)은 곧 기내(畿內) 5국이요, 이하(伊賀)ㆍ이세(伊勢)ㆍ지마(志摩)ㆍ미장(尾張)ㆍ삼하(參河)ㆍ원강(遠江)ㆍ준하(駿河)ㆍ이두(伊豆)ㆍ갑비(甲斐)ㆍ상모(相模)ㆍ무장(武藏)ㆍ안방(安房)ㆍ상총(上總)ㆍ하총(下總)ㆍ상륙(常陸)은 곧 동해도(東海道) 15국이요, 근강(近江)ㆍ미농(美濃)ㆍ비탄(飛驒)ㆍ신농(信濃)ㆍ상야(上野)ㆍ하야(下野)ㆍ육오(陸奧)ㆍ출우(出羽)는 곧 동산도(東山道) 8국이요, 약협(若狹)ㆍ가하(加賀)ㆍ월전(越前)ㆍ월중(越中)ㆍ월후(越後)ㆍ능등(能登)ㆍ좌도(佐渡)는 곧 북륙도(北陸道) 7국이요, 단파(丹波)ㆍ단후(丹後)ㆍ단마(但馬)ㆍ인번(因幡)ㆍ백기(伯耆)ㆍ출운(出雲)ㆍ석견(石見)ㆍ은기(隱岐)는 곧 산음도(山陰道) 8국이요,파마(播摩)ㆍ미작(美作)ㆍ비전(備前)ㆍ비중(備中)ㆍ비후(備後)ㆍ안예(安藝)ㆍ주방(周防)ㆍ장문(長門)은 곧 산양도(山陽道) 8국이요, 기이(紀伊)ㆍ담로(淡路)ㆍ아파(阿波)ㆍ찬기(讚岐)ㆍ이예(伊豫)ㆍ토좌(土佐)는 남해도(南海道) 6국이요, 축전(筑前)ㆍ축후(筑後)ㆍ풍전(豐前)ㆍ풍후(豐後)ㆍ비전(肥前)ㆍ비후(肥後)ㆍ일향(日向)ㆍ대우(大隅)ㆍ살마(薩摩)는 서해도(西海道) 9국이다.
그 지방을 말하면 동으로 육오(陸奧)에서부터 서로 비전(肥前)에 이르기까지가 4천 2백 리요, 남으로 기이(紀伊)에서부터 북으로 약협(若狹)에 이르기까지가 9백 리에 지나지 아니하니, 그 육지가 서로 연한 땅이 동서는 길고 남북은 짧다. 그러나 바다 가운데 있는 모든 도(道)의 영량(永良)ㆍ다미(多彌)ㆍ일수(一艘)ㆍ팔장(八丈)ㆍ증도(甑島)와 같은 등속이 별처럼 벌여 있고 바둑처럼 분포되어 지역이 혹 대마도보다 배나 되는 곳도 있으면서 모두 66주(州)에 들지 아니한 것인데, 서로의 거리는 또한 각각 수천 리가 된다. 도주(島主)가 된 자는 군(君) 또는 후(侯)라고 부르고 일본의 통치를 받아서 군대를 공급하고 군함을 연습한다. 그러므로 재화나 곡식과 같은 백 가지 토산물이 국중에 모여든다. 일본이란 나라가 생긴 때로부터 문득 황제(皇帝)라 칭하여 연호(年號)를 가졌고, 역서(曆書)를 따로 만들었으니 조타(趙佗)의 황옥좌둑[黃屋左纛]에 비하면 훨씬 나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 내가 우삼동과 더불어 지리(地理)를 논의하다가 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육오주(陸奧州)는 넓고 크기가 가없어서, 북으로 하이도(蝦蛦島)와 접경이 되어 동서가 50일의 길이요, 남북이 60일의 길이 된다 하는데, 참으로 그러합니까?”
하니, 그가 말하기를,
“전하는 사람이 잘못 말한 것입니다. 육오주가 다른 주에 비하면 조금 크기는 하나 그 지방은 수일의 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북쪽에 과연 하이도가 있는데 송전수(松前守)라 칭하는 자가 관리를 합니다. 본래 큰 지방이 아니며 토질이 나빠서 살 수가 없는 곳입니다. 주민들은 얼굴이 검고 털이 있으며 글도 몰라서 동물과 같은데 다만 의복과 언어가 일본입니다.”
하였다.
○ 대마도에 있을 때에 멀리 바라보니, 동남 바다 위에 주먹 같은 섬이 있어 일기도(壹岐島)와 서로 대치한 듯 하였다. 이곳이 어느 지역인지를 물으니, 왜인이 말하기를,
“그곳은 은려도(驢島)라 합니다. 땅이 넓고 인구가 많으며 축전주(筑前州)의 관할에 속하는데, 대마도의 동쪽에 있어 수로(水路)로 6백여 리입니다.”
하였다.
○ 일본의 지형은 천지의 정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와 같으면서 조금 높다. 오직 대마도가 우리나라 남쪽에 있는데 수로로 5백 리 거리에 불과하다. 대마도로부터 동북으로 3천여 리를 가면 대판에 당도하고, 대판에서 또 동북으로 1천 6백 리를 가면 강호에 도착한다. 강호의 땅은 동남이 다 큰 바다로 그 북쪽의 육지가 멀어서 바로 야인(野人)의 경계에 이른다고 하니, 이것으로 미루어본다면 우리나라의 강원도 여러 고을이 일본의 산성(山城)ㆍ대화(大和) 등지와 서로 맞서고 강호 이상은 함경도의 육진(六鎭)에 맞먹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동쪽에 위치하여 해와 달이 뜨는 곳으로 가장 양명(陽明)함이 되고, 아무리 춥더라도 우리나라의 함경도와 같지는 않다. 사신의 행차가 10월에 강호에 머물렀는데도 추위와 물색(物色)이 우리나라 삼남(三南)의 9, 10월과 같았다.
○ 왜인이 말하기를,
“만약 육오(陸奧)로부터 바로 조선의 동북으로 오면 수로(水路)는 매우 가까우나 북쪽에 바람이 높고 바다에 섬들이 없으므로 배가 다니지 못한다 합니다.”
하였다. 또 들으니,
“수길(秀吉)이 조선을 침범할 적에 육오(陸奧)로부터 조선의 국경으로 나오려 하였는데, 바다 가운데 무릎까지 빠지는 진흙 구덩이가 3백 리나 되므로 대울타리[竹籬]를 펴고 군사와 말이 건너가려고 계획하였다가 마침내 계획대로 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는데, 그 말이 괴이하고 허탄하여 족히 믿을 것이 못되었다. 그러나 대개 지세를 논하면 가까운 지름길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예로부터 두 나라에서 한번도 길을 열지 아니한 것은 반드시 험하고 어려움이 있는 때문이다.
○ 내가 우삼동과 필담(筆談)을 할 때에 묻기를,
“일본이 큰 바다 가운데 있는데 혹 《산해경(山海經)》에 기록된 괴이한 형상을 가진 이상한 무리들이 경내에 표류되어 온 일이 있는가?”
하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해외 여러 나라에서 장기로 찾아와 장사하는 이들은 아란타(阿蘭陀)와 서양국(西洋國) 사람들인데, 의복과 언어는 비록 같지 않으나 형상은 별로 다른 것이 없고, 단 10여 년 전에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배가 파손되어 표류하다가 왔기 때문에 그 배와 행장은 하나도 수습된 것이 없고, 한 남자가 언덕에 닿아 살아났는데 머리털은 긴데 거두지 아니하고 드리워서 이마를 덮었고, 두 다리는 모두 푸른빛인데 무릎에는 슬개골(膝蓋骨)이 없어서 모양이 죽간(竹竿) 같고, 오곡을 먹지 않고 소금 두어 되를 먹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은 때문에 마침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대황경(大荒經)》에 현고국(玄股國)이 있다 하였는데 다리가 청색인 것은 현고라 할 수 있겠으나 다만 소금을 먹는다는 글이 없으니, 상고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 또 묻기를,
“동해 가운데 여인의 나라가 있다 하니, 혹 보고 들은 적이 있습니까?”
하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일본이 바다 가운데 모든 나라로부터 수로로 통하는데, 만약 여인국이 있다면 천백 년 동안 고로(故老)들이 서로 전하는 말에 어찌 그 사람을 한번도 본 이가 없겠습니까. 일본의 동남 바다 가운데 팔장도(八丈島)란 곳이 있어 땅이 크고 백성이 많은데 모두 여자이고 남자는 열에 2, 3인밖에 되지 아니하므로 속칭 여자의 고을이라고 부르니, 옛말에 이른바, 여인국이란 것이 여기에서 나온 것 같은데, 지금은 일본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상고에 신인들이 기록한 것은 모두 바다 섬의 원시 시대를 말한 것이므로 그 지방의 풍속과 인물이 혹 근사한 대로 이름을 지었지만, 지금은 풍속과 습성이 변하여 백 가지에 한 가지도 맞는 것이 없다. 수길이 통합한 이후로부터 모두 나라가 일본에 통합된 중에 반드시 옛날의 그러한 종류들이 많았을 것이다.
○ 내가 묻기를,
“기이주(紀伊州)에 서불(徐巿)의 무덤과 서복(徐福)의 사당이 있다 하는데 서복 등이 일본에 들어온 것은 진시황(秦始皇)이 책을 불태우기 전이었으므로 세상에서 전하기를, 일본에는 고문(古文)의 진본이 있다 하는데, 지금 수천 년에 이르도록 그 글이 천하에 나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이 말은 허황한 것입니다. 구양수(歐陽脩)도 이런 말을 한 바가 있으나 모두 이치에 가깝지 않은 말입니다. 대저 성현의 경전은 천지간에 지극한 보배로서 귀신도 그것을 능히 감추지 못하므로 《고문상서(古文尙書)》가 혹 노(魯) 나라 벽에서 나오고 혹은 대항두(大杭頭)에서 나온 것입니다. 일본이 비록 멀리 바다 가운데 있으나 그 책이 있다면 반드시 나올 이치가 있고, 일본의 인심이 자랑하기를 좋아하는데, 만약 옛 성인의 남긴 책이 홀로 이 땅 위에 감추어져 있어 천만 세의 보배가 될 만한 것이 있다면 비록 국법을 엄하게 세워도 그것을 외국에 파는 것을 금하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그 책의 파는 것을 금한 일이 처음부터 없었는데 이겠습니까.”
하였다. 서복이 바다에 들어온 뒤에 어디로 갔는지를 알지 못하는데 세상에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서복의 자손이 지금 왜황(倭皇)이 되고, 5백 명의 동남 동녀는 각각 씨족(氏族)이 되어 왜국이 생겼다.”
하니, 이것은 근거가 없는 말이다. 대저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토지가 있으면 사람이 있고, 사람이 있으면 임금이 있기 마련이다. 왜국의 땅이 모든 섬을 합병하여 자못 수천만 리가 되어 아름다운 산, 고운 물, 기름진 토지에 백가지 곡식이 풍부하고 만 가지 보화가 자연스럽게 나는데, 이것이 어찌 진 나라 시대를 기다려서 사람이 있게 된 것이며 서복을 기다려서 임금이 있겠는가. 서복의 부자가 본시 방외(方外)의 이인(異人)으로서 바다 가운데 살 만한 땅이 있는 것을 보고서는 진 나라를 피할 꾀를 내어 불사약을 캔다는 말로서 진시황을 달래어 배와 동남 동녀를 얻어가지고 간 것이다. 그때에 중국에서는 왜라는 땅이 있고 그 땅이 풍족하고 즐거움이 이와 같은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서복이 일본에서 살다가 일본에서 죽었다는 것은 믿을 만하나, 지금 일본에 사는 사람들이 그 자손이다거나, 5백 명 남녀의 후손이 다 성을 바꾸었다는 것은 시대가 멀어서 알 수가 없다.
○ 국중에 이름난 산수를 내가 왕래하면서 본 것은 부사산(富士山)ㆍ비파호(琵琶湖)보다 큰 것이 없고, 영(嶺)의 험한 것으로는 홀로 상근령(箱根嶺) 같은 것이 없다. 기타 애탕산(愛宕山)ㆍ접침령(摺針嶺)ㆍ금절하(金絶河)ㆍ육향강(六鄕江)의 등속은 모두 논할 것이 없고, 육오(陸奧)의 금화산(金華山), 하야(下野)의 일광산(日光山), 이세(伊勢)의 열전산(熱田山), 기이(紀伊)의 웅야산(熊野山)은 모두 명산으로 드러났으나, 내가 눈으로 본 것이 아니다. 왜인의 풍속이 거짓이 많고 허황하여 신이(神異)한 말을 하기를 좋아하여 이르기를,
“부사산은 하루에 절로 솟아났고, 비파호는 하루 동안에 절로 열렸으니, 이것은 신령의 조화로 설치된 것이므로 사방에서 유람하러 오는 자가 반드시 재계한 뒤에야 앙화를 면하는데, 부사산은 재계를 열흘 동안 하여야 되고 비파호는 하루 동안 재계를 하여도 된다.”
하여, 내가 듣고 웃기를,
“만약 그렇다면 부사산비파호 뿐만 아니라, 천지간에 흙 한 줌, 돌 한 덩이가 조화의 신이 만들지 아니한 것이 어느 것이 있는가.”
하였다. 또 들으니,
“열전산(熱田山)에는 태진원(太眞院)이 있다.”
하였다. 이것은 당 명황(唐明皇)이 꿈에 태진원에서 놀았다는 말을 빙자하여 열전산을 봉래산(蓬萊山)으로 삼으려고 궁관(宮觀)을 지어서 신선의 경계라고 하는 것이다. 웅야산(熊野山)의 서복사(徐福祠)도 또한 이런 종류가 아닌 줄 어찌 알겠는가.
○ 국중의 모든 산이 동북에서 시작하였으므로 그 지세를 보면 역시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다. 대저 산의 형상이 수려(秀麗)하여 높고 큰 산이라도 반드시 기이하고 곱고 뾰족하여 웅장하여 험하고 원대한 형세가 없고, 그 밖에는 낮은 산이 들을 안았고 얕은 멧부리가 돌아서 거의 다 명랑하고 곱고 산뜻하여 그림 속에 있는 것과 같고, 물도 또한 근원이 크지 않고 빙빙 돌고 맑고 푸르러서 파서 만든 것과 같다. 그 인물들이 민첩하고 명석한 자는 많은데 질박하고 두터운 자는 적으니, 대개 강산의 기운을 얻은 때문이다.
○ 일본의 역법(曆法)이 우리나라와 더불어 대동소이한데 자기네가 말하기를, 그 땅이 해 뜨는 동쪽에 있으므로 밤낮의 길고 짧은 것이 같지 아니하고 달의 크고 작은 것이 서로 틀림이 있다 한다. 내가 일찍이 그 동지(冬至)를 본 즉, 우리의 동지와 하루를 두고 먼저하고 뒤에 두는데, 섣달 그믐날은 다름이 없었다. 그들이 날과 달은 혹 틀리면서 해[歲]는 홀로 변하지 않는 것은 자못 알 수 없는 일이다.
○ 성여필(成汝弼)이 천문관측을 할 줄 알아서 바다 위에서 별을 바라보다가 가리켜 말하기를,
“남방 칠수(七宿) 밖에 여러 큰 별이 있는데, 이것은 다 우리나라에서 보지 못하던 바이니, 아마 이것은 노인성(老人星)인 듯합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옛말에, ‘노인성을 보는 자는 수(壽)가 백 살 넘는다.’ 하는데, 지금 그대는 이번 걸음에 오래 살게 되었구나.”
하였다. 이장흥 사성(李長興思晟)은 또한 천문을 아는 사람인데, 말하기를,
“천문서(天文書) 가운데 노인성은 현증(現證)이 없다.”
하였다. 우삼동이 옆에 있다가 말하기를,
“나는 천문가[甘石]의 말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일본이 궁벽하게 바다 가운데 있으나 능히 별[星] 분야(分野)의 법으로써 국내의 모든 주(州)에 배정하여 각각 별과 지방의 정한 위치가 있어 국사에 기록되어,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지방의 길하고 흉한 것이 또한 능히 그럴 듯하게 징험이 있는 것이 중국 사람의 별 분야의 말과 같은 점이 있으니, 그 이치를 진실로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 말이 심히 우습다. 그러나 천문의 별이 다만 중국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닌즉, 중국 구주(九洲) 밖에 천문의 분야로서 자기 국토의 길흉을 점치는 것이 또 홀로 일본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 사시의 명절은 우리나라와 서로 같은데, 8월 초하룻날과 10월 초하룻날도 또한 속절(俗節)이 되고, 단오와 백중날이 가장 가절(佳節)이 된다. 단오에는 집집마다 기를 세워서 전쟁을 익히는 장난을 하니, 우리나라의 두 남자가 씨름을 하는 종류와 같은 것이다. 백중날에는 산에 올라가 등을 달고 노래하고 춤추고 즐기는데, 한 사람이 각각 등 하나씩 달아서 자손이 많은 자는 혹 수십 등에 이른다. 술과 음식을 많이 갖추어 집안 사람을 먹인다.
○ 겨울 추위가 맹렬하지 아니하여 예로부터 눈이 한 자 되도록 쌓일 때가 없고, 국가에도 얼음을 저장하는 법이 없다. 유일하게 부사산 상봉에는 사계절 내내 얼음이 있으므로 단옷날에 그것을 캐다가 천황과 관백의 궁에 바친다. 서민들은 얼음 모양의 떡을 만들어 그것을 먹으면서 더위를 막는 방법이라고 하니, 가소롭다.
○ 육오주(陸奧州)에는 황금이 난다. 금산(金山)이 바다 가운데 있는데 금을 캐는 자는 반드시 재계 목욕하고 신에게 제사지내어, 금 몇만 근(斤)을 얻겠다고 청한 후에 들어간다. 조금이라도 그 수량을 초과하면 반드시 그 배가 파손된다. 석견(石見)ㆍ좌도(佐渡)ㆍ단마(但馬) 등의 주에는 은이 생산되고, 비중(備中)ㆍ파마(播摩)에서는 구리쇠가 생산되고, 풍전(豐前)ㆍ풍후(豐後)에서는 철(鐵)이 생산된다. 섭진주(攝津州)에는 목화가 많고, 월전주(越前州)에는 흰 솜[綿]이 많고, 축전주(筑前州)에는 미곡(米穀)이 많고, 상모주(相模州)에는 재목이 많다. 일기(壹岐)의 포(布), 가하(加賀)의 비단, 미농(美濃)의 종이, 적관(赤關)의 벼루, 삼원(杉原)의 술, 우치(宇治)의 차(茶), 도포(韜浦)의 돗자리는 모두 국중의 명품이다. 갑비(甲斐)에서는 말이 나는데, 대부분 준마들이다. 총과 갈기를 깎아버리고 발에다가 짚신을 신겨서 다니게 한다. 장문주(長門州)에서는 소가 나는데 몸이 작고 색은 검다. 여기는 소를 잡는 법이 없는데도 산출되는 소가 농장에도 넉넉히 공급되지 못한다. 비전(備前)ㆍ미장(尾張)ㆍ살마(薩摩) 등 주에는 긴 창과 예리한 칼이 생산되어 천하의 좋은 기물이 되었다.
○ 바다에서 나는 어류 품종은 한결같이 우리나라 동해의 어류와 같은데, 석결명(石決明)이 많고, 청어(靑魚)ㆍ대구어(大口魚)ㆍ연어(連魚)ㆍ송어(松魚)ㆍ문어(文魚)ㆍ고도어(古刀魚)는 다만 북륙도(北陸道)와 산음도(山陰道)에서만 생산되고, 산돼지[山猪]고기, 노루[獐]고기, 사슴고기 및 그 피물(皮物)들은 북쪽에는 천하고 남쪽에는 귀하다. 채소는 각종이 우리나라와 같은데, 무 뿌리는 길이가 한 자를 넘으나 맛이 없다. 토란[芋]은 그 큰 것은 사발만 하므로 쪼개어 구워서 시장에 팔곤 하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사먹고 요기를 한다. 과일의 종류는 귤과 유자가 가장 많아서 가는 곳마다 숲이 되었고, 감자(柑子)의 작은 것은 밀감이라 하는데, 맛이 달기 때문에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이다. 그 크기가 주먹만한 것은 이름을 구년모(九年母)라 하는데, 옛적에 구년모라는 어떤 노파가 맨 처음 심었다 하여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이다. 금귤(金橘)은 색깔과 향기가 모두 아름다우나 맛이 시어서 먹을 수 없고, 기타 배ㆍ대추ㆍ복숭아ㆍ오얏ㆍ밤 등속은 다 우리나라와 같다. 참외는 모양이 길고 맛이 싱거우며, 수박은 속이 붉고 맛이 달다. 화초는 국화가 제일 번성하고, 매화와 대가 그 다음이다. 사앵(絲櫻)ㆍ다화(茶花)ㆍ비파(枇杷)ㆍ소철(蘇鐵)ㆍ종려(棕梠)가 다 명품이며, 동백은 집집마다 다 심어서 기름을 짜서 팔아 생활의 밑천으로 삼는다. 사앵화(絲櫻花)는 잎이 엷고 가늘고 길며, 가지가 하늘거려 수양버들과 같고 또 해당(海棠)으로써 수사(垂絲)한 것이 있는데, 붉은 실로 구슬을 꿴 것 같아서 주렁주렁한 것이 사랑스럽다. 다화는 한겨울에 번성하게 피고, 비파는 겨울에 꽃이 피어 여름에 열매가 여니 또한 이상한 물건이었다.
생산되지 않는 것으로는 과일은 백자(柏子)와 호두[胡桃]이며, 새는 꾀꼬리ㆍ까치ㆍ매ㆍ새매[鸇]이며, 짐승은 범ㆍ표범이 없다. 약에는 인삼이 없고, 음식에는 벌꿀이 없다. 이 두 가지는 다 우리나라에서 얻어다 쓰기 때문에 매우 귀하다. 음식을 달게 하는데는 모두 설탕을 타고, 촛불은 고래 기름과 나무의 즙을 쓴다. 후추[胡椒], 단목(丹木), 설탕, 화탕(花糖), 흑각(黑角)과 공작의 날개 등은 다 일본의 토산이 아니라 혹 중국의 복건(福建) 또는절강(浙江)에서 나거나 혹은 남만 여러 나라에서 나는 것들이다. 이것을 그 나라 바다 상인들이 장기도에 내왕하여 금은과 무역해 가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이 그것을 얻어다가 동래(東萊)에 팔곤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일본의 특산물이라고 부른다.
○ 내가 우삼동과 더불어 감자를 먹다가 묻기를,
“이 물건은 우리 남방 해읍(海邑)에도 간혹 있고, 제주(濟州)에는 생산이 많아서 해마다 공물(貢物)로 바치는데, 그 맛이 다 귀국의 감자와 같지 않습니다. 감자도 또한 아름다운 종자가 있는 것입니까?”
하니, 우삼동이 답하기를,
“좋고 나쁜 것이 각각 토질에 따라 달라질 뿐입니다. 어찌 종자가 따로 있겠습니까. 지난해에 귀국의 배가 남도(藍島)에 표류하여 온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탔던 사람과 실렸던 물건은 이미 침몰되고 홀로 부서진 배의 남은 목판에서 감자 한 상자를 얻었는데, 상자 위에 문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제주 목사가 공물로 바친 것이었습니다. 관청에서 조정에 아뢴 뒤에 그 상자를 열어보니, 감자는 모두 부패하여 먹을 수 없었습니다. 섬 가운데 사람들이, 그것을 타국의 물건이라고 귀중히 여겨 그 씨를 심었습니다. 그 나무가 성장하자, 이름을 제주감자라 하였습니다. 지금 이른바 제주감자란 것이 맛이 달고 품질이 좋기가 일본의 감자와 구별이 없습니다.”
하였다.
○ 내가 강호에 있을 때에 한 왜인이 필담으로 묻기를,
“일본에 범과 표범이 없으므로 그 형상은 알지 못하거니와 들은 바에 의하면 사나운 어금니와 갈퀴 발톱으로 사람을 잡아먹곤 하며 한번 포효하면 산골이 찢어지는 듯하여 오획(烏獲)과 맹분(孟賁)같은 용사도 감히 앞에서 맞서지 못한다고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귀국에서 범ㆍ표범 가죽을 많이 쓰는데 어떤 방법으로 잡습니까?”
하여, 내가 말하기를,
“천지간에 사람을 먹는 짐승이 사람에게 먹히지 않는 것이 없음이 마치 하육(夏育)ㆍ태사교(太史噭)가 보통 사람에게 목숨을 잃은 것과 같으니, 이것이 진실로 이치이다. 우리나라에서 범ㆍ표범을 잡는 데는 혹은 함정으로, 혹은 조총과 화살로써 하고, 서북도 변방에 재관(材官) 용사들은 모두 철갑(鐵匣)을 팔에 끼우고 능히 손으로 쳐서 잡는 것이 많다. 또 범을 먹는 짐승이 있어 이름을 비(羆)라 하는데, 이것들은 사람으로서는 두려운 바가 없다.”
하니, 여러 왜인들은 서로 돌아보며 놀라는 표정이었다. 일본에는 다만 범ㆍ표범만 없을 뿐 아니라, 또한 곰이나 비(羆)나 늑대와 같은 사람을 잡아먹는 짐승이 없다. 사람들이 모두 부드럽고 약하여 간사한 꾀는 잘 내면서 위무(威武)에는 부족하므로, 나의 말을 듣고 놀라고 겁내기를 이와 같이 한 것이다.
○ 왜인이 또 묻기를,
“귀국의 인삼은 성분과 맛이 천연으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인력으로 만드는 수가 있습니까?”
하여, 내가 대답하기를,
“약 성분은 천연으로 된 것이 귀중한 것이므로 독이 있는 약을 법제(法製)하는 외에는 그 성분을 손상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영약인데 어찌 인력을 필요로 하겠는가.”
하였다. 왜인이 말하기를,
“일본에도 또한 그런 풀이 있는데, 줄기와 잎과 뿌리가 한결같이 인삼과 같은데도 먹으면 맛이 없고 또한 그 효력이 없으므로 조선의 인삼은 만드는 방법이 있는가 하고 의심하였더니, 지금 공의 말을 듣고 보니, 일본에서 나는 것은 필시 사이비(似而非)한 것인 듯싶습니다.”
하였다.
○ 내가 보건대, 왜인들이 사용하는 기명(器皿) 백물이 검은 칠 한 것이 반짝거려 거울과 같고, 궁실과 선판(船板)ㆍ다리ㆍ가마 같은 데도 또한 반드시 칠을 하였는데, 칠빛이 반짝거려 우리나라에서 보는 것과는 아주 달랐다. 만약 그것이 오로지 옻나무 액을 가지고 이와 같이 광채나게 바른다면 서민의 집에도 한 해에 소용되는 옻나무 액이 아마 몇 말은 될 것이며, 공후(公侯) 귀인은 마땅히 열 섬을 써도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경과한 동리나 산과 들에는 또한 칠림(漆林)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마음에 괴이하게 여겨 왜인에게 물었더니, 답하기를,
“푸른 감을 두드려 즙을 짜서 깊이 잘 간직하면 해를 지나도 변하지 않는데, 일본의 칠하는 법은 먼저 감즙을 가지고 바르고 재삼 발라 말린 다음 팽엽(彭葉)으로 갈[磨]면 그 빛이 환하게 되는데, 그런 뒤에야 옻칠을 하기 때문에 옻칠을 적게 하여도 색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였다.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 음식의 제도는 밥은 두 홉에 지나지 않고, 반찬은 두어 가지에 지나지 아니하여 극히 초라하다. 먹는데 따라 다시 보태어 남는 것이 없게 하고, 밥 먹은 뒤에 청주를 마시고 다음에는 과실을 먹으며 과실을 먹은 뒤에는 차를 마시고 파한다.
술은 제백(諸白)을 상품으로 삼는데, 백미와 누룩을 가지고 백미밥에 섞어 만드는 것이므로 제백이라 한다. 매주(梅酒)ㆍ상주(桑酒)ㆍ인동주(忍冬酒)ㆍ복분주(覆盆酒)는 맛이 아름답고 향기가 강렬하다. 연주(練酒)는 우리나라의 이화주(梨花酒)와 같다. 장(醬)은 콩과 누룩을 섞어서 만들었는데, 맛은 약간 시고 빛깔은 거칠다.
떡은 우리나라의 인절미와 같은 것이 매우 많고, 소종(篠粽)이란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권무병(拳拇餠 가래떡)과 같이 만들어 댓잎에 싸서 쪄서 형상이 죽순과 같으며 열 개를 1파(把)라 한다. 외랑병(外郞餠)이란 것이 있는데 소종과 대략 같다. 길이는 한 자 남짓하고 모가 있고 마디가 나고 색은 붉고 맛은 단데 댓잎으로 싸서 형상이 죽간(竹竿)과 같으므로 남에게 선사하는 자는 일간(一竿), 이간(二竿)이라 한다. 또 만두(饅頭)란 것이 있어 우리나라 상화병(霜花餠) 같은데 겉은 희고 안은 검고 맛은 달다. 양명당(養命糖)이란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백탕(白糖)과 같은데 부드럽고 들러붙지 않는다. 구비이(求肥飴)란 것이 있는데 흑당(黑糖)의 종류로써 약을 달여서 만든 것과 같고, 천야이(淺冶飴)란 것이 있는데 천문동(天文冬)에 설탕을 탄 것이요, 당고(唐糕)란 것이 있어 우리나라의 설고(雪糕)와 같은데 엿을 타서 맛이 달고 참깨로써 입혔는데 먹으니 가장 아름답다.
또 변과자(卞果子)란 것은, 왜속에 간(乾)을 변(卞)이라 한다. 대개 간(乾)자의 반자(半字)를 쓴 것이다.설탕물에다가 쌀과 누룩 가루를 섞어 과자를 만들었는데, 그 형상이 혹은 모나고 혹은 둥글어 크고 작은 것이 섞였고, 그 색은 푸르고 붉고 아롱지고 희고, 혹은 금과 은을 칠하여 우리나라 빙사과(氷沙果)ㆍ약과(藥果)의 종류와 같은 것인데 기름으로 굽지 않았다.
국수는 사면(絲麪)과 삭면(索麪)이 있으니, 약간 가는 것은 삭면이라 하고, 지극히 가는 것은 사면이라 하는데 칡가루에다가 메밀을 섞어 만들어서 가닥이 길어서 끊어지지 아니하고 접어서 사리[卷]를 만들었고, 국물에 타서 빛깔이 흰데 맛이 좋다. 떡국[湯餅]은 찹쌀떡 둥글고 두터운 것 두 가락을 가지고 그릇에 넣어서 물과 장을 탄 것인데, 조금 신맛이 있으나 먹을 만하였다.
○ 찬품(饌品)은 삼자(杉煮)로서 아름답다 하는데, 어육(魚肉)과 채소 백 가지 물건을 섞어서 술과 장을 타서 오래 달인 것인데, 우리나라의 잡탕 등속과 같은 것이다. 옛적에 여러 왜인들이 삼목(杉木) 밑에 비를 피하다가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생각하여 각기 가진 바 물건을 가지고 한 그릇에 집어넣어 삼목을 가지고 불을 때어 달였는데, 그 맛이 매우 좋았으므로 인하여 삼자(杉煮)라 하였다. 왜인의 방언(方言)에 삼목을 승기(勝技)라 하므로 속(俗)에 이 음식을 승기야기(勝技冶技)라 하니 야기는 굽는다는 말의 와음(訛音)이다.
어품(魚品)은 박지(粕漬)로써 아름다운 것을 삼는데 생선을 술찌꺼기에 담가서 맛이 익으면 깨끗이 닦아 마치 우리나라 식염어(食鹽魚)와 같은 종류이고, 별로 특별할 것이 없다. 또 변갱(卞鰹)이란 것이 있는데 형상이 소뿔과 같아서 단단하여 부수기가 어렵다. 그 육질을 보면 우리나라 고등어의 살 두터운 것을 두들겨 합하여 만든 것인 듯하다. 왜인들이 반드시 국을 끓이거나 면탕을 할 때에 칼로 다져 가루를 만들어 조미료로 쓴다. 대구어는 설(鱈)이라 하고, 은구어(銀口魚)는 조(鰷)라 하고, 도미어(道味魚)는 조(鯛)라 하고, 고등어는 점(鮎) 혹은 정(鯖)이라 하고, 방어(魴魚)는 홍어(紅魚) 또는 사(鰤)라 하고, 연어(鰱魚)는 규어(鮭魚)라 하고, 적어(賊魚)는 갈()이라 한다. 마른 것을 변(卞)이라 하고 생 것을 선(鮮)이라 하고, 소금에 담근 것은 염지(鹽漬)라 하고, 술 찌꺼기에 담근 것은 박지(粕漬)라 한다. 이 밖에 물새를 털 그대로 말리고, 바다 소라를 그 껍질을 제거하지 않고 삶아서 금과 은으로 점을 찍고 도금해서 연회의 화려한 음식으로 삼았다.
○ 음식을 담는 그릇은, 삼중(杉重)이란 것이 있는데 일조(一組)에 삼목판(杉木板)으로써 삼층의 합을 만들어서 위에는 떡 등속을 넣고, 가운데 함에는 과실과 나물을 넣고, 아래층에는 어육을 넣고 아롱진 실로 노끈을 짜서 그 허리에 매었다. 회목(檜木)으로 만든 것은 회중(檜重)이라 하고, 백목(柏木)으로 한 것은 백절(白折)이라 하고, 채색을 한 것은 화절(花折)이라 한다. 2층 대합(大榼)은 주(橱)라 하는데 술을 선사할 때는 1하(一荷), 2하(二荷)라 한다. 왜인들이 물건을 운반할 때는 반드시 어깨에 메는데, 멜 때는 앞뒤에 두 통이므로, 1하라고 하는 것은 두 통의 술이다. 기타 국이나 밥이나 술과 과실을 담는 보통의 기명(器皿)은 다 붉은 칠, 검은 칠을 한 나무 그릇을 쓰고, 혹 백철기(白鐵器)가 있고 원래 유기(鍮器 놋그릇)는 없다. 연회에 술을 붓는데는 토배(土杯)를 쓰는데, 붉은 식토(埴土)로 만든 것으로서 형상이 접시와 같아 제도가 매우 질박하고 누추하였다. 위로 임금으로부터 아래로 민간에 이르기까지 이 잔으로 술을 수작하여 존경하는 것이라 하니, 그 뜻이 대개 주인과 손과의 사이의 예의는 성실함과 공경함을 위주로 하는 것이므로 헛 문채를 꾸미지 아니하고 예스럽고 질박함으로써 보여서 주인과 손과의 술자리에 쓰는 것이라 한다.
○ 국중에 귀하고 천한 남녀가 하나도 물을 마시는 법이 없고 반드시 다탕(茶湯)을 마신다. 곧 집집마다 차(茶)를 저축하기를 곡식보다 더 중하게 여긴다. 차는 곧 작설(雀舌)의 종류인데, 혹 푸른 싹을 따서 두들겨 말리어, 가늘게 가루를 만들어 더운 물에 타서 마시고 혹은 긴 잎으로 더운 물에 끓여서 찌꺼기를 건지고 마시는데, 매양 식후에 반드시 한 사발씩 들이킨다. 시가와 길가에도 화로를 설치하여 차를 끓이는 사람이 천 리에 서로 바라볼 만큼 있었다. 사신 행차 대소 수백 인이 날마다 공급 받는 것이 각각 청다(靑茶) 한 홉, 엽차 한 묶음이요, 지나가는 곳마다 관(館) 가운데 따로 차 끓이는 중[僧]을 두어서 낮과 밤으로 물을 끓여 놓고 기다리게 한다. 그들 풍속의 매일 행하는 떳떳한 예절로 차와 같은 것이 없다.
○ 우리나라의 소위 남초(南草)란 것은 본래 동래(東萊)의 왜관(倭館)으로부터 얻어 온 것인데, 속담에, 담마고(淡麻古 담배) 곧 왜말에 다엽분(多葉粉)이란 음(音)이 잘못 전해진 것이다. 왜인도 역시 부르기를 우리나라 속음처럼 부른다. 그러나 뜻은 잎이 많고 가는 가루[粉]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쪄서 말리어 독을 제거하고 실처럼 가늘게 썰어서 매인이 반드시 담뱃대 두 개를 가지고 번갈아 피워서 더운 기운이 목구멍에 침투하지 못하게 하니, 식물(食物)에 대하여 정갈하게 하는 것이 이와 같다.
○ 왜인이 고래고기의 회(膾)를 가장 중하게 여겨서 비싼 값으로 사서 손을 접대하는 화려한 찬으로 하나, 부드럽고 미끄럽고 기름져서 별로 다른 맛이 없었다. 내가 통역에게 이르기를,
“듣건대, 일본 사람은 큰 고래 한 마리를 잡으면 종신토록 부귀(富貴)를 할 수 있다 하니, 과연 그런가?”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어찌 한평생에만 그치겠습니까. 대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공후 귀가(公侯貴家)에서 고래 회ㆍ고래 젓[醢]을 제일의 명품(名品)으로 삼아서 중한 값을 아끼지 아니하고, 일본의 등촉(燈燭)은 다 고래의 기름을 쓰는데 고래고기의 크기가 주먹만한 것이면 능히 기름 한 사발을 취할 수 있으니, 이것은 기름을 파는 이익만도 당장에 1만금을 얻을 수 있고, 이[齒] 기름, 등지느러미[鬐], 수염[鬣]도 다 기물(器物)을 만들 수 있어 그 이익이 또한 많으므로, 바다 근처의 사람들에게 포경장(捕鯨將)이란 것이 있어, 무리를 모으고 재물을 소비하여 그물과 기계를 설치하되, 그것을 잡아 부자가 된 자는 또한 적습니다.”
하였다.
○ 왜인은 갈분(葛粉)을 잘 제조한다. 갈근(葛根)을 물에 담가 두들겨 가루를 만드는데 부드럽고 가늘고 깨끗하고 희고 맛이 달고 성질이 냉(冷)하여 국수를 만들면 가장 훌륭하다. 녹말(菉末)을 만드는 것은 능히 우리나라처럼 정밀하게 하지 못하므로 대마도에서 강호에 해마다 바치는 것은 조선 녹두가루를 바치는 것이라 한다.
○ 세상에서 전하기를, 일본에는 옛적에 의복의 제도가 없어서, 사람들이 알몸으로 있었는데, 진 무제(晉武帝) 시대에 백제왕(百濟王) 아화(阿花)가 여공(女工) 재봉하는 법을 일본에 전해주어 비로소 의복이 있었다 하니, 그 말은 상고할 수 없으나, 지금 보건대 그들의 소위 공복(公服)이란 것은 대략 우리나라 단령(團領)의 제도와 같으면서 소매는 넓어서 중의 옷과 같고, 옆에는 재단이 없고 다만 양쪽에 바로 기운 것만이 있고 또 옷 허리에 붙여 기운 것이 앞뒤로 각각 칠팔 촌쯤 되게 드리웠으나 또한 띠도 없고 그 색깔은 붉은 것, 검은 것의 차별이 있으니, 가장 귀족은 흑색이요, 나머지는 다홍색이요, 그 다음은 두 폭을 가지고 단삼(單衫)을 하였는데, 소매가 없어 모양이 반비(半臂)와 같아 바지로써 받쳐서 허리에 결속(結束)하였으며, 그 다음은 우리나라의 도포의 종류와 같은데, 앞에는 깃이 없고 옆에 자락이 있으니, 이것이 다 존전(尊前)에 통용하는 옷이다. 바지의 제도도 세 가지가 있는데 반드시 청백교직(靑白交織)으로 하여 제도가 우리나라 여인의 네 폭 바지와 같고, 앞뒤에 각각 주름이 있는데, 앞은 셋이며 뒤는 둘이요, 또 끈을 매었고 상반(上半)은 깁지 아니하였고, 후면에는 따로 검은 칠을 한 작은 판(板)을 붙였는데 길이는 5촌 남짓하고 넓이는 2촌인데 허리에 가로 붙여서 대 모양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은 귀인의 옷이요, 그 다음 제도는 중국인의 바지 같으면서 그 길이가 발[足]을 덮어서 땅에 두어 자나 끌리는데, 모든 왜인들이 존전(尊前)에 성복(盛服)을 할 때에 입고, 그 다음은 길이가 발을 가리지 못하고 매우 좁아서 겨우 다리를 꿸 만하니, 이것은 천한 자들이 심히 추운 때에 입는 것이다. 관(冠)은 제도가 세 가지가 있으니, 한 가지는 대략 사모(紗帽)와 같으면서 낮고 둥글기가 주발 뚜껑과 같아 겨우 발제(髮際)를 가릴 만하고, 위에 관이 있어 양(梁)이 뾰족하고 높은데 검은 나무 잠(簪)으로 양(梁)에다 가로 꽂았으며, 뒤에는 한 뿔이 있어 길이는 한 자 남짓하고 넓이는 두어 치나 되는 것이 솟아나왔는데 조금 구부려 아래로 드리웠고 또 긴 갓끈으로써 폭의 위에서부터 턱 밑에 매었는데 귀족들은 붉은 실 갓끈을 쓰고, 나머지는 다 흰 종이로 된 갓끈을 달았다. 이것은 관의 최상이 되므로 관백(關白) 이하의 각주(各州) 태수가 사용한다. 그 한 가지는 모양이 정자(丁字)와 같은데 오모(烏帽)라 한다. 그 한 가지는 모양이 베 짜는 북[杼]과 같은데 앞에 두 귀가 났다. 이것은 절오모(折烏帽)라 한다. 모두 종이에 풀칠을 하여 만들었는데 각주의 봉행(奉行) 이상 직명(職名) 있는 자가 쓴다. 공(公)이나 사(私)의 예석에 한 번 쓰는 외에는 다시 보통 때에 관을 쓰는 자는 없으니, 우습다.
○ 중[僧]도 관품(官品)이 있으니, 자삼(紫衫)을 입은 자가 상품이 되고, 황삼을 입은 자가 다음이요, 나머지는 다 검정 옷이다. 옷의 제도는 대략 심의(深衣)와 같은데 두 소매는 넓고 상(裳)의 폭은 혹은 바로 하고, 혹은 재단을 하였다. 가사(袈裟)는 우리나라 중들이 입는 것과 같으면서 길이와 넓이가 더하고 턱 아래 합금(合襟)한 곳에 쇠고리를 가지고 걸어 매었으며, 모두 안에는 추울 때 더울 때에 입는 장의(長衣)가 있고, 바지는 입지 않았으며, 머리에는 관도 건(巾)도 없어 담 장로(湛長老)나 창 장로(菖長老)가 사신에게 들어와 볼 때에도 또한 맨머리로 대해 앉았다. 강호에서 국서(國書)를 전하는 날에 두 장로가 관백의 궁으로 들어갈 때에 비로소 그 머리 위에 물건이 있는 것을 보았다. 모양은 함(函)의 뚜껑과 같은 것이 길이는 한 자 남짓하고 넓이는 머리를 용납할 만하고 황색을 칠하였는데 그것을 머리 위에 이고 뒤로는 두 어깨에 걸었는데 그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궁중에서 쓰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밖에서는 쓰지 못한다는 말인가. 우습다.
○ 평민의 의복은 남녀가 구별이 없어 모두 우리나라 여인의 장의(長衣)와 같은 종류인데, 소매는 너르고 짧으며 그 색깔은 푸른 바탕에 흰 무늬로 된 것이 많고, 여자는 화초를 여러 가지 채색으로 놓고 그려서 바라보면 그림 가운데 부처[佛]와 같았다. 남자는 띠가 없고 여자는 큰 띠로써 허리를 묶었다. 남녀가 모두 반폭의 푸른 베로써 배꼽 아래로부터 생식기를 가렸고, 치마, 바지의 등속은 없었다.
○ 신은 귀천(貴賤)이 모두 짚신을 신었는데 다만 한 가닥의 승비(繩鼻)로써 발가락을 걸었으므로 버선도 역시 두 쪽으로 쪼개져서 승비(繩鼻)를 걸고 다닌다. 혹은 나무껍질로 삿갓을 만들어 모양이 갈대 삿갓 같으면서도 편편하며 넓게 하여 남녀간에 그것을 쓰고 볕을 막고, 비를 피한다. 우의(雨衣)는 깁이나 종이를 가지고 삼수(衫袖)가 있는 단의(單衣)를 만들어 푸른 그림이나 칠을 하였고, 추위를 막는 데는 솜을 둔 한 자의 비단으로 정수리를 덮었는데 모양이 주머니와 같고, 여자는 붉고 흰 설면자(雪綿子)로 머리에 덮는 것과 자색의 깁으로 네 귀를 가리는 것이 있었다.
○ 왜인의 풍속은 앉으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귀천(貴賤), 남녀, 노장(老壯), 아이 병약(病弱)한 자를 막론하고 앉기만 하면 반드시 꿇어 앉아 비록 길가에 술을 파는 여인이나 논에서 벼를 베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두 무릎을 땅에 붙이고 옷을 여미고 앉는데 그 법을 본즉 예의(禮儀)로 꾸미기 위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대개 그 옷이 앞에는 옆으로 섶[衽]이 없고, 아래에는 바지가 없으므로 그와 같이 하지 아니하면 생식기를 가리기가 어려운 까닭에 부득이한 데서 법이 생겨 습관이 천성(天性)처럼 되었으니, 우습다.
○ 또 가장 우스운 것이 있으니, 관백의 궁중에 모든 집정(執政)과 측근자가 공복(公服) 판(板)을 붙인 바지를 입으면 바지가 짧은데도 꿇어앉게 되므로, 두 다리 사이에 두어 자나 되는 백포(白布)를 달아 뒤로부터 드리우는데, 긴 바지를 입을 때에는 백포의 길이가 발에서 한 자 남짓이나 더 되어 모두 땅에 끌고 다니므로 모든 신하들이 동작을 할 때에는 싹싹 소리가 있어 자리 위가 소란스러운데 이렇게 하는 것을 그들은 공경하는 것이라 하고, 각주(各州) 태수의 집에도 그 신하되는 섭정 이하가 또 이와 같이 한다. 그 법을 보건대, 왜인의 풍속이 경망하고 날래서 사람을 찌르는 데에 용감하므로, 그 윗사람 된 자가 혹 무슨 변이 있을까 염려하여 그들로 하여금 행보하기에 불편하여 몸을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되도록 하여 감히 창졸에 일을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 국법에 또 맨발로써 공경하는 것이라 하므로 천한 사람들은 평생에 버선을 신어보지 못하고 각주의 섭정 이하 모든 신하들이 그 태수를 볼 때에 맨발로 하고, 태수가 관백을 볼 때에 맨발로 하니, 웃음을 금치 못하겠다. 내가 경과하는 역(驛)의 벽에 붙어있는 천황(天皇)의 놀러나가는 그림을 보면 금은으로 만든 수레가 극히 화려한데 앞뒤에 따르는 벼슬아치들이 붉은 옷, 검은 옷에 백포(白布)를 질질 끌면서 옹기종기 걸어서 따르는데 전부가 맨발이어서 보기에 해괴하기가 관백의 궁중에서 보는 바와 같은 데도 여러 왜인들은 그 그림을 우러러보고서 참새처럼 뛰며 부러워하기를 마치 천상에 참 신선을 보는 것과 같이 하니, 우습다.
○ 궁실(宮室)의 제도는 극히 정하고 깨끗하기에 힘쓰고 단청(丹靑)을 하지 아니하고, 기둥과 들보는 섬세(纖細)하고 기와는 가벼우나 덮기를 빽빽이 하였고 지붕의 마루는 높고 처마는 낮게 하여 나무 조각을 덮기도 하고 나무껍질을 덮기도 하여 첩첩으로 비늘과 같이 하였는데, 치밀(緻密)하며 완고(完固)하고 초가(草家)도 높이 쌓아올려 지붕의 형상이 동이를 엎어 놓은 것 같아 40, 50년은 유지할 만하고, 목판으로 벽을 만들되 매 1면마다 반드시 장자(障子) 셋을 설치하여, 밀어서 열고 닫으며 지도리[樞]와 문고리[環]의 제도가 없다. 한 칸의 넓이가 모두 3보(步)로 되었는데 이것은 온 나라 안이 다 동일하여 털끝만큼도 틀림이 없고, 매칸(每間)에 자리(일본의 다다미) 석 장을 펴는 것도 또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장자(障子)와 자리가 혹시 그 하나가 없어지는 때에는 비록 아무 데서나 구해다가 보충하더라도 모두 병부(兵符)를 합하는 것과 같으니, 국중에 통용되는 척도(尺度)의 정밀함을 알 수가 있다.
○ 집을 짓는 데는 복도(複道)와 부엌ㆍ욕실(浴室) 등이 모두 한 지붕 밑에 있어서 집 하나의 크기가 혹 수백 보에 이르기도 한다. 방에서 벗어나면 아담한 담이 그림과 같고, 연못은 거울과 같다. 또 돌아서 겹겹의 문턱을 지나면 괴석(恠石)ㆍ대[竹]ㆍ이름난 꽃이 뜰을 둘렀고, 또 깊고 으슥한 방에 들어가면 비단 장막, 붉은 담요며 문목(文木)으로 중방[楣]을 만들었고, 벽에 접하여 상을 만들어 기댈 수 있고 누울 수 있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어디로 들어올지 어디로 나갈지를 모르게 되어 있다. 처마 끝에는 긴 홈을 설치하여 지붕에서 내리는 빗물을 받고, 집 머리에는 물통을 두어 화재를 방지하고, 뜰과 마당에는 가는 돌을 펴서 비올 때에 다녀도 진흙이 묻지 않게 하고, 복도에는 종이 등을 달아서 밤에 다녀도 어둡지 않았다. 이것은 도성(都城)과 지방에 부귀(富貴)한 사람들의 가옥이 대략 이와 같다. 비록 관백의 거처하는 궁전이라도 정결하고 치밀(緻密)한 것은 더할 나위가 없으나 굉장(宏壯)한 것은 부족하고, 장막이나 자리도 또한 주부(州府)의 관사(館舍)와 차별이 없으니, 대개 교묘한 것만을 숭상하고 예법에는 전혀 어두워서 임금의 거처에도 따로 제도를 세우지 아니하고 평민의 부호들도 또한 왕후(王侯)와 사치함을 다툴 수 있으니, 그 등급이 없는 것이 이와 같다.
○ 국중에 왕궁(王宮)이나 민가에 모두 온돌로 불을 지피는 법이 없고, 다만 판자방(板子房) 위에 두터운 자리와 솜요[雪綿褥]를 깔고 잠자며, 솥이나 남비같은 밥 짓는 그릇은 모두 따로 부엌에 두어 연화(煙火)가 사람의 거처하는 방에는 서로 접하지 아니하고, 다만 지극히 추울 때에는 방 가운데 지로(地爐)를 설치하여 흙을 쌓아 숯불을 피우고 작은 평상을 그 위에 놓는데, 평상은 우리나라의 작은 창처럼 모든 구멍이 있어 불기운을 통하고 이불과 요로써 덮어서 거기에 올라 앉아 땀을 내는 사람도 있고, 그 옆에 끼고 앉아 손발을 쪼이는 사람도 있다.
○ 여름날 더울 때에도 파리와 모기가 매우 드므니, 이것은 방 안이 정결하여 더러움이 없고, 어육(魚肉)의 부패한 것은 곧 땅에 묻고, 측간(厠間)에 냄새나고 더러운 것은 곧 밭으로 옮기므로 파리나 모기가 생길 수 없는 것이다. 모기가 한 번 생기면 푸른 실로 방장(方帳)을 만들어 네 귀의 나무에 걸었는데, 그 높이는 사람이 그 안에서 앉았다 일어났다 할 만하게 하고 한 사람의 잠자는 것을 용납할 만하였다. 속(俗)에 측간을 설은(雪隱)이라 하고, 설은의 옆에는 반드시 욕실(浴室)이 있고 욕실 가운데는 큰 통을 두어 물을 저장하고, 옆에는 한 상이 있고, 상 위에는 흰 저포(紵布) 두어 자를 두었다. 그 풍속이 측간에 간 다음에는 반드시 씻으므로 물통이 있고, 상이 있고, 수건이 있다. 남녀가 교합(交合)하는 방에도 또한 이것을 설치하였다 한다.
○ 사찰(寺刹)은 건축이 높고 크기가 왕궁(王宮)보다 배나 되어, 아름드리 나무로써 둥근 기둥을 만들고 황금으로써 입히고, 문과 창은 모두 문목(文木)이요, 문과 윗중방은 검은 칠이 선명하기 거울과 같은데, 다만 단청 채색만 하지 아니하였을 뿐이요, 벽 사이에 간혹 그림이 있다. 절이라 칭하는 것도 혹은 불상(佛像)을 모시거나 중을 두지도 않고, 천황(天皇)의 모든 아들인 법왕(法王)의 거처하는 곳 및 사신 행차의 머무는 관(館)이 되는 것이요, 정말 절도 또한 민간에 있어 중들이 민간인과 섞여 살아 혹 민간에 관세음보살의 금상(金像)을 모셔놓고 중들 두어 사람이 서서 경쇠[磬]를 치기도 하고, 또 높고 큰 금불(金佛)이 길 옆 노천(露天)에 앉아 있는 것이 매우 많은데, 조상(造像)의 교묘한 것이 우리나라만 못한 것 같았다.
○ 산수(山水)의 좋은 곳에는 반드시 정사(精舍)와 별관(別館)이 있어 깨끗하고 명랑하여 신선이나 도사(道士)의 거처하는 곳과 같은데, 그것은 반드시 관백 이하 각주 태수의 설치한 찻집[茶屋]이라 하니, 곧 그들이 왕래할 때에 쉬면서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는 곳이었다. 또 길 옆 좌우에 간간이 깨끗한 한두 칸 집을 아주 묘하게 지어 쉴 만한 곳이 있는데, 물은 즉, 그것은 곧 귀인(貴人)이 길가다가 쓰는 측간으로 설치한 것이라 했다.
○ 관제(官制)는 그 제도가 9품이 있는데, 품(品)이라 하지 않고 위(位)라 한다. 거기에도 정(正)ㆍ종(從)의 구별이 있다. 대집정(大執政)ㆍ좌집정(左執政)ㆍ우집정(右執政)이란 것이 있으니, 옛적의 삼공(三公)과 같다. 대장군(大將軍)이 가장 귀하고, 대납언(大納言)은 아상(亞相)이 되고, 중납언(中納言)ㆍ소납언(小納言)은 옛적 황문(黃門)급사중(給事中)의 등속이다. 식부(式部)ㆍ치부(治部)ㆍ민부(民部)ㆍ병부(兵部)ㆍ형부(刑部)ㆍ궁내성(宮內省) 이것이 육관(六官)인데, 각각 경(卿)ㆍ대보(大輔)ㆍ소보(小輔)ㆍ대승(大丞)ㆍ소승(小丞) 등의 관(官)이 있고, 소부(掃部)ㆍ직부(織部)는 소제(掃除)와 직조(織造)를 맡은 관직이요, 대장(大藏)은 조세(租稅)를 맡고, 준인(準人)은 의장(儀仗)을 맡고, 선부(膳部)는 음식을 맡고, 전약(典藥)은 의약(醫藥)을 맡고, 채녀(采女)는 여관(女官)을 맡고, 태학료(太學寮)는 문학(文學)을 맡고, 탄정료(彈正寮)는 규찰(糾察)을 맡고, 중장(中將)ㆍ소장(小將)ㆍ좌위문(左衛門)ㆍ우위문(右衛門)ㆍ좌병위(左兵衛)ㆍ우병위(右兵衛)ㆍ좌마료(左馬寮)ㆍ우마료(右馬寮)ㆍ병고료(兵庫寮)는 모두 숙위(宿衛)를 맡아 백관(百官)의 직책이 각기 관청이 있는데, 요(寮)라고 칭하는 것은, 반드시 두(頭)ㆍ윤(允)ㆍ조(助)의 3등의 관(官)이 있고, 서(署)라고 칭하는 것은 반드시 수(首)ㆍ우(佑)ㆍ영(令)ㆍ사(使)라는 관이 있어서 각기 그 직책으로 육관(六官)의 속관(屬官)이 된다. 각주에는 수(守)ㆍ개(介)ㆍ목(目)ㆍ연(掾)이 있으니, 수는 자사(刺史)와 같고, 개는 별가(別駕)와 같고, 목은 주부(主簿)와 같고, 연은 사마(司馬)와 같다. 이것은 그들의 내외의 관직이다.
전대(前代)에는 천황이 정치를 했기 때문에 관명(官名)을 띤 자들이 각각 그 직책을 행하였었다. 그러나 천황이 권력 없이 헛 명칭만 가진 뒤에는 관백이 정이위(正二位) 대장군의 직으로서 60주(州)의 땅을 총괄하여 통치하고, 각주의 땅을 외[瓜]처럼 쪼개어 종실(宗室) 집정(執政) 등의 식읍(食邑)으로 삼고, 대소(大小)의 관사(官舍)는 한갓 빈 명칭만을 빌려서 사은(謝恩)하는 예식만 있는데, 천황의 육관(六官)과 삼공(三公)은 지금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른다.
○ 내가 일본의 관명(官名)과 그들이 띄고 있는 직책을 볼 때에 낱낱이 상관이 되지 아니하니, 예를 들면, 원정잠(源正岑)이 하내수(河內守)라 칭하는 것과 원충신(源忠辰)이 준하수(駿河守)라 칭하는 것과 원중지(源重之)가 태화수(太和守)라 칭하는 것과 원중지(源重治)가 근강수(近江守)라 칭하는 것은 모두 그 주(州)의 수(守)가 아니며, 원직유(源直惟)의 소부두(掃部頭)의 원계우(源繼友)의 중납언(中納言)과 원구충(源久忠)의 내선정(內膳正)과 평방성(平方誠)의 습유(拾遺)는 또 중앙정부의 관직을 실지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통치하는 구역은 동도(東道)에 있으면서 서주(西州)의 태수라 칭하고, 몸은 지방의 수(守)로 있으면서 중앙정부의 관직에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관명(官名)과 직책이 거리가 천 리나 되고, 한 주(州)의 태수가 혹은 4, 5명이나 되므로 내 생각에 매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삼동에게 조용히 물으니, 우삼동은 다만 말하기를,
“일본의 관제(官制)가 귀국과는 매우 다르니 비록 말하더라도 공은 반드시 알아듣지 못할 것이요, 또한 말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하였다. 대개 천황이 관제를 만들 때에 본래 정한 명칭이 있어서 안으로는 삼공(三公)ㆍ육관(六官)ㆍ백집사(百執事)와 밖으로는 66주의 태수가 등급이 분명하여 큰 것 작은 것이 다 갖추어졌던 것인데, 관백이 나라를 차지한 뒤로부터는 따로 관직을 만들지 않고 천황의 관직을 빌려가지고 그 대신을 거느려서, 임명은 비록 관백에게서 나오나 작첩(爵帖)에는 반드시 천황의 인장을 찍고 임명을 받은 뒤의 사은(謝恩)도 반드시 천황에게 하였다. 이것은 천황이 벼슬을 주는 형식이 되므로 옛 명칭대로 바꾸지 아니하고, 직책을 주는 것은 관백에게 있으므로 관할을 따라서 일을 맡기게 되니, 아무 주(州)의 태수, 아무 부(部)의 관(官)이란 것은 다 천황이 주는 것이요, 아무 성주(城主)라 하는 것은 곧 관백이 임명한 것이다.
관백은 비록 국군(國君)이라 하나 천황의 앞에 가서는 정이위(正二位) 대장군(大將軍)의 반열이 되고, 황경(皇京)의 정일위(正一位)와 종일위(從一位)는 반드시 대납언(大納言)ㆍ우집정(右執政)ㆍ좌집정(左執政)ㆍ대집정(大執政)의 등류로서, 관백 삼종실 집정(三宗室執政)이 되고, 세신(世臣)이란 것은 조산대부(朝散大夫) 정사위(正四位) 종사위(從四位)의 중장(中將) 중납언(中納言) 소부두(掃部頭)의 벼슬에 지나지 못하고, 대납언 이상의 칭호가 없는 것은 월존(越尊)하는 혐의가 있는 까닭이다. 관백 제신(諸臣)으로 하여금 읍을 맡아 늠료(廩料)를 받아먹게 한 것도 치병(治兵)의 제도에서 나온 것이나, 백관의 의도(儀度)를 세우지 않았다. 읍을 맡은 자는 또 각각 섭정(攝政)ㆍ봉행(奉行)ㆍ기실(記室)의 신하가 60만 석을 먹는다는 것은, 그가 맡은 땅에서 1년에 받는 토지의 납세가 60만 석이라는 말인데, 군사 한 사람의 1년 봉급이 25석으로 치면 1백 석에 군사 네 사람을 기르는 것이 되고, 1만 석에 군사 4백 명을 기르고, 10만 석에 군사 4천 명을 기르게 되니, 땅이 넓은 자는 받는 것이 많고, 받는 것이 많은 자는 군사가 많게 되는 것이다. 태수가 자기 먹는 것을 많이 떼어 군사를 잘 기르는 사람은 유능한 관이라 하여 상으로 더 주고, 사사로 저축하여 군사가 부족한 자는 어질지 못한 관이라 하여 벌로 땅을 깎는다. 관에 있는 사람들은 힘을 다하여 군사를 기르는 데에 힘써야 하므로, 읍을 맡은 자는 모두 무직(武職)이요, 소위 문학의 직책을 가진 임신독(林信篤) 같은 사람은 비록 그 재주가 관중(管仲)과 제갈량(諸葛亮)을 겸하였더라도 능히 한 자, 한 치의 땅도 얻어 맡을 수가 없고, 다만 의관(醫官)ㆍ승도(僧徒)처럼 달마다 봉급을 받아서 먹을 뿐이다.
○ 오산집(烏山集)에 언급한 승상(丞相)ㆍ아상(亞相)ㆍ대종백(大宗伯) 등 여러 사람은 당시 천황의 대신 정일위와 종일위의 자급이 있으나 그는 군국(君國)의 큰일에는 전혀 참여한 일이 없다. 땅과 인민에게 정치 교화를 베풀지 못하고 다만 빈 이름으로 위에 있기만 하니, 그 존귀(尊貴)할 것이 무엇인가. 또 일본의 고사(古史)를 보건대 ‘고려왕이 사신을 보내어 글을 전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그때의 황태자가 고려왕이 보낸 글 중에 말이 거만스럽다 하여 노하여 그 글을 찢고서, 사신은 죄 주었다고 하였는데, 아조(我朝)와 통신사(通信使)는 관백이 나라를 차지한 뒤에 있었으므로 관백에게 국서를 전하러 가는 길에 가마를 타고 군악을 울리면서 천황의 거처하는 옆을 거들거리고 지나갔으니, 관백의 위품(位品)은 물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신묘년에 우리 사신이 갔을 때에는 관백이 임금이라 자칭하였는데, 지금은 공순함을 지켜서 임금으로 자처하지 않아 회답하는 국서 중에 다만 일본국 원길종(源吉宗)이라 쓰고 위호(位號)를 쓰지 아니하였으니, 대개 대장군이란 위호를 쓰게 되면 이웃 나라의 국왕과 대등(對等)의 예로써 국서를 주고 받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삼동이 나에게 이르기를,
“만약 귀국(貴國)에서 일본의 관품(官品)을 자세히 안다면 반드시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이므로 감히 말을 다할 수 없습니다.……”
하니, 그 뜻은 아마 관백의 위호(位號)가 정이위(正二位)이어서 존귀하지 않으므로 우리나라에서 말썽을 일으킬까 염려하는 듯했다.
○ 각주의 섭정(攝政)ㆍ봉행도 또한 세습(世襲)으로 하고, 준인(準人)ㆍ채녀(采女)ㆍ병위(兵衛) 등의 칭호는 천황의 관명(官名)을 쓴 것인데, 품위(品位)는 또 태수의 계급보다도 아래에 있으니, 이것은 관백이 임명한 것이다. 그 밖에 기실(記室)ㆍ의관(醫官)의 등속은 태수가 스스로 불러 쓴 것이다. 대마도는 우리나라를 접대해야 하기 때문에 사무가 가장 번다하므로 재판(裁判)이란 관직을 더 두었는데, 이것도 역시 태수가 임명한 바이므로 지위는 봉행의 아래에 있으나, 봉급은 기실(記室)보다 배나 된다.
○ 내가 강호에 있을 때에 일찍이 조용히 우삼동에게 묻기를,
“내가 귀국의 제도를 보건대, 역시 중국을 모방한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아십니까?”
하였더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중국의 어느 시대와 견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에 천자(天子)가 쇠미(衰微)하여 권력이 천자에게 있지 아니하므로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晉文公)이 천자의 빈 명의를 빌려서 제후에게 호령하였으며, 천승(千乘)의 나라에는 백승(百乘)의 대부(大夫)가 있고, 백승의 집에는 각각 재신(宰臣)이 있어 대부의 고을을 다스리니, 이른바, 재신이 대부를 섬기면 문득 군신(君臣)의 관계가 되어, 주인이 환란을 당할 때에 재신은 의리(義理)에 보면 법이 있었는데 공자의 제자도 다 대부의 집에 벼슬하였습니다. 지금 본즉 귀국의 천황이 친히 정치를 하지 아니하고, 관백 이하가 다만 천황의 작명(爵名)만을 가지고서 군(君)이니, 후(侯)니, 대부(大夫)니 하여, 성읍(城邑)과 백관(百官)이 있어 모든 실무는 다 대부의 가신(家臣)에게 있고, 각주의 섭정ㆍ봉행 모든 사람은 또 태수에게 사사로 군신(君臣)의 분(分)을 맺어서 각기 능히 자기 일국의 정치를 행하니, 이와 같은 것은 전국의 시대에 견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우삼동이 놀라며 사례하기를,
“이는 진실로 정확한 이론입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 법이 다만 전국 시대에만 행하였는데, 일본은 오랫동안 폐단이 없으니,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또 말하기를,
“지형과 민속이 중국과 같지 아니한 때문입니다. 주(周) 나라 말기에 열국(列國)이 나누어 경쟁하여 정치가 천자에게서 나오지 아니하므로 제후(諸侯)와 대부들이 나라를 집으로 삼아 전쟁을 일삼으니 백성이 견디어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진 시황(秦始皇)이 나서 주(周) 나라를 삼키고 천하를 통일하여 정치가 모두 황제(皇帝)에게서 결정된 후에 인재를 선택하여 관직을 주어 성적고사를 3년에 한정하는 법이 있었으며, 한(漢)ㆍ당(唐) 이하에 이 법을 썼는데 귀국은 바다 가운데 궁벽하게 있어 이웃 나라와 전쟁하는 화(禍)가 없으므로 모든 주(州)의 대부가 세습제도(世襲制度)에 습관이 되어 상하가 다른 뜻이 없으니, 이것이 나라의 운수가 다함이 없고 또한 변하지 아니하여 지금토록 폐단이 없는 바입니다. 그러나 하늘, 땅, 사람이 생긴 이래로 한 가지 일, 한 가지 물건도 억만 년 동안 고쳐지지 아니하는 것이 없는데, 이 뒤에 일본의 관제(官制)가 진(秦)ㆍ한(漢)과 같은 때가 다시 있을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니, 우삼동이 탄식하기를,
“이는 곧 이치를 아는 말입니다.”
하였다.
○ 전제(田制)는 30보(步)가 1묘(畝)가 되고, 10묘가 1탄(畽)이 되는데, 1탄에 상등은 세(稅)가 8석이요, 중등은 세가 6석이요, 하등은 세가 5석이니, 1석은 곧 우리나라 25두(斗)에 해당된다. 시전(市廛)은 3보가 1칸(間)이 되고, 60칸이 1정(町)이 되고, 36정이 1리(里)가 되니, 5정은 곧 전(田)의 3묘에 해당된다. 가옥(家屋)에 대하여는 매칸에 은(銀) 5전을 세로 바치고, 공업ㆍ상업을 하는 자는 각각 그 물건의 10분의 1을 세로 바친다. 1정마다 이문(里門)을 두어서 5가(家)의 법을 시행한다. 한 시(市)에는 한 시의 수세(收稅)를 맡은 자가 있으니 그 명칭이 좌(座)요, 한 이(里)에는 한 이의 수세를 맡은 자가 있으니 그 명칭이 간전(肝煎)이다. 외방에는 한 촌에 한 촌의 일을 맡은 자가 있으니 그 명칭이 장옥(莊屋)이요, 각 주에는 관할하는 태수가 각자 수세를 하고, 왜경(倭京 경도(京都))ㆍ계빈(界濱)ㆍ병고(兵庫)ㆍ천하기(天河崎)ㆍ금수(今須)ㆍ묵가(墨街)ㆍ명해(鳴海)ㆍ적판(赤坂)ㆍ신거(新居)ㆍ견부(見付)ㆍ삼도(三島)ㆍ대의(大礒)ㆍ신내천(新奈川) 등지는 지방은 비록 각 주에 소속이 되었으나, 시여(市閭)의 수세는 모두 관백에게 직접 바치고 살마주(薩摩州)의 농도(籠島)와비전주(肥前州)의 장기(長崎)는 장사꾼이 모여드는 곳이므로 또한 관백의 별장(別藏)이 있다. 대저 국중에 인민이 많고 집들이 번성하며 시전(市廛)의 풍부한 곳은 흔히 큰길 옆에 있어 도읍(都邑)이 있는 지방, 바다의 배가 정박하는 곳에는 여행하는 자는 물건을 무역하고, 사는 사람들은 이익을 얻어서 농사짓고 길쌈하지 아니하고도 입고 먹는 것이 사치하고 높은 대문, 화려한 집들이 골목에 연하였다. 그러나 주(州)ㆍ국(國)의 세법(稅法)이 심히 각박하여 추호(秋毫)도 빠뜨리지 아니하므로 먼 촌의 농민들은 1년 내내 경작하여도 다 관청에 바치고, 풍년에 콩죽으로도 끼니를 이어가기 어려워서 제 아내와 자식을 파는 자까지 있다. 가난하고 부유함이 고르지 못한 것은 모두 국법의 폐단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다만 인민들이 한번 세를 바치고 나면 달리 사역되는 일은 없다. 관백 이하 각주의 태수가 출입할 때에도 다 인부와 말이 증발되거나 참(站)이나 길에 공급하는 비용이 없으므로 통신사의 행차에 대하여 많이 사역되는 인부 및 공급하는 모든 물자가 날마다 천이나 만으로 헤아릴 수 있지만 모두 관(官)에서 돈을 주고 사서 쓴 것이므로 털끝 만큼도 백성에게 번거롭게 하지 아니하니, 백성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군제(軍制)는 가장 정(精)하고 강하다. 각 주의 태수는 다 무관(武官)인데 받아들이는 전세(田稅)는 다 군사를 육성하는 데 쓴다. 군사 한 사람의 연급(年給)이 25석으로써 다른 부담은 없고, 장관(將官) 1백 석 이상을 두고 또 땅을 떼 내어 주어서 백성 부리고 세금 받는 것을 그 자유에 맡기므로 장관된 자가 혹 원래의 정한 수량에 구애되지 않아 만 가지로 백성을 학대하고 빼앗아 몰수(沒數)로 수입하여 각기 그 맡은 땅으로 그 부하를 기른다. 그래서 평민의 기름과 피가 날로 다되어 군사가 되지 않고는 입고 먹을 것이 나올 데가 없다. 그러므로 백성이 모두 힘을 다하여 운동을 하여 장관들의 부하에 들어가려한다. 이미 군사가 되고나면 제 몸을 제 마음대로 못하고, 죽고 살고 배고프고 배부른 것이 모두 장관의 손에 달렸으므로 한 번 비겁(卑怯)하다고 이름이 나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상대하지 않는다. 칼이나 창에 맞은 흔적이 안면의 앞에 있으면 용감한 사내라 칭하여 녹을 받고, 그 흔적이 귀 뒤에 있으면 잘 달아나는 자라고 지목되어 배척을 받는다. 대개 그 법령이 사람을 몰아넣기를 이와 같이하고 의식(衣食)의 나올 데가 다른 길이 없으므로 그들이 생명을 가벼이 여기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처음부터 의(義)를 위해 그런 것도 아니요, 또 타고난 성질이 그런 것도 아니라, 실은 스스로 제 몸을 위해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평일에는 군사들이 훈련되고 익히기로 성질이 되었다가 일을 만나면 달아나는 이무기[蛟]나 충돌하는 멧돼지와 같고, 적병을 보면 등불에 덤비는 불나방이나 수레바퀴에 대항하는 당랑(螳螂)과 같아서 장수는 비록 보잘 것 없는 인재라도 군사의 죽음 바치는 힘을 얻고, 군사는 비록 나약하더라도 전장에 달려가는 데는 용감하다. 이것이 비록 오랑캐 종족의 본습(本習)이긴 하나 군사 기르는 방법을 얻었다 할 수 있다.
○ 군사의 재주 시험은 매월 여섯 차례 한다. 물에는 주사(舟師)가 있고 육지에는 보병이 있는데, 모두 포수(砲手)로써 상등을 삼는다. 갑비(甲斐)의 기병(騎兵)과 살마(薩摩)의 검사(劍士)가 가장 날래고 용감하여 당적할 수 없기로 이름이 났다 한다. 그들의 무기는 칼과 총이 제일 정밀하다. 칼을 찬 자는 반드시 길고 짧은 쌍칼을 차서 긴 것으로는 치거나 찌를 때 사용하고, 짧은 것으로는 던져서 남이 뜻하지 않는 사이에 맞히면 당장 죽지 않는 자가 없다. 총은 대ㆍ중ㆍ소 세 가지가 있는데, 작은 것은 다닐 때에 쓰는 것이요, 중간 것은 그 몸이 조금 커서 녹로(轆轤)에 싣고 다니고, 큰 것은 길이가 한 발이나 되고 크기는 우리나라 천자총(天字銃)과 같아서 다만 성을 지키는 데에 쓴다. 창(鎗)은 간(竿)이 가늘고 긴데 또한 단지(單枝)와 3지(三枝)가 있고 위에는 검거나 흰 깃을 달았고, 간혹 붉은 담요로써 기를 만들었는데 넓이가 한 치 남짓하고 길이는 한 자 남짓하다. 활의 제도도 나무로 간(幹)을 만들고 대[竹]를 끼워 아교(阿膠)로 붙였고, 등(藤)으로 얽어서 칠을 하였는데, 그 길이가 한 발 남짓하며 힘이 약하여 능히 멀리 쏘지 못하고 화살도 또한 짧고 가늘며 깃[羽]이 넓어서 갑옷을 뚫기가 어려울 것 같다. 왜인이 우리나라 큰 활을 보고는 모두 놀라며 겁을 먹었다. 관백이 특히 힘센 사람을 선택하여 당겨도 능히 활줄을 버티지 못하였는데, 우리 군관(軍官) 양봉명(楊鳳鳴)으로 하여금 힘껏 당기어 화살을 쏘게 하니, 보고 있던 상하의 관리들이 모두 놀랬다.
○ 나라에 사민(四民)이 있으니, 병(兵)ㆍ농(農)ㆍ공(工)ㆍ상(商)이다. 선비[士]는 그중에 속하지 않는다. 군사는 입고 먹는 것이 제일 편하고, 장사꾼은 비록 부(富)하나 세법(稅法)이 너무 중하고, 공(工)은 기술은 교묘하나 값이 헐하고, 농민이 제일 괴로우나 1년에 세를 바치는 외에는 다른 부담이 없다. 대개 사민(四民) 외에 따로 유학(儒學)과 승도(僧徒)와 의학(醫學)이 있다. 그러나 국속에 의학은 사람을 살리는 공이 있기 때문에 의학이 상(上)이 되고, 승도(僧徒)가 다음이 되고, 유(儒)는 말등이 된다. 소위 유(儒)라는 것은 시문(詩文)을 짓기를 배우나 과거(科擧)에 올라 벼슬할 길이 없으므로 명예를 얻어서 각주의 기실(記室)이 되면, 능히 수백 석의 봉급을 받으면서 평생을 바치고, 자리를 얻지 못하면 군사에 들기를 구하거나 또 의학에 붙어서 산다. 내가 지나가는 역로(驛路)ㆍ참(站)ㆍ관(館)에 자기가 지은 글을 보이며 만나기를 요청한 자가 있었는데 아무 지방의 의관(醫官)이라고 하고, 아무 성(城)의 무신(武臣)이라 하였다. 그 글이 간간이 볼 만한 것이 있었다. 대개 문사(文士)로서 의관(醫官)이 되거나 군사가 되어 녹을 먹는 자들이었다.
○ 각주의 태수가 출입할 때에는 좌우에 호위하는 자가 든 흑우기(黑羽旗)와 홍전기(紅氈旗)에 모두 뾰족한 창끝이 있고, 군사들은 조총(鳥銃)을 끼고 화승(火繩)에 불을 붙여 뜻밖의 사변을 예방하고, 봉행 이하는 반드시 사람을 시켜 창과 기를 가지고 앞에 인도하고, 기실(記室) 등 여러 사람이 다 그러하여 그 의식(儀式)이 모두 무직(武職)에서 나온 것이요, 문구(文具)는 일체 찾아볼 수가 없었다.
○ 각 주의 사람이 모두 표지(標識)가 있어서 그 장막 선범(船帆) 및 의복의 옷깃 뒤를 자세히 보면 반드시 검은 색으로 표(標)를 만들었는데, 표가 혹은 모나고 혹은 둥글고 혹은 매화와 같고 혹은 나뭇잎 같고 혹은 태극도(太極圖)와 같고 혹은 품자(品字)와 같고 혹은 품자 위에 그림 하나를 덧붙여서 각기 지방에 따라 다르게 하였으니, 만약 미리 각 지방의 표를 알면 그 돛을 바라보아도 아무 지방의 배라는 것을 알 수가 있고, 그 사람을 보면 아무 지방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도 또한 군제(軍制)를 위해 만들어서 부곡(部曲)이 서로 혼란되지 않게 한 것으로써 우리나라 각영(各營)ㆍ각초(各哨)의 복색(服色)ㆍ기색(旗色)의 구별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모든 백성을 옷깃에다 묶어서 평소 출입할 때에도 감히 서로 동서가 섞이지 않게 하였으니, 그 법이 준엄하고 각박함을 알 수가 있다.
○ 그 풍속이 본래 등급이 없어서, 가옥ㆍ가마ㆍ말ㆍ의복ㆍ기물은 참람되어 규제(規制)가 없으되, 명분이 한 번 정해지면 위아래의 차별이 엄하여 공경하며 두려워하여 준행하고 받드는 것이 감히 태만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는다. 사신 행차의 왕래하는 길에 보면 접대하는 제관(諸官)으로, 태수ㆍ봉행 이하가 못나고 잔약하고 어리석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자가 있는데 그 부하들이 감히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 다니면서 명령을 듣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척촌(尺寸)도 잃지 아니하고, 칼을 차고 문을 지킬 때에는 문안에 오뚝하게 서서 밤새도록 나태함이 없고, 차(茶)를 끓여서 올리려고 할 때에는 화로를 끼고 숯불을 피우며 잠깐도 떠나지 아니하며, 무릇 부르는 일이 있을 때에는 응답하기를 메아리처럼 하여 매질을 할 필요가 없이 일마다 잘 처리되고, 길을 끼고 관광하는 자는 모두 정로(正路) 밖에 앉되, 작은 사람은 앞에 있고, 조금 큰 사람은 제이의 열이 되고, 더 큰 사람은 뒤에 있어 차례로 대열(隊列)이 되어 엄숙하고 정돈되어 떠들지 아니하여 수천 리의 보는 바에 한 사람도 망동하여 길을 범하는 자가 없었다. 대개 인심과 습속이 모두 손무(孫武)와 양저(穰苴)의 군사와 같은 것이요, 예법과 교화로써 일제히 된 것이 아니었다. 관백과 각 주 태수의 정치가 한결같이 군제(軍制)에서 나왔으므로 대소(大小)의 백성이 보고 익혀서 한결같이 군법과 같이 된 것이다.
○ 국중에 관(冠)ㆍ혼(婚)ㆍ상(喪)ㆍ제(祭)의 예법이 없어서 남자가 장가들지 아니한 자는, 다만 중앙의 머리털을 깎고 정수리 앞과 머리 뒤의 털만 남겨 놓는다. 장가를 든 뒤에는 정수리 앞의 털까지 깎아버리고 머리 뒤의 한 줌의 털만을 길이 네 치쯤 남겨서 종이 끈으로 묶어서 구부려 위로 올린다. 이것이 결혼한 자의 표시이다. 혹은 앞머리도 깎지 아니하고 머리 뒤의 털을 틀어서 굴곡(屈曲)하게 한 자도 있다. 여자는 머리를 튼 것이 중국의 제도와 같이 정수리 위에 가르마도 가르지 아니하고 바로 머리 뒤에 틀어서 세 송이[朶]로 접어서 구불구불하게 아래도 드리우고 흰 실로써 매어 그 쪽을 느슨하게 하며, 정수리에는 대모(玳瑁)빗을 꽂는다. 이미 시집간 자는 이가 모두 검은 빛인데, 철액(鐵液)으로서 약에 타서 머금으면 그 이가 곧 물들여진다. 시집가지 아니한 처녀와 기생은 모두 흰 이빨이다. 혼인할 때에는 폐백을 쓰지 아니하고 다만 혼인날 저녁에 신부를 신랑의 집에 보내는데, 피차의 친척들이 성대하게 등촉(燈燭)과 위의(威儀)를 베풀어 보내고 맞이하는 예식을 하고, 두 집에서 각기 음식을 차려서 손님들에게 대접하여 즐겁게 연회를 한다. 초상과 제사는 임금과 부모의 초상에도 곡(哭)하거나 상복을 입는 법이 없고, 음식과 언어마저도 평소 때와 같이 한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나무통 가운데 앉혀서 돌을 쌓아 묻고 나무를 세워 표시를 한다. 귀인(貴人)의 집이라야 비석이 있고 붉은 문을 세워서 그 지점을 표시한다. 제사 지내는 예법은 쌀을 흩으며 술로 땅을 적시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또 연기(年忌), 월기(月忌), 일기(日忌)라는 설이 있는데, 만약 사람이 정월 초하루 날에 죽었을 경우 11일, 21일을 다 기(忌)라 하고, 매년 정월 및 매월 초하루 날도 또한 그와 같이 하여 중을 청하여다가 재(齋)를 올리고 공양(供養)을 잘하니, 중들이 그 때문에 살아간다 한다.
○ 대마도의 통역 중 한 사람인 나이 젊고 민첩한 자가 나를 따라서 강호에까지 갔으므로 내가 자주 불러서 심부름을 시켰는데, 홀연히 하루 걸러 보이지 아니하므로, 내가 다름 사람에게 묻기를,
“아무 통사(通事)는 어디 있는가?”
하였더니, 왜인이 말하기를,
“그는 어제 모친이 죽었다고 부고를 받았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그 모친이 대마도에서 죽었는가?”
하니, 그렇다고 하였다. 나는 불쌍히 여겨서 그가 이미 분상(奔喪)하였거니 하고 다시는 묻지 않았다. 그 뒤 수 일 만에 그 사람이 와서 뵙는데 의복과 언어가 한결같이 평일과 같았다. 내가 말하기를,
“그저께 사람들이 전하기를 네가 애통하게 모친의 상을 당하였다 하기에 매우 놀라고 슬퍼하였다.……”
하니, 그 사람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기를,
“제가 멀리 왔다가 이런 애통한 일을 당하였으니,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일본의 왕법에는 분상을 허락하는 예(例)가 없으므로 몸이 공역(公役)에 매어서 억지로 따라다니느라 몸에 입은 푸른 무늬의 옷을 조금도 바꾸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조선 사람을 대하기가 부끄럽습니다.”
하였다. 그 뜻은 대개 조선이 상례(喪禮)를 중히 여기는 것은 저도 또한 들은 바이므로 부끄러운 줄 알아서 타고난 양심에서 문득 이마에 땀이 흐른 것이다. 위정자들은 어찌 이런 백성들로 하여금 이 본심을 상실하게 한다는 말인가.
○ 그들의 풍속에 귀신을 말하기를,
“사람이 살았을 적에 남의 존경과 믿음을 받은 자는 죽어서 반드시 제사를 받는다.”
하여, 사당을 설립하여 매양 재계목욕(齋戒沐浴)하고 기도하는 일이 있고, 부모의 죽은 날에 혹 소식(素食)을 하며 신(神)이 기(忌)한다 하여 어육(魚肉)을 절금하고 신당(神堂)과 음사(祠)가 곳곳에 있다. 천조황대신궁(天照皇大神宮)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들의 시조(始祖) 여신(女神)을 모셨다. 웅야산 수신(熊野山守神)이란 서복(徐福)이며, 애탕산 수신(愛宕山守神)이란 신라(新羅) 사람이요, 춘일(春日)ㆍ팔번(八幡)ㆍ주길(住吉) 등은 가장 대명신(大明神)이 된다. 기타 소소한 신령, 사람, 죽은 귀신 및 나무나 돌에 붙은 요망한 신으로서, 속(俗)에 숭봉(崇奉)하는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무릇 맹약(盟約)이나 금계(禁戒)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이런 신을 증명으로 맹세를 하고, 남녀가 장가들거나 시집갈 때에는 역시 받드는 신의 앞에 나아가서 술을 붓고 맹세를 한다.
○ 그 풍속이 색은 아롱진 것을 숭상하고, 맛은 단 것을 숭상한다. 찬은 고래 고기의 회를 상품으로 삼고, 자리는 붉은 담요를 상품으로 삼는다. 그 나머지 온갖 물건도 다 가볍고 간략한 것을 숭상한다. 심부름을 하는 자도 두 끼 세 끼 밥을 먹는 일이 없어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아침 저녁으로 음식을 들이겠다는 청이 없고 다만 배고플 때에 두어 개의 동전으로 유병(油甁) 한 개나 소우(燒芋) 두세 개를 사 먹어 요기를 하고 소위 관장(官長)의 음식하는 기구라는 것도 다만 반장(飯藏) 반궤(飯樻)라는 것이 있다. 반장이란 것은 나무궤로서 높이는 한 자가 안 되고 길이와 넓이는 두어 치요, 그 속에 붉고 검은 그릇과 나무숟갈 소반 등의 물건을 넣었는데 모두 가늘고 작고 모나고 둥글고 떡, 국수, 과일을 들이는 것도 다 1작(勺)에 차지 않는다. 비록 높은 벼슬아치가 윗사람의 명령을 받들고 여행하는 자라도 스스로 반장(飯藏)을 가지고 다니는 외에는 각 참(站)의 접대하는 비용을 번거롭게 하지 아니하고 입는 의복도 두세 가지 외에는 머리에 관이나 모자도 없고, 발에 가죽신이 없고, 밥을 짓는 기구도 모두 가볍고 얇고 교묘하므로 반 묶음의 나무로 밥ㆍ국 모든 탕을 만들 수 있고, 또한 온돌에 불을 지피는 법이 없으니, 한 사람이 1일에 먹는 것이 두세 개의 동전과 반 묶음의 나무에 지나지 아니하고, 1년에 입는 것이 한 냥의 은자(銀子)에 지나지 아니하므로 인구가 비록 번성하고 국가에서 받아들이는 세금이 비록 중하여도 사람들의 생활은 궁핍하지 않으며 땔나무[薪木]의 귀한 것도 또한 부족할 지경에 이르지는 않는다.
○ 죄수를 문초하는 법은 매질을 하지 아니하고 다만 죄수로 하여금 드러눕게 하여 큰 주발에 물을 담아서 바로 입에다 들어부어서 자복하게 한 후에 중한 죄는 바로 그 목을 베는데 형을 받을 자가 술을 마시고 정신없이 취하여 구덩이 속에 앉으면 친우 되는 자가 칼을 가지고 치는데 조금도 어려운 기색이 없다. 왜인의 큰 칼은 반드시 사람을 죽여야 이름이 있으므로, 사형을 받을 죄수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먼 데 가까운 데서 칼을 가지고 사람 죽이기 시험하려는 자가 장꾼처럼 다투어 모여드니, 풍속의 참혹하고 독함이 심하다. 죄가 감사(減死)에 해당될 경우에는 바다 위 외로운 섬, 사람 없는 곳에 귀양을 보내어 죄의 가볍고 중한 데에 따라서 그 연수(年數)를 한정하고, 죄가 비록 가볍더라도 두 번 범하면 사형을 한다. 역율(逆律)에 관계되는 자는 십자목(十字木)을 거리에 세워놓고 그 몸을 발가벗겨 그 손에 못을 쳐서 나무 위에 달아 놓고 왕래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불태우고 살을 깎게 하여 참혹하고 독한 짓을 극도로 한 후에 사형을 한다.
○ 내가 우삼동에게 묻기를,
“일본의 풍속이 자고로 생명을 가볍게 여겨서 성이 나면 반드시 스스로 목을 찌르고 스스로 배를 가르므로 관(官)에서 매질하여 문초하는 법이 없다 하니, 과연 그러하오.”
하니, 우삼동이 대답하기를,
“살기를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常情)인데, 일본 사람이라고 어찌 홀로 그렇지 않겠습니까. 다만 살마주(薩摩州)는 풍속이 특수하여 일을 당하여 걸핏하면 죽고 맙니다. 그리하여 큰 죄가 있는 자는 관(官)에서 잡아 가두지 아니하고 그에게 말하되, ‘네 죄는 마땅히 너의 집에서 죽어야 한다.’ 하면, 그 사람이 수긍하고 집에 돌아가 자살하여 조금도 어김이 없으므로 관에서도 또한 믿고 의심하지 아니하니, 대저 일본 사람이 생명을 가볍게 여긴다는 말이 실로 살마주 때문에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그렇다면 그것은 연조(燕趙)의 절사(節士) 협사(俠士)들과 풍속이 같은데, 그 가운데 혹 칭찬할 만한 기절(氣節)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옛글에 있는,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다 함과, 삶을 버리고 의(義)를 취한다 함은 군자도 어렵게 여기는 바이어늘, 살마주에서는 사람마다 이와 같으니, 어찌 기절이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대개 그 지방의 풍속이 기괴한 것입니다.”
하였다. 풍속이 기교(技巧)를 숭상하여 여공(女工)은 비단과 베를 짜는 것이 정밀하고 가늘며, 온갖 물건이 가볍고 묘하여 두어 치의 그릇으로 능히 상용(常用)하는 모든 기구를 담아서 품속에 넣을 수가 있고, 화초(花草) 같은 식물에 이르러서도 자연 그대로 두는 것이 없고, 반드시 가지와 잎을 펴거나 오므려서 교묘하게 모양을 만들어 둑[纛]과 같게 하고, 일산과 같게 하고 여러 층의 탑과 같이 하며 나무는 용이 서린 듯하며 봉이 나는 것과 같고 풀은 모난 상(床)과 둥근 독과 같은 모든 형상이 사람으로 하여금 놀래며 웃게 하고, 조화(造花)가 꼭 참꽃과 같아서 참인지 만든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으니, 대개 그 천성이 교묘하고 조작하여 진실하지 아니함이 이와 같다.
○ 우삼동이 나에게 이르기를,
“일본의 어느 일이 조선과 서로 같습니까?”
하므로, 나는 답하기를,
“경도(京都)에 이르러 길에서 물건을 파는 남녀가 외치는 음성을 들으니 우리 서울의 남녀와 흡사하고,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 음식을 먹는 모양을 보니 우리나라 중들이 모여 앉아 밥 먹는 모양과 흡사하고, 그 나머지는 같은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어떤 일이 중국과 서로 같은 것이 있습니까?”
하였다. 나는 답하기를,
“나는 중국을 보지는 못하였는데 다만 책에서 전한 것으로 말한다면 일본에서 집집마다 차를 마시는 것과 여자의 머리를 쪽진 모양이 가장 비슷하고, 물건을 운반할 때에 반드시 어깨로 메는 것이 또한 중국 사람들의 삼태기를 메고 시루를 메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우삼동이 말하기를,
“일본에는 세 가지 좋은 것이 있으니, 문둥이 악질(惡疾)이 없고, 저주 고독(蠱毒)으로 사람을 해치는 변이 없고, 백성이 관장(官長)을 죽이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풍속에 음악이 없고 다만 부귀(富貴)한 집에서 손님에게 연회하고 신(神)에게 굿을 할 때에 약간 북, 피리, 비파(琵琶), 노래, 춤이 있을 뿐이다. 내가 대마도 태수의 경저(京邸)에서 음악을 하는 것을 보고 돌아와서 여러 문사(文士)와 필담(筆談)하기를,
“예(禮)와 악(樂)은 유가(儒家)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귀국(貴國)의 음악을 본 즉 노래는 범음(梵音)과 같고 춤추는 것은 창을 쓰는 형상이나 권법(拳法)과 같으니, 이것으로써 귀국에서 불교를 숭상하고 군사를 연마하는 풍습이 승하고 유교(儒敎)는 흥성하지 못함을 알겠습니다.”
하였더니, 모든 선비들이 답하기를,
“참으로 바른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유교는 비록 아주 없다고 하여도 옳습니다.”
하였다.
○ 풍속이 글씨와 그림을 좋아하여 귀족의 집이나 민간에서 비록 글자를 알지 못하는 자라도 반드시 중국 사람의 글씨와 그림을 구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보물로 삼는다. 내가 일본의 글씨체를 본 즉 모두 홍법대사(弘法大師)의 법첩(法帖)을 모방하고 간간이 홍무격(洪武格)을 쓰는데, 연약하여 뼈가 없고 그림은 무슨 체를 쓰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역시 절묘하고 고와서 강산(江山), 초목(草木), 영모(翎毛) 등속은 절묘(絶妙)한 것이 있으나, 사람의 얼굴을 그린 것은 틀렸다.
○ 일본 사람이 우리나라의 시(詩)와 문(文)을 구하여 얻은 자는 귀천(貴賤) 현우(賢愚)를 묻지 아니하고 우러러 보기를 신명(神明)처럼 하고 보배로 여기기를 주옥(珠玉)처럼 하지 않음이 없다. 비록 가마를 메고 말을 모는 천한 사람들이라도 조선 사람의 해서(楷書)나 초서(草書)를 두어 글자만 얻으면 모두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감사의 성의를 표시하며, 소위 문사(文士)라 하는 자는 천릿길을 멀다 하지 아니하고 와서 역(驛)이나 관(館)에서 기다려서 하룻밤 자는 동안에 혹은 종이 수백 폭을 소비하고 시(詩)를 구하다가 얻지 못하는 자는 비록 반 줄의 필담(筆談)이라도 보배로 여겨 감사해하기를 마지 아니한다. 대개 그들이 정화(精華)로운 땅에 생장하였으므로 본래 문자(文字)를 귀중히 여길 줄 알기는 하나 중국과는 너무 멀어서 평생에 의관(衣冠)의 성한 의식(儀式)을 모르고, 평소에 조선을 높이 사모하는 이유로 그 대관(大官)귀인은 우리의 글을 얻어서 자랑 거리로 삼고, 서생(書生)은 명예를 얻는 길로 삼고 낮고 천한 자는 구경거리로 삼아서 우리가 글을 써 준 뒤에는 반드시 도장(圖章)을 찍어 달라고 청하여, 진적(眞蹟)인 것을 증명하므로 매양 이름난 도회지나 큰 고을을 지날 때에는 그들을 응접하기에 겨를이 없었다.
○ 일본의 크고 작은 모든 관원(官員)은 인신(印信)이나 부절(符節)을 위에서 받는 규정이 없고 다만 사사로 새긴 도장을 가지고 공문서에 찍으므로, 모든 금령(禁令)을 반포하여 보일 때에는 또한 수압(手押)이 있으니, 모양은 항아리와 같고 획이 크고 정연(整然)하다. 관직이 없는 사람도 조금 글을 아는 사람은 노소를 막론하고 반드시 자(字)나 호(號)가 있어서 각각 도장을 두어 개 만들어서 편지나 시편(詩篇)에 쓰되 주홍(朱紅)으로 가늘게 찍는데 전각(篆刻)의 묘함이 중국 사람에게 양보할 정도가 아니다.
○ 일본 사람이 글자를 읽는 음(音)은, 동(東)ㆍ동(冬)ㆍ양(陽)ㆍ경(庚)ㆍ청(靑)ㆍ증(蒸)의 글자를 읽는 것을 예로 들 경우 두 개의 음절로 발음하여 동(東)은 도우, 양(陽)은 요우, 청(靑)은 세이, 강(江)은 예이라 읽고, 진(眞)ㆍ문(文)ㆍ원(元)ㆍ선(先)ㆍ한(寒)ㆍ산(刪)의 글자를 읽을 때에는 우리나라와 대략 같다. 천(天)ㆍ천(千)ㆍ천(泉) 등의 글자는 모두 션[仙]이라 읽고, 기타 소(蕭)ㆍ호(豪)의 글자나 입성(入聲)의 ‘ㄱㆍㄹㆍㅂ’의 글자는 역시 두 개의 음으로 읽고 간혹 우리나라와 방불하다. 그러나 왜인의 혀를 놀리는 것이 본래 가볍고 부(浮)한 것이 많으며, 지껄이는 말이 새소리와 같으므로 전청(全淸)이요 탁음(濁音)이 없으며, 얕은 소리만 있고 무거운 소리가 없어서, 우리나라의 발음이 중국 전탁(全濁)을 내지 못함과 같다. 일찍이 우삼동으로 더불어 음역(音譯)의 같고 다름을 말하여 보았는데, 우삼동이 말하기를,
“중국의 발음은 탁음이 많고, 조선의 발음은 청한 것이 많고, 일본의 발음은 순청(純靑)이요, 탁음이 없습니다. 그것은 음성이란 것은 각각 풍기(風氣)에서 나오는 것인데, 조선은 중국과 거리가 가깝고 일본은 또 조선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므로 내가 일찍이 말하되, ‘조선은 중국의 음을 그대로 배워서 잘못된 것이요, 일본은 또 귀국의 음을 배워서 잘못된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 말이 진실로 옳습니다.”
하였다. 우삼동이 또 말하기를,
“방음(方音)의 길고 짧은 것도 또한 구별이 있으니, 중국 사람은 문자를 가지고 말을 하기 때문에 사람을 대하여 문안(問安)을 하는데 다만 서너 말이면 족한데 조선말로 번역을 하면 그 길기가 배나 되고, 일본은 또 길기가 3배나 되고, 서양(西洋)ㆍ남만(南蠻) 사람들은 그 말의 길기가 일본에 비교하여 또 3배나 되니, 이것으로써 중국과 거리가 멀수록 말이 더욱 길어진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과연 그렇습니다. 일본의 국경에 들어온 이후로 매양 보면 사람들이 나에게 자기의 소회(所懷)를 말하고자 할 때에 먼저 통역에게 말하여 그로 하여금 번역하여 전달하게 하는데, 그 말을 들을 적에는 매우 지루하여 천백(千百)의 곡절이나 있는 것 같다가, 통역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전하는 것을 들으면 두세 가지 일을 부탁하는 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 풍속에 문자를 쓰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없는 것이 매우 많다. 예를 들면 산전(山田)을 전(畠)이라 쓰고, 십자가(十字街)를 십(辻)이라 쓰는 유인데, 모두 번역만 있고 음은 없으며, 또 글자를 달리 쓰는 것이 있으니, 예를 들면 편지를 남에게 보낼 때에 아무 전(前)이라 할 것을 아무 양(樣)이라 쓰고, 물건을 서로 나눌 때에 아무 물건 얼마씩[式]이라 할 것을 식(式)이라 하지 않고 완(宛)이라 쓰고, 전(殿)자, 어(御)자는 보통 사람의 존대하는 말로 쓰고 관백 이하 각 주의 태수에게는 그 아래 사람들이 부르기를 돈우사마(敦于沙麻)라 쓰는데 돈우는 전(殿)의 번역이요, 사마는 양(樣)의 번역이니, 곧 전양(殿樣)이 된다. 그 밖에 존경하는 자제에는 모두 오마이사마라고 부르는데, 오라는 것은 왜말에 어(御)자의 번역이요, 마이라는 것은 전(前)자의 번역이요, 사마라는 것은 양(樣)자의 번역이니, 곧 어전양(御前樣)이다. 내가 관(館)에 있을 때에 나에게 선물을 보내는 사람이 있을 적에는 대개 어선(御扇), 어필(御筆), 어용지(御用紙), 어과자(御菓子)라고 쓴 것이 많았는데, 처음에는 매우 놀래어 퇴각시키려 하였더니, 역관(譯官)이 말하기를,
“왜인의 습속이 이와 같고 본래 참람된 것이 아닌데, 그것을 고쳐 쓰라 하면 이루 다 고칠 수가 없습니다.”
하기에, 웃고 그대로 두었다.
○ 일본국의 성(姓)은 본래 평(平)ㆍ원(源)ㆍ등(藤)ㆍ귤(橘) 사성(四姓)이 있었는데, 각기 식읍(食邑)으로써 나누어 씨족(氏族)으로 삼았으니, 두 자 성, 석 자 성은 다 지명(地名)으로써 된 것이다. 중국의 춘추 시대(春秋時代)에 수회(隨會)ㆍ양설힐(羊舌肹)의 자손이 범(范)씨ㆍ양(楊)씨가 된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이름에 오랑(五郞)ㆍ삼랑(三郞)ㆍ육랑(六郞)ㆍ칠랑(七郞) 등이 있고, 좌위문(左衛門)ㆍ우위문(右衛門) 등의 말은 모두 관직으로 이름을 지은 것이니, 마치 원(元) 나라에서 얼굴을 가지고 이름을 노화(魯花)ㆍ불화(不花)ㆍ첩목아(帖木兒)라 지은 것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모두 자기의 말로 번역하여 누루(縷縷)라 부르는데, 한 사람의 성명이 많은 것은 8, 9자에 이른다.
○ 왜인의 말에 뜻이 없는 것은 산(山)을 야마라 하고, 바다를 유미라 하고, 물[水]을 민주라 하고, 종이를 가미라 하고, 붓을 후데라 하고, 먹을 수미라 하고, 벼루를 수수리라 하고, 물건의 아름다운 것을 볼 때에는 예이라 하고, 좋지 않은 것은 왈이라 하고, 배에 노를 젓는 자가 힘을 쓰는 소리를 낼 때에는 예사예사라 하고, 혹은 야사야사라 하고, 메는 사람은 앞에 사람이 고리와사하면 뒤에 있는 자가 응하기를 고리와시라 하고, 천천히 행할 때에는 소리를 늦추어 이직우이라 하고, 빨리 행할 때에는 급히 부르기를 소로소로라 하니, 대저 겹친말을 많이 쓴다.
○ 국중에 쓰는 언문(諺文)은 48자가 있는데, 자형(字形)은 모두 진서(眞書) 수미의 점과 획을 잘라 만들었고, 음만 있고 석(釋)은 없어 서로 붙여 소리를 이루는 것이 거의 우리나라의 언문과 같았다. 그래서 그 방음(方音)으로써 방언(方言)에 맞추어 일반 사람이 익히기에 편리하고 통정(通情)하기에 적당한데, 그 언문의 초서가 기괴하여 떨어지는 꽃, 나는 새와 같아서 잘 알아볼 수가 없다. 그것은 곧 홍법대사가 만든 것인데, 홍법은 특이한 중이었다. 국중에 간행(刊行)되어 두루 퍼진 그의 필적을 보건대, 살[肉]이 많고 뼈는 작으면서 색태(色態)가 무르익고 고왔다. 왜인의 필법이 모두 여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 일본의 방언(方言) 역시 강호(江戶)와 지방의 구별이 있으니, 지방은 약간 느리면서 실(實)하고, 강호는 더욱 가볍고 간단하므로 대마도 사람이 강호에 와서 말로써 많이 말[缺] 조롱을 당하는 것이 곧 우리나라의 서울과 영남과의 사이와 같다. 내가 우삼동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본말을 배운다면 몇 달이면 될까요?”
하였더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중국말은 두어 달이면 되겠고, 조선말은 1년이면 되겠고, 일본말은 비록 총명이 남보다 뛰어난 자라도 3년이 아니면 능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 왜국은 옛적에 문자가 없었는데, 백제왕(百濟王)이 문사(文士)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 등을 보내어 비로소 문자를 가르쳐서 여러 해 강습을 시켜서 대략 전한 것이 있었다. 그 뒤에 당 나라 현종(玄宗) 때에 왜인 조형(鼂衡)이 중국에 들어가 이름이 있어 비서감(秘書監)이 되었다. 그가 본국에 돌아올 때에 왕마힐(王摩詰)이 시(詩)와 서(序)를 지어 그 일을 상세히 말하였는데, 중로에서 배가 전복되어 죽고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 뒤 천여 년에 일본 사람이 문장으로 이름난 사람이 없었다. 내가 보니 그 풍속이 글로써 사람을 쓰지 아니하고 또한 글로써 공사(公事)를 하지 아니하여 관백 이하 각 주의 태수와 모든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도 글을 아는 자가 없고 다만 언문(諺文) 48자에다가 약간 진서(眞書 한문(漢文))를 섞어서 장계(狀啓)와 교령(敎令)을 하고, 문부(文簿)와 편지를 만들어서 상하(上下)의 정을 통하니, 관백의 지도함이 이와 같다. 그 음역(音譯)을 들은 즉 산천, 지명, 육갑(六甲)이나 성명, 직호(職號)를 모두 방언으로 해석하여 부르고 그 자음(字音)이 또 청탁(淸濁)과 고저(高低)가 없으므로 시를 배우고자 하는 자는 먼저 삼운(三韻)을 가지고 여러 해 동안 공부를 하여 능히 아무 글자는 높고 아무 글자는 낮은 것을 구별한 뒤에 억지로 맞추어 시를 만들고, 글을 읽을 때에는 선후(先後)를 거꾸로 맺는 법을 알지 못하고, 글자마다 애를 써서 그 손가락을 내렸다 올렸다 한 뒤에 겨우 그 뜻을 통하니, 당시(唐詩)에 ‘마상봉한식(馬上逢寒食)’이라는 귀(句)를 읽을 적에는 봉(逢)을 한식(寒食) 밑에 읽고, ‘홀견맥두양류색(忽見陌頭楊柳色)’을 읽을 때에는 견(見)을 양류색의 뒤에 읽어서 문자를 학습하기 어려움이 또 이와 같으니, 비록 높은 재주와 통달한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도 부지런하고 애씀이 우리나라에 비교하면 마땅히 백 배나 될 것이니, 문인(文人) 운사(韻士)들이 대를 지나도 이름난 자가 없고 그중에 한 두 사람 붓을 잡는 무리도 또한 그 명성을 국중에 날릴 수가 없는 것이다.
전에 원가선(源家宣)이 관백으로 있을 때에 조금 글을 알았는데, 일찍이 사저(私邸)에서 원여(源璵)와 공부를 하였으므로 관백이 된 뒤에 원여를 발탁하여 써서 국정(國政)에 참여하게 하였다. 원여는 재주가 족히 고문(古文)을 알 만하고 시를 짓는 것이 자못 운치(韻致)가 있어서 그의 저술인 백석집(白石集)이 세상에 행한다. 그의 스승 목하순암(木下順庵)이 또한 박식(博識)하고 글 잘하기로 소문이 났으므로 일시에 문학을 좋아하는 무리들이 차차 세상에 진출하여 쓰이게 되었는데, 그 문장이 간간이 칭도할 만한 것이 있어 지금까지 강호(江戶)와 지방의 모든 사람이 서림(書林) 예원(藝苑)에 힘을 쓰는 자가 있으니, 훌륭하다 할 수 있다.
대저 그 땅이 양명(陽明)의 구역이 되어 강산이 수려(秀麗)하고 초목이 겨울에도 꽃이 피어 북쪽 오랑캐 털옷 입은 자들과는 자질이 다르므로, 사람들이 대개 총명하고 민첩한 이가 많아서 그들과 필담이나 짧은 편지를 주고 받아 보면 창졸간의 수작에 기이하고 아름다운 말이 많다. 국중의 서적은 우리나라로부터 간 것이 백(百)으로 셀 수 있고, 남경(南京)의 상인들을 통하여 온 것이 천(千)으로 셀 정도이므로 고금의 기이한 글, 백가(百家)의 문집이 민간에서 간행된 것이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십 배 뿐이 아니다. 그들 중에 글을 좋아하는 사람은 본래 타고난 총민(聰敏)한 성질에다가 과거(科擧)를 보기 위해 표절(剽竊)하는 폐단이 없이 익숙히 익히고 오로지 하여 두어(蠹魚 책을 파먹는 좀)가 글자를 파먹어 눈이 밝음과 같으므로 옛글을 토론하여 능하고 못한 것을 평할 때에 ‘이 같은 것은 한(漢)이요, 이 같은 것은 당(唐)이요, 이 같은 것은 송(宋)이다’ 하여, 소견의 정확한 것이 혹 거의 글을 잘하는 선비와 같으나, 그로 하여금 고시(古詩)나 율시(律詩)를 짓게 하면 평측(平仄)이 많이 어긋나고 운치(韻致)가 전혀 상실되어 우리나라의 삼척동자(三尺童子)가 들어도 웃음거리가 될 만하고, 서문(序文)ㆍ기문(記文)ㆍ잡문(雜文)을 짓게 하면 눈먼 뱀이 갈대밭에 달리듯 하여 법도와 기운이 하나도 볼 것이 없으니, 이것은 어찌 인재가 정한 한도가 있어 그러한 것이겠는가. 그 토풍(土風)과 정치 교화가 구애(拘礙)시킨 것이다. 내가 처음 대마도에 이르니, 우삼동이 나에게 이르기를,
“일본에서 문장을 배우는 사람들은 귀국과 아주 달라서 노력은 엄청 하는데 성취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공이 지금 여기서부터 강호까지 가는 도중에 얻어 보는 시문(詩文)들이 반드시 졸(拙)하여 우스운 것이 많을 것이나 천신만고(千辛萬苦)하여 애를 써서 겨우 그들이 얻은 글들이니, 모름지기 더럽다고 버리지 말고 수용하여 칭찬해 주면 좋겠습니다.”
하였다. 우삼동은 그 나라에서 걸출한 사람이다. 능히 3국의 음에 통하고 능히 백가(百家)의 글을 분별하여, 방언(方言) 번역의 같고 다른 것과 문자의 어렵고 쉬운 것에 대하여 가슴 속에 시비가 분명하기 때문에 그의 말하는 바가 이와 같은 것이다.
○ 일본 사람은 글을 짓는 자들이 반드시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抄)를 가지고 읽고 익혀 오로지 숭상하므로 심정을 서술한 장서(長書)를 보면 논리가 풍부하고 말이 유창한 것이 있으나, 시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당시(唐詩)를 배우려 하면서도 한 구절도 옛사람의 것에 비슷한 것이 없었다. 그것은 대저 해외에서 오랑캐의 말을 지껄이는 것이 되어 성률(聲律)이 전혀 어긋나므로 운문(韻文)을 짓는 것이 서술문(敍述文)보다 백 배나 되는 때문이다. 간혹 편지로써 묻기를,
“명 나라 왕감주(王弇州)ㆍ이우린(李于鱗) 등의 문장이 당 나라 구양수(歐陽修)ㆍ소식(蘇軾)과 어느 것이 낫습니까?”
하나, 그들 중에 명 나라 사람의 문장을 배우는 자를 나는 보지 못하였다.
○ 일본의 시나 문 가운데 그 땅의 산수를 두고 짓는 자가 쓰기를 진산(秦山)이니 초수(楚水)니 낙양(洛陽)이니 장안(長安)이니 오월(吳越)이니 연(燕)이니 촉(蜀)이니 하였으므로 그 글을 읽으면 일본인 줄을 모르게 된다. 그것은 지명(地名), 인명(人名)이 모두 이상하고 기괴하여 문장을 만들 수 없으므로 중국의 지명을 빌려서 문장을 만든 것이다. 그 땅에 꾀꼬리와 까치가 나지 않는데, 문장에는 꾀꼬리가 울며 까치가 지저귄다는 말이 있고, 음악에는 거문고와 비파를 쓰지 아니하면서도 문장에는 거문고를 타며 비파를 두드린다고 쓰고, 관(冠)이 없는데 또 건(巾)을 비스듬히 쓰고 있다는 문구가 있고, 띠가 없으면서도 금대(錦帶)니 옥패(玉佩)니 하는 문자를 써서 모두 헛된 이름을 쓰고 실지에 맞는 말을 짓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도 또한 간간이 범하는 일이다.
○ 일본 사람으로서 나와 마주 앉아 시를 지어 주고 받은 자는 대개 추솔하고 막혀서 말이 되지 않는 것이 많은데, 혹시 그가 내어 보이는 평소의 시고(詩稿)를 보면 간간이 한 구(句) 한 연(聯)이 매우 아름다운 것이 있어서, 즉석에서 지은 그의 시에 비하면 전혀 비교도 안 될 만큼 특수(特殊)하였다. 나의 생각으로는 남경(南京)의 해상(海商)들이 매양 서적을 싣고 와서 장기도(長崎島)에 팔기 때문에 순치(順治) 이후에 강남(江南)의 재자(才子)의 시집(詩集)이 많이 일본으로 건너온 것이 있는데, 조선 사람으로서는 보지 못하던 것이므로 저들이 가만히 호백구(狐白裘)를 도적질하여 진희(秦姬)에게 아첨한 것인가?
○ 임신지(林信智)는 신독(信篤)의 아들로서 그 가벌(家閥)이 글 잘하는 집이므로 매우 재주 있다는 명망이 있었다. 그가 나에게 오언배율(五言排律) 20운(韻)을 지어 주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멀고 먼 숭악(崇岳 삼각산(三角山))에 / 邈矣神嵩嶽
풍운이 완연하구나 / 風雲竟宛然
물화는 만고요 / 物華惟萬古
인걸은 천년이네 / 人傑自千年
기린굴(麒麟窟)에 아름다운 구름이 일어나고 / 麟窟祥煙起
봉산에 상서로운 해가 달려있네 / 鳳山瑞日懸
동방에 도로가 두루 통하였고 / 東方通道里
남두성(南斗星)에 분야(分野)를 꼈네 / 南斗夾星躔
아름다운 신가의 선비는 / 濟濟申家子
당당한 한국의 어진 이로다 / 堂堂韓國賢
왕조에서 역사책을 편찬하고 / 王朝稽彼史
종묘에서는 제기(祭器)를 받드는 집사관(執事官)이네 / 宗廟執其籩
이름은 비서성(秘書省)에 높았고 / 名重文郞省
재주는 훌륭한 학사로세 / 才宏學士員
임금의 조칙을 대신 짓는 직무를 맡았으니 / 絲綸嘗屬務
문필에 이미 전권이 되었도다 / 翰墨已專權
비서성에서 임금의 글 초하는 데에 모셨고 / 侍制秘丘上
어좌(御座) 앞에서 은혜를 받았네 / 賜恩淸禁前
장열(張說)ㆍ소미도(蘇味道)가 당 나라 시대에 드러났으며 / 張蘇唐代顯
반고(班固)ㆍ채옹(蔡邕)이 한(漢) 나라에서 이름을 전했네 / 班蔡漢宮傳
문득 사신(使臣)의 임명을 띠고 / 忽見聘交事
예회의 자리에 올랐네 / 斯登禮會筵
장한 놀이가 어찌 쓸쓸하리요 / 壯遊何索落
높고 맑은 흥취가 다시 날리네 / 逸興更聯翩
붉은 기운에 관을 나가는 손이요 / 紫氣出關客
푸른 물결에 바다에 뜨는 신선이로다 / 蒼波浮海仙
옥피리를 불면서 새벽에 말을 먹이고 / 玉珂晨秣馬
비단 뱃줄로 밤에 배를 멈추네 / 錦纜夜留船
객지에서 한 해가 저물려 하는데 / 祗役歲云暮
고향을 바라보매 달이 몇 번이나 둥글었는고 / 望鄕月幾圓
구추(九秋)에 손의 꿈이 고요하고 / 九秋覉夢寂
한 바다를 사이에 두고 나그네의 정서가 기네 / 一水旅情綿
역은 홍진의 땅이 닿았으며 / 驛接紅塵地
관은 흰 눈 내리는 하늘에 열렸네. / 館開白雪天
매화를 꺾은 들 어찌 서로 보낼 수 있으랴? / 折梅寧可寄
풀을 깔고 서로 모여 앉아 보세 / 藉草且相牽
칼을 뽑아 기특한 기절을 논하며 / 劍舄論奇節
술과 안주로 좋은 인연 말하네 / 盃盤說勝緣
또 대아의 곡조를 듣는데 / 還如開大雅
붉은 줄의 소리에 세 번 탄식함과 같도다. / 三嘆在朱絃
하였다. 그는 또 칠언고시(七言古詩)를 지어 주었는데, 시에 이르기를,
대동강 물이 천고의 빛인데 / 大同江水千古色
깊게 일렁거리며 빙둘러서 만 리에 떴네 / 奫淪靡迤萬里浮
높디 높은 저 은하수가 긴 하늘에 걸렸는데. / 倬彼銀河長天掛
서풍 하룻밤에 바다 동쪽 머리에 닿았구나 / 西風一夜東海頭
지금 손으로 무지개를 버티고 가니 / 方今手撑虹霓去
표연(瓢然)하기가 천지 밖에 선선이 된 것과도 같네 / 飄如八極作神遊
깃발이 나부끼며 어디메로 가는고 / 旌旆飄悠何處所
바라 뵈는 곳 구름 기운 단구에 둘렀구나 / 望中煙氣遶丹丘
사신으로 왕래하는 것이 원래 가장 성한 일이라 / 信聘由來最盛事
의관 옥백에 아름다운 계책을 우러르네 / 衣冠玉帛仰嘉謀
그대는 다시 문장을 잘하니 / 君復濛汜堪裁賦
채색 붓을 종횡으로 놀리어 쉬지를 아니하네 / 彩筆縱橫更不休
흰 이슬이 대나무에 스치고 / 白露更拂琅干樹
푸른 노을은 산호의 갈퀴에 가득 차네 / 蒼霞欲滿珊瑚鉤
관산의 한없는 길에 머리 돌이키며 / 回首關山無限路
나그네의 마음 왕찬의 누에 오래 올랐네 / 客心久登王粲樓
베 돛이 이로부터 돌아감이 응당 빠를 것이니 / 布帆從此歸應疾
대붕새 날개 바람 가운데 일월이 흐르리 / 鵬翼風中日月流
보배 피리로 만파식곡(萬波息曲)을 불러내니 / 寶管吹徹萬波息
한양성 위에 오색 구름이 배회하리 / 漢陽城上五雲留
성스런 시대에 공명이 빛나리니 / 聖代功名終赫奕
두 나라에 명성을 뉘가 능히 짝할 수 있을까 / 兩邦聲譽是誰儔
나와 처음 잠깐 만나서 마음이 깊이 합했으니 / 慚我傾蓋得妙契
비단과 모시로 서로 주매 뜻이 간절함을 어찌하랴 / 縞紵難奈意綢繆
이별가 한 곡조에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니 / 離歌一曲人不見
기러기 멀고 먼데 백 년의 가을이로다 / 鴻雁遙遙百年秋
그대는 듣지 못하였는가 뽕나무 활, 쑥대 화살은 남아의 일이라 / 君不聞桑弧矢男兒事
사방으로 다니는 본 뜻을 마침내 어찌 거두려는고 / 四方素志竟何收
또 듣지 못하였는가, 외국에 교제하는 높은 재주는 사신의 사업이라 / 又不聞專對高才使者業
부지런히 노력하여 조심하소 / 夙夜努力愼前修
하였다. 그 시를 자기로서는 잘된 것이라 이르나 말이 되지 않는 것이 많고, 글씨는 홍무체(洪武體)를 모방한 것인 듯 하나 졸(拙)하고 약하여 가소로웠다. 그의 형 신충(信充)이 나에게 지어준 시도 또한 많은데, 더욱 보잘 것이 없었다.
○ 동계(東溪) 반전작(飯田綽)이 나를 이별하면서 지어 준 시에 이르기를,
시월 바람이 붉은 비단 갖옷에 차가운데 / 十月風雲紫綺裘
이역(異域)에서 함께 세월 흐름을 슬퍼하네 / 共憐殊域歲華流
채색 무지개 늘어뜨린 그림자 삼천 길이요 / 彩虹落影三千丈
검은 학의 울음 소리 십이루에 들리네 / 玄鶴遺聲十二樓
구름 밖 종소리에 먼데 꿈이 놀라고 / 雲外霜鍾驚遠夢
역정의 밤비에는 맑은 시름이 맺혔네 / 驛程夜雨結淸愁
먼 길에 목과를 주었다고 혐의하지 마시고 / 莫嫌遠有木瓜贈
여주(驪珠) 만 곡을 받은 듯이 여기소서 / 賴把驪珠萬斛酧
하였다. 그 끝에 짧은 편지를 부기(附記)하기를,
“본월 재생명(哉生明 초3일)에 객관에서 만났으나 보름날에 깃발이 서쪽으로 향하니, 나는 공의 풍채를 사모함이 꿈속에도 아른거립니다. 당일 석상(席上)에서 지어준 품격 높은 시를 가지고 한갓 안면을 대한 듯이 여기고 있습니다. 비루한 율시(律詩) 한 편을 기러기 날개에 부쳐서 아뢰오니, 그것이 홍교(洪喬)의 버림을 면하여 높은 눈에 접할 수 있다면 천행(天幸)이겠습니다.”
하였다.
○ 설계(雪溪) 정상유기(井上有基)가 나를 이별하면서 지어 준 시에 이르기를
이별곡을 파하고 손은 돌아가려 하는데 / 驪駒歌罷客將歸
새벽에 패교를 바라보니 눈물이 옷에 가득하네 / 曉望㶚橋淚滿衣
재택 천 년에 사람이 다 없어졌고 / 梓澤千年人盡去
평원의 열흘 동안 일이 이제는 틀렸네 / 平原十日事多非
부용산 밑에 안계(眼界)가 가이 없고 / 芙蓉山下眼無極
버드나무 나루터에 혼이 날고자 하네 / 楊柳渡頭魂欲飛
바닷물에 아침저녁의 소식을 전하기 어려우니 / 海水難傳朝夕信
난간에 기대어 섭섭하게 사양(斜陽)을 대했네 / 憑欄怊悵對斜暉
하였다. 끝에 짧은 편지가 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만나 뵌 뒤로 사신의 관(館)에는 영(令)이 엄하여 뜰 아래에 재배(再拜)할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 또 소개와 편지를 통할 수도 없어 헛되이 저문 구름, 봄나무[暮雲春樹]의 생각만 가졌습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수레바퀴에 이미 기름칠을 하였다고 들으니, 섭섭하고 한 됨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대개 군자의 벗은 그 마음이 후함과 박함에 있는 것이요, 같고 다름으로써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만난 동안이 지극히 짧은 것이 한이 되니, 어찌 평일에 품었던 바를 털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간절한 정성을 꿈에다 의탁하겠습니다. 편지를 대하니 슬프고 섭섭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날씨가 추운 때에 나라를 위해 몸을 조심하소서.”
하였다.
○ 학정(鶴汀) 계산의수(桂山義樹)가 고풍체(古風體) 한 편을 지어 주었다. 그 시에 이르기를,
봉황루 밖에 금은 궁궐이요 / 鳳凰樓外金銀闕
오양성 위에 여러 신선이로다 / 五羊城上群仙人
어젯밤에 고리와 패로 하늘에서 내려오니 / 環佩昨夜降霄漢
무릉의 복숭아 꽃 일만 년 봄이로다 / 武陵桃花一萬春
나를 보자 흔연히 선약정(仙藥鼎)에 불을 피우게 하더니 / 見我欣然供鼎役
잠깐 사이 옥기린을 타고 갔네 / 頃刻爲御玉麒麟
부상의 푸른 물이 하늘에 넘치는데 / 扶桑碧水蹴天漲
인간에서 다시 길을 묻는 떼 배가 없었네 / 人間無復槎問津
하룻날에 여러분이 바람과 비를 몰아서 왔으매 / 一日諸公驅風雨
아름다운 기운이 도성에 가득한 것을 거듭 보겠네 / 重瞻佳氣滿城闉
남산의 야사는 성이 계인데 / 南山野士原姓桂
청전선(靑錢選)에 그릇 뽑혔으나 석상진(席上珍)은 아니로세 / 謬中銅選非席珍
삼동의 문사에 빙설을 씹었고 / 三冬文史嚼氷雪
한 자루의 보검(寶劍)에 정신을 의탁하였네 / 一把雄劍寄精神
푸른 눈알로 돌아보아 주매 언덕이나 산처럼 중한데 / 靑眸賜顧丘山重
한평생에 곽임종(郭林宗)의 건을 꿈에라도 생각하네 / 百年夢想鉢宗巾
다만 붉은 난새가 하늘을 향해 날까 걱정되어 / 只愁紫鸞慕天翥
북두성(北斗星) 밤마다 높은 자취를 바래네 / 北斗夜夜望後塵
속절없이 이별하는 한을 바람에 부쳐가니 / 空將離恨付風去
그대를 좇아 바로 한강 가에 떨어지리 / 逐君直落漢水濱
하였다.
○ 감곡(甘谷) 원방경(源芳敬)이 오언배율(五言排律) 20운(韻)을 이별시로 지어 주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바다 동쪽 군자의 나라 / 海東君子國
덕이 이웃이요 아름다운 이름도 같도다 / 隣德美名均
통신사(通信使)의 내왕은 유래가 오래요 / 聘禮由來久
맹약(盟約)은 좋은 전례를 따랐도다 / 約盟令典循
여러 현인(賢人)의 비단 깃발이 빛나매 / 群賢輝繡節
사신으로 온 이는 사모 쓰고 큰 띠 매었네 / 專對見簪紳
비서의 명예를 흠앙하였는데 / 欽仰秘書譽
다시 옥당(玉堂)의 사람인 줄 알았네 / 更知玉府人
학식은 사고를 알았고 / 學識諳四庫
건필(健必)은 천 근(千斤)의 무거운 것을 당기네 / 毫健挽千匀
웅변은 박연폭포가 내리 쏟고 / 雄辯朴淵掛
높은 표격(標擊)은 백악산(白岳山)이 새롭네 / 高標白島新
신유는 장래를 아는 식견이 있고 / 申繻傳遠識
명도는 본래 온순(溫純)하네 / 明道本溫純
항상 도산의 깊은 데를 열람하였고 / 常閱道山奧
원래 석상진을 지녔네 / 元懷席上珍
들은 것이 많으매 옛 학업을 스승으로 하였고 / 多聞師古業
오절은 남륜을 대대로 하였네 / 五絶世南倫
돛대는 더운 기후(氣候)를 무릅썼는데 / 帆冒炎熱候
관에서 서리 내리는 새벽이 가까웠네 / 館近霜露晨
일산을 기울이니 서로 의기(意氣)가 합하였고 / 蓋傾投意氣
말씀이 높아서 나는 수작하기가 부끄러웠네 / 語高愧敷陳
널리 사랑하매 어리석고 못난 이를 용납하고 / 泛愛容愚劣
풍채는 한 점의 티끌도 없었네 / 丰儀絶點塵
새로 알았는데 사귀는 정이 절로 담박하고 / 新知交自淡
기이한 만남이 어찌 인연이 없으랴 / 奇遇豈無因
하필 혀끝을 움직이랴 / 何用舌端動
목격에 의하여 친해지네 / 情依目擊親
수레를 돌릴 기일이 이미 촉박한데 / 脂車期已促
학을 타고 또한 따라 왔네 / 駕鶴亦隨臻
이역에서 마음이 도리어 장하고 / 異域心還壯
하늘에 드리운 날개를 또한 폈네 / 垂天翼亦伸
돌아가는 길의 봉우리는 창과 같고 / 歸程峯似戟
큰 바다의 물결은 은빛 같네 / 溟渤浪如銀
내일은 그대가 떠난다는 말을 들으니 / 明日聞君去
저문 구름이 나의 마음 상하게 하네 / 暮雲傷我神
꿈에는 봉래산(蓬萊山)의 경치가 남았고 / 夢殘蓬島景
서기(瑞氣)는 부산 바닷가에 가득하리 / 瑞滿釜山濱
만 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생각하는 곳에 / 萬里相思處
누각에 올라 달을 바라보리 / 登樓望月輪
하였다.
○ 미장주 기실(尾張州記室) 목실문(木室聞) 선인편(仙人篇)을 지어 보내어 나에게 이별하였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옥경의 신선이 여섯 마리 용을 타고서 / 玉京仙人馭六龍
날아서 멀리 부상까지 오려 하였네 / 翶翔遠欲窮扶桑
밤중에 동남에서 태양이 뛰노니 / 夜半東南日毬躍
큰 바다가 솟구쳐 구슬을 부수는 듯 / 大海湧動碎琳琅
문득 고삐를 달려 천상에 올라가 / 倐忽騁轡凌紫虛
아침에는 석수를 먹고 저녁에는 경장을 마시네 / 朝餐石髓暮瓊漿
쌍쌍의 선녀가 봉황의 피리를 부는데 / 兩兩神女吹鳳簫
구름 사이에 흰 무지개 치마가 나부끼네 / 雲間飄颻素霓裳
봉래산을 굽어 보매 오색구름이 보였는데 / 俯觀蓬萊五雲簇
잠깐 동안 멍에를 멈추고 높은 당에 올랐네 / 少時停駕上高堂
산호의 패물이 대모(玳瑁)자리에 빛나는데 / 珊瑚寶玦耀玳筵
신선들이 웃으며 술잔을 함께 들었네 / 仙人解顔共壺觴
왼손에는 연꽃을 쥐고 오른편에 지초(芝草)를 희롱하니 / 左把芙蓉右弄芝
가래침이 단약(丹藥)을 이루어 옥상에 가득하네 / 咳唾成丹滿玉床
구름의 모였다 흩어짐이 어찌 그리 쉬운고 / 雲氣聚散何容易
속절없이 아득한 허공을 바라보니 마음만 미칠 것 같네 / 空望窈冥心欲狂
원컨대 우리로 하여금 날개가 돋쳐서 / 願使吾輩生羽翼
곤륜산(崑崙山)에 가서 길이 놀게 하소 / 翻跡長游崑崙岡
하였다.
○ 복창언(福昌言)이란 사람이 있어 호를 학저(鶴渚)라 하며, 자못 시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미장주(尾張州)에 숨어서 살았다. 내가 강호(江戶)로부터 돌아올 때에 본주(本州)를 지나는데, 그 사람이 와서 보지는 아니하고 기실(記室) 조문연(朝文淵)을 소개로 하여 칠언절구(七言絶句) 두 편을 지어 떠나는 나에게 보냈다. 그 시에 이르기를,
이웃 우호(友好) 천 년에 덕이 외롭지 아니하니 / 隣好千年德不孤
사절(使節)이 봉래산(蓬萊山) 찾아옴을 기쁘게 보네 / 喜看旌旆訪蓬壺
오색 구름이 자라머리의 경치를 물들여 / 五雲染出鼇頭景
시인(詩人)의 붓 아래 주옥(珠玉)으로 변화하네 / 化作騷人筆下珠
하고 또 이르기를,
만 리 긴 바람에 역마가 우는데 / 萬里長風驛馬嘶
오늘 밤에는 머물러 시를 써 주시오 / 今宵偏要爲留題
그대가 내일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 憶君明日遙歸去
다만 흰 구름이 물 서쪽에 나는 것만 보이네 / 徒見白雲生水西
하였다. 조문연이 그의 시가 보통의 조격(調格)이 아니라고 매우 칭찬하였다. 왜인의 칭하는 상등(上等)에 속한다는 사람이 이와 같은 데에 불과하였다. ○ 중들의 시가 비록 많으나 더욱 눈에 들 만한 것이 없었다. 내가 좌화성(佐和城)에서 용담사(龍潭寺) 중 소영(素盈)이란 자를 만났는데, 필담을 밤새도록 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또 서로 만났는데 그 중이 자못 친하게 굴며 시로써 나에게 작별하기를,
이별한 뒤에 또 서로 보니 / 別後又相見
찬 매화가 백옥의 자태를 드러내네 / 寒梅逞玉姿
저문 구름 손을 만나는 날이요 / 暮雲逢客日
위수(渭水)의 나무 그대를 보내는 때로다 / 渭樹送君時
교칠을 먼저 서로 약속하였는데 / 膠漆先爲約
금란이 다시 누가 있을꼬 / 金蘭更有誰
비파호(琵琶湖)와 한강(漢江)에 / 琶江兼漢水
밝은 달이 마음 비쳐 아네 / 明月照心知
하였다. 시가 비록 고담스럽고 졸열하나 정경(情景)만은 사랑스러웠다.
○ 내가 우삼동과 시를 주고받은 것이 또한 많은데, 배가 일기도(壹岐島)에 멈추어 바람을 기다릴 때에 우삼동이 시를 지어 보내기를,
가을바람이 편의를 빌려주지 않아서 / 秋風難借便
손의 배가 난초(蘭草) 나는 언덕에 매어 있네 / 客舸繫蘭汀
건너는 어구에 불 그림자가 차갑고 / 影冷渡間火
이슬 밖의 별은 빛이 희미하네 / 光微露外星
공연히 귀밑에 눈이 가득하고 / 漫將髩堆雪
다시 자취가 부평초(浮萍草) 따름을 깨달으리 / 仍覺跡隨萍
타루 밑에서 칼을 두드리노라면 / 擊劍柁樓底
이역(異域)의 노래 차마 듣지 못하리 / 吳歌不忍聽
하였다. 배가 남도(籃島)에 이르자 또 칠언율시(七言律詩) 한 편을 지어 부치기를,
목란배가 큰 바다 언덕에 매었으니 / 木蘭舟繫大瀛隈
높은 누각에 이리저리 기대이매 서쪽으로 안계(眼界)가 열리네 / 徙倚高樓西望開
먼 포구에는 구름이 신녀묘를 막았고 / 極浦雲遮神女廟
웅장한 관문에는 달이 패가대에 비치네 / 雄關月照覇家臺
일천 숲의 귤과 유자에 가을 서리가 차고 / 千林橘柚秋霜冷
한 섬에 연기 안개는 저문 빛이 구슬프구나 / 一島煙霞暮色哀
고향 산천에 머리 돌리자 소식이 끊어졌으니 / 回首鄕山消息斷
꿈 가운데 변방의 피리를 서로 재촉하지 말라 / 夢中戍笛莫相催
하였다. 또 오언율시(五言律詩) 두 편을 지어 보냈는데, 그 첫 편에는,
늙어 병들었고 벼슬에 매었는데 / 衰病仍官繫
다시 만 리의 놀이를 하네 / 復成萬里遊
파도는 밤새도록 빗소리요 / 波濤終夜雨
솔과 계수나무 산에 가득한 가을이네 / 松桂滿山秋
기러기는 철 이르게 공중에 날아 지나가고 / 雁早書空度
반딧불 한가로이 물에 비치어 흐른다 / 螢閒照水流
누가 양춘곡(陽春曲)를 연주하여 / 陽春誰奏曲
노부의 시름을 풀어줄 수 있을까 / 能解老夫愁
하였다. 그 다음 편에는,
못난 자질로 희망을 버렸거늘 / 樗材甘自棄
이번에 함께 놀 줄을 어찌 헤아렸으리 / 何料此同遊
바다 구름의 새벽에 거문고 아뢰고 / 琴奏海雲曉
산장(山莊)의 가을에 술잔을 전하네 / 盞傳山榭秋
풍연은 좋은 경치를 제공하는데 / 風煙供勝槪
문장은 명류로세 / 詞藻屬名流
손을 잡고 뜻이 서로 합하니 / 握手意相得
고향 생각 시름이 반이나 감하리 / 鄕心半減愁
하였다. 배가 지도(地島)에 닿자 연일 비바람이 쳤는데, 그는 또 시를 지어 보내기를,
풍우는 언제나 개려는고 / 積陰何日已
나그네 회포 답답하여 트이지 못하리 / 覊抱鬱難開
배 안에서 자매 오랫동안 해안(海岸)에 의지하였고 / 舟宿長依岸
신기(蜃氣)를 뿜으매 곧 누대가 되네 / 蜃噓旋作臺
자주 사공을 불러 말하고 / 頻呼篙子語
때때로 기러기 소리 듣고 슬퍼하네 / 時聽旅鴻哀
술을 마셔도 마침내 소용이 없고 / 樽酒終無賴
가을 바람만 귀밑털 희어지는 것을 재촉하누나 / 秋風兩鬢催
하였다. 그 끝에 작은 편지가 있는데, 거기에,
“연일 음천에 역풍(逆風)이 방해를 하므로 신선놀이의 기약은 아득하고, 또 여러 군자와 더불어 자리를 같이하여 담화하지 못하니, 호사다마(好事多魔)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들으니, 공은 동행한 여러분과 함께 주야로 서로 주고받아 좋은 시가 책상에 가득하다니, 바다 속에 늙은 용왕(龍王)이 필시 생각하기를, 강산의 기묘한 곳에서 공의 창자 속에 들어있는 아름다운 시를 있는 대로 발설(發泄)시킨 뒤에야 한 자리 맑은 바람으로써 도와서 장문(長門)의 바다로 바로 보내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없는 학식과 다함없는 재주가 마침내 다할 때가 없을 것이니, 그러고 보면 늙은 용왕의 도모하는 바는 한갓 일 많은 것만 되고 말 것으로서 서로 밝게 알아주는 것이 도리어 나보다도 못하므로 가소롭습니다. 어제 하소(霞沼)와 더불어 시를 논하다가 인하여 말하되, ‘나의 시는 골동품점(骨董品店)과 같아서 집이 넓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기명(器皿)이 많지 아니한 것이 아니나, 한되는 것은 냄새나는 구리쇠와 깨어진 자기(磁器)에 재[灰]와 먼지가 쌓여서 사람으로 하여금 구토(嘔吐)를 하게만 할 뿐이요, 자네의 시는 한 송이 말리화(茉莉花)와 같아서 비록 웅위(雄偉)한 구경거리는 없으나 스스로 맑고 아담하여 사랑스러울 만하다.’고 하였으니, 공은 이 말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내 집안의 추한 것을 밖에 드러내는 것이 되므로 절로 얼굴이 붉어집니다마는 한편으로는 공으로 하여금 한번 웃게 하려는 것이요, 한편으로는 가르침을 청하는 것이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하소는 곧 송포의(松浦儀)의 호인데 시를 짓는 것이 자못 재치(才致)와 정(情)은 있으나 기력이 미치지 못하여 고담(孤澹)한 것을 면하지 못하므로 우삼동이 그들끼리 서로 품평(品評)한 말을 기록하여 나의 평론을 듣고자 한 것이다. 내가 편지를 써서 답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편지를 받아보니, 하소와 더불어 시를 논평한 것은, 마치 왕장공(王長公 감주(弇州))의 시 가운데 자기의 시는 큰 바다 붉은 물결[大海紫瀾]로 자처(自處)하고, 이우린(李于鱗)의 시는, 눈속의 아미산[雪中峩眉]으로 평한 것이 지금까지 천하에 이가(二家)의 평이 된 것과 같습니다. 대저 큰 바다는 웅혼(雄渾)한데 비유한 것이요, 아미산은 맑고 높은 것을 말한 것이니, 공의 뜻도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나는 생각하기를, 골동품점의 먼지 묻은 구리쇠는 정정(程鄭)의 집 물건 아님이 없으니, 곧 하루 아침에 갈고 닦으면 진주(眞珠)ㆍ월패(月貝)와 같게 할 수 있는 것이요, 한 송이 말리화(茉莉花)도 역시 우로(雨露)의 덕택으로 자라는 가지와 잎이니, 저 자연이 배양(培養)하는 것이 세월이 더 간다면 다른 날에 향기가 산에 가득하여 풍부한 구경거리가 되지 아니할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나 일본은 좁은 땅이라, 공의 골동품도 일찍이 사람들에게 팔려 본 일이 없고, 하소의 말리화도 그 외롭게 고운 것을 상심할 것이 없습니다. 힘써서 스스로 아끼시오.
하였더니, 그뒤 수일 만에 두 사람이 와서 사례하기를,
“주신 편지를 받았는데, 권면함과 감탄함이 함께 지극하니, 감히 지기(知己)의 주는 말씀을 잊겠습니까.”
하였다.
○ 섭진주(攝津州)의 문인(文人) 삼택즙명(三宅緝明)은 호를 창명(滄溟)이라 하는데, 평수집(萍水集)이란 책을 가지고 나에게 서문을 청하면서 편지로 말하기를,
“나의 아우 무충(茂忠)이 호를 석병(石屛)이라 하는데, 연고가 있어 공에게 가 뵙지 못하고, 근간에 대마도의 사람에게 부탁하여 편지 및 평수집을 공에게 바치면서 공의 서문을 얻기를 요청하였더니, 그것이 전달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고로 귀국에서 우리나라에 사신이 올 때에는 과군(寡君)이 대대로 관반(館伴)의 일에 참여하였는데, 나는 곧 과군 휘하의 고구(故舊)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조고(祖考)와 선인(先人)이 모두 사신의 관(館)에 출입하면서 귀국의 여러 학사들과 시를 주고 받고 하였으니, 조고와 박나산(朴螺山), 선인과 성취허(成翠虛)의 관계를 평수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신묘년에 우리 형제가 과군을 모시고 사관(使館)에 출입하여 이동곽(李東郭) 등 여러분과 더불어 함께 놀면서 문묵(文墨)으로써 즐겼으므로 우리들은 스스로 한평생의 기이한 즐거움이요 두 번 있기 어려운 일이라 하였습니다. 이제 뜻밖에 공을 만나 반겨주심을 받았으니 내가 귀국의 선생들에게 우연한 것이 아니므로, 옛사람의 이른바, 전생의 인연이라 한 것이 있는 것입니까, 어찌 그리도 기이합니까. 우리나라 사람이 귀국의 여러 학사에게 교분을 가진 이가 심히 많으나 3대로 서로 계승하기를 우리 형제와 같은 이는 드뭅니다. 세상에 드문 풍류는 또한 손자(孫子)된 복을 볼 수가 있고, 추모(追慕)하는 마음은 더욱 슬픔이 간절합니다. 인하여 함께 선대의 사관(使館)에 출입하면서 지은 모든 작품을 편찬하여 가묘(家廟)에 간직하여 선대에 효도하는 한 도움이 되게 하고 또한 후세의 자손으로 하여금 읽어서 두 나라의 성(盛)한 모임을 부러워하며 사모하여 선대의 남긴 덕택을 공경하고, 더욱 선대의 유업(遺業)을 잊지 않게 하려는 것이니, 이것이 평수집(萍水集)을 만든 까닭입니다. 거기에 신묘년의 시를 붙여 편찬한 것도 또한 자손에게 보이려는 것입니다.
이미 이 문집이 있는데다 또 귀국의 훌륭한 선비의 글을 얻어서 서문으로 삼아서 후세 자손으로 하여금 더욱 이 문집을 더욱 높이고 믿어서 비단보에 열 겹으로 간직하여 영원토록 전하기를 원하니, 우리 형제가, 바라는 것이 마치 진인(秦人)이 조(趙) 나라 옥을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방금 공이 여기에 도착한 것은 하늘이 장차 우리로 하여금 오래 품고 있던 소원을 이루어 이 문집이 영원히 썩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이 하늘이 주는 기회에 맞추어 주는 여부(與否)는 오직 공 한 사람의 생각에 달린 것입니다. 신묘년에 이 학사(李學士) 등 여러 분에게 애란당기(愛蘭堂記)를 청하였더니, 여러 분이 거절하지 아니하고 흔연(欣然)히 붓을 들었는데, 지금 공의 도덕의 높음과 인혜(仁惠)의 두터움으로써 능히 이역(異域)의 사람을 친애하기를 이와 같이 하여 주고, 우리 형제가 또한 어진 이를 깊이 존경하고 덕을 숭상함이 간절하여 능히 다른 나라 군자의 버리는 바가 되지 아니함이 이와 같다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정자(程子)의 말에, ‘일명(一命)의 벼슬을 한 사람이라도, 진실로 남을 사랑하려고 마음을 가진다면 사람에게 반드시 건져 주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일명(一命)의 벼슬을 한 사람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조선의 대학사(大學士)인데 이겠습니까. 감히 묻노니, 공은 승낙하시겠습니까?”
하였다. 석병(石屛)의 편지는 글이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하나 참으로 이른바, 형 되기 어렵고 아우 되기 어렵다 할 수 있다. 창명(滄溟)이 시를 짓는 것은 문(文)보다는 못한 듯하나 간간이 운치가 있었다. 내가 처음 대판에 도착했을 때에 그가 곧 와서 서로 종일토록 필담을 하였다. 내가 한 절구(絶句)를 써서 주기를,
이역(異域)에서 같은 선성(先聖 공자(孔子))의 문하에 노니 / 異域同遊先聖門
유가(儒家)의 한 물줄기가 흘러 쉼이 없구나 / 儒流一派正源源
후생이 비로소 은(殷) 나라 예(禮)를 말할 만하니 / 後生始可言殷禮
다행히 기자(箕子)의 나라에 문헌이 있었네 / 幸有箕邦文獻存
하였다. 돌아갈 때에 또 한 절구를 지어 주기를,
돌아가는 배가 눈 속에 온 것이 산음(山陰)과 같으니 / 歸舟乘雪似山陰
흥이 다하고 사귐이 쉬어지매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네 / 興盡交休淚滿襟
다른 날 높은 누각 머리 돌려 바라는 곳에 / 他日高樓回首處
뜬 구름이 오늘 이별하는 정만큼 깊지 못하리 / 浮雲不及別情深
하였다. 석병이 나에게 시를 지어 주기를,
일본과 한(韓)이 지맥(地脈)이 통하였고 / 和韓通地脈
높은 뫼가 신을 두 번째 낳았구나 / 嵩岳再生申
오늘날 문장의 선비요 / 今日文章士
다른날 사직신이 되리 / 他年社稷臣
하였다. 그 형제가 대개 문학으로써 스스로 거벽(巨擘)이라 하여 대대로 천남(泉南)에서 이름이 있으므로 여러 왜인과 상대할 때에 말과 안색이 자못 교만하여 우삼동과 서로 친절하지 아니한 것 같았다.
○ 임신독(林信篤)이 일본 제일의 늙은 석학(碩學)이 되는데, 그의 문도(門徒)들이 나와 필담할 때에 모두 “학문의 순수함과 도덕의 깊기는 우리 정우(整宇)선생 한 분이다.” 하니, 그가 국중에 추앙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내가 그 얼굴을 본즉 근신하고 후함은 남음이 있으나 시문(詩文)은 하나도 볼만한 것이 없었다. 내가 돌아오는 길에 편지로써 작별을 대신하였더니, 그의 회답 편지에 이르기를,
“금년 가을 겨울의 즈음에 조선국 세 사신이 우리나라에 올 때에 내가 공무의 여가에 두 아들을 이끌고 갔다가 제술관 청천(靑泉) 신 학사(申學士)를 만나 술 마시고 시 짓는 자리를 거듭하여 자못 망형(忘形), 내구(耐久)의 교분을 맺었더니, 얼마 안되어 병들어 누워서 두 사람 사이의 정을 다하지 못하여 자못 실망하였습니다. 그런데, 돌아감에 다달아 간절하게 편지를 보내어 속 마음의 정곡을 토로(吐露)하여 주셨습니다. 무릇 이별이란 것은 인간에게서 중한 일이니, 처량하게 간장을 녹인다는 것은 장부의 정이요, 눈물을 주루룩 흘리는 것은 아녀자(兒女子)의 정입니다. 옛적에 문절(文節)이 자고(子高)와 이별할 때에는 손을 쑥 빼어서 갔고, 범단(范丹)이 왕환(王奐)과 이별할 때에는 옷을 떨치고 간 것은 이별로써 정에 관계치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다와 육지가 멀고 멀어 두 번 모일 기약이 없으니 다른 날의 이야기가 될 뿐입니다. 고시(古詩)와 율시를 두 편 화답한 것은 두 아들이 기뻐하니 감사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사례하는 시를 짓지 못함에 정은 길고 붓은 짧아 이렇게 초초히 올립니다.”
하였다. 오직 이 편지 한 장이 소박(素朴)하고 솔직한 데에 가까웠다.
○ 담 장로(湛長老)는 나와 더불어 교분이 가장 깊어서 서로 주고 받은 시편이 한 권 한 축(軸)이나 되나 시는 모두 졸(拙)하므로 다만 그 긴 편지 한 장을 기록한다. 편지에 이르기를,
“근일에 짧은 편지를 올려 겨우 안부를 묻고는 탈 배가 총총하여 이미 기양(岐陽)에 도착하자 회답한 글을 받았습니다. 공은 한림학사(翰林學士)의 지위에 있었으면서 우리 불문(佛門)의 경전(經典)에 유의하였으니, 젊은 학사가 어찌 능히 이와 같이 박식하며, 운치가 있습니까? 내가 전일 풍도(風度)를 엿보고서 실로 운치 있는 분인 줄을 알았습니다. 깊이 흠앙하므로 말을 다 진술합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집을 떠나서 한 절에 들어갔다가 한 절로 나와서 고생살이 하느라고 스스로 격려(激勵)하기 어려워 둔한 자질이 일찍이 불조(佛祖)의 울타리도 엿보지 못하고, 그럭저럭 20, 30년의 세월만 소비하고 다만 깊은 숲 그윽한 골짜기에서 나무 열매를 먹고 시냇물을 마시면서 초목과 함께 썩으려고 도모할 따름이더니, 뜻밖에 외람되이 뽑혀서 관사(官寺)의 주지로 있다가 다시 왕명(王命)을 받들어 세 사신을 접반(接伴)하게 되어 인하여 학사 및 세 서기와 더불어 마음이 서로 통하여 후의(厚誼)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나의 분수에 어찌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부끄럽고 송구스러움이 많을 뿐입니다. 주신 편지 가운데 ‘선가(禪家)의 정혜(定慧)는 그 요점이 다만 거짓의 마(魔)를 쫓아버리고 망상(妄想)을 막는 데에 있다.’는 말이 있으니, 실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우리 부처님의 도리는 이상하고 요망한 술법이 아니며 또 아득하고 미묘하고 기특한 일이 아니라, 다만 뭇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 자리를 발명하게 할 따름입니다. 마음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옛적이나 지금이나 장래에도 관계가 없고 초연(超然)하여 견줄 데가 없는 것이요, 또 붓끝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시대가 다르고 사정이 다르매 그 도가 점차로 낮아지고 쇠퇴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양(梁) 나라 보통(普通) 연간에 우리 달마조사(達磨祖師)가 불(佛)의 심인(心印)을 차고 동방으로 와서 송산(菘山)에 이르러서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키는 것[不立文字直指人心]으로써 긴요한 것을 결단하여 갑자기 기틀을 바꾸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교 밖의 따로 전한 것[敎外別傳]이라는 것입니다. 신광(神光)이 세 번 절하고 분명히 받아서 교 밖의 종(宗)이 천하에 두루 선포되어 어진 사대부(士大夫)들이 잇따라 귀의(歸依)한 자가 많으니, 장상국(張相國 상영(商英)), 유자사(柳刺史 종원(宗元)), 황태사(黃太史 용(容)), 소한림(蘇翰林 식(軾)), 송문헌공(宋文憲公)같은 이는 벼슬과 공명(功名)과 과거(科擧), 결혼을 떠나지 아니하고도 바로 가리키는 도리[直指道]를 발명하여 기운이 불조(佛祖)를 삼키고 눈이 건곤(乾坤)에 높았습니다. 이것은 문자와 언어를 쓸어버리고 홀로 해탈(解脫)함을 증득(證得)한 것입니다. 비록 이와 같으나 또 문자로 말미암지 아니하면 어찌 말세(末世)에 전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조사(祖師)가 육문(六門)의 문자가 있어서 아손(兒孫)들에게 남겨 주었으니, 또 문자반야(文字般若)의 힘이 아닙니까. 도는 본래 말이 없는 것이지만 말을 빙자하여 도를 나타내는 것이 이것입니다. 도와 문자를 누가 두 가지가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공자(孔子)가 이른바, ‘자신을 극복하여 예(禮)를 회복하라’한 가르침도 공자의 뜻을 환히 통하면 어찌 반드시 문자 언어에 구애되겠습니까. 그런즉 유교와 불교가 그 근원이 같은 것임을 대개 알 수 있습니다. 유아풍류(儒雅風流)의 선비가 양춘백설(陽春白雪)의 곡조를 시로 지을 때에 서로 화답하는 것도 역시 이에 있을 것입니다. 공은 제술관의 임무를 띠고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높은 풍류, 아담한 운치와 격앙(激昻)한 뜻과 절조로 명망이 더욱 높아지고 연령이 더 높아질수록 명성과 빛을 상국(上國 조선)에 떨치니, 비록 장상국, 유자사, 황태사, 소한림의 무리에게라도 혹 못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지금 국가의 사절로 와서 멀리 창해를 건넜으니, 어찌 도의(道義)의 있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빌고 비나이다. 인하여 생각하건대 서기(書記) 삼군(三君)도 전단수(旃檀樹)의 수풀 가운데 전혀 잡목이 없는 격이니, 진실로 가상합니다. 원컨대, 그들에게도 나의 이 성의를 같이 전달하여 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하였다.
○ 국중에 문장의 재주가 어린 아이들 중에 많이 있으니, 대판의 수족동자(水足童子)는 나이 14세요, 북산동자(北山童子)는 나이 15세요, 왜경(倭京)의 명석경봉(明石景鳳)은 나이 18세요, 강호의 하구호(河口皞)는 나이 17세인데, 읽고 짓는 것이 이미 풍부함은 물론이요, 모두 얼굴이 옥설(玉雪)과 같고 눈길이 단정하고 말과 행동이 조용하여 예법 속에서 자라난 사람과 같으니, 대개 그 자질의 청명한 것은 강산의 정기를 타고 난 것이나 마침내 정치 교화의 배양(培養)을 받지 못하고 명주(明珠)로 하여금 연석(燕石)이 되게 할 수가 있다. 내가 강호에 있을 때에 장택학(長澤學)과 장택주(長澤主)형제가 있어 모두 눈이 멀었고 모두 능히 시를 배웠는데, 한번 보기를 원하므로 괴이히 여겨 불러 들여서 운(韻)을 내어 시험한즉, 운을 부르자 문득 대답하는데 지은 시가 모두 감개(感慨)한 생각이 있었다. 그 호를 물으니, 하나는 불원재(不怨齋)라 하고, 하나는 불우재(不尤齋)라 하였다. 내가 차운하여 주었다.
일본의 성리학(性理學)은 하나도 들을 만한 것이 없었다. 대개 그 정교(政敎)와 민풍(民風)이 군사가 아니면 불(佛)이므로 국내에 문묘(文廟)와 향교(鄕校)도 공자를 제사지내는 곳도 없고 또 임금과 부모의 상복(喪服)도 없으니, 그 인민이 착한 본성을 하늘에서 타고 났지만 어디로부터 도덕을 들어서 알겠는가. 회진후(會津侯) 원정지(源正之)는 귀공자(貴公子)로서 작(爵)을 받은 사람인데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데에 한결같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교훈을 준수한다 하니, 또한 특이한 일이다. 호를 암재(闇齋)라 하는 산기씨(山崎氏)가 있어 또 정자와 주자의 학을 사모하여 소학(小學)의 목차(目次)에 의방하여 송유(宋儒)의 언행(言行)을 편찬하여 책을 만들어 세상에 전한다.
목하순암(木下順庵)은 이름이 정간(貞幹)이니, 학식이 넓고 행실을 닦았는데, 원여(源璵)ㆍ우삼동(雨森東)의 무리가 모두 그 문인(門人)이었다. 죽은 뒤에 시호(諡號)를 공정(恭靖)이라 하였다 한다. 근세에 경도(京都) 사람 이등유정(伊藤惟貞)이란 자가 있어 학문으로 국내에 이름이 나서 자기의 견해를 책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그의 설(說)은 성리존양(性理存養)과 같은 학설을 무익한 것이라 하고, 다만 일상(日常)에 실지로 도(道)를 행하는 것만을 힘쓰게 할 것이라 하고, 그가 저서(著書)하여 후세에 교훈을 남길 적에 항상 이르기를,
“무릇 사람은 효제충신(孝悌忠信)만이 일상(日常)의 몸에 절실한 공부이니, 학자는 성리(性理)가 어떠한 것임을 물을 필요가 없다. 중용(中庸) 수장(首章)에,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이른다[率性之謂道] 한 교훈은 도가 성리 가운데서 나온다는 것이요, 도를 행하는 자가 성리로써 공부를 삼으라 한 것은 아니다.”
하고, 그밖의 의논도 선유(先儒)에게 위배됨이 많은데, 일시의 선비들이 혹은 숭배하여 믿는 자도 있고 혹은 고집함을 나무라는 자도 있었다. 나는 그 문집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매번 모든 문사와 담화할 때에 이등씨(伊藤氏)의 설을 들면서 그 옳고 그른 것을 묻는 이가 있을 때에 매번 말하기를,
“이것은 순경(筍卿)의 성악설(性惡說)과 죄가 같은 것이다. 그의 말대로 따르는 자는 사람의 도리를 금수(禽獸)와 초목의 성(性)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인가?”
하였더니, 모든 선비들이 혹은 나의 말을 옳다 하였다.
○ 세속에서 전하기를,
“일본 흠명천황(欽明天皇) 때에 백제(百濟)의 성명왕(聖明王)이 불경을 보냈으므로 일본에 불법이 있게 된 것이 이때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뒤에 홍법대사(弘法大師)가 중국을 거쳐 인도에 들어가서 종법(宗法)을 배워 가지고 돌아와서 불교를 크게 발전시켰다.”
한다. 지금 보니, 일본의 풍속이 대저 불교를 숭상하나 평민이 중이 된 자는 열에 두셋이 못 되고, 능히 불경을 읽어 법사(法師)가 된 자는 셋에 한 사람도 못 되니, 그것은 국법이 심히 가혹하여 백성이 공정(空丁)이 없고 또 중이 먹고 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절은 민간에 있어서, 관광(觀光)할 때에 여자와 중들이 섞여 앉으니 모양이 추솔하고 행실이 없다. 혹은 고기를 먹고 음행(淫行)을 하면서 다만 중의 옷만 입고 칼을 차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경(經)을 말하고 불(佛)을 배우는 자가 매우 적다.
○ 천황(天皇)의 법은 불조(佛祖)와 같아서 모든 아들은 법친왕(法親王)이 되고, 모든 딸은 비구니(比丘尼)가 되고, 그 신하는 법인종(法印宗)이라 하는데, 모두 문서ㆍ역사ㆍ천문(天文)ㆍ역법(曆法)을 맡았다. 국중에 절이 오산(五山)이 있어 중을 주지관(住持官)으로 임명하여 칭호를 화상(和尙)이라 하고 또한 장로(長老)라고도 칭하는데, 모두 천황이 임명한다. 대마도의 이정암(以酊庵) 및 사신을 접반(接伴)하는 장로도 또한 오산 중에서 청하여 돌림 차례로 파견한 것이니, 용창(龍菖)은 제2산(第二山)의 주지요, 성담(性湛)은 제5산의 주지이다. 내가 사관(使館)에서 데리고 시를 지은 자로서 중 소영(素盈)ㆍ주염(周恬)ㆍ요혜(了慧)ㆍ시습(時習)ㆍ정간(貞侃)ㆍ선의(禪儀)ㆍ주경(周鏡) 등은 모두 관품(官品)이 없고, 그 시는 혹 우열이 있으나 족히 말할 것도 못되었다. 그 교리(敎理)는 조동종(曹洞宗)과 임제종(臨濟宗) 두 파가 있으나 도를 깨달은 자는 더욱 적다. 우리나라 송운대사 유정(松雲大師惟政)의 필적이 강호에 있는데 내가 보니, 묵은 종이가 색이 변하였으나 필적은 알아볼 수 있었다. 왜인들이 보물로 간직하여 백 년 동안 사모하고 귀중히 여기며 모든 중들이 다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이름을 알고 그 시를 들려주기를 원하였다. 내가 서산집에 있는 오언절구(五言絶句) 한 편을 써 주었더니, 그들은 곧 흠모해 마지않았다.
○ 의학(醫學)은 가장 숭상하는 바로서 천왕으로부터 관백 이하 각 주의 태수가 모두 의관(醫官) 두어 사람씩을 두며 봉급도 매우 후하다. 그래서 의관은 모두 부자가 된다. 그 풍속이 글을 배운 자는 태반이 의원(醫員)이 되는데 그 복색은 중으로 더불어 대략 같으며, 다만 칼 한 자루를 차고 머리를 다 깎았다. 내가 축전주(筑前州)에서는 소야현림(小野玄林)을 보았고, 강호에 이르러서는 임태의(林太醫)의 부자와 즐겁게 사귀었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문장을 좋아하고 용모가 단정하고 마음이 선량하였다. 북미춘포(北尾春圃)는 호를 당장암(當壯庵)이라 하는데, 저술한 정기신론(精氣神論)이 포부가 있는 것 같으므로 내가 서문을 지어 주었다. 제약법(製藥法)이 정묘(精妙)하여 수도(首都)와 지방의 거리 길가에 금패(金牌)가 총총하여 환(丸)ㆍ단(丹)ㆍ 탕(湯)ㆍ산(散) 등의 이름을 써 붙였는데, 화중산(和中散)과 통성산(通聖散)이 가장 많았다. 그것은 아마 사람들의 성질이 조급하여 기뻐함과 성냄이 편벽되고 또 덥고 따뜻한 지방에 살기 때문에 병이 대부분 담(痰)ㆍ화(火)ㆍ체(滯)와 같은 울증(鬱症)에서 생긴다. 이 때문에 그들이 사용하는 약방문이 통화 이중(通和理中)하는 화제(和劑)에 더욱 치중한 듯하다.
○ 여색은 요염하고 고운 것이 많아서 비록 연지와 분을 바르지 아니하여도 대개 부드럽고 희다. 분을 바르고 화장을 짙게 한 자도 살결이 부드럽고 미끈하므로 자연히 본색과 같으니, 눈썹을 그리고 불그스레한 안색, 검은 머리, 화잠(花簪)에 오색 무늬의 비단 옷을 입고, 띠로써 허리를 묶고 부채를 안고 선 자를 바라보니 사람 모습이 아닌 것 같았다. 머리에는 동백 기름과 같은 향고(香膏)를 모두 써서 머리털 빛이 칠(漆)과 같았다. 관백 이하 각 주 태수의 비빈(妃嬪)의 칭호는 반드시 어내실(御內室)이라 하여 각각 풍랑(豐娘)ㆍ태랑(泰娘)ㆍ혜랑(惠娘)ㆍ익랑(翼娘)의 칭호가 있다. 귀가(貴家)의 여자는 출입할 때면 가마를 타고 관광할 때에는 비단 창에 기대어 주렴을 드리운다. 그 나머지 밖에 있는 자는 혹은 앉거나 설 때에 손에 그림 수건을 가지며,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맑았다.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는 좋아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혹은 손으로 부르는 형용을 하기도 하고, 혹은 나이 젊은 왜남(倭男)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뺨을 어루만지면서 서로 좋아하여 사람 많은 데나 넓은 길에서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 국중에 인구가 매우 번성한데 여자가 남자에 비하여 더 많다. 결혼은 동성(同性)을 피하지 아니하여 사촌남매끼리도 서로 혼인을 한다. 형수와 아우의 아내가 과부가 되면 또한 데리고 살므로 음탕하고 더러운 행실이 곧 금수(禽獸)와 같다. 집집마다 반드시 목욕탕의 설비가 있어서 남녀가 함께 벗고 목욕을 한다. 대낮에 서로 정사(情事)를 하기도 하고, 밤에는 반드시 불을 켜고 정사를 하는데, 각기 색정(色情)을 돋우는 기구를 사용하여 즐거움을 극대화시킨다. 그것은 곧 사람마다 춘화도(春畫圖)를 품속에 지녔는데, 화려한 종이 여러 폭에 각기 남녀의 교접하는 모습을 백 가지 천 가지로 묘사하였으며, 또 춘약(春藥) 몇 가지가 있어 그 색정을 돋운다고 한다.
○ 또 풍속에 각 지방에 노래하고 춤추는 기생을 설치하는 법이 없으므로 부상(富商)의 여행하는 자들이 모두 지내는 곳마다 사사로이 창녀(娼女)를 접하므로 이름난 도시의 큰 객점(客店)에는 모두 창루(娼樓)가 있는데, 대판(大坂)의 번화한 것은 가장 화류(花柳)로써 이름이 났다. 층층한 다락과 구불구불한 집이 길거리에 연하여 병풍ㆍ장막ㆍ이불ㆍ베개ㆍ술병ㆍ다당(茶鐺) 등 속이 모두 비단과 금은으로 되었고, 그 가운데 각각 한 미인을 두고 위에 금방(金)을 달기를 상상창루(上上娼樓)라 하였는데, 호협한 남아들이 금을 싸가지고 온 자는 자기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아간다고 한다. 상상(上上)의 집이라도 하루의 화채(花債)가 백금(白金) 열 냥에 지나지 아니하고, 중ㆍ하는 차등이 있다고 한다. 내가 통역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웃으며 흉보기를,
“옛적부터 정(情)과 색(色) 가운데에 빠져서 혹한 남녀들이 있어, 남자는 인연을 기뻐하여 천금을 아끼지 아니하고, 여자는 정에 감동되어 한 푼의 돈도 사랑하지 아니하나니, 이것이야말로 상상(上上)의 풍류스런 일인데, 지금 너희들이 말하는 상상주(上上姝)라는 것은 추잡한 놈이나 이름난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단지 돈만 보고 애교를 바친다 하니, 이것은 문에 기대어 웃음을 파는 하품(下品)으로서 몇 푼어치도 못 된다.”
하였더니, 통역이 말하기를,
“나라의 풍속이 서로 다릅니다. 여자의 마음이야 어찌 그렇겠습니까. 일본의 호귀(豪貴)한 집에서 그런 특수한 미인을 사가지고 이익을 얻는 물건으로 삼기 때문에 소위 창루(娼樓)에 화려한 온갖 기구를 다 주인이 설비하여 놓고 문에 간판을 붙여서 그 값을 정하고는 매일 세(稅)를 받아가니, 저 미인들은 감히 제가 임의로 할 수 없으므로 눈물을 흘리면서 이별을 서러워하는 자도 있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억지로 몸을 바치는 자도 있습니다.”
하였다. 내가 대판에 이름 있는 창녀의 이름 및 나이가 얼마인가를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화자(花紫)는 22세요, 약자(若紫)는 20세요, 소자(小紫)는 15세요, 만주춘(滿州春)은 20세요, 보야향(保野香)은 25세요, 발지(發枝)는 20세요, 우영(友影)은 17세요, 촌춘(村春)은 16세요, 촌우(村雨)는 21세이니, 이들이 상상(上上)ㆍ상중(上中)의 미인입니다.”
하였다.
○ 일본에 남창(男娼)의 곱기가 여색보다 배나 되고, 그것을 사랑하여 혹하는 것이 또 여색보다 배나 된다. 국중의 사내아이가 나이 14, 15세(歲) 이상으로 용모가 특수하게 아름다운 자는 머리에 기름을 발라 양쪽으로 땋아 늘이고 연지분을 바르고 채색 비단옷을 입히고, 향사(香麝)와 진기한 패물로 꾸며 그 가치가 천금에 해당한다. 관백 이하 부호(富豪)와 일반 백성이 다 그것을 사서 데리고 있어 앉으나 누우나 출입할 때에 반드시 딸려서 추행을 실컷 하고 혹은 밖의 사람과 통하면 질투하여 죽인다. 그들의 풍속이 남의 처나 첩을 몰래 통하는 것은 쉬운 일로 알아도 주인 있는 남창에게는 더불어 말도 웃지도 감히 못한다. 우삼동이 저술한 문고(文藁) 가운데 귀인들의 화려한 생활을 묘사한 글에 이르기를,
“왼쪽에는 붉은 치마요, 오른쪽에는 어여쁜 총각이다.”
라고 한 문구가 있었다. 내가 그 문구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른바 어여쁜 총각이란, 소위 남창(男娼)을 말합니까?”
하니, 그렇다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귀국의 풍속이 괴이하다 하겠습니다. 남녀의 정욕은 본래 천지 음양의 이치에서 나온 것이니, 천하가 동일한 바이나 오히려 음(淫)하고 혹(惑)하는 것을 경계하는데, 어찌 양(陽)만 있고 음(陰)은 없이 서로 느끼고 좋아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였다. 우삼동이 웃으며,
“학사(學士)는 그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하였다. 우삼동과 같은 사람이 말하는 것도 오히려 그와 같은 것을 보면 그 나라 풍속의 미혹(迷惑)함을 알 수 있겠다.
○ 장기도(長岐島)는비전주(肥前州)에 속하는데, 사신 행차의 경과하는 곳이 아니므로 비록 눈으로 보지는 못하였으나 실로 해외 여러 나라가 모이는 구역으로써 남경의 장사꾼들이 항해(航海)하여 온 자가 혹 왜녀를 관계하여 자식을 낳고 왕래하는 때문에 왜인이 그로 인하여 중국의 사정을 알 수 있고 혹은 중국말도 통한다. 그러나 배운 바 어음(語音)이 소주(蘇州)ㆍ항주(杭州)ㆍ절강(浙江)ㆍ복건(福建) 이하의 지역이므로 우리나라에서 배운 북경의 말과는 차이가 있다. 또 남만(南蠻)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몰려와서 무역을 하는데 들으니, 그 복장(服裝)이 머리털을 뭉쳐 매었으며, 걸터앉아 아직도 위타(尉佗)의 옛 풍속이 있고 아란타국(阿蘭陀國) 사람들은 가장 이상하여 머리털이 길지도 않은데, 뒤에서부터 얽어 매었으며, 붉은 비단 전립(氈笠)을 쓰고 구슬 신이며, 옷은 모두 기이한 비단인데, 좁아서 겨우 몸을 용납할 만하고 바지도 또한 겨우 두 다리를 꿸 수 있어 굴신(屈伸)을 할 수 없어서 사람마다 호상(胡床) 한 개씩을 끼고 다니다가 앉을 일이 있으면 문득 걸터앉아 발을 편다. 풍속이 문서가 없고 길고 짧고 느리고 급한 획(畫)으로써 모든 일의 더디고 속한 부호(符號)로 삼고, 온갖 물건이 사치하여 옷에 한 점의 더러움도 없고, 성정이 탐하고 음란하여 오기만 하면 반드시 왜녀와 서로 사귀어 밤낮으로 희롱하여 즐기므로 장기(長崎)의 창루(娼樓)에서는 매양 외국인을 접하여 진기한 보물을 얻는다 한다. 내가 묻기를,
“일본의 국법에 이미 외국인과 교통하는 것을 금하지 아니하니, 외국인이 좋아하는 여자를 혹 싣고 갈 수도 있는가?”
하였더니, 통사가 말하기를,
“교통하는 것은 비록 금하지 않으나 다만 싣고 가지는 못하게 하고, 그들이 낳은 자녀는 마침내 일본 사람이 됩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서양국 사람 이마두(利瑪竇)는 아마 이상한 사람인 모양인데, 그의 경력과 기록한 바를 비록 다 믿을 수는 없으나 천지가 생긴 이래로 그런 설(說)을 하는 사람은 홀로 이마두 만이 있을 뿐이므로 내가 본래 기이하게 여겼다. 지금 들은즉 서양국 사람도 또한 장기도와 교통한다 하니, 혹시 그 사람의 행적을 전한 바가 있었는가?”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장기에 와서 무역하는 사람들은 장사꾼이라 무식하여, 별로 신빙(信憑)할 만한 문답도 없으나 다만 들은즉 전년에 배 한 척이 일본의 남해에 와서 닿았는데 그 사람이 스스로 서양국의 교주(敎主)라 칭하면서 그 임금의 명령으로 만국을 교도(敎導)한다 하는데, 그의 소위 교(敎)란 것은 이마두를 성이라 하고 말이 황당하고 해괴하므로 국가에서 그를 서로 교통하지 못하게 금지하니, 그들이 노하여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 유구국(琉球國)은 대소(大小)의 두 종류가 있는데, 모두 일본의 서남 바다 가운데 있다. 그 작은 것은 중산주(中山主)라 하는데, 옛적부터 일본에 조공(朝貢)하였다. 들으니 그 의복과 언어가 왜인과 대략 같으나, 사신으로 온 관직이 있는 자의 쓴 사모(紗帽)가 우리나라의 사모와 같으면서 작고, 공복(公服)도 또한 단령(團領)의 제도가 있는데 3년에 한 번씩 조공(朝貢)하러 와서 살마주(薩摩州)로부터 상륙(上陸)하여 강호에 이르러 예(禮)를 행하고 간다한다. 내가 우삼동에게 유구국의 풍속과 인물에 대해 물었더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옛적에 명 태조(明太祖)가 명령하여 중국의 24성(姓)을 보내어 유구(琉球)에 살게 하였는데, 그 자손이 지금 10여 성이 있어 대대로 문학을 하여 관인(官人)이 되었으므로 관인의 의복은 아직도 중국의 옛 풍속을 보존하였고, 평민은 일본과 다름이 없어 다만 긴 옷만 입고 바지는 없으며, 풍속이 기교(技巧)를 숭상하여 모든 공인(工人)들이 모두 한 구역에 모여 서로 섞여 살지 아니하며 그 만든 물건이 반드시 정묘(精妙)하여 일본에서 쓰는 대모빗[玳瑁梳] 및 겹돗자리[重茅席]가 모두 유구국에서 나옵니다.”
하고, 인하여 사관(使館)에 있는 자리 하나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이 유구 사람의 손으로 짠 것입니다.”
하였다. 그 제도를 본즉, 왜국 자리와 길고 짧은 것은 차별이 없으면서 띠[茅] 빛이 매우 누렇고 부드럽고 질기고 단단하고 빽빽하여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게 생겼다. 내가 본국에 있을 때에 서울에 한 천인(賤人)이 스스로 말하기를,
“일찍이 제주(濟州) 바다에서 풍파에 표류하여 유구국에 이르렀더니, 온갖 공인의 사는 곳이 각각 부락이 있는데, 저는 피혁공(皮革工)의 구역에서 1년을 머물렀습니다. 남녀의 의복, 음식, 언어는 한결같이 일본과 같았으며, 그 나라에서 일본에 조공(朝貢)하므로 임금이 저를 일본에 보내주어 다시 동래로 왔습니다.”
하던 말이 기억이 났다. 지금 우삼동의 말한 바와 서로 부합하였다. 또 우삼동에게 묻기를,
“유구 관인(官人)의 글을 아는 사람이 혹 전한 바 시문(詩文)이 있습니까?”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들으니, 정총예(程寵乂)란 자가 있어 중국 서호(西湖)에 이르러 시를 짓기를,
서자호 머리에서 죽지사를 부르니 / 西子湖頭唱竹枝
지나간 옛 일이 사람의 관심을 끄는구나 / 不堪往事繫人思
대낮에 파도는 전왕의 쇠뇌요 / 波濤白晝錢王弩
푸른 산 바람 비는 육수부(陸秀夫)의 사당이네 / 風雨蒼山陸相祠
옷에는 천축사(天竺寺) 길의 구름 향기가 젖었고 / 衣濕雲香三竺路
행장에는 버들 푸른 육교(六橋) 시(詩)가 남았네 / 囊餘柳色六橋詩
동해에서 온 사신의 뜻을 가지고 / 難將東海勞臣意
매화 심던 처사에게 말하기 어렵구나 / 說與栽梅處士知
하였는데, 《설당연유초(雪堂燕遊草)》 한 권이 세상에 전합니다.”
하였다.
○ 우삼동이 일찍이 강호 객관(客館)에서 조용히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소회(所懷)가 있는데 틈을 타서 말하고자 합니다. 일본과 귀국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신의(信義)가 서로 맞아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조선 국왕이 과군(寡君)과 서로 공경하는 예의(禮儀)로 국서를 통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공사(公私)의 문서에 반드시 극히 높이는데, 귀국 사람의 저술한 문집을 보면 그중에 말이 우리나라에 관한 것은 반드시 왜적(倭賊)이니 만추(蠻酋)니 하여 추하게 여기고 멸시함을 함부로 한 것이 차마 말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므로 우리 문소왕(文昭王) 말년에 우연히 조선의 문집을 보고 매양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어찌 조선이 우리를 모욕함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을 알았겠는가.’ 하면서, 평생토록 한을 품었는데, 오늘날 여러분이 과연 이 뜻을 아시오?”
하면서, 말과 기색이 심히 불평하여 성내는 심정이 점점 드러났다. 내가 말하기를,
“이것은 알기 쉬운 것인데, 귀국이 양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군이 본 우리나라 문집이 어느 사람이 저술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임진란(壬辰亂) 뒤에 간행(刊行)된 글들입니다. 평수길(平秀吉)이 우리나라에 철천한 원수가 되어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수치와 욕됨과 생령이 피를 흘린 것은 실로 만고에 있지 않던 변이니, 우리나라 신민(臣民)으로서 누가 그의 고기를 찢어서 먹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위로 사대부(士大夫)로부터 아래로 천인(賤人)에 이르기까지 노(奴)와 적(賊)이라 말을 함부로 하고 글에 나타난 것이 진실로 마땅히 그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우리 성조(聖朝)에서 생민(生民)을 인애(仁愛)하여 해관(海關)에 시장을 열어 물자를 서로 통하고 또 일본의 국토에 이미 수길의 남은 종자가 없는 줄 알기 때문에 사신을 보내어 친목을 도모하여 국서가 서로 연달아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덕의(德意)를 우러르니, 어찌 감히 다시 묵은 원한을 끄집어 내어 말에 나타내겠습니까. 근자에 대판에 이르러 평가(平家)의 옛터를 보니, 머리털이 오히려 쭈삣쭈삣 하였습니다.”
하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그것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다만 지금 여러 종자(從者)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부를 때에는 반드시 왜인이라 칭하니, 또한 평소에 바란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귀국이 왜라는 칭호를 가진 지 이미 오래인데, 군이 무슨 유감입니까?”
하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당사(唐史)에 이미 이르기를 ‘왜가 국호를 고쳐서 일본이라 하였다.’ 하였으니, 이 뒤에는 원컨대 하인들에게 신칙하여 우리를 일본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내가 또 묻기를,
“귀국 사람이 우리를 당인(唐人)이라 부르고 또 우리나라 사람의 필첩(筆帖)에 쓰기를 당인의 필첩이라 하는 것은 또한 무슨 뜻입니까?”
하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국가의 명령으로는 객인(客人)이라 칭하고 혹은 조선인이라 칭하도록 하였으나 민속(民俗)이 옛적부터 귀국의 문물이 중화(中華)와 같다고 한 때문에 당인이라 칭하니, 이것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 내가 우삼동에게 묻기를,
“수길이 이미 귀국의 옛적 임금이 되었으니, 군도 또한 그의 이름자를 휘(諱)하고 그의 악한 것을 숨기는 뜻이 있습니까?”
하였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는 시랑(豺狼)의 성품이 인간의 액운(厄運)에 응하여 태어난 자이므로 참혹히 도륙(屠戮)한 것이 귀국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일본인에게도 전 가족을 죽여 종자도 없게 한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나의 고조ㆍ증조 이상이 대대로 우삼(雨森)의 수(守)가 되어 성을 우삼이라 하였더니, 또한 그에게 멸족(滅族)을 당하였는데, 한두 사람 잔약한 자손이 민간에 숨어 죽음을 면하여 요행으로 종자가 남았습니다. 매양 그를 생각할 때마다 실로 이가 갈리는 통분함이 있습니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그러면 수길이 일본에 무슨 공덕이 있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공덕이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수길 이전에는 일본 66주(州)가 각각 나라를 세워 서로 공격함이 많이 있었으므로 명 나라 때에 일본 여러 섬에서 중국을 침노한 것이 종종 끊이지 않은 것은 여러 분이 반드시 명사(明史)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수길이 전쟁을 극도로 일삼아서 그것을 모두 평정하여 통일하였으니, 만약 그 공을 논한다면 이것이 있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나는 또 묻기를,
“임진년에 조선을 침략할 때에 청정(淸正)이 가장 흉악하고 독하였으므로 우리나라의 원수로는 반드시 그를 첫 손가락으로 꼽는데, 만약 그의 자손이 관(官)이나 민(民)이 되어 우리 사신 행차와 접촉하는 사이에 끼었다면 대면하여 담화할 수 없으니, 군은 우리를 위하여 분명히 그 사람을 가리켜 주시오.”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천도(天道)가 심히 밝아서 당시의 모든 장수 중에 사람을 많이 죽인 자는 다 자손이 없는데, 청정이 어찌 후손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 들은 바에 의하면, 원여(源璵)란 자는 본래 미천(微賤)한 가문에 났으면서 전 관백(關白) 가선(家宣)의 총애를 받아서 벼슬이 축후 수(筑後守)에 이르렀는데, 재주를 믿고서 제도를 변경하였다. 신묘년에 우리 국서에 회답할 때에 우리 어휘(御諱)에 범한 것이 있어 서로 다툴 때에 원여가 일을 주장하였는데, 임신독(林信篤)이란 자가 그른 것을 바르게 하지 못하였다. 무릇 그의 주장하는 것이 많이 이의(異議)를 고집하므로 종실(宗室)ㆍ대신(大臣)이 모두 원망하였다. 지금의 관백이 계승한 뒤에 곧 원여를 내쫓고 임신독을 친근히 하므로 원여의 당은 모두 벼슬길이 막혀서 감히 유관(儒官)이 사신과 교제하는 자리에 참예하지를 못하고 우삼동도 원여의 동학(同學)이기 때문에 아직도 대마도의 기실(記室)로 있었다. 우삼동이 일찍이 말하기를,
“백석공(白石公 원여의 호)이 만약 지금까지 권력을 잡았더라면 우리 무리도 또한 길이 트일 희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묻기를,
“백석은 왜 벼슬을 하지 않습니까?”
하니, 늙고 병들었다고 답하였다. 어느 곳에 사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집은 강호에 있는데 문을 닫고 일을 사절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우삼동은 일이 관백의 정치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기휘(忌諱)하는 것이나 그 기색을 본즉 스스로 불평하였다. 국서를 전한 뒤에 나와서 우삼동에게 이르기를,
“귀대군(貴大君 관백(關白))이 검소하고 간솔(簡率)하여 매우 임금의 도량이 있으니, 태평의 정치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다.”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임금의 덕은 그러합니다마는 자고로 어진 신하를 쓰면 다스려지고 간사한 신하를 쓰면 어지러운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뜻이 가리키는 바가 있는 듯하면서 말을 다하지 못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역참(驛站)으로 한 문사가 찾아와서 보고 필담으로 말하기를,
“공이 강호에 있을 때에 몇 사람의 문사(文士)를 보았습니까?”
하여, 답하기를,
“임봉강(林鳳岡)의 제자 수십 명을 보았습니다.”
하니, 그 손은 또 써서 보이기를,
“내가 듣기로는 임봉강은 시문(詩文)이 치졸하다고 하던데 제자가 어찌 그리 많답니까?”
하였다. 나는 이미 그 눈치를 알고 곧 종이 끝에다 쓰기를,
“말을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더니, 그 손은 앉은 자리 끝에다 직접 글자를 쓰기를,
“그들은 가소롭고 가소로운 자들입니다.”
하고, 스스로 필담한 종이를 찢어가지고 갔다. 아마 그도 역시 원여의 당으로써 나로 하여금 그 뜻을 알게 하려는 것인 듯 싶었다.
○ 내가 일본의 인물을 본 것이 관백 이하 대관(大官)ㆍ서료(庶僚)로부터 각종의 사람이 여러 천 명, 만 명만이 아닌데, 대저 그 인물들이 모두 정한(精悍)하고 긴착하고 민첩하고 몸은 짧고 작으며, 아이들은 살빛이 흰 것이 많고, 기품은 연약한 것이 많고, 말과 행동은 추솔하고 얕은 것이 많고, 한 사람도 걸출하고 웅장하여 바라보아 두려워할 만한 형상을 가진 자라곤 없었다. 그 지위가 집정(執政)에 이르고 부(富)로써 식읍(食邑)을 가져서 수천 석, 수만 석의 녹을 자손에게 전하는 자라면 비록 상법(相法)을 논하더라도 반드시 그 천창(天倉)의 명록궁(命祿宮)이 높고 후하고 광명(光明)하여, 한번 보면 곧 알만한 것이 있는 것인데 지금 본즉 그들이 천박(淺薄)하고 못나고 누(陋)하게 생긴 것이 열에 팔구가 되고 또 그 성정(性情)을 논하면 대개 속은 조급하고 밖은 박한 것이 많아서 자기에게 이익이 있으면 기뻐서 참새처럼 뛰어 폐간(肺肝)이 다 드러나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거슬리면 떠들며 날뛰어 생사를 모른다. 대하여 말할 적에는 여우가 얼음 밑 물소리를 듣는 것 같고, 일을 만날 때에는 당랑(螳螂)이 수레바퀴를 항거함과 같아서, 모두 새나 쥐의 창자로써 사람 쏘는 벌[蜂]떼의 성을 분발(奮發)하고 한 사람도 넓은 도량으로 중한 인망을 지닌 자가 없다. 그들이 가강(家康) 이후로 국토가 완전하고 군사가 정강(精强)하여 국중에 변란이 없어 인구의 많음과 국고의 풍부함이 근일보다 더 융성한 적이 없으므로 비록 젖내나는 작은 아이라도 태연히 높은 지위에 있어 높고 화려한 궁궐과 비단 장막, 좋은 음식의 안일함을 대대로 전하여 끊이지 아니하여 그 마음이 안락한 생활에 익어서 혹 사변이 있을 것만 두려워하는데, 무슨 다른 계책을 도모하겠는가. 내가 추측하건대, 인간에 액운이 닥쳐서 수길ㆍ청정과 같은 적이 다시 그 땅에 나지 아니한다면 우리 국가 변방의 걱정은 만(萬)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다만 관시(關市)를 통한 이래로 대마도의 교활하고 간사한 것이 한이 없어 관역(館驛)에서 업신여김을 받는 것이 많은데도 조정에서는 매양 은혜로 후하게 대접하여 조그마한 섬의 장(長)으로 하여금 반드시 호리(毫釐)를 다투어 이기고야 말도록 만들었으니, 실무(實務)를 아는 이는 마땅히 보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 사신이 기해년 4월 11일에 조정에 하직하여 9월 1일에 부산에 도착하고, 2일(신유)에 배를 타고 떠나서 9월 4일(계유)에 대판성에 당도하여 육지에 올라 27일에 강호에 도착하였고, 11월 4일에 도로 대판성에 당도하여 다시 배를 타고 경자년 정월 6일(계유)에 부산에 돌아와 닿았고, 24일에 복명(復命) 하였다. 내왕을 통틀어 계산하면 수로(水路)가 5천 2백 10리고, 육로가 1천 3백 50리요, 왕복한 날수는 2백 61일이 되는데, 일행 중에 한 사람의 병든 자도 없었으며, 하루 동안의 풍파의 액을 당하지 아니하였으니, 예로부터 있지 않았던 일이었다. 처음에 내가 영가대(永嘉臺)에 바람을 빌 때에 재계하고 목욕하던 밤 꿈에 한 휼륭한 장부가 유(酉)라는 한 글자를 크게 써서 나에게 보이므로 깨어서 괴이히 여겨서 나의 본명(本命)이 신유(辛酉)이므로 점을 쳐서 물었더니, 점치는 자가 말하기를,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하였다. 마침내 신유일에 순풍을 만나 배를 출발시켰고, 계유일에 대판에 당도하여 육지에 올랐으므로 마음으로 다행히 여겼다. 돌아올 때에 대마도에 당도하여서는 미리 동료(同僚)에게 말하기를,
“이번 걸음에는 마땅히 정월 6일이라야 부산에 도착할 것이다.”
하였더니, 과연 6일 계유일에 서박포(西泊浦)로부터 문득 순풍을 만나서 돛을 걸고 바로 왔다. 모든 동료들이 놀라며 기뻐하여 나에게 돌아보고 말하기를,
“군의 말이 헛되지 않았다.”
하였다. 사신이 또한 듣고 괴이히 여겼다. 대개 영가대 위의 꿈에 유자(酉字)를 얻어서 배가 출발하였으며, 대판에서 육지에 오른 것과 부산에 돌아와 댄 것이 모두 유일(酉日)이니, 이것은 용부(龍府)의 어른이 글자를 써서 나에게 고한 때문인가, 또한 한 가지 특이한 일이었다.


 

[주D-001]황옥좌둑[黃屋左纛] : 남월왕이 자기 본국에서 황제(皇帝)라 칭하고 황옥대둑[黃屋大纛]을 탔다. 황옥대독은 황제만이 타는 수레다.
[주D-002]경저(京邸) : 지방에 있는 봉후(封侯)가 수도(首都)에 두고 있는 저택(邸宅)이다.
[주D-003]홍법대사(弘法大師) : 일본의 중 공해(空海)의 시호(諡號)다.
[주D-004]호백구(狐白裘) : 맹상군(孟嘗君)이 진(秦)에 가서 구금(拘禁)되었을 때에 보물인 호백구(狐白裘)를 진왕의 총희(寵姬)에게 바치고 풀려 나왔다. 호백구란 여우의 겨드랑이 밑 흰털 있는 가죽을 모아서 만든 옷이다.
[주D-005]기린굴(麒麟窟) : 고구려(高句麗) 동명왕(東明王)이 하늘에 올라간 자리인데, 평양에 있다.
[주D-006]분야(分野) : 하늘에 있는 별들이 각 지방을 나누어 맡은 것을 분야라 한다.
[주D-007]만파식곡(萬波息曲) : 신라 신문왕이 이상한 대[竹]를 얻어 피리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불면 적병이 퇴각하고, 병이 낫고, 바람이 순하고, 물결이 잔잔해졌다 한다. 그 이름을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하였다.
[주D-008]십이루(十二樓) : 천상의 옥경(玉京)에 12루가 있다 한다.
[주D-009]여주(驪珠) : 바다 속에 있는 여룡(驪龍)의 턱 밑에 있는 보배 구슬.
[주D-010]홍교(洪喬)의 버림 : 진(晉) 나라 은홍교(殷洪喬)가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편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중도에 편지를 물에 던지며, “뜰 것은 뜨고 잠길 것은 잠겨라. 나는 편지 전하는 우(郵)가 될 수 없다.” 하였다.
[주D-011]패교 : 패교는 당 나라 장안(長安) 근처에 있는데, 사람을 그곳에서 송별하였다.
[주D-012]재택 : 진(晉) 나라 부호(富豪) 석숭(石崇)의 별장이 있는 금곡(金谷)이다.
[주D-013]평원의 열흘 동안 일 : 진왕(秦王)이 조(趙)의 평원군(平原君)을 청하여 10일 동안 술을 마시자 하였다.
[주D-014]청전선(靑錢選) : 당 나라 장작(長鷟)이 문장을 잘하므로 사람들이 청전만선(靑錢萬選)이라 하였다. 청동전(靑銅錢) 만 개를 뽑아내어도 다 좋다는 뜻이다.
[주D-015]석상진(席上珍) : 예기(禮記)에, “유(儒)는 석상(席上)의 진(珍)이 있다.” 하였다.
[주D-016]삼동의 문사 : 동방삭(東方朔)의 상서(上書)에 삼동(三冬)에 문사(文史)를 공부하였다 하였음.
[주D-017]푸른 눈알 : 진(晉) 나라 완적(琓籍)이 눈으로 청안(靑眼) 백안(白眼)을 잘 만드는데, 뜻에 맞는 친구를 만나면 푸른 눈알을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흰 눈알을 하였다.
[주D-018]신유(申繻)는 장래를 아는 식견이 있고 : 노 환공(魯桓公)이 부인 강씨(姜氏)와 처가인 제국(齊國)에 가는데 신유(申繻)가 앞으로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이다 하였더니, 그 예언이 과연 맞았다.
[주D-019]명도(明道)는 본래 온순 : 명도(明道)는 송 나라 정호(程顥)인데, 자질이 온순한 사람이다.
[주D-020]석상진 : 예기(禮記)에, “유(儒)는 석상(席上)의 진(珍)이 있다.” 하였다.
[주D-021]일산을 기울이니 : 길에서 처음 만나 서로 일산[蓋]을 기울이고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주D-022]사귀는 정이 절로 담박하고 : 예기에 “군자의 사귀는 것은 담박하기 물과 같고, 소인이 사귐은 달기가 단물과 같다.” 하였다.
[주D-023]목격에 의하여 친해지네 : 장자(莊子)에 “온백설자(溫伯雪子)가 공자를 만나서 쳐다만 보고 말을 하지 아니하니, 공자가 말하되, ‘이 사람은 눈이 부딪치면[目擊] 도가 있다.’ 하였다.” 하였다.
[주D-024]하늘에 드리운 날개 : 장자에 “붕새[鵬]의 날개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하였다.
[주D-025]용을 타고서 : 주역 건괘(乾卦)에 “여섯 용을 타고 하늘에 오른다.” 하였다.
[주D-026]위수(渭水)의 나무 : 두보(杜甫)가 이백(李白)을 생각한 시에, 위북춘천수(渭北春天樹), 강동일모운(江東日暮雲)이란 글귀가 있는데, 위북은 자기가 사는 곳이요, 이백은 강동에 있었다.
[주D-027]교칠 : 고시(古詩)에 “아교[膠]를 칠(漆) 속에 던진다.”는 글귀가 있는데, 친구의 우정이 그처럼 단단하게 합하여 뗄 수 없다는 뜻이다.
[주D-028]금란 : 주역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그 예리하기가 쇠[金]를 끊을 수 있고, 그 향내가 난초와 같다.” 하였다.
[주D-029]정정(程鄭) : 한대(漢代)에 주철업(鑄鐵業)으로 큰 부자가 된 사람.
[주D-030]과군(寡君) : 타국 사람을 상대할 때 자기의 임금을 칭하는 말이다.
[주D-031]관반(館伴) : 외국에서 온 사신을 접대할 때에 사신의 관(館)에서 접대를 맡은 사람.
[주D-032]조(趙) 나라 옥 : 조왕(趙王)이 초국(楚國)의 보옥(寶玉)을 얻었더니, 진왕(秦王)이 그것을 탐내서 15성(城)과 바꾸기를 청하였다는 고사.
[주D-033]일명(一命) : 주(周)의 관직의 등급에 1명으로부터 9명까지가 있는데, 1명이 최하의 낮은 벼슬이다.
[주D-034]형 되기 어렵고 아우 되기 어렵다 : 한 나라의 진식(陳寔)의 두 아들이 원방(元方)과 계방(季方)인데, 두 사람의 아들들이 서로 자기 아버지가 승하다고 다투어 조부에게 물었더니, 조부는, “원방이 형 되기 어렵고 계방이 아우 되기 어렵다.” 하였다.
[주D-035]은(殷) 나라 예(禮)를 말할 만하니 : 공자가, “은 나라 예를 내가 말할 수 있으나 은의 후손인 송 나라에 고증할 수 없는 것은 문헌(文獻)이 부족한 때문이다.” 하였다.
[주D-036]신(申)을 두 번째 낳았구나 : 시경(詩經)에, “악(岳)의 정기로 신(申)을 낳았다.” 하였으니, 이것은 주 나라 재상 신보(申甫)를 칭찬한 말이다. 여기서는 유한(維翰)의 성이 신(申)이므로 인용한 것이다.
[주D-037]망형(忘形) : 노인과 소년이 서로 벗하는 것을 망형(忘形)이라 한다. 그것은 서로 나이의 차이를 잊는다는 뜻이다.
[주D-038]내구(耐久)의 교분 : 오래도록 변치 않는 친구를 내구붕(耐久朋)이라 한다.
[주D-039]선가(禪家)의 정혜(定慧) : 불교의 수행(修行)에 정(定)과 혜(慧)가 있는데, 정은 마음이 안정되어 고요하며 맑은 것이요, 혜는 밝은 지혜다.
[주D-040]신광(神光)이 세 번 절하고 분명히 받아서 : 선종(禪宗)의 이조(二祖) 신광이 스승인 달마(達磨)의 선법(禪法)을 받아 전하였다.
[주D-041]문자반야(文字般若) : 문자(文字)를 통하여 지혜[般若]를 얻는 것.
[주D-042]연석(燕石) : 연석(燕石)은 옥과 비슷하나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다.
[주D-043]소학(小學)의 목차(目次) : 주자(朱子)가 편찬한 소학의 목차는 입교(立敎)ㆍ명륜(明倫)ㆍ경신(敬身)ㆍ가언(嘉言)ㆍ선행(善行)으로 되었다.
[주D-044]공정(空丁) : 병역(兵役)이나 납세(納稅)에서 빠진 사람.
[주D-045]죽지사 : 지방의 풍속을 읊은 시.
[주D-046]전왕의 쇠뇌 : 오월왕(吳越王) 전규(錢鏐)가 쇠뇌로써 항주(杭州)의 조수(潮水)를 쏘았더니, 조수가 물러가서 후일에 수환(水患)이 없어졌다 한다.
[주D-047]매화 심던 처사(處士) : 송 나라 때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서 매화를 많이 심고 숨어 살던 임포(林逋)를 말한다.
 
   
  
홍재전서 제53권
명(銘)
서산대사 화상당명(西山大師畫像堂銘) 병서(幷序) ○ 갑인년(1794)

석가(釋家)를 통칭 사미(沙彌)라고 하는데, 사미란 식자(息慈)이니 자비의 땅에서 안식하는 것을 이름이다. 그러므로 불교에 삼장(三藏)이 있는데 수다라(修多羅)가 으뜸이며, 불교에 십회향(十回向)이 있는데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으뜸이다. 대체로 계율(戒律)과 선정(禪定)과 지혜(智慧)가 자비를 구승(究乘)으로 삼지 않는 것이 없다. 법계(法界)의 공덕도 여기에 있고, 항사(恒沙)의 복전(福田)도 여기에 있으니, 이보다 더한 것이 없도다, 자비의 가르침이여. 후세의 사미는 그렇지 않아서 운천(雲天)과 수병(水甁)의 실상(實相)의 밖에서 마음을 유람하고 취죽(翠竹)과 황화(黃花)의 정이 없는 물체에 몸을 비교하니, 마침내 우리 유학에서 고목(枯木)과 사회(死灰)라고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유학에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후세의 사미가 스스로 비난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 같은 이의 사미됨은 아마 자비에서 안식하는 뜻에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석장(錫杖)을 지니고 여러 곳에 두루 참례하여 법당(法幢)을 세움으로써 인천안목(人天眼目)이 되어 운장(雲章)과 보묵(寶墨)의 하사품이 특별히 융성하였으니, 지금까지 정관(貞觀)이나 영락(永樂)의 서문과 도솔란야(兜率蘭若)에서 영광을 다툴 지경이다. 중간에는 종풍(宗風)을 발현하여 국난을 크게 구제하고 의병을 창설하여 군왕을 구제한 원훈(元勳)이 되어 요사스럽고 성전(腥羶)한 기운이 손을 따라 맑아졌으니, 지금까지 방편으로 세상을 제도한 공적은 염부제(閻浮提)ㆍ무량겁(無量劫)에 영원히 의지할 것이다. 끝에 가서는 인연을 따라 현신(現身)하고 업보를 따라 섭신(攝身)하여 인과(因果)를 찾아 상승(上乘)의 교주가 되어 매화가 익고 연꽃이 피어나 순식간에 피안(彼岸)에 이르렀으니, 지금까지 바라보면 엄연하고 가까이 가면 온화한 초상이 남아 있어 서북과 남도의 영당에서 정례(頂禮)를 받고 있다. 이러한 다음에야 비로소 삼천 대천(三千大千)을 구제하고 속세에 은혜를 베풀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몇 알의 염주로 면벽(面壁)하거나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드는 따위를 자비라고 할 수 있겠으며, 탑묘(塔廟)를 많이 건축하고 경률(經律)이나 많이 쓰는 것으로 자비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내가 영당(影堂)의 편액을 요청하는 서남 도신의 청에 따라 남도는 표충당(表忠堂)이라고 하사하고, 서도는 수충당(酬忠堂)이라고 하사하는 한편, 관리에게 명하여 제수(祭需)를 주어 해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금년이 갑인년(1794, 정조18)이므로 홍무(洪武) 갑인년(1374, 공민왕23)에 선세선사(善世禪師)에게 시를 하사한 고사를 추억하여 서설과 명문을 지어 영당에 걸게 하노라. 내 비록 불가의 진체(眞諦)를 익히지는 않았으나 일찍이 《법화경》의 의해(義解)를 들은 일이 있는데, 게(偈)의 의미가 유학의 서문(序文) 다음에 오는 명문(銘文)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으니, 유학의 명문은 진실로 범어의 게송이다. 명문은 이러하다.

불일이 처음 비추니 / 佛日初照
자비의 구름 법이 되도다 / 慈雲爲經
호겁에 외길로 전수되니 / 浩劫單傳
부탁함도 정녕하다 / 囑付丁寧
그 맹서하여 발원한 것을 묻는다면 / 問其誓願
누구인들 보시(普施) 아니라 할쏘냐만 / 孰非施舍
의리의 바다 망망하니 / 義海茫茫
건너는 이 적었는데 / 津逮者寡
복된 나라 도움 많아 / 福國多祐
높은 스님 시기에 맞추었네 / 高僧應期
석장 세우고 한 소리 외치니 / 卓錫一喝
마귀의 군졸 흩어졌고 / 魔軍離披
하늘 맑고 달 밝은데 / 天晶月朗
파도는 잠들고 물결도 조용하여라 / 波恬浪平
우담바라의 꽃이 / 優曇鉢華
동해에서 피어났네 / 涌現東瀛
경사는 적현으로 돌려주고 / 歸慶赤縣
진으로 돌아간 곳 청련이어라 / 返眞靑蓮
엄숙하고 아늑하다 쇠북과 목어(木魚)여 / 肅穆鐘魚
선방의 등불 하나 호젓하구나 / 禪燈孤懸
이름은 죽간에 전해지고 / 名流竹簡
도는 패엽에 남겼도다 / 道存貝葉
적막한 시골 주발만 한 절간에 / 寂鄕鉢寺
모습 전하여 빛나도다 / 交暎眉睫
보답하는 제사 어떻게 하나 / 報祀伊何
채소 음식은 관청에서 보내리라 / 蒲饌自官
신령스러운 복 내린다면 / 儻布靈貺
길이 시주를 보우하리 / 長蔭旃檀
상마(桑麻)와 도량(稻粱) 대나무와 갈대가 / 麻稻竹葦
온 나라에 두루 무성하여 / 匝域蓊若
주 나라의 부유하고 많음을 짝하고 / 匹周富庶
당 나라의 농경에 비견하리라 / 媲唐耕鑿
팔만 사천 세를 / 八萬四千
자자손손이 함께 즐기리 / 子孫同樂
내 즉위한 지 십팔 년 / 予卽阼之十有八年
갑인 사월 초파일에 / 甲寅四月初八日
표충사와 수충사에 봉안하노라 / 安于表忠酬忠之祠中

[주D-001]인천안목(人天眼目) : 불가(佛家)의 용어로, 인간과 천상의 일을 환히 꿰뚫어 보는 지혜나 그러한 지혜를 갖춘 사람을 이른다.
[주D-048]천창(天倉) : 관상법(觀相法)에 이마를 천창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