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금석문 등/좌윤(左尹) 최공(崔公) 묘갈명

좌윤(左尹) 최공(崔公) 묘갈명

아베베1 2011. 3. 5. 15:29

약천집 제21권
 묘갈명(墓碣銘)
좌윤(左尹) 최공(崔公) 묘갈명


지금 영의정으로 있는 최공 석정(崔公錫鼎)의 아우인 이조 판서 석항(錫恒)이 그 선부군(先府君) 정수재(靜修齋) 좌윤공(左尹公)의 행장을 나에게 주고 묘에 명문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아, 나는 실로 문장을 잘하지 못하니, 어찌 공의 아름다운 덕을 형용할 수 있겠는가. 내가 비록 문장을 잘하지 못하나 어찌 차마 두 자제의 효성스러운 마음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 어찌 차마 공이 평소에 인정해 주신 것을 잊고서 사실을 기록하는 일을 담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행장을 살펴보니, 완산 최씨(完山崔氏)는 고려 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순작(純爵)이 비조(鼻祖)이다. 고려조로부터 본조에 들어와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덕업을 서로 계승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된 휘 수준(秀俊)이 있었는데, 이분이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영의정에 추증된 휘 기남(起南)을 낳았고, 이분이 영의정으로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문충(文忠)이며 휘가 명길(鳴吉)이고 호가 지천(遲川)인 분을 낳았다. 배위는 인동 장씨(仁東張氏)이니,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만(晩)의 따님이다. 문충공은 아우가 있었으니 이조 참판으로 휘가 혜길(惠吉)이고, 그 배위는 함평 이씨(咸平李氏)로 관찰사 춘원(春元)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병진년(1616, 광해군 8)에 공을 낳았다.
공은 휘가 후량(後亮)이고 자가 한경(漢卿)이다. 문충공이 처음에 아들이 없어 공을 데려다가 양자로 삼았는데 늦게 아들을 두니, 이름이 후상(後尙)이었다. 문충공은 호문정(胡文定)을 법으로 삼아 조정에 청해서 공을 후사로 정하였다. 이때 문충공은 일등 공신으로 요직을 담당하여 매일 한가한 틈이 없으므로 집안 살림을 모두 공에게 맡겼는데, 공은 실로 가사를 잘 주관한다는 칭찬이 있었다.
정축년 공은 상신의 자제로 심양(瀋陽)에 가서 인질이 되었으며, 임오년 문충공이 오랑캐에게 붙잡혀가서 감옥에 갇히자, 공은 파발마를 타고 세 번이나 오랑캐 지방을 왕래하며 주선해서 화를 늦추었으며, 을유년 문충공을 모시고 동쪽으로 돌아왔다.
정해년 문충공이 별세하였다. 공은 심양에 머문 것이 거의 8, 9년이었으므로 몸이 수고롭고 마음이 고달파서 진작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운 증세가 있었는데 상을 당하여 더욱 심해지자 문을 닫고 병을 잘 다스려서 오랜 뒤에 다소 덜해졌다.
신묘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남별전 참봉(南別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사산감역(四山監役)에 제수되었다가 체직되었다. 병오년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에 제수되고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로 승진하였으며, 종부시 주부, 공조 좌랑, 충훈부 도사를 역임하였다.
경술년 배천 군수(白川郡守)에 제수되었다가 다음 해 체직되고 을묘년 사복시 첨정에 제수되었다. 이때 시국이 크게 변하니, 벼슬살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병으로 사직하고, 진산 군수(珍山郡守)와 면천 군수(沔川郡守)에 연달아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기미년 영천 군수(榮川郡守)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체직되었다.
경신년(1680, 숙종 6) 보사 공신(保社功臣)을 녹훈할 때에 정사 원훈(靖社元勳)의 큰아들로 회맹제(會盟祭)에 참여했다 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로 승진하였으며, 신유년 청풍 부사(淸風府使)에 제수되었다가 계해년 체직되었다.
을축년 70세가 되니, 조정에서는 두 아들이 시종관(侍從官)이라 하여 은혜를 미루어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올리고 세습하여 완릉군(完陵君)에 봉해졌으며, 한성부좌윤 겸 도총부부총관을 제수하였는데, 얼마 안 있다가 사양하여 체직되고 집에서 한가롭게 여생을 보냈다. 기사년(1689) 세상의 일이 또 변하여 보사 공신을 삭탈하자 이로 인하여 품계가 강등되어 통정대부가 되었다.
계유년(1693, 숙종 19) 정침에서 고종명(考終命)을 하여 양주(楊州) 천마산(天磨山) 아래 판곡리(板谷里) 간좌(艮坐)의 산에 장례하니, 선영을 따른 것이었다. 이해 여름 다시 보사 공신의 훈호(勳號)를 복구해 주어 품계와 직책을 옛날과 같이 환급하였으며, 치제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배위 광주 안씨(廣州安氏)는 관찰사 헌징(獻徵)의 따님인데, 장엄하고 후중하며 단정하고 정성스러워 부도(婦道)를 특히 잘 닦으니 친척들이 귀의하였으며, 문충공이 더욱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다. 신유년에 출생하고 계축년에 별세하여 공의 묘소에 부장되었다.
3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석진(錫晉)은 정랑인데 공보다 먼저 죽었고, 다음은 바로 의정(議政) 석정(錫鼎)이고 다음은 바로 판서 석항(錫恒)이며, 장녀는 진사 윤제명(尹濟明)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현감 신곡(申轂)에게 출가하였다. 정랑은 4남을 두었으니 생원 창헌(昌憲), 도사 창연(昌演), 봉사 창민(昌敏)과 창억(昌億)이다. 의정은 공의 아우인 응교 후상(後尙)에게 양자 갔는데 아들 창대(昌大)를 두었는바, 지금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있다. 판서는 공의 생가 아우인 교관 후원(後遠)에게 양자 갔으며, 또 창억(昌億)을 자기의 양자로 삼았다. 손녀와 외손이 또 약간 명이다.
공은 천품이 온화하고 바르며 의표가 단정하여, 남들과 화합하면서도 휩쓸려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고 장엄하면서도 사납지 않았으며, 널리 사람을 사랑하고 현자를 친애하여 한결같이 성심에서 나오니, 사람들이 모두 믿고 사모하며 좋아하였다. 공은 침착한 사려와 원대한 식견이 있었으므로, 문충공이 깊이 믿어서 군국(軍國)의 기무를 자문하는 일이 많았다.
무인년 공은 심양(瀋陽)에 인질로 있다가 돌아와 문충공에게 아뢰기를 “대인께서 국정을 담당함에 두 가지 잘못된 일이 있으니, 김청음(金淸陰 김상헌(金尙憲))을 논박하여 배척한 것과 중을 홍 군문(洪軍門)으로 보낸 것이 이것입니다. 화의와 척화가 일은 비록 대립되나 마음은 모두 국가를 위하는 충심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에 이르러 결국 대인의 말씀이 비로소 맞았으니, 이는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한산성에서 항복하는 맹약을 맺은 것은 다행이 아니요 실로 치욕이니, 대인에게 있어서는 굳이 나라를 보전했다 하여 훌륭함이 될 수 없으며, 청음에게 있어서는 또한 일을 그르쳤다 하여 허물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의심과 서로 막힌 마음을 제거하고 서신을 왕래하여 청 나라와 화친하는 일이 부득이함을 깊이 밝히시고 또한 깨끗한 의론이 없을 수 없음을 장려하여, 피차간에 심사가 툭 트이게 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잘잘못을 거론해서 서로 반목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또 남조(南朝)와 통신(通信)하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별도로 단사(單使)를 보내어서 상주문을 가지고 항해하되 옛날 고려 때에 송 나라와 내왕했던 옛 길을 다시 찾아낸다면, 배 한 척만 있으면 중국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마침내 중에게 배를 주어서 요동(遼東)과 심양의 경계를 지나가게 하시니, 저들의 정탐이 서로 이어져서 오랑캐에게 발각되기가 쉬우며, 비록 혹 군문(軍門)에 이른다 하더라도 반드시 황제의 조정에 도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자, 문충공은 크게 깨닫고 말하기를 “내 이런 방법을 알지 못했다.” 하였다.
뒤에 들으니 해변을 순라하던 오랑캐 기병들이 우리나라 배가 서쪽을 향하는 것을 바라보고 우리에게 의심을 품었는데, 홍 군문이 오랑캐에게 항복하자, 우리나라에서 보낸 편지를 찾아내어 문충공이 붙잡혀 가게 되었다. 공은 말하기를 “대인은 국가를 위하여 죽을 곳으로 가는 것을 진실로 마음에 달갑게 여기실 터이나, 자식이 아버지의 죽음을 구원하는 것으로 말하면 또한 지극함을 쓰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 하고, 마침내 많은 돈을 가지고 심양의 관문에 들어가서 권력자를 설득하였다.
이때 청음 김공 또한 구류되어 같은 관사에 있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김공은 평소 성품이 방정하고 엄격하시니, 뇌물을 쓰는 것을 마음에 나쁘게 여기지 않겠는가.” 하였으나 공은 “이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들어가 김공에게 묻기를 “산의생(散宜生)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하자, 김공은 대답하기를 “옛날의 어진 사람이다.” 하였다. 공은 나와서 말씀하기를 “김공의 말씀을 들어보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하였다. 공이 동쪽으로 돌아오게 되자 김공은 공에게 시가(詩歌)를 지어 주었으며, 또 작은 서문을 지어 공을 매우 칭찬하였다.
공은 학문에 있어 이미 가정에서 교육을 받고 또 계곡(谿谷) 장공(張公 장유(張維))과 백헌(白軒) 이공(李公 이경석(李景奭))에게 수학하여 유가(儒家)의 여러 책을 두루 읽었으나 일찍부터 고질병을 앓아 공부에 전심전력하지 못하였는데, 항상 이것을 한하였다. 평소 역사책을 두루 섭렵하여 꿰뚫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국가가 다스려지고 혼란해지는 조짐과 현신(賢臣)과 간신이 나가고 물러가는 기미에 대하여 일찍이 깊이 마음을 쏟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인물을 품평함에 옛사람이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을 많이 말하였다.
공은 시에 있어 재주가 매우 뛰어났다. 비록 중간에 환난을 겪어 힘을 다 쓰지는 못하였으나 시를 지으면 왕왕 경구(警句)가 있었다. 심양에 있을 적에 시를 지었는데 청음공이 자주 품평하고 칭찬하였으며, 말년에 문원(文苑)의 여러 공들과 창수한 것이 많이 있는데, 모두 그 격조와 운치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칭찬하였다. 이것을 모아 약간 권을 만든 것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공은 마음이 깨끗하고 욕망이 적으며 또 몸을 아끼고 보호하여, 여러 해 동안 볼모가 되었으나 집안 식구를 데리고 가지 않았으며, 관서 지방을 왕래할 적에 한 번도 음악과 기생을 가까이 한 적이 없었다. 감사 구봉서(具鳳瑞)가 공을 칭찬하기를 “최한경(崔漢卿)의 뛰어난 절개는 소무(蘇武)보다 더하다.” 하였다. 그리고 부인을 잃게 되자 나이가 그리 노쇠하지 않았으나 첩을 두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세 고을을 맡았을 적에 모두 깨끗함과 고요함으로 고을을 다스렸으며, 배천(白川)에 있을 적에 마침 신해년 큰 흉년을 당하였는데, 굶주린 자들을 많이 살려주니, 남긴 은혜가 더욱 깊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비석에 새기기를 ‘만세불망(萬世不忘)’이라 하고 그 앞을 지나가는 자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경례하였다.
공은 집안에 있을 때에는 효도와 우애를 돈독히 하고, 남과 사귈 때에는 위급한 일에 달려가 구원하기를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으며, 기개와 충절을 사모하여 비록 덫과 함정이 앞에 있더라도 피하지 않고, 나쁜 사람을 멀리하여 때가 묻지 않게 하였으니, 무릇 이러한 종류를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아들을 가르치기를 순수하고 깊게 하여, 아들에게 잠(箴) 한 편을 지어 주었는데 다음과 같다.
“마음이 보존되면 자연 후중하고, 말이 적으면 후회와 부끄러움이 적게 된다. 벗을 취함에는 반드시 기국과 식견을 먼저 하고, 일을 당해서는 마땅히 공경하고 삼갈 것을 생각하라.〔心存則自然凝重 言寡則可無悔吝 取友必先器識 臨事宜思敬謹〕”
이 몇 마디 말은 내용이 천근하면서도 뜻이 심원하고 적은 것을 들어 큰 것을 포괄하였으니, 진실로 사람을 만드는 좋은 본보기라 할 것이다. 더구나 공은 사람을 가르칠 적에 반드시 자신이 솔선수범하였음에랴. 복을 남김이 성대하여 두 아들이 현달해서 한 시대의 유명한 공경이 된 것이 당연하니, 아 거룩하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우리 최공은 / 維我崔公
자식이 되어 직분을 다하였으니 / 爲子盡職
어떤 험한 것인들 구제하지 못하며 / 何險不濟
아버지가 되어 자식을 잘 가르쳤으니 / 爲父能敎
어떤 경사인들 열어놓지 않았겠는가 / 何慶不啓
자식이 자식 노릇 하고 아비가 아비 노릇 함은 / 子子父父
인도의 큰 강령이니 / 人道大體
모든 행실의 근원이요 / 百行之源
온갖 선의 뿌리라오 / 衆善之柢
이것을 명문에 새겨 밝혀서 / 銘以昭之
오는 자들을 기다리노라 / 來者是徯


 

[주D-001]호문정(胡文定)을 법으로 삼아 : 호문정은 북송(北宋)의 학자인 호안국(胡安國)으로 문정은 그의 시호이다. 호안국은 처음에 아들이 없어 조카인 인(寅)을 양자로 세웠는데, 뒤에 아들 굉(宏)을 낳았으나 파양(罷養)하지 않고 그대로 제사를 물려주었다.
[주D-002]중을 …… 보낸 것 : 중은 승려인 독보(獨步)를 가리키고 홍 군문(洪軍門)은 명 나라 도독(都督) 홍승주(洪承疇)를 가리킨다. 독보는 초명이 중헐(中歇)로 묘향산에서 수도하다가 병자호란에 공을 세웠으며, 홍승주의 군영에 가서 청 나라를 정탐하였는데, 홍승주가 청 나라에 항복하여 이 사실이 발각되었다. 뒤에 임경업(林慶業)의 밑에서 명 나라를 왕복하다가 명 나라가 망한 후 임경업과 함께 청 나라에 잡혀갔다.
[주D-003]남조(南朝) : 남쪽 조정이란 뜻으로 명 나라 의종(毅宗)이 이자성(李自成)에게 망한 뒤에 명 왕실의 일족이 세운 조정을 이른다. 1644년 의종이 자결하자 복왕(福王) 주유숭(朱由崧)이 남경(南京)에서 즉위하였으며, 다음해 복왕이 청 나라 군사에게 사로잡히자 당왕(唐王) 주율건(朱聿鍵)이 복주(福州)에서 황제를 칭하였고, 당왕이 또 청군에게 붙잡히자 주계왕(朱桂王) 유랑(由榔)이 조경(肇慶)에서 황제라 칭하였으나 또다시 청군에게 쫓겨 평락(平樂)으로 달아나 16년간 명맥을 유지하였다.
[주D-004]산의생(散宜生) : 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어진 신하로, 문왕이 주왕(紂王)에게 미움을 받고 옥에 갇히자 보옥(寶王)과 미인(美人)을 주왕에게 뇌물로 바쳐 석방되게 하였다.
[주D-005]소무(蘇武) :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의 충신으로 흉노(匈奴)에게 끌려가 온갖 고생을 하였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언제나 한 나라의 깃발을 손에 잡고 있어 깃발이 모두 닳아버렸다. 그러다가 19년 만에 귀환하였는바, 주인공이 절개를 지킨 것이 소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